악인 특징
잠 21:1-12
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3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6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
7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정의를 행하기 싫어함이니라
8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으니라
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10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 그 이웃도 그 앞에서 은혜를 입지 못하느니라
11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
12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
잠 21:1-12 / [생각은 하고 또 해야] 임금의 마음도 여호와께서 이끄시는 물길과 같아 그분 생각대로 이끄신다. 2) 하는 일마다 자기가 보기에는 모두 올바르지만 여호와께서는 그 마음을 꿰뚫어 헤아리신다. 3) 올바르게 살아가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수천 번 여호와께 제물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4) 거만한 눈, 교만한 마음, 못된 짓 일삼는 자들이 벌이는 짓은 모두 죄이다. 5) 이 궁리 저 궁리 해가며 손놀 틈 없이 일하면 점점 세간살이가 늘어나나 일이 잘 안 된다고 마음만 급하게 먹으면 점점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6) 남 속이고 착취하여 재산을 쌓아올리는 자, 한낱 가련한 인생이라. 죽임과 죽임만을 가져올 것이다. 7) 못된 짓만 일삼고 남 억누르고 착취만 하는 자들은 이웃을 못살게만 굴고 정의를 실천하는 일은 죽기보다도 싫어하니 때가 되면 물거품처럼 스러지리라. 8) 더러운 짓만 하고 다니는 자들은 비뚤어진 길만 따라가고 깨끗이 사는 이들은 반듯한 길로만 걸어간다. 9) 큰집에 살면서 아내와 티격태격 싸우는 것보다 다락방 한구석에서 혼자 사는 것이 훨씬 속 편하다. 10) 못된 짓만 일삼으며 남 등치고 착취하는 자들은 그렇듯 못된 짓을 벌이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며, 이웃을 따뜻하게 대해 주는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다. 11) 남을 우습게 여기고 제 잘난 맛에 사는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마음이 여린 이는 그 벌받는 모습 보고 지혜를 얻고, 슬기로운 사람은 가르침을 받으면 깨달음을 얻는다. 12) 올바르신 하나님은 못된 짓만 일삼아 남 짓누르고 착취하며 살아가는 것들이 무슨 궁리하며 사는지 일일이 헤아리시고 그들을 거꾸러뜨려 다시는 일어나지도 못하게 하신다.
잠언의 글쓴이는 계속 대칭 구조를 사용하여 지혜로운 의인의 모습과 어리석은 악인의 모습을 대조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할 때 나오는 참된 지식, 곧 지혜를 설파합니다. 지혜는 정신활동의 영역만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측면에 적용되어야 하는 삶의 기술입니다.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1-3) 하나님이 이 세상 최고의 주권자이십니다. 왕 위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지혜입니다(1).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기에 내가 늘 옳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하나님은 인간의 무의식까지도 꿰뚫어 보실 수 있음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2).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삶에서 공의와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온전해집니다. 정의로운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3).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4-8) 교만하여 남을 깔보는 악인이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통은 죄일 뿐입니다(4). 씨를 뿌릴 때와 거둘 때를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전 3:1-8). 하나님을 경외하면 일할 때와 기다릴 때를 분별함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5). 불의와 거짓으로 재물을 추구하는 일은 헛됨과 죽음을 추구하는 일입니다(6). 폭력은 정의를 싫어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 남을 거쳤다가 결국에는 내게로 돌아와 나를 무너뜨립니다. 폭력을 그치십시오(7). 이 세상에는 시작과 과정, 결말이 완전히 다른 두 길이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길을 걷고 있습니까?(8)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9-12) 현숙한 아내와 화목은 행복한 삶의 바탕입니다(9). 악인은 이웃이 불행하기를 바랍니다. 이웃이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돌아보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악인의 삶엔 이웃이 없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 없애거나 제쳐야 하는 경쟁자만 있습니다(10).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일을 통해 배웁니다. 그는 타인이 벌을 받는 일을 통해서도 배우고, 훈계를 통해서도 배웁니다(11). 공의로운 하나님이 내 인생을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습니다(12).
적용: 혹시 악인의 형통을 보고 부러워하거나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힘을 내어 계속 의인의 길을 걸으십시오. 결국 악인은 심판받습니다.
가끔은 흔들려보며 때로는 모든 것들을 놓아봅니다. 그러한 과정 뒤에 오는 소중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희망을 품는 시간들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시간들 안에는 새로운 비상이 있습니다. -핸리 롱펠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휘어지는 것은 부러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당신도 거센 바람과도 같은 시련이 몰아칠 때마다 조금 흔들리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원래 나무든 사람이든 조금씩 흔들리며 성장하는 법이니까요.
< 설 교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잠 21:1-6 / 한태환 목사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은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그의 걸작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공연되었고 그 공연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중이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늙고 병약하였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공연장에 입장하였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공연을 마쳤을 때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는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을 위로 치켜들고 외쳤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그 음악은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기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태어난 존재입니다. 즉 인간 삶의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게 바로 인간의 목적이란 말씀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우리는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말로, 어떤 일로 창조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지 고민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인 우리가 무엇을 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인생의 성공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1. 의와 공평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3절에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하였고,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11:1)하였습니다. 이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부당한 방법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미워하시고, 의와 공평을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저울눈 속이는 것은 도적질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제가 인천 연안부두에 교사들 회식자리 참석하고 부둣가에 나갔는데 조개를 파는데 통 가득히 담은 조개가 서울에서 보다 훨씬 싸게 팔아 사려고 돈을 주었더니 조개를 붓는데 통속에 칸막이가 있어 아주 적은 양을 받았습니다. 또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회 2Kg을 샀는데 집에 가져가서 저울에 달아보니 1.5Kg 밖에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내가 그곳에 가서 또 사겠습니까? 하나님은 공평이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사59:15)
윌리암 바클레이는 '의'란 사람과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져야 할 것을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마음과 행동'도 어떤 의미에서 이것과 일맥상통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자연히 공평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공평을 무조건적 평등, 차별 없는 평등으로 이해하는데, 이것은 무리한 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공평은 '정의'를 전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땅히 받아야할 사람이 받고 주어야 할 사람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 공평과 의를 상실했을 때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것도 인(仁)과 의(義)와 신(信)의 실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스라엘 평민들과 더 깊은 유대 관계를 가지고 그들을 사랑과 공평으로 지도하길 원하셨고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이시길 원하셨지만 그들은 개인적인 기득권을 누리는데 만족하며 즐거워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공동체의 비극이 시작됨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공의롭고 공평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성도가 공평하게 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가난한 자의 송사입니다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출23:6)
둘째는 저울과 추, 도량형입니다.(레19:35,36, 신25:15)
"너희는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밧을 쓸지니"(겔45:10)
셋째는 부하직원이나 아랫사람을 대할 때 공평하게 해야합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4:1)
넷째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지 말고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뇌물을 받으면 공평하게 처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잠28:21)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은 차별 대우하는 것을 말합니다. 혈연, 지연, 학연 등의 관계를 통해 연줄을 댄 사람이라 해서 보아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한 조각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이와 한가지입니다. '한 조각 떡'은 적은 뇌물을 가리킵니다. 뇌물을 받고 눈감아주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범법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재판을 하거나 어떤 일을 결정하고 처리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공평하고 의롭고 정직하며 적법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 악인은 사람의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잠17:23)
세상 사람들은 "의롭고 공평하게 살면 재물을 얻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우리에게 "의롭고 공평하게 사는 지혜로운 자는 재물을 얻되 곳간까지 채울 정도로 많이 얻는다"고 가르쳐 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의 인도함을 받아 의로운 길, 공평한 길로 행합니다. 이처럼 의를 행하고 공평한 길로 행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런즉 네가 공의와 공평과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잠2:9)
다음은 어느 무명 성도의 선행을 위한 고백입니다. "저는 이 세상을 단 한 번만 지나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행할 수 있는 선한 일과 친절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게 하옵소서. 제가 그것을 미루거나 핑계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는 제가 다시 이 길을 지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아침이면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안개와 같은 인생을 우리가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길은 선한 길을 걸어가, 공의와 정직을 행하는 것입니다. 공의와 공평과 정직 안에 모든 선한 길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길'이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행동 방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여 얻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공의롭고 공평하며 정직하게 살아야겠습니다.
2. 겸손한 사람입니다.
본문 4절에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하였습니다.
성 부러더 로렌즈 수도사는 어느 날 말썽이 많고 다투기를 제일 잘하기로 소문난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그가 문제가 많은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자 젊은 수도사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 수도사가 서있는 것을 보고, "노 수도사가 왔구려! 어서 식당에 가서 접시를 닦으시오!" 처음 부임한 수도사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전통이 된 모양입니다. 노 수도사는 이 수도원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노 수도사는 "네! 그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곧장 식당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노 수도사는 한 달, 두 달, 석 달, 접시를 닦았습니다. 멸시와 천대와 구박이 대단했습니다. 석 달이 지나서 감독이 순시차 왔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이 쩔쩔 매었습니다. 그런데 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물었습니다. "원장님은 어디 가셨는가?" 수도사들이 대답했습니다. "원장님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깜짝 놀랬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로렌즈 수도사를 3개월 전에 임명했는데!" 감독의 말에 젊은 수도사들이 아연실색했습니다. 그 즉시 식당으로 달려가 노 수도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노 수도사의 극도로 낮아진 겸손의 도에 모두가 감동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그 수도원은 모범적인 수도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귀히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무슨 일이건 성취되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을 것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다고 선언하신 것은 교만이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겸손한 마음이 가장 칭찬 받는 미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마음에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찾고 계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8-19)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149:4)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라"(사29:19)
신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일까요? 저는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겸손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요사이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좀 받으면 성자(성자)인 척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깨닫게 되고, 죄를 알게 되어 자연히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해 질수록 큰 은혜를 받습니다. 낮은 골짜기에 이슬이 많이 내립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산꼭대기 높은 곳에는 이슬이 내리지 못합니다. 겸손한 마음에 은혜의 이슬이 내립니다. 벼락도 가장 높은 곳을 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고 교만한 자의 기도는 물리치십니다. 신앙의 모범이 될만한 사람이 자주 빠지게 되는 시험이 바로 영적 교만입니다. 내 신앙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말 잘하는 사람이나 재능 많은 사람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안에서 겸손한 자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택하시고 귀한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겸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마굿간에 오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셨지만 군인도 없고, 돈도 없으셨습니다. 내각도 고기 잡는 어부로 구성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 때도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은혜를 받고 주님을 만납니다. 구원의 은혜는 나의 공로가 아니라 겸손하게 주 예수를 영접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은혜를 못 받았지만 오히려 창기나 세리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접하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가 필요하다고 찾는 자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대나라를 떠나 이방나라로 건너가 이방 땅을 풍성하게 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와 은혜는 겸손한 자를 찾습니다.
겸손할 때 봉사할 수 있습니다. 겸손할 때 감사가 나옵니다. 겸손할 때 기쁨이 옵니다. 잠언 22장 4절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재물을 주십니다. 영광을 주십니다. 생명을 주십니다. 시편22편 26절에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이 영원히 살지어다"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르고 언제나 샘솟는 기쁨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겸손이 생명입니다. 겸손한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겸손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길이길이 겸손하여 만대에 축복 받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본문 5절에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라'하였습니다.
어느 농장 주인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진 후부터 가축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습니다. 동물들은 회의를 열어 이 농장에서 주인에게 가장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희생제물이 되기로 했습니다. 먼저 황소가 나섰습니다. "나는 주인님의 농사를 짓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번에는 개가 말했습니다. "도둑을 누가 막는가. 내가 짖어대면 도둑이 도망간다." 고양이도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는 곡식을 훔쳐먹는 쥐를 잡는다." 닭도 목을 길게 뽑으며 자랑했습니다. "주인에게 새벽을 알리고 아침 식탁의 달걀을 제공하는 일을 누가 하는가." 그러나 한 동물만은 말 한마디 못한 채 눈물만 떨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게으른 돼지였습니다.
이 사회와 가정에 쓸모가 없는 인생은 비참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절대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항상 후회가 따를 뿐입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에 있어서 부지런함은 필요 조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솔로몬은 '개미의 교훈'을 통해 우리에게 부지런히 살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꼭 지켜야 할 덕목 한 가지가 있는데 ‘근면’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1-30절에 보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졸며 자다가 기름을 준비 못해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고 영육 간에 주리게 합니다.(잠19:15) 그리고 달란트 비유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주인으로부터 각기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 달란트를 받은 세 번째 종입니다. 처음의 두 종은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후 곧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마태25: 16-17절) 처음의 두 종은 자기에게 맡겨진 것으로 바로 일하기 시작했고, 세 번째 종은 그것을 땅에 묻어두고 주인이 올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대조적인 삶의 모습을 본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을 향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 종을 향해서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엄하게 꾸중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잠12:27)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잠13:4)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잠15:19)
톨스토이는 '게으른 자의 머릿속은 악마가 집을 짓기에 알맞은 장소이다"라고 말했고, 벤자민 플랭클린은 "부지런한 사람은 만물을 황금으로 만들고, 무형의 시간까지도 황금으로 변화시킨다. 일하는 농부는 앉아있는 신사보다 존귀하다."고 하였고, 케네디 대통령은 말하기를 "최대의 행운은 자신의 전 능력을 들여서 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죄악은 게으름과 권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근면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이루어 가는 사회는 건강하게 발전합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부지런히 일하며 사는 것을 생활 철칙으로 삼아야겠습니다.
4. 정직한 사람입니다.
본문 6절에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시고 속임이 없는 정직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미국 시민들의 영원한 존경을 받는 링컨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에 18세에 집을 나와 상점 점원으로 일했습니다. 그가 스무 살 되던 해에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일리노이주의 한 상점에서 일하던 때였습니다. 밤늦게 상점 문을 닫고 장부를 보며 결산을 하던 링컨은 장부보다 3센트가 더 많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생각해보니 그 날 낮에 한 부인으로부터 3센트를 더 받은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거기서 한 시간도 더 되는 부인의 집을 찾아가 그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부인은 그 돈을 받고, "이것은 백금보다 더 귀한 3센트이군요. 당신의 정직한 마음은 반드시 참된 값으로 인정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라며 덕담을 해주었습니다. 과연 링컨은 그 정직한 마음으로 미국의 운명을 바꾸었고, 미국의 대통령으로 세계 역사 속에 뚜렷이 남아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성품이 지향해야 할 덕목 중에 중요한 하나는 정직입니다. 현대사회의 총체적 위기는 서로 속고 속이는 양심의 상실과 부정직이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산 선생은 일찍이, "거짓이여 너는 이 민족을 망친 원수로다" 경계하였습니다. 세태를 탓 할 것이 없습니다. 마치 어두운 밤에 별이 더욱 빛나는 것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버리고 정직하지 않을수록 그리스도인은 더욱 정직해야 합니다. 이 시대 하나님은 정직한 그리스도인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정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직하신 분이시기 때문에(시25:8, 사26:7) 정직한 자를 기뻐 하사,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고(잠2:7) 거짓된 자를 미워하십니다.(잠12:22, 잠19:9) 그리고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며(호14:9), 정직은 성도의 의무입니다.(고후13:7)
미국에 "아딜로우"라는 아주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정직합니다. 그곳에 사는 하메닝씨는 사료상과 농기구상을 경영하는데, 아침7시에 문을 열어 정오에 문을 닫고는 목장에 나가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목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마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창고 문을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누가 어떤 물건을 가져 갔는 지, 그리고 얼마를 받아야 할지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뒤, 문에 걸려있는 장부를 보고 검토합니다. 하메닝씨는 이런 식의 장사를 여러 해 해왔지만 결코 물건을 도난 당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아딜로우"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을 결코 속이지 못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정직한 자가 복을 받습니다.(신6:18-19) 학교를 갓 졸업한 한 그리스도인 여성이 어느 회사사장 비서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수십 통씩 걸려오는 전화가운데 절반 이상은 적절한 거짓말을 해서라도 사장실로 연결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견디다 못한 그 여성은 어느 날 사장에게 사직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며칠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고는 며칠 뒤에 그 비서를 경리담당 중역으로 발령 내렸습니다. 사장은 그 그리스도인 여성의 정직성을 높이 산 것이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정직한 것은 바보스러운 짓이라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은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정직한 사람은 후손에게까지 복이 있습니다.(시112:2) 영국선교사로서 아프리카 선교에 크게 공헌한 리빙스턴 집안은 평민출신으로 귀족적인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으나 그의 혈관 속에는 천사도 부러워할 만한 귀한 것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경건한 신앙과 정직한 정신입니다. 그의 조상이 죽을 때 자식들을 불러놓고 "자녀들아 정직하라" 라는 한마디를 유언으로 남긴 이후 리빙스턴 가의 가훈은 정직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귀히 알고, 자자손손 지킴으로서 이러한 가정에서 리빙스턴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하며, 의와 공평을 행하고, 겸손하며, 근면하고, 정직한 사람,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시147:11) 여기에 축복이 있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라
잠 21:1-3, 요한복음 7:23-24 / 이성희 목사
서론
2000년 12월 12일 국제법정에서 일왕 히로히토 등 8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수석 판사였던 맥도날드는 “2000년 국제법정의 목적은 보복이 아니라 정의에 있다. 그 정의는 후세와 먼저 죽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라고 판결문에서 말하였습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한참 나라들을 점령할 때 그들은 “힘이 곧 정의다”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곧 정의다”라고 공공연하게 외쳤습니다. 인간의 목숨을 건 이런 불공정한 게임이 인간사에 얼마나 비일비재했는지 모릅니다.
인류의 인구문제와 식량문제는 항상 맞물린 하나의 주제였습니다.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 가지 고전적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을 ‘3M 방법’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맬서스(Malthus)의 ‘인구론’ 이론에 의한 방법이라고 합니다. 인구증가에 따라 식량을 증식하면 된다는 이론입니다. ‘인구론’이 저술된 1798년에는 세계인구가 10억 명 정도였는데 이 이론은 당시에는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산되기 때문에 식량증산이 인구증가를 따라갈 수가 없어 실패하였습니다. 둘째는 마르크스이론(Marxism)입니다. 사람들이 함께 공평하게 나누면 모든 사람이 다 잘 먹을 수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인간사에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제도가 없습니다. 이 이론을 따랐던 공산주의도 절대로 공평하게 나누지 못했습니다. 셋째는 미션(Mission), 즉 사랑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면 모든 사람이 다 식량 걱정 없이 나누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함께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인간세계에는 어떤 인간 이론도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세상은 절대로 정의롭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공리주의의 원칙에 따라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이 이익을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가진 자가 능력 있는 자이지만 공산주의에서는 가진 자가 죄인 취급을 받습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자신의 능력껏 많이 가지는 것이 정의이지만 공산주의에서는 불의한 것입니다.
어떤 인간의 사고나 제도도 모든 사람에게 정의롭지는 못한 법입니다. 미국이 노예제도를 가지고 있을 때나 최근 까지도 남아프리카 신학자들은 노예제도나 인종차별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여 신학자들이 정치가들의 성경적 대변인 노릇을 하였습니다. 노예제도나 인종차별이 성경적 정의라고 강변하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마이클 샌들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권이 팔렸습니다. 그 책을 보면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경우를 들어 독자들이 각자 정의에 대한 정의를 내리게 합니다.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정의에 대한 해석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정의는 차별을 내포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뜻 외에 인간에게 차별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정의를 봐야 차별이 없는 절대적인 정의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19에는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까닭은 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 법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공의와 정의 이 두 단어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백성과 백성의 언약을 지키는 것이 공의와 정의라는 말입니다. 약속은 상호 신뢰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은 복을 주리라고 하셨으면 반드시 복을 주고, 죽으리라고 하셨으면 반드시 죽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말입니다.
잠언 1장에서 9장은 솔로몬의 잠언 1부이며, 10장에서 22장은 솔로몬의 잠언 2부이며, 22장에서 24장은 현자들의 잠언이며, 25장에서 29장은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솔로몬의 잠언이며, 30장은 아굴의 잠언이며, 31장은 르무엘의 잠언입니다. 솔로몬의 잠언 2부에서는 지혜와 의인의 삶과 악인의 삶을 대조하고 있고, 375개의 주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정직과 정의와 공의를 설명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정직과 정의와 공의를 새기고 우리 모두가 의롭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자기중심의 정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정직을 요구하십니다.
잠언 21:2에는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합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외부로 드러나는 행위를 보고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행위보다 먼저 마음의 동기를 평가하신다는 말입니다.
‘감찰하신다’란 말은 히브리어로 ‘토켄리보트’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마음을 달다’라는 뜻입니다. 감찰하는 것은 마음의 동기가 무엇인지, 마음의 동기가 선한 뜻인지를 하나님께서 달아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마음의 동기가 중요합니다. 동기가 자기사랑인지, 타인사랑인지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이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스캇 펙은 ‘끝나지 않은 여행’에서 “자기애와 자기중심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중심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자기중심은 자기 사랑과는 다르며 진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 정직은 정직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 의는 의가 아닙니다. 정직이나 의는 성경적이며,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꼬박꼬박 잘 했습니다. 그리고 이래에 한 번씩 금식하였습니다. 하루에 세 번의 기도시간도 빼먹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율법대로 하기만 하면 어떤 일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자기 의나 자기중심적 정직은 하나님의 사랑과는 너무나 먼 것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때리라고 하였기에 바울에게 39대의 매를 때리고도 양심의 가책이 없었습니다. 원수는 사랑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미워해야 합니다. 간음한 사람은 돌로 쳐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중심적 의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보세요. 그들은 율법적으로 볼 때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적 정직과 의로 성전에서 제사하고 가는 중에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율법에 가르치는 대로 할일을 충실히 하고 가는 길이기에 강도 만난 사람을 보살피지 않아도 얼마든지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에 시체나 더러운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였기에 그냥 지나치는 것이 율법에 충실한 삶이었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버리고 가는 것이 지극히 정직하고 의로운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순종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강조합니까? 순종은 생명을 줍니다. 순종은 강하게 합니다. 순종은 심령을 새롭게 합니다. 순종을 향한 가장 결정적 단계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는 것입니다. 순종은 자기중심적 삶을 버리게 하고, 하나님 중심적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24에는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자기의 유익에서 남의 유익으로, 남의 유익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의 자세가 진보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자기 의에 사는 사람은 누구와도 타협을 하지 않습니다. 누구와도 조화를 못합니다. 누구의 말도 안 듣습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주장하는 자세로 삽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인간은 모두가 거미형 인간입니다. 거미에게는 거미줄의 정중앙이 항상 자기 자리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모두가 자기가 항상 정중앙입니다. 현대인의 사고가 자기중심적인 이유가 다 있습니다. 우리시대의 ‘미더필더’인 2635(26-35세)세대의 최대 관심은 돈입니다. 2635세대의 키워드는 자기중심적(individualized), 진보적 세대(innovative), 현실주의적, 경제적 세대(into the reality), 유행추구 세대(inclined to fashion), 다양한 문화에 개방적인 세대(intercultural)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사고는 하나님 중심적이며 사람 지향적인 사고이어야 하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사람 중심적이며, 하나님 지향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17에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합니다. 주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면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자기중심적이란 언제나 확실하지 못하며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자기중심적 사고란 이런 것입니다. 남이 오래 걸리면 느린 것이고, 자기가 오래 걸리면 철저한 것입니다. 남이 하지 않으면 게으른 것이고, 자기가 하지 않으면 바쁜 것입니다. 남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면 주제 넘는 것이고, 자기가 그러면 솔선하는 것입니다. 남이 규칙을 무시하면 무례한 것이고, 자기가 그러면 당연한 것입니다. 남이 상사를 기쁘게 하면 아첨꾼이고, 자기가 상사를 기쁘게 하면 협조한 것입니다. 남이 성공하면 운이 좋은 것이고, 자기가 성공하면 열심히 일한 대가입니다.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 사고로 살아야 참된 인간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고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롭게 하고, 질서대로 살게 하고, “내 주여 뜻대로”라고 찬송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잠언 21:3에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대로 사는 것입니다. 정직한 삶은 하나님이 제사보다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직한 삶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내 의의 하나님이여”(시4:1)라고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30:18)라고 합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말2:17)라고 묻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공의’(righteousness)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인데 재판 용어입니다. 재판장이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판결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동시에 공의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죄를 지은 사람을 살게 하기 위하여 바르게 재판하여 대신 예수님을 죽게 하신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죽으리라고 하셨으면 죽이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정의’(justice)는 히브리어로 ‘체다카’인데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를 의미합니다.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를 의미할 때에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올바른 도리로 운행되는 사회를 말합니다.
잠언 15:8에는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고 합니다. 공의와 정의를 버린 제사는 아무 의미가 없는 종교행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제사를 미워하십니다. 공의와 정의가 없는 제사는 무의미합니다. 정직하고, 공의롭고, 정의로운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런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지만 의란 무엇입니까? 저는 의를 하나님의 질서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질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질서 있게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창조질서를 벗어나는 것이 불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질서대로 살면 기뻐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의롭게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공의와 정의는 제사보다 더 기쁘게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제사나 제물이라는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대로 사는 것을 참 예배라고 하십니다. 정직한 삶을 살지 않고, 정의와 공의가 없는 종교 행위나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아무 의미 없이 “주여”하는 것이나, “할렐루야”의 무가치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마음이 없이 “주여 주여”하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입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의롭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불법이 무엇입니까? 정직함이 없는 것이 불법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무시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떠난 것이 무법이며, 불의이며, 부정직입니다.
하나님은 왜 불의와 불법과 부정직과 불화를 싫어하십니까?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시기에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나하고 너는 너무 달라”라고 하실 것입니다.
시편 33:5에는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라고 합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세요.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성군입니다. 이스라엘 전 역사에 다윗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야의 아내인 밧새바를 취한 다음에 회개해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3:22에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만났을 때 그가 죄를 지을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룰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해답은 사무엘하 8:15에 있습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다윗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다고 하셨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정의와 공의로 행해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행동을 하게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도와 우리가 의로운 백성이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결 론
전쟁을 할 때마다 외치는 말은 ‘정의를 위하여’, ‘정의 수호를 위하여’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연합국 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전쟁이었습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에서 100만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군인들이 전장에 나갈 때 가도에 여인들과 어린이들이 꽃을 뿌리며 연호하였습니다. ‘정의 수호를 위하여.’ 그런데 젊은 군인들이 전장에 가서 보니 생지옥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90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습니다. 정말 정의가 전쟁의 목적일까요? 현재 우리나라의 탄핵정국도 비슷한 형국입니다. 탄핵을 찬성하는 쪽도, 탄핵을 반대하는 쪽도 민주주의를 외치며, 정의를 위한 일이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정의란 하나님의 마음에서 봐야 하는데 인간의 잣대로 정의를 보니 소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고대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는 정의에 대하여 각각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트라시마코스 정의’는 “각자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파스칼은 “피레네 산맥 이쪽에서에서의 정의는 저쪽에서의 불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힘 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라는 말이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법만이 정의롭고, 힘이 있습니다. 정의는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의로워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은 공평하고, 평화롭고, 살기에 좋은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정의로운 자가 손해보고, 공의로운 자가 뒤처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정의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얘기를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하나님을 들어야 합니다. 교회를 보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살아 있는 성경적 정의, 공의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정의로운 우리를 통하여 복음이 널리 전해지는 선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나라
잠언 21:3, 사도행전 8:4-8 / 이성희 목사
서론
현재 전 세계에 몇 개국이나 있는지 아세요? 어떤 자료에는 지도상으로 237개국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자료에는 196개국이라고 합니다. 아마 정식으로 국가의 명칭을 가진 나라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 UN 가입국은 192개국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 이렇게 많은 나라들이 있는데 이 나라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나라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나라는 아닙니다. 모르긴 해도 이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나라는 많이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기쁨과는 멀지도 모릅니다.
구약의 나라들을 보세요. 이스라엘 나라가 나뉘어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변방에 애굽, 앗수르. 바벨론, 바사, 에돔, 모압, 암몬, 헬라, 로마 등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나라도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시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그리스도인이 위축되기 쉽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교회가 문을 닫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순교 후에 교회는 더 왕성했고, 그 성에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즐거움은 그리스도가 주신 신비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화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나아갔습니다.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전도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것이 기쁨의 원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 명령을 수행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실천하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려고 했던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시작되고 순교가 시작된 때에 그들에게는 두려움과 무서움이 아니라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뻐하지 못할 때 기뻐하는 것, 웃지 못 할 때 웃는 것, 감사치 못할 때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신비입니다. 빌리 선데이는 “신앙생활 가운데 전혀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당신의 기독교에 어딘가 구멍이 났음에 틀림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남모르는 기쁨이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쁨과 나의 기쁨이 일치하면 참 기쁨입니다. 참 행복입니다. 이것이 참 가치입니다. 여기에 참 인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에 보면 선한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합니다. 악한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정직은 악의 반대입니다. 정직은 곧 선한 것입니다. 정직한 영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거짓 영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거짓 영들이 가득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선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도 못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왕들을 보세요. 솔로몬 왕이 죽은 후에 나라가 분열하여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됩니다. 북 이스라엘에는 19왕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선한 왕이 하나도 없습니다. 남 유다에는 20왕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8왕이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왕도 많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왕도 많지 않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지 않고 인간의 뜻이나, 경제나, 무기에 의존하는 나라는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나라로 전락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나라들은 믿음이 나라들입니다. 십자가가 국기인 나라들, 청교도 정신으로 세워진 미국은 하나님이 기뻐하셨지만 지금은 십자가도 청교도 신앙도 다 버린 것 같습니다. 이런 나라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듣기를 바랍니다.
첫째, 전도자의 말을 따르면 기쁘시게 합니다.
사도행전 8:6에는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고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의 말을 듣고, 표적을 보고, 그 말을 따랐습니다. 듣고, 보고, 따르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입니다. 먼저 들어야 하고, 그 다음에 보아야 하고 그리고 따라야 온전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르다’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세이콘’입니다. 이 단어는 미완료입니다. 미완료란 계속 따라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복음을 듣고, 보았으면 따라야 합니다. 여기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따르지 않으면 듣고 보는 것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을 듣기만 하고 보기만 하면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복음 듣기만 해도 듣지 않는 것 보다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보기만 해도 보지 않는 것보다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듣고 따르면 제일 기뻐하십니다.
마태복음 13:23에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고 합니다. 듣고 따르는 자가 결실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결실해야 기뻐하십니다. 열매가 없다면 어떻게 하실까요?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듯이 하나님이 슬퍼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가 그랬고, 마태가 그랬고,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제자들은 모두 다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면 기뻐하십니다. 따르는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세리 마태와 셀롯인 시몬은 다 함께 제자로 따랐습니다. 당시에 세리는 유대정치의 극우파입니다. 세리들은 로마의 권력에 앞잡이가 되어 유대인들의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열심당원인 셀롯인은 유대정치의 극좌파입니다. 가나안인들은 로마인보다 세리를 더 싫어했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시몬은 가난안인이었다고 합니다. 마태와 시몬은 서로 상극일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을 함께 따르는 동안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면 모든 견해의 차이가 좁아집니다.
전도자 빌립의 말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험하고 무겁지만 복된 일입니다. 우리와 같이 부족한 사람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한한 영광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야 할 법을 따르는 것은 안전한 일입니다. 평안하고 행복한 일입니다. 따라야 할 것을 따르지 않으면 불행이고 불편한 일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도리를 따르기도 하고, 돈을 따르기도 하고, 쾌락을 따르기도 하고, 권력을 따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따를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삼종지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려선 아비와 어미의 뜻을 함께 따르고, 시집가면 지아비를 가르쳐서 평등한 가정을 만들며,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에 연연하지 말며 나의 길을 간다”로 ‘삼종지도’가 바뀌었습니다. 무엇을 따르느냐 하는 것은 도리이며, 인격이며, 신앙인에게는 신앙의 척도입니다. 주님을 따라야 거기에 행복이 있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도리입니다.
‘따르는 자 없는 리더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따르는 자의 도리를 요즘 말로 ‘팔로워십’이라고 합니다. 팔로워십은 중요합니다. 리더가 누구든 따르는 사람들은 세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헌신적인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단계가 가장 유능한 추종자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리더와 대의에 헌신적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헌신적으로 따르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따르면 좋아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좋아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셨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0:27에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양이라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염소는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아야 양입니다. 양이라면 모름지기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목자가 양을 기뻐합니다.
찬송가에도 참 좋은 가사가 있습니다.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누가 죄를 떠나 주만 따를까 누가 주를 섬겨 남을 구할까 누가 주의 뒤를 따라 가려나. 부르심을 받아 주의 은혜로 주를 따라가네 주만 따르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고백할 때에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기뻐하실 것입니다.
둘째, 귀신이 나가고 병이 나으면 기쁘시게 합니다.
사도행전 8:7에는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라고 합니다. 귀신 들리고, 병이 들고, 아픈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이 나가고, 낫게 될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빌립이 갔던 사마리아는 귀신이 나가고, 환자들이 치유되고, 병이 낫고, 표적이 있어 그 성에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귀신이 나가고 병이 나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사람이 귀신 들리고 병이 드는 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마귀의 권세 때문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쫓겨나고, 병이 나은 것은 마귀를 이겼다는 뜻입니다. 마귀를 이겼으니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왜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까? 마귀의 권세인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으면 왜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마귀의 권세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얽히고설킨 인간관계가 풀리고 서로 화평하고 화해하면 왜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마귀의 권세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가 죄로 말미암아 들어왔고, 마귀의 세력이므로 이런 모든 매듭이 풀어지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마태복음 11:5에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그랬습니다. 이 말은 “당신이 메시야입니까?”라는 말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모든 병든 것, 인간을 괴롭히는 것, 나쁜 것을 다 고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은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귀신이 나가고, 병이 낫고, 죽은 자가 살고, 가난한 자가 부요해지는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고치십니다. 병들고, 신음하고, 고통 당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길을 지나가실 때에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도우소서”, “내 딸을 고쳐 주소서”, “내 아들을 살려주소서”, “할 수 있거든 내 아들을 고쳐주소서”라고 하는 말은 한 번도 주님은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민망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라고 하셔서 고쳐주시고 낫게 하실 마음을 본성적으로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처럼 낫게 되고 살게 될 때에 주님도 기뻐하십니다.
귀신이 나가면 사람이 온전해집니다. 예수님이 만났던 군대귀신 들린 자를 보세요. “귀신이 나가고 옷을 입고 온전하여지니라”고 합니다. 귀신이 나가고, 병이 나아야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병들지 않은 원래 상태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고치시는 치유기적에는 ‘고치다’라는 말을 헬라어로 두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한 단어는 ‘테라퓨오’입니다. 이 단어는 ‘고치다’는 말입니다. 영어에서 ‘테라피’라는 말의 어원입니다. 다른 한 단어는 ‘이아오마이’입니다. 이 단어는 ‘돌려놓다’ 혹은 ‘회복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치유에는 ‘테라퓨오’보다 ‘이아오마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병들지 않은 온전한 원래 상태로 돌려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은 원래 사도들에게 주신 능력입니다. 마태복음 10:1에는 열두 사도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후에는 이 권능은 믿는 모든 자에게 약속된 능력입니다. 마가복음 16:17에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합니다. 이 능력을 우리 모두가 받고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심각한 병에 걸려 있습니다. 마치 중증환자와 같습니다. 범죄와 부조리와 빈부차이는 도를 넘었습니다. 사건 수를 시간으로 나눈 수치인 범죄시간도 계속 빨라지고 있습니다. 작년의 범죄시간을 보면 2005년보다 1.5초 앞당겨져 있습니다. 절도는 2분 31초마다 발생합니다. 성폭행은 1시간마다 발생합니다. 살인은 7시간 54분마다 발생합니다. 각종 범죄는 16.9초마다 발생합니다. 금요일과 화요일이 범죄가 가장 많고, 서울에서는 서울 강남3구라고 하는 강남, 서초, 송파가 범죄가 제일 많습니다. 성폭행은 강남구가 제일 많습니다. 살인은 구로구와 영등포구가 많습니다. 절도는 강남구와 광진구가 많습니다. 폭력은 강남구가 제일 많습니다. 사기도 강남구가 제일 많습니다. 방화는 동대문구가 제일 많습니다. 재물이 많은 곳에 범죄도 많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병든 도시의 현실입니다.
요즘 애들 말로 ‘빵셔틀’, ‘담배셔틀’, ‘시험셔틀’, ‘체육복셔틀’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신종학교폭력입니다. 만만한 아이들에게 빵 시름을 시키고, 담배 심부름을 시키고, 시험 답안지 심부를 시키고, 체육복 심부름을 시키는 용어입니다. 이제는 아이들 용어도 발달하여 외래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에 우울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또는 대인기피 등 다양한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파괴된 인격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나라가 얼마나 심각한 병에 걸려 있는지 아시겠지요?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입니다. “이 땅에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정말 하나님께서 이 땅을 고쳐주셔야 합니다. 이 땅을 속히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이니까 고침을 받아야 기뻐하십니다.
역대하 7:14에는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고치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정신병동에 두 환자가 함께 방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환자가 발작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 다른 환자가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나 쟤 때문에 미치겠어요”. 모두가 서로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상대방 때문에 미치겠답니다. 여와 야가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상대방 때문에 미치겠답니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상대방 때문에 미치겠답니다. 빈부가 서로 갈등을 가지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모든 것을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피와 물이 어느 쪽으로 흐릅니까? 농도가 진한 것이 약한 쪽으로 흐릅니다. 우리가 강하면 세상의 더러움이 우리에게 들어오지 않지만 우리가 약하면 세상의 온갖 악이 죄다 들어와 우리까지 오염시킵니다. 성탄의 동방박사 이야기 가운데 제4의 박사 알타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방에서 함께 출발했지만 오는 도중 아프고 신음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네에 와서 그 사람들을 간호하고 돌보다가 세 사람이 떠나도록 돌보는 일을 놓지 못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가서 만나기도 하지만 그분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회를 고쳐주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입니다.
결 론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의 박상철교수는 장수 원인으로 유전적 요인보다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규칙적인 생활방식, 올바른 식습관 등 후천적 요인이 지배적이라고 합니다. 그는 백세 건강의 권위자입니다. 건강한 노년생활을 위한 다섯 가지 생활 태도를 말하면서 움직여야 한다, 적응해야 한다. 틀림이 없어야 한다, 느껴야 한다, 생각해야 한다고 권합니다. 개인이나 사회나 어떤 조직이나 국가나 다 이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복음 전파에 빨라야 합니다. 병 고침이 있어야 합니다.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건강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미신을 타파해야 합니다. 영적각성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회귀해야 합니다. 사회적 병폐를 치유해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재무장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복음전파와 치유를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느리게 사는 즐거움
잠 21:5 / 노경모 목사
느리게 산다는 것은 게으르게 산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거북이와 토끼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거북이가 느리게 갔지만 게으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도끼가 빨리 갔지만 게을렀지요..
'느리게 사는 즐거움을 가져라' 이 말은 게으른 사람들을 위한 말이 아닙니다. 느림의 지혜를 터득하고 싶어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권면입니다.
현대의 모든 삶은 빠르게 진행되는 것 같아요. 비행기의 속도도 점점 빨라집니다. 기차의 속도도 빨라집니다. 한국에서 KTX가 서울과 부산간을 2시 40분에 주파합니다. 자동차도 성능도 좋아지고 최근에 인기를 끌고 있는 모 자동차 쿠페는 정지상태에서 100km/h까지 6.5초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의 도달 시간은 4.7초 밖에 걸리지 않는 스포츠카가 한국에 수입된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빨라야 하는지요.
컴퓨터의 속도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인터넷 속도가 얼마나 빠릅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고속 인터넷을 지나서 초고속, 광속 인터넷망을 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빨라지다 보니 우리의 생각과 행동 자체도 빨라지게 됩니다. 빨라질 필요가 없는 것 까지 빨라지게 됩니다. 빨라져서는 안되는 것까지 빨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현대인들은 내가 바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보다 처진다고 생각합니다. 낙오자가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바쁘지 않으면 불안감이 생깁니다. 안절부절하게 됩니다. 자신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바쁘게 빡빡하게 스케줄을 잡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쁘게 만듭니다.
약속이간이나 모임시간에도 일부러 늦게 갑니다. 자기가 바쁘다는 것을 은연중에 인식키려고 합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를 않습니다.
기차도 너무 빠르다보니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기가 힘들듯이 너무 바쁘게 살다보면 삶의 보람과 맛을 느끼기가 힘듭니다.
어떤 분이 너무 빠르게 살고 있는 현대인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보라. 붉게 물든 석양을 바라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지는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어라. 가든 길을 멈추고 노을진 석양을 바라보며 감탄하기에 가장 적합은 순간은, 그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이다.'
오늘 본문인 잠언 21:5에는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 삶이 조급해지면 모든 부분이 궁핍해집니다. 영적으로 궁핍해 집니다. 마음이 궁핍해 집니다. 우리의 삶의 질도 궁핍해집니다.
그렇다는 느리게 사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게으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오늘 본문에도 부지런하라고 말씀합니다.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다.'
느리게 사는 것이란 어떻게 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을가요?
첫째, 여유를 갖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여유'는 우리의 삶의 풍요롭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자매의 집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준비하느라고 분주합니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언니인 마르다가 자기가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동생 마리아는 도와줄 생각을 안하고 있으니 좀 도와주게 해달라고 주님께 불평하듯이 요구합니다. 그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0:41-42,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많은 일로 인해 분주해지니깐 염려가 생기도 불평이 생기게 됨을 지적히신 말씀이요, 바쁜 일상의 일을 멈추고 여유롭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교훈하시는 말씀입니다.
한 번은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붙잡아서 혈기등등하게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예수님을 고소하기 조건을 얻기 위해서 올무를 놓는 것이지요.
이 때 예수님께 어떻게 하셨습니까? 급하게 대답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굽혀 땅에다 손가락을 무엇을 쓰십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혈기등등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앞에서 여유를 갖는 것입니다. 조급해진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다구치듯이 묻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여러 말씀 안하시고 이 한 마디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또 몸을 굽히시고 땅에다 손가락으로 무엇을 쓰십니다.
거기 모여있는 사람들이 양심을 가책을 받아서 한 명 두 명씩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손가락으로 땅에다 무엇을 쓰시는 이 예수님의 여유.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뭐 그렇게 바쁘십니까? 시간적으로 바쁜 것도 있지만 사실 우리의 내면을 냉철히 들여다 보면 대부분 우리의 마음이 바쁜 것입니다. 마음이 바쁘면 여유가 안 생깁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스피드'가 강조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쉼없이 반복되는 인생의 여정에서 스피드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여유'입니다.
세계적으로 빠른 명차들이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시속 몇백 Km까지 달릴 수 있는 차이냐,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에 이르는데 불과 몇 초 걸리는 차인가, 마력은 몇 백 마력의 차인가. 그러나 이러한 명차에 '스피드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브레이크'입니다. 잘 듣는 브레이크입니다. 브레이크가 없거나 불실하다면 그것은 이미 명차가 아닙니다. 아니 차가 아닙니다.
스피디한 사회 속에서 여유는 브레이크나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여유가 있으면 내 삶을 다시 한 번 성찰할 수 있습니다. 여유가 있으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여유있으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유태인들의 성공 비결도 바로 여유의 기술에 있다고 합니다. 즉 안식일과 안식년이라는 여유를 통해 영육을 재충전을 하기 때문에 창의적 성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성수주일합시다.
둘째, 욕심을 갖지 않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욕심을 갖지 않고 사는 것은 삶의 의욕을 갖지 않고 무력하게 사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져야 할 좋은 욕심도 있을 수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러한 것들도 탐욕의 성격이 강하지요, 탐욕이란 가져서도 안될 것들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가지려고 욕심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야고보서 1:15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욕심 때문에 죄짓고 욕심 때문에 결국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욕심이 사람을 바쁘게 만듭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이성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 성공에 대한 욕심, 출세에 대한 욕심. 이러한 욕심이 마음에 들어가게 되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머리가 분주하게 돌아갑니다. 방법을 찾습니다. 수단을 간구합니다. 생활이 바빠집니다. 조급해집니다.
욕심이 생길 때 기도도 잘 안됩니다. 잘못 구하게 됩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이라고 야고보서 4;3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앞설 때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직장에서 인정받으려는 생각,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생각, 남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생각, 남한테 과시해 보고 싶어하는 마음들 이러한 마음들을 들여다 보면 욕심이 그 바닥에 깔려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욕심들이이 나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나를 쉬지 못하게 만듭니다. 나를 과로하게 만듭니다.
나를 분주하게 뛰어다니게 만듭니다. 주님과 차 한잔 하면서 다정하게 이야기 할 시간이 사라지게 됩니다.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현재의 상황에 만족할 때,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옛날에 어떤 한 농부가 살았습니다. 그 농부는 부지런히 일했지만 사람들이 땅을 사서 자신도 땅을 사 둬야겠다는 생각과 욕심이 조금씩 생겼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기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농부에게 한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누구시죠?"
"저는 천사예요. 당신에게 땅을 드리겠어요."
"그게 정말입니까?" 농부는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루동안 선을 그린 원 안의 땅은 모두 당신의 땅이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농부는 바로 선을 그리며 땅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만큼 돌까? 아냐아냐 이게 어떤 기회인데 .. 저~ 만큼 돌자"
그렇게 농부는 하루 종일 쉬지도, 먹지도 않고 돌았습니다. 점점 해가 지면서 농부도 거의 도착점에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농부는 도찾점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이제 이 땅은 모두 당신의 것 입니다." 이렇게 천사가 말을 끝낸 순간, 농부는 숨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말을 타면서 먹지도, 쉬지도 않고 계속 탄 욕심 많은 농부의 최후였습니다.
욕심이 우리를 바쁘게 분주하게 조급하게 만들지 않도록 욕심을 내려 놓읍시다. 욕심이 우리를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마음을 비웁시다.
셋째, 삶을 목적을 인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빨리 달리는 고속열차에서는 바깥 풍경을 잘 감상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완행 열차를 타고 창가를 바라보면서 산도 감상하고 시골 마을도 감상하고 황금물결이 치는 들판도 감상하고 길가에서 손을 흔드는 동네 사람들도 감상을 합니다.
우리가 바쁘게 살다보면 우리의 삶의 목적을 잊어버릴 때가 참 많습니다. 왜 사는 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바로 인식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고가 나거나 병이 나서 병원의 침상에 눕게 되었을 때 그제서야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내가 바로 살아왔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되지요.
한국 사람들은 마음도 바쁘고 행동도 바쁘다 보니 묵상을 잘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묵상은 느리게 사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존재를 인식하게 됩니다.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이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꼭 기억합시다. 주안에서 여유를 갖고 삽시다. 욕심을 버리고 삽시다. 삶의 목적을 인식하면서 삽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많은 열매를 맺어드리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서 연구
잠 21:1-12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여도 야훼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신다.
야훼께서는 옳고 바르게 사는 것을 제물보다 반기신다"(21:2-3)"의로우신 하느님은 악인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악인을 내던져 망하게 하신다"(21:12)
"악인이 바치는 제물은 야훼께서 싫어하신다.
하물며 못된 속셈으로 바치는 것이랴"(21:27)
하느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는 속임수를쓰거나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 하느님이 기뻐하시는것은 제물(예배)도 아니다. 옳고 바르게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하는 일은 정당하고 떳떳하다고 생각한다. 도둑질을 하면서도 그에 상당한 이유와 변을 내세운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결단코 용납되지 않는다. 하느님은 악인은 반드시 내던지시고 망하게 하신다. 인간역사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간여하는 대원칙은 정의이다. 이것은신구약성경이 일관성있게 주장하는 멧세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훼께선악한 사람의 제물을 역겨워하시고 바른 사람의 기도는 반가와하신다"(잠언15:8)고 하였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길은 정의와 진실 뿐이다. 이것이 없는 모든 종교적 행위는 위선이요 하느님의 진노를 사는 일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르게 사는 일"이다. "바르게 사는 것이 착한 사람에게는 기쁨이 되고 나쁜 일 하는 사람에게는 낭패가 된다"(잠언 21:15)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판단기준은 정의이다. 바르게 살기를 힘쓰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되는대로, 욕심대로 사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 "애써 정의와 신의를 좇아 살면 존경을 받으며 복되게산다"(21:21)
(2)
"악한 사람은 바르게 살기를 싫어하여
남을 해치려다가 도리어 제가 죽는다"(21:7)
"악한 사람의 마음은 못된 일에 쏠려 그 이웃에게도 호감을 주지 못한다"(21:10)"가난한 사람의 호소에 귀를 막으면
제가 울부짖을 때 들어 줄 이 또한 없다"(21:13)"악한 사람은 얼굴에쇠가죽을 쓰고 정직한 사람은 제 길을 살핀다"(21:29)
사울 왕은 자신의 충신 다윗 장군을 시기하다가 스스로 망한 사람이다. 여러번 다윗의 공로로 전쟁에 승리하고 죽음의 위협에서 살아났음에도그 은공을 헤아리지 못하고 질투심의 악신에 사로잡혀 아들마저 자신과 함께 죽게 하였다.
가룟 유다는 인색마귀에 사로잡혀 마침내 자신의 스승이요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를 배반한 만고의 죄인이 되었다. 배신자의 말로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본래 선량했던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임을부인했다가 회개하였다. 그로써 그는 위대한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 본래악했던 유다는 뒤늦게 후회했지만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남을 해치려는 사람치고 제 명에 살다 간 사람은 흔치 않다. 거의가다 얼룩진 인생의 흔적을 남기고 갔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해 매정하고 인색한 사람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신뢰받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런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 주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도움을 받더라도 여러가지 좋지 않은 비평을 들으며 받게 되는 것이다. 아랫사람들에게 야박한 사람은 결코 선량한 사람일 수 없다.
(3)
"임금의 마음도 야훼의 손에는 흐르는 물줄기 같아당신 마음대로 이끄신다"(21:1)"누가 감히 야훼 앞에 나서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의견을 펴랴전시에대비해서 병마를 준비하더라도 승리는 야훼께 달려 있다"(21:31)
인간 만사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박 대통령의 시정 방침이"유비무환(유비무환)"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인생은 인민군에 의해서가아니라 자신의 정보부장에 의해 끝났다. 옛날 모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주여, 당신은 대대손손 우리의 피난처,
당신 앞에서는 천년도 하루와 같아 지나간 어제 같고깨어 있는 밤과같사오니 당신께서 힘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아침에 돋아나는 풀이옵니다.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저녁이면 시들어 마르는 풀잎이옵니다"(시90:1-6)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건강, 자기 능력, 자기 학벌, 자기 가문을 믿고살아간다.
"어찌하여 나라들이 술렁대는가 어찌하여 민족들이 헛일을 꾸미는가야훼를 거슬러, 그 기름부은 자를 거슬러 세상의 왕들은 들썩거리고 왕족들은 음모를 꾸민다. 왕들아, 이제 깨달아라.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신을 차려라경건되이 야훼께 예배드리고 두려워 떨며 그 발 아래 엎드려라.
자칫하면 불붙는 그의 분노, 금시라도 터지면 살아 남지 못하라"(시2:1-12)"야훼께 의지하는 자는 시온산과 같으리니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든든하리라"(시 125;1)
마음을 감찰하심
잠언 21:1~8 / 이장우목사
지금 이 나라에는 연일 적폐청산에 대하여 온갖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있는데 전 전직 대통령의 호위무사였던 사람은 이런 일들보다 더한 경천동지할 위법 사항들이 더 있다고 합니다. 지금 언급되는 대통령은 교회의 장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통령들이 왜 불법에 연루가 되는 것입니까? 대통령이라는 권력이 너무 크기 때문 입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큰 이익을 챙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도 그것에 따른 반대급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권력자들과 어떻게든 줄을 대어 이권을 얻고 싶어 하는 자가 많습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왕의 마음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대통령의 마음도 누가 움직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움직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정책들이 나오면 기도하자고 하는 문자가 많이 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만이 아니라 요즈음은 청와대에 20만 명 넘게 청원을 하면 의무적으로 답변을 해야 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떤 정책에 반대의견을 표하라는 문자도 많이 옵니다. 이제는 기도보다 그런 식으로도 압력을 넣습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의 대통령이나 국회가 어떤 결정을 하면 좋겠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에 좋은 결정을 원할 것입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절에 좋은 종교정책을 원할 것입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방금 읽은 말씀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농부가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봇물을 이리 저리 방향을 바꾸듯이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만이 아니라 일반인의 마음도 다 지으셨고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시편 33:13~15절을 봅니다.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 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14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 살피시는 도다 15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 살피시는 이로다” 여호와께서 모든 인생을 살피시고 모두의 마음도 지으신 분이십니다. 이런 말씀을 근거로 왕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나를 위한 소원, 또는 교회를 위한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수많은 왕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움직였다는 예를 듭니다.
애굽의 바로 왕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의 아내를 손대지 못하게 하십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게 하시고 그 해석을 다니엘만이 할 수 있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하여 바벨론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하는 순간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고 일곱 때를 그렇게 지내게 됨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고레스 왕의 마음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자신의 목자로 삼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도 합니다. 아하수에르 왕이 잠이 오지 않아 옛날 궁중일기를 잃게 합니다. 그때 모르드개의 일을 알게 됩니다. 이런 예를 들면서 우리도 기도하면 대통령의 마음도 바꾸어 우리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소원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 마음을 움직입니다.
시편 33:16~17절을 봅니다. “16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17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지으시고 그 마음을 다 살펴보신다는 말씀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런 말씀들을 보면서 우리는 권력자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가 힘을 얻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고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힘의 방식으로가 아니라 오직 그의 인자(仁慈)입니다.
이어지는 18~22절입니다. “18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19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20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21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22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인자하심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사랑입니다. 이것이 자기 백성들에게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인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 자신이 구하는 이 마음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신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지으셨기에 그 마음을 다 감찰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께서 자기의 마음을 감찰하심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행위가 옳고 정직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 항상 악할 뿐임을 이미 창세기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창6:5, 8:21). 항상 악하기에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면 그렇게 항상 악한 상태가 무엇인가 보니 하나님의 아들들의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결혼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항상 악한 것입니까?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에 모든 인간은 선악을 자기중심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의 행위를 옳다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이 나라가 남한 사람은 남한이 옳다고 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북한이 옳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한 안에서도 또 갈라집니다. 보수가 옳다고 하고 진보가 옳다고 합니다. 자신이 속한 그 환경을 따라 자기가 옳다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싸웁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백퍼센트는 아니라고 하여도 상대적으로도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행동이 옳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여호와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노출 당하신 적이 있습니까?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적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거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거나 간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제대로 마주친 자들의 특징은 자신이 전적으로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티끌과 재 같은 자가 감히 아뢴다고 하였습니다(창18:27). 모세는 신발을 벗고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출3:5,6).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사6:5). 신약의 바울이 주님을 만났을 때의 모습이나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서 주의 영광을 보았을 때에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자기 행위가 정직하다고 여겨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추어지면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사건이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점점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가는 자도 있을 것이고, 바울처럼 급격하게 꼬꾸라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살피시는 대상이 되는 자라면 어느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 말씀의 비추임 앞에서 결코 자기의 행위를 정직하다거나 옳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고백하기를 나 행한 것이 다 죄 뿐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로마서 3:9~18절입니다.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ㄴ)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ㄷ)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ㄹ)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ㅁ)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ㅂ)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ㅅ)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을 다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나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결코 자기의 행위를 정직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의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면서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딤전1:15). 이것이 말씀에 비추인 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이 비추어졌습니까?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늘 옳은 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말씀을 보아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비추어주지 않으면 말씀의 필요한 문자만 취하여 세상만사를 자신의 가치관과 자신의 선악체계로 판단하는 교만한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보고 듣는 시간은 우리의 속이 하나님의 눈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이어지는 14~16절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말씀 앞에 벌거벗겨 지는 사람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곧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게 됩니다.
본문 3절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는 구약에서 너무도 많이 나옵니다. 지난 19년 동안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 12명의 선지자의 글을 상세하게 다 살펴보았습니다. 온갖 절기를 지키며 제물을 바치지만 그들의 일상은 속임과 도둑질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성전에 나와서 이렇게 재물을 바치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망한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1)형통한 것은 다 죄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족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여 그렇습니다. 이러한 죄 역시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땅의 티끌이며 피조물인 주제에 감히 선악을 판단하면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였기에 나오는 모습입니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해져 있는 인간들은 악인의 형통을 성공이라고 하고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이라는 것이 죄인데도 사람들의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해져서 끊임없이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세상의 자랑거리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통이라는 각주를 보면 등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인이 빛으로 보이고 의인이 어두움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십자가는 저주와 어두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시면 세상과 전혀 반대로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31:1~3절입니다.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선악과 이후의 모든 인간은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합니다. 그래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고 악인의 형통을 빛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눈이 오만하지 않기에 큰일이나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을 배부르게 먹고 엄마 품에 있는 아이 같게 하였다고 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지금부터 영원까지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본문 5~8절입니다. “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6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 7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정의를 행하기 싫어함이니라 8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으니라”
악인의 형통함을 좋게 보는 것은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자족합니다. 그렇다고 게으르게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러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것은 물질만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사는 것도 마찬 가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단기속성 코스 같은 것이 없습니다. 평생을 말씀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급한 자는 물질을 얻고자 하거나 말씀을 얻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급하게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망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불려 다니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악인의 강포는 결국 자기를 소멸합니다. 악인의 강포가 무엇입니까?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여져 있으니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강포(强暴)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강포를 검색하여 보면 ‘우악스럽고 사나움. 성서에 따르면, 이때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나옵니다. 창세기 6:13절의 말씀입니다.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세상에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그 포악이 가득한 모습이 자기 좋은 대로 먹고 마시며 사고팔며 시집가며 장가가는 일에 바빠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이 살아간 것입니다. 이들은 홍수가 나서 세상을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기에 그 강포로 가득한 것이 결국 자기를 소멸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악인의 강포라는 것은 뉴스에서 보도되는 흉악한 범죄만이 아니라 자신이 선악의 판단 자가 되어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강포가 가득한 세상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정의를 행하기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정의로움을 싫어하는 것도 자기중심의 정의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의라는 것은 긍휼과 자비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는 말씀은 너희가 긍휼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긍휼을 버리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기에 이들이 결국은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감찰(鑑察)하십니다. 이러한 감찰은 높으신 분이 낮은 자를 잘 살펴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찰(監察)은 감사원에서 하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둘 다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기 백성은 전자입니다. 주께서 죄를 살피시면 그 앞에 설 자가 없습니다. 오직 자기 백성을 은혜로 보살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잘 살펴서 우리의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여지지 않도록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고 환경을 흔들어 주십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고 낮은데 마음을 두도록 보살펴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 옳다고 여겨진다면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여지는 길이기에 주님은 신실하게 우리의 마음을 낮추어주십니다. 그러할 때에 비로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주님이 보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읽기
잠언 21장 1-14절
고대사회에서 왕은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의 말 한 마디에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죽일 수 있었으며, 마음만 먹으면 죄수의 사형을 면해주거나 노예를 총리의 자리에 앉힐 수도 있었습니다. 인간 중에 가장 높고 큰 위에 앉은 자가 바로 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가장 높은 왕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21: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여기서 ‘보의 물’이란 농사를 짓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수로 안에 담겨 있는 흐르는 물을 가리킵니다. 필요에 따라서 수로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고, 물의 양도 조절할 수 있습니다. 물이 임의로 흐르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수로를 따라 흘러가듯이, 왕이 가진 권력이 막대해 보여도 결국 여호와의 통치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권력도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도 만물은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삶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위로를 줍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인생도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한 악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고, 의롭게 살아가는 자들을 반드시 상과 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1절에서는 ‘여호와의 손’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손’이란 온 우주와 인간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들을 보호하시고 도우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삶이 여호와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염려도 근심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마음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2절 말씀입니다. “(잠 21: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마치 X-Ray를 통해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뼈를 보듯이, 현미경을 통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작은 세포까지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속 꽁꽁 숨겨져 있는 생각과 동기도 다 보고 계십니다. 사람이 겉으로는 좋은 일을 하며 전혀 다른 마음을 품고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을 판단하실 때 눈에 보이는 외적인 행동이나 일의 결과만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마음의 동기와 행동의 목적까지도 깊이 다 꿰뚫어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밖으로는 거룩하다 할지라도, 마음 속에 죄악이 남아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의 행동 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태까지도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도록 의롭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롭고 바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제사 드리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절입니다. “(잠 21:3)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교회에 와서는 누구보다 예배는 열심히 드리지만, 삶의 자리에 돌아가서는 계속해서 불의를 행하고 거짓과 속임수로 살아가는 한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삶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교회에 와서 드리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의 현장 속에서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속한 가정과 사회 공동체 가운데서 의를 행하는 것,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만 드리면, 나머지 날들은 정의를 행하지 않아도 괜찮고 불의를 저질러도 면제를 받는다는 오해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일 하루 공예배만 드리는 삶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께 의로운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부지런한 자’의 반대 개념은 ‘게으른 자’입니다. 그런데 5절 말씀을 보면 ‘부지런한 자’와 ‘조급한 자’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지런한 자는 성실하고 정직함을 갖춘 사람으로 의로운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 다르게 ‘조급한 자’는 빨리 재물을 모으려는 욕심에 눈이 멀어 부정직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악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사람은 결국 궁핍함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6절 말씀을 이어서 보면 “(잠 21:6)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 남을 속이고 피해를 주면서까지 재물을 모으려 하는 사람은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여기서 ‘불려 다니는 안개’란 표현은 아침에 잠깐 있다가 흩어져 사라지고 마는 안개를 뜻합니다. 속이는 말과 거짓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려는 시도가 결국에는 그 사람을 파멸로 빠트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거짓과 속임수로 빨리 부자가 되려는 악한 길에 들어서고자 하는 유혹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땀 흘려 일하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7절에 ‘악인의 강포가 자기를 소멸한다’는 말은 악인이 남에게 행한 악한 행위의 결과가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서 그를 망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악행은 “누워서 침 뱉기”와 같습니다. 악인은 자기가 파 놓은 함정에 자가 자신이 빠지게 됩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21:12)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은 악인을 심판하고 계십니다. 죄악의 길을 걸어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 벌을 받아 멸망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날마다 죄악의 유혹을 무찌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지혜이며, 복된 길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풍성한 생명의 길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지혜자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