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지도자의 영적 성숙
딤전 4:11-16
11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15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딤전 4:11-16 / 그대는 이러한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분명히 가르치고 명령하시오. 12)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얕잡아 보이게 하지마시오. 오히려 그들에게 모범이 되시오. 말과 생활로 모범을 보여 그들이 따르게 하고 그대의 사랑과 믿음과 순결한 사상으로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시오. 13) 내가 그곳에 갈 때까지 교회에서 성경을 읽고 설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온 힘을 다하시오. 14) 교회의 장로들이 그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소중하게 여기시오. 15) 그 능력을 그대가 맡은 직무에 다 쏟아 부어 전력을 다하시오. 그래서 그대의 발전이 모든 사람의 눈에 드러날 수 있게 하시오. 16) 그대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시오. 옳은 일에는 끝까지 충실하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대뿐 아니라 그대를 따르는 다른 사람들도 구원받게 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젊은 사람으로서 또한 신앙의 지도자로서 구원의 도리와 경건생활 특히 언행심사에 있어서 신중한 행실과 정욕을 제어하는 일들에 본이 되라고 명합니다.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11) 바울은 디모데에게 구원의 진리와 경건생활의 모든 교훈을 명하고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명하고 가르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신적권위에 입각해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실 때에도 자주 사용되었습니다(마 10:5; 눅 8:29).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배우고 확신한 진리에 근거하여 명할 자를 명하고, 가르칠 자를 확실히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바라는 능력 있고 성숙한 젊은 지도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12) 디모데는 연소함 때문에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섯 가지를 명하였습니다. ‘말과 행실’에서 말이 중요하지만 반드시 행실로 나타나야 합니다. 자신이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각기 틀리면 사람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고 존경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기본자세입니다. 이것은 이해하고 관용하며 무엇이든지 베풀 줄 아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없다면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전도하며 기도한다는 것을 기대하기란 무리입니다. ‘믿음’은 진리에 대한 확신입니다. ‘정절’은 도적적으로 방탕하지 않고 순결함을 유지하며,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께 믿음의 지조를 지키는 것입니다. ‘본이 되어’의 의미는 쇠로 만든 틀을 쳐서 그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은 젊은 지도자 디모데를 향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라(13-16)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진리의 편지를 보내어 권면하고 위로하고 교훈을 주며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하였습니다. 영지주의와 유대주의에 대항하여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회중 앞에서 성경을 낭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의 진리를 바로 해석하여 사람들이 바로 행동하고 살 수 있도록 권하고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적용: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당신의 삶에 주시는 사도 바울의 명은 무엇일까요?
교회는 사람을 모으기 위해 이벤트나 마케팅을 사용하여 부흥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회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고 그 일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질문들의 답은 말씀에서 찾아야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멈추지 말아야 할 것
디모데전서 4:11~16 / 이규헌 목사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 기독도가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리 신앙에도 여정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갈대아 우르에서 약속의 땅으로 나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도 우리의 신앙을 잘 표현합니다. 출발, 과정, 도착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 여정에서 경험한 것을 영적으로 낳은 디모데에게 전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떤 단계를 거치며 성숙과 변화로 나아갈 것인가? 연초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주제입니다. 본문 15절,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성숙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성숙은 영적인 성숙을 의미합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가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멈추어 서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앞으로 가든지, 뒤로 밀리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내가 오랫동안 정체되어있는 것 같다면 뒤로 물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영적으로 자라가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드러내라고 합니다. 성숙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깊은 산으로 가다가 비경을 만나면 그냥 내려가고 싶지 않습니다. 더 깊은 곳으로 가면 더 멋있는 곳이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난 영적인 경험을 했다고 해도 어떤 한 부분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고 그분을 우리가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심전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디모데에게 신앙을 전수한 것처럼 디모데가 또 다른 사람에게 신앙을 전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숙함을 통해 또 다른 사람에게 성숙이 전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7절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라고 말합니다. ‘연단’은 참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것을 이어진 8절에는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라며 육체의 연단과 비교합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의 눈물을 보면 압니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피와 땀이 서려있습니다. 연단은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훈련을 통해 조금씩 축적된 힘이 어느 순간 발휘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습니다. 약간이라는 말은 “잠깐”이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연단으로 오는 유익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경건을 위한 연단은 범사에 유익하고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습니다. 역도 선수들도 한순간에 무거운 무게를 들지는 못합니다. 아주 조금씩 들다가 나중에는 어마어마한 무게를 들고 버텨냅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성숙이 없으면 영혼의 빈사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골다공증이 그렇습니다. 뼈의 골밀도가 점점 없어집니다. 그래서 넘어지면 뼈가 다 부러져 몸져눕게 됩니다. 영적으로도 골다공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자신의 영혼이 텅 비어갑니다. 육체는 세월이 가면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건강식을 먹고 운동을 해도 육체적인 쇠잔함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겉사람은 낡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쇠하여지는 육체를 위해서만 투자를 합니다. 몸에 집착하는 동안에는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어떻습니까?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영혼의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영혼의 변화와 성숙이 일어나게 될 때 이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세상의 무게에도 견뎌내는 영혼의 강인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근육이 단단해지는 것보다 영혼이 단단해져야 합니다. 육체는 어쩔 수 없이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상승곡선을 그려가야 합니다.
스포츠 경기를 보아도 전반전에는 강하다가 후반전에 급격하게 힘을 잃고 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뒷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전반전에는 조금 헤매는데 후반전에 가서 더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후반전에 다 약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잘하는 것입니까? 전반전은 헤매더라도 후반전에 만회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후반전에 더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게 낫습니다. 갈렙과 같은 사람은 후반전에 더 강했던 인물입니다. 엘리 제사장 같은 사람은 후반전에 숱하게 자책골을 먹습니다. 갈수록 잘하는 것, 처음보다 끝이 더 좋으려면 만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연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헬라어로 ‘짐나조’라는 연단은 운동선수가 경기에 나가기 전에 몸을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 국제대회 나가는 선수들이 얼마나 땀을 흘리며 훈련을 합니까? 이것이 연단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이 연단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초기부터 훈련해야 합니다. 좋은 교회에서 좋은 인도자들을 만나서 제대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도 훈련입니다. 저절로 기도가 터지는 법은 없습니다. 훈련은 습관을 바꿉니다. 우리 안에는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망,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습관들이 있습니다. 죄 된 습관들을 바꾸어 내는 작업을 하려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죄를 짓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져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으로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훈련을 해야 하고, 그 훈련이 쌓이면 제2의 천성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디모데의 신앙 멘토 역할을 합니다. 신앙이 성장하려고 하려면 멘토가 있어야 합니다. 운동도 그렇습니다. 혼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본문 12절에는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는 젊은 사역자입니다. 그래서 그가 가르치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나이를 많이 따집니다. 어디를 가든지 나이를 묻습니다. 나이가 어리면 약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이는 중요합니다. 살아온 삶의 경륜이 있고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적인 나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새로운 질서가 있습니다. 나이가 몇인가 하는 것보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영적 성숙도입니다. 육체의 나이와 영적인 나이는 비례하지 않습니다. 영과 육의 세계가 구분되어야 합니다. 육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영에 눈을 뜨지 못하면 육의 나이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눈을 떴는지, 복음에 눈을 떴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의 엘리트입니다. 젊은 나이에 산헤드린 공회원이 된 것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굉장히 지성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 뭐가 나타납니까? 전혀 영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고린도교회도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젖을 먹고 딱딱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갓난 아이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 권위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습니까? 이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나이에 걸맞게 신앙의 여정 속 영의 세계에 눈을 뜨고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그것을 성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성숙을 위해서 본문 12절 하반절은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라고 말씀합니다.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라는 것입니다. 본이 된다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닮아가야 할 대상이십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려면 내가 본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본 만큼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내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분들입니다. 내 믿음만 지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노출될 때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고 있는가?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믿음의 실력 이상을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가정 교육입니다. 신앙의 대를 잇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1세대가 100 정도 뜨거워도 다음세대로 넘어가면 70-80 정도가 됩니다. 이마저도 잘 전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신앙의 계승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실체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은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살아본 다음에 “내가 해보니 좋더라” “내가 살아보니 이 말씀이 진리더라”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우리의 고민은 성경 해석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있습니다. 신앙은 이론만으로는 안 됩니다.
본을 보여야 하는 것 중에 첫 번째는 ‘말’입니다. 성숙은 혀가 중요합니다. 나의 혀가 스스로 통제되고 있습니까? 이게 참 어렵습니다. 그다음으로는 행실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말과 행실 그 외에도 믿음과 정절 사랑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성숙에 대한 매우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결국 내 안에 있는 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문제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죄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의 종노릇 하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죄에 끌려다니지 않고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3절에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존 오웬은 “죄를 계속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죄가 너를 계속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죄는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 죄의 속박으로부터 이겨내는 끝없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죄로부터 자유를 얻고 선을 행할 능력이 강해져 가는 것이 성숙입니다. 말과 행실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그런 변화가 먼저 믿는 자 안에서 본이 되어야 그것을 성숙이라고 합니다. 따르고 싶은 신앙이 되는 것이 성숙이라는 것입니다.
영적 성숙을 위해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본문 13절에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세 가지를 다루는데 첫 번째는 말씀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읽고 몸에 새겨가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그냥 낡고 뒤떨어진 구전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영감된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시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은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보는 자체가 매우 중요합니다. 요즘 교회에서 성경통독도 하고 필사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참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이 나도 모르게 살찌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선명하게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우리의 삶의 의문들이 하나씩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이 우리의 영적 성숙에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도록 권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내가 은혜받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내가 예수를 잘 따르면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때 나를 따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 권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교회에는 ‘권사’라는 직분이 있습니다. 권사님들의 역할이 권면입니다. 일종의 멘토 역할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성장을 나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가르치는 일입니다. 교회의 핵심 사역 중 하나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누가 가르치느냐도 참 중요하고, 어떻게 가르침을 받는가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성도들이 영적으로 자라갑니다. 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이일을 계속하게 됩니다. 교회는 가르치는 교육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배울 때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안 배우면 성장이 멈춥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또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가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성장에 참 중요하다는 것을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은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자신을 계속 점검하고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 대한 평가를 게을리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남들을 평가하는 것에 더 열심을 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면 자기 세계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지 않으면 스스로를 속이게 됩니다. 이것은 말씀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말고 나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오래 믿은 사람들, 교역자들이 범하기 쉬운 죄입니다. 다른 사람을 계속 판단하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고 맙니다. 자기를 성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 참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변화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접할 때 일어납니다. 나보다 신앙이 월등하고 탁월한 사람을 만나면 자극이 됩니다. 그분을 통해 내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항상 헷갈립니다. 서로 판단하게 되고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아니면 부족한지,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영혼을 세워가는 사람들은 남이 아니라 자신을 통찰하며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시간을 많이 가집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비난하기보다 자신 안에 있는 연약함을 보아야 합니다. 내면의 소리를 듣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내 목소리를 내려고 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성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있습니다. 바로 고난입니다. 잘 나갈 때는 모릅니다. 그런데 고난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게 됩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고난 속에서 인내하면 그 인내를 통하여 온전함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계속 성숙해 가는 신자들의 특징은 고난입니다. 욥이 순금같이 나오게 되는 모든 과정 속에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고난이야 말고 우리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믿음이 여물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순례는 일평생입니다. 멈추어 있지 않고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마라톤을 할 때 초반에 선두로 달리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초반에 질주한 사람은 나중에 위험합니다. 정말 노련한 마라토너는 똑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꾸준하게 달려갑니다. 한때 열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동받고 한두 번 열심히 하는 것,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굴곡이 많으면 위험합니다. 챔피언은 기복이 없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하고 변함없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골인 지점까지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끝까지 달려갈 수 있습니까? 자신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날마다 성숙함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영혼의 부를 축적하시길 바랍니다. 위대한 영혼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영혼이 자라가고 세워져 가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뿐만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선한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16절 하반절에는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성숙함을 추구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개인적인 성숙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거룩하게 살아가는데 세상과는 분리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갈수록 신앙이 축소됩니다. 점심시간에도 혼자 밥 먹고 종일 기독교 채널만 보는 것은 신앙의 성숙이 아닙니다. 신앙의 성숙은 그 이상입니다. 내가 죄를 안 짓고 살아가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신앙이 주일성수와 십일조, 술·담배 안 하는 것 이상을 못 넘어갔습니다. 물론 기본을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실체를 드러내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세상 속에서 진가를 발휘해야 합니다. 복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 복음은 세상 속에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으니까 겁을 냅니다. 자꾸 작아지고 어쩔 수 없이 다시 교회로 도피합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구원으로 끝나버립니다. 나의 구원으로만 끝나면 안 됩니다. 나의 변화가 세상의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나의 신앙이 가정과 직장에서 빛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입니다. 연초에 우리는 신앙이 어디 지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지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어디 지점에 와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지금 있는 곳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신앙생활 몇 년을 해왔든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훨씬 더 깊은 세계가 있습니다. 훨씬 더 풍성한 하나님의 약속이 앞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족하거나 여기서 멈추어 있지 않고 신앙의 성숙을 향하여 결단하시고 연단하시고 훈련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연말에는 하나님이 나를 자라게 하신 것에 대한 감격과 기쁨을 표현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교사(일꾼)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딤전 4:11-16 / 지태일 목사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우리는 오늘 스승의 주일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림니다. 교회에서 스승하면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양육하는 사역에 진력하는 교역자들입니다. 또한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 선생님들입니다. 그리고 여러 부서에서 말씀의 사역을 감당하는 일군들입니다.
1)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먼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가운데 어린 영혼들을 가르치며, 양육할 수 있는 기관 주일학교를 세우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2) 교사들, 교역자들께 감사를 드림니다.
주님의 지상대명령이요 미래교회를 준비하며 교회의 성숙을 위하여 끊임없이 사랑하며 섬기는 모든 교사들 교역자들께 감사를 드림니다.
3) 모든 성도들께 감사를 드림니다.
교회의 가르치는 사명을 위하여 늘 기도하며 모든 주의 종들과 합심협력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감사를 드림니다.
미국의 지미 카터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지미 카터는 말하기를,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함이었지,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나에게 임시직이지만, 교회학교 교사직은 나의 평생직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도, 대통령으로부터 체신부장관직을 제의 받았을 때, "나는 교회학교 교사라는 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만약 장관직을 맡아서 내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나는 절대로 장관직을 맡지 않겠습니다"라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교회학교 교사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고, 그제서야 그는 장관직을 수락했는데, 그는 매주 토요일이면 자기 본 교회 교회학교 교사직을 수행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필라델피아까지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워너메이커는 말하길, "교회학교 교사직은 내가 평생동안 해야할 본업이고, 체신부 장관직은 한두 해 하다가 그만 둘 부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교사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맡고 있는 교사의 직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 일에 대한 긍지가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끊임없이 그리워하는 교사상이 무엇일까요?어떤 교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사는 어떤 교사일까요?
이것은 교사들뿐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요구되는 동일한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 어떤 교사들, 어떤 일군들이 되어야 할까요?
당시 에베소교회를 섬기던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주신 사도 바울의 말씀들을 몇 가지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어떤 교사, 교역자, 성도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을 나누기를 바람니다.
1.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12절에서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여기서 "본"이라는 말은 "쇠로 만든 원형을 쳐서 생기는 자국"을 뜻합니다. 그래서 거울, 모형, 모범, 모본을 뜻합니다.
성경의 교훈을 가르치는 지도자나 교사들, 일군들은 반드시 자신의 생활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 특별히 학생들이나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가르치는 교사들의 행동거지를 주시하고, 그대로 본받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말과 행실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가르치는 자는 먼저 말로 말씀으로 가르치고 전도도 합니다. 그러나 말과 행실에 본이 될 때 그 가르침을 배우고 따릅니다. 학생들은 말보다 삶을 통해 더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사람을 대하는 기본자세로서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 거룩한 종교적인 사랑입니다. 남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고전13장에 보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천사의 말을 해도, 내 몸을 불살라 드린다해도 아무 것도 아님니다. 요21장에서 부활하신 이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 물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그 다음에 내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이 사명 감당 못합니다. 사랑으로 양떼를 붙잡기 바람니다. 사랑으로 수고할 때 귀한 교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본이 되야 할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믿음은, 페이스풀, 신실함, 충성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기본 자세입니다. 교사로서 어떤 환경이나 현실속에서라도 할지라도, 번거롭고 어렵고 유혹이나 반대나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믿음, 신실함이, 충성이 끝까지 있어야 한다. 변덕스러우면 안됨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정절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순결과 도덕적 삶의 모든 순결을 다 말하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성결이 아님니다. 사람이 완전히 그렇게 될 수 없수 없습니다. 이 말은 부단히 회개하면서 점점 날마다 거룩해지는 성화생활을 말합니다. 왜, 깨끗한 마음과 행동을 가질 때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마5:8)
오늘날 우리는 말과 행실에, 사랑과 믿음에, 정절에 큰 본이 되시기 바람니다.
2. 잘 배워야 합니다(13절).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여기서 "착념하라"(프로세코)는 말은, "마음을 ~에게 돌린다. 주의한다. 관심을 가진다. 전념, 몰두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교사로서 우리가 주의하고 관심을 가지고 몰두할 것은 먼저,
1) 읽는 것/ 성경을 끊임없이 읽으면서 깊이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권하는 것/ 이 말은 읽고 연구한 성경을 잘 풀어서 그 교훈과 교리를 가지고 이끄 는 일, 권면하는 일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3) 가르치는 것/ 무엇을 믿고,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교회의 생활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선한 일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지상대명령이 무엇입니까? 마28:19-20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했습니다.
히브리어의 가르치다…라는 뜻을 가진 '라마드'는 단지 'to teach', 가르치다라는 뜻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to learn', 배우다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랍비는 말하기를 "우리는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있어 탁월한 스승은 언제나 탁월한 학생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잘 가르치려면 먼저 배우는 학생이 되어야 합니다. 팔 걷어 부치고,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해 침튀길 준비하기 전에, 먼저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는 교사가 되야 합니다. 잘 가르치는 교사는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의 성공적인 목회를 기대하면서 제일 먼저 부탁했던 일은 권하고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13절에 우선 읽는 일에 착념하기를 부탁했습니다.
또한 바울 자신도 로마 감옥에서 이제 마지막 달려 갈 길을 다 달리고 인생을 마무리해야 할 순교에 다다랐을 때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뭘 부탁했는지 아십니까? 책을 부탁했습니다. 딤후4:13에,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 오라", '책을 부탁하고 있는 바울',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 책을 읽기를 원했던 바울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17세기 유럽 회화사상 최대의 화가인 네델란드 출신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van Rijn,1606.7.15.-1669.10.4.)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무엇보다도 초상화를 많이 그린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름 있는 화가입니다. 그중 그리스도의 수난 연작 시리즈 5작품, 1)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 2) 강하(降下) 3) 매장 4) 부활 5) 승천은 유명한 작품입니다.
이 화가 렘브란트가 "옥중의 바울"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릴 때 바울이 감옥에서 뭐하는 모습을 그린지 아십니까? 두꺼운 책을 무릎 위에 놓고, 가느다란 펜을 손가락 사이에 낀 채, 그 손가락을 입으로 살짝 물면서 무엇인가 골몰히 생각하고 있는 바울을 그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르치는 모든 교사선생님들, 그리고 교역자들, 모든 성도님들은 잘 가르치기 위해 먼저 끊임없이 잘 배우는 교사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전심전력, 열정적으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15절).
바울은 디모데에게 15절에서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무엇입니까? 13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읽는 것과 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 받은 은사와 직분에 대해 전심전력(全心全力)!! 하라는 것입니다.
1) 전심하라. 마음으로 하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을 하는데 생각없이, 곧 맹목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말할지, 내 어떻게 일을 할지, 내가 가르치는 모든 사역에 있어서, 그것이 말씀이든지, 프로그램이든지, 학생들이든지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하는지, 그 영혼이 얼마나 귀한 가치가 있는지, 그 아이들의 10년, 20년 후도 한번 생각하면서 장차 교회와 가정과 나라에 어떤 모습이 될지? 훗날에 주님앞에 우리가 설 때 어떤 모습인지? 요4:33절 말씀처럼 씨를 뿌린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할 그 날을 마음에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이 일 다하시기 바람니다.
2) 전력하라. 이 말은 실천, 수고, 노력, 힘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마음만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주께서 허락하시고 명하신 일인줄 알고 힘을 다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해나갈 때 진보가 나타나게 됩니다. 모든 교회에, 부서에, 사랑하는 아이들의 영혼속에 나타나게 됨니다. 몸과 마음, 어느 하나 무시되거나 결여될 수 없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읽는 것 가르치는 것 받은 은사와 직분에 대하여 전심전력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마음을 다하고, 모든 힘을 다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라는 것이다. 하고 있는 일에 뜨거운 열정을 품고 하는 것입니다. 전념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열정가지고 가르치되 중요한 것은 성실한 열정입니다. 반짝 열정이 아니라, 꾸준한 열정입니다. 반짝 열정과 성실한 열정을 구분할 수 있는 시금석은, 반짝 열정은 사람 앞에서 잘 보이기 위한 열정입니다. 반면에, 꾸준한 열정은 사람이 보아주지 않는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 분 앞에서 잘 보이기 위한 열정입니다.
1850년 영국 콜체스터의 한 교회에서 조그만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폭풍우가 굉장히 세게 몰아치는 날이었습니다. 너무 일기가 좋지 않아 아무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이 교회의 한 교회학교 한 교사가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누군가 교회에 오겠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미리 가서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자 조금 후 총 17명의 아이들이 들어 왔고, 이 교사는 그날 이 17명의 아이들 앞에서 매우 열정적으로 복음을 증거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어린이 가운데 장차 19세기 설교의 황태자라고 불리우는 스펄전이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위대한 결실은 최선의 성실에서 비롯됩니다. 시편31:23에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는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는 엄중히 갚으시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보던 안보던 아이들에게서 열매가 당장 보이던 안보이던지, 하나님의 눈동자를 의식하고 성실한 자세를 잊어버리지 않는 성실한 열정을 가지고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람니다.
이렇게 성실한 열정과 더불어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인내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고전 13장, 사랑장에서 말하는 사랑의 제 1절은 무엇입니까? ♬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실 오늘날 우리는 인스턴트 문화속에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30초 내지는 1분 안에 결정을 나야 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훈계하기 위해 앞에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는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당장 이렇게 해라 조용히 해라 떠들지 마라, 교회예배에 빠지지 말라, 당장 뭐가 되기를 바랄 때가 많습니다. '세번 셀 때까지 와! 가져와! 해! 뭐해!' 이것이 우리가 베푸는 자비의 한계입니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4:19에 보면, 바울은 말하길,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한 어머니가 하나의 생명을 보기 위하여, 열달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해산하는 수고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것이 비록 지옥에 열번 이상 갔다오는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기꺼이 감당해 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사 여러분,
절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인내하고 기다리면, 참고 기다리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열매를 거둘 줄로 믿습니다. 성실한 열정을 가지고, 그리고 인내를 가지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직분을 사랑하면서 전심전력한다면…, 오늘 우리 아이들은 변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가슴속에는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기를 바람니다. 우리 중에는 가르치는데는 좀 어눌할지 모릅니다. 말하는데는 좀 약할는지 모릅니다. 수사법에는 뛰어나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 열정이 있다면, 쉽게 사그라 들지 않는 뜨거운 열정이 있다면…,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일에 있어서, 여전히 펄펄 끓는 열정이 있다면, 그 열정 때문에 냉랭하던 학생들이 마음을 열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이는 열정 때문에 학생들은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고 왜, 우리 선생님은 예수님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열을 낼까?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릴까? 이제 곧 오실 주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치 오늘 살다가 말 사람처럼, 저렇게 간절하게 말씀하실까? 우리가 열정을 품고, 예수님을 증거하면, 반드시 우리 아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르치는 일을 계속한 결과의 영광입니다(16절).
열정적으로 전심전력으로 가르칠 때 결과적으로 어떤 것을 우리에게 줍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 가르침의 비젼과 영광이 무엇입니까?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계속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메네'는 문자적으로 '어떤 것(학생)의 옆에 계속 머물러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가르치는 일을 지속하다, 고수하다, 끝까지 해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곳에 계속 머물러 내가 지시한 일들을 계속해서 끝까지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그렇습니다. 이것을 행함으로 가르치는 내 자신과 내게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고, 그리고 말씀을 열어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먼저 내 자신을 구원시키는 일일뿐만 아니라, 내 가르침을 받는 뭇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거룩한 일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잘하는 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내 직무를 마칠 때까지... 괴로우나 즐거우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비가오나 눈이오나 부디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이 가르침의 직분을 사랑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있었던 일을 하나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한 어린 영국 군인입니다. 이 군인이 전쟁중에 싸우다가, 적군의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이 때 그 캠프에 있었던 한 군목, 목사님이 이 어린 군인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어린 군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제 어머니에게 전해 주세요. 아들은 고통없이, 아들은 고통없이 기쁘게 죽었다구요" 그리고 나서 이제 편안히 눈을 감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비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한 가지 어려운 부탁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다니던 교회학교 선생님께 이 말을 꼭 전해 주십시오.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구요. 선생님의 가르침 때문에,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편안하게, 눈을 감게 해주셨으니, 정말 선생님께 감사한다고 전해주세요. 꼭 전해주세요"
이 군목, 목사님은 어린 군인의 유언에 따라 교회학교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수소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어린 병사의 마지막 유언을 그 선생님께 들려주었습니다.'선생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라는군요…, 선생님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래서 이렇게 편안하게 잠든다고'
그러자 이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 교회학교 교사가 아닙니다. 교회학교 교사라는 직분이 그리 대단치 않게 생각되어 그만 두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이렇게 내 제자의 유언을 듣고 있자니 결심이 섰습니다. 이번 주일부터, 이번 주일부터, 다시 교회학교로 돌아가, 이제 내 남은 평생동안, 교사로 봉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였답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아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모든 교역자들과 교사들, 모든 주의 일군들께도 감사를 드림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 목회자로, 일군으로 충성하시는 여러분들 위에, 우리 주일학교 위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위로와 축복이, 놀라우신 역사가 늘 함께 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분명히 발전한다
딤전 4:11-16 / 김상복 목사
우리는 새해를 출발하고 있습니다. 영어에 "We don`t get older, just get better"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는 늙는 게 아니라 더 나아지고 있다는 뜻인데 오늘 설교의 요약입니다. 새해엔 여러분 삶의 어느 부분에서든지 더 좋아지기 바랍니다. 구체적으로 제가 드리는 말씀 속에 여러분 각자에게 해당되는 말이 있을 테니, 한두 가지라도 올해 더 좋아지고 성장해서 풍요로운 삶의 축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제까지는 자네가 나약했지만 이제는 더 발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걱정과 염려를 끼치기보다는 오히려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어라"고 충고하는 편지입니다. 디모데는 원래 내성적이고 불안과 두려움이 많아서, 과감하게 전진, 발전, 성취하기보다는 소극적 태도를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고전16:10)고 부탁하였습니다. 디모데는 마음이 여려서 누가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금방 상처받고 낙심하고 긴장하고 초조해하는 사람이므로, 바울은 "이 분이 도착하면 무시하지 말고 조심해서 잘 대해줘요"(고전16:11) 라고 특별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이제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 나이가 어려도 인격적으로 성숙해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를 멸시하지 말라고 사도님이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제가 어리다고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입니까?" 라고 주장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받는 것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나이를 잡술수록 인격이 성숙하기는커녕 오히려 후퇴해서, 결국 나이 값도 못한다고 무시를 당합니다. 반면에 어떤 아이는 그 인격이 훌륭해서 어른도 함부로 대하기 어렵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인격적 성장과 성숙을 위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 세 딸 중에도 한 아이는 어릴 때에 존경스러워서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어요. 아빠인 제가 존경했습니다. 제가 그런 사람을 또 하나 압니다. 옛날에 초등학교 4학년인 어떤 여자아이를 만났는데 너무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훗날에 결혼했지요. 나이와 상관이 없어요. 왜 존경스럽습니까? 좋은 인격을 형성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존경받는 인격을 다섯 가지 면에서 발전시키라고 합니다.
첫째, 좋은 말씨입니다.
금년에 여러분의 말씨가 발전하기 바랍니다. 언어는 인격의 표현이므로, 남자나 여자나 험한 말을 쓰는 사람은 존경을 못 받습니다. 항상 좋고 아름다운 말, 격려와 희망을 주는 말을 열심히 배우고 써야 합니다. 자녀가 문제를 좀 일으킨다고 "너는 싹이 노랗구나. 그래 가지고 뭐가 될래?" 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내게 20여 년을 맡아 기르라고 위임하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어리다고 함부로 말해서 괴롭히고, 어둡게 하고, 슬프게 하고 노하게 하지 마십시도.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은 역으로, 말 한마디로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말도 됩니다. 칼로 짼 상처는 한 두 달 지나면 아물지만, 말로 받은 상처는 잘 아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언어를 아름답고 깨끗하게 가꾸시기 바랍니다. 어느 때는 인간의 의지로 잘 안됩니다. 나쁜 언어로 살았었기 때문에 저절로 튀어 나와요. "하나님, 금년에는 제 입을 깨끗하게 해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좋은 행실입니다.
예배생활이 더 나아지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자리가 부족해서 로비에 의자를 놓았더니 밖에서 예배드리게 된 것이 화가 나서 몇 분이 그냥 가셨답니다. 그래서 오늘은 로비 복판에 TV와 의자를 놓았습니다. 한 가족이 예배 시간에 딱 맞춰 오면 한자리에 나란히 앉을 수가 없습니다. 30분은 일찍 와야 주차도 쉽고, 부모자녀가 함께 앉을 수 있고, 올겐 연주를 들으며 평안하게 예배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문을 잠그는데, 만일 5분 늦었는데, 주님이 이미 다 데리고 가버린 후라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우리 교회 지하 주차장은 1200대를 수용할 수 있지만, 주일 오전에는 그것도 부족해서 저 밑에 삼거리까지 주차를 해야 합니다. 건물 위에도 70여대를 주차할 수 있으니, 일찍 오셔서 거기 주차하시면 다른 분들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작년보다 나아지기 원합니다.
올해는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새벽 기도회에 오셔서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아내도 모시고 오고, 남편도 모시고 오세요. 때로는 자녀들도 데리고 나오세요. 엊그제 새벽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데 어떤 아이가 "목사님 생신 축하드려요. 목사님 건강하고 걱정 없게 기도해 드릴께요" 하면서 작은 카드를 내밀더군요.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새벽기도에 나오는 경험은 참 좋은 것입니다. 저는 그 아이를 안고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부모 때문에 자녀들이 교회에서 좋은 경험을 풍성히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엔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많은 도전들이 잠재해 있습니다. 문제를 키워서 20일 금식하러 올라가기보다는 날마다 기도해서 능히 극복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수요기도회에 오셔서 30분 동안 속시원하게 찬송하고, 30분은 말씀을 듣고, 1시간 동안은 열심히 기도하십시다.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방황하지 말고 그 시간에 수요기도회에 오셔서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해결해주십니다. 새해에는 여러분의 찬송이 더 발전하기 바랍니다. 목소리뿐 아니라 몸과 표정과 삶으로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더 나아지기 바랍니다. 누가 기도를 하면 소리를 내든지 마음으로 하든지 "아멘" 하여 동의합시다. 성가대 찬송을 들을 때도 그저 감상만 하지 말고 마음과 입술로 "아멘" 하며 적극적 예배를 드리기 바랍니다. 예배 끝에 목사가 여러분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하면 여러분은 주기도문 찬송으로 화답하고 돌아갑니다. 부특이한 몇 분을 제외하고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주기도문 찬송까지 다 드리고 가시기 바랍니다. 금년에는 예배의 모습이 더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식당에는 새 교우들이 빨리 식사하고 성경공부에 들어가도록 '새교우석'이 지정되어 있는데, 그 자리는 새 교우들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금년에는 남을 배려하는 면도 더 발전하기 바랍니다. 헌금 생활도 더 나아지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감사헌금을 드려본 적이 없는 분은 올해 시작하기 바랍니다. 신앙이 좋아질수록 감사할 것이 많이 보입니다. 감사 예물을 드릴 때 내용을 구체적으로 써도 좋고 그저 "범사에 감사합니다" 라고 써도 좋습니다. 감사도 훈련입니다. 훈련 없이 발전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발전, 성장하기만 원한다면 우리 교회의 많은 훈련 프로그램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만든 프로그램을 전국에서 사용하지 않습니까? 평목원같은 경우는 지난 11년 동안 전국의 2,500여 교회에서 27,000명이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서리 집사는 3 가지, 장로와 권사는 5가지 훈련을 받아야 자격이 주어집니다. 모든 재직은 일년에 한 가지 이상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평목원, 성경대학, 상담아카데미, 전도폭발, 기도학교, 선교학교, 교사학교 등을 통해서 금년은 작년보다 더 발전하기 바랍니다.
집안청소의 특권을 전적으로 아내에게 드렸던 남편들은 올해는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그 특권을 뺏어서 누리기 바랍니다. 제가 미국 가기 전에 잠시 처가에 머물렀는데, 사위라도 그냥 얻어먹고 있을 수는 없어서 어느 날 마당을 쓸기 위해서 빗자루를 찾으러 부엌에 들어가려니까 장모님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와?" 하면서 빗자루를 꺼내주시더군요. 옛날 부엌은 남자들이 드나들기 불편했지만 요새 아파트야 얼마나 좋습니까? 좋은 세상 되었습니다. 올해는 일주일, 또는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설거지를 해서 아내가 "남편이 나에게 마음 써주는구나" 느끼도록 해주면 어떨까요? 그리고 아내에게 특별 데이트를 신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세 딸에게 공평하게 하느라고 다 데리고 다녔어요. 그러다가 각자가 나와의 특별한 경험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각자에게 데이트를 신청했습니다. 이번 토요일에는 큰 아이와, 다음 토요일에는 둘째와, 그 다음 토요일에는 셋째와 단 둘이 데이트를 한 것입니다. 금년에는 아내와 남편과 아이들과의 1:1 데이트로 할렐루야 교인들이 바쁘기 바랍니다.
셋째, 사랑입니다.
뭐니뭐니 해도 가족사랑이 우선입니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느 여자가 남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여보 아직도 나를 사랑해요?" 물었더니 "15년 전에 결혼할 때 사랑한다고 했잖아. 맘이 변했으면 벌써 얘기했지" 하더랍니다. 사랑은 표현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가족과 이웃과 성도들간에 서로 사랑을 느끼고 보고 듣도록 사랑의 발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영원히 나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임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므로 긍정적이고 자신감있게 사는 태도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더 나아지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말 한마디라도 믿음의 표현을 자주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표현방식이 다릅니다. "될 겁니다. 방법이 있겠지요. 하나님이 인도하실 겁니다. 돌봐 주실 겁니다" 해야지, "본당 건축을 무슨 돈으로 완성하지?" 해서야 되겠습니까?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공급하실 것입니다. 안될 때까지는 된다고 믿고, 그렇게 말하고 즐겁고 희망적으로 사십시오. 만약 안되면 "하나님이 다른 방법이 있으시겠지. 이번에 안됐으면 다음에 되겠지. 하나님이 내 편인데 무엇을 두려워하리? 기도하면 된다, 조금 기다려보자, 나아질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겁니다.
금년에는 가정예배에 발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예배를 인도해보지 못한 가장들은 올해엔 시작해 봅시다. "오늘의 양식"이 있어서 예배 인도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오늘의 양식"을 펴고 거기 제시된 찬송가를 찬양의 은사가 있는 식구가 부르기 시작하고, 큰 아이에게는 성경 본문을 읽게 하고, 둘째에게는 설교하라 하면, 그 아이는 그냥 읽으면 됩니다. 그리고 기도할 줄 모르면 아내에게 기도시키고, 주기도문으로 마치면 됩니다.
다섯째, 정절(purity)입니다.
이것은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사고방식과 언어와 태도가 투명해서 다른 사람들이 위협을 느끼지 않는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혹시 불안, 시기, 질투, 욕심, 욕정, 분쟁, 갈등이 마음에 있으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회개할수록 깨끗해집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라고 하셨습니다.
올해는 하나님과 더 친해지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멀리 있다고 생각되면 마음에 걱정, 근심, 쓰레기가 잔뜩 들어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씩 꺼내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은 그저 늙어 가지 않습니다. 날마다 반드시 어느 부분에서든지 좋아져 갑니다.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으며, 내 삶에서 더 나아져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찾아내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본을 보입시다
딤전 4:12 / 강성찬 목사
어느 집사님이 예배를 드리는데 안내를 하는 집사님이 황급히 와서 집에 불이 났으니 빨리 가보라고 했습니다. 급히 달려가 보니까 집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급히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이 집사님은 그 자리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집사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시간에 집에 불이 났다고 하면 얼마나 조롱거리가 되겠습니까? 하나님, 이 불을 꺼 주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눈을 떠서 보니까 집은 다 불타고 재만 남았다고 합니다.
어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라는 갈대 섬으로 봄철에 야유회를 갔었습니다. 한참 노는데 주변에서 불이 났습니다. 봄철에 갈대밭에 불이 붙으니 어마어마하게 타는데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달려가서 불을 끄는데 한 친구가 갑자기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평소에 그 친구는 참 믿음이 좋았습니다. 친구들도 다 인정했습니다. 친구들은 가끔 색깔이 있는 구두도 신었지만 그 친구는 항상 검정 구두를 신고 검정양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색깔 있는 구두나 양복을 입으면 "신학생이 그게 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급한 순간에 그 친구는 불을 끄지 않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친구들은 다 동원이 되어 불을 껐습니다. 불길이 다행이 잡혔습니다. 그때 다른 친구들은 기도한 친구를 향해 모두 "야! 그 친구 믿음 참 좋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믿음이 없이 불을 껐던 친구들은 다 목사가 되었는데, 혼자서 간절히 그렇게 기도했던 그 믿음 좋은 친구는 목사는커녕 나중에 이단에 빠져서 돌아다니다가 이제는 예수도 안 믿고 지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변론하는 것을 지켜본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주님께 나아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선의의 질문에 신6:5과 레19:18을 각각 인용하여 대답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해서 신앙의 영역과 윤리의 영역을 사랑 안에서 통괄했습니다. (막12:28-31)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되 사랑의 본을 보이는 달입니다.
이웃 사랑의 본을 보입시다.
레위기에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19:18) 하셨고 야고보 사도는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 2:8)라 하여 이 말씀을 "최고한 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로마의 황제가 제정한 법은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황제가 제정한 법은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감히 이 세상에 그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최고한 법입니다. 지고의 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누구도 이 말씀을 어긋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사람이 율법사인 것을 아시고 그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더냐? 네가 어떻게 읽느냐?"그는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인정해 주시면서 "잘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렇게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합니다. 그러자 율법사가"그러면 내가 사랑해야 할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있는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옷도 벗겨졌습니다. 실컷 맞아서 인사불성이 된 채 길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도움을 주어야만 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가다 보면 우리 눈앞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그 사람의 외모가 어떠하든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그 사람이 우리가 사랑해야 하고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참 사랑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웃 사랑하기를 우리의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배우지 않아도 우리의 몸 돌보기를 저절로 터득합니다. 배고프면 먹입니다. 추우면 옷을 입힙니다. 병들면 약을 먹이기도 하고 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이와 같이 돌보듯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으면 그렇게 보살펴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25:40에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곧 예수님을 돕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히13:2∼3에 보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돌보아줄 때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도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또한 롯도 그러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고난받으실 때가 가까운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요한은 증거했습니다.
예수의 사랑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나타났습니다. 제자들과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예수는 친히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씻기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은 매우 파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발을 씻기우는 행위는 종이 상전에게나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진정한 사랑과 겸손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위는 제자들과 예수와의 관계성을 상징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목욕한 자는 온몸이 깨끗하므로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우심이 그들의 죄 사함과 관련이 있음을 교훈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주와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제자들이 서로 발을 씻기게 하기 위한 본을 보이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서로가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겸손하게 사랑의 섬김에 대한 교훈을 행동으로써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의 낮아지심은 십자가의 고난당하심에서 그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기까지 낮아지심으로써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희생하신 것처럼, 제자들이 겸손하게 서로를 위하여 스스로 낮아지며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하실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셔서 자신이 제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희생한 것처럼 예수께 보냄을 받는 제자들이 복음을 받아 그들의 제자가 되는 자들에게 그와 같이 사랑의 섬김을 보일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몇 달을 집에서 쉬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마음에 드는 회사에서 직원을 채용한다는 광고가 나왔습니다. 그는 이력서를 제출했습니다. 다행히 서류전형에서 합격을 했습니다. 그는 회사로부터 정해진 날 면접을 보러오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제 면접 보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침부터 잘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넉넉하게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서 차를 몰고 회사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달려가는 도중에 그는 웬 아주머니가 길가에 차를 세우고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펑크난 타이어를 갈아 끼우기 위해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간이 조금 바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아주머니 대신에 자기가 펑크난 타이어를 갈아 끼워주었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그는 부랴부랴 회사로 갔지만 면접이 다 끝나버렸습니다. 그는 인사과를 찾아가서 사정을 했지만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풀이 죽은 채 뒤돌아 서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부터 회사로 출근하세요." 그는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웬 아주머니가 웃고 계신데 조금 전에 길가에서 자기가 도움을 주었던 그 아주머니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주머니가 바로 그 회사 사장님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도움을 주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셈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우리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최고한 법을 지켜 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사랑의 본을 보입시다.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은 (시 18: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 하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인생을 통해 줄곧 역사 하시면서 그를 구원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나의'라는 소유격을 붙임으로써 그 능력과 보호의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생애 동안 함께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 23:1)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하면서 자신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성도들은 비록 양과 같이 무력하더라도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요, 성도들을 늘 지켜 보호하시는 분이기에 하나님만 의지하면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은 받은 자를 치면 죄가 된다고 하며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살려 줍니다.(삼상26:9)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은 피곤에 지쳐 동굴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이 순간 다윗은 사울을 살해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다윗의 부하 장군들은 사울을 죽이자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런 기회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사울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울을 죽이지 않으면 언제 다윗과 그 부하들이 사울의 칼에 죽음을 당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이 세운 통치자라 하여, 죽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비록 자신의 신변에 피해가 올망정, 결단코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부하 장군들에게 사울을 죽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도자에게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모든 심판과 복수의 권한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기에 인간이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침해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분명히 인식하였고, 또한 인정하였습니다. 정녕 모든 복수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사랑과 선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몫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은 하나님의 사자의 책망을 받고 회개합니다.(삼하12:1-13)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행동했던 다윗에게 대언자인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다윗 앞에 선 나단은 한 비유를 들려주어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나단이 다윗 왕 앞에서 많은 양과 소를 가진 부자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가난한 이웃의 단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빼앗았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단이 말한 이야기는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의 은밀한 죄를 드러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단의 비유를 들은 다윗은 크게 노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며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한 마리 양을 빼앗은 부자는 가난한 자에게 4배나 갚아 주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나단의 비유를 들은 다윗은 그것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인 줄도 모르고 크게 진노하였습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는 추상같은 목소리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살인과 간음을 범하였기 때문에 다윗의 집에서 칼이 영영히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단으로부터 하나님의 추상과 같은 책망과 징계를 들은 다윗은 그 즉시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회개하였습니다.
왕알 책망하는 나단의 요기도 대단하나 선지자의 책망을 하나님의 책망으로 받아들이는 다윗왕의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의 신앙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다윗의 회개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다윗을 사랑하시어서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그를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 다윗은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이 허락 않으시자 준비를 합니다(삼하7: 대상22:)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법궤를 수도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 하나님은 그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모든 어려운 나날들을 보내고 평안히 왕궁에 거하던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왕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장막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고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순데 있어서야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성전 건축에 대한 다윗의 소망이 하나님의 계획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뜨거운 열심과 변함없는 신앙을 보시고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의 마음을 가상히 여기신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그와 항상 동행하며 존귀케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를 향한 예언 은 당대에 성취되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그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성취되어 졌습니다.
다윗은 비록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려는 계획이 좌절되었지만, 성전 건축에 대한 열망은 조금도 식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성전 건축은 솔로몬 때에 할 것이지만 그에 대한 준비는 빨리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철저히 준비하였습니다. 성전 부지는 오르난이라는 여부스 사람의 땅이었는데, 이 장소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오르난의 타작 마당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안에 있습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자재들을 준비하였으며, 이방인들까지 건축 사역에 참여시키는 등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윗은 값이 비싼 것이나 귀한 것만 준비하지 않고 못을 만들 철에서부터 비싼 백향목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재료를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순수 유대인들만 건축 준비에 동원한 것이 아니라 기술이 있는 이방인도 동원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직접 성전 건축은 못하여도 아들 솔로몬이 아직 어리고 건축할 성전은 극히 광대하기 때문에 자신이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리라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최선을 다해 성전 건축 준비에 필요한 일들을 실천하였습니다. 사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에 크게 성공한 것은 부왕 다윗의 공로에 크게 힘입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의 언약을 받는 복을 누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대상 22:)
링컨(Abraham Lincoln)이란 이름은 모든 대통령(지도자)의 모범으로 여겨집니다.
세계 최대의 기업인 GE(General Electric)의 웰치(Jack Waltch)회장은 가장 성공적인 모델의 최고경영자(전문경영인, CEO : Chief Executive Officer)로 평가됩니다.
유일한 장로님이 창업한 우리나라의 제약회사인 유한양행은 비록 규모가 작은 회사지만 투명성과 공익성등 모든 면에서 가장 모범적인 기업의 모델로 연구대상이 됩니다.
방탕한 아들 어거스틴을 예수님 이후 가장 위대한 성자로 변화시킨 모니카는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델이 됩니다.
생후 19개월만에 질병으로 인하여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의 삼중고(三重苦)를 신앙으로 극복한 헬렌 켈러(Hellen Keller)는 고난을 이기는 승리자의 표상입니다.
또한 헬렌 켈러를 6살 부터 50년 동안 가르친 설리반(Anne Sulivan Macy)은 사랑과 인내의 교사로서 모범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들이 바라보고 추구해야 할 삶의 최고의 모델이 되십니다(히브리서12:2).
한 수도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제까지의 그 어떤 설교보다도 더 훌륭한 설교를 하겠다고 알리며, 모든 사람들이 모이기를 강요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성전은 노인과 청년들로 가득 찼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예배를 통하여 훌륭한 설교를 들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수도사는 설교를 시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대신에 촛대를 꽂아 둔 곳으로 가 밝게 타고 있는 초가 꽂힌 촛대를 집어 들고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상이 조각되어 있는 제단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수도사는 조용하고 밝게 타고 있는 촛불로 못 박히신 예수님의 팔을 비추어서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히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다음에는 촛불을 옮겨 역시 못 박히신 예수님의 다른 한 팔을 비췄습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촛불은 못 박힌 예수님의 두 발을 밝게 비추어 주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그 수도사가 일어나서 돌아섰습니다. 그때에도 손에 쥐고 있던 촛불은 그의 얼굴을 밝게 비춰 모인 사람들은 그 수도사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그의 뺨을 흘러내리는 눈물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설교입니다." 그리고 그는 축복기도를 하고서 사라졌습니다.(하나님의 사랑-로버트 슐러-디럭스바이블)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합니다. '본'('튀포스)은 '상처를 내다'(튀프포)로부터 나온 단어로서 어떤 것을 만드는데 필요한 '양식' '모델', '본보기'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본이 되셨으니 주님을 본받아 사랑의 본을 보이는 모두가 됩시다.
말(言)한마디의 축복
성경-딤 전4:12-16 / 박영규 목사
말 한마디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격언도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말을 [에메르]라고 발음하는데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말은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나타냅니다(욥33:3) 선한 말은 꿀 송이와 같아 마음에 달다고 했습니다.(잠16:24) 요셉은 꿈과 말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의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창37:8)
좋은 말은 마음에 새겨두시고 기도하시면 그 말대로 이뤄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함께 계셔서 사무엘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뤄진 것입니다(삼상3:19)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말대로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부귀영화와 전무후무한 축복을 주셨습니다.(왕상3:12) 좋은 말을 하면 마음에서도 서예가의 붓글씨 같은 말이 나옵니다(시45:1) 때에 맞는 말은 아름답습니다.(잠15:23)
지혜의 말은 아름답습니다(전10:12)
하나님의 종의 말은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사44:26)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을 하나님의 종의 입에 두십니다(사51:16) 다니엘이 21 일 금식을 시작한 첫 날부터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말을 들으셨습니다(단10:12) 다니엘의 말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다니엘을 어루만져 주며 계시를 하셨습니다(단10장)
욥은 넘어져 가는 사람을 말로 붙들어 주었습니다.(욥4:4)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였습니다.(창22:18) 예수님의 말은 은혜로웠습니다(눅4:22) 서로가 위로하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살전4:18) 성도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믿는 자의 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딤전4:12)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마음에 간직 하였습니다.(눅2:19, 51)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줍니다(요6:63) 바울 사도는 셋 째 하늘에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고후12:4) 경우에 맞는 말은 은쟁반에 담긴 금 사과 입니다(잠25:11)
하나님께서 회막에서 모세와 말하시고 70 인에게는 하나님의 신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민11:16-17) 스데반 집사가 성령과 지혜로 말함을 구레네 인, 알렉산드리아 인,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변론에서 스데반을 당하질 못 했습니다.(행6:9-10) 바울이 부름 받고 성령 체험 후 예루살렘에서 주 예수 이름으로 담대히 말 하였습니다.(행9:28-29)
베드로 사도가 나사렛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할 때에 성령이 [고넬료]의 집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임하셨습니다.(행10:44) 빌립보 강가에서 바울 사도가 말할 때에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바울의 말을 청종케 하셨습니다.(행16:13-14) 고린도에서 주께서 바울사도에게 두려워 하지 말며 잠잠치 말고 말하라 하시며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행18:9-10)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 보다 더 믿은 결과 태풍을 만나 배가 파선되었습니다(행27:11) 경험자의 말 보다 성령 충만한 믿음이 진실하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들어야 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눈물을 흘리며 빌립보 성도들에게 믿음의 말로 권면하였습니다.(빌3:18) 성령의 감동으로 말해야 합니다(행11:28) 성경에서 말로 인하여 일어난 기적과 축복을 전해드리겠습니다.
1.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의 말(막7:24-30)
귀신들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가서 딸을 고쳐달라고 말을 했더니 주님께서 여인의 진정성을 보시려고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하셨으나 여인이 "상 아래의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 말을 하였으니 네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말 한마디에 귀신들린 딸이 고침 받았습니다.
2. 백부장의 말 한마디(마8:5-10)
갈릴리의 [가버나움]에서 로마군 장교 백부장이 예수님께 하인의 중풍 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하였을 때 예수께서 가서 고쳐주신다는 말에 백부장이 제 집에 들어오심을 저는감당하지 못 하겠으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셔도 제 하인이 낫겠다."고 말씀드리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시며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의 중풍 병이 나았습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말로만 하셔도 살줄을 믿었기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3. 베드로 사도의 말 한마디(마16:13-19)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함으로 주님께서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며,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신앙고백의 말 한마디에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4. 소경 거지 [바디매오](막10:46-52)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가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던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계속 외침으로 주께서 발걸음을 멈추시고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니 [바디매오]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말씀드렸더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되었고 길에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5. 삭개오(눅19:1-10)
[여리고]에 오신 예수님을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 때문에 볼 수가 없어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에게 주님께서 "오늘 네 집에 유해야겠다."고 말씀하시니 삭개오가 주님을 제집으로 모시고 [삭개오]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고 말씀드리니 예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고 축복하셨습니다. 주님만난 삭개오의 인생관, 물질관이 바뀌고 과거를 청산하는 말과 이웃을 사랑하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6. 마르다(요한11:22-40)
동구 밖에서 주님을 맞이한 마르다는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또 주님께 고백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내 말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신 말씀을 마르다에게 상기시키시며 오빠 나사로를 죽음에서, 무덤에서 부활 시켜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음의 말을 합시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을 합시다. 상대방을 사로잡는 말을 합시다. 책망 보다는 칭찬의 말을 합시다.
믿음과 사랑의 말은 보약과 같습니다. 성경의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서 말하듯이 신중하게 말합시다.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합시다. 일으켜 주는 말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말을 합시다. 말대로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귀가 좋아하는 말 -죽겠네, 글쎄, 안 된다. 글렀다. 실패로군. 될 턱이 없다. 더 나빠졌다. 죽을 맛이다. 소용없다. 별로다 . 푹 썩고 있다. 망한다. 지옥 간다. 또 그러는군, 김 샛다. 잘 될 리가 없다. 뻔하다. 는 등 부정적인 말을 입 밖에 내도 안 되고 마음먹어도 안 됩니다. 믿음의 말 긍정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방향으로 인도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공하겠군요. 잘 되겠습니다. 축복이 열리겠습니다. 좋아지셨군요. 성공과 합격이 보입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도대로 됩니다. 응답이 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영광 받으시겠군요. 이번엔 성공입니다. 젊어보이시는군요. 멋있어 보입니다. 행복해 보입니다. 어울립니다. 밝아 보입니다. 부자 되세요. 등 긍정적이며 믿음의 말 칭찬의 말 격려의 말을 아끼지 마세요. 믿음의 말대로 됩니다.
부정적으로 말한 10 명의 정탐 군은 가나안 복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지만 긍정적으로 말한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었고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아브라함의 무덤이 있는 [헤브론]과 산지를 개인적으로 분깃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말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합시다(벧전4:11) 말의 응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잠16:1)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출19:5-6) 나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고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엡4:29) 사람의 말에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십니다(마12:36) 예수님의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습니다(요8:51)
예수님 말씀을 듣고 행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습니다.(마7:24) 여러분의 믿음의 말을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감탄하실 수 있는 말을 해 보세요. 여러분의 말과 기도와 묵상이 하나님께 열납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믿음의 말을 해 보세요.
오늘 성경말씀 본문으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성도들에게 본이 되며, 가르침을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말씨를 옥토에 마음 밭에 심으세요. 성경 말씀을 심으셔서 100배의 풍년을 거두시기를 축원합니다. 풍년들 말씨를 심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본을 보입시다
딤전 4:12 / 강성찬 목사
(딤전 4: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예수님은 요단강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로 나아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세례를 받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로소 자신의 때가 이르렀음을 직감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 앞에 주님은 셰레 받기 위해 서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임하셨고, 하늘로부터“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령 충만을 원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이제 나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 성령에 사로잡힘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내 의지대로 했던 나의 영 대신에 이제는 다른 영에 사로잡혀 그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성령 충만함을 원하면서도 나의 영이 아닌 다른 영에게 사로잡히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영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할지라도, 그 영이 온유하신 예수님의 영이라고 할지라도, 그 영이 순수하고 자유롭고 건강한 영이라고 할지라도, 그 영이 지혜의 영이라고 할지라도, 그 영이 고귀한 신유의 영이라고 할지라도, 그 영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영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 영에 사로잡히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영이 심령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성령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성령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데 우리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나는 성령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가요? 어쩌면 내가 원하는 것은 성령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말고 그분이 주실 수 있는 이런저런 유익은 아닌가요?’
물론 이런 것들을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사로잡히기를 원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열쇠를 성령님께 넘겨 드리면서‘주님! 지금부터 저는 제 집의 열쇠를 갖지 않겠습니다.
주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오라 하시면 올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가요?
회사의 사무실 열쇠까지 성령님께 넘겨 드리면서‘주여! 여기에 앉으셔서 전화도 사용하시고, 임원들도 주관하시고, 이 회사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가요?
이 세상의 쉬운 길을 반대하고 세상 사람들이 다 싫어하여 다니지 않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사로잡히기를 원하는가요?
하나님의 영이 나를 사로잡는다면 예수님이 세상과 적대관계에 놓였듯이 세상과 적대관계에 놓일 것입니다.
세상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주님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세상을 꾸짖었기 때문에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세상은 주님을 미워했던 만큼 성령님을 미워합니다.
성령님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성령님도 예수님처럼 세상의 미움을 받으십니다.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괜찮은가요? 그것과 상관없이 성령 충만을 원하고 있는가요?
세상의 편한 길을 용납하시지 않는 그분과 동행할 준비가 되었는가요?
만약 이 모든 것에“예”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성령 충만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 것을 붙잡으면서 살아왔습니다.
내 정욕대로, 내 쾌락대로, 내 욕심대로 다 살고, 그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내려놓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성령의 충만을 원한다고 입술로만 그렇게 말해 왔던 것은 아닐까요?
삶의 주인은 여전히 내 자신과 세상인 채로 남겨둔 채 우리는 이런 마음 가운데 성령이 임하여 달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 몸이 물속에 잠길 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아버지! 이제 저는 이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저를 아버지께 드리려고 합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라면 저는 어떤 일이라도 할 것입니다. 내가 이 세례를 받음으로 세례 요한보다 못하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해도 저는 이 세례를 받겠습니다. 이 세례를 받음으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저는 이 세례를 받겠습니다. 이제 저는 메시아로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이제 세례 속에 담겨 있는 의미처럼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다짐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세례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례란 그리스도 밖에서 죄인처럼 살아가던 지난 삶을 회개하고 돌이켜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례는“죄의 세계에서부터 의의 세계로, 속박에서 자유로, 율법 아래의 죽음으로부터 성령 안에서의 생명으로 옮겨지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또한 세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창조된 사람이 그분께 자신의 삶을 위탁하고 의지하겠다는 결단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세례받은 사람은 죄악된 세상에서 물들지 않기 위해서만 애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몇 가지 능력을 조금 더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삶의 주인을 정말 그분으로 인정하며 살아갈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아직도 내 안에 내 것을 붙들고, 그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속에는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있을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삶의 주인이오니 나를 십자가에 못 박겠습니다. 나
를 사용하여 주소서.”라고 결단할 수 있다면 성령님은 오늘 지금이라도 심령을 채울 수 있습니다.
교회를 개척해서 3년의 세월이 흐른 어떤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니 참 많은 것이 변했다고 합니다.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하나님은 자신이 걸치고 있는 여러 가지 누더기 옷을 벗기셨다고 합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 과거의 부유한 삶에 대한 향수, 인간적인 술수와 방법들……. 때로는 그것을 벗는 것이 힘들고 그래서 벗지 않으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 둘씩 그것들을 벗겨 내셨다고 합니다. 나의 것을 다 벗는 대신 하나님은 말씀의 충만을, 성령의 충만을 주실 것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설교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의 외침의 전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또 변한 것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모습과 인격도 조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3년 동안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만드셨고, 그런 부분을 하나님은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속으로 가장 많이 했던 기도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자.”라는 기도였다고 합니다. 그 기도는 그분의 기도 제목의 첫 번째였습니다.“하나님! 저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사람들이 칭찬한다고 거만하지 않고,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내 마음이 무너져버릴 만큼 분노하지도 않게 해주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참으로 하나님의 빚으심을 느낄 수 있는 고백이었습니다.
주님만을 닮는 것, 그것이 우리 소원의 전부가 되게 합시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꿈꾸는 전부가 되게 하며 더욱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요한의 세례는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날의 정경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례 예식을 통하여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분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죄 없으신 그분은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시고자 기꺼이 세례를 받으시고, 그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켰습니다.
마태복음은 세례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세례를 베풀기 전 요한의 메시지는“회개하라.”(3:1)였으며, 세례를 베푼 다음에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는“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3:8)였고, 자신의 세례를 가리켜 말하기를“너희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기 위한 세례”(3:11)라고 말합니다.
셰례를 받기 위해 찾아오신 주님을 보고 요한은 깜짝 놀라며 세례 베풀기를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자기 앞에 서신 그분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 세상 죄를 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회개는 죄를 전제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왜 주님은 기꺼이 세례를 받으시려고 하신 것일까요? 더구나 예수님은 세례받기 위해서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의 틈에 계십니다. 결코 예수님은 사람들이 다 돌아간 다음 아무도 없을 때 가만히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지는 않았을 것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지금 요한 앞에서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앞으로 메시아 사역을 할 때 사역의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저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사람이 아닌가? 우리가 받았던 회개의 세례를 받았던 사람이 아닌가? 저 사람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아닌가? 자신이 메시아라고? 웃기지 마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기꺼이 세례를 받으십니다.
요한의 손이 예수님의 머리에 얹어지고 물속에 잠길 때 주님은 물속으로 들어가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피조물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은 기꺼이 자신을 피조물에게 맡기십니다. 왜 주님은 기꺼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모든 의'를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께서 요한과 함께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의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사적 생애를 마감하고 메시야 직무를 수행하는 공생애로 들어가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Bruce, Erdman).
더욱이 예수의 세레 받으심의 주제는 모든 죄인을 대신한 고난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적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 받는 종으로 나타냅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세례를 베푼 후 즉시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 불렀고, 예수 자신도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세례로 표현했습니다
(눅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요한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예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무흠한 신성의 소유자이시지만, 그분 곧 메시야에게 합당한 세례를 베풉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공생애에 앞서 예수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직의 자격과 능력이 구비되었으나 인간적 수준에서 또 인간들의 이해를 위해서 교회의 선한 제도에 순종하셨습니다. 이런 예수의 자세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성령 강림과 하늘의 음성을 통해 예수님이 모든 의를 갖추셨음을 공적으로 나타내십니다.
이를 통해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도래했음과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했습니다(요 1:31-34)
회개나 세례가 필요없었던 예수님은 세례받으심을 통해 죄로 타락된 인간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켰고 우리를 대신하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고후 5:21)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에수님을 믿는 자에게 보이신 세례 받음의 모범이었습니다.
모든 의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의는“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나무 십자가에 몸뚱이가 매달려 있는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셋째 날에 나무를 만드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창조주께서 그 나무에, 그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나무를 지으신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나무에게 기꺼이 자신을 맡기십니다.
손과 발을 깊이 찌르고 있는 대못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우리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셋째 날에 땅을 만드신 분입니다. 땅 속에 있는 수많은 광물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셋째 날에 지으셨던 그 피조물, 그 철광석, 그 못에 예수님은 기꺼이 자신을 맡기십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기꺼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어떤일이 벌어졌는가요?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막 1:9-11]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세례 받으심으로 자신의 메시아 사역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는데, 기꺼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내가 얼마나 더 편할까요? 내가 얼마나 일을 더 쉽게, 더 잘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있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을까?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까?’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내가 좀 불편하고 어려워도, 내가 좀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기꺼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흐믓해하지 않고, 사람들의 비판에도 얼굴 붉히거나 감당할 수 없는 내면의 화재로 내 자신이 망가져버리는 일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했을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더욱 힘쓰는 모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의 인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세례는 어떤가요? 처음 세례받을 때를 기억하는가요? 아직도 그때의 감격을 기억하는가요?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함께 세례를 받은 사람이며, 이것은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위탁하고 그분의 소유와 제자가 되는 것이다 말하기도 합니다(신약학자 제임스 던)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의 세례가 자신의 세례(스스로 세례받는 것)가 아니라 세례를 받게 되는 것처럼 세례받은 자는 그리스도 아래 자신을 놓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어가는 것이다 말하기도 합니다(기독교 역사학자 에드문드 슈링크)
세례를 다 그런 의미를 두고 그렇게 받았습니다. 단순히 물 몇 방울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겠습니다. 주님, 주님은 이제 내 삶의 주인입니다.”라는 결단이요, 고백입니다.
따지고 보면 신앙생활이란 내 삶의 주인을 누구로 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의 맨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세례 때부터 우리는 그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신앙생활 내내 우리는 그것과 씨름합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마침내 내 삶과 생명의 모든 주인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갑니다.
병과 싸우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진정한 자신이 아닌 것들을 모두 벗어던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또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실수, 그의 잘못, 그의 업적, 그의 위치, 그의 질병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전에는 그런 것들로 그 사람을 평가했지만 이제는 오직 그 사람만 보일 뿐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오면 사람들은 진실해지고, 정직해지고, 더 진정한 자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미켈란젤로에게 어떻게 피에타상이나 다비드상 같은 훌륭한 조각상을 만들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이미 조각상이 대리석 안에 있다고 상상하고,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어 원래 존재하던 것을 꺼내 주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주님을 믿으면서 한 가지 일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는 일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내 자신을 십자가에 내려놓음으로 완성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지만 세례를 받고, 주님을 더 깊이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또 지금의 우리들처럼 성령 충만을 갈구하지만 나의 신앙의 부족함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십자가에 나를 내려놓는 것은 계속됩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님의 수세 주일이기도 합니다.
세례란 내가 그리스도와 합하는 예식이며 성령으로 거듭남과, 새롭게 하심과, 나는 주님께 속한 존재임을 확인하며 헌신을 서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주님께 헌신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여러 가지 여러 모양의 사역을 맡기셨습니다(교역의 사명, 교사의 사명, 찬양대의 사명, 항존직의 사명, 그리스도인의 사명). 우리는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주님을 봅 받아 기꺼이 나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그의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면서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을 보이라고 명합니다.
'말과 행동'에서 모본을 보인다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자연히 풍기는 외적 경건의 모습이라면 '사랑과 믿음'은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과 신앙의 자세를 말하는 내적 경건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이 세 가지 방면에서 모두 믿음의 본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펜실베니아에 가면 필라델피아 근처에 시골답지 않게 아주 큰 교회가 하나 있다합니다. 이 교회는 '수잔'이라는 소녀의 꿈과 기도로 이루어졌다합니다. 본래 이 마을에는 교회가 없었는데 먼 도시까지 교회를 찾아가는 번거로움으로 '수잔'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소녀는 병에 걸려 죽어 갔습니다. 얼마 후 소녀가 죽고 난 후 그 소녀의 자리 밑에서 간절한 기도와 열망이 담겨진 편지 한 장과 그 속에 마지막 헌금 5달러가 나왔습니다. 이 소녀의 이야기가 전해지자 마을 사람들이 앞 다투어 헌금하기 시작해 이 마을에 아름다운 예배당이 생긴 것입니다.
선다 싱(S. Sundar Singh 1889-1929)은 인도의 부유한 시크교도 가정에서 출생하여 기독교에 굉장한 거부감을 느꼈으나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고 개종그리스도인이며 신비가입니다. 그가 영국에 갔을 때 옥스퍼드의 학자들이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술엔 천재가 있는 것처럼 종교에도 영적 감수성이 남다른 자가 있습니까? 예를 들면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 웨슬리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 질문에 선다 싱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종교적 소질이란 것은 선천적인 게 아니며,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분은 영혼의 수용력을 더 잘 발달시킨 사람일 뿐입니다." 사실 웨슬리만 하더라도 대학 시절부터 줄곧 매일 아침에 세 시간씩 기도했고 루터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선다 싱이나 프란체스코는 40일 금식기도를 했으며 다른 많은 위대한 종교가들도 역시 평생 동안 종교적 헌신을 경주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마다 기도하셨고 바울은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기도했으며 야고보는 항상 기도했기 때문에 무릎이 약대 무릎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되 믿음의 본을 보이는 달입니다.
주님께서 세레를 받으심으로 보여 주신 교훈을 심비에 새기고 믿음에 본을 보이며 사명 감당하며 영광 돌립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왕따를 당하며"
딤전 4:12-13 / 김명혁 목사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입장에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청소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요사이는 우리 청소년들이 살기가 힘이 드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요사이는 우리 초등학교 학생들이 어른들보다도 살기가 힘이 든다고 합니다. 어떤 초등학교 어린이는 학교 다녀 온 후 학원 몇 곳을 다녀 오면 밤 9시가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새벽 1 시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식욕이 떨어지고 잠을 자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탈모증에 걸리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극성스럽게 여러가지 공부를 하느냐고 물으면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서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그렇게 극성스럽게 공부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가지 공부를 하는 것이 재미있느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재미는 하나도 없고 할 수 없이 공부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부모들의 과잉 기대와 억압에 짓눌려서 우리의 어린이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청소년들은 지금 부모의 성화에 시달리고, 친구들과의 경쟁에 시달리고,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와 무질서에 짓눌려서 멍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 청소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나는 오늘 아침 우리 청소년들에게 세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1. "왕따를 당하면서 살라"
요사이 우리 청소년들은 왕따 즉 따 돌림 받는 것을 제일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따 돌림을 당하지 않고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서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친구들이 담배를 피우면 자기도 담배를 피우고 친구들이 머리에 염색을 하면 자기도 머리에 염색을 하고 친구들이 가출을 하면 자기도 가출을 해서 친구들로부터 따 돌림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으로부터 소외를 당했기 때문에 또래 친구들에게서라도 따 돌림을 받지 않으려는 소속 본능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요사이 우리 청소년들에게 따 돌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왕따를 당하면서 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왕따를 당할망정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자기를 보호해야 합니다. 자기를 포기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자기란 이기적인 자기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자기란 착하고 의로운 자기를 말합니다. 양심대로 살려는 자기를 말합니다. 신앙대로 살려는 자기를 말합니다. 자기를 포기하면서까지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서 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평양 제5인민에서 주일날 교회 간다는 이유로 학교 친구들로부터 따 돌림을 당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 때는 서울 방산국민학교에서 불량 친구들로부터 따 돌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왕따를 당해도 좋습니다. 착하고 의로운 자기를 지키면 됩니다. 신앙대로 살려는 자기를 지키면 됩니다. 사실 제일 먼저 왕따를 당한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왕따를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15:18). 우리 청소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 왕따를 당하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2. "당당하게 어울리면서 살라"
왕따를 당한다고 해서 외톨이로 구석에서 숨어서 외롭게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왕따를 당할망정 당당하게 적극적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 허민우가 대치중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저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강변 홈페이지 상담실에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항상 건강하시기를 원하면서 글을 드립니다. 제가 3월2일부터 대치중학교로 전학을 왔습니다. 친구들도 다 놓고 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글을 드립니다." 저는 허민우에게 떳떳하게 적극적으로 자연스럽게 행동하라고 답을 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허민우에게, 교회 가까운 학교인 대치중학교로 전학 오게 된 것을 우선 환영한다. 친구들을 다 놓고 와서 서운하겠지만 인생이란 떠나고 또 만나고 그리고 또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민우는 지금 인생의 한 걸음을 내 디디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도 고향과 집을 떠났고 청교들도 고향과 조국을 떠났다. 인생이란 새로 처하는 처지(환경)에서 새로운 일들을 모험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약간의 두려움도 있으나 기대가 있고 스릴이 있고 기쁨이 있다. 우선 자연스럽게 행동하라. 떳떳하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라. 겸손하고 친절하게 대하라. 즉 항상 웃는 얼굴로 말을 먼저 건네고 도움의 손길도 펴라. 신앙과 교회에 대해서는 서둘러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 차츰 조금씩 이야기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사람됨과 인간됨이다. 멋지고 신나고 즐거운 일들이 생기기를 바란다. 민우, Fighting! 2000년 3월 3일 김명혁 목사"
저는 우리 청소년들이 당당하게 적극적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외톨이로 구석에서 숨어서 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왕따를 당할망정 당당하게 적극적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공부를 좀 못한다고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 공부가 제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착하고 의로운 성품을 가졌다면 그것이 공부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명랑하고 웃는 기질을 가졌다면 그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졌다면 그것은 모든 것보다도 더 낫습니다. 운동이나 음악이나 예술에 대한 특기가 있다면 그것이 공부보다 훨씬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떳떳하게 어울리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제가 방산국민학교 5학년 때 반 친구들이 나를 놀리고 무시하려고 했습니다. 아마 제가 북한에서 왔다고 그랬는지 모릅니다. 공부를 좀 잘 하고 행동을 좀 착하게 해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놀리고 무시하는 한 친구와 싸움을 하기로 했습니다. 학교 뒷 마당에 반 친구들이 다 모였습니다. 반 친구들이 둘러선 가운데 우리 둘이 가운데로 나가서 두 팔을 내 밀고 권투를 하면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겼습니다. 그 후부터는 제가 전보다 반에서 더 당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청소년들이 저처럼 모두 학교 뒷 마당에 가서 친구들과 싸우라는 말은 아닙니다. 허민우처럼 친구들과 웃으며 친절하게 적극적으로 사귀는 것이 좋습니다. 허민우처럼 친구들을 집에도 데려오고 교회에도 데려오면서 친구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면서 사귀라는 말입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왕따를 당하면서 살 망정 당당하게 어울리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3. "강인하게 꿋꿋하게 살라"
며칠 전 어느 청소년 전문가에게 문의를 했습니다. "요사이 청소년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그 분의 대답이 요사이 청소년들이 너무 힘이 없고 약한 것이 문제라고 대답했습니다. 꿋꿋하게 견디어 나가는 강인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는 힘도 없고 버티어 내는 힘도 없다는 것입니다. 꿈도 없고 비젼도 없고 의욕도 없고 창의력고 없고 저돌적인 투지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소리도 작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데는 부모의 책임이 거의 전적이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과잉보호를 받으며 부모의 과잉 기대에 따라서 부모의 지나친 강요에 기계처럼 수동적으로 살다 보니 의욕도 비젼도 창의력도 투지도 강인함도 다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모가 자녀들을 과잉 보호로부터 풀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잉 기대와 강요로부터도 내 버려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균 상태로부터 균이 사는 세상으로 풀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 독일 교수는 뜰에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잔디에 기어 다니는 아이가 잔디에 떨어진 음식을 주어 먹으려고 하자 그대로 내 버려 두는 것을 제가 본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수가 하는 말이, "그래야 아이가 건강해 집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틀에 박혀서 너무 빡빡하게 무균 상태에서 살도록 얽매지 말고 좀 풀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좀 심심한 시간을 가지도록 내 버려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면역도 생기고 의욕도 생기고 창의력도 생기고 투지도 생기고 강인함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이겨 나갈 수 있는 강인함입니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강인함을 가지고 살도록 우리 모두가 우리의 청소년들을 격려하고 도와 주어야 할 것입니다. 도와 주되 풀어 놓으며 도와 주고 내 버려 두면서 도와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 청소년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세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왕따를 당하면서 살라." "당당하게 어울리면서 살라." "강인하게 꿋꿋하게 살라." 우리의 청소년들이 왕따를 당할 찌라도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를 지키기를 바랍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왕따를 당할 망정 당당하게 어울리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아무리 강요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해도 힘 없이 주저 앉지 말고 강인함을 가지고 세상을 이겨 나가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당당해 질 수 있고 강인해 질 수 있습니까? 학교 교육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학원 공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영적 감화와 인격적 감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종교심과 사람에 대한 도덕심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 감화와 인격적 감화를 어디서 얻을 수가 있습니까? 교회와 가정과 학교에서 얻어야 합니다. 교회의 목사님과 교사들로부터 신앙적 감화를 받아야 하고 가정의 부모와 학교의 교사들로부터 인격적 감화를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들, 여러분들에게 올바른 신앙적 감화와 인격적 감화를 주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목사로서 교사로서 부모로서 학교의 선생으로서 종교심과 도덕심을 바로 심어 주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사과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인생은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너무도 귀합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귀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길거리에 내 버려진다 해도 여러분들은 여전히 여러분들의 인생을 귀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다 버린다 해도 여러분들은 아주 버려진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여러분들을 여전히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여러분들을 붙잡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구속주이신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버리지 않고 붙잡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물론 부모님의 손 안에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렘18:6을 읽습니다. "이스라엘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 안에 있느니라." 여러분들의 인생은 우리의 토기장이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들, 되는 대로 살지 마십시요. 여러분들의 귀중한 인생을 포기하지 마십시요. 잘못 가는 또래 친구들에게 여러분들의 인생을 맡기지 마십시요. 분명한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왕따를 당해도 좋다! 나는 당당하게 그리고 강인하게 살겠다!" 이렇게 다짐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분부했습니다. "믿음의 아들 디모데야, 무질서와 부도덕한 에베소에서 살지라도 너는 되는대로 살지 말아라. 오직 너는 말과 행실에 본이 되는 삶을 살아라. 오직 너는 믿음과 사랑과 깨끗함에 본이 되는 삶을 살아라." 물론 역사상 본이 되는 삶을 산 사람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장기려 박사님, 박윤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처럼 본이 되는 삶을 산 사람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본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소수의 사람들이 역사를 움직였습니다. 사랑하는 강변교회의 청소년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본이 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본이 되게" 살기를 바랍니다. 왕따를 당할 찌라도 당당하게 그리고 강인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역사를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우리 나라의 역사는 여러분들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우리 청소년들, 지금 그 자리에서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제가 기도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피곤합니까? 부모님과 학교의 강요에 지쳐 있습니까? 다 집어 치우고 싶습니까? 되는 대로 살고 싶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은 너무나 귀중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가장 귀중한 선물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을 귀하고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됩니다. 지금 하나님께 여러분들의 인생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왕따를 당해도 좋습니다. 당당하게 강인하게 믿음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한 평생을 멋지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영적 신앙인의 자기발전
딤전 4:12-16 / 이정익 목사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유산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물려주려고 애를 씁니다. 유산 중에 문화의 유산이 있습니다. 이태리, 이스라엘, 터키 같은 나라들은 거리에 돌이 천지입니다. 그것들은 최하 2천 년 전 것들입니다. 전국이 문화유산들인 셈입니다. 그것들을 보려고 세계 각 곳에서 옵니다. 그 관광객들이 뿌리고 가는 돈이 연간 수백억 달러씩이나 된다고 합니다. 가문의 유산도 있습니다. 엊그제 신문에 미국의 최대 가문은 1위가 케네디 가이고 2위가 록펠러 가를 꼽았습니다. 케네디가 젊은 나이에 미국의 대통령이 된 것도 자신의 능력도 있었지만 가문의 명성의 영향도 컸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유산이라고 말합니다. 또 물질의 유산도 좋은 것입니다. 이런 유산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유산은 다 물려주고 받고 쌓아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지성과 인격과 지식은 물려주지를 못합니다. 그 사람이 사망하면 그 즉시로 그 좋은 지식과 인격은 아깝게 사라집니다. 어려서 우리 집안에 한학에 아주 깊은 분이 있었습니다. 온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유학을 가르쳤습니다. 마침내 그분이 돌아가자 사람들이 “그 지식을 물려주고 가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아깝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다른 것은 다 물려주게 하시고 지성이나 지식이나 인격은 물려줄 수 없게 하셨을까요. 만일 물려줄 수 있게 하셨다면 아마 이 세상은 매사를 돈으로 사고파는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노력도 공부도 수양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하고 연구하고 스스로 노력해서 얻도록 하셨습니다. 스페인의 작곡가이자 첼로 연주자인 파블로 카잘스는 나이가 95세가 되었는데도 날마다 6시간씩 연습을 했습니다. 어느 날 젊은 리포터가 와서 인터뷰하며 “당신은 이제껏 살아왔던 사람들 중에 가장 위대한 첼로 연주자인데 지금 연세가 95세인데도 여전히 하루에 6시간씩 연습을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제가 지금도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리더나 지도자들은 모두 자기개발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모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신앙인들은 일반인들 보다 영적으로 생각이나 의식이나 책임감에 앞서가는 사람들입니다. 고로 신앙인들은 그 시대를 늘 배우며 자신을 더 성숙시키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사도바울과 디모데의 이야기입니다. 디모데는 사도바울의 애제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과 같이 여겼습니다. 디모데는 3대 신앙자의 가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외할머니가 유명한 로이스라는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유니게는 경건한 유대인입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경건의 훈련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거기다 디모데는 사도바울이라는 좋은 지도자를 만났습니다. 그런 디모데에게 바울은 스승으로서 계속해서 자기훈련을 하라고 충고를 합니다. 그리고 읽는 일에 전념하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디모데는 그 시대의 경건한 신앙인이고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디모데는 나이가 어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이가 어리다고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고 충고합니다. 그 일이 영적 실력을 쌓는 일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꾸준히 실력을 쌓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계발하여 실력을 쌓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철저하게 자기관리 속에 날마다 진보해야 합니다. 발전하지 않는 지도자나 신앙인은 퇴보합니다. 신앙인은 자기계발을 위해 노력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 그를 사용하십니다. 그 훈련의 덕목이 몇 가지 있습니다.
자기 훈련
발전하는 신앙인은 자기훈련에 최선을 다합니다. 미래에 주어진 비전과 목표를 향해 자기 자신을 꾸준히 계발하고 훈련합니다. 바울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고전 9:27)”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이 자기 훈련입니다. 교회생활을 그냥 편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안하는 것 보다는 좋습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생활은 신앙이 자라지 않고 더 이상 구체적으로 전개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자기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영적으로 더 자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훈련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4:7)”, “너는 명하고 가르치라(11)”, “네 나이 어리다고 업신여기지 않도록 말에 주의하라(12)”, “전심전력하여 성숙함을 보여주라(15)”고 무섭게 자기훈련을 강조했습니다. 지도자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은 자기를 훈련하고 무섭게 절제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내 안에 영적 잡초들이 돋아나게 됩니다.
영성 개발
영성은 하나님에 대한 친밀감을 말합니다. 누군가가 영성이 깊다는 말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41장8절을 보면 “하나님과 친한 아브라함”이라고 말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친밀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하기 위해서 기도와 말씀으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분과 친밀하여지고 그분과 동역하고 그분과 연합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자기를 무섭게 통제하고 훈련하고 절제하지 않으면 녹슬게 되어 있습니다. 쇠는 그냥 놔두면 녹이 슬게 되어 있습니다. 밭도 갈아엎고 그냥 놔두면 잡초가 우거지게 됩니다. 지식은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됩니다. 내 영적생활도 노력을 하지 않으면 내 마음과 내 심령에 잡초가 우거지고 영성이 무디어지고 영적안목이 흐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엘리는 늙어 몸이 비대해졌습니다. 그러자 영적으로 무디어지고 나태해졌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옆방에 있는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뛰어나오는데 비대해진 엘리는 듣지를 못했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듣지 못하면 그 생명이 끝난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가장 큰 불행한 일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과 친밀하여야 영적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들은 늘 공부해야 합니다. 아니면 녹이 슬게 됩니다. 그러면 10년 전의 누렇게 바랜 강의 노트를 그냥 들고 가르치게 됩니다. 그래서 퇴출당하는 것입니다. 사업하는 실업인도 늘 공부해야 합니다. 오늘 이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합니까. 오늘의 5분이 이집트 시대의 12년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옛날 사고를 가지고 사업하는 사업가도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면 퇴출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은 영성을 계발하고 깊은 영성으로 하나님과 친밀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인성 개발
인격은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받고 사람들의 헌신을 이끌어 내는 힘입니다. 사람들은 지도자의 인격의 수준 그 이상을 따르지 않습니다. 지도자가 이기적이라면 아무리 똑똑하고 기도 많이 해도 존경하고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이나 지도자는 인격개발을 위해서 매일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22-23절에는 우리가 맺어야 할 영적 그리고 인격적 열매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 열매가 모두 9가지입니다. 마음에 3가지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가, 이웃을 위하여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의 열매가,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과 절제와 온유의 열매가 맺힙니다. 신앙인이 신앙 안에서 살면 이런 열매들이 맺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열매를 성령의 열매 또는 인성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성령이 내안에 내재하고 말씀이 내안에 내재하면 이런 열매가 맺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열매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감동을 주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제도가 아닙니다. 힘도 아닙니다. 개혁도 아니고 혁명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성의 열매로 가능합니다. 그 열매에 사람들이 스스로 따르고 협력하여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안수 받을 때 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하라(딤후1:6)”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영을 사장시키지 말고 활용하라는 말입니다. 그때 각종 열매가 열리고 그 열매는 나로 하여금 힘과 능력을 공급합니다. 그 힘이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영성과 인성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자아상 개발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왜 이 일을 해야만 하는지 분명한 이유는 나의 자아상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4:7)”, “너는 안수 받을 때에 주어진 은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딤후1:6)”,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6:12), “너는...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고 했습니다. 나이 어린 디모데가 사도바울 같은 분명한 신앙을 가진 스승을 만나게 된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탄생한 것입니다. 사도바울 자신도 이 자아상을 아주 분명히 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노라(고전2:2).”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유혹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갈6:17)”,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빌1:20)”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한 자아상입니까. 우리 신앙인에게는 이 자화상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의 목적도 가는 방향도 하는 일도 살아가는 자세도 분명해지게 됩니다.
얼마 전에 말씀드린 송명희 시인은 외모로는 너무나 불행한 모습입니다. 온 몸이 뒤틀린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보신 어느 분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자 정색을 하며 “나는 이대로가 좋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철저하게 신뢰하고 믿고 수용하고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볼 때는 내 모습이 안타깝게 보일지 모르나 나는 행복한 것입니다. 내가 행복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주님을 사랑해야 나의 자화상이 분명해집니다. 그때 나는 세상에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회성 개발
우리 신앙인은 영적 리더로서 사회성도 개발해야 합니다. 무슨 일에 성공한 사람은 20%는 자기 능력 때문이고 80%는 대인관계 때문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선호하는 IQ, EQ 도 중요하지만 NQ (Network Quotient) 즉 대인관계 지수가 더 중요합니다. 대인관계에서 중요한 승리의 비결은 다른 사람을 성공시키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성공시켜야 결국 내가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미인대칭 즉 미소 인사 대화 칭찬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타인에 미소와 인사와 대화와 칭찬이 있으면 다른 사람도 내게 그렇게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미인대칭의 사회성 개발하는 방법을 예수께서 마태복음 7장12절에서 이미 오래전에 지적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 2장14절에서 “너는 이단들과 거짓 증언자들과 핍박자들과 말다툼을 하지 말라, 하나님 앞에서 엄히 말하노니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를 망하게 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1절에서는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아버지에게 하듯 하고 젊은이에게 형제에게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모두 사회성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이 사회성의 부족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상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불필요하게 고집이 세다, 자기주장이 강하다, 말을 많이 한다고 지적을 합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성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이 많고 고집이 세고 불평도 많이 하고 관계도 원만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한번 불화가 야기되면 좀처럼 화해가 어렵습니다. 분열은 쉬운데 합하는 데는 문제가 많습니다. 이 지적들은 사회성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1절에서 “무릇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고 공경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비방 받지 않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믿는 상전을 둔 종들은 상전이 믿음의 형제라고 가볍게 소홀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겨라, 그것이 믿는 자의 할 일이요 네가 사랑을 받는 비결(딤전6:2)”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할 수 있는 한 이 세상에서 누구와도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을 줄여야 합니다. 누구의 부족한 부분을 말하기 전에 내 모습에서 부족한 부분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단 진리가 왜곡되고 주께서 욕을 당하고 구원의 길이 막힐 때에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것은 직무유기입니다. 그때에는 강하게 잘못된 주장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체력 개발
신앙인이 체력이 약해지면 영성개발이나 신앙 유지가 어려워집니다. 몸이 건강할 때 우리들이 영적인 힘을 발휘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위탁하신 몸입니다. 그래서 잘 관리해야 합니다. 만일 몸이 병들면 신앙도 쇠하게 됩니다. 몸이 건강할 때 마음도 정신도 생각도 신앙도 건강해지게 됩니다. 아니면 좋던 신앙도 병들고 쇠하고 메말라지게 됩니다. 몸이 좋지 않아 예배를 누워서 집에서 TV로 드리고 사무실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주일날 내 발로 걸어서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내 발로 걸어옴, 와서 예배당에 앉아있음, 그리고 함께 기도함, 영적 공간 안에 내가 지금 참여하고 있음, 내 손으로 헌금을 드림, 두 손 모아 기도함, 말씀을 새김, 입을 열어 찬송을 부름” 이것들이 집에서 누워 TV로 드리는 예배와 같을 수가 있습니까.
신앙인은 건강해야 합니다. 특히 노년을 조심해야 합니다. 건강하게 살며 예배드리다가 3일만 아프고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는 문제도 생각해 보면 죽을 준비가 미흡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준비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삶을 진심으로 정리정돈 할 시간이 3일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달려갈 길을 다 달렸으니”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이고 그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아가야 하는 청지기들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매일 훈련하고 연단해야 합니다. 아니면 내안에 영적 잡초들이 돋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자기훈련과 영성과 인성의 개발과 분명한 자아상과 사회성을 기르고 체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전인적 건강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그 시대 우리는 가장 강력한 자질을 가진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너의 발전된 모습을 보이라
딤전 4:12-16 / 노경모 목사
회사를 다니게 되면 승진시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승진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보아야 합니다. 물론 회사원들에게는 스트레스가 됩니다. 그러나 회사의 입장에서는 일정한 점수이상을 받은 사람을 승진시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처음 입사했을 때 보다 여러 면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인 자에게 승진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많은 회사들이 직원들에게 정기적으로 토익시험을 치게 합니다. 좀 더 높은 점수를 받은 자에게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 회사에서 진급하기 위해서는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 과거보다 지금이 내가 더 발전되고 진보되었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생존경쟁이 치열한 현 사회의 모습입니다.
애기가 태어나게 되면 그 애기는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자라야 합니다. 신체적으로 자랍니다. 지적으로도 성장합니다. 말하는 것, 보는 것, 느끼는 것, 움직이는 것, 생각하는 것 등 모든 면에서 애기는 성장합니다. 즉 발전하는 것입니다. 진보하는 것이지요. 만일 애기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가 그 애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TV에 한 인도 소녀가 소개되었습니다. 나이는 15세, 몸무게는 5.4kg, 키는 60cm도 안됩니다. 이름은 조티, 고등학생입니다. 인도의 엄지공주이지요. 태어난 지 정확히 열 세 달이 지나자, 키를 비롯한 모든 신체의 성장이 완전히 멈췄다고 합니다. 조티는 연골무형성증을 앓고 있는데 조티의 부모님은 그 딸이 이렇게 작은 것에 대해서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요.
성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육제적인 성장이 중요합니다. 지적인 성장도 중요하지요. 나이는 18세인데 여섯 살의 지능만 갖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회성의 성장도 중요합니다. 인지 능력, 판단력, 이해력도 나이에 걸맞게 성장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위해서 교육을 받기도 합니다.
만일 성장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관심을 아끼지 않습니다. 노력과 시간을 투자합니다. 물질과 정성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중요하게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다른 어떤 부분 못지않게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장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쉬운 말로 말하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과거보다 현재가 더욱 더 진보되고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분 15절을 보면 ‘너의 진보된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보라는 말은 ‘발전’, ‘성장’을 말합니다.
어린아이는 태어났을 때 보다 한 돌이 되었을 때는 모든 면에서 성장해져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러지 못하다면 부모님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요, 그 아이는 돌잔치를 치르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많은 병원비가 드는 한이 있더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병원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보다 한 달이 지나고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지나면서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더욱더 성장해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아니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만일 성장하지 않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오늘의 본문에서만 아니라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성장할 것을 여러 군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11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즉 말하는 것, 깨 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성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이 말씀은 지혜가 성장하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부분에 있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부분에 있어서 자라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성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자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요 영적으로 심각한 병이 들었다든지, 심각한 문제가 우리에게 생겼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긴급하게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간곡하게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너의 진보된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라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우리가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성장하고 진보하고 발전할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읽는 일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13절에 ‘읽는 것에 착념하라’고 말합니다. ‘착념한다’는 말은 ‘전념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읽는 것은 개인적으로 성경을 탐독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배 시에 회중 앞에서 성경을 낭독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의 초대교회는 유대교의 회당에서 행해져 왔던 성경 낭독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 받아 예배 의식의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읽는 것에 착념하라는 말은 성경을 읽는 것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는 일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의 영적인 양식입니다. 영적인 젖이요, 음식입니다. 이것을 먹어야만 영적으로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먹지 않으면 성장이 안됩니다. 영적으로 건강에 이상이 생깁니다. 죽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굶주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계속해서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회를 많이 가지십시오. 말씀을 배우십시오. 수요예배에 나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 영적 성장을 위한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성경 말씀을 암송하십시오. 이것은 음식을 꼭꼭 씹어 먹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먹는 것은 성장을 위해서 아주 효과가 있습니다. 말씀을 암송을 하는 자는 그냥 말씀을 먹는 자보다 잘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도 하고 연구도 하고 배우기도 하십시오. 이것은 영적 성장을 깊이 있게 가져오는 좋은 영양제를 먹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 초대교회 성도들이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차기를 바랍니다.
둘째, 권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또 13절에 ‘권하는 것에 착념하라’고 명령합니다. 권하는 것은 ‘바른 길로 가도록 간곡하게 타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상대방을 격려하고 힘을 북둗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권하는 것이 어떻게 내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궁금해 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내가 완전히 성장하고 난 뒤에야 남을 권하는 것이지 아직 나도 부족한데..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지요.
지금은 그러한 직책이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과거에는 교회에 ‘권찰’이라는 직분이 있었습니다. 이 권찰의 직분은 권사, 집사, 그 다음의 직분이었습니다. 평신도에서 집사가 되기 전에 반드시 권찰이라는 직분을 거쳐야 했습니다. ‘권’은 권한다는 말이며 ‘찰’은 보살핀다는 말입니다. 권찰은 자기가 맡은 구역의 성도들을 심방하면서 그 가정을 보살핍니다. 어려움이 있나, 어떤 문제가 있나 보살핍니다. 그리고 권하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발로 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되는 성도들이지만 이 권찰의 일을 맡겼습니다. 처음에는 ‘저는 부족해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이들이 이 권찰의 일을 하면서 얼마나 영적으로 성장하는지.. 정말로 놀랍게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권찰의 일을 잘 수행한 사람들이 집사의 임직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다른 사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보다 연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고 권면하고 격려하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날, 성도들은 자기 일이 바빠서 그런지 남을 돌아보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내 코가 석잔데..’, ‘내 일이 발등에 떨어 졌는데 어떻게 남을 돌봐..’ 이렇게 생각하고 오로지 내 일에만 매달립니다. 참 지혜로운 것 같지만 성경에는 그러한 것을 지혜로운 것이라고 말하지를 않습니다.
셋째,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또 13절에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배운 것이 확실히 자기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남을 그것으로 가르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일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쳐 보십시오. 학생들이 성장하기에 앞서 내가 확실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주일학교 교사로의 첫발을 디뎠습니다. 그리고 18년 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빠짐없이 초등학교 학생, 고등학교 학생들을 성경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왜 이것이 내 신앙 성장에 엄청난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족헤도 내가 그 부분에 완전히 못하더라도 남을 가르친다면 내가 성장하고 남도 성장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르침의 유익에 대해서 16절에,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는 자를 구원하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영적으로 자라고 싶습니까? 신앙적으로 성장하고 싶습니까? 일단은 남을 사람을 가르치는 것으로 섬겨 보십시오. 확실하게 보장된 방법입니다.
넷째, 은사를 잘 활용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하라는 말입니다. 14절에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당시에는 장로의 회에서 안수를 통해서 은사를 베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하지를 않고 그냥 묵혀 두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은사란 말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은사를 주셨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주시기도 하셨고 우리의 재능 즉 달란트를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다 한 가지 이상의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달란트를 주셨느냐 하면 그것을 잘 활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활욯하지 않고 방치해 놓거나 묻어 놓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 달란트 혹은 두 달란트 혹은 다섯 달란트를 주인이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을 합니다. 열심히 활용하여 이익을 남기 종들은 칭찬했지만 그것을 활용하지 않고 묻어 놓은 좋에게는 무섭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22-30을 봅시다.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는 자는 그 있는 것 까지 다 빼앗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장하기는 커녕 점점 즐어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달란트를 잘 활용한 자에게는 더 풍족하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점점 더 성장해 나간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과 은사를 잘 활용하는 일에 전념하라고 말합니다. 15절에는 이 일에 전심전력하라고 말합니다. 즉 마음과 힘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성장하고 진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보된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조금하다가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라고 16절에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형재 자매 여러분 성장이 멈춘다는 말은 퇴보한다는 말입니다. 나이는 한 살 두 살 많아지고 신앙생활한지도 시간이 흐르는데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성장 제로가 아니라 마이너스 성장 즉 퇴보입니다. 우리가 성장하고 발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장과 발전을 택하겠습니까? 퇴보를 택하시겠습니까? 올바르고 지혜로운 선택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며 행하게 합시다
딤전 4:13 / 강성찬 목사
그룬트비히[Grundtvig, Nikolai Frederik Severin,1783~1872] 목사의 설교를 듣고 삼애 운동에 헌신키로 한 인물 중에 크리스텐 콜(1816~1870)이란 사람은 초등학교 교사였으나 진부한 재래식 교육에 염증을 느껴 자신이 만든 교재로 새 교육을 실시하다가 이로 인해 해고를 당한 경력이 있는 교사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기울어져 가는 덴마크를 바로 세우려면 교육이 새로워져야 함을 절감하고는 국민들의 얼을 깨우치는 새 교육, 산교육을 펼치는 일에 헌신키로 결심을 하고는 두메산골로 들어가 허름한 물방아간 하나를 빌려서는 학교 교실로 개조를 하고 국민고등학교란 이름으로 국민교육을 시작하였다합니다. 학생모집 광고를 하고는 기도하기 시작 하였다 합니다. 첫 학기에 15명의 학생들을 보내달라고 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입학식이 있는 당일의 아침나절까지 원서를 낸 학생이 단 한 명밖에 되지 않았다합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은 그는 학교 뒷편 숲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드리기를 개학시간이 될 때까지 14명의 학생을 더 보내달라고 기도 드렸다합니다. 그가 기도를 드리고 나오는데 소달구지에 이웃마을 젊은이들 14명이 타고 와서는 말하기를 입학하러 오다가 달구지가 빠져서 건지느라 이렇게 늦었노라고 하였다 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덴마크 국민고등학교의 시작이라 합니다. 크리스텐 콜은 그들과 함께 살면서 산교육을 실시하였다합니다. 그들에게 지식을 전수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사랑, 겨레 사랑, 이웃사랑에의 삼애 정신을 심어 주었다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 개척자로 일하게 하는 개척정신, 도전정신을 길러 주었다합니다. 거기에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국의 땅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척박한 땅을 비옥한 땅으로 바꾸어가는 일에 헌신할 사명감을 심어 주었다합니다. 이 운동이 덴마크를 좌절의 역사에서 번영의 역사로 변모시킨 출발점이 되었다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실제적인 권면을 하며 교인들을 잘 가르치되 디모데의 나이의 적음을 인하여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 등의 신앙생활에서 모범이 될 것을 권면하며 단계적인 교훈을 함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미 딤전1장에서 4장 본문에 이르기까지 말한 내용들을 명령하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또한 명령하고 가르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젊다는 것으로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말과 행동, 사랑과 믿음, 정절등에 신자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범적 행동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아야 권면하고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이야말로 교회 지도자, 더욱이 아직 젊은이들에게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만드는 것, 그것은 최고의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18세기 독일 낭만주의 기독교 시인 노발리스(Novalis)의 노래라 합니다. 인류 교육의 역사는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전인교육의 역사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전문화 시대에 더 절실히 요청되는 '인성교육'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성경 진리를 중심한 '교회교육'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라 하겠습니다. 더욱이 죄로 말미암아 못쓰게 된 인간을 예수 안에서 새사람 만드는 일(고후 5:17)이야말로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예술', 그 자체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의 말씀들을 명령하고 가르치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성도들에게 무엇을 명령하고 가르쳐야 하는지를 밝히 보여 주고 있는데 현재의 우리에게는 성경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고 합니다.
요즘처럼 다원화된 시대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많은 이들이 그 말에 감화되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의 교회 교육은 보다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교육이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길러 내는 일이라면 교회 교육을 좀 더 엄하고 철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교육만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을 배출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아가 연소함으로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가르치라고 합니다.(딤전 4:12)
젊은 나이에는 연륜의 부족과 혈기의 왕성함으로 자칫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연령의 문제까지 다루며 교훈하는 점에서 바울의 부성적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이상근).
신약에서 연소하다는 것은 현재처럼 나이 어린것을 의미하지 않고, 군대에 갈 수 있는 나이, 즉 20세에서 40세까지를 포괄적으로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회에서는 언제 실수할지 모르는 애송이로 보였던 것입니다. 디모데가 바울을 따라 루스드라를 여행했을 당시의 나이를 약 20세로 추정합니다. 신학자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디모데는 이때 30-40세 가량의 청장년층에 속했을 것이라 하는데 이때의 나이는 대략 35세 전후였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도 유교적 윤리가 강하여 흔히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 의견이나 실력이 묵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시골 교회에 부임하여 마을 어른들에게 인사를 갖더니 왔는가 자네 한문 좀 아는가 해서 한문은 잘 모르나 믿음 소망 사랑을 신망애라 하기에 그대로 신앙애를 말하자, 이제는 문자를 좀 아는가 해서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 하라는 경천애인을 많이 쓰기에 그대로 말했더니 아무 말도 못하고 목사님 한문 실력이 대단 합니다 하더라고 합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상대의 의견이나 인격, 실력을 공정하게 평가해 주는 사회 풍토가 아쉽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곳의 새로운 지도자 디모데의 영적 어버이로서의 염려를 가지고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가르치라고 따뜻한 마음으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가르치라고 합니다(딤전 4:12)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12)는 교인의 모본이 될 것을 디모데에게 당부한 부분입니다. 교인들로부터 이런 업신여김을 받지 않기 위해서 말과 행동, 사랑과 믿음, 순결 등에 있어서 그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생활의 증거야말로 어느 누구도 헐뜯거나 중상할 수 없는 객관적 평가가 되기 때문입니다.
흔히 어떤 이들은 직분자가 되면 자연히 존경과 권위를 얻게 되는 줄 알고 직분 얻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생활이 그 직분에 어울리지 못하면 도리어 그 직분은 자신을 초라하고 업신여김 받는 경멸의 대상으로 만들기 십상이라 하기도 합니다.
'말과 행동'에서 모본을 보인다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자연히 풍기는 외적 경건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말(로고스)은 단지 공적인 설교 뿐만 아니라 사적인 담소까지를 포괄합니다.
행실(아나스트로페)은 일반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습관이나 품행 및 삶의 방식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과 관계되는 모든 행동을 의미하는데 이 단어가 ‘말’에 이어서 나오는 것은 말과 행동이 일치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하겠습니다.
'사랑과 믿음'은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과 신앙의 자세를 말하는 내적 경건의 모습이며, 사랑(아가페)은 자신을 회생하는 헌신적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께서 모범을 보이신 사랑으로 원수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형제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웃에 대한 순수한 관심,그리고 모든 사람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을 촉구합니다 (Hendriksen).
'사랑.'은 기독교의 최고의 덕목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기본자세입니다.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사랑의 본질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바울의 묘사를 압축하면 사랑은 희생과 책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인들에게는 믿음보다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바울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하였고(고전 13:2),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 하였습니다(고전 13:13).
물론 믿음 없는 사랑도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은 아니지만 사랑 없는 믿음은 그보다 더욱 가증하고 비기독교적인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 5:6)고 합니다. 믿음(피스티스)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를 가리킵니다. 즉 사랑이 사람들 사이의 수평 관계에 대해 적용된다면 믿음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수직 관계에 적용됩니다.
'정절'(하그네이아)은 본래 ‘깨끗하다’(고후7:11)란 뜻의 말(하그노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사상과 행위에 있어,그리고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철저한 순결을 의미합니다.
이성 간의 문제나, 결혼 문제에 있어서의 끼끗한 경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교회의 지도자는 이러한 면에서 모두 뛰어난 본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이러한 생활이 몸에 밸 때 비로소 교회의 지도자는 그가 젊든지, 어리든지 간에 교인들의 존경을 받게 되고 교인들은 그의 가르침과 명령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본이 되어.'의 본이란 단어는 기술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주물과 같은 것입니다. 주물에 쇠를 녹여 부으면 주물에 새겨진 것과 같은 모양의 주조 품이 나오듯이 '모형, 원형'을 의미하지만(행 7 : 44 ; 히 8 : 5), 윤리적인 의미에서 '모범, 본보기'등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모범적인 본이 되어 자기와 같은 모양의 신자들이 나오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려운 상황 속에 있는 디모데에게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갖추기 위해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지도자의 진정한 권위는 겉모습 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과 행동이 부합하는 참된 모범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는 말씀과 삶이 완전히 일치하는 데서 오는 참된 모범과 권위가 있었습니다.
지도자로서 성도로서의 권위를 갖추기 위해 그 어떤 허황된 방법들에 의지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역시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고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도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빌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그리고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하엿습니다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고 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디모데가 성도들에게 신앙과 도덕적 측면에 있어서 귀감이 되어야 함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모습에서 보듯,또한 베드로의 권면이나 사도 바울의 권면이 그러하듯 오직 말과 행실과 믿음과 사랑의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정녕 전적인 수단들을 통해 얻은 권위는 그야말로 껍떼기와 같은 힘밖에 없으나 내면의 진실함과 삶의 모범에서 오는 권위에는 모든 사람들을 중심에서 순복게 하는 참된 힘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며 가르치라고 합니다(딤전 4:13)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곧 교회의 교사가 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교회 사역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하여야 권면하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성경을 예배시마다 교인들에게 읽어 주었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예배의 중요한 내용이었기에 만일 성경을 읽을 수 없다든가 그것을 해석해 줄 능력이 없다면 그는 아무리 거룩한 생활을 한다고 해도 교회 지도자로서는 부적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늘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 합니다.
‘읽는 것’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성경 연구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고 당시 초대 교희가 유대회당의 전통을 이어받아 예배 전에 성경을 낭독했다는 점에 근거하여 공적 예배시의 성경 낭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하나 요지는 바로 말씀을 읽고 가르치고 이를 실천하도록 권하는 일에 모든 힘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을 내 보내시며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던 주님의 명령과도 완전히 일치합니다(마28 :20).
이러한 점에서 말씀 사역이 중심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성경과 그에 필요한 학문들을 연구할 때 바르게 교인들을 권면하고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할수록 더욱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풍성한 꼴은 기도와 함께 성경 연구에 의해 준비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이 구비될 때 비로소 그 직분에 어울리는 가르침의 권위와 존경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옆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아래로 만물을 다스린다.'라고 하는 이것이 교육해야 할 올바른 관계라 하기도 합니다. 교육은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관계인을 만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관계인보다 기능인에 우선을 두고 있다는 지적을 하기도 합니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예능 체육을 잘하는 것은 다 기능인데 기능은 관계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능인과 동시에 관계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공부해서 남 주나"라고 하는데 공부해서 내가 잘되는 것이니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것이지만 이것은 잘못된 개념이라 하기도 합니다. "공부해서 남 주나"라고 하지 말고, "공부해서 남 주자"고 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남 주기 위해서 공부하면 손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부해서 남 주면 관계의 틀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관계의 틀이 커지면 공헌의 틀도 동시에 커진다는 것입니다. 공부해서 남 주는 인물에게는 하나님도 더 많은 것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관계인 교육은 인격과 봉사의 틀을 키우는, '큰 인물' 교육이라는 것입니다.(권성수 목사 대구동신교회)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가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행하는 한해를 살며 가르침을 끝까지 행하도록 하는 달에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여 행하도록 하는 사명을 감당하며 영광돌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끊임없는 자기 성숙을 이루라
딤전 4:15 / 김영대 목사
성도님들의 기도 가운데 평상시 한끼도 먹지 않고는 잘 못 참는 저였지만 은혜가운데 금식기도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몸에 붙었던 필요 없는 지방은 많이 뺏고, 영적으로는 귀한 것들로 속을 채우는 아주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교회를 비운 동안 저를 대신해서 수고하신 원로목사님과 전도사님들, 그리고 기도해 주신 성도님들께 이시간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시간 먼저 지난 두 주간 동안 기도원 머무르면서 경험하고 느꼈던 것을 조금 여러분과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 주: 장로교회에서 주관하는 전국 중·고등학생 연합수련회 800여명이 참석했고,
이번주: 사랑의 교회 대학부가 수련회로 1,200명이 모였습니다.
비교) 첫 주는 기도원 전체가 시끌벅적 했습니다. 저 스스로도 학생들이 800명이 모였으니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주를 지나면서 "아! 지난주가 대단히 번잡하고 시끄러웠었던 것이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지난 주 보다도 전체 인원에서 1/3쯤 더 많은 1,200명이 모였는데도 기도원 전체가 마치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습니다. 어디서도 괴성을 지르거나 값싼 웃음으로 분위기를 흐트러지게 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식사시간에 배식을 기다리며 줄을 서는데 배식이 끝나기까지는 약 40-50분 소요되었습니다. 전 주에 아이들은 그 시간에도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울 정도로 까불고 장난을 쳤습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길게 늘어선 그 줄을 끊고 제가 사이를 통과해 지나가기가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 사랑의 교회 대학부 학생들은 차분히 흐트러지지 않고 줄을 서서 말씀카드를 내 놓고 외우거나, 방금 전 반 별로 나누어 공부했던 말씀들을 핸드북을 뒤적이며 되새기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미처 토론이 끝나지 않은 팀들은 실외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는 배려가 분명히 있는 모습으로 조용 조용 대화를 계속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는 각기 두 세 차례 저들의 집회에도 함께 참석하였는데 대학생들의 집회 후에는 성전 안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난주에는 그렇질 못했습니다. 진행부에서는 혹시나 무심히 껌을 씹다가 버릴까봐 아예 모든 껌은 수련회 시작 초반에 다 거두는 세심함도 보였습니다. 물론 집회의 참여도나 집중력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사랑의 교회 대학부 학생들의 수련회는 가히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 않다는 소망도 갖게 되었습니다. 나이로 치자면 불과 적게는 2-3년, 많아야 4-5년 차이인데 왜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성숙도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격적인 면에서나 공동체 생활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함을 배우고 훈련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성숙한 신앙인격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또한 그 힘은 사회의 변화와 변혁을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나 미성숙한,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들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마음을 닫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 모두가 성숙한 신앙의 인격자들이 되어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꿈마을엘림교회는 오늘로 꼭 창립 28주년을 맞이했습니다. 1975년 1월 19일, 28년 전 단 한 평의 땅도 없어, 삼정동 사거리 시 소유의 땅 한켠에 천막을 치고 시작한 우리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교회는 주변의 많은 교회들과 성도들도 부러워하는 좋은 위치에, 아름다운 건물과 신실한 성도들로 가득 찬 교회가 되었습니다. 어린아이들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기쁨에 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런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은 원로목사님을 중심으로 지난 사반세기 동안 교회를 충성스럽게 받들어 온 장로님들과 임원, 성도님들의 피땀어린 헌신의 결과인 줄로 믿습니다. 사실 저만해도 수고로이 나무를 심은 자가 아니라, 원로목사님과 앞선 성도님들이 피땀 흘려 심어놓은 과일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누리는 목사입니다. 조금 일했다면 그저 지난 몇 해 동안 물주는 역할만 감당해온 것입니다. 심은 것보다 누리고 혜택받은 것이 훨씬 더 많은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특별히 앞서 수고하신 원로 목사님과 장로님들, 그리고 성도님들에게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원로 목사님 한번 자리에서 일어나시죠! 오늘의 우리 교회를 목사님과 함께 이루신 모든 성도님들까지를 포함해서 대표로 목사님께 감사의 박수를 한번 쳐들입시다. (박수)
그러나 우리는 오늘 현재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말씀에서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계속적인 자기 발전과 성숙을 위해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굉장히 힘주어 강조합니다.『너 자신의 발전과 진보를 위하여 전심전력하라』저는 오늘의 이 말씀을 우리 교회가 실시하고 있는 일사천리 신앙부흥운동과 연관짓고 싶습니다.
우리 꿈마을엘림교회 모든 성도들은 끊임없는 신앙의 자기 진보를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1. 자기 자신의 인생의 기준을 높여야 합니다.
인생은 자기가 정한 기준이 곧 자기의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는 자기 기준의 개선, up grade가 필요합니다. 21세기 성공적인 기업가들이 외치는 슬로건처럼 "어제보다 오늘을 더 잘하기"(Beat yesterday)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저 평균에 만족하고, 현재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균에 머무르고, 현재에 만족하다보면 금새 평균 이하로 전락하고 말게 되기 때문입니다.
Wal-Mart의 회장 샘 월튼(Sam Walton)이 말했듯이, "한 때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고 해서 그것이 계속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항상 새로운 수준으로 향상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는 자기 성장을 위해서 새로운 수준으로의 향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업에서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 혁신의 최전선에 있어야 합니다. 소위 다음 단계로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휴대폰이 세계 시장을 점유해 나가는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비자들, 젊은이들의 다양한 욕구에 맞춰 끊임없이 신제품을 개발해서 시장에 내 놓는 것입니다. 모두다 시장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삼성전자 한곳에서만 매해 약 150개의 새로운 휴대폰 모델을 개발한다는 것입니다. 거의 이틀에 하나 꼴로 신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평균에 머무르고 현 상황에 머무르다보면 한 순간에 평균 이하로 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표준이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함을 강력히 요구하십니다(마태복음 5:20). 즉 우리들의 영적 수준과 실행력이 여느 종교인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우리자신은 물론이려니와 세상의 잘못된 체제와 가치관의 일부분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는 영적인 자기 혁신과 진보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는 자기 진보를 이루려면 우선 자신의 기준을 올려야 합니다. 자신의 기준을 높여서 그 이하는 만족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보다나은 미래를 향하여 창조적인 생각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유명한 화가 라파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작품 중에 가장 훌륭한 그림은 어느 것입니까?" 그랬더니 라파엘은 "그야 내 다음 작품이죠"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창조적인 사람은 자신의 다음 단계 수준을 더 높이 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현대 경영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Peter Drucker는 올해 나이 94세인데도, 자기 발전에 전심전력합니다. 그가 작년 가을에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감동적인 말을 했습니다. "박사님, 그 동안 많은 책을 저술하셨는데, 어느 책이 가장 잘 쓰신 역작인가요?" 피터 드러커는 이렇게 멋진 비전 지향적인 대답을 하였습니다. "다음에 쓰는 책이지요."
우리 모두 인생과 신앙생활의 기준을 높이 정하고, 끊임없는 자기 진보를 위하여 전심전력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인격의 성숙과 함께 주일성수, 온전한 십일조, 교회중심 생활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일사천리 신앙부흥운동을 내 삶의 기초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상급과 면류관이 큰 성도가 될 것입니다.
이제 2003년을 시작하면서 나 자신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믿고, 비록 남들보다 속도가 뒤떨어졌다 할지라도 자신의 향상을 위하여 전심전력하다보면 반드시 새로운 단계로 부상하게 될 날이 올 것임을 믿고 새 출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끊임없이 재 시도하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향상과 진보를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뭔가를 하고 계시다면 오늘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구한 것처럼 전심전력하고 계신가요? 안타까운 것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발전과 진보를 포기하고 '이 정도면 됐어'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진보에 자포자기한 사람들은 목사가 아무리 강조를 해도 "됐어! 나는 그냥 내 스타일대로 살아갈 거야...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해봤지! 그렇지만 나는 안돼." 이런 패배의식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으려고 하고, 스스로 자신의 영성 개발이나 성숙을 향한 노력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 듯이 농구 게임에서 승리하려면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리바운드입니다. 누군가가 슛을 했을 때 재빠르게 움직여 백 보드나 바스켓 링을 맞고 튀어나오는 공을 리바운드 하여 다시 잡기만 하면 슛에 실패했어도 다시 득점할 찬스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기 팀 선수가 슛을 던졌는데도 아무도 튀어나오는 공을 잡으려고 리바운드에 참여치 않는다면 그 팀은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승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도구로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포기하기를 거부했던"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슛에 실패했어도 계속 리바운드 했습니다. 다시 시작하고, 다시 도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자신의 신앙의 발전과 향상을 스스로 포기하며 자조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매너리즘과 허무주의에 빠져가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만일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에 다시 내 신앙의 수준을 더 높여보기로 결심하는 리바운드의 새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라도 정기적인 기도생활을 시작하십시오. 성경책을 펼쳐 읽으십시오. 30분만 투자하면 1년이면 성경을 완독 할 수 있습니다.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들을 암송하십시오. 그리고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십시오. 그들 중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내가 전도해야 할 대상자들은 누구인지? 그들의 이름을 태신자 카드에 적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해 보십시오. 영혼 구원의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를 맛보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여러분 중에는 지난 1년 동안 기도와 성경 읽기와 암송, 전도하는 일이 조금씩 습관화 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또 전진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는 바로 그 때부터 다시 퇴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1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좀더 고급한 성장과 성숙을 이루기 위하여 다시 출발하십시오.
어느 젊은이가 오랜 수행 끝에 드디어 검은 띠를 받기 위해 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그 제자는 수년간의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마침내 무술 단련의 정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승이 '검은 띠를 수여하기 전에 한 가지 시험이 남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자는 스승이 자기와 직접 대련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한 질문으로 시험을 치렀습니다. "너는 검은 띠를 받기 전에 내 질문에 바른 대답을 해야만 한다. 검은 띠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냐?" "예! 제 수련 과정의 끝이며, 제가 오랫동안 노력한 결과로 주어지는 보상입니다." 만족스런 대답을 얻지 못한 스승은 고개를 저으며 "너는 아직 검은 띠를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다. 1년 후에 다시 오너라."
1년 후 제자는 다시 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스승은 또 묻습니다. "검은 띠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냐?" "뛰어남의 상징이며, 무술에 있어서 최고의 성취를 의미합니다"라고 제자가 대답합니다. 이번에도 만족스런 대답을 얻지 못한 스승은 또 다시 고개를 저으며, "너는 아직도 검은 띠를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다. 1년 후에 다시 오너라."
1년 후 제자는 다시 스승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번에도 스승은 똑같은 질문으로 묻습니다. "검은 띠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냐?" 이 때 제자는 스승이 원하는 바른 대답을 했습니다.『예, 스승님! 검은 띠는 시작을 의미합니다. 자기 극복, 꾸준한 노력, 보다 높은 수준의 추구라는 영원한 여행을 이제 스스로 시작하는 것입니다.』스승은 제자의 대답을 아주 만족스럽게 여기며 제자에게 검은 띠를 메어줍니다.「그래 맞다. 이제 너는 너의 진보를 위한 노력을 스스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구나. 자! 검은 띠를 받아라.」
매일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아무도 강제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일을 스스로 꾸준하게 지켜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변화와 성숙을 위해서는 기꺼이 값을 치르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해야 합니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변화나 성숙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을 위해 시간을 들이는 것은 충분히 투자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단지 육적이고 세상적인 일 뿐만 아니라, 영원에 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신의 변화와 성숙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각자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영혼을 책임진 목사인 저와 교회가 여러분의 영적 성장과 진보를 위해 힘써 돕겠습니다. 또한 진정으로 내가 변화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친히 도와주실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내 인생을 변화시켜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모쪼록 우리 꿈마을엘림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일사천리 신앙부흥운동에 동참하여 고급한 신앙성숙과 진보를 이루어 세상의 빛과 소금 되는 성도와 교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삶을 요구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전심전력하는 최선의 삶은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앞에 것, 주님께서 보여주신 완전함의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고 고백했던 것 같이, 우리도 나 자신의 영적 진보와 성숙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성실한 하나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지금 어떤 변화와 개혁을 원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화, 정치지도자들의 개편, 체제의 변화, 가족들의 변화,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의 정신 개조를 원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정작 바뀌어야할 장본인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전심전력하기보다는 그저 되는대로 신앙 생활했던 저희들을 깨우치사, 높은 뜻을 품고 그 푯대를 향하여 전진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새롭게 하는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는 해
딤전 4:15 / 문기태 목사
아프리카 남부의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부시맨 중에는 지금도 석기시대와 똑같이 생활하는 종족이 있습니다. 부시맨(Bushman)은 2만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다른 종족과 싸운 적이 없습니다. 위험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때마다 도망해서 적과 맞부딪힐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부시맨이 도망가는 곳은 언제나 먹을 것이 풍부한 지역뿐입니다. 전투의욕은 희박해지기만 했으며,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므로 아무런 불편이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부시맨을 조사하러 간 학자들이 놀랐던 것은 먹을 것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장소에 주거를 정하면서도 채 한 시간도 되기 전에 두 손에 가득 먹을 것을 안고 돌아오는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환경이 좋은 땅에서 생활하므로 경작할 필요가 없고, 짐승을 잡으러 나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먹고 살기 위한 싸움이나 경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진보와도 담을 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진보가 없는 것은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부시맨만이 아닙니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믿음에 있어서나 사역에 있어서 오랜 시간의 흐름속에서도 거의 진보를 나타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영적인 면에 있어 진보를 이루지 못하는 현대판 부시맨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진보란 말은 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월이 갈수록 영적, 인격적, 사역적인 면에서 수준이 점점 더 높아져야 합니다. 처음 믿을 때는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를 받고 섭섭해서 삐치고 교회 안나간다고 시위를 벌일 수 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고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그 수준에 머물면 안됩니다. 진보를 나타내야 합니다.
처음 교회 나오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다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모든 것을 도와주기를 바랄 수 있지만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비위를 맞추어 주지 않는다고 원망을 하면 안됩니다. 진보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평신도때는 기도생활도 열심히 안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으며 적당하게 예배도 드릴 수 있지만 집사가 되고나서도 적당하게 눈치보며 게으른 신앙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진보를 확실하게 나타내어야 합니다.
서리집사때는 기본적인 예배생활, 헌금생활, 봉사생활에 만족하고 남보다 뒤쳐지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수도 있지만 안수집사가 되면 달라져야 합니다.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거룩한 삶에 모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보다 더 수고하고 희생하여야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지난 해 보다 더 나아진 모습을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우리 성도들중에서 확연하게 진보를 보이는 사람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난 한 해 동안 믿음의 진보를 보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김찬호형제는 지난 해 다시 교회에 나오면서 하루에 세곽 이상 피우던 담배를 딱 끊고 얼마나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는지 수요기도회에도 빠집없이 아들까지 데리고 꼭 참석합니다. 목자에게 신앙생활을 더 잘하려고 헌금은 어떻게 하느냐? 물어가면서 십일조는 물론이고 건축헌금까지 작정하고 아주 열심입니다. 얼마나 행복하게 예수를 믿는지 모릅니다. 금년에 새가족들이 모두 저만큼만 진보를 보이면 좋겠습니다.
황경희집사님은 건강이 약한데도 지난해 새벽기도회도 열심히 나오면서 성경공부 인도자로 헌신하여 믿음을 키우고 싶어하는 이들을 잘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와 봉사에도 아주 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의 열매도 있는데 황집사님에게 전도되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한양숙자매 역시 전도자를 닮은 모습으로 믿음이 잘 자라고 있습니다. 금년에 집사 임명을 받은 분들이 그만큼만 진보를 보이면 우리 교회는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그 외에도 눈에 띄게 진보를 보이고 많은 변화를 나타낸 좋은 교인들이 많습니다. 송유복집사, 정선화집사, 정미경집사, 곽옥련집사, 이정필집사등 크게 진보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잘하다가 시험이 들어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진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1년 전이나 2년 전이나 3년 전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는 제자리 걸음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제자리 걸음을 하는 신자로 살아가거나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뒷 걸음 신자로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진보하는 신자 그것도 모든 사람들의 눈에 나타나게 진보하는 신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구원받았습니까? 거기 머물지 말고 확신에 이르십시오.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거기 머물지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감격을 나누는 신자가 되십시오.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거기 머물지 말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그 날을 꿈꾸며 그 날이 속히 임하도록 그 일을 위해 여러분의 인생을 헌신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있는 소중한 것을 투자하여 천국의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보를 확연하게 나타내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전심 전력할 때 진보가 나타납니다. (15)
오늘 사람들은 적당히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적당히 열심히 해라." "적당히 믿어라. 광신자같이 되지 말고.." 적당히 하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 적당히 하라고 합니까? 열심히 하는 사람이 항상 손해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일하고 월급만 받으면 손해는 안본다는 생각입니다. 적당히 흉내만 내도 손가락질은 안 받는다는 생각입니다. 이 사회가 이런 적당주의 때문에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적당히 공사를 하니까 얼마 안 있어 무너지고 맙니다. 적당히 일하니까 불량품이 많이 나오고 수출이 어려워집니다. 적당히 자리만 지키고 눈치만 보며 복지부동하는 이들이 있으니까 나라의 세금이 낭비되고 발전이 늦어집니다.
그러나 적당히 하고서 우승하는 선수는 없습니다. 적당히 하고서 성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적당히 공부하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적당히 하지 않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 성공합니다. 신앙생활도 적당히 해가지고는 은혜도, 축복도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손해볼 때 보더라도 열심을 내야합니다. 하나님은 적당히 하라고 하시지 않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하십니다.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하나님은 적당히 하는 사람들 중에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사람이 없나 두루 찾으십니다. 신앙에 있어서의 열심은 믿음이 빨리 자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거룩한 욕망입니다.
신앙에 열심있는 사람은 탁월하게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입니다. 뜨거운 심령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일만을 위해서 살고, 한 가지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진보를 나타내는 일에 전심 전력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살든지 죽든지,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영예를 얻든지 수치를 당하든지, 칭찬을 듣든지 꾸중을 듣든지, 관심사를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는 일에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까지는 결고 쉬지 말고 달려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만이 진보를 나타내려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운동선수가 기록을 단축하려고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 줄 아십니까? 1초를 단축하여 기록을 세우기 위해서 온 힘을 쏟습니다. 1cm를 더 높이 뛰려고 수없이 많은 연습을 합니다. 1점을 더 높이려고 타킷에 온 신경을 집중시킵니다.
믿음이 더욱 성장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를 받고자 제자로 헌신하고 훈련을 받는 일에도 그처럼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려고, 기도에 힘쓰려고, 주님을 닮으려고 온 마음을 집중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작년보다 더 성숙하고자 예전보다 더 좋은 열매를 맺고자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려고 힘을 집중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서 진보가 나타나지 못한 이유가 전심전력하지 않고 적당하게 흉내만 내다가 어려운 일 만나면 포기하고 장애물을 만나면 뒤로 물러서기 때문이 아닌가 돌아 보십시오. 그리고 금년에는 반드시 진보를 나타내고자 전심전력하시기 바랍니다.
2. 자신을 절제할 때 진보가 나타납니다. (16)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생활의 지혜까지 가르쳐주는 이 시를 쓴 사람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푸쉬킨(1799-1837). 그는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대가이며 러시아의 국민적인 시인입니다.
푸쉬킨은 실생활과 동떨어져 있었던 종래의 러시아 문학어를 일반 회화의 언어에 접근시켜 근대적 문학어를 만들어 내는 거창한 사업을 이룩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확립자라고 합니다.
그는 문학을 국민생활에 연결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러시아 사람들은 웬만한 수준이면 푸쉬킨의 시나 산문 한 두 절쯤은 외우고 있을정도였습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명문 종류 귀족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부틴은 세르게이 푸쉬킨이며 어머니 나제즈다는 표트르 대제이 총애를 받던 이디오피아인 아브람 한니발의 손녀였습니다. 그는 당시 귀족들이 그랬듯이 프랑스어를 일찍 배웠고 유모인 알리나로부터 러시아의 전설과 민요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총명한 그는 아버지의 서재에 틀어박혀서 닥치는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스로마 고전 러시아 작가의 글, 볼테르, 루소 등의 글을 널리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불과 15세때 '시인은 친구에게'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때부터 페테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 사교계에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1828년(29세) 무도회에서 열여섯 살 미소녀 나탈랴를 만났고 3년후 결혼했습니다. 나탈랴는 미모가 뛰어났고 푸쉬킨과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습니다.
나탈랴는 아름다웠으나 이해심이 없고 경박하여 푸쉬킨에게 재앙이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사치벽 때문에 돈을 대기 위해 글을 써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명성이 날로 높아져 갈 때 나탈랴를 짝사랑하던 프랑스 망명 귀족 단테스가 푸쉬킨을 자극하자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이 결투에서 그는 치명상을 입고 3일후 숨을 거두었는데 37년 1월 29일 그의 나이 불과 38세였습니다.
첫째, 그는 사교계를 너무 좋아했고 그 사교계는 그를 시기하여 단테스와 이간을 시키면서 결투를 하게 하였고 이로 인해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둘째, 그의 아내 나탈랴, 그녀의 경박한 처세와 사치와 허영은 천재 푸쉬킨의 생애에 운명적인 재앙덩이였습니다.
어느 때나 사람은 분수를 지켜야 하고 생활과 감정을 현명하게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운동선수들은 절제가 필수적입니다. 정말 최고가 되려는 선수는 술, 담배를 멀리합니다. 이성도 멀리합니다. 음식도 철저히 조절합니다. 감정조절도 잘 해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의 썩을 면류관을 위해서도 이처럼 절제하는 데 영원한 면류관을 얻도록 달려가는 성도들이 더 최선을 다하여 절제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도전합니다. 오늘 말씀에도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라고 권고합니다. 우리가 삼갈 줄 알 때 진보가 나타납니다. 많은 이들이 잘 성장하다가 감정의 절제를 잘 못해 성장이 멈추었습니다. 사단은 믿음의 진보를 보이는 사람을 보면 다가가서 시험합니다. 절제하기 어려운 것들을 가져다주고 주의력을 흩어 놓아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더이상 믿음의 진보를 보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절제를 해야 합니다.
잠언 4장 24절에서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말은 마음을 절제한다는 말입니다.
행동이 무너지는 것은 그 이전에 마음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1) 욕심을 절제해야 합니다.
2) 분노와 미움같은 감정을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는 쉽지 않습니다.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고 하나님앞에 옳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고 주님의 지배하심을 받으며 살아 마음을 절제하고, 감정을 절제하고 말을 절제하며 생활속에 절제의 열매가 넘쳐나서 중단하지 않고 계속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기를 바랍니다.
3. 이 일을 계속할 때 진보가 나타납니다. (16)
사람들의 믿음이 진보를 멈추는 이유는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고 중단하기 때문입니다. 이만큼 배웠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배우기를 멈추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만큼 열매를 맺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멈추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만큼 사랑하고 섬겼으면 충분하다고 섬김을 중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라고 권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에까지 자라야만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식과 사랑과 인격과 사역의 수준이 예수 그리스도만큼 자랐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충분한 사람입니다. 더 이상 진보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이르지 못했으면 계속 자라야 합니다. 계속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계속 말씀을 배우고 계속 기도에 힘쓰며 계속 섬김에 투자해야 합니다.
이번에 오신 전도사님은 신학교때 가장 친한 친구가 적극 추천한 분입니다. 그런데 전도사님을 통해 그 친구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친구 목사님이 지금 수 천 구절의 성구를 암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학교 1학년때부터 같이 제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때 경건의 훈련을 받으며 암송을 함께 시작했습니다. 60 구절을 암송하고 다음에 180구절을 암송했습니다. 매일 새로운 말씀을 한 구절씩 암송을 하고 이미 암송한 말씀을 날마다 복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모든 조각 시간을 암송에 투자해야 합니다. 화장실에서도 말씀카드를 가지고 가서는 중얼 중얼, 식당에서도 줄을 서서 순서가 올 때까지 중얼 중얼, 그러다보니 신학교에서도 유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180 구절 암송을 하고는 멈추었습니다. '이정도만 암송해도 충분하다. 60구절도 암송하지 못하는 신학생이 많은데 200여 구절을 암송하고 있지 않는가? 이 말씀만 복습하여 묵상을 해도 말씀에 붙잡혀 살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제 친구 목사는 암송을 계속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중단하지 않고 계속을 암송을 하였으니 20여년간 암송에 투자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수 천 구절을 술술 암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경건의 능력은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그 친구가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계속 진보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중단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생활하다가 중단하면 성장도 중단합니다. 말씀을 날마다 읽다가 중단하면 성장도 멈춥니다. 경건의 시간을 갖다가 중단하면 성장도 중단됩니다. 전도하다가 봉사하다가 중단하면 진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계속하십시오. 힘들어도 계속하십시오. 누가 비웃어도, 시비 걸어도 핍박이 몰려와도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이 오고, 귀찮게 여겨지고, 하기 싫어져도 조금만 더 참고 하자 하며 그 위기를 넘기면 큰 축복이 된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렇게 계속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자를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진보가 우리 자신에게 유익이 될 뿐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도 영혼에 큰 유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만을 위해서 진보를 이룬다면 힘들면 포기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여러분의 진보를 통하여 큰 축복을 받아 누린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여러분이 계속 진보하지 않고 멈춰버리면 주변의 영혼들이 망합니다. 구원에서 멀어집니다. 여러분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하고 세상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는 영원히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보를 나타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금년은 진보를 나타내는 해입니다. 경건에 있어서, 인격에 있어서, 능력에 있어서,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사역하는데 있어서 모든 면에 진보를 크게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합시다. "너를 보니 네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구나! 나도 예수믿으면 너처럼 변할 수 있니?" 물어오는 이들이 많아지게 확실히 변하는 역사가 우리에게서 크게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