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한 자들에게 권하는 말
딤전 6:17-21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20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21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딤전 6:17-21 / 부자들에게는 교만하지 말고 또 곧 없어질 돈을 의지하지 말라고 일러두시오.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즐겁게 해주시려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항상 풍족하게 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자랑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도록 가르쳐 주시오. 18) 착한 일에 돈을 쓰도록 가르쳐 주시오. 자기가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언제든지 다른 사람과 기쁘게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질 때 그들은 참된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9) 그러면 그들은 하늘에다가 참 보화를 쌓는 것이며 이것만이 영원을 대비하는 안전한 투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사람은 이 땅 위에서도 열매가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20) 오, 디모데여,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맡기신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시오. 지식을 자랑함으로써 오히려 자기의 무지를 드러내는 자들과 어리석은 논쟁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21) 그들은 대부분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자들,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그대에게 있기를 빕니다.
바울은 교만하지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며, 선을 행하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앞날의 자신을 위해 기초를 쌓고 참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부한 자들을 가르치라(17-19) 9-10절에 다루었던 ‘재물의 위험성’을 다시 언급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부요한 사람들에게 ‘재물이 지닌 위험성’과 ‘재물의 선한 사용’에 대한 권면을 재차 당부하기를 바랐습니다. 17절에 재물의 위험성에 대해 세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로 가진 재물로 인해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재물은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에 소유권이 항구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믿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18절은 재물 사용에 대한 권면입니다. 첫째, 재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둘째, 재물로 선한 사업을 많이 해야 합니다. 셋째, 재물을 나누어 주기 좋아하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장차 참된 생명을 취할 수 있도록 좋은 터를 쌓는 것입니다. 19절은 재물을 선행에 사용하고 그 대가로 영생을 얻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는 사람은 여전히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영생보다 가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영생을 위해 어떤 것이라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 당부와 끝인사(20-21)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이미 시작된 배도의 시대를 직시하며 ‘망령되다’, ‘헛된 말’, ‘거짓된 지식’같은 상당히 경직된 단어들을 열거합니다. 그만큼 진리로부터 벗어난 이론들과 진리를 대적하는 이론들이 이미 판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시작된 배도의 시대를 바라보고, 앞으로도 계속될 배도의 시대를 내다보면서 디모데에게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자신이 부탁한 것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전한 교훈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돌아갔던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적용: 지금까지 나눔의 삶을 실천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오늘 당신이 동참할 수 있는 나눔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은 자기의 올바른 이성과 양심을 닦기 위하여 애쓰는 것보다 몇 천 배나 재물을 얻고자 하는 일에 머리를 짠다. 그러나 우리의 참된 행복은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것이지 곁에 있는 재물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속에 무엇이 있어야 행복할까요?
< 설 교 >
열매신앙(2)
딤전 6:17-19 / 홍문수 목사
흔히 많은 사람들은 소유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소유에 그 인생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재물이나 명예, 권세 등을 소유하면 당연히 행복하고 존귀한 인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인생관, 이런 가치관에 동의하십니까?
이런 인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 당대 최고의 철학자에게 개인 교수를 받았습니다. 노래와 시에 능했습니다. 그는 복도 길이만 1킬로가 넘는 궁전에 살았습니다. 집안의 모든 벽은 상아와 자개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타던 말은 은장식이 달린 신발을 신겼습니다. 그가 외출할 때는 1천명의 군사들과 마차의 행렬이 수행했습니다. 그가 낚시를 할 때면 금으로 만든 바늘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많은 옷을 갖고 있어서 한번 입은 옷은 두 번 다시 입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의 이름은 ‘네로’입니다. 여러분, 그 인생이 그 모든 소유로 행복했습니까? 존귀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막연히 그랬으리라 추측하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음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로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만족이 없었습니다. 끝없는 사치와 방종으로 타락했고, 나중에는 정신 이상까지 되어 모친을 살해하고 로마 시가지에 불을 지르고 결국에는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예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 황제의 이야기는 사람의 소유 자체가 그 인생을 무조건 행복하고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님을 웅변으로 말해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지만 세속 사회 속에서 살다 보니까 우리도 모르게 ‘소유 지향적 가치관’에 물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소유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참 신앙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평안과 만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으로 인해 맺어지는 열매가 중요합니다. 특별히 소유를 통해서 맺어야 할 열매는 ‘선행의 열매’입니다. ‘선행의 열매’는 참 신앙의 증거요, 더 나아가 지속적인 축복과 영원한 영광을 위한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선행의 열매’에 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남은 생애 선행의 열매를 많이 맺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선행의 열매로 인해 우리의 인생에 더욱 복되고 존귀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그는 디모데가 교회 지도자로서 성도들에게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에 관해 가르치도록 권면합니다. 그 내용이 곧 소유를 가지고 선행의 열매를 맺으라는 겁니다. 본문 중심으로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봅니다.
[1] 소유의 한계 : 정함이 없는 것(사라지는 것)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성도들에게 건면할 말씀을 전해줍니다. “ ...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에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 ” 사람들은 흔히 소유가 많아지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본문에서는 주로 재물에 관해 언급하고 있지만, 인간의 소유 가운데는 재물 외에 명예, 권세, 지식, 재주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것들을 많이 소유한 사람들은 대개 신앙생활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의 소유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의 소유에는 다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세상의 재물을 가리켜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정함이 없는 재물’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불확실성, 불안정성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있다고 없고 없다가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을 어떻게 신뢰하고 살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소유는 어디까지나 고상한 목적을 위한 수단과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나 가치가 아닙니다.
특히 사람은 누구라도 언젠가 죽는 게 철칙인데, 소유는 어떤 것이라도 죽음과 더불어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앞에 딤전6:7에서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 ”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 들고 간다는 말입니다. 스페인 속담에는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를 정복했던 희대의 영웅이었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되었습니다.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고, 최근에는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는 설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요절했습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감지한 그는 총애하는 신하에게 부탁을 합니다. “내게 특별한 부탁이 하나 있다네.” 신하는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내가 이제 얼마나 살겠나? 내게 죽으면 특별한 관을 하나 만들어주게나.” 신하는 금이나 상아로 만든 관을 상상하며 가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을 들었습니다. “내가 입관될 관의 양 옆에 구멍을 뚫어 주게나. 그리고 그 구멍으로 내 손을 내밀어 보이도록 해 주게. 그래서 온 국민이 알렉산더 대왕도 역시 빈손으로 갔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면 좋겠네.”
여러분! 사람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것 지극히 단순한 진리 아닙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사람이 이 진리를 기억하면 자신의 실상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해 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떠집니다. 더 나아가 내세 천국을 소망하는 눈이 떠집니다. 그게 바로 신앙이죠. 그래서 바울은 17절(하)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 ...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 ”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믿을 게 하나 없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의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남은 생애를 위한 노후대책입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를 위한 사후대책이 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목자이신 그분께서 우리 마음에 신령한 기쁨과 평안을 주시고, 우리 일생을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 십자가 대속을 믿으면 죄 사함 받고 천국 백성 되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하게 됩니다.
[2] 소유의 목적 : 선행의 열매를 맺는 것
인간의 소유는 선한 목적을 위해 쓰기 위한 것입니다. 18절 보면,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곧 선행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소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소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대개 다음의 세 가지 유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① 불용(不用) :
어떤 사람들은 소유를 모으는 데만 관심이 있고 도무지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 권세, 지식, 재능 등 각종 소유를 안 쓰고 쌓아 두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25:14~30에서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주인이 멀리 떠나면서 세 명의 종에게 각각 달란트(당시 금속의 중량 단위 & 화폐 단위)를 맡깁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다섯 달란트 ... 오랜 후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합니다. 두 달란트 받았던 종,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은 부지런히 일해서 두 배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땅 속에 파묻었다가 그대로 꺼내왔습니다. 그때 주인이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을 호되게 책망합니다. “악하고 게으를 종아!” 사용하지 않은 것을 질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라고 주신 소유를 쓰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악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쓰지 않으면 결국은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6:19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언젠가 신문에서 황당하고 안타까운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부산에서 한 노숙자의 늘 베고 자던 베개가 터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서 돈 다발이 쏟아졌습니다. 무려 3천만 원이나 됐습니다. 비와 땀에 절어 냄새나고, 구겨지고, 뭉개진 돈 다발! 기자가 그 사연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숙자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30년 동안 구걸해서 한 푼 두 푼 모은 돈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 도저히 쓸 수 없었습니다.” 어이 없는 대답입니다. 그게 효성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소유를 쓰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악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② 오용(誤用) :
많은 사람들이 소유를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인간은 단지 맡은 자에 불과합니다. 빈손 들고 왔지만 세상에서 누리고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하나님 주신 것입니다. 혹자는 자신이 열심히 땀 흘려서 벌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건강도 주시고 일자리도 주시고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단지 기 소유를 위탁 받은 관리인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가리켜 ‘청지기’라는 표현을 씁니다.
‘청지기’는 소유자(Owner)가 아닙니다. 관리인(Manager)입니다. 하나님만이 소유자(Owner)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책망을 받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당연시합니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이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눅12:16 이하를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는 농경 사회입니다. 아마 그는 대농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인들을 거느리며 크게 농사를 지었습니다. 소출이 많아서 창고가 좁은 게 고민일 정도로 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창고를 확장하고 많은 소출을 저장한 후 즐거운 마음으로 독백을 합니다. 눅12:19 “ ...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 ” 소유가 많아졌으니 이제는 앞날을 염려하지 않고 놀고먹자는 겁니다. 세상 말로 이렇게 팔자가 좋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겁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판단은 어떻습니까? 눅12:20~21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그런 사람은 살아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영혼을 당장 부르시겠다는 겁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것 갖고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③ 선용(善用) :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인 곧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이 있는 사람은 삶 속에서 소유를 갖고 하나님의 뜻대로 선용합니다. 이것인 참 신앙의 증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선한 목적대로 소유를 사용하는 선행의 열매가 꼭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삭개오의 이야기를 다 아시죠? 그는 여리고의 세관장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 정부는 세금을 걷어 들이기 위해 유대인 세리를 고용했습니다. 세리들은 로마 정부에 붙어서 동족을 억압하고 세금을 많이 거두어 일부는 상납하고 나머지는 자기 몫으로 챙겼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겠죠. 특히 여리고는 교통의 요로요 무역의 중심지여서 세금이 엄청났을 겁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세무서장으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한편으로는 늘 곤고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그의 참 신앙이 어떤 증거로 나타났습니까? 눅19:8~19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 믿는 증거는 그의 행위 변화로 나타납니다. 토색한 것을 4배로 갚고, 자기 재산 절반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다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결단입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의 증거는 인격과 행위의 변화입니다. 특별히 자기 소유를 가지고 선행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딛2:1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목적이 바로 ‘선행의 열매를 맺는 백성’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행의 열매를 맺을 때 유의 사항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음의 두 가지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럴 때 선행의 열매가 아름다운 향기를 풍겨낼 수 있습니다.
i) 은밀한 선행 -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선행을 하려면 은밀하게 해야 된다고 말입니다. 마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자기 이름을 내고 나발을 불면 이미 자기 상을 다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밀하게 선행을 실천해야 됩니다.
개인적으로 지혜로운 방법으로 은밀성을 유지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통해서 하면 은밀성이 유지되고 효과적으로 선행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사역 헌금을 드린다든지, 어떤 좋은 일을 교회와 의논해서 하면 은밀히 하면서도 치우치지 않고 잘 할 수 있습니다.
ii) 대가 없는 선행 - 어떤 선행을 행하면 보답이 되돌아 올 수도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런 일이 생기는 것까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미리 계산을 하며 선행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급적 대가 없이 이뤄지는 선행을 지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봅시다. 눅14:12~14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무슨 말씀입니까? 가까운 사람들과 잔치하지 말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것은 사람 사는 사회에서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그런 것만 하지 말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을 많이 하라는 겁니다. 그게 신앙의 열매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겁니다.
[3] 선행의 열매를 맺는 자의 복 : 이생의 축복과 내세의 영광
선행의 열매를 맺는 것은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신앙의 증거로 당연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시고 보상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보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 역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선행의 열매를 많이 맺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장래에 좋은 터라는 것은 하늘의 상을 쌓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생명을 위한다는 것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는 아니고, 하늘의 상을 쌓음으로 더욱 영광스런 생명을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충성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은 이생에서 허락하시는 축복과 내생에서 허락하시는 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① 이생의 축복 :
선행의 열매를 맺다 보면 자기의 소유를 많이 쓰게 됩니다. 산술적으로는 손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몇 배로 넘치는 풍요를 경험한다고 말씀합니다. 막10:29~30을 보십시오. 막10:29~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백배의 보상을 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잠언에는 이런 말씀들이 나옵니다. 잠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잠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이웃을 구제하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반드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선행의 열매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적극 반영한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선행의 열매를 맺는 자에게는 후손들이 잘 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본인이 받는 축복도 귀하지만, 자손이 받는 축복은 더욱 귀합니다. 시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 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 도다”옛날 청교도들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보다 더 주신 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책임을 부여한다. 하나는 감사의 책임이고, 다른 하나는 나눔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면서 이웃을 돌보며 섬기는 사람을 실천하였습니다. 이런 청교도 신앙을 계승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복된 삶을 영위했습니다.
석유 왕 록펠러의 손자 데이빗 록펠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맨하튼 은행의 총재를 지낸 분입니다. 그는 어릴 때 돈을 관리하는 법을 부친으로부터 배웠다고 합니다. 그것은 물론 조부인 록펠러로부터 내려온 교훈입니다. 데이빗 록펠러의 아버지는 어린 그에게 일 주일에 25센트를 용돈으로 지급했습니다. 지금은 별 게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꼬마에게 결코 적지 않은 액수입니다. 그리고 용돈을 사용하는 지침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첫째, 10%는 하나님께 십일조 헌금으로 꼭 드려라. 둘째, 10%는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해라. 셋째, 10%는 반드시 선행에 사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친은 토요일마다 금전출납부를 보고 합당하게 사용했으면 5센트씩 보너스를 주고, 반대의 경우이면 5센트의 벌금을 거두어 갔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부요의 법칙을 배웠고 후손들에게도 동일한 방법으로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우리 옛말에 부자 3대 못 간다고 하지만,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부요의 법칙을 실천하면 천 대, 만 대도 내려갑니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도 이런 원리를 잘 실행해서 이 땅에 사는 동안 늘 하나님의 풍요를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② 내세의 영광 :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늘의 영광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결정됩니다. 마25:31 이하를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양과 염소 비유」가 나옵니다. 임금(예수님)이 오실 때(재림하실 때) 심판이 있을 겁니다. 그때 주님 앞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양과 염소가 줄을 지어 서게 됩니다. 주님은 양과 염소에게 행위를 갖고 따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닙니다. 신앙의 증거로서의 행위입니다. 염소가 심판받아 지옥에 가는 것은 불신앙 때문입니다. 양들이 천국에 가는 것은 그들의 신앙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이 참된 것이므로 행위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른 쪽에 있는 양들에게, 즉 성도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마25:34~36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때 성도들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마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 ”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는 유권 해석을 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 살면서 연약한 이웃들에게 선행을 한 모든 것을 주님은 기억하시고 상을 내리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112:9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하늘의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인격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유를 가지고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재물, 지위, 권세, 명예, 학식, 건강, 시간, 재능, ...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한 목적대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젠가 세상을 떠나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실 겁니다. 그때 과연 어떤 질문이 우리에게 주어질까요? “얼마까지 벌어 봤느냐?” “얼마나 높이 올라가 봤느냐?” “얼마나 유명해 봤느냐?” “얼마나 많이 배워 봤느냐?” 이런 게 아닙니다. 주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행을 했느냐를 물으실 겁니다. 부디 선행의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남은 생애가 더욱 복되고, 언젠가 하늘나라에 갈 때 잘 하였다 칭찬받고 영광을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생을 취한 사람들 Ⅱ
딤전 6:17-21 / 박종순 목사
소유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물질문명에 익숙한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삶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신문명에 익숙한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많이 가지면 행복하고 적게 가지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 높으면 행복하고 낮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 오래 살면 행복하고 빨리 죽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을 소유로 보기 때문입니다. 소유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대단한 잘못인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다이아몬드를 휴지로 쌌다고 해서 돌맹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돌맹이를 실크 보자기로 쌌다고 해서 보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씀대로 질그릇에 보배를 담으면 보배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천박하고 무가치한 사람이라도 보배이신 예수님을 그 안에 모시면 귀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17절을 보면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라고 했습니다. 17절은 세 가지를 교훈 합니다. 첫째는 부한 자들은 마음을 높이지 말라 고했습니다. 부자들 소유가 넉넉한 사람들은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권력 가진 사람도 겸손해야 합니다. 언젠가 권력이 떠나기 때문입니다. 부자도 겸손해야 합니다. 돈이 한정함이 없이 돌고 돌기 때문입니다. 인기인도 겸손해야 합니다. 인기란 기운처럼 떠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50년대와 60년대 한국 성악계를 대표하는 성악 교수가 있었습니다. 인기 정상을 달리며 뭇사람들의 인기를 모았던 음악교수였습니다. 1984년도 제가 미국 LA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 바로 그 여교수가 특별찬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20여년만에 그 분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때문에 놀랐습니다. 하나는 너무 많이 늙은 모습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노래가 힘이 없고 처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페라 무대며 독창회장을 휩쓸던 그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눈에 보이는 것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교훈 합니다.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1:5를 보면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이라고 했고 골로새서 3:1을 보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했고 3:2에서는“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다 맡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평안합니다. 걱정이 없습니다. 태국에서 선교하다 세상을 떠난 미국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천국 가는 환송식”으로 명명되었고 설교는 환송사 조사는 축사 조가는 축하의 노래로 바꿨습니다. 딸도 아들도 아버지 천당가신 걸 기뻐한다며 인사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회사는 각각 다르지만 두 사람이 50대 초반에 구조조정에 밀려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A라는 사람은 그동안 열심히 일하며 살아왔으니 잠깐 쉬라는 하나님의 뜻이라며 그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못했던 교회 봉사 성경공부 새벽기도에 열심을 다해 참석했습니다. 부부가 함께 나오고 함께 기도하고 신앙이 열배 이상 뜨거워졌습니다. B라는 사람은 자신을 내쫓은 회사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날이 갈수록 높아집니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역겹습니다. 자기를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젊은 녀석이 원수처럼 여겨집니다. 한을 풀 곳이 없습니다. 다니던 교회 내던지고 술 마시고 걸핏하면 집에 들어와 소리지르고 싸우고....부부사이가 나빠지고, 결국 신경성 울화병으로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입니다.
A라는 사람은 그만둔 회사 계열사에서 전문 경영인이 필요하다며 회사를 밭아 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회사 그만둔 지 2년 6개월 8일만에 회사 관리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B라는 사람은 지금도 약봉다리를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제가 B라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A라는 사람 이야길 하면 서 당신도 회복하고 재기할 기회가 있다고 했더니 “사람이 다르지요 여건이 다르지요”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둡시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소망
하나님이 해결하신다는 소망
하나님이 길을 여신다는 소망
하나님이 살리신다는 소망을 가집시다.
2. 나눠주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18절을 보면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대표하는 두 바다가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바다이고 하나는 사해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각종 물고기가 뛰놀고 있습니다만 사해는 생명이 살지 못합니다. 이유는 물이 빠져나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들어오는 물을 꿀꺽 꿀꺽 삼키기만 할 뿐 단 한 방울도 딴 데로 내보내질 못합니다. 이유는 바다 위치가 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입구와 출구를 따로 만드셨습니다. 음식물이 들어가면 배설되는 곳이 따로 있습니다. 코와 입으로 산소가 들어가면 각 기관으로 필요량의 산소를 공급하고 불필요한 가스는 딴 곳으로 배출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자동차의 원리도 비슷합니다. 경제 원리도 같습니다. 돈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유통되지 못하고 지하로 스며든다 던 지 자본이 해외 시장으로 빠져나가면 경제에 빨간 불이 켜지는 것입니다. 돈을 번 재벌들이 편하게 재투자할 수 있는 사회구조, 근로자들이 열심히 일한 만큼 대가를 지급 받는 근로조건, 이런 것들이 갖춰져야 경제 안정과 발전이 이룩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나눠준다”는 것은 조건 없이 나눠주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사도행전 초대교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42를 보면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고 44절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고 했고 45절을 보면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고 했습니다. 언뜻 보면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내용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전혀 같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는 두들기고 부수고 폭력으로 아니면 제도적 장치로 빼앗아 나눠 먹자는 것입니다. 강압과 강제수단이 동원됩니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호의호식하고 자기 것을 내 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누가 누구를 강요한 일이 없습니다. 협박도 한일이 없고 범을 만든 일도 없습니다. 성령 받고 기뻐서 자기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내놓고 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한 결과를 분배하는 것은 공산주의 이론입니다. 본문의 교훈으로 돌아갑시다. 왜 나눠줘야 합니까?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빈손으로 세상에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은혜로 이만큼 먹고 쓰고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나누며 사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남을 돕고 나누는 일을 외면하지 맙시다. 그리고 땀흘리지 않고 남의 것을 바라고 기대하지 맙시다.
3. 참된 생명을 취해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영생을 취하라”고 했고 19절에서는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0:28을 보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 영생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만 누리는 영원한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창세기 5장을 펴면 아담이 930세를 살고 죽었다(5:5)고 했고 에노스는 912세에 게난은 905세에 죽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950세에 죽었고(9:29)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었고(25:7-8)야곱은 147세에 애굽에서 죽었습니다.(49:33) 모세는 120세에 모압평지에 있는 느보산에서 죽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경우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가를 개인별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전혀 다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가 바울이 언제 죽었는가 마태, 마가, 누가가 언제 죽었는가 요한이 언제, 어디서 죽었는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신약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부활과 영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요 11:25-26)말씀하셨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고 영원히 사는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은 죽음의 문제보다는 생명을 크게 취급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죽음보다 생명의 중요성과 그 힘을 믿었기 때문에 바울도 베드로도 스데반도 야고보도 순교가 겁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숭실대학 최근 노대통령의 목소리를 연구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탄핵 소추 안이 부결된 이후 노대통령이 국무회의와 같은 공식 석상에서 말한 목소리를 분석한 결과 한 맺힌 목소리가 석여있다고 했습니다. 타고난 저음 호소력 있는 부드러운 음성보다는 폭발성이 있는 목소리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김선일씨의 경우 사망 전 그의 목소리는 거의 노인 목소리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어떤 마음, 어떤 신앙을 갖느냐에 따라 목소리도 달라집니다. 목소리뿐이겠습니까? 참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말투가 다릅니다. 얼굴표정이 다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사도행전 6장과 7장에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기사가 취급되고 있습니다. 전도하다 붙잡힌 스데반이 공회에 끌려가 수모를 당하고 공격을 받으며 심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15를 보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위협 공포 협박 죽음 앞에서 그가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생의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은 얼굴로 드러납니다. 제 아무리 성형을 하고 보톡스 주사를 맞았더라도 성내고 화내면 일그러집니다.
그러나 독에 맞아 죽어도 마음속에 영생이 있으면 천사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취합시다. 참된 생명을 소유합시다. 예수님을 내 심령 내안에 모십시다.
소망은 하나님께 두고 영생은 취하고 믿음은 지킵시다.
받는 것과 누리는 것
딤전 6:17-21 / 서정호 목사
사람들 가운데 배운 것에 비해 유식한 사람, 아는 것에 비해 많은 것을 다양하게 표현을 잘 하는 사람, 책을 읽거나 영화를 감상한 다음 멋지고 즐겁게 재미있고 실감나게 표현을 잘 하는 사람, 처한 환경이나 여건에 비해 너무나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 평범한 배우자를 통해서도 너무나 행복해하는 사람, 아름다운 자연을 접할 대 풍성한 감정을 감동하면서 표현하는 사람, 대수롭지 않은 밥상을 대할 때 푸짐하게 먹는 사람, 가진 것에 비해 풍요롭게 나누며 베풀며 즐기는 사람, 말씀을 듣고 받은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음을 감사하며 감동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받는 것보다 누리는 은혜를 가지고 삶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더욱더 나누고 베푸는 마음이 커지는 반면에 많은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움켜쥐고 확장하려는 마음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은 옛날보다도 경제적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풍요로워졌지만 점점 더 나누고 베푸는 마음은 줄어들고 모두가 소유의 노예로 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입니다. 이렇게 경쟁을 하듯이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이웃과 담을 쌓고 지냅니다. 더군다나 이웃을 같이 살아가야 할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모두가 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남을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남이 나를 밟고 일어선다고 하는 일종의 피해망상적인 생각이 이웃과의 간격을 더욱 깊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학교의 뒷면 게시판에는 "네가 잠자고 있는 사이에 네 친구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라고 게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경쟁은 친구와 친구사이의 우정의 벽도 허용하지 않으며 친구도 이웃이 아니라 오직 경쟁상대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받는 은혜가 있고 두 번째는 누리는 은혜가 있습니다. 받는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은혜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천국백성이 되는 것 그리고 성령으로 성화되는 것은 받는 것입니다. 또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하는 말씀처럼 구할 때 받는 것입니다. 병 고침을 받았다거나, 사업에 실패했다가 회복하여 성공했다는 것은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받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과는 달리 또 다른 은혜가 있는데 그것은 누리는 은혜입니다. 받은 은혜를 가지고 잘 사용하여 즐기는 은혜입니다.
요6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옵니다. 한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 배고픈 오천 명이 먹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그 오천 명 가운데 가장 기쁜 사람은 누구였겠습니까? 그 사람은 바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친 소년이었습니다. 그 작은 것, 한 사람의 식사 밖에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오천 명이 먹었으니 이 소년이야 말로 그 오천 명 가운데 가장 기쁘고, 감사하고, 즐거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작은 것 가지고 기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결국 일은 주님께서 하셨지만 바치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 사람이 바로 누리는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부장의 하인이 병이 들어 백부장은 안타까워하며 그 이웃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께 좇아왔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이 예수님께 하인의 병을 고쳐주기를 구하니 이웃사람들도 덩달아 백부장의 청을 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백부장은 그 동네에 회당을 지어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이웃사람들이 예수님께 간곡히 부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권력을 가지면 대접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은 그 권력을 가지고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칭찬받고, 인정받고, 높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백부장이 모두 다 높임을 받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만 특별히 주님의 칭찬과 사랑과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누리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 은혜, 받는 은혜와 누리는 은혜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귀하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누리는 은혜에 대해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주신 다음에는 누리게 하시는 은혜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 6:24“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
막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시는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풍랑이 센지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런데 더 화가 난 것은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신 후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바람아, 파도야 잔잔하라”고 말씀하시니 다 잔잔해 졌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있는 것은 받은 은혜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분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인도자이십니다. 그분과 함께 있다는 것은 받은 은혜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이 함께 계심에도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받는 은혜는 있었지만 누리는 은혜는 없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 일 없을 거야’ 주님이 함께 계시면 걱정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주님께 의지하기만 하면, 맡기기만 하면, 내 힘과 노력을 의지하지 않아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만 하면, 두려워 할 필요도 속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들으시자마자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누리는 은혜가 없으니, 못 받았으니 두려워하고,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아낀다고 아무 것도 쓰지 않으면 결국 모두 다 죽을 수 있습니다. 없다고 하여 아무 것도 안하고 살면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이기에 있는 것을 가지고 서로 활용하여 돕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받는 은혜는 적지만 있는 것을 가지고 누리면서 잘 살아야 합니다. 받는 은혜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리는 은혜는 더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받는 은혜는 있지만 누리는 은혜를 받지 못하면 이것은 엄청난 불행입니다.
전 6:2“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많이 벌었는데 누리는 은혜는 받지 못하여 그만 죽으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가끔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좋은 말입니까? 억울하다는 뜻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려보지 못하면 이것처럼 더 억울한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누리는 은혜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받는 은혜도 중요하지만 누리는 은혜도 받아야 합니다.
인류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의 그 많은 것들을 모두 자신의 것을 삼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받는 은혜는 있었지만 누리는 은혜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죄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 좋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땀을 흘리고 고생하고 죽음을 바라보고 사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리는 은혜를 받지 못하니 있는 것 다 빼앗기고 뿐만 아니라 그 가문이 부끄러운 가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리는 은혜를 받았는가, 못 받았는가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알 수 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어려움이 닥쳐올 때에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성도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리는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려운 일 당할 때 원망하고, 불평하고 섭섭하여 주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누리는 은혜는 어려운 일 당 할때 원망이나 불평하지 말고 섭섭해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은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받는 은혜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은혜를 얼마만큼 받았든지 그 은혜를 가지고 누릴 줄 아는 은혜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얘기합니다.
누리는 은혜를 받으려면 누리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참 신앙인은 날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성도이며 누리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성도가 참 성도인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좋은 일이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17절에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명령을 합니다. 하나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가진 것이나 갖고 싶은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받는 것은 복입니다. 우리의 실생활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없으면 얼마나 속상하고 힘이 듭니까? 재물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대로 하루하루 살면서 내일 또 주실 것을 기대하며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희소가치가 있어서 내가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은 조금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누가 많이 가지면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은 조금밖에 가질 수 없기에 빈부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빈부의 차가 생기면 상대적인 빈곤감에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싸움이 됩니다. 없어서가 아니라 더 많이 못 가지는 것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전쟁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물에 소망을 두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다 보니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는 잘 살수 없습니다.
또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할 것은 재물은 우리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려운 이유는 미래가 확실치 않아서입니다. 그러나 재물이 많다고 해서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재물을 많이 쌓아 둔다고 해서 우리의 미래가 잘 될 것이라고 하면 오산입니다.
또 하나의 두려움은 죽음입니다. 돈이 많다고 안 죽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모두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다고 두려움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돈이 많으면 죽음의 위험이 훨씬 더 많습니다. 돈이 두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실패의 두려움도 있습니다. 돈이 있다고 실패하지 않습니까? 실패합니다. 돈이 있다고 가정을 살 수 있습니까? 돈이 있어서 침대는 살지는 몰라도 잠을 사지 못합니다. 돈 가지고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병은 또 어떻습니까? 돈으로 모든 병이 해결됩니까? 어느 정도는 해결될지는 모르지만 돈으로 해결될 수 없는 병이 더 많습니다. 돈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은 돈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장 결정적이고, 위급한 상황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자녀들을 키우면서 느끼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있다고 해서 자녀들이 바르게 되고, 돈이 없어서 잘못되지는 않습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소망을 두어야 할 것은 누리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에게 은혜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받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첫째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쁨인지 모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할 뿐 아니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이유는 누리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계명대로 사는 모든 이들에게 누리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직분도 받았습니다. 남이 가지지 못한 직분을 받은 것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교회직분은 물론 가정에서의 직분, 자녀를 낳으면 부모의 직분, 결혼을 하면 남편과 아내의 직분이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입니다. 이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엉뚱한 곳에 가서 행복 찾으려 하지 말고 내게 주어진 직분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교회, 내 자녀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누리는 은혜를 받으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고부간의 갈등 왜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그저 시집안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아들에게 아내를 주셔서 며느리를 얻게 하시니 감사합니다’‘하나님 제게 또 한 분의 어머니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받는 은혜보다 누리는 은혜가 더 귀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얼마를 받았든지 이것을 가지고 귀하게 사용하고 높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참으로 클 줄 믿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누며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딤전 6:18-19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손님대접하기를 즐겨 하다가 하나님의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딱 한번 손님을 대접해서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손님 대접하기를 즐겨 하다 보니 하나님의 천사를 대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소돔과 고모라 성이 유황불로 멸망당한다는 소식, 자신의 조카 롯과 그의 자녀들에게 좋은 삼촌이 되었습니다. 남을 대접하고 살아가는 것이 손해인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복이 예비 되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을 받으려면 남을 대접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도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대접하지 않으니 복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이 위대한 것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한 번도 원수 갚을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해하고 손해를 끼칠 때 원수 갚으려고 하면 그것은 자신에게 독입니다.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복 주실 줄 믿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섬기는 자가 되면서 살아갈 때에 그는 누리는 복도 얻게 됩니다.
사랑에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이 나를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도 나누면 커지게 됩니다.
세계적인 부호 록펠러는 삼십대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사십대에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인 쉰셋에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쿠르트 한 병과 비스킷 두개로만 끼니를 채울 수밖에 없는 중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두 가지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돈 버는 일과 주일학교 교사를 충실히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병을 주시다니.. 너무 억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제부터는 돈 버는 일보다는 돈 쓰는 일에 관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날로부터 돈 쓰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지은 교회가 있고, 그가 지은 많은 건물들, 그리고 수많은 자선단체들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살게 하셨는지 그는 98세까지 장수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주는 자에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누리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복을 주시고 높이시는 것입니다.
돈은 복이 아니다
딤전 6:17-19 / 임덕순 목사
여러분은 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도가 바르게 살기위해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돈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갖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돈만큼 우리 생활과 밀접한 것도 없습니다. 한 순간도 돈이 없이는 살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돈에 관한 바른 이해와 철학이 필요합니다. 돈?많아도 인생에 실패하고 돈이 적어도 인생에 실패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돈에 대한 바른 신학과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은 돈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앞으로 몇 주간, 돈에 관한 철학을 정립하는 기회를 갖기를 원합니다.
기독교인들의 돈에 대한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나는 물질을 터부시하는 유교적인 물질관이며, 다른 하나는 물질을 축복으로 여기는 기복적인 물질관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물질관은 기독교의 물질관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기독교의 물질관이 기복적 물질관과는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물질을 터부시하는 유교적 물질관과도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질을 터부시하는 유교적인 물질관이 기독교의 물질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기독교의 물질관은 기복적인 물질관도 아니고, 돈을 터부시하는 물질관도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제 돈에 대한 바른 신학과 자세를 정립하기 위하여 기독교적인 물질관을 성경에서 찾아 논의해 봅시다. 이 기회에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돈에 대한 선입견을 잊어버리고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배우고 바른 물질관을 갖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돈은 복이 아니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문제는 “돈은 복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물질을 복으로 가르치면서 예수를 잘 믿으면 물질의 복을 받게 된다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물론 보편적으로 예수를 잘 믿으면 물질적으로 안정되고 넉넉해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예수를 잘 믿어도 가난해 질 수 있고, 예수를 안 믿고도 부자가 될 수 있는데,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부자가 되기가 훨씬 쉽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잘 믿어도 가난해질 수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부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질이 복인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그것을 신자에게 줄 수 없거나, 하나님은 분명 계신데 물질이 복이 아니기 때문에 주시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믿고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도 부인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그가 계신 사실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히11:6)라고 성경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도 가난한 사람이 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도 부자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물질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궁극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마6:19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일은 너희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 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려고 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바로 땅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이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일이 우리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물질을 복이라고 생각하고 물질을 땅에 쌓아두는 일, 즉 부자가 되는 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사람들은 물질이 우리를 잘살게 한다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흔히 돈이 많은 사람을 “잘사는 사람” 이라고 하고, 돈이 없는 사람을 “못 사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그를 잘사는 사람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돈이 많으면서도 잘못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찬가지로 돈이 없는 사람을 못사는 사람이라고 불러서도 안 됩니다. 돈이 없는 것은 못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난한 것입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베스트셀러 책이 있습니다. 물론 부자가 되는 데에도 방법이 있고 부자가 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배우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책이 주는 부정적 영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자가 된다는 것이 곧 인생의 성공이라고 단정 짓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자 아빠는 유능한 아빠이고, 가난한 아빠는 무능한 아빠라고 세뇌시킨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절대로 잘사는 사람이 되는 길을 배울 수가 없고, 행복하고 만족하게 사는 삶을 배울 수도 없습니다. 다만 돈을 빨리 버는 법을 배울 수 있을 뿐입니다.
물질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지고 살려면, 우선 돈이 많은 사람을 잘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또 돈 없는 사람을 못사는 사람이라고 하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부자이고, 돈이 없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일 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도 바르게 잘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돈이 많은 사람 중에도 못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을 먼저 생각 속에 새겨야 합니다.
2. 세상은 채워줄 수 없다.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을 존귀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는 내 딸들을 사랑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내 딸들은 내게 아주 귀한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청년들 중에 하나에 불과하지만, 애비인 나에게는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아주 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아주 귀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8:37) 고도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천하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하보다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가난하든 부하든,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세상의 지위가 높든 낮든 간에, 모두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한 사람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야 말로 기독교의 중요한 인간관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진리가 들어있는데, 우리가 천하보다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세상에서는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우리는 천하보다 더 크기 때문에, 천하를 얻어도 그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는 진리가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행복하다는 말을 만족하다는 말로 바꾸어 쓸 수가 있습니다. 만족한 것이 곧 행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 23편에서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부족함이 없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온 천하를 다 얻어서 그것으로 내 삶의 잔을 채워보려고 한다면, 그 잔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천하보다 크게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작고 더 낮은 천하의 그 어떤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 것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사람은 자기가 바라던 것, 욕심내던 것을 얻으면 처음에는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조금만 지나면 그저 그런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만족은 며칠 못갑니다. 이 만족은 절대로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나이 사십이 넘도록 남의 집 셋방을 전전하던 사람이, 30평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내 집을 갖게 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 좋아서 이사가기 며칠 전부터 잠이 안 옵니다. 손꼽아 기다리던 이삿날이 되어 짐을 챙기고 웬만한 짐은 다 버리고 새 살림 장만해서 이사를 갔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식구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더 행복합니다.
이웃, 친척들이 집들이에 와서 집 좋다고 하니까 더 좋습니다. 마치 천국에서 사는 기분을 느낍니다. 집도 좋고 주변 환경도 좋고 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게 며칠이나 가나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이 사는 더 큰집과 비교가 되면서, 그 집에 불편과 불만족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새집이 주는 만족은 결국 그것으로 끝입니다. 단 며칠간입니다.
돈이 주는 만족도 그와 같습니다.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만족케 하는 힘과 능력이 돈에 있습니다. 돈이 지갑에 두둑하면 허리가 펴지고 발걸음이 당당해지지만 지갑에 돈이 없으면 허리가 구부러지고 다리에도 힘이 없습니다. 돈을 어디에 쓰고 누구에게 내보이지 않아도 돈을 지닌 것만으로도 힘이 납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돈만큼 좋은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돈 하는 것이고, 그것을 땅에다 쌓아서 부자가 되려고 그렇게 애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처음에 이사 간 날 밤에는 너무 좋고 행복해서 잠을 못 잤습니다. 그러나 그 만족감과 행복감이 도대체 며칠이나 갔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확히 하루였습니다. 새집으로 이사 간 것이 너무 좋고 행복해서 이틀 사흘씩이나 잠을 못 잤다면 사람들은 지나치다고 생각할 것이고, 일주일간 잠을 못 잤다면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천하에 그 어떤 것을 얻을지라도 그 만족은 그것의 단점을 알기 전까지 단 며칠동안 행복하고 만족한 것이지, 끝내 만족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자가 된 단 며칠동안만 행복하고 만족한 것뿐입니다. 그 다음에는 더 목이 마르고 더 큰 허무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윗왕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황금기에 통치자가 된 솔로몬은 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좋은 것을 거의 다 누려본 사람입니다. 부귀와 영화와 쾌락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듯이 자연스럽게 솔로몬에게 흘러들어왔습니다. 그는 재물이 넘쳤고, 처첩이 가득했으며, 온갖 좋고 아름다운 것들을 먹고 마시며 누렸습니다. 공부도 원 없이 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런 삶으로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전도서에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던지 그리로 계속하여 흐르느니라.”(전1:2-7)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오듯이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와 쾌락이 솔로몬에게로 집중되었는데, 솔로몬은 왜 만족할 수가 없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천하의 그 어떤 것들보다 크고 귀하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는 반할 수 없는 것처럼, 자기가 가진 것보다 못한 것을 얻었다고 만족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하를 다 얻은 솔로몬이었지만 천하보다 큰 솔로몬의 가슴은 그것들로 채워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만족과 불행의 원인이 소유가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일단 소유가 넉넉해지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땅에 보물을 쌓아두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일은 너희를 위하는 일이 아니다.”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질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너희의 삶의 잔을 채워줄 수 있는 보물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3. 물질은 일종의 은사이다.
물질은 복이 아닙니다. 물질은 복이 아니라 오히려 은사에 가깝습니다.
하나님께 물질을 받아서 부자가 된 사람은 물질의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물질의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참 복은 구원입니다. 복은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다 받지만, 은사는 각 사람에게 맞도록 골고루 나눠주십니다. 예를 들어 방언이나 신유의 능력은 복이 아니라 은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고 해서 누구나 다 방언을 하거나 신유의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는 지혜를 맡기시고, 누구에게는 물질을 맡기시고, 누구에게는 솜씨를 맡기시고, 누구에게는 특별한 사랑의 능력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물질은 재능과 영적 능력처럼 은사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은사는 주님의 일을 위하여 쓰라고 주신 도구요 연장입니다.
물질도 주를 위하여 쓰라고 주신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물질을 풍성하게 주신 것은, 이것이 복이니까 너 혼자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바로 사용하라고 잠시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는 “물질의 복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물질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맞습니다. 은사는 쓰면 늘고, 쓰지 않으면 소멸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바로 사용하지 않으면 물질의 은사 역시 소멸되고 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약 5:1-3에『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은사로 주신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쌓아두기만 하면, 아껴두었던 돈이 좀먹고 녹슬듯,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소멸되게 하셔서 그들이 어느 순간에 통곡하게 될 것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물질의 은사도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됩니다.
하나님께 물질의 은사를 받지 않았는데도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이 부어지는 통로가 꼭 하나님만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물질은 하나님으로부터 올수도 있지만, 정 반대로 사단과 마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올수 있습니다. 돈 많은 부자라고 해서 하나님의뜻대로 살아서 물질의 은사를 받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사단이 시키는 대로 죄를 지은 결과로 돈을 쉽게 버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물질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판단해야 합니다. 억만금을 준다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면 복이 아니라 화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돈을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만 벌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식과 법대로 벌어야만 하나님이 주시는 돈이 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번 돈은 하나님이 맡기신 돈이 아니며, 결국은 자신과 주변을 망치는 화가 됩니다.
우리 속담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처럼 번다.” 는 말이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라면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한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후자의 뜻으로 사용하는 예가 많습니다. 어떻게 벌었더라도 잘만 쓰면 된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식과 법대로 벌었다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 돈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돈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바르게 쓰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에 대하여서도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듯,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듯, 물질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그 돈을 지불하는 청지기 즉, 회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그 일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부자처럼, 내가 가진 재물이 다 내 것인 양,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창고를 크게 짓고 쌓아두기에 바쁩니다.
예수님을 믿는 부자 중에도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주신 물질을 아무렇게나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들은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 돈 때문에 죄를 더 짓게 되고, 그 돈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두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돈은 복이 아니라 화이며 저주입니다. 돈이면 무조건 축복인줄 아는 어리석음에서 어서 깨어납시다. 돈은 내것이니 내맘대로 써도 된다는 생각에서 깨어납시다.
4. 성도는 가난할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억만금이 생긴다 해도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방법이 아니고 죄 된 방법이라면, 단호하고 당당하게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 푼을 벌어도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벌겠다는 고집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집하다보면, 가난해 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현실은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불법을 해야 돈이 모이게 되어 있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돈을 벌려면 신앙은 포기해야 한다, 믿음으로 살면 가난할 수밖에 없다, 돈을 가질 것이냐 신앙을 가질 것이냐 양자택일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돈은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난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물질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고집하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는 생각입니다. 학 2:8에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하셨고, 사 60:5-9에 보면 “네가 일어나 빛을 비취기만 하면,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다시스의 배들이..그 은금을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리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고, 세계경제를 주관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이며, 당신의 뜻을 준행하는 백성들에게 바로 쓰도록 물질을 주시다는 약속입니다.
6.25 직후 혼란과 가난에 찌들리던 시절에 호열자라고 이름붙여진 장티푸스가 전국을 휩쓸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구 약령시장에서 한약방을 하던 정규만 이라는 장로님이 대구 서현교회를 섬기고 있었는데, 너무 가난하여 마음대로 교회를 봉사하지 못하는 것을 마음아파아면서 새성전을 짓기 위해서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개인기도를 하는데 호열자에 이런 약을 처방하면 어떨까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집에 돌아오자 호열자 약을 사러 온 사람이 있어서 새벽에 얻은 아이디어대로 약을 지어 주었더니 그 약을 먹고 단번에 나았다는 소식이 퍼지고 전국으로 확산되어서 대구역의 인파보다 정규만장로님 약방 앞에 인파가 더 많았답니다. 너무나 바빠 돈을 세지도 못하고 사과궤짝에 그냥 넣었는데, 장로님이 가만히 생각하니 하나님께서 이 돈을 부어주시는 이유가 새 성전 건축하라는 뜻이구나 하는 생각이 나서 목사님께 돈이 가득담긴 사과궤짝 24개를 드리면서 가장 훌륭한 성전을 지어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때 지은 대구 서현교회 성전은 당시 동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대리석 예배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돈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돈은 복이 아닙니다. 돈이 복이 아니라고 해서 돈이 악이거나 돈 자체가 화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돈은 복도 아니고 화도 아니라 그냥 돈일뿐입니다. 돈은 정직하게 벌고 하나님의 뜻대로 쓰면 복이 되고 선이 됩니다. 그러나 정직하지 않게 벌고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못하면 악이 되고 화가 됩니다. 복과 화, 악과 선은 돈에 달린 것이 아니라 돈을 관리하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달렸습니다. 성경은 돈이 복이라고도 하지 않으셨고, 돈이 화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돈은 다만, 우리의 생활에 편리를 위해서 주신 도구요 복된 일을 하라고 맡기신 은사입니다. 물질에 매이지 말고, 물질을 모으기 위해서 죄를 짓지 말고, 물질이 없어도 당당하게 바로 사는 성도가 됩시다. 그리고 물질이 있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의를 행하는 성도가 됩시다. 그것이 제대로 잘 사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