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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30424 / 여호와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제물 / 레 22:17-33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3.05.09|조회수758 목록 댓글 0

여호와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제물

레 22:17-33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 중에 거류하는 자가 서원제물이나 자원제물로 번제와 더불어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19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20 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너희가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21 만일 누구든지 서원한 것을 갚으려 하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 하여 소나 양으로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

22 너희는 눈 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습진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이런 것들은 제단 위에 화제물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

23 소나 양의 지체가 더하거나 덜하거나 한 것은 너희가 자원제물로는 쓰려니와 서원제물로 드리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하리라

24 너희는 고환이 상하였거나 치었거나 터졌거나 베임을 당한 것은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너희의 땅에서는 이런 일을 행하지도 말지며

25 너희는 외국인에게서도 이런 것을 받아 너희의 하나님의 음식으로 드리지 말라 이는 결점이 있고 흠이 있는 것인즉 너희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이레 동안 그것의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여덟째 날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기쁘게 받으심이 되리라

28 암소나 암양을 막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지니라

29 너희가 여호와께 감사제물을 드리려거든 너희가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드릴지며

30 그 제물은 그 날에 먹고 이튿날까지 두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31 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32 너희는 내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33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22:17-33 / [흠 없는 것을 제물로 바쳐라]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사람이든지 이스라엘에 몸붙여 사는 나그네든지간에 이미 드리겠다고 약속한 것을 여호와께 바치거나 즐거운 마음으로 여호와께 어떤 예물을 바치되 번제를 올리고자 할 경우에는 19)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소나 양이나 염소 중에서 흠이 없는 수컷을 끌고 와 바쳐야 한다. 20) 몸뚱어리에 자그마한 흠집이라도 나 있는 것은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21) 또 누구든지 자기가 이미 바치겠노라고 약속한 것을 나 여호와에게 드리려거나 또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즐거운 마음으로 제물을 드리되, 소나 양으로 화목제물을 바치려면 아무런 흠이 없는 것을 바쳐야 한다. 22) 다시 말하지만 눈이 먼 것이나 뼈가 부러진 것이나 몸뚱어리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이나 몸에 옴이 생긴 것이나 종기가 생긴 것이나 부스럼이 생긴 것을 나 여호와에게 바쳐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을 제단 위에서 불살라 나 여호와에게 바치지 말아라. 23) 소나 양이나 염소 가운데에서 기형인 것이나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은 속에서 우러나와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는 자원제물로 나 여호와에게 드려도 좋으나 이미 바치겠다고 약속하여 드리는 서원제물로 드려서는 안 된다. 나는 그런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 24) 또한 불알이 터졌거나 으스러졌거나 떨어져 나간 가축은 나 여호와에게 바치지 말아라. 너희가 사는 땅에서 이런 것을 바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25) 이런 가축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받아서 너희 하나님인 내가 먹을 양식으로 바쳐서는 안 된다. 이런 가축은 너희가 내게 바친다해도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26)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셨다. 27) `송아지나 양 새끼나 염소 새끼가 태어나거든 이레 동안은 어미 품에 그냥 두어라. 여드레째 되는 날부터는 나 여호와께 살라 바치는 제물로 드려도 된다. 내가 그 제물을 받아들이리라. 28) 소나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잡아바칠 때에는 그 새끼와 어미를 한날에 잡아서는 안 된다. 29) 너희가 나 여호와에게 감사제물을 갖다 바칠 때에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여러 조건을 다 갖추어 바쳐라. 30) 제물은 바친 바로 그날 먹어 치워야 하며 이튿날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나는 여호와이다. 31) [마무리] 내가 너희에게 지금까지 명령한 것을 잘 지켜 그대로 실천하도록 하여라. 나는 여호와이다. 32) 너희는 나의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아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거룩히 여김을 받아 마땅한 여호와이다. 나는 너희를 거룩히 가려 뽑고 33)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이다.'

 

분문은 여호와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의 조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17-25) 여호와께서는 서원제물, 자원제물, 화목제물, 감사제물을 드릴 때는 반드시 흠이 없는 제물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리하여야 여호와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명확하게 흠 있는 제물과 흠이 없는 제물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구체적으로 열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제물을 드릴 때 스스로 구별하고 확인하여 흠 없는 것을 들고 올라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특히 22-25절의 흠 있는 제물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인간의 아까워하는 본성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이에서 눈속임으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여지가 많음을 아시고 미리 차단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지니라(26-30) 먼저 짐승의 새끼를 제물로 삼으면 최소한 생후 8일 이상이 되어야 가능하며 어미나 새끼를 함께 드릴 때 같은 날에 둘 다 잡지는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정신이 깊이 반영된 규례입니다. 당시 이방 족속들 사이에는 주술적인 의도나 식도락적인 취미로 어미와 새끼를 함께 잡거나(신 22:6, 7), 그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는(출 23:19) 잔인한 풍속이 성행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동물을 제물로 드리는 일까지 하나님의 긍휼이 깊이 깃들어 있습니다. 감사 제물로 드린 제물은 그날에 먹고 이튿날까지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31-33) 이렇게 하나님께서 백성이 지켜야 할 규례를 제정하신 목적은 결코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언약의 백성이 그것을 지켜 행함으로써 당신과 지속적인 교제를 가지고, 그 결과로써 영원한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즉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구원시키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바로 그들을 통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여호와는 구속의 주 자격으로서 구속된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룩함'의 규례를 명하셨던 것입니다.

 

적용: 여호와께서 기쁘게 받으실 흠 없는 제물을 준비하는 참 예배자의 마음으로 주일을 맞이하시나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참 예배자로 살고 있나요?

(롬 12:8; 고후 9:10)

 

세상에서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제사 자체보다는 성도들의 바른 삶에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온전함과 자비로운 마음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온전한 산 제사를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

레위기 22:17~33 / 김종호 목사

레위기 22장은 성물(거룩한 음식)을 먹는 규정과 제물을 드리는 규정이다.

어제 성물은 제사장과 그 가족만이 먹을 수 있지만 거룩한 제사장 이라고 해도 성물을 먹을 수 없는 경우를 보았고 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물을 먹을 수 있는 경우를 보았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을 드리는 규정에 대한 말씀이다.

동일하게 예배를 드리고 동일하게 예물을 드리지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이 있고 또 열납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말씀을 보면서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가 생각이 난다.

어떤 예물은 여호와 하나님께 열납이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예물을 드리지도 말아야하고 열납되지 않는가? 본문에 해답이 보인다.

늘 그랬던 것처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17)

아론과 그 아들들과 온 백성에게 말하라고 명령하신다.(18)

무엇을 명령하라는 말씀인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 제물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예배 안내를 하다보면 눈에 참 거슬리는 일이 참으로 많이 있다. 정말 가르치고 싶다.

예배 시간에 늦게 오는 것은 기본이요, 음료수 잔을 들고 성전에 들어 오고, 예배 중에도 신문 보고,

스마트 폰으로 카카오톡 문자 하고, 반바지에 슬리퍼에 노출이 심한 옷에 .........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편의상 먼저 어떤 경우에 예물을 드리지도 말아야 하며 드려도 열납되지 않는가?

1. 흠이 있는 것은 드리지도 말 것이요 열납되지 못할 것이라 하신다.(20)

2. 눈먼 것, 상한 것, 다리가 잘린 것, 종기가 있는 것, 괴혈병 있는 것,

비루먹은 것(말, 나귀 따위의 짐승이 피부가 헐어서 털이 빠지는 병에 걸린 것)(22)

3. 황소나 어린양의 부분적으로 너무 크거나 작은 것(23)

안드려도 되지만 스스로 자원해서 드리는 낙헌제물로는 드려도 되나 서원한 것을 갚기 위한 예물로는 드릴 수가 없다.(23)

4. 고환이 상했거나 치었거나 터졌거나 잘린 짐승은 여호와께 드릴 수 없다.(24)

5. 외국 사람에게서 동물을 받아서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25)

종합하면 한 마디로 흠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고 하나님께 드려서도 안 된다는 말씀이다. 아멘.

그러면 최고의 하나님께 최상의 예물을 드려야 하는데 어떤 것을 드려야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이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열납 되도록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해야지 열납이 되는가?

 

1. 서원제나 낙헌제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18)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려야 한다.(19)

황소를 드리면 받고 비둘기를 드리면 안 받는 다는 것이 아니시다.

비싼 것은 받으시고 싸구려는 안 받는 다는 의미가 아니다.

큰 것은 받고 작은 것은 안받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흠이 없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의무감으로 억지로 마지 못해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순전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호와를 기뻐하는 마음으로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물과 받지 않으시는 예물이 있듯이 나의 예배를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아멘.

여호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물은 첫째는 흠 없는 온전한 예물이였다면

 

2. 생후 8일 이상의 것을 드려야 한다.(27)

황소나 양이나 염소가 태어나면 7일 동안은 어미와 함께 있게 해야 한다.(27)

흠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해서 태어 나자 말자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짐승의 어미도 생각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의 배려가 보인다.

 

3.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아 예물로 드리지 말라 하신다.(28)

하나님은 동물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4. 감사 제물은 당일에 먹으라 하신다.(30)

감사 예물은 이튼날 까지 두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5. 가장 중요한 것 나의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31)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제사는 흠 없는 제물을 드리는 제사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드리는 예배만이 열납이 된다.

우리의 예배에는 가장 흠 없고 존귀하신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예배의 제물이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배 하는 것은 내가 이 땅에서 행해야 하는 부분이다. 아멘.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고 통회하는 마음이라 하셨는지 모른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허울뿐인 제사보다 참된 순종을 원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흠없고 온전한 예배과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된다.(32) 아멘.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 하셨는데

여호와께 열납 되는 예물과 예배를 드리자. 아멘.

 

하나님 아버지!

지난 한 달 동안도 감사하며 살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이 받으시는 예배와 받지 않으시는 예배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비싼 것, 큰 것이 아니고, 의무감이나 인색함이 아니라

흠 없는 온전한 것, 순전한 마음과 참된 순종으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올바르게 제사 드리는 법에 대해서 배웠으니

예배때 마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 되게 하옵시고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는 자 되게 하옵소서.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흠 없는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 되게 하소서

 

 

레위기 22:17–33

시작 기도

주님 오늘도 주의 은혜 가운데 잠에서 깨워 주시고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매일의 삶이 주의 은혜로 인함임을 고백하며 오늘도 그 은혜로 살아갑니다.

연약한 인생을 돌보시고 죄에서 건지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손길을 경험합니다.

그 손길을 거부하게 만드는 죄와 부정함의 모습을 주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주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어 주시고 주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자로 서게 하옵소서.

주의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치시고 생명의 길로 걸어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함께 하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본문 해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서원제나 자원제로 예물을 드릴 때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리라고 명령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거주하는 이방인들도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셨는데 이는 열방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물에 흠이 있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함을 말씀하시면서 눈먼 것이나 상처가 나고 베이거나 종기나 습진, 비루먹은(발진성 피부병) 것들을 드리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또한 소나 양의 지체가 지나치게 크거나 발육이 부진한 것들은 자원 제물로는 사용할 수 있으나 서원 제물로는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제물들의 고환에 문제가 있는 것은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방의 땅에서는 제물의 고환을 상하게 하는 일을 할지라도 이스라엘 가운데에서는 하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또한 외국인에게 이런 것을 받아서 하나님의 제물로 드리지 말라고 명령하시면서 결점이나 흠이 있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이 될 수 없음을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이어서 수소난 양, 염소의 새끼가 나면 7일 동안 어미와 같이 있게 하셨는데 이는 7일 동안은 새끼가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생명으로 여겨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할례가 난지 8일 만에 행하여 하나님의 소유임을 고백하는 것처럼 동물들도 난지 8일째부터 드리게 함으로써 제물로 드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28절에서 암소의 단어는 실제로는 수소를 의미하며 암양도 성별 구분이 없는 양을 의미한다.

이런 표현은 새끼와 함께 성체가 된 가축을 같이 잡지 말라는 표현을 위해 번역한 것이며 한 날에 잡지 말라는 표현은 씨의 번성의 질서를 훼손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그 제물을 먹을 때는 다음날까지 두지 말라고 명령하시는데 이는 주변의 사람들과 나눠 먹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개인적인 욕심으로 보관하지 말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할 것을 명령하시면서 말씀을 거역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말씀하시면서 언약 백성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명령하신다.

 

나의 묵상

하나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대해서 온전한 것을 드리도록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재물이 필요한 분이 아니시고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런데 그 드림에 있어 인색함과 억지, 온전하지 못한 것을 드림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가 되며 형식적이며 마음에도 없는 가식적인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는 마음과 그 마음에 따른 행위를 원하신다.

그것은 예물을 드리는 형식으로 나타나며 그 형식에 내용을 갖추어 드리게 한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예물을 드림은 형식과 내용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스스로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려는 마음은 온전한 예배를 향한 발걸음이 되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의 표현이 된다.

그러나 사람의 의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드는 제물을 드릴 수 없다.

온전한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지만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죄와 허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온전한 제물은 흠 없는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보여주며 모든 죄인들은 흠 없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제사하며 자신을 드리는 영적 산제사를 드릴 자격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흠 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게 하신 것은 흠 없는 그리스도가 제물이 되어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 안에 자신의 온전한 마음을 담아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제사의 규정을 살피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찾다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제사를 주관하시고 성취하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과거에는 지루하게 느껴졌던 레위기의 말씀이지만 그리스도를 발견하면서 복음의 내용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말씀이며 곳곳에 그리스도의 희생과 중보의 모습을 드러내는 말씀임을 발견한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서원제과 자원제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제물을 드리는 것이며 그 이후에 그 제물을 주변의 사람들과 나누는 것임을 보여준다.

흠 없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먹을 양식을 자신이 먹고 또한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나눠주어 함께 그것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42절부터 44절에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기쁨과 풍요함, 그리고 참 된 만족을 주는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시는 모습이 제사의 과정에서도 온전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계명으로 명령하시고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심으로써 계명을 지키고 따라야 할 이유를 제시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명령을 지켜야 하는데 지키지 못하는 부담을 느끼는 경우도 많지만 그리스도를 알고 깨닫고 그 은혜를 경험할 때는 명령을 따름이 기쁨이 된다.

또한 내게 베푸신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통로가 되며 더욱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오늘도 그 은혜를 따라 살아가며 주의 은혜를 증거 하는 자가 되길 소망한다.

또한 교회의 모든 지체들도 동일하게 주의 은혜에 감사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묵상 기도

주님 오늘도 주의 은혜 가운데 시작합니다.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시고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주님을 기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흠많고 부족하며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치 않은 자이오나 그리스도를 통해 용납하시고 받아주시며 주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증거 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어지는 시간 가운데 더욱 주를 닮아 가도록 도와주시고 주와 함께 걸어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이 내 삶을 붙드시고 주를 기억하는 시간이 더욱 많아지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함께 하시고 은혜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흠 없는 제물

레위기 22:17~33

레위기 21장부터 살펴본 내용은 제사장이 흠이 없어야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제사장의 몸이 흠이 없어야 할뿐 아니라 제사장의 생활과 먹는 음식에서도 흠이 없어야 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본 대로 구약의 제사장은 다 흠이 있고 약점이 있기에 자기 자신을 위하여 제물을 바친 후에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제사장에 대한 규례들은 장차오실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 역할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물로 드려지는 제물도 흠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사장도 제물도 흠이 없어야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신다고 합니다. ‘기쁘게 받으심’이 분문에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19,20,21,23,25,27,29).

 

본문 17~2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땅에 거류하는 자에게도 말합니다. 서원이나 자원 제물을 드릴 때에 흠이 없 없는 수컷으로 드려야 합니다. 흠이 있는 것은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21~25절입니다.

흠이 없는 제물을 드려야 하는데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원 제물로 쓰는 것은 제물에 흠이 있어도 드려도 된다고 합니다. 자신이 감사하여 자원함으로 드리는 것은 제물에 흠이 있어도 용납이 됩니다. 그 이유는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자원은 하나님께 반드시 드려야 한다는 의무가 아니라 감사하는 드리는 것이기에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생제물의 흠이 없어야 한다는 내용과 앞에서 본 제사장의 신체가 흠이 없어야 한다는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레21:16~21). 그러므로 제사장이나 제물에 흠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흠이 있어도 제물을 먹으며. 제물에 흠이 있어도 자원 제는 용납됩니다. 이런 예외 규정을 저는 은혜로 봅니다.

26~28절입니다. 처음 태어난 수컷을 여호와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7일은 어미와 함께 있게 하고 8일째 바치라고 합니다. 7은 성경에서 항상 온전함과 완성을 말하기에 8일째 드린다는 것은 완성으로 봅니다. 할례도 8일째 하라는 말씀이 이러한 제물 드림도 8일 째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제물로 드리는 암소나 암양일 경우는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규례는 가나안 풍습을 방지하려는 뜻이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제물을 그 날에 먹으라는 것은 화목제의 경우 이웃과 나누어 먹을 수 있기에 보관하지 말고 이웃과 나누라는 의미임을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31~33절입니다. 흠 없는 제물을 드려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그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내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백성 만드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제사장이 흠이 없어야 하고 제물도 흠이 없어야 하고 백성들도 흠이 없어야 하나님께 기쁘게 받으심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기쁘시게 받으시는 제사를 드렸습니까?

선지자들의 말씀을 보면 수많은 제물을 바치고 절기를 지키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다고 너무나 많이 말씀합니다. 제물을 바치라는 뜻과 의미를 모르고 하나님께 거래하려는 식으로 제물을 바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질린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의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 1:10절에서는 헛된 제물을 드리지 못하도록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말라기 1:6~7절입니다.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너희가 나를 멸시한다고 하니 우리가 언제 멸시하였느냐고 합니다.

8~9절입니다.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흠 없는 제물을 드려야 하는데 온갖 흠 있는 것을 드렸다고 책망합니다. 그런 것들은 그들의 총독도 받지 않을 것들인데 여호와 하나님께 그런 것을 드림으로 경멸한 것입니다.

10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헛된 제물을 드리지 못하도록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십일조에 대한 내용도 나옵니다. 아무리 율법으로 흠이 없는 제물을 드리라고 하여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구약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심판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약속이 주어집니다.

말라기 4:5~6절입니다.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율법으로도 제사로도 하나님께서 온전히 드려질 수가 없음을 구약 전체가 보여줍니다. 물론 이러한 제사를 통하여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습니다만 이러한 제사를 멸시한 자들은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마지막 성경 마지막 절이 여호와께로 돌이킬 엘리야가 온다는 말씀을 합니다.

마태복음 17:10~13절입니다.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1)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았습니다. 이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구약의 약속을 알고 있는 제자들이기에 이제 천국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이 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이 메시아 왕국이 도래하려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했느냐고 묻습니다. 서기관들이 말라기를 통하여 엘리야가 와서 메시아 왕국이 이루어진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엘리야가 왔지만 사람들이 임의로 대하였다고 합니다.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세례요한의 역할, 곧 엘리야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는 역할입니다. 그렇게 돌이키는 것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모든 구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 한 것입니다(요1:29).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는 흠이 없는 제물임을 믿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자녀가 돌이키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를 하나님 아버지가 용납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흠이 없는 제물만이 아니라 흠이 없는 영원한 대제사장임을 성경이 증거 합니다.

히브리서 9:11~15절입니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흠이 없는 제사장과 흠이 없는 제사장의 생활과 흠이 없는 제물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흠이 없이 이루어집니다.

베드로전서 1:18~25입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1)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ㄴ)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에베소서 5:25~27절입니다.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흠 없는 제사장과 제물이 되신 분에 의하여 구원받은 자들까지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흠이 없게 되는 것이 십자가 그 보혈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15:16절입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함을 보음의 제사장 직분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제사장 직분이란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자를 기쁘시게 받으십니다.

빌립보서 4:18절입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립보 교회가 바울사도를 위하여 연보한 것에 대하여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복음에 참여됨이 성도의 기쁨입니다.

유다서 1:1~2절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부르심을 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부르실 뿐만 아니라 의롭게 하시고 끝까지 지키셔서 영화롭게까지 하신 그 능력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롬8:30).

유다서 1:24~25절입니다.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최고의 예물

레위기 22:17-33 / 조약돌묵상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려야 하는 제사와 제물에 관한 법으로, 여기에는 드려지는 제사의 종류에 따라 제물의 성격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제물의 결격사유가 명시되어 있고, 아무리 희생 제물이라고 하더라도 그 동물의 생명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번제와 그 제물의 흠, 화목제와 그 제물의 흠, 희생제물에 대한 배려사항, 화목제 제물의 유통기한 등입니다.

‘서원제물이나 자원제물로 번제와 더불어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 이 말은, 이전에 맹세한 것을 이행하기 위해서나 혹은 자발적으로 번제를 드리려면 흠이 없는 황소나 숯 양이나 숯 염소로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서원제물이나 자원제물로 번제와 더불어’라는 말을 얼핏 보면 서원제물과 자원제물이 번제와 별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번제를 드리기 위해 가져오는 서원제물과 자원제물을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제사는 번제를 말합니다. 화목제를 위한 서원제물과 자원제물은 다음 문장에 이어집니다.

화목제는 서원화목제, 자원(낙헌)화목제, 감사화목제의 3가지가 있는데 본문에서는 서원화목제와 자원화목제만 나옵니다. 서원화목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나, 자원화목제는 약간의 흠이 있어도 됩니다. 예를 들어 제물의 몸이나 머리가 비 정상적으로 크거나 작은 경우입니다. 제물에 관한 특약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물로 드릴 짐승이라도 태어나서 7일 동안 새끼는 어미와 함께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생명을 사랑하시는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깃든 규례입니다. 아무리 갓 태어난 금수라 하더라도 7일은 이 세상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7일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완전한 일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제물은 최소 1년 이상 된 것으로 드려졌습니다. 또한 제물인 암소나 암 양을 그 새끼와 함께 같은 날 잡아서는 안 됩니다. 당시 가나안 족속들은 짐승을 어미와 함께 잡거나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삶아 내는 잔혹한 풍속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반인륜적인 짓은 결코 성민인 이스라엘이 쫓아서는 안 될 일이지요. 이것 역시 여호와하나님의 짐승까지도 사랑하시는 온정이 배어있는 규례입니다. 비록 짐승일지라도 어미와 새끼간 애정관계를 존중하고 보존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즉, 성치 못한 동물을 제물로 바쳐서는 안 됩니다. 완전한 제물로 온전한 속죄를 이룰 수 있는 것이지, 불완전한 제물을 드려 놓고 온전한 제사를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와 같이 헌금은 정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물은 쓰고 남은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지적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앞에서 사람들의 헌금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때 하필 두 부류의 사람이 헌금을 하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었습니다.

한 부류는 부자들로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습니다. 또 한 부류는 가난한 과부로 두 렙돈의 아주 적은 액수의 돈을 헌금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하였지만 과부는 궁핍함 중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헌금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지극정성을 다하여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하는 선물도 같다고 봅니다.

기왕지사 선물을 하려면 자기의 힘닿은 한의 최고의 것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체면치레로, 마지못해서, 가급적 적은 돈으로, 더 나아가 폐기 처분하듯이 하면 안 됩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하지 않은 것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면 익히 알 수 있어서죠.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선물의 성격과 질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알고 보면 기분 나쁠 것입니다. 그만큼 무시당했다는 모욕감은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물의 필수조건이 있다고 봅니다. 감동과 감사입니다. 감동 어린 선물은 기쁨을 주고, 감사가 담긴 선물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성과 성의는 인간이라면 서로서로 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야!

예전에는 헌금을 다리미로 다려서 헌금을 내는 우리 선배교인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 인가 꾸겨진 돈이라도 액수만 크면 최고라는 것으로 분위기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돈을 다림질하시는 분들이 부끄러워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꼭 이것이 옳고 저것이 틀렸다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시라면 어떤 예물을 기쁘게 받으실 까? 라는 고민을 할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예물은 자신의 것 중 최선의 것, 가장 값진 것, 소중한 것, 그리고 마음에 마음을 담아야 할 것입니다. 곧 최고의 예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정성을 담아드린 예물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선물은 받는 사람보다는 주는 사람이 더 기쁜 법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에게 드리므로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헌금일 것입니다. 인간들끼리 통하듯이, 하나님아버지와 그 자녀들이 교류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감동과 감사의 예물은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얻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흠 있는 예물을 드리지 말라

레 22:17-33

 

레 22:20-25

우리가 성경을 베우는 것은 구원을 받고자 함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고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신약의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구약 이스라엘은 은물 교육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그림자라고 하고 신약을 실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너희는 애굽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애굽 사람처럼 살아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충돌이 일어나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 충돌과 갈등을 어떻게 해소해 가는지를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는 거룩한 백성이 된 자들이 날마다 이루어가는 거룩에 관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지침서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사장을 선택해서 거룩한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로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21장과 22장은 제사장이 지켜야 하는 규례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21장에서는 제사장의 신분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고,

22장에서는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22장 전반부에서는 성물을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자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하나님 앞에 흠 있는 예물을 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흠 있는 예물은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는 것과 같은 것이고,

제사장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제사장들의 삶을 말합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들이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단번에 주어진 거룩을 말하고, 레위기는 날마다 이루어 가는 거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단번이 이룬 거룩은 아이가 출생하는 것과 같고, 날마다 이루어가는 거룩은 아이가 어미의 젖을 먹고 자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장성한 자로 자라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자람이 없는 아이는 부모에게 재앙입니다.

그건 결코 기쁨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던 자들을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을 시킨 것은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게 하고자 함입니다.

광야는 가나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가는 곳입니다.

 

광야는 어린아이들을 교육하는 것과 같이 훈련을 받는 곳입니다.

훈련은 실전을 위한 것입니다.

훈련을 올바로 받지 않으면 실전에 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훈련은 실전처럼 실전은 훈련처럼 하라고 합니다.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신약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땅에 지체를 죽이고 위엣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삶을 예배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은 거룩함을 입은 백성들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 자체가 예물인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가 세상 가치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구약적으로 흠 없는 예물인 것입니다.

 

육체의 흠이란? 부정한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부정한 삶은 이방인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애굽의 가치를 좇아가다가 징벌을 받았습니다(고전 10:1-12).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있어 흠이란?

애굽적 신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애굽의 음식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애굽에서와 같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기다가 3000명이나 죽임을 당하였고 애굽에 음식을 달라고 하다가 메추라기를 먹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가는 길이 험하다고 원망을 하다가 불 뱀에 물려서 죽었고 이방 여인들과 간음을 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우상 숭배하고 간음하고 탐욕을 부리고 원망하는 것이 흠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이방인들이 즐겨하는 것들입니다.

이방인들의 삶이 곧 하나님 앞에서 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흠 있는 예물은 받지 않겠다는 것은 애굽적 가치로 살아가는 자는 만나주시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당한 일들을 거울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의 고린도 교회에 구약의 사건을 거울로 말하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행한 일들이 신약의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계로 기록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것은 구약의 사건을 가볍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신약의 성도들도 얼마든지 넘어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왜 넘어졌는지를 똑똑히 보고 너희는 넘어지지 않도록 싸우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드리는 예물은 신약에서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흠을 신약적인 의미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눈먼 것은 영적 소경으로 비진리를 쫓아가는 것을 말하고,

상한 것은 이방인의 부패하고 타락한 삶을 말하고,

피부에 나는 종기나 병들은 아름답지 못한 삶을 말하고,

지체에 더하거나 덜한 것은 믿음에 합당하지 못한 결격사유가 있는 삶을 말하고,

불알이 상하거나 치어서 터친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으로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흠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름답지 못한 삶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흠 있는 예물을 드리지 말라는 것은 너희는 다른 사람이니까 이방인들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엡 4:17-2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애굽의 풍속을 쫓지 말고 이방인의 삶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은 신앙생활이란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방인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는 흠 있는 예물로 간주하고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땅이 그런 자를 용남하지 않고 토해낸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원에서 잘려 나간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어떻게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모습으로 살아 갈 수가 있느냐 라는 책망의 소리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신분론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호적에 올려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수준론적인 면에서는 죄와 싸워야 할 자들입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가야 할 자들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싸움인 것은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가나안 땅과 같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원주민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곳에 예수그리스도가 새로운 주인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옛 주인과 새 주인이 우리 몸을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운다고 합니다.

육신의 소욕이 이기면 우리 몸은 이방인의 삶을 쫓아가게 되고,

 

성령의 소욕이 이기면 우리 몸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이 이기면 육신의 탐욕으로 살아가고, 성령의 소욕이 이기면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것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흠 없는 예물이 되지만 그 은혜에 감사치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흠 있는 예물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감사로 행하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받은 그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서 사랑으로 행하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이 빠진 것은 흠 있는 예물로서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3:1-3).

 

하나님은 사랑으로 행하는 것만 받으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행하는 것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을 해도, 순교를 해도, 구제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예배가 있습니다.

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있고, 은혜로 드려지는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는 삶입니다.

율법으로 드리는 예배는 억지로 행하는 삶이고, 은혜로 드려지는 예배는 감사로 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즐겨내시는 자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즐겨낸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헌신을 말합니다.

자발적인 헌신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자발적인 헌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율법으로 드려지는 예배라고 합니다.

율법으로 드려지는 것은 흠 있는 예물입니다.

하나님은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구약 이스라엘의 신앙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율법으로 배웠다는 것입니다.

율법 신앙을 외식이라고 하는 것은 감사함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입니다.

두려워서 하는 것에는 감사와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법으로 나아오는 자를 받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문을 닫으면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였습니다(말 1:6-14).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더러운 떡을 하나님의 단에 예물로 드렸다고 합니다.

병들고 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흠 있는 것들인 것입니다.

이를 눈 먼 희생으로 드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강도의 굴혈이 된 성전을 쓸어버리셨습니다.

성전 문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교회의 율법 신앙을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로 표현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으로 자기 치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을 겉은 화려하지만 그 속은 썩은 것으로 가득한 무덤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영광을 구하였고,

상석에 앉아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고,

신앙을 자기 유익을 얻는 수단으로 이용하였고,

속으로는 탐욕이 가득하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외식은 껍데기만 있고 알맹이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말라기 선지자는 절기의 똥이라고 하였습니다.

똥이란 양분이 빠져버린 쓰레기입니다.

절기 지킴은 있는데 정작 그 절기가 담고 있는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절기 속에 담겨질 내용은 은혜와 감사와 찬송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율법 교회는 그 알맹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식으로 가득한 구약 교회를 폐하시고 신약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신약 교회는 은혜로 세워졌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세워진 교회는 감사와 찬송이 넘쳤습니다.

자발적으로 행하는 헌신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예수님께서 재림 할 때가 가까이 오자 은혜로 세워진 신약의 교회가 구약교회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요한계시록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맨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로 말해주고 있습니다(계 3:14-22).

라오디게아 교회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문 밖으로 쫓아내었습니다.

세상 것으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세상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예수님이 계실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마음속에서 예수님을 다 몰아 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흠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서 먹을 수가 없어서 입에서 토하여 내친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처럼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발가벗은 것이라고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다 벗어던지고 발가벗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라는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율법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 의에 취하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발가벗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버리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를 입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들의 의로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의로 선생 노릇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이라고 일갈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신앙은 내용이 없는 껍데기 신앙이었습니다.

의와 인과 신이 빠진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내용이 없는 형식은 열매가 없는 잎만 무성한 나무입니다.

율법은 형식이고 은혜는 내용입니다.

율법은 밥그릇이고 은혜와 사랑은 밥입니다.

하나님은 율법 속에 은혜와 사랑을 담고자 하였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담겨지지 않은 율법은 속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말의 때에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마 24:19-20.

아이 밴 자들이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구약의 율법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젖 먹이는 자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히브리서에서는 어린아이라고 하였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이루신 십자가 도인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하는데 아직도 율법적 신앙에 머물러 있으면 어찌 하느냐입니다(히 6:1-2).

 

신앙은 생명의 자람과 같습니다.

어린아이로 출발하여서 장성한 자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장성한 신부들을 데리러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아이 밴 여자들이나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여야 할 때에 젖을 먹이는 자는 거짓 선지자인 것입니다.

 

은혜 시대에 율법 신앙을 가르치는 것은 불의가 되고 미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재림하시는 때가 겨울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이 겨울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겨울은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계절입니다.

겨울은 모두가 얼어붙고 죽어 있는 시기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멀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은 뜨겁고 죽은 신앙은 차갑습니다.

산 자는 뜨겁고 죽은 자는 차갑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안에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살아 있어서 따뜻하고 감사가 넘치고 생명의 향기를 풍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예수그리스도를 문 밖으로 내어 쫓은 자들은 죽은 신앙으로서 차갑고 부정적이고 냉랭하며 사망의 향기를 풍기고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때를 고통을 당하는 말세의 때라고 하였습니다(딤후 3:1-5).

종말에 고통당하는 때를 일컬어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마음속에 돈을 사랑함으로 가득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이름만 신자이지 실제로는 불신자와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병든 상태인 것입니다.

 

신앙은 뜨겁고 따뜻해야 합니다.

차가운 건 죽은 신앙입니다.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하고 크고 비밀한 것을 말한다 하여도 차가운 것은 죽은 자입니다.

지식으로 알아진 예수는 차갑고,

은혜로 경험으로 알아진 예수는 뜨겁고 따뜻합니다.

지식으로 알아진 예수는 정죄와 비판을 쏟아내지만,

은혜로 경험으로 알아진 예수는 술람미처럼 나도 향을 토하여 내듯이 감사와 찬송과 사랑을 토하여 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는 영지주의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배고 젖을 먹이는 율법주의도 화가 있지만,

지식으로 알아진 예수로 앉은뱅이나 중풍병자들처럼 손과 발은 움직이지 못하고 입만 나불거리는 영지주의자들도 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믿는 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때입니다.

극심한 타락의 때입니다.

마치 엘리야 시대에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다른 신으로 섬기던 때와 같은 때입니다.

예수를 세상에 복을 주는 바알로 섬기고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7000명이 숨겨져서 보이지 않았듯이 이 시대도 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찾아보기 힘이 드는 때입니다.

흠 없는 예물로 드려지는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때입니다.

이사야의 선지자의 말처럼 병들어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때입니다(사 1:4-6).

 

인류의 역사는 시대 말에는 항상 극심한 타락으로 나타납니다.

노아의 때가 그러하였습니다.

구약 교회의 종말인 예수님의 초림 때가 그러하였습니다.

신약 교회의 종말인 예수님의 재림 때도 이러한 타락은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열심을 내라는 말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거짓입니다.

신앙이 믿음이라고 한다면 삶은 행함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믿음이 나무라고 한다면 행함은 열매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귀신의 믿음이고,

귀신의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대 마귀는 신앙을 도를 깨닫는 것으로 미혹하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미혹을 당하면 성경적 지식을 알면 그것이 마치 신앙의 전부인 줄 알게 됩니다.

이를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초대교회로부터 항상 있어 왔습니다.

산 자에게 있어서 삶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산 자가 움직이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고 필연적인 것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도 그 내용을 삶으로 토하여 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 안에 새겨진 그림이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가이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으면 삶이 세상 것으로 그려지게 되어 있고,

그 안에 하나님이 그려져 있으면 삶이 하늘에 것으로 그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나는 어떤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가고 있는가요?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아들이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입니다(롬 8:29-30).

 

성령은 아들의 영으로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셨습니다.

 

그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성도들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성령이 그렇게 인도해 가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예수님과 같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는 자세로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도의 구원을 여자가 해산하는 것으로 말한 것은 성도의 신앙생활이 날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고 하늘에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늘로 살아나야 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나야 합니다.

그리 할 때 흠 없는 예물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추수 때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예물로 드려지고 있습니까?

흠 있는 자로 하나님 앞에서 버려짐으로 살고 있는지,

흠 없는 예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짐으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끝을 로마서와 히브리서의 말씀으로 맺겠습니다.

로마서 12:1-2

히브리서 12:15-16

마라나타! 주님이 곧 오십니다.

 

 

 

 

제물의 성화

레 22:17-33

제사의식의 성화에 관해서는 안식일, 유월절과 무교절, 초막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과 같은 정기적인 계절에 관한 규정과 회막의 등잔불, 진설병과 같은 상시 부단한 제사에 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이스라엘의 전 국민이 준수할 명령입니다. 17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주 언급된 사항은 “불구”, “허약”, “불완전한” 짐승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죄라는 점을 여기서 보다 더 선명하게 가르치며 보다 더 상세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 예배에 있어서 얼마나 자유 분방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세상은 어린애 같이 제멋대로 시시한 일을 해 놓고 자기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상상합니다. 세상은 쓰레기 같은 일을 해 놓고 보상을 요구하는가 하면 하나님께 대한 조롱으로 낙을 삼으면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께 무슨 의무라도 지우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 드린 것으로 떠들어 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잘못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아무 흠이 없는 제물을 당신께 바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말 1:7-8에는 유대인들이 그들이 눈멀고 절름발이요, 병든 희생제물을 제단에 드림으로서 당신의 상을 더럽혀 놓고도 그것이 악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을 때 당신께서는 엄하게 꾸짓고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결을 아예 부정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올바른 예배의 두 가지 사항이 필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자는 모든 흠으로부터 깨끗하게 되어야 하며, 둘째, 그런 사람은 모든 불결이 없이 순수한 것이 아니고서는 그 어느 것도 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9절에 “열납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라고 줬습니다. 열납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체”라고 부르는데 “선한 뜻”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제사가 하나님의 선한 뜻과 일치하는 방향에서 정직하고 신실하게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는 점을 배워야겠습니다. 예배가 아무렇게나 더렵혀지는 것은 우리가 그의 완전성에 합당한 것이 무엇인가를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들에게서 어느 면에 있어서든 순결한 것이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지만 최소한 우리 본분을 다하면서 우리의 욕망이 너무도 그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서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사 드릴 때 다음 네 가지 율법이 필요합니다.

 

1. 무엇이든지 희생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21절에 “열납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히 5:7에 “그의 경외 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시는데 흠없는 온전한 제물을 드리는 것이 하 나님을 경외하는 증거입니다. 흠 없는 온전한 것,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제물의 흠에 관한 구체적인 몇 가지를 기록했습니다. 즉 눈이 먼 짐승이나, 다리를 절거나, 종기가 있거나, 피부병이 있든지(22절) 또 상처가 났든지 깨어지고 부서졌다든지 베인 칼자국이 있다든지(24절) 또 황소와 수양일 경우 거세 되었으면 그것은 제물로 바쳐질 수 없는 것입니다.

 

2. 제물의 짐승은 난지 8일이 지나기 전에는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짐승은 난지 8일이 지나야 제물이 될 수 있는 규정을 지었습니다(출 22:30). 그 이유는 안식일이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해 주므로 안식일을 한 번이라도 지난 것인 아니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죽이는 것은 금해졌습니다 28절에 “암소와 암양을 무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에 잡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제물에 잔인성을 가미한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제물에 있어서 모든 야만성과 잔인성이 금지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인간들이 일상 음식에 있어서도 잔인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원칙이 규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미와 새끼가 함께 죽여지는 꼴을 본다는 것은 결코 온화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유쾌한 일일 수 없으며, 그것이 일상적인 습관이 되었더라면 인간들은 전반적으로 피흘리는 일에 있어서 쉽게 냉담하게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앙적인 관례가 인정을 베푸는 일과 무관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출 23:19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젖으로 새끼를 삶은 그 고기를 먹는 것은 마치 피에 젖은 고기를 먹는 것이나 다름없이 금지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제물을 제멋대로 뒤섞음으로써 그것을 더럽히는 일을 방지하고 있습니다.

 

4. 감사제물의 고기는 제사 당일에 먹어야 함니다(29-30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는 일반적인 명령으로 결론을 짓습니다(31-32절).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한 자들이라도 만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가장 흠 없는 제사요, 기뻐하시는 제사는 우리 몸을 하나님 앞에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롬 12:1). 그러므로 우리 는 죄를 품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지는 않는가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자만심이 있어도 안됩니다. 자만심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몸으로 또한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요 나약한 자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입어 주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주일을 거룩히 지키고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물질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정성껏 드리며 예배 보아야 할 것이며, 흠 없는 정성스런 제물에 의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며 축복한 생활이 전개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나의 성호를 욕되게 말라

레 22:31-33 / 피영민 목사

레위기 21장과 22장에는 제사장, 대제사장, 성물과 제사에 합당한 제물에 관한 규례 등 아주 복잡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규례들을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여기에 의식법 뿐만 아니라 도덕법적인 요소가 혼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살펴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22장을 보면 복잡한 여러 가지 규례들이 기록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중심이 되는 메시지가 하나 있습니다. 2절에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드리는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32절에도 “너희는 나의 성호를 욕되게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2장 처음에 해당하는 구절과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구절들에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22장은 전체적으로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 21장도 마찬가지입니다. 6절에 “그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1장과 22장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복잡해 보이는 여러 가지 규례들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21장과 22장에 중요한 두 개의 동사가 있습니다. 첫째는 ‘Profane’(욕되게 말라)입니다. 레위기 21장과 22장에 6번 사용되었습니다. 둘째는 ‘Hallow’(거룩하게 하다, 깨끗하게 하다)입니다. 5번 사용되었습니다. 레위기 21장과 22장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거룩하게 할 것인가?”라는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의 삶과 사상과 언어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거룩하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을 마구 모독합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불경스러운 짐승의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습니다. 미국 사람들도 ‘Jesus!’라는 말을 자주하는데, 뉘앙스가 좋지 않은 말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제3계명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인데, 성도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절대로 모독하면 안 됩니다. 설령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거나 비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불신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믿고 싶지 않으니까 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21~22장은 불신자들을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지도자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성호를 욕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제사장과 대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의 중심에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과 부패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반기련(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이라는 단체도 생겼습니다. 목회자들이 세습을 하고, 각종 성범죄에 연류되는 등 갖가지 문제들을 일으키다 보니,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다가 이곳에서 목회를 시작한지 14년째가 되었는데, 지금도 목사라고 사람들이 한 수 깔고 봅니다. 목사, 장로, 권사를 포함해서 교회 안에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는 짓을 하니까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술집에서 ‘장로님!’이라고 부르면 몇 분이 돌아보신다는 것 아닙니까? 감옥에 가서 ‘목사님!’이라고 부르면 ‘왜 불러요?’라고 대답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레위기 21~22장의 말씀은 불신자들을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들을 향해, 교회 지도자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라는 규례가 제사장, 대제사장, 성물, 제물에 관한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들

 

레위기 21장 1~9절은 제사장의 성결규례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네 가지 사항의 경우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

1. 가족, 형제, 자매, 친족 등의 장례에 참석이 가능하지만, 타인의 장례에 참석해서 시체와 접촉하는 경우입니다. 제사장이 시체와 접촉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2. 이방종교를 믿는 사람들처럼 머리를 대머리로 밀거나 수염 양편을 깎고, 살을 베는 행위입니다. 이방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주로 머리를 깨끗하게 밀고 광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장이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자연스러운 모습을 갖추는 것이 성도의 정상적인 모습니다.

3. 기생, 부정한 여인, 이혼 당한 여인과 결혼하는 경우입니다. 과부나 정당하게 이혼한 여인과는 결혼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제사장이 가정적으로 깨끗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4. 제사장의 딸이 행음하는 경우입니다. 그것은 아비를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 불 태워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규례들은 의식법에 속하기 때문에 오늘날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사장, 즉 백성들의 영적 지도자들은 일반 백성들보다 훨씬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레위기 21장 16~24절에 아론의 자손들 중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 성물을 먹을 수는 있지만,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은 제물을 들거나 자르기 어렵고, 불태우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하지 못하도록 금하셨습니다.

또 레위기 22장 1~16절에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는데, 그것도 부정한 상태에서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체적인 정결 조건이 잘 갖춰진 상태에서 먹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소제물을 먹을 수 있고, 화목제물 중에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고기는 ‘흔든 가슴’과 ‘든 우편 뒷다리’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성물을 먹을 때, 문둥병이나 성병 등 부정한 요소가 있으면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벌레에 접촉한 자는 정결할 때까지 먹을 수 없고, 저절로 죽은 짐승의 고기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도 먹을 수 없습니다.

또 제사장의 가족들도 먹을 수 있는데, 돈으로 산 품꾼도 제사장의 가족으로 대우를 받아 같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이나 임시로 고용된 품꾼, 외국인에게 시집간 제사장의 딸은 성물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성물도 거룩히 대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레위기 22장 17~30절에 제사를 드리는 예물은 반드시 흠 없는 수컷이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짐승의 새끼를 제물로 드릴 때에는 8일째부터 제물로 드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새끼가 태어난 지 7일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제물로 드리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고 해서 금하셨습니다. 또 어미와 새끼를 하루에 모두 잡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서로의 죽음을 보지 못하도록 금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율법은 참으로 은혜로운 율법입니다. 이러한 제사장의 규례는 일면 복잡해 보여도 한 마디로 하면 일반백성들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더 높은 거룩성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규례는 21장 10~15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제사장 규례보다 더욱 엄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심지어 부모나 형제의 장례조차도 참여할 수 없으며, 정당하게 이혼한 여인과도 결혼할 수 없고, 오직 이스라엘의 처녀와만 결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모두 거룩해야 하는 사람들이지만 제사장은 더욱 거룩해야 하고, 대제사장은 그보다 더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법들은 거의 모두 의식법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의식법 속에 도덕법적인 요소(영적인 교훈)가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교회 안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일반 성도들보다 일상생활이나 가정생활에서 더욱 거룩해야 하고, 덕을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해야 할 책임이 크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에 보면 감독과 장로의 자격이 기록되어 있는데, 자격요건을 자세히 보면 ‘개인의 능력’보다 ‘성결’이 더욱 중요시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가 되려면 개인적인 성결, 가정적인 성결, 사역적인 성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 장로는 일반 성도들보다 훨씬 거룩해야 합니다. 절대로 여호와의 이름에 욕이 될 만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신학교 학생들 중에도 동성애자가 있다고 합니다. 목사를 청빙할 때에 앞으로는 사모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꼭 확인해 봐야 합니다. 남자 사모가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지도자가 될 사람은 우선 성결해야 합니다.

둘째, 대제사장은 완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적으로나 영적으로 완전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지상에 이런 대제사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대제사장은 어디에 계실까요?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며 완전하고 절대적 거룩성을 지닌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람조차도 그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성결을 지닌 분이시라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일까요?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이 죄가 없으셔야 우리 죗값을 갚아주실 자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속죄는 점이 없고 흠이 없는 분이 하셔야만 합니다. 완전한 성결을 지닌 분만 우리의 죗값을 갚아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완전한 의를 전가해 주셔야 그 의의 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공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착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천국에 들어갈 만큼 착한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옷을 입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허물이 있어도 예수님 의의 옷을 입고 있으면 당당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운 존재로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해 주시는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중보자는 죄가 없는 분이셔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중보기도라고 하지 않고 도고기도라고 합니다. 중보기도라는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해 중보기도한다는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에게는 완전한 거룩이 요구되는데, 이를 갖춘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영적인 교훈은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더러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일꾼들이 거룩합니다.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구별해서 쓰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제사장에게 먹으라고 하신 성물도 거룩하고, 하나님이 대제사장을 만나주시는 성소와 지성도도 거룩한 곳이고, 하나님의 말씀도 거룩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도 거룩하기 때문에 이 역시 모욕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백성의 지도자들은 절대로 여호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Ⅱ.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해야 해야 할 이유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거룩하지 않은 분을 거룩하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으로부터 분리된 분이시고, 피조물로부터 분리된 분이시기 때문에 본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연히 하나님을 거룩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악한 자로 여기는 것이고, 피조물과 같은 차원의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레위기 22장 32절에 “너희는 나의 성호를 욕되게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마귀와 지옥으로부터 건져내신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에 거룩하게 대해야 합니다. 레위기 22장 33절에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마귀와 지옥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마귀의 종입니다. 마귀에게 이끌려 사는 것이고, 귀신을 숭배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마귀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구원자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은 참으로 배은망덕한 짓인 것입니다.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니 보따리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남에게 선한 일을 하기가 겁이 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따리까지 달라고 하는 일이 실제로 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덕을 베풀면 나중에는 더 큰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선을 베풀고 덕을 베푼 사람들을 욕되게 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주 배은망덕한 짓입니다.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따르게 됩니다. 레위기 22장 3절에 “그들에게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에 그 몸이 부정하고도 이스라엘 자손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에 가까이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지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끊어진다’는 것은 히브리어 ‘카라트’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지, 제사장 직분의 파면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큰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계속해서 모독하는 사람은 나중에 큰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한 두 번은 참으시지만, 때가 차면 큰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레위기 22장 9절에 “그들은 나의 명을 지킬 것이라 그것을 욕되게 하면 그로 인하여 죄를 짓고 그 가운데서 죽을까 하노라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을 지도 모른다고 하십니다. 레위기 10장에 기록된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이 그 예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계속해서 모독하면 결국 그 사람의 삶에 고통이 임하게 되고, 심판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이유만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고 거룩하게 해야 할 근거가 충분합니다.

 

Ⅲ. 오늘날 우리가 거룩하게 대해야 할 일곱 가지

 

우리가 거룩하게 대해야 할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야 합니다. 십계명의 제3계명은 지금도 유효한 말씀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망령되이 일컫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5장 23절에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직접 섬기지 예수님은 믿지 않겠다”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공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예수님을 섬기지 않을 방법은 전무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이 받아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보자를 통하지 않고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천하 인간에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해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조직신학 교수님이 어느 시골에 살고 있는 부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남편이 매일 술을 마시고 교회에 가는 아내를 때리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이었는데, 성경책을 다 잘라서 화장실에 못으로 꽂아 휴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성경을 그렇게 불경스럽게 사용한 남편은 일주일 만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성경을 거룩하게 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스라 7장 10절에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날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대해야 합니다.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구별해서 정하신 주일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만드신 날입니다. 그래서 주일을 자기의 안일과 쾌락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주일성수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이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복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평생 어려서부터 주일성수 하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 주일예배를 충성스럽게 드렸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귀한 간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날을 거룩히 여겨야 합니다.

다섯째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수단들입니다. 먼저는 예배, 그리고 침례와 주의만찬과 같은 교회의 의식을 거룩하게 여겨야 합니다. 어떤 분은 예배 도중에 밖으로 나가시는 분이 계십니다. 결혼식을 가셔야 한다고 가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업신여기는 자는 하나님이 고약하게 여기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에 뒷자리 앉아서 스마트폰을 하는 것도 좋지 않은 예배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거룩한 자세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설교를 하더라도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시간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서 은혜를 받고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섯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대해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핏 값을 주고 사신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어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는 존귀한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더 이상 마귀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약한 사람, 가지지 못한 사람, 학벌이 낮은 사람, 가난한 사람, 직분이 없는 사람들도 존귀히 여겨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 즉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이 거하시는 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교회를 해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찌르려는 사람이기 때문에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절대로 교회를 해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여겨야 합니다.

일곱째는 하나님이 쓰시는 종들입니다. 그들을 거룩하게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목회자를 통해서 교회에 말씀을 주십니다. 천사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죽은 마틴 루터를 데려다가 말씀을 전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기관입니다. 조금 부족한 점이 있다할지라도 여러분은 목회자를 통해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기관으로서 존중해야 합니다.

목회자를 향해서 막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은 거룩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가 비록 나이가 어려 아들 벌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말씀기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말씀을 받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13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사도바울에게 “글은 힘이 있는데, 말은 잘 하지 못한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저런 정도의 설교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식의 비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차원은 천지차이입니다. 상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 구리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자에게 그것은 우상이라고 한 사도 바울에게 해를 끼친 사람도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4장에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 론

 

여러분, 우리는 지난 주일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마카데쉬’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호를 공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는데, 우리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고 거룩하게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가정이나 직장, 사업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며느리가 “나는 저런 시어머니가 다니는 교회라면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한다거나,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동료가 “교회 장로라고 하면서 저렇게 이상한 사람은 처음 본다. 저런 사람이 다니는 교회라면 절대로 다니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고(Profane), 거룩하게 여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Hallow). 말씀의 결론은 사무엘상 2장 30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이 말씀은 불신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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