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년
레 25:1-7
1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3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4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5 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6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류하는 자들과
7 네 가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출로 먹을 것을 삼을지니라
레 25:1-7 / [안식년]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줄 땅으로 들어가거든 매 칠년마다 땅을 쉬게 하여 나 여호와를 기리어라. 3) 여섯 해 동안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포도밭을 가꾸어 수확을 거두어라. 4) 그러나 일곱째 해가 되거든 땅을 쉬게 하여라. 그 해에는 땅에 씨를 뿌리지도 말고 포도원도 가꾸지 말아라. 5) 그 해에 저절로 자라난 곡식에 손을 대지 말아라. 가꾸지 않은 포도나무에 열린 포도 송이에도 손대지 말아라. 이 일곱째 해는 땅이 쉬는 해인 까닭이다. 6) 이렇게해야 너희뿐만 아니라 너희 남종과 여종과 품꾼과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도 그 땅에서 나는 소출로 먹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7) 너희가 기르는 가축과 들짐승까지도 그 땅의 소출로 먹고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에 기본이 되는 안식년(Sabbatical Year)에 대한 규례를 주었습니다. 안식년은 칠년 주기로 한 해 동안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1-2)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년에 대하여 말씀했습니다. 안식년을 지켜야 할 대상은 바로 ‘너희’라고 말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그 시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지키라고 하셨고, 그 방법은 ‘여호와 앞에’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두 보고 계심을 말해줍니다.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출 20:8-11)고 하시고 또한 그들이 거주하는 땅(가나안)에서 안식년에 그 땅을 쉬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온 자기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안식년에 쉬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그분만 가능한 일입니다.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3-7) 안식일이 칠 일 중 마지막 하루를 안식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이라고 한다면, 안식년은 땅을 칠 년마다 한 해를 땅을 쉬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육 년 동안 밭에 씨를 파종하고, 포도원을 가꾸어 소출을 거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해, 안식년에는 그 땅을 개간하거나 파종하지 말고 저절로 난 곡물이나 열매라 할지라도 거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안식년에는 심고 가꾸지는 않지만 저절로 난 것은 남종과 여종과 품꾼과 함께 거류하는 자들과 가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함께 먹게 하기 위함입니다. 안식년의 규례는 토지를 쉬게 함으로써 지력을 회복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탐욕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의 주인으로서 권한을 지니고 계심을 알게 하려 함입니다. 노예로 있을 때에 하루를 쉬는 안식일과 칠 년마다 한 해를 쉬는 안식년은 큰 은혜와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땅, 자기 포도원을 갖게 되었을 때는 안식일과 안식년은 큰 시험과 불평의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간 면에서 볼 때, 다른 절기들의 기간은 당일이나 길어야 일주일에 불과한 반면 안식년은 그 기간이 한 해였습니다.
적용: 시내 산에서 안식년 규례를 주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실제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는 어떠했을까요? 당신이라면 어떠했을까를 묵상해 봅시다.
쉼이라는 시간을 통해 우리는 회복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여행객들로 북적이던 관광지는 쉼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을 가졌고, 그로 인해 자연적 회복이 찾아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쉼을 통해 육체의 회복의 시간뿐만 아니라 노동의 의무에서 벗어나 영적인 일에 집중함으로 인간다움과 여유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참된 자유와 평안을 이룰 수 있습니다.
< 설 교 >
안식년 법과 희년법
레 25:1 / 기독넷
1. 희년에 대한 어의론적 의미
'희년'이라는 말은 '요벨' 즉, '양의 뿔' 이라고 하는 히브리어에서 번역된 용어로서 히브리 성경에 모두 26번 나온다. 희년을 맞이하는 해의 일곱 번째달의 열번째 되는 날 즉, 대속죄일에 이 양의 나팔이 울려퍼지게 되면, 기업의 원주인에게로의 회복을 포함한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자유가 선포된다. Liber, van Selms, Lemche 그리고 Wright와 같은 학자들은 '요벨'의 정확한 어원적 의미를 설정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지만, Morgenstern, Noth, Patrick, Heinisch, Chirichigno, North, Snaith 그리고 Neufeld등과 같은 대다수의 학자들은 '양의 뿔'에서 그 어원적 의미를 찾는다.
Morgenstern은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은 특별한 때에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사용되어졌다고 보면서, 일반평민들은 '쇼파르'라는 나팔을 사용한 반면 제사장들만이 요벨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또한 일반적인 해는 그 해의 첫해에 '쇼파르'를 통해서 선포되어진 반면에 희년은 '요벨'에 의해서 선포되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Chirichigno는 '요벨'과 '쇼파르'를 동의어라고 보았는데, 출 19:16절과 여 6:4-8, 13절에 나타나는 '쇼파르' 역시도 양의 뿔로서 묘사가 되어진 점을 본다면 이 Chirichigno의 견해가 더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2. 희년의 선포는 49년째인가? 50년째인가?
희년주기는 아주 복잡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즉, 49번째 되는 해에 희년이 선포되었는가? 아니면 50번째 되는 해에 희년이 선포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는 일차적으로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라고 한 레 25:8-9절과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라고 한 레 25:10-11절 사이의 텍스트 상의 희년선포 시기에 대한 불일치 때문에 제기되어지며, 부차적으로는 2년 연속되어지는 땅의 휴경이 가져오게 될 사회 경제적인 어려움을 고려하는 학자들의 견해 때문에 생기게 되었다.
첫째, 희년이 50년째에 선포되었다는 견해
50년 희년 설은 주로 초기의 보수적인 학자들에 의해서 주로 주장되었다. Lesetre는 신 16:9절의 "칠주를 계속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주를 계수하여"에 나타나는 맥추절은 49일 다음에 오는 날이며, 요세프스와 파일로등과 같은 랍비 주석가들이 모두 50년에 동의 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고 한 레 25:11절의 파종을 금지하며 충분한 양식을 약속한 말씀은 50년설에 더욱 적당한 것이라고 보았다. Paton역시도 49년 설은 본문과 고대증언들과 상치된다고 보았고, 구체적으로 랍비중 한 사람인 Yehuda Ben-Ilai를 들며 랍비의 전통적인 견해는 50년 설에 서있다고 주장했다. Delitschz는 49년 희년 주기설은 인본주의적인 계산법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레 25장의 내용에 반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는 희년은 레 25장에 기록된대로 7번째 안식년 다음 해, 일곱 번째 달, 열흘 째 되는 날 양의 뿔나팔 소리로 선포되었다고 보았다. Strack 역시도 50년 희년 설을 받아들이면서, 매 7번째 희년은 어느 한 안식년과 일치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희년은 안식년주기의 어느 해와 겹쳐질 수 있음을 지적했다.
둘째, 2년 연속 땅의 휴경의 농경적 비현실성
Wetzstein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토양은 안식년이 지난 8년째에는 기경을 해야만 농산물을 얻을 수 있는 농경적 환경조건에 주목하면서, 만약에 2년 연속 휴경이 되어진다면 양식을 얻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Kugler역시도 땅과 기후의 조건이 좋지 않기 때문에 땅의 기경이 없는 연속된 휴경은 곡물을 생산할 수 없는 땅의 황폐함을 야기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North는 마카비 일서 6:49절의 안식년 준수로 인한 기근의 도래를 사례로 들면서, 2년 연속의 휴경을 전제로 하는 50년 희년설 보다는 일곱 번째 안식년과 희년의 일치를 주장하는 49년설을 이야기 했다.
셋째, 희년이 49년째에 선포되었다는 견해
Hoenig와 Wenham은 희년을 49일의 '도약된 점핑된 해'(leap year)로 제안을 했는데 제 2성전기의 월력에서 희년에 사라진 것은 이 견해를 뒷받침해준다고 보았다. Box는 창세기에서 출애굽기 14장까지의 역사를 49주기로 등분하여 재구성한 가경중의 하나인 'The Book of Jubilees'의 저자가 50에 대한 이해를 49로 하여 역사를 49등분하여 기록한 것을 주목하면서 일곱 번째 안식년과 희년의 동일성을 이야기 한다. Morgenstern역시도 'The Book of Jubilees'의 49주기를 주목하면서 마키비와 마카비후기에는 희년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했다. Heinisch, Reventlow, Elliger, Cardellini, van Selm, Kugler 그리고 Noth와 같은 학자들은 히브리인들이 날짜 계산시에 마지막 숫자에서 처음 숫자를 빼고 남은 날수를 계산하는 히브리 계산법을 염두에 두면서 49년설을 지지한다. 즉, 히브리인들은 7일에서 12일 사이에는 6일이 아닌 5일이 있는 것으로 계산한다. Vaccari는 또한 고대 로마의 월력에서 희브리 계산법과 비슷한 자료 즉, 이틀전이라는 것을 'tertio calendas'로 표현한 것을 들어 49년설을 이야기 한다. 한편 Kaufmann은 '요벨'과 고대 바빌론의 'misarum' 선포를 비교하면서 희년은 49년에 선포되었다고 했는데, 현재 희년주기의 마지막 해는 다음 희년 주기의 첫해가 되어진다고 보았다. Hartley는 만약에 단 9:24절의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에 나타나는 490년을 10번째 희년이라고 본다면, 일곱 번째 안식년이 희년이라고 하는 견해를 지지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50이라는 숫자는 실제적인 특별한 월력을 나타내는 숫자가 아니고 상징적인 것이라고 보았으며, 희년은 다른 안식년들과는 달리 일곱 번째 안식년을 구별하기 위한 특별한 표식이라고 보았다. Stone은 50년은 두 월력 체계 즉, Sun과 Moon력의 상이한 길이에 의해서 발생되어지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그는 희년을 두 월력사이의 차이를 조절하기 위한 Moon력에 부가된 길이의 시간으로 보았다. Klostermann역시 두 월력사이의 차이점을 보면서 49번째 Sun year는 50번째 Moon year의 이어지는 달 수로 보았다. 그러므로 49년의 Sun year 시작은 50년의 Moon year의 후반기 시작이 되는 것이다. 즉, 50년 Moon year는 49년 Sun year 일곱번째 달 열흘째 되는 날에 끝나게 되는데 이때 희년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희년선포 시기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은 확실한 희년 선포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에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으나, 다니엘서의 490년에 대한 해석과 중간기 가경인 'The Book of Jubilees' 저자의 희년의 49주기 이해나 Sun-Moon 월력의 차이는 49년째 희년 선포를 더 지지해주고 있는 듯하다.
3. 레위기 25장의 안식년법과 희년법
3.1. 서 론
레위기 25장에는 세가지 희년규례 즉, 땅의 휴경과 노예해방 그리고 토지의 원주인에게로의 반환을 규정하는 조항들이 나타나 있지만 부채탕감에 대한 규례는 언급이 없다. North나 Noth와 같은 학자들은 부채에 대한 용어의 언급은 레위기 25장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너의 형제가 가난하게 되면...' (25a, 35a, 39, 47a)과 같은 조건절을 들어 25장이 부채탕감의 조항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Elliger와 Wenham과 같은 대다수의 학자들이 말하듯이 부채탕감에 대한 특별한 규례를 레위기 25장에서는 찾아볼 수 가 없다.
3.1.1. 레위기 25장의 구조
레위기 25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으로 즉, 하나는 2-7절의 안식년과 그에 따른 규례들이며 다른 하나는 8-55절의 희년과 그에 따르는 규례들로 구분할 수 있다. Hartley는 조금 다르게 레 25장의 구조를 보고 있는데, 그는 2-22절의 안식년과 희년의 월력과 몇몇규례와 23-55절의 희년과 관련된 부속규례들로 나눈다. 특별히 그는 희년을 'a high sabbatical year'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 두 구조가 밀접히 연관되어져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후반부에 등장하는 세가지 규례 즉, 땅의 매매와 대여 (23-34절),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대부 (35-38절) 그리고 부채로 인한 노예해방 (39-55절) 등의 규례등은 그 각각의 계약만기 시점을 모두 희년에 두고 있다고 하는 사실과 가난-대부-기업을 잃음-노예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관련성 때문에 이 세가지 규례들은 희년에 밀접히 연관되어져 있는 규례들이라고 이야기 한다.
3.1.2. 안식년에 관한 규례 (레 25: 2-7)
이 안식년 법에 관한 규례에서 우리는 안식년 법들의 기초가 되고 있는 땅에 대한 여호와의 소유권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Henry는 이 법이 출애굽기 23:10-11절과 아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레위기의 이 규례에서는 아주 독특한 동기가 발견되어진다고 이야기 한다. 즉, 출애굽기 23:10-11절에는 가난한 자들이 경작하지 않는 땅에서 자연히 자라난 곡식들을 먹을 수 있게 한 인도주의적인 사회적 기능을 볼 수 있는데 반하여, 레 25:4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는 안식의 개념을 통하여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는 종교적인 동기롤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Wright는 Gordon과 Lemche의 견해에 동의 하면서 안식년 법이 고대 이스라엘에 하나의 제도(Institution)로서 정착하기전에, 이미 안식년 법의 개념과 그 실행에 있어서 분명한 종교적이며 제의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러한 안식년 법은 어떻게 지켜졌으며, 안식년의 양식의 종류와 용도는 무엇이었으며, 안식년 법의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A) 안식년은 개별적 혹은 부분적으로 지켜졌는가? 아니면 동시에 전체적으로 지켜졌는가?에 대한 학자들간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 Killian 과 Porter는 개별적인 안식년 즉, 돌아가면서 땅을 휴경하는 견해에 동의하는데, 이들은 돌아가면서 이루어지는 안식년은 농부들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안식년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둘째로, Ginzberg는 전체적인 땅의 휴경으로 말미암은 사람들의 굶주림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가나안의 정복이 같은 해에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언제 안식년이 지켜졌는지 결정할 수가 없다고 이야기 했다. 셋째로, Wright는 안식년 법은 가난한 자들과 들짐승들에 대해 인도주의적인(Humanitarian) 동기를 가지고 있는데, 전체적인 땅의 휴경은 이들로 하여금 더욱 어려운 시간을 가지게 할 것이라고 하면서, 땅의 휴경은 전체 농부들에 의해서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개별적인 농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적으로 돌아가면서 땅의 휴경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에 대해서 전체적인 안식년 즉, 땅의 휴경을 지켰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를 가진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첫째로, Wacholder는 안식년 법과 안식일 사이의 매우 밀접한 성격과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안식일 법이 모든 백성이 동시에 전체적인 준수를 했다면, 안식년도 동시적이며 전체적인 준수를 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둘째로, Safrai와 Eisenstein은 만약에 개별적인 안식년의 준수가 이루어진다면 희년의 계산에 아주 치명적인 혼선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을 했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안식년의 준수는 모든 지파가 각각 땅을 분배받은 뒤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셋째로, Paton은 땅의 휴경와 노예해방과의 관계를 주시하면서, 특별한 부분적인 휴경은 땅의 주인으로 하여금 나머지 7분의 6에 해당하는 땅을 매년 농사지어야 하는 부담과 욕심을 주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노예해방을 시행하지 못하도록 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넷째로, 제 2성전 말기의 제 1 마카비서와(I Macc. 6:49, 53) 요세프스의 기록(Ant. XII. 377-378; Ant. XIV 475ff)의 역사적 자료들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음식부족으로 인한 기아가 도래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부분적인 휴경의 준수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다섯째로, 레 25:20절의 "혹 너희 말이 우리가 만일 제 칠년에 심지도 못하고 그 산물을 거두지도 못하면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에 있는 질문은 7분의 6의 농사를 지을 땅이 있는 상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물음이다.
이러한 안식년의 휴경법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와 역사적인 증거 그리고 성서 텍스트의 증거들은 부분적인 휴경보다는 전체적이며 동시적인 안식년 법 준수의 견해를 더 타당한 안식년 준수 방법으로 말하고 있다.
B) 안식년의 양식의 종류와 용도
레 25장에는 안식년을 위한 두가지 양식 즉, 레 25:5-7절의 저절로 자라난 양식과 레 25:20-22절의 저장된 양식이 나타난다. Noth와 Saith는 비록 안식년에 수확하는 것이 없다하더라도 전년도 수확기에 떨어진 이삭으로부터 저절로 자라난 곡물들이 양식이 되어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Hartford-Battersby도 이들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안식년에 곡식을 거두지 못하게 한 것은 상거래를 목적으로하는 일련의 수확들을 금지한 것이라고 간주한다. Brown, Driver 그리고 Briggs도 '떨어진'의 히브리어 어원적 접근을 통하여 이전 수확기에 우연히 떨어진 곡물들이 안식년에 자라난 것으로서 이것을 양식으로 사용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5절의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네지레'는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드리는 나실인의 모습중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민 6:2, 13, 18-21절), 이처럼 전혀 수확을 위한 노력이 들지 않은 포도나무 열매를 가르킨다. Ginzberg도 안식년에 저절로 자라난 곡물의 매일 양식으로서의 이용은 저자의 humanitarian적인 배려라고 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견해들을 볼 때 안식년에 사용된 양식은 전해에 저장된 양식과 저절로 자라난 곡물인데, 특별히 이 저절로 자라난 곡물은 가난한 자들을 비롯해서 필요한 사람들 모두에 의해서 상업적인 목적이 아닌 일용할 양식으로 사용되어졌음을 볼 수 있다.
C) 안식년의 기원
안식년의 원래적인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의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첫째 견해는 인도주의적인 관점이다. Weber와 Kugler는 휴경 즉, 안식년은 순수한 인도주의적인 관점을 반영한다고 했다. Eichrodt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떨어진 곡물뿐만 아니라 모퉁이에 곡물도 남겨놓으라고 한 레 19:9-10절에 주목하면서 the Holiness Code의 전반적인 인도주의적인 강조점을 말했다. 둘째 견해는 안식년의 제의적인 기원을 이야기 한다. North는 소유주의 땅의 소산물에 대한 권한포기를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방법으로 간주하면서 안식년 제의의 기원을 이야기 한다. 셋째 견해는 안식년의 농경적인 기원을 이야기 한다. Penderson은 땅과 사람과의 밀접한 관련성에 주목하면서 안식년의 농경적인 관점을 이야기 한다. 그는 토양의 성질에 대한 성경의 구절 즉,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욥 31:38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40절),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19-22절)을 언급하면서 땅의 본질상 자유의 시간 즉, 휴경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안식년의 기원에 대한 여러 견해들은 각각 어느 한 기원의 설명이 안식년 기원증거로서 필요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비록 안식년의 일차적인 초점이 인도주의적인 관심에 있다하더라도 다른 두 요소 즉, 제의적이고 땅에 대한 농경적인 관점도 또한 이 안식년 기원의 한 뿌리로 간주하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
3.1.3. 희년에 관한 규례들(레 25:8-22)
양의 뿔인 요벨은 희년의 일곱째달 열번째 날에 울려퍼졌다 (8-9절). 이 희년에 모든 백성들은 모든 빚의 탕감과 노예해방 그리고 그들의 원래의 기업으로 돌아가는 은혜를 포함한 자유의 선포를 받게된다 (10절). 희년의 목적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 각 지파의 견고성을 지키려고 했던 것으로서, 무름(redemption)에 관한 규례들은 유산의 소유와 개인의 자유를 지키게 하는 주요한 원칙들이었다.
야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애굽에서의 구출의 두가지 동기가 이스라엘 백성으로하여금 이와같은 해방의 규례들을 선포하게 만들었다. 다음 돌아오는 희년까지의 남은 햇수가 사고 파는 거래에 있어서 가격 결정의 중요한 요소였다 (15-16절). 이 법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착취하지 말아야 할 것과 야훼 하나님께서 충분한 양식을 주실 것이라는 권면도 가지고 있다 (20-22절). Hartley는 특별히 21절의 "내가 명하여 제 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년 쓰기에 족하게 할지라"에서 '나의 축복' 전에 있는 '명령하다'라는 단어에 주목하면서 이는 충분한 수확을 보장하는 야훼의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3.1.4. 땅의 회복에 관한 규례들 (레 25:23-34)
안식년 법전과 비교해서 희년 법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독특하게 보이는 규례는 레 25장에서만 발견되는 유산의 본래의 주인에게로의 회복에 관한 규례이다. 레 25장에는 6가지 유업의 회복에 대한 규례가 있다. 23절에 농경을 위한 땅은 팔수 없고 오로지 임대만이 가능하며, 25절에는 가난으로 말미암아 그의 유산을 팔 수밖에 없는 형제를 위해서 근족의 구제의 의무를 명시하고 있으며, 26절 하반절에는 근족이 없는 원주인이 땅을 다시 사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29-31절에는 집에 대한 규례로 성곽안의 집과 시골에 있는 집의 거래에 대한 규례와, 32절에 레위인의 재산에 대한 특별규례등이 그것들이다.
3.1.4.1. 땅의 거래에 대한 규례 (레:23-28)
이 구절들에는 야훼의 땅에 대한 소유권과 모든 가계의 유산에 대해서 무를 수 있는 권한에 대해서 다시금 규정하고 있다.
A) 땅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소유권
땅의 소유주가 임차인과 농경지에 대해서 일정기간 계약을 체결하는 것과 같이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맺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의 진정한 주인은 야훼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자 한 것이었다. Wilkie는 야훼의 명령하에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사건은 땅에 대한 야훼의 주권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이야기라고 보았다. 이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팔레스타인에서 야훼의 땅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게 만들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Fager는 특히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한 23절에 대해서 모든 희년법규의 궁극적인 기초 (the ultimate moral basis or the cornerstone of the Jubilee) 라고 했다. 그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한 뒤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준 야훼 하나님께서 그 땅과 그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유주라는 것이 모든 희년법규 시행의 동기가 되는 신학적인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히브리 성경 원문에는 땅이 주어이며 미완료 수동형의 동사(닢알 3인칭 여성 단수)가 사용되어져 있기 때문에 '토지는 영원히 팔릴 수 없다'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지며, 이것은 곧 이어지는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고 하는 야훼 하나님의 선포와 더불어 토지는 인간이 자의적으로 팔고 살 수 없는 야훼 하나님의 것임이 더 강조되어 나타난다. 이 히브리 성경 구절의 번역본들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개역성경),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 (표준 새번역), "The land must not be sold permanently, because the land is mine and you are but aliens and my tenants" (NIV), "The land shall not be sold in perpetuity, for the land is mine; with me you are but aliens and tenants" (NRSV), "The land shall not be sold permanently, for the land is Mine; for you are strangers and sojourners with Me" (NKJV), "The land shall not be sold for ever: for the land is mine, for ye are strangers and sojourners with me" (KJV).영문성경들이 이 문장을 땅을 주어로 하여 수동으로 번역해 놓은 것과는 달리, 개역성경을 비롯한 한글성경들이 능동형으로 번역해 놓은 것은, 토지와 직접관련을 가지고 있는 이용주체에 강조를 두고 번역을 한데 기인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개역성경에서도 곧 이어지는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고 하는 문구가 명확히 야훼 하나님의 토지 소유권에 대한 선언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개역성경도 궁극적으로는 23절의 문맥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Hartley는 '하에레쯔'가 23절 문장 첫머리에 쓰인 것은 강조를 위함이라고 보았으며, Hogg는 개역성경 '영원히'에 해당하는 '쯔미투트'를 'without right of redemption' 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문맥의 이해들은 야훼 하나님의 토지에 대한 궁극적인 소유권을 더욱 잘 말해주는 생각들이다. 23절에 하나님과 함께 쓰여진 두 개의 히브리어 즉,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는 노예의 상태에 대해서 쓰여지곤 했던 단어들인데, Wright는 이러한 두 단어를 가나안인들이나 이주민들의 후손을 언급하는데 쓰였다고 보았다. 그들은 단지 땅을 소유하지 못한 거주하는 고용인들로서 주인에게 그들의 노동력을 주었다.
B) 근족의 기능
근족의 책임은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라고 한 25절에 나타나 있다. 즉, 근족은 '기업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는 사람을 구원해줄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가리킴을 보여준다. Noth는 '고엘'에 대해서 그는 그 자신을 위해서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으며, Hubbard는 부채로 인한 모든 노예들이 희년에 그들의 지위를 회복할 때 야훼께서 그들의 근족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또한 Ginzberg는 고엘의 기능에 대해서 넓은 가족의 범위안에 그 기업을 둠으로 해서 가족의 견실성을 지키려는 수단으로 보았으며, 한편으로 Buhl은 이 고엘의 기능을 개인의 기능으로 보기보다는 그 사회의 집단의 기능으로 보기도 했다. 이러한 각 가족의 유산을 최소한 친족의 소유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고(룻 4:9절) 예레미야가 하나멜의 땅을 사는 것(렘 32:6-15절)에서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규례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조상이 물려준 기업을 팔아야만 했을 때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기업의 친족안에 머무름을 위해서 사야하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근족의 제도를 보면서 Bellefontaine은 이스라엘 사회의 구조는 그들의 땅에 대한 태도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엘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도 희년이 가까워 짐에 따라 땅의 가격이 내려가기 때문에 수년이 지난 다음에는 그 잃었던 땅을 다시 살 수도 있었다 (26-27절). 따라서 원래의 주인이 그의 땅에 대한 소유권을 회복하는 길은 고엘을 통해서나, 그것을 얼마뒤에 다시 사든지, 아니면 희년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3.1.4.2. 집의 매매에 대한 규례 (레 25:29-34)
(A) 성곽안에 있는 집과 시골에 있는 집 (레 25:29-31)
일반백성의 집에 대한 두가지 종류의 규례가 있다. 성곽이 없는 마을에 있는 집들은 팔린 후 언제든지 무를 수가 있었으며, 희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원주인에게로 회복이 되어진다 (31절). Kellog에 따르면 성곽이 없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목자들이거나 농부들이었기 때문에 목축과 경작을 위해서 그들의 집들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므로 성곽이 없는 마을의 집들은 희년법의 적용을 받게 된 것이다.
반면에 성곽안에 있는 집은 팔린 뒤 일년안에 무르지 않으면 무를 수가 없었다 (29-30절). 다른 말로하면 언제든지 무를 수 있는 권한이 성곽안에 있는 집들에게는 적용이 되어지지 않았다. 성곽안에 있는 집들이 희년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이유는 희년의 규례들이 농경에 사용되어지는 땅들에만 적용되어졌기 때문이다. Sulzberger는 성곽안의 경제제도와 시골 땅의 경제제도의 차이점을 보면서 귀족들은 성곽안에 있는 재산들을 영구히 살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으로 레위기 저자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으로부터 나온 견해로서 Ginzberg는 저자의 부자와의 타협책의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상업적인 이익 때문에 성곽안의 유업의 배제가능성을 이야기 하기도 했다.
(B) 레위인들의 집들과 그들의 재산 (레 25:32-34)
레위인들은 언제든지 그들의 도시에 있는 그들의 집들을 무를 수가 있었다 (32절). 또한 레위인들의 성에 있는 그들의 집은 그들의 유업이었기 때문에 희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회복이 되었다 (33절).
3.1.5.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빌려주는 대부에 대한 규례 (레 25:35-38)
이자의 종류에는 돈을 빌려주는 것과 관련이 있는 '네섹'이라고 하는 것과 음식을 빌려주는 것과 관련이 있는 '타르빗' 혹은 '마르빗'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자는 이스라엘 백성사이에서는 늘어나는 이자로 인해서 가난한 자들이 노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금지되었다 (36절). 이러한 규례들의 정신 역시도 야훼 하나님에 의해서 애굽의 속박에서 놓여난 출애굽 정신과 관련이 있다 (38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곤경에 처한 형제들로부터 이자를 받는 대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다 (35절). 그렇지만 Noth는 이법과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라고 한 출 22:25절의 초점이 가난한 자들이라는데 주목하면서 구약성경의 규례들이 이자를 받는 대부를 반대하지 않았다고 하며, 이러한 이자를 반대하는 규례가 돈을 빌려주는 모든 상황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3.1.6. 부채에 의한 노예에 관한 규례 (레 25:39-55)
희년의 마지막 규례는 노예해방에 관한 규례이다. 노예와 함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년이 되어 요벨이 울려퍼질 때 그 노예들을 놓아주었다. 그러면, 노예들은 그들의 지파와 유산인 그들의 땅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이 규례의 동기도 역시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바 나의 품군인즉 종으로 팔리지 말 것이라"고 한 레 25:42절의 애굽으로부터 구속한 야훼 하나님을 기억하는데에 있다. 노예해방에 관한 이 희년법은 다음과 같은 규례들을 말하고 있다. (1) 노예를 다루는 방법 즉, 가혹하지 않고 고용된 일군을 다루듯이 친절하게 (39-40a, 43, 50c, 53절), (2) 노예해방의 기간 (40a-41절), (3)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규정 (44-46절), 그리고 (4) 이방인과 이주민에게 팔린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규정 (47-55절)등이 그것들이다.
노예가 되는 원인들은 풍족하지 못한 수확, 전염병, 질병, 다른 어려운 상황등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너는 그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너의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한 43절은 주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심하게 다루거나 지배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40절의 "품군이나 우거하는 자같이 너와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는 그 노예들의 성격과 조건에 대해서 '고용된 일꾼들' 이나 '우거하는 자'라고 묘사 했다. 고용된 일꾼들로서의 지위를 갖는 노예들은 집들과 얼마간의 땅과 같은 것들이 함께 제공 되었다. 그러므로 Fuchs는 "이스라엘 백성들사이에는 전혀 노예가 없었다......단지 때때로 자유를 잃었을 뿐이다."라고 했다. Buhl 역시 "이스라엘 백성은 팔리기 보다는 일정기간동안 부림을 당할 수 있었다."라고 했다. 한편 Noth는 레 19:13절과 신 24:15절의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의 고용된 일꾼들에게 해가지기전에 품삯이 주어진 것에 주목하면서, 해마다 노예들에게 고용된 일꾼처럼 임금이 주어졌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Wolf, Reviv, de Vaux 그리고 Driver와 Miles같은 학자들은 다른 고대 근동의 법률 모음집들과 계약서등을 보면서 고용된 일꾼들의 의무는 목수, 대장장이, 보석공 등과 같은 숙련된 노동자들의 특별한 일들이었다고 했으며, Warhaftig 또한 노예주는 노예와 맺은 계약외의 일들을 그들에게 시킬 수 없었다고 보았다.
48-49절의 "팔린 후에 그를 속량할 수 있나니 그 형제 중 하나가 속하거나 삼촌이나 사촌이 속하거나 그 근족 중 누구든지 속할 것이요 그가 부요하게 되면 스스로 속하되"에서 쓰인 근족의 범위는 25절에서 쓰여진 근족의 범위보다 더 넓은 범위를 나타내고 있다. Japhet은 또한 주인과 종과의 관계를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과 그들 각각의 하나님의 관계로서 보았다. 그녀는 이러한 종교적인 개념이 땅과 노예들의 구속을 위한 규례들을 하나의 사회 복지를 위한 제도로서 묵어주게 된다고 보았다
* Reflections on the Stipulations of the Sabbatical Year and of the Jubilee Year
레위기 25장에 나타나 있는 안식년법과 희년법의 규례는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몇가지 깨닫게 하는 바가 있습니다. 애굽 노예신분에서 하나님의 자유한 백성으로 바꾸어주신 것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들의 죄인된 몸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됨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며, 야훼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가나안 땅의 복된 선물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날마다 주시는 커다란 은혜들이며, 출애굽과 야훼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가나안 땅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더불어 살게 하신 안식년 법과 희년법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의 은혜를 받고 그 분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땅에서의 그 분의 나라를 위한 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과 행함을 요청하시는 말씀임을 깨닫게 합니다.
희년사상의 현대적 적용을 하려고 하는 노력의 첫째 근거는 신학적인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을 얻은 모든 이들에게는 '그러면 이땅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신학적 전거는 '이 땅도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희년사상은 이 물음에 대한 실천을 위한 고민의 한 대답으로 삼을 수 있는 규례이기 때문에 그 적용성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천당'식의 복음 전도가 잘못되어서라기 보다는, 시대마다의 사명이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한다면, 오늘의 믿는 우리들에게는,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고 하는 행함의 방법과 표현은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비율적인 균형이 아닌, 온전한 믿음은 온전한 행함으로 열매를 맺게되는 것이 말씀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희년사상의 현대적 적용의 둘째 근거는 희년법의 이른 기원에 대한 견해입니다. 희년법 기원에 대한 논의는 분분합니다. 아주 이른 연대기를 주장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은 바벨론 포수기 이후 제사장계열의 문서편집기에 첨가되고 신학화되어진 사상이라고 보는 편이 있습니다. 후자를 취하면 희년사상은 단순히 메시야 도래시에 이루어지게될 유토피아적인 해석을 하게 되어 본질적으로 인간이 이룰 수 없는 규례들이 되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희년사상의 이른 연대기를 주장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고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 이른 연대기는 희년사상이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닌 실제적인 사회적용을 위한 규례였음을 보여주는 견해입니다. 먼저는 레위기에 나오는 희년을 나타내는 '요벨'을 비롯한 4가지 중요한 단어들은 후기 성서에 관련된 문헌들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운 단어들인 반면에, 고대 우가릿어 'mk'나 'samid adi dariti'에서 그 기원을 찾게 되어지는 것은 이 희년사상의 초기 발생설을 지원해주는 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고대근동에서 시행된 노예와 부채의 탕감에 대한 실제 사례들과의 여러면에서의 유사성은 초기 발생설을 주장하게 되는 또 다른 설명입니다. 이러한 초기 발생설은 희년규례가 단순히 유토피아를 지향한 실현할 수 없는 규례가 아니었으며,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실제적인 실현을 위한 규례였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정의를 위한 규례를 어떻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적용하느냐는 그 당위성에 있어서는 정당합니다. 하지만, 각론적인 실천을 위해서는 여러면에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분석하고 적용해야 하는 우리모두의 노력과 지혜가 필요한 일입니다. 안식년과 희년법 규례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따라 행함으로 옮기게 하는 것은 그 어느 길보다도 지극히 좁은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의 발을 내딛을 때 우리들에게 기쁨으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가 또한 있음을 말씀하시는 약속의 말씀을 믿으며 새 힘을 얻게 됩니다.
희년의 공동체
레 25:1-13 / 배영진 목사
오늘은 희년의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희년의 공동체를 꼭 마음에 새기고 가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가장 복주시려는 것, 가장 멋지고 거룩하게 백성들을 세워가실 아이디어였습니다. 희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쁠 희 자를 써서, 기뻐하는 해입니다. 히브리어로 희년을 ‘요벨’이라고 하는데, 요벨이란 양의 뿔이라는 뜻입니다. 희년이 되면 양의 뿔나팔을 붑니다. 희년은 안식년이 일곱번 지나 49년이 끝난 그다음 50년째 되는 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매50년마다 희년이 옵니다. 50년만에 오는 대축제입니다.
오늘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명하신 이 희년을 실현하고 순종했다면 엄청난 축복과 평강을 누리고 맛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거룩함을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열방 다른 나라들과 구별되게 살아라. 출애굽으로 구원받은 내 백성들아 너희는 이렇게 한번 살아보라, 그러면 내가 하늘을 열어주고 말할 수 없는 풍성한 수확을 주겠다! 이 약속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희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믿고 구원받았다, 이건 절대천국가는 티켓 한 장 따는 게 아닙니다. 예수믿고 구원받았다면 그것은 절대로 끝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뭐가 시작일까요? 세상사는 사람들과 다른,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노예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구원해요. 그 다음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목표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 그 핵심이 오늘 희년의 공동체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다른 나라들과 차원이 다르게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라. 레위기 25장 희년은 이스라엘의 구별됨, 거룩함이 뭔지 클라이막스가 나옵니다. 가나안땅에서 너희가 어떻게 경제적 나눔을 실현하고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경제활동입니다. 너희가 먹고사는 일, 돈벌고 사는 일,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라, 구별된 공동체를 만들어라 이것입니다. 공동체를 만드는 원리는 뭐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하라. 그러니까 열한지파가 각각 하나님의 땅을 기업으로 받아서 농사짓고 사는데, 시간이 흘러 부자도 나오고 가난한 자도 나옵니다. 그런데 매50년마다 희년이 되면 이스라엘에게 두가지를 순종하라고 명하십니다. 희년이 되면 나눔을 시행하라. 희년이 되면 자유를 선포하라.
희년은 나눔의 해다. 희년은 자유의 해다.
오늘 1절부터 보면 안식년이 나옵니다. 안식년은 매7년마다 오는 해를 말합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같은 사상입니다. 매 7일마다 오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매 7년이 안식년입니다. 안식년이 일곱번 지나면 희년이 옵니다. 하나님은 일곱이라는 숫자를 완성, 온전함, 하나님의 안식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안식년이 되면 두가지를 하라고 하십니다. 땅을 쉬게 합니다. 빚을 면제해줍니다. 2절 나 여호와가 쉰다. 그러니까 땅도 쉬게 하라 하십니다. 안식년은 하나님이 쉬는 해예요. 4절 나 여호와가 쉰다. 땅도 반드시 쉬게 하라. 6절, 그러면 그 다음해에 땅이 풍성한 먹거리를 주리라. 신명기 15장으로 가보면 안식년에 또 하나 할 일이 뭐냐? 여호와의 면제년, 빚을 면제해주라는 겁니다. 모든 부채 무상탕감! 그래서 이스라엘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8절 보면 희년이 나옵니다. 안식년이 일곱번 지나고 49년 다음해 50년째입니다. 안식년의 안식년입니다. 희년에는 전국에 양각나팔, 양의 뿔로 된 나팔을 불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두가지를 하라 하십니다. 다같이 10절 한번 읽어봅니다. 엄청난 얘기가 나옵니다. 첫째, 이스라엘은 자기의 본래 기업, 땅을 되찾습니다. 자기 땅을 찾는 겁니다. 둘째, 이스라엘은 모든 자기 종에게 해방을 선포합니다. 자기 자유를 되찾는 것입니다. 토지개혁과 노예해방, 이것은 엄청난 명령입니다. 이건 그야말로 당시 고대사회 문맥에서 이스라엘을 제외한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감히 꿈도 못꾸는 최고의 경제개혁운동입니다. 다른 나라는 이런 생각 자체를 할 수도 없어요. 이런 발상이 불가능한 시대입니다. 내가 합법적으로 산 땅을 본래주인에게 돌려준다. 내 종을 그냥 풀어준다. 이것이 상상이 가는 일인가요? 그러니까 희년은 지금 봐도 대단히 엄청난 토지개혁이자, 인권해방 선언입니다.
구약성경의 이런 면을 볼 때 이걸 갖고, 학자들이 성경을 인간이 만든 책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이것저것 꾸며 정교한 사상으로 만들어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도저히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안됩니다. 당시 고대 이집트나 가나안이나 블레셋, 시리아, 그 이후 앗수르나, 바벨론, 어떤 제국도 이런 제도가 없습니다. 이런 정도로 획기적이고 엄청난 토지개혁 제도를 찾아볼 수 없어요. 다른 나라가 상상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럴까요? 그럴 이유가 명확히 있습니다. 세상 모든 나라 제도는 다 똑같은데 그게 뭘까요? 강한 자 중심, 가진 자 중심, 이긴 자 중심, 힘센 자 중심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 모든 나라는 가진 자 있는 자 중심입니다.
그런데 오늘 희년을 명하신 하나님의 공동체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어가시는 이스라엘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가리켜 다르다, 구별된다, 거룩하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시내산언약에서 이미 십계명에 다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구별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특징은 뭔가요? 세상나라와 완전히 다릅니다. 이 목표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약자배려, 약자중심, 약자보호법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부자에게 굉장히 강조하십니다. 너희 중 가난한 자들을 너희가 품으라 하십니다. 기득권층들에게 과감하십니다. 너희 강자들아 약자들과 나누라고 하십니다. 열한 지파 얘기에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늘 했지요. 열두지파중에 땅이 없는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그래서 땅이 있는 열한지파가 농사를 지어 수확하면 누구를 먹이라고 했습니까? 땅이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라. 배려하고 나누라. 이것입니다. 그것이 레위지파, 그리고 당시 사회적 약자들, 고아 과부 나그네 종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꿈꾸신 거룩한 공동체예요. 삼위일체 하나님 공동체를 이땅에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얼마나 서로 사랑하면 매50년이 되면 자기들 모든 땅을 본래대로 개혁할까요? 얼마나 사랑해야 50년이 되자마자 자기 종들을 다 풀어줄까요? 이게 하나님의 성품이어서 그렇습니다. 희년은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한 공동체를 위하여 힘껏 일하고 강하게 되고 수확많이 할 필요가 없나요? 하나님은 약자중심, 약자보호니까, 가능하면 우리가 약자로 살아야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열심히 힘을 기르고 농사도 짓습니다. 목축도 하고 재산을 늘리고 해서, 가능하면 힘있는 자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뭔가요? 공동체를 만들라. 이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내가 실현하자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되어 약한 자를 돕는 것입니다. 힘을 길러서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나라는 거룩한 나라,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겁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공동체를 세상에서 드러내는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이 말씀에 순종했다면 제50년 희년이 되면 뭘 했을까요? 양각나팔을 전국에서 불어요. 그러면 각 집집마다 두가지 명령에 순종을 합니다. 자기 토지문서를 갖고와요. 자기 집 소작농이 된 사람들을 다 자기 집에 불러요. 그 토지문서에 내 이름이 등기되어있는 것을 지워버리고, 그 땅의 본래주인에게 등기문서를 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만 해도 엄청난 감동의 물결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자기 집 종들을 다 불러요. 종들도 문서가 있거든요. 종들을 다 불러서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고 한 사람씩 축복해주고, 자유를 선포해줍니다. 종들이 주인의 해방선언을 듣고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아마 주인과 종들이 서로 껴안고 어쩔줄 모르고 감격할 것입니다. 주인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기쁨, 종들은 주인의 이 긍휼과 자비에 고마움에 어쩔 줄 몰라 기쁩니다.
가난한 자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땅을 되찾는 것입니다. 남의 종의 신분으로 살았는데, 자유민 신분을 되찾는 것입니다. 아마 가족들이 남의 집 종으로 뿔뿔히 흩어졌다면, 희년에 다같이 집으로 돌아와 만나는 기쁨이 엄청났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모두가 자기 땅을 되찾고 이스라엘 모두가 자유를 얻어 자기 가족에게도 돌아간다. 희년은 바로 해방과 자유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누가 순종을 해야 이게 가능합니까?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 누가 순종해야 이게 가능합니까? 이스라엘 부자들이 기꺼이 그렇게 해야만 희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 공동체를 거룩하고 아름답게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디자인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들에게 뭘까요? 이것이 바로 엄청난 복음이 됩니다. 가나안 땅의 약자들에게 엄청난 축제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재산과 인권이 매 50년마다 재분배되는 시스템입니다. 그렇게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누구나 자기 땅을 되찾는다, 이것이 기업무르기, 다시 말해서 구속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가알이라 하고 기업무르는 사람을 고엘이라 합니다. 고엘은 구속자, 주님이 우리 구속자이십니다. 그러니까 남의 땅으로 넘어가버린 가난한 약자에게 누군가가 찾아가서 자기 돈으로 그 땅값을 치르고 사서 그 약자 본인에게 땅을 되찾아주는 겁니다. 이것이 가알, 영어로 Redeem이라 합니다. 희년의 참된 의미는 구속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이미 남의 땅이 된 본래 내 땅, 내가 가난해져서 팔아버린 내 땅, 내 힘으로는 다시 내 것으로 할 수 없는 상황, 그런데 누가 값을 치르고 그땅을 나에게 돌려준다, 뭘까요?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인 것이죠. 이렇게 좋은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살다가 어쩔 수 없이 가난해져 할 수 없이 남의 종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내 몸값을 지불하고 나를 자유민으로 선포해준다, 이것이 뭘까요? 복음입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소식, 그런데 이것이 바로 희년의 메시지입니다. 너희는 본래 땅으로 돌아간다. 너는 이제부터 자유민이다! 자 이스라엘이 거룩한 나라가 되어, 이 하나님의 아이디어, 희년에 순종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하늘이 열립니다. 너희가 순종하면 하늘이 열리리라. 순종하는 인생은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항상 명확합니다. 이스라엘의 기득권층들에게, 그동안 너희가 열심히 벌어서 합법적으로 너희 것으로 모아들인 땅, 이제 그땅의 원주인에게 다 돌려주고, 너희 집에 종이 된 자들을 다 해방시켜 풀어주어라.
여기에 순종하는 부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희년을 선포한 부자, 땅도 돌려주고 종들도 풀어주고, 그러면 그 부자 이제부터 가난하게 될까요? 다 내주고 나니까 자기 집 곳간이 텅빌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순종하는 사람을 보셔요. 그러면 가만 계실 리가 없습니다. 그 다음 해 하늘이 엄청 열리고 엄청난 풍년이 찾아옵니다. 왜? 순종했으니까! 순종한 자는 하나님이 하늘을 활짝 열어주십니다. 이것을 경험해본 사람은 이게 얼마나 축복이 열리는 삶인지를 간증할 것입니다. 이거 경험을 안해본 사람은 못합니다. 어이구야 살 떨려요. 내 땅인데, 절대로 못돌려줍니다. 내 종들 어떻게 그냥 풀어주나? 순종을 못합니다. 오늘 13절까지만 읽었습니다만, 14절 이스라엘이 희년의 공동체를 하지않을 경우를 경계하십니다. 희년을 앞두고 부자들이 욕심을 부릴 수가 있어요. 부당한 이익을 많이 남기려고 인간적인 수를 쓰려는 사람들 꼭 있습니다. 그거 하지말라! 이 말씀을 하십니다. 욕심이 작동할 것을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슬픈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희년이 제대로 선포됐을까? 슬프게도 그런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바알신앙 때문입니다. 여러분 알듯이 솔로몬 이후 나라가 둘로 찢어집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눠집니다. 북이스라엘에 바알신앙이 들어옵니다. 바알신앙은 탐욕의 종교입니다. 바알신앙을 가진 이스라엘이 안식년이 왔을 때 빚 면제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희년이 왔을 때 땅을 본래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습니다. 종을 풀어주지 않습니다. 누가 희년을 거부했을까요? 강자들, 부자들, 기득권층들입니다. 부자들의 담합, 약자들을 괴롭히고 빼앗습니다. 특히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이세벨을 보세요. 탐욕의 사람들입니다. 이세벨은 아합이 욕심내는 나봇의 포도원을 계략을 써서 빼앗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남유다에 시집을 옵니다. 바알신앙이 들어왔습니다. 그때부터 남유다도 부자들이 탐욕의 종교로 들어갑니다. 부자들이 담합을 하여 약자의 재산을 빼앗고 유린했습니다. 이사야 시대를 보면 유다왕국이 강자들과 부자들과 제사장들이 담합하여 가난한 자들의 머리를 맷돌질하며, 기득권층 부동산과 재물을 탐하고 자기들의 재산을 넓히고 약자를 짓눌렀습니다.
구약성경 사사시대에 ‘희년 공동체’ 같은 일이 나옵니다. 룻기를 보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부자요 유력한 보아스가 룻의 기업, 땅을 되찾아주는 일이 나옵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자기 땅을 팔고 모압땅으로 갔다가 완전 망해버립니다. 완전 가난해져 돌아오는데 그때 모압여자 이방여인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옵니다. 그때 보아스가 나오미의 땅을 자기 돈으로 지불하고 나오미와 룻에게 돌려주고, 더군다나 모압여인 룻을 신부로 맞아 결혼을 합니다. 여기서 보아스가 룻에게 기업무를 자, 곧 구속자가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 희년의 공동체의 주인은 누구냐? 구속자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죄의 종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우리의 구속자이신 독생자가 오셔서, 자기 몸으로 죄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복음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내게 죄의 종 신분을 면제해주고,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민이 되게 하셨습니다. 레위기의 주인공은 구속자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내 인생에 희년을 선포하신 분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가나안땅에 데리고 가셔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너희는 거룩한 공동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제7년이 되면 빚을 면제하라. 제50년이 되면 희년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희년의 공동체, 이것을 명하신 하나님의 뜻을 오늘 우리가 헤아려봐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 저 사람이 안가진 것을 내가 가졌으면 그것을 나누자. 나는 건강하고 저 사람은 아프구나, 그러면 그를 위로하자. 여러분 이것이 거룩한 삶이고 구별된 삶입니다. 약한 이웃을 위하여 뭔가를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나는 좀 여유가 있는데 저 사람은 어렵다, 그러면 뭔가 그와 나누는 것입니다.
이 희년의 공동체가 신약교회 AD 1세기때 예루살렘 초대교회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믿은 이들 공동체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을 깨닫고 서로 사랑했습니다. 아무도 제것을 제것이라, 하는 이가 없더라 그랬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니 기쁨과 감격과 감동이 작동했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약자들에게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희년의 공동체가, 구약시대 보아스가 룻에게 해준 일 정도였는데, 희년의 공동체가 신약시대 예루살렘 초대교회때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희년의 공동체를 여기 실현하면 좋을까요? 나눔입니다. 탐욕이 아니라 나눔입니다. 내것을 이웃과 나누는 일이 희년입니다. 여러분이 순종하면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의 인생에 가만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희년의 공동체, 여기에 순종하면 반드시 하늘이 열리는 인생이 됩니다.
거룩한 땅과 거룩한 백성
레위기 25:1-13 / 스데반황 목사
하나님은 땅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땅은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살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란 ‘이 땅’에 세워지는 하나님의 통치로서 인자, 즉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임할 새하늘과 새땅은 하나님의 통치가 죽임 당하신 어린양 예수님을 통해 온 우주에 영원토록 서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이전의 세상이 죄악으로 온통 가득하게 되자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만들게 한 후에 이 땅에 거하는 모든 호흡 있는 것들을 홍수로 쓸어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대한 성경의 묘사를 보면 땅에 대한 언급이 뚜렷합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1-13).
그후 노아의 방주를 탄 여덟 사람이 홍수가 지난 후에 이 땅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땅인 새하늘과 새땅에서 그 땅을 밟게 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얻은 자들이 그 땅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즉, 죄에 물든 사람 및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는 그 어떤 사람도 영원토록 새땅을 밟지 못할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로 가득한 이 세상 가운데 가나안 땅을 정하여 거룩한 땅을 만들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사는 거민들을 몰아내고 하나님께서 택한 야곱의 족속, 즉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그 땅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따로 택하여 거룩하게 구별하셨고, 그 곳에 살던 악한 자들을 몰아내시고 거룩한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그 땅에 두신 것입니다.
레위기는 거룩에 대한 책인데 신기하게도 땅에 대한 언급이 대단히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땅을 줄 것을 약속하시며 그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너희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룩하게 구별하신 가나안 땅에 머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특히 성적인 죄는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최고의 죄악으로 치부하십니다.
레위기 18장을 봅시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4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은 애굽 및 가나안 족속이 행하던 풍속과 규례 중에 근친 상간의 죄악, 몰렉 우상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죄악, 동물과의 성관계, 동성 연애 등을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주의 택한 백성은 절대로 이러한 세상의 풍습과 규례를 따르면 안 된다고 명합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레 18:24-25).
“그러므로 너희 곧 너희의 동족이나 혹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나 내 규례와 내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의 하나라도 행하지 말라. 너희가 전에 있던 그 땅 주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이 가증한 모든 일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가 들어가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따름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8:26-30).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중에 흥미로운 점은 죄와 땅의 관계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땅이 황폐하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거룩한 땅에서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 땅이 사람을 토하여 내칩니다. 따라서 그 땅에서 죄인들은 백성 가운데 끊어지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은 죄악을 범하는 자가 거룩한 땅에 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새하늘과 새땅에 죄가 있는 자가 거하지 못하고 불못에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레위기 26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하지 않는 백성을 향한 주님의 징계가 단계별로 나타나 있습니다.
레위기 26장 14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14 그러나 너희가 내 말을 잘 듣지 아니하고, 내 명령에 복종하지 아니
하며 율법과 명령을 따르지 않고, 내 언약을 어기면, 내가 너희에게 끔찍한 벌을 내릴 것이다. 너희에게 폐병과 열병을 보내어 너희 눈을 어둡게 하고, 너희 생명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너희는 씨를 뿌려도 거두지 못할 것이며, 너희 원수가 너희 작물을 먹을 것이다. 내가 내 얼굴을 너희에게서 돌리겠고, 너희 원수가 너희를 물리쳐 이길 것이다. 너희 원수가 너희를 다스리겠고, 누가 너희를 뒤쫓지 않더라도 너희는 쫓기는 신세가 될 것이다.
레26:18 그래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 죄를 일곱 배로 벌할 것이다. 너희가 자랑하는 큰 성들을 내가 무너뜨리겠고,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며, 땅에서는 작물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아무리 힘을 써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너희 땅에서는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으며, 나무에는 아무 열매도 맺히지 않을 것이다.
레26:21 그래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 죄를 일곱 배로 벌할 것이다. 내가 들짐승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짐승들은 너희를 공격하며, 너희 자녀를 물어가고, 너희 가축 떼를 죽일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수가 줄어들고, 너희가 다니는 길도 텅텅 비게 될 것이다.
레26:23 이 모든 일이 있은 뒤에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나도 너희에게서 등을 돌리고, 너희 죄를 일곱 배나 벌할 것이다.
레26:25 너희가 내 언약을 어겼으므로 너희에게 군대를 보내어 벌을 내릴 것이다. 너희가 여러 성읍들로 도망치더라도, 너희 가운데에 병이 퍼지게 할 것이다. 결국 너희 원수가 너희를 물리쳐 이길 것이다. 내가 너희 먹을 것을 끊어 버릴 것이니, 여자 열 명이 너희가 먹을 빵 전체를 한 화덕에서 구울 것이며, 빵을 저울에 달아 조금씩 나누어 줄 것이다. 너희는 먹어도 여전히 배가 고플 것이다.
레26:27 그래도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게서 등을 돌리면 나도 계속해서 노할 것이며, 너희 죄를 일곱 배로 벌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들과 딸의 살을 먹게 될 것이다. 너희가 거짓 신들을 섬기는 곳을 내가 무너뜨리며, 분향단을 부수며, 너희의 주검을 너희가 섬기는 우상들의 주검 위에 쌓아 올릴 것이다. 나는 너희를 미워하며, 너희 성들을 무너뜨리며, 너희 성소들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의 향기도 맡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땅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너희 땅을 차지한 너희 원수들도 그 모습을 보고 놀랄 것이다. 나는 너희를 여러 나라에 흩어 놓고, 너희를 향해 내 칼을 뽑을 것이다. 너희 땅은 황폐하게 될 것이며, 너희 성들은 폐허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과 행한 언약의 내용에는 그들의 불순종이 극에 달할 때 취하시는 조치가 담겨 있는데 그 조치는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나라에게 잡혀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거룩한 땅에 거룩을 잃은 주의 백성이 머물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26장 34절은 포로가 된 이스라엘 민족으로 인하여 거룩한 땅이 안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너희 땅이 황폐하게 된 그 때가 너희 땅이 쉬는 때가 될 것이다. 너희가 원수의 나라로 끌려가 있는 동안, 너희 땅은 비로소 쉴 수 있게 될 것이다. 너희가 그 땅에 살 동안에는 안식년이 되어도 땅이 쉬지 못하였지만 폐허로 변한 동안에는 쉴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한 땅이 황폐하여져서 매년 놀게 되면 매년 안식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안식년이 7번 지나면 희년이 되는데, 그 희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들이 잃은 땅을 다시 찾도록 언약이 되어 있습니다. 이 언약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로 70년 있었습니다. 하지만 70년이 되자 광복을 얻게 됩니다. 즉, 70년 동안 거룩한 땅이 매해 안식년이 되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일곱 번의 안식년인 희년에 완전수 10을 곱한 것으로써 영원한 희년을 상징합니다. 그 상징하는 바는 우리가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 다름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누구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라도 죄악을 회개하고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다시 하나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는 복음이 희년 및 70년에 의해 상징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죄가 이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7-19).
즉, 인간의 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아 황폐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저주를 받은 그 땅을 다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은 먼저 조그마한 가나안 땅을 따로 구별하셔서 거룩한 땅으로 정하시고 그 땅을 중심으로 하여 온 세상을 거룩한 땅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 땅은 구약에서는 가나안 땅이고, 이제 신약에서는 영적인 땅으로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적으로 거룩한 땅인지라, 누구든지 완악하게 죄악을 고집할 경우 교회의 회원으로 남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그 언약은 영원한 언약으로써 깨뜨려지지 않는 언약입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십자가의 언약입니다.
레위기에는 거룩한 땅을 더럽혀 외국 나라로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의 언약을 예표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들어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거스른 잘못으로 자기의 죄악과 그들의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고 또 그들이 내게 대항하므로 나도 그들에게 대항하여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 그들이 내 법도를 싫어하며 내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그 땅은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땅에 있을 때에 내가 그들을 내버리지 아니하며 미워하지 아니하며 아주 멸하지 아니하고 그들과 맺은 내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애굽 땅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하여 낸 그들의 조상과의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6:40-45).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지 않은 삶을 고집할 때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우리를 거룩한 땅에서 쫓아 내십니다. 그 때 우리의 삶은 비참과 고통과 슬픔과 저주 가운데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비참한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은 안식하는 땅을 보게 됩니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하기만을 기다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영적인 원칙을 기억하면서 작은 죄악이라도 멀리하며 더욱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성적인 죄악들과 이 세상의 타락한 풍습을 본받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주의 규례와 말씀을 따라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를 사하신 영원한 언약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거룩에 힘쓰는 주의 백성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레 25:1-12 / 이필재 목사
오늘은 광복절 기념주일 예배가 되겠습니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 함무라비 법전과 유대인의 율법과 로마법은 인류의 법문화를 창시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유대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법 제정이 선포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 성경에 나오는 안식법과 노예 해방법, 물질 탕감법은 인류 역사에 특별법으로 법의 기초를 아름답게 놓는데 공헌했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안식법은 “안식일에는 쉬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만 하고 다른 일은 하지 말라.” 이 법의 최고 혜택자들은 노예들이었습니다. “네 남종이나 여종이나 가축까지도 일하지 말라.” 하나님이 이 법을 선포하심으로 끝없는 노동의 고통에서 노예들이 잠시 휴식을 얻을 수가 있었고 몸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제도적으로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땅도 안식년을 주라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과학적입니다. 우리나라 같이 땅이 부족한 곳에서는 땅을 쉬게 할 수가 없어서 7년은 고사하고 70년이 지나도 땅이 쉬지 못합니다. 그래서 땅이 다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땅도 가끔 쉬게 해야 건강해지고 땅의 구실을 제대로 하는데 땅이 계속적으로 일을 하니까 병이 들어 건강한 식품이 생산되지 않으니까 병충해가 생기고 농약을 치고 해서 우리 건강에 큰 해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도 한계가 있어서 적당한 휴식을 취해야 건강이 유지되는데 사람들이 욕심이 많아서 계속적으로 업무에만 시달리게 되니까 하나님이 아예 안식법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선포를 하셔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 남종, 여종도 쉬게 하라.” 이런 법을 주심으로 모두가 쉼을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락을 영어로 ‘레크리에이션(recreation)’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재창조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쉼으로 새로운 어떤 일에 창조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10절입니다. “너희는 전 국민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만약 노예를 데리고 살았다면 6년 동안 일을 시키고 7년째는 자유를 주라고 했습니다. 빚진 것도 다 탕감하여 주라는 법입니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6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7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하게 할 것이니라.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아내도 함께 가게 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법이니까 다 지켜야 합니다. 이 법 정신이 인류의 소망이 되었고 생명이 되었습니다. 이 정신에 기초해서 세상이 모든 법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계산하다가 50년이 되면 국민 전체가 다 자유함을 얻으라.” 희년 선포, 자유 선포식을 함으로써 온 나라는 이제부터 다시 출발입니다. 빚을 얼마를 졌든지 내가 누구 집에 노예가 되었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다 평등한 자유를 선포하고 그때부터 다시 시작하는 법정신입니다.
민주주의 사회를 창조한 서구 선진국들의 법 정신은 세 가지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생명과 자유, 행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서적인 기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생명 존엄성은 하나님 형상에 대한 경외심으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사람이 곧 하나님 됨을 받도록 하는 철학입니다. 서구 사회에서 목사가 되려는 사람,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생명 문제에 대한 정확한 철학을 말해야 됩니다. “낙태 문제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뱃속에 들어있는 생명에 대한 당신의 정의를 말하십시오.”라고 물었을 때 대답해야 합니다. 낙태는 절대로 안 된다든지, 낙태는 괜찮다든지 말해야 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대답을 회피하면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지도자가 되겠다고 합니까?” 안됩니다. 그 다음에 자유는 기독교 진리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영적으로 자유를 얻었잖아요? 진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면 자유가 얻어지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자유함을 선포해 줍니다. 그렇게 되니까 우리 모두는 다 마음의 고통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모든 사람이 무서워하는 사망의 고통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인류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는 진리가 기독교의 중심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계실 때 인간의 육신적 고통에도 자유함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질병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자유함을 선물하사 건강회복 사역을 그렇게 열심히 하셨고 또, 율법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자유케 하리라.” 복음의 성격을 자유함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미국은 독립 100주년과 200주년에 자기들이 만든 것이 아닌 외국으로부터 의미 있는 선물을 하나씩 받았습니다. 독립 100주년에는 프랑스가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자유의 나라이다.” 그래서 자유의 여신상을 만들어 선물했습니다. 그 여신상은 “자유가 그리운 자여, 내게로 오라.” 횃불을 높이 들고 오늘도 대서양을 비추고 있고 독립 200주년에는 대한민국으로부터 자유의 종을 선물 받아서 “이것은 정반대쪽인 태평양가에 설치하라.” 그래서 지금 태평양 언덕에 세워 세계를 향해 종을 울리라고 잘 설치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은 네 사람입니다. 워싱턴과 제퍼슨, 루즈벨트, 링컨입니다. 뭘 잘했는가? 똑같은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자유를 위해 몸을 바친 공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행복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것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곧 너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겠다.” 그래서 그들을 이끌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마침내 약속을 성취시킨 것이 하나님의 역사로 구약 가운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국가 철학은 개인의 자유와 생명, 행복에 초점을 맞추어야 위대한 국가와 국민이 됩니다.
이 지상에서 제일 흉악스러운 나라들이 있습니다. 개인의 생명이나 자유나 행복은 절대 무시하고 국가 권력을 행사하는 그런 나라들입니다. 그런 나라들은 빨리 그 권력 기구가 무너져야 합니다. 여러분, 혈통이 미국 사람이 아닌 중국 태생, 한국 태생인 여기자 두 명이 북한에 억류 되었을 때 전직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직접 가서 그들의 손을 잡고 석방시켜 나오는 광경을 보시고 무슨 느낌이 없으십니까? 미국은 자국민보호, 모든 국민이 혈통이 누가 되었든지 옛날 국적이 어떻게 되었든지 미국의 시민권자가 된 자의 자유와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는 절대 노력한다는 국민 철학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성경에서 하나님은 어느 종족이 다른 종족을 노예화 하는 것을 절대 용납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여러분, 역사를 보세요. 물리적으로 다른 종족을 식민지화했던 국가들이 과연 그 나라와 민족을 보존했는가? 역사가 지나니까 모두가 다 독립하고 지배했던 자들은 지금 죄만 남았습니다. 알렉산더, 칭기즈칸, 로마,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일본, 소련 모두 지금은 자기의 본래의 것, 죄만 가지고 남아있습니다. 미국도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던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5천년 역사에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폭군과 성군이 있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연산군은 폭군이요, 세종은 성군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기준입니까? 폭군은 사람의 생명과 자유와 행복은 절대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죽이고 살린 사람이고, 성군은 그 반대의 일을 한 사람을 말합니다. 성군이라는 말이 세종과 순종 때 나오기 시작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임금님이 대궐 문 밖에 나가서 높은 곳에서 백성들의 집을 내려다보다가 연기가 오르면 자기도 식사를 하고 연기가 오르지 아니할 때는 “백성들이 굶는구나. 나도 저녁 식사를 안 하겠다.” 성군의 모습이 그렇게 나타나는 일화가 있잖아요? 다른 사람의 행복과 고통을 생각하는 마음, 우리나라의 자부심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많은 침략과 고통의 역사를 받아왔지만 다른 민족을 침략한 일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 타고르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 그대는 동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찬사를 한 것입니다.
저는 청산리 김좌진 장군 기념비를 찾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중국 화령에 있습니다. 1913년 조국 광복을 위해 광복회가 조직되었을 때 노백임, 김성태, 김좌진을 만주로 보냈습니다. “당신들은 거기 가서 독립운동을 하라.”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갈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일송정 누각은 지금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한국인들을 맞이하고 있으며 해란강은 그때나 이때나 변함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이 우물이 지금 원형 보존되어 그대로 있고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용문교 다리는 깨끗하게 잘 단장되어 있습니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 광복을 위해서 타국에서 외로이 숨진 선구자들의 숨결! 용정에 가면 일본인들에게 박해 당하던 지하 장소가 있습니다. 거기 가면 박해당한 조선인들의 슬픈 모습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고 고문 기구들이 놓여 있는데 거기 벽을 보면 들어가자마자 제 사진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왜 거기 붙어 있는가? 오래 전 제가 갈보리 교회에 오자마자 용정에 가서 갈보리교회가 경비를 보내서 우리 민족의 숨결을 살려내는 일에 협조하여서 그것이 보전되었기 때문에 갈보리교회 담임 목사가 사진이 붙어 있는 겁니다. 박상진, 이석대, 권용만은 광복회 국내 조직원으로 활동하였고 종교는 기독교와 불교, 천도교 모두 합하여 삼일운동 기초를 놓았습니다. 1940년 9월 27일은 중국에서 이청천, 이범석 중심의 광복군이 조직이 되어서 투쟁했고, 지금 우리들은 그분들이 투쟁하면서 바라본 청사진 대한민국의 화려한 현장에서 그분들의 노력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용정 중학교에 가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시인 윤동주가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이모저모로 외국에서, 본국에서 투쟁했던 선배들의, 조상들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1966년에 김재준 목사님이 대한민국의 앞날을 찬송가로 예언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부르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 되어 타거라.” 지금 그렇게 되어 가고 있잖아요?
이제 우리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세계 시선은 우리 국민이 선진국으로 비춰지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되려면 몇 가지 국민 의식이 필요합니다. 지금 세계는 다문화 혼합 문화로 변했습니다. 앞으로 더욱 그렇게 되어 갑니다. 현재 우리 한국에도 외국 이주민이 110만 명이 넘게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구촌 개념이 문화적으로 정착되어 국경이나 인종을 초월해가고 있는 시대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다문화 세계에서 살려면 두 가지 변수가 생기는데 우리 국민도 외국에 많이 가서 살게 되고 이 나라에도 외국인들이 끝없이 찾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함께 사는 준비가 필요한 때라서 어느 나라나 지금 FTA를 서두르고 있고 고립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이 시대 훌륭한 지혜인가? 특별히 우리 크리스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 내가 만약 중국에 가서 살든지 필리핀에 가서 살든지 또 다른 인종이 우리나라에서 살려고 할 때 어떤 성서적 방향 제시가 필요한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착하는 마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이곳이 내가 영원히 살아갈 내 땅이라고 생각해야 이 나라가 발전합니다. 적당히 살다가 기회가 오면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면 손해는 나라가 봅니다. 껍데기만 남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그 땅에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 자신들이 타고 온 배를 불 질러 버렸습니다. “돌아갈 수 없다. 여기서 살자.” 그래서 그 사람들이 그 사회에서 가장 크게 성공했고 공헌했고 미국 건설에 이바지하지 않았습니까? “돌아갈 때 돌아가도 주어진 환경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여기고 이제는 여기서 100년 계획을 하고 살자.” 우리 외국인들도 이 땅 대한민국에서 그렇게 살아야 대한민국이 발전합니다. “보따리를 싸가지고 언젠가는 돈이나 가지고 나가자.” 그러면 우리나라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왜 선진국들이 이민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래야 자기들도 행복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이 이민정책을 잘해야 되는 것은 대한민국이 지금 세계에서 출산율 저조 금메달이라고 합니다. 제일 아기 안 낳는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합니다. 그러면 50년 후에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일 났습니다.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 같이 일해주고 여기서 살아야 우리도 함께 살 수 있는 겁니다.
두 번째는 참여의 문제입니다. 누구든지 이 나라에 와서 살면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하는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 갈보리교회 나오는 교인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서 다른 교회를 나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갈보리교회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훌륭한 삶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영원히 신앙 생활할 것으로 믿고 그 교회가 가는 일에 적극 참여해야 됩니다. 반대로 타교인이 갈보리교회에 왔으면 과거는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 날부터 ‘내가 신앙생활 해갈 내 영혼의 안식처가 이 교회이다.’ 여기 모든 일에 참여하면서 교회 가는 일에 협조해야 합니다. 나라를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한국인들이 외국으로 이민을 많이 갔습니다. 저도 송별회 끝없이 해주었는데 아무쪼록 이민 가서 성공하고 잘 살라고 축복해줍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십일조는 본 교회로 보내라.” 왜 십일조를 본 교회로 보냅니까? 다니는 교회에다 내야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외국인들이 이 땅에 와서 성공을 해서 이 땅에다 재투자하고 번영해 가면 우리도 함께 행복해 지는 겁니다. 국가 개념을 인류 공동체 개념으로 가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저는 캘리포니아에서 오래 살았는데 캘리포니아 TV 방송에 2시간 특집 방송을 했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캘리포니아에 땅을 많이 사는지 이러다가는 캘리포니아가 일본이 되겠다는 말들이 막 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추적해서 “도대체 캘리포니아에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땅을 샀으며 왜 사는가?” 전부 조사해서 2시간 동안 특집 방송을 한 일이 있습니다. 사실상 일본은 일본 땅만큼 외국에 땅을 사두었습니다. 브라질, 미국 할 것 없이 일본 땅보다 더 크면 크지 작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미국 사람들이나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큰일 났잖아요? 일본 사람들이 다 와서 자기들 땅 사버리면 다 일본 땅이 되는 거 같아 겁나잖아요? 그러면 법을 제정해서 외국 사람들이 땅을 사지 못하게 하면 되잖아요? 안합니다. “얼마든지 와서 사라. 다 사도 좋다. 마음대로 사라.” 그래서 사라고 나라 법으로 열어주기 때문에 사는 겁니다. “다 사도 좋다.” 그리고 하는 말 “그리고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자. 같이 살자.” 왜 선진국들이 투자 이민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이런 정신입니다. “와서 같이 살자. 너희도 행복하고 우리도 행복하자.” 지금 세계 국가 개념이 이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도 앞으로 외국에 더 많이 이민 갈 것이며 외국인들도 더 많이 올 것입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유대민족들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만약 너희들 중에 나그네 된 자나 외국인이 너희와 함께 살기를 원할 때 절대로 학대하거나 차별하지 말라. 내쫓지 말라. 함께 살라. 그리고 할례를 받기 원하면 다 할례를 주어라.” 벌써 하나님은 구약 창세기 때부터 이민 정책을 펴십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고 했는데 실상은 어떤가? 사실 유대인들 가운데 노예들은 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평생 노예라서 날마다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어서 행복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6년 동안 노예로 일 시켰으면 7년째는 자유하게 하라. 빚도 다 탕감해 주어라.” 하나님이 율법으로 정해버렸습니다. “이런 법을 만들어서 이렇게 살아라. 누구에게나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라. 그래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우리나라에 와서 사는 사람들이 ‘아! 대한민국이 정말 내가 살만한 곳이다. 이곳에서 내 후손들도 여기에 와서 살기 바란다.’ 그리고 정착해서 다른 곳에 갈 생각하지 않아야 대한민국이 복 받습니다.
이민정책을 잘해서 최고 성공한 나라가 미국인데 미국에서 국가별로 그 사회에 공헌한 종족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미국에 와서 어떻게 했나? 일본 출신 청년들은 미국에 와서 군대를 많이 나갔습니다. 왜 그러느냐? 전쟁 철학에 있어 일본보다 미국이 훌륭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은 동남아를 피로 물들였잖아요? ‘미국은 아니다. 전쟁은 의로운 것이다. 미국의 전쟁은 의롭다.’ 일본에서 온 청년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군국주의 일본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니까 ‘그렇다면 내가 이 의로운 군대에 많이 나가야 되겠다.’ 군대를 많이 나갔습니다. 여러분, 하와이의 상원의원은 언제나 일본 사람인 이노우에가 당선이 됩니다. 그는 일본인이지만 미국 군인으로 나가서 전쟁하다가 팔이 하나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 사람이 상원의원이 되었을 때 이란 무기 판매 중역이었던 노스 중령을 청문회하는 것을 TV로 생방송을 했습니다. 일본 사람이었던 이노우에가 노스 중령을 앉혀놓고 질문하는 말! “당신 미국의 정신이 뭔지 알아? 조지 워싱턴이 마당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나무를 잘라버렸을 때 누가 했느냐고 험악하게 꾸중했을 때 아버지가 보지 아니한 그 일을 이 어린 아이가 아버지 앞에 나가서 아버지, 제가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의 그 정직성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정신이다. 당신 이란에 무기를 팔았으면 팔았다고 정직하게 말해라. 거짓말하지 말아라.” 일본 사람이 막 야단을 치지요? TV에서 중계방송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청년들은 미국의 군인으로서 정직한 면을 심어주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사는 외국인들도 한국을 위해서 그런 정신으로 살아주어야 한국에 도움이 되고 한국도 그들이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문화가 그렇게 변했습니다. 아프리카 미국 이민자들은 뭐했느냐? 그들은 인권과 평화 운동에 공헌했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인물이 나왔고 재즈 음악과 스포츠 음악의 절대적 공헌자들이 되어서 삶을 즐겁게 하는 음악을 다 그 사람들이 보급시켰잖아요? 올림픽에 나가 미국 국가를 울리면서 금메달 타는 사람들 다 흑인들이잖아요? “그들이 미국을 빛냈다.” 남미계 사람들은 어떻게 했느냐? “미국 노동시장의 절대적 공헌자들이다.” 그들이 일을 다 했습니다. “그들이 일을 안했다면 우리가 먹고 살지 못했다.” 그들의 노동력 때문에 미국 경제가 발전한 것입니다. “독일 이민자들은 우수한 교육 제도의 값진 선물을 들고 왔다.” 그래서 유치원이라고 하는 말을 영어로 ‘킨더가든(Kindergarten)’이라고 하잖아요? 독일 발음입니다. 독일 발음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기독교 신앙을 이 땅에 심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이렇게 하나님 믿고 살게 된 것이다.” 한국인에 대한 평가는 좋습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일하며 자립 능력이 강하고 교육열이 강해서 모든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며 그들이 있는 곳에는 교회가 세워졌다.” 한국이 꿈이라고 찾아오는 많은 외국인들이 이곳이 나의 살 곳이라고 정착하기 바라고 우리 국민들도 외국에 나가서 그런 긍정적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지구촌의 당연한 21세기의 갈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자유의 상실이 얼마나 큰 인간 고난인지 넉넉히 경험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인간의 생명과 자유, 행복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하니까 하나님 믿는 사람들도 똑같은 일을 위해 몸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격 대우하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방해하지 말고 나도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 행복과 자유를 위해서 하나님은 법을 주신 것이 오늘 말씀 “안식일을 주신 것이며 안식년 선포하고 50년이 되면 희년을 공포해서 인간답게 살게 하라. 자유함을 주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법이 있으므로 온 세계에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것을 방해하고 있는 집단과 싸우고 계십니다. 애굽과 싸워서 자유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싸우셨고 그 자유의 행진에서 만나는 모든 방해꾼들을 하나님이 “내가 다 물리쳐줄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셨잖아요? 우리나라 광복은 사실 우리 힘으로 불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셨습니다. 이 민족에게 자유를 공포하라는 하나님 말씀의 영적 사역이 이 땅을 향해서 이루어진 것이 광복으로 우리가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심히 안타까운 일은 한반도의 분단 과정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도 저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가만히 계신 것 같아도 지금도 쉬지 않고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계산과 하나님의 계산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64년 전 해방의 만세를 부르던 독립투사들은 모두 우리 곁을 떠났고 그 해에 태어난 아기가 이제 64세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으로 가능치 않은 광복을 주심과 똑같이 또 한 번의 역사가 고압선으로 가로막힌 삼팔선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자유의 선물이 이 한반도 거민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선포되어 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가 광복절 기념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God bless Korea!” 대한민국 만세!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안식년의 의미
레위기 25:1-7 / 목사 이진수
레위기 25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하신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인 1-7절은 안식년에 관한 내용이고 8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희년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23장에 나누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엿새동안은 일하고 이레가 되는 날은 거룩한 안식일로 거룩한 모임, 다시 말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주 칠일째 되는 날을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고 매 칠년이 되는 해를 안식년으로 땅과 밭에 씨를 뿌리지 말고, 포도원을 쉬게 하고 저절로 자란 것들은 거두지 말고 필요한 자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안식년을 가지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안식일과 안식년의 의미를 알려면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이라는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2:2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라고 안식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옵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주신 명령인 출애굽기 20:11절을 보면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라고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셨기에 너희도 안식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안식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시오 생명과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안식일, 안식년 희년이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5장에는 안식일을 좀 다르게 설명합니다. 신명기 5:15절을 보면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이집트에서 400년간 노예생활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육체적인 쉼만이 아닌 영혼의 쉼, 안식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노예 생활로 쉼과 안식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끄집어 내심으로 안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죄와 사망, 저주와 사단의 권세에 사로 잡혀 쉼과 안식이 없는 저와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 하셨기에 하나님 안에 참된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는 7년이 되는 안식년에는 밭에 씨를 뿌리지 말고 과수원의 나무들도 파종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2-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너희가 들어가면, 나 주가 쉴 때에, 땅도 쉬게 하여야 한다. 여섯 해 동안은 너희가 너희 밭에 씨를 뿌려라. 여섯 해 동안은 너희가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두어라. 그러나 일곱째 해에는 나 주가 쉬므로, 땅도 반드시 쉬게 하여야 한다. 그 해에는, 밭에 씨를 뿌려도 안 되며, 포도원을 가꾸어도 안 된다”
왜 하나님께서 땅을 쉬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안식년에 땅을 생각해서 명령하신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안식년의 의미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고 믿음으로 내려 놓는 것이 안식년의 의미입니다. “땅의 모든 소산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땅에서 얻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라고 믿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밭과 과수원을 가진 자가 한해 농사를 쉰다는 것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안식년을 지키는 것은 큰 결단해야 할 일입니다. 걱정과 염려가 생기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걱정과 염려를 아십니다. 그래서 20절에 “일곱째 해에는 씨를 뿌려도 안 되고, 소출을 거두어들여도 안 된다면, 그 해에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하고 너희는 물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21절에 “그러나 여섯째 해에 내가 너희에게 복을 베풀어, 세 해 동안 먹을 소출이 그 한 해에 나게 하겠다”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명령은 많은 경우 우리로 갈등하게 합니다. 세상의 방법, 세상의 기준, 우리의 경험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고 뜻일 때 그대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보호하시고 채우십니다. 실제적으로 십일조 생활, 헌금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먼저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나머지를 넘치게 채워 주십니다.
희생하고 섬기고, 나를 죽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높이십니다. 주님 안에 안식하며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안식년에 다른 영혼을 섬기기 위해 내것을 내려 놓는 안식년의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안식년 규례
레위기 25:1-7 / 예수쟁이 박예찬
내용분해 : A. 안식년 및 희년 규례의 서론(1-2a절)
B. 안식년에 관한 규례(2b-7절)
1 .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그 땅도 안식하게 하라고 명하심 (2b절)
2. 6년 간은 밭에 파종하여 열매를 수확할 수 있으나 7년째 되는 해는 쉬게 하라 명하심 (3-4a절)
3. 안식년에는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경작하지 말며 저절로 난 곡물이나 열매일지라도 거두지 말라 명하심 (4b-5절)
4. 안식년의 소출은 땅 주인뿐 아니라 종, 품군, 객, 심지어는 육축이나 들짐승들 모두의 양식을 삼으라 명하심(6-7절)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새 아침을 허락해 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예배할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며,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신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 다함께 전심을 다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아침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레위기 25:1-7절 말씀으로 안식년 규례에 대한 말씀입니다. 모두 합하여 55절에 이르는 비교적 긴 장인 제25장의 다섯 문단은 제23-25장 사이에 이어지는 절기법 일련 기사의 종결부로서 안식년(安息年, Sabbatical Year) 및 희년(禮年, Jubilee) 관련 규례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약 이스라엘의 3대 주요 절기로는 모든 남자 성인들이 성소가 있는 곳으로 나아와 성회를 가져야 했던 유월절 (Passover), 칠칠절 곧 오순절 (Pentecost), 그리고 장막절(Tabernacle Day) 등이 꼽힙니다. 또한 전 민족 차원에서의 정결의 연례적 회복을 위한 대속죄일(the Day of Atonement)도 매우 중대한 규례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본단락에서 부터 논의되는 이 안식년 및 희년 규례는 가장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가장 이채로운 절기들인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먼저 안식년과 희년은 그 절기의 기간이 한 해 전체였습니다. 여타 절기들의 기간은 해당 일자 당일이나 길어야 일주일 이었던 점에 비하여 이는 참으로 긴기간입니다. 그리고 여타 이방 문화권에도 즉위식이나 왕실의 혼례 및 장례식 등 비정기적 행사를 제외하면 하나의 절기가 십수일 이상 지속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따라서 한 해 전체라는 기간은 참으로 파격적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 년 동안 그리고 일곱번째의 안식년과 희년이 겹치는 해에는 무려 이년 동안 농경을 위시한 모든 생산 활동을 쉬고, 그야말로 전적으로 안식하며 하나님과 자신 및 선민 민족 사회 전반과의 관계를 새로이 하는, 영적 사역에만 힘쓸것이 요청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작게는 각 가정의, 그리고 넓게는 민족 국가 전체가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큰 위험 부담(危險負擔, Risk)을 안아야 하는 너무나 이상적 규정으로만 생각될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 점을 더욱 강조하시며, 안식년을 준수할 경우 오히려 더욱 큰 물질적 번영도 허락하실 것을, 가히 도전적으로 약속하시면서, 안식년과 희년의 준수를 촉구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안식년과 희년의 법은, 이제 갓 선민이 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던져진 크나큰 도전이요, 동시에 놀라운 은혜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안식년이나 희년 그리고 이 이전에 이미 거듭하여 이스라엘의 기본 율법의 하나로 강조되어 주어진 안식일 제도등은 모두 다 ‘7’ 을 단위로 한 것이었습니다. 즉 이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 완성의 기간인 7일에서 유래한 숫자인 ‘7’ 이 그 단위로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안식년과 희년 제도에서는 이 같은 안식의 축복과 기쁨이 토지 곧 인간이 거하는 자연 환경(自然環境)에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로 한 분 창조자 하나님 안에서 인간과 자연은 모두 다 안식의 기쁨과 은혜를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가장 이채로운 것은, 이 안식년과 희년은 일상의 세속사를 잠시 접어두고 그 각절기의 의미를 중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로이 하며, 영적 성장에만 전념한다는 히브리 절기의 일반적 목적이외에도 이 절기를 기점으로 선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사회, 경제적 기본권을 회복케 하여, 선민 사회 구성원 모두 근본적 평등을 회복게 함으로써, 선민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갱신시킨다는 독특한 목적도 담겨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안식년과 희년 규례를 세부적으로 살펴 보면, 그 일년 동안의 무슨 특별한 의식적, 절차적 규정보다는 이를 기점으로 선민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특히 그동안 여러 이유로 자신의 땅이나 가옥을 팔거나 남의 밑에서 종 노릇함으로써 사회, 경제적 기본신분조차 유지 할 수 없었던 자들에게, 그 사회, 경제적 기본 신분을 회복하게 하기 위한 규정 중심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룬 선민 사회안에 지나친 계층간의 차이가 고착(固훌)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선민 사회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평화와 공영의 길을 도모케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상 생활 중에 선민으로서의 성결을 유지하기 위한 규례를 주시는 중에 이같은 선민사회 구성원 각자의 사회, 경제적 기본권의 회복과 선민 사회 전반의 기본적 평등의 회복을 주목적의 하나로 하는 안식년과 희년의 규례를 주신 것은 인간의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즉 인간이 그 성결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개인의 영적,도덕적 차원에서의 거룩함을 지키려는 노력뿐만 아니라, 육적 사회적 차원에서의 기본적 존엄성의 유지도 필요하며,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그 구성원 모두에게 기본적 존엄성과 생존권을 평등하게 보장해 주는 사회 일반의 구조적 제도(構造的 制度)도 필요하다는 현실적 이유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희년등을 기점으로 하여 선민 이스라엘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규례들은 주로 토지와 가옥 및 노예 제도와 관련해서였습니다. 이 에 의하면 선민 이스라엘은 장차 일단 가나안 땅을 서로 공평하게 분배하여 가진 후, 근본적 생산 기반이 되는 토지나 가정 생활의 근간이 될 가옥은 절대 영구 매매 할 수 없고, 다만 희년을 기준으로 임시 임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선민 개인 역시 영구히 종이 될 수는 없으며, 다만 임시로 고용될 수 있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이처럼 제한적 임차 내지, 고용만을 허용한것은 사유 재산제에 바탕을 둔 세속 일반의 경제 논리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선민이 된, 이스라엘의 기본권은 원천적으로 보장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차이로 인한 사유 재산상의 차이는 인정함으로써, 개인의 창의력과 근본 의욕은 고취 시키면서도, 각 개인에게 그 근본적 생활 기반과 한 인격으로서의 기본권 만은 절대 보장해 주는 소위 성경적 경제원리(聖經的 經濟原理)의 기본원칙에 접하게 됩니다.
이외에도 안식년 및 희년 관련법에는 우리 인간들이 사회 생활의 각 부분에서 영원한 원리로 삼아야 할 요소들이 많습니다. 인간생활의 가장 원초적 근거요, 모든 생산 활동의 궁극적 기반이기도 한 토지(土地)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출애굽 구원 및 가나안 정복 사건에 근거하여,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선민 각자는 그 땅을 하나님으로부터 공평히 분배 받아 쓰고있는것에 불과하다는 토지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소유권 내지 선민 공동 소유 개념 그리고 각 개인의 청지기적 토지 보유 및 이용개념등이 그 첫 째입니다. 그리고 선민은 선민 모두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안에서 근본적으로 영원히 자유하다는 자유시민정신(自由 市民精神)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선민끼리는 서로를 한 분 구원자요, 통치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함께 보호하심과 다스리심을 받는 동등한 형제로 여겨야 하며, 더욱이 이윤 추구나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선대하라는 평등과 박애의 정신도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끝으로 혈족을 단위로 한 토지 및 친족 무르기 제도에서는 공동구제(共同 救濟)의 정신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안식년과 희년의 법은 실로 모든 구약 율법 중에서도 선민 모두의 기본권의 보장과 근본적 평등을 통한 사회 복지의 구현을 위한 위대한 원리들을 그야말로 집약, 응축하고 있는 놀라운 혁명적 규례였습니다. 참으로 모세가 이 율법을 기록한 때 로부터 수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선진시민 사회 일수록 하나님이 그 옛날 선민 사회의 안정과 공동번영을 위해 주신 규례들에 담긴 근본 정신을 되살려 가고 있는 현실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더욱이 사회, 경제정의가 결코 건실하다고 보기 어려운 한국 사회에서 기독자(基督者)로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이 본문의 말씀은 진정 도전과 향도(짧導)의 외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25장은 23-25장가지 이어지는 절기 관련 규례의 종결 부분으로 매 7년 주기로 돌아오는 안식년과 매50년 주기로 돌아오는 희년 관련 규례입니다. 그중 본문은 안식년 관련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성막을 건립한 후, 시내산을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안식년에 관한 규례를 주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로 7년 주기가 되는 해는, 그 땅을 개간하거나 파종해서는 안되었으며, 저절로 난 곡물이나 열매라 할지라도 거두지 말고, 가난한 자와 객 그리고 짐승을 위한 양식으로 남겨 두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규례를 주신 것은 물론, 땅의 지력을 높여 생산성이 좋은 땅으로 만드시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규례의 근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안식하는 동안에 하나님과 보다 밀접한 영적 교제를 나누도록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년은 안식일의 확대적 성격을 지니며, 결국 안식년 역시 하나님 나라에서의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건 성도의 안식은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로서의 안식이어야 하기에 "안식일은 지키는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안식년에 관한 규례입니다. 안식년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대단히 기쁘고 좋은 해 였습니다. 왜냐하면 6년 동안 땀흘려 일 했는데, 이제 그 모든 수고를 내려 놓고 쉴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6년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안식년 에 먹을 양식을 더해서 주셨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스라엘 백성틀은 안식년을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어떤 의무감으로보다는 기쁨으로 참 안식을 누리는 해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식년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을 지킴에 있어서 명령에 못이겨 어떤 의무감에서 ‘지키는것’이 아니라, 베풀어 주셨으므로 ‘누리 는 날’ 로 보내야만 한다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실 명령에 못이겨 마지 못해서 지키는 안식 이라면 거기에는 참된 기쁨이나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 다. 하지만 땀 흘려 열심히 일 한 후에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안식으로 맞이 한다면, 거기에는 기쁨과 감사가 있게 됩니다. 우리는 주의 날을 바로 그런 날로 보내야만 하는 것 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국경일 이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에서든지 쉬게 되는 날이 있으면 그 날을 얼마나 기다리고 고대합니까? 여러분은 그런 날도 어떤 명령이나 의무감에서 지키십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땀 흘려 일 한 후에 주어지는 주일도 그렇게 맞이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참된 안식을 누리는 날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일을 열심히 일 한 후에 주어지는 안식일로서 기쁨과 감사를 가지고 누림으로써 보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쉬는 날 없이 일주일 내내 일하라고 하시지 않고, 하루를 안식할 수 있는 날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날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날입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주일 성수를 명령이기 때문에 지켜야만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으므로 마음껏 누린다는 생각으로 지킵시다. 그럴때 우리는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안식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감사와 기쁨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안식년
레 25:1-7
성경이 가르치는 절기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안식일이 더 발전하고 확대된 것이 바로 안식년입니다. 안식년은 7년을 1주기로 환산할 때 마지막 7년째 되는 한 해 동안(엄밀히 말해서, 6년째 되는 해의 속죄일부터 7년째 되는 해의 속죄일까지)을 안식하는 제도입니다. 안식년이 되면, 모든 경작 행위를 중지함으로써 사람과 짐승뿐만 아니라, 땅도 휴식을 취하게 하였습니다. 안식일이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가늠케 하는 척도였다면, 안식년 역시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가늠케 하는 척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충만했을 때는 안식일은 물론이고 안식년도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신앙에서 떠났을 때는 안식년도 소홀히 여기며 지키지 않았습니다. 안식년이 지니고 있는 근본 취지와 정신은 안식일과 동일한데, 안식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일 확대 안식년
7일째 되는 날 하루 7년째 되는 해 1년
동안 안식 발전 동안 안식
1. 어의
1)7년마다 특별히 지키는 절기라고 하여 ‘안식년’이라고 하였습니다.
‘안식년’을 히브리어로 ‘쉐나트 솨바톤’이라고 하는데, ‘쉐나트’는 ‘년’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솨바톤’은 ‘안식일’을 뜻하는 ‘솨바트’에서 유래된 말로 ‘안식’ 혹은 ‘안식일’을 뜻하는데, 특별한 절기로서 지키는 ‘안식’이나 ‘안식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쉐나트 솨바톤’은 매 7일마다 지키는 안식일과는 달리 특별한 절기로 지키는 ‘안식하는 해’라는 뜻입니다.
2)빚 독촉을 면제해 주는 해라는 의미에서 ‘면제년’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안식년이 되면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안식년 동안 빚 독촉을 유예해 주어야 하는데, 신15:1-2에 보면 “매 칠 년 끝에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무릇 그 이웃에게 꾸어 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면제하고’라는 말은 ‘나가떨어지게 하다, 쉬게 하다, 풀어주다, 묵혀두다’는 뜻인데,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모든 권리를 위임하는 행위를 반영하고 있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년 동안은 빚 독촉을 하지 않고, 유예(猶豫)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안식년은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 독촉을 유예해 주는 해라고 하여 ‘면제년’(이라고도 하였는데, 본문의 ‘여호와의 면제년이란 말은 ‘여호와를 위한 면제’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입은 은혜와 긍휼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이웃들에게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빚 독촉을 면제해 주는 해라는 의미입니다.
2. 안식년의 유래
1)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부터 지키도록 제정된 절기입니다.
안식년에 대해서는 출23:10-11에서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데, “너는 육 년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제 칠 년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라고 하여 매 칠 년째 되는 해는 경작을 중지하고 땅을 묵히며 안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15:1-18과 레25:1-7에서는 안식년을 지키는 규례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레25:2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너희에게 주는 땅’은 ‘가나안 땅’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안식년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지킨 절기가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간 후부터 지키는 절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의 전승에 의하면, 안식년은 가나안 입성과 동시에 지켜진 것이 아니라 가나안 정복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뒤부터 지켜졌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을 거의 완성한 시기는 가나안에 입성한 지 8년째 되는 해인데, 이 때로부터 계산하기 시작하여 7년째를 첫 안식년으로 삼고, 50년째를 첫 희년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2)매 7년마다 땅을 휴식하게 하고, 영적 생활을 위한 시간을 충분히 가지 도록 하기 위해 제정된 절기입니다.
(1)광야 생활 중에는 만나로 생활하였기 때문에 땅을 휴식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안식년을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부터 지키도록 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 매일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 주시는 만나를 거두어 생활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광야 생활 중에는 농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땅을 휴식케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간 후부터는 직접 땅을 경작하여 거기서 나는 소출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 요단 강을 건넌 후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킨 다음 날부터 가나안 땅에서 생산된 곡식과 열매를 먹었는데, 가나안에서 생산된 것을 먹은 다음 날부터 만나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수5:12에서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고 하였습니다.
(2)안식년은 지력을 회복시키는 한편 영적 생활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도록 하 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직접 농사를 짓게 된 후부터 일정 기간마다 땅을 휴식케 함으로써 그 동안 떨어진 땅의 지력(地力)을 회복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영농법이 발달되지도 않았으며, 인조 비료도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순전히 자연의 힘에 의해 땅의 지력을 회복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매 7년째 되는 해에는 모든 경작 활동을 중지하고, 1년 동안 땅을 쉬게 함으로써 그 동안 상실했던 지력을 회복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년을 제정한 보다 더 큰 목적은 안식하는 1년 동안 그 동안 소홀했던 영적 생활을 위한 시간을 충분히 갖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자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매 7년마다 안식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 기간이 ‘7’이라는 숫자와 연관이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주요 절기들은 모두 ‘7’이라는 숫자와 연관되어 주어졌습니다. 매 7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 매년 7월에 거행되는 절기들, 즉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 그리고 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따라서 이 모든 절기 속에 포함된 근본 정신은 대동소이합니다.
3. 안식년을 제정한 목적
1)첫째로, 토지를 휴식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출23:10-11의 “너는 육 년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제 칠 년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고 한 말씀과 레25:2-5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 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라고 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안식년의 목적이 땅을 휴식케 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안식년은 6년째 가을, 즉 종교력으로 7월에 시작되어 이듬해 가을까지 1년 동안 지켰는데, 이렇게 안식년 동안 땅을 쉬게 한 것은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땅의 지력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영농법이나 인조 비료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순전히 자연의 힘에 의지해서 지력을 증가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안식년 동안 농사를 짓지 않고 휴경(休耕)함으로써 땅의 자양분을 증가시켜 생산력을 높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특히 출23:11에 보면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고 하였는데, 안식년 동안 밭에서 자연적으로 생산되는 것은 가난한 자와 들짐승들의 양식을 삼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고 한 것은 들짐승까지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들짐승의 배설물이나 돌아다니는 활동으로 인해 토지가 비옥해지도록 하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2)둘째로, 영적 생활을 개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레25:4에 보면,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안식년의 목적이 단순히 땅의 휴식케 하여 생산력을 높이려는 물질적 측면에만 있지 않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년 동안 농사를 짓는 것과 같은 노동에서 벗어나 휴식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시간을 갖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년 기간 동안 충분한 휴식과 더불어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갖도록 하는 데 안식년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 7일째 되는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며, 은혜를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매 7년마다 안식년을 통해 하나님과 더 깊은 영적 교제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년 1년 동안은 농사를 짓는 것과 같은 노동을 쉬는 대신 이 기간 동안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영적 개혁에 힘써야 했습니다. 마치 땅이 1년 동안 휴식하면서 지력을 회복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년 1년 동안 안식하면서 그 동안 상실했던 영력 회복에 힘써야 했던 것입니다.
두 나무꾼 친구가 나무를 하기 위해 산에 올라갔습니다. 두 사람은 경쟁적으로 나무를 찍어 장작을 만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은 유달리 승부욕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같이 간 친구에게 지지 않으려고,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식으로 숨을 돌려 가면서 일했습니다.
어느덧 산을 내려갈 시간이 되어, 두 사람은 각자 서로가 수고한 결과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셈일까요? 쉬어가면서 일한 친구가 마련한 장작이 쉬지 않고 계속 일한 친구보다 더 많은 것이었습니다.
승부욕이 강한 친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했는데도, 왜 자네 것이 더 많단 말인가?” 그러자 쉬어 가면서 일한 친구가 점잖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10분씩 쉴 때마다 도끼날을 갈았다네.” 당연히 주기적으로 휴식 시간을 가지면서 일한 친구가 이길 수박에 없는 것입니다. 도끼날이 무디어 지는 줄도 모르고, 덮어놓고 열심만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바쁘다해도 경건의 시간, 즉 하나님 앞에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존재의 상실을 경계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을 항상 지니고, 기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경건이 요구됩니다. 안식년은 바로 경건의 훈련을 하는 기간으로 삼도록 하시기 위해 주어진 시간인 것입니다. 그 동안 무디어진 영력을 회복하라고 주어진 시간이 바로 안식년인 것입니다.
3)셋째로,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1)하나님은 6년째 되는 해 안식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소출을 주셨습니다.
안식년이 되면 일체의 생산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레25:20에 보면, “혹 너희 말이 우리가 만일 제 칠 년에 심지도 못하고 그 산물을 거두지도 못하면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안식년의 휴경으로 말미암은 양식의 부족을 걱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께서 먼저 그에 대한 모든 걱정과 염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레25:21-22에 보면, “내가 명하여 제 육 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 년 쓰기에 족하게 할지라 너희가 제 팔 년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곡식을 먹을 것이며 제 구 년 곧 추수하기까지 묵은 곡식을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안식년 동안 양식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도록 육 년째 되는 해에 충분한 소출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년에는 1년 동안 휴경을 하며 안식을 하게 되지만, 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맞게 되면 2년 동안 안식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7번째 안식년 1년과 그 다음해 희년 1년, 이렇게 2년 동안 안식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제 육 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 년 쓰기에 족하게 할지라’고 한 말은, 만약 희년이 겹치는 해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년을 기쁨과 풍요 속에서 지킬 수 있도록 안식년 전 해, 즉 6년째 되는 해에는 소출을 평소보다 훨씬 더 많게 하여, 희년까지 3년 동안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2)6년째 되는 해 안식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소출을 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을 의뢰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안식년의 휴경으로 인해 소출을 거두지 못하게 되어 식량 부족을 염려하게 된다면 안식년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안식년 동안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주심으로 세상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시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뢰하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여 나라를 세운 후 북쪽 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쪽 유다는 B.C.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유다가 망할 것을 예언하면서 70년만에 다시 돌아올 것은 예언하는 것입니다.(렘25:11-12) 이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70년 후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안식년과 관계가 있습니다.
대하36:21에 보면,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에 이스라엘의 땅은 안식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많은 주경학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하나님이 명하신 안식년을 지키지 아니 한 것이 70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기간만큼 포로가 되게 하고 땅을 안식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그가 작정한 규례를 그의 백성들이 지키면서 살기를 원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혹은 이 법을 지킴으로 먹을 것이 없어지고, 마실 것이 없으면 어찌할까 하는 인간의 염려와 근심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4)넷째로, 인권 보호와 존중을 위해서입니다.
(1)이스라엘 백성이 같은 동족에게 종이 되었을 경우에는 주인은 7년째 되는 해에 그를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신15:12에 보면,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 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 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안식년이 되면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종이 된 지 7년째 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주인이 그 사람을 해방시켜 주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25:39-43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인 동시에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원칙상 다른 사람의 종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동족뿐 아니라 이방인의 종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레25:47)
이스라엘 백성이 종이 되는 경우는 빚이나 가난 때문에 스스로 종으로 팔린 경우(레25:39), 극도의 빈곤으로 인해 그 부모에 의해 종으로 팔린 경우(느5:5), 범죄로 인해 종으로 전락한 경우(출22:1-3)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으로 팔린 경우에는 주인은 7년째가 되면 그 사람들을 해방을 시켜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종의 해방은 안식년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년이 아닐지라도 종이 되어 6년 동안 주인을 섬겼으면 7년째 되는 해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해방을 시켜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출21:2에서도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 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 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2)종이 된 지 7년째 되는 해에는 반드시 자유를 얻도록 한 것은 인권의 보호와 존 중을 위해서입니다.
사실 모세의 율법 속에 나타나 있는 종의 제도는 당시 이방 사회의 잔인한 종의 제도와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의 적극적인 공의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 속에 나타나 있는 종의 제도에는 관용과 자비와 인도주의적 정신이 내포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비록 종의 신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인권을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모세의 율법 속에 나타나 있는 종에 대한 인권 보장과 처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히브리 종들은 자신의 생명과 육체를 보호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레21:26-27) 둘째로, 만일 주인이 지나치게 혹사시킨다는 생각이 들 때는 법에 호소할 권리도 있었습니다. 셋째로, 의식주에 대한 온당한 대우와 안식일 휴식 및 가정 생활의 자유로운 영위 등을 보장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넷째로, 주인이 종을 해방시킬 때는 그냥 보내지 않고,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보내게 함으로써 의식주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15:13-14에서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空手)로 가게 하지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다섯째로, 상전은 종을 품꾼이나 형제처럼 대우해 주어야 합니다.(레25:40)
5)다섯째로, 물질에 대한 탐욕을 억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안식년이 되면 모든 경작 활동을 중지하는 것은 물론이요, 안식년 동안 밭이나 포도원 등에서 자연적으로 나는 열매는 수확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대신 가난한 사람들과 들짐승들이 식량을 삼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출23:11) 레25:5-7에 보면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하는 객과 네 육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산으로 식물을 삼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안식년에 저절로 자라 열매 맺은 모든 수확물은 가난한 자와 짐승들이 식물로 삼도록 수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안식년의 이러한 규례는 물질에 대한 탐욕을 억제시키는 한편, 가난한 이웃이나 심지어 들짐승들까지도 돌볼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강력한 독일의 함대에 포위 당한 영국은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전시 내각을 이끌던 수상 윈스턴 처칠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전 국민에게 “지금 영국은 독일 함대에 의하여 완전 포위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공군의 폭격이 심하여, 기동력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상당한 식량을 비축해 놓았습니다. 식량이 떨어져서 비축미를 필요로 하는 국민들은 배급소 앞에 모여 차례대로 타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몇 주간 더 저항하면 반드시 연합군의 함대가 독일 함대를 격파하고, 우리 영국을 구출해 줄 것을 확신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방송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처칠의 방송 메시지가 전달된 후 한 사람도 배급소에서 비축미를 배급타간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영국이 독일 함대에 포위되어 있는 기간 동안 국민들이 어떻게 견디었는지 모르지만, 영국 국민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배급소에 나타나서 비축미를 타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 후 연합군의 함대는 독일 함대를 물리치고, 영국을 구출해 주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거친 윈스턴 처칠은 제2차 대전의 회고록에서 “대영제국의 승리는 영국 국민만이 자랑하는 신사도의 정신이 가져다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안식년 동안 자연적으로 자란 열매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수확하지 못하게 한 이유가 물질에 대한 욕심을 자제하는 한편 어려운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