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왕
시 24:1-10
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시 24:1-10 / [성소에 들어서며; 다윗의 노래] 온 누리와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여호와의 것. 세상과 그 속에 살고 있는 것이 모두 다 여호와 우리 주님의 것. 2) 주께서 바다 위에 그 터전 마련하시고 깊은 물 그 위에다 이 땅 세우시어 든든히 걱정 없이 굳혀 놓으셨도다. 3) 그 누가 여호와의 언덕에 오르리오? 그 누가 주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서리오? 4) 깨끗한 손, 정결한 마음, 심지 굳어 덧없는 데 정신 쏟지 않는 이, 이웃에게 거짓 맹세하지 않는 이, 5) 이런 사람 여호와의 복을 누리고 아무런 잘못 없다 칭찬 듣는다. 6) 이런 사람 여호와 주님을 열심히 찾고 야곱의 하나님 얼굴 뵈오려 애태우지 않으랴. (셀라)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고색 창연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스런 임금이 들어가신다. 8) 그렇다면 그 누가 영광스런 임금이시냐? 힘세고 용감한 여호와 아니시더냐? 싸움이라면 누구도 따라 잡지 못할 용사 여호와 아니시더냐?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고색 창연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스런 임금이 들어가신다. 10) 그렇다면 그 누가 영광스런 임금이시냐? 만군을 거느시고 계시는 여호와 그분이 영광스런 임금이 아니시더냐? (셀라)
시편 24편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새 수도로 세우고 신정 국가의 구심체가 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부른 노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1-2) 땅과 세계 그리고 그 안에 충만한 것과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임을 강조합니다(1). 이는 온 천지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니 그의 소유된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시며 강들 위에 건설하셨다’는 말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하의 물을 바다와 강으로 모으시고 땅이 드러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피조물에게 삶의 기반을 주신 창조 사역과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덕적 왕권(3-6) 본문은 ‘누가 여호와의 산에 오를 것인가?’라고 시작하여 ‘그를 찾는 족속이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라고 마치는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경배할 자격이 있는 자가 누구냐는 물음과 답입니다. ‘손이 깨끗하다’라는 말은 흠 없이 깨끗한 외적인 행동을 상징합니다. 마음의 청결은 내면적인 자세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악한 생각을 품지 아니하고 은밀한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마 5:8). 허탄한 데란 이 세상의 것들을 지나치게 탐닉하는 헛되고 어리석은 욕심이며, 거짓 맹세는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는 불성실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손과 마음과 입이 청결한 사람은 의롭다 칭함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되며,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군사적 왕권(7-10) 주님은 영광의 왕으로 찬양을 받으십니다(7).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전투력과 연관되며, 전쟁의 용사라는 칭호와 함께 개선하시고 입성하시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7절부터 10절까지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의 정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문들은 예루살렘에 설치된 성소인 장막의 문을 의미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도 자신의 마음의 문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성소의 문을 영원한 문이라고 노래한 것은 그것들이 영원히 존속하는 성소를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다윗은 법궤가 성막에 들어가는 것을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왕궁에 입성하시는 것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적용: 다윗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입성을 선포함으로써 이스라엘과 온 우주가 그의 주권에 전심으로 복종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 최고의 소설가 '천재 중의 천재'라는 평가를 받는 찰스 디킨스는 당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디킨스가 12살 되었을 때 가족은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디킨스는 학교를 중퇴한 뒤 구두약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하루 10시간씩 일하며 고단했지만, 늘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일이 좋으냐'며 한 마디씩 묻곤 할 때, 그는 "그럼요, 저는 희망을 닦고 있는걸요." 이후에 '위대한 유산', '올리버 트위스트' 등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작품을 쓰며 최고의 인기 작가가 되었습니다.
< 설 교 >
마음을 활짝 열고 왕을 영접하라
시 24:1-10 / 유기성 목사
주님께서 그 기초를 바다를 정복하여 세우셨고, 강을 정복하여 단단히 세우셨구나.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며, 누가 그 거룩한 곳에 들어설 수 있느냐? 깨끗한 손과 해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 헛된 우상에게 마음이 팔리지 않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고,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주님을 찾는 사람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사모하는 사람이다.(셀라)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왕께서 들어가신다. 영광의 왕이 뉘시냐? 힘이 세고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전쟁의 용사이신 주님이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왕께서 들어가신다. 영광의 왕이 뉘시냐? 만군의 주님, 그 분이야말로 영광의 왕이시다.(셀라)
우리는 하나님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심을 믿고 만 왕의 왕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엄청난 것입니다.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믿음을 가지고도 삶의 변화가 없는 교인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리적으로 믿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천지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왕되신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찬양입니다.
저는 이 시편 24편을 묵상하면서 놀라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다윗은 하나님이 창조주요 왕이심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저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왕께서 들어가신다”라고 7절부터 시작되는 표현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학적인 상상력이 아닙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뵙지 않은 사람은 쓸 수 없는 표현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도 그렇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 기록도, 사도 바울이 회심할 때 기록도 분명히 왕이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나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시편 24편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찼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왕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두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부흥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알 수 없는 흥분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교리적으로만 하나님이 천지만물의 창조주요, 만 왕의 왕이라고 믿지 않고, 정말 왕이신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놀라운 삶을 살게 됩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오늘 본문을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올 때, 너무나 기뻐서 아이처럼 춤을 추며 불렀던 노래라고 해석합니다.
삼하 6:14 다윗은 모시로 만든 에봇만을 걸치고,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다
당시 다윗의 행동은 사람들의 눈에 비정상이었기에 아내 미갈이 비난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는 1절의 다윗의 고백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다” 라는 고백이 단순히 교리적인 지식이 아니라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려고 애를 쓴 사람이 아닙니다. 부귀를 탐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복을 엄청나게 많이 받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목동의 신분에서 왕이 된 것 말고도 말년에 하나님의 성전 건립을 위해 바친 재물의 양을 보면 어마어마했습니다. 역대상 29장에 보면 성전건축 헌금으로 금 3천달라트, 은 7천달란트를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만 따져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조원 가까운 돈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재물을 인색한 마음이 없이 기꺼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1절의 고백처럼 다윗은 정말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 왕이신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도 다윗 처럼 믿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인생이 바로 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왕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3절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며, 누가 그 거룩한 곳에 들어설 수 있느냐?
4-6절에서 여러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손(행실)이 깨끗하고, 마음이 해맑고, 헛된 우상에게 마음이 팔리지 않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았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고, 주님을 찾으며,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사모하는 사람.
이러한 세세한 언급을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찬 사람입니다.
시 84:5-7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2012년 1년 만이라도 예수님을 마음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 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왕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입니다. “마음을 다 하라!” 그래서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왕이신 예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왕으로 모시면 어떤 마음이 되는 것일까요?
오늘 시편 24편 7-10절에서 저는 노래를 듣습니다. 그 때 다윗의 심정을 찬양으로 다같이 한번 느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편으로 찬양을 만든 것이 있습니다.
■[문들아 고개 들어라]
문들아 머리 들어라 들릴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영광의 왕 들어 가시도록
영광의 왕 들어 가신다 영광의 왕 뉘시뇨 강하고 능하신 주로다
전쟁에 능하신 주시라 다 찬양 위대하신 왕
왕께 만세 왕께 만세 당신은 영광의 왕이라 다 찬양 위대하신 왕
여러분, 어떠십니까? 시편 24편은 글로 읽고 머리로 이해할 성경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슴으로 읽고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감동이 있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성령님이 계시다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다윗처럼 춤을 추지 않았어도 마음 안에 무엇인가 뛰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 더 하소서! 다윗 같게 하소서!”
주님은 우리가 진정 원하면 우리에게 다윗 처럼 이사야 처럼 스데반 처럼 사도 바울 처럼 부흥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왕이신 하나님을 모시기 원하십니까? 마음을 활짝 열고 왕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유태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하시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어머니가 자기의 아들을 랍비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랍비가 아이에게 질문을 합니다.“얘야, 하나님은 어디 계시니? 네가 나에게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말을 해 준다면 동전 한 개를 주겠어.” 이 랍비는 아이가 설마 이처럼 어려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 대답합니다.“선생님, 제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해주시면 저는 선생님께 동전을 두 개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하나님이 어디에 안 계신가를 말해줄 수 있습니까?”아이의 깨끗한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장소도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는데, 죄 많은 어른의 마음은 하나님을 찾기 어렵다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이 왜 좁디 좁은 우리 마음에는 못 들어오셔서 안타까와하시는 것입니까? 천군 천마를 동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놀라운 신비인 것입니다.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임하지 못하시는 영역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 만큼은 우리가 하나님께 열어드려야 들어오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마음만큼 마음대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딸도 어느 정도 크면 방문에 <노크하고 들어오세요> 하고 붙여 놓지 않습니까?
안타깝게도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마귀를 마음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타락한 이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으나, 우리가 스스로 예수님을 마음에 왕으로 영접하기를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예수님은 마음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기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온 우주에서 오직 인간 세상만 하나님께서 당분간 왕노릇하시는 것을 보류하고 계신 영역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인간의 마음만이 하나님이 임의로 다스리지 못하는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마음을 활짝 열고 하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만왕의 왕이 들어가시는데 누가 문을 닫아 놓겠습니까? 왕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왕이 없이 사는 것이 자유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죄와 육신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지 않으면 그 헌신을 마귀에게 바치게 될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이 왕이어야 우리가 죄와 육신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문을 열어도 그저 문을 여는 정도가 아닙니다. 왕을 영접하는 마음으로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사위나 며느리가 와도 목사님이 심방 와도 문을 활짝 여는데 왕이신 주님이 오시는데 당연히 문을 활짝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찬양만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찬양 속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염려나 두려움을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슬픔이나 낙심과 절망을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림자도 없습니다. 담대함과 기쁨과 확신이 넘칩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의 왕으로 믿는 성도의 삶의 분위기입니다.
큰빛교회 부흥회, 한 집사님, 늘“내 잔이 넘치나이다”하는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는데, 이번에 자신의 잔이 이미 넘치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눈물로 고백하였습니다. 재정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형편인데, 가만히 살펴 보니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도 많더랍니다. 예수님 한 분 만으로도 이미 넘치고도 넘치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주님은 나의 최고봉] 7/4 짜증내지 말라
짜증(신경질, 분노, 불평)이라는 것은 정신적 또는 영적으로 정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짜증을 내지 않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압니다. “주 안에서 평안하기 바랍니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주 안에서 참고 기다리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혼란과 역경 속에서 참으로 주 안에서 안식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얻는 것은 환경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 평안은 오직 예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짜증을 내며 신경질을 내는 것은 언제나 죄와 연결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걱정하기도 하고 짜증나게 마련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악한 지를 말해줍니다. 짜증은 바로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의지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한 번도 걱정하거나 짜증내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이 이 땅에 자신의 뜻을 이루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짜증(걱정, 신경질, 염려 등)을 낸다면 이는 악한 것입니다. 지금 나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해결하시기에도 벅찰 것이라는 아주 어리석은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까? 모든 어리석은 생각은 다 접고 전능자의 그늘에 머무십시오. 그리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말씀하십시오.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으며 짜증내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염려와 신경질은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기에 발생되는 문제들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왕이 되시면 온 세상의 하나님이 왕되심이 보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죄와 육신의 종노릇 하면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제 마음에 예수님이 왕이 되시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음에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축원합니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시편 24:1-10 / 이삼규 목사
시편 22편은 고난의 주님, 23편은 부활의 주님, 24편은 재림의 주님에 대한 노래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본 시편이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셔올 때의 기쁨과 영광을 노래한 시라고 생각합니다(삼상 6:12-19). 그런데 시편의 내용으로 보면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여 성소로 행진하는 장면을 연상하고 쓰여졌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승리할 수 있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행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문에 다가갔을 때 레위인 문지기들이 그들을 맞이합니다. 누가 여호와의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묻는 것은 예배자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규정된 기준들(완전한 의)로 대답해 주는 것은 문지기의 몫이었습니다. 이 경우 예배자들은 자신들이 들어갈 자격을 갖추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여호와의 은총을 구하고 있다고만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여호와의 요구 사항을 충족하기 원했으나, 그렇게 하기 위해 제물을 가져와야 했음을 시사합니다. 이 시편은 사람들이 격려하는 반복구 형태로 표현된 여호와의 위대하심에 환호를 외치며 성소로 들어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1.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1-2절)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너무도 작은 나라의 신(神)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세상 여러 나라들 중 가장 작은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작은 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 세상과 온 나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24: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을 믿습니까?
학 2: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 주인이 되셨을까요?
시 24: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창 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실제로 지구 표면의 바다 면적은 육지의 세 배나 된다고 합니다.
땅을 바다나 강 위에 세우셨으니까 일단은 바닷물이나 강물이 밀려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언젠가는 다시 육지가 바다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왜냐하면 물에서 육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육지를 지탱할 힘이 없어지면 육지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안전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붙드신 손을 놓아버리면 땅은 한순간에 바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더욱이 죄에 빠진 이 세상은 더욱더 안전하지 못합니다. 마치 세월호가 순식간에 침몰하는 것처럼 침몰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당장 침몰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대로 편하게 먹고 살 수 있지만 결국 어느 한 순간에 배가 침몰하면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바다에 빠져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은 진짜 행복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죽기 전에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는 것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2. 하나님께 나아갈 자의 자격(3-6절)
1)예배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하나님의 기준들을 충족해야 합니다.
레위인들은 성문을 지키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아무나 성문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성소에 오는 사람들이 거룩함의 요구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지 적절한 제물을 가졌는지 확인하는 일을 했습니다.
시 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여기에서 여호와의 산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산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장소를 상징합니다(요 4:19-24).
2) 행동과 생각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들어가고 복을 받을 것입니다.
시 24: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여기서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행위로 범죄하지 않음을 말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이것은 내부적 마음과 뜻이 옳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한편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라는 것은 말에 있어서 거짓된 점이 없어야 할 것을 특별히 언급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손, 마음, 입 등 세 가지 면에서 정결해야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런데 왜 다윗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냐고 질문을 하였을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시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성을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그리고 다윗 자신도 법궤를 옮기려고 하다가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를 잡았던 사람이 즉사해버렸습니다. 그러나 감히 어는 인간이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든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고 인도해 주셔야만 여호와의 성산에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하실 때 아무도 그 산에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불과 빽빽한 구름 가운데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 주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려 오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내려 오셔도 안 되고 오직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덮어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죄인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허탄한데 뜻을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믿음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얻을 축복은 무엇입니까?
시 24: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여기에서 핵심 단어는 ‘복’과 ‘의’입니다. 참된 예배자가 여호와께 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복’(베라카)이라는 것은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의미는 선물, 여호와에게서 오는 풍성함 혹은 관대함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 둘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의 복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민 6: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민 6: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민 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민 6: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민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 6: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한걸음 더 나가 ‘의를 얻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시 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기본적으로는 율법, 곧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 45:25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누구를 찾는 족속이라고 하였습니까?
시 24: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이것은 겉꾸미는 자들과는 달리 행동으로 여호와의 산에 오르기 전에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시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우리는 외식을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예배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3. 영광의 왕의 입성(7-10절)
1)영광의 왕이 누구십니까?
시 24: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①영광의 왕은 우주의 창조자이십니다(1-2절)
예수님은 영원한 말씀으로 계실 때, 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요1:3, 골 1:16, 히 1:2).
②영광의 왕은 인류의 최고 심판장십니다(4절)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께 심판의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인류 최대 최후의 백보좌 심판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계 20: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③영광의 왕은 강하고 능하시며,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8절).
모든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마귀의 전쟁에서 승리함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영광의 왕을 모신 자는 강한 자가 될 수 있고,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광의 왕을 모셔야 합니다.
2)영광의 왕을 모시려면?
①문을 열어야 합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아 5: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시 24: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②문을 넓게 열어야 합니다.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도록 우리는 마음의 문을 넓게 열어야 합니다. 왕을 모시기 방해되는 문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우리가 영광의 왕을 모시려는 ‘편견의 문’, ‘부패의 문’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빈 마음에 주님이 좌정하시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③감격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열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성전으로 들어올 때, 기뻐 찬송하였습니다. 다윗은 법궤가 시온산에 들어올 때 일어나 춤을 추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성령이 거하실 성전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혼 깊은 곳에 모셔야 합니다. 그때 기쁨으로 감격하는 마음으로 모셔야 합니다.
눅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눅 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행 16:34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영광의 왕을 잘 모시면 복을 받습니다. 모든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축복하는 길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로부터 세상에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게 됩니다.
거룩한 곳에 설 자
시 24:1-10 / 지성래 목사(예수사랑교회)
사무엘하 5장에는 왕이 된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하여 이기는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니 마치도 물을 흩어 버리듯이 블레셋을 이기게 하셨다. 이기고 또 이기게 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나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삼하5:24)고 하셨다. 하나님은 블레셋의 르비임 골짜기에 가득한 블레셋의 군대를 정면공격하지 말고 뽕나무 수풀 맞은 편에서 기습공격을 하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은 “뽕나무 수풀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날 때에 공격하라”고 명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쟁을 수행하였고 블레셋을 넉넉히 물리칠 수 있었다.
이는 우리의 범사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형통해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의 말씀은 순리적이다. 상식적이다. 세상을 역리로 살고 세상을 공의와 진리의 상식에서 벗어나게 살아가는데 잘되는 경우가 있나. 그건 당장은 몰라도 잘 되어 가는 것 처럼 보이는 것 뿐이지 잘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불의한 자는 비 온 후에 풀 베임을 당하듯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전쟁에 이긴 다윗은 뽑아낸 군사 삼만 명을 모으고 하나님의 법궤를 되찾아 오게 되었다. 제사장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새 수레를 몰았다. 얼마나 기쁘던지 왕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들은 잣나무 악기를 총동원하였다. 비파와 수금과 소고와 앙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우렁차게 연주하였다. 여호와의 궤를 수레에 싣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던 중에 소들이 뛰었다. 이 일을 맡았던 제사장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법궤를 붙들었는데 그 현장에서 죽고 말았다. 법궤가 흔들리니 만지거나 붙잡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민수기 4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은“성물은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법궤를 이동할 때에 궤 양편의 네 고리에 두 개의 채를 꿰어 어깨에 메어 옮기라고 하셨다. 그런데 수레에 실어 옮겼으니 처음부터 이동 방법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두려운 마음에 휩싸인 다윗 왕은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법궤를 보관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석 달 동안 여호와께서 오벳에돔의 온 집에 복을 내리셨다. 성경은 하나님이 오벳에돔의 집에 내리신 그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벳에돔과 그의 온 집이 여호와의 법궤를 모시고 지낸 석 달 동안 하나님이 내려 주신 복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소문을 전해 들은 왕 다윗은 직접 나서서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시어 오기로 하였다. 역대상 15장에 보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그리고 레위 사람 여섯 명을 포함한 여덟 사람이 이 일을 전담하였다. 저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여섯 걸음을 갔는데 다윗은 감격하여 제사장들을 앞세우고 소와 살진 송아지를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 다윗은 앞장서서 에봇을 입고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온 백성이 뒤따르며 즐겁게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기뻐하였다. 이 역사적인 현장에서 크게 기뻐하며 춤을 추던왕 다윗을 업신여긴 다윗의 아내 미갈은 죽을 때까지 복을 받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일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시편 24편은 그 날의 그 감격과 기쁨을 고백한 다윗의 고백이다. “메시아 예언시”로 구분하는 내용이 시편 24편이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2절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3-6절은 “여호와의 법궤를 대하는 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7-10절은 여호와의 법궤를 모시어 들일 수 있도록 성소의 문을 활짝 열라는 선포이며 명령이며 찬양이다. 마치 왕이 왕궁에 입성하기 위하여 성문을 활짝 열라는 명령과도 같은 장면이다. 이는 성문을 열 듯이 성막의 문을 활짝 열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각자 자신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여호와의 임재를 환영하고 영접하라는 선포이기도 하다.
자, 그러면 과연 누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이며 과연 누가 거룩한 곳에 설 자인가. 3절에서 말씀하는 ‘여호와의 산’이란 예루살렘 성이 있는 곳을 말한다. ‘거룩한 곳’이란 여호와의 성막에 여호와의 궤를 모셔 들일 곳을 말한다. 사실 ‘거룩한 곳’이란 예루살렘과 같이 지정된 장소라기 보다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을 일컫는다.
그러면 과연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일까.
몸과 마음이 청결한 자.
다윗은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여야 한다고 하였다. 코로나19바리러스에 대한 두려움은 각 사람이 손을 늘 깨끗하게 유지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 결과 독감환자도 줄고 감기 환자도 줄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손이 깨끗하다는 말은 행실이 깨끗한 자를 말씀한다. 인간은 거룩하지 못하다. 이 세상에 거룩한 인간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10절에서 시편 14편 1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편지하였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그리고 로마서 3장 23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였다. 시편 14편 1절에 보면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그 마음이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며,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청결할 뿐만 아니라 그 행실이 깨끗한 자를 찾고 계시다. 욥기 17장 9절에 보면,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고 하였다.
종교 개혁가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게서 전해지는 그의 수도 생활의 일화이다. 그가 수도사 생활을 하던 수도원에서 여러 날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 제목은 한결 같았다.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 제발 나의 마음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마틴 루터는 수 십 번, 수 백 번 같은 내용의 기도를 계속하여 반복하였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마틴 루터는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놓고 손을 씻는데 실성한 사람처럼 손을 씻고 또 씻고 계속하여 손 씻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동료 수도사가 마틴 루터에게 물었다. “아니 자네는 왜 그렇게 손을 씻고 또 씻는가”그 때에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던 마틴 루터는“이보게 아무리 깨끗이 씻으려고 하여도 내 마음을 깨끗이 씻을 수가 없구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청결한 마음과 행실을 지켜 살기를 원했던 젊은 수도사 마틴 루터였다.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통하여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의 불을 지피도록 하셨다. 그 때의 마틴 루터의 나이는 34살이었다.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의 팔복 설교에서 교훈해 주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씀은 세상 탐심을 떠난 ‘거룩한 가난’, 청빈의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 사람들이 물욕에 끝이 없는 탐욕을 부리는 중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그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불의와 거짓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하고 명예에 먹칠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며 양심이 마비된 채 살아가는 세상의 수 많은 권세자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성도는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의 마음 가짐을 굳게 지켜 나가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말씀대로 그래야 그 의로 배부르고 그 의로 목마름이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언급하지만 강화도 성공회 예배당 입구에 들어서면 돌비에 새겨 놓은
修己洗心 去惡作善 수기세심 거악작선
이란 한자어를 대하게 된다. 이것이 무슨 교훈인가. 구한말 선교 초기에 기독교의 복음을 이렇게 명쾌하게 정의한 교훈을 접하게 된다.
그렇지 않나.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마음의 자세가 어떠하여야 하나.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씻고 악을 멀리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마치도 오늘 시편 24편 4절의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나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라는 말씀을 축약한 교훈이라 할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이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지 말고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그 말과 행실에 덕을 세우므로 하나님 앞에서 다윗처럼 “내 마음에 드는 자”라는 칭찬을 받아야 할 것이다.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않는 자.
거룩한 곳에 설 자의 또 하나의 특징은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않는 자”라고 하였다. <새번역 성경>에 보면 “헛된 우상에게 마음이 팔리지 않고”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과거나 오늘 날이나 사람의 마음을 허탄하게 하는 것은 우상 숭배이다. 돈, 재산, 명예, 인기, 권력, 힘, 외모, 젊음, 학식, 학력, 학위 등등 그 모든 것들이 잘못하면 다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되고 만다. 심지어는 아들딸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너무 잘 나서 남들보다 실력과 능력이 뛰어난 것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우상에 사로잡히는 그 것이 허탄한데 마음을 두는 것이다.
요즘 출애굽기를 새벽마다 대하는데 왜 모세는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두 돌판을 던져 깨트리게 되었나. 산 꼭대기에서 이미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 알고 있었다. 모세가 산 아래 내려와서 보니 시내산 아래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앞장 세우고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제사하며 먹고 마시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모세는 두 손에 들고 있던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을 던져 깨트린 것이다. 그 후에 하나님은 다시 두 돌판을 모세더러 다듬어 만들어 가지고 산에 오르게 하셨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이 그 두 돌판에 십계명의 말씀을 기록해 주셨다.
그 우상 숭배의 현장을 보신 하나님은 모세만 남겨 두고 모두 다 진멸해 버리시겠다고 크게 노하셨다. 그때에 모세가 중보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생각을 바꾸셔서 저들의 우상 숭배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다.
지난주 내내 날마다 조금씩 묵상한 출애굽기의 내용에 보면 하나님은 성막 건설을 명령하셨다. 백성들은 회개하는 심정으로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을 쓰고도 남도록 가져다가 넘쳐나게 쌓았다. 그만 가져오라고 할 정도였다. 우상 숭배에서 벗어난 증거란 그런 것이다.
탐심에 붙잡히고 우상 숭배에 사로 잡히며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일이 인색해진다. 그러나 우상 숭배를 회개하고 탐심을 버리기 시작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 생활이 가장 기쁘고 즐겁게 된다. 이게 무슨 말인지는 아는 사람만 안다. 그런 것을 기독교에서는 “ 은혜 받았다. 은혜가 들어갔다. 은혜를 안다. 성령 충만하다”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나. 사도행전 1-4장의 성령 받은 백성들은 가진 것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쌓아 두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의 필요를 충분히 채우며 더불어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밭을 팔아 바친 바나바였다.
하나님의 임재와 부르심 앞에 응답하며 거룩한 곳에 서는 자의 마음 가짐으로 다윗 왕과 같은 마음을 가지면 예배의 시간마다 기쁘고 예배의 시간마다 춤을 추고 싶어진다. 다윗은 그런 인물이었다. 다윗의 하나님 사랑과 하나님 섬김은 남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하나님은 다윗에 대하여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22)고 하셨다. 그렇지 않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마음에 맞는 사람과 일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과 여행도 가도, 마음에 맞는 사람과 동업도 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싶어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다윗을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공언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인물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하시려는 뜻을 이루기를 원하셨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은혜를 회복하는 주인공이 되자. 은혜를 받는 매 순간으로 자신을 지켜 가자.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
하나님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자를 찾으신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것 같지만 그 마음 속에는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행세하며 온갖 세상 불의를 짝하고 탐욕에 가득차게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그를 거룩하게 여기실 리가 없다. 불신앙과 불의의 결과는 패망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디도서 1장 16절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하였다.
겉으로는 의로운 척, 선한 척, 착한 척, 양심적인 척, 하나님을 잘 믿는 척하면서 그 마음 속으로는 온갖 추하고 악하고 더러운 생각에 사로 잡혀서 파리가 썩은 생선 위에 날아 앉듯이 살아가는 자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산에 오르고 하나님의 거룩 한 곳에 설 자는 정직하고 진실해야 한다. 세상의 불의와 거짓을 멀리해야 한다. 입으로는 거룩한 척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을 속이는 자이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이다. 레위기 19장 12절에 보면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섬기는 성도라면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처럼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불의와 거짓이 가득하고 불의하고 거짓되게 사는 자들이 득세하는 것 같은 세상에서 거짓을 버리고 공의와 진리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의 승리를 믿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각 사람이 되기를 축원한다. 그리할 때에 5절의 말씀처럼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게”될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와를 찾는 족속을 축복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복을 내려 주신다. 여호와의 문에 들어갈 자가 누구인가. 다윗은“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도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법궤를 되찾아 오는 것이 영광스럽듯이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는 것이 복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받고 사망을 이긴 부활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복 중의 복이다. 강하고 능하신 영광의 왕을 따라서 영원한 나라에 승리하는 백성으로 입성하는 영광을 누리는 주인공이 다 될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아름다운 예배
시 24:1-10 / 이규현 목사
편 24편은 잃어버린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그 순간을 기념하여 악기에 맞춰 부른 찬양 시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적들로부터 승리를 거둔 후 성전 문으로 입성하는 영광의 왕을 축하하는 찬양의 시입니다. 그 이후에도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오프닝 시로 낭독했습니다.
본문 1-2절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해 말씀하는데 하나님은 창조자라고 말씀합니다. “1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만물이 다 하나님께 속해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편 24편뿐 아니라 많은 시편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속해 있다고 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을 보면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가 연상됩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마땅한 반응은 무엇일까요? 창조주를 높여 드리는 일입니다. 창조주는 예배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피조물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앞서는 행위는 예배입니다. 시편 100편 3절에서는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합니다.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틀림없이 무엇인가를 섬기고 있습니다. 섬길 대상을 분명히 알고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섬길 대상을 잘 모르면 그것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교회를 다녀도 미신적인 신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고 그냥 교회를 다닌다면 미신입니다. 인간은 무엇이든 섬기며 삽니다. 무신론자도 신이 없음을 믿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종교입니다.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예배의 대상이 바뀌는 일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길 때가 많았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산 아래에서 모세의 형 아론이 백성들과 함께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며 섬겼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신앙입니까? 특별히 오늘날은 우상이 우글거리는 시대입니다. 거짓된 신들에게 절을 하도록 부추기는 문화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예배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본문 1절과 2절을 보면 창조주이십니다. 7절, 8절, 9절에서도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영광의 왕,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승리를 가져다주는 왕으로 소개합니다. 예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완전한 승리를 가져오게 하십니다.
그러면 예배자가 누구입니까? 3절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고 하는데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아무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는 거룩한 곳입니다. 감히 아무나 설 수 없는,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예배를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렸다고 드려진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예배가 성립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예배를 드렸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예배에서는 우리의 만족이 핵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족하든 불쾌하든 그것이 초점이 아닙니다. 예배의 초점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고자 할 때 관심은 예배자에게 있습니다. 예배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가 무슨 재물을 바쳤던 소용이 없습니다. 인류 최초에 일어났던 아벨과 가인의 제사를 통해 받은 교훈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재물을 받고 거부하신 것은 재물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재물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의 태도에 있습니다. 오늘로 치면 헌금을 얼마를 가져 왔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에게 초점을 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재물을 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기만족에 빠졌었습니다.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재물이 아니라 예배자입니다. 예배자가 잘못되어 있으면 모든 것은 다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나는 참된 예배자인가?”입니다.
본문에는 예배자의 자격이 나옵니다. 본문 4절에서는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합니다. 예배자의 마음의 상태와 외적인 행동,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까지 확인하게 합니다. 예배자는 자신을 거룩히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예배자의 필수는 정결함입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힘은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 영적인 교류가 오고가는 예배는 외적인 어떤 형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그 거리끼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항상 가깝게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다가도 하나님의 부재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과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플로이드 맥클랑(Floyd McClung)은 이렇게 묘사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니 모든 영적인 느낌이 다 사라졌다. 기도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마귀를 꾸짖고 대적도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적 슬럼프에 빠진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잃어버린 것이다.” 주로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죄의 문제로 인하여 가로막혀 있을 때입니다.
예배자에게 장애물은 마음속에 숨어있는 은밀한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입니다. 우리의 마음까지도 지으신 분이시기에 속속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문제가 있는 부부는 남편이 집에 들어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심하면 집에 들어와 자는지도 관심이 없습니다. 남편도 아내가 오늘 하루 무엇을 했는지, 아픈지, 힘들어 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대화를 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부부는 다릅니다. 서로에게 민감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서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친밀한 관계에 있을수록 하나님과의 사이에 민감함이 있습니다. 작은 죄의 문제라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걸림이 됩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그냥 앉아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그대로 두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시편 17편 3절에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이룬 엄청난 업적이나 공적 때문이 아니라 영적인 민감성 때문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거장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작은 죄의 문제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느끼고 살아갔습니다. 영적인 깨어있음을 통하여 영적인 민감성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늘 느끼며 살아갔습니다. 거짓말을 한 번 하고 나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걸림돌이 생깁니다. 그냥 사람 앞에서 거짓말 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악감을 가지고 있는 순간, 내 마음에 무엇인가 가로막고 있는 것을 느끼며 하나님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작은 죄라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시간을 보내 보십시오. 욕심에 이끌려 있는 내 마음이 그대로 있는 상태 속에서 과연 예배가 되는지 한 번 보십시오. 작은 죄라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시간을 보내 보십시오. 형식적인 예배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예배는 안 됩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닫아버리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게 만듭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실수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뭘까요? 본문 5-6절에서는 “5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어야 합니다. 누가 이런 은혜를 얻을 수가 있을까요?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에서 “찾는다”는 표현은 원문적으로 매우 간절함을 가지고 찾는 것을 말합니다.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아니라 간절하게 찾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고 합니다. 갑자기 왜 야곱의 이름이 나올까요? 야곱의 인생은 실패로 뒤범벅되어 있었습니다. 수많은 실수와 실패의 늪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고 죄를 지으면 도망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실수와 실패로 점철되었던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품어주시고 다시 그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셨습니다. 예배의 한가운데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나아올 자격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보혈은 어떤 죄도 덮을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예배가 시작됩니다. 7-8절과 9-10절은 반복입니다. 7절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절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에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라고 합니다. 성전에 큰 문이 닫혀져 있는데 왕이 들어가면 문이 활짝 열려야 했습니다. 왕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예배자들이 법궤를 들고 성전에 올라갈 때 작은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바깥에서 합창단들이 소리를 지르며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라고 찬양하면 성전 안쪽에 기다리고 있던 합창단이 응답합니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그러면 바깥에 있던 합창단이 화답합니다.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문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왕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니 문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문들이 있는데 모든 문들을 활짝 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메시지는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책망받은 여러 교회가 있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책망이 가장 심한 책망이었습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교회를 향한 주님의 준엄한 심판은 “토하여 내치리라”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하여 부족한 게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가 뭡니까?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결정적인 문제는 주님을 문 밖에 세워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라고 문을 열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예배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활동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없는 예배를 드렸지만 주님이 그 예배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없는 예배, 주님에게 관심도 없는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만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에 대해 마음이 완전히 닫혀 있었습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 예배를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없는 봉사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주님을 적극적으로 마음의 중심에 모셔 들이는 예배자의 마음이 닫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요즘은 아파트 벨을 누르면 그냥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렌즈 구멍으로 먼저 확인하거나 웬만하면 반응하지도 않습니다. 살짝 열어준다 해도 줄이 걸려 있습니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큽니다. 왕을 맞으려면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머리를 들라”는 말은 문을 끝까지 활짝 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활짝 열리지 않은 채 예배를 드리면 예배를 드린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자의 마음에 민감하게 반응하십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마음이 열려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오셨습니까? 마음이 정말 열려 있습니까? 정말 주님을 내 마음에 모셔 들이기 위해서 갈망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가 누구를 맞이해야 합니까? 영광의 왕이십니다. 절대 지존이신 하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영광의 왕, 절대 지존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냥 맞이할 수 없습니다. 왕 중의 왕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미리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문을 활짝 여는 것입니까? 갈급한 마음, 주님에 대한 굶주림, 가난한 심령이 있어야 합니다. 열린 마음은 “지금 나에게는 오직 하나님만 필요합니다!”라는 가난해진 마음입니다. 시편 73편 25절에서 시인은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음의 중심에 주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다른 것이 자리 잡고 있으면 안 됩니다. 주님이 찾아오실만한 환경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푹 젖어 살다가 주일에 오면 마음의 문이 바로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은 쉽게 열리는 게 아닙니다. 일주일동안 뜨겁게 영적인 삶을 살았던 분은 예배에 오면 불이 붙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부딪히고, 치이다 보면 영적으로 깡마른 상태가 되고 그렇게 주일날 와서 앉으면 바로 불이 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가 너무 중요합니다. 오랫동안 닫혀 있는 문은 녹슬어서 열리지도 않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기 전 마음의 준비가 중요합니다. 예배에 앉았다고 되는 게 아니라 예배를 어떻게 준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심방을 가 봐도 심방 받을 준비를 한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예배에서 가장 큰 사건은 무엇일까요? 영광의 왕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왕은 전쟁에 능하신 왕, 승리를 가져다주는 왕이십니다. 영원한 왕이신 이 왕을 만나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은 없습니다. 이번에 호주 오픈에 한국 선수가 4강에 진출한 것으로도 온 언론이 칭송을 하는 것을 봅니다. 세상은 칭송할 것에 목이 말라 있습니다. 사인을 받으려고 하고 그와 연관된 것들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과 비교가 안 됩니다.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예배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홀로 칭송을 받기 합당하신 분입니다. 최고의 지존을 만나고 난 다음에 오는 만족감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다 일어난다고 해도 왕을 알현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만남보다 더 강력한 체험은 없습니다. 예배에서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서는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라고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는 것입니다. 복 중의 복은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주어진 특권은 예배입니다. 예배보다 더 큰 선물은 없고, 더 큰 특권은 없습니다. 예배에 대한 기대감을 가진 성도는 복이 있습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세상의 어디에서도 가질 수 없는 최고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압도를 당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으로만 경험할 수 있는 경이로운 황홀함과 장엄함, 그리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반복되는 단어는 “여호와의 영광”입니다. 모세는 가시떨기의 불꽃 가운데 임하신 여호와의 영광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영광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그는 거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소명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모세의 인생 최고의 갈망은 하나였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8절의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로 모세의 최고의 갈망은 하나님의 어떤 축복도 어떤 은혜도 아닌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목마름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 영광을 한 번 살짝 보기만 해도 세상의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영광 안에 숨어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생애에 수없는 고난이 있었지만 고난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이 있었는데 그것은 장차 내게 나타날 영광,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영광”이라는 단어에 “무게”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보다 더 큰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배의 특권은 영광의 왕을 만나는 겁니다.
모세의 갈망이 너무도 강해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집니다. 하나님은 특이한 방식으로 당신의 영광을 모세에게 살짝 보여주십니다. “내가 내 등을 보이리니 내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살짝 눈을 가리고 보여주셨음에도 모세는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를 당합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은 광채로 사람들이 볼 수 없을 정도로 광채가 났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 가장 축복된 경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을 통하여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눈으로 본 것 같은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영광입니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나 그 영광이 어떠한 것이든 하나님의 영광에 비교하면 태양빛 앞의 반딧불만큼도 아닙니다. 바울은 그 영광의 무게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한 번이라도 보면 다른 모든 것을 다 삼켜 버립니다. 모든 것을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력합니다. 우리가 이전에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될 때 놀랍니다. 경이롭다고 표현합니다. 그때 우리는 감격합니다. 너무 좋아서 거기에 빠져들고 빠져들다 보면 다른 게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게 영광의 충격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너무 좋아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없을 정도로 그 영광에 압도를 당합니다.
신자는 예배 속에서 그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맛보게 됩니다. 예배를 드렸다는 것으로 만족하며 끝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입맛에 맞는 예배가 아닌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예배를 드리다 보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기 위해서 승부를 거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배에 모든 것을 생명처럼 붙들고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신앙과 삶은 예배에서 결정됩니다. 교회는 예배 드리는 곳입니다. 예배가 예배답게 드려지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참된 예배가 드려지고 그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면 그것이 부흥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부흥이 아닙니다.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에 승부를 걸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배에 승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인생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지만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면 승리합니다. 어떤 고난도 이겨 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 중의 축복은 예배입니다. 보물 중의 보물이고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내 죄의 문제를 다 청산하고 거룩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그 임재에 압도를 당한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능히 이기고도 남을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예배 안에 나타나는 영광을 본 자들이 세상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한 해 동안 예배에 성공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을 받고 의를 얻을 사람
시 24:1-5 / 이규왕 목사
늘 우리는 사면초가라는 말을 그대로 실감할 만큼 나라와 민족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종교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걱정스러운 것은 오늘이 아니라 미래가 오늘보다 더 못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입니다.
요즘 시중에 ‘10년 후 한국’이라는 책이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의 위기,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으며, 추락의 7가지 원인을 지적하고 있는데 매우 공감이 가는 말들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정치가나 우리 국민들이 자기 철학이 부재한 반면 이미 세계 역사의 실험장에서 실패한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 무엇일까요?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 올바르게 살므로 민족과 개인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과 교회는 결코 이대로 주저앉거나 무너져 내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민족과 교회를 통해서 세계 속에서 해야 할 사명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빈손으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져야 합니다.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나야 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야 하고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하고, 좋은 믿음을 가져야만 하고, 최선의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 가운데 행복한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 좋은 믿음을 갖는 일입니다. 다른 조건들은 서로가 큰 차이가 없고 또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변수가 있지만 좋은 믿음은 다른 조건이 좀 불리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능히 극복할 수 있게 하는 행복의 절대 요소인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과 지나간 역사 속에서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와 같은 원리가 적중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가고 오는 역사 속에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고, 누구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다윗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의를 얻을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말씀으로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주목해야할 말씀입니다.
1. 다 여호와의 것-하나님의 주재권
오늘 우리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나, 아니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신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친히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인류의 역사와 민족의 흥망성쇠와 개개인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삼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그와 같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 어느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우리 중에서도 ‘그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성 있게 성경에 소개된 인물 가운데서 누구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많이 받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오늘 시편 기자 다윗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흔히 사람들이 축복의 대명사로 여기는 부귀권세는 물론 영적인 면에 있어서 다윗만큼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도 별로 많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과의 두드러진 차이 중에 하나는 한국 사람은 좀 돈이 있으면 큰 집. 큰 차, 사치한 생활을 통해서 겉으로 반드시 드러내지만, 중국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평범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어서 알부자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현지 안내원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와 같은 사람을 찾는다면 솔로몬은 부귀권세를 드러내는 일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면, 다윗은 누구보다 많은 부귀를 하나님께 드린 알부자였습니다.
다윗의 평소 생활을 보면 부귀권세를 탐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목동의 신분에서 왕이 된 것 말고도 말년에 하나님의 성전 건립을 위해 바친 재물의 양을 보면 그가 얼마나 부자였었는가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대상 29:3) 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대상 29:4)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전 벽에 입히며 (대상 29:5) 금, 은그릇을 만들며 공장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쓰게 하였노니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금 한 돈의 무게가 3.75g 이며 요즘 소매 시세가 66,700원이라면 여기서 '금 3천 달란트는 약 102,000g 인데 모두 얼마일까요? 다윗은 하나님께 금만 드린 것이 아니라 은을 드린 것이 7천 달란트 약 242,000g 이라고 하였는데 그 값은 또 얼마나 될 까요?
다윗의 행동에 감동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 다투어 드린 금이 오천 달란트라면 다윗이 드린 금은 온 국민이 드린 금의 3/5이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가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는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재물을 인색한 마음이 없이 기꺼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재산의 액수와 상관없이 믿음과 비례하는 것이라면 오늘 성경에 시편 기자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그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시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그것은 자신이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면서도 자기가 최고이고, 주인이 아니라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고 그 중에 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하나님의 주재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대상 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많은 것을 드리고서도 교만하거나 아까워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믿음이 바로 시편기자처럼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창조주 되심과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주재권의 회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주인인체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것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청지기의 삶을 사느냐 아니면 주님의 것을 마치 내 것처럼 생각하고 나만을 위해 사는 횡령죄를 범하며 사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대상 29: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2. 성산에 오를 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그것을 다스리시는 대 주재가 되심을 믿는 사람의 한 가지 특징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죄악된 세상과 비교한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영광스런 하늘나라에만 계셔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땅위에서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지상에 임하셨습니다. 그 곳이 바로 시내산입니다.
(출 19:20)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그 때 하나님은 제사장들은 몸을 성결케 하고 시내 산 사면을 거룩하게 하여 백성이 산에 오르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시내 산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임재하여 그 백성들과 함께하시기 위해 성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 성막의 중심이 되는 것이 법궤이며 그 안에는 십계명 돌비를 담고 그 법궤를 덮는 뚜껑인 속죄소를 만들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 위에 친히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모세는 거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출 30:6)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민 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씀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뵙기 위해 하늘나라나 시내 산에 올라갈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항상 성막에 임재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밤낮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낮에는 구름 기둥이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속죄하는 제물을 가지고 성막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과 제사는 중심적이며 필수적인 것으로 오늘 시편 기자가 바로 그러한 정서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좀 더 많은 제물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는 형식화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은 그러한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1) 사울 왕은 이 점을 간과한 채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다가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도리어 버림을 받는 왕이 되었습니다.
(삼상 15:22)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2) 다윗 왕은 이 점을 깨닫고 하나님께 형식이 아니라 마음을 드림으로 기쁘시게 하여 복을 받고 의를 얻는 왕이 되었습니다.
(시 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시 24: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여기서 여호와 산에 오른 다는 말씀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것을 뜻한다면 나머지는 예배자의 바른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하거나 부요하거나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정말 창조주 되심과 만물의 대주재가 되심을 믿고 인정하는 사람과 정반대로 자기가 주인인줄 착각하며 사는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예배 자세입니다.
가) 몸과 마음이 청결한 자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죄가 없는 의로운 자를 뜻한다면 과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만물보다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자는 손뿐만 아니라 마음도 청결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먼저 죄악으로 더러워진 손과 마음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거룩케 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나) 허황된 것을 버리는 자
세상에서 가장 허황된 것은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과 더불어 헛된 욕심과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여져서 우리의 삶 속에 확실한 승리를 보장하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 약속에 신실한 자
하나님은 중심에 진실한 자를 원하십니다(시 51:6). 그러므로 참 예배 자는 거짓을 버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민 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이 같은 마음의 자세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편 기자에게서 우리는 예배자에게 있어서 제물보다 올바른 마음의 자세가 더 우선되어야 함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 같은 자세로 예배에 참여하는 자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대주재가 되심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사람은 다윗처럼 하나님께 많은 것을 헌금하는 사람이라고만 규정한다면 기독교는 부르주아의 종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은 만물의 대 주재되심을 믿었을 때 그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혀지는 물질을 많이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전 인격을 신령과 진정의 예배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기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모르는 체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그에게 복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복이 지속되게 하시고, 그 복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의를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 24:5)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시 24: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3. 지상 최대의 기쁨-하나님께 영광 돌림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마치 곡식이 자라서 결실하는 것처럼 시편 기자의 신앙이 점진적으로 성숙해져 마침내 결실되어가는 과정을 보아왔습니다. 그가 먼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주재권의 회복과 더불어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를 드리는 예배의 회복이 따랐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뜻 없이 지으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작은 미물도 다 쓸데가 있어서 지으셨다면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요 하나님의 형상인 나를 창조하신 분명한 목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주셔서 오늘 이 자리까지 나오게 하신 것도 분명히 뜻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것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이 성공적인 삶이요, 나 자신에게도 행복이요 기쁨이라는 것을 시편 기자를 통해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될 때 일평생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바른 삶을 살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삶의 일관된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의 일관된 목표가 무엇일까요? 돈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여 부귀권세를 한 손에 움켜쥐고 나 보라는 듯이 사는 것이었나요? 그렇다면 목동 다윗이 왕이 되어 나라를 평정하였으니 모든 목표가 다 이루어졌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일관된 목표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목동이든지 왕이든지, 가난하든지 부요하든지 어떤 처지에서도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성공이요, 승리요, 축복이요, 행복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성공의 정상에 오른 시점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삼하 5:25)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이처럼 다윗이 왕이 되어 나라가 안정된 후 제일 먼저 서둘러 한 일이 무엇인가를 보면 그의 일관된 목표가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인 시온 산성을 정복하여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도읍을 정한 후 제일 먼저 계획한 일은 그의 왕궁을 건축하는 일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 예루살렘이 군사나 경제나 행정이 아니라 신앙의 중심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다윗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나라가 안팎으로 견고하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한 것도 그의 일관된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이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많은 성경학자들의 견해를 빌리면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다가 첫 번째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재도전하여 성공하게 되었을 때 너무나 기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아이처럼 춤을 추며 부른 노래라고 합니다.
(삼하 6:14)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삼하 6: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오늘 성경은 다윗이 왕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고, 영토를 확장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일도 중대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지상 최대의 과업으로 삼았음을 여실히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시 24: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시 24:8)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시 24: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다윗 성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광의 왕이시오 영원하신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 성으로 들어가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들이 활짝 열어 제치고 그 영광의 왕의 입성을 환영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신앙이 다 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성막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자기의 성안으로 모시기를 원하였으니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에 불타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높인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을 영광의 왕이요 영원하신 왕이신 하나님께 모든 승리의 영광을 돌리며 높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은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든 피조물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목적으로 창조되고 또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의 뜻은 우리의 관심과 일생의 사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인생,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는 세상의 군왕들, 교만한 부자,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패역한 우상 숭배자, 이 모두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복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남보다 부귀권세가 더 많고, 높은 사람이 아니라 패역한 세상에서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서 누가 과연 하나님에게 복을 받고 또 의를 얻은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시 24:5)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시 24: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말씀은 ‘여호와를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함으로, 여호와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은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현실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해도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 위기 상황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이 아들을 낳고서도 도리어 슬퍼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 농촌은 지금 풍년이 들었어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농부들이 근심이 하늘에 닿고 있습니다.
그것은 쌀 소비량 감소, WTO 농산물시장개방, 뉴라운드 출범에 따른 정부추곡수매물량 매년 4% 감소 등 장기적으로 불투명한 농업 전망과 농민의 불안 심리 때문입니다.
조선업계는 앞으로 몇 년간의 일감을 미리 싼 가격으로 수주해 놓았기 때문에 쉴 사이 없이 계속 일은 하지만 그 때보다 원자재와 유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급상승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면 한이 없고 답답하여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 민족과 개개인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과거 6.25 사변의 잿더미에서 오늘이 있도록 축복해주신 역사의 주권자요 민족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며 개개인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로 이 민족이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을 앞당기는 길이 바로 전도이며, 그 일을 위해 교회가 새생명 3.1 운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 사람을 찾아가서 경험담을 듣고 노하우를 배울 때 시행착오를 줄이고 성공을 앞당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해 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깨닫고 오늘 말씀을 되새김질 하고 일상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며 산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복을 받게 하시고 의를 얻게 하실 것입니다.
1) 우리의 소유 중에 그 무엇 하나 내 것이 하나도 없고 다 대주재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최상의 목적을 삼고 살아가기로 일관된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여야 합니다.
2) 무슨 일을 하든지 성실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 예배자의 마음이므로 예배자는 그 마음이 청결하고 허탄한데 뜻을 두지 않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돈을 구하고 명예를 구하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의 삶을 살며, 주일 하루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하나님을 내 마음의 성전에 모시고 언행심사(言行心事),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메마름이나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구원의 하나님의 의를 얻는 오늘 말씀의 축복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
시 24:1-6 / 피종진 목사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는 저주와 멸망을 받는 대상으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복을 주셨습니다(창 1:27,28). 그러나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 에덴동산의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자가 여호와께 복을 받을 자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여호와께 예배하는 자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시 24:3) 여기에서 ‘여호와의 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곳이고, 예배를 드리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 예배하는 자가 복을 받을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 24:4) ①손이 깨끗해야 합니다. 즉 선하고 깨끗한 행실로 예배해야 합니다. ②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마음에 악하고 더러운 생각과 죄의 요소가 없고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만을 좇으며 예배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8에 보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③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아야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 권력, 쾌락 등에 그 뜻과 목적을 두고 그것만을 추구하며 사는 자들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습니다. ④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은 여전히 불신앙과 불의한 요소들로 가득차있고, 자신의 뜻대로만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되고 가증한 자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자입니다.
창세기 32:24~28에 보면 야곱이 얼마나 축복을 사모했는지 밤새도록 천사를 붙잡고 날이 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천사가 이제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고 했을 때 야곱이 천사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끝까지 붙잡고 축복을 호소하자 그의 이름을 묻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주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때에 중언부언하거나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포기하는 이러한 기도를 드려서는 안됩니다. 야곱은 환도뼈를 다쳐 매우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날이 샐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자에게 매달려 자신을 축복해달라고 간구했을 때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소원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포기하지 말고 응답될 때까지 인내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충성을 다하는 자입니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잠 28:20) ‘충성된 자’는 재물을 모으고자 하는 데 있어서도 성실하게 일하며 정당한 방법으로 얻으려 하는 자를 가리키고,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정당치 않은 방법으로 남보다 더 많은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충성하지 않고 요행만 바라는 자는 복을 받지 못합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기만 바라면 안됩니다. 충성하는 자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충성(忠誠)이란 말은 한자어로 풀이해보면 마음 중심을 다해서 말한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극치가 충성입니다.
민수기 14:24에 보면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열 두 정탐꾼 중에 열 정탐꾼은 불신앙적인 보고를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게 했지만,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정탐꾼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인 줄 믿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신앙의 말을 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복을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10에 보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충성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안겨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십일조를 드리는 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3:10~12) 십일조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눈에 보이지만 믿음이 없이는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교회에 어려서부터 십일조생활을 잘한 아이들이 청년으로 성장하여 축복을 받은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생활을 하면 질병으로 고통당하지 않도록 건강하게 해주시고, 재산을 악한 자들이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해주시며, 최후까지 성공을 지켜주시고, 세계적인 인물이 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성일을 지키는 자입니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사 56:2)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거룩히 하시고 복 주신 날입니다(창 2:3).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일을 거룩히 지키는 자는 여호와께 복을 받게 됩니다. 출애굽기 20:8~11에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심을 확고히 인식케 되고,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은혜를 세세토록 찬양하게 되며,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여섯째, 교회를 평안하게 하는 자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시 122:6)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평안하게 하는 자는 기쁨과 형통과 승리의 복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응답을 받기까지 생명을 걸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성일을 거룩히 지키고, 교회를 평안하게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풍족하게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시 24:3-6 / 김광일 목사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작품 ‘성 프란치스코’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프란치스코의 동료 수사 레오가 질문했습니다. “프란치스코 형제, 당신은 다른 형제들에겐 쉽고 평탄한 길을 선택해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당신은 왜 고통스러운 오르막길을 택했습니까? 왜 하필이면 추위와 비와 눈 속으로 갑니까?” 그때 프란치스코는 대답했습니다. “레오 형제, 하나님은 항상 추위와 비와 눈 속에서 나타나십니다. 그러니 속 태우지 마세요. 평지에서는 부유한 영주들과 아름답고 매력적인 귀부인들을 만날 수 있고, 그 세계의 주인인 죽음과 당신의 육신인 가엾은 늙은 당나귀를 만날 수 있어요. 레오 형제, 그렇지만 진정한 형제는 산을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등산 중에도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등산, 곧 오름의 길을 걷는 것과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며 연약한 나와 광대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안병욱(安秉煜) 교수는 산에 오르기를 좋아 했습니다. ‘산의 철학’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이 우울해질 때는 산으로 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륙색을 짊어지고 조용한 산길을 친구와 같이 걸어가노라면 인생의 우울이 어느 새 안개처럼 사리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삶에 지치고 생에 권태를 느꼈을 때에 산에 오르는 것이 좋습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정상을 향해 오를 때 생의 용기를 느끼고 건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신이 피곤하고 인생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 산의 정기가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 시인은 본 시를 통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이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구절은 시편 15편 1절에도 나타납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두 곳에서 함께 노래하고 있는 여호와의 산은 성전이 자리 잡고 있는 시온 산이며 그 거룩한 곳은 예루살렘 성전을 뜻합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산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으로 기록된 여호와의 산에 올랐습니다. 그 곳에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그는 하나님을 만나 뵙고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이야말로 최초로 여호와의 산에 오른 산행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거룩한 등반자입니다. 또한 주의 성산에 머무는 경건한 산사람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산에는 아무나 오르지 못합니다. 시편기자는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그렇다면 과연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어떠한 자가 되어야 합니까?
첫째로 손이 깨끗한 자
미국 정치가 대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려서 학교에 다니던 때 하루는 교칙을 어기어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를 불러 세워놓고 벌을 주는데, 손바닥을 때리는 것이 보통 흔하게 쓰이던 체형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손이 형편없이 더러웠습니다. 그것 때문에 야단을 더 맞을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책상으로 불려가는 도중에 오른 손바닥에 침을 발라 양복바지에다 문질러서 닦았습니다. “손 내놔라!" 선생님이 호령하였습니다. 대니엘은 침을 칠해서 좀 닦은 오른 손을 내놓았습니다. 그 손을 보자 선생님은 즉시 말했습니다. “대니엘, 이 교실에서 이 손보다 더러운 손을 찾으면, 이번만은 너를 용서해주마” 그러자 즉각적으로 등 뒤에 숨겼던 왼손을 내 보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여기 있습니다” 그 손을 보자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습니다. “그만하면 됐다. 이번만은 용서해 두지. 네 자리에 가서 앉아도 좋다.”
본문 4절입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여기의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행실이 올바른 자를 가리킵니다. 손은 사람의 백 가지 행실을 나타냅니다. 손의 정결과 부정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의 깨끗함과 더러움에 이어집니다. 인류는 깨끗지 못한 더러운 손 때문에 비극을 맛보고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담의 손은 범죄한 손입니다. 그 손으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손도 부정했습니다. 그 손으로 아벨을 쳐 죽였기 때문입니다. 아간은 그 손으로 도적질을 했고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약탈했으며 가룟유다는 그 손으로 은 30냥에 예수를 팔았습니다.
이 시대에도 손이 깨끗한 자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회에 행실이 바른 자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테러와 살인, 성폭행과 가정파괴, 백주강도와 환경파괴, 어디서나 부정한 손들이 저지른 상처들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구약의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으로 피흘린 손을 가졌다하여 성전을 짓는 데 실격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손이 깨끗한 지의 여부는 인생의 흥망과 상관관계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손이 깨끗해야 합니다. 그 손에 흠과 티가 없는 자라야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복이 있습니다.
둘째로 마음이 청결한 자
로버트 멍어(Robert Boyd Munger)의 작품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주님을 영접한 사람의 마음속에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집을 짓고 사십니다. 서재, 주방, 거실, 작업실, 오락실, 침실이 잘 갖추어진 집입니다. 저자는 주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봅니다. 서재에 들어가 보니 성경책이 있어야 할 서재엔 세상의 온갖 책들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는 주방엔 돈, 학위, 직업, 명성 등의 부끄러운 음식들이 차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거실로 나왔을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와 매일 거실에서 교제를 하자” 하지만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회사에 가고, 친구를 만나고, 학교에 가며, 내가 좋아 하는 취미 생활을 하고 자신의 일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작업을 하는 작업장은 썰렁하기만 합니다. 주님의 도움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방식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뭐든 금방 포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집에 있는 오락실에는 주님의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보이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것들이 많고, 주님과 함께하면 세상 것들을 즐기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술, 담배, 도박 외에도 주님보다 우선하는 모든 것들에 해당하는 개인적인 것들이 그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네 곁에 있으면 재미있는 것을 즐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온 것은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임을 기억하거라” 주님과 모든 방을 돌아본 후 최종적으로 침실로 향합니다. 침실엔 비밀스럽게 여기는 은밀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性)입니다. 이렇듯 주님을 영접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마음속에 계시는 이상, 주님께서는 이것들을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로 바꾸어 주십니다. 방 귀퉁이에 있는 벽장에 몰래 담아뒀던 부끄러운 과거와 잘못들도 주님께서 깨끗이 청소해 주십니다. 마지막으론 내 마음속 그리스도의 집을 주님의 이름으로 명의 이전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 집을 관리할 자신이 없기에 열쇠를 드리며 간청합니다. “주님, 당신은 손님이었고 제가 주인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하인이 되겠습니다. 당신이 집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명의 이전이 되고 나서야 저자는 진정한 평화가 영혼에 임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삶은 모든 것의 주권을 그리스도에게 넘겨드리는 모습을 말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여기의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동기의 순수성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른 존재입니다. 격식을 갖추어 예배를 드리면서도 오래 믿은 자라는 체면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선량하고 부드럽게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사악하고 날카로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거룩한 모양을 하면서 은밀한 곳에서 죄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겉으로 순종하는 것 같은데 마음으로는 이미 불순종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순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체면이나 위치 때문에 마지못해 순종하는 모습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산상설교의 첫 머리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 이전에 마음의 청결을 크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시민권이 하늘에 있습니다. 세상에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됩니다. 세상을 바르게 살며 하나님의 나라로 말미암아 즐거워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세상의 권력 앞에서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물질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온갖 부정한 옥심의 유혹을 물리 칠 수 있습니다. 부디 마음을 청결히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오르는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
프랑스의 작가 빅톨 유고(Victor Hugo)는 젊은 날에 탕자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파리 세느강에 한 어린 소년의 시체가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을 막기 위해 죽음으로 항거한 사랑하는 딸의 시체였습니다. 이때 유고는 “내가 다시는 세상열락을 즐기지 아니하리라”고 결심합니다. 심기일전한 그는 사회복지사업으로 딸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했습니다. 교육부장관이 되었을 때는 자유와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3색 국기를 창안했고, 노년에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어린 딸과의 약속을 지킴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약속하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에 신실을 다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맹세와 약속에 대해 분명히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거짓맹세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는 불성실한 태도를 갖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뜻을 허탄한 데 두고 거짓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자기가 한 말과 맹세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습니까? 한 해를 시작하면서 주님을 열심히 섬기겠노라 맹세하고 그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까? 열심히 봉사하겠노라 약속하고 도무지 나타나지도 않는 것은 아닙니까? 무릇 거짓말은 사탄의 것입니다. 죽음을 부르는 재앙입니다. 오직 이익만을 위해 거짓말을 내뱉으며 거짓 맹세를 일삼는 사람은 여호와의 산에 결코 오를 수 없습니다.
1598년 낭트칙령(Edict of Nantes)에 의해 프랑스에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유명한 루블(Louvre)에서의 예배는 바로 본 시편의 말씀으로 개회되었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로다.” 구원받은 백성이면서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자로 살아가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판가름 날 것인데 그렇게 마구잡이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세상은 거짓과 진리가 뒤섞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가 점점 없어집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로 살아가시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등산가들은 깨끗한 마음으로 산에 올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사고가 없다는 것입니다. 험한 산에는 아무나 떼 지어 몰려가는 곳이 아닙니다. 히말라야 산맥(Himalaya)에는 해발 8천m가 넘은 봉우리가 14개나 있습니다. 그 중 알려진 것의 하나가‘애나푸르나’입니다. 이 산의 정상에 올랐던 모리스 에르조그(Maurice Herzog)는 동상에 걸려 열 손가락 모두와 발 가락 몇 개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그 산이야말로 우리의 남은 생애를 바쳐 올라갈만한 보물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는 누구입니까? 성산에 오르기 위해 온갖 희생을 무릅쓰는 산악인들처럼 어떻게 행하여야 합니까? 우선 손을 깨끗이 하여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 맹세하지 말고 성실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육신과 정신과 영혼이 깨끗한 자가 되어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입니까
시 24:3-6 / 최응희 목사 / 안디옥 교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질문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3
‘여호와의 산’과 ‘그의 거룩한 곳’은 같은 의미의 동의어입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뜻하는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성전을 뜻하는 말이고, 오늘 우리에게는 예배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배의 자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것이요, 거룩한 곳에 서는 것이요,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배자의 자격에 대해서 네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손이 깨끗하며
둘째, 마음이 청결하며
셋째,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넷째,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
손이 깨끗하다는 것은 행실이 바르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영혼이 맑은 것을 말합니다.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는 것은 그 중심이 세속적인 데 있지 않고 말씀에 삶의 중심이 있는 것입니다. 거짓 맹세하지 않는 것은 진실됨을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서라는 말씀입니다. 행실을 고치는 마음,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간절함,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는 믿음, 거짓됨을 버리고 진심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태도, 그것을 말씀합니다. 늘 말씀 드렸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온전하지 못했어도 예배는 온전히 드리라. 세상에서는 세상처럼 살았다 해도 적어도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 백성의 모습을 회복하라.’ 어쩔 수 없이 그런 삶을 살았다 해도 마음 아피 회개하는 마음, 진실된 믿음의 모습으로 돌아서는 것이 바른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교회에서도 누군가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비방하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추한 모습입니까? 교회에서 교만하고, 허세를 부리는 것은 얼마나 우습고 격이 맞지 않는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산, 그 거룩한 곳은 오히려 그런 마음을 떨쳐버리는 곳이 아닙니까. 손을 깨끗하게 하려고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고 거룩한 곳에 오는 것입니다. 허탄한데 마음 빼앗겼던 것을 고치려고 하나님 앞에 오는 것입니다. 진실된 삶의 모습을 회복하려고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더러워진 손과 어두워진 영과 추한 생각과 헛된 마음들을 씻는 곳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여호와의 산, 그 거룩한 곳에 오를 자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중심은 예배입니다.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지 않는다면 그 어떤 대단한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믿음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예배드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도덕적인 사람일런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예배만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위요, 하나님을 모시는 행위요,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하게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4:21-23
어디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장소가 아니라 태도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어디서 은혜를 받을까를 생각하고, 무슨 설교를 누구에게 들을까를 생각하지만 진정한 예배는 ‘어디서’가 아니고 ‘어떻게’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영혼으로 예배하고 말씀중심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입니다. 몸은 예배당에 와 있지만 마음은 딴 데 가 있다면, 그건 ‘예배의식에 참석’한 거지, ‘예배’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의식에 참석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자를 찾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도덕적인 사람을 찾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실수 없는 사람을 찾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죄 가운데 빠졌었어도, 비록 온전치 못했어도, 비록 말씀대로 살지 못했어도, 비록 부끄러운 모습이라 하여도,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받아 주시고, 용서하시고, 어루만지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인쳐주십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겠습니까?
1.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초대의 자리에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사람들의 자리나 사람을 위한 모임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재하신 자리요, 하나님께 드리는 모임입니다. 예배는 설교 듣는 시간이 아닙니다. 설교가 예배가 아닙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요한 시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설교가 곧 예배는 아닙니다. 설교 들으려 교회에 와서는 안됩니다. 예배드리러 와야 합니다. 예배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시간입니다. 영혼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믿지 않는다면 찬양은 노래자랑에 불과한 것이요, 기도는 심리적 위로를 얻기 위한 것이요, 설교는 연설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곧 성령의 임재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찬양,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믿으며 드리는 예배가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2. 참회와 고백을 담은 예배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을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세상의 가치관에 묻히고, 세상 사람들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시간에 이제 그런 욕심 사납던 삶의 찌꺼기들을 씻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다시 태어남을 경험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바삐 사느라 잊었던 나의 신분을 회복하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세상에 물들고, 사람들 속에 상처받은 영혼을 씻고 닦아서 다시 맑은 심령을 회복하는 시간--그것이 예배입니다. 때로는 십자가 앞에 무릎꿇는 믿음으로 그 앞에서 가슴을 두드리고, 은혜 속에서 심령을 어루만져 주시는 그 크신 사랑에 감동하여 눈물도 흘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사실 우리 속에는 이기심과 교만과 탐욕과 거짓과 죄된 생각이 가득합니다. 하나님 앞에 더럽고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어디에서 이 죄의 짐을 내려놓고, 어디에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어디에서 눈물을 흘려 영혼을 씻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그래야 합니다. 예배에서 그래야 합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던지, 예배를 잘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배에서 그 굳은 심령을 푸시기 바랍니다. 예배에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가장 낮은 자의 자세로 하나님께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상처받고 낙심한 마음, 더럽혀지고 이지러진 심령을 예배에서 고침을 받고, 거듭나고, 축복 받고,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참회와 고백이 있는 예배, 그런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3. 믿음으로 말씀을 듣는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만남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만남은 아주 철학적인 말입니다. 그냥 오늘 교우들이 한 자리에 앉았다가 간다고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다가 동네 사람과 긴 시간 얘기를 나누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만남은 인격적인 교류와 감동이 있을 때 만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함께 살아도 한번도 못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굴을 못봐서가 아닙니다. 성격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인격적인 교류와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얼굴로는 한 번도 못 본 사람과도 만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먼 거리가 있는 사람과도 만날 수 있습니다. 책을 통해서 건, 이야기를 통해서 건, 인격적인 교류가 있을 때 만남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런 만남보다 더 깊고 실제적이고 영적인 만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이야기만 들어도 감동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의 생애를 걸기도 합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과 나의 인격이 만나고, 그 만남 속에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은 또한 생명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바로 그런 만남의 장소입니다. 말씀 속에서 우리는 바로 그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만나겠습니까? 말씀에서 만나지 못하면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나겠습니까?
이렇게 말씀이 주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되려고 하면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선포되는 말씀에 감동 받으려는 열린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듣는 것입니다.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들으십시오. 저기 그때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지금 나에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여십시오. 영의 귀를 열어 영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4. 헌신의 결단이 있는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성령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심령 속에 결단의 씨앗을 심고 헌신으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하실 때, 그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예배의 최종 목적은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성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 열매가 있는 예배가 영과 진리의 예배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여호와께 복을 받을 사람이요, 진실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참된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도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예배가 영광중에 올려지고, 더 크고 풍성한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뜻
시 24:3-4 / 고신일 목사
<목회기도>
사는 복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배하며 살게 하셔서 기쁨으로, 하나님 영광 받으시라고 찬양을 드립니다.
감사하며 살라시고 축복하심에 감사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더러움과 많이 어울리며 살았습니다.
감추었으나 하나님 아시는 모든 허물과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방주에 오른 자로, 거룩한 산에 오를 자로 살아야 하는 우리들…
거침이 되는 수고와 무거움의 짐을 벗게 하시옵소서.
하나님, 성도들의 기도 제목 중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야 한다는 내용이 많습니다.
하나님, 기막힌 사연을 감춘 채 눈물 참고 앉아 있는 성도들을 보시옵소서.
어루만지시고 싸매셔서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일어나게 하옵소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간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병든 이, 군대에 나가 있는 이, 객지에 나가 사는 이들, 외국에 나가 사는 이들…
저들에게 평안의 소식이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몸이 불편하여, 오지에서 외국에서 인터넷에 접속하여 예배드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들에게도 가슴 뜨거움의 역사가 있는 성령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하시옵소서.
말씀 들고 선 부족한 종을 붙드셔서 능력과 치료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매 주일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금년에 매 주일빠짐없이… 주일성수하는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에 성공하고, 주일성수에 성공하고, 범사에 성공하는 2005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술도 좋아하고 놀음도 좋아하고 자기 편한 대로 막 살던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으면서도 걱정이 되었던지 '나는 틀림없이 지옥 갈텐데' 하는
말을 남기고 갔답니다.
그런데 죽어 도착한 곳 문 앞에 베드로 사도가 하는 말이
"너 천당 갈래 지옥 갈래?" 하더랍니다.
'아,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어떻게 이걸 저에게 물어본다는 말이요?'
"그러면 한 번 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뭔데?"
"제가 어딜 갈지 마음을 정하기 전에
먼저 구경을 할 수는 없는지요?" 했습니다.
그랬더니 "좋다"고 "구경해 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먼저 천국을 갔습니다.
흰옷을 입은 성도들과 천사들이 다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뒤에 앉아 있으려니 따분해서 못 견디겠어요.
그런데 잠시 후 지옥에 가보니 지옥에는 카지노도 있고
술집도 있고 여자들도 많고 시끌벅적 왁자지껄한데…
놀던 물 같아서 거기가 맘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앞에 가서 그랬답니다.
"저는 아무래도 지옥체질입니다. 그러니까 지옥으로 보내 주세요"
그랬더니 "그래라"하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탄광 굴 같은 깊숙한 곳에 들어가
뜨거운 불 속에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이거 좀 틀리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왔던 데가 여기가 아닌데요."
그때 안내자가 하는 말이
"지난번에 네가 본 것은 선전(광고)이야"라고 답했답니다. 】
여러분은 혹시 눈에 보이는 무언가에 속고 살지는 않습니까?
광고와 같은 것에, 귀에 들리는 좋은 소리에 속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일을 선택할 때 '기준'이 무엇입니까?
범사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결정을 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참된 크리스챤은,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라는 짧은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고민하며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3가지가 있습니다.
- 그중 하나가, '나는 누구인가'하는 정체성(identity) 문제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염세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가
어느 날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사색을 하는 동안 날이 저물었습니다.
텅빈 공원에 홀로 남았을 때에 관리인이 다가와서
'여보시오 당신은 누구요 어디서 왔기에 해가 지는데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않고 이곳에 앉아 있는 거요?' 라는 말에
쇼펜하우어는 대답하기를 '바로 그거요, 내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그것 때문에 지금 번민하고 있는 중이요' 라고 대답했답니다.>
이 정체성에 대한 번민은 예수 믿어 구원받아
하나님 자녀 되고 천국백성 된 우리에겐 없어야 합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 알지 못하는 분들은
오늘 깨닫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 두 번째는, '나는 과연 중요한(필요한) 존재인가?' 하는
중요성(importance)문제입니다.
- 세 번째는, '나의 위치는 어느 정도인가?'하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끼치는
영향력(impact)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세 가지 [정체성(자기 인식), 중요성, 영향력]에 대한 의심을 갖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낙심하게 되고… 마침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쓸모 없는 인생이란 생각까지 하여… 죽음을 재촉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오늘 살아 있다고 하는 자체가 여러분의 삶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대고 함께 따라서 합니다.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 나는 꼭 필요한 사람이다.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살아 있다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고,
오늘 예배 드리는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중요한 사람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어디에 마음을 뺏기고 있는가? 어디에 뜻을 두고 있는가?
그래서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할 수 있느냐>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 예수 믿음으로 망하지 않는, 영생을 얻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요3:16)
-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되었습니다.(요1:12)
- 예수 믿음으로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빌3:20)
그런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면 천하보다 귀합니다.
한 생명을 위해 "하루가 천년 같이 천년이 하루 같이" 기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만큼 중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께, 하나님의 나라에 VIP가 되었습니다.
매우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얼마나 귀중하고 대단한지…
우리의 말에 권세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으로 구원을 받기도 하고 멸망 받아 지옥 백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고(롬10:10)
입으로 소리내어 하나님 귀에 들린 소리는 하나님께서 시행하신다 했습니다.(민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14:28)
우리가 내뱉는 말을 하나님께서 시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말을 조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그렇게 귀한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헛된 것에 귀를 기울이거나
마음을 허탄한 곳에, 쓸데 없는 곳에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안개 자욱한 하늘과 같습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생은
마치 안개 낀 공항에 착륙해야 하는 비행기 조종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고, 볼 수 없을 때 조종사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앞세워
계기판의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읽으려 합니다.
고도, 속도, 거리, 방향, 활주로와의 거리… 등등
그리고 가능한 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제사]의 지시(뜻)를 잘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착륙이 가능할 것 같은 지식이나 경험보다
'착륙 허락여부'를 알려 주는 관제사의 뜻에 따라야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완전한 관제사가 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잘 따라야 범사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우리는 하나님의 뜻하심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 하나님 말씀을 읽으려 하고
- 하나님 말씀을 잘 가르치고/배우려 하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 말씀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
이 말씀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세상 흘러가는 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과 한 맘 되어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마음이 청결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최고의 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에 의해 실현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더 이상 첨가나 수정이 불필요한 완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마음을 정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2005년엔 어떤 뜻을 정하셨습니까? 어떤 결심을 하셨습니까?
그 정함이, 그 결심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은혜를 베푸실만한 것입니까?
다니엘 1장에 보면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왕족과 귀족 중에 몸이 튼튼하고, 잘 생기고, 교육을 많이 받고,
지혜와 총명이 있는 소년들을 뽑아 바벨론의 언어와 문학을 배우게 했습니다.
그들을 훗날 왕궁에서 왕을 모실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최고의 음식들이 제공되었습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단1:8)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마음을 기뻐하시고
다니엘이 마음 정한대로 되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단1:9)
마음을 정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그 마음 정한 대로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지혜를 주셔서 모든 문학과 학문에 뛰어나게 하시고
환상과 꿈을 해석하는 특별한 능력까지 주셨습니다.(단1:17)
다니엘의 주변에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
함께 뜻을 정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냐(사드락), 미사엘(메삭), 아사랴(아벳느고)>(단1:7,16)입니다.
이들은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에 절하라고 했는데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풀무불에 던져지기도 했습니다(단3:1~30).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 주시지 않고 우리가 죽게 되더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금신상에 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물론 그의 세 친구들은 죽음의 협박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다니엘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는 어떤 친구들이 있습니까?
그 친구들과 어울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끊으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마음을 정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함께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다니엘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친구가 있기를 바랍니다.
내 뜻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내 뜻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해 사람 몸을 입은 자신의 뜻을 포기하셨습니다.
"…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14:36)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12:50)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성경에 수많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만 더 소개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6)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5:17)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8)
이 하나님의 뜻은 초환경적이고/무조건적이고/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 쉬지 말고 / 범사에> 라는 말은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쉬지 말고 감사하며…
범사에 기뻐하고, 범사에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시간도 초월하고, 환경도 초월하고, 상황도 초월하여…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삶,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환경에 지배를 받고 조건에 얽매여 있습니다.
의존적입니다. 무엇인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럴 땐 기뻐하고, 저럴 땐 낙심합니다.
이럴 땐 기도하고, 저럴 땐 기도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삽니다.
이럴 땐 감사하고, 저럴 땐 투덜댑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결코 우리를 괴롭히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뭐라고 하면 자녀들은 대부분 부모에 대해
"우리 엄마 아빠는 잔소리가 심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녀들을 괴롭히기로 작정합니까?
그러나 자녀들은 자기 잘 되라고 하는 말을 귀찮아 합니다.
하나님의 법, 계명, 성경에 담긴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진 꿈, 희망, 바램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순간순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어야
역대하 14장에 보면 아사 왕은 유다 백성들에게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라'고 했습니다.(대하14:4)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중심에 계시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게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누가 지킵니까?
빌립보서 4장 4~7절에 보면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믿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습니다.
어려운 교회를 돕고 선교사들의 활동을 지원합니다.
못 먹고 못 배우는 아이들을 위해 후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
우리가, 기둥교회가 세상 모든 어려움을 짊어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모든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시지 않으셨고
모든 사람을 배부르게 하시지 않으셨으며
모든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기둥교회가, 제가 받는 스트레스 중 큰 것은
수많은 기관에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수많은 어려운 교회들이…
수많은 어려운 목회자들이…,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이…
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기둥교회가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이번 남아시아 지진/해일에도 우리는 <국제기아대책기구>를 통해 후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곳에서 다 자기들한테 후원금을 보내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조각 내어 나누어 보낼 수도 없고…
우리가 손닿는 곳을 통해 전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더 하고 싶은 마음으로…
할 수 있음에, 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겸손하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도우면서 신문에 내고 이름내고 박수 받고 상패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가진 보물, 시간, 마음, 물질, 재능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써야 할 줄 믿습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신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9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동록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마6:19)고 했습니다.
세상 것에 목표하지 말고, 하늘에 소망을 두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하나님 마음에 드는 쌓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게 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뜻을
허탄한 곳에, 허망한 곳에, 망할 일에, 어이 없고 공허한 일에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부자가 되고, 위인, 유명인, 큰 교회, 이름난 교인이… 아니라
세상에 빛 되고, 소금 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어디에 두셨습니까?
마음에 따라 몸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교회에서나… 언제 어디서나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으며~
거짓 맹세치 않는~ 자로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오를 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2005년 뜻을 정했습니다. 마음을 정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세상 것 바라보고 흔들리거나 유혹받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잘못된 선전에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은 백성 되지 않도록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거짓맹세
시 24:3-4 / 고신일 목사
목회기도>
좋으신 하나님, 예배드릴 수 있음에,
은혜로운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심에 감사 드립니다.
여기 대부분 삶에 지친 이들이 모였습니다.
여기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산에 오를 자"가 되기 원하는 심령들이 모였습니다.
새 힘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엔 참으로 험악한 범죄자들이 판을 쳐
귀로 듣기에 소름 끼치고 눈으로 보기 어려워 눈감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런 기막힌 세상에 사는 우리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좁은 외길가는 인생임에 감사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배드림으로, 주일 성수함으로… 시작하는 이 주간,
1월을 보내고 2월을 맞게 되는 이 주간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군대에 나가 있는 이들, 객지에 나가 어렵게 사는 이들,
하나님 저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상함이 없는 은총으로 지켜 주시기 원합니다.
외국에 나가 있는 성도들 있습니다.
저들에게서 오고가는 소식이 좋은 소식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병상의 환자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하루 속히 회복하여
우리와 같이 기쁨의 자리에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귀한 시간 악한 마귀 틈타지 않도록 성령께서 주장하여 주실 줄로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여러분 생각에는 세월이 빠른가요, 느리나요?
어떤 글에 보니까 세월은 나이대로 흐른다고 합니다.
- 10대 때는 세월이 시속 10km로 느리게 가고
- 20대 때는 세월이 시속 20km로 가고
- 40대 때는 세월이 시속 40km로 가고
- 50대 때는 세월이 시속 50km로 가고
- 70대 때는 세월이 시속 70km로 달리고
세월이 빠르다고 느끼는 분은 그만큼 나이가 많이 들었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은 "나는 언제 어른이 되나"라고 생각한다는데
어른들은 "너 벌써 중3이니?"라고 한답니다.
말하는 그분은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옆의 분과 "세월 참 느리네요"라고 인사합니다.
송구영신 예배 때 시편 24편 3~6절 말씀을 가지고
2005년 "산에 오를 자"로 살자고… [산에 오를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라는
말씀을 전했고 오늘 [거짓맹세]에 대한 말씀으로
"산에 오를 자"의 자격에 대한 말씀을 4번 째 전하려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거짓]과 [맹세]는
어떤 것의 속과 겉처럼 묶어서 하나로 언급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과 [맹세]에 대해 먼저 구별하여 살펴봅니다.
● 거짓(False, lie)
<거짓(False, lie)>은 사실과 다른 것이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말하거나, 사실처럼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은
'하나님 보다 자신을 더 높게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을 표현합니다.(시59:12-13, 사28:15)
그리고 거짓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인 우상숭배, 복술, 주술과 관련하여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렘10:14, 암2:4, 슥10:2)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속여서 예언하는 사람들도
거짓을 말하는 자로 표현되었습니다.(렘29:9)
분명히 모세의 율법에서 거짓을 금하였고(출20:16, 레19:11, 신5:20)
거짓 고소, 거짓 증거를 경계하였습니다.(신19:15~21)
신약에서도 거짓은 구원의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며 사탄에 속한 것이라고 보아
요한은 마귀를 거짓말하는 자이며, 거짓의 아비이고 살인한 자라고 하였습니다.(요8:44)
그리고 바울은 성도들에게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가르쳤습니다.(골3:9)
그러나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 창세기 12장 10~20절에 보면
자기 아내 사래가 너무 예뻐서, 이집트의 바로 왕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까봐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14절에 보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창세기 20장 1~13절에 보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도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여자가 너무 예뻐도 안되고, 남자도 너무 멋있어도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바라보고 갖고 싶은 대상이 되어 좋을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슬쩍 지나치며 봐도 불쾌하지 않고,
다시 쳐다 보고 싶지 않을 정도'가 좋습니다.
지나가다가 또 보고 싶을 정도로 생겼다면 문제입니다.
옆의 분과 서로 "그 정도 생긴 것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 이 자리에는 "심히 아름다운 분"이 안계시는 것 같습니다.
없습니다. 그런 분 없어서 감사합니다.
>> 이삭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 창세기 26장 1~11절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자기의 예쁜 아내로 인해 자기가 죽임을 당할까봐' 리브가를 누이라고 거짓말했습니다.
>> 야곱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 창세기 27장 19,24절에 야곱도 아버지 이삭에게 거짓말을 하여
형이 받을 장자의 복을 가로챘습니다.
>> 아니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5장 1~11절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대 그리스도 교회 성도들은 아가페의 정신으로써 피차 유무상통하는
일종의 그리스도교 공산주의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복음 전파하는 성도의 삶에 찬동하면
일단 자기 재산을 처분해서 공동체에 바친 다음에
그 재산은 그 공동체의 공유(公有) 재산이 되고 사사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아니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바치면서도
온전하게 드리지 않고 거짓말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 출애굽기 1장 15~22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때에
산파 십부라와 부아는 히브리 여인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명을 받았으나
"히브리 여인은 건강하여 산파가 도착하기 전에 애를 낳아버립니다"라고 말하였으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 한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 여호수아 2장 4~5절에 라합은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군을 거짓말로 살려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 보아 거짓말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죽을까봐 두려워하여 거짓말로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경우와
- 산파 십부라와 부아 그리고 라합처럼 생명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경우
- 야곱처럼 자기 유익을 위해 남을 속이는 경우
-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을 속이는 경우… 등이 있습니다.
칸트(Kant)는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적으로 참을 말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프랑스의 철인 콩스탕(M. Benjamin Constant)은
"진실을 말하는 것은 의무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을 주장할 권리를 소유한 사람에게나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It is a duty to tell the truths, but only to one who has a right to it.)
고인이 되신 홍현설박사님도 그의 책에서 (홍현설 저작전집 제 1권 p.366)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녀나 부모의 운명을 대신 지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은 그 자체의 동기 속에 악한 요소가 하나도 없다.
다만 자기의 이해 문제를 위해서 자기에게 편리하도록
자기 욕심 채우기를 위해서 하는 사업상의 거짓말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라고 했습니다.
저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악한 요소가 없는
아브라함(창12:10~20, 20:1~13)과 이삭(창26:1~11)과 같은 경우와
산파 십부라와 부아(출1:15~22) 그리고 기생 라합(수2:4~5)의 경우처럼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경우에는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십부라와 부아처럼 언제나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자기 기준에 따른 것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거짓으로 남을 깎아 내리고, 평안을 깨고,
거짓말을 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거짓 고소하고,
거짓 증거하고, 거짓 맹세하는 것은 모두 삼가야 합니다.
● 맹세(Oath)
그리고 맹세(Oath)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 약속을 보증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당시 맹세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증인으로 하거나 특별한 상벌 조항,
특히 '맹세를 어기는 경우에는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규정을 정하여
맹세를 지키게 하였습니다.(삼상14:44, 삼하 3:35)
이스라엘 사람들은 "맹세"가
하나님 앞(신6:13, 삼상14:45, 19:6, 사48:1, 렘12:16)에서 약속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맹세의 엄중함과 신성함을 강조하였습니다.(창21:23, 31:53, 갈1:20, 히6:15)
그러므로 당연히 맹세를 함부로 해서는 안되었습니다.(출20:16, 신5:11)
그들은 혹시 맹세를 해 놓고 지키지 않는 경우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레19:12)으로 여겨
마땅히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겔17:13, 16,18~19)
그렇기 때문에 맹세를 한 경우 그것이 비록 손해가 되더라도 지켜야 했습니다.(레5:1~4)
그리고 어떤 맹세는 자기가 한 것 때문에 그 후손에게까지도
구속력을 가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창50:25~26, 수9장)
이런 무서운 맹세가 다른 사람을 속이는데 악용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맹세의 오용을 막기 위해
맹세를 함부로 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마5:34~37)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 (마5:34~37)
물론 예수님이 진실한 맹세 자체를 거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마26:63~64)
야고보서에도 맹세를 금하고 있습니다.(약5: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약5:12)
<맹세>는 <약속>과 다른 것입니다.
약속은 '어떤 상대자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서로 합의하여 결정하여 두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끼리 한 약속도 잘 지켜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우리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예"와 "아니오"가 분명해야 하고,
현대 크리스챤의 문제는 "예"와 "아니오"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예" 한 대로 "아니오"한 대로 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란 수식어가 붙지 않더라도 사람은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맹세는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는 다짐'입니다.
그러므로 맹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맹세를 할 때, 쉽게 '하나님께 맹세코'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라도 그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면 '맹세'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지난 1월 14일 심야기도회는 비전센타에서 <권사교육 및 헌신예배>로 모였습니다.
그때 제가 권사님들을 모두 일어서게 하고는
"권사는 입교인 15명의 한명을 세우는 것이니 전도하지 못한 분들은
올 한 해 동안 어떻게 해서든 15명을 교회에 데리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등록 시키지 못해도 15명을 교회 구경이라도 시키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하기로 작정하신 분만 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일어섰던 분들 모두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신이 없는 분들은 다시 일어서십시오."라고 했는데
일어서는 분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배 중에 정한 그것도 맹세입니다.
그때 제가 3번이나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렇게 맹세를 해놓고 지키지 않으면
그것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하신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맹세하고 지키지 않으니 거짓말했으니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하신 계명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맹세를 잘못하면 계명 둘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 [서원]
그리고 맹세의 한 종류가 <맹세할 서, 바랄 원(빌원)>을 뜻하는[서원(誓願)]입니다.
<요구되지 않은(하도록 되어 있지 않은) 선행 또는 그에 준하는 어떤 "일"을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 [서원]한 사람들
성경에 나타난 서원한 사람들의 [서원]에 대하여 몇 가지 살펴봅니다.
- 야곱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면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다고 서원했습니다.(창287:20~22)
- 입다는 전쟁에 승리케 하시면 집에 돌아와
제일 먼저 맞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삿11:30~40)
전쟁에 이겨 집에 돌아왔는데 무남독녀가 소고 치며 춤추며 영접했습니다.
그때 입다는 자기 옷을 찢으며 "슬프도다 내 딸이여" 하며
서원한 대로 딸을 바쳤습니다.
-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다 했습니다 - 삼상1:9~11)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남편 엘가나와 동침하여,
정상적인 임신 방법으로…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그밖의 여러 사람들의 서원이 성경에 나옵니다.
* [서원]한 사람들의 의무
그렇다면 서원을 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사람끼리의 약속(언약)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말고 지켜야 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갈3:15)
>> 하물며 서원은 반드시 이행해야 합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악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민30:2)
>> 자기에게 해로울지라도 이행해야 합니다.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시15:4)
>> 서원한 것을 실수라고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 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전5:6)
>> 더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전5:4)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신23:21)
>> 돌이키거나 변역치 말아야 합니다.
사사기 11장 30~40절에 입다의 서원을 보면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삿11:35)
라고 했습니다.
[서원]한 사람들이 이행치 않으면 손으로 하는 것을 진멸하십니다.(전5:1~7)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것을 요구하십니다.(신23:21)
그러므로
>> 함부로 서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솔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 (잠20:25)
>> 이행치 못할 서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전5:5)
여러분 서원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하고,
잘못된 서원이면 목회자를 찾아가 서원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위하여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레27:8)
순교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약속한/서원한/맹세한 것을 지키려고 죽은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이 한 마디 말만하면
그 무서운 처형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데…
하나님과의 맹세를 지키려고 죽어간 사람들이 순교자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Polycarp)은
155년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의 순교에 대한 이야기는 [폴리갑의 순교에 대한 서머나인들의 편지]
(The Letter of the Smyrneans on the Martyrdom of Polycarp)에 남아있습니다.
로마의 통치자는 폴리갑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86년 동안 그분의 종으로 살아왔지만,
그분은 나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는가?" 라고 하며 죽어갔습니다.>
[Tony Lane 지음 [기독교 사상사] P.26 참조]
예수님 이름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 복음 전하다 죽어간 사람들, 순교자들…
그들은 "거짓 맹세"치 않으려고, 맹세한 것을 지키려고 죽은 사람들입니다.
맹세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를 드리며 사는 사람은
거짓을 버리고 맹세한 바를 신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슥8:17)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싫어하신다고 했습니다.(잠6:16~1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진실한 사람, 곧 믿을 만한 사람,
약속을 지키는 사람, 맹세를 지키는 사람, 서원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대부분도 하나님 앞에 맹세한 것이 있습니다.
-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 앞에서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 처음 세례 받을 때 하나님께 맹세한 것이 있습니다.
세례는 많은 성도들 앞에서
"이제부터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빛되고 소금된 삶을 사시겠습니까?"라고 묻는 물음에
"아멘"함으로 세례를 주고 세례 받는 것입니다.
- 처음 은혜 받았을 때 맹세한 것이 있습니다.
- 처음 집사 될 때 목회자 앞에서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집사 될 때 목회자들이
"술 마십니까? 담배를 피우십니까? 도박을 하십니까?" 물으면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하고 다짐받았습니다.
- 처음 권사 될 때…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권사될 때는 서약서에 사인을 합니다. 그 서약한 대로 하고 계십니까?
- 장로 될 때… 다짐한 것,
- 신학교 들어갈 때… 추천 받는 목사님 앞에서 다짐한 것,
- 목사 될 때, 다짐하고 맹세한 것
-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팠을 때…
목사 앞에서 하나님께 맹세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 0시 예배 때 마음으로 다짐 한 것, 서원 한 것, 맹세한 것…
- 작정하여 기도하기로 한 것, 헌금하기로 한 것(작정헌금),
봉사하기로 한 것… 모두 거짓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산에 오를 자는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산에 오르는데 거짓 맹세가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로 장애 되는 거짓맹세는 없는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다짐했는데 혹 지키지 않은 것은 없는지…
스스로를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2005년 산에 오를 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산에 오른 삶, 하나님을 뵈옵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승리의 삶이 되려면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시편 24편 5절 말씀대로 약속된 복을 받습니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시24:5)
여러분,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는
2005년 산에 오를 자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산에 오를 자로 살기 원합니다.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않는 삶이 되도록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시옵소서.
스스로 돌아보아 거짓 맹세한 것 없는 지 살펴 보게 하시고
맹세한 것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 복을 받고 하나님께 의를 얻는 복된 성도들,
산에 오를 자, 산에 오른 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손
시 24:3-6 / 고신일 목사
<목회기도>
생명 주신 하나님, 오늘도 살아있음에 감사 드립니다.
세상에서 각기 다른 어려움을 견디며 살던 우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우리가 바쁘다는 이유로, 지쳤다는 이유로, 힘들다는 이유로, 어렵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능력을 잊고 살았음을 회개합니다.
믿음에, 소망에, 사랑에, 경제에… 병들고 지친 손을 들고 주님 앞에 왔습니다.
신령한 복을 주셔서 치료하시고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세상 삶에, 세상 재미에 익숙해진 우리들…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시고…
세속과 방종을 물리칠 용기를 가진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된 승리자의 삶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군대에, 객지에, 외국에… 병상에 누워 있음으로…
교회와 가정을 그리워하며 예배에 마음을 둔 모든 이들에게도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는 복을 주시옵소서.
우리를 "산에 오를 자"로 살게 하시려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른 손 높이 들고 "할렐루야"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전도서 9장 4절에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나음이니라"(전9:4)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살았으니 감사하며, 소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소망이 있으니 웃으며 삽시다.
옆의 분과 웃으며 인사합니다.
[웃으며 삽시다. 춥지만 잘 견디십시오]
얼굴의 14개 근육만 움직이면 쉽게 미소가 나온다는데
뭐하러 72개의 근육을 움직이면서 얼굴을 찌푸립니까?
72개씩 움직이며 수고하지 말고 14개만 움직여 미소 지으며 사시기 바랍니다.
<조선일보 2005. 1. 7(금). D2면> [올해는 웃자] 웃음의 효과
매일 배꼽 쥐게 웃으면 '종양·바이러스도 무기력'
척추 불치병환자 ‘박장대소 치료’ 끝에 정상인 회복
미국 남캘리포니아 로마 린다 의과대학의 웃음학 교수
리 버크 연구팀이 밝혀낸 웃음의 효과는,
첫째 종양과 바이러스를 공격하는 킬러세포의 증가 및 활성화,
둘째 인체 면역기능을 하는 감마 인터페론 증가.
그리고 스트레스 호르몬 감소 등이다.
‘웃으면 복이 와요’ 혹은 ‘웃으면 건강해져요’라는 말이 헛말은 아닌 셈이다.
노먼 커즌즈라는 미국 언론인은 척추를 움직이지 못하는 불치병을 앓다가
전신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의사들의 처방은 진통제와 신경안정제 기타 등등
독한 약을 먹으며 견디다가 죽으라는 것.
하지만 노먼은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자기 몸에 대한 자세한 정보 탐색으로 이겨내기로 결심한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가장 큰 힘이 된 것이 바로 웃음이다.
하루에 몇 시간씩 웃기는 영화 보기가 주된 치료방법이었다.
약물요법을 병행하면서 웃기는 영화 한 편을 보고
잠자리에 들면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다. 배꼽을 쥐고 웃어대는 일을 반복하니 고통이 잦아들고
심지어 염증도 치료되는 효과까지 나왔다.
1979년 그는 정상으로 돌아왔고 그 해에 그는 자기의 경험을
‘질병의 해부(Anatomy of Illness)’라는 제목의 책으로 정리했다.
이어 1980년 강의 도중 심장발작으로 눕게 되자 이 또한 웃음요법으로 극복했다.
이 또한‘마음의 치유력(The Healing Heart)’이라는 책으로 나와 있다.
두 책 모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였다.
커즌즈는 이후로도 언론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90년 75세로 타계했다.
오늘 본문 시편 24편은
"이스라엘을 위해 친히 싸우신,
거룩한 용사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 1~2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우주적이고 절대적인 주권을 찬양하는 송가(Chant)입니다.
- 그리고 3절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들의 자격에 대한 질문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시24:3)
[거룩한 산]은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 곳, 하나님께 예배하는,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이 있는 언덕(시온)과 동의어입니다.
(참조: 시3:4, 15:1, 24:3, 78:54 / 단9:16,20 / 옵16 / 습3:11)
거룩하신, 구별되신 …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하는
질문에 대해 4절에 그 자격이 나옵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시24:4)
●손이 깨끗하며…
물론 성경이 말하는 깨끗한 손은 깨끗하게 씻은 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손]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모두 손들어 보세요. 두 손 다~
안 올라가시는 분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손을 올리기 싫거나, 기분 나쁘거나, 다쳤거나… 신경통이 있으신 분일 것입니다.
<강도와 신경통>
오 헨리의 소설 중 '강도와 신경통'이라는 작품에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하러 남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물건만 훔쳐서 나오려고 했는데 주인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총을 겨누고 주인에게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한 손만 들었습니다.
잘못하다 총을 꺼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 손 다 들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한 손만 드는 것입니다.
왜 한 손만 드냐고 물었더니 한 손은 '신경통'이라 들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 도둑은 그 주인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신경통에는 이런 것이 좋다… 저런 것이 좋다…' 이야기하며
신경통 해결하는 방법을 설명하다가 날이 밝았다고 합니다.
사람은 공통의 관심사가 있을 때 쉽게 친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격이 다르고, 나이도, 고향도, 생활수준도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하나되어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하나될 수 있고, 친구될 수 있고, 선교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이름으로, 예수님 믿음으로 하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손의 여러 가지 의미
특별한 장애가 아니라면 사람은 누구나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을 어떻게… 어느 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평가됩니다.
그래서 철학자 칸트는 "손은 외부의 두뇌"라고 했습니다.
마음 속의 생각을 표현하는 두뇌적 역할을 하는 기관이 "손"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손"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의미합니다.
"손"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인류의 시조는 손을 들어 선악과를 따먹어 최초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창3:6)
가인은 손을 들어 동생 아벨을 쳐죽여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창4:8)
그리고 손은 여러 의도로 사용되었습니다.
• 손을 드는 것은 : 백성에의 축복의 의미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레9:22)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눅24:50)
여러분, 예배를 마칠 시간에 안수 받은 목사가 손을 들고 축도를 합니다.
그런데 예배 드리다가 바쁘다고 중간에 나가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예배는 시작부터 끝까지 다 중요하고 귀한 것이지만
마지막에 축도를 받고 찬양대의 송가를 끝으로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이지
설교를 들었다고 예배 드렸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 손을 드는 것은 : 영원한 맹약의 의미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노라 나의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신32:40)
• 손을 씻는 것은 : 결백의 표명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신21: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시26:6)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 27:24)
희생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은 : 그것에 죄를 지우는 표시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찌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레1:4)
손은 죄를 전가시키는 것이기도 합다.
• 축복의 표시로 머리에 안수 : 임직(任職)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창39: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민27:18)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행 6: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19: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10:16)
• 승리의 상징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출17:12)
• 기도할 때의 습관
"솔로몬이 여호와의 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마주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왕상8:22)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왕상8:38)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이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께 아뢰기를 마치고
여호와의 단 앞에서 일어나" (왕상8:54)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시28:2)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시88:9)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사1:15)
우리 교회에서도 기도할 때
"오른손들고 기도합시다. 두 손들고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도 성경말씀 대로 하는 것입니다.
• 경배의 표시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134: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할 때도 손을 들어 표시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손은 우리네 세상 삶의 표현이기도 하고
한 사람의 인격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 손이 크다'는 것은 마음 씀씀이가 크고 통이 크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 손이 작다'는 것은 반대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손이 깨끗하다는 말은 깨끗한 인격, 깨끗한 마음, 정결한 신앙심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손
2005년을 살아가는 우리… 또 한 해의 기회를 부여받은 우리…
<손이 깨끗하여> "산에 오를 자"로 살아야 합니다.
2005년에 산에 올라야 합니다.
→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이 있는 산(언덕, 시온)
(참조: 시3:4, 15:1, 24:3, 78:54 / 단9:16,20 / 옵16 / 습3:11)
→ 하나님께 예배하는 산
→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산
→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자리의 산
→ 사람들에게 빛 되고 소금 된 사람이 오르는 산
→ 손이 깨끗한 사람이 오를 수 있는 산에 올라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산에 올라 하나님께 의존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되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싶어하실 만한
깨끗한 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손이 되십시다.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편 73편 23절에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73:23)
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내 손을 붙들어 주셔서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항상(always)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의 고백이 2005년 여러분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면 안심이 됩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면 염려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년 전(2001년) 우리 기둥교회 달력에 있던 그림 기억나시지요?
어린아이가 어른의 손을 잡았습니다.
어른이 어린아이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2005년의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 붙잡힌 손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의 오른손이 붙잡혀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 시편 73: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73:23)
☞ 시편 37:24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4)
하나님께 붙들려야 하고, 내 손이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붙들리면 염려도 없고 안심이 됩니다.
안심이 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간혹 산 속에 들어가, 기도원에 들어가… 가족과 세상을 멀리하고
거룩함과 성결을 유지하며 산다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만이 하나님의 원하심은 아닙니다.
물론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하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거룩함과 성결을 유지하며
빛과 소금된 역할을 하는 것을 원하셨지
세상을 등지고 혼자만 거룩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 하나님은 우리가 영생을 보장받은 구원받은 백성이지만(요3:16)
이 세상의 삶에도 충실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 백성된 구원받은 사람이지만(빌3:20)
세상에 속한 나라에서도 좋은 시민으로 살며
빛 되고 소금 되며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구원받은 자녀이지만(요1:12)
이 땅에 태어나게 되어 연결된 부모, 형제, 친척, 이웃…에게도
잘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했고, 네 자녀를 노엽게 말라고 했습니다.
형제와 친척과 화목하게 지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과 그 속에서 잘 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며 수많은 사람의 손을 잡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오늘 집에 가서 종이에 '나와 연결된 사람이 누가 있으며
내가 잘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가, 어느 곳에 연결되어 있는가'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기둥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학교나 직장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 지금 만나는 사람, 즐겨 하는 일이, 자주 만나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일이며 사람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누구와 가깝게 지내며 어느 곳에 연결되어 있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손에 붙잡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조금 전에 보신 그림처럼 2005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손잡고 사는 우리를 우습게 여기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어도…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 잡은 손놓고 쉽게, 편하게, 재미있게 살라고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런데 조금 크면 부모의 손을 놓고 자기 마음대로 가려고 합니다.
꼭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고, 많이 배우고 똑똑해지면 하나님보다 더 나아지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10살이든, 20살이든, 40이든, 70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자녀임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손잡은 것이 가장 안전한 삶이요,
하나님 손잡은 것이 가장 복(福)된 삶이요,
하나님 손잡은 것이 가장 확실한 승리의 삶입니다.
"손이 깨끗하다"는 말은 하나님께 붙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붙잡혀 있으면서 더러운 시궁창에 손을 넣으려 할 때
부모가 아이의 손이 시궁창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더러운 것이 묻으면 닦아 줍니다. 문제는 손을 놓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상 주와 함께 하면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더러운 손이 될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 손을 잡아 주십니다.
하나님 손잡고 사는 깨끗한 손으로 2005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함께 찬양합니다. ♬ "손 잡고 일어서세요" 왜 나만 겪는 고만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헤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손잡고 계심에 감사합니다.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결심합니다.
역사하여 주셔서 헛된 삶이 되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손에 더러운 것 묻히지 않는 깨끗한 손으로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 도와 주세요. 하나님 힘을 주세요.
하나님 연약한 우리들의 손을 붙잡은 것 놓지 말아 주세요.
2005년 승리의 삶이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 역사하여 주실 줄로 믿사오며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마 음
시 24:3-6 / 고신일 목사
<목회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오늘, 정성으로 예배드리는 기둥교회에 있게 하심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매주 반복되는 습관적 예배가 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온 이들… 마지못해서… 억지로 나온 이들까지도
웨슬리처럼 가슴 뜨거움이 있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이제 2005년을 사는 우리들…
- 습관과 평범함의 반복에서 일어나기 원합니다.
- 무기력함과 무능력의 자리에서 일어나기 원합니다.
- 허약함과 괴로움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원합니다.
- 실망과 좌절의 탄식의 자리에서 일어나기 원합니다. 일으켜 주옵소서.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으로…
기쁨으로 간증하며 전도하는 삶이 되도록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하나님, 양떼들을 위해 부족한 목자가 기도합니다.
- 여기 병든 몸 이끌고 나온 이들이 있습니다.
치료하시어 강건함으로 일하게 하옵소서.
- 여기 상처받은 마음으로 앉은 이도 있습니다.
어루만져 주시고 싸매 주시옵소서.
- 낭패와 실망 당한 이들이 있습니다. 새 힘 주시옵소서.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시간 사람의 소리를 듣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종의 목소리에 기름 부으셔서 성령으로 역사 하여 주옵소서.
병원에 있는 환자, 집에 있는 환자, 하나님 치료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군대에 나가 있는 젊은이들… 일하기 위해, 공부, 여행으로 외국에 나가 있는 이들
어느 하늘 아래 있든지 평안함으로 지켜 주시옵소서.
우리가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이 시간
악한 마귀 틈타지 않도록 성령께서 간섭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힘있고 은혜로운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 찬양대에 감사드립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은 그 사람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말, 소망 담긴 말, 사랑의 말"을 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좋은 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아내의 친척
드라이브를 즐기던 부부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내외는 화가 나서 서로 말도 않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차창 밖에 개 한 마리가 어정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빈정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친척이잖아? 반가운데 인사나 하지."
남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내가 개에게 소리쳤습니다.
"안녕하셨어요. 시아주버님!" - 월간지 [참소중한 당신]에서
아내를 개친척이라고 했다가 자기가 개가 된 것이지요.
입으로 내뱉는 말이 좋아야 귀로 들리는 말이 좋은 것입니다.
옆의 분에게 "이렇게 좋은 분 옆에 앉아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옆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 있는지요?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는데
여러분의 마음이 온전히 이 예배에 있으신지요?
사람 마음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알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요.
그래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마음을 알기 어렵다는 뜻일 것입니다.
♬ 당신의 마음 (방주연)
바닷가 모래밭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당신을 그립니다.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 턱 밑에 점 하나
입가에 미소까지 그렸지만은 아~ 아~
마지막 한가지 못 그린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
이 노래 아시나요. 아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손드신 분들은 쉰세대입니다.
신세대는 이노래를 모릅니다.
이 노래 가사대로 사람 마음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 지 "마음먹기 달려있다"는 말에 부정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난 3일 신문에 보면 (2005. 1. 3. 조선일보)
올림픽에 가서 메달을 따는 선수와 따지 못하는 선수의 차이가 무엇이냐,
대부분 [마음가짐]이 [마음 상태]가 성적을 좌우한다고 합니다.
[체육지식발전소] (3) 실전용·연습용 선수
'실전용 선수'는 유전자가 다르다, '불안유발 유전자'
일반 선수보다 적어 연습용선수도 심리훈련 통해 약점 보완
‘신궁’으로 이름이 높은 김수녕의 경우, 연습 기록은
다른 선수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대회, 중요한 한 발을 남기면 여지없이 과녁을 맞혔다.
다른 선수들이 “혹시 잘못 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할 순간에
김수녕은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테네올림픽 양궁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던 백웅기 감독은
몇 년 전 이렇게 한탄했다. “연습 때면 매 번 세계 최고 수준인
1350점 이상을 쏘는 선수가 시합에만 나가면 부진하다. 어쩌면 좋겠는가.”
결국 백 감독은 이것을 주제로 삼아 논문을 썼다.
연습 기록이 1350점을 넘는 양궁 선수 60명을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딴
A그룹 30명과 메달을 못 딴 B그룹 30명으로 나눴다.
그들에게 ▲시합 전에 나는 마음이 불안하다 ▲시합 전에 뱃속이 불편하다
▲잘 못할까봐 걱정이 된다 등 15개 문항으로 구성된
심리 검사(일명 SCAT)를 실시했다.
그 결과 메달을 딴 30명은 이런 증세가 거의 없는 반면,
메달을 못 딴 30명은 증세가 심했다.
결국 마음가짐이 성적을 크게 좌우했다는 결론이다.
선수의 정신적 능력에 대해서는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특성 이론’과 훈련에 의해 습득된다는 ‘학습 이론’이 팽팽하게 맞서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유전자 공학의 발달로‘특성 이론’이 우세를 점하고 있다.
불안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어떤 선수는 갖고 있고
어떤 선수는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시합 선수 따로 있고, 연습 선수 따로 있다”는
스포츠계의 속설이 사실로 굳어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연습 선수’도 심리 훈련을 강화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
올림픽을 3개월 앞두고 “시합에서 실수하면 어떡하나”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던 레슬링의 정지현은 “혹시 실수를 하더라도
나는 다시 나를 통제하여 제자리에 돌아올 방법과 기술을 갖고 있다”는 등의
주문으로 이를 극복했다. 아테네올림픽 역도 은메달리스트 이배영은
평소에“인간이기 때문에 100% 완벽할 수 없으며
완벽하려고 초조해할 필요도 없다”는 자기 최면으로 부담감을 줄였다.
금메달과 은메달 혹은 동메달 사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결승전에서의 패배자는 도박에서의 패배자처럼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
이때 ‘끼’가 있는 선수는
패배의 원인을 자신의 선천적인 능력 부족으로 돌리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노력을 덜 했다거나 혹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도전한다.
사실 우승자와 준우승자의 실력 차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고
승부는 운으로 갈리는 경우가 많다.
2005년 우리는 똑같이 시작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산에 오를 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은 잡아 두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예배드리는 이 순간에도 사방팔방으로 떠다니고 있으며
기도하는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은 못 가는 데가 없이
집으로도 가고 회사로도 가며 갈데 못 갈데 제 마음대로 다니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빠른 것이 '사람의 마음' 일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4장 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4:23) 했습니다.
사실 우리 마음은 전쟁(戰場)터와 같습니다.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이 서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웁니다.(롬7:21)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나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내가 싸웁니다.(롬7:22~23)
여러분의 마음에는 지금 어떤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님의 산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손이 깨끗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 손이 깨끗하려면 먼저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8) 했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 것을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을 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을 뜻했습니다.
- 여호와의 산은 성전 산을 가리켜 있으며,
성전산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신앙자가 경험하는 모든 경험
즉 평안, 기쁨, 도움, 힘, 보호, 친밀함을 일컫는 것으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박수암 지음 [산상수훈] 참조>
대부분의 성경연구가(주석가)들은
오늘 본문 시편 24편 4절의 "마음이 청결한 자"와
마태복음 5장 8절의 "마음이 청결한 자"를 같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 하나의 마음을 가진 자(single-heartedness)를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이 복잡하지 않은 상태, 즉, 마음이 단순하며, 하나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단순하다', 혹은 '하나의 마음'이란
오직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어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하나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마음을 가지지 못한 자'(non-single-heartedness)는
마음이 갈라진 사람을 말합니다.
마음이 둘로 갈라지면 능력도 1/2로 나뉩니다.
그 생각의 쏠림도 둘로 나뉘어 집니다. 10개로 갈라지면 1/10, 30개로 갈라지면 1/30…
더 갈라지면, 모든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소위 말하는 "정신분열증"이란, 마음이, 생각이 여러 개로 갈라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이 몇 개인지, 얼마나 몇 조각이 나서
그 조각들이 어디로 흩어졌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 비워야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될 수 있을까요?
마음의 "성결" [깨끗함과 구별됨]은 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되지 못했다는 것은
마음 속에 다른 것들이 꽉 들어차 있어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요1:12) 우리를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도 표현합니다.
종 된 우리의 마음이 나뉨이 없이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에 보면 종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16:13)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종된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전적으로/전심으로
모든 시간과 모든 마음과 정성을 다 바쳐
하나님과 함께 하는/드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분적인 헌신과 부분적인 섬김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종된 우리가 파트 타임으로 섬기는 것을 거부하십니다.
매순간 순간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 된 우리는 종들끼리 사소한 질투를 할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일로 바쁘다 보면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평가하고/비판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종은 불공평함에 대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처지를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측은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주인이신 분, 그분의 마음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섬길 뿐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 지에 대해 신경쓸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 지에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주인의 다른 종을 평가한다는 것은 같은 신분인 종들의 일이 아닙니다.
로마서 14장 4절에 보면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며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14:4) 했습니다.
종은 남에 대해 판단할 입장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다른 사람들의 비판이 있을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세상이 그리고 심지어 많은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 드려졌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도 제자들이 비판했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가장 귀한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을 때
제자들은 그것을 '낭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귀히 여기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배우고 싶어하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인이 부은 향유를 낭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좋은 일'(마26:10)을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좋은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누가 뭐라고 하든지
<예수님이 어떻게 보시는 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섬김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절대로 낭비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비난하고, 심지어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따라다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한 사랑의 행위를 낭비라고 비난했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르게 헌신하고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낙심케 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입니다.
●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종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identity, 자기인식)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확실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자기인식, 자기가 누구인지, 정확한 자아상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 지'를 항상 걱정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군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에
더 관심 갖는 사람은 정체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을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 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측정하려고
세상 잣대를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제가 지난 주에 어떤 분으로부터 명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명함 앞 뒤가 빽빽하게 차 있는데
'○○ 모임의 총무, ○○ 운영위원, ○○ 서기" 등 직함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자기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니'조심하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한편으론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빛되고 소금된 삶을 살기 원한다면…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빛되고 소금된 삶을 사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여러분, 주님께 인정받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룩한 업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측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고후10:18)
여러분, 주님께로부터 칭찬 받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의 권세가 나를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나의 마음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분이 누구인가?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나 자신인가, 돈 많은 사람인가,
힘센 사람인가, 높은 사람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나를 움직여야 합니다.
"ruling power of God",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3:16)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세에 지배 받아야 합니다.
오늘 예배당에, 예배드리기 위해 지어진 이 건물(기둥교회)에 나온 이들은…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 된, 구별된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손 붙들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삶을 위해
"항상 주와 함께" 하려고 애쓰는 삶이어야 합니다.(시73:23)
"항상 주와 함께" 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링컨이 미국 대통령일 때 한 국회의원이 다분히 아부하는 뜻으로
"하나님이 대통령 곁에 계십니다."고 하자
링컨은 "아니오, 내가 하나님 가까이에 있으려고 늘 노력하고 있소"라고 대답했답니다.
링컨을 정직한 사람의 모범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 가까이 하려고 늘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깨끗하게 살려는 사람들도 목숨을 겁니다.
억울한 누명을 썼던 사람들이 자살을 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자살이 박수 받을 일이란 뜻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도 목숨을 걸고 자신이 깨끗하다고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에 오를 자로 살려면 당연히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일본의 한 사무라이 자식이 떡장수에게 야단을 맞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아비가 떡장수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아이가 자기의 떡을 훔쳐먹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절대로 먹지 않았다고 해도 떡장사는 분명 훔쳐먹었다는 것입니다.
떡장수가 자꾸 고집하니 화가 난 사무라이는 그럼 확인하자고 하고는 칼로
자기 아들을 죽여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안 먹은 것을 확인시키고는
그 떡장수를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다는 것, 깨끗함을 보이기 위해 때로 목숨을 거는 것이 사람입니다.
하물며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께서 손을 잡아 주십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산에 오를 자가 누구입니까.
마음이 청결한 사람, 마음이 나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 역경 중에도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 위기 중에도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 평안할 때도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주변이 어떻게 변해도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난 [송구영신예배]때 말씀 드렸는데 기억하실 것입니다.
<수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하는 감별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일 쉽고 간단한 방법은 그것이 주변의 영향을 받는 지 여부를 보는 것입니다.
유리로 만든 가짜 수정은 옆에 강한 색이 있으면 그 영향을 받아 색깔이 달라진다.
그러나 진짜 수정은 아무리 강한 색깔이 옆에 있어도 영향을 받지 않고,
희고 맑은 원색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진짜는 주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 색깔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내 주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내 마음이 변치 않아야 진짜입니다.
여러분 모두 진짜로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거룩한 산에 오르려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청결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성경 요엘 2장 13절에 보면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욜2:13)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했습니다.
요엘의 때는 타락의 시대였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한 마음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때 선지자 요엘은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했습니다.
거짓됨을 찢고, 더러운 것을 제거해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인애가 크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훗날 후회하지 않는 삶이 되려면 [마음을 찢는] 삶이어야 합니다.
2005년 [산에 오를 자]로 사십시다. [산에 오른 자] 되십시다.
그러기 위해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 되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가정 이루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예수님 향기 나는
빛 되고 소금 된 삶으로 범사에 승리하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는 성도들, 거짓 맹세치 않는 성도들
그러기 위하여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하나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거룩한 주일에 습관적으로 나와 예배 드리고
말씀을 귀로만 듣고 가는 자가 아니라 가슴에 담게 하여 주시옵소서.
생활속에 청결함을 지켜가며 사는 성도들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