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암의 죽음과 므리바 사건
민 20:1-13
1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2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
3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4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5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6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9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3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민 20:1-13 / [가데스에서 있었던 일] 그해 정월 이스라엘 온 공동체는 신 광야로 옮겨 오랫동안 가데스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미리암이 세상을 떠나 그곳에 묻혔다. 2) 그들이 진을 친 곳에는 물이 없었다. 그러자 무리가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와 대들면서 3) 이렇게 항의하였다. `우리 이스라엘 형제들이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죽을 때 차라리 우리도 함께 죽었으면 좋을 뻔하였소! 4) 당신들은 어째서 여호와를 모시고 사는 이 무리를 광야로 이끌어 내어 우리뿐 아니라 우리가 돌보던 가축까지 모조리 죽게 하는거요? 5) 어쩌자고 우리를 애굽에서 이렇게 험악한 광야까지 끌고 나왔단 말이오? 이 거친 광야에서는 농사 지을 곳도 없고, 무화과 포도도 석류도 자라지 못하오. 더구나 마실 물마저 없지 않소!' 6) 모세와 아론이 무리를 떠나 만남의 장막문 앞에 이르러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 앞에 찬란하게 빛났다.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계약궤 앞에 둔 지팡이를 들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온 백성을 불러모아라. 그런 다음 그들이 보고 있는 데에서 바위를 향하여 물이 터지라고 명령하여라. 그러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 물을 너희 온 무리와 가축까지도 마시도록 하여라.' 9)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세가 가서 지팡이를 가져왔다. 10) 모세와 아론은 바위 앞에 온 공동체를 모아 놓았다. 모세가 입을 열었다. `이 반항하는 무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내가 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주랴?' 11) 그가 지팡이를 든 손을 쳐들어 바위를 두 번 내리치자 물이 콸콸 솟구쳐 나왔다. 온 무리와 가축들이 바위에서 솟아나오는 물을 마셨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나를 굳건히 믿지 아니하여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거룩한 힘을 드러내지 못하였구나. 그러므로 너희는 이 무리를 내가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하리라.' 13)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불평을 하였기 때문에 `불평하다'라는 뜻으로 므리바라고 불렀지만 여호와께서는 물이 터져 나오게 함으로써 당신이 거룩하시고 힘이 있으신 분임을 드러내신 곳이기도 하다.
본문은 미리암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권위를 업신여김이 죄가 되어 가나안 입성 일 년 전 최후를 마치는 첫 절로 시작하지만 이어 모세도 가나안에 입성 못 할 실수 사건 기록입니다.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1-5) 미리암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또다시 물이 부족한 상황에 봉착합니다. 이번에도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합니다. 광야에서 식수 문제는 언제나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생존의 문제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근본 문제의 본질은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원망과 불평은 모든 어려운 사건 앞에서 상투적으로 반복되었다는 점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기사와 이적을 보고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근본 부분부터 흔들리는 영적인 미숙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6-11) 이번에도 모세와 아론은 회막 앞으로 나아가 엎드렸고,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가서 백성들 앞에서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 물로 백성들과 짐승들로 마시게 하라고 하셨지요.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팡이를 취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반석 앞에 모읍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그러자 반석에서 물이 솟아 나왔고, 백성들과 짐승들은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먹이시고 입히는 하늘 아버지입니다.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12-13) 문제가 순조롭게 잘 해결된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너희가 나를 믿지 않았다’라는 표현은 모세와 아론은 최악의 환경 조건이 지속되더라도 수십 년이 흘러도 반복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적인 모습에서도 여전히 그 언약을 이루실 여호와 하나님의 열정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부정적인 감정에 먹히었고 급기야는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는 쇼까지를 부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가장 심각한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이 인도해낸 백성들과 광야에서 죽을 운명을 같이 하게 됩니다.
적용: 래퍼가 반복하듯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반복 단어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내면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모세의 실수가 심각한 이유를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설명하셨습니까?
분노. 영혼의 잡음, 마음을 거슬리게 하는 보이지 않는 실체, 끊임없이 정적을 깨트리는 침입자. 분노가 커질수록 절망도 더 깊어집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세상 속 그 안에 원한이라는 이름의 종양이 자라고 있습니다. 영혼을 옥죄는 암 덩어리입니다. 그 치명적인 조직이 천천히 죽음의 손을 뻗쳐서 영혼을 감싸다가 결국에는 황폐하게 만들고 말 것입니다. 어제는 바꿀 수 없지만, 어제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반응은 바꿀 수 있습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어도, 자신의 과거에 대한 태도는 바꿀 수 있습니다.
< 설 교 >
살아계신 하나님
민 20:1-13 / 이정원 목사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이 심판은 시내산에서 주신 언약의 말씀에 따라 되어졌는데 순종하는 경우에는 축복이, 거역하는 경우에는 저주가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민수기의 역사를 더듬어 가노라면, 우리는 손에 땀을 쥐며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이 범죄하면 하나님께서 즉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또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께서 즉시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즉각적인 개입이 잘 나타나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집니다. 범죄하면 물론 벌을 받지만, 때로는 범죄한 사람이 벌을 받지 않고 잘 지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순종하는 자가 복을 받지만, 때로는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여전히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생생하게 느끼지 못하고 해이한 자세를 가지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역시 광야와 같은 곳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과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수기를 묵상해 나가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더욱 생생하게 깨달으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신앙생활 해 나가는 법을 배우도록 해야겠습니다.
다시 가데스에 오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가데스에 도착했습니다.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에 시내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1절) 그들은 38년 전 이곳에 도착했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열 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정탐꾼들은 불신앙적인 보고를 함으로써 백성들을 낙담시켰습니다. 정탐꾼들의 불신앙적인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며 악한 말로 원망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 40년의 형벌을 선고받았었습니다. 그 40년 동안 출애굽 첫 세대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들은 기나긴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다시금 가나안 땅이 바라다 보이는 가데스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먼 길을 돌아 다시 가데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했더라면 진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하여 그들은 오랜 세월, 먼 길을 돌아서 이제야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다시 가데스에 오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게 하며 곤고하게 합니다. 인생을 가장 잘 사는 길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살아감으로써 더 이상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거나 실패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미리암의 죽음
그런데 가데스에서 미리암이 죽었습니다.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에 시내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1절)
미리암은 모세의 누나이며, 와 아론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해온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여선지였으며, 홍해를 건넌 후 여인들을 이끌고 승리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했었습니다. 그러나 불평하면서 모세에게 도전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당해 나병에 걸렸었습니다. 미리암의 죽음은 그녀의 죄를 상기시켜 줍니다. 죄란 우리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을 상실하게 만들고, 영광스러운 특권을 초라한 것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성도의 죽음은 이러한 불행을 뛰어 넘고도 남는 은혜와 축복을 보여줍니다. 미리암은 광야에서 죽었으나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온갖 죄악과 문제와 고통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인생을 마치고 죽을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죽을 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특권이며 축복입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합시다!
난관 - 되살아 난 불평
40년 만에 다시 가데스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물이 없었던 것입니다.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몰려드니라”(2절) 광야에서 물은 곧 생명이었습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이 없다는 것은 더욱 큰 문제였습니다. 백성들은 마실 물과 가축에게 먹일 목초를 찾을 수 없었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곤경에 빠졌습니다. 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신 같으면 이럴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니, 당신은 이런 난관을 만날 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이나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광야 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또 다시 물이 없어 죽을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광야 같은 우리 인생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인생의 풍파와 문제들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이 모든 일을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하는 성도는 어떤 인생의 문제를 만나도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미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게 되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다시 지도자를 공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3-5절)
백성들은 모세에게 불평을 하면서 대들었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고생하며 훈련을 받았지만, 그들의 불신앙과 악한 습관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몇 년 동안이나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습니까? 이제 불신앙과 악한 습관을 버렸습니까? 아직도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실 물이 떨어졌을 때 다시 불신앙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와서 이렇게 물이 없어 죽기보다는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불평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대하여 불평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마치 모세가 자기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만 하는 사람인 양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은 이처럼 심각한 불신앙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의 죄
백성들의 악한 원망으로 모세는 곤경에 빠졌습니다. 이 때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과 함께 다투지 않고 문제를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가지고 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6-8절)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는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말하면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들이 마시니라”(9-11절)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2절)
지금까지 모세는 신실한 중보자였으나 이제 더 이상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그들의 지도자를 지치고 실망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실망하고 상처를 입은 모세는 성미가 급해지고 혈기를 이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자비와 능력을 나타내지 않고, 마치 자기가 반석에서 물을 나오게 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는 중보자로서 끝까지 인내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모세는 그가 그토록 사모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지도자를 공박했고, 지도자는 지치고 상처를 입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지도자와 백성들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성도
오늘 본문에는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악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제 광야 40년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출애굽 1세대들이 거의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또 다시 불신앙적으로 원망하고 불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어 백성이 마시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대들고 원망하는 백성들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반석 앞에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10하) 백성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자 모세는 분노와 실망에 치를 떨게 되었고, 혈기를 부리며 백성들에게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지난 주 제자반에서 이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학원에서 늘 속을 썩이는 아이들에게 신경이 곤두서곤 했던 집사님이, 그날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주세요.’ 그 날도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물고 학원으로 몰려들어왔습니다. 다른 날 같으면 아이스크림을 다 먹기 전에는 못 들어오게 했을 텐데, 그날은 어서들 오라고 환영을 했습니다. 그리고 들어와 함께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게 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말썽을 부려서 신경을 곤두서게 하던 아이들이 그날따라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도 아이스크림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을까 조심하면서, 제 손으로 흘린 것을 닦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집사님의 기도를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우리 성도들 때문에 속이 상할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주셔서 성도들이 사랑스럽게 보이고, 성도들에게 더 관대한 마음을 갖게 해주십니다.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그리고 집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다시 다짐해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성도들을 더욱 사랑하자!’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아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더욱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
생수가 터져 나온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 생수는 차고 넘치는 강이 되었고, 그 생수가 흘러 들어가는 곳마다 죽은 바다가 소생함을 입었습니다(겔47:1-12).
생수가 흘러나온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도 친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39상)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리는 생수의 근원이 되십니다.
본문에서 생수가 터져 나온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반석이 지팡이로 얻어맞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예표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더라면 그들은 소망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며, 불신앙으로 원망하는 죄를 반복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이 우리를 살피시며,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본향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나는 동안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난관과 역경을 만난다 해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며 돌보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이 전진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까지 신앙으로
민 20:2-13 / 김철현 목사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일곱 가지 자세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늘 좋은 기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환경의 희생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즐거운 웃음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타인을 도우려는 생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나 대상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마지막 일곱 번째 만남에 대한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일상사 흔한 일은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만난 사람들로 인해 행복하십니까? 그 만남이 부부이든지, 친구이든지, 그 만남이 나에게 행복이냐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누구에게든지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가끔 만남에도 특별한 만남이라는 의미를 둘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몇 번의 특별한 만남이 있겠습니까? 적어도 오늘 여기 계신 여러분에게는 한 번의 특별한 만남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고, 이 만남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이 만남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감당해야할 신앙적 책임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행복한 만남으로 유지하느냐 아니면 불행의 관계로 만드느냐는 것은 내 신앙이 결정한단 말입니다.
[스티븐 코비] 하면 그의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책 속에서 전반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도성의 문제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책임진다.” 말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한일이다.” 라는 주도성입니다. 만일에 “나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저 사람이 하라고 해서 했다.” 라고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내 존재가 없어지는 겁니다. 무슨 일이든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는 것, 그게 주도적 인격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책임질 줄 아는 주도적 신앙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종종 화를 내신 경우가 있습니다. 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토록 화를 내실까 싶을 정도로 분노하신 경우를 가만히 살펴보면 책임 있는 주도적 신앙의 자세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화를 내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부부가 땅을 팔았는데 그 값을 제대로 하지 않고 속여서 바쳤다가 죽은 사건을 잘 아실 것입니다. 물론 그 사건 자체가 마음에 안 들죠. 그러나 더 냉혹한 것은 거짓말 한번 했다고 해서 당장 그 자리에서 부부가 다 죽었습니다. 어찌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가혹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바치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데 그래도 그들은 얼마나마 바쳤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속인 것 때문에 죽을죄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의 사고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건입니다. 모세의 생애를 아는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다른 사람들은 다 못 들어가도 모세만큼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행복을 누려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와 고생과 핍박을 받았습니까? 그랬던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세의 생애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너는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아니했다” 는 말씀과 “너는 이 회중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지 못 할 것” 이라는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맙니다. 마지막까지 책임 있는 주도적 신앙의 자세가 없어서 실패하고 마는 모세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물론 모세가 훌륭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한 평생 남긴 업적이 칭찬받아 부족함이 없습니다마는 그 업적과 지금 모세 자신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모세의 업적에 대한 평가문제는 우리들의 생각이고 그가 가나안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는 문제는 하나님의 판단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가끔씩 착각하는 것이 자기의 업적과 하나님의 사역문제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사람에게 집행하는 가운데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과 같이 높은 존경과 추대 받는 것을 큰 자랑거리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말아야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역일 뿐이지 자기의 업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것이 잘못 되어서 신앙에 실패합니다.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갔느냐 못 들어갔느냐의 문제는 그의 업적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과 불신앙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 있을 때 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것과 심지어는 모세를 원망하면서 차라리 모세를 죽이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하는 말까지 나오게 됩니다. 이때 모세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원망하는 백성들로 인해 몸과 마음이 피곤한 나머지 자기가 하지 말아야 할 소리까지 다 뱉어버립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솟아나오므로...” 그랬습니다. 시편106:33은 모세의 이런 실수를 보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한마디로 하나님 행세를 했다는 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서는 안 됩니다. 사실 가만히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제는 문제입니다. 모세가 화를 낼만도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한다는 말이 3절을 보면 “우리가 그때 죽었으면 좋았을 걸” 합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우상을 섬기다가 광야에서 엎어져 죽은 사건입니다. 그걸 떠올리며 “그들이 죽을 때 우리도 죽었으면 좋을 뻔했다.” 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하나님의 은혜를 일순간에 다 지워 버리는 불신앙적인 망언입니까?
뿐만 아닙니다. 4절을 보면 “왜 우리를 애굽에서 불러내서 이 광야로 인도해 냈느냐?” 합니다. 이게 할 말입니까? 그들은 물이 없다는 이 하나의 사건 속에서 과거에 받은 그 많은 은혜까지도 다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실이 조금 괴롭다고 지난날에 받은 많은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저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의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리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 그리고 그 믿음이 있어야지요. 그런데 이것까지 다 그대로 부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신앙이란 과거의 은혜와 미래의 약속은 다 부정해 버리고 오늘 현실 때문에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신앙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백성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모세는 그러지 말아야 했었는데 똑같은 불신앙의 모습으로 그 백성을 원망하고 저주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 는 “사람의 진실은 그가 급한 일을 당해서 무의식중에 하는 말을 종합해보면 알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의식이 있어서 앞뒤를 다 생각하면서 하는 말은 오히려 거짓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급한 일을 당했을 때 무의식중에 갑작스럽게 내뱉는 말이 그 사람의 진실한 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술 취한 사람이 취중에 한 말과 술 깬 뒤에 한 말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만 오히려 진심은 술 취했을 때 한 말이 오히려 진심이라는 말이랍니다.
또 모세가 실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하고 한 말입니다. 언제 모세가 물 낸 일이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셨고 자기는 심부름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반석을 쳐라” 하면 쳤고 “지팡이를 들어 쳐라” 하면 쳐서 홍해가 갈라졌는데 그것이 어디 모세가 한 겁니까? 모세는 심부름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40년 동안 그럭저럭 이적을 행하고 표적을 행하고 보니깐 자기 업적이 되어 버렸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 살면서 자기가 능력의 사람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 교만이 불신앙의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했으면 과정도 믿음으로 해나가야 되고 마지막도 믿음으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불신앙으로 마치며, 겸손한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교만으로 끝나며, 순종으로 시작했다가 원망으로 마치며, 드리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받고자하는 마음으로 마치며, 사랑으로 시작했다가 증오로 끝내고, 소망으로 시작했다가 절망으로 끝낸다면 이 모두가 불신앙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소크라테스] 의 교훈을 총 정리해 보면 네 가지로 요약된다고 합니다. “어려서는 겸손하라. 젊어서는 온화하라. 장년에는 공정하라. 늙어서는 신중 하라.” 모세가 마지막까지 지키지 못한 일들입니다. 오늘 마지막까지 잘했어야 할 모세가 자기의 위치를 잃어 버렸을 때 신앙을 잃어 버렸고, 신앙을 잃어 버렸을 때 하나님을 잃어 버렸습니다. 신앙은 끝까지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올 해의 마지막 달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해 동안 달려 온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시고 마지막까지 신앙으로 전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 광야에서의 산 교훈
민수기 20:1~9 / 송기성 목사(정동교회) 맥추감사주일
“아 하나님의 은혜로”
역사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를 기록하고(record), 기억하는(remember) 것은 그 역사에 우리 자신을 반영해 보고(reflect)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recreate) 지혜와 교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백성들로 하여금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출애굽 40년째 되던 해 1월에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모세와 아론의 누이 미리암이 죽었습니다. 신(Zin) 광야(미드바르)는 가나안의 남방 경계를 이루는 지역입니다(민34:3,4). 그런데 대부분이 불모지이기 때문에 성경은 신 광야를 ‘크고 두려운 광야’(vast and fearful desert, 신1:19)라고 했습니다. ‘크고 두려운 광야’라는 별명을 가진 신 광야는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죽음의 땅 신 광야에서 무슨 교훈을 배울 수 있을까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죽음의 땅 신 광야에서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산 교훈을 배울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고쳐야 감사와 희망이 넘치는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다.
광야에서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을 물입니다. 신 광야의 가데스는 사막의 오아시스 지역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한 지 2년째 되었을 때 가데스에 이르러 가나안 땅을 정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불신앙하고 불순종하였으며, 감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불평하고 원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38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방랑였습니다. 그리고 20세 이상 된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출애굽한 지 40년, 그리고 가데스를 떠난 지 38년 만에 다시 그곳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당연히 물을 얻을 것으로 잔뜩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물이 없자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와 다투어 말하기를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20:3~5)라며 불평과 원망을 퍼부어 댔습니다.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은 불신앙과 배은망덕의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사실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지난 40년간을 광야에서 파종해 본 적이 없었어도 생존할 수 있도록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신 것 등등을 기억하며 감사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초부터 시작된 그들의 불평과 원망은 광야 40년 동안에도 전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생활 속에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기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과 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불평과 원망을 그치지 않고 고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감사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고치는 사람들은 감사와 희망이 넘치는 행복한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시각장애의 몸으로 유학을 가서 1976년 한국 최초 맹인 박사가 된 후, 2001년에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낸 강영우(1944~2012)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듬해 축구공에 눈을 맞아 시력을 잃었습니다. 같은 해 그의 어머니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졸지에 가장이 된 큰 누나는 학업을 포기하고 평화시장 봉제공으로 취직해 밤낮 없이 2년간 일하다가 죽었습니다. 누나가 세상을 떠나던 날, 그는 어린 두 동생을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가혹한 형벌이 또 있을까?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크게 지었다고 이런 벌을 내리시는 건지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망과 절망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는 원망과 절망을 그쳤습니다. 그는 더 이상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말년에 그는 췌장암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2012년 그는 죽음을 앞두고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저는 참으로 복되고 감사한 한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저의 실명을 통해 하나님은 제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역사들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두 눈을 잃고, 저는 한평생을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나 둘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 할 시간도 허락받았습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the angel of death)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광야에서 원망하다 멸망을 받은 사람들을 결코 본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망은 곧 멸망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고치면 감사와 희망이 넘치는 행복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 광야에서의 산 교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고침으로써 감사와 희망이 넘치는 삶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일생은 참으로 복되고 행복하였노라고 간증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하고 간구해야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체험하는 신나는 인생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과 원망을 퍼부어대며 다투었을 때 그들도 그들에게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코 그들에게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물론 하나님께도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그들과 다투어 불평하고 원망하는 회중 앞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렸습니다. 이 자세는 오직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의탁한다는 전적 신뢰와 간구의 표시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눈부신 빛으로 그들에게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민20: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도구인 지팡이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게 하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고 그의 분노와 혈기로 인해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바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하나님은 성막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들 곧 교회에 나아가 하나님께 엎드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으로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기적으로 축복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들을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들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들과 그들의 짐승들에게까지도 물을 마시게 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평하고 원망하며 다투는 자들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간구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덕을 보게 하십니다. 광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신뢰하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마실 물이 없고 물을 얻을 가망이 없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잡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시며 하나님의 기적으로 축복하심을 체험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미국이 자랑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인 워너 솔맨(Warner Sallman, 1892~1968)의 이야기입니다. 시카고에서 태어난 그는 1917년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은 25세의 젊은 나이에 중병에 걸렸습니다. 의사는 그가 잃고 있는 병은 임파선 결핵이며 앞으로 길어야 3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솔맨의 마음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유명한 가수였던 그의 아내는 그 때 임신 중이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도 미안한 마음이었거니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며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괴로웠습니다. 그가 몹시 괴로워하며 절망에 빠져 신음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그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여보, 3개월밖에 못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3개월을 허락해 주셨다고 생각하며, 감사하고 기도하며 살아갑시다. 그리고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3개월이 얼맙니까? 천금 같은 그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봅시다. 3개월이나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 후 두 부부는 매일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믿음이 독실한 아내로부터 사랑과 격려의 말을 들은 워너 솔맨을 용기를 얻고 절망적인 마음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3개월을 의미 있게 살기로 결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후 그가 그린 성화가 바로 「그리스도의 머리」(The Head of Christ, 1941년)입니다. 그 그림으로 그는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담긴 그의 그림책은 1940년도에 500만부 이상이나 인쇄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워너 솔맨, 그는 병원에서 씻은 듯이 나았다는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의 주치의인 존 헨리는 말하기를 “감사는 최고의 항암제이다. 감사는 최고의 해독제이다. 감사는 최고의 치료제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간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기적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는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신뢰하고 간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며, 그런 사람을 축복해 주십니다. 이것이 또한 신 광야에서의 산 교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들에게서는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체험하는 신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나쁜 곳’(terrible place, miserable place, 민20:5)이라고 불평하며 원망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물이 없는 광야는 끔찍하고 비참한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광야는 사람이 도무지 생존할 수 없는 절망의 땅, 죽음의 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광야는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항상 함께 계신 곳이며, 하나님께서 날마다 내려주시는 하늘양식을 체험하는 기적의 땅입니다. 그리고 광야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이 있고, 언약백성으로서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 불평과 원망으로 불행과 절망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믿음과 순종으로 행복과 희망을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 광야에서의 산 교훈을 배우고 익힌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2년째 되던 해 신 광야 가데스에서 행하였던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38년이 지난 후에도 똑같은 장소에서 반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한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 광야에서의 산 교훈을 더욱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고침으로 감사와 희망이 넘치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간구함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체험하는 신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끝까지 참으라!
민수기 20:1-13 / 崔仁根牧師
[인간관계]라고 하는 것이 때로는 우리들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커다란 슬픔과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불신감은 말할 것도 없고, 이기적인 동기나 상대에 대한 불성실함 등등의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아픔을 겪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 때문에 한 때는 가깝고 친밀했던 상대와의 인간관계가 여지없이 깨져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소한 오해만으로도 쉽게 깨어지는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마치 바윗돌 같이 서로의 관계가 두터워서 결코 깨어질 것 같지 않은 인간관계도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지켜나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들은 또 무엇일까요? [성경]에 그 해답이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골3:12-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여기에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는 것은 “이러한 것들로 자신을 감싸라.”는 말입니다. 비록 긍휼이나 겸손과 같은 것들이 완전히 내부에 감춰져 있을 때에도, 항상 이러한 것들에 몰두하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던졌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성경]은 건강하고 가치 있는 인간관계에 필요한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긍휼, 자비, 겸손,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입니다. 우리는 이 다섯 가지 성품으로 [옷을 입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사람은 긍휼이 넘치고 자비하며 겸손하고 온유하고 또 오래 참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멋진 인생이겠습니까? 때로 지치고 넘어졌을 때, 그 사람에게서 친절함을 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 그 사람의 따스함이 있기에 위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때에도, 다른 사람을 보살필 때에도, 그 사람은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습니다. 결코 다그치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몇 번이나 잘못을 거듭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우면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인내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오늘은 바로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성경으로 돌아가 바른 진리를 배워보려고 합니다. 한 시간에 다섯 가지를 다 배울 수가 없기에 오늘은 오래 참는 일에 관해 준비해 보았습니다. 모쪼록 마음 귀를 기울이시고 복된 말씀으로 풍성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참되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민20:10-12)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들이 성경에서 밝히 잘 아는 대로 모세는 참으로 그 성품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았고 그 어떤 모욕과 멸시도 묵묵히 참아 내며 오로지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인도하심을 따랐던 인물이었습니다. 젊은 날에 자기의 의로 나라를 구원하여 보려고 사람을 쳐 죽인 것이 화근이 되어 왕궁에서 도망 나와야 했었고 광야에서 40년이란 긴 세월을 유랑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그를 새로운 인격체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세를 하나님께서도 친히 인정하시고 그의 온유함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성경에 친히 기록해 두셨습니다.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누이 미리암과 아론이 자신을 향하여 감히 비방까지 하였으나 그는 내색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안으로 새겼습니다.
(민12:1-2)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시고 그렇게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생기도록 심판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고라의 자손들이 당을 지어 떼를지어 모세에게 몰려와 모세를 배신하고 모세를 공격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모세는 그들을 직접적으로 상대하여 싸우거나 대항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참아냈습니다.
(민16:1-3)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도저히 우리는 그곳 사람들을 이길 수 없노라고 보고하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하며 난리를 치다가 급기야는 모세를 돌로 쳐 죽이고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난리를 칠 때에도 모세는 묵묵히 하나님 앞에 엎드릴 뿐 그들을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그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거의 초인적으로 참아내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묵묵히 잘도 감당해 나갔습니다.
(민14:1-5)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민14: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그는 최악의 경우에도 잘도 참았었는데 마지막 신 광야에서는 그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목이 마르다고, 물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의 원망 앞에서는 그만 참지 못하고 거칠게 화를 내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민20:10-12)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 한 번의 실수로 모세는 꿈에도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참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렇듯 “적당하게”는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미 급한 베드로에게 “너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명령하셨던 이유 또한 끝까지 참아야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제자로서 스승을 보호해야 하고 지켜야 함이 마땅한 도리이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인간적인 도리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욱 귀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지키려는 베드로의 충정을 다 아시면서도 “참으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눅22: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참아야 합니다
사람이 길이 참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스스로 해명하고 스스로 벗어나려고 하니 늪에 빠진 사람처럼 더욱 더 깊이 빠져들고 해결은커녕 소중한 삶조차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우리들의 삶의 주인은 하늘의 하나님이신 줄 믿고 묵묵히 그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길이 참고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마 24:9-13)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끝까지 참고 견디다가 구원을 받은 사람이 성경에 있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비참하게 무시를 당하고 살았지만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그 하나님만 기대하고 의지하며 견디다가 구원을 받은 모르드개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무려 127도나 되는 거대 제국 아하수에로 왕정 하에서 존재하던 소수민족 유다민족은 그야말로 바람 앞에 선 작은 등불만큼이나 위태로운 존재였습니다. 거기에서 악하기로 유명한 2인자 하만의 계략으로 이 작은 유다민족은 서러움과 무시를 온 몸으로 받으며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절대 권력을 가진 자의 밥이 되어 송두리째 사라지게 될 순간까지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는 끝까지 굴하지 아니하고 온갖 위협과 멸시를 참아내며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고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절대적인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며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도 아하수에로 왕에게 공덕을 받을 마땅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에게 원한을 품은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을 모살하려고 모의를 하는 현장을 목도하고 이것을 즉각 동생 에스더에게 고하였고 그것을 사실하여 본 결과 그들이 범인인 것을 발견하고 왕을 시해하려던 자들을 붙잡아 사형에 처하도록 하여 왕의 생명을 보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에2:21-23)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 지킨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왕을 원한하여 모살하려 하거늘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고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한지라 사실하여 실정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의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소위 왕의 1인자가 그러한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면 어떻게든지 자신의 공을 앞세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 자신을 변호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철저하게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실을 왕이 스스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왕은 잠이 오지 않자 신하를 불러 궁중일기를 읽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모르드개의 그 아름다운 선행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에 6:1-4)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왕이 가로되 이 일을 인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시신이 대답하되 아무 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 왕이 가로되 누가 뜰에 있느냐 마침 하만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모르드개 달기를 왕께 구하고자 하여 왕궁 바깥뜰에 이른지라 시신이 고하되 하만이 뜰에 섰나이다 왕이 가로되 들어오게 하라 하니 하만이 들어오거늘 왕이 묻되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뇨 하만이 심중에 이르되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자는 나 외에 누구리요 하고 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시려면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이에 왕이 하만에게 이르되 너는 네 말대로 속히 왕복과 말을 취하여 대궐 문에 앉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에게 행하되 무릇 네가 말한 것에서 조금도 빠짐이 없이 하라
이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어느 때에 나타나게 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 때에 왕이 잠이 오지 않았으며 그래서 궁중 일기를 읽는데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사건들 중에 모르드개의 선행을 읽게 되었으며 하필이면 바로 그 때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모든 계략을 완성해 놓은 하만이 문밖에 서게 되었을까요? 일부러 감독이 사건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그렇게 극본을 끼워 맞춰도 이처럼 절묘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렇게도 정확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사실을 이 사건을 통해서 분명하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너무 성급하게 모든 일을 인본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모르드개처럼 묵묵히 때를 기다리며 참고 견디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고 기다리는 자에게만 주시는 풍성함과 자유함으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가가와 도요히꼬 이야기가 이처럼 묵묵히 참고 견디는 미덕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가와가 젊은 시절에 빈민굴에서 전도하는 것을 본 친구의 눈에는 이 사람이 아무리 보아도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도박꾼, 싸움해서 살인한 사람, 전과자, 창녀에게 전도하여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리는데 그들 중 모두가 다 찬송을 부를 줄 모르므로 자기 혼자 찬송을 목이 터져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뒤에서는 남자들이 와서 예배드리고 있는 창녀를 끌어내고 창녀는 또 일어나 따라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돈을 내라고 사람들이 가가와의 따귀를 때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가가와는 바보처럼 또 돈을 내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바라 본 친구는 화가 났습니다. "저 사람들에게 돈을 주면 가서 또 도박을 하거나 술을 마실 텐데 너는 왜 그런 것을 다 알면서도 돈을 주느냐? 행여 넌 위선자가 아니냐"고 가가와에게 따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가가와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같이 하는거야."라고만 대답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어린이를 키울 때 넘어지면 일으켜 주듯이, 의사가 병자에게 주사를 놓고 또 놓듯이 넘어지면 일으켜 줘야 한다. 다 알고 마지막까지 믿어 주고 참아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냐?"고 그는 말했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마지막까지 참는 것이고 속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참으려면 끝까지 사랑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남을 보지 말고 자신을 살피며 참아야 합니다
(삼하16:5-11)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사람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그 모든 고통의 요인을 타인에게 돌리며 원한을 품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고통의 요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며 조용히 반성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에서 읽은 말씀 속에서 우리는 다윗의 위대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자신의 목숨을 헤하려고 함으로 부끄럽고 창피하게도 왕이 도망을 가고 있는 노중에 뜻하지도 않게 사울 왕의 신하였던 시므이가 나타나 다윗을 독한 말로 저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가뜩이나 아들에게 도망가는 신세가 처량하고 부끄러운데 감히 왕인 자신을 저주까지 하며 따라오는 시므이를 당장에 목을 베고 말았을 것인데 다윗은 신하가 그렇게 하겠다고 공분하고 나섰으나 만류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내 아들도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남이 나를 저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을 만나 모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남을 보지 말고 자신의 못나고 초라한 모습을 보고 길이 참아내는 미덕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시고 우리들의 억울하고 원통함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보다 또한 하나님을 더 생각하는 자세,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
(시 37:32-37)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처럼 다윗은 신하의 저주까지 받으며 초라한 도망자의 신세였으나 그 모든 수욕을 참고 견디니 결국 하나님께서 왕권을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당당하게 군림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시므이는 결국 자신의 악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죽음으로 당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다윗과 같이 비록 오늘은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내일의 하나님의 공의와 축복을 기대하며 조용히 참고 견디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 반석에서 물을 내라
민 20:1-3 / 피영민 목사
서 론
민수기 20장은 모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슬픈 네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장입니
다. 민수기 20장에서 모세는 자기의 누이 미리암을 잃게 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
들이 물이 없다고 불평한 므리바 사건을 통해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극한 형벌을 받게 된 것도 민수기 20장입니다. 그리고 에돔 왕의 거절로 에돔땅을 지
나가지 못하게 된 것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험한 산길로 가다가 호르산
에서 모세의 형 아론이 123세의 나이로 죽은 것도 민수기 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모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슬픈 사건은 민수기 20장에 다 모여 있는듯 합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슬프고 괴로운 사건은 아마도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반석을 지팡
이로 두 번 친 므리바 사건일 것입니다. 모세는 80세에 소명을 받아서 120세가 될 때
까지, 40년 동안 어려운 목회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60만 백성
들을 먹이고 입히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 그들을 인도하여 40년의 광야방황 생
활을 다 마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인류 최고의 법인 십계
명을 받아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오합지졸 같은 백성들을 대 민족 국가로 형성했
으니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라 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감당해
낼 수 없는 대 위업을 이뤘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나안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모세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엄명을 듣게 되었으니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12절
후반에 보니까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120세가 되어 죽기 전에도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
라 하나님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명기 3장 26절에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일언지하
에 모세의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심각한 형벌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세는 계
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고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진노하셨다고 거듭 거듭 말합
니다. 신명기 1장 37절에서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도 진노하사 가라사대 너
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고백합니다. 또 신명기 3장 26절에서도 “여호와께
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너희란 광야에서 살아남은 신세대들입니다. 이 신세대는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
이 죽은 구세대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누이 미리암을 잃고 슬픔에 잠긴 모세
와 아론을 위로하기는커녕 도리어 물이 없다고 모세와 아론을 세워놓고 공박합니다.
더더군다나 그들의 언어는 구세대들보다도 더 직설적이고 가혹합니다. “백성이 모세
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
을뻔 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
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20:3~5)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세대나 구세대
나 죄성은 아주 동일합니다. 40년 동안 일하고 수고한 모세를 향하여 이 신세대들은
감사하다고 말하기는커녕 오히려 돌을 들어 쳐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이와 같은 일을 당할 때, 모세와 아론은 언제나 동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
며”(20:6) 모세는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저 같으면 아마 이렇게 기도했을 겁니다.
“하나님! 이 신세대가 광야 40년 생활 가운데서도 살아남았는데 자신들의 부모와 똑
같은 죄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 사람들의 버릇을 좀 고쳐주시옵소서. 단단히 혼을 내주
시옵소서!” 그러나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라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백성의 불평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 물을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자비로
우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응답을 하십니다. “모세야. 너는 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총회를 모아라. 총회를 모으고 너희는 그 목전에서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반석에게 말을 해서 물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총
회를 반석 앞에 모으고 이렇게 말합니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
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그리고는 성질을 내면서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두 번
이나 딱딱 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물을 내셔서 사람과 짐승이 함께
마셨습니다. 이 물을 칭하여 므리바 물이라고 합니다. 므리바라고 하는 것은 다투었다
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도 맛사, 혹은 므리바라고 하는 물이 나옵니다. 민수기 20장의 므리바
는 출애굽기 17장과는 구별되는 므리바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20장의 므리바를 가데스
의 므리바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바네아, 즉 38년전 자기 조상들
이 열 명의 불신앙 정탐꾼들을 따라 모세를 대적했던 그 지점에서 하나님과 또 다투
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결국 반석을 두 번 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벌을 받
게 된 것입니다. 죄를 지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인데 벌은 모세가 받았습니다. 모세가
참 억울할 것 같습니다.
모세가 왜 이런 벌을 받게 됐을까요? 죄가 없이는 벌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
서 모세의 세 가지 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죄는 사소한 죄가 아니었
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1.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 죄
첫째로 모세는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 죄를 지었습니다. 모세는 신세대가 구세대와 동
일하게 죄를 범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모세의 분노는 당연합니다. 모세의 분
노는 의로운 분노입니다. 제가 모세라도 아마 화를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분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화나는 거야 할 수 없는 일이지 분노는
통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분노를 마음에 새기고 통제하지 못하여 성급하
게 입술로 토해내고 말았습니다. 시편에 “저희가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
게 하였으므로 저희로 인하여 얼(trouble)이 모세에게 미쳤나니 이는 저희가 그 심령
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시 106:32-33)고 했
습니다. 모세가 아주 성급한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분노를 드러냈다는 말입
니다. 이것이 모세가 지닌 인간적인 약점 한 가지입니다. 모세는 분노를 제대로 통제
하지 못했습니다. 성질이 나면 그것을 즉시로 풀어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2장에서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민족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히브리인을 치는 애굽 사
람을 쳐죽이고, 그 시신을 모래 속에 파묻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쫓겨 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도 모세
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두 돌비에 새겨진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40일
금식을 하고 두 돌비를 받아서 내려오는데, 산중턱에서 보니까 산 아래에 있는 이스라
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기면서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분노해
서 그 돌비를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려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할 수 없이 또
다른 두 돌비를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분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적
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의 분노 가운데는 의로운 분노도 있습니다. 사람이 불의에 대해서 의분을 가
지는 것은 마땅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신약성서를 보면 의로운 분노는 딱 두 번만 등
장합니다. 그것도 사람의 분노가 아니라 예수님의 분노였습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 1
장 19-20절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권면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는데 모세가 성질을 내
고 그것을 통제하지 못해서 벌을 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손해입니까? 에베소서를 통해
서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라고 말씀
하시고 있습니다. 모세는 분노는 사실 의로운 분노였지만 그 분노를 올바로 통제하지
못해서 결국 어마어마한 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부부싸움을 너무 심하게 하였습니다. 이 부부는 서로 사랑하였지만 서로
화가 나면 단 5초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 심하게 다투곤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
는 아내가 “여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도 이렇게 다투며 살고 있으니 문제입니
다. 우리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진찰을 한번 받아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했습니
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으러 갔더니, 의사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안으
로 들어가서 노란 물약이 든 큰 통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부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약에 화가 치솟거든 이 물약을 세 숟가락씩 꼭 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물약을 한꺼번에 세 숟가락씩 삼키지 말고 한 숟가락 먹을 때마다 입 속에
넣고 1분 동안 머금은 후에 삼켜야 합니다. 그렇게 세 숟가락만 먹으면 큰 효과를 볼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부가 의사의 말을 실천하였습니다. 성질이 날 때마다 노란 물약을 찾아
마셨습니다. 물약을 먹고 3분이 지나니 성질이 가라앉아서 싸움을 하지 않게 됐습니
다. 이 약을 먹는 동안 부부는 서로 싸움을 하지 않고 잘 지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에 약이 떨어지자 부인이 다시 의사를 찾아 왔습니다. “선생님. 약이 떨어졌습니다.
한 병만 더 조제해주세요.” 그러자 그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부
인. 이제 더 이상 약은 필요 없습니다. 사실 그 약은 설탕물입니다. 부인이 싸움을
안 하게 된 것은 그 약을 먹고 3분 동안 기다리는 동안 분노가 삭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부부싸움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는 맹물이라도 마시고 3분간 분을
삭혀보십시오. 그러면 싸움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처럼 모세도 노란 물약을 먹고 3분만 기다렸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
리라고 생각합니다. 잠언 16장 32절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
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화가 날 때마
다 분노하지 마시고, 그 분노를 잘 다스리시기를 바랍니다.
2. 교만했던 죄
두 번째로 모세의 죄는 교만죄입니다. 모세는 사실은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민수
기 12장 3절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했습니다. ‘humble spirit’, 즉 ‘겸손한 영’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했던 사람이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겸손한 모세의 마음속에 순간적으로 교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만 모세는 10절 말씀처럼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가만히 들으면 모세와 아론이 물
을 주겠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모세가 수많은 기적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 기적의 주
체는 모세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모세가 있기 때문
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 하나님께서 안 계시고 모세와 지팡이만 있었으면 기적은 절
대로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모세의 말을 들으면 마치 모세와 아
론에게 능력이 있어서 반석에서 물을 쳐 내는 것 같이 들린다는 말입니다.
교만이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도 내 힘으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삶의 태도입
니다. 자기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도 내가 내 힘으로 얼마든지 내 일을
처리할 수도 있고, 나는 내 힘으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교만입
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
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순간순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교만
하면 그 앞에는 결국 패망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한 인격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성도
의 기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도는 인격을 다스리는 기도입니다. 순간순간 교만이 쳐
들어올 때에 그 교만을 치고 이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위대한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고
향으로 돌아올 때 있었던 일화입니다. 슈바이처가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슈바이처가 도착할 기차역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기차가 도착하
고 사람들은 슈바이처 박사가 당연히 1등칸을 타고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기다렸습
니다. 그러나 1등칸 손님이 다 내릴 때까지 슈바이처 박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
다. 혹시 2등칸을 타고 왔나 생각해서 사람들은 다시 2등칸 쪽으로 몰려갔습니다. 역
시 거기에도 슈바이처 박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3등
칸 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3등칸의 맨 끝에서 슈바이처 박사가 내리는 것을 발견하
였습니다. 사람들이 슈바이처 박사에게 질문했습니다. “박사님. 박사님처럼 위대하
신 분이 왜 3등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1등칸을 타고 오실 수 있었을텐데요.” 그러자
슈바이처 박사는 “4등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겸손은 사람을 위대하게 합니다. 사람이 겸손하면 그의 인생의 앞길에는 존귀함이 기
다립니다. 그러나 교만하면 그 길에는 패망이 있을 뿐입니다. 모세는 순간적인 교만
때문에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
다.
3.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
모세의 세 번째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민수기 20장 24절을 보면
“아론은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
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연고니라”고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
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는
데, 모세는 반석을 두 번이나 때렸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반석을 치지 말았어야 했습
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나와 있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
리스도시라” 이 반석은 그리스도이며, 이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는 성령과 말씀입니
다. 그리스도는 한번 침을 당하시지 두 번 침을 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서 한 번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단번에 우리 죄를 모두 사하시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두 번, 혹은 세 번 죽으시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기 17장에
서 모세가 한 번 반석을 친 것과는 다르게 두 번 반석을 친 것은 잘못된 일이었습니
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명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는데 모세는 자기의 경험을 의지했습
니다. 모세의 생각은 아마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출애굽기 17장에서는 쳐
서 나왔는데요. 하나님께서 뭘 잘못 아신 거 아닙니까? 내 경험으로 보건데 반석은 그
냥 말해서는 물을 안냅니다. 내 경험을 보건대 반석은 지팡이를 가지고 쳐야 나옵니
다. 지난번에는 한번 쳐서 나왔는데, 이번은 두 번째니까 두 번 쳐야 나올 것 같습니
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신의 경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반
석이 그리스도이므로 이 반석이 두 번 침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말씀 하셨는데, 모세가 그것을 깨달을 리가 없습니다. 모세의 손에는 신약성경
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무조건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경
험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큰 죄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이 죄악으로 말미
암아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결론
통제되지 않는 분노와 순간적인 교만심,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기의 경험을 의지한
불순종으로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장애
물 경주를 뛰어넘는 사람이 모든 장애물을 다 뛰어넘은 후에, 마지막 장애물에 걸려
넘어져서 골인 지점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은 저는 민수기 20장
을 보면서 모세와 아론이 무척 억울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4
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먼저 시작된다는 사실
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
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우리는 세
상을 보면서 세상이 죄가 많다고 말하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에서 먼저 이루
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인 우리들에게 먼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순서가 하나님의 집이 먼저요, 그 다음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나쁘다고 비판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
다. 세상의 죄악을 먼저 정죄하기 전에 하나님의 집의 죄악을 스스로 살펴보고 반성하
면서 죄악을 이겨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높은 직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됩니다. 모세와 아론이 심판받았듯이, 목사와 장로, 권사와 집사가
먼저 심판을 받고, 그 다음에 일반 신도들과 세상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
서 높은 직분을 맡은 사람일수록 하나님 앞에 더욱더 겸손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통제되지 않는 분노, 순간적인 교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심판받
는 3대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이 세 가지를 날마다 버리고, 반석에서 나오는 생
수로 우리의 심령을 말씀과 성령으로 채운 바 되어 승리하는 주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
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경건을 잃어버린 자의 비극
민 20:2-13 / 양인순 목사
진품명품’ 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출연해 골동품의 진위와 가치를 가격으로 평가합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연예인들이 감정 평가단으로 나옵니다.
먼저 골동품 소장가들에게 그 물건을 소장하게 된 사연을 직접 듣습니다.
연예인들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골동품의 가격을 정합니다.
그리고 나서 전문가들이 진품여부를 확인하고 가격을 확정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골동품 가운데 고가의 진품으로 추측된 것일수록 대부분 가짜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한번은 중년 신사가 오랜 되어 보이는 붓글씨 한 점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분은 애국지사가 쓴 작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습니다.
연예인 감정가들도 감탄하면서 매우 비싼 가격을 매겼습니다.
소장자도 감정가를 1억 원이 넘게 써냈습니다.
모두가 마지막으로 전문가의 평가를 기다립니다.
숨을 죽이고 전광판을 지켜보는데 감정가가 단돈 500원이 나왔습니다.
소장자의 얼굴이 벌개지더니 금방 표정이 굳었습니다.
그것은 진품이 아닌 가짜였습니다.
소장자는 지금까지 가짜를 진짜인줄 알고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진품명품 프로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저런 모습이 아닐까?
나는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긍지를 가지고 있는데, 주님께서 바라보시고 가짜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나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정작 하나님 보시기에 진품이 아닌 가짜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오늘 본문에는 바로 경건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한 주인공의 비극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지도하에 광야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들은 신광야를 거쳐 가데스라는 지역에 이릅니다.
여기서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이 죽습니다.
모세의 눈에 슬픔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하나님 앞에서 죽을 때 차라리 죽는 것이 좋을 뻔 했다고 합니다.
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여 사람과 짐승을 죽게 하느냐고 원망합니다.
왜 우리를 애굽에서 살게 나두지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해서 죽게 만드냐고 합니다.
왜 우리를 파종할 곳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석류도 없는 곳으로 끌고 왔느냐고 불평합니다.
마실 물조차 없는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게 하느냐고 지도자 모세를 대적합니다.
하나님의 지도자는 위기의 때에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서 탁월한 역량을 보여줍니다.
자기 생명을 걸고 중보기도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기도 했습니다.
원망과 불평 제조기처럼 쏟아내는 백성들의 원성을 온유함과 인내로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인정받았습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였더라”(민12:3)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이렇게 변호하십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12:7-8)
이처럼 하나님 앞에 특별한 인정을 받고 있는 모세입니다.
그런 모세가 한 순간의 실수로 경건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하나님은 본문 12절에서 모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토록 인정받고 신뢰를 받았던 모세에게 하나님은 믿음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 결과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책망하십니다.
모세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40년 동안을 신실하게 쓰임 받던 자를 하루아침에 가장 영광스런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셨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경건의 모습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모습을 봅니다.
경건(Godliness)은 곧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바라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경건하다는 것은 단순히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깨달은 바를 삶 속에서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집의 충성스런 사환처럼 경건의 모습을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한 순간 실수함으로 경건의 모습을 상실합니다.
우리는 모세의 모습을 거울삼아 경건의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로,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경건을 잃어버리는 첫 단추는 말입니다.
모세는 말로 하나님 앞에 실수합니다.
시편 106편 33절에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 하였음이로다.” 라고 합니다.
신앙인은 무슨 말을 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순간적으로 불신앙적인 말을 합니다.
화가 난 모세는 백성들을 그 반석 앞에 모아 놓고 말합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10절)
여기서 모세는 두 가지 큰 실수를 합니다.
하나는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반역한 너희여’ 라고 말합니다.
개역성경에는 ‘패역한 너희여’ 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의 원래 의미는 ‘망할 자식들아’ 의 의미입니다.
아무리 모세가 화가 났어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반역자나 망할 자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그들은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패역한 길로 걸어갈 때 얼마든지 책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모세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명백한 실수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이 잘못할 때 아버지가 자녀를 책망할 수 있습니다.
권면해서 말을 듣지 않으면 매를 들어서 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잘못했다고 옆집 아저씨가 아들을 책망하거나 때린다면 가만히 있을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똑같은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반역한 너희들아’ 말씀하실 수 있지만 모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불신앙적인 모습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지도자들은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그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축복할 권리를 주십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은 대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27절) 아멘!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향해 축복을 선포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복을 내리십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축복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배 마지막 시간에 하는 축도를 귀하게 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택하신 주의 종을 통하여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축도를 받지 않고 가는 예배는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소중한 복을 놓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도자들은 항상 신중하게 말해야 합니다.
지난 주 용천노회 목사회 세미나에서 곽선희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자기가 목회를 하면서 지금도 하나님 앞에 후회하고, 회개하는 것이 있답니다.
소망교회에서 목회를 하는데 8년 된 포니 자동차를 탔답니다.
걸핏하면 시동이 꺼지고, 길거리에서 멈춰서기를 반복할 때마다 인간적으로 화가 나더랍니다.
그런데 마침 그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포니를 타고 다니니까 보기도 좋고, 교인들도 은혜를 받습니다.”
당시 그 장로님은 최고급 승용차인 빨간색 레코드 로얄을 탔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곽 목사님이 화가 나서 말했답니다.
“장로님! 내가 이렇게 좋은 차를 타니까 목사님은 저보다는 좋은 차를 타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목사인 내가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그보다 못한 차가 더 편하고 좋습니다.”
이렇게 대화가 이루어져야 정상 아니겠습니까?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가 보니 장로님은 앞으로 평생 동안 썩은 포니나 타고 다닐 것 같습니다.”
그랬는데 지금 그 장로님이 사업이 망해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순간 자기 입술로 책망한 것에 대해서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말은 ‘자성적 예언의 힘’이 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처럼 하나님의 지도자들의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망할 자식이라’고 책망합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가 경건하지 못한 불신앙의 말을 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모세는 자기가 반석에서 물을 낼 수 있는 것처럼 교만한 말을 합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언제 모세가 반석에서 물을 낸 적이 있습니까?
물은 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심부름꾼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백성들을 위하여 물을 낸 것처럼 교만해집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아주 불신앙적인 말을 한 것입니다.
말의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의식중에 망령되이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말, 자기의 능력이나 의를 과시하는 말, 자기를 자랑하는 말,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말 등..
망령된 모든 말들은 불신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카메라가 우리를 비추고 있다면 말과 행동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할까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방송 카메라는 오늘 우리의 모든 마음의 생각과 생활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우리의 믿음을 측량하십니다.
불신의 말을 제하고 믿음의 말을 많이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원망이나 불평의 말, 부정적인 말, 불신의 말, 교만한 말을 버립시다.
항상 믿음의 말, 긍정의 말, 격려의 말, 칭찬의 말을 합시다.
그것이 바로 경건한 삶을 이루어가는 중요한 비결입니다.
둘째로, 항상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순간순간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실수합니다.
결국 그 실수가 하나님의 경건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오늘 모세가 결정적인 실수를 한 이유도 바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이 미리암이 죽고, 슬픔 가운데 있는 모세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은 못할망정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너무 미웠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불신앙적인 말을 하고, 자신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행동에 대해서 2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론은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까?
8절에 보면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9절 말씀에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의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여기까지는 모세가 순종합니다.
그런데 분을 참지 못한 모세는 11절에서 불경건한 행동을 합니다.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화가 난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쳤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고 맙니다.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믿는다면 주님의 말씀에 온전한 순종을 해야 합니다.
선택적 순종, 부분적인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전하고, 완벽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긴다면 그 결과는 비참합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한다할지라도 끝까지 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순간적으로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정에 파도가 밀려올 때 조심해야 합니다.
평소에 경건한 모습을 보이다가 순간적으로 감정의 파도를 조절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됩니다.
경찰관하고 소방관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소방관이 이깁니다.
그 이유는 소방관은 물불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소방관하고 맹인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맹인이 이깁니다. 왜냐고요?
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화가 나도 하나님 앞에서 뵈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면 안 됩니다.
그때 하는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경건의 모습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경건한 사람은 화가 날수록 침착해야 합니다.
감정이 상할수록 차분하게 믿음의 행동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시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경건을 지키는 비결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늘의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로, 거룩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백성들 앞에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처음 부를 때부터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말씀하십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 거룩한 마음이 모세를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목전에 둔 마지막 지점에서 모세는 실수를 합니다.
12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세의 불경한 모습을 지적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도록 보냄을 받은 능력의 종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잠시 사명을 잊고 자신을 드러냅니다.
자신이 물을 내는 기적을 행하는 대단한 사람처럼 행세합니다.
아마도 백성들이 계속 원망하고 반항을 하니까 자신의 능력을 다시 한번 보여줌으로 그들을 제압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의 그런 태도를 매우 섭섭하게 여기십니다.
“네가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고 너를 과시하는 것은 불신이다.”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삶의 자리에서 경건의 모습을 잃어버릴 때가 언제입니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과시하고 싶을 때입니다.
자신의 인물이나 학벌이나, 재물이나, 권세를 자랑하고 싶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을 나타내고자 할 때 경건에서 멀어집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영광을 받고, 내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할 때 불경건해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권면합니다.
오직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와 부활,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것이 경건의 비밀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려고 기념비를 세운 사람은 다 망합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이기고 자기 이름을 나타내려고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버림받아 망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승승장구하는 인생을 살았지만 기념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기 위해서 성전을 지으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성공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내게 주신 축복으로 자신을 나타내지 마시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십시오.
내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영화스럽게 할까를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경건한 삶을 지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한 순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불신앙의 말과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토록 사모하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봅니다.
그의 불경건한 모습으로 말미암아 한 순간 비극적인 모습으로 추락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모세를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십니다.
진품명품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진품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가짜라고 판명이 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모세는 지금까지 진품인생을 살아오다가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불경건한 모습을 통해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록 가짜이지만 진짜처럼 행세했어도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회개와 결단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경건한 신앙의 회복을 위해 결단하십시오.
“하나님! 이제부터는 혈기를 부리지 않고 믿음의 말을 하겠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는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는 나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며, 오직 주님만 자랑하며, 주님께 영광돌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 이상 경건을 잃어버린 자의 비극적 자리에 머물지 맙시다.
지금 이 시간 결단하셔서 경건을 회복한 승리의 자리로 나아가 영적인 가나안을 차지하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앙인의 불신앙
민 20:6-12 / 문기태 목사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의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니라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민수기 20:6-12)
한 여행자가 그랜드캐니언 가장자리에 다가갔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가까스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는 매달렸다. 그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
"거기 위에 누구 없소? 누가 날 좀 구해 줘요!"
그러자 어떤 음성이 들려 왔다. "내가 여기 있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당신이 거기 계시다니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구해 주기는 하겠지만, 그 전에 한 가지만 물어 보겠다. 넌 나를 믿느냐?"
"주님, 제가 확실히 믿습니다. 저는 매주일 교회에 나갈 뿐만 아니라 기도회에도 열심히 나갑니다. 또 성경도 읽고, 매일 기도 시간도 가집니다. 헌금도 몇 불씩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아니, 네가 정말로 날 믿느냐고?"
"제가 얼마나 당신을 믿는지 모르실 거예요. 저는 당신을 믿어요!"
"정말 날 믿는다면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거라."
한참 동안 그는 조용히 있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소리쳤다.
"거기 위에 누구 다른 이 없소?"
그리스도인을 다른 말로 신자라고도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겉으로는 믿는 사람인데 정작 믿음을 드러내야할 때에 믿음을 보이지 못하고 불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 " 좋은 그리스도인은 진실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은 항상 주님께 믿음을 보여드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자주 하나님께 진실된 믿음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께 신뢰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찬스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믿음을 보여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은 모세가 원망하는 백성들 앞에서 큰 실수를 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광야를 지나면서 물이 좀 없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모세를 죽이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강팍하여 불신앙을 드러내며 원망을 하는 백성들 앞에서 그만, 모세가 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분노를 폭발했습니다. 벌컥 화를 내며 반석을 칩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꽝, 꽝" 두 번 쳤습니다. 그러자 반석에서 물이 펑펑 솟아났습니다. 모든 백성들과 짐승들이 다 물을 충분히 마시고 갈증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조용히 불러 크게 책망하십니다. 심지어는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가 간절히 그리던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왜 그 사건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까지 심하게 모세에게 섭섭해하십니까?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신앙이 무언가, 참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됩니다.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누가 뭐라 해도 믿음의 사람입니다. 모세가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그는 믿음으로 이 백성을 인도했고 믿음으로 오늘도 능력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 순간 그는 불신앙을 드러낸 사람이었습니다. 믿음 없이 말을 했고 믿음 없이 행동을 했으며 믿음 없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책망을 받습니다. 믿음의 사람 같으나 한순간,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신앙인으로써 불신앙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출석을 오래 하였다고 저절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직분을 받았다고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다 하나님께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보여야 할 때 믿음을 보이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하실 때 믿음의 반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언제 어떻게 믿음을 나타내어야 하겠습니까? 모세의 실수를 거울삼아 어떻게하면 믿음을 잘 표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1. 신자는 항상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10)
모세는 말로 실수를 했습니다. 시편 106편 33절에 보면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신앙적으로 말을 해야 됩니다. 모세는 함부로 지껄였습니다. 아주 불신앙적인 말을 했습니다. 백성들을 그 반석앞에 모으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언제 모세가 물을 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물을 내신 것입니다. 모세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내신 것입니다. 모세는 심부름을 한 것뿐인데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9절에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니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앞에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불신앙적인 말을 했습니다.
말의 영향력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의식중에 망령되이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말, 자기의 능력이나 의를 과시하는 말, 자기를 자랑하는 말,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말 등 망령된 모든 말들은 불신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평양에 갔는데 누가 말하기를 "호텔방에 카메라와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으니 절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방에 들어가 여기저기 살펴보았습니다. 그날 호텔에서의 행동은 여느날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평생에 그렇게 거룩하게 행동하고 점잖게 말을 하게 되더랍니다. 아주 경건하게 하룻밤을 보내게 되더랍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불신의 말을 하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그래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줄 알고 자기가 반석에서 물을 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우리중에는 아예 반석에서 물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더 심한 불신의 말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왜 우리를 여기로 인도하여 망하게 하느냐? 조금만 곤란을 만나도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음을 부정하고 사람에게 온갖 원망을 쏟아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아무 역사도 이루실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우리가 만난 문제를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고 모른척 하실 것이라는 식의 말들은 불신의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우리의 믿음을 측량하십니다. 불신의 말을 제하고 믿음의 말을 많이 하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따라 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도우신다. 하나님이 공급하신다.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하나님이 이루신다. 기도하며 조금만 더 기다리자.] 오늘부터는 부정적인 말, 불신의 말, 원망의 말을 제하고 믿음이 배어나오는 말만 골라 하시기 바랍니다.
2. 신자는 주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연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까?
민수기 20장 8절에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반석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9절 말씀에 '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의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니라.' 여기까지는 순종했습니다. 지팡이로 총회를 그 반석앞에 모은 것 까지는 잘 순종했는데 흥분한 모세는 그만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하나님을 말씀대로 하면 반석을 향하여 말로 명령을 하는 것인데 모세는 자기 감정대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한 순종을 하였습니까? 불순종했습니다. 처음에는 순종하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제 맘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연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완전하신 주님으로 믿는다면 그분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분의 말씀을 귓등으로 흘려버리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심과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이 절대 진리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하나님이 설교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것과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한순간 흥분하여 그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온전히 순종치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했습니다. 처음에는 순종하다가 나중에는 제 생각대로 손을 들어 반석을 두 번 내리쳤습니다. 그 행동이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섭섭하게 여기셨습니다. '모세가 나를 온전히 믿지 않는구나!'하고 생각하셨습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누군가 평온한 감정에 돌을 던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자기 생각대로 마구 행동합니다. 기분이 조금 상하면, 자존심을 조금 건드리면, 섭섭함이 생기고 속상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아무렇게나 마구 행동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만 절제하면 좋을텐데 뵈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 마구 말하고 마구 행동합니다.
누가 그럽디다. 경찰관하고 소방관이 싸우면 누가 이기냐?고 물불을 안가리니까 소방관이 이긴답니다. 소방관하고 맹인하고 싸우면 누가 이기냐?고 뵈는 것이 없으니까 맹인이 이긴답니다.
여러분 아무리 화가나도 하나님앞에서 뵈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마구 날뛰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인은 화가나거나 감정이 상한 때일수록 더 차분하게 믿음의 행동을 보여야 합니다. 신자는 기분이 안 날때에도 온전히 주의 말슴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을 주님께 보이고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주의 말씀에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삶을 통해 주님께 믿음을 인정받기를 축원합니다.
3. 신자는 주의 거룩함을 나타내야 합니다.(12)
12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지적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도록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도록 하나님께 능력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잠시 사명을 잊고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자신이 물을 내는 기적을 행하는 대단한 사람처럼 행세했습니다. 아마도 백성들이 자꾸만 원망을 하고 반항을 하니까 그런 식으로 기적을 행하며 자신의 능력을 보여줌으로 백성들을 제압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굉장한 능력을 받은 사람인데 까불면 혼날 수도 있어."하는 일종의 엄포를 놓으려는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주 섭섭해 하셨습니다. '네가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고 너를 과시하는 것은 불신이다.' 하고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자신의 영광을 목표로 삽니다. 어떻게든지 돈을 많이 벌어서 화려하게 보란듯이 치장하고 사람들에게 과시하며 뽐내고 싶어합니다. 어떻게든지 수단방법 안가리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 아래를 굽어보면서 사람들에게 큰소리쳐보고 싶어합니다. 좋은 학교 나온 것 자랑하고 싶어하고, 인물 좋은 것 자랑하고 싶어하고, 자식 잘 둔 것 자랑하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일을 이룬 것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자기 자랑에 열을 올립니다. 그러다가 남보다 뒤쳐진다 싶으면 속이 상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공연히 시기하고 미워합니다. 이 모든 것은 모두 자기의 영광을 사람들앞에서 자랑하고 싶어 안달하는 세상 사람들의 본능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안됩니다. 기회가 있는대로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고 권면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열을 올릴 때 같이 자기 자랑하면 안됩니다. 다 들어주고 칭찬해주세요. 그리고나서 기회를 잡아 예수님 자랑해야 합니다. 십자가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속에 찾아 오셔서 행하신 일들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여드려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믿음 좋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운동선수가 운동을 잘해서 금메달을 따고 자기는 감추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학생이 공부를 잘해 서울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해도 비결을 물으면 하나님이 지혜를 수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업을 성공해도 하나님이 도와주셨다고 말하고 어떻게 그렇게 잘난 자식을 두고 잘 키웠냐?고 물어도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더니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삶의 방식입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이기고 나더니 자기를 위하여 자기 이름을 기념비에 새겨 세워놓았습니다. 압살롬도 자기를 위하여 자기 이름을 전하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모두 하나님께 버림받아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전쟁에 나가 싸워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승승장구하였으나 자기를 위하여 자기 이름을 높이려고 기념비를 세우는 짓을 하기보다는 찬양을 지어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고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으려고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계속 높이셨습니다.
여러분이 부자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십시오. 여러분이 공부를 잘합니까?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시오. 여러분이 재주가 뛰어납니까? 그것으로 하나님을 높이십시오. 여러분이 성공하셨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십시오. 여러분이 건강하고 힘이 셉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그것이 믿음을 보이는 좋은 길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을 많이 드러냄으로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받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신앙인이십니까? 그러나 신앙인중에는 불신앙을 드러내며 사는 신앙인과 믿음을 드러내며 사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믿음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으나 하나님께는 믿지 않는다고 책망듣는 신앙인과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받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쪽입니까? 여러분 모두 말로써 믿음을 표현하여 인정받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을 인정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나타내므로 귀하게 인정받는 신앙인으로 발견되기를 축원합니다.
믿는 자의 불신앙
민 20:7-13
그리스도인을 다른 말로 말하면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앞세우며 살아야 할 사람이 분명한데 정작 믿음을 드러내야 할 때에 믿지 못하고 불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앞으로 보아도 뒤로 보아도 옆으로 보아도 분명히 믿음의 사람이 틀림없는데도 정작 믿음을 보여야 할 때 불신앙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써 모든 순간마다 믿음을 드러냄으로 하나님께 칭찬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믿음을 드러냄으로 비 신자 들에게도 믿음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믿음의 사람들끼리도 피차 믿음의 본을 보이고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구약 성경에서 가장 위대하게 쓰임 받았던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께 책망 받는 장면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왜 책망을 받을까요? 12절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세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을 또 우리가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 모세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에게 나아와서 다투기 시작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마실 물도 없는 이 광야로 인도하여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여러 번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기적, 쓴 물이 단물로 바뀌는 기적, 반석이 갈라지고 물이 솟아나는 기적, 날마다 만나가 내리는 기적, 메추리 떼가 날라와 떨어지는 기적 등 셀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큰 역사를 체험하며 가나안 땅이 보이는 가데스 바네어 광야에 이르렀는데 믿음이 전혀 자라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려고는 하지 않고 불평과 원망만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완악하여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불신앙을 드러내며 원망을 하는 백성들 앞에서 그만, 모세가 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분노를 폭발했습니다. 벌컥 화를 내며 반석을 칩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꽝, 꽝" 두 번 쳤습니다. 그러자 반석에서 물이 펑펑 솟아났습니다. 모든 백성들과 짐승들이 다 물을 충분히 마시고 갈증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고 모두가 만족해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불러 크게 책망하십니다. 심지어는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모세가 간절히 그리던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 사건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까지 진노하십니까?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누가 뭐라 해도 믿음의 사람입니다. 모세가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내심에 순종하여 바로에게 나아갔습니다. 목숨을 걸고 바로와 맞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고 홍해바다를 건넜습니다. 믿음으로 거칠고 황량한 광야를 지나며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며 수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 모세는 불신앙을 드러냈습니다. 믿음 없는 말을 했고 믿음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한 순간, 믿음이 없는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신앙인으로써 불신앙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 모세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께서 몹시 섭섭해 하십니다. "너희는 이 회중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너는 여기까지다 더 이상 너를 귀하게 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출석을 오래 하였고,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고, 성경도 잘 알고, 기도도 잘하고 훌륭한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저절로 믿음이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다 하나님께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보여야 할 때 믿음을 보이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순간에 믿음의 반응을 할 수 있어야 믿음을 인정받습니다. 한 두번 믿음을 보였다고 계속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히 믿음을 보여야 더 아름답게 쓰임 받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나타내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믿음을 표현하여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모세처럼 뼈아픈 실수를 범하지 않고 끝까지 쓰임 받으려면 어떻게 믿음을 보여야 합니까?
1. 믿음의 말을 해야 하나님께 인정 받습니다.(10)
사실 모세에게 나아와 다툼을 시작한 회중들이야말로 불신앙의 말을 했습니다. 아무도 물이 없어 갈증으로 죽은 사람이 없었는데도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선하게 인도하신 것을 잊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접은 채 절망의 말, 불신의 말을 뱉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회중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큰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반석에서 엄청난 물이 솟아 백 만 명도 넘는 그 많은 사람과 가축이 다 갈증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한 믿음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모세가 믿지 않았다고 하십니까?
모세는 말로 실수를 했습니다. 시편 106편 33절에 보면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신앙적으로 말을 해야 됩니다. 모세는 불신앙적인 말을 했습니다. 백성들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언제 모세가 물을 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물을 내신 것입니다. 모세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내신 것입니다. 모세는 심부름을 한 것뿐인데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것이 잘못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주 불신앙적인 말을 했습니다.
말로 믿음을 나타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의식 중에 망령되이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말, 자기의 능력이나 의를 과시하는 말, 자기를 자랑하는 말,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말들을 내뱉습니다. 이런 말들이 불신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불신의 말을 하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왜 우리를 여기로 인도하여 망하게 하느냐? 조금만 곤란을 만나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담겨있음을 잊고 사람에게 온갖 원망의 말을 쏟아 붓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아무 역사도 이루실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우리가 만난 문제를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고 모른 척 하실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 말이 불신앙입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이루어진 것들을 자신이 한 것처럼 말하는 것도 불신앙입니다. 누가 이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잘되게 하셨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위기와 질병에서 건져내셨습니까? 누가 여러분의 자녀들을 지혜롭게 하시고 존귀하게 하셨습니까? 여러분이 전도를 잘하고 열심히 봉사하도록 누가 건강을 주시고 누가 새 힘을 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내가' 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이기기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을 사용하시고, 나의 기도를 사용하시고, 나의 헌신을 사용하셔서 역사하십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하신 것을 잊어버리고 내가 한 것처럼 생각하고 내가 다 했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우리의 믿음을 측량하십니다. 불신의 말을 자제하고 믿음의 말을 많이 하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따라 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도우신다. 하나님이 공급하신다.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하나님이 이루신다. 기도하며 조금만 더 기다리자.] 오늘부터는 부정적인 말, 불신의 말, 원망의 말을 절제하고 믿음이 담긴 말만 골라 하시기 바랍니다.
2. 믿음으로 순종해야 하나님께 인정 받습니다.(11)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까?
민수기 20장 8절에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반석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9절 말씀에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여기까지는 순종했습니다. 지팡이로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은 것 까지는 잘 순종했는데 흥분한 모세는 그만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반석을 향하여 말로 명령을 하는 것인데 모세는 자기 감정대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과거에 르비딤에서 같은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반석을 지팡이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데스에서는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습니까? 불순종했습니까? 불순종했습니다. 처음에는 순종하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제 맘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연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대로 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말씀대로 반석을 향하여 말로 명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완전하신 주님으로 믿는다면 그분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분의 말씀을 귓등으로 흘려버리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심과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이 절대 진리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하나님이 설교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것과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말씀을 힘써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물론 모세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도 한 순간 흥분하여 그 말씀대로 순종치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했습니다. 처음에는 순종하다가 나중에는 제 생각대로 반석을 두 번 내리쳤습니다. 그 행동이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섭섭하게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물이 펑펑 솟아난 결과만 보고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이로구나! 생각하였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나를 온전히 믿지 않는구나! 이제는 내게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구나!'하고 생각하셨습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평온한 감정에 돌을 던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자기 감정대로 마구 행동합니다. 기분이 조금만 상하면, 자존심을 조금만 건드리면, 섭섭하고 화가 나서 말씀을 잊고 감정을 앞세웁니다. 속 상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화가 나서 아무렇게나 마구 행동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만 절제하면 좋을 텐데 눈에 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어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합니다. 불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 빨리 잊어 버립니다.
여러분, 아무리 화가 나도 하나님 앞에서 뵈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마구 날뛰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인은 화가 나거나 감정이 상한 때에도 절제하고 차분하게 믿음의 행동을 보여야 합니다. 신자는 기분이 좋을 때 뿐만 아니라 기분이 내키지 않을 때에도 온전히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을 주님께 보이고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주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 주님께 믿음을 인정받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정말 예수를 믿습니까? 신앙인중에는 불신앙을 드러내며 사는 신앙인과 믿음을 드러내며 사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신자 중에는 사람들에게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신자와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받는 신자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 모두 믿음의 말을 하여 하나님께 인정받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여 잘 듣고 온전히 순종함으로 믿음을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주어진 모든 상황에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믿음을 하나님께 인정받고 계속 쓰임 받기 바랍니다. 좋은 믿음을 드러내어 계속 하나님께 큰 은혜와 복을 받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반석에 서지 못한 사람들
민 20:7-13 / 윤삼중 목사
역사적으로 볼때에 가데스가 어떤 곳입니까? 가데스 바네아는 40년 전에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불신하고 출애굽 구원의 은혜와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38년 간의 광야 방랑과 가데스 대반역 사건에 동참한 출애굽 제1세대의 진멸이 선언된 장소입니다. 그런데 가데스에서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다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온유한 모세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의 소리를 듣고 참고 인내하지 못하고 분노를 발하며,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믿고 신뢰하지 못한 모세의 한계성, 인간의 한계성을 그대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거나 버리지 아니하고 가나안을 향한 새 출발을 시작하는 희망(希望)의 장이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재기하였거나 심기일전해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일거에 진멸되어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져야 마땅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렇게 실수하고 넘어집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가데스 바네아 대반역 사건으로 야기된 38년여의 광야 방랑 생활을 마치고, B.C.1406년 1월 다시 가데스 바네아에 재집결하여 물이 없음으로 므리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가데스에서 모압 평지까지의 여정 중에 발생한 여러 에피소드의 모음집인 제 20-21장은 일면으로 이스라엘 광야 생활 전체의 축약판이기도 합니다. 출17장에서 이미 반석에서 물을 내었다는 사건은 출애굽 초기 출애굽1세대 때의 사건에 대한 기록이고, 오늘 본문의 사건은 출애굽 후 40여년이 지난 출애굽 후기 출애굽2세대 때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헤메다 다시 도착한 곳이 가데스라는 곳입니다. 전통적으로 그곳에는 물이 풍부한 곳이라 학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200만명이 오랫동안 먹고 살았으니 추측하건대 샘이 말라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였고 모세는 참지 못하여 분노를 발하는 큰 실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이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그들이 가나안 입성을 불허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출애굽의 영웅이자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도자인 모세는 누구보다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모세는 그의 간절한 간구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입성(入城)이 끝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 일차적 이유는 물론 므리바 물 사건 때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온전히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보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는 결정적인 불순종으로 인해 이때껏 쌓아 올린 순종의 아름다움을 산산히 부수져 버렸는데 이는 상징적으로 율법 준수의 한계를 암시합니다. 즉 율법 계시의 전수자요, 선포자인 모세도 '율법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가나안 입국 실패는 이러한 구속사의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수여자요, 선포자이며, 전수자로서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는데 그러한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은 '율법 으로는' 결코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징인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상징인 모세가 그 율법으로 인해 죽었거늘 하물며 그 누가 율법으로 구원 얻을 수 있다고 자신할 자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우리를 가나안의 입구까지 인도하는 몽학선생에 불과할 뿐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경륜이 깔린 구속사의 대선언인 것이고, 모세의 실수는 그러한 섭리의 결과로 파생된 하나님의 또다른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의 반석에 서지 못하는 사람들, 믿음에서 실패한 자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면서 큰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음으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장소에 장막을 치게 됩니까? 1절에 보면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주그며, 거기에 장사되니라” 1절을 보면 정월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광야에 이르러 가데스에 거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정월’ 이란 출애굽 제40년째 되는 해의 1월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가데스’ 는 약 38년전 출애굽 1세대가 반역 사건을 일으켰던 곳으로(13,14장) 가나안 경계 지점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처음 가데스에 도착한지 약 38년 만에야 다시금 가나안 정복을 위해 그곳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반역 사건만 없었더라면,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정복을 목전에 두고도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정복을 38년이나 유보당한 채 멀고 먼 길을 돌아가서 이제야 다시금 가나안의 진입로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늦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불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지연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불신앙을 버리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갖기까지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은혜의 때를 늦추십니다.
가데스 광야에서 무슨 사건이 터집니까? 물이 없음으로 원망하는 므리바 사건이 일어납니다. 므리바 사건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과 원망과 불평이 용솟음치는 사건입니다. 겉으로 볼때는 물이 없는 것이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마음과 자세가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보았고,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항상 그들 곁에 있었는데 왜 불평불만이 이렇게 않습니까? 노예근성이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죄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에 조그만 문제 앞에서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물이 없다고 모세와 다투는 것입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곳으로 인도해 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것은 모세나 아론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음을 깨닫지 못하는 불신앙의 외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렀던 가데스는 그들의 말대로 모든 것이 절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나쁜 땅이란 '아무 쓸모 없는 땅'으로, 사람이 도무지 생존할 수 없는 죽음의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육신적인 눈으로 그곳을 바라본 것에 불과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곳은 모든 것이 넘치는 충만의 장소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셨고,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이 있었으며, 계약 백성으로서의 미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정적인 발언은 결국 그들의 불신앙에서 나온 말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허락하실 것이라 하셨지요, 그들의 말대로 '죽음의 땅'을 약속하신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참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현실에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4-5절에 보면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왜 물이 없는 이 곳으로 인도하여 우리를 죽게 하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을 쏟아 붓었습니다. 물이 없다는 것은 인간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에 출애급 1세대, 광야 1세대 사람들은 참고 인내하기보다는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들은 가데스에 모이자 또다시 고질적인 불평과 원망을 시작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38년 전의 반역 사건으로 출애굽1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어야만 했던 사실을 망각하고 다시금 그 자리에서 물이 없다는 이유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이 많았던 윗 세대의 조상들은 그 비옥한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는데 이제 와서 그들은 그 땅에 비해 광야의 환경이 열악하다고 모세와 아론을 비난했던 것입니다.
2.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회막에 앞에 나아가 엎드려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큰 위기 상황속에서 어떻게 합니까? 6절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을 떠나 회막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여기서 모세와 아론은 그들과 정면으로 대항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가서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그 해답을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에서 찾은 것입니다. 이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반석에서 물을 냄으로써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기도는 만능의 열쇠였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의 소리가 커지자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변하지 않는 광야의 어려움 속에서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던 것과 달리 모세와 아론은 변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의 문제를 목도하며 기도했습니다. 이런 차이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불평 불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모세와 아론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기도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만나주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다른 사람들의 문제까지 해결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모세에게 영광을 보여주며, 무슨 말씀을 주셨습니까? 7-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숭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이 엎드리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적인 언행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마실 수 있는 충분한 물을 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변함없이 범죄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한 결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품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가 백성들의 눈앞에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고 하십니다. 마른 돌에서 물이 솟아나오는 능력을 통해 백성들이 불평하며 불신앙에 빠져있더라도 그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여호와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이 없는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실 물을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반석에서 물을 나오게 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지구상에 어떤 사람도 바위에서 물을 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낼 때 모세가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반석에서 마실 물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석위에 서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찾으면 하나님이 자청하여 반석위에 서계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됩니다.
우리 주변에 마실 물이 없을 때, 먹을 양식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창조주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르비딤은 원망과 불평하는 곳이 되면 안됩니다. 르비딤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호렙 산 바위틈에서 솟는 물을 마시기 위해서 그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기 위해서 기도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답답함이 그렇습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요구하지만 만날 그게 그것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바로 기도할 기회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할 기회입니다. 르비딤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 오니 물이 없습니다. 어디에서 물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길을 가르쳐 주옵소서”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새로운 일이 없어 일상이 심심한 것 같고, 무의미 한 것 같을 때에도 기도하십시오. 물이 없어 목이 마를 때에도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이며,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는 누구인가?’였습니다. 이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사람은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그의 학창시절 생활기록부는 엉망이었습니다. “품행이 나쁘고 믿을 수 없는 아이. 희망이 전혀 없으며 다른 아이들과 싸움질만 일삼는 문제아.” 성적도 초라했습니다. 그는 3수 끝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셰익스피어를 제치고 영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는 철저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처칠은 전쟁터에서나 국회에서 늘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이런 용기 있는 믿음이 그를 가장 존경 받는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큰 능력을 주십니다. 기도는 ‘희망이 없던 소년’을 ‘희망을 주는 지도자’로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성경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기도소리에 친근해 있었던 링컨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기도하는 일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아침이면 기도로 영혼의 호흡을 시작했으며 저녁이면 커튼을 닫듯이 기도로 하루의 일과를 마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야 말로 다른 어떤 일 보다 우선되는 일이며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 도구라고 믿었고 그의 믿음대로 기도의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중 노예 해방을 위한 남북 전쟁 때의 이야기입니다. 막강한 지휘관들이 모두 남부 연합을 이끌었습니다. 유능한 지휘관의 부족으로 북군은 남군에게 계속적으로 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민심은 분열되었으며 일부의 주에서는 탈퇴의 기미가 보였고 극단주의 자들의 견해 속에서 링컨은 현명하게 균형을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거듭되는 패전의 소식 속에서 링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간구했습니다. 오직 북군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 밖에 없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쉬지 않고 기도했으며 그의 간절한 기도는 자신과 전 국민의 금식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사람의 지혜나 군사의 수나 무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3. 모세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하며,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치는 큰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세는 이스라엘 회중앞에서 무슨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까?10-11절에 보면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그런데 모세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하나님은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으나 모세는 반석을 두 번 씩이나 힘껏 내리 치고 맙니다. 극도로 예민해진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혈기를 부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정확히 새겨 듣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사실 그 이전에도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어 주신 일이 있었는데 그 때에는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7:6절을 보면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이번에도 반석에서 물을 내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모세는 하나님 말씀을 끝까지 경청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대충 들었고, 과거에 반석을 쳐서 물을 냈던 기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모세처럼 온유한 사람도 40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달린 결과 하나님 앞에서 혈기를 부렸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끝까지 듣지 않고, 과거의 경험을 의지했습니다. 반석에게 명하기만 해도 물을 내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두 번이나 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고, 그 뜻을 변질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함이 가득한 모세에게 무슨 책망을 하셨습니가?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나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만일 이때 모세가 단순히 '명령'으로만 반석에게 '물을 내라' 하였다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이 높이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함에 사로잡힌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백성을 치고 싶은 심정으로 반석을 두 번이나 두들겨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욕하는 그 백성에게 기적을 보이시고 당신의 능력과 영광을 높이 드러내고자 하셨으나 그가 백성에게 혈기를 냄으로써 오히려 여호와의 영광과 거룩함을 파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원망하는 백성에게 일단 물을 제공하셔서 그들에 대한 당신의 끝없는 사랑과 보살핌을 확인시키려 하셨던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와 거룩함을 여지없이 짓밟아 버린 불경스런 처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죄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훼손한 아론과 모세를 징벌하심으로 당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셨고, 원망하는 백성들에게는 그들의 요구대로 물을 공급하여 불평을 일추시킴으로써 당신의 거룩함을 증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있는 영예를 박탈당했고, 가나안 입국이 금지되는 준엄한 내용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모세는 반석에서 물을 내는 것이 자신이 하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10절을 보면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마치 물을 내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물을 내는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마치 자신이 내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모세에 대해 "네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라고 지적합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은 실패만이 남는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속에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가 겪게 되는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됩니다. 이럴 때 믿음을 가진 신앙인으로서 어떠한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해야 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