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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40708 /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 고전 3:10-23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5.01.24|조회수115 목록 댓글 0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 3:10-23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전 3:10-23 / 하나님의 은총으로 유능한 건축자가 된 나는 기초를 놓았고 아볼로는 그 위에 건물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기초 위에 건축을 하는 데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11)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기초를 놓았으니 그외의 다른 어떤 기초도 놓을 수가 없습니다. 12) 그러나 그 기초 위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건축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은 보석을 사용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나무나 풀 또는 짚을 사용할 것입니다. 13) 그리스도의 심판날이 오면 모든 사람들이 세운 건축물은 불의 시험을 받아 건축자가 각각 어떤 재료를 사용하였으며, 그 건물이 존속될 것인가, 참으로 완벽한 건물인가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눈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14) 그리하여 그 기초 위에 적절한 재료로 건물을 지음으로써 그가 지은 건물이 불을 견디어 내면 그 사람은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15) 그가 세운 건물이 불타버린 사람은 큰 손실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 자신은 화염 속을 빠져 나와 겨우 목숨만은 구하듯 그렇게 구원받을 것입니다. 16) 여러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당신의 성전인 바로 여러분 속에 계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17)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거나 허물어 버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고 정결하며 여러분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18)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이 세상 표준으로 판단해서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매우 슬기롭다고 생각한다면 그 모든 생각을 내던져 버리고 차라리 바보가 되십시오. 그래야 정말 슬기로운 사람이 됩니다.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ㄱ) `슬기롭다 자처하는 자들 궁리하는 것 순식간에 끝장내 버리시지'라고 씌어 있듯이 인간은 자기 지혜에 걸려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ㄱ. 욥5:13) 20) 또 ㄴ) `여호와께서는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모두 잘 알고 계신다'라고 하는 말씀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ㄴ. 시94:11) 21) 그러므로 ㄱ) 이 세상의 지혜를 자랑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ㄱ. 문자적으로는 사람을 자랑하지 말아라) 22) 바울도 아볼로도 베드로도 여러분을 도우라고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들입니다. 생명이나 죽음까지도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여러분이 사용하도록 주셨습니다.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모두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모든 것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닦은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나 이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우는데, 불이 이를 시험할 것입니다. 이때에 그 위에 세워 놓은 일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불에 타면 해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자신을 더럽히면 안됩니다.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넘어지게 하시고 그들의 생각이 허망한 것을 아십니다.

 

집터와 건축재료(10-15) 집을 건축할 때 터가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터 위에 인생을 건축한다면 터로 인해 집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건축할 때는 터뿐만 아니라 건축 자재도 중요합니다. 어떤 자재로 건축하느냐에 따라 집이 견고해지거나 약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금과 은, 보석 같은 견고한 믿음의 건축자재로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이 불로 시험하실 때 금과 은과 보석처럼 강하고 귀한 믿음의 재료로 지어져야 합니다.

 

우리 몸이 중요한 이유(16-23)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은 우리 몸에 대한 가장 높은 차원의 시각을 제시합니다. 어떤 종교인들은 흔히 몸은 악하고 영은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뿐만 아니라 몸도 창조하셨으므로 우리의 몸은 영과 동일하게 소중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뿐만 아니라 몸도 구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의 몸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음란이나 술같은 것으로 몸을 해치면 안 됩니다. 일중독으로 몸을 혹사시키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과정에서 몸의 정결과 순결은 매우 중요하고 건강한 몸에 건강한 은혜가 임한다는 사실도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어떤 터 위에 인생을 세워야 합니까? 당신은 어떤 건축자재로 인생을 세워가고 있습니까? 당신 자신을 가장 교묘히 속일 수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왜 자신의 지도자를 사랑합니까?

 

성령은 보혜사로 와 계십니다. 보혜사란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도와주고 위로하며 돌보아주기 위해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어떤 능력이나 신비한 힘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령은 인격자이시고 지성과 감정,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과 더불어 인격적인 교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면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심으로 항상 성령충만을 구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 설 교 >

예수님은 견고한 터

고전 3:10 / 이원근목사

오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에 나와 예배하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다같이 은혜 받을 말씀은 “예수님은 견고한 터”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일이나 물건의 가치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상당한 견해차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엄청난 값이 나가는 골동품도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오래되고 낡아서 쓸모가 없는 물건인 것이 사실입니다. 때문에 무엇이든지 그 가치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파악하여 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도 이와 같습니다.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분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시지만,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와 같이 훌륭한 빛을 남긴 한 역사적 인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인생의 성공과 승리를 위한 견고한 터가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유일한 터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건축물을 세우려면 반드시 터가 있어야 하듯이 인생의 건축물을 세우는 데도 터가 필요한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훌륭한 인생, 위대한 인생을 건축할 수 있는 터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각기 원하는 터 위에다 자신의 인생을 건축하지만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터 위에만 건축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성공과 승리로 이끌어 주는 터는 이 터뿐이며,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를 대신함이 불가능합니다. 만일 이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할 만한 어떤 가치가 존재했다고 하면 기독교 역사는 순교자들의 이름을 그토록 많이 기록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1)예수님은 유일한 속죄의 길입니다.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든 죄의 매임으로부터 놓여 자유하게 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분께 담당시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으므로 아무도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속죄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증명했듯이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죄의 결박을 벗어버리고자 하면 그리스도의 터 위에 인생을 건축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속해 줄 다른 인물이나 종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그분에게만 속죄의 길이 있으며, 그분은 모든 사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넓게 열어 두셨습니다.

 

2)예수님은 유일한 축복의 길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후사가 되게 하는 유일한 축복의 통로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와 같은 축복을 소유하고자 하면 이 터 위에다 인생을 건축하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됩니다. 터가 처음에는 별로 중요한 것처럼 생각되지 않으나 그것이 인생의 승패를 결정하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방향을 어디에 잡느냐에 따라서 나중에는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되기 때문에 터를 잘못 선택하는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의 유일한 속죄의 터이며 축복의 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생의 축복 가운데 날마다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견고한 터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건축물을 세우기에 적합한 터는 견고해야 하듯이 인생의 건축물을 세우는 터 역시 견고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견고한 터가 되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위에 인생을 건축하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됩니다. 터가 처음에는 별로 중요한 것처럼 생각되지 않으나 그것이 인생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방향을 어디에 잡느냐에 따라서 나중에는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되기 때문에 터를 잘못 선택하는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1)세상이 이기지 못합니다.(요16:33)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기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터 위에 인생을 건축하는 사람들 역시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성도들 가운데 더러는 세상에 당하는 핍박이나 환난 때문에 좌절하고 실패하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그 터가 예수가 아닌 다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폴리갑'은 화형을 당하기 직전에 드린 기도에서 자신이 순교자가 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라는 터 위에 인생을 건축한 사람들은 어떠한 곤경이나 역경 속에서도 추호도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2)마귀가 빼앗지 못합니다.(요일3:8)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이고 이를 이루셨기 때문에 이 터 위에 인생을 건축하는 사람들은 마귀에게 이끌리거나 귀한 것들을 그에게 빼앗기는 법이 없습니다. 비로 그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을지라도 그리스도의 터 위에다 인생을 건축한 사람들을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대적하여 물리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견고한 저와 여러분의 터가 되시기 때문에 원수 마귀와 세상의 재앙과 환란과 곤고한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를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굳게 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영원한 터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무리 터가 좋게 보여도 영원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특별한 가치가 없는데, 그리스도의 터는 영원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터 위에 인생을 건축하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급에 참예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 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1)수고에 따르는 보상이 있습니다.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터 위에 인생을 건축한 사람들이 얻게 되는 최종적인 보상을 절망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인생을 건축한 사람들이 얻게 되는 보상은 수고의 분량에 비례합니다. 즉 각 사람의 일한 데 따라서 적당한 상급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므로 성도의 모든 수고는 하나도 헛되이 돌아가는 법이 없습니다.

 

2)영원히 보장된 기쁨을 주십니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고 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이란 잠시 잠깐 후면 지나가 버리는 일시적인 것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인생을 건축하는 사람들에게 보장된 기쁨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탐심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영원한 기쁨을 위하여 일시적인 쾌락을 피할 줄 아는 지혜를 갖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결 론

우리가 인생을 건축할 수 있는 견고한 터, 소망과 비젼이 있는 터는 예수 그리스도뿐인데도 수많이 사람들이 입술로는 주를 부르면서 인생은 다른 터 위에다 세워가고 있는데, 이것은 어리석은 노릇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성공과 승리로 이끌어 주는 인생의 터는 그리스도뿐이며, 이 터에 인생을 건축하는 사람마다 견고히 세워져 흔들림이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 외의 다른 모든 터는 무너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터로 삼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을 지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인생을 건축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견고하고 온유하며 겸손한 사람으로 빚어지시기 바랍니다.

 

 

 

 

공력을 쌓아놓으라

고전 3:10-15 / 김원효목사

공력’이란 말은 힘쓰고 애쓰고 공들여 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마다 인생을 사는 데에 있어 각자 힘쓰고 애쓰고 공들이는 것들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속한 영산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의 일입니다. 같은 동기의 신학생들은 같이 3년을 한 교실에서 지내다보니 서로의 성격과 인격, 그리고 신앙의 모습을 대충 잘 알게 됩니다.

저의 경우 신학생 시절은 어땠을까요? 제가 다녔던 영산 신학대학원은 제가 입학할 당시에 동기들이 90명가량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나이가 입학 당시에 27살이었습니다. 같은 동기들 중에 가장 나이가 적은 막내였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가장 많으신 분들은 거의 60세가량이 되었습니다.

서로 동기이지만 나이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났습니다. 어찌 보면 그렇게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이 저를 바라보면 마치 아들처럼 어리게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때 저는 청년부에서 조장과 전도 실장을 하면서 전도와 기도에 누구보다 열심이었습니다. 매주 청년들을 이끌고 병원 전도, 유치장 전도, 노방 전도, 지하철 전도, 공장 기숙사 전도 등 전도에 거의 미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도상도 계속 타고, 제가 맡은 구역과 조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크게 부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 공부는 그렇게 열심히 하지 못했습니다. 옛날 한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최권능 목사님이 있습니다. 본명은 최봉석입니다. 이 분이 은혜를 크게 받고 신학교 시절에 기도와 전도를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그분이 외친 유명한 전도 구호가 이겁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그러나 신학교 공부는 못해서 시험 때에 백지를 내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농담가운데 “시험에는 성령님도 쩔쩔매는 구먼!”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는 결국 4년이면 졸업할 신학교를 7년이 지나도 졸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무실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교수님들에게 아뢸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교수님들 먼저 저와 함께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같이 부족한 죄인을 불러서 예수님 믿게 하시고, 또 신학교에 와서 이렇게 공부하게 하시고, 또 목사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공부만 잘해야 목사가 됩니까? 하나님의 종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해야 하는데, 저는 기도하고 전도 하느라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들이 나에게 졸업장을 주어 나도 목사 될 수 있도록 길을 열러 주옵소서. 주실 줄 믿고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너무도 간절하고 뜨겁게 기도를 했기 때문에 교수님들은 모두 덩달아 아멘을 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최봉석 신학생은 마펫 교장님에게 졸업장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교장님은 “안 됩니다. 1년을 더 공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최봉석 신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교장님과 교수님들이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합니까? 조금 전에 저의 기도에 모두 아멘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어기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교장님과 교수님들은 할 수 없이 그에게 졸업장을 주기로 했습니다. 전무후무한 낙제의 기록을 세운 최봉석 신학생이 이렇게 해서 졸업장을 받고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낙제한 신학생이 졸업한 스토리는 평양신학교 역사에 미담으로 길이 남아있습니다.

자- 이상 최권능 목사님에 대한 신학교 시절 이야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저의 경우 신학교 시절은 어땠을까요? 저의 경우도 신학교 시절에 전도와 기도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으나 공부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신학교 성적이 최권능 목사님처럼 아주 낙제할 정도로 나빴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동기들보다 나이가 가장 적고, 그에 따라 기억력도 그분들보다는 좋으니까 시험 때만 반짝 공부해도 어느 정도 성적은 나왔습니다. 평균 80점 이상은 되고, 상위 20% 수준에는 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제가 전도와 기도에 열심을 내니까 그것을 지켜보던 나이가 많으신 제 동기분이 저에게 이런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아- 참 열심이네요. 보기에 좋습니다. 그렇게 젊었을 때부터 기도를 쌓아놓고 공력을 쌓아놓으면 나중에 다 찾아먹습니다.” 아니 게 아니라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주의 종으로 목회 현장에 들어갔을 때 미리 쌓아놓은 그 공력이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 부교역자로 있으면서 4개 교구를 맡았었는데 맡은 교구가 모두 부흥이 잘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지요? 그런 결과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Rome was not built in a day.(로마는 할 아침에 세워지지 않았다.)" 즉 미리부터 실전 훈련도 받아야 되고, 공력도 미리미리 쌓아놔야 합니다. 가능한 많이 쌓아놔야 좋습니다. 즉 기도도, 봉사도, 전도도, 각종 헌신도 많이 해놔야 됩니다. 그래야 나중에 저축한 그것을 꺼내 먹을 수 있고, 하나님도 내가 저축한 이전의 것을 달라고 하면 주시지, 저축을 하나도 안한 것을 달라고 하면 좀 난감해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늘 하나님께 우리를 이렇게 참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저 녀석은 저축도 하나도 안했는데, 하나도 심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마구 주시면 어떡합니까? 그건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에 어긋납니다. 그러니 저 인간에게 그렇게 주시면 안 됩니다. 안돼요. 안 돼. 블라블라...”

고로 하나님께 많이 받기를 원하시면 많이 심어야 하고, 많이 저축을 해놔야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이여, 젊었을 때에 열심히 심고, 젊었을 때에 열심히 공력을 쌓아놓으십시오. 그래야 중년과 노년에 쪼들리지 않고 찾아먹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 말씀입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12:1)

즉 나이가 먹어서 체력이 달리고, 지력도 달리고, 영력도 달릴 때가 되서 후회하지 말고 젊었을 때에 미리부터 하나님께 충성하며 헌신하라는 겁니다. 그래야 나중에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되어서 그 저축한 것을 찾아 먹을 수 있다는 겁니다. 아- 이거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저축도 하지 않고, 공력도 쌓아놓지 않고 “나중에 잘 되겠지!” 하는 사람은 빨리 그 헛된 꿈을 깨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먹고 늙으신 분은 어떡합니까? 아- 이런 분은 자기의 자손들을 위해 죽기 전까지 공력을 쌓아놔야 합니다. 그래야 본인이 죽은 후 그 자손들이 부모가 저축한 것을 찾아먹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 말씀입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37:25-26)

성경에 보면 예수님 당시에 로마의 백부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가버나움 동네에 들어가셨는데 한 백부장이 자기의 사랑하는 종이 중풍병이 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 장로 몇을 보내어 자기의 종을 치료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몇몇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예수님, 이 백부장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해 회당을 지었나이다. 그러니 이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합당합니다.”(눅7:4-5) 보십시오. 이 백부장은 평상시에 공력을 많이 쌓아놓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장로들도 예수님께 이 사람의 부탁을 들어달라고 대신하여 간절히 부탁할 수 있었고, 예수님도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셨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또 다른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의 집안의 모든 식구들이 성령을 받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이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행10:2-5)

보십시오. 고넬료는 미리부터 기도와 구제의 공력을 많이 쌓아놓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쌓아놓은 공력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이 베드로를 그에게 보내어 그들로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의 모든 식구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다비다’라는 여집사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9:36) 그런데 그녀가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그 시체를 다락에 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 소식을 듣고 그녀의 집에 급히 심방을 갔습니다. 그러자 모든 과부들이 베드로 곁에서 울며 다비다가 자신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어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줍니다.

즉 이렇게 많은 구제를 한 다비다가 죽었으니 너무나 안타깝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겁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다락에 올라가 그녀의 시체를 향하여 말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보십시오. 평상시에 심히 많은 구제의 공력을 쌓아놓으니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예수님의 복음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즉 고린도에 교회를 처음 설립했습니다. 후에 그 교회에 사람들이 들어와서 각각 헌신하고 봉사하며 나름대로 공력을 쌓아놓았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그 쌓아 놓은 공력을 따라서 각각 상과 복을 주려고 하는데 불로서 그 공력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평가한다는 겁니다.

즉 가짜 공력은 불타서 없어질 것이고, 진짜 공력은 불타지 않고 남게 됩니다. 다시 말해 봉사를 하고 공력을 쌓아놓아도 시기와 다툼으로 하고, 위선과 명예욕으로 쌓아놓은 공력은 다 꽝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들도 예수님을 믿었으니 구원은 받지만 간신히 구원 받은 모습이지 그리 큰 상급은 없다는 겁니다. 즉 공력을 쌓아도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공력을 쌓아야 한다는 겁니다.

보물의 경우, 즉 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 각자는 여기 캐나다에서 은행구좌가 있을 겁니다. 요즘은 여러분의 그 구좌에 밸런스가 어떻게 됩니까? 제법 있습니까? 아니면 아- 그거 생각하기도 싫습니까? 암튼 여러분이 은행에 돈을 찾으려고 하면 일단 구좌에 돈이 들어가 있어야 내줍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는 Home Equity of Line of Credit이 있습니다. 즉 돈이 없어도 그 동안 쌓아놓은 신용도 있고, 집을 담보로 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확실한 공력이 있기 때문에 은행에서 돈을 내주는 겁니다. 영적 법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고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권면합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20)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그런데 이건 있습니다. 부모가 생전에 모아두고 저축한 것을 나중에 부모가 죽고 나서 그 자녀가 유산으로 물려받습니다. 즉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공력을 많이 쌓아놓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그 유산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그 공력을 인정하여 우리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그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고로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쌓아놓은 그 공력을 우리에게 대신 주신다는 겁니다. 아- 이거 참 고마운 일입니다.

좀 더 가슴 벅차고 현실감 있게 설명해볼까요. 때로는 이 외국 땅에서 우리들의 인생이 너무나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솔직히 말해서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서 설움도 받고, 돈이 없어서 슬프고 괴롭고,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제 내 인생은 이렇게 힘들게 살면서 끝나는가 싶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이런 소식이 나에게 전달이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큰 유산을 남겨준다는 겁니다.

얼마일까요? 캐나다 달러로 3,000만 불입니다. 한국 돈으로 하면 300억 원입니다. 우와- 대박! 이게 꿈이냐 생시냐?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대박을 찾아 먹을 수 있는 저축을 미리 해놨다는 겁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런 대박의 축복을 찾아 먹을 수 있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다름 아닌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이 자녀가 되어야만 합니다.

 

결론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고로 예수님이 우리들을 위해 공들여 쌓아놓은 그 좋은 것들을 그분의 이름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고로 오늘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찾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사랑하는 자녀들인 우리들에게 그 좋은 것, 이미 쌓아놓은 것을 아낌없이 주시기를 기뻐하시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각자가 이런 은혜를 풍성히 받고 누리기도 하시면서, 또한 여러분도 후손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공력을 계속 쌓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더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반드시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혜로운 건축자

고전 3:10-15 / 배 혁목사

매년 캐나다 산불로 인해서 미국까지 그 연기로 인해서 고생을 합니다. 이러한 산불들은 나무뿐만 아니라 그 산에 있는 집들을 불태웁니다. 특별히 정기적으로 산불이 나는 LA 에서 보면, 산불로 인해 아주 호화스러운 집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 참 안타깝습니다. 그 주인이 그 집들을 짓거나 구입하기 위해서, 그리고 가꾸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애를 썼겠습니까? 그런데 불로 인해 삽시간에 태워지고 사라집니다. 불을 피하게 하려고 물을 뿌리고 방비를 하지만, 일단 불이 붙게 되면 삽시간에 타버리게 됩니다. 그 동안의 그 집을 지었을 때의 수고도 날라가고, 그곳에서의 삶의 추억들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 주인은 얼마나 마음이 아플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마 집에 불이 나보신 분들은 그 마음을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떻겠습니까? 교회도 불을 대비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습니까? 우리교회도 많은 분들의 수고로 교회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보면, 하나님께서 불시험을 성도와 교회에 보내신답니다. 그 이유는 성도와 교회들에게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지를 시험하시기 위함입니다. 불을 지남으로 그 공적이 남아 있을지, 아닐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는 열심들, 공적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다 합당한 것들은 아닌 것입니다. 불을 지나도 타지 않는 것이 있고, 어떤 공적들은 다 타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불시험의 의미는 무엇이고, 우리는 이 불시험을 통과할 집을 잘 짓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기를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자신이 닦은 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건축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 터, 기초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에서, 모래 위에 기초를 닦고 집을 세운 신앙인이 있고, 반석을 기초로해서 집을 세운 신앙인이 있음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주초를 두고 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모래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아 보여도, 비비람과 창수가 나면, 반석위에 있는 집은 그대로지만, 모래위의 집은 기초가 무너지고 집이 무너져 내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터를 닦아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을 정도로 가장 좋은 터를 닦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고린도교인들에게 잘 증거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경험하고, 또한 하늘나라를 다녀온 영적인 체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잘 전했겠습니까? 바울은 그가 터를 닦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그 터를 닦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고 이제 그 은혜로 그 터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터로 해서 세워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교회를 세웠다고 그 공적을 자랑치 못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터를 닦아 놓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있습니다.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터가 됨을 알렸습니다. 그렇게 터를 닦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터위에 집을 지어야 하는데, 각자가 그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세울지 조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집을 세우는 재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재료로 만들어지는 지에 대해서 조심하고 관심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집을 지을 때에 재료가 중요합니다. 그 재료에 따라 튼튼한 집이 되고 가치있는 집이 됩니다. 그런데 재료가 부실하면 쉽게 무너지고, 가치 없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집의 재료에 관심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앞으로 불시험을 준비해야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건물을 지을 때에 화재가 났을 때를 염두해서 집을 짓기도 합니다. 소방법에 맞게끔 재료를 써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화재를 예방하거나 불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한 법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집을 짓지만 불이 날 것을 기대하고 이를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재료를 구입하지 않습니다. 집 건물도 그렇고, 그안에 내장이나 가구들도 그렇습니다. 그냥 보기 좋고, 꾸미기 좋은 것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만약 앞으로 불이 날 것을 생각한다면 조심할 것입니다. 불에 타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것들을 쓸 것입니다.

믿음의 집이 세워질 때는 불의 시험이 날 것을 꼭 염두해 놓아야 합니다. 바울은 여섯가지 재료를 샘플로 말합니다.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재료로 집을 짓고 싶으십니까? 당연히 앞에 것 아니겠습니까? 불이 나더라도 그 불을 통과할 수 있는 재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재료들은 사람의 공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적, 헬라어로‘에르곤’으로 ‘일, 행위, 업적’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집을 세우기 위해 힘쓴 업적들, 수고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 믿음을 가지고 행하는 열심과 수고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공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수고들로 지었는데, 그것이 어떠한 재료인가라는 것입니다.

각자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는 여러가지 수고가 있습니다. 모두들 열심으로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바른 교회와 믿음을 세우는 수고였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불시험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13절에, 그날이 공적을 밝힌다고 했습니다. 그날에 밝히 드러나게 되는데, 그 날은 종말적인 심판의 때입니다. 그때에 교회를 세운 공적이 제대로 된 것인지를 알아보시기위헤 불을 지나 사람들의 공적이 바른 수고였는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최후의 불심판 전에도, 이 세상에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불과 같은 시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른 믿음의 집을 짓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불시험은 피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내 믿음을, 내가 수고한 것이 허무한 것이 아닌지를 점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잘못 지어졌으면 이것을 바른 재료로 불을 지나는 것으로 다시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고함, 공적이 지금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공적, 열심이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공적은 불시험 때에 타지 않고 통과하는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에게는 상급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시험때에 다 타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공적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때에 해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아무런 상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타지 않는 재료로 잘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지을 때에 터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 우리 각자의 집 주인은 누구십니까? 믿음의 터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터만 빌려주시고, 집은 각자 마음대로 올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어야 되는 집은 내 집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원하시는 집을 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집을 짓기 위해, 성도가 교회가 열심히 수고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공적이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불시험가운데 타버리는 공적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시험을 주실 때에 타지 않는 공적은, 시험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더 나타날 때입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시험이 올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교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각자가 우리교회를 세워가시는 수고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얼마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는 사역을 하고 계십니까?

말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대로 말하고 행동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가지 시험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갑니다. 교회에 어려운일이 닥칠 때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충성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터위에 주님을 위한 공적들은 그대로 남습니다.

그런데 어떤 공적들은 불시험에 그대로 타버리기도 합니다. 그 열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 공적은 불타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그 공적인 자기 자신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면 그 공적이 불시험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이 뜻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교회를 위해서 열심을 내었다면 그것이 불을 통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라, 나의 성공과 업적을 위해서, 만족을 위해서 수고했다면 그것은 불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불시험을 말하며 그리스도의 터위에 세운 것을 조심하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지 않는 교회, 성도는 불시험에서 그 공적 다 타버립니다. 열심히 수고했지만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에게 그러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분열이 있었습니다. 교회안에 파당이 만들어졌는데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성도가 나누어져서 분쟁합니다. 그런데 그 수고가 불시험을 통과하겠습니까? 그러한 열심들은 불시험에서 다 타버리고 남지 않습니다. 그 열심히 도리어 교회에 해가 되고, 헛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 세상적인 명예와 재물에 기초해서 세워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일 아니라, 금전적인 것, 부자가 되고, 내가 유익되고 성공하는 등의 일들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러한 것들은 다 허무하게 불타버립니다.

마태복음 6:20-21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의 보물은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을 두고 행하는 일들은 보물이 됩니다. 그것은 타지 않고 상급을 받는 영원한 공적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예수님보다 사람들, 그리고 재물, 명예, 다른 것들에 있다고 하면 그것은 허무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불시험이 올 수도록 더욱 그분은 분명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불시험이 올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더 드러나는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용서, 하나되게 함, 헌신등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시험가운데 다툼과 분쟁, 분열, 미움의 마음으로 열심을 내는 이들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시험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성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만 남아야 합니다. 사람과 재물, 내 욕심은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아야 합니다.

 

4. 그런데 불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먼저 받아야 할 불이 있습니다. 성령의 불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죄의 불순물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회개가 없는 삶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성령의 운행가운데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발견되고, 회개할 때에 우리는 정결하고 온전해 집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터위에 주님이 원하시는 집을 짓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교회는 지금 무슨 재료로 교회가 세워지고 있습니까? 많은 분들이 수고하며 공적을 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시험을 당할 때에 그것은 온전할까요? 아니면 다 타버릴까요?

우리 교회도 다른 교회도, 여러 시험을 당합니다. 특별히 지난 이년동안 코비드라는 불시험을 당했습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드리지 못할 때에도, 예수님을 마음에 두고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하셨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은 사라지도, 나의 편함과 잡다한 생각이 마음에 가득하셨습니까?

이번에 교회가 교단에서 분리되면서 또 하나의 불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교회에서는 어떠한 모습이었습니까?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났습니까? 아니면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모습만이 드러났습니까?

앞으로는 어떻겠습니까? 우리 교회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에, 교회는 더욱 하나가 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 용서 등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 교회에 시험이 있어도, 그 불시험을 통해서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워진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최후의 불의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의 우리의 공적이 어떤 것인지 나타납니다. 우리교회가 지금까지 세워지는데 많은 분들이 수고를 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금과은, 보석과 같은 재료로 태워지지 않는 재료로 만드는 공적을 행한 분도 계시고, 어떤 분은 반대로 나무, 풀, 짚과 같이 태워지는 허무한 헛된 공적을 한 분도 있으십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15절에 보게 되면, 비록 블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불에 다 타버리는 아무 공적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공적은 없지만 구원을 받는데, 왜냐하면 그 터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공적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터로 해서 그 위에 있음으로 해서, 그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시험을 이기는 공적, 그래서 하나님께서 상을 기쁨으로 상을 주실 만한 교회를 세우는데 수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수고할 때에 상급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터위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공적을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날에 불시험을 내리실 때에, 화르륵 타버리는 공적이 있으니라, 불가운데서도 거뜬히 능히 통과하며 주님께 칭찬과 상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지혜로운 건축자

고전 3:10-15 / 이동주목사

서론: 바울 사도는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에 비유하셨습니다. 집이나 빌딩이나 인공구조물을 건설하는 사람을 건축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신 건축자는 집이나 빌딩을 세우는 건축자가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신앙의 건축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에는 “지혜로운 건축자”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지혜로운 건축자는 자신의 재능을 100퍼센트(%) 다 활용합니다.

 

바울 사도는 10절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로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이냐?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 받은 재능, 달란트(talent)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각기 다른 재능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노래하는 재능을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운동의 재능을 주셨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사업을 하는 재능을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음식을 만드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과학자와 철학자의 재능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재능을 카리스마(Χαρισα)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노력해서 따라갈 수 없는 특별한 재능,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천부적인 재능을 카리스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고 사용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썩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잘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어떤 일이든지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노력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할 수 없고 자신의 재능을 활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을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일을 하고 경험을 쌓아야 하고 만고불변의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절대로 지혜로운 건축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지혜로운 건축자의 문자적인 뜻은 숙달된 건축자와 능숙한 건축자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 건축한 건물들을 보면 같은 건축비가 들어가도 건물의 값어치는 천차만별입니다. 공사비는 같이 들어갔는데 건축물의 가치에서 왜 차이가 나느냐? 건축자의 능력에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있는 건축자는 아름답고 튼튼한 건물을 세우지만 실력이 없는 건축자는 불량건축물을 양산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신앙의 건축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숙달되고 능숙한 건축자가 되어야 하며, 일에 미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근대 철학의 시조이며 합리론의 개척자인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가 한 말입니다. 이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도 젊었을 때는 자기의 철학적 재능을 의심한 적이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그의 자서전에서 자기는 철학자의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고 수학자와 철학자의 길을 놓고 어떤 길로 가야할지 고민하고 망설였다고 고백했습니다. 데카르트가 철학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가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데카르트에게 철학자의 재능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내가 하나님께 받은 재능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방법이 무엇이냐?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재미있고 다른 사람보다 일을 잘하면 그 일이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입니다.

인생에서 매사에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안 된다’ ‘나는 못 한다’ ‘그 일은 불가능하다’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고 도전하는 사람이 성공하고 승리합니다(빌립보서 4:13).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주어진 기회에 도전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자신의 재능을 100% 활용하는 사람이며 숙달된 건축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숙달되고 능숙한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지혜로운 건축자는 진리의 터 위에 건축합니다.

 

바울 사도는 11절에서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터 위에 건축하라는 말씀입니다. 집을 짓거나 건축을 할 때 모래 위나 물이 질퍽한 시궁창에 공사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드시 터를 닦고 기초공사를 한 다음에 집을 짓고 건축을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닦아 둔 터 위에 건축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이 닦아 둔 터’가 무엇이냐? 신앙과 진리의 터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 위에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와 이단을 나누고 분류하는 기준과 근거가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으면 이단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 외에 구원의 조건으로 율법이나 행위나 안식일 준수와 같은 것을 강조하면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바울 사도가 신앙과 진리의 터로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한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은사나 신비한 체험 같은 것을 강조하고 거기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언이나 예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는 신앙에 유익을 주고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셨습니다. 은사를 위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보다 은사나 체험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주신 생명의 주님이시고,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며,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지체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강단에서는 성경 말씀보다 철학이나, 과학이나, 고고학이 더 권위 있게 선포됩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인 성경 말씀을 철학이나 과학이나 고고학의 권위에 호소하여 변증(辨證)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천박한 인간들입니다. 오늘날 자유주의자들과 일부 진보주의자들과 카톨릭 교회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오늘날 카톨릭 교회에서 성경은 권위를 잃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교황청의 결정이 성경말씀보다 권위가 있습니다. 성경과 예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교회는 잘못된 교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건축자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24-27,에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인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성공하지만 예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 실패한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현실이지만 오늘날도 철근이 들어가지 않은 아파트와 철근이 들어가지 않은 건축물로 온 국민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습니까? 철근을 도둑질 해먹은 건설사 사장들과 거기에 관계된 인간들은 다 지옥에나 떨어질 인간들입니다. 그 건축업자라는 인간들 부끄러운 줄이나 알까요? 왜 부실공사가 됩니까? 공사를 법과 규정대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공사에는 법과 규정이 있습니다. 콩크리트 공사를 할 때는 몇미리(mm) 굵기의 철근을 어느 정도의 길이로 절단해서 얼마 간격으로 박아야 하며, 콘크리트의 강도와 두께는 어느 정도 돼야 한다고 건축법에 다 나와 있습니다. 법과 규정대로 하면 절대로 부실공사가 될 수 없습니다. 공사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규정대로 시공을 하지 않고, 자재를 도둑질하고 빼먹기 때문에 부실공사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면 안 되고 예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순종하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예수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과 인생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진리의 터가 되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 말씀대로 행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지혜로운 건축자는 좋은 재료를 사용합니다.

 

12절에는 건축에 사용된 여섯 가지의 재료가 등장합니다. 금과 은과 보석과 나무와 풀과 짚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과 같은 재료는 하나님 성전이나 신전이나 왕궁의 건축에 사용했고 나무와 풀과 짚은 가난한 사람의 집을 지을 때 사용했습니다. 나무는 목재로 사용했고 풀은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데 사용했으며 짚은 지붕을 덮는 데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섬기고 하나님 일을 할 때 어떤 재료를 사용해야 하겠습니까? 불에 타지 않는 좋은 재료를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불로 우리의 공적을 시험하실 때 나무나 풀이나 짚과 같은 재료는 불에 타서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좋은 재료와 나쁜 재료는 진리와 비 진리를 상징합니다. 금 은 보석은 불의 시험에도 타지 않고 변하지 않는 진리를 상징하며 나무와 짚과 풀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비진리를 상징합니다. 그릇된 진리와 거짓 교훈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혜로운 건축자는 질적으로도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양적으로도 풍성하게 드려야 합니다. 돈이 많은 부자로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과 가난한 형편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이 죽어서 두 사람이 다 하늘나라에 들어갔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천사가 구원받은 성도들이 살아갈 집을 지정해 주었는데 대궐처럼 크고 화려한 집도 있고 작고 초라한 집들도 있었습니다. 천사는 가난한 사람에게 대궐처럼 아름답고 훌륭한 집을 지정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천사는 부자를 데리고 작고 초라한 집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이것이 너의 집”이라며 작고 초라한 집을 지정해 주었습니다. 부자의 집은 조금 전에 가난한 사람이 받았던 집에 비해 너무 작고 초라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천사에게 “아까 그 사람은 좋은 집을 주고 왜 나에게는 이런 집을 주느냐?”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부자에게 “하늘나라에서 사는 집은 인간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헌금하고 봉사하고 하나님을 섬긴 데 따라 받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형편에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저렇게 큰집을 건축할 만큼 많은 것을 드렸지만 네가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는 이런 오두막밖에 지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천국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한 사람과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이 천국에서 똑같은 영광을 누린다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구원과 상급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천국의 상급과 영광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고 하나님께 드린 것만큼 받습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 15절에서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불이 난 위급한 상황에서는 알몸으로라도 뛰어나가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불 가운데서 알몸으로 뛰어나와 구원을 받으면 부끄러운 구원이 됩니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 천국에 간 부자는 불 가운데서 구원받은 사람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구원의 심판은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급의 심판은 받습니다. 참된 승리자는 부끄럽지 않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뵐 수 있는 사람이며 최후의 승리자는 하나님 앞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좋은 재료를 사용해서 하나님 나라를 건축하고 귀한 것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 지혜로운 건축자는 자기 재능을 100퍼센트 다 활용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100퍼센트 활용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지혜로운 건축자는 진리의 터 위에 건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진리의 터는 예수님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진리의 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위에 건축하고 만고불변의 진리인 예수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지혜로운 건축자는 좋은 재료를 사용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귀하고 좋은 재료로 하나님을 섬기시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의 터, 예수 그리스도.

고전 3:10-15 / 김동호목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저는 기쁨이라는 단어가 참 좋습니다. 그래서 아들 삼형제의 이름에 기쁠 '열'자는 넣어 이름을 지었습니다. 부열, 지열, 정열. 부열은 아비의 기쁨이라는 뜻이고, 지열은 기쁨을 앎 이라는 뜻이고, 정열은 바른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삶의 목적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위하여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을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것을 터 삼아 그 위에 행복한 삶을 건축합니다.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위하여 마련하려고 애쓰는 행복한 삶의 터는 건강과 장수, 경제적 안정과 그것을 넘어선 여유와 명예, 그리고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사랑과 평화) 같은 것들입니다.

건강과 장수, 경제적 여유와 명예 그리고 사랑과 평화는 정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는 그와 같은 터를 구축하고 실제로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법 있습니다.

저도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복을 받았습니다. 제가 요즘 누리고 있는 행복을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와 같은 것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젠 저도 슬슬 노인성 질환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안과에 가서 검진을 받으며 시력검사를 했는데 오른 쪽이 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의사에 말에 의하면 제 오른 쪽 눈에 백내장이 시작되었답니다. 요즘 백내장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습니다.

요즘 부지런히 치괴를 다니고 있습니다. 이가 하나 둘씩 고장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이 하나가 완전히 빠져서 지금 인플란트를 하기 위하여 치료 중에 있습니다. 안 쪽 이가 빠져서 잘 보이지 않지만 음식을 먹을 때 음식이 그 빠진 이 사이로 왔다갔다 하는 느낌이 참 신기합니다.

인플란트 치료 중인데 며칠 전 또 어금니 하나 끝이 부스러졌습니다. 이놈 고쳐 놓으면 저놈이 사고치고, 저놈 고쳐 놓으면 또 다른 놈이 사고를 칩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치과 열심히 다니게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오랜 당뇨 환자입니다. 올해로 26년이 넘었습니다. 제법 잘 관리한 편이지만 당뇨를 완벽하게 관리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끔 텔레비젼을 보면 당뇨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당뇨의 합병증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당뇨는 혈관질환이고 합병증이 무섭습니다. 발끝과 같은 곳에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못해 발이 괴사하여 잘라내는 경우도 있고, 신장에 문제가 되어 혈액투석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혈액투석과 같은 경우는 저처럼 오래 동안 당뇨를 앓는 사람은 피하기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신경을 쓰고 두려워 하는 것은 실명입니다. 실명 자체가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가 무엇보다도 실명을 두려워하는 것은 제가 제일 좋아하고 즐기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컴퓨터 자판에 앉아서 글을 쓰는 것입니다. 제 요즘 제일 큰 낙 중에 하나는 페이스 북에 글을 써서 올리는 것입니다. 팔로워가 9만 명 가까이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수 만 명의 팔로워들과 글과 소통한다는 것은 보통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실명을 하면 그 큰 기쁨과 즐거움을 잃게 될 겁니다.

지금 까지는 그래도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기 때문에 건강이 주는 최대한의 즐거움과 행복을 만끽하며 살았는데 그 건강은 반석이 아니라 모래입니다. 그러므로 제게 행복을 주는 건강이라고 하는 터는 끝까지 제 삶의 행복을 담보해 주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압니다.

경제적인 여유와 안정이 주는 행복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어려서 제법 가난했었습니다. 가난이 주는 불편함에 대해서는 저도 그것을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저는 그때 제법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경제적인 여유 없음에 대하여 그리 크게 두려워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은퇴 하면 총회 연금과 국민연금을 받게 될 겁니다. 현재까지로서는 그 두 연금만 있다면 경제적으로 큰 문제 없이 안정적으로 지금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여유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마 그 연금들 그렇게 안정적이지는 못할 겁니다. 어떤 사고가 나고 어떤 변수가 일어날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재 제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경제적인 안정과 여유도 반석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고, 흔들릴 수 있는 모래와 같은 것입니다.

올해로 결혼 37주년이 넘었습니다. 27살에 결혼을 하여 37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건방진 이야기일는지 모르겠으나 저희 부부 제법 성공적으로 잘 살았습니다. 부부사이가 좋다는 말씀입니다. 부부사이가 좋으니 자녀들과의 사이도 무척이나 좋습니다.

부부사이가 나빠서 또는 자식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행복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 많은데 저는 가정의 복을 받았습니다. 아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지금 상태로 보아서는 부부와 자식과의 관계와 사이가 나빠져서 불행해 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부사이가 좋기 때문에 제가 은근히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내가 저보다 먼저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아마 거의 아내보다 제가 먼저 하나님 앞에 갈 겁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 순서가 바뀔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는 자주 그런 상상을 합니다. 그때도 나는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자신이 썩 없습니다. 잘 극복할 겁니다만 꽤 우울하고 쓸쓸할 것 같습니다.

이 역시 반석이 아니라 언젠가는 무너질 수 있는 모래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위하여 터로 삼는 것들을 누구 못지 않게 잘 준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지금 그것들이 주는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에게 그와 같은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현재 지금이 제게는 정점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서서히 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나빠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겁니다. 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때도 나는 행복할 수 있는가?'입니다.

답은 '그때도 나는 행복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건축자에 비유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건축자에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자신의 집을 반석위에 짓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조금 다른 식으로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불이 났을 때 타서 없어질 것으로 집을 짓는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은 불이 나도 타서 없어지지 않을 것으로 자신의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위하여 마련하는 대부분의 것들, 그리고 제가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한 삶의 대부분은 안타깝지만 불이 나면 타서 없어질 힘 없는 것들입니다.

어느 인생에나 바람은 있습니다. 비 바람은 있습니다. 홍수는 있습니다. 어느 인생에나 불같은 시련이 있습니다. 그것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런 일 없이 살기에 인생은 너무나 길고, 세상은 너무나 험합니다.

그런 일이 없는 세상을 꿈꾸고 바라기 보다는 그런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을 터 위에 인생을 건축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비 바람이 불어도, 불이 나서 모든 것을 태워도 무너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을 것 위에 자신의 인생을 건축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그 답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리 인생에 비바람이 불어도, 불이 나서 모든 것을 태울 때에도 흔들리지 않고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우리 삶의 터입니다.

나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내가 예상치 못한 일로 내가 누리고 있는 경젝적인 안정과 여유가 무너진다고 하여도 나는 예수님 때문에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잘 관리를 한다고 하여도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건강의 뒤 끝에 보지 못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고 하여도, 자판을 두드리고 글을 쓰지 못한다고 하여도, 좋아하는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여도 나는 예수님 때문에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환하게 밝게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저는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에 하나 아내가 나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가 아내 없는 집에서 산다고 하여도 나는 예수님 때문에 그 외로움과 우울함을 극복하고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저는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에서 시작되지만 생각만으로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훈련과 연습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때가서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아직 모래와 같은 것들이 다 무너지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것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감사하면서도, 예수님 때문에 누리고 느끼는 기쁨과 행복을 연습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행복을 키워야만 합니다. 그 기쁨이 이 기쁨을 이기고 넘어설 수 있기를 연습해야만 합니다.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말씀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나름 깊이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 말씀을 읽고 깨닫는 것이 너무 좋아 '날마다 기막힌 새벽'이라는 표현을 했었고 그 제목으로 책도 한 권 썼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깨닫고 은혜받는 연습과 훈련을 좀 더 늘려가야겠습니다.

찬송하는 기뻐하며 즐기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 기숙사에서 밤새 찬양을 하며 은혜를 체험했던 때가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늘 성가대를 했었습니다. 찬양하는 것이 좋아서 청량리 중앙교회에서는 부목사를 하면서도 목사님께 부탁을 드려 주일 성가대를 했었습니다.

요즘은 너무 바빠서 찬송의 은혜를 누리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잃고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내야 하는 때가 온다면 저는 하루 종일 찬양을 듣고 따라 부르며 예전처럼 감동하며 행복해 하겠습니다.

기도의 시간을 늘려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 기도보다 일을 더 많이 해야하는 때입니다. 일이 주는 기쁨과 행복과 보람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점점 일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참 허전할 것 같습니다.

일이 줄어드는 만큼 기도의 시간을 늘려가면 될 것 같습니다. 가족들과 특히 자녀들과 어린 손주들을 위해 하나 하나 이름을 불러가며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니 그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했던 일들과 그 일을 맡아서 수고하는 여러 후배들과 사람들을 위하여 사역과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다보면 주셔서 받는 은혜와 축복 감당 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아마 이 찬송을 많이 부르게 될 것 같습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아멘.

나는 돈이 좋습니다.

나는 걸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건강이 좋습니다.

나는 아내가 좋습니다. 자식들이 좋습니다. 사람들이 좋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 없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잘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하면 부한대로 비천하면 비천한대로 자족하며 잘 살 수 있다고 고백한 사도바울의 고백을 믿습니다.

나도 바울처럼 내 삶의 터를 하나님으로 굳게 정하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함께 그 복을 누리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가자

고전 3:10-17 / 성홍모목사

오늘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가자’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은 가슴 부듯한 소식도 있었고, 가슴이 찢어지는 사건 사고도 있었습니다.

지난 17일 저녁, 경주 마우나 오션 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고로 부산외대 학생들이 9명과 이벤트 업체 관계자 1명이 죽었고, 100여 명의 많은 부상자들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한 주간 동계올림픽 소식으로 부산외대 학생들의 비통한 죽음이 묻혀버리고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큰 체육관 지붕이 단 13초 만에 무너져 내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막힌 노릇입니다. 오늘과 같은 첨단 과학시대에 그런 부실한 건물을 건축했다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은 소유자인 코오롱 그룹과 시설관리자가 전적인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눈이 많이 온 것이 사고의 원인이라면 눈을 치우든가 아니면 위험하다면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체육관을 지을 때, 1제곱미터 당 300Kg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 하는데, 1제곱미터 당 150Kg도 견디지 못하는 건물을 지었습니다.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 샌드위치 판넬- 조립식 건물이었다니 모양을 보니 허술하였습니다. 언젠가는 붕괴될 건물을 지어놓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건축규정에는 2제곱미터 당 50Kg의 하중만 견딜 수 있으면 된다고 하니, 법적인 규정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눈이 그렇게 많이 올 줄 몰랐다고 하는 것은 정말 변명 아닌 변명으로 들립니다. 큰 태풍이 불고, 엄청난 비가 온다면 또 어떻게 합니까? 이번 사건을 거울삼아 정말 튼튼한 건물을 지어야 하고, 관리도 잘 하고, 안전에 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당신을 “지혜로운 건축자”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10절 말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란 말은 ‘숙련된 건축가’, ‘많은 일꾼을 감독하는 노련한 건축가’를 말합니다. ‘수석기술자’, 우리말에 ‘도목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건축을 비유로 하여 교회의 사역자들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전3:9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 ‘우리는’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바울과 바울 다음에 와서 교회를 성장시킨 아볼로와 같은 사역자들을 말합니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의 밭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는 사람들, 하나님과 동사 동역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이요, 사람이 불러서 세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하나님의 밭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역자들은 말씀의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 자라게 하였습니다.

고전3:6-8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하나님의 밭인 교회와 성도들에게 바울은 말씀의 씨를 뿌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교회와 성도들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집이라고 하셨는데, 교회를 밭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제 교회와 성도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비유하고 건축하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는데, 너희는 교회요, 곧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다 인격이라는 집, 영적 성숙이라는 집을 지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주인으로 사시는 집, 하나님이 거하시고 임재하시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사람들만 모이는 집단이 되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고, 우리 주님이 주인이 되시고, 성령이 임재하시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12살 되었을 때에, 부모님을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에 왔다가 돌아갈 때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남아계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3일 동안 찾아 헤매다가 성전 마당에 와서야 율법학자들과 말씀을 나누는 아들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어머니가 나무라는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2:48)고 하였습니다. 그 때 우리 주님이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귀한 생각입니까? 우리는 내가 사는 집보다 하나님의 교회가 더 아름답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집은 하나님의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집이라고 하면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형제의 사랑이 있고, 안식과 휴식이 있고, 평화가 넘치는 한 가정을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정이나, 회당이나 한 민족 공동체를 한 가족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내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만 가정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히브리 민족은 민족 공동체를 큰 가족으로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을 한 집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에는 성(姓)이 없고, 이름만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성이 있습니다. 저는 성이 성(成)씨인데, 김, 이, 박, 최, 정, 강, 조, 윤, 장, 임씨가 1-10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성(成)씨는 인구수로 37위에 해당합니다. 우리나라는 편 가르기를 잘하는 민족입니다. 양반, 평민, 상민이다, 천민으로, 구분이 많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성이 없고, 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래서 이름만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좋은 조상도 아닌데, 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모님 잘못 만나서 상놈의 성을 가진 사람은 성을 바꾸지 못하니, 이런 불공평한 사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넓은 의미에서 한 가족이라는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 잘하는 아이가 한 동리에서 나오면 그를 온 동리 사람들이 돈을 주어서 좋은 대학에 보내고 훌륭한 학자로 키웁니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기의 인격이라는 집을 지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건축자, 도목수는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요즈음 전원주택을 짓는데, 정말 쓸모 있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삽니다. 천년만년 살고 싶은 집입니다.

바울은 터를 닦았습니다. 10절을 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건축할 때는 먼저 터를 잘 닦아야 합니다. 기초공사를 잘 해야 합니다. 교회의 기초는 오로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1년 반을 머물면서 기초를 다지는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교회는 건물과 같습니다.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터입니다. 기초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11절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이 교회의 터요, 주님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터전입니다. 교회의 터는 사역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님만이 교회의 터전입니다.

갈1:8에 보면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터전이요, 인생의 터전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도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인생의 터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님으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은 영원히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사업을 합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주님을 위하여, 주님을 사랑하면서 공부합니다. 주님을 터전으로 하여 예술을 발전시키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건강도 유지해야 합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제부터 기초공사에 대한 말씀을 마치고 상부 구조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건물을 짓는 자재를 두 종류 씩, 세 가지를 말하면서 도합 6가지의 자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6가지 자제가 나오지만 크게 나누면 두 가지입니다. 불에 견딜 수 있는 것과 불에 견디지 못하는 것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은 자재는 불에 잘 견딥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은 불에 취약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7:24에서 건축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마7:24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말씀은 주님에게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듣고 행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배우고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의 말씀을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것은 주님에게 자기의 운명을 내맡긴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았으면 행동으로 옮겨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뜻을 아시고 우리에게 그 말씀대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말은 주님에게 우리의 운명을 내어맡기고 모든 책임은 말씀해주신 주님에게 있다는 확신이 영성입니다. 반석위에 집을 짓습니다.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꺼내어 우리의 삶의 좌우명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요한일서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터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나만의 인격이라는 집을 짓습니다. 일생에 걸쳐 집을 짓고 있습니다. 돌로 짓느냐, 나무로 짓느냐, 쉽게 풀이나 짚으로 짓느냐, 건축할 때에 풀이나 짚으로 건축하는 이들은 없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건축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은 것을 봅니다. 더운 지방에는 집들이 튼튼하지 못하고,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건축합니다. 더운 지방에서는 난방을 고려하지 않고 건축하니, 벽이 두껍지 못하고 빈약합니다. 심지어는 원두막 같은 정도로 집을 짓는 나라도 많습니다. 비만 피하고 바람만 막아주면 되는 그런 집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 바람, 추위, 눈과 태풍에도 견딜 수 있는 집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 예배당을 지을 때에 성수대교가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에 성실로 집을 지어야 한다고 모두다 주장하였습니다. 우리 장로님들이 작대기를 가지고 나와서 콘크리트를 칠 때에 시멘트가 잘 들어가라고 작대기를 넣고 잘 들어가라고, 쑤시면서 얼마나 정성을 다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예배당은 금이 가는 곳이 없고, 지금까지 별 하자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옛날 붉은 벽돌 예배당을 허무는데, 세상 포크레인이 한번 벽을 툭 치니, 전체 건물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불에 타지 않는 자재를 써서 집을 지어야 합니다.

 

13-15절에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날이 공력을 밝힌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은 그리스도의 날, 심판의 날입니다. 무엇으로 집을 지었는지, 쓸 만한 자재를 사용하였는지,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면 쓸려나갈 집인지, 귀한 자재를 쓰고, 정성을 다하여 잘 지었는지, 평가하는 날이 다가옵니다. 터가 중요합니다. 그 터 위에 무엇을 가지고 집을 지었느냐 하는 것은 머지않아 주님 앞에 가서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공력이라고 하였는데, 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는 헌신하고 수고해야 합니다. 내가 수고해야 합니다. 부모가 목사요, 장로라고 하여도 신앙은 나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내가 헌신하고, 내가 바쳐야 하고, 내가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내가 시간을 내어야 하고, 내가 마음을 드려야 하고, 내가 헌금해야 합니다. 우리의 집을 평가하는 날에 불로 그 공력을 드러낸다고 하셨습니다.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구원받은 후에 아름다운 집을 짓는 사람들인데, 우리는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잘 하였다고 칭찬하시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하여 신앙생활 하여야 합니다. 옛날 열심히 믿었다고 하여 지금은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옛날에 다 해본 일이라고 지금은 손을 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는다는 말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연옥설까지 동원합니다. 부끄러운 구원은 사실 없습니다. 모두 다 자랑스러운 구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다가 주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경고와 경계의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14-15절 말씀이 보상과 손해의 모티브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심사상이 보상과 손해를 말하니, 해석에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 인간의 공로가 구원받는 일에 무슨 영향을 주고, 개인의 공로의 차이가 보상과 형벌을 가늠하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개인의 행위를 심판하시고 평가하신다고 합니다. 칭의는 단 한 순간이지만, 성화의 성숙은 일생 계속되어야 합니다.

고후5:10에 보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계20:12에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행위를 따라 심판에 이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있습니다. 이신칭의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루어가는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화라고 합니다. 이 성화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우리의 시간과 물질 건강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정성을 기울여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한 번 구원받은 것으로 구원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구원받은 감격이 있습니다. 한번 구원받으므로 영원히 구원받습니다. 이 구원, 영생의 은총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달려가야 하는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런 긴장관계, 구원받은 감격이 있으면서 주님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 위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나는 되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다 해본 일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빌3:12-14에“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감격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빌3:15-16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온전히 이룬 자들은 성숙한 제자들은 지금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지금 주저앉아 계신 분들이 있습니까? 일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져가야 합니다. 바울은 16-17절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 건물로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너희’라는 말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성령을 모시고, 우리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성전,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

성령에 인도함을 받아 살아갈 때에, 우리는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고, 성령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이 예배당이 벽돌 한 장, 한 장이 모이고 쌓여져서 아름다운 성전을 이룬 것처럼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한 성령을 모시고 큰 성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전입니다. 구별된 성전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성전이고 보니 분쟁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부도덕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더럽히면 멸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을 깨뜨리는 사람은 심판에 처해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징계하십니다. 따끔하게 책망하십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모시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님을 터전으로 알고 그 위에 신앙의 튼튼한 집을 지어야겠습니다. 불에 취약한 자재를 버리고, 정성을 드리고 최선을 다하여 금과 같이, 은과 같이 보석과 같은 자재를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가르고 고통을 주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 때문에 감격하여 아름다운 인격자로,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의 참된 터

고전 3:10-15 / 박덕기목사(송정중앙교회)

사도 바울은 고전 3:6-9절에서, 모든 전도자들을 농부로 비유하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사도 바울 자신은 씨를 심은 자로, 목회자는 싹이 튼 식물에 물을 주는 자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자라나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사실은 씨도, 물도, 그리고 전도자들이 헌신 봉사한 힘까지도, 모두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무엇도 자랑할 수 없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3:9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진정한 소유주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의 교계 현실을 보면, 가끔 신문 지상에 교회 매매 광고가 나오는 것을 볼 때,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한 사도 바울은, 이제 10-15절에서 사역자들을 건축자로 비유합니다. 10절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로 자처합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를 교회의 기초로, 바울 자신을 기초 공사자로, 다른 지도자들은 기초 위에 건물을 세우는 건축자로 묘사하였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면, 반드시 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터를 잘 잡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풍수지리설이 밝은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외국의 선교사들보다 훨씬 안목이 좁고 어두운 것 같습니다. 외국인들이 교회나 성당, 혹은 선교사 사택의 터를 잡아 놓은 걸 보면, 감탄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시야가 단견이라면 그들의 시야는 확실히 멀리 내어다 보는 안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터, 좋은 장소는 교회 부흥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목사의 메시지만 좋으면 교회가 다 부흥되는 것이지 하고 부정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좋은 장소에 자리 잡고, 그 목회자에게 영력이 있으면, 더 큰 부흥과 성장이 있을 것은 자명합니다. 10년 20년 침체되어 있던 교회라도, 도시가 개발되면서 주택이 들어서고,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하면, 수년 내에 급속하게 성장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우리 송정 교회가 이만한 성장을 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지난 날 교회당의 터를 송정리의 중심지에 잡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현재는 더욱 큰 부흥을 꿈꾸며 이곳으로 옮겨왔지만, 어떻든 교회당의 터를 잘 잡아야 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교회의 터는, 결코 공간적이고 장소적인 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니 장소적인 터보다 훨씬 더 중요한 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의미에서의 교회의 터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혜로운 건축자로서, 가는 데마다 교회의 터를 잡고 혹은 닦아 두었는데, 저 숙련되고 위대한 건축자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교회의 터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곳저곳 열심히 전도하여 고린도에, 혹은 에베소에, 데살로니가에, 혹은 빌립보에 수많은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처럼 많은 교회들을 세웠으나, 그가 교회를 세우는데 갈고 닦은 터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습니다. 11절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기초라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기본 사상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천하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으며,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 고백에 근거하여 세워진,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자신이 교회의 머릿돌이심을 주장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디에 가든지 똑같은 터를 닦았습니다. 그 터란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구주로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어떤 사람이나, 조직이나, 철학이나,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엡 2:20절 이하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신령한 반석이시고,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시며, 그의 말씀이 반석이 되시고, 그를 믿는 신앙이 반석이 되시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과거 죄의 용서를 얻는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함을 믿게 되고,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됨을 확신하게 됩니다.

2)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현재를 살아갈 진정한 힘을 얻는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와 도우심으로, 생의 난관에 대처할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이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의 길을 걸으며, 인생의 싸움터에서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3)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다가올 미래에 대하여 결코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세계, 만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세계, 생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그러한 세계에서 살다가, 언젠가 죽음이 찾아올지라도, 죽음은 곧 종말이 아니라, 보다 큰 영광을 위한 하나의 서곡이요, 하늘나라 영생복락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소망 속에서 생의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터로 삼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이러한 생을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이러한 축복을 누리도록,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사명임을 한 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기초가 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 모든 것의 기초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를 기초로 삼은 것만이 무너지지 아니하며, 그 외의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떠한 터도, 곧 사람에 의해 닦여진 사상이나 업적에 의한 그 어떤 것들도, 참다운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로마 제국을 보십시오. 얼마나 위대한 나라였습니까? 전설에 의하면 로마는 늑대에게 길러진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티베르 강변의 작은 언덕에서 시작된 이 조그만 나라는, 이후 지중해 전 지역을 정복하며 그야말로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는 제국이 되었습니다. “지중해는 로마 제국의 호수다.”라거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하는 말들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강력한 세력과 문명을 자랑하던 로마제국도, 결국 때가 되자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함께 허망하게 붕괴되어, 이제는 그 유물만이 관광객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소련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소련은 20세기 초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레닌이 제정 러시아를 쓰러뜨리고 건설한 공산국가입니다. 그리고 이후 한 때는 세계 최초로 우주선을 쏘아 올리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미국과 경쟁하며 세계를 양분하여 지배하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때가 되자 허망하게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소련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세웠던 레닌의 동상은 이제 거의 모두 철거되어, 공원 한구석에 거적으로 덮여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다니엘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간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은 제아무리 강대해 보이는 나라라도,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비단 한 나라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기초로 삼지 않는 사람들 역시, 제아무리 화려하게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때가 되면 무너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인생의 기초로 삼지 않은 자들은, 장차 마지막 심판 날에 자신이 세운 모든 공적이 무너지는 것을 볼 것이며, 그 자신도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주목하며, 과연 우리의 삶이 어디에 기초해 있는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살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그 어떤 다른 기초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두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사, 우리를 요동치 않게 하실 영원한 반석이 되심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와 인생의 터라 믿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혹 집을 그 위에 잘못 짓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12-13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열거된 여섯 가지 건축 자재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금, 은, 보석이고, 둘째는 나무, 풀, 짚입니다. 루터나 칼빈은 금, 은, 보석은 영속적이고 순결한 하나님의 진리를 의미하고, 나무, 풀, 짚은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거짓된 교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우면서도, 자신의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나무와 풀과 짚 같은 보잘것없는 사상을 섞어 잘못된 건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재료로 지었던지, 각각 공적이 나타날 때가 있는데, 곧 주님의 날에 밝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그들의 행위에 따라, 마지막 때에 상급과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이 건축자로서 어떻게 교회를 세워나가야 하는지를 경고하였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깨닫게 되는 것은, 구원은 믿음과 은혜로 받지만, 상급은 각자의 삶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종교 개혁이후,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라는 모토 아래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적 진리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성경이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해 다소 관심을 소홀히 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믿어 구원만 받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믿음 이후의 생활과 영적 성숙에 대해서는, 다소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같은 믿음의 터 위에 있어도, 신앙의 집을 짓는 재료는 다를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은 금, 은, 보석과 같이 귀한 재료로 짓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나무, 풀, 짚과 같은 값싼 재료로 짓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재료로 신앙의 집을 짓느냐에 따라, 구원 이후의 상급에는 천양지차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어떠한 재료로 집을 짓는가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인 각 개인의 결단과 의지에 달려있으며, 따라서 구원 이후에 어떠한 상급을 받게 될지도, 각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단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나는 어떠한 재료로 신앙의 집을 지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너무나 풀과 짚과 같은 값싸고 보잘것없는 재료로 집을 지을 것이 아니라, 금이나 은이나 보석처럼 값지고 견고한 재료로 신앙의 집을 지음으로써, 마지막 날 모든 불 시험을 이기고, 많은 상급과 함께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생명과 영광의 부활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면, 그 집을 세울 터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의 참된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우리 송정 중앙 교회는 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인생과 가정도,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인생, 그들의 가정을 돈 위에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돈은 우리의 인생 건축에 있어서 모래와 같은 것이지, 결코 반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난해서보다 많은 돈 때문에 오히려 방탕하고 범죄하고 가정이 파탄에 빠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아서, 재물은 가정과 인생의 기초로서 반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단 번에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가정을, 부부간의 애정 위에 세우려고 합니다. 한 가정을 이룩하는데 부부간의 사랑과 애정은, 매우 중요한 요소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라고 하는 것, 애정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입니다. 결혼 3년 만에 이혼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합니다. 한 때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결혼식을 올렸던 톱 탤런트 최진실과 야구 선수 조성민 부부는, 별거와 이혼을 하고 가정이 파탄에 이르더니, 결국 한 편의 자살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우리가 다 목격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가정을 건강 위에 세우려고 합니다. 이 시대에 건강은 모든 사람의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믿을 만한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언제 어느 때 우리의 건강이 망가질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외에 권력, 인기, 사업, 직장, 그 무엇도 인생의 반석이 될 수 없고, 가정의 견고한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철학도 흔들리는 기초이며, 과학도 불완전한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위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에는, 우리의 인생을 마음 놓고 세울만한 반석이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 각자가 지은 집의 공력을 따라 영영 상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집은 어디에 지어야 할 것입니까? 어떤 부인이 어느 봄 날 창가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는데, 어미 새 한 마리가 땅위에서 높지 않은 나무 위에 둥우리를 짓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부인은 그 광경을 보고 “아 가엾은 친구, 너무 집을 낮은 곳에 짖는군!” 이렇게 말하며 밖으로 나가서, 그 둥우리를 부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어미 새는 다시 돌아와서 낮은 장소에 둥우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몇 마리의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미 새가 미친 듯 울어대기에, 그 부인은 창가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한 마리 커다란 뱀이 그 둥우리를 발견하고서, 새끼들을 모두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어매 새는 너무 낮은 곳에 집을 지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여러분의 가정을, 좀 더 높은 곳 위에 지으십시오.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의 가정을 교회의 참된 터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탄이 감히 넘겨다보고 해칠 수 없는 가정, 천만 풍파가 밀어닥쳐도 무너지지 아니하는 인생, 우리 구주 오셔서 지은 상을 주실 때 지혜로운 인생 건축자로 인정받아, 영원한 하늘의 상급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교회와 인생의 참된 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가치 있는 꿈을 향하여

고전 3:10-15 / 이필재목사(갈보리교회)

먼저 부족한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우신 이 갈보리교회에 말씀을 전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그리고 저에게 귀한 기회를 주신 성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부족한 종을 단에 세우시고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 말씀만 전하게 해주시고 그리고 전하는 말씀이 잘 박힌 못처럼 우리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하게 하옵소서.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때 우리 성도들의 삶에 큰 열매가 맺히는 귀한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우리 동네 가까운 곳에 “김형석, 암병욱 철학의 집”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두 분 교수님의 철학 세계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놓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매월 한 번씩 김형석 교수님의 철학 강연이 있습니다. 저와 반은 달랐지만 저의 동문, 대 선배님이 되십니다. 늘 존경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강연마다 꼭 듣고 있습니다. 2시간을 강연하시는데 구수하고 아주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혀 힘들어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 아십니까? 94세이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혈색도 아주 좋으시고 꼿꼿하게 2시간을 계속 명강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하도 병약하셔서 그 부모님 소원이 ‘이 녀석이 한 20살 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소원을 갖고 계셨답니다. 이 김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꿈이 없는 20대는 죽은 인생이다. 20대는 꿈을 꾸며 살아야 한다. 이상이 없는 40대는 방황하는 사람이다. 40대는 이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가치 있는 인생을 살면서 늙을수록 소명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우리 인생은 젊어서부터 나이 들 때까지 계속해서 이 꿈과 이상을 향해서 달려가야 하고 또 그렇게 지음 받은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김 교수님은 병약했던 자신이 점점 건강해져서 100세를 바라보도록 오래 사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치 있는 이상을 꿈꾸면서 또 그것을 실천하면서 계속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100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으면 가치 있는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 가치 있는 꿈과 그 이상에 눈 뜬 한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아주 잘 아는 분입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 이전에 이 사도바울의 삶의 기준은 아주 세상적인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혈통을 자랑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이 분은 자기 지혜와 지식을 자랑했습니다. 이 분은 율법의 거두인 가말리엘 학파, 그 당시 최고의 율법을 가르치는 학파였습니다. 거기에서 수학한 율법학자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수님이고 학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자랑할 만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주 부러워하는 로마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으로서 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것이었고 또,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봐서 이 사도바울은 그 당시 사회에 유력한 지위에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니까 그의 눈에 씌어졌던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고 성경은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니까 새로운 가치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보다 높은 가치에, 그리고 보다 영원한 가치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참 생명을 살리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가는 일이었습니다. 이후에 이 사도 바울은 이 꿈을 위해서 자기 온 일생을 다 바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살고 간 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도 가치 있는 꿈을 향해서 달려가라. 그 꿈을 이루는 멋진 인생이 되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가치 있는 꿈을 향해서 달려가는 삶을 집을 짓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인생의 터를 잘 닦아두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집을 짓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집을 짓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기초입니다. 집의 기초가 든든하지 못하면 그 집은 조그만 충격에도 쉽게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초가 튼튼한 집은 웬만한 충격에도 끄떡없이 견디어냅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홍수가 나고 지진이 나도 끄떡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의 인생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성도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인생의 집을 짓는데 유일한 터요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생의 터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의 생명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위해서 내 대신 피를 흘려 내 죗값을 대신 치르신 예수님을 위해서 나의 인생이 존재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나의 꿈과 이상을 펼쳐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의 인생은 너 자신을 터 삼고 있느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터하여서 지어져 가고 있느냐? 너의 삶은 너를 위한 삶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냐? 네가 좋아하는 꿈과 이상은 너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냐?”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이제 제 이야기를 조금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꿈이 교수나 법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후학을 가르치고 또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약자를 돕는데 제 가치와 꿈을 두었습니다. 사실 어려서는 꿈이 막연합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가면서 구체화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려서부터 계속해서 이 꿈을 가지고 그렇게 노력을 했습니다. 어렵고 힘들게 공부했지만 그러면서 계속해서 그 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찍이 군대에 가서 예수님을 영접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좋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좋았고, 예수님의 삶이 너무너무 멋졌습니다. ‘생명 구원을 위해서 섬기고 또 섬기다가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는 거 얼마나 멋진가?’ 그 삶을 본받고 싶었습니다. 제가 되고 싶었던 교수나 법관이 되어서 그 가치를 실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다니는 교회는 아주 조그만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서 “형제는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면 좋을 거 같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대답을 했습니다. “저의 꿈은 교수나 법관이 되어서 기독교 정신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약자를 돕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이렇게 확신 있게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대답을 잘했지 않습니까? 얼마나 멋집니까? 기독교 정신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치고 올바르고 실력 있는 인재들을 길러내는 거 멋진 꿈임에 틀림없습니다. 가치 있는 꿈임에 틀림없습니다. 법관이 되어서 억울한 자를, 약자를 도우면서 사회 기강을 바로잡고 사회 정의를,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해 나가는 거 얼마나 멋있습니까? 정말 가치 있는 이상 아닙니까? 그런데 몇 년에 걸쳐서 똑같은 제안이 여러 목사님으로부터 또 지인들을 통해서 저에게 들어왔습니다. “형제님은 신학을 하고 목사님으로서 주님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들으면 어떻게 됩니까? 처음에는 그냥 흘리다가 ‘이거 좀 고대해봐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여러 번 거듭되다 보니까 저의 마음이 점점 갈등이 생겼습니다. ‘정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작정하고 여러분도 아마 많이 가보셨을 텐데 영락기도원에 올라가서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지금의 건물이 아니라 아주 옛날의 낡았던 시절 그 건물에 올라가서 3일 동안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전에는 금식 한 번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인생 절체절명의 기로에 있는 이 상황에서는 금식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간절해서 제 꿈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것을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을 원합니까?”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교수가 되고 법관이 되고 그 꿈이 정말 나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너 자신을 위한 것이냐? 너 인간적인 꿈을 위한 것이냐?” 그렇게 물으셨습니다. 저는 깊은 고뇌 끝에 겸손히 무릎 꿇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교수가 되고 법관이 되고자 했던 것은 명분이 그랬던 것뿐이지 사실은 저의 인간적인 성취의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주님 앞에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저는 저의 인간적인 욕심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이 부족하지만 주님이 저에게 주신 그 사명, 생명구원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도 모두 지금 하시는 일을 다 내려놓고 목사가 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면 정치는 누가 하고 법질서는 누가 잡습니까? 후학들은 누가 가르치고 공장에서 물건은 누가 만들어내고 이 세상의 일은 누가 하는 겁니까? 여러분! 은혜 받았다고 무조건 다 목사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목사들이 너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정말 예수님이 원하시는데 가치를 둔 꿈인가 이것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바라기는 명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과 그리고 꿈의 초점, 그것을 예수님처럼 정말 가치 있는 삶에 맞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가치 있는 인생의 재료로 집을 지으라고 말씀합니다. 기초가 든든하게 세워졌으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냥 기초만 만들어놓고 끝납니까? 무엇을 하려고 그 기초를 만들었습니까? 그게 집을 세우려고 만든 거 아니겠습니까?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집의 기초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 중요합니까? 집을 무엇으로 짓는가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집을 짓는 재료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재료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품질이 좋은 고급재료가 있는가 하면 품질이 나쁜 싸구려재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품질이 좋은 고급재료를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 재료로 비유하고 있고, 품질이 나쁜 재료를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재료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집을 짓는데도 같은 논리가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사용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또, 내가 무엇이 되었는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슨 종류의 일을 했는가 그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일을 많이 하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일을 어떻게 행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일컬어서 공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뜻이 뭐냐 하면 어떤 종류의 일을 했는가, 그리고 그 행한 일의 질이나 특성이 어떠했는가 이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인생의 집을 짓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가진 것, 여러분의 건강이나 시간이 물질이나 지위나 지식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이 모든 것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고 계십니까? 금이나 은이나 보석과 같은 보배롭고 가치 있는 꿈을 향해서 그렇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혹시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된 낡아지고 쉽게 썩어질 수밖에 없는 것을 위해 사용하는 분은 혹시 없으십니까?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소출이 풍성해서 곡간을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그곳에 차곡차곡 다 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겁게 지내보자.’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물으셨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내가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누가복음 12장 19절과 20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여러분이 아마 들어봄직한 분인데 혹시 최의숭 회장님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장로님이셨는데 지금은 목사 안수도 2006년에 받으셨습니다. 이분이 대의그룹 회장님이십니다. 기업인으로서 유일하게 세계평화상을 받은 분입니다. 자동차 부품 제조가 그 그룹의 주요 기업인데 이 분은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믿고 세 가지 꿈을 꾸었답니다. 첫 번째는 박사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큰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세계에 100개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100개의 교회를 세운다는 거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습니다. “꿈은 단지 꿈일 뿐이다.” 이 소년이 장성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추상적인 것으로 보였던 그 꿈들이 점점 현실화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년은 단 한 번도 이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세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했는데 그것이 점점 구체화되더라는 것입니다. 이 분은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학 교수가 되었고, 그리고 사장, 이어서 회장이 됩니다. 꿈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교회를 짓기 시작합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제가 최근 것은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2010년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일본 기타큐슈 지역에 73번째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몇 개를 더 지었겠지요? 머지않아서 그의 꿈인 100개 교회를 짓는 그의 원대한 꿈이 현실화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한 개 교회를 세우는 것도 대단한데 교회 100개를 세운다, 그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이 구원을 받고 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되겠습니까? 얼마나 멋진 꿈이 아니겠습니까? 이 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부를 활용해서 “주님! 이를 위해서, 생명 구원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라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금, 은, 보석으로 된 인생의 집을 짓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물질을 누구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고 계십니까? 바라기는 할 수만 있으면 어려운 사람들과, 그리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영혼 구원을 위해서 많이 사용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더 많이 가지셨습니까? 그러면 더 많이 나누시고 더 많이 아주 값지게 사용하시고 더 주의 일에 값있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또 한분을 소개합니다. 이 분은 물질로 이렇게 그 꿈을 향해 나가시는가 하면 또 한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외의 것들, 자기의 지식, 지위, 명예, 권력 이 모든 것들을 활용해서 종합적으로 꿈을 향해 나아가는 분입니다. 아마 들어보셨을 것 같은데 베네수엘라의 음악가이고 경제학자이고 또 정치가이고 또 사회운동가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오 박사님입니다. 이 분이 자기 음악적인 재능을 어려운 청소년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경제학자였고 정치가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지위, 명성, 명예, 권력을 가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어려운 이웃들, 특히 청소년들을 위해서 사용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 아브레오 박사님이 먼저 마약과 총기와 폭력과 범죄가 판을 치는 카라카스라고 하는 도시의 빈민가 차고에서 빈곤층 청소년들의 교육과 재활 사업을 시작합니다. 전과 5범의 소년을 포함해서 11명의 청소년들에게 사비를 들여서 악기를 사줍니다. 그리고 연주법을 가르치면서 음악 교육을 시작을 했습니다. 그때가 1975년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분의 열정이 점점 더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어려운 아이들에게 음악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정부에 제안을 했습니다. 청소년 예술 교육 시스템인 엘시스테마를 창설합니다. 이것은 그 나라 말로 제도 시스템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청소년 예술 교육 시스템을 정보를 통해서 제도화 시키는 교육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분의 꿈과 이상은 단순히 이 음악 교육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 오케스트라 활동을 통해서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들에게 “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야. 너는 소중한 존재야.” 이런 것을 일깨워주고 싶었습니다. 소속감을 주고 질서를 배우게 하고 책임감을 가르쳐주고 의무와 배려와 같은 아주 값지고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주고 싶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들 청소년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 이웃까지 빈곤과 무질서의 이 악순환 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이분의 값진 꿈이 현실화 되었습니다. 전과 기록으로 얼룩진 11명의 아이들로 시작했는데 그 엘시스테마라고 하는 청소년 예술 교육 시스템이 현재는 200여개의 지역별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게 되었고 세계적으로 30만에 가까운 단원을 거느리는 초대형 오케스트라로 발전이 되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세계적인 지휘자가 나왔고 이 가운데서 세계적인 교향악단의 수속 주자들이 나옵니다. 이제 이분이 공적을 인정받아서 서울 평화상을 받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인생의 가치를 일깨워주어서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사회 봉사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다.” 이렇게 수상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 분의 가치 있는 이 사역에 감동을 받아서 여러 나라에서 지금 점점 자기의 재능을 기부하고 명예를 기부하고 그러면서 이 뜻 깊은 사역에 동참하는 그런 나라,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지휘자, 금난새 지휘자입니다. 이 분이 먼저 말씀드린 아브레오 박사님 그 영향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이 분이 자기의 재능을 농어촌 청소년들을 위해서 지금 계속 3년째 기부를 해오고 계십니다. 농어촌 지역의 초등학생, 그리고 중학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자 전국에서 오지를 뽑습니다. 서울은 해당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지만 뽑습니다. 그래서 20개 지역을 선정해서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만들었습니다. 작년부터 매년 8월 이들을 모아서 5박 6일 동안 합숙 훈련을 한 다음에 세종문화회관에서 합동연주회를 열고 있습니다. 올해가 두 번째였습니다. 제가 공연을 관람하면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렇게 어린 아이들이 연주를 잘 할 수 있을까? 저렇게 서툰 아이들이 잘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그들이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면서 힘차게 연주하는 것을 제가 봤습니다. 그 결과 세종문화회관대강당 3층 저 높은 데까지 있지 않습니까? 거기까지 가득 매운 관객들의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를 받으면서 그들이 그 연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멋진 일은 어떤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고 저와 여러분 모두가 얼마든지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각자에게도 그와 같은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 한번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쁘게 할 수 있는 그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만큼 가치 있는 그 기쁜 일이 무엇인가? 그것을 한번 이 시간 깊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불로 시험하여도 변함없는 가치 있는 인생의 집을 지으라고 말씀합니다. 건축 재료로 다시 돌아갑니다. 평소에 겉만 봐서는 이게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있습니까? 겉보기는 잘 모릅니다. 겉보기에는 멋지고 튼튼하게 보이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아닌 경우가 여러분 있지 않습니까? 화재 같은 재난이 일어나면 그것이 잘 일어납니다. 그 품질이 드러납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화재가 나면 어떻습니까? 끄떡없습니까? 금방 다 타버리고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불이 나더라도 그 형체와 본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인생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보다 높은 가치, 보다 영원한 가치에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까? 나의 선한 의도, 가치 있는 꿈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값진 꿈과 이상을 가졌다고 해서 박수만 쳐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너만 고상한 꿈을 가지고 사느냐?” 그러면서 은근히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 숨겨진 저의가 있어서 좋은 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의심의 눈초리를 자꾸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해하고 모함하는 사람들도 생겨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처럼 생명 구원이라고 하는 고귀한 가치를 위해서 자기 인생을 다 바쳤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모함이고 박해입니다. 방해와 협박이 왔습니다. 때로는 굶주리고 매 맞고 박해와 비방과 모욕을 받고 심지어는 감옥에까지 갇히기도 했다고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가 받은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서 오늘 본문 13절에서 불시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고귀한 꿈과 이상을 불태워버리려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절대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불같은 시험이 닥칠 때마다 누구를 바라봤습니까? 그의 삶의 기초, 인생의 집의 기초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푯대를 향해서, 꿈을 향해서 계속 달려간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올해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연설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런 연설을 그분이 하신지 꼭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 50년 전 그 자리에서 킹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그 날이 올 것이라는 그런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그리고 작은 산마다 낮아지고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하게 되고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그래서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그런 꿈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분은 극심한 인종 차별에 대항을 해서 “피부색 인종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은 모두가 존귀하다. 그러기에 흑인, 백인 구별 없이 모든 인종은 평등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헌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박수만 쳐주었습니까? 폭파의 위협이 옵니다. 협박을 합니다. 온갖 방해와 위협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이 분이 무엇을 했습니까? 겸손히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를 감싸면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마틴! 고결함을 위해서 일어나라. 정의를 위해서 일어나라. 진리를 위해서 일어나라.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 이런 음성을 듣습니다. 그분은 그 꿈을 위해서 살다가 암살당해 돌아가셨지만 이분이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라고 하는 그 연설을 한지 50년이 지난 지금 이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꿈은 그 뜻을 같이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이 고귀한 꿈을 간직하기는 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낙심하고 그 열정이 식어가는 그런 분들이 혹시 이 자리에 계십니까? 그래서 그동안 잘 싸워온 가치 있는 그 공적이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워진 그 집처럼, 그것들이 타버리듯이 점점 사그라져가지는 않습니까? 다시금 겸손히 무릎을 꿇어서 우리 인생의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다시금 그 꿈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가치 있는 꿈, 어떤 불같은 시험이 오더라도 끝까지 이기면서 끝내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 고귀한 가치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전 인생을 투자하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 공적을 따라서 합당한 상급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고전 3:10-15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서 사도 바울이 쓴 글을 함께 봐야 할 것입니다.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온 사도 바울은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가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을 밝힌 바 있습니다(고전2:2). 그리고 그것을 전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지혜로운 말로 설득하려 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려 했다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고전2:4). 이어서 사도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자”의 차이를 말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을 말하고 “신령한 자”란 성령을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영적인 일 즉 하나님의 본성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계획과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 같은 것들을 이해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즉 성령께서 가르쳐주시지 않으면 알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그런 말을 믿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은 오직 신령한 자들만이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요지로 쓴 글이 2:10-15입니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렇게 “육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를 구별하여 설명을 마친 사도 바울은 3:1-3상에서 놀랍게도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신령한 자들”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들”로 대하겠다고 선언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밝힙니다. 3:3하-4입니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편지 머리 부분에서 언급했듯이(고전1:11-12)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게바파니 그리스도파니 하는 파당이 생겨 서로 시기하며 분쟁하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니고 신령한 일을 알아듣지 못한 증거이니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아직도 육신에 있는 자들로 간주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 직전에 있는 3:5-9입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과 아볼로를 예를 들어 언급하며 두 사람 사이의 관계 즉 차이점과 공통점을 설명합니다. 먼저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바울은 심은 사람이고 아볼로는 물을 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통점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두 사람 모두 고린도 사람들을 믿게 하는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다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울과 아볼로가 하나님과 동등한 사역자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두 사람 다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동등한 사역자라는 것입니다. 동역자라는 말은 두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관계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모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든 물을 주든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면 그 두 사람의 사역은 다 소용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바울과 아볼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성과 두 사람이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관계성을 바로 이해했다면 서로 다른 파당을 이루고 서로 시기하며 분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어리석은 것은 그들이 진정 성령을 받지 못하였고 그래서 신령한 일을 이해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책성 설명을 하고 나서 이어서 쓴 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각각의 사역자는 교회를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다 가치 없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역자가 각각 무엇을 하든 교회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는 한에서 꼭 같은 동역자임도 분명히 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각각의 사역자들이 공히 주의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건축에 비유하며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먼저 본문 10-11절을 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이 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합니다. 하나는 누가 어떤 건축을 하든 그 터는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터를 닦았는데 다른 사람이 또 다른 터를 닦아서는 안 되고 오직 자기가 닦은 터 위에 건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닦은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교회가 서야 할 유일한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서지 않는 것은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는 모든 사역자들이 항상 살펴야 하는 것 중 첫 번째는 자기의 사역이 과연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바로 세우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다른 하나는 교회를 세우는 모든 사역자가 공히 주의해야 또 하나의 일은 무엇을 세울까보다 어떻게 세울까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한 것입니다.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사도 바울은 본문 12-13절에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불로 심판하실 “그 날”에 각 사람이 행하며 세운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쓸 데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은 불에 타서 없어질 것이고 주님께서 인정하실 공적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날의 그 불에 타 사라지지 않을 건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만든 건축물처럼 순식간에 타 사라질 헛된 일들을 하지 말고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이 아름다운 공적으로 인정받을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교회를 세우는 일을 어떻게 했느냐 하는 데 따른 각각의 결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 14-15절을 봅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우리는 여기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건축한 사람은 어떤 건축을 했던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믿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한 것이 그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같은 터 위에서 건축을 했어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실 상은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이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았다고 인정받을 사람에게 주어질 영광스러운 상도 또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구원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성령께서는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일들을 바로 이해하는 신령한 사람들이 될 것을 권면하십니다. 신령한 사람들의 교회 안에서는 파당을 짓고 서로 시기하며 분쟁할 수 없음을 가르치십니다. 교회와 모든 신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확실히 서야 할 것을 명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이시고 모든 신자는 그에 속한 지체들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믿음의 삶을 살며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되 주님의 심판의 날에 불에 타 사라지지 않을 공적을 쌓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가르침과 명령 앞에서 우리 각자와 우리 교회는 지나간 우리의 삶과 지금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들을 냉철히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수십 년 신앙생활 한다며 서 있던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엉뚱한 터는 아니었는지, 주님의 은혜 아래 있기는 했지만 살아온 방식은 완전히 세상적이지는 않았는지, 교회 안에서 파당 짓기 좋아하고 싸우기를 즐기며 교회를 온통 들쑤셔 놓는 데 쾌감을 느끼며 살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한다며 행한 일들이 사실은 주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고 주님의 그 날에 다 불에 타 없어질 것들이 아닌지, “우리 교회에서 내가 이런 일 했다”, “저것도 내 공이다” 하며 자랑하는 것들이 과연 금과 은과 보석 같은 것인지 아니면 지푸라기 같은 것에 불과한 것인지 한 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옷이 불에 온통 다 그을려서 거의 알몸으로 구원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주님께서 입혀주시는 빛나는 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갈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신령한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지혜로운 건축가

고전 3:10-11 / 지용수목사

제가 몇 주 동안 집회를 인도하러 계속 나가서 여러분을 주일에만 뵙게 되니 죄송한 생각이 듭니다. 오래 전의 일이 생각납니다. 제가 3개월 동안 한 주도 빠짐없이 집회를 인도하러 다녔더니 한 집사님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음성이 평소와 달라서 "목소리가 좀 이상합니다."라고 했더니, "목사님이 집회하러 다니시느라 교회를 자꾸 비우시니 허전해서 한 잔 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식은 땀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집회를 한 달에 한 번만 하려고 애를 쓰는데도 자꾸 나가게 되어 한 잔 하는 사람이 또 나올까 봐 걱정이 됩니다.

이 고민을 서울의 어느 목사님에게 이야기했더니,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면 자식은 희생을 감수해야 된다고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면 아버지에게 자장면을 먹으러 중국집에 가자고 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를 위해 아버지를 내어 놓아야 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만 목회하는 목사라면 여러분과 자장면도 먹고 차도 마실 수 있지만, 제가 세계의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말씀을 전해야 하니 여러분이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이고, 우리 목사님 또 나가시나?'라고 하지 마시고, 갑절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나가니 많은 교회에서 좋은 것을 배워 오지 않습니까? 훌륭한 분들을 만나니 많이 배워 오지 않습니까? 그렇게 배워 온 것을 우리 교회에 접목시키니 결국은 우리 교회가 잘 되고 여러분이 잘 되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과 제가 가까이 지내면 여러분이 은혜를 적게 받습니다. 대개 장로님들이 은혜를 가장 적게 받느다고 하는데, 장로님들과는 한 달에 한 번이라도 함께 식사를 하고 가깝게 지내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해 보면 존경할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저는 스크린용이라 멀리서 보아야 좋지, 가까이에서 저를 보면 실망하게 됩니다. 맥아더 장군은 리더십을 지키기 위해 참모들과도 식사를 함께 하지 않았답니다. 예수님은 가까이 할수록 좋지만, 저 같은 사람은 멀리 할수록 은혜를 받습니다. 가까이 할수록 허점만 드러나게 되니, 제가 여러분 가정을 심방하지 않는 것도 좋은 쪽으로 생각하시고, 이 시간에도 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대구에서 집회를 마치고 서울의 공항에 도착하니 시간이 조금 남아 공항에서 1시간 동안 강의를 준비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전에 부탁 받은 강의를 하러 연세대학교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담배를 피우던 기사 분이 "아이고, 죄송합니다." 하면서도 담뱃불을 바로 끄기가 아까운지 한참 "흡 흡 흡…" 하다가 껐습니다. 그리고는 또 "죄송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괜찮습니다."라고 했지만, 담배 냄새 때문에 구역질이 나서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담배를 피웠던 사람이 쓴 방이면 꼭 옮겨달라고 합니다. 담배 냄새가 나면 저는 머리가 너무 아픕니다. 그런데 그 택시에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습니다. 운전 기사 분에게서도 냄새가 나서 내리고 싶었지만, 참고 물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녀서 담배가 뭔지 모르는데, 담배를 피우시면 가슴이 시원해집니까?"

"가슴이 시원해진다기보다도 습관입니다. 그저 습관으로 피웁니다."

"건강도 좀 생각하셔야지요."

"글쎄 말입니다.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안 되는 게 담배라고, 아무리 힘써도 안 됩니다."

제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전도하기 위해 "혹 교회에 다녀 보셨어요?"라고 물으니 "저의 어머니가 권사님이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기독교 재단의 고등학교를 나왔고, 청년 때까지도 교회에 다녔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산소가 교회 묘지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아찔했습니다.

"제가 살아 보니 인생의 행복도, 소망도, 기쁨도 예수님밖에 없습디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꼭 신앙을 회복하세요. 교회에 꼭 나오세요."

"힘써 보겠습니다."

"꼭 나오셔야 합니다."

연세대학교에 도착하여 보니 요금이 만 사천 몇 백 원이 나와 있었습니다. 교회에 대해 따뜻한 생각이 들게 하려고 이만 원을 드리면서 "거스름돈으로는 따뜻한 차 한 잔 마시세요."라고 했더니, "고맙습니다."하며 차에서 내려 인사를 했습니다.

제가 연세대학교의 안내를 받아 준비실에 들어가 강의를 앞두고 성경을 읽는데 잠언 18장 21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그때 그분의 어머니인 권사님이 아들을 어떻게 지도했기에 권사님의 아들이 담배 골초가 되었을까? 주일학교 선생님이 도대체 어떻게 가르쳤기에 교회학교를 6년이나 다니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교회에 다닌 권사님의 아들이 불신자가 되었을까? 청년부 지도 목사님이 도대체 어떻게 설교했기에 권사님의 아들이 저렇게 불신자가 되었을까? 담임 목사님은 어떻게 설교했기에 몇 십 년 교회에 다닌 사람이 불신자가 되었을까? 우리 양곡 교회에 나오던 분이 저렇게 담배 골초가 되고, 술독에 빠진 자가 되고, 불신자가 되는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할까?'하는 생각과 함께 '하나님, 제 혀에 권세를 주셔서 제가 설교할 때마다 불신자는 믿음이 생기고, 신자는 믿음이 성장하고 전진하도록 은혜를 주세요.'하는 기도가 간절하게 나왔습니다.

여러분 중에 불신자로 떨어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축원합니다.

정말 믿음으로 전진, 전진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에도 권세가 나가서 여러분이 성장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과 제게 '건축가'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건축가가 되되, 아마추어가 아닌 아주 지혜로운 전문 건축가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By the grace of God)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주초를 놓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을 보내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고린도 교회를 세웁니다. 바울 혼자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세우는데, 조심해서 지혜롭게 잘 세우라고 바울이 교육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문가가 하는 일은 훌륭합니다. 노래도 전문가가 하면 안정감이 있고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듣는 이가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비전문가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림도 전문가가 그린 것은 걸작이 됩니다. 미래 목회 연구회원이신 목사님 한 분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목사님 교회에 훌륭한 화가 한 분이 계신데, 그분은 큰 그림을 그릴 때 마루 바닥을 닦는 밀대에 물감을 적셔서 화지에 밀고 당기고 밀고 당긴답니다. 그러면 산이 되고 골짜기가 되고 호수가 된답니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몇 천만 원이 되는 것입니다. 전문가는 청소하는 걸레를 갖고 왔다갔다 해도 작품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팽 장로님이 걸레를 가지고 왔다갔다 하면 작품이 되겠습니까? 저 같은 사람은 붓으로 1년 간 그려도 그런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데, 그분은 슬적슬적 왔다갔다 해도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집도 전문가가 지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교회 건축 부문에서는 한국 최고의 권위자가 설계를 하셨고, 또 훌륭한 분들이 잘 지어서입니다. 만일 제가 건축했다면 우리 교회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하려 할 때 우리 교회를 돌아보았습니다. 교회 옆에 사택이 있었는데, 누가 지은 집인지 아십니까? 우리 팽 장로님과 김 장로님, 황 집사님을 비롯한 우리 교회 청년들이 지었답니다. 그런데 자기들 마음대로 흙을 뭉쳐서 얹어 놓아 담이 구부렁 구부렁했습니다. 제가 그 집에 들어갔더니, 주님께서 '여기에 들어와 살면 순교하느니라.'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그런 집에서 저보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벽이 금방 무너져 저희 가족 다섯 명이 다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택에 들어가지 않고 남의 집 2층에 세를 얻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사택은 담을 터서 사무실과 창고로 썼습니다. 비전문가가 지은 집이기 때문에 그런 집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농사짓는 분들이 직접 지은 담이 구부렁 구부렁한 집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가 그러면 안 됩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러면 안 되고, 우리 양곡교회도 구부렁 구부렁하면 안 됩니다. 전문가가 세운 것처럼 완전하고 훌륭한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목사님 혼자 세우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 혼자 고린도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아볼로가 도와 주어야 합니다. 많은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함께 세워야 합니다.

교회 건물은 교회가 아니고 교회당, 예배당입니다. 물론 교회 전체는 하나님의 집이지만, 엄격히 말하면 건물은 교회당, 예배당입니다. 우리 교회 예배당은 2년 만에 지었습니다. 교회당, 예배당은 이렇게 다 지어지지만, 내용적인 교회는 계속 지어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 전체적으로는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 교회는 함께 계속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참 신비롭게도 미국에 가나 일본에 가나 호주에 가나 스위스에 가나 독일에 가나 교우들이 수고를 한다는 것이 다 똑같습니다. 찬양하는 사람, 차량 안내하는 사람이 다 있습니다. 호주에 가니 그 더운 날씨에도 차량 안내를 하는 사람이 밖에 꼭 있었습니다. 이번 집회에 갔던 대구의 교회에서는 청년들이 차량 안내를 했습니다. 새벽에도 밤에도 청년들이 안내를 했습니다. 꽃꽂이하는 사람, 안내하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강사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이 있으니 교회가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양곡교회에도 귀한 장로님들이 계시고, 구역장님들, 교회학교 교사들, 성가대원들, 오케스트라단원들, 남선교와 여선교회원들, 다니엘 회원들이 충성하시고, 또 의사 선생님들과 미용사, 이용사님들이 사랑의 선교를 하시고, 변호사님이 무료 법률 상담을 하시니, 모두 이렇게 충성하고 노력하니 교회가 이렇게 지어져 가는 줄로 믿습니다.

지용수 혼자 짓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짓는 것입니다.

다 함께 짓는데, 모두 전문가처럼 잘 지어야 합니다. 이쪽은 전문가가 짓고, 저쪽은 비전문가가 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전문가같이 지어야 합니다.

그래서 '조심하라. 조심해서 지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전문가같이 짓습니까?

쉽습니다. 노아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지, 목수가 아닙니다. 설계사도 아닙니다. 그런데 노아는 배수톤수가 20,000톤, 용적톤수가 14,000톤∼15,000톤인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 방주의 크기는 양을 240마리씩 실을 수 있는 기차 522대 분입니다. 학자들의 추정에 의하면,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동물이 45,000마리입니다. 그런데 45,000마리가 들어가도 방주의 3분의 1정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그런 거대한 배, 엄청난 배를 어떻게 그런 훌륭한 걸작으로 만들어서 비가 한 방울도 새지 않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따라 합시다.

"나도 할 수 있다. 전문가가 될 수 있다.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내 생각, 내 지혜로 하면 안 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노아가 자기 생각으로 배를 지었으면 작은 배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이디어, 하나님의 설계대로 지으니 큰 작품을 만든 것처럼,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 말씀대로 따라 하면 위대한 교회를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주초 위에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집을 짓기 위해서 이쪽에 기초 공사를 해 놓고 집은 저쪽에 지으면 그 사람은 바보입니다.

교회에 충성하면서 예수님께 맞추지 않고 자기 마음에 맞추면, 예수님 기초 위에 충성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충성하면 그 사람은 바보입니다. 충성할 때 예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맞추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몇 백만 원짜리 피아노를 교회에 바쳤다면 반주자가 반주할 때마다 은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큰 부자가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는 내가 오늘까지 은혜만 받고 한 일은 하나도 없구나.' 하며 1억 원짜리 피아노를 바쳤다고 합시다. 그래서 몇 백만 원짜리 피아노를 교육관으로 옮기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할렐루야! 우리 교회에 재력 있는 분이 은혜를 받고 이렇게 좋은 것을 바쳤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왜 사람을 차별하나? 1억 원짜리는 왜 본당에 두고 내 것은 교육관으로 옮기나?'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충성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의 담을 쌓았으면 하나님의 담이지, 내 담이 아닙니다. 바친 다음에는 그것을 고물상에 팔아도 무슨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이 교회에 바친 것을 교회 사정에 의해 고물상에 파는 일이 있어도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바친 것을 고물상에 팔아?' 하는 사람은 아마추어 건축가도 아닌 형편없는 건축가인 것입니다.

집을 지을 때는 벽돌을 뚝 잘라서 버리기도 하고 쓰기도 하지 않습니까? 건축 전문가는 필요한 것은 쓰고 불필요한 것은 버립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하나님 말씀대로 버릴 것은 버리고 세울 것은 세우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3시간 정도 달리면 갈 수 있는 교회의 한 장로님이 40억 원을 헌금해서 교회를 잘 지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장로님을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장로님이 '이 교회는 내가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생각하게 되어 목사님이 자기에게 친절히 대하지 않고 다른 장로님들에게 친절히 대하면 "이 교회가 누구 교회인데…."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께 뺨을 맞기 시작하는데, 그 자녀가 부모(장로님)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식 때문에 가슴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40억 원이 아니라 400억 원을 바쳤어도 하나님께 바쳤으면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우리 교회를 지을 때 200억 원을 헌금해도 그것을 다 잊어버리는 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지혜로운 건축가가 됩니다. '이 교회에 내가 200억 원을 바쳤는데….' 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건축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터에 예수님께 맞추어 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께 맞추는 설계는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목회도 말씀을 따라 하면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오늘 아침에는 얼마나 고단한지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잠 실컷 자는 것' 하고 저도 모르게 노래를 했습니다. 그러다 깜짝 놀라 '아이구, 내가 이러면 안 되지.'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래 전에 '하나님, 잠 좀 실컷 자고 싶어요.'라고 했다가 '죽고 싶냐? 천국 가서 실컷 자고 지금은 열심히 일해라.'라는 응답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몸은 피곤해도 제가 얼마나 즐겁게 목회를 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목회를 즐깁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지시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 목회를 하면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니 힘들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목회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비전문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면 전문가 이상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 말씀대로만 순종했으면 왕 노릇하며 살았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 28절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따라 합시다.

"번성하라.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이것은 왕 노릇하라는 말씀입니다.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씀은 왕 노릇하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 말씀대로만 건축하고 그대로 살았으면 에덴에서 왕 노릇했을 텐데, 이브가 뱀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에덴을 잃어버렸습니다.

"너 이 선악과만 따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 눈이 밝아진다."라는 말을 따르면 안 되는데, 그 말을 따르니 왕 노릇하다가 마귀의 종이 되어서 마귀에게 끌려가 에덴을 잃어버렸습니다.

장로님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 교회에서 대접받는 존귀한 장로님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말을 들으면 거지꼴의 장로가 되는 것입니다.

상주의 어느 교회에서 큰 교육관을 지었습니다. 그 교회의 중직자 한 분이 옥상에 올라가서 구경을 하다가 현기증이 나 떨어졌는데 목이 부러져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남녀 선교회원들이 "이제 우리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분이 얼마나 교회의 아픔이 되었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후 1년 만에 교회가 두 배로 부흥되었답니다.

말씀대로 장로 노릇하면 1등 장로님이 됩니다.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자기 재주대로 하면 형편없는 장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참고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양곡교회가 성경대로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저도 성경대로 목회하고, 우리 장로님들도 성경대로 충성하고, 여러분도 성경대로 충성해서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노아의 방주, 구원의 방주, 양곡 방주를 만들어 보십시다.

말씀대로 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이사야 55장 8절, 9절에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우리 지혜가 아무리 좋아 보여도 하나님 말씀의 지혜를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면 살 것 같고 하나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가면 죽을 것 같았지만, 다시스로 가니 죽게 되고 하나님 말씀대로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니느웨로 가니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뿐 아닙니다. 내 개인, 내 가정, 내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터 위에 세워야 무너지지 않습니다. 대통령이라도, 사장이라도, 병원 원장이라도, 대학 총장이라도 예수님과 상관없는 인생은 모래 위의 집일 뿐입니다.

예수님 위에 말씀대로 세워야 무너지지 않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크 워싱턴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소금 공장에서 일하고 광산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자기 인생의 기초를 예수님으로 닦았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미국의 최고 교육가, 교육계의 별, 교육계의 아버지가 되어 미국 돈에 그의 사진이 프린트되었습니다.

그가 유명한 대학의 총장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그가 편안한 옷을 입고 산책을 하고 있는데 한 백인 귀부인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한가하게 걷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 집에 와서 장작을 좀 패 주면 몇 달러를 주겠소."

미국의 대학 총장은 연봉이 보통 3, 4억 원은 됩니다. 한 달에 4,000만 원씩 연구비가 나옵니다. 5억 원의 연봉을 받는 총장들도 있습니다. 그가 총장인 줄을 모르고 그 부인이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예, 부인."하며 옷소매를 걷어 부치고 장작을 팼습니다. 그때 그 부인의 딸이 집으로 들어오다가 총장님이 자기 집에서 장작을 패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엄마,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내가 저 흑인을 불렀다. 장작을 패 주면 몇 달러를 주겠다고…."

"엄마, 저 분은 우리 나라 국민이 존경하는 교육자시고, 대학 총장님이에요."

부인은 피가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총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총장님을 몰라 뵈었습니다."

"괜찮습니다, 부인. 저는 가끔 이렇게 노동하는 것을 즐깁니다. 고맙습니다."

사람은 끼리끼리 지내지 않습니까? 그 부인의 친구들도 모두 귀족이고 부자들이었습니다. 그 부인이 친구들에게 부크 워싱턴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 위대한 교육자라며 자기 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 모두 감동을 받아 "우리가 그 학교를 돕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큰돈을 내어 그 학교에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부크 워싱턴은 장작 몇 개를 패 주고 떼돈을 번 것입니다. 그에게도 감정이 있는데 그런 대접을 받을 때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감정대로 살지 않고 말씀을 따라 겸손히 자기를 지키니 위대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부부도 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길을 가다 보면, 자기 남편에게 다리를 끄덕끄덕 하면서 "야! 그랬어? 저랬어?"하는 아내가 많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성경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복종하라."

대통령도 성경에 복종해야 합니다. 나라 헌법도 성경에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건방진 아내는 복이 없습니다.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을 섬겨야 됩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귀히 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되, 자기 기분대로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존귀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기분대로 사랑하면 오히려 아내를 괴롭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다스릴 때 아름다운 부부, 아름다운 가정이 되고, 자녀도 아름답게 서는 것입니다.

사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무리 똑똑하고 예의가 있어도 내 생각, 내 판단은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사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제가 첫목회를 할 때의 일입니다. 그 마을의 일류 집사님이 저희 이웃에 사셨습니다. 남편이 고시에 패스한 사람으로 자칭 그 마을의 퍼스트 레이디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저희 가족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특별히 성찬이를 좋아해서 늘 과자를 사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도 오고, 점심 때도 오고, 저녁에도 오고, 하루에 서너 번씩 왔습니다. 제가 쌈을 싸서 입에 넣으려고 할 때 들어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긴장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교인이 저희 집에 오면 긴장합니다. 저 때문에 여러분이 은혜를 받아야지, 손해를 보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자동차도 편히 타지 못합니다. 우리 장로님들이 너무 좋은 차를 사 주셔서 아무도 없을 때는 편하게 타는데, 누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제가 그렇게 조심하며 사는 사람인데, 그 집사님이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저희 집에 오니, 제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좀 낫습니다. 집사님의 발자국 소리가 나면 서재로 들어가면 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제 아내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두세 달쯤 지나니, 아내의 얼굴이 노래졌습니다. 그 집사님은 자기 집에는 있지 않고 거의 저희 집에만 있었습니다. 아내가 집안 일도 해야 하고, 시간이 얼마나 아깝습니까? 그렇다고 "집사님, 자주 오지 마세요."라고 할 수도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역시 하나님 말씀이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그때 제가 새벽기도회 때 잠언 강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설교 준비를 하려고 말씀을 펴니, 기가 막힌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잠언 25장 17절)

그런데 걱정이 되었습니다.

'내일 새벽에 이 집사님이 안 오시면 어떻게 하나?'

다른 교인들은 오지 않아도 그분은 꼭 나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설교 준비를 하면서 '주여, 내일 우리 이 집사님이 꼭 새벽기도에 오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분은 절대로 새벽기도에 빠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기도하시고, 또 아침, 한낮, 저녁 때, 밤 10시, 하루에 다섯 번씩 꼭 교회에 와서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라도 혹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여, 내일 새벽기도에 이 집사님이 절대로 빠지지 않게 해 주세요.'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 가서 보니, 그 집사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됩니다. 이웃을 사랑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웃집에 너무 자주 다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이웃의 시간을 아껴주고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합니다. 이웃집에 너무 자주 다니면 싫어할까 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 알아서 주시는 말씀이니 이웃을 사랑하거든 몇 달에 한 번씩만 가고 자주 가지 마시기를 …."

그 다음부터 집사님이 저희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잠언 25장 17절 말씀이 제 아내를 살렸습니다.

똑똑한 부인이지만, 몰랐던 것입니다. 말씀을 따르니 '아하!'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회 생활을 할 때도 매력이 있는 사람, 반듯한 사람이 되는 길은 성경을 따르는 것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 나라가 걱정됩니다.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가 걱정이 아니라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가 걱정입니다. 어떤 전문가는 '북한과 미국의 전쟁이 말(언어)로 시작되었다.'라고 했습니다. 말로 전쟁하다가 잘못되면 무기가 오가게 됩니다.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이 처음에는 말로 전쟁했습니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이 미국을 따르지 않으니 진짜로 무력을 퍼부었습니다.

북한도 너무 큰 소리치면 미국에 망합니다. 북한이 미국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때 북한만 망합니까? 아닙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어려우니 파키스탄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습니까? 우리는 파키스탄과 다릅니다. 파키스탄은 미군이 그 땅을 사용하도록 잠시 허락한 것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당했는데, 지금 우리 한국에는 곳곳에 미군 기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북한을 치면 북한이 우리 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때 북한이 미군 기지를 공격했다고 하면 우리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 뒤에는 중국이 있습니다. 러시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잘 보는 일본이 있습니다. 그러니 내일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릅니다.

전쟁이 터지면 미국은 경제가 일어나게 되어 더 강해집니다. 미국이 싸우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미국은 전쟁을 하면 할수록 강한 나라, 부유한 나라가 되는데, 김정일씨가 그것을 모르고 계속 큰 소리 치다가는 큰일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 대통령께서 아무리 햇볕 정책을 하고, 남북한 관계를 좋게 하려 애써도 미국과 북한이 나빠지면 안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세워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18세 처녀 때에 왕이 되었습니다. 행정도, 통치도, 정치도, 경제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춘기 소녀로 뛰어다니며 놀다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 성경을 옆에 놓고 나라를 다스렸는데, 63년 간 태평성세를 이루었습니다. 그의 시대에 영국이 황금시대를 이룬 것은 하나님께서 세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것은 사람이 아무리 집을 잘 지어도 모래 위에 지은 것은 무너지듯이,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짜고 땀을 쏟아 나라를 세우고, 회사를 세우고, 집을 세우고, 인생을 세워도 주초가 예수님이 아니면, 방법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면 비가 내릴 때 지붕이 새고, 바람이 공격할 때 벽이 넘어지고, 창수가 날 때 집이 쓸려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위에, 말씀대로 세운 개인, 가정, 교회, 나라는 비가 지붕을 아무리 공격해도, 바람이 벽을 아무리 공격해도 하나님께서 막아 주십니다. 아무리 창수가 일어나도 하나님께서 그 집을 세워 주십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에서 25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할렐루야!

여러분과 저, 우리 교회, 우리 나라가 반석 위에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북한이, 남한이 예수님 기초 위에 말씀으로 나가면 흔들 자가 없을 줄로 믿습니다. 러시아가, 중국이, 미국이, 일본이 우리를 흔들 수 없을 줄로 믿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12장을 보십시오. 르호보암이 왕이 되어 어려움을 당하고 나라를 잃어버리고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집니다. 그가 겸손하니 하나님께 지혜를 얻어 나라가 견고하고 부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라가 부강하게 되자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애굽 왕 시삭을 그 나라에 보내셨습니다.

'그래, 이놈아. 네가 나의 종으로 섬기는 것과 시삭의 종이 되어 섬기는 것이 뭐가 나은가 판단해 봐라.' 하시며 싹 쓸어가셨습니다.

르호보암 왕이 회개하니 하나님께서 그의 목숨은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보물, 예루살렘의 보물을 다 빼앗기게 하시고, 그는 그저 허수아비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는 시삭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예배하러 갈 때 경호원들이 금 방패로 르호보암 왕을 에워쌌는데, 그 금 방패도 빼앗겼습니다. 아버지가 내려주신 금 방패를 빼앗기고 나니 놋으로 만든 방패로 호위를 받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황금이 놋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잘 지어졌다 해도 교만하고 하나님을 떠나면 그 때부터 황금 집이 놋 같은 집이 됩니다. 그러나 더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황금이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By the grace of God)』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건축자가 되었다는 이 말씀은 바울이 똑똑하고 유능했지만 겸손하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어 전문 건축가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봉사하고 말씀대로 충성해도 교만하면 위험합니다. 말씀대로 하면서도 '주님, 주님께서 도와 주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하는 겸손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정말 최고의 건축 전문가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따라 합시다.

"예수님 기초 위에, 말씀으로 세우고, 겸손으로 세우자."

그러면 우리를 흔들 자가 없을 줄로 믿습니다.

 

 

 

 

삶을 변화 시키는 기도

고전 3:10-15 / 김태환목사

오늘 읽은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 아주 특이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크리스천의 삶을 기초 위에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foundation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참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 각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모두가 다 그리스도라는 foundation 위에 각자의 집을 그렇게 짓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집을 잘 지었는지, 잘못 지었는지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 검증은 불로 합니다. 불로 그 집을 태워 보아서 다 타서 없어지면 그 사람은 예수를 믿긴 믿었지만, 크리스천의 삶을 잘못 산 것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예수를 믿은 덕분에 불 속에서 살아 나온 것처럼 겨우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끄러운 구원”을 얻는다고요. 불 속에서 겨우 살아 나왔으니까 머리카락이 그슬리고, 눈썹이 그슬리고 콧잔등에 검댕이 묻었겠네요. 이런 사람은 부끄러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 제 콧잔등에 검댕이 묻어 있으면 저는 부끄러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비록 부끄러운 구원이지만, 이런 경우에도 구원을 얻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굉장한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는 엄청난 은혜요 축복입니다.

불로 태워 보아서 타지 않고 그대로 남는 집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의 삶을 잘 산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foundation 위에 올바로 집을 지은 것입니다. 이 사람은 “보수를 받게 된다(14절)”고 했습니다. NLT 성경에는 이 말씀이 “If the work survives, that builder will receive a reward”라고 나와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reward”가 무엇인지 오늘 말씀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로 보아 그 reward는 주님의 한마디 말씀입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 하였도다(마태복음 25:21).” 우리의 삶을 마지막으로 심판하시는 주님께로부터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 하였도다”라는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 구원의 주이신 그분에게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 하였도다” 하고 칭찬 받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보상입니다.

문제는 그 집이 무슨 재료로 지어졌는지 불로 태워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행이도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지었다면 불에 타지 않겠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진 집이라면 모두 타서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지은 집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느 초등학교 학생이 “소나기” 라는 말을 가지고 말을 만들어 오라는 숙제를 해서 냈는데, 그 내용이 하도 기발해서 네티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습니다. “소-소방차가 불 난 집 불을 끈다. 나-나는 신나게 구경을 했다. 기-기절했다. 우리 집이었다.”

찰스 스탠리(Charles F. Stanley)라는 목사는 오늘 말씀에 “A Life-Changing Prayer”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삶을 변화 시키는 기도”라는 뜻이지요? 챨스 스탠리 목사는 아틀란타에 있는 First Baptist Church의 목사이고, “In Touch Ministry”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in Touch Ministry”는 30년이 넘게 100개 이상의 언어로 진행되는 유명한 라디오와 TV 방송 프로그램입니다. 그는 성경의 핵심을 현대인들에게 잘 요약해서 전달하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목사입니다. 챨스 스탠리가 오늘 읽은 말씀을 “삶을 변화 시키는 기도”라고 제목을 단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스탠리 목사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 한번쯤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저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주님의 심판의 날에 부끄러운 구원을 바라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불 속에서 겨우 뛰어나와서 머리카락이 그슬리고, 눈썹이 타고, 콧잔등에 검댕이 묻는 그런 부끄러운 구원을 바라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내가 지은 집이 불타 없어지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부끄러운 구원”을 얻지 않도록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부끄러운 구원”을 얻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길러나가야 합니다. J. I. Packer의 말로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을 길러야 합니다. J. I Packer의 책도 그렇습니다. 이 책이 백 만권 이상 팔린 책이라고 하는데, 이 책을 읽어 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 읽어 볼만한 명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만 읽으면 된다는 억지를 부리지 마세요. J. I. Packer의 책은 정말 읽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우는 교과서는 물론 성경입니다. J. I. Packer의 책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부교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 자연히 하나님을 배우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로마서 12:2에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우리는 그저 이 말씀을 암송하는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의 결정 과정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인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뜻인가?” 하고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세시는 하나님은 그만큼 우리들의 삶의 구체적이고 세밀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우리는 모든 삶의 결정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짓는 집은 불 속에서도 타지 않고 견딥니다. 그래서 상을 받습니다. 결코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않습니다.

 

둘째로,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않으려면, 주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3:10-15 말씀을 잘 보세요.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아니라 믿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 사람의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의 무게가 영원한 것인지, 아니면 일시적인지, 그리스도께서 검증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해 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주님, 이 사람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이렇게 기도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기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 사람의 삶이 불에 타서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것이 되도록 하나님께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해서 하는 기도 한마디가 그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 중에는 정말 신실하게 믿음생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여러분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합니까? 그런 사람을 보는 반응이 천태만상인 것 같습니다.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자기하고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괜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흥? 저만 믿나?” 하면서 못 마땅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반응이 어떻든지 간에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은 지금 불에 타지 않는 집을 짓고 있고, 우리는 불에 타서 없어질 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셋째로, “부끄러운 구원”을 얻지 않으려면, 우리는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태복음 12: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라디아서 2:20)”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게 되면 자연히 우리 삶에서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의 성품에서, 우리의 생동에서, 우리의 말에서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이 시간 성령님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성령님, 제가 성령님께서 맺게 하시는 열매를 맺도록 도와 주십시오.” 이 기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고자 하는,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성령님께 아뢰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날마다 이 기도를 빼놓지 말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 3:10-15 / 조용기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건물에 불이 나면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잿더미로 변하고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철골이나 시멘트로 지은 집은 뼈다귀가 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 주님의 상급 심판을 받을 때 세상 것으로 신앙의 집을 지은 자는 다 잃어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은 심판의 불을 능히 이기고 영구히 설 것이요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 집을 짓는 자들입니다. 인생이란 집을 잘 짓는 자도 있고 못 짓는 자도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 중에 서로 대조가 되는 것으로 이태리의 토스카 지방에 있는 피사의 사탑과 미국 뉴욕 맨하탄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있습니다. 이 두 건물을 비교해 보면 건물의 터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큰 바위를 기반으로 기초공사를 잘했기 때문에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사의 사탑은 기반이 약한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1174년 착공이래로 현재 5.2미터 기울어져 붕괴의 위험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터를 잘 닦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꼭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튼튼하고도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고 무너질 수 없는 터전위에 신앙의 집을 지어야지 흔들리는 터전위에 신앙의 집을 지으면 터도 무너지고 집도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본 론>

1. 집과 터 닦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집과 터 닦기는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인본주의적인 터를 닦아서 그 위에 자기의 미래를 건축하고 있습니다. 인본주의적인 터라는 것은 인간의 철학이나 학문이나 수양이나 노력이나 고행이나 종교 등 자립으로 이룬 터 위에 자기 인생의 집을 짓습니다.

성경 골2:8에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터를 닦아 놓은 것은 다 무너지고 남아있는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고대 국가들이 왕성했던 수도가 돌더미에 쌓여 있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은 인간이 닦은 터는 다 그와 같이 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 혼합주의적인 터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닦은 터에 인간이 보태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즉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으로 터를 닦아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더라도 인간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 아무리 은혜를 주시더라도 우리가 금욕하고 고행을 해야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가 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해도 할례를 받거나 종교의식을 집행해야만 그 은혜가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혼합주의적인 터를 닦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다른 터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집을 지을 터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고전3:11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과 부활의 터전은 영원하고도 절대 완전한 터인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몸찢고 피흘려 영원히 청산해 버려서 어떠한 죄악의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터가 되는 것입니다.

행4:11~12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터전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지 절대로 대가를 주고 살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놓은 엄청난 대 역사인 것입니다. 이 대역사의 터전위에 우리 사람이 아무것도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터전을 우리가 은혜의 선물로 받아서 그 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님이 닦아놓은 터를 양도 받을 수는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몸 찢고 피흘려서 이 떠를 닦아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자기의 생명을 받쳐서 닦아놓은 터를 인간의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대가를 지불하고 그 터를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닦아준 은혜의 선물로 우리가 받을 따름인 것입니다.

엡2:8~9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아! 내가 이 터 닦는데 도움을 베풀었다. 내 힘으로 터를 닦는데 보탬이 되었다. 이렇게 자랑하지 못하게 하나님은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터는 하나님이 홀로 영원히 닦아 놓은 터이고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은 이 터를 우리에게 공짜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여서 그 위에 우리가 인생의 터를 닦는 것입니다.

 

2. 집짓기

우리가 인생의 터 위에 집을 지을 때 성경은 금으로 짓는 집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금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보면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성소와 지성소는 모두다 금으로 장식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금으로 장식하는 것입니다. 금은 하나님의 신성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인 것입니다. 금은 바로 사랑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되 우리 신앙중심이 사랑으로써 실천하는 신앙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말하니까 슈바이처 박사처럼 아프리카 오지에 들어가서 일생을 바치는 그런 사랑을 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테레사 수녀같이 인도의 가장 가난한 곳에 들어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일생을 보내야 된다. 이런 것만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가장 우리 가까운 내가 있는 현자리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동정하고 인내하고 사랑하는 사랑의 생활이 금으로써 집을 짓는 것입니다. 어떠한 부부가 하룻밤을 자는 자는데 동시에 꿈을 꿨습니다. 꿈에 남편과 아내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일 내가 너희 집을 찾아올 터이니 나를 영접할 준비를 하라" 깨어나서 남편이 그 꿈 이야기를 하니까 부인이 화닥닥 놀라면서 "나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 내일 예수님이 찾아온다고 하니까 우리 대접할 준비를 하자" 집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그날 하루 종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안 오는데 해거름이 되어서 누가 문을 두드리거든요. 뛰어나가 보니까 고아 아이가 눈보라가 치는데 발이 퉁퉁 부어 얼어서 손을 호호 불면서 먹을 것을 좀 달라고 그럽니다. 오라는 예수님은 안 오고 무슨 고아가 왔느냐. 그러나 왔으니까 돌보아 주자고 들어와서 발을 씻겨 주고 옷을 따뜻하게 입혀주고 음식을 잘 먹여 주어서 신발을 신겨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둘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밤 10시쯤 되어서 누가 문을 두드립니다. 그런데 보니까 노인 한사람이 길을 가다가 눈 속에서 길을 잃어 버리고 허기에 처해서 벌벌 떨고 서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청해다가 따뜻한 음식을 먹이고 옷을 입혀주고 몸을 녹여서 보내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 왔어요. 그래서 둘이가 낙심을 하고 그날 밤을 자는데 똑같이 꿈에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내가 너희 집을 찾아갔는데 대접을 잘해 주어서 참으로 고맙니다." "주님, 안왔는데 무슨 오시기는 오셨어요?" "내가 고아의 몸을 통해서 너희 집을 찾아갔고 길 잃은 나그네 노인의 몸을 통해서 너희 집을 찾아갔는데 너희가 나를 대접하듯이 고아와 노인을 잘 대접해 주어서 내가 흡족했다. 고맙다. 너를 축복한다." 그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다른데서 찾으면 안 됩니다. 바로 내 이웃에서 예수님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 이웃에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되고 버림받고 고통당하는 그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베풀고 산다는 것은 바로 내 이웃을 나보다 못한 사람, 나보다 어렵고 고통스럽고, 괴롭고 외롭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을 베푸는 삶이 바로 예수님을 모시는 삶이요, 황금으로 집을 짓는 삶인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을 멀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여러분 이웃에 사랑이 필요합니다. 남편이 바로 사랑이 필요하고 아내가 사랑이 필요하고 자식이 사랑이 필요하고 이웃이 바로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일을 해야 사랑을 실천하고 금으로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한 자가 큰일에도 충성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뿐 아니라 금으로 집을 짓는 것은 절대 복종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인간의 이론을 내놓지 말고 절대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내게 아무리 지위, 명예, 권세, 돈에 손해가 가더라도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 금으로 짓는 집인 것입니다.

중국 선교사로 일생을 헌신했던 에릭 리델은 원래 영국의 육상 선수였습니다.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100미터 선수로써 세계에서 가장 좋은 기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올림픽 100미터 경주에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 확증했는데 경기하는 그날이 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릭 리델은 "나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절대로 주일은 뛰지 않겠다. 예배드리러 간다." 그러니 올림픽 위원회와 영국 황실에서까지 들고 일어나서 설득을 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습니다. "나는 죽음을 당할지라도 주일은 주님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 안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영국은 100미터 선수를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400미터 출전을 하는데 100터 선수가 400미터에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올림픽위원회에서 에릭 리델을 400미터에 출전을 시켰는데 군중가운에 한 사람이 고함을 치면서 손을 흔들기에 보니까 쪽지 하나를 들고 있거든요. 그 쪽지를 이 사람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에릭 리델이 그 쪽지를 보니까 삼상 2:30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 리델은 마치 하늘을 날 듯한 감격을 느끼고 그 종이쪽지를 읽고 400미터에 출전해서 1등을 해서 금메달을 영국에 안겨준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먼저 섬기니까 하나님은 자기 종목도 아닌 400미터에 날개를 달아 주어서 1등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황금 같은 신앙생활이란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이요,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은 금으로 인생을 짓는 삶인 것입니다.

시19:9~11에 "야훼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야훼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터전에 은으로써 일생의 집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은 구속함을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을 팔고 살 때 은을 주고 팔고 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1년에 한번 씩 성전에 반세겔의 은을 속전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은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은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잘 이해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받아들이고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은 거기에서 몸 찢고 피흘려 우리의 죄와 불의와 추악을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와 의와 영광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실천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이 세상 마귀와 세속을 다 멸하고 거룩함을 성결함과 성령 충만의 삶을 주었으니 그를 따라서 거룩하고 성결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고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육체의 병을 다 제하고 치료와 건강을 주셨으니 믿음으로 건강을 얻어서 살고 십자가를 통하여 저주와 낭패와 절망을 이기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주셨으니 그것을 믿고서 삶에 저주와 가난을 이기고 형통하고 살며 십자가를 통하여 사망과 음부를 멸하고 부활, 영생, 천국을 주셨으니 이것을 믿고 천국 백성으로 사는 이러한 구속받은 신앙을 가지고 철저히 자기의 새로운 신분, 새로운 자화상, 새로운 자기 지위를 확실히 알고 사는 삶은 은으로 집을 짓는 삶인 것입니다. 그냥 교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이나 의식적으로 믿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예수 믿는 정체성이 확립되어서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 치료받았다. 복 받았다. 천국 영생 인이 되었다. 예수로 말미암아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 된 것을 확실히 알고 이것을 믿고 이 가운데서 승리하고 이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도해서 죄악과 절망과 슬픔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삶을 사는 것은 은으로 집을 짓는 삶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벧전1:18~19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대속의 은총을 전파하는 것은 은으로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다음 보석으로 집을 짓는 것은 보석은 아름다운 장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61:10에 "내가 야훼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아름다운 신앙에 찬란한 보석으로 단장한 것은 보석으로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 보석은 무엇이냐, 승리의 은사가 있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하고 교회 열심히 나와서 하나님을 섬기되 성령의 은사가 없으면 보석이 없는 생활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옷을 단정하게 입으면 이쁘고 좋지요. 그러나 여성들은 귀고리도 달고, 금반지, 다이아몬드 반지, 팔고리, 발고리 여러가지 보석으로 장식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더 이뻐 보이고 아름다워 보인다구요. 우리 신앙생활이 예수 믿고 구원받고 살지만 성령의 은사가 있으면 우리 삶이 보석같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지혜의 말씀이 있고 지식의 말씀이 있고 영분별이 있고 방언도 하고, 방언 통역도 하고, 예언도 하고, 믿음의 역사도 일어나고 권능의 역사도 일어나고 병 고치는 역사도 일어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보석으로 단장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터전위에 보석으로 집을 짓는 자는 성령 충만하고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가득하여 성령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보석으로 집을 짓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12:7에도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11절에는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은사를 받아서 나누어 주고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보석으로써 집을 짓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어떠한 집입니까? 나무나 풀이나 짚은 불로 다 쓰는 땔감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은 고생하지 않아도 땅위에 그대로 솟아나는 것입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은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욕심이나 명예나 지위나 권세나 부귀나 쾌락을 따라서 살고 주님을 중심으로 서지 못합니다. 주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며 살려고 하는 이러한 사람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터전 위에서 인생을 살아가기는 살아갑니다. 주일날 교회도 나오고 십일조도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도 하는 것입니다.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도 교회밖에 나가면 곧장 세상 욕심을 따라 명예, 지위, 권세, 부귀, 쾌락을 따라서 사는 육신에 속한 성도의 생활인 것입니다.

딤전6:17~19에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 중심으로 살지 아니하고 세상 욕심이나 명예, 지위, 권세, 부, 쾌락을 따라서 인생을 살면 예수를 믿기는 믿었으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인생이 되어서 나중에 주님이 심판 하실 때 주님의 불에 다 타버리고 자기는 구사일생으로 불에서 끄집어낸 나무 동갱이 같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상급이 하나도 없고 수치와 곤욕을 당하고 말것인 것입니다.

 

3. 무엇이 금이나 은이나 보석과 나무나 풀이나 짚을 다르게 하는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이 우리 신앙을 금이나 은이나 보석과 나무나 풀이나 짚을 만들겠습니까?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여러분 땅속 깊은 곳에 있습니다. 땅을 캐고 바위를 깨뜨리고 들어가야 금이나 은이나 보석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우리 속에 잠재적으로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은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가 깨어지고 파헤쳐져서 우리 속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을 캐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캐낸 광물을 재련을 통해서 불같은 제련을 통해서 찌꺼기를 드러내고 순수한 금이나 은이나 보석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고난의 터널을 통하고 불같은 시련을 통해 자기가 깨어지고 회개를 통해 변화 받아야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은 신앙생활은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우리를 캐내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금을 캐내고 은을 캐내고 보석을 캐내는 것입니다. 금을 캐내려면 더 깊이 파헤쳐야 되고 은은 좀 덜 깊이 파고, 보석은 조금 덜 깊이 파도 우리를 파헤치고 깨뜨려야 보석을 캐내지요. 우리 신앙생활이 평탄하면 결코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은 신앙은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신앙생활에 시험과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 생애 속에 금 캐고, 은 캐고, 보석 캐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참고 견디고 변화 받으면 금 같은 신앙이 되고 은 같은 신앙이 되고 보석 같은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깨어지고 불을 통할 때면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깨어지고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사랑 못한 사람이 사랑의 사람으로 변하고 진실로 주님 중심으로 주님의 구속 사업을 믿고 은혜의 사람이 되고 성령 충만하여 보석 같은 은사를 받는 사람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벧전 1: 7에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고난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 믿는 사람으로 큰일을 한 사람은 인생에 큰 고통을 통해서 깨어지고 파헤쳐지고 변화받고 금이나 은이나 보석같이 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보물섬의 작가 스티븐슨은 결핵 말기의 고통 속에서 명작을 집필했고, 테레사 수녀는 평생 자신을 괴롭힌 만성두통을 참아가며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파스칼은 청년 시절부터 괴롭힌 온몸의 통증을 이겨내고 '팡세'를 남겼으며, 베토벤은 청각장애의 고통 속에서 불후의 명곡을 만들었습니다. 선교사 마틴은 폐결핵과 악전고투하며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프랑스의 화가 르느와르는 류머티즘의 고통을 이기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구세군운동을 주도한 캐더린 부스는 "내 삶에 있어서 단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결코 고난 없이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마찬가지로 나무나 풀은 작은 불씨에도 쉽게 타버리는데 금과 은은 아무리 큰 불에도 쉽게 타지 않습니다. 고난의 터널을 통하고 불 같은 시련을 통해 자아가 깨어지고 회개하고 통회하고 변화받는 금 같은 사람, 은 같은 사람, 보석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이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변화되고 살만한 곳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삿갓조개는 바위나 배 밑창에 붙어서 삽니다. 이 삿갓조개는 워낙 집착력이 강해서 바위를 깰지언정 거기에 붙은 삿갓조개를 떼낼 수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삿갓조개가 이렇게 강하게 붙어 있는 이유 중에 하나로 오랫동안 파도와 싸웠다는 점을 꼽습니다. 파도의 힘은 시속 500Km의 엄청난 바람과 비슷한 힘으로 조개를 때립니다. 이렇게 강한 파도 속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남기 위해서는 삿갓조개는 엄청난 살갓 힘을 키워서 바위에 바짝 붙었습니다. 파도가 너무나 세기 때문에 실려 나가면 죽거든요. 죽으라고 바위에 붙어 있으니까 점점 조개 살이 강해져 가지고서 나중에는 바위를 깨뜨려도 조개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많은 풍파와 시련을 통하면 예수님께 바짝 붙고 더 바짝붙고 더 바짝 붙어서 나중에는 어떻게 되어도 예수님께 떨어지지 않습니다. 진실로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은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찰싹 드러 붙어서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불같은 시련 많으나 겁네지 말지어다. 그 시련이 여러분과 나를 그리스도의 품에 깊이 안기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은 신앙이 되는 것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벧전 4:12~13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보석 중의 보석으로 여기는 것은 다이아몬드입니다. 바로 이 다이아몬드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보면 놀랍습니다. 자연 다이아몬드 아니고 인공 다이아몬드가 지금 많지 않습니까? 인조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과정은 탄소로 이루어진 숯을 1천 7백도의 고열로 가열한 뒤에 5만 기압의 무게로 압축시킵니다. 5만 기압이라고 하면 도토리를 집채 만한 쇳덩어리로 누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아름답고 영롱한 다이아몬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1천 7백도의 불로써 숯을 태우고 거기에 5만 기압, 도토리를 집채 만한 쇳덩어리로 누르는 기압으로 눌러 놓으면 까만 숯이 반짝반짝하는 다이아몬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죄가 많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한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 시련과 환난이 다가와서 불같은 시험과 환난의 어려움이 누르면 다이아몬드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라질 것 같지만 고난당할수록 우리는 더 강해지고 아름다워지고 변화받고 영광스러운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신앙생활에 따라오는 시험과 환난과 고난을 피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믿음으로 주의 품에 더 안기는 삿갓조개나 다이아몬드가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주님 오시는 날에 불로 시련해도 타없어지지 않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은 신앙의 집을 짓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은 지상에 있습니다. 깨뜨릴 필요가 없어요. 파헤칠 필요가 없어요. 그냥 발에 차이는 것이 나무나 짚이나 풀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쾌락이나 방탕은 연단 받을 필요가 없어요. 내버려 놓으면 들풀같이 자라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저항 없이 세상에서 이런것에 섞여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불타거나 썩을 것밖에 없습니다. 세상적 이고 정욕적이며 일시적인 것을 쫓아 살고 자아가 깨지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삶은 나무나 풀이나 짚과 같은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아무 공로가 없어요. 다른 사람에게 변화를 가져오지 않고 행복도 가져오지 않고 도움도 가져오지 않고 복음을 위한 영광도 나타내지 못하고 자기나 겨우 턱걸이 구원을 받아서 하늘에 올라가더라도 하나님이 상급심판의 불을 통하게 되면 이 세상 일생사라는 것이 다 불타 버리고 자기는 불구덩이 가운데 겨우 목숨만 건져 나오는 사람처럼 구원을 받게 되고 수치스럽게 되고 말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루쿠스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집정관으로 강력한 지도자이자 용맹스러운 군인으로 잘생긴 외모에 머리도 비상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그는 '은빛 목청을 가진 로마의 웅변가'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육신적이고 말초적인 욕구에 따라 사는 습관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집트로 원정을 간 그는 제국의 중요한 순간에 클레오파트라를 보고 그만 클레오파트라에 빠져서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서 순간의 쾌락을 위해서 그녀와 불륜관계를 맺고 자신과 세상의 지도자로서 갖고 있던 권력과 생명까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일시적인 세상의 나무나 짚이나 풀 같은 쾌락에 빠져서 일생을 불타버리고 잃어버리고 만 것 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일시적인 것을 따라 살면서 자아가 깨지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삶은 나무나 풀이나 짚이 작은 불씨에도 불타듯이 썩어져 없어지는 비참한 인생을 살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항상 경계해야 되는 것입니다.

 

<결론>

인간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으나 그의 생활이 그 신분을 금같이 은같이 보석같이 나무같이 검불같이 짚같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터는 아무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터지만 그 위에 세우는 나의 일생의 집은 금같이 지을 수도 있고, 은같이 지을 수도 있고, 보석같이 지을 수도 있고, 나무나 짚이나 검불로 지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영의 눈으로 보면 이미 우리는 금이요 은이요 보석이요 나무요 검불이요 짚으로 다 보일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 집 벗고 주님 나라에 갈 때 어떤 신분으로 갈까요? 최후의 심판의 날에 불구덩이에서 건져낸 나무토막 같이 구원을 받아 수치를 당치 말아야 할 것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가슴속에 손을 얹고 여러분을 돌이켜 보십시오.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다 동일합니다. 똑같은 영생의 터전위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금같이 사랑과 순종으로 사느냐, 은같이 복음 속에서 내 정체성을 가지고 복음 전도를 하며 사느냐, 보석같이 성령 충만하고 성령의 은사로써 남을 도와주며 사느냐,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과 쾌락을 쫓아서 나무나 짚이나 검불같이 바람 부는데로 물결치는 데로 살아가느냐. 우리 스스로를 깨달아 알아야 될 것입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우리는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앞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을 떠나가든지 주님이 강림하시든지 언제고 주님 앞에 우리는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터전위에 세우지 않는 집은 터전도 없으니까 통째로 불타서 지우고 잿더미 속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속하여 나무나 짚이나 검불같이 세속을 쫓아서 살면 불타버린 자기 일생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수치스럽고 곤혹스러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구원을 받아 살 수 있는 사람은 금으로써 인생의 집을 짓고, 은으로써 집을 짓고, 보석으로써 인생을 지은 사람은 칭찬과 찬양과 박수 속에 천사의 환호를 받으며 영원한 영광 속에 들어가게 되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 위에 우리를 불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터는 어떠한 다른 터로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만 터전위에 우리가 일생의 집을 지을 때 하나님이여 금으로 은으로 보석으로 집을 짓게 도와 주시옵소서. 금같은 믿음, 은 같은 믿음, 보석 같은 믿음을 가지고 우리 신앙생활을 하게 도와 주시옵시고 이 세속을 따라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의 포로가 되어 나무나 짚이나 검불로 살다가 일생을 마치지 말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은혜를 따라

고전 3:10-15 / 강성찬목사

한 여행자가 여행을 갈려고 현자를 찾아 상담 하였더니 한문 글자를 여럿 내 놓아며 한 자를 선택하라고하여 집에 알른 오고픈 마음에서 집 옥(屋)자를 선택하였더니 죽게 되겠다고 말해 주면서 옥(屋)자는 주검 시(尸) 에 이르 지(至)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합니다. 집은 주거지이며 또한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집하면 우리는 향수에 젖어 초가 삼간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실버들 늘어진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정든 임과 둘이 살짝 살아가는 초가삼간(최정자) 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나 초가삼간은 그렇게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가난의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초가삼간을 유지 보수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며 특히 화재에 취약한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함석으로 스레트로 콘크리트 벽돌로 아파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육신의 장막도 견고하고 아름답게 지어야 하지만 신양의 집은 더욱 견고하고 아름답게 지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받은 은혜대로 집을 세우는 세우는 자들입니다.

유능한 건축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큰 회사에서 일해 온 그는 드디어 은퇴할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의 사장은 그에게 집을 하나만 더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사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작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건축가는 집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마음은 딴데 있었습니다. 그는 별로 좋지 않은 재료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재목도 엉성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집을 지으면서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많은 일들을 잘 감독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드디어 집이 모두 완성되자 그 회사의 사장은 그를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집은 바로 당신의 것입니다. 여기 열쇠가 있습니다. 당신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해 준비한 선물입니다.” 건축가는 그 즉시 가장 좋은 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것과 일급 기술자들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몹시도 후회하였습니다. 만약 그 집이 자기를 위한 집인 줄 알았다면 아마….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자신을 위한 영적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재료들을 마련해 주십니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재료들을 써야 할까요?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다양한 선물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마음과 생각이 뒤따라야 된다는 사실도 잊지 맙시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남을 대신하여 영원의 집을 지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집은 언제나 내가 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천년간이나 그대로 유지되는 집이 있을까요? 실제로 미국 테네사주 매리빌이란 곳에 그러한 집이 있다합니다. 이 건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세상을 다스리게 될때까지 그대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집은 99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에 완성되었는데 특이 한 것은 집 안팎 어디에도 못을 사용한 흔적이 없고 문과 창의 틀을 제외하고는 나무를 쓰지 않았고, 대리석과 돌, 시멘트만을 사용해 벽은 두께가 5피트나 되도록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 집을 지은 니콜슨 부부는 이 집은 주님 오실 때까지 견딜 수 있노라 믿고 있다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삶도 이와 같다하겠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성도의 신앙을 계획하고 건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까마귀는 집을 짓는 데 명수라 합니다. 집을 빨리 지어서가 아니라 정교하고 튼튼하게 짓는 데 명수라 합니다. 까마귀들의 둥지는 여느 새들의 그것처럼 아무렇게나 틀어지지 않는다합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아야 하며 딱딱해서도 휘어져서도 안 되는 그런 특수한 나뭇가지들만으로 특이한 공법에 의해 짓는다합니다. 게다가 여간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 아니라 합니다. 더욱 어려운 점은 이런 안성맞춤의 재료가 아무 데나있는 것이 아니므로 알맞는 나뭇가지를 찾아내기 위하여 하루에도 수천 수만 번씩 날아다니는 노역을 감수해야함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합니다. 그렇다면 까마귀가 이런 노역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을까? 분명히 있다합니다. 다른 까마귀가 지어놓은 둥지의 나뭇가지를 빼내오면 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면 굳이 알맞은 재료를 찾는 수고도 멀리까지 날아다니는 애씀도 면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까마귀들은 절대로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까마귀 사회의 철칙이라 합니다. 비록 인간들의 눈에 어리석게 비칠지 모르는 까마귀 사회의 도덕률은 바로 집과 먹이만이 전부인 그들을 보호하고 생존을 유지시키는 근본적인 힘이 되고 있다합니다.

 

그리스도의 터 위에

인생은 벽돌 하나하나로 집을 짓듯이 지정의의 하나하나의 언행심사로 인생과 인격의 집을 짓습니다.

영국의 허드슨 테일러가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형은 국회의원에 출마해서 정치 지망생이 됐습니다. 동생 허드슨은 중국 선교사로 가고 형은 정계로 갔습니다. 먼 훗날, 영국의 역사가들이 이 두 사람을 기록할 때 테일러의 길고 풍성한 역사를 쓰는 대신 그 형은 허드슨 테일러의 형이라고만 썼다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터 위에 화려한 집을 지었고, 하나는 예수의 터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세계의 도서관을 메운 위인전과 공원과 번화가에 세워진 동상들의 주인공들이 역사의 뚜껑을 최후로 열어 볼 때, 누구의 터 위에 세워진 생애의 집이었는가가 문제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인생, 한번 밖에 못사는 생애, 영원한 예수의 터위에 불멸의 집을 지어야합니다.

집을 세우되 어느 터에 세우느냐는 각기 다릅니다. 세상의 사람은 그것이 재물과 명예와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죄를 사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 입니다.

 

은혜대로

한 불우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가난했으며 아사직전 이웃에게 발견돼 겨우 목숨을 건진 적도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굶주림에 허덕였습니다. 그때 한 구호단체가 그녀에게 구호품을 전달했는데 그 단체는 국제 연합아동구호 기금(UNICEF)이었습니다. 소녀는 구호 빵을 먹으며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장성해 세계적인 영화배우가 됐습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으로 그녀는 세상에 사는 그 날까지 이 단체의 홍보대사로서 전 세계를 다니며 굶주린 어린이들을 도왔습니다. 그녀는 늘 '절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준 분들을 위해 이제 내가 봉사할 차례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은혜를 은혜로 갚는 사람이 참 드뭅니다. 사람들 중에는 은혜를 받는 만큼 악으로 갚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남에게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가지고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배은망덕한 악인의 집안에는 악이 떠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은혜로 갚으면 은혜가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수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땅히 행할 바요 하나님의 복을 유업으로 얻는 길입니다.

 

금과 은괴 보석 같은 영적인 재료로

또한 집을 세우되 두 종류의 자재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금, 은, 보석'등 값비싸고 견고한 것과 '나무, 풀, 짚' 등 값싸고 허술한 것입니다.

바울은 순수하며 변치않는 영원한 것과 이에 비해 무미건조하고 일시적인 것을 비교 대조함으로써 거짓된 가르침은 쉽게 소멸될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고용주가 자기의 고용인에게 방까지 제공하는 시대에 살았던 어떤 경건한 스코틀랜드의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지 못한 농부를 위해 일하러 갔습니다. 그 농부가 자기를 돕는데 대한 댓가를 후하게 지불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그 그리스도인은 그와 함께 오랫동안 머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웃 사람이 그 믿는 자에게 왜 그렇게 일찍 떠나느냐고 묻자 그는 "그 집엔 지붕이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자기의 이상한 대답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옛 격언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께 규칙적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는 집은 마치 지붕이 없는 집과 같습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평안과 위로 그리고 안전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인도의 캘커타에 있을 때 마더 테레사의 '죽어가는 자를 위한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캘커타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녀가 청결하게 청소해둔 예배당에 데려가서 보살피고 있었다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갈 때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 그 집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지붕이 낮은데다 비좁았고 불빛도 희미했지만 그러나 사방은 청결했고 신선해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한 간호원이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매일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죽어가는 사람들만 이곳에 수용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들이 이곳에 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게 되면 그들은 소망을 가지게 되기 떼문에 결국 다시 살아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을 죽음의 집이 아니라 "소생의 집'으로 개조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불란서 남부에 새로 부임한 한 목사님이 자기 담당 지역을 알기 위해 방문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지역 사회의 지도자이며 좋은 인상을 끼치기를 간절히 바라던 한 부부는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직장에서 돌아 왔을 때에 그 부인이 말하기를 목사님이 왔다 갔다고 했습니다. "그가 무었이라고 말했소?" 남편이 물었습니다. "그가 묻기를 '여기 이 집에 그리스도가 사십니까?' 했어요. 그래서 나는 무엇이라 대답할지 몰랐어요."하고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남편의 얼굴이 이글어졌습니다. "왜 당신은 우리들이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그에게 말하지 않았소?" "그런 것을 묻지 않던데요."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린다고 왜 말하지 않았소?" "그것도 묻지 않았어요." 남편은 좀 더 화가나서 "당신은 어째서 우리가 교회에 출석을 잘한다고 말하지 않았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것도 또한 묻지 않던데요." 하며 부인이 목이 메어 울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한 가지만 물었어요. '여기에 그리스도가 사십니까?'라고..." 목사님의 질문은 새로운 힘으로 그 부부를 강타했습니다. 서서히 그들의 생애는 변화 되었습니다. 이 질문은 그대와 나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 가정에 사시는가요?

 

공적이 불타지 않게

미국의 6대 대통령이었던 죤 퀸시 아담스가 80세가 되었을 때 오래된 친구를 한 분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떨리는 손을 잡고 "죤 퀸시 아담스씨,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은퇴한 노 대통령은 그를 잠시 쳐다 보더니 "저는 아주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현재 거하고 있는 집은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그 기초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했지요. 지붕은 거의 다 걷혀졌고 담장은 대부분 허물어졌고, 바람이 불 때마다 집이 조금씩 허물어져 내리고 있습니다. 낡은 셋집은 이제 거의 아무도 살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저는 곧 그 곳에서 이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아주 좋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후서5:1에 바울은 현재의 몸을 거할 처소 혹은 '장막집'으로 비유합니다. 아담스 대통령이 웅변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이 장막집은 일시적이며 영원히 계속되지 않고 결과적으로는 변화와 쇠퇴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기다리는 새로운 집은 놀라우며 튼튼한 집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영광스럽기 때문에 현재의 불완전한 질그릇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죽는 순간 이 불멸의 장막 집은 영혼을 맞아 들이게 될 것이며 그 후 부활의 몸과 연합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복된 장래에 온전히 실현될 것이지만 이 사실은 이미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우리의 옛 '장막집'이 걷힐 때 우리가 하나님의 지으신 집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합니다.

'그날'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주의 날'(롬 13:12;살전 5:2-9;히 10:25)입니다.

그 날에는 각 사람의 공력에 따른 결과와 성격이 공개적으로 드러날 것인데 그 드러나는 방식이 '불'에 의해 결정되어지는데, 이는 '심판의 불'을 의미합니다.

 

상을 받도록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합니다

공적이 무익하여 없어져 버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을 갖고있지 못하므로 단지 구원만 받게 될 인데 그 구원도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아서 쉽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이 표현은 화염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사람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Morris).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쌓은 공적의 최종적인 시험이 불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을 선언합니다(13, 15절).

우리는 롯의 경우에서 그 좋은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이 세운 공력에 따라서 불로 심판을 받아 견디지 못하고 멸망당했으며, 그의 처 또한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연고로 심판을 받았으나 오직 롯과 그의 두 딸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창 19:15-29).

그처럼 그 세운 공력을 그리스도 위에 세우면 상급을 받을 것이요, 세상의 것에 세우면 불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14, 15절)>

그날에 하나님은 재판장이 되셔서 모든 자들의 일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판단하시되 그의 의로우심과 불로써 하실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은 양과 염소를 나누시고(마 25:32),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어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실 것입니다(마 3:12).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운 건물이 그리스도 위에 세운 것이면 상을 받되 그렇지 못하면 시험에 견디지 못하고 파쇄되어 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밴 다이크는 이런 유명하고 풍자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마의 어떤 부자가 천국에 가서 천사의 안내를 받아 가며 천국의 여기 저기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한곳에 와보니 참 아름다운 집이 있었습니다. 아주 근사하고 멋있는 집이었습니다. 이 부자가 깜짝 놀라면서 "도대체 이집이 누구 집이요." "그 집은 당신이 거느리고 있었던 당신 종의 집이오"천사가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이 천국에서 이런 집을 소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자가 이렇게 말하자 천사가 대답합니다. "천국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그가 보낸 자료로 이 집을 지었습니다." 한참을 더 가다 보니 무척이나 날고 허술한 집이 한 채 보였습니다. 이 집앞에서 깜짝놀라며 부자가 "도대체 이집은 누구 집이요?"라고 물었습니다. "당신 집이오"라고 천사가 대답하자 부자는 반문했습니다. "그럴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 집이 내 집일 수 있습니까?"천사가 다시 대답합니다. "천국은 오류도, 실수도, 착각도 없습니다. 이집은 당신이 보낸 그 자료로 지어진 집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물질은 어떤 일에,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습니까?

 

공적이 불타지 않고 상 받는 자리에 함께 하는 모두가 됩시다.

 

 

 

 

아기 돼지 삼형제

고전 3:10-15 / 이정선목사

어느 외딴 산 속에 엄마 돼지와 아기 돼지 삼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 돼지는 아주 게으르고 잠이 많았습니다. 둘째 돼지는 일은 하지 않고 먹기만 하는 먹보였습니다. 셋째 돼지는 매우 부지런해서 늘 집안일을 도와주는 착한 돼지였습니다.

엄마 돼지가 아기 돼지들에게 각자 살 집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첫째 돼지는 짚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대충 짓고는 집에 들어가 낮잠을 잤습니다. 둘째 돼지는 나무로 집을 지었습니다. 뚝딱뚝딱 집을 짓고 나니까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얼른 일을 마치고 밥을 먹었습니다.

셋째 돼지는 벽돌로 집을 짓기로 했습니다. 벽돌로 집을 짓는 일은 너무나 힘들고 시간도 많이 걸렸습니다.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는 셋째 돼지가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것을 보며 놀려댔습니다. 한참 후에야 셋째 돼지의 벽돌집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는 날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첫째 돼지는 자기가 지은 집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늑대가 숨을 크게 내뿜자 첫째 돼지의 집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첫째 돼지는 둘째 돼지의 나무 집으로 도망쳐 숨었습니다. 늑대가 주먹으로 집을 쾅 내리치자 둘째 돼지의 나무집이 부서졌습니다.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는 셋째 돼지의 집으로 도망쳐 함께 숨었습니다. 거기까지 쫓아온 늑대는 셋째 돼지의 벽돌집에 쾅 부딪쳤습니다. 그러나 벽돌집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단순한 동화이지만, 사실 매우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도 이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바울은 바울파 아볼로파 등으로 나뉘어 싸우는 고린도 교인들의 분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바울이나 아볼로는 심고 물을 주는 일꾼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밭이라면 바울이나 아볼로는 그 밭에서 일하는 일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밭이라고 하면서 또 집이라는 말을 붙여 넣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면 바울과 아볼로는 그 집을 짓는 목수들이 되겠지요. 집을 짓든 밭을 일구든, 어차피 하나님의 일꾼인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집에 비유를 하면서, 곧바로 바울은 성도의 삶을 집짓기에 비유합니다. 출발은 일단 앞에서 설명하던 심고 물주는 일꾼의 역할과 동일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자신의 역할로 시작합니다. 자신은 매우 뛰어난 건축자인데, 특히 집을 지어야 할 기초를 닦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바울이 닦아놓은 터 위에 집을 세워야 합니다. 어떤 누구도 바울이 닦아놓은 터 외에 다른 터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가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놓는 터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실하고 정확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도 하는 말이, 다른 복음은 없나니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이단이나 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들이 어지럽게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집을 짓는 데 있어서 기초를 올바로 닦는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한 건물을 지었다 하더라도 기초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 건물 전체가 헛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첫 단추를 꿰는 것과 같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그 다음에 하는 모든 일은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유한하며 절대자의 도움과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존재합니다. 종교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원시적인 형태의 종교도 있고, 매우 발달된 사상체계를 가진 종교도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 열정은 무엇보다도 강한 신념이 됩니다. 또 종교는 인간의 모든 삶을 지배할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절실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이 과연 그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거대한 고층건물 같은 그 사상체계가 과연 그들을 인간의 운명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외에 다른 터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아닌 다른 터 위에 세워진 집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바울은 말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다른 방법으로 인간은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터를 세우고 아볼로가 벽돌을 쌓아올렸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바울이 심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의 논점은 이제 그 터 위에 집을 세우는 각자의 삶으로 옮겨갑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대답에 매우 만족해하셨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면서 그 반석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입니다.

이제 각자가 자신의 교회, 자신의 집을 세워야 할 차례입니다. 기초공사는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든든한 기초공사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금으로 집을 짓기도 하고 보석처럼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자기 목숨을 내어주고 교회와 신앙을 지켰습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 아닙니까?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아들로 삼고 평생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는 자기 먹을 것을 먹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까지 해서 옥중성자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과연 보석처럼 빛나는 믿음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같은 터 위에 나무로 집은 짓기도 하고 풀이나 짚으로 짓기도 합니다. 예수는 잘 믿는 것 같은데 사는 것은 말씀과 거리가 멀어요. 새벽기도 마치고 돌아오다가 남의 집 호박 따온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얼마나 회개기도도 많이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도 많이 하겠어요? 얼마나 믿음이 좋아요?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직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에서 남의 집 담장에 열린 호박을 따가지고 간다는 거예요.

바울은 말하기를 각자가 살면서 세운 그 공력이 최후의 날에 밝혀질 터인데 불이 그것을 밝힐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불을 꼭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것이 무엇이든 그 믿음을 정확히 테스트해서 밝혀내는 것을 의미할 테니까요. 어쨌든 그렇게 살면서 지은 집이 불속을 통과한다고 해 봅시다. 나무나 풀로 지은 집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겠지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데, 가톨릭에서는 믿음과 행위 모두가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선행이 강조되고 과거에는 고행이 요구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어도 행위가 없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가톨릭의 주장입니다.

오늘이 바로 종교개혁 기념주일인데, 그러한 가톨릭의 주장에 반발해서 발생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의 모토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만이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믿음이 강조되고 그에 수반되는 윤리적인 삶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졌습니다. 사실 이것은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하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라고 했거든요. 믿음은 행위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과 행함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믿음이라고 인정받기 곤란하다는 말이지요.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는데, 바울이 행함을 소홀히 하면서 믿음만 강조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강조하게 된 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대주의 전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바울이 말하는 집을 짓는 비유에 의하면 재미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믿기는 하지만 형편없이 믿는 사람들의 삶은 불에 타 없어져버립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구원을 얻기는 보석으로 집을 지은 사람이나 지푸라기로 지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지은 집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벽한 터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두 번 살 수 없습니다. 다시 집을 지을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집을 지으면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은 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보석으로 지은 집도 있고 판자집이나 지푸라기로 지은 집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그 터 위에 세운 공력에 따라 상을 받는다고 했어요. 불에 타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얻기는 하지만 아무런 상이 없습니다. 물론 구원을 얻었다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큰 일입니다. 그리고 상급의 차이가 어떻게 천국에서의 삶에 영향을 줄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지푸라기 집 들고 갔다가 홀라당 터버리고 불 가운데서 구원을 얻는 것 같은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하루 하루 살아가는 모습은 벽돌 하나 하나를 놓는 일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게을러서 짚으로 대충 얼기 설키 엮은 집, 일하기 싫어서 나무로 얼렁뚱땅 세워 놓은 집은 늑대의 콧바람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우리가 그런 꼴을 당할 수는 없잖아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에 어울리는 튼튼하고 아름다운 집을 지읍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우리의 신앙고백에 어울리는 귀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또한 상급을 약속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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