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룻 3:1-5
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2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3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4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5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룻 3:1-5 / [룻과 보아스] 얼마 뒤에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아가, 내가 네 남편감을 찾아봐야 하겠구나. 그래야 너도 아늑할 보금자리를 꾸미지 않겠니? 2) 네가 보아스댁 아낙네들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주워오곤 하였다만 사실 그 집 주인 보아스는 우리 친척이 아니냐? 오늘 밤 그분이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부르고 있을거야. 3) 그러니 너는 목욕을 하고 화장을 하고 새옷으로 몸단장을 하고는 그분이 일하고 있는 타작마당으로 내려가거라. 그분이 저녁을 다 먹을 때까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거라. 4) 그리고 그분이 잠을 자려고 할 때 어디에 눕는지 잘 알아두었다가 그분 잠자리에 들어가서 발치께를 들고 거기에 누워라. 그 다음부터는 그분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5) 룻이 시어머니에게 `어머님께서 이르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본문은 룻기의 절정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룻은 2장에서 보아스를 만나고 그 만남을 시모인 나오미에게 나눕니다. 그러자 시모인 나오미는 룻과 보아스를 결혼시키기로 작정하고 룻에게 조언합니다.
나오미가 룻을 보아스와 결혼시키기 위해 조언(1-4) 나오미는 룻을 볼 때마다 늘 빚진 마음이 있는 듯합니다. 시모인 자신을 무턱대고 따라온 며느리 룻, 타국인으로 이방 땅에서 살아가는 며느리 룻에 대한 고마움과 안쓰러움이 나오미의 마음을 늘 무겁게 누룬 모양입니다. 어떻게든 젊은 룻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은 어미의 마음이 오늘 본문에 짙게 배어나옵니다. 그러나 사실 나오미도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은 허망한 처지이고, 몸종처럼 자신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룻이 없다면 나오미의 삶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텐데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보아스와 함께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조언합니다.
룻은 나오미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를 결정(5) 룻은 나오미의 진정성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오미가 그녀를 부르는 호칭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을 딸이라고 부릅니다(1:11, 12; 3:18). 히브리어에는 분명 며느리(창 38:11)라는 단어 칼라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미는 룻을 딸이라는 뜻인 바트라고 부릅니다. 자신을 딸로 대하는 시모를 볼 때마다 룻은 결심했을 것입니다. ‘나를 그렇게 받아주는 저 어른을 내가 평생 모시리라’라고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받아주고 용납해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을 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룻도 그런 시모의 조언이 고맙고 또 고마웠을 것입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이 한없이 우리를 받아주시는 그런 용납과 수용의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적용: 오늘 만나는 사람(가족, 일터 동료)을 나오미가 룻을 용납해준 것처럼 받아주면 어떨까요?
화는 습관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화를 가장 편하고 쉽고 화를 내도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제일 화를 많이 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한 사람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화내고 있지 않은지를 더 많이 돌아봐야 합니다. 혹시 그 사람들이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너무 편하고 쉽게 우리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지 않은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습관은 쉽고 편안하면 나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족을 너무 편하게만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 설 교 >
다 행하리다
룻 3장 5절 / 정팔현목사
룻 3: 5. 다 행하리다. -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는 율법으로서 '계대 결혼'(1: 11)에 대한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풍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의 가난한 과부가 베들레헴 성읍에서 소문난 부자인 동시에 덕망 있는 보아스에게 밤에 잠자리로 찾아가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룻이 보아스를 마음속으로 연모했을지라도 여자로서 남자에게 먼저 접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시어머니의 말에 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말씀대로 다 순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면면(面面)이 곧 평소 시어머니를 공경하는 룻의 효성의 발로라 볼 수 있다.
1]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 말씀대로
룻은 나오미의 제안을 모두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전혀 말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어머니의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약속했다.
룻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을 것이다. 이삭을 주우면서 많은 소년들도 보았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소년도 있었을 것이다.
룻은 무엇보다도 나오미를 지켜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오묘한 은혜를 체험하였다. 모압으로부터 베들레헴에 이를 때까지와 이삭을 줍는 동안 처음 만난 모든 사람이 친밀하게 대우해 주었다.
2] 내가
룻의 베들레헴에서의 생활은 매우 생소하였을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법은 두렵고 떨리기도 하였을 것이다. 나오미가 가르쳐주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나 배울 수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룻의 길을 순탄하게 지켜 주셨다. 모든 것을 맡겨버린 룻이다.
* 마 16: 24-27 –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3]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 다 행하리다.
룻은 나오미가 알려준 방법대로 모두 실천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어머니가 가르쳐주는 유대의 법을 배우면서 사랑을 깨닫고 지시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실천하겠다고 약속하였다.
* 출 24: 3 -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 신부로 단장하라. ( 3: 1-5 )
오늘 본문의 말씀은 나오미가 룻이라는 그의 며느리를 그 당시의 유력자였던 보아스에게 결혼을 시키기 위하여 행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영적인 신부된 우리들이 신랑되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해야 주님과 하나되는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문 3절에'그런즉'- 주님께서 사람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이때에 그 신랑을 맞이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곱게 단장하여야 한다'
신부가 신랑을 맞이할 때에 아무렇게 맞이하지 않는다. 곱게 단장한다. 왜냐하면 잘 보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아름답고,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부부간에도 서로 사랑을 받기 위하여 신경을 쓰야 한다. 그래야 정이 든다(남편이 직장에서나 밖에서 곱게 단장된 여인들을 본다. 그러므러 안에 있는 사람들도 곱게 단장해야 한다).
1. 목욕을 해야 한다.
① 왜 목욕을 해야 하는가?
목욕은 몸에 붙어 있는 더러운 먼지를 싯어 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신랑되시는 예수님과 하나 되는 일들을 위해서는 우리에게 뭍어 있는 더러운 것들을 씻어야 한다. 우리에게 뭍어 있는 더러운 때는 무엇인가?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갈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약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가 해야할 목욕은 내게 있는 죄를 씻는 것, 회개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신랑되시는 주님과 결혼시키기 위해서 무엇부터 해결하자고 합니까?
(사 1:18)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② 무엇으로 더러운 것을 씻어 낼수 있는가?
㉮ 예수 그리스도의 피
주님은 내게 붙어 있는 때를 벗겨 주시기 위해서 '보혈'이라는 세제를 주셨다.
(히9: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오늘 주님의 보혈로 목욕을 하자.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슴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물들게 해야 한다. 그리할 때에 우리속에 있느 온갖 더러운 것들에게서 우리가 정결함을 입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힘입어야 한다.
㉯ 하나님의 말씀
(요15:3)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시119:9)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그렇다. 우리가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보혈과 말씀과의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가 죄인되었을때에 그 죄를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의 씻음을 받는 것이라면, 말씀은 예수믿고 난 이후에 우리들의 삶속에서 범하는 죄에대한 씻음을 볼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보혈과 말씀은 늘 같이 역사하게 되어있고, 언제든지 효력이 있다.
2. 기름을 발라야 한다.
① 기름을 왜 바르는가?
신부의 단장은 머리를 보고 알수 있다. 옛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발라 윤이 나게하여 단장하였다. 기름은 왜 바르는가? 향긋한 냄새와 윤기를 준다(화장품을 바르는 것과 같다). 더 아름답게 한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 거듭난 우리들이 주님과 늘 동행하는 일들이 있기 위해서는 기름을 발라야 한다. 거듭난 내 심령에 말씀의 기름을 바르고, 기도의 기름을 바르고, 봉사의 기름을 바름은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다. 날마다 기름을 발라야 광택이 난다. 또한 성도에게 있어서는 성령 충만의 요소가 중요하다.
② 기름의 특징
㉮ 빛을 발하게 한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마5: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빛은 멀리 멀리 비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받은 은혜, 받은 은사를 멀리 멀리 전해야 한다. 우리의 사명은 어떤 것인가?
(행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기름은 치료제이다.
누가복음 10장에 여리고를 내려가든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을때에 사마리아인이 치료할 때에 기름을 상처에 붓고 치료한다.
(눅10: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야고보서에도 병든 자가 있을때에 이 기름을 사용할 것을 말씀하신다.
(약 5:14)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곧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죽어 있는 것을 살리는 일들을 해야 할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다.
㉰ 기름은 윤택하게 한다.
성도가 다른 사람을 대할때에 대화속에 가시가 돋쳐서는 안된다. 부드럽고, 어딘가 모르게 돋보여야 한다. 어느 신혼부부가 사랑이 꽃이 피기도 전에 신랑에게 군대소집 영장이 나왔답니다. 내일이면 입대하는 전날 밤에 신혼부부가 달빛 아래에서 손을 맞잡고 데이트를 합니다. 신부는 이별을 앞두고 신랑이 무슨 위로의 말을 해 주기를 기다리며 걸어가는데 목석같은 이 사나이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참다 못해 신부는 십오야 밝은 달을 쳐다 보면서 말하기를 "달도 밝지요"하자 신랑왈 "그거야 보름 달이거든"하고 내뱉었습니다. 무안해진 신부이지만 그래도 참고 용기를 내어 다시 말합니다. "가시거든 편지나 종종해 주세요?"하니 신랑이 "가 봐야 알지" 하더랍니다. 즉 성도로서 사람을 윤택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향기를 발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향이 나야 합니다. 몸에 향수를 뿌려서 나는 향이 아닌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향기라고 했다.
(고후2:15)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좋은 향기를 나타내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3. 새 의복을 입어야 한다.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웨딩드레스,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① 예수 그리스도의 옷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내가 구원받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사건인 것을 말씀합니다.
(갈 3: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 예수의 옷을 입지 않는 자는 어떠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 22:12)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지기 위해서는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은 내것은 감추어지고 오직 드러나야 할 것은 주님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려면 나에게 맞추어주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옷 입는다는 것은 그분의 것을 내것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② 성도의 생활을 의미한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성도의 생활을 의미합니다.
(골3: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성도다운 생활, 덕 있는 삶
4. 타작마당에 내려가야한다.
주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내 사랑을 가지고 주님께로, 사랑은 일방적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를 늘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께로 가야한다.
결 론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신랑되시는 예수님과 결혼하여 하나되는 일들을 위하여서는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새 옷을 입고,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야 한다.
시어머니와 어머니
룻 3장 1~5절 / 안효관목사
여자 홀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며 아들을 판사로 키워낸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노모는 아들 생각만 하면 밥을 한 끼 굶어도 배가 부른 것 같고, 잠을 청하다가도 아들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비록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그 아들로 인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아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이 노모가 한 해 농사를 마치고 손수 정성으로 기른 것들을 한 보따리 가득 싸서, 세상에서 제일 귀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 아들집을 찾아갔습니다. 아들 집에 도착해보니 아들 며느리는 집에 없고 손주만 혼자 놀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판사이기도 하지만 부잣집 딸을 며느리로 둔 덕택에 촌 할머니의 눈에 신기하기만 한 살림살이가 집안에 가득했습니다. 할머니는 이곳저곳 집안 구경을 하다가 안방 경대에 올려져 있는 가계부를 보게 되었습니다. 부잣집 딸이라 가계부 따위는 쓰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며느리가 가계부를 쓴다고 생각하니 며느리가 참 기득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계부를 살펴보았습니다. 각종 세금, 부식비, 의류비 등 섬세하게 쓰여진 가계부를 보면서 감격해 하다가, 문득 ‘촌년 10만원’이란 항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건 무엇을 산 것일까 하고 자세히 보니까 매달 같은 날짜에 지출한 것을 보고 시골에 사는 자신에게 보내준 용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순간 할머니는 머리를 뭔가로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한참을 서 있다가 아들에게 주려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이고지고 싸가지고 온 것을 다시 주섬주섬 다 싸서 고속버스를 타고 시골로 내려가고 말았습니다. 고속버스 안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아들에게서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아마도 집에 전화를 하다가 집에 놀고 있던 아들 녀석에게 할머니가 오셨다가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입니다. 판사 아들이 어머니에게 “오랜만에 오셨는데 왜 주무시지도 않고 그냥 가셨냐?”고 묻자 어머니는 가슴 속에서 폭탄이 터지듯이 대답했습니다. “아니 왜? 촌년이 어디서 자-.” 화를 내시는 어머니의 말씀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아들이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묻자, 할머니는 “무슨 말? 나보고 묻지 말고 네 방 경대 위에 있는 공책한테 물어보면 잘 알거다.” 그러면서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판사 아들은 집에 돌아와 가계부를 펼쳐 보고서 어머니가 왜 그렇게 역정을 내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내와 싸우자니 판사 집에서 큰 소리 난다고 소문이 날 것이고, 아내를 쥐어 패자니 판사가 폭력을 쓰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그렇다고 이혼할 수도 없고... 며칠을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아내에게 ‘처갓집에 다녀오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아내는 무슨 연고인줄도 모르고 친정에 간다니 좋아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처갓집에 도착한 후 아내와 아들 그리고 준비한 선물 보따리를 모두 집 안으로 들여보낸 후 사위는 마당에 그냥 서 있었습니다. 장모님이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아니, 우리 판사 사위 왜 안 들어오는가?”하고 묻습니다. 사위가 대답합니다. “촌년 아들이 감히 이런 부잣집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차를 타고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시골 할머니 집에는 사돈 내외와 며느리가 찾아와 납작 엎드려 ‘죽을 죄를 지었으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 달부터는 ‘촌년 10만원’이란 항목은 없어지고, ‘시어머니 용돈 50만원’이란 항목이 며느리의 가계부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여자가 결혼을 하면 두 어머니를 섬기게 됩니다. 한 분은 친정어머니이고 다른 한 분은 시어머니입니다. 친정어머니는 그냥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이 어머니는 생각만 해도 편하고 사랑이 느껴집니다. 시집살이에 고달프다가도 친정에 가서 어머니를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남편에게 아내로, 또 아이들에게 엄마로 살다가도 친정 엄마에게 가면 어느새 아기처럼 순진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인생의 쉼과 안식이 있는 곳이 어머니의 품입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다릅니다. ‘어머니’ 그러면 평화스럽고 내 마음이 안식을 얻을 고향과도 같은 생각이 드는 반면, ‘시어머니’ 그러면 긴장되고 뭔가 불안한 마음을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 고부관계, 고부간의 갈등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숙제’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지구가 없어질 때까지 절대로 풀릴 수 없는 갈등과 대립의 관계가 고부간의 관계라는 말입니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은 시어머니가 두렵거나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런 찬송을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시에미) 오나 겁 없네.”
고부간의 갈등은 정말로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숙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씀해 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입니다.
룻기의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성경 역사에서 사사시대는 불안과 혼란의 시대로 특징 지워 질 수 있습니다. 시대적인 상황은 불안과 혼란이 만연된 그런 시대였지만, 그런 시대적인 배경과는 달리 어려움 가운데서도 일상생활을 참되게 살아가는 한 가정의 슬픔과 기쁨, 그리고 애환과 고통을 뛰어넘는 사랑을 통하여 안정과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주고 있는 것이 룻기의 내용입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Johann Wolfgang Goethe, 1749-1832)는 룻기를 가리켜서 ‘가장 사랑스럽고 완전한 작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룻기의 주인공은 물론 룻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자기 나라 땅으로 이민해 와 살고 있던 유대인을 남편으로 맞아 결혼 생활하다가 일찍 남편을 먼저 여의고, 남편의 나라에서 끝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공경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룻기입니다. 우리는 룻기를 읽으면서 룻이라고 하는 이방 여인이 얼마나 훌륭한 며느리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룻이 그렇게 훌륭한 며느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시어머니를 공경한 것도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그보다 더욱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은 나오미의 며느리 사랑입니다.
우리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 고부관계는 상하관계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은 의무이기에 며느리의 공경과 대접이 극진할 때 시어머니도 아량을 가지고 며느리를 대해 주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잘 모시면 상대적으로 며느리를 향한 시어머니의 사랑도 커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룻기에 보면 그런 우리들의 생각을 과감하게 깨뜨리고 있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먼저 며느리에게 극진한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 사이에는 고부간에 흔히 일어나는 갈등은 없고, 사랑이 가득한 모습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 점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부간의 갈등, 그리고 교회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룻을 향한 나오미의 훌륭한 사랑의 모습은 며느리를 며느리로 생각하지 않고 딸로 여겼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마음 - 며느리를 며느리로 여기지 않고 딸로 여겼다는 그 아름다운 마음이 룻과 나오미의 관계를 원활하게 풀어 가는 열쇠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부를 때 언제나 “내 딸아”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 1절뿐만 아니라, 룻기에 여러 번에 걸쳐 며느리 룻을 “내 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아주 사랑스러운 표현입니다. 마치 시집간 딸이 안쓰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서 부른 어머니의 따뜻한 음성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스럽게 ‘내 딸아’ 하고 부를 수 있었기 때문에 나오미와 룻이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었고 사랑의 관계를 맺어갈 수 있었습니다.
혹 우리 가운데 며느리와의 관계가 원만치 않아서 마음고생을 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나오미와 같이 불러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딸과 같이 사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내 딸처럼 부른다면 관계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부를 때에 그 부르는 목소리나 명칭에도 나름대로 사랑의 감정을 충분히 넣어서 부를 수 있습니다. 며느리를 딸처럼 - 시어머니가 아닌 어머니의 마음으로 부르면 며느리들도 며느리가 아닌 딸의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대하게 되고, 바로 그런 사랑의 자리에서 갈등이나 불편이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내 딸아” 그렇게 불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딸처럼 여겨주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나오미와 롯의 이야기는 룻기 1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유다 베들레헴 사람이던 엘리멜렉이 그 땅에 흉년이 들자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가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멜렉이 먼저 죽고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게 됩니다. 나오미는 남겨진 두 아들을 결혼시키려고 하는데, 이방 모압 지방에서 유대 아가씨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나오미는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선택하게 됩니다. 어쩌면 남편을 잃고 아들 둘만 남은 상태에서 아이들이 가정을 이루고 살면 어머니가 마음에 좀 더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서둘러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맞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결혼하자마자 두 아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남편을 잃은 과부 세 명만이 남았습니다. 고대사회에서 남자의 역할을 아주 중요했습니다. 남자가 그 집안의 울타리였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은 후 과부 셋만 남은 나오미에게는 울타리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요, 가장 가난한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남의 집에 돼지 치는 자로 들어간 모습과 흡사합니다. 돼지 치는 가 되어 굶기를 밥 먹듯 하던 탕자가 아버지를 그리워하여 아버지께로 돌아갔듯이, 나오미도 가난과 고생의 자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고 타향살이를 정리하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두 며느리도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들을 데리고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두 며느리를 자신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데리고 가면, 자신에게는 고향이지만 며느리들에게는 타향살이입니다. 그것도 남편 없이 타향살이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두 며느리를 생각하면 나오미의 마음이 결코 편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따라오지 말고 그들의 고향 그들의 어머니에게로 가라고 권고합니다. 따라 오지 말라고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유다 땅에 간다 한들 너희에게 무슨 낙이 있겠느냐.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는 땅에서 너희가 무슨 재미로 살겠느냐.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서 새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라.’ 그것이 나오미가 두 며느리를 따라오지 말라고 만류한 이유였습니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이 이방 땅에서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나오미는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자신이 지금 그런 처지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또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시어머니를 따라가 봐야 가난하게 고생하며 살게 눈에 보듯 뻔합니다. 그런 삶에 며느리들을 데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들이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습니다.
나오미의 간곡한 만류에 며느리 하나는 친정어머니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겠다고 해서 결국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 두 과부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나오미와 룻은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논밭에서 추수하고 남은 이삭을 주워 그것으로 생활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며느리를 바라보면서 나오미는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다가 며느리에게 배필을 지어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며느리를 자기 딸처럼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오미가 보아스라는 훌륭한 청년과 며느리 룻을 맺어주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며느리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룻에게 그 방법을 자세하게 알려줍니다. 먼저 예쁘게 치장하게 합니다. 3절입니다.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이것은 마치 결혼식을 앞둔 신부가 치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는 ‘보아스가 타작마당에 나올텐데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보아스가 잠을 잘 때에 그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건 스캔들 날 이야기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불은 단순한 이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불은 겉옷입니다. 낮에는 겉옷으로 사용하다가 밤에는 이불로 사용하는데, 이 겉옷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 남자의 보호 아래로 들어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남자 몰래 겉옷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남자가 그 여자를 부도덕한 여자로 몰아세울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때 남자가 자기의 겉옷 아래 머물도록 허락하면 그는 그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룻이 보아스의 겉옷 아래 스스로 들어간다는 것은 모험입니다.
더구나 보아스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총각이었고, 그 지역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룻기 2:1절에 보면 보아스를 가리켜서 “유력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 지역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도 되고, 굉장히 부자라는 말도 됩니다. 그런 사람이 처녀도 아닌 과부를, 그것도 이스라엘 여인이 아닌 이방여인 과부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이겠다고 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그렇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보통 시어머니 같으면 며느리가 밖에 나가서 외간 남자를 만나는 것 같은 어떤 조짐이 발견되면 눈에 쌍불을 켜고 무슨 일 없나 하고 감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룻에게 오히려 스캔들이 날 일을 자세하게 가르쳐줍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룻과 보아스를 연결시켜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며느리의 재혼을 적극적으로 후원할 뿐만 아니라, 재혼할 수 있게 앞장서서 추진했던 사람이 시어머니인 나오미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나오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건 시어머니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려 깊고 자상하게 사랑을 베푸는 친정어머니 이상의 사랑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나오미의 훌륭한 점입니다.
자기 며느리가 혼자되었다고 해서 며느리의 재혼을 적극 나서서 추진하는 시어머니가 어디 많이 있겠습니까? 결혼에 대해서 많이 개방되고 자유스러워졌다는 오늘의 시대에도 그런 경우는 쉽지 않습니다. 손수 며느리의 재혼을 앞장서는 시어머니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거리가 되기에 충분할 만큼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거의 3,000년 전에 나오미라는 시어미가 자기의 며느리 룻의 재혼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파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나오미가 룻의 재혼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까? 룻을 며느리로만 생각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며느리가 아니라 딸로 생각했기 때문에, 혼자된 딸이 평생을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서 재혼을 추진한 것입니다. 나오미에게 있어서 룻은 결코 며느리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룻도 나오미를 친정어머니처럼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동서 오르바는 새로운 삶을 찾아서 고향 친정어머니에게로 돌아가자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너도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렇게 권면합니다. 그러자 룻은 나오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은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기 1:16-17)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아마 딸도 그렇게 말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며느리인 룻이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어머니는 이제부터 내게 시어머니가 아니라 나의 어머니친정 어머니 같은 분)입니다. 그러니 나는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그리고 룻에게 또 하나 훌륭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들레헴에 돌아와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절대로 혼자서 결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어머니에게 먼저 물어보고, 그리고 그 일을 마치고 와서는 어머니에게 꼭 그 이야기를 해 드립니다. 사소한 것까지도 와서 보고합니다. 룻기 2장에 보면,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추수가 끝난 밭에 나가서 이삭을 주어 그것으로 양식을 삼아 살아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룻이 나오미에게 ‘나로 밭에 나가서 이삭을 줍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자 나오미가 ‘내 딸아 가라’ 그렇게 대답합니다. 그래서 룻이 나가서 보아스의 논에서 이삭을 주웠습니다. 저녁이 되어 이삭 한 광주리를 주어가지고 오니까, 어머니가 묻습니다.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떤 일이 있었느냐’ 그러니까 룻이 보아스를 만난 이야기부터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자세하게 나오미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이렇게 룻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하고 나서 늘 어머니인 나오미와 상의하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작은 문제일지 모르지만 그 작은 것이 나오미와 룻 사이를 화목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이 바로 룻으로 하여금 좋은 며느리가 - 딸 같은 며느리가 되게 해 주었습니다.
나이 드신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가장 섭섭할 때가 바로 그런 때라고 합니다. 한 집에 살면서도 자식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 부모님들께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뭘 잘했느냐 잘 못했느냐 하는 것을 따지기 위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이 가정에 필요한 존재이고, 이 가정에 한 식구라는 것을 확인 받고 싶어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나이 드셨다고 뒷전으로 물러서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주 이야기를 해드리고, 여러 가지 상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도 자녀들이 뭔가를 상의하거나 이야기하면 잘못했다고 꾸짖거나 부모님들이 결정해 주려 하면 안 됩니다. 이야기를 들은 후에 “요즘 많이 힘들겠구나. 잘 될거야. 내 기도할게 힘 내거라.” 그런 말씀만 해 주시면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주위를 한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친정어머니 같은 분들이 많습니까? 아니면 시어머니 같은 분들이 많습니까? 여러분 주위에 딸과 같은 분들이 많습니까? 아니면 며느리 같은 분들이 많습니까? 또 우리의 가정은 어머니와 딸과 같이 사랑으로 묶어져 있는 가정입니까? 아니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같은 갈등관계로 묶어져 있는 가정입니까?
시어머니와 며느리 같은 관계로 맺어져 있는 가정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우들 사이가 시어머니와 며느리 같은 교회가 있고, 친정어머니와 딸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가 모두 어머니와 딸과 같이 서로 사랑으로 굳게 연합된 공동체여야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며느리가 딸같이 사랑스러울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먼저 시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시어머니 같았던 분을 어머니처럼 대할 수 있습니까? 내가 먼저 며느리가 아니라 딸처럼 생각하고, 딸이 친정 엄마를 존경하고 기쁘게 해 드리는 것처럼 그렇게 어머니를 먼저 생각하면 그것이 가능해 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랄 때에는 결코 그런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언제나 내가 먼저 해야 됩니다. 내가 먼저 어머니 같아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딸처럼 사랑스러워집니다. 내가 먼저 딸처럼 해야 내 주위에 있는 분들이 내게 어머니 같은 분들이 됩니다.
내가 시어머니 같으면 며느리가 괴롭고 힘든 것이 아니라 내가 더 힘들고 괴롭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먼저 시어머니 같은 마음을 빨리 버려야 기쁘게 여생을 살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시어머니가 같은 역할을 하려고 하면 교회생활이 기쁠 수가 없습니다. 친정엄마와 같이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사랑을 베풀어주면 나도 교회생활을 기쁘게 할 수 있고, 우리 교회도 사랑과 기쁨이 가득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에 시어머니 같은 분들이 많다면 저도 목회하기가 정말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지금까지 제가 부족한 것이 많아도 여러분들이 저를 아들처럼 딸처럼 사랑스럽게 보아주시고 기도해 주시기에 제가 행복하게 목회하고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시어머니 같이 하면 내 주의에 있는 사람은 모두 내게 며느리와 같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친정어머니 같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보살펴 주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스런 내 딸과 같아질 것입니다. 내가 며느리와 같이 하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은 모두 내게 시어머니 같은 사람들뿐입니다. 내가 딸과 같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어머니로 섬기며 존중해 주면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내게 어머니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내가 먼저입니다. 내가 먼저 변하면 내 주변이 변하고, 내가 먼저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룻과 보아스
룻 3장 1~13절 / 손상률목사
사도 바울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이루어지는 행복을 “큰 비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엡 5:32). 옛날 솔로몬 왕은 왕비가 60이요, 후궁이 80이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녀가 있었지만, 그의 사랑하는 자는 술람미 하나뿐이라고 하였습니다(아 6:8).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하만민 가운데 너희만 알았다고 하시며 우리를 그의 반려자로 삼았습니다(암 3:2). 본문 성경에 나오는 룻과 보아스의 관계도 솔로몬과 술람미처럼 신비로운 행복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1. 은혜를 추구하는 룻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곧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처지였기 때문에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은혜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1) 이삭을 줍는 일
19세기 프랑스 화가 밀레(J. F. Millet)의 그림 ‘이삭줍기’는 그의 대표작 ‘만종’과 함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종교미술입니다. 소박한 전원의 풍경과 노동의 신성함을 느끼게 하는 이 그림은 허리를 숙여 이삭을 줍는 룻을 연상하게 합니다. 본문 성경 2:2에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시어머니의 허락을 청원하는 태도에서 룻의 근면하고 성실한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이삭을 줍는 것 자체도 자기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노력은 내가 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보아스의 밭으로.
베들레헴 들판에 많은 사람의 농장이 있었지만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습니다. 2:3에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고 하였습니다. 보아스는 예수님의 모형이고, 그의 밭은 주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집을 나선 룻이 어디에 누구의 밭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발길 닿는 데로 갔을 것인데, 우연히도 보아스의 밭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솔로몬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였습니다(잠 16:9). 성령께서 우리의 걸음을 교회로 인도해 주십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처럼 이상적인 교회는 신령한 양식의 공급처가 됩니다.
3) 감동 깊은 은혜
보아스의 밭에는 모든 것이 풍요로웠습니다. 이삭을 주우러 갔던 룻은 거기서 상상할 수 없었던 많은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 밭에서 일하는 보아스의 권속들은 하나같이 평화스럽고 화목하였습니다(2:4). 식사 시간에는 모든 사람들이 룻과 같이 앉아 볶은 곡식과 떡을 배불리 먹게 하였습니다(2:14). 무엇보다도 주인되는 보아스의 사랑과 은혜가 베어나고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밭에서 일꾼을 거느린 사환으로부터 룻을 소개 받았을 때, 대번에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룻이 남편 사후에 시어머니에게 효도하며 그를 따라서 고국을 떠나 베들레헴까지 왔다는 것을 높이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축복하였습니다(2:11-12). 이에 감동한 룻은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2:13).
2. 보아스의 침소로 향하는 룻
룻기 3장은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로맨스의 장면이 소개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주님 사랑의 맛을 알고 더 가까이 나아가는 적극적인 삶을 묘사한 것입니다. 언제나 은혜는 받은 사람이 더 받게 되는 법입니다(요 1:16).
1) 시어머니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본문 말씀 1절에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나오미는 고국과 가족을 등지고 베들레헴까지 자기를 따라 온 룻을 자기의 딸처럼 아끼며 그의 앞길을 염려해 주었습니다. 여기 안식할 곳을 구하겠다는 것은 마땅한 배필을 만나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에게로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룻은 나오미의 뜻을 받들어 그의 말에 전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신앙생활에 올바른 지도자기 필요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는 세례 요한처럼(요 3:30) 자기는 뒤로 빠지면서 예수님과 연결되도록 이끌어 주는 사람이 참 좋은 멘토입니다.
2) 세심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지시한 내용들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성도가 반드시 갖추어야 될 기본적인 소양입니다. 본문 3절에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한 신부의 단장을 의미합니다(계 21:2). 목욕을 하는 것은 몸을 씻는 것으로써 회개를 뜻합니다. 회개하고, 죄 사함 받는 것은 성결케 되는 기본 요소입니다(행 3:19). 기름을 바르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케 함을 뜻합니다. 성경에는 성령을 기름으로 비유하였습니다(출 29:7, 슥 4:14). 기름은 불을 밝히는 것 외에도 부드럽고 유연하게 하는 역할을 의미합니다(마 25:7). 또 의복은 성도의 착한 행실을 뜻합니다(계 19:7). 이는 건전한 성도의 삶을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롬 13:14).
3)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룻은 몸단장을 끝낸 다음 시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보아스에게 접근하였습니다(6절). 보아스는 타작마당에 천막을 치고 침소에 들었습니다. 룻은 예고도 없이 보아스에게 다가가 발치 이불 밑에 누웠습니다. 참으로 무례하고 대담한 행동이었으나 룻의 입장에서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모압 여인이라는 천한 신분의 룻이 지체 높고 명망 있는 보아스를 정상적으로 만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적극적인 행동을 감행하여야 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기 때문입니다(마 11:12). 히브리서 4:16에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3. 보아스의 응답
밤중에 침소에서 룻을 만난 보아스는 그의 당돌한 행동을 나무라지 않고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하고 복을 빌었습니다(10절). 그뿐 아니라 룻이 요청한 대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이행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13절).
1) 준비하시는 하나님
믿음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준비해 주시는 사실을 체험하곤 합니다(창 22:14). ‘어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겠다고 고백한 룻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필요에 따라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거기 보아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엘리멜렉의 친족이요, 또 유력한 자였습니다(룻 2:1). ‘친족’은 룻의 기업을 무를 수 있는 법적 자격이 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유력하다는 것은 재력과 모든 능력을 갖춘 자라는 뜻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제도를 율법에 명시하게 하였습니다(레 25:25-28).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지만 그는 재산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포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보아스가 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4:6).
2)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기까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쉬지 않고 일을 하십니다(요 5:17). 나오미는 룻으로부터 보아스와 침소에서 나눈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18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히 11:6). 나오미가 예견한대로 보아스는 지체하지 않고 룻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일을 하였습니다. 적법하고 합리적인 수단으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완벽하게 이뤄내었습니다(4:9-12).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한 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동안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자입니다(출 14:13).
3) 크고 은밀한 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이루어내십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크고 비밀한 일입니다(사 7:14). 범죄하여 멸망받을 인간을 예수님의 보혈로 속량하시고 구원 얻게 하신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롬 3:23).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신 목적을 위하여 자기 백성들의 삶 속에 개입하시고 꿈같은 일들을 이루어 내십니다. 몰락한 엘리멜렉의 가정이 회복되고, 희망이 없었던 모압 여인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알 수 없는 크고 은밀한 일을 행하십니다. 예레미야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렘 33:3).
룻의 프로포즈
룻 3장 1~13절 / 류영모목사
I. 지난 줄거리 흐름
오래 전에 종영된 "파리의 연인"이라는 드라마에는 여자들을 설레이게 했던 프로포즈들이 나옵니다. 남자 주인공인 "사랑해도 되나요?" 피아노를 연주하며 했던 사랑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리고 "네 눈엔 내가 안 보이니? 이 안에 너 있다."는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명 대사가 되었습니다.
「빅 피쉬」라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에드워드는 사랑하는 여인 산드라가 황금 수선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미국 전지역에서 1만송이 황금 수선화를 공수해 옵니다. 그리고 산드라의 집 밖을 가득 채웁니다. 밖을 내다보다 깜짝 놀라는 산드라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산드라, 난 너를 사랑해. 너랑 결혼할거야."
오늘 본문엔 사랑스런 여인 룻의 프로포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기는 단 넉 장으로 구성된 짤막한 단편같은 성경이지만 룻기를 바라보는 눈(관점)은 참 다양합니다.
① 룻기는 한 이방 여인의 개종을 통해 구약에도 누구나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약의 사도행전이라고 합니다.(A.S. Herbert)
② 룻기를 국제결혼을 금지한 유대 율법에 반항하는 개혁 문학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③ 룻기는 다윗 왕권으로 정통성을 옹호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쓰여진 정복자의 논리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④ 약자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보여준 민중 문학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⑤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보아스는 그리스도를, 룻은 성도를 즉 교회를 의미한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여기 나오미는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성령님이라고 합니다. 혹 나오미를 목회자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룻기를 어두운 사사시대와 다윗 왕조의 역사를 연결하는 구속사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야 룻기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숨은 주인공이 보입니다. 그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암울했던 사사시대 남편들마져 그들을 돌봐주지 못하고 이 땅에 버려진(남겨진) 여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룻기의 주제입니다. 그래서 룻기는 하나님의 손에서 펼쳐지는 연약한 성도들의 아름다운 인생 역전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헷세드는 아무에게나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에겐 철저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세상적인 안일을 찾아간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헷세드는 순간적인 행복을 포기하고 신앙의 길로 들어선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을 얻기 위해 당당히 댓가를 지불한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룻기 2장에 들어오면서 룻은 은혜의 백성이 버린 은혜의 이삭을 줍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짓밟은 언약의 이삭을 줍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당신의 은혜의 이삭 한 줌이면 나는 당신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눈빛 한번이면 나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내 인생은 역전될 수 있습니다.
이삭 줍는 여인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으로 갑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분면 우연입니다. 그러나 그 배후엔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웃기 저자는 외칩니다. "보라, 보아스가 나타났다. 짠, 보아스 나타나다." 룻 앞에 등장한 보아스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룻의 인생을 역전시키는 은혜의 날개였습니다. 그래서 날개란 말이 2장에서도 나왔고 이제 곧 3장에서도 나올 것입니다.
보아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룻기에는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 가난과 절망, 고독과 외로움의 사건으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가 짠! 하고 나타나자 룻기의 이야기는 풍요와 회복의 이야기로 그 흐름이 바뀌어졌습니다. 희망의 햇살이 돋고 있습니다.
이제 보리 추수와 밀 추수가 끝나고 오늘밤 보아스의 밭에서 마지막 타작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룻은 더 이상 이삭을 주울 수가 없습니다. 보아스의 사랑안에서 지내던 40여일 행복의 순간도 마무리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룻과 보아스의 만남도 어려워집니다.
마지막 이삭줍기를 마치고 돌아온 며느리 룻에게 나오미가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합니다. 지난 며칠동안 시어머니가 무슨 작정 기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룻은 가질 수 있었습니다. 며느리의 손을 꼭 잡은 시어머니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3장 1절 - 드디어 나오미가 말을 합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보리타작을 하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단정한 예복을 입고 타작 파티가 끝날 때까지 몸을 숨겨 있다가 보아스가 야영 침실에 들어가면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리하면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지난 줄거리와 오늘 3장 본문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흐름을 잡으셨습니까?
II. 룻의 프로포즈(3:1-7)
1절을 보십시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여기서 룻을 복되게 할 안식이 뭘까요? 가정을 이루어 얻는 행복을 말합니다. 시편 23편에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안식(메누하)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이 안식을 잃어버렸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남편을 얻어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신앙적, 환경적 복을 누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가 누구를 염두에 두신 걸까 궁금해 하는 룻에게 보아스 얘기를 합니다. 그는 우리 친족 중 기업을 무를 고엘 중 한 사람이라고 일깨워 줍니다. 그리고 "보라" "힌네"라고 합니다. 2:4에서 마침이라고 번역했던 바로 그 말입니다. 제가 "짠"이라고 했던 그 말을 여기서는 "보라(behold)"라고 번역했습니다. 잔뜩 호기심이 차 있는 룻에게 "짠"하고 보여주는 인물이 보아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타작을 마치는 날 밤이 늦도록 먹고 마시고 파티를 여는 풍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파티가 늦어지면 성문이 닫혀 성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날밤은 주인도 야영 캠프에서 잠을 자는 겁니다. 물론 일꾼들과는 다른 곳에 별도로 준비가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이날 밤 거사를 위해 어떻게 준비할 것을 꼼꼼이 일러줍니다. 먼저 몸을 깨끗이 씻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몸에 기름을 발라 몸을 매끈 매끈하게 하랍니다. 다음엔 결혼할 때나 입는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이런 준비는 결혼식 때나 하는 행위입니다.
이제 어둠이 깔리면 몸을 숨겨 먹고 마시는 파티를 지켜보고 주인 보아스의 침실을 잘 확인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보아스가 누워 잠자는 곳으로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어라고 합니다. 히브리 문학에서 "발"은 성생활에 대한 완곡한 표현합니다. 그날 밤 두 사람 사이에 첫날밤 행사가 있을 수 있겠구나 독자들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러한 나오미 와 룻의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성경 어디에 여성이 결혼을 위해 남성을 이처럼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일이 있더란 말입니까? 과부 시어머니가 과부 며느리에게 부자 영감을 유혹하도록 치밀하게 지시를 합니다. 깊은 밤 혼자 사는 남자의 이불 속으로 단장한 젊은 여자를 밀어 넣다니? 나오미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젊은 여인 룻은 시어머니의 이런 부도덕한 계획을 그대로 따릅니다. 독자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룻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일순간에 무너집니다. 젊은 과부가 야밤에 남자의 이불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다니?
오늘 우리의 문화적인 시선, 도덕적인 잣대로 본문을 보면 이처럼 불순하게 보이는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인 관습으로 보면 이건 대단히 정중하고도 겸손한 프로포즈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된 행위였습니다. "당신이 나를 아내로 삼아 침실의 여주인으로 받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는 정중한 제의였습니다. 멋진 프로포즈였습니다.
룻은 지금 아무에게서나 이런 프로포즈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는 당시 법이 정해주고 성경이 인정해준 남편될 자격이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룻기 어디에서도 나오미와 룻의 이런 계획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성경보다도 더 거룩한 척하지 마십시요. 이런 제안을 받은 보아스도 룻의 행동을 부도덕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사실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다"는 이 말이 성관계를 요구한 것인지 침묵의 프로포즈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룻에 저자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 버립니다. 상상에 맡겨 주었으니까 제가 한번 상상해 봅니다. 제 상상에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프로포즈를 한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왜 이렇게 정중한 예의를 갖추면서도 대단히 적극적으로 프로포즈를 한 것일까요?
첫째는 나이든 보아스의 입장을 세워드린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룻을 좋아하고 있다는 심증을 여러 곳에서 발견했습니다. 내심 좋아하면서도 나이 들고 젊잖은 사람으로서 젊은 여자에게 먼저 프로포즈를 하기가 쑥스러웠을 것입니다.
둘째 보아스는 기업 무를 친족 중 최우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업 무러줄 것을 요청해야 한다면 제일 순위자 그 사람을 찾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아무리 기도를 해 보아도 하나님이 정해준 사람은 보아스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중 사람 보아스 - 그러니 기업 무를 제일 순위자가 아니라는 현실에서 나오미는 바로 이런 적극적인 프로포즈를 선택한 것입니다.
보아스의 결정에 모든 것을 위임하는 것입니다. 백지 위임장을 맡겨 주는 것입니다. "당신 뜻에 우리는 모든 것을 맡깁니다. 문제가 있어도 당신이 원했다면 당신이 물어 가십시요.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그것으로 우리는 O.K.입니다." 이런 백지위임 프로포즈를 보아스는 기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룻기 저자는 이 프로포즈를 성경 최고의 프로포즈로 해석한 것 같습니다. 음탕한 여인 룻이 아니라 지혜롭고 향기로운 여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고부간에 함께 제안했던 이 프로포즈는 보아스의 신앙과 인격에 대한 신뢰가 없었더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보아스의 영적, 현실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보아스에 대한 무한한 신뢰! 백지위임을 했을 때 멋진 작품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 자신을 단정하게 준비하고 그분에게 몸을 던지는 헌신! 바로 이런 자세와 태도가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도들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맡길 때 신랑되신 예수는 우리를 짓밟지 않습니다. 그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분께 나를 드리지 못합니다. 나의 시간을 바치지 못합니다. 나의 물질을 맡기지 못합니다. 내 인생계획을 위탁하지 않습니다.
III.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3:8-9)
타작 파티를 마치고 곡식 단 더미에서 잠을 자던 보아스가 한밤 중 뭔가를 느끼고 화들짝 놀라 일어납니다. 돌이켜 보니 자기 발치에 한 여인이 누워 있는게 아닙니까? "당신 누구요?"라고 물었겠지요. 발치에 누웠던 여인이 머리를 만지며 일어나 단장을 합니다. "저는 당신의 여종 룻입니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당신은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2:13에서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를 만나 자기를 소개할 때 자신을 "당신을 하녀"라고 합니다. 여기 하녀(쉬프하)는 신분과 존재가 달라 결혼 같은 건 엄두도 못낼 관계입니다. 그러나 본문 3:9에서 말하는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시첩(아마)으로 결혼이 가능한 관계를 말합니다. 자신의 정체의식에서 상당히 당당해졌습니다.
얼마만큼 당당해졌느냐?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 여종 나를 덮으라고 요청합니다. 여기 옷자락은 2:12에서 나왔던 "날개"라는 말과 원문상 꼭 같은 말 "카나프"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베들레헴에 온 것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들어온 것이라고 격려합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룻은 보아스에게 이제 당신의 날개를 펴 벗은 나를 덮어 달라고 합니다.
지금도 중동지방에서는 남자들이 프로포즈를 할때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는 풍습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옷자락으로 자신을 덮어달라는 것은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결혼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부를 지도할 때 수련회에 가서 보면 가끔 날씨가 쌀쌀한 밤 여자 청년이 남자 청년의 상의를 걸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당한 수준에 접근이 된 겁니다. 얼마간 지나다 보면 결혼하겠다고 찾아옵니다. 옷을 함부로 줄 것도 아니고 옷을 걸쳐 준다고 함부로 입어도 안됩니다.
에스겔 16:8에 보면 하나님의 옷자락으로 벗은 이스라엘을 덮어 신부로 맞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어 달라는 말은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겁니다. 날 책임져 달라는 겁니다. 나의 남편이 되어 나를 따뜻하게 해 달라는 정중한 청혼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기업을 무를 자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기업 무르기와 결혼을 동시에 요구한 것입니다. 룻은 자기 백성과 신을 버리고 여호와를 찾아 왔습니다. 죽은 남편의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룻은 끊어질 위험에 처한 유다 가문의 대통을 이어가는 여인으로 쓰임받고 있습니다. 그 가문을 타고 메시야가 이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룻의 지금 행동은 성적 욕망이나 단순히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업에 대한 거룩한 열망일 뿐입니다. 영적 유산, 하나님의 기업, 구원의 축복을 이어가는 충성되고도 신비한 행동입니다.
룻기에서 옷자락으로 룻을 덮는 일 그리고 기업을 무르는 고엘 제도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피묻은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어 나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잃어버린 천국기업을 무러 주시고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룻의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신비한 연합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IV. 현숙한 여인 룻(3:10-11)
룻의 당당하고 적극적인 프로포즈를 받고 보아스는 "내가 네 말대로 다 행하리라"는 말로 프로포즈를 받아 들입니다. 그리고 여러 말로 룻을 격려합니다. 보아스는 칭찬과 격려 그리고 축복의 천재입니다.
① 먼저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복을 빌어 줍니다.
② 둘째 볼수록 귀한 헤세드의 사람이라고 칭찬합니다.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나쁜 인상을 받았는데 볼수록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엔 인상이 좋았는데 갈수록 나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 인상은 좋지 않았는데 겪어갈수록 좋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룻은 좋은 인상으로 만났는데 볼수록 더욱 귀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겁니다.
③ 셋째로 걱정스러워하는 룻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청을 거절하지 않겠다는 거지요.
④ 넷째로 성읍 백성이 함께 인정하는 "현숙한 여자"라고 칭찬합니다.
우리 말로 "현숙한 여인"이라고 하면 성경이 가지고 있는 본래 의미와는 다른 뜻으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조용하고 얌전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2:1에 보아스가 "짠" 나타날 때 그를 일컬어 유력한 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유력한 자 - 깁보르 하일은 능력도 있고 성품도 아름다운 실력자라는 뜻이었습니다.
여기 현숙한 여자 - 에쉐트 하일은 깁보르 하일(유력한 자)과 같은 말입니다.
남자는 깁보르 하일이요 여자는 에쉐트 하일일 뿐입니다. 능력있는 여장부라는 뜻입니다.
깁보르 하일과 에쉐트 하일 - 능력있는 남자와 능력있는 여자의 만남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어떤 CF의 카피를 따르면 그때 우리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 그것 내 스타일이야!"
솔로몬의 잠언 마지막 주제가 현숙한 여인입니다. 잠언 마지막장 31:10-31에 보면 에쉐트 하일에 관한 설명이 잘 나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10절)
① 에쉐트 하일은 살림을 잘하는 여인입니다.(11절)
② 에쉐트 하일은 가난한 자에게 선을 베푸는 여인입니다.(20절)
③ 에쉐트 하일은 남편으로부터 신뢰를 받으며 그 남편을 존귀하게 높여주는 여인입니다.(11,23절)
④ 에쉐트 하일은 말이 아름다워 그 입에 헤세드가 넘치는 여인입니다.(26절)
⑤ 에쉐트 하일은 맡겨진 일에 성실한 여인입니다.(27절)
⑥ 에쉐트 하일은 공동체안에서 언제나 칭찬을 받는 여인입니다.(31절)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눈빛을 보니 자신을 가리키며 그런 여인 여기 있다! 하는 눈치입니다. 여러분 모두 깁보르 하일, 에쉐트 하일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룻의 아름다운 프로포즈로 보아스를 만난 사건이 우리 성도들이 신랑 예수를 만난 사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보아스를 만난 룻의 인생은 가난에서 풍요로 반전됩니다. 버려지고 남겨진 인생에서 선택받은 인생으로 역전됩니다. 이 시간 신랑 예수 앞에 우리의 영혼을 단정하게 준비하여 백지위임 프로포즈를 하시지 않겠습니까?
룻과 나오미의 투쟁
룻 3장 1~11절 / 이종철목사
성의 정치학
가난한 자들에게 인생은 소풍이 아니라 전쟁입니다.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벌어지는 물을 찾아 이동하는 물소 떼의 장관이나, 사자들이 약한 짐승을 공격하고, 이를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동물들의 생존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단지 인간이 다른 것은 서로 돕는 능력이 좀 뛰어나다는 데 있을 뿐입니다. 이런 도움마저 없을 때 각자도생이라는 말처럼 인간은 악착같은 생존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지금 룻과 나오미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땅도, 재물도, 도울 남자도 없이 과부 두 명이 그 생존을 이어갑니다. 그러다 이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나타났습니다. 보아스입니다. 이들은 살찐 먹잇감인 보아스를 노리는 두 마리의 하이에나 같습니다. 영화에 자주 나오듯 두 명의 여 주인공(버디 무비)이 치밀한 계획으로 악당을 무너뜨리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나오미의 목적은 1절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룻의 안전과 자신의 노후보장입니다. 다른 어떤 고상한 목표가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약간은 냉소적으로 말씀드리는 이유는 도덕적이나, 신앙적으로 말씀을 보려는 의도를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메시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에 대해서 우리 친족이며(3:1), 기업 무를 자(2:20)라고 합니다. 진짜 그런가요? 먼 친척일 수는 있지만 강력한 의무와 연대로 묶일 수 있는 그런 친척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룻에게 엉뚱한 짓을 지시하지 말고, 본인이 대낮에 찾아가 요청했어야 합니다. 거절당할 우려가 충분했기에 나오미는 야밤에 보아스를 기습하는 방식을 취하도록 합니다.
룻도 이에 동조합니다. 이는 성적으로 유혹하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오늘 말씀에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서술되었습니다. 거의 19금 수준입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가기 전에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바꿔입었습니다. 보아스가 술에 취해 타작마당에 누워 있는데 그 이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7)고 성경은 완곡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냥 옆에 누운 정도가 아닙니다. 발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보아스의 알몸에 누운 것입니다. 나중에 보아스가 룻을 알아보고는 그 밤에 돌려보내지 않고 그 상태로 하룻밤을 새고 새벽에 돌려보냅니다.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14) 룻과 보아스가 그냥 손만 붙잡고 있었겠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이 장면은 매우 낯 뜨겁고 신앙적인 유익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성을 이용해서 자기 목적을 달성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는 현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의 관점이지 성경은 성적인 순결이나 정결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와 성적인 관계를 했으니까요. 조선시대 기준으로 보면 짐승만도 못한 짓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적 정결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이해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성적인 순결을 매우 강조해 왔습니다. 1990년대 미국에서는 ‘프라미스 키퍼스’라고 하여 성적인 순결 운동이나, 혼전 순결을 강조하는 운동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보수적 신앙인들이 사회가 타락했다고 말할 때 제일 먼저 이 성적인 타락을 그 대표적 증상으로 듭니다. 중세 교회에서는 마리아의 ‘동정녀’ 전통을 계승하여 결혼하지 않고 성적인 정결을 지키는 것이 신앙의 미덕이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여자가 남성에게 유혹거리가 된다는 이유로 히잡이나 부르카로 머리칼이나 온몸을 감싸 노출시키지 않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이 간음을 금지하고, 성적인 정결을 요구하는 첫 출발은 이런 이유들에 있지 않습니다. 죄는 무엇보다 관계성입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습니다. 간음이라는 것은 타인의 소유를 빼앗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자식의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또한 서로에 대한 신뢰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립니다. 인간에게 성은 자기 자존심이고 자기 마음입니다. 가난하고 약하다는 이유로 성폭력을 당하거나, 성을 상품으로 팔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고 싶은 사람도 없습니다. 성적인 죄는 근본적으로 타인이나,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는 관계성의 죄입니다.
그러므로 룻이 지금 자신의 성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 순결 이데올로기로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조선시대처럼 수절을 해야 한다거나, 순결의 고고한 가치를 성경은 찬양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더 근본적인 죄는 가난에 있습니다. 지금 룻에게는 살아야 한다는 ‘생명’이 더 높은 가치입니다. 11절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는 식의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높습니다. 현숙하다는 단어가 마치 조신하고 순결하다는 의미로 잘못 읽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숙하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헬라어 번역 성경은 ‘두나미스’ 곧 ‘능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영어 성경은 ‘worthy’를 사용하여 ‘가치 있는’ 정도로 번역합니다. 현숙한 여인의 표상은 잠언서 31장에 예시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정결한 여인이 아니라 집안 살림을 잘 하는 유능한 여인을 말합니다. 룻은 조신한 여인이 아니라 의리 있고 집안을 잘 먹여 살리는 여인이고 그것을 현숙하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경이 바라보는 여성 개념이 다릅니다. 아가서에서 솔로몬과 사랑을 나누는 술람미 여인은 조신하고 얼굴 예쁜 여자가 아닙니다. 결혼하기도 전에 적극적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입니다. 여인에게서 정결은 한 사람과만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밖에서 일을 많이 해서 얼굴이 타 거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네 목은 다윗의 망대”(아4:4)와 같다고 노래합니다. 여자에게 망대 같다고요? 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꼿꼿함을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여성을 바라보던 관점이나 순결이데올로기는 남성 가부장제가 낳은 폐해입니다.
신데렐라 콤플렉스?
또 한 가지 언급할 것은 가난한 여자가 부유한 왕자와 결혼하여 신분상승 하는 류의 신데렐라 콤플렉스 문제입니다. 룻기는 깨어 있는 여성이나 페미니스트들이 보기에는 좀 거부감이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룻기를 “여성들의 정신 건강에 해로운 책”이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입니다. 여성은 수동적인 존재로 부유하고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 구원을 얻게 된다는 식의 설정은 여전히 현대 드라마에서도 자주 통용됩니다.
보아스는 땅이 있고 재산이 있는 유력한 자입니다. 룻을 ‘내 딸아’라 부르는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나이가 있어 보입니다. 나중에 룻과 정식으로 결혼하여 가정을 가진 것을 볼 때 홀로 있는 상태였거나, 당시 또 하나의 아내를 둘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였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으니 룻과 나오미가 노렸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현대적 기준으로 룻을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전형, 이런 식으로 비하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는 시대적 상황이 있습니다. 고대 사회는 여성들의 활동이 제약되고, 특히 재산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던 시대였습니다. 심할 때는 노예와 같은 취급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고대 사회의 모든 여성들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성해방 전통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제라는 엄혹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여성이 주체적으로 독자적 생존과 나름의 해방을 이어갔는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성신학자 트리블은 룻의 행동을 “전적인 용기로 인한 구원”이라고 평가합니다. 룻은 거절당할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창녀 취급하거나, 독한 년이라고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평판이 안 좋게 날 수도 있고, 함께 쫓겨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위기를 각오하고 용기 있게 행동하였습니다. 보아스를 쟁취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가문을 잇는 것에 등한히 할 때 다말은 창녀로 취급받는 모험을 감행했고, 다말에 의해서 유다가문의 씨는 이어졌습니다. 보아스의 어머니 라합은 여리고의 창녀였지만 그 기회를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숨겨주어 자기 가족을 살립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사는 이런 여인들의 모험과 용기가 있었기에 이어졌습니다.
보아스의 결단
지금 오히려 코너에 몰린 쪽은 보아스입니다. 룻의 유혹이 있는 순간 그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까요? “독한 년!” 하며 몰인정하게 내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룻을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룻에게 매력을 느껴서? 어리숙하게 당해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룻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했고,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사를 잇게 했습니다. 역사를 만든 것입니다. 환대가 필요한 순간, 형식적인 환대가 아니라 온전한 환대를 했습니다. 온전한 환대는 새역사를 창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룻기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하나님의 환대가 인간의 환대를 통해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두 단어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는 9절에 있는 ‘날개’입니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에서 여기 ‘당신의 옷자락’은 ‘당신의 날개’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카나프(날개)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날개는 하나님의 보호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2장 12절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지금 보아스가 룻의 날개가 되어 그를 보호합니다. 보아스가 하나님의 날개입니다.
또 하나는 인애라는 단어입니다. 10절의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에서 인애가 헤세드입니다. 룻이 나오미에게 헤세드를 베풀었습니다. 지금은 자기 몸을 바쳐 나오미의 미래를 보호하려 합니다. 나오미를 향한 하나님의 헤세드가 룻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보아스가 룻과 나오미에게 헤세드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 헤세드는 또한 보아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헤세드일 수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무료하던 삶에 즐거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헤세드는 나눠야 합니다.
하나님은 손이 없습니다. 대신 사람의 손을 통해 자신의 헤세드를 보여주십니다. 사람이 베푸는 친절한 손은 실상 하나님의 손입니다. 여러분이 그 하나님의 손이 되십시오. 지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여러분을 돕고 계십니다. 이 은혜가 함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쁨의 날 맞으라
양은익목사 / 룻 3:1~6
‘기쁨의 날 맞으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누겠습니다. 푸시킨의 시에도 이 말이 나옵니다.‘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멋있습니다.
1. ‘위하여’의 마음(1절)
오늘 3장 초반부 읽었습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말합니다. 7주간의 이삭줍기가 끝난 어느 날인 것 같습니다. 힘든 이삭줍기로 고생한 룻의 수고를 보면서 나오미가 마음에 담고 있던 얘기를 합니다. ‘얘야,이제 너도 행복하면 좋겠다’ ‘이제 결혼해서 가정을 가져야지’ ‘내가 찾아봤다’. 룻의 재혼 얘기를 끄냅니다. 남편 먼저 보낸 시모가 남편 먼저 보낸 同病相憐의 며느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시모도 며느리도 마음이 어땠을까요?
나오미는 지금 진심입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너도 이제 기쁨의 날을 맞이해야지’. 기쁨을 선사膳賜하고 싶어 합니다. 1절에 보면 나오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위하여’. 보셨습니까?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겠다’(3:1)
‘내가 너를 위하여’. 나오미를 움직이게하고, 룻을 감동시키고, 그들의 삶을 일으켜 세운 힘있는 ‘단어’입니다. ‘내가 너를 위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소중하게 여긴다. 내가 너를 돕고 싶다’. ‘위함’입니다. 격려와 사랑이 가득합니다. 눈물 많은 이들, 서러운 이들, 실패한 이들, 외로운 이들에게 필요한 단어이며, 마음입니다. 위함이 있는 자의 눈에는 아픔이 보이고,눈물이 보입니다. 그래서 온 맘 다해 감싼 안게 됩니다. ‘내가 너를 위해, 힘내’. ‘위함’이 선사(膳賜)되어지면 회복과 희망이 만들어집니다.
‘위하여’가 없는 가정, 교회, 사회, 정치, 경제는 실패의 문 앞에 와 있는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위함’이 없이 가정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위함’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정치와 사회가 온전해 질 수 있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위함’이 있으면 환대와 연민, 배려와 사랑으로 풍성해지지만, ‘위함’이 없으면 미움과 냉대와 적대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위하여’는 기쁨과 치유, 회복과 화해를 가져오게 하는 출발이고, 시작입니다. ‘위함’의 아름다운 마음(Beautiful mind)이 삶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위하여’는 사랑이고, 사랑만큼 귀한 것입니다.
3장과 4장에서 일어나는 복된 일은 전부 나오미가 가졌던 ‘위하여’에서 출발한 일들입니다. ‘위하여’가 있었기에 룻의 행복을 원했고, 룻의 행복을 원했기에 시집을 보내게 됐고, 시집 잘 보내려고 ‘모험’을 감행했고, 결국 시집 잘 보내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까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위하여’에서 시작된 기적이고, 신비입니다. 기쁨의 날 맞으려면 ‘위하여’라는 ‘큰 마음’이 필요합니다.
본문을 보면서 ‘위함’에 대해 세 가지 묵상하겠습니다. ① 실패할 때 ‘위하여’를 생각하라(1절) ② 내일이 필요할 때 ‘위하여’를 가져라(2~4절) ③ ‘위함’이 오면 받으라(6절)
(1). 묵상 1: 실패할 때(힘들 때) ‘위하여’를 생각하라.(1절)
첫 번째 묵상입니다. 실패 할 때, 힘들 때 ‘위하여’를 생각하라. 힘들 때, ‘위하여’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힘들면 하나님의 ‘위하심’를 생각하고, 네가 힘들면 가까이 가서 ‘위해’ 주시고. 이 ‘위하여’가 우리를 일으켜 세워줍니다.
타락은 ‘위하여’의 마음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에덴에서 묻습니다. ‘먹지 말라 한 것, 왜 먹었니? 저 여자가 줘서 먹었습니다. 너는 왜 먹었니? 저 뱀이 꾀어서 먹었습니다’. ‘위함’이 사라졌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라멕은 자신의 상처 때문에 사람을 죽입니다. ‘위함’이 없어졌습니다.
‘위하지’ 않고 사는게 ‘위하면서’ 사는 것보다 훨씬 유리해졌습니다. 부끄러운 일인데 부끄러운지 잘 모릅니다.’위하여’의 삶이 얼마나 중요하면 하나님이 친히 ‘위함’의 모습을 보여 주셨겠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나님의 위하심은 우리를 일어서게 하는 가장’ 큰 ‘위함’입니다.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이 의사 외아들을 사고로 잃고 나서 한 얘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시련을 겪지 않는 것이 아니다. 시련을 겪을 때 대들고 따질 상대가 있다는 것이다’. ‘그저 만만한 건 신이었다.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번 고쳐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한 말씀만 하소서, 박완서)
그렇게 하나님께 대들고 따지다가, 선생이 놀랍니다. 하나님이 먼저 ‘성자’(자식)을 죽이셨다는, 늘 들었지만 흘려들었던 십자가 사건이 가지는 온전한 뜻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아시겠구나!!’ 하나님은 가장 크게, 가장 깊게, 우리를 위하십니다. 하나님의 ‘위함’이 보일 때,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될 때 그 마음에 생기를 얻어, 내 옆에 있는 타자의 아픔을 ‘위해’ 줄 수 있습니다.
2장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위함을 알게된 나오미가 룻의 아픔을 보게 됩니다. 죽은 남편의 나라 와서, 홀로된 시어머니 봉양하기 위해 매일 밭으로 나가 보리 이삭을 주워오는 며느리를 볼 때 눈물이 핑 돕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윤복희)을 부릅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께.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내가 너의 벗 되리, 너는 나의 기쁨이야’.이 마음 아니었을까요? ‘여러분’은 명곡입니다. 실패할 때 ‘위하여’는 나를 일으키고, 서로를 일어나게 만듭니다. 묵상하여 마음에 새깁시다.
(2) 묵상 2: 내일이 필요할 때 ‘위하여’를 가져라(2~4절)
두 번째 묵상입니다. ‘내일’의 희망이 필요할 때 ‘위하여’의 마음을 가져라. 묵상하시고, 이 마음 꼭 가지기 바랍니다. ‘위하여’는 ‘내일’을 만들고, ‘미래’를 만들고,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는 ‘희망’을 선사해 줍니다. 좋은 내일, 희망찬 내일을 가지려면 ‘지금’ ‘위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위함’이 내일이라는 길을 열어줍니다.
김현승 시인은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을 ‘빛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러케 내일을 맞으련다. 모든 것을 실패에게 주고, 비방은 원수에게, 사랑은 돌아오지 못하는 날들에게. 나의 잔에는 천년의 어제보다 明日의 하로를 넘치게 하라’(김현승, 내일, 부분, 1946)
해방 직후 1946년, ‘내일’이 포기된 시대에 ‘내일’을 말합니다. 아무리 절망스럽더라도 ‘내일’을 포기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내일을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서로 위할 때 ‘내일’에 밝은 빛이 비칩니다. ‘위함’이 없으면 좋은 미래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오미 보십시오. 룻을 위하는 마음이 생기자 룻의 내일, 룻의 미래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룻이 행복할까? 나 죽은 후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나오미의 결론은 안식할 곳, 가정이었습니다. ‘좋은 신랑 만나게 하자’. 룻은 좋은 신랑을 만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동남아 여자입니다. 가난합니다. 결혼 경험도 있습니다. 시어머니와 삽니다. 불임입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좋은 혼처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오미가 신랑을 점찍어 놓고 밀어 붙입니다. 이 장면은 오늘 다루지 않겠지만, 나오미는 확고한 마음을 가지고 룻을 보아스에게 보냅니다. ‘넌 가서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 그러면 보아스가 알아서 할거다’. 룻을 위하기에, 룻의 내일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1802~1885)의 말입니다. ‘미래는 여러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약한 자들에게는 불가능이고, 겁 많은 자들에게는 미지이고, 용기있는 자들에게는 기회다’ 나오미가 가진 미래의 이름은 ‘기회’입니다. 룻의 밝은 내일을 위해 ‘기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위함’이 있을 때 기회가 만들어지고, 내일이 밝아집니다. 자녀, 남편, 부인, 교회, 나라 다 똑같습니다. 내일이 필요하면 ‘위하여’를 놓치지 마십시오. 작은 ‘위함’이라도 만들어 내야 됩니다.
(3) 묵상3: ‘위함’이 오면 받으라(5~6절)
세 번째 묵상입니다. 세 번째 묵상은 ‘위함’이 오면 거절하지 말고 받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잘못된 ‘위함’도 있고, 수상한 ‘위함’도 있기에, 모든 ‘위함’을 다 받아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받아야 하는 ‘위함’은 거절하지 말고 받아야 합니다.
5절과 6절에 보면 룻이 나오미의 ‘위함’을 그대로 다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룻이 말합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다 하겠습니다’.(5절). 그리고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그대로 다합니다(6절). 쉽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존심 상할 수도 있고, 일이 잘못되면 음행한 여인으로 오인받아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위험 천만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룻은 그대로 다합니다. 다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나오미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는 자(Giver)와 받는 자(Taker)의 관계에서 주는 자(Giver)는 믿음(신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받는 자(Taker)도 거부하지 말고 주는 자의 ‘위함’을 흔쾌하고 감사하게 받는 게 좋습니다. 그 받음이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위하여’라는 말 오늘 아침 생각해 봤습니다. ‘위하여’의 마음 많이 품으셔서 기쁨의 날 맞이하고, 기쁨을 선사하는 복된 인생, 누리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라
룻 3장 1~5절 / 이한규목사
본문에는 나오미가 보아스의 마음을 얻도록 룻에게 지혜롭게 코칭하는 장면이 나온다. 믿음과 더불어 지혜도 있어야 한다. 철저히 준비하고 심리도 분석하고 계획도 하고 아이디어도 짜내면서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활용하라. 지혜가 있으면 강한 자도 이길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잘 살 수 있다. 약하다고 다 망하는 것은 아니다. 약한 존재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개미는 약한 동물이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하고 있다.
사람도 약하다고 생존경쟁에서 지는 것은 아니다. 지혜를 발휘하면 얼마든지 강한 자들 속에서 잘 살아갈 수 있다. 지혜가 언제 생기는가? 남을 잘 되게 하려고 할 때 생긴다. 나오미는 룻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지혜가 생겼다. 요셉이 왜 지혜롭게 살 수 있었는가? 가는 곳마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복 받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고 감옥의 간수장이 복을 받았고 나중에는 애굽도 7년 대흉년 때 오히려 더 복을 받았다. 그러므로 남을 잘 되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라.
링컨은 말했다. “행복하려면 남을 행복하게 만들라. 행복을 준 만큼 행복해진다.” 남을 잘 되게 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놀라운 지혜를 주실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나 때문에 내 주위 사람이 잘되고 많은 사람이 유익을 얻게 하소서.” 거룩한 비전을 향해 무작정 나아가지 말고 지혜와 창조성을 앞세워 나아가야 성공 가능성도 커진다.
편을 가르고 싸우면 참된 지혜를 잃고 내 편은 무조건 좋게 보고 네 편은 무조건 나쁘게 본다. 그런 편 가르기와 편견으로 인생도 조각나고 사회도 조각난다. 가끔 올림픽 금메달 결정전 등이 펼쳐지면 전 국민이 하나가 되면서 편 가르기가 잠시 멈춰지기도 한다. 사람의 깊은 곳에는 누구에게나 하나 되고 싶은 열정과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을 성령 안에서 잘 살려나가면서 남을 행복하게 해 주려고 할 때 지혜가 따르고 복된 인생이 펼쳐진다.
< 용기를 발휘하라 >
유대의 고엘 제도 하에서 여성의 적극적인 프로포즈가 용납되어도 룻이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룻은 당시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정숙한 여자였다. 그래도 룻은 시어머니의 말대로 하겠다고 결정했다. 일차적으로는 시어머니의 말에 순종한 것이었고 더 나아가서 룻은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믿었다. 그래서 정숙한 룻이 남자의 이불을 들고 들어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새로운 복된 세계로 들어서려면 믿음의 용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며 처녀 수태를 받아들이는 용기를 발휘했기에 메시야를 낳는 복된 존재가 되었다. 룻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하며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들어가 눕는 용기를 발휘했기에 메시야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홍해가 갈라진 후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줄 알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 후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홍해가 갈라지게 하셨다(출 14:15-16). 하나님의 뜻에 나를 용기 있게 드릴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은 그런 용기를 앞세워 인물의 길을 갈 수 있었다. 내게서도 그런 용기가 나타나게 해서 나의 인생에도 새봄의 역사가 따라서 나타나게 하라.
여호수아 1장을 보면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반복해서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가나안 정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용기였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거듭 담대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역설적으로 여호수아의 내면에도 일말의 두려움이 있었다는 암시다. 강자에게도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을 떨치고 용기 있게 나아가야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다.
인생을 바꾼 순종
염두철목사 / 룻기 3:1-6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록펠러가 76세일 때 어느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당신이 세계 최고의 부자로 성공하게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록펠러는 “어머니로부터 세 가지 신앙의 유산을 받은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신앙 유산은 십일조 생활이었습니다. 록펠러의 어머니는 어릴 적 20센트 씩 받은 용돈에서도 반드시 십일조를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록펠러는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정직하게 십일조를 드렸고 회사의 십일조를 계산하기 위해 별도의 십일조 전담부서를 둘 정도였습니다.
두 번째 신앙 유산은 교회에 가면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록펠러의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언제나 40분 정도 일찍 교회에 나와 맨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세 번째 신앙 유산은 교회를 다닐 때 교회의 일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록펠러는 98년 동안을 살면서 자신이 번 돈으로 록펠러재단을 세워 많은 사회사업과 선한 일을 하기에 힘썼고 24개 대학과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헌납했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록펠러는 절대적으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순종이 그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순종하면 인생이 바뀝니다.
록펠러의 이야기는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합니다. 성경에는 순종으로 인생이 바뀌어진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신 성경의 인물의 공통적인 특징은 순종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룻이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본문 5-6절을 보겠습니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그가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룻도 순종함으로 그녀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지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룻의 인생만 바뀌어진 것이 아닙니다. 룻의 순종에 의해서 시어머니 나오미의 인생도 바뀌어 졌고, 그 집안이, 가문이 완전히 바뀌어졌던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순종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지만 오늘은 조금 로맨틱하고 흥미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정한 순종이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순종은 청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여기서 ‘안식할 곳’은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사는 가정을 가리킵니다. 지금 나오미는 룻에게 재혼을 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이 보통 사람 같았으면 아주 열 받았을 것입니다. 모압 땅에서 시어머니가 그렇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시어머니를 따라 이방 땅인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왔는데, 이제 와서 시집가라고 하니까 충분히 열을 받을 수가 있는 상황입니다.
“어머니 제가 모든 것을 다 각오하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 그리고 어머니를 끝까지 모시기 위해서, 이곳으로 왔는데, 또 쓸데없는 말씀을 하십니까?”하고 시어머니에게 쏘아 불일만도 합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을 정성껏 들었습니다. ‘어머니, 또 그 이야기입니까?’ ‘이미 그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닙니까?’ ‘이제 좀 안정되려고 하는데, 잔잔한 가슴에 돌을 던지는 것입니까?’하고 시어머니가 말을 하는 것을 도중에 가로채고 반론을 제기하거나, 짜증을 부릴 만도 한데, 그러지를 않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습니다. 아무 대꾸도 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시어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청종을 하고 있습니다. 룻은 정말로 인격이 제대로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인격이 성숙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도 룻은 인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룻에게 복을 쏟아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순종은 자기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룻은 이방여인이었고, 남편이 죽었지만 어엿한 이스라엘 가문의 며느리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시어머니를 끝까지 모시겠다고 자기 고향 모압을 포기하고 이스라엘까지 따라 온 것입니다. 굳이 시집을 가야 한다면 베들레헴가지 와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동서 오르바처럼 돌아가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룻은 다시 시집가기를 포기한 사람이었고, 또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형편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지금 상황에서,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해서 뭔가 팔자를 고치겠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아무 말 없이 시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룻은 자신의 형편을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형편을 생각하면, 순종의 자리까지 나아가기를 못합니다. “글세요, 제 형편이 이런데요. 못한다니깐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내 형편이라면 이렇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무척 바쁩니다. 제 아이가 고3입니다. 제가 몸이 약합니다. 제가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저의 가정이 힘듭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의 형편을 앞세우며 순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 그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80세 노인이었습니다. 돈도 없고, 힘도 없고, 권력도 없었습니다. 40년 동안 양이나 치는 일을 해 온 목자였습니다. 머리가 다 녹이 쓸었습니다. 형편을 따지자면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를 이스라엘 지도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모세가 자기의 형편을 생각하면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결국 두 손을 들고 순종의 자리까지 나아갔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는 총리였습니다. 다니엘의 앞길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더없이 좋은 상태에서 성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를 시기하는 원수들이 다니엘의 약점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 다니엘은 바벨론 왕의 눈에 벗어나는 행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의 신상에 절하지를 않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자초해서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보다 더 높으신 만왕의 왕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자기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의 형편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형편을 초월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자기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그 형편을 뛰어넘어 순종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복과 은혜, 기적을 베풀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순종은 자존심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이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그가 오늘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앞서 룻의 이야기를 들으며 좋은 예감을 갖게 된 나오미는 룻의 장래를 생각하며 기도하다가 룻과 보아스를 결합시키기 위하여 묘안을 찾아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나오미는 룻을 불러 그녀의 계획을 속삭였습니다.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이스라엘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추수가 끝나면 곡식단을 들에 쌓아두고 주인이 자면서 지키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그것을 기회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본문 3-4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아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고대 팔레스틴 지방의 관습에 의하면 친절을 베푼 남자가 자기의 배필일 수 있다는 생각이 여자의 마음속에 있다면 여자가 먼저 프러포즈를 해야만 결혼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어머니 나오미가 제안한 프러포즈의 방법은 너무도 파격적이었습니다. 정숙한 여인으로서는 감히 시도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나오미의 접근 방법은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남녀 결합의 시도였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와 잠자리를 같이 할 준비를 해가라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말은 룻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남자의 품이 그리웠다면, 자기가 모압에서 왜 이스라엘로 왔겠습니까?
룻은 자기 고향 모압에서 잘생기고 건장한 남자를 구해서 재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정절을 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 자기에게 보아스에게 가서 몰래 발치에 드러누워 있으라니, 아무리 대를 잇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드러누워 있는 룻을 보고 보아스가 ‘이게 무슨 짓이냐’ 라고 화를 낸다든지, ‘쫓아내라고’ 고함을 치면 얼마나 큰 망신입니까? 그러므로 룻이 자기의 자존심을 생각했다면, 도저히 시어머니 룻의 말을 순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존심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때문에 촛불 시위가 일어났을 때 미국 뉴욕 타임즈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왜 미국인들조차 문제 삼지 않는 미국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에 항의하며 촛불 집회에 나서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한국인의 분노는 쇠고기 문제를 넘어선 민족적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한미 양국의 관계 복원을 위해 한미정상회담에 앞서 우리(MB) 쪽에서 정치적 선물로 소고기 수입 개방을 한 것을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마치 과거 조선시대 왕들이 황제에 조공을 바친 것과 같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정말 자존심이 강합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존심 건드리면 분노하여 앞뒤를 가리지 않습니다.
‘제가 이래 뵈도 대학을 나온 사람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는 사장입니다. 교수입니다. 목사입니다.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자존심을 내세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느 미국 선교사님이, 아프리카 지역으로 단기 선교를 떠났습니다. 자기는 미국인이고, 재능이 많기 때문에 그 지역에 가면 그 지역주민을 위해서 효과적인 많은 사역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지역에 파송을 받은 그 단기 선교사님이 현지에서 사역하고 계신 선교사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역은 그 주민들의 옷가지를 빨래를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단기 선교사님은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영어도 가르칠 수도 있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온갖 것을 가르칠 수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일은 고작 빨래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빨래를 하려고 이곳으로 왔는가?’ 그러나 그는 곧 주님을 생각하면서 기쁨으로 그 사역을 감당하기로 굳게 결심을 했습니다.
그 단기 선교사님은 그 곳에서 1년 동안 사역을 하시면서 빨래만을 했다고 합니다. 1년이 되어서 그 선교사님은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1년 동안 빨래를 하고 왔으니 무슨 선교의 열매가 있겠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단기 선교사님이 그 곳을 떠나오고 난 뒤부터, 그 지역 주민들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과거에 그 지역에 미국 선교사님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선교사님도 그 지역주민들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주민들은 미국 선교사님이 자기들을 가르치려고 하고, 많은 것을 주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미국 선교사님의 우월의식, 즉 자기들이 무식하고 못살기 때문에 무시한다는 인식을 그 선교사님으로부터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미국 선교사님은 실패하고 돌아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번에도 미국 선교사님이 오신다고 하니까 그 주민들은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 선교사님을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교사님은 그들의 옷가지를 아무 불평 없이 기쁨으로 빨래는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었습니다. 한 달 두 달, 무려 일 년 동안이나 꾸준히 빨래를 해 주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의 겸손과 사랑과 섬김에 그 주민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자존심을 초월하는 순종이 내 인생은 말할 것 없거니와 다른 사람들의 인생까지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넷째로, 순종은 내 마음대로 고르지 않고 명령받은 대로 다 하는 것입니다.
본문 5-6절을 보겠습니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그가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시어머니의 말씀에서 이것은 순종하고 저것은 안하고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룻은 ‘내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했고, 또 말한 그대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만을 골라서 순종한다면 그것은 이미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분적인 순종을 원하시지를 않습니다. 온전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120년에 걸쳐 다 순종을 했습니다. 120년 동안 그는 백성들에게 120년 후에는 홍수로 심판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노아의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날이 좋은 데 방주를 만드니 얼마나 사람들이 조롱했겠습니까? 그것도 산위에서 방주를 만들었으니 아마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가운데 괜찮은 것만, 마음에 드는 것만 순종한 것이 아니라 명하신 대로 다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6장 22절을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40장 17-33절까지 내용 가운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는 구절이 일곱 번 반복됩니다.
즉 모세가 성막기구들을 세팅함에 있어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온전하게 순종했다는 것을 완전수인 7이하는 숫자에 담아 표현한 것입니다. 그대로 했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번째 기적은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고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돌 항아리 여섯에 물을 채우라 하시고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은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로 맛있는 포도주로 변해 있었습니다. 말씀 그대로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기적이 있고 비약이 있고 반전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순종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이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을 우리 깊이 있게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청종을 자세를 가지고,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순종하고, 우리의 자존심을 초월하여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일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우리 인생에 더욱 잘되는 일,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