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창 21:14-21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창 21:14-21 / 다음날 아침 아브라함은 먹을 떡과 물이 든 가죽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어 주고는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집을 떠나게 하였다. 하갈은 아들과 함께 집을 떠나 브엘세바 들녘을 헤매었다. 15) 가죽부대에 들어 있던 물이 다 떨어지자 하갈은 가시덤불 아래에 자식을 놔두고는 16) 혼자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만큼 떨어져 앉아서 `아들이 저렇게 죽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하면서 목놓아 울었다. 17)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시고 심부름꾼을 통해 하늘에서 하갈에게 이르셨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어째서 여기서 이렇게 울고 있느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다 들으셨다. 하나님께서 네 자식이 우는 소리를 들으셨단다. 18) 어서 일어나 가서 아이를 일으켜 세우거라. 그 아이를 다독거려 주어라. 네 아들의 후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19)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게 하셨다. 그래서 하갈은 샘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하갈은 달려가 가죽부대에 물을 가득 담아 가지고 돌아와서 이스마엘에게 먹였다. 20) 그 아이가 자라날 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 이스마엘은 바란 광야에서 살았다. 커서는 재주가 뛰어난 사냥꾼이 되었다. 21) 그의 어머니 하갈은 이스마엘의 색시감으로 애굽 처녀를 맞아들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갈과 이스마엘을 떠나보냅니다. 광야에서 물이 떨어져 죽을 위기에 처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구원해 주십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의 추방(14-16)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갈과 이스마엘을 위해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준비합니다. 성경에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라는 표현은 중요한 행동을 할 때 자주 사용되는 관용구로 이 결정의 중대함을 강조합니다. 떡과 물 한 가죽부대는 당시의 기본적인 여행 준비물이었으며 가죽부대는 물을 담아 운반하는데 사용된 용기였습니다. 그들은 브엘세바 광야로 보내졌는데 이 지역은 네게브 사막의 북부에 있는 건조한 지역으로 생존이 매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목이 말라 죽기 직전의 상황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17-19) 하갈과 이스마엘이 절망 속에서 마주 보며 울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이스마엘의 울음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혀주셔서 샘물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가장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한계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종종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이스마엘의 성장(20-21)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와 보호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애굽 여인인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보셨습니다(창 16:1). 우리도 편견을 내려놓고 모든 사람을 사랑과 겸손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유목민의 전형인 활 쏘는 자로 자라납니다. 그는 바란 광야에 거주하게 되는데 이 지역은 시나이반도 북부에 있는 광활한 사막 지역으로 후에 이스마엘 자손의 발상지가 되었습니다.
적용: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샘물을 공급해주십니다. 인생의 광야에서 이 기적을 구하십시오.
어둠은 빛의 부재가 아닙니다. 빛을 등진 존재들이 실존이며 현실입니다. 어둠이 찾아온다는 것은 어둠이 당신에게로 침략해 들어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빛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의 다른 표현입니다. 어둠의 깊이 또한 당신이 빛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떠나 있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빛을 등지면 어두운 법, 빛에서 멀어지면 추운법입니다. 인간 영혼이 어둡고 춥다는 것은 그만큼 빛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결과이며 빛이신 하나님을 등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눈을 밝히시매
창 21장 14~21절 / 지용수목사
아기가 엄마의 가슴에 안겨 젖을 먹는 것은 엄마의 사랑을 받는 아기라는 증거입니다. 또 엄마 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기는 엄마의 아기요 그 엄마는 아기의 엄마인 것이 나타나듯이, 우리가 교회에 나와 강단 앞에서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증거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증거입니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말씀을 받는도다』(신명기 33:3) 할렐루야! 우리는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기가 엄마 젖을 먹을 때 엄마의 사랑도 함께 먹듯이, 우리가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의 품에 안겨 그 사랑을 받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돈 버는 기쁨도 괜찮고, 자식이 공부를 잘하는 기쁨도 괜찮습니다. 또 승진해도 기쁘고 새 집을 얻어도 기쁘고 새 자동차를 타게 되어도 행복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큰 기쁨, 더 큰 행복은 가정에서 아기를 보는 일입니다. 이 행복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입니다.
괴테가 말했습니다.
“임금이든, 백성이든 자기 가정에서 아기를 보는 그 행복이 가장 빛나는 행복이고 그 기쁨이 가장 큰 기쁨이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보는 아브라함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눈을 떠도 기쁘고, 눈을 감아도 기쁘고, 보아도 기쁘고, 생각만 해도 즐거운 아들입니다. 그 아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젖을 떼니 그날 큰 잔치를 베풀고 모두 기뻐합니다. 아무리 큰 잔치를 해도 엄마의 관심은 아기에게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살펴보니 아들 이삭이 보이지 않습니다. 놀라서 사방을 살펴보니 한켠에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을 이스마엘이 이삭을 끌고 가서 막 손찌검을 하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그때 이삭은 서너 살이고 이스마엘은 열일곱 살입니다. 열일곱 살이면 이미 철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마엘이 ‘이 이삭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다 받고 온 종들도 다 나만 섬길 텐데, 이 아이가 태어나서 아버지의 사랑과 재산을 다 빼앗기게 되었구나.’하는 생각에 질투가 나서 아이를 희롱하며 손찌검을 하는 것입니다. 사라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달려가 이스마엘을 밀쳐내고 이삭을 구해 옵니다. 그리고 바로 아브라함에게 가서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이 여종의 아들을 여종과 함께 쫓아내세요. 이 여종의 아들은 내 아들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사라는 이제까지 항상 남편에게 “내 주여, 내 주여.” 하며 순종했는데 그날은 남편에게 명령하듯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명령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민이 컸습니다. 본문에 보면 깊이 근심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이스마엘도 자기 아들입니다. 술집 색시와 잠을 자서 낳은 아기라도 자기 아기인 줄 알면 버리지 못하는데, 17년간 키운 정든 아들입니다. 그리고 하갈도 비록 애굽 출신의 여종이지만 자기 여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쫓는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그냥 둘 수도 없습니다. 그냥 두면 사라가 상처를 받을 것이고 이삭이 이스마엘의 손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형편에 처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집에 여자가 둘이면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이 생기니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만 살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여자 사이에서 괴로워합니다.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 네 아내 사라의 말을 들어라. 여종과 그 여종의 아들을 내쫓아라. 이삭의 씨만 너의 참 자녀가 된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아브라함은 울면서도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른 아침에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워 준 다음 아들과 함께 내쫓았습니다.
“아빠, 아빠! 왜 나를 내쫓아요?”
“어찌 이럴 수 있어요? 어찌 이럴 수 있어요?”
이스마엘과 하갈이 울 때 아브라함도 울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최선임을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만일 그들과 함께 살면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 모릅니다. 가정이 지옥이 될 것입니다.
허름한 가방에 보석을 가득 넣어가지고 다니며 아들과 함께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번 한 보석 상인이 있었습니다. 보석을 가득 사서 이 나라 저 나라에 다니며 팔곤 했는데, 하루는 배 갑판에서 뱃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 보석 상인과 아들을 죽이자. 그래서 우리가 보석을 다 나누어 갖자.”
보석 상인과 아들이 보석 때문에 죽게 된 것입니다. 고민하던 상인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상인은 아들과 함께 가방을 갖고 갑판 위에 올라가 모든 선원들이 듣도록 큰 소리로 아들에게 욕을 했습니다.
“이 나쁜 놈아! 이 못된 아들놈아!”
아들이 아버지에게 대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나쁘지, 왜 내가 나빠요?”
그러자 아버지가 “너 같은 놈에게는 보석 한 개도 남겨줄 수 없다.”라며 가방을 열어 보석을 바다에 다 쏟아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상인과 아들이 살았습니다. 선원들이 그 상인 부자를 죽이려 했던 것은 보석을 빼앗기 위해서였는데 보석이 없어졌으니 그들을 죽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전 재산인 보석을 바다에 던지는 것은 뼈아픈 일이지만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쫓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하지만 이스마엘보다 귀한 이삭을 살리고, 하갈보다 귀한 사라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때로는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최선인 줄 알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1절, 2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능한 재벌 청년에게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부자인 채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었던 청년은 예수님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뒤안길로 이름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때 그가 단호하게 결단하여 그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가난한 자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면 그는 최고의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만고에 이름을 떨치고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보좌 옆에 앉을 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워도 순종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집에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은 떡과 물을 메고 광야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집을 떠나려거든 눈썹도 뽑아 놓고 가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행갈 때는 될 수 있으면 짐을 가볍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일주일 여행에 이민 가방처럼 큰 가방을 챙겨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공부도 하지 않는 학생이 여행갈 때는 책을 한 가방 가득 가져가기도 하는데 아마 한 권도 제대로 보지 못할 것입니다. 여행 가방은 작고 간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갈과 이스마엘이 메고 가는 물과 떡은 짐이 아니라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가는데, 하갈이 애굽을 떠난 지 20년이 되었으니 길을 몰라 광야에서 방황하는 사이에 물이 동이 났습니다. 그러니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떡은 40일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물은 며칠만 먹지 않아도 죽습니다. 병으로 죽는 것, 사고로 죽는 것도 아픈 일이지만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해 죽으면 더 아프고 서럽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7절 8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작은 집에 살든, 큰 집에 살든, 셋집에 살든, 자기 집에 살든, 라면을 먹든 진수성찬을 먹든 먹을 음식이 있고 입을 옷이 있으면 감사해야 됩니다.
이스마엘과 하갈이 물이 없어 죽게 되었습니다. 하갈이 쓰러져 가는 아들을 떨기나무 밑에 눕혀 놓고 “내 아들이 죽는 것을 내가 차마 보지 못하겠다.”라며 살 한 바탕쯤 떨어진 곳에서 방성대곡을 합니다. ‘살 한 바탕 떨어진 곳’은 화살을 쏘면 떨어지는 거리로 요즘에는 270m~300m쯤 된다고 하는데, 옛날에는 활이 좋지 않아서인지 100m(약 100야드) 정도의 거리였습니다. 하갈이 아들과 100m쯤 떨어진 곳에서 방성대곡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저수지도, 강도, 내도, 샘도 없는 그 메마른 광야에서 이제 죽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캄캄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부르십니다.
“하갈! 하갈! 왜 그러니? 무엇이 문제냐? 두려워 말아라. 하나님께서 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네가 가서 그 아이를 일으키고 네 손으로 붙잡아 주어라. 하나님께서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리라.”
그리고 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히십니다. 그러니 바로 그 주변에 있는 샘이 보였습니다. 광야의 샘은 증발이 잘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큰 바위나 나뭇가지로 샘을 덮어 놓고 그 자리에 샘이 있다는 표시를 해 놓습니다. 그런데 하갈이 그런 샘을 보지 못하다가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밝히시니 샘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갈이 샘을 보고 기뻐하며 가죽부대에 물을 담아 아들에게 먹이니 아들이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란 광야에서 살게 하시니 이스마엘이 거기에서 장성하고 활 쏘는 자가 되었습니다. 애굽 여자를 취하여 아내로 삼고 마침내 큰 족속을 이루게 됩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의 아라비아 족속입니다.
한 다이아몬드에 오색 빛이 영롱하게 반짝거리듯, 본문 말씀에도 교훈이 얼마나 많은지 하루종일 전해도 다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몇 가지 중요한 말씀만 전할 텐데, 이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광야에서 물과 양식이 떨어지면 살길이 없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그런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이 발견되어 그들이 그 광야에서도 목숨을 구했고 나중에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직장이나 사업장을 잃을 수도 있고 가정에 아픔이 올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 인생이 여기에서 막을 내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심각한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도 하나님께서 우리 눈을 밝히시면 새 길이 열리는 줄 믿습니다. 살길이 열리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눈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대 성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도 1991년까지는 부산 경남에서 제일 컸습니다. 새로 짓게 되는 교회는 현재 교회보다 5, 6배 더 큽니다. 새 성전을 지어 놓으면 많은 영혼이 구원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대 성전을 지으려 할 때, 우리 교우들의 숫자에 비해 큰 교회를 짓는 것이 제가 약간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교회를 지을 때 교우들이 부담을 느끼고 교회를 빠져 나가면 어떻게 하지요?’라고 여쭈었더니, 하나님께서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무슨 소리냐? 교회 짓는 동안 내가 큰 복을 주리라. 가정들이 잘 되게 하리라.’
그래서 ‘성전을 짓는 동안에 우리 성도들에게 기적 같은 복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맹렬하게 기도했더니 우리 교회 십일조가 불어나고 있습니다. 때로는 깜짝 놀랄 십일조를 하는 가정들이 나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정말 우리가 구하는 대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혹 ‘성전을 짓는 동안 다른 데 있다가 성전이 다 지어지면 다시 와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도 제가 늘 “1~2년 안에 큰 복을 주십시오.”라고 하니 그 복을 놓칠까 봐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을 다 지으면 우리 교회가 부흥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 큰 박수를 올려 드립시다.
하나님께 답이 있는 것입니다.
내 가정의 어두움을 밝히는 답, 내 회사의 어려움을 밝히는 답, 나라를 살리는 답이 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완구업을 하는 한 회사가 상대방 회사의 창의적인 제품들을 따라가지 못하여 자꾸만 밀려났습니다. 그러다 더 이상 회사를 꾸려나갈 수 없을 지경이 되자 사장은 ‘이제 이 회사 문을 닫으면 무얼 해서 먹고 사나?’라는 걱정에 얼굴이 어두워지고 수척해졌습니다. 여러분의 사업은 잘 되기를 축원합니다. 창대하기를 축원합니다.
하루는 이 사장이 머리를 식히려고 공원에 나가 산책을 하는데 공원의 한 곳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났습니다. 그곳에 가보니 세상에! 아이들이 흉측하게 생긴 벌레를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얘들아, 왜 그렇게 흉측하게 생긴 것을 가지고 놀아? 너희 엄마들은 장난감을 안 사주니?”
“아저씨, 우리 집에 가면 장난감이 가득해요. 그런데 지겨워서 싫어요. 다 똑같은 것은 싫어요. 이것은 무섭고 징그럽게 생겼지만 특이해서 좋아요.”
그 순간 그 사장의 머리에 빛 같은 것이 좍 지나갔습니다.
“바로 이거다!”
그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얘들아, 고맙다. 얘들아, 고맙다.”라고 수십 번이나 말한 후 회사로 돌아가 벌레 완구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예측대로 그것이 불티나게 팔려 사업이 대성했다고 합니다.
회사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었지만 하나의 아이디어 때문에 회사가 살아난 것입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견해도 운명이 달라지는데,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면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0장, 31장에 보면 야곱이 직장생활을 19년이나 해도 품삯을 열 번이나 사기를 당해 집 한 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양들이 교미를 하는데 다 아롱지고 점이 있는 양들만 보였습니다. 그 꿈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인을 받습니다. 그래서 주인인 외삼촌과 이렇게 계약을 합니다.
“이제부터는 양이 새끼를 낳아서 아롱진 것이나 얼룩진 것이나 점 있는 것이 있으면 제게 주시고 그렇지 않은 것은 삼촌께서 다 가지세요.”
양이 새끼를 낳으면 아롱진 것이나 얼룩진 것이나 점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백 마리 중 한두 마리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주인은 ‘이 바보 같은 놈!’ 하면서 얼른 그렇게 계약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꿈에서 본 그대로 양들이 냇가에 와서 사랑을 합니다. 그때 야곱이 살구나무와 버드나무, 신풍나무의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아롱지고 얼룩지게 무늬를 낸 다음 양들이 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새끼마다 얼룩지고 아롱지고 점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비실비실한 양들의 눈에는 나뭇가지를 대지 않았더니 비실비실한 양들만 무늬가 없는 새끼를 낳고, 건강한 양들은 다 아롱지고 얼룩지고 점이 있는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창대하게 됩니다.
야곱의 눈을 밝혀 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눈도 밝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의 눈이 밝으면 교회가 대성하게 됩니다. 사업가의 눈이 밝으면 사업이 대성하게 됩니다. 작은 부자는 자기가 부지런하면 됩니다. 그러나 큰 부자는 하늘이 내려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도 눈이 열리면 공부가 잘 되고 강의를 들을 때 벌써 ‘아! 이것은 시험에 나오겠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그러나 눈이 어두우면 공부할 때도 헤매고 시험칠 때도 헤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시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육안도 열어주십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에서 52절에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사건이 나와 있습니다. 소경에다가 거지이니 그 삶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전능하신 분이요, 소경의 눈도 뜨게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신다.’라는 말을 듣고 희망을 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기대감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 합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바라는 것이 없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미래를 향한 바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에게는 ‘내가 예수님을 만나면 눈을 뜨리라.’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사람아, 조용히 해! 귀한 분이 지나는데 왜 이 소란이야?”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기회를 얻을 수 없습니다. 기회는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 발길을 멈추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내게 불러 오라.”
오늘 여러분 앞에 주님께서 서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앞에 서시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소경은 기뻐서 겉옷을 벗어 던지고 깡통의 돈도 아랑곳하지 않고 용수철처럼 뛰어 예수님 앞으로 왔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예수님 앞에 올 수 있습니까? 주님께로 오는 길은 주님께서 붙잡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소경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 믿음이 너를 치료했느니라.”
그 순간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할렐루야!
마태복음 9장 27절 이하에 보면, 소경 두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소경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두 소경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예수님을 따라오니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 믿느냐?”
“예, 그러하옵니다. 믿습니다.”
“그래,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때 두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할렐루야!
요한복음 9장 1절에서 7절에도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보신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그대로 하니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1993년 3월 8일의 일입니다. 이것은 제 간증입니다.
그날 새벽, 주님께서 흰옷을 입고 제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제가 늘 성령을 느끼면서 예수님을 모시고 살지만 제 눈으로 예수님을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피를 뚝뚝뚝 흘리셨습니다. 그 피가 흥건히 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오른손을 잡으시더니 그 피에 제 손을 담그셨습니다. 제가 “주님, 왜 이러세요?” 하고 손을 빼자 주님께서 아무런 말씀 없이 또 제 손을 잡고 피에 담그셨습니다.
‘내가 이 손으로 무슨 더러운 죄를 지었기에 주님의 피에 담그시나?’
제가 예수님을 믿은 후 늘 기뻤는데 그날은 그 일로 마음이 슬프고 괴롭고 천근같이 무거웠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아침 10시쯤, 우리 민 권사님이 인터폰으로 연락을 주셨습니다.
“목사님, 여섯 살 먹은 아이가 장님이 다 되어간답니다. 한쪽 눈은 실명되었고 나머지 한쪽 눈마저 거의 보이지 않는답니다. 아이 엄마가 새 신자인데 일주일째 금식기도를 하고 있답니다. 목사님께서 미국에 가시기 전에 기도 받기를 원합니다.”
제가 그 이틀 후면 미국에 가서 9개월 동안 있다가 올 계획이었습니다.
그 아이와 엄마가 제 연구실로 들어왔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이의 눈에 이상이 있었는데 의술로는 시력을 회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아이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지만,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 병 때문이란다. 우리의 병을 치료하시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이란다.”
그리고 기도하기 위해 아이의 눈에 손을 댔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 ‘아! 주님께서 이 아이의 눈을 치료하시려고 내 손을 예수님의 피에 적시셨구나. 내 손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이 아이에게 기적을 주시려고 그러셨구나.’라는 감동이 왔습니다. 아!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이의 눈에 손을 대고 조용히 기도한 후 믿음이 와서 달력을 가리키며 아이에게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5, 10, 15, 25.”
다 읽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체크해 보았더니 시력이 한쪽은 1.0, 또 한쪽은 0.8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아빠가 이 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 엄마는 지금 구역장으로 봉사하고 계십니다.
지난번, LA 한인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집회 첫 시간에 “아픈 분은 아픈 곳에 손 얹고 기도합시다.”라며 기도를 하는 시간에 앞을 잘 보지 못하시던 한 집사님의 눈이 열려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안을 열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 모든 소경의 눈을 다 열어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사람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자에게 그렇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신명기 34장 7절에 보면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흐린 눈도 밝게 하시고, 약한 눈도 강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120이 되어도 하나님께서 제 눈을 밝게 하시고 기력을 좋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저는 팔굽혀펴기를 144번 했습니다. 오후에 또 하면 오늘도 팔굽혀펴기를 170개에서 180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20대에는 팔굽혀펴기를 20개밖에 못했습니다. 30이 넘어서는 140개, 170개씩 합니다. 120이 되면 1,000개씩 할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도 밝히시고 우리 몸도 건강하게 하십니다.
우리 육신의 눈도 귀하지만 육신의 눈보다 더 귀한 눈은 영의 눈입니다.
따라 합시다.
“영의 눈, 영의 눈.”
화니 크로스비는 소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육안은 열어 주지 않으셨지만 영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귀한 세계를 본 그는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면서 수많은 찬송가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찬송을 부르면 얼마나 은혜로운지 우리도 가슴이 은혜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하나님께서는 헬렌 켈러에게도 육안은 열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영안을 열어 주셨습니다. 육안이 멀쩡해도 영안이 닫히면 지옥에 갑니다. 그러나 육안이 어두워도 영안이 열리면 구원을 받습니다.
누가복음 23장의 십자가 한편의 강도는 영안이 열리니 “와!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메시아네. 이분이 우리가 몇 천 년 기다렸던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네.”라고 깨닫고 “예수여, 당신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15리를 걸어가면서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신 줄을 몰랐습니다. 저녁식사 시간에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며 떼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을 밝히시니 그때서야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이구나.’라고 깨닫습니다. 그러니 가슴이 기쁨으로 벅차 다시 15리 길을 달려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용기백배해진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우리 모두 영안이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영안이 밝아지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 사이에 잦은 전쟁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적국 아람 왕이 이스라엘 왕을 암살하기 위해 이스라엘 왕의 스케줄을 알아내었다가 이스라엘 왕이 가고자 하는 길목에 특공대를 잠복시켜 놓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스라엘 왕이 어디로 사냥을 간다고 해서 그곳에 특공대를 잠복시켜 놓으면 다른 곳으로 가고, 낚시하러 갈 때도 예정된 곳으로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곤 합니다. 그래서 암살하려는 계획이 매번 좌절됩니다. 화가 난 아람 왕이 신복들에게 말합니다.
“우리 중에 스파이가 있구나. 적과 내통하는 스파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누구냐?”
한 신하가 말합니다.
“왕이여, 우리 중에 스파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이 있어서입니다. 그가 얼마나 영특한지 왕께서 침실에서 하시는 말씀까지 다 안다고 합니다.”
“그가 누구냐?”
“엘리사입니다.”
“그를 잡아오라.”
그래서 많은 병거와 마병을 거느린 아람 군대가 엘리사가 있는 도단 성을 에워쌉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사환이 그것을 보고 두려워서 덜덜 떨며 엘리사에게 갑니다.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이 일을 어찌 하오리까? 우리가 포위당했습니다. 어찌 하오리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저들과 함께한 군사보다 우리와 함께한 군사가 더 많으니라. 하나님, 이 아이의 눈을 열어 주소서.”
사환의 눈이 열리니 하늘의 불병거와 불말, 하늘의 천군천사가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천국에 가면 불말과 불병거가 있다는 것을 저는 어제 깨달았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할 때도 하늘에서 불말과 불병거가 내려왔지 않습니까?
그런데 엘리사가 “하나님, 저 적군들의 눈을 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니 아람 군사들이 다 소경이 됩니다. 롯의 집 앞의 폭도들이 소경이 되어 아무것도 못한 것처럼 아람 군사들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그들이 항복하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영안이 열린 사람은 세상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에 보면, 스데반의 영안이 열리니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봅니다. 그런 스데반의 얼굴이 사도행전 6장 15절에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 얼굴을 볼 때, 제가 여러분을 볼 때 서로 천사의 얼굴처럼 보이기를 바랍니다. 영안이 열리면 천사 같은 얼굴, 성령 충만한 얼굴이 되고 영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히 주께 맡긴 내 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교회가 신비주의에 빠지면 안 되지만 신비가 없어도 안 됩니다.
미국의 한 국방대학 교수는 제가 설교할 때 강단에서 신비로운 빛을 보았다며 감격해 했습니다. 미국 우리교회 박 장로님도 아들의 돌 잔칫날, 제가 설교할 때 강단에서 신비로운 빛이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고 간증했습니다.
영안이 뜨이면 이 땅에서도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울고 있는 하갈의 눈을 밝히셔서 샘을 보게 하신 것보다 더 중요한 교훈,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행하신다.”
“아브라함아, 그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삭에게 난 씨만 네 아들이다. 그러나 그 여종의 아들도 네 아들이니 내가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내가 그와 함께 하겠다.”
그래서 하갈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아무리 목이 타도 절대 죽지 않는 것입니다 서부 영화의 주인공은 죽지 않듯이 이들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마엘은 아라비아 나라를 이루고 아라비아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그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내가 너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참으로 도와주리라. 굳세게 하리라.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리라.”
또 우리에게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라.”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떠날 때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우리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아야 됩니다. 말씀에 굳게 서서 긍정적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얘들아,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파란 눈의 아이들은 IQ가 좋고 학습 능률이 뛰어나단다. 그런데 갈색 눈의 아이들은 IQ가 나쁘고 학습 능률이 떨어진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눈 색깔대로 ‘내 눈은 파란색’ ‘내 눈은 갈색’이라는 팻말을 가슴에 걸게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니 파란 눈의 아이들은 생기차고 공부도 잘하는데 갈색 눈의 아이들은 힘이 없고 공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몇 주 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지난번에 발표가 잘못 되었다고 하는구나. 파란 눈의 아이들이 IQ가 좋은 것이 아니라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이 IQ가 좋고 성적도 우수하단다. 파란 눈의 아이들은 IQ가 나쁘고 학습능률이 떨어진단다.”
그리고 지난번처럼 ‘내 눈은 파란색’ ‘내 눈은 갈색’이라는 팻말을 걸게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니 갈색 눈의 아이들은 성적이 올라가고 눈에서 빛이 나는데, 파란 눈의 아이들은 꺼벙해지고 성적도 내려갔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목사님들 중에서도 부흥하는 교회의 목사님들을 보면 ‘우리 교회는 부흥합니다.’라는 생각으로 꽉 차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안 됩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부흥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장래는 하나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상황이나 형편이 캄캄해도, 밝아도 담대해야 됩니다. 교회를 누가 핍박해도 기죽을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원래 교회를 핍박하는 자는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9절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하듯이, 오늘날에도 악한 영들과 믿지 않는 자들은 믿는 자들을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말씀대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엄마가 딸에게 말했습니다.
“순이야!”
“왜 엄마?”
“뒷마당에 가서 빗자루를 갖고 오너라.”
“무서워서 못 가.”
“왜 무서워?”
“캄캄하잖아.”
“그래도 괜찮아. 뒷마당에도 예수님께서 계시니 무서워 말고 가서 갖고 오너라.”
“정말 예수님께서 계셔?”
“그럼.”
그러자 순이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예수님, 빗자루 좀 갖다 주세요.”
예수님께서 빗자루를 갖다주지 않으셔도 예수님께서는 뒷마당에도 계시고 앞마당에도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뿐 아니라 여러분의 일터에도, 가정에도, 어디에나 다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십니다. 그리고 전능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장 부족한 자가 사는 길
창 21장 14~22절 / 민경설목사
우리사회의 가장 고질적 문제는 언제부터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어느 시대나 다 있었지만 문제의 심각성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중간 역할을 하는 중산층이 요사이 들어 줄어들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합리와 대화의 폭은 줄고 대립과 충돌로 일삼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 사회의 일류선호사상입니다. 일등만 되어야 하고 금메달만 따야 하고 일류대학만 들어가야 박수를 치는 풍조,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것들도 중요하지만 뒤에서 묵묵히 노력하고 뛰어주는 수많은 사람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적은 보수에도 땀흘려 일하는 손길들이 있기에 일등도 있고 최고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에게는 다릅니다. 누구든지 주님 안에만 있으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 속에만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는 일등도 꼴지도 없습니다. 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믿느냐 입니다. 또 우리 주님께서는 처음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부족한 자, 실패한 자, 넘어진 자라도 주님 안에서는 다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끝까지 믿으면 승리합니다. 비록 죄를 지어 잘못했다 해도 진정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과 그 믿음을 의지하고 순종하면 누구든지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도 보면 다말, 라합, 룻, 밧세바 등 이들은 도저히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순종하면 길이 열립니다. 성경에서 이스마엘이라고 하면 나쁜 사람, 아브라함과 그의 첩인 하갈에서 불법으로 태어난 사람, 죄를 지은 사람, 하나님에게 부족한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는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고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깨닫게 됩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창21:9-11)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헤매다가 물과 음식이 다 떨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하갈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샘물을 찾게 하시고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자들에게 갈 수 있는 길을 어떻게 열어주십니까?
첫 번째,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고 부르짖으면 길이 열립니다.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거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창21:16-17)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갈과 이스마엘이 잘못했어도 하나님께 나와서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했어도 우리의 부르짖음을 보십니다. 우리의 잘못보다 부르짖고 기도하는 것을 더 크게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큰 실패를 하고 잘못을 해도 하나님을 움직이는 방법은 하나님께 나와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긍휼과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 나오는 자를 하나님은 한 번도 버리신 적이 없으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두 번째, 아무리 부족한자도 주께 나와 기도하면 영적 눈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창21:19) 우리가 어렵고 길이 없는 것은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 눈이 감겨있기 때문입니다. 하갈이 광야에 있을 때 그 곳에 샘물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샘물은 옆에 있었지만 하갈의 눈이 감겨서 못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문제가 있는 곳에 길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 길을 보지 못합니까? 우리 속에 분노와 정욕과 세상을 사랑하는 욕심이 우리의 눈을 가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눈을 열어주십니다.
세 번째, 기도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쏘는 자가 되었더니”(창21:20) 참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이스마엘과 함께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스마엘이 나쁜 사람이라고, 나쁜 사람이 됐다는 것은 그가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가 신앙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도 처음부터 버리운 자는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신임을 받아 회계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의 유혹을 받았고 버린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기도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기도하십시오. 아무리 부족해도 살 길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4:7) 이스마엘도 기도하여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광야에서도 살아남게 되고 나름대로 승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일등이 아니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살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안에서는 나중 된 자가 처음 되는 길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쫓겨나는 하갈과 이스마엘
창세기 21장 14-21절 / 행복한목사
14절 /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아브라함은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했을 때 도저히 사라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그 두 모자는 당장 생계가 막막해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살인자가 되고 말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차마 자기 아들과 그 어머니 하갈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는 것은 절대로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공의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하자고 하는 대로 그 요구를 다 들어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사라의 요구를 거절할 이유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무슨 생각을 품었든지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4절 앞부분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이 말은 22장에도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억지로 순종한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왜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야 한다고 할 때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까? 그건 사라의 말대로 그 두 사람을 내보내면 그 두 사람이 당장 살아갈 길이 막막해서 분명히 목숨을 잃어버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 두 사람을 내보내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두 사람을 내보내라고 하실 때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 두 사람의 생계를 책임지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시고 그 명령을 내리신 것이라고 아브라함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3절 /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스마엘을 통해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거라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는 이제 하갈과 이스마엘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더 이상 버티지 않고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면 그 명령이 아무리 우리 생각에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 명령을 책임지고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무슨 명령이든지 달게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 두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15-16절 /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내어 우니”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준 음식과 물을 가지고 정처 없이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이 떠날 때 가지고 나왔던 물이 다 떨어져버렸습니다. 이제 그 두 사람은 꼼짝없이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갈이 그런 자기들의 신세가 너무 처량해서 이스마엘과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서로 마주보며 목 놓아 울었습니다. 하갈은 자기들의 신세가 너무 비참하고 너무 절망적이어서 아주 큰 소리로 통곡하였습니다.
17절 /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하갈이 그렇게 목 놓아 울고 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하갈을 위로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통곡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천사를 하갈에게 보내주신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하갈에게 보내주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원망과 불평은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갈은 자기들의 신세가 너무 처량해서 목 놓아 울었는지 모르지만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은 그 어머니 앞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했으며, 하나님께서는 살려달라고 하는 이스마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하갈에게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다보면 하갈과 이스마엘이 만난 것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반드시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절대로 그 절망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낙심에 빠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다 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그들이 처해있는 힘든 상황으로부터 건져주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애굽 병사들이 자기들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을 그 쪽으로 인도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할 때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듣고 그들을 구해주신 것이 아니라 모세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을 구해주셨습니다.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불만을 쏟아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말을 들으시고 그들을 그 어려운 상황에서 건져주신 것이 아니라 그 때도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더라도 절대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더라도 거기서 우리를 건져내주실 하나님을 믿으시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간구를 통하여 우리는 그 절망 가운데서 건짐 받게 될 것입니다.
18절 /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처한 절망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통곡하고 있는 하갈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마엘을 통하여 한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약속의 후손들에게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약속을 받지 않은 종의 후손들에게도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며, 모든 만물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19절 /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하갈은 그들이 마실 물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목 놓아 울었는데, 놀랍게도 그들 바로 곁에 샘물이 있었습니다. 하갈은 그걸 보지 못하고 그렇게 통곡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열어주시니까 그들 바로 곁에 있는 샘물이 하갈의 눈에 띄었고 그들은 그 샘물을 마시고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살고 죽는 것,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느냐, 열어주지 않으시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왜냐하면 살 길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에 있는데 다만 우리가 그 길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게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심으로써 늘 눈이 밝은 상태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바로 곁에 있는 사는 길, 성공하는 길을 발견하시고 그 길로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창 21:14-21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 .”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신 것은, 사랑스러워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치는 모든 인간의 마음과 그 행실은 사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오직 악할 뿐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창세기 6:5).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시게 (창 6:6) 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 대해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창세기 8:21) 라고 진단을 내리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주님께 여쭙기를,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바울도 에베소서 2 장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전,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 (1절) 이요,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2절) 살면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 .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3절).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4-5절).
그러니까, 하나님은 세상이 사랑스럽거나 구원받을 만한 자격과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분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더더욱 구원받은 여러분과 제가 그나마도 구원받지 않은 이들보다 의로워서 구원해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비가 넘치시고 그 사랑이 크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4).
이 사실이 오늘 본문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이 그 엄마와 함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게 된 이유는, 이스마엘에게 잘못이 있어서였습니다. 아버지는 같지만, 배는 다른 동생 이삭이 젖을 떼던 날,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삭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적어도 17 살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날 때, 아브라함이 86살이었고, 이삭이 태어날 때는 그의 나이가 100살이었습니다. 이 때 이스마엘은 14살이었고, 이삭이 태어난 지 3년 만에 젖을 떼었다고 한다면, 이스마엘은 14살인 겁니다.)
17살의 이스마엘이 3살짜리 동생 이삭이 젖뗀 것을 기념하는 큰 잔치 중에 그 동생을 어떤 말과 행동으로 놀렸는지, 성경은 자세히 언급을 하지 않고 있지만, 사라가 보았을 때에는 이삭을 위해서, 이스마엘과 그 엄마인 하갈을 더이상 집 안에 둘 수 없는 이유가 될 정도였으니, 아마도 이스마엘의 장난이 도가 넘어간 장난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사라의 요구를 따라 이스마엘과 하갈을 집에서 내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도 자신의 아들인지라, 차마 그리할 수 없는 마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도 이삭과 이스마엘은 떨어져야 하고, 이삭만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이어갈 씨라고 하시면서, 아내의 말을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갈은 졸지에 아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아들과 함께 집에서 쫒겨나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으로, 엄마가 자신과 함께 집에서 쫓겨 나고 말았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에 사로잡혔을 겁니다.
두 모자는 쫓겨나서 브엘세바라는 빈 들에서 정처없이 방황하다가, 결국 가죽부대의 물이 다 떨어지고 말았고, 하갈은 아들을 한 응달에 있게 하고 자신은 화살이 날아갈만한 거리만큰 떨어져서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하갈은 울면서, 자신을 많이 탓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자기가 처음 이스마엘을 임신했을 때, 여주인 사라에게 교만하게 굴지만 않았더라도, 지금까지 오랜 세월 여주인의 미움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테고, 지금 아들과 함께 이렇게까지 집에서 쫓겨나서 이 빈들에서 마실 물이 다 떨어져서 아들과 함께 죽을 수 밖에 되지는 않았을거라고 말입니다.
그 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천사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하갈에게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17-18절) 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사의 말씀에 따르면, 소리내어 울고 있던 사람은 하갈만이 아니라,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도 울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이스마엘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엄마마져 비참하게 되어 죽게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깊은 죄책감 속에서 울고 있었을 겁니다. 두 모자는 자신들의 잘못이 가져 온 결과 앞에서 자신들을 탓하고 있었을 테고, 피할 수 없이 다가오고 있는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소리 내어 울고 있던 하갈과 그 아들에게 하나님은 응답하시며 다가 오셨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찾아 오신 하나님의 천사의 입에서는 저들을 책망하시거나 정죄하시는 말 한마디도 없었다는 겁니다. 이들이 당하게 된 고통과 위기가 이들이 잘못하여 당하는 것이었지만, 이들이 아브라함이나 사라를 원망하거나 탓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자비를 구하였을 때, 하나님은 이들에게 정죄하시거나 책망하시는 말씀 한 마디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는 용서와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과 진리 속에 여러분과 저의 소망이 있고, 기쁨과 감사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대부분은, 우리의 욕심과 어리석음과 교만의 열매가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고통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탓하기보다 우리의 잘못을 자백하며 겸손히 하나님의 용서와 도우심을 구하며, 고통과 회심의 눈물을 보여드릴 때,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과 허물을 들추어 내기를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또 우리에게 죄책감을 불어 넣어주며 정죄하기를 즐기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오히려 이런 것은 같은 죄인들끼리 서로에게 그렇게 합니다. 자신도 죄인이고 허물과 잘못이 많은데도,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들추어내고, 책망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죄가 없으신 분이신데도, 죄인들의 죄를 들추어내고 책망하며 정죄하시는 것보다 덮어주고, 용서하고, 새롭게 만들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찾아 오셔서, 얼마든지 저들에게 책망의 설교를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울음과 눈물 속에 자신들의 후회와 회개와 뉘우침을 담은 마음을 보신 하나님은, 이미 이들을 용서하시고 자비와 사랑의 품으로 안아 주시며,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시고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 당장 필요한 식수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하갈이 샘을 발견하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담아다가 아이에게 먹였다”). 그리고 이스마엘과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세상에는 의인과 죄인 두 부류가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광 또는 하나님의 기대와 수준에 미칠 수 있는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죄인만 있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큰 죄를 지었어도, 그것을 뉘우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원하는 사람의 귀에는 하갈이 들을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정죄와 멸하시기를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회개하는 자들은 용서하시고 생명과 풍성한 삶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은, 자비와 사랑이 넘치고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두 전에는. . .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 . .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서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 .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3-5, 8-9).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하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출애굽기 34:6, 7).
여러분과 저의 죄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용서해주시고, 새 생명과 끊임없는 은혜를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오늘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이 찬양과 감사는 영원토록 드려도 충분하지 못하지만, 기억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릴 때마다 마음과 뜻을 다해 드립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저희에게 영원한 자비를 끊임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죄인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라 불러주시고,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라고 불러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또다시 새롭게 헌신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얻은 저희의 감사와 찬양을 받으시옵고, 저희를 부르신 뜻을 따르고자 새롭게 헌신하는 저희에게 능력과 지혜를 더하여 주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얻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하갈아 무슨 일이냐?
창 21:14~21 / 송기현목사
독일의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창조질서 네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가정, 국가, 교회, 노동, 이 네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간여하시는 창조의 기본 질서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이 중 첫 번째가 가정입니다. 구약에 "가정"이라는 단어가 1,850회나 나옵니다. 그런데 가정을 가지런히 하는 것은 전적으로 어른들의 책임입니다. 방탕한 부모는 자녀를 방탕으로 인도하도하게 되며, 욕심이 많은 부모는 그 자녀들을 탐욕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정 공동체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정욕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결정을 하거나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스스로 가정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위적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평안하던 가정에 하갈을 끌어들이고 이스마엘을 얻게 됨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의 가정은 여려 차례 불란을 겪에 됩니다. 그 중에 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 말씀이 오늘 주어진 본문 말씀입니다.
하갈과 그의 소생인 이스마엘과 사라와 그의 소생 이삭이 한 집에 동거하는 상황 가운데서 또 한번의 가정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삭이 자라서 젖을 떼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일이 발생했고 그것을 본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10절)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1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므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을 떠나게 됩니다. 집을 나온 이 두 모자에게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습니다. 곧 가지고 나온 떡과 물은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는 가운데 다 떨어져 버리고 환경에 약한 아이였던 이스마엘이 죽은 것을 차마 지켜보지 못하겠어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나아가서 소리내어 울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어린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스마엘이 무엇을 말했는지 한 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이의 소리를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고 찾는 자의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하갈은 자신을 위해서 보다 아들 이스마엘을 위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갈이 하나님꼐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은 그 어린아이 즉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울음과 기도를 통하여 그녀의 아들의 소리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위한 근심과 기도에 대해서 뛰어나고 놀라운 관심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하갈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인생을 고달프게 하고 눈물짖게 하고 고통케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실리가 없으시겠지만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질문하신 것입니다. 항상 질문에 답이 있습니다 질문만 잘 하고 잘 받아도 그리고 그 질문을 붙잡고 씨르만 잘 해도 좋은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울고 있는 이유를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하갈은 침묵합니다. 이 침묵의 의미는 하나님, 하나님이 아십니다. 이스마엘 때문입니다. 이스마엘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이스마엘을 위해서 무엇을 돕는데 있어서 무기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침묵은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 답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답변을 들으시고 "이스마엘을 큰 민족이 되게 하실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친어머니조차 포기해버린 아이가 큰 민족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민족은 너무 강했기 때문에 수천년 동안을 이 세계의 모든 적들과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국가였습니다. 누가 그 민족, 그 나라를 창시했습니까? 광야에서 축쳐저 죽어가고 있던 그 이스마엘, 바로 그 어린 아이였습니다.
전에는 '사래의 여종'이라고 부르셨으나, 이제는 종이 아닌 자유인으로서 '하갈'이라 부르셨습니다. 언제까지 종의 태도를 갖지 말고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고 격려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뵈옵고 약속의 말씀을 듣자 하갈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히셨습니다." 19절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하갈과 이스마엘이 목말라 찿았으나 찿지 못했던 샘물이 하나님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하갈의 눈이 밝아져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글의 코끼리 가족이 물줄기를 찾아서 광야를 횡단하여 길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코끼리 가족을 이끌고 있는 것은 60살 먹은 할머니코끼리였습니다. 할머니코끼리로부터 시작해서 손자손녀 사촌코끼리들이 생존을 위해서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갑니다. 그런데 가족중에 어린 코끼리가 지쳐서 결국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게 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할머니코끼리가 자신의 코를 땅을 향하고서는 이리저리 탐색하더니 한곳을 상아로 찍어 파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샘물이 솟아났고 그 물을 마신 쓰러진 코끼리가 힘을 얻고, 모든 코끼리 가족들도 그 물을 마시고 생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니 코끼리가 쓰러져 죽어가는 자신이 돌보아야할 어린 코끼리가 죽어가자 그를 살리고자 한 행동이 놀랍기 그지없었습니다.
관점이 바뀌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게 됩니다. 인생의 모든 일은 우리의 시각, 관점, 눈높이에 의해서 제한을 받습니다. 하갈의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하갈의 아이 같던 관점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높아졌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부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갈과 이스마엘의 하나님도 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울고 있는 아이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가 아이였기 때문에 더욱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선택받은 민족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도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도 돌보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함께 계셨습니다. 사라는 두 모자를 내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고작 하루분의 양식과 물을 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먹이시고 키워주셨습니다. 이스마엘은 빠르게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면서 활 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 하갈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하물며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백성들이야 얼마나 기뻐하시고 돌보시겠습니까?
광야에 거주하는 인생
창 21:14-21 / 이상모 목사
이스마엘과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들의 파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도 한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13절) 이들이 언약의 가정으로부터 분리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계속해서 돌보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 믿는 사람들, 하나님 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이 세상의 불신자들은 아무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내려주시는 은총을 일반은총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에게도 햇빛을 비춰주시고 비를 내려주십니다. 이러한 일반은총 가운데는 하나님의 손길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겸손하게 하나님을 인정하며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도 이런 은혜가 함께 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의기양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지 않으면 결국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집에서 내쫓긴 하갈은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다가 물이 다 떨어져 기진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는 간단히 기록되어 있지만, 그 상황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절박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기진하여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하갈은 죽어가는 아들로부터 활의 사정거리, 약 250-300m 쯤 떨어진 곳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고 떨어져 나온 이 모자는 이제 죽음 앞에서 신음하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음과 통곡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17-18절)
아브라함이 이렇게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보낸 것은 무책임하고 몰인정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아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을 이러한 각도에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들을 내보내면 그들이 광야에서 죽게 될 것을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그토록 고민하며 깊이 근심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했을 때,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내보낸 이스마엘과 하갈을 돌보아주셨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순종이 이들을 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순종하면 망할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는 대안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결국 이스마엘과 하갈을 살렸습니다.
첫째 : 부르짖으면 도움의 길을 주신다.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16,17절)
하갈과 이스마엘이 브엘세바 들에서 아무 희망도 없이 방황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의 묘사는 머물 곳도 갈 곳도 없이 헤매고 있는 절망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물마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들이라고 번역된 광야는 물이 떨어지면 곧 죽음을 뜻하는 장소였습니다.
하갈은 물이 떨어지자 아들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는 큰 나무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광야에서 큰 나무를 발견하기란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의 고통을 겪고 있는 아들을 떨기 나무 그늘에 쉬게 해 잠시라도 뜨거운 햇볕을 피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떨기나무는 허리 높이에 미치는 것도 별로 없고 그저 무릎 정도가 대부분인 관목의 일종이었습니다.
그러니 작디작은 그 가시 덤불이 얼마나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하갈은 화살이 날아가 떨어질 거리만큼 가서 아들을 마주 보고 앉았습니다. 화살이 날아갈 거리라면 꽤 먼 거리입니다.
어미로서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갈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마음으로 멀리 가시 덤불 아래 있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방성대곡 하며 눈물을 쏟아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17)
그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하갈은 과거 하나님으로부터 큰 구원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임신한 채로 사라의 핍박을 피해 광야로 무작정 도망쳐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나타나 그녀와 그녀의 태중의 아이를 돌보아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하갈은 하나님께서 보잘것없는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실 뿐만 아니라 돌보아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감격해 '엘 로이', 즉 '살피시는 하나님'(창16:13)이라 이름을 지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감격적이고도 은혜로운 체험이었습니다. 그 체험이 있은 후 하갈이 하나님의 돌보심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면 지금처럼 그렇게 쉽게 낙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살피시는 하나님' 즉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그 고백을 믿고 살아왔다면 어려운 상황이 닥쳐올지라도 지금 하갈의 모습처럼 쉽게 절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갈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에 품고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앙고백도 잊고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 떨어지자 아들의 죽는 꼴을 못 보겠다고 방성대곡 울음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둘째 : 기도하면 눈을 열어주신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19절)
우리 인간은 우둔해서 보고도 못 보는 소경과 같습니다. 같이 산에 가도 산삼을 보고 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아서 캐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야에 열리지 않으면 보고도 모르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주시면 우리 영혼은 아무 설명 없어도 다 본능적으로 알아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눈을 밝히사 샘물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그 샘은 없었던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 때 새로 만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있던 샘을 발견하게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게 되었고,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장성하여 활 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갈이 발견한 샘물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이미 주셨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부족한 것이 많아서 고생하며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우리 가운데 풍성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낙심하고 슬퍼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하갈을 기억해주셨을까요? 왜 하나님의 사자가 이들을 구하러 오셨을까요? 그들이 아직 언약으로부터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언약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기억하시고 돌보신 것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 밖에 있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언약 밖에 있던 자들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광야에서 하갈은 가까이에 있는 샘을 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녀의 눈을 밝히시자 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 육체가 연약해도 귀히 쓰신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18절)
20절에도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아들 이삭에게만이 아니라 서자인 이스마엘에게도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복음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 얄궂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사랑해 주시고 복 주셨을까?
그러기에 우리 육체도 희망이 있습니다. (렘32: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이 그 험한 광야에서 강해져서 활 쏘는 자가 되었듯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도 우리 육신에 주신 은사로 세상을 이길 능력을 갖게 하시고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게 하시고 또 복음 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우리 육신도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그의 아내는 애굽 여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영혼은 하늘에 속했지만 우리 육체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이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도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육신이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육신도 잘 관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약해지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육체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의 영원한 새 집이 우리에게 입혀지기까지 우리의 시원치 못한 육신이라도 잘 관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스마엘의 축복
창세기 21:14-21 /
하갈의 방황(14-16); 아브라함은 하갈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는 아내 사라의 요구에 갈등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라의 말대로 하라는 말씀을 듣고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보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행동을 보면 너무도 매정하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 아브라함의 행동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갈을 내쫓지 않고 하갈의 어깨에 떡과 물 가죽 부대를 친히 메워줍니다. 그리고 배웅(살라)을 합니다. 아마도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갈을 매정하게 내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쩔 수없이 내보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야박한 사람일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는 족장이었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에 낙타 한 마리 정도는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시대의 고대 문헌을 보면, 주인의 아이를 낳은 종에게 자유를 주게 되면 그 종의 자식은 유산에 대한 모든 상속권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당시 관습대로 했을 수 있지만 이 역시 아브라함의 성품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초점을 둬야 할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앞날에 하나님께서 책임 지실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대로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하갈은 육체의 자유를 얻었지만, 그녀에게 닥친 환경은 광야였습니다. 물론 하갈이 원한 자유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육체의 자유는 그만큼 고통이 따릅니다. 사람들이 육체의 구속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힘들어하면서도 자유를 찾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갈 역시 종이 신분이며 주인인 사라로부터 눈칫밥을 먹는 신세였지만 그래도 주인 곁에서 배를 곯지 않는 종의 신분이 더 나았습니다.
종도 두 가지 종류의 종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선한 사람과 또는 악한 사람 밑에서 종노릇 하는 사람이 있고, 육체의 종노릇 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종인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의 종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육체의 삶과 나가서 영원한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과 축복(17-18); 아브라함이 준 물이 다 떨어졌을 때 하갈은 황량한 들판에서 위기를 맞았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서로 목놓아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다"라며 하갈의 슬픔을 위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의 실수에도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실수의 결과이며, 언약 백성이 아닌 하갈과 이스마엘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손길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역사를 이뤄나가실 때에, 이들과 관계된 믿지 않는 자들이 원치 않는 피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저들이 비록 믿지 않는 죄인들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한 보응을 해 주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의 축복(19-21);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 육체의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즉 이스마엘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그의 필요를 채워 주셨으며 아울러 활 쏘는 자, 즉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의 한계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주어진 것은 육체의 복으로 누구나 신앙과 관계없이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신학적인 표현으로 일반 은총인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믿음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복은 육체의 복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결국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이스마엘이 받은 육체적인 축복을 원하는 믿음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국 하갈의 신앙에 머문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에 사라와 이삭 그리고 그의 충실한 종 엘리에셀과 같은 종이 있었던 반면에 교만한 하갈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갈 수준에 머무는 교회가 있고, 하갈 수준의 신자들이 예배당 안에 있습니다. 신앙과 예배가 세상과 양다리 걸치며 살아가는 수준의 사람들입니다. 하란에 머물렀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처럼 'Almost Christian'인 것입니다.
성경은 지속적으로 말합니다. 데라처럼 하란에 머물지 말고, 하갈처럼 불신의 수준에 머물러 광야로 내쫓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의 장막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오직 예수 신앙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떠나지 않음으로써 교회를 통해 부어지는 특별한 은총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황야의 이스마엘과 하갈
창세기 21장 14~20절
종의 신분에서 아브라함의 첩이 돼 대족장 아브라함의 후계를 잇는 복을 누릴 뻔한 하갈은 그러나 은혜도 모르고 그 주인과 아들을 모욕함으로써 쫓겨난 하갈은 이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광야에서 그 자식과 비명횡사할 위기에 놓이게 됐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면서 죽어가는 자식 이스마엘을 붙들어 세우라고 한다. 그리고 하갈에게 이스마엘을 통해 민족을 이룬다고 하면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 그들을 살린다. 그리고 그렇게 살리신 이스마엘에게 그가 장성할 때까지 함께 하셔 그가 광야의 들에서 살아가는 민족을 이루개 한다. 광야에서 목말라 죽게 될 뻔한 하갈과 이스마엘이 하나님으로 인해 목숨을 건지고 복을 받는다.
이스마엘과 하갈이 내쫓긴 것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가문에 들기엔 알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갈은 대대로 유목민의 집안이었던 아브라함의 가문과 달리 정착민이었던 이집트의 여인이었다. 또 하나님을 섬기던 아브라함 가정에서 태양신이며 다양한 신을 섬기던 이집트에서 나고 자란 하갈의 영향력은 하나님만을 유일한 신으로 섬기는 아브라함의 가문에는 어울리지 않는 영향력과 사고관을 그 후예들에게 형성하기에 십상이었다.
또 적자인 이삭에 비해 이스마엘은 서자일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지 못한 아브라함의 믿음 약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직접 그 태를 열어 사라를 통해 생산하게 한 신이 주신 아이 이삭보다 정통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게다가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처럼 응당 하나님의 기업을 잇는 정통성은 사라와 이삭에게 양보해야 함에도 가문의 권력과 지위만을 욕심내어 자신의 주제를 넘는 짓을 벌여 결국 주인과 주인의 신인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잘못까지 저지른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의 출신과 배경과 또 개인적인 성품으로 인해 하갈과 이스마엘은 쫓겨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처럼 신의 일을 하는데 적합하지 않은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나타나 그들의 목숨을 구원해 줄뿐만 아니라 그들이 큰 민족을 이룬다며 어쩌면 사라와 이삭이 받은 복 못지않은 축복 또한 허락해 준다. 어째서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그와 같은 축복을 허락하셨을까? 물론 하갈은 아브라함의 씨를 가졌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비록 하나님을 믿지 못해 제멋대로 하나님의 사업을 그르칠 뻔한 적도 있는 등 하나님 앞에 완전한 의인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돌이키고 회개해 더 나은 자신의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자였다. 따라서 이런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아브라함의 씨 이스마엘 역시 아브라함의 모습을 닮을 가능성이 있는 자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나타나신 것은 하갈이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육만을 이은 존재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 하갈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는 믿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갈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모욕하기 이전, 이미 아브라함의 첩으로 들어갔을 때 이스마엘을 임신할 때 그의 주인 사라의 임신하지 못함을 가지고 그 여주인을 모욕해 쫓겨난 전례가 있다. 비록 그 자신의 주제넘음의 결과로 하나님의 가문에서 쫓겨남에도 이미 하나님은 하갈에게 나타나 그에게 자신의 사자를 통해 하갈에게 하갈의 씨를 크게 번성해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니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는 말을 전한다. 그러자 하갈은 그 말에 감동해 하나님이 자신의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다면서 그곳을 브엘로 헤 이스라엘이라 이름 지으며 그를 학대하던 여주인 하갈에게로 돌아간다.
비록 그녀는 아브라함의 가문과 출신도 또 신분도 다르고 믿는 신도 다른 존재였지만 적어도 자신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에 신뢰해 자신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룬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면서 자신을 학대하는 주인 밑으로 다시 복종하기 위해 들어가는 용기를 지닌 자였다. 하갈은 아브라함과 달리 인종도 신분도 겸손한 성품 또한 지니지 못했지만, 아브라함과 만나 하나님의 가문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의 복을 기대해 용기를 낼 수 있는 아브라함과 같은 가능성을 지닌 자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가능성을 보고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임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아이가 자라 어엿한 성인이 될 때까지 그와 함께 하면서 그가 장성해 광야에서 거주하면서 활 쏘는 자가 되어 결국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해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어 이스마엘은 민족을 이루게 된다. 비록 하갈과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하나님께선 그들에게 다른 가능성, 다른 모양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해 번성할만한 가치를 보신 것이다.
비록 그렇게 번성한 무리가 이스마엘이 이삭을 모욕한 것처럼 하나님의 민족 이스라엘과 다투며 싸우기도 하는 역사를 되풀이하기도 했지만 하갈이 그 태생적인 신분과 배경과 지위를 넘어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대해 용기를 낸 것처럼 그 가운데서 그들이 변화하고 이스라엘과 관계 맺으며 교류한다면 그들이 그 태생적인 한계를 넘어 다시 자신을 넘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의 후손을 이 땅에 남겨둔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업을 잇는 일에 적합하지 않을 뿐, 이 세상에 다른 모습,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번영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갈과 이스마엘의 존재를 후대로 잇는다.
결국 하나님이 이처럼 하갈과 이스마엘을 돌보신 것은 하나님이 사라와 이삭 못지않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가문을 돌보신 궁극적인 이유가 하갈과 이스마엘 같은 히브리인과 다른 이방 민족, 온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민족은 결국 하나님의 사업 즉 모든 민족과 사람들에게 축복과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기 위해 선택된 민족이다. 따라서 그런 막중한 사명을 갖춘 민족은 엄격한 자격요건을 갖춰야 했고 배경과 또 출신에 있어서 특수성을 지녀야만 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런 아브라함의 가문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제한 것은 그들의 자질이 하나님의 기업을 잇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그들을 미워하거나 아브라함의 가문만을 편애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단순히 조금만 생각을 한발 더 나아가 본다면 아브라함의 존재 이유,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기업을 잇는 가문의 존재 이유는 하갈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민족을 위해서라는 점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못지않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구원이 정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선 그들이 하나님의 가문을 이을 자질이 없다고 해서 그들을 내팽개쳐 두고 죽든 말든 알아서 하게 방치해두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께선 아브라함의 가문을 통해 그의 위대한 사업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즉 하갈이 아브라함의 나약함, 어쩌면 아브라함이 부족하고 하나님을 불신해 생긴 관계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주인과 이삭을 모욕해 쫓겨난 사람들이라도 상관없이 그들이 아브라함과 관계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복을 받고 또 구원을 받는 모습은 결국 사람의 부족함이나 나약함에 상관없이 그 한계를 지닌 인생사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만으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한계를 넘어 우리의 가죽 부대의 물을 채우시겠다는 본질을 보여주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도 아브라함과 같은 사랑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갈과 이스마엘이 생명을 이어 민족을 이루는 구원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