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에서 마므레까지의 여정
창 35:16-29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창 35:16-29 / [베냐민을 낳고 죽은 라헬] 야곱 일행은 벧엘을 떠났다. 에브랏까지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 라헬이 해산할 때가 다 되어서 몹시 고통스러워하였다. 17) 그 출산은 난산이었으므로 라헬은 너무나 괴로워하였다. 그때 산파가 그에게 말하였다. `라헬, 두려워하지 마세요. 아들을 낳으셨어요. 기운 차리세요.' 18) 그러나 라헬은 죽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거두면서 그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다. `내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아이의 아버지인 야곱은 `운이 좋은 아들'이라는 뜻으로 베냐민이라 고쳐 불렀다. 19) 라헬은 이렇게 세상을 떠서 에브랏으로 가는 길가에 묻혔다. 지금은 에브랏을 베들레헴이라 부른다. 20) 야곱은 라헬의 무덤에 비석을 세웠다. 그 비석은 오늘날까지도 그곳에 남아 있다. 21) 야곱은 그곳을 떠나 에델 망대 건너편에 천막을 쳤다. 22) 야곱 일행이 그 땅에서 살 때 르우벤은 자기 아버지 야곱의 소실인 빌하와 잠자리를 같이하였다. 야곱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척 격노하였다. [야곱의 아들들;대상2:1-2]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다. 23) 레아가 낳은 아들로는 야곱이 맏아들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 있다. 24) 라헬이 낳은 아들은 요셉과 베냐민이고 25) 라헬의 몸종 빌하가 낳은 아들은 단과 납달리이며 26) 레아의 몸종 실바가 낳은 아들은 갓과 아셀이라. 이들은 모두 메소보다미아에서 태어난 야곱의 아들들이다. 27) [이삭이 죽다] 야곱은 기럇아르바라고도 하는 헤브론 근처 마므레에 사는 아버지 이삭을 찾아갔다. 기랏아르바라고도 부르는 헤브론은 한때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몸붙여 살았던 곳으로, 그때는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28) 이삭은 180세까지 살았다. 29) 이삭은 나이가 많아 기력이 쇠하여 숨을 거두고 조상들 곁으로 갔다.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다.
야곱과 그 일행이 다시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에브랏에 이르기전에 라헬의 산고가 시작됩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16-21) 아이를 낳는 라헬의 산통이 아주 극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파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 힘을 내라 격려했지만 결국 라헬이 난산으로 인하여 죽게 됩니다. 죽으면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부릅니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갓 태어난 어린 아이를 남겨두고 떠나는 어머니 라헬의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름을 베냐민이라고 고쳐 짓습니다.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그의 마지막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으로 지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구원사적으로 열두 지파의 기초가 되는 열두 아들이 완성인 막내아들로서 고통을 기쁨으로 보상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하고 묘지를 세웁니다. 다시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표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베냐민의 출생과 함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22-29) 막내 베냐민이 태어나고 이스라엘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장남 르우벤으로 인하여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르우벤의 패역한 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들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의아한 것은 이 일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본 단락에서 야곱의 열두 명의 아들들이 소개됩니다. 여기서 소개하는 순서는 본처의 자식들, 그리고 첩 중에 연장자의 자식들의 순서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밧단아람에서 낳은 자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라헬이 마지막으로 낳은 아들 베냐민은 밧단아람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베냐민은 에브랏, 즉 베들레헴 근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아들을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라고 말합니다. 창세기의 기자는 이 열둘을 각각의 존재로 표현하기보다 열둘을 하나로 표현하여 열둘이 다함께 우상의 문화 밧단아람에서 빠져나왔고, 이제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적용: 야곱의 삶에 문제는 끊임없이 계속 됩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삶의 문제 속에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마귀의 방법은 언제나 기도보다 사람의 무엇을 앞세우게 합니다. 마귀의 목표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도를 멀리하게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데 있습니다. 죠지 뮬러는 기도를 모든 일보다 제일 앞에 순서로 놓았습니다. 기도를 둘째로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둘째로 여기는 것과 같은 잘못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 설 교 >
인생여정(III)
창 35장 21~29절 / 이한배목사
ㅇ 질 문 - 무엇이 무섭습니까 ?
I. 서 론
우리가 인생의 길을 가면서 만나게 되는 일들을 창세기 35장에 나오는 야곱의 인생여정을 통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담고 있는 내용이 거룩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경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 진실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인생의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되는 진실을 정직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솔찍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II. 본 론
우리가 인생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일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요 ?
6. 절망이 있습니다.(창 35:21-22)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자 그를 베들레헴에 장사를 지내고 길을 또 갔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를 잃어도 인생의 길은 계속해서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죽었다고 우리의 인생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가 죽어도 우리는 우리의 인생길은 계속해서 가야 합니다.
그리고는 에델 망대를 지나서 장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 땅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때에 장남 르우벤이 서모 라헬의 몸종 빌하와 통간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버지 야곱이 들었습니다.
빌하도 자기 아버지의 두 아들 단과 납달리를 낳았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곧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생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이 사건은 어떤 사건일까요 ?
1) 절망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르우벤과 빌하가 통간한 것을 야곱이 들었다는 말로 끝이 납니다.
이것은 야곱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빌하와 르우벤이 통간을 한 것은 서로 놀아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 중에 어떤 하나가 주도적으로 잘못한 것이 아니라, 둘이 서로 눈이 맞아서 놀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의 아들 둘을 낳은 빌하를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장자인 르우벤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야곱에게는 그들을 어떻게 할 힘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듣고만 말았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여정에는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런 절망적인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이 이 사실을 인정한 것과 같이, 우리는 이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절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길에는 우리의 힘과 지혜로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있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더 큰 불행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길에서 절망적인 일을 만날 때에는 받아드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2) 가정에 관계에 심각한 기능장애가 찾아옵니다.
빌하와 시므온의 사건으로 야곱의 가정에는 심각한 기능장애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① 야곱과 빌하와의 관계가 망가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야곱은 이제는 빌하와 정상적인 관계를 갖을 수가 없습니다.
아들 르우벤과 놀아난 여인을 어떻게 정상적으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
이렇게 야곱과 빌하와의 관계가 망가졌습니다.
② 야곱과 르우벤과의 관계가 망가졌습니다.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한 자를 비록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정상적으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
이렇게 야곱과 장남 르우벤과의 관계가 망가졌습니다.
③ 식구들 간에 관계가 망가졌습니다.
시므온과 빌하가 통간하는 장면을 야곱이 목격한 것이 아니라, 야곱은 그것을 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야곱의 식구들 중에 누군가가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정에 식구들 간의 관계에 심각한 장애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망적인 일입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생의 여정을 가다가보면 이렇게 가정의 관계에 절망적인 기능장애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① 부부간에 사별로 인한 부부의 관계에 기능장애가 찾아옵니다.
② 자녀들의 출가로 인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기능장애가 찾아옵니다.
③ 이런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것 외에도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가정에 관계에 기능장애가 찾아옵니다.
이 중에 문제가 되는 것은 세 번째입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가정에 관계가 기능장애가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왜 르우벤과 빌하 사이에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성경에 없습니다.
이것은 이 사건이 우연히 일어났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들었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을 알고도 야곱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야곱도 인정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분명한 동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야곱은 그런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관계의 기능장애가 생기는 것은 그 앞에 뭔가 원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야곱은 라헬이 죽자 그의 몸종 빌하에 대하여 무관심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야곱이 다른 아내들은 사랑하고 빌하는 무관심함으로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관계의 기능장애가 생기는 것은 그 앞에 뭔가 원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적인 관계의 기능장애는 어떻게 막을 수 없지만, 이런 불행으로 인한 관계의 기능장애는 막아야 합니다.
3) 죄악의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에 대한 심판은 성경에 금방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나중에 보면 그 죄악에 대한 심판이 분명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1) 르우벤에 대한 심판(자격 상실)
야곱은 죽기 전에 자녀들을 축복합니다.
그때에 르우벤에 대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창 49:3-4)
① 르우벤은 장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대를 이어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① 위광이 초등했습니다.(pre-eminent in pride)
즉 장자라는 자존심이 강했습니다.
자존심이 있는 자였습니다.
② 권능이 탁월했습니다.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르우벤은 장자가 될 능력과 권리가 충분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장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죄악으로 인하여 그는 장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장자의 권리를 박탈을 당했습니다.
장자의 자격이 박탈되었습니다.
우리 식구들 중에 자격 상실자가 나온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다가보면 이런 불행한 일도 만날 때가 있습니다.
(2) 레위와 시므온에 대한 심판
르우벤이 장자의 명분을 잃으면 둘째인 시므온이 그 장자의 명분을 잇고 그리고 시므온이 장자의 명분을 잃으면 셋째인 레위가 그 장자의 명분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레위도 이 장자의 명분을 이어받지 못합니다.
나중에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기도할 때 이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노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5-7)
이것은 축복기도가 아니라 저주기도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두 번째 세 번째 아들이기 때문에 르우벤이 잃은 장자의 명분을 이어받아야 하는데, 숙곳에서 세겜 족속 하몰의 식구들을 칼로 죽였기 때문에 그들도 장자의 명분을 받는 자격이 박탈되었습니다.
이들도 자격이 박탈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냥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가 장자의 명분을 잃었다는 식으로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식구들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자격을 받탈 당했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왜 르우벤, 시므온. 레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
이 두 사건에는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가던 길을 중단하고 머물렀을 때 일어났습니다.
①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다가 숙곳에서 머물렀을 때에 딸 디나가 세겜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에 강간을 당하고, 그래서 그 수치를 갚기 위하여 레위와 시므온이 자기 여동생 디나를 아내로 달라고 하는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으면 주겠다고 하고는 그들이 할례를 받고 고통을 당할 쯤 제3일에 칼을 차고 가서 그 집의 남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렇게 야곱이 가던 길을 중단하고 머물러 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② 야곱이 베들레헴을 떠나 헤브론으로 가다가 중간에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을 때, 즉 거기에서 머물렀을 때, 그 때에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인생의 길, 신앙의 길을 가다가 중단하게 될 때 이렇게 우리의 자녀들이 그들의 자격을 박탈 당하는 비극을 맛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단을 하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
신앙생활에 방학을 하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
여러분의 자녀들 중에 신앙생활에 방학을 자들은 없습니까 ?
봉사생활에 방학을 한 자들은 없습니까 ?
그것이 자녀들의 인생에 자격을 상실하는 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7. 끝이 있습니다.(창 35:27-29)
에델 망대에서 절망적인 일을 만난 야곱은 그곳을 떠나 기럇아르바로 갑니다.
기럇아르바는 헤브론을 이야기 합니다.
이곳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우거하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보니 아버지 이삭이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그때 이삭의 나이는 180세였습니다.
야곱이 집을 나갈 때 160세였는데, 20년을 버틴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 이삭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례를 지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1)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가 온다.
이삭은 180세라는 긴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래도 결국은 그도 죽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세대는 결국은 가게 되어있습니다.
아무리 안 갈 것 같아도 다 갑니다.
아무리 가시 싫어도 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가 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대도 간다는 것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야하는 사람은 갈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젊은이들은 우리의 세대도 온다는 것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앞으로 세대가 오는 자들은 앞으로 자기 앞에 다가올 세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세월은 빨리 간다.
이삭은 180세라는 긴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래도 이삭에게 자기의 산 삶을 이야기 해보라고 하면, 어젯밤 꿈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욥은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이 없이 보내는구나”(욥 7:6)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고 했습니다.
세월이 빨리 간다는 것을 명심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3) 인생은 오직 한번 뿐이다.
영국에 세계적인 명문 캠브리지대학을 졸업한 명문 가정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3형제가 다 명문대학을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장래가 총망 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은혜를 받아서 23세에 서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죽을 때까지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그의 이 모범적인 선교활동으로 인하여 세계적인 선교단체가 생겨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계복음화십자군(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입니다.
그가 바로 찰스 스터드(Charles T. Studd)입니다.
그가 “오직 한번뿐인 인생”(Only one life)이란 시를 썼습니다.
그는 그 시에서
“Only one life, ‘twill soon be past
(인생은 오직 한번뿐, 그것도 속히 지나가리)
Only what’s done for christ will last“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 삶만이 영원하리)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오직 한 번뿐입니다.
누구도 인생을 두 번 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남이 있는 삶은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산 삶뿐입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은 헛것입니다.
험악한 삶을 산 야곱도 오직 하나님께 단을 쌓은 것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만이 영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더하십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 사는 분들은 지금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님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시지 않으신 분은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속히 지나가고 가면 모든 것이 헛된 인생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라헬과 이삭의 죽음
창 35:16-29 / 엘림전원교회
창세기 35장의 전반부(1-15절)는 바른 길에 들어선 야곱의 언약행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롭게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재확인시켜 주셨습니다.
하반부인 16절-29절까지는 야곱의 주변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가 한편의 드라마처럼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의 비극적 운명(16-20절), 장자 르우벤의 패륜적 범행(21,22절), 4명의 여인에게서 출생된 야곱의 열두 아들들(23-26절), 이삭의 쓸쓸한 죽음(27-29절)등은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을 살다가 사라져 가는 유한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무상(無常)한 가를 절실히 느끼게 합니다.(시90:10절) 한편 르우벤은 서모(庶母)와의 패륜행위로 인하여 장자권을 박탈당했을 뿐 아니라(대상5:1), 그 후손도 언약의 뒷전으로 물러나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1. 야곱과 함께 하신 하나님
우리는 야곱에게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을 통하여 인생이 가야 할 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야곱의 관계는 곧 나와 하나님의 관계이며 야곱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은 바로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40:8-10, 43:1-2참조)
(1) 하나님에게 돌아올 것을 촉구하심
35:1절에 보면 야곱에게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벧엘로 올라갈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자들의 삶속에서 실패나 퇴보가 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촉구하십니다. 계시록 2:5절에도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 회복의 원리인 것을 아셔야 합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 보면 미지의 넓은 세계가 보이듯이 하나님의 높고 거룩한 표준을 생각할 때 사람이 자기의 타락한 상태의 비참함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이게 됩니다. “×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란다(책망)” 는 말과 같이 사람은 얼마든지 자기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과거의 언약을 상기시키며 벧엘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시는 음성을 듣고서야 야곱은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입니다. 세겜에서 벌어진 엄청난 비극적 사건의 원인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눈을 뜨고 가정을 바라볼 때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자기 가정에 이방 우상이 있었으며,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수 없는 추한 모습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을 향하여 우상을 버리고 정결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죄를 회개하고 생각을 바꾸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제야 하나님의 기준을 깨닫고 참된 예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2) 무능력한 존재임을 깨달은 야곱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 하던 때에 나타났던 하나님”을 기억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사람은 환난 날에 자신의 마음이 가장 낮은 단계에 처해있던 과거의 한 지점으로 가 보아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현실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인들은 그러한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고 자신의 부족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하고 하나님께 힘과 도움을 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무능함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야곱이 벧엘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시어 복을 주시고 야곱에게 왕들이 그의 허리에서 나오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창35:10) 그러나 인생은 무상한 것입니다. 야곱이 베들레헴(에브랏)에 이르렀을 때 그렇게도 사랑했던 라헬이 막내아들 베냐민을 출산하다가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한 생명은 태어나고 한 생명은 떠났습니다.
2.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22-26)
22절에 보면 레아에게서 난 큰 아들 르우벤이 그 서모 빌하(라헬의 여종)와 통간(通姦)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야곱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성경은 여기서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는 딸 디나가 세검에게 강간을 당해 얼마나 무서운 소동이 일어났었습니까? 르우벤의 패륜적 행위 자체도 규탄되어야 하겠지만 세겜에서의 불 신앙적 행위와 일처제 제도를 어긴 결과였음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상들에게 약속하신대로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선민 이스라엘의 열두 조상으로 세우셨으니 이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뿌리가 되었고(창49장, 신33장) 이는 신약에서 예수님의 열두 사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신약교회와 천국의 기본 형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계21:12이하 참조)
3. 이삭의 죽음(27-29)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떠난 지 30년 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집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올 때 12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아버지가 사시는 곳에 와서 13년간 모시고 살았습니다. 이삭이 소천 했던 곳은 아브라함도 우거했던 헤브론 이었으며 그때 이삭의 나이는 180세였다고 했습니다. (28절) 우리는 여기서 이삭의 죽음의 주는 의미를 생각 해 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1) 평온한 죽음
29절에 보면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盡)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중간에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 문제로 야곱이 이삭의 품을 떠난 지 30년 만에 돌아오는 가슴 아팠던 세월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삭의 한 생애는 비교적 평온했고 잠자는 듯 열조에게 돌아가는 죽음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이 함께 장사하였으니 복된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늦둥이 외아들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으며 신앙으로 죽은 이삭의 생애는 하나님의 은총이 그와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열조에게 돌아간 이삭
그는 더 높고 더 다른 생을 시작했습니다.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는 것은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생의 시작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생의 온갖 수고와 노고는 무덤과 함께 끝나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계14:13)
(3) 끝으로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모두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신분이 낮은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도 죽고,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미모의 여인 라헬도 죽고, 하나님의 유업의 상속자 이삭도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도, 자색 옷을 입고 날마다 뚱땅거리며 잔치를 베풀었던 부자도 죽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번 나면 죽게 되어 있는 인생, 살았을 때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심각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아야 하겠습니다.
또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더 나은 성이 예비되어 있습니다.(살 전 4:13-18, 계14:13)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복하는 삶을 삽시다. 우리는 본장(창35장)에서 야곱을 중심으로 한 라헬의 죽음, 이삭의 죽음을 통하여 신앙의 타락과 회복, 하나님의 징계와 사죄하심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롬15:4절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무엇이든지 전(典)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의 열두아들
레아-①르우벤 ②시므온 ③레위 ④유다.- 첩(妾)빌하(라헬의 여종)-⑤단 ⑥납달리. 첩(妾)실바-⑦갓 ⑧아셀. 레아: ⑨잇사갈 ⑩스불론-(딸)디나. 라헬-⑪요셉 ⑫베냐민
라헬의 죽음과 르우벤의 패륜
창세기 35장 16-29 /
◆ 라헬의 죽음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자식을 낳음으로써 비로소 야곱은 아들이 12명이 되었다. 이로써 이스라엘 12지파의 기초가 완성되었다. 베냐민은 지금까지 11명의 아들 중 가장 막내였던 요셉보다 무려 15년 이상이나 차이가 난다.
라헬은 그토록 자식을 더 낳기를 원했지만, 뒤늦게야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죽게 되었으므로 자신이 돌볼 수 없으리라는 슬픈 마음에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불렀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야곱은 후에 그 이름을 비슷한 발음인 '베냐민'으로 바꾸었다.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오른손은 행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라헬의 죽음은 뜻밖이다.
라헬은 에브랏 근방에서 죽었는데, 에브랏은 후에 베들레헴과 같은 지역으로 취급되었다. 벧엘은 예루살렘 북쪽이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이다. 벧엘에서 에브랏까지는 도보로 대략 30km 거리다.
라헬은 베들레헴에 다가와서 죽었다. 이동 중에 죽은 것이다.
왜 야곱은 만삭이 된 아내를 데리고 이동을 시작했을까? 서두를 이유도 없고,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이동을 강행했을까? 야곱의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었겠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라헬이 아들을 낳을 정도라면, 아직 젊은 나이다.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 대략 사십 대 중반에서 오십 대 초반 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난산하고 죽었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은 야곱에게 특별한 슬픔이다.
28절에 보면 야곱의 아버지 이삭도 죽은 기록이 나오는데, 언뜻 보면 라헬의 죽음 직후에 일어난 사건 같지만, 사실 이삭의 죽음은 라헬의 죽은 지 13~14년 이후의 일이다. 오히려 이삭의 죽음보다 12년 정도 앞서서 요셉의 실종 사건이 먼저 벌어진다.
◆ 르우벤의 패륜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라헬의 죽음에 겹쳐서 이젠 장남 르우벤이 야곱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죄를 저질렀다. 기가 막힌 패륜이다. 장남이 이러하니 밑의 동생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그런데 야곱의 태도가 매우 모호하다.
단호하게 책망해야 하건만, 야곱은 단지 '들었더라'로 끝이다. 한마디로 자녀도 아내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우유부단하고 속으로 구시렁대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못하는 겁 많고 소심한 사람이다. 이쯤 되면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답답하고 본인도 답답했을 듯하다.
야곱에게 계속되는 고난.
딸 디나의 겁탈 사건에 이어서, 이제는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그리고 르우벤의 패륜까지.
이뿐 아니다. 더 큰 사건이 야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는 것이다.
도대체 복을 약속하시고 항상 함께하시겠다는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야곱에게는 당시에 이스라엘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가 붙었고, 후대에는 메시아의 조상, 믿음의 선진,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을 받은 자라고 칭송되었지만, 정작 야곱의 일생은 고난과 슬픔의 연속이었다.
야곱은 130살이 되어서 애굽의 바로를 만났을 때 자기 인생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 47:9)
험악한 세월 - 그것이 야곱이 스스로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도 한가지는 분명하다. 야곱은 그 험악한 인생길에서 신앙의 사람으로 살았고, 평생에 걸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배웠다. 비록 야곱은 자기 인생을 만족하지 못했을지라도 야곱의 인생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교훈과 위로를 남기고 있다.
야곱은 말년에 병들어서 죽어갈 때 하나님을 향해 이런 고백을 한다.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창 48:15)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우리는 야곱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나를 기르신 하나님!
우리 인생은 해석하기 어려운 일이 참 많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왜 그러시는지 이유를 알아내려고 골몰하지만, 끝내 알 수 없는 일들이 태반이다. 안 풀리는 문제 붙잡고 있다가 그 뒤의 많은 문제를 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시험이 끝나면 해설이 포함된 정답이 주어지듯이 천국에 가면 모든 것이 또렷해질 것이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욥처럼 하나님을 함부로 판단하는 잘못은 저지르지 말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선하심은 변하지 않는다.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
당신을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신뢰합니다.
야곱의 아들 열둘
창세기 35:16-29 / 김영대목사(주성교회)
“마하나님”(32:2)을 통해 “브니엘”(32:30)에서 야곱은 죽고 하나님과 하나 되었고, 세겜에서 “엘엘로헤이스라엘”(33:20)로 나타내셨는데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디나 사건을 통해 벧엘에서 “엘벧엘”(35:7), 즉 ‘벧엘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다. 야곱을 벧엘로 몰고가심으로 자기 언약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벧엘의 하나님이란 야곱이 하나님의 집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오심으로 하나님의 집이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난 강론에서 ‘벧엘의 이스라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다. 하나님의 집이 된 이스라엘이다. 이제 열두 아들로 채워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신다.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16-17절). “길을 떠나”라는 말의 ‘나사’는 ‘(말뚝을) 뽑아내다, 출발하다, 떠나다, 여행하다’라는 뜻이고, “에브랏”의 ‘에프라트’는 ‘열매를 맺음’이다(대상 2:19에서는 “에브랏”, 대상 4:4에서는 “에브라다”로 번역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벧엘이 목표였다면 이제 벧엘에서 살도록 해 주셔야 하는데 또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벧엘을 떠난 것이지만 언약적 의미에서는 벧엘이 되어 출발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야곱 한 개인이 아니라 야곱과 함께 그 가족이 성전으로 지어진 후 언약으로 출발한다는 뜻이다. “벧엘”에서 출발해야 하는 이유는 “에브랏”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의 옛이름이다(19절). 이런 점에서 언약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먹이시는 것이 온전한 열매 맺음이다.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16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해산”도 히브리어로는 ‘얄라드’이고 “고생하여”라는 말도 ‘얄라드’이다. 즉 ‘아들을 낳다, 해산하다, 산고를 겪다’라는 뜻이다. “심히”라는 말은 ‘카샤’인데 ‘어렵다, 완고하다, 맹렬하다, 곤란하다, (목이) 곧다’라는 뜻인데 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강함을 나타낸다(신 10:16에서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난산”(17절)이라고 번역된 말도 ‘카샤 얄라드’이다. 즉 라헬이 아들 낳는 일을 완강하게 거부함으로 사람들이 언약의 아들을 낳는 일을 싫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이것은 라헬이 원했던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던 일이다.
2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30:23-24)
언약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 육에서 벗어나는 일은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환난과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이 말씀의 은혜를 입히시는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18절). “혼”이란 ‘네페쉬’로 ‘호흡하는 존재, 욕망, 욕심, 동물, 생명력’이라는 뜻이다. 호흡하는 목숨은 이제 버리는 상태가 되었다.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베노니”는 ‘벤’(아들)과 ‘아웬’(고통, 슬픔, 거짓, 사악, 헛됨)이고, “베냐민”은 ‘빈야민’으로 ‘오른손의 아들, 남쪽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베노니와 베냐민은 한 사람의 두 이름이다. 진짜 언약의 아들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두 이름의 의미를 담고 오신다는 것이다. 여자의 슬픔, 고통 가운데서 죽음으로 완성되는 구원이다. ‘오른손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구원을 나타내는 표현이다(시 17:7, 20:6, 98:1 등).
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15-17)
라헬이 요셉을 낳고 또 다른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분명 그녀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라헬은 위로받기를 거절했다. 왜 그런가? 레아처럼 더 많은 아들을 낳아야 위로가 된다는 것인가? 예레미야의 예언은 바벨론 포로의 상황을 가리킨다. 라마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며(수 18:25)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서 가깝고 또한 벧엘로 가는 도중에 위치한 곳이다. 그리고 이 부근에 라헬의 무덤이 있는 셀사가 있었다(삼상 10:2). 라헬은 바로 이 라마에서 그 자식들이 끌려가는 모습(렘 40:1-2)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라헬은 이스라엘의 어머니로서 통곡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식이 없어 슬퍼했던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로 죽은 사실을 이스라엘의 포로 된 상황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고 마태는 선언한다(마 2:18). 헤롯의 유아들 학살 사건과 관련시킨 것이다. 즉 이 두 사건의 초점은 라헬로 비유된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의 애곡이라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 때에는 이방 왕의 속박을 받게 된 것에 대한 어머니들의 애곡이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는 또 다른 이방인 에돔 사람 헤롯 왕에 의해 살해된 베들레헴의 아이들로 인한 어머니들의 애곡이었다. 그러므로 언약적으로 라헬의 애곡은 말씀의 씨가 없어서 참 생명을 낳지 못하는 여자들의 아픔을 대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라헬이 비록 요셉이라는 아들을 얻었고 거기 더하여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하나 더 얻었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죽어야 하는 목숨을 가진 자로 이는 자기 목숨이 영생이 아니라는 고백을 담은 애곡이다. 그러나 이러한 애곡은 베노니가 아닌 베냐민으로 말미암아 그치게 될 것이다. 이제 아들들이 열둘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언약의 아들 야곱 안에서 이스라엘로 완성된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언약의 완성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언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19-21절). 라헬은 열조의 묘 막벨라 굴에 장사되지 못했다. 막벨라 굴에는 오히려 레아가 묻힌다(49:30-31). 라헬이 길에서 죽어 버려짐으로 레아가 막벨라 굴에 묻히게 되었다는 것은 레아는 라헬 덕분에 야곱의 아내가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이라는 죽음은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 된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떡을 나누어주는 베들레헴이라는 떡집이 되는 것이다.
“묘에 비를 세웠더니”라는 말에서 “묘”의 ‘케부라’는 ‘바위를 뚫거나 돌이나 벽돌로 지은 무덤’이고, “비”는 ‘맛체바’로 ‘기둥’이라는 뜻이다. 라헬이 비록 막벨라 굴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상태가 되었다. “이스라엘 다시 길을 떠나”라고 다시 길을 떠났다고 언급한다. 16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기서도 ‘나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출발하게 하신 것임을 나타낸다. “장막을 쳤더라”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성전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22절). 장자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하는 사건으로 인해 후에 야곱은 예언의 축복을 할 때에 르우벤이 장자권 축복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내었다(49:31-33). 아마도 르우벤은 이러한 이교적인 행위를 통해서 섣불리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했던 듯하다. 즉 장자권을 이어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이는 야곱이 과거에 장자권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탈취하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르우벤의 이러한 행위는 율법을 문자로 열심히 지키는 것을 비유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라고 언급한다는 것은 디나가 강간을 당한 그 사건과 같은 차원에서 언약의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의 부끄러운 일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역대상에 의하면 장자가 둘이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대상 5:1)
르우벤은 육의 장자이고 요셉은 영의 장자이다. 둘 다 야곱의 아들이지만 요셉은 육의 아들이 아닌 영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요셉은 합환채(‘두다이’ : 언약적 사랑)가 낳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야곱 집안의 장자는 르우벤이지만 이스라엘의 장자 명분은 요셉에게 있다는 의미이다. 재산권을 계승하는 자가 장자가 아니라 언약을 계승하는 자가 장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언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이스라엘로 하나님은 이끌어 가신다. 그래서 르우벤의 음행으로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라는 완성을 향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다. 열둘이란 숫자로 야곱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육의 사람이 장자권을 잃고 영의 사람이 제대로 장자권을 가지고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하나님은 야곱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야곱의 아들들을 다시 명확하게 언급함으로 단순히 육의 아들이 아닌 언약의 아들로 열두 지파를 이루실 것이다. “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23-26절).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27-29절). 라헬을 잃은 슬픔과 지울 수 없는 치욕의 기억을 지닌 채 야곱은 마침내 이삭이 있던 “기럇아르바의 마므레”에 이르렀다. “기럇아르바”는 “헤브론”의 옛 이름이다. 이렇게 옛 이름을 언급한 것은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루스가 벧엘이 되었으며, 야곱의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된 것에 대한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끌어 어떻게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는가를 말씀하는 것이다.
이삭이 “백팔십 세”로 죽었다는 것은 ‘100’과 ‘80’은 ‘7’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일하심 위에 이루어진 안식, 여분으로 주어진 은혜의 충만한 상태를 나타낸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태 속에서 두 국민, 두 민족이 싸우며 나누이는 것으로 시작된 여덟 번째 톨레도트는(25:19)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어 열두 아들을 거느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으로 돌아옴으로 끝맺는다. 이삭의 사망은 사실상 뒤에 전개될 요셉이 총리가 되기 1년 전의 일이나 이제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말씀이기에 이삭의 톨레도트를 마무리 짓고 나서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을 주신다는 의미이다(2024111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말한 대로 인생이 지어집니다
(창세기 35장 16-29절 / 이한규목사
< 말한 대로 인생이 지어집니다 >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한 문제가 풀리면 또 다른 문제가 다가옵니다. 그런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고난을 승리로 만들고, 탄식을 찬송으로 만들고,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어가며 사는 것입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으면서 죽어갈 때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불렀습니다(창 35:18). 베노니란 ‘슬픔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때 야곱은 곧 그 이름을 베냐민이라고 바꿔 부릅니다. 베냐민이란 ‘기쁨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 장면을 보면 극한 슬픔 중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겠다는 야곱의 의지가 엿보입니다. 또한 그 장면은 말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만약 ‘슬픈 자녀’란 뜻의 베노니라고 계속 부르면 그 자녀는 기쁜 자녀가 되기 힘듭니다. 그처럼 “나는 불행하다!”라고 말하면 어느새 불행한 삶이 자신을 휘감습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면 어느새 행복한 삶이 자신을 휘감습니다. 누에가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로 고치를 짓듯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인생의 집을 그 말한 대로 짓습니다.
요새 신혼부부 중에 이혼이 많은 이유 중에 하나는 호칭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새 신혼부부 사이에서 남편을 부르는 호칭 제 1위가 ‘오빠’라고 하는데 그렇게 부르니까 부부가 아닌 오빠로 알고 헤어지는 것도 쉽게 한다고 합니다. 그처럼 말은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삶과 인격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말은 자신을 나타내고 자신을 빚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긍정적으로 만들어 가십시오.
어린 자녀가 무서운 꿈을 꾸고 공포에 젖을 때 부모가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합니까? 이런 식으로 말해주십시오. “얘야! 나도 가끔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좋은 일이 꼭 하나 생겼단다.” 그 말 한 마디가 자녀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런 말은 어떤 예언자의 예언보다 위대한 예언입니다.
어떤 축구팀이 중요한 축구시합을 하러 가는데 그 선수단 차량을 장의사 차량이 막고 있었습니다. 한 선수가 말했습니다. “더럽게 재수 없네!” 그 말을 듣고 다른 선수들도 재수 없다고 생각했고 선수들의 사기가 떨어졌습니다. 그런 안 좋은 영향을 간파하고 코치가 지혜롭게 말했습니다. “좋은 징조야! 내가 선수 시절에 장의사 차량만 보면 꼭 이겼어!” 그 말 한 마디가 선수들의 사기를 올려주었습니다. 그 코치의 말은 위대한 예언입니다.
< 가장 잘 믿는 사람 >
말과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십시오. 문제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야곱은 가장 사랑했던 라헬이 죽는 상황에서도 기쁨을 노래하며 살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처럼 어떤 고난이 와도 기쁨을 노래하는 자가 되십시오. 사실상 고난을 통해서 영혼은 더욱 성숙해지고 강해집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습니다. 고난은 사람을 강하게 만듭니다.
지구본을 보면 강한 사람은 대개 북쪽 사람들입니다. 장수하는 사람들과 잘 사는 사람들도대개 북쪽 사람들입니다. 적도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다 열악하고 평균수명도 40세밖에 되지 않습니다.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휩쓰는 사람들도 거의 북쪽나라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하계올림픽은 거의 남쪽나라 사람들이 금메달을 휩쓸어야 하는데 하계올림픽도 북쪽나라 사람들이 거의 금메달을 휩씁니다. 그처럼 따뜻하고 좋은 환경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지나온 세월을 살펴보면 어느 해도 문제가 없었던 해는 없었습니다. 해마다 정치는 혼란했고, 사회는 불안했고, 경제는 어려웠습니다. 그런 문제들을 뚫고 지금 잘 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문제가 없는 것’이 감사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믿음을 잃지 않은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그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성과 헌신을 새롭게 다짐할 때 삶의 무게는 현저하게 줄어들고 삶의 기쁨도 회복될 것입니다.
누가 가장 잘 믿는 사람입니까? 이상하고 특이한 신앙행위를 하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겸손한 모습으로 기쁨과 생기를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입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주님의 세계와 주님의 섭리를 노래하는 기쁨을 잃지 마십시오. 믿음의 수준은 봉사의 양이나 헌금의 양이나 기도시간이나 금식기간으로 잘 가늠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누리는 기쁨으로는 잘 가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