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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50719 /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 눅 4:21-30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5.07.15|조회수96 목록 댓글 0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눅 4:21-30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눅 4:21-30 /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성경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22) 거기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 23)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마도 너희는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라는 속담을 내게 적용하여 `가버나움에서 행한 것과 같은 기적을 고향인 여기에서도 해보시오!' 하고 말할 것이다. 24) 그러나 내가 분명히 너희에게 일러둔다.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는 예언자는 없다. 25-26) 예언자 엘리야가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과부를 도운 일을 생각해 보라. 그 당시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아 온 땅에 기근이 계속되던 때에 도움이 필요한 이스라엘인 과부가 많이 있었으나 엘리야가 보냄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아니라 이방인 과부가 아니었느냐? 27) 또한 엘리사는 도움이 필요한 이스라엘인 나병환자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그들을 제쳐놓고 오히려 수리아 사람 나아만을 고쳐 주지 않았더냐?' 28)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화가 나서 29) 뛰어 일어나 예수께 몰려들었다. 그리고 동네 끝에 있는 벼랑으로 끌고 가서 아래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군중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그곳을 떠나셨다.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나사렛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지만,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응하신 말씀(21-23) “응하였느니라”는 말씀은 대개 예언의 성취와 관련하여 사용되어지는 표현입니다(막 1:15). 따라서 너희가 방금 들은 성경 말씀이 오늘날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이제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으로, 지금 이 말씀을 보는 모든 세대들에게도 구원의 시기가 동일하게 현재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고후 6:2).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목수였던 요셉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메시야로 증거한 사실을 의심하며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 있는 말씀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배척받는 사역(24-2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례를 따라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사 61:1-2). 그리고 이 예언의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증거하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은혜로운 말씀에 귀를 기울였지만, 말씀을 끝마친 후에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며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염두에 둘 뿐 그가 메시야라는 사실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선입견으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는 자가 없다”라는 말씀과, 엘리야와 사렙다 과부, 엘리사와 나아만의 예를 들며 이방인의 신앙을 통해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책망하십니다.

 

그들 가운데 지나가신 예수님(28-30) 예수님의 책망에 나사렛 사람들이 격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선민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구원은 확실히 보장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들이 이방인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찬양과 경배의 분위기로 가득 찼던 회당은 아수라장으로 돌변하였으며,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교만하여 회개하지 못하는 완악한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적용: 예수님께서는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는 사람들 가운데를 그냥 지나가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그냥 지나치게 한 일들은 없는지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벤자민 프랭클린. 별것도 아닌데 왠지 귀찮게 느껴지는 사소한 일들이 있지 않나요? 어떤 사람들은 중요한 일과 함께 그런 일들마저 척척 처리하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귀찮고 자잘한 일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자 합니다. 처음에는 분명 작고 귀찮기만 한 문제였는데, 쌓아놓고 보니 엄청난 일이 되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때 그때 처리하고 뒤돌아보면 뿌듯하고 가뿐할 텐데 말입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룬다면 내일은 또 더 많은 일을 해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 설 교 >

누구를 위하여?

김흥규목사(내리교회) / 눅 4:21-30

<故鄕有情-처음에는 듣기 좋았는데>

오늘 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에는 누가복음에 나타난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하겠습니다. 성경을 여러 차례 읽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설령 이 말씀을 읽었다고 할지라도 그 의미가 이렇게 깊은 줄도 몰랐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제가 받은 은혜를 오늘 여러분도 그대로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이 자라나신 나사렛 고향에 가셨습니다.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 들어 가셨습니다. 회당에는 고향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가족들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갑자기 이스라엘의 스타가 되셨습니다. 각색 병자를 고쳐주셨고 이전에 그 누구로부터도 들어보지 못한 신비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눅 4: 14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산지사방에 퍼졌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유명해진 예수님이 고향에 돌아온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기대를 많이 했겠습니까? 아마도 기대와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듯 컸을 것입니다.

우리 내리교회에서 쭉 자라난 분이 신학교에 들어갔고 한국을 대표할 만한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런 분이 모교회에 와서 설교를 한다고 할 때 우리 역시 기대와 자부심이 클 것입니다. 다름 아닌 우리 교회가 저런 훌륭한 분을 길러냈다는 긍지 때문이지요.

지금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이 일어나 성경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이사야 61: 1-2절 말씀을 보란 듯이 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복음을 전하게 했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이제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 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억눌린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읽으신 뒤 자리에 앉으시자 고향 사람들의 눈은 일제히 예수님께로 쏠렸습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사야 61장에 있는 말씀이 고향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이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복음이 되었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제 참으로 중요한 장면은 22절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너무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을 들은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자부심이 넘쳐흘렀습니다. “과연 우리가 소문에 듣던 대로 예수님은 대단한 분이구나!” 이구동성으로 감탄했습니다. 22절을 보세요.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너나없이 감탄했다는 말이지요. 여기에서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는 말은 예수님을 비꼬는 말이 아니라 친근감에서 나온 덕담입니다. 요셉이 아들 하나는 잘 키웠다는 칭찬이지요. 마치 우리 교회 출신의 훌륭한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은혜를 받은 교인들이 “야, 아무개의 아들 참 대단하다!”고 칭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셉의 아들이 참 대단하다고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호적인 분위기가 23절 이하부터 갑자기 바뀝니다. 따뜻했던 분위기가 일시에 싸늘해집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눈에 고춧가루와 흙먼지를 뿌립니다. 그것은 나사렛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께 진짜로 기대하는 속마음이 무엇인지를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그 당시 이스라엘에 널리 알려진 속담이 하나 있었습니다.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Doctor, cure yourself!) 의사가 남의 병을 고치기 전에 자신의 병부터 먼저 고치라고 비아냥거리는 속담이지요.

이 속담 바로 뒤에 나오는 말씀으로 보건대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이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고향인 나사렛에서 그대로 해주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아셨던 것 같습니다. 의사가 괜히 다른 사람을 고친다고 설치지 말고 자기의 병부터 먼저 고치라는 충고처럼, 예수님 역시 다른 동네 사람들의 병 고친다고 설치지 말고 고향 사람들의 병부터 먼저 고치라는 주문이지요. 나사렛 사람들의 이런 마음속에는 분명히 “네 고향부터 먼저 챙기라!”는 은근한 압력과 주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교회? 누구를 위한 목회자?>

여기서 우리는 교회나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와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져봐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합니까? 목사는 누구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이 교회에 속한 교인들부터 먼저 돌봐야 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지요. 우리 내리교회나 내리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은 기본적으로 이 내리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을 섬기고 돌보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건대 교회가 꼭 내부에 있는 교인들만 돌보라고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고향 사람들만 위해서 봉사하시지 않고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섬겼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내리교회도 일차적으로는 내리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을 위해서 존재하겠지만,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더 넓혀야 합니다.

내리교회가 위치한 중구, 인천, 대한민국, 온 세상을 위해 섬기기 위한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저를 비롯해서 교회의 녹을 받는 이들 역시 교인들이 헌금해서 나온 돈으로 월급을 받으니 꼭 교회 일만 하라고 못 박는 것도 잘못입니다. 교회 안이든 밖이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때로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에 더 크게 기여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 배우는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예수님은 당신이 자라난 고향이라고 해서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기적과 봉사를 베푸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고향땅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혈연이나 지연, 학연과 같은 연결고리를 떠나 우주적인 마음을 품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24절에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탄식하십니다. 예수님이 자기들과 똑같은 고향출신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기대감을 품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리의 말씀만 선포하시는 예수님이 달갑게 여겨질리 없습니다. 달콤한 칭찬을 기대하는 고향사람들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니 누군들 좋아하겠습니까?

 

<이방인들을 먼저 돌보시는 하나님>

이제 25-27절을 보면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이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는 기대를 정확하게 간파하신 후에 그들의 기만과 허위를 폭로하십니다. 아마 예수님 같은 분이 설교하시기에 딱 들어맞는 장소로서 나사렛 같은 곳이 없을 것입니다. 나사렛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로 넘쳐 났습니다. 나사렛의 서쪽과 북쪽에는 페니키아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남쪽에는 사마리아인들이 있었습니다. 서쪽에는 헬라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또한 나사렛를 비롯한 주변 동네들은 수도인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성도(聖都)인 예루살렘의 영향은 거의 받지 못했고 오히려 이방인들의 영향권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나사렛에서는 정말로 경건한 유대인이 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조롱한 것도 이러한 나사렛의 분위기를 그대로 압축한 말입니다. 이런 시기에 나사렛 사람들은 갑자기 유명해진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들의 마음에 유대인이라는 선민의식 혹은 성민의식을 다시 불붙여주기를 잔뜩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이들의 지방색이 강한 민족주의적 기대와는 아랑곳없는 말씀만 하십니다. 구약의 두 경우를 예로 드는데 모두 선지자들이 동족인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부터 먼저 돌봤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온 땅에 기근이 심했습니다. 도처에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이들이 속출했을 때 엘리야는 이방인 과부를 먼저 돌봤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수많은 유대인 과부들이 굶어 죽어갔지만 엘리야는 유독 이방인인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또 한 경우는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 안에 나병환자들이 많았지만 아람, 즉 시리아의 군대장관이었던 나아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쩌자고 구약시대에 가장 큰 이사와 기적을 베풀었던 엘리야와 엘리사 두 선지자가 이스라엘 동족들이 아닌 이방인들부터 먼저 돌봤다는 사실을 강조하시는 것일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나사렛 사람들이 고향부터 먼저 챙기라는 소리 없는 요구를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고향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더욱 더 큰 기사와 이적이 고향과 동족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팔이 안으로 굽은 하나님이 아니라, 안과 밖의 이분법적 경계를 뛰어넘어 무차별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혈연과 지연과 학연과 같은 좁은 틀 안에다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가두지 말고, 우리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우주적인 뜻과 계획 밑에다가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故鄕無情-때로 입에 쓴 약이>

이제 참으로 중요한 대목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의 매몰찬 반응입니다. 먼저 28절을 보면 회당에 모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나사렛 사람들이 크게 화를 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만일 사람들이 내 설교를 듣고 나서 화를 내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당연히 저는 두려워 할 것이고 장차 목회에 많은 어려움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진리와 생명의 말씀만 외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때로 청중들의 마음을 휘젓고 화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오늘 여기 성경에서 확인했습니다. 듣기 좋다고, 다 칭찬만 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가 아니라, 때로 청중의 기대와 하나님의 뜻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날 때 하나님의 뜻이 고스란히 실린 설교가 그릇된 회중들을 화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듣기 좋은 설교만 좋은 설교가 아닙니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나게 만드는 설교도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사렛 사람들이 그렇지요. 자기들은 지금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에게 더 큰 이사와 기적을 베풀어주기를 기대하는데 예수님은 엉뚱하게도 구약시대 최고의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부터 돌봤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계속해서 이런 말을 듣게 되자 누구 말대로 뚜껑이 열렸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을 더 사랑하신단 말인가?” “우리가 이곳에서 와서 듣기 원한 말은 하나님이 우리 유대인들, 특히 나사렛 사람들을 최고로 사랑하신다는 말인 줄 알았는데 왜 자꾸만 이방인들 이야기만 하는 걸까, 이제 이방인들에 둘러싸여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나사렛 사람들마저 망하게 할 작정인가?”, 하면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산 낭떠러지까지 예수님을 끌고 가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지요! 오늘 읽은 22절에 보면 나사렛 사람들은 처음에 예수님께 호의를 보였습니다. 감탄해서 덕담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생판 딴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자기들이 듣고 싶은 말을 안 하니까 화를 내며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친구가 원수로 급변한 것이지요!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내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다고 칭찬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 달콤한 이야기로 재미있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때로 청중들 사이에서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고 심지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존 웨슬리가 설교했을 때 사람들이 격분해서 두 사람을 해치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귀에 달콤하게 들려온다고 해서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은 아닙니다. 내 마음을 흔들어놓고 때로 화나게 만든다고 해서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말씀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내리교회는 진리의 반석 위에 선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내 기대 밑에 두는 교회가 아니라 내 기대를 하나님의 뜻과 계획 밑에 두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이 교회는 교회에 다니는 이들만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땅 끝까지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위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아멘!

 

 

 

 

낭떠러지 상황을 극복하라

눅 4:22-30 / 이한규목사

< 사명을 잃지 말라 >

 

1992년 임병철 선교사는 목사 안수를 받고 1993년 괌 밑의 축이란 남태평양의 한 작은 섬으로 선교를 갔다. 당시에 냉장고도 없는 열대 지역에서 3년간 선교하면서 그의 몸은 거의 망가졌다. 근육무력증에 심장도 허약해져서 거의 죽을 몸이 되어 1996년 자신의 제2의 고향인 뉴욕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대출받아 폐가처럼 방치된 집을 싸게 사서 거주했고 새롭게 교회도 개척했다. 담당 의사는 회복을 위해 절대 무리하지 말고 약간 운동만 하라고 했다. 그래서 주일설교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집수리를 했다. 매일 땀을 흘리며 집을 수리하자 1년 만에 몸이 거의 정상이 되었고 폐가도 살만한 집으로 변했다.

그때 그는 성도들에게 선교 비전을 심고 수시로 축복기도를 해주었다. “하나님! 저희 교회에 선교를 위해 멋지게 쓸 줄 아는 의로운 부자가 많이 나오게 하소서.” 성도들도 선교 비전을 품으면서 삶과 가치관이 크게 달라졌고 하나님도 베풀 수 있는 축복을 주셨다. 그때 선교사 가족들도 많이 축복받고 은밀히 여러 선교사들을 후원했다. 임 선교사도 선교 열정을 감추지 못해 다시 몽골로 선교를 떠났다. 그 후 몽골에서 교회를 개척하며 지금까지 잘 사역하고 있다.

거룩한 선교 비전을 가지면 하나님이 비전을 이룰 수 있는 능력과 여건도 주신다. 또한 가끔 다가오는 어려운 상황도 능히 극복하게 하신다. 지금 임 선교사는 몽골에서 2020년까지의 마지막 텀 사역을 하고 있다. 며칠 전에 받은 선교편지에서는 생활의 어려움을 짤막하게 피력했다. 그 동안 다른 기도제목은 많이 보냈어도 생활의 어려움을 직접 피력한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그 어려움도 잘 극복할 것이다. 사명을 따라 살면 어려움도 겪지만 계속 사명을 따라 살면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이 신기하게 열린다.

말씀과 기도와 지식과 경험을 통해 미래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거룩한 선견지명을 가지라. 예측만 잘하면 안 된다. 대비까지 잘해야 선견지명이 있는 것이다. 어려움을 예측해서 대비하는 선견지명을 발휘하면 어려움이 극심한 어려움으로 커지지 않고 극심한 어려움이 오기 직전에 대개 길이 열린다. 믿음이 있어도 낭떠러지 상황이 올 수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잘 대비하면 낭떠러지 상황에 처하지 않고 그런 상황에 처해도 비교적 손쉽게 극복할 수 있다.

 

< 낭떠러지 상황을 극복하는 길 >

 

예수님은 여러 번 죽음의 위협을 겪으셨다. 본문을 보면 출신지인 나사렛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산 낭떠러지까지 끌려가서 밀쳐져 떨어져 죽기 직전에 그 상황을 극복하셨다. 살다 보면 그처럼 죽음 직전의 낭떠러지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다. 그 상황을 잘 극복하고 사명의 길을 잘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편견에 매돌되지 말라

당시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고 놀라면서 말했다(22절).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말씀은 은혜롭게 들었지만 그 말씀을 전한 사람이 ‘요셉의 아들’임을 알고 경탄하기보다 무시하는 감정을 가지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때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가문에 대한 편견이 진리를 놓치게 한 것이다.

편견을 통해 남을 낭떠러지로 밀어 떨어뜨리면 언젠가는 자신도 낭떠러지 상황에 처한다. 편견의 가해자는 조만간 편견의 피해자가 된다. 그런 일이 없게 하려면 소외된 자와 함께 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편견은 버리라. 같은 나라 안에서도 소외된 지역이 복음화율이 높다. 교회가 소외된 자와 함께 한다는 반증이다. 소외된 사람과 함께 해주고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일으켜 세워주라.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

편견의 가해자도 되지 말아야 하지만 편견의 피해자로서 너무 신음하며 지내지도 말라. 남의 부정적인 말과 시선에 너무 분노하지 말라. 분노할 대상은 세상 사람보다 세상의 불의다. 인종차별, 지역차별, 성차별 등의 세상 불의에 용기 있게 대응하되 차별적인 사람의 비정상적인 개인 언행으로 마음이 상하지 않는 훈련을 하라. 영적인 성숙은 상처를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는 능력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나님! 부드러운 마음과 강한 영혼의 갑옷을 겸비해서 쉽게 상처받지 않게 하소서.”

 

2. 능력을 과시하지 말라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말만 그럴듯하게 하지 말고 능력을 행해보라.”고 할 것까지 알고 계셨다(23절). 사람들은 누군가의 권위를 인정하기 위해 “네 능력을 보여주라.”고 요구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필요할 때 주어지는 것이지 남에게 보이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능력을 과시하는 것은 이단 교주의 행태다. 예수님은 사람의 시선을 끌려는 눈요기나 호기심 충족을 위해 능력을 행하거나 과시하지 않으셨다. 기적과 능력을 너무 추구하지 말라. 그래야 거짓 목자와 이단에 미혹되지 않는다.

외경에는 예수님의 어릴 때 기적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어떤 외경에서는 동굴에서 뱀이 나와 예수님의 가족을 위협하자 엄마 무릎 위에 앉은 예수님이 깡충 뛰어나가 뱀을 내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다른 외경에는 예수님이 어렸을 때 30일 걷는 거리를 하루에 걸었고 아기 예수님이 애굽 피난길에 애굽에 도착하자 355개의 우상이 땅바닥에 엎드려 지나가는 예수님께 절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열두 마리 참새를 어린 예수님이 진흙으로 빚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훅 불자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 기적들을 내세우면 예수님이 더 훌륭하고 위대해보일 수 있지만 그런 기적들은 가나 혼인잔치 기적이 예수님의 첫 기적이란 말씀에 의거해 모두 꾸며낸 얘기임을 알 수 있다(요 2:11). 신기하고 기적적인 것보다 진실한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신기한 기적에 집착하지 말라. 신기함보다 진실함을 더 위대하게 보는 영적 안목을 가지라. 진실한 삶이 진짜 기적과 축복의 원천이다. 능력을 과시하거나 집착하는 삶은 벼랑 위를 걷는 삶처럼 위태하다. 기적을 너무 좋아하면 결국 벼랑 앞에 서지만 말씀을 앞세우고 나가면 진짜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

 

3.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라

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가? 시기와 질투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문에 대한 편견이나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인한 편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편견도 잘 승화시키면 인생 전체로 볼 때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로 인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통해 더 발전할 때도 많다. 어떤 세계나 인식에만 너무 갇혀 있지 말라.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라. 누군가 편견을 가지고 나를 벼랑으로 내몰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새로운 세계로 가서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라.

요새 한국 교회가 세습 문제로 많이 시끄럽다. 부모의 꿈과 비전과 가업을 자녀가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성경은 선대의 땀과 희생을 통해 후대가 복 받는 ‘가문의 축복’을 인정한다. 역사상 가문의 축복을 무시하는 인간 사회는 없었다. 공산주의 국가도 가문의 축복을 사실상 인정한다. 물리적 평등이 기초 사상인 공산주의에서도 선대의 공헌을 완전히 무로 돌려서 후대를 무로부터 출발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거기서도 특권층이 나오는 사상적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천국도 물리적인 평등 사회는 아니다.

믿음생활을 잘해서 후대의 축복을 예비하라. 세상은 다 가문의 축복을 인정한다. 또한 부모의 꿈과 비전과 일을 자녀가 계승할 수도 있다. 그런 계승을 통해 장인들이 생겨난다. 그처럼 복된 계승이 이뤄지려면 2가지 전제가 꼭 필요하다. 첫째 전제는 ‘비전의 일치’다. 둘째 전제는 ‘희생정신’이다. 만약 힘 있는 공공적인 자리에 사람들이 나를 원하지 않는 기류가 있거나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면 과감히 좋은 자리를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그 후에 새롭게 섬김의 길을 가거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면 더 존경받으며 살 수 있다.

 

4. 선택된 한 사람이 되라

역사상 수많은 인물들이 편견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그런 편견의 희생자였다. 중요한 것은 편견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선택된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엘리야 때 큰 흉년으로 수많은 과부가 비참하게 생활했지만 멀리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과부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다(25-26절). 엘리사 때는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수리아 사람 나아만 한 사람만 엘리사를 통해 치유의 은혜를 입었다(27절).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한 사람이 되면 어떤 환경도 극복해낼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순종하고 헌신해야 한다. 순종은 생명력도 증대시키지만 선택된 한 사람이 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다. 공동체에서 소리보다 헌신이 크면 의도적으로 중심에 서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점차 중심에 서게 된다. 반면에 헌신보다 소리가 크면 의도적으로 중심에 있으려고 해도 저절로 점차 주변으로 밀린다. 왜 그런 차이는 헌신과 순종의 유무 차이로 생긴다. 좋은 리더가 되려면 먼저 좋은 팔로워부터 되라.

어떤 사람은 가끔 교회를 돕겠다면서 리더 직분부터 원한다. 그러나 일을 맡길만한 사람인지 알아보는 과정과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리더 직분을 맡기면 공동체의 비전 성취력은 점차 약해진다. 어떤 목회자는 교회를 돕겠다고 오는 리더 희망자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히 목사나 전도사 등의 사역자 위치로 오려는 것은 더욱 받아들이는 것이 조심스럽다. 아무나 리더로 세울 수는 없다. 좋은 팔로워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그 공동체가 복된 공동체가 된다. 순종과 헌신과 희생으로 선택된 한 사람이 있는 곳에 미래도 있다.

 

5. 문제에 의연하게 대처하라

예수님은 자신도 유대인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을 깨뜨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이방인이 은혜 받은 자로 선택된 얘기를 했는데 회당에 있는 나사렛 사람들은 그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화를 내면서 일어나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했다(29절). 그때 갑자기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신비한 일이 일어나서 백성들이 넋을 잃어버린 채 길을 열었고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서 지나서 가셨다(30절).

그때 예수님은 안간힘을 써서 탈출하지 않았다. 아마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예수님의 주위에 후광처럼 나타나 군중들이 눈이 잠시 멀었든지 아니면 넋을 잃었을 것이다. 그때의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문제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교훈 받는다. 아무리 다급한 문제를 만나도 의연하게 대처하라. 그러면 나로부터 혹은 내 주위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신비한 손길이 나타나 문제의 태풍을 가라앉힐 것이다. 특히 원망과 불평은 힘써 삼가라. 성도에게 모든 과정은 필요한 과정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의연하게 문제와 현실에 대처하라.

미국에서 신대원 다닐 때 어떤 집에 가보니까 집 지하실에 거의 슈퍼마켓 수준으로 먹을 것이 가득 차 있었다. “왜 이렇게 먹을 것이 많이 사두었느냐?”고 묻자 미국 내전이 일어나거나 외계인이 침입할 때를 대비해 그렇게 쌓아두었다고 했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각종 불안과 두려움에 묶여 살고 있다. 그러나 성도는 낭떠러지 상황에서도 살 길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처럼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다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라.

 

 

 

 

살아 있는 믿음(Living Faith)

눅 4장 23~30절 / 조용기목사

<서론>

“살아 있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독수리나 곰을 박제로 만들어 전시해 놓은 것을 우리가 간혹 보게 됩니다. 박제된 독수리나 곰은 살아 있을 때와 꼭 같습니다. 독수리는 눈이 반짝반짝하고 곰은 발톱을 내고 지금이라고 뛰어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은 죽었고 생명이 없어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적인 박제된 믿음은 종교적인 형식이나 의식은 잘 행하되 생명력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신앙이 아니면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본론>

1. 엘리야와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기적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이 굶주려 죽을 때 이스라엘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그들은 박제된 신앙을 가졌지 살아있는 순종하는 믿음을 안 가졌습니다. 오직 이방 땅 시돈에 있는 사렙다의 과부만이 살아있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엘리야가 그곳에 보냄을 받아서 기적을 행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엘리사시대에 이스라엘에 수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으나 한 사람도 살아있는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깨끗함을 받지 못했으나 이방 나라 수리아의 대장 나아만은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와서 고침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회당장 회당의 사람들은 너무나 화가 나서 예수님을 언덕에 밀어 죽이려고 했으나 주님께서 피해서 나가셨다는 말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3년 6개월 동안 가뭄이 와서 먹을 것이 없을 때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에게는 안가고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과부에게만 엘리야를 보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가 극심하여 아합 왕 때 하나님께서 3년 6개월 동안 가뭄의 심판을 보낸 것입니다. 그때에 온 천하가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시돈 땅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돈 땅에도 역시 이방 땅이지만 가뭄이 와서 수많은 사람이 굶주려서 절망에 처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시돈 땅 성문 곁에 가니까 한 과부가 나무를 줍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느냐?” “나무를 주어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서 내 아들과 나누어 먹고 죽으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가만히 보고 “글쎄. 그것은 그렇게 해도 좋겠지만 가서 물 한 사발을 내게 갖다 주시오. 나는 엘리야요.” 그러니까 그 과부가 나무 잎사귀를 줍다말고 물을 길러 가는데 “조금 기다리세요. 기다리세요. 물만 가져 오지 말고 빵을 만들어서 내게 먼저 가져 오세요.” 깜짝 놀라서 뒤돌아 보았 습니다. 마지막 빵 하나 만들어서 자기와 자식하고 나눠 먹겠다고 했는데 이것을 가지고서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먼저 가져 오라니 어떻게 된 일인 것입니까? 망연자실하여 쳐다보니까 엘리야가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가뭄이 지날 때까지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하나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서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사렙다의 과부의 책임입니다. 사렙다의 과부는 극한 상황에 처해있는데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 엘리야를 만났는데 엘리야가 너무나 어려운 부탁을 한 것입니다. 아들은 떡을 달라고 몸부림치고 우는데 물 한사발도 구하기 힘든데 마지막 밀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서 엘리야에게 먼저 가져오라니 이 일이 웬일입니까? 과부는 어찌할 찌 몰라서 당황했으나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었고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주어졌으므로 말씀을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자기가 선택할 것인데 사렙다의 과부는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의 과부들은 말씀을 듣고도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사렙다의 과부는 이방 여인이지만 하나님이 종, 엘리야의 말을 듣고 그 말씀을 믿기로 작정을 하고 그는 가서 물 한 사발과 빵을 만들어서 가져오는데 어린 아들이 따라오면서 떡을 달라고 몸부림치고 웁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뿌리치고 물 한 사발과 떡을 엘리야에게 주었습니다. 우리 생각하기는 엘리야가 받아서 도로 돌려줄 것 같이 생각했는데 그 과부와 어린아이가 보는 앞에서 엘리야는 그 떡을 혼자서 다 먹고 그 물 한 사발을 다 꿀꺽꿀꺽 마셨습니다. 야박하게 보이지요. 너무나 사랑이 없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과부의 신앙을 시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정말 백척간두에서 진일보로 한발자국, 벼랑에서 믿음의 발을 내딛느냐, 안 내딛느냐 보시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으로 목숨을 내어 놓고 순종하느냐, 안하느냐를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과연 그 이후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과부가 밀가루 통에 가보니까 밀가루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고 기름병에 기름이 계속 흘러 나와서 그 가뭄이 다 지날 때까지 과부와 그 어린아이와 엘리야가 한집에 살면서 배고프지 않고 넉넉히 먹고 가뭄을 이길 수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서 실천하는 믿음에 대해서 기적을 보여준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이란 쉽게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서커스가 외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 보셨지요? 미국의 유명한 블론딘 이라는 줄타기 서커스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이아가라 폭포를 미국과 캐나다에 걸쳐서 줄을 걸쳐 놓고 장대를 들고 지나갔었습니다. 그리고 올 때는 조그마한 손수레를 허리에 걸고 그 줄을 타고서 건너왔습니다. 밑에는 천길만길 폭포가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찔합니다. 캐나다 편에서나 미국 편에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때 그가 미국 편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 수레에 내가 사람을 태워서 이 줄을 타고 캐나다 편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여러분 믿으십니까?" 모두 다 "믿습니다." "그러면 누구 자원하는 사람 여기 수레에 타십시오." 한 사람도 안탔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것은 벼랑에서 뛰어 내리는 것이 믿음인데 모두다 이 사람이 손수레에 사람을 싣고 그 외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갈 것을 믿는다고 했지만 수레에 자원해서 올라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 믿음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다고 하지만 행동을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렙다의 과부가 엘리야에게 물 한 그릇과 빵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 우리가 읽을 때 마음으로 쉽게 생각합니다. “그것 나라도 물 달라고 하면 물주고 하나님의 종이니까 빵을 만들어서 대접 하는 것 당연한 이치지. 그것 어려울 것 있느냐.” 그러나 실제는 너무나 배가 고프고 너무나 절박한 상황에 과부 혼자도 아닌 아들조차 달려서 떡을 달라고 우는데 엘리야가 와서 물 한 그릇과 떡 한쪽을 만들어 먼저 가져오라고 그렇게 하면 가뭄이 끝날 것 같이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흘러나오고 기름병에 기름이 흘러 나올 것이라고 말을 했지만 그것이 될지 안 될지 어떻게 알아요.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믿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직접 여러분 집에 와서 달라면 나는 달라요. 나는 못해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렙다의 과부가 엘리야보고 “당신이나 잘 먹고 잘사십시오. 나는 이 떡을 만들어서 당신에게 줄 수 없어. 떡을 먹고 아들과 나는 마지막 죽겠소.” 그렇게 했으면 그대로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말을 듣고 이 사렙다의 과부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했습니다. 하나님 먼저 대접하고 그 다음 살겠다. 살아도 하나님 먼저, 죽어도 하나님 먼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실천한 결과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2. 엘리사와 수리아 대장군 나아만의 나병 치유

엘리사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 문둥병자가 굉장히 많았으나 아무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적을 일어날 것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원수의 나라 수리아에 대장군 나아만은 위대한 장군이었으나 그 옷 속으로는 몸이 문드러지고 썩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외면적으로 화려하나 내적으로는 썩어져가는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리아군인들이 국경에 나가서 이스라엘 처녀 한사람을 잡아와서 그 집에 도우미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처녀가 그 주인의 비참함을 보고 주모에게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의 엘리사에게 갔으면 참 좋겠습니다. 엘리사가 그를 고쳐 주었을 것입니다.” 도우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러나 성경에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는데 도우미의 말을 듣고 주모가 나아만에게 말을 하니 나아만이 귀가 번쩍했습니다. 그가 임금님에게 가서 “이스라엘에는 엘리사가 있어서 문둥병을 고친다고 하니 나에게 말미를 주어서 이스라엘에 가서 문둥병을 고침을 받고 오겠습니다. 편지하나 써주십시오.” 시리아의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 부하를 보내니 문둥병을 고쳐 주십시오.” 그 편지를 받아 가지고서 시리아의 대장군 나아만이 수레를 타고 군인들을 거느리고 당당하게 이스라엘로 갔었습니다. 조그마한 소녀의 말을 듣고 믿음으로 행했다는 것 대단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지만 실제 당해보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원수의 나라인 것입니다. 가서 체포당할 수도 있습니다.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과연 엘리사가 문둥병을 고칠지 안고칠지를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말을 듣고 믿고서 실천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와 같이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모험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생사를 걸어놓은 모험인 것입니다. 천길만길 벼랑에 믿음으로 한발자국 들여놓는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왕에게 그 편지를 내니 이스라엘 왕이 그 편지를 읽고 옷을 찢고 고함을 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인가? 문둥병을 고치게. 시리아왕이 시비를 걸어서 우리하고 전쟁하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엘리사가 “그를 나에게 보내십시오.” 그래서 엘리사에게 보내니까 보부 당당하게 군인들을 끌고 나팔을 불고 엘리사 집에 가니까 조그만 초막에 엘리사가 나오지 않고 그 종 게하시가 허리가 구부정하게 나와서 굽신굽신 하면서 하는 말이 “우리 주인이 말씀하기를 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라고 합니다.”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자기는 그래도 시리아의 참모총장인데 대장군인데.. 주인이 나오지 않고 종이 나와서 허리를 굽신거리고 “요단강의 물로 일곱 번 목욕을 하라.”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가 있지. 내 생각에는 엘리사가 나와서 손을 들어 내 당체에 흔들고 기도를 해서 고쳐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모욕을 줄 수 있느냐? 목욕을 할 것 같으면 우리 시리아의 아바나강과 바르발강이 얼마나 맑고 좋으냐? 목욕해서 나을 바에야 그곳에 가서 내가 목욕하지!” 분을 내고 돌아서니까 그 종자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대장군이여! 노하지 마소서. 선지자가 이보다 더 어려운 일 하라고 해도 했을 것 아닙니까? 요단강의 물로써 목욕하라는데 못할 것 뭐 있겠습니까? 하십시오.” 믿음은 동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믿음이 약할 때 옆에 있는 사람이 도와주면 굉장히 좋습니다. 그대로 돌아갈 뻔 당했는데 자기 보좌관들이 간청하는 바람에 그는 요단강으로 갔습니다. 요단강에 들어가서 흙물이 쫙 솟아오르는 곳에 그는 사성장군의 옷을 입고 퐁당 들어갔다 나옵니다. 이제 밖에서 헤아립니다. “두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여전히 문둥이입니다. “일곱 번!” 일곱 번째 올라오니까 문둥이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깨끗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나아만장군도 이 어린 이스라엘 소녀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까지 나와서 행동하는 믿음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3. 살아 있는 믿음

여러분 믿음은 복제된 믿음과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형식은 다가지고 있어도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믿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절망상황에 처해보면 자기의 몸을 날려 주님을 믿고 맡기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벼랑 끝에 설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믿음을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해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의지 할 곳은 다 의지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복제된 신앙인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목숨을 내어 건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나중에 벼랑 끝에 서서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죽으면 죽으리다. 하고 주님을 믿을 때 주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여행객들이 배에서 부산하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귀부인이 발을 잘못 딛어서 그만 배에서 물로 빠졌습니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원을 보고 “빨리 건져라! 건져라!” 합니다. 선원이 가만히 내려다보고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이 여자는 물에 푹 잠겼다가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또 두 번째 푹 잠겼다가 또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세 번째 물에 푹 빠지면서 그만 가라앉습니다. 그러자 쏜살같이 이 선원이 뛰어 들어가서 완전히 기가 빠지고 기절한 이 여인을 끌어안고 나와 가지고서 인공호흡을 시켜서 살려 놓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선원을 보고 고함을 쳤습니다. “무슨 악취미냐? 물에서 허두둥칠 때 건져내지 기절할 때까지 왜 기다리느냐? 그런 악취미가 어디 있느냐?”그때 그 선원이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모르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아 쥡니다. 물에 빠져 있을 때 내가 들어가면 그가 살아있을 때는 내 몸을 휘어 감으면 나도 같이 빠져 죽습니다. 절대 헤엄 못 칩니다. 그가 기운이 다 빠지고 기진맥진 했을 때 내 손에 자기를 맡길 때 내가 건질 수가 있습니다.” 그 말 맞습니다. 여러분이 살겠다고 발버둥 칠 때 하나님이 내려오면 하나님도 붙잡혀서 꼼짝을 못합니다. 기진맥진해서 하나님 손에 맡길 때까지 하나님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수단과 방법을 다해보고 노력을 다해보고 이제는 할 수 없다.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기진맥진하고 주여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주님께 내어 맡기면 그때야 주님께서 와서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49년의 목회생활 가운데 수많은 어려운 난관에 부딪힌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아무리해도 인간은 불안하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합니다. 수단과 방법과 노력을 다하고 나중에 아무리해도 사람으로써 해결할 수 없을 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주님께 옵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 뜻대로 하시 옵소서 하면 꼭 그때 와서 주님이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마음속에 ‘주님 취미가 너무 하십니다. 왜 떨어지면 낙동강 떨어지면 낙동강까지 기다립니까? 낙동강까지 오기 전에 좀 건져 주시지.’ 그래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기다려서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느냐, 의지하지 않느냐를 테스트 해보시고 난 다음에 전적으로 주님을 믿을 때 주님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경험이 쌓이면 우리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내어 맡겨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이 생기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점점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사렙다의 과부가 죽음이냐, 삶이냐의 기로에 섰을 때 주님께 내어 맡긴 것입니다. 수리아의 대장군 나아만이 자기의 인격이 달려있고 명예가 달려있고 수리아의 명예가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종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믿고서 찾아온 것은 믿음의 결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 벼랑에 처할 때 주님께서 찾아 오신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까지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벼랑에 서기 전에 주님을 믿을 수 있으면 참 좋습니다. 그것은 노련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초신자는 어찌할 수 없이 벌거벗어야 하나님 옷 달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벌거벗기 전에는 자기가 검불을 가지고라도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자를 책임져 주시지 반신반의 하는 자는 주님께서 돌보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무엇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사렙다의 과부가 뭘 믿고 자기의 마지막 물 한 그릇과 떡 한 조각을 엘리야에게 내놓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엘리야가 말하기를 “야훼께서 말씀하기를 네가 그렇게 하면 이 가뭄이 지날 때 까지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이 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장군 나아만도 자기 집에 있는 이스라엘 여종의 입을 통해서 엘리사 앞에 서면 병이 낫는다는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이 없이 믿는다는 것은 감각이요, 감정이요, 인간의 지혜요, 지식이요,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없이 내 생각과 내 감각으로 믿는다는 것은 엉터리인 것입니다. 내가 보이는 것이 없고 들리는 것이 없고 만져지는 것이 없고 내 마음이 아무리 차고 냉정할지라도 말씀이 있으면 말씀에 서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려면 말씀을 찾아 가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려면 말씀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말씀을 떠나서 우리에게 역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간절히 사모하고 말씀을 달라고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가 부딪히고 고통을 당할 때 아무리 믿으려고 발버둥쳐도 믿음이 오지 않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말씀을 주시옵소서. 나에게 말씀으로 찾아와 주시옵소서. 그리고 집회에 나가고 예배에 나오고 성경을 읽으면서 말씀을 달라고 간구할 때 성령께서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요15: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으면 말씀을 찾고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믿어지면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루어지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크리스천은 말씀을 찾아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을 뒤흔든 위대한 설교자 무디는 거듭난 이후에 깊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산에 가서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가 성령의 은혜를 이렇게 체험했으니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겠다.’고 세상에 나와서 한달이 지나자 그만 세상으로 빠져들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안 되겠구나! 위대한 주의 종들이 부흥회 이곳저곳 찾아가면서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으면 이제 나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부흥회에 은혜 받고 얼마 세월이 지나가지 않으니까 또다시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약해졌습니다. 그는 탄식했습니다. 나는 화인 맞은가 보다. 나는 하나님이 버렸는가 보다. 믿기는 믿었는데 믿음을 계속할 수 없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탄식했습니다. 그러자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롬 10:17을 읽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가슴을 탁 쳤습니다. ‘아, 내가 은혜만 찾았지 말씀을 찾지 않았구나! 말씀을 매일같이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가지고 있었으면 내가 믿음이 굳건하게 설수 있겠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무디 목사님은 말씀을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항상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과 더불어 사니까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고 만세반석에 섰습니다.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나의 사랑하는 故신현균 목사님이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 나에게 연락을 했어요. “조 목사 빨리 오너라. 날 좀 만나자.” 만나니까 “나하고 자네하고 차원이 다르다”고 그래요. “자네는 40일 금식기도 안했지만 나는 40일 금식기도를 해서 나는 성결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거룩하다. 나는 이제는 세상과 완전히 끊었다. 그러므로 내 근처도 오지 마라. 너는 세상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며칠 가는가 한번 보자.’ 며칠 동안은 정말 거룩하고 신령하게 지내더니만 한 한달 쯤 지나고 난 다음 날보고 하는 말이 “조 목사 날 좀 만나자.” 보니까 “나 효과 다 떨어져 버렸어. 한 한달 동안 신령하더니만 이제는 온 세상이 내 속에 들어오고 나도 세상에 들어오고 이럴 수 있느냐?” 그래서 “여보시오. 당신 40일 금식기도 한 것이나 40일 금식기도 안한 사람이나 별 차이 없지 않소? 문제는 말씀에 있는 거요. 40일 금식기도 하는 것 좋아요. 그러나 말씀에 서야 되고 금식기도 못했어도 말씀에 서야 되고 말씀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씀에 잡히면 신령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제가 말한 적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승리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가 믿음을 얻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말씀을 찾아 가십시오.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 7천 가지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다 주옥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말씀에 서서 원하는 대로 구하라. 이루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행동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늘 중간에 서서 이래 저래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타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안 믿으려면 안 믿고, 믿으려면 믿고, 뜨거우면 뜨겁고, 차면 차갑고 화끈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의 무덤가에 가셨을 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 무덤 문을 옮겨 놓아 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보고는 “마르다야, 마리아야, 광신자가 되지 말아라. 네 오라버니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데 무덤 문을 옮겨 놓다니. 그런 일이 어디 있느냐?” 그래서 마르다가 울상이 되어서 예수님을 쳐다보고 “주여, 우리 오라버니가 무덤에 들어간 지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그런데 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합니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결단을 못 내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얼굴을 붉히고 주먹을 불끈 쥐고 고함을 쳤습니다. “마르다여,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믿음이란 생각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결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생각하니 결단을 하고 행동을 하려니 그 주위에 보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나를 광신자라고 비웃을 것이다. 어찌할 것이냐. 타협할 것이냐, 결단을 내릴 것이냐. 그는 마리아와 함께 결단을 내렸습니다. “욕을 먹든, 미쳤다고 하든, 유대인의 회당에서 쫓겨나든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자.” 그래서 두 처녀가 돌문에 매달렸습니다. 큰 돌이라 움직이지 않아요. 그가 돌을 움직이려고 매달려서 발톱이 떨어져 나가고 몸이 찢기고 피가 흐르고 그래도 아무도 안도와 줍니다. 예수님도 안도와 주고 유대인들도 안도와 줍니다. 왜냐, 믿음은 우리가 행동하는 결단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믿으면 끝까지 실천하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을 결단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명령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이 결단을 내려서 믿음을 실천할 때까지 안도와 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여러분 눈에 보여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숨어있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어린 아기를 가진 부인이 동에 가서 “내 아기를 동네에 호적등록을 하려고 합니다.” “아기가 아들입니까? 딸입니까?” “아직 몰라요. 내 배속에 있어요.”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낳거든 오십시오.” “아이, 내 배속에 있는데요?” “그러나 배속에 있는 아기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낳거든 아들인지, 딸인지 이름 지어서 오십시오.”라고 그럴 것입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보여줘.” “배속에 있습니다.” “그것 나는 못 믿어.” “내놓아. 행동으로 내놓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야. 보여 다오.” 주님은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마르다와 마리아가 믿음을 보여 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갔을 때 수많은 사람이 인산인해로 진을 쳐서 예수님 앞에 더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중풍병 환자가 친구들에게 의해서 들것에 들려서 왔으나 예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으므로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그 침대를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남의 집 지붕을 뚫고 침대를 내려놓을 때는 얼마나 행동하는 믿음인 것입니까? 집을 통째로 헐었으니까 집값을 지불해야 될 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앉아서 계셨습니다. 먼지가 쏟아지고 매로써 지붕을 때리니 때리는 쿵쿵 소리가 나도 주님은 꾸짖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고함을 쳤습니다. “왜 남의 집을 허느냐? 왜 매로 때리느냐? 이 먼저를 왜 날리느냐? 그만두라”고 고함을 쳐도 예수님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 침대가 줄에 달려서 예수님 앞에 내려왔을 때 성경은 말씀하기를 예수님이 그 사람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을 끝까지 참아 보시고 난 다음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침상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기적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도 있는 힘을 다해서 초죽음이 될 때까지 돌을 흔들어서 옮겨 놓으니까 썩은 냄새가 확 무덤에서 납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덤 안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수의를 동인 채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실천하면 주님이 기적을 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타협하고 이것도 저것도 안하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이 일어날 것을 언제나 기대하고 감사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기적이 없으면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기적인 것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 기적이고,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성령 받은 것이 기적이고, 주님의 일생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깨끗이 하고, 파도를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로 5천명 먹이고 열 두 바구니 남기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그렇게 한 일절 모든 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기적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기적을 빼놓으면 겉장과 끝장밖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어떤 현대주의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그 교회 교인이 출석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성경을 펼쳐놓고 “이것은 이야기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다. 이것은 이스라엘인이 지은 시다. 이것은 소설이다. 이것은 전해온 이야기다.” 그럴 때마다 성경을 찢기 시작한 것입니다. 1년을 교회 나오고 난 다음에 성경 껍데기만 들고 목사님께 나와서 “목사님,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이제 교회를 떠납니다.” “아니 당신같이 착한 교인이 왜 떠납니까?” “1년 동안 목사님 설교를 듣고 나니까 모두다 성경은 소설이고, 이야기고, 신화고, 지어낸 말이고 하나도 믿을 것이 없으므로 다 찢어 보니까 겉장만 남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기적을 제켜 버리면 겉장만 남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은 모두다 기적의 이야기요, 기적이 일어난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감사하지 아니하면 믿을 것이 없어요. 우리가 회개하고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는 것 기적인 것입니다. 성령 받는 것 기적인 것입니다. 병 낫는 것 기적인 것입니다.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 기적인 것입니다. 죽어 천당 가는 것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신앙생활에 적은 기적이나 큰 기적이나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할 바에야 믿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라는 것은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라는 신학자가 한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만일 기적을 제외한다면 성경은 표지 2장만 남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언제 일어날까? 영국의 웨스터 민스터 사원에 들어가면 정면에 이런 구호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위대한 일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안에 가족들이 구원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가족이 병 낫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망한 사업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은 기적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셔서 오늘도 우리 가운데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히 종교적이었으나 죽은 신앙, 형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에 대한 지식을 알고 의식은 집행하나 살아있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엘리야 때 가뭄이 와도 하나님의 기적을 믿지 않았습니다. 엘리사 시대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어도 치유 받을 것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없는 종교는 의식에 묶인 죽은 박제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어떤 믿음이 있든지 그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예수를 믿고 교회 왔다 갔다 했는지 그것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주님 앞에 나오면 말합니다. 주님께서 “네 믿음을 보여 다오.” “주여, 우리 가족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네 믿음을 보여 다오.” 어떻게 보여 줍니까? “네 가족들을 교회에 데리고 나오라. 네가. 구원은 내가 하지만 데리고 나오는 것은 네가 해야 되는 것이다.” “주여,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십일조와 헌물을 심어라. 그러면 축복은 내가 한다.” “그러지 말고 복부터 먼저 주세요.” “안보여주는 믿음에 내가 기적을 행할 수가 없느니라.” 주님은 여러분의 믿음을 보여 달라고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심의 무덤돌문을 옮겨 놓아라. 그러면 내가 기적을 행하마.” 여러분은 사회적인 체면 때문에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해서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있어서 믿음을 실천하지 않고 머뭇거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주님도 머뭇거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확실히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차면 차고, 더우면 더우라. 미지근하면 뱉어 버리겠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사렙다의 과부처럼 받아들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굶어 죽을지라도 믿어보자. 수리아의 대장 나아만처럼 명예와 권세를 다 잃어버릴지라도 이스라엘 적국의 나라에 가서 엘리사에게 몸을 맡겨 보자. 실천하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이요, 이런 믿음이 있으면 적으면 적은 데로, 크면 큰 데로 오늘날도 주님은 기적을 행하셔서 여러분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역사하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너무나 박제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왔다 갔다 하고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신앙을 집행해도 마음속에 감춰 놓은 믿음을 가지고 있고 행동하는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주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것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적게 실천하면 적게 기적을 체험하고 많이 실천하면 많이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도 주님은 우리 마음 문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믿음을 실천하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가짜 신자 되지 말고 진짜 신자가 되게 도와 주시 옵시고 바라보는 신자 되지 말고 행동하는 신자 되게 도와주시옵기 간절히 바라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주의 능력을 믿으라 의지하라 경험하라

눅 4장 24~30절 / 김삼환목사

같은 아픔일지라도 어린아이의 아픔은 더 크고 보는 이를 더 안타깝게 합니다. 요사이는 청소년들에게 정신적으로 불안 증세가 있어 방황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뭐 방황하며 헤매 인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그런 학생들이 아주 많습니다. 환자이지요. 마음은 원이로되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잠도 안 오고, 공부도 안 되고, 길거리에 그냥 뛰쳐나가서 방황하고, 음식도 먹지 않고 이렇게 지내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부모님에게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보다도 이 시대는 방황하는 시대입니다. 물질, 기계문명, 정서적으로 심히 메마르고, 핵가족으로 인하여 어려서부터 고독하게 지냅니다.

 

또 학교에서는 경쟁 속에서 한번만 낙오자가 되면 일생동안 길이 없다 라고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얼마나 아이들이 많이 갖고 있는지 모릅니다. 안 할 수도 없고, 또 따라갈 수는 없고 마음이 괴로움이 심한 것입니다. 또 오늘 많은 청소년들은 성에 대한 자유로 인해서 무책임한, 준비 없는 이런 실수로 말미암아 불행하게 되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저께 우리 교인을 위해 기도하면서 두 살 난 어린아이를 데려 온 교인을 만났는데 안타까운 것은 데리고 온 아이가 눈이 실명됐어요. 얘가 누구냐고 물으니까 입양해 온 아이인데 중학교 3학년 여자아이하고 고3 아이가 낳은 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중3 때 임신을 했으니까 그냥 조심하며 숨기고 못 먹고 하다 보니까 영양실조로 아이도 실명이 되고, 애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중3 애도 불행하게 되고 고3도 문제예요. 내가 보면서 이를 어떻게 하나, 버림받은 이 아이를, 또 장님 된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겠나 안타까왔어요. 우리 교인 가정은 자녀가 있는데도 이 아이를 데려다가 좀 기르려고 하는데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목사님 아무래도 내가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는 것이었어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 우리가 이 단어를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사랑=행복, 물론 그런 건 맞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객관적이고 공식적이고 절차를 잘 밟아야 이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식을 간단하게 몇 말씀 드리면 그렇습니다. 참 사랑은, 남모르는 사랑이 아니에요. 참 사랑은 공개적이에요. 그래서 결혼식을 할 때도 드레스를 입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입장을 해서 공개적으로 결혼을 사람에게 선포를 하고 그리고 둘이 공개적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어린아이 사랑이든 어른의 사랑이든 은밀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참 사랑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런 사랑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랑만 하면 사랑이다 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오직 너와나, 그저 하늘 높이 종달새처럼 높이 높이 날아 올라가서 그냥 춤추며 기뻐하며 지저귀며 다 아래를 잊어버리고 둘이 있는 곳에서 저 하늘 높이 행복이 있는 줄 알고 날아가는데, 그런 공개적인 사랑이 아닌 사랑은 오히려 사랑 때문에 본인이 떨어집니다. 날개가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두 번째, 사랑은 장성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짐처럼 이 세상에 무거운 짐이 없습니다. 사랑의 짐을 어린아이는 질 수가 없습니다. 중3, 고3이 사랑의 짐을 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6개월이 되면 혹은 1년만 되어도 거의 동물들은 장가가고 시집 다 갑니다. 동물적인 사랑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랑은 별로 짐이 없고 책임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만나서 좋아만 하면 되고 그리고 끝나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오랫동안 준비해야 되고 사랑의 짐을 어떤 짐이라도 질 수 있는, 신체적으로도 건강해야 되고 정신적으로도 건강해야 되고 그래서 우리 일생 가운데 가장 건강한 23살부터 27-28살까지 모든 면으로 정신적으로도 가장 깨끗하고 건강할 때 사랑의 짐을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어려서부터 이미 정신적으로 흐트러져 있고 병들어 있으면서 어떻게 행복의 짐을 짊어질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일년도 안 가서 이 짐을 못 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물적인 그런 사랑으로 살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노래는 주변의 많은 박수를 받아야 되고 오케스트라가 있어야 좋은 하모니를 이루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축복을, 부모님에게도 감사를, 많은 친지와 친구와 많은 분들이 박수해 주는 그 소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 소리 없이, 소리를 무시하고 모든 축복을 떠나서 둘이 복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정말 축복이 없는, 하나님의 인정이 없는, 은혜가 없는, 부모를 떠난 사랑들이 너무 많습니다.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먼 여행입니다. 일시적인 하룻밤의 사랑으로 사랑이 다 라고 생각하면 이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사랑은 또 희생입니다. 봉사예요. 끝까지 섬김이에요. 겸손이에요. 한없이 낮아지는, 자기를 작게 보면서 감사하는 마음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 세 주전에 어느 교회에 선교사님이 파송을 받게 되어서 설교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님이 부부가 같이 서 있어야 하는데 혼자인거예요.. 그래서 왜 사모님이 안 오셨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사모님이 소아마비예요. 소아마비는 대체로 소아마비를 이해할 수 있는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거든요. 장님이 장님끼리 대체로 만나요. 그런 분들이 그런 분끼리 만나죠. 그런데 이 분이 소아마비인데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남편으로 맞이했어요. 남편은 하이델베르크에서 박사를 받으신 분이에요. 세계적인 명문학교에서 공부를 하셨어요. 키가 1m85는 돼요. 인물도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런데 그렇게 행복해 하는 거예요. 본인은 또 그렇다 해도 부모님이 그렇게 좋아해요. 신랑 부모님이, 우리 같으면 가만히 두겠어요? '얘 이놈아, 우리 집에서 썩 나가라, 보기도 싫다, 네가 인간이냐, 내가 너를 어떻게 공부시켰는데 이놈아,' 안 그러겠어요? 그런데 그 부모님이 그렇게 기뻐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이 없으면서 사랑인 척 하는 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구를 만나서 사랑한다는 것입니까 사랑이 하늘에 있는 것입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은 내 안에 있습니다. 이 사랑은 누굴 만나도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자기는 사랑이 없으면서 사랑을 찾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누굴 만나면 누가 사랑을 주는 줄로 아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은 한 곳에도 없는 것입니다. 다 여자도, 남자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하나님은 참사랑, 그 사랑이 내 안에, 그 사랑을 가지고 살 때에 우리는 어디에 서 있을지라도 우리는 능력 있는, 행복한 삶을 살 줄로 믿습니다. 오늘 사랑의 날개가 다 떨어져서 사랑을 모르고 사랑의 오히려 아픔을 누리는 분들이, 사랑에 오히려 가정과 행복과 생명을 잃어버린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해서 선한 자가 아닙니다. 선한 사람이 선한 일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잘 해서 의로운 사람이 되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내가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우리들이 차츰 차츰 잘 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흉악한 죄인 괴수라도 예수는 능히 구원하시고 저 흉악한 죄인 강도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자리에서 당장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이 임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에요. 능력으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이지 인간의 절차와 과정을 따라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떠나 죄인된 우리 인간은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어 주신 이 길이 기독교의 길이요 이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 은혜가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성경은 능력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의 나라예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능력으로 가득 차있어요. 하나님의 권능으로 가득 차있어요.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온 땅을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시는 능력, 아라랏 산도 물로 다 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 소돔 성이 범죄 할 때에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애굽의 나일강을 다 피로 만드시는, 홍해를 육지같이 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풀무 불에서 건지시는 능력, 해일 수 없는 능력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제일 큰 능력은 이것과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위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를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건져 주신 이 능력, 우리 인간이 전혀 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혼자, 그 아들이 우리를 모든 저주에서 건져 주시는 능력, 우리 인간이 죄와 저주와 멸망으로 살아왔던 이 모든 악의 세력을 파멸하시고 우리를 건져 주신 이 능력은 기독교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여기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판의 주님이에요. 승리의 주님이에요.

 

열왕기하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나라가 바벨론 나라에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옛날이나 요사이나 전쟁에서 지게 되면 적의 왕이 와서 모든 것을 사로잡아 다스리게 됩니다. 예루살렘성은 다 불태워 버리고 재산은 다 빼앗아 갑니다. 노인들과 여자들은 다 죽여버리고 젊은이들만 사로잡아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시드기야왕, 유대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왕을 불러다가 앞에 세우고 시드기야왕의 자녀들을 다 앞에 세워 놓고 왕이 보는데서 그 자녀들을 다 죽입니다. 이기는 자가 와서 심판하는 거예요. 그리고 시드기야왕의 두 눈을 빼어 버립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그래가지고 바벨론 나라로 붙들려 갔습니다.

 

그 때에 붙들려간 예레미야 라든지 선지자들도 다같이 그때 붙들려 가지 않습니까? 이기는 자가 와서 다 사로잡고 다 없애 버립니다. 성을 다 불지르고 무너뜨립니다. 임금과 같이 살던 중전들은 거지가 되든지 윤락녀가 되든지 죽여버리든지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망권세 이기시고 우리 인류를 사로잡던 원수마귀를 주님이 다 멸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6장 11절에 보면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세상을 다스리던 악한 통치자인 원수마귀는 우리 주님 앞에 완전히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했죠? "너를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바벨론의 승리는 왕이 승리하므로 모든 자의 승리가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의 승리는 예수께서 이기시므로 우리 모두에게 승리가 있고 능력이 있고 자유가 있고 구원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님은 우리 온 인류에게 참된 기쁨을 안겨 주시고 자유를 안겨 주시고 구원을 안겨 주신 만 왕의 왕이신 것입니다. 조금 전에 불렀던 찬송 한 번 불러 보십시다.

 

13장입니다. 이런 진리를 모르고 이런 찬송을 부르면 무슨 말인지도 몰라요. 기독교가 왜 승리의 종교냐, 예수 믿으면 왜 능력 있냐? 1절과 4절만 부르시겠습니다.

♪기뻐하며 경배하세 영광의 주 하나님 주 앞에서 우리 마음 피어나는 꽃 같아 죄와 슬픔 사라지고 의심 구름 걷히니 변함없는 기쁨의 주 밝은 빛을 주시네, 새벽 별의 노래 따라 힘찬 찬송 부르니 주의 사랑 줄이 되어 한 맘 되게 하시네 노래하며 행진하여 싸움에서 이기고 승전가를 높이 불러 주께 영광 돌리세♪

기독교는 승리의 종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이기는, 모든 것을 감당하는 능력의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는 두려울 것도 염려할 것도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승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승리, 죄와 사망을 이기시므로 우리 인류의 대적의 머리를 멸하신, 파괴하신 만 왕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AD 313년에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온 로마 제국에 받아 들여서 국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러분, 로마 하면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은 헬레니즘을 기억해야 합니다. 헬라의 모든 문화가 로마에서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헬라어가 그대로 헬라의 건축이 그대로 헬라의 예술, 헬라의 철학, 헬라의 문학 온 세계 최고의 가장 아름다운 모든 위대한 것들은 로마에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로마의 권력과 통치와 로마의 힘이 헬라 문명과 같이 합작이 되어서 온 세계 인류 역사에 헬라 문명같이 찬란한 문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명을 넘어뜨린 것이 무엇입니까? 이 문명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로마에 건설된 이 힘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바로 예루살렘에서 건너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사실은 Ism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닌 그냥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지셨다라고, 하는 무엇인가 설명도 아름다움도 위대함도 없는 하나의 신앙이 로마로 건너갔지만 로마는 모두를 다 무너뜨리고 십자가를 로마에 건설하였습니다. 헬라의 문명과 지식과 철학과 과학과 건축은 인간에게 생명과 죄사함과 자유와 기쁨과 소망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를 하나님의 거룩한 땅으로 만들고 능력으로 만들어서 오늘날까지 세계를 다스리는 위대한 나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는 능력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능력의 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시대를 살면서 무엇을 아름답게 보십니까? 헬라 문명도 아닌 보잘것없는 것에 유혹을 받고 박수하며 아름답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거기는 능력이 없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왜 기계 문명 속에서 이렇게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 만능 정보 사회에 이렇게 갈 바를 찾지 못하여 인간의 참 정보를 몰라서 왜 이렇게 방황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연약한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 편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사야 53장2절에 보면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진리요 구원이요 생명이 되셔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저주에서 우리를 건져 주신 줄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만 가지면 최고를 가지는 것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도 엉뚱한 유혹을 받아서 교회가 뭔가 잘 꾸며야 능력이 있는 줄로 알고 많이 모여야 능력 있는 줄로 알고 건물을 잘 지어야 큰 교회인 줄로 알고 위대한 줄 알고 성가대가 장엄해야 힘있는 줄 압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가대원이 한 명 없어도 건물이 보잘것없어도 아무 사람이 모이지 않는 것 같아도 예수님이 이 곳에 계시면 능력 있는 교회입니다. 로마의 카타콤이 뭐 오르간이 있나요? 보잘 것 없는 흙더미 속에 살아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 능력이 있어서 로마를, 세계를 기독교로 만들 수 있었어요. 기독교의 능력은 보이는 능력이 아닙니다. 세상 문화로부터 오는, 지식으로부터 오는 그런 능력이 아닙니다. 권력이 가지고 있는 총, 칼의 능력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은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할 것이라 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능력, 만군의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는 이 믿음으로 오는 능력이 기독교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주님이 고향에 가셨는데 고향 사람이 하나도 받아주지 않았어요. 고향 전도가 어렵습니다. 전도도 가까운 친구 전도가 어렵고 부모 형제 전도가 어렵습니다. 다 아니까요. '얘 너나 잘 믿어라' 아는 분들에게 전도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도 고향에 가시니까 부모님을 다 알죠 자라날 때를 다 아니까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받아들였던들 예수님의 고향 땅, 예수님이 태어나신 유대 나라는 최고의 나라가 될텐데 이 기회를 놓쳐버린 거예요. 주님은 믿어야 합니다.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안되죠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보면 목수의 아들이요 나사렛에서 자라나시고 보잘것없는 분이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우리 인류의 구주예요. 만 왕의 왕이에요. 메시아예요. 우리의 길과 진리요 생명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가대 찬양을 했지요 ♪주는 나의 큰 능력 주는 나의 큰 소망 내가 항상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이스라엘 나라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믿음이 있는 사렙다 과부만 은혜를 받았느니라 많은 문둥병 환자가 있었으되 믿음으로 따라가고 믿음으로 순종한 나아만 만이 능력을 경험하였느니라 문둥병 고쳤느니라. 오늘 이 시대에 많은 사람이 살아도 다 능력 있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받아들이고 의지하고 행하는 자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역사 하는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아합왕 때에 큰 흉년이 들었지요. 3년 6개월 동안 흉년이 들었을 때에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얘야 너는 저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로 가거라 내가 준비한 과부가 있느니라 너는 그곳에 가서 3년을 지날지니라" 그래서 엘리야가 갔어요. 사렙다로 가니까 어떤 분이 나무를 줍고 있었어요. "아주머니 물 좀 주세요" 3년 동안 가물어지니까 짐승도 살 수 없어요. 새 한 마리도 살기 어려워요. "물 좀 주세요" 아주머니가 물 가지러 가니까 "아주머니 물만 주지 말고 먹을 것도 좀 주세요 나는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그 때 사렙다 과부가 말했어요.

 

"지금 내게 먹을 것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두 모자가 살아가고 있는데 기름병에 기름이 조금 있고 밀가루 독에 지금 우리 둘이 마지막 먹고 죽을 수밖에 없는 밀가루가 조금 있습니다 지금 이걸 먹고 마지막 죽을 것입니다." 그럴 때 엘리야가 말합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죽지 않습니다 그것 가지고 나에게 대접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아주머니에게 3년 6개월 동안 계속하여 기름이 떨어지지 않고 밀가루 독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기적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믿으세요" 우리 같으면 가만있겠어요? '이 아저씨가 어디서 해 먹던 버릇을, 어디서 왔어요 미쳤어요' 하고 가만히 두겠어요? 그런데 이 아주머니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래요 제가 우리 둘이 먹으면 끝나는 것이지만 대접했어요 믿음으로 대접했어요. 하나님께서는 많은 과부가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과부, 사렙다 과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이 과부의 집에 기적이 나타났어요.

 

오늘 이 시대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물질은 우리에게 더 공허함을 주고 방황함을 주고 오늘 이 시대처럼 우리 인류가 헤매는 시대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총체적으로 긴장하고 불안해하고 답답해하는 이 시대에 위로부터 능력을 받아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밀가루가 채워지는 내 마음의 밀가루 우리 가정의 밀가루 내 영혼에 밀가루가 채워지는 기적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나아만이라고 하는 아랍 나라에 문둥병 환자를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문둥병은 걸린 사람이 많아요. 누가 나았느냐? 믿음 있는 문둥병이 낫는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 능력이 나타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잘 해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돌보고 위로부터 보시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를 향하여 언제나 내 믿음대로 하나님이 역사하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문둥병이 걸려서 약으로 고치지 않고 인간의 방법으로 하지 않고 사마리아까지 믿음으로 왔어요. 하나님 앞에 기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고쳐 줄 줄로 믿고 하나님의 땅으로 왔어요.

 

엘리사에게 가니까 엘리사가 또 요단강에 가서 목욕을 일곱 번 하라고 합니다. 상식에는 안 맞았어요. 나아만도 처음에는 이해가 안됐어요.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갔어요. 하나님의 종이 시키는 대로 갔어요. 가서 목욕을 일곱 번하고 깨끗하게 치료함을 받았어요.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옛날이나 오늘이나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은 살아 계심을 보여주시고 능력으로 우리에게 경험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 나라에는 안 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불행할 사람도 없고 지옥 갈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과부일지라도 어떤 질병일지라도 그를 믿고 의지하면 어떤 실패, 어떤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흉년입니까? 가난입니까? 자녀입니까? 남편입니까?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그마한 자신이 갖고 있는 세상적인 힘 가지고 이 세상을 승리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광야같은 이 세상 지치지 않고 피곤해 하지 않고 끝까지 잘 달려가는 길은 여호와를 의지하여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 인 줄로 믿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7절에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기독교는 능력의 종교입니다. 모든 것을 이기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는냐" 죽는 자리에서도, 임종 앞에서도 찬송 할 수 있는 사람, 이미 죽음을 점령한 사람입니다. 이화여대 총장 하시던 김활란 박사님은 임종 순간에도 '내가 죽거든 울지 마라 행진곡을 틀어라' 여러분, 남의 죽음 앞에서야 그럴 수 있지 자기가 죽는데 이런 말 할 사람이 누가 있느냐 말이에요. 내가 죽으면서 죽음을 이렇게 정복할 수 있는 자신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말이에요. 다 벌 벌 떨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저는 수많은 성도들을 보면서 우리 성도들은 한 사람도 나는 죽어도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며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길이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 외에는 없는 줄로 믿습니다. 능력입니다. 기독교는 능력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능력은 기본이 있습니다. 다섯 가지예요. 말씀의 능력, 두 번째는 성령의 능력, 기도의 능력, 믿음의 능력, 교회의 능력입니다. 교회는 능력이에요. 인간 안 된 것도 여기에 오면 인간 만드는 거예요. 인간 만드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이 어디 있어요. 자동차 만드는 것 그건 능력이 아니예요. 배 만드는 것? 그게 아니에요 배 값이야 몇 억이죠. 인간 만드는 것 몇 조원으로도 못 갚아요. 어떤 인간, 못 쓰는 인간도 여기 오면 쓰게 만드니 그런 능력이 어디 있어요. 죄인도 의인 만드니 이런 능력이 어디 있어요. 지옥 갈 사람도 천국 가게 하니 이런 능력이 어디 있어요. 불행한 사람도 행복해지니 이런 능력이 어디 있어요. 주의 교회는 능력입니다. 슬픈 모든 마음 물러가고 기쁨, 소망 주신 ♪기뻐하며 경배하세 영광의 주 하나님 주 앞에서 우리 마음 피어나는 꽃 같아 죄와 슬픔 사라지고 의심 구름 걷히니 변함없는 기쁨의 주 밝은 빛을 주시네♪ 이런 기본, 힘이 되는 기본을 잘 몸에 익히면 일생동안 힘있는 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안 되는 사람은, 소망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런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불신앙, 부정적인 생각, 믿음이 없는 것, 그게 문제예요. 비판하고 이런 것들이 문제예요. 대체로 비판하는 사람이 못나서 비판하는 건 아닙니다. 너무 훌륭해서 비판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아무리 훌륭해도 비판은 좋지 않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 믿음이 없는 사람이, 못해서 안 믿는 게 아니라 너무 잘해서 안 믿는 분이 많아요. '너나 믿어라'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믿어야 될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비판할 만한 완전한 자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얼마 전에도 시민 운동하던 사무총장이 큰 부끄러움을 당하고 감옥에 가는 걸 보면서 저는 사실 그전에 선거 할 때, 시민운동은 순수하게 시민운동으로 가야지 정치인들까지 다 비판하는 쪽으로 가면 자기들도 완전하지 못한데 얼마나 좋지 못하죠. 교회는 교회 길로 가고 학교는 학교 길로 가고 정치인은 정치로 가고 시민운동은 순수하게 시민운동을 각 분야로 일으켜야 우리 국민 전체가 좋아지는데 뭐하러 정치 쪽으로 가느냐 말이에요. 뭐하러 그런 데에 손 대냐 말예요. 결국 알고 보니 자기는 더 나쁜 놈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남을 비판하고 그럴 수 있느냐 말이에요. 여러분 인류 역사에 보십시오. 비판하는 것은 어느 것이든지 그 나라에 발전이 되지 않습니다. 좋은 운동, 기독교처럼 예수님은 비판하지 아니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비판을 못하게 하셨어요. "네 눈에 들보가 있다"는 거예요. "남의 눈에 티를 보지 말라" 그러셨어요. 비판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사람은 비판하면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했고요. 사람의 비판은 극히 부분적으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도 못 보는 우리 인간이 뭘 비판 할 수 있냐는 거예요.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우리 인간이 누구를 비판하느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남을 비판하면 항상 죄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웃기는 이야기인데, 무학대사하고 이성계가 둘이 만나서 이성계가 무학대사보고 '돼지같이 생겨 가지고' 그렇게 말했대요. 아마 무학대사 얼굴이 좀 그런가보죠. 그러니까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보고 '당신은 부처님 같습니다' 그랬어요. 너무 말이 대조가 되니까 이성계가 물었어요. 어떻게 부처 같다고 그러냐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 하니까 무학대사가 그러더래요. '사람은 꼭 말할 때 자기 얼굴 같이 다른 사람을 본 대요' 자기 얼굴이 돼지이면 상대를 돼지로 보고 자기 얼굴이 개이면 개로 본 대요. 그래서 세상을 비판하는 사람은 그만큼 자기 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에요.

 

세상을 똥으로 보는 사람은 자기가 똥이라는 거예요. 우리 나라가 잘 되는 길은 우리 국민이 서로서로 한 사람 책임을 다할 때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이지 너무 비판의 소리 높은 것이 좋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합이 얼마나 그 때가 어려운 때입니까 마는 이렇게 말했어요. 하나님 믿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에 우상에게 때묻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칠 천 명이 있다 그랬어요. 이 나라가 다 나쁜 것 같아요? 훌륭한 분이 너무 많은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나라를 전부다 나쁘게 보면 안됩니다. 이 나라에 경건하게 살아가고 진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알면서 소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내가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역사 하는 줄로 믿습니다. 공산주의의 특징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부하지 마라 나라가 다 시켜줄께, 병원? 나라가 다 치료해 줄께, 양식? 나라가 다 먹을 것 줄께 그러니까 하나가 안되고 망하는 거예요. 다 시켜줄 수 없으니까 전부 무식하게 만들었고 다 치료할 수 없으니 전부다 병들어 죽게 되었고 다 먹일 수 없으니 굶어 죽는 거예요. 제가 소련에 수도에 가보니까 치과 병원에 갔는데 전부 15세기에 쓰던 펜치를 가지고 이를 빼잖아요. 보세요.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공부하라는 거예요 네가 열심히 하라는 거예요 네가 믿고 네가 순종하라는 거예요 그물을 네가 내리라는 거예요. 네가 하면 내가 너를 도와준다 는 거예요. 공산주의 식으로 살아가면 안됩니다. 여러분 열심히 믿고 나아가면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요사이 조금 내 마음에 이러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근로자들 주 5일 근무제, 우리 나라에 노동운동 하는 분들도 많고 하지만 나는 5일 근무제는 지금 시기상조이고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우리가 엿새 일해도 어려운데 5일 일하면 어떻게 하냐는 거예요. 하루 쉬어도 얼마나 우리가 타락하는데 말이죠, 전부 다 러브호텔인데 더구나 금요일 오후부터 나가서 이건 더블로 러브호텔이 생길텐데 이래가지고 뭐가 되겠나 말이에요. 우리는 영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열심히 일하고 믿고 순종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이 역사 할 줄로 믿습니다.

 

 

 

 

은혜를 받을만한 사람들

눅 4:25-27 / 이대성목사(큰빛광성교회)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여러분? 교회 절기에는 40일을 지키는 절기가 두 번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앞으로 40일, 그것을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기다린다, 준비한다. 고해서 대강절, 대림절이라고 부르고 그 절기를 지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교회역사를 통해서 이 대림절 기간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터인데 그 다시 오실 예수님을 어떤 마음으로 우리가 맞이할 것이냐?’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재림을 기대하면서 신앙을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순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날을 기점으로 해서 앞으로 40일 인데 주일은 제외하고 40일을 말합니다. 그래서 지난 2월 6일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난주간 금요일까지의 40일 동안을 사순절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그리고 부활을 기대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을까?’ 신앙적인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40일 특별새벽기도회 등을 통해 집중적으로 신앙을 훈련시킵니다.

영어로는 사순절을 ‘Lent’라고 하는데요? 이는 “봄”이라는 뜻입니다. 추운 겨울 속에서 따뜻한 봄으로 가는 계절처럼 얼었던 땅이 녹고 새싹이 돋아나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이 과거의 신앙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으로 거듭나는 기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저는 왜 신앙이 안 성장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오늘 이 시간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여러분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것은 훈련이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꾸준히 운동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오히려 건강해 보입니다. 젊은이의 건강을 되찾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들도 영적 훈련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이 사순절 기간에 영적 훈련을 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7절과 8절 말씀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그림 즉 명화는 그냥 그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과 연습을 통해서만 그려지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는 고백을 하지만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내 편한 대로, 내 믿음대로 하나님을 믿어서 신앙 성장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신앙이 성장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영적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여러분? 훈련이 무엇입니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쉬운 것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은 억지로도 하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한평생 살아갈 때 가장 소중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돈? 건강? 행복? 명예? 물론 불신자들의 눈에는 이러한 것들이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다르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은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우신 은혜를 받고 사는 것이 잘사는 길이요, 행복하게 사는 길이요, 보람되게 사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건강이 最高라구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건강은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돈이 최고라구요?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누려야 價値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합니다. 限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힘이나 정신적인 힘이나 어떤 과학적인 힘이라도 모두가 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뭔가 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 여러분의 노력과 열심으로 된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부모 잘 만난 덕이라구요? 남편 잘 만난 德이라구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우리 크리스찬만큼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사람을 의지해서 얻는 도움은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도움을 받아도 그 도움이 완전한 도움이 되지 못하기에 부작용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부작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리 받아도, 평생을 받는다 할지라도 짐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기쁨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끝까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잠깐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1)영원히 우리를 도우시고 2)변함없이 우리를 도우시고 3)풍성한 은혜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노력해야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됩니다. 그러려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와야 되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겸손한 마음을 평생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은혜를 받을 만한 두 사람의 모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을 배격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은 따로 있노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자신의 마지막 것으로 엘리야를 대접하여 가뭄 가운데서도 주리지 아니한 사렙다 과부와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깨끗함을 얻은 나아만 장군입니다.

다같이 25절부터 27절까지 한 목소리로 함께 읽습니다. (시작)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아멘.

그런데 여러분? 이 두 사람은 은혜를 받을 수 있었던 共通點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저와 여러분도 은혜 받을 만한 사람이 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은혜 받을 자는 모두 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다같이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는 하나님의 사람 사도바울의 간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온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 또한 모두 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그들은 지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 순간이요, 마지막 순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그들을 결단코 버리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그냥 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은혜가 필요한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렵고 답답한 상황이 닥쳤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다시금 살 수 있습니다. 질병이 온전히 치유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써 1980년도 재선에서 큰 표차로 재선에 실패하고야 말았습니다. 선거비용 때문에 부모님이 주신 유산인 농장까지 팔아야 했습니다.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러나 지미카터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였습니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으로는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대통령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분쟁을 조종하는 평화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에디오피아, 소말리아, 아이티, 북한의 핵문제, 쿠바의 분쟁까지 세계 속에 분쟁이 있는 곳이라면 다 찾아 갑니다. 그래서 마침내 2002년에는 세계의 인권, 경제, 사회 개발에 대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습니다.

여러분? 지미 카터라고 하는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하게 되면 이제 이런 말이 뜹니다. ‘집권 시에는 최악의 대통령, 퇴임 후에는 최고의 전직 대통령’ 그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미국의 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대통령의 경험으로 세계를 다스리는 대통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능력은 내 생각보다 크고 내 계획보다 넓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려울 때 찾아오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부부가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 물건 다 싸가지고 가!” 그랬답니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이 큰 가방을 가지고 나오더니 아내에게 하는 말 “여보! 나는 다 필요 없어요. 단 하나만 가지고 가겠소.” “그게 뭐예요?” “당신을 이 가방에 넣고 가겠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 가방에 꼭 넣어야 할 분이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요, 참 소망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조셉 스크리븐이라고 하는 청년이 결혼전날 약혼녀가 수영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너무나 슬퍼서 자포자기를 한 나머지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시비를 걸고 아주 삐뚤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더 이상 고향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아일랜드를 떠나 멀리 캐나다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우연히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로 그 순간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기쁨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시험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근심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나를 버려도, 아니 내가 내 자신을 버린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결단코 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죄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여러분? 어떻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찌 좋은' 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 같았으면 그런 슬픔과 낙망 속에서 과연 이런 가사를 아픔의 치유에 대한 보응으로 쏟아낼 수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진정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절대로 절망에 빠져서는 아니 됩니다.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끝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부활의 시작입니다. 비록 사방은 꽉 막혀있다 할지라도 하늘은 열려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소망을 바라볼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우리의 삶을 지켜 보호 인도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은혜 받을 자는 모두 다 하나님의 종에게 찾아왔습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종에게 찾아왔습니다.” 다같이 에스더 4장 14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시작)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는 왕비 에스더로 하여금 유다민족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단을 낳게 한 모르드개의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렙다 과부 또한 어찌 보면 우연히 엘리야를 만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믿는 자에게 우연이란 없습니다. 필연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하심에 기인한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를 이렇게 부릅니다. “하나님의 우연!”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우연처럼 보이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섭리요, 계획하심입니다. 결국 사렙다 과부는 엘리야의 말을 듣고서 마지막 남은 음식을 엘리야를 위해 대접합니다.

또한 나아만 장군도 계집종을 통해 하나님의 종을 알게 되고 결국 그를 만나기 위해 그 머나먼 길을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자 깨끗이 나음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먼저 하나님의 종에게 찾아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은혜 받는 비결중의 비결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천년을 믿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수 있습니다. 만년을 기도해도 하나님을 볼 수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종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당신의 종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당신의 종들을 통해 계속 말씀하시고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은혜를 바로 누리려면 주의 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 그 분을 만나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주의 종의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만약에 주의 종과 어긋나고 다툼이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의 모든 신앙생활이 어려워지게 될 런지도 모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주의 성전에 부지런히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주님 전에 나와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전에 나와야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 답답하고 어려우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종에게 있는 그대로 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강력한 중보기도를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는 주의 종이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종은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통로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렙다 과부가 들은 엘리야의 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들은 엘리사의 말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온전히 쓰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사르밧에 사는 과부, 그는 정말이지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에게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보내셔서 은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는 나아만 장군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의 문둥병은 저주받은 병입니다. 그에게 과연 누가 가까이 다가오겠습니까? 아내도, 자식도, 그리고 부하들도, 심지어 왕까지도 그에게 가까이 올 수 없었습니다.

완전히 사회로부터 격리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도 포로로 붙들려 왔던 계집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만날 수 있는 은혜의 길을 열어 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이대성 목사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은혜가 있어야 산다. 은혜를 누리려면 소망을 품고 주님께 나아오라. 주의 종을 통해서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을 들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 은혜받기를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아온 여러분 모두에게 부족한 종을 통해 진정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의 말씀, 치유의 말씀, 위로의 말씀이 임하므로 영적회복을 맛보는 자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은혜 받을 자는 모두 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다같이 사무엘상 15장 22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은 모두 다 하나님 말씀에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갖가지로 우리를 시험하시기도 하고 연단과 환난에 집어넣으시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는 가장 큰 목적은 겸손과 순종을 확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실 때에 반드시 순종을 통해서 베푸십니다. 왜냐하면 순종하는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순종하려면 과연 어찌해야 할까요? 가장 큰 장애물인 교만의 장애물을 넘어야 합니다. 잠언 18:12절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자신의 경험, 고정관념, 교만을 벗어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잠언 22:4절에는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두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종의 명령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가루 한 움큼, 기름 조금 가지고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 한다는데 엘리야는 그것을 먼저 가져오라고 합니다.

나아만 장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니요? 여러분? 문둥병이 물에 씻어 날 병입니까? 도대체 어느 정도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 믿을것 아닙니까? 나아만 장군은 잠시 잠깐 교만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신하 덕분에 이를 잘 극복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여 끝까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오셔서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을 달라고 말씀 하실 런지도 모릅니다. 이에 사렙다 과부는 한 마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을 가지고 음식을 주의 종을 대접했습니다. 그 결과 성경은 무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비가 오기까지 통의 가루와 기름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아멘.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 말씀일진대 제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없다고 이야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남은 것일지라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기적은 반드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 때에 하나님께서 사렙다 과부를 축복하셨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누르고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에 세상 사람들은 다 나를 버릴지 몰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언제나 내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야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절대로 헛되이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종과 결단과 각오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붙잡는 바로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병 나음을 얻을 뿐만 아니라, 독에 밀가루가 솟아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혹시 무리한 요구를 하고 계십니까? 도저히 안 되는 상황인데도 자꾸만 뭔가를 요구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그것이 진정 하나님 말씀일진대 순종만이 은혜를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미련하리만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체험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더 이상 세상 기적이 기적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제 상식입니다. 우리 큰빛광성교회 3대 목표 중 하나인 상식이 통하는 교회라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세상 기적이 하나님의 상식이 되어 평안과 기쁨을 맛보는 교회’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성도 여러분? 언제 어디서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이 진리일진대 그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셔서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순종하는 자가 누리는 은혜

눅 4:25~27 / 조학환목사

 

1.경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누리고 이루기 위해서는 열심히 움직이며 준비해야 합니다. 안 그래요? 육체가 건강하려면 열심히 양식을 먹고 활발하게 움직여야 하지 않습니까? 성숙한 인격을 가지려면 열심히 마음의 양식을 섭취하고 선과 의를 따라 살기를 힘써야 하지 않습니까?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열심히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며 땀 흘려 일해야 되지 않습니까? 훌륭한 선수가 되려면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기다리며 열심히 훈련해야 하고, 목이 터져라 열심히 노래를 불러야 훌륭한 가수가 되고,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열심히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야 훌륭한 파이니스트가 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열심히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주님을 섬기며 말씀을 따라 살기를 힘써야 영적인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르고 딤전4:7,8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이지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신앙도 훈련해야 합니다. 물론 신앙훈련도 다른 모든 훈련과 같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다른 일들과 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힘들어도 해야 하고 어려워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힘들어도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섬김의 삶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숙한 신앙인이 되고 성숙하고 성화된 모습을 가질 때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무한한 생명의 열매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에, 아니 사순절만 아니라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열심히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따라 사랑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며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영적인 능력과 은혜와 지혜로 충만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가 충만한 가운데 주님 영광 나타내며 주님 역사 이루어 가는 복되고 존귀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열심히 신앙적 훈련을 해야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데 그러면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으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물론 일일이 열거하자면 수 백 가지도 넘겠지만 그 중 가장 기본적인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겸손히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경건의 훈련을 하여 주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는 정말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존재요, 오로지 예수님 안에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와 복이 있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걸 안다면 당연히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자신의 생각과 이성과 경험과 왜곡된 가치관을 버리고, 오로지 완전하고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죄와 무지와 허물 속에 있는 자신을 버리고 겸손하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예수님 안에 그 생명과 은혜와 빛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은혜 받은 시돈 지방의 사렙다라는 곳에 사는 가난한 과부와 아람의 군대장관으로써 나병환자였던 나아만 장군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오늘 말씀 바로 앞부분에 있는데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사렛에 오셨을 때 고향사람들이 그 알량한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지만 그 알량한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을 버리고 겸손히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요, 도리어 너희가 더럽다고 기피하는 사람이라도 겸손히 엎드려 내 말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덧입게 될 것이라며 그 교만과 아집과 고집을 버리고 나를 영접하고 내 말을 따르라고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사렙다 과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것은 열왕기상17장에 나오는데 하루는 엘리야 선지자가 사렙다 과부를 찾아가 물과 떡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는 하필 이스라엘 땅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자기 가족도 먹을 것이 없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왕상17:12절에 보면 사렙다 과부가 엘리야에게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즉 지금 나는 한끼 분량의 식량 밖에 없고 그래서 나는 이것으로 아들과 함께 밥을 해 먹고 죽기만을 기다려야 할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야 선지자가 뭐라고 합니까? 왕상17:13절입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여러분, 엘리야 선지자가 너무 하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사렙다 과부가 겨우 한끼 분 식량 밖에 없어 이걸 먹고 나면 굶어 죽을 판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통분을 하며 어찌 그렇게 딱한 처지가 되었단 말이냐? 그럼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좀 보태주마, 나는 괜찮으니 너희들이나 해 먹고 기운을 차리라.’ 뭐 그렇게 말해야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거 먹고 나면 죽어야 할 형편이라는데 그걸 달라고 하니 벼룩이 간을 내 먹어도 유분수지 어찌 이렇게 염치가 없을 수가 있느냔 말씀입니다.

그럼 정말 엘리야 선지자의 행동이 염치없는 행동입니까? 물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엘리야 선지자의 이 말씀은 결코 염치가 없는 말도 아니요, 그들을 곤경에 빠트리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슨 뜻입니까? 한 마디로 너의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 네 생각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상은 네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자 사렙다 여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놀랍게도 선지자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왕상17:15절입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지금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딱 한끼 식사할만한 떡과 기름입니다. 그걸 먹고 죽기만을 기다려야 할 형편입니다. 3년6개월 비가 오직 않았기 때문에 어디서 꿔 올 데도 없고, 꿔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굶주린 자식에게 먹여야할 그 너무나 소중한 한끼 식사를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바쳤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가족이 큰 곤경에 처했습니까? 물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왕상17:15,16절입니다.“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놀랍게도 한끼 식량밖에 안되던 가루와 기름을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렸더니 한 끼가 아니라 열끼 백끼 천끼 만끼를 먹고도 남는 양식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만약 이 여인이 에이, 선지자님도 참 너무하십니다. 한끼 밥해 먹고 죽으려고 한다는데 그걸 달라고 하시니 세상에 염치도 없으시지 그런 말씀이 어딨습니까 하면서 그냥 자식 먹이는데 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그 한끼 밥을 먹고 굶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모든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드렸을 때 통에 가루와 병에 기름이 먹으면 또 채워지고, 먹으면 또 채워지고 하여 그 극심한 가뭄가운데서 염려 없이 지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도 마찬가지죠. 왕하5장에 보면 그가 문둥병에 걸려 엘리사를 찾아갔을 때에 엘리사는 나가 보지도 않고 종을 보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는 분노하며 감히 아람의 국방장관이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고 고작 종을 보내어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한다면서 그까짓 요단강에 가서 씻느니 차라리 우리나라에 있는 더 큰 강에 가서 씻겠다고 하며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나아만의 하인이 말하지 않습니까? ‘아니 주인님, 선지자가 이 보다 백배 어려운 일을 시켜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까짓 요단강에 가서 씻는 일이 뭐가 어렵다고 돌아가려 하십니까?’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려운 일을 시켜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단강에서 씻는 게 뭐가 어렵습니까? 그래서 나아만도 듣고 보니 과연 그러해서 요단강으로 들어가서 씻지 않습니까?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씻어도 아무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시키는 대로 일곱 번 씻었을 때 나병이 깨끗하게 나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자신의 생각 상황 환경 여건 다 떠나서 갓난아이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요 믿음이요 경건이며, 그건 결코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닙니다. 안 그렇습니까? 가끔 말씀드리지만 예배드리고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이 뭐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밭에서나 회사에서 일하고, 집에서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것보다 쉽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30:11절에서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고 하시면서 14절에서는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쉽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나는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과 한계와 죄악 속에 있는 존재요, 반대로 하나님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능력과 지혜와 선과 의와 주권의 하나님이시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나보다 백배 천배 억만배 옳으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오직 그 안에 유일하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자신의 알량한 생각과 가치관을 내려놓고 갓난아이처럼 겸손히 말씀에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여기 있는 이 조학환 목사가 비록 못나고, 능력도 없고. 설교도 잘 못하고. 사랑도 부족하고, 허물도 많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세움을 받아 말씀을 전할 때에 잘나고 똑똑하고 의롭고 선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이성을 내려놓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믿음이요 경건인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토록 겸손하라. 낮아지라.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고, 약4:6절에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사순절을 보내며 좀더 겸손히 엎드려 말씀과 기도와 찬송 등의 경건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덧입어 내 생각이 어떠하고, 세상없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상황과 환경과 조건이 어떠하든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손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여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가운데 주님 영광 나타내며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복되고 존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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