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비밀
누가복음 8:4-15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 8:4-15 / 눅 8:4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마 13:1-9,막4:1-9] 많은 사람들이 여러 동네에서 모여들자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5) `한 농부가 그의 밭에 씨를 뿌렸다. 그런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서 발에 밟히기도 하고 새들이 쪼아먹기도 하였다. 6) 어떤 것은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져 싹은 났으나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나무들이 함께 자라 곧 그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자라나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이 비유를 들려주고 나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 하고 말씀하셨다. 9)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마 13:10-17, 막 4:10-12]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묻자 1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는 이 비유의 의미를 알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군중은 옛 예언자들이 예언한대로 ㄱ)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를 못한다. (ㄱ. 70인역 사 6:9) 11) [씨뿌리는 비유의 설명;마 13:18-23, 막 4:13-20] 이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12) 씨가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그 마음이 길바닥같이 굳어져 있어 곧 마귀가 와서 말씀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믿지도 못하고 구원받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13) 씨가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은 기쁘게 듣지만 믿음이 뿌리를 박고 자라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잠시 동안 믿기는 하지만 시험을 받을 때에 떨어져 나간다. 14) 씨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생활에 대한 염려와 모아놓은 재물과 여러 가지 책임이나 세상 쾌락들에 휘말려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이르는 말이다. 15) 그러나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정직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지켜 나갈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함으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무리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려주었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심(4-8) 예수님이 각 성과 동네를 찾아가자 큰 무리가 나아옵니다. 여기서 이때 예수님은 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비유로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는 그들이 잘 아는 농부가 씨를 뿌리는 이야기였습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릴 때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서 지나는 사람의 발에 밟히고 공중의 새들이 먹어 버렸습니다. 어떤 씨는 바위 위에 떨어져서 싹이 났으나 수분이 부족하여 말라 죽었습니다. 어떤 씨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져 싹이 났으나 더 빨리 자란 가시에 짓눌러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백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같은 농부가 같은 씨를 같은 때에, 같은 곳에 뿌렸음에도 그 결과가 달랐다는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비유의 해석(9-15)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리에게 말씀했던 씨 뿌리는 비유의 뜻을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먼저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는 그들로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비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길가에 떨어진 씨를 새가 먹었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으나 마귀가 그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을 말하고, 바위 위에 떨어졌으나 습기가 없어 말라 죽은 것은 잠깐 믿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가시떨기 속에 떨어져 가시에 덮였다는 것은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백 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인내하여 결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귀를 가졌다고 해서 다 듣고, 다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앞 단락에 자기 소유로 예수님을 섬겼던 여인들이 나옵니다(눅 8:2-3). 바로 그들이 백 배의 열매를 맺은 좋은 땅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적용: 당신은 네 종류의 땅(길가, 바위, 가시떨기, 좋은 땅) 가운데 어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당신의 상태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
‘하나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구원은 선물입니다. 나의 어떤 노력이나 댓가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음이라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이 깨달음은 누구한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준비된 마음이 있으면 언제라도 이 진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준비된 마음이란 말씀이 어떻게 지시하든지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준비된 자는 말씀을 잘 듣게 되고 생활 속에서 말씀대로 실천하는 자로 하나님 나라의 귀한 보배가 될 것입니다.
< 설 교 >
호크마 주석
=====8:5
씨를 뿌리는 자 - 원문상으로는 씨를 뿌리는 자 앞에 정관사 '호'(* )가 붙어 있다. 이는 씨를 뿌리는 전체를 대표하거나 또는 예수께서 본 비유를 베푸실 당시 주위에 씨를 뿌리는 특정한 사람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아무튼 예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말씀하실 때 대다수의 청중들은 농경 문화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 말씀의 표면적인 의미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5-8절은 씨뿌리는 비유에 관한 말씀으로서,씨뿌리는 자나 씨앗 자체보다도 오히려 다양한 종류의 토질(土質) 곧 성도들의 마음밭에 강조점이 있다.
길가에 떨어지매 - 밀이나 보리 등을 사람이 손으로 뿌리는 일은 통상적이었다. 팔레스틴의 토지는 보통 가늘고 길게 분할되어 있고 분할된 밭 사이에 좁은 길이 있어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다. 씨를 뿌릴 때는 이 좁은 길에도 씨가 뿌려질 수 있는 일이었다. 이 곳에 떨어진 씨는 당연히 뿌리를 내릴 수가 없으며 농부들이 지나다닐 때 그발에 밟히거나 새들의 먹이가 되어 버리게 마련이었다.
=====8:6
바위 위에 떨어지매 - 마태(마 13:5)나 마가(막 4:5)는 '돌밭'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돌로만 이루어진 곳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밭에 간혹 바위가 있어 그 바위위에 흙이 얇게 덮여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땅에서는 씨에서 싹이 나서 조금 자라기는 하지만 수분이 부족하고 자양분이 없으므로 해가 뜨면(마 13:6) 곧 말라 죽게 된다.
=====8:7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 팔레스틴에는 유난히 가시가 돋은 식물들이 많이 자란다. 헥커(Hacker)와 같은 학자의 분석에 의하면 히브리 성경에는 가시나 가시 종류의식물을 의미하는 용어가 22종류나 된다고 한다. 아무튼 가시 떨기 속에 뿌려진 씨는싹이 나고 자라기는 하지만 왕성한 성장력들 지닌 가시떨기에 자양분(滋養分)을 빼앗겨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8:8
좋은 땅에 떨어지매 - 충분한 습기와 자양분을 구비하고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없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잘 성장하여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 마태나 마가의경우에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3단계로 구분되어 있으나(마 13:8; 막 4:8), 누가는나머지 두개는 생략한 채 백 배의 결실만을 언급함으로써 풍성한 결실을 강조하고 있다.
들을 귀 있는자 - 들려 준 이야기의 표면적 의미 외에 숨은 뜻이 있음을 암시해 주는 말씀으로, 이러한 표현은 종종 예수께서 중요한 교훈의 종결 어귀로 사용하신 것이다(14:35; 마 13:9, 43 등).
=====8:9
제자들이...물으니 - 유감스럽게도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없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비유에 대해 적절한 응답을 한 청중도 없었고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그 비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물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로톤'(* )은 '심문하다'의 뜻을 가진 '에페로타오'(* )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집요한 질문을 하였음을 뜻한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의 비유를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뜻을 알려고 하는 열정적인(passionate)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8:10
하나님 나라의 비밀 - 비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스테리아'(* )는 '가둔다'의 뜻을 지닌 '뮈오'(* )에서 온 말로 숨겨겨 있는 사실을 뜻한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발견해 낼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실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참다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그 고유한 속성으로 인해 인간의인식 능력으로는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이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부여받을 때 뿐이다. 그런데 그 선물은 인간의 상태에 따라 선택적(選擇的)으로 주어진다. 예수께서는 그의 열 한 제자들과 그밖의 제자들(막 4:10)에게는 그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들 즉 군중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그것을 진실된 마음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닫혀 있음을 말해 준다. 이는 저희로...함이니라 - 본문은 사 6:9, 10의 내용을 축약적으로 인용한 것인데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셨던 목적을 설명해 준다. 한편 마태는 사 6:9,0을 보다 명확하게 인용하고 있는데(마 13:13-15),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한 이유를 설명하였다는 점에서 본서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나 이 두 복음서들의 기록은 상호 보충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마태의 문장은 '호티'(* )절로되어 있어 '왜냐하면...'의 구문으로 이해되는바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백성들이 완악(wicked)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듣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마 13:15). 사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은 은사를 주시기 원하지만(마28:19,20;요 3:16;딤전 2:4;벧후 3:9)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5:21, 30;6:2, 7, 11; 7:30; 마 23:37)증거한다. 한편 누가의 문장은 '히나'(* ) 구문으로 되어 있어 '...하기 위하여'로 이해되는데 이는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을 말해준다. 즉 하나님의 은사를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비밀'을 감추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8:11
하나님의 말씀 -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어귀로 본서에 네 번(11,21절; 5:1; 8:11, 21;11:28) 나오고 사도행전에는 12회나 사용되고 있으나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한 차례씩만 사용되고(막 7:13;요 10:35), 마태복음에는 한번도 쓰이지 않았다. 제자들의물음에 대한(9절) 예수의 답변은 '씨를 뿌리는 자'보다는 '씨'와 씨가 뿌려진 밭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물론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 자신일 것이다. 씨가 하나님의말씀 또는 천국 말씀(마 13:19)이라면 그것은 예수 자신이고(요 1:14) 복음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8:12
길가에 - 계속되는 설명은 씨가 뿌려진 밭(5-8절)이 다름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인간 자신임을 말해준다. 좁게 말하면 인간의 마음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전인격적인 인간을 말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길가와 같은 상태의 인간은 말씀을 듣기는 하나 그 말씀에 대해 냉담(冷談)하거나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지않음으로써 말씀이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게 된다.
마귀 - 마태는 '악한 자'(포네로스, * )로, 마가는 '사단'(* , 사타나스)으로 표현하는데 비해 누가는 '마귀'(* , 디아볼로스)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길가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데 그치고 받아들이기를 보류(保留)하고 있을 때 그 말씀을 빼앗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5절과의 관계에서 살펴볼 때 씨앗은 밟히기도 하고 새에게 먹히기도 한다는 점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려는 마귀의 훼방은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훼방을 물리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것 뿐이다(엡 6:13-17).
=====8:13
바위 위에...시험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 바위 위에 얇게 흙이 덮혀있는 것과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 감정적 흥분과 피상적 열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감정의 상태를 넘어 말씀이 심령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신앙을 예수께서는 뿌리없는 믿음이라고 규정하는바 이들의 믿음은 일시적이며 잠정적이다. 믿음의 진정성 여부는 시험에 견디어 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검증(檢證)되어진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말씀을 듣기 이전의상태로 되돌아가 버린다. 한편 본문에서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믿음이 참인가를 검증할 수 있는 '시험'이 필연적임을 암시한다.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믿음은 마치 뿌리없는 식물과 같이 그 생명이 오래가지 못하며 따라서 그 과실은 더 더욱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시험을 견디어낸 믿음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약 1:12).
=====8:14
가시떨기에...일락에 기운이 막혀 - 가시떨기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어느정도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상당한 정도의 신앙을 갖게되지만 궁극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가치를 혼동함으로써 결국에는 실패하는 부류들이다. 마치 세례요한의 메시지에 대해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지만 세상적인 지위와 부귀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국은 인정하지 않고 죄를 범했던 헤롯 안디바와 갈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음의 세 가지가 문제가 된다. 첫째는, 이생의 염려이다.마가는 '이생의' 대신에 '세상의'라고 표현했는데(막4:19), 지극히 세속적인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신앙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게 됨을 말함에 있어서는 같은 뜻이다.
이 염려는 신앙생활에 매우 해로운 것으로 영혼의 저항력을 조금씩 약화시켜 마침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죽은 영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것을 경계하여 염려하지 말 것에 대한 교훈을 주신 바 있다
(12:22-34;마 6:25-34). 둘째는 재리(財利)이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열망 때문에 진리를 따르지 못한 예는 '어리석은 부자'(12:16-21), '부자 관원'(18:18-23)과 같은 이야기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셋째는 일락(逸樂) 즉 생의 향락이다. 일시적이고 표면적이며 충동적인 육체의 쾌락을위해 영혼의 존귀한 가치를 망각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숭고한 영혼을 조금씩 침식하여 마침내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요 4:36) 맺지 못하게 하는 생의 향락은 크게 둘로 나누인다. 첫째는 그 자체가 죄악이 되는 술취함, 음란한 행위, 폭력 등이며 둘째는, 그 자체는 죄악이 아니나 심하게 빠져들 경우 죄가 될 수 있는 유흥(amusement), 스포츠 등이다.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 성경에는 온전한 신앙을 갖지 못한 자들을 열매 없는 나무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는데, 호 10:1, 2는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잎사귀만 무성한 포도나무로 비유한다.
=====8:15
착하고 좋은 마음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 )는 인간의 영적, 지적, 의지적인 요소가 집중되어 있는 전인적(全人的)인 좌소를 가리킨다.한편 '착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레'(* )는 '칼로스'(* )의 변형으로 '카코스'(* )의 반대어이다. '카코스'는 '올바로 쓰이지 못하는 펜'이나비겁한 병사처럼 그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카코스'의 반대말인 '칼로스'는 목적에 적합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돈벌이나 사리사욕과 같은 낮은 차원의 성취에 몰두하지 않고 지혜나 의로움 등의 숭고한 일을 획득하는 일에 열심인 태도를 묘사하는 말이다. 복음의 씨가 뿌려져서 좋은 열매를 맺기에 적합한 마음은 그 다음의 형용사 '좋은'이라는 단어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다. '좋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데'(* )는 숭고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시에는 작은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아는 내면 상태를 가리킨다. 이 단어도 반대어인 '포네로스'(* )와 비교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포네로스'는 '적극적으로 악한 것'이란 뜻이며 '가장 큰 피해를 끼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포네로스'의 반대어인 '아가데'는 선하고 유익한 것이라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달리 말해서 말씀을 듣되 그 말씀을 듣는데 그치지 않고 지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염려, 재물에 대한 욕심, 그리고 쾌락과 같은 마귀의 시험을 '인내'로 견디어내 마침내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 '인내'는 모든 영적 열매가 발아(發芽)하고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요소이다.
하늘의 농사꾼
눅 8장 4~15절 / 김창인목사
하늘 농사꾼!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믿음 농사꾼이라는 말이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인데, 돈 농사를 짓는 것 아니고 곡식 농사를 짓는 것 아니고 믿음 농사짓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 농사꾼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비유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한번은 농사꾼이 씨를 뿌리는데 그 씨가 길바닥에 떨어지니까 새가 와서 먹어 버렸답니다. 그래서 그 농사는 안됐습니다. 그 다음 돌이 많은 돌밭에 떨어지니까 흙이 약간 있어 싹이 나고 뿌리는 내렸지만 여름 더위와 햇볕에 견디지 못해서 싹이 말라죽고 말아서 농사는 실패하였습니다. 또 다음에는 가시덤불에 떨어지니까 그래도 가시만 제거하면 그 땅은 쓸모가 있었습니다. 뿌리가 깊어지고 싹이 자랐지만 워낙 가시가 기운을 막아 버리니까 도저히 열매를 맺지 못해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에, 기름진 좋은 땅에 떨어지니까 싹이 나고 꽃 피어 열매 맺는데 백 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농사를 비유로 들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는 믿음의 농사를 잘 지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믿음의 농사꾼' 혹은 '하늘 농사꾼' 이런 제목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I. 모이는 농사꾼(4절)
그런데 본문 4절에 보니까 농사꾼들은 모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이는 농사꾼, 열심히 모이는 농사꾼이 농사를 잘 짓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돈 농사를 짓는 사람, 곡식 농사를 짓는 사람은 모이지 않아도 될지 모르나 우리 믿음 농사짓는 사람들은 열심히 모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4절을 보니까 열심히 모였어요,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그러니까 모이긴 모였는데 도대체 누구들이 모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① 각계 각층에서 모임
본문에 의하면 각 동네 사람들이 모였다 했습니다. 이 각 동네라고 하는 것은 2천 년 전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도 가령 예를 들면 천 년 전쯤의 동네는 한 씨족 사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동네에는 김씨 저 동네에는 이씨 건너 동네에는 최씨만 살아요. 만일에 김씨 동네에 박씨가 한 사람 이사 갔다 하게 되면 발을 못 붙입니다. 멸시 천대가 보통이 아닙니다. 그 집안의 김씨가 동네 휘어잡고 사는 거죠. 저 동넨 이씨, 최씨, 박씨, 이렇게 씨족 사회를 이루고 살다 보니 동네 나름대로 전통이 생기고 그 가문 나름대로 문화가 생깁니다. 그러다 보니 오랜 전통사회에서 그런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안에는 별별 사람들이다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양반도 있겠고 상놈도 있고 또 벼슬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부자,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건강한 사람, 별별 사람들이다 모였다는 것입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다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 농사짓는 교회에서는 각계 각층이다 모여야 됩니다. 그저 이 동네 저 동네 김씨 박씨 다 모여야 된다는 뜻 이전에 오늘날 각 동네 사람들이다 모였다는 현대적인 의미는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교회에 모인다는 뜻입니다. 어떤 한 계층만 모이는 교회라면 곤란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게 되면 정치가도 교회에 나오고, 농사짓는 사람도 교회 나오고, 학교 교사도, 장사하는 사람도, 회사원도 나오고 그래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은혜 받고 나아갈 때 각계 각층으로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국회 의사당 사람들만 교회에 나오면 장사하는 사람에게 전도 못합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국회 의사당에서 정치하는 사람들과 혹은 장사하는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은 학생 가르치는 것밖에 모르고 국회 의사당에서는 정치하는 것밖에 모르는데 대화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전도가 안됩니다. 그러므로 각계 각층이 모여서 우리가 은혜 받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각계 각층으로 돌아가서 전도할 때에 바로 그 교회가 잘 되고 하나님 나라가 잘 되고 믿음 농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께 모임
각계 각층이 모여야 되고 그 다음으로는 예수님께 모여야 됩니다.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에게 나와 " (4절 상).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은 믿음 농사짓는 우리가 모일 때에 사람을 보고 나오면 안 됩니다. 만일 성경에 예수님 제자 중의 첫째 가는 베드로에게 나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그렇게 했다면 오늘날 이 말씀은 목사를 위해 나오라는 말이 됩니다. 담임 목사에게 나아와서 뭘 할 것입니까. 목사에게 나와야 얻을 것 하나도 없습니다. 목사에게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또 사람들끼리 모일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끼리 잘 모이는 일은 계꾼들이 더 잘 합니다. 계꾼들이 그 날 그 시간만 되면 꼭꼭 모입니다. 계꾼들 열 명 백 명 모인들 그것이 교회입니까. 그것이 믿음 농사입니까. 전혀 상관없습니다. 사람끼리 모여 봐야 계 놀이만도 못한 겁니다. 또한 사람을 위해 모여도 안됩니다. 오늘 교회 안 나가면 내일 당장 심방 오겠으니 목사님을 위해서 나가 줘야지. 왜 목사를 위해서 나옵니까. 사람을 위해서 나올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나온다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보니까 전부 예수에게 나아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였고 예수를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가 흩어지라 하기 전에 흩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임이라 하는 것은 꼭 예수님을 위해 모일 때에 교회가 잘 되고 하늘 농사 잘 되고 믿음의 농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③ 큰 무리로 모임
"큰 무리를 이루니 "(4절 하).
요즘 가만히 들어 보세요. 방송국에서 방송하는 것이나 신문에 나는 것이나 또 어떤 모임에 가거나 "교회가 물량주의에 빠졌다, 회개해야 한다"고 합니다. 물량주위가 무슨 뜻입니까? 교인 많이 모이는 것, 헌금 많이 하는 것, 교회가 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본-물량주의에 빠져서 타락했다고 하질 않나, 교회 좀 커지니까 목사가 뭐 죄인 같아서 얼굴 들고 못 다니겠습니다. 얼마나 라디오 신문 등 모이는 곳곳마다 욕하고 공격하는지 .... 그래서 속으로 " 자기네들은 교회가 커지고 싶지 않아서 커지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욕하고 떠들어대는 사람 자기 교회는 커지고 싶지 않아서 커지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그리고는 전화, 편지로 "도와 주시오" 합니다. 욕하는 사람들이 꼭 그 일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교회 큰 것 자랑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키운 것 아니고 하나님이 키운 것이니 영광은 다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내 교회가 커지지 않고 남의 교회가 커졌다고 욕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욕하면서 도와 달라고 손 내밀고 전화를 합니까. 거기서 언제 개척교회 세우고 선교사 파송합니까? 우리는 금년엔 예배당 다 지었으니까 내년부터는 선교사 보내야 됩니다. 내년부터 개척교회를 필요한 곳에 세워야 됩니다. 적게 모이면 내 교회하나 유지 못합니다. 많이 모여서 강력한 힘이 될 때 주님께서 큰 일을 시켜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여야 합니다. 모인 다음에 교육을 시켜도 그 때 시키고 질적 성장도 그때 있는 것입니다. 모이지 않는데 뭐가 있습니까. 아니 예수님이 모이라고 했는데도 대여섯 명이 모였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가 모여 힘을 합쳐야 됩니다. 주님께서 큰 일을 맡겨도 우리가 큰 무리로서 크게 일해서 봉사할 때 하늘 나라가 확장되고 하늘 나라 농사가 잘 되고 믿음의 농사가 성공할 줄로 믿습니다.
④ 지도를 받으러 모임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더라" (4절 하).
농사지으려면 우리가 모이기도 하고 힘을 합하기도 해야 되지만 농사에 대하여 앞서간 사람에게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농사는 항상 개량되어야 합니다. 옛날 농사나 지금 농사나 씨를 뿌려 농사지어 수확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옛날과 지금은 다릅니다. 벌써 생산량이 달라졌습니다. 그 다음 농기구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농사 기술이 달라졌습니다. 계속 앞서 가는 사람에게 지도를 받아야 그 다음에 우리가 성공합니다.
여기 본문을 보니까 예수님께 모인 무리들이 무엇 하러 모였습니까? 지도 받으려고 모였습니다. 하늘 농사꾼으로서 하늘 농사 잘 지으려면 예수님께 지도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더라." 이 비유라고 하게 되면 영적 세계에 대한 이야기인데 물질적인 세계에서는 그대로 이야기해 봐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가지고 쉽게 풀어 주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니며 설교학을 배울 때에 설교학 교수가 "한국에서는 아무 목사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그렇게 잘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학교 다니면서 그 교회엘 열심히 나가 보았는데, 내가 볼 때엔 하찮게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듭니다. 저런 설교를 잘 한다 하고 모여드는가 싶어 마땅치 않아, 몇 번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두고두고 생각해 보니까 참 훌륭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교회에는 장관들도 나오고 벼슬로 말하면 쟁쟁한 분들 그리고 박사도 수십 명 나오고 있는데 국민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할머니도 나와서 좋아할 정도로 설교를 쉽게 합니다. 그러니까 박사도 나와 성경을 쉽게 풀어 주니까 좋아합니다. 박사라고 해도 성경은 무식합니다. 세상의 박사이지 성경도 박사입니까. 또한 무식한 할머니도 나와 쉽게 풀어 주니까 전부가 다 하나같이 은혜 받습니다. 그런데 내가 들어보니까 연애 소설에 나오는 미사여구의 문장들은 없었습니다. 철학에서 쓰이는 유식한 문구도 없었습니다. 좋은 옛 이야기도 없었습니다. 저것도 설교인가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철학 사전 찾아서 철학 용어 쓰셨어요? 아니 어느 소설에 있는 문장 빌어 썼습니까? 보통 쓰는 말, 보통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우리 생활 주변에서 피부로 느끼는 것으로 쉽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배우는 사람들이 쉽게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지도했고 사람들은 바로 이 지도를 배우러 나간 겁니다. 예수님께 직접 3년 반 동안 지도를 받은 제자들은 믿음의 농사를 잘 지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늘 지도를 받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틀림없는 정통적인 신앙으로 우리가 믿음의 농사 잘 지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모이는 농사꾼, 각계 각층에서 모였고, 예수님께 모였고 큰 무리로 모였고 지도를 받기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II. 일하는 농사꾼(5-8절 상)
우리는 모이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일을 해야 합니다. 가정에 식구들이 모였을 때 즐겁고 재미있습니다. 남편, 아내, 아빠, 엄마가 있습니다. 아들과 딸들이 있습니다. 텔레비젼을 보고 저녁을 먹고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 보니 재미있습니다. 재미있다고 해서 그 다음날 낮에도 모여서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망하는 것입니다. 모였다가 아침 식사 후에는 즉시 흩어져 나가야 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일하러 나가고, 아들은 아들대로 딸은 딸대로 일하러 가야 합니다. 아내의 일터는 부엌입니다. 아내도 출근하는 것입니다. 안방에서 부엌으로 출근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일도 사실 월급 받고 해야 합니다. 일하지 않는 집안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 모여 힘을 얻고 회사에 나갑니다. 회사에 나가서 일하다 보니 윗사람에게 구박 당하고 억울한 일 당할 때도 많습니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며 웃고 푹 쉬고 나면 전혀 딴 기분, 새 사람이 되어서 일하러 나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믿음의 농사짓는 사람들도 믿음 생활하다보면 속상하고 억울한 일 많습니다. 피곤한 심신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 예배시간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아 새 마음 새 기분이 되어야 일하러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① 씨 뿌리는 일
농사짓는 것을 가만히 보면, 나도 농사꾼의 아들인지라 재미있습니다. 봄철이 되면 소에 보쟁기를 메워 밭을 갈아요. 밭가는 사람도 보통 일꾼이 아닙니다. 지금 나에게 보쟁기 메워 밭을 갈라고 하면 못 합니다. 그만큼 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 거름을 줍니다. 그 다음 이랑을 밟아 나가야 됩니다. 이렇게 발로 밟아 나간 다음 씨를 뿌리는 겁니다. 덮어놓고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그 다음 덮는 사람이 덮습니다. 농사짓는 것이 하나 같지만 이런 여러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밭가는 사람, 거름 주는 사람, 김 매는 사람, 밟아 나가는 사람, 덮는 사람이 있지만 그 중의 최상의 일꾼은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밭 잘 갈아도 씨를 엉망으로 뿌려 놓으면 농사는 망칩니다. 서툰 일꾼이 뿌리면 고랑에 듬뿍 떨어지고 이랑에도 듬뿍 떨어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안 나올 곳은 듬뿍 나오고 나올 곳에는 안 나옵니다. 밭을 아무리 잘 갈아줘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니까 씨 뿌리는 사람을 보시기 바랍니다. 떨어질 곳만 골고루 떨어뜨리는 것이 최상의 일꾼입니다. 하늘 농사짓는 믿음 생활이 교회 생활 중에서 최고입니다. 식당에서 봉사를 해 주는 일꾼, 구역에서 봉사하는 일꾼, 성가대에서 봉사하는 일꾼, 청소하면서 봉사하는 일꾼, 헌금 봉사하는 일꾼 그 외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일꾼은 씨 뿌리는 일꾼, 즉 전도인 입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농사는 헛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농사짓는 데 씨 뿌리는 것이 최고인 것처럼 교회 안에서 최고의 일꾼은 열심히 복음의 씨를 뿌려서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본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오늘날에는 씨 뿌리는 사명과 일감을 우리들에게 맡겨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할 일은 복음 전하는 일, 이것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사명이요,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② 씨를 선택하는 일
농사지을 때 선택을 하게 되는데, 밭에 농사를 지어도 해마다 똑같은 것을 심지 않습니다. 바꿔야 됩니다. 금년에는 무슨 농사를 지을 것인가 이것부터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씨앗은 알곡 중에서도 제일 좋은 것으로 고릅니다. 못된 것은 버리고 좋은 것만 골라냅니다. 이것이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금년에 목화를 심을 것이냐 밀을 심을 것이냐 선택해야 됩니다. 종자를 선택한 후에 못 되고 잡된 것은 버리고 뿌려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 선택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안 따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 돼지에게는 그 자유를 안주셨습니다. 개에게도 그런 자유를 안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개가 남의 물건을 훔쳐먹었다고 책임 묻지 않습니다. 돼지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아니합니다, 개나 돼지에게는 자유를 안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내가 자유롭게 말하고 싶으면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책임은 꼭 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셨기에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믿음 생활해 나갈 때에 우리는 좋은 것 선택하고, 바른 것 선택하므로 믿음 농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갔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 오시면 항상 먹을 것 대접하는 것밖에 모릅니다. 동생 마리아는 열심히 말씀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니까 언니가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집에 먹으러 온 줄 아느냐, 내가 먹을 것 없어서 오는 줄 아느냐, 봉사하는 것보다 내 말 들어 주는 게 더 좋다,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택했다, 이래야 믿음의 농사가 되는 거다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좋은 편을 선택할 때에 믿음의 농사가 잘 되는 줄 믿습니다.
③ 땀을 흘리는 일
좋은 종자를 뿌려 놓았다고 그 농사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풀을 뽑아 줘야 되고, 물을 대주어야 되고, 돌도 제거해 줘야 되고 가시도 제거해야 되고, 잘 가꾸어 주고 땀 흘리는 노력 없이는 안 됩니다. 농사는 땀을 흘리는 만큼 우리에게 수익을 줍니다. 농사는 게으름 피우는 만큼, 땀 안 흘리는 만큼 수익이 없습니다. 절대로 우리 사람은 속일지라도 식물은 속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땀 흘리는 만큼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땀흘려 하는 일, 여기에 우리 믿음의 성장이 있는 줄로 압니다. 우리의 믿음의 농사가 잘 되는 것은 앉아서 쉽게 되는 줄 아십니까. 열심히 모이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일할 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노력없이 크지 않습니다. 내가 애쓰고 땀 흘려 노력할 때에 크는 법입니다. 일하는 농사꾼! 씨 뿌리는 일, 선택하는 일, 땀흘려 일하는 일이 우리에겐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III. 배우는 농사꾼 (8 하 - 15절)
우리 농사꾼은 모여서 힘을 기르고 나가서 일해야 되는데 그것으로 끝이 나면 안 됩니다. 또 배워서 금년 농사는 작년 농사를 그대로 지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워야 됩니다. 그런데 보니까 들어서 배웠다는 것입니다.
① 들어서 배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8절 하) 했습니다. 귀가 없습니까? 귀는 있지요. 그러나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관심이 없는 귀는 듣지를 않습니다. 보십시오. 어느 모임에 복부인들만 모였습니다. 복부인들만 모였을 때에는 어느 아파트가 당첨되면 얼마 남고 어느 아파트는 위치가 좋고 이 소리하기 전에 다른 소리는 듣지 않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 믿고 복음 전하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전혀 관심 없이 안 듣습니다. 이건 들을 귀가 없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한번 들어 보라는 겁니다. 들어야 배웁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듣지 않으면 절대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들을 때에 분별력이 생기고 우리의 믿음은 자라서 믿음의 농사가 잘 됩니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하늘 농사꾼으로 일등 농사꾼이 되는 것입니다.
② 물어서 배움
그 다음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 이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9절)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쉽게 가르쳤는데도 뜻을 모르겠던가 봅니다. 뜻을 잘 모르겠으니 베드로도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다시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 항상 그저 넘어가지 마십시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전화해도 좋습니다. 찾아와도 좋습니다. 또 그것이 시간상 어려우면 우리 교구장 목사님들이 심방할 때 물읍시다. 그저 넘어가지 맙시다. 어물어물 넘어가면 내 믿음은 엉망이 되고 맙니다. 모르는 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겁니다. 물어서 배우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설명해 주는데 "길가에 떨어졌다" 하는 길가는 누굽니까? 마음이 길바닥처럼 되어 아주 완고한 사람입니다. 길바닥을 봅시다. 곡괭이로 파도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이런 길바닥같이 완고한 사람! 이런 사람은 지금 이 시간에는 듣고 있지만 돌아서면 다 빼앗기고 맙니다. 마귀가 와서 그 말씀을 다 빼앗아 갑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비가 쏟아진 다음 파서 뒤엎고, 뒤엎은 다음에야 옥토가 겨우 될 수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죽었다 살았다 몇 번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완고"한 마음이 절대로 옥토가 되지 않습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 " 아 그렇습니까? 그래야겠다 꼭 해야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고 나가서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면 돌밭에 뭐가 있습니까. 말라 버리고 맙니다. 다 말라서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왜? 세상에 나가서 믿음 때문에 어려움 당합니다. 예수 안 믿으면 안 당할 어려움을 믿음 때문에 당합니다. 주일날에는 더 잘 벌 수 있는데 예수 믿는 까닭에 문 닫고 나와야 됩니다. 벌써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두번 하다 손해 보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문을 열고 믿음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씨앗을 받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나갔지만 믿음 까닭에 당하는 어려움 때문에 다 말라죽어 버렸습니다. 또 가시 떨기는 이 세상의 재산, 명예, 권세에 대한 욕심이 너무 많다 보니 이 믿음, 그리고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도저히 귀에 안 들어옵니다. 이런 사람은 결실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옥토에 떨어졌다는 것은 좋은 마음 바탕, 심성이 좋은 바탕 위에 그 말씀을 받아 들여 그대로 열매 맺는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다시 한 번 설명해 주니까 확실히 배우고 깨달아 믿음이 바로 서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르는 것은 물어서 깨우치고 계속 배워 나가면서 복음에 바로 서야만 믿음의 농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③ 순종해서 배움
우리가 들어서 배우고 물어서 배웠다고 해서 농사가 잘 됩니까? 순종을 해야 됩니다. 순종하고 나면 배우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아는 것만 순종하려고 하면 성경에 몇 가지 없습니다. 모르는 것도 믿고 순종하면 순종한 다음 나중에 배우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다. 이브라함이 고향 떠날 때 갈 바를 알고 갔습니까? 모르고 갔습니다. 왜 가야 되는 줄도 몰랐습니다. 어디로 가야 되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순종하고 보니 축복의 가나안 땅이 앞에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순종했기 때문에 배웠습니다. 우리는 순종하고 배우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부였던 베드로가 바로 그것 아닙니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가 한 말이 뭡니까? 경험과 이성과 생각으론 전혀 맞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지만 예수님 말씀이니 순종해 보겠습니다. 그는 순종으로 배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농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만, 이로운 것만, 이치에 맞는 것만 순종하려고 하면 믿음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배워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늘 농사꾼은 모이는 농사꾼, 열심히 일하는 농사꾼, 계속해서 배워 나가는 농사꾼입니다, 여기에서 배워서 농사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성공한 농사꾼이 됐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믿음의 농사를 짓는 하늘 농사꾼으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마음 밭이 문제입니다
눅 8장 4~8절 / 방원철목사
지난주일 저녁부터 수요일 저녁까지 있었던 부흥회가 은혜 가운데 끝났습니다. 부흥회에 참석하신 분들의 대체적인 의견이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셔서 담임목사로서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첫날 저녁집회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조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우선 시간이 길어서 부담스러워하시는 분들이 계셨고, 또 더 산뜻한(?) 설교를 기대하셨던 분들도 계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둘째 날 새벽 집회를 마치고나서부터 오전 집회 전까지 약 세 시간 반 동안 강사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중에 제가 그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목사님, 제가 기대했던 목사님의 설교는 더 논리적이고, 더 세련된 것이었습니다. 공부도 할 만큼 하시고, 머리도 좋으신 분으로 알고 있는데, 목사님의 설교에서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기성 부흥사들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그동안 당신의 살아온 이야기며, 부흥회에 임하는 자세 등에 관해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의 요지는 집회 시간에도 간간히 말씀하셨습니다만, 신앙이란 논리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목사님은 미국에서 당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도 하고, 또 열심히 목회도 했지만, 결국 엄청난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너무 처절한 아픔을 맛보았습니다. 이틀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를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의 일기, 그분의 논문, 그분의 설교를 접하면서, 아주 귀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존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에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1738년 이전의 웨슬리는 옥스포드 대학 출신답게 그야 말로 세련된 사람이었고,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그야말로 명설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변화를 맛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실패는 북미 조지아 주 선교에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도망치다시피 영국으로 돌아오던 중에 그가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당장이라도 뒤집힐 것만 같은 위기 속에서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그 배위에서 일단의 무리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조금도 요동치 않았습니다. 웨슬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웨슬리는 어느 날 올더스게잇 가의 작은 집회에 참석했다가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그의 삶이 180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런 자신의 변화를 '종의 믿음에서 아들의 믿음으로의 변화' 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뒤로 설교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왔습니다. 그렇게 논리정연하고 윤리적이던 그의 설교는 이제 그야말로 논리도 없고, 체계도 없어졌습니다. 어떨 때는 앞뒤가 안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설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련된 설교를 듣고도 하나도 변하지 않던 성도들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막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의지하던 모습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이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은 후에 당신의 목회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왔다고 합니다. 이제는 철저하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드러내는 목회와 설교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자 갑자기 교회에 성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4~50명 모이던 교회가 3~4백명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은평교회의 초빙을 받았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 당시 은평교회가 천명 수준의 교회였는데, 지금 약 4천명의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달은 후에는 어디를 가든지 '당신이 만난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라는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과의 긴 대화를 통해서 목사님의 삶과 철학을 조금 이해하고 나니까 제가 가졌던 의문이 많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설교 시간에 이번 부흥회가 누구를 위한 부흥회인지 알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결과적으로 저를 위한 부흥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지난 한 주간 동안 하나님이 강사 목사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기를 원했던 메시지를 제 입장에서 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의 삶
신앙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요, 그 만남을 통해서 우리 인생이, 우리 가치관이, 우리 삶의 자세가 하나님 중심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신앙의 위인들 가운데서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도 바울, 그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그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서, 많은 공부를 하고, 또 열심히 살려고 애를 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야 말로 성공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주님과의 만남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는 자기의 사명, 즉 존재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열심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그에게 많은 어려움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런 고난까지 특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어떤 위협이나 고난도 그의 복음 전하는 길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아덴에서의 전도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아덴(오늘의 '아테네') 에서의 전도를 앞두고 너무 흥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동안에 상대적으로 무식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던 사도 바울은, 이제 아덴에서만은 대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그가 쌓아온 학문적인 노력과 그야 말로 극적으로 주님을 만났던 체험을 섞어서 복음을 전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로 기대했습니다. 사실 아덴에서 사도 바울이 한 설교는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변증학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그 설교는 그야 말로 명설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명설교를 듣고도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대성공이 아니라, 대실패였습니다.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와는 달리 그를 핍박하거나 대적하는 무리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너무 부끄러워서 고린도로 도망치듯이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동안 복음전도자라는 신분을 숨긴 채 천막을 짜면서 살았습니다. 그때의 심정을 고전 2:3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누가 그를 핍박해서 두려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그를 위협해서 떤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도저히 복음을 전할 자신이 없어서 두려워하고 떨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그는 아주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렇습니다. 아덴에서의 실패는 사도 바울의 인생을 또 한 차례 바꿔 주었습니다. 이제 전적으로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분만 전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그의 삶의 가치관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귀하게 여겼던 신분이나 학벌, 율법적인 의 같은 것들이 그야말로 배설물로 여겨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장차 주님 앞에 설 날을 바라보면서 푯대되시는 주님만 바라보며 앞에 있는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나갔습니다.
신앙이란?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가치관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 중심적인 가치로부터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말 중요한 것은 씨가 아니고, 씨 뿌리는 사람이 아니고, 밭이라는 것입니다.
수학의 방정식으로 말하자면, 씨나 씨 뿌리는 사람은 상수 즉 변하지 않는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밭은 변수입니다. 밭의 상태에 따라서 똑같은 씨를 똑같은 사람이 뿌려도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모든 유대인들의 공통적인 관심은 '메시야 대망' 이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는 메시야는 과연 언제 올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 혹시 그가 메시야가 아닌가 하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시자, 사람들은 다시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닌가 하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하는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큰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 중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아시는 예수님이 주신 비유의 말씀이 바로 본문 말씀인 '씨 뿌리는 비유' 인 것입니다. "이미 천국은 임했다. 그 천국을 소유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너희들의 문제다." 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문제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 즉 설교자가 문제가 아니라, 말씀을 듣는 여러분 각자의 마음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식당을 운영한다고 해서 그 운영하는 사람의 마음이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맛에 관심이 있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드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조금 영양가가 파괴되고, 또 먹는 사람에게 조금 손해가 나도 음식이 더 맛있을 수만 있다면, 그 방법을 택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영양에 관심이 있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음식을 더 영양가 있게 만드느냐에 있습니다. 이분에게는 맛보다 더 중요한 것이 먹는 사람의 건강입니다. 아무리 맛이 있어도 몸에 좋지 않으 것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명에 관심이 있는 분입니다. 이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맛도 아니고, 영양도 아닙니다. 물론 맛을 내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또 영양가도 생각하지만, 이분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벌어서 그 수입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를 결산하고 한달을 결산하면서, 그 수입으로 내가 어떻게 보람 있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가대의 찬양을 들으면서, 어떤 분은 성가대의 음악 실력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분은 성가대의 찬양을 음악적인 차원에서 분석합니다. 성가대원들의 수준은 어떤가, 지휘자는 어떤가, 연습은 얼마나 했는가 등등. 음악적인 수준에 모든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영적인 부분에 관심이 있습니다. 성가대원들이 얼마나 신앙적인가, 찬양을 하는 분들의 모습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이 드러나시는가 등등 이분의 모든 관심은 성가대의 영적인 부분에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역시 사명에 관심이 있는 분입니다. 이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가대원들의 음악 실력이 아닙니다. 영적인 수준도 아닙니다. 그들의 찬양을 들으면서 자기를 봅니다.
저분들은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저렇게 수고하는데,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것입니다. 성가대원들을 통해서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무슨 불평에 있겠습니까? 모두가 은혜죠.
그렇습니다. 이처럼 똑같이 식당을 운영해도 그 사람의 마음이, 그 사람의 가치관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똑같이 예배 시간에 찬양을 듣고 있어도 그 사람의 마음이, 그 사람의 가치관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고,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체험을 바탕으로 고전 2~3장에서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 즉 불신자입니다. 둘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 즉 영적 미숙아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영에 속한 사람', 즉 온전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두 번의 사건을 통해 인생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먼저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은 그를 '육에 속한 사람', 즉 불신자의 차원에서 '육신에 속한 사람', 즉 영적 미숙아의 차원으로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면 혹시 여러분 중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 이전에도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지 않았느냐고 반문하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때에도 하나님은 열심히 섬겼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 이전의 바울의 신앙은 온전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통해 온전히 예수님을, 그리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은 아직 '육신에 속한 사람', 즉 영적 미숙아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를 '영에 속한 사람', 즉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차원으로 변화시켜준 사건이 바로 아덴에서의 실패였습니다. 그는 아덴에서의 실패를 통해 어리석게만 보였던 십자가를 바로 보게 되었고, 또 그 능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십자가 앞에서 과거의 모든 것들이 배설물로 여겨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그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맺는 말
그러고 보면 부흥회를 하기 전의 저의 모습은 여전히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있지도 않은 내 능력, 내 열심, 내 공로를 의지했던 저 자신이었습니다.
그런 저를 향해 하나님은 강사 목사님을 통해서 "네 주제를 알아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좀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보거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이제 십자가만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목회하고 싶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에 저처럼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신 분이 계시면, 이번 기회를 통해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결단의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씨 뿌리는 인생
눅 8장 4~8절 / 최응희목사
누가복음 8:4-8, 마태복음 13:3-9
1. 씨 뿌리는 인생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본문의 씨 뿌리는 비유는 복음을 전파할 때에 그 복음을 받는 사람들의 심령에 대해서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좋은 밭과 같은 심령도 있고, 좋지 않은 심령의 밭도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심령도 있고, 말씀을 거부하는 심령도 있습니다. 말씀을 잘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다른 요소들이 그 심령에 뒤섞여 있어서 제대로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다른 각도에서 읽어보려고 합니다. 복음을 받는 심령에 대한 말씀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을 사는 삶의 모습으로서 이 비유를 읽으려고 합니다. 우리 인생의 모습도 마치 밭에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삶도 인생의 밭을 갈고 가꾸어 거기에 자신의 삶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인생의 농사는 단 한번의 농사이기 때문에 땅의 농사보다 더 정성스럽고, 더 열심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농사에서 무엇을 얼마나 거두냐는 것은 단순히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지금 성공하였느냐, 네가 지금 높은 지위에 있느냐, 네가 지금 건강하냐,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결과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현재의 결과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지금 성공한 사람은 좋은 열매를 거둔 사람이 되고, 지금 실패를 경험하는 사람은 거둘 것이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인생을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느냐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찌 됐던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의미의 속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인생을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서울을 못 가도 바로 가라고 하십니다.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태 때문에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자신의 목적만 추구하는 세상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전쟁도 그래서 생기고, 세상의 악도 그래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의 최후승리를 믿으면서 말씀 위에 굳게 서라고 하십니다. 비록 지금 실패하고 있어도, 비록 지금 건강하지 못해도, 지금 떠들썩하지 않아도, 비록 지금 초라해 보여도, 네가 살아가는 너의 진실되고, 충성된, 삶의 흔적들을 가장 아름다운 열매로 여기시고 그것들을 거두시겠다 하십니다.
강릉에 있는 사천교회에서 목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사십 여년 전에 당시에 24살 먹은 최영환이라는 청년에 의해서 개척이 됐습니다. 이 청년은 공부를 많이 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났다가 약방면허를 얻어 고향에 다시 돌아와 약방을 차렸습니다. 이 사람이 고향을 떠날 때에는 예수를 알지 못했지만 돌아올 때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젊은 사람이었지만 꿈을 가지고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생활을 꾸준히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코흘리개 아이들을 모아 열심히 찬송을 가르치며 예배를 보고 전도도 했습니다. 동네 친구들뿐 아니라 마을 사람 모두가 비웃고 놀려대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자신의 젊은 아내와 함께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듯이 그 일을 꾸준히 하였습니다. 사십 년이 지나간 지금, 그를 놀려대던 사람들은 별 볼일 없는 담배냄새 찌들은 시골영감이 되어 버렸지만, 이 열심 있던 청년 최영환은 장로가 되어 교회를 두개씩이나 개척하였고 지역사회에 존경받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 분이 남들이 알아주던 몰라주던, 핍박을 하던, 놀려대던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믿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당장은 우스워 보이기도 하고, 당장은 놀림거리였지만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결국은 거기서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히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6장은 바울사도가 로마서를 마치면서 안부인사를 기록해 놓은 곳입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보면 하나같이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겐그리아 교회의 일군 뵈뵈' '나의 동역자 브리스가와 아굴라' '처음 익은 열매 에배네도' '그리스도 안에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 '나의 어머니같은 루포의 어머니'.... 이러한 별명은 공연히 붙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의 흔적을 보고 붙여준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씨를 뿌리듯이 자신들의 삶의 흔적들을 인생 속에 심음으로서 그러한 명예로운 별칭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면류관이요, 인생의 열매 같은 별명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 아름다운 별명들이 붙여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삶의 흔적들이요, 여러분이 뿌린 인생에서 거두는 열매들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내게 주신 삶의 밭에 무언가 열심히 씨를 뿌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을 결산하는 열매들이 될 것입니다.
2. 더러는 좋은 땅에
씨를 뿌리는데 있어서 씨도 중요하지만 땅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씨를 뿌려도 땅이 나쁘면 싹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부지런히 땀을 흘려 뿌리고 가꾸고 힘을 썼지만 마치 길가에 뿌려진 씨앗과 같이 열매도 없이, 거둘 것도 없이, 보람도 없이 끝이 나는 일이 허다합니다. 인생에도 나쁜 밭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실패하는 것은 땅을 잘 못 선택하기 때문입니
길과 같은 땅이 있습니다. 길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입니다. 이러한 길에다가 자신의 인생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나도 좋아하고, 사람들이 그렇다니까 나도 그런 줄 알고, 사람들이 저렇게 사니 나도 저렇게 사는 삶은 마치 길가에 인생의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자신이 없어진 인생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친구도 좋고 친척도 좋은 것이지만 친구나 친척 가운데 아무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돌짝밭 같은 땅이 있습니다. 이러한 땅에 자신의 삶의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온갖 나쁜 감정에다가 자신의 인생의 씨를 뿌리는 사람입니다. 온 통 마음속에 이런 감정 저런 감정을 다 싸안아 가지고 온 세상의 슬픔과 미움과 근심과 걱정을 자신의 좁은 마음에 다 담고 사는 사람입니다. 캐어 버릴 것은 캐어 버리고, 녹일 것은 녹이고, 갈아엎을 것은 엎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땅은 애초부터 좋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쓸데없는 것들을 정리해 버렸기 때문에 좋은 땅이요, 좋은 밭이 된 것입니다.
가시떨기가 있는 땅도 있습니다. 사람도 좋고, 외모도 좋고, 환경도 모자람이 없지만 잘 못된 습관이나 잘못된 생활태도에 그 인생의 씨를 뿌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한번 밖에 없는 인생에서 멀리 내다보며 바르게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가시떨기를 뽑아 좋은 밭을 일구어야 합니다. 가시떨기 속에서는 어떤 씨도 제대로 자라 열매를 맺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길이나, 돌짝밭이나, 가시덩굴은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 집이 든든히 설 수 없듯이 그런 밭에서 열매가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결실을 맺는 밭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땅을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을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떤 밭이 좋은 땅이 되겠습니까?
목회를 하다가 보면 정말 좋은 밭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무엇이나 말씀을 은혜로 받고, 스스로 최선을 다하여 행하는 성도들입니다. 심령이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은 말없이 감당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믿음을 이끌어주는 건강하고 풍성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을 보면 마치 잘 자란 큰 소나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수려한 모습과 그 넉넉한 품성이 그 나무 그늘에 누구라도 쉬고 싶어집니다. 심지어 목회자도 그 그늘에 쉬고 싶어지기까지 합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이러한 좋은 밭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심으면 쑥쑥 자라는 부드럽고, 거름지고, 풍성한 좋은 밭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 부담이 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주님도 인생이 항상 백배의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태복음13:8
여기서 주님께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도 모두 백 배가 아니라고 하신 것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타율이 100%인 타자는 없습니다. 30%의 타율만 올려도 좋은 선수로 여겨져 연봉이 올라가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은 밭이라 하여도 항상 백 배의 열매를 거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에 있어서나, 믿음에 있어서 완벽하지 못하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좋은 밭, 믿음의 밭, 은혜의 밭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다시 백 배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무엇을 뿌려 어떤 열매를 거둘가를 생각하는 지혜로운 인생의 농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 6:8
인생의 농사에서 어떤 사람은 썩은 씨를 뿌려 멸망을 거두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생명의 씨를 뿌려 영생을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항상 성령으로 심어 영생을 거두고, 최선을 다해 풍성한 결실을 맺는 능력있는 인생의 농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안에 성육신 하신 예수
눅 8장 4~8절 / 이정익목사
세상에는 달력이 있듯이 기독교에는 교회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일 년 12달을 정리해서 교리화해 놓은 것을 교회력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 기독교가 이 교회력에 의해서 일 년 동안 목회계획을 짜고 설교계획을 세우고 신앙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 교회력에 나오는 첫 번째 절기가 대강절입니다. 오늘이 그 대강절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기간을 말합니다. 대강절 기간은 오늘부터 앞으로 4주간을 일컫는데 이 4주간이 지나면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성탄절은 고대하던 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날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4주 동안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밭에 씨를 뿌리는 비유“입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렸습니다. 씨가 가시밭에 떨어지기도 했고 돌밭에, 길가 밭에 또는 옥토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옥토에 떨어진 씨만 결실하여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농부
여기 농부는 전도자이고 일꾼이고 사역자를 말합니다. 이 전도 사역자들이 열심히 세상에 씨를 뿌립니다. 전도하는 모습이 씨를 뿌리는 모습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이 이 씨를 뿌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주신 말씀 그대로를 세상에 전하였습니다. 성경은 주님은 전도할 일꾼을 부른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복음전도자들을 일꾼이라고 부릅니다. 골 1장23절을 보면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마 9장37절을 보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다”고 했습니다. 롬 13장6절에는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일꾼들은 모두 씨를 뿌리는 농부들이고 전도자들입니다.
밭
여기 밭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밭만 해도 돌짝밭, 가시밭, 길가밭, 옥토 등 네 종류나 됩니다. 여기 밭은 “사람들의 마음상태”를 말합니다. 본문은 사람의 마음의 밭도 길가밭, 돌짝밭, 가시밭, 옥토 같은 여러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밭에 씨를 뿌리면 다 100배로 결실하는 것은 아닙니다. 길가밭, 돌짝밭, 가시밭은 씨를 뿌려도 자라지 못하고 죽어버립니다. 다만 옥토에 떨어진 씨만 잘 자라서 100배의 결실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면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마디로 거부합니다. 받는가 했는데 곧 변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 믿음을 갖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씨를 뿌려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밭은 길가밭, 돌짝밭, 가시밭과 같이 완악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지적하시기 위해서 본 비유를 사용하시기도 했습니다. 마음밭을 옥토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밭이 옥토가 되어 그 씨를 받아들이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것도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전도하다 보면 믿고 싶으나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소연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덮어놓고 믿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말이 참 묘한 말입니다. 성경을 열어놓고 믿어야지 어떻게 덮어놓고 믿습니까. 그래서 내 마음밭이 가시밭, 돌짝밭, 길가밭과 같은 사람들은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어느 신학대학 캠퍼스에서 한 학생이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할렐루야 하고 소리쳤습니다. 지나가던 신학자 한분이 “무슨 대목을 읽었기에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가르고 지나가는 대목을 읽었는데 참 신나는 대목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신학자는 “이 사람아 그 홍해는 깊은 강이 아니고 발목까지 차는 물이야, 홍해는 red sea가 아니고 갈대밭인 reed sea야” 하고 참 어리석다고 혀를 차고 갔습니다. 조금 후에 이 학생이 더 크게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가던 신학자가 발걸음을 돌려 “또 무슨 일인가”하고 물었습니다. “글쎄 여기 보니까 발목까지 찬 물에서 애굽군대가 모두 물에 빠져 죽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우스개 소리지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홍해를 홍해로 그냥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진 것이 축복인 줄로 믿으십시오. 그 믿음을 주신 분은 분명 성령님이십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내 마음에 뿌려진 말씀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옥토가 되는 일입니다.
씨
여기 씨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보면 “씨는 하나님의 말씀(11)”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떨어지면 곧 바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 밭이 옥토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말씀인 씨를 받아서 내 마음에서 싹을 내기까지에는 두 가지 과정이 있습니다. 첫째 과정은 내가 전도를 받아 말씀이 내 마음에 떨어지면 먼저 내 머리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부지런히 계산하게 됩니다. 내 이해와 지식을 통해서 이 씨를 받을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를 놓고 계산을 하게 됩니다. 계산해서 어떤 사람은 거부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밭이 돌짝밭이거나 가시밭이거나 길가밭입니다. 씨가 땅에 떨어졌지만 그 땅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산해서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게 되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 두 번째 단계는 그 씨가 내 머리에서 마음으로 옮겨지는 과정입니다. 내 마음으로 옮겨지면 말씀이 내 안에 심겨지게 됩니다. 그 과정이 말씀이 내안에 비로소 거하시게 되는 과정입니다. 문제는 내 머리에서 내 마음으로 옮겨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 참으로 어려운 과정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다리는 이 머리와 마음 사이의 다리입니다. 이 다리의 거리가 참 멀고 길고 까다롭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다리가 너무 쉽게, 신속하게, 빨리 연결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에게 전도하면 금방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분들은 이 다리 연결이 평생 좁혀지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머리로 알기는 많이 아는데 마음으로 연결이 되지 않아 믿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억지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갈등을 많이 겪게 되는데 그 갈등이 이 거리가 멀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쉽게 마음으로 믿어지는 사람은 이 거리가 아주 빨리 연결된 상태입니다. 예수는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이 거리가 아주 잘 연결된 상태를 말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옥토에 떨어진 씨는 곧 이 다리가 잘 연결된 사람을 말합니다.
씨 - 예수
이 씨는 말씀을 일컫고 그 말씀은 곧 예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씨로,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 1장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곧 예수”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말씀이 되시고 씨가 되시는 예수를 마리아 안에 심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마리아가 하나님의 씨를 받아서 잉태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몸에서 예수가 태어나셨습니다. 성령은 그 예수의 영이 오늘 우리 안에도 심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내 안에 예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진 사란을 그리스도인이라 하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요 15장7절을 보면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거한다”는 말은 “내안에 심겨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성경말씀을 많이 외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은 그 말씀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잠기는 일입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흠뻑 받아들이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에 내가 깊이 잠기고 그 말씀에 내가 깊숙이 흠뻑 적셔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내가 주의 말씀에 흠뻑 적셔질 때 비로소 내 안에서 점진적으로 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생각이 새로워지는 변화를, 감정이 치유 받는 은혜를, 의지가 곧아지고 공허한 마음이 평화로 가득 채워지게 됩니다. 그것이 내 안에 말씀 즉 예수를 받아들일 때 얻어지는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그것을 아직도 느끼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말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10년을 믿어도 변화나 실감이나 눈물이 나오질 않습니다. 우리는 내 안에 말씀이 깊숙이 심겨져 있는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안에 깊숙이 심겨져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말씀 받아들이기
이 씨 즉 말씀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겸손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겸손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핵심적인 덕목입니다. 예수님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다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겸손은 “가난한 마음으로 주께 나아가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머리를 깊숙이 숙이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주님께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때 나는 내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갈 때 주님은 주님의 뜻대로 나를 사용하십니다. 그때 성령이 나에게 할 일을 주시고 나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것이 겸손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능력자이십니다. 창조자이십니다. 그래도 그 하나님은 내가 내 마음에 들어오시는 것을 거부하면 못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내가 거부하면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야고보 1장21절을 보면 “너희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온유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그 온유를 마 11장28-9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겸손과 온유의 성품입니다. 내가 주님을 받아들일 때 주님은 내게 이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말씀 안에서 온유와 겸손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사랑의 힘, 온유의 마음, 겸손의 자질을 주십니다. 그렇게 주어진 사랑과 온유와 순종의 자질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애급에 가서 네 동족을 구하라고 말씀하실 때 순종하여 갔습니다. “왜 내가 가야 합니까?”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가면 위험한데 가기 싫습니다”하고 핑계대지 않았습니다. 가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내서 출애굽을 시켰습니다. 이것이 순종이고 겸손이고 사랑이고 온유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리라 했을 때 “나는 당신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다”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면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할 것인데도 그냥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겸손이고 온유입니다. 요셉은 사랑하는 정혼자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그 잉태가 사람의 아이가 아니고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겸손이고 온유입니다. 그러니까 그 온유의 바탕에서 예수가 태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모세의 온유가 마침내 민족을 출애굽 시키는 기적이 일으켰습니다. 마리아의 순종과 온유함이 마침내 예수가 잉태되어 이 세상에 메시야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그렇게 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성육신해 다가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는 일을 바로 내가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칼든 사람, 주먹 든 사람이 무섭지 않습니다. 총든 사람에게는 칼든 사람이 무섭지 않듯이, 대포를 가진 사람도 칼을 든 사람이 결코 두렵거나 무섭지 않습니다. 더구나 핵폭탄을 가진 사람은 대포를 가진 사람도 무섭지 않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겁나는 것이 없습니다.
어느 한 암환자가 “죽는 날까지 걸어서 예배에 참석하리라“ 하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갈 때는 남편이 산소마스크를 들고 따라 왔습니다. 머리는 다 빠지고 얼굴을 창백하였고 그런데도 찬송할 때는 손을 들고 찬양했습니다. 힘들게 들린 팔은 떨렸습니다. 흔들렸습니다. 강단에서는 목사가 설교를 했고 단 아래에서는 암환자가 손을 들고 찬양했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모습입니까. 그때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성도들이 환자의 무언의 설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말씀이 주시는 신앙의 힘은 이렇게 강할 수 있습니다. 대강절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 것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기간을 말합니다. 우리는 온유한 마음으로 이 말씀되시고 씨가 되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맞아들여야 합니다. 마치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때 내 안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영광이 임하고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 기적이 내 안에 말씀을 사모하게 하는 본능의 힘을 주십니다. 본능이라는 말은 참 신비한 언어입니다. 연어는 3년마다 태어난 곳으로 회귀합니다. 30m가 넘는 폭포의 물줄기를 치고 올라갑니다. 그것이 본능의 힘입니다. 그 본능은 과학으로 증명이 안 됩니다. 배고프면 먹고 싶은 것이 본능입니다. 졸리면 잠자고 싶고 목마르면 물을 사모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 본능을 잃어버리는 것이 생의 마지막이고 죽음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연어처럼 말씀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인 씨를 내 안에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내게 본능을 강하게 하십니다. 그 본능이 말씀을 사모하는 힘으로, 능력으로, 간절함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사모하는 본능은 마침내 나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고 온유하게 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그릇으로 활용되며 전도자로 혹은 사역자로 그리고 온유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마음밭이 먼저 옥토로 변하는 일입니다. 돌짝밭이나 가시밭 그리고 길가 밭은 아무리 크고 넓고 많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과 예수께서 그리고 성령께서 아무리 외치고 타 이르고 피를 흘려도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변화의 기미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전통에 매여 있었고 율법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밭은 이미 돌짝밭이었고 가시밭이었고 길가 밭이었기 때문에 구태의연했습니다. 내 마음 밭이 옥토인 것이 축복입니다. 은혜입니다. 성령의 감화 속에서 말씀으로 흠뻑 젖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 마음은 내가 만든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마음입니다.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눅 8장 5~11절 / 조용기목사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 예수님 안에서 천국 꿈을 꾸는 사람들입니다. 천국 꿈이 가슴속에 없는 사람은 예배 드리러 교회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슴에 손을 한번 얹어 보세요.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계시지요? 여러분 속에 예수님이 안주하고 계시면 천국 꿈을 꾸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해 주십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항상 사람은 마음속에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것이 강렬한 꿈이든지 희미한 꿈이든지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여러분 꿈 꾼대로 된다는 거서입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꿈을 꾸는 것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고 좌절감을 가져오는 꿈을 꾸는 것보다 낫습니다. 기왕 꿈 꿀 바에는 축복의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서론>
오늘 저는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에 관해서 여러분과 함께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새 첫째,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 했습니다. 아주 슬픈 일입니다. 길가에 떨어져있으니 새들이 먹이로 삼을 수밖에 없지요. 둘째는 바위 위에 떨어지니 습기가 없는데 뿌리가 내릴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말라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셋째, 가시떨기 속에 떨어져서 가시가 우거지니 길을 막아서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넷째, 좋은 땅에 떨어집니다. 아주 옥토에 떨어지니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에 자주 인용되는 겨자씨는 너무 작아서 잘 안보입니다. 언젠가 제가 겨자씨를 가지고 와서 우리 성도들에게 보여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권사님 한분이 날 찾아오셔서 겨자씨 구경을 하겠다고 좀 보여달라고 그래서 제가 성경에 얹어서 보여주니까 “안 보이는데요?”하는데 콧바람에 다 날라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적은 겨자씨인데 그게 자라면 4미터나 자랍니다. 눈에 안보이는 겨자씨가 4미터... 제 키 배로 자라서 새들이 와서 둥지를 치고 아름다운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적은 겨자씨 속에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넣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주님 비유하시기를 겨자씨와 같다 했습니다. 나는 목사님 믿음이 없어요. 나는 믿음이 형편없어요. 형편없이 적은 믿음에도 굉장한 축복을 하나님이 프로그램으로 넣어 놓은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들을 명하여 저 바다에 던져도 된다고... 그 믿음 속에 하나님이 만들어 넣어 놓은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내 마음밭에 심어서 가꾸면 기가 막힌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겨자씨를 좋은 땅에 심어야지 길거리에 심거나 바위 위에 심거나 가시밭에 심거나 하면은 겨자씨가 다 죽어버리지요. 그 믿음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이지만 옥토에 심지 않고 잘못 심어 놓으면 믿음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오늘 여러분 저와 함께 우리 마음을 살펴보고 옥토를 만들어 가지고서 하나님께서 여러분 보시고 네 믿음대로 되라. 네 믿음대로 되라. 네 믿음대로 되라. 믿음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론>
우리 마음은 농사짓는 텃밭이 아닙니까? 여러분과 내 마음은 다 농사짓는 텃밭인 것입니다.
1. 길 가에 떨어진 씨
그런데 첫째로, 길가와 같은 마음밭에 말씀이 뿌려지면 큰일입니다. 길가라는 것은 무관심한 곳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에 누가 관심을 기울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관심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되지 무관심한데는 주님께서 축복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굳어진 마음은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아주 무관심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세상이 꽉들어차면 하늘나라 일에 대해서 관심이 기울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말씀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 임금 마귀가 와서 뿌려진 씨를 당장 주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마귀가 내가 마귀다 하고 돌아다니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생각을 통해서 나에게 끊임없이 유혹하고 내 속에 뿌려진 하나님 말씀을 무관심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마음 속에 자꾸 강하게 뿌리 내려서 세상이 뽑히지 않도록 마귀는 역사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 12절에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38절에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여러분, 하나님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기도원에도 가고 교회도 찾아가고 훌륭한 주의 종의 집회에도 찾아가는데 좋습니다. 그렇게 해야지요.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말씀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말씀이 바로 천국이 들어있는 씨앗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교회도 가라! 기도원에도 가라! 집회도 가라! 그러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말라. 그 말씀은 들을 필요 없다.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말씀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원수의 하는 대적적인 일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로 10절에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진리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사랑하지 않게 하므로 구원을 못받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 세상 쾌락을 다 주고도 말씀 만은 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하게 되면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을 지낸 존 F. 케네디의 아버지를 보십시오. 그는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인 것입니다. 미국에 와서 뭘 했느냐. 술도가를 했습니다. 술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래서 자식들을 다 일류대학에 공부를 잘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여러 아들 중에 한 아들은 중풍병에 걸려서 평생에 병신으로 살다가 죽고, 다른 아들은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고,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는 암살당했고 또한 대통령 후보로 나갔던 로버트 케네디도 총에 맞아 죽었고 상원으로 있던 아들도 여비서 익사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당했습니다. 아들들이 어려움에 빠지고 비참한 생애로 마치게 된 것을 본 아버지는 이렇게 가슴을 치고 탄식했습니다. “내가 수십 년 간 술을 팔아 수많은 사람들이 내 술을 마시고 가정이 파괴되고 인생을 파탄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대가를 내가 톡톡히 받았다. 내 아들들이 다 비참한 생의 결과를 맺은 것은 내가 술장사를 한 그 대가로 된 것이다!” 그렇게 탄식을 했습니다. 그는 술 사업을 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는 것입니다. 길 가는 사람이 교통 신호에 빨간 불이 켜지면 정지해야 하듯이 믿음의 사람은 늘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빨간불이 켜지면 회개를 해야 돼요. 여러분 자동차를 운전해 가던 사람중에 빨간불 안본 사람 한번 손들어봐 주십시오. 늘 파란불만 있지 않습니다. 빨간불 있어요.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는데 늘 의롭고 거룩하고 성결한 삶만 살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잘못된 길로 비뚫어진 길로 빗나가는 길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빨간불이 켜져요. 그때는 무엇이냐. 스톱하라는 것입니다. 빨간불이 켜졌는데 그대로 자꾸 나가면 큰 사고를 일으키고 마는 것입니다. 스톱하라는 것입니다. 인생에 빨간불이 켜지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죄없다 하면 거짓말 하는 것이라.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했었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우리가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 빨간불이 켜지면 회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길거리에 뿌려진 씨가 안되는 방법인 것입니다. 길거리에 뿌려진 씨가 된 것은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2. 바위 위에 떨어진 씨
둘째로, 바위와 같은 마음밭에 뿌려진 씨가 있는 것입니다.
바위는 딱딱하지 않습니까? 깨어지지 않은 마음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깨어지는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지지 않는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를 하지 아니하면 천국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회개는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을 치고 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진 사람은 안깨어집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옳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잘했다고 말합니다. 자기 타당화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씨를 뿌릴 틈이 없어요. 다 내가 옳고 내가 잘했고 내가 훌륭한데 내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일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깨어진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자백하고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나님께 항복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이요 마귀적인 마음이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심어진 곳은 그러한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8장 13절에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습기인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위가 어떻게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입니까? 깨어지지 않은 완악한 마음은 성령이 아무리 역사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3장 29절에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된다고 했는데 성령을 안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 26절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내 힘과 능력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와서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회개하고 자복해도 변화 안됩니다. 내 힘으로 변화 안됩니다. 제가 요번 교도소 헌당식에 가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교도소를 짓고 좋은 환경에 사람을 갖다 놓아도 마음이 깨어져서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변화되지 않는다. 교도소에 왔다가 또 나가서 죄짓고 들어와서... 그 마음에 변화를 받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된다. 성령이 와서 변화시켜야 돼요. 여러분 오늘 여기와 계시지만 여러분 마음에 여러분 힘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변화 안돼요. 결심을 하고 돌아가서는 또 그 진흙탕에 들어가고 돌아서서 또 진흙탕에 들어가요. 여러분을 진흙탕에 안들어가게 하는 것은 성령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인 것이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내 힘으로 새것이 안됩니다. 성령께서 역사해야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이 깨어져서 주여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나는 빈손 들었습니다.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님께 의지할 때 주의 성령이 와서 내 마음을 변화시켜줘요. 술 주정뱅이는 술이 먹고 싶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담배피는 자는 담배가 피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 쾌락을 취하는 사람은 그 쾌락으로 나가던 발걸음이 돌아섭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아니되되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인정하시면 아멘하십시다. 환영하시면 아멘하십시다. 의지하시면 아멘하십시다. 이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와주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깨어지기만 하면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안깨어지면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새마음을 주고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준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이 내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고 하나님이 내 완악한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특별한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인 C. S. 루이스는 믿음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국 어떤 노신사가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다가 기독교에 대한 책을 읽게 되었어요. 상당히 관심을 기울여서 아, 하나님이 계신가? 내가 열심히 책을 읽고 알아보아야 되겠다. 그런데 마귀가 와서 속삭인 것입니다. 야, 지금 점심시간이다. 점심먹고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 지금은 읽지 말고 점심먹으러 가라. 그래서 시계를 보니까 12시가 다 되었거든. 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그래서 식당에 가서 식사를 배불리 했습니다. 그리고 도서관에 돌아가니까 마귀가 와서 또 말했습니다. 야, 오늘 너 집에서 할 일이 많다. 도서관에 갈 시간이 없다. 집에 가서 도서관은 언제나 갈 수 있으니까 집에 가서 오늘 할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도 좋으니까 빨리 집에 가서 할 일을 하라! 그래, 그말 맞구나. 오늘 집에 일이 많구나. 버스를 타고 집에 갔습니다. 집안일을 한다고 정신없이 하고 하루 해가 지나가니까 마귀가 회심의 미소를 하면서 내 말대로 되었다. 내 말만 들으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을터이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변화되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못가게 하는 것이 내 임무라고 마귀가 그렇게 말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있다가 교회 가겠다. 조금 있다가 하나님 말씀을 읽어 보겠다. 조금 있다가 찬송하겠다. 자꾸 마귀는 조금있다가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들을 때 절대로 미루지 말고 회개할 때 그때 회개하고 기도할 때 그때 기도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때 기도하고 다음에 하자. 내일 하자. 천천히 하자는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늦추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
셋째로,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다는 말은 가시떨기와 같은 욕심과 탐심이 우거진 마음 밭에 말씀이 뿌려지매 욕심과 탐심이 죄를 짓게 하고 죄가 사망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가시떨기가 우거진 그 가운데 무엇이 자랄 수 있습니까? 가시기운에 살아남지를 못합니다. 다 말라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 14절에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말했고
야고보서 1장 15절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로 8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마태복음 6장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미국의 성공학자인 마크 스티븐스(Mark Stevens)는 최고의 경영자가 되기 위해서는 옛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나이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고 적은 것을 떠나 낡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나는 이제 나이가 많아서 요사이 책임을 짊어질 수 없다. 저도 종종 그런 말을 합니다. 내 나이가 이제 일흔이 넘었는데 무슨 새 일을 하겠느냐? 그러다가 우리 성도들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생각을 하라고 늘 우리에게는 가르쳐 놓고 난 다음에 나이 늙었다고.. 그래서 저도 회개를 하고 나이 문제는 말안하기로 작정을 했었습니다. 나이야 얼마가 되든 하나님이 힘주시면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사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저의 마음에 50세로 생각하자! 여러분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주님 안에서 아직 젊다. 여러분 우리는 다 젊습니다. 늙지 않았습니다. 항상 젊게 살다가 젊게 천국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둘째, 낡은 지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요사이 하도 과학이 발전되고 나날이 이 세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옛날에 내 생각에 묶여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여야 되겠는데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는 요사이 새로운 전화기를 가지고 연습을 하는데 아~ 보통 힘들지가 않아요. 손가락만 움직이면 확 화면이 달라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나 혼자 책을 가지고 연구하다가 연구하다가 안돼요. 김성혜 총장은 보니까 그것을 새로운 전화기를 잘써요.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해보니 안되더라구요. 역시 사람은 배워야 돼요. 옛날 생각에 붙어있지 말고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거든 나이가 젊든 나이가 늙었든 가서 배워야 돼요. 그래서 자꾸 발전해야 우리가 되지 발전 안하면 여러분 세상 가시넝쿨에 휩싸여 기운이 막혀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낡은 경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잊고, 타성에 젖은 경험에서 벗어나야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너 아버지 시대는 이렇게 안했다. 너희 어머니 시대는 이렇게 안했다. 우리 시대는 그렇게 안했다. 지금은 다 그때 시대보다 달라졌습니다. 향상하고 발전하고 변화된 시대이기 때문에 옛날 시대에 묶여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가야 돼요. 머리 스타일도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서 머리 스타일도 바꿔야 되고 옷도 변화된 스타일로 따라서 입어야 되고 말도 변화된 스타일로 해야 되고 생각도 변화된 스타일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시대를 잡아 놓으려고 하지 말고 변화된 시대에 우리가 함께 걸어 들어가야 이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는 것입니다. 옛것을 벗어버리고 새것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항상 마음에 믿음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도록 마음이 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령은 영원히 새로운 것입니다. 성경이 얼마나 오래된 책입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경말씀은 영원히 새롭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새로워요. 이 세상 문화나 문명이 따라잡지 못하게 하나님 말씀은 앞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언제나 이 세상의 최첨단에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밭을 늘 갈아엎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까 나이에 묶이지 말고 세상 틀에 잡히지 말고 낡은 경험을 버리고 우리 마음에 새로운 삶을 말씀을 통해서 받아들여 하나님 앞에 영원히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될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4. 좋은 땅에 떨어진 씨
넷째로, 좋은 땅과 같은 마음 즉 옥토에 떨어진 씨를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마음이 옥토가 되어야 돼요.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은 길거리에 있는 무관심한 마음도 안되고 깨지지 않는 바위같은 마음도 안되고 세상 탐욕에 우거진 가시넝쿨에 우거진 마음도 안되고 옥토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 8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 14절에는 가시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인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이 세상에 염려 근심이 꽉 가시덩쿨같이 우거진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까, 염려, 근심이 마음을 뒤엎어 놓습니다. 이 가시넝쿨 같은 마음 깨어지지 않는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세상의 쾌락에 젖은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쾌락은 재물의 유혹과 이 세상의 향락,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 등으로 세속적인 쾌락적인 마음으로 마음이 잡혀 있는 그런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향락 등과 같은 욕심과 탐심으로 채워 있으면 말씀이 뿌리를 내릴 도리가 없습니다. 말씀이 뿌리 내리고 잘 자랄수 있는 좋은 땅이란 먼저, 말씀을 듣고 지켜 말씀으로 다져진 마음이 되어야 되겠는데 어떻게 그런 마음이 될 수 있느냐. 회개하는 도리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이 다져진 마음은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데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도와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저도 그럴 때가 많아요. 성경 읽기 싫어요. 성경말씀이 듣기 싫어요. 지칠때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아니하고 세상이 들어오면 성경이 멀어지고 성령의 역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를 해야 돼요. 내가 좋든 하찮든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굳어져서 말씀이 싫고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옵소서. 회개하고 자복하면 곧장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방송에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 사막에서 사는 무식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아주 뜨거운 신앙을 갖게 되었어요. 그런데 아주 박식한 박사와 함께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박사님이 당신 하나님 언제나 보았느냐? 보지도 못한 하나님을 그렇게 열렬히 믿느냐? 당신 무식하고 사막에만 사니까 하나님이 누군지 보지도 못하면서 그런 소리하느냐? 하니까 무슨 소리 합니까? 나는 하나님을 매일 같이 만나는데... 역시 무식한 사람은 할 수가 없구나. 어디 하나님을 매일같이 만난다. 지금도 만나느냐니까 지금도 내가 하나님과 만나고 있어요. 박사님은 못만나지만 나는 만나고 있어요. 어떻게 만나느냐? 박사님 내 말만 들으면 박사님도 하나님 볼 수가 있어요. 어떻게?? 죄를 회개하여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요. 박사님과 하나님 사이에 죄가 딱 막혀 있는데 죄의 담을 쌓아놓고 난 다음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어요? 죄를 회개해야 돼요. 죄를 회개하고 그 다음에는? 그 다음은 성령충만을 받아야 돼요. 하나님이여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 주시옵소서. 예수님 보혈로 성령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기도를 해야 돼요. 하나님 나와 만나 주시옵소서. 기도를 해야 돼요.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말할 필요없어요. 하나님 와서 만나 줄테니까 그래서 이 박사가 허허허 웃으면서 무식한 사람은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그리고 헤어졌는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하니까 어떻게 그 사람 말대로 해볼까? 주위에 사람도 없고 하기에 무릎을 꿇어 하나님 안계시는 것 물론 알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니까 나도 시험삼아 해봅니다. 내 죄를 회개하고 성령을 받기 원합니다. 계시면 도와주시옵소서. 그까지만 자기가 말했는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감화 감동을 받아서 눈물을 흘리고 콧물을 흘리고 죄를 회개해서 이것 내 정신도 아니다. 이것 왜 내가 이러냐? 그러면서도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회개를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막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니까 알지도 못하는 혀가 꼬부라지더니만 알지도 못하는 말이 막 나오면서 찬송이 나오고 기도가 나오는데 하나님 배워 달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을 체험했어요. 그래서 그 박사가 하는 말이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보았습니다. 내 몸 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여러분 앞에 오셔도 여러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임하시면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말씀이 하나님을 모시고 우리 가슴 속에 오는데 우리가 마음이 회개하고 깨어지고 성령충만하면 말씀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느껴지게 되고 감동하게 되고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로 25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임재하시고 오늘날도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와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생각을 합니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달라져야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달라지지 아니하면 아무리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어떻게 달라집니까? 말씀을 통하여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들으면 성경말씀이 우리 생각을 바꿔 놓습니다. 그러나 세상 말을 들으면 세상 말이 우리 마음을 세상적으로 변화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듣느냐, 무슨 생각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데 요사이 가장 큰 문제는 어린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에 정신이 빠져 가지고서 시간만 있으면 핸드폰에서 컴퓨터 게임을 합니다. 부모님하고 서로 대화가 없습니다. 부모님 말씀을 들어야 생각이 건전하게 될 것인데 부모님 말을 들을 여과가 없어요.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하는 말은 뭐냐. 엄마 돈줘! 그 말 밖에 안해요. 그리고 돈 받으면 가서 게임하고... 오늘 게임에 중독된 자녀들 때문에 큰 문제입니다. 그 자녀들이 어떻게 변화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서 생각이 하나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 말씀으로 지은 꿈을 마음에 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에 꿈이 있는 마음이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제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목사님, 자꾸 꿈을 가지라고 하는데 어떻게 꿈을 가집니까? 내가 꿈이 어떤 꿈을 가졌는지 어떻게 압니까? 굉장히 쉽습니다. 꿈을 가지기 위해서는 여러분 소원이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꼭 갖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까? 그 소원이 바로 꿈인 것입니다.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꿈을 꾸는 사람이요, 꿈을 꾸는 사람은 삶에 바라는 목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목표없이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사는 사람은 반드시 인생을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옥토가 되지 못합니다. 마음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살기 위해서는 꿈을 꾸어야 되고 꿈은 내 마음 속에 소원과 바라는 것이 있으면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마음 속에 꿈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꿈이 뭐냐. 내 마음에 소원의 제 1호가 건강인 것입니다. 하나님 내게 건강 주시옵소서.
그게 소원이고 그 소원이 바로 꿈입니다. 그것 바라보는 것입니다. 둘째가 하나님 설교 잘하게 해주시옵소서. 그게 내 소원입니다. 소원이 내 꿈이고 그게 바라는 것입니다. 셋째가 하나님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을 통해서 더 많은 어렵고 고난 당하는 사람을 도와주게 해주옵소서. 그것이 바로 내 소원이니까 그게 꿈이요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분명한 꿈을 갖고 그 꿈을 여러분 수첩에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은 그대로 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꿈을 기록할 수 있으면 굉장한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꿈을 갖고 있는 사람이 믿음을 사용하는 사람이지 꿈이 없는 사람은 믿음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무슨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 수첩에 적으십시오. 그냥 아멘만 하지 말고 집에 가서 꼭 꿈을 적으십시오.
꿈을 적으면 그 꿈이 바로 여러분 소원이 되고 그 소원이 생명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얼룩덜룩이 새끼 양을 낳기 위해서 순수한 색깔의 양이나 염소를 갖다 놓고 그 앞에 얼룩덜룩이 나무를 병풍처럼 세웠습니다. 나뭇가지를 꺾어서 얼룩덜룩 얼룩덜룩 껍질을 벗겨서 병풍처럼 세워 놓고 그 앞에 물구유를 갖다 놓고 물을 마시는 짐승떼가 새끼를 얼룩덜룩이를 밸 것을 마음 속에 상상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종이에 적는 것보다도 그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얼룩덜룩이 병풍을 만들어서 세웠다구요. 적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의 수첩 여백란에 자꾸 적습니다. 내 마음의 소원을 자꾸 적어요. 적고 눈 감고 생각하고... 바라보고... 그러면 내 본 대로 될지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 적은 꿈을 마음 속에 품고 살면 목표있는 인생을 살게 되고 그 다음에는 목표있는 삶을 살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냥 생겨나지 않아요. 마음에 소원이 있고 소원이 꿈을 꾸고 꿈이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이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했는데 그 믿음가진 사람이 그냥 하루 아침에 믿음이 생기는 것 아니에요. 마음에 소원을 가지고 꿈을 꾸는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열두해 혈루병 앓는 여인도 내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대면 낫겠다는 꿈을 꾸고 소원을 가지고 있으니까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거지 바디매오도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내 장님 거지 바디매오가 눈을 뜰것이라고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니까 예수님이 내가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소원과 믿음은 이콜입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이게는 믿음도 없습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 믿음을 안주시는 것입니다. 소원이 꿈을 만들고 꿈이 삶의 목표를 만들고 목표가 믿음을 생산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음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모든 것을 믿음으로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께서 마음에 소원을 확실히 기록해서 꿈을 꾸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주여 믿습니다. 믿음과 소망 이것은 언제나 같이 가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믿음이 있고 믿음이 있으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부정적인 마음을 갖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승리적인 말을 하십시오. 기왕 말할 바에는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마십시오. 부정적인 말이 여러분에게 도움을 안줍니다. 아무 도움을 안줍니다. 부정적인 말이 올바른 말일지라도 여러분에게 도움을 안줍니다. 남이 못되기를 말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그 생각이 점령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내 마음에 파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기왕 말할 바에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 그놈의 자식 변화되어서 새사람이 되기를 바라네. 그 놈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면 욕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마음에 결심을 해야 돼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말을 하라. 아침에 일어나거든 여러분 꼭 제가 부탁합니다. 뭘 하느냐.
오늘도 좋은 날입니다. 나는 오늘 행복합니다. 나는 기쁩니다. 나는 즐겁습니다. 오늘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입의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힌 바 되었느니라.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리라. 말로써 묶고 풀며 말로써 여러분 삶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냥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칠십 평생을 살면서 돌아보니까 과거에 저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이 내가 말을 잘못해서 만들어 놓은 불행이었습니다. 내가 그때 그런 말을 안했었으면 참으로 좋았을 것인데 부정적인 말을 했기 때문에 다 내가 덮어썼다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이가 늙어서.. 늙었다는 말하지 말아야지.. 취소! 이제 오래산 경험을 통해서 보니까 읏는게 우는것보다 낫다고 부정적인 말보다도 긍정적인 말이 좋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로 8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엄청난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어떻게 구하라구요? 원하는대로 구하라. 첫째 소원이 오고 꿈을 꾸고 믿게 되면 그 믿음으로 구하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는 것입니다. 그냥 구하라고 말안하셨습니다. 너희 원하는대로 원하는대로... 따라 말씀하세요. 나의 원하는대로 소원을 가지고 구하면 믿음이 생긴다. 믿음으로 구하면 꼭 이루어진다.
<결 론>
기독교 신앙이란 종교 의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받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엄청난 은혜를 우리 위해서 갈보리산에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름 앞에 계좌에 주님은 일생의 죄를 용서하고 의롭다함을 줄 선물을 넣어 놓으셨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여러분 앞으로 모든 불의를 용서하고 거룩하고 성령충만의 은혜를 그 계좌에 넣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이름 앞으로 치료와 건강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아브라함의 축복, 거대한 축복을 약속해서 넣어 놓으셨습니다. 물질적인 부족함이 없이 풍부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이 다 예비해서 넣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천국 부활 영생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밑에 나가서 내 앞에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부족한 것이 없어요.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이 없어요. 그런데 왜 부족함이 이렇게 많습니까? 예수님이 말씀 이르기를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 침노하는 자가 점령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진리를 깨달아 알고 그대로 시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옥토가 되기 위해서 여러분 마음에 생각이 주님의 생각으로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말씀을 따라 마음 바탕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 속에 소원을 통해서 꿈을 분명하게 갖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희미하지 말고 분명한 꿈 말입니다. 내가 뜨거운 소원으로 바라는 꿈을 마음 속에 가지고 목표있는 삶을 살면은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렷한 말을 하십시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또렷한 말을 하십시오. 부정적인 말을 하면 여러분 손해를 봅니다. 안됩니다. 패배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할 수 있다는 분명한 말을 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이 여러분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내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말로 내가 사로잡힌 바 되었느니라. 죽고 사는 권세가 입에 있으니 말의 혀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그래서 저주 받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마음에 받아 들여 새사람으로 변화를 받고 마음에 기쁨, 소망, 사랑, 평화, 희락 등 변화가 다가오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변화를 받습니다. 똑같은 사람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달보다 달라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변화 받습니다. 변화될 것을 기대 하십시오.
마음문을 활짝 열고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성령으로 오셔서 내 마음에 변화를 가져와 주시옵소서. 맹물같은 인생이 포도주 같이 변화되게 도와주시옵시고 나아만 같이 문둥병 환자인 내가 깨끗하게 낫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적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주님은 기적을 일으키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원자과학을 발전시킨 아인슈타인도 말하기를 나는 기적이 없는 세계에 사는 것보다도 기적이 있는 세계에 살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 반드시 그리스도의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기적을 가지고 우리 영혼을 돌보아주고 범사를 돌보아주고 강건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십자가는 여러분을 위해서 주님이 예비한 하나님의 축복의 밥상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오늘 이 시간에 변화받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백배의 결실을 위하여
눅 8장 8절 / 최낙중목사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자유케 하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시니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유를 씨 뿌리는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비유란, 자연이나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남으로 사람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일들을 소재로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 쉽게 가르쳐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농사짓는 농부로 소개하고 또 씨 뿌리는 비유로도 말씀하십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뿌릴 때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니 그 씨는 밟히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어떤 씨는 바위위에 떨어지니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라버렸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니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아버렸고,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맺었으니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하신 것입니다. 이 씨 뿌리는 비유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 그리고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길가와 바위, 가시떨기 속이나 좋은 땅은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백배의 결실이라고 하는 것은 꼭 백배라는 백이라는 숫자적인 의미보다는 차고 넘쳐 부족함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농부에게 있어서 백배의 결실은 밀 하나를 심었더니 백을 거두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어부에게 있어서 백배의 결실은 한번 그물을 던졌더니 백마리의 고기를 잡았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상인에게 있어서 백배의 결실은 백만원을 가지고 장사를 했는데 훗날 1억을 벌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공부하는 학생에게 있어서 백배의 결실은 하나를 깨우쳐주면 열을, 백을 깨닫게 되는 그런 지혜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백배의 결실은 성도 한사람이 백명을 전도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백배의 결실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인내로 지키기만 하면 우리의 삶의 현장에 이렇게 차고 넘치는 은혜가 있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기뻐하며 웃을 일이 없던 사람들에게 항상 매일 기뻐하며 살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백배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전에는 죽지 못해 산 인생이었는데 이제는 삶의 의미를 알고 가치를 알고 목적을 찾았다면 백배의 결실을 얻은 성도입니다. 전에는 자기 목숨 하나 살기위해 여러 사람에게 구걸하며 살던 사람이 이제는 여러 사람을 돕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는 백배의 결실을 얻은 사람입니다. 전에는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발하며 신경질을 내고 남을 미워하던 사람이 이제는 죽음 앞에서도 천국을 바라보는 성도라면 백배의 결실을 맺은 사람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사람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 현장은, 아이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가스실로 끌고 가서 비참하게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던 나치스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한사람이 가스실로 끌려가면서 높은 벽돌담 위에 피어있는 작은 노란꽃을 보고는 미소를 짓습니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나는 지금 더 아름다운 천국으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요, 그 영혼이 백배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와 같은 은혜를 백배의 복으로 채워주실까요?
첫째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자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험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스러워서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부담은 결국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귀는 속임수의 명수요 가장의 천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정신을 차려야만 합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내 영혼이 잘되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위선과 욕심의 탈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방죽의 물이 조금 세어 나올 때 막는 것이 지혜입니다. 죄는 작은 것이라도 용납하면 그것이 큰 죄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것이라도 크게 생각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대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이 전쟁할 때였습니다. 그리스군은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지휘하에 천척의 배를 타고 트로이 성을 치려하였으나 트로이성은 난공불낙의 요새였으므로 쉽게 함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 장군이 생각해 낸 목마의 계략에 의해 트로이성은 함락되고 맙니다. 목마계락이란 나무로 깍아 만든 말 속에 몸집이 아주 작은 병사 하나를 넣어 성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목마에서 가만히 나온 병사에 의해서 트로이 성문이 활짝 열렸고 물밀듯이 쳐들어 온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서 트로이성은 함락되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우리 영적세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작은 욕심, 작은 고집, 교만이 들어오면서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망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편안하기를 구하는 자, 남에게 그만큼 짐이 됩니다. 책임 전가하는 사람, 사소한 일에도 불평을 말하는 사람, 하나님의 평화를 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백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인내로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지난달에 뉴저지 부흥회를 마치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 남북전쟁 기념관을 견학했습니다. 당시 북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링컨이 거기에 예배당을 지어놓고 전시에도 늘 기도했던 그 장소에 가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사람이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며 그 전쟁에서 결국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했습니다. 말씀을 지켰습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인내로 지켰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위대한 대통령, 존경받는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뒤로 미루지 말고 결단하고 곧바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여 낙심할 것이 아니고 인내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놓고 그리고 겨울을 인내합니다. 그리고 봄이 왔을 때 밀과 보리는 다시 자라고 초여름에 수확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인내하지 못하면 성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독일에 부흥회를 갔다가 스위스 알프스 산에 올라가서 에델바이스라는 드라이 된 꽃을 기념으로 하나 사왔습니다. 눈 속에서 피어난 꽃, 혹독한 겨울을 견디어 냈기에 그 꽃은 장미처럼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또한 백함처럼 향기가 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에델바이스의 의미는 인고, 고난을 극복하고 피어난 꽃이었기 때문에 그 꽃은 참으로 멋있습니다.
우리 모두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주님이 당한 고난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 그러면 끝내는 아름다운 열매로 맺게 하십니다. 시험을 참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함을 인정받은 후에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마음으로 듣고 지키고 인내로 결실하라
눅 8장 9-15절 / 인명진목사(갈릴리교회)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믿고 뭔가 소득이 있습니까?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고 열심히 가꾸면 가을에 추수를 하게 됩니다. 과일을 심고 열심히 가꾸면 몇 년이 지나면 과일을 수확하게 됩니다. 사업을 시작해서 열심히 일하면 결과가 있습니다. 아무튼 무슨 일을 시작해서 열심히 하면 소득이 있게 됩니다. 그와 같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고 바쁜 중에도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없는 살림에 정성을 다해 헌금하고 땀 흘려 수고하고 봉사하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을 한 달도 아니고 일 년도 아니고 십 년, 이십 년 계속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소득이 있어야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고 고생하고 시간 내고 헌금하고 때론 안 되는 일을 하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냈는데 아무런 소득이 없다면 그런 헛수고가 없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그런 쓸데없는 일을 왜 하겠습니까? 손해가 되더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 아니면 목사님을 위해서 한다는 것은 말이 되는 않는 것입니다.
제가 평생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된 지도 40년이 되었는데 최근 들어 때때로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나에게 무슨 소득이 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혹자는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어서 평생 먹고 살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여러분 생각에 제가 새벽부터 일어나 다른 일을 이만큼 열심히 했다면 이만큼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여간 최근 들어 저는 예수님을 믿어 나에게 소득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도 생각 없이 교회에 다니지 말고 이와 같은 생각을 심각하게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만 밑지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옛 말에 아지매 떡도 싸야 산다는 말이 있듯이 예수님을 믿는 것도 뭔가 소득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 소득도 없고 손해만 되는데 교회에 왔다 갔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과연 무슨 소득이 있는가 제가 오늘 아침 여러분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드렸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지켜보는 바로는 예수님을 믿어서 덕을 보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대박을 터뜨린 사람도 적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고 고생을 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도 더러 있습니다. 왜 똑같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대박 터지는 사람도 있고 생기는 것이 없고 손해만 보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중에 성경을 통하여 크게 깨달은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그 말씀을 여러분에게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 8장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에 대해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미루어 짐작하건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셨을 때 오늘 우리들이 가진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은 큰 유익이 되어 대박이 터지는데, 어떤 사람은 아무 소득이 없는 것을 예수님이 보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의 말씀을 똑같이 듣고 어떤 사람은 그 인생에 행복과 즐거움이 넘치는데 어떤 사람은 시간만 낭비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신 것이 누가복음 8장의 비유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 누가복음 8장의 씨뿌리는 비유는 예수님 믿고 수고를 하지만 별 소득이 없는 사람들이 왜 그런 수고를 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이 말씀은 혹시 여러분 중에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 때문에 얻은 소득이 없는 사람들, 헛수고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재미없는 사람들이 잘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8장을 통해서 주시는 예수님의 결론적인 말씀은 씨가 문제가 아니라 밭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씨가 아니라 말씀을 듣는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씨와 같은 것인데 이 말씀이 좋은 밭에 뿌려지면 대박이 나는 것이고 가시덩굴, 돌짝밭, 길가에 떨어지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헛수고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몇 십 년을 믿어도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은 말씀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탓하지 말고 씨 뿌리는 농부 탓하지 말고 그 씨가 떨어진 내 마음 밭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는데 가시덩굴, 돌짝밭, 길가와 같은 마음에 떨어졌기 때문에 아무런 소득이 없는 헛수고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지만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돌짝밭같은 마음이면 10년, 20년을 다녀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맨들맨들한 길가같은 마음, 가시 덩굴이 우거진 마음 밭에 뿌려진 씨앗은 10년, 20년을 다녀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을 때 다른 사람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느냐에 따라서 소득을 얻을 수도 있고 생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헛수고일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수없이 읽었지만 오늘 누가복음 8장 15절 말씀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이 말씀은 네 가지 땅의 비유를 잘 종합해 놓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첫째입니다. 두 번째는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참고 기다려야 결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박이 터지고 소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마음 예수님을 믿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마음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씨가 떨어진다고 해도 아무리 좋은 생명의 말씀이라도 삐딱한 마음으로 들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은 무슨 말을 하는가 보자, 서론이 틀렸다, 결론이 잘못되었다 토를 달며 말씀을 들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편견을 가지고 들으면 안 됩니다. ‘저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이구나.’, ‘며칠 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더니 그 말을 하는구나.’ 편견을 가지면 안 됩니다. 의심을 가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십거리가 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말씀으로 엄중하게 무거운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결국 오래 동안 예수님을 믿었는데 아무 소득이 없는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좋은 마음으로 착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들었는가 스스로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사건건 토 달고 의심하며 말씀을 들으면 차라리 집에서 낮잠을 자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긍정적으로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설교자가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당혹스러운 것은 설교 후에 이상한 토를 달고 이상한 말을 할 때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들으면 안 되고 겸손하고 착한 마음으로 들어야 듣는 자에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을 듣고 지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지식이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지식을 더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듣고 지키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것으로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대로 지켜야지 하는 각오를 가지고 들어야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듣고 그것으로 끝내지 말고 처음부터 지켜야 할 것을 결심하고 들어야 합니다.
제가 최근에 한 가지 걱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해야 할 분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하시기 전에 자진해서 스스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에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고 실행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예수님을 믿는 것에 소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어도 소득이 없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행하고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소득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내로 결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래 참아야 결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 대목에서 실패해서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어도 손에 가지는 것이 없는 헛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좋은 마음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습니다. 삐딱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때가 때때로 있지만 그것은 사탄에 꾐에 넘어가서 그렇고 대부분은 좋은 마음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지켜보려고 노력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만족할 만한 성과가 없는 것입니까? 소득이 없는 것입니까? 대개의 경우 이 세 번째 문턱에서 걸려 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두 번 마음먹고 잘해보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오래 가지 못하고 조금만 힘들면 포기하게 됩니다. 조그만 일이 생기면 그만둡니다. 인내가 부족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저절로 술술 잘 되는 일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참고 견뎌야 결론이 있고 결실이 있습니다.
누구든 다 기도를 하지만 오래 하지 못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작은 하지만 오래 하지 못합니다. 기도 며칠 하고 봉사 몇 주 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도 그런 경험이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건강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비싼 휘트니스 센터에 등록하고 돈이 아까워서라도 운동을 해야지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좋은 자전거를 사기도 하고 걷기 위해서 좋은 운동화를 사기도 합니다. 큰맘 먹고 운동을 시작합니다. 특히 몸무게를 줄여보려는 사람은 체중기를 사다 놓고 매일 체크를 합니다. 이만큼 운동했으니 몸무게가 내려가겠지, 샤워를 하면서도 몸매를 살펴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 경험했겠지만 땀 흘려 운동을 해도 몸무게가 꼼짝을 하지 않습니다. 성과가 없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운동을 그만두게 됩니다. 만약 한 시간 뛰고 나면 1킬로그램이 빠지고 아니 몇 백 그램이라도 빠지게 되면 재미가 있어서 운동을 그만두지 못할 것입니다. 그날이 그날이니까 바늘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성과가 없으니 그만두게 됩니다. 운동을 일주일 해서 안 됩니다. 한 달 해서 안 됩니다. 최소한 6개월은 1년은 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건강을 자랑하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 동안 1시간 5분씩 걸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20년을 해야 그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학생시절에 경험한 것이지만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 열심히 공부하고 한 달 열심히 공부해서 성과가 있다면 공부 안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공부해도 변화가 없으니까 그만두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큰맘 먹고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지만 일주일 해도 한 달 해도 하나님께서 아무 말도 안 하십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은 5년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일주일 기도해서 변화가 된다면 기도 안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식을 위해서 일주일 기도했더니 자식이 변했다면 누가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사업을 위해서 한 달 동안 열심히 기도했더니 사업이 성공했다면 누가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도는 절대로 일주일에 한 달에 되지 않고 일 년 해도 오년을 해도 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잠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오래 동안 변치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는 것을 아십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21장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았을 때 나이가 백세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30년을 기다려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다리고 참고 인내하는가 보신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금방 축복해주신다면 누가 선한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가진 것을 다 털어서 선한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1년을 2년을 선한 일을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까 중도에서 포기합니다. 그러니까 소득이 없고 결론이 없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여름에 농사짓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어도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은 하다가 중간에서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기도하고 끝까지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끈질기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이웃을 사랑하는 선한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소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도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도 봉사하는 일도 참고 인내하며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과가 있습니다. 봉사를 하다가 그만두니까 인내하지 못하니까 결과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평생 예수님을 믿으면서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애를 썼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6-70년 그렇게 했더니 요즘 감히 고백하건대 이제야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정말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주변의 사람이 느낄 만큼 하나님께서 저를 축복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저는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오래 참고 하나님을 끈질기게 사랑하며 살려고 노력한 결과가 이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소득을 얻을 때가 되었다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으면서 소득이 없는 것은 인내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오래 기다리지 못해서 중도에 포기해서 그렇습니다. 끈질기게 해야 성과가 있습니다. 인내로 참아야만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고 참고 기다릴 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 인생에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귀한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눅 8장 9~15절 / 옥한흠목사
이제 한 달만 지나면 제가 이 교회에서 사역한지 만 25년이 됩니다. 지금까지 25년 동안 저는 한가지 일념 하에 목회해왔다고 감히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목회를 할 것인 지에 대해 저의 첫번째 생각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간단히 요약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도록 하여 예수님이 원하는 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은 '바울이 나에게 보여준 목회의 모델을 따라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명령을 가장 잘 순종한 목회자입니다. 선교사이면서도 목회자로서 탁월한 모범을 보였습니다. 골로새서 1장 28-29절을 보면 이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곧 예수 믿는 각 사람을 그분을 닮은 온전한 제자로 만드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으며 노력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보여준 목회의 모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령을 좇아 바울이 보여준 목회의 모범을 나도 그대로 받아들여 사랑의교회를 목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따라서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가르치려고 노력했고, 목회의 여러 가지 일 가운데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을 가장 우선하면서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알다시피 20년이 넘도록 다락방 교재를 제가 손수 만들어 좀더 풍성하게 말씀을 가르치려고 애써왔고 제자훈련, 사역훈련 등 모든 교재를 직접 만들어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렇게 25년 동안 말씀을 가르쳐 제자 삼는 이 일에 우선 순위를 두고 목회해 왔는데, 한번도 이것이 뒤바뀐 적이 없었습니다. 좌우로 두리번거리면서 방황한 일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제가 예수님 앞에 선다고 할지라도 감히 이런 말씀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 제가 부족한 종이지만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제자 만들라는 주님의 명령에 최선을 다해 순종해보려고 애썼습니다."
이런 저의 소박한 자세와 목회철학을 하나님께서 귀히 보셨는지, 분수에 지나치도록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받은 복도 엄청나지만, 제 목회를 통해서 영향을 받아 똑같은 목회철학과 목회방법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려 하는 훌륭한 동역자들이 국내외에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아름다운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다음은 우리 교회가 미치고 있는 영향 중 한 이례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며칠 전 유력한 모 일간지에 소개된 '능인선원'에 관한 기사를 읽으셨을 것입니다. 능인선원은 1984년 지광(智光) 스님을 통해서 개척되었습니다. 그것도 우리 교회에서 직선거리로 100m도 안 되는 삼익상가에 자리잡았었는데, 그 후 굉장히 부흥하여 밖으로 크게 건물을 짓고 나갔습니다. 능인선원은 불교대학으로도 유명합니다. 지광 스님에 의해 시작된 불교대학은 기초반에서 대학원 코스까지 있는데, 평신도들이 전부 그 코스를 밟도록 되어있습니다. 지난 17년 동안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 코스를 거쳐갔는데, 지금 불교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정도입니다. 그분은 "불교 신자들이 불교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그래서 복 달라고만 매달리는데 이것은 큰 문제다."라고 지적하면서, "교육이 없이는 한국 불교의 미래가 없다."는 표어 아래 가르침을 통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언젠가 지광 스님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삼익상가에서 능인선원을 시작했는데, 바로 그 옆에 사랑의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보니까 옥 목사라는 사람이 제자훈련을 열심히 시키더군요. 그것도 성경을 막연히 가르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제가 힌트를 얻어 우리 불교에서도 가르치고 훈련하면 잘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불교대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좀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은연중에 불교 진흥에까지 기여할 정도로 사랑의교회가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다루고, 그 말씀을 생명처럼 가르치는 이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하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가르치는 말씀을 어떤 마음의 자세로 듣고 배우고 받았습니까?
이와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4가지 밭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길가 밭은 씨가 떨어져도 금방 새가 와서 먹어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돌 밭은 씨가 떨어지면 잠깐 싹이 나지만 뜨거운 햇살을 받으면 곧 말라 버립니다. 가시떨기가 덮여 있는 밭은 땅이 비옥하여 씨가 떨어지면 자라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가 햇살을 받지 못해 여물지 못합니다. 좋은 땅은 씨가 떨어지면 뿌리를 내리고 나중에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마음의 자세도 4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씨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사람의 마음은 길가 밭과 같아서 그 말씀이 전혀 마음에 새겨지지 않고 금방 잊혀지고 맙니다. 주님을 이를 가리켜 마귀가 와서 듣는 데로 말씀을 빼앗아버린다고 해석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 누구도 길가 밭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은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마음에 와 닿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또한 돌 밭과 같은 마음을 갖고 계신 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예수를 처음 믿고 나서 말씀을 받고는 '내가 믿어야 되겠다.'며 스스로 결심하고 신앙고백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좋지 않은 반응이나 가정에서의 핍박, 직장에서의 걸림돌 등이 있는데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예배하는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은 그 마음이 돌 밭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머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의외로 교회 안에는 가시밭과 같은 마음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 중에는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받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미 예수를 믿고 성령을 모시고 사는 우리 마음에 왜 가시떨기가 있을까요? 그 이유는 가시떨기를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가시떨기 때문에 회개하고 하나님 의 은혜를 구하면서 그것을 뿌리 채 뽑으려고 몸부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농사 짓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에 가난할 때는 산비탈에 손바닥만한 땅만 있어도 그것을 밭으로 개간해서 무엇이든 씨를 뿌려 농사를 지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가시나무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농부가 그것을 가만 놔두는 것이 아니라, 괭이를 가지고 찍어서 뽑아 버립니다. 그런데도 또 다시 가시가 자라면 그것이 안 자랄 때까지 한 번이든 열 번이든 뽑아 버립니다.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온 밭에 가시가 퍼져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중생을 받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 갈 때, 행여 내 마음에 가시가 보이면 즉시 회개하고 그것을 뽑아야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그대로 내버려둔 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기 때문에 결과가 신통치 않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은혜 받는 것도 많지 않을 뿐더러, 그 말씀이 내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아름다운 행복도 맛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있는 가시가 말씀을 짓눌러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하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가시를 3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가시 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14절) 첫째는 여러 가지 세상의 염려이고, 둘째는 재물에 대한 탐욕, 그리고 셋째는 일락입니다. 그저 하루하루 즐기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된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생할 생각은 안하고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려고만 하는 쾌락주의자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 가시떨기가 그 마음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3가지만 말씀하셨다고 해서 내 마음에 있는 가시가 3가지 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 완악함, 음란, 게으름, 고집 등 도 다른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3가지가 대표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말씀을 저항하는 저항 세력입니다. 말씀과 충돌하는 악한 심성입니다. 말씀에 대해 항상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육적인 것들입니다. 왜 이런 것들이 내 마음에 있는 것일까요?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밭을 개간하는 농부처럼 눈에 보이는 대로 뽑아내려고 작정하면 절대 내 마음 속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가지고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또한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과 권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좋은 마음으로 받기만 하면 세상적인 염려가 말씀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가지신 아버지, 자비로우신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가 세상에 사는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시며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1, 33-34)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있는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받으면 어떤 염려도 내 마음에 계속해서 틀어 앉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재물에 대한 탐욕, 애정, 사랑을 가차없이 정리하고 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줍니다. 하나님은 재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딤전6:17) 우리가 이 말씀에 동의하면 재물에 대한 애착에서 떠날 수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6:10) 이 말씀에 "아멘" 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서 재물에 대한 탐욕을 소멸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이 경고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재물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그대로 담아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우리 마음에 있는 쾌락을 없애줍니다. 성령의 사람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옛날처럼 정과 욕심에 따라 '즐기자, 마시자' 하며 육신의 기쁨을 위해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5:6) 세상에서 즐기려고 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므로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우리 마음에 있는 가시를 제거할 수도 있는데 이것을 그대로 허용한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염려 좀 했다고, 돈 좀 사랑했다고, 인생을 좀 즐기자고 했다고 해서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거냐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것들이 내 마음에 뿌리내리고 있으면 가시처럼 세력이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공부해도 그것이 내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고 열매 맺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열심히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지만 어떤 감격스러운 변화나 삶의 열매가 잘 보이지 않는 다면 한번 스스로 반성해보십시오. 그것은 내 마음에 있는 가시와 같은 나쁜 것들이 말씀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들은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하도록 그 말씀의 생명을 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가지만 더 생각해 봅시다. 왜 이렇게 좋지 못한 것을 우리 마음에 계속 허용하고 있을까요?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도 왜 이것을 뽑아 버리지 못한 채 그대로 허용하고 있을까요?
백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
눅 8장 11~15절 / 문기태목사
금년에 여러분 모두 백배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금년에 여러분 모두 기도한 것에 백배의 응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금년에 여러분 모두 수고한 것에 백배의 상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금년에 백배로 행복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신앙생활을 잘 하여 백배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좋은 성도는 좋은 열매를 많이 맺는 사람입니다.
똑같은 씨앗이 땅에 떨어지지만 어떤 것은 싹이 나기도 전에 새가 먹어버립니다. 어떤 것은 싹이 나오지만 땅에 습기가 없어 곧 말라 버립니다. 또 어떤 것은 싹이 나고 줄기가 되어 자라나 가시나무가 함께 자라며 방해를 하여 기운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잘 자라서 주렁주렁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여러분 모두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 사랑받고 칭찬듣기를 축원합니다.
한 여인이 꿈속에서 시장에 갔습니다. 새로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갔는데 그 가게의 주인은 다름아닌 천사였습니다. 여인이 이 가게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자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팝니다." 그 대답에 무척 놀란 여인은 한참을 생각한 끝에 인간이 원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사기로 결심했습니다. 여인이 말했습니다. "마음의 평화와 사랑, 지혜와 행복, 그리고 두려움과 슬픔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세요."
그말을 들은 천사가 미소지으며 말했습니다. "부인, 미안하지만 가게를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이 가게는 열매는 팔지 않습니다. 오직 씨앗만을 팔 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에 좋은 씨앗을 뿌리십니다. 생명이 담긴 말씀을 들려 주십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이 주신 좋은 씨앗을 잘 자라게 하여 좋은 열매가 많이 맺히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15)
착하고 좋은 마음 밭을 가지시려면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좋지 못한 것을 없애야만 합니다. 좋지 못한 마음 밭이란 길가와 같은 마음의 밭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그와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상처로 인해 단단하게 굳어진 마음을 갈아 엎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밭에 있는 의심의 돌과 불신의 돌을 주워 내야만 합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이란 완악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리 내릴 수 없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마음에 의심으로 가득차 있어서 좋은 말씀을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탄에게 다 빼앗기고 맙니다.
우리의 마음이 길가와 같이 단단하게 되는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관심이요 둘째는 교만이요 셋째는 부정적인 마음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이후부터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되어졌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지게 되면 욕심에 눈이 어두어지고 자기외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밭은 황폐하여지는 것입니다.
또한 교만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마음이 굳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도 자기의 잣대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의 생각대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연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씨가 먹히지 않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부정적인 마음과 삐뚤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무슨 말씀을 전해도 마음에 의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은혜 받지 못합니다.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참 불쌍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깊이 자리잡은 의심과 불신을 몰아내야 합니다. 단단한 땅을 부드러운 옥토로 만들기 위해 땅을 쟁기로 갈아엎어야 합니다. 교만과 불신과 무관심을 회개함으로 마음을 기경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의 씨앗이 깊이 뿌리 내리도록 의심의 돌과 불신의 돌을 골라내어 부드럽게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2. 말씀을 잘 듣고 굳게 간직해야 합니다.(15)
사람들의 마음에는 돌짝밭과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돌짝밭과 같은 마음에는 말씀이 밑으로 뻗지 못합니다. 땅속에 돌이 많아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합니다. 말씀이 마음 깊이 뿌리를 뻗지 못하므로 시련을 견뎌내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듣고 기뻐합니다. 분명히 그순간은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서도 막상 시험을 만나게 되면 그만 말씀을 잊어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비겁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잘 들을 뿐 아니라 말씀을 마음에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개역 성경에는 '말씀을 듣고 지키어'라고 되어있는데 표준 새번역에는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우리는 들은 말씀을 너무 쉽게 잊어 버립니다. 들은 말씀을 마음에 잘 간직해야 합니다. 좋은 말씀을 사단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돌짝밭의 문제는 씨앗이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뿌리를 깊이 내려야 가물때도 수분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말씀을 잘 간직하고 있으면 말씀을 통해서 늘 은헤를 공급받습니다. 새힘을 공급받습니다. 지혜를 공급받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어도 쉽게 잊어버리면 정작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할 때 공급받지 못하고 말라 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들은 말슴을 기쁨으로 마음에 받아들이고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지난 주일 들은 말씀이 어떤 말씀이었지? 하나님이 내게 무슨 말씀을 하셨지? 오늘 아침에 읽은 말씀의 내용이 무엇이었지?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잊어버리지 않고 마음에 말씀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나요? 난 머리가 나빠 금방 잊어버립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분이 있습니까? 지난 주에 본 영화나 드라마 내용은 다 기억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까요? 굳게 붙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시험을 이기는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말씀에서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사랑을 공급받습니다. 말씀에서 인생을 풍성하게 만드는 지혜를 공급받습니다.
위대한 설교자 D L 무디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거듭난 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 것을 서약하고 생활했는데도 늘 넘어졌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무디는 산으로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기도 중 어떤 때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하늘의 신기한 복들이 자기 심령에 물밀 듯 쏟아졌습니다. "아,이제 나는 됐다!"라는 생각을 하고 산을 내려와 살았지만 큰 은혜가 한 달도 가지 못했습니다. 유명한 부흥 목사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부흥집회를 쫓아다니기도 했지만 이 방법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스스로 탄식하기를 "나는 화인 맞은 양심인가보다. 성경 속 비유에 나타나는 길가의 마음처럼 씨가 자라지 못하는 마음인가보다"하며 스스로를 혐오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펴든 성경에서 로마서 10장 17절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으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무디는 말씀을 읽기 시작했고, 날마다 들은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썼습니다. 이후 그는 전 미국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승리케 하는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이 옥토와 같이 착하고 좋은 마음밭이 되어 말슴을 잘 받아들이고 들은 말씀을 잊지 않고 잘 간직하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아름답게 변화되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고 형통하게 하십니다.
3. 말씀을 붙잡고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15)
인내로 결실한다 즉 열매를 맺게 된다라고 말씀합니다. 농부는 밭에 씨를 뿌리고 계절이 바뀌도록 인내해야 합니다. 과수원지기는 나무를 심고 몇 년을 기다리며 인내해야 열매를 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말씀에 순종하고 인내로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고 사람이 변하기 까지 충분히 인내해야 합니다.
중국산 대나무는 심고 나서, 물과 거름을 주지만 4년 동안 이 대나무는 거의 혹은 전혀 성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5년째 되는 해에 놀랍게도 나무는 5주일 동안 높이가 90피트나 자란다고 합니다. 4년 동안 중국산 대나무는 성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땅속 깊이 꾸준히 뿌리를 내리다가 때가 되면 급속히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일수록 빨리 되어지지 않습니다.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속담에 "시간과 인내가 뽕잎을 비단으로 바꾼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빨라야 하는 세상이지만 위대한 업적은 단번에 성취되는 일이 없고, 최상의 진보는 늦은 속도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인내의 힘은 성급함을 다스림에 있습니다.「욱리자」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나라 변방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어렵게 우산 만드는 법을 익혔지만 큰 가뭄이 들어 우산을 사는 사람이 없자 바로 우산 만드는 일을 포기하고 양수기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3년 동안 어렵게 기술을 익혔지만 이번에는 연일 비가 내려 다시 우산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사방에 도적 떼가 일어나 군복과 무기가 모자라게 되자 그는 또 무기가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인내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의 심지가 수시로 흔들리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인내의 힘을 기르려면 성급하게 포기하려는 순간을 이기는 것입니다.
사자굴 속에서 혹독한 시련을 당한 다니엘도, 형들에 의해 미움받고 팔려간 요셉도, 사울왕에게 시기를 받아 쫓겨 다니던 다윗도,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던 예수님도 인내의 힘으로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길가입니까? 돌짝밭입니까? 가시밭입니까? 좋은 밭입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듣고 배운 결과 나타난 말씀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열매를 구하신다면 어떤 열매를 내놓겠습니까? 성령 충만하여 선한 영향을 끼치는 삶입니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사는 삶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닮은 인격과 삶입니까? 사랑과 섬김입니까? 어떠한 열매를 주님 앞에 내어 놓겠습니까?
식물마다 각양 열매를 맺습니다. 그중에는 좋은 열매도 있고 가치가 없는 열매도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잘 맺어야 좋은 나무로 인정을 받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열매를 잘 맺는 성도가 있고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열매에 올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앞에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 사랑받고 더 좋은 복을 많이 받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좋은 열매를 백배나 맺어 하나님께 크고 좋은 상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