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눅 10:38-42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 10:38-42 / [마르다 자매를 방문하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계속하는 길에 한 마을에 들어갔는데 마르다라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셔들였다. 39) 그 여자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는데 마리아는 마루에 앉아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자 식사를 준비하느라고 정신이 없던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보시고도 왜 가만히 계십니까?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말씀해주십시오.' 41)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여러 가지 일에 너무 얽매여 걱정하고 있구나. 42) 참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그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고 싶지 않다.'
본문은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한 내용입니다. 이를 통해 믿는 자들이 가져야 할 우선순위에 관한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마리아와 마르다(38-39) 두 자매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것은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넘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길 원했던 것입니다. 38절의 영접은 헬라어 데코마이(δέχομαι)로 받다, 받아들이다, 선물 또는 보상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영혼이 몸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것은 자신의 구원자로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면서 시작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
우선순위가 잘못된 마르다(40-41) 마르다는 복음사역으로 바쁘셨던 예수님이 시간을 내서 자신의 집에 오신 것에 감격해서 열심히 식사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아무것도 안하고 예수님 앞에 있는 것이 미워서 예수님께 하소연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고 하십니다. 정상회담 중에도 주일예배를 우선해서 드린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저에게는 긴급한 문제와 중요한 문제, 두 종류의 문제가 있습니다. 긴급한 것은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절대 긴급하지 않습니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후에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로 발전하였습니다. 긴급성과 중요도에 따라 업무의 우선순위를 정하여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좋은 선택(42) 마르다와 다르게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말씀 듣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리아에게 좋은 선택을 했으니 빼앗기지 말라 하십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마르다처럼 바쁘게 삽니다. 바쁘게 살다보면 본질을 상실하게 되고 급기야 번아웃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기도와 말씀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기쁨이 사라지고 모두가 미워집니다. 원인은 우선순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다른 어떤 사역보다 먼저입니다. 성도는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해야 합니다.
적용 : 당신의 현재의 모습은 마르다인가요? 아니면 마리아인가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내 삶의 최우선 순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은 어디일까요? 바로 기도의 자리입니다.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바울은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계획, 인도, 비전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힘도 얻습니다.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 집중할 때, 하나님과 소통할 때, 나의 삶은 주님께서 마음껏 사용하시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매일성경 묵상]
< 설 교 >
발아래 엎드린 여인
눅 10장 38~42절 / 이정익목사
본문은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3남매가 살아간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나사로의 집은 예루살렘 동쪽 3km지점에 있는 베다니 동네에 있었는데 예수님은 오고 가시며 이 3남매가 살아가는 가정을 자주 방문하여 쉬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이야기 가운데 나사로의 부모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가정의 모습을 우리에게 성경에서 소개하는 것은 이 가족 이야기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정의 구성원은 세 사람입니다.
나사로
나사로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입니다. 그는 죽었다 나흘 만에 예수께로부터 은혜를 입고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나사로는 그리스어로 “나자로스”이고 유대명으로 “엘르아살”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그래서 그런지 나사로는 예수께로부터 큰 은혜를 입고 죽었다 다시 살아났습니다. 성경에 나사로가 두 사람이 나오는데 하나는 거지 나사로이고 또 하나는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내 친구(요 11:11)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나사로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사람이면서도 그 후 큰 행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다만 그가 살아남으로 사람들이 그를 살려낸 예수를 메시아로 보기 시작하였고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나사로를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도 그 점이 더 큰 역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마르다
마르다는 마리아의 자매였고 나사로의 누이입니다. 일설에는 문둥이 시몬이 그의 남편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르다라는 말은 “숙녀”라는 뜻인데 그래서 그런지 그는 살림을 도맡아 하던 충실한 주부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오셨습니다. 마르다는 혼자서 음식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분문을 보면 마르다가 “마음이 분주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사방에서 끌어당기다”라는 뜻입니다. 바쁠 때는 사방에서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르다는 행동파입니다. 손 대접을 도맡아 했습니다. 이것은 큰 은사입니다. 그런데 혼자 열심히 음식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는데 동생 마리아는 방에 앉아서 도와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예수께 마리아를 내 보내 달라 요구합니다. 왜 보고만 있느냐고 불평을 했습니다. 혼자서 음식을 만드느라 바빠 죽겠는데 나 몰라라 하고 있는 마리아가 얄미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다 보면 사람들이 협조를 안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일러바치고 싶어집니다. 비난하게도 됩니다. 그래서 불평하게 됩니다. 성경은 마르다의 속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마르다의 심정이 곧 우리들의 심정일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마리아는 주님의 발아래 앉아서 말씀 듣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여기 마리아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엎드려 머리털로 발을 닦아냈던 여인입니다(요 12:). 그 마리아가 오늘도 또 예수님의 발앞에 앉아 집중하여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부엌에서 음식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고 마르다가 예수님께 마리아를 내 보내 나를 도와주라 하지 않으시냐고 불평을 할 때 그때 예수님은 마리아를 두둔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이 두 여인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마르다는 분주하게 음식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아래 앉아 말씀 듣는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서가 아니고 예수께서 드실 음식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음식 만드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라아를 명하여 도와주라 하지 않느냐고 서운해 하고 있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그 시간 음식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여기 이 두 자매의 생각의 차이가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여기 마리아의 모습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39절을 보면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이 구절이 부각되고 강조되는 부분입니다.
오늘 우리 현대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은 이 말씀을 대하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매일 듣고 사는 소리가 세상의 소리뿐입니다. 세상의 소리는 즐거운 소리가 얼마 없습니다. 모두 우리 마음을 삭막하게 하고 걱정되게 하고 메마르게 하는 소리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말씀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열심도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한편 마음으로 마르다가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의 따뜻한 마음이 감사했을 것입니다. 누구를 정성껏 대접한다는 것은 참 귀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을 더 따뜻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해 우리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답이 나옵니다.
예배에 전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우리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나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나의 전존재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나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새해에는 무엇보다 예배에 목숨을 걸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분주해도 예배생활에 등한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내가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행위와 수고와 보답의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오늘은 이 예배가 경시되는 시대입니다. 독일교회는 5%만 교회에 나간다고 합니다. 영국교회는 10년 전에 5%만 나간다는 통계가 나왔는데 오늘은 더 떨어졌을 것입니다. 미국교회는 날마다 쇠퇴해서 오늘은 그리스도인 중에서 20%만 교회에 출석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한국도 이제는 쇠퇴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증가율이 저하되고 신자들이 교회에 와서도 예배보다 행사를 우선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간단히 드리고 행사에 치중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새해 예배에 전념하십시오.
말씀에 전념
마르다는 열심히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정성을 들여 음식을 만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를 더 칭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주님 곁에 앉아서 ... 말씀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안에서 봉사도 참 중요한 일입니다. 먹는 일도 참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간직하는 생활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 말씀은 말씀이 없는 예배와 봉사는 허구라는 말입니다. 봉사도 헌신도 말씀 다음에 할 일입니다. 오늘은 이 예배에도 점점 말씀이 희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에 폭발력이 없고 변화와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섭리하시고 일하시고 계시하시고 인도하시고 알게 하시고 변화하게 하시고 깨지게 하시고 불을 붙여주십니다. 그래서 요시야 왕은 잃어버렸던 율법책을 성전을 수리하다 발견해서 읽고는 그동안 무지하게 살았던 것을 생각하고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역대하 34:8). 주의 말씀은 우준한 자를 깨닫게 하십니다(시 119:130). 주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습니다(전도 12:11).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을 내좆으셨습니다(마 8:16). 사도바울이 말씀에 붙잡혀 예수를 전하였다고 하였습니다(행18:5).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고 사람의 마음을 판단하신다(히 4:12)고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있는 곳에 회복이 일어나고 깨달음이 주어지고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은 자신을 향한 뜻을 발견하고 이해하게 하고(시19:8) 하나님의 뜻 발견하게 하고(롬 12:2) 부정적 사고방식에서 긍정의 생각으로 변화도 주시고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삶이 건강하게 균형 잡힌 삶으로 인도하셔서 복종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십니다. 죄의 억제와 속박에서 풀어지고 순종하여 자유하게 되게 하시고 영이 즐거워지게 하셔서 우울함과 절망과 의욕상실과 무관심에서부터 외부상황에 영향 받지 않는 내면의 기쁨과 자유로운 상태로 바뀌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편의 시인은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요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시19:10-11)”고 말씀을 칭송하였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갈 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A. J 제이콥스가 “미친 척 하고 성경말씀대로 살아본 1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패션잡지 에스콰이어 편집자인 주인공은 성경을 읽어가며 700여개의 계명들을 정리하여 일 년 동안 그 계명대로 실행하여 보았습니다. 왜 그런 착안을 하였는가 하면 성경말씀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가를 알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그는 성경에서 “거짓말 하지 말라”는 계명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식당에서 가족과 식사하고 나오다가 부인의 동창생을 만났습니다. 그때 상대방이 아내에게 “조만간 또 다시 봅시다”하고 말했습니다. 이 남편이 생각해 보니 얼마 후에 다시 만날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정직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아내 동창에게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럴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그냥 약속하지 말고 헤어집시다.” 그리고 아내에게 핀잔을 받았습니다. 주일날 뉴욕 거리를 거닐면서 주일날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에게 돌을 던지라는 말씀 그대로 실행한 것입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미친 척 하고 말씀 그대로 실행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얻은 것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도하면서 위로받게 된 것,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무능하고 흠이 많은 사람인가를 비로소 알게 된 것, 성경에서 이렇게 안식을 찾고 기쁨을 누리게 된 것, 그리고 한 가지 부작용도 느끼게 되었는데 그것은 너무 자주 하찮은 것에도 감사하게 되는 부작용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줄이 끊어져 지하 바닥에 메다꽂지 않은 것 등을 감사하고 매일 삶에 무탈하게 해준 수천가지의 사소한 일들에 감사하다 보니까 결국 감사에 중독이 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고 눈을 뜨게 해 주는 섭리의 힘이 들어 있습니다.
갈림길에서 과감한 결단
한해를 살아가다가 보면 몇 번의 갈림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때가 몇 번은 반드시 올 것인데 그때마다 갈등이 올 것입니다. 결과가 클수록 갈등도 커질 것입니다. 그때는 과감하게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원칙이고 순리입니다. 그러면 당장은 손해일 수도 있지만 멀리 보면 반드시 합동해서 좋은 결과를 주실 것입니다. 마르다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때 마리아도 부엌에 가서 언니를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여기도 있어야 했습니다. 마리아는 생각하다가 여기 주님의 발 앞을 택한 것일 것입니다. 그 선택이 후에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일로 연결됩니다. 그것이 선택의 삶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이렇게 갈림길을 만나게 될 때를 만나게 됩니다. 그 때는 내게 유리한 길을 찾기 보다는 하나님께 유리한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말씀을 듣고 행동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절친한 친구 두 사람이 한 학교 한 기숙사에서 생활했습니다. 친구 둘 다 교회에 잘 다녔습니다. 하루 저녁에는 술이나 마시러 가자하고 둘이 기숙사를 나섰다가 길가 옆에 있는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술은 내일하고 오늘은 부흥회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또 한 친구는 부흥회는 무슨 부흥회냐 술이나 마시러 가자하고 앞서 갔습니다. 그 길로 이 두 사람의 운명은 갈라졌습니다. 그날 부흥회에 참석한 친구는 후에 미국의 22대, 24대 대통령이 된 클리 브랜드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 술집으로 갔던 친구는 후에 술로 살인을 하고 사형수가 되어 옥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사형수가 그때 헤어진 친구의 대통령 취임식날 감옥에서 TV를 통해 그 모습을 보고 그동안의 삶을 고백해서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금년 한해를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이 같은 결단이 요구되는 때가 여러 번 주어질 것입니다. 그때는 과감하게 말씀을 따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편을 따르십시오.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영적 실력
오늘은 실력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실력이 없으면 자꾸 도태됩니다. 기업도 실력이 없으면 도태됩니다. 직장에서도 실력이 없으면 밀려나게 됩니다. 경기에서도 힘이 약하면 패배하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도 영적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영적 실력은 우리로 하여금 힘을 주고 능력을 주고 담대함을 줍니다. 성령의 충만이 없으면 성경의 말씀은 분명 생명의 말씀이지만 잠이 오는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에 충만하여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쩌면 인간은 성령 충만의 삶이 본능의 삶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영적으로 고갈상태에 빠지면 병들게 되어 있고 무력감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 충만은 인간이 누리는 본능입니다.
연어는 3년 마다 태어난 곳으로 회귀합니다. 그래서 30미터나 되는 거센 폭포를 치고 올라갑니다. 그것은 연어가 갖는 본능의 힘 때문입니다. 그 본능을 과학으로 증명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을 사모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은 천국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본능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본능적으로 천국을 사모하게 되고 말씀과 예배를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그 영적 실력이 약화되면 다 싫어집니다. 하나님도, 예배도, 말씀도, 모든 관계도 싫어집니다. 그것은 영적 본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삶이 기름 없는 기계처럼 빡빡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결혼행활 30년 한 10쌍 부부에게 “다시 태어나도 결혼하겠는가”고 물었더니 10쌍중 2쌍만 다시 결혼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두 쌍에게 “정말 남편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니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 다른 놈을 다시 길들이려면 힘드니까, 이왕 길들여진 놈이 낫지 않겠느냐”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일치되는 삶을 살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도 원만하게 이루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에 충만해지는 방법뿐입니다. 그때 말씀은 우리에게 이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말씀을 경청하는 모습을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해 더 많은 시간을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립시다. 그리고 거기서 말씀을 얻고 예배에 동참하고 영적 실력을 축적하십시다. 그러면 금년도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현실적 관심과 궁극적 관심
이필재목사 / 누가복음 10:38~42
오늘 성경말씀에 나오는 장소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마을인 베다니라고 하는 동네입니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삼남매가 이 지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기록상으로 봐서 부모님은 안 계신 것으로 생각이 되고 이 집은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성경기록으로만 보면 예수님이 제일 심방을 많이 가신 집이 이 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관계도 매우 좋았습니다. 어떤 때는 이 집에서 예수님 일행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베푼 일도 성경에 기록으로 남았고 오늘 말씀에도 마르다가 식사 대접을 하기 위해서 분주한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집의 가장이 되는 오빠 나사로는 죽었다가 예수님의 도움으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사건도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은 2~3번 나오는데 다른 곳에는 암시적 기록으로 나오고,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의 죽음 소식을 들으셨을 때는 기록상으로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라고 직설적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일행은 전도하러 다니다가 아마 휴식 겸 이 집에 가시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집을 자주 찾으시는 이유는 이 집에 두 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쉼이 될 수 있는 편안함이 그 집에 있었고 또 하나는 마르다가 열심히 일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따뜻한 식사가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전도 사역에 나타난 특성을 연구 해보면 확실한 것이 나타납니다. 전도를 받아들이고 환영하는 사람과 또 그 장소에는 오랫동안 계셨습니다. 그렇지 않은 곳은 일찍 떠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긴 대화가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하신 대화인데 그때 그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큰 관심 표명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대화가 길어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어느 날 열두 제자를 전도 파송하시면서 “너희는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는 자가 있거든 거기 머물라. 그리고 그 집에서 베푸는 음식을 먹으라.” 그렇게 말씀하시고 “만약 너희를 핍박하는 동네가, 혹은 사람이 있다면 빨리 떠나라. 떠날 때는 발의 먼지까지 떨어버리고 나오라.” 그러면서 저주 예언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는 재앙적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런 저주 예언을 하셨습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예수님이 제일 대화하기 싫어하셨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입니다. 하루 종일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 설교하셨던 때는 말씀을 듣기 좋아하는 군중들을 만났을 때라고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자주 심방가신 이 마르다의 집에서 일어났던 작은 한 사건을 조명해 보면 주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항상 삼남매가 등장하는데 때마다 나사로의 역할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마르다라는 언니와 마리아라는 동생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자매이면서도 나타나는 모습은 아주 다르게 보였습니다. 마르다는 활동적인 사람으로 나타났고 마리아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지금 여인으로서 매우 필요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미리 준비도 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손님 13명이 별안간 집안에 들이닥치니까 식사 준비가 당황스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모두 젊은 남자들로 구성된 13명의 공동체입니다. 13명의 장정들의 한 끼 식사를 별안간 마련하는 일도 작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여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훌륭한 식사 대접이 행복 조건에 속하는 일이 됩니다. 마르다는 그런 일을 잘 하는 사람으로 조명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현실적 관심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필요한 일을 말합니다. 이 관심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며 이 관심을 떠나서 누구도 살 수가 없는 필요입니다. 만약 이 날 마르다가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않았다면 예수님의 일행은 식사 없는 썰렁한 분위기로 쓸쓸이 헤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행복 중에 축복 과 큰 비중이 있는 것이 먹는 것입니다. 이것을 1차 산업이라고 합니다. 식량을 생산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배부르게 먹는 시간이 인간에게 제일 행복하고 중요한 일로 그렇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아! 나는 행복하지 않다.’ 이런 생각이 드시는 분은 24시간만 한번 금식기도를 해보세요. 금방 생각이 달라집니다. ‘이야! 평소 내 주변에 따뜻한 식사가 있는 것이 그렇게 행복했던 일인가?’ 그렇게 생각이 바뀌어져서 적어도 일 년에 한번쯤은 금식기도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특별히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김지하 씨가 쓴 시를 보면 그런 시가 있잖아요?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입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밥이 곧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 현실적 관심에 마르다는 지금 충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유대 나라는 GNP가 100도 안 되는 가난한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굶어 죽는 이야기가 끝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왜 옛날 임금들이 그토록 많은 전쟁을 했는가? 한 가지 철학 때문에 그랬습니다. “한 평의 땅이라도 넓혀야 자국민의 먹는 문제가 해결된다.” 칭기즈칸, 알렉산더, 나폴레옹, 히틀러 다 똑같은 철학에서 그렇게 많은 전쟁을 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영토 확장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 대통령이든지 경제 성장을 시켜서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 향상을 마련하지 못할 때는 무능한 대통령으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은 현실적 관심 속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마르다는 급작스럽게 만난 이 현실적 관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마음이 분주하고 손놀림이 매우 바빠졌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렇게 현실적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마리아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집안에 음식을 만들 사람이라고는 마르다와 마리아 두 사람 밖에는 없는 상태입니다. 마리아가 열심히 도와주어도 시간이 바쁜데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급기야는 마르다의 불만이 그만 터져 나오고 말았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그렇게 불평스럽게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상식적으로 객관성 있게 판단하면 여신도들께서는 생각이 되실 겁니다. 이런 상황이 되었다면 누구든지 마르다를 동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좀 얄밉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기 보니까 지금 마리아는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앉아서 시선을 마주치며 주님은 말씀하시고 마리아는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 입장에서 질투가 있어도 넉넉히 있는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마르다가 약이 오른 겁니다. 그러면 마르다는 이때 왜 자기 동생 마리아에게 “야! 너 보지도 못하니? 나 혼자 이렇게 쩔쩔 매는데, 이 많은 사람 별안간 들이닥쳐 점심 마련해야 되는데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으면 어떡해? 빨리 나와! 너도 일 좀 해!” 이렇게 말해도 되는데 마리아에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불평을 털어놨습니다. “주여! 왜 마리아를 가만히 그냥 두시나이까? 나를 도와주게 하소서.” 이 말은 “나는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이렇게 예수님께 불평을 털어놨습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이런 일이 지금 처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오실 때마다 여러 번 경험한 일입니다. 어떤 면에서 마르다가 이렇게 지금 식사 준비를 열심히 잘하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식사는 언제나 행복했던 것을 자신이 보았기 때문에 열심히 한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별명이 뭡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그랬습니다. 음식을 조금씩 먹는 소식가를 보고 먹기를 탐한다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식사를 많이 하신 겁니다. 웬만하면 삭개오의 집에는 안 들어가시는 것이 정서상 좋을 뻔 했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거기서 식사를 함께 나누는 예수를 보고 사람들이 문밖에서 뭐라고 그럽니까? 선포를 합니다. “우리도 들어가지 않는 죄인의 집에 선지자가 들어갔도다.” 사람들이 막 불평하잖아요? 더한 일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했다고 그랬습니다. 웬만하면 그 초대는 안 가시는 것이 좋을 뻔 했는데 거기에도 가셔서 식사 대접을 받으신 적이 있고 어떤 때는 그 지역의 무화과는 식량입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 아래 가셔서 너무 배가 고프니까 예수님이 먹을 것이 있나 찾아보셨는데 없단 말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화가 나셨습니다. “너는 다시는 열매를 맺지 말라.” 말라죽었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이 있는 자리에 나타나셔서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여기 먹을 것이 없느냐?” 그래서 구운 생산 하나를 드리니 잡수셨다고 이렇게 예수님의 모습이 조명되어 있습니다. 마르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제일 행복하게 식사를 하실 분이 예수님이신데 자신이 가장 좋아하시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나는 생각하지도 않으시고 마리아만 데리고 저렇게 즐겁게 이야기 하시는 것인가?’ 금방 화가 납니다. 그래서 “주여, 나를 생각지 않으십니까? 내가 지금 누구를 위해서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마리아도 나를 도와주게 하소서.” 이렇게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사람 마음의 교화는 서로 상대적 교감이 생길 때 피차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분주한 마르다는 예수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하는데 예수님의 교감이 마르다에게 오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불평을 하는 겁니다. 공감대 형성이 안 이루어지고 있는 그 현장을 이 마르다가 참을 수 없어 “예수님도 나같이 생각하셔야지 내가 지금 이렇게 열심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당신을 위한 것인데 왜 나를 생각지 않고 마리아만 데리고 말씀하시나이까?” 아마 이때 마르다의 심정은 ‘수틀리면 확 뒤집어버리고 말겠다.’ 그런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필요한 현실적 문제를 관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세 번의 식사를 어떻게 해야 되나 생각하고 마련해서 먹고, 입고 다닐 옷을 세탁해야 되고, 타고 다닐 자동차를 정비해야 되고, 학생들은 가서 시험을 봐야 되고, 계약서를 써야 되고, 은행에 밸런스 체크를 해서 부도가 안 나게 막아야 되고, 결혼식 축하하러 가야 되고, 졸업식 참여해야 되고, 계모임, 동창회, 문화교실, 미장원, 이발소, 시장, 헬스 현실적 관심이 우리 주변에 항상 많습니다. 만약 이렇게 현실적으로 절대 관심해야 될 일을 관심해야 될 사람이 관심하지 않을 때는 불평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가족들의 현실적인 문제가 먹고 사는 문제인데 아버지가 아무 것도 안하고 돈을 안 벌고 바둑만 두고 있다든지 책만 읽고 있다든지 하면 가족들이 불평하잖아요? “아버지여, 가족들은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왜 당신의 관심만 그렇게 관심하시나이까?” 말할 수 있잖아요? 또, 저녁때가 되었는데 엄마가 저녁 식사 준비를 하지 않고 연속극만 보고 앉아있다든지 눈썹만 그리고 앉아있다든지 해보세요. “어머니, 가족들은 생각지 않으십니까?” 이게 현실의 문제입니다. 현실에 마땅히 해야 될 일에 대한 무관심을 마르다가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 틀에 관심을 갖는 당연한 지적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왜 거기에 관심을 갖지 않았느냐 말입니다. 저희 언니가 그렇게 바쁜데 말입니다. 지금 마리아는 예수의 발아래 앉았다고 했으니까 사실 붙어 앉아있는 겁니다. 그러면 마리아의 관심은 뭔가? 오늘 성경 말씀에 말씀을 들었다고 그랬습니다. 이 관심을 궁극적 관심, 혹은 절대 관심이라고 표현합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관심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우리 집에 이렇게 가까이 볼 수 있는 시간이 언제 그렇게 많이 있다고, 식사 준비보다 더 중요한 관심이 메시야의 영성에 대한 진리를 듣는 일이지 식사 문제는 천천히 해도 되고 또 간단히 해도 예수님에게 절대 실례가 안 된다는 판단이 마리아의 판단입니다. 궁극적 관심자는 현실의 문제는 다소 소홀해도 괜찮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현실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어떤 때는 우리 사람들이 우리 인생에 절대 도움이 안 되는 문제 때문에 공연히 불필요하게 마음이 분주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어떤 때는 단순하게 살아도 행복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게 너무 많습니다. 불필요한 사치품을 그렇게 많이 소유하려고 마음이 분주한데 도대체 그것이 정말 행복한가? 은행에 보면 선진국은 ‘세프티박스’라는 제도가 있는데 박스 하나를 은행에 가서 사는 겁니다. 그것은 내 것입니다. 그러면 집안에 귀중품이 많다면 집안에 두면 도둑맞을 위험이 있으니까 거기 갖다 넣어두는 겁니다.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날마다 누리지도 못할 것을 그렇게 돈을 많이 써서 거기다 집어 처넣으려면 뭐 하러 사는 것인가?’ 그 다음에 아무리 은행 세프티박스에 잘 보관해 두었지만 걱정이 됩니다. ‘이거 또 은행 직원이 하나 슬쩍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열며 문안인사를 드리더라고요. 확인하고는 “아! 다 있구나! 안녕히 계십시오.”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부담입니다. 우리 인생을 가만히 조용히 생각해보면 인생에 그런 불필요한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너무 많은 소비를 하고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그럴 보물이 있으면 하늘에 쌓아두라. 그게 너를 위해서 훨씬 더 좋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 안하셨습니까? 인생은 성취 의욕에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도 못할 성취를 위해서 공연히 분주할 따름입니다. 안 해도 괜찮을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안 가져도 좋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게 너에게 그렇게 다 필요하냐? 누리지도 못할 것을 가지기 위해서 너무 분주한 게 너 아니냐?” 이렇잖아요?
오늘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를 책망하거나 이것이 필요 없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사람 이름을 두 번 반복해서 부른 것은 애정입니다. 오늘도 마르다를 부를 때 “마르다야, 마르다야! 한가지만으로도 족하니라. 너는 지금 너무 많은 것에 불필요한 관심을 쓰기 때문에 현실적인 관심보다 더 중요한 궁극적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마리아의 선택이 옳다. 뭐가 잘못됐냐? 현실적으로 식사하는 것에 대해 나도 똑같이 필요를 알고 있지만, 내가 너희 집에 온 첫째 목적은 밥한 끼 때우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느냐? 단순하게 살아도 괜찮다. 너무 많은 것을 갖지 않아도 괜찮다. 하나만 가지고 살아도 된다. 한 가지만 해라!” 다만, 이날 마르다는 마음에 시험이 좀 들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그렇게 민감한 여인의 감정에 민망스러운 답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편에서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마 상식적인 대답을 하셨다면 “마리아야, 언니가 화났다. 가서 좀 도와주거라. 그리고 끝난 다음에 우리 같이 예배드리는 시간을 갖자. 그게 아무래도 낫겠다. 저러다가 뒤집어엎으면 어떻게 하냐?” 그래야 마르다도 마음이 좀 풀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득이나 약이 올라있는 마르다에게 더 약이 오르는 답변을 하셨으니 아마 이때 예수님은 좀 썰렁했을 거라고 계산을 해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는가? 지혜가 없으신가? 마르다의 현실적 관심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밥 한 끼 해결이라는 아주 간단한 관심사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유한한 관심이요 일시적이라서 매일 반복되는 관심일 뿐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으로부터 얻고 싶어 했던 관심은 일시적으로 한 번에 끝나는 그런 관심이 아니고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이 좋은 기회에 무한적이요 영원적 관심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유한적이며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관심에 너무 분주합니다. “네 주변에 그런 거 안 해도 괜찮을 텐데…. 그것을 다 해야 되겠니? 그렇게 많이 가져야 되겠니?” 따라서 이 현실적 관심이 너무 커질 때 그 자체가 성경에서는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출세를 하면 좋습니다. 못해도 괜찮아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부자가 되면 좋습니다. 가난해도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됩니다. 어떤 때 우리가 자녀들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없어도 삶이 즐거울 수 있어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일시적 관심이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 될 때 하나님 섬기는 일이 힘들어집니다. 예수님의 설교 중에 보세요. 지금 사람들의 관심은 “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예수여!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이 말이 뭡니까? “실제적 관심보다 궁극적 영원의 관심을 가지고 살아라. 내가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제가 옛날 안양에서 개척교회를 할 때 집사님 한분은 개척교회라서 교인도 얼마 안 되는데 제가 열심히 심방하며 전도하러 다니는데 항상 심방을 따라다니십니다. 그분은 가족이 없습니다. 혼자 사세요. 불쌍한 동정해야 될 위치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일 년 52주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하는 게 있습니다. 감사헌금을 매주 하십니다. 그분은 일 년 내내 주일마나 항상 그렇게 정하고 사십니다. ‘저 분이 돈이 많은가?’ 하도 궁금해서 제가 물었습니다. “집사님! 목사가 모르는 좋은 일이 항상 있으시죠?” “왜요?” “감사헌금을 일 년 52주 한 번도 안 빠지고 하시니 이것은 틀림없이 집사님 생활 가운데 무슨 비밀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한테 얘기 좀 해보세요. 제가 궁금합니다.” “있습니다. 숨은 내용인데 이거 비밀인데 목사님이 물으셨으니 할 수 없이 제가 폭로하겠습니다. 나같이 행복한 교인이 없습니다.” “그래요. 뭣 때문에 행복한지 말해보세요.” “나는 혼자 살고 있습니다. 평생 부부싸움 안합니다. 내가 보니까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집사, 권사들이 부부싸움하고 머리 끄집어 당기고 하니 나는 그런 거 볼 때마다 반사적 행복이 있습니다. 자식걱정도 안합니다. 고3 엄마들 볼 때마다 불쌍하고 자식 잘못될까봐 밤잠 못자고 붙들려 다니고 시집보낼 걱정, 장가보낼 걱정, 집 사줄 걱정…. 나는 그런 걱정 하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늦게까지 심방 다니고 밤 12시 넘어 집에 들어가도 누가 잔소리할 사람도 없고 아! 자유여! 나는 이것을 행복하게 누립니다. 내가 조금 가지고 있는 거 있지만 물려줄 자식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헌금 많이 하고 이렇게 살다가 나 죽은 다음은 알게 뭡니까? 내가 하나님 앞으로 가는데, 좋습니다.” 그 분같이 되라고 우리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기 위치에서 행복을 찾는 능력 있는 크리스천입니다. 그분 사는 게 옳습니다. 불필요하게 누리지도 못할 것을 너무 많이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머리가 터지게 복잡하기만 하고 가졌으나 행복하지 않고 오히려 부담스럽게 살고, 이 생활을 지혜롭게 하란 말입니다. 현실적 관심을 초월해서 절대 관심, 궁극적 관심으로 전환하면 삶이 풍성해지고 행복해집니다.
성경에도 많은 실례가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 하나님이 롯에게 말했잖아요? “현실적 관심에서 떠나라! 빨리 이 성을 빠져나가서 도망가라.” 가는데 롯의 처가 현실적 관심의 뒤를 돌아보잖아요? ‘이걸 두고 간단 말이야?’ 그래서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영적 교훈이 기록으로 남은 겁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버려도 좋은 관심에 생명을 걸고 부둥켜안고 마치 그것을 놓치면 자기 인생은 무의미한 듯 투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어휴! 저 사람은 저것만 버리면 행복할 텐데….’ 행복하지 못할 것을 붙들고 공연한 고생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대학 못 들어갔다고 자살하면 되겠습니까? 대학은 현실적 관심이지 궁극적 영원 관심은 아닙니다. 연애하다가 실패했다고 인생까지 버리면 되겠습니까? 또 국회위원 선거가 다가옵니다. 되면 좋은 일입니다. 안되었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인생에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마르다와 같이 분주하다가 주님을 향하여 나중에 “왜 내가 이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나를 도와주지 않으시나이까?” 불평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똑같이 대답하십니다. “한 가지만 해라! 그렇게 뭘 많이 해야 돼? 그렇게 많은 것을 다 가져야 돼? 괜찮아. 마르다야, 마르다야! 하나만 해라.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살아간다. 마리아의 영원 관심, 궁극적 관심은 잘 한 일이다. 네가 식사 대접을 하면 나는 행복하게 늘 맞이했다. 그러나 내가 온 것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다. 밥 한 끼 얻어먹으러 온 사람 취급하지 마라.” 역사 관찰! 그렇게 분주하던 헬레니즘 문명은 무엇을 남겼는가? 쓰레기입니다. 왜 세계는 결국 헤브라이즘으로 가고 있는가? 유한적 관심과 영원에 대한 궁극적 관심의 차이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예배당에 와서 그렇게 한가롭게 노래 부르고 명상에 잠길 그런 시간이 어디 있어? 아니, 이렇게 바쁜 시간에 새벽에 나가서 기도를 해? 천지개벽을 해도 난 그런 일은 안 해!” 예수님 설교 “이 세대도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춤추다 인자가 오리라.” 그 말씀은 시집가지 말라는 말도 아니고 먹고 마시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유한적 관심에 너무 많이 사로잡혀서 궁극적 관심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마르다야, 단순하게 너무 분주하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 세상 관심이 너무 많으면 우상이 될 수 있어. 오늘은 마리아가 더 잘했어. 나는 이 집에 또 올 거야. 그때도 그렇게 해!” 알렉산더 어렸을 때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정교사였다고 그러죠? “대왕이시여! 이제 곧 왕위에 오르시게 되는데 왕이 되면 뭘 하시겠습니까?” “헬라 통일해야지요.” “통일한 다음에는요?” “아시아, 인도까지 점령해야지요.” “그 다음에는요?” “이집트를 통해서 아프리카까지 점령하려고 하는데요.” “그래요? 온 세상을 다 점령했다고 합시다. 그 다음에는 뭘 하실 겁니까?” “나도 그때 되면 죽겠지.” “그러면 그런 거 하지 말고 그냥 살다가 죽으시지요.” 알렉산더가 33세에 그거 하다가 죽었잖아요?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 버리면 더 좋은 일, 사람이 너무 마음이 분주하고 이 세상은 마귀에 사로잡혀서 정신없습니다. “마르다야, 하나만 해! 괜찮아! 단순하게 살아. 괜찮아! 영원에 관심을 더 두어! 오늘 일은 마리아가 더 잘했어. 그렇게 해!”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시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서명성목사(팔로마한인교회) / 눅 10:38-42
예수님께서 지금 집에 오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분은 급히 방안을 쓸고 닦고 화장실을 청소할 것이요, 어떤 분은 빨리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것이요, 어떤 분은 잘 보이려고 화장을 할 것이요, 어떤 분은 성경책을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겁니다. 사람들마다 하는 행동은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신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이 뛴다는 점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주님의 심방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나요? 주님이 내 집에 오시는 것이 기쁩니까? 아니면 평소 한 행동 때문에 오시는 것이 부담스러우십니까?
예수님이 원하시는 참 제자의 모습이 어떤 것일까 하는 주제로 누가복음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바로 앞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 사랑은 말로만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돕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감으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본문 다음에 있는 스토리에서는 제자들은 기도의 대상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소망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주님을 섬기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교제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심방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가는 도중에 예루살렘 변두리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남매가 사는 집에 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들어서자 마르다가 반가이 맞이합니다. 마르다는 오랜만에 들르신 예수님께 맛있는 저녁상을 대접하려고 부엌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집에 있는 재료를 총동원하여 씻고, 썰고, 지지고, 볶고, 끓이면서 정신없이 바빴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음식 준비 과정은 주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 향유 옥합을 깨뜨립니다. 거기서도 마르다는 열심히 음식을 준비합니다. 마르다는 부엌에서 일하기를 좋아했던 여인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에 의하면 마르다는 일만 잘하는 여인이 아니라 신앙적인 통찰력도 있었고 믿음도 좋았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님과 주고받는 대화 내용을 보면 마르다는 부활 신앙이 있었고 메시아에 대한 믿음이 분명했던, 그리고 성경 지식과 믿음 면에서도 잘 준비된 여인이기도 했었습니다.
불청객의 방문
마르다가 주님만을 생각하며 한창 음식을 준비하는데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마르다의 마음이 분주하다고 누가는 적고 있습니다. “분주하다”는 표현은 마음이 나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많은 음식을 제 시간 안에 준비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생깁니다. 자기는 부엌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동생은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화가 납니다. 그런 마리아를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 같아 주님 또한 원망스럽습니다. 콧노래로 시작한 음식준비가 갑자기 짜증스러워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고 계신 방안에 들어갑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씩씩 대고 나타난 마르다를 주목했을 것입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말을 하는 마르다의 표정이 어떻겠습니까? 인상도 찡그리고 얼굴도 붉으락푸르락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는 시간, 은혜의 자리에서 흥분을 합니다.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자기를 부엌에 홀로 팽개친 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자기 생각에 동조할 것을 기대하며 던지는 질문입니다. 마르다가 불평을 할 뿐 아니라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예수님에게 지시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이 도리어 예수님에게 자기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반응
1) 마르다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부르십니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마르다가 준비하는 것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마르다가 주님을 섬기는 과정 가운데 예수님께 초점이 온전히 맞추어져 하는 자세가 흐트러졌다고 하십니다.
2) 마리아를 향하여
복음서에 보면 마리아가 세 번 언급됩니다. 요 11:32,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면서 오빠인 나사로를 잃은 안타까움을 주님께 고합니다. 요 12:3 다시 살아난 오빠를 인하여 잔치를 베풀 때 언니 마르다는 음식준비를 하고, 마리아는 예수의 발밑에 와서 비싼 향유를 그의 발을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으며 최상의 헌신의 모습을 보입니다. 39절에도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세 구절에 나타난 마리아의 공통된 부분은 예수님의 발 앞에 있다는 점입니다. 주님의 발 앞에서 자기의 슬픔을 주님께 고하고, 기쁨으로 주님을 온전히 섬기고,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배우는 것을 예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발치에 앉아”라는 표현은 학생이 랍비에게 말씀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배우기 위해서 취하는 자세입니다. 당시 풍습에 의하면 여자는 발치에 앉아 말씀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여자에게 말씀을 가르쳐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었는데, 예수님은 사회적인 제약을 깨뜨리시고 마리아가 말씀 듣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주의 깊게 들으며 주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좋은 편을 택하였기에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1) 주어진 상황에서 우선순위를 알았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그저 밥 한 끼 들기 위하여 마르다의 집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천국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마르다의 집에서 모인 무리들에게 열심히 가르치십니다. 제대로 손님을 대접하려면 손님이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여 그가 원하는 것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자기의 입장에서 주님을 이해하고 자기 식으로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마르다가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가 전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덜 중요한 것에 신경을 쓰고 도리어 분을 내다가 마르다는 이미 받은 은혜마저 쏟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마르다가 주님 섬기는 일에 열심인 것을 비난할 수는 없으나 초조해지다보니 마리아를 신랄하게 비난한 것은 책망 받을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 마르다가 주님조차 가르치려 한 것은 더욱 책망 받아 마땅합니다. 마르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혹시 우리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각자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 보겠다는 것보다 주님과 더불어 무엇을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의 관심을 주님으로부터 멀리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데에 신경을 쓰면서 가진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지는 않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어 우리 삶에 무엇이 진정 중요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해야 합니다.
2) 섬김의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마르다는 예수님과 더불어 생명의 말씀으로 풍성한 교제를 나눕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가 하시는 사역을 보며 마르다는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1-2에도 보면 마르다가 식사준비를 합니다. 죽었던 자기 오빠가 살아난 것을 인하여 잔치를 준비합니다. 예수님, 열두 제자, 자기 가족 적어도 열다섯 명분의 식사를 준비하는데 한마디 불평이 없었습니다. 수고가 수고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기쁨이 없습니다. 마르다가 나 혼자 “일하게” 할 때 사용된 diakoneo라는 단어에서 명사 deacon이 나왔습니다. 집사는 사도들을 도와 봉사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에베소서 4:12를 보면, 목회자의 임무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diakonia)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엌일 하는데 봉사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교회 건물 안에서만 하는 것이 봉사가 아닙니다. 가정, 직장, 학교 어느 삶의 현장이든 주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행동이 봉사에 해당합니다. 봉사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러러면 날마다 개인적으로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의 일은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마음에 기쁨이 없고 도리어 씁쓸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한다면서 불평하고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있다면서 원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바로 알고 섬기지 못할 때, 주님과 교제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제대로 채워지지 못할 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되며 일은 하지만 기쁨이 없고 분주하지만 열매가 별로 없습니다. 마르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고후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각자의 믿음을 점검하고 주어진 책임을 감당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고치려할 때 다른 사람의 허물은 덜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감격하며 계속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환경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고 위에 계신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히 채우며 섬기는 기쁨을 되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1) 섬기는 동기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주님께 맛있는 음식을 해 드림으로써 얼마든지 섬길 수 있었고 흡족하게 해 드릴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배울 수 있게 해주고 나는 주님을 위해서 최선의 음식을 만들어서 주님께 드리고 마리아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해주어야지”하며 땀을 흘렸다면 주님을 비롯한 모두 기뻐하며 식사를 하였을 겁니다. 사탄은 많은 경우 목적은 양보하지만 동기를 불순하게 만들기도 하고 동기를 양보할 때는 목적을 이루어가는 우리의 자세를 망가뜨리고 술수를 쓰기도 합니다. 사탄은 교회에 가지 말라고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 몸은 예배당에 앉아 있을지라도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생각을 하게 합니다. 설교자에 대한 섭섭한 생각을 갖게 하여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 그 가사가 우리 마음을 담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합니다. 무슨 찬송을 4절까지 불러. 경배팀은 잘 알지도 못하는 곡을 선택했어 등등. 형제자매들을 열심히 섬기도록 하되,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많이 받겠다는 식으로 어떤 동기를 가지고 섬기게 만듭니다. ‘나보다 잘 섬기는 사람 있으면 나와 봐’ 하는 교만한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목사가 설교 준비를 열심히 해야 하지만 그 목사 설교 잘한다는 칭찬을 받으려고 준비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대가가 있어야만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우리의 숨은 동기를 아십니다.
남을 섬기고 싶은 그 마음이 주께서 받으실 만한 제사입니다. 주님은 음식이 맛이 없다고 투정하시고 일하는 능력이 좀 떨어진다고 결코 탓하실 분이 아닙니다. 마르다의 문제는 말씀을 배우지 않고 부엌에 간데 있지 않습니다. 섬김의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본문을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항상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만 배우고 섬김이 없으면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누군가는 주님을 위해 부엌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본문은 열심히 일하는 마르다와 말씀을 사모하는 마리아를 비교 평가하지 않습니다. 마르다의 열성적인 봉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가 언니를 도와주지 않은 것을 두둔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과 봉사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예배, 교육, 선교, 봉사, 친교는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중요한 부분. 예배드릴 때가 있고 섬길 때가 있습니다. 본문은 성도들의 수고와 봉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고하고 봉사하는 열정적 섬김이 자칫 주님에 대한 관심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수고나 헌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대체하고 그 관계를 가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세상은 퍼모먼스나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하지만 주님은 그 동기와 목적을 기준으로 섬김을 평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정확하게 아십니다. 우리의 헌신과 그 동기를 다 아십니다.
2) 주님 발치에 앉아 배워야 합니다.
마르다는 단지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동기는 좋았지만 엉뚱한 것에 정신을 팔았기에 놓쳐서는 안 될 기회를 놓쳤습니다. 각자 자기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생각이 자꾸 주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습니까? 애초에 우리 속에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였으며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자 했으며, 세상을 향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던 우리였습니다. 우리의 상식, 우리의 판단력,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자세에 문제가 있으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척은 할 수 있지만 실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부족한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면 주님 발치에 앉아 배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아름답지 못한 것을 하나씩 제거하고 주님의 마음과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의 속을 채워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도 마르다의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언제나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찬송가 507장의 가사와 같이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의 말씀이 내 영혼을 감싸고 들어와 내 영혼을 바로 세워 주시고 신선한 충격으로 빚어 가시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마르다가 큰 실수를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모처럼 오신 분이 전하는 하늘양식보다 자신이 마련할 음식에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있다 보니,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오히려 그 저녁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주어진 인생, 제한된 시간을 가장 값지게 활용하는 최선의 전략은 주님의 발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 어떤 일도 주님 말씀을 듣는 일보다 우선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너무 많은 봉사와 사역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십니다. 너무 바빠 말씀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3) 다른 사람도 배려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느라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혼자서 바쁘게 일하던 마르다는 하던 일을 멈추고 예수님께 가서 마리아를 명하여 자신을 돕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하겠다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은사와 다양한 헌신의 모습으로 주님을 섬깁니다. 비록 예수님은 마리아의 선택이 더 좋은 것이라고 하셨지만, 마르다의 헌신도 또한 필요합니다. 마르다가 책망 받은 이유는 마리아의 헌신까지 자신의 뜻대로 주도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마르다의 접대가 중요한 만큼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리아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봉사와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르다고 다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 참견하면서 다른 사람도 자기 생각대로 움직여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각자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중요하며, 자기중심적으로 공동체를 움직이려 하다가 자칫하면 공동체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기울여서 투자할 만한 가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분주한 인생길에서 과연 보다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어린 양의 피로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푸셨으니 이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항상 교회에 와서 살라는 것이 아니요, 전부 신학교에 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영원한 변하지 않는 진리를 찾으며 그 진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일할 때가 있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주님을 찾을 때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발아래 앉아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가운데 주님께서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바른 선택을 하게 하시고 맡겨진 일을 제대로 감당하게 하십니다. 교회 창립주일을 맞이하며 나와 내 가정과 사업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본 받아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고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나아가면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에녹과 같이 주님과 동행하며 다윗과 같이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되어 하늘에 신령한 복과 이 땅에 기름진 복을 풍성히 누리고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버릴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인명진목사 / 누가복음 10:38-42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쉼 없이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선택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우리가 무엇을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는 삶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금까지 몇 시간 동안 많은 결정과 선책을 했습니다. 아침 밥상을 준비하는 주부들은 오늘 아침 무슨 음식을 할까 결정하고 선택했을 것입니다. 또 밥상에 차려진 음식 가운데 어떤 것을 먹을까 결정하고 선책해서 오늘 아침 밥을 먹었을 것입니다. 주일인데 교회에 갈까 말까 생각하다고 교회가기로 결정하고 9시에 갈까 11시에 갈까 결정하고 또 무슨 옷을 입고 갈까 결정하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오늘 하루도 수많은 선택을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의 인생 모두가 결정과 선택 속에서 살아가지만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나의 출생입니다. 내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날까, 언제쯤 태어날까, 어떤 가정,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날까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운명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태어난 출생 말고는 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의 나의 모습은 지난날 내가 선택한 결과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선택을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내 인생에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좋은 선택을 하면 좋은 결과가 나타나고 나쁜 선택을 하면 나쁜 결과가 최선의 선택을 하면 최선의 결과가 위대한 선택을 하면 위대한 결과가 나옵니다. 인생을 성공했다는 사람은 탁월한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 인생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0장 38-42절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선택에 대해 하신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집에 찾아갔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밑에서 말씀을 들었고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부엌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두 자매의 다른 선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는 좋은 선택을 했다고 칭찬하시고 그 언니 마르다에게는 네가 한 선택은 문제가 있다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르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가 선택한 일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나쁜 일을 해서 나무란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게 사는 것 다시 말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느라고 분주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평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42절을 보면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쉬운 성경에는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르다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를 하려고 하다보니 분주한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중요한 것 한 가지만 결정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다에게 지적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을 선택하면 선택한 것도 가지고 나머지도 갖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택은 하나만 가지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은 무엇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선택은 버리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착각 이것도 가지고 저것도 가지고 다 가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은 한 가지만 가지고 나머지는 다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 할 때 한 남자 한 여자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여자와 남자는 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택입니다. 한 남자와 여자를 선택하고도 다른 사람을 다 가지려고 하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것저것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사실 다 갖는다는 말은 다 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선택을 하고 나머지를 버릴 때 그 선택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로 이것을 착각하는 것이고 마르다도 이점을 착각한 것을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22절 이하에 한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마태복음 19장에도 나오고 누가복음 18절에도 나옵니다. 이 부자를 마태복음에서는 청년이라고 했고 누가복음에서는 관리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 부자가 예수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세상의 것을 다 가졌으니 마지막 하늘의 것을 가지고 싶은 한 가지 욕심이 생겼습니다. 말하자면 양손에 떡을 가지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의 것도 가지고 영생도 가지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계명을 다 지켰느냐고 묻자 이 사람이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를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것을 가지려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버리지 않고는 다른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손에 무엇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버려야 다른 것을 쥘 수 있는 것입니다. 버려야 가질 수 있습니다. 영생을 선택하려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만 갖고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한 가지를 확실하게 내 것으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너나할 것 없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들입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에 파묻혀서 살아갑니다. 얼마 전에 직장에서 퇴직한 사람을 만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회사다닐 때보다 더 바쁩니다.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은퇴는 쉬라는 것입니다. 은퇴한 사람이 바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이 흔히 하시는 말씀이 ‘나는 나이가 먹어도 마음은 청년이다.’라고 하는데 잘못된 말입니다. 나이가 들면 마음도 따라서 늙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힘들고 고달픈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저것 너무 시달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것저것이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욕심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 내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혹은 한 가지만 하라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것저것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정작 필요한 것은 몇 가지 혹은 한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분주하고 시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분주하게 하는 일이 정말 나에게 꼭 필요한 일인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한번 시간을 내서 내가 필요한 것을 다 적어보고 일의 순서를 매겨보아야 합니다. 우선순위 1번은 무엇이고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내 능력을 살펴보아서 내 능력으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 이외의 것은 하지 않겠다고 과감히 버릴 수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복잡한 내 인생, 정신없는 내 인생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원칙을 세워서 아닌 것은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을 간단하게 살아야 합니다. 아깝지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정해야 합니다.
저는 나름대로 원칙이 있습니다. 저에게 오라는 회의도 많고 모임도 많지만 저는 제가 안가면 안 되는 곳에만 갑니다. 여러 사람 가운데 하나로 끼는 모임에는 안 갑니다. 그런 모임을 따라다니려면 인생이 두 개 세 개라도 부족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정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내가 하고 싶다는 것은 욕심입니다. 이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저것 늘어놓고 복잡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 가지를 하려고 하지 말고 가장 필요한 것 한두 가지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대우그룹의 사장이었던 김우중씨가 쓴 책 중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할 일 많이 하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몇 가지만 했으면 크게 성공할 사람인데 할 일이 너무 많아 망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저것 하고 다니다나 나중에 내가 무엇을 했는가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많은 것 중에 무엇을 제일로 할 것인가 우선순위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우선순위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의 마르다도 나름대로의 우선순위를 생각하며 움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처럼 자신의 집을 방문하셨는데 잘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살림을 하는 사람으로서 예수님께 대접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알고 분주하게 음식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정한 기준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우선순위가 옳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로 우선순위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일을 옆에서 보고 계시다면 나름대로 정한 우선순위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어떻게 평가하실지 우리가 쓰는 시간을 보면서 어떻게 평가하실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마리아처럼 칭찬하실지 마르다에게 하신 것처럼 잘못되었다고 하실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돈을 쓰는 것도 시간을 쓰는 것도 의미있는 일을 선택해서 제대로 살고 있다고 우선순위가 제대로 되어 있다고 말씀하실지, 부질없는 것에 인생을 낭비하고 안 써야 할 곳에 돈을 쓰는지 시간을 들이는지 그러다가 나중에 허무하게 인생을 끝내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말씀하시지 않을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우선순위의 기준을 잘 정한 사람은 성공한 인생을 살아갈 것이고 행복한 인생을 살 것입니다. 분주하게 바쁘게 열심히 살았지만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면 엉뚱한 일에 매달려서 살다보면 그 인생이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 남겨놓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8-90년 세상에 살면서 끼친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아무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돼지나 소가 열심히 일하다가 그냥 죽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으로서 한 평생 살면서 역사에 남는 위대한 삶은 아닐지라도 무엇인가 의미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람들에게 내 이름이 기억되고 내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감동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선순위를 잘 정해야 합니다. 이것저것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의 경우처럼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 삶에 우선순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먹든지 한 끼 식사입니다.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마르다의 집에 하나님의 뜻이 임재하고 하나님이 바로 옆에 계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입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마르다의 선택도 예수님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이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먹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먹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그것 때문에 분주하고 염려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우선순위 삶의 목표 삶의 가치를 잘 정해야 합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았느냐 하는 무엇이 중요한 것입니다. 고속도로에서 진입로를 잘못 들었는데 열심히 달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달리면 달릴수록 목표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표를 잘 정하고 가치를 잘 정하고 우선순위를 잘 정하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차피 우리 삶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입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제가 아니면 노동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나놓고 보니 노동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돈이나 시간이나 능력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는 시간, 나에게 주어진 물질과 재능을 어떻게 중요한 곳에 적절하게 집중적으로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것저것 다 할 수 없습니다. 몇 가지 혹은 한 가지만을 집중적으로 해야 합니다. 나머지는 버려야 합니다. 물론 막상 버리려면 아까워서 버리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도 넥타이가 너무 많아 버리려고 골라보지만 한두 개밖에 고르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때 매고 이것은 이때 매고 이것은 누가 주어서 못 버립니다.
버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버리는 것에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폴 틸리히라는 실존주의 신학자는 믿음은 가장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나머지를 버리는 용기라고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정해놓고 나머지는 다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먹고 어디에 살고 무슨 차를 타는가 하는 것은 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은 후에 다 잊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무엇을 입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집에 살았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인생을 낭비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염려와 걱정은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염려하고 그것 때문에 분주해야 합니다. 그것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려야 합니다. 믿음으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저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사시는 모습을 보면 너무 분주하신 것 같습니다. 피곤이 얼굴에 배여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힘들여 하는 일이 정말 꼭 필요한 것입니까? 중요한 것입니까?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심각하게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정작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한두 가지입니다. 그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버려야 합니다. 간단하게 인생을 정리해야 합니다. 왔다갔다 분주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선택을 하고 집중해서 살아야 우리가 이땅 위에 무엇인가를 남겨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택은 버림을 의미합니다. 선택한다는 것은 버린다는 것입니다. 한두 가지를 선택해서 집중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인생의 지혜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한분을 가지고 나머지는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다 버렸습니다. 우리들도 다윗처럼 삶의 기준을 정해야 합니다. 주님 한분이면 아쉬울 것이 없으며 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다윗은 주님 한분으로 만족하고 나머지는 다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버릴 수 있었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오늘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이것저것 너무 많은 것으로 분주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보고 걱정하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으로 많은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깨달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이 변화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베다니의 마리아와 마르다
눅 10:38-42 / 이동휘목사(평강교회)
1.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가 사는 마을은 ‘베다니’라는 곳입니다. 이 마을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감람산(the Mount of Olives)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예루살렘에서 3km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습니다. 이 마을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지만,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던 곳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한 사람은 마르다로 마리아의 언니이며 죽었다 나흘만에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동생입니다.(요11:19-20,12:2-3) 나사로는 죽었다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난 일이 있으며,(요 11, 12장) 마리아는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일이 있는데,(요12:2-3) 그 만큼 이들 가족은 예수님과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요한복음 11:5에,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말하고 있 것을 볼 때, 예수님이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계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를 통해 기독교의 가장 소중한 덕목인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2. 먼저,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묵상하여 그 말씀 안에서 행할 때 자라가며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열세 사람 분량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는 말씀을 볼 때, 예수님께 대단한 정성을 다 하는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분주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바쁜 마르다의 모습과 예수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조용히 듣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마르다도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예수께서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음식을 장만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자매 사이에 갈등을 야기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도착하시기 전까지는 언니를 돕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도착하시자 그 가르침을 듣기 위해 예수님의 발 앞에 가서 앉았던 것입니다. 마르다는 계속해서 식사를 준비하면서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방으로 들어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예수님과 마리아 두 사람을 모두 비난했습니다.
(눅10: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아마 마르다는 혼자서 음식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바쁘니, 와서 도와 달라고 마리아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너무 열중인 나머지 그녀의 요청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동생 마리아의 태도에 화가 난 마르다는, 마침내 예수님에게 직접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바쁜데도 불구하고 전혀 자기를 도우려 하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인 책망과, 그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예수님의 무관심에 대한 원망이 섞여 있는 투정이었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상황에서 음식을 마련하는 자신의 판단과 행위가 가장 옳다고 하는 확신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에 비해, 자기가 지금 얼마나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를 은연중 과시하려는 마르다의 생각이 담겨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난처한 상황에서 우리는 자매의 성격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서슴없이 하는 적극적인 사람이었던 반면, 마리아는 듣고 조용히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여성 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모두를 사랑하시고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와 조용히 생각하는 사람이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일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가정은 각기 다른 재능과 성격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능력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마르다의 문제는 마리아가 자신을 버려두었다거나, 예수님이 마리아가 해야 할 일을 제쳐놓고 말씀을 듣게 하셨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문제는 그녀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일들이 그녀를 원망과 비난으로 몰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정말로 자신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0:40에서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라고 묻고 있는 마르다의 질문에는, 동생 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을 기대하고 있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실 마르다는 불신앙 때문에 마음이 산만하고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격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정말로 자신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그 때문에 걱정하며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폭풍우치는 바다에서 제자들도 똑같은 죄를 범했습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 편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는데, 때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자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침몰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며 급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께서 깨어 일어나셔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자, 이내 잔잔해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눅8:22-25)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행선(行船)하고 있음에도 믿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들어야 합니다. 로마서10:17입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라가는 동안 우리의 믿음도 자리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우리가 선택한 것들에 의해 그 삶의 양태(樣態)가 결정됩니다. 마르다는 식사를 준비하려는 훌륭한 선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기로 한 것은, 더 나은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양식이 훨씬 더 오래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선택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두 선택을 조합해서 예배도 드리고 일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믿음과 힘과 능력을 받아 그 믿음으로 주어진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마르다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시간을 냈더라면, 마리아와 예수님을 비방하는 일 없이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 왕처럼 우리 모두 성실한 마음과 공교한 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봉사해야 합니다.
(시78:7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행할 시간과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마르다가 “(눅10:40)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라며 원망과 불평을 털어놓자, “(눅10:41-42)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너무 많은 종류의 음식을 만들려 했기 때문에 바쁜 것이니만큼, 음식의 가지 수를 몇 가지로 줄이거나, 또는 한 가지만 하여도 족하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로 하여금 자기를 돕도록 명하여 달라는 마르다의 요청은 거부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마르다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섬기는 적절한 방법은, 필요 이상으로 지나친 물질로써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동참함으로써 섬기는 것입니다. 앨런 레드패스(Alan Redpath)는 “분주한 삶의 황폐함을 경계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분방하여 서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시험하게 된다.’ 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전7:3-5)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마르다는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소해 줄 먹을거리 보다는,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생명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더 소중하고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119:103-105)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더욱 더 온전해지는 믿음으로 성숙해지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두 번째로 소망입니다. 참된 소망은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약속과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들의 오라비가 병에 들자,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 11:3)는 말을 진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무슨 일을 하셔야 하는지, 어떻게 해달라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무거운 짐을 예수님과 나누었을 뿐입니다. 자매는 과거에 예수님을 접대하는 일로 그들이 서로 판이하게 다른 모습과 믿음을 보여주었지만, 이제 그들의 오라비에 대한 염려와 그리스도께 대한 확신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전갈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으시게 될 병이라.”는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베다니에서 예수님이 계시는 곳까지 가는 데 하루가 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전갈을 가지고 베다니로 돌아오는 데 또 하루가 걸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전갈을 전해 들으시고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시다가, 그리고 베다니까지 여행하며 하루를 더 보내셨습니다.
(요11:6-7)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베다니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나사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 지났다는 시실을 알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예수님이 보내신 희망의 메시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는 메시지를 가지고 베다니로 돌아온 바로 그날,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라는 말씀이 사실로 입증되리라는 것을 그 자매에게 상기시켜주셨습니다.
(요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마르다와 마리아는 희망을 거의 잃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즉각 오시지 않았던 것인가? 왜 오라비가 죽도록 내버려두신 것인가? 어디에 계셨건 왜 그 계신 곳에서 능력의 말씀으로 오라비를 고쳐주지 않으신 것인가? 그래서 자매 둘 다 예수님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요 11:21, 32)이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라 부르며 주님을 신뢰할 수도 있고, 아니면 “하셨더라면”이라고 말하며 주님을 의심하고 우리 생각대로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부르면서, 정작 ‘믿음’을 가지지 못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일정표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0:38-41에서, 예수님은 마르다의 초청을 받고 식사 자리에는 일찍 도착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는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지체하셨습니다.
(요11:6-7)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그러나 예수께서 일찍 오시든, 늦게 오시든 그들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를 사랑하심에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요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히13:8). 마르다가 예수께 “(요11:21-22)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고 하자, 예수께서 “(요11:23)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요11:24)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며 그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요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마르다가 “(요11:27)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오라비 나사로가 부활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 “(요11:41-43)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라고 하시며,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나사로가 그야말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음에도 부활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죽음을 비롯한 모든 원수를 이기는 승리와 능력이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셨고, 그 결과 마리아와 마르다의 많은 친구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요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죽은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께서 공개적으로 행하신 미지막이자 가장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그들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요11:32). 어떻게 예수님의 발 앞에 나아가 그분의 약속을 의지해야 하는지를 아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응답을 늦추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체는 성도 여러분의 기도에 대한 부인(否認)이 아닙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딤전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해야 했던 유일한 일은, 예수님이 사자를 통해 그들에게 보내신 약속, “(요11:4)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믿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사시는 믿음의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유월절 엿새 전,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기 일주일 전,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향유 냄새가 온 집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요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는 예전에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몰두했었습니다.
(눅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이 자매는 오라비 나사로가 죽어 장사지낸지 나흘이나 되었지만 부활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께서 “(요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장차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사건을 준비하기 위해 예수님께 향유를 붓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향유를 가지고 이른 이침에 무덤으로 간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막16:1-3)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그러나 그들은 텅 빈 무덤만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덤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향유를 붓기 위해, 그녀는 노동자의 1년 품삯에 해당되는 엄청난 비용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비용을 계산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녀는 오라비의 시체에 그 값진 향유를 바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그 향유를 보관해두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엿새 남기고 예수께 그 향유를 아낌없이 붓고 닦아 드렸습니다. 이때 잔치를 준비하고 있던 그의 자매 마르다는 전과 달리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히 움직이며 예수님과 마리아를 비난하는 마르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면서 아무 불평도하지 않는 마르다를 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비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예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 경험이, 이전보다 더욱 더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을 깊게 해주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발 앞에 나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에 따라, 예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는 마르다가 마리아를 비난했지만, 요한복음 12장의 이 장면에서는 가롯 유다와 다른 제자들이 마리아를 비난했습니다. 모든 공공체 안에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헌신된 사람들을 공격하는 가룟 유다 같은 사람들이 적어도 한 사람씩은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 안에서 악의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충분히 기다리면 그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예수께 아낌없이 부어드린 마리아를 두고 가롯 유다가 “(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면서 비난합니다. 마치 그 누구도보다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엄청난 돈을 횡령할 기회가 날아가버려 아쉬워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요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이러한 가롯 유다에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2:7-8)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주님은 마리아를 변호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성도 여러분을 위해 변호하시고 계십니다.
(롬8:33-34)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마리아가 행한 일이 온 천하에 알려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아낌없이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마리아의 믿음과 사랑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증거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롯 유다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가장 좋은 것을 그분 발 앞에 내어드리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을 섬기고 그들의 가장 좋은 것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며 세상의 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대접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의 짐을 그분과 나누며 가장 좋은 것을 선물로 드리고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엡3:17)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정착하시고 편안하게 느끼시게 되기를”이라고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을 섬기고, 우리의 짐을 주님과 나누며, 우리에게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은 분명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특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하는 방법입니다. 예수께서 “(막14: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대접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10:40-42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마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을, 그리고 ‘제자’는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이들 모두를 예수께서는 ‘작은 자’라고 부르며 이들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자는 선지자와 의인, 그리고 제자들이 받게 되는 상과 똑같은 상을 받게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지자와 의인, 그리고 제자들을 예수께서 ‘작은 자’로 부르신 것은 그들이 하는 일들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겨자씨같이 아주 작아 보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전한다 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철저히 무시당했다는 점에서 ‘작은 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들에게 메마르고 무더운 팔레스틴 땅에서 한 그릇 냉수는 생명력 넘치는 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하찮게 보이는 ‘작은 자들’이지만 이들에게 정성어린 냉수 한 그릇 대접은 하늘의 상을 결단코 잃지 아니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들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에 대한 상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값비싼 옥합에 든 향유를 깨어 예수 그리스도에 부은 마리아의 섬김과 사랑은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함께 증거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작은 자’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며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32-46입니다.
(마25:32-46) 그리고 모든 민족을 내 앞에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 놓듯 사람들을 갈라 놓아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세울 것이다. 그때 왕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된 나라를 물려받아라.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 집으로 맞아들였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간호해 주었으며 갇혔을 때 찾아 주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의로운 사람들이 ‘주님, 언제 우리가 주님이 굶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우리가 주님이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우리 집으로 맞아들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우리가 주님이 병드신 것을 보고 간호해 드렸으며 갇혔을 때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왕은 그들에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이들 내 형제 중에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일이 바로 내게 한 일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은 사람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 부하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거라.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 집으로 맞아들이지 않았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병들고 갇혔을 때 돌보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주님, 언제 우리가 주님이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갇히신 것을 보고 돌보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왕은 그들에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일이 곧 내게 하지 않은 일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에, 의로운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에 들어갈 것이다.
성도 여러분의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과 소망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사랑으로 섬기는 삶으로 그 열매를 맺어, 하나님 앞에 영원히 기억되며 금세와 내세에 하나님의 상급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적 무감각에 빠뜨리는 바쁨을 제거하라.
누가복음 10:38-42 / 계강현목사
한 달 여 전에, ‘슬로우 영성’(저자: 존 마크 코머)이란 책을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너무 내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한 번 읽고 정보습득으로 끝낼 책이 아니라, 계속 곰씹어 보고 적용하며 살아갈 필요를 느꼈다. 나뿐만 아니라 현대를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꼭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고난주간 특새에 이 책을 갖고 설교할 건데, 오늘 설교는 그 서론 격이다.
‘슬로우(slow)’라는 말은 이 시대에 잘 맞지 않는 단어 같다. 웹스터 영어사전에도 ‘느린, 게으른, 어리석은, 준비성이나 의지가 결여된, 만성의, 오랜 시간이 걸리는’ 등 별로 좋은 뜻은 아니다. 현대는 바쁜 걸 미덕으로 생각한다. “잘 지내시나요?” 인사하면 “예, 바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게 일반적이다. 바쁘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이란 생각이 가득한 세상이다.
존 마크 코머 목사는 33살의 나이에 한참 급성장하고 주목받던 대형 멀티사이트 교회의 담임목사였다. 그 교회는 7년 연속 한 해에 천 명씩 성도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는 일중독에 빠져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걸 자랑으로 여겼다. 주일에 여섯 번 예배와 설교를 하고 회의까지 마치고 나면 주일 저녁에는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곤 했다. 어느 주일 저녁, 소파에 철썩 앉아 감정적, 영적으로 지칠 대로 지쳐 정신이 멍한 상태로 액션영화에 심취해 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런 자신이 마치 유령이 되어 반은 살아있고 반은 죽은 상태, 무감각한 상태, 맥 빠진 상태, 깊이 생각할 수 없고 시야가 좁은 상태, 감정적으로 자기 삶의 밑바닥에는 끝없는 불안과 슬픔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무엇보다 영혼이 텅 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게 주님이 원하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삶일까?’하는 회의가 밀려왔다. 무엇보다 자신과 가족이 행복하지 않았다.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오래 고민하며 멘토의 자문을 구한 끝에, 한발 물러나는 파격적인 선택을 한다. 정서적, 영적으로 건강하게 살기 위해 삶의 속도를 늦추기로 결정하고, 그는 가차 없이 담임목사직을 사임하였다. 그렇게 지금은 포틀랜드에 작은 브리지타운 교회에서 목회하며, 예수님의 습관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단순화하여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을 시작했다. 그는 지금 매우 행복해하고 있다. 이 책은 그 귀한 결정과 훈련들의 결과물이다. 이 책이 지금 미국 크리스천들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고, 한 때 아마존 북에서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그는 고백하길, “내 인생의 최악의 순간들은 하나같이 바쁜 순간들이었다.”고 말한다. 여러분의 인생의 최악의 순간은 어떤 순간인가? 어쩌면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 사실은 실패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바쁨 속에 조급증에 빠져 짜증과 불평을 말하고 쉽게 분노하며 불안하게 살게 되면서, 관계가 피상적이 되고 깨어지고,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바닥이 된다. 이런 삶을 주님이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덧없는 것에 정신을 파느라 만성적 바쁨에 빠져 영적으로 무뎌진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이 책이 던져주는 귀한 메시지가 있다. 정욕과 세상적 목표를 따라 정신없이 살아가며 과로로 지친 인생들에게 주는 치료제다.
이 책을 설교하면, 혹시 잘못 이해해서 가뜩이나 먹고살기 힘든 가운데 바쁘게 목자 목녀 하고 있는데, 그럼 목자 직을 내려놓고 슬로우 하게 살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에 주저되기도 했다. 반대로 지금도 진짜 슬로우하고 게으르게 사는 데, 이 말씀이 그들에게 더 게으르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는 건 아닐지 염려도 되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다 차제하고 나 자신이 먼저 이 책에서 도전을 받았다. ‘내가 주님의 원하는 삶을 사는 게 아니었구나!’ 각성이 되었다. 모두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점검해봐야 되겠다는 강한 생각이 들었다. 성령님이 이런 동일한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실 것을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하여 전한다.
1. 속도감 있는 삶에 중독된 현대인들
존 마크 코머 목사가 이런 위기의식을 느꼈을 때, 자신의 멘토인 존 오트버그 목사(캘리포니아주에서 사역하는 목사, 작가)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때 존 오트버그는 자신의 과거 얘기를 들려주었다. 존 오토버그 목사도 저자와 똑같이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을 이룬 후, 정신없이 달리는 대형교회의 방식에 남모르게 회의를 느꼈을 때, 지금은 돌아가신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영적 거장인 달라스 윌라드(하나님의 모략)에게 전화를 걸어 영적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제가 바라는 제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때 달라스가 긴 침묵 끝에 들려준 대답은, “삶에서 바쁨을 가차 없이 제거해야 하네.” “혹시 다른 건 없습니까?” 다시 긴 침묵 후에 달라스는 한 번 더, “바쁨은 우리 시대에 영적 삶을 방해하는 큰 적이야. 삶에서 바쁨을 가차 없이 제거해야 하네.”하고 조언해줬다. 저자는 비록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멘토를 통해 전해들은 이 조언을 따라 삶을 바꾸어 행복해졌다. 그래서 이런 간접 조언을 해준 달라스 윌라드에게 자신의 이 책을 바치고 있다.
네덜란드의 코리텐 붐 여사는 “사탄이 우리가 죄를 짓게 만들 수 없을 때는 바쁘게 만든다.”는 말을 했다. 심리학자 칼 융은 “바쁨은 악마의 것이 아니라 악마 자체다.”라고까지 말했다. 우리 자신이 그런 조급하고 바쁜 삶을 살아가는지 여부를 파악하는 체크 질문이 있는데, 혹시 여러분은 해당이 되는지 살펴보라.
1) “바쁘다. 바빠!”라는 말이 입에 배어 있다. 2) 마트 계산대에서 더 짧고 빠른 줄로 옮겨간다. 3) 운전 중에 앞에 있는 차들을 살펴서 차들이 가장 적거나 가장 빠르게 이동하는 차선을 탄다. - 나는 이 부분에 찔렸다. 교인 중에 내 차를 타본 분들이 종종 “목사님, 운전을 터프하게 하시네요.” 그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아내도 종종 그런 지적을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터프한 게 아니라, 물 흐르듯이 운전하는 겁니다.”라고 대답한 기억이 난다. 4) 한 가지 일을 잊어버릴 정도로 멀티태스킹을 한다. TV를 보며 밥을 먹고, 성경을 읽는다. 휴대폰을 하며 대화를 한다. - 이것 또한 찔리는 내용이다. 5) 스마트 폰이 곁에 없으면 불안하다. 6) 아무 할 일이 없으면 불안하다. 7) 최근 집중력과 참을성이 크게 떨어졌음을 느낀다. 8) 사소한 일에도 감정의 동요가 심하다. 9) ‘이건 아닌데,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등이다. 지금 얘기한 것 중에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게 몇 개나 있나?
이 시대 사람들은 첨단 기기, 첨단 문화와 함께 엄청난 속도의 정보 홍수시대를 살고 있다. 조금만 정신줄을 놓으면 뒤처지게 된다. 거기에 대한 압박감을 갖고 쫓아가려고 애쓰며 살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이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해와 함께 리듬을 따라 살았다. 해와 더불어 일어나고 해 떨어져서 어두워지면 잤다. 그러나 시계가 발명되면서 하나님의 통제 아래 살던 인간들이 고용주의 통제 아래 혹사당하게 되었다. 더구나 전구가 발명되면서 사람들은 밤이 되어도 자지 않고 시간은 더 많아졌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은 더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게 되었다. 평균 11시간 잠자던 게 7시간으로 줄었다. 지금은 더 짧게 자지 않나? 그러니 만성 피로에 시달리며 산다. 산업화와 더불어 결정적으로 우리 인생이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한 시점은 스티브 잡스에 의해 우리 손에 스마트폰이 주어지는 때부터다. 인터넷이 우리 호주머니 안으로 들어오면서 우리 삶의 빠름은 가속화되었다. 물론 삶에 편리함을 제공해 주었지만, 동시에 정신없고 분주하고 바쁘게 만들고 피상적인 관계의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다.
최근 미국의 연구에 따르면, 스마트 폰 사용자들이 하루 평균 2,617번 스마트 폰을 만지고, 76번 스마트 폰으로 작업을 하고, 2시간 30분을 사용한다. 밀레니얼 세대(다음 세대)는 이 수치의 두 배가 나왔다. 우리 교회에서 엊그제 실시한 스마트 폰 및 미디어기기 사용 설문조사(104명) 결과를 보면, 스마트 폰(미디어기기)을 21.2%가 3~4시간, 14.4%가 4~5시간 사용하고, 10.5%가 5~10시간, 심지어 2.9%는 10시간 이상 사용한다. 저녁 10시~12시 사용이 35.6%, 새벽 1시~2시 사용이 29.8%, 새벽 2시 이상까지 사용하는 사람도 5.7%나 되었는데, 이들은 수면 장애를 경험한 대상들과 일치했다. 영상 시청과 SNS 인터넷 검색 순으로 이용하고 있었고, 절반 이상이 절제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마트 미디어 기기 때문에 가족과 갈등이 없다(66.3%)가 훨씬 더 많은 것은 그 심각성을 못 느끼거나 너무 당연히 여기고 있단 느낌이 들었다.
한 마디로 느린 걸 견디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음식이 느린 걸 견디지 못해 패스트푸드가 생기고, 영화도 느린 걸 견디지 못해 속도를 1.5배로 높여서 본다. 드라이브 스루를 통해 햄버거를 사서 차를 운전하면서 햄버거를 먹고 전화를 받고, TV를 보면서 밥을 먹고 휴대폰을 검색한다. 차를 운전하면서도 차선을 변경해가며 쫓기듯이 살아간다. 문명의 이기로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났지만, 여유로워진 게 아니라 더 분주하고 바빠지고 집중도가 떨어졌다.
니콜라스 카의 책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인터넷은 사람들의 집중하고 숙고하는 능력을 갉아먹었다.”고 지적한다. 주의 집중 시간이 매년 뚝뚝 떨어지고 있다. 2013년에 마이크로 소프트 캐나다 연구팀이 ‘사람들이 한 곳에 주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실험했는데, 디지털 혁명 전인 2,000년에는 집중 시간이 12초였는데, 13년 후에는 무려 5초가 줄어서 8초가 되었다. 스마트 폰과 유튜브 같은 영상을 보면서 점점 더 신나고 재미있고 더 색다른 콘텐츠를 원하기 때문이란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수치인지, 금붕어의 주의 집중 시간은 9초인데, 우리가 8초니까, 지금 집중도 면에서 사람이 금붕어한테 지고 있다. 그래서 이건 병적인 바쁨이다. 심리학자들도 이걸 ‘조급증 바이러스’라고 얘기한다. 쉬지 못하고 일중독에 빠지고 잘못된 우선순위에 빠져서 살아가는 현상들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인들이다. 그 심각성에 우리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지 않은가!
2. 예수의 사람들의 시간 사용법을 배우자.
슬로우 영성은 단지 느리게 천천히 살자는 게 아니다. 예수님도 사역을 하면서 하루를 바쁘게 사셨다. 어떨 때는 식사할 겨를도 없이 병자들을 치료하니까 믿지 않는 동생들과 친족들이 예수를 미쳤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요한 일에 바쁘셨다. 언제나 일보다 우선하는 것은 선뜻 무리와 제자를 떠나 한적한 곳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독대하여 기도시간을 갖는 일이었다. 슬로우 영성은 주님이 원하시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삶이 뭔지를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쫓기는 분주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자는 것이다. 덧없는 것에 정신을 파느라 영적으로 무뎌진 삶을 벗어나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예수님이 방문했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에 집중하고 있고,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할 음식 준비로 분주하고 마음이 바쁘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도와주지 않는 걸 보고 불평을 터뜨리며 예수님에게 요청했다. v40,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때에 예수님의 대답이다. vv41-42,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42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주님이 자신에게 음식대접을 하지 말라는 걸까? 그건 아닐 거다. 먹기를 좋아하고 잔치를 좋아한 주님이시다. 교회 안에 그렇게 봉사자들이 많아서 일을 분담하면 좋다. 남들은 봉사하는데, 말씀과 기도만 하는 게 잘하는 거란 얘긴가? 아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많은 일로 분주하며 염려하며 들떠 있는 평소의 태도를 지적하시는 거다. 그의 영적 무감각에 빠질 정도의 병적인 바쁨과 조급증의 삶의 방식을 문제 삼고 있다.
멀티태스킹을 하며 정신없이 분주하게 사는 우리를 향해 주님이, “네가 너무 분주하구나. 말씀 읽고 나와 함께 독대할 기도시간조차 갖지 못할 정도로 바쁘구나! 신앙서적 한 권 읽지 못하는구나! 목회일기도 못 낼 정도로 바쁘구나! 너무 많은 염려와 계획 속에 들떠 있구나! 너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씀하신다. 죄나 바쁨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단절시키고, 하나님에게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 예배드리는 시간에도 엉덩이가 들썩들썩 하고, 1시간 반의 예배조차 불안해서 참지 못하고 잡생각이 왔다 갔다 하고, 예배 중에도 전화를 받으러 나간다. 이런 조급증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관계를 깨뜨린다. 악한 사단의 나라는 바쁜 나라다.
서울 광화문 글 판에 2012년 봄 편에 올라온 나태주 시인의 ‘풀꽃1’이란 시가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 시가 서울시민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 들꽃 하나를 봐도 시간을 들여 자세히 오래 봐야 예쁘고 사랑스러운 걸 알게 된다. 그런데 삶이 너무 바쁘고 분주하다 보니까 자세히 보고 오래 볼 새가 없다. 피상적이 된다. 들풀이나 요즘 곳곳에 만발한 벚꽃조차 자세히 볼 여유가 없고, 분주하고 쉽게 분노하고 염려와 근심이 가득 차서 살아가는 우리들 아닌지!
핀란드 격언에 “하나님은 바쁨을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찰스턴 서던 대학교 경영학 교수 ‘마이클 지가렐리’는 전 세계 2만 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무엇인가를 조사하여 결국 ‘바쁨’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바쁨과 사랑은 결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 없다. 바쁜 삶 속에 약속에 늦고 비현실적인 일상에 쫒기고, 하루에 너무 많은 것을 하려다가 분노와 짜증, 비판 불평이 일어난다. 이 모든 게 사랑의 반대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인데,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고 무례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고전 13:4-7)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오래, 천천히 해야 하는, 시간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사람관계도 연애도 그렇다. 빨리 빨리하면 문제가 생긴다. 차분하게 앉아서 생각을 들어주고 말해주고 격려해주고 공감해줘야 한다. 그런데 멀티태스킹에 익숙해져서 피상적인 관계에 늘 머물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해도 피상적으로 깊이 없이 한다. 너무나 바쁘게 흘러가는 시대 속에서, 그리고 너무나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저자는 ‘과연 이렇게 단지 바쁜 삶이 예수님의 길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정말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게 어디 후딱 해치울 수 있는 일인가? 그렇게 살다가 영혼을 다 팔아먹고 자녀들을 다 놓치지 않았나? 하나님 나라의 속성인 사랑과 기쁨과 평안도 마찬가지로 시간을 요하는 일이다. 바쁨은 사탄의 속성이고, 느림은 예수님의 속성이다. 일본 신학자 고스케 고야마는 자신의 책 <시속 3마일의 하나님>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천천히 걸으신다.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시라면 훨씬 빨리 가실 것이다. 사랑에는 나름의 속도가 있다. 그것은 내적 속도이고, 영적 속도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고 표현하지, 하나님과 함께 달린다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가 주는 메시지는, “느린 것은 나쁘고 빠른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은 서두르지 않고 느린 속도로 걷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정상으로 여기는 만성적인 바쁨은 말 그대로 병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필요한 게 바로 속도를 늦추는 슬로우 영성이다.
3. 이 시대를 위한 전인적 슬로우 영성 훈련을 시작하자.
마 11:28-30,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것은 인생의 무게를 지는 전혀 새로운 방식인데, 단지 천천히 사는 게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새로운 멍에를 지고 사는 삶이다. 주님의 쉬운 멍에를 메고 배우는 삶은 그의 교훈만 따르는 게 아니라, 그의 생활방식까지도 따라가는 삶이다. 이런 영적 훈련은 우리 의지력도 사용하지만, 그보다 더 큰 힘인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내 삶을 세세한 부분까지 그대로 따라하라. 내 일상을 네 삶의 모델로 삼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고 해오던 방식에 지쳤느냐? 영혼에 쉼을 원하느냐? 그렇다면 와서 쉬운 멍에를 메라. 내 삶을 세세한 부분까지 그대로 따라하라. 이런 것들이 예수님의 습관들이다. 이 부분은 오늘 그냥 제목만 살펴보고 자세한 내용은 내일부터 설교하겠다.
1) 침묵과 고독 훈련이다.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가장 먼저 스마트 폰을 집어 든다.’가 77%의 청년들의 답이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세상의 좋고 아름답고 참된 모든 것과 우리 자신의 영혼에 집중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침묵과 고독 훈련을 배워야 한다.
2) 안식일 훈련이다. 일을 멈추고 욕구를 멈추고 걱정을 멈추는 연습이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사람이 7일 전부를 남들과 다르게 살 수 있다.
3) 단순함과 늦추기 훈련이다. 영혼을 갉아먹는 물질주의와 소유욕의 굴레를 끊어버리고, 생각하는 속도와 몸을 움직이는 속도를 같이 늦추는 연습이 필요하다.
내일부터 특새를 통해 이런 훈련을 시작하자. 우리를 영적 무감각에 빠뜨리는 바쁨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따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자. 아멘.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눅 10:38-42 / 김서년목사(벧엘교회)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소수의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가까이에 두셨습니다.
우선은 열두 제자를 꼽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이 열둘’을 선택하셔서 제자로 삼으시고, 그들과 늘 함께 다니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열 둘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더 가까이 두신 것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던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실 때,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못 들어갔지만 이 세 사람은 주님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또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에도, 다른 제자들은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 셋은 산 정상까지 함께 올라가서 변화하시는 그 놀라운 장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기도하실 때에도, 이 세 제자는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주님과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이 세 제자는 이렇게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더 가까이에서 주님을 모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한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와 우리 주님은 특별히 가까이 지내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그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그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는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와도 아주 특별히 사랑하시고 가까이 하셨음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더욱 사랑하시며 가까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론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되, 기왕이면 여기 이 세 제자처럼, 또 나사로의 세 남매처럼, 더 가깝고 더 친밀한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것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같이 바라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우리 주님으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는 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 주님으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가까웠던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집에서 있었던 일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실 기회가 있으면 이들 집에서 유숙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 집은 마르다의 소유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르다가 맏이고, 나사로가 중간이고, 마리아가 세 번째일 것이라고 말이지요.
어쨌든 예수님께서 그 집에 유숙하신 것은, 그 집이 특별히 크고 훌륭해서가 아니고, 또한 시설이 좋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 집의 세 남매가 한결같이, 마음과 사랑을 다하여 예수님을 정성껏 섬기며 모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이 사랑과 정성을 다해서 예수님을 대접할 때,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흐뭇하셨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어떤 집에 초대되어 갔을 때 느끼는 바입니다만, 꼭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기쁜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공궤되는 것! ― 그래서 나물만 먹어도 사랑이 거기에 있고 그래서 마음이 기쁘면, 어떤 육선 진미보다도 더 나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을 맞는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서도 그 맞이하는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혼자 가셨다기보다는 일행과 함께 가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늘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귀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신 데다가 일행도 많으니, 맏이인 마르다는 매우 분주히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언니 마르다가 음식 준비하기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그 언니를 돕지는 않고,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하시는 말씀만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내심 ‘이렇게 바쁜데 좀 거들어주지 않고 왜 저렇게 한가하게 앉아만 있는가?’ 하고 불만을 가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 마르다의 말을 듣고서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마르다처럼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마리아처럼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하고 우리의 생각대로 판단하려고 합니다만, 여기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일단 보류해 두고, 우리가 본문에서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결론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바로 이 말씀에서 ‘이 좋은 편을 택하는 자’에게 우리 주님의 더 큰 사랑이 임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마리아가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는 말씀이신데, 그러면 ‘마리아가 택한 이 좋은 편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좋은 편’을 택한다면 더 큰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여기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이 좋은 편’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몇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좋은 편’이란 바로 ‘주님의 편’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찬은, 비록 우리의 몸은 이 세상에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 편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그저 내 편 네 편을 나누고들 있습니다만, 여러분, 우리는 결단코 세상 편에 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편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소속이 어디입니까?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어도,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편인 것입니다!!
마리아를 보세요. 마리아는 언제나 예수님 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그 하시는 말씀을 청종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12장 3절에 보면,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발 앞에서 떠나기 싫어했던 여인!! 항상 주님 곁에 있고 싶어했던 여인이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그 마음을 예쁘게 보셨겠습니까? 그렇게 열정적이고 헌신적이고 또 적극적인 마리아를 왜 사랑하지 아니하고, 귀히 여기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다 주님의 ‘더 큰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더 큰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항상 물어야 할 질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마리아처럼 헌신적이고 열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주님 앞에 다가서고 있습니까?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주님 앞에 가까이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항상 주님의 편에 서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사탄 마귀가 우리 인간을 하나님 편에서 떠나게 만들려고 합니다. 사탄은 우리 인간을 예수님 편에 서 있지 못하게 합니다. 계속 훼방합니다.
우리 인간이 주님께로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마귀가 이를 방해하며 잡아당깁니다. 사탄은 ‘예수께 가지 마라, 교회 나가지 마라, 오늘만 주일이냐? 오늘은 놀러가고 다음 주일에 나가라. 피곤한데 새벽기도는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푹 더 자거라’ ― 이렇게 속삭입니다. 기도하려고 하면 기도 못하게 방해합니다.
하지만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님 앞에 가장 가까이 가는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하는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마귀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바쁘니까, 피곤하니까, 이러니까 저러니까’ 하면서, 갖은 핑계를 붙여서 우리를 하나님 편에서 떨어져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로 무장해야 됩니다. 더욱 모이기에 힘쓰며 예배해야 합니다.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욱 겸손히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내가 무엇을 할까? 내가 어떻게 할까? 내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까?’ 계속, 계속, 다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꾸만 이 핑계 저 핑계로 기도하지 않게 만들려고 합니다. 예배하는 일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유혹을 뿌리치고 예수님 편에 서야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에서는 망령됐다”(히 12:16)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가 망령되는 것입니까? 이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그의 행위’에 대한 평가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떠났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결국 ‘세상 물질’과 ‘하나님’을 맞바꾼 것입니다. 그 결과, 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계보에 들 수 없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에서 떠난 에서는 에돔과 모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이스라엘이 되지 못한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결국 야곱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더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는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행 1:25) ‘직무를 버렸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버리고 세상으로 간 것입니다.
예수보다도 ‘돈’이 지금 당장 더 귀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보다도 ‘명예’가, 예수보다도 ‘출세’가, 예수보다도 ‘지금의 향락’이 더 크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다 사탄의 유혹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결단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잘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버리고 우선 자기 눈에 더 좋아 보이는 것에 기울어진 사람들이 다 어찌 되었나 보십시오. 주님 앞에 서 있지 않고, 주님 편에 서 있지 않고, 주님을 떠난 사람들이 다 지금 어찌 되었나 한번 보십시오. 정말 한심스럽지 않습니까?
시편의 시인은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오며, 내가 늙어도 주님 버리지 않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늘 이렇게 기도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직업에서 일하든 우리는 예수님 편에 있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떳떳하고 투명하게, 언제든지 누구 앞에서든 예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예수 편도 아니고 세상 편도 아니고, 왔다 갔다 하며 ‘갈 지자’ 걸음을 걸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분명하고 선명하게, 예수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편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 편에 더욱 가까이 있기 위해 기도하시며, 더욱 힘쓰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이 좋은 편’은 바로 말씀과 진리의 편인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말씀 편에 서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 듣기를 그 무엇보다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찾을 수 없는 보화이지 않습니까? 가진 재산 다 팔아서라도 그 진주를 사야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말씀을 꿀처럼 달게 여기고, 보석처럼 귀하게 여기고, 주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오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온 가족과 일가 친척과 친구들을 다 모아놓고는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이제나 오시려나 저제나 오시려나 간절히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도 이같이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모하는 영혼은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서 8장 3절에 보면, 에스라가 수문 앞 광장에서 모세의 율법책을 낭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이 그것을 어떻게 들었느냐 하면,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새벽부터 정오까지, 일곱시간 동안 말입니다.
한 시간 동안 예배드리면서도 지루해 하는 우리 현대인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들은 일곱시간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시간은 눈물의 집회요, 아멘의 집회요, 축복의 집회요, 말씀의 집회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성루에 서서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았습니다.’(2:1) 그는 ‘주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실까?’ 귀 기울여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배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찬송과 또 주의 종의 입술을 사용하셔서 무슨 말씀을 하실는지 귀 기울이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또한 하박국은 “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며 기다렸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가 살아가며 당면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묻고 그 대답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문제들을 우리 스스로의 생각대로 판단해버리고 처리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고 그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듣고 해결하는 사람이 바로 이 좋은 편, 곧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시편 119편 131절에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시편 42편 1절에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 얘기가 되었습니다만, 북한에 외부에서 사람들이 잘 들어가지 못하던 당시에, 미국 장로교 총회에서 일하시는 한국인 목사님 한 분이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미국 정부의 신임장을 들고 북한에 들어갔습니다. 그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목사님이 평양을 갔었는데, 성경책을 일부러 끼고 평양거리를 지나가니까, 어떤 할머니가 “그 책이 성경책이지요? 참말로 반갑습니다. 그리웠습니다. 성경책 좀 봅시다” 하면서 쫓아오더랍니다.
한때는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거리이지만, 김일성과 공산당이 집권한 이래 성경책이란 다 불태워 없애버렸고, 교회당은 다 파괴해 버렸고, 그러니 평양거리에서 성경책을 끼고 가는 사람을 어디 한번인들 보았겠습니까? 그런 중에 성경책을 보았으니 반갑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그 성경책을 자기에게 주고 가라고 조르더랍니다. 목사님이야 그랬으면 좋겠지만, 만약 발각됐다가는 할머니가 위험할 것 같아서 망설였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죽어도 좋습니다. 이제 제가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죽는 것이 무섭지 않습니다. 옛날에 보던 그 성경을 펴놓고, 한번이라도 보다가 죽는 게 소원입니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경책을 주고 왔다고 그럽니다.
그 후에 그 할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느낀 점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경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우리 마음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우리는 성경을 자주 대하고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북의 그 할머니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할머니말고도 얼마나 많은 북한의 지하 교회의 성도들이 성경을 그리워하고 있겠습니까?!!
예수 편에 선 사람은 예배를 기다리고, 주일을 기다리고, 말씀을 기다립니다. 반면에 세상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유행하는 노래,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이 좋은 편’은 ‘오직 이것 한 가지다!’―이렇게 생각하며 거기에 충성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흔히 오해하기 쉬운, 그러나 결코 오해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르다가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려 한 것은 ‘육신을 위한 것’이니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마리아처럼 말씀을 듣는 것이 ‘영적인 일’이니 그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흔히 본문의 이 장면에서 그렇게들 오해하기가 쉽습니다만,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닌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말씀을 듣는 영적인 일이 중요하다’고 마르다도 거기 앉아만 있었고, 그래서 아무도 예수님과 손님들에게 음식 대접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 교회에는 수고하고 헌신하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만약 모든 성도들이 예배 중에 봉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모두가 다 예배위원만 한다든지, 성가대원만 하려 한다든지, 또는 교사만 하려든다면, 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어떻게 되고 말겠습니까?
본문에 보면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이것 저것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하여, 염려하고 근심하였습니다. 내가 하는 이 일도 버리지 못하겠고, 다른 사람이 하고 있는 저 일도, 마리아가 하고 있는 그 일도, 이렇게 이것 저것 다 중요하게 여기다가 그만 마음이 흐트러지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도 집중하지 못하니 분주하기만 하고, 그래서 염려하고 근심을 하는 것이지요.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르다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그 시점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그 일에 손을 대었다면, 바로 그 일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남이 어떻게 한다고 거기에 흐트러지지 말아라. 오직 그 일로 충성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 이 말씀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우리가 살아갈 때, 참으로 고민도 많고 번민도 많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왜 그런 것입니까?
그러나 ‘오직 이것뿐이다!’ 할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집니다. 오직 이것뿐이고, 그것만 해야할 때에 무슨 고민이 있겠습니까?
이북에서 피난오신 분들에게서 들은 간증입니다. 미쳐 피난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피난 내려오실 때, ‘오직 38선을 넘어야 한다’는 이 한 생각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무슨 먹을 걱정, 입을 걱정, 무슨 딴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 ‘한 가지’는 매우 단순 명료합니다. 그러나 가장 귀합니다. 가치로 따지면 이보다 더 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한가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내가 가야할 궁극적 그 목적지를 바라보고 ‘그 길을 향해 갈 때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가장 중요한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바로 그렇게 하였기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르다도 그가 하는 그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거기에 전념하며 충성하였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마르다를 향하여 ‘네가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 하시며 아주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좋은 편을 결정하고, 거기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래서 흐트러지거나 분주하거나 염려하거나 근심하거나 하지 않고, 바로 그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주님께서는 더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주님께서 더 사랑하시는 ‘이 좋은 편을 택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바로 ‘감사하는 사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과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에 이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부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이 행위를 가리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가장 기뻐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이 행위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은혜에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으로 드림으로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주님! 주님의 그 은혜에 내가 참으로 감사 감격 하나이다!! 나의 이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드리오니, 나의 이 정성, 나의 이 감사를, 주여 받아주시옵소서!!”
“그래, 너의 그 감사, 너의 그 정성, 내가 기쁘게 받노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시편 104편 3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우리가 평생에 할 일은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일입니다. 이 한가지보다 더 귀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생활입니다.
그리고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하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이시겠다!! ― 다시 말해서 더 사랑하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벧엘의 성도 여러분! 가장 가치로운 것―그 한가지를 택하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충성을 다 하십시오. 우리는 주님 편에 속한 자로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특히 우리는 지금 11월―감사의 달을 맞이하였고, 두주 후에는 감사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더욱 넘치는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마리아처럼 ‘여러분의 옥합’을 주님께로 깨뜨리십시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너는 참으로 이 좋은 편을 택했다!” 이렇게 칭찬 받으시며, 더욱 큰 주님의 사랑을 더욱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한 가지
눅 10:38-42 / 이대성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주가 원하시는 한 가지”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주가 원하시는 한 가지” 여러분! 요즘 TV를 보면 맛있는 음식점 즉 유명 맛집을 소개하는 프로가 빠짐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보면 더더욱 맛있게 보이기에 꼭 한 번 가서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게 됩니다. 보통 이런 식당들을 보면, 사람들이 먹기 위해 번호표를 받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명 맛집들을 보면 대개 특징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특징은 맛있다고 하는 한 가지 메뉴만을 가지고 장사를 하더라는 겁니다. 별반 다른 메뉴가 없습니다. 그냥 한 가지 메뉴인데도 늘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런 저런 메뉴를 다 잘하면 좋을 것 같은데 한 가지만 잘해도 크게 소문이 나고, 소위 대박이 나더라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교회도, 우리의 신앙도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 저것 우리가 다 잘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한 가지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분명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다른 대형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인프라나 프로그램을 다 따라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여러 가지 사역과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싶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가 다른 대형 교회와 똑같이는 하지 못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이 잘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외적인 규모에 상관없이 정말로 우리가 잘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겁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이를 기도하며 생각해 왔었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비록 작고 연약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주께서 원하시고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과 장비나 인원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을 누리면서 기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저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짜증스러울 정도로 복잡한 현대 문명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지혜롭게 구별하지 않으면 인생의 실패자가 될 수 있다.
사소한 것들을 중요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거기에 매달리다 보면 파멸을 자초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소한 것들의 홍수’에 빠져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사소한 것들이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들이 당신의 몸과 마음을 압사시키기 전에 빨리 거기서 빠져 나오라.” 그러므로 우리도 주가 원하시는 바로 그 한 가지를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을 영적인 교훈으로 삼아 주가 원하시는 바로 그 한 가지를 온전히 회복함으로써 우리 주님을 진정 기쁘시게 해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맞이하게 된 마르다는 매우 분주한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이 집안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그녀로써는 예수님을 잘 영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는 철이 없어서 그런지 도대체 마르다를 도와주지를 않습니다. 더욱이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만을 듣고 있는 겁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마르다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가서 투정하듯 말합니다. “예수님, 제 동생으로 하여금 제가 하는 일을 돕도록 말씀해 주세요!”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조금 전에 함께 읽은 42절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좋은 편”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 좋은 편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 – 그것은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예배의 자리를 선택했으며, 그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 그 무엇에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배의 자리가 왜 그토록 중요할까요? 예배는 모든 것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스미스라는 유명한 예배 사역자는 예배를 가리켜서 “우리 신앙의 핵”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핵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핵심 즉 중심에 놓여 있음을 뜻합니다.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모든 것의 중심입니다. 여러분! 이 ‘중심’이라는 말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중심’이라는 말에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전자제품의 중심 하이마트”라고 한다면, 하이마트에 가면 모든 전자제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도 항상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모든 것의 중심이라면, 그 중심에 어떤 존재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 존재가 과연 누구이시겠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예배의 중심에는 늘 항상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의 자리에 언제나 거하십니다.
예배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항상 예배의 중심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산에서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산 정상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왜입니까? 산 정상은 하나이고, 그곳은 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모든 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산 정상에 올라가면 우리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산 정상으로 가면 하산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확실한 정답을 발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면 그곳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든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그 분을 통해서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실패해도 좋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인간관계에 실패하고, 자녀교육에 실패해도 하나님은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해도 좋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인생의 목적을 잃고 낙심하고 있어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 우리를 예배의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 홀로 있음에 더욱 힘들어지는 그 순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자리에서 우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분이 그 자리에 계시기에 언제든 우리는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우리는 여러 각도로 해석합니다. 때로는 형님의 입장에서, 때로는 동생의 입장에서 해석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석을 해도 변하지 않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집을 나간 아들을 밤새도록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늘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유산을 가지고 도망친 아들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알면 정말이지 창피해서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그런 불효막심한 아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만을 밤새 문 열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들이 성공해서 돌아올 것이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냥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몇날 며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을 나갔던 아들은 비로소 고향집에 돌아와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 진실된 사랑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배의 자리로 나오는 성도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실패해도 좋고, 가진 것이 없어도 좋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으로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두 팔 벌려 기쁘게 우리를 맞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무엇보다도 먼저 신앙생활의 핵인 예배가 중심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날마다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과 47절 말씀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만 성전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왔습니다. 시간이 남아서 왔을까요? 그들에게는 직장도 없고 가정도 없고, 돌봐야 할 자식들도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들도 우리와 똑같았습니다.
매일같이 일해야 먹고 살 수 있었으며, 돌보지 않으면 늘 말썽만 피우는 자식들도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살림을 해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날마다 모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날마다 교회에 가면 어떻게 먹고 살아?’ 바로 이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말씀하실 때에 먼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41절을 보니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렇다면 도대체 이 무슨 말입니까? 근심 걱정, 염려 일랑 다 내려놓으라는 겁니다.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좋은 것을 선택하기만 하면 다른 것은 별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대체 무엇이 좋은 것입니까? 예배가 좋은 것입니다. 예배가 신앙의 핵입니다. 예배를 선택했다면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잠 한 시간 덜 자고 날마다 하나님 전에 나아와 기도하고, 말씀 듣고, 그 말씀대로 믿고 나아가면 저와 여러분에게 과연 무슨 일이 생길까요? 하나님 말씀이 우리 삶속에서 실제가 될 줄로 믿습니다.
넘실대던 홍해 바다와 요단강물이 쫙 갈라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 젖은 땅이 마른 땅이 되어 온전히 걸어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도 와르르 무너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늘의 태양이 멈추어 서는 기적 또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반드시 차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양 부를 때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함으로 상처와 질병은 치유함 받고, 한 길로 들어왔던 사탄 마귀는 일곱 길로 쫓겨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인생이 매일 같이 고단하고 힘들지 않으십니까? 어느 날 하루라도 위로받지 않고는 견딜 수 있는 날이 있으십니까? 그렇다고 해서 사람에게 받는 위로로 상처 입은 우리 영혼이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 크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상한 심령이 온전히 치유함 받는 예배의 자리만큼은 결단코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날마다 말씀보고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바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형제와 화목한 후에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형제와 화목한 후에 예배드려야 합니다.” 마르다는 전부터 그토록 함께 있고 싶었던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마음은 결코 기쁘지 않았습니다.
왜 기쁘지 않았을까요? 동생 마리아의 행동이 너무나도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 동생의 행동이 못마땅하게 여겨지니까 주님과 함께 있어도 전혀 기쁘지가 않은 겁니다.
주님을 위해 깨끗이 집을 청소하고,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면서도 즐거움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마태복음 5장 23절과 24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여러분! 성도들 간에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셀모임에서든, 선교회 모임에서든 의견 충돌로 인해 서로 간에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 사람 때문에 교회 못 다니겠어요!”
그런데 이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입니다. 그 누구 때문에 교회에 안 나오겠다고 버젓이 이야기 합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목사로써는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왜 제가 답답하고 안타까울까요? 그들 모두가 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누구만 좋아합니까? 사탄 마귀만 좋아합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석지변으로 변하는 사람을 바라보지 마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는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한없는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전에 나아오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능력의 말씀을 통해 치유함 받고, 위로의 말씀을 통해 용기도 얻고, 삶에 대한 의욕도 불끈 불끈 솟아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지 않고 세상에 발을 담그고 사는 분들은 그 마음에 분노로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버젓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열 받고서 아예 세상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화목해야 합니다.
갈등이 있다면 씻어 버려야 합니다. 싸웠다면 화해 해야 합니다. 오해했다면 먼저 찾아가서 그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배를 드려야 우리 모두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에는 여러분이 먼저 주도적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먼저 잘못했다고 손 내밀고 그에게 용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은혜 받는 일에서만큼은 주도적이 되십시다!”
요즘 핸드폰이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말로 하기 힘들면 진심을 담아 문자로 보내보시기 바랍니다. 그 문자를 통해 화해의 물꼬가 트여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은혜 받는 것만큼은 내가 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 다른 그 무엇에도 빼앗길 수 없습니다. 마르다도 얼마든지 은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음식을 만들면서도 은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음식 장만은 내가 했다면 설거지는 나중에 마리아를 시킬 요량으로, 말씀 듣는 시간만큼은 분명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들 간에 갈등을 겪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오늘 이 순간 이후로 여러분이 먼저 상대방에게 용서와 이해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다 하나님께 은혜 받는 예배의 자리만큼은 끝까지 지키는 굳건한 믿음의 용사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주님께 집중해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 집중해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41절과 42절 말씀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이 무슨 뜻입니까? 한 가지만 하라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 만이라도’ 이 말은 몇 가지를 할 수 있으면 한 번 해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몇 가지를 다 감당할 수 없거든 한 가지만이라도 온전히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 말씀을 듣는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르다와 마리아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요? 마르다는 매우 분주했던 반면에, 마리아는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한 가지! 바로 그것을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은혜 받는 예배는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소천하신 아버지께서 월요일마다 전화로 저에게 늘 하시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납니다.
아버지가 저에게 원하셨던 것은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가끔 한번씩 제 얼굴을 보고 싶으셨던 겁니다. 그것도 안 되면 전화상으로라도 제 목소리를 듣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그리 바쁘다고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하고, 전화 한통 하지 못했는지... 너무나도 후회막심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부모님을 찾아뵙고 싶어도 결코 만날 수 없고, 아무리 부모님 음성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 사람과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이제는 아무리 카톡을 보내도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없기에 카톡의 1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와 늘 함께 있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시도 때도 없이 말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의 자리는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입술로는 “나 구주 위해 살리라!” 찬양을 힘차게 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느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 일등도 아니고 이등도 아니고 삼등! 아니 아예 등수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지금 당장에 해야만 하는 바로 그 일마저도 주저하지 않고 내려놓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온전히 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 말씀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성령 안에서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드릴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일에 여러분의 관심이 분산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만 모든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배는 신앙생활의 핵입니다. 신앙생활의 중심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주님이 항상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예배의 자리에서 여러분을 만나길 고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혹여 상처가 있으십니까? 실패의 경험이 있으십니까? 뼈저린 아픔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주님 앞에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항상 그 자리에서, 늘 언제나 예배의 자리에서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고자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날마다 주님께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이는 꼭 주님 전에 나아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에 있어 우리의 분주함이 핑계가 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한 모진 박해와 핍박 가운데서도, 어쩌면 우리들보다 더 바쁜 삶을 살면서도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예배드리기에 앞서 그 동안 불신 반목했던 형제를 찾아가 먼저 화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처가 있는 상태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면 결코 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용서한 후에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 왔다면 오직 주님께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늘 언제나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사랑한다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오직 그 분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3년여 동안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로 인해 솔직히 우리의 신앙이 많이 나태해졌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열심을 품고 주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한 가지! 신앙생활의 핵심인 예배부터 다시금 온전히 회복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주가 원하시는 예배를 우리 인생의 가장 중심에 놓고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 누가 뭐라 해도 말씀의 자리를 결코 빼앗기지 않았던 마리아처럼 우리 주님이 주시는 한량없는 은혜와 복을 누리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좋은 편을 택하라
눅 10:38-42 / 김양인목사(목양제일교회)
오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한 마을’이란,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3킬로 떨어진 베다니 마을입니다. 그곳에는 마르다가 동생 마리아와 오라버니 나사로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 세 남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며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으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면 거의 빠짐없이 그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때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부담 없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보살펴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를 매우 사랑하셨고,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 살려내신 적도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 마을에 가셨는데 마르다가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마르다는 갑작스레 찾아온 많은 손님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느라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동생 마리아가 도와주기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마르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예수님께 나아가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매우 짧지만 한 폭의 정겨운 그림처럼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편을 택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그녀의 집을 찾아오실 때마다 기쁨으로 맞이하였고 성심껏 대접했습니다. 그날, 혼자서 많은 음식을 장만하느라 얼마나 분주했을까요? 동생이 부엌에 나와 거들어 주었으면 했으나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느라 언니 생각을 잊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그의 입장을 이해해 주실 줄 알았으나 오히려 마리아를 두둔하시자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르다를 책망하신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얼굴에는 따뜻한 웃음이 번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정성과 수고를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데도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이 있다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으며,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고 생략해도 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없으므로 중요한 일부터 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일과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일, 이 두 가지는 다 귀한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자도 상을 주시마 하셨는데, 주님께서 성심껏 주님을 대접하려는 마르다를 무시하실 리 있겠습니까? 그러나 두 가지를 놓고 경중을 말하자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음식을 대접하는 것보다 중합니다. 그것은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거나 주님의 말씀처럼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라도 무방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므로 생략하거나 나중으로 미룰 수 없으며 들을 기회가 주어졌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을 방문하신 것은 절기를 지킬 때나 예루살렘 전도를 하실 때로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성경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하였듯이, 우리의 믿음이 자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열심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말씀이 흔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성도마다 성경책을 갖고 있고,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드리며 설교를 들을 수 있고, 라디오나 티브이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말씀이 흔하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귀한 줄을 모르는 신자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 보릿고개가 있었던 과거에는 밥 한 그릇이 그렇게 소중했는데, 요즘은 한국인들이 부자가 되어서 밥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생각만 있으면 언제라도 먹을 수 있으므로 양식 귀한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양식은 과거나 지금이나 소중한 것입니다. 곡물 가격이 저렴하다고 양식을 하찮게 여기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흔하다고 해서 그 소중함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밥 대신에 인스턴트식품을 즐겨 먹습니다. 그러나 인스턴트식품은 당장에 먹기에는 맛도 있고 편리하지만 거기에 치중하면 영양 불균형이 생겨 비만이나 성인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힘쓰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이나 세상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다가 영적 영양실조에 걸리는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인스턴트식품에 중독되면 몸에 이상증상이 생겨도 입맛이 잘못 길들여져서 밥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힘쓰지 않으면 영적으로 병들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마리아처럼 신앙생활의 우선순위를 올바로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말씀 듣는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11)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13)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암 8:)고 했습니다.
이 예언은 말세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져서 듣고자하나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영적으로 볼 때 낮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완전하게 보장받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캄캄한 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도 자유롭게 모일 수 없고, 목회자도 없고 성경도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지도 못합니다. 몰래 예배하고 기도하다가 발각되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거나 처형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때 태만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0장에 이르기를 “23)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24)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25)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라고 했습니다.
갓 주님을 믿은 신자들은 설교를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콩나물을 키울 때 물을 주면 곧장 밑으로 다 빠져버리지만 그런데도 하루에 물을 몇 번 끼얹어주기만 하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처음 한 동안은 설교를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듣다보면 믿음이 자라고 조금 씩 조금 씩 말씀이 들리고 이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주님께 가까이 하는 편을 택해야 합니다.
그날 마르다의 집에는 예수님만 오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함께 방문했습니다. 방안에는 예수님과 마리아 뿐 아니라 열 두 제자들도 함께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맨 앞자리인 주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한 마디로 빠뜨리지 않고 경청하려는 태도입니다. 예로부터, 예배실의 맨 가운데 앞자리를 은혜 받는 금자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성도님들의 경험을 통해서 증명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앞자리에 앉으셔서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발아래에 앉은 것은 그가 얼마나 주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간절함 또는 열심은 신앙의 기본요소입니다. 시편 42편 1절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지 않는데도 은혜를 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학생이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데 열심이 없는데 실력이 향상될 수 있겠습니까? 경기에 출전한 선수가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고서 메달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2)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을 만나고 위대한 응답을 받게 됩니다.
열심이 있으면 주의 일을 많이 해도 지치지 않습니다. 열심을 내면 낼수록 주의 일에 재미가 붙습니다. 또한 열심 있는 성도는 자연스럽게 다른 성도들을 분발시켜 열심을 내게 합니다. 마치 불이 다른 곳으로 옮겨 붙듯이 말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이 유별난 사람으로서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기까지 지치지 않고 바알숭배자인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에 대항하여 싸워 승리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사도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복음 전파를 위해 열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헌신으로 인해 복음이 세계만방에 전파되었고 지구 맨 끝에 있는 우리도 복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주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경청한 것은 그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여 줍니다. 사랑 역시 신앙의 기본요소입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여쭙기를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29)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내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려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여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감탄하기를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움 없이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요일 4:18).
자녀들을 사랑하거든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를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방탕했던 어거스틴을 회심케 만들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위대한 일군이 되게 한 것은 끝까지 그를 위해 눈물로 권면하고 기도했던 어머니 모니카의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회심한 어거스틴은 더 이상 세상을 좇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발휘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이냐 주님이냐 선택의 기로에 설 때 주님께 가까이 하는 편을 택하시기 바립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세상을 이길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범사에 좋은 편을 택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21)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고 했습니다. 여기서 ‘좋은 것’이란 선한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오셨을 때 주님의 말씀을 듣는 편을 택했습니다. 마리아는 그 편이 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던 마르다가 무슨 악을 행했다거나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르다의 행동은 선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는 칭찬을 받아 마땅합니다. 다만, 두 자매를 비교할 때 마리아가 마르다보다 더 좋은 편을 택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지만 마르다처럼 주의 일에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마르다가 마리아처럼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다음에 동생과 함께 음식을 장만했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해야 하지만, 여기에는 엄연한 순서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순서를 반드시 지켜야지 뒤바뀌면 크게 잘못되고 맙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범사에 좋은 편을 택하려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시되 하나님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는 목적으로 행하셨습니다.(요 14:13)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행할 때 그것이 좋은 편을 택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인지 여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이르기를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것은 자기 원하는 대로 해도 무방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먹고 마시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중요한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우리의 어떠한 행위이든지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거든 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 같거든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의 기준을 분명하게 세운다면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인지를 두고 갈등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갈등이 생기는 것은 우리가 기준을 확고하게 붙들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는 편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좋은 편을 택하려면 성령님의 인도를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16)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17)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 5:)라고 했습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을 성전 삼아 거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난 성도는 성령을 그 심령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일러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감화를 주십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십니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성령의 감화를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화를 순종하면 언제나 좋은 편을 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성령의 감화를 방해하는 육체의 욕망을 제어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어느 성도님께서 저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오늘 아침 친척이 찾아왔는데 ‘나는 먼저 예배를 드려야 하니 당신은 여기서 기다리든지, 나중에 다시 오든지 하라’ 하고 교회에 나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 성도님은 성령의 인도를 순종함으로 육체의 욕망을 이긴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 이르기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소멸이란 불을 끈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감화하실 때 “아멘”하고 순종하고 거역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좋은 편을 선택하도록 감화를 주시는데도 우리 고집대로 행하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가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근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성령의 감화를 순종하여 좋은 편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느라 마음이 분주하여 동생 마리아가 도와주지 않은데 대해 불평했으나, 주님께서는 말씀 듣는 편을 택한 마리아를 감싸주시고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통하여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편을 택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마리아처럼 항상 좋은 편을 택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삶을 평화롭게 하는 더 좋은 선택
눅 10장 38~42절 / 송기성목사
“자유는 선택이고, 선택은 책임이다”(Freedom is choice, choice is responsibility.)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선택의 자유에 대한 책임도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다양한 선택을 통해서 변화와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들은 물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다를 때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선택에 관한 말씀입니다. 마르다의 선택은 주님을 위한 봉사였습니다. 반면에 마리아의 선택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경청이었습니다. 마르다의 선택도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의 선택을 더 좋은 편을 택하였다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왜 마리아의 선택을 더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하셨을까요?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시는 교훈은 “삶을 평화롭게 하는 더 좋은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하나님을 위한 육적인 봉사보다 우선시 하는 것이 삶을 평화롭게 하는 더 좋은 선택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은 하나님을 위한 봉사에 그 누구보다도 크게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사역을 가능케 한 비결은 매일 새벽마다 적어도 한 시간 이상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영적 관계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위한 봉사에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그 이름이 ‘여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주님을 잘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해졌습니다. 여기서 ‘준비하는’일이란 ‘봉사하는’일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준비하고 봉사하고자 한 마르다의 선택은 결코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고맙고 칭찬할 만한 좋은 선택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님께 칭찬을 받지 못했습니다. 주님께 칭찬을 받은 사람은 동생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의 별명은 ‘발 아래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눅10:39). 그리고 그녀는 죽은 오라비 나사로를 위하여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드렸습니다(요11:32). 뿐만 아니라 그녀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값진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어 드리기도 했습니다(요12:3). 마리아의 특징은 주님을 위한 육적인 봉사보다도 주님과의 영적인 관게를 더 중요시 하고 우선시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더 좋은 편을 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결코 편견이나 편애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발 아래 여인’마리아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가까이 하였으며, 주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였을 뿐 주님의 발 아래 앉지도 않았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다만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며 봉사코자 하였습니다만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녀는 주님께 감히 불평하고 불만하였습니다. 그녀는 결국 주님께 칭찬은커녕 책망을 받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보다 하나님을 위한 육적인 봉사를 앞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하나님을 위한 일보다 우선시 하고 중요시하는 것이 삶을 평화롭게 하는 더 좋은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믿음이 좋은 의사의 이야기입니다. 소문을 듣고 많은 환자들이 몰려왔습니다. 병원을 하나 더 지어서 운영하면 매달 평균 2억 원 정도의 수입이 늘어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수입이 더 들어오면 선교를 위해 더 유용하게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응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얘야, 나는 너의 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의 관계를 원한단다.” 그는 사실 그의 동기 자체는 순수했지만 늘어나는 일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는 자신의 영적인 삶을 돌이켜 보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이 아침 진료와 일과에 쫓겨 점점 짧아지고, 하나님보다는 병원 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하여 매월 2억여 원의 수입을 포기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매마른 영혼에 지극히 큰 평안이 넘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봉사보다 더 중요한 것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 채 하나님을 위한 일에 분주한 사람은 그 마음에 평안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도리어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 하는 더 좋은 선택을 한 사람은 주님을 가까이 합니다. 주님의 발 아래 앉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비록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듣고 욕을 먹을지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맞대응 하지도 않습니다. 평온하고 태연하게 대응할 뿐입니다. 삶을 평화롭게 하는 더 좋은 편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존 뉴튼은 “성경을 빼고 꼭 읽어야 할 책이라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의 저자인 윌리엄 거널(William Gurnall, 1617 - 1679)은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감동이 아니고 그 갑옷의 주인이신 하나님이다”라며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전쟁에 있어서 전신갑주를 입고 싸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전신갑주가 아니라 그 전신갑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중요시 하고 우선시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을 위한 봉사에 앞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인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위한 일도 좋은 선택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삶을 평화롭게 하는 더 좋은 선택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삶을 평화롭게 하는 더 좋은 선택을 하셔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주님께 칭찬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2. 필요한 것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게 여기는 것이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보다 삶을 평화롭게 하는 더 좋은 선택입니다.
최근의 갤럽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 95%가 자기 직업을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자기 직업으로부터 얻는 의미와 목적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장마비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때는 월요일 오전 8시부터 9시 사이라고 합니다. 이는 주말에 쌓인 피곤과 주초부터 다시 씨름해야 할 일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르다는 ‘여주인’이라는 이름 그대로 근면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기쁨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헌신적으로 주님을 대접하고자 하였습니다. 주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고 대접한다는 것은 마르다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광이며 또한 최대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마음에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평화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녀의 마음과 입에는 불평과 불만, 염려와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그 원인은 그녀가 준비하는 일이 너무 많아 마음이 분주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분주한지라’(페리에스페토, distracted)라는 말은 마음이 ‘사방에서 끌어당긴다’라는 뜻으로 마르다가 정신없이 바쁜 상태에 처해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준비하는 일이 많고 마음이 분주하다 보니까 마르다는 주님께 칭찬을 받기는커녕 책망을 듣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리아는 ‘발 아래 여인’이라는 별명 그대로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주님의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 언니 마르다와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자신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동생은 한가하게 말씀만 듣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가 감히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10:40)하고 부탁드렸습니다. 그것은 점잖은 부탁이라기 보다 무례한 원망과 요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주인답지 않게 불평을 토해낸 마르다를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2). 예수님은 마르다의 요청을 사실상 거절하셨습니다. 대신 더 좋은 편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게 여기는 것이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보다 삶을 평화롭게 하는 더 좋은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페르샤(이란)의 선교 선구자 헨리마틴(1781-1812)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801년 20세 때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석으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최고의 영예를 쟁취하려고 할 때 “네가 너를 위하여 큰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렘45:5)라는 말씀이 그의 뇌리에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는 최고의 소원을 성취했지만 그가 잡은 것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게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 낙심과 슬픔에 빠져 있던 그는 어느 날 성경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점점 더 알게 된 그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인도에서 귀한 사역을 마치고 그는 페르샤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위험한 도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만류했지만 그는 페르샤로 향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페르샤 언어를 배운 다음 9개월 만에 신약성경 전체와 시편을 번역했습니다. 페르샤에서 자신의 생애를 6년 반 동안 불태운 그는 마침내 왕으로부터 성경의 인쇄와 배포에 관한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흘 뒤 학질과 열병에 걸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1812년 10월 6일 마지막 일기를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과수원에 앉아 감미로운 위로와 평안을 누리며 나의 하나님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홀로 앉아 있었지만 고독 속에서 나의 벗, 나의 친구, 나의 위로자이신 보혜사께서 나와 함께 계셨다.”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필요한 것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게 여기는 평화입니다. 꼭 필요한 것 한가지만이라도 족하게 여기지 않고 많은 것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사람에게는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습니다. 도리어 자기가 자원해서 시작한 일에 대해서 짜증을 냅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기쁨으로 영접한 주님께 대해서도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게 여기는 더 좋은 편을 선택한 사람은 다소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친구이자 위로자이신 보혜사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평안을 누릴지언정 염려와 근심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는 삶을 평화롭게 하는 더 좋은 편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기쁨은 정복을 통해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기꺼이 내려놓음으로써 받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려놓는 사람은 불평이나 불만, 근심이나 걱정을 그 마음과 입에 담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것은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향하고 추구해야 할 것은 필요한 것 한가지만이라도 족하게 여기는 평화인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보다 필요한 것 한가지만이라도 족하게 여기는 단순함이 더 좋은 선택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삶을 평화롭게 하는 더 좋은 선택을 하셔서 불행과 불만, 염려와 근심을 떨쳐 버리고 마음의 평안과 관계의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캐나다 출신 평신도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로버트 하디(1865-1949)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0살 때인 1875년 1월에 아버지, 5월에 어머니를 다 잃었습니다. 19살 때 교사 자격증을 딴 그는 21살 때 고향 친구 마가렛 켈리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는 그녀와의 사이에 입양한 딸을 포함 하여 9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2년간 교편생활을 하던 그는 교직을 내려놓고 의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 부부는 “이 세상에서 아주 유익한 존재가 되겠다”(most useful to the world) 는 그들의 삶과 비전을 위해 선교사의 길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1890년 8월 13일, 25살 때 하디는 그의 가족과 함께 “조용한 아침의 위대한 땅”(great land of the morning calm) 한국을 향해 캐나다 토론토를 떠났습니다. 그 후 그는 1903년 원산대부흥운동을 일으킴으로써 “한국교회 부흥의 아버지”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 감리교도들은 1903년 원산대부흥운동 110주년을 맞아 “하디 1903 성령한국대회”를 갖고자 합니다. 오늘 참가 신청서를 내주시기 바랍니다.
삶을 평화롭게 하는 더 좋은 선택, 이는 결코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더 좋은 선택은 하나님을 위한 일보단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많은 일로 분주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보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게 여기는 단순함과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을 평화롭게 하는 더 좋은 선택으로 더 좋은 인생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
눅 10:38-42 / 박신진목사(삼척제일교회)
일 잘 하는 사람들
십오 년 전에 몇 해에 걸쳐 위스컨신연회 손님들과 교류하는 일을 맡아 했을 때, 저는 미국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을 조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가 더 부자 나라였기 때문이라거나 영어가 더 유창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영어 못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그들은 한국어를 못했으니까요. 제가 그 사람들에 비해 참 부족하다고 느낀 것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철저히 계획하여 깔끔하게 시행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위스컨신연회와 우리 동부연회가 2003년에 공식 자매결연을 맺고 여러 가지 협력사업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목사님들 오가는 교류는 계속 하고 있지만 다른 일은 잘 추진이 되지 않습니다.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이 여름에 수련회 가도록 결정을 하였으나, 이 일이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들과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 좀 다르기 때문이었어요.
우리는 올해 여름에 수련회에 아이들을 보내려면 봄에 준비하거나, 외국에 가는 경우는 전 해에 준비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자기네 여름 캠프장 사용 스케쥴을 2년 전에 잡아놓습니다. 우리가 내년 여름에 청소년들을 보내기 위해서 일년 전에 일정을 잡자고 하니까, emergency(응급)로 해야 하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더구나 외국 어린이나 학생들을 받아서 수련회를 하려면 그들은 모든 절차와 과정, 안전 문제와 언어문제를 비롯하여 예상되는 모든 어려움을 다 철저히 해놓아야 하기 때문에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같으면 여름에 가면 작년 연말부터 준비해서 봄에 갈 사람 확정하고 비행기 표 끊으면 될 텐데, 그 사람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하더군요.
모든 게 완벽하고 철저하다 보니 안전하고 깔끔하며 편안하게 천천히 움직입니다. 극적이거나 갑작스런 상황을 만들지를 않습니다. ‘재미없는 천국’입니다. 편안하긴 한데 재미는 없더라고요. 그에 비하여 우리는 복잡하고 불안하고 정신이 없지만 변화가 많고 한번 맘만 먹으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미국사람들처럼 일하려고 하면 일이 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 나라 복음 운동을 위해서는 미국사람처럼 철저하고 완벽하게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한국사람처럼 주님께만 집중하고 열린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일을 벌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두 자매와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
본문은 예수님이 한 마을에서 들어가신 집에 있었던 두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여기 두 여자가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인데, 아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준비성이 있고 일 잘하는 여인이었고, 동생 마리아는 차분하고 감수성이 예민했습니다. 마르다는 실용적이며 어떤 일에든지 부지런하고 요란하게 하는 편이었고 걱정이 많은 스타일입니다. 그에 반해 마리아는 천성적으로 내성적이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스타일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잘 대접합니다. 언니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은 전형적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입니다.
마르다는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에게 동생더러 자기를 도와주라고 말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예수님은 마르다를 두 번이나 부르시면서 꾸짖으십니다. 메시지 성경에 의하면, 이렇게 말씀하시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사랑하는 마르다야, 네가 지나치게 염려하여 아무것도 아닌 일로 흥분하고 있구나. 마리아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을 택했다. 그러니 마리아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마르다 같은 교인이 있고 마리아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시간 계획, 생활 계획을 다 짜놓고 규모 있게 삽니다.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자기 손 안에 넣고 시행합니다. 이런 계획에 어긋난 것은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기에 여유가 없습니다, 틈이 안 나는 거예요. 마르다는 일 중심의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빈틈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아줌마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생활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라도 일정을 조정하고 자기 계획을 바꾸면서 동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리아 같은 사람은 참으로 어설픈 사람이죠, 계획이 없고 무책임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가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을 택했다고 칭찬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택하고, 모든 길을 다 걸으며, 모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건 다 아실 거예요, 그렇죠?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못할 일,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것을...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중요한 것도 다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덜 중요한 것을 하느라고 세월을 보내고, 후에 크게 후회합니다.
오늘 성경은 마르다가 한 일과 마리아가 한 일을 극적으로 대비해 놓고,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마르다가 중요한 일을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밥도 먹어야죠, 간식도 잘 대접해야 합니다. 유대사회에서는 손님이 오면, 발 씻을 물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특별히 자기 집에 모신 그들에게 한 가지를 택하라 했다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과 인생의 참 길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그 속 깊은 얘기를 듣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차선이 최선을 가로 막습니다. 덜 중요한 것을 하느라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이런 일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우리 인생 전체에서 너무도 자주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께 집중
그날 마르다와는 달리 마리아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은 예수님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마리아는 천성적으로 게으른 여인이어서 일하기보다는 구석에 앉아 간식을 먹거나 어지르고 지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체질인지도 모릅니다. 마르다는 항상 일을 잘 처리하고 책임있는 여성이라, 다른 사람의 수고를 덜어주고 일을 되게 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날 그 시간, 마르다는 여러 가지 분주한 일을 했지만, 마리아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을 했다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일에 집중하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 최우선의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물론 주님을 섬기는 일을 하였어요. 그러나 그는 예의 절차와 상식을 따라 할 일을 1에서 10까지 하다 보니 정작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두 자매가 다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준비했더라면 주님은 방안에 홀로 버려질뻔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물론 마르다의 일을 돕지는 못하였으나, 여기 주님께 더욱 집중하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절대적으로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입니다. 그 다음에 밥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신혼부부가 있는데,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아내와 얘기하고 싶고 아내와 안고 싶은데, 아내는 집안을 돌보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할 일이 아직 남아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보다보다 못해 이렇게 소리 지르지요. “아, 빨래 그만하고 들어와서 나랑 얘기 좀 해!” 지혜로운 아내는 집안이 어질러져 있어도 남편에게 다가가 얘기를 들어주며 따뜻하게 도닥여 줍니다. 부부는 이 관계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편과 아내가 눈을 맞추고 얘기하는 시간은 없이 항상 아내는 주방에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시간 남으면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러면 남편이 아주 좋은 아내라고 매우 즐거워할까요? 남편을 돌아보십시오, 아내를 다독여주세요! 그러면 집안일이 저절로 잘 됩니다.
교회생활을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주님께 집중하세요. 아무리 분주하고 생각할 게 많아도 먼저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을 만나고 주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교사들이 바쁘다보니 자기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그냥 어린이 예배만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배는 없이 사역만 하는 거예요. 바로 마르다 교사가 되는 겁니다. 교사의 일에는 충실하나 주님과의 만남과 예배는 소홀한 마르다지요. 유치부 예배는 11시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와 같은 신실한 유치부 교사들은 먼저 9시 예배에 나와 정성껏 주께 예배드리고, 주님과 교통하고 은혜 받은 후에, 교사로서 사역을 합니다.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당번 여선교회는 먼저 자기 예배를 주님께 바로 드리고, 점심식사 준비를 해야 해요. 안 그러면 마르다 되는 겁니다. 칭찬 듣는 마리아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 주님과의 만남을 절대 빼먹지 않습니다.
우선순위가 바뀌면 영적으로 실패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바쁜 수련회와 여름성경학교 준비의 와중에 왜 계속 기도회로 모이고 말씀을 듣겠습니까? 조용히 주님께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주님께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공허해지고 병들고 맙니다. 마르다가 주님을 영접하였으나 형식적인 영접이요, 식사는 대접했을지 몰라도 주님의 마음을 격려하고 진정으로 만나는 일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다른 점이 좀 부족하지만 주님께 집중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었어요. 주님의 발치에서 주님 말씀을 듣고 은혜 받으며, 주의 뜻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께 집중하세요!! 예배와 영성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우려야 합니다. 주님은 완벽하고 철저한 일의 준비보다는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고 성령과 함께 나아가는 것을 더욱 소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
또, 사람 보기에 좋은 것보다는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을 자기만족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리에 치중하기 보다는 얼마나 자기 입장과 자기 문제가 잘 받아들여지고 해소되는가에 치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래 믿을수록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물론 신앙생활은 자기 소원을 이루고 문제와 갈등이 풀리는 결과도 얻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진리에 근거하여 이뤄질 때 진정한 자아성취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실은 우리 믿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인가, 자기 소원만을 이루려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기독교 영성은 어찌보면 수동적 영성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뭔가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일을 벌여서 하나님을 나타내려 하기보다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의지를 강조합니다. 순종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태도의 문제인 거죠. 신앙생활에서 무얼 한두 가지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근본 태도가 어떠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겸손하여져서 하나님께 순종하려 하는가, 아니면 온갖 생색을 내면서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하는 태도입니다. 주어진 지시에 드러나는 행위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전적으로 따르는 순복, 자연스럽게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분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스페인의 중세 영성가 마이클 몰리노스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순종은 내적인 것입니다. 또한 저는, 순종은 장님이 되어야만 하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 순종은 언제라도, 변명이나 지체함이 없이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순종은 내적인 원망 없이 즐거이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은 반드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판단하려는 본성과 개인적인 판단은 제쳐놓아야 하므로 장님이 되어야 합니다.’(영성깊은 그리스도인, p.96)
너무 ‘나’라는 자아가 강합니다.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시간표에 나를 맞추는 것이 인간 편에서 보면 어설픈 것 같지만,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계획과 입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면이 있어요. ‘그러나 주님이 필요하시면 주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하는 게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내 입장, 하나님이 요구하셔도 따라갈 수 없는 내 계획이란 게 어디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배와 그물을 다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부모까지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어떤 복음서에서는 기록합니다. 참 얼마나 황당하고 어설픈 사람들입니까! 자기들이 어부인데, 대대로 갈릴리 호숫가에서 살던 촌사람인데, 갑자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겠다니 얼마나 뒤죽박죽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실 때,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 그들은 순종함으로 따라갑니다. 주님 중심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르는 것, 이것이 믿음이요 제자의 길입니다!
때로 주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만을 순종하는 것은 큰 길입니다. 더 큰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주님께 순종할 때, 우리는 결국 평안과 하늘의 복을 얻게 됩니다. 공부 대신 교회 수련회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는 십대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이고 담임선생님에게 ‘정신없는 학생’이라고 혼날지 모릅니다. 영성 세미나에 참가하겠다고 일주일동안 직장을 쉬는 남자를 생각해보세요. 회사에서 충성심이 없는 회사원으로 찍혀 중요한 기회를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순종할 때 복이 있습니다. 순종할 때 하늘의 길이 열립니다.
염려를 넘어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염려하고 근심하나.” 여기서 염려는 ‘메림나스’를 씁니다. 나누어짐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여러 가지로 나뉘어져 있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믿는 이들이 피해야 할 마음의 분열, 산만함을 말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복음이 명령하는 계명에 대하여 어린 아이 같은 단순함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이유가 많고 핑계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쁩니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바로 이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마르다처럼 마음이 갈라겨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그에 반하여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습니다. 부엌에서 자기가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주님 말씀 듣는 데에만 치중하였고, 주님께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교회 역사의 수도원운동이 지향하는 중요한 가치는 복음과 하나님을 위해 단순해지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순성! 하나님 앞에서 힘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 그것은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고, 주님 발 앞에 앉아 순종하는 태도입니다. 마리아처럼 가장 중요한 것을 택하지 못할 때 우리는 마르다처럼 신앙이 타락되고 침체될 것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져 산만하고 상실될 것입니다. 염려는 넘어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마리아가 선택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에 집중하십시오. 기도하는 생활, 예배에 집중함으로 주님을 만나는 일, 복음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그 한 가지 일에 치중하십시오. 교회생활 내내 자기 성취, 자기 이익만 추구하지 말고, 주의 뜻을 위하여 기꺼이 순종해야 합니다.
민다비다,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 여인
강화에 가면 교동이라고 있습니다.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북한과 접하고 있고, 연산군이 귀양살이하던 외진 동네입니다. 그런데 개화기에 그 동네에서는 경성제국대, 연희전문대, 이화여전, 감신대 등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인재가 많이 나왔습니다. 대학 다니는 사람이 한 군에 몇 명 있을까 말까 하던 시절에 어떻게 60여 호밖에 되지 않는 외진 마을에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위대한 복음의 용사인 민다비다 전도부인 때문입니다.
교동 북면에 살던 황아무개 씨는 복음을 듣고 진리를 깨우친 뒤에 우상을 불사르고 제사를 폐하니 부모와 동생들이 와서 상투를 붙잡고 넘어뜨린 후에 깔고 앉아서 뺨을 치며 칼로 찔러 죽이려고 하는데, 그 부인이 손뼉을 치며 하나님께 일 년 동안 기도하였더니 회개시켜주셨다며 소리를 질러서 사람들이 다 놀랐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민다비다입니다. 그녀는 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집안 어른들에게 온갖 수모를 다 당했답니다. 문제는 이런 고통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교회 갈 때면 이웃 아이들이 예수쟁이라도 던지는 돌을 맞아가며 갔답니다.
이런 고난과 시련을 통과하면서 동생과 친척들이 교회 나오기 시작하고, 불과 몇 년 안 되어 수십 명의 교인들이 생겼습니다. 인현동은 교인들로 가득한 동네가 되고, 민다비다는 교동구역 전도부인이 되어 주위 섬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에게 개인적으로는 딸이 죽고 촉망받던 큰아들이 알코올중독이 되는 등 어려움이 계속 찾아왔지만, 찬송을 부르며 기도로 시련을 다 이기고 나갔다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예수만 따르는 그 믿음은 강화 전체에 복음의 열매로 나타나, 기독교로 개종한 젊은이들 중에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해 내어 정재계의 인사, 고위공직자, 신앙지도자, 독립운동가 등 다수의 청년들을 길러내는 신앙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합니다.
‘언제나 불꽃처럼 불타고 있는 것, 보석처럼 격렬한 불꽃을 가지고 언제나 감동에 타오르며 살고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성공이다. 언제나 생기발랄하게 계속 불타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의 성공자다!’(르네 유그이씨) 주님 앞에서 자기 앞가림 잘하고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마르다가 되기보다, 차라리 주님만 따라가며 바보처럼 주책없이 손해 볼 짓을 하는 마리아가 되기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기적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 주님께만 집중하고 주님만을 순종하는, 마리아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 아름답게 타오르는 빛의 생애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 발 앞에 앉고 있습니까?
눅 10장 38-42절 / 이호준목사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많은 면에서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관계 중심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남성들은 일 중심입니다.
일 중심이라는 것은 목표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일중심의 남편과 관계중심의 아내가 함께 쇼핑을 가면 부부싸움하기가 일쑤입니다.
그 이유는 여자는 옷을 사려고 할 때 이것저것 만져보고 물어보고 뒤적거리다가 그냥 나옵니다. 그 다음 가게에 가서도 마찬가지지요. “여보 이것 어때요? 예뻐요?”라고 묻고는 그냥 나옵니다.
그러면 남자는 어떻게 말합니까? “아니 옷을 살거야 안살거야?”라고 말하면서 화를 버럭 내지요. 그 이유는 남자들은 옷을 사고 안사는 것에 관심이 있지만 여자들은 남편과 함께 있는 것에 더 관심이 있고 옷을 고르면서 즐기는데 더 관심이 있습니다.
휴대폰으로 전화할 때도 남자들은 용건만 이야기하면 끝입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아닙니다. 언어적인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자는 관계 중심이기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전화를 합니다. ‘30초 동안, 용건만 이야기 하라’라는 것은 여성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입니다.
남자가 밖에서 일을 잘하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남자가 행복하려면 가정에서 아내와 관계를 잘 맺고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남편은 일 중심의 사고방식을 내려놓고 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아내와 관계를 잘 맺어야만 행복한 가정생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일 중심, 과업 성취중심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 중심의 사람은 언제 기도를 하냐하면 문제가 생기면 기도합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기도하는 사람은 진짜 문제가 있습니다.
일 중심인 사람은 언제 새벽기도에 나오는지 아십니까? 문제가 생길 때만 나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열심히 나오면 ‘문제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새벽기도를 안나옵니다. 그러면 ‘아, 문제가 해결 되었구나’라고 생각됩니다.
기도생활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만 합니다. 일 중심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읽고, 봉사도 하고, 기도도 하는데 기쁨이 없다면 그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갖지 않은 채 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습니까? 아니면 그저 맹숭맹숭 합니까? 아니면 관계가 불편합니까?
“예수님 사랑해요!” 이런 고백을 매일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이런 고백 없이 살고 있다면 나는 예수님과 관계는 맺지 않은 채 신앙생활을 일 중심으로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 등장할 때마다 언제나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친밀한 관계를 갖고 살았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예수님으로부터 칭찬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마리아가 언제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있었는지 말씀을 찾아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발 앞에 앉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 발 앞에 나와 말씀을 듣고 있나?(눅10:38-42)
예수님께서 즐겨 찾으셨던 한 가정이 있습니다. 그 가정은 베다니에 살고 있는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삼 남매가 살고 있었던 가정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친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대하는 모습과 방법이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마르다는 일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일을 성취했을 때 거기서 보람과 만족을 얻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위해 정성껏 식사준비를 했습니다.
이에 반해 마리아는 관계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먼저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관계 중심의 사람이었고 그래서 예수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눔을 통해서 관계 속에서 기쁨과 보람을 얻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10:39).
그런데 예수님께서 두 여자 가운데 누구를 더 칭찬하셨는지 42절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2절). 둘 다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 중에 마리아를 더 칭찬해 주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식사 준비를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마르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것입니까? 마르다는 좋은 편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여 우선순위가 잘못된 채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마르다는 자신이 하고 있는 봉사 생활에만 치중하고 있을 뿐 우선적으로 먼저 해야 할 말씀 생활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성도 가정에 심방을 가서 경험한 일입니다. 그 집 자매님은 목사님을 접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도 오지 않고 음식을 만듭니다.
그래서 찬송을 또 부르면서 기다렸지만 여전히 음식준비에만 신경을 쓰면서 말씀을 듣기 위해 예배의 자리에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집에 심방을 갔는데 정작 그 집 자매님이 빠진 채로 말씀을 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 은사를 따라서 열심히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기는 일에는 앞장서지만 정작 개인적으로는 말씀은 읽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개인 경건의 시간은 전혀 갖지 않은 채 봉사생활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 가지 않아서 봉사 생활에도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말씀의 공급을 받지 못한 채 봉사를 하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기쁨과 감격이 사라지게 되고 나중에는 타성에 젖어서 마지못하여 하는 봉사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행한 일보다 마리아가 행한 일이 더 잘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42)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봉사와 섬김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적으로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예수님의 발 앞에 나아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말씀으로 채움을 받는 생활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움을 입기 위해 주님의 발 앞에 다가가서 앉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듣기 위해 매일 최우선적으로 시간을 내어 개인 경건의 시간을 갖고 삽니까? 아니면 봉사 생활만 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기 위해 한 주간을 살면서 매일 하루에 두 장 이상씩 먼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살아가기 바랍니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예수님이 칭찬해 주신 마리아처럼 좋은 편을 택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 발 앞에 나와 기도하고 있나?(요11:32-44)
마리아가 예수님 발 앞에 앉은 두 번째 말씀이 요한복음 11장 32절에 나옵니다. 함께 찾아서 읽어 보겠습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요11:32).
지금 마리아는 오빠인 나사로가 죽는 비통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으로 나아가서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예수님께 아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기도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도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기도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신의 속마음을 숨김없이 그대로 내어 보이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나사로가 죽은 일로 인하여 너무나 큰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예수님 앞에 가지고 나아와서 그대로 아뢰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자신의 마음 상태를 그대로 주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5절을 보면 이에 예수님께서도 마리아의 슬픈 마음에 함께 동참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여러분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주님 발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하시고 이해하시며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울 때 함께 마음 아파하시면서 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일들을 만날 때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 앞에 나와 마음을 쏟아 놓으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발 앞으로 나가서 기도하면 주님께서는 “내가 너 마음을 안다.”고 말씀하시면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던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마리아처럼 매일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면서 매일 살아가는 성도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 발 앞에 나와 헌신하고 있나?(요12:13-8)
마지막으로 우리는 마리아가 세 번째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나아온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12장 3절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12:3)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마리아는 큰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랬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께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놀라운 축복에 감사하면서 자신에게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 다시 한번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았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께 부어 드리기 위해 지금 헌신의 자리에 앉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드린 향유는 삼 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비싼 것이었습니다(요12:5). 삼 백 데나리온은 어른의 1년 치 봉급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5,000만원에 해당되는 돈이었습니다.
마리아가 그처럼 귀중한 것을 어떻게 단번에 드릴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마리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분은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보다 더 가치 있는 분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옥합을 기쁨으로 예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소중한 분에게 드릴 줄 알았던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귀한 향유를 부어 드리면서 자기 머리털로 씻을 때 주위에 있는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아십니까?
마리아가 행한 일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책망하면서 그것을 왜 허비하냐고 말했습니다(요12:5,마26:8,9).
제자들이 그렇게 말한 까닭은 향유의 가치는 알았지만 그 향유를 받으실 예수님의 가치는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장 귀한 것을 가장 귀한 분에게 드리는 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마리아를 책망하고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행한 일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7절).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26:10).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다 드리는 사람을 향하여 “너는 왜 허비하고 있느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심으로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은 허비가 아닙니다. 그러한 헌신과 드림이야말로 영원토록 남게 될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옥합을 드린 마리아는 유월절 엿새 전에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1절). 그리함으로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될 예수님의 몸을 미리 장사지낸 유일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건강할 때 말씀을 보고 기도하고 헌신하기 바랍니다.
어느 날 건강이 상실 될 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주님을 섬기고 싶어도 제대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할 때, 물질이 있을 때, 주님을 위하여 무언가 할 수 있을 때에 최선을 다하여 주님의 일을 행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장 귀한 것을 가장 귀하신 예수님께 드리기 위해 예수님 발 앞에 앉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도 어디엔가 앉아서 시간을 보내면서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앉아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까?
TV 앞자리에 앉아서 시간을 오래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스마트폰을 보면서 게임하는 자리에 너무 오래 않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원치 않는 죄를 짓는 자리에 너무 오랫동안 앉아서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어디 앞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다 오셨습니까?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살다가 오셨습니까?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면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읽으면 깨닫는 말씀이 주어지게 됩니다.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면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면 헌신이 자연스러운 영성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행한 일을 칭찬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으니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옥합을 깨뜨려 부어 드렸던 마리아의 헌신과 그가 행한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반드시 그의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지냄으로 예수님과 가까이에서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매일 말씀의 자리에 앉아서 살아가기 바랍니다. 기도의 자리에 앉아서 살아가기 바랍니다. 헌신의 자리에 앉아서 살아가기 바랍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예수님과 좋은 관계 속에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편을 택한 사람
눅 10:38-42 / 안양준목사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하는 예수님의 칭찬의 말씀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전에 어떤 TV 광고에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것이 있었는데 좋은 편을 택한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항상 좋은 편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예루살렘 근처에 베다니라고 하는 동네에 예수님과 친하게 지내던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남매가 있었습니다. 이 집은 예수님이 언제나 부담없이 들릴 수 있는 집이었습니다. 본문에도 이 삼남매 중에 마르다라고 하는 여인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해서 예수님께 드릴 좋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정성껏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만 앉아 있는 겁니다. 여러가지 음식을 준비하다 보니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자기 동생은 그저 앉아 있으니 그것을 본 마르다가 예수님께 “나는 이것 저것 하느라 이렇게 바쁜데 내 동생은 나 혼자만 일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습니까? 내 동생보고 나를 좀 도우라고 말좀 해 주세요”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예수님은 도리어 마르다를 향해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저 몇가지만 하든지 아니면 한가지만 해도 족하다 그리고 마리아가 이렇게 앉아서 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가 바쁘게 움직이는 것보다 더 좋은 쪽을 택한 것이란다”하고 도리어 마리아의 역정을 들어 주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의 말씀을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서 왜 예수님이 마리아를 향해 더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아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분주하게 이것저것 준비하는 일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편이 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가장 기초단계는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기 위해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아니 아무리 생활이 바쁘고, 하는 일이 많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 만큼은 조용하게 앉아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님들 중에도 보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분들 중에 전도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신하는 일도 참 많이 하는데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가볍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쁘게 뛰어 다니는 것보다 먼저 주님의 발 아래 앉는 일부터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도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봉사하는 일도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그 시간을 귀하게 여기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전도는, 그 사람의 봉사는 오히려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도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가면서 어떤 때는 전도도 해야 하고, 봉사해야 할 일도 많이 생기고 여러가지 일로 분주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앉아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교회 생활 뿐만이 아닙니다. 저도 경험해 보았지만 학교 성적 때문에 학원도 다녀야 하고, 과외를 하는 경우도 있고 그러다 보면 주일에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일을 소홀히 여기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주님의 편에서 볼 때 좋은 편을 택한 것이 못됩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다보면 자연히 교회에 전혀 관심을 두지 못하고 거의 1년 동안 신앙의 방학을 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는데 그것이 긴 인생을 두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좋은 편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사무엘이라는 선지자가 나옵니다. 이 사무엘은 그 어머니 한나가 아주 어릴적부터 성전에 갖다바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어릴적부터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자랐습니다. 삼상 3:19절을 보면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늘 가까이 있으니 하나님이 그를 붙들어 주셔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정신적인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또 솔로몬 왕도 젊은 날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먼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이 솔로몬이 구한 지혜를 주셨는데 왕상 3:12에 보면 “내가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지혜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자에게 이런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봉사를 해도 참된 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신앙생활은 내 맘대로, 내가 좋은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오래 하지 않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니까 그저 기뻐서 열심히 하다보면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만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할 수록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막연하게 “내 생각이 이러니 하나님도 기뻐하실거야!”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을 읽는 중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우리 교회의 성도님들의 가정을 다니면서 심방을 많이 하게 되는데 보면은 지혜로운 분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받으려고 조용히 자리에 앉아 게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뭘 그리 준비할 것이 많은지 계속 왔다갔다 하면서 그러니 예배드리기 위해 앉아 있는 동안에도 그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의 신앙은 대체적으로 보면 자기 멋대로 신앙이 많습니다. 자기가 기분이 좋고 마음이 내킬 때는 열심히 하다가 그렇지 못할 때는 금방 신앙도 약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마르다도 보면 주님을 기껏 자기 집으로 영접해 놓고도 그 입술로 불평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왜 내 동생이 나를 돕지 않고 있는 것을 그냥 두시는 것입니까? 빨리 나를 도와주라고 하세요.”
그리고 그 속에는 모든 것을 자기 기준에 맞추려는 교만함도 있습니다. 자신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주님이 좋아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나처럼 이렇게 바쁘게 주님을 위해서 봉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마리아는 항상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겸손하게 그의 말씀을 듣기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봉사를 할 때는 정말 귀하게 봉사하고 가장 적절한 시기에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마 26:에 보면 한 여인이 매우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드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런 뜻도 모르고 그 귀한 향유를 허비한다고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훨씬 더 값진 일이 아니냐”고 분해합니다. 그때 주님이 무어라고 하십니까? “이 여인이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그렇게도 오랫동안 생활을 같이 하면서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이 여인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준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여인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요 12:3에는 이 여인의 이름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어떻게 남들이 알지 못하고 무관심하던 것을 마리아는 알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늘 귀를 기울여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보면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만 잘난 것처럼 “왜 비싼 향유를 허비하느냐?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썼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주님의 뜻은 전혀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봉사는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다른 이들은 음식을 대접하려는 마음조차 없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좋은 편을 택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일인데 많은 학생들이 주님께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보다 다른 것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더 좋은 편을 택하였노라”
마르다와 마리아
눅 10:41-42 / 이정익콕사
잠언을 보면 현명한 여인을 찾는 것은 진주와 같다(31:10)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현명하다는 말은 지혜롭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지혜는 일의 우선순위를 알고 더 중요한 일을 발견할 줄 아는 능력을 말합니다. 오늘 이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말하면서도 우선순위가 뒤바뀐 뒤죽박죽 된 삶을 살아갑니다. 더 중요한 것을 모르고 덜 중요한 것 때문에 골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세상에 끊임없이 싸움과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아주 현명한 한 여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있는 초막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2-3km 떨어진 곳입니다. 예수님은 오고 가실 때에 이 집을 자주 들르셨습니다. 이 집에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삼남매가 살았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예수님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또 마르다는 언니이고 마리아는 동생입니다. 그런데 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성향이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랐고 서로 은사도 달랐고 가치관도 달랐습니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데도 생각이 너무 대조적이었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봉사를 잘했습니다. 손님이 오면 음식을 준비하고 대접하는 데에 열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음식을 준비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녀는 섬기는 은사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마르다와 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녀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 듣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혼자서 부엌에서 식사준비를 했습니다. 마르다는 그런 마리아가 서운했습니다. 일은 많은데 혼자 하려니까 마음이 급하고 불만이 생겼습니다. 결국 화가 난 마르다는 방에 들어가 예수님께 “마리아에게 명하여 나를 도와주라고 하소서”하고 간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마르다처럼 오신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는 것은 좋은 모습입니다. 또 마리아처럼 오신 예수님 곁에서 진지하게 말씀을 듣고 경청하는 것도 좋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 편을 들지 않고 예상 밖으로 마리아 편을 드셨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기본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믿음의 길에 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마리아 편을 드셨을까요?
주님 뜻 헤아림
예수님은 지금 왜 이 집에 오셨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까? 놀러 오신 것입니까 아니면 대접 받으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잠시 쉬었다 가려고 오신 것입니까? 잠시 쉬려고 오셨다면 예수님은 마르다의 집보다 마가의 집으로 가셨을 것입니다. 마가의 집은 마르다의 집보다 더 넓었고 쉴 수 있는 다락방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지금 이 협소한 마르다의 집에 오셨을까요? 더구나 12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말입니다. 가난한 마리아의 집에서 대접을 받으려고 하신 걸까요? 예수님이 이 집에 오신 목적은 베다니 동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리아는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마리아는 오히려 언니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에게는 오래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복음을 전하고 또 움직이셔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차 한잔이나 내 놓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언니처럼 저렇게 수선을 떨면 오히려 예수님께 방해가 됩니다. 마리아는 오히려 언니 마르다 염려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마리아와 마르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지금 상황을 보는 판단이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여러분,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일은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더 중요한 일이 있고 덜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덜 중요한 것에 신경을 쓰게 되면 우선순위가 뒤바뀌게 되고 결국 삶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우선순위를 바꾸어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놓치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삶이 혼란스러워지고 가정, 직장, 교회에서 갈등도 다툼도 생기는 것입니다.
결혼 초 부부가 싸움을 합니다. 대부분 주도권 때문에 싸웁니다. 부부가 왜 주도권을 놓고 싸웁니까? 또 처가가 먼저냐, 시가가 먼저냐를 놓고 싸웁니다. 처가도 시가도 모두 중요합니다. 양쪽이 다 중요한데 그것을 왜 따지고 싸웁니까? 또 교회에서 봉사하는데 내가 더 잘했다고 우기고 다툽니다. 잘 했으면 그만이지 왜 따지고 강조합니까? 신혼 초 부부는 누가 주도권을 갖느냐를 따지지 말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고 따져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누가 더 잘했느냐를 따지지 말고 과연 우리가 지금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가를 따져야 합니다. 무엇이 중요한 지에 대해 명백히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신앙에서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첫째 목표는 주님의 뜻을 우선 선택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의 핵심입니다. 신앙인은 전적으로 주님의 뜻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지금 마르다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지 모르고 엉뚱한 것을 붙들고 혼란 속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삶이 부자연스럽고 혼란스럽고 갈등과 다툼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그래서 동생이 불만스러운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오히려 마르다가 답답하고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서로 다른 인성
언니 마르다는 예의가 바른 여인이었습니다. 또한 매사가 깔끔하고 빈틈이 없었습니다. 거기다 살림도 잘했습니다. 음식 솜씨도 뛰어났고 누구를 대접하는데 있어서 열정이 남달랐습니다. 남성은 이런 아내를 만나면 행복할 것입니다. 남성분들, 오늘 아침 밥을 드셨습니까? 드신 분이 아마 드물 것입니다. 이런 여인을 만나기기 쉽지 않습니다. 마르다는 현모양처였습니다. 살림을 아주 잘하고 가족 관리도 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덜렁거렸습니다. 언니처럼 야무지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마리아는 솔직한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나사로가 갑자기 죽게 되었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오라비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슬퍼도 속으로 삭이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극도로 절제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체면을 중시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가 맞으러 나왔습니다. 그때 그녀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는 몹시 아쉬움을 나타낸 표현입니다. 동시에 극도로 슬픔을 절제한 말입니다. 마르다는 그런 스타일이었습니다. 자기의 내면을 드러내지 않았고 절제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언니와는 반대로 솔직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갖고 있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다 쏟아냈습니다. 나사로가 죽고 난 후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급히 달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엉엉 울었습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상관없었습니다. 체면도 자존심도 상관없이 울고 통곡을 했습니다. 자기 마음의 슬픔을 그대로 여과 없이 모두 쏟아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사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34)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까지도 덩달아 울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누가 사랑스러운 여인입니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마르다의 집을 자주 들르셨습니다. 왜일까요? 주님께 스스럼없이 대하는 마리아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마리아의 응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굳이 예의범절, 절차 따지지 않고 반기는 마리아의 모습을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마리아의 모습을 좋아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제일 사랑하실 때가 언제일까요? 사람들도 깍듯이 예의범절을 지키고 체면을 지키고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들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사람은 나의 허물을 스스로 인정하고 솔직하게 대하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분수대로 나를 솔직하게 내 놓을 때 우리를 더 사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신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야곱은 실수도 많이 했고 얄미운 짓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곧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고 안타까워하며 회개를 했습니다. 때로는 통곡을 하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 나의 실수, 나의 죄를 그대로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의가 바른 여인이었습니다. 깍듯했습니다. 정성을 다해 혼자서 열심히 일하며 점수를 땄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삶은 얼마 가지 못해서 스스로 지치게 됩니다. 지치면 짜증을 내게 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게 됩니다. 칭찬을 안해 준다고 서운해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님을 찾아가 마리아를 보내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말는 마르다가 예수님께 짜증을 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언니와 정반대였습니다. 마리아는 애초부터 예의범절이 부족했습니다. 굳이 점수를 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좋으면 펄쩍 펄쩍 뛰고 슬프면 펑펑 울었고 반가우면 뛰어나가 맞이하는 등 모든 일에 솔직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그저 좋아서 그 옆에 있었고 그 말씀을 사모해서 무조건 그 뜻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의외로 주님은 마리아의 모습을 칭찬하셨습니다.
여러분, 너무 얌전떨지 마십시오. 너무 절차, 과정, 체면, 자존심 따지지 마십시오. 그렇게 살면 인생이 피곤하고 금새 짜증이 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들입니다. 너무 부족한 존재들입니다.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십시오. 실수한 것이 있다면 그 모습 그대로 회개하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맡기고 눈물을 흘리십시오. 기쁜 것이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은혜를 나누십시오. 그 모습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마리아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두 사람의 열정
여기 이 두 여인은 열정이 참 대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열정은 서로 질이 달랐습니다. 마르다는 섬기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음식을 대접하고 손님을 극진히 공궤했습니다. 이것은 여성으로서 참 좋은 장점이고 열정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신앙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 앞에서 마냥 즐거워했습니다. 진짜 보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만나고 나서 너무 큰 변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확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만 서 있으면 기쁘고 즐겁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이 행복과 기쁨을 아시겠습니까? 이 기쁨을 모르니까 진정한 신앙의 맛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다가 그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 날 마리아가 그동안 준비했던 향유병을 깨서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어드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때도 마르다는 음식 준비 때문에 바빴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마리아가 느끼는 이 기쁨을 몰랐습니다. 만약 마르다가 향유를 부었다면 어떻게 부었을까요? 마리아처럼 그렇게 붓지 않았을 것입니다. 품위 있고 명분 있게 부으려고 시간을 재고 상황을 따지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그런 동생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그런 마음을 누가 알아주었겠습니까? 오직 주님만이 그 마음을 이해해주셨습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마음 그대로 솔직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귀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마리아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않으리라” 하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두가지 중요한 길에 서 있습니다. 하나는 마르다의 길이고 또 하나는 마리아의 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두 길 중에 어떤 길을 택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매일 분주하게 마르다의 삶을 흉내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뭔가를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내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고 불평도 하고 원망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일이 잘 안되니까 예수님을 찾아가서 “마리아를 내 보내서 나를 도와주라고 하소서”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마르다가 예수님께 짜증을 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 불평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오늘 우리들이 사람들이 왜 교회에 와서 요령만 부리고 형식적으로 일하는가 하고 불평하였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살아온 지난 한해를 되돌아 보십시오. 우리들이 마르다처럼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되돌아 보면 우리들이 주일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살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만큼 무엇인가를 이루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똑같이 피곤하고 힘들었습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또 십일조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만큼 재물을 더 모아서 풍족해졌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지금도 궁색하고 삶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를 드렸을 때나 드리지 않았을 때나 똑같이 쪼들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된 일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 삶에 짜증이 발생하고 실망이 생기고 삶이 지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르다의 인생, 삶, 신앙입니다.
여러분 중 지금 마르다처럼 살아가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삶에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여유가 없고 관계가 원만치도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보십시오. 마리아는 항상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즐거움과 보람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누구에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옆에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직접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마리아의 삶은 편안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마리아의 삶의 강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절호의 기회가 왔을 때 그동안 준비해 놓았던 향유병을 가져다 예수님 머리에 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2천년 전 마리아와 마르다라는 두 여인이 살았습니다. 이 두 여인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주는 사람들입니다. 이 본문에서 주님은 완벽하려고 애쓰는 마르다 보다는 좀 미완성 상태이긴 하지만 뜨거운 열정이 있고 눈물이 있고 말씀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마리아를 칭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아침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하여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메시지를 주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주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며 금년 한해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자리를 택하는 지혜
눅 10장 38~42절 / 박근호목사
지난 주간과 이번 주간에 올 하계 휴가의 70%가 쏠려있다는 매스컴의 보도가 있습니다. 어제 오늘 고속도로 상하행선은 극심한 정체현상을 빚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간에 절정을 이룬 피서 행렬이 이번 주간을 고비로 한풀 꺾이면 이제 곧 결실과 추수의 계절 가을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한 여름에 갖는 휴가철은 가을을 준비하는 의미가 있는 쉼의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주간 여러분은 어디를 다녀오셨는지요? 또 이번 주간에는 어디를 가시려는지요? 물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쉼을 갖지 못하는 분들도 없지 않습니다만은 휴가철이 되면 고민되는 것 중의 하나가 '어디로 갈까'하는 장소 선정의 문제일 것입니다. 모처럼의 쉼을 어디서 보내는 것이 좋을까 라는 고민과 갈등을 나름대로 겪게 됩니다. 어제 몇몇 교우들을 만나 물었더니 서해쪽의 섬에 다녀오신 분도 계시고, 동해쪽에 다녀오신 분도 계시고, 산이나 계곡 또는 고향엘 다녀오신 분도 계셨습니다.
아마 모두들 좋은 시간들을 가지셨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다 같은 휴가 경험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개중에는 '야, 참 잘왔다'라고 생각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 '에이, 올해는 장소를 잘못 택했네'하고 후회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자리를 택한다는 것은 피서가는 한철만의 고민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인생의 가장 큰 고민과 갈등거리일 수 있습니다. 시1편 기자의 경험처럼 따라나서도 좋은 자리인지, 머물러도 괜찮은 자리인지,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도 좋은 자리인지를 분별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리에 관계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마르다를 향해 하시는 말씀 중에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가 택한 자리는 빼앗길 수 없는, 빼앗겨서도 안되는 좋은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리아의 자리 선택을 칭찬하십니다. 마리아가 택한 자리는 좋은 자리로 결코 빼앗기지 말아야할 자리라는 것입니다. 즉 마리아에게는 '좋은 자리를 택하는 지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말씀을 마리아의 언니인 마르다에게 하고 있습니다. 즉 마르다가 택한 자리와 마리아가 택한 자리를 놓고 마르다가 택한 자리보다 마리아가 택한 자리가 더 좋은 자리요 빼앗기지 말아야할 자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럼 마르다가 택한 자리는 어떤 자리일까요? 왜 그 자리보다 마리아의 자리가 좋은 자리인가요? '빼앗기지 아니할 좋은 자리'란 어떤 자리를 말하는 걸까요?...
지금 마리아가 택한 자리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리'입니다. 거기에 반해서 마르다가 택한 자리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접대하려 분주한 자리'입니다. 이 두 자리 중 예수님은 마리아의 자리를 더 인정하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마리아의 자리'만 좋은 자리이고 '마르다의 자리'는 나쁜 자리라는 이분법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마르다의 자리도 필요한 자리요 좋은 자리입니다. 사람을 초청해 놓고 저를 접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시중들기 위해서 애쓴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마르다가 갖고 있는 손대접하기를 힘쓰는 그 마음은 복된 마음입니다. 마르다의 그러한 섬김의 자세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자리도 좋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자리와 마리아의 자리를 놓고 비교해 볼 때 마르다의 자리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그건 바로 그녀의 자리에 불평과 원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마르다의 불평에서 비롯됩니다. 40절에 보면 시중드는 일에 분주한 언니 마르다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있는 동생 마리아의 처사를 못마땅해하며 그녀를 상대하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이건 예수님의 입장에서 상당히 당황스런 말입니다. "왜 할 일이 많은데 지금 그 아이를 붙들고 노닥거리고 계십니까? 그 아이더러 '너도 나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언니를 좀 도와주라'고 명령하소서..."
참으로 당돌한 마르다의 주님을 향한 일갈입니다. 그녀는 마리아와 주님을 싸잡아 비난하고 책망합니다. 왜 자기 생각을 안해주느냐는 겁니다. 당신들을 접대하기 위해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왜 그 아이와 노닥거리고 있느냐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만약 마르다가 자기 일을 하면서 동생 마리아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터뜨리지 않았다면 예수님도 아무 말씀을 안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로 인한 불평을 예수님께 터뜨립니다. 그것은 곧 동생에 대한 얄미움도 깃들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마르다의 마음이 그대로 표출됩니다.
만약 마르다가 그냥 묵묵히 자기 일을 했다면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별다른 말씀을 안하셨을 것인데 마르다의 불평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드러내준 것입니다. 벌써 마르다에게서 불평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은 마르다가 선택한 자리가 좋은 자리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해도 불평이 터져나오는 자리는 결코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건 신앙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악은 불평에 기인합니다. 불평은 불신앙에서 비롯됩니다. 지금 마르다가 그런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마르다가 택한 자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본문 어디에도 마르다가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는 것은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시중드는 일에 음식 대접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음식 대접말고도 손님들을 시중들려면 이런 저런 할 일이 많았을 겁니다.
이 마르다의 일도 소중한 일입니다.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이 공연한 짓이거나 무시하거나 업신여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 의미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에게서 불평이 터져나왔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그런 마르다를 두둔하지 아니하고 마리아를 두둔한 것은 그런 불평스런 태도로 일하는 그녀를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은 불평을 터뜨리는 마르다를 향해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염려와 근심이라는 말과 족하다는 말이 대칭을 이룹니다. 그리고 많은 일, 몇 가지라는 말과 한 가지라는 말이 대칭을 이룹니다. 마르다는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고 마리아는 한 가지 일로 평온합니다. 마르다는 염려와 근심 속에 있지만 마리아는 만족 속에 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고 그 가운데서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사는 자가 아니라 한 가지 일이라도 만족하고 평온함 속에 사는 자임을 말씀하십니다.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해져서 중심이 흐트러져서는 안되는 겁니다. 봉사에 있어 중요한 것은 불평과 원망이 싹터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과 불평을 가져오는 많은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것이 없는 일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여럿이냐 하나냐, 많은 일이나 적은 일이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많은 일을 해도 거기서 불평이 야기된다면 그건 불평없는 하나의 일만도 못한 겁니다.
우리 인생사를 한번 보십시다. 우리는 평생동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숱한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파도가 지나가면 저런 파도가 옵니다. 그런 밀려오는 파도를 어떻게 풀어가느냐 하는 방법과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근심, 걱정, 염려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근심이 있고 아무리 태평스러워 보이는 사람에게도 고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가느냐 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평을 터뜨리는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복잡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기보다는 그 많은 문제를 파생시키는 문제 '하나'를 먼저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를 해결지음으로서 모든 것을 해결지으라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많은 염려와 근심 걱정은 하나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의 결핍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겁니다. 당뇨로 인해 많은 합병증이 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문제, 한 가지의 결핍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시급한 게 그 한 가지를 해결해야 하는 것일 겁니다. 당이라는 그 하나만 해결하면 나머지 여럿은 자연히 해결되는 법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가르침입니까? 그러니까 인생의 합병증이 오기 전에 예방하는 비법을 주님은 마르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불평이라는 합병증이 오기 전에, 원망이라는 합병증이 오기 전에, 질투라는 합병증이 오기 전에 먼저 그것들을 예방하는 비결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운동도 건강할 때 하면 약이지만 병든 다음에 하면 독입니다. 타이밍이 중요한 겁니다. 나중할 것이 아니라 먼저할 것이 있는 겁니다.
숲 속에 많은 나무들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병든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처음엔 잎에 진딧물이 생기더니 점점 이 가지 저 가지로 번져갑니다. 그럼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병든 잎사귀를 차례대호 하나씩 하나씩 따주어야 하겠습니까? 병든 잔가지를 하나하나 골라 쳐내야 하겠습니까? 아니지요. 그거 어느 세월에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거 하는 동안 번지는 병충해를 어찌 하겠습니까? 지혜로운 것은 병든 그 나무 기둥 하나를 베어버림으로써 수많은 가지를 한꺼번에 베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지혜로운 겁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마리아는 그 인생의 지혜를 알았고 마르다는 그것을 몰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께 다가가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서 그분을 진정으로 손님 대접해드렸고 마르다는 뭔가 자기가 그분을 대접해 드려야겠다는 조바심에 결국은 불평이 터져나오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 것입니다.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인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대학(大學)에 보면 '물건에는 본과 말이 있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고 했습니다.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가려서 하는 게 바로 지혜'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가 택한 그 하나가 본(本)이었다면 마르다가 택한 그 여럿은 말(末)이었습니다. 본은 하나요 말은 여럿이었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적다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열보다 중요한 하나가 있고 하나보다 못한 열이 있습니다. 이걸 구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던 진주 장사는 지극히 값비싼 진주 하나를 만난 후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진주들을 다 팔아서 그 진주 하나를 사지 않습니까? 열보다도 그 하나가 더 귀한 겁니다.
지금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 본과 말을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인 본을 차지한 것은 마리아였고 열인 말을 차지한 것은 마르다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 아니 스물을 가진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리아가 차지한 그 하나가 훨씬 좋은 것인데 말입니다.
어떤 나무든지 밑동은 하나입니다. 그 한 밑동에서 수많은 가지가 나옵니다. 그 가지를 수없이 치는 것보다 밑동 하나를 치면 열 시간 일할 것을 한 시간에 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복잡하게 얽힌 여러 문제에 함께 얽혀버려서는 아무리 그 얽힘을 풀려해도 풀려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은 모두 '하나'에서 파생된 것들입니다. 그러니 한 가지만 해결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것들, 먹고 마시고 입는 인생사의 여러 일들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마르다는 안타깝게도 여러가지 일들 속에서 불평과 원망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한 가지 일에서 감사와 헌신의 열매를 맺습니다. 어느 것이 더 좋은 자리입니까?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일의 순서를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할 일이 있습니다. 본말을 잘 분별해야 하는 겁니다. 마르다가 하는 일들에서 마리아가 하는 일이 나오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마리아가 하는 일에서 마르다가 하는 일들이 나와야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앙적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발앞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분을 섬기는 법이 나와야지 그런 과정 없이 그분을 섬기려 하다가는 불평과 원망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선택은 어떻습니까? 우리 또한 마르다가 하는 일에서 마리아가 하는 일이 나오는 것처럼 행동하진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자의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습니까? 자기 경험, 자기 지식을 절대화하고 거기서부터 매사를 시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럼으로서 결국엔 부정적이고 불만섞인 그 무엇을 토해내고 열매맺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리아의 일이 나중이 아니라, 마르다의 일이 나중이어야 합니다. 마르다의 일이 시급한 게 아니라 마리아의 일이 시급한 겁니다. 예수님을 육의 양식으로 대접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영의 양식을 예수님께로부터 먼저 받아먹는 게 중요한 겁니다. 얼핏 생각하면 마르다의 일이 먼저이고 마리아의 일이 나중인 것 같지만 진실은 그 반대라 그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와 사자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 날 둘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결혼 후 정말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만을 골라 뽑아다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합니다. 육식동물인 사자는 내심 먹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소의 정성을 생각해서 참고 그것을 받아 먹었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사냥을 해서는 사냥감의 맛있는 살코기 부위만을 골라 날마다 소에게 대접을 했습니다. 초식동물인 소는 무척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사자의 정성을 생각해서 참고 그것을 받아 먹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저들은 상대방에게 불만을 터뜨리고는 서로 헤어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헤어지면서 둘이 서로에게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난 너에게 최선을 다했어!..."
맞습니다. 저들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것을 장만해 상대방에게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최선이 서로에게 최악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건 바로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를 못보는 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그 최선은 자기에게는 최선임에도 불구하고 남에게는 최악이 되고 말았던 겁니다. 소는 소의 눈으로 최선을 찾았고 사자는 사자의 눈으로 최선을 찾았습니다. 바로 그 나 위주로 생각하고, 상대방을 보지 못하는 최선이 저들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최선이 최악을 낳는다는 이 말이 상당히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사실 우리 생 가운데 그런 경우가 적지않은 것이 바로 현실입니다. 갈라서기로 마음먹고 법정을 찾은 부부가 하는 말 대부분이 '최선을 다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최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최선'이었는가가 중요합니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곧 상대를 못보는 최선이라면 그건 최선일수록 더 최악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배려하는 최선, 그것만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 고집이나 독선으로서의 최선은 결코 최선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이웃'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앞에 두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니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보이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옵니다. 히브리서 11:3절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 아닙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그런데 사람들은 이 순서를 뒤집어 놓고 살아갑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게 아니라 보이는 세상을 먼저 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귀기울이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사의 문제입니다. 인간 세상의 온갖 비극과 곤경이 바로 이 선후의 뒤바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앞뒤를 가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본말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인지를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이게 안되면 그 인생은 허사입니다. 말을 본으로 알고 살거나, 처음과 나중을 뒤집어 살아가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과 재물, 무엇이 본이고 무엇이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내 뜻, 무엇이 본이고 무엇이 말입니까?...
휴가란 '앞뒤가 제대로 된 생을 내가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짚어보는 멈춤의 시간, 자기성찰의 공간을 갖는 겁니다. 그래서 진정한 인생의 좋은 몫을 차지하게 하는 은총입니다. 본말을 제대로 파악하고 교정해서 새롭게 사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생일을 갖습니다. 그럼 생일이 무엇입니까? 어떤 날입니까? 내가 태어난 날입니까 아니면 어머니가 나를 낳으신 날입니까? 둘 다 맞는 얘기일 것입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라고 해도 맞는 말이고 어머니가 나를 낳으신 날이라고 해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가 나를 낳으신 게 아니라, 어머니가 나를 낳으셨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본말입니다. 이 본과 말을 착각해선 안됩니다. 이렇게 본과 말을 잘 가려서 먼저 본을 잡을 줄 아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사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손대접한 자가 누구입니까? 뭔가를 대접하려다 불평과 원망을 터뜨려 주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마르다입니까 아니면 그분의 말씀을 먼저 경청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한 마리아입니까?... 마리아가 진정 주님을 손대접한 자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보이지 않는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이지 우리한테서 보이는 양식을 받아 잡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예수님과 그 일행에 대한 손님 접대를 더 잘 한 것이냐가 묻는다면 마르다가 아닌 마리아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손님이 원하는 바를 먼저 해드리는 게 제대로 된 손님 접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좋은 자리를 택하시는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빼앗겨도 좋은 자리가 아니라 빼앗겨선 안될 자리를 차지하시는 여러분되시기 바랍니다. 불평과 원망이 터져나오는 자리가 아니라 만족과 감사가 있는 자리를 선택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서 새롭게 2022년도의 하반기를 시작하시는 우리 영락의 권속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