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1-13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13 / [주님의 기도; 마 6:9-13]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는데 기도가 끝났을 때 한 제자가 와서 말하였다. `주님, 침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 같이 저희에게도 가르쳐 주십시오.' 2)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속히 임하소서. 3)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4)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하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5-6) [기도에 대한 가르침; 마 7:7-11] 예수께서는 기도에 대한 것을 더 많이 가르쳐 주시면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에게 친구가 있다고 가정하자. 한밤중에 그 친구에게 가서 `여보게, 떡 세 덩이만 꾸어 주게. 친구가 여행 중에 우리 집을 찾아왔는데 먹으라고 내놓을 것이 없어 왔네' 하고 말하면 7) 그 친구는 침실에서 큰소리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제발 나를 귀찮게 하지 말게. 문은 이미 다 잠가 놓았고 우리는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네. 그러니 지금은 자네에게 어떻게 해줄 수 없네.' 8) 그러나 내 말을 잘들으라. 그가 친구라는 이유로는 일어나서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면 그 간곡히 조르는 것 때문에 일어나 그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9) 기도도 이와 같다. 구하라, 주실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어주실 것이다. 10)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아버지된 사람으로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겠느냐?' 12) 아들이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비록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는 뚜렷한 목적과 목표가 있고, 기도를 드리는 사람의 자세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1-4) 예수님의 삶은 제자들이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예수님은 일상생활에서 규칙적으로 기도하시면서 기도하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본 단락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를 요청합니다(1).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는 기도의 우선순위인 기도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나타나 있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을 지향합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내용이 기도 속에 담겨 있습니다. 기도는 개인적이면서,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요청되는 기도로 드려질 수도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채워집니다. 성도는 기도로 매일의 삶을 위한 기본적인 필요를 구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성도들은 용서하고, 다른 사람에게 용서받는 삶을 구합니다. 이는 유혹에 넘어지면서 죄를 지은 성도가 회복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기도자의 자세(5-13) 기도는 실현될 것을 기대하며 드려집니다. 예수님은 응답을 위해서 포기하지 않는 인내의 기도와 믿음의 기도가 필요하다고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예상치 못한 때에 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해 먹을 것을 구하는 상황을 기도와 연관시키십니다. 손님을 풍성하게 대접하는 유대인의 관습에서 이해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미 잠자리에 든 이웃에게 부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간청해야 할 상황을 비유로 든 것입니다. 간청은 요청하는 당사자의 간절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응답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이러한 간청은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될 수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노력으로 나타나고, 인내로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지속됩니다. 이는 기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간절하고 끈질긴 기도의 근거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택한 자녀들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적용: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성도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기도의 자세, 응답에 대한 기대에 앞서 당신이 기도하고 있는 내용은 하나님의 뜻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성경을 읽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 계시던 하나님이 점점 가까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성경을 읽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며 살아가길 힘써야 합니다.[조혜련의 잘 보이는 성경이야기]
< 설 교 >
호크마 주석
=====11:1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 마태복음의 경우 '주의 기도'는 산상 수훈에 포함되어 있어 적어도 그 장소는 어느 산 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다소 모호한 표현인 '한 곳에서'로 이야기의 서두를 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인데(3:21;6:12), 이렇게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에 대한 열심을 지니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요한이...가르쳐 주옵소서 - 복음서 안에서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서 요청하는 것은 이 곳이 유일한 경우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도하는 것을 보자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것이 생각나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당시 어떤 종교 공동체(宗敎共同體)에서 지도자들이 기도를 가르치는 일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랍비들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만들어 준 일이 있었고(Farrar, Plummer), 또한 일반 유대인들도 정시에 일정한 형태의 기도문으로 기도를 하였다(행 10:3,9).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그들의 공동체를 특징 지워줄 수 있는 기도를 원했던 것이다(Jeremias).
=====11:2
이렇게 하라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 본문을 영원 불변의 기도형으로 생각해서 마치 주문(呪文)을 외듯이 반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서는 안될 것이며, 기도가 담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내용과 그 기도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마땅하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것을'(what) 기도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how) 기도하라 하신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버지여 - 이 호칭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사용했던 것으로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가 마치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것임을 나타낸다(10:21 주석 참조). 이제 예수는 제자들도 그런 의미에서 이 칭호를 사용하라고 하신다.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 새롭게 갖게되는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준다(요 20:17; 롬 8:14-17). 한편 평행 본문인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로 되어 있어 형식에 있어서 더 세련되고 완벽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이 부분은 마태복음과 일치한다(마 6:9).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 자체를 표현한 것이니만큼 여기서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뜻한다. 결국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원(祈願)이자 경외심에서 기인하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 또한 본 구절의 표현이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높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겠다는 신앙의 표시이자 하나의 서약이라고 할 수 있다(레 22:32; 시 79:9; 사 8:13; 29:23). 동시에 이 기원은 기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역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범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worship)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형편을 허락해 달라고 하는 간구이기도 하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지배하는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어지는 것에 상응하는 인간에 대한 축복이다. 이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종말론적 성취를 대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사단의 통치의 종식(終熄)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이 나라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미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9:1; 10:17). 따라서 본문의 말씀도 성도들이 단지 미래에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개인과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을 바라며, 또한 실제로 경험하며 살게 해달라는 간구로 보아야 한다.
=====11:3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두 번째 부분은 개인적인 필요를 구하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용할'(* , 에피우시온)이라는 형용사의 해석이 난해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여기에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사용된 범례(凡例)를 참고할 수도 없으며 그 의미도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❶ '내일을 위한'이란 의미. 그러나 문맥상 '내일'이 아니라 현재의 필요를 요청하는데 초점이 있는만큼 이 해석은 저녁에 기도하는 경우에만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단어가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해석된다면 '내일'은 종말론적 완성의 때를 가리키며 '양식'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을 영적인 양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마태복음에 기록된 '오늘날'(6:11)은 그 미래의 양식을 '오늘' 허락해 달라는 간구로 이해할 수도 있다(Liefeld). ❷ '필요한' 또는 '충분한'이라는 의미. 이렇게 되면 본문은 "날마다 충분한 양식을 주옵시고"가 되어 비교적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예수 당시의 날품팔이 노동자들에게 있어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는다는 것은 매우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었으며(마 20:1-5),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었다는 사실은(출 16:4; 신 8:9) 이 신앙의 근거가 된다. 육체적인 양식이든 영적인 양식이든 그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은 매우 중요하다.
=====11:4
용서하오니...사하여 주옵시고 - 여기서 '죄'(* , 하마르티아)는 아람어 '호바'(hoba)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빚'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이에 근거하건대 '죄'란 하나님께 '빚' 또는 '부채'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죄를 범한 사람이란 하나님께 응분의 대가를 치뤄야 할 '채무'를 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빚을 탕감받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바 그것은 나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것이 하나님께 빚진 나의 채무를 필연적으로 탕감되도록 하는 담보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 빚의 탕감을 조심스럽게 간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 여기서 '시험'(* , 페이라스모스)은 '유혹'(temptation, NIV)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는 성도의 신앙을 꺾으려는 외적인 시련과 죄를 범할 수 있는 내적 유혹을 함축적으로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단 시험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중요한 것은 그 시험을 견디어내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하는 주체가 하나님인 것으로 오해의 여지를 남기나 약 1:1-15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성도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물론 때로는 그분의 선한 뜻을 펴시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기도 하지만(4:1-12;욥 1:12) 본문은 성도가 시험에 부딪쳤을 때 굴복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인 것이다. 이것은 마 6:13의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송영구가 있으나 권위있는 마태복음 사본 가운데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도 있어 이것이 본래적인(original)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11:5
밤중에...내게 빌리라 - "너희 중에 누가"라는 양식으로 비유를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께서 자주 사용하신 형식이다(11절;12:25;14:28;15:4;17:7). 한 친구가 찾아온 시각은 '밤중'이다. 7절에 의하면 이 시각은 제법 늦은 밤이었다. 왜냐하면 식구들이 모두 잠 자리에 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친구의 방문이 예의를 벗어나는 것임과 따라서 환영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11:6
여행 중에...먹일 것이 없노라 - 이 친구가 밤중에 떡(bread,NIV)을 얻으러 다른 친구의 집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제시된다. 팔레스틴의 기후 조건 즉 낮의 찌는 더위를 고려하건대 밤에 여행하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므로 여행하는 친구가 밤에 찾아 온 것은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었다(마 2:9). 그런데 친구의 방문을 받은 이 사람은 공교롭게도 손님을 대접할 음식이 없었다. 이 친구에게 대접할 음식이 전혀 없었는지 아니면 조금은 있었으나 당시의 풍습상 손님에게 떡을 부족하게 대접하거나 먹다 남은 떡 조각으로 대접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모욕이었기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그는 떡을 필요로 하는 여행중의 친구를 위해 가족이 모두 한 방에서 자야하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친구의 집을 찾아간 것은 분명하다.
=====11:7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 아마 이 주인은 잠이 들었다가 친구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 다소 불쾌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친구의 방문을 환영하는 "친구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Manson). 실질적으로 이 집 주인이 괴롭게 생각했던 것은 떡을 주는 것보다는 첫째는 문이 이미 닫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식구들과 함께 자고 있는데 일어나 움직이면 식구들이 깨어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염려이다. 첫째 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문을 잠그기 위해 문빗장을 걸었을 텐데 그것을 어두움 속에서 찾아 여는 것은 대단히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Easton). 이 집은 온 가족이 한 방 한 이부자리 밑에서 잠을 자는 팔레스틴의 시골 농가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11:8
벗됨을 인하여...강청함을 인하여 - '강청'(boldness, NIV)함을 견디지 못해 필요한 것을 준다. 여기서 '강청함'(* , 아나이데이안)은 부정접두어 '아'(* )와 '부끄러움이 없음'을 뜻하는 '아이도스'(* )의 합성어로 체면 불구하고 간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는 두 가지 교훈이 내포되어 있다. ❶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으려 했던 집 주인과 하나님의 쾌히 주심을 대비함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반드시 응답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려는 것이고(9-13), ❷ 응답이 즉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계속해서 끈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함을 가르친다(살전 5:17).
=====11:9
구하라...주실 것이요 - 본문의 '구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테이테'(* )는 동등한 입장에서 구하는 '에로토'(* )와는 달리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구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기도'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된다(10:13; 마 18:19; 막 11:24; 요 11:22; 엡 3:20). 본문의 의미는 '받기 위해서는 구해야 한다', '구하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다'로 이해할 수도 있고(Lagrange), '구하면 확실히 받을 수 있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Marshall). 그런데 후자의 의미는 다음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볼 수 있기에 본절은 전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기도할 때 반드시 그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찾으라...찾을 것이요 - 이 문구의 의미는 기도한 것을 얻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야 함을 말해주는 거일 수 있고, 또한 여기서 사용된 동사 '찾으라'(* , 제테이테)의 성경적 용버버에 따라 하나님을 찾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신 4:29; 삼하 21:1; 호 5:15; 행 17:27). 두드리라...열릴 것이니 - 기도를 문을 두드리는 것에 비유한 예는 랍비들의 가르침에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기도를 함에 있어서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예레미아스(Jeremias)는 이 장면이 하늘의 잔치에 들어가기 위한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전후 문맥상 다소 거리가 있다.
=====11:10
구하는...열릴 것이니라 - 본절은 앞의 말씀에 대해 재차 강조 하면서 하나님께 드린 올바른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고취시킨다(시 91:15; 사 58:9; 슥 13:9; 요 15:7). 본절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자의 끈기와 인내보다는 하나님께서 필히 응답해 주신다는 '절대 신뢰'와 구한 것은 틀림없이 받는다는 '확신'이다.
=====11:11
생선을 달라하면...뱀을 주며 -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할 근거를 제시하는 비유의 말씀이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자식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자가 있겠는가. 생선을 주거나 생선이 없다면 적어도 해로운 것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를 말해주는 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틀림없이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응답해 주시되 선한 것으로 주신다는 사실이다.
=====11:12
알을...전갈을 - 여기서 알은 떡, 마른 생선과 함께 유대지방의 정식으로 알려진 삶은 달걀을 말하며 전갈은 꼬리로 상대를 찔러 무감각하게 만드는 독을 가진 짐승이다. 이 전갈(全蝎)은 성경에서 악하고 위험한 것의 상징으로 묘사되며(신 8:15; 계 9:3, 10), 몸을 구부리면 계란과 비슷한 모양이 된다. 한편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에는 '떡과 돌이' 한 쌍을 이루며 서술되어 있어(마 7:9) 누가복음과 차이를 보인다.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 여기서 '악한'(* , 포네로스)이라는 형용사는 사람과 그 행위를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3:19; 6:45). 혹자는 이 표현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쓰여졌다는 사례에 근거하여(마 12:34), 여기서도 이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기도 한다(Marshall). 또한 이 말씀이 인간 일반의 원죄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둘 다 정확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설사 후자의 견해가 옳다고 하더라도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데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을 강조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천부께서...성령을 - 누가가 인간이 주는 '좋은 것'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성령'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의 것과 하나님의 것의 질적인 차이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총 가운데 최고의 선물인 성령이기 때문이다(요 16:7). 성령은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고전 12:4-11). 실제로 오순절 이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장 귀한 선물 곧 복음의 물결이 온 세계로 확산되어 갔다. 한편 마샬(Marshall)의 견해대로 마태의 '좋은 것'이라는 표현이 영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면(롬 10:15; 히 9:11; 10:1) 누가와 마태는 결국 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눅 11:11-13 / 정근두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주일 세례요한의 소개를 따르면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은 예수님 자신이 하신 도전의 말씀, 누가복음 11장 13절 후반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중심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땅을 사는 성도들에게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숨쉬는 성도들에게는 “성령을 구하는 기도”야말로,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성도답게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올해의 울산교회 목표인 “은사의 발견, 섬김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가장 절실합니다. 이 땅의 교회가 민족의 희망이 되기 위해서 “성령을 구하는 기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께서 동시 다발적으로 신앙공동체에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을 부흥이라고 부릅니다. 부흥하면 “부흥회” 혹은 “부흥사경회” 아니면 “심령부흥회”를 떠올린다면 여러분은 부흥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부흥이란 강사를 초빙해서 집회를 마련한다고 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흥은 동시 다발적인 성령의 부어주심입니다. 부흥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고, 부흥이 일어나면 우리는 다만 그것을 의식할 뿐입니다. 달리 말해 사람이 부흥을 기획하거나 연출할 수 없습니다. 부흥은 정의상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교회에 특별하게 부어주시는 일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면, 무기력하던 성도들이 새롭게 됩니다. 능력을 입어 놀라운 증인으로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교회에 특별하게 부어주시면, 이미 주님을 믿고 있던 성도들이 새로워질 뿐만 아니라 바깥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기 시작하고, 선한 영향을 사회전반에 끼치게 됩니다.
이런 부흥을 대망하며 10여 년 전에는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앞두고 “Again 1907”을 소원하는 모임을 만들고 “Again 1907, 부흥이여 다시 오라”는 찬양을 보급하고, 부흥을 위한 연합기도운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평양 대부흥 100주년이 되는 2007년뿐만 아니라 10년을 훌쩍 넘긴 아직까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어느 해에는 해운대백사장에서 모여서 회개운동을 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했습니다만 그날 비는 내렸지만 영적인 은혜의 단비는 내리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가질 일은 무엇인지를 살피기 위해 부흥이란 무엇인지를 바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모해야 할 일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부어주심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기로 다시 한 번 서원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개인적으론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교회적으로는 부흥이 임하는 역사를 간구합시다.
마치 주님이 승천하고 성령이 강림하시기까지 열흘 동안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기록된 것과 같이 기도에 마음을 합하기로 결단하고 자신을 드리는 일입니다. 마치 축복해 주시지 아니하면 보내드리지 않겠다고 사생결단하던 야곱의 씨름처럼 기도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부흥을 구하는 기도는 결코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 일상적인 축복을 구하는 기도는 늘 해야 하지만 부흥을 구하는 기도는 이런 수준의 기도일 수는 없습니다. 일상적이지 않는 무언가 특별한 소원을 그 가슴에 품는 성도들을, 그 때처럼 ‘일백 이십 명’정도만 주신다면 새로운 부흥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1세기의 속화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그리고 우리의 기도의 자세가 바뀌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강하게 도래하기 위해서 우리의 기도가 바꾸어야 합니다. 사단이 기승을 부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려면 사생결단하고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13절 끝 부분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주님의 마지막 도전의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성령에 대해서 몇 가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성령은 아버지께서 자녀에게만 주시는 선물입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여기서 “너희”란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주시는 선물에 관심을 갖고,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두고 성령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말고는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고귀한 선물을 아무에게도 주시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1장 앞부분까지 성령에 대한 언급은 일체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지금 기도에 대한 교훈을 하신 후에야 비로소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제목이 많겠지만 성령보다 더 절실하고 중요한 것이 없음을 새삼 깨우쳐 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꼭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기도 제목 한 가지씩 말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중직자 여러분, 그리고 교역자 여러분, 우리 모두 여기에 일치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지난 1월부터 각 공동체를 위해서 요일마다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대체로 일상적인 기도제목들이지만 우리 모두 성령을 구하는 것보다 더 절실하고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함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적인 필요를 응답받든 말든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하늘의 은혜 속에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우리 모두가 밤낮없이 생각하고 사모하며 기도하는 제목이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성령 충만보다 더 절실한 기도제목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여, 성령을 주옵소서.”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부르짖기 바랍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사람들은 주님의 이 도전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을 때 이미 성령이 그 마음속에 들어와 계시는데 무슨 성령을 또 달라고 하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신학적으로 무식한 사람 취급을 종종 합니다. 특히 우리 보수주의 전통에서 자란 사람들 가운데 그런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무식한 사람들은 바로 그들 자신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와서 처음 세워진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서는 중생과 성령세례는 서로 다른 은혜이고 중생한 성도가 성령체험을 하지 못하면 무능함을 면치 못한다고 처음부터 가르쳤습니다.
보십시오.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셔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믿을 때에,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믿는 순간, 임하셔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펼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이었다고!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도전하신 누가복음의 이 기록은 오순절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만약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는 도전이 오순절 이전의 제자들에게만 유효한 것이라면 오순절 이후에 기록된 누가복음에서 이처럼 상세하게 분명하게 기록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에게 1차적으로 말하지 아니했다고 하더라도 모든 성경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기록된 말씀인 것은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 자신의 경험을 한 번 돌아봅시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짐을 따라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아무리 제자훈련을 받고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기도를 많이 한다 해도 해결되지 않는 영적인 영역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흔히들 제자 훈련을 받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면 인격과 사역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갖춘다고 생각하지만 모양은 그럴 듯한데 그 속에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상의 수준이 있습니다. 능으로도 안 되고 힘으로도 안 되고 오직 성령으로만 되는 그런 영역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성령을 달라는 기도 말고는 모두 2차적인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의 성령을 구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도하라고 권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바로 기도하도록 권면해야 합니다. 특히 성령을 달라는 것이 가장 절실한 소원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2. 성령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구절이 있습니다. 소위 산상 보훈 가운데 나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오늘 우리 본문 13절과 대조해 봅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두 곳을 대조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좋은 것”이란 단어가 오늘 우리 본문 13절에 “성령”로 바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선물 중에서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악한 인생들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을 압니다. 어떤 아비가 생선을 먹고 싶어 하는 자식에게 독뱀을 주며, 알을 달라는 자녀에게 무서운 전갈을 주겠습니까? 자식의 손에 알처럼 보이는 움츠린 전갈을 쥐어줄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 악한 자들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을 안다면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을 아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늘 아버지께 그동안 무엇을 구해왔습니까? 생선과 달걀, 아니면 빵을 구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까? 이제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구해 보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성령을 구하도록 초대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선물은 그 분 자신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 자신의 영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를 주십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구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복 주시는 성령님을 구하십시오. 성령께서는 이미 모든 성도들 가운데 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 속에 찾아오시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17절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지금)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장차)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하)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면 우리의 삶은 변합니다. 평소에 불만스럽게 여기던 것들이 감사와 찬양으로 바뀝니다. 성령의 은혜가 임하면 평소에 “나는 못해”하고 체념하던 삶이 바뀝니다. 불가능이 없는 삶으로 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성령의 은혜는 좋은 것 중의 좋은 것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 중에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주님이 친히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상 죄를 담당하신 주님이 부활, 승천하여 아버지께로 가셔서 영광을 받으시면 성령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새로운 차원의 교제가 시작됩니다. 그때 성도들은 새로운 차원의 사역을 행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성령은 아버지께서 아무에게나 주시는 선물이 아니고 구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버지께서 자녀에게 주시는 선물로서 성령에 대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믿고 중생 받을 때 우리 마음에 오시는 성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오신 그 성령께서 다시금 능력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한 번 성령을 모시는 것으로 평생 동안 성령 충만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땅에서 경험하는 천국생활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 보나 많은 위대한 선배들의 삶을 두고 보나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히 성령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구하지 않으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잘못된 장로교 신학의 틀에 안주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구하라”는 말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이미 우리 안에 계신데 감사하면 되지 무슨 성령을 또 구하느냐?’는 생각에 사로잡혀 “성령을 구하라”는 말이 귀에 잘 안 들어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 한국장로교의 가장 원천적인 신학의 요람이던 평양신학교에서, 당시 조직신학교수인 이율서 교수가 감수와 서문을 쓴, 1931년에 교재로 번역된 가옥명의 책에서는, 중생과 성령세례가 구별되는 은혜임을 밝히며,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신자가 무능함을 면치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기도에 힘쓰도록 강조한 것이 처음부터 우리 한국 장로교의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귀담아 듣지 않고 있는 가운데 지난 20세기 초반부터 세계 교회 역사에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별로 건전한 신학이나 체계적인 교리도 없는 사람들이 다만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를 붙들고 “주여 성령을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구하자 하나님께서 놀랍게 응답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한 번 있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시작된 성령의 불길은 20세기가 끝나도록 전 세계로 확산되어갔던 것입니다. 남미를 휩쓸고 아프리카를 강타했습니다. 우리 기성교회가 잘못된 교리의 틀에 갇혀서 성령을 구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엉뚱한데서 불을 지피신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말하면 오늘날 전 세계 기독교인 가운데 3분의 1은 성령을 구하여 성령의 역사를 실제로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3분의 2는 성령을 알고는 있지만 아직 구하지 않아서 성령이 어떤 분인지 실제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교인이 성령을 구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교리와 역사를 망각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성령”하면 오순절 파의 독점물인양 생각하는 무식이 판을 치는 현실을 우리는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세기 영어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장로교 신학자로 인정받는 워필드는 이렇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발전된 성령교리는 배타적으로 신교 교리이며,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개혁주의 교리이며, 더 정확히 표현하면 청교도 교리”라고 선언합니다.
“주님, 성령을 주십시오.”라고 구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주님은 도전하십니다. 성령 체험은 그리스도인이 제대로 사역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능력 있는 증거와 탁월한 봉사를 하는 사람 치고 성령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전도를 빼어나게 잘 하는 사람, 목회와 선교에 탁월한 사역을 하는 사람은 모두 성령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축복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을 향한 소원을 아뢰어야 합니다. 그 분을 찾으십시오. 그 분을 사모하십시오. 그 분 없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분을 항상 갈망하십시오. 이 축복은 기도로 얻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 116문답은 이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가 필요합니까?” 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은혜와 성령을 마음으로 끊임없이 탄식하며 구하는 자들과,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기도하기 시작하던 그 첫날 제자들처럼 성령을 기다립시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성령을 달라고 구하는 긴박한 기도를 주 임무로 삼읍시다.
더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더 긴박한 심정으로 구하게 될 때 새로운 부흥이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이 땅의 회복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드리기로 결단합시다. 그러면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우리 자신이나 민족의 상태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고, 자신을 이 숭고한 사역에 드리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의 직접적인 활동인 부흥의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첫 부흥인 사도행전의 오순절 역사로부터 시작해서 교회사를 보면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는 항상 이렇게 능력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대개 백년을 주기로 일어나는 새로운 부흥이 이 수년 내에 반드시 일어나야 이 민족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평양 대 부흥이 일어난 지 꼭 100주년을 11년이나 넘긴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부흥이 이 땅에 시작되면 깊은 죄악의 잠에서부터 교회를 불러 깨우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놀라운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잦아든 교회의 영적 생명의 흐름이 폭포수와 같이, 대하(大河)와 같이 민족역사의 중심 흐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영광스런 미래를 사모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혹시나 하는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지만 이 모든 사역의 중심에 우리 자신이 너무나 부각되어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 내기가 힘듭니다.
여러 조직은 만들어졌고 대회도 많이 구상되었지만 과연 그것이 다시 한 번 이 땅에 부흥을 가져오는 마중물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부흥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개입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조직을 만드는 일에 열정을 쏟는 대신 오히려 이사야가 드린 것처럼 기도에 자신을 드리는 주의 종들이 나타난다면 이 땅을 새롭게 하는 부흥의 도래, 그 분명한 조짐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그 옛날 이사야처럼 여러분과 함께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시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께서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 . .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사 63:15~16, 19)
이제 말씀 맺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은 구하는 자들에게만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은 그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자들에게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탄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탄식하며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의 내용과 기도의 모습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는지 바로 인식한다면 이제 우리는 새롭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 바로 인식한다면 이제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궁극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구한다면 우리는 강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소유한 성도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 특별한 능력을 공급받는 것은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와 성령
눅 11:11-13 / 피종진목사
본문에 보면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간구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 즉 ‘성령’을 반드시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기도는 성령을 받는 채널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하나님은 성도가 기도할 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오순절 마가다락방에 모인 무리들이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무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행 4:31). 그래서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살전 5:17). 사도행전 8장 14~17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 받기를 위해서 기도했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또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어떤 제자들에게 성령 받기를 위해서 기도했을 때에도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행 19:6). 이처럼 기도는 성령을 받는 채널입니다.
둘째, 기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합니다.
사도행전 16장 6~10절에 보면 바울이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제지를 받아 소아시아에서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방향을 바꾸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 길마저도 제지하셨습니다. 이렇게 되자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에게해 연안의 항구 도시 드로아에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통해 바울의 발길을 유럽쪽으로 돌리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바울의 전도 사역이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순종하여 아시아에서 전도의 발길을 돌려 환상을 통해 본 마게도냐를 향하여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행 16:11~15).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은 기도할 만한 장소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성밖의 강가로 나갔다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합니다.
셋째, 기도는 성령의 능력을 폭발시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초대교회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했을 때 모인 곳이 진동하면서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성령의 폭발적인 능력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성도들의 기도 응답으로 받은 성령 충만은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교회를 하나 되게 하였습니다. 기도는 이처럼 성령의 능력을 폭발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평생에 기도해야 합니다(시 116:2).
넷째, 기도는 성령 충만한 사명자가 되게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행 6:3)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위해 일할 사명자는 가장 먼저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일곱 집사를 선정할 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을 자격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로서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생활, 하나님께 늘 간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성도를 가리킵니다. 교회의 일은 성령의 지시와 도우심으로 행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성령을 받는 채널이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하며, 성령의 능력을 폭발시키고, 성령 충만한 사명자가 되게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믿고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 능력있는 사명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가장 좋은 것을 구하라
눅 11장 10~13절 / 문기태목사
솔로몬왕이 일천번제를 드리는 중에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구하라."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의 백성들을 잘 다스리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주께서는 솔로몬이 그렇게 구한 것이 마음에 드셨습니다. "네가 자신을 위하여 오래 사는 것이나 부유한 것이나 원수갚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네 말대로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어 너와 같은 왕이 없게 하겠다. 또 부귀와 영화와 오래 살게 해 주겠다." 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리고 자신과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것을 구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 밤에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한 가지만 구해라." 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만약 주님이 저에게 구하라고 하시면 저는 성령 충만을 구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하게 되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은혜가 절로 쏟아지고 기쁨과 감사가 솟아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또 성령충만함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가장 주시고 싶어하시는 은혜이기도 합니다. 성령충만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입니다. 성령충만하기만 하면 지혜롭게 되고 문제가 절로 다 해결됩니다. 내가 성령충만하면 점차 성령의 충만함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확산됩니다. 교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가정에도 복된 영향을 끼칩니다.
지난 주간에 모 안수집사님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짜증을 좀 내고 교회에 대한 불평을 했습니다. '왜 목회자로 하여금 기쁨으로 사역하도록 교회에서 지원하지 않느냐? 열정을 품고 일하려 하면 번번히 발목을 잡아 주저 않히는것 같다. 교회의 중직들이 목사의 방패막이 되어 주고 목회자와 동역하지 않고 오히려 같이 흔드는 것 같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사역다운 사역이 나오겠느냐?' 그런 요지였습니다.
그분이 불쾌한 내색이 없이 조용히 다 잘 들어주었으나 저는 하루 종일 기분이 찜찜했습니다. '내가 또 절제하지 못하고 실수를 했구나! 불평이나 하는 성숙되지 못한 목사의 모습을 보여서 실망을 안겨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너에게 있다. 네가 성령충만하지 못한 때문이다. 너만 성령충만하면 그런 것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할 때는 아무것도 아닌 문제가 성령충만하지 못할 때는 큰 문제처럼 여겨집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못마땅하고 힘들고 짜증으로 이어집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영적인 침체로 이어지고 다른 은혜와 축복이 아무리 많이 부어져도 별로 기쁘지 않습니다. 여간해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어둡고 답답한 깊은 수렁에서 아무리 자신의 힘으로 헤어나오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충만한가? 늘 점검하고 그렇지못하면 무엇보다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수년간 다니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신자요, 교회 밖에서는 세상 사람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인줄 알면서도 어떤 죄를 계속 범하고 있습니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순종이 안되지는 않습니까? 예배가 지겹습니까? 기쁨이 메말랐습니까? 기도가 안됩니까? 전도의 열매가 없습니까? 이 땅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한 안타까운 심정이 없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도 성령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아 새롭고 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본문을 통해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고 잇습니다. 본문을 통해 주님게서 성령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시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무엇보다도 성령을 주고 싶어 합니다.(13)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여러분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자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 가장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 가장 유익한 것, 가장 좋은 것만을 물려 주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더욱 그런 소원을 갖고 계십니다. 가장 좋은 것을 당장에라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오늘 읽은 말씀 13절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가장 주고 싶어하는 선물이 성령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가장 먼저 주기를 원하시는 기도의 응답이 성령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기도는 성령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본문은 얼핏 기도를 강조하는 말씀같지만 사실은 기도보다 성령을 더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다 소용없음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너무나 중요하여 강조하고 싶으니까 의문법을 사용하십니다. 주님이 뭐를 몰라서 질문한 것도 아닙니다. 강조하려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다른 기도는 몰라도 성령을 주십사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도둑도 제 자식에게는 제일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고 조폭도 제 자식에게는 필요한 것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구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성령임을 아시고 성령을 주실 준비를 다 하고 기다리십니다. 성령받으면 크고 작은 문제가 다 해결되기 때문에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받아 충만하면 은사가 따라오고 성령충만하면 인격이 성숙되어 주님께 귀히 쓰임받을 수 있기에 성령을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이 말씀을 들으면서 "주여 옳습니다. 내가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을 다시 충만케 하옵소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옵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응답이라면 주여! 이 시간 성령을 주시옵소서!" 하고 부르짖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냐! 나도 오랫동안 기다렸다. 성령충만을 받고 새롭게 되기를 바란다. 당연하다 성령만큼 좋은 응답이 나에게 없느니라 내가 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있다면 성령이니라." 우리 하나님께로부터 여러분에게 그런 응답이 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솔로몬왕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딱 맞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정말 기쁘시게 여기시고 주고 싶어 하시는 가장 좋은 선물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답게 복되게 살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성령은 가장 좋은 것입니다.(13)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고 세상의 아버지와 하늘 아버지, 세상의 좋은 것과 성령을 대비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이고 성령 안에 온갖 좋은 것이 다 들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하고 이 본문하고 비교해 보면, 이 본문에서는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마태복음 7장 11절에는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렇게 성령을 가리키는 자리에 좋은 것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좋은 것입니다. 성령 안에는 온갖 좋은 것이 다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평소에 달라 달라 하는 것을 그 다음에는 달라고 할 필요가 없어지는 때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 이미 아실 것입니다. 은혜 받아 보신 분들은 '아,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 답답해 죽겠습니다. 주여! 내 마음에 기쁨을 주옵소서! 왜 마음이 시원하지 않습니까?' 이런 기도를 평소에 하던 사람이 성령의 은혜만 받으면 그 기도가 없어져 버립니다 성령이 오셔서 그 마음에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막혔던 것을 푹 뚫어 주시니까 그 기도가 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 안에 좋은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오, 주님! 내 남편이 미워 죽겠습니다.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힙니까? 주여! 내 남편 고쳐 주옵소서!' 하던 여자가 성령 충만 받으면 그 다음에는 남편을 보는 눈이 확 달라져 버립니다. '아, 모든 잘못이 나에게 있었구나? 그래서 성령 충만한 부인으로서 남편을 위하여 참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봉사해 주고, 남편이 약간 기분 나쁘게 해도 오히려 그 마음에 기쁨이 충만해지니까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변하니까 남편도 변합니다. 괴롭히던 것이 줄어들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부드러워집니다. 그렇게되니 '남편 고쳐 주옵소서!'하는 기도가 사라집니다. 성령 안에 모든 좋은 기도의 응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성령 안에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모든 좋은 것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성령 충만하면 우리의 기도가 참 단순해집니다. 복잡하던 기도가 단순해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복잡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다 해결되어 버리니까 그런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주의 은혜가 흘러 넘치면 인간관계가 서로 달라지고 보는 눈이 달라지니까 과거의 문제가 다시는 문제로 남아 있지 않는 것을 우리는 자주 체험을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좋은 성령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구하기만 하면 준다고 했는데 왜 우리에게 안주실리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성령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임을 깨닫고 성령안에 우리에게 유익한 온갖 좋은 것이 넘침을 발견하고 무엇보다도 성령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령은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고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13)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아무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구하는 이라는 말은 간청한다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간청한다는 의미는 귀찮을 정도로 못살게 군다는 말 아닙니까? 그래서 5절이하에서는 예수님이 비유까지 들어서 우리가 알아 듣도록 설명을 하셨어요. 손님이 늦게 찾아와서 집에 대접할 것이 없어 친구에게 밤늦게 찾아갑니다. "친구야! 빵 세 개만 꾸어 주라. 귀한 손님이 왔는데 내 놓을 것이 없어 대접을 못한다네." 그러자 친구가 대답하기를 "야 이 사람아, 지금 시간이 몇 시인가? 이미 잠자리에 들어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지금 일어나면 잠 다 달아나서 안 되겠네. 내일 오게." 그래도 찾아온 친구는 안가고 계속 문을 두드리며 조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의리를 생각해서 주는 것이 아니고 귀찮아서 이러다가는 밤새 한 잠도 못 잘것 같아 할 수 없이 일어나 빵을 내어줍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기도를 하되 이 간청하는 기도를 못해 가지고 많은 손해를 봅니다. 왜 강청하는 기도를 못하는지 아십니까? 체면때문에 못합니다. 눈치보느라고 못합니다. 이것 저것 따지고 상대방이 곤란할까봐 미안할까봐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슨 홀아비 과부 생각해주듯이 하나님 사정 봐주는 것 같은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필요하고 급한 것이라면 매달리고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졸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안 주실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시시한 것 가지고 조르는 것이 아니고 성령주십사 강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은 무슨 일이 있으면 "목사님 심방 와주세요. 또는 기도 해주세요."하고 요청을 잘 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전화도 잘 못합니다. "목사님, 피곤하실텐데 쉬시는것 방해할까봐 망설이다가 겨우 했습니다." 꼭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피곤하면 제가 알아서 다 쉽니다. 제가 혹 바빠서 안 되겠는데요. 하고 거절해도 정말 필요하면 간청하십시오. 제가 혹 잊어버렸다가도 다시 생각나도록 또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거절할 수 없습니다.
방송국에서 얼마전에도 상담봉사를 요청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전파 좀 타면 유명해지고 교회부흥에 큰 도움이 될까해서 얼른 갔었는데 가만히 보니까 부흥에 별 도움도 안 되고 괜히 시간만 많이 뺏기고 신경만 많이 쓰이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일단 거절부터 합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습니다. 바빠서 곤란합니다.' 그러면 어떤 이는 " 목사님 꼭 좀 도와주세요. 모두 목사님이 적임자라고 합니다." "그럴리가요. 다른 좋은 분들이 많은데 제가 시간이 없으니 다른 분한테 부탁하세요." "아닙니다. 꼭 목사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바쁘시지만 꼭 좀 도와주십시오."하고 계속 사정하면 거절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떤 피디는 "그러세요. 그럼 할 수 없군요. 다음에나 도와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하고 끊습니다.
제 생각에 '내가 하나님 앞에 저 식으로 기도하고 나면 맨날 결과가 똑같겠다. 하나님을 너무 귀찮게 구는 것 하나님께서도 불편하실 테니까 딱 한번만 주님 앞에 구하고 대답이 없으면 하나님이 안 주시는 걸로 제가 알겠습니다' 이러고는 응답 없으면, 다시는 그 기도 안하면 하나님께서 '야 너 참 신사적이구나!' 하시며 기특해 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보고 "귀찮도록 달라고 해라. 특별히 성령을 구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게 해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왜 눈치보고 자꾸 얌전을 떱니까? 하나님 귀찮아 하실까봐 얌전을 떠는 겁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봐주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러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가 달라고 하면 주지 않느냐 하물며 내가 안주겠냐 내가 가장 주고 싶어하는 것 왜 안주겠느냐?" 하십니다.
재미난 우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두 마리 개구리가 우유통에 빠졌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기로에 놓였습니다.
한 마리는 '어떻게 여기 빠져가지고 재수 없게 죽게 되었는고' 하고 절망을 하고는 네다리 확 뻗고 허우적거리다가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개구리 한 마리는 "아니야, 나는 살아야 돼" 하고는 막 헤집고 돌아다닙니다. 성령충만한 개구리입니다. 밤새도록 막 헤집고 다녀요. 성령충만한 사람은 그런 사람이랍니다. 막 헤집고 다녔더니 우유가 그만 나중에 자꾸 굳어져 가지고 치즈가 되어서 단단해지고 통 밖으로 펄쩍 뛰어 나왔다고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체험한 사람들은 어떤 상황 속에 빠지던지간에 내 팔자가 왜 이렇나 하고 다리 쭉 뻗고 가만히 있다가 죽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대로 끝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 주세요. 살려 주세요. 은혜를 많이 부어주셔서 더 좋아지게 해주세요. 주님 믿습니다!" 하고 매달리니까 우유가 나중에 치즈로 바뀌는 것 같은 체험을 자주자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체험하는 과정을 통해서 영적으로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고 성령의 감동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적과 같은 사건을 직접 맛보게 하십니다.
그러다보니 사람이 생각이 달라지고 하나님이 내게도 응답하셨다고 하는 그런 큰소리를 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눈빛이 반짝반짝하고 사람이 달라 집니다. 어떤 시험이 찾아와 위협해도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 확신에 차있고 기븜과 감격이 넘치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려면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귀찮아서라도 하나님이 벌떡 일어나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시도록 간절히 매달리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체면 차릴 필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 없습니다. 성령받아야만 삽니다. 성령충만해져야 능력있게 살 수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여러분 모두 성령충만함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배가 지겹습니까? 기쁨이 메말랐습니까? 기도가 안됩니까? 전도의 열매가 없습니까? 이 땅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한 안타까운 심정이 없습니까? 죄가운데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미워지고 원망과 불평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교회생활이, 가정생활이 위태로와지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도 성령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안에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해져야 합니다. 오늘 성령충만해져야 합니다. 이 시간에 성령의 충만을 위해 기도합시다. 구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 오늘 부르짖고 매달려서 성령의 은혜를 충만하게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한 후에는 어떻게 하는가
눅 11장 9~13절 / 민경설목사
기도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수동적이고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도만이 인간들이 땅에서 하늘을 움직일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은총 수단입니다. [약5:17∼18]"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그러므로 기도를 정적으로 수동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잘못 이해하거나 하나님의 역사를 막고 있는 현상이 됩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가 올바른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마귀들이 보름스 국회 재판장의 기왓장만큼 많다해도 저는 그들 앞에 서겠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기도했어도 재판장에 나가지 않았다면 종교개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의 뜻대로 했다하여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에 4:16]"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마가복음 2장의 중풍병자도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가 간절히 기도한 후 강한 신유의 확신을 갖고 네 친구의 도움을 받아 가버나움 집에 도착했지만 사람이 많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내리자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막2:5]"(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이 모두 기도의 역동성을 나타냅니다. 이제 본문을 중심으로 기도한 후에는 어떻게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성령의 평안이 유지되도독 중단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평안이 오면 기도가 응답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평안을 주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평안이 올지라도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평안이 유지되도록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평안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내가 기도할 때 먼저 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래서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평안이 유지될 때 구한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평안과 다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잃어버리면 세상이 주는 평안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나가게 되고 세상의 일들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오는 평안을 버리고 성령의 평안을 소유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성도의 축복은 평안입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돈이 많아도, 명예가 있다해도 힘듭니다. 엘리사에게 어떤 생도의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인 생도가 빚을 지고 죽게 되고 두 자녀를 빼앗길 상황에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빈 그릇을 많이 빌려오라고 합니다. 이 말은 평안의 능력만큼 빌려오라는 뜻입니다. 이 빈 그릇은 생도의 부인이 가진 평안에 따라서 수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빌려온 그릇의 수만큼 그릇이 채워졌습니다. 평안의 능력만큼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평안이 온 후에는 내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합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 반드시 해답이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내가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세상에 있지만 해답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세상 속에 길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길을 찾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평안을 얻으면 문제의 길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성령이 충만하여 늘 기도하고 평안을 유지하고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왕의 꿈을 해몽하게 되고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길은 내가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을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3. 길을 찾았다면 믿음으로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행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가 발을 딛일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미국의 영적 지도자인 '오스왈드 챔버슨'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느낌이나 환경이 하나님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대로라면, 하나님께 믿음이 있다면, 시작하고 걸어가면 어느새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홍해를 지팡이로 짚으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의심하지 않고 명령대로 했습니다. 그 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서 7번 몸을 담급니다. 6번 째까지 들어가도 그의 몸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7번 째에서야 몸이 어린아이 같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을 유지하시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길을 찾으시고 그 길로 나아가십시오. 날마다 기도가 응답이 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성령을 주십니다
눅 11장 9~13절 / 권오서목사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어령 교수가 쓴 「아들이여 이 산하를」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 속 에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나옵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 수염을 길게 기르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사는 어떤 꼬마 아이 하나가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궁금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만나자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밤에 주무실 때 그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밖에 내 놓고 주무세요?” 그 할아버지는 질문을 받고 금방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얘야, 미안하다. 나도 미처 생각을 못한 일인데 오늘밤에 한번 자 보고 대답 해주마.”하고는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밤에 수염하고 씨름을 했습니다. 이불 속에 넣고 자니 답답하고 내놓고 자니 이상 하고 밤새도록 수염을 가지고 씨름을 했습니다. 30년 동안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그 수염이 잘 때 이불 속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미처 생각을 못했다가 이제 그것을 의식하니까 그렇게 불편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가끔 이런 할아버지와 비슷한 분들이 계십니다. 모든 분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내가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성령이 내 안에 계시는지 밖에 계시는지’라고 질문을 하면 선뜻 자신 있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성령을 받으셔야 합니다. 오늘은 웨슬리회심주일입니다. 죤 웨슬리 목사님은 1738년 5월 24일 회심을 했는데, 그날의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주님이 내 죄를 다 사하시며, 죄와 사망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내 일생에 처음으로 그런 뜨거운 감격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내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정욕과 죄악이 물러가면서 주님만을 모시는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이와 같은 체험을 했기에 그는 자신 있게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령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었습니다.(예화노트, 검색어 : 성령, 제목 : 요한 웨슬리) 성도는 끊임없는 성령과의 교류를 통해 믿음, 사랑, 기쁨, 감사, 평화 등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령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본 론
오늘 본문 말씀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은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성령을 주신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의 능력을 입혀 주신다”는 뜻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이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다고 고백하는 경우를 종종 보아 왔습니다. 또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의지, 자기의 노력을 강조하며 뭐든지 최선은 다하지만 열매가 별로 없는 신앙생활을 하며 허탈해 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스가랴 4장 6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문제? 무력감? 영적침체? 우리의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능력만이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고,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할 수 있고, 우리에게 풍성한 열매를 주실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에이든 W. 토저(Aiden Wilson Tozer) 목사님은 “Holy Spirit”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의 문제는 영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의 본질이 영적이기 때문이다. 내적인 생명의 문제가 해결될 때 삶의 다른 문제들도 해결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외적인 문제를 바로잡는 데 투자하는 시간의 절반을 투자하여 당신의 마음을 바로 잡으라. 그러면 그 결과에 크게 만족할 것이다.”(에이든 토저, Holy Spirit, 78)
성령을 구하십시오. 성령은 구하는 사람이 받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1. 성령은 “구해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능력, 성령의 은혜, 성령의 역사는 구해야 주십니다. 매달려야 주십니다. 주실테면 주시고 안 주시려면 마시라는 식으로 구하면 주시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소극적이거나 지나치게 부정적이거나 지나치게 이기적이거나 지나치게 비판적인 사람에게는 성령의 능력이 임하지 않습니다. 사모하며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찬송하나를 부르더라도 성령의 만지심을 경험하도록 사모하며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의 은혜가 마른 땅을 적시는 봄비 같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도행전 1장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1장 14절에 보니까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라고 했습니다. 얼마동안을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까? 사도행전 2장에 보니까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라고 했습니다. 곧 예수님이 승천하신 날로부터 오순절까지를 계산하면 약 10일 동안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열흘 동안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말입니다. 전혀 기도에 힘써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기도에만 전념했다는 뜻입니다. 그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장 4절에 보니까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아”라고 했습니다. 곧 기도하던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여기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다 도망갔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각자 자신의 일에만 매달려 고기 잡으러 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니까 어떻게 바뀝니까? 의기소침하던 제자들이 담대해졌고, 지혜가 부족하던 베드로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거침없이 복음을 전할 정도로 지혜가 충만해졌고,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날 정도로 치유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세계적인 부흥사인 무디(Dwight Lyman Moody)는 학교교육이라고는 보잘 것이 없었으나 그는 강한 성령의 능력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처음 성령의 불을 받았을 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개 목사님들은 자신의 설교가 끝나고 난 뒤,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좋아합니다. 무디 목사님도 그런 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디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 몇 사람이 꼭 그에게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을 위해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기도해준다고 하니 고마운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얼마나 못났으면 기도를 해준다고 하는 걸까?’-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계속해서 ‘기도해 드리겠습니다’라는 소리를 듣자 무디 목사님은 조금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참다못해 물어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합니까?” 그때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에 자극을 받은 무디 목사님은 그날부터 성령강림을 위해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의 월스트리트를 걸어가다가 정신없고 바쁜 도시 한복판에서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는 서둘러 친구 집으로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방에 혼자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 그는 혼자 있었습니다. 기도의 문이 터지면서 그는 강한 불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강력했기에 무디 목사님은 하나님의 손을 거두어 달라고 구하기까지 했습니다. 기쁨이 너무 커서 그 자리에서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예화나라, 검색어 : 성령, 제목 : 성령을 구한 기도, R.A. 토레이 ‘왜 무디인가? 70))
신앙생활, 성령 없이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의지하면 신앙생활만큼 쉬운 것이 없지만,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신앙생활만큼 힘든 것이 없습니다. 성령받고 신앙생활하세요. 구하면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 성령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의미는) “강청하며 구해야 할 기도제목이 바로 성령”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11장 1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2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신 후, 5절부터 보시면 강청하는 기도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친구 집에 사랑하는 친구가 밤늦게 찾아 왔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고 그것도 늦은 밤에 찾아온 방문이라서 그들에게 대접할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 집에 찾아가 자신의 손님에게 대접할 수 있게 빵을 좀 빌려달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가 친구이지만 지금 모든 식구가 잠자리에 들기 위해 다 침소에 누웠기 때문에 지금은 빵을 빌려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곧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밤늦은 시간에 빵을 달라고 하면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강청하며 구한다면 그 강청함으로 인해 일어나서 달라는 대로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그런데 이 말씀의 결론이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으로 결론지어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강청하며 지금 시급히 구해야 할 기도제목이 바로 성령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를 보십시오. 사회전반에 걸쳐 양극화 현상이 첨예화되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우익과 좌경, 부자와 가난한 자, 지배층과 피지배층-극도의 긴장감속에 갈등의 골만 깊어지고 있습니다. 부정부패는 정권이 바뀌어도 근절되지 않고, 오히려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지금 우리가 강청하며 구할 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로부터 일어난 미국의 제 1차 영적 각성운동을 보십시오.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부어진 성령의 역사가 미국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임하면 1년, 아니 10년 동안, 아니 100년 동안 인간이 노력하며 수고해도 안 되던 일이 한순간에 풀려지고 해결됩니다. 그토록 강퍅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열려지고 변화되며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무장하여 시대를 위해 애통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강청하며 구할 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입니다. 우리는 마가 다락방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며 강청하며 기도하는 인생이 되어야 함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3.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의미는) “성령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24장 48절로 49절을 보시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명령하신 것이 있습니다. 사실 마지막으로 당부할 말씀이시라면 굉장히 중요한 말인데 그 말씀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려면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 곧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사도행전 1장 4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라며 성령을 기다릴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성령을 강조하셨습니까? 성령님 안에 모든 문제의 해결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살면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모든 것을 받은 자요, 가장 최고의 것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알고 가까이에서 모신 제자들조차 성령의 능력이 필요했다면 이것이 필요없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필요합니다. 주의 제자들처럼 3년 이상 훈련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살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나 성령의 세례가 필요합니다. 나이도, 신앙의 연수도, 지난 날의 경험도 상관이 없습니다. 또 어떤 위치에 있든 관계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위하여 살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더구나 자신의 능력과 지혜가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주 예수를 섬기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그러한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봉사하는 것도 힘들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주님께 물질을 드리는 것도 기쁘기만 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쉽게 상처받지도 않고 늘 겸손하게 삽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평안합니다. 만나게 되는 사람들마다 사랑할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은혜롭게 말합니다. 섬기는 것이 행복이며, 전도하는 것이 행복이 됩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 왜 저에게 성령만 주십니까?”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성령은 적당히 주셔도 되니 60평 짜리 아파트를 달라고, 능력은 적당히 받아도 되니 명예를 달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파트보다, 명예보다, 성공보다 더 값지고 귀한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기쁨이 넘칩니다. 시험가운데서도 넉넉히 이깁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더라도 성령의 능력으로는 가능합니다.
정 리
오늘은 웨슬리 회심 기념 주일입니다. 저녁 시간에는 영등포 교회 김진두 목사님을 모시고 죤 웨슬리 목사님에 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뜨거운 분이셨습니다. 다른 교단 목사님들도 인정하듯이 ‘뜨거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바로 웨슬리 목사님이십니다. 오늘 저녁 예배 시간에 꼭 참석하셔서 웨슬리 목사님의 신앙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 모든 성도는 뜨거워야 합니다. 성령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간절히 사모하세요. 성령을 떼어놓고는 성도의 생활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지금이 성령 받아야 할 때입니다.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성령받으면 해결됩니다. 가장 좋은 선물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능력있는 삶을 사는 춘천중앙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간절히 구해야 할 성령
눅 11장 9~13절 / 이수영목사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당부말씀은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예수님의 직제자 열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주어진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과연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가르칠만한 자리에 서있는가 물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교회는 한국사회 안에서부터도 신뢰와 사랑과 존경을 상실함으로써 사회와 국가에 대한 지도력과 영향력을 잃어왔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일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자만심, 세계와 사회의 변화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무사안일주의, 이기심, 세속적 욕심으로 그 마음을 채워가면서 그 영성이 빈곤하여졌고, 이 세상과 별 차이가 없이 되어버림으로써 사회로부터 그 존재이유를 인정받지 못하게 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교회 안의 신학적 혼란과 이를 틈탄 이단과 사이비기독교종파들의 확산으로 교회의 공신력은 더욱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곧 이렇게 될 것임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2의 종교개혁이 한국교회에 요구된다는 외침과 경고의 소리가 들려온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디서부터 변해야하고 무엇부터 고쳐야할지를 몰랐거나, 알았다 하드라도 나부터 달라져야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결핍된 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옛 소련을 위시한 동구공산권의 몰락과 함께 냉전시대를 벗어났지만 오히려 그 여파로 크고 작은 지역분쟁과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냉전은 사라졌으나 그 이상으로 치열한 무한경쟁의 시대, 전쟁 아닌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진과학기술을 보유한 국가들의 패권주의와 그렇지 못한 나라들의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은 냉전시대 이상의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자정보교류수단의 숨가쁜 발달과 경쟁은 소수의 첨단정보과학기술을 소유한 집단들이 부를 독점하게 만들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경쟁을 좇아가지 못하거나 날로 새로워지는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절대다수의 국가들과 개인들은 심한 좌절감을 안고 살 수 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기술의 발달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많은 편리함을 제공하며 피상적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켰을지 몰라도,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갑작스럽게 처하게 된 소외상태 속에서 내면적으로는 삶의 질의 저하를 강요당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삶의 변화를 주도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유전공학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전자조작기술과 생명체 복제기술의 발달은 무한하고 무절제한 인간의 욕망과 결합될 때 무분별한 인간생명조작을 낳게되고 그로 인한 인간성과 생명의 존엄성 파괴와 함께 통제불능의 재앙을 온 인류에 초래하게 될 것으로 크게 우려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어떠합니까? 한국사회는 이 모든 오늘날 세계의 세기말적 현상을 고스란히 공유하면서 이에 더하여 심각한 사회병리현상을 드러내고있습니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남북한의 관계는 우리 정부의 소위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긴장감과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있으며 국론을 분열시키는 원인도 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분열과 대립상황은 남북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크게는 동서로, 그리고 보다 세부적으로는 각 지역별로 고착되어있습니다. 망국적이라고 하는 지역감정과 지역주의는 선거가 거듭되고 정권이 바뀔수록 더욱 심화될 뿐입니다. 이와 병행하여 극심한 집단이기주의 또한 한국사회가 유기적이고 공생적인 복지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큰 장애요소로 작용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한국사회에는 언제부터인가 극도의 물질만능주의와 쾌락지상주의가 만연되어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과 쾌락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며 온갖 인륜파괴현상이 빈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경제적인 여건이 호전되면서부터 우리 국민들은 아마도 역사상 지구상의 그 어떤 민족도 보여주지 못했던 교만과 허세부리기, 허영과 사치, 낭비와 과소비를 일삼아 왔습니다.
그리고 성공지상주의, 결과지상주의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고, 수단과 방법과 과정에서의 정당성은 중요시하지 않는 풍조에 젖다보니 준법정신과 질서의식이 실종되었으며, 범법행위에 대한 죄의식이 사라지거나 극도로 약화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정직한 삶에 대한 냉소주의를 낳았고 한탕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를 빚었으며 거짓말의 상습화로 이어졌고 결국 우리 사회전반에 불신풍조가 자리잡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갈수록 경박해지고 각박해지며 험악해지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사랑과 신뢰, 화해와 평화, 일치와 공생의 도를 심어야할 사명을 가진 한국교회는 한국사회 안에서부터 공신력과 감화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공신력과 감화력 상실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원인들 중 하나가 무엇보다도 기복주의 신앙 때문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단지 일반교인들의 기복주의 성향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심리를 악용하는 목회자들의 세속적 야망과 이기적 욕심에 더 큰 책임이 있음을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는 가치관의 변화와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향전환을 가르치기보다는 교인들의 기복적 심리를 자극하고 이용하는 손쉬운 목회와 급속한 양적 성장을 꾀한 탓이 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목회철학이 교인들로 하여금 신앙과 교회를 단지 세상적 성공과 출세의 도구와 발판으로 여기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음은 분명한 것입니다. 또 이러한 사고는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하고, 세상사람들과 아무런 차이도 없이 편법과 부정을 가책 없이 일삼게 만들 뿐 아니라, 믿음을 그런 일들을 자행하고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호장치로 여기게 만들며,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부정직하고 불법적인 일에 있어 세상보다 오히려 더 앞질러가는 교인들 되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인수를 부풀려가며 자랑하고 허세부리는 교회가 세속사회와 무엇이 다릅니까? 교회, 노회, 총회 등에서 연출해내는 돈 뿌리는 선거, 지역패권주의는 우리가 세상사회에서 목격하는 그것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기복주의는 왜곡된 신앙이해의 전형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무엇보다도 참 믿음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날의 우리의 잘못되었던 신앙행태를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는 그저 마음으로 후회하거나 단지 입술로 고백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이며, 가치관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삶의 의미, 삶의 목표, 삶의 방식까지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 좋던 것, 옛날에 추구하던 것, 세상에서 즐기며 기쁨으로 삼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육을 향하여 죽고 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바른 지식과 함께 섭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은 배워서 아는 대로 행하는 실천적 삶입니다. 성경지식이 곧 믿음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를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바로 서게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성령의 역사 속에서 밖에는 찾을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오늘날 세상의 모든 병리현상과 한국교회의 문제는 결국 성령의 역사와 다스림에 거스르고 대항하는 악의 역사이며 육의 소욕을 좇는 결과이기에 성령께서 임하시고 강하게 역사하지 않고서는 극복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한국교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성령의 임재를 간구해야 할 때입니다. 스스로 새로워지고 바로 서기에는 너무나 허약해진 그리스도인들이고 너무나 무력해진 오늘날의 교회이기에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절히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힘을 의지하고 그의 명령과 인도를 따르는 것밖에 한국교회가 그 생명력과 존재이유를 유지할 길이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신앙이해가 가장 큰 문제라고 했지만, 우리에게 참 믿음을 깨닫게 하시고 갖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의 조성자이신 성령께서 한국교회에 임하셔서 진리의 바른 이해와 올곧은 삶의 의지를 회복시켜 주시며, 육의 소욕으로부터 돌아서서 성령의 소욕을 좇게 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배워서 아는 대로 행하는 실천적 삶이라고 했지만,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삶으로 살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삶의 믿음이 되며 우리의 삶이 믿음의 삶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우리의 잘못되었던 신앙행태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우리로 참된 회개를 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온전히 변화시키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우리를 육을 향하여 죽게 하시고 영으로 살리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에 눈뜨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기쁨을 발견케 하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고 바로 서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가르치라는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우리에게 이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비로소 확신있고 담대하고 능력있는 주님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오시고 그 증거의 능력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어지도록 우리는 간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하는 일을 어떤 위험이나 손해나 오해나 멸시나 외로움이나 고난이나 불이익을 당하게 될지라도 변하지 않고 일생 동안 계속할 수 있는 견인의 능력을 주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는 온갖 시련과 유혹 앞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임하시고 함께하셔야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인데 그런 삶 속에서도 오히려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세상사람들 같으면 슬퍼할 일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불안해할 일 앞에서 평안을 누리며, 불행하다 여길 형편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원망할 일을 두고도 감사할 수 있으며, 탄식할 일을 놓고도 찬송할 수 있게 해주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참 믿음은 우리를 거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삶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우리에게서 믿음의 열매, 성결한 삶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바울은 갈5:19-23에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하고 있는데 실로 한국인들의 병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치유할 힘이 오직 성령께 있음을 봅니다. 날로 더욱 피폐해 가고 흉포해지는 우리의 심령을 치유받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고맙고 위로가 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끝 절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의 기자는 같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마태복음의 기자가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한 것을 누가복음의 기자는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로 바꾸어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 좋은 것,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 성령이심을 보아야 할 줄 압니다. "구하면 좋은 것을 주신다" 했다고 그저 인간적이고 세상적으로 좋은 것만 한없이 달라고 쉴새 없이 조를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것이 어떤 것임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뿐 아니라 한국교회를 위해서 진정 필요한 것은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참 주님의 제자들로 만드시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교회로 하여금 진실로 능력있는 믿음의 공동체로 만드시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시고 온 세상을 제자 삼아 가르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은 그저 나에게 좋은 것, 세상적으로 좋아보이는 것밖에 구할 줄 모르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좋은 것, 그의 의를 위해서 중요한 것,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먼저 구하고,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성령께서 함께해주시기를 늘 기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어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면 해결된다
눅 11장 9~11절 / 이중표목사 / 2003년 2월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감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살펴보면 일관되게 기도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막 6:46)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2)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눅 22:44)
예수님은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셨기 때문에 친히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고 또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눅 11:2)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 말씀은 기도에 대해서 거듭 거듭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기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구하는 것은 마음으로 소원을 갖는 것이고, 찾는 것은 행동으로 노력하는 것이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주님 면전에서 마주하고 결단하고 주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한다는 것은 무엇이 모자라는 상태이며, 찾는 것은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것이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닫혀있기 때문에 최후로 그 면전에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1. 기도는 신앙고백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이 많이 있지만 거듭 거듭해서 강조하신 말씀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구원받은 확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아버지의 자녀로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의 언어가 아버지를 부름으로 시작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확증이며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께 영광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지극히 영화롭게 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곧 신앙고백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저씨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아버지 앞에 나아가 뭘 구합니다. 그러나 아저씨에게는 구하지 않습니다. 달라고 해도 주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이고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아저씨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아버지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어린 아이들은 자기 부모가 최고입니다. 아버지가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아버지, 이것 사주세요." 그럽니다. 아버지 주머니가 빈털터리 인줄도 모르고 사달라고 조릅니다. 그만큼 자기 아버지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조금 크면 자기 아버지가 돈이 없는 줄 아니까 아예 입을 열지 않습니다. 달라고 해도 줄 것이 없으니까요.
예수 믿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어린 아이의 심정으로 단순하게 믿으면 아버지를 믿는 것이고 자기가 교만에 빠지면 아저씨로 생각하면서 믿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숨을 쉴 때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밥을 먹고 삽니다. 밥은 땅을 채우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것은 밥이요, 물이기 때문에 땅을 채우는 것입니다. 또한 공기를 마시고 삽니다. 공기는 우리의 가슴을 채웁니다. 그런데 숨쉬는 것은 하늘을 마시기 때문에 하늘을 채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노력하고, 돈 벌고, 출세하고, 발버둥쳐서 배를 채우나 이것으로는 만족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함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하늘을 채워야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너무 너무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학교에 도시락을 못 싸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점심 시간이 되면 수돗가에서 물을 마시고 잔디밭에 누워서 하늘을 보면서 "배는 물로 채웠으나 가슴은 하늘로 채워다오"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배는 물로 채웠으나 가슴은 하늘로 채워다오' 하면서 나중에 신비한 비밀을 알았습니다. 쉴 때마다 하늘을 마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가난해서 배는 물로 채웠지만 나는 하늘을 채우는 사람이다.' 마치 길을 걸어가도 공중을 떠다니는 것처럼 어린 소년의 마음속에 '나는 하늘을 품었지 그래서 넓은 마음을 가져야지 그리고 하나님의 효자가 되어야지'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 숨쉰다는 것은 예수를 늘 모시고 성령을 마시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늘을 품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도들 마음속에 하늘을 품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2. 기도는 문제의 해답
'문을 두드리라'는 말은 기도에 대한 단순한 얘기가 아니고 천국에 대한 약속입니다. 천국문을 두드리는 신비한 의미를 약속하기 때문에 천국문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천당문을 여는 것이 아니고 기도함으로 천국문을 여는 것입니다.
유명한 요한 웨슬레는 "하늘나라는 무릎으로 올라간다"라고 했습니다. 기도해서 능력이나 기적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기도없는 설교는 교인들에게 찬밥을 먹이는 것이다." '그렇다, 기도로 하늘의 열기를 받아서 영양가 있는 밥을 만들어 교인들에게 먹도록 하는 것이 곧 목회자의 설교다. 목회자는 요리사와 같은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교인들이 늦게 와서 기도없이 설교 듣고 가는 것은 찬밥 먹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미리 와서 하나님 앞에 찬양하며 기도로서 준비한 예배는 따뜻한 밥을 대접받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예배는 곧 기도요, 기도가 곧 찬양이며, 찬양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도 기도하셨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되겠습니까? 우리의 생의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오래전에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새로운 목사님을 청빙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성경고등학교를 나와서 무릎으로 목회를 해서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대학 교수가 한 분 있는데 너무 학적인 분이기 때문에 '우리 목사님은 무식하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니니까 그 목사님이 너무 너무 상심이 되어서 교회를 사임하고 변두리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이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자 마자 교회는 잘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떠나고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목사님이 새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옛날 목사님이 계실 때는 교인들이 '아멘 아멘' 하면서 은혜를 받으니까 찬양과 예배가 살아있었는데 그 목사님이 떠나고 새로 오신 목사님은 미국에서 학위까지 받았고 설교도 신학적, 철학적으로 하는데 교인들이 전혀 은혜를 못받으니까 찬양과 예배가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 부임한 목사님 마음이 심히 무거워졌습니다.
어느날 목사님이 밖에 나갔다 오니까 사찰이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집사님, 내가 옛날 목사님과 뭐가 다른 것이 있나요?" "목사님은 참 훌륭하시죠. 인물로 보나 학력으로 보나 교양으로 보나 옛날 목사님과는 대조가 안됩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까 목사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사찰 집사가 한마디를 더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한가지가 옛날 목사님과 다릅니다. 옛날 목사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많이 했는데 목사님은 기도하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날 밤부터 목사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깊은 밤 기도하는 중에 환상이 나타났는데 교인들이 가득 찬 예배당 안에서 자기가 설교를 하더랍니다. 강대상 위에서 열심히 설교를 하는데 소리가 하나도 안나가는 것입니다. 성가대가 찬양을 하는데도 소리가 하나도 안나고, 교인들이 찬양을 하는데도 소리가 전혀 안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는데 저 뒤에서 찬양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보니까 권사님 한 분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교회에서 늘 기도하는 권사님이었습니다. 그 권사님의 찬양만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천군 천사가 화답했습니다.
그때 목사의 마음속에 이런 감동이 왔습니다. '기도없는 설교는 말은 되지만 말씀이 아니구나! 기도없는 찬양은 화음 맞춘 노래는 될지 모르나 하늘로 올라가는 찬양이 안되는구나! 교인들도 미리 기도하지 않고 찬양하는 것은 가수의 노래에 불과한 것이구나!' 깊이 회개하고 그날 밤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면서 기도중에 말씀을 받아가지고 다음날 말씀을 전하니까 교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전부 삐삐를 가지고 다녔는데 지금은 핸드폰을 가지고 다닙니다. 심지어는 초등학생들도 핸드폰을 가지고 다닙니다. 얼마전에 TV를 보는데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잘못해서 자동차가 언덕으로 굴러 떨어졌는데 핸드폰으로 119로 연락하니까 구호차가 금방 와가지고 실어가는 것입니다.
핸드폰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잇는 무선 연락이라면 기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잇는 무선 연락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무선으로 연락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을 요즘 용어로 'Heaven Phone'이라고 그럽니다. Heaven은 하늘이라는 뜻인데 하늘에 통하는 전화입니다.
우리가 위급할 때 하나님과 통하는 것입니다. 애인보다도 더 좋은 우리 주님, 이 세상의 아버지 보다 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더 능력있는 전능하신 아버지 앞에 우리가 Heaven Phone 기도를 통해서 간구할 때 우리의 모든 소원이 응답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 기도는 기적을 낳는다.
한신대 교수님 중에 오영석 교수님이 있습니다. 원래 그 분이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는데 너무 너무 가난해서 다른 친구들은 다 중학교에 가는데 자기는 중학교도 못가고 날마다 풀이나 베러 다니고 지게 지고 나무하러 다니다가 나무하러 갔다 오면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도 중학교에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때 이런 감동이 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상서를 올려라."
이 분이 감동을 받고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써서 봉투에 "하나님 아버지 전상서" 라고 쓰고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우체부가 우편물 분리를 하는데 주소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 전상서"라고 써 있는 편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망설이다가 '하나님 아버지를 좋아하는 사람은 목사밖에 없으니까 목사한테 갖다 주자' 해서 그때 당시에 해남읍 교회에 계시던 이준묵 목사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그 목사님이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아가지고 그 소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불러다가 목사님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같이 지내면서 중학교, 고등학교 공부를 시켰습니다. 이 분이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한신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계속해서 한신대학을 졸업하고 나중에는 유학을 가려고 유학 준비를 하는데 유학 비자가 안나오는 것입니다. 유신 정권 때 유신 반대 데모를 하다가 요주의 인물로 찍혔기 때문에 아무리 비자 신청을 해도 비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 길이 막막해서 유학가는 것을 잠시 접어두고 경기도 어느 시골에 있는 교회에 가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교회 근처에 있는 골프장에 경찰 제2국장이 골프를 치러 왔습니다. 그래서 경찰 국장과 친분이 있는 그 교회 장로님이 경찰 국장에게 "우리 전도사가 외국 유학 준비를 하고 있는데 비자가 안나와서 유학을 못가고 있으니 비자 좀 나오게 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경찰 국장이 장로님의 부탁을 받고 비자를 받게 해주려고 알아봤더니 요주의 인물로 붉은 줄이 쳐 있는 것입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장로님에게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아예 갈 생각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하고 전화를 했습니다.
어느날 오영석 교수님이 눈이 하얗게 쌓인 수유리 언덕을 넘어오는데 동쪽에서 빛이 비취는데 너무 찬란하게 비취고 또 때마침 성령의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와서 눈 위에 엎드려 손을 들고 "오 주님, 내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이 밝은 햇살같이 내 앞길도 밝아지게 하옵소서." 하고 눈물 뿌려 기도했습니다. 그 날 밤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지프차를 타고 와서는 문을 열고 "영석군 나와" 하더니 지프차를 타고 중앙정보부로 들어가더랍니다. 들어가면서 철커덩 하고 문이 닫히는데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진짜로 중앙정보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영석씨입니까?" "예, 그런데요?" "빨리 와서 비자 받으시오."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신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문이 열리기 바랍니다. 기도로 모든 문제가 해결받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기적을 이루십니다. 한신교회가 이렇게 부흥한 것도 기도의 응답입니다. 무명의 종이 기도해서 이런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학력이 있느냐 없느냐, 재산이 있느냐 없느냐, 인물이 좋으냐, 가문이 좋으냐를 묻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십니다. 그보다 더 좋은 가문이 없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권세가 없습니다. 그 능력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간디는 "나의 고난과 시련 속에서 기도가 없었다면 나는 오래전에 미쳤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4. 기도는 최고의 능력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0-13절)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며,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기도하는 자가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무릎 꿇고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면 놀라운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시고 내려오니까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소란스럽게 하느냐" 하고 물으니까 한 사람이 와서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의 아비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하고 간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고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니까 귀신이 나왔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그때 예수님께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능력, 그것은 바로 성령을 받는 일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가 찾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데 기도하는 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은혜는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자의 비밀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받는 것도 있고 나가는 것도 있습니다. 물론 기도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가난한 사람은 물질의 축복을 받고 많은 것을 받습니다. 그러나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한 것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 속에 있는 더러운 귀신이 나가야 되고, 질병이 나가야 되고, 우울증이 나가야 되고, 우리는 괴롭히는 모든 것이 나가야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기도 외에는 나갈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하면 나가느냐? 굴 속에 있는 여우를 나오게 하려면 굴에 불을 지르면 여우가 나옵니다. 우리 심령속에 도사리고 있는 추하고 악한 것들을 무엇으로 내보냅니까? 성령의 불이 들어와야 됩니다. 기도하면 성령의 불이 들어와 이것을 내보냅니다.
기도함으로 성령의 불을 받아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괴롭히는 근심과, 걱정과, 우리의 심령을 병들게 하는 모든 악한 것들이 우리 가정에서, 자녀에게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 민족에게서 일곱 길로 도망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 해결됩니다. 기도로 승리하고, 기도로 하늘문을 열고, 기도로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눅 11장 9~13절 / 김태환목사
누가복음 11장은 기도의 장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에게 먼저 주기도문을 알려주신 후 기도의 핵심인 ‘간청’을 설명하시기 위해 본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간청’은 무엇입니까? 떼를 쓰는 것일까요? 소원이 이뤄질 때까지 기도의 양을 채우는 것일까요?
성경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것이지요.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기도를 드리며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낙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가 더디 응답될 때 낙심되기도 하고 조급해 지기도 합니다. 물론 기도의 응답이 안될 때 낙심되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낙심되는 마음을 이겨내고 인내하도록 해줍니다.
유대사회에서 이방인이었던 누가가 볼 때 기도하는 것이 익숙치 않았을 것입니다. 직업이 의사였던 누가의 시선으로 볼 때에 예수님의 이 기도의 가르침은 새롭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누가는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시며 하신 예수님의 비유를 기록했습니다.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인데요.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해 이 사람은 다른 친구집을 찾아가 떡 세덩이를 꾸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한밤중에 피곤하고 힘들었을텐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늦은 밤 다른 친구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립니다.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이기적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절실한 필요를 안 친구는 그 밤에 찾아온 친구의 간청을 들어줍니다. 이것이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살아온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직무를 수행하며 수천만명의 장애인을 대변한 강영우 박사입니다. 그의 삶에는 예수님의 기도의 간청이 담겨 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중학교 3학년 때, 축구를 하다 친구가 찬 축구공에 눈을 맞아 시력을 잃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8시간 만에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납니다. 믿고 따랐던 누나마저 공장에서 일하던 중 과로로 숨져 그는 졸지에 고아가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이 절망스러워 보였던 그 시절 눈을 고쳐 달라고 기도 했을 때 하나님은 ‘No’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그는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기 위해서 중학교 시절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끝임없는 노력으로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1972년에 장애가 유학의 결격조항으로 있던 시절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미국 유학을 못 가는 불평등한 조항을 없애 달라는 청원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여, 당시 민관식 장관으로부터 승인받아 한국 장애인 최초로 유학생으로 도미 유학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각 장애인으로 유학을 가서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가 탄생하게 됩니다. UN 세계 장애위원회 부의장,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로 강영우 박사는 세상의 장애인들이 함께 어우러진 세상을 만드는데 밀알의 삶이 되었습니다.” 그가 유학을 왔을 때 LA공항에서 그를 맞아준 사람은 미국 양부모였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의 기여가 있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눈을 뜨지 못했더라면,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해 놓으신 사람들의 만남은 불가능했었을 것입니다. 기도는 그의 인생에 닫힌 문을 열어 주었고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도구가 되게 해주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11:9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문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다.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문이 열릴 것이다
멕시코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이 여자아이를 입양했습니다. 친아버지에게 학대 받던 아이였는데, 하나님이 그 아이를 입양하라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선교사님이 ‘이제 너는 내 딸이야, 무엇이든지 필요하면 말해’라고 했지만 아이는 어떤 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한번도 울지 않고, 뭘 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고 버림 받을까봐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아이가 선교사님에게 다가와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빠, 신발 끈이 하나 필요해요. 선교사님이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합니다. 아이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는데 감사하더랍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며 하나님께 간청하지 않는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를 원문으로 보면 ‘아이테이테’, ‘제테이테’, ‘크루에테’라고 되어 있는데, 모두 ‘현재 명령형 동사’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영어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의미가 더 자세히 보여집니다. ‘Keep on Asking, Keep on Seeking, Keep on Knocking’ 기도는 지속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녀들에게 숨겨진 하나님 나라를 밝히 드러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부터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줄기차게 다가 오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예언자적 상상력을 갖는 것은 새로운 삶을 향한 도전이며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라는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 prophetes인데, 이는 예언자의 기본 성격을 암시하는 말로 다른 이를 위하여 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 중심 개념은 신적(神的) 교제를 나타냅니다. 기도란 단순히 듣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며,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자기 일을 전부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을 뜻합니다. 온몸을 바쳐 기도 드리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대부분의 삶을 마칠 때까지 자기 삶이 얼마나 메마르고 황폐해 있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욕망의 벌판위에서 방향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수 없습니다.
기도가 단순히 내 소원을 구하는 간구가 되어 ‘내 뜻이 무조건 이뤄지이다’라고 요구하는 도구쯤으로 여긴다면 도리어 해가 될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구하는 간청의 입을 닫아 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이 드린 기도의 간청을 드릴때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즉 그의 수명을 연장해 주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라고 야고보서를 결론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역사를 주관하시는 동시에 인간의 기도와 행동을 사용하시는 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시작과 끝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움직이신다면 인간의 행위는 의지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기도의 소리도 듣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기도의 힘이 강력하게 영향력이 있고 일정부분 기도의 힘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기도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여호와께 바라는 일 한가지 일을 구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기도의 바른 출발을 한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게 되면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 다음으로 다윗을 언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하십니다. 3,000년 이상 되는 구약의 긴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혈통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 혈통에 관계되는 족보에 아브라함과 다윗이 언급됩니다. 구약의 역사속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사람을 제외하고 오직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 길을 닦아 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매일 옷장에서 입을 옷을 고르는 것처럼 새로운 마음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어제의 기도가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기도를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일평생 고아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했던 죠지뮬러가 있습니다. 평생 고아들을 돕는 일을 위해 그가 드린 기도는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옵고”였습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1938년 11월 28일. 오늘 아침 기도할 때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상황이 암담하였지만 주님께서 도와 주시려는 확신이 들었다. 평상시와 같이 형제들과 기도모임을 가졌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을때 나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 위에 놓여 있는 편지 한통이 눈에 띄었다. 그 편지는 기도중에 배달된 것이었다. 그 안에 고아들을 위해 쓰라고 10파운드가 들어 있었다”
이 일기는 죠지물러의 기도의 응답의 일부분입니다. 죠지물러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공급해 주셨둣이 고아들을 돕는 일에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11 너희 가운데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생선을 주지 않고 뱀을 주겠느냐? 12 또 계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하더라도 좋은 것을 자녀에게 주려고 한다.
어떤 부모가 자녀들에게 뱀과 전갈을 그 손에 들려 주겠습니까? 성경에 뱀과 전갈은 악한 세력이고 자녀를 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죄를 짓는 악의 씨가 있는 것을 아십니다. 그런 까닭에 악에 빠져들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 내 손에 들린 것이 나를 해치는 것인지 내게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정확하게 일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더듬더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다 보면 동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이 시대는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향할 때입니다. 마음을 돌이켜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아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 고통으로 인해 기도를 잃어버린 성도들입니다. 아버지는 집을 떠난 아들이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을 얼마나 학수고대(鶴首苦待)하며 기다렸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아들이 용기 내어 아버지께 다시 돌아왔을때 아버지는 어떻게 맞아주십니까? 멀리서 부터 오는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겼습니다. 달려가 목을 안아 입을 맞춰주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으로 내어 다가 입혀 주셨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 주셨습니다. 발에는 신발을 신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고,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아들은 아버지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생활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기도하기를 좋아하십니까? 매일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요. 하루의 시간을 들여 진실한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천년의 사랑과 애정을 부어 주실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바다를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망가진 몸보다 크고, 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가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으로 나아갈때에 십자가 사랑을 확증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발견한 사람은 보화를 찾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 집에 돌아가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서 그 밭을 사는 것입니다. 보화를 발견했으면 원래의 밭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윤리적인가? 도덕적인가, 근면한가에 관해서 초점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우리가 간청함으로 역동적으로 누리는 나라임을 설명합니다.
소비주의 사회는 기도가 세상의 기준에서 필요한 걸 마땅히 조달해 주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애통하며 구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게 중요합니다. 삶의 문제를 만나서 비관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애통하며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시기에 우리는 애통해도 됩니다. 일어설 용기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기뻐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위선적인 신앙으로 갈 경향이 높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할 때에 인생의 상실감, 고통과 상처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 주십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간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눈을 뜨지 않는 이들에게는 스스로 눈을 감고 있으니 보이는 것은 사방이 어두움 뿐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편 40:1-3
칼빈은 성령께서 인간의 정욕을 바라잡아 주시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정욕은 우리를 웅덩이와 수렁으로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하시며 우리의 정욕을 통제해 주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빚어 가십니다. 우리 안에 죄를 죽이는 일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은혜로 넘치게 하고, 육체의 열매에 반하는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게 함으로 죄를 이기게 해 주십니다.
이번 주간에 팔복에 대한 새벽 설교를 준비하며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 1926 –2015) 의 ‘고통은 헛되지 않아요’ 책을 읽다가 제 마음에 다가 온 간증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1820년 생후 6주밖에 되지 않은 한 여자 아이의 눈에 염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뜨거운 찜질약을 바르는 바람에 각막이 타버렸고, 아기는 그만 영영 앞을 볼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 아홉살이 되었을때 그 아이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비록 볼 수 없으나 나는 얼마나 행복한 영혼인가요. 만족하며 살기로 결심했어요. 나는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복을 누리고 있어요. 눈이 멀어서 눈물을 흘릴 수도 한숨을 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이 소녀는 나중에 찬송가 615장 그 큰일을 행하신, 찬송가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찬송가 275장 저 죽어 가는 자 다 구원하고를 비롯해 8천 편에 달하는 찬송가를 썼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패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 1820-1915)입니다. 9살된 소녀가 어린 나이에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더 기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성령께서 그 소녀의 애통함을 복으로 바꿔주신 결과입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고통이 복이 되는 위대한 교환이 이뤄지는 장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밝은 면만 있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도 있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삶의 슬픔과 고통을 마주할 때마다 부인하는 것은 스스로 진실에서 멀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은 척하고 살게 되면 반드시 누려야 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실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주시는 힘을 통해 마지막 숨을 내시게 될 그 날을 향해 용기 내어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생명줄입니다. 기쁨보다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을 찾아 가십시요. 어려운 시기를 걷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친구가 되어 주십시요.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주님의 길로 돌봄의 사람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에게 환대의 문을 활짝 열고 쉴 수 있도록 안식처가 되는 기도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에게 문을 열고 접촉할때에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한주도 사람들의 닫힌 마음에 기쁨을 실어 나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보혜사는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이 있는 자에게 임하신다.”
눅 11:9-13 / 이삼규목사(낙양교회)
지난 주일에 이어서 “보혜사 성령님을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해 드리겠습니다.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이 높아지실 때 보혜사 성령님을 부어주셨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후에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분을 높일 때 다시 말씀드려서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게 할 때 보혜사 성령님이 충만하게 우리 가운데 임하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충만을 받으셨습니까? 성경이나 교회 역사 그리고 개인의 신앙 간증 등을 들어보면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성령 충만 받은 자가 성령 충만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성령 충만을 받았은데 자기가 언제 성령 충만을 받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점진적으로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점진적이라는 것은 천천히 진행되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성령 충만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사람들은 그럴 것입니다.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성령 충만하다.” 또는 “나는 작년보다 금년에 조금 더 성령 충만하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위로할 것입니다. 점진적 성령 충만 교회는 육신적 사람들의 도피처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점진적 성령 충만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하셨다”, “성령이 그들에게 찾아오셨다” 또는 “성령이 그들을 충만히 채우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런 성령님의 행위는 즉각적인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나는 점진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든지 아니면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교회를 충만케 하시고 교회에 있는 각 구성원을 충만케 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보혈로 사신 교회가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 특권을 누리려는 교회의 모든 노력을 방해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전심으로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성령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모든 사람들을 충만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요, 그리스도의 보혈로 얻은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비정상적이고 특별하고 이상야릇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상적인 삶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한 준비 단계
1단계 :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먼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온전히 확신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어떤 의심이 있습니까? 혹시 누군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날 하나님의 모든 복을 다 받았다는 잘못된 교리를 주입시켰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결코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을 받는다면 그 순간부터 그의 삶은 변화됩니다. 즉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아무 것도 시작하지 말라고 충고 드립니다. 차라리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깊이 살피십시오.
2단계 : 성령 충만 받기를 진정으로 원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성령 충만을 간절히 원한다고 스스로 확신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원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도 있을까요?’ 있습니다. 모두가 성령 충만을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먼저 그것을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는 다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시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님께 여러분의 통제권을 내어 드리셨습니까? 왜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 배의 통제권을 가지시는 것을 반대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원하면서도 우리의 뜻대로 계속 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의 불을 끄는 것이 됩니다. 성령님은 순종을 원하시지만 사람들은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행 5: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충만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에쿠스라는 자동차 타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에 따른 차 값을 지불하면 됩니다. 에쿠스 리무진 VL 500은 차 가격이 1억 1260만원부터랍니다. 제가 타고 다니는 차 3대 정도 살 가격이지요. 이 돈이 아까운 사람은 절대로 에쿠스 못 탑니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령충만을 원하지만, 그것을 받기 위한 조건을 충족시킬 만큼 그렇게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를 치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으로 가득한 사람이 채움을 얻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무너집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충만해집니다.
3단계 : 성령 충만을 받을 필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는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심하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우리가 회심했고 죄 사함을 받았으며 천국에 갈 확신이 있다고 해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몰려오는 낙심과 어려움을 이겨낸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지금보다 성령 충만 받지 않으면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진리를 이해하고 신앙의 열매를 맺고 승리하며 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령 충만을 더욱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원하는 갈망이 우리 삶의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원하는 갈망보다 더 큰 것이 여러분의 삶에 있다면 여러분은 결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갈망보다 더 급한 것이 여러분의 삶에 있다면 결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은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흘러가는 선물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 통과하는 절망과 불안은 휴경지 같은 우리의 마음을 갈아엎고 우리의 그릇을 비우기 위한 준비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비워지지 않으면 채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불안과 절망이 찾아오는 것은 우리가 이미 다른 것들로 가득차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것들이 제거될 때 성령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기회를 얻으십니다.
성령 충만을 받는 법
어떻게 하면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을까요? 성령 충만 받는 법에 대한 네 가지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1) 나의 그릇을 드려야 합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너희 몸을 ~~~드리라”는 것은 우리의 그릇을 드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릇을 드리지 않는다면 그 그릇에는 아무 것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지 않은 그릇을 채우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그릇을 드려야 합니다.
요즘 강원도와 중부지방은 가뭄이 최악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농사가 실농의 위기에 처해 있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마실 식수와 짐승들이 먹을 물도 없어서 난리입니다. 살수차가 오지 않으면 짐승들에게 먹일 물이 없습니다. 아무리 살수차가 온다 할지라도 받을 그릇이 있어야 물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전 인격을 하나님께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한 첫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첫 단계는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릇을 내밀면 됩니다.
2)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눅 11: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눅 11: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질문에 대해 스스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전 세계의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이 은혜로운 약속에 따라 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구하여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을 붙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성령 충만을 위해 당신의 그릇을 드린 후에 반드시 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논리적이고 분명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았는데도 주님이 성령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면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통하여 성령을 주시기로 정하신 것입니다.
시 2: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우리가 먼저 구한 후에 주님이 주시는 것이 주님이 정하신 순서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무슨 기도에 힘썼을까요?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3)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해야 합니다.
행 5: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하나님의 영은 불순종하는 자녀에게 자신의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녀에게 성령 충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님과 부활의 주님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여러분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배운 대로 살면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 간단하지만 또한 혁명적입니다.
4)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갈 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들은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다시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성령충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은 믿음과 순종으로써 받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생명과 존재를 완전히 소유하고 우리의 온 인격을 통제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통제는 직접적이지만 또한 온유합니다. 성령님이 온전히 통제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처가 됩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님이 계십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을 구원의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이것과 성령 충만 즉 기름부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기름부음은 구약에서 나오는 단어입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 선지자, 왕에게 기름을 부어 세웠습니다. 이것은 점진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직분자로 세우고자 할 때 그 사람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부으면 그 기름이 수염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옷자락으로 흘러 내리게 됩니다. 그럴 때 반경 수백 미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름 붓는 의식이 거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름에는 유향, 몰약, 침향, 계피 그리고 육계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름이 부어지면 주변의 모든 것에 향기가 가득했습니다. 이런 기름부음은 점진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의 문제는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고생하지 않고 복을 받고 천국에 가서 면류관을 쓰고 다섯 고을을 다스리기를 원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물을 바치려면 각을 떴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제물로 베어 넘겨 토막 내시는 (각을 뜨시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연약한 신앙인들에 속하게 됩니다. 우리는 괴롭고 힘든 일은 모두 예수님께 떠넘기고 즐겁고 편한 일만 하려고 합니다. 내가 볼 때,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부끄러움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 보혜사 성령님을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보혜사 성령님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굶주림을 가진 자에게 주어집니다. 원하지 않는데 성령 충만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원하십시오. 원하되 간절히 원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그릇을 비워 그분께 드리십시오. 성령 충만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믿음으로 성령 충만을 받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밤의 중의 두드림(A Knock at Midnight)
눅 11장 5~13절 / 이종윤목사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어느 사람이 한밤 중에 떡을 구하려고 친구집의 문을 두드리는데 친구가 외면하다 그의 강청에 못 이겨 결국 떡을 주었다는 비유를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처럼 강청하는 자는 원하는 데로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것은 지속적인 기도가 우리에게 가져오는 효과가 어떤 것이며 현대인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교회가 어떻게 취급해줄 수 있는지 알려주는 메시지입니다.
Ⅰ.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
비유에 나타난 밤이라는 것은 이 시대의 밤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길을 잃게하고 모든 것을 혼돈에 빠뜨리는 것이 밤의 특성입니다. 밤중에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고 혼란스러움이 찾아 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사람들이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다가 과학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과학자들 역시 한밤중에 길을 잃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외형적인 위협뿐 아니라 내적 위협도 받고 있으며, 어두움 속에서 진리와 악을 분별하지 못해 헤매고 있습니다.
Ⅱ. 우리에게 필요한 세가지 떡
1. 우리에게는 믿음의 떡이 필요하다.
한밤중이란 일을 할 수 없는 시기를 말합니다. 그런 시기를 맞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와 간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엔 교회를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찾아왔다는 사람도 간청을 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온 사람으로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우리가 교회에 무엇을 찾으러 왔습니까? 현 세대는 절망과 늪지대에서 허덕이는 시대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에 서로를 의심하며 헐뜯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을 간청해야 할 것입니다.
2. 우리에게는 소망의 떡이 필요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회가 급속히 발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이기심이 커지고 타락한 모습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인생이 고통의 연속화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뿐인 세상에 희망이란 없을까요? 인간에게 희망이 끊어지는 순간, 그 사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80, 90세의 노인도 희망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그들은 희망의 떡을 찾습니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교회를 찾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참 소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우리에게는 사랑의 떡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내가 사랑을 많이 받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받는 사람보다 사랑을 줄만한 대상이 있는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소속감을 상실하여 사랑 받거나 사랑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불행을 느낍니다. 인격이 사라지고 수화, 기계화 되어버린 세상에서 사랑과 존경은 결여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참 사랑의 떡을 찾아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해주듯이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서로를 기억해주는 사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정말로 어려움을 당하면 위선이 사라지고 진실로 인격전체를 바쳐서 하나님을 구하고 됩니다. 그때야말로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진정으로 하나님을 체험하였는지, 단순히 입술로만 그를 구하지 않았는지 심각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고 위의 세가지 떡을 구하여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따름으로서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는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최고의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
눅 11장 5~13절 / 김흥규목사
오늘 봉독한 말씀 바로 전에는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할지를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주기도문 바로 다음에 굉장히 흥미로운 비유가 하나 나옵니다. 저는 이 비유를 '뻔뻔스런 친구의 비유'(A Parable of Shameless Friend, CHUTZPAH)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에 나오는 한 남자는 그 당시 중동 지방의 예절로 볼 때 여간 뻔뻔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우리는 이 사람이 왜 그렇게 뻔뻔스러웠는지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⑴ 뻔뻔스러운 친구의 强請
중동 지방에서 손님 접대(HOSPITALITY)는 아주 유별난 데가 있었습니다. 손님을 극진히 환대하는 것이 예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예수님 자신뿐만 아니라 이 비유를 듣는 청중들은 누구나 다 이와 같이 손님 대접이 중요한 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 비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 밤중 어떤 집에 손님이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중동 사막의 뜨거운 불볕 더위를 피해서 친구 집에 들렀던 것이지요. 문제는 찾아온 손님에게 대접할 빵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개 집에서 빵을 구웠는데 시간이 지나서 상한 것은 먹지 않았기 때문에 꼭 하루 먹을 분량만 준비했습니다. 주인은 손님을 접대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이렇게 빵이 다 떨어졌으니 참 난감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 집을 찾아온 친구를 기쁘게 만들어야겠다는 일념 때문에 이 사람은 또 다른 친구 집을 찾아갔습니다. 한 밤중에 그 집에 가서 빵 세 덩어리만 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고대 중동 지방에서 밤중에 남의 집에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창문이 하나밖에 나지 않은 방 하나로 된 집에서 온 가족이 함께 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 방에는 밤마다 가축들도 함께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양이나 염소, 닭 등과 같은 가축들에게 잠자리를 방해받지 않기 위하여 바닥으로부터 한 18 인치 정도 더 높여서 만든 방에서 온가족들이 잠을 잤습니다. 방이 하나이지만 이렇게 높이를 조금 더 높여서 사람이 자는 곳과 짐승들이 자는 곳을 구별했던 것이지요.
식구들은 대개 옷을 입고 잠이 드는데 낮에 입었던 망토(CLOAKS)를 둘러 입고 잤습니다. 또한 갈대를 깐 땅바닥 위에서 온 식구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서로 서로 가까이 누워 잠을 잤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잠을 깨서 일어날 경우 다른 사람까지 잠을 설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조심했습니다. 거기다가 누가 찾아와 문을 두드려 댈 경우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축들 마저 잠을 깨어서 소란을 피울 수 있기 때문에 보통 큰 실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가옥 배경을 놓고 본문 7절 말씀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갈 것입니다.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아이들을 비롯하여 온 가족들과 가축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깨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몰차게 친구의 부탁을 거절해버렸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는 그 당시 그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돌아가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빵을 구하러 온 사람은 대단히 뻔뻔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끈덕진 사람이었습니다! 빵을 꾸어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그 결과 견디다 못한 집주인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자기 집에 있던 빵을 건네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본문 8절을 다같이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强請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 사람이 문을 열고 자기 집에 있던 빵을 나누어 준 것은 두 사람이 친구 사이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정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친구의 '强請함' 때문에 빵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희랍어로 '强請함'은 'anaideia'인데 '끈질김'(persistence), '낯두꺼움'(impudence), '몰염치함'(shamelessness)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자기 집에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기 위하여 모든 결례를 무릎 쓰고 물러서지 않은 남자는 특유의 anaideia, 즉 厚顔無恥性 때문에 마침내 빵을 얻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리거나 잠자리에 든 식구들을 깨워서는 안 된다는 예절을 깡그리 잊고 오직 빵을 얻어야만 한다는 한 가지 목적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결국 이와 같이 끈덕진 노력과 뻔뻔스러움 때문에 빵을 얻고야 말았습니다.
여러분,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일차적으로 우리의 기도가 끈질긴 것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예의를 찾고 뭐 찾고 하면서 적당히 하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중도에 포기해버리는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이지요!
⑵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비유를 말씀하신 바로 다음에 예수님은 본문 9-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예의는 털끝만치도 없는 사람이 끈질기게 강청한 덕분에 빵을 얻어냈던 것처럼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결국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행위가 점점 더 강도가 높아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무엇을 구합니다. 소리를 지르며 도와 돌라고 합니다. 이 때 아버지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아버지를 찾습니다. 아버지를 찾아도 보이지 않으면 아버지가 있을 법한 방문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상의 아버지와 달리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구할 때 즉시 주십니다. 찾을 때마다 즉시 찾아주십니다. 문을 두드릴 때마다 즉시 열어주십니다.
여러분, 어떤 문제로 기도를 하든지 간에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George Mueller)는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친구 5 명을 놓고 끈덕지게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한지 5년이 지났을 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 다음에 10년이 지났을 때 2명의 친구가 역시 구원을 받았습니다. 25년이 지났을 때 네 번째 친구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한 친구를 놓고 뮬러는 자그마치 52년을 기도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뮬러가 눈을 감은지 불과 몇 달 후에 그 마지막 친구까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어떤 기도는 세상을 떠난 다음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절대로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⑶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이렇게 끈질긴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주님은 갑자기 본문 11-13절에서 아주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한번 다같이 읽어봅시다.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으로 보건대 예수님께서 '뻔뻔스러운 친구의 비유'를 통하여 강조하시려고 했던 진짜 요점은 다른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기도할 때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라, 이것을 강조하려고 하셨기보다는 뻔뻔스러운 친구의 소원을 들어 준 사람과 하나님을 날카롭게 대조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례하고 낯두꺼운 친구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지요! 육신의 악한 부모도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주거나, 달걀을 달라할 때 전갈을 주는 법이 없는데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기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일까요? 사실 본문과 비슷한 말씀이 마 7: 7-11에도 그대로 나옵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가 서로 다른 것은 누가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를 통하여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성령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행전에 보면 초대 교인들이 성령을 선물로 받은 다음에 변화가 되었습니다. 예전의 무능하고 심약한 제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목숨을 거는 담대한 순교자들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구해야 할 최고의 기도 제목이 하나님의 영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8: 9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옳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히 11: 38의 말씀처럼 우리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뻔뻔스러운 친구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려고 했던 진짜 요점은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는 좋은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친구도 뻔뻔스럽고 끈질긴 친구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세상의 악한 아버지도 자녀들에게만큼은 좋은 것을 줍니다! 하물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하나님 아버지는 당연히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문제는 우리가 구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찾지 않는데 있습니다. 문을 두드리지 않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 좋은 것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 성령을 주십니다. 성도가 성령을 받아야지만 성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데 이 성령은 구하는 자, 즉 기도하는 자에게만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최근의 어떤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 사람들 가운데 10명중에 9명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기도 생활에 만족하는 사람은 4명중에 오직 1명뿐이라고 합니다. 또한 기도가 효과가 있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개신교인들은 60%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40%의 개신교인들이 기도 생활에 어떤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중에 이와 같은 분들이 계시다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믿고 구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최고의 선물 성령을 사모하고 구하십시오. 좋으신 하나님께서 풍성히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깊은 밤을 사는 성도의 지혜
눅 11장 5~13절 / 피종진목사
본문에 보면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배가 너무 고파 떡 세 덩이를 빌리기 위해 친구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이 시간은 ‘밤중’으로 모든 식구들이 함께 잠자고 있는 시간이라 비록 친구라 할지라도 실례가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중에 찾아간 것은 여행 중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방문을 받은 사람은 찾아온 친구에게 대접할 아무런 음식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떡을 필요로 하는 친구를 위해 친분이 있는 다른 친구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이 때 그 친구가 친구 됨을 인해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강청(强請)함을 인하여서는 그 필요한대로 줄 것이라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밤중’은 나그네 인생을 사는 성도들이 저 천성을 향하여 가다가 만나게 되는 ‘깊은 밤’을 의미합니다.
‘깊은 밤’이란
①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지치고 피곤한 절망의 밤입니다. 사람이 원하는대로 다 되어지고 또 자기의 계획대로만 척척 되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이 세상은 그렇게 쉽게 되어지는 세상만은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원치 않은 일이 생기고 달갑지 않은 일들이 찾아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행 중에 있는 나그네 인생(6절)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지치고 피곤한 절망의 밤에서 승리하려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② 죄악 속에 방황하는 어두운 밤입니다. 깊은 죄악의 밤에서 승리하려면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③ 사탄이 최후로 발악하는 밤입니다.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계 9:14~15) 이러한 밤에는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요 15:5). 또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길에는 누구에게나 깊은 밤이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지치고 피곤한 절망의 밤, 죄악 속에 방황하는 어두운 밤, 사탄이 최후로 발악하는 밤에 성도들은 어떤 지혜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강청(强請)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强請)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눅 11:8) ‘강청’(强請)이란 ‘뻔뻔스러울 정도로 끈질기고 집요하게 매달림’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주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문제가 있을 때 고민하지 말고 강청해서 해결 받으라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인내로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지체된다고 포기하거나 낙심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이 지체될수록 더욱 열심히 강청하듯 기도해야 합니다. 즉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참고 인내하며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9,10절에도 보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집요함과 끈질긴 인내, 열성이 담긴 적극적인 기도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강청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와 찾는 자와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확실하게 응답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성령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기도할 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깊은 밤을 살아가는 자에게 있어서 최선의 지혜는 곧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것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삶은 성령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의 무한정한 에너지요, 위로자이며, 돕는 자요, 지혜자이십니다. 성령님은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해주십니다(사 40:29).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게 될 때에 강같이 흐르는 기쁨이 있게 되고, 성령의 은사를 통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고전 12:7~11). 또한 권능을 받아 전도할 때 말과 행동에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찬송과 말씀과 기도에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자는 마귀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는 역사가 나타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안되거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그의 성공의 비결을 말하면서 “언제나 성령님과 함께 함으로 성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가면서도 “성령님, 함께 올라갑시다.”라고 기도하고, 강단에 서서도 “성령님, 이제 설교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옆에 비켜 설 테니, 성령님께서 말씀해주옵소서.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전하겠습니다.”라는 기도를 한번도 빠뜨린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토록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했기 때문에 전도자의 길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지치고 피곤한 절망의 밤, 죄악 속에 방황하는 어두운 밤, 사탄이 최후로 발악하는 깊은 밤을 살아갈 때에 주님께 강청(强請)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응답을 받으십시오
눅 11장 5~12절 / 김태복목사
내일부터 ‘40일 특별 기도회’가 개최됩니다. 이번 귀한 기회에 교우들 모두가 참여하심으로 여러분의 안타까운 문제가 기도로 해결 받으실 뿐 아니라 성령의 은혜를 받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기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드럼몬드라는 분은 말하기를 “하루에 단 10분간이라도, 아니 십 분이 없으면 단 이분간이라도 세상 복잡한 생각을 온전히 떠나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합일(合一)하는 시간이 있다면 하루의 생활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요, 이런 생활을 매일 계속한다면 인격 전체에 큰 변화가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C.H. 스펄젼 목사는 “기도는 절벽 아래로 던져지는 밧줄이며 그 위에는 하나님의 귓가에서 울리는 큰 종이 달려 있다. 지지부진한 기도를 하는 탓에 그 종이 울리지 않게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아주 급할 때만 그 밧줄을 홱 잡아당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늘과 교제를 하는 사람은 그 밧줄을 담대하게 쥐고 온 힘을 다하여 계속적으로 잡아당기는 사람이다.”고 했고, 마틴 루터는 “기도 없이 기독교인이 되려는 것은 호흡 없이 살아가려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이 늘 승리와 성숙한 삶을 살려면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가장 중요한 것은 응답에 있습니다. 아무리 철야하고 금식을 많이 하면서 기도한다 할지라도 응답이 없다면 열매가 없는 무화과와 같은 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1. 기도하는 동기가 순수하여야 합니다.
약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왜, 많은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하지만 응답을 받지 못합니까? 순수하지 않은 동기에서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여 성도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 동기가 순수하지 못합니다. “주여, 남편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항상 술에 취해 있고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으므로 미칠 지경입니다. 교회 앞에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사오니 구원 받아 착한 남편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남편의 영혼을 진정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의 체면, 자기의 욕심이 기도의 동기입니다. 건강과 물질을 구하는 동기도 순수하지 못합니다. “주여, 건강과 물질 축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제가 병이 있고 가난하게 사니까, 믿지 않는 친척들이 예수 믿어서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강한 축복을 부어 주셔서 나의 위신을 세워주옵소서.” 그런 기도는 응답 받기 어렵습니다. 동기가 순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인데 그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어느 날 친구 하나가 여행을 하는 중에 한 밤중에 찾아 왔습니다.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 대단히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저녁이나 먹었는가?”라고 물어 보니 “못 먹었네. 지금 너무나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니, 찬밥이라도 있으면 주게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침 양식도 다 떨어지고 돈도 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요즈음처럼 24시간 편의점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한 이 가난한 사람은 체면 불구하고 그 동네에 있는 부자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아마, 자정이 넘은 밤 시간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잠긴 대문을 두드립니다. 그런데 부자 친구를 찾아가 체면 불구하고 사정하는 그 동기가 배고픈 친구를 위한 사랑의 동기에 의해서 구했기에 호소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 욕심을 위해서 밤 12시가 넘어서 남의 대문을 두드렸다면 욕을 실컷 당하고 쫓기어 났을 것입니다.
여러분이여, 여러분의 안타까운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번 40일동안 간절히 기도하되 여러분의 기도의 동기를 잘 분석해 보십시오. 자기 욕심, 자기 위신, 자기 자랑을 위해서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살피고 그런 잘못된 동기가 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동기에서 구함으로 이번 40일 동안 반드시 응답의 기쁨을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간절한 기도하여야 합니다.
가난한 친구가 큰마음을 먹고 부자 친구의 대문을 두드리지만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가?’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그러나 염치불구하고 굶주린 친구를 위해 다시 대문을 더 크게 두드립니다. 여전히 반응이 없습니다. 죽을 맛입니다. 그냥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배고픈 채 자기를 기다리는 친구를 생각하니까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세 번째 대문을 두드립니다.
그러자 하인배가 “어느 놈이 한 밤 중에 이렇게 소란을 떠는가?”라고 고함을 칩니다. 그래서 자기는 아무개인데 이런 사정으로 왔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인배가 “지금은 주인께서 주무시니 내일 오시라.”고 냉정하게 대꾸합니다. 그래도 계속 졸라대자, 할 수 없이 하인배가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대답도 똑 같습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이미 잠옷으로 갈아입고 식구들과 잠자리에 들었고 문도 다 닫았으니 일어나서 줄 수 없노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이 가난한 친구는 대문을 떠나지 않고 사정사정을 하며 강청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강청함’이란 헬라어로는 ‘아네이데이안’인데 그 뜻은 ‘부끄럼도 없는 파렴치한’입니다. 그것은 좋은 뜻이 아니라, 욕에 가까운 말입니다. 부자 친구는 상당히 화를 내면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8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나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네가 아무리 친구라도 이렇게 무례할 수가 있는가? 내가 주기는 주지만 친구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자네가 너무 강청하기 때문이네.”라면서 하인을 시켜서 떡 세 덩이를 내어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기도의 요건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구할 때에 염치 불구하고 간곡히 구하는 열심과 끈기가 있어야 응답이 된다는 비유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강청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둘만 대표적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밤이 맞도록 천사와 씨름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야곱이야 말로 너무 죄가 많아서 감히 기도할 수 없는 자입니다.
사기도 많이 치고 거짓말도 많이 하고 음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럼에도 뻔뻔스럽게 강청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도적놈이라는 죄인의 이름이 바뀌어 이스라엘이라는 축복된 이름을 응답으로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 가나안 여인이 와서 간구하기를 ‘흉악한 귀신이 사로잡힌 자기 딸을 구해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몇 번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면 보통 사람 같으면 포기하고 돌아갈 만도 한데 이 여인은 전혀 굽히지 않고 끝까지 매달릴 때에 마침내 응답을 받기를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라고 하심으로 병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기도에는 이러한 간절함이 있어야 응답이 됩니다. 조금 기도하다가 조그마한 난관이 오면 쉽게 포기하는 자는 전혀 응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난관이 오던지, 반대가 있던지 간에 관계하지 않고 이루어질 때까지 간절히 구하는 자가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눅18:1절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기도 응답의 장애 요소는 낙망입니다. 여러분이여. 여러분이 자기 부모님이든지, 자녀든지 구원받기를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해 왔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더 열심히 간구하여 보십시오. 마침내 응답을 받는 날이 옵니다.
「1,000 예화 사전」에는 이런 예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열심히 기도했으나 아들은 교회를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군대에 간 아들에게 열심히 편지를 쓰면서 교회 나가기를 권하였습니다. 아들은 군대 오기 전에 그런 성가신 소리를 많이 듣다가 군대에 오면 벗어날 줄 기대했으나 편지로까지 그런 잔소리를 하니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어느 날은 어머니에게 너무나 심한 내용의 편지가 왔습니다.
“내 아들아, 이 편지를 받거든 조용한 곳으로 가서, 네 어머니의 하나님께 네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기도드리기를 바란다. 내 아들아, 지금 당장 네가 믿음의 사람이 되지 않겠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그 동안 귀 따갑게 듣던 소리라 귀찮게 여기면서 집어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는 어머니의 편지가 끊겼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충격을 받은 아들은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드리기로 결심하고 조용한 숲 속에 들어가 꿇어앉아 어머니가 섬기던 그 하나님께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 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니 여러분 앞에 어떠한 낙심할 조건이 닥쳐오더라도 이번 40일 동안 여러분의 기도 제목을 간절히 아뢰므로 응답의 기쁨을 만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구체적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여행하는 친구를 위해서 부자에게 가서 구할 때,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고 했습니다. ‘떡 세 덩어리’는 아마 장정의 한 끼 음식 분량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한 결과, 과연 떡 세 덩어리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기도하기를 교육하셨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라 했고, 막11:24에서도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많은 성도들이 기도하러 와서는 구체적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했다가 응답이 안 되면 자기 믿음에 시험을 받을까 해서인지 막연한 기도만 하다가 갑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 하는가 듣고 계셨지만 무엇을 요구하였는지 모르실 정도로 모호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시지만 믿음으로 구하지 않기 때문에 응답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호한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구체적인 기도는 믿음의 기도이기에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들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음식점에 가서 ‘아무 음식이나 주십시오.’라거나 여인들이 시장에 가서 ‘아무 것이나 한 바구니 채워 주시요.’라고 하지 않습니다. 상치 한 단, 고등어 한 손, 콩나물 2,000원어치 등등 구체적으로 요구할 것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기도할 때에 “아들을 달라.”는 것과 “그 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는 순수한 동기와 구체적인 제목으로 기도함으로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명하실 때 구체적으로 기도하기를 삿6:36-37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기도는 구체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자 다음날 다시 기도합니다.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 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이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기도에 대한 책을 많이 썼던 이 엠 바운즈의 글에는 무디 목사님에 대한 간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디가 1872년 어느 주일, 그는 런던에 있는 한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디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설교에 은혜가 없었고 마치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았습니다. 그는 저녁에도 설교를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마지못해 설교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날 저녁예배에는 더 많은 사람이 찾아왔고 새로운 영적 생명력이 충만한 분위기였습니다. 무디는 고백하기를 “보이지 않는 세계의 능력이 모두 청중들 위에 쏟아지는 기분 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은혜가 충만했는지, 무디 목사님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사람은 일어날 것을 권유하자 자그마치 500명의 사람이 일어섰습니다. 어떻게 아침과 저녁에 이렇게 교회가 달라질 수 있었습니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느 여인의 중보기도 때문이었습니다. 한 여자 교인이 그 날 아침예배에 참석한 후 집으로 돌아와서 그의 병약한 동생에게 무디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시카고로부터 와서 설교를 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병약한 자매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시카고에서 온 무디 목사님이라고요?” 하며 놀라워했습니다. “얼마 전에 미국 신문에서 무디 목사님에 대한 기사를 읽었는데 그분을 이 런던의 우리 교회에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어요. 오늘 아침예배에 그분이 설교하는 줄 알았다면 아침 금식을 하고 그의 설교를 위해 기도를 드렸을 텐데요. 언니, 밖으로 나가셔서 문을 잠가주세요. 저녁도 주지 마세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세요.”
“오늘 오후와 저녁 내내 무디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 한 후에 불타는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엠 바운즈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쓰기를 “아침에 무디 목사가 설교할 때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침대에 누워있던 이 병든 여인의 기도가 응답되어 하나님께서 저녁예배 때는 성령의 능력으로 넘치게 부어주신 것이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연초에나 40일 기도회 시 기도 카드를 나누어 드리면서 구체적으로 제목을 써내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믿음을 드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기도 카드를 살펴보면서 성도들 중에 여러 명이 카드에 써낸 대로 응답되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기도를 믿음의 기도로 인정하시고 응답해 줄 줄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이번 기도회 동안에 모호하게 기도하자 마시고 구체적으로 기도하심으로 응답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가장 선한 것으로 응답 주실 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잘못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내게 손해가 될 일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쓰기도 합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위험하기 그지없는 총을 사 달라고 하거나 시퍼런 칼을 달라고 떼를 쓴다면, 부모는 그 소원을 들어줍니까? 아닙니다. 더 좋은 것을 주면서 달래는 것처럼 우리도 때로는 미련해서 우리에게 손해가 될 제목을 놓고 울고불고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어느 때는 오늘 본문 11절, 12절에 나오는 대로 뱀을 달라고 구하거나 전갈을 달라고 구합니다. 뱀이나 전갈은 독이 대단해서 물리거나 쏘이기만 해도 즉시 죽고야 맙니다. 이렇게 잘못 구할 때 아버지 하나님은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까? 아닙니다. 더 좋은 것을 주어서 달랩니다. 뱀을 달라고 해도 생선을 주시고, 전갈을 달라고 떼를 써도 알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대 지방의 정식은 생선과 알과 떡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는 금과 은을 구했으나 하나님은 저에게 가장 좋은 것인 일어나 걷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처럼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좋은 것’이란 말이 두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가나한 친구가 부자 친구에게 가서 체면불구하고 강청하는 것도 부자 친구가 좋은 마음을 소유한 자인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돈 뿐이 모르는 수전노 같은 친구라면 감히 그 늦은 시간에 대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자 친구는 처음에는 거절해도 반드시 일어나 사정을 들어 주는 좋은 친구로 믿고 강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기 위해서 머리를 숙일 때 좋으신 하나님을 먼저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엄위하신 하나님 만이거나 잘못하면 벌을 주시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작해야 있다가 없어질 세상적인 것을 구한다 할지라도 가장 좋은 것인 성령을 주시는 분이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나와서 열심히 간구하십시다. 때로는 우리가 구할 바를 잘 알지 못하고 구하거나 갈 바를 못하고 주님께 간구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자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가장 좋으신 것으로 넘치게 채워 주실 줄 믿어야 합니다.
N. I. 살로프 에스텍호프 목사가 저술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는 기도」라는 저서에는 이런 유명한 간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인가 말씀 드린 예화지만 너무나 귀한 내용이라 다시 소개합니다. 동아프리카 적도 부근에서 활약한 「기독교선교동맹」의 P. K. 스미쓰 선교사 일행은 한 번은 맹수가 들 끊는 밀림 지역에서 천막을 치고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선교사가 자다가 큰 굉음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진이 난 것처럼 갑자기 대지가 움직이며 천막이 마구 흔들리는 이상한 느낌을 받아서 총을 가지고 뛰어 나가 보니 7-8미터뿐이 되지 않은 전방에서 약 15마리의 거대한 코끼리 떼가 몰려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코끼리들이 선교사를 발견하고는 큰 코를 공중 높이 쳐들고서 공격 신호처럼 나팔 같은 소리로 울부짖으며 자기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겁에 질리어 급히 뒷걸음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설상가상으로 식기들과 식료품을 쌓아 놓은 테이블 건드리면서 크고 작은 그릇들과 깡통들이 와장창 소리를 내면서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짐승들이 더 화가 나서 맹렬히 덤빌 줄 알고 ‘이제는 죽었구나.’ 싶더랍니다. 그런데 코끼리들이 무엇엔가 놀랐는지 급히 후퇴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코끼리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깡통 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방법으로 구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선교사가 안식년 휴가를 맞아서 미국에 와서 어느 교회에서 그러한 간증을 했더니 예배를 마친 후에 어느 부인이 그에게 와서 ‘그 때가 언제냐?’고 묻습니다. 그러더니 그 부인이 자기의 경험을 말하기를 어느 날 유리창을 닦고 있는데 갑자기 그 선교사 일행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너무나 할 일이 많아서 나중에 하려고 하는 데 계속 지금 바로 기도하도록 강한 충동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선교사 일행들이 위험을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기도하고 나니까, 다시 마음이 평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기도하던 그 시간이 선교사 일행이 위험에 직면했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교사 일행의 생명을 구하시려고 수천 마일 떨어진 여인으로 하여금 강권적으로 기도를 시키셨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어떻게 기도할지 몰랐으나 좋으신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중보기도를 통해서 믿음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 여인이 성령이 강권하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핑계하고 기도하지 않았다면, 선교사 일행은 큰 위험을 만날 뻔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누구인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히 일어날 때, 즉시 기도해야 합니다. 때로는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할 때 즉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십시오.
사랑하시는 여러분이여, 여러분들의 안타까운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번 40일도 더 좋은 길을 예비하시고 우리에게 기도를 시키시는 줄 알고 열심히 기도의 제물이 되십시다. 그 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응답의 큰 역사가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나타날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
눅 11장 5~13절 / 이필재목사
월드컵 축구 경기 때는 목사가 설교를 너무 잘해도 흉이랍니다. “목사님은 월드컵 축구 경기도 안보고 설교 준비만 하셨나?” 이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동안 우리 한국이 이것저것 얻어터지기만 하다가 어젯밤에 우리 선수들이 시원하게 승리한 것을 보면서 큰 국민적 기쁨이 생겼고 우리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바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청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소서.” 그래서 오늘 말씀을 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보면 40일 금식기도부터 시작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밤이 맞도록 철야기도도 하셨고 새벽기도도 하셨고 산 기도도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그런 기도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안수 기도해 달라고 찾아와서 안수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은 기도 요청이 있을 때 그렇게 또 안수 기도를 합니다. 기도하는 모습도 어떤 때는 얼굴을 땅에 대시고 고민하시고 슬퍼하시면서 기도를 하셨고, 때로는 홀로,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큰 소리로, 어떤 때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는 모습이 성경에 잘 나타납니다.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가? 기도를 해서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알아내는 것입니다. 어떤 때 우리는 갈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저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그럴 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하나님의 뜻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인간의 거룩한 행위가 기도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내용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주시면서 하신 예화입니다. 어떤 친구가 밤에 자기 친구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여행 중인데 배고프고 피곤한 이 친구는 밤늦게 자기 친구 집을 방문했는데 친구는 대접할 떡이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네를 다니면서 떡을 구했습니다. 한 집에 가서 “내가 지금 형편이 이러니까 나에게 떡 세 덩이를 좀 빌려 달라.”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요청을 받은 다른 친구의 집에서 하는 말이 이 밤중에 그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합리적 이유들을 몇 가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는데 끝까지 달라고 요청을 해서 결국 떡을 얻어가지고 밤에 찾아온 자기 친구에게 만족을 주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먼저 이 성경을 이해하려면 일반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의 여행 풍습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밤에 다닙니다. 왜 밤에 다니는가? 낮에는 뜨거워서 못 다닙니다. 여러분은 경험하셨을 겁니다. 100미터도 뜨거워서 못 걸어갑니다. 그냥 쓰러지거나 일사병 걸리거나 열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낮에는 아예 다니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디 여행을 다니려면 걸어가야 하니까 밤에 여행을 떠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 가운데 예수님이 “어떤 형제가 5리를 같이 가자고 하면 10리를 같이 가라.”하신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 가운데서는 이 말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데 유대 나라에서는 같이 가주는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밤에 길을 가니까 위험스러워서 같이 가주는 동행자가 필요한 문화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요청이 “내가 어디서 어디까지 가야 하는데 혼자 가기 무섭다. 같이 가달라.”입니다. 그래서 요청을 하고 같이 가주는 것이 그 나라의 문화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결혼식을 밤에 합니까? 기후 때문에 결혼식이 거의 서늘해진 저녁에 시작을 합니다.
오늘 이 여행객은 목적지까지 잘 왔는데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먼 길을 걸어왔으니 피곤하고 배가 고픈데 맞이한 집안에서는 먹을 것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옛날에 무슨 여관 시설이 잘 되어 있습니까? 이런 문화에서는 할 수 없이 누구네 집에 신세를 져야만 여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율법 가운데 덕을 강조하는 데 무엇을 많이 강조하느냐 하면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는 겁니다. 그래야 서로 살 수 있다는 겁니다. “너도 나그네가 될 때가 있고 또 밤에 찾아온 손님을 안 재워주면 갈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사회는 아예 “하나님 잘 섬기는 사람이란 손님대접을 잘 하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법이 생겼습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고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느니라.”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집 앞에 있다가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보았습니다. 그러면 가만히 내버려두었으면 그만인데 쫓아갑니다. “우리 집에 거하소서.” 그래서 그 사람이 아브라함의 간청을 듣고 그 집에 갔더니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시켜서 요리를 만들어서 그 지나가는 나그네를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랬더니 히브리 성서 기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일들이 있었느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 나라 문화는 나그네를 그냥 보내지 않는 겁니다. 나그네가 우리 집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는 신앙적 문화가 생겨서 열심히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고 여행 중에 있는 사람들을 극진히 대접하는 문화가 생겼기 때문에 성경에 그와 같은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은 그 나라 문화권에서 지금 몇 가지 그 사람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첫째는 자기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의 요청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네 친구이니까 네가 알아서 했어야지 이 밤중에 어떻게 나더러 와서 지금 그 떡을 만들어내라 하느냐? 할 수 없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이 이야기를 했는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기도의 내용은 거의가 다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새벽기도회 매일 나오시는 분들은 거의 매일 나오십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으십니까?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혼자 사는 부인이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똑같은 말로 기도를 했습니다. 혼자 사니까 그랬나 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 날마다 똑같은 말로 계속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딸아! 시험도 한번쯤 드는 게 필요하다. 내가 기억상실증 환자인줄 아느냐? 너는 어떻게 날마다 똑같은 기도만 하느냐?” 물론 꾸민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의미는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기도하는 내용들을 거의 90퍼센트 이상이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겁니다. 캄보디아를 일주일 갔다 왔지만 그 사람들이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다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캄보디아는 온 나라가 다 찜질방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돈 갖다 주면서 안타까워합니다. 기도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의 행복과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합니다. 어떤 때는 필요치 않은 기도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아주 부자로 잘 사는 사람이 “하나님! 오늘 제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합니까? 이미 많이 주었는데요? 건강한 사람이 “내 건강을 하나님이 도와주시옵소서.” “이미 건강을 주었지 않느냐? 너 건강하지 않느냐?” 필요 없는 기도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기도는 너와 상관도 없는 이웃을 위해서 열심히 하라.”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겁니다. 그런 기도가 아름다운 겁니다.
두 번째, 친구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문이 닫혔다는 말을 썼습니다.
이미 문이 닫혔다면 열면 되지 뭐가 문제입니까? 누구네 집이나 다 문을 닫아 놓지 않습니까? 우리 문화에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유대 나라 주택 구조는 이해가 됩니다. 유대 나라는 하도 침략이 많아서 외부 침략에 대해서 신경을 써서 건축을 합니다. 문을 닫아버리면 그 다음에는 아침이 될 때까지 열지 않는 문화입니다. 안전 위주의 주택문화입니다. 예루살렘 갔다 오신 분들은 예루살렘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아실 겁니다. 성곽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문을 몇 군데 막아놓고 문을 닫아 버리면 아무도 들어가고도 나가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의 예화 가운데도 나옵니다. “열어주소서, 열어주소서 하되 이미 문은 닫혔는지라.” 문이 열려있을 때 들어오던지 나가던지 했어야지 문을 닫아놓으면 그 이튿날이 될 때까지 열지 않는 문화입니다. 집도 그렇고 예루살렘 성곽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미 닫아 놓았는데 “보라! 네가 아는 그 친구라는 사람의 신분을 내가 알지 못한다. 그가 강도인지 어떻게 내가 보장하느냐? 그래서 위험스럽게 문을 개방하고 이 밤중에 내가 이런 일을 할 수가 없노라.” 합리적입니다. “그러면 이 친구는 아, 그렇습니까? 그만 두겠습니다. 그러면 되겠느냐? 끝까지 자기 소원을 위해서 나는 오늘 저녁에 너의 집에서 떡을 빌려가지 않으면 이 친구가 기진맥진해서 쓰러진다. 이 친구의 필요를 위해서 내가 너한테 요청하는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요청을 해서 결국 필요한 대로 떡을 얻어가지고 그 친구의 고난스러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닫힌 문을 열게 하는 것이다. 닫혀있다고 포기하면 기도가 아니다. 열릴 때까지 기도하라. 열어줄 때까지 두드리라. 물러나면 절대 안 된다.” 그것이 기도라고 가르쳐 주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좋은 게 있습니다. 마음이 편합니다. 기도해놓고 나면 하나님께서 다 지혜롭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믿음은 벌써 이루어졌기 때문에 마음이 편한 겁니다.
세 번째 이유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뭐가 문제가 됩니까? 지금은 우리나라 문화가 아이들 방이 다 따로따로 있습니다.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유대 나라는 방이 하나입니다. 아열대 기후이지만 밤이면 또 얼음이 업니다. 기후의 변화가 심해서 건강이 굉장히 피해를 입습니다. 가운데 조그만 난로 하나 세워놓고 빙 돌려 잠을 자는 문화입니다. 그래서 밤에 잠을 자다가 누가 하나 일어나서 공연히 왔다갔다 소란을 피우면 온 식구들이 안면방해, 수면장애를 일으켜 다 같이 잠을 못잡니다. “아이들이 이미 나와 함께 잠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소란을 피워봐라. 이 집안에서 이 밤중에 무슨 일이냐고 다 깨어난다. 이런 불편한 일을 왜 밤중에 나더러 하라고 하느냐? 그러니 빨리 가거라. 네 친구는 네가 알아서 책임을 져라.”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물러났습니까? 오늘 성경말씀에는 “간청함을 인하여” 라고 나왔는데 옛날 성경에는 “강청함을 인하여”라고 했습니다. 강제로 청하는 겁니다. 줄때까지 두들기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그것을 주었다고 했는데 유대 나라의 문화는 빵이 주식인데 우리나라 같이 동글동글한 빵이 거의 없고 빵 하나가 장작더미에 쌓아놓고 파는 것 같이 길거리에서 팝니다. 그래서 빵 두 개만 들고 가면 일주일씩 먹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집에나 나누어줄 빵은 준비가 되어 있는 문화입니다. 그런데 이 집이 마침 떨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웃집은 틀림없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주인의 마음만 움직이면 빵은 언제든지 나온다는 겁니다. “신호를 하면 하나님의 마음만 움직이면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는 빵이 있도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 기도를 안 하느냐?”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세요. 몇 가지 예화가 나옵니다. 먼저, 수로보니게 여인 예화를 보십시오. 수로보니게 여인은 유대 사람들이 볼 때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동물 취급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한테 지금 어떤 여인이 따라와서 귀찮게 하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왜 저 여자를 쫓아 보내지 않으시고 저렇게 따라오게 두시는가?’ 이런 생각들을 제자들이 가지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래? 그러면 내가 저 여인을 한번 만나봐야겠다.” 그래서 그 여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을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했습니다. “여인이여!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그래서 수로보니게 사람을 유대인들이 개 취급 하는 것을 그대로 반영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소리를 들은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존심이 상해서 자기도 쌍스러운 욕을 던지고 도망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좋습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사나이다. 유대인들에게 베풀어 주시고 우리 수로보니게 사람들에게 베풀 찌꺼기 같은 은혜가 있다면 내가 그것을 받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봐라. 너희들보다 낫지 않느냐? 네 믿음이 크도다.” 바로 그 소원대로 그 딸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끈질긴 기도 요청대로 예수님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불의한 재판관 이야기가 나옵니다. 돈 없는 부인이 억울함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재판관에게 가서 이것을 바로 잡아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뇌물을 가져오지 아니하는 불쌍한 돈 없는 여인의 요청을 재판관이 들어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물러났을까요? 끝까지 두들겼다고 했습니다. “당신 같은 재판관이 할 일이 있다면 나 같은 사람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두들겨 대니까 이 재판관은 그 여인의 끈질긴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 여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만든 예화입니다.
오늘 말씀에 “소용대로 주리라. 필요대로 주리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성도들이 기도 많이 하면서도 잘 생각해야 됩니다. 가끔 욕심스러운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왜 괜찮을까요? 하나님은 지혜롭게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때로는 이기적인 욕심의 수단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필요대로 주십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소용대로 지혜롭게 나눠주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하나님 잘 믿고 훌륭하게 잘 살기 때문입니다. 지금 3살, 4살 된 어린 아이들이 그 예리한 면도칼을 가지고 논다고 울어댄다면 주겠습니까? 다른 더 좋은 것을 줄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지만 내 필요를 따라서 나누어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한 사람은 이것을 믿기 때문에 아직 응답이 안 왔어도 마음이 편안하고 내 기도에 정 반대 사건이 되었다 해도 결코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지금 내 기도를 들으시고 가장 필요한 것을 나에게 허락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는 평생 동안 필요를 얻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기도를 안 하십니까? 하도 기도를 안 하시니까 이렇게 하는 겁니다.
지금은 그런 엿장수는 없어진 거 같습니다. 아무리 봐도 없습니다. 옛날에 제가 어렸을 때는 이 시골 마을에 엿장수가 오는데 이만한 리어카 위에다 목판을 만들고 그 위에다 엿을 만들어서 굽니다. 그 다음에 밀가루를 뿌려서 허옇게 해서 동네에 나타나면 엿장수들이 쓰는 철 가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옷 자르는 가위가 아니라 소리 내는 가위입니다. “철컥철컥” 소리를 내면 아이들이 다 흥분을 합니다. “와! 엿장수 아저씨가 오셨다!” 그때부터 아이들이 집 안에 있는 빈병, 고무신짝, 어떤 때는 남의 집의 고무신까지 집어가서 엿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엿장수 아저씨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래, 줄게.” 하시면서 엿을 줍니다. 그런데 그 목판에 대고 엿을 깨는 아주 두툼한 쇠칼이 있습니다. 그것을 엿에 대고 가위로 “툭” 치면 엿 덩어리 하나가 “툭툭” 떨어져 나오고 아이들이 그것을 받아먹는 재미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그런 엿장수가 없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와서 달라고 할 때 하나씩 떼어주면 사건이 반드시 벌어집니다. 불공정입니다. “왜 쟤는 크게 떼어주고 나는 조그맣게 떼어주세요?” 이것 때문에 아이들이 늘 엿장수 아저씨한테 항의를 합니다. “내가 고무신 더 가지고 왔는데!” 사실 엿판에 있는 엿을 자로 재어서 떼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항의를 하면 엿장수 아저씨는 합리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쓰는 말이 뭔지 아시죠? “엿장수 마음대로야!” 그겁니다. 우리가 기도는 열심히 해도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가장 필요한 것을 따라서 네 소용대로 주리라.” 그러니까 얼마나 좋아요? 우리는 그것을 믿고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소용대로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 나를 그렇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기도생활입니다. 그래서 평생 기도하는 사람은 평생 필요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속에서 살게 됩니다.
보십시오. 한 나라도 지도자가 짤막한 믿음의 기도 문구 하나를 가지고 구원하는 역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 목사가 일본 소년들을 향해서 “Boys, be ambitious!” 외쳤습니다. 그 아이들이 일본을 재건시켰습니다. 우찌무라 간조의 이 말 한마디가 일본을 재건시켰습니다. 독일은 다 망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 피터 목사가 “독일인에게 고한다.” 외쳤습니다. 그래서 독일이 재건되었잖아요? 덴마크 나라가 다 망했을 때 그룬두비 목사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라.”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덴마크를 지상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I have a dream.” 외쳤습니다. 그래서 지금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잖아요? 믿음의 구호 한 마디가 나라도 구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줄 것이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간절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포기하는 자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기도대로 응답되시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
이동원목사 / 눅 11:1, 22:39-46
“생각을 뛰어넘는 기도”라는 책의 저자인 레이 프리챠드(Ray Pritchard)목사는 2003년 새해에 겪었던 자신의 이야기로 이 책을 열고 있습니다. 그는 새해 첫 주일을 지내고 그 이튿날 월요일 저녁 무렵에 그의 자전거를 끌고 나와 석양을 즐기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차로에서 불법 좌회전을 하던 차 한대가 갑자기 그가 타고 달리던 자전거를 들이 받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가 ‘어~어’하고 소리치는 순간 그는 이미 차에 받혀 자동차의 본네트 위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의 자전거는 복잡한 길 한 가운데 나가 떨어졌지만 다행히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양 방향에서 차들이 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본네트 위에 널브러진 채로 팔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고 합니다. 기적처럼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고 다친 데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는 이어 본네트 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자전거를 일으켜 보았습니다. 자전거도 망가진 데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럼 상대방 차라도 다쳤는가 싶어 자기를 받은 차를 보니 차도 전혀 긁힌 데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는 겁에 질린 상대방 운전자에게 다가가 “우리 아무도 다친 데가 없군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새해 주님의 축복을 누리시기 빕니다.”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물론 그날 밤 집에 도착하는 대로 있었던 일을 자기 아내에게 이야기했고, 그의 아내는 교인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 후 몇몇 교인들이 프리챠드 목사를 찾아와 하는 소리가 “기도의 응답이네요”하더랍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목사님, 올해 교회 표어를 ‘주님,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고 목사님이 정하시지 않으셨나요?”하더랍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교인은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지난주일 설교 끝에 금년의 표어를 설명하시면서 목사님을 위해서도 특별히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셨고 심지어 목사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려면 예배에 오지도 말라고 하셨잖아요. 주님께서는 틀림없이 목사님께서 월요일에 그 사고를 당할 줄 아시고 지난주일 우리에게 기도부탁을 하신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때 비로소 이 프리챠드 목사는 자기 스스로 깨닫지 못한 기도 제목을 교인들에게 부탁하게 하신 것과 그리고 교인들의 기도를 통해 그가 보호받은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하고 살아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이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기도를 명하시고 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 자신에게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예수님에게 기도하신다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1. 기도는 일상의 습관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습관이라는 말을 때로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습관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습관이 운명을 만든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서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의 씨앗을 뿌리면 행동의 열매를 얻게 되고,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를 얻는다. 습관의 씨앗은 성품을 얻게 하고, 성품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을 길러준다면 자녀 교육의 90%는 이미 성공했다고 할 것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 규칙적으로 독서하는 습관, 예습하고 복습하는 습관, 운동하는 습관, 타인의 말을 잘 경청하는 습관, 봉사하는 습관, 교회 가는 습관, 성경 읽는 습관,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 주었다면 무엇을 더 기대하시겠습니까? 자녀 교육-끝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습관은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습관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기도하는 습관이셨습니다. 본문 누가 복음 22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감람산 겟세마네 정원에 기도하러 가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내일 십자가를 지게 되는 사건 때문에 그곳에 가신 것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눅22:39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 갔더니” 무엇을 따라 그가 감람산에 가셨다고 했습니까? 맞습니다. ‘습관을 따라’였습니다. 그가 감람산을 찾아 기도하는 것은 그의 일상의 습관이셨던 것입니다. 거룩한 습관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결코 형식적인 습관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눅11:1에 보면 어느 한 곳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이 그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주님의 기도가 일상적인 형식이었다면 주님의 기도가 끝났을 때 제자들은 그냥 ‘잘 끝내셨구나’ 정도의 반응을 보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기도의 태도가 주는 어떤 감동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다시 눅11:1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의 기도가 제자들을 목마르게 한 것입니다. 그들도 주님처럼 기도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일상적 습관이 아닌 거룩한 습관이셨던 것입니다. 아니 그분의 삶의 거룩한 리듬이셨습니다. 없어서는 안 될 실존의 방식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배들은 예로부터 기도를 호흡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는 호흡을 습관적으로 하며 삽니다. 그러나 호흡을 멈추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래서 호흡은 생명인 것입니다. 성경은 기도가 바로 그런 생명의 호흡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이제 금년 한해 주님의 거룩한 습관이었던 기도를 우리의 거룩한 습관으로 만드시겠습니까? 그것은 옵숀의 문제(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가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 입니다. 살고 싶으시면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거룩한 습관으로 만드십시오.
2. 기도는 위기의 극복이었습니다.
기도는 호흡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특별한 위기를 만나면 더욱 특별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범을 예수님의 생애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분에게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은 그분의 생애에서 위기중의 위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위기를 어떻게 직면하셨습니까? 물론 기도로 직면하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먼저 분명한 것은 그분에게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은 그분이 언제나 습관적으로 찾던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그 밤도 그분은 그분이 익숙했던 그 장소에 기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그의 기도는 그분의 일상의 기도와 달랐습니다. 본문 눅22:44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여기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의사 누가가 동원한 수식어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땀이 핏방울 같이” 비상한 상황은 비상한 기도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저는 우리 교회에서 조용히 침묵으로 기도하는 ‘관상 기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잠히 기도할 때가 있는가 하면 부르짖어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침묵의 기도가 필요한 것처럼 강청의 기도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아마도 대부분의 기도의 시간에 그는 조용한 침묵의 기도를 드리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밤은 달랐습니다, 자신을 위해, 우리를 위해 통곡하실 수밖에 없는 밤이셨습니다. 저는 히5:7의 말씀이 그 밤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저는 우리가 침묵이 필요할 때는 침묵으로 기도하지만, 통곡이 필요할 때는 통곡하며 기도할줄 아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뻐할 때는 기뻐할 줄 알아야 하지만 울어야 할 때는 울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상황이 여러분에게 눈물을 요구하신다면 우십시오. 울며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차라리 그 솔직한 눈물을 보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하나님은 눈물에 약하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때 통곡으로 기도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열왕기하 20:3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구하노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여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이어지는 왕하20:5에서 우리는 주님의 응답을 발견합니다. 읽어 보실까요.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의 통곡을 들으시고 우리의 눈물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주님이 이런 비상한 기도의 모범을 보이시고, 또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인생의 비상 상황에서 기도로 위기를 극복하는 모범을 보이셨다면 우리도 당연히 이런 기도를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함 그 자체가 위기의 극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우리에게도 기도는 위기의 극복입니다.
3. 기도는 사역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사역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일생을 복음서를 통해 연구해보면 그분은 일생의 사역을 오직 기도로 실현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그는 그의 공생애를 광야의 기도로 시작하십니다. 제자들을 택하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을 강하게 훈련하시고자 그들을 밤바다에 보내놓고 산에서 기도하십니다. 하루 종일 가버나움 동리에서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지친 다음 날 새벽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십니다. 기도로 그 날 어느 동리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계획하시고 결정하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통해 인류 부활의 레슨을 가르치시고자 그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진실로 그분의 일생은 기도의 일생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그분의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심은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보이시고자 하는 영웅심리 때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원하심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눅22:42입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11장 1절 이하에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그가 제일 강조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바로 그런 아버지의 사역을 이루는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에게 기도는 사역의 방법이셨던 것입니다. 저는 기도가 기적을 이룬다고 의심의 여지없이 믿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하나의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기 때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다면 지금도 우리가 기도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품고 사는 사람들-그들은 기적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2002년에 있었던 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2002년 10월은 미국의 수도인 워싱톤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공포의 달이었습니다. 소위 얼굴 없는 연쇄 저격범에 의해 연달아 무고한 시민 10명이 계속적으로 살해당하고 3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한때 워싱톤에 살았기 때문에 이 사건은 저에게도 특별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제가 목회하고 살았던 교회와 사택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모두가 걱정만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던 때 이 미궁에 빠진 문제를 해결하고자 크리스쳔 트럭 운전사들의 기도회가 열립니다. 이 기도회에 참석한 한 트럭 운전사요 교회 주일 학교 교사였던 란 랜츠(Ron Lantz)라는 이가 그 다음 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경찰에 의해 신고 된 자동차 쉐브레 캐프라이스(Chevrolet Caprice)를 발견합니다. 그의 신고로 15분후 도착한 경찰에 의해 범인은 마침내 체포되고 이 살인극은 한 달 만에 막을 내립니다. 그의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랜츠씨의 대답은 단순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그래도 총기를 지닌 범인을 상대하기 위해 당신에게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다시 이런 말로 대답합니다. “우리는 기도했고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라고 우리는 믿었습니다.” 그에게 기도는 사역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자기 몫으로 돌아오는 보상금 수령을 거절하고 보상금 전액을 이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쓰도록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래서 가장 비극적인 이 사건은 가장 감동적인 사건으로 마무리 됩니다. 무엇이 그렇게 바꾸었습니까? 기도였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지금도 그렇게 기도를 믿고 기도로 역사를 바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꾀나 재주, 그리고 열정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사역의 방법임을 믿는 사람들-그들을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저는 금년도 우리 교회 모든 청지기들이 기도로 사역하는 일군들이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우선순위가 무엇일까요? 기도의 거룩한 습관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기도로 사역을 감당하는 멋진 한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안에 내가 있다(I Am in My Prayer)
눅 11장 1~4절 / 김영봉목사(와싱톤교회)
사람은 누구나 기도합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어떻게 기도하는가, 혹은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하는가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한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일생을 살면서 몇 번은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고, 종교가 없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초월자에게 기도하며, 어떤 사람은 '하나님, 부처님, 알라님!'이라고 소리쳐 기도합니다. 무신론자도 알고 보면 어떤 형식으로든 기도합니다.
미국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무신론 운동이 마치 하나의 종교 운동처럼 부흥했습니다. 어떤 평가에 의하면, 최근에 가장 급성장한 종교는 무신론교(the church of atheism)라고 합니다. 미국 무신론 운동의 부흥을 이끈 세 명의 저자가 있습니다.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짐 해리스(Jim Harris) 그리고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입니다. <만들어진 하나님>(God Delusion)을 쓴 리차드 도킨스가 무신론교의 교황이라면, <하나님은 위대하지 않다>(God Is Not Great: How Religion Poisons Everything)라는 책을 쓴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무신론교의 추기경 쯤 되는 사람입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암으로 투병하다가 2011년 12월 11일,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교회와 기독교 단체에서 치료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해도 되겠느냐고 문의했습니다. 히친스는 그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혹시나 히친스가 임종 전에 회심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무신론자로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맞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죽음에 의해 수동적으로 당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죽기' 원합니다. 죽음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 보고, 그것이 다가올 때 무엇인가를 하려 합니다. (I personally want to ‘do’ death in the active and not the passive, and to be there to look it in the eye and be doing something when it comes for me.”)
참, 멋진 말이요, 멋진 태도가 아닙니까? 그는 언론인(journalist)으로서 일생동안 초월적인 것들과 신성한 것들을 맞서 싸우면서, 인간이 만든 모든 성역을 허물려고 몸부림쳤는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일관되게 살았습니다. 그 일관됨에 대해 그리고 그 거침 없음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냅니다만, 그의 태도는 인간이 한계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보여 줍니다.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중독에 가까운 흡연과 음주의 습관을 버리지 않은 것이나, 자신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신을 부정하고 죽음을 맞은 것이나, 제게는 모든 것이 강해 보이고 싶어하는 약한 자의 몸부림처럼 느껴집니다. 마음을 짓누르는 두려움을 부정하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고 "나는 두렵지 않아!"라고 소리치는 어린아이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일생동안 부정해 온 하나님에 대한 그 나름의 기도 방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섰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홀로 버티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네 안에 있는 두려움을 위장하고 강한 척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느냐? 수고 많았다. 이제 내 안에서 쉬거라." 교리적으로 판단한다면 히친스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만, 하나님을 부정하려는 그의 몸부림에 대해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기보다는 가엾게 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예수님을 통해 체험한 하나님은 꼭 그러실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에 대해 하는 모든 행동은 일종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행동도 기도요,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행동도 기도입니다. 시편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께 대들고 따지고 분노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모든 것이 기도이기에 시편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신론자도 끊임없이 기도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의식하고 하든 의식하지 않고 하든, 기도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 중 하나입니다.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homo sapiens)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따진다면, 인간을 '기도하는 동물'(homo prex precis)라고 불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이 '기도하는 동물'이라는 말은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 기도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는 뜻입니다. 기도를 911 call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다행히도 그 동안 살아오면서 911을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누가 저에게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911 call이다"라고 말한다면, 저는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를 911 call로 생각하는 사람도 기도가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가 911 call의 역할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기도를, 하나님을 조종하는 리모컨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 기도를, 인터넷에서 상품을 주문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필요한대로 주문하면, 즉시로 그 상품이 배달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기도를 마법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손오공이 마술 지팡이를 흔드는 것처럼, 혹은 도깨비가 방망이를 내려 치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기도를 오해합니다. 또는 기도를 넋두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듣든지 말든지, 그냥 답답하여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한 명상 정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기도를 이렇게 생각한다면, 기도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크게 아쉽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참된 의미에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사귐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한 두 번 만난 것을 가지고 사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귐은 또한 서로 주고 받는 인격적인 소통입니다. 그래서 사귐은 사랑과 신뢰와 존경이 있어야 일어납니다. 친구 사이든 남녀 사이든, 서로 좋아야 사귐이 이루어집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귀다 보면, 말할 때도 있고, 무엇인가를 부탁할 때도 있고, 싸울 때도 있고, 말 없이 손 잡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사귐의 과정입니다. 그렇게 사귀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 더 깊게 사랑하게 되고, 사랑이 깊어지는 만큼 두 사람은 서로 닮게 됩니다. 진실한 사귐을 나누는 부부는 얼굴 생김새가 전혀 달라도 왠지 모르게 닮아 있습니다. 그것이 사귐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과 사귐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과의 사귐인 기도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C. S. 루이스가 잘 표현했듯, 하나님은 인간 안에 두 가지 가능성, 즉 동물적인 차원으로 전락할 가능성과 하나님의 차원으로 솟아오를 가능성을 두셨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힌두교나 다른 종교처럼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 형상이 깨어지거나 희미해지면 동물적인 차원으로 전락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선명하게 드러나면 하나님의 차원으로 솟아 오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인간이 인간 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오롯이 회복될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 안에 있는,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려면, 하나님과 사귀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귀지 않고는 하나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동물의 수준으로 전락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차원으로 솟아 오르지도 않고, 그대로 인간의 차원에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차원으로 솟아 오르지 않으면, 동물의 차원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현상유지'라는 말이 있지만, 실은 그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진보하지 않으면 퇴보하는 것입니다. 하늘로 솟아 오르지 않으면 땅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인간이 하늘로 솟아 오르지 못하고 동물적인 차원으로 전락하면, 타락한 마음이 동물적 본성을 사로잡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사악한 '짐승'(beast)이 될 위험에 노출됩니다. 그 증거를 우리는 매일 아침 신문에서 쉽게 찾아 읽을 수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의 일입니다.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펼쳐 읽는데, 하나같이 인간의 비열한 범죄 이야기 뿐입니다. 성 범죄, 정치인의 거짓말, 사업가의 부정, 교사의 부정 등, 그 날은 정도가 특별히 심각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니, 오늘 신문은 왜 이래? 도대체 역겨워서 읽을 수가 없네!"라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지난 일주일 동안 목회자 학교를 인도하느라고 한 번도 신문을 읽지 않았잖아요. 그렇게, 한 동안 신문을 읽지 않고 있다가 다시 읽으니 그렇게 보이는 거지요. 세상은 항상 그랬어요."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비열하고 역겨운 것인지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짐승같은 인간들에 익숙해져 있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사귐을 통해 솟아 오르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렇게 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밖에 없다. 악한 사람과 악해질 기회를 아직 얻지 못한 사람!" 인간의 본성과 존재를 정확히 꿰뚫어 본 말입니다.
기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그리고 참된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다면, 기도를 제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가운데 오셨던 예수님에게도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1절)
네 개의 복음서 중에서 특히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분이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 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신 것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이 늦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일곱 개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세 개는 기도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 27:46)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 23:46) 주님은 공생애를 기도로 시작했고, 기도로 마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열 두 제자를 뽑을 때도 먼저 기도하셨습니다(눅 6:12). 전도하도록 제자들을 보내놓고 나서 기도하셨습니다(눅 10:17-20). 이른 아침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고, 밤이 늦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숨 쉴 겨를도 없었지만, 기도하는 시간만큼은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기도로 일을 준비했고, 기도로 시작했으며, 기도하며 일했고, 끝나고 나서도 기도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아, 그거야,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그랬어야지요"라고 말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건 당연한 일이 아니라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보냄을 받으신 분이 아닙니까? 그분에게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초월적인 능력을 구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기도할 이유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기도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식사를 거르는 한이 있어도 기도는 거르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기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잠 자는 시간을 줄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기도가 약해지는 것만큼 하나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큰 능력을 행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는 일을 가장 우선적인, 가장 중요한 일로 삼았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을 때에만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권세를 올바로 사용할 수 있음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한자의 '이심전심'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대면하여 말 없이 마음으로만 가르침을 주고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불교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석가세존이 어느 날 설법하기 위해 제자들 앞에 서더니, 아무 말 없이 꽃을 하나 꺾어 들어 보여주었습니다. 그 때, 다른 제자들은 무슨 뜻인지 몰라 모두 어안이 벙벙해 있었는데, 가섭이라는 제자만이 활짝 웃었다고 합니다. 스승이 꽃을 꺾어 든 이유를 알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상태를 가리켜서 '이심전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친구 관계에서도, 부부 관계에서도, 혹은 교우 관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한자로 '지기'(知己)라 하고, 영어로는 Confidant라고 합니다. 기도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그분의 뜻이 저절로 느껴지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분의 성품이 우리 안에 흘러 넘치게 됩니다.
기도가 예수님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동고동락하던 제자들이 그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1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유대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전통에 따라 기도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예수님도 그들처럼 기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분과 함께 살면서 그분의 기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알아 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내로라던 율법학자들의 기도와 뚜렷이 달랐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제자들은 진지하게 따져 보았을 것입니다. 상당한 기간 동안 관찰하며 분석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분을 관찰하며 분석하던 제자들은 그것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기도하시는지, 터놓고 이야기하며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같은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 질문을 한 제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다른 열 한 제자는 그 질문을 한 제자에게 속으로 감사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학교 다닐 때 한 두 번은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뭔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막상 손을 들어 질문할 용기가 없어서 망설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질문과 동일한 질문을 할 때, 그 아이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열 한 제자의 심정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모르셨을 리 없습니다. 그 때를 기다려 오셨을지 모릅니다. 그분은 마치 그 때를 위해 준비해 두셨다는 듯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여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드리는 '주기도문'이 이렇게 하여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교회에서 이 기도문이 너무 자주 사용되다 보니, 마치 '주문'(spell)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주문'은 '주기도문'의 약자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이유는 주문처럼 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심전심의 사귐 안에 들어가려면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기도를 통해 참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가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와 맥을 같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고, 참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을 하나씩 짚어 가면서 교우 여러분과 함께 기도에 대해 배우려 합니다. 이 기도문은 오늘 읽은 누가복음 11장 2-4절에도 나오고, 마태복음 6장 9-13절에도 나옵니다. 우리가 보통 암송하는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것을 따른 것입니다. 그것이 좀 더 예전(liturgy)에 맞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기도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문보다 짧은데, 이것은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으로 마태복음의 본문을 따라 설교를 이어갈 것입니다. 부디, 이 연속 설교를 통해 기도의 정수를 발견하고, 예수님처럼 기도하여 그분을 닮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안에 그 사람이 담겨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기도 안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무엇을 고민하고 있으며,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고, 무엇을 귀하겨 여기며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실하게 기도하고 있다면, 자신이 기도에 담은 것이 무엇인지 적어 놓고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장함에 따라서 기도하는 내용과 태도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같은 것을 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영적 상태는 언제나 같은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영적 성장은 기도를 달라지게 만듭니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많은 기도시를 남겼습니다. 그 기도문 안에는 릴케의 내면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기도 중 하나가 이렇습니다.
저의 눈을 감겨 주소서. 주님을 볼 수 있도록.
저의 귀를 막아 주소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발이 묶여도 저는 주님께 가렵니다.
혀가 없어도 주님께 기도하렵니다.
제 팔을 꺾어 주십시오. 주님을 껴안도록.
손으로 잡듯, 제 마음으로 주님을 잡도록.
제 심장을 결박하소서. 그러면 저의 뇌가 박동할 것입니다.
저의 뇌에 불을 붙이시면
저는 뇌에서 흐르는 핏줄기로 주님을 전하겠습니다.
문학가로서 혹은 사상가로서 하늘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온전히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도문만으로도 우리는 릴케라는 시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진실한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의 내면 세계가 담겨 있게 마련입니다.
주기도문 안에는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 안에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겨 있기를 바라는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문이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이 기도문 안에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주기도문 하나만 암송하고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냥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문의 내용과 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꾸준히 기도하고, 기도하는 것처럼 살면, 우리는 예수님을 점점 닮아갈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우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마음을 다잡아 이 거룩한 여정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주기도문 연속 설교에 더하여, 2월 22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새벽기도회 시간에는 '사순절 기도 여행'(Lenten Journey for Prayerful Life)이라는 제목으로 기도에 대해 배우고 훈련하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부디, 앞으로 3개월의 기간이 기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반성하며 진지하게 배우는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이 과정을 통해서 기도의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또한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또한 여러분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과정을 통해 여러분이 하는 일 가운데 기도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 속에 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영적 성장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바른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을 누리시며, 그로 인해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동물성을 딛고 하늘로 솟아 오르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로 인해 거룩하고 아름다운 '인간다움'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또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