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주고받는 이야기의 주인공(2)
누가복음 24:13-23
눅 24:13-23 / 눅 24:13 [엠마오로 가는 길;막16:12-13] 바로 그날, 예수를 따르던 이들 중의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11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동네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길을 가면서 예수께서 돌아가신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15) 그때 예수께서 가까이 가셔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러나 하나님께서 막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그다지도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느냐?'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18) 그들 중에 글로바라는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살면서도 지난 주간에 일어났던 그 끔찍한 일들을 전혀 모르고 있단 말이오?' 19) 예수께서 물으셨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께 있었던 일이오.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놀라운 일들을 베풀어 보인 예언자요, 권능 있는 선생으로 높이 존경을 받는 분이었소. 20)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붙들어 로마 정부에 넘겨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였소. 21)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이 난국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생각해 왔소. 이런 일이 있은 것은 사흘 전이었지요.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오. 22-23) 그분을 따르던 우리 동료들 가운데 여자들 몇이 오늘 새벽에 그분의 무덤에 갔다가 그분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들만 보았다는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소.
< 설 교 >
변화된 신앙
눅 24장 13~34절 / 고흥식목사
의인은 고난을 받고 경건한 사람은 핍박을 받는 것이 이 세상의 풍조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소유한 사람은 역경이라는 쓴물을 먹고 삽니다. 꿈이 큰 사람은 역경도 큽니다. 꿈이 숭고한 사람일수록 혹독한 역경을 만납니다(창 49:33). 요셉은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버림받습니다. 그리고 노예로 팔려갑니다. 오해받고 감옥에 갇힙니다. 요셉의 이러한 고통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세우시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여러분, 처지가 힘들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단단한 쇠는 두드려서 만듭니다. 용광로를 통과한 금이 맑고 깨끗하고 빛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역경은 하나님의 보석을 가공하는 다이아몬드 칼입니다. 큰 배는 깊은 바다를 필요로 하고, 위대한 선장은 잔잔한 호수에게 키워지지 않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은 역경을 지치게 만듭니다. 역경은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머지않은 날에 당신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를 띠우실 것입니다.(시30:11)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고, 엠마오라는 곳은 의기소침하고 슬픔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두 제자라고 했는데 그중 한명은 글로바라는 사람으로 마리아의 남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목격한 사람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5)
1.엠마오로 내려가게 된 이유
엠마오로 내려간 이유는 실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의 보리떡과 물고기로 축복하시니 수만 명이 먹었습니다. 그 당시 기아에 허덕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기만 하면 그들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로마 사람들의 종으로 있었던 저 유대민족들이 예수님이 왕이 되시기만 하면 로마 총독부는 무너지고 이스라엘은 해방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들에게 예수님은 구주였습니다. 그들의 현실에 대한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믿었던 그분이 죽은 것입니다. 한꺼번에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허무하게 돌아가신 것을 보고 실망하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 오면 좋은 일이 생길 줄 알고 예수를 믿으면 잘될 줄 아는 이러한 신앙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를 위한 죽음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죽음 후 다시 부활하실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에 믿는 사람도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한때는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것 같지만 시들해지는 원인은 그 신앙이 말씀에 뿌리를 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때 신앙의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깊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깨닫게 됩니다.(눅22:34,61)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시며”(시19:7)
2.내려가는 사람들 특징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16절)
예수님이 옆에 계시지만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운 사람은 세상눈이 밝아집니다. 세상눈이 밝은 사람은 세상의 죄악세계의 눈은 투철히 잘 봅니다. 그리고 그리로 빠져듭니다. 돈에 눈이 밝고, 욕심에 눈이 밝습니다. 세상일 때문에 영적인 일에는 게을리 하고, 세속적인 일에는 근심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본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세상 눈이 밝은 사람은 말 표현이 불 신앙적입니다. 소망이 없는 말들을 합니다. 입이 부정적입니다. 시험에 빠진 사람은 말을 들어 보면 즉시 알아봅니다. 체념에 잠긴 말을 합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말을 합니다.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말을 합니다. 어두움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29절)
신앙이 내려가는 길은 해가 저물고 어두운 길입니다. 불신앙의 상태이고 절망상태이고, 죄악상태입니다. 그리고 근심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슬픔 속에 늘 잠겨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17절)
3.다시 올라올 수 있는 변화 신앙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31절)
눈이 밝아지니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예수님을 알아봤을 때 놀라움과 황홀함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고후5:7) 믿음 앞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눈이 열렸을까요? 한자리에 앉아있었기 때문입니다.(30절) 음식도 함께 먹었습니다. 여기서 음식이란 육의 음식과 영의 음식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할 때 영안이 열립니다.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29절)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 예수님의 은혜를 절실히 원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만약 그들이 강권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그냥 지나갔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지금도 지나가고 계십니다.(창1:2,요3:8,겔37:5,왕상19:11,출34:6)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지나가십니다. 이 시간 눈이 열려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야 합니다.(32절) 낙심한 심령에 말씀을 듣는 중에 힘이 생깁니다. 눈이 열리지 않으면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31절) 즉시 내려가던 길이 올라가는 길로 바뀌어졌습니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갔습니다.(33절) 식사도 거른 채 음식도 중단하고 빨리 갔습니다. 피곤한 몸이 순식간에 쾌활하게 변화됐습니다. 복음은 죽음에서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11Km나 되는 길, 즉 세 시간이나 걸릴 길을 단숨에 돌아갔습니다. 한 밤 중에 일어나 돌아갑니다. 밤길이 위험했습니다. 강도의 위험과 길이 험한 상태인데도 밤중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증인이 됩니다. 증거자가 됩니다.(35절)
부활(Anastasis아나스타시스)은 “일으키다, 세우다, 다시 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 받았습니다.
내려가고 계십니까
눅 24장 13~35절 / 김영대목사
'사랑이냐 소유냐'로 유명한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인간을 정의하기를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고 했습니다. 의역하자면 '인간은 꿈과 희망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에밀 부루너도 '허파에 산소가 필요하듯이 우리의 삶에는 소망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즉, 인간은 '꿈을 먹고사는 존재요, 희망을 가짐으로서만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글로바와 또 다른 한사람은 삶의 근거가 되는 꿈과 소망을 잃어버린 채 '수심 가득 찬 얼굴'로 힘없이 낙향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을 걷고 있는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직접 제자는 아니었지만 예수를 가까이에서 따르던 추종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두 사람에게서는 아무런 꿈과 소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저들이 왜 이렇게 수심이 짙게 드리워진 슬픈 기색을 띠고 길을 걷고 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들이 그토록 꿈꾸어왔던 기대와 희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희망이란 21절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구속'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런 희망을 실현시켜 주실 인물로 믿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라면 이 일을 능히 이루어 주실 것이다' 여겼던 희망의 등대,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속하기는커녕 로마의 그 악명 높은 십자가 형틀에 처참하게 매달려 참혹한 죽음을 맞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 저들의 꿈과 기대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다름 아닌 저들이 가졌던 희망의 종말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실망과 좌절감이 밀물처럼 밀려왔고 허탈한 마음으로 주저앉아 이틀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저들은 꿈과 소망을 모두 접고 넋 나간 사람처럼 자신들의 고향, 서쪽 엠마오를 향해 힘없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는 '저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길을 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지금 길에서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긍정적인 이야기? 소망 찬 이야기? 밝고 미래지향적인 이야기였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는 부정적이고 암울하고 절망적인 '실패와 좌절의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에 대한 깊은 애도도 있었고, 그 십자가의 형벌이 너무 참혹하여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컸을 것이라는 연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내용보다는 자신들의 낙담, 자신들의 이상이 좌절된 것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분이시라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분이시라면 충분히 우리의 염원,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그런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짙게 배어있는 대화들을 나누면서 저들은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한숨 섞인 탄식의 대화를 우리는 저 2천년 전 엠마오 도상에서만 듣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삶 한복판에서도 이런 탄식과 절망의 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있는 것입니다. I.M.F 때도 어려웠지만 이라크 전쟁과 북한 핵 위기, 또 심각하게 번져가고 있는 사스(SARS)의 공포 때문에 I.M.F 때보다도 더 어렵다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어디까지 갈 것인가?'하는 탄식과 우려의 목소리도 듣고 있습니다. '좋은 시절은 다 지났고, 꿈도 희망도 다 사라졌다고' 한탄하는 아픔의 대화들이 나라 구석구석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여기가 엠마오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은 높은 지역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엠마오로 가는 길은 끝없이 내려가는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위치적으로 엠마오는 예루살렘 서쪽에 있으므로, 엠마오를 향하여 가는 길은 해 저무는 쪽을 바라보며 걷는 서향길입니다. 즉, 엠마로로 향하는 길은 점점 어두워져 가는 길입니다. 낙심과 좌절이 배어있는 길입니다. 땅거미가 찾아들 듯이 온갖 암울함과 낙담이 스며드는 길입니다. 얼굴엔 수심에 차고, 마음엔 절망이 일고, 몸은 피곤해지는 그 길이 바로 엠마오의 길인 것입니다.
자신이 믿던 모든 일들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자리가 바로 엠마오요, 큰 상실감에 몸부림치는 자리가 엠마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한 이가 어찌 글로바와 그 친구뿐이겠습니까? 오늘도 이 땅에는, 아니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성도들 가운데도 직장을 잃은 사람, 사업에 실패한 사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 입시에 실패한 사람 등, 수많은 이유들로 좌절과 상실감에 몸부림치는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고비와 역경, 내려감이 있는 곳이 바로 엠마오요,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저들 곁에 한 길손이 따라붙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저들과 달리 가볍고 힘찼습니다. 엠마오를 향하여 낙향하는 저들에게 뜻하지 않은 동행자가 생긴 것입니다. 그 새로운 동행자는 저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주고받으며 길을 가느냐?'고 묻습니다. 글로바와 그 친구는 그를 핀잔하는 투로 '당신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오면서 엊그제 일어난 그 충격적인 십자가의 사건도 모르느냐?'면서 '나사렛 예수의 일'을 설명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행하는 일이 바르고, 행위로나 말로나 참으로 훌륭한 분이셨오. 그런데 그만 제사장과 장로들이 그를 시기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총독에게 넘기지 않았겠소.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다오. 사실 우리는 그분께 큰 희망을 걸었었오.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저들은 이어서 어떤 여자들과 제자들이 경험한 빈 무덤 이야기, 그리고 천사가 전해준 부활 메시지도 있었다는 소식도 전합니다. 이러한 저들의 말을 다 듣고 그 길손은 크게 탄식합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사람들아,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어야 승리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 아니었더냐?...' 그 길손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오셔야할 메시야'에 대한 모든 예언의 말씀들을 분명하고도 차근차근하게 설명해 나갑니다.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은 오히려 오랫동안 예언되어온 구약의 성취라고 설명합니다. 메시야 생애의 클라이막스가 바로 십자가이며, 말씀이 거기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요, 멸망이 아니라 승리요, 부끄러움이 아니라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사망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의 새로운 탄생인 부활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는 필연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영광을 이루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질 않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그것은 실패요 좌절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십자가와 고난이 필요한 줄은 알지만 그것이 내 삶 속에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다음에 영광! 그렇게는 생각하지만 내 삶 속에서는 십자가 없는 영광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따로, 생활 따로 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주님이 저들에게 지난 금요일의 십자가 사건을 말하게 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저들을 찾아와 자신들의 입으로 그 날의 일을 말하게 하고 그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설명하게 하는 것은 사건 자체를 다시 기억하게 함이 아니라, 그 십자가 사건에 대한 저들의 잘못된 해석을 고쳐주기 위함이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시는 긍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 이 사건은 실의와 좌절과 절망의 스토리였습니다. 주님은 그런 저들의 잘못된 이해를 고쳐주시는 겁니다.
십자가는 결코 절망할 현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좌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들이 절망이라고 단정한 그 이야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과 부활의 희망의 소식을 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이 길손의 말을 듣고 있던 저들에게 어느새 뜨거운 감동이 일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그 무겁고 우울했던 마음이 말끔히 가시고 무엇인가 새로운 희망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비로소 가리워 졌던 두 사람의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의 '가리워졌다'라는 헬라어 '이크라툰토'는 '어떤 힘에 의해 붙들려 있다'는 뜻입니다. 저들이 그 무엇엔가 붙들려 있음으로 십자가의 사건을 올바로 볼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저들이 붙들려 있던 것은 바로 인간의 이념, 이데올로기, 자신의 아집이었습니다. '유대나라, 이스라엘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그 이념, 그 아집' 말입니다. 그 이념이 저들의 눈을 가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어두워져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고, 저들의 눈이 닫혀있어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들은 사실 메시야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꿈꾸어온 세상나라가 실현되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 아닌 자신들의 꿈의 실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그러한 꿈이 실현되지 않자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단정짓고 좌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들의 마음과 눈이 열려짐으로써 새로운 깨달음과 전망이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눅24장에는 '연다'라는 말이 세 번 등장합니다. 헬라어로 '디아노이고'라고 하는 이 단어가 이 24장에서는 세 가지 의미로 각각 다르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31절에서 '눈이 밝아져'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32절의 '성경을 풀어'의 '풀어'라는 단어도 헬라어로는 같은 '디아노이고'입니다. 그리고 45절의 '마음을 열어'도 역시 '디아노이고'입니다. 따라서 '눈이 밝아지고', '성경이 풀려지고', '마음이 열려지는 것' 이 모두가 디아노이고 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를 다 종합하면 '디아노이고'는 '밝아지고, 풀려지고, 열려지는 것'입니다. 즉 '올바른 시력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말씀을 열어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실 때 생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자신들의 아집과 이념에 사로잡혀 실의와 좌절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두 제자를 찾아와 사랑의 경험을 회상하게 하고, 다시 깨닫게 하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는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저들로 하여금 새로운 자기로 탄생케 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저들은 이제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제껏 저들 삶의 초점은 이스라엘의 독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저들의 새 삶의 초점은 부활하신 주님, 자신들과 동행해 주시며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바로 그분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환경은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단 하나, 저들과 동행하신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생긴 것입니다. 그랬을 때 저들은 더 이상 자기들의 이념을 추종하는 생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새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라의 독립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자신들의 삶의 주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것을 알리려고 힘차게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간 것입니다.
저들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간 그 때는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저들에게 이제 밤은 더 이상 무섭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길에서 살아 계신 주님과의 동행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향하는 방향은 이제 곧 태양이 떠오를 동쪽을 향한 길이었습니다. 저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말씀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을 가졌고 그로 말미암아 뜨거운 마음으로 사명의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엠마오란 지리적인 어느 한곳에 고정된 자리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엠마오는 단순히 어떤 한 장소가 아니라, 모순과 실망과 의심과 고통으로 뒤덮인 일상의 삶에서 새로운 의미를 깨닫는 곳입니다. 엠마오는 낙심하여 실의에 빠져 자신은 불필요하고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났다고 자포자기하는 인생들에게 새로운 마음과 눈을 열어주는 비전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정' '길' '걸어간다'는 단어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 단어들이 뜻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엠마오의 사건은 길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곧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정은 우리의 삶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장미 빛 환상과 지극히 낙천적인 기대를 가지고 살다가 십자가 죽음이라는 고통을 만나 실의와 좌절에 빠져 해가 기우는 서쪽, 내려가는 엠마오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인간들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낙심한 내려가는 삶의 여정을 그냥 버려 두지 않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함께 하셔서 고통의 새로운 의미, 하나님의 역사를 알게 하시며 그 길에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저들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주님은 결코 인간을 자신들의 운명에 홀로 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길동무가 되어주시고 안내자 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친히 저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은 저들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셔서 저들로 참된 인생의 기쁨과 보람을 그 길에서 발견케 하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제 저들에게 더 이상 허탈한 말들이 오가지 않고 뜨거운 말들이 오가고 있지 않습니까? '아아! 길에서 우리의 마음이 그토록 뜨거워진 것은 그랬었기 때문이야. 그분이 말씀을 풀어주실 때 우리의 마음이 불붙고 있었던거야!...' 그 뜨거운 마음으로 저들은 자리를 박차고 사명의 자리 예루살렘을 향해 내달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엠마오 길에서 두 제자들과 함께 동행해 주셨던 주님은 오늘 우리들과도 동행해주시는 부활의 주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지키리라" 아멘! 누가 나와 함께 울어줄 것입니까? 내려가는 내 인생길에 누가 나와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되어줄 것입니까?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인간의 끝자리, 죽음까지도 동행해 주시고 그 너머까지도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힘들고 곤고해도 주님이 내 인생 길에 아름다운 동행이 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함께 하시며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를 일러주십니다. 낙심하고 좌절하고 허망해하는 우리 곁에서 우리를 북돋우시고 싸늘하게 식어 가는 마음에 새로운 열정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한때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던 박노해 씨가 쓴 시를 소개해 드림으로 말씀을 마치려합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총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의 본명은 박기평이지만 노동해방의 약자로 박노해라는 필명을 썼던 사람입니다. '불의한 권력을 향해 몸바쳐 투쟁하는 삶에 치열했던 혁명가 박노해, 그가 외부의 적을 행해서만 목소리를 높이는 사상과 투쟁에서 이제 삶의 안쪽에서 자기 자신과 치열하게 투쟁하는 삶이 진정한 혁명적 삶이란 것을 깊이 깨우치고 8년 동안의 감옥생활을 정리하며 지은 시입니다.
시의 제목은 '굽이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 시의 내용은 우리교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릴 것입니다. 내용이 필요하신 분들은 홈페이지를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겹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돌아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 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 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은 엠마오 길과 같은 우리의 내려가는 인생 길에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동행이 되어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활기차게 자신있게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
눅 24장 13~35절 / 지태일목사
지금을 교회력에서는 부활주일 두 번째 주일, “Second Sunday of Easter”이라고 하는데 지금이야말로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부활절은 역사적인 한 순간의 사건만이 아님니다. 부활하신 이후에도 주님의 부활절은 계속되고 있었잖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세상에서 승천하시기전 40일 동안 실의(失意)에 찬 제자들을 만나 주시고, 제자들의 삶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서 복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러한 변화를 볼 때에 부활절은 그 이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순절 기간을 거쳐 종려주일, 고난주간을 거쳐 부활절을 기념한 교회는 뭔가 다 끝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가 있는데 사실은 큰 절기후의 파장이 아니라 지금부터 우리의 사명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그런 때입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중요한 시간들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시간 부활후 부활의 주님을 만나 변화된 사람들, 다시 실의와 절망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 그 첫 번째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 관한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에는 이 말씀이 없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아주 간략하게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막16:12-13)”라고 나와 있습니다.
1. 두 사람은 가슴 벅찬 감동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21절)
그런데 오늘 본문 누가복음에는 비교적 상세하게 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우선 이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짐작컨대 엠마오는 이 두 사람의 고향이었을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 되는 엠마오라는 촌으로 가면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저희 중 둘이”라고 했으니까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Cleopas)인 것으로 보아 이들은 열 두 제자들 중 두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하여 직접 목격을 했든지 아니면 들어서 알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2-23절에 있는 말씀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the Empty Tomb)”에 대해서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을 그냥 보통으로 믿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람으로 알고 그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절)”는 그들의 말속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글로바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을 구속할 메시야라는 생각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아! 이 분이야말로 메시야로구나! 그래 맞다. 이런 분이 메시야여야지, 내가 그 메시야를 만났구나 하면서 크게 감동합니다. 크게 흥분되어 철썩같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야! 내가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너무 잘했구나하면서, 신나게 충성하면서 크게 만족했습니다. 시간도 드리고 물질도 드리고 재능도 드리고 때로는 감동의 눈물로 밤을 지새운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면서 길을 걸어가다가도 주님을 부르며 감사하고 눈시울이 뜨거웠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2. 낙심한 글로바입니다.
메사야를 만남으로 감격했던 글로바와 그 제자, 그 분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철저히 믿었던 이 사람에게 큰 시련이 찾아옵니다. 그렇게 믿었던 메시야가, 예수님이 너무나도 힘없이 한 번 싸워보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로마 병정들에게 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그대로 십자가위에서 죽어 갔습니다. 그 순간에 모든 기대와 믿음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자신들은 예수님이 혁명을 일으켜 로마를 몰아내고 왕이 되실 것이라고 믿었는데 예수님은 답답하게도 십작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한 절망의 모습을 보고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 생각하여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를 향하여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짐작컨대 엠마오는 이 두 사람의 고향으로서 "알지 못하는 길"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불확실한 길입니다. 방황의 길입니다. 올라가는 길이 아닌 내려가는 길입니다. 낙심의 길입니다. 희망이 아닌 절망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일로 보아서 이 두 사람 뿐만 아니라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후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더라도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예전에 자기들이 살던 곳으로, 그리고 예전의 일터, 고기잡던 갈릴리로 돌아가 고기나 잡던 일도 있었습니다(요한복음21:3).
더욱이 글로바와 그 제자가 엠마오로 가던 때는 오후 시간으로 29절에 보면 얼마 가지 않아서 날이 어두어졌다고 했으니까 날이 저믈었음을 보여 줍니다. 날이 저물었다는 사실이 이 두 사람의 실망스러운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17절을 보면 그들의 얼굴은 슬픈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즉 마음은 무거웠고, 그들의 얼굴은 우울했습니다.(17절, Their faces downcast.)
과거에는 은혜 충만함이 그들을 이끌었다면 지금은 절망과 어둠이 저들을 포로로 잡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우울하고 절망스러웠겠습니까?
절망과 우울로 가득찬 두 사람이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들을 서로 이야기 하면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얘기해 봐야 모두 실망스러운 얘기들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의 결론은 한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마당에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예루살렘에서 엠마로를 향하여 내려가던 그들이었습니다.
3. 다시 일어서는 글로바, 우리의 모습입니다.(30절)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15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말씀합니다. 한 나그네로 알고 동행하다가 나그네가 말을 걸었습니다.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심각하게 하십니까?”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일이요(About Jesus of Nazareth).” 그게 “무슨 일입니까?” “당신은 예루살렘에 살면서도 지난 주간에 일어났던 그 끔찍한 일들을 전혀 모르고 있단 말이오?"
19절 이하에 보면 그들이 말합니다. ”그 분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놀라운 일들을 베풀어 보인 예언자였습니다. 권능 있는 선생으로 높이 존경을 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붙들어 로마 정부에 넘겨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바로 사흘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오. 그분을 따르던 여자들 몇이 오늘 새벽에 그분의 무덤에 갔다가 그분의 시신은 보지 못하고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들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 우리 제자들 중 몇 사람이 무덤에 달려가 보니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 부질없는 일이지요. 그 분이 돌아가신 마당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이야기들을 들어 보면 진짜 절망하고 포기하고 낙심하고 기대도 소망도 다 무너진 어처구니없는 인생의 한 모습을 봅니다. 그들이 만난 인생의 풍랑은 너무 컸습니다. 얼마 큰 절망이었는지 모름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찬송가로 유명한 존 뉴톤 목사님(John Newton, 1725-1807)은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다 찢어 없앤다고 해도 누가복음 24장만 있으면 성경은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존 뉴톤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중해 연안에서 장사를 하던 한 상선의 선장 아들로 태어 났습니다.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는 11살 때부터 아버지의 배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불행했던 그의 어린 시절과 거친 선원 생활로 그의 삶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포학한 그의 성격과 부도덕한 그의 생활에 아버지도 손을 들고 그를 내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온갖 죄를 저지르며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던 뉴톤은 끝내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이 가망 없던 사람이 어쩌다가 우연히 구해 읽은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을 읽고 그의 삶은 급격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나이 39세 때 목사가 되어 버킹범에서 16년을,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있는 “올니(Olney)”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27년간, 죽을 때까지 목회했습니다.
이 존 뉴톤 목사님은 누가복음 24장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들을 읽을 수 있었기에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만 있으면 성경은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그렇게 자신있게 말씀한 것입니다. 밑바닥에 떨어져 방황하던 인생을 건녀주신 하나님, 그렇게 절망적 인생이었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새로운 삶의 소망을 찾고 일어섰던 은혜를 깨달으면서 그렇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다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인생의 방황을, 신앙의 방황을 끝낼 수 있습니까?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인생의 어려움, 시험속에서 굳건히 승리할 수 있습니까? 다시 일어서려면!
첫째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미국 하바드 의대의 정신과 교수로 있는 로버트 콜리스 교수는 사회에서 어렵게 환경적으로 불리하게 태어난 사람들이 자기의 처지를 훌륭하게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열등한 상태에 있었지만 좋은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들보다 더 성공한 비결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콜리스 교수는 인터뷰와 조사를 통해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강한 내적인 힘의 원천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들의 내적인 강한 힘은 예수님 때문이었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불행한 상태에 있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을 통해 더욱 강한 사람이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망과 낙심, 불안과 공포, 근심과 걱정, 죽음의 인생 길을 걷고 계신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기독교는 절망으로 마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으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 죄와 함께 내가 죽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 내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안보이던 길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 만나면 무미건조하던 삶이 풍요로운 삶이 됩니다. 죽을 맛 나는 인생이 살 맛 나는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은 희망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절망이 변하여 빛나는 희망이 됩니다.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먼저 만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는, 다시 일어 서려면 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미국 보스턴의 한 정신병원에 불쌍한 소녀가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소녀는 사람들을 갑자기 공격하는 정서불안 증세를 보였습니다. 의사는 소녀에게 회복 불가능이란 판결을 내렸습니다. 작은 애니로 불린 이 소녀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부모와 연락도 완전히 단절되어 고독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병원에 나이 많은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이 간호사는 매일 성경을 들고 애니를 찾아와 위로해 주었습니다. "애니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다. 나도 너를 정말 사랑한다." 간호사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소녀를 위해 6개월 동안 한결같이 사랑을 쏟았습니다. 그 때부터 애니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며 밝은 웃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몸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 이 소녀는 신문기사를 읽고 중대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의 헬렌켈러라는 어린이를 돌볼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기사였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이 어린아이의 평생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간호사가 자신에게 베푼 사랑을 헬렌켈러에게 쏟았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바로 헬렌켈러의 스승인 애니 설리번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감동을 받고 뜨거워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에 문제가 생기고, 회의가 생기고, 열심이 식어갈 때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합니까? 그냥 참아 넘기나요? 누구하고 상의를 하시나요?
가장 좋은 해결책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우리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불이 붙습니다. 불신이 믿음으로 바뀝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지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을 때는 매사가 억지가 되고 억지로 하는 모든 일로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뜨거워져서 기도하면 지치지 않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봉사하면 오히려 기쁩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성경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교회 오면 기뻐서 날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전도하면 욕을 먹어도 기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막을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가 그들의 전도를 중단시키지 못했으며, 로마의 총칼도 그들이 외치는 부활의 행진을 결코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부활의 능력으로 마음이 뜨거워지심으로 인생의 방황을 끝내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절망이 있습니다. 실망이 있습니다.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바로 그 때야 말로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때에 그분이 가까이 이르러 여러분과 동행하십니다(Jesus came up and walked along with you). 그 때 예수님은 여러분 가까이 계십니다. 그 때 우리가 두 제자들처럼 슬픔 때문에, 실망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분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이 두 사람에게 모세와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성경 말씀들을 자세하게 풀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성경대로 부활하셨다고, 그 분은 못박혔다고,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고,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work)가 이루어졌다고, 그래서 그 분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주님(the Lord)이 되셨다고 깨우쳐 주었습니다.(25-26절)
28절 이하를 보면 어느덧 나그네의 모습인 부활의 주님 말씀을 듣는 동안 엠마오에 도착했습니다. 저녁 식탁에 앉은 나그네는 자기가 그 식탁의 주인인 것처럼 떡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고 두 사람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웬일인지 이 두사람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누었던 마지막 만찬을 통하여 신기하게도 이 때 두 사람의 눈이 열렸습니다. 바로 앞에 계신 그분이, 자기들과 같이 걸어왔던 그 분이, 자기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어주시던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비로서 알아 보았습니다.
마치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알아 본 것처럼, 이 두 사람도 자기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는 나그네에게서 떡을 받는 순간 바로 그 때에 그들의 눈이 열려서 그를 알아 보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 말씀(기록되어진 로고스, 들려지는 말씀 레마)와 보여지는 말씀인 성찬의 교제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신령한 눈이 밝아졌습니다. 참으로 황홀한 영적 체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적인 체험도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벌써 길을 오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얘기합니다. 32절을 보면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않았습니까(32절, Were not our hearts burning within us while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opened the Scriptures to us?)”
여러분, 여러분은 신앙생활에 혼돈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고, 신앙의 회의(懷疑)가 생기고, 열심이 식어갈 때,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합니까? 그냥 참아 넘기나요? 누구하고 상의(相議)를 하시나요? 가장 좋은 해결책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불이 붙습니다. 불신이 믿음으로 바뀝니다. 루터가 그랬고, 칼빈이 그러했고, 웨슬레가 그랬고, 어거스틴이 그랬고, 모든 성경에 인물이나 교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우리의 가슴에 이렇게 불이 붙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라(딤후1:6).”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가슴에 성령의 불이 붙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불, 말씀의 불이 가슴에 붙어야 합니다. 있어야 합니다. 이 뜨거운 불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불이 붙어야 눈이 열립니다. 이 불이 붙어야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이 불이 붙어야 성령께서 말씀을 조명(illumination)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 불이 붙어야 자기의 사명을 압니다. 이 불이 붙어야 가기 생의 목적과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왜 어떤 사람은 가슴에 뜨거운 불을 안고 사명감에 붙타서 사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의 생을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의 생을 살고 있습니까?
셋째는, 마지막으로 다시 일어서려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두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보니 벌써 동이 터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두 제자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마음도 뜨거워지고 신령한 눈도 밝아지자, “그 시로”(33절) 동이 트는 새벽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다시 올라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새벽을 향하여 달려가는 삶입니다. 실망과 낙심의 지는 해, 엠마오를 향하여 터벅터벅 걷던 사람들이 이제는 밝아 오는 태양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구약성경 민21:11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백성들도 광야에서 방황했을 때 "해 뜨는 쪽을 향하여 여행을 하였다(민21:11, They journeyed toward the sunrise)는 말씀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서해 바다로 떨어지는 황홀한 해의 모습은 황혼의 신비입니다만, 아침에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 빛보다는 약합니다. 떠오르는 태양에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엠마오도상의 두 제자는 해가 지는 석양의 엠마오에서 희망이 기다리는 동쪽 예루살렘을 향해서 되돌아 올라갔습니다. 실망과 낭패의 절망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잃어버린 신앙의 원위치로 돌아왔다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허물 된 행동을 회개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로 되돌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셨기에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돌아와야 합니다.
지는 태양 아래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나이 젊은 청년만이 아님니다. 청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때가 지난 사람도, 장년이 된 사람도, 이제 이제 노년이 된 사람이라도 떠오르는 동녘의 태양처럼 나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몇살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까 75살 때입니다. 모세가 생의 사명을 받은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의 나이 80세 때였습니다. 갈렙이 거치른 헤브론 산지(山地)를 달라하여 정복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85세 때였습니다.
여러분! 지는 해에서 해뜨는 동쪽을 향하여 돌아 서시기 바람니다. 그리고 사명을 가지고 달려가는 삶을 사시기 바람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두 제자는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달려 갔습니다”(33절). 예루살렘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달려 갔습니다. 자신들이 만난 부활의 주님을 증거합니다. 다시 소망을 가지고 힘있게 역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되돌아갈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때로 절망과 어둠과 낙심이 있어도 떠나서는 안 되는 곳은 영적 예루살렘입니다. 물질과 번영으로 출세해도, 인생의 행복한 길을 달리는 그 때도 예루살렘은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어두운 엠마오의 인생 길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찬란한 생명의 빛 되신 그리스도가 계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내려가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님니다.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삽니다. 잘됨니다. 번영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심니다. 함께 하심니다.
오늘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엠마오의 길이 아님니다. 예루살렘의 길입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삶이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내가 주님을 만나 은혜 받은 자리, 내가 충성해야할 자리, 내가 사명 받던 그 자리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함께 주를 섬기며, 함께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나눔이 있는 곳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제 신앙의 방황도, 인생의 방황도 끝나야 합니다. 더 이상의 방황이 아닌 정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은혜의 정착입니다. 충성의 정착입니다. 어디서 많이 보고 들은 말씀입니다.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나고, 인생의 방황은 예수님을 만나면 끝납니다”. 얼마나 교회를 다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야만 신앙의 방황이 끝이 납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제 인생의 방황을, 신앙의 방황을 끝내시려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분의 말씀으로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신령한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3절 말씀처럼 “그 시로 일어나” 절망의 길 엠마오에서 약속의 땅, 은혜의 땅, 충성의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시기 바람니다. 힘을 얻기 바람니다. 힘을 내시기 바람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고 붙들어 주시고 끝까지 용서해 주시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늘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의 귀한 믿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부활하신 주를 만나라
눅 24장 13~35절 / 한경직목사
(누가복음 二十四장 十三-三十五절)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나』(눅 二十四·二十五, 二十六)
오늘은 기쁘고 즐거운 부활 주일 아침 예배로 우리가 모였습니다.
이 우주에는 부활의 원리가 있습니다. 재생의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의 근본이 되시는 까닭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생을 내실 때에 곧 죽을 생명으로 내시지 않은 것입니다. 단순히 이 세상에 죄악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인생에게 사망이 온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만민의 죄를 대속하셔서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죄악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모든 죽은 자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되었습니다.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넓은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읽은 이 설경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부활절 어떤 오후에 된 일입니다.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거기서 참혹히 죽으시는 광경을 보고 돌아온 제자들은 말할 수 없는 상심 가운데서 낙심하게 되었고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절 이른 아침에도 제자들이 먼저 무덤에 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여인들이 먼저 일찍이 무덤에 가서 빈 무덤을 보고 천사들을 만나보고 돌아와서 그 사실을 고할 때에 제자들이 달음질하여 갔다고 그랬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제자들과 거기 있던 사람들은 아직까지 예수 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이 마음 가운데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아직 앞길의 장래가 캄캄하였고, 어떻게 하면 좋을는지도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대로 예루살렘에 있다가 언제 신변의 위험이 닥쳐올지도 모른다고 느낀 제자들 가운데 두어 사람은 조용한 엠마오라고 하는 촌에 가서 기다리면서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살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마 이런 심경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던 도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길을 외로이 걸어가면서 그 두 제자가 주고받은 말은 다른 말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말이었습니다.
그 때에 뜻하지 아니한 어떤 행인이 그 두 사람의 뒤를 따라오면서 같이 걸어갑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이야기만 하느라고 아마 그이를 처음에는 모른 것 같습니다. 그 때에 그이들을 따라오는 사람이 하는 말이『당신 네 들은 무슨 말을 그렇게 열심히 합니까?』하고 물어볼 때에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다보니 어떤 점잖은 분이 따라옵니다. 그 때 그들의 표정은 슬픈 빛을 띠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심정을 그대로 말하여 준 것입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고 물어보니까 그 사람들이 그 때는 열심 이 나서『아, 당신도 예루살렘에서 오는 모양인데 근일에 예루살렘에서 된 사건을 알지 못합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 말과 일에 능하신 분, 위대한 선지가요 우리 이스라엘의 대속(代贖)자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스라엘 제사장들과 관원들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을 당신은 모릅니까?』비장한 가운데 그런 설명을 하여 주었습니다. 그 때 그 말을 듣더니 그 뒤에 따라오는 사람의 말이『모든 선지자의 말을 더디 믿는 미련한 사람들이여, 그리스도가 먼저 고난을 받고 그 후에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그러면서 모세로부터 선지자들에게 내려오기까지 모든 성경을 풀어서 그 진리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예수 님이 지나갈 듯이 하니까 그들은 강권해서 같이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같이 식탁에 앉아서 떡을 떼어 줄 때에야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예수이신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 님은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에 이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그대로 머물렀습니까? 엠마오에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 보니 곧 그 날 저녁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먼저 번에는 힘없고 맥없는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걸어왔지만, 이번에는 기쁨으로 달음질해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돌아갔습니다. 무엇 하러 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러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 님을 만난 것을 다른 친구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기쁨으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에서부터 엠마오로 내려오던 제자들의 그 심경, 그들의 그 감겨진 눈, 그리고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친히 보게되고 눈이 밝아진 다음에 기쁨으로 달음박질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는 그 두 제자들의 심경과 그들의 행동을 비교해 보세요. 얼마나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있습니까? 그 전에는 눈이 가려져서 예수 님이 동행하지만 동행하는 예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다음에는 눈이 열려져서 예수를 보고 예수를 본 까닭으로 기쁨으로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여러분, 부활절을 축하하는 오늘날에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이 두 가지 형태의 제자가 있는 줄 압니다. 우리 가운데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오는 도중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 부활에 대한 말은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읽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참 부활의 예수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아직도 실망과 환멸의 비애 가운데서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 사람이라고 예수께서 멀리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까닭으로 예수 님께서 동행하십니다. 그들이 슬픔 가운데 있고 낙심 가운데 있으며 어려움을 당하는 까닭으로 예수 님께서 버리지 않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동행하십니다. 성경 말씀으로 그르쳐 주십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살아 계시는 예수 님을 알아보지는 못합니다.
八·一五 해방 이후와 六·二五사변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큰 고통과 큰 슬픔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한국의 교인을 예수 님께서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슬픔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모든 신도들과 함께 주님께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신령한 가운데 동행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여전히 실망과 슬픔과 근심과 염려 중에 삽니다. 그러나 이들이 사관에 들어가서 음식을 나눌 때에, 떡을 주는 것을 받을 때에야 예수 님인 줄 깨달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을 다 살고 인생의 날이 다 저물어서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 나라에 가서 천국 잔치에 참여할 대에야 예수 님을 보게 됩니다. 그때에야『아, 나는 몰랐더니 내 일생을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였구나』하고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물론 그것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예수 님께서 동행하던 그 군간부터 깨달아 알았던들 얼마나 더 엠마오 길을 기쁨으로 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의 눈이 감겨진 이유를 예수 님께서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로, 믿기를 더디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눈이 감겨졌습니다. 예수 님께서 부활하시겠다는 말씀을 여러 번 했습니다. 여인들도 갔다 와서 예수 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곧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성을 가진 인생으로서 그와 같은 기상천외의 일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물론 믿기 어려웠겠습니다. 믿기를 더디 했습니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의 눈이 지금까지도 감겨져서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와 동행하시건만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합니까? 실상은 믿음이 적은 까닭입니다. 믿기가 어려워, 이성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워, 대자연의 모든 신비를 인정하면서도 성경의 신비를 인정하기 어려워 믿지 않습니다.
둘째로는, 예수 님께서『너희들이 성경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로부터 선지자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지 않고 공부하지 않습니다. 성경이라는 책은 알지만 성경 자체는 읽기를 게을리 합니다. 다른 책은 많이 읽지만 성경 읽기는 게을리 합니다. 성경을 모릅니다. 그런 까닭으로 신령한 눈이 감겨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인생의 길을 걸어갈 때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과 같이 믿기 는 믿으면서 슬픔과 근심과 낙심 가운데서 맥없는 외로운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길에서 동행하며 격려해 주시건만, 마음이 뜨거워지건만, 주님의 동행을 모르고 외로운 인생의 행로를 걸어가는 신자가 없이 않아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여기 앉은 여러분은 어떤 신앙 생활을 하십니까? 이들이 예수 님의 말씀을 듣고 이들이 그 교훈을 받고 떡을 떼어 주는 것을 먹고 눈이 밝아진 다음에는 이들의 방향이 변했어요. 예루살렘에서 멀리 가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해 돌아왔습니다. 기쁨으로 달음질했습니다. 가서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쁨으로 돌아오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하면서 일생행로를 걸어가되 기쁨과 즐거움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환난이 없는 것 아닙니다. 슬픔이 없는 것 아닙니다. 역경을 당하지 않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본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이 동행하시니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생행로를 걸어갑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할 대에 간밤에 주님께서 나와 같이 서서 계셨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리신 주님께서 내 속에 사느니라』그런고로 옥중에서『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즐거워하라. 너희 양선 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너희 쓸 것을 기도와 간구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너희 사람의 지각에 뛰어나는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다스릴 것이라』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기쁘고 즐거운 부활절 아침에 여러분의 믿음이 새로워지고 여러분이 성경을 더 연구하여 신령한 눈이 밝아져서 우리와 영원히 같이 동행하시는 주님을 체험하면서 생명 있는 신앙생활의 새로운 시작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프리카에 새로 개척 전도를 한 리빙스톤이 읽은 유명한 성경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다른 성경 구절이 아니고 마태복음 二十八장 마지막 절이올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온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는데 너희들은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모든 사람을 가르치라』고 하면서 하시는 말씀이『또 내가 너희와 항상 같이 있으리라』하였습니다.
리빙스톤이 이 성경을 읽을 때에 이런 생각이 들어갔다고 합니다.『예수 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제일 진실한 사람이다. 예수 님은 거짓말할 수 없어. 예수 님은 글자 그대로 신사야. 세상의 다른 사람은 다 거짓말하되 예수 님께서는 거짓말할 수 없어. 그런 까닭에 나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겠다. 내가 아프리카에 가면 주님께서 나와 같이 계실 것이 분명하다.』 이 확신 가운데서 담대히 고국을 등지고 암흑의 대륙에 가서 일생을 거의 외로운 가운데서 고독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혼자 한 것 아닙니다. 주님께서 같이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동행했습니다,. 격려했습니다. 힘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이 기쁜 부활주일 아침에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의 능력을 체험하는 교회
눅 24장 13~35절 / 이명규목사
예배는 기독교인의 모든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기독교 예배를“기독교 공동체 삶의 중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실패하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는“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통한 성육의 사건과 십자가의 구속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 속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자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분께 최상의 가치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가장 크고 놀라운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사건입니다. 결국 기독교 예배는 안식 후 첫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제자들이 모여서 떡을 떼었던 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요,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축제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매주일이 기쁨의 날이요, 부활 신앙을 입증하는 감격스러운 날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배는 이렇게 기쁨의 잔치, 부활의 잔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의식이 바로 예배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이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망과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고 우리의 죄를 다 사하시고 우리로 이제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시는 일을 우리 주님께서 이루셨습니다. 실로 온 인류가 가장 기뻐해야 할 날이고, 이 땅에 모든 성도들이 가장 기뻐해야 할 날이 바로 오늘 부활의 아침인 줄 믿습니다. 우리를 붙잡고 있었던 흑암의 세력을, 우리를 죄와 사망의 사슬아래 꼼짝 못하게 했던 그 권세들이 깨어져 나가고, 사망, 저주,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렇게 그의 몸 된 교회에 주일마다 모이는 것은 이 부활의 사실을 근거로 하고 이 사실을 믿고 확신할 때 우리 신앙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을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부활의 아침,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잠들었던 영혼이 다시 깨어나고, 게을렀던 마음들이 다시 분발함을 얻으며, 우리의 눈이 더욱 밝아져, 우리를 부르신 부름과,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신자가 됩시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아무리 험한 시험과 역경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의 삶에 새로운 용기와 소망이 넘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생각하면 삶에 용기와 소망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을 누르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십니까? 감당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지쳐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의 부활의 영광이 여러분에게도 나타날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그 능력으로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서 소망을 가지고 다사 살았듯이 에스겔의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생기를 얻어 다시 소생하였듯이 부활의 생명을 얻어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그리스도인,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삶이 되고 그런 예배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함께 보기를 원합니다.
1. 우리의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15-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두 제자가 나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허망하게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자 낙심하여 고향으로 낙향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오늘 우리 거리 단위로 볼 때 약 12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입니다. 두 사람이 이곳을 향해 쓸쓸하게 걷고 있었습니다. 이 지금 이 두 사람이 걷고 있는 엠마오 길은 상징적으로 한 가지 두드러진 이미지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엠마오는 서쪽 방향입니다. 그리고 엠마오는 하산 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바다를 향해 긴 고개 길을 따라 내려가는 내리막길입니다. 중요한 것은 29절에 보면 지금이 바로 해가 질 무렵이라는 것입니다. 상징적으로 제자들이 걷고 있는 엠마오 길은 앞에 석양의 허무함이 또 내리막길의 쓸쓸함이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17절을 보면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라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거운 슬픔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본문이 그려주는 두 제자의 모습은 희망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동행하고 있는데 왜 희망을 잃고 절망하고 낙심하고 슬퍼하고 있습니까?
능력의 주님이 함께 하고 있는데 이들이 왜 절망하고 낙심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를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저희 눈이 가리워져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영의 눈이 가리워져서 함께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의의 눈이 가리워져 있으니까 3년 동안 동거동락했던 주님을 불과 며칠 사이에 다시 만났는데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니까 절망하게 되고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영의 눈이 열려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함께 하겠다.”“내게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겠다.”“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님께서는 우리를 고와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항상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열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에 주님이 함께하심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31절 말씀입니다. '저희 눈이 밝아져'라고 말씀했습니다. 앞의 16절과 대조되는 표현입니다. 눈이 가리워졌었는데 이제 그 가리워졌던 것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두 제자는 절망 속에 엠마오로 낙향을 하던 도중 그들의 눈은 무엇엔가 가리워져 제대로 볼 것을 볼 수 없었지만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에 그 무엇인가가 사라지고 눈이 활짝 열려 봐야 할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행 9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사울이 갑자기 눈이 보이질 않게 되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의 인도를 받아서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아나니아를 만났습니다. 그가 사울에게 안수하며 기도했을 때 행 9:18을 보면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우리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집니다. 이 세상 정욕의 비늘, 이 세상 물질의 비늘, 이 세상 자랑의 비늘, 이 세상 욕심의 비늘... 이런 비늘이 벗겨질 때 우리가 저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희망이 찾아듭니다. (예/엘리사의 사환)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부활의 날 희망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능력을 체험하면 우리의 삶은 변화될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이 사람들이 눈이 열려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였을 때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영의 눈이 열려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부활의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던 주 제자가 주님이 함께하는데도 불구하고 함께함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첫째는 눈이 가리워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말씀을 속히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주님께로부터 책망 받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예배가 되려면 말씀을 깨달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태복음 17:22-23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그 뿐 아니라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을 통하여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들이 여인들이 주님의 무덤에 갔다가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지만 이들은 믿지 못하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주님께서 분명히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말씀하셨고, 또 무덤에 가서 확인한 사람이 그 소식까지 전해주었지만 이 두 제자는 믿지 못하고 절망 중에 낙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희망을 잃어버리니까 의욕도 사라지고 열정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선지자들이 메시야에 대해 기록하였던 모든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고 믿어야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처녀였으나 하나님이 보낸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믿고 시인하였기 때문입니다.
시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시인할 때 그 말씀은 반드시 현실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통하여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17-19절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이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부활의 신앙을 믿는 사람과 부활의 신앙을 믿지 않는 사람과는 전혀 다릅니다.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 믿음과 신앙을 갖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기적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전 연세대교수 황수관 박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시인하는 말의 중요성을 일치감치 깨달았습니다. 그가 발견한 만병통치약은 바로 “아멘 약”입니다.
그냥 웃어넘길 말이 절대 아닙니다. “아멘”하면 의술이 해결할 수 없는 병도 낫는다는 것입니다. ‘아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믿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신속히 믿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린도 후서 1:20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여러분이 설교를 들을 때 성경 말씀을 볼 때 아멘을 많이 한다면 틀림없이 많은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대신에 말씀을 들으면서 분석하고 평가한다고 또는 갸우뚱한다면 당신의 삶에 하나님의 기적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말은 우리의 환경과 운명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변화시킵니다. 잠언 6:2절 말씀입니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우리 입의 말로 우리가 얽히고 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인 이해인은 그의 시 [나를 키우는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
아릅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
당신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축복을 누리길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시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능력을 체험하는 축복된 성도가 될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믿을 때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3.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만났을 때는 언제나 감격하고 흥분되고 기뻐했었습니다. 주님을 보는 것만 해도 감격스럽고 말씀을 들으면 용기가 나고 기적을 보면 흥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으로 제자들의 마음은 가라앉고 차갑게 식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그들의 마음은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32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여러분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마음이 뜨거워지는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할 때 나타납니다. 말씀을 깨달아 감동받을 때 나타납니다.
뜨거워지는 순간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입니다.
마음이 뜨겁다는 것은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고,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고, 마음에 결단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뜨거워지면 사람은 힘 안들이고 행동하게 됩니다. 마음이 뜨거우면 모든 것이 기쁘고, 빠르고, 힘 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먹기 달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마음이 뜨거워지면 우리 마음에 희망이 피어오릅니다. 우리의 삶에 희망이 가득 차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은 오늘도 얼어붙은 심령을 녹이고 불을 붙여 뜨겁게 해줍니다.
예레미야 23:29에서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입니다. 불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깨달아지는 말씀이 될 때 이 말씀은 내 마음에 불을 붙이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열정적인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열정을 회복하고 싶으십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통해 들려주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서 있는 우리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역사와 세상을 뜨겁게 만드는 열정의 사람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주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마음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낙심하여 절망하며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난 후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가슴이 뜨거운 열정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들은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그들은 신앙을 등지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등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에서 어두움이 가득한 세상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만나는 사람마다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로운 사명을 향하여 달려간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현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엠마오의 제자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그들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였던 그들은 부활을 확신하고 믿었을 뿐 아니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초대 교부 중에 크리소스톰이란 분이 로마 황제에게 붙잡혀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황제는 명령을 하였습니다. "저 녀석을 독방에 쳐 넣어라.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자 옆의 신하가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인입니다." 황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별거냐? 속히 독방에 넣어라!" 신하가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런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독방을 좋아합니다. 독방에 넣으면 하루 종일 찬송하고 기도하고 중얼거립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의 영이라는 것이 있어서 함께 있답니다. 독방에 넣으면 저들 좋은 일만 시키는 거랍니다." "그러면 이 자를 극악무도한 죄인들 틈에 넣어라" 황제가 말했습니다. "그것도 안 됩니다. 이들은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고 좋아합니다. 이들은 전도를 잘 하는데, 며칠만 지나면 모두 예수쟁이를 만들어 버릴 겁니다." 황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얼른 이 자를 데려다가 목을 베어라." "아니 되옵니다. 저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순교입니다. 순교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가장 큰 상급이랍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이런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교부들이 어떻게 이렇게도 강할 수 있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생명을 다하여 복음 전하는 사명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고, 세상은 이러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렇게도 강하고, 위대한 것입니다.
2003년 우리는 부활절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끝나는 부활절이 아니라, 두 제자와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만남의 부활절, 뜨거운 부활절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찬양으로 기도로 늘 하나님의 임재에 깊이 들어가고 부활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영안이 밝아지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새로운 사명을 향해 일어나는 부활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눅 24장 13~35절 / 김성광목사
A. 뜨거움에 대하여
1. 뜨거움 (열심, 성령)
2. 본문 배경 설명
B.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1. 예수님을 만났다 - 예수님과 만남, 교회생활(눅 24:13-16)
2.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 말씀, 설교, 성경공부(눅 24:17-27, 32)
3. 눈이 밝아졌다 - 영적인 눈이 뜨여짐, 보는 눈이 달라짐(눅 24:28-31)
C.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듣고, 영적인 눈을 떠서, 마음이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축복받고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되자(눅 24:33-35)
A. 뜨거움에 대하여
1. 뜨거움 (열심, 성령)
우리가 인생을 살아도 뜨거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차가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뜨거운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차가운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열정적이고 뜨거운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MBC 문화방송의 대표적인 시사교양프로그램에 ‘성공시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1997년 11월 IMF 한파로 어려움이 닥쳤을 때 낙심하고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드라마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4년 동안 그 성공시대를 거쳐간 주인공들이 총 187명인데, 사업가, 예술가, 운동선수, 의사, 대학교수, 정치가, 방송인, 작가, 전문 직업인 등 각계 각층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취재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열심히 살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열심히 해서 남보다 더 앞서게 되고, 불행을 극복해서 행복하게 되고, 가난과 저주를 물리치고 성공하고 풍족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열심입니다. 성공은 열심을 내느냐, 내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성공철학 저술가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 ; 1888~)는 “열심 있는 태도로 일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 성공의 비결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돈, 지식,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큰 원인이 되고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기업 중의 하나인 맥도널드를 창업한 크룩(Ray Kroc ; 1902~1984) 사장은 ‘사업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지식보다 열정’이라고 말했습니다.
맥도널드는 항상 밤 11시에 문을 닫는데 점원들은 새벽 2시가 되어야 퇴근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날 썼던 기계들을 전부 분해하여 청소하고 소독하고 다시 재조립을 하기 때문입니다. 근무시간 중에는 머리를 한번이라도 만지면 바로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든 지 10분 이상 지난 음식은 반드시 버립니다. 이렇게 고객 봉사의 열정을 가지고 일한 덕분에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기업이 된 것입니다.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 1803~1882)은 “열심 없이 성취된 위대한 일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열정적으로 해야 그 사람 삶에 열매와 결실이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인생을 더 보람되게, 더 선하고, 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면한 문제는 바로 열정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열정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냉소주의와 적당주의에 빠져 직장생활도 적당히, 교회생활도 적당히 합니다. 주어진 일만 하면 되지 하는 게으름과 나태함 속에 빠졌기 때문에 보람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신 직분도 감당치 못합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그 무엇도 올바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 성공할 수 없습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열정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다 못한다고 하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에 도전합니다. 창조적인 일을 합니다. 발견하고 발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잃어버린 열정을 되찾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14∼16절 말씀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3장 19절 말씀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도 열심히 믿어야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찬송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 앞에 주어진 사명도 열심을 다해 감당할 때 보람도 생기고 결실도 맺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3절 말씀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라고 했습니다. 성전을 사모하는 데에도 열심을 내야하고, 말씀을 배우는 데도 열심을 내야합니다. 또, 주를 섬기는 데도 열심을 내야하고, 좋은 일, 선행과 전도에도 열심을 내야하고, 사랑에도 열심을 내야합니다. 회개할 때에도 열심을 내야만 죄에서 용서를 받습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오늘 본문말씀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만나서 낙심하고 절망에 처한 제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향하던 두 명의 제자들은 길을 가면서 예수님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얘기, 또 부활하셨다는 소문 등을 얘기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그들의 눈을 번쩍 뜨게 해서 예수님인 것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살면서, 낙심하고, 또 절망에 처하고, 슬퍼하는 사람들, 또 교회 나와서 믿었다가 올바른 신앙과 믿음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마음이 뜨겁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을 열정적으로 뜨겁게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세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둘째로,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셋째로,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B.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1. 예수님을 만났다 - 예수님과 만남, 교회 생활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 24:13∼16)
그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중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12제자와 또 70명의 제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70명의 제자들 중에서 두 사람, 그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세상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과 모여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이 두 제자는 믿음도 없었습니다. 확신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들이 들은 얘기를 서로 주고받았을 뿐입니다. 낙심하고 절망에 처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입에서 예수님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셔서 위로의 마음과 또 축복의 말씀과 소망의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가 축복과 은혜를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되고, 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역사하시면 큰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무엘하 5장 10절 말씀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이 점점 번창하고 강성하고 잘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직장과 회사와 함께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존귀한 자가 되고 축복을 받습니다.
시편 73편 28절 말씀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겠다는 신앙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점점 멀리 등져서 예배 시간에도 제일 뒤에 앉고, 늦게 왔다가 일찍 가고, 교회 예배 시간도 빼먹고 등한히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5절 말씀에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제자들을 구해주셨습니다.
비록 풍랑을 만났다 할지라도, 절망에 처했다 할지라도, 죽음의 위기에 닥쳤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고 도와주시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죽을병도 죽지 않고 살아납니다. 망할 일에도 망하지 않고 다시 흥하게 만들어 주시고, 절망에 처한 자에게 소망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철학자 칼 힐티(Carl Hilty ; 1833~1909)는 “하나님께로부터,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이 사람의 불행이다”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불행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이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이사를 가도 교회 가까이 가야 합니다. 직장을 얻거나 사업을 할 때에도 교회 근처가 좋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까워지고, 우리의 몸이 가까워지고, 시간이 가까워져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능력과 은총을 주어서 그를 통해서 큰 역사와 기적과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조지 포먼(George Foreman ; 1948~)이라는 1968년에 올림픽 금메달을 딴 권투선수가 있었습니다. 이 선수는 항상 시합 초반에 상대방을 KO시켜 KO 머신이라는 별칭이 있었습니다. 1미터 92센티의 거구에 주먹이 강해서 헤비급 최고의 주먹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1973년에 챔피언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자신의 주먹을 과신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술을 마시고 불규칙한 생활을 하고 성격도 난폭하고 사나워져 고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챔피언이 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그만 알리에게 역전 KO패 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챔피언 자리를 빼앗기자 그는 낙심하고 절망해서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는 등 방황했습니다.
그가 절망적인 삶을 살 때, 누군가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새롭게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본격적으로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텍사스의 휴스턴 길거리에서 마약 중독자와 범죄자와 불량배들을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털어 교회를 지었고, 불량 청소년들을 위해서 청소년 회관을 지었습니다. 불량 청소년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선교활동과 전도를 하는 그를 보고 전 세계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암흑의 장소에서 방황하던 그가 빛의 전도사로 변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교활동을 시작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워지고 지원이 더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앞으로 제가 일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더 필요하고 지원이 필요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주시고 새로운 힘을 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힘과 젊음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권투에 재도전하게 되었습니다. 1977년에 은퇴해서 10년 이상 선수활동을 하지 않은 이 조지 포먼, 1987년 39살의 나이로 재기를 하겠다며 시합에 나갔습니다. 1994년 46살의 나이로 마이클 무어러에게 도전해서 세계 최고령의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재기에 성공한 그는 많은 돈과 명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 “이제는 내가 남은 인생을 통해서 충성·봉사·헌신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계속 해서 불량 청소년들, 마약 중독자와 범죄자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재기하게 만들어 주시고 다시 번창케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일꾼으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비록 실패하고 버림당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다시 나와 예수님을 만나고 능력을 받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에게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2.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 말씀, 설교, 성경공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17∼27, 32)
누가복음 24장 17절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라고 말했습니다. 두 제자가 이야기를 하는데 얼굴 표정이 슬픈 빛을 띠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을 시키고 자기 민족을 부강하게 만들 줄 알았는데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고 절망하고 낙심했습니다.
그들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여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과연 그것을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도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4장 25절 말씀에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선지자의 글과 모든 성경에 쓴 것을 자세히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말씀 몰라서 믿지도 못하고, 하나님 뜻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말씀을 보고 깨달음을 통해서 심령이 뜨거워집니다. 제자들이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라고 했습니다.
성경말씀을 읽을 때나 성경 말씀을 들을 때나 심령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그 말씀이 무엇인지 몰라서 멍해 있으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 맘속에 희망과 용기가 되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인간적인 지식과 인간적인 학문은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모르고 어리석고 미련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인생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마치 짐승처럼 일만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육신의 욕망과 먹고 마시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어리석고 미련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을 가르치시고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기록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눅 24:26-27)
모세 오경 중 창세기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는 말씀을 설명하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신 말씀을 설명하셨습니다.
시편 22편 1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하신 말씀을 설명하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의 죄를 구속하고 또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통과 고난 당할 것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부활케 하실 것을 성경에 기록하고 예언한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심령이 뜨거워야 합니다. 심령에 사랑의 불길이 붙어야 합니다. 믿음이 활활 타야 합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아무리 외쳐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의 불이 꺼지고, 믿음의 불이 꺼져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다시 한번 잃어버린 신앙을 되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뜨거운 성령의 감동하심과 성령체험과 성령 불 같은 역사를 우리 마음속에 체험하고 느껴야 합니다. 심령이 뜨거운 사람은 교회 나오는 것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심령이 뜨겁지 않고 차가운 사람은 교회 나오는 것이 지겹고 부담스럽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기도를 해도, 말씀을 들어도 무슨 뜻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심령이 뜨거운 사람은 “아멘! 아멘!” 하게 되고, 감사와 찬송과 기쁨 속에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에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놀라운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 후손이 축복을 받는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또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만들어 주시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심령이 뜨거워지기 바라고, 말씀으로 잠자는 영혼이 깨어서 하나님 앞에 소리쳐 기도하여 응답 받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미처 알지 못하는 말씀도 듣고 깨닫게 되면 진리 가운데 거하게 되고 남은 여생을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겠다는 결심과 각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Francis Bacon ; 1561~1626)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종교나 법률을 막론하고 성경만큼 인류의 행복을 향상시킨 것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성경만큼 인류 역사에 영향을 미친 것은 없습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 1743~1826)은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을 만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지구에 수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성경을 믿고 성경 말씀대로 사는 민족이 선진 국가이고 우수한 민족입니다.
1517년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1483~1546)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이 어려운 라틴어로 되어있어 그 성경을 읽고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모든 사람들이 알기 쉬운 독일어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전 독일인이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독일 사회 전체에 퍼지자 독일이 유럽 문화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문화·정치·경제·법률·정신적인 흐름에 중심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어가 학술어가 되었고, 요즘도 의학이나, 신학, 법학, 철학 등의 고등학문을 하려면 독일어를 배워야 합니다.
독일이 중심지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독일 민족이 제일 먼저 국가적으로 성경을 번역해서 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나라가 선진국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복지국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남한과 북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땅이 다릅니까? 사람이 다릅니까? 남한에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는 성경을 대신해서 공산주의가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배고프게 만들고 나라를 어렵고 힘들게 만들지만, 성경은 나라를 부강하고 발전하게 합니다. 남한은 교회를 세우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주의 복음을 전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크게 번창케 하여 주신 것입니다.
『가시고기』라는 소설을 아십니까? 조창인씨는 이 소설 때문에 유명해진 43살의 작가입니다. 그는 다른 일을 하다가 몇 년 전에 소설가가 되겠다고 자칭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책이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민하면서도 소설을 썼습니다.
‘내 소설을 읽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지.’ 생각하고 아들의 백혈병을 고치기 위해 고생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소설로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자신의 눈을 기증하겠다는 장면까지 소설을 썼는데 도대체 마무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끝을 맺어야 할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소설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될 지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다가 성경을 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 속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부분을 보자, ‘그렇지,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죽어야 되겠구나.’ 하고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목숨을 잃는 장면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출판사에 원고를 들고 가서 이 책이 한 만 권만 팔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IMF가 터진 다음에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외로움과 고독에 몸부림치다가 이 책이 나오자 무려 140만 권이 팔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스트셀러작가가 되고, 이 소설을 읽는 사람마다 감동 받고 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도록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3. 눈이 밝아졌다 - 영적인 눈이 뜨여짐, 보는 눈이 달라짐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눅 24:28∼31)
날이 어두워지고 길을 더 갈 수 없게 되자, 두 제자는 성경 말씀을 잘 가르쳐 준 예수님에게 ‘우리와 같이 머물고 우리에게 더 말씀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하는데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복기도를 하실 때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밥 먹을 때가 되었는데 밥을 안 먹으면 눈이 어른어른하고 어지럽다고 합니다. 그래서 밥을 먹지 않고는 30분도 못 견딥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는 먹을 때 눈이 밝아진 것이 아니라 축사할 때 눈이 밝아졌다고 했습니다. 먹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몸과 마음과 물질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눈을 환하게 밝혀주십니다.
여러분, 기도함으로 눈이 밝아집니다. 인생을 어둡게 사는 사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순간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아람 군사들이 자기 스승을 잡기 위해서 성을 둘러싼 것을 보고 두려워 불안에 떨었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함으로 이 종 게하시의 눈이 떠지자 산에 하나님의 군대가 가득 찬 것을 보고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왕하 6:17)
육신의 눈으로 보면 적 밖에 보이지 않는데, 영의 눈을 뜨니까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불 말과 불 병거가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가득 두른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육신의 눈만 뜨지 말고 영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앞으로의 시대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천국을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두려워하거나 겁먹지 않습니다. 방황하거나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3)고 말씀하셨고, 또한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스위스의 교육가 페스탈로치(Jahann H. Pestalozzi ; 1746~1827는 “눈이 밝으면 전신이 밝다. 그러나 눈이 어두우면 전신이 어둡고 그 하는 일은 모두 어둠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극장 프로그램만 보면 극장에 들어가게 되고, 술집 간판만 보면 술집에 들어가게 되고, 화투만 보면 화투를 치게 되고, 담배만 보면 담배를 피우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학생 눈은 책만 봐야지 다른 것을 보면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교사의 눈은 제자를 보고 제자에 대한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의사의 눈에는 환자가 보여야지 돈만 보이면 큰일납니다. 목사의 눈에는 성도가 보이고, 기업가의 눈에는 근로자가 보이고, 정치가의 눈에는 국가의 장래가 보여야 합니다.
여러분, 행복을 보는 사람은 행복하게 삽니다. 성공을 보는 사람은 성공하고,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은 천국 갑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루종일 TV만 보는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문만 보는 사람은 걱정거리만 생깁니다. 여러분, TV 끄고 신문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설교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 볼 때, 우리의 영원한 삶, 저 높은 곳을 향해서 전진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1986년 미국 애리조나주에 스미스라는 보석상 주인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수석 전시회에 구경을 갔는데 한 쪽 구석에 별로 귀하게 보이지 않는 돌덩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 돌은 값비싼 사파이어 원석이었습니다. 그 돌에는 15불이라고 붙어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돌을 들고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이 돌이 정말 15불입니까?” 하고 묻자, 주인이 “왜 비싸요? 5불 깎아줄까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사파이어 원석을 10불에 구입했습니다.
그 사람은 사파이어 원석으로 목걸이, 팔지, 반지 등 비싼 패물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패물로 228만 불을 벌었습니다. 10불 짜리 원석이 200만 불 짜리 보석이 되었습니다. 10불이면 약 만원입니다. 200만 불은 약 20억입니다. 만원으로 돌을 사서 20억을 번 것입니다.
여러분, 사파이어 돌덩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들고 다니는 성경입니다. 이 속에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축복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들고 다니며 값싸게 취급하고, 그것이 얼마나 귀한지 알지 못합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 롱펠로는 성경말씀으로 성공하고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십일조를 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도 성경말씀으로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 많은 예술가, 음악가, 작가, 노벨상 수상자 등이 다 성경 말씀대로 살아서 훌륭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살면 여러분의 남은 인생을 아주 빛나고 훌륭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 말씀에 있는 진리, 생명, 하나님의 축복을 깨닫고, 말씀대로 순종해서 영혼도 잘 되고 범사에 강건해지고, 또한 심은대로 거두고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께 축복 받아서 다 부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 감당하는 하나님의 일꾼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듣고, 영적인 눈을 떠서, 마음이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축복받고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되자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눅 24:33∼35)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고, 심령이 뜨거워지고, 눈이 밝아져서 이제는 말씀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에 충성하고 봉사 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낙심하고 절망했던 두 제자도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밝아져서 정신 차리고, 즉시 예루살렘에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했습니다.” 하고 목숨 걸고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다시 그 얼굴에는 슬픔이 없고, 다시 그 마음에는 고통과 절망이 없으며,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열심 있는 주의 일꾼, 주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적인 생각만 하면 슬프고 외롭고 고달프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건을 믿고, 하나님을 만나고, 성경 말씀대로 살면 여러분은 세상에서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하는 삶을 살아나갈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 간증입니다. 한 여자 교인이 있었는데, 교회를 다니긴 했어도 교회 나가는 것 보다 친구들 만나서 호텔에서 식사하며 노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세상 재미가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남편이 벌어다 준 돈 쓰는 것도 재미있고, 다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이 자주 피로하고, 왼쪽 팔이 아프고, 가슴이 아프고, 겨드랑이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유방암이 팔과 가슴에 다 퍼졌다고 했습니다. 수술을 해도 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죽어도 수술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지 말 것인가 하는 죽음의 기로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떠나고, 또 하나님 앞에 충성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며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생명을 주시옵소서. 암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금식기도 일주일만에 응답받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보호식을 하면서 몸의 통증이 사라지고 몸이 가벼워 졌습니다. 또 식욕도 생겨 음식을 먹으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 마음속에 확신과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했는데 그 의사가 깜짝 놀라며 “당신 몸에 암의 흔적이 다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암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이 죽을 수밖에 없는 암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시고, 생명을 주셨으니 이제 남은 일생 주를 위해서 충성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부터 교회 예배시간마다 참석하고, 여선교회 봉사하고, 전도하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열심을 다해 충성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올바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애통하며 죄를 회개하고 눈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죽을병도 살려 주시고 건강과 응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참석한 여러분, 차가운 심령과 마음으로 인생을 살지 마시고 뜨거운 심령과 열정으로 인생을 사시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눅 24장 13~35절 / 이삼규목사
주님은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11차례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에는 점진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나타나심은 막달라 마리아에게였는데, 그것은 그녀에 사랑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다른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여인들의 순종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베드로에게였는데 그것은 그의 회개를 인정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반면에 네 번째 나타나심은 주님의 부활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어서 슬퍼하며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의심에 자비로 응해 주심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은 저마다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순서도 주님께 대한 개인의 마음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차서(次序)인 것입니다. 첫째는 사랑이요, 둘째는 순종이며, 셋째는 회개요, 넷째는 정확한 사실을 알려고 솔직한 마음으로 품는 의심인데, 이러한 의심은 그 알지 못함과 당한 일에 대한 놀람이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1.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주님이 부활하신 그 날에 무명의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25리 되는 엠마오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두 제자 중 하나의 이름은 글로바라는 것이 18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글로바가 누구인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나 누가가 오늘 본문에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특히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그의 이름을 데면 금방 알 수 있는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른 또 한 사람의 제자는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무튼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주님의 나타나심은 아름다운 차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과 같은 십자가 사건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들은 저으기 낙심하고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지 사흘이 지났고 날이 밝아 오면서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거리에 나서기를 두려워했고, 따라서 예루살렘이 아직도 그렇게나 흥분되어 있는 동안에도 그 소문을 확인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소문들을 근거 없는 풍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문들로 인해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들이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자연히 그들의 이야기의 주제는 주님의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아직도 충격과 슬픔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2.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두 제자
이와 같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나그네 하나가 가는 길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이 의심하던 제자들에게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제자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을 까요? 그들은 죽은 예수만을 생각하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그들 곁에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가리워져'라는 말의 뜻은 '고정되어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의식과 시각입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의식과 시각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의식변화 또는 영적 각성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존재 문제인데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지만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늘 함께 하였던 사람들까지도 면전에서조차 알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존재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길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이 가까이 이르렀을 때 어떤 나그네가 같은 방향의 길을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과 길가는 두 제자와의 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주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 앞서 누가는 그들의 얼굴 표정을 질문에 대한 반응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에 따른 깊은 실의(失意)에 빠져 있었으며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픈 빛을 띠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 중에 하나인 글로바가 역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합니까?"
주님은 그들에게 되묻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또 놀랄만한 독특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슬픔의 이유를 그들 자신보다 더 깊이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그들의 슬픔의 이유를 직접 주님께 말씀드리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입술로 기도 드리기 전에도 우리의 마음에 있는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필요를 우리 입으로 고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실 까요? 그 요구를 그분께 아룀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활짝 열려 그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손을 펴서 일하게 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열어 놓습니다. 또 마음이 열려야 주시고자 펴신 손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대화로써 그들의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도록 하셨을 때, 우리는 그들이 마음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 말은 그들의 처음 사랑을 잃은, 따라서 처음에 가졌던 믿음도 잃은 상태에서 나온 말이며, 따라서 그들의 마음은 어둠에 차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말속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속을 얻을 소망이 어쩌면 한갓 꿈이나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소름끼치는 의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엄하게 꾸짖으시면서 노를 발하였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주님의 책망은 '오'라는 감탄사로 시작되면서 자신의 감정이 강하게 주입됩니다. 첫마디가 "미련하고"라는 책망인데 이 말은 그들의 생각이 '바보스럽고 무지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진술했던 그들의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선언한 셈이 됩니다. 두 번째 책망이 무엇입니까? "더디 믿는 자들이여"그들이 신뢰하고 있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책망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고난, 죽음, 부활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된 일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이 사실에 대해서 엄히 꾸짖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갑자기 음성을 엄하게 바꾸신 것은, 우리가 믿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예민한 품성을 지닌 주님께 대한 모독이며 또 주님께서도 모욕적으로 느끼셨음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됩니다.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이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죄가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미련한 그 제자들, 더디 믿는 제자들을 책망만 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눅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주님은 모세 오경과 선지자들의 예언서를 가지고 자신이 고난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두 제자
그 두 제자는 마침내 엠마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미 날이 저물어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길을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가 자기들과 함께 유하자고 강권하여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셨습니다.
"강권하여"라는 말은 '압력을 넣어 강제로 하게 하다'의 뜻을 가진 단어이나 여기서는 절박한 간청으로 봄이 적절합니다. 이제 날이 저물어 더 이상 길을 가는 것이 어렵게 되었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길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분과 함께 유숙하면서 더 많은 가르침을 받고자 하여 예수님을 강권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주님께서 그대로 가시도록 내버려두었더라면 오랫동안 의심에 싸여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권하여 주님을 자신들과 함께 유하도록 하였고 음식을 함께 나눌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음식을 잡수실 때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는데 이것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실 때를 생각나게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글로바 일행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16절). 그런데 예수님과 저녁 만찬을 드는 중에 눈이 열려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글로바 일행이 예수님을 낯선 여행자로 보지 않고 생전의 예수님의 모습으로 보게 된 것은 두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함축합니다.
첫째, 식사 이전까지는 예수님께서 낯선 타인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훌륭한 선생님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떡을 떼심은 최후의 만찬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께서 떼어 나누어주시는 떡을 받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떡을 떼는 만찬을 친교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친교 속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갑자기 눈이 열려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32절의 고백을 보십시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뜨거운 감동으로 받아들였고 그 낯선 손님을 애써 대접하려 했다는 것이 예수를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열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를 소원하십니까? 주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들을 만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의심하던 두 제자를 만나 주신 것처럼 만나 주시기를 소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주님을 강권하여 모셔들이는 사람이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이 주님을 만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뜨거움이 생깁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슬퍼하면 근심하던 두 제자는 곧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져지신 일을 증거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시몬에게도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도 나타나셨다는 것은 주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부활하신 주님은 의심하는 제자들도 만나 주셨습니다. 그들의 의심을 말끔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며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의 참맛
눅 24장 13~35절 / 박지온목사
하루는 저희 집 아이가 집사람에게 ‘옛날부터 꽃뱀이었느냐?’라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그래서 매일 아빠 돈을 뜯어내는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꽃뱀이 뭔지 아냐?’고 묻자. ‘남자를 꼬여서 돈을 뜯어서 도망가는 여자가 아니냐?’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매일 뜯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뜯기고 살아도 기분이 좋습니다. 좀 더 있다면 주고 싶은 것이 제 마음입니다. 제 마음에 복음이 있으니 여유가 생기고 더 주고 싶은 것입니다. 제 마음에 복음이 없으면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충만하면 기분이 좋고 싫은 소리를 들어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저는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얼마나 예민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견딜 수 가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복음과 성령으로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복음과 성령의 참 충만
① 복음과 성령의 참 충만이 있습니다.
② 각박하고 서로 경쟁하는 이 세상에서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불신자보다 사는 것이 더 어려워집니다.
③ 기분 나쁘면, 고함을 치고 술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해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의 양심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④ 복음에 충만해져 있을 때 완전히 뛰어넘을 수 있고, 여러분의 마음에 평안이 넘치게 됩니다.
⑤ 단 6장을 보면서 복음 속에서 참 여유가 있을 때,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⑥ 당시에 다른 신을 섬기면 사자 굴에 던진다는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창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 3번 기도했습니다.
⑦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고도 불안했던 다리오는 새벽이 되자 사자 굴로 가서,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하나님이 너를 건지시기에 능하였냐?’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다니엘은 여유가 있었기에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말하였습니다.
⑧ 사업과 인간관계가 비틀릴 때 마음에 참 여유가 있습니까? 이런 여유가 마음에 없습니다. 더욱 크게 보복을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⑨ 얼마나 복음으로 충만합니까? 세상과 복음의 충만은 완전히 다르고 인생의 결말도 다르게 됩니다.
2. 말씀과 괴리감이 있는 우리의 삶
① 다락방 초기에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 복음은 모든 것, 전도가 전부’ 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② 그러나 나의 삶이 그렇지 못할 때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③ 경제적으로는 얼마나 궁핍합니까? 가정에서는 서로 문제가 없습니까? 나의 영적인 문제는 없습니까?
④ 성경이 틀리지 않았다면 내 자신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며 해법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⑤ 신앙의 참 맛을 모르기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참 맛 세 가지를 보아야 합니다.
3. 말씀의 참 맛을 보아야 합니다.
① 시편기자는 ‘주의 말씀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의 꿀보다 더 달다’ 이야기하였습니다.
②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너무 소중하다, 받지 못하면 죽는다, 말씀이 들려지게 하옵소서. 이때 우리의 인생이 살아나게 됩니다.
③ 그러나 말씀을 들을 때도 다른 생각이 든다면 우리 심령이 어떻겠습니까?
④ 겔 37:1-6 의 영적으로 죽은 시체가 됩니다. 에스골 골짜기에 마른 뼈가 되었습니다.
⑤ 그러나 이런 뼈들에게 말씀이 들어갈 때 살아나는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⑥ 애 4:3을 보면 젖먹이가 목이 말라서 혀가 천장에 붙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면 기갈한 상태가 됩니다.
⑦ 17절에 엠마오 도상에서 너희가 길을 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무엇이냐 예수님이 묻자 슬픈 빛을 띄고 머물고 섰습니다.
⑧ 그러나 그들에게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때 마음이 뜨겁지 아니었냐고 제자들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32절)
4. 기도의 참맛을 보아야 합니다.
① 기도를 우리는 오래앉아서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종교적인 시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② 요 14:14에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면 시행하겠다. 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③ 우리가 현장에서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기도해야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면 시행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④ 렘 33:3에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말하셨습니다.
⑤ 우리가 현장에서 맞설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때 흑암의 세력이 완전히 꺽입니다.
3. 전도의 참 맛을 보아야 합니다.
① 앞의 두 가지 사실이 전제가 되어야 전도의 맛을 볼 수 있습니다.
② 현장 속에서 살려 내려는 마음만 가져도, 축복하십니다.
③ 소돔과 고모라. 망하는 성읍을 가지고 롯이 기도할 때 축복을 얻었습니다.
④ 생명에 대한 참 애착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세 가지 맛을 제대로 보면 모든 문제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의 맛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속에 깊이 들어가십시오. 둘째는 기도의 맛을 보십시오. 약령의 힘을 이길 수 있는 힘이 기도의 맛입니다. 셋째로 이 두 가지가 되어질 때, 삶 속에서 전도가 제대로 될 것입니다. 서론에서 예수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되어지지 않는 이유는 맛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총신을 다닐 때 탁구의 맛을 제대로 보자 새벽까지 탁구를 치고 눈을 감아도 탁구가 보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3가지 맛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 다른 길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 3가지 맛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이때 여러분의 인생은 최고의 인생이 됩니다. 온전한 승리의 축복을 누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눈이 밝아져야...
눅 24장 13~35절 / 마경훈목사
예수님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말씀하실 때의 소경은 육신의 눈이 가려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가려진 사람을 말합니다. 발람이 나귀를 타고 발락에게 가다가 천사를 만났을 때 나귀도 보는 천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눈이 열리게 되자 천사를 보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16절에보면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던 두 제자가 31절에 보면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았다고 말합니다. 발락이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는 육의 눈은 열려있었으나 영의 눈은 가리워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설교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으면 어떤 일이 있는가? 둘째, 어떻게 하면 영의 눈이 열릴 수 있는가?
1. 영적인 눈이 가려지면 어떻게 되는가?
1) 함께 계신 예수님을 몰라봅니다(15-16절).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글로바와 다른 제자 하나가 엠마오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 동안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서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성경해석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계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 몰라봤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몰라봤던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워 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보통 사람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 하나님은 빛나는 옷을 입으셨거나 뒤에서 후광이 비취는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마25장에서는 우리 주변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보통의 사람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나타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주변에 우리와 비슷한 모습으로 주님이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아내나 남편의 모습으로 아니면 자식이나 부모의 모습으로 아니면 성도나 목회자의 모습으로 주님은 나타나실 수 있습니다.
2) 많은 것을 듣고 알았으나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17-24절).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그러자 두 제자가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은 여인들이 빈 무덤에서 천사들을 만나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들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빈 무덤까지 확인했다는 것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부활에 대해서 들었으나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내용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세계를 보는 눈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핍박했고,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였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기독교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의 영광에 대해서 들어 알기는 하지만 교회와 멀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은 들은 풍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으면 주님을 떠나게 되어있습니다.
3)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을 보았으나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25-27절).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보셨을 때 많이 답답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말씀합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답답하신 예수님은 성경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고난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에 대해서 잘 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지식은 우리에게 상당한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식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없습니다. 영적인 힘이 없다면 지식은 무력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두 제자는 영적인 지식은 가졌으나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고난 당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힘은 없었던 것입니다.
한동안 한국교회 안에 성경 공부 열풍이 불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성경공부, 성경대학, 제자훈련 등의 이름으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성경공부에 집중하면서 성도들이 성경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어설픈 목사 뺨치는 정도의 실력을 가진 펑신도도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에 반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공부에 집중하다보니 기도가 식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기도가 식어지니 영성은 떨어지고 영성이 떨어지니 교회가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된 이유가 여러 가지 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성경공부 열풍으로 기도가 식어진데 있습니다.
가끔 이런 사람 보지 않습니까?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데 성경과 상관없는 생활을 하고, 거기다가 교회와 신자를 비난하고 심지어 성경으로 예수님까지 비난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지는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 아주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알지만 영적인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알지만 성경이 영혼의 양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4) 마음은 뜨거웠으나 변화는 없었습니다(32절).
32절에서 말하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은 눈이 열리기 전의 체험입니다. 그리고 32절의 내용을 말하는 지금은 눈이 열린 후의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그 뜨거워진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지는 않았습니다. 뜨거운 체험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는 없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체험 중심의 신앙을 가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기도하고 체험은 하는데 변화가 없기 때문에 욕을 먹는 것입니다. 체험이라는 것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과 만남은 만남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거기서만 멈춰서는 안됩니다. 구체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하거나 예배를 드리다 보면 신비한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뜨거운 경험이 뜨거운 것으로 끝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는 작은 체험 가지고도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변화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는 많은 체험을 했다고 간증은 하는데 그 생활을 보면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답답한 신자입니다.
2. 어떻게 해야 영의 눈이 밝아질까요?
영의 눈이 밝아지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31절에 보면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의 눈이 열리기 전에는 예수님이 같이 게셨고,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성경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웠는데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눈이 밝아지니 단번에 예수님이신 줄 알아봅니다.
영의 눈이 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든지 인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영의 눈이 열릴까요?
1)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민 24:4에서 발람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엎드려 눈을 뜬 자". 자신이 영적인 눈이 떠진 것은 엎드려서 기도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알아지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에 대한 헌신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 강권적인 방법으로 영적인 소경의 눈을 열어주는 경우가 있으나 일반적인 방법은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의 응답으로 영적인 세계를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2) 영적인 지도자를 통해서 열어줍니다.
왕하 6장에 보면 도단성을 포위한 아람 군대로 두려워 떠는 게하시의 눈을 영적인 지도자 엘리사가 열어줍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는 앞을 못 보는 사울의 눈을 아나니야라는 사람이 열어줍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영적 체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보지 못하는 세계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서간 사람의 지도를 받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신자 중에 이런 면에서 미련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서 지도자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겸손함이 없는 신자입니다. 겸손히 도움을 구하시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움을 받으십시오.
3) 주님이 열어주셔야 열립니다(30절).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희와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주시자 눈이 열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다른 영적인 체험을 할지라도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허락하시므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께서 임하실 때 "하늘로부터"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늘로부터 임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영적인 체험도 예외는 아닙니다. 체험자가 열심을 냈어도, 아니면 강퍅함을 깨트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허락하신 것이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4) 성령의 역사로 열립니다.
계1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 되었을 때에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의 눈이 열리면서 하늘의 신비를 경험하며 특히 예수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계 1:10을 보면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영적인 눈이 열리며 영적인 세계가 보여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영적인 체험을 하려면 영적실체와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영적인 체험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십시오.
적요
1.영적인 눈이 열려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2.당신은 장애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본문에서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 말합니까?
4.당신에게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신다고 생각합니까?
5.마음이 뜨거워졌던 제자들처럼 뜨겁거나 신비한 체험을 해보셨습니까?
6.그런 체험이 당신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까?
7.위의 설교 내용 중에서 영적인 눈이 떠지는 네 가지 방법을 말해보세요.
8.당신은 영적인 눈을 뜨기를 원하십니까?
9.당신의 영적인 눈이 떠지기 위해서 당신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무엇입니까?
10.이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말해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눅 24장 13~35절 / 지태일목사
작년 사순절 기간에 멜 깁슨의 "The Passion of the Christ"(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비디오 cd로 라틴어로보고 들었음으로 이해가 좀 부족했는데 지난 주 고난주간 수요일 저녁에 다시 보았습니다.
이번에도 한글 자막으로 처리된 DVD로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어 사순절 고난주간에 맞추어 너무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저 듣기만 했던 주님 가신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로마 군병들이 때린 채찍이 어떠한 것인지, 머리에 쓰신 가시 면류관, 세 개의 못, 잘못 알고 잘못 믿던 유대인들, 종교 지도자들의 교권, 로마 군병들, 빌라도 총독, 헤롯왕, 주님의 고난과 멸시와 천대, 십자가 지심을 그래도 보고 깨닫고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영화가 성경 말씀을 다 대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주님의 고난을 다 묘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 사랑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약간 어려운 표현도 있습니다만 귀한 영화입니다.
그러나 좀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함께 끝부분에 가서 그리스도의 부활도 강조가 되었다면 너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경의 말씀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흐르는 강이 있다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입니다. 요즘은 성경책 옆을 금같은 믿음이라 해서 금색으로 많이 만들지만 그전에는 그저 빨간색으로,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붉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 기독교도 없었을 것입니다. 고전1:18절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만 강조해선 안됩니다.
성경대로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승리의 기쁨도 동시에 강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 찬양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승리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승리하신 주님을 기쁘게 할렐루야 찬양해야 합니다. 이 은헤를 허락하시기 위해 아들까지도 세상에 보내주신 성부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은총을 믿게 하고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고 거듭나게 하시고 각종 좋은 은사들을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성령의 동행하심도 찬양해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의 그 은혜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회개와 애통한 심정으로 기도하며 느린 찬송, 고난의 찬송만 하는 것이 아님니다. 금식하며 조용히 경건하게 보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니다. 이제는 사망권세 이기신 부활의 주님을, 선포하고 찬양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를 선포하면서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부활 승천하셨네'라고 외치며 승리를 주신 주님을 만방 가운데 선포해야 합니다.
저는 요즘 자료를 모으고 찾는 중 장로교 신앙고백의 표준인 되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영광돌리는 삶이 첫째입니다. 다음에는 이어서 오는 모습이 무엇이냐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속에, 좀더 구원의 기쁨이 표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의 기쁨이 넘치는, 웃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한번 옆에 계신 분들의 얼굴을 보시기 바랍니다. 활짝 펴있는 얼굴을 하고 계시면 "보기에 참 좋습니다!"라고 인사하십시오. 그러나 아직도 굳어 있는 얼굴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2005년 부활절 아침을 맞아 우리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의미를 한번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절망(죽음)을 희망(부활)으로 바꾸었습니다.(17,32절)
에반스라는 박사라는 분이 군의관으로 전쟁에 참여했을 때의 자신의 경험담을 글로 발표한 이야기입니다. 한 사병이 중상을 입고 야전병원으로 호송되어 왔습니다. 군의관 한 사람이 바쁘게 지나가다가 이 환자를 잠깐 들여다보고 무심코 말했습니다. "이 친구, 내일 새벽까지만 죽지 않으면 희망이 있어" 신음하던 사병의 귀에 이 한 마디가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춥고 긴 밤을 잘 견뎠습니다. 왜냐하면 해가 뜰 때까지만 살아 있으면 자신은 죽지 않는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밤새 고통을 잘 견디어 살아나게 되고 나중에 건강을 되찾아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가 가르쳐 주고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희망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희망만 있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희망은 사람을 살맛 나게 만듭니다. 그러나 반대로 절망은 어떻습니까? 절망은 삶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절망은 산 사람도 죽음으로 재촉합니다. 그래서 절망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절망이야말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 미국에서만 약 2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같은 기간동안 죽은 사람이 200만명이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 200만명 중에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해 절망하여, 결국 심장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최소한 100만명, 즉 전쟁에서 죽은 병사보다 5배가 더 많다는 통계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죽은 사람보다, 절망으로 인해 심장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5배나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절망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두렵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달려 돌아가셨을 때, 절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나를 따르라 말씀하실 때 가족도 버리고 부모형제도 뒤로 하고 배도 그물도 일터도 다 버리고 자신들의 생애를 예수님께 맡겨도 괜찮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죽자살자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훈련도 받았습니다. 각종 질병을 고치고 귀신을 좇아 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여러가지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찬란한 미래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메시야가 되시는 예수님이 이제 왕으로 오르시면 3년간이나 예수님을 따르고 모시고 있기에 자신들의 출세는 이제 보장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희망이 산산이 부서져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눈앞에서 힘없이 로마 병사들에게 끌려가 결국 십자가 위에서 맥없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기대와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무기력하게 달려 돌아가시자 그들은 슬픔에 빠져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엠마오의 두 제자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그들은 슬픔과 함께 깊은 절망속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삶의 의욕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넘긴 가룟 유다를 제외 한 11명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어느 한 가정에 숨어 버렸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아예 예루살렘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이십오리 떨어진 엠마오라는 한 시골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오늘날 수도 텔아비브쪽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포기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요,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슬픔과 절망속에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부활의 주님이 친히 찾아 오셔서 두 제자에게 성경을 풀어 부활의 도를 말씀하실 때 그들의 식어버린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심령이 요동하기 시작했습니다.
32절에 말합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냐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두 제자들 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두려움으로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그들의 마음이 다시 한번 뜨거워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심령은 어떻게 뜨거워질 수 있습니까? 부활의 능력은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변화시켜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혹시 지금 이 자리에 부활의 기쁨도 없이, 부활의 감동도 없이 냉냉한 마음을 가지고 앉아 있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 그러한 분들이 계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진 제자들처럼, 성령으로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통해 식어진 가슴에 불이 붙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힘이나 의지나 노력이나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조금의 조금의 진전을 가져올지는 몰라도 얼마간은 가능해도 머지 않아 안됩니다. 못합니다. 불가능해집니다. 계속 넘어집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회복되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이 깨달아져 심령에 불이 붙기를 바랍니다. 식어버린 열정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소식은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시 살 수 있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쓰라린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을 다 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모든 단절을 참 생명으로, 그 모든 고뇌와 절망을 환희와 희망으로 이어 놓으심과 같이 주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절망과 단절이 아닌 희망의 인생을 살 수 잇기를 바람니다.
사람들은 죽음이야말로 모든 것에 마침표를 찍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때로는 “죽으면 그만이야”, 다 끝장이야, 끝나는 줄 압니다. 그래서 감정이 격해지면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상대방을 죽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마무리될 줄 알고 하는 말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고통스러울 때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들 합니다. 자살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아니면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다 식입니다.
지난 주 안타까운 소식은 20일 화성시에 사는 청각 장애인 남편의 자살 소식입니다. 부부가 같은 청각장애인인데 남편이 그만 벌금 70만원과 월세 30만원을 마련하지 못한 것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자기 노점하는 조그만 트럭에서 LPG 가스를 마시고 자살한 것입니다.
이 부부는 0.5t 트럭을 개조해 떡볶이, 어묵 등을 팔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오다가 작년 10월, 하루 수입이 고작 1만-2만원이었던 부부는 불법 노점행위로 관할 시청에 적발돼 벌금 70만원을 부과 받았습니다. 법원으로부터 ‘공판기일까지 법정에 출석하지 않으면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 있다는 내용의 피고인 소환장이 전달됐고. 10평 남짓한 원룸(보증금 500만원)에서 가족 4명이 함께 살던 남편에게는 월세 30만원도 적지 않은 부담이었습니다. 결국 이 남편은 벌금 70만원과 월세 30만원을 어떻게 마련할까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그는 지난 18일 아내에게 “나와 결혼해서 사느라 고생이 많았다. 앞으로 잘 살길 바란다”는 마지막 인사를 수화(手話)로 남긴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렵지만 보통 사람들이 감당하기 너무 힘든 벌금이고 소환장, 구속영장 내용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처자식을 남겨두고 목숨을 끊는다고 일이 다 해결되는 것 아니잖습니까?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안타깝지만 이 일 역시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 생각에서 나온 불행한 일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고 자신의 목숨이든 남의 목숨이든 끊는 사람은 사실 가장 용감한 것이 아니고 이 말은 죽음 앞에 인간들은 무기력하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무능을 그대로 폭로시키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장난 줄 알았습니다. 제자들도 이제는 끝장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21절 말씀처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는데 그만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이젠 다틀렸다는 것입니다. 죽었으니 끝장이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원수 마귀도 이제 다 끝났다 생각했습니다.
죽음으로만 끝났다면, 부활이 없다면 무슨 희망과 미래가 있겠습니까? 죽음으로 끝난 곳에는 슬픔과 눈물과 절망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다시 사심이 없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끝났다면 이 기독교보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종교가 어디있을 것이고 저와 여러분은 바울의 말을 보더라도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전도도 믿음도 희생도 다 헛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오늘 부활의 아침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 문을 여시고 사망권세를 깨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끝을 새로운 시작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죽음으로 치닫는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생명의 물길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의 무능을 가능의 현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닫고 봉하나 주님은 여십니다. 닫고 봉한 무덤을, 우리 인생의 막힌 장벽을 여시고 영광된 미래를 열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접었으나 주님은 우리의 날개를 펼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길이 막혔어도, 우리가 실패했어도, 우리 앞이 망망해도,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오른편 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실패한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실패의 현장은 새로운 시작의 현장이었습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단절이었습니다. 슬픔입니다. 비극입니다. 고뇌와 불안과 소외에 빠지게 합니다. 고독과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절망을, 죽음을 단절된 것을 이어놓는 이음표였습니다. 소망입니다. 부활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33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은 발걸음을 어디로 돌이켰습니까? 33절을 보겠습니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원래 그들은 실망과 절망 가운데 예루살렘으로부터 이십오리 떨어진 엠마오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다시 방향을 돌렸습니다. 계속 실망과 슬픔의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33절 상반절에 언급되고 있는 '곧'이라는 단어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주저할 것도 없이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29절에 의하면 “날이 다 지나고 저녁이 가까웠음”에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날이 새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즉시 밤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한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에게로 향했습니다. 바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달라진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이 바뀌어진 것입니다. 인생 역전의 만남이 부활의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만남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좋은 부모님도 잘 만나야 하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평안히 사심으로 자녀손들과 함께 하는 것 얼마 큰 축복입니까? 학교에서도 가르치시는 선생님도 잘 만나야 하고, 아내도 남편도 잘 만나야 하고, 교회도 잘 만나야 신앙의 방황이 없는 것이고, 목회자도 잘 만나야 내 신앙의 신실함을 끝까지 견주어 나감니다.
누군가 말하는데 외국에 이민가서 처음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그 나라에서의 삶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낯선 땅에 가서 무슨 말이 제대로 통합니까?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 무슨 직장이나 직업, 사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데 이 때 만나서 도와주는 사람이 고맙고 얼마나 중요하고 영향을 끼치는지 모름니다. 청소하는 분들을 만나면 나중에도 청소를 하게되고, 야채장사를 만나게 되면 야채 장사하게 되고, 가게 하시는 분을 만나면 가게를 할 확률이 많고, 세탁소 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그런 일을 하실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체국 다니는 분을 만나면 우체국에 서 일하게 되고 한다는 것입니다. 만남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유한한 인생은 슬픔과 두려움과 죄중에 사는 우리 인생의 중요한 만남은 둘도 없이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거작으로 아카데미상 11개를 수상한 불후의 명작 벤허라는 영화를 잘 아실 것입니다. 벤허는 미육군 퇴역 장군이며 정치가요 문학 천재인 월레이스(Lew Wallace)라고 하는 소설가가 쓴 작품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월레이스가 이 작품을 쓴 동기는 아주 어이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친구인 로버트 잉거솔이라는 사람이 말하길 “만약에 당신이 성경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증거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예수보다도 위대한 사람이 될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같이 기독교 신화를 없애 버리는 책을 저술하자고 약속을 합니다. 그래서 월레이스는 예수님을 반박하기 위하여 유럽과 미국에 유명한 도서관에서 기독교를 없앨 자료를 찾고 성경을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월레이스는 본래 반기독자이며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렇지만 소설을 쓰기 위해서 예수님을 알아야 했고,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월레이스는 성경을 읽은 지 2년쯤 되어 예수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조롱하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 my Lord and my God ...... 하고 크게 울부짖었습니다. 후에 그는 "나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내 책의 중심이 되었고, 내 마음의 중심이 되었소"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반대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유명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벤허의 마지막 장면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문둥병이 고침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때 인간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변화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생명의 길, 영생의 길을 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인격이 바뀌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계신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인생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실망과 좌절로부터 희망과 기쁨의 사람으로 변화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처럼, 주님을 만남으로 절망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희망의 자리로, 어둠의 자리에서 빛의 자리로,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자리에서 일어나 능력있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의 능력은 변화의 능력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증인이 되게 역사합니다.(33-35절)
실망하여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 마음이 뜨거워지자 변화된 모습으로 곧 바로 방향을 바꾸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몰래 숨어 있는 예루살렘의 한 곳으로 갔습니다.
3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비밀리 숨어있던 제자들은 마침 "주님이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고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사도들에게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증거합니다.
또 35절을 보면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때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길에서 일어났던 모든 것을 사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슬픈 빛을 띠고 내뱉던 깊은 한숨소리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대신에 그들이 만난 부활하신 주님을 당당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을 만나면 말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을 자랑하며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 만나기 전에는 집 자랑, 가구 자랑, 자식 자랑, 남편 자랑, 아내 자랑, 자동차 자랑, 골프채 자랑하던 사람도 예수님을 정말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너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찬양 ♬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날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세상의 어떤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기 좋아합니다. 또 자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부활의 주님 만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후에 그들의 고백이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행4:20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것들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집에 있을 때든지 거리에 다닐 때든지 입만 열면 예수님 자랑이요, 입만 열면 성령의 역사하심을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평생에 나의 약한 것과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했습니다.(찬송가 ♬ 나의 평생 자랑은 주의 십자가로다.... 나의 달려 갈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위하여서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백합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입술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자랑하고 복음을 자랑하는 입술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사오정 시리즈 아시지요? 저도 몇 번 들어서 한번은 이야기 하는데 사오정과 손오공이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 시험을 치르러 어느 회사에 갔습니다. 손오공이 먼저 면접장에 들어갔습니다. "15번 손오공입니다" 질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자네, 축구 좋아하는가?" "예, 좋아합니다" "축구선수 중에 누굴 가장 좋아하는가?" "예, 옛날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요즘은 안정환입니다" "산업혁명이 언제 시작되었지?" "예, 18세기입니다." "자네 UFO는 있다고 생각하나?" "예, 과학적으로 증명은 안되었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면접을 마치고 나간 손오공은 벌벌 떨고 있는 사오정에게 불쌍해서 첫 번째 질문부터 순서대로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오정은 열심히 외우면서 자기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름이 호명이 되자 안으로 들어갑니다.
"17번입니다" 사오정이 이름을 말하지 않자 심사위원이 묻습니다. "자네 이름이 원가?" "예, 옛날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안정환입니다." "뭐, 자네 언제부터 그렇게 됐나?" "예, 18세기입니다." "자네, 혹시 바보 아닌가?" "예, 과학적으로 증명은 안되었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오정 시리즈가 무엇을 교훈 합니까? 모방한다고 따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들이 기독교를 절대 모방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요즈음 한국의 불교가 산에서 도심으로 내려와서 다방면으로 기독교를 모방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찬송가처럼 그들도 찬불가를 만들어 부르고, 우리 기독교가 심방하는 것처럼 그들도 심방도 하고, 우리의 여름성경학교를 하면 그들도 여름불교학교를 개설하고, 교회에서 선교원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면 그들은 자비원을 만들어 가르칩니다. 어린이집을 개설하여 가르칩니다. 우리가 수련회를 가는 것처럼 그들도 수련회를 가고, 주일의 개념이 없이 일년에 한 두번 절에 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우리처럼 주일마다 정기 예불도 드리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기독교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아무리 기독교를 모방한다 할지라도, 한 가지만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모방할 수 없을까요? 부활입니다.
기독교의 부활만은 그들이 모방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는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절의 환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82살의 나이에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 화장된 후, 사리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온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사라림 숲속의 큰 사라 나무 밑에 병들어 누워서 마지막 임종 설법을 했습니다. 그는 그 설법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석가 자신은 신이 아니므로 자기를 신으로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인륜(人倫)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깨달은 바가 있으나, 천륜(天倫)에 대하여는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석가는 그 설법을 통하여 자기가 신이 아닌 이유를 말했습니다.
첫째는 “무연중생 제도불능(無緣衆生 濟度不能)이라.” 자기가 신이라면 죄 많은 중생들을 다스리는 신적 연분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는 그렇지 못해서, 중생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삼세중생 제도불능(三世衆生 濟度不能)이라.” 자기가 신이라면 과거 현재 미래를 주관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전지전능한 신성을 가져야 하는데, 자기는 그렇지 못하므로 중생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업보중생 제도불능(業報衆生 濟度不能)이라.”
자기가 신이라면 모든 중생들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 죄 사함의 권세가 있어야 하나, 그렇지 못하여 중생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신이 아님을 만천하에 이야기 했습니다. 연약한 인생임을 알고 보리수 나무 아래서 해탈의 세계를 경험한 것 뿐이었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나 이슬람의 마호메드나, 유교의 공자와 맹자나 세상에 와서 도를 깨닫고 후에 다 죽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는 다른 어떠한 종교에서도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함이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세상의 그 어떠한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사건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성도와 모든 인류에게 최대의 승리를 안겨 준 승리의 날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진리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기독교입니다. 물론 예수님 탄생하신 성탄절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온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기독교의 진리도 진실입니다.
반대로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진리도 가짜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만약 부활의 사건이 거짓이었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의 예배도 헛되고, 우리의 헌신도 헛되고, 우리의 전도도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게 되며,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고전15:13-19)
그러므로 믿음 생활을 잘 하려면 부활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려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최대의 자랑은 빈 무덤입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의 창시자는 죽은 후, 그들의 무덤이 남아 있지만 예수님의 무덤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구원의 종교입니다. 영생의 종교입니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가면 1924년에 죽은 레닌의 묘가 있습니다. 그의 시신은 썩지 않게 처리되어 80년이 다 되어가고 있는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 많은 순례객들이나 관광객들이 그 곳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레닌의 관 위에는 이러한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모든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러므로 새로운 인류의 주인이고, 그는 세계의 구원자였다.”
여러분! 레닌이 위대한 지도자입니까? 세계적인 지도자입니까? 그가 세계의 구원자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였고 그를 따르던 사람, 그를 따르던 나라를 다 망쳐 놓았습니다. 얼마나 잔인하게 죽였습니까? 세계를 망하게 한 공산주의자의 괴수입니다.
북한의 평양 금수산에도 죽은 지 10년이 지난 김일성의 시신이 썩지 않게 처리되어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 수령님은 우리 곁에 항상 있다”고 써붙여 놓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불가능한 것을 믿는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는 왜 역사적인 사실을 못 믿습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중요한 것은 “네가 이것을 믿느냐?”는 질문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2005년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모든 여러분들이 다시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식어버린 열정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죽음과 절망과 탄식의,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 희망의 자리로, 부활의 자리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삶의 방향이 달라지길 바람니다. 더 이상 무기력한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당당한 능력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나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습니다. 내가 만난 주님을 여러분들도 믿으십시오"라고 선포하시며 주님을 증거하시는 증인의 귀한 삶을 다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
눅 24장 13~35절 / 조상호목사
어떤 조사 기관에서 사람들이 슬퍼하는 이유에 대해서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질문은 이러한 내용이었습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당신은 무엇이 가장 슬프다고 생각 하십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이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분들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 기관에서 조사한 바로는 이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크게 5가지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육체적으로 아플 때에 슬픔을 느낀다고 대답한 사람이 12%, 노력해도 돈이 벌리지 않을 때에 슬픔을 느낀다고 대답한 사람이 12% , 가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슬픔을 느낀다고 대답한 사람이 16%,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에 슬픔을 느낀다고 대답한 사람이 17%,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에 슬픔을 느낀다고 대답한 사람이 39% 등의 결과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통계에 의하면 사람들은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했을 때,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아플 때나 노력해도 돈이 벌리지 않을 때나 가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에도 슬픔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러한 것들보다도 가장 큰 슬픔을 느끼는 경우는 정말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라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에게 손가락질 하고 돌을 던지는 원수 때문에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기 때문에 큰 슬픔을 느낍니다. 그 동안 믿었고 사랑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 곁을 훌쩍 떠날 때, 심한 좌절감과 허무감을 느끼고 심하면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그러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3년 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앉은뱅이도 일으키시고, 눈먼 자도 뜨게 하시고, 문둥병자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기적의 현장을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예수님만 따라다니면 언젠가는 출세할 날이 있겠지, 저 분 뒤만 좇아 다니다보면 좋은 일이 있겠지, 이제 곧 예루셀렘에 입성하여 로마제국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해방시키고 나면 나도 한 자리 차지할 수 있겠지’라는 미래에 대한 장밋빛 기대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예수님께서 로마병사들에게 체포되어 무기력하게 체포당한 채 끌려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금 후면 예수님께서 능력을 발휘하여 로마병사들로부터 풀려나시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예수님은 풀려나시기는커녕, 오히려 무서운 채찍을 맞으시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 믿고 의지했던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자, 그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무리를 지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태로 3일이 지나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오늘 새벽이 되었습니다.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막 솟아오르는 시각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왔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0절에 의하면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살로메라고 불리우는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그들과 함께한 다른 여자들로서, 최소한 5명 이상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돌아가신 주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려고 주님의 무덤에 찾아 온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성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이 약하게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면 오히려 남성보다 더 강해집니다. 평소에는 여성들이 겁쟁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문제를 만나면 여성들이 남성들보다도 더 용감할 때가 있습니다.
작년 10월25일자 국민일보에 “제2의 대구지하철 참사, 용감한 여성이 막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작년 10월24일 오후 8시쯤 서울 지하철 4호선 사당역에서 당고개행 열차를 탄 36세의 김모 여인은 맞은편에 앉은 30대 초반의 남자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신문을 보던 그 남자가 라이터를 꺼내 신문지에 불을 붙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불은 곧 꺼졌지만 그 남자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 승객들 쪽으로 재를 날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객차 안에 건장한 남자 서너 명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을 말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둘씩 다른 객차로 자리를 옮겨 갔습니다. 그 남자가 정상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한 김모 여인은 전동차 벽면에 부착된 고객센터 전화번호를 확인한 뒤, 휴대전화로 “누군가 신문지로 불을 붙이려 한다”고 신고했습니다. 결국 다음 정차역에 대기 중이던 역 직원과 공익근무요원에게 그 남자는 붙잡혔습니다. 나중에 체포된 그 남자는 경찰 조사에서 “세상 일이 제대로 안돼 불을 지르려 했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용기 있는 김모 여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대형사고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시민신고 보상금제도에 따라 100만원의 보상금을 받게 된 김모 여인은 이러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함께 타고 있던 젊은 남자들이 임씨의 라이터를 뺏거나 불을 붙이지 못하게 했으면 신고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휴대전화를 꺼내들 때는 무척 겁났지만 신고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여성은 약하지 않습니다. 믿으십니까? 남성들 중에 ‘아멘’ 하신 분들은 정직한 분이십니다. 여성들 중에 ‘아멘’하신 분들은 정말로 용기 있는 분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무덤에 누가 찾아왔습니까?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 곁을 따라다니던 제자들 중, ‘나도 십자가를 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뿔뿔이 다 흩어졌습니다. 다 도망을 쳤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피해 다 숨어버렸습니다. 제자들 중 어느 누구 하나 예수님 무덤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용감하게도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인들을 용기 있게 만든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믿음입니다.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믿음인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힘이 무섭습니다.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겁쟁이를 담대한 사람으로 만들고, 무기력한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성별을 초월하고 나이를 초월하고 환경을 초월하는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했을 때, 주님의 무덤을 막아놓은 육중한 돌문이 굴려진 채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 속에 들어가서 보니 예수님의 시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빈 무덤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우리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다른 어떠한 종교에도 없는 부활이 있습니다. 오래 전 인도에서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대단히 떠들썩했던 적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선생이 주전 5~6세기의 인물인데, 어떻게 그것이 석가모니의 뼈인 줄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지 그 뼈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뼈를 앞세우고 수백만 인도사람들이 시가행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고 또 어떤 사람은 환호하고 또 어떤 사람은 너무 기쁜 나머지 기절까지 했습니다. 그때 이 광경을 지켜본 한 선교사님이 그의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만약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뼈를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기독교는 산산 조각나고 말 것이다." 그렇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뼈 조각이 하나라도 발견된다면 우리 기독교는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여러 곳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만약 예수님의 뼈 조각이 나왔다면 기독교는 가짜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차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고 하셨던 예수님은 거짓말쟁이요, 희대의 사기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종교의 창시자와 달리,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빈 무덤을 남기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진 채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본 여인들은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있는데, 두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5~7절) 두 천사로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여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들은 숨어서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알리려고 무덤을 떠나 마구 달려가는데, 갑자기 "평안하뇨"라는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기뻤습니다. '사흘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니 너무 기쁜 나머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서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여인들로부터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고, 자기들에게 보이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무슨 허튼 소리를 하는 거야,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단 말이야'라고 하며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단숨에 무덤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지고 시신을 쌓던 세마포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이 세마포는 예수님께서 분명히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또 다른 증거물입니다.
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1997년 4월초에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의 내부가 누전으로 인하여 완전히 소실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토리노 대성당의 화재가 전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성당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의', 즉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것으로 알려진 ‘세마포’가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3중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뜨린 다음, 그 세마포가 담긴 성궤를 안고 나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 프랑스의 한 잡지사가 세계의 저명인사 100여명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지구 최후의 날에 무엇을 가지고 도망가겠는가?' 그 때 1위를 차지한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토리노 대성당의 '예수님의 수의'였습니다. 그리고 2위가 '미로의 비너스상'이었습니다. 미로의 비너스상은 인간예술의 극치로 인정받고 있는 걸작중의 걸작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예술품을 제치고 폭 1미터 5센티미터에, 길이 4미터 20센티미터에 불과한 하찮은 삼베천이 어떻게 인류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었을까요?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해주는 증거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태리의 소방대원들이 불길에 휩싸인 토리노 대성당 안으로 뛰어 들어가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예술품이나 값비싼 보물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세마포만을 반출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사망권세 깨뜨리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당신의 시신을 쌓던 세마포를 남겨놓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자기 눈앞에 놓여 있는 세마포를 보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약 10Km 떨어진 엠마오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인 것으로 보아 그들은 열 두 제자에 포함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으로 알고, 예수님께 모든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메시야가 한 번 싸워보지 않은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어느새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 생각하여 절망한 채로 예루살렘에서 고향인 엠마오를 향하여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들과 함께 가면서 “당신들은 왜 그렇게 슬퍼합니까? 왜 그렇게 절망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 동안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면서 “예수님께서 사흘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어떤 여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어떻게 부활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함께 동행 하던 그 사람이 구약에서 예언한 말씀을 가르쳐 주는데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두 제자는 그 사람에게 여관에 유숙할 것을 청하고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 그 동안 자기들과 동행했고, 함께 말씀을 나누고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그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그 분이 예수님이란 것을 깨닫자마자 예수님께서는 사라지셨습니다. 이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가던 길을 멈추고, 거꾸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6장 13절에서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제자들은 여전히 의심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일제시대 때, 어떤 목사님이 만주 지역에 있는 교회를 순회하면서 선교부에서 마련한 선교비를 각 교회에 나누어 주곤 했습니다. 한번은 돈을 잔뜩 넣고 순회하는 도중, 어느 외딴 여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이 많아서 작은 방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잠을 자야 했습니다. 잠자리에 누웠으나 두 사람 다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님대로, 또 다른 사람은 그 사람대로, ‘혹시 저놈이 내가 잠든 사이에 돈을 훔쳐가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다음날 아침, 여관 주인이 차려다 준 아침 밥상에서 함께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둘은 서로 마주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식사기도를 하고 막 수저를 들었을 때, 마주 앉았던 사람이 “선생님, 예수 믿는 어른입니까?”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네, 저는 채필근 목사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저는 OO교회 장로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 상대방을 의심한 것을 사과했다고 합니다.
의심은 병입니다. 의심은 불치병입니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아무 것도 믿지 못합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보아야 믿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기사와 이적을 체험하면, 더 잘 믿고 신앙이 빨리 성장할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바로에게 행하신 10가지의 재앙을 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위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태양이 멈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많은 현장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입만 열면 모세에게 불평했습니다.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1세대는 단 한 사람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의심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의심하고 있는 그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그러니까 오늘 저녁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꼭꼭 걸어 잠근 채 숨어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못자국난 손바닥에 손을 넣어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8일이 지난 후 다시 의심 많은 도마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도마는 자기 앞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더 이상 손을 내밀어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파스칼은 “믿음이란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생각과 경험과 상식과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비로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상식과 이성과 경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의심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도마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2,000여 년 전 오늘 새벽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계시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많은 여인들에게 보이셨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보이셨고, 10명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보이셨습니다. 이 외에도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잡이 하던 7명의 제자들에게, 야고보에게,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에게, 일시에 500여 형제들에게, 마지막으로 감람산에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인들이 많은 것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인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다시 살아나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저는 존 뉴톤 목사님(John Newton, 1725-1807)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 목사님은 너무나도 유명한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찬송가 405장을 쓰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흔하지 않습니다. 그 분은 선장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찍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11살 때부터 아버지의 배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거친 선원생활을 시작한 그를, 아무도 말리지 못할 만큼 그는 포학한 성격을 가지고 부도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 내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온갖 죄를 저지르며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던 그는 끝내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서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을 읽고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이 39세 때 목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43년 동안 최선을 다해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존 뉴톤 목사님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다 찢어 없앤다고 해도, 누가복음 24장만 있으면 성경은 존재할 가치가 있다.”
여러분, 죤 뉴톤 목사님이 왜 누가복음 24장만 있으면 성경은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그렇게 자신 있게 말했을까요? 여러분들은 그 이유를 아십니까? 누가복음 24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제자들처럼, 자신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다 변화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담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식어진 심령을 안고 엠마오로 가던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심령이 뜨거워졌습니다. 고난과 핍박이 두려워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막연한 불안 속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 낙심과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 죽음에 대한 공포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두려움을 주시지 않고 평안을 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죽음으로 끝나는 종교가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종교인 줄로 믿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내가 다시 살아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마지못해 사는 인생이 살 맛 나는 인생으로 바뀝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깜깜한 미래가 안개 걷히듯 환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신 분들은 삶의 현장 속에서 항상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받음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제자의 슬픈 이야기
눅 24장 13~35절 / 김명혁목사
오늘 본문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슬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에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라고 했습니다. 슬픔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습니다. 이별의 슬픔도 있고 고통의 슬픔도 있고 사랑의 슬픔도 있습니다. 이별의 슬픔과 고통의 슬픔과 사랑의 슬픔은 모두 좋은 슬픔들입니다. 그와 같은 슬픔들에는 눈물도 있고 감동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슬픔들은 보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두 제자의 슬픔은 불신과 절망의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 저들은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의 슬픔은 또한 절망에서 온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저들은 모든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고 절망 가운데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바클레이 박사가 지적한 대로 석양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지리적으로도 예루살렘으로부터 석양을 향하고 있었지만 영적으로도 석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들은 sunrise를 향해서 즉 해돋이를 향해서 걸어가지 않고 sunset을 향해서 즉 석양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해돋이를 향해서 걸어가야 하는데 두 제자들은 석양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불신과 절망 가운데서 슬픈 빛을 띠고 석양을 향해서 힘 없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불신과 절망의 슬픔을 지니고 사는 불행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도마처럼 그리고 여기 두 제자들처럼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불행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지녔던 기대와 희망이 모두 사라져 버린 듯한 절망의 느낌을 지니고 사는 불행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건강에 대한 기대도 사업에 대한 기대도 물질에 대한 기대도 다 사라져 버린 듯한 절망을 지니고 슬픈 빛을 띠고 살아가는 불행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불신과 절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눈물도 감동도 없고 메마름과 삭막함만 있을 뿐입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한 평생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해돋이를 향해 걸어가면서 살아오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항상 내일을 기대하면서 소망을 지니고 기쁘게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이제 불신과 절망의 슬픔을 지니고 석양을 향해서 힘 없이 걸어가던 두 제자들의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두 제자는 눈이 가리워져서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6). 불신과 절망의 슬픔을 지니게 될 때에 눈이 가리워져서 살아계신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인데, 두 제자는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이 옆에 오셨는데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도 처음에는 부활의 주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고 디베랴 바닷가에 갔던 일곱 제자들도 처음에는 부활의 주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눈이 어두웠던 소경들이었습니다. I once was blind. 우리들은 모두 소경들이었습니다. 얼마 동안 눈이 가리워져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십 년 이상 계속된다면 그것은 큰 일 입니다. 교회에 십 년 이상 다니면서도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큰 일 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욥은 나중에 은혜를 받고 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용42:5).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아직도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믿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두 제자는 귀가 어두워져서 주님을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눅24:17). 불신과 절망의 슬픔을 지니게 될 때에 귀가 어두워져서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인데, 두 제자는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이 지금 옆에 오셔서 말씀을 하시는데도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요나단 에드워즈가 우주 만물에서 주님을 보고 들었을 뿐 아니라 주님을 읽었다고 고백한 글을 읽었을 때 얼마나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두 제자는 주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도 처음에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고 디베랴 바닷가에 갔던 일곱 제자들도 처음에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귀가 어두웠던 귀머거리들이었습니다. 얼마 동안 귀가 가리워져서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십 년 이상 계속된다면 그것은 큰 일 입니다. 교회에 십 년 이상 다니면서도 주님의 음성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큰 일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마13:16). 그리고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라는 말씀을 수 없이 많이 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아직도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믿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두 제자는 가슴이 굳어져서 주님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불신과 절망의 슬픔을 지니게 될 때에 가슴이 굳어져서 살아계신 주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나중에는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지만 지금은 부활의 주님이 옆에 와서 말씀을 하셔도 두 제자들은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가슴에 아무런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가슴에 아무런 뜨거움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임재하심과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인데 두 제자들은 주님의 임재하심과 함께 하심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세밀한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신자입니다. 배순자 권사님은 수술 후 곧 퇴원하고 저를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저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세밀하게 함께 하신 것을 체험했다고 감사를 드리고 또 감사를 드렸습니다. 정진선 집사님도 일 주일 동안 미국을 다녀온 후 저를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기도해 주신 그대로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구체적으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신 것을 체험했다고 감사를 드리고 또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함께 하심을 가슴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주님의 손길을 세밀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존재가 모두 마비되어 굳어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우리의 영적 존재가 살아나서 주님을 조금씩 느끼게 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모든 것을 주장하심을 가슴으로 느끼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아직도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하심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믿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4장은 불신과 절망의 슬픔을 지니고 있던 두 제자가 믿음과 소망의 기쁨을 지닌 새로운 사람들로 바뀌어진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눅24:33-35에 그 변화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석양을 향해서 슬프게 힘 없이 걸어가던 두 제자가 해돋이를 향해서 기쁨으로 힘차게 뛰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하던 두 제자가 부활의 주님을 온 몸과 입으로 증거했습니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두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믿었을 뿐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힘 있게 증거하는 예수님의 증인까지 되었습니다. 불신과 절망의 사람들이 믿음과 소망의 사람들로 바뀌어졌고 슬픔을 지녔던 사람들이 기쁨을 지닌 사람들로 바뀌어졌습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어제 결혼한 오명환 군과 이태실 양이 지난 몇 달 동안에 생각이 바뀌어지고 느낌이 바뀌어졌습니다. 삶에 대한 자세가 바뀌어졌습니다. 앞으로 더 많이 바뀌어질 것입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불신이 신앙으로 변화되고 절망이 소망으로 변화되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됩니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고 듣지 못하던 것을 듣게 되고 느끼지 못하던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까?
첫째,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들을 찾아오셔야 우리들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께서 황송하게도 못난 우리들을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십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15). 불신과 절망에 쌓여있던 두 제자도 찾아오셨고, 불신과 의심에 쌓여있던 도마도 찾아오셨고, 배신과 좌절에 쌓여있던 베드로도 찾아오셨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우리들과 말씀도 하시고 깨우쳐도 주시고 떡도 떼어서 먹여도 주십니다. 너무나 감사하고 황송한 일입니다.
둘째,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셔야 우리들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구원도 들음에서 오고 변화도 들음에서 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7). 지금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저에게는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과 같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시고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황송한 일입니다.
셋째,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오셔서 떡을 떼어주셔야 우리들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떡을 떼어주신다는 것은 주님의 살 깊은 사랑을 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살 깊은 사랑을 몸으로 받아먹어야 하고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주신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운명이 변화되고 우리의 존재와 삶이 변화됩니다. 영생을 얻게 되고 하늘을 얻게 되고 그리고 죄와 지옥을 이기게 됩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
눅24은 우리들이 하여야 하는 일 한 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주님을 강권하여 우리들의 마음과 집에 영접하는 일입니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28,29). 주님을 강권하여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집에 모시는 일은 너무 중요합니다. 유명한 주석가 헨드릭슨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들이 강권하지 않았다면 아마 주님께서 그대로 지나가셨을 것이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편에서 내리는 결단을 전혀 무시해버리지 않으신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불신과 절망에 빠질 수도 있고 슬픈 빛을 띠고 석양을 향해 힘 없이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께서는 못난 우리들을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바꾸어주십니다. 눈을 뜨게 해주시고 귀를 열게 해주시고 가슴을 움직이게 해주십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까이 찾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까이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까이 오셔서 주님의 살 깊은 사랑을 부어주시고 주님이 찢기시고 흘리신 살과 피를 먹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삶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귀가 열려져서 주님을 듣기를 바랍니다. 가슴이 뜨거워져서 주님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슬픔이 변해서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석양을 향하던 발걸음이 해돋이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가슴으로 믿을 뿐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서 부활의 주님을 온 몸으로 힘있게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뜨거워진 사람들
눅 24장 22~35절 / 이성우목사(왜관감리교회)
한 여자가 나이가 많아서 늦둥이를 낳았는데 친척들이 모여 아이를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말했습니다. "아직 안 돼!" 잠시 후에 친척들이 또 아이를 보자고 했습니다. 그 때도 여자가 고개를 저으며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척들이 궁금해져서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쯤 아이를 볼 수 있어요?"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아이가 울면 보여줄게." 그러자 친척들이 또 물었습니다. "왜 아이가 울 때만 볼 수 있죠?" 그러자 여자가 자신도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안 나잖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서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중에 노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데 왜 두 제자만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내려갔는가에 대해서 오우스터 제이(Oosterzee)는 “예수님의 죽음이 수치스럽게 끝나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해 구원을 얻으리라는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믿고 기대하며 따르던 사람에 대한 실망감이 두 제자를 실망과 좌절에 빠지게 만들었고 결국은 고향으로 내려가도록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충분이 이해할만한 상황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유야 어떻든지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내려갔다는 것은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좌절의 결과이었기 때문에 결코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낯선 동행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행인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두 제자가 건네는 말들은 상당히 불평 섞인 표정으로 투덜거리는 식으로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아무 느낌 없이 내 뱉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낯선 동행인은 뜻밖에 두 제자에게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25~26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결국 이 두 제자는 이 낯선 동행인을 억지로 엠마오 동네까지 동행하게 해서는 함께 음식을 나누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 이 낯선 동행인은 두 제자의 눈에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두 제자가 이 낯선 동행인과 헤어진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본문 후반부의 말씀은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두 제자는 낯선 동행인이 들려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눈이 밝아져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는 곁에 계시면서 자신이 예수님이심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밝혀 주셨습니다만, 일단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을 때 주님은 그들 곁에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두 제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에 대해서 의심이 있을 때는 가까이 다가오셔서 자세히 가르쳐 주심으로써 그들의 의심이 사라질 수 있도록 하셨지만 이제 그들이 진리에 대한 눈을 뜨게 되자 더 이상 그들 곁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의심하고 있을 때는 가까이 다가오셔서 깨닫게 하시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지만 그들이 깨닫게 되자 이제는 더 이상 그들 곁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또 다른 의심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시기 위해서 그들 곁에 머물러 계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두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눈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눈입니다. 육체의 눈은 사물을 보고 산하를 보고 하늘과 땅을 보고 그리고 사람을 보는 눈입니다. 이 눈의 기능은 놀랍고 신비합니다. 눈에는 30만개의 회로가 있고 안구에는 1억만 개의 신경 세포가 있어서 거리, 광도, 색상을 자동으로 조절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파스칼이 지적한 대로 그 눈으로는 지극히 큰 것도 볼 수 없고 지극히 작은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눈으로는 지구를 볼 수도 없고 아메바 같은 미생물도 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치켜떠도 그 눈으로는 바로 눈 위에 있는 눈썹도 세거나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른 하나의 눈은 영혼의 눈입니다. 이 눈이 있어야 하나님을 보고 영원한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눈썹도 못 보는 눈, 자기 뒷머리도 못 보는 눈으로 하나님을 본다든지 영원한 세계를 보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세계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육신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과 영원한 세계를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 영혼의 눈은 죄를 범하면 어두워집니다. 일단 어두워진 눈은 믿음이라고 하는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 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인간이 범죄하고 달라진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각이 달라진 점입니다. 타락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살았는데, 타락한 이후부터는 수치를 보고 절망을 보고 죄를 보며 살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한 이후에 눈이 밝아져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게 되었지만, 본문에 나오는 두 제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말씀을 듣고 나서는 의심으로 인해 어두워졌던 영혼의 눈이 밝아져서 인간이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을 보게 되는 은혜, 곧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보게 되는 은혜가 임한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우리의 영혼의 눈을 밝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늘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영혼의 눈이 밝아지게 되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 두 제자에게 일어난 일은 눈만 밝아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얼굴이 뜨거워지고 몸이 뜨거워지는 경우는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신체에 어떤 질병에 의해서 정상적인 체온 이상으로 열이 있을 때, 뜨거운 음식이나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 갑자기 무안을 당했을 때, 마음이 기쁘고 흥분했을 때 등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두 제자의 경우는 이런 경우가 아니라 그 원인이 전혀 다른데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32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했습니다.
두 제자의 마음이 뜨거워진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주님과 함께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둘이서만 고향으로 내려가는 그 길을 걸어갔더라면 그들의 마음은 더 차가워지고 경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사단이 준 의심으로 인해서 실망과 좌절로 말미암아 차가워져 있었던 마음이 서서히 뜨거워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 가장 큰 특징은 몸에 열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몸이 서서히 차가워져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죽음이 다가오면 몸이 차가워집니다. 정상적인 사람, 건강한 사람은 우리 몸에 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말씀 가운데 살아가며, 기도하며 봉사하며 살아갈 때는 우리 영혼에 뜨거 움이 있고 우리 믿음이 뜨거워지지만 어떤 이유로든지 사단이 우리 맘에 역사하기 시작하면 말씀도 들리지 않게 되고, 기도하던 것도 쉬게 되며, 봉사도 귀찮아지게 되고 모든 영적인 일들이 게을러지게 되어서 결국은 우리의 믿음이 차가워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매일 같이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셔서 뜨거운 열정을 간직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와 동행하는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심이 많은 사람, 불평하고 원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 불신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단점만 찾아내는 사람과 동행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은 사람, 그래서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매사에 좋은 점만 말하고 가능성을 말하며 믿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기도하는 사람과 동행하게 되면 어느새 자기도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동행하고 계십니까? 주님과 동행하시고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라며, 믿음의 동료들과 늘 동행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제자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되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두 제자는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셨던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통제와 인도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잘못하면 야단치고 타이르고 때리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갈 길을 밝히고 보여 주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의 말씀을 듣게 되면 그 사람의 삶에 커다란 이변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고넬료의 집에 모여서 베드로 사도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듣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자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과 위로와 빛을 비춰 줍니다. 약한 자에게는 힘을 주며 죄인에게는 구원의 길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사단에게 붙들려 얼어붙어 있는 것처럼 죽어가는 영혼에게는 그 심령을 녹이고 불을 붙여 뜨겁게 해 줍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말씀이 없었더라면 그들의 영혼은 영원히 식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그 결과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어가던 그들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힘을 잃고 쓰러져가던 그들에게 다시 힘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더 정확이 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그들에게 힘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힘을 얻게 하는 양식인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진 두 제자는 그 즉시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서 거기 머물러 있었던 다른 제자들과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다른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들 또한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일과 말씀을 들려주심으로 자신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된 사실을 증거 함으로써 피차간에 새 힘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로 그들은 능력이 충만한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두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져서 새 힘을 얻게 되며 그 결과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게 된다는 사실과 함께 다른 사람들에게도 새 힘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사명을 감당하도록 만들어 주는 능력의 사람들이 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사실 마음이 뜨거워지면 가만히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열 에너지는 운동 에너지를 만들어 내게 되어 있습니다. 자동차가 빠르고 힘 있게 움직이는 원리는 엔진에 있는 열 에너지가 동력 전달 장치를 통해서 운동 에너지로 바뀐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성서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편찬과 보급을 위해서 세워진 기관들과 그 곳에서 헌신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관심을 갖고 기도하며 후원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아침 들려주신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심으로써 날마다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라며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듣고, 묵상하는 가운데 마음이 뜨거워져서 새 힘을 얻으심으로 나 자신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헌신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정을 불어넣어주는 믿음의 사람으로 새 역사를 만들어 나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