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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51104(2) / 에베소 교회(2) / 요한계시록 2:1-7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5.11.06|조회수376 목록 댓글 0

에베소 교회(2)

요한계시록 2:1-7

1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말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 설 교 >

처음 사랑을 간직하십시오

계 2장 1~7절 / 배 혁목사

켄 블랜차드(Ken Blanchard) 라는 사람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든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 보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책 제목은 다 아실 것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칭찬이라는 것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람을 기분좋게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할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부어 줍니다. 제가 어떤 일을 한 후에, 저를 보시면 ‘수고하셨습니다. 좋았어요’ 하고 말씀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을 때에, 제가 한 일이 꼭 잘 해서 하시는 말씀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수고에 칭찬해 주시고 그런데 그 말씀은 저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최근에 여러분들은 무슨 일로 칭찬을 들으셨나요? 만약 칭찬을 받는 일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그 날 하루 다른 일을 할 때도 기분 좋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칭찬과 더불어 필요한 것이 책망입니다. 때로 잘못된 일을 바로 잡아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책망의 말은 마음이 상하고 받아들이기 힘들기도 하지만, 책망은 꼭 필요합니다. 책망을 통해서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던 잘못을 깨닫고, 바른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망의 가치를 아는 어떤 분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이제 더 이상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듣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칭찬과 책망을 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를 갔다가 환상중에 예수님을 뵈었는데,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편지하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각 교회들마다 칭찬할 것과 책망할 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땅에 있는 교회가 완전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칭찬받을 것이 있고, 또한 책망받을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각 교회들마다 칭찬과 책망의 말씀을 전하셨는데, 이는 일곱 교회에게만 주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일곱은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인데,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은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 교회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칭찬과 책망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서, 우리 교회가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지를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일곱교회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교회가 에베소교회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에베소교회를 칭찬하십니다. 예수님은 에베소교회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수고한 것에 대해서 칭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에베소 교회가 행한 행위와 수고, 인내를 알고 계시고,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가 한 일들을 모두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인 교회를 관심하시며, 건강하고 바르게 성장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에베소교회에서 잘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자칭 사도라고 하는 사람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낸 일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악한 것과 거짓된 것들을 분별하여서 선과 진리를 고수했던 것입니다. 에베소라는 도시는 믿음생활을 하기 위해서 특별히 분별력이 필요한 도시였습니다

에베소는 항구 도시였는데, 세계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상업을 위해서 모여서 커다란 도시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에베소에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형성되었습니다. 에베소에는 다양한 이방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데미 라는 신을 섬기는 당시 최대 규모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풍요를 상징하는 아데미여신이 자신들의 도시에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에베소에는 워낙 다양한 문화와 사상, 철학이 공존하니까 그곳에 세워진 교회가 제대로 된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거짓된 가르침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교인들이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고, 거짓 사도의 거짓을 분별해서 드러냈던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할 때에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세상적으로 관용되는 가르침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맞는지를, 에베소교인들과 같이 자세히 살펴서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 만연한 거짓을 구분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진리를 제대로 알기에 노력하는 것입니다.

전에 과테말라 선교를 갈 때에 주의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현지에서 환전을 할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위조지폐가 많기 때문에 환전을 하려면 미국에서 미리 하라는 것입니다. 은행에서 직원들에게 위조지폐를 분별하는 것을 가르칠 때에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진짜 지폐가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진짜 지폐를 바로 알때에,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위조된 지폐를 분별해서 알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과 거짓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과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거짓된 것을 분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진리를 제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자칭 사도라고 말하는 이들이 전하는 말씀을 비교하며, 뭔가 잘못된 것은 없는지를 자세히 살폈습니다.그리고 그들의 거짓을 발견하고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가 예수님께 칭찬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늘 진리의 말씀을 알기에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사탄의 거짓된 말에 속아서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때에, 사탄의 거짓을 분별하며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에베소는 마술과 관련된 일들이 널리 행해진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통해서 여러가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쓰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 얹으며 병도 낫고, 악귀도 떠나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마술에 관한 책들을 가지고 와서 사람앞에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태워버린 책들의 가격이 은 5만이었다고 합니다. 하루 일해서 은 하나를 벌게 되니까 137년 동안 일해서 벌어야 하는 돈을 다 불살라 버린 것입니다.

그 책들은 마술사들에게 살아가는 생계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진리를 발견했을 때에, 거짓된 마술과 관련된 책들을 다 태워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에베소 교인들이 되어서, 선과 진리를 탐구하며 지켜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적인 가치관과 이단적인 가르침들이 만연해 있습니다. 에베소보다 더합니다. 자세히 조사하지 않으면 분별할 수 없는 정교한 거짓들도 만연해 있습니다. 이럴 때에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더욱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에 더욱 힘쓰고, 그 말씀대로 인내를 가지고 열심히 행함으로 예수님의 칭찬받는 교회요 성도가 되어야 겠습니다.

 

2. 그런데 에베소교회는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또한 책망받을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에베소교회를 향해,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십니다.

어떤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고 그 여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열심을 냈습니다. 여자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해 줍니다. 처음에는 관심없던 여자도 남자의 열렬한 사랑에 감동되어, 나를 이정도 사랑해주는 남자라면 내 인생을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혼을 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남자의 여자를 향한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예전만큼 여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남자를 보면서 그 여자가 불만의 말을 합니다. “당신은 결혼 전과 결혼 후가 왜 그렇게 달라요?” 그랬더니 남자가 하는 말이, “잡은 물고기에게 먹이 주는 것 봤어?” 라고 하더랍니다.

이 말은 일본의 평론가 ‘오야소이치’라는 사람이 처음 쓴 말입니다. 그 분은 1900년대에 태어난 오래 전 분이십니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이 허용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세대가 변했습니다. 이런 말을 했다가는 남자가 쫓겨납니다.

여자들만 사랑이 식어진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처음 사랑을 버린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변함없는 첫사랑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예수님과 첫사랑을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만나 사랑했던 인물들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병고침을 받았던 이들, 귀신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이들, 죄인으로 정죄받다가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받은 이들은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의 경험이 있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하신 분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을 가지고서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의 순수함과 열정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뭔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만나 사랑가를 하는 교회를 예수님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가 무엇보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수고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도 말씀해 주십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잃어 버리게 되면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씁니까?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점심식사를 대접하시던 권사님께서 반지를 잃어 버리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있을 만한 곳은 다 찾아 보셨는데 반지가 나오지 않으니까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을 보던 성도들이 몰려 들어서 그 반지를 찾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은 그 어떤 보석보다 귀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은 잃어 버리지도 말아야하지만, 잃어 버릴 때에는 그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 어느것보다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잃어 버렸을 때에 기억을 더듬어서 내가 지나온 자리를 자세히 살핍니다. 우리의 첫사랑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로 와서 첫사랑을 늘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일에 바빠서 예수님의 사랑이 식어졌을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와야 합니다. 세상적인 재물과 즐거움이 더 사랑스러워 예수님의 사랑을 버렸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사랑의 십자가 아래로 다시 돌아와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하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들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첫사랑의 회복을 위해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이 떨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보다 세상의 성공과 명예, 재물을 사랑하냐고 예수님과의 첫 사랑을 잃어 버린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되어 예수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위해서 헌신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늘 첫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첫사랑의 순수함과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며, 헌신된 사역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교회에 첫 사랑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첫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 교회가 주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있다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교회에 대한 첫사랑을 가지고 교회의 연약함과 무지함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저와 여러분은 은혜로 여전히 사랑해 주고 계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에베소교회는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영적으로 혼란한 도시에 세워졌지만, 성도들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시험하여 거짓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고수하기 위해서 그들은 분별력있게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수고하고 인내하고 열심을 낸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에 책망할 것이 있었습니다. 첫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교회의 수고와 열심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시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돌아가신 십자가의 사랑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이 예배도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을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사랑했던 것들을 회개하며, 주님께 나의 온전한 사랑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이기는 자에게 상을 약속하고 있으십니다. 7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서 먹기에 금지된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승리한 교회와 성도는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먹게 되어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됩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행하는 모든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기를 원합니다. 늘 예수님의 첫사랑을 간직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행함으로 말미암아,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늘 누리면서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들을지어다

김정호목사 / 계 2:1-7

말씀을 들을지어다

반복된 사과는 진실성이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불러 올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진실성 없는 사과를 하는 사람이라고 인식하면 앞으로도 자신이 한 사과를 잘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도 자녀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는 서로 사과를 잘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지만 부모와 자녀 사이의 솔직한 대화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특히 부모들은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부모의 솔직한 모습은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자녀도 부모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은 대부분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잘 알지 못하고 말로만 사과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녀들도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먼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부모에게 사과하면 부모는 자녀를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싸우는 것은 서로의 인간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기에 앞서 자신의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서로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에베소는 아시아주의 수도이며 소아시아 지방의 정치, 경제, 교통, 무역,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아시아의 빛이라고 불리웠습니다. 주민은 원주민과 아테네에서 온 헬라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주후 29년에 여신 로마(Roma)와 씨아라를 경배하기 위한 신전이 세워져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 곳에는 유명한 아데네 신각이 있어 이교와 신비주의의 온상이기도 했습니다(행19:27). 이 신각은 대리석 120개로 구성된 장대한 이오니아식의 건축물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때(54년-59년) 설립한 것으로 3년간의 에베소 전도는 바울의 전도 여행 중에서 최장기간이며 절정기였습니다. 바울 이후에는 디모데가 이곳의 첫 감독이라 불리웠고(딤전1:3) 아볼로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이 곳에서 전도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와서 전도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라

본문 1-3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각 교회의 상태가 각양이기에 각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모습도 각양입니다. 한 주님은 교회의 신앙 상태를 따라 다르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교회의 주권자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른손에 별들을 잡고 금 촛대 사이에 거니신다는 두 모양은 목사 및 교회들을 사랑으로 감독하여 능력으로 보급하시는 친밀한 협조를 극히 아름답게 상징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하며 먼저 칭찬을 하셨습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황제 숭배 강요 때문에 심한 박해 가운데 있었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들의 내적 도전들이 많았으나 에베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고 복음에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높은 영적 식별력으로 이단들을 구별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와 교인들의 오랜 수고와 인내와 희생을 주님께서 다 아시고 칭찬하셨습니다. 신앙의 정절을 끝까지 잘 지켰습니다. 교회는 잘 참았고 성도들의 신앙을 잘 지켜주었습니다.

아들을 생각해서 모든 재산도 다 미리 상속해주시고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자 했던 한 서울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과 며느리가 할 말이 있다며 말하기를 “어머니! 저는 어머니랑 마음이 안 맞아서 같이 못 살겠어요! 이제 집을 나가주세요! 나가서 혼자 사세요!” “이런 짐승만도 못한 녀석들....” 어머니는 그날 마음에 너무나 큰 상처를 받고 아들과 며느리에게 버림받고 돈도 없이 집을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당장 먹고 살 곳도 없고 돈도 없고 정처 없이 그저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 무조건 번듯한 동네를 찾아가서 벨을 누르고 파출부로 써달라고 슬픔을 참으며 할머니는 간절히 부탁을 하면서 돌아다녀야만 했습니다. 할머니는 심신이 모두 지친 가운데 계속 퇴짜를 맞다가 어느 집에서 할머니를 보고 그 집 주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저희 집에 아버님이 병환으로 누워계시는데 혹시 외람되지만 가능하시다면 병간호 좀 해주시고 그냥 말벗도 좀 되어주시겠어요?” 아들과 며느리에게 쫓겨나 거처와 돈이 없었던 할머니는 “네! 그럼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머니는 그날부터 그 집에 들어가 사랑과 정성을 다해 그 집 환자 할아버지를 돌보고 친구처럼 말벗이 되어주었습니다. 어느덧 그렇게 1년이 지날 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고 그 집 주인 부부는 어느 날 이렇게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저.....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요. 저희 어머니가 되어주세요! 아버님도 할머니를 너무 좋아하시고 저희 부부도 우리 어머니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셔 어머니가 안 계셔서 어머니로 꼭 모시고 싶어요. 괜찮으시면 저희 어머니로 모시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그렇게 그 할머니는 그날부터 뜻밖의 간청을 받고 마치 재벌 동네 같은 지역에서 착하고 마음씨 좋은 아들과 며느리 또래의 그 집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와 아들 부부와 함께 고급 승용차를 타고 밖을 나갔는데 정말 우연히 그 할머니의 독자였던 친아들과 며느리를 만났습니다. 아들이 오랜만에 어머니를 뵈니 놀랍게도 훤해진 어머니는 예전 모습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매우 럭셔리하면서도 우아한 옷과 장신구를 한 어머니는 누가 봐도 한눈에 재벌 집 마나님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묻고는 당시 사업에 어려움을 겪게 된 그 아들은 다시 보게 된 어머니가 돈 좀 있어 보이니 그 아들과 자부가 말하기를 “어머니! 다시 우리 집에 들어오셔서 사세요. 저희가 잘 모실게요!”하니 할머니 왈 “누구신지요? 나는 당신과 같은 아들과 며느리를 둔 적이 없습니다. 내 아들과 며느리는 저기 있고 내 남편도 있습니다.” 그 할머니는 그렇게 배반의 늪을 지나 신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일로 우리에게 많은 느낌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부모와 자녀도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타난 현상을 잡으려고 따라다니다가는 근본과 정체성을 다 잃어버립니다. 끝까지 효도해야 합니다. 황제 숭배와 거짓 교사들로 인해서 고난이 많았으나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은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신앙 생활을 하였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것처럼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본문 4-5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성숙한 에베소 교회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점이었으나 그 단점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뜨거운 형제애를 가졌으나(행20:37) 선악을 가지고 순교적 정절을 수호하는 중에 자연히 첫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다가 보니까 싸움이 되었고 사랑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의 신앙의 정절은 칭찬하시면서 사랑을 잃어버린 점을 책망하셨습니다. 교리적 순결과 윤리적 실천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는 필요 조건인 것입니다. 처음 사랑으로 복귀하는 세 가지 과정이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의 아름다운 사랑의 시절을 생각하며 그 때와 현재와의 현격한 차이를 생각함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의 고침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을 고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회개를 원하신 것입니다. 셋째는 처음 행위를 행하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열매가 따라야 합니다. 잘못된 자리에 그대로 머무는 한 참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말이 아니라 행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기신다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없어지고 그 도시 전체가 황폐화할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떠난 교회와 가정과 성도는 실상은 죽은 것이고 저주이고 지옥인 것입니다.

무엇을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든 늘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입니다. 감사가 체질화되어야 하고 그것이 응집되어 표현되는 곳이 바로 성만찬 예식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빵과 포도주를 주님께 받들어 올리고 하나님이신 주님은 그 선물을 온전히 받으신 후 우리에게 돌려주어 양분과 힘이 되게 하십니다. 이 신비로운 교환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감사와 나눔의 한복판에 들어섭니다. 세상에 나가서도 이 감사를 매 순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과 그분이 바라시는 평화를 생각하며 다른 사람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은 우리가 정복하거나 소유하거나 지켜 내거나 악착같이 붙잡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풍성한 선물이기에 우리는 나누고 아낌없이 베풀면 됩니다. “아니, 나는 가진 것이 너무 적어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몇 마리분이라고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나누어 주십시오! 그러면 몇 배로 불어납니다. 만나는 모든 이에게 기쁨으로 베풀면 우리가 가진 작은 빵 조각과 몇 마리의 물고기가 배가될 것입니다. 지식과 애정과 친구를 마치 자신만의 재산인 듯 움켜쥐지 마십시오!. 양식도 사랑도 지식도 나누면 몇 배로 불어나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그것이 성만찬의 삶이며 주님이 말씀 하시는 거룩한 환대의 삶입니다.

사랑은 베푸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며 성도도 아닙니다. 주님이 떠나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폐허로 돌아가 일부 철로가 통하고 몇 개의 움막이 있을 뿐으로 이 예언의 성취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며 다 없는 것입니다. 교회와 가정과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모든 것이 회복되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으라

본문 6-7절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니골라당의 특징은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또 행음하게 하였습니다. 발람의 행위와 동일시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괴하는 거짓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무율법주의이며 무도덕주의였습니다. ㉠율법의 때는 지났으므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은 악이며 영은 선하므로 육신은 무슨 일을 하든 관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보호를 받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행하든 해받음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진리를 사랑함은 비진리를 미워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그가 미워하시는 것을 같이 미워함에서 나타납니다. 중요한 구절이 주어질 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일곱 교회 모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신령한 귀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리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이기는 자는 현재분사형으로 계속적으로 이긴 자입니다. 계시록에서 15회나 사용되었습니다. 타협이 없는 박해의 결정에서 이기는 자는 곧 순교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에덴 동산에 있던 나무로(창2:9,3:22)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잃어버린 과실이 신천신지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은(22:2) 신비로운 연관입니다. 이는 곧 영생을 표시하며 범죄로 잃어버린 영생을 회개한 자가 얻는 신천신지에서 다시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믿는 자를 위해 늘 상을 예비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빼앗아 가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자기 방법대로 할 때 더 잘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떻게든 자기 힘을 무언가를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합니다. 자기 노력의 결과는 처절한 절망입니다. 이런 패턴을 극복하는 길은 성경을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단면적을 보지 않고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 섭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 인물들의 삶을 읽어 가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연구하면 그들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했던 대로 따라 해 보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면 눈이 가려지지만 순종하면 눈이 열립니다. 하나님 뜻을 깨닫습니다. 더 높은 차원의 영적 성숙을 맛볼 수 있습니다. 순종의 영이신 성령님이 도와주셔서 들을 귀가 열리고 이전에 못 보던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애써도 내 방법은 차선을 뿐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최선입니다.

하나님의 낙원은 궁극적으로 구원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게 될 하나님 나라 자체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에 모두가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공이고 승리이고 행복이고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낙원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자가 최후에 웃는 자이고 잘 믿는 자입니다. 죽음과 고난이 존재하지 않는 영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권면대로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에베소 교인들은 첫창조 때에 에덴 동산이라 했으며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할 예루살렘 즉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며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 이런 복이 임하게 되고 낙원에서의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면 모든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어려운 세상이지만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며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기 위하여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 2장 1~7절 / 김민호목사

5월달은 ‘열매’, 특히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요한계시록 2장에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 나오는 ‘열매’에 대해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겠습니다.

에베소는 B.C 130년 경에 로마제국에 편입되었으며 소아시이의 수도였습니다. 에베소는 상업의 요충지였으며 중요한 고대 유물인 대극장과 아데미(아르테미스) 신전 등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2차 전도 여행 중에 아데미 신상을 만드는 사람들과 대립하며 일대 소동이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3년간 에베소 지역에 머물며 눈물로(행 20:31,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교회를 세웠으며, 에베소 교회는 디모데가 목회한 장소 였으며, 사도 요한이 마지막 생애를 보낸 곳(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 사면되어 밧모섬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에서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 기록한 것으로 추정)이기도 합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칭찬과 책망, 그리고 권면이 다 포함 되어 있는데. 먼저 칭찬이 말씀이 나오는 오늘 본문 1절을 읽어 드립니다.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아멘.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라고 했는데, 편지하라고 명령은 누가 한 것이고, 명령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기본적으로 요한 계시록 1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라고 시작하기 때문에 편지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명령을 받는 사람은 사도 요한일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좀 더 정확한 내용이 1장 9~20절에서 나오는데,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있을 때(유배되어서 섬에 갇혀 지냄) 주의 날(부활하신 날, 안식일)에 성령에 감동되어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은 “네(요한)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음성의 주인공을 보았고, 그 분은 ‘인자 같은 이’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러면 편지를 보내라고 하신 분이 누구인지 명확해졌습니다. 본문 1절 첫 부분에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이 말씀에서 ‘사자’라는 단어는 원문에서는 ‘천사(앙겔로스, angel)’이고, ‘편지하라’는 단어는 ‘기록하라(그라폰, write)’로 되어 있습니다.

원문 그대로 번역한 것이 훨씬 더 좋았을 겁니다. 신천지는 이만희가 ‘사자’라고 주장합니다. 이만희가 천사가 되었다는 것일까요? 원문을 보여주며 사자가 천사라고 말해주면 신천지는 자기들은 원문 성경이나 영어 성경을 믿지 않고 오직 “개역한글”성경만 진짜라고 믿는다고 우깁니다. 요한계시록 읽다보면 신천지가 장난쳐 놓은 일들 때문에 여기저기서 화가 납니다.

1절에서 원문대로라면 교회마다 고정 배치된 천사가 있는 것인가? 천사가 왜 교회에 머물고 있나?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히브리서 1장 4절에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는 말씀이 있습니다.

천사는 우리를 돕기 위해 보냄을 받고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교회에 천사가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인 요한이 어떻게 천사에게 편지를 써서 전달 할 수 있나? 천사가 인간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수행하는 존재는 아니지 않는가? 라는 의문도 생깁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천사가 교회의 지도자나 목회자 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천사에게 보내기 위해 기록하라”는 것이 원문의 내용이기 때문에 말씀 그대로 생각해야지 성경 내용을 임의대로 변형시키면 안 됩니다.

요한은 자기가 본 그대로의 사실만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기 때문에 “편지하라”가 아닌 “기록하라”는 말씀에 충실하면 됩니다. 일곱 교회에서 그 기록된 내용이 전달되는 방법은 사람을 통해서 전해지겠지만, 그 내용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실체인지 아닌지는 영적인 전달이 되어야 말씀의 권위가 온전해집니다.

요한이 기록한 내용을 에베소 교회에서 지도자이든, 성도든, 누군가가 읽을 때에 그 말씀이 진리임이 깨달아지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활이시고, 천사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편지를 읽는 에베소 교회의 사람들에게 그 내용의 진위를 올바르게, 그리고 온전하게 깨달아지는 영적 분별이 되도록 충실한 메신저 역활을 할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생각하면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보내도록 기록하라”는 말씀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서신학인 신약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면밀하게 잘 살펴보고 전달하려는 편입니다. 여러분은 ‘사자, 편지하라’는 번역이 본문과 다르다는 사실정도만 상식적으로 알고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1절 후반부에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앞서 1장 29절에서 일곱별은 일곱 천사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말씀 하셨는데, 인자 같은이, 곧 예수님은 자신의 권능을 상징하는 오른손으로 일곱 천사들을 붙잡고 계시고, 일곱 교회 사이를 거니시고(항상 함께하심) 계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천사들을 통해 교회를 굳게 붙잡아 주시고 계시며, 교회와 동행하여 주시기를 멈추지 않는 분이심을 명확히 밝혀 주시는 이유는, 이 편지를 읽는 교회들이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임마누엘’의 약속을 지켜가고 계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고 소망을 잃지 말라는 강력한 응원과 격려를 주시기 위함이십니다.

그런 응원과 격려를 담은 칭찬이 말씀이 2~3절에 있습니다.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아멘.

“너희들 에베소 교인들아, 정말 잘 수고 많았다, 잘 참아내 주었다, 잘 견디고 게으름 피우지 않은 것을 내가 잘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 하신 이런 칭찬의 글을 읽은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의 한량 없는 보살핌의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바다가 되었을 겁니다. 사람은 자신의 진심과 노력이 인정 받을 때 가장 큰 보람과 감격을 느낍니다. 에베소 교회가 바로 그런 기분이었을 겁니다.

에베소 교회가 참고, 수고하고, 게으름 피우지 아니한 것만 잘한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자칭 사도라고 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의 거짓을 밝히 드러낸 것도 잘했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믿음, 헌신, 열심 등에서 뛰어난 본보기를 보였던 것 같습니다. 우상의 도시이며 향락이 넘쳐나는 도시에서 이런 교회가 세워진 것은 교회 설립자인 바울의 남다른 수고와 교인들의 눈물어린 기도가 어우러진 아름 다운 열매였습니다.

아무리 오랜 고난의 시간이 오랫동안 흐른다고 하여도 진리는 반드시 승리하며, 아무리 거짓이 사람들을 괴롭게 하여도 진심은 반드시 통하게 되어 있으며, 아무리 핍박과 환란이 몰려와도 믿음의 수고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로 수확하는 기쁨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런 사실을 증명해 보여 주었습니다.

3절 후반부에 “네(에베소 교회)가 내 이름을 위하여 견녀낸 것을 내가 아노라”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을 읽는 동안 성도들은 함께 부여잡고 감격하여서 울다가 웃다가 찬앙하며 기도하며 큰 영광을 돌렸을 겁니다.

이렇듯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이루어질 계시의 책이지만 “오직 예수” 이름 하나를 굳게 붙잡고 묵묵히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참된 위로를 가져다 주는 강력한 소망의 책입니다. 상황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의 책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고 계심을 확신시켜 주시는 책입니다.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말씀 하신 수고와 인내와 열심의 칭찬이 우리 교회의 미래에도 반드시 내려지기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의 주인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세상 끝날 까지 결코 교회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절대로 교회와 성도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항상 주권과 권능을 행사하셔서 거룩과 영광으로 충만하게 역사하십니다.

일곱 별을 오른손에 붙잡고 계시며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인자 같은 이 어린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교회와 항상 함께 하심을 굳게 믿으십시오.

지금 당장은 힘들고 답답하지만 묵묵히 맡은 자리에서, 수고하고, 인내하고, 열심을 내고, 악을 물리치고, 거짓을 멀리하는 일관된 신앙을 유지하셔서 하늘로부터 칭찬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 최고의 상급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에베소 교회에게 전하는 편지에는 칭찬에 이어서 책망의 말씀도 있습니다. 4~6절을 읽어 드립니다.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아멘.

에베소 교회에 첫 번째 책망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처음 사랑이 무엇일까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무엇인지는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씀 속에 답이 있습니다.

처음 에베소 교회가 세워졌을 때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 온 마음으로 함께 예배하던 그 감격,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던 그 열기, 교회의 구석 구석을 자발적으로 닦고 가꾸어 가던 그 헌신, 고통스러운 핍박과 환란속에서도 과감히 죽기까지 순종하던 그 충성, 부활 영생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소망으로 언제나 기쁨이 넘치던 그 행복, 이 모든 것들이 처음 행위들이었습니다.

이 처음 행위들을 가능하게 했던 토대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증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수고와 인내로 칭찬 받았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처음 행위가 열정적이었는지를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어느시점부터) 떨어졌는지도 모르게 이런 처음 행위들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이런 처음 행위를 되찾기 위해서 “회개하라”고 강력하게 권면 하면서,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처음 행위,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촛대는 교회를 상징하며, 옮긴다는 것은 더 이상 예수님이 거기에 함께 있지 아니할 것이며, 천사들도 떠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인되시는 예수님이 떠나버리면 더 이상 교회는 교회가 아니게 됩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이 떠나가시면 교회는 더 이상 살아있는 교회가 아닌 것이 됩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말씀은 마치 이스라엘 성전이 멸망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가신 것과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함께하지 않겠다, 떠나겠다, 내버려 두겠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 이런 의미를 지니가 촛대를 옮긴다는 것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징계와 심판을 경고하는 말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버려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두렵고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전처럼 주인되시며 친구 되시는 예수님과 항상 함께 계시기를 원한다면 오직 “회개”하는 것 뿐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방법에 다른 것은 다 필요하지 않습니다. 처음 사랑, 처음 행위의 회복은 오직 회개뿐이라는 사실만 기억하면 됩니다. 어디서(언제)부터 처음사랑과 처음 행위가 떨어졌는지 점검하면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또 회개해야 합니다.

6절에 또 다른 책망이 나오는데, 에베소 교인들이 니골라 당의 행위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니골라당의 행위가 무엇인지는 여러 해석들이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우상숭배를 하거나 이교도의 풍습을 따라 음란을 저지르는 행위, 이단사상에 빠져서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키려 하는 행위, 거짓에 속아 넘어가서 배교하는 행위 등을 말합니다. 니골라당의 행위는 나쁜 생각, 다른 복음,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들이 혼합된 것을 말한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니골라당의 행위를 따르는 것은 오직 예수 구원의 진리를 저버리고 믿음에서 이탈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당연히 책망 받을 만한 잘못된 행동입니다. 기회 조차 줄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는 책망할 것도 없기 때문에 이 책망은 이미 은혜를 받았던 자들에게 용서와 돌이킴의 기회를 주기 위한 책망입니다.

칭찬을 받고 눈물바다를 이뤘던 에베소 교인들은 책망을 받고서는 심히 부끄럽고 가슴이 뜨끔했을 겁니다. 이러다가 교회가 사라지고, 버려진 고아처럼 진노의 대상이 될까봐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모든 교인들은 회개하라는 말씀 앞에 엎드려 통회하고 자복하며 참된 회개의 시간을 가졌을 겁니다.

신앙생활은 처음과 지금과 나중이 일관되게 유지되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따라 사는 길 뿐입니다. 성령을 무시하거나 소멸(거부, 불순종)되어 버리면 자꾸 딴 생각, 딴 길, 딴 마음이 가득하여 좋아보이고 즐길거리가 많은 세상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립니다.

에베소 교회의 칭찬과 책망이 우리 교회, 내 믿음, 우리 가정의 화목일 이루는데 잘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칭찬 받을 만한 것도 분명 있지만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잃어버려서 책망 받을 만한 일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처음 사랑, 처음 행위로 돌이키는 방법은 오직 회개 뿐이라는 성경 말씀을 모른체 해서는 안 됩니다. 전심으로 기도하고 진심으로 참회하며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소망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굳센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에서야 5월의 주제인 ‘열매’가 나옵니다. 우리 함께 7절을 읽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아멘.

7절에는 권면과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권면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권면은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한 후 맨 마지막에 마치 후렴구처럼 동일하게 반복되어 나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직접 내려주신 말씀의 권위가 가득 담긴 말씀입니다. 이 편지가 사람의 생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겸손한 자세로 읽고, 받아 들이고, 잊지말고 지켜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귀 없는 자들이 되어서 칭찬과 책망과 권면 약속의 말씀 듣기를 거부 하거나, 가볍게 여기거나, 읽고도 아무 생각없이 이전과 동일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는 이중적인 암시가 담긴 말씀입니다. 어느 시대나 성령의 음성을 들을자는 들을 것이고 듣지 않으려는 자는 듣지 않을 것입니다.

인자같은 이 어린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으로 약속하셨고, 기록으로 남겨 놓으셨습니다. 이기는 그가 되어야만 낙원에도 갈 수 있고, 거기서 생명나무 열매도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기는 그”가 바로 내가 되고, 우리 가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이겨내야만 낙원에 갈 수 있다는 말일까요? 누가 이기는 그가 될 수 있을까요?

무엇을 이겨야 되는 것을 말하기 전에 누가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아무나 이기는 그가 되지 못합니다. 누가 이기는 그가 될 가능성이 있는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성령의 말씀을 듣는 겁니다.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으면, 듣고도 무반응 이면 이기는 그가 되기는커녕, 어떠한 이기려는 시도 조차도 진행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기는 것에 대해 끊임 없이 말씀하고 계시지만, 내 스스로 듣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이기는 길로 가지 않겠다고 스스로 거부를 하는 것이며, 이기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불순종의 행동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를 열고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된 자에게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내용을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이겨야 하나요? 무엇을 이겨내야 하는지는 각자개인의 사정상 다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더러운 죄와 악, 거짓, 불순종, 교만, 시기, 질투, 모함, 게으름, 불순종, 나쁜 생각과 품이 없는 말과 행동, 모든 것에서 이겨내야 합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에게 편지를 보냈으니 이 편지의 내용을 기초로 이겨내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일곱 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① 우리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끝까지 유지되도록 이겨 내야 합니다.

② 악한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③ 예수 이름으로 참고 견디고 게으름을 이겨내야 합니다.

④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버리지 말도록 오직 회개하며 이겨내야 합니다.

⑤ 촛대를 옮기시는 분을 두려워 하며 죽도록 충성하며 이겨내야 합니다.

⑥ 니골라당의 행위(우상숭배, 음란, 가증한 행위, 배교...)와 싸워 이겨내야 합니다.

⑦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를 열고 들으며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가 2천년 전에 에베소 교인이었다면 이렇게 이겨내면 됐을 겁니다. 이렇게 이겨내야만 낙원에 들어가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이 오직 믿음과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성령으로 사는 자들이기게 당연히 성령의 열매들이 맺어지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귀에 끊임 없이 열매 맺는 방법, 이기는 방법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를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무엇이든지 말씀 하시는데로 고치고 바꾸고 돌이키겠다는 결단으로 나아가면 그 길이 곧 이기는 길이 됩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낙원에 들어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며 영원한 영광 속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인자 같은이가 말씀하시고 성령이 귀 있는 자들에게 말씀 하시는 칭찬과 책망과 권면과 약속의 말씀을 머리로 듣고, 가슴에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으로 여러분을 축복하며 말씀을 마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일평생 성령 충만을 구하며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자 갈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민감하게 듣고 반응하는 귀 있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 안에서 전심으로 기도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돌이키고 변화되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와 악과 죽기까지 싸워 끝내 이겨내시는 승리자가 되어 생명나무의 열매를 드시는 면류관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온전케 하는 7대 비밀

강해설교연구원 / 계 2:1-3:22

이 시간에는 “온전케 하시는 7대 비밀”이라는 제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온전입니다. 마5:48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고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도 13년의 침묵이 흘렀는데 13년 후 그 침묵을 깨고 하신 말씀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하셨습니다.

이 완전은 하나님으로서의 완전이 아니라 신자로서의 완전입니다. 우리 믿음이 온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자로서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요한계시록의 아세아 일곱 교회에 편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봅니다. 여기에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7대 비밀이 있습니다.

 

1. 온전함의 비밀은 사랑입니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는 행위 수고 인내 성결 영분별 충성 등 모두 갖춘 교회였지만, 처음 사랑을 잃었습니다. 처음 사랑이란 신혼의 첫사랑과 같은 것으로 그것을 잃었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영원히 함께하시므로 임재가 떠난 것이 아니고 그 임재의 경험이 사라진 것입니다. 뭔가 주님의 마음을 서운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에베소 교회가 일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마음을 드려야 할 주님께는 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함께하시는 임재를 잃어버렸습니다. 독수공방하듯 고독하고 비참한 모습입니다.

에베소교회를 통해서 계시하신 온전함의 원리는 사랑의 비밀입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모든 면에서 우수해도 주님에게 대한 사랑을 잃는다면 주님께서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결혼의 목적이 살림을 잘함이 주목적이 아님과 같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너무 모르고 아내가 남편을 너무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포함한 그 무엇도 하나님께 몸과 마음 드리는 예배와 기도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 머물지 않고 이웃 사랑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고전13:1-3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 아무 것도 아니요 -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요,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면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2019년부터 3년간의 코로나 소동이 교회에 치명적인 피해가 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방해를 받고 이웃 사랑인 심방을 멈추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온전하게 되는 비밀입니다.

 

2. 온전함의 비밀은 환란입니다.

계2:10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인데, 성경에서 10은 연단의 수, 가득한 만수입니다. 우리가 성숙하고 온전해질 때까지 연단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고난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119:67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했고, 71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했습니다.

고후7:1에도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 했습니다. 바울도 몸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계7:14에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했는데, 이 셀 수없이 많은 흰옷 입은 무리는 바로 우리입니다.

그래서 히12:12-13에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했듯, 하나님을 섬김과 이웃 사랑에 부족함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순종함에 부족하거나 처리할 부분들은 우리의 삶에서 자꾸 테스트 될 것이고 어느 한 과정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도 고난 중에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이처럼 고난을 통해 체득한 교훈은 우리에게 흔들림이 없는 산 지식이 될 것입니다.

 

3. 온전함의 비밀은 말씀입니다.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인데, 계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하셨습니다. 여기 “검”은 말씀을 가리킵니다. 버가모 교회가 이단에 빠진 것은 말씀에 대한 무지와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문제는 발람의 교훈 같은 니골라당의 교훈 때문이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인계로 유혹하여 우상에 빠뜨린 죄입니다. 이처럼 니골라당은 영과 육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영지주의로 죄에서의 자유를 죄짓는 자유로 오해했습니다. 그 결과 풍성했던 만나는 감춰지고 교회는 세속화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말씀 떠나면 안 됩니다. 말씀이 우리를 온전하게 합니다. 딤후3:16-17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요15:3)다고 하셨듯이 성경을 읽어야 마음이 진리로 정리되면서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말씀의 수준도 높아져야 합니다. 히5:13에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 했습니다. 이젠 자랄 만큼 자랐으니 예수 구원만 강조하지 말고,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의의 도도 가르쳐야 합니다. 바울이 무법한 행실을 가진 총독 벨릭스에게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와 함께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행24:24-26) 했습니다. 사랑만 전할 것이 아니라 공의도 가르치고, 복음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의의 도도 가르치고, 들음에 그치지 않도록 신앙훈련에 들어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 읽기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4. 온전함의 비밀은 성령입니다.

계1: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 퍼뜨린 것은 세속주의입니다. 바알이란 육신 잘되자는데 초점을 맞춘 현세적이고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입니다(요일2:15-16). 두아디라 교회는 계2:19에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하실 정도로 건실한 교회였지만, 교인들이 길드(조합)에서 일자리를 얻고 살아가다 보니 하나님과 바알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세속화입니다.

세속은 왕후 이세벨처럼 왕적 권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 위력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슬람이 왜 문제입니까? 종교가 국가권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소돔에 갔던 의인 롯의 가정이 세속화되었듯 세속의 위협만큼 빠르고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온갖 매체를 통해서 혹은 매체가 없어도, 세속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예고 없이 떠밀려 들어오고 사람들의 마음을 세속화시키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워 선악과를 마음으로 따먹는 것은 1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이기는 길은 엎드려 기도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성령 충만이 그 비밀입니다. 그래서 갈 5장에서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비교하면서 갈5:16에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육신대로 살지 않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충만 받는 법은 몸과 마음을 드려 겸손과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입니다.

 

5. 온전함의 비밀은 행함의 믿음입니다.

계3: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 행위를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2번이나 "일깨라"고 강조하십니다. 마치 선교교회가 선교하지 않는 것처럼,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이었기 때문에 실상은 죽은 교회였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에 게으르면 답이 없습니다. 잠24:33-34에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했습니다. 영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결과 생명책에 기록된 거룩한 성도도 많지 않았고, 부흥의 일군도 없었고,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3:3에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하셨는데, 이건 심판의 경고입니다. 한국교회가 제자교육으로 부흥된다고 좋아하더니 큰일났습니다. 대부분 성경공부에 그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가면 교회는 우리 시대로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사는 길은 “일깨라”는 말씀처럼, 교인들을 다시 깨워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의 신분에 맞게 신부로서 성도로서 성전으로서 성령의 동역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6. 온전함의 비밀은 인내입니다.

10절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눅8:15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한 말씀이 생각나는 구절입니다. 인내란 기록된 말씀에 생명을 거신 그리스도의 인내처럼 끝까지 머물러 계속하는 마음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아마 성경도 갖추지 못하고 화려한 설교도 없었고, 전해 들은 성경 몇 마디 소개함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전1:6에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성경의 한 마디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실천함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약1:4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듯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온전한 인내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100배의 열매를 맺는 옥토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7. 열심의 비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계3:19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라오디아 교회는 초대형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인 부요와 형통을 영적인 부요와 형통으로 착각하고, 자만한 결과 열심을 잃었고 그 결과 주님은 그들과 멀리 계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의 심장이 멈추면 살 수 없듯이 열심 사라지면 그 믿음은 죽습니다. 눅12:49에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하셨는데, 열심의 불이 사라지면 부흥도 멈추고 맙니다. 신앙의 뜨거움은 감정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학문은 없었지만 열심이 있었기에 온전한 주님의 제자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스펄전 목사는 “주님을 향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 열두 명만 있다면 이 런던의 삭막하고 고독한 환경을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루 세 번씩 감사하며 기도하던 다니엘과 같이, 날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제하던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와 같이 뜨겁게 하나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함을 원하십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십시다. 그것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비밀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비밀은 사랑 고난 말씀 성령 행함 감사 열심입니다. 이 중 하나라도 붙잡읍시다. 그러면 다른 것도 지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실 가장 온전한 믿음에 도달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생명나무 같은 성도

김정호목사 / 계 2:1-7

독일 나치에 체포되었던 유대인 정신과 이사 빅터 프랭클은 그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 첫날까지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증언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수감자 대부분이 성탄절에는 석방되어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다가와도 희망적인 소식이 들리지 않자 그들은 용기를 잃었다. 정말감은 그들의 저항력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고 그중 많은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다” 소망은 고난을 인내할 힘을 줍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이를 악물고 그냥 버티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뎌 낼 힘을 공급받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뜻은 미래와 소망과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심과 공의가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십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악인이 형통하고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인데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상속권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롬8:18). 선을 이루기 위해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악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영광의 아침을 맞이할 그날을 고대하며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때(54-59년) 설립한 것으로 3년간의 에베소 전도는 바울의 전도여행 중에서는 최장기간이며 절정기였습니다(행20:31). 바울 이후에는 디모데가 첫 감독이라 불리웠습니다(딤전1:3).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와서 전도하였다고 합니다.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각 교회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각양입니다. 교회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주님은 교회의 신앙 상태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교회의 주권자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른손에 별들을 잡고 금 촛대 사이에 거니신다는 두 모양은 목사 및 교회들을 사랑으로 감독하며 능력으로 보급하시는 친밀한 협조를 극히 아름답게 상징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칭찬과 책망이 있었습니다. 오래되고 권위 있는 교회가 흔히 가지는 장점과 단점입니다. 오늘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신 내용을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고 더욱 변화되어 순종하고 충성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성숙한 신앙

 

본문 2-3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와 성도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거짓 사도들을 드러낸 것을 주님이 다 아셨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높은 영적 식별력을 뜻합니다. 당시 순회 전도자들을 사도라 칭했고 그 중에는 거짓된 자들이 많았습니다.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계는 예수님도(마24:11) 베드로도(벧전2:1) 바울도(빌3:18) 사도 요한도(요한일서4:!)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에베소 교회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정절을 의미합니다. 선악의 식별력과 더불어 성숙한 신앙을 나타낸 것입니다. 당시 황제 숭배의 강요 때문에 교회는 박해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자들의 먹이가 되고 화형으로 죽는 가운데서도 에베소 교회는 잘 참았고 그리스도의 믿음을 지키고 신앙의 정절을 끝까지 지켰던 것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교회와 성도들의 모든 행동과 삶을 주님께서는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한 지질학자가 사막을 건너는 도중에 오아시스를 보고 생각했습니다. ‘사막은 이리도 척박한 땅인데 오아시스에는 어떻게 물만 있다고 야자수와 다양한 풀들이 자랄 수 있는가?’ 그리고 혹시나 싶어서 사막의 지질을 조사해봤는데 전혀 뜻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막은 물이 없어서 풀이 자라지 못할 뿐이지 모래는 매우 비옥했고 일조량이 풍부해 물만 충분히 수급된다면 굉장히 비옥한 토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하라 사막에는 오아시스 근처에 농장을 만들어 야자수, 무화과, 올리브, 포도 등을 재배하고 있고 미국 아리조나의 임페리얼 사막에는 후버댐의 물을 끌어다가 품질 좋은 목화와 옥수수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척박한 사막에 물만 공급되면 비옥한 토지가 되는 것처럼 시들어가는 우리의 삶에 진리의 말씀이 들어오면 생명의 삶으로 변화됩니다. 우리 인생이 메마른 사막과 같이 황량하게 느껴질지라도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생명수 되신 예수님을 온전히 우리 안에 모시기만 하면 됩니다. 유일한 구원의 방법인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면 갖게 되는 새 생명과 새 성품으로 새 생활을 하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우리 영혼에 사막지대가 있다면 생수의 말씀으로 꽃이 피게 합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삶과 교회를 지배하시고 통치하시고 공급하십니다. 고난과 환란 가운데서도 잘 참고 견디며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사탄을 추방하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환란과 핍박이 없던 시대는 없습니다. 늘 대비하고 각오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황제 숭배 강요 때문에 심한 박해 가운데 있었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들의 내적 도전들이 많았으나 에베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고 복음에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순교적인 자세로 굳게 지켰습니다. 성숙한 신앙으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처음 사랑을 회복함

본문 4-5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성숙한 교회인 에베소 교회의 유일한 단점이었으나 그 단점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한때 뜨거운 형제애를 가졌으나(행20:37) 선악을 가리고 순교적 정절을 수호하는 중에 자연히 교회의 첫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의 정절을 칭찬하시면서 사랑을 잃어버린 점을 책망하셨습니다. 교회의 순결과 사랑의 실천은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는 필수조건입니다. 처음 사랑으로 복귀하는 세가지 과정을 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의 아름다운 사랑의 시절을 생각하며 그 때와 현재와의 현격한 차이를 생각함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회개하여 과거로 돌아감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처음 행위를 행하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열매가 따라야 합니다(마3:8). 잘못된 자리에 그대로 머므는 한 참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말이 아니라 행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신다는 경고입니다. 우주적 교회에서 떠난다는 것이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에서 떠나며(엡1:22) 본체인 포도나무에서 베임을 당하는 것을 뜻합니다(요15:6). 눈에 보이는 형제적인 교회가 있든 없든 그는 벌써 참 교회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재 에베소는 폐허로 돌아가 일부 철로가 통하고 몇 개의 움막이 있을 뿐으로 이 예언의 성취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의 리차드 박사 연구팀은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연구팀은 먼저 평소 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다른 사람을 돕는 생각을 회상해 달라고 한 뒤에 뇌의 움직임을 연구했습니다. 그러자 남을 돕는 생각만 해도 뇌의 전두엽이 활동하면서 행복감을 느낄 때와 똑같은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다음으로는 평소에 봉사활동을 자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최소 5번은 아무에게나 어떤 종류의 친절이든지 베풀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관련 없는 것처럼 인생의 만족도를 조사했는데도 삶의 만족도가 큰 폭으로 높아졌습니다. “자신이 행복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라”가 이 연구팀이 내린 최종 결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따라 살 때에 저절로 행복은 찾아옵니다. 사랑을 베풀고 자비와 양선을 실천하고 이런 놀라운 마음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만족이자 최고의 행복임을 기억하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소한 친절의 습관을 갖는 것은 내가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을 받게 되고 행복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명령과 권면은 어떤 희생의 값을 치루더라도 꼭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에 반드시 완전하게 이루어집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일을 하느라고 사랑을 버리면 모든 것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가정과 우리 마음에 첫 사랑을 회복하여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니골라 당을 미워함

본문 6-7절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예루살렘 교회의 7집사의 하나인 안디옥사람 니골라가 후일에 배교하여 이 당의 시작이 되었고 그의 추종자들이 엄격한 율법주의 반발로 무율법주의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니골라당의 특징은 우상의 제물을 먹게하고 또 음행하게 하였습니다(14-15). 무율법주의이며 무도덕주의였습니다. 저들은 ㉠율법의 때는 지났으므로 지킬 필요가 없다 ㉡육신은 악이며 영만이 선하므로 육신으로 무슨 일을 하든 관계없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보호를 받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행하든 해받음이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니골라당을 미워한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사랑함은 비진리를 미워함에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그가 미워하시는 것을 같이 미워하고 그가 사랑하시는 것을 같이 사랑함에서 나타납니다. 다시 에베소 교회의 장점을 들어 칭찬하신 것입니다. 신령한 귀로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만이 아닌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보내신 말씀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들어야 할 나에게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를 동경하던 한 청년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저도 선생님과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하고 공부를 해도 선생님과 같은 말과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청년을 데리고 강가로 갔습니다. “내가 시키는 일을 하면 그 답을 주겠네. 강의 깊은 곳으로 가서 숨을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았다가 나와 보게. 다만 숨을 오래 참을수록 자네가 답을 얻을 확률은 높아지네.” 청년은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숨을 참았다가 나왔습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청년에게 소크라테스가 물었습니다. “물에서 나올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무엇인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기입니다.” “그 간절함을 잊지 말게. 방금 숨을 쉬고 싶어 했던 만큼 평소에 지혜를 원한다면 지혜를 반드시 얻을 것이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면서도 독약을 먹으면서까지 자기가 믿고 구하는 바를 관철하며 피하지 않았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의 헬라어 ‘토 니콘티’는 현재 능동태분사로 계속해서 이기는 자를 가리키며 본서와 복음서에서 여러번 반복되는 문구입니다. 군사적 용어로서 사탄과 대결해도 타협없이 끝까지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한 자를 나타냅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은 죽음과 고난이 존재하지 않는(계22:2) 영생을 상징합니다. 영생을 영원히 누리는 영원한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환난과 고통이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말세지말입니다. 이 때에 성숙한 신앙을 소유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함으로 영원히 사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생명나무 같은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계 2장 1~절 / 문기태목사

"에베소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냈으며, 낙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그런데 네게는 잘 하는 일이 있다. 너는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한다.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겠다."(요한계시록2징 1-7절)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성도들이 요한 계시록 하면 먼 미래에 일어날 계시로만 알고 있습니다. 또 너무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며 멀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요한계시록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성도들을 미혹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요한 계시록은 먼 미래에 관한 책이기보다 오늘날 존재하는 교회에 관한 책입니다. 교회가 시작된 직후부터 예수님이 재림하기 전까지를 모든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일곱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대표적 교회입니다. 동시에 모든 시대 모든 지역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지금도 선교에 열심인 교회가 있고 죽은 것 같은 교회도 있으며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서 소아시아에 존재하는 일곱 교회를 모델로 해서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설립한 교회이며 가장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시 에베소에 자리잡고 지내며 두란노 서원도 만들고 3년동안 소아시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바울에 의해 세워지고 바울이 공을 많이 들인 교회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바울이 최선을 다해 목회하다가 에베소를 떠나며 디모데를 세워서 디모데가 목회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말년에 사역했던 교회이기도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위대한 사도들이 사역한 교회이고 1세기 말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목하여 말씀하신 교회입니다. 당시 으뜸으로 꼽을 만한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의 교회들의 모 교회 격인 교회입니다. 에베소에서 말씀을 배운 이들이 나가서 주위에 여러 교회를 개척하여 세웠습니다.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 일대에 수도 격인 대표적 도시입니다. 문화가 많이 발달하였고, 경제적으로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인구도 많이 몰려 들었습니다. 지금도 에베소에 가면 많은 유적들이 거의 이 천년 전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그 발전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아주 훌륭한 교회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크고 대표적인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께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2절에 예수님께서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는 바른 행위를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옳은 일을 많이 행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열심으로 봉사하고 부지런히 섬기는 일을 잘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어려움을 견디고 잘 인내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옳은 행위를 보이고 부지런히 수고했으며 믿음으로 고난을 잘 감당했습니다. 주님께 칭찬받을 열매를 잘 맺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고 섬기는 일에, 복음이 널리 퍼지도록 선교를 하는 일에 오직 예수를 위해 열심히 감당한 것을 주님이 다 아시고 칭찬하십니다. 기도와 전도와 예배에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였으니 얼마나 잘한 것입니까?

또한 에베소 교회는 아주 분별력이 있고 지혜로운 교회였습니다. 이단이 수시로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지만 잘 분별하고 쫓아냈습니다. 2절 후반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6절'그런데 네게는 잘 하는 일이 있다. 너는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한다.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에베소 교회는 영적인 진리와 비 진리를 구별하여 진리는 받아들이고 비 진리는 거부했습니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여 참 선지자는 받아들여 잘 배우고 거짓 선지자는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내고 쫓아버렸습니다.

특히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고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니골라는 첫 번째 일곱 집사의 한 사람이었지만 영지주의에 빠졌습니다. 영지주의는 초대교회를 흔들어 놓은 유명한 이단입니다. 그 영향을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잘 분별하고 쫓아내 교회를 지켰습니다.

교회 안에 슬그머니 들어와 교회를 분열시키고 거짓을 가지고 싸움에 휘말리게 하여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이단을 물리쳤으니 아주 잘 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에 매달리다 보니 사랑이 점점 식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옳은 행위, 사랑 없는 봉사와 수고, 사랑 없는 인내, 사랑 없는 전도, 사랑 없는 이단 척결만 남았습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결국 형식적으로 변할 뿐입니다.

또 하나는 3절에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냈으며, 낙심한 적이 없다." 당시 로마의 황제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았으나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견디며 섬긴 것을 주님께서 아신다는 말씀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믿음이 분명하여 고난 중에도 잘 참고 견디었습니다. 큰 박해를 받았으나 큰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인내하며 승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에베소 교회를 크게 칭찬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부지런했고 영적 분별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박해를 견디고 믿음을 지킨 교회입니다. 아주 좋은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4,5절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에베소교회의 문제는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부지런한데 사랑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 자기처럼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른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사랑이 식으니까 자신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교만해 집니다. 사랑이 없어지니 봉사는 열심히 하는데 나중에 입으로 한방에 무너뜨립니다. 열심히 기도는 하는 것 같은데 사랑이 없으면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 않습니다. 섭섭함이 생기고 섭섭함이 비판으로 바뀝니다. 열심히 예배를 드려도 사랑이 없으면 감동과 감격과 감사가 오래가지 않습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섭섭함이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남을 판단하고 원망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가득하면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사랑이 넘치면 예배와 기도와 봉사 무엇을 해도 행복합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사람들도 귀하게 여겨지고 다 이해가 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 사랑이 없는 은사, 사랑이 없는 열심, 사랑이 없는 헌신 모두가 위험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이 없는 열심은 판단하게 하고, 사랑이 없는 능력은 분열하게 만듭니다. 처음 사랑이 식어지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처음 사랑을 가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옮기겠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함께 하시지 않고 떠나겠다는 말씀입니다. 처음 사랑을 가지라. 이 처음이라는 말은 시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지체들을 향한 진실된 사랑을 말합니다. 형식적인 신앙에서 사랑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처음에 품었던 순수한 사랑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처음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잇습니까? 예수님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듣고 여러분 모두 처음 사랑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여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을 갖게 되면 순수한 동기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니 순수하고 선한 마음으로 지체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래 믿다 보면 사랑이 식어지기 쉽습니다. 순수한 사랑이 변질되고 신앙이 화석화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으로 베풀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오해와 비난 그리고 상처뿐일 때가 있습니다. 기대한 사랑이 돌아오지 않자 손해 본 느낌이 듭니다. 억울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을 잃어버리면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굳어집니다. 체면치레의 믿음생활로 변합니다. 기쁨도 사라집니다. 감사도 희석됩니다. 능력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처음에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기쁘고 좋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눈뜨고 나니 얼마나 감격스러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를 시작하고 나도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사랑이 고픈 사람들에게 열심히 베풀며 살아야지 결심합니다. 사랑의 삶을 살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사랑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순수한 사랑이 식어지니 여러 사람과 함께 교회생활을 하는 중에 맘에 안 드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눈에 거슬립니다. 그래서 신경을 쓰다 보니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만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나 감격은 식어지고 사람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 불평이 마음에 가득해집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해도 행복하지 않게 됩니다. 예전과 같은 기쁨과 감동, 감사와 감격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되었습니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다들 사랑 없이도 잘 믿고 교회 생활 잘하던데..' 하고 합리화하면 사랑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왕년에 나도 뜨겁게 사랑했던 적이 있어. 하지만 상처를 많이 받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어?' 하고 변명하면 처음 사랑을 영영 되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 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다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단호하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열흘 전에 일본선교사님 부부가 요청을 해서 사천과 남해로 모시고 가서 2박3일 동안 힐링 여행으로 섬겼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힘껏 섬겼습니다. 일본선교사님들이 저희 부부의 섬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어떤 조건도 없이 이처럼 넘치는 사랑을 받아서 너무나 행복해요. 그 동안 사역을 하면서 별난 사람들을 만나서 상처도 많이 받고 얄미운 사람, 야속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일본으로 돌아가 받은 사랑을 교인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어떤 조건도 없이 힘을 다하여 갚으며 사역하겠어요."

주님께서 남은 생애 뜨거운 사랑을 실천하며 살라고 순회선교사의 일을 맡겨주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단 700여 선교사님 중에 3분 2가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상태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전쟁을 하다가 부상을 입으면 전투가 아무리 치열해도 후방의 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최전방으로 돌아가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군인이 부족하다고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도 하지 않고 전투에 내몰면 희생만 크고 패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 주님께서는 저와 우리교회에 몹시 중요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땅 끝까지 가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삼고 영적 전쟁을 하는 우리 선교사님들을 풍성한 사랑으로 치유와 회복시키는 일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계속 기도와 후원을 지속하여 우리교회를 통하여 큰 사랑이 땅 끝까지 흘러갈 수 있게 하십시다.

아울러 우리 교회와 목장 안에서 처음 사랑이 계속 타 올라서 우리의 사랑으로 변화되는 사람, 구원받는 사람, 천국을 맛보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 모든 지체들이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이유와 조건이 없이 VIP들을 아름답게 지속적으로 섬겨서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을 맛보고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고 더욱 사랑이 충만하게 하여 주님께 칭찬을 듣고 참 행복을 맛보며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계 2장 1~6절 / 문기태목사

강철왕으로 알려진 카아네기가 신규 사원을 채용하는데 .. 응모자들에게 시험의 하나로 짐짝을 묶은 끈을 풀도록 했습니다. 응모자들은 각인 각색의 모습으로 저마다 자기 방법대로 애씁니다. 끈을 공손히, 그리고 찬찬히 한 가닥씩 한 가닥씩 푸는 사람도 있고,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대강 대강 빨리 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예 처음 부터 가위로 송당송당 잘라 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사장이라면 누구를 직원으로 채용하시겠습니까?

끈 풀기가 전부 끝난 다음 그것을 보고 있던 간부 들은 물어 볼 것도 없이 끈을 잘 푼 사람이 채용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추천 했습니다. 그러나 카아네기는 이것을 거부하고, 끈을 가위로 아무렇게나 자른 사람을 채용하라고 했습니다. 간부들이 까닭을 물은 즉.. "세상은 바야흐로 스피드 시대다" 즉 효과적인 데 시간을 쓸 줄 아는 사람을 찾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포장을 묶어 놓은 끈이 아나라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의 확인이 중요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시간 사용의 우선 순위의 관념이 밖힌 사원을 찾았다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제껴두고 덜 중요한 것에 매달리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다른 일들, 중요성의 강도가 약한 것들에 매달리다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의 성취를 앞세워다가 사람을 잃는다든지, 행위를 강조하다가 은혜를 지나친다든지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 는 책을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리차드 칼슨 박사가 쓴 책 가운데 "사랑은 사소한 일에도 상처를 입는다" 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관계라는 것입니다. 좁혀서 말하면 두 사람의 관계입니다. 더구나 부부간의 관계라는 것은 두 인격의 만남입니다. 이 사랑 속에서 참 오묘한 것은 큰 일에 대해서는 문제가 생기질 않습니다. 우린 자꾸 큰 일만 생각하고 크게 생각하나 큰 일이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부부사이에 자라나고 있는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간다고 생각합시다. 어린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뭐 남편이건 아내건 다 하나가 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의 치료를 위해 애쓰고 그 답답한 시간에 사랑은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여긴 문제가 없습니다. 근데 우리는 거기에만 문제가 있는 줄 알아요. 그게 아니라 사실은 작은 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큰 일을 당하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용기와 창의성을 가지고 대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합심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문제가 없는데 사소한 일, 예컨대 TV 채널을 선택하는 일, 남편은 이걸 보겠다 그러고 아내는 저걸 보겠다 그러고, 이거 가지고 티격태격 합니다. 거기까지도 괜찮은데 '당신은 그 수준이 낮아서 늘 그런 걸 본다'하면 '그래, 수준 높은 사람 좋은 대로 해봐.'하고 싸움이 커집니다. 이렇게 되면서 금이 가기 시작을 합니다. 그 말 한마디에. 그렇지 않습니까?

양말을 벗어서 아무데나 내 던진다고 한마디씩 하게 되면 마음이 상합니다. "당신은 근본적으로 가정교육을 잘못 받아서 늘 그렇게 말해도 못고친다" 이렇게 나오는 날이면 일은 끝나는 겁니다. 큰 문제가 됩니다. 이래 돼서 사소한 일, 자그마한 일인데 거기서 상대방의 인격을 헐뜯어요. 상대방의 명예를 짓밟아요. 자존심을 묵살해버려요. 이 사소한 일 같지만 사소한 일이 아니에요. 벌써 사랑이 멀어졌다는 것을 여기서 보게되는 것이지요. 이건 사소한 일이 아니에요 큰일입니다.

그래서 리차드 칼슨박사는 100가지 처방을 내놓습니다. 사소한 일로 부딪치지 않으려면은. 100가지를 설명을 하는 데, 그 중에 99번째가 "처음처럼 행동하라." "처음처럼 행동하라" 그랬습니다. 연애시절로 돌아가라는 것이지요.

너무 무의미한 생활에 타성에 젖어 가다가 남편이 그래도 옛날 연애할 때 생각을 하면서 '오늘은 그래도 기분을 좀 내보자.' 그래서 꽃이라도 몇 송이 사 가지고 집에 들어갔대요. 그러면 부인이 "어머 웬일이에요? 옛날 연애할 때 생각이 나네.." 하고 받아주면 좋은데 흘깃 보구 "갑자기 웬 꽃? 무슨 바람이야?" 하거나 "쓸데없이 돈 없애고 웃기는 짓하네" 이렇게 되면 오히려 대판 싸움이 벌어집니다. 말 한마디가 큽니다. 사소한 일이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작게 생각하고 무심결에 습관적으로 나온 한 마디가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겁니다.

라이프지 최신호에 그런 논문이 나와 있습니다. "사랑의 과학"이라는. 그 "사랑의 과학"이라는 책에는 뭐라고 하느냐. 처음 사랑, 즉 다시 말해서 '정말 저 사람 없이는 내가 못 살 거 같애.' 그런 순간이 얼마나 가느냐. 과학적으로 연구해 보았더니 18개월 간답니다. 그리고 최고로 오래간 사람이 3년 간다고 합니다. 그런 고로 특별한 대처가 없이는 그대로 자연적으로 사랑이 이어지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돼는 거예요. 저절로 사랑이 자라나고 유지되는 줄 알면 안됩니다. 사랑을 지속시키고자 부단히 애를 쓰는 가정만이 위기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서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아주 훌륭한 교회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크고 대표적인 교회인데 이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도 문제가 있었어요. 잃어버린 것이 있었어요. 첫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여러분 사랑을 어느 정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아무 것도 아니요.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이거 얼마나 굉장한 얘기입니까? 얼마나 엄청난 희생입니까?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런데 에베소교회는 주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자, 여기서 오늘 본문 성경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이 에베소 교회는 수고가 있었어요. 인내가 있었어요. 많은 수고 많은 인내함이 있었어요. 그러나 사랑이 없어지니까 불평과 원망 뿐이요. 오늘도 보면은 자식을 위해서 수고했어요. 한 평생 수고했어요. 오래오래 참았어요.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원망과 불평이요. 왜? 자식이 그 사랑을 몰라주고 찾아오지도 않고 감사할줄도 모르니 섭섭합니다. 그런데 본질은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이걸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 어떤 때는 자식 하나를 위해서 정말 혼자서 그 아이를 키우면서 한평생 수고를 해요. 얼마나 수고했어요. 얼마나 오래동안 참았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나는 잘못 살았다" "헛살았다" 하고 말한단 말입니다. 문제는 자식이 아니고 내가 문제입니다. 본래 자식은 달라진게 없습니다. 본래부터 자식은 받는 존재였어요. 그래도 내가 사랑하니까 일방적으로 주기만해도 행복했어요. 내 마음에 사랑이 식으니까 상대방이 잘못하는 것이 보이고 나만 손해보는 것이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식은 수고와 인내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래요. 결국은 원망과 불평으로 그렇게 끝나고 말아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에베소교회는 처음에는 사랑이 충만한 가운데 서로 섬기고 수고하며 인내했습니다. 사랑이 가득하니 섬김이 인내가 기븜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식어지니 의무로 변했습니다. 사랑없는 수고와 인내를 반복하다보니 불평과 원망 섭섭함이 늘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 교회는 아주 분별력이 있고 지혜로운 교회예요. 그래서 이단을 척결했어요. 교회안에 슬그머니 들어와 교회를 분열시키고 거짓을 가지고 싸움에 휘말리게 하여 은혜로부터 멀어지게하는 이단을 물리쳤으니 아주 잘 한 일이요. 아주 잘 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에 매달리다보니 그속에 사랑이 식어졌어요. 사랑 없는 이단 척결, 사랑 없는 비판. 결국은 상처 뿐입니다.

또 하나는 오늘 여기 보니까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하고" 그랬어요. 참 귀한 말씀이죠?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다. 이보다 더 좋은 얘기가 어디 있어요? 내 이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견뎠다 이거예요. 기도와 전도와 예배에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대단히 잘 했어요. 열심이 뜨거우니 얼마나 잘한 것입니까? 그러나 사랑이 없었어요. 부지런하기는한데 다른 사람이 자기처럼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른 것을 용납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교만했어요. 여기서 원망과 불평으로 끝났어요.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답니다. 교회안에서 수고 많이 하고 열심이 뜨거운 분들 부지런한 분들에게서 원망 불평이 많아요. 왜요? '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수고하는데 왜 나를 안 도와주나?' '도대체 교회는 이런 나를 알아주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냐?' 그러고 비판한다구요. 교만에 빠졌어요. 사랑이 없기 때문에 교만해져요. 그것으로 끝났단 말입니다요. 남을 비판하고 원망하고 이런 것을 볼 수가 있어요. 그런 고로 모든 일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피곤하고 절망하고 비판하고 분열하고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이는 지식은 교만하게 되고 수고와 업적이라는 것은 원망과 불평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처음 사랑을 가지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옮기겠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머무시지 않고 떠나겠다는 말씀입니다. 처음 사랑을 가지라. 이 처음이라는 말은 시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질적이고 속성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사랑이 근본적인, 본래적 사랑으로 돌아가라, 이제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처음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잇습니까? 오늘 본문 가운데는 이걸 자세하게 처방을 내렸습니다.

 

1.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순수한 동기로 사랑을 하고 선한 마음으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선한 일 하면 칭찬 받아요. 표창장도 받을 수가 있어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을 수 잇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에 고만 칭찬 받는데 매력을 느끼고 사랑은 없어졌어요. 말슴대로 살고 믿음으로 살다보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지요. 그러나 축복 받는데 그만 마음을 두기 시작하면서 어느 사이에 그만 순수한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어요. 사랑을 잃어버리면 남는 게 뭡니까?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그래서 어디서 떨어지고 무엇 때문에 잘못됐는지 어디서부터 잘못 되기 시작했는지를 깊이 생각하라 그 말씀이에요.

여러분 혹 생각해 보세요. 운동을 하십니까? 운동 좋아하세요? 제가 건강을 위해서 테니스를 시작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들 시작했는데 기왕 할 바에는 좀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제가 보니까요 승부욕이 생기고 게임을 하다가 지니까 열을 받고 스트레쓰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면 건강이 좋아져야 하는데 스트레쓰가 쌓여 오히려 해가 되는거예요. 승부에 집착하여 들어갔다 나갔다 싸우며 흥분하는 것은 건강에 해가 됩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본래의 목적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주목적은 승부가 아니고 건강이다. 그러면 경기를 하다가 질 수도 있고 상대방이 억지를 부려도 까짓거 그래라 그렇게까지 해서 꼭 이기고 싶다면 내가 져주마. 나는 건강이 목적이다. 건강을 위해 뛰면서 운동하고 땀흘리고 했으니 져도 유익하다. 할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 예요. 처음에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깨닫고나니 얼마나 기쁘고 좋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눈뜨고나니 얼마나 감격스러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말슴에 순종하며 교회안에 들어와 경건하게 살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다보니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혹시 누가 이단적인 가르침을 하지 않나 감시하기 바빠집니다. 남보다 더 축복받아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힙니다. 여러 사람과 함께 교회생활을 하다보니 맘에 안드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눈에 거슬립니다. 그래서 신경을 쓰다보니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만 보이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나 감격은 식어지고 사람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 불평이 마음에 가득해졌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돼요. 그래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 그랬잖아요. 보세요. 남편이 저녁에 집에 돌아올 때 어떻게 맞이합니까? 아내와 맞닥뜨리며 무슨 말을 합니까? 여러분 한참 뜨거울 때는 어땠습니까? 만나면 무슨 말로 즐겁게 해줄까? 어떤 음식을 준비해서 만족하게 해줄까? '내가 첫마디를 뭐라고 할까? 오늘 무슨 옷을 입고 맞이할까? 이 헤어스타일은 어떻게 할까?' 옛날에는 그랬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얼마 살다 보니까 그만 타성이 생겨 가지고 세수도 안하고 앉았다가 "여보, 나 왔수" 그러면 "왔어?" 그러고 말잖아요. 생각이 없잖아요 도대체가. 순간순간 하나의 사건에도 생각이라는 것을 얹어 가지고 행동하고 말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습관이나 혹은 익숙해진 것으로부터 내가 탈피해야 되는 것이에요. 항상 새롭게 생각하고 처음처럼 생각을 해야 돼요. 그래야만 이 사랑을 지켜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

 

2.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 회개란 말은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라.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라. 신혼여행으로 돌아가라. 그 쪽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하라.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져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그 단테의 "신곡"이라고 하는 책이 있지요? 거기 보면 지옥편에 말입니다. 내려가고 내려가면 지옥 맨 밑바닥 제일 깊은 곳에 제일 무서운 죄인이 거기 있어요. 세 사람이 있답니다. 하나가 자기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가롯유다. 그 다음에 자기를 사랑한 친구 시저를 배신한 부르투스하고 키시우스가 그 맨 밑바닥에 있다고 합니다. 단테가 생각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배신이라는 죄가 가장 큰 죄라는 것이죠. 사랑의 배신, 가장 소중한 첫 사랑의 배신, 이것이 가장 큰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배신한 것을 회개하고 처음 행위 처음 사랑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처음 믿음생활을 시작할 때 어땠습니까? 처음에는 만물이 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고 모든 것들이 다 나를 축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구원받은 것 감사하고 죄 사함 받은 것 감사하고 천국 약속 받은 것 감사하고 그래서 행복하고 기쁨이 충만하여 시키지 않아도 교회 자랑 예수님 자랑하고 열정적으로 살지 않습니까? 작은 일을 맡아도 기쁨으로 감당하고 최선을 다하여 잘 하려고 하고 기도생활도 즐겁고 예배시간이 기다려지고 천국과 같은 삶이 이어집니다.

전도를 누가 제일 많이 할 것 같습니까? 전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통계학적으로 1년 6개월 못 된 사람. 예수 믿고 1년 반 될 때 까지가 제일 전도를 많이 합니다. 예수 믿고 오래되고 시간이 많이 흐르면 일년 내내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아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오래 믿으면 전도 잘 할 것 같은데 더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 영접하고 난 직 후가 가장 뜨거운 때입니다. 처음 사랑이 불탈 때입니다. 그저 만나는 사람붙잡고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럼 예수믿은제 십년 이십년 된 사람은 왜 전도를 잘 못합니까? 신앙도 사랑도 타성화되어서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문제라는 거예요. 첫 사랑을 잃어버린 거예요. 처음 감격이 없는 거예요.

처음에는 예수님이 알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만족하죠. 그러나 뒤에는 그렇지 못하더라구요. 처음에는 예수만 보고 나왔는데 그 다음엔 사람을 보아요.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나 못 알아주나 칭찬하나 안 하나 요거 생각하더라구요. 첫 사랑엔 이런 게 없었거든요. 오로지 예수, 오로지 하나님,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만족하고 충만했는데 어쩌자고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의 평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을 하는 거예요? 여기서 그만 추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무엇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피곤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을 잃었어요. 처음 사랑을 잃었어요.

이제 다시 기쁨을 찾는 길은 첫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참된 열정을 찾는 길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처음 행위를 가지는 길뿐입니다. 그 뜨거운 사랑으로 돌아가면 온 세상을 다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반가워질 것입니다. 삼라만상이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에 깊이 빠질때 바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복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계획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때 가정도 회복되고 교회도 회복되며 직장안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주님께 칭찬듣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첫사랑의 감격

계 2장 1~7절 / 김경년목사

지금 제가 읽어드릴 내용은 육군사관학교의 김충배 교장이 지난해 11월 생도교육에 사용했던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눈물’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만한 내용이라고 생각되어 이시간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 들이여! 여러분들은 5,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날 5,6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 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붙여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서 시민들이 플랭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을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 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처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 가세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부모님이 보고 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 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 해?" 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로 폄하하는 그 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 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5,6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하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흘리며 일한 오늘의 5,6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하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낳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 우리들 신,구 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 한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뭉쳐보자. .....(중략)

지금 우리나라는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지도자가 절실히 요청되는 때입니다.

오늘날 우리교회에도 눈물의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또한 여러분들의 가정에도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부모가 필요한 때입니다.

사도 바울은 눈물로 목회를 했습니다. 특별히 에베소 교회에서 3년동안 목회를 할 때에 그는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목회했습니다.

사도행전 20:31절에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눈물의 목회는 많은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의 삶이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본문2절에 보면 사도 요한을 통하여 주님은 에베소 교인들의 신앙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주님을 위하여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거짓 선지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철저히 말씀 중심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매우 부지런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하여 산다는 이유로 게으르지 않고 오히려 더 부지런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눈물로 목회를 했던 결과였습니다. 눈물의 힘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눈물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사역 가운데 웃었다는 기록은 없는데 울었다는 기록은 세 번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눈물은 의미 있는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은 한 영혼에 대한 애정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한 영혼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한 영혼을 사랑하면 울 수 있습니다.

또 주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민족을 사랑하는 눈물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면 국가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민족의 멸망을 먼저 보시고 흘리신 눈물입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주님은 마지막 십자가를 앞에 놓고 심한 통곡으로 우셨습니다. 이 눈물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기가 싫어서 울었던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지막 사명 완수를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우리가 각자 할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하여 흘리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감당할 사명을 위하여 울 수 있는 사람이 진정 필요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눈물 없이 못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영문 밖의 길)

눈물 없이 못가는 길 피-없이 못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길 만은 걸어야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눈물 없이 못가는 길-피 없이 못가는 길- 이 길이 우리 주님이 가신 길이요 또한 우리 성도가 가야 할 길입니다.

주님은 사도 요한을 통하여 그렇게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에베소 교회가 이제는 첫 사랑의 감격도, 열정도 없는 모습을 보시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 4절-5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오늘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첫 사랑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띠고 감격하여 눈물 없이는 십자가를 부를 수 없고 바라볼 수 없었던 그 때를 말입니다.

주님 한분만이 전부라고 고백했던 그 순수함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열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서 우리가 가진 열심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주님을 믿을 때 가졌던 그 열심과 열정을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금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아멘-

 

 

 

 

죄란 무엇인가?

계 2장 1~7절 / 김명혁목사

“처음 사랑을 버리는 것”

며칠 전 어느 곳에서 재미 있는 글이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5분 동안의 웃음은 5시간의 운동보다 몸을 건강하게 만든다. 웃음은 몸 안의 암 세포만을 골라서 죽이는 00 세포를 만들어 낸다.” 아주 재미 있는 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강변교회 유치부 어린이 한 명을 생각했습니다. 저를 볼 때마다 “목사님, 사랑해요” 라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서 환한 웃음을 짓는 어린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는 “김명혁 목사님 사랑해요” 라고 쓴 글을 가지고 달려와서 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 어린이의 환한 웃음은 암은 물론 모든 병들을 물리치고도 남을 것입니다. 웃음은 기쁨과 사랑에서 옵니다. 웃음과 기쁨과 사랑은 사람을 건강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듭니다. 웃음이 없고 기쁨이 없고 사랑이 없을 때 암을 비롯한 각종 병에 걸릴 것입니다. 우울함과 근심 걱정과 미움의 감정이 오래 머무를 때 몸 안에 암을 비롯한 각종 병이 생길 것입니다. 강변교회에는 웃음이 많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명희 전도사님이나 곽한상 전도사님이나 이영란 전도사님이나 유경민 집사님이나 노오현 집사님이나 김선애 집사님을 보면 얼굴에 항상 웃음이 있습니다. 모두 건강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세 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첫째 웃음과 기쁨과 사랑이 충만했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소아시아에 있던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3차 선교여행 때 겸손과 눈물과 수고와 사랑으로 세운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행20:19).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내가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행20:31-35).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저들과 이별 할 때 저들은 모두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배에 까지 그를 전송하니라”(행20:36-38).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눈물과 수고와 사랑으로 세운 눈물과 사랑과 기쁨이 넘치던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믿음과 사랑을 이렇게 칭찬했습니다.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엡1:15,16).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안에 사랑이 충만하기를 위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4-19. 사도 바울은 또한 저들이 사랑 안에서 행하라고 거듭해서 권면을 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엡4:15).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5:2).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과 같이 하라”(엡5:25). 사랑으로 충만하게 해 달라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와 권면이 있었으니 에베소 교회는 그야말로 사랑이 충만한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나중에는 바울의 신실한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가 목회하던 교회였고 그 다음에는 사랑의 사도인 요한이 목회하던 교회였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요한과 함께 그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 보다 눈물과 사랑을 지닌 훌륭한 지도자들을 많이 가졌던 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눈물과 사랑과 기쁨과 웃음이 충만한 아름답고 행복한 교회였습니다.

 

둘째 에베소 교회는 웃음과 기쁨과 사랑을 상실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웃음과 기쁨과 사랑이 충만하던 에베소 교회가 세월이 지나면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기쁨과 웃음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사랑인데 에베소 교회는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집의 기초와 같고 소망은 집의 창문과 같다면 사랑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방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기초가 튼튼하고 창문이 아름다워도 따뜻한 방이 없으면 그 집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인생을 지탱해 주는 세 가지 다리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평생 고아들과 노인들과 병자들과 난민들과 미망인들을 돌보는 긍휼과 사랑의 목회로 일관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기쁨도 웃음도 잃어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7 교회들 중의 한 교회였습니다. 7 교회들은 2천 여년 전 소아시아에 존재했던 실제적인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7 교회들은 지난 2천 여년 동안 지구상에 존재했던 7가지 종류의 교회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칭찬 받은 교회들도 있었지만 책망을 들은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첫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도 책망을 들었고 일곱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도 책망을 들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책망을 들은 첫째 교회의 죄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처음 사랑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죄는 웃음을 잃고 기쁨을 잃고 사랑을 잃는 것입니다.

 

셋째 에베소 교회가 웃음과 기쁨과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➊ 에베소 교회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보다는 행위와 수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었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행위와 수고와 인내는 귀한 것이지만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되기가 쉽습니다. 마르다가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봉사의 행위와 수고를 아끼지 않았지만 곧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나 주님에 대한 사랑보다는 일종의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나중에는 짜증까지 내게 되었습니다. 헨디릭슨 이라는 유명한 주석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아내가 남편을 내조하는 데 소문이 날 정도로 충성과 열의를 다 한다 해도 거기에 사랑의 결핍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남편에 대한 세밀한 부분까지 깊이 내조하는 것은 아내로서의 임무에 대한 책임감으로서도 가능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성도가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지 않고서도 교회의 모든 규례를 잘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행위와 수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다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➋ 에베소 교회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보다는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고 이단의 잘못을 드러내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었습니다.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을 아노라.”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고 거짓 선지자들을 시험하고 이단의 잘못을 드러내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권면하면서 ‘흉악한 이리’를 삼가라고 분부했고(행20:29) 사랑의 사도 요한도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4:1). 에베소 교회는 이 일을 잘 해 냈습니다. 이단을 비판하고 진리를 보수하는 정통신앙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식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주석가 윌이엄 바클리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정통 보수는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간다. Orthodoxy costs too much. 이단 색출은 사랑을 죽였다. Heresy hunting had killed love. 모든 잘못된 사람들을 제거하려는 열성이 차갑고 엄격한 정통 보수를 초래했다. The eagerness to root out all mistaken men had ended in a sour and rigid orthodoxy.” 죄를 용납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죄인들을 비판하고 제거하려는 것은 교회를 냉랭하고 경직되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사랑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보다는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고 이단의 잘못을 비판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다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➌ 에베소 교회가 단순히 시간이 오래 지남에 따라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사랑을 점점 잃어버리게 되었던 같습니다. 지금 이 편지가 쓰여진 때는 에베소 교회가 세워 진지 40여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사람은 본성이 부패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처음에 가졌던 순수하고 뜨겁던 사랑과 헌신을 상실하게 됩니다. 여호수아의 시대가 지나갔을 때 그 후손들은 이전 시대가 지녔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을 상실했습니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2:10).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아를 통해서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해 가졌던 뜨거운 헌신과 사랑을 회상하며 그 당시 사람들의 불신앙을 책망했습니다.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을 내가 기억하노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기름진 땅에 들여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내 땅을 더럽히고 나를 알지 못하며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렘2:2,7,8).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40여년이 지나면 일반적으로 신앙이 타락합니다. 교회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신앙생활과 사랑 실천을 힘쓰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신앙과 사랑의 열정이 상실되고 맙니다.

 

이제 끝으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에게 권면하신 주님의 말씀 세 마디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영어로는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Remember. 기억은 우리들로 하여금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게 만듭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던 때와 장소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을 항상 기억했을 것이고 삭개오는 뽕나무를 기억했을 것이고 간음한 여인은 돌에 맞아 죽을 번 했던 돌무더기 현장을 항상 기억했을 것입니다. 김무씨와 박종서씨는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며 세례 받았던 세례의 현장을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던 때와 장소를 기억하고 내가 죄인임을 눈물로 고백했던 때와 장소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Repent. 회개는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회개야말로 우리들로 하여금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게 만듭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났던 탕자는 그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얻었아오니”(눅15:18). 변명도 필요 없고 다른 사람들을 탓하는 것도 필요 없습니다. 나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깃이 필요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빼앗아 버렸다면 그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나의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드리던 것을 중단했다면 그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만큼 사랑의 관계를 신속하게 회복시키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셋째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Do. 여기 행위는 마르다의 봉사의 행위보다는 마리아의 무릎 꿇는 사랑과 헌신의 행위를 말합니다. 주님의 발 앞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순종의 행위를 말합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는 헌신의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분부를 좇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치료할 것을 공급하는 이웃사랑 실천의 행위를 말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세 가지 비결을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했습니다. Remember, repent, do 입니다. 기억하라 회개하라 행하라 입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는 영생의 축복을 주시 마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촛대를 옮겨버리는 저주를 받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촛대를 옮긴 다는 것은 주님이 떠나시는 것을 말하고 주님의 버림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모두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처음 사랑을 뜨겁게 유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송명희 시인처럼 날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내 마음 다하여 모든 것 다하여 그 무엇보다 더 그 누구보다 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기까지 사랑하고 싶어라.” 찬송가 512장을 주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함께 부르겠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계 2장 1~7절 / 이종윤목사

오늘은 종교개혁 487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16세기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권주의와 윤리적 타락, 그리고 잘못된 신학에 항거하여 ①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으로, ②오직 은혜(Sola Gratia)만으로, ③오직 믿음(Sola Fide)만으로, ④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기치를 걸고 영적 전투를 시작한 역사적인 날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영적 전쟁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오늘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일곱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중 “이기는 자에게”(계 2:7, 11, 17, 26, 3:6, 13, 22)라는 말씀과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11,17,29, 3:6,13,22)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말씀 안에서 이김이 있다는 심오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반드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또 이겨야 된다는 깊은 영적인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Ⅰ. 이기는 자의 복

①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신다(계2:7). 이기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낙원을 회복시켜주시고 생명나무 되시는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게 하십니다. ②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하신다(계2:11). 성도는 두 번 낳고 한번 죽으나, 불신자는 한번 낳고 두 번 죽습니다. 둘째 사망은 하나님과의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롬8:1-2)고 말씀하십니다. ③감추었던 만나,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주신다(2:17). 만나는 생명 양식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흰 돌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에 금 신상을 때려 가루로 만들고 태산을 이룬 산에서 뜨인 돌(단 7장)로서 이 흰 돌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④만국을 다스리시는 권세(2:26) 와 새벽별(2:28)을 주신다. 새벽별은 구원성취의 약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⑤흰 옷을 입을 것이고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될 것이다(3:5). 그리스도는 순교자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계6:11), 하나님의 부르심과 복음에 합당하게 행한 자들에게 구원을 주십니다(엡4:1, 빌1:27). ⑥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시고 3가지 이름(예수님의 이름, 예루살렘의 이름, 나의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신다(계3:12).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이 세운 기둥같이 요긴하게 쓰임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⑦그리스도의 이김과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된다(3:21). 그리스도는 죽음과 세상을 이기신 분이시며(계12:11), 그 안에 있는 우리도 세상과 사망권세를 이기게 하시며(요일5:4), 이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십니다.

 

Ⅱ. 오늘의 한국교회에 주시는 말씀

①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계2:5).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며 그러한 삶은 그리스도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②고난을 두려워 말고 죽도록 충성하라(계2:10). 성도는 자신에게 환난, 궁핍, 감옥, 죽음의 고난이 닥친다 해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계2:9). ③진리를 잡고 믿음을 지키라(계2:13). 성도는 좌우에 날선 검(말씀)을 가지신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계2:12). 또한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구원의 주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④거룩함을 지키라(계2:21). 성도의 삶은 세상과 구별된 삶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가치관의 목표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⑤진실하라(계3:3). 오늘 죽은 전통을 가진 교회는 빈사상태에 놓인 교회가 됩니다. 우리는 행함이 없는 이론만 내세우고 공명주의, 현실주의, 안일주의에서 벗어나 진실해야 합니다. ⑥기회를 놓치지 말라(계3:8). 성도들 앞에는 구원의 문, 섬김의 문, 일할 수 있는 문, 전도의 문, 믿음의 문, 기도의 문, 승리의 문, 하늘 문이 열려 있으며, 우리는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⑦전심을 다해 섬겨라(계3: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맺는말.

요한계시록 3장22절에서는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울교회 모든 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복을 받고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수고와 책망

계 2장 1~7절 / 김형준목사

1959년부터 미국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1994년 병으로 더 이상 강의할 수 없을 때까지 사회학을 가르쳤던 모리 슈와르츠(Morrie Schwartz)교수는 루게릭병이라는 불치병, 즉 근위축성 측생 경화증이라는 치명적인 신경계통의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영국의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도 같은 병을 앓고 있습니다. 1939년 미국 양키스 팀의 야구선수 루게릭이 이 병에 걸리면서 ‘루게릭병’ 병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는데 발병한지 5년이 되면 서서히 근육이 마비되는 증상이 끝내는 가슴까지 진행되어 죽게 되는 병입니다.

모리 슈와르츠 박사는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까지 제자와 함께 매주 화요일 마다 수업을 했습니다. 화요일 수업의 유일한 제자였던 미치 앨봄(Mitch Albom)은 모리 슈와르츠 교수님과 나눈 대화를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에도 번역되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은 교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인생을 어떻게 마감하고 있는가를 진솔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자인 미치 앨봄에 따르면 모리교수님이 남은 생을 진지하게 살 수 있었던 계기는 ‘살아있는 장례식’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함께 강의하던 친구 교수가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온 모리교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이런 부질없는 일이 어디 있담……. 거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멋진 말들을 해 주는데 정작 주인공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하니 말이야…….” 그러면서 아주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했는데, 바로 살아있는 장례식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추운 일요일 오후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들을 모아놓고 살아있는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모리 교수가 죽었다고 전제하고 모여서 죽은 모리 교수에게 각각 경의를 표했습니다. 몇 명은 울고, 몇 명은 소리 내어 웃기도 합니다. 어떤 여자 분은 시를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장례식에 온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은 모리 교수는 남은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남은 마지막 생애 동안 ‘죽어간다’는 말이 ‘쓸모없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님을 증명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외람된 말씀일지 모르지만 최근에 들어 저도 나이를 의식하게 됩니다. 지나온 날을 돌아봅니다. 이제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기에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해 봅니다. 연세가 많으신 어른들이 자기 삶을 정리하며 마감하는 모습이 조금씩 보이고, 젊은이들이 인생 목표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는가 분별도 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몇 년 전부터는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님을 주변 사람들이나 책을 통해 알게 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 고민에 대한 가장 좋은 해답은 모리 교수님처럼 ‘살아있는 장례식’을 한번 해보는데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살아온 약력을 한번 적어보십시오.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 대신 조사를 써보는 것입니다. 내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하는 말 그 뒤에 진짜 나에 대한 평가의 말을 예상해본다면 어떨까요? 적어도 우리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계기는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동안교회가 창립된 지 46주년 되는 날이자,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지 54년의 세월이 흐른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전쟁과 민족의 비극 그리고 분단의 아픔과 함께 탄생하여 사람으로 말하면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교회는 그동안 시대적 사명을 잘 감당해왔고, 어려운 시련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잘 성장해 왔습니다. 교회의 마흔 여섯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오늘, 교회의 살아있는 장례식을 한번 상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생일도 생일이지만, 종말을 향해 가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동안 교회가 주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 방황하는 많은 영혼에게 복음과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영향력 있는 공동체인가를 한번 점검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관한 말씀은 마지막 때 교회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마지막 때 교회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또 어떤 특징을 갖게 될 것인가를 말씀해주는 동시에 인간적 혹은 세상적인 시각이 아닌 교회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관점에서 교회를 어떻게 고치실 것인가를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교회된 우리 각자와 교회가 갖춰야 할 바람직한 모습, 주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내 앞에 나타나신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나실까, 오늘 우리 교회에 주님께서 나타나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교훈을 주실까.

1절 말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일곱별과 일곱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 다른 여타한 해석이 있지만, 종합해 볼 때 교회에 주인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에베소 교회가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곱별과 일곱 촛대 사이를 왔다 갔다 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교회가 본질적인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하고 있는가를 계속 점검하시고 점검하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간섭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하필 에베소 교회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셨을까요? 당시 에베소 교회는 일곱 교회 중에서도 가장 안정감 있게 자리 잡은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들과 주변 교회에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에베소 교회를 개척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고, 3차 전도여행 시 3년간이나 직접 목회를 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오래 머물렀던 적이 없는데 3년 동안이나 에베소 교회의 여러 교인들을 가르치며 기초를 세우고 훈련시켰던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유명한 성경교사였던 아볼로, 신실했던 목회자인 디모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현장에서 직접 어머니를 부탁받았던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를 끝까지 모시고 목회했던 곳이었습니다. 교회가 있던 지역은 무역으로 유명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였습니다. 한편으로 우상 숭배와 미신으로 선교가 힘든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아데미 여신전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 사역이 가장 힘든 곳이어서 바울사도는 두란노라고 하는 서원을 세워 말씀으로 교인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켰던 것입니다. 또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헌신적인 부부가 나왔던 곳이기도 하고 소아시아 교회 중에서 가장 모범이 되면서도 정통적이고 뿌리가 깊은 교회였습니다. 주변교회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는 교회, 주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였다는 사실입니다. 얼핏 보아서는 책망 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한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에 이단이 들어오려 했을 때, 말씀의 기준이 분명하여 지혜롭고도 조용하게 분별해내었습니다. 2절 말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칭찬받을 만한 교회였지만, 에베소 교회는 자신들도 모르게 핵심은 잃고 외형만 있는 교회로 변했기 때문에 특별히 교회의 주인 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오래되었다고 자랑할 만한 것이 많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역사와 전통이 오래되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복음의 본질을 잃고 외형에 의존하며 형식을 강조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전통과 같은 다른 비본질적인 요소가 주인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주님이 칭찬하시는 내용에서 더 정확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에베소 교회를 비교해보면 뚜렷이 알게 되는데,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칭찬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두고 ‘내가 네 믿음의 역사를 아노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순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안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에베소 교회가 수고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랑의 수고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행함은 많았지만 믿음에서 나온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짜여진 조직과 프로그램, 여러 활동으로 바빴지만 믿음과 사랑이 아닌 자기 명예와 맡은바 책임이 동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인내는 하였지만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재림에 대한 기대와 감격 또 천국에서 누릴 상급과 소망으로 인내하며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자기 유익을 위해서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3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긴 있었지만 하나님께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함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기초한 역사라 함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의 말과 행위 그리고 내면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임재하심,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수고와 노력은 많았지만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나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 때문이었다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한다 해도 믿음으로 할 때와 책임 때문에 할 때는 결과가 다릅니다. 관계 때문에 자기중심적으로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인내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자기 의와 수고에 대한 대가를 구하게 돼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는 사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늘 생각하며 어떤 어려움과 시련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하는 일이 없습니다. 어려운 문제 앞에 기도합니다. 중심이 어떠하냐에 따라 과정과 방법에서 분명히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교회도 역시 점검해봐야 할 점입니다. 인간관계나 책임감 때문에 혹은 성품 때문에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봉사가 아니라 중심에 하나님 살아계심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 때문에 하는 봉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주님께서 열심 자체는 인정하실지 몰라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역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수고라는 뜻은 내가 피곤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일을 떠맡는 것을 말하는데, 사랑에 의해 촉진된 수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와 내가 오랫동안 만났기 때문에 정이 들어서 하는 수고, 가족간이나 동기간에 피차간 끌려서 하는 수고, 강한 애착 혹은 이성간의 사랑 때문에 하는 수고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고 왕래하는 것이 정말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사랑에 근거해서 하는 사랑인지, 오래 얼굴보고 친하기 때문에 하는 사랑인지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주신 사랑이라면 처음 교회에 나온 교인들에게 자신을 헌신하여 돕고 사랑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 대부분은 조금 불편하다는 이유로 애쓰지 않습니다. 사랑을 줄 수 없는 곳에 사랑을 주고 주어도 되돌려 받을 수 없는 곳에 주는 그런 사랑을 주님은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오래된 교회일수록 끼리끼리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수고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오래된 교회가 갖는 결정적인 어려움 일 수 있습니다.

소망의 인내란 무엇입니까? 여기서 소망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소망이 아닙니다. 소망의 인내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원어를 보면, 소망으로 인한 인내를 말합니다. 현재 억울함도 있고, 고통스러운 상황도 있지만 오실 주님과 약속의 성취를 바라며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가운데서 장차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였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세상의 유익을 위해서도 인내합니다. 조금만 참으면 자기 인격에 손상이 가지 않으니까, 조금만 인내하면 목표하던 바를 이룰 수 있으니까 이것 때문에라도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소망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정당하게 심판하시고 갚아주실 천국의 소망 때문에 오늘을 인내하고 견디며 기뻐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수고와 행위, 사랑 등 모양은 있는데 정작 내용이 빠지게 된 원인을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양과 형편 다 중요하지만 처음 사랑이 빠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림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하실 만큼 비중을 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어쩌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을까요?

데오도르 에프 목사님은 에베소 교회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에 대한 헌신이 너무도 철저하여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와 에베소 교인들 사이를 나눌 수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을 혼돈하게 만들어서 주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는 데는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해야 하는데 예수님을 위한 일에 우선순위를 두게 만들어 정작 예수님으로부터는 멀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예배드리고 교회 나오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것인데, 성가대로, 교사로, 차량 봉사로, 예배 안내로 너무나 바쁩니다. 이런 것은 부수적입니다. 봉사 때문에 예배도 놓치는 분이 많은데 착각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서 만나고 기쁨으로 교제하기 때문에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지 교제도 없이 봉사만 하면 결국 사단이 승리하는 결과가 됩니다. 마치 남편이 결혼해서 돈 실컷 벌어 주고, 아내도 열심히 빨래하고 밥해주는데 가족으로서 만나는 시간이 없으니 조그마한 일에도 쉽게 깨지고 이혼하는 부부와 같습니다. 돈 벌어 주기 위해, 밥 해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랑의 교제와 함께하는 기쁨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미국의 한 전문가는 남편이 아침에 출근할 때 부인이 ‘여보, 잘 다녀오세요!’ 라는 한마디만 하면 이혼하지 않을 가정이 많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일주일에 얼마나 갖고 있습니까? 말구유는 얼마짜리며, 예수님이 머물렀던 여관은 어느 여관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는데 정작 말구유 안에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점점 멀어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5-8에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처음사랑이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랑 즉, 자아를 부인하는 사랑입니다. 처음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비교가 없고, 아무것도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제 딸이 지금 7살인데 딸아이가 자장면 먹는 것만 봐도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입 주변에 다 묻혀도 귀엽습니다. 전 딸이 자고 있으면 발에 뽀뽀도 합니다. 사랑에는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까? 사랑이 빠져나간 형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인 시몬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시는데 한 여자가 와서 비싼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머리와 발에 부으니 가롯 유다가 화를 냅니다. ‘아니 차라리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얼마나 더 귀하겠는가.’ 그때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를 책망하시며, ‘돈이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여인에게는 예수님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처음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오히려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일도 함께 증거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순교한다 할지라도, 한 사람을 대신해서 죽을지라도 사랑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20세기 미국의 예언자라고 불리는 에이든 토저 목사님(A.W. Tozer)은 종교가 타락하는 세 단계를 설명했습니다. 첫째 단계가 기계적 상태입니다. 아무 느낌 없이 종교적 활동을 반복합니다. 오랫동안 출석했기 때문에, 너무나 많이 드려왔던 예배며 찬양이기 때문에 새로운 감격과 기쁨이 없이 기계적으로 종교적 행위만 반복하는 단계입니다. 놀라움이나 기대감도 전혀 없습니다. 의식 없이 찬송 부르며 가사의 의미도 모릅니다. 기도드릴 때도 그냥 눈 감고 있다가 눈 뜹니다.

다음 단계가 습관적 상태입니다. 기계적 단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바로 이러한 기계적인 상태가 자기 영혼을 마비시키고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사실조차 분별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마지막 단계가 부패한 단계입니다. 교회역사는 이 단어로 가득 합니다. 이 상태는 더 좋은 것을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성장을 향한 소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기대가 없습니다. 경쟁은 있지만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경쟁입니다. 회개도 성령의 능력도 모르며 굉장히 메말라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늘 평가와 비판이 따라 다닙니다.

이때 나타나는 세 가지 죄가 있는데, 자기 의입니다.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일 없이, 늘 마음속에 이것을 봐도 혹은 저것을 봐도 잘못이고 자기 자신이 모든 것에 중심이 되어 계획하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외에 남을 비판하는 기능까지 작동하여 비판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자기는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만 변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죄의 모습은 자기만족이 최대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족하는데 스스로는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좋다고 말씀하시는데 자기 마음에 만족이 없으면 불편하고 불만스럽습니다. 무감각한 채로 바리새인처럼 형식에 매여 다른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토저 목사님의 말씀처럼 오늘 나 자신과 교회, 나아가 한국교회에 이러한 모습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때입니다.

동안교회는 그냥 하나의 개교회가 아닙니다. 이미 많은 목회자들과 세계 교회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셨을 때나 지방에 가셔서 우리 교회를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전통이 오래면서도 끊임없는 개혁을 통해 교회가 어떻게 복음 앞에 변화하는가를 관심 있게 살피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말입니다.

불과 1-2년 새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10-20년 만에 변할 일들이 6개월 만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엄청난 가치관의 혼란과 변화는 조만간 교회에도 밀려 올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런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물리적으로라도 변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교육 현장이 변화에 따른 대책 없이 능동적으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교조에 의해 어려움을 겪는 이유와 같습니다. 사회와 시대의 변화 앞에 복음으로 바로 세워져 변하지 못한다면 교회도 일그러진 모습으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제게 있습니다.

큰 변화의 소용돌이 앞에서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주신 건강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나타내며 천국의 소망을 주는 공동체로 설 수 있는가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치관 없이 혼란 중에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지침과 기준을 세워주고 양육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더 이상 내 인생만 관심사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 겪는 혼란과 아픔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사명을 다시 돌아보고 우리 삶의 자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면 지금의 혼란과 어려움은 창조적인 고통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혼란을 기쁨으로 감당할 소망과 인내를 지닌 사람, 주님의 백성과 공동체로서 비전을 품은 사람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또한 이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살아있는 장례식을 잊지 마시고, 계속해서 자신을 점검하는 지혜를 소유하십시오. 또한 우리 수고와 노력과 행위가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지, 욕망과 책임과 환경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분명히 분별하시기를 바랍니다.

동안교회는 내 교회가 아닙니다. 동안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동안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성령의 열매를 얻기 원하시지 우리 육신과 생각의 열매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과 지식, 다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령 앞에 순종하는 새로운 결단이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할 사람들

계 2장 1~7절 / 조상호목사

옛날 어떤 청년이 여러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렸지만, 등록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완전한 교회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그대가 만일 그 완전한 교회를 찾게 되면 그 교회에 절대로 등록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형제가 그 교회에 등록하는 순간부터 그 완전한 교회는 형제 때문에 불완전한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시사해주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지상 교회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완전하신 주님을 믿고 그 주님께 찬양하며 예배드리는 주님의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교회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불완전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에 아무리 완전한 교회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겉모습일 뿐입니다. 이 땅 어디에서도 완전한 교회는 찾을 수 없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등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등장합니다. 이 일곱 교회들을 살펴보면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받은 반면, 나머지 다섯 교회는 책망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역시 완전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들 교회에게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권면 혹은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지구상 어디에도 완전한 교회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어느 누구도 완전한 교회를 추구할 수도 없고, 완전한 교회를 이룰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라고 해서 별 다를 것 없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1993년 창립 이래 지금까지 10년 동안 힘차게 달려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도 다른 지상에 있는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완전한 교회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새로운 10년을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래 기도하는 가운데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 교회가 나아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생각하다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살펴보고 싶은 한 가지 소원이 마음속에 생겼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7주 동안 매 주일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를 차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그 메시지를 우리 교회의 나아갈 기준으로 삼고자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인생의 좌표와 기준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원래 이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지중해의 한 작은 섬인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환상과 계시를 받아 적은 말씀입니다. 장차 종말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이 되며, 교회가 어떻게 종말을 대비해야 하는지를 기록한 말씀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 중에 2장과 3장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이야기는 우리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뿐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일곱 교회 이야기는 우리 크라이스트처치순복음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일 뿐 아니라, 주님을 믿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이 말씀은 1차적으로 에베소라는 특정 교회를 대상으로 주신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교회들”이라는 복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등, 모든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에도 보면, 똑같이 “교회들”이라는 복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기록하셨을까요? 요한계시록 기자인 사도 요한이 문법을 몰라 실수로 기록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일곱 교회 이야기는 2,000여 년 전, 소아시아에 자리하고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한 사람은 누구나 다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 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발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말세를 살아가는 삶의 기준과 푯대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일곱 교회 중, 그 첫 번째로 에베소 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절 상반절을 보면,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 ‘사자’라는 말은 교회의 지도자나 사역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일곱 교회 이야기는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청지기가 되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사역자들을 향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각 교회마다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십니다. 각 교회들의 영적 상태와 형편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1) 오른 손으로 지켜주시는 주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첫 번째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오른 손으로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같이 1절을 보겠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주님께서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일곱 별’이란 교회의 사자, 즉 사역자를 의미하며, ‘일곱 금 촛대’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붙잡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크라톤(Kraton)>이라는 단어로, 힘 있게 붙잡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교회의 주인으로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강한 힘으로 붙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저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가만히 서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일곱 금 촛대 사이로 다니시며 활동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과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가 염려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능력의 오른 손으로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감리교를 창설한 요한 웨슬러가 하루는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항구에서 출발한 배가 바다 한 가운데 이르렀을 때 심한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 떨게 되었습니다. 물론 요한 웨슬러도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 한쪽 구석에 일단의 무리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심하게 배가 기우뚱거리며 언제 침몰하여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평안하게 찬송하고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웨슬러는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무섭지 않소?” 그 질문을 받은 모라비안 교도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데,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웨슬러는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통곡하며 회개하였고, 그 때부터 웨슬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항상 동행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의 사람으로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처지가 어떻습니까? 풍랑이는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것 같은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해 있지 않습니까? 벼랑 끝에 서 있는 같은 절박한 상황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다윗은 시편 139편 8절로부터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게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다윗은 그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음부에 내려갈지라도, 바다 끝에 갈지라도, 거기에서도 항상 자기를 인도하시며, 자기와 동행하시며, 자기를 붙드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16:8) 다윗의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강한 능력의 오른 손으로 붙들고 계시는 주님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조금도 요동치 않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교회인 우리 교회를 능력의 오른손으로 꽉 붙들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성도들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과 성령으로 동행하시며, 역사하시며 격려하시며 활동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2) 가장 먼저 칭찬하시는 주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두 번째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우리의 작은 행위에도 칭찬하신다는 것입니다. 책망할 것이 많이 있어도 먼저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먼저 칭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최고의 격려자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녀가 90점짜리 성적표를 받아오면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얘야, 수고했다. 90점 맞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90점이나 맞았구나.”라고 칭찬하기 보다는 ”야, 한 문제만 잘 풀었으면 100점 맞을 수 있었는데, 왜 문제 하나 잘못 풀어서 90점 밖에 맞지 못했니?“라고 합니다. ‘90점이나’라는 말과, ‘90점밖에‘라는 말은 같은 점수를 의미하지만, 받아들이는 상대방은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또 장점이 많아도 그 장점은 칭찬하지 않고, 단점만을 드러내면서 ’이 집사님! 집사님을 위해서 충고하는 거예요. 집사님은 그것을 고쳐야 해요.‘라고 말한다면 듣는 이집사님은 그 말을 충고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만약 “이 집사님! 집사님은 열심도 있고, 인격도 훌륭하고, 겸손하고, 배울 점이 많아요. 제가 본 받고 싶어요. 그런데 이러이러한 모습이 보충되면 어떨까요? 훨씬 더 좋을 것 같아요.”라고 먼저 칭찬을 하고나서 충고를 한다면 이집사님은 그 충고를 받아들이기가 쉬울 것입니다. 또 자기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를 향해서도 “이 교회는 왜 이렇게 사랑이 없습니까? 이 교회의 젊은 애들은 왜 이렇게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인사도 가르치지 않습니까?”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백번 맞는 말일지라도, 그 말을 듣는 사람은 그 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 교회는 이런 점, 저런 점이 너무 좋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점들이 수정되면 어떨까요?”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듣는 교회의 일꾼들은 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먼저 책망하는 것과 먼저 칭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커뮤니케이션의 좋은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가 비록 연약하여 실수도 하고, 범죄도 저지르고, 실패를 거듭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먼저 우리를 칭찬하십니다.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에베소 교회에 책망할 것이 있었지만, 그래도 주님은 먼저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행위, 즉 업적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업적이 그들에게 있었습니까? 그들은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끝까지 인내했습니다. 또한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위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일”을 했습니다. 원래 에베소 교회 안에는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하면서 교회에 그대로 눌러 앉아 여러 가지 대접을 받으면서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거짓 가르침으로 인하여 영적 순결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인들은 이것을 잘 분별하여 거짓 사도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진리가 변질되지 않도록 지켰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에베소 교회와 교인들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칭찬의 명수이십니다. 사람을 칭찬 하실 때는 언제나 자상하고 구체적으로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름까지 거명하면서 칭찬하고 복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옥합을 깨뜨리며 헌신했던 마리아를 향해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며 저를 기념하라.”(막14:8,9)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주님께서 다만 말씀만 하셔도 내 하인의 병이 낫을 것이라고 하는 백부장을 향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라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고 칭찬하시면서 그의 고백대로 하인의 병을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또 동전 두 렙돈 밖에 되지 않는 적은 금액이지만, 자기의 모든 소유나 다름없는 물질을 드리는 한 가난한 과부에게 주님은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막12:43,44)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다 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헌신과 수고를 잊지 않으시고 칭찬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은 열심을 다한 수고와 최선을 다한 헌신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목사나, 전도사나 장로나 집사나, 권사는 열심을 다한 수고와 최선을 다한 헌신을 칭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다 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크게 기뻐하시며 큰 상을 준비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행위를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에 따라 우리를 칭찬하시며, 우리에게 귀한 상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첫사랑의 회복을 요구하시는 주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세 번째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첫 사랑의 회복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믿음의 수고와 인내를 했던 교회였습니다. 또 복음전파에 게으르지 아니하고, 열심을 다해 복음을 전하여 소아시아에서 가장 크게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단이나 교회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단호하게 처리할 정도로 진리 위에 바로 서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에베소 교회의 모습은 초대 교회 뿐 아니라,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모든 교회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에베소 교회에도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여기 ‘그러나’가 문제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모이기를 폐하지 않고,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수고하며 헌신하는 수많은 일꾼들이 교회 안에 많이 나타났지만, 그러나 그들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여기 ‘처음 사랑’이란 처음 주님을 믿을 때 느꼈던 구원에 대한 기쁨과 감격과 감사를 의미합니다.

마치 이것은 처음 만나 사랑의 불꽃이 튀기면서 금방 만나 헤어졌음에도 또 보고 싶고, 빨리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또 만나고 싶어 하던,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교제를 하다가 사랑을 하게 된 여인들이 마침내 결혼에 골인을 하여 부부가 되고,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더 단단한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속았어. 저 사람에게 그러한 모습이 있는 줄 몰랐어. 내 눈에 콩깍지가 쓰여 있었지. 어떻게 저 사람의 단점을 내가 보지 못했지. 아이구 내 팔자야. 연애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군.”이렇게 생각하는 부부가 있다면, 그 부부는 첫 사랑이 식어진 부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처음 주님을 믿을 때는 지금부터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주님만 믿고, 주님만 의지하며 살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마음이 사라졌다면 그 사람은 주님에 대한 첫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역사가 오래된 교회와 믿음생활을 오래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첫 사랑의 상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기계적입니다. 교회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어렸을 때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봉사를 하는 것도 오래전부터 해오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늘 그렇게 해 왔기 때문입니다. 전혀 새로운 결단이나 감격은 사라져 버린 채, 모든 것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됩니까? 그 익숙함이 오히려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됩니다. 타성이 오히려 망하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과거 컴퓨터 업계의 선두 주자였던 IBM 컴퓨터사의 공급업체였던 인텔(Intel)사의 앤디 그로브(Andy Grove) 회장은 IBM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IBM은 지속적으로 컴퓨터 업계에서 선두 고지를 점령해 온 회사이다. IBM 간부들은 이 오랜 세월의 승리에 도취된 채 살아왔다. 시대가 바뀌고 시장이 바뀌었는데도, 그들은 제품 개발과 경쟁력 향상에 있어서 과거에 자신들이 쓰던 것과 똑같은 방식을 고집했다.” 사실 앤디 그로브의 IBM에 대한 지적은 정확했습니다. IBM 사의 간부들은 자만에 빠져서, 세월이 흘렀는데도 옛날 성공했던 기술과 비즈니스 전략을 수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디자인의 혁신적인 변화에도 둔감했고, 컴퓨터 안의 하드웨어 프로그램인 오퍼레이션(OS: Operation System)도 옛날 방식을 택했고, PC 판매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도매상과 소매상들에게 아주 교만한 자세를 취함으로 IBM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1986년 <포춘>지 선정 미국 제1위의 그룹이었던 IBM은, 7년만인 1993년에 가서는 206위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처럼 타성은 대단히 무섭습니다. 이것은 단지 기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삶에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타성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 느꼈던 기쁨과 감격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처음 뉴질랜드에 도착하여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던 눈물이, 6개월이 지나서 보니 어느새 말라버렸습니다. 예배 때마다 말씀을 들으면서 흘리던 눈물이 멈춰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열정적으로 찬양을 드린 지 너무나도 오래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기도한 지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되었습니다. 아무리 눈물을 짜내려고 해도, 한번 마른 눈물샘에서 결코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는 과거에 잘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한번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김형제야, 네가 나에 대한 첫 사랑을 잃었구나. 이자매야, 처음 네가 나를 믿을 때 품었던, 그 마음이 사라졌구나. 조목사야, 네가 처음 목사 안수 받았을 때의 그 결심을 어디다 팔아먹었니? 박집사야, 네가 처음 직분을 받았을 때, 품었던 그 마음을 어디다 두웠니?”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첫 사랑을 회복하라”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이 음성을 들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이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새롭게 출발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 사랑을 회복하는 법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해야 첫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5절에서 그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 말씀에는 세 개의 중요한 동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첫째로 ‘생각하라’(Remember)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한번만을 의미하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보라는 계속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해서 첫 사랑이 식었는지를 회상(Remember)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 다음으로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회개하라’(Repent)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눈물 콧물을 흘리는 참회와 다릅니다. 회개란 빗나간 자리에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잘못된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된 자리로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처음 행위로 ‘회복하라‘(Restore)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로 돌아왔으면 계속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자리에서 주님께로 돌아왔으면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5절에 언급된 세 단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회상하라’의 ’Remember‘, ’회개하라‘의 ’Repent', ‘회복하라’의 'Restore'로 번역되어 있는데, 세 단어가 모두 ‘R'자로 시작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하려면 회상과 회개와 회복, 이 3R을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십니까? ’촛대‘를 옮겨 놓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가 감당할 사명을 다른 교회로 옮겨 놓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우리 교회에게 주실 하나님의 복을 다른 교회로 옮겨 놓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있는 사명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복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 놓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결국 첫 사랑을 회복하지 못한 에베소 교회는 주님의 말씀대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있던 에베소 도시는 폐허의 도시로 전락하였는데, 이는 “돌이키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옮기리라.”는 경고의 말씀이 응답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귀한 직분을 받았다 할지라도, 주님에 대한 첫 사랑을 잃은 사람은 촛대가 옮겨지는 아픔을 맛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전에 믿음의 가정으로 세움을 받았다 할지라도, 주님에 대한 첫 사랑을 잃으면 주님께서는 그 가정에 있던 촛대를 옮겨, 더 이상 그 가정을 쓰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여 과거에 엄청난 일을 한 교회라 할지라도, 주님에 대한 첫 사랑을 잃으면 주님께서는 그 교회에 있던 촛대를 옮겨 그 교회를 통해서 더 이상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촛대가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주님에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촛대가 우리 가정으로부터 옮겨지지 않도록 우리의 가정들이 주님에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촛대가 우리 교회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우리 교회가 주님에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절)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이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우리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첫 사랑이 회복되는 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촛대를 옮겨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는 것과 같은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주님께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타성에 젖은 삶이 아닌, 매일 매일의 삶에 구원의 기쁨과 감격과 축복이 넘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 그리고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처음 자리로 가야 할 에베소교회

계 2장 1~7절 / 조재호목사

세상에는 여러 가지 모양, 수많은 종류의 교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씩 다르고 입고 다니는 옷도 각기 다르듯이 보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십 여명 모이는 초미니 교회, 수 만 명 모이는 초대형 교회, 세운지 채 1년도 채 되지 않는 걸음마 교회, 설립된 지 100년이 넘는 교회, 지붕은 함석, 벽은 흙벽돌로 지는 교회, 번쩍이는 유리로 외벽을 두른 교회, 2시간 넘게 일어서서 노래하며 예배드리는 교회, 조용히 앉아서 차분히 1시간 예배드리는 교회, 세계선교를 위해 교회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교회, 기독교교육을 위해 모든 것 바치는 교회 등등

모두가 다 하나님의 교회인데 하나님의 교회라면 예외 없이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교회는 설계자는 하나님이시고 건축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 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만들어진 모든 것에는 만든 사람의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건축물은 설계자의 의도가 그림에는 화가의 생각이 글에는 작가의 생각이 노래에는 작곡가의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존재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당의 건축자재, 건축규모, 사람들의 구성 등을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는 그 본질적인 모습과 목적과 운영에 있어서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규모나 외모나 역사가 조금씩 다르더라도 그 교회를 이루신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와 하나님의 방법을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모든 교회의 공통점은 교회는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태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건강하게 자라기도 하며 병들고 시들어 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병들지 않고 시들지 않고 건강하고 성숙하게 발전되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건강하고 바르게 살아있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설계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진지하게 알기 위해서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7, 11, 17, 29)

엘리와 사무엘의 차이는 사람들이 보기는 엄청납니다. 엘리는 이스라엘 나라를 대표하는 성전의 제사장이고 사무엘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엘리의 수종자요 성전 일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보시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엘리는 벌써 오랫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고 사무엘은 어느 날 밤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들으면 삽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으면 삽니다. 들리면 변하고 새로워집니다. 성경은 잘 듣는 것을 강조합니다. 듣는 다는 것은 믿음의 귀, 마음의 귀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의 귀, 마음의 귀로 듣는다는 것은 듣고 깨닫는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대로 나를 수정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될 뿐만 아니라 믿음이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잘 듣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음으로 진지하게 대하고 다독보다는 정독하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하나님 말씀의 선포인 설교를 짧은 내 경험과 온전하지 못한 내 생각으로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 예배를 형식적으로 드리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드리고 그러기 위해 기도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넷째 믿음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나에게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믿음의 안목으로 뒤돌아 봐야 합니다.

 

2. 7교회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7교회는 초대 교회 시절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에 실존했던 지역교회들입니다.

지금은 그 지명만 있고 교회가 자리 잡았던 유적지의 돌들만 자리를 지킬 뿐 현존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7교회는 단순히 한때 있다가 없어진 단순한 교회가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교회를 대표합니다.

7교회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교회의 모습입니다. 7교회를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7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은 곧 오늘 우리 교회와 우리를 향하신 말씀입니다. 7교회를 살펴보면 서머나, 빌라델비아 2개 교회는 책망 없이 칭찬만 들었고, 사데, 라오디게아 2개 교회는 칭찬 없이 책망만 들었으며, 나머지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3개 교회는 칭찬과 더불어 책망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각 교회마다 잘못된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을 지적하시며 고치라고 말씀하시고 잘 하면 반드시 상급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처음으로 에베소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 도시에 있었던 교회입니다. 에베소 도시의 3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로마 중앙정부가 정치적 자치를 부여한 자유도시입니다.

둘째 가장 크고 가장 부유한 항구 상업도시로 ‘아시아의 시장’ ‘아시아의 관문’ ‘로마로 가는 하이웨이’입니다.

셋째 강력한 우상숭배와 미신의 중심도시로 그 중심에는 아데미(일명 다이아나)여신이 있었습니다.

가로 70미터, 세로 130미터 크기, 18미터 높이의 120개의 기둥으로 구성된 아데미 신전은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파르테논신전보다 4배나 큰 신전입니다.

 

3. 에베소에 있는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살아 계신 주님의 칭찬은 지금까지 인내하고 믿음을 지키며 열심히 살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2)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행함과 땀흘린 수고들과 고난을 참고 이긴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자신과 교회를 지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알고 계신다는 것이 큰 힘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과거에 머물지 않으시고 꼭 한세대를 지난 교회를 향하여 책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4-5)

처음 사랑은 첫 사랑입니다. 누구나 첫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사랑은 어설픈 것 같지만 순수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순박하며 대단하게 크지는 않지만 진실합니다. 첫 사랑은 설명적이지 않고 행함적이고 외모가 아니라 내면이며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첫 사랑은 무엇을 주고받아서가 아니라 그냥 존재함으로 좋고 의무감이 작용하지 않고 사랑이 작용하며 상투적이지 않고 신선합니다.

사람은 첫 사랑에만 멈춰 있을 수 없습니다. 첫 사랑이 바람직하고 멋있는 성숙한 사랑으로 발전해가야합니다.

우리는 믿음생활에도 첫 사랑이 있습니다. 처음 믿었을 때의 추억이 있고 순수한 열심이 있습니다..

모태 신앙을 가지고 성장한 사람들은 교회 나가 예배드리고 교회학교 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예배 때, 수련회 때, 어느 말씀 집회 때, 어느 성경 공부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부모를 통해서 온 믿음이 아니라 내게 온 사건입니다. 부모의 믿음이 아니라 나의 믿음이고, 부모의 신앙이 아니라 나의 신앙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부모님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주님이 되시는 첫 사랑의 경험입니다.

모태신앙이 아니라 전도 받은 신앙이 있습니다. 억지로 끌려온 전도집회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가세가 기울고 실패와 좌절 가운데서 간절히 무엇인가 찾던 중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병원에서 손 붙잡아 기도해 주는 따뜻한 인도를 따라 교회를 나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지적 호기심이 있어 성경을 공부하다가 생명의 주인 되시는 구원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주님’ 부르는 그분을 만나고 그 분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첫 사랑의 경험을 한 겁니다.

그때는 교회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예배가 달라지고 봉사가 달라지고, 생각도 태도도 사람대하는 것도 가치관도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지 첫 사랑이 성숙한 사랑으로 변화되지 못하고 퇴보하게 되었습니다.

매번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성 예배 가운데 감격이 사라지고 매년 임명받는 봉사직분 그 봉사 가운데 남을 위한 진정한 섬김과 헌신은 사라지며 수도 없이 듣는 성경말씀 그 말씀 가운데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은 사라지고 늘 대하는 교우 그들을 향한 영적인 관심과 사랑은 사라지며 늘 오가는 교회 오가는 발걸음 가운데 처음 가졌던 교회를 향한 애정은 사라지게 됩니다.

섬김보다는 주장이 강해지고 헌신보다는 명예가 강해지며 충성보다는 자기 위치가 강해집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이렇듯 순수한 열심히 사라지고 타성적인 믿음생활에 물들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7)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깨닫고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목적하심과 설계 의도대로 되어 감으로 마침내 믿음의 승자가 되어 칭찬과 생명나무 과실을 받는 여러분과 우리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금 촛대 교회

계 2장 1~7절 / 김창인목사

로마 정부가 사도 요한에게 핍박을 가하는 중 그를 죽이는 대신에 지중해 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섬 ‘밧모’라 하는 곳에 정배를 보냈습니다. 그때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면서 전 세계 교회를 지도하고 있던 때입니다. 정배 가서 어느 주일을 맞이했는데 사도 요한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위틈에 엎드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하늘나라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을 보고 쓴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 여러 환상 중의 하나가 오른손에 일곱 별을 잡으신 예수께서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환상의 뜻을 알 수 없어서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해석해 주시는 말씀이 일곱 별은 일곱 교회에 보낸 사자요,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 일곱 교회 중 첫째 교회가 본문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그 에베소 교회를 비롯하여 일곱 교회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주님 재림하시는 날까지의 시대를 상징하는 교회라고 해석하는 학자가 많습니다. 저도 그 해석을 가장 좋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는 실제적인 에베소에 있는 교회이기도 하지만 영적으로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의미합니다. 또 금 촛대는 교회를 상징하고, 금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믿음으로 되어진 교회라야 합니다. 믿음으로 모여진 단체가 아니면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세워진 교회, 믿음으로 성장하는 교회, 믿음으로 일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빛을 발할 수 있는 촛대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금 촛대 교회는 어떤 교회를 의미하는 지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I. 인정받는 교회(1∼3절)

1) 주님의 인정(1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계시록 1장 20절에 보면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경 신학자는 해석하기를 이것은 일곱 교회를 지키는 수호천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만약 천사를 가리켰다면 일곱 교회 중에 에베소 교회 사자에게 편지한다 하였으니 그러면 예수께서 천사에게 편지한다는 말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그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를 맡아서 일하고 있는 주의 종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들은 예수님의 오른손에 붙잡혔다는 뜻입니다. 주의 종이 오른손에 붙잡혔다 하는 뜻은 주의 종들은 자기 마음대로 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손에 붙잡혀서 주님 시키는 대로해야 됩니다.

둘째로 주님의 종의 인사권은 주님의 손에 있고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오라 하면 오고 쫓아버리면 쫓겨가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라 하면 가고 주님이 오라 하면 오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께서 금 촛대 사이를 다니면서 잘 감찰하십니다. 교회와 교회 사이를 다니시면서 보살펴 주시고, 지켜주시고, 모든 것을 후히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인정받는 교회가 가장 귀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 사회가 우리 교회를 인정 안 해준다 해서 겁낼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 인정받으면 교회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사람들이 다 인정한다 해도 주님께서 인정 못한다 하면 그 교회는 제 구실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인정받는 교회여야 됩니다. 동네 사람들한테 이런 칭찬 저런 칭찬 다 받는다 해도 정작 인정받아야 할 남편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내라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런가 하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한테 인정받아야 할 남편이 처자식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인정을 마땅히 받아야 할 분에게서 인정받을 때에 행복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정받아야 할 분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인정하시던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 교회에 오셔서 우리 교회를 인정해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 신앙의 인정(2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치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주님께서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네 행위를 안다는 것입니다. 무슨 행위입니까? 믿음의 행위입니다. 네 수고를 안다고 했습니다. 무슨 수고입니까? 믿음의 수고입니다. 네 인내를 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인내입니까? 믿고 참아 나가는 인내를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상징한다면 예루살렘 교회의 믿음의 행위는 과연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모였다 하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났다 하면 성경공부 했습니다. 성경공부가 끝났다 하면 흩어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흩어져서 전도했습니다. 전도가 끝났다 하면 하나님과 사회를 위해서 봉사했습니다.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하나하나 보고,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인정받는 신앙입니다. 우리도 우리들의 믿음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얼마든지 속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저와 일주일 중 낮에 한 시간 혹은 저녁에 두 시간만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강단에서 여러분들에게 천사노릇 한 두 시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내 가정식구는 못 속입니다. 내가 내 처자식들을 어떻게 속일 수 있습니까? 항상 같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처자식이 내 믿음을 인정해주면 내 믿음은 진짜입니다. 그러나 내 처자식이라고 해서 24시간 같이 있습니까? 저를 24시간 계속 지켜보고만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심지어는 처자식도 속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24시간 못 속일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내가 네 믿음의 수고, 믿음의 행위, 믿음의 인내를 모두 다 알고 있다고 인정해주는 교회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복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3) 봉사의 인정(3절)

“또 내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첫째는 참고, 둘째는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셋째는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내가 안다, 즉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봉사, 즉 섬긴다는 얘기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역사가 오래된 교회가 아닙니다. 복음이 들어간 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거의 첫 믿음입니다. 부부가 함께 나오는 교인이 별로 없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나오는 교인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내가 교회 나간다고 남편에게 온갖 학대를 다 받고, 며느리가 교회 나오다 보니 시어머니에게 온갖 학대를 다 받습니다. 그래서 네가 그렇게 학대받을지라도 참고, 네가 내 이름을 위해서 핍박을 받을 지라도 견디어 내고, 그리하고도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봉사하는 것을 내가 안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온갖 시중 다 들어주면서 며느리에게 나가서 봉사하라 할 때 그것마저 못한다면 믿음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온갖 뒷바라지 다 해주며 나가 봉사하라 할 때 안 한다면 믿음은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온갖 핍박과 괴로움 속에서도 참고 견디어 내면서 부지런히 봉사하였고, 그것을 주님이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핍박 중에 하는 봉사야말로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봉사요, 우리가 인정받아야 할 봉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주님의 인정, 신앙의 인정, 봉사의 인정을 말합니다.

 

II. 갱신하는 교회(4∼5절)

천주교로부터 우리 신교가 개혁한 지 500년이 되었습니다. 개신교라 할 때 ‘개신’이라는 말은 고칠 “改”자에 새“新”자입니다. 즉 계속 새롭게 고쳐나가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천주교로부터 한 번 교회를 개혁한 다음 그것으로 끝나버리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송장이 되어 버립니다. 교회는 자꾸 새롭게 개선해 나가고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개신교라고 합니다.

전에 우리교회 헌신예배에 말씀을 전하러 오셨던 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군인 시절에는 간첩 잡는 전문가였습니다. 셰퍼드를 훈련시키고 부리는데 아무리 사나운 개도 손가락질 몇 번하고 툭툭 치 면 꼬리를 흔들며 쫓아올 정도로 개 훈련을 잘 시키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간첩 냄새만 맡았다 하면 기가 막히게 찾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냇물이 흐르는 데서는 못 찾아간다고 합니다. 도무지 냄새를 못 맡습니다. 그래서 간첩들은 냇물 있는 데 가서는 한참 내려가다 건너가거나, 거슬러 올라가다 건너갑니다. 바로 건너가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사람이 직감으로 위치를 대량 잡아주면 개가 다시 냄새를 찾아간다고 합니다. 개가 어떻게 냄새를 알아내는가 하면 사람에게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늘이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떨어진답니다. 그것은 우리 세포가 죽어서 떨어지는 것인데 개가 세포냄새를 맡고 쫓아갈 재간이 없습니다. 사람에게서 비늘이 그토록 많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죽어 떨어지면 한편으론 계속 새로운 세포가 형성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육신은 계속 새로워집니다. 그래서 칠 년만 되면 완전히 뒤바뀌어 전혀 다른 살이 되어 집니다. 그래서 완전히 새 것이 됩니다. 계속해서 한편으론 죽어 나가고 한편으론 새롭게 되는 것이 멈추어 지는 날 그 사람은 죽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특징은 내 모습은 그대로 지니면서 바뀌어 집니다. 칠 년 됐다고 그 사람을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습은 갱신해 나가야 하는 데 이 갱신은 먼저 책망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본문은 가르칩니다.

 

1) 책망 받고 갱신(4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아니라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렇게 칭찬을 많이 하고 좋은 점이 많았는데 책망할 것이 있을 때는 가차없이 책망하셨습니다. 미워서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나를 책망해 준다면 그만큼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책망할 일이 있는데도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두면 그것은 관심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누가 나를 책망하면 그건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키워준다는 뜻입니다.

이화여자대학교 교목실장을 8년이나 지낸 마경일 목사님께 졸업반 학생 한 명이 찾아왔습니다. 그 학생은 목사님에게 약혼식 주례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잘 모르는 학생이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자기가 이화여고 졸업생이라고 소개하면서, 학생시절에 어떻게 선생님들을 골탕먹였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수업시간에 엉뚱한 질문을 해서 수업분위기를 망쳐놓기도 하고, 말썽은 혼자 다 부렸다는 것입니다. 마경일 목사님도 전 이화여고 교목실장을 3년 했기 때문에 그 학생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 여학생 때문에 수업 분위기가 흐려지고 맙니다. 한 달 두 달 지켜보다가 마목사님이 하루는 그 여학생을 조용히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지적해서 책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얼굴을 못 들 정도로 책망했습니다. 결국 그 여학생은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그 후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여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이화여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후 목사님은 이화여대 교목실장으로 가게 되고 그 일을 아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여학생이 약혼식 주례를 부탁한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목사님, 그 때 책망하실 때에는 너무너무 괴로웠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목사님처럼 고마운 분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뒤에서 흉만 보았지 그렇게 따끔하게 책망해 주신 분이 없었는데, 정말 목사님 덕분에 공부해서 이화여대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때 저를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이화여대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했답니다. 성도 여러분, 책망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갱신은 시작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회개하고 갱신(5상반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생각 없이 회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이 통성 기도하면서 울며 회개하니까 그냥 같이 실컷 울다가 내가 무슨 회개를 했는지도 모르는 그런 회개는 백 번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내 감정에 북받쳐 운 것뿐이지 냉정하게 생각해보고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잘 압니다. 한 곳에 부자가 있었는데 아들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아들은 순종을 잘 하는데 작은아들은 문제아입니다. 돌아 가시지도 않은 아버지의 유산을 자꾸만 졸라서 결국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유산을 가지고 멀리 아버지를 떠나 타국으로 갔으니 얼마나 자유롭고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 품을 떠나 누리는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 누리는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닙니다. 엄청난 돈으로 창기와 더불어 먹고 놀아날 때 친구들이 모여들었는데 전부 돈보고 모여드는 친구들입니다. 돈 때문에 사귀어지는 친구는 참 친구가 아닙니다. 돈이 바닥이 날 때 다 떨어져 버립니다. 그 다음에는 흉년이 듭니다. 결국 양돈업자에게 취직을 했지만 월급은 고사하고 끼니조차 못 먹을 정도입니다. 그 때 탕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울고만 있은 것이 아닙니다. 남이 우니까 운 것이 아닙니다. 감정이 북받쳐 운 것 이 아닙니다.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 지나온 날에 자기 아버지와 같이 있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즉 과거를 회상해 보았습니다. 둘째, 현재 내가 왜 이렇게 비참해졌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셋째,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살 길이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아가 옛날의 지위를 되찾게 된 것입니다. “생각하고 회개하며!”란 말씀은 회개할 때에 하나하나 정확히 생각하면서 과거를 청산하고,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지향해 나가면서 회개해야 그것이 참 회개요, 참으로 이루어지는 갱신이라는 말입니다.

 

3) 제 모습을 찾는 갱신(5하반절)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처음 행위를 가지라, 네가 앓은 첫사랑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처음 에베소 교회가 개척되고 모일 때는 굉장히 사랑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지나다 보니 그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였고 영적으로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처음에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많은 헌금을 바쳐서 구제하면서 얼마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구제 보따리가 문제가 되어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간에 싸움이 생겨 결국은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구제 보따리가 사랑 보따리가 아니라 싸움 보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에서 구제하는 것은 좋긴 하지만 때로는 구제가 큰 문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구제 받고 크는 교인은 항상 받을 줄만 압니다. 자기가 잘되고도 받을 줄만 알뿐 하나님 앞에 바칠 줄은 모릅니다. 구제를 받으려고 하지말고 하려고 하십시오. 구제하면서 큰 교인이 되어야지 구제 받고 크는 교인은 문제점이 많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제해주고 돈 몇 푼 주는 것이 참 사랑이 아니라 참 사랑은 전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저의 경험에 의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외삼촌의 전도를 받아 예수 믿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아마 제 외삼촌이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되기까지 이것저것 좋은 것 많이 사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 잊어버리고 아무 것도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 믿고 목사가 되기까지 이끌어 주신 외삼촌의 공로만큼은 잊지를 못합니다. 나에게 사탕을 준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때는 그것이 더 좋았을는지 모르지만 지내놓고 보니 멸망당할 나에게 예수 믿도록 전도해서 목사 되게 해준 그 사랑에 비해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성전 미문에 앉아 한 푼, 두 푼 오고가는 사람에게 얻어야만 먹고사는 그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은 한 푼 주었다면 얼마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는 다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주었더니 예수 이름으로 근본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우리가 쌀 한 가마 주고, 오 한 벌주는 것도 좋지만 그를 불쌍히 여겨 전도하여 그 영혼을 구원해 주는 것이야 말로 사랑 중의 사랑입니다. 교회가 가져야 할 첫 열심, 첫사랑은 바로 전도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도록 갱신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III. 예수 닮는 교회(6∼7절)

 

1) 미워하시는 예수(6절)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예수님이 미워하는 것은 우리도 미워해야 됩니다. 이것이 예수 닮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가는데 예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우리도 가차없이, 용서 없이 미워하자 그 말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미워하시면 우리도 죄를 미워하고, 예수님이 마귀를 미워하시면 우리도 마귀를 미워하고, 반면에 예수님이 좋아하시면 내가 싫어도 좋아하는 이것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이 미워하신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 교회였는데 이것을 예수님이 칭찬하셨습니다. 니골라당의 행위가 무엇입니까?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일곱 집사를 택할 때 맨 마지막에 택함 받은 집사가 니골라라고 하는 집사인데 안디옥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처음에는 은혜를 받고 열심히 집사로 봉사했었는데 나중에는 유대교로 입교해 버렸습니다. 유대교회에서 패당을 만들어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훼방하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세상에 이런 집사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이 그런 악한 행위를 그냥 보시겠습니까? 주님은 그런 행위를 미워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도 주님이 미워하는 그 당파의 행위를 미워했습니다. 주님이 미워하시는 죄, 주님이 미워하시는 악, 주님이 미워하시는 마귀, 우리도 함께 미워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닮는 것입니다.

 

2) 말씀하시는 예수(7상반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오늘날 제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성경말씀을 전하고 가르쳐 줘도 성령이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감동시켜 역사하지 않으면 귓전에도 성령이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감동시켜 역사하지 않으면 귓전에도 울리지 않습니다. 성령이 여러분 마음을 뜨겁게 감동시키고, 뒤엎어 놓고 녹여 주실 때 그 말씀이 믿음의 양식이 되고, 영의 양식이 되어 예수님을 하나하나 닮아가게 됩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교회가 무엇입니까? 건물입니까? 아닙니다. 바고 교인들이 교회입니다. 성령이 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 목사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성령의 역사로 우리 마음에 받아들일 때에 예수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를 우리는 닮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3) 승리하시는 예수(7하반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세상을 이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즉 아담과 하와 이후 인간으로서 세상을 이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을 이긴 사람은 예수님뿐입니다. 마귀를 이긴 사람, 죄를 이긴 사람도 없습니다. 전부 죄의 종이 되었고, 마귀의 종이 되어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승리자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내가 예수 편에 서면 예수님의 승리가 내 승리가 되고 예수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 되고, 예수님의 온갖 축복이 나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정받는 교회, 갱신하는 교회, 예수 닮는 교회, 이것이 금년 우리의 세 가지 기도 제목입니다.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

계 2장 1~7절 / 정필도목사

무엇을 잃어버리면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잃어버리면 대단히 섭섭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무척 아쉽습니다. 값으로 치면 비록 얼마 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내게 꼭 필요한 것을 잃어버렸을때,그때의 섭섭함과 당혹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속상합니다. 그러나 잃어버렸다가 생각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이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너무 좋아서 절로 탄성이 터져나옵니다. 일백 마리의 양을 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주인은 그 양을 찾아 헤매다가 천신만고 끝에 잃어버린 양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는 얼마나 기쁘든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친구들을 부르고 이웃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귀하면 귀한 것일수록 더욱 고통이 심하고 피해가 큽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평소에는 눈의 귀함을 몰랐는데 막상 앞을 보지 못하게 되자 얼마나 불편하고 어려움이 큰지, 새삼 눈의 귀중함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또 잘 들리던 귀가 어느 날 갑자기 안 들릴 때 그 답답함이란 이루말할 수 없습니다. 당해보지 않고는 느끼지 못합니다. 청각을 잃어버리면 말도 어눌해집니다. 왜냐하면 남의 말만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도 잘 들리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정확한 언어표현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점점 말이 어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될수있는 대로 귀한 것들을 잃어버려서 안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이것만은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은?

1.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귀한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6절 이하를 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 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모릅니다.

디모데전서 2:1-4절을 보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서를 쓸 때 임금이 누구입니까? 기독교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설명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런 악독한 인간일지라도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을 보면, 성경에서 주님이 오신다고 계속해서 말씀하면서도 속히 오지 않으므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교회안에 있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재림이 곧 될 것처럼 말하면서도 자꾸 늦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도 멸망 받지 않고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도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돈 몇 푼 때문에 사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가치를 어떻게 돈으로 칠 수 있습니까?

IBM의 설립자인 톰 왓슨의 성공비결 중의 하나는 사람을 가장 소중한 자신으로 여긴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젊은 부사장이 매우 모험적인 신제품 개발 계획을 가지고 와서 보고했습니다. 왓슨은 과연 이 사업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이냐고 되물었습니다. 이에 부사장은 위험부담이 큰 사업일수록 높은 수익률을 올릴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왓슨은 그의 열정을 믿고 그 사업을 승낙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회사는 1000만 불이라는 거금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에 부사장은 실패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왓슨은 정색을 하며 “무슨 소린가? 자네를 교육하는데 무려 1000만 불을 썼는데 어떻게 그만 둘 수 있는가. 다시 시작하게]라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부사장은 신제품 개발에 다시 도전하여 성공하였고 회사는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교역자는 물론이고, 구역장을 비롯하여 모든 성도들을 귀중하게 여기고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2. 사랑입니다.

사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자연히 사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재산이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학벌이 좋으면 뭐합니까? 높은 지위에 있으면 뭐합니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면서 살면 살맛이 납니다. 사랑으로 살면 사람다워집니다. 사랑하며 살면 행복해집니다. 사람에게서 사랑을 빼면 짐승보다 더 무서운 인간이 됩니다. 이 세상에 사랑하나 빼면 인간처럼 무서운 동물이 없습니다.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 인간답게 살수 있고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클수록 그만큼 행복해집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면 그 마음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행복할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사랑이 없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눈에는 온통 미운 사람만 보일테니 얼마나 속이 상하고 괴롭겠습니까? 따라서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만큼 행복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만큼 불행한 것입니다. 사랑을 잃으면 사람도 잃고 행복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사랑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크고 대표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어느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믿음이 좋은 것처럼 큰소리 치고 굉장한 일을 한다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며, 또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정도로 희생하고 봉사할지라도 사랑이 없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비중이 이처럼 큰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평생 수고를 많이 합니다. 고생이 되더라도 잘 참고 견뎌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마지막에 가서 자식을 원망하며 나는 헛살았다고 괴로워한다면 자식에 대한 사랑이 식은 증거입니다. 만일 대가를 바라고 자식에게 투자하고 사랑했다면 그동안 쏟은 수고와 인내가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랑으로 수고하고 인내했다면 끝까지 원망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수고도 많이 하고 인내도 잘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원망불평이 많아졌고,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이는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랑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사람의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안경을 벗고 사람을 보기 시작하면 왜 그렇게 그 사람의 허물이 잘 보이는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되고 비판하게 되며 자연히 원망불평이 늘게 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원망하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진리를 소중히 생각하고 진리를 사수하는 교회였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는 거짓된 자들인 이단 세력을 색출하여 참된 진리를 수호하는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 일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좋은 일은 했지만 결국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에 처해도 무슨 일을 해도 사랑만은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거스틴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진리를 한번 강조할 때 사랑은 두 번 강조하라.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만 진리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가진 진리에 대한 관심을 갖기보다는 우리의 사랑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사랑을 발견하게 되면 마음 문을 열고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나 우리에게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면 마음 문을 닫아버리게 되어 결국은 그들이 진리를 발견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본문 5절을 보면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교회가 사랑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교회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은 촛대를 다른 교회로 옮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처음 행위는 무엇을 말할까요? 그 형제를 위해서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도 그 사람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긴 사람들, 나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람들, 내게 손해를 주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기도해줄 수 있다고 하면 이것은 큰 사랑인줄 믿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핍박자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면 그들을 사랑하게 될 줄 믿습니다.

 

3. 믿음입니다.

믿음은 보배중의 보배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천국에 갑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믿음으로 기도하여 기도응답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믿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영생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천국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믿음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온전한 사람은 결코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게 됩니다.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똑바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알게 되면 누구나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게 되고 말씀대로 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온전한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14-22절을 보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라는 뜻은 쉽게 말해서 믿음만큼 행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는 뜻은 행하는 만큼 믿음이 온전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주고 행하는 만큼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소유하면 사랑도 행하게 됩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온전한 믿음의 사람만 구원받지 않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성경은 겨자씨만큼의 작은 믿음만 있어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산을 여기서 저기로 옮길 수 있고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17:20). 그러나 우리가 구원만 받으려 해서는 안될 줄 믿습니다. 구원받은 것으로 족하게 여기고 아무렇게나 살아서 되겠습니까?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흠과 티와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야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서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 듣고 면류관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큰사랑을 베풀면서 살아서 한 영혼이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다 구원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자

계 2장 1~7절 / 송영태목사

한국 전쟁직 후 한 나병환자 촌을 방문한 미국 관광단이 있었습니다. 한 관광객이 거기 선교사로 파송된 한 간호사가 나병환자의 상처를 싸매는 광경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수십억의 돈을 준다해도 저 일은 할 수 없어"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간호사가 대답합니다. "나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말을 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기에 이 일을 합니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만들었지만 그 이후의 인간은 부모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양식은 땅을 통해서 얻게 하셨습니다. 즉 씨 맺는 채소와 나무의 열매를 통하여 살아가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부모 없이는 태어날 수 없으며 땅을 통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부모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요, 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축복의 수단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통로요 기관으로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부르실 때 사용하시는 대리기관이요, 수단이며 방법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속 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 구원의 역사를 다 마치신 다음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하여 구원 활동을 펼치시고 계십니다.

때문에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 속에 성령께서 오셔서 구원 공동체를 이루어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세상에 당당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부흥할 때 주님의 역사는 흥왕 하였고 교회가 타락할 때 주님은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서는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선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부르시고 믿게 하시며 변화시키고 훈련시키셔서 주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잘못된 길로 가서도 안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전 세계로부터 칭찬을 받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 교회는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행2:46절에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전에 모여 예배드리고 합심하여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나누는 성찬을 행하였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된 것처럼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가 칭찬 받는 교회입니다.

다음으로 한국 교회는 새벽기도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막1:35절 말씀에 새벽기도는 우리 주님께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이 새벽기도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경건 생활의 좋은 밑거름이며 폭발적인 교회 부흥을 이룬 교회들의 힘이기도 합니다. 시46:5절 하반절에 보면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육간에 풍성해지는 비결입니다.

세 번째로 한국 교회가 칭찬 받는 것은 전도에 힘쓰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왕성한 전도사역이 있기에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핍박과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전도를 계속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는 십일조와 헌금을 많이 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헌신이 있고 희생이 있는 예배가 바른 예배이며 하나님께서 흠향 하시는 예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요한을 통해서 역사의 마지막 일을 환상과 계시로 말씀하신 것으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의 신앙을 심판하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주님의 뜻에 온전히 합당하게 행하여 칭찬 받은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교회는 모두 주님의 책망을 면치 못했습니다.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중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교회는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당시 에베소 지역은 소아시아의 항구도시로 상업과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하나인 아데미 신전의 소재지였으며, 동방 이교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행19:19-20절에 보면 에베소에는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 책을 다모아 불살라 버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모든 일들은 사도 바울이 2차, 3차 전도여행 때 전도하면서 이루어진 사건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에베소는 다른 교회들 보다 가장 훌륭한 목회자들을 모셨던 교회이기도 합니다. 사도바울, 아볼로 그리고 디모데와 사도 요한이 차례로 목회하던 교회였습니다.

이렇듯 에베소 교회는 훌륭한 목회자들을 통하여 성경적인 훈련을 잘 받아 성경지식이 풍부한 교회였으며, 교리에 밝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정확히 분별하여 드러냈는데 주님께서 이것을 보고 칭찬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6절에 보면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니골라 당이란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에서 니골라 집사를 따르는 무리와 그들의 주장을 말합니다. 말씀에서 타락한 니골라는 교회 안에 헬라 철학을 받아들여 사람의 영은 절대 선하나 육신은 근본적으로 악하다 하여 몸은 어떤 죄악을 범해도 괜찮다는 잘못된 교리를 선포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때문에 니골라 당을 쫓는 사람들과 교회는 음란과 방탕으로 타락된 길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계급 제도를 세워서 교회를 세상적 모습으로 타락시켰던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니골라 당을 에베소 교회는 단호히 배격하고 미워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2절에 보면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을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악한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성결한 교회였으며, 옳은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윤리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그 뜻에 따라 실천해 가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에베소 교회는 열심 있는 교회였습니다. 3절에 보면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말씀하였습니다.

분명 에베소 교회는 주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참고 인내할 줄 아는 교회였습니다. 주님의 사업에 게으르지 아니하고 열심을 품어 땀흘리며 일하여 헌신하는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렇듯 주님께서는 말씀을 잘 배워 교리에 밝은 에베소 교회를 칭찬 하셨고, 불의와 거짓을 용납하지 않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에베소 교회를 칭찬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업에 열심있는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5절에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진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촛대를 옮기겠다고 분노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떠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보세요! 주님께서 떠나시면 그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떠나신 교회는 불꺼진 화로같이 재만 날릴 뿐입니다. 주인 떠난 허망한 빈집일 뿐입니다.

 

구약 성경 역대기에 보면 한 인간의 삶이 유종의 미를 거둔다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을 보여주는데,

특히 남쪽 유다 왕가를 기록한 역대기를 보면서 처음에는 왕으로 등극할 때에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가다 그만 교만해지면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 3대 왕인 아사는 41년간을 나라를 통치하면서 온 나라가 평안과 번영을 누렸던 축복의 원인을 대하14:2-4절에 기록하기를 "아사가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사왕이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에게도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그것은 군사 100만명을 거느린 "이디오피아 왕 세라"가 침공하였던 것입니다.

화평과 번영의 날에도 하나님을 찾았던 아사 왕은 이 어려운 순간에 더욱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더욱 그의 믿음을 시험코자 어려움을 당하게 하였지만 아사 왕은 이 시험에서 낙제하지 않고 하나님이 도우심을 구하며 더욱 믿음을 굳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58만명의 병력으로 100만명의 적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하16장에 가면서 아사 왕의 불신앙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불신앙은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경건한 왕이 나라가 평안하여 지면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자 교만에 빠지게 되면서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지하고 잘못을 꾸짖는 선지자"하나니"를 감옥에 가두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엄청난 죄악으로 결국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유다의 성군 여호사밧 왕이 그랬고, 요아스 왕이 그랬으며 아마샤 왕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듣고 선지자들의 명을 받아 그대로 행할 때에 형통하던 왕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로 인한 오만과 우상 숭배하는 실정으로 결국 그들의 최후가 비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심을 믿고 하나님께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공통된 말씀입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면 악해집니다. 망합니다. 성경의 증언이며 역사의 증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리에 밝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열심이었던 에베소 교회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주님을 이렇게 진노하게 한 것일까요?

어떤 과오와 오류가 있길래 우리 주님께서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실망스러운 교회가 된 것입니까?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멋있는 교회인지 모릅니다. 일꾼들도 있고 열심도 있으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4-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촛대는 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첫 사랑에 머문다는 말씀입니다.

촛대는 도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첫 사랑에 머문다는 말씀입니다.

촛대는 열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첫 사랑에 머문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배우고 교회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믿기를 기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윤리적인 교회와 성도를 바라십니다. 주님께서는 부지런하며 열심 있는 신앙 생활을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뛰어 나게 잘 한다 할지라도 첫 사랑이 빠져 버린 것이라면 주님께서는 더 이상 거기에 머물 필요가 없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직 이 한가지, 너의 처음 사랑이 불타오르고 있는가, 이 처음 사랑의 감격과 감동과 정열이 넘쳐 나고 있는가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처음 사랑의 감격과 눈물이 마르지 않는 곳에 주님이 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의 과제는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서강 가족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오늘의 우리 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성경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듣고 세월이 지나면서 교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으로 주님이 함께 계시리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생황을 오래했고, 세상 사람들처럼 간음하지도 않고,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지도 않았으며,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다는 도덕적인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열심 있는 마음으로 사업을 하고 땀을 흘린다고 하여 주님이 여기에 머물러 축복하실 것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 주님께서는 교리나 도덕이나 열심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처음 사랑에 머물러 계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도여러분!

에베소 교회가 상실한 처음 사랑은 무엇이겠습니까? 죄인 되었던 나를 의인으로 바꾸어 주신 그 은혜, 이것이 처음 사랑입니다. 지옥으로 한없이 내려가던 나를 천국으로 올라가도록 부르셨던 구속의 사랑, 바로 이것이 처음 사랑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그 감격! 그 감동! 그 사랑! 이것이 처음 사랑이란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와 성도가 처음 사랑에 젖어 살기를 바라십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세상살이 때문에 실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다가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며 눈시울이 붉어지십니까?

마음이 연약하여 다른 길로 가다가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내가 목마르다"라고 비명을 지르시는 모습을 떠올리며 순간 목이 매어 주님을 부르며 가슴을 쥐어 뜯는 경험이 계속되고 있으십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놀라워 이 목숨 다 바쳐 주님을 사랑한다 해도 다함이 없는 신앙고백을 가슴 뜨겁게 하며 신앙생활를 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처음 사랑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에 틀림없습니다. 주님의 처음 사랑에 젖어 살아가는 성도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첫째는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에 감격하며 사는 신자는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무슨 일을 행하든지 이 일에 대하여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알아주든 몰라주든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이 고맙고 고마워서 마땅히 할 일을 한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재산을 전부 드리고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는다 해도 칭찬 받을 일은 아닙니다. 상 받을 일이 아닙니다.

더 못해서 부끄럽고 다 드리지 못하여 안타까울 뿐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눈물로 생명으로 응답할 뿐입니다. 이것이 처음 사랑에 젖어있는 신자의 신앙인격입니다.

마26:7절에 보면 한 여자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귀신에 들려서 고생하다가 예수님께 고침 받은 여인입니다. 1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많은 액수의 향유입니다. 땅에 떨어집니다. 못쓰게 됩니다. 어쩌면 낭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여자만이 드릴 수 있는, 예수님께 대한 계산할 수 없고, 값으로 따질 수 없고, 조건이 없는, 사랑과 헌신의 표현입니다.

어디 옥합 뿐이겠습니까? 자신의 자존심도, 명예도, 재산도, 그 어떤 것도 아낌없이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순교해서라도 자신을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셨던 최고의 하나님께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은 이 여인만이 압니다. 헌신한 사람만이 예배의 기쁨을 압니다. 사랑을 쏟아 부은 자만이 사랑의 감격을 맛봅니다. 희생한 것만큼 감격이 있고, 포기한 것만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최상의 존재에게 나의 최상의 것을 아낌없이 쏟아 버리는 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둘째로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립니다.

구속의 처음 사랑에 젖어 사는 사람과 교회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롬3:26-27절에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런 즉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계속해서 롬8:31절에서 바울은 말하길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이 주님의 역사요, 주님의 은혜요, 주님께서 살게 하셨기에 살았고, 되게 하셨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란 말입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 할 말이 없는 사람, 오직 주님만 자랑하고 주님께만 영광 돌리는 사람입니다.

"제가 뭐 하는 것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하셨지요" 이렇게 말하고 이런 생각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 이 사람이 구원의 첫 사랑에 젖어 사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첫사랑에 젖어 사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해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아까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절대로 후회가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사랑 받는 것을 생각하여, 고생하고, 고난 당하며, 핍박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진 신자의 심령 속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처음 사랑에 젖어 살았던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몸이 깨져 피 흘리며 죽어가면서도 천사의 얼굴처럼 행복한 얼굴이었습니다. 목숨을 바쳐도 후회가 없는 행복, 이것이 처음 사랑에 젖어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은혜 주시며 역사하시는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머물러 계셔야 합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처럼 교리에 밝고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열심이 있다해도 주님이 첫사랑에 젖어 있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실 것이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형식과 제도에 얽매여 의무감 때문에 감격 없는 습관적인 반복 행위에 대해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주님의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십시오. 골고다 언덕 십자가 밑으로 무릎을 꿇고 올라갑시다. 구원의 감격과 눈물로 부르짖읍시다. 메마른 눈으로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정말 주님의 사랑이 감격스럽고, 주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께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가장 소중한 마음으로 드리셨습니까? 잘하셨습니다.

늘 감격 속에 사시길 축원합니다.

 

 

 

 

 

처음 사랑을 가지라

계 2장 1~7절 / 김진호목사

일본의 여류작가인 미우라 아야꼬씨는 작가인 동시에 진실한 크리스찬입니다. 그가 쓴 작품중 「빙점」이란 소설은 우리 나라에도 널리 번역되어 한때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쓴 수필집이 있는데 「사랑한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속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저자 미우라 아야꼬씨는 이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무서운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사람은 도둑이나 강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기야 요즘의 도둑은 돈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여자에게 추행까지 행하는 악인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을 살자면 참으로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세상에서 두렵고 무서운 것은 지진이라고 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별로 지진의 두려움이 없지만 일본만 해도 지진으로 인해 갑자기 땅이 꺼지고 건물이 내려 앉고 철로가 휘어지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졸지에 죽고 상하는 비극은 아무리 인간이 과학의 힘으로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무서운 천재지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세상에 두려운 것은 술취한 운전수가 달리고 있을 때 참으로 두려워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술취한 운전수가 있는 버스를 타보신 적이 있습니까?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이 땅에는 두렵고 놀랍고 무서워해야 될 일이 많은데 「빙점」의 작가인 미우라 아야꼬씨는 「사랑한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란 책속에서 말하기를 이런 두렵고 무서운 것들 중에 더 두렵고 더 무서운 것이 하나 있는데 '자신의 생활이 습관화 된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랜 경험과 세월속에서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순수한 감격이나 감동없이 모든 것이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익숙해져 버리고 마는 생활을 미우라 아야꼬는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13년동안 병원침대에서 누워서 요양중에 있었을 때 처음에는 자기를 찾아주고 방문해주는 사람들에 대해서 무조건 고맙고 감사하고 새롭게 반가워 했는데 너무 긴 요양생활을 계속하다보니까 사람들이 찾아올 때마다 들고 오는 선물에 대해서 관심을 쏟게 되고 으례히 자기는 그런 선물을 받아야 되는 당연지사로 느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먹을 것을 사오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꽃을 사오기도 하고 책을 사오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위로금을 가져 오기도 하는데 이젠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반갑게 대하기도 하지만 그 손님이 무슨 선물을 사가지고 왔는가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한 번은 몇 년만에 반가운 친구가 자기를 문병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실을 들어오는데 척보니 그 친구의 손엔 먹을 것도 꽃도 아무 것도 들고 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갑게 만나 위로를 받고 대화하면서도 속으론 어쩌면 문병 오는데 빈손으로 오는고 하고 생각하다가 그렇지 아마 이 친구는 다른 것을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봉투에 돈을 가지고 왔겠지하고 생각하면서 얼마간 이야기하다가 그 친구는 일어나 작별인사를 하고 무언가 봉투 하나를 내놓을 줄 알았더니 그냥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대단히 섭섭하게 헤어지면서 아 그렇지 저 사람이 자기 주머니 속에 든 위로금을 깜빡 잊어버리고 나가다가 버스 탈 때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어 보고 위로금 봉투가 그냥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다시 내 병실을 찾아오겠지 하고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친구는 여러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어쩌면 몇 년만에 나를 병문안 오면서 빈손으로 오다니 참 시시한 사람도 다 있군"하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자기 자신에게서 몸서리치고 두렵고 무서운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 내가 이렇게 순수한 마음이 없어지고 고등거지가 되어 버렸습니까? 내가 어찌 다른 사람에게 사랑 받는 일 선물 받는 일에 습관화가 되어 버린 것입니까?"하고 그 자신에 처절한 모습을 발견하며 회개했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그 먼 곳에서 병문안 온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감격해야 될 자신이 이렇게 잘못된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 첫사랑을 잊어버린 자신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매달 구독해 보는 월간 목회지에서 어느 선배 목사님이 쓰신 간단한 글속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을 발견하면서 내 자신을 다시 들여다 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목사 노릇을 오래할수록 자꾸 첫사랑 첫열심 첫감동이 사라져 아주 못되어 간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 계시록2장에서는 7교회중 제일 첫교회인 에베소 교회를 향해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말씀하신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장점이 많은 교회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에베소교회 만큼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본문에 있는 에베소 교회는 행위와 수고한 많은 교회는 어려운 핍박과 환란도 견디고 나가는 인내하는 교회요, 악한 이단자들을 용납지 아니할뿐 아니라 거짓 지도자들의 잘못을 잘 드러내어 분별할 줄 아는 영적으로 실력이 있는 교회요, 주님을 위해 견디며 게으르지 아니한 부지런하고 열심 있는 교회였다는 사실을 본문은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훌륭한 교회요 좋은 교회일 수 있는데 사도 요한은 이런 에베소 교회를 행하여 가장 중요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며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엄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인내하고 게으르지 않고 이단을 몰아내고 많은 수고를 한다고 할지라도 첫사랑 첫행위를 다시 찾지 않으면 에베소 교회에 생명의 촛대, 사명의 촛대를 옮겨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거듭거듭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을 향해 냉엄하게 판단해봐야 될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첫사랑 첫행위를 잊어버린 사람이 곧 형식적이요 외식적이요 습관화 되어 버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 성년 남녀가 사랑으로 사귀게 될 때 이들 가슴속엔 첫사랑이 싹트고 자라갑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그의 말도 그의 행동도 모두가 새롭게 느껴지기 때문에 진실해지고 깊어집니다. 그런데 이들이 결혼해서 여러 해 사는 동안에 첫사랑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익숙해가고 형식화 되어가고 하나도 새롭고 달라진 것이 없고 습관적으로 말하고 습관적으로 대하게 되고 말 때 그 부부의 관계는 덤덤해지고 나중에 어떤 조그만 의견에 말다툼이 생기면 그것이 싸움으로 변해서 이혼까지 당도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첫사랑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제가 마산에서 아는 젊은 부부가 있습니다. 이들에겐 두 딸을 낳고 아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부부싸움이 나서 그것이 이혼까지 번져서 교회는 나오니깐 이제 마지막으로 목사님 모셔다가 마지막 예배드리고 갈라서자고 그래서 저를 청했습니다. 제 목회 생활중 약혼식 결혼식 회갑식 결혼기념 예배는 인도했지만 이혼 예배는 처음으로 드리게 되엇습니다.

참 입장이 곤란하대요! 내가 전에 그들의 과거를 얘기 들어 압니다. 남자는 책외판원으로 고생고생하면서 성실하게 산 사람이고 여자는 미용사요 인물도 잘생겼어요! 두 사람이 서로 연애해서 사글세 방에서 시작해서 이제 조그만 20평 집이라도 내 집 장만해 살게 되었거든요. 이 남자가 외아들인데 아들 못낳는 것 때문에 늘 불만이 컸습니다. 그런데다가 개성들이 강하니까 서로 다투고 양보하지 않다가 이제 갈라서자고 한 것입니다.

전에 그 부인이 제게 상담했을 때 자기와 결혼할땐 아이를 안나도 좋으니 당신하고만 살면 행복하겠다던 남편이요 사글세 방에서 지내도 좋으니 같이 살자고 했던 부인인데 두 딸을 낳고 내집 장만했는데 외적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첫사랑이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본문 말씀을 가지고 단단히 설교한 후 기도하는데 이혼을 위해 기도할 순 없으니 한달만 연장해서 그때가서도 이혼해야겠거든 이혼하라고 그러면 기도하겠다고 - 둘이서 한달을 연기하자고 목사님 기도 안하시고 가면 안될테니까 - 그후에 그들이 참고 은혜 받은 후 다시 결합해서 제가 떠날 해에 아들을 쑥 낳고 잘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에수님 당시에 유대교의 열심파인 바리새인을 왜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습니까? 그들만큼 안식일을 잘지키고 십일조 꼭 바치고 금식기도하고 구제도 정규적으로 하면서 열심히 회당에서 율법을 배우며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믿는다는 것이 조금도 에수님께 책망 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23장에 거듭 책망 하시기를 "화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하도다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라고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을 떠나 습관화 되어 버린 그들의 종교생활을 책망하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유대교의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겉으로만 믿었지 하나님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여 시기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마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다 보니깐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선물에만 마음을 쏟아버린, 첫사랑을 잃어버린 미우라 아야꼬만 그 생각이 습관화 된 것입니까?

예수님 당시에 있던 바리새인들만 그들의 신앙이 겉으로만 익숙해져서 습관적인 기도, 습관적인 종교행위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도 에베소 교회 성도들처럼 다른 것은 잘하는데 첫사랑 첫열심 첫행위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닙니까?

오늘 저나 여러분들이 이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아직 첫사랑이 남아 있다고 아직도 나는 내 신앙 생활이나 모든 생활에 요령만 남아있는 습관화 되어가고 있지 않다고 느끼신 분이 있다면 정말 천만다행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순수한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첫사랑을 잊어버리지 말고 더욱더 자신을 지켜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진단해 보면 나나 여러분이나 미우라 아야꼬처럼 바리새인처럼 그리고 초댜교회인 에베소 성도들처럼 내 기도가 습관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드리고 있는 이 예배가 습관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잇는 봉사가 아주 익숙해져서 습관화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설교를 들어도 내 가슴 속에 와닿는 뜨거움이 없어졌습니다. 나의 기도속에 회개의 눈물이 말라버렸습니다. 교회에 와도 주님을 만나는 감격과 주님만 알아주시면 부러울 것도 없다는 순수한 생각보다는 인간들의 칭찬에 예민해지고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더 크게 기울이고 잇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관심보다 목사님이나 다른 어느 사람이 나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는가에 대해서 내 기분과 마음이 좌우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옛말에 "제사에는 마음이 없고 제사상에 올라오는 떡이나 음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잇는"나는 아닙니까? 과거에는 조그만 사건에도 주께 감사하고 감격했던 마음이 지금은 과거보다 더 많은 좋은 조건속에서 살면서도 감사도 없고 감동도 없고 감격도 없는 내 신앙이 되고 만 것은 아닙니까?

과거에는 405장에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다"고 하는 찬송만 불러도 내 가슴이 뭉클해지고 내 눈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그 감격이 이제 다 어디로 간 것입니까? 왜 우리의 신앙과 붕사가 약아지고 얕아져 가고 있습니까? 왜 내 믿음이 뜨거워졌다고 하는데 차디 찹니까? 왠만한 어려움에도 참고 견디던 내가 이제는 불만과 불평속에 있는 것은 한마디로 환경탓이 아니라 내 속에 첫사랑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첫사랑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이 첫사랑을 다시 찾지 않고 이대로 내 믿음이 향식화 습관화 되어 버리면 주님께서 내게 잇는 촛대를 옮겨 가신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계2:5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대로 미우라 아야꼬씨는 자신이 첫사랑이 떠나 습관화 되어가는 자신에 대해서 몸서리 쳐지면서 두려워 했다고 자인햇습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그렇게 습관화 되지 않으려고 경계하면서 자기 남편에 대해서 지금까지 덤덤히 살아오면서 가진 생각을 버리고 자기 같은 병자와 살아주고 잇는 남편에 대해 뜨거운 고마움을 느끼면서 살게 되니깐 자신도 변해지고 남편도 더 새로워졌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내 믿음이 습관화 되고 형식화 되고 있다는 사실을 무섭고 두려운 것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 한 첫사랑을 다시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으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내 인간의 생각, 내 인간의 기분과 감정으로는 자주 변질 되어 갑니다. 열심도 식어지고 사랑도 식어지고 충성도 식어집니다. 성령의 불이 내속에 임해야 내 믿음도 내 충성도 다시 뜨거워질 수 잇습니다. 성령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첫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봉사할 때도 첫사랑의 마음으로 봉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예배할때도 첫사랑의 마음으로 예배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직분의 사명을 감당할 때도 첫사랑의 마음으로 감당하기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를 대할때도 그리고 서로 성도들끼리의 만남도 첫사랑을 가지고 대하며 친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도봉 교회가 첫사랑을 떠나버린 교회가 되지 말도록 우리 모두 회개하여 첫사랑을 가지고 교회생활에 힘써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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