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의 설교 4
행 7:30-36
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33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35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행 7:30-36 / 그로부터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모세가 시내산 근처 광야에 나가 있을 때였습니다. 한 천사가 가시나무 덤불 불길 속에 나타났습니다. 31) 이 광경에 놀란 모세는 무슨 일인가 자세히 알아보려고 달려 갔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32) ㄹ)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두려움으로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였습니다. (ㄹ. 출3:6(참조,출3:15)) 33)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ㅁ) `네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한 곳이다. 그러니 네 신을 벗으라. (ㅁ. 출3:5,7,8,10 상반절) 34) 나는 내 백성이 애굽에서 학대받는 것을 보았고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들을 구해 내려고 내려왔다. 가라.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낸다.' 35)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나 재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하고 동족에게 배척받은 바로 그 모세를 애굽으로 되돌려보내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배자요, 해방자로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36) 모세는 수많은 놀라운 이적을 행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 냈으며 홍해를 건넌 뒤 40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때에 맞추어 모세를 부르셔서 자기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게 했습니다.
사십 년이 차매(30a) 스데반은 모세가 사십 세에 자기 민족을 구원하려는 자각을 가졌고(23),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 년을 살았고, 그 이후 사십 년간 자기 백성들을 인도했다고 했습니다(36). 여기서 ‘사십 년’은 미디안 땅에서의 40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때가 찼을 때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17) 곧 출애굽의 때를 정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실 때도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냈다고 했습니다(갈 4:4).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30b-34) 모세는 시내 산에서 양을 치던 중에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았는데 그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그것을 보려고 가까이 갔을 때 ‘나는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의 신을 벗으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에서 고통을 당하는 자기 백성을 확실히 보았고 그들의 탄식소리를 들었다고 하시고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사실을 증거하는 것은 모세를 통하여 구세주 되신 예수님을 깨닫게 하고자 함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35-36) 모세는 자기 동족으로부터 거절당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자기 백성들을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습니다. 비록 그들은 모세를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을 이루시고 사십 년간 그들을 기사와 표적으로 광야에서 이끌었습니다. 스데반은 자기 동족으로부터 거절당했던 모세를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 사용하여 출애굽의 대업을 이룬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자로 쓰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적용: 당신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때’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에스더처럼 ‘이 때를 위함은 아닌지’를 묵상하고 함께 나누어 봅시다.
20세기 초 알제리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일찍이 전쟁터에서 사망하였고, 소년은 청각장애가 있는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야 했습니다. 몸도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고질병인 결핵 때문에 그 좋아했던 축구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자동차 수리공으로 일하면서 주변의 도움으로 겨우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불행한 환경이었지만, 소년은 언제나 성실과 열정으로 가슴이 미어질 듯한 슬픔과 가난을 견디며 꿋꿋하게 자라났습니다. 훗날 소년은 비관적인 상황들에 굴하지 않고 문학을 향한 열정으로 삶의 아픈 상처들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44세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 사람은 프랑스 최고의 작가 ‘알베르 카뮈’입니다.
호크마 주석
=====7:30
사십 년이 차매 -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나(출 2:23-25) 본절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특히 본 구절의 표현은 모세의 미디안 생활이 하나님의 섭리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천사가...그에게 보이거늘 -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 생활은 모세를 히브리 민족의지도자로서 성숙하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여러 모양으로 단련하신 후 비로소 부르셨다. 출 3:1에서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곳이 '호렙 산'이라고 언급되고 있으나 본 구절에서는 '시내 산'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를 별개의 장소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마도 '호렙'은 그 산맥의 이름이고 '시내'는 그 산맥 중 어느 특정한 산꼭대기의 명칭이었을 것이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그 반대로 '호렙'과 '시내'를 바꾸어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 두 산이 별개가 아니라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한편 '가시 나무떨기 불꽃'으로 약간 달리 번역되어있으나 70인역과 본절의 표현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상 차이는 없다. 이 나무는 땔감으로나 목재로서별로 소용이 없는 나무로 당시 학대받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 같다.
=====7:31
모세가...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 출 3:2에서는 '여호와의 사자'로 묘사되었고 30절에서는 단순히 '천사'로만 언급되었으나 본절에서는 '주'로 표현되고 있다. 사실 모세에게 나타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지만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단순히 '사자' 즉'천사'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창 18:1-21에서 이와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7:32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 출 3:6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본 구절의 말씀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1) 하나님 자신은 과거와 같이 현재에도 변함없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즉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은 지금까지 신실하게 지켜오셨고 지금도 그 약속을 시행하고 계신다는뜻이다(시 102:27;말 3:6). (2) 하나님은 영원토록 불변하시리라는 뜻이다. 조상들과맺은 언약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며 모세가 죽더라도 그 하나님의 신실성은 변함없으리라는 뜻이다(히 1:12;13:8;약 1:17).
=====7:33
거룩한 땅 - 출 3:5을 인용한 구절이다. 본 구절은 시내 산 자체가 거룩한 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시내 산 광야에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곳을 거룩한 땅이라고지칭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곳이면 어디든 그 장소는 거룩한 곳이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중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로 구분한 성막도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7:34
저희를 구원하려고...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한지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에게 임했다. 이 부르심은 40년 전 모세가 스스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생각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 부르심에 의해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이끄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끄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구원하려'의 헬라어 '여셀레스다이'(* )는 '직접 끌어내기 위하여'라는 뜻으로 애굽에서 고통받고 압박받는 백성들을 해방시키겠다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적인 표현이다. 이 말은 출애굽 사건에 대한 주도권을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실것임을 가리킨다.
=====7:35
관원과 재판장으로...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 여기서부터는 문체가 전환되고 있다. 평온하게 사실적인 설명처럼 이어지던 설교는이제 그의 청중들을 향한 논박(論駁)으로 바뀌었다. 이 설교의 요지는 모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와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가 동일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들은하나님께서 보낸 구속자인 모세를 거부했듯이 구세주이시며 생명주로 보내심을 받은메시야 예수도 거부했다.
=====7:36
백성을 인도하여...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 스데반은 출 7:3의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는 말씀이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에서 성취되었음을 강조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통하여 그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애굽의 바로 앞에서 많은 표적과 이적을 행하셨으며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방랑 때에도 그 백성 가운데 임하셔서 수많은 능력을 행하셨다.
< 설 교 >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양향모 목사 / 행 7:30-34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아서 전했던 사람이고 그 십계명을 중심으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책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도, 성전도, 제사제도도 다 모세를 통해서 받았습니다.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에게 잡혀 와서 당시 최고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 법정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모세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이라도 구걸하기 위해서 변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자 않았다든지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든지 그런 변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복음을 전했으며 앞으로도 전할 것인데 그것은 너무나 정당한 것임을 말합니다.
다만 그들이 아직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의 핵심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이야기가 그냥 그 이야기 자체로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이야기만 가지고 그들을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도 사실은 믿음이 없었던 너무나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요셉이나 모세도 사실은 개인적으로는 별 볼일이 없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약속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고 그들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고 결국 그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핵심 알맹이를 두고 겉만 알고 따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함을 스데반이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야기는 그의 생애를 가지고 세부분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모세가 광야로 나간 지 40년 후 즉 모세가 80세가 되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세월을 보낸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오셔서 사명을 상기시키고 애굽으로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본문 30-31절 말씀에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라고 했습니다.
“사십 년이 차매”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첫 사십 년은 바로의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물에 떠내려가는 모세를 바로의 공주가 건져다가 양아들로 삼아서 왕궁에서 키웠기 때문입니다. 사십년이 되었을 때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 나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봐주기 위해서 일하다가 애굽사람을 죽인 것 때문에 광야로 도망을 와서 살았습니다. 광야로 도망을 와서 거기서 마침 목축을 하는 르우엘(이드로)이라는 사람의 가족을 만났고 그 르우엘의 딸과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결혼을 하고 가장으로서 목축을 하면서 산 것이 모세의 두 번째 사십 년의 모든 기록입니다.
사십 년 동안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출애굽기도 모세 자신이 기록을 한 책이기 때문에 그 사십 년 동안 있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한 일 중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이나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노력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무예를 닦았다든지 군사들을 모아서 훈련을 시켰다든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기도를 했다든지 연구를 했다든지 그런 특별한 일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그런 일을 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성경은 그런 일에 대해서 기록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나 같은 사람을 이런 광야에서 썩게 하는지 왜 황금과 같은 시기를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내게 하는지 때로는 궁금하고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모세가 처음 사십 세가 되던 때 한참 혈기 왕성 할 때 이 일을 했더라면 그 공이 모세에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모세가 배운 지식과 무세가 받은 훈련과 모세의 젊은 혈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도 자기 생각으로 자기 혈기로 모든 일을 하려고 하지 하나님의 명령을 순순히 따라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이 팔십이 되어서 이제 혈기나 용기나 자신의 지식을 가지고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온전히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해야 할 그런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하나님은 그에게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힘이나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구원까지도 사람들 마음대로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해졌는지 자기들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은 믿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자기들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말이고 그것은 잘못된 말이라고 해버립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하는데도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믿지 않습니다. 물이 어떻게 포도주가 되고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고 사람이 어떻게 물 위로 걸어 다니느냐고 비웃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못 믿지만 우리들은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다. 물로 포도주 하나도 못 만드신다면 죽은 사람 한 사람도 살리지 못하신다면 물위로 걸어 다니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분이라면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가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시건방져졌는지 자신들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보겠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율법도 잘 지키고 선한 일도 잘 해서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속으로는 사람을 미워하고 온갖 욕심을 다 부리고 틈만 있으면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죄를 짓고 살면서도 겉으로 보이는 몇몇 가지 잘 하는 척하면서 그렇게 구원을 받아보겠다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80이 되도록 기다리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런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믿고 따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받는 구원은 완전하고 확실한 구원입니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기 3장에 좀 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3:1-2)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이라고 했고 스데반은 시내 산이라고 했는데 이 두 명칭은 서로 다른 장소가 아닙니다. 호렙 산맥의 시내 산이든지 혹은 시내 산맥의 호렙 산이지 다른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나무 떨기와 떨기나무도 같은 뜻입니다. 번역이 좀 다르게 되었을 뿐이지 같은 나무를 말합니다. 가시나무 떨기는 당시에 별로 쓸모없는 나무라고 합니다. 나무가 작아서 집을 짓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없으면 그냥 땔감으로나 사용되는 보잘 것 없는 나무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불이 붙었는데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불이 붙기는 했지만 타서 없어지지는 않고 불만 붙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임재 했음을 사람의 눈에 보이게 한 것입니다. 보통 불처럼 나무가 타 없어져 버렸다든지 불길이 다른 나무로 번졌다든지 했으면 불이 났다고 생각하면서 불을 끄려고 했을 것입니다.
불이 타는데 나무가 타지 않는 희한한 광경을 보았기 때문에 이것은 사람이 낸 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낸 불이며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앞에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가시나무는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서도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그들을 불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의 잘남이나 나의 행함으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젊었을 때 혈기 왕성했을 때 뭔가 선한 일을 많이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런 모습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나이가 다하고 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별 볼일이 없는 늙은이라고 우리를 천대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목하여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쓸모가 있고 이용가치가 있다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나무와 같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고 특별하게 대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고 나이가 들어간다고 너무 한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가 가진 믿음을 위대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본문 32-33절에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서 자신을 소개하시기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조상들을 통하여 들었던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섬기며 따랐던 그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잡신이 아니라 참신이신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에나 세상에는 온갖 잡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천사가 타락하여 된 사탄과 그 졸개들인 귀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탄이나 귀신들이 온갖 잡신의 이름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을 유혹하고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 귀신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신도 있습니다. 신도 아닌데 사람들이 신이라고 우기는 신들도 있습니다. 태양이나 달이나 이상한별이나 신이 아닌데 사람들이 신이 되어달라고 조르고 신이라고 섬기고 있습니다. 호랑이나 코끼리나 심지어 뱀이나 쥐새끼 까지 신이라고 섬기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모세는 그의 조상들이 섬기는 신이 참 신인 줄 알았습니다. 후에 그가 창세기를 기록하면서 그 하나님을 천지를 창조하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기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모세 앞에 나타난 하나님이 조상들이 믿고 따랐고 그 하나님 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서 특별히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고 강조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에게 약속을 하신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언약은 그들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며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신다는 언약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언약이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에 관한 언약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조상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노릇하고 있는 애굽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이시며 우리들을 사탄의 종, 죄의 종에서 구원하셔서 영원한 가나안 땅인 천국으로 인도하실 분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엉뚱한 잡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사탄을 섬기고 귀신을 섬기고 신도 아닌 것들을 신이라고 우기면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섬기고 있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섬기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죄에서 구원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바르게 알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큰 복임을 알고 따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본문 34절에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처음 사십년은 권력의 중심지이며 화려한 왕궁에서의 삶이었습니다. 뭐 부족한 것도 없고 어려울 일도 없는 평안한 사람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꿈을 키우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사십년은 먼 이국 땅 시내산 광야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양을 치며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왕궁의 호화로운 삶보다야 힘들고 어려운 삶이었을 것이지만 그러나 나름대로 가정을 가지고 그런대로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사십년의 삶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노예로 살고 있는 동족들을 찾아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애굽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막강한 권력을 가진 바로의 손에서 구출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 삶으로의 출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학대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들의 탄식 소리도 들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구하려고 내려왔다.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겠다.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신 말씀이고 확실한 명령이었습니다.
애굽에서 고생하고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이 받는 학대도 보시고 구원하러 내려오셔서 그들을 구하러 모세를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죄의 노예 죽음의 노예로 고생하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구원의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그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믿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삶을 접고 애굽으로 가려고 했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 애굽으로 내려갔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으로 오실 때 그 고난은 얼마나 극심한 고난이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난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세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멸망으로 지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명령을 따라 세상으로 나아가서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하는 일에 앞장을 서야 합니다.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앞장을 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때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하는 일에 쓰임 받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할 수 없다(I can't do it)
행7:30-36 / 김상수 목사
어느 나라(또는 가문, 특정분야)나 그 나라를 대표할 만한 위대한 인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광화문 광장에 가면 이순신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이 있다. 이것은 그 두 분이 우리나라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들 이라는 것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역사나 성경 특히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 중에는 모세를 빼놓을 수가 없다. 모세는 출애굽을 시킨 지도자였고, 모세오경을 기록 했으며, 그 이름이 성경에 무려 813번이나 나올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다. 신명기 34:10에 보면 모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이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모세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못했다는 것을 아는가? 모세는 12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생애는 정확히 40년씩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40세까지는 애굽의 바로의 궁전에서 생활했고, 40-80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쳤고, 80-120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출애굽을 이끌었다. 그러니까 모세는 인생의 일모작이나 이모작 때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황혼의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듯이 마지막 삼모작에 가서야 마침내 찬란한 빛을 발했다.
그러면 모세가 80세 이전에 실패한 원인은 무엇이고, 그 이후에는 위대한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 받을 수 있었던 원인은 또 무엇이었는가? 이것이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깨닫기 원하시는 말씀의 핵심이다. 모세의 80세 이전의 실패원인과 이후의 성공적인 삶의 원인은 하나님 앞에서 한 마디로 “나는 할 수 있다(I can do it)!"와 "나는 할 수 없다(I can't do it)!”의 차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 이 말씀이 선포되어 질 때, 나의 문제들에 대한 영적인 원인과 해답의 불이 번쩍하고 켜지기를 기원한다.
그러면 먼저 모세는 젊은 시절에 왜 실패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어떤 사람은 젊은 시절 모세의 동기나 목적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젊은 시절 그의 인생의 방향과 목적은 지금 웬만한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아도 너~~무 좋았다. 이것은 히브리서 11장 24-26말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다 같이 읽자.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모세가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 했던 때의 나이가 40세였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그야말로 모세는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정말 대단한 열정과 결단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패하고 광야로 도망가서 40년 동안이나 잠수를 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이 무엇인가? 그것은 목적은 훌륭했으나 그것을 ‘자기 힘’으로 이루어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내 힘으로는 안 된다.
요즈음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나는 할 수 있다”라는 말을 강조해도 시원찮을 판에 “나는 할 수 없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수도 있다. 실제로 “나는 할 수 있다”는 말이 패기 있고 멋진 말처럼 보이고, 또 때로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아 보이는 성과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까지일 뿐이다. 나에게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바로 함정이다. 내가 용쓴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굳이 “나는 할 수 있다”는 외치고 싶다면,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단서를 붙이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다(빌4:13).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이루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들은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와 통로일 뿐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젊은 시절 모세의 모습이 마치 그동안 수없이 실수를 반복했던 우리들의 모습과 유사하지 않은가? 우리는 주님의 영광과 열정이라는 화려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포장지 속에 숨어있는 나의 만족과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 특히 청년의 때는 젊음과 건강과 패기가 넘치는 나머지 나를 앞세우기가 쉽고, 장년과 노년의 때는 내가 가진 경험과 재정과 알량한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나를 앞세우기가 쉽다. 그래서 누가 나를 조금이라 알아주지 않으면,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지고, 마치 상대방을 잡아먹을 듯이 눈에 힘을 주고, 목소리가 커지며 혈기 부릴 수 있다. 그러다가 여전히 내 뜻대로 안되면 좌절하고 열등감 속에서 복수의 칼을 간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금쪽같은 내 인생의 귀한 세월을 허송할 뿐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반대로 80세 이후의 모세는 왜 성공했는지를 살펴보자. 사도행전 7장에는 순교자 스데반의 설교가 나오는데, 오늘 본문말씀은 그 중에서 모세가 80세에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장면이다. 모세의 위대한 질주가 시작되는 인생의 전환점(터닝 포인트)은 시내산에서 가시나무 떨기에 붙은 불꽃을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30절).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행7:30).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34절에 나온다. 다같이 34절을 읽자.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행7:34)
이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그를 통해서 애굽에서 괴로움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출애굽기 3장과 4장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 앞에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식의 말들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렇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가 위대한 일을 하게 된 비결이다.
우리들이 좋아하는 찬송 중에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곡이 있다. 이 찬송의 가사 중에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이 찬송의 가사처럼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40년 동안 광야학교에 입학시키셨고, 우리들을 연단시키고 때로 광야 같은 가정환경이나 고난학교에 몰아넣으시고 깊은 고독을 경험하게 만드시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 80세나 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 속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관점과 세상 사람들 관점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은 나이나 상황을 중요시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런 것들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우리들의 나이가 75세든(아브라함), 80세든(모세) 또는 청년이든(요셉, 다니엘) 심지어 청소년이나 어린이든(소년 다윗, 어린 시절에 소명 받은 예레미야, 오병이어 소년 등)이든 상관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사람의 나이나 능력에 상관없이 어떤 일을 이루어 가시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순종, 겸손, 믿음 그리고 충성과 같은 본질적인 것들이다. 바꿔 생각해 보면 나이에 상관없이 그 심령이 준비된 사람은 얼마든지 쓰임 받을 수 있고, 반대로 아무리 젊거나 가진 것이 많아도 그 심령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쓰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그 순간부터가 늘 인생의 전성기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주민 여러분이여, 범사에 하나님이 모든 일의 주체이시고, 우리는 통로와 도구에 불과하다. 우리들은 단지 연약한 질그릇에 불과하다. 이것을 빨리 깨닫고 하나님께 엎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앞당기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의 앞길과 죽음의 모든 문제까지도 다 하나님께 맡기자. 무슨 일을 만나든지 결코 하나님 보다 앞서지 않고 다만 주님과 함께 여주동행(與主同行)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가 되겠다고 결심하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
우리의 하나님
고흥식 목사 / 행 7장 30~36절
우리 하나님을 바로 알고 살면 위대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믿음이란 아직 이 땅 위에 증명되지 않은 것을 이룩하는 작업입니다. 원시 사회의 사람들은 운명에 잡혀 불행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사람들은 죄 의식에 잡혀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현대 사회의 소외된 문명인은 삶의 무의미에 잡혀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시간 새롭게 하십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겨지는 것입니다(마9:17). 서울 청년 세 사람이 어느 시골 커피숍에 갔습니다. 종업원이 “뭘로 드릴 까 예?” 세 청년이 각각 주문했습니다. “저는 모카, 저는 헤이즐럿, 저는 카푸치노 주세요”. 그랬더니 주문받은 종업원이 카운터를 향하여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언니, 여기 커피 셋!” 여러분이 이런 일을 당하신다면 그 커피솝 종업원에게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는 거냐?”고 하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보십니까? 하나님을 무시한 적은 없으십니까? 하나님을 우습게 잘못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오늘 본문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스데반이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도대체 너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너희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 이길래 내가 전하는 하나님을 배척하느냐? 너희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냐?” 그러면서 하나님은 진정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의 진면목(眞面目)을 모세라는 사람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 유대인들 같은 어설픈 하나님 관을 갖지 마시고, 올바른 하나님 관을 가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하나님은 진정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1. 언약을 꼭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행7:30-32)
서두에 있는 “사십년이 차매” 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세는 사십년이 될 때까지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사십년이 되니까 그 때에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지금 모세의 나이는 팔십 세 입니다. 사십년 전 모세는 혈기 왕성하고 애굽의 궁궐에서 왕자의 모든 교육을 다 받았었습니다. 지도자의 최고의 교육을 받았던 모세! 살인자라는 죄명을 쓰고 쫓겨서 광야로 내몰려진 잃어버린 세월! 사람도 그를 잊어버렸고 하나님도 사십년 동안 그를 기억조차 아니 했을 것만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사십년 동안 모세는 믿었던 자기의 힘도, 자기가 의지했던 모든 백그라운드도 사라졌습니다. 지금의 모세에게 지난날 그가 의지했던 권력이나, 알고 있던 과거의 모든 학문,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십 년이 차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일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잊지 않고 그 언약을 꼭 지키시기 위해서 다시 부르신 것입니다. 사십년 이라는 시간이 지나 모세도 까마득히 잊어버린 하나님인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니까 그 분이 과연 하나님일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행7:32)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기억하시고 또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사십년이 아니라 사백년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셨다가 사백년 종살이했던 이집트의 히브리 백성을 끌어내신 것입니다(히 13:8). 지금도 우리를 다시 불러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신 은 사십년 이고 사백년 이고 천년도 기억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모세를 40년간 양치기로 내 모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을 사십년 동안 애굽에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곧 양의 성품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양치기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앞에 어떤 흑암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말씀을 붙잡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길 원하십니다(행 7:33-34).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언약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까? 모세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신에는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이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벗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신을 아직 신지 않을 때에는 부모가 업고 다니지만, 신을 신고 다니게 되면 걸어 다니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신을 벗어야 우리를 하나님께서 업어주십니다. 또 신을 벗는 것은 유대 습관에서 권리를 포기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 권리를 포기할 때 거룩해집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도 그 곳은 거룩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서 있는 광야라도 하나님이 계시면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행7:34)
내려오신 하나님은 직접 일하시지 않으시고 모세를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시되 사람을 통해서 언약을 이루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농구장에서 농구선수로 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전 선수가 되고 싶으십니까? 허수아비가 되고 싶으십니까? 힘들고, 땀 흘리고, 돈 들고, 희생이 따르고, 시간 들고, 코피 흘려도, 그래도 주전 선수가 값진 것입니다. 감독과 코치는 하나님이십니다. 뛰어난 축복의 선수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기회를 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되 사람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하는 귀한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나와 내 가정과 사업장과, 직장,
내 자녀들이 쓰임 받는, 영적으로 빛나는 믿음의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은 기대이상으로 넘치게 이루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의 질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1)당연한 봉사 2)기대하는 만큼의 봉사 3)기대이상의 봉사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KTX 고속철도를 탔을 때 철도청이 제공하는 1) “당연한 봉사”는 도착지까지 도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2) “기대하는 만큼의 봉사”는 정시에 출발하여 정시에 안전하게 도착하는 것입니다. 3)기대이상의 봉사는 기차내 서비스가 너무 좋고, 예상하지 않았던 특실을 타게 되는 것입니 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되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팔십 노인에게 지팡이 하나 들려 보냈습니다. 아니 애굽이 어떤 나라인데 그렇게 보낸단 말인가? 피라밋, 스핑크스 등을 보면 과거 애굽의 국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수백 명 노예들이 죽는다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팔십세 된 모세가 지팡이 하나 가지고 이 백성을 풀어주어라 하니 그게 통할 얘기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 하나 들려서 애굽으로 보냈습니다. 너희 백성을 이끌어내라. 말씀대로 그런 강대국에서 이집트 백성을 끌어낸 줄 믿습니다. 지팡이 하나 가지고 홍해바다도 가르고 육지처럼 건넜습니다. 농사지을 수 없는 광야에서 백성이 굶주릴 때 하늘에서 만나가 쏟아져 내려 백성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그뿐입니까? 백성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니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면서 메추라기떼를 몰고 와서는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낮에는 광야 더위에 지칠까봐 구름기둥으로 서늘하게도 하시고 밤이면 맹수와 추위에 일교차가 극심한 광야에서 보호하려고 불기둥을 세우셔서 안전하고 따뜻하게 보호하신 하나님! 지금도 우리에게 이러한 보호하심이 있어서 여기까지 살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대이상의 하나님! 베데스다 광야에서, 예루살렘 거리에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 주님!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처녀의 몸에서 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다음에 구속을 다 이루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 승천하시고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주님! 그 주님을 믿어야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기대이상의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그러면 우리는 왜 그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습니까! 왜 불평만 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기대이상의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무슨 문제라도 주님께 가지고 나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기대이상으로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Our work is to cast care, God"s work is to take care.”우리가 할 일은 염려를 맡기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염려를 맡아 주시는 것이다.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행 7장 35~36절 / 양향모목사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의 말씀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이 구원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늘 이런 구원에 관한 주제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제가 이 구원에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성경의 핵심을 파악하고 보면 결국 그런 구원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관한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핵심을 흐르는 주요 관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구원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그냥 받으면 좋고 받지 않아도 무방하다든지 구원은 특별히 부족한 사람들이나 받으면 되는 것이라든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생들이 이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참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기필코 꼭 받아야 하고 받으면 엄청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나는 너무나 중요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신분 상승을 위해서 엄청난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에서 탈피하고 서민에서 중산층 그리고 상류층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돈을 벌고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그런 신분상승이 어렵기도 하지만 상류인생이 된다고 해도 그나마 백여 년 살면 그것으로 끝이 나고 마는 허무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신분이 변화되는 것은 세상의 그런 신분상승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며 시한부가 아니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원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하든지 이 구원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 이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된 사람들이 이 구원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 주시겠다고 하면 예 감사합니다. 라고하고 구원을 받으면 될 것인데 어쩐 일인지 선뜻 손을 내밀지 않고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구원은 다른 사람에게 해 주시고 저는 다른 것 좀 있으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돈이 없어서 살기가 좀 불편한데 가능하시면 돈을 좀 주시든지 사업이나 잘 되게 해 주시고 우리 아이들 좋은 대학이나 들어가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그런 구원 같은 것은 받지 않아도 스스로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남에게 사기를 친 일도 없고 도적질이나 살인 같은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는 죄 용서 같은 것 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또 하나는 구원을 방해하는 적군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이 그들입니다. 사탄과 그 졸개들이 귀신과 그 들에게 노예가 된 사람들이 이 구원을 절대적으로 방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력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것을 철저하게 방해를 합니다. 공갈을 치고 협박을 하고 유혹을 하고 감언이설로 속이고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권보호라는 이름으로 자유의지라는 이름으로 별별 것을 다 동원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물론이거니와 교회 안에까지 이런 사탄의 사주를 받는 거짓선생들이 들어와서 구원이 별것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교회에서 딴 짓을 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사탄이 하는 짓인 줄 모르고 자기도 모르고 따라하는 목회자들도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매주 이 구원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구원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런 구원과 관계가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구원이 필요한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으로 보내서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스데반이 이 설교를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하면서 모세를 통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관련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또 오늘날 우리들을 구원하시려는 열심을 살펴보겠습니다.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본문 35절 말씀에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신 마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구원이 필요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애굽에서 종노릇을 하면서 인간이하의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바로 앞의 34절 말씀에서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와서 살면서 처음부터 고통스럽게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정권이 바뀌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왕이 되어서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숫자가 적었을 때는 핍박을 받지 않았습니다. 인구가 엄청나게 많아지고 한 나라가 형성될 정도가 되자 겁을 먹고 핍박을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애굽은 원래 이스라엘 땅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흉년이 지나고 살만한 세상이 되었으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살만한 세상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느 정도 고통스러운 삶이 시작 되었으면 누군가는 돌아가지고 외치든지 하나님께 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이 시작되었으면 이 고통에서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호소를 했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늦게 그 고통이 견딜 수 없게 될 때 그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호소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각 사람들의 형편에 따라 다양한 세상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을 극복하고 인간답게 평안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소 어렵지만 그런대로 지낼만하고 견딜만해서 그냥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로 죽지 못해서 사는 어려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편의 사람들이라고 해도 이 세상은 완전한 세상이 아니고 이 세상의 삶은 죽음을 향해 멸망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세상의 삶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삽니다. 살만하기 때문에 세상의 재미에 빠져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그런 어려움을 통해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를 많이 지은 자에게 은혜가 크다는 말이 지은 죄를 통해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의 주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2) 관리와 재판장으로 생각하고 거절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냈습니다.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자기 백성들을 돌아볼 마음으로 그들이 사는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그때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에 묻어버렸습니다. 그 다음날 또 그곳에 가 보았더니 이번에는 이스라엘 동족들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을 말립니다. 동족들끼리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지 서로 싸우면 되느냐고 싸움을 말립니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에게 하는 말이 누가 너를 우리들의 관리와 재판장으로 삼았느냐고 항의를 하고 모세의 도움을 거절합니다.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을 우리를 죽이려 왔느냐고 항의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구원해보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도망을 하고 말았던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거부한 이유는 네가 왜 우리의 관리나 재판장이 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관리로 번역된 헬라어 알콘(ἂρχων)이라는 단어는 왕, 통치자, 집권자, 관원, 당국자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이 되는 단어입니다. 당시에 권력을 잡고 다스리는 사람들 편에서 일을 하는 애굽의 관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재판장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 법에 따라 재판을 하고 잘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관리들과 재판장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당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억울한 일도 많이 당했을 것이고 착취도 당하고 정말로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관리들과 재판장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관리나 재판장들은 피하고 멀리해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들이 평화롭게 잘 살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관리들은 우리들이 어떻게 더 평화롭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게 하는가를 연구하여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재판장은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잡아서 벌을 주고 못하게 하여 우리들을 보호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맡은 사람들이 그 임무를 망각하고 자기들 권력으로 삼고 바르게 집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고 괴롭혔기 때문에 그렇게 오해를 하고 피하려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오해 때문에 그들을 도우려거 한 모세를 관리나 재판장이 되려하는 사람이라고 거절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불러 모으신 교회를 그들을 다스리고 재판하는 곳으로 오해를 하면서 거절을 합니다. 교회에 가면 목사가 맨날 잔소리만 해, 이것 하지 말라 저것하지 말라 이것해라 저것해라 안 그러면 벌 받는다 공갈을 하는 곳으로 생각을 합니다.
교회는 여러분을 다스리는 곳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바른 길로 가도록 잘 안내하고 도와드리는 곳입니다. 여러분을 재판하는 곳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심판이 없는 곳으로 안내하는 곳입니다.
3)관리와 속량자로서 보내셨습니다.
관리와 재판장으로 오해를 하고 모세를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런 오해를 풀어주시기 위해서 관리와 재판장이 아닌 관리와 속량자로서 모세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낸 것은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고 재판하고 벌을 주는 사람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사하고 그들을 죄에서 종에서 노예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주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왕으로 통치자로 심판관으로 오셔서 그들의 권력을 빼앗고 그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괴롭히러 온 것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여기 속량자라고 하는 단어는 다른 성경에서 구속자 혹은 구원자로 번역을 했지만 속량자라고 번역을 한 것은 이 단어의 어원이 “값을 치르고 자유로워지다.”라는 뜻을 가진 뤼트로오(λυτρόω)라는 단어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구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값을 치러주고 자유의 몸이 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를 모세에게만 적용을 한다면 좀 모순이 있는 말입니다. 모세가 애굽 백성을 구해낼 때 몸값을 주고 구해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강제로 풀어주게 해서 끌고 나왔습니다. 여기에다가 이런 단어를 쓴 것은 이 모세의 모습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예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예수님의 피로 그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아무렇게나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지은 죄에서 구원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죄 값을 치러야만 됩니다. 그 반드시 치러야 할 죄의 값을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보혈로 값을 지불하고 받은 구원이기 때문에 너무나 귀한 구원입니다.
4)가시나무떨기에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보내셨습니다.
모세를 보내신 하나님을 “가시나무떨기에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가시나무떨기의 불을 통하여 모세를 만나주셨던 하나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셨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를 보내셨습니다.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습니다. 구원을 약속하신 그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도 그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있으신 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해주셨습니다.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본문 36절에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보냄을 받은 모세는 그 명령을 따라 애굽으로 가서 그 백성들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면서 40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오늘 다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악착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보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열 가지의 재앙으로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고통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장자들을 다 죽이고 짐승들도 먼저 난 것은 다 죽임을 당하지 마지못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주고도 바로 후회하고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을 군사를 이끌고 다시 붙잡으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가르고 건너게 해 주셨고 애굽의 군대들은 바다 안으로 들어와서 수몰이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 40년간의 삶은 기적적인 삶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가진 것 없이 다 입고 먹고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적들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서론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탄의 세력들은 애굽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방해하는 것처럼 우리들을 죄에서 멸망에서 구원받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초자연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엄청난 방해가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반드시 구원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하나님의 구원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 구원의 복음을 우리도 선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이런 구원을 중요하게 여기고 선포하는 광성교회에 보내신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가문의 구원을 위해서 이 가정에 태어나게 하시고 시집오게 하시고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는 직장에 사업장에 우리의 이웃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해서 우리를 여기 보내셨습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 모세의 손에 든 지판이가 능력을 발휘한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작은 것들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아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구원을 꼭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이 구원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 구원을 받게 해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이 구원의 복음을 세상 만민들에게 선포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