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의 설교 5
행 7:37-43
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42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행 7:37-43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ㄱ)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의 동족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한 사람을 불러 세우실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ㄱ. 70인역 신18:15) 38)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살 때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준 천사 사이의 중개자였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인 살아있는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입니다. 39)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모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였습니다. 40) 그래서 아론에게 `우리를 애굽으로 데려갈 신들을 만들어 주십시오. 애굽에서 우리를 이끌어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도대체 모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41) 그러고는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희생제물을 바치고 자기들이 만든 것을 섬기며 즐거워하였습니다. 42)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시고 그들이 태양과 달과 별들을 신처럼 섬기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아모스의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ㄴ)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40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에 바친 희생제물이 나를 위한 것이었더냐? (ㄴ. 70인역 암5:25-27) 43) 너희는 몰록의 신과 별의 신인 레판, 그 밖에 너희 손으로 만든 우상을 떠메고 다녔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바벨론 저 멀리 포로로 끌려가게 하겠다.'
스데반은 자신을 고소하여 재판하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모세의 율법을 훼방하고 모독한 것은 자신이 아니고 모세가 증거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임을 구속사적으로 증거했습니다.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37-38) 스데반은 모세를 중시하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해주었던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고 했고(신 18:15), 또한 “그의 말을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모세의 이 글을 읽고 메시야를 기다렸으나 정작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배척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모세가 임의로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전달한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39-41)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부터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원망했습니다. 동족을 화해시키려 할 때(출 2:14)에도, 바로에게 애굽에게 나가게 해 달라고 하여 고역이 가중될 때(출 5:21)에도, 홍해 앞에서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았을 때(출 14:11, 12)에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출 16:3)에도, 마실 물이 없을 때에도(출 17:1, 2), 시내 산에 올라가 율법을 받을 때(출 32장)에도 원망했습니다. 또한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서도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민 14:3). 그들은 아론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하여 송아지를 만들고 제사하며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사(42-43) 스데반은 우상을 만들고 제사하며 기뻐하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외면했으며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 곧 일월성신을 숭배하는 것도 내버려두었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스데반은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황소 머리에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암몬족의 신 몰록과 앗수르인들이 섬기던 ‘레판의 별’(토성)을 숭배하였기에 바벨론으로 옮겨진다고 아모스를 통하여 경고를 받았다고 했습니다(암 5:2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돌이키지 않다가 결국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왕하 23:26-27; 대하 36:11-21). 스데반은 모세의 율법을 훼방하고 모독했다는 고소를 당했지만 오히려 모세가 증거한 선지자요, 메시야인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모세의 율법과 훼방하고 모독한 것은 자신이 아니고 바로 당시 유대인들임을 지적했습니다.
적용: 산헤드린은 스데반을 정죄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고 하면서 자신의 눈 속에 들보는 외면한 것은 없는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
영국의 종교개혁자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는 훌륭한 어머니 중 한 분으로 손꼽힙니다. 하지만 그녀도 여러 자녀 중 행실이 바르지 못한 딸 한 명 때문에 무척이나 힘들었는데 딸은 못된 친구들과 계속 어울려 지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수잔나는 검정 숯을 한 다발 가져와 딸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딸아, 이 숯을 한번 안아보렴. 뜨겁지 않단다.” 그러자 딸이 기겁하며 말했습니다. “뜨겁지는 않지만, 손과 몸이 더러워지잖아요.” 그때 수잔나가 딸을 꼭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란다. 바르지 못한 행실은 화상을 입게 하지는 않지만, 몸과 마음을 더럽히는 법이란다.” 딸은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어머니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호크마 주석
=====7:37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 이는 신 18:15에 언급된 말씀이다. A.D. 1세기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거부하고 메시야를 기대하면서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를 기다렸다. 그들은 메시야가 '모세와 같은'모습으로 오실 것을 기대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같은 구속자'라고 말하였는데 그들은 쿰란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이 같은 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신 18:15, 18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후기 랍비 자료들에서는 신 18:15-18을 '사무엘'에게 적용시키는가 하면 혹은 '예레미야'에게 또는 예언자들의 전체에 적용시키기도 하여 기독교적 해석을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무드의 많은 구절들에서는 이스라엘의 첫번째 구속자모세와 그와 같은 모습으로 오실 메시야를 평행적으로 언급하며 신 18:15, 18을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신 18:15, 18의 예언에 근거를 둔 스데반의 주장은 당시 일반적으로 유대교의 종말론적 소망과 일치한다.
=====7:38
광야 교회에 있었고...이 사람이라 - 여기서 스데반이 모세의 율법을 경시한다거나 뜯어 고치려고 했다는 고소 내용이근거없는 사실임이 입증된다. 이 구절은 모세를 지극히 칭송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여기서 '광야 교호'라 함은 문자적으로 '광야에 모인 회중' 즉 '율법을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의미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교회'란 표현을 사용한 스데반의 의도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의해 다시 생기게 된 '교회'와 대조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교회는 주로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1) 마을 단위의 집회(19:32, 39, 41). (2)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서의 성도들 즉 보편적인 교회(골 1:18). (3)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모인 지역적 집단, 지역 교회. 본구절의 '교회'는 광야에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킴과 동시에 신약 시대의교회를 예표(豫表)한다. 한편 '생명의 도'는 율법을 가리키는데 혹자는 누가가 '생명'이라는 표현을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Haenchen).그러나 신 32:47에서 율법이 생명을 주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에 스데반은 율법을 과소 평가하지 않기 위해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스데반은 자신이 전하는 도가 그 '생명의 도'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7:39
조상들이...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 이 구절은 민 14:3에서 인용한 것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철저한 노예 근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몸은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었지만 마음과생각은 애굽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출애굽시킨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애굽에서 당했던 노예 생활이 잠시 당하는 광야의 생활보다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스데반은 여기서 새로운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약속을 망각하고 과거에 집착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앞절에서 언급된 '생명의 도'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리고 하나님께 배은 망덕의 죄를범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7:40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만들라 - 이는 출 32:1의 인용 구절이다. 백성들의 완악함은 극에 달해 그들을 애굽의 압제의 그늘에서 기적과 능력으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을 인도할 우상들을 요구하였다. 특히 '우리를 인도할'이라는 말은 곧 자신들을 이 거칠고 고된 광야길에서 애굽의 길로 인도할'이라는 말로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조그마한 시험도 견디지 못하고예수를 믿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스데반 당시의 사람들도 '생명의 주'이신 예수를 죽일 만큼 완악했음을 지적해주고 있다.
=====7:41
송아지를 만들어...기뻐하더니 - 탈무드(Talmud)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행위에 대해 이스라엘이지은 최초이자 마지막의 가장 가증한 죄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랍비들이나 회당 예배에서는 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려할 뿐 아니라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그리고 어떤 랍비는 금송아지 사건에서모세에 대한 백성들의 반역은 언급하지 않고 그 사건으로 인해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드렸음을 강조하여 모세란 인물 자체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스데반은 탈무드에서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구속자들을 반역한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지적함으로써 스데반은 당시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행위와 예수에 대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행위 사이에 공통점을 끌어내그들의 패역함을 지적하고자 하였다.
=====7:42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 하나님께서는 자신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 민족을외면하셨다. 사도 바울은 죄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고 계속 범죄하는 사람들은 더 깊은죄악의 길에 들어설지라도 하나님께서 버려두신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스데반도 바울과 같은 맥락에서 본절의 표현을 사용했다(롬 1:24, 26, 28). 그런데 여기서 '하늘의군대'란 '일월 성신'(日月星辰)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우상 숭배를 대표한다. 일월 성신 숭배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 가운데서 계속 존속되어 왔기 때문에 (신 4:19;17:3;왕하 21:3, 5;렘 8:2;19:13;습 1:5) 스데반은 이 우상 숭배를 지적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을 다시 강조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 하늘의 군대'란 표현이 41절에 언급된 송아지 우상과 동일시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스데반은 송아지 우상이라는 특수한 진술에서 하늘의 군대라는 일반 진술로 단순히 논리를 비약했을 뿐 동일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송아지 우상은 애굽의 우상이었으며 일월 성신은 주로 고대 근동의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일월 성신 자체에 대한내용은 다음 도표를 참조하라. 천체 - 태양 : 태양 숭배는 애굽에서 널리 행해졌으나 앗수르와 바벧론에서도 많이행해졌으며 가나안 지역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달 : 주로 가부장제 사회의 영향권에속해 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숭배되었으나 가나안 지역에서도 일찍이 숭배되었다. 금성 : 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숭배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아스도렛(Ashtoreth)으로 섬겼던 것 같다. 토성 : 암 5:26에서 언급된 앗수르의 별신 '식굿'과'기윤'이 토성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천사 - '하늘의 군대'란 표현이 대부분 일월 성신 곧 천체와 관련된 표현이지만 왕상 22:19;대하 18:18;눅 2:13에서는 '천사'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나쁜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7: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 여기서 '몰록'이란 말에 대해 혹자는 '너희들의 왕'이란 뜻의 히브리어 '말렉크켐'(* )을 70인역(LXX)이 잘못 번역한 것을 누가가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 주장한다(Haenchen). 그러나 본 구절은 우상 숭배와 관련된 이방신의 이름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아람의 주(主)신인 '몰록'으로 번역되는 것이 무난하다. 이 우상은 놋쇠로 만들어져 있으며 황소 머리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형태를 지녔다. 사람들은 우상의팔 가운데 제물로 바칠 어린아이를 산 제물로 바친 후 밑에서 불을 놓아 어린아이를태워 죽였다(왕하 23:10). 한편 여기서 '레판'이란 말은 70인역(LXX) 암 5:26에서 인용된 것이며 맛소라 사본(MT)에서는 '키윤'(*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42절의 도표중 '토성'을 참조하라. 그런데 '레판'에 대한 명칭이 70인역 본문과 히브리 원문에 어떻게 해서 서로 다르게 사용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시리아어와 페르시아어에서 토성이 '렘판'(Remphan)으로 불려지기 때문에 '키윤' 대신에 '레판'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데반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적나라하게 지적하여 '생명의 도'(38절)를 받은 백성이 우상 숭배를 통해얼마나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했는지를 설명했다. 이는 예수를 통한 '생명의 도'를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당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 설 교 >
살아 있는 말씀
행 7:37-38 / 양향모 목사
나이가 들면 병원에 자주 가게 됩니다.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아져서 자주 가게 되고 또 주기적으로 검진도 받아야 하고 장기적으로 약을 먹어야 할 병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좀 긍정적인 말을 해 주면 기분이 좋습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 약을 먹으면 괜찮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좀 아는 사이의 의사를 만나면 저를 위해준답시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줍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고 음식도 조절을 하고 체중도 빼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 저에게 좋게 해 주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별로 안 좋습니다.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한 동안은 음식도 조절을 하고 운동도 하고 바른생활을 합니다.
교회에 와서 여러분은 무슨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습니까? 아 참 좋습니다. 그 정도면 신앙생활 잘 하시는 것이니까 복도 받을 것이고 앞으로 잘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좀 좋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사느냐, 그래가지고 복을 받겠느냐, 똑바로 살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나쁘실 것입니다. 물론 그런 꾸지람을 듣고 바르게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고 한동안은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병원에 가는 것이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가기 때문에 병원에서 건강하게 사는 방법을 배우고 약을 받아서 먹는 것으로 만족을 합니다. 보통 교인들은 교회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바르게 살고 그래서 복을 받아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병원에 가면서 깨달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가면서 무슨 병이든지 다 고쳐서 오래오래 살겠구나 하고 착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병원은 임시방편으로 고장 난 부분을 부분적으로 수리를 해 줄 뿐이지 영구적으로 고치지 못하고 늙어가는 것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병이 한두 가지라면 고치면서 살겠지만 수십만 가지 종류의 병이 있다고 하는데 의사도 알지 못하는 병, 병명도 알지 못하는 병, 원인도 모르는 병들도 허다하다고 하는데 그 많은 병들을 어찌 다 예방하면서 살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키고 바르게 착하게 살아서 복을 받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다니면서 그렇게 실천을 하면 좀 나은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율법들을 다 지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모든 면에 다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두 가지는 잘 할 수 있겠지만 그 외에 오만가지는 다 잘 못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래서 바르게 살고 복을 받고 칭찬을 받자고 하는 것은 그저 조금 나아지는 것일 뿐이고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나 자신의 부족함을 보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시라도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비참한 인생임을 깨닫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그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유대교 지도자들이 가진 율법과 성전에서의 제사에 관하여 잘 못 알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주려 하고 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림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잘 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성전에서의 제사를 주신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제사는 다 같이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과 제사를 통해서 구세주가 필요함을 알게 하고 그 율법과 제사를 통해 오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라고 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모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이 모세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그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8절 말씀에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하여서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 광야를 통과하고 있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광야에서의 생활을 “광야 교회”라고 스데반은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무리들이었기 때문에 교회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광야에서 배우고 훈련받고 한 삶이 오늘날 우리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신앙의 훈련을 하면서 사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 광야교회로 있을 때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었습니다. 그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기록한 것이 모세오경이라고 하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부심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아서 가지고 있는 민족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밖에 없으니까 그 자부심은 가질만한 자부심입니다. 스데반도 이 말씀을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에 대해서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 살아 있는 말씀이란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엄청난 책들이 있습니다. 서울의 대형서점이나 학교 도서관에 가보면 내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느낍니다. 저렇게 많은 책들이다 그냥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 분야에서 오랜 경험을 했거나 그 분야에서 성공을 했거나 그 분야를 연구해서 학위를 받았거나 한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이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쓴 책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을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그 책을 쓴 사람들은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견해가 항상 옳은 것이 아니고 반대되는 견해도 많이 있고 세월이 흐르면 더 좋은 견해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고 그 종교가 가진 많은 경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전을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신은 죽은 신이고 잡신이고 신들이 직접 말을 해서 기록을 한 책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자신의 신이 살아 있는 신이고 최고의 신이라고 하지만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냥 인간들이 더듬어서 깨달아서 기록을 하고 그것을 신적인 것으로 믿고 사는 것이지 우리 성경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 하셔서 주신 말씀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은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일점일획이라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공격을 했지만 그 누구도 거부하지 못한 진리가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그 말씀을 따라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2. 살아 있는 말씀이란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살아 있는 말씀을 전에 우리가 쓰던 개정한글에서는 “생명의 도”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우리가 잘 아는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란 단순히 우리가 말하는 언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말씀으로 번역하기는 좀 다른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이 로고스를 세상을 움직이는 어떤 큰 원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 즉 로고스는 예수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는데 그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분이 말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살아 있는 말씀을 “생명의 도”라고 번역을 한 것이 오히려 더 좋은 번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말씀을 생명의 도, 즉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라고 하려면 지금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에 관한 생각이나 제사에 관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그들이 가진 지식에 의하면 그들이 가진 율법이나 제사는 사람을 죽이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죄를 범하는 자들은 당연한 벌을 받고 죽음을 당해야만 하는 법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우상숭배나 남을 미워하고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기만 해도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어기면 다른 것을 다 잘 지켰다고 해도 죄인이 되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제사는 우리가 죄로 인해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도 바르게 드리지 않으면 벌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이나 제사의 용도를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스데반은 그런 유대교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제사가 생명의 도 즉 살리는 말씀이 되려면 그 율법이나 제사제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예수님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짐승의 제사가 우리를 완전히 죄에서 용서받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셔서 단번의 제사로 우리 모든 죄를 용서 받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거나 계속 제사를 지내려고 하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교회에서 율법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꾸 타락의 길로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윤리 도덕을 잘 가르쳐서 바르게 살게 하고 복을 받고 살게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꼭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이나 제자들을 통해서 주신 삶의 원리들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가르치고 기독교인으로서 살아야 하는 삶의 원리를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는 것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거기까지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거나 그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핵심이라고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르게 살고 천사처럼 산다고 해도 그런 것을 가지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결국 바른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그게 그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시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많은 차이가 아니라 정 반대일수도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거나 하나님께 충성함으로 인정을 받고 복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교만하게 자기의 의를 자랑합니다. 속마음보다 겉으로 들어나는 것을 중요하게여기기 때문에 때로는 가식적으로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들을 잊어버리고 무슨 일이 자기 마음대로 잘 안 될 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를 바르게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겸손합니다. 선한 일을 하고도 그 공로를 하나님께 돌립니다. 가식적이거나 형식적인 것이 아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합니다. 잘 되거나 잘 못됐을 때도 늘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성경의 핵심인 줄 알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최고인 줄 알고 그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우리가 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고 그 복음을 위해서 삽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도가 되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이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이 중요함을 알고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너희 형제 가운데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본문 37절에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율법을 자랑하고 성전에서의 제사를 자랑하고 그 율법과 제사제도를 하나님께 직접 받은 모세를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모세가 한 중요한 말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라고 한 사람이 모세라는 것입니다. 그 모세가 이 말씀도 하나님께 받아서 너희에게 준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이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신명기 1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거의 다 마쳐갈 때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했는데 그 말씀을 기록한 것이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을 읽어보면 이런저런 규칙을 말씀하고 그 규칙대로 살지 못할 때 죽인다는 이야기를 자주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17:5) “사람이 만일 무법하게 행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에게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7:12)
그런 무서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18:16-17)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말씀을 더 듣지 않게 해 달라고 호소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호소가 옳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지키지 않으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아무 무서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들려준 말씀이 바로 오늘 스데반이 인용한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말씀은 살리는 말씀이 아니라 죽이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도 살리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그 말씀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그 살리는 말씀이 죽이는 말씀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이는 말씀이 아닌 살리는 말씀을 줄 선지자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네 후손 가운데서 네 형제들 중에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주실 것인데 너희들은 그 말씀을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너희를 죽이는 말씀이 아닌 살리는 말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같은 선지가 즉 메시야가 올 것을 오랜 세월동안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그 모세와 같은 선지자 즉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바로 우리 예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길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 예수님을 가리키는 율법이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특별한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민족이고 성전과 제사를 받은 민족이었지만 율법과 제사가 가리키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함으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율법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믿을 때 이 모든 말씀들이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어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살리시는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고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믿는 것 같았지만 믿지 않은 사람들
사도행전 7장 37-53절 / 이준원 목사
[들어가는 말]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특별히 기억나는 만남이 있으실 겁니다. 저에게도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던 몇 번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태어날 때 부모님과의 만남이 있고, 그 후 배우자의 만남도 있지만, 어릴 때 학창시절에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님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목사님이셨는데, 바르게 목회하시고 강해설교를 열심히 하셨습니다. 그때 배운 대로 저도 지금껏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다니던 대학부에서 평신도 지도자의 본을 보여주셨던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입지전적인 인물이신데, 야간 대학을 나오시고 아주 어렵게 사시던 분입니다. 그런데 국비장학생으로 유학을 오셔서 나중에 세계적인 학자가 되시고 교수를 하셨습니다. 그 장로님이 대학부에 담당 장로로 오셔서 매주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제가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후 미국에 이민 와서 처음에 힘들었을 때 대학교에 편입했는데, 마침 거기에 유학을 오신 30대 초반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과의 만남이 제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 대학생들을 모아 성경공부를 하는데, 마침 그분을 만나서 그 목사님이 지도를 해주셨습니다. 왔다 갔다 모시고 다니며 좋은 대화를 했고 아주 좋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만남들이 있었던 사이사이를 생각해볼 때, 중고등부 학창시절에 교회를 다니던 친구들이 많았고 지금까지 연락을 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만남들 중에서 지금껏 신앙을 지키며 나아가는 친구들이 참으로 적습니다. 그때는 임원도 하며 열심히 했는데 지금은 아예 교회에 담을 쌓고 있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에도 많이 있습니다. 믿음에 아주 근접하고 믿을 만했는데 끝끝내 믿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도 그랬고,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 역시 진리이신 예수님을 바로 앞에 두고도 결국 진리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와서 물었던 부자 청년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근심하며 돌아간, 그래서 결국 믿지 못한,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믿는 줄 알았는데 안 믿은 경우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며 교육도 받고, 동고동락하면서 지냈으며, 재정까지 맡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결국은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오늘 본문이 이야기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수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오늘 스데반이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 광야 교회의 지도자 모세
1. 인생에서의 모든 만남들은 의미가 있다
스데반은 자신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고소를 당해서 그런지,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 이야기에 비해서 아주 길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모세의 생애를 살펴보면, 크게 네 번에 걸쳐 사람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만한 획기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각각의 만남마다 그의 인생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모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그의 부모였습니다. 우리도 똑같지만, 그에게 특별했던 것은 그의 아버지 아므람과 어머니 요게벳은 레위 지파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신분은 이집트의 노예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노예인 부모 밑에서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사실은 강에 빠뜨려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이 바로의 딸인 이집트 공주였습니다. 역사적으로 투트모세 1세의 딸 핫셉수트인 이 공주가 갈대상자 안에 담겨 있던 히브리 아기 모세를 불쌍히 여겨 양자로 삼음으로써(물론 자신의 야심과 견제심리도 있었지만), 노예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신분 상승을 모세가 이루게 됩니다.
세 번째로 만난 것이 자기 동족입니다. 이집트 공주가 모세를 거두었지만, 거기에 누이가 있다가 젖을 먹일 유모를 구해드리겠다고 하여 그러라고 했을 때 자기 어머니를 붙여줍니다. 그래서 자기 어머니가 키워준 겁니다. 그러나 나중에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알고 동족을 돌아보려 했는데,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이 드러나서 그만 도망하고 맙니다.
네 번째 만남은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다가 우물가에서 만난 십보라라는 여인입니다. 그녀를 만나서 남편이 되고, 그곳에 정착하여 80세가 될 때까지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는 미디안 광야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아무 의미 없이 광야에서 양만 치다가 끝나 버렸을 그의 인생은 그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인하여 영원한 의미를 지닌 인생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모세의 인생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모세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고대 이집트에서 태어난 모세가 이집트 사람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이스라엘 노예를 부모로 만났기 때문에, 그 상황은 아주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오히려 이스라엘 노예가 부모였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 태에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지배자인 이집트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수많은 이집트의 우상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노예인 부모를 만났기 때문에 당시 상황에 의해 강에 버려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나일 강에 버려졌기 때문에 마침 그때 나타난 이집트 공주를 양어머니로 만나, 바로의 왕궁에서 40년 동안 위대한 이집트 제국의 왕자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40세에 자기 동족을 도우려다가 졸지에 도망자가 되어서 도망침으로, 모세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갖고 있어도 세상의 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의 우물가에서 만난 십보라와 결혼하여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가 됨으로써, 모세는 인생이란 나그네일 뿐이라고 하며 첫 번째 아들의 이름을 ‘나그네’라는 뜻의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두 번째 아들은 ‘엘리에셀’(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지으면서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만 인생이 온전히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거듭남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마치 우연처럼 보이는 네 번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종 모세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입니까? 정말 길이 없고 다 끝난 것 같았는데, 하나님은 거기에 새로운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오히려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 모세를 이끄셨고 놀라운 하나님의 종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 후 그는 이집트와 홍해와 광야에서 40년 동안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36).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온전히 역사하신 것입니다. 아무 쓸모없어 보이던 모세의 삶, 아니면 이집트 왕자로 승승장구했다면 결국 이집트의 권력투쟁 속에서 사라져버렸을 인생이었을 텐데, 하나님 안에서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절망적이든 죽음의 상황이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2. 수많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7-38절)
37절은 신명기 18:15의 인용입니다. 모세가 그때 이 말을 했는데, ‘나와 같은 선지자’라는 것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말한 이 선지자를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40년 동안 힘들었던 광야 생활을 스데반이 ‘광야 교회’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교회(church)를 말하는 게 아니라 모임 또는 회중(assembly)을 말하는 것이지만, 광야에서의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 교회의 목회자로 세우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리더로서 한 일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말씀을 받고도 행하지 않은 데에 있는데, 그 내용이 뒤에 나옵니다. 결국 모세는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낸 리더로서, 목회자로서, 훈련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세에게 백성이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39-40절)
스데반의 설교의 목적 중 하나는 모세를 이스라엘의 리더로, 선지자로, 훈련자로, 목회자로 세워주셨던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하나님이 세워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모세에게 복종하지 않고 불순종하며 거역하고 반역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었습니다. 불평불만을 가진 세력이 그들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완벽한 조직이 있습니까? 또 완벽한 교회가 있습니까? 여기서 다른 데로 이사를 가서 교회를 찾으실 때 완벽한 교회를 찾아보겠다고 하면 당연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점이 많이 있더라도, 약점도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조직이든지 다 그렇습니다.
런데 사람의 인격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관점입니다. 내가 좋은 점을 볼 것인가, 나쁜 점을 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나쁜 점만 있는 조직이나 교회라면 안 되겠지만, 어디 곳이든 100%는 없고 다 섞여 있습니다. 인간관계, 교회,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좋은 점을 볼 것인가, 나쁜 점을 볼 것인가 하는 것이 인생의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항상 약점을 잡고 나쁜 점만 들추어내고 끄집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약점을 지적하면 얼마나 설득력이 있습니까? 그것을 큰 문제인 것처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관계를 파괴하게 됩니다. 그 모임을, 조직을, 교회를 파괴하게 됩니다.
이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는데, 교회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아니다, 저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들어보면 둘 다 일리가 있습니다. 본인들이 관계를 파괴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닐 텐데, 결과적으로는 분열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쁜 점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도, 저렇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괜찮습니다. 그럼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까?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지만, 서로 ‘내가 옳다’ 하며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의 차이점을 극복하고 이해하고 격려하고 좋은 점을 봐주면서 마음을 합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불평의 세력을 심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런 그룹들이 모이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모세를 비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세를 비판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과 불만과 원망을 한 사람들은 결국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모세가 산으로 기도하러 간 사이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똑똑히 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장자는 다 보호해주신 것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앞에는 홍해로 막혀 있고 뒤에는 이집트 왕 바로의 군대가 쫓아와서 갈 곳이 없는데, 그 엄청난 바다가 갈라지고 거기를 건넌, 정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일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만나가 내려 먹고 또 메추라기가 와서 먹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아무 물도 없는 곳에 샘물이 터지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서 40년을 살았다는 것은 엄청난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해주셨음에도 조금만 불편해지니까 금방 원망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하냐?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얼마나 노예로 고생했습니까? 그런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지금 이 광야에서 그들은 자유인이고 더 낫습니다. 그런데도 애굽으로 돌아가서 노예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입니까?
그렇게 선동을 하는데, 사람들이 거기에 혹 합니다. ‘저 가나안 땅에 우리가 뭐 하러 가야 하느냐? 모세가 왜 우리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었느냐?’ 하고 선동하니까 사람들이 거기에 쓱 넘어갑니다. 현실적인 고통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동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쉽게 동의를 해줍니다. 앞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 채 너무나 쉽게 거기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이 너무나 반역적인 것은,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선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을 걷어 금송아지를 만들고 흥분해서 거기에 절을 하며 ‘이게 바로 우리를 인도한 신이다.’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 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통해 선택을 받았고, 약속을 받았고, 복을 받았습니다. 복의 근원, 제사장 민족으로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이집트의 압제와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었고, 특별히 홍해가 갈라지는 엄청난 기적을 경험함 백성입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에서도 살았습니다. 생업이 불가능한 곳에서 사는 동안에도, 그들의 의복이 해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인도하심입니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조금 불편하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자기들에게 이제 모세는 필요 없다고 합니다.
광야를 생각하면, 최악의 상황이라도 하나님만 함께 해주시면 그곳은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조건 속에서라도 하나님이 동행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광야는 정말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곳입니다. 며칠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40년을 살았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손길이 보호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손길만 있으면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렇게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많은 약속과 복과 기적을 체험했지만,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조금만 힘들고 순간적으로 어려움에 부딪치면 원망하고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41절)
인간은 형편없지만 또 신기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많은 축복을 경험하고 이렇게 많은 기적을 체험하며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순간순간 하나님이 인도해주셨는데, 인간은 그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조금만 불편함이 생기거나 자기 마음에 조금만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금방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심지어 이렇게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시면서 안타깝고 슬프고 마음이 아프신데, 이들은 너무 기뻐하며 좋아했습니다.
2. 가짜 신앙과 진짜 신앙
1.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은 가짜 신앙이다
스데반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렇게 인도해주셨는데 과연 너희들이 제대로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42-43절)
하나님이 이렇게 물어보셨다는 겁니다. “40년 광야 생활 동안 너희를 보호했고 지켜주었는데, 너희가 정말 내게 희생제물을 드린 일이 있었느냐? 너희가 정말 예배를 드린 일이 있었느냐?” 희생과 제물을 안 드린 게 아니고 드렸는데, 거짓으로 또 형식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의 규정에 따라 형식상 제물을 드렸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사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분에 있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헌신하고 봉사하고 섬기고 남들을 돕는 것도, 겉으로 보이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겉만 보고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남들이 보기 좋게 슬쩍 속이고 꾸밀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겉모습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정말 받으실 만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헌신이고 봉사이고 예배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예배가 그냥 형식적인 것이었고 하라 하시니까 억지로 할 수 없이 한 것이었지, 마음의 중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예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하나님께 드린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 예배가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한 것이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이용한 겁니다. 자기들이 먹고 살려면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을 찾을 수가 없는데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니까 잘 보여야 만나를 주시지, 괜히 예배도 안 드리고 그러면 안 주실까봐 그렇습니다. 또 목말라서 물이 필요하니까 샘물이 터지게 하시는 하나님이 필요했습니다. 자기들이 광야에서 보호를 받아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이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런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격하시키는 신앙생활로 잘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에게는 진짜 감격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해도 만족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일은 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것은 있는데, 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은 기쁨도 없고 보람도 없습니다. 그냥 주기를 바라고 받고,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관계만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 밭입니다. 네 가지 종류의 밭을 이야기하셨는데, 길 가, 돌짝밭, 가시덤불, 좋은 땅입니다. 그런데 가시덤불의 문제는, 종교적으로 형식적으로 예배, 헌금, 봉사 등 하는 건 다 하는데, 인생의 염려, 특히 재물의 염려 때문에 열매를 못 맺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평생 염려로 시작하고 염려로 끝납니다.
정말 하나님 중심으로 섬기며 예배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평생 염려에서 해방되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삶이 되고 맙니다. 항상 ‘이거 어떡하지? 저거 어떡하지?’ 하다가 그냥 끝납니다. 진정한 예배, 진정한 헌신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내 마음을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지금 주일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크리스천이니까 어쩔 수 없이 일주일에 한 번은 가야 하니까 가는 것인지, 회비 내니까 가는 것처럼 오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와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손해가 아니라 우리에게 큰 손해입니다.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기쁨이 없습니다. 아무 보람이나 만족이나 감격이 없습니다.
2. 진짜 신앙과 가짜 신앙을 가르는 기준은 희생이다
그렇다면 그런 잘못된 자세를 바꿀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희생이 없는 신앙생활은 진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내가 지금 얼마나 희생하며 얼마나 손해를 보고 있는가? 내가 한 번도 손해를 보지 않았다면 진정한 헌신이 아닐 것입니다. 희생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면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시간을 희생해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시간을 내어 온 것도 희생입니다. 돈도 희생합니다. 교회에 오는 데 개스 값도 들고 헌금도 합니다. 그런 희생이 있는 게 예배인데, 그 정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정말로 내가 희생을 하고 있는가?
지금 전 세계적으로 문제인데, 믿는다고 하는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의 태도가 최소한만 하자는 것입니다. 아주 최소한으로 주일날 잠깐 왔다 가고 끝입니다. 나머지는 다 내 마음대로 합니다. 그럼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까? 전혀 기쁨이 없습니다. 누가 열심히 믿어보려고 하면 ‘적당히 믿어라. 너무 빠지지 마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적당히 하는 신앙생활은 보람도 없고 감격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업을 하신다고 하면, 지금 하시는 사업을 적당히 해보십시오. 재미가 있습니까? 돈을 법니까? 혹시 운이 좋아서 돈을 벌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말 재미가 없습니다. 적당히 사업을 하면서 딴 생각을 합니다. ‘빨리 끝내고 가서 골프 쳐야 되는데. 빨리 가서 샤핑해야 하는데.’ 사업을 하는 게 재미가 없습니다.
직장생활도 똑같습니다. 몰입해서 일하지 말고 적당히 해보십시오. 하나도 보람이나 기쁨이 없습니다. 오히려 직장생활도 사업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거기에서 보람을 느끼고 기쁨을 느낍니다. ‘이거 진짜 내게 딱 맞는 직업이다. 너무 좋다.’ 하며 더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적당히 하는 사람은 정말 재미가 없습니다. ‘내가 언제 여기서 벗어나나?’ 하는 생각 밖에 없습니다.
교회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적당히 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얼마나 보람도 없고 감격도 없습니까? 희생이 들어가고 헌신이 들어가야 그게 진짜 신앙생활이고, 그렇게 하면 손해 볼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쁨이 옵니다. 감격이 옵니다. 그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3. 진짜 신앙을 위하여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배의 핵심은 은혜 받는 게 아닙니다. 물론 은혜를 받아야 되는데, 은혜를 받고 결단하며 헌신을 하고 나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그런데 결단만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결단하고 나가서 잊어버리면 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가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말씀을 듣고 결단하며, 나가서 진짜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겁니다.
우리가 목장을 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다른 것을 하자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훈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일 중요하다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목장을 통해 정기적으로 하는 겁니다. 사람은 놓아두면 안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정기적으로 나를 끌어다 붙여 놓고 자꾸 섬기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도 가서 보고, 매번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도 들어주고, 내가 한마디 했는데 저쪽에서 피식 비웃으면 기분이 상하지만 그래도 또 하고, 그러면서 용서하는 법, 사랑하는 법을 진짜 배우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믿지 않는 분들을 주님께 인도해보자고 하고, 서로 기도하며 응답도 받고, 모르는 게 많다고 느낄 때 삶 공부를 들으며 배우고, 또 배운 것을 가지고 나가 실천하는 겁니다. 사랑하자고 배웠으면 사랑하는 방법 1, 2, 3을 배우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나가서 진짜 사랑을 해보는 겁니다. 나가서 진짜 용서를 해보는 겁니다. 진짜 희생을 해보는 겁니다. 그런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생명의 삶>을 하신 분들이 의아해하실 수도 있는데, 로마서에서는 계속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행함이 없으면 안 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믿음으로 반응할 때 받는 것입니다.’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반면 야고보서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쓴 것입니다. ‘당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아무 삶의 변화가 없고 행위가 없으면 그게 어디 믿는 거냐?’라고 하는 겁니다. 정말 믿는 사람이라면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행함은 구원받는 행함을 말하는 게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의 행동을 말하는 겁니다. 구원받았으면 행동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행동이 없고 아무 변화가 없다면 그게 어디 구원받은 것이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구원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들이라면 이런 희생, 사랑, 용서, 헌신이 우리 삶에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도 닦는 크리스천 신앙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주셨습니다. 교회에 와서 함께 그 사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전체가 다 같이 하기가 힘드니까 우리가 목장별로 모여서 그 섬김과 사랑을 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훈련 없이 어떻게 우리에게서 사랑이 쑥쑥 나오겠습니까? 전혀 연습도 안 하는 사람이 국가대표가 되겠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훈련이 매일매일 필요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훈련하고, 같이 모여서도 훈련합니다. 특히 같이 모여 사랑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4. 우상은 우리를 파멸로 인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된 예배와 참된 헌신이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서 섬겼습니다.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섬겼습니다. 몰록은 암몬의 아주 악한 우상으로 자기 자녀까지 죽여서 희생하는 악한 것이었습니다. 레판의 별은 잔인한 앗시리아 사람들이 섬기던 별이었습니다.
이런 우상은 영원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상을 만듭니다. 우상은 절대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하는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좋다고 하며 거기에 절을 합니다.
유명한 무신론자 중 데이비드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라는 사람이 있는데, 몇 년 전 죽었습니다. 문학계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실질적인 무신론자는 없다. 신을 안 믿는 사람은 뭔가를 믿게 되어 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으면 사람은 다른 것을 경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면서도 우상을 여전히 섬길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럴 수가 있습니다.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에 왔다 갔다만 하면, 틀림없이 뒤에 다른 우상이 있는 겁니다. 자기 우상을 따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면 우리의 눈은 다른 데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대신 지금 섬기는 우상인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나를 위한 최고의 가치, 최고의 결정이 우상이 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나에게 뭐가 유리한가?’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기뻐하실까?’가 아니라 ‘나에게 무엇이 유리한가?’만 철저히 따집니다. 하나님과 의논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건가?’만 생각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가가 아니라 ‘나에게, 내 가족에게 어떤 게 유리한가?’를 따집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가장 큰 우상이 자기감정인 것 같습니다. 내가 좋으면 하고 내가 싫으면 안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하라. 용서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별로 나는 사랑하고 싶지 않고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안 합니다. 자기감정이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습니다. 그런 게 우상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대신 권력과 돈과 지식과 명예를 의지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겉으로 다 찬양하고 기도도 합니다. 교회도 나옵니다. 헌금도 합니다.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우상을 갖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우상이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상을 섬긴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 결과는 파멸이라는 것을 여기서 말씀합니다. 43절에서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하신 것처럼, 실제로 다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것이 아모스 5장의 말씀인데,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한지 아십니까? “너희가 그렇게 우상을 섬기고 싶어 했으니까, 이제 우상 섬기는 데 가서 실컷 섬겨봐라.”라고 하셨습니다.
5. 은혜의 보호막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라
42절에 보면 아주 무서운 말이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름대로 자기 우상을 갖게 되어 있고, 어떤 형태이든 우상을 갖게 되면 심판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형태로 옵니까? 걸어가는데 갑자기 번개가 번쩍 쳐서 벼락 맞아 죽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은 그냥 그 죄 가운데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호막이 없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보호막이 우리를 가려주고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도생활을 잘 안 하고 있는데, 내 배우자가 열심히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내 자녀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내 부모님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 내가 잘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은혜의 보호막 아래 있다는 것을 지금 모르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시던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나를 위해 이제 기도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던 형제자매를 내가 떠나버리니까 나를 위해 기도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즉시 죄악에 빠져버리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원래 본질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지켜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정도로 사는 것인데,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은 그 은혜의 보호막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그냥 두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지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때, 죄 가운데 살고 예배도 안 하고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내 맘대로 살고 심지어 악을 꾀하고 남을 등치고 사기를 치더라도 특별한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겉으로는 평안해 보여도 아주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절대 좋은 게 아닙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게 좋은 겁니다. 그게 사실은 축복입니다.
나쁜 짓을 하고 남을 속이고 사기를 쳤을 때 들통이 나고 거기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축복입니다. 매를 맞는 것이 사실은 사랑입니다. 채찍이 있는 것이 오히려 사랑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악을 행하고, 아무리 사기를 치고, 아무리 남을 미워하고, 아무리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가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게 오히려 저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막이 사라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간섭받고, 들키고, 매 맞는 것이 좋은 겁니다.
나쁜 일을 해서 슬쩍 넘어가면 좋겠는데 들키면 보통 사라들은 뭐라고 합니까? ‘재수 없게’ 들켰다고 합니다. 재수 없는 게 아닙니다. 그건 재수가 좋은 겁니다. 아주 복을 받은 일입니다. 오히려 슬쩍 넘어가는 게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 일이 쌓이고 또 쌓이며 계속된다면 나중에 엄청난 비극이 생깁니다.
3. 성막과 성전
스데반은 이제 조금 더 깊은 이야기로 나아갑니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44-45절)
이 ‘증거의 장막’은 성막을 말하는데, 영어로 Tabernacle이라고도 하고 Tent of Meeting(회막)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이 만나주신 장소입니다. 그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하나님을 만나는 법궤도 거기에 있습니다. 증거의 장막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동행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광야에서 성막 중심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신앙뿐 아니라 그들의 삶의 중심도 성막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나의 삶에 들어와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말처럼 주관적인 말이 없습니다. 그냥 믿는 사람과 정말 동행하는 사람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믿는 것과 동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믿는 것은 내 중심, 내 주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뭘 믿는지를 자기가 결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주일날 와서 이렇게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다 할 수 있는데, 정말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느냐가 관건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24시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사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기대며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런 증거의 장막은 하나님이 인간 속에 오셔서 우리 삶을 간섭해주시고 인도해주시고, 먹고 마시고 사는 모든 것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곳인데, 그렇게 구체적인 하나님의 동행으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성막이 솔로몬 때 와서 완전히 성전 건물로 지어집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6-47절)
열왕기나 역대기 읽어보시면 여기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자기는 화려한 집에 사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너무 초라한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셨지만, 다윗이 아니라 그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거기에 사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48-50절)
이것도 시편 66편의 인용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전을 주신 것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즉 ‘하나님은 항상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위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안 믿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식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할수록 이게 더 문제입니다. 저처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녀서 50년 이상 교회를 다닌 사람일수록 더욱 그런 경향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히 믿기는 믿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믿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자기 관점으로 보는 겁니다. 성경의 관점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생각해야 하는데, 내 생각, 내 경험, 내 지식대로 하나님을 자꾸 가두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결국 하나님을 자기가 소유하고, 하나님을 자기가 부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도록 만들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 계속 지적하셨던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자기들이 부리려고 하는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말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스데반의 결론과 도전 (51~53절)
지금까지 스데반이 이런 이야기들을 죽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깜짝 놀랄 말을 스데반이 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51-53절)
안하게 듣고 있는데 갑자기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그게 바로 너희다!”라고 하니까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들은 항상 성령을 거스르고 슬프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죽이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이 격분하여 결국 스데반을 죽이게 됩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오늘 우리가 다시 한 번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매일 살아가고 있습니까? 외적인 어떤 형식과 관습과 전통을 지키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며 살았던 것은 아닌지, 그런 유대인들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영원히 책임져줄 수 없는 유한한 것들이나 어떤 우상을 붙들고 그것을 지키느라 애쓰면서 그와 동시에 영원한 말씀은 잃어버리는 미련함을 버리기 원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시게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우리를 맡기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지키라 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영원한 삶을 준비하도록,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는 것임을 잊지 말기를 원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아브라함과 모세와 스데반을 지금까지 지켜주고 계시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영원한 말씀으로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광야교회와 연동교회
출애굽기 25:21-22, 사도행전 7:37-38 / 이성희 목사
오늘은 우리교회가 이 땅에 창립된 지 119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그동안 여러 달 동안 모두가 기도하고 수고하여 새 예배당에 입당하게 된 주일입니다. 교회 개축 공사 기간 동안 인내하시며 기도해주신 성도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렇게 의미 있는 주일을 맞이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랜 역사 가운데서 교회의 참 모습을 지켜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좋은 교회의 성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교회는 오래 전에 예배당이 화재로 소실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119’는 불을 끄고, 문제를 해결하는 전화번호입니다. 어느 집에 불이 났는데 아버지가 얼마나 당황했든지 아들에게 “야, 119에 전화해야겠는데 번호가 몇 번이냐?”고 했더니 아들도 당황해서 “아버지 114에 물어보세요”라고 하더랍니다. 우리교회가 119주년을 맞이하여 세상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해결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건축을 마치고 봉헌할 때에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여 모세가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마치고 봉헌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였고,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며,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새롭게 개축한 우리교회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교회가 되어 온 누리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는 119년 전인 1894년, 우리 조국의 암흑기에 연못골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일제강점 시기를 지나, 개화의 소용돌이를 맛보았습니다. 이때는 나라를 일제의 손에서 다시 회복하려는 애국 독립지사가 우리교회에 많았습니다. 그 후에 군사독재 시절에는 사회정의를 부르짖고 통일운동에 앞장 선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회를 섬기는 교회로서 복지와 봉사에 주력하고 있는 사회성이 강한 교회입니다.
장로교회는 개혁주의 전통을 가진 개혁교회입니다. 개혁교회는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라는 대명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개혁교회는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What the church should do for the society?)라는 물음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새롭게 변하는 시대마다 개혁되는 교회,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고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는 시대마다 국가를 위한 일꾼, 교회를 위한 일꾼, 사회를 위한 일꾼을 많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배당이라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며, 함께 모임이 교회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개축된 교회에 입당하면서 우리의 마음, 신앙, 삶의 자세가 개혁되고 우리 몸이 주님이 거하시는 거룩하고 새로운 성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애급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공동체를 이룹니다. 출애굽은 구원의 상징입니다. 요단강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의 상징입니다. 그 가운데 광야공동체는 교회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집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전 훈련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참 교회를 알려면 교회의 원형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원형은 광야교회입니다. 처음 교회는 광야교회인데 우리교회의 참 모형을 찾기 위해서는 처음 교회인 광야교회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7:38에는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고 합니다. 출애굽 후의 광야를 성경은 광야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광야교회의 목회자는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영적 지도자이며 이스라엘의 절대적 지도자였습니다.
광야교회는 광야에 있던 교회입니다. 광야가 교회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필요한 것이 다 있는 충만한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1:23에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교회가 창립 119주년을 맞이하여 처음 교회인 광야교회의 모습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가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광야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살펴보고 광야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을 만나는 교회입니다.
출애굽기 25:22에는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고,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지만 특정한 만남의 장소를 만들게 하시고 거기서 만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만남이란 인생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인생이란 만남으로 시작하여 만남으로 마칩니다. 인생은 출생부터 새로운 세상인 천국을 만나기까지 만남의 연속입니다. 만남을 잘 해야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만남으로 인생의 전환기를 맞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삼중고의 장애를 가지고 절망 가운데 있던 헬렌 켈러가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므로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므로 “사랑은 기적을 낳는다”는 말을 낳았습니다. 고 박정희대통령은 고 정주영회장을 만나므로 한국 경제발전의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축구선수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을 만나므로 세계적 선수로 거듭났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에게 “지성아, 월드컵에서 제대로 한번 보여주자. 너도 잉글랜드와 같은 큰 무대에서 한 번 뛰어야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박지성의 인생은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내 남편, 내 아내를 만나므로 인생이 변한 사람들입니다.
치바 코모유키의 ‘인생이 빛나는 만남의 법칙 50’이란 책에는 “오늘 만나는 사람이 당신의 미래를 바꾼다”, “사람은 만남으로 90% 바뀐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우리의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만남은 정말 중요합니다. 특히 어떤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느냐 하는 것은 미래와 직결됩니다. 흔히 말하는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이렇게 중요한데 하물며 영적 임자, 주님을 만나는 것은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영적 인생에서 만남이란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 예수님을 만나는 일, 좋은 성도를 만나는 일은 자신의 영적 삶에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베드로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바울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핍박자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전환되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과 예수님의 만남은 언제나 예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만남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만나러 오신 것입니다. 사람은 예수님과 만나지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베풀 때에 저는 아기가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좋으신 부모님을 만난 것을 먼저 감사하고 그리고 세상에 살면서 좋은 스승을 만나게 하시고, 좋은 친구를 만나게 하시고, 좋은 책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경험해 보니 이런 좋은 만남이 인생을 풍요하게 하는 좋은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기들에게 기도하기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기도는 하지 않지만 그것도 중요합니다.
인생은 일생입니다. 한 번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인생은 연습이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미신적인 전생이나 내생도 없습니다. 연습이 없는 한번밖에 없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며, 축복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더구나 이 만남 때문에 인생이 변한다면 어찌 복이 아니겠습니까?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올라가서 높이 들린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므로 그의 삶이 완전히 변하여 참 선지자로 거듭났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대제사장은 매년 한 차례씩 성전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과 대제사장의 만남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지성소에서의 만남 없이는 죄 사함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죄 사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으로 영원한 제사장이 되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제거된 것은 다시 지성소에 들어갈 필요가 없이 하나님과의 영원한 만남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도스토에프스키는 1821년 모스크바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28살이 되던 해에 좋지 못한 정치집단에 가입하여 체포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시베리아 옴츠크로 호송되던 중 토불스키라는 시골 역에 잠시 정차하였습니다. 장교부인들이 호송되는 죄수들을 위하여 따뜻한 차를 대접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인이 작은 성경책을 도스토에프스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옴츠크 감옥에서 성경을 읽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총살형 2분 전에 황제의 사면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왕성한 작가 생활을 통하여 ‘죄와 벌’,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수많은 명작들을 내 놓았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의 삶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로 하여금 최고의 작가가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교회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에 오는 사람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교회의 전통을 잘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119년 전에 우리교회를 세우신 목적입니다.
둘째, 살아 있는 말씀 위에 선 교회
사도행전 7:38 하반절에는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라고 합니다. 모세는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의 전언자 즉 배달꾼이었습니다. 광야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전해진 말씀으로 훈련받는 곳이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입니다. 그 말씀대로 각자의 삶을 훈련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3대 본질적 사명은 ‘케리그마’(말씀 선포), ‘코이노니아’(말씀의 내적 적용), ‘디아코니아’(말씀의 외적 반응)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을 믿는 교인이면 누구나 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는 말씀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훈련이나 행사나 프로그램이 말씀 없이, 말씀을 떠나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성격도 좋고, 재주도 있고, 지능도 높고, 생겼다고 하더라도 말씀을 떠나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영적지도자입니다. 민족적 지도자입니다. 백성의 재판장입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잘 알아서 전해야 하는 것이 모세의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현재 목회자의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목회 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모든 사역은 다 하지만 설교는 하지 말라고 하면 목회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전하지 않고 어떤 일을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이 중심입니다. ‘케리그마’ 없이는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듯이 말씀이신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 되시고 머리가 되셔야 합니다.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는 말씀(케리그마)이 육신이 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7:16에 예수님께서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4:24에서는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고 전달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하신 말씀이신 예수님의 말을 듣고 순종한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이며 목회자인 디트리히 본훼퍼는 성자 아우구스티누스와 개혁자 루터의 주장을 반영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실 뿐 아니라 교회의 말씀으로서 거하신다. 즉 설교 말씀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설파되는 말씀의 형태로 존재하신다”. 교회는 말씀의 형태로 존재해야 합니다. 말씀이 선포되지 못하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며 교회의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모세는 살아 있는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4:12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듣는 이들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듣는 말씀이 듣고 실천하는 말씀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헬라어로 본래적인 말씀인 ‘로고스’와 내게 주시는 말씀인 ‘레마’로 구분합니다.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로고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기가 우리 집에서 전등에 켜진 불을 ‘레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발전소에 전기가 많아도 우리 집에 전등이 없으면 전기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로고스’가 ‘레마’가 되어야 참 말씀입니다. 발전소에 전기가 많으면 뭐합니까? 우리 집이 밝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말씀, 복음을 내 것으로 받고, 전하고, 실천하는 곳입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프랑스어 판 서문에 ‘기독교 강요’는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의 전체를 발견하는 데에 사용되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기독교 강요’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것으로 발견하게 하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독교의 핵심가치입니다.
교회의 핵심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도의 핵심가치는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선교 없이는 교회를 논하지 말아야 합니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며, 아무 것도 없을 때가 가장 풍요한 때입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때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은혜로 주시는 것이 광야이며, 현재의 교회입니다. 우리교회가 말씀 중심의 교회, 말씀이 전파되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119년 전에 하나님이 이 곳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입니다.
결 론
현재 한인 디아스포라는 세계에서 가장 넓게 퍼져 사는 민족입니다. 현재 한국인은 세계 175개국에 동포 726만 명이 흩어져 있습니다. 유대인은 100여 개국에 730만 명이 흩어져 있고, 중국 화교는 130여 개국에 4,543만 명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 항구를 통하여 개신교 신자를 비롯한 121명의 조선인이 하와이로 첫 이민을 떠났습니다. 1903년 1월 13일 그들은 하와이에 도착하였고, 질병검사 등을 거쳐 최종 상륙허가를 받은 사람은 86명이었습니다. 이것이 대한제국이 추진한 첫 공식 이민이 성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지금은 세계 어디에나 가보면 한국인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세계 많은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여러 지역에서 연동교회 출신을 만납니다. 가는 곳마다 많은 연동 가족들이 있는 것을 보면 놀라운 일입니다. 이들이 바로 ‘연동 디아스포라’입니다. 흩어진 백성들은 이 땅의 작은 교회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하늘나라로 가는 과정입니다. 디모데전서 3:15에는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라고 합니다. 우리교회가 기둥과 터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교회가 120주년을 향해서 힘차게 나아가서 글로벌 시대에 진리의 기둥과 터로, 수많은 작은 교회들을 이 땅에 심고 하나님의 나라를 크게 확장시켜 나가는 주님의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행 7장 39~40절 / 양향모목사
‘십계’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어서 가나안땅으로 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착한 사람들이 아니고 참으로 악하고 미련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하는 일들이 사사건건 참으로 미련하고 악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애굽의 나쁜 사람들에게 압제를 당하고 모진 고생을 하고 비참하게 산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한 사람들이 세상을 잘못 만나서 고생만 하던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 마음속에도 애굽 사람들 못지않은 악한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사사건건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순종하고 눈에 보이는 자기들 이익만 생각하는 전형적인 죄인의 모습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왜 그들이 그랬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쁜 것 하나라도 하셨습니까? 그들을 노예생활에서 해방을 시켜서 자유로운 몸이 되게 하고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해 주시려고 하는데 왜 그들은 자꾸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를 했을까요?
모세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만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의 산헤드린 공회를 중심으로 한 유대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렇게 성경을 잘 알고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거부했을까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거부합니다. 그들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죄로 인해 죽어가고 있고 그 형벌로 영원한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받아 교회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등한시하며 더 좋은 것을 찾으려고 하고 더 좋은 것이 없어 보이면 다시 세상으로 나가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요즘 공부하는 것이 있어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있습니다. 거기서 칼빈은 우리가 하늘의 신령한 복들을 받는 것은 철저하게 성령님에 의해서라고 말합니다. 성령님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알게 하는 분이시고 성화시키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 마음에 계시지 않는 사람은 교만하고 자기자랑하고 남 원망하고 불평하고 항상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님이 없는 사람이요 복음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안 계시면 선택도 믿음도 구원도 없습니다.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도를 주셨는데 그 생명의 도를 따르지 않고 도리어 종노릇하고 있었던 이 세상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애굽이 아닌 가나안으로, 세상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나라로 가야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본문 39절에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스데반이 출애굽기 32장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3개월쯤 광야 길을 걸어서 시내 산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여정을 살펴보면 기적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들이 지긋지긋한 종살이에서 해방이 된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할 일인데 그것도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기 때문에 그들 마음에 다른 생각이 들어갈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그 사악한 애굽왕 바로의 마음을 돌려서 애굽을 빠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바로의 마음이 변해서 군사를 이끌고 다시 잡으러 올 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하셨고 따라오던 애굽의 군사들은 바닷물에 수몰시켜버리셨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런 체험을 하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키시고 자유로운 몸이 되게 해 주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그 현장에서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 갈리진 바다로 건넜고 나를 잡아 죽이려고 뒤따라오던 군사들을 수몰시켜 버리는 그 감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체험을 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단 그 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나 한 3개월쯤 지나서 시내 산에 도착을 했는데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 엄청난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해서 마시게 하셨고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와서 먹게 하셨고 전쟁을 하면 기적적으로 이기게 해 주셨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가끔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불과 3개월 동안에 엄청난 일들을 그들이 경험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시내 산에 도달 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 위로 부르시고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들을 정해서 내려 보내셨습니다. 십계명을 위시한 여러 규정들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십계명이란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가장 기초적인 것들을 제시한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 것을 열 가지 계명 안에 정해서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제일 싫어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상을 만들거나 거기 절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도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사람을 죽이지 말고 남의 남자나 여자 넘보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는 것은 인간이라면 해야 할 인간이 서로 함께 살려면 최소한 지켜야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받고 그런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런 최소한의 규칙마저 지키지 않으려고 거절을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했다는 것이 바로 이 말입니다. 이런저런 은혜는 다 체험하고 다 받았으면서 막상 그들을 위해 그들에게 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거절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일을 해 주시면서 그들에게 아주 작은 일 그것도 그들 자신들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지정해 주셨는데 그것을 거절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스데반은 그 이유를 “그들의 마음이 도리어 애굽을 향하여”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아주 큰 생각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지정을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보다 애굽의 땅이 더 좋게 여겨져서 틈만 있으면, 핑계꺼리가 생기기만 하면 애굽으로 가서 살려고 하였습니다.
가나안은 척박하고 좁은 땅이었지만 애굽은 넓고 물도 풍부해서 농사짓고 살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으로 가서 살면 그곳이 사람들의 눈에는 척박한 땅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살기를 원했고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잘 살 수 있는 땅을 원했습니다. 누구의 도움이 없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 살 수 있는 그런 곳을 원했고 그곳이 애굽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거기에 사탄이 있든지 거기에 온갖 우상숭배가 있든지 거기가 타락의 온상이든지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든지 거기에서 죄의 종이 되든지 죽음의 종이 되든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고 그냥 재미있게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하나님을 섬기고 바르게 살고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타락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거기 있으면 아무리 좋은 생각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생각을 하고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할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대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자기가 배운 지식 자기의 경험 그래서 자신이 느끼는 것을 최고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것으로 원칙을 정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이 세상을 삽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 생각들은 잘못된 생각들이 많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타락해 있고 그 타락한 마음을 원칙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생활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들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돈이 없고 몸이 약하고 형편들이 곤란하고 직장 때문에 사업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 때문에 별별 핑계들을 다 댑니다.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직 애굽을 향하고 있으면 그런 여러 가지 문제 앞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가나안으로 향하고 있으면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에게 더 기도하게 하고 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게 하고 큰 힘을 받게 하는 것이지 그것이 불신앙의 핑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마음에 성령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영원한 천국을 향하지 못하고 세상을 향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으면 교회에 오지도 못하고 와도 세상으로 향한 욕심 때문에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를 수시로 점검을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살고 있는지 타락한 나의 마음을 따라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영원한 생명을 영원한 천국을 향하여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본문 40절에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려고 하시기 때문에 애굽에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마음을 따라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을 인도할 다른 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론에게 다른 신을 만들어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좋은 곳으로 인도하게 하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있었습니다. 산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이를 못 참고 다른 신을 만들어서 인도함을 받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금 귀걸이를 다 내라고 하고 그것을 녹여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를 신이라고 섬기려고 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써주신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 판을 들고 내려오다가 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돌 판에 제일 먼저 기록된 1계명과 2계명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짓을 그들이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는데 지금 그 계명을 확실히 위배하는 짓을 그들이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두 돌 판을 던져서 깨어버리고 하나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다 죽여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큰 민족을 만드시겠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서 즉시 그들을 죽이는 일은 거두셨지만 사실은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이상의 장정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을 직접 죽이시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수명을 다해서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가 그들이 죽고 난 다음에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애굽으로 즉 세상으로 향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폐단이 이것입니다. 그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다른 신으로 대체를 하거나 하나님의 모습을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서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을 우리의 신이라고 했을까요? 첫째는, 신이 인간의 삶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신 것은 좋은데 이런저런 계명들을 주셔서 귀찮게 합니다. 이것은 하지마라 이것은 하라 이리로 가고 저리로는 가지 말라 그런 규칙들을 정하고 잘못하면 죽이겠다고 까지 하니까 그렇게 간섭하는 신은 싫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냥 금송아지처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무 간섭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다가 우리가 필요해서 기도하면 기적이나 일으켜주고 복이나 주는 그런 신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설교도 잘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타락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말 못하는 송아지를 신을 삼는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계시다가 우리가 아쉬운 것 말씀드리면 그 기도나 들어주시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신을 황금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보다 황금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황금을 의지하는 것이 더 확실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돈이 필요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은 돈이 없으면 한시도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돈이 있어야 뭐든지 하고 돈이 얼마나 있느냐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하면서 삽니다. 그냥 하루하루 벌어서 먹고 살면 불안합니다. 그래서 평생 먹을 것 쌓아두고 살기를 원합니다. 평생 먹고 살 것 쌓아둔 사람도 욕심은 끝이 없어서 더 화려하게 살고 더 잘 살려고 더 많은 돈을 모으려고 합니다.
저도 가끔은 저나 우리 교회에 돈이 좀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돈이 없으니까 교회 운영도 어렵고 사람들이 우리교회를 무시하는 것 같고 돈 몇 푼 때문에 사람들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돈이 없는 삶이 좀 힘이 듭니다. 그래서 로또복권을 사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일이 십억만 있으면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왜 그런 기도 하나 안 들어주시는지 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불신에서 온 마음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의지해서 살고 싶어 하는 타락한 마음에서 온 것을 생각하고 참 나도 타락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노력하지 않고 희생도 헌신도 없이 쉽게 살려는 게으른 마음 때문에 그러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길이라면 고난도 감수하고 목숨까지도 바쳐서 충성을 해야 할 사람이 돈을 욕심내고 돈을 의지하고 잘난 척하고 살려는 악한 마음 때문에 그런 생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왜 가나안 땅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에게 왜 가난한 삶을 살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왜 척박한 땅에 살게 하고 왜 가난하게 고생을 하면서 살게 하시는 것일까요? 이 세상이 우리가 정착해서 살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스쳐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돈은 우리를 타락하게 하는 우상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불신자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서 다 보고 배웁니다. 가난할 때 교회에 왔다가 부자가 되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난할 때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다르게 부자가 되어서 별질 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가난할 때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이 먼저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먼저인데 부자가 되면 서서히 자기중심의 신앙으로 바뀌게 됩니다.
나라가 가난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가 전국에 생겼다가 부자나라가 되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교회도 문을 닫는 나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변질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그 전철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애굽으로 향하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돈을 의지하고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언젠가는 그 돈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주인이 되어서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에서 하루하루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살아야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돈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신앙으로 사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갑자기 엄청난 재물을 가지게 될 때도 노력하여 성공하고 많은 것을 가지게 될 때도 그런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여러분의 가슴속에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다 망해버리고 아무 것도 없을 때도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세상에서 받는 축복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게 될 때도 죽도록 희생하고 헌신하고 사는 것이 주님의 일임을 알게 될 때도 그 때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때도 내가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복이라는 마음이 있으면 그제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임이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마음이 향한 사람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마음이 향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확실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로 향해 있습니까? 가나안을 향해 있습니까? 애굽을 향해 있습니까? 천국을 향해 있습니까? 이 세상을 향해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까? 금송아지를 향해 있습니까? 점검을 해 보시고 여러분의 마음이 바른 것을 향해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면서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였더니
양향모목사 / 행 7:41-43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산다고 할 때 우리가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일 우리가 지켜 행하여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일도 지켜야 하고 성경공부도 해야 하고 예배도 드려야 하고 기도생활도 해야 하고 헌금도 해야 하고 각 분야에서 헌신도 해야 하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도 살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고 이런저런 좋은 일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함에 있어서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본질적이고 근본적으로 꼭 기필코 붙잡고 있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다른 모든 일들은 아무 소용이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배우고 있는 스데반의 설교 가운데 그 중요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스데반이 중요한 핵심은 놓치고 겉껍데기만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것이 큰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들의 생각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들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하는 것은 신앙인이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아 내려올 때부터 그 말씀에 위배되는 행위를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대로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라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부터 그들은 그 말씀에 복종하지 않고 거절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너무나 중요한 언약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그 언약 즉 구원의 복음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고 자기 마음에 맞는 대로 해석을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과 반대 방향으로 감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발견하고 순종하고 따르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또 하나를 말씀 드리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지를 분명히 알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시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꾸 애굽으로 가여 한다고 생각하고 틈만 있으면 하나님의 뜻과 반대가 되는 애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교회 내에 꼬리가 다른 이단이 아닌 머리부터 다른 이두가 있다는 것을 제가 자주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목적지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은 심지어 그 방향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면서도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머리부터 다른 이두입니다.
이 땅에서 가난한 삶을 산다고 해도 영원한 가나안 땅인 천국을 향해서 가는 것이 바른 목적지를 가는 것이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고 충성스럽게 일하고 좋은 일 많이 한다고 해도 이 목적지를 향하고 있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를 오늘 설교를 통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오늘 설교의 제목대로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라고 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 있는 귀한 진리를 바르게 알고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본문 41절 말씀에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앞 절의 말씀을 보면서 생각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석 달간 여정 끝에 시내 산에 도착하여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동안 산 아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신이라고 하면서 그 우상 앞에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고 복만 주는 신을 원했기 때문이고 그 복이 황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 결정적인 원인은 그들의 마음에 가나안 땅이 아닌 애굽으로 가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말씀은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서 그 우상 앞에 제사를 드리고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보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대해서 더 자부심을 기지고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르게 만들어진 것인지 죄가 되는 것인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그런 것은 상관이 없고 단지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는데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해 주셨고 우리 인간도 티끌에 불과하던 존재를 이렇게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 만들어주셨으면 그 안에서 사는 우리가 무엇을 해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아주 작은 일 하나 해 놓고 되게 생색을 내려고 합니다. 그것도 바르게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고 그 일을 자신이 했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죽을죄를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우상을 그것도 자기 손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고 기뻐하는 것은 참 바보 같은 짓입니다.
요즘 갑질을 하는 대기업 사장들 때문에 사장들이 욕을 먹습니다. 그리고 악덕 기업주들이 많이 있어서 사장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들을 하시는데 그렇지 않고 착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 아주 소규모의 사업을 하면서 사장노릇을 해 보았는데 사장들도 참 힘들게 사업하는 사람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일하는 사람들이 갑질을 하고 사장을 괴롭히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사원들이 뭘 하나 해놓고 그것을 모두 자기 공로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실적을 올리게 하기 위해서 사장은 회사를 만들고 투자를 하고 그들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마련해 주어서 그 일을 하게 된 것인데도 마치 자기가 똑똑해서 그 일을 한 것처럼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들이 그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서 비유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께서 이미 창조해놓으신 그 가운데서 일어난 것이며 자랑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인간이 교만한 것입니다. 자기 자랑하는 교만한 사람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하고 그 일이 하나님께서 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조심을 하고 살펴보아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하거서 그 일을 자기가 했다고 자랑하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출세를 하고 돈을 많이 벌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신 것을 자기 욕심 채우려고 잔뜩 모아두고 그것을 잘했다고 자랑하는 것은 금송아지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자기가 만들었다고 자랑한 사람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요즘 교회당 크게 잘 지어놓고 수천수만 명 모아놓고 은근히 자기 자랑하는 목사들이 더러 있습니다. 초대형교회가 아니더라도 작은 교회라도 짓고 수백 명 모여도 은근히 자기 실력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들도 수시로 말하듯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헌금해서 건축을 했고 성도들이 전도해서 성도들이 많아졌고 자기 공로로 다 그렇게 된 것은 아닌데도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생각하면 그렇게 교회를 성전처럼 화려하게 짓고 수천수만 명을 모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기 생각대로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은 아닌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의 공로라고 자랑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우리가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신앙생활의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해 놓고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면서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사
본문 4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외면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냥 조금 기분 나쁘고 용서할만한 그런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예 얼굴을 돌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고의 악을 행하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물보다 특별히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특별한 인간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하고 그것을 잘했다고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는 그만 등을 돌려버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외면을 하시고 그들을 내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웬만하시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고 깨닫게 하시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훈계를 하시고 용서를 하신 다음 바른 길로 가게 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시고 금송아지 우상숭배만 한 게 아니라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내버려 두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하늘 군대’란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말합니다. 금송아지만 만들어서 섬긴 것이 아니라 태양도 신으로 섬기고 달도 섬기고 별들도 섬기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살라고 했더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한 태양이나 달이나 별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 어리석은 인생들입니다. 그것들이 말이나 한 마디 할 줄 압니까? 하나님께서 질서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물건에 불과한 것들을 신으로 섬기는 어리석은 일을 하도록 내버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암5:25)라고 하신 아모스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서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에게 절하고 그 우상을 만든 것을 기뻐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정말로 바른 제사를 드렸겠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안 봐도 뻔 하다는 것입니다. 죽어 있고 말 못하고 아무런 능력도 없는 우상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도 하나님을 말 못하는 신으로 아무런 능력도 없는 신으로 알고 형식적인 제사를 드릴 것이 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상 숭배하는 것처럼 섬긴다면 우리 하나님을 말 못하는 힘도 없는 형식적인 신으로 생각한다면 신앙생활의 목적이 애굽으로 세상의 탐욕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 예배는 보나마나 뻔한 예배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중요시하고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을 하는 것은 그저 신앙생활 좀 잘하자 그런 뜻이 아닙니다. 교회의 근본적인 것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중요한 일을 바르게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없으면 바른 예배가 없으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도 모르는데 예배드리는 것 제대로 못 드리는데 다른 것 잘 해봤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뭐 좀 잘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라면 반드시 해야 하고 그것이 없으면 교회도 아니고 오히려 우상숭배가 되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 무엇인줄을 알고 그 중요한 것을 바로잡자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우상숭배 정도를 가지고 신앙생활이라고 했다고 한다면 이제야 우리가 비로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상숭배와도 같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것을 모르는 엉터리 교회들이 잘 되는 것은 그러고도 별일 없이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등을 돌리셨기 때문입니다.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셔서 영원한 지옥으로 멸망으로 달려가는 것을 내버려 두셔서 엉터리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를 바벨론으로 옮기리라
본문 43절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했습니다.
“몰록의 장막이나 신 레판”은 당시에 있었던 우상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신으로 섬기는 것에 더 나아가서 당시 이방인들이 섬기는 온갖 이상한 잡신들도 따라 섬기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셨다는 것은 잘 못해도 그냥 놔두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도 어이가 없으니까 그냥 대꾸도 하시기 싫어서 등을 돌리고 모르는 체 했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결국 그 사람들에게 묻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은 그 결과로 어떤 벌을 받을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역시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그들이 받을 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을 벌에 대해서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암5:27)라고 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다메섹 밖으로라고 했으나 스데반은 바벨론 밖으로라고 했지만 그 뜻은 같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겠지만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결국 나라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붙잡혀 간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여곡절 끝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았지만 우상숭배와 가식적인 제사로 인해서 남북왕국이 다 전쟁에 망하고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만 비참하게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갔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산 삶은 아무런 평가가 없이 그냥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살았던지 그 삶으로 평가를 받고 죄에 대한 재판을 받고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바르게 살지 못하는 사람도 그냥 잘 사는 것은 그들의 삶이 정당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알면서도 섬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등을 돌리시고 외면하시기 때문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삽니다.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버림받은 삶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뒤로 미뤄두었다가 회개할 기회도 없이 비참하게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 그들의 삶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줄 도 모르고 바른 예배도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그대로 살아도 괜찮기 때문에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엄한 벌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들의 잘못도 모르고 착각 속에 살다가 그들도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로 바르게 알고 따라야 할 근본적인 것이 있음을 알고 다른 것은 좀 부족하더라도 그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아는 것 성경전체의 진리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알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믿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는 목적지는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 땅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부과영화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이 들어도 영원한 천국을 향하는 것이 바른 목적지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바로 알고 목적지를 바로 아는 사람은 세상 부귀영화를 위해서 우상을 만들지 않고 우상숭배를 따르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와 같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예배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의 설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은 행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고 기뻐하는 모습에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 존재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지만 그런 행동들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그들을 엄하게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을 바로 알고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시고 꼭 잊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 삶을 사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