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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60704 / 스데반의 설교 6 / 행 7:44-53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6.06.19|조회수47 목록 댓글 0

스데반의 설교 6

행 7:44-53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 7:44-53 /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 있을 때부터 메고 다닐 수 있는 성전, 곧 증거의 장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이 들어 있는 이 장막은 천사가 모세에게 일러준대로 정확하게 만든 것입니다. 45)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이 장막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이방인 나라들과 전쟁을 벌여 새로운 땅을 점령하자 장막을 그곳으로 운반해 가서 다윗 때까지 보존하였습니다. 46) 하나님의 크나큰 복을 받은 다윗은 야곱의 하나님을 위해서 영원히 보존될 성전을 건축할 특권을 달라고 간구하였지만 47) 실제로 성전을 건축한 사람은 솔로몬이었습니다. 48-4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는 머무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예언자들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ㄷ)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인데 너희가 나를 위해서 어디에 성전을 지을 수 있겠느냐? 내가 들어가서 쉴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느냐? (ㄷ. 사66:1-2) 50) 하늘과 땅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냐?' 51) 이교도처럼 목이 뻣뻣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까지 성령을 거역할 셈입니까? 당신들의 조상이 한 짓을 당신들도 똑같이 되풀이할 셈입니까? 52)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거든 그 이름을 대보십시오. 그들은 의로우신 그분이 오실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지만 당신들은 바로 그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 53)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천사에게서 받은 하나님의 율법을 당신들 스스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모독했다는 거짓 증인들의 고발로 인하여 받게 된 재판에서 스데반은 참된 성전의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하는 동시에 유대인들에게 바른 성전관을 가르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44-45) 증거의 장막은 43절의 몰록의 장막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 증거 장막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 돌판을 보관하기 때문에 증거의 장막으로 불리었으며(민 9:15, 10:11),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는 장소였기에 회막으로도 불리었습니다(출 27:21; 신 31:14). 이 장막은 모세가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그대로 만들었습니다(출 25-27장). 이 장막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가지고 들어갔으며(수 4:16) 다윗의 때까지 전해졌습니다(삼하 6:1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46-50) 팔레스틴 지역을 정복하고 화려한 궁전에서 생활하던 다윗은 하나님의 장막이 초라하므로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을 지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지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성전건축에 필요한 재료를 준비했습니다. 그리하여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준비했던 것을 가지고 마침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대하 3-4장). 성전을 건축한 후에 솔로몬은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실 뿐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는 분이시라고 찬양했습니다(왕상 8:27).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51-53) 스데반은 지금까지 완악하고 패역했던 그들의 조상들의 모습과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그 죄악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음을 꾸짖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겸손한 것 같았지만 교만하여 목을 곧게 했으며, 외형적으로는 할례를 받았지만 그들의 조상들처럼 항상 성령을 거슬렀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것처럼 그들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적용: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교회에서의 모습과 집에서의 모습이 같은가, 다른가? 여러 사람과 같이 있을 때와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하여 서로 나누어 봅시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인요 국립공원 삼림지에서도 해발 3,000m 이상의 고지대에는 무려 4,900년 된 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 이름을 성경 인물 중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의 이름을 따서 부릅니다. 보통의 나무처럼 므두셀라 나무에도 형성층이 있어 굵기가 계속 굵어지는데, 4,900년 동안 굵어졌으니 엄청나겠다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나무는 아주 더디게 조금씩 자라, 100년 동안 고작 3cm밖에 굵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므두셀라는 혹한의 날씨와 사나운 바람, 적은 강수량 등 가장 나쁜 생존 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므두셀라의 장수 비결은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내는 강인한 생존력과 다른 나무보다는 더디지만 아주 조금씩 꾸준히 자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롱런하는 비결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호크마 주석

=====7:44

증거의 장막 - 벤트(Wendt)는 이 '증거의 장막'이란 원래 하늘에 있는 장막의 실제 모형이며 성전은 그것을 본뜬 모형이라고 한다. 그러나 히 8:5은 이러한 생각을 거부한다. 이 '증거의 장막'이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새긴 두 개의 돌판을 그 장막 안에 보관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민 9:15). 그 장막(帳幕)의 실체가 하늘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장막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투영(投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셔서 택한 백성과 교제를 나누셨기 때문에 '회막'(會幕)으로도 불리었다.

 

=====7: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때까지 이르니라 -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 역시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그 장막을 가지고 다녔다. 이 장막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중앙에 위치해 항상 그들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여기서 '받아'라는 뜻의 헬라어 '이아뎌사메노이'(* )는 '물려받다', '상속으로 계승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이는 그 장막의 계승이 여호수아 세대에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초기부터 다윗 시대까지 계속해서 이어졌음을 나타내 준다.

 

=====7:46

다윗이...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 혹자는 다윗이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려고 한 것은 '장막'의 처소이지 어떤 견고한 건물을 지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Haenchen). 그리고 그 근거로 '처소'란 뜻의 헬라어 '스케노마(* )가 '천막', '초막', '오두막 집' 등의 의미임을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분명 너무 지나친 자구적(字句的) 해석이다. 오히려여기서의 처소란 다윗이 건축하려고 했던 집으로 볼 수 있다(삼하 7:5-16). 렌스키(Lenski)는 이 '스케노마'가 여기서 '시적 표현'으로 사용 되었다고 하여 다윗이 건물성전을 구상했음을 암시한다. 특히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함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여러가지를 준비해 두었다. 이는 그가 건물 성전을 염두에두었음을 입증한다. 따라서 여기서의 '처소'란 곧 '집'이나 '전'을 의미하는 것으로보아야 할 것이다.

 

=====7:47

솔로몬이 집을 지었느니라 - 이제 여기서는 앞서 언급된 '증거의 장막'과 솔로몬이 지은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이 비교되고 있다. 헨헨(Haenchen)은 스데반이 여기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여호와신앙의 타락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사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면서 역동적으로 움직이시며 수많은 역사를 일으키신 하나님을 견고한 성전 안에서 번제나 희생제를 받으시는 정적인 하나님으로 가두어 놓았다는 사실은 여호와 신앙의 정체(停滯) 내지는 후퇴로 규정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서만 예배받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데반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냉소적으로 진술한 것이 아니다. 그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건물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 의미로 바뀌었음을 진술하기 위해 그 성전에대해 언급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성전이나 스룹바벧의 성전은 구약 시대에서는 그 자체로서 그림자적 의의를 지니면서 존속해야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7:48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 실제로 유대인들도 하나님께서 성전 안에 거하시면서 제한을 받으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의 '성호'(聖號)나 그의 '임재하심'은 성전 안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스데반이 본절에서 진술하고 전하는 요지는 예루살렘 성전 예배가 바뀌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이를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가 운명하실 때 성소가 찢어진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마 27:51;막 15:38). 본 구절의 진술을 통해 비록 자세하지는 않으나 스데반은 무소 부재(omni-present)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보이면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 성전에만 제한되어 성도를 만나지 않으심을 역설한다.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이'를 나타내는 헬라어 '휴시스토스'(* )는 히브리어 '엘레욘'(* )에 상응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호칭중 하나이다. 벤트(Wendt)나바우에른파인트(Bauernfeint)는 이 표현을 초월적인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으로 파악했으나 이 용어는 인간이 범접(犯接)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표현이므로 단순히 초월성만 나타내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

 

=====7:49,50

하늘은 나의 보좌요...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 이 구절은 사 66:1, 2을 인용한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창조물 안에 거하실 수 있는분이 아니시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 역시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으로서 그분이 거하실 처소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스데반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수많은 이방 세계의 신전들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을 자신들의 신을 위한 거처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그러한 유대인들의 생각을 통박(痛駁) 내지는 후퇴로 규정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서만 예배 받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데반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냉소적으로 진술한 것이 아니다. 그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건물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 의미로 바뀌었음을진술하기 위해 그 성전에 대해 언급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성전이나 스룹바벧의 성전은 구약 시대에서는 그 자체로서 그림자적 의의를 지니면서 존속해야 했던것이기 때문이다.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 지금까지 스데반은 청중들의 마음을 자극시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갑자기 본절에서 자극시키는 표현을 사용하여 극적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그는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에 대해 즐겨 사용된 구약적 표현들을 사용함으로써(출 33:5;레26:41;신 9:13;10:16;렘 4:4;9:26) 그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도 그들과 같은 부류에 포함시켰다. 즉 이 말씀은 금송아지를 숭배하며 배교했던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지금 성령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아니하는 완악한 마음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내려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7:52

의인이 오시리라 - 여기서 '의인'이란 표현은 '무죄한 자'라는 의미에 가깝다(I. H. Marshall). 이는예수가 무죄한 자로서 십자가를 진 사실과 연관짓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의인'을 메시야이신 예수로 보는데에는 학자들 간에 별 이견이 없다. 왜냐하면 '오시리라'는 표현이 메시야의 오심과 관련된 것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 블라쓰(Blab)는 스데반이 50절 다음에설교를 잠시 중단했다가 51절의 말씀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Haenchen). 그러나 설교의 내용이나 어투가 달라졌다고 설교가 중단되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특히 성령이 충만하여 거침없이 설교하던 스데반이 뚜렷한 이유없이 설교를 중단했을 리없다. 그리고 특히 스데반의 설교가 중단되었다면 누가는 그 사실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고 그의 설교를 계속 이어갔을 것이다(Haenchen). 한편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하여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는 사실은 비일 비재하다(대하 36:15, 16;느 9:26;렘 2:30). 그리고 이렇게 선지자들이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주제는 유대 문학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다. 유대 사회에서높은 학식을 갖추고 있는 공회원들은 구약성경과 유대 문학에서 반복되고 있는 이러한내용들을 수없이 접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심지어 메시야까지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만행(蠻行)을 저질렀다. 그래서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살해했던 것 같이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오신 메시야를 살해한 무리임을 폭로하였던 것이다.

 

=====7:53

천사의 전한 율법을...지키지 아니하였도다 - '천사의 전한 율법'이란 천사의 중보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율법(갈 3:19)을말한다. 신 33:2 뿐 아니라 구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율법 전수 과정에서 천사들이중보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는 묘사되어 있지 않다. 신약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사상이보편화된 것으로 짐작된다(히 2:2). 아마 바울이나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이 복음보다계시의 차원에서 열등하다는 의미로 율법 수여에 있어서 천사의 중보개념을 수용했을것이다(W. Neil).

 

 

< 설 교 >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행 7:44-50 / 양형모 목사

이스라엘 지도자들 앞에서 행한 스데반의 설교를 여러 차례에 걸쳐서 듣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중요하게 여기고 자세하게 살펴보는 이유는 이 설교가 단순히 보통 자주하는 그런 한편의 설교가 아니라 아주 중요한 문제의 진실을 순교를 각오하고 말하는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 설교를 마친 후 스데반은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냥 대강 적당히 변명을 하거나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으면 돌에 맞아 죽는 그런 비참한 죽임을 당하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또 우리가 이 설교를 중요하게여기는 이유는 이 설교가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면서 가장 오해가 심한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분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과 성전을 무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6장 14절에 기록된 대로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온 예수가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이 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해준 규례 즉 율법을 고치겠다고 했다는 말로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그런 나쁜 사람을 따르는 너희들을 처벌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시비 거리 중에 성전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을 하셨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유대인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성전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 성전에 관한 오해의 문제는 유대교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교회의 문제이기도 하고 오늘날 현대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유의해서 잘 들으시고 신앙인이 가져야 할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본문 44절과 45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성전의 시작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성전의 시작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의 장막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믿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자꾸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보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금귀고리를 거두어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신이라고 섬기고 기뻐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아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해 주시기 위해서 만들라고 하신 것이 이 장막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장막에 계신다고 하면 사람들은 또 장막을 섬기려고 할 것입니다. 장막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장막이 또 하나의 우상이 되어서 장막에다가 대고 절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장막을 화려하게 만드시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장막 안에 있는 도구들은 금으로 은으로 귀한 재료를 써서 만들기는 했지만 웅장하고 화려하게 만들지는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우리 인간들에게 아주 중요한 약속들이 생각나게 하는 물건을 만들어 넣어두셨습니다. 언약궤라고 하는 것인데 그 안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아주 중요한 기념적인 물건들을 넣어두셨습니다. 그런 중요한 언약이 있는 장막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스데반은 “증거의 장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장막을 대할 때 장막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증거의 장막이 성전이 되고 오늘날 교회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장막을 성전으로 만들면서 그 의미를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성전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을 하면서도 그 성전이 주는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1.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

먼저 두 돌 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이 알고 지켜야 할 중요한 핵심계명을 두 돌 판에 써서 주셨습니다. 두 돌 판에 열 가지 계명을 써 주시면서 서론으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돌 판을 보면서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 애굽 땅에서 노예가 되어서 짐승과도 같은 비참한 삶을 살던 우리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너무나 고마우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제 짐승 같은 존재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그것도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면서 지켜야 할 중요한 핵심을 계명으로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장막에 오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구원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만 알면 조금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 장막에서 날마다 행하여지는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면 나머지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장막에서 날마다 행하여지는 것은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왜 제사를 드려야 했을까요? 십계명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율법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대가를 짐승의 피를 흘려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막에서 십계명을 보고 또 피를 흘리는 그 제사를 보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 의로운 삶을 살 수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 와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똑바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면 교회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장 기본적인 계명마저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죄로 인해서 영원히 멸망을 당해야 할 사람이 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나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에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아론 집안의 자손인 고라라는 사람이 그를 따르는 250명의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 대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운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의 불만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왜 모세와 아론만이 지도자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 같은 하나님의 백성인데 왜 모세와 아론만 지도자가 되어서 우리 위에 군림하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서 광야에서 고생을 시키느냐는 것입니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민16:13)라고 하면서 원망을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려고 하시는 것에 대해서 반항을 하고 다시 애굽을 그리워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반란을 일으켰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반란에 화를 내시고 엄한 벌을 내리셨습니다. 250명은 불에 타서 죽게 하셨고 그들의 집과 물건들은 땅을 갈라서 매장을 시켜버렸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염병에 퍼지게 해서 일만 사천 칠백 명이 죽었습니다. 그 사건이 있을 후 이런 일을 기억하고 더시는 그런 불평이나 반역이 없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론을 들어 쓰신다는 증거로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시고 그것을 보관하게 하신 것입니다.

민수기에는 아론의 지팡이를 보관하라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민17:10) 오늘날 우리가 이 교회에 와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란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반란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애굽으로 향하는 것이 반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사탄의 소굴이기 때문에 사탄에게 종노릇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애굽에서 구원해 내서 가나안으로 가게 해 주셨는데 다시 애굽을 그리워하면서 그 사탄의 소굴로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지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반역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반역자들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간다고 말은 하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 산다고 하면서도 늘 소망은 세상을 향해서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론의 지팡이에다가 새 생명의 싹을 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말라비틀어진 지팡이처럼 도저히 다시 살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런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생명을 주신다는 그 약속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 만나

만나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물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와서 먹을 것이 없을 때 광야에 들어온 후부터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을 때까지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내리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용할 양식으로 먹고 살게 한 것이 만나입니다.

이 만나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해서 보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하나님께 기도해서 저희들이 배가 고픕니다.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먹을 것을 허락해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려서 받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몸에 밴 것이 그냥 원망이고 불평입니다. 그것도 자기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준 것에 대해서 불평입니다. 자기들을 노예에서 해방 시켜서 인간답게 살게 하고 더 중요한 일을 하게하시려고 구원을 해 주었는데 그것을 원망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장면을 출애굽기 16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2,3)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긴 했지만 그 때 고기 가마 곁에서 먹고 떡을 배불리 먹었는데 왜 우리를 이런 곳으로 불러내서 굶어죽게 하려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 같은 일들을 통하여 여기까지 왔으면서도 아직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들이 먹고 살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분으로 생각하고 원망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서 먹게 하시고 메추라기 떼를 내려 보내주셔서 고기도 먹게 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에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약식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만나를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비단 이 세상의 육신의 양식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양식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약속이 그 만나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이 하늘에서 온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영생을 얻게 하는 영생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 물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우리가 장막에서 죽임을 당하는 짐승들처럼 죄로 인하여 죽임을 받아야 할 죄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내 죄 대신 죽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곳이 교회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본문 46,4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은 증거의 장막인데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그것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의 장막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기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성전을 건축하여 법궤를 성전에 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는 허락을 하지 않으시고 대신 솔로몬 시대에 와서 건축하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솔로몬 때에 성전을 건축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처음 성전 건축을 생각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건축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야곱의 집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익함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그를 위해서 성전을 건축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그는 하나님을 가리키기 보다는 아버지 다윗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을 좋게 여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하서 7장에 보면 성전건축에 대한 다윗의 청원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말씀을 드리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거절하셨습니다. 그 이유로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삼하7:5)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인데 그런 하나님이 계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원하지도 않으시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삼하7: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파 그 누구에게도 왜 성전을 건축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를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나를 위하여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집을 지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너의 몸에서 난 후네 씨를 통하여 왕위를 잇게 하시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유지할 것이고 그 씨 중에 한 자손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영원하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말의 뜻을 해석합니다. 다윗은 이 말씀이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한 것으로 알았고 모든 준비를 마쳤고 솔로몬은 아버지의 뜻대로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전건축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워질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자신을 성전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전은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시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는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장막이요 성전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믿음을 고백하고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성전입니다. 그곳이 높은 산이건 거친 들이건 넓은 곳이건 좁은 곳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인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붙잡고 있는 그곳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거룩한 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이 증거의 장막을 바로 알지 못해서 자기 마음대로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못 이해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교회들이 그와 같이 화려한 교회당을 짓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외쳐지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한 건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거기 진정한 예배가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교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의 세가지 책망

행 7:44-50 / 변영익 목사

여러분 ! 스데반의 운명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면 비겁해질수도 있습니다. 즉 살기 위하여 거짓말도 할 수 있고 자기의 주장을 접고 상대 주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자는 담대해지고 용감해질 뿐 아니라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입니다.

# 여러분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즉 1941년 12월 7일에 있었던 일본군의 진주만 폭격을 아시는지요, 미국은 이 폭격으로 인해 12척의 미 함대가 침몰 당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를 당했으며 2.403 명의 미군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졌던 미국이 일본군에게 이렇게 크게 당한 것은 일본군의 가미가제 때문이고 합니다.

= 즉 일본군의 가미가제는 죽기로 결심한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로 죽음을 각오하고 공중에서 미군 비행기와 충돌할 뿐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미 함대로 떨어져서 불을 지르는 특공대라고 합니다. 아무리 전력이 막강한 미군이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드는 가미가제 특공대에게는 당해낼 재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군대나 사람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 여러분 !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매우 용감했고 매우 담대했으며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지금 공회원들 앞에서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낫낫이 지적 할 뿐 아니라 격한 말로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책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여러분 ! 무엇이 스데반을 이렇게 용감하게 했고 담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그렇게 용가하고 담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 베드로도 성령에 충만을 받기 전에는 죽음이 두려워서 공회원들 앞에서 거짓말이나 하며 비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을 체험한 후 그는 공회원들 앞에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 (행4:19)에 배드로는 말하기를 < 하나님 앞에서 너희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 고 했습니다.

= 여러분 ! 죽음을 각오한 스데반은 마지막으로 공회원들을 향하여 무서운 책망을 합니다. 스데반의 책망은 대체적으로 3 가지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스데반은 공회원들에게 책망하기를 .....

 

1,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는 자

= 본문(48-4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며 나의 안식처가 어디뇨 >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 스데반은 지금 공회원들의 잘못된 성전개념을 책망하려는 것입니다.

= 여러분 !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밖은 죄 목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성전 모독죄입니다. (요2:19)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대답하기를 <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 라고 했습니다.

= 여러분 ! 예수님께서 네가 이 성전을 헐라, 라는 성전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참된 성전임을 말씀하는 것으로서 자신이 곧 하나님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십자가에 죽게 해 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리라, 는 말씀입니다.

= 여러분 ! 유대인들의 율법적 성전 개념은 하나님께서 성전 안에만 계신다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전 안에서는 거룩한 예복을 입고 거룩한 모양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성전 박으로 나오면 거룩과 율법에서 해방이 되어 자유로워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 왜 그런지 아십니까 ?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다, 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 ! 스데반의 책망이 무엇입니까 ?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고 성전에서만 거룩하고, 성전에서만 제사하며, 성전에서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본문(48절)에서 말하기를 <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나니 >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전에 갇히어 계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씀입니다.

= 스데반은 본문(49절)에서 말하기를 <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 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느뇨 > 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 하나님은 성전에만 가둘 수 없는 분이시며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어느 곳에도 존재해 계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 어떤 부부가 주일아침에 크게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부가 대충 타협하기를 오늘은 주일이니까 월요일에 다시 하기로 하고 교회로 갔습니다. 이 두 부부는 교회에 가서는 내색도 하지 않고 성도들과 반가운 인사도 하고, 성가대도하고, 설교들을 때 아멘도 하며 아무 은혜로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든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부인이 남편에게 먼저 말하기를 쇠뿔은 단번에 빼라고 했는데 뭐 내일까지 기다리겠느냐고 하면서 싸움을 다시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그런 분은 안 계시는지요?

= 여러분 ! 이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은 성전에 가두는 사람이라고 스데반이 책망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 우리 하나님은 주일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시며 성전에만 계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주일에도 계시고 월요일에도 계시며 자동차 안에도, 집에도 계시는 분이시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여러분 ! 공회원들을 향한 스데반의 두 번째 책망이 있습니다. 두 번째 책망은 ..

 

2. 의인을 핍박하는 자

= 스데반은 본문(52절)에서 다음과 같이 공회원들을 책망합니다. <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뇨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자가 되나니 > 라고 했습니다. 즉 스데반은 말하기를 너희는 의인으로 오신 예수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달므로 살인한 자들이라는 책망인 것입니다.

= 유대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이사야는 므낫세 왕에 의하여 톱으로 몸을 잘리 우는 죽음을 당했고, 또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애급 땅에서 동족의 손에 매를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스데반이 의인을 핍박했던 조상을 상기 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 여러분 ! 스데반이 공회원들에게 너희 조상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의인들을 핍박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희들의 의인에 대한 무지가 곧 예언을 따라 구주로 오신 예수를 곧 핍박 했고 십자가에 죽게 했다는 사실을 책망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스데반의 설교는 매우 성경적이며 스데반의 설교는 매우 역사적 증거가 분명한 설교입니다.

= 여러분 ! (54절) 말씀에 보면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공회원들이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 왜 이들의 마음이 찔렸습니까? 너무도 그 말씀이 분명하므로 할 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코너에 몰리면 신사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므로 자신을 부인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여러분 !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두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에 대하여 무지할 때 진리 안에 있는 자를 핍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도 복음의 진리를 깨달지 못했을 때 교회를 핍박하고 진리 안에 있는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한 것은 개인적 미움이 아니라 진리에 대지 때문입니다.

= 둘째는 예수께서도 억울하게 핍박을 받으셨고, 스데반도 억울하게 핍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께서도 억울하게 핍박을 받는 일이 있다면 예수님을 생각하고 스데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이나 스데반과 같이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여러분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조롱하는 무리들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시지 않은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어서가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핍박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시려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 ! 우리나라가 이렇게 복음으로 축복을 받는 나라가 된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무서운 복음의 핍박을 받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나 스데반의 핍박이 헛되지 않은 것 같이 여러분이 받는 핍박도 절대로 헛되 않을 것입니다.

= 스데반이 말하는 네 번째 책망을 다음과 같습니다.

 

3,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는 자

= 본문(53절)에 보면 다음과 말씀이 나옵니다. < 너희가 천사의 전하 율법을 듣고도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 > 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여러분 ! 스데반은 마지막으로 공회원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율법을 듣기만하고 지키지 않는 자들이라고 강하게 책망을 합니다.

= 여러분 ! 여기서 스데반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모모양은 가졌지만 마음과 귀에 할레를 받지 못한 자들로 사실상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남 보기에 율법을 지키는 자로 보이기 위하여 길거리에서 손을 들고 기도 하는 사람들이였고, 그들은 또 성전에서 긴 옷을 입고 거룩한 자처럼 외식하는 사람 이였다는 말입니다.

= 여러분 ! (약1:22)에 보면 <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 고 했습니다. 또 (약2:22)에서는 <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하므로 믿음이 온전케 되느니라 > 고 했으며, (약2:17) 에서는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 고 했습니다. 여러분 ! 이 모든 말씀들이 동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말씀을 받았으면 그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여러분 ! 행함을 강조하는 순수한 한국 속담들도 있습니다. 술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말로만 큰소리치는 사람 무섭지 않다, 라는 말들도 있습니다.

= 여러분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은 말씀에 대한 불신입니다. 기적은 언제 일어납니까?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해 볼 때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 앞에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 볼 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고,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널 때 에도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을 믿고 첫발을 내 디뎠더니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나만 장군도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오라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했더니 문둥병이 낳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도 일어나서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봤더니 걸어가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 여러분 !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이런 기적들이 일어나기를 바라십니까 ?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한번 행해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공회원들에게 하는 스데반의 세 가지 책망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는 자, 라는 것이며 둘째는 진리에 무식하므로 의인을 핍박하는 자, 라는 것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율법을 받고 지키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행여나 나와 여러분은 이 세 가지 망에 무관한 사람인지 자신을 살피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성전의 역사와 의미

김영규 목사 / 행 7:44-53

성전 모독에 대하여

스데반 설교의 세 번째 부분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성전입니다. 유대인들과 공회원들은 스데반이 성전을 모독했다는 죄목을 씌웠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런 죄목을 적용해서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성전을 모독한 것은 곧 신성을 모독한 죄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면 과연 스데반이 성전을 모독했을까요? 이점에 대한 스데반의 반론이 바로 본문 내용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스데반은 성전을 모독한 일이 없습니다. 성전을 모독한 예수님을 추종했다는 것이 스데반의 죄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을 모독한 일이 없습니다. 단지 헤롯 성전을 헐면 사흘에 짓겠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유대인들이 일부러 왜곡한 것뿐입니다. 성전에 대해서 진짜 죄를 지은 것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 조상들은 대대로 성전을 모독해 왔습니다.

우선 광야시절부터 돌이켜 봅시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44) 광야 시절의 성전은 성막입니다. 성막은 예루살렘 성전과 비교할 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명령하셨다는 점입니다. 솔로몬 성전도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받은 설계인 것은 사실입니다.(대상28:19) 그러나 성막은 본래부터 하나님이 지으라고 명령하신 성전입니다. 반면에 솔로몬 성전은 다윗이 짓겠다고 자원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전입니다. 더구나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헤롯 성전은 하나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헤롯이 정치적 목적으로 지은 건물입니다. 짓게 된 배경이 전혀 다릅니다. 둘째로, 성막은 이동식입니다.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솔로몬 성전이 더 화려하고 견고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광야의 성막은 텐트입니다.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성전의 기능이나 그 내포하고 있는 의미로 본다면 솔로몬 성전보다 몇 만 배 더 신성한 것이 성막입니다. 성막은 모든 구조물 하나하나가 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물건들입니다. 성막은 이동식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성막을 “증거의 장막”, “tabernacle of testimony!”라고 부릅니다. 무엇을 증거 합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증명합니다. 성막은 광야 40년간 이스라엘과 함께했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정복 때에 성막은 이스라엘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러한 성막을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이동식 성전, mobile temple 앞에서 그들은 성전을 모독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앞선 부분을 말씀드렸지요?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동안 뭘 했습니까? 한 편에서 여호와를 섬기면서 다른 한 편에서는 끊임없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몰록의 장막, 레판의 별, 애굽이 송아지, 바알브올 들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60,3550명의 장정들 중에 단 두 명만 살려두시고 다 죽이셨겠습니까? 지금 유대인들은 모세를 신성시하고, 헤롯 성전을 신성시 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과거 성막 시절에 끝없이 성막을 모독하던 조상들의 후손들입니다.

다음은 다윗 시대 이후의 성전입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에 열렬한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나단을 불러서 성전을 짓겠노라고 했습니다. 나단은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을 짓지 말라는 응답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습니다.(역대상22장-29장) 금은동철 목재 석재 인부 설계도까지 다 준비했습니다. 시공은 솔로몬이 했지만 모든 준비는 다윗이 했습니다. 성전 명칭도 솔로몬 성전이라고 했습니다만 실상은 다윗 성전입니다. 어쨌든 솔로몬 성전은 약 400여 년 동안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전을 얼마나 사랑했을까요? 나름대로 제사는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주 엉망입니다. 성전을 보통 모독한 게 아닙니다. 몇 몇 왕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성막이나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은 건물 관리를 잘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건물은 멀쩡합니다. 그런데 성전 안팎에서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제사를 욕되게 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러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0,13) 성전 밖에서는 두 가지로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첫째는 우상숭배입니다. 성전에서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밖에서는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쳤습니다. 므낫세 시대에 얼마나 우상에 빠졌는가? 산당, 바알, 아세라 목상, 성전 마당의 일월성신의 제단,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고, 태양수레, 아스다롯, 그모스, 밀곰 등을 섬겼습니다. 성전을 국가의 중앙에 두고 전국적으로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해도 보통 모독한 게 아닙니다. 둘째는 도덕적인 타락입니다. 선지자들은 왕국 시대의 타락상에 대해서 누누이 경고합니다.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습3:4)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사1:23)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미3:11) 하나님 백성이 겉으로 거룩한 체 하면서 윤리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성전을 모독할 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라도 망하고, 민족도 망하고, 성전도 망하게 하셨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BC586년에 바빌론에게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에 세워진 스룹바벨 성전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황폐화되었습니다. 세 번째 세워진 성전, 곧 예수님과 사도들 당시에 있었던 헤롯성전은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해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붙었다고 하나님의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지도 않는 건물이 무슨 성전입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빙자하고, 율법을 빙자하고, 모세를 빙자하고, 성전을 빙자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제 스데반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 스데반이 성전 모독자가 아니라, 그들이 성전 모독에 신성 모독자들입니다.

 

성전 건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

스데반은 성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일깨워 줍니다. 성전이란 뭐냐? 성전은 하나님을 가두는 곳이 아닙니다. 이방 신들은 신전에만 거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48-50) 스데반은 손으로 지은 집을 강조합니다. 이방 신전들은 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실 분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온 천하가 하나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늘도, 땅도, 만물도 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물입니다. 온 우주가 다 하나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가 만드신 피조물 속에 갇힐 수 있겠습니까? 다구나 사람 손으로 만든 초라한 건물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4) 우리는 성전에 대해서 두 가지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첫째로, 성전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는 처소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허락하신 처소입니다. 이점을 바로 알아야 됩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어 놓고 하나님 앞에서 긴 기도를 했습니다. 그 내용이 열왕기상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기가 지은 성전에 오셔서 거주해달라는 부탁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부탁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대하6:18-20) 하나님이 어떻게 제가 만든 성전에 계시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이 성전에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들으시고 응답하소서! “하늘에서 들으시고”라는 말을 여덟 번이나 반복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다만 성전을 바라보시고 거기서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솔로몬 성전의 용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사56:7)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막11:17) 광야 시절 성막은 백성들이 죄를 씻어주시는 속죄의 장소였습니다. 동시에 죄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면회소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의 처소입니다. 결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는 神殿이 아닙니다.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히8:2)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히9:7)

둘째로,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어드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의 집을 지어주시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 또한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처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46절), 하나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습니다. 다윗은 한 편으로 죄송스러웠습니다. 나는 백향목 왕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집은 낡은 텐트에 있는 것이 옳은 일인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역시 인간이 지은 집에 사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내 집을 짓겠느냐? 내가 네 집을 지어주겠다!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10-12,16) 다윗이 짓겠다고 한 것은 돌로 만든 건물입니다. 나름대로는 꽤 화려한 건물입니다. 다윗은 이 건물을 가리켜 “처소”( skhvnwma)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본문 46절) 이 단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에 “habitation”(거주지, 거주 공간), 혹은 “bivouac”(야영지)란 단어로 번역합니다. 다윗이 황금으로 도배를 한다 해도 그 건물은 하나님께 일개 비박의 장소도 안 된다는 사실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지어주실 집은 영원한 집입니다. 영원한 왕국, 영원한 가문, 영원한 통치권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짓겠다고 한 성전과,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지어주시는 왕국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지어주실 집에 대해서는 영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집은 바로 다윗 왕국을 말합니다. 다윗 왕국은 영적으로 그리스도 왕국, 곧 참 교회를 의미합니다. 다윗이 가나안 땅에 세웠던 이스라엘 왕국은 400년 만에 망했습니다. 그 왕위도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왕위나 왕국이 어떻게 영원히 지속됩니까?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다윗의 족보는 예수님까지 이어집니다. 다윗 왕국은 영적인 그리스도 왕국을 예언한 겁니다.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을 행진하실 때에 사람들이 이런 찬양을 불렀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12:13) 예수님이 헤롯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고 하신 것은 한편으로 맞는 말입니다. 헤롯 성전은 단번에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짓겠다고 한 것은 비유입니다. 예수님을 고소하던 자들이 이런 고소를 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막14:58) 성경은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19-21)

오늘 우리가 진정 신성시해야 될 성전은 주님이 지어주신 교회, 즉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또한 주님이 구원하신 성도 자신들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우리가 아끼고 영원히 신성시해야 될 성전은 주님의 몸이요, 교회요, 성도 자신입니다.

 

누가 성전 모독자인가?

그러면 다시 유대인과 스데반의 논쟁으로 가 봅시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선지자를 박해해 왔습니다. 광야 성막 시대에는 모세를 거역하고 성막 밖에서 우상 숭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세대 사람들을 거의 전멸시키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시대에는 끝없이 우상 숭배를 하고,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을 모독했습니다. 왕국 시대에는 바른 말을 하는 선지자를 지속적으로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므낫세 왕에 의해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왕궁에 갇히고, 우물과 굴속에 던져지고 돌로 쳐 죽임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과거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이런 변명을 하고 가르쳤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마23:29-30)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들의 변명을 이렇게 반박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1-33)

이제 스데반은 자신을 재판하는 공회원들을 마지막으로 공격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7:44-53) 너희는 목이 곧고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교만하다. 바른 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너희는 항상 성령을 거스리고 있다. 너희도 조상의 악행을 미련하게 반복하고 있다! 너희는 조상들보다 더 나쁘다. 왜냐하면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를 죽였지만, 너희는 참 메시야를 죽였기 때문이다! 저들은 성전을 위한다면서 메시야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도들과 스데반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성전이 없어서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망했습니다. 이제 유대인들도 그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주님의 집을 지어드리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생각을 바꾸세요. 오히려 주님이 내 집을 지어주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몸 된 교회 공동체를 세우셨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 육체를 영광된 부활의 몸으로 지어주십니다. 이 땅에서 우리 가문을 지어주십니다.

지금도 꽤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교회를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절반이 크고 작은 갈등과 분쟁에 휘말려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지킴이”라는 사람들 때문에 마귀의 교회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를 누가 지킵니까? 다윗처럼 감히 자기가 주님의 집을 세우겠다는 생각입니까? 교회는 주님이 세우셨고, 주님만이 지키십니다. 교회가 부패하면 콘스탄티노플이나 소아시아 교회들처 1000년 교회라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니 감히 내가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요즘 교회 안에도 노동조합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과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은혜는 떠나고 법으로 해결하자는 겁니다. 헤롯 성전처럼 사람이 지은 집에, 성도 아닌 인간들이 좌우합니다. 이런 시대에 정신 차리세요. 겸손히 섬기세요. 주님 성전을 위한다는 생각 말고, 주님이 성전을 세워주시기를 믿고 기다리세요.

 

 

 

 

부활하신 주님을 보라!

행 7장 46~60절 / 오정호목사

지난주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어떤일들을 해주셨는가?'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볼 때 어떤 삶을 살수 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면류관'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스데반입니다. 초대교회가 태동되고 처음으로 집사로 안수를 받은 평신도 지도자입니다. 초대교회가 설립된 이래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스데반이 이런 삶을 살수 잇었던 비결은 하늘이 열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55절>.

주기철 목사님께서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어려울때마다 순교의 정신으로 살아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강건함을 얻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말하기를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성장한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을 통해서 오고오는 세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배반할 즈음에 깨닫고 믿음을 돌이키는 영적인 삶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을 소유한 스데반의 모습

 

1. 부활하신 주님께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본문은 스데반의 생애 최후를 진술한 내용입니다.

성령충만의 극치가 무엇입니까?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의 살을 찢고 깨뜨려서 주님의 순교의 제단에 나를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을수 있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나라를 위해 살다 죽는 것을 '순국'이라 하고, 직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 죽는 것을 '순직'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발전과 진리를 파수하다 죽는것은 '순교'라 합니다. 우리 대한민국 교회는 순교자의 정신과 순교자의 피로 태동된 교회입니다. 순교는 한 순간에 기분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삶 전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6:5에 보면 초대교회에서 가장 인정받는 사람들이 뽑혀서 평신도 지도자가 되었는데, 안수 받을 때 스데반의 각오는 초지일관(初志一貫)했습니다. 순교의 상황에도 '내가 살을 찢어서라도 교회가 올바로 서기만 한다면 기꺼이 내 몸을 내어주겠다'는 처음의 각오와 열정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 결심한대로 살았습니다.

스데반이 사람들 사이에 큰 기사를 행했습니다<6:8>. 사람들이 놀라고 가는곳마다 '스데반은 정말 대단해! 스데반 처럼 믿어야해!'하며 칭찬합니다. 그럴때에도 믿음의 초점을 주님께로부터 사람들에게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고 사람들의 평판에 좌우되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께만 인생의 나침반을 맞췄습니다. 그의 삶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 충성했습니다.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과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의 기대와 칭찬에 어긋나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온 교회로부터 칭찬듣는 사람이었습니다<6:3>.

요즘 교회다닌 성도들이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칭찬이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칭찬은 말한디 잘해서 받을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말한대로 삶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영적인 생명력은 온 백성들로부터 심지어는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로부터도 칭찬과 인정을 받는 삶에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그의 직분에 충성했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메시야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구주시오 부활의 주님이시다'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돌멩이에 맞아 돌무더기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우리 자신의 충성은 어떻습니까? '충성(忠誠)'은 '내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과 '내가 주님앞에서 결심하고 고백한대로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시대는 충성있는 자를 찾아보기 힘든 때입니다. 주님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충성 했듯이 주님과 교회를 위해 기꺼이 충성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스데반은 부활하신 주님께 자신의 몸을 드려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는 자마다 주님께 충성을 다할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불충성을 충성으로 바꿔 주시기를 바랍니다.

 

2. 관용하고 온유한 통큰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스데반은 반대자들의 비난과 핍박 때문에 주님께 드려야할 충성과 사랑을 유보하거나 변질 시키지 않았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60절).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끝으로 생각하지만, 지상(地上)의 삶이 끝나면 천상(天上)의 삶이 시작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사람들에게 관용할수 있고 온유할수 있었던 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이런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고 진리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있는 삶을 살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실 때 십자가의 고통이 있지만 그 앞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기쁨을 바라보며 능히 이겨냈습니다(히브리서12:2).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과정일 뿐입니다. "십자가 없이 영광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주님이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고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능히 용납하는 기도를 드릴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얼마이든지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천상에서의 영광스러운 삶을 준비하기 위해 이 땅에서의 삶과 믿음을 새롭게 다듬어야 합니다. 우리의 받은 사명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스데반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이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은 작은일에 매여 미래를 망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사람의 문제에 얽매여 하나님의 일을 깨뜨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믿는 자를 "속이는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6:8-10)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면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워드 휴즈의 말처럼, 인생의 모든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소유하지 못하면 빈털털이 인생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인생은 성공이요, 축복입니다. 스데반 집사님같은 분들이 우리 새로남교회에 수없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런 스데반 집사님에게 주님은 복을 주셨습니다.

 

1. 주님께서 스데반을 영접해 주셨습니다<55절>.

주님이 서 계시는 이유는, 첫째로 고난의 현장에 있는 스데반을 보시며 '조금 더 참고 힘을 내라'고 응원하시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얼마있지 않아 스데반의 영혼이 주님앞에 올라갈텐데 환영하며 맞이하기 위한 마음입니다. 이것을 스데반이 보았습니다.

이 주님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때 스데반이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59절>라고 기도했습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 자기의 지상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맡기는 기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라 마지막 순간에 내 인생을 누구에게 의탁해야 할지 몰라 발악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게 주님을 따랐던 자들은 어떤 상황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든지 천사와 같은 얼굴로 우리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는 기도를 드릴수 있습니다<6:15>.

인생의 마지막을 이렇게 맞이하는 인생이 복된 인생이요 하늘의 영광을 경험하는 인생입니다. 개인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외에는 이런 영적인 비밀을 깨달을수 없습니다.

 

2. 순교의 피를 복되게 하셨습니다<58절>.

이때 이미 성령께서 사울로 하여금 순교에 대한 현장실습을 하게 하셨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의 피로 인하여 사울이 바울이 되어 "나의 달려갈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20:24>고 고백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스데반의 순교의 피에서 또 다른 새싹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평신도들을 통해 복음전도운동이 시작 되었습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 순교와 충성의 모델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8:4>.

 

3. 평신도 제자도의 모델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제자]는 주님께 배우고 주님의 삶을 오늘에 재현하는자입니다. 제자도의 핵심은 '의탁'입니다. 내 영혼과 삶과 물질의 주권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철저히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인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한국교회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스데반 같이 평신도 제자도의 모델이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 새로남교회가 현대사회를 깨우고 복음으로 영향을 끼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스데반 집사님처럼 균형잡힌 사람,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 조화를 이루는 훈련된 평신도가 많아져야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영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영광과 그 보좌옆에 서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의 일생을 가장 충성스럽고 아름답게 하나님께 드릴수 있었다면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볼 때 스데반 집사님의 삶의 흔적을 한걸음 한걸음 우리도 따라갈수 있습니다.

부활절은 지난주로 끝이난 것이 아니라 나의 날마다의 삶에서 부활은 매일매일 체험되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부활을 체험하며 살기 위해서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옛사람을 다 십자가에 못박고 날마다 부활을 체험하는 은총의 하루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양향모목사 / 행 7:51-53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의 설교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 사도의 설교 그리고 스데반의 설교를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 설교와 스데반의 설교의 내용은 다 비슷합니다. 다 같이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듣는 사람의 반응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었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 숫자도 3천명 그리고 5천명이라고 기록을 할 정도로 엄청났습니다.

반대로 스데반이 설교를 하고 난 다음에는 한 사람도 회개를 하거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돌을 던져서 스데반을 죽여 버린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의 입장에서 보면 참 기분이 나빴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를 하니까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는데 왜 내가 설교를 하니까 삼백 명이나 삼십 명 안 되면 두세 명이라도 설교를 알아듣고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지 어떻게 돌을 맞게 할 수 있느냐고 불평을 했을 뻔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영광스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하고 당당하게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어떤 차이가 이렇게 상반된 결과를 가져오게 했을까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설교를 듣는 대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가난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그래서 메시야가 오시기를 갈망하는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음의 문이 열려 있고 기쁜 소식을 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준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교적 권력을 가진 배부른 사람들이었고 이 세상의 삶에 만족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에게 고개를 숙이고 남의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스데반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강하게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교만함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질책을 하는 것입니다.

이 질책의 말씀이 오늘 우리가 생각할 설교 제목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만 하니까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지금 이대로 사는 것이 좋고 세상이 더 좋아 보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못하고 진리는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진짜 은혜는 받지 못하고 재미삼아서 취미삼아서 교회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이 곧은 사람들

 

본문 51절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목이 곧다는 것은 우리말에서는 주로 교만한 사람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남에게 고개 숙이지 못하고 교만하게 행하는 사람을 목이 곧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는 강조점이 완고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라는 뜻에 있습니다. 자기 욕심으로 가득차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순종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목이 곧다”는 말씀은 모세시대 때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출 32:9) 출애굽 직후에 그들이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출애굽 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이 되어서 가나안으로 향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십계명을 위시한 여러 율법들을 주시려고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를 자기들의 신이라고 섬겼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의 심리를 말씀드렸습니다. 잔소리 하는 신을 싫다는 것입니다. 금송아지처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원하는 것만 주면 되는 신을 섬기려고 했습니다. 또 그들은 재물을 신으로 섬기려고 했습니다. 척박한 땅 가나안으로 가는 것보다는 살기 좋은 애굽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고 그들에게 보람된 일을 하게 해 주셨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가는 길을 특별히 주셨는데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하나님의 높으신 뜻보다 자기들의 생각을 앞세우고 자기 고집대로 행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을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요? 정말로 겸손하게 자기 생각 자기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을 볼 수 있을까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목이 뻣뻣한 사람이라고 꾸짖으실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출애굽 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잔소리로 생각하고 듣기를 싫어합니다. 이런저런 말 하지 말고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말고 그냥 복이나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좋아하고 천국으로 가기 보다는 이 땅에서 잘 살기를 바라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저주하시고 떠나십니다. 교회가 이렇게 목이 뻣뻣하게 될 때 하나님은 외면하시고 떠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일 조심할 것은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머리를 숙일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을 곧게 하고 머리를 쳐들면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돈이 많고 권력이 있고 지금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무시합니다.

사람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은 괜찮습니다. 어차피 쓸데없는 말들이 많으니까 들으나 마나입니다. 그러나 그런 남을 무시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은혜를 받는데 걸림돌이 되는 고약한 것이 되고 맙니다.

목이 곧은 사람은 교만하여 자신을 높이려는 사람은 이런 귀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할례란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들에게 그 언약의 백성이라는 표시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행한 특별한 의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과 이방인들을 비교할 때 이 할례를 받은 것과 받지 않은 것을 가지고 비교를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못한 짐승과도 같은 사람들이고 자기들은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임을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면 뭐하느냐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으면 그 언약을 바로 듣고 마음에 있어야 할례를 받은 보람이 있는 것인데 그 연약을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1) 귀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귀는 다 가지고 있고 그것도 두 개씩이나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꼭 들어야 할 말씀은 듣지 않고 듣지 말아야 할 온갖 세상의 죄악 된 이야기들은 솔솔 잘 듣는 사람은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나쁜 말은 잘 듣는데 좋은 말은 잘 안 듣는 습성이 있습니다. 나쁜 친구들의 말이나 사기꾼들의 말은 잘 듣는데 부모님의 말씀은 잘 안 듣습니다. 이단들의 말이나 사기꾼 같이 속이는 목사들의 말은 잘 듣는데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의 말은 잘 듣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으라”라는 말씀을 엄청 자주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신6:4),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사28:23),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시81:13),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사42:18),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사1:2).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막9:7)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들으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13:9),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 하도 사람들이 말을 안 들으니까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있어야 복을 받을 것인데 사람들은 말씀 듣기를 싫어하니까 믿음을 가질 수도 없고 진짜 복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 듣는 것도 문제이지만 거짓선생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구약시대 때는 거짓선지자들이 나타나서 돈 좀 주면 축복을 하고 빈손으로 오면 저주를 했습니다.

지금 죄가 하늘까지 쌓여서 회개하지 않으면 곧 멸망을 당할 때인데 괜찮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시겠느냐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그냥 두시겠느냐 안심하라 라고 거짓 평화를 외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설교를 가장 중심부에 놓습니다. 타락한 중세 로마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신부도 잘 모르는 라틴어로 설교를 한다고 조금 하고 예식만 아주 신비스럽게 행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가 아닌 우상숭배 장소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교회에서는 무엇이 교회냐고 할 때 제일 먼저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이 교회라고 했습니다. 말씀도 아무렇게나 전해지는 말씀이 아니라 성경을 바로 해석한 말씀 십자가의 복음이 정확하게 선포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 바르게 선포되는 말씀을 잘 듣는 곳이 교회입니다. 설교는 그냥 기분 좋은 말이면 듣고 듣기 싫으면 안 듣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진리 말씀만 선포되게 하고 그 말씀을 정확하게 듣고 실천하는 곳에 교회입니다. 설교를 잘못했을 때 그 교회에 속한 영혼들이 멸망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가 중요합니다.

 

2) 마음에도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듣기는 잘 듣는데 전혀 변함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갈급한 사람은 어쭙잖게 들은 말 한 마디에 인생이 변하는 사람도 있는데 주구장창 좋은 말씀 옳은 말씀만 듣는데도 도무지 변함이 없습니다.

귀는 듣고 머리는 오케이 하는데 마음은 따라가지 않습니다. 깨닫지도 못하고 실천할 의지도 없습니다. 그저 좋은 말씀으로 머리에 가지고 다닐 뿐 자신의 삶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의 할례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이 그 마음에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좋은 말을 들어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저 좋은 말일 뿐이고 자기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지적해도 자기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평가기준을 정하고 살기 때문에 남의 충고는 소용이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진리고 생명의 길이고 그런 것 상관하지 않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자기 이익만 챙기고 삽니다.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들으면서도 무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내 생각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내 삶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그대로 삽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없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을 들어도 도무지 삶이 바꿔지지 않는 것은 정말로 큰 비극입니다. 자신이 똑똑해서 자기 마음대로 산다고 생각하면 안 될 일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말씀을 잘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고 삶을 바꾸는 것이 너무나 귀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성령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나 너희들이나 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고 했습니다.

여기 ‘항상’이라는 말은 ‘끈임 없이’, ‘영원히’, ‘변함없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항상 끈임 없이 영원히 변함없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는데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일은 항상 해야 할 일인데 항상 할 것이 없어서 성령을 거스르는 일을 그렇게 항상 하는 것이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좋은 일은 조금 하다가 금방 때려치우는데 나쁜 일에 빠지면 변함도 없이 점점 더 잘합니다.

성령님을 거스른다는 말은 성령님께 대항한다는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항하여 반대로 가고 성령님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생각나게 하시는 일입니다.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성경말씀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고 반항한 결과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지 못하고 딴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성령님을 받지 못한 사람이거나 아예 대놓고 성령님과 대항을 하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성령운동을 한다는 사람들까지도 성령님께 대항을 합니다. 성령님께서 하신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성령님께서 복음을 전하고자 일으키신 이적에만 관심이 있고 정작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을 잘 모르고 반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날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할 마음을 주시고 새 사람이 되게 하시고 천국을 향해서 가게 하십니다. 이 와 반대되는 길을 가르치거나 가는 사람은 성령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만 펴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딴 소리를 하고 딴 소리 하는 것을 좋아할까 라고 생각을 자주합니다.

 

왜 신학을 엄청나게 많이 공부한 똑똑한 박사님들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거부하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을 할까요? 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훌륭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거부할까요? 기도해서 엄청난 일을 이루고 기적 같은 일들을 이루어 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복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사도바울은 아주 간단하게 이런 질문에 대해서 답을 줍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2-14)

우리들은 세상의 영 즉 귀신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님의 일들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일이 어리석게 보이고 복음의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처럼 사시지는 않습니까? 성령님의 역사를 거부하시고 사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아파하십니다

행 7장 51절 / 김우영목사

성령은 지, 정, 의, 곧 인격적인 신이 시기에 모든 것을 아시고, 희비애락의 감정을 갖고 계십니다. 때문에 노여워도 하시고, 기뻐도 하시며, 슬퍼도 하시고, 근심도 하시며, 뜻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존이십니다. 성령은 인간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기도할 수 있게 도우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며, 거듭나게 하시고, 뜻대로 살도록 감동과 감화를 주십니다. 헌데 인간들이 성령을 거스려 성령께서 탄식하시게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7장은 성전과 율법을 거스려 행한다(행6:10-14)는 죄목으로 공회에 잡혀온 스데반의 순교 전 설교이며, 본문은 결론 부분입니다. 본문에서 스데반은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공회원 및 유대인들에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 도다"라고 그들의 죄악을 준엄하고 신랄하게 꾸짖습니다. '거스리다'라는 헬라어 '안티핍테테'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서 통제되지 않는 욕망과 타락케 하는 사단의 세력 아래 줄 곳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양심이 부패와 짝하여 빛이신 하나님께 도전 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을 거스리는 생활은 성령을 아프시게 하는 생활이요, 성령을 아프시게 하는 생활은 성령을 훼방하고, 근심케 하며, 소멸함입니다.

 

Ⅰ: 성령을 훼방치 말라(마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함 받지 못할 어떠한 죄도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헌데 본문 말씀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훼방'이라는 헬라어 '블라스페미아'는 '모독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권세와 위엄에 대한 일체의 훼손 행위, 곧 성령의 역사를 부인, 부정하는 죄를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역사를 눈으로 보면서도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대항하며,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케 하는 성령의 감화감동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훼방함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참회하고 중생에 이르게 하는 은혜의 길을 완전히 막아 버리는 죄이기에 용서하심을 얻지 못합니다. 성령 훼방은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려는 악한 독선적 인본주의로 성령을 추방하는 행위입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자요 소망이 끊긴 자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아무것도 제공 받을 수 없는 자입니다. 성령 훼방자의 몫은 이생에도 내세에도 없습니다. 성령 훼방은 완전한 파멸이요 회생 불가능의 멸망입니다. 성령 훼방자는 자신을 사단의 잔치집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성령 훼방 후의 후회나 근심은 무용지물입니다. 채프맨 목사의 성회에 어떤 가장과 아내, 딸이 함께 참석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내와 딸이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라"고 애원을 해도 무감각, 무표정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채프맨 목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그리 완고하십니까?" "나는 10년 전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반항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바위처럼 굳어져 이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제 마음이 움직이질 않습니다" 성령훼방 죄를 짖고 사함 받지 못함은 완악한 심령이 스스로 만든 결과입니다.

 

Ⅱ : 성령을 근심케 말라(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고 계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헌데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성령을 근심케 말라고 하십니다. '근심하게 하다'라는 헬라어 '뤼페오'는 '괴롭히다' '슬프게 하다' '고통을 주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역, 무지, 무정, 교만... 우상숭배, 거짓, 불만불평, 분쟁, 시기질투, 추악한 생각, 완악, 음담패설, 노함, 불의, 악독... 이는 모두 성령을 근심하시게 하는 것들입니다. 지난 18일 대통령 전도사라고 존경을 받던 부시 대통령이 일본 메이지 신사에서 일인들이 신으로 모시는 일왕의 위패 앞에서 절을 했습니다. 그것도 자원해서... 충격, 충격입니다. 정작 부시 대통령을 안내한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는 반대여론을 의식, 메이지 신궁 앞까지만 동행, 참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일본교계는 물론 한국, 미국 교계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는 성령훼방, 성령근심, 성령소멸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기에 우리가 거룩치 못한 일을 하면 아파하십니다. 자식이 잘못 살면 부모가 걱정하고 염려를 하며, 슬퍼하고 괴로움을 당하듯이...동물에는 하등동물과 고등동물이 있습니다. 신자도 하급신자와 고급신자가 있습니다. 성령을 근심하시게 하는 자가 전자요 성령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후자입니다. 성령께선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날에 패배할까봐 근심하십니다. 성도는 악한 날에도 승리하며 복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삶의 원동력은 성령을 받음이요 성령 충만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몰라서 잘못 살고, 알면서도 무력하여 넘어지며, 잘 믿을 수 있는 조건이 모두 준비되어 있음에도 세상애착 때문에 무관심함은 성령의 근심 대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아파하시는 대상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기도하고, 은혜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나는 성령을 아프시게 해도 성령은 나를 아프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Ⅲ :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소멸하다'라는 헬라어 '스벤뉘테'는 '불을 끄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란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불은 꺼야하나 성령의 불은 일어나야 하고, 더 훨훨 타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불을 끄는 소방수이지 성령의 불을 끄는 소방수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1:6)" 성령의 감화 감동을 소멸치 않아야 새로운 변화가 와집니다. 기도하고 싶을 때 기도하고, 성경을 보고 싶을 때 성경을 보며, 전도하고 싶을 때 전도하고, 구제, 봉사, 헌신하고 싶을 때 구제, 봉사, 헌신, 하십시오. 지혜 주실 때 '아멘'으로 화답하십시오. 성령은 하나님이심에 초능력으로 역사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지 않아야 역사의 열매가 있고, 능력 있는 성도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능력 없는 생활을 함은 성령을 소멸함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아니하면 잘 되고, 복되며, 이기고, 높아지며, 영예롭게 됩니다. 성령을 억제치 않고 소멸치 아니하면 성령의 역사는 무제한으로 일어납니다. 성령께선 우리를 쓰시길 원하십니다. 성령이 내 심부름꾼이 아니라 내가 성령의 심부름꾼입니다. 성령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물건이 아니라 인간을 복되게 하고 영원으로 인도하시는 살아계신 유일 신이십니다. 우리에게서 성령은 성령 되셔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특권적 의지, 행동하심을 거부하지도, 억제하지도, 남용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내 속에서 성령을 아프시게 하는 것들을 끄집어내어 버리십시오. 성령과 인격적 교제가 있는 곳에서만 영과 육, 현세와 내세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내적, 외적 증거를 보이며 살아야 합니다.

혼성 아이스 댄싱 선수들이 은반에서 아름다운 묘기를 펼칠 수 있음은 파트너쉽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파트너입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는 신앙의 멋진 파트너, 성령께 꼭 맞는 파트너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과 가장 친해야 합니다. 늘 함께 거하고 행동해야 됩니다. 인간 생활에 있어 실제로 꼭 필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까닭에 나의 지배권을 성령께서 독점하셔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아니하는 그리스도인만이 활력 있는 삶, 온전한 성공의 생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신앙은 원인에서부터 결과까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을 아프시지 않게 하고, 슬프시지 않게 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은 미래적이며 동시에 현재적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심부름센타, 성도는 성령의 심부름꾼 되어 절망 속에 있는 자, 외로운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를 찾아가는 교회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훼방치 아니하고, 근심케 아니하며, 소멸치 아니해야만 인생에서 정말 보아야 할 것을 보고, 가져야 할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죄를 품은 거룩

행 7장 51~53절 / 박정근목사

저는 여름에 가끔 바닷가에 나가서 조개를 주운 경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들어가지 못하는 약간 깊은 곳, 수경을 쓰고 약 3미터 정도 더 내려가면 제법 큰 조개들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묵직한 조개를 잡고 올라올 때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숨은 좀 차고 가슴은 답답하지만 그 모든 고통을 다 이길 수 있어요. 큰 조개를 잡았다는 기쁨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끔 기분이 나쁠 때도 있습니다. 언제인가 하면 껍데기를 주울 때입니다. 물위에 떠서 수경으로 내려다보면 저 밑에 큰 조개가 있어요. 감히 내려가기 힘든 곳인데도 잠수를 해서 그 조개를 주워보면 빈 껍데기예요. 한쪽만 있는 빈 껍데기도 아니고 신기하게 껍데기가 완벽하게 있는데, 안에는 텅 비어 있는 거예요. 이런 일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굉장히 기분이 나쁩니다. 속은 기분이 드는 거지요. 껍질이 좋으면 당연히 내용도 좋아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아마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도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보시면 가장 기분 나빠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양은 어디로 보나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 속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 외모로 보면 하나님을 따르는 자인데, 그러나 그 마음은 아닌 자들! 겉으로는 거룩한데, 속으로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품고 사는 자들! 이 모두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유대교에 국가를 이끄는 유명한 지도자들이었어요. 스스로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하나님을 충성되이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자처한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믿음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배우기보다는 늘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자신들만이 올바른 믿음을 소유했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했습니다. 때로 사람들을 때리고, 감옥에 넣고, 욕하고, 심지어 죽이면서도 자신들은 의로운 일을 행했다고 양심에 조금의 가책도 받지 않는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겉은 너무나도 거룩하여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속은 어쩌면 상관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외모가 너무 완벽했으니까요. 자신이 보아도 그렇고, 남이 보아도 그렇고, 그들은 분명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니었습니까? 말씀을 가르치지 아니했습니까? 누가 그 속을 의심이라도 해 보았겠습니까?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이러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남이 봐도 그렇고 자신이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나왔습니다. 매 주일 성수를 합니다. 수요예배도 출석하고, 때로 십일조도 드리고, 구역성경공부는 말할 것도 없이 새벽기도까지 드립니다. 누가 보아도 완벽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어느새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관습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참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몸에 배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도 스스로를 믿음이 있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조금도 의심해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느새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능한 얘기입니까? 예! 가능하다고,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 서기관과 장로들과 제사장들을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에 도통했던 사람들이요, 말씀을 줄줄 암송한 자들이요, 날마다 기도했던 사람들이요, 날마다 예배를 인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저주하셨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겉을 보니 너무 멋있어요. 멋있는 페인트를 칠했어요. 인테리어를 했어요. 그런데 안을 뜯어보니 죽은 사람의 시체가 그곳에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에게 저주를 퍼붓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여!" 마태복음 23장에서 8번이나 예수님은 화를 발하셨습니다. 저주를 발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그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 저주를 하셨단 말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몇 가지 읽어봅시다.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16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더 늦기 전에 이 말씀 앞에 당신을 성찰해보지 않으시렵니까? 혹 나도 모르게 믿음에서 멀리 떠나 겉은 화려하지만 내 속은 비어있는 것은 아닙니까? 매주 교회를 나오고, 어느 한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경도 읽었습니다. 성경공부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직분도 얻고 봉사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신앙생활의 모든 구석구석이 관습화, 종교화되어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전혀 단절된 채 내 속이 텅 비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도행전 7장 2절부터 53절까지는 스데반의 설교 한 편입니다. 아마 이 원고를 가지고 설교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구약의 역사를 단숨에 요약해주고 있는데, 대략 6가지 사건으로 구약의 역사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2절부터 16절까지 그는 창세기를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17절부터 41절까지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길게 요약합니다. 곧바로 세 절 말씀, 42절부터 44절까지 짧은 구절을 가지고 민수기와 신명기를 요약하며, 한 절 말씀 45절로 여호수아를 끝내 버립니다. 그리고 46절, 47절 두 절에서 사무엘 하부터 역대 하까지의 역사를 함축합니다. 마지막으로 48절에서 50절까지는 에스라에서 말라기까지를 총망라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를 그가 요약하는 가운데 반복되는 하나의 주제가 있습니다. 'Thing'이 있단 말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무엇을 연상했는지 아십니까? 군인들이 행진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행진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멀리서 군악대가 앞에 서서 행진을 해옵니다. 군인들이 행진하면 반드시 동원되는 것이 팀파니, 드럼입니다. 저 멀리서부터 드럼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거기에는 음높이도 없고 아무 것도 없지만 이상하게 우리들을 흥분시키는 것이 있어요. 그 드럼 소리를 들으면서 제식훈련을 해보면 몸에 힘이 하나도 들지 않아요. 용기가 솟아요. 왠지 모르겠어요. 이 드럼 소리가 점점 가까워집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이 주제를 보십니까? 수많은 구약의 역사를 한 장에 요약하면서 스데반은 주제를 잃지 않는데, 그곳에는 반복되는 주제가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저 멀리서 시작된 주제곡은 점점 스데반 설교의 결론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크게 크게 들려서 우리의 가슴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 반복되는 주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무나도 간단한 '순종과 불순종', '믿음과 불신앙'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수없이 많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주제로 스데반은 역사를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 예를 창세기에서 찾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할 때 순종하기 쉬운 환경에 있었나요? 순종하기 쉬운 명령에 있었나요? 아닙니다.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임 목사님과 몽골에 갔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다 아는 곳이에요. 처음 가보는 곳이기 때문에 한편 마음이 설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두려운 마음도 있었어요. 웬만한 나라에 가면 영어가 다 통하니까 저도 불편한 것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곳은 영어가 안 통하는 나라더군요. 사흘 동안을 "으까까까 으까까~" 손가락으로 얘기하면서 지내는데 말이 안 통하는 답답함을 그때 처음으로 저는 경험해 보았습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안내하는 선교사님이 "지갑을 조심하십시오! 붙들어야 됩니다." 밤에 나가려고 하니까 "위험합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두 사람이 한 사람을 때리고 돌멩이로 내려 찍습니다.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 많은 몽골인들이 이상해져 가고 있어요. 제가 다 아는 여행지임에도 밤길을 다니고 호텔로 혼자 들어갈 때면 불안했습니다. 공항에 나올 때까지도 "임 목사, 잘 잡어. 지갑 잡고 있지?" 여권을 잃어버리면 못 나오잖아요. 얼마나 위험했던지요.

경찰이 다 깔린 그 사회에서 우리가 그렇게 불안했거든, 하물며 이 시대이겠습니까? 국제 경찰이 없었습니다. 낯선 나라, 그 동네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자 하면 죽어야 합니다. 누가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명령을 아브라함은 순종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왜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를 보호하시고, 그분이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순종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 남 모르는 땅에 가서 땅 한 평 받지 못한 채 아들을 낳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순종의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불순종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 불순종했나요? 이스라엘 백성들, 믿음의 조상의 신분을 가진 열 형제가 요셉을 시기해서 은 20에 그를 팔아버린 겁니다. 아버지를 속이고요. 믿음의 조상의 신분을 가졌던 열두 명 가운데 열 명이 불순종했다고 스데반은 지적합니다.

또 다른 예를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씁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출애굽 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한 수많은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 원망하고, 서로 원망하며 불평하고, 모세를 돌로 쳐죽이려고 하고,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며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에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스데반의 설교 요지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스데반이 지금 말씀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 포인트는 이 불순종의 사건들이 과거에만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스데반이 과거 얘기를 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나 이해가 빨랐을 겁니다. 왜? 자기 조상들 중 불순종한 사람과 순종한 사람들의 역사를 서기관들은 너무나도 환히 꿰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스데반은 갑자기 그 설교의 시제를 바꿉니다. 과거의 불순종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불순종을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과거 역사에서 불순종한 조상들을 보았느냐! 그러나 그 불순종의 죄악이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 영안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 중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똑같이 주님을 섬기고, 똑같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외모를 꾸미고 앉아있는 이 사람들 가운데서도 순종의 사람들과 불순종의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겉으로 보면 믿음의 지파입니다. 외모로 보면 출애굽 했습니다.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침례도 받습니다. 그러나 속은 아닌 사람들! 오늘 여기에 그러한 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스데반은 불순종의 사람들의 특성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스데반이 말하는 불순종의 사람, 죄를 품은 거룩한 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속은 아닌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오늘 이 특징을 살펴봄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겸허히 성찰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

 

5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아무리 완벽한 신앙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해도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 우리가 순종치 않고 있다면, 그는 참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믿음생활이 무엇일까요? 믿음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내 노력으로 나를 발전시키는 수양이 아닙니다. 겉모습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달달 외우는 지식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그 즉시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십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저 잠시 1초 동안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한 달 동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아예 성령님의 집을 지으시고 거기 들어와 사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보통 일입니까? 성령의 성자가 거룩한 聖(성)자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죄가 조금이라도 있는 곳에는 가실 수가 없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안에 성령님이 잠시가 아닌 아예 영원한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영원히 성령 하나님이 떠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언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할 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흘린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씻으십니다. 우리는 지금도 죄를 짓습니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에 그냥 보시지 아니하고 하나의 창을 통해 보십니다. 이것이 보혈의 창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린 붉은 피를 통해 우리를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고 꺼멓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하얗게 보십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겁니다. 그것을 '칭의'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신분적으로 의롭게 된 겁니다. 완벽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그 순간, 나는 부족하고 나는 거듭나지 못하고 내 행위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를 거룩하게 보셔서 성령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내 마음 안에 보내셔서 그곳에 거처를 삼으시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내재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처를 만드셨어요. 이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기적 가운데 이것보다 더한 기적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스데반은 얘기합니다. "너희가 성전을 지었느냐?" 또한 솔로몬은 성전을 지어놓고 올바른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기도합니다. "주여, 어찌 하늘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감당치 못하겠거든 내가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이리이까!" 여기서 그는 우주도 하나님을 담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이 우리 마음 안에 거하셔서 무엇을 합니까? 팔짱끼고 가만히 계시나요? 아닙니다.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날마다 인도하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던 주님! 그들이 배고프다고 할 때에 만나를 주셨던 하나님! 목 마르다고 할 때에 반석에서 물을 내시던 하나님!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할 때에 메추라기를 보내시며 그들을 사랑으로 인도하셨던 그 동일하신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얘야, 그런 말하면 안 된다. 그런 생각 가지면 안 돼. 그렇게 행동하면 안 돼." 참 믿음의 사람은 이 성령님의 인도에 나를 굴복시키는 겁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말을 듣고도 성령님이 참으라고 하시면 참습니다. 아무리 작은 잘못을 범했어도 성령님이 그 작은 것을 지적하시면 자복하고 회개합니다. 내게 당장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성령님이 시키는 일은 순종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겉은 화려하고 믿음의 사람 같아도 성령을 거스르는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성령을 소멸시킵니다. 이 말은 성령을 내 속에서 없앨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 물을 끼얹는 겁니다. 불길이 확 줄어들 듯이 성령님의 역사에 항상 물을 끼얹어 꺼버립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다. 아무리 주일성수하고, 아무리 십일조를 드리고, 아무리 오래 교회생활해도 성령님께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그는 불순종의 사람이라고 스데반은 설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멸망했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해서 멸망했나요?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를 거절했기에 멸망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날마다 들으시나요? 그분의 뼈아픈 지적을 받고 울어 보신 적이 언제입니까? 그분의 교정의 음성을 듣고 엄히 무릎을 꿇고 "주여, 말씀하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그렇게 겸허히 성령님 앞에 여러분 자신을 맡겨본 적이 언제입니까? 성령의 사람, 참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은 성령의 역사에 굴복합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사람은 항상 성령을 거스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한다

 

성령을 거역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합니다. 52절을 보십시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

이 말은 조금 어려운데, 너희 조상들이 도대체 핍박하지 않은 선지자들이 있었더냐? 너희 조상들이 한 행위는 선지자들을 언제나 핍박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선지자들을 핍박했는가? 그 다음이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

모든 선지자들을 다 핍박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선지자들을 골라가면서 지독하게 핍박하고 악착같이 죽였습니까? '선지자 가운데 의인이 오실 것이다'에서 이 의인이 누구입니까? 착한 사람입니까? 원어에 보면 대문자로 써놓았어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의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앞으로 완벽한 의인 한 사람을 이 땅에 보낼 것이다. 그는 사실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거야. 그는 죄가 없어. 그래서 그가 너희들의 모든 죄를 도말해 줄 것이다.' 선지자들이 한 얘기는 하나입니다. '의인이 오실 것이다. 하나님이 의인을 보내실 것이다. 메시아를 보내시고... 메시아, 메사이어, 크라이스트, 그리스도!'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 중 불순종한 사람들이 지은 죄는 무엇입니까? 의인이 오신다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하는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골라가면서 다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더 했어요. 그 다음을 보십시오.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누가 더 큰 죄인입니까? 의인이 오실 것이라고 하는 선지자를 죽인 사람과 그 의인이 마침내 왔는데 그 의인을 죽인 사람들! 여러분, 이 설교가 얼마나 그들의 마음을 찔렀는가를 상상하시겠습니까? 조상들이 의인을 죽였다는 것도 창피합니다. 조상 욕을 하는 것도 창피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얘기합니다. '너희가 그 의인을 죽였도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 보면 참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들은 십자가, 그렇게 많이 들은 복음인데 다시 그 마음 안에 감동을 느껴요. 마음이, 영이 살아나는 것을 느껴요. 찬송가를 그렇게 많이 불렀는데 보혈에 관한 찬송가를 부를 때면 그 마음에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요. 뜨거워져요.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설교하기만 하면 마음에서부터 거부합니다. 윤리를 설교하면 좋아합니다. 상식을 설교하면 좋아합니다. 쾌락을 강조하면 눈을 반짝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면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이들은 마음에서부터 거부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정말 십자가의 복음을 사랑하십니까? 갈보리 십자가를 사랑하십니까? 십자가와 관련된 찬송을 부를 때 감격이 넘치십니까? 십자가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여러분 마음에 꿈틀거림이 있습니까? 그것이 없다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 속은 비어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비어있는 자신의 속을 바라보며 "주여, 기도하기를 내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결국 한 사람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그는 원래 하나님과 본체이신 하나이셨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만물을 말씀 한마디로 지으셨던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로 작정하셨어요. 그는 33년간 이 땅에 계시며 수많은 하나님의 나라를 교훈하셨고, 마지막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 분의 죄가 아니라 바로 내 죄 때문에, 내 잘못 때문에 대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를 붙들지 못하고 그는 사흘만에 완벽한 몸으로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승천하십니다. 성령이 무엇을 얘기합니까? 언젠가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시는 날, 그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요, 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앉으신 바로 저와 여러분을 - 교회에 나왔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아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순종하는 순종의 사람인가, 아닌가 - 심판하시기 위해 권세를 가지시고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순종의 사람은 이 복음을 거절합니다. 믿음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겁니다. '주님, 돈도 당신 것입니다. 내 생명도 당신 것입니다. 시간도, 내 인생도, 내 재능도 모두 당신 것입니다. 제 인생의 열쇠를 당신 앞에 넘겨드립니다. 주님, 저를 사용하시옵소서! 말씀하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 이것이 순종의 사람입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다닙니다. 성경도 읽습니다. 온갖 교회 봉사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문밖에 세워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선배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사실을 보고 마음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입니다.

 

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밖에 세워두니 참 나의 수치라

 

오늘 이 자리에 앉은 사람 가운데 가장 수치스러운 사람이 누군 줄 아십니까? 하나님을 알면서, 성령도 알면서, 이렇게 피가 끓는 수많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두는 자들! 수치입니다.

불순종의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거스릅니다. 불순종의 사람들은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합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우리를 바라봄으로 주님 앞에 여러분 인생의 주도권을 넘겨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3.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

 

53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51절을 보세요. 그는 그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불신앙의 사람들은 수없는 설교를 듣고 수없는 예배와 말씀을 읽어도 순종치 않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목이 곧다고 표현합니다. 자기 생각이 너무 꽉 차 있는 겁니다. 자기 경험이 제일입니다. 자기 지식이 제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목을 곧게 하는 것이죠. 교만한 겁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입니다. 마음도 옛 마음이요 귀도 옛 귀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하지만, 여전히 옛날 세상 소리의 하나로 들어버립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도 합니다.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는 못합니다.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나이 어립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저에 대해 섭섭한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저의 말로 이 말씀을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경험으로 판단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지식으로 취사선택하지 마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과 귀를 열고 받으십시오.

예수님은 앞으로 장차 올 한 세상, 말세를 농사짓는 모습에 비유했습니다. 어른들은 다 알 겁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농사짓는 것을 압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으나 틈이 나면 농사일을 도와주곤 했습니다. 나락, 벼를 다 베어 옵니다. 그 벼를 말립니다. 탈곡기를 경상도 말로 와룡이라고 합니다. 탈곡기를 발로 밟습니다. 저는 그것을 하다가 딸려 들어간 적도 있었어요. 아버지 흉내내고 한 단을 얹었더니 지탱을 못하고 딸려 들어가더라고요. 그래서 벼로부터 곡식을 다 분리해 냅니다. 마지막으로 하는 작업이 뭔지 아세요? 지금은 선풍기로 하지만 그때는 선풍기가 없었어요. 어른들이 큰 담요를 가지고 발로 밟고 부채를 부칩니다. 바람을 세게 일으켜요. 그러면 어머니들이 체에다가 곡식을 떨어뜨려요. 바람이 오면 알이 꽉 찬 곡식은 밑에 쌓여요. 그런데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아름다운데 안이 비어있는 것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은 바람이 불 때 저 멀리 날려가 버립니다. 농부는 그 모든 날려간 나락들을 주워서 불태우는 겁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들어서 앞으로 장차 이러한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신에게 닥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말씀을 왜 기록하셨는가? 그 날을 준비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이 말씀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겸허히 한번 성찰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교회 나오셨습니까? 직분을 받으셨습니까? 과거에 2.7시리즈를 끝내셨습니까? 성경공부를 많이 하셨습니까? 교사이십니까? 집사이십니까? 아니오. 지금 그것을 묻는 질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속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

행 7장 51~60절 / 이명규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도 있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 ; 1632∼1704)는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주신 가장 위대한 축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축복은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이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6:13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독일의 시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 1749∼1832)는 “독일이 위대한 나라가 된 것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1517년 종교개혁을 해서 전 독일 사람들에게 독일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고 배우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이 최고의 민족이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일은 유럽 문화의 중심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학문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해서 오늘날에도 의학이나 철학, 신학 등의 고등학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독일의 학문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또 프랑스의 시인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 1802∼1885)는 “영국이 세계적인 나라가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지상에서 제일 좋은 나라가 어디입니까? 가장 아름답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 스위스라고 말합니다. 스위스가 좋은 나라가 된 것은 종교개혁자 칼뱅(Jean Calvin ; 1509∼1564) 때문이라고 합니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말씀으로 정치와 경제를 다스리고, 교육을 새롭게 했습니다. 온 나라에 기독교 정신을 불어넣었습니다. 스위스 대법원에는 “국민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쓰여진 벽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위스가 오늘날까지도 존경받는 부강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또 미국은 어떻습니까? 현재 최강국인 미국은 앞으로 30∼40년 동안은 세계를 이끌어 나갈 것이라고 합니다. 영국의 청교도인 102명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았습니까? 미국은 신앙으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요즘에도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성경에 손을 올려놓습니다. 국회의장, 대법원장, 대학교 총장들도 성경에 손을 올려놓습니다. 또 지폐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인쇄를 했습니다. 그 돈은 세계 경제를 주름잡고 있습니다.

복지가 잘 되어있고, 잘 사는 나라, 부강한 나라, 세계를 이끌어 가는 나라는 다 기독교 국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도 훌륭하고 위대한 인물로 만들뿐만 아니라, 그 가정, 회사, 더 나아가서 국가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잠언 13장 13절에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노력하고 애쓰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나라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번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나라는 패망하고 멸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스테반의 설교를 듣고 반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통하여 말씀을 듣는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같이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약속되어 있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는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까요?

 

1. 성령을 거스리지 말라.(51-53)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성령을 거스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1절 말씀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성령을 거스리는 자는 무슨 일을 합니까?

51-52절을 보십시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너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자가 되나니”

성령을 거스리는 자는 조상들의 나쁜 것들을 계속 유전으로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거스리는 사람은 죄를 계속 반복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조상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의인을 핍박한 것입니다. 의인이 올 것이라고 예고했는데 그들은 그를 환영하지도 않았고 죽였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는 이들도 지금 그런 조상들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자신들의 잘못을 책망할 때 기분이 나쁘지만 ‘가슴치며 회개했었더라면’ 조상들의 유전을 따르지 않고 아무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존심을 계속 내세웠기 때문에 결국 이를 갈고 스데반을 죽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조상들의 유전은 무엇입니까?

아니면 계속 반복적으로 짓는 죄는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마다 타고난 개성이 있고, 각자가 자라난 문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습관도 다르고 태도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릅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끊임없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도록 하고, 우리 육신의 모습이 빚어져서 성령의 사람이 되도록 합니다.

갈다이아서 5장22절에서 “성령을 쫓아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고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나의 습관을 지적할 때가 있고, 나의 변화되어야 할 행동을 지적할 때가 있고, 나의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할 것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성령이 내 속에서 변화를 요구하실 때 그 음성에 순종하십니까? 아니면 거스립니까? 성령이 나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하라고 할 때 그 때 순종하십니까? 아니면 거스립니까?

예수를 믿지만 여러분의 삶에 남아 있는 조상의 유전은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성질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 집안의 가치관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인격으로 살아야 하고, 성경의 가치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 육신적인 습관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들에게 역사하시고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이 역사하실 때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 뜻을 거스르지 않고 기쁨으로 받아 주님을 본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거스리면 조상의 유전을 따라행할 뿐 아니라

성령을 거스리면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습니다.

53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말씀을 받았으면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지키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다 되어 있는 것 같지만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내릴 때 하루 아침에 무너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거스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지키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을 거스리는 사람인것입니다.

사람들이 성령을 거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51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교만하기 때문이고,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꽉 차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사울왕이 겸손할 때,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순종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고 높여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의 말을 버렸기 때문에 내가 너를 버리노라"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사울왕은 전쟁에 성공하였습니다.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전쟁에는 이겼는데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실패했습니다. 교만해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은사를 모독하였습니다. 제사는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 외에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왕이라고 하더라도 왕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 대신 자신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교만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모독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사울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한심합니까? 무엇에 씌웠지 않습니까. 악령에 씌워서 이렇게 행동을 하다가 결국엔 죽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작은 성공이 미래를 망친다.' 그는 전쟁에 이겼습니다. 차라리 패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전쟁에 이겼다는 것 때문에 아주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교만해지면서 그와 그 가문, 그 족벌이 다 망했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이야기입니까?

문자 그대로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삼가 주의 말씀을 들으라." 삼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라,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내가 직접 대면하는 바른 자세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 환경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남이야 어렵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역사할 때 성령을 거스리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으라. (54-58)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마음에 이를 갈았습니다.

54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설교를 통하여 구약의 나타난 모든 말씀을 그들에게 적용시켰습니다. 바로 그 순간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영혼이 비수로 찔리는 것 같은 찔림을 받은 것입니다. 죄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이를 갈았습니다. 그리고 돌을 들어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며 나의 것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두 부류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한 부류는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발견하였을 때 그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반대로 다른 부류의 교만하고 거짓된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지적받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기 보다 자기의 잘못을 지적한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 사람을 원수처럼 생각합니다. 그 사람에게 분노하고 공격합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로부터 자신의 죄를 지적 받았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죄인입니다.”

그 때 다윗의 태도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다윗이 실수하고 잘못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 때문입니다.

시편119:33-35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

시119: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말씀을 사모하여 마음으로 받습니까?

그 말씀을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습니까?

 

3. 목숨을 다해 말씀을 믿으라.

 

스데반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저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었기에 돌을 들어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스데반의 메시지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회개하지 않고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그리고 돌을 들어 일제히 스데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이런 가운데서도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 스데반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기가 싫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합심하여 달려들어 돌로 쳤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 스데반이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는 자신의 영혼을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 그는 이 말을 하고 잤습니다. 그의 기도는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기도와 같습니다. 그가 어떻게 무서운 고통 가운데서도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사모하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갔습니다.

스데반은 목숨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다가 영광스럽게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는 그것으로 무의미하게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순교의 피는 교회 성장의 씨가 되어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져 나가는 세계선교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가 개척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1:19) 뿐만 아니라 핍박자 사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순교를 받으시고 복음 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삷을 살았던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말씀에 목숨을 걸 정도로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까?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목숨을 내놓고 할 때 못할 일이 없습니다. 죽음은 그 사람의 일생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죽는 것은 정해진 것으로서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을 때 어떻게 죽는가 하는 것은, 살았을 때 어떻게 사는 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니체]는 하나님이 죽었다고 함으로써 수 많은 사람들에게 불신을 심고 실족시키는 생활을 하더니 죽을 때 미쳐서 악을 쓰며 죽었습니다. 우리가 영광스럽게 인생을 마치기를 원한다면 평소에 그와 같은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이 말씀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서 그는

'말씀에 붙잡혔다'라고 말합니다. '쑤네케토' 라고 하는 이 말은 점령되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포로 되었다. 점령되고 완전히 붙잡힌,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생각도 의지도 운명도 이제는 다 그를 붙잡은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도다." 강권적인 역사가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나는 말씀대로 살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상태가 바울의 모습입니다.

사도행전26장에서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로 호송되어 가는 도중에 우라굴라라는 풍랑을 만나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만나 죽을 지경에 되어 불아하고 있었을 때 바울이 외칩니다. “나는 어제 밤에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아브라함이 창세기 22장에서 약속으로 100세에 받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이삭을 번제로 바쳤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히브리서에서 설명하기를 “이 아들을 죽있다 할찌라도 그 아들을 살리실 것을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습니까?

목숨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북한이 어려운데 어떻게 북한이 그렇게 계속해서 체제와 함께 서있는지 궁금해서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에게 물었습니다. 그 때 이런 설명을 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김일성 수령과 그 부자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물었는데 "당신들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충성을 다하고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다같이 전쟁고아입니다." 6·25전쟁 때 많은 폭격을 했어요. 아주 다 융단 폭격을 해가지고 다 망해 다 죽어버렸어요. 고아들만 어린아이들만 남았는데 이 우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탁아소를 세웠어요. 그래서 수령님께서 우리를 잘 키워주셔서 이렇게 컸고 또 그 중에서 우수한 사람들을 김일성대학을 나오게 했어요. 최고의 대학을 나오고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 얼굴도 모릅니다. 오로지 수령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고로 그 어버이 수령이라는 말이 절대로 과장된 말이 아니에요. 진짜로 어버이 수령밖에 몰라요. "그런 고로 우리는 그 큰 은혜에 감사해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죽으라면 죽습니다." 이 질문을 한 분이 하도기가 막혀서 묻기를 "당신같은 사람이 몇 사람이요?", "20만명입니다." 그 20만명이 있으므로 북한은 서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합니다. 말씀에 붙잡힌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어요. 아무 선택권도 없어요. 오로지 그 은혜에 감사하고 있을 뿐이요. 보세요. 참으로 믿음의 사람은 선택권이 없습니다. 특별히 결과에 대해서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가라' 하신 분이 책임질 겁니다. 가라하는 말씀을 듣고 가면 그 책임은 나에게 명령하신 그 명령자가 책임을 지는 겁니다. 그런 고로 갈 때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잘될까 못될까 걱정 안합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당신 마음대로 입니다. 그가 아시니까요. 그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전가합니다. 나는 그저 순종할 뿐이요.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용기와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 IBM을 창립한 토마스 왓슨(Thomas J. Watson ; 1874∼1956)은 성경을 읽다가 히브리서 3장 1절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에 감동을 받아 어떤 회사를 만들 것인가, 어떤 제품을 만들 것인가, 판매량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일을 했습니다. 회사의 사훈도 ‘생각하라’로 정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통해서 ‘생각’이라는 지혜를 터득하고, 그것을 통해서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를 설립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할 때, 여러분의 기업도 번창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기 때문에 어둠과 흑암과 절망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산다면 그 사람은 빛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가 어떻습니까? 그것이 당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축복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첫째, 성령을 거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사모하여 나의 것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째, 목숨을 걸고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

행 7장 51~60절 / 김 조목사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도 한계 있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 이해할 수가 없기에 거부하고 거역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참 많습니다. 450여년전(1543년)에 지구는 둥글고 다른 유성과 함께 태양을 중심으로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다는 지동설을 말했던 코페스니쿠스나 갈릴레오는 사형을 당하고 말았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범하였겠습니까. 예수님을 3년 동안 함께 하며 가르침도 받고 기적의 떡도 먹고 수많은 병자들 고치는 현장도 보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참된 뜻을 이해 못하고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겠다고 하는 것 보시고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 하셨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현실 밖에 볼 수 없는 사람은 어리석고 미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믿음의 눈,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시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능력 있는 삶에 주인공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우편에 서계신 예수님을 보고 힘 있게 증거 했던 것이라 우리도 그렇게 되기 원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 제목하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53절까지 공회에서 재판받는 스데반 집사가 그들을 향해 설교하는 내용이요, 54-60절까지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 스데반 집사처럼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분명한 외침이 있어야 합니다. (51-56절)

대제사장과 공회원들과 많은 백성 앞에서 재판 받는 스데반 집사에게 하나님을 모독하였고 모세의 율법을 거스렸고 성전을 무시하는 자라고(6:13,14) 했으니 이것이 사실이냐 하고 심문 받게 될 때에(1) 이에 이스라엘 역사를 족장시대부터 지금까지 역사 속에 일하신 하나님을 증거 했던 것으로 매우 상세하고 중요한 성격을 띠고 있는 이스라엘의 구속사를 개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1-7절), 요셉(8-16절), 모세(17-36절)를 들어 신앙의 본질을 말씀하심으로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을 섬기기에 모독한 일 없고 율법 거스리는 자라 했으나 율법주신 하나님의 본 뜻을 전하고 강조하는 옹호자이니 모세가 십계명 받으려 시내산 올라간 후 금송아지 우상숭배 했던(출32:)것처럼 너희가 율법을 범한자요, 거역한 자며 성전을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제사)하는 장소로 의미 있는 것이지 건물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니 성전에 대한 미신적 숭배의식 버려야 할 것을 다윗의 말(시66:1)을 인용하였고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를 죽였던 것처럼 예수도 죽인 너희는 하나님의 대적자요 살인자임을 당당하고 분명하게 말했고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의 증거자임을 나타낼 때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았다”고 했습니다. 이 표현은 극심한 분노에 머리에 재를 뿌리고 옷을 찢었듯이 이를 가는 행위도 마음에 찔리면 회개하지 아니하고 격분하고 있었다며 국가 최고의 권력자와 많은 사람 앞에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고 분명히 외칠 수 있었던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여! 어떤 형편에 있든지 많은 반대자가 있든지 상관할 것 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은혜와 사랑을 바르게 분명하게 최선 다해 외치는 복된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2.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56-58절)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라”는 말씀은 예수를 이단자로 몰아 십자가에 죽게 한 자기들이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기에 그 소리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큰 소리 지르며 극도의 흥분으로 돌을 던져 스데반 집사가 죽었습니다. 그때 사형권은 로마에 있었기에 스데반 집사를 돌로 친 것은 불법이요 자기들 감정에 치우쳤던 것이요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책임자였던 사울이란 청년이 훗날 사도 바울이 되었으며 순교를 시작으로 엄청난 환란 핍박으로 세계전역에 흩어진 자들이 복음 전하니 세계복음화가 이루어졌으니 하나님의 영광 본 스데반 집사의 순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성도여!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고전3:9에 “너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하나님의 집이요 밭이라”고 했습니다. 동역자란 같은 일 함께 일하는 사람이란 것이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이니 하나님이 알아주는 것이라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복된 성도되시기 소원합니다.

 

3. 참된 승리와 평강 넘칩니다. (59-60절)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잠시는 돌로 치던 자가 승리한 줄 알겠고 좋아했을 것이나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예수님처럼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눅23:34,46)라고 하셨으니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참된 승리인 것이요, 자기를 돌로 치는 자를 불쌍히 여겨는 참 평안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 세상 어떤 것에 흔들리거나 자지 아니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승리자요 평안이 넘치는 자였습니다. 이 승리와 평안은 일시적인 승리와 순간정인 쾌락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에 참 승리요 평강입니다. 순교함으로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참된 승리와 평강을 얻었습니다. 성도들이여! 육신의 눈만 뜨고 현실만 보면서 거기에 얽매여 이기는 것 같으나 지고 얻는 것 같으나 모두 잃어버린 자 되지 마시고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영광 바라보시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는 일에 헌신하시고 참된 승리와 평안을 누리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기독교의 첫 순교자가 되었던 스데반 집사처럼 주위환경과 대적자가 있어도 해야 할 말 복음을 분명 증거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사울이 모든 것 보게 되어 변화의 절대적 영향인 바울사도 되었고 환란으로 흩어진 백성이 복음 증거로 하나님의 뜻 이루셨으니 참된 승리자요 평강이 넘치는 자입니다. 이러한 삶에 주인공 되시기 원합니다.

 

 

 

 

스데반의 순교

행 7장 51~60절 / 이필재목사

어제 서울 주변의 꽃집들은 흑장미가 동이 났습니다. 갈보리교회 꽃장식팀도 새벽 4시 꽃시장에 나가 오늘 강대상을 꾸미려고 흑장미를 구해온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순교 당한 배형규 목사님을 추모하는 뜻으로 모든 교회들이 흑장미를 다 사갔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피랍 첫날부터 이 시간까지 우리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두 똑같이 안타까운 심정의 기도를 드리며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나라의 모든 교회 목사들은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설교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기도와 협조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어려움을 당했는데 “그런 곳에 왜 보냈느냐?” “그런 위험한 곳을 왜 갔느냐?” 인터넷에 별 소리를 다 올리고 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에는 가끔 이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지만 어떤 사람은 어려움을 더 어렵게 만드는, 마치 이때다 해서 불필요한 말과 행동으로 해결에 더 어려움을 주는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확인되지도 아니한 것으로 괜히 이상한 말을 흘리고 다닙니다. 지금 우리들은 모두가 이유를 불문하고 이 어려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기도와 협조적 말을 해야 할 때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우리가 아는 대로 순교의 역사입니다.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성취되지 않았습니까? 십자가에서부터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에 최초의 순교자가 된 스데반 순교의 모습을 오늘 조명함으로 이 어려운 시간을 잘 이겨나가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해졌습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가? 죽음이 기다리는 장소를 무서워하지 않고 나갔습니다. “거기 가면 죽을지도 몰라!” “예루살렘 거리는 지금 죽음의 그림자로 가리어져 있어! 예수도 죽였잖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못나가다가 성령 충만한 다음에 죽을지도 모르는 그 거리를 나갔습니다. 그리고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말을 했습니다. 설교를 한 겁니다. “여러분이 죽인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언된 메시야를 너희가 죽였다. 빨리 회개하고 그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라!” “여보시오! 지금 이 거리는 당신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가 아니오! 당신들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오? 예수도 끌어다가 죽였는데, 더군다나 당신은 그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니 그 말을 하지 마시오! 죽을지도 모릅니다.” “죽이시오!” 성령 충만해져서 이렇게 나가는 겁니다. 그 중에 스데반도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본래 스데반이라고 하는 사람은 교회 봉사를 위해 선택된 집사입니다. 설교를 하기 위해서 준비되었거나 훈련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저도 설교학을 배웠고 지금도 설교를 후배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설교를 교재로 이렇게 설교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목사가 될 사람을 놓고 집사의 설교를 교과서로 삼아 가르치고, 저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스데반은 신학교에 가서 설교를 배운 일이 없는 교회 봉사자 집사로서, 지금 예루살렘 군중들 앞에서 대중 집회를 열고 죽을 수밖에 없는 말을 부흥사와 같이 길게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에 의해 죽었습니다. 즉, 스데반은 이 땅에 한편의 설교를 남기고 돌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설교라는 겁니다. 스데반이 우리들에게 남겨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자세와 듣는 자의 올바른 자세에 대한 진리입니다.

오늘 말씀을 처음부터 보면 스데반이 이렇게 긴 설교를 할 수 있었던 동기로 아브라함을 들고 나왔습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아브라함을 증명하는 히브리 민족은 “아니, 이 사람이 지금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 아니야?” 거절하지 못하고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솔로몬 시대까지의 긴 설교를 하고, 마지막 설교를 하는 결론 부분이 오늘 읽은 51절부터입니다. 이 설교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 반역 행위를 했느냐? 역사를 보라! 그렇게 많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죄를 지었는데 그 후손들인 너희가 메시야까지 죽였도다. 회개하라!” 이렇게 설교를 한 겁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러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의인을 살인하더니 너희들도 똑같이 메시야까지 죽였도다. 회개하라!” 그리고 설교를 마쳤습니다. 이 설교는 잘한 설교인가? 본문에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대체로 설교를 잘하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야 잘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평화를 줄 수 있는 설교, 또 하나는 찔림을 주는 설교! 사실 저도 설교하는 사람이지만, 설교를 듣고 나면 뭔가 가슴에 와 닿아야 합니다. 말씀에는 심판적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할 것이 깨달아지는 찌르는 그것이 설교이지, 교인들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는 수준에서 살살 피해가는 식으로 하면 설교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기 찔렸다는 말에 헬라어의 본뜻은 “빗나가지 않았다.”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찔렀습니다. 사실 주일날 교인들은 찔림을 받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그럼,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일으켰는가? 마음이 찔렸으면 회개해야 됩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런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주일 설교를 듣고, 또 어디서든지 설교를 듣고 제일 많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 오늘 설교 말씀은 나를 두고 한 말씀이다.’ 이런 생각이 들어야 은혜를 많이 받은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내 마음 밭을 방해합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다 찔렸습니다. 그러면 그 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믿게 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몇 사람을 동원하여 선동함으로 그런 일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방해를 놨습니다. 지금 있는 장소는 공회당입니다. 72명의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이 있는 장소이고, 이 사람들은 최고의 권력 실세들이며, 귀족 출신의 종교 지도자들이요, 하나님이 가장 잘 섬긴다고 자청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유대 나라의 법 집행 기관의 최고 권력자들입니다. 그리고 방청객들이 수없이 많이 와있는 그 현장에 지금 스데반이 설교하고 있는 겁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줄 알았습니다. 왜? 알아들었기 때문에 마음이 찔렸습니다. 아픈 상처를 스데반이 건드린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린 사건은 여기에서는 7장에 나오는데, 2장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때 설교자는 베드로였습니다. 설교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요 하나님께서 나사렛으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했느니라. 그런데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들어 그를 못 박아 죽였느니라. 너희는 살인자다.” 그러면 베드로에게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항의할 수 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 지금 누구에게 살인죄 누명을 씌우는 거야? 예수를 죽인 자는 빌라도요! 그가 죽이라고 해서 죽였소! 못 박은 사람은 로마 군병들이요 동의한 사람들은 이 나라 최고 권력 지도자들이야! 우리는 옆에서 구경만 했는데 당신이 뭔데 우리가 죽였다고 말하는 거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맞다. 우리가 죽인 것이다.” 베드로가 가로되 “회개하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러면 된다. 너희가 죽였다.” 그랬더니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은 그날에 다 세례를 받으며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 이런 반응이 베드로 설교 때 나오지 않았습니까? “오늘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는 이를 갈거늘” 양심에 찔리면 회개하면 되는 것인데 반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똑같이 설교를 듣고 똑같이 찔림을 받았는데 한쪽에서는 회개하고 돌아서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이를 갈고 있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스데반과 베드로의 설교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너희 자신을 한번 객관성 있게 평가해 보라! 너희는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죄인들이다. 왜 너희가 자신을 보지 못하느냐?” 이렇게 설교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정확히 보고 판단할 수 있으면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능력을 키우기 위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마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잘 못합니다. 저는 아침에 새벽기도 마치고 탄천에 가서 운동을 합니다. 어느 날 뛰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멋있는 유니폼을 입고 가슴에 “마라톤 동호회”라고 붙이고 척척 뛰는데 너무 멋있었습니다. ‘이야! 이 사람들을 내가 따라가 보자.’ 젊은이들을 따라가 봤는데 이 사람들이 빨리 뛰지 않습니다. 뛰는지 마는지 아주 천천히 뛰는 겁니다. ‘어휴! 젊은 사람들이 빨리 뛸 것이지 이게 뭐야? 에이! 모르겠다!’ 과시하려고 그 사람들을 추월해서 앞서서 막 뛰었습니다. ‘날 따라와 봐라. 마라톤 동호회도 아무것도 아니다!’ 여러분, 그러다 죽을 뻔했습니다. 너무나 숨이 차서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아 헉헉 거리고 있는데 그 친구들이 뛰어가면서 저를 살짝 쳐다보고는 웃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웃음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느냐? “너 자신을 알라!”

스데반의 설교를 정리한다면 아브라함 때부터 현재까지 조금도 빗나가지 아니한 역사의 정확한 설교를 신학적으로 했기 때문에 찔렸습니다.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해야 됩니다. 그런데 회개를 안 하는 겁니다. 우리 현대 교인의 특징! “회개하라!” “당신이나 하쇼! 뭘 회개하란 말입니까?” 회개를 안 합니다. 설교를 지닌 심판적 요소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공의회 위원들은 “야! 우리가 누군데, 너 헬라파 유대인이 어디서 굴러먹다 우리 앞에서 뭘 어쩌라고 이야기하는 거냐?” 그에게 창피 당한 것에 자존심이 상해 지독한 복수심으로 결국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 깡패나 불신자들에게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가장 믿음이 좋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맞아서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그는 기독교 2000년 역사의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남긴 진리가 무엇이 설교인가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저도 설교하는 사람이지만 이 땅의 모든 설교자들은 스데반과 같이 ‘나는 오늘 이 한 편의 설교를 마치기 위해 죽는다.’는 각오를 가지고 설교를 해야 힘 있고 마음을 찌를 수 있는 것이지, 이 눈치 저 눈치 이것저것 다 살피고 생각해서 원망 안 받을 길만 빠져나가면 힘이 없습니다. 그런 설교자는 설교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설교를 교과서로 삼아 설교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는 기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우리가 기도 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아주 분명한 것은 기도가 이기적인 목적일 때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은 조금도 수정하려는 생각 없이 내 뜻에 동의만 필요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절대로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사도행전 6장 15절에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라고 했습니다. 지금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과 공포에 쌓여있는 사람이 어떻게 천사의 얼굴을 했을까? 스데반은 이미 이곳에 들어올 때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예수도 저기서 살아나가지 못하셨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서 걸어 나올 것인가? 나는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죽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들어간 것입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리스도인의 가장 높은 차원의 행위인 용서가 그 마음 가운데 가득하였기 때문에 그 영혼의 밝음이 얼굴에 반영되어서 천사같이 보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 사람들이 로마에게 빼앗긴 몇 가지 권한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우리에게는 사람 죽일 권한이 없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게 잘 알고 있는 법 집행 기관의 실력자들이 어찌나 마음이 강퍅해 졌는지 로마의 권한을 무시하고 그 자리에서 스데반을 돌로 때려 죽였습니다. 17절에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라고 했습니다. 우리 생활 가운데서도 싸움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싸움꾼들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그 다음에 귀를 막고 남의 소리를 안 듣습니다. 이런 현상이 여기도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이 말을 좀 들으라.” 그러나 안 듣는 겁니다. 귀를 막고 자기 소리만 크게 합니다. 돌에 맞아 죽을 만큼 괴로운 상태가 되었는데도 그는 기도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죄 값을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자니라.”

세 번째 그가 남긴 것은 죽는 문제입니다. 만약 스데반이 그 자리에서 만분의 일이라도 살아남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면 그의 말은 비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 비겁해지는가?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할 때입니다. 스데반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왔기 때문에 그렇게 담대하게 기도하고 설교했습니다. 성도의 삶이란 무엇인가? 잘 죽기를 희망하는 길입니다. 그 살벌한 현장에서 옳은 소리에 귀를 막고 돌을 드는 사람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그 어려운 현실을 이기고 있습니다. 만약 자기를 죽이려고 성이 난 그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그 분노가 자신에게도 치밀어 도저히 자기 마음을 조절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향해 눈을 떴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서 스데반을 응원하셨습니다. “스데반아! 잘하는도다. 나를 보고 돌에 맞아라. 죽어라. 짓밟혀라. 그리고 그 땅에 나 다음으로 피를 흘려라.”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피를 흘려 죽는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장렬한 순교와 기도는 금방 큰 열매가 왔습니다. 72명의 공회원이 모여서 결정하는 국가 차원의 사건이 주는 그 의미 때문에, 스데반의 살인 현장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회원이나 인파 가운데 오직 한 사람의 이름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입니다. 그가 가장 나이 적은 공회원 멤버이기 때문에 스데반의 살해 현장에 가장 열심히 날뛰었습니다. 그 증거로 그 이후 그는 참지 아니하고 공문서를 가지고 다메섹까지 쫓아가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잔멸하는 작업을 계속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제일 열심이었습니다. 만약 그보다 더 지독한 사람이 그 현장에 있었다면 그의 이름이 성경에 남았을 것입니다. 그가 대표적으로 활동한 것을 보고 사도행전 기자가 남긴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기도는 즉시 응답되어 하나님이 스데반 대신 그 사울을 거꾸러뜨려서 바울이 되게 하셨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의 열매가 바로 바울이 된 겁니다. 여러분, 신학적으로 스데반의 설교에 나타난 역사 신학적 해석은 바울 신학과 동일합니다. 구약을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는 신학의 시각, 신학적 입장에서 구약을 해석하는 해석론, 신구약 모든 성경에 대한 예언은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등 스데반의 설교와 바울신학은 동일합니다. 바울은 그때 스데반의 설교를 경청하였기 때문에 그 기초에 신학을 확립했습니다. 스데반의 천사와 같은 얼굴은 마귀 같은 사울의 얼굴을 또다시 천사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저는 배형규 목사 살해 사건을 같은 목사 심정에서 정의해 봤습니다. 아마도 그는 살해하려면 내가 책임자요 나를 살해하고 다른 이들은 자유케 하라는 요청을 암시적으로 많이 하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스데반을 돌로 때려죽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탈레반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탈레반들에게 하나님 자녀의 거룩한 마지막을 구원 설교하면서 메마른 사막의 땅을 피로 적시면서 소리 없이 갔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가 영적 평가한다면 이제 그 땅에 뿌린 그의 피는 며칠 동안의 봉사 활동에 의한 열매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앗을 그 땅 깊숙이 파종한 피가 되었습니다. 스데반 살해에 앞장섰던 사울이 바울이 된 것처럼 배형규 목사에게 탈레반들이 역사가 지나면 그 나라 복음화에 쓰임을 받게 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계신 것 같아도 우리가 계산할 수 없는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돌을 던지는 폭도들을 스데반이 바라보지 아니하고 하늘을 바라본 것처럼 지금 우리가 텔레반들을 바라보지 말고 우주 통치자이신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 문제가 세계 선교 역사에 빛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 계산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론에서는 이 모든 것이 밑거름이 되어 구원 역사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인 줄 믿습니다. 이 문제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가장 선하게 해결지어주시고 배 목사가 흘린 거룩한 피가 그 땅에 스데반의 피와 같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족들을 위로하시고 이 어려움에 처한 샘물교회도 주님이 지켜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도다

행 7장 52~53절 / 양향모목사

한번 설교 듣고 삼천 명 그리고 오천 명이나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게 한 베드로의 설교와 한 사람도 회개시키지 못하고 설교를 들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설교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봅니다.

지난주에는 이 차이가 설교를 듣는 사람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비교적 가난하고 어려운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메시야가 오셨다는 소식에 귀를 열고 듣고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이고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교만하여 목이 곧고 자기들이 가진 생각이 늘 최고라고 생각하여 도무지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귀도 막고 마음의 문도 닫고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하자 화가 나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두 설교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또 설교의 내용에 또 다른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좀 인용하기는 했지만 바로 그 예언을 따라 오신 예수님을 소개했고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부활하셨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예수님 이야기는 하지 않고 처음부터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간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게 하려고 했습니다. 구약 역사 이야기만 하다가 예수님 이야기는 하지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이 설교의 끝부분인데 설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중단된 상태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올 참인데 유대인들이 설교를 도 못하게 막아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도 이런 실수들을 많이 합니다. 주로 구약성경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할 때 그 성경의 목적지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하지 않은 채 설교를 끝내버리고 마니까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최종 목적지를 말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합니다. 의도적으로 최종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고 율법만 강조함으로 사람들을 충성스런 도구로 만들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복을 받아서 잘 살아야 된다고만 말하고 설교 끝 하면 사람들이 아 성경이 그런 말씀이구나 하고 오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스데반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미처 다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설교를 마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본문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직접 말하려는 흔적이 보입니다.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자가 되었나니”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에 대한 오해가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즉 율법이나 성전이나 성전에서의 제사나 모든 것이 오실 예수님을 예언하고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한 유대인들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예언하게 하셨는데 그 때마다 그 선지자들을 박해했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 예언하신 의인이 이 세상에 오시자 그 의인 즉 예수님을 죽게 한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을 때 그 결과는 이렇게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그저 비슷하게 해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따라서 확실하게 해석을 해야 합니다.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자가 되나니

 

본문 5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유대인들이 자신들 스스로는 의로운 사람이요 율법을 지키고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그 사람들은 살인자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대선지서 5권 소선지서 12권 도합 17권의 선지서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여러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그 내용은 다 유사한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사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는 했지만 겉으로 형식적으로 지키는 척만 했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지 못함을 지적했습니다. 그 잘못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으며 그 죄 값으로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말을 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예언들대로 이스라엘은 주변의 강대국들에 의해서 비참하게 나라가 망합니다. 전쟁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남은 자들은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선지자의 예언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벌을 받아 나라가 망했지만 그들의 후손을 통하여 오시는 메시야의 언약은 변함없다는 것입니다.

 

1)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51절 말씀에서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라고 하셨고 또 오늘 본문에서도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갔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계명들을 잘 지키라고 했지만 형식적으로 지키는 척 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오히려 죄를 지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했지만 항상 애굽을 바라보며 애굽을 그리워하면서 살았습니다. 틈만 있으면 핑계거리만 있으면 애굽으로 세상으로 향하려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고 했지만 틈만 있으면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신으로 만들려고 했고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그리워하면서 우상을 숭배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 잘못을 지적하는 선지자들은 박해를 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선지자들이 그렇게 간절하게 회개를 외쳤지만 그들은 회개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회개를 외치는 선지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했습니다.

거짓 평화를 외치고 이 세상에서 잘 살라고 축복하는 거짓선지자들을 따르고 진리를 외치는 참 선지자들은 핍박을 했습니다. 그들의 조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 오실 당시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고 오늘날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오늘날의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다른 길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사상의 축복을 바라며 돈을 출세를 우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을 세상의 출세를 말하는 설교자들은 존경하고 따르면서 구원의 복음을 외치는 설교자들은 외면합니다.

사람들은 남들이 가는 길이면 별로 의심 없이 따라갑니다.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가면 그 길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에는 항상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착하고 대부분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따른다면 많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 가면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싫어하고 인간의 욕심대로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좋다고 따라가는 길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이 많습니다.

오늘날 대형교회가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진리의 길로 복음의 길로 십자가의 길로 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단들의 교회가 더 크고 십자가의 복음을 외면하는 교회가 더 크고 진리의 길을 바르게 사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을 믿는 교회라고 하면서도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는 바른 설교자들을 외면하고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역사 이래로 항상 그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똑바로 보지 않으면 우리 속에 있는 세상을 향한 욕심 때문에 우리도 엉뚱한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롭게 산다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의인이 오시리라고 예언한 선지자들을 죽였고 그 의인을 잡아준 자가 되었고 살인한 자가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면 이런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롭게 산다고 하는 것이 의인을 죽이는 것이고 의인을 잡아주는 것이고 살인을 저지른 자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고 떠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늘 하나님나라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이 엉뚱한 길로 가게 되었을까요? 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거짓선생들의 말을 듣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씀이 좀 기분이 좋게 여겨지지 않더라도 자신들을 삶을 살펴보면서 잘못을 바라보고 회개하고 돌이켰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좋은 말은 기분이 나쁘다고 거절을 하고 자기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따랐습니다. 거짓선지자들이 하는 말이 거짓말인 줄 몰라서 따른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거짓선지자들이 하는 말이 그들의 마음에 들었고 역시 같은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뜻이 통했기 때문에 알면서도 따랐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할 때 그 설교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바른 설교인지 잘못된 설교인지 판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 듣기에 좋은 말이면 아멘하고 따릅니다. 잘한다, 좋다, 잘될 것이다, 복 받고 잘 살아라, 이 세상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니까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들 얼마나 듣기에 좋습니까?

그러나 정말로 조심을 할 것은 그런 잘못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살인자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하고 지옥으로 달려가는 비참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약간 잘하고 잘못하고 그런 차이가 아닙니다. 의인이 되느냐 살인한 죄인이 되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경말씀을 통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바르게 알고 따른다면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요 영원한 생명으로 가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됩니다.

이 복음을 외면하고 스스로 바르게 살아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사람들 보기에는 그것이 좋아보일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살인자로 영원히 멸망할 자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조금 더 잘 살기 위해서 영원한 천국을 버리는 정말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진리를 바르게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본문 5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천사가 전한 율법”이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일을 하시기도 하시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세상의 일과 구별하여 말할 때 천사가 한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받은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율법이라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율법은 세상의 어떤 규칙보다도 앞서서 지켜야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율법을 받고도 그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받은 율법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아주 특별한 율법을 자신들이 받아서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율법을 받았으면 그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지키지 못한 사람이 받을 벌을 받는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율법은 좋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인생들이 율법을 지키고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한다면 그것이 하나님나라이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완전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타락한 습성에서 오는 욕심 때문에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율법을 다 잘 지키는 그런 나라를 만들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많은 율법들 중에서 한두 가지만 잘 지키고 다 잘 지킨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사람들이 볼 때만 지키는 척하고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는 어기면서도 그것을 율법을 다 잘 지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율법의 겉으로 들어나는 것만을 지키고 다 지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속에는 그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존심까지 지켜주어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욕을 하고 업신여김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위반한 것입니다.

오늘날 비교적 자신이 바르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몇몇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윤리적인 죄를 지적하고 교회가 썩었다고 비난을 합니다. 자신들은 똑바로 살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몇몇 가지 잘 했다고 해서 사람들 보기에 바른 삶을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정도로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자체가 위선이고 교만한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통하여 지적한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다 죄인일 뿐입니다. 율법은 그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보고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일 깨닫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는 절대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같은 사람도 그렇게 율법을 많이 연구하고 잘 알고 그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던 사람도 율법 앞에서 자신을 보고 한탄을 했습니다. 한 마음은 바르게 살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을 하는데 또 다른 한 마음이 자꾸 죄를 짓게 하는 것을 보고서 선하게 살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아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가요!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현대어성경)

율법의 가장 결정적인 역할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3:24)

스데반이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하나님께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을 한 것은 율법의 이러한 용도를 잘 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한 것도 잘못이지만 지킨다고 하면서 형식적으로 겉으로만 지키는척하여 위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 것도 그들의 죄입니다. 정말로 양심적으로 율법 앞에서 자신을 보면 율법을 지키지 못한 죄인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율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을 통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잘 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율법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했고 그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봤다는 것입니다.

그런 전철을 밟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흉악한 죄인인 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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