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의 순교
행 7:54-60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54-60 / [스데반의 순교] 유대인 지도자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부드득 갈았다. 55)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시는 예수의 모습이 보였다. 56) 그가 소리쳐 말하였다. `보시오! 하늘이 열리고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십니다!' 57) 그러자 사람들은 손으로 귀를 틀어 막으면서 스데반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58) 그러고는 돌로 쳐죽이려고 그를 성밖으로 끌어냈다. 공증인들, 곧 사형 집행인들이 겉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놓았다. 59) 그러나 돌들이 우박처럼 날아오는 속에서 스데반은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 하고 기도를 드렸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하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 말을 남긴 뒤 그는 눈을 감았다.
스데반이 논리정연하게 이스라엘 역사와 성경을 꿰뚫어 설교하면서 그들의 죄악을 지적했을 때 그들은 시기와 분노로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54) 당시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모였던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을 때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하면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자들은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해 마음에 찔림을 받고서도 회개하지 않고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갈았습니다. 같은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회개하고, 어떤 사람은 대적하기도 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5-56)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유대인들(51)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의 모습이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때 스데반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그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서 외쳤습니다. 같은 장소에 있었음에 불구하고 스데반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지만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막혀 있었음을 말합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57-60)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습니다. 돌에 맞은 스데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스데반은 다시 무릎을 꿇고 더욱 크게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잔다’는 단어는 평화로운 죽음의 상태를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적용: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했을 뿐 아니라 죽을 때까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 강병화 교수는 17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야생 들풀을 채집했습니다. 그 결과 4,500여 종의 씨앗을 모을 수 있었고 혼자의 노력으로 종자은행을 세우는 큰일을 해냈습니다. 이 일로 많은 언론에서 취재를 왔는데, 강병화 교수는 말했습니다. “17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제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 세상에 ‘잡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그게 바로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그 역시 잡초가 됩니다. 산삼이라 해도 엉뚱한데 나면 잡초가 됩니다. 잡초란 단지 뿌리를 내린 곳이 다를 뿐입니다. 들에서 자라는 모든 풀은 다 이름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호크마 주석
=====7:54
이를 갈거늘 -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극심한 분노를 나타낼 때 머리에 재를 뿌리거나 옷을 찢는행위와 유사한 의미에서 사용되었다(욥 16:9;시 35:16;112:10). 이는 그들이 스데반의질타를 듣고 얼마나 격분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7:55
성령이 충만하여 -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6:3, 5, 8, 15) 이 표현은 분노한 청중과는 완전히대조적인 스데반의 모습을 부각시켜 준다. 즉 스데반의 권고적 설교에도 불구하고 완악함을 버리지 않은 청중들과는 반대로 성령의 성품조차 변화된 스데반의 모습을 누가는 간략하게 보여주었다.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이 말에 대하여 주석 학자들 간에 다음과 같은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1) 예수는 죽는 순간 천국에 들어올 자신의순교 제자인 스데반을 환영하기 위하여 일어서셨다(Bengel). (2) 그는 지상에서 자신의 메시야적인 직무를 이행하시기 위해 서 계셨다(Bauernfeind). (4) 법정에서 증인이재판장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예수는 하나님 앞에 서서 스데반을 시인하고 계신다(F.F.Bruce). 그런데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의 모습이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언급된 것은 앞에서 진술된 예수의 죽으심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하다. 즉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서 계신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간접적 표현임과 동시에 스데반 자신의 증거가 신적(神的) 권위를 지녔음을강조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예수가 서 계신 모습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7:56
인자가...보노라 - 예수를 '인자'라는 명칭으로 사용한 경우는 복음서들 외에는 본 구절과 계1:13;14:14 뿐이다. 예수께서는 이 명칭을 '나'라는 대명사에 대한 하나의 관용어법으로 사용하셨고 또 단 7:13-28의 용례를 반영하는 명칭의 하나로 사용하셨다. 인자에대해서는 요 8:21-59의 주제 강해 '인자의 칭호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7:57
큰 소리를 지르며...달려들어 - 공회의 스데반에 대한 사형 집행은 불법이었다. 이들은 당시 로마법에 따른 법적절차를 거치지 않고 감정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여기서 그들이 큰소리를 지른 것은 스데반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의미와 함께 그들의 감정이 얼마나 고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7:58
성밖에 내치고...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 유대인의 죄인 처형 방법은 먼저 죄인을 3.5m 정도 사형 집행 장소에서 아래로 떨어뜨린 후 그가 죽지 않았을 경우에는 크고 무거운 돌들을 그 죄인에게 던져 죽게 하였다고 전한다(Mishna). 그리고 죄인에게 돌을 던질 때 증인들이 먼저 던진 후 주위의사람들이 던졌다. 그런데 스데반의 청중들은 자신들이 모두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다는의미에서는 증인들이었으나 공식적인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은 불법이었다. 특히그들은 로마법에 의해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제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발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이는 예수의 사형 집행 과정에서와 유사하게 그들의 종교적 편견과 독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편 증인들이 옷을 벗었다는 사실은 피고가 옷을 벗었다고 기록한 미수나(Mishna)와 다르다. 어떤 이유로 증인들이 사울 앞에 옷을 벗어놓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가는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사울이 주도적으로 동참했음을 보여주고자 그 표현을 사용한 것 같다. 이는 22:20에서 기록된 바울 자신의 회고(回顧)에 의해 입증될 수 있다.
=====7:59
돌로 스데반을 치니...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여기서 영혼을 부탁하는 스데반의 기도는 눅 23:34, 46의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기도를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혹자는, 저자 누가가 스데반의 처형 사건을 두고 예수의 위대한 최초의 순교 행위의 재현인 것처럼 나타내려고 의도했다고 주장한다(C.H.tabent). 그러나 이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누가가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스데반의 순교를 동일시했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누가는 여기서 예수의 생애와 죽음을 특징지웠던 용서와 책임의 정신이 예수의 초기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났었음을 보여주고자 했으리라고는 짐작될 수 있다.
=====7:60
무릎을 꿇고...자니라 - 렌스키(Lenski)는 스데반이 겸손과 순종의 자세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공회원들에게 너무 심하게 돌을 맞았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무릎을 끓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59절에서 스데반의 기도가 1차적으로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본절에서 그가기도하기 위해서 무릎을 끓었다고 보기 힘드나 돌에 맞는 과정에서 그가 쓰러져 있던중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기 위해 그리고 곧 대면하게 될 하나님께 겸손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무릎을 끓었다고 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편 이 스데반의 순교는 예루살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박해의 시발점이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교회는 팔레스틴 각지와 아시아 지역까지 흩어지게 되었다(8:1).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박해는 결과적으로 교회를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하여 선교의 촉진제 역할을 하게되었다. 결국 스데반의 순교의 피는 초기 기독교 확산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 설 교 >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
문기태 목사 / 행 7:54-60
장마가 지고 난 후 강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물살을 따라 떠내려 옵니다. 뿌리가 뽑힌 나무도 떠내려 오고, 수박도 떠내려 오고, 수해를 만나 물에 잠긴 가재도구도 떠내려 오고 심지어 돼지새끼도 떠내려 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물이 불어나고 물살이 세게 흘러도 떠내려 오기는 커녕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물고기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조류에 따라 흘러가지만 생명이 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헤치고 맘대로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 세대의 풍조에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행따라, 세상의 풍조에 밀려, 세상의 가치관 따라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세상 사람들이 춤 바람이 나면 같이 춤추러 다니고, 세상 사람들이 땅 투기해서 돈 벌면 같이 돈 될 땅 찾아 전국을 누비고, 세상 사람들이 컨닝하며 시험을 보면 같이 컨닝하고, 세상 사람들이 가정을 외면하고 바람피우면 같이 한눈을 피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대를 본받으면 안됩니다. 사단은 이 세상의 풍속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갖 악한 영향을 끼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뒤집어 놓을 큰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지옥과 같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며 사는 사람이 우리들입니다. 사도 바울을 제사장 아나니아가 벨릭스총독앞에서 고소하며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괴수입니다.(행 24:5) 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들이 사는 도시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염병과 같이 강하게 세상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세상을 소요케하고 있습니까? 단 몇 사람만 있었어도 그로인해 온 도시가 시끄러웠는데 오늘 우리는 천 만이 넘는 그리스도인을 자랑하는데 무슨 영향을 나라와 민족에 우리가 살고 잇는 도시에 끼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향력이 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대, 이세상의 사람들 꽁무니만 쫓아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따라가면 세상에 아무 영향도 끼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이런 기도를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주님 저에게 이 세상 이 세대의 물결을 따라 흐르지 않고 거슬러 올라가며 사는 사람 열 명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들과 함께 주님께 만 명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단 열 명만이라도 이세대의 조류를 거슬러 사는 사람만 있으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중에 그렇게 살 사람이 몇 분이나 계십니까? 세상 사람이 다 돈을 하나님처럼 섬겨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주님만 섬기며 사시겠습니까? 세상 사람이 쾌락만을 쫓으며 죄의 길을 따라 걸어도 단호하게 거기서 나와 유행을 거부하며 사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비웃어도 모두 비난해도 혼자만이라도 의의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가난해도 좋다. 고생해도 좋다. 손가락질 당하고 비웃음거리가 되어도 좋다. 나는 오직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겠다.' 하는 결단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예루살렘교회의 스데반은 아주 짧은 인생을 살다간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집사 안수를 받고서 일년도 사역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스데반은 사도들도 하지 못한 큰일을 이루었습니다. 완악하여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큰 해를 입힌 사울이라는 청년을 회심시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하게 쓰임받게 한 인물이 바로 스데반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죽고 난 후에도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스데반은 어떻게 그런 강력한 능력을 보일 수 있었습니까? 그는 항상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55절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니까 강력한 영향력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습니다. 성령충만하니까 죽어가면서까지 그의 원수까지도 변화시켰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충만하니까 누가 뭐라고해도 요동하지 않고 심지어 죽음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그가 성령충만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1. 성령 충만하면 영안이 활짝 열립니다. (55)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고 잇는데 스데반이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앗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영안이 열리고 영적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중에 마게도냐 사람들이 손짓하며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3층 천국까지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앞에서 앉은뱅이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육안에 의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따라갑니다. 영안이 닫혀 있기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일어서셨는지 앉으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육에 속한 삶을 살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에 대해 무지합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육안에만 의지하여 살지 않고 또 다른 눈 즉 영적 안목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며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살다보면 하늘 문이 열리는 것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2. 성령충만하면 용서가 쉽게 됩니다. (60)
사단에게 사로잡혀 잇는 사람은 미움과 원망으로 충만합니다. 살기가 등등합니다. 본문에서 사울과 따르는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일심으로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너 나 가릴것 없이 돌을 들어 쳤습니다. 죽이기로 결심하고 사람을 돌로 쳐서 목숨을 끊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죽어 가면서까지 원망하지 않습니다. 복수심으로 불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용서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죄값을 찾지 않으시도록 죽어가면서까지 돌을 던진 사람들을 예수님께 부탁하고 잇습니다.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고 죽었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감정의 상처를 많습니다. 그리고 보복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가 조금만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싸우려고 덤벼듭니다. 용서할줄을 모릅니다. 사소한 실수까지도 보복하려고 합니다. 미움과 원망, 증오등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끌려 다닙니다. 사실은 그 감정 배후에서 사단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겉보기에는 화려하나 실상은 심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가장 심각한 것이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줄 아십니까? 성령충만하지 못하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서로 감정을 품습니다. 오해하고 미워하며 저주하고 눈을 흘깁니다. 그러나 스데반처럼 성령충만해지면 다 이해가 됩니다. 용서가 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하나님이 풍성하게 주시니까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도 '쯔쯔 은혜를 모르니 저렇지 저러다 멸망당하면 얼마나 비참할까?'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3. 성령충만하면 늘 기도가 나옵니다. (59)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스데반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를 합니다. 조용한 공간도 아닙니다. 기도할 분위기도 아닙니다. 몸은 돌에 맞아 으스러지고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마귀처럼 일그러진 사람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스데반은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무엇을 간구합니까?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대제사장도 사울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주님게 한번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주를 위한 열심이었다면 먼저 기도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들은 자기의 편협한 선입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없애려고만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기도했다면 하나님게서 깨우쳐 주셨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은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괴롭히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게서 얼마나 안타갑게 여기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임을 잘 압니다.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도 들었습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주어지고 문제가 해결됨을 알면서도 기도를 잘 못하는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살려고 하고 잇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먼저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자연스럽고 쉽습니다. 기도하니까 천사처럼 변합니다. 기도하니까 용서도 절로 됩니다. 기도하니까 영안이 열려서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며 삽니다. 기도하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살게 됩니다.
모노 뉴클레오시스란 병이 있습니다. 피에 단핵을 가지고 있는 세포들이 많아지는 전염병입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입맞춤을 하면 환자가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그 병에 걸리게 됩니다. 모든 병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감기에 걸린 사람과 있으면 건강한 사람으로 인해 감기에 걸린 사람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감기에 걸립니다.
올바른 소수가 잘못된 다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며 바른 사상이 잘못된 사상을 바꾸기가 힘듭니다. 좋은 말 열 마디보다 나쁜 말 한 마디가 더 힘이 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악한 사람보다 몇십배,몇백배 더 건강해야 하고 영적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어두운 세상에 빛의 영향을 줄 수 있기 바랍니다. 부패한 세상에 소금의 영향을 끼치기 바랍니다. 문제 많은 세상에 불행한 세상에 행복을 확산시키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능력이 아닌 성령 충만하여 위로부터 부어진 강력한 능력을 큰 영향을 끼치며 살기 바랍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
이대성 목사 / 행 7:54-60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죽음을 이긴 사람”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죽음을 이긴 사람” 여러분? 지금 잠깐 본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의 압권은 누가 뭐래도 8인조 오케스트라가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의 음악을 끝까지 연주하는 장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 중 악단의 단장인 웰레스 하틀리는 실재 인물이고, 그는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배에 승선했다고 합니다. 찬송가 364장 ‘내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여러분? 이 찬송을 천천히 연주하는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배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승선한 한 사람이 있었으며 배가 침몰하는 중에도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 분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죽음 앞에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위로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처음에 타이타닉이 세계에서 가장 큰 배이며 가장 안전한 배라고 소개하는 모습은 자연의 위엄 앞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무용지물임을 다시금 느끼게 합니다.
우리의 삶 또한 지금 제아무리 잘나가고 풍요롭다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에 죽음의 문제를 결단코 해결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문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 주신 분이십니다.
사도행전은 이 예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행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1장 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이 약속대로 사도행전에는 성령이 임하시는 이야기가 처음 나옵니다. 그 뒤를 이어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 그리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복음 전파가 확산되려 할 때에 커다란 장벽이 나타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주저했으며, 또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쉽게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좀처럼 복음 전파가 예루살렘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결코 이방인에게로 복음 전파의 발걸음이 내딛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이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뜻밖의 한 사람을 소중한 도구로 쓰고 계십니다.
그가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은 이방인들이 공용어로 사용하던 헬라어를 할 줄 아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렀다가 그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아예 예루살렘 교회에 머무르면서 신앙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그 열심이 두드러져 7집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에 이릅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는 집사로써,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는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던 중 마침내 체포되어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 심문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에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스데반이 순교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스데반의 순교 이후 복음 전파는 예루살렘을 뛰어넘게 됩니다.
그리고 이방 세계로 힘 있게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마치 둑이 무너진 뒤 물이 밭으로 논으로 집으로 시내 한 복판으로 가리지 않고 밀려들어 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밀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스데반 집사는 복음 전파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리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위대한 복음 전파사역의 귀한 길목에서 너무나도 소중한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예수 믿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를 위해 봉사한 기간 또한 정말로 짧습니다. 그러나 그는 짧으면서도 굵게 예수를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짧고 굵게, 여러분? 그는 너무나도 소중하게 주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보면 스데반 집사의 충성된 자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쓰실 때 그가 어떤 자세로 쓰임 받았는가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오늘 이 시간, 주님의 도구로 온전히 쓰임 받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교훈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특별히 세 구절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다같이 55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여러분?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스데반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스데반은 교회 밖으로 나와서 복음을 전하면서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사람들이 변론하자고 덤벼들었습니다. 변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저들은 거짓 증인을 내 세워 스데반을 종교 재판 대에까지 서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 54절을 보면 스데반의 변론을 들은 사람들이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스데반은 더 이상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바로 그 때 그가 보인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여러분? 고사성어 가운데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사면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온다는 말로써, 사방이 빈틈없이 적에게 포위된 고립무원의 상태,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지금 스데반이 바로 이 사면초가의 상태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주님이 계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자기를 돕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려 맞아 주십니다.
그러자 두려움에 흔들리던 믿음이 이내 굳건해 집니다. 절망의 파도가 요동치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듭니다. 다시금 주님이 주시는 새 힘이 솟구칩니다. 때론 우리도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 빠져들 때가 분명 있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후좌우 사방팔방 보이는 건 온통 적들뿐입니다. 초나라 왕 항우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두려워 도망치다 자결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아직 쳐다볼 곳이 한 곳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방이 꽉 막혀 있다할지라도 하늘은 뚫려 있습니다. 고개를 들고 저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벌써 일을 시작하고 계신 우리 주님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땅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아라!”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를 도울 손길은 없습니다.
오직 한 곳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진정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단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말입니다.
스데반이 이 위기 상황 속에서 바로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었던 비결을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그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나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사람들, 바로 그들만이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전후좌우 사방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소리는 이 사방을 보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령은 우리에게 하늘을 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시력을 밝혀 주셔서 저 하늘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방은 다 막혀 있을지라도 하늘은 온전히 열려 있습니다. 무시로 주의 전에 나아와 예배를 통해 성령 충만한 자 되셔서, 늘 언제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맛보며,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날 지켜 보호 인도해 주셨노라, 기쁨으로 간증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부르짖어 가로되
59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미 처형이 시작된 것입니다.
스데반은 종교재판에서 제대로 판결 절차도 다 끝나기 전에 성난 사람들에게 성 밖으로 끌려가 내던져 졌습니다. 그리고 이성을 잃은 사람들로부터 돌팔매를 맞았습니다.
여러분? 죽음의 공포가 밀려드는 시간입니다. 견디기 힘든 육체적인 고통이 온몸에 넘쳐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데반은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 기도의 줄을 결단코 놓지 않습니다.
아니 더 굳게 기도의 줄을 잡았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 대화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간절한 기도로 그 위기의 순간을 끝내 이겨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사명을 다 완수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의 상황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결단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스데반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기 스데반의 기도를 잘 살펴보면 십자가상에서의 우리 주님의 기도와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함을 아시고 영혼을 부탁드린 기도를 드린 것처럼, 스데반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지금 자신의 영혼을 부탁드리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이 상황에서 끝까지 자기 목숨을 살려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건져주신 것처럼, 지금 자기를 이 위기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내 뜻과 내 욕심에 사로잡혀서는 결단코 아니 됩니다.
여러분? 언제나 병 낫기만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성공만을 위해서 기도해서도 안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병중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패하기를 원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 때 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똑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은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용서와 사랑과 축복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상황에서 저들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던지는 돌에, 저들이 맞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저들을 용서했습니다.
저들도 모두다 예수 믿고 축복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궁극적으로 영혼 구원과 영혼 축복에 있어야 합니다.
저주의 기도, 복수의 기도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용서의 기도를 드리시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축복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사람은 진정 주님처럼 기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맞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처럼 아니 스데반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부르짖으면서, 진정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자니라.”
다같이 60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러분? 스데반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는 장열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 십자가에서 끔찍한 고통 중에 운명하신 것처럼, 스데반 또한 돌에 맞아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스데반이 죽었는데 잔다고 표현했을까요? 여기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 담겨져 있습니다. 스데반은 기독교 역사상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뒤 첫 번째 운명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의 죽음과는 다른 죽음입니다. 그래서 다른 죽음과 같이 죽었다고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잠시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것처럼, 부활의 시간을 기다리며 잠시 무덤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잠을 잔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장차 부활 후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며 잠시 쉬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코 죽음 때문에 무너질 수 없고, 죽음에게 질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스데반의 죽음 이후의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8:1절을 보시면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적들이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차제에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박멸할 태세로 거세게 박해를 가해왔습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8:4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로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저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저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스데반이 죽은 것을 똑똑히 지켜본 자들입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두려워서 도망쳐 숨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스데반의 순교에 진정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이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들 또한 온전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순교 이후 복음이 예루살렘을 뛰어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까지 퍼져가게 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8:1절을 보면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당연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가 왜 이 이야기를 구지 여기에 써 놓았을까요? 사울이 표면적으로는 변화되지 않았지만, 바로 이 때 그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9장에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때, 이 순간 마음의 동요를 주님께서 보시고 그를 전격적으로 만나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죽음은 사울의 회심에 지극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 결과 사울이 바울이 되어 이방 세계 곧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을 산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의 죽음은 너무나도 가슴이 아픕니다. 스데반은 단지 복음을 제시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이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너무나도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열심히 정성을 다해 설교했지만 베드로처럼 수 백명, 수 천명이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단 한 명도 회개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스데반이 그토록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피를 토하며 말씀을 선포했건만, 저들은 오히려 이를 갈며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스데반은 저들의 돌팔매질 속에서 그렇게 죽어간 한 사람의 이단자에 불과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토록 잔인한 하나님이셨습니까? 이처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자신의 뜻만 내세우시는 그런 하나님이셨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렇다 치고, 이러함에도 왜 스데반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냥 그렇게 죽음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56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렇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은 이생을 넘어서 펼쳐져 있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겪었던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완전 종결시켜 주시는 곳,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은혜를 주시는 곳, 기갈이 없고 목마름도 없고 오직 생명수가 넘쳐흐르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은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죽음은 결단코 그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죽음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라는 위대한 전도자가 탄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처럼, 절대로 허무한 죽음이 아닌 놀라운 영향력을 드러낸 가치 있는 죽음이 된 것입니다.
새생명 전도축제에 오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스데반처럼 죽어야 진정 다시 사는 진리를 온전히 체득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 것처럼, 저와 여러분 모두 다 주의 영광을 바라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맞이하시기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려 스데반을 기뻐 맞아 주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 또한 우리 주님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려 기뻐 맞아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 진정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아멘.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주를 가까이” 이 찬송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던 타이타닉호의 웰레스 하틀리처럼 사나 죽으나 주의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저들의 돌팔매질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죽어가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영광을 바라보았던 스데반 집사처럼, 예수 안에서 영원토록 변치 않는 사랑과 참된 행복을 누리며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스데반처럼 승리하게 하소서
이윤재 목사 / 행 7:54-60
여러분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람마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닮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흑인 부부가 아브라함 링컨을 너무 존경했답니다. 링컨이 노예를 해방해서 자기들도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아이를 임신했는 데 존경하는 링컨을 닮은 아이가 나오라고 방안에 링컨 사진을 걸어 놓고 매일 바라 보았답니다. 태중의 아이에게는 매일 링컨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링컨을 사모하고 링컨만 생각하며 열 달을 살았습니다. 드디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아이를 낳고 보니 흑인이 아니고 백인이었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해외토픽감입니다. 그만큼 좋아하고 존경하면 닮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두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나는 좋아하고 하나는 존경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구약의 야곱입니다. 야곱은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합니다. 슬슬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그러다가 급하면 천사를 붙들고 기도합니다. 야곱은 저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테반입니다. 그 논리정연한 믿음과 그 장열한 죽음이 어린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스테반이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2천년 교회사를 보면 딱 하나의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교자가 역사를 다스린다는 진실입니다.
로마에 가면 카타콤이 있습니다. 카타콤을 찾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는 것은 로마의 황제가 아닙니다. 순교자입니다. 그 중에 순교자 세바스티안이 있습니다(그림1). 세바스티안은 3세기, 로마의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황제에 의해 순교당했습니다. 군인이었던 그는 예수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수없이 화살에 맞습니다. 그래도 안 죽자 황제가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때렸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하수구에 버렸습니다. 세바스티안은 죽었으나 카타콤에 살아 2천년동안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순교의 역사는 로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도 있습니다. 1919년 4월, 당시 일본 경찰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수원 제암리 교인 21명을 교회에 가뒀습니다(사진2). 그리고 교회를 못질하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습니다. 그때 교회안에서 21명, 교회 밖에 2명이 죽었고 동네 집도 33채가 탓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카나다 선교사 스코필드가 급히 달려갔더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교회안에 있었던 교인 21명은 동그랗게 손을 맞잡고 무릎을 꿇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기의 순간, 밖으로 피하지 않고 모두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최후 승리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다 순교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차피 인생은 둘중의 하나로 판가름나게 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전도를 하든 선교를 하든 자녀를 기르든 직장생활을 하든 성공이냐 실패냐 둘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날마다 승리하는 것이고 차선은 최후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저는 스테반을 통해서 승리의 세 가지 원리를 발견합니다. 이번 주에도 이 말씀을 여러번 읽고 그 원리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얼마나 기뻣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스테반처럼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믿으라
첫 번째 원리가 2절에 나타납니다. 행7:2, “스테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여기에 “영광의 하나님”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영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승리의 첫 번째 원리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스테반은 유대인들에게 둘러쌓여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테반을 죽이기 위해 손에 손에 돌을 들고 있습니다. 스테반이 유대교로부터 이탈하여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스테반이 언제 어떻게 예수를 믿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행6장에 보면 스테반은 당시 훌륭한 믿음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행6:3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스테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7집사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예수님을 증거하자 유대인은 싫어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테반이 자기만 믿을 뿐 아니라 많은 유대인들을 예수믿도록 영향준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스테반을 미워하고 핍박했습니다.
유대인이 스테반을 핍박한 첫 단계는 논쟁이었습니다. 행6:9절 마지막,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테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변론은 요즘 말로 하면 공개토론입니다. 공개적으로 누가 옳으냐 그르냐 논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개토론을 통해 스테반을 당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테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말로 안되자 그 다음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중상모략입니다. 중상모략의 내용은 스테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행6:11절입니다.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결국 유대인들은 스테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워 결국 그것으로 스테반을 체포했습니다. 12절입니다. 행6: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처음에는 말로 공개토론합니다. 그것으로 안되자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중상모략합니다. 그래도 안되자 그것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 잡아 가두고 불법 재판을 통해 죽입니다. 스테반은 지금 이 과정을 거쳐 공회까지 왔습니다. 행6:15절입니다. 행6:15, “공회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테반을 주목하여 보니”. 자, 지금 스테반이 공회앞에 섰습니다. 공회는 72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최고 사법기관입니다.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말 한 마디 잘못하면 가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독일에 갔습니다. 독일 보름스에 가면 루터가 제국의회에서 심문받은 장소가 있습니다. 수많은 카톨릭 신부들앞에 루터가 섰습니다. 그때 했던 루터의 기도가 그가 섰던 자리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도와 주소서”. 그 심정이 바로 스테반의 심정일 것입니다. 스테반은 지금 유대인 대적자들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섰습니다. 유대인들이 스테반에 대하여 제기한 죄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스테반이 성정을 헐자고 했다, 또 하나는 스테반이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신앙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 성전신앙과 ”하나님이 율법을 만드셨다“. 율법신앙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어기는 것이 가장 큰 죄였습니다. 이에 대해 스테반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이것이 행7장입니다.
먼저 스테반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시간이나 장소에 제한받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솔로몬까지의 역사를 개관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성전은 솔로몬 시대에 지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때부터 일하셨다”. 그 하나님이 2절,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부터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인도했고 이삭, 야곱, 요셉을 세웠습니다. 때가 되자 영광의 하나님은 모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나왔고 광야에 잠시 광야교회를 이루다가 가나안땅에 들어와 다윗을 통해 나라를 세우시고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영광의 하나님”이 다스린 역사였습니다. “모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시대와 공간에 제한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History is the His story,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입니다. He is everywhere, 그는 어디나 계십니다. He lives anytime, 그는 언제나 살아 계십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시간이요 우주는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그는 성전에 매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에서 말씀하시지만 성전에 제한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제정하셨지만 율법에 매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의 하나님이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십니다. 7:51절, 성령의 하나님, 7:52절,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하나님은 곧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나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그 믿음 때문에 여기 서 있습니다. 내가 그 믿음 때문에 죽더라도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영광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사나 죽으나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스테반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되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을 믿습니까? 모든 인생은 결국 두 가지로 결판납니다. 첫째 하나님을 믿느냐? 둘째 믿는다면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믿습니까? 무서운 하나님을 믿으면 언제나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젊은 루터가 그랬습니다. 루터가 어느날 친구와 함께 집에 다녀오다가 들에서 벼락을 맞았습니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루터는 간신히 살았습니다. 그때부터 루터는 전전긍긍, 불안하게 살았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하나님이 벼락을 내리지 않나 공포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어야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마25장에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을 남기고 두 달란트받은 사람은 둘을 남겼는 데 하나 받은 사람은 땅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다시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왜 그랬냐고 하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마25:24,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알았습니다. “굳은 사람”,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굳은 분입니까? 감정표현도 없고 항상 딱딱하고 무섭습니까? 저도 어릴 때 그렇게 알았습니다. 알고보니 아버지 이미지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 이미지는 아버지 이미지 따라갑니다. 아버지가 좋으면 대부분 하나님도 좋습니다. 아버지가 나쁘면 하나님도 나쁩니다. 아버지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자녀에게 하나님 이미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셔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아버지가 누구든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루이스 앤더슨이 말한대로 “모든 노력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렇습니다. 모든 능력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모든 은혜와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영광의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승리의 첫 번째 원리입니다.
하늘의 예수님을 바라보라
스테반이 보여준 승리의 두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55절입니다. 행7:55-56, “스테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절입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자, 지금 스테반에 유대인들에게 돌에 죽고 있습니다. 스테반이 잘못한 것도 없는 데 억울하게 죽어 갑니다. 그러면 누구를 바라 보겠습니까? 자기에게 돌던진 사람들을 바라 볼 것입니다. “너희들 두고 보자. 내가 하늘 나라 가면 너희들에게 천벌을 내릴거야”. 그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스테반은 사람을 바라 보지 않았습니다. 스테반은 또한 자기 자신을 바라 보지 않았습니다. 아무 이유없이 죽어가는 자기가 안쓰럽고 불쌍하고 또한 대견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테반은 자기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스테반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하늘도 어떤 하늘이냐가 중요합니다. 하늘의 구름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를 바라본 것도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다시 55절을 보십시오. 행7:55-56, “스테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신앙은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이면서도 또한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은 바라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젊고 유능한 은행 간부인 앤디가 아내의 살해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하는 내용입니다. 처음에 주인공은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고자 애를 쓰지만 부질없는 일임을 알고 탈출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탈출하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감옥의 벽돌을 보면서 싫어했지. 그것은 우리를 미치게 했지. 그런데 좀 더 시간이 지나면서 거기에 점점 익숙해지고 어느 날부터는 그것이 편하게 느껴지는 거야. 마치 감옥이 없으면 내가 죽을 것 같은 거야. 그때 깨달았지. 진짜 감옥은 내 안에 있다고. 그때 나는 결심했지. 탈출하기로”.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불편했던 감옥이 자꾸 보니까 편안해 지고 집같이 여겨지고 그것 없으면 못 살 것 같게 됩니다. 위기는 내가 감옥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옥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보는냐가 문제입니다. 자꾸 보면 그 사람이 됩니다. 자꾸 감옥을 보면 내 마음도 감옥이 됩니다. 건물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건물은 처음에 사람이 짓습니다. 그러다가 그 건물에 오래 살면 나중에는 건물이 사람을 짓습니다. 자꾸 보니까 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테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모양과 형태가 만들어진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 봅니까? 본대로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아브라함과 롯도 그들이 본대로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둘이 오랫동안 같이 살면서 양과 소가 많아졌습니다. 분가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롯, 네가 먼저 선택하라.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가고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다”. 그때 롯이 눈을 들어 바라 보았는 데 소돔쪽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 당시 소돔은 아무 비옥한 곳, 물좋고 정자좋은 곳이었습니다. 마치 애굽들처럼 물이 넉넉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롯은 소돔을 선택했습니다. 롯이 떠나고 나니 아브라함은 갈 데가 없었습니다. 눈을 들어 보니 광야가 보였습니다. 광야에 무엇이 있습니까? 풀이 있습니까? 물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창13:14,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아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롯은 소돔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광야를 바라보았습니다. 롯은 물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얼마후 소돔은 불과 유황으로 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축복받았습니다. 본대로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스테반처럼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바라보면 닮습니다. 스테반이 예수님 바라볼 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59-60절입니다. 행7:59-60, “그들이 돌로 스테반을 치니 스테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무릎를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테반은 먼저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지기전 겟세마네동산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되도록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바라보면 기도하게 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하신대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를 더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주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스테반은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죄를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스테반은 자기를 죽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으나 죄는 사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죄는 예수님만 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표현했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죽음의 순간,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예수님처럼 닮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기도하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남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래서 패트릭 존스톤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When we work, we work. When we pray, God works.) (패트릭 존스톤) . 고난이 있습니까? 하늘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아무 이유없이 핍박당하고 무시당했습니까? 가끔 나만 당하는 슬픔이 있습니까? 하늘의 주님을 바라 보세요. 예수님은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눈은 지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신 분, 그 분이 하늘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자기를 버려야 세상을 살린다
스테반이 보여준 세 번째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60절입니다. 행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테반은 아무 죄없이 죽었습니다. 참 억울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긴 역사를 보십시오. 죽은 자가 세상을 다스립니다. 역사의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을 보십시오. 모두 자기를 버린 자입니다. 억지로 버리면 타살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버리면 희생입니다. 계란도 자기가 스스로 깨지면 부화가 됩니다. 그러나 남이 깨뜨리면 후라이가 됩니다. 마5:13-14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아십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니”. 소금과 빛이 무엇입니까?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소금은 자기를 녹여 맛을 냅니다. 녹지 않으면 맛도 낼 수 없습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빛은 올리브 기름으로 밝힙니다. 해마다 9월이면 이스라엘 농부들이 올리브를 땁니다. 올리브를 따면 그것을 씯고 찧어 부숩니다. 아주 옛날에는 올리브를 돌위에 올려 놓고 사람이 일일이 발로 밟거나 절구를 이용하여 찧었습니다. 그 후에는 무거운 돌로 눌러서 짯습니다. 올리브 열매위에 무거운 돌을 덮고 누르면 기름이 나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라는 뜻을 눌러서 짠다는 말입니다. 빛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올리브를 찧고 부숴서 나옵니다.
영어 단어에 “영향력”이란 말이 있습니다. "influence"라고 합니다. 이 말은 ”flu" “흘러가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in flu 하니까 “안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flow in”, “안으로 유입되는 것”입니다. “독감”이란 단어가 그래서 나왔습니다. “influenza”. 무엇이 안으로 흘러갔느냐? 감기 균이 안으로 흘러갔습니다. 감기균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influence", 영향력은 안에 들어간 것이 다시 나온 것입니다. 누가 세상을 살립니까? 자기를 버린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남에게 들어가 다시 나옵니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영향력이 됩니다. 스테반의 죽음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입니다. 7:58절을 보십시오. 행7:58, “성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당시 사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스테반이 죽는 장면을 옆에서 다 지켜 보았습니다. 사울은 그때 유대교 신자였기 때문에 스테반이 죽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행8:1입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니라”.
그러나 막상 스테반이 기도하며 죽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죽어가는 스테반의 모습을 통해 엄청난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비록 신앙은 달랐지만 “야, 대단하다. 무엇이 저로 하여금 저렇게 죽게 하는가?”. 그 후 사울이 하나님께 돌아와 바울이 된 후 스테반의 영향력이 그에게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스테반의 정신이 그 속에 들어가 in flu 했습니다. 평생 스테반의 정신으로 선교했고 마지막에 로마에서 스테반처럼 순교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한 장면입니다(그림3). 손을 뒤로 묶이우고 참수를 당했습니다. 아마 죽어가면서도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주여 저들의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스테반의 영향력입니다.
스테반의 영향력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복음 전파에 불을 붙였습니다. 8장에 보면 스테반의 일로 인해 핍박을 받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빌립이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지역을 다니며 전도했습니다. 에디오피아에서 온 내시를 전도해 에티오피아를 지상에서 가장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또 그 영향으로 안디옥교회가 생깁니다. “아, 한 사람이 죽어 세상을 살렸습니다”. 바울 한 사람을 살려 그리스, 로마를 살리고 전도자들을 일으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스테반 자신은 죽어 예루살렘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지만 그로 인한 영향력은 민들레 홀씨처럼, 태평양의 파도처럼, 전 세계로 퍼져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스테반 한 사람만 죽이면 기독교는 끝난다 생각했지만 스테반이 죽음으로 오히려 복음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예수믿는 우리의 삶을 한마디로 오스왈드 샌더스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얻는 것으로 살고, 잃는 것으로 살린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얻는 것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무엇이나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더 구해야 합니다. “주여, 나로 인해 잃는 것도 있게 하옵소서”. 그동안 우리는 너무 얻는 것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이제 무엇을 좀 버릴까 무엇을 좀 잃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스테반처럼 꼭 순교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피흘리는 순교말고 희생하는 순교는 불가능할까요? 하나님, 우리가 무엇을 좀 버릴까요를 기도해야 합니다. 개인이 그래야 하고 교회가 그래야 하고 한국교회가 그래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시간을 조금 버릴 수 없습니까? 선교를 위해 물질을 드릴 수 없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재능, 지식, 몸, 충성을 드릴 수 없습니까? 그래서 얻는 것으로만 살아온 우리가 조금 잃는 것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까?
누가 최후 승리자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영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누가 고난속에서도 끝까지 승리합니까? 하늘의 예수님 바라보는 자, 보좌에 앉으신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는 자,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역사를 새롭게 하는 승리자입니까? 자기를 버려 남을 살리는 자, 얻는 욕심으로 살지 않고 잃는 기쁨으로 사는 자, 몸도 물질도 희생도 시간도 사랑으로 잃고 잃고 잃어 예수님처럼 스테반처럼 사는 자, 그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승리자들 되시기 바랍니다.
순교의 신앙을 본받아
양인순 목사 / 행 7:54-60
지금까지 교회는 순교의 피를 먹고 자랐습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가 세워진 이후 교회는 수많은 고난을 믿음으로 싸워 이겼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1866년 27살의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쪽 복음을 뿌리며 순교했습니다. 양화진에 가보시면 이름 모를 수많은 선교사들이 낯설고 물설은 이곳에 와서 뼈를 묻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산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도 있습니다. 6.25 공산치하에서 손양원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피 흘림을 통한 고난의 순교의 흔적이 오늘 우리를 있게 만들었습니다.
순교는 신앙을 지키거나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서 피 흘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적색순교라고 부릅니다. 피를 흘리고, 생명을 던짐으로 신앙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어쩌면 신앙인으로서의 최고의 영광일 수 있습니다. 일제치하나 공산치하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순교를 각오해야 했습니다. 순교의 결단은 짧은 시간이지만 그 결과는 오랫동안 기억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를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주후 2세기에는 순교자들은 모두 숭배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예배당을 건축하고, 순교자들의 유품이 제단 위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공격의 대상이 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순교자들을 성자로 추앙하여 성자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성자를 숭배하고, 성자들이 지금도 우리에게 무슨 공로를 끼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잘못된 행위입니다.
적색순교와 대비되는 표현으로 백색순교가 있습니다. 비록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바치지는 않지만 날마다 예수 정신을 가지고, 십자기를 지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 때문에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의 자유 속에서 마음껏 신앙고백을 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순교의 신앙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주님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적색순교보다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순교는 그 상황과 조건 속에서 결단하면 됩니다. 하지만 주님과 함께 오늘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가는 백색순교는 더욱 힘들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순교는 어떤 특정한 시대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삶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는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고 있는 것입니다.
루터교회가 가진 신조 중에 가장 유명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1530)에 순교신앙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 곧 성자들은 추모를 받아야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강건해질 수 있도록 우리는 그들이 받은 은혜가 무엇이고 어떻게 신앙을 지켜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순교자들은 마땅히 추모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우상시해서는 안됩니다. 그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아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지켜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간 우리가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은 가장 짧은 기간 동안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그는 설교한번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데반 그 이름의 의미대로 “면류관”처럼 빛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성령충만한 자요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충만하여 누구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본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매수합니다. 그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체포합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들을 동원하여 스데반이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거슬렀다고 고발합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천사의 얼굴은 무엇을 말할까요? 성령충만, 지혜충만, 능력충만한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대제사장은 스데반을 고발한 자들을 향하여 고소 내용이 사실인가를 묻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7장 2절부터 53절까지 기록된 스데반의 설교내용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무소부재한 분이심을 역설합니다. 돌과 나무로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면서, 그것을 우상시 여기는 그들의 잘못을 질타합니다. 스데반은 성전 안과 밖에서 표리부동한 자신들의 삶을 책망하는 선지자들을 박해한 유대인들의 잘못을 질책합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을 고수하기 위해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그들의 죄과도 책망합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미명아래 자신들의 종교적 관행과 전통, 이기심과 욕망, 기득권은 철저하게 고수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그들의 이중성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격렬한 반응을 보입니다. 5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7:54)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한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잘못을 깨달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쓰인 단어 ‘찔리다’는 ‘디아프리오(diaprio)’인데 ‘마음이 온통 분노로 이글거렸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 ‘갈다’로 번역된 ‘브뤼코(briko)’는 ‘물어뜯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닌 짐승에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분기탱천하여 짐승처럼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짐승수준으로 이를 갈면 분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최고의 법정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자기들의 모든 치부를 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앞에 있는 스데반은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속히 그 자리를 떠나 도망쳐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본문 55-56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7:55-56)
여기서 우리는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스데반의 모습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충만함을 지속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은 성도는 결코 순교자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순교자의 길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용기에 의해 이뤄지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그 마음속에 결단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셔야 합니다.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와 절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권능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고자 분노하는 유대인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영광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봤습니다.
오늘 우리가 백색순교자로 살아가는 비결은 다름 아닌 성령충만함을 날마다 덧입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려야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상황이나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삽니다. 그 속에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로움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고,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기 원하십니까? 날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십시오. 날마다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깨닫고 주께로 돌이키십시오. 날마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 앞에 순종하려고 몸부림을 쳐보십시오. 성령충만하면 우리는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위한 삶으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점점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나타냅니다.
그 속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칩니다. 성령충만함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자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날마다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스데반은 분기탱천하여 이를 갈고 있는 유대인들 앞에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늘을 본다는 것은 땅에 것에 매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지금 상황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지만 그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위를 바라보는 동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늘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땅을 바라보면 온갖 더럽고 추악한 것들이 보입니다. 땅을 보면 우리는 낙심하거나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위에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었다가 살아난 우리들은 위에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곳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영광의 보좌에 계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이 생깁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절망을 뚫고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은 위기상황에서 땅을 보지 않고, 위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봤습니다. 그 결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봅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산헤드린의 공회원들은 오직 땅만을 보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기심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욕망이나 이기심에 매여 있으면 땅만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 속에 희망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안식이 있습니다. 놀라운 평강이 있습니다. 날마다 땅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 가기시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 기도와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순교자의 길은 아무나 걷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하고, 위에 것을 바라보는 자만이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한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난 후 분노가 극에 달한 유대인들은 큰 소리를 지릅니다. 분을 참지 못하는 격앙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듭니다. 성 밖으로 내던지고 돌로 칩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내는 거룩한 곳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처형할 때는 반드시 성 밖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유대인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돌로 그를 칩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돌로 사람을 쳐서 죽일 때는 세 단계를 거쳤다고 합니다. 먼저 증인이 보는 앞에서 머리를 잡고 돌로 머리를 내리칩니다. 두 번째로 돌로 가슴을 내리찍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졌다고 합니다.
스데반은 지금 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가슴이 터졌습니다. 수없이 날아오는 돌에 맞아 그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고, 깨지고 부숴집니다. 그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바로 그 순간 스데반은 부르짖으며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7:59)
죽음의 상황에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쳐와도 머릿속이 하얗게 됩니다. Why Me? 하필이면 왜 접니까? 원망 불평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아보였던 사람도 고난과 시련 앞에 무참하게 믿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스데반은 그 죽음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드렸던 십자가의 기도입니다. 스데반은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사모했던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도 언젠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고통을 당할 때 나도 이렇게 기도해야지 늘 주님의 기도를 품고 있던 자입니다.
우리는 어떤 위기상황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보면 평소에 그 사람의 모습을 압니다. 위기상황에 봉착하면 무의식적으로 그 마음속에 담겨있는 말과 행동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언제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올지라도 스데반처럼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고통 속에서도 무릎을 꿇습니다. 크게 주님을 부르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이 기도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기도입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유대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메시야이신 예수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패역한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언젠가 저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기를 사모하는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의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우리에게도 이 시간 스데반이 지녔던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증인으로 지켜보던 자가 있습니다. 바로 사울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순교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죄인들을 향한 용서를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은 자가 있습니다. 사울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백으로 스데반의 순교현장에서 지켜본 그의 모습이 얼마나 놀라웠던가를 고백합니다.
순교는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놓습니다. 비록 스데반은 죽었지만 그 죽음은 핍박자 사울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 바울로 만드는 출발점이 됐습니다. 그의 죽음은 예루살렘 공동체에 머물던 복음을 이방 안디옥으로, 로마로 흩어지게 하는 선교의 폭발점이 됐습니다. 그는 순교의 제물이었지만 그 이름의 의미대로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됐습니다.
경기도 '능내'라는 곳에 가면 미재 부락에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전도를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회장이 되었습니다. 신유박해 때 고난을 받고 사형장으로 가면서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나는 영원한 길로 가고 있다.”
그리고 형틀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할 때 눈을 뜨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면서 말했습니다. “땅을 보고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낫다.” 이 말에 겁을 먹은 망나니가 자신 없이 칼을 쳐서 목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정약종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하늘을 우러러 손을 들어 십자 성호를 긋고 참수를 당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아 사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날마다 성령충만함으로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땅을 보며 살아가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보배임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서 조차 주님을 생각하며 용서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을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 순교의 신앙이 우리 삶 속에서 이뤄질 때 미천한 우리를 통하여 또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썩어지는 밀알이 될 때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놀라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신앙을 본받아 주님 앞에 영원히 별과 같이 빛나는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십자가의 길> 찬양을 주님께 드립니다.
♫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 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
천사의 죽음
이수영 목사 / 행 7:54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첫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며 또한 하나님의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스데반이 자신의 죽음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그의 설교를 시작하기 직전의 상황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의 맨 끝에 있는 말을 주목합니다.
즉 15절에서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말의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주석가들이 그것을 스데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봅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밝고 환하게 빛났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 충만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얼굴이 어두울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말을 그저 그의 얼굴이 빛났다는 뜻으로만 보는 것은 그 말이 지닌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 그의 얼굴이 빛났을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 때 어떤 상황에 있었습니까?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및 소아시아에서 온 소위 자유민들, 즉 노예였다가 풀려난 사람들과 그 자손들이 스데반에게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그들이 논쟁에서 말로 스데반을 당해낼 수 없자 사람들을 매수해서는 그가 하나님과 율법을 모독했다고 고발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또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스데반을 붙들어 공회에 세우게 했습니다.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스데반의 혐의를 확인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십중팔구 그 악랄한 고발자들과 모든 공회원들 앞에서 긴장해 있거나 겁에 질려 사색이 되어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분기에 차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환한 얼굴을 하고 있을 상황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을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겠습니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하면 우리는 일차적으로 천사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천사는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계획과 할 일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천사는 늘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뜻을 전하며, 하나님의 일을 집행하는 도구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듯 그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보였음을 뜻하는 것이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는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또 그가 그의 할 일과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한 지혜와 능력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행했을 뿐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나라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사람들을 향해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예수가 참으로 영광 중에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 그의 아들이심을 영안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행7:55-56은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자기가 서있다는 사실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일하며 살아야 함을 의식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그가 하는 하나님의 일로 인한 어떤 두려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사실들이 그의 얼굴로 하여금 천사의 얼굴 같이 보이게 했던 것이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교인들로부터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6:5)으로 인정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다"고 합니다. 그는 비록 집사의 한 사람으로 택하여 세움을 받았지만 단지 구제하는 일과 교회의 재정을 출납하는 일만 한 것이 아니라 놀라운 이적기사를 행했고 특히 병든 이들을 고쳐주는 권능을 행사했습니다. 그렇게 충만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에게 주신 은혜와 권능은 그로 하여금 또한 뛰어난 사고능력과 언변을 구사할 수 있게 했습니다. 본문 9-10절에 보면 그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그와 더불어 논쟁하던 사람들이 그를 당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공회에 붙들려 가서 그를 고발하는 자들과 온 공회원 앞에서 행한 설교는 참으로 훌륭한 설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신 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내신 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일과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바를 적시할 때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을 만큼(행7:54) 그의 설교는 웅변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돌로 스데반을 칠 때에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간구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도들과 다름없는 주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얼굴만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로 천사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천사 같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로 스데반과 논쟁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고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으며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 스데반이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순교인 것입니다. 죽어야 할 정당한 이유가 없이 죽을 때 그것이 순교가 됩니다. 악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진리와 믿음과 의를 지키며 살 때에 순교의 위험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순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명하시는 그의 일이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로 인하여 벌어질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나를 그에게로 받아주시리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순교입니다.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스데반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스데반이었기에 그 어느 사도들에 앞서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는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순교는 자랑스러운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죽음, 한 천사의 죽음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위로를 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믿음과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순교를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한 상황 하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순교적 삶의 자세를 요구하는 일은 늘 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적 삶의 자세를 항상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그 천사와 같은 얼굴을 우리도 늘 지니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순교는 두려운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돌을 맞아야 할 일이 없는데 돌을 맞게 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상은 악한 사람을 치지 않고 의로운 사람을 칩니다. 거짓된 세상은 거짓된 자를 정죄하지 않고 진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을 정죄합니다. 그러기에 악하고 거짓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늘 순교의 위험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처럼 스데반의 죽음도 매수와 충동질과 거짓 증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악한 세상은 매수와 충동질과 거짓 증언을 밥 먹듯이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순교적 상황 속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은 사실은 그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반성하고 회개하지는 않고 바른 말로 깨우쳐주는 사람을 향해 이를 간 것입니다. 그들은 의인이 하는 말을 막으려고 일제히 큰 소리를 질렀으며, 바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자신들의 귀를 막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을 향해 계속 돌을 던졌습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며 진리를 말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부끄럽게 여겨서도 안 되고 피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천사 같이 사는데도 고난을 당한다고 탄식할 것이 아닙니다. 천사 같이 살기에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순교적 삶을 사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우리에게 순교적인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또한 순교자를 만드는 핍박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순교자를 만드는 일은 악한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서지 못한 교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바로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실하게 살며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 사적인 감정과 이해관계 때문에 남을 비방하고 모함하며 거짓말로 인격의 흠집을 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른 소리에 귀를 막고 바른 소리 하는 입을 막으려 하거나 그에게 돌을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마음에 찔리는 말을 해주면 그것을 고맙게 여기고 얼른 자기 자신을 고치려 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감정을 품고 그 사람을 죽이려 한다면 그런 자보다 더 딱하고 불쌍한 인생은 없는 것입니다. 순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자들이 같은 믿음의 사람을 부당하게 죽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쓴 본문의 저자가 누구입니까? 누가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서 들었겠습니까? 누가는 끝까지 바울을 동행했던 그의 동역자였습니다. 아마도 누가는 바울에게서 스데반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바울이 아직 사울이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행7:58에 보면 사람들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했습니다. 이 사울 자신이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음을 보았으면서도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리면서도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던 사람들 중에 사울도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돌에 맞으면서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던 스데반에게 계속 돌을 던지도록 사람들의 겉옷을 받아 지켜준 사울이었습니다. 나중에 다메섹을 향해 가던 길에서 주님을 만나고 회심한 바울 자신이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켰다"(행22:20)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다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바울은 자신이 흘리게 한 스데반의 순교의 피를 자신의 생명으로 갚을 또 하나의 순교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오늘 순교자기념주일을 맞아 순교적 삶을 살기로 새롭게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순교를 해야 할 때에는 순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그러나 먼저 그 누구도 순교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천사의 얼굴을 가진 이들로 가득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천사가 죽임을 당하는 일이나 고통을 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회
이중표 목사 / 행 7:54-60
우리 주님께서 한신교회를 1977년 6월 5일 창립케 하셨습니다. 한국 민족을 사랑하고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계획속에서 한신교회가 탄생했습니다. 한신교회의 창립과 함께 항상 기억되는 서정주씨의 시가 있습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밤새도록 울었나 보다"
청계산에 들어가 6개월을 울고서 한신교회 창립 비전을 이 종에게 주셨습니다. 한신교회 비전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우러러 보는 그리스도인을 스데반이라고 합니다. 스데반은 이름 자체가 위대하고 이름대로 산 사람입니다.
예수교 사제이며 심리학자인 헨리 나우엔은 "목회 사역은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가운데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스데반 교회가 되는 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인들이 많은 것이 가장 복된 교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살다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데반을 닮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증인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땅끝까지 예수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순교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죽는 것입니다. 영광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감동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역사에 길이 남아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최고로 인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실로 스데반은 짧게 살았으나 굵고 크게 산 자요, 하늘에 계신 예수님까지도 자리에서 일어서게 한 놀라운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처럼 죽었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증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신앙을 간증하면서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있었다"(행 22:20)라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은 죽었으나 사도 바울은 땅끝까지 증인으로 이어가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증인입니다. 스데반이 없었으면 사도 바울이 없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령과 은혜가 충만했는지 그에게 능력과 기사와 표적이 따랐습니다. 그가 얼마나 지혜가 충만하였는지 입을 열면 그의 설교에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사랑이 넘치는 집사였습니다. 스데반은 구제하는 일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랑의 손을 폈습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자비의 손을 펴서 언제나 가난한 자가 있는 곳에 스데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에 대하여 가장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성경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간단하게 '죽었다'는 말로 기록되어 있으나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한 것은 스데반이 죽을 때의 모습이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신앙이 바울 사역으로 꽃이 피었습니다. 스데반에 있었던 가능성이 바울이 된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초대교회 큰 타격이었으나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중대한 섭리였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신랄하게 책망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 7:51-53)
이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스데반은 이때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했습니다. 그때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 7:55-58) 라고 하였습니다. "저희가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것과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은 같은 사건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것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스데반이 공통으로 닮은 모습이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본 것은 예수님께 배웠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수많은 무리가 있을 때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심으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막 6:41).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요 11:41).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다락방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예수님은 언제나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에게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이나 인격을 닮을 수는 없습니다.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그 모습을 닮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삶의 자세는 닮을 수가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배워야 합니다.
스데반의 믿음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그 믿음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본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을 설교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행전 7장 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능력을 간구합니다. 또 우리는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는 자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좋으신 하나님으로 임재하셔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다 자신의 입장에서 자기 중심적인 소원을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하고 영광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자나깨나 영광의 하나님을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리들이 이를 갈며 달려들 때 "주님, 나를 도와주소서. 저 원수의 무리에게서 나를 보호하소서." 하고 간구한 것이 아니라 "주여, 나는 죽어도 좋사오니 영광을 받으소서." 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나깨나 영광의 하나님을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사는 자는 가난해도 영광이 나타납니다. 실패해도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환난중에도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이 영광은 성공이나 부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고 그를 찬양하고자 하는 삶의 목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목적이 고상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인간의 실패 가운데 최고의 실패는 사는 목적의 실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실패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사랑했습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56절)
스데반은 '인자'를 보았습니다.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영광스러운 인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영광스러운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을 보는 그 믿음 위에 섰던 것입니다.
인자 예수는 죽으러 오신 예수였습니다. 죽으러 온 예수는 희생하며 산 예수를 말합니다. 스데반은 인자 예수를 믿엇고 그 예수를 바라보았기에 인자 예수의 사랑을 본받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사랑은 인자 예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인자 예수의 사랑으로 스데반은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인자 예수의 사랑을 본 스데반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닮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며 용서하고 죽습니다.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원수를 사랑하였습니다. 원수들이 이를 갈고 달려들 때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고 자기를 저주하는 자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원수들은 이를 갈며 달려들었으나 성령이 충만하고 스데반은 입을 열고 저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그는 사랑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최고의 사랑은 원수 사랑입니다. 구제하고 친절을 베푸는 사랑은 비교적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해하고 죽이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사랑입니다.
소설가 정연희 씨는「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는 명의순 씨의 숭고한 삶의 일생이 사실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의순씨는 평양 장대현 교회 맹관호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해방 후에 월남한 그는 한신대학에 다니다가 한국전쟁을 만나 북한군에게 잡혀서 고문을 당했고, 모진 고생 끝에 부산으로 피난 내려가던 중 미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는데 북한군 첩자로 오해를 받게 되고 결국 포로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2년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중환자들을 돌보면서 물을 떠다가 발을 씻겨주고, 죽어가는 결핵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밤새워가며 위로하고 기도해 주는 거룩한 나날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수만명의 포로 수용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억울하게 거제도 수용소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주변 사람들이 미군당국에 진정한 결과 석방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옥같은 포로 수용소에 그대로 남아있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은 성 프랜시스의 사상적 영향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친구에게 써 보낸 편지에 프랜시스의 기도를 인용했습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받을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천국으로 들여보내시든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소서. 그리고 만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가 없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에 남아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겠나이다."
이러한 프랜시스의 기도를 그는 실천하려 했던 것입니다. 친구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담담하게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 곳에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라네. 내가 이 곳에 남아있는 것은 결코 희생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아닐세. 이 곳에 있는 형제들 중에는 나 같은 것이나마 필요로 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밥 한 톨을 가지고 서로 으르렁거려야 했던 그 살벌한 포로 수용소에서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오래 하고 또 그 비참한 환경 속에서 온갖 병자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그의 몸은 약해질대로 약해졌고, 나중에는 몸에 병까지 얻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중공군 포로들은 이렇게 통곡하면서 추도문을 썼습니다.
"1952년 8월 11일 새벽 3시, 우리는 맹선생의 죽음을 통곡합니다. 애통합니다. 선생님께서 환자를 다 씻긴 다음에는 언제나 시편 23편을 중국말로 더듬더듬 읽어주시던 음성이 귀에 들려옵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외치시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목자 잃은 어린 양처럼, 어머니를 잃은 고아처럼 슬픈 포로민으로 이제 누구를 바라보며 살 것인지 우리는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목자이신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곡합니다. 맹 선생님 편히 잠드소서. 우리는 맹 선생님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포로 수용소 중공군 병동 환자 일동이 드립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습니다. 그는 저희 한신대학교 선배로 위대한 생을 살다 2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간간히 친구들에게 보냈던 편지들이 모아져서 그의 생애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포로 수용소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께 '사랑의 잔이 넘치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참 목자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그 사랑의 잔을 포로 환자들에게 사랑의 잔으로 부었던 것입니다.
천국 소망으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소망의 사람입니다. 소망은 하늘나라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영혼은 주님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스데반은 자기 영혼이 가야 할 곳을 알았습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59절)라고 말합니다. 이 기도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소망을 두고 하늘 영광을 위하여 생명을 드린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스데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산 것입니다.
경기도 '능내'라는 곳에 가면 미재 부락에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전도를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회장이 되었습니다. 신유박해 때 고난을 받고 사형장으로 가면서 "나는 영원한 길로 가고 있다"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리고 형틀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할 때 눈을 뜨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면서 "땅을 보고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겁을 먹고 망나니가 자신없이 칼을 쳐서 몸이 끊어지지 않아 정약종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하늘을 우러러 손을 들어 십자 성호를 긋고 참수를 당했다고 합니다.
"주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하고 살아서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스데반의 신앙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니요, 예수 안에서 산 자입니다.
증인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증언한 사람들입니다. 이 행복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이며,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서도 웃고 소망 중에 기뻐하는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사랑하는 맘 변치 못해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
순교자는 산자의 신앙을 가졌기에 산자의 행복을 최후로 증거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평소에 가진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이름의 사람
스데반은 참으로 위대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스데반이라고 하는 말은 그 이름 자체가 '스테파노스'( )라고 하는 헬라어로 '면류관'이라는 뜻입니다. 면류관은 왕이 쓰는 것으로 영광의 상징이며 충성된 자나 사랑하는 자가 받는 영광의 상징입니다. 면류관은 '자랑스럽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면류관이요, 자랑스러운 존재를 의미합니다.
스데반은 어디에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면 스데반이요, 면류관입니다. 사회나 직장이나 교회 어느 곳이든 희생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그 모임의 자랑이며 면류관입니다.
오늘 이 교회에서 스데반은 누구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선언하고 부활의 신앙으로 사는 별세의 성도입니다. 그 사람이 스데반이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성도입니다.
스데반은 누구든지 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되어야 됩니다. 스데반 목사, 스데반 장로, 스데반 권사와 집사, 스데반 성가대, 스데반 구역장, 스데반 성도가 되십시오. 이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하늘나라에 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벌떡 일어나셔서 "오, 스데반아! 어서 오라"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감고 스데반과 같이 영광스러운 존재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스데반의 영광스러운 믿음을 가져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의 사랑을 가져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의 소망을 가져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은 살아도 스데반이요, 죽어도 스데반입니다. 예수 때문에 행복하고 예수 때문에 죽어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죽으면서 스데반과 같이 불멸의 웃음을 지어야 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죽이는 자를 용서하며, 그리고 괴롭히는 자를 위해 복을 빌어주고 마지막 죽으면서도 그 얼굴에 환희를 가지고 죽어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죽으면서 천사처럼 빛이 났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스데반은 별세의 증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아름답게 증거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첫 순교자와 교회를 향한 큰 박해
이준원목사(콜럼버스교회) / 행 7:54~8:3
우리가 여행을 할 때는 대개 호텔 방에서 잡니다. 호텔 방을 들어가면 열고 들어간 문 안쪽에 ‘비상시 주의사항’이라는 것이 붙어 있는 것을 봅니다. 만일의 사태를 위해 비상구 위치나 대비 방법을 써놓은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본 내용인데, 뉴질랜드의 오클랜드(Auckland)에는 남반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스카이타워(Sky Tower)가 있고 그 옆에 스카이시티 호텔(Sky City Hotel)이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사업차 여행을 많이 하게 된 어떤 분이 출장을 가서 그 호텔에 묵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상시 주의사항’에 다른 호텔에서는 못 본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크게 세 가지 내용이었는데, 첫 번째는 “Do not use lift in fire”, 그러니까 “화재 발생 시 승강기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어떤 건물에나 있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Walk, don‘t run”(뛰지 말고 걸으라)이었습니다. 서두르며 뛰다가 불 속에서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호텔에 붙어 있지는 않아도, 종종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아주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Do not go back”이었습니다. “되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도 호텔에서 많이 자보았지만 이런 것은 본 기억이 없습니다. 불이 났는데도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뭔가 귀중한 것을 두고 온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도 불이 난 경우에 절대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화재 현장에서는 불도 아주 무서운 것이지만, 유독가스 때문에 불과 1-2초 사이에 살고 죽는 것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귀중하고 값비싼 것이라 해도, 생명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1초 사이에 생사가 갈리는 위급상황에서 자기 귀중품을 두고 왔다고 그것을 가져오기 위해 방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그 물건보다 자기 생명이 더 하찮다고 여기는 아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귀중한 것을 손에 넣더라도, 그것을 잡는 순간 개스를 마시고 질식해서 죽는다면 그것을 누릴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방에 두고 온 것이 아무리 귀하고 소중해도 결코 되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직 생명을 살려줄 수 있는 비상구를 향해 옆을 보지 말고 앞만 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데 눈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오직 비상구를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런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자기가 자기 생각에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그러나 생명을 주지는 못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유일하게 생명을 살리는 비상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 있다고 그리로 눈을 돌려서는 생명이 위급해집니다. 믿음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죽게 되고, 믿음이 있으면 생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성경을 죽 읽어보면,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토록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방에 있다고 화재가 난 위급상황에서 되돌아가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을 붙잡겠다고 되돌아가는데,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귀해도 자기 생명보다 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되돌아가겠다고 하는 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니까 죽는 길이기 때문에 못 가게 막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상숭배를 하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길을 택하여 나아간 믿음의 선배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스데반입니다.
1. 스데반과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보인 반응
1) 스데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스데반은 거짓 증인들에 의해 모함을 받아 산헤드린 공회에 섰습니다. 공회는 71명으로 구성되었고 대제사장이 의장이며, 국회와 비슷한데 종교문제만 다루는 유대인들의 기관입니다. 스데반은 그곳에 섰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이 자리에 섰고, 예수님도 이 자리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바로 그 서슬 퍼런 공회 앞에 섰을 때, 스데반은 구약의 이야기를 죽 하면서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는 게 아니라, 우리와 늘 동행하시는 분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51절)라고 통렬하게 그들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4절)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인데, 그들은 마음에 찔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 회개가 아니라 증오와 살인의 마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이를 갈았다’는 것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며 먹이 앞에서 아주 무섭게 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짐승과 같은 증오와 분노와 미움으로 스데반에게 나아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지만,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지적을 받았을 때 대개 두 종류로 반응합니다. 하나는 겸손하고 온유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와 반대로 교만하고 거짓된 마음 때문에 자기 허물을 지적받았을 때 오히려 자기 잘못을 지적한 사람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원수처럼 여기면서, ‘네가 가만히 있었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데, 왜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냐?’라고 하며 오히려 잘못한 사람이 화를 냅니다.
사실 내용을 보면 스데반의 설교는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와 비슷하고, 어떻게 보면 더 뛰어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마음에 찔려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그날 3천 명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이 사람들은, 마음에 찔린 것은 같았지만, 왜 이를 갈면서 스데반을 죽이게 된 것입니까?
물론 말하는 사람이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교회의 리더였고, 늘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라고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사도가 아니었고 소위 일곱 집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이곳저곳에서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헬라파 유대인들, 즉 해외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통 히브리파 유대인인 베드로가 하는 말을 듣고 귀를 기울이다가 마음에 찔려 회개했는데, 스데반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히브리파 본토 유대인들이고 공회원들이며 거짓 증인들도 있고 다 같은 편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본토도 아니고 헬라파로 다른 데서 온 스데반이 자기들을 가르친다고 느껴지니까 분노가 일어났고, 신성모독이라고 하며 죽이게 된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요한과 함께 공회에 잡혀갔는데, 거기서 담대히 예수님의 부활과 그분을 믿는 믿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때 이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죽이고 싶었지만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스데반 혼자이니까 죽여 버리게 된 것입니다.
2) 사람들에 대한 스데반의 반응
이렇게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 스데반은 놀라운 반응을 보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5-56절)
스데반은 크게 네 가지로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 스데반은 성령 충만했습니다.
모든 예수 믿는 사람 안에는 성령이 함께 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모든 크리스천이 다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나고 감정이 복받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은 성령 충만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상태,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데반은 바로 이 순간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환경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환경이 너무 중요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조금만 상황이 좋아지면 기뻐하고, 조금만 환경이 나빠지면 좌절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성령 충만한 사람은 상황에 따라 마음이 오락가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지금 재판을 받으면서 사형을 당하기 직전인 최악의 상태에서 최선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둘째,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주목했습니다.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살기등등한 사람들이 있는데, 스데반은 그들을 보지 않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우리도 해야 할 일이 바로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그냥 하늘만 쳐다본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늘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땅을 보면 실망과 좌절과 막힌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보며 하늘의 관점으로 내려다보면 주님의 길이 보이게 됩니다. 스데반은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지만 하늘을 봤습니다. ‘내가 사형선고를 받을 것인가? 내가 죽을 것인가? 몇 년 형을 받을 것인가?’ 하면서 재판 결과에 고민하지 않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셋째,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하늘을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봐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하늘은 sky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heaven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볼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넷째, 스데반은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매주 사도신경으로 무엇을 고백합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봤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그냥 가만히 앉아서 세상 끝 날까지 쉬고 계신 것이 아니라, 로마서 8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바로 그곳에서 우리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데반이 죽기 직전의 위기상황에서, 마치 군대가 출정식을 하며 떠나려는 것과 같은 자세로 서 계셨다는 것입니다. 스데반도 그것을 보고 너무 신기해서 예수님이 서 계시다고 말한 것입니다.
2. 스데반의 순교
그런데 그러한 스데반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7-58절)
그들은 짐승처럼 이를 갈고 짐승처럼 큰소리로 울부짖으면서 일제히 달려들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신성 모독죄로 돌로 쳐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인을 처형할 때 반드시 이렇게 성 밖으로 끌어내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죄인은 부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의 거룩함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다에서 못 박아 죽였고, 스데반도 성 밖으로 끌고 나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죄인을 돌로 쳐 죽일 때 그 죄인을 고발한 증인들이 가장 먼저 돌로 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도 보면 증인들이 돌로 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이 매수한 거짓 증인들이었습니다. 거짓으로 스데반을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치기 전에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드디어 사울(우리가 아는 그 사도 바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거짓 증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는 말은, 사울이 그곳에 모인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 앞쪽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곳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직접 나가서 돌로 친 것이 아니라, 뒤에서 조종하는 실제 리더였습니다.
지금 첫 번째 증인이 스데반의 머리를 돌로 쳐서 쓰러뜨리고, 두 번째 증인이 스데반의 가슴을 돌로 치고 나서, 무리들이 기다렸다는 듯 돌 세례를 퍼부으며 돌로 쳐 죽이는 끔찍한 장면입니다. 사실 아이들이 작은 돌 하나만 던져도 유리창이 깨어지고 사람에게 맞으면 다칩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라 주먹 만한 돌을 있는 힘을 다해 던지니까 얼마나 아프고 치명적입니까? 그대로 죽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장면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똑똑히 목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 스데반이 놀랍게도 영원한 생명의 비상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드리며, 자신을 돌로 쳐 죽이며 살기등등한 짐승 같이 달려드는 저 사람들도 주님 안에서 죄 사함을 얻기를 기도하는 모습도 생생하게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죽어 가면서도 스데반이 놀라운 말을 하는 것을 사울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었습니다. 어떤 말을 했습니까?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59-60절)
스데반은 마지막에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 말을 하고 죽었습니다. 첫째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급박한 상황입니다. 돌에 맞아 피 흘리며 정신을 잃어가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다급히 소리친 겁니다.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상황, 피를 철철 흘리면서 머리가 깨지고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님께 자기 영혼을 받아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이런 고난이 오면 하나님을 그냥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마지막 순간 주님께 자기 영혼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크게 불렀습니다. 누구나 다 들을 수 있도록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고 급박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 두 기도가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기도입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일곱 마디 중 두 마디입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 23:46). 그리고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
예수님이 하셨던 기도를 스데반도 죽어가는 상황에서 하고 있습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까지 스데반이 죽는 순간에 이른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기본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면 그게 무슨 사랑이냐? 원수도 사랑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한다는 개념은 인간 안에 없는 개념입니다. 여러분, 나를 돌로 치고 죽이려 드는 사람을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만 있는 개념이 원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은 정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잔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떤 이단들은 죽으면 정말로 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표현이 아닌 것을 우리는 다 알지 않습니까? 정말 자는 것이라면 왜 시체가 썩습니까? 그러니까 죽은 겁니다. 그런데도 왜 잔다고 표현합니까? 우리의 몸이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첫 번째 순교가 가져온 결과
1)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교회에 불어 닥친 큰 박해
스데반은 교회 역사에서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믿음의 승리인 순교의 순간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8장 1절)
놀랍게도 순교의 결과는 큰 박해였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오히려 박해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정말 이상합니다. 순교의 결과가 좋은 쪽으로가 아닌 아주 나쁜 쪽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 이런 역설을 많이 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런 것이 많습니다. 주님을 위해 수고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아주 열심히 했는데 그 결과가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냥 나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위험한 일도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을 위해 희생했는데, 아무 대가도 없고 보상도 없으며 오히려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면,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주님 뜻대로 살아보려 했는데 일이 더 안 풀리고, 직장에서 해고되고, 사업은 문을 닫아야 하고, 돈이 없어서 쫓겨나게 되면, 그럴 때 우리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주님의 정의와 진리를 위해 살았는데 그 결과가 너무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까? 그런데 그것을 계기로 오히려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박해나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은 바로 이런 고난과 박해 속에서 오히려 성장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순교의 피를 흘린 곳에 오히려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고난과 박해를 통해서 이 땅에 확장이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도 고난 없이 자라지 않습니다. 편안하게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축복을 받으면 신앙이 잘 자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해달라고 해서 열심히 기도해주었더니 일이 잘 풀리고 돈도 잘 법니다.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 얻고, 높이 올라갑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교회에 발을 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바빠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하게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일이 잘 풀리고 세상에서 잘되면 더 잘 믿을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대부분은 고난을 통해 성장합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면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 합니다. 그래서 축복 가운데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혹시 고난이 오더라도 이게 재앙이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2) 박해를 통해 복음을 들고 흩어지게 된 성도들
무엇보다 박해가 크게 일어났기 때문에 성도들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박해가 온 것은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더 능력 있게 주님의 교회를 확장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흩어지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됐다. 적당히 편안하게 살면 된다.’라고 하는 것이 더 안 좋은 겁니다. 그렇게 안주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흩으십니다.
이때 순교 때문에 박해가 왔는데, 박해가 오니까 흩어져야 했고, 흩어지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복음이 이곳저곳으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1장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셨습니까, 안 임하셨습니까? 임하셨습니다. 권능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습니까, 안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를 것이라고 하셨는데 갈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8장 1절에 보면 어떻게 됩니까?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고, 그 수만 명 되던 사람들이 몇 명 안 남고 나머지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안 나가니까 흩어버리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다른 데로 가지 말고 여기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다렸더니, 정말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이 기도할 때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셔서 방언을 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루에 3천 명이 들어오고, 그 후에 남자만 5천 명이 들어오며, 교회가 수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내 것 네 것 없이 나눠 쓰고, 교제하고, 예배하고, 떡을 떼고, 날마다 모여서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고 기적들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뭘 느꼈겠습니까? ‘여기가 천국이다! 너무 좋다!’ 그런데 여기는 우리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여기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은혜 받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했지만, 예루살렘이 목표는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일단은 예루살렘에서 그 근방의 유대 지역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 유대인들과 원수 관계에 있는 사마리아로 나가고, 그 다음에는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땅 끝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지리적인 예루살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땅 끝까지 주님의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다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꾸 편한 것을 찾고 안주하려 합니다. 신앙생활이 좋고 교회가 괜찮으면 거기 안주하려 합니다. 모험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고생 끝났고 편안한데 뭘 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 가니까 하나님이 흩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주하고 편안하게 하면 하나님이 흩으실 겁니다.
8장 1절의 박해가 왜 일어났습니까? 1장 8절을 안 했기 때문입니다. 1장 8절대로 하니까 그 후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구조가 1장 8절의 구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3) 좋아지지 않고 더 악화되는 상황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2-3절)
이 경건한 사람들은 교회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와서 스데반을 장사하고 울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사람도 웁니다. 장례식에서 ‘믿음의 사람은 울면 안 됩니다.’라고 하면 잘못된 겁니다. 감정으로는 슬픕니다. 그러나 소망 없는 사람 같이 울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만날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이들도 비참하게 죽은 것 때문에 슬퍼서 우는 것이지,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때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사울이 아예 교회를 잔멸합니다.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고 아예 각 집에 들어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이렇게 순교도 일어나고 믿음으로 나아갔지만, 상황이 변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악화되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당연히 상황이 바뀌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상황을, 이 환경을 변화시켜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 별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변했는데 내가 안 변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변하면, 나를 통해서 상황이 바뀝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기도의 응답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기도 응답이 안 되고 오히려 반대로 악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이것이 저주가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응답이 잘될 때도 있지만, 기도한 것의 반대로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지만, 사도 바울도 세 번이나 목숨 걸고 기도했는데 낫지 않았습니다. 기도해도 안 될 수 있습니다. 평생 병을 안고 살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을 변화시켜주실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변화를 안 시키시고 더 악화시키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럴 때도 하나님이 그 뒤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 당장 눈에 안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나를 변화시키시는 역사입니다. 이 큰 박해 때문에 초대교회 예루살렘 성도들과 사도들이 더 놀랍게 변화되었고, 더 성숙해졌고, 더 담대해졌습니다. 더 지혜로워졌습니다.
여러분, 상황은 바뀌는데 내가 안 바뀌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바뀌면 상황이 안 바뀌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상황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을 바꿔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주님, 이 상황을 통해 저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를 변화시켜주시고 주님의 시각을 갖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4)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세워진 사도 바울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죽는 이 자리에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 공회원들 70명이 있고, 거짓 증인들이 있고, 매수당한 사람들이 있고, 그 외에 바람잡이도 있어서, 최소 100여 명은 있었습니다. 그들이 스데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을 죽이는 데 가담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딱 한 명의 이름만 나오는데, 그가 바로 사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 딱 한 명만 나옵니다. 대제사장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사두개파나 바리새파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공회원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사울의 이름은 나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울이 처음 등장하는 이 7장과 그가 회심하는 9장 사이에 8장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스데반의 죽음이 사울이 변화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의 이름이 여기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앞으로 복음을 들고 나가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그의 이름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스데반의 죽음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본 사람이 사울입니다. 아마도 돌을 칠 때 그 피가 튀었을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는 스데반이 죽으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취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 자기 영혼을 맡기는 최후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이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나중에 사도 바울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내가 손해를 보고 억울하더라도 믿음의 길을 갈 때, 잘되면 좋겠는데 일이 안 풀리고 꼬이며 더 손해보고 악화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혹시 내가 주님을 따르는 그 믿음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나를 통해 사도 바울을 준비시키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은 그것을 모르고 죽었습니다. 천국에서는 아마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죽었지만,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결코 무의미하거나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을 탄생하게 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생애에서 혹시 열매를 못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은 다음에 나타나는 열매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여기서 못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데로 이사 가거나, 우리가 여기서 애썼던 분들이 다른 데 가서 열매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전혀 모르고 그냥 무의미한 것처럼, 손해만 본 것처럼 우리 인생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그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바로 우리의 고난과 핍박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후에 교회에는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복음의 큰 진보를 가져왔고, 특히 복음 전파를 땅 끝까지 이루는 사도 바울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의 역사이며, 바로 그것이 8장 이후의 사도행전의 내용입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께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
이대성목사(큰빛광성교회) / 행 7:54-60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죽음을 이긴 사람”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죽음을 이긴 사람” 여러분? 지금 잠깐 본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의 압권은 누가 뭐래도 8인조 오케스트라가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의 음악을 끝까지 연주하는 장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 중 악단의 단장인 웰레스 하틀리는 실재 인물이고, 그는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배에 승선했다고 합니다. 찬송가 364장 ‘내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여러분? 이 찬송을 천천히 연주하는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배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승선한 한 사람이 있었으며 배가 침몰하는 중에도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 분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죽음 앞에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위로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처음에 타이타닉이 세계에서 가장 큰 배이며 가장 안전한 배라고 소개하는 모습은 자연의 위엄 앞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무용지물임을 다시금 느끼게 합니다.
우리의 삶 또한 지금 제아무리 잘나가고 풍요롭다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에 죽음의 문제를 결단코 해결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문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 주신 분이십니다.
사도행전은 이 예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행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1장 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이 약속대로 사도행전에는 성령이 임하시는 이야기가 처음 나옵니다. 그 뒤를 이어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 그리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복음 전파가 확산되려 할 때에 커다란 장벽이 나타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주저했으며, 또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쉽게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좀처럼 복음 전파가 예루살렘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결코 이방인에게로 복음 전파의 발걸음이 내딛어 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이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뜻밖의 한 사람을 소중한 도구로 쓰고 계십니다.
그가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은 이방인들이 공용어로 사용하던 헬라어를 할 줄 아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렀다가 그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아예 예루살렘 교회에 머무르면서 신앙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그 열심이 두드러져 7집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에 이릅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는 집사로써,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는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던 중 마침내 체포되어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 심문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에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스데반이 순교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스데반의 순교 이후 복음 전파는 예루살렘을 뛰어넘게 됩니다.
그리고 이방 세계로 힘 있게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마치 둑이 무너진 뒤 물이 밭으로 논으로 집으로 시내 한 복판으로 가리지 않고 밀려들어 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밀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스데반 집사는 복음 전파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리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위대한 복음 전파사역의 귀한 길목에서 너무나도 소중한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예수 믿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를 위해 봉사한 기간 또한 정말로 짧습니다. 그러나 그는 짧으면서도 굵게 예수를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짧고 굵게, 여러분? 그는 너무나도 소중하게 주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보면 스데반 집사의 충성된 자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쓰실 때 그가 어떤 자세로 쓰임 받았는가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오늘 이 시간, 주님의 도구로 온전히 쓰임 받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교훈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특별히 세 구절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다같이 55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여러분?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스데반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스데반은 교회 밖으로 나와서 복음을 전하면서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사람들이 변론하자고 덤벼들었습니다. 변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저들은 거짓 증인을 내 세워 스데반을 종교 재판 대에까지 서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 54절을 보면 스데반의 변론을 들은 사람들이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스데반은 더 이상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바로 그 때 그가 보인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여러분? 고사성어 가운데 사면초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사면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온다는 말로써, 사방이 빈틈없이 적에게 포위된 고립무원의 상태,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지금 스데반이 바로 이 사면초가의 상태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주님이 계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자기를 돕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려 맞아 주십니다.
그러자 두려움에 흔들리던 믿음이 이내 굳건해 집니다. 절망의 파도가 요동치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듭니다. 다시금 주님이 주시는 새 힘이 솟구칩니다. 때론 우리도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 빠져들 때가 분명 있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후좌우 사방팔방 보이는 건 온통 적들뿐입니다. 초나라 왕 항우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두려워 도망치다 자결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아직 쳐다볼 곳이 한 곳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방이 꽉 막혀 있다할지라도 하늘은 뚫려 있습니다. 고개를 들고 저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벌써 일을 시작하고 계신 우리 주님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땅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아라!”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를 도울 손길은 없습니다.
오직 한 곳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진정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단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말입니다.
스데반이 위기 상황 속에서 바로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었던 비결을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그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나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사람들, 바로 그들만이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전후좌우 사방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소리는 이 사방을 보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령은 우리에게 하늘을 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시력을 밝혀 주셔서 저 하늘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인도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방은 다 막혀 있을지라도 하늘은 온전히 열려 있습니다. 무시로 주의 전에 나아와 예배를 통해 성령 충만한 자 되셔서, 늘 언제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맛보며,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날 지켜 보호해 주셨노라, 기쁨으로 간증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부르짖어 가로되” 59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미 처형이 시작된 것입니다.
스데반은 종교재판에서 제대로 판결 절차도 다 끝나기 전에 성난 사람들에게 성 밖으로 끌려가 내던져 졌습니다. 그리고 이성을 잃은 사람들로부터 돌팔매를 맞았습니다.
여러분? 죽음의 공포가 밀려드는 시간입니다. 견디기 힘든 육체적인 고통이 온몸에 넘쳐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데반은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 기도의 줄을 결단코 놓지 않습니다.
아니 더 굳게 기도의 줄을 잡았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 대화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간절한 기도로 그 위기의 순간을 끝내 이겨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사명을 다 완수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의 상황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결단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스데반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기 스데반의 기도를 잘 살펴보면 십자가상에서의 우리 주님의 기도와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함을 아시고 영혼을 부탁드린 기도를 드린 것처럼, 스데반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지금 자신의 영혼을 부탁드리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이 상황에서 끝까지 자기 목숨을 살려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건져주신 것처럼, 지금 자기를 이 위기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내 뜻과 내 욕심에 사로잡혀서는 결단코 아니 됩니다.
여러분? 언제나 병 낫기만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성공만을 위해서 기도해서도 안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병중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패하기를 원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똑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은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용서와 사랑과 축복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상황에서 저들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던지는 돌에, 저들이 맞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저들을 용서했습니다.
저들도 모두다 예수 믿고 축복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궁극적으로 영혼 구원과 영혼 축복에 있어야 합니다.
저주의 기도, 복수의 기도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용서의 기도를 드리시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축복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사람은 진정 주님처럼 기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맞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처럼 아니 스데반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부르짖으면서, 진정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자니라.” 다같이 60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러분? 스데반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는 장열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 십자가에서 끔찍한 고통 중에 운명하신 것처럼, 스데반 또한 돌에 맞아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스데반이 죽었는데 잔다고 표현했을까요? 여기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한 해석이 담겨져 있습니다. 스데반은 기독교 역사상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뒤 첫 번째 운명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의 죽음과는 다른 죽음입니다. 그래서 다른 죽음과 같이 죽었다고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잠시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것처럼, 부활의 시간을 기다리며 잠시 무덤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잠을 잔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장차 부활 후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며 잠시 쉬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코 죽음 때문에 무너질 수 없고, 죽음에게 질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스데반의 죽음 이후의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8:1절을 보시면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적들이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차제에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박멸할 태세로 거세게 박해를 가해왔습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8:4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로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저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저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복음을 전하다가 스데반이 죽은 것을 똑똑히 지켜본 자들입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두려워서 도망쳐 숨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스데반의 순교에 진정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이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들 또한 온전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순교 이후 복음이 예루살렘을 뛰어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까지 퍼져가게 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8:1절을 보면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당연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가 왜 이 이야기를 구지 여기에 써 놓았을까요? 사울이 표면적으로는 변화되지 않았지만, 바로 이 때 그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9장에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때, 이 순간 마음의 동요를 주님께서 보시고 그를 전격적으로 만나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죽음은 사울의 회심에 지극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 결과 사울이 바울이 되어 이방 세계 곧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을 산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의 죽음은 너무나도 가슴이 아픕니다. 스데반은 단지 복음을 제시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이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너무나도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열심히 정성을 다해 설교했지만 베드로처럼 수 백명, 수 천명이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단 한 명도 회개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스데반이 그토록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피를 토하며 말씀을 선포했건만, 저들은 오히려 이를 갈며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스데반은 저들의 돌팔매질 속에서 그렇게 죽어간 한 사람의 이단자에 불과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토록 잔인한 하나님이셨습니까? 이처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자신의 뜻만 내세우시는 그런 하나님이셨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렇다 치고, 이러함에도 왜 스데반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냥 그렇게 죽음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56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렇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은 이생을 넘어서 펼쳐져 있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겪었던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완전 종결시켜 주시는 곳,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은혜를 주시는 곳, 기갈이 없고 목마름도 없고 오직 생명수가 넘쳐흐르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은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의 죽음은 결단코 그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죽음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라는 위대한 전도자가 탄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처럼, 절대로 허무한 죽음이 아닌 놀라운 영향력을 드러낸 가치 있는 죽음이 된 것입니다.
새생명 전도축제에 오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스데반처럼 죽어야 진정 다시 사는 진리를 온전히 체득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 것처럼, 저와 여러분 모두 다 주의 영광을 바라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맞이하시기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려 스데반을 기뻐 맞아 주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 또한 우리 주님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려 기뻐 맞아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 진정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아멘.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주를 가까이” 이 찬송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던 타이타닉호의 웰레스 하틀리처럼 사나 죽으나 주의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저들의 돌팔매질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죽어가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영광을 바라보았던 스데반 집사처럼, 예수 안에서 영원토록 변치 않는 사랑과 참된 행복을 누리며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대성목사(광성교회) / 행 7:54-60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지난 7일 아침에 아버지께서 제가 먹여드리는 식사를 드시다가 조용히 천국에 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마도 사랑하는 아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지난 1년 동안에 저에게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 너무나도 건강하시던 아버지께서 혼자서 강남 일원의 삼성의료원에 입원중인 환자 분을 위해 기도하러 갔다 오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그 후로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시다가 그만 6개월 전에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시고, 이번에는 아버지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된 겁니다. 하지만 지난 1년간은 제게 있어 너무나도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머니 소천 후에 아버지를 이곳 풍동지역 요양병원에 모시고 아버지 식사 수발을 하면서 그 동안 못 다한 효도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저는 6개월 동안 병상에 계신 아버지를 거의 매일 만나면서 주의 종이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지를 분명히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이신 아버지께서는 다른 것은 다 기억 못하시는데 오직 예수님은 확실히 남아 계셨습니다. 어느 날 저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지요. “대성아 예수 잘 믿어라!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단다.”
그리고는 요한복음 14장 1절 이하의 말씀을 힘들어 하시면서도 또박 또박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 순간 저는 “아버지는 진짜 목사라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드리면서 저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과연 예수 잘 믿고 있는가? 나도 아버지처럼 다른 것은 다 기억 못해도 예수님만 남아있을 수 있을까?’
주의 신실한 종이라고 나름 자부해 왔음에도 저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의식 중에 하는 말이 어찌 보면 그 사람의 진심일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로써 많은 분들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예수 잘 믿는 것 같았는데 마지막에는 정말 죽기 싫다고... 더 살고 싶다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저주를 퍼붓는 안타까운 사람들을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제 아무리 잘나가고 풍요롭다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에 죽음의 문제만큼은 결단코 스스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숙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 주신 분이십니다. 사도행전은 이 예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장 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러분? 이 약속대로 사도행전에는 성령이 임하시는 이야기가 처음 나옵니다. 그 뒤를 이어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 그리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복음 전파가 확산되려 할 때에 커다란 장벽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주저주저했으며, 또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쉽게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좀처럼 복음 전파가 예루살렘을 뛰어 넘지 못했습니다. 이방인에게로 복음 전파의 발걸음이 내딛어 지지 않았던 겁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이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뜻밖의 한 사람을 소중한 도구로 쓰고 계십니다.
그가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은 이방인들이 공용어로 사용하던 헬라어를 할 줄 아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렀다가 그는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아예 예루살렘 교회에 머무르면서 신앙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 그 열심이 두드러져서 일곱집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에 이릅니다. 스데반은 교회 안에서는 집사로써,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는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힘써 전파하던 중에 체포되어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 심문까지 받게 되고 산헤드린 공회에서도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스데반이 순교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스데반의 순교 이후 복음 전파는 예루살렘을 뛰어넘게 됩니다.
마치 둑이 무너진 뒤 물이 밭으로 논으로 집으로 시내 한 복판으로 가리지 않고 밀려들어 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밀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스데반 집사는 복음 전파의 가장 큰 장벽을 무너뜨리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의 위대한 복음 전파 사역의 귀한 길목에서 너무나도 소중한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분명하게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순교하면서까지도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5절부터 60절까지는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초점을 스데반에게 맞추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제까지 행한 스데반 설교의 중심이 그리스도였듯이, 순교하는 이 장면의 중심도 스데반이 아닌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되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이제까지 자신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고 이를 증거했으며, 이로 인해 죽임을 당하게 되자,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면서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린 후에 잠이 든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중심은 늘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말씀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설교의 중심 또한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되어야 합니다.
스데반이 그토록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피를 토하며 말씀을 선포했건만 무리들은 오히려 이를 갈며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은 진정 그들의 돌팔매질 속에서 그렇게 죽어간 한 사람의 이단자에 불과했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토록 잔인한 하나님이셨습니까? 이처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자신의 뜻만 내세우시는 그런 하나님이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렇다 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스데반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냥 그렇게 죽음을 선택하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그 무엇이 스데반으로 하여금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의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했을까요? 오늘 이 시간, 주신 말씀 속에서 죽음의 비밀을 온전히 발견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첫째로, 위기의 순간에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같이 55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그렇습니다. 여러분?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은 교회 밖에 나아와 복음을 전하면서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었습니다. 사람들이 변론하자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리고 변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거짓 증인을 내 세워 스데반을 종교 재판대에 서게끔 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변론을 들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 54절에 보면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스데반은 더 이상 빠져나올 길은 없었습니다. 그 때 그가 보인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여러분? 고사성어 가운데 사면초가란 말이 있습니다. 사면에서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온다는 뜻입니다. 초나라 왕 항우가 패하게 된 원인은 자기 군사들이 자기를 배반해서 모두 한 나라 군사에 가담했기 때문입니다.
초나라 군사들이 한나라 진영에 가서 초나라 노래를 부르니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따라서 이는 빈틈없이 적에게 포위된 고립무원의 상태,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지금 스데반이 바로 이 사면초가의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바로 그 순간,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자기를 돕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니까 두려움에 흔들리던 믿음이 굳건해졌습니다.
절망의 파도가 요동치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새 힘을 얻게 된 겁니다. 때론 우리도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 빠져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후좌우 사방팔방 온통 적들뿐일 때가 있습니다. 초나라 왕 항우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두려워 도망치다 자결을 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분명 있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아직 쳐다볼 곳이 한 군데 남아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후좌우가 아닌, 하늘을 바라보면 이미 우리를 도우시고자 일하고 계시는 우리 주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땅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고개를 들고 나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를 도울 손길은 없습니다. 오직 한 곳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단어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말입니다. 이는 스데반이 이 위기 상황 속에서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었던 비결을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충만했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의 인도로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무나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사람들, 그들만이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전후 좌우 사방만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하늘을 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영적 시력을 밝혀줌으로써 저 하늘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늘 언제나 성령충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으로부터 참된 위로와 평강을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위기의 순간에 우리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우리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59절 말씀 다같이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여러분? 이미 처형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종교 재판에서 제대로 판결 절차도 끝나기 전에 성난 사람들에게 성 밖으로 끌려가 내 던져 졌습니다. 그리고는 이성을 잃은 사람들로부터 돌팔매를 맞았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의 공포가 밀려드는 순간입니다. 견디기 힘든 육체적인 고통이 온몸에 넘쳐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 위기의 순간에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 기도의 줄을 꽉 붙잡고 놓지를 않습니다. 아니 더 굳게 기도의 줄을 붙잡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욱더 깊은 영적 대화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기도로 그 위기의 순간을 온전히 이겨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완벽하게 이루어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위기의 상황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결단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스데반의 기도를 들으셨던 것처럼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스데반의 기도를 잘 살펴보면 십자가상에서의 우리 주님의 기도와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그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함을 아시고 영혼을 부탁드린 기도를 드린 것처럼, 스데반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영혼을 부탁드리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상황에서 끝까지 자기 목숨을 살려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자 굴에서 다니엘을 건져주신 것처럼, 지금 자기를 이 위기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내 뜻과 내 욕심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병 낫기만을 위해서 기도해서는 아니 됩니다. 언제나 성공만을 위해서 기도해서도 아니 됩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가 병중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패하기를 원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간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스데반은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그 또한 용서와 사랑과 축복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상황에서 그들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던지는 돌에 그들이 맞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도 끝내는 예수 믿고 축복의 자리로 나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궁극적으로는 영혼구원과 그 영혼에 대한 축복에 가 있어야 합니다.
저주의 기도, 복수의 기도는 결단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용서의 기도, 축복의 기도를 우리 주님께 간절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진정 귀하게 쓰시는 사람은 스데반처럼 기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맞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뜻과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할지라도 스데반처럼 내 생각, 내 뜻대로가 아닌, 주님 생각, 주님 뜻대로 끝까지 부르짖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깊은 잠을 자는 것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죽음은 깊은 잠을 자는 것입니다.” 다같이 60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러분? 주님께서 저 십자가에서 끔찍한 고통 중에 운명하신 것처럼, 스데반도 돌에 맞아 처참하게 죽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이 죽었는데 왜 잔다고 표현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그 날을 기다리면서 조금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죽음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가 결단코 무너질 수 없으며,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음에게 절대로 질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스데반의 죽음 이후의 장면입니다. 8:1절을 보면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했습니다.
대적들이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차제에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을 박멸할 태세로 거세게 박해를 가해왔습니다. 그러자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8: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여러분? 그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스데반이 돌아 맞아 죽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그들이 두려워서 도망쳐 숨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스데반의 순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는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순교 이후 복음이 예루살렘을 뛰어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져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8:1절을 보면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한 죽음이라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누가가 왜 이 이야기를 굳이 여기에 써 놓았을까요? 사울이 표면적으로는 변화되지 않았지만, 이때 그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왜나하면 곧바로 9장에서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놀랍게도 복음 전파는 대규모의 진군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복음의 기폭제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이처럼 살면서 복음의 기폭제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죽어서도 거룩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스데반처럼 진정 죽음을 이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저는 스데반의 이 모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마지막 모습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스데반은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조금 더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잔다는 말은 반드시 다시금 깨어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은 이 세상의 삶이 끝이 아님을 분명히 확신했기에 담대히 육신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스데반은 보좌 우편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 벌려 맞아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 바로 그 분을 보게 된 겁니다. 이 세상을 넘어서 펼쳐져 있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 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겪었던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완전 종결시켜 주시는 곳,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은혜를 주시는 곳, 기갈이 없고 목마름도 없고, 오직 생명수가 넘쳐흐르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스데반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가 죽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기뻐 맞아주시기 위해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벌떡 일어나서 품에 안아주고 계십니다.
스데반은 인간적으로는 고통 중에 죽음을 맞이한 불쌍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우리 주님이 가장 기쁘게 맞아주신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주님 품안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특권을 부여받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하나님의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부터 2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아멘.
그러므로 여러분? 설사 지금 나에게 갑작스런 죽음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나도 스데반처럼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을 살겠노라 분명히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부활의 첫 열매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자 되겠노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온전히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보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벌떡 일어나 스데반을 두 팔 벌려 기뻐 맞아 주셨던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보좌 우편에서 벌떡 일어나 저와 여러분을 당신의 두 팔에 포근히 감싸 안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영원히 변함없는 하늘나라가 반드시 예비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잘 믿다 죽으면 저 천국에서 주님 품에 안겨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 어떤 경우에도, 그것이 비록 죽음이라 할지라도, 스데반처럼 전혀 흔들리지 말고 예수 잘 믿다가 하늘을 바라보면서 사망 권세 다 이기고 영생의 기쁨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스테반처럼 승리하게 하소서
이윤재목사 / 행 7:54-60
여러분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람마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닮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흑인 부부가 아브라함 링컨을 너무 존경했답니다. 링컨이 노예를 해방해서 자기들도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아이를 임신했는 데 존경하는 링컨을 닮은 아이가 나오라고 방안에 링컨 사진을 걸어 놓고 매일 바라 보았답니다. 태중의 아이에게는 매일 링컨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링컨을 사모하고 링컨만 생각하며 열 달을 살았습니다. 드디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아이를 낳고 보니 흑인이 아니고 백인이었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해외토픽감입니다. 그만큼 좋아하고 존경하면 닮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두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나는 좋아하고 하나는 존경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구약의 야곱입니다. 야곱은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합니다. 슬슬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그러다가 급하면 천사를 붙들고 기도합니다. 야곱은 저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테반입니다. 그 논리정연한 믿음과 그 장열한 죽음이 어린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스테반이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2천년 교회사를 보면 딱 하나의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교자가 역사를 다스린다는 진실입니다.
로마에 가면 카타콤이 있습니다. 카타콤을 찾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는 것은 로마의 황제가 아닙니다. 순교자입니다. 그 중에 순교자 세바스티안이 있습니다. 세바스티안은 3세기, 로마의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황제에 의해 순교당했습니다. 군인이었던 그는 예수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수없이 화살에 맞습니다. 그래도 안 죽자 황제가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때렸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하수구에 버렸습니다. 세바스티안은 죽었으나 카타콤에 살아 2천년동안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순교의 역사는 로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도 있습니다. 1919년 4월, 당시 일본 경찰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수원 제암리 교인 21명을 교회에 가뒀습니다(사진2). 그리고 교회를 못질하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습니다. 그때 교회안에서 21명, 교회 밖에 2명이 죽었고 동네 집도 33채가 탓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카나다 선교사 스코필드가 급히 달려갔더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교회안에 있었던 교인 21명은 동그랗게 손을 맞잡고 무릎을 꿇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기의 순간, 밖으로 피하지 않고 모두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최후 승리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다 순교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차피 인생은 둘중의 하나로 판가름나게 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전도를 하든 선교를 하든 자녀를 기르든 직장생활을 하든 성공이냐 실패냐 둘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날마다 승리하는 것이고 차선은 최후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저는 스테반을 통해서 승리의 세 가지 원리를 발견합니다. 이번 주에도 이 말씀을 여러번 읽고 그 원리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얼마나 기뻣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스테반처럼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믿으라
첫 번째 원리가 2절에 나타납니다. 행7:2, “스테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여기에 “영광의 하나님”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영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승리의 첫 번째 원리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스테반은 유대인들에게 둘러쌓여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테반을 죽이기 위해 손에 손에 돌을 들고 있습니다. 스테반이 유대교로부터 이탈하여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스테반이 언제 어떻게 예수를 믿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행6장에 보면 스테반은 당시 훌륭한 믿음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행6:3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스테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7집사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예수님을 증거하자 유대인은 싫어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테반이 자기만 믿을 뿐 아니라 많은 유대인들을 예수믿도록 영향준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스테반을 미워하고 핍박했습니다.
유대인이 스테반을 핍박한 첫 단계는 논쟁이었습니다. 행6:9절 마지막,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테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변론은 요즘 말로 하면 공개토론입니다. 공개적으로 누가 옳으냐 그르냐 논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개토론을 통해 스테반을 당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테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말로 안되자 그 다음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중상모략입니다. 중상모략의 내용은 스테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행6:11절입니다.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결국 유대인들은 스테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워 결국 그것으로 스테반을 체포했습니다. 12절입니다. 행6: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처음에는 말로 공개토론합니다. 그것으로 안되자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중상모략합니다. 그래도 안되자 그것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 잡아 가두고 불법 재판을 통해 죽입니다. 스테반은 지금 이 과정을 거쳐 공회까지 왔습니다. 행6:15절입니다. 행6:15, “공회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테반을 주목하여 보니”. 자, 지금 스테반이 공회앞에 섰습니다. 공회는 72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최고 사법기관입니다.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말 한 마디 잘못하면 가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독일에 갔습니다. 독일 보름스에 가면 루터가 제국의회에서 심문받은 장소가 있습니다. 수많은 카톨릭 신부들앞에 루터가 섰습니다. 그때 했던 루터의 기도가 그가 섰던 자리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도와 주소서”. 그 심정이 바로 스테반의 심정일 것입니다. 스테반은 지금 유대인 대적자들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섰습니다. 유대인들이 스테반에 대하여 제기한 죄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스테반이 성정을 헐자고 했다, 또 하나는 스테반이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신앙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 성전신앙과 ”하나님이 율법을 만드셨다“. 율법신앙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어기는 것이 가장 큰 죄였습니다. 이에 대해 스테반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이것이 행7장입니다.
스테반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시간이나 장소에 제한받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솔로몬까지의 역사를 개관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성전은 솔로몬 시대에 지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때부터 일하셨다”. 그 하나님이 2절,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부터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인도했고 이삭, 야곱, 요셉을 세웠습니다. 때가 되자 영광의 하나님은 모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나왔고 광야에 잠시 광야교회를 이루다가 가나안땅에 들어와 다윗을 통해 나라를 세우시고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영광의 하나님”이 다스린 역사였습니다. “모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시대와 공간에 제한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History is the His story,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입니다. He is everywhere, 그는 어디나 계십니다. He lives anytime, 그는 언제나 살아 계십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시간이요 우주는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그는 성전에 매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에서 말씀하시지만 성전에 제한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제정하셨지만 율법에 매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의 하나님이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십니다. 7:51절, 성령의 하나님, 7:52절,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하나님은 곧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나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그 믿음 때문에 여기 서 있습니다. 내가 그 믿음 때문에 죽더라도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영광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사나 죽으나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스테반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되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을 믿습니까? 모든 인생은 결국 두 가지로 결판납니다. 첫째 하나님을 믿느냐? 둘째 믿는다면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믿습니까? 무서운 하나님을 믿으면 언제나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젊은 루터가 그랬습니다. 루터가 어느날 친구와 함께 집에 다녀오다가 들에서 벼락을 맞았습니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루터는 간신히 살았습니다. 그때부터 루터는 전전긍긍, 불안하게 살았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하나님이 벼락을 내리지 않나 공포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어야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마25장에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을 남기고 두 달란트받은 사람은 둘을 남겼는 데 하나 받은 사람은 땅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다시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왜 그랬냐고 하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마25:24,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알았습니다. “굳은 사람”,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굳은 분입니까? 감정표현도 없고 항상 딱딱하고 무섭습니까? 저도 어릴 때 그렇게 알았습니다. 알고보니 아버지 이미지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 이미지는 아버지 이미지 따라갑니다. 아버지가 좋으면 대부분 하나님도 좋습니다. 아버지가 나쁘면 하나님도 나쁩니다. 아버지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자녀에게 하나님 이미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셔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아버지가 누구든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루이스 앤더슨이 말한대로 “모든 노력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렇습니다. 모든 능력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모든 은혜와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영광의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승리의 첫 번째 원리입니다.
하늘의 예수님을 바라보라
스테반이 보여준 승리의 두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55절입니다. 행7:55-56, “스테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절입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자, 지금 스테반에 유대인들에게 돌에 죽고 있습니다. 스테반이 잘못한 것도 없는 데 억울하게 죽어 갑니다. 그러면 누구를 바라 보겠습니까? 자기에게 돌던진 사람들을 바라 볼 것입니다. “너희들 두고 보자. 내가 하늘 나라 가면 너희들에게 천벌을 내릴거야”. 그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스테반은 사람을 바라 보지 않았습니다. 스테반은 또한 자기 자신을 바라 보지 않았습니다. 아무 이유없이 죽어가는 자기가 안쓰럽고 불쌍하고 또한 대견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테반은 자기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스테반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하늘도 어떤 하늘이냐가 중요합니다. 하늘의 구름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를 바라본 것도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다시 55절을 보십시오. 행7:55-56, “스테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신앙은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이면서도 또한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은 바라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젊고 유능한 은행 간부인 앤디가 아내의 살해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하는 내용입니다. 처음에 주인공은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고자 애를 쓰지만 부질없는 일임을 알고 탈출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탈출하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감옥의 벽돌을 보면서 싫어했지. 그것은 우리를 미치게 했지. 그런데 좀 더 시간이 지나면서 거기에 점점 익숙해지고 어느 날부터는 그것이 편하게 느껴지는 거야. 마치 감옥이 없으면 내가 죽을 것 같은 거야. 그때 깨달았지. 진짜 감옥은 내 안에 있다고. 그때 나는 결심했지. 탈출하기로”.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불편했던 감옥이 자꾸 보니까 편안해 지고 집같이 여겨지고 그것 없으면 못 살 것 같게 됩니다. 위기는 내가 감옥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옥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보는냐가 문제입니다. 자꾸 보면 그 사람이 됩니다. 자꾸 감옥을 보면 내 마음도 감옥이 됩니다. 건물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건물은 처음에 사람이 짓습니다. 그러다가 그 건물에 오래 살면 나중에는 건물이 사람을 짓습니다. 자꾸 보니까 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테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모양과 형태가 만들어진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 봅니까? 본대로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아브라함과 롯도 그들이 본대로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둘이 오랫동안 같이 살면서 양과 소가 많아졌습니다. 분가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롯, 네가 먼저 선택하라.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가고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다”. 그때 롯이 눈을 들어 바라 보았는 데 소돔쪽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 당시 소돔은 아무 비옥한 곳, 물좋고 정자좋은 곳이었습니다. 마치 애굽들처럼 물이 넉넉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롯은 소돔을 선택했습니다. 롯이 떠나고 나니 아브라함은 갈 데가 없었습니다. 눈을 들어 보니 광야가 보였습니다. 광야에 무엇이 있습니까? 풀이 있습니까? 물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창13:14,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아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롯은 소돔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광야를 바라보았습니다. 롯은 물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얼마후 소돔은 불과 유황으로 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축복받았습니다. 본대로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스테반처럼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바라보면 닮습니다. 스테반이 예수님 바라볼 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59-60절입니다. 행7:59-60, “그들이 돌로 스테반을 치니 스테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무릎를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테반은 먼저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지기전 겟세마네동산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되도록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바라보면 기도하게 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하신대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를 더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주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스테반은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죄를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스테반은 자기를 죽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으나 죄는 사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죄는 예수님만 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표현했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죽음의 순간,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예수님처럼 닮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기도하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남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래서 패트릭 존스톤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When we work, we work. When we pray, God works.) (패트릭 존스톤) . 고난이 있습니까? 하늘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아무 이유없이 핍박당하고 무시당했습니까? 가끔 나만 당하는 슬픔이 있습니까? 하늘의 주님을 바라 보세요. 예수님은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눈은 지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신 분, 그 분이 하늘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자기를 버려야 세상을 살린다
스테반이 보여준 세 번째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60절입니다. 행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테반은 아무 죄없이 죽었습니다. 참 억울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긴 역사를 보십시오. 죽은 자가 세상을 다스립니다. 역사의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을 보십시오. 모두 자기를 버린 자입니다. 억지로 버리면 타살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버리면 희생입니다. 계란도 자기가 스스로 깨지면 부화가 됩니다. 그러나 남이 깨뜨리면 후라이가 됩니다. 마5:13-14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아십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니”. 소금과 빛이 무엇입니까?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소금은 자기를 녹여 맛을 냅니다. 녹지 않으면 맛도 낼 수 없습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빛은 올리브 기름으로 밝힙니다. 해마다 9월이면 이스라엘 농부들이 올리브를 땁니다. 올리브를 따면 그것을 씯고 찧어 부숩니다. 아주 옛날에는 올리브를 돌위에 올려 놓고 사람이 일일이 발로 밟거나 절구를 이용하여 찧었습니다. 그 후에는 무거운 돌로 눌러서 짯습니다. 올리브 열매위에 무거운 돌을 덮고 누르면 기름이 나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라는 뜻을 눌러서 짠다는 말입니다. 빛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올리브를 찧고 부숴서 나옵니다.
영어 단어에 “영향력”이란 말이 있습니다. "influence"라고 합니다. 이 말은 ”flu" “흘러가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in flu 하니까 “안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flow in”, “안으로 유입되는 것”입니다. “독감”이란 단어가 그래서 나왔습니다. “influenza”. 무엇이 안으로 흘러갔느냐? 감기 균이 안으로 흘러갔습니다. 감기균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influence", 영향력은 안에 들어간 것이 다시 나온 것입니다. 누가 세상을 살립니까? 자기를 버린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남에게 들어가 다시 나옵니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영향력이 됩니다. 스테반의 죽음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입니다. 7:58절을 보십시오. 행7:58, “성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당시 사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스테반이 죽는 장면을 옆에서 다 지켜 보았습니다. 사울은 그때 유대교 신자였기 때문에 스테반이 죽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행8:1입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니라”.
그러나 막상 스테반이 기도하며 죽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죽어가는 스테반의 모습을 통해 엄청난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비록 신앙은 달랐지만 “야, 대단하다. 무엇이 저로 하여금 저렇게 죽게 하는가?”. 그 후 사울이 하나님께 돌아와 바울이 된 후 스테반의 영향력이 그에게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스테반의 정신이 그 속에 들어가 in flu 했습니다. 평생 스테반의 정신으로 선교했고 마지막에 로마에서 스테반처럼 순교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한 장면입니다(그림3). 손을 뒤로 묶이우고 참수를 당했습니다. 아마 죽어가면서도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주여 저들의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스테반의 영향력입니다.
스테반의 영향력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복음 전파에 불을 붙였습니다. 8장에 보면 스테반의 일로 인해 핍박을 받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빌립이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지역을 다니며 전도했습니다. 에디오피아에서 온 내시를 전도해 에티오피아를 지상에서 가장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또 그 영향으로 안디옥교회가 생깁니다. “아, 한 사람이 죽어 세상을 살렸습니다”. 바울 한 사람을 살려 그리스, 로마를 살리고 전도자들을 일으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스테반 자신은 죽어 예루살렘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지만 그로 인한 영향력은 민들레 홀씨처럼, 태평양의 파도처럼, 전 세계로 퍼져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스테반 한 사람만 죽이면 기독교는 끝난다 생각했지만 스테반이 죽음으로 오히려 복음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예수믿는 우리의 삶을 한마디로 오스왈드 샌더스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얻는 것으로 살고, 잃는 것으로 살린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얻는 것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무엇이나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더 구해야 합니다. “주여, 나로 인해 잃는 것도 있게 하옵소서”. 그동안 우리는 너무 얻는 것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이제 무엇을 좀 버릴까 무엇을 좀 잃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스테반처럼 꼭 순교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피흘리는 순교말고 희생하는 순교는 불가능할까요? 하나님, 우리가 무엇을 좀 버릴까요를 기도해야 합니다. 개인이 그래야 하고 교회가 그래야 하고 한국교회가 그래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시간을 조금 버릴 수 없습니까? 선교를 위해 물질을 드릴 수 없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재능, 지식, 몸, 충성을 드릴 수 없습니까? 그래서 얻는 것으로만 살아온 우리가 조금 잃는 것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까?
누가 최후 승리자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영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누가 고난속에서도 끝까지 승리합니까? 하늘의 예수님 바라보는 자, 보좌에 앉으신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는 자,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역사를 새롭게 하는 승리자입니까? 자기를 버려 남을 살리는 자, 얻는 욕심으로 살지 않고 잃는 기쁨으로 사는 자, 몸도 물질도 희생도 시간도 사랑으로 잃고 잃고 잃어 예수님처럼 스테반처럼 사는 자, 그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승리자들 되시기 바랍니다.
복된 죽음
행 7장 54절 / 김영준목사
우리나라 지방 어느 곳에 ‘죽음’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대나무 竹자에 그늘 陰자인 것 같은데 동네 사람들이 이름이 재수가 없다고, 이름 때문에 교통사고가 많이 난다고 불평하고 이름을 바꿔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바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가 세상을 떠날 때 돌아가셨다, 소천 하셨다, 또 하늘나라 가셨다, 이런 식으로 우회적인 표현을 쓰지, 죽었다는 말은 적어도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외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미국의 어느 목사님의 장례식을 보니까 passing이라는 말을 쓰고 celebration이라는 말을 쓰던데 die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말을 담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기꺼이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도 ‘나사로가 죽었느니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정말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질 정도로 하나님께 간구하며 괴로워하며 기도하실 정도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고 예수님에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예수님이 부활할 것을 알고 계셨다고 해서 그것이 죽음의 고통을 약화시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힘들게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괴로워하시고 목마르다 하시고 얼마나 맞았는지 당신의 십자가를 메고 갈 여력도 없어서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대신 그 십자가를 메고 가게 할 정도로 예수님은 힘들고 고통스럽게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주 부끄러운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는 상황에서 거기에 대한 분명한 믿음, 그리고 승리에 대한 확신, 영생, 믿음, 천국 이런 것을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결코 조작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은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지 죽음을 경험한 다음에 그 다음에 무엇을 할 만한 그런 용기나 지혜나 그 대안이 없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다음에 본론에 들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죽음 다음에 본론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부활과 영생과 승리와 십자가의 영광과 복음의 능력과 교회의 증거가 비롯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죽음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이 재림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 죽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창세 이후에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 두 명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에녹이고 또 하나는 엘리야입니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에 들려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이든 모세든 예수님도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죽음을 미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죽음은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본 적이 없는 길,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는, 그렇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슬픈 것입니다. 사람들이 장례식에 갈 때 검정색 옷을 입는데 검정이 뜻하는 것은 슬픔, 애도, 상실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둡다는 말은 기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어두운 옷을 입고 다닐 때 그의 마음의 슬픔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제 인생에 가장 슬펐던 순간을 꼽으라면 집사람이 첫째 아이를 유산했을 때, 그때 굉장히 슬펐고 그리고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정말로 슬펐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저의 아버님이 천국에 가셨다고 믿지만 그래도 슬픈 것은 슬픈 것입니다. 천국 가신 것은 아버님이고 아버님을 잃은 것은 저이고, 안 그렇습니까. 기쁘다면 아버님이 기쁠 수는 있지만 저는 기쁘지 않아요. 왜냐하면 떠나셨기 때문에 다시는 뵐 수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어요. 물론 천국에서 뵐 것을 믿지만 그러나 지금은 볼 수 없다는 사실, 아버님이 안계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고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효자식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보다 오래 사셔서 저의 장례식에 오게 되신다면 많이 울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마 제가 천국에서 내려다 볼 것입니다. 누가 가장 많이 우나, 그래서 가장 많이 우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달라고 기도할 것이니까 우는 시늉이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LA에서 제가 가르치던 어느 청년이 목사가 돼서 제 앞에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어머님의 안부를 물었더니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대답했습니다. ‘
‘저런, 아, 미안하구만.’
‘예수님 믿고 천국에 가셨으니 괜찮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제가 마음속으로
‘불효자식 같으니. 아니 어머님이 천국가시면 안 슬픈가? 천국 가는 것은 기본이지, 어머님과 정도 없었냐, 너는?’
그런 말을 하고 싶지만 꾹 참았는데 저는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인간의 보편타당성을 부인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슬퍼할 때는 슬퍼하고 기뻐할 땐 기뻐하고 어려운 건 어렵고 쉬운 건 쉬운 것이지 예수를 믿는다고 그 사람이 슈퍼맨이 되는 것도 아니고 천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보편타당적인 것에서 예외가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지만 예수님도 배고프시고 목마르시고 피곤하시고 주무시고 때로는 상처를 입으시고 노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인간의 보편타당성의 원리에서 예외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는 다만 죄가 없으시고 믿음으로 사시고 율법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셨다는 것이 우리와 차이가 있는 것이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특권을 누린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그것이 예수님에게 시험이 될 정도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바꾸라든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든가 이런 것은 예수님에게 시험이었지요. 예수님은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광스럽게 순교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죽은 다음에 그를 위해 크게 울었다고 했습니다. 8장 2절을 보면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누구를 위해 울었습니까? 스데반을 위해서 울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운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불쌍하고 억울하고 슬프고 그래서 스데반을 위해서 슬피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운 게 아닙니다. 이들은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보다 더 믿음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기 때문에 운 것입니다.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초대교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도의 죽음에 슬픔, 결별, 그 이상의 무엇이 있습니다. 이것을 주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앞두고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게 사는 것뿐만이 아니고 죽을 때도 성령 충만하기를 소원해야 됩니다. 성령 충만하게 세상을 떠나게 해 달라, 그래서 내가 세상 떠나는 것이 사람들에게 은혜가 될 수 있고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고 그것이 나의 신앙의 고백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앞두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55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사도신경에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평소에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데 스데반이 순교하는 순간에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셨다, 이것은 순교하는 사람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순교할 때 예수님이 서서 그 순교를 받으십니다. 그것을 스데반이 보았습니다. 56절에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이것이 믿는 사람의 종말론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죽는 사람 자신이 가져야 의미가 있습니다. 스데반 본인이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서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순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 만약 스데반 자신에게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이 이 믿음을 가져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이 일부러 작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누가 대화하다가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작은 차를 타고 다니시니까 보기가 좋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목사님이 정색하시면서 한 마디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내가 스스로 작은 차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자네가 그것을 나에게 요구할 수는 없네. 자네가 그것을 판단할 수는 없네.’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십니까? 스스로 겸손한 삶, 검소한 삶을 선택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것을 남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검소함을 자기가 스스로 선택해야지요. 누가 검소하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재미도 없고 따분하고 은혜도 없고 속상한 일이 될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것은 자기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고 자기가 선택하고 내가 더 큰 차를 탈 수도 있지만 작은 차를 선택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게 아니고 누가 ‘앞으로 목사님들은 이런 급의 자동차만 타시오.’ 그건 믿음도 아니고 주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에게 율법의 멍에를 씌워주는 것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도 마찬가지에요. 본인이 그것을 가져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병원에 환자를 심방하러 가서 ‘집사님, 아무리 기도해 봐도 이제 천국가실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십중팔구 시험에 들 것입니다. ‘아, 목사님 나보고 죽으라는 얘기입니까? 아니, 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야지요. 저는 준비 안됐습니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걸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환자 자신이 마음의 준비가 되고 환자 자신이 ‘하나님이 저를 부르십니다. 이제 저는 갈 때가 됐습니다. 저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또 믿음을 지켰고 이제 나를 위해서 면류관이 준비돼 있습니다. 저를 위해서 슬퍼하지 마세요.’
한 대학 총장님 한 분이 이렇게 유언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내가 죽으면 장례식을 천국환송예배로 드리고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말고 기쁜 노래를 불러라.’ 그래서 그분 장례식 때 대학 합창단이 헨델의 할렐루야 코러스를 불렀습니다. 장례식 때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이 그렇게 주문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본인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그게 아니고 마지막 순간까지 ‘제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세요.’라고 하다가 죽었다면 서로 괴로운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갈 때가 됐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도 순종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영원히 산다는 것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서른 세 살의 젊은 나이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통과하셨습니다. 그것이 쉬운 죽음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죽음을 통과한 다음에 부활이 있고 영광이 있고 기쁜 날이 있고 인간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할렐루야!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에 그 무엇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것을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데 그러므로 복 있는 죽음은 죽는 사람이 남아있는 사람을 격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했지요. 또 야곱이 죽기 전에 열 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예수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축복했습니다. 이것이 복 있는 죽음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남아있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축복할 수 있는 것, 그 반대가 아니고 떠나는 사람이 남아있는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정말로 복된 죽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 스데반의 죽음은 억울한 죽음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불의한 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니까 억울한 죽음입니다. 우리 고유의 정서상으로 보면 한이 맺힐 수 있는 상황입니다. 전설의 고향의 이야기 대부분이 그런 것 아닙니까.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저승에 가지 못하고 그 영혼이 세상을 맴돌면서 사람들에게 그 사연을 알리려고 한다,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도 내용이 그것 아닙니까. 주인공이 억울하게 죽어서 영혼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여자 친구에게 자꾸만 뭔가 커뮤니케이션을 하려고 하는 줄거리인데 스데반도 한이 많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불의한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 죽었습니다. 젊은 사람이고 재능도 많은 사람인데 그것을 다 펴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죽기 전에 이미 한을 풀었습니다. 사람들을 다 용서하고 죽었습니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에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러니까 스데반은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두고 보자’ 이러고 죽은 것이 아니고 죽기 전에 한을 풀었어요. ‘저들의 죄를 하나님 돌리지 마옵소서’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운명하시기 전에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 그렇게 다 풀어버리고 운명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의인의 죽음, 이게 성도의 죽음입니다. 억울할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예수님 믿는다는 이유로 돌을 맞아 죽었으니까, 젊은 나이에. 그러나 그는 그것을 하늘나라까지 들고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 놓아버리고 다 풀어버리고 그리고 예수님 계신 곳으로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도 복되게 살아야 되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복되게 떠나기를 바라는데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첫째는 빚을 다 탕감해 주어야 됩니다. 누가 나에게 섭섭하게 한 것, 나를 배신한 것, 나를 상처 입힌 것, 다 용서하고 빚을 탕감해 주고 둘째, 내 빚도 탕감을 받고 가야 됩니다. 내가 지은 죄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받고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했다면 그 사람에게 사과하고 그 사람에게 용서를 받고 그래서 더 이상 빚이 남아있지 않는 상황에서. 자유로운 인간이지요.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가야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데반이 56절에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늘이 열려야 됩니다.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우편에 인자가 서신 것을 보면서 죽었습니다. 복된 죽음입니다. 우리가 세상 떠날 때는 세상일에 더 이상 연연해하지 말고, 미련 갖지 말고 이 세상의 일은 끝났다 이제 나를 맞아주시는 분이 계시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너희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면 우리가 세상 떠날 때 예수님이 우리를 당신이 계신 곳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영접해 주시겠네’ 할렐루야!
이름 값을 하는 사람
홍문수목사 / 행 7:54-8:8
저희 집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씩씩거리며 집에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아빠! 내 이름 당장 바꿔 줘!”하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입니다. 얘가 왜 이러나 싶어 잘 달래면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동네 아이들이 자기 이름(홍보석)을 갖고 자꾸 놀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아니, 네 이름이 어때서 ... 아빠가 성경 읽고 기도하면서 제일 좋은 이름으로 지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랬더니 “좋기는 뭐가 좋아? 중국집 이름이라고 놀리는데 ... ” 그래서 “네 이름은 하늘나라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 중에 여섯 번째 보석인 ‘홍보석’이란 말이야.(계21:20) 네가 그렇게 존귀한 사람이 되라고 지어준 건데 ... ” 이러면서 달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나중에 수그러들자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해 줬습니다. “야, 딴 생각하지 말고 그 좋은 이름값이나 해라!”
우리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범은 가죽을 남긴다.” 그렇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와 인격,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생애 전체를 반영합니다. 예를 들어 “아무개!” 하면 그 사람에 대한 그림(Image)이 그려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름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름을 지을 때 좋은 이름으로 지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 작명소에 가서 돈을 많이 주고 이름을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게 있습니다. 좋은 이름을 짓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설사 이름이 좋지 않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살면 그 이름이 저절로 좋은 이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모세!” 하면 어떤 이미지가 연상됩니까? 출애굽의 영웅, 그리고 구약 시대 대표적인 인물, 하나님이 아끼고 사랑하는 종, ... 정말 훌륭한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그래서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선교사님은 아드님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이름이 본래 무슨 뜻입니까? ‘물에서 건져낸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 부모가 당시 애굽의 압제 하에서 어린 모세를 숨기다가 도저히 숨길 수 없어서 갈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띄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바로 왕의 공주가 발견했고, 양자로 삼습니다. 무슨 이름으로 지을까 생각하다 물에서 건졌으니 ‘모세’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 유래를 알면 이름치고는 평범하다 못해 유치한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위대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영광스런 이름, 아름다운 이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렇게 정리하십시오. 여러분이 좋은 이름을 갖고 계십니까? 그 이름에 합당하게, 부끄럽지 않게 사십시오. 혹시 평범하거나 별로 좋지 않은 이름을 갖고 계십니까? 괜찮습니다. 인생을 열심히 아름답게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이름이 나중에는 빛나는 이름이 될 줄로 믿습니다.
본문에 보니까 좋은 이름도 가지고 있고, 훌륭한 인생도 살았던 사람이 나옵니다. 여러분, 누굽니까? 예, 스데반입니다. 그래서 그를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이름값을 한 사람! 이 시간 스데반의 생애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도 그런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름값을 하는 사람, 그리고 이름을 빛내는 사람!
[1] 스데반의 이름 : 면류관
스데반이란 이름은 헬라어로 ‘스테파노스’(Στεφανος)입니다. 이 단어는 ‘면류관’이란 뜻입니다. 면류관은 본래 왕관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심판 때에 승리한 성도들에게 씌워주시는 관(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헬라식 이름이데, 그것으로 봐서 그는 아마 헬라파 유대인이었을 겁니다. 주후 1세기의 초대교회 당시에는 성도들의 분포가 대개 두 부류,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본토 에스라엘에 계속 거주해오던 유대인입니다. 반면 헬라파 유대인은 외국에 나가 거주하다 돌아온, 쉽게 말하면 외국물을 먹은 유대인입니다. 헬라파 유대인 중에는 식자층이나 엘리트가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스데반은 아마 그런 류의 사람이었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도 그렇지만,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 대한 기대와 소원을 담아 이름을 짓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이런 생각으로 그의 부모가 이름을 지어주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얘야, 앞으로 신앙생활 잘 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해서 하늘나라에 갈 때 면류관을 받는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이렇게 생각해볼 때 스데반은 정말 좋은 이름입니다. 부모의 신앙과 소원이 담겨져 있는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좋다고 스데반의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닙니다. 만일 스데반이 인생을 엉터리로 살았다면 그 이름은 우스꽝스런 이름이 되고 말았을 겁니다. 사람들이 조롱했을지도 모르죠. “뭐, 스데반? 웃긴다, 웃겨! 면류관은 커녕, 개털 모자도 못 쓰겠다!” 아마 이랬을 겁니다. 다행히 스데반은 그 이름이 어울리는, 아니 그 이름대로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2] 스데반의 인생 : 면류관을 얻은 생애
스데반은 정말 그 이름 그대로 ‘면류관을 받은 인생’이었습니다. 본문 7:54절~60절 보면 그의 최후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교자의 모습입니다. 그는 기독교회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혹자는 순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무섭고 비참하고 고통스런 것으로 오해합니다. 물론 겉 보기에는 그렇죠. 하지만 순교는 신앙인으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또 순교의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셔서 그 고통을 충분히 이기게 해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순교자를 통해 큰일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회는 순교자의 교회이다!” 교회의 융성은 순교자들의 피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2천년 기독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기독교회는 순교의 피로 세워져왔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사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짧은 기간에 그만한 부흥을 이룬 교회는 유례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가능했을까요? 초기 선교사들이 흘린 순교의 피, 초대 성도들이 흘린 순교의 피 때문입니다.
수년전 우리 교회에 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세미나 후 질문 시간에 한 여자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 한국교회는 선교 역사가 그렇게 짧은데(태국은 거의 두 배 되는 선교 역사를 갖고 있음) 태국교회에 비해 엄청난 성장을 가져왔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순교의 피가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공감을 하셨습니다. 태국교회에는 순교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영광스런 것입니다. 우리가 일부러 순교할 수는 없지만, 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넉넉히 감당할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사람이 한번 왔다가 어차피 한번 죽는 법인데, 천국이 있고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 게 확실하다면 순교보다 더 아름답고 멋진 죽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스데반은 그렇게 영광스런 모습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입니다.
그가 임종할 때 어떤 영광스런 장면이 펼쳐지나 살펴보십시오. 54절~56절. 공회의원들이 스데반의 설교(십자가와 부활 증거)를 듣고 발악을 하지만, 그는 영안이 열려 하늘의 영광을 봅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예수님)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알고 있나요? 사도신경 고백할 때 뭐라고 합니까? “ ...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 ”
그러면 어떻게 짐작해 볼 수 있을까요? 앉아계시던 예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종 스데반이 순교하며 천국에 입성하는 그 순간 앉아 계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쁨으로 영접하는
장면입니다. 어쩌면 그의 손에는 스데반에게 씌어줄 면류관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한 인생이 왔다가 천국에 들어갈 때 이런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라토너가 마지막 결승점의 테이프를 끊고 감독과 코치의 품에 안기는 장면이 얼마나 멋집니까? 마치 그런 식입니다. 스데반은 그런 감격적인 장면을 연출하며 인생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목표를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해야 됩니다. 언젠가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이런 감격적인 장면을 맞이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하늘의 상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상(賞) 때문에 신앙 생활 하나? 그런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누누이 상을 바라보며 살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예수님이 재림 하는 목적도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불신자들은 정죄의 심판을 받고 지옥의 형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상급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실이 언급된 구절을 읽어드리죠.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마16:27 “인자(=예수님)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심지어 우리의 믿음이 이래야 온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살아게신 하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온전한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목표를 갖고 살았습니다. 빌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은 하날의 상을 위해 열심히 살앗습니다. 그러다가 영광스런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그의 최후 진술을 들어보십시오. 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저와 여러분도 이런 목표를 갖고 열심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스데반의 신앙과 삶 : 성화된 인격, 사랑의 실천, 복음 증거
그러면 하나님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우리에게 상을 주실까요? 성경을 연구해 보면 다음의 세 가지 기준으로 인생을 평가합니다. 스데반은 그 기준에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① 성화된 인격 : 하나님은 고난과 환란이 많은 세상에서 인내하며 성화된 성도들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이후에는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아직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시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겁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천국에 들어오기를 기대하십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가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 얼마나 아름다운 인격의 모습으로 가고 있는가! 그가 공회에서 설교할 때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행6:15) 그리고 유대인들이 흥분해서 그를 개처럼 질질 끌고 성밖으로 나가 돌로 쳤지만, 그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행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천사를 넘어 예수님과 흡사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남긴 가상칠언 중 기도문이 있죠. 그와 비슷한 기도를 드리며 운명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스데반에게 면류관이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② 사랑의 실천 :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받은 대로 실천하기를 소원하십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주고 받는 조건적 사랑만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건을 초월해서 사랑을 주십니다. 죄인들에게 독생자를 주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고 이웃에게 실천해야 됩니다. 그게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일일이 기억하셨다가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냉수 한 그릇이라도 진정한 사랑으로 한 것이라면 분명히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상을 주십니다.
스데반은 이런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친 사람입니다.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그는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자신을 불살라드린 사람입니다. 이런 스데반에게 하나님이 면류관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③ 복음 증거 :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 감당할 사명은 복음 증거입니다. 나를 구원한 십자가 복음이라면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도 전파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무이자 우리의 특권입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고 하늘의 상을 주십니다.
바울은 그가 복음을 증거하고 양육한 성도들을 ‘자랑의 면류관’이라 부릅니다. 살전2:19~20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여러분, 주님 앞에 설 때 내새울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누리던 모든 것은 명함도 못 내밉니다. 오직 우리의 증거로 천국에 간 성도들이 나를 위해 면류관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어린 딸과 부모님, 이렇게 세 식구가 살던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딸은 비록 어리지만 신앙 생활을 아주 잘 합니다. 어머니는 보통으로 신앙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주변에서 아무리 전도해도 믿지 않고 버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 아이가 열이 펄펄나며 쇠약해져갑니다. 검사 결과 급성 백혈병이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 아이는 얼굴이 핼쓱해지고 눈이 쾡하게 들어갔습니다. 치유될 사망이 없어 보입니다. 아버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딸 아이의 병상을 지킵니다. 딸 아이가 조용히 아버지를 부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저도 조금 후에 죽을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이죠.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있어요.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천국에 가면 주님이 면류관을 주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해서 면류관에 별이 달리지 않을 것 같아요. 아빠가 제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으시면 안 돼요? 그러면 제 면류관에도 별이 달릴 텐데 ... ”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즉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딸 아이는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결국 천국에 갔습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주일 예배에 그 부모가 참예했습니다. 그 교회는 예배 중에 간증 순서가 있었는데, 누구든 손을 들고 나가서 간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앞으로 나가 간증합니다. “여러분, 제 딸은 천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면류관을 쓰고 있을 겁니다. 그 면류관에는 분명히 별에 달려 있을 겁니다. 그 별이 바로 접니다.”
스데반은 살아 생전에도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순교한 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먼저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58절 보면,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사울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행8:1에서 보는 대로 살기등등하고,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후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사도행전 9장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 예수님을 보고 뒤집어집니다. 그런데 미리 스데반을 통해 충격을 받은 상태여서 그게 가능했습니다. 사울은 겉으로 거부했지만, 그의 영혼 깊은 곳에는 스데반의 기도 소리가 비수처럼 꽂혔을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천국에 대해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원수들은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있던 사울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면서 완전히 변화 받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스데반의 순교가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킨 셈입니다. 그래서 고대 신학자인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회는 스데반의 기도 덕분에 사도 바울을 얻었다!”
더 나아가 복음이 넓게 넓게 확산되어 감을 볼 수 있습니다. 행8:1(하) 보면, 큰 핍박으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흩어집니다. 행8:4 보면, 그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11장에 보면, 안디옥까지 복음이 들어가 교회가 생기고, 1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최초의 선교사 바울과 바나바가 파송됩니다. 그후 바울의 선교팀을 통해 소아시아, 유럽, 로마로 복음이 전파됩니다.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이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많은 사람을 도전하고,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런 스데반이 어찌 하나님이 면류관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4] 스데반처럼 사는 비결 : 성령 충만
여러분, 우리도 스데반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게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본문 55절 보면 그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 ” 우리가 기도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이런 삶이 가능해집니다.
가만히 생각 보면 우리도 좋은 이름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행11:26),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성도, 거룩한 사람 즉 성자(Saint)라는 칭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종, ... 여러 가지 이름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외에 직분도 있습니다. 장로, 권사, 집사, 교사 등 ... 우리는 과연 이 모든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계3:11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세상을 따라가다 보면 다 놓치고 맙니다. 세상 것은 본래 놓치는 것이고 우리를 위해 예비된 면류관마저 놓치게 됩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야기입니다.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간직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 말년에 자신의 생애를 회고해 보니 자기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삶이 아니라, 황금을 마음에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눈물로 회개하고 부모가 지어준 이름에 걸맞게 살겠다고 결단합니다. 그후 그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침내 그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난 14년 동안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그 기간이 내 인생 중 가장 행복하고 보람있는 시기였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다 사라집니다. 사라지는 것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일입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십시오. 스데반처럼 천국을 소망하며 하늘의 면류관을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이름을 빛내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스데반처럼 주님의 영접을 받으며 천국에 입성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우리의 이름 때문에 후배들이 도전받고 격려받아 뒤따라올 수 있는 모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3∙1절과 한국교회
이정익목사 / 행 7:54-60(2011.3.5.)
오늘은 3∙1절 92주년을 기념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3∙1절의 역사도 깊어져 3∙1절을 경험한 세대들은 극소수만 생존하고 있습니다. 전후 세대들은 그 때의 아픔이나 고뇌를 잘 몰라 오늘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는데 경험이 참 중요합니다. 고난도 배고픔도 경험이 중요합니다. 이런 경험들은 살아가는데 많은 유익을 줍니다. 특히 배고픔의 경험은 생각을 넓게 해 줍니다. 쌀 한 톨의 소중함을 알게 해 줍니다. 인생의 깊이를 알게 하고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여 삶을 겸허하게 해 줍니다. 실패의 경험도 일부러 할 필요는 없지만 기왕 했으면 참 좋은 기회가 되고 소중한 기회로 활용됩니다. 삶의 눈이 뜨이고 모르던 부분을 알게 하고 보게 해 줍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자만하지 않게 해 줍니다. 암담한 현실의 경험도, 중병의 경험도 때로 삶을 침착하게 만들고 겸허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그때 삶에는 또 다른 손길이 있음을 알게 되고 신비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여 삶을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북에 살다가 월남한 분들은 대부분 강합니다. 사선을 넘어 온 경험 때문입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들고 역사가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민족이 오늘 세계 속의 한국을 이룬 것을 기적이라고들 말하지만 사실은 이런 고난이나 아픔을 일찍 경험했고 그 아픔 속에서 얻은 경험과 의지가 오늘의 이 발전의 삶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일제의 압제를 당할 때 현실의 암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배고픔과 절망과 서러움을 경험하였습니다. 서러움 중에는 나라 없는 설음이 최고입니다. 내 땅에서 남의 지배를 당하고 농사를 지어도 모두 수탈당하고 처녀들이 공출당하고 젊은이들이 좌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라의 소중함을 발견하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뜨이고 나라를 생각하고 민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은 오늘 한국이 기적을 일구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배경에는 이런 고난이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스데반의 순교하는 모습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일곱 집사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열정이나 행동이나 결단은 제자들 보다 월등했습니다. 스데반 이야기는 사도행전 6장~7장에서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8장부터 마지막 28장 까지 내용은 사울이라는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진두지휘한 것이 사울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순교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사울이 회심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울의 회심의 시작을 스데반의 순교에서부터 시작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뿐만 아니라 스데반의 죽음과 순교로 당시는 상당한 핍박이 시작되고 환란이 시작되었지만 그런데 스데반이 죽음으로서 사람들은 복음전파에 장애가 될 것을 알고 걱정하였겠지만 오히려 기독교의 복음이 더 거세어졌고 기도와 전도의 열기가 불붙었습니다. 그 결과 스데반 순교를 계기로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고 빌립을 통하여 에티오피아에 복음이 들어가고 사울이 회개하고 그 후 복음이 확장되어 퍼져 나갑니다. 우리는 오늘 현실만 보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 주어진 현실의 암담함에 낙심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주어진 암담한 현실을 사용하여 미래를 여십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초기 기독교에 상당한 손실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주어진 핍박은 기독교에 위기로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그 핍박은 기독교의 확장으로 세계화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성령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보면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기독교 강국이 된 것도 이 역사속의 핍박과 고난과 전쟁과 일본 압제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고난을 통해서 성장하였고 기도하였고 전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나라로 하여금 기독교 강국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고난과 더불어 확장되는 종교라고 말 하는데 그 말은 사실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날 고난을 통해서 기도하는 체질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기도하는 DNA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우리민족은 아픔이 주어질 때마다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일제 침략이 우리나라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민족은 외부로부터 압박과 설움을 받을 때마다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적으로는 미국을 의지하게 되었고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과 미국 그리고 한국과 하나님을 떼어낼 수 없는 관계로 만드는 작용을 하게 되었습니다.
종교 독립
1831년9월9일 로마교황청은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독립시켜 조선교구로 설정하였습니다. 지난 5천년 동안 한국은 중국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국으로부터 독립해 본 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오로지 종교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이 로마교황청에 엄중 항의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로마교황 그레고리 16세는 엄격하게 한국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켰습니다. 그리고 1882년3월 미국이 한국과 우호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때 중국은 또 항의했습니다. 한국은 중국의 속국인데 중국이 대신 조인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때 미국이 단호하게 거절하고 한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체결하고 북경의 미국 공사관과 동격으로 서울에 미국 공사관을 설치합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미국과 연대의식을 강화하여 조선의 근대식 교육을 위해서 1886년6월에 미국 정부에 훌륭한 교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요청에 미국은 3인을 보내왔는데 그 3인을 모두 신학교 출신자들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한국에 기독교와 기독교 정신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기독교의 영향이 조용히 이 땅에 들어오면서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기독교가 마침내 우리민족의 대들보로 입지를 굳히게 된 사건이 1895년에 두 가지가 발생하였습니다. 하나는 청일전쟁 이후 온 나라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사대문 안에 살던 사대부의 지배층들도 전염병으로 가족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밖의 출입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길거리에 그냘 버릴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재앙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시체들이 뒹굴고 있었고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시국이 뒤숭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기독교인들이 십자가 완장을 차고 내다버린 시체들을 정중히 입관하여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기독교는 그때나 지금이나 장례 치르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장례가 임박하거나 늙으신 부모님들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장례가 나도 당황하지 않게 됩니다. 그때도 그리스도인들이 길거리에 버려진 시체들을 수습하였고 또 전염병에 걸려 앓고 있는 환자들을 데려다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환자 308명 중 145명이 살아났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기독교가 민족교회로 자리매김하게 된 한 가지 사건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사건은 명성황후인 민비의 시해사건이었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던 날 고종은 분노하기에 앞서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명성황후를 구둣발로 침실까지 들어와 칼로 죽인 일본 군인들이 자신에게 또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종은 선교사들을 불러 신변보호 요청을 하였습니다. 일국의 왕이 이 땅에 와 있는 외국의 선교사들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할 지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상황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력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때 5명의 선교사가 입궐하여 두려워 떨고 있는 고종을 곁에서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때에 이 나라를 붙잡아 준 것은 기독교뿐이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지 10년 밖에 안 되는 기독교가 왕을 보호해 주었고 이 민족을 구해 주었습니다. 이 두 사건으로 한국 기독교는 고난 받은 우리민족과 함께 하는 교회로 발전하여 한국은 유일하게 종교가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고 일본으로부터 싸울 용기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애국하는 교회
이 두 사건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이 나라의 임금을 충성스럽게 모시고 고난 받는 이 민족과 함께 한다는 것을 확인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감리교 출신 존스 선교사가 1901년 한국에서는 기독교보다 더 나은 애국과 충성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문서로 보고했습니다. 그 살벌한 때에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당시 기독교인들이 정동교회에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고 일 년 후인 1896년에 영천에 있는 독립문에서 고종탄신기념축하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그 행사가 있기 하루 전 독립신문에 “하나님께 찬미하고 기도할 것이고 애국가로 노래할 것”이라고 광고까지 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백성들이 임금님의 탄신을 경축하는 대회를 연 것은 그때 기독교 뿐 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부터 한국 기독교는 모든 일을 민족과 함께 합니다. 1907년에 윤치호가 찬미가를 발행하였습니다. 전체 15장에 불과했지만 당시에는 큰 사건입니다. 그곳에 찬송가도 넣었지만 특이한 것은 그 찬송가 속에 애국가와 황제송을 삽입한 것입니다. 찬송가에 애국가를 삽입한 것은 한국교회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빨리 기독교로 돌아가게 된 것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의 공로입니다. 일본이 이 나라를 무자비하게 지배하니까 우리민족이 그때 기댈 곳은 기독교 밖에 없다고 믿어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의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우리민족은 일본의 지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눌림 받았습니다. 우리민족은 힘도 없고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때 믿을 것은 오직 기독교뿐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민족이 가장 많이 부른 찬송이 “예수 예수 내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쉬 떠나지 마시고 부형같이 되소서”입니다. 그 무렵 1907년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베어드 선교사가 집회에서 한국민족의 아픔과 설움과 탄압을 생각하며 눈물로 기도했는데 그 내용이 “나의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버지시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성령이 불같이 떨어져 교회를 휩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제탄신경축 예배가 평양 대동강 건너편 사각대청에서 열렸는데 그때 300여명이 모여 기도를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때 기독교인이 300면이면 오늘 3만 명과 비슷한 숫자일 것입니다. 그때 교인들이 성령이 임하심으로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독립가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전국의 교세는 6개 교파에서 파송한 90명 선교사가 있었고 전국에 2천명의 기독교인이 있었고 50여 교회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기독교가 국민생활을 이끄는 세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때 당시 황제탄신축하 행사는 고관대작들이 개최하여야 하는데 일제가 두려워 못하던 것을 기독교가 나서서 더 크게 행사를 치렀는데 그때 빈부귀천 모두가 참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교회는 애국심으로 체질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바탕이 만들어 졌습니다. 그때 태극기를 가장 많이 게양한 곳이 교회였습니다. 고종이 평양지방을 순시할 때 교회가 태극기를 높이 게양하였고 고종을 위해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그런 열기가 마침내 교회로 하여금 무력까지 사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천주교인 안중근은 조선의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암살하였습니다.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본 안중근은 순간 무릎을 꿇고 “천주님, 폭살자는 죽었습니다, 감사합니다”고 기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구국기도회
그런 과정을 거치며 아픔과 핍박 때문에 한국교회가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구국기도회라는 것이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가장 많이 기도한 때는 6∙25때였습니다. 지금 한국이 살 길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 밖에 없다고 외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기도는 하나님께 손을 들고 기도하게 하였고 그것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손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한국을 당시는 조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전 세계에 한국 상황을 타전하기 위해서 당시 조선을 영문으로 쓰고 나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조선을 영문으로 써 놓으니 “초슨”(Chosen)이 되었습니다. 그 말은 “선택받음”이라는 말입니다. 선택이라는 “초슨”이라는 말의 어원은 한국말 조선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부를 영어로 “도네이션(donation)”이라고 말하는데 그 말도 한국말 “돈 내슈”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또 우리나라를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기적적인 성장의 원인을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가 성경을 구원의 말씀으로 그대로 믿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뜨겁게 기도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믿으면 반드시 전도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부흥회를 자주하였습니다. 개교회단위로도 하였지만 군, 면, 리 단위로 모여서 사경회를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뜨거운 기도와 찬양이 함께 어우러졌고 그곳에 어김없이 성령이 임재하시고 기사와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마다 구름떼처럼 모여 기도와 찬양을 하였습니다. 1903년에 원산에서 선교사들이 시작한 집회가 여러 달 동안 계속되었는데 마침내 그 열기가 평양 장대현교회를 시작으로 그 유명한 새벽기도회를 하게 하였는데 그때 일본경찰들이 와서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그 기도소리를 듣기에도 눈물이 났다”고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힘 있게 기도했으면 일본경찰까지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우리민족은 한이 많은 민족입니다. 서러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그냥 기도하지 않고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런 훈련으로 오늘까지 한국교회는 뜨겁게 기도하는 교회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형성되던 시기는 일제의 침략기였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민족교회로 출발하였습니다. 당시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조직은 교회뿐이었습니다. 한국민족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한국교회는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면서 이 어려운 난국과 역사의 굴곡을 헤쳐 나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전통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전통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는 국가나 민족을 생각하는 것 보다 개인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공공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나라를 앞세우고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에스더의 기도를 들으셨고,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으셨고, 다니엘과 스룹바벨과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늘 평안만 주시지 않고 환란도 핍박도 고난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잘 나가던 복음의 흐름이 갑자기 스데반이 순교로 주춤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몹시 당황하고 앞날이 캄캄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그 환란을 통해서 복음을 더 깊고 더 넓게 확장시키셨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보면 그 환란은 축복의 기회였습니다. 그 결과로 사울이 회개하고 복음이 사마리아로 유럽으로 신속하게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환란도 고난도 은혜입니다. 한국교회는 고난과 더불어 성장하였습니다. 그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앞으로도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이 나라의 앞날을 이끌어주실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의 섭리 속에 나와 우리민족의 운명도 들어 있음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