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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60705 / 스데반의 순교(3) 행 7:54-60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6.06.20|조회수61 목록 댓글 0

스데반의 순교(3)

행 7:54-60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설 교 >

천국에서 환영받는 사람

행 7장 54~60절 / 박정근목사

여러분은 이 땅에 살면서 환영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우리 모두는 누군가로부터 몇 번 정도는 환영을 받은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적게는 친지나 부모님 집을 방문했을 때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집 앞에 마중 나와 있으면 얼마나 반가우셨습니까? 환영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중 앞에서 열렬한 박수를 받기도 합니다. 신문이나 TV를 통해 보면 가끔 대단한 환영의 모습을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탤런트나 축구선수, 그들이 이기고 돌아왔을 때 그 나라 국민들의 환영은 대단합니다. 외국의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우리는 김포공항 좌우로 학생들을 동원해서 양 나라의 국기를 들고 그를 열렬히 환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환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환영을 받고 난 이후에 그 환영이 크면 클수록 허전함을 느낀다고 고백합니다. 실제로 이런 극진한 환영들이 때로는 야유와 저주로 바뀌는 것을 주위에서 종종 목격합니다. 미국에서 월드컵이 열렸습니다. 한 축구선수가 자살골을 넣어서 그 나라가 축구에서 졌어요. 그 선수가 공항에 귀국했을 때 그 국민 가운데 한 사람이 권총을 쏴서 그 선수를 죽인 사건, 그것이 미국 신문에 얼마나 크게 보도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마 한 ·일전 참패 후 우리 한국 선수들도 공항에 나오면서 굉장히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귀국했으리라고 저는 생각됩니다.

이렇듯 이 세상의 환영은 일시적이요 변화적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늘 나를 환영하던 사람들이 내일 나를 향해 칼을 들이댑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벽한 환영이 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 환영은 허전하지도 않습니다. 변하지도 않습니다. 정말 완벽한 환영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천국에서의 환영입니다.

이 본문은 스데반이 순교 당하는 것을 자세히 기록해 놓은 것인데, 달리 말하면 스데반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모습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영혼이 이 땅을 떠나 천국에 갔을 때, 그곳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이것에 관하여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자세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56절 말씀에 학자들은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이 56절이 주목을 받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인자'라는 단어입니다. '인자'란 무엇인가? 사람의 아들입니다. 신약성경을 볼 때 예수님을 두 가지 명칭으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인자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은 신자라고 하지 않는가? 아마 번역하는 사람들이 이상해서 안한 것 같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자신의 명칭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자(사람의 아들)로 소개했건만, 제자들은 단 한번도 예수님을 '인자'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아!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그러나 단 한번 어느 제자도 예수님을 인자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 유독 스데반이 예수님을 향해 '인자'라고 불렀습니다.

왜 인자라고 불렀을까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거기에 서 계셨습니다. 스데반이 발견한 예수님은 완벽한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완벽한 인간이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이 땅을 창조하셨으며,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다스리실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그 앞에서 그를 향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그리스도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동시에 인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하늘 보좌 영광을 다 버리시고 저와 여러분의 모습으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 하셨어요.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셔서 병자들,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약한 자들과 동고동락하신 분입니다.

스데반이 마지막 죽는 순간에 발견한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인가? 부활 승천하셔서 인간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인간을 그저 통치하시기만 하는 통치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저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오늘도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시는 하나님! 인자였습니다. 내가 지금 고난받는 것, 내가 곧 돌에 맞아 죽을 터인데 저 돌을 맞는 고통이 얼마나 아픈 것인가를 친히 남김없이 다 아셔서 나를 이해해 주시는 인자 되신 하나님! 스데반은 마지막 죽는 순간에 그 인자를 발견했습니다. 인자! 그래서 스데반은 유일하게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인자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 인자 되신 예수님께서 '서 계셨다'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종종 보는 바로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여기에 '앉으셨다'는 것은 속죄의 사역을 다 마치셨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보좌에 앉으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하늘을 열어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목도하였는데, 예수님이 일어서 계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 계셨어요!.

벵겔이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일어서셨는가? 예수님은 스데반을 환영하기 위해 일어서셨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왜 서셨다고 표현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는 겁니다. "스데반아, 어서 올라오너라!" 그의 순결을 보고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예수님은 앉아서 그를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 예수님은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 스데반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는 날, 우리가 천국에 막 들어가는 그 순간 주님께서 앉으셨던 보좌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으신다면 그것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스데반이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도대체 주님께서 그의 고통을 어떻게 다 이해하셨기에 그가 마지막 천국 문에 들어서는 그 순간 일어나서 그를 맞이했단 말인가! 여러분,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맞이하시는 천국에서의 대단한 환영을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은 이것에 대해서 침묵하시지 않습니다. 스데반만 환영받기를 원치 않으신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도 천국에서 동일한 환영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으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을 수 있는가를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반응해야 한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반응해야 합니다. 스데반을 죽인 자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소위 말하는 가해자지요. 그들이 누구입니까? 산헤드린입니다. 좀더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교회의 지도자였어요. 구약성경을 줄줄 외우다시피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쳤어요. 구약성경을 알뿐만 아니라 그들은 스데반의 말씀을 들었던 자들입니다. 말씀을 듣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오늘 본문에 보니까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찔렸다고 얘기합니다.

54절을 보세요.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

'찔렸다' 헬라어로 '디에프리온토'라는 이 말을 직역하면 '화살이 과녁에 꽂혔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몽골에 가면 역사 박물관은 꼭 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세계를 한때 지배했던 몽골족이 지금은 처참하게 2백만 밖에 남지 않았어요. 지금 그들이 얼마나 가난하게 사는지,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이 역사의 아이러니가 저는 궁금했어요. 박물관을 쭉 둘러보았습니다. 그 중에 징기스칸이 쓰던 활을 전시해 놓았어요. 그 활이 얼마나 큰지 화살 하나가 창만 했어요. 징기스칸이 대단한 거구였는데, 그 큰 화살을 활에 매겨서 장사가 힘껏 당겨 놓았을 때 그것이 과녁에 가서 깊이 꽂힙니다. 바로 이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찔렸어요. 꽂혔어요. 즉 정곡을 찔림 당한 겁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산헤드린 사람들은 스데반이 설교할 때 이 설교를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나를 두고 한 말씀으로 알아들었다는 겁니다. 말씀이 빗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것은 내게 말씀하신 것이다. 아! 저 사람은 나한테 얘기하고 있구나!'하고 과녁에 화살이 꽂히듯 그들의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찔렸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성경은 가르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찔림 받기 위해 온 사람들입니다. 무슨 말씀이든 '이것은 나를 두고 한 말씀이구나, 내게 주신 말씀이구나'하고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가끔 설교를 마치고 나가다보면 어떤 분이 저를 두고 핀잔하는 투로 얘기합니다. "목사님, 오늘 왜 제 얘기를 꺼내셨어요?" 신기한 것은 저는 그 사람에게 지난주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동시다발적으로 예닐곱 명, 많게는 열 명 정도가 같은 얘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어찌 이 사람들을 다 알아서 그들의 얘기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지요. 찔림을 당한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찔림을 받고 난 이후에, 그 이후에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찔림을 받은 다음에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왜 내 얘기를 하냐고 쓸데없이 다른 데 신경을 씁니다.

오늘 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54절을 다시 한번 보세요.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박혔습니다. 주의 말씀이 화살같이 그 마음에 꽂혔는데, 이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게도 이를 갈았어요. 이를 갈 뿐만 아니라 그 다음절에 보니까 귀를 막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문제입니다. 싸울 때 보면 왜 싸우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귀를 막으니까 싸웁니다. 대부분의 싸움을 보십시오. 귀만 열면 싸울 일이 없어요. 남의 얘기를 좀 들으면 안 싸워요. 그런데 왜 싸웁니까? 내 얘기만 하려는 거예요. '니 얘기 들어봐야 아무 소용없다'하고 악을 쓰고 남의 얘기는 듣지 않으니까 거기서 싸움이 나고 살인이 발생하는 겁니다. 듣는 마음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귀를 열면 이해가 가요. 감동이 오는 겁니다. 악의에 찬 사람은 막바지에 이르러 귀를 막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천국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오늘 이 산헤드린 이스라엘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 성경의 박사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맥락인 사도행전 2장 37절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를 하는데 똑같이 찔렸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찔렸어요. 그 사람들은 유대인들 일반 사람들인데 삼천 명이나 되었어요.

도대체 베드로가 무슨 설교를 할 때 찔렸는가? 이런 설교를 했어요.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여러분! 정말인가요? 실제로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로마 군병이 박았어요. 조금 더 책임이 있다면 아마 빌라도가 책임이 있을 것이고, 바라바가 책임이 있을 것이고, 아마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배반자인 가롯 유다가 책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삼천 명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얘기합니까? 제가 그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그랬을 겁니다. "말 조심하시오! 우리가 언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단 말이요? 로마 군병이 박았지 않았소. 당신이 보지 않았소!"

그러나 성경 말씀은 무엇이라고 얘기합니까? 그들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옳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찔릴 때에, 화살이 되어 꽂힐 때에 그들은 반항하지 않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똑같은 말씀이 선포되었으나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를 갈았고,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은 가슴을 열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말하였습니다.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삼천 명은 그 날에 성령의 충만함과 구원을 얻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누가 천국에서 환영받을 것인가? 이 땅에서 존경받는 사람일까? 지위가 높은 사람일까, 호화로운 집을 가졌던 사람일까? 이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 내 마음에 찾아온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반응하는 자를 주님은 보좌에서 일어나,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찔릴 때 귀를 여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러분의 가슴을 여십시오. 들으십시오.

탈무드에 보면 사람을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항아리에 비유했어요. 어떤 사람은 거꾸로 된 항아리와 같은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데 항아리를 엎어놓은 것입니다. 여기에 아무리 소낙비가 쏟아지면 뭐합니까? 거꾸로 놓으면 소용없는 겁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똑바로 놓여 있긴 있는데, 그 안에 오물이 가득 찬 사람이 있어요. 더러움이 가득 찬 것이지요. 여기에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한 종류의 사람은 비어 있는 항아리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우십시다. 주님을 향해 우리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찔릴 때에 올바로 반응해야 합니다.

 

2.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자가 되어라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보는 것에 따라 그대로 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날마다 삼류 연속극만 보면 묻지 않아도 삼류 인생이 되는 겁니다. 얼마 전 우리 교인을 만나서 텔레비전 얘기가 나왔어요. TV 연속극을 얼마나 봅니까 하고 물었더니 별로 안 본다고 합니다. 자기는 월 ·화 드라마 하나 보고, 수 ·목 드라마 하나 보고, 주말 드라마 하나 본다고 하더군요. 정말 별로 안 보더군요. 여기에 혹시 그런 분이 계십니까? 그쯤 보면 여러분은 10년 후에 묻지 않아도 삼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음란물을 보면 음란하게 되어 있어요. 틀림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니까요.

우리가 날마다 돈만 생각하고, 돈만 바라보고 살면 돈 신(神)의 노예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우상은 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우리나라 말에는 재물로 번역되었지만, 이 단어는 사실 매먼(mammon), 돈 신(神)입니다. 예수님은 아예 돈을 돈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신으로 표현해 주었어요.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이것에 빼앗기기 쉬웠으면 말입니다. 날마다 미운 것만 보고 살면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복수의 화신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산 괘법동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한 사람이 이혼했는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기의 두 아들을 칼로 찔러 죽이고 장인과 장모를 칼로 찔렀어요. 장인은 죽고 장모는 중태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요? 짐승도 아닌데... 그러나 가능합니다. 어떻게요? 날마다 미운 것만 바라보고 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위에 것을 찾으라!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이 말씀은 우리의 관심을 일시적인 것에 두지 말고 영원한 하늘 나라에 집중시키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본문을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왜 우리가 위에 것을 찾아야 합니까? 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늘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계속 얘기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멀쩡히 살아있는 우리보고 죽었다니요? 우리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니 무슨 얘기일까요? 오늘 사도는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데,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죽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치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를 참으로 믿는다고 하는 것은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어서 세상에 대해서 내가 죽는 것입니다. 세상의 쾌락, 세상의 돈, 이런 것에 대해서 내가 죽는 겁니다.

죽은 사람을 보셨습니까? 죽은 사람 앞에 재미있는 연속극을 갖다대면 그 사람이 "허허허"하고 웃으면서 벌떡 일어납니까? 진수성찬을 차려놓은들 그 사람이 일어나 먹습디까? 여러분, 우리는 죽었습니다. 예수 믿는 그 순간, 세상 것은 다 죽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어요.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 이제 다른 데 있어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감취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하나는 안전함입니다. '오! 나의 예수는 반석이시니 우리의 생명이요' 이 세상에 상관없이,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 딱 보호되어 있어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귀중한 어떤 것은 감추어 놓잖아요. 안전한 곳에 말입니다. 가장 안전한 금고, 하나님 안에 우리의 생명이 감춰져 있어요.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 더 얘기합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아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과 차이가 없어요. 아니 오히려 못할 때가 있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사업을 일으키는데, 믿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해요. 돈도 사랑하지 않아요. 쾌락도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사냐고 사도는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이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이 세상 사람들이 꿈도 꿀 수 없는 놀라운 영생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을 생각지 말고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하늘나라를 얼마나 바라보십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까 스데반은 이 극한 상황, 사람들이 하나 하나 손에 몇 개의 돌을 들었습니다. 이제 곧 명령이 떨어지면 자기를 칠 그 찰나에 스데반은 환상이 아니라 하늘이 열리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앉으셨던 예수님이 아니라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고통을 이해하시는 그 주님을 보았다고 스데반은 말씀합니다.

사람에게 위기가 닥치면 평소 생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이 극한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늘 나라가 열림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평소에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산 줄 믿습니다.

천국에서 환영받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천국에 갔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를 열어보세요. 물론 수박 쪼개듯이 열어보지는 않겠지요. 여기에 슬라이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빛을 비추자 내가 일생동안 했던 머리의 생각들이 저기에 전시물처럼 사진이 되어 쫙 나타납니다. 그 나타난 첫 번째 장면이 하나님의 말씀, 하늘나라, 예수님, 사랑, 용서, 성결, 찬양... 거기에 모였던 뭇성도들과 예수님이 무엇을 할까요? 김일성(?) 박수를 칠 줄 믿습니다. 우뢰와 같은 박수! 또 다른 사진이 펼쳐지고 평생 어떻게 살았는가가 보여졌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나오는 것이 세종대왕 지폐, 달러, 섹스, 수많은 음란한 것들이 비취기 시작합니다. 교회에서는 그렇게 거룩했는데... 사도 바울은 이것을 향해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말씀합니다. 환영받지 못할 구원!

여러분, 천국에서 환영받기 원하십니까? 그 날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심판하실 때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셔서 우리를 맞이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생각을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늘나라를 바라보십시오. 이 땅에 대해서 우리는 죽었습니다. 하늘나라를 사모하십시오.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천국에서 환영받을 자가 될 수 있는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시때때로 나에게 말씀할 때 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날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3. 늘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늘 기도하는 자세! 우리가 잘 아는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에 대해 언급하시며 세 가지를 얘기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16,17,18절의 짧은 구절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니요? 운전할 때도 밥할 때도 기도해야 하는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이 말은 늘 기도할 자세가 되어 있으라는 겁니다. 옆구리만 쳐도 기도가 튀어나오도록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라는 얘기입니다.

이미 제가 말씀드렸지만, '쉬지 말고'라는 단어를 올바로 번역하면 hacking cough, 우리 나라 말로 '잔기침'이라고 합니다. "요즘 잔기침 병에 걸렸어!" 목에 잔기침 병이 걸린 사람은 조금 호흡만 잘못 해도 콜록거립니다. 기침이 항상 목에 붙어 있어 늘 나올 준비가 되어 있는 겁니다. 참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어요. 여기에 이 단어를 썼어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 내 환경이 어렵든지, 슬프든지, 좋든 나쁘든 간에 항상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가라는 겁니다.

60절을 보세요.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릎을 꿇었다고 본문은 얘기하지 않습니다. 언제 꿇은 겁니까? 뭇돌에 맞았어요. 이미 육신은 깨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정신은 혼미해집니다. 이제 이대로 죽는구나 싶은 순간에, 끝이라고 판단되는 그 순간에 스데반이 무릎을 꿇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남의 얘기로 읽지 마시고 상상해 보세요. 수많은 그 동안 알아왔던 여러분의 친구들이, 같이 교회 생활하던 유대교의 친구들이 돌을 들고 갑자기 원수가 되어서 자기를 내려칩니다. 돌이 날아와 머리를 쳐서 피가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온 갈빗대를 치고 다리를 칩니다. 그 순간에 스데반은 무릎을 꿇었다고 얘기합니다.

돌무더기 속에서 지금 엉망이 된 육신, 정신은 오락가락 합니다. 한 가닥 남은 정신마저 가물가물 사라져 갑니다. 이러한 순간에 무릎을 꿇은 겁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기도 없이 내 인생을 끝낼 수는 없다!' 그래서 넘어져 가는 몸을 가누면서 한사코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군중의 고함소리와 온갖 저주, 그 수많은 돌 세례 속에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귀한 모습입니까!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이것이 하루 아침에 가능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번도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 친구들이 돌을 던질 때에, 마지막 죽어 가는 순간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때문에 가능했던 줄 믿습니다. 스데반은 늘 기도했습니다. 늘 언제 어디서든 기도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기쁠 때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슬플 때도 그는 기도할 줄 알았습니다. 내 몸에 병이 찾아올 때, 누가 나를 저주할 때... 무슨 일을 당하든지 그는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에도 그는 평소에 기도하던 모습대로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다가 죽는 것이 여러분의 소원입니까? 오늘부터 소원을 바꾸십시오. 저는 이 본문을 연구하다가 어제 책을 덮어놓고 1,20분간 기도했어요. 제 죽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돌에 맞아 죽는 순교는 못할지언정 저도 기도하다가 무릎 꿇고 죽게 도와주세요.' 기도하다가 죽는 자! 하나님이 환영 안 하시겠습니까?

그는 마지막 죽으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한 가지 더 기도를 덧붙입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러한 스데반을 주님께서 보시고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하신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만일 이 예배당 문을 나가서 여러분의 영혼이 천국 문에 이르게 된다면,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 영혼을 부르셔서 천국에 입장해야 된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천국에서 어떤 환영을 받을 것 같습니까? 과연 주님이 여러분을 벌떡 일어나 맞이하시겠습니까? 혹 들려진 말씀에 귀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게 화살이 박히듯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꽂히는데도 일심으로 귀를 막고 자기의 생각대로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매주일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가슴에 화살처럼 꽂힘에도 불구하고 무반응하게 닫아놓은 항아리, 썩은 물이 고인 항아리, 돌짝밭, 길가, 가시밭처럼 찾아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멸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당신은 무엇을 바라보며 사십니까? 당신의 진정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오늘 하나님이 와서 여러분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시겠다고 하면 여러분은 솔직하게 무엇을 1,2,3위로 내어놓으시겠습니까? 혹 이 세상의 것은 아닙니까? 썩어질 돈은 아닙니까? 쾌락입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립니다.

당신은 기도하시나요? "예! 목사님, 저는 새벽기도 합니다."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예! 목사님, 저는 철야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 이것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옆 사람이 나를 치기만 해도, 내가 조금만 조용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만 해도 정말 살아 계신 주님과 대화하는 하나님과의 대화의 채널이 열려 있으신가요?

스데반은 가장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돌아 맞아 죽는 것은 너무 흔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죄를 지으면 돌로 치라고 했어요.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돌로 쳐 죽으라고 하면 죽을 사람 하나도 없어요. 돌을 찾다가 보면 다 도망갔거든요. 그러나 이스라엘에 가면 걸리는 것이 돌입니다. 제주도입니다. 늘린 것이 돌입니다. 스데반은 그 당시 가장 저주스러운 방법으로 그것도 친구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었어요. 그 주동자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사도 바울의 전기를 잘 읽어보면, 그가 언제부터 하나님의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바로 이 날이었습니다. 스데반의 겉옷을 맡아서 그 사건을 다 지휘하고 돌로 치라고 명령한 자가 사울이었을 것입니다. 그 스데반이 죽으면서 천사의 얼굴이 되어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죽어가는 스데반의 모습을 본 사울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보좌에서 일어나 맞이하셨습니다. 그는 천국에서 위대한 환영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 좀 고생스럽더라도, 이 땅에서 좀 불편하시더라도 우리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 갑시다. 주님과 교제하며 살고, 주의 말씀에 반응하며 살아 천국에 갔을 때 주님이 우리 모두를 벌떡 일어나 맞으시는 천국에서 환영받는 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스데반에게 본 받을 점

행 7장 54~60절 / 박봉수목사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는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이 최초의 순교자라는 점은 의외입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그가 사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교할 수 있는 사람은 사도처럼 특별히 택함을 받은 영적 지도자나 예수님께 특별히 훈련 받은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평신도일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순교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예수님을 직접 뵈었다든지 예수 믿은 지 오래된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오순절 사건 때 사도들의 전도로 예수 믿었고, 이제 1년이 채 안 된 초신자일 뿐입니다.

이 점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주님을 위한 충성은 직분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한 헌신은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직 믿음의 깊이에 달려있습니다. 오직 개인적인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스데반은 성경에 잠깐 등장합니다. 초대교회 이야기의 한 토막에 등장했다가 바로 사라졌습니다. 그저 초대교회의 한 에피소드처럼 다루지는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자칫 바울의 등장의 배경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여운은 사도행전 전체에 길게 드리워있습니다. 아니 초대교회 이래 교회사에 잔잔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 드라마를 보면 드라마 속에서 주연보다도 빛나는 중견배우들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주몽이라는 드라마에서 해모수 역을 했던 허준호라든지, 대조영이라는 드라마에서 양만춘 역을 했던 임동진이라든지, 최근 식객이라는 드라마에서 대령숙주 역을 하고 있는 최불암 등입니다. 이들은 주연은 아니지만 주연 못지않게 그 드라마를 빛나게 합니다.

스데반이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주연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 못지않게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를 빛나게 합니다. 그는 짧게 등장하지만 긴 여운을 남긴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이 스데반의 발자취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한 삶

 

1. 평소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하면서 내부적인 진통을 겪게 됐습니다. 교인들이 갑자기 늘어나다보니 사도들의 사역에 한계가 왔습니다. 말씀 사역하는 일, 기도하는 일, 그리고 교인 돌보는 일을 다 할 수가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집사를 세워서 일을 분담키로 했습니다. 특히 교인들을 돌보는 일, 어려운 교인들을 구제하는 일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사도들이 교인들을 모아 놓고 7사람을 뽑으라고 했습니다. 이때 사도들이 제시한 기준이 세 가지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지혜가 충만한 사람, 그리고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교인들이 사도들의 말씀을 기쁘게 받고 이 기준대로 7사람을 뽑았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 뽑힌 사람이 바로 스데반입니다.

사실 당시 초대교회는 무척이나 역동적이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창립 멤버입니다. 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한 번은 3000명, 또 한 번은 5000명이 전도돼서 교인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무척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특히 그 땅에 살고 있던 히브리파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외국에 살며 다니러 왔던 헬라파 신자들도 있습니다. 저들은 로마세계 각 곳에서 모여들었기 때문에 더욱 다양했습니다.

이런 교회에서 투표를 했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1등으로 당선될 수 있을까요? 한두 파의 지지로는 어려울 것입니다. 전체 교인들 골고루 지지를 받아야 가능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바로 그렇게 신앙 생활했습니다. 모두에게 칭찬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파 그리스도인들에게 칭찬 받았습니다.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가 평상시에 최선을 다하는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 특정인들과만 잘 지내서는 안됩니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칭찬을 받아서도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평소에 최선을 다해서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2. 교회 내 맡은 바 직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행 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7집사를 세워 교인들을 돌보게 된 뒤의 상황을 설명한 말입니다. 저들이 최선을 다해서 맡겨진 일을 감당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말입니다.

스데반이 이 일에 앞장 섰을 것입니다. 그가 한 일은 어려운 교우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특히 과부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구제하는 일은 잘해야 본전입니다. 도움 받는 사람들은 수고한 사람들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또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움 받을 때 섭섭했던 점은 잘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두고두고 마음에 새기고 말하고 욕합니다.

스데반이 이 일을 맡은 뒤로 불평이 없어졌습니다. 교회가 더욱 하나가 됐습니다. 저가 직분을 맡은 뒤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공정하게 했습니다. 소외된 사람, 누락된 사람이 없는지 철저하게 살폈습니다. 한 사람도 그 마음에 섭섭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내게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최선을 다해 앞 장을 서야 하겠습니다.

 

3. 교회 밖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행 6: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스데반이 교회 밖에서 어떻게 신앙 생활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 밖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스데반은 결코 쉽게 전도할 수 없었습니다. 방해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기처럼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 때문에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논쟁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비열하게 방해했습니다. 스데반과 논쟁에서 이길 수 없게 되자 공회에 고발했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을 매수해서 거짓으로 스데반을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물러 서지 않았습니다. 모진 방해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전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반대한다고 물러서면 안됩니다. 박해가 일어난다고 포기하면 안됩니다. 지혜롭게 하되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한 교수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학기 초에 리포트에 대한 안내를 했답니다. 언제까지 어떤 주제로 얼마만한 분량이라고 알려주었다는 겁니다. 날짜가 임박해서 한 번 더 확인했답니다. 리포트를 걷는 날 학생들에게 자신이 정직하게 점수를 매겨서 리포트 앞에 쓰라했답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100, 할 만큼 했으면 80점, 대충했으면 40점 하는 식입니다.

리포트를 걷어보니 그 많은 학생 중에 2명만 100이라 썼더랍니다. 그래서 그 두 리포트에만 코멘트를 달아서 돌려주었답니다. 다른 학생들이 불만을 늘어놓더랍니다. “다른 수업 시험이 있어서, 아르바이트가 바빠서, 부모님이 편찮아서” 등등 핑계도 많더랍니다.

이 교수님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자네들이 취직하려고 면접시험 볼 때 면접관에게 이 회사에 입사한 뒤에 80%만 노력하겠다고 말하겠나? 결혼하기 위해 교제하는 사람에게 당신에게 60%만 집중하겠다고 말하겠나?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인생을 성공하는 걸세”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신앙생활에 몇 점이나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 몇 %나 헌신하고 계십니까? 100점을 줄 수 없다면 어떤 핑계를 대시겠습니까? 스데반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100점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감동적인 죽음

 

스데반은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 아니라 멋지게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1. 그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스데반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평안했습니다. 6: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참 표현이 이름답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지금 억울하게 끌려왔습니다. 무고한 채로 죄인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공회에 끌려와 앉았는데 누구도 자기 편 들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자칫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점점 깊어옵니다.

이럴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억울한 표정을 짓게 됩니다. 무서워 두려운 표정을 짓게 됩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고 절망적인 표정을 짓게 됩니다. 이것이 이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달랐습니다. 담대한 표정이었습니다. 평안한 표정이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표정을 천사의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그 표정 자체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샘물 호스피스 원주희 원장의 말이 생각납니다. 한 분이 말기 암의 극도의 고통 속에서 죽어 가 더립니다. 너무도 딱해서 웃옷을 벗고 침상으로 올라가 등 뒤에서 꼭 안았답니다. 그 분이 가쁜 숨을 고르며 말하더랍니다. “목사님 고마워요. 잊지 않을께요. 먼저 가서 기다릴께요. 저기 뭔가가 보이네요. 그럼 다시 만나요” 그만 고개를 떨구더랍니다.

편히 눕히고 자리를 정리하면서 얼굴을 보았답니다. 그렇게 평안한 표정이더랍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까지 있더랍니다. 이것이야 말로 천사의 얼굴이로구나 생각이 들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얼굴을 살펴보십시오. 평상시 우리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아야 합니다. 환난이 다가와도 천사의 얼굴과 같아야 합니다.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과 같아야 합니다.

 

2. 그 마음이 감동적입니다.

 

스데반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 7:59-60을 보면 이렇기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이 돌에 맞아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사죄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용서했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스데반은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전도하러 나왔다가 붙잡혔습니다. 공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끌려나왔습니다. 분노한 사람들이 그를 내치고 돌로 칩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죽게 된 것입니다.

생각이 많을 것입니다. 갑자기 생긴 상황에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이렇게 기막힌 상황으로 몰고 가는 거 포악한 무리들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을 것입니다. 욕하고 저주를 퍼부어도 시원치 않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런 상황에도 저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합니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죽어가면서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그 용서가 감동적입니다.

 

네덜란드의 믿음의 여인 코리텐 붐이 수용소에서 자신을 학대하고 언니를 죽인 간수를 전쟁 후에 만났습니다. 그 때 기도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하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다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난 너에게 용서할 마음이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용서하라는 말에 순종하겠느냐?”

마침내 감정을 뒤로하고 순종하는 뜻에서 두 팔을 내밀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 마음 속에 용서할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간수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후에 붐 여사는 이 모든 용서가 기도의 응답이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용서하고 사십니까? 우리는 결코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다만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용서할 마음을 부어주십니다. 마음을 따라 행동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스데반처럼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이런 감동적인 모습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그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바울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그가 변화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또한 우리의 마음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감동이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스데반이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평상시 최선을 다해 살았고, 또한 감동적인 죽음을 맞을 수 있었을까요? 본문은 그 비결을 한 마디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55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렇습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스데반으로 하여금 감동적인 죽음을 맞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이 이토록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또 감동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령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늘 성령 충만하여 항상 친절하고 밝은 표정으로 장사를 해서 날로 번창했습니다. 어느 날 가게가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왜 저렇게 잘 믿는 사람 가게에 불이 났을까?” 이 분이 기도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었습니다. 다음 날 이런 벽보가 붙었습니다.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새로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이 그 벽보를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도왔습니다. 어렵지 않게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은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 성령을 의지하고 살면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할 수 있습니다. 감동적으로 삶을 마감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스데반의 본을 받아 최선을 다해 살고, 감동적으로 삶을 마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도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회

행 7장 54~60절 / 이중표목사

우리 주님께서 한신교회를 1977년 6월 5일 창립케 하셨습니다. 한국 민족을 사랑하고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계획속에서 한신교회가 탄생했습니다. 한신교회의 창립과 함께 항상 기억되는 서정주씨의 시가 있습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밤새도록 울었나 보다"

청계산에 들어가 6개월을 울고서 한신교회 창립 비전을 이 종에게 주셨습니다. 한신교회 비전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우러러 보는 그리스도인을 스데반이라고 합니다. 스데반은 이름 자체가 위대하고 이름대로 산 사람입니다.

예수교 사제이며 심리학자인 헨리 나우엔은 "목회 사역은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가운데서 예수님을 가장 많이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스데반 교회가 되는 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교인들이 많은 것이 가장 복된 교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살다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데반을 닮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증인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땅끝까지 예수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순교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죽는 것입니다. 영광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감동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역사에 길이 남아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최고로 인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실로 스데반은 짧게 살았으나 굵고 크게 산 자요, 하늘에 계신 예수님까지도 자리에서 일어서게 한 놀라운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처럼 죽었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증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신앙을 간증하면서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있었다"(행 22:20)라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은 죽었으나 사도 바울은 땅끝까지 증인으로 이어가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증인입니다. 스데반이 없었으면 사도 바울이 없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령과 은혜가 충만했는지 그에게 능력과 기사와 표적이 따랐습니다. 그가 얼마나 지혜가 충만하였는지 입을 열면 그의 설교에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사랑이 넘치는 집사였습니다. 스데반은 구제하는 일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랑의 손을 폈습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자비의 손을 펴서 언제나 가난한 자가 있는 곳에 스데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에 대하여 가장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성경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간단하게 '죽었다'는 말로 기록되어 있으나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한 것은 스데반이 죽을 때의 모습이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신앙이 바울 사역으로 꽃이 피었습니다. 스데반에 있었던 가능성이 바울이 된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초대교회 큰 타격이었으나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중대한 섭리였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신랄하게 책망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 7:51-53)

이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스데반은 이때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했습니다. 그때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 7:55-58) 라고 하였습니다. "저희가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것과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은 같은 사건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것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스데반이 공통으로 닮은 모습이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본 것은 예수님께 배웠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수많은 무리가 있을 때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심으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막 6:41).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요 11:41).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다락방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예수님은 언제나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에게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이나 인격을 닮을 수는 없습니다.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그 모습을 닮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삶의 자세는 닮을 수가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배워야 합니다.

 

스데반의 믿음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그 믿음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본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을 설교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행전 7장 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능력을 간구합니다. 또 우리는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는 자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좋으신 하나님으로 임재하셔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다 자신의 입장에서 자기 중심적인 소원을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하고 영광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자나깨나 영광의 하나님을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리들이 이를 갈며 달려들 때 "주님, 나를 도와주소서. 저 원수의 무리에게서 나를 보호하소서." 하고 간구한 것이 아니라 "주여, 나는 죽어도 좋사오니 영광을 받으소서." 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나깨나 영광의 하나님을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사는 자는 가난해도 영광이 나타납니다. 실패해도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환난중에도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이 영광은 성공이나 부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고 그를 찬양하고자 하는 삶의 목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예수님께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목적이 고상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인간의 실패 가운데 최고의 실패는 사는 목적의 실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실패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사랑했습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56절)

스데반은 '인자'를 보았습니다.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영광스러운 인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영광스러운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을 보는 그 믿음 위에 섰던 것입니다.

인자 예수는 죽으러 오신 예수였습니다. 죽으러 온 예수는 희생하며 산 예수를 말합니다. 스데반은 인자 예수를 믿엇고 그 예수를 바라보았기에 인자 예수의 사랑을 본받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사랑은 인자 예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인자 예수의 사랑으로 스데반은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인자 예수의 사랑을 본 스데반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닮게 했습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며 용서하고 죽습니다.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원수를 사랑하였습니다. 원수들이 이를 갈고 달려들 때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고 자기를 저주하는 자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원수들은 이를 갈며 달려들었으나 성령이 충만하고 스데반은 입을 열고 저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그는 사랑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최고의 사랑은 원수 사랑입니다. 구제하고 친절을 베푸는 사랑은 비교적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해하고 죽이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사랑입니다.

소설가 정연희 씨는「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는 명의순 씨의 숭고한 삶의 일생이 사실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의순씨는 평양 장대현 교회 맹관호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해방 후에 월남한 그는 한신대학에 다니다가 한국전쟁을 만나 북한군에게 잡혀서 고문을 당했고, 모진 고생 끝에 부산으로 피난 내려가던 중 미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는데 북한군 첩자로 오해를 받게 되고 결국 포로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2년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중환자들을 돌보면서 물을 떠다가 발을 씻겨주고, 죽어가는 결핵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밤새워가며 위로하고 기도해 주는 거룩한 나날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수만명의 포로 수용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억울하게 거제도 수용소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주변 사람들이 미군당국에 진정한 결과 석방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옥같은 포로 수용소에 그대로 남아있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은 성 프랜시스의 사상적 영향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친구에게 써 보낸 편지에 프랜시스의 기도를 인용했습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받을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천국으로 들여보내시든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소서. 그리고 만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가 없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에 남아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겠나이다."

이러한 프랜시스의 기도를 그는 실천하려 했던 것입니다. 친구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담담하게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 곳에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라네. 내가 이 곳에 남아있는 것은 결코 희생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아닐세. 이 곳에 있는 형제들 중에는 나 같은 것이나마 필요로 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밥 한 톨을 가지고 서로 으르렁거려야 했던 그 살벌한 포로 수용소에서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오래 하고 또 그 비참한 환경 속에서 온갖 병자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그의 몸은 약해질대로 약해졌고, 나중에는 몸에 병까지 얻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중공군 포로들은 이렇게 통곡하면서 추도문을 썼습니다.

"1952년 8월 11일 새벽 3시, 우리는 맹선생의 죽음을 통곡합니다. 애통합니다. 선생님께서 환자를 다 씻긴 다음에는 언제나 시편 23편을 중국말로 더듬더듬 읽어주시던 음성이 귀에 들려옵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외치시며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목자 잃은 어린 양처럼, 어머니를 잃은 고아처럼 슬픈 포로민으로 이제 누구를 바라보며 살 것인지 우리는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목자이신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곡합니다. 맹 선생님 편히 잠드소서. 우리는 맹 선생님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포로 수용소 중공군 병동 환자 일동이 드립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습니다. 그는 저희 한신대학교 선배로 위대한 생을 살다 2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간간히 친구들에게 보냈던 편지들이 모아져서 그의 생애가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포로 수용소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께 '사랑의 잔이 넘치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참 목자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그 사랑의 잔을 포로 환자들에게 사랑의 잔으로 부었던 것입니다.

 

천국 소망으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소망의 사람입니다. 소망은 하늘나라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영혼은 주님 계신 곳으로 갔습니다. 스데반은 자기 영혼이 가야 할 곳을 알았습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59절)라고 말합니다. 이 기도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소망을 두고 하늘 영광을 위하여 생명을 드린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스데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산 것입니다.

경기도 '능내'라는 곳에 가면 미재 부락에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전도를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회장이 되었습니다. 신유박해 때 고난을 받고 사형장으로 가면서 "나는 영원한 길로 가고 있다"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리고 형틀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할 때 눈을 뜨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면서 "땅을 보고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겁을 먹고 망나니가 자신없이 칼을 쳐서 몸이 끊어지지 않아 정약종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하늘을 우러러 손을 들어 십자 성호를 긋고 참수를 당했다고 합니다.

"주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하고 살아서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스데반의 신앙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니요, 예수 안에서 산 자입니다.

증인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증언한 사람들입니다. 이 행복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이며,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서도 웃고 소망 중에 기뻐하는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사랑하는 맘 변치 못해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

 

순교자는 산자의 신앙을 가졌기에 산자의 행복을 최후로 증거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평소에 가진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이름의 사람

스데반은 참으로 위대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스데반이라고 하는 말은 그 이름 자체가 '스테파노스'( )라고 하는 헬라어로 '면류관'이라는 뜻입니다. 면류관은 왕이 쓰는 것으로 영광의 상징이며 충성된 자나 사랑하는 자가 받는 영광의 상징입니다. 면류관은 '자랑스럽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면류관이요, 자랑스러운 존재를 의미합니다.

스데반은 어디에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면 스데반이요, 면류관입니다. 사회나 직장이나 교회 어느 곳이든 희생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그 모임의 자랑이며 면류관입니다.

오늘 이 교회에서 스데반은 누구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선언하고 부활의 신앙으로 사는 별세의 성도입니다. 그 사람이 스데반이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성도입니다.

스데반은 누구든지 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되어야 됩니다. 스데반 목사, 스데반 장로, 스데반 권사와 집사, 스데반 성가대, 스데반 구역장, 스데반 성도가 되십시오. 이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하늘나라에 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벌떡 일어나셔서 "오, 스데반아! 어서 오라"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감고 스데반과 같이 영광스러운 존재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스데반의 영광스러운 믿음을 가져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의 사랑을 가져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의 소망을 가져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은 살아도 스데반이요, 죽어도 스데반입니다. 예수 때문에 행복하고 예수 때문에 죽어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죽으면서 스데반과 같이 불멸의 웃음을 지어야 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죽이는 자를 용서하며, 그리고 괴롭히는 자를 위해 복을 빌어주고 마지막 죽으면서도 그 얼굴에 환희를 가지고 죽어야 스데반이 됩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죽으면서 천사처럼 빛이 났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스데반은 별세의 증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아름답게 증거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스데반 안에 계신 성령

유민용목사 / 사도행전 7:55-60

오늘은 성령강림후 두번째 주일이며 환경선교주일입니다. 26주 동안 성령강림절기를 보내게 될텐데, 스톨의 녹색은 믿음의 성장을 표시하는 색깔입니다. 이 스톨을 보실 때 마다 믿음을 성장시키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감싸주심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설교가 담긴 매우 긴 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로 발생한 순교 사건이 소개되지요. 스데반의 순교는 구원사에 있어서 ‘적색순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환경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인한 수많은 북극곰들의 죽음과 발생하는 화재들, 폐수로 인해 죽어가는 바다 물고기, 환경오염으로 인한 수많은 자연재해 등은 ‘녹색순교’가 아닐까요? 우리는 녹색이 은총인 시대를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지으시고 난 뒤에, 사람을 초대해 주셨습니다. 피조세계를 잘 관리하라는 청지기의 사명을 주신 것이지요. 그러니 창조신앙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 창조된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삶의 일터와 땅을 밟고 살아가는 현장에서 성령께서 일하고 계심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터로 나가서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것은 매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오늘날은 믿음을 지키기 위한 ‘적색순교’의 박해가 사라진 시대를 살아갑니다. 한편으로 보면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탐욕에 물든 마음을 내려 놓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은 매일 순교의 삶을 연습하는 것이지요.

 

태초에 하나님은 혼돈, 공허, 흑암이 있던 곳에 에덴동산을 창조하셨습니다. 지상의 파라다이스입니다. 에덴을 만드시고 인간을 초대했을때에는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것입니다. 예컨대, 여기 그림 한장이 있습니다. 후안 후아네스(Juan de Juanes, 1510-1579)가 그린 스데반 집사의 그림인데요. 그는 예술가 가문에서 태어났고 16세기 후반에 ‘스페인의 라파엘로’로 불렸을 정도로 유명한 발렌시아 화가로 성장합니다. 500백년 전 그가 그린 스데반 집사의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림 안에는 그의 생각과 시대적 배경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미술에 조회가 깊어 질수록 더 많이 발견될 것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 창조된 인간 안에는 ‘신적갈망’이 있고 분명히 보여져 있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가는데 있습니다. 창조세계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이 있음에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로 인해 창조자의 숨결을 모른다고 핑계되고 변명하는 것이지요. 죄로 인해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후, 사람들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바벨탑을 쌓으며 엄청난 발전을 이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왔던 인간 생명의 신비에도 도전합니다. 유전공학의 발달은 마음만 먹으면 복제인간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문제는 문명과 과학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 20, 21절에서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 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지구의 파괴는 하나님을 떠나 인간중심의 발전을 이룬 어두운 그림자라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사람의 신앙 안에는 성령의 일하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Στέφανος)은 ‘면류관’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요. 그의 짧은 삶은 우리가 무엇을 바라 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해 줍니다.

 

첫째로, 스데반의 삶속에는 성령의 영이 가득했습니다.

 

55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스데반은 사도행전 6장 5절에 집사로 선택된 일곱 사람들 중의 한명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당시에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헬라파 유대 과부들이 돌봄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은 7명의 집사를 택하기로 결정했고, 그 선택 조건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뽑힌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라고 공회 앞에서 설교를 합니다. 스데반은 성경에 능통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설교에 언급된 인물들을 보면 아브라함으로 부터 이삭, 야곱, 그의 열두 아들들, 모세, 여호수아, 다윗과 솔로몬까지 구속사를 꿰뚫고 열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그렇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는 너희들이 죽였다고 책망합니다. 제 눈에 띄인 것은 스데반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너희가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

 

유대인들은 직면하기 싫은 죄가 드러나자 죽일듯이 달려듭니다. 감정의 노예된 것처럼 분노하며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는 맞으면서도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성경을 보면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과 닮은 점이 참 많습니다. 요한 복음 1장 14절에 보면 ‘예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언급하는데, 사도행전 6장 8절은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라고 소개합니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합니다. (막 15:1) 스데반도 백성, 장로, 서기관에게 잡혔습니다(행 6:12)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예수를 죽일 거짓 증거를 찾았고(마26:59) 스데반이 설교할때에도 그들은 처벌하기 위해 거짓 증인을 세웠습니다.(행 6:13) 성경은 ‘예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라고 하면서, 스데반 집사의 얼굴도 ‘천사와 같았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도록 기도했고’, 스데반도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의 내용을 보니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 기도는 예수의 마지막 기도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이 일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전적인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은 하루 아침에 형성되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삶을 보면 성령이 충만했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의 삶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성품이 보여진다면 그건 믿음으로 인내한 시간들이 빚어 낸 결과일 것입니다.

 

둘째로, 스데반은 ‘재창조된 세계’를 보았습니다.

 

56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모든 자녀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 신뢰가 쌓이고 믿음이 형성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말씀 안에서 관계적으로 응답하는 법을 매일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밖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받는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밖의 세계가 두렵다고 해서 뱃속 밖으로 나가기 싫다고 버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이지 보여 주십니다.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생명이 자라간다면 순종하는 일에 어떻게 머뭇거릴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은 성령의 임재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채워지고, 예수께서 함께 하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내적 친밀감을 통해 ‘재창조된 세계’을 본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신생의 표적들’(The Mark of the New Birth)이란 설교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된 표적이 나타나는데, 첫번째 표적은 그리스도를 확신할 때 부어지는 ‘살아있는 믿음’과 두번째 표적은 ‘산 소망’입니다. 죽은 소망은 모든 악한 말과 나쁜 행실의 근원이며,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산 소망’은 세상에서 막연히 잘 될거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진실하게 살아간다는 ‘양심의 증거’이고, 어떤 상황에도 절망 가운데 보호하시는 소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셋째로, 스데반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58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후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목격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58절에서 사울이라는 청년이 처음 등장합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청년이었습니다.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많은 이들의 숭고한 피가 새시대의 문을 열기 위한 희생이었듯 ‘적색은총’은 생명의 강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매일의 십자가를 지며 우리의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걸어 간다면, 주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스데반의 피값이 바울의 생애에 이어짐을 보게 되는데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빛을 본 후에 바울의 삶의 가치와 방향, 삶의 이유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신생의 표적’입니다. 이후 바울은 스데반과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가서 전도를 하지요. 또한 동족 유대인들 설득하다가 핍박과 박해 속에서 고소를 당하고 결박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바울은 스데반의 일을 기억하지 않았을까요? 행 22:20절을 보면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줄 저희도 아나이다” 바울의 사역을 보면 성령이 충만했던 스데반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스데반에게 바울의 선구자(先驅者)가 되어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던 바울은 그 복음을 경험하고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던 AD 30년경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기독교는 엄청난 박해로 믿는 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세상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할수도 있구나 겁도 났을 것입니다. 죽음이 현실 앞에 다가오니까 결국 마음이 흔들리고 뿔뿔히 흩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흩어진 자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행8:4)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의 흩어짐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면은 세계 선교로 퍼져가게 되는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이것의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우리가 사는 3차원의 공간을 X,Y,Z라고 했을때, Z라고 하는 부분이 없으면 우리는 그 사물을 인지할 수가 없습니다. Z라는 높이가 없다는 것은 사물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Z를 성령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아이가 어머니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때때로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도 성령의 힘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줍니다. 성령은 지금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신앙의 깊은 세계로 초대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계와 멀어지고 계신가요? 아니면 가까이 들어가고 계신가요?

 

우리는 성령의 일하심을 모두 다 가늠할 수 없습니다. 제한없이 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믿을 뿐입니다. 누가는 스데반이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는 새 하늘 새 땅에서 다시 깨어날 테니까요. 스데반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얼 얻으려고 열심히 달려가십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어두운 세상에 새벽을 깨우며 빛을 밝히는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행 7장 55~56절 / 양향모목사

옛날 사람들은 비교적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해버리는 것은 오히려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마음 깊숙이 간직하는 것이지 상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을 할 줄 몰랐습니다. 마음에는 있지만 그 진실한 마음을 표현할 말을 몰랐습니다. 좋으면서도 안 좋은 척 마음과 반대되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립서비스(lip-service)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립서비스는 “말을 그럴듯하게 해서 상대방이 공감하기 좋도록 하는 것”이라고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립서비스는 마음에 없는 것을 입술로만 상대방이 기분 좋게 하기 위한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진실 된 마음은 없이 그냥 기분 좋으라고 과장해서 말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좋은 말 해주고 칭찬해주는 말을 해주는 것이 좋다고 하니까 정말로 그 사람에게 있는 좋은 점을 발견하고 칭찬해주려고 하는 것 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상대방이 듣기 좋게만 하려고 거짓말하는 것을 연습합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착각 속에 빠져서 삽니다.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삽니다. 누군가가 곁에서 진정한 모습을 알려 주어야 하는데 욕먹으면서 그런 말 할 사람이 없으니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사랑은 그 마음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그런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을 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는 것을 연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엄청나게 목숨 바쳐서 사랑할 것같이 말을 하지만 내일 보면 그 말이 아무 소용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다가 보니까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이 립서비스가 대세를 이룹니다. 교인들을 칭찬하는 연습을 하고 설교도 립서비스 차원에서 성도들이 듣고 기분좋아할 대목만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인기도 올라가고 그로인한 이익도 챙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칭찬해주고 좋은 말 해주어도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데 맨날 죄인이라고 구박이나 하고 잘못했으니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면 다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목사들이 돈을 많이 주고 설교 연습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를 바르게 전할까 어떻게 하면 진심을 공감하게 할까 이런 연습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방법만 배우다가 보니까 진심을 감추고 거짓을 이야기하는 기술자가 되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말들은 몰라도 설교에서만 진실이 있어야 하고 마음과 마음이 바로 전달되어야 하는데 립서비스와 같은 설교가 많아지고 있고 그것을 좋은 설교라고 듣고 있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문제입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오늘 본문 말씀은 진정한 설교자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사례를 받기 위해서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큰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대가나 이익이 되는 일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귀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설교를 합니다. 진리를 잘 못 알고 엉뚱한 길을 가고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중요한 진리를 전해주는 대가는 너무나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화를 내고 이를 갈고 돌멩이를 들고 죽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런 비참한 일을 스데반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을 것을 각오하고 육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고 설교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스데반이 설교를 중단당하고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서 죽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위기를 맞으면서 스데반이 보여준 당당한 모습은 오늘날 진리를 말하는 설교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많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본문 55절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갑자기 왜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까요? 무슨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까요? 그냥 우연히 하늘을 우러러 볼 수도 있었겠지만 많은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본 이유는 이 땅에 기대하고 볼 것이 없어서였을 것입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스데반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들었으면 그 중에 한두 명이라도 스데반의 설교를 알아듣고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스데반을 변호해 줄만한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 한 사람도 그의 편이 돼줄 마음이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한 결 같이 화만내고 이를 갈고 스데반을 죽이려고만 하지 누구 한 사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스데반이 자기 육신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마음으로 하늘을 쳐다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하늘의 천군천사를 파송해서 이 못된 인간들을 바로 처벌해 달라고 하늘을 쳐다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이 로마병정을 앞세워 자신을 체포하러 왔을 때도 하늘의 천군천사 동원령을 내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거셔서 죽음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도 이미 죽음을 당할 준비가 마쳐진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 다 포기하고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육신의 목숨 따위는 별 관심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가고 있는 그에게 이 세상에서 좀 더 사는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나라를 보기 위해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스데반이 이런 장면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인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전파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스데반이 전한 그 설교의 중요성 확인입니다. 그냥 유대교 율법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약간 우월한 정도냐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스데반이 목숨을 바쳐서 전해야 할 정도로 그 설교가 중요한 설교인가를 증명하는 것이 지금의 큰 문제입니다. 그 문제 앞에서 스데반은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한 목숨 바쳐서라도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이 복음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이 그의 설교의 목적입니다. 지금까지 한 설교가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민족의 구원을 위한 너무나 중요한 것을 선포했다는 자신감입니다.

 

2)자신이 전한 복음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자신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실성을 하나님께 확인하기 위함이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지금 제가 선포한 복음이 사실이지요? 이 사람들이 이렇게 화를 내면서 죽이려고 덤벼드는데 혹시 제가 잘못된 것을 말한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께 확인을 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실이기만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만 하면 그것이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할 핵심적인 복임이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스데반에게 있었기 때문에 스데반이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않고 왜 그렇게 뭘 모르느냐고 항의하지도 않고 화를 내며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주도 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3)성령님의 충만한 역사가 하늘을 우러러 보게 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는 것은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산다고 해도 이런 억울함을 당할 때면 당연히 화를 내고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다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그가 지금 성령이 충만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본 것은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에 충만하게 역사하심으로 세상의 일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실 때 악한 사람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심으로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스데반처럼 이런 엄청난 경우야 당하지 않지만 크고 작은 어려운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의 일을 가지고 해결하려고만 하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문제를 꼭 해결을 하고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려고 하지 말고 하늘을 우리러 하나님의 뜻을 한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한번 살펴보는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어서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 거기 아무것도 없었다면 실망이 컷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감사하게도 그런 스데반의 모습에 하나님께서 귀한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러러 하늘을 보았더니 거기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스데반이 감격스럽게 외칩니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거기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셔서 초자연적인 능력의 눈으로 일반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영광스런 광경을 보게 된 것입니다.

 

1)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기록을 하고 있지 않아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사람의 언어로 기록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면서 가깝게 생각하고 삽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떼를 쓰기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르게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설 수도 없고 감히 어떤 말씀도 드릴 수 없는 너무나 엄청난 분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 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우리가 그동안 세상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섬기고 산 것에 대한 무한한 영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렇게 위대하신 분이시다니요 그 영광 앞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찝찝한 마음이 없도록 미리부터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너무 얕잡아보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2) 거기에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외쳤던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님께서 거기에서도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만 구원하신 분이 아니라 이 우주 만물의 통치자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힘이 없으셔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힘이 없어서 사악한 유대인들에게 당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아시고 보고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이 마음 아파하는 것이 그런 부분입니다.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목사들은 교회도 부흥이 되고 자신들도 호화롭게 잘 사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은 왜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혹시 우리가 잘 못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닌가? 혹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볼 수 없는 곳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을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듣기 좋은 말을 한다고 교회로 가고 아무렇게나 해도 교회로 가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잘못된 복음을 듣고 모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탄의 종들이 자기들이 듣기 좋은 대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찾아서 가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의 생각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바른 복음을 따라 사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뭐가 잘 안 풀릴까 라는 생각을 하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 복음을 따라 주님의 곁으로 오고 있는 우리를 보고 계실 것입니다. 계획대로 잘 가고 있다고 박수를 치고 계실 것입니다. 그날이 되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래 수고했다. 내거 너를 다 보았다. 진리 따라 살기 위해서 고생하는 모습 다 보았다. 우리 눈에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셨다고 했습니다. 앉아계시지 않고 서 계신다는 말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이기 때문에 순교자를 맞이해주시는 예수님의 특별한 모습을 서계시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냥 성도로 이 세상을 살다가 주님 곁으로 가면 앉은 채 왔냐 하고 맞아주실 것이지만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순교까지 당하고 오는 순교자를 특별하게 맞이하시는 모습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순교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맞아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서 계신다는 것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앉아 계실 때는 심판주로 앉아계시고 예수님께서 서 계실 때는 변호자로 나타나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벌을 줄 사람이 오면 앉아서 심판을 하시고 상을 받을 사람이 오면 혹시 잘못 될까봐 서 계시면서 우리 편에서 우리를 변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서서 맞이해 주시든지 본척만척하시든지 쫓아내지만 않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뭘 한들 주님이 서서 맞이할 정도가 되겠습니까? 눈길 한번만 주신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큰 영광일 것입니다. 혹시 칭찬 한마디만이라도 해주시면 우리는 몸 둘 바를 모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우리러 하늘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그 우편에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서서 스데반을 맞이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다가 복음을 따라 살다가 어려움을 당하시고 힘든 일을 당하시면 우리러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를 맞이해 주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일어나 세상을 변화시켜라

행 7장 55~60절 / 황성주목사

저는 4개월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섬길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교회가 뉴욕 부흥과 뉴욕 선교와 세계 선교와 어린이 대 추수 역사에 크게 쓰임 받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축원 합니다.

저는 21세기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스데반의 순교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나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순교할 수 있는가, 순교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 문제를 가지고 어제와 그제 좀 고민을 했습니다. 여러분 죄의 본질은 자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요구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순교적 신앙은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권리를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을 내가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선교의 현장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순교적 삶을 경험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축복을 다 거둬 가셨을 때, 모든 재산이 다 날아갔을 때, 자녀들이 다 죽었을 때, 하나님 앞에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 중에 여러분의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은혜로 주신 것이에요. 다 주신 것입니다. 권리를 주장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 지어다. 윌리엄 캐리는 십일 년 동안 번역했던 수백 권에 달하는 원고들이 한 직원의 실수로 불에 타 버렸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번역하라는 싸인 인줄 알고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걸로 알고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반드시 죽어야 할 영역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가정의 영역이고 하나는 교회라고 하는 곳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다 드러나게 돼 있어요. 아무리 숨겨도 가정에서는 우리의 본성이 다 드러나게 돼 있어요. 자아가 다 드러나게 돼 있어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숨겨도 교회 생활하다보면 다 알게 돼 있어요. 비밀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영역에서 날마다 죽노라고 하는 고백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가정이 삽니다. 남편이 죽으면 가정이 살아납니다. 한 여인을 선택했다는 것은 30억의 여인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한 여인에게 집중하는 것은 다 쏟는 것이에요. 한 여인만 바라본다는 것이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성경의 말씀대로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함같이 목숨을 걸고 한 여인에게 전체를 쏟아 부으면 여자가 아름다워 집니다. 회복이 일어납니다. 행복해 집니다. 가정이 회복됩니다. 아담이 잠들고 갈비뼈에서 하와가 일어납니다. 가정이 탄생했어요. 남편이 잠들고 가정이 탄생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죽어야 가정이 살아납니다. 왜 가정이 회복되지 않는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었기 때문에, 잠시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니까 가정이 죽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됩니다. 말씀대로 순종해야 됩니다. 권리를 포기해야 돼요. 권리를 포기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의 역사가 가정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권리를 주장할 때, 나의 권리를 주장할 때,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때, 기름 부으심이 끊어집니다. 하나님 앞에 가정과 교회는 권리를 포기할 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름 부으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목사님이 장로님에게 요구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장로님들이 목사님에게 요구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성도가 목사님에게 요구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목사님이 성도에게 요구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 머리는 그리스도 이십니다.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세요. 온 성도가 예수님께 순종하며 주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목사님이 교회 리더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 분이 리더십니다. 목사님은 제일 먼저 순종하는 사람이에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예수님이고 악장입니다. 제일 먼저 순종하는 사람, 그래서 가정과 교회는 오직 주의 말씀에 순종할 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름 부으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권리를 포기하면 담대해 집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온유해 집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해 집니다. 남에 대해서는 온유해 집니다. 관대해 집니다. 확신하게 됩니다. 순교적 삶을 살게 됩니다. 붙잡고 있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안 버리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정말 영적인 충격을 주는 순교적 삶을 살려면 다 선교사가 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 선교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가 다 선교사가 되는 놀라운 축복이 이 교회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선교사가 되겠다고 작정하고 살면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순교적 삶을 살게 됩니다. 제자 훈련 받게 됩니다. 사랑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내가 언젠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선교사가 돼서 마지막 주님 앞에 가는 이런 비젼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로 시시하게 살 수 없습니다.

은퇴하신 분들이 실버 인생입니다. 실버가 결단하면 골드가 돼요. 골드가 현장에서 죽으면 다이아몬드가 되요. 순교하기 때문에. 다이아몬드가 되시길 바랍니다. 한번밖에 없는 인생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여러분 목표를 정하십시오. 내가 10년 이내에 선교사로 나갈 텐데 하나님 나가기 전에 이 땅을 치유하고 변화시키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다가 옮기게 해 주십시오. 열매가 나타나게 해주십시오. 이 땅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 다음에 가게 해 주십시오. 검증이 안 된 선교사는 필요가 없어요. 도움이 안 됩니다. 물론 검증이 안 된 사람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검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준비하다가 가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결단하시면 자녀분들이 영적인 충격을 받게 됩니다. 교회가 영적인 충격을 받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이 영적인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 사람이 믿는 복음은 진짜라고 믿게 됩니다. 복을 전파가 됩니다. 하늘문이 열리게 됩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그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하나님 함께 하여 주옵소서. 임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 나로 하여금 시시한 인생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 최고의 삶을 마지막 나의 인생을 선교지에서 불태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해주시옵소서.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썩어진 밀알이 되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죽으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훈련 받으시고 교회에서 훈련받고 철저하게 섬기고 나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면서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성령 충만자의 삶

행 7장 55~60절 / 피종진목사

본문에 보면 성령이 충만한 자 스데반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성령이 충만한 자가 된 이후에는 스데반처럼 성령 충만한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불려지는 호칭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일꾼’이라 하고, 경쟁에서 우승한 자를 ‘챔피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공적이 앞선 자를 ‘성공자’라고 말합니다. 또 모든 생활에 감사가 넘치는 사람을 ‘감사 집사, 감사 권사, 감사 장로’ 이렇게 부릅니다. 또 사랑이 많은 분은 ‘인자한 분’이라고 하고, 욕 잘하는 사람은 ‘욕쟁이’, 거짓말 잘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부릅니다.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의 이미지는 ‘성령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삶은

 

첫째, 하늘을 우러러보고 살아야 합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5)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즉 스데반은 땅에 있는 재판관보다 하늘에 계시는 영원한 재판관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보고 의지한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위기를 당할 때 그 위기만을 보면 안됩니다. 그 위기의 환경이나 문제만을 보면 위축되거나 절망하게 됩니다. 불의와 타협하게 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위기 때에 스데반 집사처럼 먼저 그 눈을 하늘로 돌리고 영원한 통치자요 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보고 그 권세를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5),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스데반이 우러러본 하늘은 저 우주 공간의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좌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히 12:2). 또한 ‘주목했다’는 말은 ‘집중했다, 오직 주님께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성가 중에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봄으로 성령 충만한 자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행 7:56) 성령이 충만한 자 스데반은 죽음 앞에서도 그가 본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그는 하늘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해 하늘의 구원의 문이 열렸다는 증언입니다. 또 그리스도를 ‘인자’라고 증언한 것은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멸시하여 죽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그리스도가 바로 만왕의 왕이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언한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가만히 앉아 계신 분이 아니라 오늘도 만유의 통치자로서 또 심판주로서 사역하시는 분이심을 증언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서 보고 계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 스데반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영광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8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의 삶은 바로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세째,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성령이 충만한 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와 유사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가 이처럼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은 몸은 죽으나 영혼은 멸하지 않고 주님이 계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확고한 믿음이 그로 하여금 순교의 고통을 견뎌내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죽음에 직면한 상태에서도 시종 일관 성령 충만한 자의 모습을 유지하였습니다. 심지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죽이는데 가담한 이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는 최후까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드러내야 합니다.

시편 120:1에 보면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요한계시록 8:4에 보면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는 향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과 연결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셀 허머는 ‘나의 전 재산은 바로 기도다. 기도는 성도의 소유 재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도의 재산 목록 1호는 바로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데반처럼 항상 하늘, 즉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우러러보고, 예수님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며,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한 자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

행 7장 55~60절 / 이규왕목사

세상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아무런 도움이 안 되며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믿는 다는 말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그 무엇으로도 행복할 수 없고, 생존할 수조차 없다고 생각하고 매사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축복이 여러 가지가 있는 가운데 가장 고귀한 축복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이 베푸시는 여러 가지 은혜 가운데 가장 큰 축복은 풍년이나 이른 비와 늦은 비와 같은 유형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이 아니라 말세에 늙은이와 젊은이, 남종과 여종에게 물 붓듯 부어주시겠노라고 약속하신 성령 충만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2006년 새해에 열두제자(G12) 비전과 꿈을 키우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우선되어져야 하는 문제가 바로 온 교우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과연 어떤 사람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름 붓듯 부음 받은 사람이고 성령 충만한 사람인지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물론 영은 영으로만 아는 것이기 때문에 육안으로 분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재는 잣대는 성경에 나와 있는 인물 가운데 성령 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1. 평신도가 살아있는 교회

 

성경에 나오는 성령 충만한 사람 중에 가장 추천할 만한 인물을 꼽는다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의 주인공인 스데반 집사일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도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었지만 스데반은 사도가 중심이 되었던 예루살렘 교회가 내외부적인 문제에 휘말려 교회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상실하게 되었을 때 평신도가 주축이 되어 교회를 회복시키는 일에 크게 공헌한 인물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그동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급성장하던 한국 교회가 중병에 걸린 환자처럼 점차 무력해져가고 있는 현실 교회를 회복시키는 일에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성령 충만한 평신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중심의 구약 교회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사도 중심의 초대 교회로는 세계 복음화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약속하신 말씀은 열두 명의 사도만으로 이룰 수 없는 원대한 꿈이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도만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권능을 받은 수많은 평신도들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사도들을 중심으로 부흥하던 예루살렘 교회에 찾아온 시험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사도들의 숫자를 늘리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신도 가운데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사람을 집사로 택하여 세워 일을 나눔으로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행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그들은 사도가 아니었지만 사도들 못지않게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로 사도들처럼 나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전도자가 되었을 때 놀랍게도 사도들이 행하던 것과 동일한 성령의 역사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이것은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목사 중심의 교회가 있으며 그러한 교회를 가리켜서 감독교회라고 합니다. 어떤 교회는 장로 중심의 교회가 있으며 그러한 교회를 가리켜서 장로교회라고 합니다. 어떤 교회는 평신도가 중심인 교회가 있으며 그러한 교회를 가리켜서 회중교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감독교회일까요? 장로교회일까요? 회중교회일까요? 그러나 알고 보면 좋은 교회는 그 중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들마다 자기 기득권 수호를 위한 갈등 때문에 힘을 소진하여 외부적으로 전도나 선교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난 파도처럼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가며 지역 복음화 세계 복음화를 성취해야 할 사명은 감독만이 아니라, 장로만이 아니라 평신도만이 아닙니다.

감독과 장로와 평신도들이 모두 다 성령이 충만하여 각기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되 하나의 목표 즉 오직 복음 전도와 세계 복음화에다 초점을 맞추고 평신도가 사도처럼 나가서 복음을 증거 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도들이 성령 충만하고 능력이 많다고 할지라도 행 1:8의 영역을 다 커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너무나 정직하여 인격 대 인격으로만 확산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전도자의 능력과 숫자에 비례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직분자가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평신도 직분자들이 스데반처럼 성령 충만한 전도자로 변화되는 것만큼 지역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가 확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두 사람이 기도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하고 다른 사람들은 예배만 드리고 설교만 듣고 돌아간다면 교회의 부흥이나 지역 복음화는 요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꾼으로 세운 1,500 여명의 평신도들이 스데반처럼 성령이 충만하여 생명력 있는 믿음을 가지고 일 년에 한 사람만이라도 확실하게 책임지고 전도를 한다면 수년 내 교회 부흥과 성장과 더불어 수원지역 복음화가 앞당겨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유능한 목회자가 있고 충성스러운 당회원들이 있고 평신도가 살아 움직이는 교회이어야 미래가 불투명해 보이는 21 세기의 거친 파도를 거슬러서 불황을 모르는 채 부흥하는 좋은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한 평신도

 

물론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으로는 시시한 평신도가 아니라 정말 스데반처럼 똑 소리가 나는 성령 충만한 평신도가 다 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마음뿐이지 왜 그렇게 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스데반과 같은 평신도가 되고 싶다면 왜 나는 그렇게 안 될까? 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스데반처럼 될 수 있는지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적으로 스데반이 수천 명이 모이는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집사로 뽑히기 전부터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평신도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았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그와 달리 평신도 때 별로 두각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라도 교회에 오래 다녔고 아는 사람이 많다는 그 여세로 직분자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교회가 아무리 직분자가 많아도 힘이 없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구성 멤버들은 오늘 우리 교회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것이 티가 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오히려 부자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예루살렘 교회 평신도들이 해냈습니다. 열심히 모였고 모이면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기를 힘쓰고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전 교인들이 사랑을 모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또한 인간들이 모인 교회는 어느 교회나 크고 작은 소리가 나고 시험꺼리가 있지만 스데반은 문제의 발원지 노릇을 하지 않고 그 문제를 진화하는 소방수 역할을 잘 감당하여 교회가 어떻게 하든지 평화롭게 하는 일에 사도들을 제쳐놓고 앞장을 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스데반은 다른 여섯 명의 사람들과 더불어 예루살렘 교회 안에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지목이 되어 일곱 집사로 피택을 받은 것입니다.

스데반은 집사가 되기 전에도 후에도, 마지막 숨질 때까지 변함없이 따라다니는 꼬리표 하나가 있다면 ‘스데반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라는 말입니다.

(행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행 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행 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의 주동 멤버들은 거의가 다 오순절의 원초적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 가운데서도 스데반처럼 지속적으로 마지막 숨질 때까지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사도도 성령 충만하며 베드로나 바울처럼 쓰임을 받고, 평신도도 성령 충만하면 스데반이나 빌립 집사처럼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두 사도의 반열에 들어가고 일곱 집사에 피택되었으나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하지 못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소홀히 한 사람은 부끄럽게 이름은 있으나 일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는 말에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하늘나라는 계급장이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대접받는 사람은 성령 충만하냐? 안하냐? 두 가지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교만한 사람들로 가득 찬 고린도 교회를 질책한 바울의 책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전 4: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고전 4:19)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고전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3. 지속적인 성령 충만의 비결

 

매사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반드시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 낸 근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단 장군은 피 흘리는 전쟁터를 넘나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다 같은 교회를 다니고 다 같은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사람은 냉랭하고, 어떤 사람은 더웠다 식었다 하고, 어떤 사람은 스데반처럼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한 것이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 집사가 마지막 숨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할 수 있게 된 비결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첫째 이유는 말씀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인 사도행전 7장 전체는 사도가 아니라 일개 평신도인 스데반 집사의 설교 전문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도 베드로의 설교는 그 분량이 얼마 되지 않음을 사도행전 2장에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행 2: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성경을 기록한 기자를 감동시키신 성령께서 이처럼 설교 전문을 사도행전에 기록케 하신 이유가 있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스데반의 설교가 어느 사도 못지않게 아브라함부터 예수님 때까지 성경 전체에 흐르는 구속사적인 맥을 꿰뚫은 설교였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성경이 희귀하던 시대입니다. 회당에서나 성경을 낱권 두루마리로 읽을 수 있고 있고 서기관들이 읽어주는 것을 들어 배울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 집사가 그처럼 성경 전체를 관통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말씀을 많이 읽고 들었는가 하는 것을 엿보여 주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함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입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새로운 것을 만들고 변화를 시도해도 거슬러 올라가면 다 예전에 해본 것이고 있던 것입니다.

아무리 현대 사회가 발전을 했다고 할지라도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고, 예수 믿으려면 전도를 받아야만 하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꾸 듣고 배워야만 생겨지고 자라는 것이고, 믿음의 근거는 어느 신학자나 철학자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목사가 되어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을까요?

(딤후 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딤후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은 가장 오랜 산 사도로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을까요?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든지 가장 기본이 말씀 중심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둘째로 스데반 집사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행복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먹고 잘산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세계 앞에서는 100년을 채우지 못하는 인간의 한 평생은 마치 하루살이와 같은 인생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고 안 믿고 누구에게나 다 죽음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죽은 후에 영생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삶은 마치 선장이 잡고 있는 배의 키와 같이 영원한 세계를 결정하는 방향타와 같은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가운데서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삶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행복이었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싶고 예수님처럼 살고 싶고 예수님처럼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 중심의 삶이 그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도록 담력과 용기를 심어 주었음을 그의 설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7:52)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그의 자극적이고 도전적인 설교가 핍박자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여 마침내 돌을 들도록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가 살고자 했다면 그렇게 강도 높게 설교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빙 둘러서 설교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게 되었어도 열려진 하늘 문을 통하여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하는 것은 한 두 개의 돌이 아닐 것입니다. 돌이 흔한 나라입니다. 빗발치는 돌을 맞으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피에 주린 사자같이 무자비한 핍박자들의 손에 도살되는 양처럼 성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갈 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이 그와 같은 고통을 기쁨으로, 두려움을 영광으로 소화시킬 수 있었던 힘은 그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님처럼 죽고 싶은 열망이었습니다.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 아닙니까? 스데반은 오순절 성령의 불길을 따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구속사의 맥을 잡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처럼 살다가 예수님처럼 죽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스데반처럼 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아니고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손해를 준 사람에게 손해배상을 물리는 것이 정당방위요 정의라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예수님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처럼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그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고상한 삶,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죽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나 한 평생 살아갑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서 누구처럼 살다가 누구처럼 죽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새로 산 일기장처럼 새해 첫날 첫 주일을 어떻게 시작할까요? 여전히 미워하고 시기하고 욕심 부리고 그렇게 살다가 죽기를 원합니까? 스데반처럼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본받되 죽음의 순간까지 닮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스데반처럼 살아간다면 바로 그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순교자는 살아있다

행 7장 55~60절 / 이중표목사

우리가 믿는 신앙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서의 핵심이며, 그리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 교리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이 사건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원리라는 것은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죽음과 나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을 별세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최대의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건이 내게 사건으로 할 때 별세의 사건으로, 별세의 신앙으로, 별세의 은혜로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의 사건이고, 또 하나님의 사건이지만 이 사건이 내게 임할 때 내게 별세를 이루어 세상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별세 신앙의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신앙의 최고의 신앙 행위를 순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별세의 신앙은 순교의 신앙 행위에 이르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순교를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죽는 것으로,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을 순교로 일컬어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진리에 확신하는 신앙을 보여주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을 순교자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잃는 사람들을 우리가 보통 기쁘게 죽어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순교자라고 말해 왔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일반적으로 기독교를 부인하라고 하는 지배자의 강요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지금은 신앙의 자유가 있지만 그 때 당시에는 모든 세상에 다 기독교를 핍박하는 이교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순교는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서 피 흘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때 당시에는 목숨을 가지고 있었지만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이 결국 순교자의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매일 매일 사는 것이 죽음을 날마다 짊어지고 사는 그러한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라고 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일상생활, 날마다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들이 거의 순교자의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초기 한국 교회 성도들도 피 흘리지 않고 살아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이미 모두 순교자의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결단 자체가 그들에게서는 이미 순교자의 각오를 한 것이고, 저들은 끊임없는 박해의 상황 속에서 저들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인간적 안정을 바랄 수 없었고, 가정의 유익이, 사회적 소외, 재산의 박탈, 생명의 위험은 순교자의 각오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천진암에 가면 천주교의 성지가 있는데, 이 천진암에는 많은 당시의 천주교인들이 사회적 대원군 핍박을 피해서 그곳으로 몰려갔던 것입니다. 한강 마포에 가면 절두산이라고 당시에 목을 치는 곳이었는데, 이곳은 당시의 민중들이 절두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거기에 가서 목을 잘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순교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도 순교자요, 죽어 있는 사람도 순교자의 각오, 모두 다 순교로 신앙을 지켜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를 일시적 순교, 한 번에 죽는 것은 일시적 순교이고,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순교자의 각오로 사는 것은 매일 순교라고 일컬었습니다.

또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죽는 것은 공적 순교이고, 매일 매일 숨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적 순교의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피 흘려서 죽는 순교를 적색 순교라고 말하고, 깨끗한 양심을 지켜 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백색 순교자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매일 매일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별세적 삶이 곧 순교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별세와 순교는 분리할 수 없는 신앙 생활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별세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가장 예수를 닮는 신앙 고백이라고 말한다면 순교는 예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예수의 부활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고백이 바로 순교이기 때문에 별세와 순교는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죽듯이 자기가 죽는 것, 자기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니고, 빼앗기면서 하나님께 바친다고 고백하는 이것이 바로 순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 죽음의 효력에도 참여한다고 신학적으로 말합니다. 순교자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희생 제사의 구속적 능력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서 우리를 구원한 구속적 능력이 순교를 통해서 피 흘림으로 함께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를 피의 세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듯이 순교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그와 더불어 다시 부활하는 실질적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집행하는 피의 세례를 집행한다고 신학적으로 말합니다.

이러한 순교의 모델을 이룬 사람을 스데반이라고 일컬어 옵니다. 이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 몸으로 실행한 최초의 성도요 예수의 부활 생명으로 살아서 지금도 살아 있는 순교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순교자는 살아 있는 스데반, 스데반은 순교자요. 그래서 스데반이라고 하는 말 이 면류관이라는 말인데, 면류관을 받는 사람이 순교자요. 그래서 스데반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순교자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살아 있다는 말은 순교자는 살아 있는 말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같이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데반이 죽는 모습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었다고 보는 사람이 있고, 살았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데 스데반이 죽었다고 보는 것은 불신앙이고 스데반이 살았다고 믿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면 스데반은 어떻게 살아 있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생명으로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또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아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 사람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스데반이 예수와 함께 살아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데반이 죽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순교자로 예수와 함께 살아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순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리러 왔는데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것은 2천년 교회사에서 제가 밝히고 있는 유일한 선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은 순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말하느냐? 2천년 교회사에서 이제 제가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순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리러 왔는데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순교자는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필요도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려니까 괴롭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다니까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내 안에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려고 하니까 모든 것이 부담입니다. 자기는 따로 있는 걸로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으려니까 이 한 목숨 죽기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은 몸,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몸. 이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게 하는 것. 순교는 믿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요, 예수를 위해 죽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보통 우리는 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고난 받고 죽으셨으니 나도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고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이것이 지금까지 죽은 사람들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올바른 신앙이 못됩니다.

기독교의 순교는 다른 종교에서처럼 자기 교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종교는 죽음으로 드립니다. 기독교의 순교는 산 자로 드리는 신앙 행위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하는 순간에 그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늘이 열렸구나. 그리고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구나.” 스데반은 살아 계신 예수를 보았고, 예수가 자기를 맞이하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스데반이 죽은 것입니까? 살아있는 예수와 함께 산 채로 가는 것입니다.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는 순교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만이 순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별세 신앙이 없으면 순교자가 되지 못합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신의 부활로 받은 이후에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진정한 순교는 부활 신앙으로 얻은 산 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오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산 자만이 순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는 죽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고 살았다고 믿어야 자기 신앙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수한 선교사와 장현진 선교사를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그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라는 주의 명령에 따라 땅 끝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드디어 순교자의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이걸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순교자는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있습니다. 순교자는 성도의 가슴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는 우리가 살아있듯이 우리와 함께 살아 있는 것입니다. 순교자는 그래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절대로 순교자는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우리 속에 살아 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의 가슴속에 살아서 감동하고 있습니다. 살았기 때문에 감동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감동을 못 줍니다.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그들의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감동을 못 줍니다. 산 자만이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그들이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에 장현진, 안수한 선교사의 순교가 눈에서 샘물처럼 눈물을 흘리게 했고 홍수처럼 쏟아졌습니다. 눈을 감으면 눈물이 솟아나고, 길을 걸어도 눈물이 솟아나고, 추모 영상만 보면 그렇게 울어야 했습니다. 두 순교자가 불쌍해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불쌍한 자가 아닙니다.

또 부모를 생각해서 내가 울 만한 사람도 아닙니다. 부모를 생각해서는 눈물 한 방울도 나질 않습니다. 순교자의 감동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그들과 무슨 정이 들었다고 눈물이 나겠습니까? 나는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입니다. 부모를 내가 얼마나 사랑한다고 눈물이 나겠습니까? 솔직한 얘기로 부모 사랑할만한 목자는 별로 되지 못했습니다.

순교자의 감동 때문에, 순교자가 받는 그 신비한 은혜 때문에, 저들의 살아서 감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순교자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감동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님 위로하려고 추모를 성대히 한 것 절대로 아닙니다. 만일이라도 그 맘 가졌다면 위선자입니다. 내가 부모님에게 비유 맞추기 위해서 그 정성을 다한 것이라고 한다면, 머리 끝에서 한 번이라도 스쳤다고 한다면 나는 목자가 아닙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내가 나를 봐도 신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어떻게? 부모를 생각해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요. 우리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그가 살아서 감동하기 때문에.

스데반은 그의 순교를 통해서 행복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는 순간에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성경은 그를 잠들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스데반은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잠 드는 순간처럼, 하루의 제일 행복한 순간이 어느 순간입니까, 밤에 잠드는 순간입니다. 스데반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잠이 들었다, 죽은 자는 잠드는 것이 아닙니다. 산 자가 잠이 듭니다.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거짓을 일컬어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나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라 너희 상이 크다.” 이것은 초대 교회 예수님께서 순교자에게 줄 행복의 보상이었습니다. 이 은혜에 따라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산 자의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순교는 별세의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자의 감동은 천지를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곁에는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어요. 오늘 이 성경을 보니까 저희가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돌에 맞습니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서 이 사울이라는 청년에게 맡겼습니다.

스데반이 뭐라고 합니까, 돌에 맞을 때 부르짖어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여기에 순교자의 행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행복입니까? 원수를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용서하는 그 사랑 때문에 순교자가 행복으로 꿇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이런 화해를 자기 몸으로 실천했어요. 스데반은 화해자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 마음에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행복이 온 거죠. 미워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마음 때문에.

스데반은 최후의 순간에 주 예수께 자기 영혼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영혼에 안식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셨지만 원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해서 용서를 빌고 그는 그의 삶을 마쳤습니다. 순교는 원수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으로 원수와 화해하기 위해서 원수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나의 죽음을 통해서 증오심과 모든 저들 마음속에 악함을 청산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것입니다.

순교자는 원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들의 아들을 순교자로 만들려면 부모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경지에 또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아들의 영광스런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순교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죽음의 제물로 내놓는 것입니다. 그 순교는 살리는 사건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순교 후에는 살리는 사건이 나야 됩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원수에게 사랑으로 증거 되어야 하며, 그 코에 향기로 호흡되어야 됩니다.

순교자는 복음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살아 있듯이 순교자는 복음과 함께 살아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영원히 영생하고 있으며 우리 가슴속에 살고 있으며 그리고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는 교회 종자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복음이 살아있듯이 순교자는 복음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증인은 순교자를 말합니다. 스데반은 죽은 것 같으나 복음과 함께 살아있습니다. 결국 이제 스데반이 순교 속에 들어있는 생명의 씨가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심령 속에 들어가서 그가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 2천년 교회사를 지금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곁에 있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울이라는 청년인데 그 사울이라는 청년이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청년을 끌어다가 스데반이 죽는 곁에다 세웠습니다. 왜? 너는 순교자의 마지막을 봐라. 사도 바울이 살아간 전 생에 살고 죽는 것은 스데반의 피가 이 속에 죽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친히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성령이 각 성에서 결박과 환란이 이제 증거하여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은혜로운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스데반이 마지막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내놓은 것처럼 사도 바울 속에 스데반의 피가 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일생은 스데반의 일생의 재판입니다. 순교자의 정신이, 순교자의 능력이 사도 바울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에 죽음의 능력이 스데반 속에 들어갔고 스데반 속에 능력이 바울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는 예수님의 그 고백이 스데반의 죽음으로 나타났고, 순교로 승화되어 생명을 이어갔으며 그리고 사울 바울이 내가 이 은혜로운 복음을 마치려 함에는 이 마친다는 말로 그 단어를 이어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선교적 사명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말씀에 보면 결국 사도행전의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로 이어갔는데 8장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어서 봅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러면서 이어서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 집에서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 할쌔” 복음의 말씀을 전 할 때 스데반이 저들을 막 흩어지게 했습니다.

간접적으로는 핍박이 왔으므로 두려워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능력에서는 스데반의 피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가슴에 튐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을 전할 때 무엇을 전합니까? 스데반의 순교를 함께 전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 머리에 부을 때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했느니라” 말씀하시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말하여 기념하리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옥합 깨뜨린 이 사건이 전하여 지리라. 스데반은 자기 몸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머리에 부었습니다. 복음과 함께 스데반의 순교가 역사에 길이 복음과 함께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는 복음 전파와 함께 살아 있는 것이요, 부활 생명으로 살아있는 위대한 능력이 복음과 함께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현진 선교사와 안수한 선교사는 선교사로서 순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살아있는 생명이 된 것입니다.

영광스럽도다. 안수한, 장현진 선교사여. 그대들 14세, 19세 나이 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33세. 십자가의 생애를 이루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영생하게 된 것입니다. 행복하시도다. 우리의 눈물을 담아 가슴속에 길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복음과 함께 영생하고 있습니다. 그대 선교사의 고귀한 발자취, 메콩 강물 줄기 따라 오대양 육대주 전 세계 땅 끝까지 갈 것입니다.

참으로 숭고한 두 순교자가 한신 제단을 이렇게 빛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순교자의 위대한 스데반의 정신 속에서 새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스데반의 신앙

행 7장 55~60절 / 피종진목사

우리가 제일 안전된 순간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순간입니다. 재물이 곁에 있으면 도둑 맞을까봐 걱정이 되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 그 지위에서 해직될까봐 초조합니다. 예쁜 사람들은 얼굴에 상처가 나고 주름이 질까봐 초조하고 불안한 것입니다. 좋은 옷을 입으면 먼지나 때가 묻을까봐 항상 조심이 됩니다. 모든 것에 우리가 참 만족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님과 함께 있는 순간은 마음에 평강이 있게 됩니다. 이 평강은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입니다.

스데반은 사도행전 6:3에 보면 초대교회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집사로 택함을 받은 초대교회의 가장 모범된 집사였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6:8에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다'고 했고, 10절에 보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스데반은 어떠한 신앙을 가졌기에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성령이 충만한 신앙입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55절상)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스데반의 인격의 평가요, 그의 신앙과 이미지의 평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 자기 나름대로의 이미지가 있고, 각자 이미지관리를 하기 위해서 여러모로 노력도 합니다. 어떤 분은 이름을 부르면 아, 그분은 착하고 부지런하고, 마음이 넓고 사랑이 많고, 인자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선을 베풀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분은 남을 높여주고 받들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분은 환경에 따라 얼굴의 모습이 달라지는 분도 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기 때문에 그의 신앙은 항상 변함이 없었습니다. 평탄한 신앙생활을 할 때도, 돌무더기 속에 순교를 당할 때에도 그의 신앙은 조금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은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사명자가 되게 하시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5:18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항상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서 이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늘 성령에 취하여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는 어딘가에 취해야만 삽니다. 취하지 않으면 허망해집니다. 그런데 어디에 취해야 됩니까? 어떤 분은 악한데, 향락, 물욕에 취하여 삽니다. 우리는 성령에 취하여 살아야 됩니다. 성령에 취할 때 가장 건전한 인격자가 되고, 성령에 취할 때 가장 건전한 인생의 정로를 걷는 삶이 되어질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16C에 죤 낙스시대는 굉장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그 때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가리켜 마치 큰 질풍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것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정말 성령이 충만한 곳에는 상상 밖의 하나님의 능력이 폭발합니다. 상상 밖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생각 밖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생각 밖의 축복이 쏟아집니다. 그 시대가 아름다워집니다. 그 시대가 착하여집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일들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종말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서로 빼앗고 점령하고 승리하기 위해서 큰 무력전이 전세계에 펼쳐집니다. 그래서 이제는 화학전에서 핵전쟁으로 많은 살상무기들이 난무합니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의 불입니다. 성령의 불은 미사일과 핵무기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불은 사탄의 역사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우리 인간의 모든 삶을 보장해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늘을 우러러 주목한 신앙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5절하) 여러분, 학창시절에 학교에서 '주목'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요? '주목'이라는 말은 세 가지를 나타냅니다.

①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어딘가 집중해야 되는데, 집중하지 못하면 산만해지는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면 정신이 산만해집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빨래 좀 하다가 걸레질 하다가 밥을 좀 하다가 TV 보다가 하면서 하루 종일 이것 하다가 저것 하다가 벌려놓기만 하고 있다면 그는 생활이 너무나 산만해지고 그 환경이 어지러울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건전한 곳에 집중력을 가져야 됩니다. 집중력을 가질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어업도 해보다가 광업도 해보다가 농업도 해보다가 상업도 해보다가 그저 문방구도 해보다가 식당도 해보다가 공장도 하면서 자꾸 이렇게 직업이 바뀌어지고 사업이 바뀌어지면 평생토록 고생을 합니다. 사실 사업 선택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먼저 기도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뭔가 집중력을 가지는데, 스데반은 하늘을 주목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주목하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이 어디에 빼앗기고 있습니까? 오늘 눈을 뜨면 또 밖의 출입을 하면 내가 어디를 향하고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땀을 흘리고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우리는 먼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해야 됩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주목해야 되고, 또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주목해야 됩니다.

②큰 관심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관심이 있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오늘 어떤 분은 지위 명예를 위해서, 어떤 분은 향락 오락을 위해서, 어떤 분은 자기 나름대로의 출세를 위해서, 어떤 자기 계획의 달성을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심지어 등산하는 사람은 자기가 목적한 정상을 향해서 로프에 자기의 생명을 걸고 올라갑니다. 모든 집중은 모든 관심을 크게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③초점을 맞추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께 향하여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에 승리하면 모든 것에 승리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성장하면 경제도 성장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국가의 모든 기관과 국민의 바탕 속에 신앙이 심어져있다면 우리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왜 덴마크가 세계에서 으뜸가는 나라가 되었습니까? UN에서 모든 삶의 여러 가지 편의와 인권과 경제력과 국방력과 그리고 그들의 모든 신사도에 대해서도 항상 덴마크가 1,2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신앙 자체가 모든 생활의 기초입니다. 신앙 자체가 교육의 기초요, 가정의 기초요, 도덕 윤리의 기초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무엇에 집중하고 초점을 맞추어서 모든 일을 시작하고 진행해야 할까요? 자나 깨나 오직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참된 자세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비쳐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을 보면 헛된 것 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세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여러분에게 조명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4:4에 보면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이 벗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가 지배해야 될 곳이고, 다스리고 정복해야 될 곳이고, 이용할 대상이지, 세상은 섬김의 대상도 아니고, 사모할 대상도 아닙니다. 창세기 1:28에 보면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영의 눈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의 지배를 받거나 노예가 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할 줄 알 때에 물권, 축복권, 인권, 상권도 터집니다. 주님이 함께 합니다. 좋은 환경도 주십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스데반의 얼굴에 빛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하늘을 보면서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한 바울처럼 오늘 주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기쁩니다. 천국은 생각만 해도 평강이 넘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있어야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억울한 일이 많은지 아십니까?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어둠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마음 문을 하나님께 향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셋째, 예수님을 증거한 신앙입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절) 스데반은 돌무더기 속에 순교를 당하면서도 그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죽을 때까지 모든 사람에게 예수를 증거하며 보여준 신앙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인자'는 구속의 주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서셨다'는 것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주님의 권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의 주님으로 오실 때는 심판주의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는 구속사역을 감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이요,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권세가 있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분, 유치원에 교회 혹은 학교에서 자녀들이 달리기 경기를 할 때 서로 앞지르고 뒤로 처지고 할 때 그것을 보는 엄마들의 표정이 어떠할까요? 서로 자기 자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도 함께 제자리에서 뛰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녀의 승리를 위한 부모의 간절한 사랑의 심정입니다. 왜 스데반이 지금 순교를 당하는 위치에 있는데 하나님 우편에 인자가 서서 계셨을까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뜨거운 관심과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승리를 기원하시면서 기뻐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봐,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을 안 두시나봐, 내 곁을 떠나셨나봐' 이런 말이나 이런 생각을 하면 주님이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부모는 자나깨나 자식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듯이 하나님도 우리를 항상 자녀같이 사랑하시고, 눈동자같이 지켜주시며,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기까지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를 향하여 마음을 쏟고 계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이 돌무더기 속에서 순교를 당하는 상황에서 '신앙을 저버리느냐 끝까지 신앙을 지키느냐, 저 악한 무서운 자들에게 신앙을 버리느냐 신앙을 가지고 승리하느냐' 여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주님이 서서 계셨듯이 오늘 여러분과 저의 사역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주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기원하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최후까지 기도한 신앙입니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59절) 여기에 보면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의 신앙은 최후까지 기도한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좋을 때도 어려울 때도 숨질 때까지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있어야 됩니다. 기도는 원자탄 미사일 핵무기보다도 더 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땅에서 기도하지만 하늘의 보좌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뉴턴은 '나는 망원경으로 천 리 밖을 바라보지만, 내가 기도할 때는 더 먼 하늘나라를 바라본다.'는 말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하면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 속에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되고, 기도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시며, 기도 속에 하나님의 인자한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보장이 있습니다.

시편 116:2에 보면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숨질 때까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항상 기도해야 됩니다. 또 신명기 4:7에 보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하여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능력있는 분이 곁에 계시면 얼마나 든든합니까? 여러분, 그 험한 길에 안내자가 있고, 경호원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가까이해주십니다. 병들 때는 치료의 주님으로, 가난할 때는 부요하신 주님으로, 위험할 때는 방패의 주님으로, 캄캄할 때는 광명의 빛으로 우리에게 역사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의 기념관에 가보면 그가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8시간 기도했다는 기록과 함께 6.25전쟁의 승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8시간을 기도했다는 그 대목에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모릅니다. 기도로서 모든 것에 승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스데반처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처럼 성령이 충만하고,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며, 예수님을 증거하고 최후까지 기도하는 신앙을 소유하여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행 7장 57~60절 / 양향모목사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당시에 유대인들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나 다 같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의 생각과 믿음의 차이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달라도 어느 정도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주 극과 극을 달릴 정도로 심각하게 달랐습니다. 그 심각한 차이를 스데반의 설교와 그 설교를 듣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다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는데 그 주장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다른 한편을 원수같이 여기고 죽여야 할 정도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걸어놓고 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만 그 속에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마치 다른 성경을 가지고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처럼 너무나 다른 사상들이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왜 그런 차이가 존재하는 것인지를 심각하게 살펴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작은 차이들이야 많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나 교회의 운영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교회의 정치에 있어서 장로를 중심으로 하는 대의정치나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회중정치 감독 제도를 둔 감독 정치 등 다양한 정치형태가 있습니다. 세례를 물속에 들어가서 받는 침례와 물을 뿌리는 약식 세례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순서도 교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성경전체가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따르는 일에는 철저하게 분석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 것인가 영원한 생명을 중요하게 여길 것인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인가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것인가 이런 문제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길로 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스데반이 이제 설교를 끝내고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다 같은 편인데 다 같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서로의 생각이 달라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운 한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기까지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본문 57절에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라고 했습니다. 바로 앞 절에서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보고 말하기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하자 유대인들이 큰 소리를 지르고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하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큰 소리를 질러서 말을 더 못하게 하고 귀를 막고서 달려들어서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죽 살펴보면서 유대인들의 성경 해석과 스데반의 성경 해석이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말씀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바르게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해서 제사에 대해서 그 원 뜻을 모르고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면서 그 율법을 제대로 다 지키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형식적으로 지키는 척 하면 율법을 잘 지키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원래의 의미대로 하면 살인을 꼭 해야 살인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미워하거나 욕만 해도 살인죄와 같은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을 100% 다 지킬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욕심 그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에 율법을 깨끗하게 다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의도는 그 율법을 잘 지켜서 인간다운 삶을 살라고 하신 의도도 분명히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산다면 정말로 행복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온갖 죄성과 욕심들이 가득 들어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겉으로 사람들이 볼 때 지키는 척 하면서 위선적인 행동을 할 뿐이지 정말로 속속들이 잘 지키면서 살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율법 앞에서 자신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나 자신이 타락한 인생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노력을 해도 율법을 어기며 죄를 짓고 살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죽어가고 심판을 받고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장시간에 걸쳐 목숨을 걸고 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지키는 체 하지 말고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인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한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고 직접 하나님의 영광과 그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고 그들에게 증언을 합니다. 내가 하늘을 우러러 보니까 하늘 문이 열리고 거기에 내가 믿으라고 한 그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성경을 잘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몰라보고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자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고 달려들어서 그런 귀한 증언을 하는 스데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그 때의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목적이 율법을 잘 지키고 선을 행하여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도 교회 내에 악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교회가 율법을 더 잘 가르쳐서 지키게 해서 이런 불미스런 일이 교회 안에 없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압니다.

요즘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신문에 오르내리면 거기에 아주 자주 목사들이 등장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자녀를 학대하고 심지어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추한 일을 한 사람이 목사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하지 않는 나쁜 일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것도 성도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목회자들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교회가 정말로 바르게 사는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분이 그런 목사들의 잘못을 이야기하니까 목사가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악한 습성을 가진 사람이 그런 세상적인 죄악을 다 정리하지 못하고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니까 결국 나쁜 짓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에는 착한 사람만 옵니까? 나쁜 사람도 옵니까? 착한 사람도 오지만 나쁜 사람들이 더 많이 오는 것이 교회입니다. 사실은 이 세상에 완전히 착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다 나쁜 사람들만 오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온 이후에 여러분은 완전히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나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직도 나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요? 조금은 착해졌지만 완전히 착해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온 이후로 아프지도 않고 점점 더 젊어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교회에 온 이후로 만사가 형통하게 잘 되고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착한 사람이 되었고 의인이 된 증거입니다.

아직도 세월 따라 늙어가고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고 하는 일이 자꾸 잘 안 되고 그러면 아직도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타락한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다 죄인으로 살고 그 죄로 인하여 어려움도 당하고 늙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말씀 속에서 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길만이 나를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고 영원한 지옥의 멸망에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그 사실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 오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죄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당하지만 주님 다시 오실 그날에 완전히 이 죄악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고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믿고 자기 스스로 의로운 사람을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바울서신을 공부하면서 이신칭의가 성경의 핵심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로마서나 에베소서나 갈라디아서나 바울서신이 아닌 요한서신이나 베드로 서신에도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이 이신칭의의 진리입니다.

제가 바울의 로마서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더니 어떤 사람들이 로마서는 바울이 착각해서 쓴 서신이라고 주장을 하고 다닙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잘 몰라서 착각하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주장을 했을까요? 성경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했을까요? 아니요 굉장한 사람들 엄청나게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고 다닙니다.

예수님 당시 성경을 줄줄 외우고 엄청나게 성경공부를 많이 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런 헛소리를 하고 다닌 것처럼 오늘날도 신학박사들이 유명한 목사들이 그런 헛소리를 하고 다닙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를 부인하는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으면 그것이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자기의 마음에 들던지 안 들던지 그렇게 인정하고 믿어야 하는 것인데 성경까지 부인하면서 자기주장을 내세우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부족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런 생각을 하면 좋겠지만 자기가 잘났다고 자기가 의롭다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필요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 성경까지 부인하는 사람은 사탄의 사주를 받는 거짓선생이요 이단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위대한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악을 쓰면서 달려든다고 귀를 막고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든다고 해도 우리는 이 진리를 떠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흉악한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이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들보고 손가락질을 할 때 너희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는 꼴이 그게 뭐냐고 비웃는다고 해도 거기 기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내 사는 꼴이 이래서 나는 예수님을 더 믿는다. 어쩔래!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본문 58절에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른 말을 하는 스데반을 유대교 지도자들이 성 밖으로 끌고 가서 돌로 쳐서 죽이고 있습니다.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인다는 것은 정말로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 끔찍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합심하여 그 악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13장에 보면 사람을 죽여야 할 경우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도록 부추기는 사람은 죽여서 그 화근을 없애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너희를 꾀어서 떠나게 한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다른 신을 섬기게 한 사람은 돌로 쳐 죽여도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스데반에게 이 죄목을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스데반이 다른 신을 섬기자고 부추겼다고 한 것입니다. 스데반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 예수님을 다른 신으로 보고 다른 신으로 자신들을 이끌고 간다고 보고 신명기의 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스데반에게 구원의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스데반에게 다른 신을 섬기라고 유혹하는 사람의 죄를 뒤집어씌워서 돌로 쳐서 죽이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잘 못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은 때로는 이런 엄청난 죄악에 대해서 정죄하고 죽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의 근본정신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먼저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에 이 사랑의 율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스데반은 그런 악을 행하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같은 율법을 가지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쓰는 유대인들과 악을 행하는 사람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이 모든 율법이 모든 제도가 다 구원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낸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게 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라고 하는 것이 최고의 진리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빼고 다른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지금 구원의 하나님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일을 해 나오셨는가를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것도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하신 일도 구원에 관한 일입니다. 모세를 세워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은 것도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이런 모든 구원의 이야기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교회를 세우고 우리를 불러 모으신 것도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이 죄악된 세상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하나님나라로 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여기 이렇게 불러 모았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복음을 등한시하거나 전하지 않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사는 법을 가르치는 곳은 구원의 복음과 반대되는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자 바르게 살자고 외치는 것은 구원의 복음을 거꾸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엉터리 복음을 가지고 구원의 복음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런 엉터리들을 잘 분별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은 구원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치다가 돌에 맞아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이 구원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이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굳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양향모목사 / 행 7:59-60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인생들에게 참 좋은 것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런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한 일을 하고 보람된 일을 하고 모두에게 유익한 일을 하면서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보다는 악한 일을 많이 하고 자기의 욕심만 채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손해를 끼치는 일을 많이 합니다. 한두 가지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잘 살펴보면 악한 면이 더 많은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머리를 주셨습니다. 그 좋은 머리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머리가 좋은 사람은 그 좋은 머리로 오히려 남을 속이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돈을 많이 주셨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그 돈을 가지고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 좋은 돈을 가지고 좋은 일을 하기 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고 남을 위해서 좋은 일에 돈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특별한 것들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셨고 제사제도를 주셨고 특별한 언약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주 특별한 것을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받은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것을 주시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메시야를 통한 구원이 그들에게 주신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최고의 것을 알지 못하고 그들에게 주신 특권들을 오히려 메시야를 통한 구원을 방해하는 악역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오랜 시간동안 사도행전 강해설교와 특별히 스데반의 설교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그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사도행전 강해설교를 지난 2014년 1월부터 시작을 했으니까 2년 6개월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기록된 7장 강해설교를 작년 12월부터 했으니까 6개월이 지났습니다. 이 오랜 시간동안 말씀드린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서계만방에 전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들이 받은 좋은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이야기 했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스데반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돌로 쳐서 죽이는 끔찍한 일을 자행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지은 이 악한 죄를, 그들이 알지 못해서 짓고 있는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시고 그들이 이 죄 값을 치르는 불행한 사람이 되지 말게 하시고 그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이 죄가 너무나 흉악한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기도에서 우리는 먼저 이 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얼른 생각할 때 이 죄는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서 죽게 한 그 죄일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죄 없는 억울한 사람을 사형에 처한 그런 정도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까지 그 죄를 위해서 기도한 것은 그들의 죄가 단순히 한 사람을 죽인 그러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받지 않으며 안 되는 너무나 흉악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1)그들의 죄는 구원의 주님을 몰라보고 대적한 죄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고 나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몰랐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죄입니까? 몰랐습니다. 그것이 죄인 줄 알았으면 그 짓을 했겠습니까? 정말로 몰랐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도 뭘 잘 몰라서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알면서도 죄를 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사실을 알고도 그런 악한 죄를 지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몰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핍박한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때 자신을 죽이려고 모인 사람들을 위하여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까짓 돈 몇 푼 때문에 그까짓 명예 때문에 그까짓 기득권 때문에 그까짓 자존심 때문에 메시야이시며 구원자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그렇게 험한 십자가에 못을 박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기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기도 속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무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조상 모세와 율법 성전제사 이런 것에 대해서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고 알아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고 그렇게 설명을 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복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복음을 설명해도 그 때는 아는 척하지만 조금 지나면 또 다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작은 신학교에서 성경과목 강의를 합니다. 강의 할 때 성경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 책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또 강의를 통해서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강의가 끝나고 리포트 제출한 것을 보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의의 기준이라는 것을 이야기해도 결론은 또 율법을 행하는데 가 있습니다. 믿음으로가 아닌 행함으로 구언을 받는다는 것이 아주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웬만하게 말해서는 그 장벽을 허물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많이 연구했다는 신학자들까지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 진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고 행함이 구원을 받는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의 제일 큰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율법을 어긴 것도 죄입니다. 교회에 충성을 하지 못한 것도 죄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그러나 이런 죄들은 죄 축에 끼이지도 못합니다. 가장 큰 죄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오랜 역사가운데 진행해 오신 가장 핵심적인 것을 잘 모르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제일 큰 죄입니다.

그 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시하는 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무시하고 비웃는 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죄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고 살지 않는 죄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죄입니다.

자기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죄입니다. 자기 스스로 선을 행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죄인입니다 나에게 구주가 필요합니다. 라고 하지 않는 거만함이 죄입니다. 이런 우리의 무지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이고 스데반의 기도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최고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2)그들의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은혜로 베푸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얻는 혜택은 너무나 엄청나서 사람들에게 말을 해도 잘 믿지를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부자가 되게 해 준다면 그 정도는 믿겠는데.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을 완치되게 해 준다면 그 정도는 믿겠는데 실패하고 좌절해 있는 사람에게 힘을 주고 재기하게 해 준다면 그 정도는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고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해 주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해주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고 살게 해 주고 심판도 없이 평가도 없이 믿기만 하면 이런 것들을 그냥 다 준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엄청난 은혜들을 거부합니다. 그런 정도는 바라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우리 남편 돈이나 좀 잘 벌게 해 주고 우리 자식들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나 들어가게 해 주고 이 세상에 살 동안 건강하게 살게만 해달라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믿음은 왕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거지가 내 미는 손과 같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손을 내밀기만 하면 왕이 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는데 손을 내 밀지 않고 은혜를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엄청난 은혜를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을 거절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교만해서 그런지 아쉬운 것이 없어서 그런지 그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몰라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믿음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죄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수천억을 내라고 했다고 하든지, 율법을 철저하게 잘 지키라고 했다고 하든지, 재산을 다 바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살아야 된다고 했다고 하면 그렇게 하지 못해서 구원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엄중하게 문책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냥 손만 내밀면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그냥 거절을 한 죄는 절대로 용서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거절하는 미련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려 주옵소서 이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이고 스데반의 기도입니다.

 

3)그들의 죄는 율법의 용도를 잘 못 사용하고 있는 죄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 사형을 집행한 근거는 율법에 의한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라고 미혹을 하는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한 신명기의 말씀을 따라서 사형을 집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다른 신을 섬기라고 미혹을 한 사람입니까? 자기들 마음에 안 드는 말을 했다고 율법을 가져다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원래의 목적을 모르고 그와 반대되는 일에 율법을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통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이런 정도는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죄를 지었을 때 받아야 할 형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살인한 사람은 그 사람도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간음한 사람도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남의 물건을 탐내고 훔친 사람도 배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계명을 어겼을 때 형벌을 가하는 것은 죄를 짓지 못하게 미리 예방하는 것입니다. 형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서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율법은 사랑이 중요성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살인이 죄라는 것을 알게 하여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하는 것이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간음이 죄라는 것을 알게 하여서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하고 부부간에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하여 부부간에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도적질이 죄라는 것을 알게 하여 다른 사람의 소유를 보장해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하며 우리에게 있는 이 욕심이 모든 죄를 가져오게 하는 악한 것임을 알게 하여 내 욕심을 채우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소중하며 여기며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렇게 계명을 지키면서 살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아서 나를 이 죄악에서 구원해 주실 구주 예수님을 발견하고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율법의 기능을 잘못 알고 그저 남이 잘못했을 때 비난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미워하고 율법을 이용하여 오히려 자기의 세상 이익을 챙기는 일에 사용하려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문제 있는 교회에 전권위원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보면 모든 사람들이 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데 사용합니다. 율법의 목적은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기 위한 것인데 사람들은 그 율법을 가지고 서로 싸우고 서로 정죄하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내치는 일에 사용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주신 사랑의 정신, 용서의 정신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율법을 가지고 남을 미워하고 정죄하는 악한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이고 스데반의 기도입니다.

 

이 악한 죄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말에서는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번역을 했지만 헬라어에서는 좀 더 깊은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돌리다’는 헬라어에서 히스테미(ἳστημι)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돌리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머물러 두다”, “확정하다”라는 뜻으로 번역하기도 하는 단어입니다. 단순이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는 의미보다는 이 죄가 그들에게 머물러 있게 하거나 이 죄가 확정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흉악한 죄가 계속 그들에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회개하고 그 죄에서 빠져나오게 해야 합니다. 이 죄가 그들에게 최후의 죄목으로 확정이 되어버리면 안 됩니다. 죄가 확정되기 전에 변호사가 필요하고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생각하면 괘씸하고 생각하면 이 흉악한 죄에 대해서 더 큰 벌을 받게 해야 할 엄청난 죄를 짓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 죄 값으로 형벌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그들을 보며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보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죄 가운데 그들이 계속 머물러 있지 않게 해 달라고 이 죄가 그들의 죄목으로 확정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흉악한 죄가 우리 가운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죄가 우리 가운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서 나 자신의 죄로 확정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설면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 받을 수 없는 흉악한 죄는 짓지 말아야 합니다. 짓지 않아도 될 죄를 알지 못해서 짓는 어리석은 일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죄가 무엇인지를 앞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성경의 핵심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복음인 구원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이 진리를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바르게 알고 그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로 선물로 주시는 이 믿음을 그 무엇보다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사랑을 행하면서 살라고 주신 율법을 가지고 교회 안에 성도들을 정죄하고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못한 죄가 가장 큰 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악한 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은 순교를 당하면서 두 마디 귀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두 마디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양향모목사 / 행 7:59-60

목사님들이 만나면 지난주에 설교 했던 내용들을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주로 제가 한 설교 이야기를 잘 합니다. 그래서 주변의 친한 목사님들이 우리 교회가 사도행전 강해설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목사님들이 저보고 “아직도 스데반 이야기야, 아직 스데반 순교 안 했어?” 라고 농담을 합니다. 오늘 드디어 스데반이 죽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두 마디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긴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의 마지막을 장식하려고 합니다.

너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가 성경 전체를 구석구석 다 할 수도 없고 그때그때 부분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마는 것이기 때문에 빨리 사도행전 다 마치고 다른 성경 해야지 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사도행전 강해설교를 하지만 사도행전 본문만 보고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서 설교를 하고 성경역사 뿐만 아니라 교회사 전체를 염두에 두고 성경의 중요한 핵심을 설교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의 한두 구절이지만 성경 전체를 설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곳에 편협 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스데반이 긴 설교를 끝내고 스데반의 설교에 반감을 품고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순교를 당하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두 마디의 말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두 마디 말을 남기고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한 대목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혼은 우리의 생명의 중심입니다.

 

사람들은 이 육신을 가지고 살면서 이 육신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고 그냥 삽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이 무엇인지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도 세상 사는데 지장은 없습니다. 그냥 재미있게 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인생을 더 보람 있게 살고 참되게 살고 미래를 대비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천지만물들을 다 창조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우리가 보고 살고 있는 이 만물들을 만드셨습니다. 천지 만물을 다 만드시고 우리 인간은 좀 특별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고 하나님께 있는 형상들을 사람들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닮게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흙으로 만드시고 그 육신에 영혼을 넣어주심으로 인간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짐승들에게 없는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원숭이 따위가 아무리 모습이 진화되고 머리가 좋아진다고 해도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은 짐승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나 고양이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단 개나 고양이를 인간과 동급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이렇게 특별하게 만들어 주셨는데 영혼 없는 개나 고양이를 인간처럼 동격으로 생각한다든지 원숭이를 조상으로 생각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된 인간은 육신과 영혼이 완전하게 창조가 되어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담 이후로 태어난 인간은 영혼은 죽은 상태로 태어나고 육신은 짧은 인생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영혼이 없어져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분리의 상태를 말합니다. 영혼이 하나님과 관계를 떠난 상태를 영혼이 죽은 상태라고 말합니다. 육신의 죽음은 육신이 영혼과 분리된 상태를 육신의 죽음이라고 말하고 영원한 죽음이란 우리의 영과 육이 영원한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떠나서 영원한 지옥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영혼을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육신은 죽지만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며 영혼이 해야 할 일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42:1-2) 살아 있는 영혼은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영혼이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 세상에서 늙어서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우리의 육신은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인데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더 분명하게 영혼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은 육신이 태어날 때 죽은 영혼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즉 하나님을 몰라보고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이 하나님나라가 아닌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죽은 영혼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죽은 영혼을 거듭나게 해 주셔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의 육신은 영혼과 분리되어서 비록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땅 속으로 들어가서 썩게 되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나라로 가게 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의 영혼과 육신이 다시 만나서 신비한 몸을 이루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영혼의 생명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 있는가?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는가? 거듭난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고 있는가? 이런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았을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나라에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우리의 영혼이 죽었을 때 사탄의 종이 되어서 사탄을 위해 마련한 영원한 지옥으로 가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 있을 때 비단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인간답게 바른 삶을 살면서 참된 평안을 누리며 살며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영혼의 생명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말이“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이었습니다.

본문 59절에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한 것은 정말로 대단한 한마디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나 자신 있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다가 죽었지만 이런 마지막 말은 남긴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만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니까 이제 육신이 죽음을 당하면서 영혼은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을 아시고 당연히 그렇게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의 이런 최후의 모습을 보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직접 보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장면은 사도들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순교를 당하면서 자신의 죽음이 예수님처럼 대속의 죽음은 아니지만 진리를 알고 영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충만하게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알고 살게 됩니다. 스데반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그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구약성경 곳곳에 예표 되고 예언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하심이 없이는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세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하늘을 우러러 볼 때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돌이 날아오고 육신은 극한 고통을 당하고 죽음이 가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하나님나라를 보고 죽음을 기쁘게 맞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이렇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은 이런 자심감에서 온 것입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의 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바를 자신 있게 외쳤기 때문에 이런 고백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뜻을 바르게 알고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담대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도 나름대로 보람된 일도 많이 있고 살기에 따라서 행복한 삶도 살 수가 있습니다. 훌륭한 일을 많이 해서 존경을 받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왕이면 좋은 일 많이 해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영원한 천국을 위해서 준비하는 사람이 이 세상의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삶은 영원한 천국을 향해서 가는 나그네 길이고 천국을 가기 위해서 준비하는 곳입니다. 여기가 최종 종착지라고 생각하고 여기서의 삶에 올인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을 잘 관리하고 있다가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만한 영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거듭난 영혼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은 상태로 있는 것과 다시 거듭난 상태로 있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죽은 상태로 있다는 것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고 죄의 노예로 살다가 영원히 하나님과 떨어져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사람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영혼이 다시 살아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회복이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갖 은혜와 혜택들을 받아 누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은 우리가 좀 착해져서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려주심으로 우리의 신분이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

우리는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사탄이 주는 잡신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2) 잠자는 영혼을 깨워야 합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은 다 성령님이 그 마음에 계시는 사람들이고 영혼이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듭난 영혼이 잠을 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은 영혼을 가진 사람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아무 감각이 없이 세상을 삽니다.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은 타락한 죄성이 남아 있어서 가만히 있으면 자꾸 옛날처럼 죄를 지으면서 살려고 하고 자구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서 살려고 합니다. 틈만 있으면 하나님을 떠나 도망을 가서 세상 사람들처럼 타락하여 즐기며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거듭난 우리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6-17)

우리 성도들에게는 성령님이 와 계시고 성령님을 따라 행할 수 있도록 영혼이 살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성령님을 따라 행하면서 살라고 하십니다. 성령님을 따라 살려고 자꾸 마음먹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힘이 없어지고 육체의 욕심이 슬슬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속에 영혼이 죽은 상태이고 악령이 그들 마음을 지배하고 있고 그래서 육신의 욕심을 따라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죄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살아 있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우리가 죄가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를 아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아는 우리가 어찌 세상 사람들처럼 살려고 하는가 그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깨워야 합니다. 자꾸 게을러지고 나태해지는 우리의 영혼을 일깨워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 있도록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쌩쌩하도록 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육신은 점점 늙어지고 낡아갈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더 열심히 성경을 읽으십시오. 더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더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십시오. 더 열심히 설교를 들으십시오. 더 열심히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하나님을 알려고 더 노력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려고 더 노력을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묵상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더 많은 충성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더 애를 쓰십시오. 어떻게 하면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사십시오.

이런 노력이 없으면 여러분은 영혼은 죽은 영혼처럼 점점 시들어 갈 것이며 결국 영혼이 죽은 자처럼 세상에서 방황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죽은 영혼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런 병든 영혼 잠자는 영혼을 가지고 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까지 하시면서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려주셨는데 다시 살아난 영혼을 가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혼이 죽은 사람처럼 산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슴아파하시겠습니까?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것이고 우리도 언젠가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받아 주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은 자기가 알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다가 죽음으로 이 세상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영혼이 사아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진리를 바르게 알았습니다.

그 살아 있는 영혼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순교를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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