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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60708 /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가르침 / 행 8:26-40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6.06.20|조회수49 목록 댓글 0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가르침

행 8:26-40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행 8:26-40 / [빌립과 에디오피아의 내시] 그 무렵 빌립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말하였다. `예루살렘에서 가사 광야로 통하는 길까지 남쪽으로 내려가라.' 27) 빌립이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더니 에디오피아 사람 하나가 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에디오파아 여왕 간다게 밑에서 큰 권력을 쥐고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내시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드리러 갔다가 28)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마차에 앉아 예언자 이사야의 책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29) 성령께서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마차 가까이로 걸어가라.' 30) 빌립이 달려가서 그가 책 읽는 소리를 듣고 물었다. `그 뜻을 이해하십니까?' 31) 그 내시가 대답하였다. `잘 모릅니다. 아무도 내게 가르쳐 주지 않으니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고는 빌립에게 마차에 올라와서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 32) 그가 읽고 있던 구절은 다음과 같았다. ㄱ) `그는 학대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그 고통을 다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잠잠하고 털 깎는 자 앞에 선 어미 양처럼 입 한번 열지 않고 모든 고난을 다 참았다. (ㄱ. 70인역 사53:7-8) 33) 그가 체포되고 유죄판결을 받아서 감옥으로 끌려갔으나 그를 위해서 걱정해 주는 사람이 그의 시대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내 백성의 허물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다. 내 백성의 죄악이 결과적으로 그를 죽였다.' 34) 내시가 빌립에게 물었다. `그분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이사야 자신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까?' 35) 그래서 빌립은 이 구절에서 시작하여 많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예수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36) 그들이 물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내시가 말하였다. `저기 물이 있습니다! 나도 침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37) 빌립이 대답하였다. `만일 당신의 온 마음을 다하여 믿는다면 침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내시가 대답하였다. 38) 그들은 마차를 멈추고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서 빌립이 내시에게 침례를 주었다. 39) 두 사람이 물에서 올라왔을 때는 이미 주님의 영이 빌립을 데려가셨으므로 내시는 다시 빌립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기쁨에 넘쳐서 자기 길을 갔다. 40) 빌립은 아소도의 여러 도시를 두루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뒤 가이사랴로 갔다.

 

성령의 말씀하심에 따라 광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빌립은 에디오피아의 관리인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합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26) 빌립 집사에게 사마리아에서의 복음사역을 마치고 새로운 사역에 관한 이야기가 주어집니다. 그 시작은 “주의 사자가 말하여 이르되...” 스데반의 죽음 이후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고 빌립도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마리아 성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역의 시작도 주의 사자가 말씀하심으로 시작합니다. 그 곳은 사람이 없는 광야로 가라는 것입니다. 빌립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립의 대답은 “일어나 가서 보니”의 말씀처럼 순종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내가 내 이해와 지식과 경험으로 내 역사를 만들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순종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27-39)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광야에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있었습니다. 이는 이방인이지만 예루살렘으로 예배하고 돌아가는 것을 보아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이든지 유대교와 관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이었을 것입니다. 성령의 명령을 따라 수레 가까이 간 빌립은 그가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보고 그 글의 내용을 깨닫느냐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빌립의 태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전도자인 빌립은 늘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자였습니다. 성령이 이르신 것에 대하여 그의 태도는 언제나 순종하며 달려가는 성실함이었습니다. 또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한 줄 알고, 깨달아 알기를 바라는, 말씀을 사모하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이사야의 말씀이 예수를 가르치는 복음임을 깨달은 내시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기를 절실하게 바랍니다. 그래서 당장 물이 있는 곳에 가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내시는 기쁘게 길을 떠납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재점검하시기를 바랍니다. 빌립과 같이 우리는 주님의 성령에 이끌리어 그의 명령에 순종하며 성실하게 따르고 있습니까? 말씀을 사모함이 또한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그 은혜를 지금도 에디오피아 내시와 같이 귀한 줄 알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적용: 우리는 매순간을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그리고 들은 음성에 대하여 순종하며 성실하게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인생을 점차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적으로 생각하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서서히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은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거듭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생각하면 허무하고 불안해 할 것입니다. 영생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그 반대로 평안 가운데 노후를 살아갑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는 “산다는 것, 그것은 서서히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호크마 주석

=====8:26

주의 사자 - 사마리아 선교 이야기는 일단락되고 새로운 선교 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면서초자연적 능력이 가시적으로 개입되었다. 여기서 언급된 '주의 사자'란 표현은 '하나님의 사자' 또는 간략히 '천사'와 동일한 의미이며 하나님의 임재와 직접적인 개입을 강조할때 사용되는 용어로서 누가가 즐겨 사용했다(7:30, 35, 38;10:7,22;11:13;12:7, 11, 23;27:23;눅 1:11;2:9).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시사하는 이표현을 통해 누가는 이방지역에 대한 선교 활동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남으로 향하여 - 이 말은 빌립이 당시 사마리아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를 볼 때 빌립은 사마리아 선교를 시작했던 장본인임을 알 수 있다. 가사로 -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고 명령했지만 정확한 지점을 지칭하지 않고 다만 가사를 향해 가라고 방향만 지시했다. 가사는예루살렘으로부터 서남쪽으로 약 70여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창 10:19에 따르면 가나안의 도시였던 것으로 보이며, 유다 지파가 그곳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여 그이후 계속 블레셋의 성읍으로 남아 있었다. 또 이곳은 삼손이 성문짝을 메었던 곳이었다.(삿 16:1-5). 이 도시는 B.C. 96년경 마카비 가(家) 출신인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에 의해 멸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Josephus). 그 후 B.C. 약57년경 폼페이의 칙령으로 '가비니우스'(Gabinius)에 의해 재건되었으나 A.D. 66년경에 멸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Josephus). 그런데 가사로 가는 길은 아스칼론(Ascalon)을 통해 가는 길과 서쪽 헤브론을 통해 갈수 있는 두 길이 있는데 여기서는어느 쪽인지 분명하지 않다.

 

=====8:27

에디오피아 사람...내시 - 빌립의 선교대상으로 언급된 이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출신지와직책이다. '검은 피부'라는 의미를 지닌 '에디오피아'는 애굽의 남쪽 지역으로서, 나일강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스 족속(사 11:11)의 후예로 구성되어 있다. 에디오피아에서는 당시 모계(母系) 왕통을 갖고 있었으며 '간다게'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왕조를 나타내는 명칭으로서 로마의 '가이사' 또는 애굽의 '바로'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국고'(* , 가자)라는 말은 본래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된 말로서 왕실의 보물 또는 국가의 재산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내시는 왕실 또는 국가의 재무 관리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 성회에 참가할 자격이 없는 고자(鼓子, 신 23:1)이면서 이방인인 그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될 수 없다. 아마 그는 유대인의 총회에 들 수는 없었으나 유대교를 독실하게 믿었으므로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한 절기 기간을 택하여 예루살렘에 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예루살렘방문이 총회는 상관없이 단지 성지 순례만이 주목적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고자됨을 감추고 절기 중 거행되는 성회에 참석하려는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한편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의 먼길을 찾아왔다는 사실은 그가 유대교를 신실하게 믿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8:28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 32, 33절에 인용된 구절이 70인역(LXX)의 사 53:7, 8과 같다. 그래서 혹자는 그 사람이 70인역을 읽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F.F. Bruce).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누가가 그 구절을 인용할 때 70인역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8:29

빌립에게 지시하는 자가 '주의 사자'에서(26절) '성령'으로 바뀌어 언급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26절은 빌립에게 가시적으로 천사가 나타났으나 본절은 음성이나 영감을 통해 명령이 주어졌기에 누가가 '성령'이란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2)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주의 사자'가 나타난 것으로 표현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는다는 유대인들의 사상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빌립에게 '내려가라' 지시한 사자나 본문의 성령은 동일한 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7:30-33 주석을 참조하라.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 빌립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가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언급되어 하나님의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묘사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당위성 및 필연성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8:30

달려가서...말하된 읽는 것을 깨닫느뇨 - 빌립은 내시의 읽는 소리를 통해 성경의 내용이 자신이 전하려 하는 복음의 내용과 어떻게 일치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큰 소리를내어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이 내시도 유대인들의 습관을 따라 마차 속에서 큰 소리로 성경을 읽었을 것이며 이를 빌립은 들었을 것이다.

 

=====8:31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 '지도하는' 이란 표현이 미래형으로 사용되었다. 직역하면 '지도해 주게 될' 이란의미를 나타내므로 내시의 소망을 담고 있다. 즉 지금까지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자신을 지도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나타내기 위해 미래형 동사를 사용한 것이다. 이는 그 내시가 성경을 깨닫는 것에 매우 관심이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므로 빌립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었다. 빌립을 청하여 - 갑자기 나타난 빌립으로부터 도전적인 질문을 받은 내시는 의외로 빌립에게 자신의 마차에 오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처럼 내시가 배타적인 태도가 아니라 호의적으로 빌립을 맞아들였다는 사실은 두 가지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1) 내시가 자신의 체면에 관계없이 성경을 깨닫지 못한다고 대답함으로써 자신의 겸손과 주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자 하는 열망이 높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2) 선교자를 맞아들이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시사하고 있는데 영접하는 자의 구원을 암시하고 있다(막 6:11 주석참조).

 

=====8:32

양...어린 양 - 사 53:7의 인용구로 그곳에서 표현은 메시야의 수난과 관련된 예언이다. 메시야의수난에서 비유적으로 '양'을 언급한 것은 메시야가 순종의 제물임과 동시에 희생 제물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자세한 것은 사 53:7 주석을 참조하라.

 

=====8:33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 이 말은 메시야가 이 땅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 사역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자기 백성들로부터 받지 못했다는 의미일 수 있으며 또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의 재판 과정에서 공의로운 재판을 받지 못했다는 것도 의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사53:8 주석을 참조하라.

 

=====8:34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 예언서에 예언된 고난의 종이 누군지를 묻는 내시의 질문에는 매우 진지하고 정중한 문장이 사용되고 있다. 즉 '청컨대'(* , 데오마이 수)라는 말을부탁을 하기 전 붙이는 '죄송하지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Haenchen). 한편 내시는 예언된 고난의 종이 이사야 선지자일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사야는 므낫세 왕에 의해 고난을 받고 죽었다는 전설 때문에 그러한 추측이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또는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고난의 종으로 상징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선지자에 대해 내시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당시에 두 세 가지의 해석들이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8:35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켜 - 아마도 빌립은 이사야의 예언을 예수의 고난과 결부시켜 가르쳤던 것 같다. 다시말해 빌립은 사 53:7, 8이 메시야의 고난임을 설명하고 그 메시야가 예수임도 밝혔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치심과 수난 및 부활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그 내시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8:36

물 있는 곳...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 많은 학자들은 '물 있는 곳'이라는 말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즉 그 장소가 예루살렘 남쪽 헤브론에서 3km정도의 거리에 있는 '벧술'이라는 샘(수 15:58;느 3:16)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하고(Jerome, Eusebius, Alford), 가사로 가는 길에 위치한 '텔엘 하시'(Tell-el-Hasy)라 이름하는 샘을 말한다는 주장(Robinson, Hervey)도 있으며,가사 부근에 있는 어떤 샘으로 추정하기도 한다(Smith).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설득력있는 주장이라고 볼 수 없다. 즉 저자는 그곳이 어느 지역인가 하는 장소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다만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음을 말하려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이 두 갈래였으므로 어느 길을 택했느냐에 따라서 견해가 다를 수 있으며 빌립이 내시를 어느 지점에서 만났느냐에 따라서도 세례 장소가 달라질 수 있다. 한편 내시가 '무슨 거리낌이라도 있는가?'라고 반문한 것으로 보아 그가 이미 세례에 관해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빌립이 예수에 대한 설명을 하던 중 세례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아마 빌립은 내시로 하여금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제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내시는 자신이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고백을 하는 대신 세례받는데 거리낌이 전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반문 형식의 의문문을 사용했다.

 

=====8:38

둘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 이는 두 사람 모두 물에 들어가 빌립이 내시에게 침례(浸禮)를 베풀었음을 암시한다. 당시에는 오늘날 행하는 약식 세례와는 달리 침례를 행했으므로 물이 넉넉히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이로 보아서 내시가 세례를 받은 장소는 단순히 오아시스의 샘이 아니라 흐르는 시내였을 것이다.

 

=====8:39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 빌립을 이끌어 주는 자가 '주의 사자'에 이어(26절) '성령'으로 언급된 후(29절) 여기서는 또 다른 표현인 '주의 영'으로 언급되고 있다. 누가는 서로 같은 의미를 조금씩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29절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이끌어 간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르파센'(* )은 재빨리 어떤 것을 채어가는 모습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빌립을 내시의 눈 앞에서 금방 사라지도록 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이 기적이 실제로 시공간(視空間)에서 발생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누가는 이 기적에 대해 묘사함으로써 빌립의 전도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해 주며 또한 이방인 전도의 정당성을 부각시켜준다. 내시는 흔연(欣然)히 길을 가므로 - 혹자는 기쁨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이 누가의독특한 표현법이라고 주장한다(Harmack, Haenchen). 그러나 이 기쁨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지 누가의 독특한 표현법이 아니다. 내시에 관한 언급은 여기서 끝나고 있지만 내시가 기뻐하며 걷는 모습은 그가 본국으로 돌아가 복음을 증거하며 이방인의 선교사가 되었으리라는 추측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8: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 빌립이 세번째로 찾아간 선교지 아소도는 가사에서 동북쪽으로 약 40km, 지중해 연안 4.8km 대륙 지방으로서, 삼상 6:17에서는 블레셋 성읍인 '아스돗'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도시는 처음에는 번창한 항구 도시였으나 암 1:8에 예언된 바대로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빌립의 선교 활동이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을 두루 포함한다는 본절의 진술은 그곳의 기독교 공동체들이 빌립에 의해 시작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를 방문하였을 때(9:32, 36) 그곳에 이미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 설 교 >

내시의 성경공부

이정익 목사 / 사도행전 8:26-39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복중의 복입니다. 성경을 보면 세상의 근원을 알 수 있고 창조과정과 나의 뿌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운명과 나의 종말을 알 수 있고 종말 이후의 문제나 내가 가야 하는 길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없을 때에는 진화론이 대세였습니다. 그런 줄로만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주어지면서 이 세상의 근원이 분명해졌고 창조과정이 적나라하게 밝혀져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섭리와 계획을 모두 성경에서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성경을 연구하고 풀어야 하나님의 섭리와 비밀을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마치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하는 것처럼 수고하고 노력하여 밝히고 찾는 사람만이 비밀을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 점을 오늘 읽은 본문이 아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디오피아의 내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디오피아 왕국의 국고를 맡은 장관 내시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가는 길에 마차를 타고 가며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이 내시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한 절기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돌아가는 독실한 유대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그 성경이 이사야서 53장이었습니다. 그가 그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빌립에게 명하여 그에게 가 보라고 지시하십니다. 여기 빌립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7집사중 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하고 예루살렘에 핍박이 시작되었을 때 그 핍박을 피하여 돌아다니던 디아스포라 중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빌립을 사용하셨습니다. 부름을 받고 빌립이 급히 가보니까 내시가 마차를 타고 가며 이사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르쳐 주었더니 듣고 감동을 받고 회심하여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 결과 이 내시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게 되었고 이디오피아에 돌아가 복음을 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디오피아 나라가 전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접한 나라가 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한 사회의 리더가 되면 역할이 그렇게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회심이 한 나라를 영적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여기 내시 한 사람이 회심하는 순간 이디오피아 나라와 민족이 전도되고 회심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 내시가 성경을 공부하는 순서가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을 손에 들음

성경을 손에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은혜를 입지 않으면 성경을 손에 든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손에 성경을 들고 읽고 묵상하고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생활하는 것은 엄청난 축복을 입은 삶인 줄 아십시오. 내시는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가는 길에 이사야서를 깊이 묵상하고 지금 진지하게 읽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더 깊이 알려고 성경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첫 번째 순서가 성경을 읽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것의 근원이 들어있고 기준이 들어있고 각종 비밀이 들어있고 그 해답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캐논이라고 부르고 바이블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모든 교훈 중 기준이 된다는 의미이고 법의 기준이 되고 삶의 기준도 되며 인생의 기준이 되고 영적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기독교를 박멸하려고 하였습니다. 박멸하려면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다 싶어서 먼저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읽다가 그는 박멸이 아니고 스스로 성경 속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기독교를 박멸할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이제는 그 하나님을 증거 해야겠다 해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영화가 벤허라고 영화이고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생키비치라는 감독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거기에 길이 있고 뜻이 있고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여기 내시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작은 일이 마침내 이디오피아 한 나라에 전도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연구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리고 갈구하면 하나님은 누군가 보내서라도 가르쳐 알게 하시고 기회를 주시고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내시의 겸손

내시는 본디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까지 와서 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거리가 자그마치 15,000km나 되는 곳을 마차를 타고 한 달을 달려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이제 일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먼 거리를 개의치 않고 예루살렘까지 와서 예배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귀국 도중에 마차를 타고 가면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가 읽은 성경은 오늘 우리들이 읽은 사도행전이 인용한 이사야서 53장 내용입니다. 내시가 고난 받는 종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지만 그는 그 고난 받는 종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사마리아에서 사역 중이던 빌립을 그에게로 보내신 것입니다. 빌립이 명령에 순종하여 급히 가보니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이해되느냐 ?”고 묻자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알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리고 빌립을 청하여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면서 “여기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이 누구냐 ?”고 묻습니다. 빌립이 “그는 고난받 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고 “오셔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당하고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내시는 그 내용이 생전 처음 듣는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과정을 듣지 못하여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충격도 컷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회심하고 마침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내시는 참 겸손한 사람입니다. 모르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한 나라의 국고 맡은 장관이니까 교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르쳐 주는 자가 없는데 어찌 알겠느냐, 올라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합니다. 참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말씀을 잘 받아들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전도할 때 더 잘 영접합니다. 겸손함은 축복이고 은혜 받은 성품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의 사역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줍니다. 성령은 오늘도 쉬지 않고 이렇게 다니시며 역사하시고 섭리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우리들이 설교를 들으면 곧 잊어버리는데 그것도 은혜입니다. 금방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도 걱정할 것 없는 것은 필요할 때마다 성령께서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마음에 뜻을 품으면 그 뜻을 풀어줄 사람을 보내 주시고 그 뜻을 이룰 사람을 알게 하시고 성취할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내시는 이사야서를 읽어도 뜻 모를 이야기만 기록되어 있었지만 그때 성령이 사람을 보내서 알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내가 이 뜻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뜻을 간직하고 품으면 그 다음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신비 경험

빌립으로부터 내시는 그 고난 받는 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고난은 곧 십자가의 고난을 말합니다. 내시는 그 십자가의 고난은 다름 아닌 자신을 위한 고난임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때 그는 생전 처음으로 십자가와 예수와 구원과 부활 같은 언어를 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풀지 못한 질문의 해답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내시는 자기의 인생에서 자기의 지성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는 신비함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얼마나 신비함을 느꼈겠습니까.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이 길을 구원의 길이라고 부르고 구원의 도라고 부릅니다. 성경을 보면 말씀을 접하고 신비를 경험을 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유다왕 요아스는 성전수리를 하다가 발견한 율법 책을 발견하여 읽은 후 지금까지 율법 책을 모른 채 기준 없이 너무 무지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삶이 하나님께 너무 죄스러워 놀라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강화도에 살던 유학자인 종순일이라는 사람은 큰 지주였습니다. 그 일대의 사람들이 그에게 빚을 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인이 된 후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임금님에게 탕감 받는 대목을 읽다가 충격을 받습니다. 이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빚 진자들을 다 모아놓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다 불태우면서 빚을 탕감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느 도적은 남의 집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물건을 훔쳐다 팔았는데 마지막까지 팔리지 않는 책이 한권 있어서 펼쳐 읽는데 첫 구절 에베소서4장28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도적질 하는 자는 다시는 도적질 하지 말고” 그 순간 얼마나 당황스러움을 느꼈겠습니까. 어거스틴은 방탕생활 하는 도중 우연한 기회에 성경을 들고 펼치는 순간 로마서13장13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방탕하지 말고 술 취하지 말고 호색하지 말며”. 그래서 모두 순간 변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영감의 의해서 기록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다가 처음으로 십자가와 부활과 예수를 알게 되면서 그는 충격과 감동과 신비의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단

그리고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는 빌립에게 “내게 세례를 달라, 무엇을 더 주저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스스로 결단하고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그 내시가 빌립으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이디오피아 사람으로서 첫 번째 세례를 받은 사람이 된 셈입니다. 오늘 세례를 한낱 형식적인 것을 꼭 받아야 하느냐 하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유식한 것 같지만 아주 무지하고 교만한 생각입니다. 그렇게 형식적인 것이면 예수님은 왜 굳이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세례를 받기 위해서 광야 요단강까지 나아갔겠습니까. 그리고 세례요한은 또 굳이 그 형식적인 세례를 베풀려고 안달을 했겠습니까. 몰이해도 어쩌면 교만이고 자만입니다. 예식을 경시하는 태도도 교만일 수 있습니다. 이 내시는 참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더 이상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나에게 세례를 달라”. 그 결과 내시는 그 순간 지성으로 깨달은 것을 영적으로 체험하는 새로운 안목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정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내시는 여기서 지적으로 예수를 알았고 영적으로 예수를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적 수준자가 영적인 수준자로 변모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의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로 발 돋음을 한 것입니다. 그 후 영적인 발전의 삶을 통해 이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였고 그 스스로 영적인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요소는 결단력입니다. 우유부단은 신앙생활의 적입니다. 머뭇머뭇, 기연가미연가, 우유부단, 꾸물꾸물은 모두 신앙생활의 적입니다. 내시는 알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순간 결단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더 주저하겠는가, 나에게 세례를 달라.” 그 말은 “나는 이제부터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사용하시고 역사하시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뜻을 이루십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가 나타날 때가 되었다 싶을 순간에 그때 주저하지 않고 나섰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빌라도를 찾아가서 담판하여 예수의 시신을 인수하여 장례를 치렀습니다. 마리아는 지금이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임을 알고 주저하지 않고 옥합을 깨트려 예수의 머리위에 부었습니다. 에스더는 지금이 내가 일어날 때요 나만이 할 수 있는 때라는 것을 알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왕 앞에 나아가 민족을 위해서 탄원합니다.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그물을 버려두고 쫒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이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이 결단력이 발휘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섭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시는 무서운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모르니 가르쳐 달라”, “내가 무엇을 더 주저하겠는가, 나에게 세례를 달라” 이 결단력이 마침내 한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결단력이 있는 사람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결국 변화 받은 사람 빌립 한사람에 의해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 회심합니다. 그리고 내시 한사람을 통해서 이디오피아 나라에 복음이 전달되고 복음이 예루살렘을 떠나 아프리카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나 한사람은 결코 나 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큰일을 이루십니다. 복음이 세상에 주어질 때 예수 한사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12제자로 늘어나고 그 12명의 제자가 70명으로 120명으로 3천명으로 5천명으로 증가하여 마침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것도 처음에 한 두 사람이 이 땅에 들어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20년이 지난 오늘 천 만 명이 복음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 복음은 또 우리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성령 사역

이와 같은 역사는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성령은 전도하는 영이십니다. 오늘 교회의 부흥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하시는 사역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확장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실 계획을 겸손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결단력을 가진 내시를 활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빌립을 보내 그를 가르치게 하였고 그 내시로 하여금 세례 받게 하여 그를 활용하신 것입니다. 이 빌립은 스데반이 순교할 때 사마리아로 도망가 전도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때 성령이 빌립을 광야를 지나가고 있던 내시에게로 보내셨고 빌립과 내시의 잠간의 대화가 그 잠깐의 대화가 멀리 이방땅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에 박해가 주어진 것은 당장 생각할 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좀 멀리 보면 하나님은 그 핍박을 통해서 유대와 사마리아의 벽을 허물었고 또 그 기회에 이디오피아까지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사람의 집사를 통해서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고 그리고 지경을 훨씬 넘어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까지 복음을 확장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내시가 성경을 손을 드는 순간부터 이 기적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를 따라 가라!

사도행전 8:26-40 / 유기성 목사

이번 중앙 연회 은퇴 목사 찬하예배 때 설교하신 목사님께서 95세 되신 원로 목사님 이야기를 하셨는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분이 70세 은퇴 때, ‘이젠 할 일이 없어졌구나.’ 하고 쓸쓸히 생각하였답니다. 그런데 25년을 더 사신 것입니다. 요즘 너무나 후회가 되는 것이 이렇게 오래 더 살 줄 알았으면 은퇴 때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까 계획을 세워 살 것을, 계획이 없이 살다 보니 25년을 허송세월한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5세가 된 지금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셨답니다. 95세라고 이젠 다 살았겠지 하고 계획없이 살다가 10년을 더 살게 된다면 그 때 또 얼마나 후회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퇴하신 목사님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새 삶을 계획하시라는 권면을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제 나이가 70이 넘으신 원로 목사님이 세운 계획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여겨졌습니다. 그 순간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는 분명히 세울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철저히 성령께 순종하며 살아보리라”하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놀라운 인생 계획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이나 형편과 상관없이 우리가 세울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인생 계획은‘이제부터 항상 성령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리라!’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어떤 축복이, 어떤 역사가 일어날지 상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려고 결단하는 자를 통하여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았던 빌립이라고 하는 전도자를 통하여 아프리카 선교의 문을 여신 하나님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도자 빌립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 지금으로 말하면 재무장관 쯤 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일화입니다. 에디오피아라는 나라는 시바 여왕 때 솔로몬에게 와서 지혜를 배워갔었는데, 그 때 유대교가 전해졌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고위 관리인 국고를 맡은 내시도 유대교인으로 유월절을 지키려고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왔다가 다시 이제 에디오피아로 가는 길입니다. 성지 순례를 해보면 다 경험하시겠지만, 마음이 특별히 갈급해지게 됩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대단합니다. 이 내시가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순례하면서 그 마음이 갈급했던 것 같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가 없으십니다. 그를 통한 아프리카 선교의 문을 열리라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전도자 빌립을 에디오피아 내시가 가는 길목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빌립은 성령충만한 사람이었고, 항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마리아에서 열심히 전도하여 많은 전도 결실을 얻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령님께서‘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늘 받았던 빌립은 순종합니다. 자기 사역을 다 내려놓고 성령이 지시하는데로 가사라고 하는 곳으로 내려갑니다.

가사는 이스라엘 서남쪽 땅으로 광야 지역이고 빌립이 활동하고 있던 사마리아 땅에서는 상당히 먼 거리였습니다. 지금은 가자 지역이라 불리는데 팔레스타인들이 독립해서 살고 있으며 최근에도 분쟁이 잦은 곳입니다.

빌립이 성령님께 순종하여 가사 광야로 가보니 에디오피아 내시가 탄 병거가 오고 있었습니다. 이 때 성령께서 빌립에게 에디오피아 내시가 탄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병거에 다가갔더니 성경책 읽는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책을 읽을 때 꼭 소리 내어 읽었지 않습니까? 책을 읽었다면 소리 내어 읽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성경을 마음 속으로 읽지 않았습니다. 독특한 리듬으로 크게 소리를 내어 읽었습니다.

들어보니 이사야 53장이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예루살렘에서 출발할 때부터 두루마리로 된 이사야서를 읽어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빌립을 만났을 때가 바로 이사야 53장을 읽을 때였던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 아닙니까? 성령님의 세밀한 역사였습니다.

빌립이 내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읽고 있는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빌립더러 병거에 올라오기를 청합니다. 병거에 탄 빌립은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난 당한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내시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지나가다가 마침 물 있는 곳에 이르러 에디오피아 내시가 세례받기를 청하게 됩니다. 병거를 머물러 두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었습니다.

오늘도 세례를 받으셨지만 세례는 너무나 놀라운 성례입니다. 세례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주로 고백하는 순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의 생명으로 다시 사는 자가 된 증거요, 이전의 삶을 완전히 청산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그런 결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빌립 한 사람의 순종이 이처럼 에디오피아 내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그 가정과 나라,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영적 지도를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아프리카에도 복음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게 됩니다. 그와 함께 이 모든 일이 성령께서 친히 주도하셨다는 사실도 보게 됩니다. 빌립은 도구였습니다.

이 일은 빌립으로서는 알 수도, 계획을 세울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빌립은 오직 철저히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랬더니 아프리카 선교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입니다.‘성령님, 오늘 나는 어떻게 할까요?’하며 살았던 것 뿐인데 성령님께서 빌립을 통하여 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님으로 인하여 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도 성령님은 그와 같은 역사를 행하십니다.

지난 주간 선교사님들의 새벽 기도회 말씀으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수요일에 태국 신광준 선교사님이 선교 보고를 하셨습니다, 선교 보고하셨던 사진들을 보여주셨는데 많은 사역을 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태국과 베트남 많은 선교 보고 후 말씀하시기를 “나는 성령께서 일하시는 대로 따라 간 것 뿐 입니다. 내가 가기 전에 이미 성령께서 많은 일을 해 놓으셨습니다, 나는 성령께 순종하여 말하라면 말하고, 가라면 가고 했습니다. 저는 주님 가신 길에 나도 간다, 이런 자세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고 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셨던 것입니다.

목요일에는 필리핀 홍성욱 선교사님이 놀라운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간증을 하셨습니다.

필리핀에서 빈민촌 선교를 하고 계십니다. 그는 고등학생 때 여학생을 사귀고 싶어서 교회에 나갔다가 여학생은 만나지 못하고 예수를 만나 목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목사가 되어 나간 임지가 의령에 있는 종합복지관이었는데, 8년 동안 무연고자 장례식만 치르면서 염도 수많이 하였는데, ‘왜 나는 결혼식 주례는 한번 못해 보고 장례만 치르는가.’ 했답니다. 그러다가 꿈 꾸던 미국 목회 길이 열려 떠나기 전 동기들과 필리핀 여행을 갔다가 필리핀 빈민촌을 들러 보다가 거기서 주님의 부름을 받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필리핀 빈민촌에 갔더니 한국 선교사가 왔다고 구제품을 달라고 모여들더랍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너는 이들에게 물질을 돕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말씀을 가르치라!’고 하셔서 구제품만 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복음을 전하니 침밷고 교회를 떠나더랍니다.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왔으나 3개월 동안 예배 드리러 오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가난한 집에 장례가 났는데 천주교에서도 장례를 치러주러 오지를 않더랍니다. 그래서 8년 동안 장례 훈련을 받은 선교사님이 장례를 치러주면서 마음이 돌아서 한 사람씩 나온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답니다. 교회가 300명 가까운 교회로 성장하였고 병원도 학교도 세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선교사님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선교사님은 우리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 원하나이다.” 하는 자세를 분명히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금요일에는 일본 김도형 선교사님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모험을 즐기는 사람으로 생각한답니다, 이유는 그 선교사님의 사역이 남이 하지 않는 대단히 모험적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님이 일본에 가실 때, 한국 교인이나 일본 교인이나 가장 많이 물은 것이 “왜 하필 일본이냐?”는 것이었답니다, 선교사의 무덤이라는 일본에 왜 선교사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듣는 질문이 “왜 하필 교토냐?”는 것입니다. 교토는 일본에서도 가장 선교하기 힘든 도시입니다. 또 듣는 질문이 “왜 하필 일본인 교회냐?”는 것입니다. 재일동포 교회도 많은데, 언어도 잘 안되는 상황에서 일본 교회에 들어갔느냐는 것입니다. 또 듣는 질문은 “왜 하필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협력 선교사를 하시지 돈도 교인도 없으면서 일본인 교회를 어떻게 개척하느냐는 것입니다. 또 듣는 질문이 “왜 하필 교토에서도 가장 우상숭배가 심한 오오미야 지역에서 개척하는 것인가?” 그러나 믿음의 시작이시며 완성이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주님만 따라 살았더니 모험이 가득하면서도 간증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예배당이 마련되고 일본 현지 주민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교회는 개척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정말 구체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는‘선교사님이니 그렇지, 내게도 그리하실까?’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오셨다면 반드시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을 믿었다면 성령님은 여러분의 삶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십니다. 믿어지지 않습니까? 인도하심을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해 보셨습니까?

여러분, 그 동안‘어떤 사람에게 전도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없었습니까? 아마 틀림없이 한번 이상은 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생각인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전도와 선교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마음에‘누구에게 전도하면 좋겠다, 예수 믿게 하면 좋겠다.’이런 생각은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성령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자기 생각으로 여기고 지나쳐버렸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하였습니다.

만일 이 시대 그리스도인 모두가 좀 더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다면 우리 시대에 복음 전도의 위대한 부흥의 시대가 또 한번 도래할 것입니다.

선교와 전도는 예수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전도는 참으로 쉬운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결과는 성령께서 이루시고 우리는 찬송할 뿐입니다.

어떤 전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우연히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은 하나님이 자신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아십니다.

 

어제 젊은이교회 전도 집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늘 하던 전도 설교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전도 집회 현장에 가서 기도 중에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제게는 전도 설교가 늘 하던 평범한 일일지 몰라도, 이 순간 이 설교를 듣는 전도 대상자에게는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요, 가장 극적인 사건, 즉 위대한 만남을 이루는 사건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순간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전도자를 보내서 인도하셨고, 필요하면 하늘의 군대도 동원하시고, 필요하면 모든 환경까지도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기 전에‘하나님 그렇게 하시옵소서. 오늘 전하는 말씀을 통하여 인생을 바꾸시옵소서.’하는 간절한 기도를 했습니다.

오늘 우연히 교회 나왔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우연히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듯이, 모세가 어쩌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고, 12명의 주의 제자들이 우연히 예수 만난 것이 아니듯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한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어쩌다가 되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명하여 부르신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성령의 가장 큰 축복은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성령의 권능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아이가 손에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무엇하겠습니까? 어린 아이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보호자인 부모가 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소유가 얼마나 되든지 얼마나 많이 배웠던지 상관없이, 여러분이 성령의 체험을 하고 능력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오셔서 여러분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하든지 시작부터 주님이 인도하신다! 는 것을 분명히 하고 살아야 합니다. 만약에 자신이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이 시간“하나님이여, 내 인생을 성령님께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령님이 임하셔서 함께 생각하고 성령과 함께 말하고 성령님과 함께 행동하고 성령님과 함께 움직이게 하여 주시옵소서.”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이 항상 명심할 것은 여러분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언제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판단할 때 이것을 주님께 물으셔야 합니다.“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주님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오병이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 주님의 의도는 분명했습니다.‘5천명을 먹이시겠다! 제자들을 통하여 먹이시겠다.’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더 늦기 전에 무리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해야 하겠다.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이 이러니 먹을 것을 주어 배부르게 해 달라고 기도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항상 주님의 뜻을 구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최근 감리사를 비롯하여 해외 선교, 북한 선교, 학원 선교 단체의 책임을 연속적으로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들을 맡으면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일이라 맡았지만, 이러한 교회 외부 사역 때문에 저의 목회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지 않을까? ‘이러다가 우리 교회는 큰 일 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생각이 다르셨습니다.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더 좋은 길이다.’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너무 바빠서 네 계획하는 목회하지 못하니 잘 되었다! 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네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 포기하라.’ ‘네 생각에 옳다고 여기는 것, 꺽어져야 한다.’ ‘네 교회를 만들려 하지 말라. 내 교회를 세우리라.’‘교인들을 네게로 모으려 하지 말라 나에게로 인도하라.’ 하셨습니다.

저는 최근 어느 때보다도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역사해 주세요.” 하고 기도해왔습니다, 그런 자세가 제 목회 계획대로 목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도 아마 더욱 그렇게 기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매 순간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죄짓는 일이 아니고 내 고집으로 하는 일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일이 분명하다면 일이 겹쳐있다 하더라도 걱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아무리 바빠도 걱정할 것 없고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만 받으면 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제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나는 죽고 예수는 사는 것’이었습니다. 담임 목사의 강한 지도력, 필요없는 것이었습니다. 포기했습니다. 과감히 부교역자들과 장로님들에게 사역을 맡기고 저도 주님만 바라보며 교인들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할 뿐입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만 분명하면 환경 때문에 조건 때문에 걱정할 것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께서 인도하십니다.

지난 OM선교훈련원 이사회가 열렸을 때, 중동 선교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선교사님 한 분이 오셔서 이집트 콥틱교회 대주교인 Father Zakaria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분은 지금 이슬람권에서 가장 복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는 위성 방송을 운영하면서 한 손에는 성경과 코란을 들고 이 둘을 비교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모슬렘들이 이 방송을 보고 개종하고 있습니다. 매일 접속자만 60만 명에 이릅니다, 모슬렘들이 진정한 복음에 목말라 있다는 증거입니다, 과격 이슬람 단체에서 그에게 공개적인 현상금 1억 달러를 걸었습니다. 이 선교사님이 그에게 “현상금이 걸렸다는데 두렵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하여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매일 매 순간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실 뿐입니다. 저는 매 순간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역에 가름부음이 넘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처해있는 형편과 처지가 어떤지 상관 없습니다. 주님은 못 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어려운 환경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우리가 주님이 이끄심을 받기 원합니다. 온전한 순종으로 주님께 반응하기 원합니다.”그렇게 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 기도하시겠습니다. 말씀을 주셨으니 그 말씀 붙잡고 기도해야 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성령님에게 온전히 순종하고 주님의 인도함을 받기 원합니다. 저의 모든 처지와 형편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주님, 기가 막힌 계획을 갖고 계신 주님, 저를 이끌어주소서.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역사해 주소서.”

 

 

 

 

성령의 역사와 인도

행 8:34-40 / 이정익 목사

예수님의 일대기를 보면 몇 가지의 마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오심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과 장차의 재림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여 일 동안 세상에 더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면서 성령강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몇 가지 준비를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는 회개입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보였던 시행착오와 졸렬함 그리고 자신들의 무능함과 두려움에 몸을 사렸던 점들을 통렬하게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면서 마음을 비웠을 것입니다. 구태의연함이 그냥 마음과 생각에 남아 있는 한 그들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새 생각을 가지려면 낡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새 옷을 입으려면 깨끗하게 목욕을 해야 하듯이, 새 집으로 이사 갈 때에는 낡은 가재도구는 버리고 새로 바꾸어야 하듯이, 성령을 입기 위해서는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120여명의 제자들은 열흘 동안 합심해서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14절을 보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이 합심과 마음을 같이 함이 중요합니다. 그때 그곳에 열흘 만에, 예수님의 부활 후 50일 만에, 오순절 명절날에 성령이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그날 성령이 강림하신 표시로 몇 가지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성령이 불같이, 바람같이” 임하신 것입니다. 물론 성령은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지만 그날에는 시각과 청각으로 확연히 보고 들을 수 있도록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레이저나 자외선 그리고 적외선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태우고 수술하고 투시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파괴력을 갖듯이 그날 성령의 강림도 그렇게 사람들 눈에 보일 정도로 강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적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그 반응은 그곳에 모인 120여명 모두에게 방언이 터진 일입니다. 방언은 성령 역사의 가장 기초적인 외적 표징입니다. 또 영적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의 입이 열리고 나가서 힘 있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전도는 강한 용기와 지혜와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 용기는 성령이 주시는 힘입니다. 그 성령의 감화를 받은 제자들은 이제 어제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어제는 무서워서 숨고 도망가고 예수를 부정하였지만 오늘은 폭발적인 능력이 나타나서 자신 있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병자들이 일어나고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3천명 5천 명씩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타났습니다. 성령이 사역에 깊이 간여하셨고 교통하고 변화시키고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는 많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계시의 역사

 

본문은 성령의 계시의 역사를 설명해 줍니다. 이디오피아 왕 내시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고 있습니다(27). 그는 독실한 유대교인입니다. 순례차 예루살렘에 왔다가 귀환하는 길에 마차 안에서 아사야서 53장7절을 읽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읽었지만 그 뜻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빌립에게 계시하십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하시니 그 길은 광야라”(26). 그 말은 “이디오피아 내시가 광야 길을 가고 있으니 가서 전도하라“는 말입니다. 그때 빌립은 사마리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달려가 보니 내시가 병거를 타고 가면서 성경을 읽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뜻이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라고 묻자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알겠는가” 라고 반문합니다(31). 그리고 내시는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앉으라”하고 “여기 말하는 자가 누구를 말하는가”고 묻습니다(34). 그래서 “빌립이 입을 열어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였다”고(35)고 했습니다. 그러자 내시는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 세례를 달라 해서 세례를 베풀었다”(36)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내시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는 것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복음의 흐름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복음이 처음에는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로 확대되고 마침내 로마로 세계선교로 발전되어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빌립이라는 제자를 통해서 복음이 사마리아를 넘어 세계화되어 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특징은 하나님은 성령의 교감이 가장 민감했던 빌립을 사용하셨음을 말씀합니다. 그를 통해 복음이 세계화 되고 마침내 이디오피아로 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성령은 이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시는데 내시와 빌립을 사용하십니다. 결국 성령은 1500km 한 달간의 거리인 이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사용하셔서 결국 이디오피아를 복음화하고 아프리카에 복음을 확산시키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의 사건도 똑같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고넬료는 로마군인 백부장이고 군 지휘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경건한 신앙인으로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에 “욥바에 있는 베드로 청하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 시간에 베드로도 기도 중에 “누군가 찾아올테니 그를 따라가라”는 계시를 받게 됩니다. 의심하지 않고 가이사랴에 살고 있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 보니 성령이 그 집으로 인도하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집에 성령이 임하심을 보고 온 집안 가족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고넬료 한사람이 세례를 받고 그 집안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골자는 고넬료 집안이 세례를 받음으로 로마전도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로마전도 계획은 고넬료에게 계시로 나타나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베드로와 고넬료는 신분의 차이로 서로 만날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고넬료는 당시 로마인으로 지배계급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사사로이 만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역시 유대인 선민으로 이방인을 사사로이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만남을 성령이 주선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만남은 아주 은혜로운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그 일은 주선자나 연출자 그리고 출연자 섭외 모두를 성령이 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의 역사

 

성령은 오늘도 똑같은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영적 교류가 예민하게 이루지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문제는 성령과 예민하게 교류하고 교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빌립이라는 한사람이 영적 교류가 아주 예민한 결과 하나님은 그 한사람을 통해 이디오피아를 복음화 시켰습니다. 베드로 한사람이 영적으로 예민함을 간직한 결과 기도 중에 계시가 주어져서 고넬료 집을 구원한 결과 그 사역이 결국 로마를 복음화 하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런데 소돔은 이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 한사람이 없어서 그 성이 멸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느 한사람을 사용하셔서 일을 하십니다. 니느웨 성을 구원하시는데 요나 한사람을 통해서 12만 명을 구하는 역사를 하셨습니다. 위기에 처한 민족을 에스더 한사람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나설 때 민족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느헤미야 한사람을 사용해서 이루셨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에 예수님 한분으로 족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때로 다수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이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장차 어떻게 사용하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 중 누구를 선택하고 사용하실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는 영적으로 예민하게 주님의 영과 교류해야 합니다.

 

사용받는 방법

 

그것은 “성령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령과 함께 하고 교제하고 교통의 삶을 가지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4장2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보혜사로 와 계십니다(요16:7). 이 보혜사는 5가지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도우시고, 가르치고, 위로, 변화, 판단하시는 역할”입니다. 성령과 깊이 교제할 때 이런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나 할 일을 그분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인도하십니다. 또한 “성령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5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묵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자세히 읽고 관찰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뜻을 들려주시는 중요한 방법이고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꿈입니다. 하나님이 꿈으로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꿈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때로 꿈은 무의미한 꿈도 있지만 메시지가 담긴 꿈도 있습니다. 그리고 “환상”입니다. 구약시대 선지자와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환상을 통해 계시를 받았습니다. 고넬료, 빌립, 다니엘, 요셉 등 모두가 환상을 통해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환경과 사람을 통해서 계시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통해서 길을 인도하시고 또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뜻을 전하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감”입니다. 우리들이 누군가를 위해서 간절히 중보기도 할 때 우리에게 영감을 주셔서 교통하시기도 합니다.

■ 1873년에 뉴욕을 향해 항해하던 로크 에른호라는 유람선이 항해 중 조정타가 고장 나서 강한 바람으로 정상 항로에서 크게 이탈하여 하루하루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선장은 하루 내에 배가 침몰할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 배에 쿡이라는 목사가 승선하였는데 그 사태를 놓고 다급하게 기도였습니다. 그는 그 기도하는 중에 구조 받을 것을 확신을 얻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승객 모두 불안한 마음으로 갑판위로 모였습니다. 배는 심히 기울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브리티시 퀸이라는 배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전날 밤 그리스인 선장도 그 시간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침몰하는 배에서는 쿡목사를 중심으로 구조를 위해서 기도하고 같은 시간에 두 배에서 기도한 것이 영적인 교통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스인 선장은 기도하는 중에 북쪽으로 선회하라는 내적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빌립에게 내시에게로 가라고 역사하신 하나님이 그 선장에게도 북쪽으로 선회하라고 영적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최고속력으로 달려가 도착해 보니 배가 침몰하고 있어 그 배를 구조한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분별할 줄 아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인해서 그날 많은 사람이 구조되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 나라에, 우리교회에 이 성령의 음성을 분별한 줄 아는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소돔은 그런 한 사람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또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고 연합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순종과 연합의 삶을 살아갈 때 일어납니다. 사도바울은 1차 전도 여행 때 큰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구부로를 거쳐 안디옥에 이르러 많은 기적을 통해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을 거닐면서 루스드라와 더베 등지에서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사람들의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2차 전도여행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아시아 지역으로 가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을 하지 않으시고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 말은 아시아지역으로 가지 말고 마게도냐 지방으로 가라는 계시였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은 오늘의 그리스지역을 말합니다. 그때 바울은 아시아지역으로 가기로 한 계획을 포기하고 마게도냐 지방으로 갑니다. 그 결과 오늘 유럽전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에 순종하고 연합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때 성령의 은혜와 섭리가 나타납니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인도를 받고 순종하고 따르면 안전하게 어느 곳이든 갈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순박하고 순종을 잘 하니까 언제나 안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순종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분명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인데도 내 의지로 바꾸려고 하니까 사고가 일어나고 실패가 주어지고 시행착오를 겪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칭 엘리트라는 사람들과 유능인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자기고집이 강합니다. 그래서 순종하지 않습니다. 협동심도 약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예루살렘 대학으로 가서 성적표를 보고 수재나 엘리트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로 가셔서 어부들을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은 고기 잡아 살면서 실패를 경험했고 가난도 경험하였고 협동심을 발휘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엘리트나 능력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자칭 지성인이고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협동심도 순종도 겸손의 정신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목회자들 중에 재벌의 아들이 없고 미인 미남도 없고 엘리트들이 적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적으로 순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순종과 겸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이 스키를 탔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어떻게 스키를 탈 수 있는가 하면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빨간 조끼를 입혀 구별하게 한 후 각자에게 믿을만한 지도자 한사람씩을 배정합니다. 그리고 지근거리에서 스키 막대기를 두드릴 때 그 소리를 듣고 방향을 찾게 하고 앞의 상황에 대해서 육성으로 말해 줄 때마다 그 지시를 절대로 따라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각 장애인들은 그 지도자들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면 스키 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절대로 필요한 요소는 믿음이고 순종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열흘 동안 한마음으로 기도하다가 마침내 약속대로 성령을 받고 사역에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강림 후 제자들은 더 이상 옛날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은 오늘도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들의 영적 지도자이십니다. 우리 안에서 길을 안내하시고 삶을 인도하시고 신앙을 회복시키십니다. 그 성령과 함께 하려면 그 성령과 교류를 이루고 순종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때 성령은 보완하시고 변화를 주시며 힘을 공급하고 안내를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여기까지 살아온 것도 그 성령의 전적인 인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성령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갈 때 승리가 주어지고 능력과 인도하심을 받아 사역을 감당하고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어디로 향하는가?

조영식목사(김포한신교회) / 행 8장 26-36절

들어가는 글

 

1월 셋째주일입니다. 지난주부터 영하의 추위와 눈이 내리는 엄동설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날씨가 춥다고 하면서도 이제야 ‘겨울답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겨울답다’라는 표현은 계절의 호칭과 날씨의 내용이 일치를 이루기 때문에 사용합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호칭과 내용이 일치를 이루어서 ‘그리스도인답다’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에 등을 돌리는 이유는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성도들이 성도답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시대에 신앙의 회복을 위해서 특별하게 어떤 것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들이 성도다워져야 합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답기 위해서 사도행전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성령을 받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여 초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초대 교회가 일곱 집사도 세우고(행6:3), 말씀이 왕성하여 부흥했습니다(행6:7). 그러나 초대 교회가 부흥한 만큼 핍박도 심해졌습니다(행8:3). 그 핍박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스데반 집사가 순교했습니다(행7장). 그러나 복음 전파는 멈추지 않았고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행8:5). 이런 초대 교회의 복음 전파를 통하여 주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마음도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빌립은 어떤 사람인가?

 

성경에는 제자 빌립과 집사 빌립이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누구입니까? 집사 빌립입니다. 첫째는 성경의 흐름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일곱 집사를 세우고(행6장),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고(행7장), 이어서 빌립이 나오는데 집사들의 사역을 소개하는 흐름입니다(행8장). 둘째는 제자들이 빌립을 가르치러 왔습니다(행8:14).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는 빌립이 제자였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집사였기 때문에 제자들이 가르치러 왔습니다. 셋째는 사도행전에서 전도를 열심히 한 사람을 집사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방문하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무르니라”고 합니다(행21:8). 하나님은 제자와 집사라는 직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고 사용하십니다.

초대 교회에서 집사 빌립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아서 일곱 집사로 택함을 받았습니다(행6:3). 둘째로 우상으로 물든 어려운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우상 숭배로 찌든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행8:5). 셋째로 자녀들을 영적으로 양육한 믿음의 가장입니다. 그에게 네 딸이 있었는데 모두 은사를 받아서 주님께 쓰임 받았습니다(행21:8,9). 우리들도 성령 충만하여 우상 숭배의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믿음의 가장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빌립을 광야로 보내는 이유는?

 

우상 숭배로 무너졌던 사마리아 성에 빌립의 전도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빌립에게 광야로 내려가라고 합니다(26절). 그는 부흥했던 사마리아를 떠나 광야로 가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27절). 빌립이 부흥했던 사마리아 교회를 버려두고 광야에서 한 사람을 찾는 것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정말 손해 보는 장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빌립을 광야로 보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마음은 순종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빌립에게 사마리아 성을 부흥시킨 성공을 내려놓고 광야로 내려가라고 합니다(26절).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불분명한 광야보다도 교회를 부흥시킨 사마리아에 남는 것이 더 유명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성공보다도 항상 순종하기를 더 원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마리아성에 많은 성도들을 남겨두고 빌립을 광야로 보내서 한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는다”고 하십니다(눅15:4). 이처럼 하나님은 관리하는 것보다도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마음에 숨겨진 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빌립을 광야로 보내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구원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숨겨진 비전이 있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고 돌아가서 한 나라가 복음화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를지라도 순종하면 당신의 숨겨진 비전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주님의 숨겨진 비전을 이루는 도구로 쓰임 받기를 소망합니다.

 

3. 내시는 어디로 향하는가?

 

빌립에게 세례 받은 내시는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로 예배를 사모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고 합니다(27절). 하나님은 예배를 사모하여 찾아온 내시를 보시고 빌립을 만나서 변화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예배를 사모할 때 하나님이 만남의 복을 주시고 변화의 은혜를 주십니다.

 

둘째로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내시는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고 합니다(28절). 우리도 말씀을 사모하여 읽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말씀을 읽으면서 “누구를 가리킴이냐?”라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34절). 우리가 말씀을 의심하면 안되지만 궁금증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무조건 믿어라는 맹목적인 믿음보다도 궁금증을 풀어갈 때 견고한 믿음이 됩니다. 이사야 말씀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35절).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와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행4:12).

 

셋째는 은혜 받은 대로 실천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내시는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라고 합니다(36절). 그가 말씀을 깨닫고 거리낌 없이 실천하는 믿음이 자신을 바꾸고 한 나라를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들이 실천하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들이 죄악을 향해서는 거리낌이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악을 향해서는 거리낌이 없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거리낌이 많다면 영적 싸움에서 패배합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가는데 무엇이 거리낌이 있습니까? 사람의 눈치를 보고, 할 수 있는 형편이 안되고,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등 온갖 거리낌들이 방해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향하기 위해서 모든 거리낌을 제거하고 실천하는 믿음으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들도 성령 충만하여 우상의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믿음의 가장들이 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숨겨진 비전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시며, 예배를 사모하는 열정과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과 은혜 받은 대로 실천하는 열정으로 자신을 바꾸고 이웃들을 변화시키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지시하시는 성령님과 순종하는 빌립

이준원목사(콜럼버스교회) / 행 8장 26~40절

여러분은 영화를 좋아하십니까? 영화 하면 영화제인데, 그 중 미국의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열릴 때면 전 세계의 팬들이 열광합니다. 요즘은 이 나라 저 나라의 영화제들이 하도 많아서 그 의미가 조금 퇴색했지만, 그래도 아카데미상은 가장 권위 있는 시상식입니다.

시상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등입니다. 한 부문당 5명 정도의 후보가 있지만 오직 한 명만 상을 받습니다. 그래서 경쟁이 치열하여 당사자와 가족과 친구들 모두 발표할 때까지 긴장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영광과 명예를 주는 상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후회와 아쉬움을 남기는 시상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시상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겠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님이 “성경을 드라마로 보면 또 다른 시각이 열린다.”라고 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성경은 드라마로 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같은 책은 드라마적 요소가 곳곳에 보입니다.

사도행전 드라마 시상식을 하게 된다면, 여기에 많은 사도들과 교회에 대한 이야기, 또 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누구에게 상을 주겠습니까? 오늘 특별히 “사도행전 8장 26-40절”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남우주연상 후보들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빌립을 광야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계획

1) 이해가 안 가는 명령을 받을 때에도 순종하라

그들 중 가장 첫 번째는 빌립입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6절)

빌립에게 주의 사자(천사)가 나타나 갑자기 남쪽으로 가라고 합니다. 천사라고 봐도 되고, 성령께서 역사하셨다고 봐도 되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천사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남쪽으로 가라!”

예루살렘에서 가사(지금의 가자 지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놓았습니다. “그 길을 광야라.” 뜨거운 모래바람과 뜨거운 태양밖에 없어서 숨 쉬고 서 있기도 힘든 곳, 독사와 전갈이 있는 곳, 아무것도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지금까지 8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빌립은 사마리아로 와서 전도했고, 거기에 많은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많은 역사와 기적을 일으키며 전도를 하는데 그것을 멈추게 하시고 빌립에게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혀 상식과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경험과도 맞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광야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고, 또 지금 거기에 가도 거기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엄청난 전도의 열매가 일어나고 있고, 기적이 일어나고 있고, 병 고침과 귀신이 쫓겨 나가는 놀라운 역사가 있는 곳에서, 사역을 엄청나게 잘하고 있는 빌립을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보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빌립도 의아했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부흥을 성공시켰으면, 적어도 그보다 더 좋은 대도시로 옮겨주셔야 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가라고 하시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의아할 수도 있고 서운할 수도 있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왜 가라고도 설명하지 않으시고, 무조건 가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빌립이 그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바로 광야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빌립이 이때 그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바로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만약 빌립이 그때 떠나지 않고 ‘하나님, 광야는 아무도 없고,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도시로 가고 싶습니다.’라고 질질 끌거나, ‘가긴 갈 텐데 지금은 너무 피곤하니 내일 가겠습니다.’라고 했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귀한 순간을 스스로 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타이밍을 놓치는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그때가 바로 순종을 해야 되는 타이밍입니다. 내가 혼자 말씀을 읽으며 큐티하거나 통독을 할 때 확 깨달아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때 그 말씀을 깨닫게 해주셨겠습니까? 지금 그것을 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지금 설교를 듣다가도 ‘아, 이게 이거였구나!’ 하고 탁 깨달아지고 마음에 와 닿았다면, 그것을 왜 지금 깨닫게 해주셨겠습니까? 성경을 좀 읽어보면 숨겨 있고 특별한 이야기는 별로 없습니다. 웬만큼 우리가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에 그 말씀이 탁 깨달아졌다면, 그 말씀을 지금 행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할 수가 없어도, 내가 조금 더 안 좋은 데로 가는 것 같고 비효율적인 것 같아도, 하나님이 뭔가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면 일단은 한 번 순종하고 보십시오. 그곳이 광야라고 생각하고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가라니까 가보았는데, 뜻밖에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뭔가 말씀을 주셨다면, 오늘 뭔가 깨닫게 해주셨다면, 오늘 뭔가 마음에 큰 감동과 은혜를 주셨다면, 은혜 받고 끝나지 마시고 바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말고 즉시 해보시기 바랍니다.

요즘 한국이나 미국에서 교회가 쇠퇴한다고는 하지만, 이 시대에 여전히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많은데도 왜 하나님의 역사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런 영적인 안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가 너무 상식적입니다. 사실 상식 이하도 많습니다. 우리가 비상식이나 몰상식하면 안 되겠지만, 상식에만 머무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는 너무나 합리적인 결정만 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 눈에 이상하게 보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광야로 가라”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 말인데,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으니까 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라고 하지 않으셨는데 가서 이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무턱대로 말이 안 되는 것을 하는 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을 때는 이해가 안 가도 해야 됩니다.

특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이해가 안 가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볼 때 별 의미가 없고 가치도 없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라고 하실지 모릅니다. 열매도 없는데 계속 하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우리는 결정을 잘 못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 사람의 귀에 듣기 좋은 것, 사람 마음에 흡족한 것, 누가 봐도 좋아 보이는 일, 누가 봐도 결과가 좋은 일에만 투자하려고 합니다.

교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일인가?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효율적인가? 우리의 땀과 수고에 비해서 열매를 얻는 일인가?’ 이런 것만 생각하고, 자기 마음에 맞는 일에만 힘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사회의 지탄을 받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아 보이고 그저 상식적이며 합리적인 결정만 내리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가 너무 영리하고 계산적이기 때문에 힘든 일은 절대 안 하려고 합니다. 손해 보는 일은 피하려고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전혀 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상식과는 반대되는 말입니다. 좁은 문을 선택해서 들어가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넓은 문만 찾고 편한 길만 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능력도 없고 삶도 변화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가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계속 주신다는 것입니다. 매순간 주고 계십니다. 지금도 주고 계십니다. 이 예배가 끝나고 나가도 계속 주십니다. 우리 매일의 삶 속에서 계속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끊임없이 잘못된 결정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끝나고 떠나면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해줄 수 없고 이 세상에서만 가치 있는 그런 일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 이 세상을 떠나도 하늘나라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일을 하도록 계속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일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을 하는 결정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만 하는 결정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결정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결정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제대로 된 결정을 하도록 계속 기회를 주고 계신데, 우리는 끊임없이 잘못된 결정을 계속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고집과 경험과 상식과 지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힘을 씁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곳으로 가라는 음성이 들릴 때 ‘저 같은 게 뭘 하겠습니까’ 또는 ‘하기 싫습니다’가 아니라, 담대하게 순종을 하는 겁니다. ‘하라고 하셨으니까 도와주시겠지’ 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높다’는 이사야의 말씀(사 55:9)을 정말 믿기 때문입니다.

 

2)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일어난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7-28절)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 새로운 차원의 삶이 열립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갔는데, 사실 빌립이 다 이해하고 갔겠습니까? 의아하지만 가라고 하셨으니까 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에디오피아 내시가 수레를 타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내시’였고, ‘에디오피아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고위층 관리였고, 요즘 한국으로 치면 재경부 장관내지 금융위원장쯤 되고, 미국으로 치면 연방준비제도 이사회(the Federal Reserve) 의장 정도 되는 아주 높고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보스가 돈을 맡기는 사람은 가장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배하러 예루살렘까지 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게다가 에디오피아로 돌아가는 길에 수레에서 성경을 읽는데, 그것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그는 에티오피아 사람이었음에도 하나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간다게(Candace)’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카이사르나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에티오피아 왕의 칭호였습니다. 빌립이 만난 이 간다게의 신하는 에티오피아의 고위 관리이긴 했지만 내시였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존재 자체는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마주 대하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에티오피아 사람이라면 당시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이방인이고, 또 에티오피아란 말 자체가 ‘검은 피부’를 의미하는 것처럼 에티오피아 사람은 그 당시 이방인들 중에서도 더 큰 경멸의 대상이었던 흑인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에티오피아는 히브리어로 ‘쿠쉬’이고 우리말로는 구스인데, 구스 사람들은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저주받은 함의 후예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내시였는데, 내시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고자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고자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사람으로 간주하여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사람은 빌립이 친절하게 대해줄 만한 자격이나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 다시 말해 결코 사람으로 불릴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이 한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3년 동안 열두 제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훈련하셨던 것처럼, 이 내시 한 사람을 위해서 사마리아 도시 전체를 섬기던 사역을 잠시 보류하게 하시고 빌립을 광야 길로 데려오신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는 순례자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이방을 향한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 교회에서 찾아야 할 사람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 제대로 인간 취급을 못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그들을 그렇게 취급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분들을 찾아서 주님께로 인도해야겠습니다.

이 사람이 그래도 국가의 고위관리인데, 자기 나라에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이런 높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행을 왔고, 그것도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 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레를 타고 남쪽 광야 길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타이밍이 중요했습니다.

사마리아는 더 북쪽의 중부지역이고, 예루살렘은 거기서 남쪽입니다. 수레가 사람 발보다 빠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빌립이 즉시 순종하고 사마리아로부터 광야 길까지 달려올 시간과, 이 내시가 예루살렘에서 그 지점을 통과할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셔서 가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내시가 떠나기 전부터 성령께서 빌립에게 가라고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타이밍에는 우연이란 게 없습니다. 어쩌다 어디서 갑자기 누구를 만나거나 어디서 전화가 갑자기 온다면,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건물 안에만 머물며 유연함과 민첩함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미처 따라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즉각적인 순종, 민첩함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음성을 들려주셨다면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 그 음성이 지금 내 삶에서 잘되고 있는 일을 버리고 광야 길로 가라고 하시는 이상한 말씀이라고 해도, 우리는 낙담하거나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길이 축복의 길이 아니라 아주 좁고 힘든 길이라 해도 우리는 순종하며 갈 이유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아주 의외의 기회, 아주 축복된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순종하는 전도자 빌립

1)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만남

사마리아에서부터 빌립을 광야로 이끌어 오신 성령께서는, 에디오피아 내시의 행렬을 보며 와 하며 놀라고 있는 빌립을 재촉하십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29-30절)

사실 수레를 따라가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빌립에게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하십니다(29). 뛰어서 마차에 따라 붙으라는 것입니다. 이때 그런 성령님의 음성에 대해 빌립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는 달려갔습니다(30). 빌립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을 때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이곳까지 왔는데, 또 보니까 가라고 하셔서 가고, 그것도 천천히 간 게 아니라 빨리 뛰어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이런 메시지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순종을 안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할 때 혹시 이렇게 기도하십니까?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음성을 들려주시든지 순종할 각오가 없다면 그런 기도를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실 수도 있고 저렇게 하라고 하실 수도 있고 하지 말라고 하실 수도 있는데, ‘뭐라고 말씀하시든 제가 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없이 그냥 ‘음성만 들려주십시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좋아하는 음성이면 따라가고 내가 안 좋아하는 내용이면 안 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 싫으면서 그 음성은 듣고 싶어 한다면 말이 안 됩니다.

순종하려면 빌립처럼 하는 것입니다. 가라고 하실 때 천천히 마지못해 가는 게 아니라, 즉시 순종하며 빠르게 달려가는 것입니다. 열정을 가지고, 부지런하며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빌립이 광야 길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보았을 때 놀랐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피가 반쯤 섞인 사마리아 지역에서 전도하는 것도 빌립으로서는 모험이고 그 당시 기준으로는 아주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수백 마일이나 떨어진 이방 나라인 에디오피아 사람, 그것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니까 내심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인종적 선입관을 단번에 뛰어넘으라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빌립을 사용하셨습니다. 빌립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에게 이것을 하라고 하셨다면 힘들었을 것입니다.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라는 로마사람 백부장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사건이 있는데, 베드로는 사도들 중에도 리더이고 정통 히브리파 유대인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빌립은 헬라지역에서 온 헬라파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는 많이 열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말씀하셨을 때 바로 순종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항상 내가 익숙하고 쉬운 방향으로만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놀라운 축복의 길이 열립니다.

에디오피아의 고위관리를 유대 광야에서 만났을 때, 빌립은 ‘이게 정말 놀라운 우연이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갔고, 가보니까 거기 이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 주님께서 나를 통해 뭔가를 하려고 하시는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라고 하셨을 때 즉시 달려서 갔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참 놀랍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자기 발로 찾아온 게 아닙니까? 에디오피아까지 가서 전도하라고 하셨으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그가 예루살렘까지 왔다 돌아가는 길입니다.

요즘도 그런 일이 많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는 선교사 한 명을 파송한다는 것이 굉장히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드는 일이니다. 또 그 나라의 말을 배워야 하고, 문화를 배워야 하고, 적응을 해야 되는 등, 엄청난 시간과 지원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난민이나 이민으로 옵니다. 한국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요즘 외국인 대상으로 사역하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조금만 돌아보면 많은 외국인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땅 끝으로 가야 하는데 땅 끝이 우리에게로 온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2) 우연 같이 보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1-33절)

전도할 때 첫 번째 접촉을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빌립이 내시를 보기는 했지만 어떻게 할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냥 가라고 하셔서 간 것입니다. 특히 이런 외국인 고위층 관리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라고 하셔서 가까이 가보니까 너무 놀랍게도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66장이나 되니까 얼마나 깁니까? 그런데 하필 그 중에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다룬 부분입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필 이 사람이 성경을 읽고 있고, 그것도 이사야를 읽고 있고, 그 중에서도 하필 메시야에 대한 예언 부분을 읽고 있습니까? 정말 너무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빌립은 더 확신을 하는 것입니다. ‘아, 정말 성령님이 나를 완전히 이끌고 계시구나.’ 하고 더 확신을 가지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합니까?”라고 물어보자, 내시는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이해합니까?” 하고 대답합니다.

말씀을 혼자 읽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영적 스승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는 영적 시각을 열어주는 스승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잘 안 깨달아지시면 삶 공부도 들으시고 큐티나 개인적인 공부도 해야 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깨닫기 위해서 누군가가 복음을 전하고 설명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된다고 썼습니다(롬 10:17).

내시가 빌립을 보는 순간, 특히 빌립이 “읽는 것을 깨닫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내시는 ‘아, 이 사람은 뭔가를 아는 사람이다.’ 하고 깨달아졌습니다. 그래서 빌립을 자기 수레 위로 올라오게 초청하여 본격적인 말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 내시는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고위관리였지만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겸손하지 않았다면 ‘네가 뭔데 왜 그래? 빨리 꺼져!’라고 했을 텐데, 아주 평범해 보이는 빌립이었지만 그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에게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좋은 영적 스승을 만나면 이 내시처럼 적극적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또 빌립의 전도 과정을 보면, 전도는 내가 설득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택하시고 준비해놓으신 사람을 나는 데려오는 것뿐입니다. 너무 단순하지 않습니까? 저도 어릴 때부터 전도하라고 하면 굉장히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려고 하니까 부담이 되는 겁니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내가 가서 전하고, 내가 데려오고, 내가 주님을 믿도록 영접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부담스럽고 힘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시고 준비해놓으신 사람을 만나서 주님께로 데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볍고 오히려 큰 기대가 됩니다. 그러니까 전도할 때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이 이미 충분히 작업해놓으신 사람에게 가는 겁니다. ‘고구마 전도법’도 있지 않습니까? 찔러서 아직 딱딱하거나 익지 않은 고구마가 아니라 잘 익은 고구마를 찍어서 먹는 것처럼, 그렇게 마음이 많이 열린 분들을 모셔 와야 합니다.

목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멀리 있고, ‘기독교’나 ‘교회’의 ㄱ 자만 나와도 거품을 물고 욕하며 비난하는 사람을 기를 쓰고 전도하려면 힘듭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먼저 사랑으로 다가가며 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 멀리 있는 분들만 모셔오려고 하니 참 힘듭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보면 아주 마음이 열린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작업을 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탁 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믿는 경우는 우리가 처음부터 시작해서 믿는 게 아닙니다. 어디선가 다 그렇게 마음이 열려서 오신 분들이 우리가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했을 때 믿는 것입니다.

 

 

 

내시가 읽던 성경구절이 이사야서 53장 7절과 8절 말씀입니다. 메시아(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미리 예언한 말씀입니다. 빌립이 전도하는 이때로부터 무려 700년 전에 이미 예언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700년 전에 이미 예언된 이 말씀을 하필 이때 이 사람이 읽고 있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메시아 예언입니다.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어가는 중에 특별히 이 부분에서 눈이 탁 멈췄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고민하던 시점에 빌립과 탁 만났다는 것은 얼마나 기가 막힌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3) 이 사람이 누구인가?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4-35절)

“이 사람이 과연 누구냐? Who is he?” 내시의 질문은 상당히 예리합니다. “이분이 누구냐?” 이 질문이야말로 구원으로 가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냐?” 세상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그럴 때 우리는 바른 대답을 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빌립은 내시의 이런 좋은 질문을 받아서, 바로 이 말씀으로 시작하여 성경에 예언된 그분이 바로 예수라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른 얘기할 것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면 됩니다. 빌립은 어느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훈련된 사람이었다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니까 내시가 믿게 되어 반응을 보이니다.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6절)

이렇게 복음을 제대로 들은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빌립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 이 내시가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단을 한 것입니다. 물이 있으니까 바로 세례를 받겠다고 나옵니다. ‘아무도 내가 세례 받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즉 세례를 받아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표시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적극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까 본문을 다 같이 한목소리로 읽을 때 다 잘하셨습니다. 37절에서 “없음”이라고 읽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한글성경에는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 37절이 어떤 사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빌립이 말하기를 ‘당신이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내시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습니다.’” 이 사람은 세례문답을 아주 확실히 했습니다.

이와 같이 초대 교회에서는 세례받기 전에 반드시 모든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의 믿음을 간증하고 공식적으로 신앙고백을 해야 했습니다. 사실 이 사람이 국가의 최고위층이었으니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기를 따라온 수많은 부하들과 수행원들이 있는데 당연히 그들 대부분은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가기 싫은데 억지로 온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이런 대가를 치르는 결단입니다. 대가를 치렀으면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3. 복음의 열매

 

이렇게 에디오피아 내시가 내린 믿음의 결단은 자신의 조국 에디오피아에 복음이 들어오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에디오피아 지역에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이 에디오피아 내시 같은 국가 고위층 사람이 그 앞의 오아시스에서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믿음의 결단을 하기만 하면 그 즉시 어디에서나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에 예식이 있고 질서를 위해서 목회자가 세례를 교회에서 베풀게 되어 있지만, 이때는 그런 때가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나 어디서든지 세례를 베풀 수 있습니다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38-39절)

세례 받은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계속 기뻐하고 찬미하며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내시에게는 진정한 구원이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춤을 추며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열심히 섬겨서 한 분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면 정말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목장에서 열심히 섬겨서 몇 년 만에 세례를 받을 때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런 순간에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분은 자기를 그 동안 섬겨준 분들에 대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러면 서로 더욱 사랑하고 섬기며 나아갈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도 빌립을 향해 그런 마음이었을 텐데 빌립은 그 자리에서 바로 사라집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제 네 일은 여기서 끝났고 다른 일을 해야겠다.’ 하고 성령께서 빌립을 끌어 다른 데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끌어갔다’라는 말은 확 낚아채서 다른 데로 보내는 뜻의 동사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때 헤어져서 서로 다시는 못 보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아간 내시는 에디오피아 복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자기가 전도한 그 열매를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주님이 원하시는 사역을 또 하게 됩니다.

우리도, 내가 열심히 했는데 내가 그 열매를 못 본다 해도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빌립도 그 열매를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 후 수단과 이디오피아 지역에 얼마나 많은 열매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흘린 땀의 열매를 보면 감사하고 좋지만, 못 보아도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면 되는 겁니다.

결국은 주님 안에서 우리가 거두던 누가 거두던, 그 열매를 거두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뿌린 것을 꼭 우리가 거둘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뿌렸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거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거두든지 어쨌든 예수님을 믿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면 감사하면서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40절)

아소도는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쫓아갔던 지점에서 몇 십 마일나 떨어진 곳입니다. 성령께서 엘리야에게 주셨던 것과 비슷한 공간이동 능력을 주셨는지, 순식간에 이동한 것입니다.

빌립은 거기서부터 여러 성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해안도시였고 로마 총독이 머물던 가이사랴까지 이르게 됩니다. 거리상으로 따지면 거의 60마일이나 되는 먼 길입니다. 요즘처럼 길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빌립은 멈추지 않고 달려서 그곳까지 갔습니다. 나중에 보면 사도 바울이 거기서 빌립의 집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사실 에디오피아 내시 같이 높은 사람을 전도했다는 것이 사실은 감사하기도 하지만 얼마나 뿌듯한 일입니까? 내가 전도한 사람이 우리나라의 장관이라면 얼마나 뿌듯합니까? ‘저 사람을 내가 전도했어.’라고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빌립은 거기에 취하지 않고 머물지도 않고, 계속 복음 전파의 길을 갑니다.

 

[나가는 말: 누가 주연상을 받아야 하는가?]

이렇게 볼 때 남우주연상은 누가 받아야 하겠습니까? LA에 가면 헐리우드(Hollywood)가 있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홀리우드(Holy Wood)입니다. 홀리우드에서 상을 누가 받아야 합니까?

첫 번째 후보는 빌립입니다. 8장에서 계속 복음을 전하며 사마리아에 있다가 광야까지 가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령에 아주 민감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 에디오피아 내시입니다. 빌립을 초청해서 복음을 듣고 믿자마자 세례를 받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온 사람입니다.

셋째,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내시와 함께 있던 병거의 운전기사나 수행원들도 있습니다. 거기서 복음을 들었을 것이고, 집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또한 성령님이 계십니다. 본문은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복음의 진보를 가져온 것은 빌립이 아니라 사실 성령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남우주연상을 타야 합니까?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배우는... 빌립입니다! 왜냐하면 감독상이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감독상은 성령님, 빌립은 최우수남우주연상, 그리고 에디오피아 내시는 조연상입니다. 성령님은 지시하시고, 빌립은 성령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따랐고 온전히 순종을 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고, 이 예수님을 믿어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이런 힘과 능력을 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듣는 사람의 자격을 따지거나 제한을 두지 않으시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유명하지도 않고, 신문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안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일꾼들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들이 변하고, 병든 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 가고, 우울증이나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자살을 생각하던 사람들이 회복되고 치유된다면 얼마나 놀랍고 기쁜 일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빌립을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보내셨듯이 우리도 보내기를 원하십니다. 내게 지금 주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미루지 마시고, 바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탄이 자꾸 미루게 하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주님, 나를 사용하여 주십시오. 나를 보내주십시오!” 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석기현목사 / 행 8장 26-39절

제가 대학생 시절에 애독했던 책 중에 하나가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가 나오는 ‘피너츠 퍼레이드’라는 만화시리즈였습니다.

그 만화 중에 이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왈가닥 루시와 그녀의 동생 라이너스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어느 날 함께 창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친구 찰리 브라운과 동생 라이너스를 항상 괴롭히는 등 아주 드센 성격을 가진 루시였지만, 워낙 비가 많이 내리니까 걱정이 되었는지 라이너스한테 “이러다 온 세상이 홍수로 뒤덮이게 되면 어떡하지?”라고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말합니다.

그러자 ‘피너츠 퍼레이드’에 등장하는 아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주일학교에 착실히 다니던 라이너스는“걱정하지 마. 성경 창세기에 보면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어.”라고 누나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 말을 들은 루시는 “그렇다면 안심이야.”라고 하면서 방으로 들어가는데, 그런 누나의 뒷모습을 보면서 라이너스가 >“다 건전한 신학(sound theology) 덕분이지...”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피너츠 퍼레이드’의 작가인 찰스 슐츠는 자신의 만화에 신학적인 소재를 가끔 사용하는데, ‘건전한 신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절로 일깨워 주는 재미있는 일화였습니다.

오늘은 ‘제네바신학대학원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고려신학교의 설립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이 제네바신대원은 ‘개혁주의 기독교 신학’을 표방하는 가운데 명실 공히 우리 교단의 신학적 구심점이 되는 소중하고도 자랑스러운 선지학교입니다.

이 시간 저는 이 제네바신대원을 통해 선포되는 ‘바른 신학’이 각 교회와 성도들이 지켜야 할 ‘바른 신앙’과 어떤 중요한 관계에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바른 신학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을 보여 주시는 자기계시’라는 바른 신앙을 가지게 합니다.

26절부터 31절에 기록하기를 “26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에디오피아는 ‘구스’ 족속의 후손들이 나일강 상류에 세운 나라였으며, ‘메로에 왕국’과 ‘나비다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중 메로에 왕국을 통치한 것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간다게” 왕조였습니다.

즉 여기의 ‘간다게’는 여왕의 이름이 아니라, 애굽의 ‘바로’처럼 그 왕조의 왕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였습니다.

그 에디오피아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라고 했으니 오늘날의 재무장관에 해당되는 높은 직위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의 수레 안에서 읽고 있던 책이 바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었습니다.

 

이 “선지자 이사야의 글”은 물론 이사야서인데, 그 이사야서가 포함된 책은 과연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선 이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이었으므로 그것이 구약성경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으며, 나중에 32절과 33절에 인용된 내용을 볼 때 바로 ‘70인역(Septuagint 혹은 LXX)’이라고 불린 성경이었습니다.

이것은 주전 270년경에 완성된, 가장 오래 된 ‘헬라어역본 구약성경’입니다.

 

구약 시대에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남북조의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이방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로마제국 시대까지도 제국 산하의 각국에 섞여서 살고 있었는데, 우리는 이들을 가리켜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역시 어디를 가도 구약성경책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들의 자녀들이 히브리어로 된 성경책을 점점 읽지 못하게 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 산하에서는 그리스어, 즉 헬라어가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어린 자녀들이 헬라어만 알게 되고 히브리어를 모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디아스포라 유대인 2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원래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던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해서 만든 것이 바로 이 ‘70인역’이었습니다.

 

원래 선지자나 사도의 친필로 기록된 ‘원본’ 성경 중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신구약 66권 중 단 한 권도 없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그것이 잘 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만약 성경의 원본이 남아 있었더라면 사람들은 그것 자체를 우상처럼 섬겼을 것이고, 또 귀중한 원본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우면서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사본’ 성경인데, 이것은 아직 인쇄술이 없던 당시 필사자들이 그 원본 성경으로부터 손으로 직접 그대로 베껴 쓴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본에는 사람의 실수가 포함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사본과 사본 사이에 실로 미미한 것이기는 하지만 약간의 차이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만 하더라도 나중에 37절에 보면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37절이 일부 사본들에만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장과 절을 표기하기 시작했던 초기의 역본은 그런 사본을 따라서 번역을 했으며 저 유명한 ‘흠정역(King James Version)’도 그 한 예입니다.

하지만 보다 권위 있는 중요 사본들에는 이 37절의 내용이 없는 까닭에 오늘날 새로 번역되고 있는 대부분의 역본들은 이 37절을 성경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는 까닭에 우리 개역개정에도 그렇게 “(없음)”이라고 표기를 해 둔 것입니다.

 

그 사본 성경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 바로 ‘역본’인데, 그런 의미에서 ‘70인역’은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역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이 기록될 당시에도 이미 구약성경의 원본은 없었고 사본만 남아 있었지만, 초대교회에서 실제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던 성경은 이 ‘70인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단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 에디오피아 내시의 경우처럼, 당시 헬라어를 아는 각 나라와 민족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읽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고 그에게 당신을 계시해 주려 하셨습니다.

그에게는 분명 자기 민족 고유의 종교가 있었을 것이고 고유 언어도 있었겠지만, 이 성경이 자기가 아는 언어로 번역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 신앙에 접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전 세계에 언어와 문화와 민족과 나라의 장벽을 다 초월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아주 소중한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하지만 에디오피아 내시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빌립이 그의 수레에 접근하여 “읽는 것을 깨닫느냐”라고 묻자, 그는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면서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에디오피아 내시는 빌립을 통해 자기가 읽고 있던 성경의 뜻을 정확하게 ‘해석’해 주는 ‘신학적 가르침’을 받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되는 ‘바른 신앙’의 길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에도, 그가 95개조의 반박문을 위텐베르크 대학의 정문에 갖다 붙인 것보다 실제적으로 더 중요한 일은 바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책은 마침 발명되었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힘입어서 많은 대중들의 손에 직접 쥐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비로소 일반성도들도 자기 손에 성경을 소유하고 자기네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며, 그처럼 성경 말씀으로 무장된 교인들이 결국 종교개혁의 주력부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전에 로마천주교는 오직 라틴어로 된 성경책만을 사용했으며 그것도 오직 사제들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게다가 천주교의 미사라는 것은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로 된 예식서(the Liturgy)만 낭독하면서 진행하는 판에 박힌 것이었습니다.

천주교 사제들은 라틴어에 무슨 특별한 영감이나 들어있는 것처럼 행세했겠지만, 아무 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평신도들에게 그런 전례식문이나 기도문은 무슨 마술적인 주문처럼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성경의 계시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가 있었겠으며, 오직 성경에만 계시된 참 여호와 하나님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천년에 걸친 중세의 영적 암흑은 이처럼 사람을 성경으로부터 멀리 떼어놓음으로써 야기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개혁주의 신학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성경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을 계시해 주시는 책’이 되었습니다.

특히 자기 나라 말로 번역된 성경책이 교인들의 손에 쥐어짐으로써 비로소 교회는 성경 위에 제대로 세워지게 되었고, 신자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직접 받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때부터 기독교는 진정 ‘성경중심’의 신앙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출발점은 ‘계시론’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신론’이나 ‘인죄론’이나 ‘구원론’ 등을 바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통로’를 먼저 찾아야 하는데, 오직 성경만이 그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계시 의존 사색’이라고 합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결코 사람 자신의 지식이나 양심이나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스스로 보여 주시는 자기계시 곧 성경 말씀에만 100퍼센트 의존해서 사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출발점에서 벗어나면 필연적으로 인본주의나 교권주의 종교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살아 계심과 그 성호와 그 절대주권과 그 뜻과 그 행하시는 일을 스스로 사람에게 보여 주시는 계시의 말씀’이라는 개혁주의 신학의 ‘계시론’을 통해 바른 신앙의 근본을 똑바로 깨닫고 붙잡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바른 신학은 ‘성경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역사’라는 바른 신앙을 가지게 합니다.

32절 이하 39절에 “32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8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아까 언급했듯이 여기 32절과 33절에서 빌립이 그 에디오피아 내시와 함께 읽고 있는 이사야서의 말씀은 ‘70인 역’에 의한 것입니다.

모든 역본이 다 그러하듯이 ‘70인 역’ 역시 번역상의 오류가 있었는데, 본문에서도 그 사실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우선 32절의 내용은 이사야 53장 7절 하반절에 기록된 것과 별 차이 없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이라는 33절은 원래 이사야 53장 8절에 기록된 내용,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라는 말씀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70인 역’의 번역자들이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이 부분을 좀 애매하게 옮겼기 때문입니다.

 

비록 번역에 부분적인 오류가 있었던 책이라 할지라도 그 ‘70인 역’ 성경은 에디오피아 내시로 하여금 믿고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도록 만들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70인역’을 번역한 사람들이 비록 어학적인 면에서 실수는 했다 할지라도 일단 그들이 번역하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만은 확실하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사실은 그 역본 성경을 가지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게 된 빌립 집사가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는 구약 성경 전체의 주제가 곧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임을 확신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 이사야서의 글 또한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대신 ‘어린양의 희생제물’이 되심을 예언한 말씀인 것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사본 성경의 사소한 차이’나 ‘역본 성경의 어학적인 실수’가 ‘잘못된 신앙’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직 ‘성경의 주제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정확하게 판단하느냐?’ 하는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하며 결정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계시론’은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는 ‘바른 신앙’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지금 성경의 원본이 하나도 없는데, 사본과 역본만을 가지고 어떻게 정확한 진리가 전달될 수 있겠느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길이를 잴 때 사용하는 자도 그렇지 않습니까?

정확한 1미터의 절대치라는 것은 지구 자오선 길이의 4천만 분의 1에 해당되는 길이이며, 프랑스 어디엔가 그 ‘1미터의 원본’이라는 것이 상징적으로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자들은 그 원본을 기준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져볼 때 절대적으로 정확한 1미터 길이의 자라는 것은 어떤 공장에서도 만들지 못하고 아무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본 1미터를 기준으로 하여 만들어진 갖가지 ‘복제 1미터’의 자들은, 우리가 실생활에서 쓰기에는 아무 지장이 없는 것입니다.

 

역본 성경의 실용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그것도 수천 년 전의 고어를 현대어로 번역할 때 100퍼센트 완벽하게 한다는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학적인 오류는 그 어떤 역본이라도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생길 수밖에 없는 차이는 실제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역본의 근원이 되는 원본 성경이 ‘정확무오하고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완벽한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읽는 성경 구절’도 원본은 물론 아니었고 심지어 사본도 아니라 역본, 그것도 번역상의 실수가 꽤 많이 있는 ‘70인 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역본 성경을 통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빌립 집사가 ‘바른 신학’으로 그 이사야서의 예언을 정확하게 해석해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세주로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참된 신앙고백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의 진짜 문제는 ‘번역상의 실수’가 아니라 ‘신학적인 오류’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 자신이 하나님을 실존하시는 절대주권자로 믿지 않는 경우인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입니다.

이들은 비록 불신자들이 볼 때에는 같은 기독교인 범주에 들어가 버리지만 사실상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와는 신앙 본질에 있어서 극과 극의 차이가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성경 전체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사실을 깨닫고 믿는 가운데 구약과 신약의 각 권과 각 절을 해석합니다.

그것은 마치 ‘숲 전체의 생태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때 그 속에 있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잎 하나 하나 또한 정확하게 연구할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이 ‘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신학자들은 비록 겉보기에는 우리와 똑같은 신구약 66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성경책을 그저 ‘교양도서’의 하나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 다닐 적에 그 학교의 설교학 교수 목사님께서 사역하시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아주 보수적인 침례교회였고 성경도 흠정역(KJV)만을 쓰고 있었습니다.

흠정역은 두말할 필요 없이 아주 훌륭한 역본이고 또 영어권 국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쓰인 전통 깊은 성경이기는 하지만, 아까 본문 37절의 경우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사본 선택에 있어서 잘못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계시던 목사님께서 부인이신 사모님께 King James Version에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려 주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모님께서는 자기가 쓰던 그 King James Version 성경을 끌어안고 며칠 동안 우셨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모님께서는 그 성경책을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사본 전달 과정과 번역 과정에서 인간의 실수가 포함되기는 했지만, 흠정역 성경은 많은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모르기는 하지만 오늘날 어학적으로 훨씬 더 잘 번역되었다고 주장하는 New International Version 같은 영역 성경보다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예수 믿고 구원 받게 만드는 영력을 발휘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흠정역’이 더 정확한 역본이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흠정역을 사용하는 신학자나 목사나 성도들은 대부분 다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계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구약의 주제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며 ‘신약의 주제가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임을 확실히 믿는 신자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해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말씀이라는 ‘바른 신학’을 통해 ‘나와 내 온 집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생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바른 신앙’을 꼭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of) 말씀’으로 믿습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에 관한(about) 말’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느낀 바, 체험한 바, 나름대로 믿는 바를 고백하고 간증하고 기록해 놓은 글’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유주의 신학의 성경관은 자동적으로 엄청난 신학적 오류와 이단 사상을 파생시키게 됩니다.

성경이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말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르게 살던 사람들이 각각 ‘자기 나름대로 믿던 신’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 살던 종교생활’에 대하여 기록한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자연히 이들은 종교다원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한 이들은 신구약 성경 전체의 주제가 공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동의하지 않고, 성경 기록의 목적이 죄인을 구원하여 천국 영생으로 인도함에 있다는 사실에도 역시 고개를 내젓습니다.

그런 잘못된 신학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성경을 번역하게 될 때에는 사소한 어학적 실수와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신학적 해독(害毒)이 그 해당 역본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구구절절 배이게 됩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1977년에 발행한 ‘공동번역’은 천주교와 자유주의 기독교의 합작품으로서, 번역상의 문제는 제쳐놓고라도 우선 성경이 아닌 ‘외경 7권’까지 포함시키고 있는 책입니다.

교회의 권위를 성경보다 더 높이고 있는 천주교의 이단적 신학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한 가지 예만 들자면, ‘공동번역’에서는 ‘하나님’이란 명칭을 ‘하느님’으로 번역함으로써 천주교의 범신론 신학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신학은 기독교를 인본주의, 교권주의 종교로 전락시키기 마련입니다.

오직 바른 신학만이 기독교를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 ‘성경중심의 신앙’, ‘참된 구원으로 이끄는 신앙’의 종교로 지켜 주는 것입니다.

 

목사들 중에서 “복잡하고 어려운 신학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그저 신앙만 있으면 되지.”라는 말을 무책임하게 내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게으름과 무지를 포장하는 변명에 불과합니다.

그런 목사일수록 온갖 유행을 따르는 ‘변칙적인 목회’에 빠지거나 성경 해석이 전혀 없는 ‘잡담의 설교’를 하기 일쑤입니다.

‘신학’이 없는 목사는 그 ‘신앙’이라는 것도 실상은 아무 알맹이 없는 빈껍질에 불과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통 기독교와 이단 기독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양쪽 다 ‘같은 하나님’을 부르고 ‘같은 예수님’을 믿는다 하고 ‘같은 성경책’을 읽고 있으니 겉보기에는 ‘같은 신앙’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는 ‘하나님을 추상적인 신’으로 여기고 ‘예수님을 그저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만 받들고 ‘성경을 사람의 글’로 받아들이는 이단들이 수두룩합니다.

오직 ‘바른 신학’만이 ‘바른 신앙’을 정의해 줄 수 있고 ‘잘못된 신앙’을 가려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제네바신학대학원의 별명이 ‘진리의 터’인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신대원을 통해 ‘성경중심의 바른 신학’이 연구되고 가르쳐짐으로써 여기서 배운 신학생들이 나중에 목사와 선교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바른 신앙’으로 이끌고 ‘성경중심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종말이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이 더더욱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딤후 4:3-4) 이 영적 혼란의 때에, 우리 제네바신학대학원을 중심으로 ‘진리’를 사수하는 ‘바른 신학’에 입각하여 ‘바른 교훈’을 ‘지도해 주는 사람’을 계속 배출함으로써 함께 ‘예수 세계화 운동’을 완성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평신도 선교사

이필재목사 / 행 8:26~40

오늘 성경말씀에는 두 사람의 만남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에디오피아 사람이고 한 사람은 유대나라 초대교회 집사입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성령이 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9절에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라고 나와 있습니다. 두 사람의 형편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 최초의 일곱 집사가 생겼는데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 12사도들이 교회 봉사자 집사님 일곱을 선택했는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를 집사로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예루살렘에 생겼습니다. 기독교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8장을 읽었는데 7장에서 이미 스데반 집사는 순교 당해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도 매우 위태한 삶을 쫓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비해서 에디오피아 사람은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권력자라고 했습니다. 한 나라의 재무장입니다. 당시 에디오피아는 세계에서 아주 잘 나가던 나라입니다. 옛날 솔로몬 시절에 남방의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온 일이 성경에 있는데 바로 그 남방의 나라가 에디오피아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재무장관이라는 대표자 한 사람과 빌립 집사 이렇게 두 사람이 만난 것같이 보이지만 에디오피아 재무장관의 수행원은 성경 연구가들이 약 70명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강대국의 재무장관이 외국 여행을 하는데 혼자서 절대 할 수가 없습니다. 에디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비행시간이 제트 비행기로 3시간 걸립니다. 서울에서 일본보다도 먼 나라입니다. 그 도중의 길은 다 사막입니다. 물과 식량, 이동수단 철저하게 준비해야 예루살렘까지 올 수 있고 또 갈 수 있습니다. 마차를 타고 갔다 오니까 말이 먹어야 되는 식량까지 완벽하게 준비해야 됩니다. 절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집단적 외국 여행입니다.

시간도 얼마나 많이 걸렸는지 경비도 엄청 납니다. 재무장관이라서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대단위의 외국 여행의 목적이 오늘 성경말씀에 나와 있는데 27절 예루살렘에 예배드리러 갔다가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것은 국제간에 정치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외국 관광 여행을 온 것도 아닙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본 고장 성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예배 한번 드리기 위해서 왔다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재무장관의 신앙이 얼마나 컸던 사람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그의 열정을 보고 성령께서 지금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역사적 배경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솔로몬을 찾아왔던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자식을 출산했습니다. 어쨌든 솔로몬은 그 방면에는 재주가 많은 실력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에디오피아 사람들은 본래 흑인 인종입니다. 솔로몬 후손은 백인 모습입니다. 전통 유대인이니까 지금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에디오피아에서는 솔로몬의 후예들이 모두 권력자들이 된 것입니다. 일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에디오피아의 국왕 하일레 셀라시에도 영락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 자신이 솔로몬의 후손이라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그 후손들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이 내시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권력을 가졌고 그래서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성지순례를 왔다 가는 중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성지순례를 많이 떠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셨던 본 고장을 한번쯤은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중요시 할 것을 성경은 늘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그리고 너희는 모이기를 힘쓰라.” 초대교회는 주일날만 예배당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왔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성전을 찾아왔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노력해야 내 믿음이 좋아질 것인가? “교회가 정한 예배 모임을 열정으로 참여하라”입니다. 예배 시간에는 성령님이 역사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20성도도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성령 충만을 체험했고 고넬료 집안에 성령이 임한 것은 베드로가 심방 와서 설교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있던 바울과 실라가 풀려난 것도 기도하고 찬송 부르다가 된 일입니다. 아벨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두 단을 쌓고 열정의 예배를 드렸고 모세, 엘리야, 사무엘 모두 똑같이 나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나가는 이유를 설명할 때 “왜 너희들은 여기서 나가고자 하느냐?” 했을 때 “우리가 광야를 사흘길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해 주소서.” 대답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가 곧 예배였습니다. 여러분! 내 믿음이 떨어지는 일종의 영적 신호가 있습니다. 예배가 싫어지면 위험신호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지금 에디오피아 내시는 에디오피아에서 마차를 타고 수많은 수행원과 경비를 들여서 행한 일이 예배의 본 고장에 와서 한번 예배를 드리고 싶어서 왔다 가는 중입니다.

그 다음에 그의 마음은 대단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막을 여행하면서 지금 이사야 성경을 읽으면서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비행기 여행을 많이 하실 텐데 저도 많이 하는 사람으로서 요즘 비행기는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편안합니다. 비행기가 가는 건지 마는 건지 가만히 있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조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비행기 여행 중에서 성경 읽는 사람은 절대 많지 않습니다. 제가 비행기 여행을 많이 하는데 그때마다 성경 읽는 사람을 찾기 힘듭니다. 이 시골길 마차는 흔들려서 글을 읽기가 불편하고 멀미가 납니다. 글을 잘 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내시는 대단한 열정의 신앙인임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이 권력가는 빌립이라고 하는 남모르는 사람이 별안간 그 일행에 뛰어든 것을 보고 겸손하게 맞아들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는데 공통점이 있어서 대화가 된 것입니다. 빌립 집사는 그가 읽고 있는 이사야 성경에 대한 주석을 설명해 줄 수가 있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성취를 설교할 수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이 이사야 성경은 예언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성취가 지금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고서 일장 설교를 해주었더니 이 내시는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고 빌립에게 요청했습니다. “나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기회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다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래서 집사가 이 사람에게 길가 개울물에 가서 세례를 주는 모습이 오늘 성경에 나온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에디오피아로 돌아간 이 내시는 그 나라 최초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평신도 선교사가 됨으로 지금 에디오피아는 기독교 국가가 그때부터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이 왜 빌립을 쓰시고 또 이렇게 에디오피아 내시를 쓰셨는가? 선교의 아주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빌립을 쓰신 이유 중에 제일 큰 것이 빌립은 헬라파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 혈통으로 태어났지만 헬라 문화권에서 탄생하고 거기서 성장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인가? 당시는 세계적 공통어가 헬라어였습니다. 우리 신약 성경도 다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영어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 영어만 잘하면 세계 어디를 가나 답답하지 않습니다. 영어를 공용으로 쓰는 나라만 해도 40여 개국이 됩니다. 당시는 헬라어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이 빌립은 세계 공통어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에디오피아 권력자와 아무 어려움 없이 지금 언어가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이 바울을 어떻게 그렇게 크게 쓰셨는가에 대해서 살펴볼 수가 있는데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바울도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해서 헬라 문화권에서 철학과 학문에 능통한 기초를 가지고 율법을 전공한 사람이기 때문에 당시에 어디를 가도 언어에 아무 지장을 받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는,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당시는 로마 시민권이 출세의 기본 요소였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함부로 대하면 큰일 납니다. 바울도 써먹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빌립보 감옥에서 나올 때 “로마 사람인 나를 아무 죄도 없이 감옥에 가두고 때리고 그냥 가라 할 수 있느냐?” 했더니 거기 간수들이 벌벌 떨면서 “당신 로마 시민권자냐?” “그렇다.” 그래서 “두려워하여 권하여 데리고 나갔다” 이런 대우를 받았습니다. “마리아 마리아” 연극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로마 대장이 막달라 마리아를 찾아와서 말하지 않습니까? “네가 만약 예수를 데리고 잠을 자서 예수의 권위를 실추시키면 로마 시민권을 주겠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에게 접근시키는 거 아닙니까? 저는 그 연극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빌립 집사는 헬라파 유대인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해서 그것이 선교에 지금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사람은 사도의 직함이 아니고 평신도였기 때문에 오히려 유리합니다. 지금 핍박시대 사도들은 활동 금지 당합니다. 그런데 평신도들은 조금 자유스러움이 있지 않습니까? 가까운 중국도 어떤 사람이 중국은 기독교 박해 국가라고 하는데 공산당이 지배할 때 박해했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예배를 활발하게 잘 드리고 있습니까? 그러나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선교사는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녕성 종교 국장과 제가 친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준 통계가 “목사님! 중국을 자꾸 핍박 국가라고 하는데 중국의 5대 종교 가운데 가장 숫자가 많은 게 기독교입니다. 이 중국에서 어디든지 목사님이 예배에 참석하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수천 명씩 1~4부로 예배를 드리는데 무슨 이 나라가 기독교 핍박 국가입니까?” 나한테 오히려 반박합니다. “다만 중국이 싫어하는 것은 선교사입니다. 우리끼리 알아서 할 테니 선교사가 와서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중국에 가는 선교사들은 거의 평신도들이 들어갑니다. 영어 강사로, 기술 보급 교사로 들어가서 그동안 많이 활동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평신도 사역자들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를 소래교회라고도 하고, 송천교회라고도 하는데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아닙니까? 이 최초의 교회는 목사가 세운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가 세운 것도 아닙니다. 정치적 이유 때문에 중국으로 갔던 한국 사람들이 중국에서 예수를 믿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평신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로서 대한민국 최초의 교회가 바로 평신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지금 빌립은 자신도 평신도이면서 또한 평신도인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를 해서 이 내시가 에디오피아에 돌아가서 교회를 세움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복음이 에디오피아에 이렇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에디오피아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빌립은 아프리카 선교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여행자 한 사람을 전도함으로 아프리카에 기독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아프리카 선교사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와 같이 교회 일을 하던 전도사 한 분이 “목사님! 나 사이판에 선교사로 파송해 주십시오.” 그래서 선교사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공장들이 많이 있는데 중국에서 단기 비자를 가지고 돈을 벌러 오는 20대 청년들이 와글와글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상대로 전도를 했는데 얼마나 전도가 잘되는지 지금은 그 사이판에 돈을 벌러 왔다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청년들이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가장 열심히 하는 일이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산되는 게 평신도들입니다.

88올림픽 때 한국교회는 대대적으로 선교 전략을 행사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오는 선수와 여행객을 상대로 선교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행 중에 예수를 믿게 되어서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갈 때는 모두가 선교사가 되어서 돌아갈 수 있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성공해서 아주 큰 효과가 있었는데 그게 무엇이냐 하면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들이 너무나도 깜짝 놀라는 것이 한국 교회의 성장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선수들은 거의 다 찾아가서 예배 한번 참석하라고 했습니다. 88올림픽 때 최고의 이름을 날린 사람이 4관왕 육상 선수 칼 루이스 아닙니까? 칼 루이스도 여의도순복음교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간단히 간증했는데 그가 미국에 돌아가서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국 교회가 진짜 교회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진짜란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도 “한국에 가보십시오.” 그래서 그 당시에 웬만한 사람을 다 교회로 인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4관왕 칼 루이스까지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돌아가서 다 한국교회를 말하니 얼마나 훌륭하게 되었습니까?

그 다음에 이 내시를 만난 것은 국가의 큰 권력 실세 아닙니까? 힘 있는 자에 대한 선교 전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라고 했으니까 한 나라의 재무 장관 수행원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도 고종황제는 마지막에 선교사들이 만들어주는 음식만 드셨습니다. 아무도 믿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꾸만 독살하려는 계획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에 대한 신뢰 때문에 “이 나라에서 절대로 선교사 활동을 방해하지 말라.” 그래서 고종황제 때 우리나라에 복음의 확산이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고종황제는 별안간 의문의 죽음을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기독교가 큰 영향을 얻은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을 쓴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이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데오빌로 각하라고 하는 최고의 통치자가 예수를 믿게 되면 그 나머지는 자연히 이루어지니까 그런 선교 전략으로 그 성경을 쓴 것입니다. 지금도 아프리카나 이리안자야에 가면 선교 전략이 반드시 그 마을의 추장을 전도해야 합니다. 선물을 갖다 주고 온갖 편의를 다 주면서 추장만 전도되면 그 마을은 전체가 금방 복음화 되는 선교 전략인데 수행원을 거느린 이 재무 장관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까 돌아가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 열정을 가지고 거기다 기초를 놔준 사람이 된 것입니다. 평신도 선교사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인을 통한 세계 선교는 바람직한 몇 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증거가 됩니다. 먼저 이 나라가 다인종 문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결혼해서 오는 숫자만 1년에 2만 명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많은 퍼센트가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되는데 아주 많습니다. 도시보다도 시골이 더 많습니다. 거의 농촌 청년들이 그렇게 결혼하지 않습니까? 시골 교회 부흥회를 가보면 언제나 외국인 교인들이 다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한국에 와서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소원이 있습니다. 자기의 고국에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것이 아주 큰 영향력이 있는데 지금 이것이 굉장히 확산되어 나가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국의 기업인들의 평신도 선교사 지망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들 문제가 모두 끝났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업적으로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면 나의 남은 인생은 어디에 내 몸과 마음을 투자할 것인가 생각했을 때 믿음 좋은 기업인들이 ‘아! 내가 선교사 활동을 하는 것으로 내 인생을 끝내자.’ 이 퍼센트가 굉장히 늘어가고 있습니다. 돈은 벌어놓았습니다. 크게 성취했습니다. 이제 자녀들 해줄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것 가지고 선교사로 활동하자.’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비량 선교사입니다. 어디 가서 선교비 달라고 요청할 필요도 없고 선교 보고서를 낼 필요도 없고 자기 돈 가지고 자기가 가서 자기 마음대로 선교 활동을 하는데 외국에 나가 있는 파송 선교사들은 그런 사람을 만나기를 아주 희망하고 있습니다. 와서 동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많이 나타납니다. 우리 갈보리교회에도 많이 계십니다. 여러분도 그런 일을 한번 계획해 보십시오. ‘남은 생애를 내가 성취는 했고, 자녀들은 다 자랐고 무엇을 할 것이냐?’ 이런 평신도 선교사들의 숫자가 날마다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 하나도 선교 전략입니다. 그 다음에는 기업 선교가 많이 늘어갑니다. 사장이 크리스천이라서 기업이 교회화 되어가는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도 목사들이 가서 예배드리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저도 강남의 한 호텔에서 대한민국의 사장들만 모이는 CBMC 아침 모임에 3년 동안이나 설교했었고, 분당 CBMC도 제가 3년 반이나 설교했습니다. 기업의 사장들이 모여서 아주 열심히 자기 기업을 교회화 하는 일을 신경을 쓰고 열심히 하는데 이처럼 “나는 선교사는 아니지만 내 기업에 와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그 숫자가 얼마나 늘어나는지 대한민국 크리스천 기업들은 다 교회화 되어가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국이 세계 선교에 주역이 되는데 필요한 인프라가 세계에 지금 마련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한국 기업의 제품은 이제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애플과 삼성이 싸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아닙니까? 이제는 한국 제품이 세계 어디에서나 인정을 받기 때문에 그런 인프라가 깔려 있는 것은 한국 선교사가 가서 일을 하기에 너무나도 영향을 많이 주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 기업 제품들을 다 사고 싶어 하고, 다 갖고 싶어 하는 인프라가 깔리니까 선교하기 너무나도 자신감이 생깁니다. 이게 한국을 쓰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한국의 한류 열풍을 보십시오.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무엇을 한다고 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열광을 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요새 싸이의 말춤을 보십시오. 야구장에서 5만 명이 다함께 싸이의 말춤을 추었다고 미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춤을 보니까 누구나 할 수 있고 기술이 필요 없는 거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하는 것은 다 좋아하는 인프라가 깔려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제는 한국인을 들어서 세계 선교를 하시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5년 후에는 한국 선교사에 세계에서 제일 많아질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이런 인프라가 이렇게 나니까 이제 21세기는 한국 아니면 세계 선교는 안 될 것입니다. 미국은 선교사가 점점 주는데 우리나라는 점점 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평신도들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평신도 선교사 활동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에디오피아 선교는 성경에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유대 나라를 찾아왔던 두 여행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구원 역사입니다. 하나는 솔로몬 왕 때 유대 나라를 방문했던 남방의 시바 여왕이요 또 하나는 오늘 말씀 에디오피아 재무 장관입니다. 다 권력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복음이 잘 확산된 것입니다. 이 재무 장관의 내용을 살피면 이 사람은 실제 안타까울 것이 없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한 국가의 재정을 자기 의사대로 지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디스아바바에서 예루살렘까지 그 많은 경비와 수행원을 거느리고 마차 행렬을 앞세워서 예루살렘을 왔다가 지금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는 전통적 예루살렘 예배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 거 같습니다. 영적인 자기의 요청이 채워지지 아니한 상태로 답답하게 돌아가다가 빌립 집사를 만나서 이 집사님의 설교를 듣고 길가에서 빨리 세례를 달라고 내가 고국에 가서 이 복음을 전하겠다고 요청해서 길가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빌립을 보고 “당신이 누구냐? 왜 나한테 접근하는 것이냐?” 묻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가 전하는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예언 설교만 듣고 감동이 된 것입니다. 권력과 종교를 초월하는 두 사람의 만남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을 성령이 그렇게 했다고 오늘 말씀에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평신도 활동의 시대입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 주변에 누군가는 부모님이 되었든지 친구가 되었든지 누군가는 여러분에게 선교했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 나가라고 해서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받은 자는 주어야 되는 기독교 진리의 책임입니다. “갈보리 교회 성도 여러분”이라고 말할 때 내가 그 “성도”를 “선교사”로 바꾸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 갈보리 교인들은 선교의 열정이 깊어져서 “갈보리 교회 선교사 여러분!”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평신도들이 다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모두 평신도 선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이해되십니까

김상복목사 / 행 8:26-40

오늘은 할렐루야 교회가 26살이 되는 날입니다. 초등학교는 12살까지 대치동에서 다녔고 중&#8228;고등학교 6년은 양재동에서 다녔지요. 이 시기에는 말썽도 좀 부렸지만 틴에이저 때니까 어쩌겠습니까? 이곳 분당에 이사를 왔을 때는 막 대학 1학년이 된 시기였습니다. 이제 대학과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군대도 다녀왔습니다. 26살의 청년이 되었습니다. 26년 동안 축복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셨고 우리를 잘 인도하여 주셔서 많은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할렐루야 교회는 이제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 앞에서 당당하고 훌륭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또한 장로, 안수집사, 권사 등 90명의 직분자를 세우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 좋은 날, 우리 모두가 어떤 성도가 되면 좋을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본문의 빌립은 예수님의 12 제자가 아닙니다. 제사장도 선지자도 목사도 아니요, 집사입니다. 그런데 이 빌립 집사은 너무 멋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교회의 모든 성도와 오늘 임직을 하시는 직분자들이 빌립 집사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된다면 정말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빌립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육(肉)을 따라 자기 생각과 감정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이끌림과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슴속에 성령을 보내 주시고 그 성령은 여러분과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며 성령은 돕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그리스어로 ‘파라클레이토스’로서 내 옆에서 손잡고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보혜사’(保惠師)라고도 하나 Helper가 더 정확합니다. 여러분이 기도로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 성령께서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26절). ‘주의 사자’를 천사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읽어 내려가면 성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29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39절). 빌립은 하나님의 영이 이끌어주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힘이 있고 소망이 있고 믿음이 있고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성령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하나님이여, 내 인생을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령이 임하셔서 함께 생각하고 성령과 함께 말하고 성령과 함께 행동하고 성령과 함께 움직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만 영적인 열매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이제 예루살렘에서 가사 지방으로 가는 길로 가라. 거기 가면 내가 다음 일을 지시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만약 빌립이었다면 “그곳이 어디입니까? 왜 가라고 하십니까?”하며 토를 달았을 텐데 빌립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가라!”고 하자 벌떡 일어나서 갔다고 했습니다. 가사로 가보니, 에디오피아의 재무장관이 병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말씀대로 순종하자 일국의 재무장관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에 순종하면 여러분의 삶에 어떤 축복이, 어떤 역사를 바꿔 놓을 만한 사건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늘 성령의 목소리를 듣고 그 분의 지시를 받아 사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의 목소리를 듣나?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성령이여, 나에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나에게 깨닫게 하여주옵소서. 나에게 보게 하시고 듣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의 뜻을 나에게 나타내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성령께서 귀를 열어주시고 눈을 뜨게 해주셔야 보고 깨닫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면서 매주 마다 설교를 듣지만 깨달음과 감동이 오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고 싶을 때마다 기도하면 여러분의 가슴 속에 있는 성령님께서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접근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전에 “성령이여, 제 눈을 뜨게 하셔서 당신의 법의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시편 119:18)와 같은 기도를 하십시오. 시편 기자도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성경은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사람이 쓴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도와주시면, 내 마음의 성령과 성경을 쓰신 성령이 동일한 성령이시기 때문에 영의 눈을 뜨게 하시고 깨닫게 해주십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마음이 열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사십시오. 그러면 평화가 있고 자신감이 생기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들이 빌립을 통해 나타난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빌립 집사의 사건이 그런 이야기입니다. 빌립은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사로 가는 길에 갔기 때문에 에디오피아 재무장관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땅 서남쪽, 지금의 가자 지방이 본문의 가사입니다. 팔레스타인들이 독립해서 살고 있는 지역으로 최근에도 분쟁이 잦은 곳입니다. 그 길에서 만난 재무장관은 상당한 세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27절)라고 했습니다. 이 분이 변하면 그 나라에 큰 영향력을 기칠 것입니다. 그 분은 병거를 타고 가면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28절). 아마 소리를 내어 읽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들었다”(30절)고 했습니다.

옛날부터 유대 사람들은 성경을 소리 내어 읽었는데 독특한 리듬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서울대학교의 신사훈 교수님께서 저희 교회에 오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한국어 성경 대신 그리스어 성경을 들고 오셔서 리듬을 붙여서 읽으셨습니다. 서울대학교 교수가 희랍어로 노래처럼 챈팅(chanting) 하며 성경을 읽는 것을 보고 제가 그만 홀딱 반해 버렸습니다. “와, 어떻게 저렇게 그리스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나?” 얼마 후에는 그 분이 저희 교회에 또 오셨는데 이번에는 히브리 성경을 들고 와서 히브리말로 읽으셨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나도 저 분처럼 되었으면!”하고 서울대학에 가서 그 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신학교에 가서 성경을 배우고 보니 챈팅을 하되 그분처럼 하는 것은 아니더군요. 그분이 자기 나름대로 리듬을 만들어서 읽은 것이었습니다.

빌립은 다가가 성경 읽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빌립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일러주셨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29절). 바짝 다가가니까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때마다 인도하시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빌립의 삶입니다. 우리 할렐루야 교인들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과 음성을 들으며 살게 되길 원합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원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도록 귀를 기울이고 듣는 훈련을 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들은 당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고, 당장은 다 깨닫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 속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빌립은 말씀을 듣고 순종할 뿐 아니라 성경을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됩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역사하시지 않으면 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지요.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구나” 하며 한탄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교회에 오실 때마다 “하나님, 오늘도 찬송과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만나고 주의 음성을 듣고 주의 손길을 보고 가게 하여주시옵소서!” 기도하시고 주의하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배 후에 가끔 이런 말을 듣습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을 통해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종종 이렇게 대답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가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 들을지어다”라고 몇 번씩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아니요, 눈이 있어도 볼 수 있는 눈이 아닙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이여, 내 눈을 뜨게 하셔서 하나님의 신비로운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옵소서.” 빌립처럼 듣고 순종하고 또 가르칠 수 있는 축복이 여러분들께 있기를 바랍니다.

재무장관을 만난 빌립이 물었습니다. “장관님, 지금 읽고 계신 것을 이해하십니까?” “아닙니다. 나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내가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이리 올라와 나랑 같이 가십시다.”

처음 성경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맛을 모르니까 재미가 없고 읽고 싶지 않지요. 성경은 마치 말린 밤, 황률과 같습니다. 황률을 먹으려면 딱딱해서 잘 씹히지도, 깨지지도 않습니다. 꽉 씹다가는 이빨이 깨지지요. 먹는 방법이 있어요. 입에 넣고 침을 살살 발라 오른쪽으로 굴렸다가 왼쪽으로 굴렸다가 하면서 한 쪽 귀퉁이를 조금만 씹어 깨뜨려서 먼저 먹고 나머지도 그런 식으로 조금씩 먹어야 황률의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읽으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참 재미가 없습니다. 카알 라일은 그의 “행복론”에서 밤에 잠을 못 자는 사람은 성경을 읽으라고 했더군요.

그러나 여러분이 성경을 펼 때마다 잠깐이라도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 말씀의 뜻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 눈을 뜨게 하셔서 말씀하고자 원하시는 것을 들려주옵소서.” 기도하고 읽으면 성령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먼저 믿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보다 뒤에 믿은 사람들에게 먼저 믿은 여러분이 성경을 어떻게 읽는 것인지 가르쳐 주세요.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깨달음이 많아서 성경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빌립과 같은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 에디오피아 사람은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32절). 양은 조금 후에 도살장에서 죽을 것을 모르고 그냥 끌려갑니다. 털을 깎으려 해도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서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잡혀 가셨을 때 입을 열지 않고 그냥 가만히 모든 수치와 멸시를 다 당하셨습니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33절). 이 구절은 다시 번역을 해야 됩니다. “낮을 때”는 “낮아졌을 때”로서 아주 비천하게 되었을 때 즉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들에게 잡혀가 멸시와 천대를 받고 채찍과 손바닥으로 맞고 아주 비천하게 되었을 때를 말합니다.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정당하고 합법적인 재판을 못 받았다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여기저기 끌려 다니다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아무 죄 없이 낮아지고 비천해지고 부당하게 재판을 받았는데도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는 아무도 변호해 줄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빌립은 이사여 53장 말씀을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잘 이해한 분입니다. 성경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하여 결국에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까지 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안 믿는 사람을 만나 예수님을 증거할 때 어떤 주제에서 대화를 출발해도 상관없습니다. 거기서 시작해서 점점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대화로 이끌어 가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게 도울 수 있는 빌립 집사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신과 의사 한 분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인데 제 학교 사무실에 오셨습니다. 정신과 의사니까 정신병이나 병원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가정의 일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정신과 병원에는 환자들이 꽉 차 있습니다. 의사들의 일이 어려운 일이지요. “왜 인간이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가?”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은 죄에 관한 이야기까지 도달했습니다. 죄의 문제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어 새롭게 출발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에 이르러 이 분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분은 돌아가자마자 독일어 성경을 포함해서 성경책을 샀습니다. 그리고 새벽마다 독일어 성경을 소리 내서 읽었습니다. 주일에는 아이들을 챙겨서 교회에 나옵니다. 그 아내가 보기에 안 하던 짓을 하는 남편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제 남편이 이상해졌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남편과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사실은 당신 남편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내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도 예수를 믿게 되었고 훌륭한 교회의 사역자들로서 저와 함께 오랫동안 일을 했습니다. 어디서부터 대화가 출발했든지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이끌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까지 전할 수 있는 훈련을 반드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우리가 빌립처럼 되는 것입니다. 빌립은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빌립은 또한 교회를 세운 분이기도 합니다. 직접 세운 것은 아니지만 에디오피아 재무장관을 예수 믿게 만든 결과, 그가 자기 나라에 돌아가 왕에게 전해 예수 믿게 만들었고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에디오피아는 기독교가 왕성한 나라로 남아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의 오순절 이야기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실 때 16개 나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예수 믿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감으로써 전 세계의 교회가 단번에 출발하게 되었는데 그 16개 나라 중에 에디오피아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에티오피아 교회는 빌립 집사 때문에 에디오피아 재무장관이 예수를 믿어 그 나라에 교회가 서게 된 것입니다.

빌립의 말을 들은 재무장관은 예수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고백하고 그 시간에 세례를 받습니다. “둘이 물에서 올라갈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39절). 이 부분의 번역이 조금 어색하게 되었습니다. 재무장관이 빌립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자마자 성령께서 빌립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지금은 목사만 세례를 베풀지만 옛날에는 집사도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지금도 목사가 없는 정글에서라면 복음을 제대로 받은 여러분이 세례를 베풀 수 있습니다. 재무장관은 “흔연히” 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기뻐하면서 갔다는 말입니다. 빌립은 다른 사람의 삶에 기쁨을, 구원의 기쁨을 주었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진리를 깨닫는 기쁨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에디오피아 재무장관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 왕에게 복음을 전한 것 같습니다. 옛날에 할라씨라는 에디오피아 왕족이 있었는데 그 왕족 전부가 오늘날까지 예수를 믿습니다. 빌립 집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께 순종한 결과 에디오피아 장관을 만났고, 그 장관을 통해서 에디오피아에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립은 성령에 이끌려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사람입니다. 성령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받았고 성경을 가르쳤고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우는 집사였습니다. 여러분도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빌립과 같은 신앙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할렐루야교회 모든 성도가 교회 창립 26주년을 맞아 빌립과 같은 교인들이 되어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왕성하게 세워지는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

행 8장 26~40절 / 김 조목사

오늘은 나라와 민족이 다시 한 번 크게 깨닫고 회개하고 결단해야 할 6.25사변이 일어난 날입니다. 해방이 기쁨도 잠시하고 우익좌익하더니 남과 북이 나뉘어져 버렸고 1950.6.25일에 북한공산당의 야욕으로 민족상쟁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국가는 초토화되었고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파괴로 된 가슴 쓰린 날이 되었습니다. 유엔의 개입으로 그나마 휴전선이 그어진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56년이 되었습니다. 준전시 상태인 이 땅에 북한은 북한대로 핵문제로 국제적 고립과 경제적 위기가 심각하고 남쪽은 우리나라대로 부정과 부패와 성적 타락과 사회질서 문란과 동과서, 남과북, 좌와우, 빈과부의 갈등으로 이질화되어가는 정치적 현실을 보며 입으로는 개탄하면서도 “나 하나는”이라는 이기주의 욕심에 빠진 우리의 현실 보며 성도로써 각오와 결심을 새롭게 다짐할 때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 전 3개월을 머물며 전도한 백령도가 13교회가 세워지고 80% 주민이 믿음생활하며 100여명의 목사가 배출된 것 보면 한 사람의 순교적 신앙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고 있나를 생각합니다. 아프리카에 유일한 기독교 국가인 에디오피아는 6.25사변때 우리나라에 군대를 파송하였던 나라입니다. 한나라를 복음화 시킨 내시의 신앙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내시의 믿음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예루살렘까지 와서 예배하고 돌아가는 에디오피아의 국고 받은 내시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빌립을 보내어 복음 전하게 하시고 믿고 물 있는 곳에서 세례 받은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내시의 믿음을 생각해 봅니다.

 

1. 열정 있는 믿음입니다. (26-29절)

에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이니 왕실 보물과 국가의 재산을 총관리하는 큰 권세가 있는 자였기에 얼마나 할 일이 많겠습니까? 에디오피아는 나일강 남쪽에 위치한 나라로 예루살렘까지 거리가 1500km로 그 때의 도로 사정이나 교통수단으로는 한 달 가까이 걸리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제일로 여기고 경배하기 위해 달려온 내시의 신앙은 뜨거운 신앙 열정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자기 위치나 모든 조건보다 하나님께 예배코자 하는 그 열정 있는 믿음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빌립에게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나라가 망하며 볼모로 잡혀갔으나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아는 뜨거운 믿음으로 왕의 명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먹는 것 때문에 몸 더럽히지 않겠다는 다니엘을 하나님이 그 믿음 인정하고 사자의 굴에서도 지켜주셨고 120개도를 다스리는 총리로 또한 선지자로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죽게까지 하시고 우리 사랑하여 구원해 주셨으니 이제 우리도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일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최선 다해서 해야 합니다.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하여 미지근한 자를 예수님은 토하여 내치리라고(계3:15,16)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알고 열정적으로 섬기는 믿음 되어 하나님께 인정받고 복을 누리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2. 겸손한 믿음입니다. (29-34절)

이사야서를 읽으며 가는 내시에게 성령의 인도하신 대로 빌립이 “읽는 것 깨달을 수 있느뇨”했을 때 자기의 위치나 입장 생각하고 무시할 수도 있었건만 알지 못하니 가르쳐 달라고 자리까지 마련한 것은 참으로 겸손한 믿음입니다. 일국에 제상임에도 자기의 부족을 솔직하게 내어놓고 배우려고 하는 자세가 좋은 믿음입니다. 이렇게 참 겸손은 하나님 앞에 솔직한 회개하는 것이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조금 아는 것으로 모든 것 다 아는 양 자만에 빠지고 별것 아닌 것 가지고 남들을 무시하려는 자에게 발전은 없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잠18:12)”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벧전5:5,약4:6) 하셨습니다. 양극화의 문제도 서로 이해하고 겸손해지면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승화됩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식구들은 겸손한 내시에게서 더욱 배우고 익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믿음 가지고 자신도 살고 가정도 복 받으며 나라와 민족이 새롭게 되는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내어놓는 회개하는 믿음은 교회생활을 더욱 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습관, 풍습도 끊고 버리며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므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가 될 줄 믿습니다.

 

3. 결단성 있는 믿음입니다. (35-39절)

내시는 물 잇는 것을 보자 세례 받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믿음의 확실 표적을 나타낸 것으로 기회를 잊지 아니하고 행동으로 옮겨간 결단성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때를 놓치고 가슴 치며 후회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가롯유다가 은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팔고 나무에 목매여 죽은 것도 결단성 부족입니다. 만사가 때가 있고 모든 만물이 목적을 이룰 때가 있다고(전3:1-10) 했습니다. 그때를 바로 알고 그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루에도 수많은 결단을 해야 하는 우리이기에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할 줄 아는 결단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두렵고 손해 볼 것 같고 적당한 핑계되어 빠지고 싶을 때 있어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성도이기에 올바른 결단을 하는 성도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6.25때 공산주의자에 의해 수많은 순교자를 내었습니다. 순교자의 생명의 위태로움 앞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결단이 있었던 것을 스데반 집사를 통해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성도여! 사회가 혼탁하고 양극화 문제로 국가의 위기라고 합니다. 나 하나의 만족 위한 이기주의 욕심 버리는 결단도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체코 프라하에서 80km 떨어진 타브르에 개혁전 개혁자인 보헤미야의 후스가 신앙을 바르게 지키려고 황제의 군대와 마주 싸우던 100마일 가까운 지하 동굴 속에서 백년여를 싸우던 곳을 보며 울며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현실의 안일을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 기쁘시게 하겠다는 결단이 있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복된 성도되십시오.

 

말씀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한 한사람 내시의 믿음이 이방인 복음 전파에 본보기가 되었고 에디오피아가 복음화 되어진 것을 보면서 바쁜 일정 먼 거리를 개의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까지 예배하려온 열정 있는 믿음, 가르침을 받고 자신의 부족을 솔직하게 고하는 겸손한 믿음 또한 물 보고 즉시에 세례 받는 결단성 있는 믿음 우리도 갖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소유자로 자신도 가정도 복 받고 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에디오피아 내시의 구원

행 8장 26~40절 / 김영규목사

빌립의 개인 전도

 

사도행전 8장은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장면입니다. 그 후반부에 빌립의 개인전도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빌립은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첫째는, 사마리아 전도를 통해서 최초로 유대땅 밖으로 복음을 확산시켰습니다. 둘째로, 에티오피아 내시 전도를 통해서 중요한 개인전도의 문을 열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본문 및 10장 11장의 고넬료 전도 장면을 비롯하여 몇 차례의 중요한 개인전도 장면이 나옵니다.

전도 역사에서 개인전도는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한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그 한 사람이 막강한 복음의 전파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티오피아는 150년 전 리빙스턴이 아프리카를 탐험하기 전부터 있었던, 아프리카 대륙에서 거의 유일한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미국 CIA자료에 보면 2008년 현재 아프리카 대륙에서 기독교 국가로 분류되는 나라는 상당 수 있습니다. 우간다는 로마 카톨릭과 신교가 각각 42%나 되어, 전국민의 84%가 기독교인입니다. 남아공화국도 전국민의 80% 가량이 기독교인입니다. 케냐는 신교가 45%, 로마 카톨릭이 33%로 전국민의 78%가 기독교인입니다. 이들 나라들은 대부분이 식민지 시대 이후에 유럽에서 복음이 전파된 나라들입니다. 에티오피아의 경우는 동방교회 계통이 50.6%이고 신교가 10.3%로 전국민의 61%가 기독교인입니다. 에티오피아의 선교 역사를 알 수 없지만, 동방교회가 주류인 것을 보면 아마 빌립이 전도했던 내시가 왕을 전도하고, 그 결과 백성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개인전도는 단순한 한 사람의 전도가 아닙니다. 그로 말미암아 많은 전도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러면 빌립은 어떤 방식으로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했을까요? 빌립의 전도는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한 사람을 전도할 수 있는지, 비결을 알려줍니다. 빌립의 전도는 단순히 개인전도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행한 방법은 전도의 원리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를 인도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특별한 비법을 전수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소리에 순종한 빌립

 

첫째는 성령의 소리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성령께 순종하면 복음이 전파됩니다. 영혼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교회가 세워집니다. 승리하는 인생이 됩니다.

교회는 순종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주님의 교회는 사도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4:19-20) 오순절 성령 강림은 120여명의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에 모여 기다릴 때에 임하셨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4-5)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3-14) 베드로 사도는 로마군의 장교 고넬료에게 가라는 성령의 소리에 순종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 사도를 청하라는 천사의 소리에 순종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행10:19-21)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지시대로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놀라운 선교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2-3) 바울은 아시아 전도를 할 때에, 마게도니아 환상을 보고 주님의 뜻인 줄 알고 순종했습니다. 그리하여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9-10)

빌립은 성령의 소리에 순종하여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로 다가갔습니다. 먼저 일어나 광야로 가라는 소리에 순종했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26) 사람이 많이 사는 마을이나 도시에서 전도하지 말고 광야로 가라고 합니다. 사마리아 부근도 아닙니다. 유대 예루살렘으로 내려와서 남쪽 가사로 가는 길입니다. 가사는 지금의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인 가자지구를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자지구로 가자면 도중에 네게브 사막 길을 통과합니다. 빌립은 왜 사마리아에 있는 자신을 엉뚱한 사막 길로 가라고 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순종했습니다. 병거로 나아가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29)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다가가라고 합니다. 그래도 빌립은 순종했습니다. 이와 같은 빌립의 행적은 내내 계속됩니다.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38-40) 빌립은 오직 성령께 순종함으로써, 모든 전도 사역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빌립의 행적 중에 특히 순종에 대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선민의 역사,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모두가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창세기 초반의 우주 창조는 순종으로 성취되었습니다. 1장의 기록에서 반복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대로 되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창1:7)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창1:9)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창1:11)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창1:15)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창1:24)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30) 자연계의 질서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순종함으로써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 법칙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거스려봤자 유익도 없거니와, 거스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 법칙을 거역하면 엄청난 재앙을 당합니다.

인간 사회의 법칙도 마찬가집니다. 법에 순종하면 질서가 세워지고 가장 유익된 결과가 나타납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1:22)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함으로써 부부의 질서가 세워집니다.(엡5:24)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함으로써 부모와 자녀의 질서가 세워집니다.(엡6:1) 공권력에 순종함으로써 사회 질서가 세워집니다.(롬13:1) 심지어는 김일성이나 김정일 같은 북한 정권조차도 하나님이 세우신 권력임을 알아야 합니다. 악한 통치자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그 공권력에 조차도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에서 순종은 도덕률이 아닙니다. 법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순종은 도덕률이 아닙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반드시 죽는 생존이 걸린 법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순종은 에덴동산에서 유일한 법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의 말씀은 도덕률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녀에게 십계명은 도덕률이 아닙니다. 위반하면 처벌 받는 법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이런 법들은 세상 법에서도 위반하면 처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제1계명에서 제4계명, 유일하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 우상 숭배,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 안식일을 위반하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가볍게 생각합니다. 안 지켜도 되는 도덕률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부모를 공경하라!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이것도 명백한 법입니다. 위반하면 처벌 받아요. 순종은 도덕률이 아니라 법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순종하면 삶에 가장 유익된 결과가 옵니다. 영혼이 잘 됩니다. 육체가 건강합니다. 재물이 풍부해집니다. 권세를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종에 따른 축복의 약속을 이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28:14) 성령께 순종하면 모로 가도 서울로 갑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성령의 소리를 들으시고, 듣거든 순종하세요. 성경은 아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듣고 순종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15)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13: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7,11,17,2:29,3:6,13,22) 성령께 순종하십시오. 영혼 구원은 물론 인생의 모든 유익이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전하다

 

둘째는, 성경을 통한 복음의 전달입니다. 구원은 복음 진리를 알고 받아들일 때에 이루어집니다. 알지 못하고 구원받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아는 복음은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시다!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시다!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던 초기 교회를 상상해 보세요. 오직 구약 성경만 있습니다. 누가 메시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에 대한 풍부한 예언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언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필요하고 적용이 필요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내시는 마차를 타고 가면서 성경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28) 빌립은 그 사람이 어디를 읽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그 읽고 있는 성경을 이해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성경은 해석하기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예언서를 해석하는 것은 더구나 힘듭니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30-31) 그 사람이 읽고 있는 성경은 이사야서 53장이었습니다.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32-34) 이사야 53장은 메시야 예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생생히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때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부문이 예수님 사후에 날조하여 첨가한 부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해사본이 발견됨으로써 그 주장이 잘못된 것임이 판명되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된 사해사본에는 이사야 66장 전부가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예수님이 오시기 600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생생히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성경은 예수님을 말하는 책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을 얘기합니다. 신약은 오신 예수님을 얘기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35) 저는 20대에 처음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신약을 먼저 읽고 구약을 나중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구약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은 구약의 성취요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석을 본 적도 없고, 참고 서적을 읽은 적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구약 성경에 풍부하게 계시되어 있는 예수님의 상징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와라는 이름, 가죽옷, 여자의 후손, 아벨의 어린 양, 반석의 물, 만나, 레위 제사법, 광야의 놋뱀, 성막 등등. 예수님의 탄생, 고난, 피난, 성장, 십자가 대속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말할 수 있고, 예수님을 말해야 합니다. 성경은 다윗의 손에 들려 있는 물매처럼 내게 익숙해야 됩니다. 익숙한 물매 하나가 골리앗의 갑옷과 방패를 제압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상, 어떤 생각들도 성경으로 파할 수 있습니다. 어정쩡한 세상 지식으로 사람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오히려 성경에 능숙하여 영혼을 얻는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빌립은 비록 평신도였지만 성경에 능통함으로 에티오피아 내시를 넉넉히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 전도에 진력하자

 

다시 본 주제로 돌아와 결론을 맺습니다. 성령님은 빌립에게 에티오피아 내시 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전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내가 전도하는 한 사람이 장차 국가를 책임질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요즘 소망교회가 세상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대통령도 장관도 나왔기 때문에 쏟아지는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국가적인 인물들이 한 교회에서 배출된 것은 교회로서는 자랑스런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내가 전도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장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울처럼 사도 바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는 국가 재정을 담당한 왕의 최측근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서 즉시 세례를 받았습니다. 확실한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가 믿은 결과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 된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아마 그 내시가 왕을 전도하고, 왕은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겁니다. 그 결과 한 나라 전체가 주님을 믿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전도는 성령께 철저히 순종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모든 일이 그렀듯이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순종은 주님 나라의 법입니다. 순종할 때에 복음이 전해집니다. 순종할 때에 영혼이 변화되고 구원받습니다. 순종할 때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순종할 때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순종을 도덕률로 여기지 말고 생존이 달린 법으로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성경에 담겨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전하는 책입니다. 성경을 전해야 합니다. 성경 속의 예수님을 알리세요. 성경의 도덕적 교훈을 전하기 전에, 먼저 성경 속의 예수님을 전하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에 익숙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전문가가 되세요. 누가 물어도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느 성경에서 시작해도 결국은 예수님을 말할 수 있는 성경의 전문가가 되세요. 그래서 빌립처럼 한 영혼을 얻을 뿐만 아니라, 한 나라까지 구원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한 영혼을 위하여

행 8장 26~40절 / 이명규목사

지금부터 약 1세기전인 20세기 초에,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유태인을 마구 학살하고 있을 때, 독일에 한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중견사업가로서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유태인 학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사업가는 그 장면을 목격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태인은 마땅히 죽어야 할 민족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는 노인, 아이, 남자, 여자, 부모와 자식 가릴 것 없이 가스실로 들어가 울부짖으며 죽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말이 600만 명이지, 서울인구의 절반이 죽어갔던 것입니다.

독일인들은 유태인의 시체를 태우기 위해 시체 태우는 큰 공장을 몇 채씩 지어놓고, 그 공장을 24시간 가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은 감옥에서 가스실로 들어가 죽기 위해 1년, 2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독일인들이 온 유태인 가족을 벌거벗겨 가스실에 넣어 죽입니다. 그는, 유태인 어머니와 어린아이가 꼭 껴안고 죽어 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참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비참한 장면을 보고 유태인을 구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 당시 독일인 관리들이 타락해 있었기 때문에, 돈을 주면 가스실로 갈 유태인들을 구해 내어 다른 곳으로 피신시킬 수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 그가 구해낸 유태인 숫자만 해도 수백 명이 넘습니다. 그러나 그 수백 명을 구해낸 후, 그는 마침내 무일푼이 됩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그의 모든 재산을 다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지막 돈을 다 털어 유태인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 위해 기차를 태워서 떠나 보낸 후, 그는 선로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로를 터벅터벅 걸어오다가 무심코 자기의 손가락에 끼어진 금반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소리 칩니다. "내가 이것을 왜 끼고 있지? 이 금반지를 팔았더라면 한사람의 생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이것을 내가 왜 끼고 있지?" 하며 앉아서 통곡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쉰들러(Schindler)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Schindler's List)'는 이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쉰들러가 구해준 유태인들이 현재 폴란드에서 약 6,000명이 되어서, 자신들을 'Schindler's Jews(쉰들러의 유태인들)이라고 부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이야기입니까? 한 사람의 헌신이 수백 수천의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중요한 사명을 주셨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 가는 저 영혼들을 사망의 길에서 구해 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는 평화스런 나라입니다. 그 누구도 어느 지방 사람을 학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 가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보는 시각일 뿐, 한 사람만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분은 우리 나라,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바라보며, 히틀러 당시에 죽어갔던 유태인처럼 사망의 길로 다가가고 있는 이들을 안타까이 여기십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사망의 길에서 벗어난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는 일을 부탁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의 쉰들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저의 설교를 들으며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한 번 해 보세요. 나는 나의 '쉰들러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가?

당신이 대가를 지불하고 구해낸 영혼의 명단을 가지고 계십니까?

쉰들러는 자기 재산을 다 없애며 구해낸 수백 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그 후손들은 수천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당신의 리스트에 과연 누가 쓰여 있습니까? 몇 명이나 쓰여 있습니까? 당신으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십니까? 오늘 이것을 우리가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어떻게 영혼을 구원하는 사람이 되어 쉰들러처럼 죽어 가는 영혼을 구원해 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오늘 본문의 빌립을 통하여 몇 가지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먼저 죽어져 가는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사람 내시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각 순종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영혼의 필요를 볼 줄 압니다.

26-27절 말씀입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빌립은 지금 사마리아 성에서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빌립을 따르는 사람도 많아졌고, 표적과 능력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 빌립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지금 빌립이 가야할 그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입니다.

상식과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인간의 경험에 맞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도를 하려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하는데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은 사람이 없는 광야입니다. 그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이런 성령의 음성을 들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볼 때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이유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였지만 순종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빌립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광야인 가사로 내려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에디오피아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있는 내시를 만나게 됩니다.

그 때 성령께서 또 빌립에게 말씀합니다.

"바로 이 사람이다.! 이 병거로 가까이 가라"

빌립이 달려가서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복음을 전하여 이 사람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이 한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한 사람을 구원시키기 위해 빌립으로 하여금 한창 부흥하고 있고, 성공하고 있는 사마리아라는 사역지를 떠나게 하였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인 가사로 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구원받고 침례받아 빌립과 헤어지고 난 후 자기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로 성경에 그 내시는 다시 언급되지 않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디오피아 내시가 구원을 받고 고국에 돌아가서 자기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서 에디오피아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며 놀라운 것은 이로 인해 시편68:31절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시편68:31절은 예언적인 구절인데 이디오피아의 복음전파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만약 빌립이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늦장을 부렸다면 이 전도의 기회는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에 예언된 말씀이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축복의 기회를 놓쳤을 것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쓰임받기를 원하십니까?

그 사람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쓰임받는 축복을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깨어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119:60절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귀중한지 우리는 상상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놀라운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한 영혼이 구원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

2. 한 영혼을 향해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여야 한다.

 

빌립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데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였습니다.

30절 말씀을 보십시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39절에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기쁘게(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가사에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한 사람을 구원시키고 또 성령이 빌립을 인도하였을 때 빌립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가사에서 32Km 떨어진 아소도에서 여러성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고, 그리고 96Km를 복음을 전하며 여행하여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사도행전 21:8절에 보면 2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가이사랴에 살면서 전도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순종하기 어려운 조건들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고, 2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사역하였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분의 얼마나 적극적이고, 열정적입니까?

처음에는 열심이였는데 지금은 그 열심이 식었습니까?

전에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있었는데 지금은 식었습니까?

전에는 자원하는 심령으로 열정적으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일하였는데 지금은 그 열정이 식었습니까?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빼앗아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게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에게 있었고, 목자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는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영혼을 향한 적극적이고도 열정적인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쓴 Why not the best?』(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라는 글을 읽고 깊은 도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수십 년 전에 자기 교회의 전도집회를 10년 동안 참가했었다고 합니다. 매년마다 전도집회가 열렸는데 매년마다 14가정을 꼭 책임지고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0년 동안 그 전도집회에 참석했으니까 140가정을 전도한 것입니다. 매우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나는 10년 동안 140가정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예수 믿은 사람도 있다.'라는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66년도에 주지사로 출마를 하여 선거운동을 하였는데, 3개월 동안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악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주지사에 당선된 뒤 그의 마음에는 부끄러운 가책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위해서는 3개월에 30만 명을 만나보면서 하나님을 위하여서는 14 년 동안 겨우 140가정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니... 이것은 보통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카터 전 대통령이 느낀 가책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가책을 받아야할 부분은 없을까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온갖 정성과 열정을 다 쏟아 붓고, 없는 시간도 억지로라도 만들고, 돈도 아낌없이 쓰며 전력을 다 기울이면서,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잃은 양, 기회 놓치면 영원히 망할 수밖에 없는 그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는 시간도 별로 안 드리고, 돈도 안 쓰려고 하고 관심도 별로 기울이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 라는 말을 하기에는 참으로 부끄러운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한 희생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사랑이라는 나무는 희생을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가치가 천하보다 귀하고 하나님의 관심이 이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전도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슈테른베르크가 그린 유명한 예수님의 그림이 있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빌라도와 유대인들 앞에서 조롱을 받으면서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이 사람을 보라]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 밑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이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은 하버겔이 쓴 찬송가가 185장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주님의 은혜에 감동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이 구원을 받도록 조그마한 수고로부터 큰 희생에 이르기까지 값을 치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처럼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사랑과 열정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이 처럼 자기 자신 전부를 불태울 수 있는 열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날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구주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랑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두움에서 깨어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즐겁게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희생할 수 있는 사람되기를 바랍니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이렇게 적극적이고, 열정적이고, 희생적일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리라 믿습니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적극적이 됩시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열정적이고 희생적이 됩시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깨어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하고, 한 영혼을 위해 적극적이고, 열정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복음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3. 복음에 대해 알아야 한다.

 

빌립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에디오피아 네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이 주신 기회에 그 영혼을 구원받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에 대해 알았기 때문입니다.

35절 입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리켜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빌립이 가로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줄 믿노라.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오스왈드 수니프는 "언제 교회가 부흥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성도들로 인해 교회는 진정한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4:12절에 말씀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어떻게 우리를 통하여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복음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복음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베드로 전서 3;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우리와 사람들이 무슨 대화를 하든지 거기서 비롯하여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훈련하여야 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립을 통하여 세가지로 보았습니다.

첫째는 영적으로 깨어있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는 한 영혼을 향해 적극적이고,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복음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주위에 전도해야 할 영혼이 있습니까? 구원받아야 할 영혼이 있습니까? 빌립의 마음처럼 그 영혼을 구원하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적극적이고, 열정적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분명한 복음을 알고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 일을 해야 합니다.

 

1857년 10월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의 닝뽀(Ningpo)에서 일을 시작하여 니(Nyi)라는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기쁨에 넘쳐서 자기의 믿음을 남에게 나누어 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이 기쁜 소식을 얼마 전부터 알고 있었죠?"

영국은 수백년 전에 복음을 알았다는 것을 테일러는 고백하였다.

그러자 그는 "저의 아버지는 진리를 찾다가 돌아가셨어요. 좀 더 일찍 오시지 그랬어요!!"라고 말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가슴을 찌르는 그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안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 복음을 개인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습니까?

처음 예화를 통하여 말씀드린 것처럼 쉰들러에게는 쉰들러 리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을 통하여 구원받은 영혼들의 리스트가 있습니까?

지금부터 늦지 않습니다. 우리의 리스트를 만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야 합니다. 영혼에 대해 적극적이고 열정적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전도의 능력을 발휘하는 교회

윤창용목사 / 행 8:26-40

우리가 이용하는 어떤 건물이건 비상구가 있습니다. 비상구라는 것은 평상시에 이용하는 문으로 출입이 불가능할 때 이용하는 문이 비상구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씨랜드 어린이 참사'사건이나, '인천 호프집' 사건도 이 비상구라는 것이 없어서 대형 참사가 일어났던 불행하고도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광 교회가 한창 부흥회를 하고 있던 29일 군산에서 또 이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화재로 인해서 젊은 소녀들이 10명이나 질식해서 죽은 사건입니다. 이 사건 역시 비상구가 밖에서 잠겨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신문에서는 죽은 아가씨들이 남긴 메모를 기사화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메모에는 '비록 여기서 만났지만 술집 작부가 아닌 한 여자로 알아준 너한테 정말 고맙다고 생각해' 또 다른 것은 '오늘따라 집이 그립다. 희망 없는 미래, 앞으로 무엇에 의지하고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갈까.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한없는 퇴락과 육체적인 향락을 고집하는 이 사회가 도대체 젊은이들에게 지금 희망을 주고 있느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희망없는 젊은이들, 그리고 속절없이 닫힌 문 앞에서 절망하며 죽어야 했던 젊은이들을 보면서 언제까지 이런 일들을 접하면서 이 땅에서 살아야 할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비상구가 없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에겐 이 비상구가 없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서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말씀하셨고 구원에 이르는 문은 주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원에 이르는 비상구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인생의 비상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의 비상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살길이 있고, 누구든지 주 예수를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 교회가 할 일이 바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인생의 비상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 분을 믿어야만 살길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도 부릅니다. 자 그러면 이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된 것입니까? 그리고 전도의 열심은 어떻게 불이 붙기 시작한 것입니까?

예수라는 젊은 나사렛의 목수를 처형하고 난 뒤, 대제사장과 성전 당국자들은 아마 틀림없이 이제 한 시름을 놓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불명예스럽게 죽은 젊은 종교지도자 때문에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킬 여지는 없어졌고, 예수라는 젊은이가 죽으면서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흩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도 예수라는 이름을 들먹거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한 가지 사건으로 모두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소동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부활이라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의 부활로 대제사장과 성전 당국자들의 계산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에서는 "해를 받으신 후에 친히 사심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를 따르던 힘없고 무식한 무리들이 완전히 바꾸어졌습니다. 그때까지는 소극적이고 겁이 많았던 무리들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예수를 목숨 걸고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던 이들은 권능이 넘쳐흘렀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가는 길이 있다고 외쳤습니다.

전도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가 부활하셨다"라는 확고한 믿음과 확신속에서 전도의 불씨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전도의 능력을 발휘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선 우리 성도들이 부활에 소망에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선포했던 바로 오실 이가 예수였고, 하나님에 의해서 들림과 일으키심을 받으신 분이 예수이고, 그 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령이 각 사람에게 부어졌고, 그분과 연합하는 순간 죄사함과 새 시대의 축복들이 선포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불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새로운 종교적인 결사가 만들어졌고, 제자들이 모임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힘을 구축하게 된 데에는 "그 도", 즉 예수가 만들어 주신 신앙과 삶의 모습을 따르는 제자들의 능력이 일조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도" 란 영어로 하면 'The Way'입니다. 그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 길을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전도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예수의 부활이라는 촉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고 '우리도 부활한다' 굳은 믿음을 가진 이들이 그 부활을 증거하면서 전도는 폭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로 전도 폭발 훈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부활을 확신'하고 믿자 전도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빌립이라는 사람을 이제 살펴 볼 차례입니다. 빌립이 누구입니까? 한번에 3천명을 전도한 베드로와 같은 인물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유명한 전도자 바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12제자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는 교회내에서 구제와 봉사를 위해서 따로 세움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전도하는 일을 그에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보다 복음 전하는 일에 우선했습니다. 특히 그는 남들이 가지 않는 곳, 남들이 잘 만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서 전도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 5,6절을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 이렇게 성령충만해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빌립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셔서 지시하십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말 그대로 광야입니다. 예레미야 17장 6절 말씀을 보면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령이 지시가 광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상식으로 이해가 되질 않는 부분입니다. 전도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우리 교회 근처와 같은 곳이나, 집집을 찾아 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늘 구덕산 꼭대기로 올라가 그곳에서 전도하라고 명령하시면 아마 여러분들중 아마 열분 중에 아홉분은 그 명령이 잘못된 명령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을 보십시오. 27절에 보면 빌립은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가서' 라고 전합니다. 그 성령충만한 빌립은 그대로 그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에디오피아는 지금 못사는 나라 중에 하나이지만 그 옛날 영화를 누리던 나라였습니다. 우리 말로 내시이지 재경부 장관쯤 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런 분이 행차를 하면 보통 70여명이 수행을 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빌립에게 그 병거에 가까이 다가 가라고 하십니다. 잘못하면 첩자로 오인되어 죽기가 십상입니다.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라하니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 올라타라 하니 올라탑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전적으로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도 성령께서 주시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낯선 사람임에도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빌립은 병거에 올라타 에디오피아 재경부 장관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전도는 이렇게 낯선 사람에게 해야 합니다. 교회에 오셔서도 앉을 때에도 가까운 사람끼리 앉거나 친한 사람끼리 앉는 것보다는 가능하면 낯선 사람하고 앉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함께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마친 다음에는 인사를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체된 성도의 할 일입니다. 매주일 한 사람씩만 사귄다 해도 그것이 얼마입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친한 사람끼리만 똘똘 뭉쳐서 돌아갑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랑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심인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면 먼저 내 교회를 찾아 온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낯선 사람과 인사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군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원칙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과 자기 부정의 사람이 전도의 능력을 발휘하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빌립은 결코 자기의 목적이나 방법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기 일에 열성을 가지고 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천사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거를 타고 있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로 간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순종과 자기 부정, 이것이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두 번째는 전도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전도의 주체가 누구냐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라사대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하니 그 길은 광야라"(26절)"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광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에 빌립이 광야로 갑니다. 다시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29절)" 다음으로 "병거에 올라타라" "이 사람에게 전도하라" "세례를 주라"하고 거듭 명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주도하신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빌립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를 붙드시어 그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완전히 고용하시어 전도 사역에 쓰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내가 전도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 전도자는 누구냐 하면 바로 성령뿐이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에게 고용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단지 쓰일 뿐입니다.

우리의 자격이나 실력, 지식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사람을 쓰시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 온전히 우리를 주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이고, 성령님이 주도하는 전도가 능력을 발휘하는 전도입니다. 전도하실 때 우리의 말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 3장 6절 7절에서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은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말씀가운데 8절에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역사하실 때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제 전도의 능력을 발휘합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초대교회 성도들이 부활에 확신에 찼던 것처럼 여러분들이 그 도인 부활의 도를 전할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이 전도의 주체자임을 믿고 순종과 자기 부정을 통해서 전도의 물꼬를 확실히 트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복음을 듣고자 하는 이들이 도처에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전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고난받으신 메시아 예수님

행 8장 26~40절 / 성홍모목사

오늘은 인간을 구원하는 주의 복음이 유대라는 지역을 벗어나 아프리카로 전해지는 한 사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서만 전파되고 있을 때 한 사람 평신도에 의하여 사마리아 지역에도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전유물인 것 같은 복음이 사마리아에 들어가서 사마리아를 변화시키고, 다시 아프리카인에게 전파되어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쓰임 받은 사람이 바로 빌립이라는 평신도입니다. 이 분 빌립은 전문적인 성직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구제와 봉사의 일을 위하여 선택받은 집사님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사도에게만 주어진 사명이 아니라,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행8장에 보면 1-7장까지의 상황과 아주 다른 것을 봅니다. 1-7장까지는 사도 베드로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선교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8장에 와서는 평신도들의 활동이 두드러집니다. 이렇게 된 큰 원인은 스데반의 순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복음은 스데반의 장렬한 순교가 있은 후에 예루살렘 중심에서 유대 사마리아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여야 합니다.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선교 전략인 것입니다. 교회학자와 선교학자들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어떤 핍박도 받지 않았다고 하면 아직도 복음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끼리 어울리면서 재미있게 예수님을 믿느라고 타지역에 복음 전하는 것을 아직도 미루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사마리아에 어떻게 복음이 들어갔습니까? 살기 위하여 도망간 교인들이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라는 땅은 밟기도 싫은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피난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싫어하였고, 개나 돼지같이 여기고 있었기에 아무리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여야 하지만, 사마리아에 들어가서 잡아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멀리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왔지만, 사마리아에 들어가서 기독교인들을 잡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사마리아로 피신한 사람들은 깊은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곳 사마리아에 보내시는 것일까? 이렇게 박해를 피하여 사마리아에 들어온 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선교 전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1절 말씀에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했습니다. 4절의 말씀에도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복음 전하러 나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교인들을 흩어지게 하시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과 박해가 있습니까? 주의 복음을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빌립이라는 분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대단한 성과를 얻었습니다. 같은 집사인데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스데반이 죽는 순간에 달려가서 "무엇이 이단이냐?"라고 합세하여 증거 하다가 함께 죽었으면 좋은데, 비겁하지만, 사마리아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박해하는 현장에서 떠나지 않고 복음을 증거 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 우리 주님은 이 동리에서 핍박이 일어나면 다른 동리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하는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것을 살펴보면 선한 사람은 선한 동기에서 적극적으로 일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악한 동기에서 악한 도구로 소극적으로 일하고 간접적으로 일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전용하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나쁜 상황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지난주간에 어떤 글을 읽다보니 "선교사를 살린 귀한 보리죽"이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최전초 선교기지에서 봉사하던 한 여자 선교사가 위독한 병에 걸렸습니다.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다가 한 달 동안 선교비가 도착하지 않아 매일 보리죽과 깡통에 든 분유만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소홀히 대하지 않으시나 하며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를 한달 정도 지났는데 질병도 사라지고 건강이 회복되었고, 생활비도 다시 도착하여 식량을 구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후 안식년으로 귀국한 이 선교사는 교회에서 자기가 가장 힘들었던 경험을 간증하였습니다. 병에 들었지요, 선교비는 오지 않지요, 그렇게 어렵게 보낸 한 달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예배는 은혜스럽게 끝났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친절하게 보이는 한 교인이 다가와서 자기는 의사라고 하면서 선교사님이 고생한 질병과 증세에 대하여 자세히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의사인 교인이 말했습니다. "선교사님의 생활비가 제 때에 왔더라면 선교사님은 오늘 살아서 저와 대화를 하지 못했을 뻔하였습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 의사들은 그런 지독한 소화장애의 질병이라면 한달 정도 보리죽을 먹어야만 고칠 수 있다고 처방하는 것입니다." 그제야 그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자기를 돌보아주셨는가를 알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선교사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선교비를 막으시면서 가지고 있는 보리를 가지고 병을 고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고, 우리를 위한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핍박이라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고, 선한 일도 아니지만, 그러나 복음을 널리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흩어진다는 것은 그들이 원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피치 못한 상황아래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힘써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그렇게도 좋은 환경에서는 움직이지 않으니 하나님은 핍박이라는 초 강수를 두어 흩어놓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두려워 흩어지고 살려고 피하여 간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사마리아로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하신 일은 우리 사람들이 다 측량하지 못합니다. 사마리아에 와서 빌립 집사님은 성공적인 전도인의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귀신들렸던 사람들이 회복되고, 수많은 중풍병자들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마술사 시몬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여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와서 집회를 가지므로 사마리아 교회는 든든히 서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빌립을 그곳에 두시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고난받으신 메시아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먼저 빌립이라는 집사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에디오피아 내시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가장 중요한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그 사람"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집사 빌립

1) 그는 전도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별명이 생기기도 하고 붙여주기도 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 판자", 구약의 여로보암에게는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자" 이런 별명이 있는데, 빌립에게는 집사라는 말보다는 "전도자"라는 이름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빌립에게는 4명의 딸들이 있었는데 처녀로 다 예언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교회를 개척하신 전도자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요,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전도하였고, 그의 딸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하여 처녀로 예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 그는 집사로서 가장 모범적인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세계 여러 나라를 전도하고 돌아올 때 가이사랴에 있는 빌립의 집에서 묵어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전도자로, 집사의 직무에 충실하고 가정을 잘 이끌어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전도하다가 가이사랴에 정착하면서 가이사랴를 통하여 외국에 나가는 교인들이나 들어오는 교인들을 영접하면서 봉사하신 것입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행21:8)고 했습니다. 빌립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사도 바울 일행을 맞아들여 여러 날을 머물게 하였습니다. 며칠 간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여러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자세히 보면 아시아에서부터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10여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선교사 일행을 맞아들여 여러 날 묵어가게 하였으니 얼마나 잘 봉사하는 집사님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어른 10여명이 먹고 지내려고 하면 여간한 봉사정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3) 빌립은 성령에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복음전파를 위하여 부름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어떤 상황 하에서도 복음을 증언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성공적인 전도인으로 봉사하던 빌립에게 주의 사자가 말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길은 광야였습니다. 이제는 사마리아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살지도 아니하는 광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안주하고 안정된 가운데 목회에 전념할 수 있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안주하게 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라는 번화한 도시를 뒤로하고 광야로 보내고 있습니다. 복음 전파하는 사람에게 대도시는 황금어장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하고 싶은 프로그램도 가질 수 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전도하기에 더 좋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 아직 사마리아 교회는 할 일도 많고, 교인들은 어린 교인들인데, 가기를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라고 항의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 광야로 가라니요, 광야로 가서 도대체 무엇을 한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한마디쯤 해볼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광야로 갑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아멘, 순종합니다.

가사로 내려가는 길에 갔더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주의 성령은 빌립에게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외국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은 좀 어색한 일인데, 빌립은 그 내시에게 달려가서 그가 무엇을 읽는지 들은 것입니다. 빌립이 말을 붙였습니다. "읽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까?" 내시가 대답하였습니다.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고 하였습니다.

빌립 집사님은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헬라파의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언어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습니다. 당시 세계적인 언어는 헬라어였기 때문입니다. 에디오피의 국고를 맡은 내시도 헬라어를 사용했고, 빌립도 헬라어를 사용하므로 언어소통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빌립은 타 문화권 전도에 불편을 느끼지 않을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나기를 타 문화권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기에 헬라어를 잘하면서 히브리어도 잘 하였습니다.

2. 에디오피아의 내시

1) 그는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드리고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에디오피아의 내시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이 내시는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에디오피아가 어디 있는 나라입니까?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먼 곳에서 예루살렘을 다녀가는데, 왜 다녀가는 것입니까? 이 사람이 한가한 사람은 아닌 것이 한 나라의 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라고 하면 옛날에는 왕실에서 전국을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나라의 살림을 다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재무장관을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에디오피아 사람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고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혼자 여행하지 않고, 많게는 수십 명, 적게는 10여명의 경호원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에디오피아라는 나라는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입니다. 나일강 상류지방의 넓은 지역으로 옛날 구스 족속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역사상으로 나일강 상류 지방에는 메로에와 나바다라는 두 개의 왕국이 있었는데 메로에 왕국은 '간다게'라고 불리는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에디오피아라는 나라는 구약에서 스바라는 나라로 이 나라는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가 유대나라의 솔로몬 왕을 방문하고 돌아가서 유대나라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많은 왕실의 사람들이 유대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왕의 후손들은 솔로몬의 후예라고 했습니다.

내시라는 말은 그가 성 불구자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 불구자는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러한 자세한 규정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고, 이방인의 뜰에 와서 기도하고 돌아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어쨌든 이방인이 예배하러왔다가 간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른 것보다 예배하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모임인 것입니다. 예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악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용서해주고 자녀로 삼아주시는 하나님 앞에 보답하고 하나님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감사와 찬양으로 그를 기쁘시게 하며, 위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통로입니다. 우리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십니까? 우리는 그 하나님에게 무엇을 드리며,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어떻게 살아갈 것입니까? 이러한 결단은 바로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헉스터블]이라는 예배학자는 "기독교 예배란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대화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글러](Franklin Segler) 교수는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이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은혜 받고 소생하고 새 힘을 얻으며,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바쳐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예배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24)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와 은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예배드리는데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산 제물이라는 심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내가 드려지지 아니하고 예배를 보고 돌아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제물이 되고, 우리들 자신이 헌신을 결단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보고 가시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2) 이 내시는 돌아가면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말씀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그가 수레를 타고 돌아가는 힘든 여행길인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당시 널리 보급된 70인역이라는 헬라어 성경이었습니다. 구약 시대 랍비들의 교훈은 여행 중에 동무가 없으면 율법을 연구하라고 하였고, 율법은 소리내어 읽어야 잊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여행 중에라도 성경을 읽기 위하여 시간을 내고, 하루 일과 중에라도 시간을 내어 성경을 읽어야 여러분의 영혼이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금 성경 공부반을 개편하여 주일에 한 시간 성경을 배우려고 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상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 고난받으신 메시아, 예수님을 모시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의 시간이라고 생각하시고 성경공부에 참여하셔야 합니다.

3. 고난받으신 메시아 예수님

내시가 읽고 있는 성경은 구약 이사야서 53장 7-8이었습니다. 2월 달의 성경 암송 구절이 이사야 53:6절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 구절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하였으리요" 이런 말씀인데 헬라어 성경 중에 자유스럽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내시가 묻습니다.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은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가르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는데,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죽으신 그 분은 과연 누구입니까?

지금도 유대인들은 오늘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 메시아를 말할 때마다 곤혹스러워 한다고 합니다. 정말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예수님의 사역을 가리키고 있고, 한 말씀도 틀림없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이사야 53장을 읽는 것조차 꺼리고 있다면 문제가 나도 단단히 난 사람들입니다.

브라질에는 [솔로몬 긴스버그]라는 이름의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유대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랍비였습니다. 솔로몬 긴스버그는 폴란드에서 랍비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폴란드에게서 보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읽다가 "아버지 이 성경에서 '저'라는 분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어린 아들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아 들고 뺨을 때렸습니다. 왜 맞는지도 모르는 채 맞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영국에서 공부하다가 유대인 한 분을 만났는데 그는 기독교를 믿고 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분을 통하여 이사야 53장의 예언하신 고난받은 종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것을 놓고 성경을 읽어보니 모든 성경이 바로 예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선교사가 되어 브라질을 복음화 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의 신앙을 한번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아니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를 모시고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 주님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생명이라는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모시면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빌립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러 세례를 받았습니다. 빌립은 내시의 신앙을 확인하고 세례를 주고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여러 도시를 다니면 전도하였고, 내시는 기쁜 마음으로 길을 가므로 다시는 빌립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두 분 모두 오직 예수만을 증거하고 예수님만으로 만족하고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으로 아름다운 광야교회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성령 충만한 지도자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결단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을 예배하고 말씀 중심의 교회요, 성령이 충만한 교회요, 성경공부로 성숙한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사람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 내시는 고국에 돌아가서 기독교회를 설립하고 구약 성경을 통하여 메시아를 증거 하는 유명한 에디오피아 정교회를 교회를 설립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하여 3000명을 회개시키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이렇게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그로 인하여 위대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빌립이라는 아주 귀한 성도도 본받아야 하고, 구스 내시와 같은 열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열심을 배워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성도들, 말씀 중심의 신앙과, 성령 충만한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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