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가르침
행 8:26-40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 설 교 >
전하자, 예수!
박신진목사 / 행 8:34-40
오늘도 또 한번의 전도설교를 전한다. 요한 15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복음을 전하는 것은 씨를 뿌려 곡식을 거두는 것과 같다. 열매가 있어야 다음 세대로 계속 번식해간다. 사과나무 한 그루가 열매를 맺어서 다 따 먹고는 다음에 씨와 종묘를 심지 않는다면 몇 해 지나서 사과나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질 것이다.
우리나라도 지금 인구문제가 심각한데, 세계 모든 사람이 한 세대 동안 자녀 낳기를 중지한다면, 세상에서 인간이란 종자가 없어지는 데 50년이면 족할 것이다. 전도는 교회를 생존하게 하고 인류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목적이며, 예수께서 친히 전도의 모범을 보이셨고, 또 명령하신 것이다.
전도할 생각
오늘은 빌립이 에티오피아 한 내관에게 복음을 전한 이야기를 읽었다. 이보다 조금 앞서 행전 8:4-7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그 말을 따랐는데,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자가 나았다. 빌립은 복음을 전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마리아에서도 온 힘을 다해 전도했을 뿐 아니라, 더 멀리까지 가서 전도할 생각뿐이었던 것 같다. 마음속에서 성령이 자꾸 어떤 생각을 주시는데, 전도하기 위해서 광야로 나가라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바닷가 고을인 가사라는 도성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에티오피아 내관을 만나 전도하였다.
여러분! 생각이 중요하다. 어떤 생각을 자꾸 하면 결국 그 행동을 하게 되고, 그런 행동을 반복해서 하다보면 그런 사람이 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7-8) 가룟 유다에게 예수를 팔 생각을 마귀가 집어넣었다. 그 결과 예수를 팔았고, 가룟 유다는 파멸의 인생길로 가고 말았다. 자꾸 먹을 생각, 타락에 빠질 생각, 거짓말 할 생각과 같은 육의 생각만 하고 있으면 죄짓게 되고 실수하기 쉽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생각을 묻는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여러분은 이번 주간에 전도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인물 중 하나는 길선주 목사님이다. 길선주는 기도할 때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목사님은 기도할 때 고개를 흔드십니까?” 물었더니 기도할 때 불신앙의 생각이 자꾸 들어오고 나쁜 생각이 스쳐가서 나쁜 생각이 물러가라고 고개를 흔든다고 했단다. 새벽기도 때 보면 참석한 성도들이 찬송을 잘 하지 않는다. 찬송은 최선을 다해 소리를 내고, 곡의 의미와 가사를 음미하면서 불러야 한다. 그렇게 나를 드리며 찬송을 부를 때 예수님 생각을 하면, 걱정과 염려가 사라진다. 예배드릴 때는 전심을 다하여 예수를 생각하라! 찬송 부르고 기도할 때 다른 생각, 잡념이 다 사라지고 예수님 생각으로 가득 차서 찬송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가득 차서 기도해야 한다.
에디오피아 여왕의 관리에게 전한 예수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북부 이집트 옆에 있는 나라다. 아프리카 중 거의 유일한 복음화된 나라가 에티오피아다. 구약에서는 구스라고 불렀다. 6.25 연합국 측 16개 참전국 중 한 나라가 에티오피아다. 2차대전 때 유대인을 보호한 나라로도 유명하다. 독일의 나치 정권이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할 때 피난처를 제공했던 나라다. 북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슬람화되었는데 에티오피아만 이슬람화되지 않았다. 남쪽 지방은 8-90%가 크리스천인 나라가 에티오피아다.
2천 년 전에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관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본문은 얘기해준다. 한 사람이 전도할 생각으로 가득해서 에티오피아에서 말씀을 들으려고 왔던 내관에게 복음을 전한 사건이 아프리카의 복음지도를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 내시의 이름이 나타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를 믿어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 전도자 빌립의 해석을 통하여 기독교를 접하게 되어 복음으로 구원받은 이방인이 된 것이다.
에티오피아 내관은 1,500km나 되는 거리를 마차로 왔다! 아마 속도로 보아 한 달은 걸렸을 것이다. 홍해바다 해변을 거쳐 광야지대를 돌아서 지중해변 가사를 지나 중간 산지로 접어들어 예루살렘으로 왔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사모하여 유대의 3대 절기 중 하나를 지킨 에티오피아의 토착 유대교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그는 겸손하고 진실한 이방인 출신 유대교 신자였다. 그러나 구원 얻는 완전한 도리, 진짜 복음을 접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26-28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란 왕의 어머니로서 왕실의 재산과 국가 살림을 돌보는 대왕대비를 가리키는 직함이었다. 간다게의 내관은 최고권력 다음 정도의 위치였다. 굉장한 실권자였다. 아마 권력과 사람을 가진 인물로서 공허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구약의 말씀으로 채우려 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텅 빈 공간을 만들었다. 이 공간은 어느 것으로도 채우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다.” 파스칼의 말이다. 지금 시장과 거리, 집과 학교에 열심히 살고있는 모든 사람들도 다 파스칼이 말한 그 존재의 공간을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해 애쓰고 있다. 권력으로도, 돈으로도, 쾌락으로도 채우지 못한다. 에티오피아 고관이었던 이 사람도 그런 갈급함을 가지고 먼먼 길을 돌아 예루살렘까지 갔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에 정식으로 들어오지도 못해, 이방인의 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달 동안 마차를 타고 절기를 지키러 갔으나, 이방인의 뜰에서 예배를 구경하듯이 하고 말았다. 그래서 펴서 읽은 것이 바로 이사야서였다.
예수의 복음
빌립은 내관이 이사야의 말씀을 읽는 목소리를 듣고 다가갔다.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34-35절) 에티오피아 관리는 궁금했다. 여기 메시아가 누구인가? 빌립이 가르쳐 주었다. “그 메시아는 나사렛 예수다! 예수가 바로 여기 예언된 그 메시아시다.” 내관은 처음 배우는 말씀을 겸손한 자세로 배웠다. 빌립은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 빈부 유무식을 막론하고 예부터 지금까지 겸손한 사람이 지혜를 얻는다. 낮은 자세로 엎드릴 때 진리를 발견하는 길을 찾는다.
빌립은 성경의 모든 내용이 예수를 전한 것임을 증언하였다. 지금 여기서 간다게의 내관이 보고 있던 성경은 바로 <고난받는 종의 노래>로서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종이 고난 당하는,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는 말씀이다. 빌립은 이 구절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였다고 36절은 말한다. 여러분! 말씀이 구원해준다! 예수가 답이다.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다! 사실 우리의 의문과 고민과 수많은 생각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있다. 백문일답! 질문은 백 가지라도 답은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36-39절) 예수가 누구인가? 온 세상을 구원하는 주님이시다! 예수님을 알면 영혼의 공허함, 파스칼이 말하는 존재의 ‘텅 빈 공간’이 채워진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영혼의 문제가 해결된다. 예수를 만나면 심지어 정치, 경제, 자녀교육, 질병과 죽음의 문제도 해결된다.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인생문제에 답이 되시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 관리는 주저하지 않았다. 역시 오래된 나라의 고관이라 결단하는 것이 빨랐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이요 생명이라 생각하면 주저할 필요가 없다! 믿음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 예수님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믿음은 그 깨달음을 실행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내시는 주저없이 결단을 내린다. 간다게 여왕의 내관은 바로 마차에서 내려 빌립을 통하여 세례를 받았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본대로 들은대로 행하였다.
지금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같은 심리적인 문제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는가? 더욱 예수님을 굳게 붙드시기 바란다. 술 중독으로 매일 생활이 힘들다면 지금 끊으면 된다. 담배나 중독이 건강을 해치고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면 오늘부터 내려놓으면 된다. 가족 중에 교회를 나올까 말까 오랫동안 망설이며 뜸을 들이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오늘, 지금 교회로 나오도록 인도하라! 세례를 받을 것을 고민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가장 가까운 절기에 세례받고 하늘나라 백성으로 결단하기를 바란다. 예수가 길이다, 예수가 답이다! 지금 결단하여 예수와 함께 살아가라!!
삼척에서 지금 복음 전해야 하는 이유
예수가 능력이요, 답이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인생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있다. 지난 주간에도 우리 믿음의 가족 가운데, 그렇잖아도 아파서 힘든데 그 위에 또 다쳐서 병원에 입원한 사람, 아직 젊은데 인생의 모든 부분이 다 꼬여서 어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하는 사람, 너무 오래 아파서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재미가 없고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중독이나 어려운 인생 문제에 매여서 인생이 진창에 빠져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예수를 전해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브루클린 태버너클교회 짐 심발라 목사님, 유명한 교회다. 그분의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느 여름 주일 오후예배 때였다. 오후에 찬양예배로 드리는데, 먼저 30분 찬양을 하고, 그 다음에 헌금을 하고, 그 다음에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예배를 마치는 순서다. 그날도 찬양팀이 나와서 찬양을 인도하고 있었다. 찬양을 드리는 중 찬양 가사 가운데 심발라 목사님의 영혼을 건드리는 은혜스러운 가사가 있었다. 거기서 감동을 받아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때 마음속에서 성령께서 자꾸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은혜받은 찬송가 가사를 가지고 지금 빨리 말씀을 먼저 전해라, 그리고 나서 찬양하라는 것이었다. 항상 30분 먼저 찬양하고 헌금하고 나서 설교를 했는데, 갑자기 나가면 당황할 것 같다고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재촉하셨다고 한다. 나가서 먼저 설교하라! 그러면 찬양팀이 상처받을 텐데. 그러면서 성령님 알아서 하시라고 맡기고 나가 설교를 먼저 했다. 그랬더니 뒤에 앉아있던 사모님도 당황하고 찬양팀도 목사님이 실수했나 하고 당황하였다. 어쨌든 그날 그렇게 마음에 감동이 생겨서 짐 심발라 목사님이 예배순서를 바꾸어서 예배를 드리고 지나갔다.
그리고 한 주간이 지났을 때 텍사스에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내용은, 부부와 19세 아들이 오랜만에 뉴욕 여행을 갔다는 것이다. 그 가정은 믿는 가정이었는데, 19세 아들이 빗나가서 하나님께 대해 부정적인 마음이 강했다. 그런 아들을 데리고 뉴욕 여행을 갔는데, 이왕 뉴욕까지 왔으니 그 유명한 브루클린 태버너클교회에 가서 오후예배에 참석하자고 하여 같이 예배드리게 된 것이다. 와서 보니 찬양하고 목사님 설교하고 끝나는 시간이 비행기 타는 시간과 겹쳐서 늦을 것 같았다고 한다. 결국 설교는 못 듣고 찬양만 하다가 가야 할 상황이어서 안타까웠던 때였다. 그런데 찬양 중간에 갑자기 목사님이 나와 설교를 했다는 것이다. 그 설교에 아들이 은혜를 받았다. 그 교회는 설교 후 결단에의 요청(After Call이라고 하는)이 있는데, 아들이 손을 들고는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가서 믿음으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부르신다. 지금 하나님이 부르시고 도우시고 일하심을 믿으라! 왜 우리가 여기서 나가 복음 전해야 하느냐?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가 생명이요 능력이요 길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복음 전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랭던 길키는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미국 하버드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부모님도 시카고대학 교수였던 명문 가정의 수재 아들이었다. 젊은 길키는 중국에 영어 교사로 가있었다. 그는 믿음 없는 인본주의자였다. 인간은 이성과 도덕으로, 양심으로 바로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또 그가 그런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굳이 종교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중국에서 영어선생으로 일하다가 일본군에 포로잡혀갔다. 그리고 산동 수용소에서 2년 반을 포로생활을 했다.
당시 산동 수용소에는 약 2천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곳 환경이 얼마나 열악하였으면, 그곳은 사느냐 죽느냐 갈림길의 공간이었다. 빵 하나를 놓고도 살기 위해 머리가 터지면서 싸웠다고 한다.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싸웠다. 인간이 죽고사는 한계상황에 이르자 다 이기주의자가 되고, 다 도둑이 되고, 다 못된 사람들이 되는 것을 보여주더라는 것이다. 거기서 랭던 길키는 인간이 참으로 악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전에는 인간이 믿을 만하고 선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인생의 깊은 곳에서 부딪혀보니까 인간이 악한 존재더라는 것이다. 그곳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공통점은 모두가 악하다는 사실이었다. 살기 위해 악해졌다.
그런데 거기 길키에게 충격을 준 한 사람이 있었다. 에릭 리델이라는 사람이었다. 영화 <불의 전차>주인공이 바로 그 사람인데, 원래 영국 100m 달리기 신기록을 가진 운동선수다. 그는 1924년도 하계올림픽에 출전하였다. 그런데 100m 결승전 날이 주일이었다. 그는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출전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영국에서 난리가 났다. “미쳤냐, 믿음도 좋지만 어떻게 그렇게 꽉 막힐 수가 있느냐?” 세계 기록을 가진 영국 선수가 금메달을 조국에 바칠 기회인데 주일 성수를 위해 포기하다니! 리델은 끝까지 출전하지 않았고, 다행히 친구가 대신 출전하여 금메달을 땄다. 그후에 에릭 리델은 400m 경기에 출전해서 주종목이 아니었지만 예상을 뒤엎고 금메달을 땄다. 이 일 후에 에릭 리델은 중국선교사로 갔다. 거기서 일본군에게 잡혀 산동 수용소에 갇혔고, 거기서 길키와 만난 것이다.
길키가 볼 때 모든 사람들은 그 수용소의 한계상황에서 다 짐승 같았다. 다 이기적이고 포악했다. 아무에게도 도덕적 양심은 없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다. 그런데 유독 에릭 리델은 달랐다고 한다. 그는 남에게 양보할 줄 알고, 삶 자체를 사랑하고, 내면에 평화가 있었다. 그 수용소에서도 유머를 구사하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에릭 리델은 산동 수용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서 죽었다. 랭던 길키는 수용소에서 풀려나는데, 그 후에 다르게 산다. 그것은 에릭 리델이 믿었던 예수님을 자기 인생에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미국에 돌아와서 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후 시카고대학에서 교수로 지낸다. 그가 쓴 책이 <산동 수용소>이다.
우리에게는 예수가 필요하다! 지금 전하자! 사람들을 탓하지 말고, 그들에게 예수를 전하자!
예수를 가르친 복음
이성희목사 / 욥 21:22-25, 행 8:34-36
서론
유대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철이 들 무렵, 성경을 펼치고 성경에 꿀을 떨어트립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성경에 입을 맞추도록 합니다. 이 책이 달다는 것을 가르치는 의식입니다. 시편 119:103에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일찍부터 가르치기 위한 그들만의 방법입니다.
‘쉐마’란 말은 ‘들으라’라는 뜻의 히브리말입니다. 신명기 6장의 “이스라엘아 들으라”라는 말에서 유래된 유대인의 교육을 일컫습니다. 2천년 동안 세계 곳곳에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과 탈무드 학습을 2세들에게 꾸준히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세계인구의 0.2%에 불과한 유대인이 노벨상 수상자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전체 변호사 70만 명 중 20%인 14만 명이 유대인입니다. 미국의 400대 재벌 가운데 23%가 유대인입니다. 미국의 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프린스턴 등 일류대학교의 교수진 30%가 유대인입니다. 미국의 5대 메이저 식량회사 가운데 3개가 유대인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7개 메이저 석유회사 가운데 6개가 유대인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쉐마’를 가르친 결과, 세계를 지배하는 사상과 엄청난 힘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매일 ‘비르카트 하드’라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이 기도문에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교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교사로 묘사하여 매일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로마서 12:7에는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라고 하여 가르치는 자를 교회의 직분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11에는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라고 하여 초대교회의 중요한 직분 가운데 교사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가르치는 일을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교사는 사도, 예언자와 더불어 초대교회의 ‘보편적 직분’이었습니다. ‘보편적 직분’이란 어느 교회에 가든지 그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직분이었습니다. 그만큼 그 직책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사가 당시에 왜 ‘보편적 직분’이었겠습니까? 당시에는 ‘예수가 누구신가?’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하신 메시야, 우리의 구원자란 사실을 믿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였기에 ‘보편적 직분’으로 어느 교회에 가든지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루터와 칼뱅 같은 개혁자들은 진실된 교회를 표시하는 몇 가지 특징을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가르치고 설교하는 교회입니다. 둘째는 성례전에 대해 올바르게 관리하는 교회입니다. 셋째는 교회의 치리를 올바르게 행사하는 교회입니다.
좋은 교회는 잘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무엇을 가르칩니까? 성경을 가르칩니다. 성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잘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이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갔다가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만나 전도하는 장면입니다. 내시는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라고 합니다. 이 말은 ‘순례로 왔다가’라는 뜻입니다. 이 내시는 순례하러 예루살렘에까지 왔다 갈만큼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수레를 타고 가면서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수레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다는 것은 신앙이 큰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읽고 있었지만 성경의 내용을 모르고 읽기만 했습니다. 이사야 53:7-8의 말씀은 고난의 종 메시야를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면 구약을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구약을 봐야 구약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수레에 올라 예수님을 가르쳤습니다. 복음을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님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첫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35에는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라고 합니다. 빌립이 가르친 것은 이사야의 예수님입니다. 이사야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내시는 빌립에게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예언된 고난의 종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한 것은 진지하고 정중한 태도입니다. 내시는 열심히 성경을 읽고 탐구하였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성경을 읽었기에 선지자가 말한 것이 누군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고난의 종이 이사야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므낫세 왕에게 많은 고난을 당한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람의 말로, 문학서적으로, 철학서적으로, 역사서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아도 예수님이 없이 보면 성경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성 예로니모는 “성경에 대한 무식은 그리스도께 대한 무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과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성경을 읽고 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면 성경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모순을 찾기 위해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다가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한 경우를 적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벤허’의 작가 루 월리스가 그런 경우입니다. 구약만 읽고 믿고 있다가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한 유대인 목사들이 요즘에는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은 그리스도가 누우신 구유이다”, “성경은 우리 주 그리스도가 입으신 옷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과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없이 성경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구약 신약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빌립은 이사야의 글에서 예수님을 가르쳤습니다. 이사야 53장은 고난의 종으로 오신 메시야의 장입니다. 구약이 신약을 말합니다. 구약이 이미 오실 메시야, 오실 그리스도를 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을 사도행전 21:8에서는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전도자 빌립”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사도들이 과부들의 구제를 위해 택한 집사 중의 한 사람이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입니다. 그의 신분이 집사든 전도자든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성경의 지식입니다.
구약의 예언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말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초대교회에 왜 ‘교사’가 중요한 직책이었나 하면 당시인들이 함께 살았고 목격했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선포’와 ‘가르침’은 복음서에 함께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 5:2)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선포(케리그마)와 가르침(디다케)을 구분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학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은 선포이고, 이것은 가르침이다”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선포와 가르침은 동시에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드(C. H. Dodd)와 같이 엄밀히 구분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보면 선포보다 가르침이 훨씬 많습니다.
디모데전서 4:13에는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디모데에게 권합니다. 디도서 2:3에는 “늙은 여자로는...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라고 합니다. 삶으로, 말로 가르쳐야 합니다. 복음은 먼저 내가 알아야 하고,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잘 가르쳐야 합니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6에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여 가르침을 강조합니다.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신앙적으로 함께 해야 성경을 바르게 학습할 수 있고, 좋은 성경 학습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함께 하지 못하면 성경은 학습하지 못합니다.
종교를 떠난 미국인이 2012년-2014년 사이에 750만 명이나 급증하였습니다. 보다 많은 미국인들이 ‘비종교’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종교를 선호하느냐’라는 설문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1/4이 ‘관심이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교회에 가본 적이 없는 미국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의 35%인 1/3 가량이 예배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이런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36에는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9:22에는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가르쳐야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야 성경을 바르게 알 수 있고, 복음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복음을 받은 증거는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36에는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라고 합니다. 세례의 조건은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세례 받기를 제안한 자는 빌립이 아니라 내시였습니다. 내시는 성경이라고는 구약밖에 몰랐습니다. 내시가 신약인 예수님에 대하여는 처음 들었습니다. 구약에는 세례가 없습니다. 아마 빌립이 예수님을 가르칠 때에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실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빌립은 개종을 권했을 것이고, 내시는 예수님을 믿게 되고 세례를 받고자 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8:38에는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라고 합니다. 내시가 세례를 받은 증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구원 받은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았으면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성령으로 받는 것이 중요하지만 물로 세례를 받는 형식도 중요합니다. 어느 하나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6에는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자기 죄를 자복하는 자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회개가 세례의 조건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예식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세례를 받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께 마태복음 3:17에는 말씀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특히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장면은 지상에서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회동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성자는 물 위에 서 계시고, 성령님은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셨습니다. 이렇듯 우리들의 세례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마가복음 16:16에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세례는 구원의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꼭 남기고 싶은 말씀도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1에는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 처음 교회가 설립될 때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하루에 3,000명이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엄청난 교회의 성장입니다.
사도행전 19:5에는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라고 합니다. 바울이 예수를 전하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듣고 믿은 사람들은 다 세례를 받습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이며 복음의 힘입니다.
알메니안 정교회 신학자인 구로이안은 “물은 창조의 피이다. 우리 몸의 팔십 퍼센트가 물이다. 물은 또한 세례의 근본요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물은 창조의 피로 세례 받기에 가장 접합한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물은 투명하므로 빛을 받아드릴 수 있다. 그리고 물은 믿음의 서약이므로 마땅히 세례에 사용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첫째는 물은 씻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를 다 씻는다는 상징입니다. 둘째는 물에 넣을 때 죽고 다시 나올 때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세례는 죄를 깨끗하게 씻는 의미가 있고, 이전에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갈라디아서 3:27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합니다.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와 합하게 됩니다. 하나가 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예식 즉 그리스도와의 혼인예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정결한 신부인 우리가 영원한 혼인을 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장군 윌리엄 넬슨은 켄터키 전투 등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장군입니다. 전쟁에서는 승리하였지만 사소한 말다툼 끝에 가슴에 총을 맞았습니다.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았지만 사소한 말다툼은 그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입니다. 그는 총에 맞은 다음 병사들에게 달려가서 “목사님을 불러주게. 세례를 받고 싶네”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 없었습니다. 이때 넬슨 장군이 로버트 리 장군을 생각했겠습니까? 의사가 와서 도와주기를 바랐겠습니까? 그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세례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영원을 준비하려는 마음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 목사님을 불러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의 미래, 영원을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두 생일이 있습니다. 태어난 날과 자신이 세례를 받고 이름을 받은 날(named day)입니다. 가톨릭이나 정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을 때에 세례명을 주기 때문에 세례 받는 날을 ‘이름을 받은 날’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세례 받은 날을 기억하시나요? 세례 받는 날은 하나님의 자녀 된 날, 구원받은 날, 참 이름을 받은 날입니다. 이 날을 꼭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첫째 생일 보다 둘째 생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뜻대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첫째 생일은 둘째 생일 보다 의미가 없습니다. 둘째 생일은 내 의지와 신앙고백으로 다시 태어난 날이기에 중요한 날입니다.
사도행전 2:38에는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세례를 꼭 받아야 합니다.
결론
약 170만 명의 교인을 가진 미국장로교회(PCUSA)는 지난 3월 17일 동성결혼을 완전히 합법화하여 미국에서 동성결혼을 수용한 가장 큰 교단이 되었습니다. 우리 총회에서는 제가 만든 동성결혼 철회와 허용할 때에 우리 총회와 관계를 단절한다는 헌의안을 보냈지만 결국 동성결혼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그 외의 미국의 많은 교단들 가운데 동성결혼 지지가 급상승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백인 주류 교단들은 10년 전에 비하여 30% 이상 동성결혼 지지가 늘었습니다. 이런 비성경적인 움직임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심지어 한국교회 안에도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성직자, 성도가 있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돌아오는 6월에 서울광장에서 ‘퀴어 축제’를 엽니다. ‘퀴어’란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지금 이를 반대하는 기독교계의 항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런 일에 반대는 개신교만 합니다. 다른 종교는 동성애에 대하여 간접적인 찬성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크리스천 가운데도 이를 옹호하고, 찬성하고, 심지어 동성애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대로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고, 세례를 받을 때에 정결케 하는 샘에 푹 잠겨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 28:19-20에는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도의 ‘대 명령’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잘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것이 복음전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주신 대 명령입니다. 당시의 제자들에게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신 대 명령입니다. 예수님을 잘 가르치고, 가르친 사람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이 시대에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그 일을 실천하는 복음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양향모목사 / 행 8:36-40
빌립이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를 드리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수레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를 통하여 빌립을 그 장소로 내려가라고 하셨고 성령님께서 수레로 가까이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내시가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그 본문이 마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언한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이었습니다. 빌립이 가서 그 읽고 있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모른다고 했습니다. 빌립이 그 성경에서 예수님을 가르쳐주고 복음을 전했더니 그가 진리를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본문이 계속됩니다. 길을 가다가 보니까 물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내시가 말을 합니다.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내가 세례 받는데 누가 방해를 허거나 받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37절은 “없음”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본에 37절이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본에는 37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대어 성경과 킹제임스 영어성경에는 이 구절을 넣어서 변역하고 있는데 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립이 그에게 ‘당신이 진심으로 믿는다면 받을 수 있습니다.’ 하자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내가 믿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실은 이 구절이 들어가야 문맥이 맞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예수님을 믿는가를 확인해야 하고 공적으로 고백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시의 신앙고백을 확인한 빌립은 물로 내려가서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세례를 베풀고 물에서 올라왔는데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고 가버렸고 내시는 자기 가던 길로 기쁘게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엄청난 것을 가르쳐 준 빌립이나 엄청난 것을 배우고 엄청난 것을 얻은 내시의 이별 장면치고는 뭔가 좀 허접합니다.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든지 주소라도 서로 주고받든지 좀 진지하게 인사를 하고 헤어져야 할 일인데 그냥 서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갈 길로 가버린 것입니다.
이런 본문 말씀을 가지고 “내가 세례 받는데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례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세례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밥티조((βαπτίζω)라고 합니다. 이 말에서 영어의 baptize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물에 담근다는 뜻으로 “세례를 베풀다”라는 말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뜻은 ‘담그다’라는 말 외에 ‘씻다’, ‘끼얹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담그거나 끼얹어서 깨끗하게 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 장로교에서는 끼얹어서 깨끗하게 하다라는 말을 중심으로 세례라는 말로 쓰고 침례교에서는 담가서 깨끗하게 하다는 말을 중심으로 세례라는 말 대신 침례라는 말을 씁니다.
세례를 받을 때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느냐 장로교처럼 물을 찍어 바르면서 받느냐는 별로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형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세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세례를 받는 것이며 서례를 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세례를 받을 수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구약시대의 세례는 정결의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제사를 드리러 갈 때 몸을 깨끗이 씻고 나아가는 정결의식의 하나였습니다. 몸만 씻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죄도 씻어 내고 하나님께 나아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 세례는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나라를 맞이하기 위해서 회개하고 준비하게 하는 세례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완전한 세례가 아니라 준비단계의 세례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다시 완전한 세례를 받게 됩니다.
1)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죄 사함의 표시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다는 의미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인 예수님께서 나의 죄 대신십자가에 죽어주셨음을 믿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용서를 받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해 주십니다. 세례를 베풀기 전에 예수님을 믿는가를 확인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공식적으로 시인을 하게 하는 것은 그 믿음이 있어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자체가 죄를 씻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 고백하는 그 신앙고백이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사해주는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하여 죄 사함을 받은 사람에게 그것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우리의 죄가 다 사해지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고백하고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예식입니다.
2) 세례는 신분의 변화를 나타내는 예식입니다.
세례는 단순히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나타내는 단어인 헬라어에 밥티조(βαπτίζω)라는 단어에도 그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냥 담갔다가 그 모습 그대로 나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김장을 할 때 소금물에 배추를 담구면 어떻게 됩니까? 소금물에 절여져서 김치를 담글 수 있는 자료로 나옵니다. 원래 그 모습대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도 그런 뜻입니다. 들어갈 때는 죄인이었는데 나올 때는 의인으로 나옵니다. 들어갈 때는 사탄의 종이었는데 나올 때는 하나님의 자녀로 나옵니다. 들어갈 때는 지옥백성이었는데 나올 때는 천국백성으로 나옵니다. 과거의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신분으로 변화된 새 사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3) 세례는 예수님과 한 편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예식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변화된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들어갈 때는 사탄의 편이었는데 나올 때는 하나님의 편이 되어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나는 사탄의 편이었는데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편과 사탄의 편입니다. 나는 이편도 저편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편이 아니면 모두가 다 사탄의 편에 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예수님을 몰라서 믿지 못했을 때는 다 사탄의 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믿을 수 없게 하는 것이 사탄이기 때문에 믿기 전에는 다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갔든지 사탄을 좋아하고 따르든지 간에 다 사탄의 편입니다. 우리가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고 만왕의 왕이시고 최후의 심판자이시고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좌우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편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복이고 영광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평생을 늘 힘없는 사람 약한 사람의 편에서 살았습니다. 우리 곁에는 강한 사람 성공한 사람 출세한 사람 돈이라도 많은 사람 별로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우리 편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감사하게도 아주 중요한 일에 아주 중요한 싸움에서는 우리가 최강의 편에 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입니다. 예수님도 우리 편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한편이 되었다는 것은 여기 모인 우리가 다 한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주적인교회 차원에서 생각하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한편이지만 여기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들은 특별한 의미에서 한편입니다.
한 지역의 교회에서 같은 진리를 가지고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함께 가는 우리교회의 성도들은 특별하게 한 편입니다. 교회가 배라면 함께 힘을 합하여 노를 저어야 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 게으름을 피우면 어느 한 사람이 배나 더 땀을 흘려야 됩니다. 교회가 단체 달라기 경기를 하는 것이라면 우리 중에 낙오자가 한 사람도 없도록 서로 격려하며 함께 달려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도 하고 각각 자기가 받은 달란트대로 충성을 합니다. 우리가 같은 편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편이 아니라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몸의 한 지체가 아프면 온몸 전체가 아프듯이 우리 중 한 사람이 아프면 우리 모두가 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도와주고 모두가 건강하게 해야 합니다. 한 몸처럼 서로 섬기고 한 몸처럼 서로 사랑하는 그런 교회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4) 세례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예식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가 예수님과 한편이 되었고 우리 서로가 한편이 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한편보다 더 강한 말씀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룬 성도들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고 모든 성도들이 각 지체가 된 한 몸과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같이 우리도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면서 피를 흘리고 죽으실 때 죄를 범한 우리도 함께 형벌을 받아서 죽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함께 우리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때가 되면 다시 부활할 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토록 왕 노릇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5) 세례는 하나님의 표를 받는 나타내는 예식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요 예수님과 한 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예식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신다는 표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으셨다는 인을 치는 것이 세례입니다. 도장을 찍고 사인을 하고 확정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세례를 다 받으셨지요? 세례가 이렇게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받으셨습니까? 얼떨결에 받으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알고 받았든지 모르고 받았든지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참으로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세례를 받는 것은 아무 거리낌이 없다.
본문 36절에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을 했는데 이런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세례를 받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세례를 받지 못하게 할 근거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과거에 이런 정도의 혜택을 받으려면 우리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노력을 해도 받을 수 없는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앞서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받는 혜택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그냥 설명을 하니까 별로 실감이 안가서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서 의인이 되고,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편이 되고, 우리가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서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축복들을 다 받아 누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까다로운 조건과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우선은 유대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유대인이 된다고 자동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에게 주어진 율법을 다 지켜야 하고 시시 때때로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려야 하고 선하게 살아야 하고 보통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들도 자신 스스로 도달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 스스로 자신의 노력으로 한 사람도 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너무나 쉽고 나무나 간단하게 이런 혜택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는 혜택을 은혜라고 합니다. 값없이 노력 없이 그냥 선물로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잘난 사람이든지 못난 사람이든지 돈이 있든지 없든지 성공을 했든지 못했든지 누구든지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서례를 받을 수 있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누리는 혜택들을 다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고백하는 이 신앙고백이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고백을 하고 못하고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신앙고백을 하면 세례를 받고 이런 혜택을 누리는 것이고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면 세례도 받지 못하고 혜택도 받지 못합니다.
왜 우리가 믿는 믿음이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그렇게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그런 엄청난 혜택을 받게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고백하는 이 신앙고백이 이 신앙을 고백하게 하는 믿음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만 특별한 선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나에게서 나온 것인 줄 알았는데 내가 알고 내가 깨닫고 믿고 고백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지정하여 선택을 하시고 성령님께서 나에게 오셔서 말씀을 통해서 그 믿음을 알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셔서 내가 이렇게 믿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그 사람에게 들어가셔서 예수님을 알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고백하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그 고백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세례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 세례 자체에 위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예식이기 때문에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 능력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하게 만들고 그 고백하는 사람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택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하심도 없는 사람들이 제 멋대로 지껄이는 말이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면 다냐. 똑바로 살아야지 착하게 살아야지 믿는다고 다 되느냐고 빈정댑니다. 그래 믿으면 다다. 믿기만 하면 된다. 너희들은 못 믿어서 배가 아프지? 믿기만 하면 돼? 아무나 믿을 수 있나? 아무나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만 믿을 수 있게 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된다.
이 말이 오늘 본문에서 하고 있는 말입니다. 내가 신앙을 고백했는데 세례를 받는데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내가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많은 엄청난 은혜들을 받는데 거리낌이 있느냐? 없습니다. 충분합니다. 넘칩니다. 받고도 주리가 남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믿는다는 고백하나로 세례를 받았지만 이 세례 속에 이렇게 엄청난 축복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양향모목사 / 행 8:39-40
제목 : 주의 며칠 전 제가 자동차 키를 잊어버려서 동네에 열쇠가게에서 열쇠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늦은 시간이었고 비도 부슬부슬 오고해서 나중에 만들려고 했는데 마침 열쇠 가게가 눈앞에 보여서 억지로 만들었습니다. 키를 잘 못 깎았는지 들어가기는 하는데 잘 안돌아가기에 주인에게 가서 잘 안돌아 간다고 했더니 키는 처음에는 다 좀 빡빡하다가 나중에는 괜찮다고 그래서 문은 열리고 시동은 걸려서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있다가 그 키로 운전을 하는데 갑자기 뭐가 타는 냄새가 나고 연기가 나서 얼른 차에서 내려서 정비공장으로 끌고 갔더니 문제는 그 열쇠에 있었습니다. 자동차 열쇠는 문을 여는 것처럼 시동을 켜면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시동을 건 후에 조금 후퇴를 해야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처음 시동을 걸 때는 끝까지 밀면 세루 모터(스타트 모터)라는 것이 돌아가서 시동을 걸게 하고 시동이 걸리면 뒤로 돌아와야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다행히 타버린 세루 모터 하나 바꾸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멀리 가서 그랬든지 차에 불이라도 났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열쇠하나 잘못 만들어서 낭패를 당할 뻔 했습니다. 차를 잘 모르는 비전문가에게 자동차 열쇠를 맡긴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아는 지식만 가지고 남이 당하는 낭패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부러 돈을 벌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나쁜 것은 말을 해주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겪은 일을 예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복음에는 장사꾼의 이권이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장사꾼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이 변질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다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 들고 교회에 다닌다고 다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착하게 살고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산다고 해서 다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거기에 다른 것이 조금이라도 섞여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100%로 순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지난주와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빌립이 풀어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믿음을 고백하자 빌립이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들을 받아 누리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런 귀한 일을 행한 후에 빌립과 내시의 행동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이런 엄청난 일을 행하고 난 후의 빌립과 그런 엄청난 은혜를 받은 내시의 모습이 우리가 생각할 때 좀 엉성합니다. 왜 두 사람의 이별 모습을 이렇게 엉성하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와 복음을 받는 자의 모습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본문 39절 상반 절에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라고 했습니다. 빌립이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고 세례를 베푼 것은 정말로 대단힌 일이었습니다. 단순히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에디오피아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에디오피아의 내시는 나름대로 자기 나라에서 재정을 맡은 막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도 하나님의 백성 즉 솔로문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일도 알고 실천을 했고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알고 읽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냥 하나의 종교로 보고 비슷하게 종교생활을 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이라는 신이 계시고 그 신이 다른 신보다 좀 좋고 그 신을 따르는 것이 복을 받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이방인에 불과 했고 예배도 드릴 수 없는 사람이었고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로 답답한 사람이었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전혀 몰랐다면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으면 될 것인데 어중간하게 하나님을 알았지만 진리도 알지 못하여서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속 시원하게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믿음을 고백하게 하고 세례를 받고 싶다고 해서 세례를 베풀었으니까 사실 대단한 일을 했습니다.
대단한 일을 했으면 사람인 이상 무슨 대가라도 받고 싶어 하고 인사라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영이 나타나서 빌립을 이끌고 가버렸습니다. 잡아채서 강제로 이끌고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인사를 받을 시간도 없이 주소라도 주고받을 시간도 없이 그냥 사라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할아버지 양용근 목사님이 시무하시다가 순교하신 구례중앙교회에 가서 주일 낮예배에 설교를 했습니다. 모처럼 큰 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를 하니까 힘이 나고 열심히 목이 터져라고 복음을 외쳤더니 사람들이 처음에는 좀 의아한듯하더니 점차 은혜를 받는 모습이 보여서 뿌듯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 하고 내려가면 성도들이 은혜 받았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면 보람도 있고 기분도 좋습니다. 그런데 같이 간 고모님이 빨리 가자고 재촉하시는 바람에 제대로 인사도 못 받고 밥도 안 먹고 사례도 안 받고 도망치듯 나와 버렸습니다. 고모님 생각은 우리가 그들에게 뭘 얻어먹고 덕을 보려고 온 것이 아니라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당당하게 바른 복음을 전하고 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섭섭하든지 조금만 있다가 오면 인사도 받을 것이고 식사대접도 잘 받을 것이고 또 큰 교회니까 사례도 좀 줄 것이고 기대를 했는데 그냥 오니까 좀 섭섭하고 허전했습니다. 목사는 복음을 전하면 그만이고 사람에게 인사 받으려고 설교를 하는 것도 아니고 사례를 받으려고 설교를 하는 것은 아닌데 어느새 나도 그런 물이 들어서 은근히 칭찬도 바라고 사례도 바라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이는 평범한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 이유는 오늘날 설교자들이 설교를 하고 난 후에 사람들에게 칭찬을 바라고 또 사례를 바라는 것 때문에 복음이 변질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사례조금 바라고 칭찬 좀 받는 것을 넘어서서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대단한 조직을 만들고 거기 군림하고 아주 재산을 많이 모으려는 속셈으로 복음을 전하고 목회를 사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이 초기에 이러한 일을 행하게 하고 성경에 기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설교를 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고 세례를 받게 하고 이런 엄청난 혜택을 누리게 해 주고 그다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으로 끝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복음이고 그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기 때문에 중간에서 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기 좋으셔서 그러시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전적으로 은혜이지 전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의 공로가 포함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이 장사꾼처럼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이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복음의 내용이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것으로 변질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많은 거짓선생들이나 이단들이 이미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기 영광을 위해서 자기 목적달성을 위해서 바른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이상한 세상 이야기를 복음이라고 변질시켜서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합니다. 사람들이 듣고 감동을 받을 이야기만 합니다. 지금 당장 이익이 되는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래서 그런 변질된 복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들을 따라가고 그들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엉터리로 공갈협박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따릅니다.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따라갑니다.
저처럼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전파하는 목사를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바른 진리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르쳐주면 모든 사람들이 저를 존경하고 따라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말로 진리를 바르게 알고 복음을 바르게 아는 소수의 사람들만 저를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제가 전하는 원색복음을 좋아하시지요.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알고 우리가 가진 믿음이 위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진실 되게 고백하시는 여러분이 진짜 성도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한 빌립을 강제로 이끌고 가버리셨습니다. 복음은 무슨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대가를 받기 위해서 엉터리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은 엄청난 전쟁이 벌어져 있습니다. 교회를 지키느냐 신앙을 지키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사람들을 많이 모아서 큰 교회를 만들고 세력을 키우느냐 적은 무리라도 정말로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하느냐의 싸움입니다. 교회가 바른 생활을 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로 훈련시키느냐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만드느냐의 싸움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잘 사는 사람이 되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목회를 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바른 믿음의 길로 가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본문 39절 하반 절에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빌립은 하나님께서 강제로 끌고 가버리셨기 때문에 그렇다고 쳐도 내시의 행동은 좀 이상합니다. 그렇게 귀한 것을 깨닫게 해 준 빌립이 갑자기 없어졌는데도 어디에 갔는지 찾아보지도 않고 자기는 기쁘게 자기 갈 길로 가버린 것입니다.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찾아본다든지 소리쳐서 불러본다든지 어떻게 해서라도 찾아서 이름이라도 물어보고 주소라도 물어보고 감사인사라도 좀 해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이 기뻐하면서 자기가 갈 길로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감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목사님들이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 내시를 나쁜 사람이라고 뭐라고 할 것입니다. 세상에 그렇게 큰 은혜를 받고도 그냥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 사람은 인간도 아니야 이런 사람을 본받으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감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큰 은혜를 받고도 감사도 없이 그냥 가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라고 설교를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당연히 감사를 드리는 것이 예의일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시는 그 큰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은혜를 베푼 빌립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유유히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한마디 감사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는 내시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자기 갈 길로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합니다. 은혜를 베푸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은혜의 전달자일 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중간에 전달자인 사람이 그 영광을 차지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문둥병이 걸렸는데 그 이스라엘 출신 여종이 이스라엘에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에게 가서 요단강물에 일곱 번 씻으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했더니 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문둥병이 나았는데 뭐가 아깝겠습니까? 가지고 갔던 엄청난 재물들을 엘리사에게 주었더니 엘리사가 거절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종이 자기가 한 것처럼 중간에서 예물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있던 게하시라는 엘리사의 사환이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뒤따라가서 우리 주인이 뭐 좀 달라고 했다고 속이고 은 한달란트 하고 옷 두벌을 받아서 자기 집에 가지고 갔다가 벌을 받아서 게하시가 그 문둥병이 걸려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만방으로 펴져나가는 것을 기록한 책이지만 그러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와 받는 자들이 알아야 할 교훈들을 아울러서 기록한 책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 복음을 전하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아무런 거래관계나 감사의 표시가 없게 함으로 복음을 전하고 받는 과정에서 무엇을 주고받는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헌금도 드리고 이런저런 헌금도 드립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에 지극히 작은 정성이라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헌금을 드리면서 나는 하나님께 은혜를 갚았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자신의 행동을 대단하게 생각하거나 자랑을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그냥 우리가 할 도리를 조금이라도 하려고 하는 성의를 보이는 것일 뿐 우리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니까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귀한 것을 깨달았고 너무나 엄청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너무 기쁜 나머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너무나 소중한 것을 은혜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는 것 하나님 안에만 있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 이런 중요한 것들을 아무런 대가없이 조건 없이 그냥 은혜로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런 소중한 것들을 조건 없이 그냥 주신 것은 그것을 받아서 기쁘게 살고 누리며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받아서 누리며 기쁘고 즐겁게 살면 됩니다. 더 이상 율법의 종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죄에 매여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저런 의무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으면 감사해라. 은혜를 받았으면 똑바로 살아라. 은혜를 받았으면 좋은 일 좀 하면서 살아라. 라고 말합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일들입니다. 감사해야 하고 바르게 살아야 하고 좋은 일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런 말 듣고 또 다시 종처럼 살 필요가 없습니다. 똑바로 못 살았다고 좋은 일 많이 못했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의무가 아닙니다. 즐겁게 사시면 됩니다. 똑 바로 살 수 없는 우리에게 좋은 일 하면서 살 수 없는 우리에게 겨우 그저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쁘고 즐겁게 사시되 주안에서 기쁘고 즐겁게 사시면 됩니다. 즐겁게 살라고 한다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거짓된 즐거움을 누리며 살려고 하십니까? 성경에 기록된 모든 법칙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만들어 주신 것들입니다.
사랑을 하면서 왜 남의 남자 남의 여자를 사랑하려고 하느냐고요 자기에게 주어진 남편이 아내가 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맞춰주신 배필로 알고 그 사람과 사랑하면서 사시면 됩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사세요. 왜 남의 것에 탐을 내고 부러워하면서 빼앗으려고 합니까? 지나치게 욕심을 내니까 그렇지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면서 살만한 세상입니다. 나를 위해서 살지 말고 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보세요. 말 한마디라도 그 사람을 배려하는 말을 해보시고 작은 일이라도 칭찬해 보시고 작은 일에라도 감사해보세요 정말로 행복한 세상이 됩니다.
내시가 기뻐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받은 복음을 자기 민족에게 전할 수 있다는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내시가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마다 왕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가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배워서 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 번도 만족할만한 답을 가지고 가지 못했는데 이제 하나님의 큰 뜻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예언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이제 그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시며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만 가지면 된다는 귀한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기쁘게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복음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세운 교회에서 아버님이 세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복음을 바르게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그저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고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고 좋은 일 하면서 사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주일 지켜라, 헌금해라, 거짓말하지 말고 똑바로 살아라. 이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이 교회에 다니는 것인 줄 알았지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것이 고역이었고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복음을 알고 난 후에는 주일이 기다려집니다. 이렇게 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기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게 이 진짜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내시는 그가 받은 복음을 가지고 기쁘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로인해 지금도 에티오피아는 인구의 절반이 기독교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가이사랴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렇게 온유다로 사마리아로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아소도는 구약성경에서 아스돗을 말하는데 이스라엘 땅이지만 여호수아가 완전히 정복하지 못해서 아낙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고 가이사랴는 로마황제 가이사랴가 특별히 세우고 지배한 도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방인이건 우상을 섬기는 곳이건 권력을 가진 황제가 특별히 다스리는 곳이건 아무런 제한이 없어 퍼져나갔고 모든 사람들이 다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복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빌립은 복음을 전하고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내시는 복음을 받고 기쁘게 자기 갈 길로 갔습니다. 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에 전하는 자나 받는 자가 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이 은혜의 선물을 받았으니까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 기쁜 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죽어가는 모든 불쌍한 인생들에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의 성령을 받은 사람들
행 8장 4~17절 / 정영도목사
1. 성령님은 누구신가?
1)첫째, 성령님은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거짓과 미혹의 영과 진리의 영이 있다.
(요일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①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영은 거짓과 미혹의 영이다.
거짓으로 인간을 유혹함으로 참 진리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그 길을 미혹하므로 막는다.
어느 것이 진리인지, 어느 것이 생명인지 알지 못하도록 미혹한다. 진리를 가장한다.
성령이 없는 모든 이 세상 종교는 고등종교이든지, 미신이든지 다 거짓 영으로 우리 인간을 미혹한다.
예>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 안상홍이는 죽었다.
JMS(정명석)-대학생들을 미혹하는 이단의 교주
박옥수 이단-기존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뒤흔들어 놓는다.
②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계신 우리 기독교는 우리 인간을 진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다.
그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요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적용> 우리 한영교회에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역사하고 계신다.
2) 둘째,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으로서 만유에 편재하시며,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
① 성령님이 아니 계신 곳이 없다. 음부와 지옥에도? 심지어 불신자에게도?
(시 139: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② 만유 안에 계셔서 만유를 존재하게 하신다. 만유를 존재하게 하시고, 그 만물이 하나님의 정하신 질서대로 움직이도록 그분이 운전하시고 계신다. 그래서 성령님은 만물의 운전자이시며, 만물이 그 창조의 목적대로 존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다.
3)셋째, 성령님은 제3위 하나님으로서 인격자이시다.
그분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주님의 영으로서, 예수님의 속성, 곧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우리 예수님을 어떻게 알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가? 성령님이 오셔서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을 경험하게 하신다.
주님의 뜻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그분이 이루어주신다. 성령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모든 것을 성취하신다.
예>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누구의 도움인가?
모든 영적 은사와 체험이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 예수님을 만나려면 누구를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가? 성령님
우리 교회 올해 표어? <우리 안에 천국을 경험하자!>
어떻게? 성령이 임하시면 경험된다.
4)넷째, 성령님은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가셔서 구원의 인(印)을 치시는 분이시다.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성령님의 역사이다.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2. 성령님은 어떤 사람에게 임하시는가?
성령님은 만유에 충만하시고, 음부와 지옥에도, 불신자 안에도 성령님은 거기 계셔서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다. 그러나, 불신자에게는 결코 인격적으로 계시지 않으신다. 영이신 그분이 그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으신다. 이런 면에서 성령님은 불신자의 마음에 안 계신다.
성령님은 어떤 사람에게 임하시는가?
1)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에게 복음 전할 때에 임하신다. <전도시>
창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복음 전하는 자와 함께 임하신다. 오늘 본문에 보라. 4-6절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성에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었을까? 하나님의 택자들에게만.. 그때에 구원받기로 택함을 받은 사람은 믿게 되는 것이다.
2) 주의 약속을 믿고 성령님이 임하기를 갈망하여 기도하는 자에게 임하신다. 오순절의 역사(행 2:1- )
3) 성령님은 하나님의 종들이 사역하는 교회에 임하신다.
① 기도할 때에 임하신다 (15-17절)
사도들의 안수함/ 함부로 손을 얹어서는 안 되는 이유? 빌립이 안수하지 않고, 왜 사도들이 왔을까?
② 예배 중에 말씀들을 때에 임하신다 (10:44절)
(행 10:44)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고넬료의 가족들처럼 준비된 마음으로 예배하면 성령님은 어김없이 임하실 것이다.
<적용> 성령님이 충만히 임하는 예배와 모임, - 하나님의 부흥이다.
3. 성령님이 임하셔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1) 첫째, 성령임이 임하셔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신다.
2)둘째,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하신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성령님이 내게 임하면 내 심령에 변화가 일어난다.
예> 불안-평안, 슬픔-기쁨, 미움-사랑이 넘치게 되고, 두려움-담대하게 되며, 병든 마음과 몸이 치유되며, 예배가 즐겁게, 하나님의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이 된다.
8절> "그(사마리아)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적용> 축복하자. 성령 받으세요. 성령님이 해답입니다.
3)셋째, 하나님의 권능을 입어 증인의 삶을 살게 된다. (행 1:8절)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① 주님의 사도들을 보라. 성령 받기 전에는 정말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앞이 안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② 빌립집사- 평신도 안수집사. 그가 교회 구제 사무만을 맡는 것이 아니라, 복음전하여 사마리아 선교에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게 얼마나 놀라운 성령의 권능이 함께 하시던지.... 마술사 시몬이 굴복할 정도였다. (7절, 13절)
4) 넷째, 성령님은 성도가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신다.
① 우리의 육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선을 절대로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을 깨우치신다.
② 우리가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주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면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사 세상의 유혹과 죄를 이기고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게 하신다.
복음의 보편적 능력
행 8:26-40
사도행전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름은 물론 바울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 바울을 주인공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은 초기 기독교를 대표하는 베드로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주도권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있었으나 그는 사도가 아니기에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아주 특이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오늘 설교 본문에서 주인공으로 활동하는 빌립입니다. 행 8:26절은 빌립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어디로 가야할지를 지시했다고 합니다. 주의 사자가 누군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사람이거나 빌립의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빌립 스스로 생각한 것을 주의 사자가 알려준 것이라고 표현할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도행전은 문학적으로 수준이 높은 텍스트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도 문학적으로 해석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걸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날개 달린 천사가 빌립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본문에 주의 사자만 나오는 게 아니라 성령(29절)과 주의 영(39절)이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빌립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간다게의 고위관료인 내시
빌립이 주의 천사에게서 지시를 받을 때는 지리적으로 중북부에 속한 사마리아에 머물러 있는 중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빌립이 사마리아로 오게 된 이유는 기독교인을 향한 유대교의 박해가 본격적으로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행 8:1절 이하를 따르면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예루살렘에는 열두 사도 외에 나머지 지도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그 흩어진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빌립입니다. 빌립은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 순교자인 스데반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에 속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집사라고 통칭하지만 사실은 지금의 집사라기보다는 사도들 못지않게 권위를 지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인 반면에 일곱 지도자들은 초기 기독교가 선정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표면적으로는 사도들보다 권위가 떨어지지만 실제로는 사도와 비슷한 업무를 감당했습니다. 이들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립이 남쪽으로 내려간 ‘가사’는 유대 쪽에서 볼 때 이집트로 갈 때 횡단해야 할 광야의 출발지입니다. 빌립은 그곳에서 어떤 한 사람이 수레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행 8:27절에 따르면 그 사람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가 재정을 책임 진 고급관리’입니다. 지금의 직책으로 바꾸면 국무총리라고 할 수도 있고, 내무장관과 국세청장을 겸한 직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디오피아는 지금의 에티오피아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에디오피아는 지금의 아프리카 수단의 북동쪽에 자리한 ‘누비아’라는 나라입니다. 누비아는 여왕이 다스렸다고 합니다. 이집트 왕을 파라오라고 하는 것처럼 그 여왕을 가리켜 ‘간다게’라고 합니다. 여왕 제도인 탓인지 이 사람은 내시입니다. 성지 순례를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중입니다. 고급관료이기에 걷지 않고 수레를 탔습니다. 그는 이사야를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그에게 다가가서 ‘당신이 지금 읽는 이사야 본문을 이해하시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해석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면서 빌립에게 동승을 권했습니다. 그가 읽던 이사야(53:7,8)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이사야의 이 대목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하지만 2천 년 전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관심이 있었던 누비아의 고급관료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빌립에게 묻습니다. ‘이 구절이 이사야 선지자 자신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를 가리키는지 설명해 달라.’ 빌립은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했을 겁니다. 본문은 빌립이 어떻게 말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보도합니다. 빌립이 이사야를 소재로 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겁니다. 저는 앞에서 빌립이 사도들에 비해서 영적인 권위가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약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사도들과 동일한 권위로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이라는 단어를 여러분은 흔히 들었을 겁니다. 신약성경 앞부분에 나오는 네 권의 책을 복음서라고 합니다. 바울의 편지에도 복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2천년 기독교 영성과 신학은 모두 이 한 가지에 집중됩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와 구별되는 대목도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간다게의 고급 관리에게 복음을 전한 빌립의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다시 그 복음을 설명해보겠습니다. 누가가 생략한 부분을 복원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의 원리는 경쟁, 승리, 업적, 성공 등등의 단어로 표현됩니다. 이를 두 가지로 줄이면 ‘살아남기’와 ‘이기기’입니다. 살아남으려면 이겨야 하고, 이기려면 일단 살아남아야 하니까 이 두 단어는 같은 의미입니다. 이게 좋은 뜻으로도 작동되고 나쁘게도 작동됩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살아남는 건 좋은 일입니다. 고대 유인원들은 척박한 환경 가운데서 살아남았습니다. 빙하기에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이 살아남지 못했으면 지금의 인류도 없습니다. 운동선수들이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런 과정에서 운동 기술이 발전합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외국 기업과의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남북의 평화 공존을 추구하는 정치세력이 그걸 반대하는 정치세력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건 좋은 일입니다. 살아남기와 이기기가 늘 좋게만 나타나지 않는 게 인류 역사입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다보니 생명 파괴도 서슴지 않습니다. 교회도 역시 그런 원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일종의 성공주의가 우리 삶을 완전히 지배합니다. 성공한 사람은 겸손해져야 하는데 거꾸로 교만해지고 실패한 사람은 열패감에 떨어집니다. 이 문제는 그 어떤 정치체제나 이데올로기로나 인격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삶의 깊이를 경험했습니다. 살아남고 이기기 위해서 무한 경쟁에 빠져들고, 자신의 성공에 인생을 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의 깊이였습니다. 삶이, 즉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생명, 즉 삶은 점수를 많이 받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만족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노력의 대가입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하나만 알아도 우리의 삶에는 전혀 다른 차원이 열립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지만 이게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일종의 영적인 공황장애를 앓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고 확신했고 경험했기에 십자가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 죽음을 생명 파괴라고 여겼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이 십자가 처형으로 파괴되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깊이를 뚫어보기는 쉽지 않기도 하고, 안다고 해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기는 불가능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수님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운명과 연결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이제 십자가 죽음과 같은 운명에 떨어진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일종의 구명정입니다. 거기에 올라타기만 하면 영적으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명정이 값없이 주어진 것이기에 예수님 사건은 바로 복음입니다. 이것보다 더 복된 소식은 없습니다. 이 복음을 아는 사람은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빌립의 세례
이사야 본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빌립에게서 전해들은 간다게의 신하는 세례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행 8:36절이 그 상황을 이렇게 보도합니다.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겠다는 말은 정말 통 큰 제안입니다. 세례를 받으려면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례는 개인적으로 베푸는 게 아니라 교인들이 모인 예배에서 베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공적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교회 규정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만의 세례 의식이 끝나자 빌립은 자기의 길을 가고, 간다게의 내시 역시 기쁘게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후로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은 이 사람이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복음 전파에 일익을 감당했을 것으로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빌립이 베푼 세례는 기독교 역사에서 특별합니다. 이 세례 사건으로 인해서 기독교의 선교 방향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빌립에게 세례를 받은 이 사람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프리카 누비아 여왕 간다게의 고급관료입니다. 이방인일 뿐만 아니라 내시입니다. 유대교 율법에 이런 사람은 배척의 대상입니다. 유대교와의 경쟁 관계에 있던 기독교 입장에서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칫 구설수에 휘말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빌립은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최초의 이방인 세례입니다. 더구나 이탈리아 백부장인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푼 베드로(행 10장)보다 빌립이 더 앞서 이런 엄청난 일을 감행했습니다. 빌립의 세례 사건은 기독교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벽을 넘은 최초 사건이라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복음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삶에 대한 인식과 경험의 깊이가 달라졌기에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철옹성 같았던 벽을 허물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벽을 넘어서
저는 구체적으로 오늘 한국교회가 복음의 능력에 근거해서 극복해야 할 벽을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산주의라는 벽이 하나입니다. 남북분단 체제가 70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입니다. 우리는 지금 척추에 큰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분단체제를 지속하게 하는 집단 중의 하나는 부끄럽게도 우리가 속한 기독교입니다. 그중에서 개신교회이고, 그 중에서 대형 개신교회입니다. 이들은 북한을 적대시합니다. 전쟁을 치렀으니 그들의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전쟁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북한이 공산주의 체제라는 사실입니다. 북한의 공산주의를 피해서 남한에 내려온 이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적그리스도로 여깁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정치사상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실제로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공산주의까지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무신론까지도 극복할 수 있어야겠지요.
다른 하나는 동성애라는 벽입니다. 빌립은 이방인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일반 사람들과 전혀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의 동성애자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한국교회, 그중에서 개신교회, 그중에서 대형 개신교회는 동성애자들을 노골적으로 비하하고 적대시합니다. 동성애는 성경이 죄라고 하니 비판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공산주의도 그렇고, 동성애 문제도 근본적으로는 생명, 즉 삶의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삶의 방식들은 시대와 민족과 나라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 거론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문자적으로 옳은 게 아니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다 허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핵무기가 성경에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악이라고 봐야 합니다.
공산주의의 벽과 동성애라는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주장은 좋으나 일단 그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간다게의 내시처럼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 하는 입장도 가능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필요합니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만 강조하면 복음 전파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공산주의냐 아니면 자본주의냐, 또는 동성애자냐 이성애자냐가 아니라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북한 공산당에게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한다고, 공산당이 내려오면 목사를 가장 먼저 처단할 거라고 말하는 분을 만나본 적이 있긴 합니다. 미국의 힘을 빌려서라도 북한 정권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구 지역에는 제법 많습니다. 그런 분들의 생각은 9백 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중해 연안의 모든 나라를 증오와 파멸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 십자군 전쟁에 단단히 결속된 것이지 복음의 능력과는 거리가 먼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복음 공동체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모든 벽과 차별과 선입견을 넘어서게 하는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그냥 되는 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복음의 능력으로 충만히 채워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전도자 빌립의 순종을 본받읍시다
행 8:26-40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집사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이야기입니다. 에디오피아는 구약성경에서 ‘구스’라고 칭하는 곳입니다. 에디오피아는 왕이 있었지만 상징적인 존재였고 실제적인 통치는 간다게라고 불리던 왕의 어머니가 맡았습니다. 그러했기에 오늘 본문의 내시가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였다는 말은 그가 에디오피아의 재무부 장관 정도의 신분이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가 내시라는 것은 거세를 당했음을 의미하는데, 구약성경에서 거세당한 자는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총회에도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신 23:1). 철저하게 멸시당하고 외면당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경 이사야 56장에 이 땅에 메시아가 임하면 누구든지, 거세를 당한 자들까지도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예언의 말씀이 에디오피아 내시의 구원사건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1. 먼저, 26절 함께 읽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사마리아는 빌립의 전도로 사도들까지 합세해야 할 만큼 부흥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잘 전하고 있는 빌립에게 사마리아를 떠나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로 가라고 하는 이상한 지시를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했고, 또 큰 성과를 내고 있었던 빌립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지시였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성령의 지시에 단 한마디의 반문도 하지 않고 자기 사역을 다 내려놓고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겸손이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로써 성경은 빌립이 이방 전도의 선봉장으로 서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은 무조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보다는 그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기의 이성적 판단에 맞춰 적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빌립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명령은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할 때 선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 외에 또 다른 한 예로, 열왕기상 17장에 사르밧 과부가 오랜 가뭄으로 먹을 양식이 떨어져 목숨과도 같은 마지막 남은 양식을 아들과 함께 먹으려고 할 때, 선지자 엘리야는 얄밉게도 그것을 자신이 먹겠다고 말합니다. 선지자가 어떻게 이렇게 염치없는 짓을 합니까? 말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명령에 순종하여 마지막 남은 식량으로 엘리야를 대접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순종했을 때 과부의 집에 가뭄 내내 밀가루 통과 기름병에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남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빌립처럼, 사르밧 과부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간증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7-29절 함께 읽습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당시 에디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애굽 다음으로 큰 나라였습니다. 이러한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나라를 대표하여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귀국하는 중이었으니, 그 행렬은 대규모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에디오피아 내시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인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다니엘이나 느헤미야처럼 에디오피아에서 출세한 사람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으며 여행 중에도 성경을 읽을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수레에 앉아 이사야서 53장을 큰소리로 읽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성경을 큰 소리로 읽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빌립에게 그 내시에게 나아가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을 그냥 버려두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30-31절 함께 읽습니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광야 길은 매우 위험한 길입니다. 도적 떼가 언제 출몰할지 모르는 곳입니다. 게다가 사마리아에서 가사 광야까지 약 70여km를 달려온 빌립의 모습은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되었을 것입니다. 매우 초라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에디오피아 내시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권력과 지위 면에서 빌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내시는 선뜻 빌립을 자기 수레에 태웠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경을 배우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권력자였지만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배움에 대하여 마음이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에게 말씀의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 겸손한 사람, 그리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과 교회를 박해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성경의 모든 것을 안다고 자만했습니다. 가르침을 받으려는 자세보다 가르치려고만 했습니다. 자신의 성경 지식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 지식에 능통했음에도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은 그 크기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한이 없습니다.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 가난한 마음,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안다고 자만하는 자는 더이상 배울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배운 것도 자꾸 잃어버리게 됩니다. 겸손하게 늘 배우려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나보다도 신앙 연륜이 짧고 어린 성도라도 내가 깨닫지 못한 진리를 깨닫고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세 사람만 만나도 그중에 나를 가르칠 자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그러한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배우고, 연구하고, 삶으로 실천하기에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나누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32-34절 함께 읽습니다.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
에디오피아 내시가 읽고 있던 성경 구절은 ‘고난받는 종’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한 이사야 53:7-8이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빌립에게 고난받는 이가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이사야가 므낫세 왕에게 순교 당했다는 전승에 따라 이사야가 바로 이 고난 받는 종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 고난 받는 종이 어느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거룩한 선지자이기는 하지만 예언의 말씀처럼 태어나지도, 죽지도, 또 부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사야 53장에는 고난받는 종 메시아(그리스도)의 천한 출신과 그가 받을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내용이 매우 구체적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예언의 말씀대로 태어나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고난 받는 종 메시아(그리스도)는 이사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는 이외에도 예수님에 관한 예언이 풍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지도 예언되어 있고(미 5:2), 예수님의 신분, 성품, 하시는 일,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까지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예수께서 메시아(그리스도)라는 사실과 십자가구속과 부활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너무나도 분명하게 예수께서 행하실 일들이 예언되어 있고 또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구약성경은 유대교 경전입니다. 또 이슬람교도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구약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그들 앞에 펴 놓고 이렇게 풍성하고 자세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해 주었음에도 믿지 않은 불신앙의 죄를 지적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39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구약성경은, 그 말씀을 읽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6-38절에 복음을 전해 들은 에디오피아 내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물 있는 곳에 이르러 세례를 받았습니다. 광야 한복판에서 세례받을 만한 물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만나 에디오피아 내시가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사모하는 내시를 위해 ‘여호와 이레’, 세례받을 물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도 부활절에 세례를 주게 되는데, 세례는 세례를 받을만큼 성경 지식이 있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에디오피아 내시는 세례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를 원하는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성령을 영접하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배워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혹, 세례에 대하여 부담을 갖거나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되시는 분은 생각을 고치시고 세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39절에, 빌립이 세례를 주자마자 하나님께서는 기적적 방법으로 빌립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시는 빌립을 다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이끌어 간지라’로 번역된 헬라어 ‘헤르파센 ἥρπασεν’은 본래 ‘큰 독수리가 순식간에 먹이를 채가는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립이 내시를 전도하고 세례까지 주자,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채가듯 그를 다른 전도 장소로 옮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을 광야로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내시를 전도하게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물을 예비하여 세례를 받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빌립을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 주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빌립이나 내시 모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구원의 기회를 잘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빌립이 게으름을 피웠다면 에디오피아 내시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도 이 기회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면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오늘 거절하면 내일 또 주어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한이 정해져 있습니다. 오늘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다가도 내일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구원의 문이 열려 있지만 언제 그 구원의 문이 닫히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먼저는 자신부터 확실하게 믿고, 빌립 집사처럼 이웃을 구원의 은혜에 참여시키는 일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때가 지나면 복음을 전할 기회가 없어질 수도 있음을 알아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 지금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이때 전도자 빌립 집사처럼 복음 전파의 선봉장이 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를 복음화했고, 더 나아가 가사 광야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구원하고 가이사랴에 이르기까지 복음전파의 선봉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에 집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 역시 하나님 말씀을 뜨겁게 사모하고 겸손했기에 내시였음에도 성경에 기록된 이방인 최초의 구원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교훈을 가슴에 담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아름답게 쓰임 받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