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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60709 / 사울의 회심 / 행 9:1-9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6.06.20|조회수61 목록 댓글 0

사울의 회심

행 9:1-9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행 9:1-9 / [사울의 개종] 한편 사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다 잡아 죽일 작정으로 살기가 등등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을 찾아갔다. 2) 그는 다메섹에 가서 그리스도인이면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눈에 띄는 대로 모조리 예루살렘으로 붙잡아 올 테니 다메섹에 있는 여러 회당에 보내는 공문을 써달라고 요구하였다. 3) 사울이 이 용무를 띠고 다메섹 가까이 갔을 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번쩍이더니 그를 내리비추었다. 4) 사울은 그만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다. 그때 한 음성이 사울에게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5)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울이 물었다. 그러자 곧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자,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서 내 명령을 기다려라.' 7) 사울과 같이 가던 사람들은 놀라서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들에게는 음성만 들려 올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8-9) 사울은 겨우 땅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눈이 먼 그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사흘동안 맹인이 된 채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지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이어지는 핍박으로 성도들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복음의 확장과 성도들의 내적 담대함을 가져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청년 사울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하나님을 향한 자기의 열심(1-2) 살기가 가득한 청년 사울은 다메섹까지 가서 성도들을 잡아오려고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하였습니다. 이런 열정적인 행동의 이유는 조상이 전해 준 율법과 관습에 비추어 나사렛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며 예수의 부활을 거짓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행 22:3; 26:8-9).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무서운 살인자의 독기가 서려 있었고, 그의 손에는 성도들의 순교의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사울은 사람의 편견에 화석화된 율법주의와 종교적인 관습을 신념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메섹으로 향해가는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충성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빚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3-5) 청년 사울이 다메섹 성에 가까이 오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작스런 신비한 일로 말에서 떨어지다시피하여 땅 위에 엎드렸을 것입니다. 이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음성은 사울에게 두려움보다 애정 어린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사울은 얼떨결에 “주님, 누구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사울이 이렇게 질문한 것은 너무나 찬란한 영광의 빛과 천상의 소리로 다가오신 분이 분명 신적 권위를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대답이 들립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성도들이 핍박 받는 것을 예수님 자신이 핍박 받는 것으로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사울에게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이 빛은 너무나 강렬하여 사울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주님의 포로가 된 사울(6-9)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사울에게 다음의 할 일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사울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어 남의 손에 이끌리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사울 일행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다메섹의 한 집으로 갑니다. 이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사울은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지하였습니다. 결국 핍박자 청년 사울은 예수님의 능력에 도리어 꺾이고 체포되었습니다.

 

적용: 당신은 당신의 주님에 대한열정과 열심이 당신 자신의 의로움과 신념에 기초한 것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에 기초한 열정과 열심입니까?

 

한 희랍의 수학자가 “기하학에 지름길은 없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노력하지 않고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우리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길은 지름길이 아닙니다.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호크마 주석

=====9:1

주의 제자들을 - 사울이 핍박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명칭으로 언급된 '주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의 하나이다. 누가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표현을 '그 도를 쫓는 사람들'(2절), '제자'(10절), '성도들'(13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14절), '형제'(17절) 또는 '형제들'(30절) 등으로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 기독교인에 대한 사울의 잔혹한 행위를 심리적으로 묘사이다. '위협'으로 번역된 '아페일레'(* )는 '경고'라는 말로도 해석되는데여기서는 당장이라도 '살해'를 할 것 같은 위협적인 모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같은 바울의 심리 상태를 '등등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동적(動的)인 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말은 본래 '숨을 쉰다'(breathe)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사울의 호흡이 살기와 위협의 숨소리로 들릴만큼 박해가 잔인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사울의 행위가 얼마나 능동적인 행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사울 자신은 박해 행위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과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 같다. 대제사장에게 가서 - 사울이 대제사장에게 간 것은 기독교인에 대한 체포권을 부여받기 위함이다(2절). 유대인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에 속한 사울이(26:5) 예수를 죽이기로 음모하고 이를 실행했던 대제사장, 바리새인들(눅19:47;20:19;22:52;23:10)과 같은 노선에 있었음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당시 대제사장은 칠십 인으로 구성된 의회 '산헤드린'의 의장으로서 로마로부터 인정받은 권한 곧사법권과 행정권을 팔레스틴 내.외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행사할 수 있었다.당시 대제사장이 '가야바'(A.D. 18-37)였는지 그 후임자 '데오빌로'(A.D. 37-38)였는지 알 수 없으나 사울의 회심(回心)을 A.D 35년경으로 본다면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Lenski).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학자는 '데오빌로'로 추정한다(alford, Levin). 그러나 사울의 회심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두 가지 견해모두 가설에 불과하다.

 

=====9:2

다메섹 여러 회당 - 사울의 행선지로 언급된 다메섹은 예루살렘 동북쪽 약 230km정도 거리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서 삼 면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해발 671m의 고원 지대이다. 이곳은 아브라함때 부터(창 14:15;15:2) 다윗 시대(삼하 8:6)와 솔로몬 시대에(왕상 11:24) 걸쳐 계속언급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B.C.73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B.C.64년부터로마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다. 초대 교회 당시 다메섹에 거주했던 유대인의 수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A.D. 66년 네로 박해 때 약 10,500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는 요세푸스(Josephus)의 보고가 이를 뒷바침한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의 공동체에있어서 중심 기구라고 할 수 있는 회당도 상당수에 이르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에있는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예루살렘 박해 때(8:1-3) 예루살렘으로부터 피신해 간 유대기독교인들과 그들에 의해 개종된 유대인들로 추정된다. 그 도를 좇는 사람 - 여기서 언급된 '그 도'란 기독교를 묘사하는 다양한 표현중의하나다. 누가는 단순하게 '도'(道)로만 언급하기도 하며(19:9, 23;22:4;24:14, 22)'주의 도'(18:25)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용어로 '도'란 말을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 예수를 '생명의 길'로 교회가 인식하고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 같다.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 사울이 이방 지역에서 행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묘사하고 있는 본 구절은 당시 대제사장이 이방의 유대인들에 대해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 본 구절은 예루살렘이 교회 탄압의 중심이며 유대인들에대한 행정의 중심지도 됨을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대제사장이 이방 지역의 유대인에게까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마카비1서 15:15-21에 따르면루기오(Lucius)총독은 유대에서 도망한 자들을 대제사장이 유대법에 따라 처벌할 수있도록 프톨레미에게 요청한 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 글라우디오 황제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헤롯아그립바 1세가 분봉왕(分封王)으로 유대를 다스렸으므로 대제사장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했을 것이다.

 

=====9:3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 본 구절은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초자연적 개입이 일어난 것에 대한 묘사이지만 그 지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한편 '빛'이 22:6에서는 '큰 빛'이라고 언급되고 26:13에서는 '해보다 더 밝았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하늘로부터 온 빛에 대해 강조하기 위한 의도와 함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함으로써 나타나는이야기의 단조로움을 없애기 위한 저자의 배려로 이해한다(Haenchen). 그러나 오히려바울이, 둘러 비친 그 빛에 대해 묘사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간증할 때 조금씩달리 표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에게 둘러 비친 '빛'의 성격은 그빛에 대해언급된 세 곳의 묘사를 종합해 봄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 26:13에서는 같은 상황을 묘사함에 있어서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고 하였다. 이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결책을 모색할수 있다. 즉 본절에서는 오직 사울이 예수를 만난 사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나,26:13에서는 사울 자신의 회심 사건에 있어 현장 목격자들도 있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일행들에게도 동일한 빛이 비추었다는 진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22:9의 기록은 본절과 26:13의 중간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아무튼 사울과 함께 다메섹으로 가던 일행들도 사울이 경험한 그 빛을 목격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9:4

땅에 엎드러져 - 본 구절은 갑자기 내려 비취는 빛에 의해 나타난 사울의 반사적 행동에 대한 묘사다. 여기서 '엎드러져'라는 단어 '페손'(* )은 '떨어진다', '넘어진다'의 뜻으로 쓰러지듯 엎드린 사울의 행동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반사적이면서 두려움에 휩싸인 즉각적 반응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이 말을 타고 갔다면 말에서 떨어지다시피하여 땅 위에 엎드렸을 것이다. 사울아 사울아 - 혹자는 구약 시대에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이 격식을 갖추는습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Longenecker). 그러나 사울에게 들려진 예수의 음성은 분명히 애정어린 음성으로 이해된다. 본절 외에 성경에서 이름을 두 번씩 불렀던경우는 아브라함(창 22:11), 모세(출 3:4), 사무엘(삼상 3:10), 시몬(눅 22:31)을 들수 있다. 이는 부르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낸다.

 

=====9:5

주여 뉘시오니이까 -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알지 못하는 음성에 대하여 사울은 '주여'(* , 퀴리에)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호칭은 자기를 부르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인식했음이 아니다. 이는 사울이 곧이어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자신을 부른 자의 정체를 묻고있다는 점에서 알수 있다. 아마도 초자연적 어떤 힘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나온 호칭으로서 짐작된다. 나는...예수라 - 본절의 헬라어 본문에는 복음서에서 예수의 자기 선언의 한 양태인 '에고 에이미'(* )가 언급되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언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를 70인역(LXX)이 '에고 에이미'의 문장으로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에고 에이미'를 사용하심으로써 구약에서모세가 만난 그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기 선언을 하신 것이다. 구약 시대의선지자들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란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선포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밝힌 반면 예수는 스스로의 신적권위를 나타내신 것이다. 본절에서도 역시 예수는사울에게 하나님으로서 자기를 선언하심으로써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와 동일한 언어습관을 나타내셨다.

 

=====9:6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 자신의 정체를 밝힌 예수께서 곧이어 사울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셨던 것은 다음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사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미 예수께서 그를자신의 제자로 지명하여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2) 사울이 예수에 대한 어떠한 반응도 없이 일방적으로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활한 예수의 초자연적인능력을 암시한다. 이 두가지 의미를 종합해 보면 사울의 소명 의식이 부활한 예수의강권적인 능력의 부름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예수가 사울을 아시기 위해 이미 예정된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26:16과 본절은 내용 전개상 약간의 모순이 있다. 즉 26장에서는 아나니아와 사울에 만남에 대해서 생략되어 있으며 사울의 소명이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주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본절은 사울의 소명이 그가 다메섹성에 들어간 후에 주어질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같은 불일치는 26장이 사울 자신의 체험을 간략하게 전달하는 것이므로 그 체험에 담긴 내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받았던 소명을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것처럼 묘사했던 것이다. 한편 본절은 헬라어 본문에서 접속사 '알라'(* , '그러나')로 시작되고 있으나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있지 않았다. 여기서 혹자는 앞절과 연관지어 '나는 네가 행한 일에 대해서 더 이상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너는 지금 어떤 일을 해야한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알라'를문자적으로 해석한다(Lenski). 그러나 혹자는 '알라'를 감탄사 정도로 생각하여 '자'로 번역했다(Haenchen). 여기서 어느 해석을 취해도 앞절과 본절의 연결은 자연스럽지못하다. 그래서 어떤 영역 성경 중에는 '그는 떨면서 놀라움에 사로잡혀 주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말했다'는 구절을 첨가시켰다(KJV, MLB). 이는 22:10과 조화시키기 위한 첨가로 짐작된다. 아마 바울은 자신이 핍박하는 자들이 섬기던 예수를 만나자 놀라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9:7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 사울과 함께 동행하였던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시각적으로 아무것도감지하고 있지 못함을 언급하고 있으나 22:9과 26:14에서는 각각 조금씩 달리 설명했다. 22:9에서는 일행이 소리는 못들었어도 빛은 보았다고 진술하여 본절과 정반대의상황을 나타내었다. 반면 26:14에서는 사울과 그 일행 모두가 엎드려졌다고 한점으로보아 모두가 초자연적 경험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바울의 세 가지 진술이 모두 서로 일치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된 '소리'는 음성을 뜻하는 것으로볼 수 있는데 바울에게 명령한 음성이 예수의 음성인지 아니면 사울의 음성(5절)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또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 하늘로부터 온 빛을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러한 의문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 두 가지의 추측이 가능하게된다. (1) 일행들은 '주여 누시오니이까?'라는 사울의 외침만 들었을 것이다(Chrysostom, Bruce). (2) 그들이 무슨 소리를 듣기는 들었으나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Bengel). 여기서 강조된 분명한 사실은 사울이 환상이라고 할 수 있는 초자연적 경험을 하였고 그 사건을 목격한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격자들은 사울이 어떤 경험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증언할 수 없는 피상적이거나 부분적인 이해만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22:9과 26:14의 기록과 본절의 기록이 지닌 차이는 모순이라기 보다는 구체적으로 초자연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사울뿐임을 강조하는 기능을 갖는다. 말을 못하고 섰더라 - 본 구절은 사울의 일행들이 무엇인가를 경험하면서도 아무말을 못하고 있음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말을 못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오이'(* )에 대해 혹자는 '공포로 인하여 말을 못하고 벙어리가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A.C. Hervey).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고 다만 70인역(LXX)의 사 56:10에서 짖지 못하는 개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사56:10에서는 이 단어가 공포와는 관계없이 어떤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無知)와연관되어 사용되었다. 아마 누가는, 사울의 일행이 자신들과 사울에게 일어난 사건에대해 전혀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9:8

 

일어나 눈은 떳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 사울이 예수의 음성을 듣고 있었던 모습은 땅에 엎드러진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보지 못했다'라는 말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사울이 보고자 했으나 볼 수 없었던 상태, 즉 빛을 경험한 순간부터 일어서는 시점까지 보이지 않고 있는 사태를 암

시한다. 따라서 사울이 경험한 소명 사건은 가시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었다기 보다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의 음성을 들었던사실은 내면적인 사건으로 돌릴 수 없다. 사울이 빛으로 인해 예수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음성은 그에게 실제로 들려왔다. 한편 그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상태에 대해 몇몇 학자들은 사울이 회심하기 전까지의 영적 무지에대한 상징으로 생각한다(Calvin, De Wette).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그러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그 생각은 별로 타당성이 없다(Meyer). 오히려 이 사건은 사울에게 실제로 발생한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였다.

 

=====9:9

사흘 동안을 보지도 못하고 심음을 전폐하니라 - 여기서는 강조점은 보지 못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흘 동안 식음(食飮)을 전폐한사실이다. 즉 사흘 동안에 걸쳐 사울에게 내면적인 어떤 큰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암시한다. 아마도 사울 자신이 지금까지 배웠고 자랑스럽게 고수했던 사상 체계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예수의 음성을 연관지어 깊은 고뇌나 생각에 빠졌을 것이다. 특히 '사흘'(* , 엔 헤메라스 트레이스)이라는 숫자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낸 요나의 이야기(마 12:40)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예수의 부활처럼 사건의 대전환을 예고한다. 이와 같이 사울의 회심은 자기 자신의 엄청난 내면적 고통을 통한 결단이었다. 이 사흘 동안 사울은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구약적 차원에서 재해석해야 했으므로 그의 신학적 체계가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에신중을 가했다.

 

 

< 설 교 >

신앙의 선배님들의 삶과 사역

행 9:1-6 / 김명혁 목사

 

1.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밀란의 어거스틴을 찾아오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셨고 평양의 길선주를 찾아오셔서 마음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한 사람이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할 때 그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어거스틴으로 인해서 고대 세계의 운명이 바뀌어졌고 길선주 목사님으로 인해서 조선 민족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면 “조선 교회 또는 한국교회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길선주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태동케 한 1907년 부흥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는 이기풍 목사님과 함께 한국 최초의 7분 목사님들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지만 29세 때 예수님을 믿은 다음부터 40여 년 동안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는데, 380여 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고, 3천 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8백 여명을 목사와 전도사와 장로로 세웠고, 6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제 길선주 목사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길선주는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습니다.

그는 1869년 3월 15일 평남 안주에서 출생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보다 4년 후에 태어났습니다. 길선주는 네 살 때부터 가정에서 어머니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일곱 살 때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열한 살 때, 열 여섯 살 되는 신부와 결혼을 했습니다. 누나 같은 아내에게 어리광을 부리곤 했는데 부엌에 가서 누룽지를 달라고 조르기도 했고 아내 등에 업혀 뒷동산에 올라가 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길선주가 몸과 마음이 약한 마마보이는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체구와 건장한 기력을 가진 굳건한 남성이었습니다. 그는 “호랑이” 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장사 같은 면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길선주는 소년시절부터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환멸을 느끼면서 보다 나은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살 때부터 산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창일이라는 도사를 만나서 그가 써준 “산신차력” 이란 주문을 밤낮으로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대성산 절에 가서 일 주일 동안 밤낮으로 주문을 외우자 영이 내려 온 몸이 떨리고 기력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뻤습니다. 길선주는 수도에 더욱 정진하기 위해서 평양에 있는 장득한 도사를 찾아갔습니다. 장득한은 선도를 수련한 도사로 길선주에게 옥경의 구령삼정 주문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길선주는 21살부터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밤낮으로 옥경의 구령삼정 주문을 외웠습니다. 때로는 21일 때로는 49일 때로는 100일씩 기도하며 주문을 외웠습니다. 결국 길선주는 선도의 영험과 신통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는 아내에게도 이 도를 가르쳐 강령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길선주는 선도에서 큰 힘을 얻어 통나무 목침을 주먹으로 부수고, 다듬이 방망이를 손으로 분질렀으며, 웬만한 개천은 단숨에 건너 뛰었습니다. 차력에 성공하고 선도에 통달한 길선주의 이름이 널이 알려지자 평양 시내에 그가 나타나면 그를 가리켜 “길도사” 라고 부르며 수군거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느끼며 계속해서 수도에 힘을 다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길선주를 성 어거스틴과 비교해 보게 됩니다. 어거스틴도 젊은 시절에 나름대로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19세 때 호르텐시우스라는 철학 책을 읽으면서 세상이 모두 무가치하게 보였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계속해서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길선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도의 도는 터득했지만 아직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해서 계속 수도에 힘을 다했습니다.

 

2. 길선주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1890년부터 평양 시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키도 크고 코도 크고 눈이 파란 양귀자 즉 괴상한 서양 사람이 나타나서 서양 교를 전하는데 한번 거기에 빠지면 혼이 뽑혀서 미치고 만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쌤 마펫(마포 삼열) 선교사를 가리켜 하는 말이었습니다. 쌤 마펫 선교사는 1890년 1월 제물포를 거쳐 경성에 도착했고 1893년부터 평양에 와서 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길선주는 평양 널다리 골에 살고 있었는데 괴상한 서양 사람이 나타나서 새 교를 전한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동하여 마포 삼열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와 담론은 나누었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 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길선주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알쏭달쏭하여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마음이 열렸습니다. 마치 어거스틴이 암브로스를 만나 복음을 들으므로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 열렸던 것처럼, 길선주는 마포 삼열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들으므로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 열렸습니다. 길선주는 진리를 더 알아보기 위해서 친구 두 사람을 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문흥준씨와 김종섭씨 두 사람을 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김종섭은 길선주에게서 선도를 배운 그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돌아온 김종섭이 길선주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길선주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길선주는 그의 배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길선주는 결국 마음에 번민을 가지고 깊은 밤 이른 새벽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어거스틴이 무화과 나무 아래서 깊은 번민에 빠졌던 것과 비슷했습니다. 길선주는 고민하며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시여, 저는 지금 심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신봉하던 선도는 정말 섬길만한 도인지 의심스럽고, 예수교에는 과연 영생의 진리가 있는지 알 수 없어 마음이 몹시 괴롭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사 이 마음을 가라앉아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수삼일간 계속했습니다. 밤이 깊어 새벽 한 시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정말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인지 알려 주옵소서” 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안에서 청아한 피리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탕탕탕 하는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깜짝 놀라는 순간 하늘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라고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길선주는 너무나 무서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엎드린 채 “아버지여,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울부짖었을 때 그의 몸은 불덩어리가 된 듯이 뜨거웠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길선주는 새로 태어났습니다. 길선주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3. 길선주는 한국교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길선주는 두문불출하고 기도와 성경에 전력했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와 만나고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도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기록을 읽을 때는 환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29세 되던 해인 1897년 8월 15일 길선주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롱했지만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상점 일을 돕고 있던 이정식에게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게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전도해서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내에게 전도해서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온 가족이 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 오게 되어 길선주는 너무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자기의 가르침으로 선도에 입문했던 의제 김찬성에게도 전도하여 그로 하여금 흐느껴 울며 예수님을 믿게 했습니다. 그는 후에 목사가 되었고 그의 두 아들도 목사가 되었는데 두 아들 중 한 사람은 저의 아버지와 함께 평양에서 목회하다가 함께 순교한 김화식 목사님이었습니다.

길선주는 1898년 30세 때 평양 널다리 교회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널다리 교회는 그 이듬해인 1899년에 장대현으로 옮겼고 1900년에는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1901년에는 33세 때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장립되었고, 1902년에는 조사(전도사)가 되어 목회에 전념했습니다. 해박한 성경 지식과 유창한 설교와 기도와 성령충만한 그의 목회 사역은 장대현교회의 급속한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조사가 된 후부터 그는 돈과 부에 대한 관심을 모두 버리고 현 평생 가난과 청빈의 생활을 했습니다. 사모님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많은 핍박과 탄압이 있었으나 길선주 조사는 더욱 더 기도에 파묻혔습니다. 1903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는 매일 한 시간씩 기도하고 한 시간씩 성경을 읽고 암송했습니다. 길선주 조사는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에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 지역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사람들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이었습니다. 드디어 1906년부터 회개와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06년 황해도 재령에서 길선주 조사가 사경회를 인도하는데 회개운동과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1월이 되었습니다.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습니다. 전국 각처에서 1,500여명의 신자들이 장대현교회에 모여 10일 동안 사경회를 가졌는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 글들을 소개합니다. “2천명 이상을 수용하는 장대현 예배당에 회중이 차고 넘치도록 모인 사경회원 전체가 성령의 휩쓸린바 되어 혹은 소리쳐 울고 혹은 가슴쳐 통곡하며 혹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고 혹은 발을 구르고 자복하며 혹은 춤을 추면서 찬미하니 소리소리 합하여 소리의 기둥은 번제단에 타오르는 불기둥 같이 하늘로 떠 떠올랐다.”(「신학지남」 14권 제 2호). “길선주 장로는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 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존귀하신 분이 비천하고 누추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고, 귀중한 몸인데도 오셔서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며, 전능하신 분이 간절히 두드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귀빈을 맞아드리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자애하신 귀빈을 환영치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고, 간절하신 음성을 듣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길 장로는 ‘문을 열라 문을 열라 문을 열고 환영하라’ 라고 준엄하게 외쳤다. 길선주 장로의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영접하라’ 라는 열띤 설교가 시작되었다. 설교가 끝나고 길 장로의 기도가 시작되자 감동을 받은 회중은 자기들도 모르게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통회 자복했다. 장내는 금새 울음바다가 되었다.”(최현, “빛을 남긴 믿음의 위인” p. 182). “그는 기도회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 라고 하면서 지난 날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했다. 길 장로는 기도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속였고 그 친구와 그의 부인을 속인 도둑놈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그 돈을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라고 공중 앞에서 눈물과 함께 자복하였다. ‘나 때문에 온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올시다’ 라는 자복기도는 쉬지 않고 계속하였다. 회중은 이 때 모두 마루 바닥을 치면서 회개하기를 시작하였다.”(김광수, 「한국기독교 인물사」 pp. 140,1).

길선주 장로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 일곱 분 목사님들 중의 한 분으로 마포 삼열 선교사에 의해 안수를 받았고,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고, 총회 전도국장이 되어 6년간 시무했습니다. 1919년 길선주 목사는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시다가 2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옥중에서는 기도와 성경 읽기와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출옥 후에 전국을 누비며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1935년 11월 26일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마지막 폐회 축도를 마치고 뇌출혈로 쓰러져 35곳의 집회를 남겨두고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으로 옮겨갔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아버지”로 한국교회를 세우는데 한 평생을 다 쏟아바치고 하나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의 철저한 “회개”와 “헌신”과 “수고”의 삶과 사역이 있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의 철저한 “회개”와 “헌신”과 “수고”의 삶과 사역으로 우리 민족은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 소망과 생명의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신 길선주 목사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우리들도 그 분의 발걸음을 따라 빛을 비추며 살기를 다짐해봅니다. 길선주 목사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길선주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2. “핍박자가 전도자로 된 이기풍 목사님”

핍박자가 전도자로 변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사울” 이라고 불리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는 선교사를 때려 눕힌 핍박자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평양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힌 “조선의 새벽 별”이 되었고, 제주도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힌 “제주도의 새벽 별”이 되었었습니다. 그는 한국 최초의 7분 목사님들의 한 분인 이기풍 목사입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이기풍은 선교사를 때려 눕힌 핍박자였습니다.

그는 평양에서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그는 1865년 12월 23일 평양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어릴 때부터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을 미워했습니다. 한 번은 평양 거리를 지나가던 평양 좌수의 거만한 행렬을 바라보다가 울화통이 치밀어 달려들어 좌수를 땅 바닥에 내동댕이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체포되어 형틀을 목에 메고 고생했다고 합니다. 그는 지배층에 대한 반항심을 품고 주먹과 머리를 휘두르는 박치기 깡패로 유명했지만 학문에 대한 소질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섯 살 때 사서오경을 줄줄 외웠고 열 두 살 때는 백일장에 나가서 붓 글씨를 써서 장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서양 사람들을 미워한 이유는 그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우리 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음흉한 계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양 사람의 한 사람인 쌤 마펫(마포 삼열) 선교사가 이기풍이 지배하고 있던 평양 거리에 들어와서 날마다 복음을 전하자 깡패 두목인 이기풍은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가 29세 되던 1893년이었습니다. 이기풍은 28세(한국 나이로는 29세)였습니다. 이기풍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마포 삼열 선교사의 말이 너무나 듣기가 싫었습니다. 그런 말을 못하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던 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그의 턱을 부서뜨렸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피 투성이가 되어 길 모퉁이에 쓸어졌습니다. 그러나 마포 삼열 선교사는 수 많은 핍박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끈질기게 전해서 그 이듬해인 1894년에는 22명에게 학습을 베풀었고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평양에 교회당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장대현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기풍은 서양 사람이 교회당을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당 건축이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기풍은 깡패들을 동원해서 교회당 건축현장을 모주리 때려 부시고 온통 수라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교인들은 너무나 분개하여 모두들 맞서서 싸우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포 삼열 선교사는 교인들을 달래며 말렸습니다. 그리고 깡패들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이 소문이 삽시간에 평양성 전체에 퍼졌습니다. 이때부터 평양 시민들은 그를 가르쳐 “마포 선교사” 라고 부르며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루 아침에 “선량한 사람”으로 평양에서 유명해졌습니다.

선교사의 턱을 부서뜨리고 교회당을 때려부순 이기풍은 의기양양했지만 양심 한 구석에 찔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잠을 자는데, 꿈에서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그는 너무 놀라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러나 즉시 항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당시 청일전쟁으로 나라가 어수선해서 잠시 원산으로 가서 피신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앞에 이상한 옷 차림을 한 서양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평양 거리의 마포 삼열 선교사와 비슷한 모습의 서양 사람이었습니다. 원산에서 선교하고 있던 스왈렌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이기풍을 보자마자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우뢰 소리와 같았습니다. 결국 이기풍은 스왈렌 선교사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29세 되던 해인 1894년이었습니다. 그는 즉시 마포 삼열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 앞에 무릎을 꿇어 백배 사죄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잃었던 한 마리 양이 돌아온 것을 바라보며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후부터 이기풍은 평양 시내를 누비며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깡패가 전도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평양 온 성안을 발칵 뒤집었습니다. 그는 동만 트면 나가서 전도하는 한국의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1896년에는 마포 삼열 선교사와 함께 함경도 지방으로 긴 전도 여행을 다녀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예수님을 전하기에는 너무 무식하다는 것을 깨닫고 1903년에는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전도자와 목회자로서의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국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던 해인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이기풍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7인 목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 마포 삼열 선교사에 의해 안수를 받았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은인입니다. 그는 턱에 돌을 맞고서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십자가와 사랑의 복음을 전한 결과 그는 조선에 이기풍 목사를 탄생하게 했고 길선주 목사를 탄생하게 했으며 나중에는 한경직 목사를 탄생하게 했습니다.

 

2. 이기풍 목사님은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기풍은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마포 삼열 목사의 선언에 의하여 우리 나라 최초 일곱 목사님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분들은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송린서, 길선주, 이기풍 목사님들이었습니다. 조선교회가 정식으로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특이한 것은 노회 셋째 날인 9월 19일 길선주 목사님의 사회로 열린 노회가 선교사들의 헌신적 노력에 보답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한 사람 파송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한 것입니다. 그 당시 제주도는 풍속이나 방언이 다른 외국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때 이기풍 목사님이 제주도에 선교사로 가기로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자신도 흑암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돌 팔매질을 당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도 사도 바울의 발걸음을 따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도 복음의 빚을 갚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교사로 떠나기로 준비하는 동안 그는 마음이 약해져서 제주도 가기를 주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윤함애 사모님은 남편을 격려했습니다. “우리가 안 가면 누가 불쌍한 영혼을 구하겠어요. 주저 말고 속히 떠납시다.” 그의 부인 윤함애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여성이었습니다. 1903년 마포 삼열 선교사의 중매로 이기풍 신학생과 결혼을 한 후 기도와 사랑으로 남편을 격려했습니다. 결국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1908년에 제주도를 향해 평양을 떠났습니다. 아기를 등에 업고 개나리 봇짐을 머리에 얹고 평양을 떠나 인천항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보고 울지 않는 여전도회 회원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 가족은 조그마한 목선을 타고 인천항을 떠나 여러 번 풍랑을 만나며 간신히 군산항을 거쳐 목포에 이르렀으나 거센 풍랑으로 사모님과 아기는 함께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모님과 아기를 목포에 당분간 남겨두고 이기풍 목사님만 먼저 제주도를 향해서 떠났습니다. 제주도를 향하던 배가 난파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으나 이기풍 목사님은 헤엄을 쳐서 간신히 추자도에 상륙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의 경험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13년 동안의 제주도 복음화의 사역은 수 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고통스러웠고 미신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고통스러웠습니다. 잠잘 곳도 얻지 못했고 먹을 것도 얻지 못해 때로는 산 기슭에 때로는 바닷가에 때로는 마구간에 쓸어져 기운이 없어 정신을 잃기도 했습니다.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면 마치 그에게서 가까이 하면 죽기라도 할 듯이 손을 흔들며 “설러버려설러버려 야가기끊어지갠” 이라고 말하면서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만 두어라 그만 두어라 내 목이 다라 난다” 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정책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핍박을 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너무도 힘이 들고 괴로워서 제주도를 떠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주도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그 사실을 편지로 써서 인편에 마포 삼열 선교사님에게 보냈습니다. 두어 달 후에 답장이 왔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하시오.” 이기풍 목사님은 그 편지를 받아 읽고서 그 자리에 쓰러져서 대성통곡하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얼마 동안 울다가 일어나니 성령님의 역사로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희망과 용기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산 속 동굴 안 구렁이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구렁이를 때려눕힌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이기풍 목사님과 사모님이 금식하고 기도하므로 미치광이를 고친 일도 있었습니다. 그 미치광이는 후에 예수님을 믿고 집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그야말로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경험을 모조리 경험한 것 같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13년 동안의 제주도 사역을 통해 제주도에서 사탄 마귀의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비추게 했습니다. 30여 개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1934년에는 제주도 독노회를 조직하게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성공적인 제주도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기도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던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봉사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나환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제주도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힌 두 개의 새벽 별들이었습니다.

 

3. 이기풍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 걸어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평생 복음을 전하다가 마지막에는 순교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제주도 복음 사역을 마친 후에도 조선교회를 위해서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특히 전라도 복음화를 위해서 그의 남은 생애를 바쳤습니다. 광주에서, 순천에서, 고흥에서, 벌교에서, 여수군 남면에서, 돌산 완도 등지의 도서지방에서 복음을 전했고 1927년에는 다시 제주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평양 출신으로 이방과 같은 제주도와 전라도에 가서 평생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사도 바울과 같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1921년에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제10대 총회장으로 한국교회를 봉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 한 평생 복음을 전하며 조선교회를 봉사하다가 성대가 막혀서 말을 못하기도 했고 관절염, 귓병 등으로 심한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교회가 심한 박해와 시련을 겪을 때 그는 과감히 일어나 일제에 대항하여 교회를 지켰습니다. 일제는 1936년을 기점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그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서 투쟁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일제는 그를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1938년 체포해서 순천 감옥에 투옥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갖은 고문을 가했습니다. 칠순의 노구로 당한 일경의 취조와 고문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순천에서 광주형무소로 이감되는 도중에 그는 쓸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1942년 6월 20일 77세를 일기로 사도 바울처럼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그의 마지막 생명을 순교의 제물로 주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기풍 목사님은 삶을 돌아보면서 한 사람의 생애와 운명이 예수님을 믿으므로 완전히 바꾸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기질도 습관도 운명도 완전히 바꾸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바꾸어진 삶을 통해서 민족의 운명이 바꾸어질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합니다. 우리들의 운명이 바꾸어진 것은 이분들 때문입니다. 전라도에서 오신 분들의 운명이 바꾸어진 것은 이기풍, 손양원 목사님들 때문이고 평양에서 오신 분들의 운명이 바꾸어진 것은 이기풍, 주기철, 최봉석 목사님들 때문입니다. 핍박자가 전도자로 바꾸어진 사도 바울의 변화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선배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소원해 봅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작은 별빛들이 되기를 소원해봅니다. 이기풍 목사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이기풍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이성우 목사 / 행 9:1-9

사도행전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입니다. 여기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사도행전 1장 1-2절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사도행전을 가리켜서 누가복음의 ‘후속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태동되게 된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던 복음의 역사가 그가 택한 사도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져가고 있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주도권이 예수님에게서 성령님에게로 옮겨간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당부의 말씀과 약속의 말씀의 주된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으로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하나님께서 영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며 활동하시는 또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함으로 제자들은 더 이상 비겁하거나 연약한 자들이 아니라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변화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자 강력한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기사와 표적이 백성들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믿음으로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은혜 가운데 기쁨을 누리게 된 성도들이 한 곳에 모여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면서 기도하는 일에 힘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물건과 재산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내어 놓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됨으로써 이 땅 위에 맨 처음 교회가 태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태동은 결국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열매였던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땅의 유일한 기관이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그 교회를 움직여 나가시는 주인의 역할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땅에 세워진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임재하심과 강력한 역사하심 가운데 날마다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져 가게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되는 놀라운 부흥과 성장의 역사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40여세나 된 사람이 걷게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기적 사건은 초대교회 부흥의 역사에 기름을 끼얹는 것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더욱 용기를 얻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자 유대교 지도자들은 몹시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했던 그들은 자신들이 승리한 줄로 알았는데 제자들을 통해서 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제자들은 그들이 십자가에 죽게 했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놀라운 부활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하게 되면서 예루살렘 온 성이 요동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복음의 역사는 거센 파도처럼 아무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의 위력을 보이면서 확장되어 나갔기 때문에 누구도 복음의 위세를 막아설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와 제자들, 그리고 성도들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능력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셨던 약속의 말씀에 기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또한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한 복음의 확장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라이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들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초대교회가 놀랍게 부흥하며 성장해 나갔던 원동력은 바로 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제자들과 성도들은 그저 성령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럴만한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통하여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갔던 것입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교회는 내적인 성장과 외적인 부흥을 동시에 이루어 나가며 균형 있게 성장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외적인 성장에 발맞추어서 일곱 집사를 세워서 내부적인 조직을 갖춤으로써 교회는 더욱 든든하게 세워져 갈 수 있었으며, 외적인 부흥의 발판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께서 일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애끓는 마음이 지칠 줄 모르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왕성하게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막아설 수 없었으며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유대교 지도자들을 통한 사도들에 대한 박해가 다시금 시작되어서 결국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라고 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지만 사실은 그것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더 확실하게, 더 왕성하게 이루어 가시고자 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박해는 교회와 복음의 역사를 약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드는 역 효과를 내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박해를 통해서 성도들이 더욱 한 마음으로 뭉쳐서 더 힘써 기도하며 외부적인 시련에 맞서게 되었으며, 공동체 구성원 간에도 서로를 더욱 사랑하고 배려하며 돌아보는 가운데 더욱 든든한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기점으로 더욱 거세진 박해의 역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또 다른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셨는데,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박해를 피해서 성도들이 각처로 흩어져 나가게 됨으로 인해서 드디어 복음은 예루살렘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 가운데 이방 세계로 강하게 전해져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흩어져 나간 성도들은 각자가 있는 곳에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면서 기독교는 드디어 세계적인 기독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박해를 피해서 흩어져 나간 성도들은 마치 산불이 나면 불씨가 바람에 날려서 다른 산으로 옮겨 붙게 되는 것처럼 다른 이방 지역에 활발하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작정하신 대로 복음이 이방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복음을 전하는 과정 가운데 있을 수 있는 시련과 역경은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또 다른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서 섭리하시는 결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임재하심과 강력한 역사 가운데 초대교회는 그야말로 놀라운 부흥과 성장의 역사를 이루어 나갔는데, 성령은 교회의 내적인 성장과 외적인 부흥의 확실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이러한 강력한 원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성령을 속이고 사도들을 속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하나님의 징계로 죽게 되는 안타까운 사건이나 사마리아 성에 살고 있었던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이 돈으로 성령을 사고자 하는 욕심스럽고 영적으로 무지한 행동을 보임으로써 때때로 한편으로는 건강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서 내적인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교회는 요동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자들의 지속적인 박해로 인한 외풍이 거세게 몰아닥쳤지만 그럼에도 교회는 오히려 더욱 놀랍게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는 교회 안팎으로 시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주도적인 복음의 역사로 인해서 오히려 더 활발하게 복음 전파의 역사가 이루어져 나갔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 대해서는 같은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 취급을 하던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감동하심으로써 빌립이 먼저 그들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베드로와 요한이 그 곳에 찾아가서 성령 받기를 기도함으로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남으로 복음은 이제까지의 장벽을 허물어 버리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은 빌립은 멀리 에티오피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드리러 왔던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가 결국은 빌립을 통해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이제 더 이상 민족적인 차별과 한계를 용납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민족 누구나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예루살렘의 종교에서 벗어나 드디어 세계적인 기독교로 탈바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9장 1-9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복음의 세계화를 위한 원대한 꿈을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서 거기에 적합한 한 사람을 일꾼으로 부르시는 내용인데, 기독교 박해의 선봉에 서 있었던 사울을 강권적으로 부르시고 그를 변화시켜서 전도자로 삼으시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울은 유대교의 열성당원으로써 유대교가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가장 적극성을 띤 사람으로서 스데반 집사의 순교 현장에서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에도 전혀 마음에 거리낌이 없이 더욱 활발하게 박해자로서의 삶을 이어나갔는데, 그는 살기가 등등해서 대제사장에게로부터 체포 영장을 발부받아서 다메섹에 있는 여러 회당을 찾아가기 위해서 의기양양하게 길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강권적으로 만나셔서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사울은 그 당시 헬라 철학의 본 고장이었던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써 당대의 사상적인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이었으며, 가마리엘 문하생으로 유대적인 정통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의 공회원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지위까지 갖춘 사람이었으며,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소수의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율법이나 유대교에 대해서는 남다른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울을 주도면밀하게 준비시키시고 훈련시키셔서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전격적으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더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다고 9장 15절 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남다른 부르심의 경험을 하게 된 사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선지자 아나니아를 통해서 안수를 받고 다시 보게 되었으며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그가 박해하고자 했던 다메섹에 있는 여러 회당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나바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에 가서도 사도들과 교제하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의 이러한 놀라운 변화는 한 마디로 말해서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은 사울의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죽이려고 시도했는데, 그의 제자들이 그를 밤중에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림으로써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 일 후에도 사울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로부터 몹시 미움을 받아서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되었던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 인류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성취해 나가시는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나가시기 위한 주도권을 가지시고 어느 시대나 일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일꾼으로 사울을 부르신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이루셨는데, 오늘 이 시대에 또 다른 복음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여기에 적합한 일꾼을 찾고 계시며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이 일을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으로 강권적인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고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일꾼을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에 발견되시고 그 손에 붙들려서 복음의 일꾼이요 생명을 살리는 일꾼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역자를 위한 치유

박지온 목사 / 사도행전 9:1-15

어떤 사람을 사역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불러서 이 자리에 오게 하셨다는 것으로 이미 우리들은 사역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냥 우리를 부르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치유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정신병자나 육신이 나약한 자는 일을 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물론, 건강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즉, 치유되어져서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을 때에 우리의 수준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치유하시고 우리를 통해 세계를 살리실 것을 작정하셨다면 산업과 가정과 자녀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교회 건축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서면 됩니다. 주님께서 성전 지으라고 돈을 주시면 성전 짓는데 돈을 드리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치려고 해도 바칠 돈이 없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간표가 있습니다. 또한, 좋은 건물을 지어놓고 텅텅 빈다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건물을 짓기 전에 우리로 하여금 그 건물을 채울 수 있는 가슴과 눈을 먼저 여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전도에 대한 인식입니다.

얼마 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무덤에 쇠말뚝과 칼 등을 꽂아 놓은 자가 점쟁이라고 밝혀졌습니다. 진상을 조사해 보니 그 점쟁이가 꿈만 꾸면 이순신 장군이 나타나서 가위가 눌리게 되자 그런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짓입니다. 즉, 사단의 역사입니다.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이 국민 의식을 바꾸기 위해 '새마을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새마을 운동의 노래 중에 '새벽종이 울렸네'라는 가사가 있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교회에서 새벽 기도회를 알리는 종소리입니다. 이것은 그가 어려서 교회에 다녔던 영향입니다. 이와 같은 국민 의식을 바꾸는 일도 복음의 영향을 입었을 때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진실로, 복음이 아니고서는 의식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가 전도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정말로, 우리 자신이 치료되어야 됩니다. 복음을 전할 거리가 없으면 말을 꺼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역자가 치유되어야 합니다.

 

1. 사역자의 자세

'내가 먼저 치유되어야 되겠다'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치유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짜 정신병입니다. 조금만이라도 '내가 치유되어야 되겠다'는 의식이 있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메시지를 받으면서 하나님께 치유를 구할 때 역사가 나옵니다. 이러한 인식이 바로 치유의 문입니다.

1. 동기

동기부터 치유받아야 합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솔직히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습니다. 천국 간다는 말은 바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또, 구원받았다는 것은 치유받았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것은 전도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계획은, 나를 전도 받게 하여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전도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 중의 계획입니다. 이러한 동기로 교회에 나오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동기들이 대부분 건강을 위해서, 혹은 돈을 벌기 위해서 등에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주님 앞에 자신의 동기를 털어놓아 보십시오. 정말 예수 믿는 동기가 고통받고 지옥 갈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저들도 나와 같이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눈이 열리지 않으면 별의 별 것이 다 나옵니다. 건강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건강을 위해서 뱀이나 굼뱅이 등을 먹는 엉뚱한 곳으로 빠지게 됩니다.

 

2. 염려와 걱정

전도에 대한 동기가 안되어 있으면 예수 믿는 것이 염려와 걱정을 더하게 만들고, 결국은 인본주의가 나오게 됩니다. 전도의 동기가 안되면 이상하게 이러한 곳으로 빠지게 됩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서 자존심만 배우게 되어 조금만 무시하는 소리를 들어도 잡아먹을 듯이 됩니다.

 

3. 인격

그렇게 좋던 사람도 점점 인격적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부드럽고 폭넓게 되는 것이 아니라 좁아지고 다투게 됩니다. 전에 같으면 웃고 넘어갈 것을 싸우게 됩니다. 왜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을 못 받아들입니까? 초대교회의 인격들이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싸움을 모르고 생활했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잘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만, 엄청난 인격적인 문제가 교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인격에 문제가 생겨서 치유받을 수 없는 방향으로 자꾸 흘러갑니다.

 

2. 인격 치유

초대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칭송을 받았고, 이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이러한 인격으로 치유받는 것이 교회의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대구시의 송현교회 교인들처럼 되어라'라는 말만 듣게 되면 다 끝나는 것입니다.

인격은 그냥 얌전하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가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인격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이 사실이 먼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이므로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격이 되어지기 위해서 먼저 생각의 순서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순서만 바로 놓으면 다 된 것입니다. 인격적인 사람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할 것과 하지 않을 것, 설 때와 서면 안될 때를 분별할 줄 압니다.

 

1. 하나님의 입장

하나님의 배경에 서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를 빼버리면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빠집니다. 그러므로, 우선 주 안에 서야 합니다. 즉, 우선 해야 할 것이 기도 스케쥴입니다. 여기에서 전도도 건축도 다 되어집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기도하기 위해서 옥상부터 올라갔습니다. 그 때에 멀리 있던 고넬료와도 연결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개인과 가정과 다락방에서 기도 회복이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기도가 회복되어지면 다 회복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입장이 우선 순위가 되면 다 된 것입니다. 즉, 나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 되겠나?'와 '저 사람도 하나님이 역사하면 된다'는 것 사이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나의 기준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그러나, 말세에 하나님을 믿는 눈으로 본다면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의 인격이 치유되어집니다.

 

2. 상대방의 입장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지 않으면 치유가 안됩니다. 이 땅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속이 터져 죽습니다. '사단이 역사하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인격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안되면 도와줄려고 해도 역반응만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을 받고 안식과 평안이 있는데, 저들은 왜 저렇게 고생을 할까'라고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격이 바로 될 수 없습니다.

 

3. 갈라디아 2장 20절

많이 알고 있는데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죽어야 되는데, 이것이 안되고 자기가 시퍼렇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자기의 감정이 시퍼렇게 나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날마다 죽는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자기가 잘 안 죽습니다. 사건과 문제가 나오면 시퍼렇게 자기가 나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삶이 안되면 인격이 안됩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기독교인들이 안 죽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열매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여호와를 앙망할 때에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의지할 때에 달려도 피곤치 않고 걸어도 곤비치 않게 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여 은혜를 주시면 할 수 있다는 고백이 철저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안주시면 안됩니다. 인간의 한계로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약할 때에 나옵니다. 바울이 삼층천에 가보았으나 자부하지 않도록 몸에 가시를 주었습니다. 이런 약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은 은혜와 능력이 머물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계속 역사가 나오고 잘 되면 정말 기고만장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곳에 머문다는 사실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지금 어려운 중에 있습니까? 이 사실이 되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사업도, 건강도 때에 따라 여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하시고자 함이라고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어려울수록 오직 성령이 임하실 때에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해주시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3. 사단의 통로

이러한 인격이 안되면 모든 것이 사단의 통로가 됩니다.

1. 열심, 종교, 신비

이러한 사실이 안되면 모두 열심에 빠지고, 안 믿는 자는 종교에 빠집니다. 혹은 신비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심히 할수록 이상한 곳에 빠지게 됩니다. 전도의 인격이 되어지면 기도를 많이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생명 살리는 역사를 위한 인격이 안되면 헌신할수록 자만해지고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려워집니다.

2. 염려, 걱정

베드로전서 5장의 말씀처럼 정말 어떤 염려와 걱정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붙잡혀 있습니다.

 

3. 공포, 불안(두려움)

요한일서 4장 18-19절 말씀처럼 사랑 안에서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싸여있습니다. 병든다고 사람이 불안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병 때문에 점점 겸손해지고 평안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상하게도 병 때문에 공포심에 빠집니다. 이것은 사단의 배경입니다.

 

4. 타락

성도들조차도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5. 의식주 문제, 명예, 경배의 대상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사단의 통로가 됩니다.

 

4. 바울

이러한 사단의 통로를 차단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 안에 둘이 있어 하나는 선하려고 하고 하나는 악하려고 한다'라고 고백했으며, 결국 바울은 악에게 져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은 위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되고, 더 나아가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이냐?'라고 담대해집니다. '생명의 법이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드디어 바울은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신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이때부터 궁극적인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삼층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울이 장가를 가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바울은 열 네 편의 서신 중에 부인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하늘 영광을 본 후로 이 땅의 것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혼자만 그 곳에 들어간다면 나쁜 자라'는 간증을 하게 됩니다. '그 큰 축복을 알고도 말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고 고백을 합니다. 바울이 하늘 나라의 영광을 본 후 '이 땅의 것은 하늘 나라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라고 고백한 배경에서 참 인격의 치유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말할 수밖에 없어서 그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전도에 생을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 '하늘 나라의 영광을 말하지 않으면 화로다!'라고 고백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연세가 많으실수록 하늘 나라 영광에 들어가기 전에 전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오늘 죽어도 행복하지만, 남은 생애를 하늘 나라의 영광을 말하다가 그 영광으로 올라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늘 영광을 보고 당장이라도 올라가는 것이 좋으나 이 땅에서 내가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로다!'라고 고백하며 나아갈 때 현재 우리가 사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다툴 일이 없어집니다.

정말 전도할 사람을 만들려면, 1분만 지옥 불에 구웠다가 내놓으면 될 것입니다. 만약 그 곳에 내 형제와 자매가 간다고 하면 기를 쓰고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한편, 5분만 천국에 갔다 오면 사람들에게 하늘 영광을 전하기 위해 돌아다닐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면 모두들 돌아다닌다고 가정과 사회의 질서가 깨어질 것이니까 실제를 숨겨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의 영광을 맛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원인 전도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인격의 역사를 이루실 때에 새롭게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돈을 맡겨야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정말 전도자로 섰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것입니다. 인격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교회와 가정과 개인이 합시다. 정말 생애가 끝나는 날까지 전도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며 이를 위해 내게 있는 것을 바칩시다.

 

 

 

사 명

김태환 목사 / 행 9:1-16

이번 주부터는 신약성경으로 넘어와서 사명을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신 것을 보면 참 이상합니다. 어떤 때는 그 일을 위해서 준비된 사람을 부르십니다. 이사야 같은 사람이 그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때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부르십니다. 모세나 예레미야 같은 경우입니다. 또 어떤 때는 일터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을 현장에서 부르시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의 어부로서 그물을 깁고 있다가 갑자기 “나를 따라 오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울과 같은 사람은 전혀 하나님의 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도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속단하지 말아야 하고, 자기 자신을 볼 때도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을 즉흥적으로 부른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생명을 지으실 때부터, 아니, 하나님은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 생기기도 전부터 우리의 생에 대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레미야서 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너를 네 어미 뱃속에서 만들기 전부터 알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러 나라에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 또 시편 139편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가장 깊은 곳을 지으셨으며, 나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를 만드셨습니다. 내가 주를 찬양합니다. 이는 내가 신기하고 놀랍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내가 땅의 깊은 곳에서 만들어졌을 때, 주의 눈이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내 몸을 보셨습니다. 내게 정해진 모든 날들이 주의 책 속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날들의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기록되었습니다. 오 하나님, 주의 생각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요 그것들이 얼마나 크고 많은지요?” (시편 139:13-14, 16-17)

 

오늘 읽은 사도행전 말씀에도 이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는 이방 사람들과 여러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 주겠다.” 도구(道具)라는 말을 아시지요?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사람을 향해 “이 사람은 내가 선택한 도구이다(He is my chosen instrument)”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토기장이에다 비유한 곳이 많습니다. 이사야 29장, 이사야 45장, 이사야 64장, 예레미야 18장에서 하나님은 토기장이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We are the clay, you are the potter; we are all the work of your hand., 이사야 64:8)”고 합니다. 또 창세기 2장에는 토기장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이방 사람들과 여러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이런 말씀을 읽으면, 마치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그 손에 도구를 들고 뭔가를 만드시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시는데 그 도구가 바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런 말씀을 성경에서 읽으면서도 애써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도구라는 사실을 부인(否認)합니다. “나는 아니야. 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울 같은 사람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일에 전혀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름부터가 “큰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전에 보면 Saul이라는 이름에 “standard”라는 뜻도 있고 “asked for”라는 뜻도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름만 보더라도 사울이라는 사람은 대단히 자기 중심적인 교만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성경에 처음 등장한 것은 사도행전 7장입니다.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울은 그 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옷을 벗어 사울에게 맡기고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쳤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는 모습을 처음부터 모두 지켜 보았습니다. 그는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잘 죽는다고, 죽을 짓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사도행전 8:1).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를 모두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집집마다 찾아 다니면서 남자든 여자든 닥치는 대로 끌어 내어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날에도 그는 다메섹이라는 도시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숨어산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그들을 잡으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이들을 모두 체포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라는 대제사장의 편지가 쥐어 있었습니다. 다메섹에 거의 이르렀을 무렵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그를 둘러 비췄습니다. 그는 그 빛을 견디지 못하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이 때 그는 강력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런 소리가 너무나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그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내가 당신을 핍박한다고 하십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다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울과 같이 있었던 사람들은 무슨 소리가 난 것은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주님의 음성이 오직 사울 한 사람에게만 또렷하게 들린 것입니다. 훗날 그가 아그립바(Agrippa) 왕 앞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명할 때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로 차 보아야 너만 다칠 뿐이다(It is hard for you to kick against the goads., 사도행전 26:14)”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가시채”라고 나와 있습니다만, 영어 성경에는 “goads”라고 나와 있습니다. 가시가 돋친 막대기라는 뜻입니다. 이 가시채를 발로 차 보아야 네 발만 아프지 아무 소용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행위는 가시채를 발로 차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봐야 네 발만 아프지 아무 소용 없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정확하게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그는 네로 황제 때 갈릴리와 베뢰아를 다스리도록 임명된 왕입니다. 그 앞에서 사울은 당당한 목소리로 그날 그가 들었던 음성에 대하여 말합니다. “나는 너를 나의 일꾼으로 삼아 네가 본 것과 앞으로 내가 네게 보여 줄 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도록 할 것이다. 내가 너를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다. 그리하여 그들도 나를 믿어 거룩한 나의 백성들이 되게 하겠다.” (사도행전 26:16-18)

 

우리는 지금 사울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명을 받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몇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날의 다메섹 도상(途上)의 체험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전에 그렇게 교만하던 사람이 이제는 겸손하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아무 가치 없는 것들이 되었고, 그의 가슴에는 새로운 가치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말씀이 빌립보서 3장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7-8)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consider everything a loss compared to the surpassing greatness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저는 한참 동안 이 말씀의 뜻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함과 비교해 보면 다른 모든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손해(loss)”입니다. 그리스도를 추구해야 할 사람들이 다른 것에 시간과 정열을 쏟는 것은 그의 인생에 큰 손실이기 때문입니다. 힘써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십시오. 전도서 12:1 말씀을 아십니까?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이 말씀을 이렇게 바꿔 읽으십시오. “너는 청년의 때에 힘써 그리스도를 추구하라!”

 

둘째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날부터 마음에 거룩한 열정을 품고 살았습니다. 열정(熱情)이란 말은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나에게 열정이 살아 있으면 내 삶의 의미와 이유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열정이 식으면 내 삶의 의미와 이유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는 이 열정이 있었기에 그의 생애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1:21 말씀을 알고 계십니까? “나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For to me, to live is Christ).” 이 말씀에서 그의 열정이 느껴지십니까?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런 거룩한 열정을 가슴에 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단 몇 마디만 서로 얘기를 나누어도 그의 눈빛에서 열정이 느껴지고,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로,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도구(instrument)에는 아무 의지가 없습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도구는 토기장이의 생각에 따라 사용될 뿐입니다. 악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악기에게는 아무 의지가 없습니다. 악기는 연주자의 손에 들려 소리를 낼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울 그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충실하게 도구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렇게 많은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삶을 살았기에 다른 사역자들과 동역하는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3:6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을 아시지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여러분, 로마서 15:19에 보면 “나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을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만하게 전파했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까지(from Jerusalem to Illyricum)” 이 말은 바울이 복음을 전파했던 영역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일루리곤은 오늘날의 마케도니아 북쪽 지역입니다. 모든 지중해 연안과 그 북쪽까지 그가 가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때로는 배를 탔겠지요. 때로는 말을 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는 발로 걸어서 다녔습니다. 고린도후서 7:5에 보면 그 때 그의 삶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마케도니아에 도착했을 때도 조금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밖에서는 싸움이 있었고, 안에서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에게 손톱만한 작은 의지(意志)만 있었더라도 그는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내가 미쳤나?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하지?" 이런 마음이 들었더라면,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그렇게 광활한 지역을 누비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로서 살았기에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그 엄찬난 지역을 누비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헌신 덕분에 수 많은 지역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사명을 통해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호산나 왕의 왕이여

행 9장 6~7절 / 김중석목사

Hosanna! The king of kings. 아프리카 탄자니아에는 중앙정부가 존재하지만 지방에서는 부족에 따라 왕이 아직도 있어서 그 권위와 영향력은 대통령보다 더하다고 한다. 왕이 부족마을을 방문하니까 온 부족이 얼마나 환호하고 보고 싶어하고 존경하는지 대단했다. 캐나다 호주 등 영 연방국가들은 명목상으로나마 영국여왕이 군주로 되어 있고 여왕을 대신하는 총독이 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 반의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며 소리질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어린 아이들도 소리지고 온 성이 떠들썩하였다. (사진: 예루살렘 양의 문, 베다니에서 성전에 이르는 지도)당시 로마정권 시대인데도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한 것이다. 정권을 잡고 있던 로마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있었고, 유월절을 지키려고 세계 각처로부터 와 있던 순례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차 있던 상황에서 갈릴리로부터 온 일단의 사람들과 아이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했다. 예수님은 정말 왕이셨다. ‘왕의 왕’ 이셨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금 왕으로 온 힘을 다하여 환영해야 한다. [호산나 왕의 왕이여!]

 

1. 왜 왕인가? 구약에 이미 하나님께서 예언하셨기 때문이다. 사9:6-7 메시야 왕은 한 아들로 때어날 것이다. 그는 ‘어깨에 정사를 멘’ 왕이다. 그는 하나님이다. 그는 평강의 왕이다. 그는 다윗의 자손으로 날 것이며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며 공의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보존하실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이 예언 7백 년 후에 예언대로 메시야 왕으로 오신 이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할렐루야!

그가 우리를 자기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을 떄의 일이다(가이사랴 빌립보 사진). 거기에는 이방 신들이 많았다. 신들을 둘러보시면서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때 베드로가 대답했다. 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대답은 정확했고 당시 제자들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17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고백은 너무나 중요하기에 그 머리글자를 따면 ‘이쿠두스’가 되는데 이 말은 ‘물고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이 서로 식별하는 암호였다. 사랑교회 교패가 물고기 모양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참된 왕이 되시는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메시야 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메시야를 세상적인 의미로 생각했지만 성경은 달랐다. 구약에서부터 신약까지 일관되게 메시야 그리스도 왕은 자신이 백성의 죄악을 대신하여 죽는, 종이신 왕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사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백성을 얻으시고 나라를 이루어 왕이 되신다. 할렐루야! 그래서 그는 작은 나귀,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이고(그림) 스가랴 선지자도 그렇게 예언하였다(슥9:9).

2. 어떻게 높여 드릴까? 첫째 찬양이다. 마21:1-10에 나타난 환영의 모습처럼, 찬양은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높여드리는 것이다. 헨델의 메시야는 얼마나 강력하게 예수님을 찬양하는가! 그런 찬송이 많이 나와야 한다. 모든 신자는 일평생 찬송이 그치지 않아야 한다. 그 인생이 아름답고 복되다.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늘 맑은 찬송가락이 울려나기 바란다.

둘째 우리의 변화된 모습이다. 믿지 않는 사람이 찬송을 들으면 잘 모른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의 착한 행실을 보면 대번에 알아본다. 벧전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예수와 그리스도인을 비방하는 사람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나오게 된다. 다들 걱정할 때 근심하지 않는 평강한 모습, 소망이 없는 상황에서 희망과 기쁨으로 반짝이는 눈과 얼굴 빛,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유를 보이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빛을 보게 된다. 빌2:15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나이가 들수록 변화된 모습되어 하나님과 내가 아울러 빛나게 되자.

셋째 다른 사람을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것이다. 빌2:8-11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사람이 나이가 들면 은퇴를 하고 여행을 하고 싶어진다. 한평생 수고를 많이 했으니 이제 좀 쉬면서 산천경개 바라보며 즐기는 것도 그에게 주신 선물이리라. 그런데 여행을 하면서도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전도의 기회로 삼으면 어떨까? 요즘 우리 교인들이 각 위치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경향이 높아지는 것을 보고 감사한다. 하나님 지으신 세계가 아름답고, 예수 믿기를 권하는 것이 아름답고, 한 사람이 예수 믿게 되는 것은 더 아름답다. 할렐루야!

 

자! 이제 우리도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찬양을 부르자. (찬140) 왕 되신 우리 주께 다 영광 돌리세 그 옛날 많은 무리 호산나 불렀네 다윗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시어 왕위에 오른 주께 다 영광 돌리세(2, 3절)

 

 

 

 

 

다메섹 길

이동원목사 / 행 9:1-9

모든 시대를 살아간 그리스도인중에 가장 상징적이고 대표적인 그리스도인을 뽑는 다면 누구를 천거하시겠습니까? 저라면 주저 없이 바울 사도를 천거할 것입니다. 그는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인 됨을 보여주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불신자이었다가 신앙인이 되는 장면에서 그의 회심은 가장 대표적인 상징성을 갖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이 없는 분들이 마음을 돌이켜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는 사건을 가르쳐 기독교 신학에서는 회심(conversion)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회심을 급진적 회심과 점진적 회심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말합니다. 그리고 급진적 회심의 대표로는 바울을, 점진적 회심의 대표 유형으로는 바울의 제자인 디모데를 천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중에도 ‘바울 형 회심’을 한 사람들이 있고 ‘디모데 형 회심’을 한 분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려서부터 예수 믿는 집안에 태어나 자라면서 점진적으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받아드린 경우를 우리는 ‘디모데 형’이라 할 수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건을 계기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믿게 된 경우를 ‘바울 형’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예수를 믿게 된 경우에도 그 체험은 꼭 같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사건과 경험을 바탕으로 소위 회심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의사 누가가 바울의 회심 사건을 보도하면서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동반된 바울의 체험들을 열거합니다. 예를 들어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인 사건, 그가 땅에 엎드려 지면서 들었던 음성, 그런데 그 소리를 함께 동행 하던 사람들은 전혀 듣지 못한 일, 그리고 그가 땅에서 일어나며 발견한 실명의 경험 등등, 그러나 과연 이런 체험들이 동일하게 있어야 누군가의 회심이 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런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 예루살렘에서 북으로 240km나 떨어진 현재 시리아의 수도인 다메섹 길(예루살렘 구성의 다메섹 문을 나와 북상하는 길-옛날에는 5-6일 소요되는 여행 거리)이어서 흔히 이 체험을 다메섹 체험이라 일컫습니다. 지금도 시리아 다메섹을 방문하면 다메섹 교외에 바울이 이 체험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바울 회심 기념 교회가 서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다메섹 체험에서 그의 회심의 본질을 보여주는 요소들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정답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여러 초자연적 체험들, 예컨대 빛과 소리, 실명 등은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것들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회심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회심 사건의 본질-과연 무엇일까요?

 

1.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기독교 회심 사건의 본질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 곧 회심한 사람은 없습니다. 니고데모도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본문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예수는 그에게 핍박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울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빛을 동반하고 오셨습니다. 그는 빛 가운데 엎드려져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4절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5절의 주님의 대답을 들어 보십시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실 그가 박해한 것은 주님의 백성들이었지 주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주의 백성들을 박해한 것이 곧 주님을 박해한 것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 순간 그는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던지(바울처럼),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께로 와야 합니다.

성경에 가장 빈번하게 출현하는 초청의 단어가 ‘오라’는 말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와 보라’(come & see) ‘내게로 오라’(Come unto me), ‘오라’(come)고 초청하십니다.

요6:37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주 예수님,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저를 만나 주십시오.”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구하면 주시겠다고, 찾으면 찾게 하시겠다고, 문을 두드리면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이 만남을 주실 것입니다. 영국 클램팜에 화가요 작가인 샬롯 엘리옷(Charlott Elliot)이란 여인이 있었습니다. 20대부터 촉망을 받던 그녀가 30대가 되어 갑작스런 병을 앓게 되면서 매사에 반항적인 여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너무 걱정이 되어 그의 친구 목사 한분을 집에 초대하였습니다. 말란 목사(Dr.Malan)가 신앙 이야기를 꺼내자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만날 수 있느냐"고 신경질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때 이 목사님은 단순한 한 마디 말-당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그분에게 오시오(Just as you are)-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화살처럼 가슴에 찔리는 순간 그녀는 주님이 자신의 마음을 만지고 계신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예수님에게 자신의 인생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녀의 회심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녀는 붓을 들어 한 찬송가를 작사합니다.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주 보혈 흘려주시고 또 나를 오라 하시니 주께로 거저갑니다.”(찬339장) 이 찬송의 원 제목은 “Just as I am”이고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전도 집회마다 이 찬송이 불리워 수많은 사람들을 주께 나아오게 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 나아올수 있느냐고요? 대답은 “있는 모습 그대로 오십시오.”입니다. 이것이 회심의 첫 단계입니다.

 

2.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회심의 또 하나의 절대적 요소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나누어 고백합니다만 초대 교회, 사도행전에서는 예수의 구주와 주님되심이 구별되지 않고 그냥 주(Kyrios)로 불리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 또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치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전12:3의 말씀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본문에 바울이 거룩한 빛에 둘러싸여 땅에 엎드려 지며 5절의 말씀처럼 “주여, 누구시니이까”하는 순간 이미 성령은 그의 마음을 만지시고 계셨던 것입니다.지금 그가 만나고 있는 분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실 것을 직감한 것입니다. 그후 바울의 전도에서 예수를 주로 부른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 됩니다. 롬10:13을 읽어보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고백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제가 자주 설명해 드렸습니다만,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 로마가 통치하는 모든 곳에서는 길에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되면 인사가 “가이사가 주님이십니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이렇게 인사를 받습니다. “맞습니다. 나의 주님은 가이사이십니다.” 그런데 신실한 그리스도인중에는 다르게 이런 인사에 반응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자, 상대가 이렇게 인사를 먼저 해 옵니다. “가이사가 주님이십니다.” 이때 종종 어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인사를 받습니다. “아닙니다. 나의 주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맞습니다. 나의 주님은 가이사이십니다 하는 대신으로) 그리고 이 인사, 이 고백 때문에 그들은 자주 고발되고 체포되었고 원형 경기장 같은 곳으로 끌려 간 것입니다. 왜냐구요? 예수가 주인되신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는 어떨까요? 예수가 참으로 당신의 주가 되셨나요? 이것이 바로 회심의 두 번째 요소인 것입니다.

 

3.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 바울이 다음으로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을까요? 바울 사도가 자신의 회심 사건을 행22장에서 다시 증언하게 될 때의 고백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행22:9-10입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10)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저는 진실하게 예수를 주로 받아드린 모든 이에게서 반드시 있어야 할 질문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이제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바꾸어 말하면 이것입니다. ‘주님, 이제부터 변화된 삶을 어떻게 살면 좋겠습니까?“ 저는 이 질문이 없는 사람의 회심을 믿지 않습니다. 정말 우리 인생의 주인이 달라졌다면 변화는 피할 수 없는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 그를 주로 고백하게 된 바울의 변화를 한 성경학자는 3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으러 왔다가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2)그는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제거하러 왔다가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메신저가 되었습니다. 3)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자이었다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박해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Application Bible Commentary) 이것이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한 변화입니까? 이 한사람 바울을 통해 이제 복음은 시리아로 소아시아(터키)로 로마로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과연 바울 사도는 고후5:17의 고백을 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것이 바로 회심의 마지막 요소입니다. 예수를 참으로 만나고 예수를 참으로 주로 고백하는 자가 되었다면 이제 변화의 흔적, 변화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삶의 주인이 바꾸어졌는데 어떻게 인생이 바꾸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회심의 진정성을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회심은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초래할 것입니다. 주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옛날 방법, 옛날 모습 그대로 삶의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회심이 한 순간 사람을 성자로 만드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전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의미 있는 변화의 시작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미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신앙의 의미를 붙잡지 못하고 명문 브라운 대학에 다니면서 무신론자 친구의 영향으로 이신론자(사실상 무신론자)가 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4년 과정 대학을 3년에 졸업하고 졸업 여행을 떠났다가 시골 여인숙에서 옆방에서 밤새도록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듣고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이튿날 그 옆방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바로 대학 시절 자기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든 바로 자기 친구였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고 인생의 실존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다가 어린 시절에 찬양하던 예수님 앞에 돌아오기로 결심합니다. 회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울처럼 즉각 기도를 시작합니다. “주님,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어제처럼 지금까지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복음밖에 없고 이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신학을 공부한 후 방금 결혼한 신부와 데리고 아시아를 향해 떠납니다. 그가 바로 미국이 버마로 파송한 최초의 침례교회 선교사 아도니럼 저드슨(Adoniram Judson)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 단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도 없었던 버마에는 21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한 사람의 회심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변하면 한 가족이 그리고 한 공동체가 한 민족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그러면 이제 여러분과 저도 다메섹 길로 나아가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아직도 진지한 회심을 경험 못한 분들은 먼저 이 날 이 예배의 장이 다메섹 길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사울의 회심

피종진목사 / 행 9:1~9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 받은 사울의 대회심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의 회심 사건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대박해자를 대사도로 변하게 한 이 사건을 어찌 우리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지혜나 상식으로 측량하기에 불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은 회심(悔心)이 얼마나 귀하고, 하나님께서는 회개(悔改)하는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크게 쓰임 받게 하시는지를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1. 회심 이전의 사울

사울은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죽일 때 현장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의 증인으로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그만큼 그가 유대교에 열심 있는 자였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서 당대의 유명한 교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철저한 유대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에 대한 그의 이러한 열심은 자연스럽게 유대교에 해를 끼치고 있다고 여겨진 기독교에 대한 극심한 박해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회심(悔心)이란 죄를 뉘우치고 뉘우친 것을 고치는 회개(悔改)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①평안이 없어집니다.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시 38:3) 마음에 평안이 없고 항상 불안해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하나님과 청산되지 못한 죄악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②형통치 못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③병이 생깁니다.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5:14) 예수님께 고침 받은 38년 된 병자는 자신의 죄로 인해 38년 동안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죄를 회개할 때 마음의 평안이 있게 되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되며, 건강이 회복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고 외쳤고, 예수님께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고 말씀했으며,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라고 말씀했습니다.

 

2. 회심하게 된 사울

사울은 유대에서만 기독교인을 박해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박해를 피하여 흩어진 기독교인들을 결박하여 투옥시키기 위해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까지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생애가 완전히 바뀌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행 9:4) 사울은 주님의 영광의 빛을 바라본 이후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행 9:8). 예수님께서는 사울로 하여금 자신이 영적으로 맹인 된 자임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이처럼 그를 일시적으로나마 맹인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은 후에야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회심은 영적 상태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자의 죄를 흔적도 없게 해주십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죄악을 친히 담당해주십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 53:11) 그리고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하나님은 아무리 중대한 죄를 범한 악인이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그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땅을 회복시켜주십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3. 회심 이후의 사울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부활의 주님을 만나 회심하여 아나니아를 통해 세례를 받고, 기독교를 박해했던 그가 이방인의 대사도로 변화되어 3차에 걸쳐 전도 여행을 하면서 기독교 복음의 증인이 되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3장 8절을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울은 회심 이후에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며 일평생 복음을 전하며 귀하게 살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6장 20절을 보면 “다메섹과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전했습니다. 회개는 과거의 그릇된 행실을 뉘우치는 것만이 아니라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둠을 떠나서 빛으로,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회심 이후의 중요한 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심한 사울에게 아나니아를 통해 안수하게 하여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셨습니다(행 9:17).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되면 성령 충만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사울이 회심하여 이방인의 대사도로 변화되어 복음의 증인이 되었듯이 죄를 범했을 때 매순간마다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이 받은 은혜

이윤재목사 / 행 9:1-22

우리가 살면서 자주 잊고 사는 것은 우리가 은혜받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받고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래전에 읽었던 해외기사가 생각납니다. 미국에 한 40대 남자가 평생 갚아도 모자랄 정도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매일 빚 때문에 쪼들려 근근히 살고 있는 데 어느날 은행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실례지만 누구 누구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만”. “주소를 물어 봐도 되겠습니까?” 주소를 알려 주었더니 은행 직원이 말합니다. “다름아니라 고객께서 왜 통 은행에 나오시지 않는지 궁금해서 전화드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은행에 계좌가 없는데요.” 했더니 “아니, 고객님, 모르셨습니까? 고객님 앞으로 30년전에 한 분이 예치한 돈이 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 은행에 갔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30년 전에 자녀가 없는 먼 친척이 이 사람 이름으로 유산을 얼마 남겼는 데 그 돈에 30년동안 이자가 붙어 지금은 거의 천만 달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졸지에 빚 다 갚고도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읽고 생각했습니다. “나 한테는 전화가 안 오나?” 혹시 여러분에게 어느날 전화가 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혹시 졸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은행에서 전화가 오지 않더라도 저와 여러분이 이미 엄청난 것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은혜받고 삽니다. 우리가 아는 은혜도 있고 모르는 은혜도 있지만 큰 은혜는 대부분 모릅니다. 우리가 은혜라고 여기지 않는 것중에 너무 큰 은혜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십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것은 내 자녀가 거리에서 있지 않고 내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나에게 지불해야 할 세금이 많다면 나에게 상당한 재산과 괜찮은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음식 먹고 치워야 할 설거지가 있다면 내가 저녁에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는 것이고, 입던 옷이 몸보다 작다면 내가 정도 이상으로 잘 먹고 살고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리미질 해야 옷이 산더미가 쌓여 있다면 내가 입을 옷이 아주 많다는 것이고, 하루 종일 일해서 온몸이 피곤하면 내가 아직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고, 내가 읽어야 할 이메일이 많다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이른 아침 잠 못이루고 새벽종소리에 잠을 깼다면 그것은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은혜중에서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은혜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받은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 은혜를 오늘 받습니다. 저는 바울이 받은 그 은혜를 우리 모두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분, 내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받은 첫 번째 은혜는 하나님의 부름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바울이 다메섹에 있는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갈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장면입니다. 1-2절입니다. 행9: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여기서 다메섹은 지금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21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이 도시는 로마제국 당시 가장 큰 도시중의 하나였습니다. 거기에 유대인도 많아 약 4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30여 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나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메섹으로 피신을 갔습니다. 사울은 그날 다메섹에 피신한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려고 길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건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3절입니다. 행9: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거리가 200킬로가 넘기 때문에 아마 바울은 한 일주일 이상 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에 도착할 즈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습니다. 때는 정오였습니다. 정오면 낮 12시, 햇빛이 가장 강하게 비출 때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비친 빛은 그 빛이 아니었습니다. 행26:13절에 보면 바울은 그 빛을 “해보다 더 밝은 빛”이었다고 말합니다. 하루중 빛이 가장 강할 때가 정오인데 그 빛보다 강했다면 얼마나 강한 빛이었겠습니까? 그 강한 빛 때문에 바울은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더듬거리며 엎드려 있는 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4절,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모기만한 소리로 “주여, 누구시나이까?” 하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하늘에서 빛이 비춰 사람이 쓰러졌다. 눈을 못 떳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현대인들이 이 부분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애썻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울은 그때 일사병 때문에 쓰러졌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햇빛이 너무 뜨거워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울이 지병으로 간질병을 앓고 있었는 데 그날 그가 너무 피곤하여 발작으로 쓰러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생리적, 심리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믿음을 마음에 강하게 가지면 신체 변화도 거기 따라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바울이 일사병이나 간질병 때문에 쓰러졌다면 그 후에 그가 변화한 사건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사람이 일사병에 쓰러졌다고 전도자가 됩니까? 간질병에 쓰러졌다고 모든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됩니까?

생리적, 심리적인 변화도 바울이 예수님을 좋아하고 그를 진심으로 따랐어야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평소에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평소에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행8:3절입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여기서 ”잔멸했다“는 말은 맷돼지가 포도밭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평소에 예수믿는 사람을, 교회를 그렇게 잔인하게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도 당연히 여겼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사울이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바울은 결코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믿는 사람 잡는 것을 종교적 신념으로, 역사적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행26장에 보면 바울은 예수님을 가시채로 뒷발길질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행26:14,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길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여기에 나오는 ”가시채“는 이스라엘 농부들이 말 안듣는 소의 발에 채운 족쇄였습니다. 하도 말을 안듣고 발길질을 하면 농부들 소의 뒷 다리에 이 족쇄를 채웁니다. 그러면 소가 뒷발길질 할수록 가시채가 살을 파고 들어 발이 더 아픕니다. 그러면 소가 발길질을 그칩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기 발 아픈 줄도 모르고 계속 예수님과 교회에 대하여 발길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울을 하나님은 다메섹에서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께 나오셨습니까? 우연히 나왔습니까? 스스로 나오셨습니까? 나도 모르게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나오셨습니까? 어느날 수양회에 참석하고, 어느날 부흥회때 은혜받고 나오셨습니까? 어느날 자신이 지은 죄가 하도 슬퍼 “천부여 의지없이 손들고 나옵니다“ 나오셨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감동적인 무슨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나왔습니까? 나이는 먹어가는 데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며 인생을 고민하다 나오셨습니까? 어릴 때 교회다녔는 데 오랫동안 안 나오다가 갑작스런 사고로, 질병으로, 사업 실패로, 자식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고, 그래서 어느날 ”아, 하나님께 돌아가야 겠구나“ 그래서 나오셨습니까? 생각지도 않았는 데 어느날 누가 전도해서 나오셨습니까? 이유는 많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이유야 어떻든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바울처럼 부르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부르시지 않습니다. 오래전 한국교회 교인들을 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나올 때 마음으로 회심했습니까?” 33%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어쩌다 하나님께 나온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고 하나님께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바울처럼 어떤 초자연적인 체험하고 하나님께 나오셨습니까?” 그랬더니 18%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5% 정도의 신자가 초자연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 나옵니다. 아마 우리 중에도 5% 정도는 죽을 뻔 한 병에서 고침받았든지, 사고로 인해 생명을 잃을 뻔 했다가 하나님이 살려주셨든지, 사업이나 자녀나 인생의 모진 고난을 겪다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께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저도 고3때 연탄가스 마시고 생사를 헤맬 때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95%는 무엇입니까? 그들도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제가 2천년 교회사에 나타난 인물들을 보면 하나님이 바울처럼 초자연적으로 부른 사람들이 많치 않습니다. 마틴 루터가 그 중 하나입니다. 루터는 25살 때 친구와 함께 집에 다녀오다가 에르푸르트 들판에서 벼락을 맞았습니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죽고 루터만 살았습니다. 그때 루터가 깜짝 놀라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개혁자 쯔빙글리나 칼빈에게는 전혀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잘 자랐고, 살아가가면서 서서히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랬어도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바울은 하늘의 음성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그런 초자연적인 경험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가에서 “나를 따르라” 해서 그냥 따랐습니다. 그랬어도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급작스럽게 불렀든 서서히 불렀든, 초자연적으로 불렀든 자연적으로 불렀든, 하나님의 부르심은 같습니다.

다만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부름은 은혜의 부름이요 둘째는 그 부름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를 때 은혜로 불렀다는 것을 아십니까?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을 핍박한 바울을 부른 것처럼,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은혜로 부르신 것을 믿습니까?

작년 안식년에 영국 베드포드라는 곳에 갔습니다(영상). 이 곳은 “나같은 죄인 살리신”을 작사한 죤 뉴톤이 시무하던 교회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 교회를 잘 나가던 착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재혼하자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술을 즐기고 허랑 방탕했으며, 폭력을 일삼았습니다. 한때는 부하를 200명이나 거느린 강패두목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더 손쉽게 돈벌려고 노예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노예를 사다가 유럽에 팔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고향에 돌아와 어짜다 한번 교회 나갔는 데 그 날 설교가 탕자의 비유였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밖에 나가 허랑방탕 살던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 내가 탕자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습니다. 그때 그가 회개하고 지은 노래가 “나같은 죄인 살리신”입니다. 그가 회개한 후 평생 목회한 강단에 서서 제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슴이 무어지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 존 뉴톤이 따로 없구나. 내가 바로 탕자요 방탕자구나”.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바울같은 우리를, 노예장사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뉴톤같은 탕자를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하나님의 부름에 감사하고 평생 그 부름에 순종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첫 번째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받은 두 번째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앞을 보지 못한 채 엉금 엉금 기어 다메섹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바울은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을 잡기는커녕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포로잡으려다가 자신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그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의 비밀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이 아무 것도 안 하십니다. 그러나 못한다고 할 때 하나님은 시작합니다. 우리의 곤경이 곧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습니다. 우리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바울이 눈멀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은 드디어 바울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번째 일이 기도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행9: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라”. 여러분, 하나님께 돌아온 바울이 가장 먼저 한 것이 기도였다는 것을 아십니까?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14세기 독일 신비주의자중에 타울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할 때 일어나는 네 가지 일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면 첫째 인간에게 상처가 됩니다. 죄의 상처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면 누구나자기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그 죄 때문에 탄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상처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죄를 용서하고 계속 사랑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포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포로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포로되어야 우리가 자유롭습니다. 기차가 레일위에 있을 때 가장 자유로운 것은 우리는 하나님안에 있을 때 가장 가유롭습니다. 결박이 자유입니다. 우리를 포로삼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계속 사랑하면 우리안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하시는 과정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가 기도입니다. 다시 11절 보십시오. 행9:11,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라”.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은 하나님께 돌아오자 마자 기도를 시작합니다. 누구에게 기도를 배웠을까요?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누가 배우지 않았는 데 “엄마”하고 부르는 것과 같이 우리도 다시 태어나면 하나님 아버지를 부릅니다. 기도는 쉽습니다. 영적으로 태어나면 반드시 기도하게 됩니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니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시니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실 때 가장 중요한 징표가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는구나 압니다. 기도는 성령님의 일입니다. 우리안에 성령님이 우리에게 기도하게 합니다. 무엇을 기도할지 모를 때 기도를 가르칩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성령님이 대신 기도합니다.

기도가 시작되자 하나님은 바울에게 영적 도우미를 보냈습니다. 그가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 세 가지를 돕게 하셨습니다. 먼저 바울을 “형제”라 불렀습니다. 17절, 행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어떻게 사울이 형제가 될 수 있을까요? 한때는 예수믿는 사람을 잡아가 옥에 가두던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이제 사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무엇을 했던 이제 상관없습니다. 주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안에서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형제관계를 이루게 함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교회는 한 하나님을 섬기는 가족공동체입니다. 세상에서 힘들게 살다가 교회에 와서 한 가족을 발견하고 우리는 영적으로 자랍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져주시는 사랑의 현장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안에서 한 형제로 살아갑니까? 교회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신앙의 요람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라고 부르면서 한 것은 안수였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행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바울의 눈에 있던 비늘이 벗어져 못 보던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실 때 우리에게 오는 변화중의 하나가 우리의 눈이 다시 뜨는 것입니다. 시력이 다시 뜨는 것이 아니라 비전이 다시 뜨는 것입니다. 예수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18절에 “다시보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행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이 “다시 보게 되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블레포”입니다, 이 말은 접두사 “아나”와 “보다”의 뜻을 가진 “블레포”기 합쳐진 말입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위를 바라 본다”라는 말입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위해 기도할 때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사울이 위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바울은 너무 아래만 보았습니다. 아래만 보다 보니 유대인의 예수믿는 것을 종교적으로, 인간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면 우리의 눈이 하늘을 바라봅니다. 세상적 가치관으로 덮혀있던 비늘이 벗겨집니다.

아나니아를 통해 하나님은 바울을 또 다시 돌보셨습니다. 19절입니다. 행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 지니라”.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음식을 먹였습니다. 얼마나 지치고 피곤하겠습니까? 아나니아는 피곤한 사울에게 음식을 먹였고 사울은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형편을 아십니다. 우리의 육적 형편뿐 아니라 영적 형편도 아십니다. 그래서 양육간의 음식을 먹이십니다. 그래서 강건하게 하십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영적 공급을 받으십니까? 말씀과 성령으로 여러분을 먹이시고 공급하십니까? 하나님이 그 친절한 손으로 안으시고 품으십니까?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받은 은혜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바울을 세상에 전도자로 보내시는 은혜입니다. 놀랍게도 바울은 회복되자 마자 바로 전도를 시작합니다. 19-20절입니다. 행9:19-20,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형제들과 며칠 있을 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여기서 중요한 말은 “즉시로”입니다. 다같이 “즉시로”. 왜 이 말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보통 전도하면 굉장히 준비를 많이 해야 하는 줄 압니다. 성경도 많이 알고 구원의 확신도 가져야 하고 말도 잘 해야 하고 사람 다루는 기술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전도는 예수님 만나고 변화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그는 최근에 예수님 만났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을 아직 체계화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훗날 로마서부터 13권의 성경을 썻지만 그때는 아직 아무 성경도 쓰기 전입니다. 아직도 의심이 많고 확신이 없는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예수님을 직접 만나본 적도 없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인 베드로, 요한등 제자들도 만나기 전입니다. 그는 지금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만 단 한 가지를 압니다. 20절, 행9:20,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그는 그가 모르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 한 가지만 말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전도가 너무 쉽고 단순한 것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어려운 신학토론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어떻게 소리쳤습니까?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내가 주를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도 어렵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본대로 말한 것 뿐입니다. “내가 주를 만났다”. 예수님 만난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어떻게 전도했습니까? 요1:41, “와보라.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심플합니다. 예수님 만난 사마리아 여자가 어떻게 말했습니까? 요4:29,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없을까요? 바울이 예수님 만나자 자기도 모르게 튀쳐나왔던 그 전도의 열정이 우리에게도 회복될 수 없을까요? 바울이 그렇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19절, 행9:19,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형제들과 며칠 있을 새”. 바울의 전도는 먼저 예수님 만난 체험때문이고 다음은 함께 있던 제자들의 도움때문이었습니다. 다메섹에 있던 제자들은 바울이 회심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찾아가 그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제자도에 대하여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도움을 받고 바울은 담대해져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입니다”. 전도했으니 초대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이미 믿던 신자도 전도하고, 새로 믿은 신자도 전도했습니다.

작년에 예루살렘에 가서 우연히 신들러의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업가로 독일에서 나찌에 의해 죽어가는 1000명의 유대인을 구해 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온 영화가 “쉰들러 리스트” 아닙니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쉰들러는 그가 구한 유대인 1,000명의 리스트를 작성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 그 이름을 기억합니다. 어떻게 다 그 이름을 기억해낼 수 있을까? 비밀이 있습니다. 그가 그들을 구해낼 때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물건 하나하나를 팔아서 값을 구해냈기 때문입니다. 1,000명을 한꺼번에 구해낸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사연과 애정을 가지고 구해 냈기 때문에 1,000명의 이름을 다 기억한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생존자들이 모여 쉰들러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그때 쉰들러가 이렇게 말합니다. “더 살릴 수 있었어... 좀 더 구할 수도 있었는데”. “아니예요. 당신 덕에 천명이 살았잖아아요?” ”아니예요. 내가 돈을 좀 더 벌었더라면 더 구할 수있었는데“ “그 이상을 하셨잖아요?” “아니예요. 내가 이 차를 팔았으면 10명은 구했을 텐데..., 이 금핀으로 한 명 아니 두 명은 구했을텐데. 더 이상 구할 수 있었는데 아, 내가 안 한 거야.” 그렇게 울부짖었던 쉰들러의 정신이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제가 그의 무덤에 유대인 방식대로 돌 하나를 올려 놓으면서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에게도 한 생명을 주옵소서. 나에게 쉰들러가 가졌던 그 순수한 영혼에 대한 사랑을 주옵소서”. 그렇습니다. 전도는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입니다. 바울이 즉시 전도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는 주님입니다” 전도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은혜를 받고 삽니다. 사울아, 사울아, 불러준 은혜,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고 영육간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안아주시고 눈을 열어주시는 돌보심의 은혜, 그리고 즉시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는 은혜, 이 은혜를 누리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역주행

이영무목사 / 행 9장 1-9절

노인 부부가 계셨습니다. 티격태격 싸움도 잘 하셨습니다. 이 노인 부부가 황혼 이혼을 결심했답니다. 마지막 헤어지기 전에 할아버지는 그래도 같이 살아 준 할머니가 고마워서 식당에 함께 가서 마지막 식사를 하게 되었답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모시고 간 곳이 하필이면 치킨 집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자기가 먹고 싶은 것도 꾹 참고 자기가 가장 좋아하고 비싼 닭 가슴살을 할머니 앞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별로 안 좋아하는 닭다리를 자기 앞에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할머니에게 고맙다면서 맛있게 먹으라고 그렇게 권면을 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안색이 달라지는 것이예요. 할머니가 뭐라고 그럽니까? ‘당신은 마지막까지 그렇게 나를 놀리는 거냐고?! 나는 닭 가슴살을 제일 싫어한다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닭다리라고’ 할머니는 역정을 내십니다. 할아버지는 일생을 살았지만 할머니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자기 식대로 사랑하고 자기 식대로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슴도치를 보면 가시가 있습니다. 암수의 고슴도치가 서로 사랑한다고 서로 껴안으면 안을수록 가시에 찔리고 피가 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식대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상대방에게 아픔이 되고 고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부부란 서로를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33년을 살았지만 아직도 제 아내를 다 모를 것 같아요. 신비의 여인입니다.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일생을 하나님을 섬겨도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저는 그래서 금요 심야 기도회 때마다 제 기도 제목이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 드린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아는 것 같지만 잘 모릅니다. 그저 내 방식대로 내 식대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라도 서로를 잘 알아 가시고 또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부단히 기도하고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에는 하나님을 잘 몰랐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입니다. 나중에 그의 이름은 사도 바울이 되지만 그는 처음에는 사울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 살고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대 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앞에 환한 빛이 비췄습니다. 빛이 비췄다는 것은 하나님이 임재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더욱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아주 놀라운 음성이었습니다. 사울은 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난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데 내가 하나님을 박해한다고?’ 옛날 성경에는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고 쓰여져 있습니다. 사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울처럼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박해했다니요? 하나님을 대적했다니요? 이게 있을 수 있는 이야기 입니까? 어떻게 가장 충성스러운 사울이 하나님을 박해하는 사람이라고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사울이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요? 혹시 하나님께서 사울의 마음을 떠 보기 위해서 그렇게 잘못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사울이 일생을 착각하면서 가장 잘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한 체 살아온 것이 아닐까요? 무엇이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을 박해하는 사람이 되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날도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찾아 오셔서 ‘네가 어찌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시면 아마 여러분 가운데 동의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잘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에 아픔을 드릴 때도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10년을 열심히 살았습니다. 남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아내를 사랑하고 세심한 부분까지 아내를 배려했습니다. 결혼 10주년이 되어서 남편과 아내가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아내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10년을 살았지만 나 이제 당신하고 살기가 싫어요. 숨 막혀서 못 살겠어요. 하루하루가 숨 막혀서 못 살겠어요.’ 왜 그럴까요? 남편은 자기 식대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방법이 아니라 자기 좋은 데로 사랑했기 때문에 아내에게는 고문이 되고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김 집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7남매에 장남입니다. 그는 어렵게 성장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가 7남매를 키우다 보니까 늘 넉넉한 살림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가 7남매를 키우다 보니까 늘 넉넉한 살림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끔 어머니가 어디가 일해가 오시면서 이 식탁에 생선을 올릴 때가 있는데 어느 날엔가 7남매들에게 살코기를 발라주고 어머니는 늘 생선 머리를 드십니다. 이 생선 대가리죠. 그러면 늘 물어요. “어머니는 왜 생선 머리만 좋아해요?” “얘들아 이게 더 맛있단다.” 하면서 어머니는 드셨다고요. 그리고는 어려운 가운데 아이들이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7남매 가운데 중소기업사장도 나오고 대학교수도 나오고 학교선생님도 나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큰 아들은 가락동에서 꽤 큰 생선가게를 열게 되었답니다. 근데 어머니 생신이 됐어요. 7남매가 다 모여서 어머니께 식사도 해드리고 이렇게 인사를 하는데 큰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게 있어요. 손님들이 생선을 사러 오면 가장 귀한 민어, 민어를 팔고나서 그 머리만 냉장고에 잘 모아놨어요. 우리 어머니는 머리를 좋아하니까. 그래가지고 그 날 생선 머리탕을 끓였어요. 그리고 어머니 생신식탁 위에 생선 머리탕을 아주 정성스럽게 갖다 놨어요. 어머니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뚜껑을 여는 순간 얼굴빛이 달라졌어요. 그랬더니 그 인자하신 어머니가 음성을 높이면서 상을 뒤엎어 버리셨어요. 그리고는 아들에게 “네가 어떻게 나를 박해하느냐 네가 일생을 나를 박해하느냐 이놈아!” 하면서 불효자라고 소리를 지르셨어요. “다시는 내 집에 오지 마라”고 역정을 내셨습니다. 자식들은 졸지에 황당했습니다. 아니 어머니가 왜 저러시나.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시는 걸 가져왔는데 왜 화를 내시냐는 말이에요. 그 인자한 어머니가 어떻게 아들에게 이렇게 화를 내며 상을 뒤엎을 수 있습니까. 또 너는 나를 박해하는 자라고 이렇게 단언할 수 있습니까. 혹시 아들의 정성이 부족했나요? 혹시 더 많은 생선 머리가 들어가지 않아서 어머니가 섭섭했을까요? 아니면 뭔가 어머니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무엇이 이 인자한 어머니로 하여금 아들을 불효자라고 책망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답을 오늘 성경 본문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답을 들으려면 졸지 않고 잘 들으셔야 됩니다.

오늘 이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부활하신지 약 10년 쯤 됐을 때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커스, 다메섹으로 가는 부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바울이라는 사울, 이제 그는 대제사장의 체포공문을 들고 체포영장을 가지고 당당하게 의기양양하게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옆에는 율법사들이 있었고 그의 제자들이 그와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을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오고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볼 때는 이 사울은 저승사자같이 보였습니다. 왜? 잡으면 붙들어 가니까. 또 유대인들에게는 사울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사울처럼 믿어야 돼. 저렇게 믿어야지 너무 부러워 저 젊은이가. 사울은 그렇게 율법과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젊은이였습니다. 근데 그가 의기양양하게 다메섹을 향해 가고 있는데 환한 빛이 그 앞에 비췄습니다. 환한 빛은 하나님 임재였습니다. 사울은 너무 마음이 기뻤어요. 하나님이 나를 격려하기 위해서 오셨구나. 나를 축복하기 위해서 나를 방문하셨구나. 더욱 그 하나님은 사울아 사울아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 목소리는 인자한 목소리였습니다. 사울은 내심 마음이 기뻤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격려하려고 나를 축복하려고 나를 찾아오셨구나.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사울에게 걸림이 되었습니다.

오늘 4절과 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성경 읽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며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아멘.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울은 순간적으로 내가 잘못 들었나 하고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를 핍박하느냐. 나를 대적하느냐. 사울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나보다 하나님 잘 믿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이렇게 장담할 정도로 그는 자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하나님의 친위대였습니다. 친위대는 뭡니까? 왕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울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생명까지 드릴 수 있는 그런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박해했다니요.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도저히 사울은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박해할 수 없는 이유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 학파의 출신입니다. 그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율법에 정통하고 하나님을 잘 아는 학자였습니다. 그 밑에서 공부한 사울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사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입니다. 또 하나님을 잘 섬기고 종교적 열심히 있고 율법을 준수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더더욱 사울은 개인적인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척결하기 위해서 가고 있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공적인 겁니다. 유대의 최고의 종교기관은 산헤드린 공회입니다.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그의 체포영장을 받아가지고 그의 명령을 따라서 지금 이 공적인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체포영장을 받아가지고 그의 명령을 받고 이 공적인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박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갈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분명한게 있어요. 분명히 빛이 비춘 것은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럼 뭐가 잘못된 것 입니까.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마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고통을 겪습니다. 마치 그는 망연자실이라고 그럴까요.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듯했어요. 여러분 우리가 차를 몰고 가다가 뒤에 차가 내 차를 박았어. 나는 누가 박았구나 하면서 의식을 잃었어. 난 분명히 피해자입니다. 근데 병원에 와서 깨어보니까 내가 가해자로 둔갑되어 있다면 이거 황당한 일 아닙니까. 오늘 사울이 그래요. 하나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했는데 내가 하나님을 박해했다니요. 있을수 없는 일이에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치 고독한 광야에 혼자 보내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어.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박해하다니요. 하나님은 제가 미워서 그러시는 거죠. 내 생명을 거둬 가시던지 하나님 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고 그는 소리칩니다.

그러나 사울은 빛을 보는 순간 눈이 어두워 사람들에 의해 3일간 길리기아 다소에 가서 안정을 취합니다.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는 갈등하고 고민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박해 했다니 말이 안되지 않느냐. 그러나 그 마지막 빛을 보는 그 간 그 주님의 모습 십자가의 양손이 박혔던 그 못자국의 흔적이 있고 따스한 미소를 지으면서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면서 자신을 꼭 껴안아 주시던 주님의 그 인자한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진정 사랑의 주님이 셨습니다. 그는 고뇌하고 갈등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마지막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맞습니다. 주님 제가 하나님을 박해했습니다. 제가 나의 구주되신 주님을 내가 박해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일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믿는 사람들은 사울을 받아 주지 않고 싶습니다. 저 분이 분명히 우리를 잡아가려고 거짓말 하고 있는 거라고 의심합니다. 같은 유대교 동료는 사울을 향해 배교자, 배신자라고 돌을 던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울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안되었습니다. 내가 돌에 맞아 죽어도 나는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고 내 구주로 고백하고 나는 살아야돼. 하고 결심합니다. 그때부터 사울의 인생이 바뀌어 집니다.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서 핍박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돌에맞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정말 사울과 같은 그런 하나님을 등지고 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박해하던 사람들이 주님의 품에 돌아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그가 잘못된 길을 가고 오히려 주님을 박해하는 가운데서도 그를 용납하고 용서하셨어요. 그리고 그의 인생을 새로운 제자의 삶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빛가운데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과거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용납하십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사울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실 뿐 아니라 사울을 축복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가 3일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했지만, 기력을 잃지 않도록 하시고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그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사울은 이제 하나님의 사랑에 메여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그런 귀중한 제자로 쓰임받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앞에서 이 김집사님의 가정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 그 인자하던 어머니가 ‘너는 나를 박해하느냐’고 소리쳤을까요. 여러분은 이미 정답을 알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예전에 얘들아 생선은 어두육미 아니니. 자식들에게 맛있는 살코기를 주기 위해 말한겁니다. 이젠 자식들이 살만합니다. 그럼 이제쯤이면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해야 할꺼아닙니까. 그 어렵고 가난할 때 먹던 생선 대가리를 지금도 좋아한다고 냄비에 끊이는 자식을 어머니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 상을 엎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어안이 벙벙한 그 자식들은 어머니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무릎을 꿇고 어머니께 용서를 빌었어요.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우리 엄마는 생선고기는 싫어하지. 대가리만 좋아하지.” 늘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저희들을 용서해주세요.” 하면서 아들이 어머니께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마찬가지로 만약에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왜 너는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 가운데 “네 제가 주님을 박해했습니다.” 라고 말할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있다.”고 여러분은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내가 9시 TV 뉴스를 보는데, 긴급뉴스라고 나와요. 경부고속도로 상에서 대전 근처에서 승용차 한 대가 역주행을 하고 있으니까, 운전자들은 조심하라는 뉴스였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아내가 자기 남편 생각이 났어요. 오늘 저녁때 쯤 부산 간다고 차 타고 떠났거든요. 아마 지금 대전 쯤 갈 텐데,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여보, 뉴스에 보니깐 대전 부근에서 역주행 하고 있는 차가 있데. 여보, 조심해. 당신 앞에 달려오면 얼른 피해야해” 그래서 남편이 뭐라고 했냐면, “여보, 여보, 정말 이상하다. 아니 역주행 하는 차가 수십 대가 넘어. 아니 수백 대가 넘는 것 같아.” 그러면 누가 역주행 하고 있는 거예요? 남편이 역주행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남편이. 여러분 우리는 다 남이 역주행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사실은 나 자신이 역주행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주님의 말씀도 그런 거예요.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위한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내 신앙의 삶에 예수님은 언제부터인가 빠져버린 것이 아닌가? 예수님이 생략된 열심, 예수님이 없는 열정, 자기 의, 자기 열심, 자기 자랑, 자기 과시, 자기 사랑만이 드러날 때 이것은 바로 예수님을 박해하는 성도가 될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 자신을 죽이는 삶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기 위한 봉사이고 열심이었다면, 그것은 주님을 박해하는 삶이 될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이미 고인 되신, 고 한경직 목사님께서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 가서 “좋은 말씀을 해주십쇼.” 그랬더니, 딱 한마디의 말씀을 하셨어요. “목사님들, 예수님 잘 믿으십쇼.” 그랬습니다. 모두가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말씀이었습니다. “아니, 목사라면 누구보다도 예수 잘 믿는 사람들 아닌가? 예수 잘 믿으니깐 신학교를 갔겠지.” 정말 그럴까요? 예수를 바로 믿지 못해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목회자들 왜 없습니까? 정말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뭘 의미할까요? 우리가 일생을 중직자로 살았지만은, 정말 내가 예수님을 박해하는 그런 재직이라면, 여러분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내 만족, 내 열심, 내 의를 위해 살았다면, 어찌 보면 그것은 주님과 상관없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이제부터는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영광 받는 길을 위해 우리가 헌신하는 그러한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잘 모르고 주님을 박해하는 인생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의 마음에 꼭 합당한, 예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그런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설 때 주님은 너무너무 기뻐하시고, 우리의 과거의 허물들을 다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셔서 우리의 잘못된 역주행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아무개야,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고 있느냐?” 우리는 깨달음 얻을 때, 즉시 돌아올 때,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결단하고, 주님 품으로,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으로 돌아올 때,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은혜를 부어줄 줄로 믿습니다. 대개, 우리가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분들, 봉사 열심히 하는 분들, 교사 성가대 뭐 이런 저런 봉사 열심히 하는 분들이, 자칫하면 이런 오류에 빠질 확률을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 열심히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비판할 수 있고,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예수님을 박해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봉사하는 것 때문에 남을 박해한다면, 내가 열심히 헌신하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에 슬픔을 드리는 일이 될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직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나 자신을 드리는 결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자신을 위한 그런 성도가 아니라,예수님을 위한,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려면 우리 결단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았듯이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됩니다. 나 중심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한 신앙생활, 이웃을 위한 신앙의 삶이 이제부터 시작이 되어야 됩니다. 아니, 그것을 우리가 결단해야 됩니다. 많이 구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제가, 주님이 빠져버린 구제라면 나의 자랑, 나의 과시를 위한 구제라면, 나의 의를 위한 구제라면,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박넝쿨에 모든 인생을 바치길 원하지 않습니다.

나의 자랑 나의 의를 위한 구제라면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내가 주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고, 내가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했다." 하여도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나는 너를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자기 의를 위한 구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자기 욕심,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제의 방법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때에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나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느니라. 내안에 살아야 할 분은 내가 아닙니다. 내 안에 살아있어야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나눔이요, 헌신이요, 기쁨이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한 섬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제가 3가지를 제안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매일 누군가를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한 명씩 칭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칭찬하다 보면 비판이 줄어듭니다. 비난이 줄어듭니다. 옆에 분들과 인사합시다. "우리 매일 한사람씩 칭찬합시다." 칭찬거리를 찾아서 하세요. 칭찬거리가 있어야 칭찬을 하지요? 아닙니다. 찾아서 하세요. 다른 사람을 칭찬하다 보면 내 입술의 비난을 사라질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매일 누군가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면 내 마음 속에 원망과 정죄가 사라질 것입니다. 내 마음에 담아둔 한 사람씩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하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위로를 주십시오. 기도가 필요한 사람에게 기도를 하십시오. 일주일에 적어도 한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십시오. 이렇게 할 때 진정 이웃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웃을 위해서 이 세 가지를 결단한다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면 정말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구로초등학교 3학년 용욱이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용욱이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제목이 있었는데 한 할아버지를 통해서 그 기도의 제목을 들어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도와줄 때 그 분의 기도가 여러분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기도가 나를 통해서 응답되어 진다면 내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가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연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구로 초등학교 3학년 용욱이에요. 우리 가족은 벌집에 살아요. 벌집이 무엇인지 예수님은 잘 아시지요? 한 울타리에 55가구가 사는데요. 방문에 1, 2, 3, 4, 5...번호가 쓰여 있어요. 그 중에 우리 집은 32호예요. 화장실은 동네 공중변소를 쓰는데, 아침에는 줄을 길게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해요. 줄을 설 때마다 저는 21호에 사는 순희 보기가 부끄러워서 못 본 척하거나... 참았다가 학교 화장실에 가기도 해요.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여동생 용숙이랑 살아요. 우리 방은 할머니 말씀대로 라면 박스만 해서 네 식구가 함께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엄마는 구로 2동에 있는 술집에서 주무시고 새벽에 오셔요. 할머니는 운이 좋아야 한 달에 두 번 정도 취로사업장에 가서 일을 하세요. 아빠는 청송교도소에 계시는데 엄마는 우리보고 죽었다고 말해요. 예수님, 우리는 가난해요. 그래서 동회에서 구호양식을 주는데도 도시락 못 싸 가는 날이 더 많아요. 엄마는 술을 많이 드셔서 간이 나쁘다는데도 매일 술에 취해서 엉엉 우시면서 우리 보면 "이 애물단지들아! 왜 태어났니...같이 죽어버리자"고 하실 때가 많아요. 지난 4월 부활절 날 제가 엄마 때문에 회개하면서 우는 것을 예수님은 보셨죠. 저는 예수님이..저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 날은 제가 죄인인 것을 알았어요.

친구들이 우리 엄마를'술집 작부'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고요. 매일 술 먹고 주정하면서 다 같이 죽자고 하는 엄마가 얼마나 미웠는지 아시죠. 부활절 날 '엄마를 미워했던 것을 용서해주세요' 라고 예수님께 기도 드렸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모습으로 '용욱아 내가 너를 용서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저는 그만 울음을 터트렸어요. 그 날 교회에서 삶은 계란 두 개를 부활절 선물로 주시기에 집에 갖고 와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생전 처음으로 전도를 했어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니까 몸이 아파서 누워 계시던 엄마는 화를 내면서 "흥, 구원만 받아서 사느냐 집주인이 전세금 50만원에 월세 3만원을 더 올려달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구원만 말고 50만원만 주시면 내가 예수를 믿지 말라고 해도 믿겠다."고 하시지 않겠어요. 저는 엄마가 예수님을 믿겠다는 말에 신이 나서 기도한 거 예수님은 아시지요? 학교 갔다 집에 올 때도 아무도 몰래 교회당에 가서 기도했잖아요. 그런데 마침 어린이날 기념 글짓기 대회가 덕수궁에서 있다면서 우리 담임선생님께서 저를 뽑아서 보내 주셨어요. 저는 청송에 계신 아버지와 서초동에서 꽃가게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던 때를 그리워하면서 불행한 지금의 상황을 썼거든요.

청송에 계신 아버지도 어린이날에는 그 때를 분명히 그리워하고 계실 테니 엄마도 술 취하지 말고 희망을 갖고 살아주면 좋겠다고 썼어요. 예수님, 그 날 제가 1등 상을 타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시지요? 그 날 엄마는 너무 몸이 아파서 술도 못 드시고 울지도 못하셨어요.

그런데 그 날 저녁에 글짓기의 심사위원장을 맡으신 할아버지 동화작가 선생님이 물어물어 저희 집에 오셨어요. 대접할 게 하나도 없다고 할머니는 급히 동네 구멍가게에 가셔서 사이다 한 병을 사오셨어요.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똑똑한 아들을 두었으니 힘을 내세요."라고

위로해 주셨을 때 엄마는 눈물만 줄줄 흘리면서 “제가 일하는 술집에 내려가시면 약주라도 한잔 대접하겠습니다."고 하니까 그 할아버지는 “괜찮습니다."하신 후에 할아버지가 지으신 동화책 다섯 권을 저에게 주고 돌아가셨어요. 저는 밤늦게까지 할아버지께서 주신 동화책을 읽는 중에 책갈피에서 흰 봉투가 떨어지기에 열어보았더니 수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봉투를 엄마에게 보여 드렸더니 엄마도 깜짝 놀라시면서“세상에 이럴 수가!.. 이런 고마운 분이 계시다니" 말씀하시다가 눈물을 흘리셨어요. 저는 마음속으로‘수표는 할아버지께서 가지고 오셨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주신 거예요'라고 말하는데, 엄마도 그런 내 마음을 아셨던지 울먹이면서 “얘, 용욱아 예수님이 구원만 주신 것이 아니라 50만원도 주셨구나." 라고 말씀하셨어요. 할머니도 우시고 저도 눈물이 나왔어요. 동생 용숙이도 괜히 따라 울면서 “오빠, 그럼 우리 안 쫓겨나고 여기서 계속 사는 거야?" 라고 하셨어요. 너무나 신기한 일이 주일 날 또 벌어졌어요. 엄마가 주일날 교회에 가겠다고 화장을 엷게 하고 가셨어요.

예배를 드릴 때 얼마나 우셨던지 두 눈이 솔방울만 해 가지고 오셨어요. 나는 엄마가 또 같이 죽자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겁을 먹고 있는데 “용욱아, 그 할아버지한테 빨리 편지 써. 엄마가 죽지 않고 열심히 벌어서 주신 돈은 꼭 갚아 드린다고 말이야" 하셨어요.

저는 엄마가 그렇게 변하신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했어요.

고마우신 예수님!

참 좋으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주신 수표는 제가 커서 꼭 갚을게요. 그러니까 제가 어른이 될 때까지... 동화 할아버지께서 건강하게 사시도록 예수님이 돌봐주세요. 이것만은 꼭 약속해 주세요. 예수님! 너무나 좋으신 예수님! 이 세상에서 최고의 예수님을 용욱이가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요. 몸이 아파서 누워 계시던 엄마는 화를 내면서 "흥, 구원만 받아서 사느냐 집주인이 전세금 50만원에 월세 3만원을 더 올려달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구원만 말고 50만원만 주시면 내가 예수를 믿지 말라고 해도 믿겠다."고 하시지 않겠어요.

저는 엄마가 예수님을 믿겠다는 말에 신이 나서 기도한 거 예수님은 아시지요?

학교 갔다 집에 올 때도 아무도 몰래 교회당에 가서 기도했잖아요.

그런데 마침 어린이날 기념 글짓기 대회가 덕수궁에서 있다면서 우리 담임선생님께서 저를 뽑아서 보내 주셨어요. 저는 청송에 계신 아버지와 서초동에서 꽃가게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던 때를 그리워하면서 불행한 지금의 상황을 썼거든요.

청송에 계신 아버지도 어린이날에는 그 때를 분명히 그리워하고 계실 테니 엄마도 술 취하지 말고 희망을 갖고 살아주면 좋겠다고 썼어요.

예수님, 그 날 제가 1등 상을 타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시지요? 그 날 엄마는 너무 몸이 아파서 술도 못 드시고 울지도 못하셨어요.

그런데 그 날 저녁에 글짓기의 심사위원장을 맡으신 할아버지 동화작가 선생님이 물어물어 저희 집에 오셨어요. 대접할 게 하나도 없다고 할머니는 급히 동네 구멍가게에 가셔서 사이다 한 병을 사오셨어요.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똑똑한 아들을 두었으니 힘을 내세요"라고 위로해 주셨을 때

엄마는 눈물만 줄줄 흘리면서 “제가 일하는 술집에 내려가시면 약주라도 한잔 대접하겠습니다."고 하니까 그 할아버지는 “괜찮습니다."하신 후에 할아버지가 지으신 동화책 다섯 권을 저에게 주고 돌아가셨어요.

저는 밤늦게까지 할아버지께서 주신 동화책을 읽는 중에 책갈피에서 흰 봉투가 떨어지기에 열어보았더니 수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봉투를 엄마에게 보여 드렸더니 엄마도 깜짝 놀라시면서 “세상에 이럴 수가!... 이런 고마운 분이 계시다니" 말씀하시다가 눈물을 흘리셨어요.

저는 마음속으로 ‘수표는 할아버지께서 가지고 오셨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주신 거예요'라고 말하는데, 엄마도 그런 내 마음을 아셨던지 울먹이면서 “얘, 용욱아 예수님이 구원만 주신 것이 아니라 50만원도 주셨구나" 라고 말씀하셨어요. 할머니도 우시고 저도 눈물이 나왔어요. 동생 용숙이도 괜히 따라 울면서 “오빠, 그럼 우리 안 쫓겨나고 여기서 계속 사는 거야?" 라고 했어요.

너무나 신기한 일이 주일 날 또 벌어졌어요.

엄마가 주일날 교회에 가겠다고 화장을 엷게 하고 가셨어요. 예배를 드릴 때 얼마나 우셨던지 두 눈이 솔방울만 해 가지고 오셨어요.

나는 엄마가 또 같이 죽자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겁을 먹고 있는데 “용욱아, 그 할아버지한테 빨리 편지 써. 엄마가 죽지 않고 열심히 벌어서 주신 돈은 꼭 갚아 드린다고 말이야" 하셨어요.

저는 엄마가 그렇게 변하신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했어요.

고마우신 예수님! 참 좋으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주신 수표는 제가 커서 꼭 갚을게요. 그러니까 제가 어른이 될 때까지... 동화 할아버지께서 건강하게 사시도록 예수님이 돌봐주세요. 이것만은 꼭 약속해 주세요.

예수님! 너무나 좋으신 예수님!

이 세상에서 최고의 예수님을 용욱이가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참 감동적인 글 아닙니까? 여러분 참 감사하죠? 이 동화작가 할아버지가 예수님이 용욱이의 깨뜨린 기도를 대신 들어주었어요.

오늘도 많은 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 응답을 주시기를 원하실 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쓰임 받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가치 있을까요?

내 의 내 자랑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여러분 우리가 죽어야 되지요. 내 자아가 죽고 내 의지가 죽을 때 나를 통해서 주님이 영광 받으실 수 있습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수 있습니다.

 

영신교회 모든 성도님들. 이제는 정말 예수님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그리고 예수님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예수님의 축복을 받는 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사랑에 감동이 되어서 정말 주님의 사랑에 눈먼 자가 되어서 주의 사랑에 매여서 인도받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다면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주의 사랑에 매여서 이끌림 받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 도를 따르는 사람

양향모목사 / 행 9:1-2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일은 인류의 역사를 바꿔버린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역사가들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의 역사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후의 역사를 나누어서 기록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과 오신 이후의 이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역사를 구분하지 않고 구분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참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바뀌었으면 바뀐 세상에서 바뀐 룰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옛날 생각만 하고 옛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 가장 획기적인 사건을 들라고 하면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사울이 변화되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건은 우리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또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사형을 시키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예수님께 복음을 직접 받아서 성경에 기록을 하고 세계만방에 다니면서 이 복음을 전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한 이 일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위대한 일의 시작을 오늘 본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비롯해서 13권 혹은 14권의 서신서를 기록하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한 바울 사도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던 사람이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그 도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도를 따르는 것은 간단하게 습관 좀 바꾸고 좀 더 착하게 살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완전하게 인생 그 자체를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다르고 가는 방법이 다른 완전하게 다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사탄의 편에 서 있다가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정했습니다. 세상은 이 도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과 이 도를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도를 따라 가는 사람들을 비웃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서로 전쟁을 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도 즉, 이 길이 무엇이기에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고 방해하는 사람이 양분이 되어서 싸워야 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가는 이 길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도를 방해하는 사람 사울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기 위해 공문을 청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울의 원래 이름이 바로 사울이었고 본문에 등장하는 이 사울이 우리가 아는 그 바울입니다. 바울이 사도가 되기 이전에는 사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승천하신 일을 통하여 이 세상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세상 역사의 기록이 B.C.에서 A.D.로 바뀌었습니다. 구약 즉 옛 언약이, 신약 즉 새 언약으로 바뀌었습니다. 유대교가 기독교로 바뀌었습니다. 도 즉,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방법을 완전하게 바꾸어버리셨습니다. 유대교를 조금 수정하고 고치신 것이 아니라 아예 유대교와 다른 새로운 기독교를 만드셨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같이 가지고 있고 유대인들이 섬겼던 하나님을 섬기고 유대인들에게 약속하셨던 그 언약에 의해서 기독교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왔다가 갔다가 합니다.

초대교회 때 기독교의 교회 안에 유대교 출신들이 들어와서 예수님을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그것이 잘못임을 지적합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의 중간에 선 사람이 사울입니다. 유대교 때는 사울이었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는 바울입니다. 완전히 바뀌는 세대 중간에 태어나서 철저한 유대교인이었다가 철저한 기독교인으로 바뀌었습니다.

 

1) 사울은 철저한 유대교인이었습니다.

후일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서 심문을 받을 때 바울이 자신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라고 했습니다.(행22:3)

그리고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육신은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5-6)고 했습니다.

베냐민 지파 중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 사울왕입니다. 사울 왕은 실패한 왕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왕가를 폐하고 다윗왕가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왕임을 알면서도 사울왕의 이름을 따라 사울이라고 지은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은 유대인 중에서도 뛰어난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규례대로 태어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에 속했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그 중에도 열심인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엄격한 율법 공부를 한 사람이고 유대교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열심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일등 유대교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교를 잘 몰라서 그냥 따라가다가 기독교가 좀 좋아보여서 옮기게 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에는 정통파이고 엄청난 공부를 한 사람이고 열심히 유대교에 충성을 다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 사울은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앞장선 사람입니다.

사울이 산헤드린공회 의원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데반을 처형할 때 가표를 던진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살기가 등등했다는 것입니다. 다메섹 여러 회당으로 가져갈 공문을 대제사장에게 청하였는데 그 공문의 내용은 누구든지 남자나 여자나 막론하고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결박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라는 것입니다.

다메섹은 현재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Damascus)를 말합니다. 다메섹은 옛날부터 이스라엘과 관계가 깊은 나라였고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났는데 아마도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메섹으로 피난을 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당시 다메섹은 이스라엘처럼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 당시의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핍박했습니다.

기독교의 뿌리는 유대교입니다. 모든 약속들이 구약성경에서 나왔고 예수님도 유대인의 자손에게서 태어나셨고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섬기고 유대인들이 지키던 율법을 삶의 원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특별히 유대교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이단으로 보고 핍박을 가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그동안 알고 있던 것을 뿌리 채 뒤흔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제사를 거부하고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죄로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기 때문에 기독교를 싫어하고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동안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놓치기 싫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반대했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유대교라는 종교를 이용해서 자기들의 지위를 지키고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은 했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그런 기득권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은 그들이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4) 유대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기독교를 반대합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는 자기들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만 최고의 신이고 다른 신들은 다 잡신이요 우상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자기들은 잡신만 섬기는 것이고 우상만 섬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기독교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주가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까 자기들이 한 수고는 헛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5) 심지어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을 얻는 길이라는 것에 대해서 반대를 합니다.

자기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했고 또 선한 일을 하면서 살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런 노력을 헛된 것이라고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게으로고 나태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기 싫으니까 그냥 믿습니다. 라고 말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자기들이 그렇게 알고 그동안 열심히 그 길을 가고 있는데 누가 나타나서 야 그 길은 잘못된 길이야 그 길로 가면 안 돼 라고 하면 그 사람이 바른 이야기를 해 주는데도 그 사람이 얄미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 재산을 팔아 아주 귀한 다이아몬드를 비싸게 샀는데 누가 와서 그것 가짜야 당신 속았어. 라고 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절대로 듣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끝까지 자기의 것이 진짜라고 우길 것입니다. 그것이 가짜가 되는 순간 그는 망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다단계에 빠진 사람들도 끝까지 자기들이 가는 길이 옳다고 주장을 합니다. 사람들이 너 다단계에 빠졌어, 빨리 나와. 라고 하면 순순히 그래 내가 잘못 왔어. 하고 나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끝까지 망할 때까지 자기들은 다단계가 아니라고 우기면서 거기 있습니다.

 

6) 그러나 이 길은 너무나 확실한 진리의 길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이 진짜라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짜라는 것을 어떻게 보증하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는 사람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한 들 그들이 믿겠습니까? 그러나 몇 가지 단서를 단다면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우주 만물이 우연히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진화론을 이야기하지만 진화론은 창조론보다 더 많은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더 비과학적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진화론이 창조론보다 더 비과학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알고 보면 창조론이 더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야기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특별히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야기 할 때 거기 인간의 고행이나 선행이나 바르게 사는 것과 관계가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부인하고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우리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지 못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또 하나는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전적으로 오류가 없는 완전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이 진리가 성경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부인하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틀린 것이나 오류가 없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그렇게 확실하게 기록된 말씀이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오류라고 하면서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뭘 잘 모르고 이신칭의를 성경에 기록했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똑바로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부인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모든 성경이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충분히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머리로 이해해서 이런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믿음을 신비한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듣기도 하고 읽기도 하지만 특별한 사람만 즉 성령님께서 역사하는 사람만 이런 믿음을 가질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중요한 것이고 오직 이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

 

그 도를 반대하고 박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진리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단들 중에 사람을 만나면 “도를 아십니까?”라고 물어보면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까 조심하십시오. 그 사람들이 말하는 도는 우리가 말하는 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을 해치고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사기를 치는 사이비 이단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아가는 길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나라로 향하여 가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따르는 것을 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길 즉 도(道)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나님께로 갈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자고 하면 사람들은 얼른 예수님처럼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셨으니까 우리도 고난을 당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으니까 우리도 순종을 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좋은 일 많이 하셨으니까 우리도 좋은 일 많이 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벽에 기도하셨고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고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셨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기도하셨는지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는지는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도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고 그대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고 누구든지 그 사실을 믿으면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해주신다는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라고 말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도를 닦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아가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노력하고 연구해서 그 길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일평생 연구하고 노력을 하고 고난의 길을 가도 결국 찾지도 못하고 닦지도 못하는 길이 이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그 길로 가면 됩니다. 그 길에서 있으면 됩니다. 그 길에서 뭘 하고말고 상관이 없습니다. 그 길에서 그 길을 가는 사람들끼리 경쟁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길이 바른 길인 줄 알고 그 길에 서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그 길을 따르는 것을 “belonged to the Way”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길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헬라어에서도 그 길에 있다는 표현을 씁니다.

제가 자주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가는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옛날에 가던 그 길에서 교회만 다닌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길로 돌아서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옛날 살던 그 삶에서 조금 착하게 살고 조금 바르게 살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삶의 목적지가 삶의 방법이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이 세상에서 좀 잘 살아보려고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살려고 하는 삶이었지만 이제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가는 삶입니다. 과거에는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의 지식대로 살려고 했다면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입니다.

과거의 길에 서 있으면 그 길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 길은 가면 갈수록 멸망의 길입니다. 잘살면 잘 사는 대로 못살면 못사는 대로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 진리의 길 영생의 길로 나와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믿고 나서 착하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비난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고 비웃습니다. 우리기 과연 그런 시시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가는 길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예전의 삶과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길이 아닌 잘못된 길로 가면서 그 길에서 선을 행하고 바르게 살고 좋은 일한다고 자랑합니다. 아무소용 없는 헛된 짓입니다. 우리는 비록 남들처럼 잘 살지 못하지만 때로는 부끄러운 삶을 살기도 하지만 바른 길에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길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신 영생의 길을 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의 길입니다. 세상은 이 길을 거부하고 방해하고 핍박합니다. 이 길을 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들도 안 가고 남도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길을 가고 있음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기쁨으로 이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

이동휘목사 / 행 9:1-16

1. 성경 인물 중 사도 바울에 대해 단편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안에서만 사도 바울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박해하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는 사도로 변화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을 통해, 그는 ‘사울’에서 ‘바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시작으로 해서, 그는 이루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에게 맡겨진 모든 사역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그는 열세 권의 서신서에서 최소한 백 번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언급했고, 그의 모든 편지에서 은혜는 인사말이 되었고 축복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엡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은혜)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실로 바울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많은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갈2:20)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랍비였고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은 율법 박사로 율법에 절대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한 요한복음 1:17 말씀을 체험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율법 앞에서는 죽음 밖에 없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롬 7장)

(롬7:4-7)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는 믿음으로, 가장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항상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 가운데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부유한 삶을 살았습니다. 에베소서1:3-8을 보겠습니다.

(엡1:3-8)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현재 성도 여러분이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 있다 해도,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은, 창세 전에 예정하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유대 율법학자였을 때, 바울은 자신의 풍성한 율법 지식과 종교적 성취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문벌과 학벌 등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들 못지않게 더 훌륭한 자신의 외적인 조건들, 즉 요즈음 말로 하면 빼어난 ‘스펙’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밝힌 바 있습니다.

(행22:2-3)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빌3: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믿게 된 이후, 그는 자신의 모든 과거와 자신의 화려한 ‘스펙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영적인 풍성함에 비할 때, 아무데도 쓸데없는 “배설물”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빌립보서3:4-9입니다.

(빌3:4-9)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과거 자신에게 유익했던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길뿐더러, 배설물로 여긴 바울은, 참으로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부유할 때, 우리에게는 살아가는 데, 그리고 사역하는 데 필요한 모든 좋은 것들과 경건한 것들로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바 영적 부유함은,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일에서 나타났습니다. 영적으로 부유한 은혜는 바울뿐만 아니라, 바울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에게도 풍성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풍성한 은혜가 주어진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고전1:4-9)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린도 교회가 영적으로 풍성한 은혜를 받았지만,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믿음과 은혜 가운데 견고하게 서 있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은사와 은혜를 받았다 해도, 그 풍성한 은혜와 은사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겸손히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양하고 많은 은사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고전12:7-11)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그러나 그 다양하고 많은 은사들 때문에 교만해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경쟁의식 속에 분렬되어 하나가 되지 못하여, 온전하게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으로 하나되어 섬기는 예수님을 닮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되어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고린도 교회가 예수님을 닮아 사랑으로 하나되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넘치는 사랑으로 함께 하심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눈물의 편지’, 고린도 후서를 보냈습니다.

(고후2:4) (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변함없는 사랑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신 성도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가장 부유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은혜가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목적은, 영육간에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 후서8:9을 보겠습니다.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더 풍성하여 영적으로 가장 부요하신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풍성하신 은혜로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12:7을 보겠습니다.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 부요한 자가 되었지만, 견디기 힘든 ‘몸의 가시’, 다시 말해 질병을 얻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믿기 전 사울이었을 때는 없었던 몸의 질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질병을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라고 부른 것은 그만큼 그 질병의 고통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살아가는데 이 질병으로 인해 몹시 힘들었고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주시라고 세 번씩이나 간구했습니다.

(고후12:8)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이 세 번씩이나 간구했다는 것은 그 고통스러운 질고(疾苦)를 벗고 싶어서 매우 진지하고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같은 간구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해주셨습니다.

(고후12:9)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 말씀은 바울에게 주어진 “육체의 가시”는, 바울로 하여금 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인간의 고난이 제거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아픔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고 늘 주님을 의지하고, 또 주님께서 은혜로 그가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더 영광스러운 일이 되기 때문에, “몸의 가시”도 하나님께서 특별히 베풀어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은혜의 원리가 그에게도 적용되어, 바울은 끊임없이 그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육체적 가시’를 안고 그는 소아시아를 비롯해, 유럽을 향한 광대한 지역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위험과 고난과 곤궁을 참았고. 매를 맞고 옥에 갇혔으며‥‥ 수고하고 잠자지 못하고 배고픔을 견뎌야 했지만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고후11:23-27)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를 괴롭히는 “사탄의 사자”, 곧 ‘육체의 가시’가 있었지만, 복음을 위해 수고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은, 자신이 너무 교만하고 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을 깨닫고,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었습니다.(고후12:7-9) 그래서 바울은 온갖 박해와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강하게 복음을 전했노라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고후12:9)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가시를 보좌로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후 12:7-10). 실로 바울에게 주어진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를 강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성경을 읽고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일은, 연약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강했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연약하여 깨지고 가난하고 비천한 존재인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이 인내 가운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누구나 다 아는 비밀입니다. 빌립보서4:13입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때로 “육체의 가시”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시어 믿음을 강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언제나 우리를 그에 맞는 능력으로 채워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당신의 뜻에 순종한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속으로 우리를 결코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고후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베풀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4. 바울은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고린도후서1:12입니다.

(고후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육체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고전 1:20;2:6;3:19), ‘인간의 지혜’(고전 2:5) 등을 말합니다. “육체의 지혜로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 대해 사역할 때, 육체의 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행했던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일을 육체의 지혜로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지혜로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교만에 빠져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1:18-31을 보겠습니다.

(고전1:18-31)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교회는 세상적인 원리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원리를 따라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골1:9)지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일꾼들이 모였을 때, 교회 부서들이 모였을 때, 그리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을 때, 늘 해야 할 기도인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탁월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가지 큰 실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아이 성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성을 파죽지세로 정복했습니다. 다음으로 정복해야 할 성은 아이성이었습니다. 아이 성의 주민은 12,000명에 불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사 2,3천명 만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분명 상대를 얕잡아 보고 이스라엘 군대의 힘만을 믿은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수7:2-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 정복 사건(6장) 등 지금까지의 연전연승만을 믿은 지나친 자만심에서 나온 잘못된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3천명 정도의 군사가 정복에 나섰지만 보기좋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아이 성 전쟁 실패의 근본적 요인이 아간의 범죄 때문인 것은 사실이지만(1절), 이들의 자만심, 교만이 실패의 중요한 요인으로 분명 작용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작고 적은 상대일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항상 이기게 된 것은, 크고 작은 모든 전쟁에 앞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상23:10-12입니다.

(삼상23:10-12) 다윗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 때문에 이 성읍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들이 너를 넘기리라 하신지라

(삼하5:19-20)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그들을 치고 다윗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부르니라

(삼하 8:6)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대상14:8-11)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아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모든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찾으러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대항하러 나갔으나 블레셋 사람들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로 쳐들어온지라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이에 무리가 바알브라심으로 올라갔더니 다윗이 거기서 그들을 치고 다윗이 이르되 하나님이 물을 쪼갬 같이 내 손으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부르니라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데 대적하는 성마다 멸망당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기브온 주민이 아주 먼데서 온 족속인 것처럼 위장해서 화친조약을 요청한 사건이었습니다.

(수9:3-6)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그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하고 그들이 길갈 진영으로 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니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이 사건을 두고 기도하지도 아니하고 그들 요구대로 화친조약을 맺고, 어떠한 경우에도 기브온 족속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수9:14-15)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수9:19-21) 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으로 말미암아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 하고 무리에게 이르되 그들을 살리라 하니 족장들이 그들에게 이른 대로 그들이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가 되었더라

이 조약을 맺고 사흘이 지나서야 비로소 위장술에 속아 화친조약을 맺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때는 늦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민 33:55)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신20:15-18)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훗날 그야말로 옆구리에 가시같은 존재를 두고 살아야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지혜를 확신하고, 하나님보다 앞서 나아가며 백성들을 패배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상당히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학문적으로도 탁월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없는 지식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고 교회에게 권고한 것입니다. 그 훈계는 교회들이 다른 교회들을 모방하러 해서는 안 되고, 각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이 집회 저 세미나로 돌아다니며,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 아이디어와 프로그램을 빌려다 쓰는 대신,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해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고 말했을 때에도,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살아갈 때, 우리의 지침서는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종교 서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어야만 합니다. 은혜의 말씀이 그 속에 풍성하게 거하는 영적 지도자들은, 세상이나 다른 설교자의 설교로부터 아이디어들을 빌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가족을 돌보는 데 필요한 지혜를 그들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골4: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하나님의 은혜가 날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지혜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헛되이 하지 마십시오.”(고후6:1)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더 풍성하시어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총명이 넘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더 풍성하시어, 영적으로 가장 부유한 삶이 되어 이웃 사람들에게 복이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더 풍성하시어, 여러분의 삶에 주어진 모든 것들, 그것이 고난이든 좋은 것이든, 하나님께서 더욱 더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주어진 삶에서 승리하시며 은혜와 감사가 넘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회 심

이상호목사 / 행 9:1-9

사도행전 9장은 두 명의 인물과 관계된 사건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사울과 그에게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사건입니다.

사울은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기독교를 따르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내려가다가 예수님을 만나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의 예수님 만남은 그의 신앙과 이스라엘의 역사, 그리고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엄청난 큰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만나느냐? 또 어떻게 만나느냐? 에 따라서 인생의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일생에 아주 중요한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첫째는 부모를 만나는 일이요, 둘째는 배우자를 만나는 일이요, 셋째는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1. 사울은 누구인가?

 

오늘 우리는 사울이 하나님을 만나므로 그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먼저 사울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경건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사울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기리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5, 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의 종교는 힘 있고 뿌리 깊은 기초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좋은 가문의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에 무시할 수 없는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즉 그가 유대인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좋은 가문임을 보여 주는 상징입니다.

셋째, 훌륭한 종교적 훈련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의 가정은 유대교 중에서도 순수성과 엄격을 자랑하는 바리새파의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찍부터 예루살렘에 보내져 당대에 유명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그의 스승 가말리엘은 당시 율법 선생 중에서 학식과 인격이 모두 함께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유일신의 신앙과 엄숙한 윤리 관념, 열렬한 애국정신, 그리고 율법에 대한 전적인 충성을 배웠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에 대해 이미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생전의 예수를 만난 일은 없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단정하고 격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이며, 유대교에 대한 비판은 모세의 권위와 전통적인 유전 그리고 율례를 파괴하는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후에 진술한 것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참으로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영광과 승리의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추악한 십자가의 처형을 받고 죽은 목수의 아들을 메시야라고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의 비위를 몹시 상하게 하고, 전통적 신앙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주장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으며, 양자의 타협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를 철저히 근절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 사울의 박해 활동

 

본문은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 운동에 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다메섹에까지 내려가 체포하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하게 됩니다. 당시에 권력을 가진 종교 대표자인 대제사장은 그의 활동을 지원해 주게 됩니다.

(행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1절에 ‘살기가 등등하여’ 는 헬라어(엠프네오)로 그 뜻은 ‘호흡하다’란 의미로 ‘오직 그런 생각으로만 꽉찬 것’을 가리킵니다. 8장에서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서서 그를 죽이고, 각 집에 들어가 남녀 그리스도인들을 끌어내어 옥에 넘겨주었습니다. 이때까지 만해도 그는 율법에 얽매여 있었고, 그의 행위가 하나님을 위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한편 사울의 이런 박해는 비록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는 행위였으나 자신이 갖고 있는 신념에 대하여 굴복치 않고 추진해 나가는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의 생각에는 가장 흉악한 죄인에게만 주어지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며, 또 그가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하는 거침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사울의 학식과 열심 그리고 종교적 열심은 참 진리를 깨닫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자신의 경험과 이성적 판단을 앞세워 진리에서 떠나 참 신앙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3. 빛을 본 사울

 

더 나아가 그의 잘못된 확신과 강한 신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들 핍박하기 위해서 교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다메섹을 택하여 그곳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다메섹에는 30-40개의 회당이 있었고 4만 정도의 유대인이 정착하여 살고 있는 곳으로 특히 많은 여자들이 개종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 근처에 이르렀을 때에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행 9: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이 빛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었습니다. 이 찬란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는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키듯이 죄의 어두움에서 헤매는 우리들을 밝은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빛이었습니다. 그는 이 빛으로 인하여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그는 빛과 함께 들리는 음성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로 인하여 그의 마음은 뿌리 채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변화의 핵심은 바로 그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를 사울에서 바울로 만든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시는 예수의 음성은 자신을 핍박하는 자에게 대하여 분노하시므로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너무 사랑하시므로 그 영혼을 위해 부르시는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이 음성은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죄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와 비슷한 하나님의 모습은 아담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창22:11)와 사무엘을 부르실 때(삼상 3:10) 그리고 시몬을 부르실 때(마 23:37, 눅 22:31)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인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죄인이든 예수를 핍박하는 자이건 상관없이 은혜를 베푸시며 하나님의 참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나길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만남은 바로 믿음의 출발점이며, 예수님을 이해하고 영접하게 되는 변화의 순간입니다.

(욜 2:12-13)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예) 영화 벤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한 유다 번허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시게 되었고, 그 일생을 통해 그를 도와주시는 예수님을 경험하고 참 평강을 얻게 됩니다. 결국 그는 평생을 괴롭혀 오던 자신 속의 증오와 분노하던 인생의 근본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4. 변화된 사울

 

이제까지 사울은 예수라는 사람을 단순히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교의 교주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진실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가 되심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핍박자로서의 살기등등한 모습은 완전히 기가 꺾이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꿔졌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엎드리어 정신없이 말했습니다.

(행 9: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는 거기서 말하기를 “주여 누구시니이까?”하며 되물었습니다. 그때에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하신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말은 짧은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울의 변화의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먼저, 사울 자신의 죄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핍박 자였고, 자만하고 아집으로 가득한 삶을 살므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바로 드러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원자임을 분명히 그에게 알리셨던 것입니다.

사울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출현으로 그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이 체험은 매우 극적인 것이었으며, 그것은 곧 자신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경험하며,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사울처럼 모든 신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놀라운 영적 놀라운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울은 이 체험 후에 눈이 어두워지게 되었습니다.

(행 9:8, 9)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하늘로부터 온 빛으로 인하여 사울은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간 후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사울을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완전히 새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개선장군과 같이 다메섹으로 들어가려던 오만 방자한 한 인간이 완전히 부서지고 낮아져서 겸손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 소경의 상태로 지내면서 식음을 전폐하였는데, 이때를 그는 요나 (마 12:40)와 같이 자발적인 자기 비하의 기간으로 삼았고, 죄 사함의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의 기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 기간에 사울은 그리스도를 만났고(고전 15:8) 그 결과 영적 소경이었던 그의 영의 눈이 열렸고, 영적 벙어리였던 그에게 입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같이 무지한 자들에게 힘있게 전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맺는 말

 

불신앙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 깨어지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사울의 회심은 사울 한 개인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사(史)상 가장 중대한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 한 사람의 회심은 온 교회의 변화입니다.

사울은 진리에 대한 자신의 확신 그리고 소명감과 정의에 불타는 그에게 우리 주님은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비록 그가 잘못되고 오해한 삶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의 조명 아래 서있지 않고는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실 때에 참 생명의 길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 있고 바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오실 줄 믿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간절하게 바라고 그를 원한다면 분명히 우리는 그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잠 8:17 /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박해자 사울을 찾아오신 예수님

이준원목사 / 행 9장 1~9절

[들어가는 말: 주님을 만나는 두 가지 유형]

 

오래 전 다른 곳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 ‘전도폭발 임상훈련 지도자 과정’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20년 가까이 되었지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될 때 대개 두 가지 유형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디모데 형’이고 어떤 사람은 ‘바울 형’이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지만, 저처럼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소위 ‘모태신앙’이거나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부모님의 신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믿거나 어릴 때부터 믿은 모태신앙인이라도 한참 떠나 있다가 주님을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디모데 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데모데 형입니다.

반면, 바울 형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처럼 성인이 되어 어떤 계기가 있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 케이스를 말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체험은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회심이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 중요성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그 이야기를 세 번에 걸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번은 오늘 본문에서(9장), 두 번은 바울의 말을 통해(22, 26장) 나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사도행전 과목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교수님이 마지막 과제로서 아무 것이나 주제를 잡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연구하여 써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뭘 쓸까 한참 고민하다가 바로 이것을 썼습니다. 사울의 회심이 9장, 22장, 26장에 나오는데 내용이 약간씩 다릅니다. 그것이 왜 그런지에 대해 제가 심혈을 기울여 페이퍼를 써서 내면서 ‘A를 받겠지’ 했는데 교수님이 A를 안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과제를 통해 아주 많은 것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울의 회심 사건을 보면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사울의 회심 사건을 보여주는 것은, 바울 형이 디모데 형보다 더 낫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런 극적인 케이스는 아주 예외적이니까 괜찮다고 하는 것입니까?

저 자신은 디모데 형으로 예수님을 만났지만 가끔 바울 형으로 주님을 믿게 된 분들을 볼 때 부러운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형인 분들은 디모데 형을 보면서 부럽다고 말합니다. 몇 대에 걸쳐 믿는 분들을 보면 부럽다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믿음의 3대이지만, 극적으로 아주 뜨겁게 주님을 만난 바울 형인 분들을 보면 부럽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바울 형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성인이 되어 늦게 믿었을지 몰라도, 자신의 아이들은 다 디모데 형이 되는 게 아닙니까? 하지만 디모데 형은 자기도 디모데, 아들딸도 디모데이니 새로울 게 없습니다. 물론 신앙의 뿌리를 가진 집안이라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 형이 나은가, 아니면 디모데 형이 나은가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그분을 믿고 영접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남편이 교회를 안 나오고 안 믿어서 교회에 나오라고 하거나 믿으시라고 하면 “내 와이프가 잘 믿으니까 와이프가 천국 갈 때 그 치맛자락 붙잡고 나도 가면 됩니다.”라고 하는데, 구원은 일대일 관계이지 결코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토록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친히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어떻게 살았든지, 디모데 형이든지 바울 형이든지, 어릴 때 믿었든지 나중에 믿었든지 상관없이, 사실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다는 것, 그리고 나를 변화시키시고 구원해주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울의 회심 사건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토록 교회를 잔멸하던 사울이 행한 모든 일을 참아주시고, 친히 찾아와주시고, 그를 변화시키시고, 구원해주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1. 예수님이 찾아오시기 이전의 사울의 모습

 

사도 바울은 정말 위대한 사도인데,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가 9장과 10장에 잠시 나온 후에 그 다음부터는 바울 중심으로 사도행전이 진행됩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1-2절)

이전에 사울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여기도 나오지만, 성경은 그것을 몇 가지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시울은 엄격한 바리새파 유대주의의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나중에 자신이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그런 것이 나옵니다. 바울이 쓴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다른 사람들이 하도 자기 잘났다고 으스대니까 바울은 ‘내 앞에서 그런 자기자랑 좀 그만 해라. 나야말로 왕년에 이런 사람이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습니다. 또한 나면서부터 할례를 받고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그대로 지키는 집안 출신이었다는 겁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다소라는 곳인데, 다소에서 자랐다는 것은 헬라의 문화와 철학에 익숙했고 헬라어를 모국어로 하는 환경에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 전통과 율법에 정통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다고 자신을 이야기합니다. 즉, 히브리 문화 안에서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2세, 3세들이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는데, 그런 우리 자녀가 한국에 있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 문화를 더 잘 알고 한국말을 더 잘하는 것과 같은 식입니다.

또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로마의 모든 정치와 법체계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당대 유대교의 석학으로 존경받았고 유대교 학파의 쌍벽을 이루던 힐렐 학파의 우두머리인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지성인의 자격을 완벽히 갖춘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다수의 엘리트 지성인들에게는 행동이 약한 게 사실입니다. 머리는 뛰어나고 판단력도 빠르며 비판 능력도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 있게 행동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의 지성인이 가진 약점입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목숨을 걸 줄 아는 행동력이 있는 지성인이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자기를 불러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라고 하여 간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사업하는 분들이 사울 같은 사람을 직원으로 있으면 정말 좋습니다. 사업하는 분들이 누구를 쓰면 돈을 지불하는 것의 반 정도 밖에 일을 안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돈을 더 주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울은 바리새파이고, 바리새파와 앙숙을 이루던 사두개파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앙숙인 사두개파 대제사장에게 가서 바리새파인 사울이 자기에게 체포영장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을 떼어다가 잡으러 갑니다. 왜냐하면 박해 때문에 여러 곳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다메섹(다마스쿠스)까지 갔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까지 200마일이 넘는 먼 길을 단숨에 달려갑니다.

얼마나 열심이 있습니까? 행동하는 지성인, 손해를 볼 줄 아는 사람, 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굶는 한이 있어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자기의 삶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는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주 어렵지는 않습니다. ‘새가족반’을 할 때 보면 “우리가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내가 왜 죄인인가?’ 하고 거부감을 갖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저는 정말 죄인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런 분들은 마음이 많이 열렸기 때문에 인도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삶이 굉장히 잘못되어 있으면서도 자기가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은 전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 소크라테스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니까 자기 자신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인데 요즘 말로는 ‘아재개그’라고 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하고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것을 보고서,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에게 국어 선생이라면 “네 ‘주제’를 알라” 했을 것입니다. 정말 주제 파악이 중요합니다. 수학 선생이면 “네 ‘분수’를 알라” 했을 겁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지리 선생 같으면 “네 ‘위치’를 알라” 했을 것입니다. 삶의 위치와 자리를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정직하고 투명하게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에 착각 속에서 아주 자신만만하게 살고 있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요즘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 바르게 살고 있다.” 그런데 그 가족들에게 물어보면 별로 바르지가 않습니다. 자기는 그렇게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울(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이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핍박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8장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8:1)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은 것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8장 3절을 보아도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잔멸했다’고 할 정도로 요즘의 테러리스트와 같이 막 때리고 폭력을 사용하면서 잡아다 감옥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삶으로 전환되는 사건이 세 번 나옵니다(9장, 22장, 26장). 그것을 함께 보면 이 사건의 내용을 조금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2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의 회심 경험을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26:9)

그러니까 예수를 대적하여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스스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하나님을 믿어야지 왜 예수를 믿는가? 내가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믿지 못하겠다.’라고 합니다. 사울도 똑같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가?’ 그래서 사울은 신앙의 이름으로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26:11)

외국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정도로 그는 종교적으로 아주 열심분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정의감이나 하나님을 향한다고 하는 열정이 사실은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100% 옳다!’라고 하며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이 가지고 있었던 커다란 착각을 바꿔주시기 위해서는 보통 사건으로는 안 됩니다. 엄청난 충격이 필요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다메섹 사건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3-4절)

사실 모든 사람이 다메섹 사건처럼 불이 번쩍거리고 어느 날 갑자기 삶이 확 바뀌는 극적인 체험이 있어야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디모데 형으로 자연스럽게 되어도 괜찮습니다. 믿는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점차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며 신뢰하는 믿음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무슨 충격적인 사건이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깨닫고 주님을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크게 착각하고 있는 사람, 자신은 100% 옳고 저 사람들은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큰 충격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위해 다메섹 사건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 사건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울이 지금 박해하고 반대하고 있는 예수가 사실은 자기의 생명의 주님이시며,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린 메시야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 그리고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삶으로 돌아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극적 경험을 가진 분들이 혹시 우리 가운데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믿지 않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인해서 주님을 믿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볼 때는 어릴 때부터 몇 십 년을 교회에 다닌 분들이 너무 천천히 가니까 ‘왜 이런 경험이 없느냐?’라고 물으면서 그런 경험을 해야만 진짜 믿는 것이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감사한 일이지, 남에게 요구할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해야 되는 건 아닙니다. 경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그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 목적이 중요합니다. 즉,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며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경험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극적인 경험을 허락하시는 것이고, 그런 극적인 것이 필요없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믿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에는 이 커다란 충격이 없이는 예수가 구주이시라는 사실을 알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까지 자신만만한 자기과시의 병에 걸려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자아도취에 빠져 있어서 사울과 같은 이런 극적인 전환점이 없이는 주님 앞에 돌아오기가 참 어려운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성경 여러 군데에서 말씀하지만 특히 잠언 14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예수님도 넓은 문이 있는데 그리로 들어가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넓은 문은 넓고 좋아 보이지만 결국은 사망으로 가는 길이고, 좁은 문은 좁고 힘들어 보이지만 생명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에 자기는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주 잘못된 길이고, 자기 파멸의 길이고, 영원한 멸망의 길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신뢰하겠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신뢰하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많은 분들의 경우를 보면 자기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에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옮기기를 두려워합니다. 그 동안 자기를 신뢰하며 살았기 떄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자신을 신뢰할 만큼 완벽한 사람입니까? 완벽한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굉장히 완벽해 보이는 것 같은데, 매스컴이나 주변에 보면 아주 정확하고 똑똑하고 완벽한 것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배우자에게 물어보면 너무 많은 실수를 하는 사람입니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다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불완전한 사람, 아주 부족한 사람을 신뢰하며 살아가겠다고 하니 그 삶이 얼마나 흔들리겠습니까? 완벽하신 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인 수를 더하려고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고 살다가는 정말 멸망의 길로 가기 때문에 정말 완벽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의 길로 가자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옳지 못한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자기가 바꿔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주 잘못 가고 있다. 이단들이다. 그래서 내가 저들을 바꿔주겠다.” 하며 박해의 자리까지 가는, 아주 격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확신과는 완전히 반대로, 정말 잘못된 길을 가고 있던 사람입니다.

 

 

 

2. 다메섹로 가던 길에서의 극적인 만남

 

그러한 삶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사울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사실은 그가 만난 게 아니라, 예수님이 그를 찾아와주신 것입니다. 사울이 그리스도와 만나는 이 장면은 사실 사울 자신이 그 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일과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예수 믿는 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확신입니다. 자아가 강할수록 자신의 고집을 꺾고 신앙의 길에 들어서기가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예수님께 내 마음을 다 드렸다. 나는 주님을 확실히 믿고 있고, 나는 크리스천이고,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며 주님의 제자이다.’라는 확신이 아직 없으시다면, 그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뭔지를 잘 살펴보십시오.

혹시 그렇게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풍성한 생명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적은 주변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대로 행동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외부 원인이 아닙니다. 사실은 자기 자신입니다. 내부 원인입니다. 그것이 사울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를 비춰주는 거울 앞에 서기 전까지는 자기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인간은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속일 수도 있습니다. 남도 속이고 자기 자신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한 사람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기 온 마음과 온 존재로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마다 ‘내가 죄인이구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나는 정말 바르게 정의롭게 착하게 산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춰보니까 너무 썩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어디 가서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썩어 있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울은 자신이 박해했던 그 예수님을 만나고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대로 거꾸러집니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훗날 바울은 이 날 발견했던 자신의 모습을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딤전 1:13-15, 새)

이 부분은 개역성경이 더 낫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울은 이렇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나는 율법에 비추어서 흠이 없다. 이만하면 나는 예수 믿는 너희들보다 훨씬 낫다.” 그렇게 자부하며 살던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앞에 서는 순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라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좋은 모습만을 보았으니까 그렇지, 거룩한 하나님의 빛 앞에 자신의 전체 모습이 노출되고 보니까 ‘아, 나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솔직히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당당했던 자신의 정의감이 만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자신의 정의로운 행동이 자기를 세워 주고 유익하게 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를 파멸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기는 인간적인 그 모든 좋은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렸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좋았던 것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신뢰했던 그의 삶이 그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이 날 그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사울에게 하신 재미있는 말씀이 추가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이 오늘 본문(9장)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26:14)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는 말이 여기 9장에는 없는데, 26장에서는 바울이 자신의 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으로는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주 큰 가시들이 돋친 막대기가 있는데 그것을 맨발로 차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저 가시를 꺾고야 말 거야.’ 하고 발로 차면 가시가 꺾이는 게 아니고 자기 발이 완전히 망가집니다. 그것은 자기를 해치는 것입니다. 자기를 다치게 만드는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말씀에 무슨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까? “사울아, 너는 정의감에 입각해서 행동하고 있지만 사실은 너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너는 이 일이 옳다고 생각하여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왔지만, 사실은 네 그런 생각이 너를 파괴했고, 너의 주장이 너를 망쳤고, 너의 고집과 철학이 너를 다치게 만들고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날 주님께서 하신 지적이었고 도전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비로소 ‘내가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것이 허상이었구나. 내가 타고 있었던 배가 난파선에 불과했었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나는 내 신념으로, 내 철학으로, 내 종교의 이름으로 인생을 살았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오히려 잘못된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순간 땅에 엎드러지며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5절)

 

사울이 땅에 엎드러지고 나서 가장 먼저 “주여”라고 합니다. 이 존재가 뭔가 엄청난 존재라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느낀 것입니다. “주여!”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그 순간, 나를 인도하고 다스리고 새롭게 해주실 새로운 삶의 주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짧은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인 동시에 자신이 깨어지는 순간입니다.

‘자아가 깨어진다’, ‘예수님께 항복하고 나온다’는 말은 자기 포기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이것을 오해해서 믿기를 주저합니다. ‘생명의 삶’ 공부를 통해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교회에 대해 배우고, 배울 것을 다 배우고 나서 “이제 다 배우셨으니까 예수님을 믿기만 하시면 됩니다.”라고 해도 “아직 나는 준비가 안 됐습니다.”라고 주저합니다. 이제 내가 알기는 알고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며 선을 넘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조롱하고 비난하던 그 예수쟁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일단 내가 뭔가 완전한 모습이 되어서 그 다음에 믿어야지, 지금 이 모습에서 믿으면 내가 안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예수 믿으면 매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되어 자유가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옭아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착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이전에 모르던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사실 그것은 자기가 새롭게 거듭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구시냐고 하는 바울의 질문에 대해 답으로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하십니다. 사실 사울은 예수님을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이미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어떻게 박해를 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십니다. 이미 주님은 사울을 “사울아 사울아” 하고 두 번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친근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교회를 박해했는데, 예수님은 ‘나를 박해한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 교회를 핍박하고 욕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핍박하고 욕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죄가 됩니다. 사울이 이것을 깨닫고 나중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예수 믿는 사람을 조롱하고 비난한 것이 곧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난한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혹시 예수를 안 믿었을 때 그렇게 하셨다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것을 통해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른 믿는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주님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예수님을 욕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다른 지체들을 미워하거나 욕을 하거나 험담을 하십니까? 교회를 욕하고 비난하십니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을 욕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바르게 가야 합니다. 바르게 가지 않을 때는 당연히 함께 사랑으로 지적하고 함께 사랑으로 고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계속 뒤에서 험담이나 하며 욕을 한다면 그것은 아주 심각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른 예수 믿는 지체들을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욕하고 비난하는 엄청난 죄가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서로를 향해 감사하고 칭찬하고 격려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께 하는 것이 됩니다.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3. 고통을 통하여 새로운 사명을 받은 사울

 

이제 예수님은 사울에게 새로운 사명에 대해 암시를 해주십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6-7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진정한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고 다시 태어나는 순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진정한 삶의 궤도를 발견하게 되는 엄청난 순간, 그 순간에 바울 사도에게는 한 가지의 경험이 더 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라는 경험입니다. 그 동안 남들을 너무 고통스럽게 해서 벌을 받은 게 아니라, 그 정도로 잘못 가고 있었기 때문에 생생한 경험을 통해서 바뀔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쉽게 믿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주 어렵게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믿은 사람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중간에 돌이킨 분들은 그 동안의 삶의 경험 때문에 큰 충격이 요구될 때도 있고 때때로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사울은 정말 자아가 깨어지고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부르고 만나는 그 순간 눈이 안 보이게 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8-9절)

영원히 눈이 안 보인 게 아니고 며칠 간 그랬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합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통을 선물로 주실 때는 언제나 두 가지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첫째는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평범한 일상적 삶 속에서 우리는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적당히 살아갑니다. 그러다 고통이 오면 비로소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고통의 둘째 목적은 사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고 싶은데 그가 고집을 피우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종종 그에게 고통이라는 선물을 주셔서 변화를 시켜주십니다.

우리가 사울에게 배워야 할 놀라운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고통의 의미를 빨리 알아차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에 대해 왜 그런지 불평하기보다는, 그것이 주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속으로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 저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제가 이제 순종하겠습니다.’

사실 이 순간이 사울에게 얼마나 엄청난 충격이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온 것이 다 무너진 것입니다. 자기가 믿던 것이 가짜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큰 충격이겠습니까? 그런데 신앙적인 민감성, 고통의 의미를 빨리 알아차리는 이 신앙적인 민감성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6장에서 이 다메섹 경험을 말한 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6:19)

 

환상을 통해서, 소리를 통해서,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자신에게 전달되었을 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것을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명을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아무리 이런 엄청난 사건을 당해도 그 순간 자기가 결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다 자기가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렇게 엄청난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나는 안 한다.’라고 하면 끝인 겁니다. ‘내가 눈을 뜨기만 해봐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더 잡아 죽이겠다.’라고 결정을 할 수도 있는데, 하늘에서 보여주신 뜻을 보며 ‘하늘의 뜻이 그게 아니었구나.’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어떻게 그가 이런 결정을 내렸겠습니까? 그가 스데반을 통해 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죽어가면서까지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 사울 자신을 포함하여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습니까? 그게 분해서 더욱 죽이는 데 가담을 한 것입니다.

그 사건이 항상 자기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는데, 이때 예수님이 정말 나타나시니까 ‘아, 이게 진짜였구나!’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스데반은 죽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분이시구나!’ 하고 확실히 깨닫고 결단한 것입니다. ‘이제는 거스르지 않고 따르겠습니다.’ 하고 결단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을 비교해 보면 다메섹의 체험이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는 사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함께 가고 있었습니다. 빛이 보이고 소리가 들렸을 때, 어떤 사람은 빛만 보았고 어떤 사람은 소리만 들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현장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각자 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반응도 달랐을 것입니다.

이때 사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 체험과 이 고통을 이제는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방향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를 위한 계시로, 자기를 위한 고통으로 생각했고, 자기를 위해서 주시는 메시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결단하며 나아갔습니다.

 

[나가는 말]

오래 전 미국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우울증으로 말미암아 아주 심각한 고통을 당했고, 어느 날 이 젊은이가 드디어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면도칼을 꺼내어 그것으로 자기의 동맥을 끊겠다는 결심으로 세면대 앞에 섰는데, 갑자기 그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는 갑자기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고, 마음속으로 ‘하나님, 한 번만 삶의 기회를 주시면 제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 가운데 잔잔한 평화가 임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드와이트 무디(D. L. Moody)의 제자로서 시카고를 비롯해서 전 세계에 복음의 위대한 영향력과 충격을 주었던 토레이(R. A. Torrey)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토레이 목사가 앓고 있었던 정신적인 우울증은 그로 하여금 한 세기의 위대한 전도자가 될 수 있도록 바꾸어준 아름다운 통로가 되었습니다.

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한 젊은이가 여행 도중에 어떤 모텔을 찾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보니 옆방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상황을 물어 보니까 옆방에 있던 젊은이 한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는 옆방에서 죽은 사람이 바로 자기 대학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친구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인생의 전부란 말인가?’

그 날부터 깊이 고민을 하다가 ‘나는 이제 허무한 일을 위해 살지 않고,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살겠다.’ 하고 오히려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그 당시 버마를 향해 떠나갑니다. 이것이 버마에 선교의 문을 열었던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의 간증입니다. 친구의 죽음이 일깨워 준 인생의 허무를 통해서 그는 제 2의 인생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믿음의 길로 밀어 넣으시거나 새로운 사명의 길로 보내십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 우리가 고통을 당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통이 되겠습니까? 고통이 나를 새롭고 복된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고통을 감사함으로 받게 됩니다.

 

 

 

 

사울의 회심

행 9장 1~22절 / 이동휘목사

1. 스데반 집사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에게 이적과 표적이 나타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초대 교회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하셨다.’ 고 증거했습니다. 이에 상당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십자가에 죽였다는 증언을 듣고 마음에 찔려 진실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증언,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못박아 죽였다.’는 증언을 듣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스데반을 향하여 증오의 불길을 내어뿜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스데반의 증언을 듣고 마음에 찔려 이를 갈 때에,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고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다!’ 그러자 그들은 귀를 막고 큰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후 돌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거짓 증인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에게 맡겨 두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사울이 주도적으로 동참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였습니다. 이를 훗날 사울이 이렇게 고백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행22:19-20) (19)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그들이 계속 돌질을 하자 스데반은 큰 소리로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으소서.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라고 기도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최초로 순교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에 자극을 받은 유대교 지도자들은 스데반을 죽이는 것으로 그치지않고 예루살렘 교회를 전면적으로 핍박하였고, 이로써 그리스도인들은 각 처에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핍박을 피해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간 가운데 다메섹이 있었는데, 다메섹은 예루살렘 동북쪽 약 230km정도 거리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 B.C.73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B.C. 64년부터 로마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다메섹에 거주했던 유대인의 수는 상당했었는데, A.D. 66년 네로 박해 때 약 10,500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는 요세푸스(Josephus)의 역사 보고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의 공동체에 있어서 중심 기구라고 할 수 있는 회당도 상당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바로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시작된 예루살렘 박해 때(행8:1-3) 예루살렘으로부터 피신해 간 유대 기독교인들과 그들에 의해 개종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알고 사울이 본격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두 팔 걷어 부치고 나선 곳이 바로 다메섹이었습니다. 이 사울은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일 때 가편 투표를 던져 스데반 집사를 죽인 인물이었습니다. 이를 훗날 사울이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행26:9-12)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사울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과 박해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과 우월감을 가지고 행했습니다. 그는 유대 종교의 중심인 율법에 대해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깎아 내리거나 욕되게 하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처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친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가장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똑같이 처형하는 것이 율법에 충실한 것이고,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말씀대로 ‘여전히 살기가 등등하여’, 스데반 순교 이후 더욱 더 잔인하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죽이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능동적으로 대제사장에 가서 기독교인들을 모조리 체포할 수 있는 체포권을 받아내 다메섹, 이방인 지역인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은 유대 최고 의회기관인 산헤드린의 의장으로서 로마 당국으로부터 사법권과 행정권을 국내외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바리새파에 속한 율법박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로 음모하고 이를 실행했던 대제사장 등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 그 노선을 같이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이라는 이방인 지역에 박해를 피해간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고자 그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2.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그에게 비쳐 왔습니다. 그 순간 그는 땅에 쓰러졌는데 그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니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울과 함께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들리고 아무도 보이지 않아 말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기만 했습니다. 사울이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같이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한 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그에게 나타나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서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지금 그가 기도하고 있느니라. 그는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손을 얹어 다시 보게 해 주는 것을 보았느니라” 그러자 아나니아가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많이 해를 입혔는지를 많은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갈 권리를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이리로 왔습니다.’ 라며 사울에 대해 몹시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가를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사울은 지금 그토록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사람이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 그리고 왕들에게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한 복음 증언의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그 집을 찾아가서 사울에게 손을 얹으며 기도합니다. ‘사울 형제, 오는 길에 당신에게 나타나셨던 주 예수님이 나를 보내 당신의 눈을 뜨게 하고 성령을 충만히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러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후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습니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리고서 그는 곧 여러 회당으로 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모두 놀라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던 사람이 아니오? 그가 여기에 온 것도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기 위한 것이 아니오?’ 그러나 사울은 더욱 힘을 얻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어리둥절하게 했습니다.

 

3.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이른 바 ‘회심’(悔心), 회개하고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로 변화된 것입니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중에 <소매치기>가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소매치기는 크게 성공합니다. 기술면에서 그는 세계 최고의 소매치기임을 자부했습니다. 그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미녀들 속에 둘러싸여 있었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거리에서 한 여자의 지갑을 감쪽같이 손에 넣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어디선가 그 여자의 얼굴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쳐다보니 그녀는 고향 국민학교에서 책상에 나란히 앉아 공부하던 그의 짝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참다운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던 소매치기는, 순진하고 정답던 옛 친구를 만나고서야, 가면(假面) 속에 들어있는 그 흉한 자기를 발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차거운 가로등 쇠기둥에 이마를 박으며 뇌까립니다. “오, 하나님, 내 자신이 싫어졌습니다.” 옛 친구와의 만남이 이 소매치기에게 가치관의 전환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성공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성공이 아니며, 행복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정말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만족과 기쁨과 산다는 것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순간이나마 옛 친구를 만남으로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회의(懷疑)와 뉘우침, 참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옛 친구처럼 예수를 만나는데서 오는 새로운 탄생, 즉 거듭하는 경험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 마음을 고치지 않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이 변화되었으며 나아가 세상 역사를 변화시키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된 인물 중 어거스틴이 있습니다. 그는 2천년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그의 참회록,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자신의 지난날의 방황과 방탕한 삶에 대해 진솔하고 참된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어거스틴 (St. Augustine, 354-430)은 352년 타가스테에서 태어나 397년 히포의 주교로 역사의 큰 획을 굵게 그은 교부였습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어머니 모니카였습니다. 모니카는 아들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기도하여 방탕한 아들을 성자로 만든 여인이었습니다.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준 또 한 사람은 밀라노의 감독입니다. 어거스틴을 육욕에서 벗어나 신앙적인 사람으로 만든 사람이 모니카라면, 암브로스(Ambrose) 감독은 어거스틴을 지적인 방황에서 벗어나 진리의 빛으로 인도한 감독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암브로스 감독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마니교(摩尼敎,Manichaeism-교주 마니가 조로아스터·붓다·예수의 계시의 진리 등 여러 종교를 혼합시켜 만든 종교로, 영적인 지식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이원론 종교인 영지주의에 속한 이단으로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주의에서 벗어나 기독교 신앙으로 방향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적인 회심은 그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여전히 진리를 깨달았지만 의지력이 약하여 악을 뿌리치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을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Monica)는 부드럽고 정숙하고 열열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전형적인 어머니 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파트키리우스(Patricius)는 타오르는 정열과 현세적인 야욕이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16살 때 카리타고로 유학을 가면서 방탕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한 아프리카 여자와 사랑에 빠져 사생아까지 낳았습니다. 그의 모친 모니카는 “기도의 아들은 망하지 않는다.” 는 믿음으로 십여 년을 하루같이 드린 기도가 어거스틴이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모니카는 동거해 온 여자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세례를 준비하며 2년을 기다려 정식으로 결혼하도록 했지만, 어거스틴은 2년을 기다리지 못하고 정욕에 사로잡혀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죄인 줄 알면서도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의 모습을 보며 탄식하며 괴로워하였습니다. 이러한 어거스틴에게 결정적으로 회심의 불을 붙인 사람은 그의 친구 폰티키아누스 (Ponticiannus)이었습니다. 그는 어거스틴을 방문하여 애굽의 수도사 성 안토니(Antony) 이야기를 나눌 때, 정욕에 사로잡힌 지신의 비참한 모습이 눈앞에 스크린처럼 드러났습니다. 어거스틴은 정원 뜰로 나가 “왜 나는 이 더러운 생활을 깨끗이 끝내지 못할까?” 애통하여 부르짖으며 폭우 같은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 때에 갑자기 이웃집 뜰에서 아이들이 떠들며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 가사가 자신에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린 것입니다. 그는 곧장 서재로 뛰어가 성경을 폈습니다. 성경을 집어 그냥 펴 눈에 확 들어 온 말씀이 로마서13:13-14이었습니다.

(롬13:13-14)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 말씀이,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하늘에서 빛이 임하여 그의 눈을 멀게 했던 것처럼, 그 말씀이 광명한 빛으로 어거스틴의 폐부를 찔렀습니다. 폭풍은 지나가고 은밀한 정적과 평화가 그의 온몸에 가득하였습니다. 그의 오랜 방황이 종착역을 맞는 순간이었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재물과 육신의 정욕에 깊이 사로잡혔던 삶에서 놓여나는 날이었습니다. 이 날이 비로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386년 8월 늦은 여름이었습니다. 그 후 397년 히포의 주교가 된 그는 그때부터 3년간 <참회록>을 집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아무리 잔악한 사울이라도, 아무리 방탕했던 어거스틴이라도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시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으려 혈안이 된 사울의 두 눈이 멀게 하고, 사생아를 낳고도 멈출 줄 모르는 방탕한 어거스틴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는 말씀 앞에 자신의 잘못된 신앙, 왜곡된 율법에 따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엄청난 죄악을 깨닫고 통렬하게 회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받으실 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고 기도하신대로 사울의 죄를 용서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눅23:34)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이를 깨닫고 알게 된 사울이 바울이 되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 그에게 가편 투표를 던졌던 사울과 그들 핍박자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했던 그 기도가 이루어져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것입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저도 30여년 전에 하나님 말씀을 읽던 중, 시편 118:117-18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시118:17-18) (17)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18)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도다

내가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는 목사가 된 것은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라” 는 사실에,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날 중에 수많은 죽음에 고비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죽이지 아니하고 살려주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주님의 음성으로 내 심장을 내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나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 그냥 고꾸라져 펑펑 울며 한 밤을 회개함으로 지새우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꿈 속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소털같이 많은 네 죄가 사하여졌노라, 네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같이 양털같이 희게 하리라는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그리고 이어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멀었던 눈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엘리사가 눈이 열려 자신을 철통같이 지키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게 된 것처럼 눈이 열려 그간 닫혔던 성경, 하나님 말씀에 눈이 환하게 열린 것입니다.

(왕하6:15-17) (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하나님 말씀에 눈이 열리자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졌습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바르게 증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4. 사울은 주의 음성을 듣는 중에 자신의 죄를 지적받고 통회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행9:4-5)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주님은 이렇게 “핍박”이란 말을 두 번이나 거듭 말씀하셔서 사울의 죄를 지적하셨고, 또 “어찌하여”라고 그 이유를 따졌습니다. 이것은 죄인으로 더불어 논쟁하시는 주님의 꾸지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죄에 대한 지적을 받아야 회개하게 됩니다. 죄악에 대한 지적은 사울에게는 공중에서 나는 소리로 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경 말씀으로 되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은 사람의 말에 의해서는 거꾸러지지 않고 도리어 강팍해질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 경남 하동군의 가마 고개에서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좁은 고갯길에서였습니다. 우연히 신부의 가마 행렬 둘이 맞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두 신부의 집안은 오랫동안 서루 다투어 온 가문들이었습니다. 서로의 학문 계통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고개가 높긴 했지만 한쪽이 비켜갈 수 없을 만큼 비좁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켜가는 가마쪽의 가문이 굽히는 것이란 생각 때문에 어느 한 쪽도 양보를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서로가 마주보며 대치하는 상황은 무려 사흘이나 갔습니다. 나중에는 각 가문의 문하생들까지 나와 응원을 하며 버텼습니다. 상황은 갈수록 절박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두 가문은 사태 해결의 방법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그 방법은 두 가문 모두 학문과 명예를 더럽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두 가문의 딸들에게 자결을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새 무거운 돌덩이가 가마 속으로 들어가고 두 딸은 마침내 그것을 붉은 비단 치마에 싸안고 벼랑 밑 시퍼런 강물 속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꽃다운 신부 둘은 강바닥으로 가라 앉았고 두 가마는 비어진 채 오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이 두 가문은 자존심과 가문의 유전(遺傳)때문에 결국 두 딸이 희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두 가문처럼 사울은 조상의 유전(遺傳)에 충실하고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무모한 생명을 해치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은 육적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면서 로마의 시민권을 소유했고 학문적으로는 당대의 주류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여 바리새파의 전도 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정치, 문화, 종교 등 다방면에 있어서 두루 정통하였고 번뜩이는 지성을 소유한 천재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탁월성으로 인해 그는 당시의 기성 세력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그들의 지시를 따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자기의 신념이 옳다고 믿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그의 삶은 다름아닌 자기 중심적 삶이었기에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선한 사람을 핍박하면서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의 말씀 따위는 아예 염두에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고 하는 일이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울처럼 자신의 그릇된 신념을 주장하면서 악을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악을 심어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는 삶을 살면서 조금도 죄의 심각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28:26)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자기 중심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참된 자신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참 자아를 발견한다는 것은 곧 죄악된 인간 자아를 깨고 새롭게 태아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삶이요 이 삶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삶입니다.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사울은 율법에 관하여 정통한 자였지만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무고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면서 자신의 악행을 깨닫지 못한 것은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향하던 그는 주님의 빛과 음성을 듣고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교만과 악함이 다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지난 날 행했던 모든 일이 엄청난 죄악이었음을 깨달은 그는 눈물로써 3일을 보냈습니다. 이 참회의 3일은 그의 자아가 깨어지는 순간이요 새롭게 태어나는 삶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삼일 삼야동안 뉘우치고 깨어졌던 것 같은 순간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말씀을 외면하지마시기 바랍니다. 요란하고 소란스러우며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들려주시는 세미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성령 충만한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으로 인도하시며 생각나게 하시는 진리의 성령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는 신앙체험으로 자신과 가정, 그리고 나아가 나라 민족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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