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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60709(2) / 사울의 회심(2) / 행 9:1-9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6.06.20|조회수46 목록 댓글 0

사울의 회심

행 9:1-9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 설 교 >

바울의 회심사건

정용섭목사 / 행 9:1-19

예수와 바울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스데파노의 순교 장면에서 바울을 잠간 등장시켰다가(8:1-3) 오늘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사도행전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독자라고 한다면 별로 놀라지 않겠지만 처음 대하는 독자라면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 졸지에 옹호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을 매우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이 유대교를 뛰어넘어 이방인을 향해야만 했다는 당위에 관한 역사적 해명이며 변증이라 할 사도행전의 전체 주제와 연관해서 본다면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의 앞부분은 바울의 등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서론에 해당된다. 이제 바울의 회심 사건을 언급함으로써 누가는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셈이다. 그런데 누가가 바울의 회심 사건을 예수와의 만남이라는 매우 신비한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는 데에는 그만큼 심각한, 또는 신학적인 이유가 있다.

우리는 앞에서 히브리파 기독교인들과 헬라파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예루살렘 공동체가 결국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한번 짚은 적이 있다. 예수의 사도들과 동생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대교와 크게 차별화하지 않으려 한 반면에 스데파노를 중심으로 헬라파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초기 기독교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히브리파는 좋은 뜻으로 헬라파를 분리시킨 채 예루살렘에 한정하는 공동체를 유지했지만 헬라파는 거침없이 이방 세계를 향해서 나갔다. 이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한 인물이 사도 바울이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혈통적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한 그는 바리새인 중에서도 골수분자였으면서도 동시에 로마의 직할 식민지인 ‘다소’ 출신이라는 점에서 히브리파와 헬라파의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세세하게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바울이 초기 기독교의 주류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런 갈등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물론 기독교의 역사는 바울을 주류로 부각시켰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중심의 기독교가 약화되고 이방 세계로 나간 헬라파가 힘을 얻게 됨으로써 벌어진 결과일 뿐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아마 바울은 자신의 선교와 신학의 열매를 전혀 못한 채 매우 비관적인, 혹은 매우 불안한 상태에서 죽었을 것이다.

이렇게 지난 5, 60년간의 역사를 알고 있는 누가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의 사도와 예수의 동생 못지않은 권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했다. 바울의 선교와 신학이 그 당시 교회에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참고적으로, 바울이 생전에 자신의 사도권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는 것은 곧 그에게 그런 약점이 있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초기 기독교에서 최고의 권위를 확보하던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했으며, 예수에 의해서 제자로 임명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생전에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따르던 이들을 박해하던 장본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은 예수와 바울과의 관계를 증명하는 데 있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정황 가운데서 기록된 초기 기독교 문서의 한 부분이다.

 

바울의 경험

바울에게서 일어난 사건은 두 단계로 나뉜다.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로 향한 가던 중간 일어난 사건이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을 체포할 수 있는 증명서를 지참하고 몇몇 수발꾼들과 함께 길을 가는 중이었다. 다마스쿠스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비추었고, 그가 땅에 엎드러지자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4). 놀란 바울이 누구냐 하고 묻자 이런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6). 바울이 땅에서 일어났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다마스쿠스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앞을 못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고 한다.(9).

우리는 이런 본문을 만날 때 상당히 곤혹스럽다. 일단 이런 현상의 역사성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어야 할는지 우리는 감을 잡기 쉽지 않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사실로 믿는 게 기독교 신앙에서, 특히 성서를 해석하는 작업에서 능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본문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렇게 특별한 텍스트를 해석할 때는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전제 조건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 본문은 흡사 신문 기자처럼 그 현장에 있던 어떤 사람에 의해서 사실적으로 보도된 게 아니라 초기 기독교 안에서 전승되어온 자료를 바탕으로 기록되었다. 전승이라는 것은 그 전승에 참여한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서 조금씩 변화되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각색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바울의 직접 경험이기 때문에 틀림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도행전 22장과 26장에 반복해서 언급되었다는 것을 보면 우리가 이 이야기의 역사성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라는 게 얼마나 한정적인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비록 바울의 신앙적 진정성을 우리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보도의 세부적인 항목까지 객관적 사실로 믿어야만 성서를 옳게 해석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는 또 다른 신학적 문제도 놓여있다. 빛으로 나타난 분, 다른 이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바울의 귀에만 들린 그 소리의 주인공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조금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는 이미 승천하셨으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이 세상 마지막에 재림하실 분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과 이 지구 사이를 필요에 따라서 오갈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소설이나 동화 같은 데서는 예수가 현현하곤 하지만 실제의 역사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이루어진 초월적인 존재와의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천사로 이름 붙여진 어떤 매개체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 등장한 예수는 실제적인 예수라기보다는 거룩한 체험에서 등장하는 어떤 특별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아무런 역사적 근거 없이 단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누가의 창작물이라는 뜻일까? 그것보다는 이 사건은 다른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사실과 해석의 종합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사실’(fact)은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했던 사람이며, 다마스쿠스에서 회심하고 아나니아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 정도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 바울에게 어떤 종교적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게 거의 없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의 회심이 빛으로 나타난 예수를 만난다는 식으로 매우 드라마틱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그의 신학적 변화, 일종의 ‘패러다임 쉬프트’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지 전승은 대개 줄거리 중심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바울의 내면적 변화는 생략된 채 이런 다마스쿠스 사건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이 전승이 이제 누가에 의해서 부활, 승천한 예수와 바울의 만남으로 해석됨으로써 새로운 의미의 ‘사건’(event)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변화와 발전이 곧 역사다. 경우에 따라서는 잘못된 해석도 있지만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그런 해석들은 제거되고 옳은 해석들이 이 세계를 끌어가는 추동력으로 작동하게 된다.

박해자에서 박해받는 자로!

오늘 본문이 바울의 경험보다 아나니아의 경험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이유는 바로 이 사건을 누가가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시력을 잃고 다마스쿠스에 들어와 있는 동안 그곳에 살고 있던 아나니아도 이상한 현상을 경험한다. 그는 바울을 도와주라는 음성을 듣는다. 그러자 이미 바울에 대한 나쁜 소문을 듣고 있던 아나니아가 머뭇거리자 좀더 명확한 음성이 들린다. 이 음성이 바로 누가가 사도행전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그래도 가야한다. 그 사람은 내가 뽑은 인재로서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제왕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할 사람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15,16). 아나니아는 말씀대로 바울을 찾아갔다. 그러자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나가 다시 보게 되었고,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아나니아의 환상에 의하면 이제 바울은 박해자로부터 박해받은 자로 살아야만 했다. 실제로 바울은 그렇게 살았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서 바울만큼 극한적인 어려움을 당한 사람은 별로 없다. 선교 여행 자체가 힘들기도 했지만 예루살렘 사도들에게서 받은 냉대도 힘들었을 것이며, 자신의 선교가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낙담한 적도 많았을 것이다. 아마 바울의 삶을 잘 알고 있던 누가는 이런 회심 전승을 통해서 바울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일군이라는 사실을 전하려고 한 것 같다. 어쨌든지 다행스럽게 이러한 바울의 삶이 누가의 저작활동을 통해서 다음 세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하나는 기독교의 역사는 바울과 누가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했으며,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것이다. 비록 그 당시에는 별 볼일 없었는지 모르지만 바울의 회심과 선교, 신학으로 인해서 기독교가 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다는 말이다. 만약 유대교 안에서 경건한 사람들로 남으려 했던 예루살렘의 사도들만 있었다면 기독교의 역사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을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누가는 숨어있던 바울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인물이다. 만약 누가가 없었다면 바울을 통해서 이루어진 초기 이방인 전도 및 신학 작업은 영원히 파묻혀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새겨야 할 또 하나의 교훈은 하나님이 역사에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원래 초기 기독교가 역사 안에 등장하게 된 것 자체가 기적적인 일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교회의 등장은 사람들이 의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도가 없었다면 결국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역사 개입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변증법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이 세계의 구원역사는 일어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신비이며, 바울의 회심 사건인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런 역사적 신비를 배울 수 있다.

 

 

 

 

사울에서 바울로

박향근목사 / 행 9:1-9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 은혜로 믿는 이가 구원받아 천국 영생을 누림을 믿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천국 백성답게 변화하고 자라가는 거지요. 어제와 같은 오늘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 안에서 새롭게 입니다. 그런 변화를 극적으로 잘 보여준 분이 바울 사도이라서, 오늘 설교 제목을‘사울에서 바울로’라 정했지요. 그냥 사울로 살았다면,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요 엄격한 바리새인으로 높은 지위와 명예, 세상 복을 누렸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삶을 내던지고, 매맞고 굶주리고 옥에 갇히는 길을 갔지요. 그 발단은 오늘 말씀에 보듯, 다메섹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영생을 누리는 것이 가장 귀중함을 알았기에, 과거의 온갖 영예를 배설물같이 여긴다 했지요. 기독교의 시작과 중심은 예수님이지만, 사울이 바울 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땅에서 시작한 예수교가 온 세계로 퍼져나가지 못했습니다.

오늘 바울을 나누는 것은, 사순절 기간에 바울을 마음에 담고 변화하자는 것과 함께, 이번 튀르키에 지진이 난 곳이 바울의 고향 다소와, 그가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운 곳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당시 선교센타 안디옥이 이번에 큰 피해를 입었지요. 일부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예수 복음을 떠났기에 지진 재앙을 당한다고 하지만, 재난당한 이들에게 그것은 조심스러운 말이고, 믿는 우리는 튀르키에 지진을 교훈 삼아서, 보다 바른 믿음을 다졌으면 합니다.

사울은, 다소에서 천막 만드는 집에 태어났는데, 집이 부요하고 자신이 총명해서, 12살 때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옵니다. 율법에 밝았고, 철저한 바리새인으로 살았지요. 바울은, 스스로‘나는 히브리인이요 아브라함의 후손, 베냐민 지파라.’하면서, 같은 이름의 사울 왕에 속한 왕손이라 자부합니다. 그런 긍지와 율법에 정통한 사울로서는‘사람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그건 말도 안 돼, 다 없애야 해.’

그래서 박해에 앞장서, 최초 순교자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옳다’는 증인 역할을 했지요. 믿는 이를 찾아 박해하고, 옥에 가두는데, 멀리 떨어진 다메섹에 예수 믿는 이를 잡으러 가는 길에, 갑자기 밝은 빛이 비치며‘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사울은 놀라 땅에 엎드려‘주여, 누구십니까?’‘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울은 예수 믿는 자를 박해했는데, 예수님은, 당신을 박해했다 하십니다. 오늘날, 믿는 이를 해롭게 하면,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과 같지요.

사울은 밝은 빛에 시력을 잃고, 다른 이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의 숙소에 들어갔으나, 몹시 두려웠을 겁니다.‘내가 길에서 만난 예수가 메시야라면 나는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한 거야? 아아!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그때, 예배 시작 때 읽어드린 말씀(행 9:10-15) 대로, 다메섹에 살며 예수 믿던 아나니야의 기도 중에‘아나니아야,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고 세례를 베풀어라.’아도니야가 놀라서 ‘그는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고 이곳에도 잡아가려 왔는데요?’

예수님은‘그는 이방인을 위해 복음을 전할 나의 그릇이니라.’아도니야가 가서 사울을 만나 안수하고 세례를 베푸니, 사울이 눈을 다시 뜨고 음식을 먹으며 체력을 회복합니다. 여기서 전능하신 하나님도, 준비된 사람을 택해서 쓰시는 것을 봅니다. 사울은, 이방 땅인 다소에서 태어나 자라서 이방인 선교에 꼭 필요한 헬라말과 문화에 익숙하지요. 말과 문화를 모르면 다가갈 수 없지요. 또, 율법을 깊이 배워서, 여호와와 구약성경에 정통하며, 오실 메시야예언을 훤히 알았습니다.

하나 더, 바울은 무엇을 하든 열심을 다했지요. 박해에도 열심이었습니다. 남은 건 하나‘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냐?’인데, 그것은 다메섹 길에서 하늘의 음성‘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로 해결되었지요. 예수는 메시야이지요. 사울의 의문이 해결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사울은 아나니아에 의해 눈 뜨고 기력을 회복되자 말자, 회당에 나가‘예수는 그리스도’라 외칩니다. 구약성경에 있는 메시야 예언이 예수님이라 증거했습니다.

듣는 이들이 놀라서‘저자는 예수 믿는 이를 잡으러 여기 오지 않았나? 우리가 저의 말을 듣고 예수 믿는다 하면, 잡아가려고 꼼수를 쓰는 거야.’의심했지요. 훗날 예루살렘에 올라와서도, 그런 오해가 풀리지 않으니, 바나바가 니서서 그간의 일을 설명하며 사울을 변호합니다. 바울의 선교 사역을 크게 도운 바나바입니다. 복음의 박해자 사울이 복음 전파자 바울로 바뀌자, 가장 충격받은 이들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지요.

전에 사울이 기독교인을 박해할 때‘잘한다.’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예수는 주 그리스도’라 선포하고 다니니, 사울을 죽이려 합니다. 바울이 곳곳에서 매나 돌에 맞거나 옥에 갇힌 것은 유대인들 때문이지요. 지금도 유대인들은‘예수는 메시야는 아니나, 선지자의 하나로 인정하지만, 배반자 사울은 도저히 용서 못 해.’한답니다. 하나님이 하신 역사는 오묘한 것이, 사울이 박해로 크게 어려움 당하는 중에, 복음은 더 널리 퍼져나갔지요.

하나님의 섭리 중에는, 바울이 이방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에 올라오니,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는데, 그를 구해준 것이 로마 군인입니다. 또한, 바울이 유대인들의 고발로 법정에 섰는데, 뜻대로 안 되니, 법정에 오가는 길에 암살하려고 하지요. 유대인 사십 명이‘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리라.’바울의 조카가 이를 알고 천부장에 알리자, 천부장이 밤에 군인 이백 여 명을 동원해, 보다 안전한 가이사랴로 옮깁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계속 죽음으로 몰자, 그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지요. 로마 시민이기에 가능합니다. 죄수의 몸으로 로마 군인의 보호 아래, 로마에 가서, 비교적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며 복음을 전했지요.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 중심에 복음을 전한 것으로, 하나 같이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잡혀 감옥에 가기 전, 세 차례 선교 여행을 했지요. 처음 지역이 튀르키에 남부 지역으로 이번 지진 피해를 본 곳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살며, 장정 열 명이 넘으면 회당을 짓고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기에, 바울이 어느 지역을 가면, 처음 하는 일이, 안식일에 회당을 찾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약 성경에 오신다는 메시야가 오셨으니, 나사렛 예수라 선포했습니다. 적잖은 이들이 듣고 믿었으나, 유대인들은 돌로 치며 죽이려 했지요. 그러다가, 바울은 성령의 인도로 유럽에 건너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첫 도시가 빌립보시인데, 회당이 없어, 유대여인 몇이 안식일에 강가에 모여 예배드린다는 것을 알고 가서 복음을 전해, 처음 믿고 자기 집을 교회로 내놓은 여인이 자주장사 루디아입니다. 이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종이 점을 쳐서 돈벌이하던 주인이, 바울이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점을 못 치게 되니 고발합니다. 바울 일행은 매를 맞고 옷이 찢기며 감옥에 들어가서도, 밤에 기도하며 찬양을 하니, 지진으로 옥문이 열렸지요.

간수장은 죄수들이 도망친 줄 알고 자살하려 하니, 바울이‘네 몸을 해치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간수장이 바울 앞에 엎드려‘주여,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 도우시니, 순탄하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바울은 매 맞고 옥에 갇혀 가며, 복음을 전해 구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사도 바울이 그렇게 훌륭했구나, 고맙다.’에 끝나선 안 됩니다.

‘난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내가 찾아서 힘쓸 일은 무엇인가?’왜 그래야 할까요? 사도 바울과 우리가 누리는 것이 같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 자녀요, 영생을 누릴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그걸 아는, 사도 바울은‘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한 것이지요. 어떻게요? 세상을 향하던 삶에서 하나님과 천국을 향한 삶으로, 육체적인 것을 좇던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자신과 가족만을 위한 삶에서 이웃을 위한 삶으로 변해가야지요.

그 길을 잘 가르쳐 준 것이, 오늘 주보에 실은 글입니다. 조용한 시간에 읽기 바랍니다. 글 쓴 분은‘자신이 흙수저보다 못한 여건이었으나,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니 다이아몬드 수저가 되었다. 그리 믿고 살면 세상이 달라진다.’우리 마음에 담고 힘쓸 일이지요. 이와 함께 도움이 되는 바울의 말씀 몇을 나눕니다.‘어서 죽어 천국 가서 주님과 함께 살고 싶으나, 너희를 위해 이 땅에 머문다.’믿는 이는‘내가 죽으면 어쩌나?’아니라, 죽어 천국가는 게 좋지만, 가족이나 이웃에 복음의 유익을 전하기 위해 산다,

 

또, 바울은‘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자신이 과거에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한 것을 생각하면 얼굴을 들 수 없지요. 바울은 그런 나를 택해 복음을 전하게 하신 주님 은혜에 감사하며 고난을 무릅쓰며 복음을 전합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십자가 주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니 오히려 감사하다 하지요. 우리도, 영 죽음의 길을 가던 우리를 택해 예수 믿고 영생의 길을 가게 하셨으니, 사는 것이 힘들어도 감사하며, 주님의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바울은 ‘약함 중에 강함을 주신다.’바울은 몸이 약해서 골골하고 눈이 아파 고생하면서도‘나는 약함으로 주님께 더 나가니 강해진다.’고백합니다. 우리도, 아프다고, 생활이 힘들다고, 가진 것이 없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가 약할 때 강함 주시는 주님을 믿으며, 용기를 내고 활기를 되찾아야 합니다. 하나 더, 바울은‘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의 십자가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뒤를 보고 후회하거나 낙심치 말고, 승리의 그 날까지 앞을 향해 달립니다.

이런 삶을 살면, 누가 좋을까요? 우리 자신이지요. 그리고 그리 살면, 주위에 좋은 본을 보입니다. 본을 보이는 하나가, 지금, 오늘, 이곳에서 이 땅 천국을 누리며 사는 거지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평안을 누리며 참 기쁨으로 삽니다. 감사와 찬양이 따르지요.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그리 살라고 합니다. 올 사순절을 지나며,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자녀,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변화하며 자라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르심

행 9장 1~9절 / 지성래목사

사울의 회심과 변화를 다룬 오늘 본문 내용은 웬만한 기독교인이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부르심’이라고 정했다. 여러분도 이 시간 자신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언제 주의 부르심을 체험하였는가”라고 말이다.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120여명의 성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된 시작이다. 그 후로 저들 가운데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하루에 삼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역사적이 일이 생겼다. 사도들을 비롯한 성령 받은 성도들은 날마다 기도를 계속하였다. 악기를 다루는 음악 전문가들은 날마다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성악가들도 날마다 자기 목소리를 가다듬어 나간다. 이는 운동 선수들도 마찬가지이다. 미술은 어떠한가. 미켈란젤로의 역사적인 세가지 조각상이 며칠만에 완성되었겠는가. 그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 예수의 시체를 무릎 위에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를 조각한 피에타와 4m 높이의 수려한 다윗상과 모세상을 조각해 내기 위해서 어떤 시간, 어떤 세월을 보냈겠는가. 이처럼 이미 성령을 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날마다 기도와 말씀에 충실하는 삶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과거 어느 순간에 성령을 체험한 그 과거의 사건만 가지고 지금의 나의 영적 상태와 영적 실상을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익숙한 본문이지만 다시 차근차근 대하는 중에 은혜가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복음의 대적자 사울.

우리는 주변에서 살기 등등한 폭력적인 기질과 악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더러 대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사울은 그런 정도, 그런 차원을 뛰어넘는 자였다. 1절의 ‘위협과 살기’라는 말은 “금방이라도 사람을 죽일 듯이 달려들며 위협을 느끼게 하는 심각한 상황”을 설명하는 말이다. 그 당시 사울의 상태가 그랬다. 사울이 대제사장에게서 받아 낸 ‘공문’이란 것은 합법적인 ‘체포 영장’과 같은 문건이다.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아니 ‘다메섹’은 이방 도시인데 무슨 여러 회당이 있었단 말인가” 라고 말이다. 다메섹은 창세기 14장 15절에도 그 도시 이름이 소개될 정도로 오래된 수리아의 고대 도시이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은 20km 거리이다. 그 곳에는 그 당시에 4만여명의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았고 30-40여개의 회당이 있었다. 예루살렘 안에 있었던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으로 인해서 이미 다메섹에까지 흩어져서 사는 기독교인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이 때가 A.D 34-35년 경이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지 불과 몇 년이 지난 때였다. 이러한 핍박은 계속되었고 역사학자 요세프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나중 A.D 66년에는 네로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인 1만명 이상이 학살당하였다.

기독교의 복음 전파 초기에 악명 높던 핍박자가 사울이었다. 성경은 사도행전 9장의 사울의 회심 사건 기록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무리 복음에 대한 핍박과 방해와 훼방이 크더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방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울이 핍박하고 잡아다가 죽여 없애려는 대상은 분명하였다. 2절에 언급된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이 색출 대상이었다. 공산당은 “기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기독교인을 타도하는 것이 저들의 체제를 유지하는 제 1의 목적 중의 하나이다. 이처럼 초대교회 당시에 공회인 산헤드린 의원들이나 대제사장을 비롯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은 똘똘 뭉쳐서 예수 믿는 이들을 박멸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런 저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앞장서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사울’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서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라고 자신이 회심하기 이전의 상태를 간증하고 있다. 그렇게 악랄(惡辣)했던 사울이 변화된 것이다.

하나님은 하시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원하시는 계획과 섭리를 이루신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핍박자 사울의 변화이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이지 수양의 종교가 아니다. 도덕과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의 힘이요 성령의 역사이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사울의 회심과 변화 사건이다. 사도행전 8장 1절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도 마땅히 여기던 자였다. 이런 기록들을 지나치면 안된다.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이와 같은 꼼꼼한 기록을 통해서 그렇게 악랄하고 율법에 사로잡힌 악당이었던 사울의 변화 장면을 자세하게 기록해 주고 있다.

나 자신을 비롯해서 내 주변에 쉽게 변화되지 않는 그 누군가가 있는가. 소망을 버리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변화시키시면 일 순간에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흔히 한국 교회 역사 초기에 변화 받은 깡패 김익두(金益斗, 1874-1950)의 변화를 예로 든다. 맞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변화시키셔서 쓰시길 원하신다. 황해도 신천의 시장 골목 사람들이 벌벌 떨던 깡패 김익두는 변화 받고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16살에 과거 시험에 낙방한 후에 장사하면서 돈을 좀 벌다가 실패한 후에 청년기를 방탕하게 지냈다. 그러나 스왈렌(Swallen,W.L.) 선교사의 ‘영생’이란 제목의 설교를 듣고 변화되어 아내와 어머니와 함께 스왈렌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한국 초대 교회 역사에서 김익두 목사를 빼어 놓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켜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76살 때인 1950년 10월 14일 새벽, 평생을 목회하던 신천교회에 들이닥친 공산당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50여 년 동안 목회하며 국내와 일본 및 시베리아 지방 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 776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150여 곳에 교회당을 세웠다. 2만 8천여 회의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를 통하여 병 고침을 받는 은혜 체험을 하였다”라고 한국교회사는 기록하고 있다.

모세는 40살에 왕궁 밖에 나갔다가 동족 히브리인과 다투는 애굽 사람을 쳐 죽였다. 우리가 아는 모세는 40살에 살인의 경력이 있는 살인범이다. 그런 그가 그 다음 날 또 다시 왕궁 밖에 나갔다가 동족 간의 싸움을 말리려 했다. 동족간의 싸움에 끼어들려 한 것이다. 그런데 어저께의 살인 사건이 이미 다 소문 난 것을 알았다. 그 날, 모세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디안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살인범이요 도망자의 신세로 미디안에서 40년을 지냈다. 거기서 장가들고 거기서 두 아들을 낳았다. 모세는 40년 세월이 지났지만 사람을 죽인 살인범임에는 분명하다. 살인자 모세의 미디안 생활 40년은 감옥과 같은 곳이었다. 살인은 모세의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호렙산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듯한 환상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이 부르셨다. 그리고 그 부르심 앞에 응답한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이끌어내는 선봉에 세우셨다. 그리고 120살에 죽기까지 40년을 모세를 사용하셨다.

오늘날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다. 처지와 형편과 탄생 환경과 성장 배경과 사회 경험이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을 나름대로 변화시켜서 사용하고 계신 것이다. 다 신학교 가고, 다 목사가 되고, 다 선교사가 되자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전파자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빛 가운데 임한 예수의 음성.

사울이 체험한 신비 체험은 두 가지이다. 강한 빛과 주의 음성이다. 3절에서 말하는 ‘홀연히 하늘로부터 임한 빛’은 평범한 빛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빛이 아니다. 우리가 한낮에 체험하는 태양의 빛과 비교할 수 없는 그 어떤 빛이다. 사도행전 22장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날의 체험을 “오정 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라고 간증하였다.

맞다. 주님은 태양 빛과 비교할 수 없는 강하고 큰 빛의 체험으로 사울을 부르셨다. 뿐만 아니라 땅에 엎드러진 사울에게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주님은 사울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대개 이처럼 반복적이었다. 창세기 22장 11절에 보면 모리아 산꼭대기에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려던 아브라함의 빼어 든 칼을 하나님이 멈추게 하셨다. 그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를 동원하여“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부르셨다. “모세야 모세야”, “사무엘아 사무엘아”이처럼 하나님이 누군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실 때에 반복해서 그의 이름을 부르신 것을 본다.

이는 예수께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가복음 10장 41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동생 마리아의 도움을 요청하는 마르다에게 “마르다야 마르다야”라고 그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셨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라는 그 말씀을 하시던 그날 말이다. 누가복음 22장 31절에도 보면 예수께서는 “시몬아 시몬아”라고 베드로의 원래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셨다. 그날 예수께서는 장차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할 것을 예언하시며 심각한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사울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신 예수께서는 사울의 교회 핍박은 곧 예수를 핍박하는 일이라고 거론하셨다. 맞다. 누가 교회나 성도를 조롱하거나 폄훼하거나 박해하거나 주의 일을 훼방하는 것은 곧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 이를 분명하게 하셨다. 그 동안 사울이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의 죽음도 마땅히 여기고 하는 처사를 다 알고 계시던 예수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하여야 한다. 교회나 성도를 조롱하거나 박해하는 것은 곧 예수를 박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와 성도는 예수의 몸이며 예수는 성도와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 보면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라고 하였다. 고린도전서 12장 27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몸과 지체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예수의 질문 앞에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반문하였다. 예수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셨다. 사울은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그러데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문제 삼으셨다. 교회와 성도를 박해하는 일은 곧 예수를 박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신비 체험과 부르심.

예수께서는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는 사울에게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다메섹 도상의 사울을 강한 빛과 주의 음성으로 부르신 분명한 목적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부르셔서 쓰신다. 이것이 성경의 역사이며 곧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이다.

사울이 다메섹 성안에 들어가려던 목적은 분명했다. 예수의 부활의 도를 가르치는 자를 색출해서 대제사장 앞으로 끌고 가서 처형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날 그를 부르신 것이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게 다메섹을 향하던 사울인데 그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앞을 못 보게 된 상태에서 다메섹 성 안으로 들어갔다. 사흘간 앞이 보이질 않았다. 사흘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예수께서는 다메섹 성의 아나니아 선지자를 통해서 사울을 찾아가서 안수하게 하였다. 직가의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고 있던 사울을 만난 선지자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였다. 사울이 앞을 못 본지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사울의 부르심의 장면이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아나니아를 통해서 사울의 회심과 변화를 통한 부르심과 사명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할 자다.

-이 사람은 내가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맞다. 사울은 예수께서 이방 선교를 위해 택하신 주의 그릇이었다. 사울은 유대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이다. “사울은 큰자이고 바울은 작은 자다” 그런 해석은 엉터리 해석이다. 히브리 이름의 ‘사울’이란 히브리어‘사알’에서 온 이름인데 ‘간구하다, 기도하다, 간청하다’라는 뜻이다. 로마 시민권자로 태어난 사울이 유대인 사회에서 활동할 때에는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로 사용되었고 이방 선교 현장에서는 헬라식 이름인 ‘바울’로 사용된 것 뿐이다. 예수께서는 로마 시민권자로서 헬라 말과 히브리 말에 능숙했고 율법에 능통했던 사울을 부르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초대 교회 이방 선교의 존귀한 사도로 사용하신 것이다.

아나니아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였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사울은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되찾았다. 주님은 그날 그 순간에 사울에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다. 사울은 그날부터 여러 날을 머물면서 다메섹의 회당마다 찾아 다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며 다녔다. 듣는 사람마다 이전의 사울이 누군지 알아보고 놀라워했다. 사울은 점점 힘을 더 얻었다. 가는 회당마다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 증언하며 다녔다. 듣는 사람들마다 당혹스러워했다. 여러 날 이런 일이 계속되자 다메섹 성 안에 살던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하였다. 그 소문이 사울의 귀에 들렸다. 유대인들은 공모해서 다메섹 처처의 성문을 지키며 사울을 죽이려고 했다. 결국 사울의 곁에 함께하던 이들의 도움을 받아 밤 중에 사울은 광주리를 타고 성 밖으로 도망쳐 나갔다. 사울은 몰래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다메섹 방문 중에 예수의 부르심을 체험하고 돌아온 사울을 환영할 리가 없었다. 사울의 다메섹 체험을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나 성도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은 자기들의 곁으로 다가 오는 사울을 두려워 하였다. 그 답답한 정황을 파악하고 사울의 변화와 부르심을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성도들에게 설명하며 나선 이는 바나바였다. 하나님은 바나바를 통해서 사울의 변화 받은 부르심의 소식을 예루살렘교회 안에 널리 알려지게 하셨다.

남은 헐몬산 새벽 기도회와 더불어 각 사람이 부르심에 순종하며 성령 충만함으로 나날이 나를 통해서 주의 복음이 확장되면 믿는 자의 수를 더해가게 하는 복음의 통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계시(啓示)

행 9장 1~9절 / 유은호목사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 1804-1872)는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라는 책을 썼습니다. 포이어바흐는 이 책을 통하여 종교, 특히 기독교를 비판하고, 인간이 중심이 되고 물질이 중심이 되는 유물론 철학을 주장하였습니다. 포이어바흐는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의 학설은 인간학이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신은 인간을 신격화시킨 본질에 불과하며, 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에 불과하다.... [따라서] 내가 신이 있다고 믿을 때 신은 존재하며 그것이 나에게 자명하다. 내가 신이 없다고 믿을 때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나에게 자명하다. 신은 상상의 존재이고, 환상의 존재이다. 환상이 시의 가장 중요한 형식 또는 기관이므로 우린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종교는 시이다. 신은 시적인 존재이다... 기독교의 신도 이교의 신처럼 상상력의 산물이다... 나는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강대석 옮김,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파주: 한길사, 2006), 63, 267, 275, 279.).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신을 만들어 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영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포이어바흐로서는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내 쪽에서 하나님을 찾아가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쪽에서 나에게 찾아오셔야 하나님을 알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4절에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먼저 찾아오셨기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알려고 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보여주셔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하나님을 보여주셔서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믿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읽겠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사울은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믿는 사람들이 유대교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사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사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환경이 못되었는데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전도를 받고 교회를 가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제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제 노력으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저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은 것도 여러분의 의지나 노력으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앞으로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셔서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더 잘 믿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3절을 읽겠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빛 가운데에서 사울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울을 찾아오시지 않으셨다면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계속 결박하고 박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울에게 찾아오셔서 예수님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사울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예수님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20세기 스위스의 개혁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그의 『교회교의학』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보여주신 계시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증언된 계시는 인간들에 의해서는 현시 될 수 없는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심으로써 발생하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계시이다... 종교는 계시에 의하여 유지되고, 거룩하게 될 수 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에] 참된 종교이다.”(칼 바르트/ 박순경 옮김, 『교회교의학 I/1』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415 칼 바르트/ 신준호 옮김, 『교회교의학 I/2』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15, 406.).

‘계시’라는 헬라어 ‘아포칼휩시스’라는 단어는 ‘드러낸다’의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고 드러내신 것이 바로 계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로 보여주셔야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빛으로 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로 보여주셨기 때문에 사울은 예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바울이 되어 갈라디아서 1장 12절에서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사람에게 받거나 배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셔서 믿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이 계시로 예수님을 보여주셔서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4절과 5절을 읽겠습니다. 빛이 사울에게 비추자 빛이 너무나 강해서 사울이 더 이상 길을 가지 못하고 땅에 얻드러졌습니다. 이때 소리가 들리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울이 놀라 누구냐고 하자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울을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사울은 평생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사람들을 박해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울은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사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계시로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신을 만들어냈다고 말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부정했습니다. 포이어바흐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계시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18세기 미국의 인디안 선교를 했던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 1747)가 자신의 영적 체험을 일기에 다음과같이 기록했습니다. “1739년 7월 12일 기도하고 있던 중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빛을 보게 되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놀라움과 탄복에 빠져 있었다! 그 빛이 가진 탁월함과 아름다움을 보자마자 그것과 비교할 만한 어떤 것도 예전에 가져 본 적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빛을 보는 순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하나님을, 그토록 영광스러운 존재를 보면서, 내 영혼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해졌다”(조나단 에드워즈 편집/ 송용자 옮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서울: 복있는 사람, 2008), 85-87.).

요한복음 1장 9절에 예수님을 빛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울에게 빛으로 나타나신 것같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빛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노력으로 아무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찾다가 결국 하나님을 못만나고, 심지어 포이어바흐같은 사람은 인간이 신을 만들어 냈다고까지 말한 것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예수님을 계시로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계시로 예수님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여기 계신 것은 계시로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예수님이 계시로 여러분에게 더 많이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8절과 9절을 읽겠습니다. 사울은 빛을 보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쓰러져 일어났지만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들어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사울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끊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예수님께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인생을 살라고 세상적인 것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울에게 보여주시고 계시되는 순간 사울은 이제 과거의 육신적인 사울은 죽고 영적인 바울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예수님을 보여주시고 계시하셨을 때 여러분의 인생도 새로운 영적인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계시해 주셔서 여러분의 인생이 새로운 영적인 인생으로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은 그 시간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들의 마음에 빛을 주시고 예수님을 보여주시고 계시하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기도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계시를 기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계시가 임할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계시해 주셔서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역자를 위한 치유

행 9장 1~15절 / 박지온목사

어떤 사람을 사역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불러서 이 자리에 오게 하셨다는 것으로 이미 우리들은 사역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냥 우리를 부르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치유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정신병자나 육신이 나약한 자는 일을 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물론, 건강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즉, 치유되어져서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을 때에 우리의 수준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치유하시고 우리를 통해 세계를 살리실 것을 작정하셨다면 산업과 가정과 자녀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교회 건축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서면 됩니다. 주님께서 성전 지으라고 돈을 주시면 성전 짓는데 돈을 드리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치려고 해도 바칠 돈이 없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간표가 있습니다. 또한, 좋은 건물을 지어놓고 텅텅 빈다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건물을 짓기 전에 우리로 하여금 그 건물을 채울 수 있는 가슴과 눈을 먼저 여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전도에 대한 인식입니다.

얼마 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무덤에 쇠말뚝과 칼 등을 꽂아 놓은 자가 점쟁이라고 밝혀졌습니다. 진상을 조사해 보니 그 점쟁이가 꿈만 꾸면 이순신 장군이 나타나서 가위가 눌리게 되자 그런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짓입니다. 즉, 사단의 역사입니다.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이 국민 의식을 바꾸기 위해 '새마을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새마을 운동의 노래 중에 '새벽종이 울렸네'라는 가사가 있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교회에서 새벽 기도회를 알리는 종소리입니다. 이것은 그가 어려서 교회에 다녔던 영향입니다. 이와 같은 국민 의식을 바꾸는 일도 복음의 영향을 입었을 때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진실로, 복음이 아니고서는 의식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가 전도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정말로, 우리 자신이 치료되어야 됩니다. 복음을 전할 거리가 없으면 말을 꺼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역자가 치유되어야 합니다.

 

1. 사역자의 자세

 

'내가 먼저 치유되어야 되겠다'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치유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짜 정신병입니다. 조금만이라도 '내가 치유되어야 되겠다'는 의식이 있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메시지를 받으면서 하나님께 치유를 구할 때 역사가 나옵니다. 이러한 인식이 바로 치유의 문입니다.

 

(1) 동기

동기부터 치유받아야 합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솔직히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습니다. 천국 간다는 말은 바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또, 구원받았다는 것은 치유받았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것은 전도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계획은, 나를 전도 받게 하여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전도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 중의 계획입니다. 이러한 동기로 교회에 나오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동기들이 대부분 건강을 위해서, 혹은 돈을 벌기 위해서 등에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주님 앞에 자신의 동기를 털어놓아 보십시오. 정말 예수 믿는 동기가 고통받고 지옥 갈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저들도 나와 같이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눈이 열리지 않으면 별의 별 것이 다 나옵니다. 건강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건강을 위해서 뱀이나 굼뱅이 등을 먹는 엉뚱한 곳으로 빠지게 됩니다.

 

(2) 염려와 걱정

전도에 대한 동기가 안되어 있으면 예수 믿는 것이 염려와 걱정을 더하게 만들고, 결국은 인본주의가 나오게 됩니다. 전도의 동기가 안되면 이상하게 이러한 곳으로 빠지게 됩니다. 교회 생활을 통해서 자존심만 배우게 되어 조금만 무시하는 소리를 들어도 잡아먹을 듯이 됩니다.

 

(3) 인격

그렇게 좋던 사람도 점점 인격적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부드럽고 폭넓게 되는 것이 아니라 좁아지고 다투게 됩니다. 전에 같으면 웃고 넘어갈 것을 싸우게 됩니다. 왜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을 못 받아들입니까? 초대교회의 인격들이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싸움을 모르고 생활했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잘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만, 엄청난 인격적인 문제가 교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인격에 문제가 생겨서 치유받을 수 없는 방향으로 자꾸 흘러갑니다.

 

2. 인격 치유

 

초대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칭송을 받았고, 이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이러한 인격으로 치유받는 것이 교회의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대구시의 송현교회 교인들처럼 되어라'라는 말만 듣게 되면 다 끝나는 것입니다.

인격은 그냥 얌전하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가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인격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이 사실이 먼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이므로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격이 되어지기 위해서 먼저 생각의 순서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순서만 바로 놓으면 다 된 것입니다. 인격적인 사람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할 것과 하지 않을 것, 설 때와 서면 안될 때를 분별할 줄 압니다.

 

(1) 하나님의 입장

하나님의 배경에 서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를 빼버리면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빠집니다. 그러므로, 우선 주 안에 서야 합니다. 즉, 우선 해야 할 것이 기도 스케쥴입니다. 여기에서 전도도 건축도 다 되어집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기도하기 위해서 옥상부터 올라갔습니다. 그 때에 멀리 있던 고넬료와도 연결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개인과 가정과 다락방에서 기도 회복이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기도가 회복되어지면 다 회복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입장이 우선 순위가 되면 다 된 것입니다. 즉, 나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 되겠나?'와 '저 사람도 하나님이 역사하면 된다'는 것 사이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나의 기준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그러나, 말세에 하나님을 믿는 눈으로 본다면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의 인격이 치유되어집니다.

 

(2) 상대방의 입장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지 않으면 치유가 안됩니다. 이 땅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속이 터져 죽습니다. '사단이 역사하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인격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안되면 도와줄려고 해도 역반응만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을 받고 안식과 평안이 있는데, 저들은 왜 저렇게 고생을 할까'라고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격이 바로 될 수 없습니다.

 

(3) 갈라디아 2장 20절

많이 알고 있는데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죽어야 되는데, 이것이 안되고 자기가 시퍼렇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자기의 감정이 시퍼렇게 나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날마다 죽는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자기가 잘 안 죽습니다. 사건과 문제가 나오면 시퍼렇게 자기가 나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삶이 안되면 인격이 안됩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기독교인들이 안 죽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열매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여호와를 앙망할 때에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의지할 때에 달려도 피곤치 않고 걸어도 곤비치 않게 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여 은혜를 주시면 할 수 있다는 고백이 철저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안주시면 안됩니다. 인간의 한계로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약할 때에 나옵니다. 바울이 삼층천에 가보았으나 자부하지 않도록 몸에 가시를 주었습니다. 이런 약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은 은혜와 능력이 머물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계속 역사가 나오고 잘 되면 정말 기고만장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곳에 머문다는 사실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지금 어려운 중에 있습니까? 이 사실이 되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사업도, 건강도 때에 따라 여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하시고자 함이라고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어려울수록 오직 성령이 임하실 때에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해주시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3. 사단의 통로

 

이러한 인격이 안되면 모든 것이 사단의 통로가 됩니다.

 

(1) 열심, 종교, 신비

이러한 사실이 안되면 모두 열심에 빠지고, 안 믿는 자는 종교에 빠집니다. 혹은 신비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열심히 할수록 이상한 곳에 빠지게 됩니다. 전도의 인격이 되어지면 기도를 많이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생명 살리는 역사를 위한 인격이 안되면 헌신할수록 자만해지고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려워집니다.

 

(2) 염려, 걱정

베드로전서 5장의 말씀처럼 정말 어떤 염려와 걱정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붙잡혀 있습니다.

 

(3) 공포, 불안(두려움)

요한일서 4장 18-19절 말씀처럼 사랑 안에서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싸여있습니다. 병든다고 사람이 불안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병 때문에 점점 겸손해지고 평안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상하게도 병 때문에 공포심에 빠집니다. 이것은 사단의 배경입니다.

 

(4) 타락

성도들조차도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5) 의식주 문제, 명예, 경배의 대상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사단의 통로가 됩니다.

 

4. 바울

 

이러한 사단의 통로를 차단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 안에 둘이 있어 하나는 선하려고 하고 하나는 악하려고 한다'라고 고백했으며, 결국 바울은 악에게 져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은 위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되고, 더 나아가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이냐?'라고 담대해집니다. '생명의 법이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드디어 바울은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신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이 때부터 궁극적인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삼층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울이 장가를 가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바울은 열 네 편의 서신 중에 부인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하늘 영광을 본 후로 이 땅의 것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혼자만 그 곳에 들어간다면 나쁜 자라'는 간증을 하게 됩니다. '그 큰 축복을 알고도 말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고 고백을 합니다. 바울이 하늘 나라의 영광을 본 후 '이 땅의 것은 하늘 나라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라고 고백한 배경에서 참 인격의 치유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말할 수밖에 없어서 그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전도에 생을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 '하늘 나라의 영광을 말하지 않으면 화로다!'라고 고백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연세가 많으실수록 하늘 나라 영광에 들어가기 전에 전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오늘 죽어도 행복하지만, 남은 생애를 하늘 나라의 영광을 말하다가 그 영광으로 올라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늘 영광을 보고 당장이라도 올라가는 것이 좋으나 이 땅에서 내가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로다!'라고 고백하며 나아갈 때 현재 우리가 사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다툴 일이 없어집니다.

정말 전도할 사람을 만들려면, 1분만 지옥 불에 구웠다가 내놓으면 될 것입니다. 만약 그 곳에 내 형제와 자매가 간다고 하면 기를 쓰고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한편, 5분만 천국에 갔다 오면 사람들에게 하늘 영광을 전하기 위해 돌아다닐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면 모두들 돌아다닌다고 가정과 사회의 질서가 깨어질 것이니까 실제를 숨겨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의 영광을 맛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원인 전도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인격의 역사를 이루실 때에 새롭게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돈을 맡겨야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정말 전도자로 섰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것입니다. 인격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교회와 가정과 개인이 합시다. 정말 생애가 끝나는 날까지 전도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며 이를 위해 내게 있는 것을 바칩시다.

 

 

 

 

이미 얻은 해답

행 9장 1~15절 / 박지온목사

인사하겠습니다. 안녕하십시오. 평강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한 주간도 주의 은혜를 따라 주안에서 인도함을 따라 살다가 또 거룩한 성 일에 말씀 앞에 세우셨사오니 하나님 어렵고 험난한 시대에 주의 종들에게 모든 해답되시는 그 축복의 그리스도를 확인하고 믿음으로 우리 남은 생애를 풀어 가실 그 은혜의 역사를 찬양하며 이 일에 쓰임 받는 복음의 사신들로 주 앞에 서게 됨을 감사를 드리며 이 일을 구체적으로 나와 내 생활에 누리며 참 삶에 증인으로 증거 할 수 있도록 종들에게 말씀 통해서 새 힘 주시고 은혜 입혀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부족한 종을 축복하시고 말씀을 주시고 주께서 저들에게 필요한 말씀으로 한 주간도 응답하는 말씀으로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연 약과 상관없이 주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 일에 쓰임 받고 있음을 감사를 드립니다. 영광을 주께 돌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오늘 제목을 이미 얻은 해답이라 이렇게 제목을 삼았습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감기로 좀 힘들었고 그래서 오늘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가 흑판을 좀 드러냈습니다. 그냥 제가 흑판을 쓰게 되면 힘이 배나 듭니다. 흑판 기록하는 것하고 시간이 상당히 소모가 많이 돼요. 제가 체력이 조금 딸리는 것 같아서 그냥 좀 가만히 서서 저도 좀 편하게 메시지를 전하면 좋겠다 싶어서 그래서 오늘 흑판을 들어내고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또 이것도 하나님 앞에 응답이다 그렇게 믿습니다. 나는 처음에 올라서면서 죄송합니다. 그럴라 그러다가 하나님 응답인데 뭐 죄송할까...

그리고 특별히 오늘 당회 모임을 2시 30분에 시작을 하겠습니다. 그 당 회의 모임은 우리 10월 달로 만기가 되고 11월 달에 각 파트별로 새로 선교 위원회가 조직이 되는데 각 선교회에서 선교 연령들을 조정하는 일을 오늘 마쳐야 됩니다. 그러면 이제 각 선교회에서 그 11월 달에 새로 총회를 할 때는 그 연령 따라서 그렇게 하도록 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다음주쯤 되어서는 선교 연령이 어떻게 조정이 되는 가는 발표가 되고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이 너무 많이 선교 그 연령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 단위를 좀 짧게 잘라서 그렇게 좀 소단위로 나눌 그런 계획입니다.

그러면 아마 여러분들이 구체적으로 활동하는데 있어서 한 사람도 누락됨이 없이 각 파트별로 속한 사람들이 발굴이 되어서 금년도에는 이 선교기관들을 좀 활용을 한 다기보다도 지금까지는 선교 기관들이 자꾸 뭔가 밖으로 나 갈려고 하고 뭔가 도울 기회가 없나 싶고 보니까 자기부터 안 되었는데 자꾸 다른 사람부터 보니까 이게 더 안 돼요. 그래서 자신들이 일어설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주고 그 다음에 우리 교회 안에 할 일이 너무 많은데 괜히 밖으로 기웃 기웃하고 있어요. 그래서 각 구역별로 선교 위원회를 한번 맡겨볼 작정입니다.

그러니까 1구역에는 제 1선교회다. 여 2선교회다. 제 2구역에는 여 3 선교회다. 이런 식으로 해 가지고 그래서 캠프 중심으로 해서 구역별로 해서 여러분 구역을 심방 한다. 그것은 우리 전도사님들이 있으니까 캠프중심으로 해서 구역을 구체적으로 돌고 그 다음에 선교위원회에서 각 선교 파트가 뭘 이 밖으로 나가서 뭘 남 도와준다 이전에 가장 안 되는 게 우리 자신이 안 되고 있어요. 복음이 안 되고 복음이 이해가 안 되는 만큼 자신도 안 되고 가정도 안 되고 후손도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교회도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 선교 위원회가 각 선교 파트가 자신이 복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실제로 눈을 좀 뜰 수 있는 그런 계획을 가지고 좀 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계획을 잡아봅니다.

그것은 이제 제일 시급한 문제가 각 선교 위원회에서 기도 중심으로 해서 기도 프로그램을 좀 잡을 때에 우 가서 어디 기도한다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개개인이 기도할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을 좀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 볼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 아니면 교인들이 자기 선교 위원회에 의해서 기도일지를 만든다 든 지. 그 다음에 성경일지를 만든 다든지 이렇게 해 가지고 구체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도를 누릴 수 있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 계신 사실이 구체적으로 내 사실로 누려지는 사실이 체험 될 수 있도록 이렇게 개개인이 좀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좀 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은 좀 그런 그 선교 위원을 좀 생각하면서 조금 기도하면서 어떻게 이들을 좀 인도해 볼 것인가 그러다가 배경을 좀 방향을 좀 잡았습니다. 그래서 금년도에는 뭐 지금 누구를 돕자! 뭘 하자! 그 이전에 교회 안에 도울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돕기 이전에 자신이 살아나야 합니다. 돈을 백 만금을 쓴다 할 지라도 자신이 구원 없이 쓰는 것은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돈을 써도 내게 돈을 써도 그렇고 교회 돈을 써도 그렇고 구원 받고 복음의 눈이 열려서 돈을 써야 복이 됩니다. 그게... 그것이 안 되면 참 원망이 돼요. 그래서 교회 목사님께 조금 드린다 싶어도 참 감사하다 이래야 그것이 복이 되고 그 다음에 그때부터 뭐냐 산업의 통로가 열립니다.

어제 우리 장일령 국장님 와서 메시지 전하는 중에도 우리가 십일조를 해도 참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나님이 내게 하나님 것을 드릴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주 앞에 드리게 됨을 감사합니다. 이럴 때 뭐냐 산업에 통로가 열립니다. 이것은 축복이 되는 겁니다. 그게 안 되고 뭔가 하나의 의무적으로 아니면 형식적으로 또 아니면 뭔가 내가 잘 해야지 하는 것으로 하면 이것이 종교가 되고 그러면 거기에 뭔가 사단이 전부 틈타고 들어와요. 그래서 문제가 가장 좋은 돈이지만 가장 좋은 돈이 쓰여지는 곳에 시험보다도 이게 고통보다도 축복과 은혜가 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이것부터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것이 안 되고는 힘들어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늘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 첫 번째 우리 교인들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등록을 하셨을 때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이런 부분들이 많아요. 제가 돈을 10만원, 20만원, 100만원, 200만원 어떤 경우에는 더 많이 그럴 때에 제가 그것을 선 듯 받지를 않습니다. 주시는 분은 참 감사함으로 주신다 그래도 나는 그 분을 알 때까지는 안 받아요. 왜냐하면 내가 그 분이 정말 복음이 되어 가지고 이 감사함으로 그리고 또 내가 그걸 받았을 때에 그 분에게 복이 되고 내게도 복이 될 수 있어야 된다. 이 기준이 안 서면 개인적으로 안 받습니다. 뭐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안 받습니다. 또 적은 돈이라도 받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복이 안 되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것이 되고 나면 그것은 피차에 복이 되니까! 그때는 주고받는 것이 기쁨이요. 감사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혹시 봉사를 하고 싶고 교회 뭐 돈을 내고 싶고 십일조를 낸다고 할 지라도 내 자신이 복음에 눈이 안 열리고 기쁨으로 이게 안 되면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뭔가 나는 그 개인적으로 그런 것이 안 되어서 내가 거절했다. 그럴 때는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그것을 억지로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시고 기다리고 기도하시면 돼요. 그리고 하나님이 은혜로 인도하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피차 복이 되고 피차 받고 주는 즐거움이 있어야 되는 데 그게 안 될 때는 고통이에요.

그래서 뭐 어떤 경우에 제가 이 일 때문에 처음 온 분들이 참 너무 감사하다 그래서 봉사하고 싶어도 제가 거절해서 시험 든 사람도 있더라 구요. 뭐 다른 교회 가기도 했습니다 만은, 저도 그 너무 그럴 때는 그랍니다. 당신이나를 언제 알고 내가 당신을 언제 알았다고 그라느냐? 내가 알기 전에는 아직까지는 아니다. 허락할 때까지는 내가 알고 충분히 감사함으로 내가 부담 없이 받아야 되지 그러기 전에는 아니다 이게 모든 교회의 기관이나 돈을 쓰는 모든 기준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이 남을 돕고 어떤 교회를 돕는다 그럴 때에 할지라도 여러분 기관이 먼저 살아서 이 복음의 눈이 열려 가지고 정말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그럴 때에 하나님이 복음이 된 자에게 축복하고 복음이 된 자가 일을 하는 그 일에 우리가 헌신하고 물질도 그 다음에 경제도 모든 헌신을 할 때에 그것이 축복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복음이 된 곳에 몸을 담을 때에 그 교회에 오는 그 자체가 복이 되는 겁니다. 이게 안 되게 될 때에는 종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라고 그러니 많이 내면 많이 내게 될수록 교만해 지게되고 많이 내면 많이 낼수록 거기에 사단이 역사 하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하시면서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도 즐거워지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 억울한 이야기거든요. 여러분 우리가 그 기관이 뭘 돕는다. 뭘 한다. 그럴 때에 정말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곳에 투자하고 기뻐하는 곳에 내가 헌신하고 기뻐하는 곳에 내가 드리고 이것이 되어지고, 그 다음에 받는 사람도 정말 하나님 앞에 참 즐겁고 감사함으로 그렇게 되어 지는 일이 반드시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전에 오늘 말씀 좀 드리고 싶은 것은 기관에서 조금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만은 복음이라는 것만큼 쉬운 것이 없다. 너무 쉬운 것이 복음인데 그런데 우리 인식에는 복음, 신앙생활 한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지금까지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신앙생활 잘 하려고 별 짓을 다 했으니까! 그래서 남은 것은 상처밖에 안 남았거든요. 그러니까 오래 예수 믿은 사람들이 복음 못 깨달으면요. 결국은 망하게 된다는 배경이 이런 배경입니다.

결국 여러분들이 복음의 눈이 못 뜨여지고 우리 자손들에게 이 눈이 안 여리게 된다 그러면 결국 뭡니까? 결국 재난과 재앙에서 끝이 나 버립니다. 이것이 안 되면 모든 것이 막히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되기 전에 뭐냐 하면 복음 바로 내 노력과 내 힘쓰는 것 애쓰는 것과 상관없이 누가 이루어 주는 겁니까?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위해 모든 것 다 준비 하셨고 그걸 그 이루신 것을 누리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누릴 수 있는 자격이 뭐냐 하면 신분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될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의 누가 돼요. 여러분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대가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어요. 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직 죄인 되어 있을 때에 아무 것도 모를 때에 여러분과 제가 이 죄와 사망에서 눌려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이런 죄의 대가를 친히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달려서 다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죄와 사망과 죽음과 고통에서부터 해방 받게 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축복된 해방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돼요.

그래서 받아들이면 그 때에 누가 하느냐?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계시고 그 때는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다 이루신다는 사실이 이게 믿어져야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면서도 자녀 아닌 삶을 얼마나 산지 몰라요. 여러분 그 참 어렵고 어려운 것이요. 생판 이웃의 아저씨를 앞에 갔다 놓고 야! 너희 아버지다. 믿느냐? 믿어라! 이러면 이것은 안됩니다. 이건 믿으려고 그러면 죽을 고생을 합니다. 믿으려고 그래도 안 되고 믿는다고 고백해도 소용이 없어요. 안 되는 겁니다.

이웃의 아저씨를 앞에 갔다 놓고 너의 아버지다. 야! 믿어라. 믿는다 그래라! 그러면 일이 됩니까? 자기 아버지를 앞에 세워 놓고 야, 아들이 너의 아버지다! 참 좋지. 너의 아버지다! 믿느냐? 그것은 믿느냐? 안 믿느냐? 물을 것도 없어요. 그 아버지 앞에 있는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뭡니까? 그저 감사하고 믿는다는 정도가 아니고 믿어지는 정도가 아니고 그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움이요, 감사요, 기쁨인데 거기에 믿느냐? 믿어라! 이럴 것도 없어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참 그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믿어라! 믿습니까? 믿어라! 이게 소용이 없어요.

여러분 아버지! 평안이 와 버려야 돼요. 아버지! 모든 문제 다 끝났어요. 안식과 평안과 감사가 그대로 터져 나오는 겁니다. 왜? 그 다음에 모든 문제는 아버지 안에서 누리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어렵다! 힘들다! 그 말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뭐라 그랍니까! 가지가 나무에 붙어만 있으면 된다 그랬어요. 이 가지가 붙어 있으려고 뒤틀고 몸부림치고 이러면 오히려 떨어져요. 가만히 붙어 있으면 돼요. 그런데 붙어 있으면 모든 줄기에서부터 뿌리에서부터 나무가 다 공급을 해 줍니다. 그러면 주는 데로 받아먹으면 되는 겁니다. 줄 때에 좋니, 나쁘니 할 것도 없어요. 믿고 받아먹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가지가 잎이 그 다음에 꽃이 그 다음에 열매가 맺히고 저 절로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 안에 섰을 때에 성령으로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급 다 해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 이루십니다. 성령으로 그러면 그 이루신 사실을 누리고 감사하면 돼요. 그 누리게 될 때에 비로소 뭐가 나오느냐? 참 감사다! 참 기쁘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뭐냐 하면 지금 이 엄청난 축복과 역사를 한 마디로 말해서 구원받았다. 구원받았다! 여기에 모든 것이 다 따라 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도 제가 좀 설명을 드렸습니다.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리라." 이 하나님의 평강이 내게 있다는 사실 자체가 판단과 생각과 모든 것을 인도해 버립니다. 이게 안 되었을 때에 불안과 염려가 올 때에 오판이 나와 버리고 잘 못된 생각이 나와 버리고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보면은 크게 다른 것도 다른 것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한국사람들이 실수를 많이 해요. 왜 실수를 많이 하느냐? 한국사람들이 조급합니다. 느긋함이 없어요. 그래서 뭐냐 하면 느긋함이 없고 조급하니까 뭐냐? 결정적으로 뭐냐 한발만 잘 차면 되는데 너무 급해 가지고 빨리 차 버린다던가, 이상하게 찬다는 게 삐뚤 게 차 버리고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니 문제는 맨 날 다 가 가지고는 헛일하고 허탕 치고 마는 겁니다. 그게 다른 게 아니거든요.

여러분 내 안에 평강이 와 있다는 사실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전 인생에 승리하느냐? 실패하느냐? 관건입니다. 모든 생각과 판단이 거기서 다 좌우해 버립니다. 여러분 구원이 내게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참 안식이 있다. 무슨 문제가 일어나도 다 이 안에서 해결되는 것을 다 보게되는 그때부터 평안이 왔다. 모두 여기서 엄청난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 대 주제가 뭐냐 하면요. 이것이 흐르는 대 주제가 구원입니다. 그 구원의 대 주권자가 누구냐?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받고 싶어서 받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 땅에 나오고 싶어서 나왔습니까? 부모를 여러분들이 마음대로 선택합니까? 나다 보니까 이상한 부모 만났다. 그래도 부모는 부모요. 나다보니 좋은 부모 만났다. 감사할 뿐이요. 그래서 나는 너무 감사한 것은 뭐냐 하면요. 내가 믿는 부모 밑에서 났고 그리고 어쨌든 간에 우리 부모님이 아버지 어머니 신앙갈등 있었다. 그것은 갈등일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뭐 이상하게 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정상적인 부모 밑에서 내가 자라났다. 그것은 복중에 복이거든요.

여러분에게 가장 축복된 것은 구원이다. 하나님이나를 정상적으로 뭐 이상하게 인도하지 않습니다. 정상적으로 생활과 사건과 일에 응답 받도록 인도해 주신다. 이 사실이 딱 바탕이 되었다. 그것이 어떤 문제나 사건을 당할 때에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믿는 만큼 누려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앙생활이 쉽다! 그 정도가 아니고 신앙 생활은 감사할 뿐이다. 참 찬송한다. 참 영광이구나! 기쁨이구나! 그래서 여러분 이 시간에 여기에 와서 이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 맞다! 그래 참 평안하다. 그게 보통 말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이 왔다는 자체가 전 인생을 완전히 좌우하는 축복 중에 축복이다.

그런데 이 큰 축복을 받고 앉아 있으면서도 모르고 앉았다. 그것도 등신! 그것 가지고 등신이라 그랍니다. 다른 게 아닙니다. 그런 것 가지고 감사도 없다. 그만큼 더 답답한 게 어디 있습니까? 기가 찰 노릇이거든요. 그래서 오늘 이 배경에서 여러분들이 정말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럴 때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을 때에 아버지가 하는 일을 다 누리면 되거든요. 아들이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서 뭐! 이렇다, 저렇다 불평하고 할 것이 없거든요. 그냥 감사함으로 누리면 됩니다. 아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가지고 아직 철도 없는 게 아빠 오늘 어떻게 살래! 그건 미친놈이지. 그건 병원에 데려가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으면서 주여 오늘도 하루를 인도하신 주여 감사합니다. 주님이나를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찬송합니다. 이러면 될 것인데, 주여 오늘도 어떻게 살 까요. 이러면요. 여러분 다른 사람이 병원에 먼저 가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자신이 병원에 먼저 가야돼요. 이게 안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 돕는다. 뭘 내어서 물질을 낸다. 다 헛수고입니다. 그것이요. 그것 가지고 뭐냐? 그게 안 되어서 뭘 노력한다. 애쓴다. 그럴 때에 그걸 가지고 우리가 종교라 그랬어요. 종교라 그랍니다. 그것은 애쓰면 애쓸수록 문제가 더 붙어 버려요. 왜? 거기에는 바로 배경이 종교에는 하나님의 배경이 아니기 때문에 사단이 역사하기 때문에 거기에 문제가 더욱 따라 오게 됩니다.

제가 몇 일 전에 추석 전에 젊을 학생 때에 아주 좀 뭐라 그럴까? 교회에 대해서도 그렇고 밖에 대해서도 그렇고 참 불만이 많은 사람이에요. 심지어는 당 회에까지 와서 나한테 항의를 하고 그랬던 학생입니다. 그 다음에 그 배경이 내가 대강 알아요. 하여튼 신비주의 할 때는 제가 학생들 끌고 가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요. 은사를 받쳐줄라고 무척 애를 썼거든요. 그때는 뭐 진짜 내 진심으로 있는 힘을 다 해서 했거든요. 그런데 이 학생에게 은사를 받쳐 줄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특별히 그때는 주암 산에 가 가지고 밤새도록 막 눌리고 그 다음에 뚜드리고 흔들고 이래도 은사는커녕 입도 안 돌아가요. 그리고 나오는 말이 "아! 나는 암만 해도 안 되네." 그러더라 구요. 절망입니다. 그때는 방언을 받아야 뭐가 되는 줄 알았으니까! 얼마 후에는 다른 교회 가버렸어요. 하다가, 하다가 안 되니까! 가는 겁니다. 당연합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그때에 신비할 때에 여러분 방언이나 받아야 뭔가 신비를 한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뭘 좀 체험이 되어야 되니까! 뭔가 좀 보여야 할만하니까! 그게 없을 때는 뭔가 이 기도해도 하는 둥 마는 둥 뭐 그렇거든요. 그러니 그렇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런데 다른데 돌아다니다, 돌아다니다 왔어요. 와 가지고 이 복음가지고 계속 그 동안 메시지 들으면서 그 옛날에 상처가 다 치유되고 지금은 집사가 되었습니다. 이 성가대에 앉아 있어요. 아마 이 말을 지금 듣고 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여러분 여기에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겁니다. 그 전에는 노력하는 것만큼 문제가 생깁니다. 노력할수록 더 고통스러워요.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노력하면서 나오는 것에는 노력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뭐가 나오느냐? 불평과 원망이 자꾸 터져 나옵니다. 노력하면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 복음이 안 되고 율법적으로 그게 율법적이라는 말이 다른 게 아니거든요. 종교에 빠지게 되면 자연적으로 교회가 차가워져요. 뭔가 교회가 이상하게 텐션이 많고 뭔가 이상하게 다른 사람 자꾸 보는 눈이 열리고 자기를 보는 눈은 자꾸 더 어두워지게 되고 감사는 없어지고 원망은 자꾸 나오게 되고 참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눈이 열리면요. 이상한 짓 하는 옆에 집사를 보고도 주여 감사합니다. 어쩌다가 나는 은혜를 받아 가지고 복음을 알고 난 후에 저렇게 삐뚤어지지 않는 생각 이상한 생각하지 않는 것 참 암만 생각해도 감사하거든. 안 그러면 나도 똑같이 그렇게 될 거거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가 나오지 원망이나 뭔가 저 사람에게 판단이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왜? 나도 똑같은 사람이었는데 이 복음이 안 되면 자꾸 그런 부분들이 나오죠.

그래서 복음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 오늘 제가 하고싶은 말씀이 본문이 모든 현실이 위기가, 위기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복음 받지 못했을 때에 온 바울은 엄청난 위기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본 아나니아는 엄청난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위기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말씀에 제목대로 복음이 되고 나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 눈이 열려 버립니다. 받아합시다. "아, 이미 응답이구나!" 할렐루야! 이미 응답으로 와 있습니다. 이미 응답으로 와 있어요.

여러분 보세요. 이 응답 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먼저 사울에게 먼저 뭘 깨닫게 만들었냐 하면 '아! 예수님은 살아서 부활하셨구나!' 복음을 깨달았죠. 죽은 줄 알았는데 부활하셨구나! 생명의 주인이시구나! 그걸 깨닫게 되는 순간에 여러분 이걸 깨달았다 그러면 뭐가 잘 돼야 될 것 아닙니까! 성경에 뭐라 그러냐 하면 눈이 멀어 버렸어요. 나는 이게 얼마나 감사하지! 바울이 눈이 안 멀었으면요. 그 다음 2차, 3차 사건이 복음의 사건으로 인도가 안됩니다. 그 교만한 것이요. 이때는 교만한 것이지. 눈이 안 멀고 눈을 멀쩡하게 뜨고 더 환상을 보고 이상을 봤으면요. 막, 봐라! 그러면서 이상한 소리할는지 모르는데 눈이 멀어 버렸어요.

여러분 한번 경험해 보세요. 다른 건강 다 잃어도 눈이 안 멀면 그때는 충격 들 받습니다. 다를 건강 다 안 잃어도 어느 날 뭔가 갑자기 충격 받고 와서 눈이 딱 멀었다. 충격 받습니다. 앞이 캄캄해집니다. 여러분 진짜 아득해 집니다.

저는 저의 집사람이 그 눈이 안에 핏줄이 터져 가지고 참 지금 저 눈을 뜨고 돌아다니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되는데 불평을 하니까 좀 내 마음이 그래요. 그러니까 완전히 눈이 멀어버렸으니까! 이 안에 동자 안에 핏줄이 터지면 밖으로는 몰라요. 동자 안에 핏줄이 터지니까 피가 까맣게 동자를 덮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눈이 안 보이는 거죠. 그 때에 다락방 초기 아닙니까! 나도 그렇게 어렵고 힘들 때인데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합니까! 내 버릴 수도 없는 것이고 그러니 데리고 다니기는 다녀야 되겠고...

그러니까, 내가 손을 잡고 데리고 다니는 것 아닙니까! 손을 잡고 다니니까! 그때 다른 사람들은 그랬어요. '아! 참 부럽다.' 그래요. 남 속도 모르고... 왜 부럽냐 하면, 이렇게 손을 잡고 내려가면서 뭘 했느냐 하면 눈이 안 보이니까 여기는 구덩이다. 여기는 계단이다. 일일이 소근, 소근 이야기 해 주거든요. 그런데 이 다른 사람들은 사랑노래를 부르는 줄 알고 '아! 부럽다.' 하고 그러더라 구요.

그때 내가 기억에 남는 것은 류 목사님 사모님이 저쪽에서 가만히 보시더라 구요. 내가 언덕을 올라오면서 보더니만 우리 기도원에 갔을 때인데 벧엘 기도원에... 목사님 참 부럽습니다. 그래 내가 사모님 심정을 알거든요. 왜 그 말하는가! 여러분 이말 하면 대강 알 겁니다 만은 부러운 게 아니거든요. 지금 현재 눈이 안 보여 가지고 앞을 지금 더듬거리고 있는데 손을 잡고 구덩이 있다는 소리 안 해주면 넘어져 버리거든요. 구덩이다 그러면 조심해서 걸으니까!

여러분 진짜 캄캄한 것이요. 눈멀었다 싶을 때에 진짜 앞이 아득하더라 구요. 본인도 진짜 아득합니다. 그러니 뭐 집중해서 하나님 앞에 메어 달리는 거죠. 그러면서 메시지 들어야 산다는 생각에 거기에 또 쫓아다니는 겁니다. 처음에 미쳤을 때에 우리가 안 그랬으면요. 나 자신도 그렇게 아마 우리 집에서 안 그랬으면 메시지 들으려고 그렇게 안 다녔을 겁니다. 그러니까 뭐 미쳤지! 참 말씀을 들어야 되겠다. 그게 마음에 있으니까! 그것 붙잡고 다니는 겁니다.

여러분 제가 이 바울을 보면서 뭘 느끼느냐! 부활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면 엄청난 축복의 역사를 체험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현실적으로 눈이 멀어버렸어요. 캄캄해져버렸습니다. 기가 찰 노릇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보세요. 이것이 응답 중에 응답입니다. 나도 지나오고 나면서 나도 그런 어려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미친 듯이 달라붙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도 체면이 있지 이제 다 늙어 가지고 뭐라고 이제 노회에서 욕하는 것이 그것이거든요. 봐라 이 박지온 목사 류 목사의 꼬봉이 되어 가지고 맨 날 졸병처럼 따라 다닌다 안 그랍니까! 내가 그래 안 그랬으면 나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나도 체면이 있지 안 그랍니다. 내가 답답하니까 메시지 들으려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바울이 이런 일이 없었다 그러면요. 아나니아에게 절대로 무릎 안 꿇습니다. 복음 받기 위해서 절대로 마음문 안 열립니다. 대 율법의 사도가 절대로 안 그랍니다. 그럴 수가 없어요. 여러분 복음 받게 되는 즉시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현장에 나타나는 위기는 모든 응답의 현장입니다. 이게 이해가 되어 버리면요. 그때부터 현장에 아픔도 늘고 괴로움도 늘고 슬픔도 느는데 그것은 괴로움이 괴로움 아니고 슬픔이 슬픔 아닙니다. 응답 중에 응답이다. 이 사실이 와야 돼요.

그래서 저는 그 바울을 보면서 그 대 석학이 이름 없는 아나니아에게 무릎을 꿇게 된 배경이 뭐냐하면 이겁니다. 눈이 멀어버렸어요. 눈이 멀면 앞이 캄캄한데 어떻게 합니까! 눈이 멀었는데 무슨 학식이 필요 있고 눈이 멀었는데 길 가는데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어디 방정식이 필요하면 뭐가 필요합니까? 그때는 앞을 인도하는 사람을 두루 찾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뭐라 그러냐 하면 간단하거든요. 여기 보면은 7절입니다.

"(행 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행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그런데 그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사흘 동안입니다.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그러니까 뭡니까 얼마나 충격을 받았든지 식음을 전폐했다 그랬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여러분 눈 깜고 한번 1시간만 더듬거리면 살아 보세요. 이 말이 얼마나 충격적이라는 게 이해 할려면요. 눈 깜고 1시간이 아니라 30분만 더듬거리며 집에 돌아다녀 보세요. 어떨 것인가! 그런데 눈을 순간에 충격을 받아 가지고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그래 놓으니까 밥맛이 있겠어요. 먹을 마음이 있겠어요. 식음을 전폐해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이때는 누가 이리 오라 그러면 이리 따라가고 저리 오라 그러면 저리 따라가고 그러니까 오라 그라는 데로 가라 그라는 데로 가는 겁니다. 그때에 10절에 보면은 하나님이 누구를 준비했습니까! 하나님이 바로 이런 일들을 다 계획하시고 현장에 이 엄청난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바울을 이렇게 꺾어 놓고는 그 눈을 막아 놓고 누구를 보냈느냐? 아나니아! 아무 이름 없는 아나니아를 보냈습니다.

그 다음에 아나니아도 봅시다. 아나니아를 가라 그러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은요. 소문이 나 가지고 어린아이까지 다 아네. 기독교인들을 잡아죽이는 사람으로... 그러니까 뭐라 그랬느냐 하면요. 11절에 "(행 9: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행 9: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절에 아나니아가 깜짝 놀라 가지고 뭐라 그랬냐 하면요. "(행 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행 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행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할렐루야!

아나니아는 전혀 안 된다 그랬는데 뭐냐? 하나님은 가라 그랬어요. 가는 것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죽으러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거든요. 하나님 그러면 나 죽으라고 보내는 겁니까?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잘 아셔야 합니다. 주님이 가라 그러면 가서 이미 모든 응답을 준비했기 때문에 가라 그라는 겁니다. 여러분 기도하라는 일이 생기거든 다 준비해 놓은 일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라 그랍니다. 그리고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았기 때문에 취하라는 겁니다. 그게 기도 제목이에요.

제가 우리 황 집사님이 공부를 좀 해야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올해도 사 오셨어요. 황명희 집사님! 벌써 가실 분인데 내가 알기만 해도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우리가 임종까지 드리고 제가 한번은 동산병원에 가 가지고 예배를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돌아왔는데 또 살아났어요. 그런데 회갑이다! 그래요. 그러면서 목사님 오실 수 있습니까 이래요. 그래 내가 죽어 기어가더라도 거기는 가야 된다. 다른 데는 못 가더라도 왜? 그게 산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셨어요. 살려 주셨는데 어디까지 복음의 눈 뜨이니까 살려 주시더라 구요. 옛날에 갔더라면 어쩔 뻔했어요. 그렇게 많은 충성 헌신 많이 했습니다. 내가 들어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일이 쉽고 축복이요, 은혜라는 것을 아마 요즘 더욱 깨달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스럽던 그것이 기도 응답이었다는 사실이 요즘 깨달아 질 겁니다. 사실은 이 말을 거기에 가서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오늘 여기에 먼저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자신들에 일어난 사실들이 바로 이게 큰 문제구나 했던 것이요. 하나님은 전부 기도 응답으로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 이게 여러분과 제게 벌써 응답했습니다. 이걸 보는 눈이 열렸다! 그때부터 여러분에게도 제게도 우리 모든 사람에게도 뭡니까? 형통해 집니다. 모든 문이 여기서 다 열리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아나니아에게 하나님이 가라 그래서 바울에게 안 갔습니까? 가서 딱 보니까 가는 것 자체가 위기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지금 눈이 멀었다. 위기입니다. 이것보다도 큰 위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의 삶에 엄청난 위기거든요. 눈멀어서 한 평생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보통 위기가 아니거든요. 위기라는 말은 두 가지 뜻입니다. 참 위험스럽다. 그런데 위기일 때가 기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뭘 합니까? 응답의 기회요. 축복의 기회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위기는 큰 축복의 기회입니다. 위험스러운 일은 축복의 기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 현재 내 문제는 나에게 큰 문제다. 엄청난 위기다. 그러면서 또 내게 주는 것은 교회와 연관되니까 교회도 엄청난 위기다. 그리고 교회가 1년, 2년 동안 침체된 이 사건 속에서 교회가 사실상 위기입니다. 우리 교회가... 진짜 위기입니다. 이상하게 뭔가 이 복음에 대해서 활발하게 못 나가니까! 뭐냐하면 옛날로 옛날에 율법적인 체질로 옛날에 또 불평스러운 마음으로 옛날에 감격하던 그 감격이 다 살아지고 이미 차츰 차츰 왜? 그게 통로가 되니까! 그래서 우리 노력과 우리 수고가 다 헛된 것으로 돌아가는 사단에 이런 배경들이 지금 자꾸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이런 역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맞다! 오늘의 이 문제는 큰 축복과 은혜의 현실적인 기회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이 문제는 큰 축복과 은혜의 현실적인 기도 응답의 기회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기회입니다. 불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는 모든 불평과 사단의 통로가 열리는 현장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 눈이 열리고 믿어지게 되면 이때에 여러분을 대하고 나를 대하는 모든 사람들마다 뭡니까?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이 다 해결되었다는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내가 가는 모든 산업과 그 다음에 내가 가는 모든 일들과 내가 가는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의 역사가 나옵니다.

그래서 십일조든지 감사든지 헌신이든지 축복이든지 복음이 된 그곳에 라야 뭐가 되느냐? 실질적으로 드리는 곳에 감사가 나오고 감격이 나오고 축복이 나오지 그것이 안 된데에서는요. 드리는 만큼 교만이 나오고 자만이 나오고요. 드리는 만큼 뭐가 나옵니까? 종교적인 배경이 나옵니다. 그리고 노력 이후에 나오는 반드시 뭡니까? 더 고통과 눌림과 괴로움이 따라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이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다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보세요. 바울이 눈이 열리자 말자! 그전에 아나니아를 딱 준비해 놓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나니아가 준비된 그런 상황에서 사울을 딱 보냈습니다. 그러니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딱 둘이 만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나니아를 보내서 그 머리에 손을 얹고 머리에 손을 얹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기도하자 말자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게 참담하던 바울의 그 고통스러운 캄캄하던 흑암의 세력들이 완전히 싹 물러가 버렸습니다. 비늘이 벗겨져 버렸습니다. 현실적인 응답이에요.

여러분 응답이라 그럴 때에 다른 게 아니거든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사실 자체가 응답이거든요. 그게 내게 누려진다고 그럴 때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해결 하셨을 때에 사단과 흑암과 어둠의 세력이 완전히 해결되었거든요.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내 안에 영접하게 될 때에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그 일이 내일이 되는 겁니다. 내 사건이 되는 겁니다. 내 안에 역사 하는 현실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구체적인 역사와 축복이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개인적으로 교회 적으로 가정적으로 문제가 딱 일어나게 되면요. 전에는 아 누구 때문이야! 뭐가 문제냐? 그렇게 살폈지만 아, 기도 제목이구나! 기도를 시작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오늘 바울이, 아나니아가 바울을 찾아가서 기도하는 순간에 흑암의 그늘이 무너져버렸습니다. 흑암의 비늘이 벗어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 동서남북, 오대양 육대주를 살리는 엄청난 축복과 은혜가 벌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게 여러분과 제게 약속된 기도응답이요. 하나님이 해결하시고자 원하시는 축복의 기도응답이요. 현실적으로 이 약속과 역사가 여러분과 제 앞에 놓여져 있는 사실입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는 게 아닙니다. 될수록 이런 일에는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겸손해 지게 됩니다. 그래서 역사가 나올수록 겸손해 져야 됩니다. 옛날에는 역사가 나올수록 교만해 져요. 자랑하게 되고 그러면 시비가 붙게 되고 그러나 이렇게 되면 역사가 나올수록 겸손해 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는 그 순간부터 비로소 진짜 일꾼다운 일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옛날에는 일꾼이 나왔을 때에 겸손하게 한다고 했어도 자꾸 다른 문제가 나와요. 자꾸 교만에 빠지게 되고 다른 사람을 시기하게 되고 시기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 나오 게 되고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해결되는 그때부터 흑암 권세가 무너지는 그 순간부터 겸손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여러분이 현실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어야 되니까, 흑암이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비늘이 벗어지기 시작하니까, 안 보이는 게 보여지기 시작하니까 감사와 감격으로 완전히 열려지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바울이 아나니아를 받아들이는데 어렵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무식하던지, 뭐 무식하던지 유식하던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받아들이는데 어렵지 않습니다. 그대로 받아 들어버립니다. 복음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사람 용납하는 것은 복음의 눈이 열리면 사람 용납하는 것 문제가 아니에요. 이게 안 될 때에 문제가 오죠. 그래서 좋든지 나쁘든지 복음 되면요. 사람 용납하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눈이 열리는 순간에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보이는 순간에 그에게는 아나니아가 얼마나 감사하고 고맙고 기쁘고 그런 존재가 되어 버렸어요. 이때부터 만남과 그 다음에 서로 아는 사이 그 다음에 보는 사이 느끼는 사이가 즐거움의 대상이 됩니다. 감사의 대상이에요. 그렇지 않으면요. 우리가 성도들과 성도들 사이에 비비고 부딪기는 사이가 고통스럽습니다.

복음이 되고 나면 만남과 그 다음에 우기가 현장에서 또 부딪기는 사이들이요. 정말 기쁨과 삶에 축복과 응답과 해답의 문이기 때문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여러분들이 모든 문제에 나뿐 아니라 우리 후손까지 열립니다. 여기에 모든 축복이 약속이 되어 졌습니다. 이것이 안 되면 개인도 망하고 가정도 망하고 교회도 어두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축복을 먼저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게 하시고 마지막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바울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바울에게서 우리가 받고 싶어 하는것은요. 바울이 이런 기회를 받고 복음에 눈이 열리고 난 후에 당장 어디로 갔느냐? 복음을 당장 전했는데 예수님이 그리스도라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사실이 바로 증거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 받은 자의 특성입니다. 전도를 한다 안 한다 그게 아닙니다. 그래 여러분 전도 캠프를 하라, 하라 그래가지고 한다. 그 배경 이전에 여러분 자신이 자신에게 대해서 전도 캠프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들이 가는 곳마다 이런 실질적인 이런 고백들이 터져 나오게 될 때에 하나님이 이제 새로 오는 밀레니엄인데 사실 1001년 시작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는 위기를 뚫고 가는 게 아니고 위기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과 역사가 오늘 바울에게 준 엄청난 축복의 역사가 뭡니까! 눈이 떠져버렸어요. 눈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적으로 우리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눈이 열리고 건강이 열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이 이제 구체적으로 응답되는 사실이 보여지는 고백들이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말씀잡고 주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한 음성으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여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교회에 주께서 위기가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위기가 왔습니다. 하나님 은혜의 역사를 이루고자 주님 앞에 섰사오니 우리 눈이 열리게 하시고 눈이 열리게 하기 위해서 흑암 권세가 사라지며 흑암 권세가 주 예수 그리시도의 놀라운 기도의 문이 열리게 하시고 기도가 되어지며 기도의 응답 받아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구체적인 사실 속에서 성취되게 이루어지도록 축복해 주시고 역사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 감사함으로 감격함으로 기뻐하며 찬양함으로 영광을 주 앞에 돌립니다. 주님의 귀중한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주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가 눈이 멀어서 충격 받고 고통받고 위기가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 그래서 우리가 현장에서 우리의 자신들이 위기가 왔고 우리 자신들의 부족함을 또 우리 자신들의 한계가 느껴졌고 우리 자신들이 더 이상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절망속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주 앞에 세우실 기도의 사실적인 응답을 다 준비해 놓으신 것을 보는 눈을 열어 주셔서 응답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눈이 열려지고 이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새롭게 개인 개인이 기도 응답 속에서 체험되게 하시고 교회가 기도 응답 속에서 체험되게 하시고 우리 기관이 이 기도 응답 속에서 체험되어 져서 우리의 고백이 되고 우리 기관의 고백이 되고 우리 교회의 고백이 되도록 주여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사 명

행 9장 1~16절 / 김태환목사

이번 주부터는 신약성경으로 넘어와서 사명을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신 것을 보면 참 이상합니다. 어떤 때는 그 일을 위해서 준비된 사람을 부르십니다. 이사야 같은 사람이 그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때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부르십니다. 모세나 예레미야 같은 경우입니다. 또 어떤 때는 일터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을 현장에서 부르시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의 어부로서 그물을 깁고 있다가 갑자기 “나를 따라 오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울과 같은 사람은 전혀 하나님의 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도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속단하지 말아야 하고, 자기 자신을 볼 때도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을 즉흥적으로 부른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생명을 지으실 때부터, 아니, 하나님은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 생기기도 전부터 우리의 생에 대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레미야서 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너를 네 어미 뱃속에서 만들기 전부터 알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러 나라에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 또 시편 139편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가장 깊은 곳을 지으셨으며, 나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를 만드셨습니다. 내가 주를 찬양합니다. 이는 내가 신기하고 놀랍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내가 땅의 깊은 곳에서 만들어졌을 때, 주의 눈이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내 몸을 보셨습니다. 내게 정해진 모든 날들이 주의 책 속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날들의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기록되었습니다. 오 하나님, 주의 생각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요 그것들이 얼마나 크고 많은지요?” (시편 139:13-14, 16-17)

 

오늘 읽은 사도행전 말씀에도 이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는 이방 사람들과 여러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 주겠다.” 도구(道具)라는 말을 아시지요?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사람을 향해 “이 사람은 내가 선택한 도구이다(He is my chosen instrument)”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토기장이에다 비유한 곳이 많습니다. 이사야 29장, 이사야 45장, 이사야 64장, 예레미야 18장에서 하나님은 토기장이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We are the clay, you are the potter; we are all the work of your hand., 이사야 64:8)”고 합니다. 또 창세기 2장에는 토기장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이방 사람들과 여러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이런 말씀을 읽으면, 마치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그 손에 도구를 들고 뭔가를 만드시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시는데 그 도구가 바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런 말씀을 성경에서 읽으면서도 애써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도구라는 사실을 부인(否認)합니다. “나는 아니야. 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울 같은 사람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일에 전혀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름부터가 “큰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전에 보면 Saul이라는 이름에 “standard”라는 뜻도 있고 “asked for”라는 뜻도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름만 보더라도 사울이라는 사람은 대단히 자기 중심적인 교만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성경에 처음 등장한 것은 사도행전 7장입니다.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울은 그 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옷을 벗어 사울에게 맡기고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쳤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는 모습을 처음부터 모두 지켜 보았습니다. 그는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잘 죽는다고, 죽을 짓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사도행전 8:1).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를 모두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집집마다 찾아 다니면서 남자든 여자든 닥치는 대로 끌어 내어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날에도 그는 다메섹이라는 도시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숨어산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그들을 잡으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이들을 모두 체포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라는 대제사장의 편지가 쥐어 있었습니다. 다메섹에 거의 이르렀을 무렵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그를 둘러 비췄습니다. 그는 그 빛을 견디지 못하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이 때 그는 강력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런 소리가 너무나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그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내가 당신을 핍박한다고 하십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다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울과 같이 있었던 사람들은 무슨 소리가 난 것은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주님의 음성이 오직 사울 한 사람에게만 또렷하게 들린 것입니다. 훗날 그가 아그립바(Agrippa) 왕 앞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명할 때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로 차 보아야 너만 다칠 뿐이다(It is hard for you to kick against the goads., 사도행전 26:14)”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가시채”라고 나와 있습니다만, 영어 성경에는 “goads”라고 나와 있습니다. 가시가 돋친 막대기라는 뜻입니다. 이 가시채를 발로 차 보아야 네 발만 아프지 아무 소용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행위는 가시채를 발로 차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봐야 네 발만 아프지 아무 소용 없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정확하게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그는 네로 황제 때 갈릴리와 베뢰아를 다스리도록 임명된 왕입니다. 그 앞에서 사울은 당당한 목소리로 그날 그가 들었던 음성에 대하여 말합니다. “나는 너를 나의 일꾼으로 삼아 네가 본 것과 앞으로 내가 네게 보여 줄 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도록 할 것이다. 내가 너를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다. 그리하여 그들도 나를 믿어 거룩한 나의 백성들이 되게 하겠다.” (사도행전 26:16-18)

우리는 지금 사울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명을 받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몇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날의 다메섹 도상(途上)의 체험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전에 그렇게 교만하던 사람이 이제는 겸손하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아무 가치 없는 것들이 되었고, 그의 가슴에는 새로운 가치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말씀이 빌립보서 3장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7-8)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consider everything a loss compared to the surpassing greatness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저는 한참 동안 이 말씀의 뜻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함과 비교해 보면 다른 모든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손해(loss)”입니다. 그리스도를 추구해야 할 사람들이 다른 것에 시간과 정열을 쏟는 것은 그의 인생에 큰 손실이기 때문입니다. 힘써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십시오. 전도서 12:1 말씀을 아십니까?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이 말씀을 이렇게 바꿔 읽으십시오. “너는 청년의 때에 힘써 그리스도를 추구하라!”

 

둘째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날부터 마음에 거룩한 열정을 품고 살았습니다. 열정(熱情)이란 말은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나에게 열정이 살아 있으면 내 삶의 의미와 이유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열정이 식으면 내 삶의 의미와 이유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는 이 열정이 있었기에 그의 생애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1:21 말씀을 알고 계십니까? “나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For to me, to live is Christ).” 이 말씀에서 그의 열정이 느껴지십니까?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런 거룩한 열정을 가슴에 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단 몇 마디만 서로 얘기를 나누어도 그의 눈빛에서 열정이 느껴지고,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로,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도구(instrument)에는 아무 의지가 없습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도구는 토기장이의 생각에 따라 사용될 뿐입니다. 악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악기에게는 아무 의지가 없습니다. 악기는 연주자의 손에 들려 소리를 낼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울 그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충실하게 도구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렇게 많은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삶을 살았기에 다른 사역자들과 동역하는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3:6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을 아시지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여러분, 로마서 15:19에 보면 “나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을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만하게 전파했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까지(from Jerusalem to Illyricum)” 이 말은 바울이 복음을 전파했던 영역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일루리곤은 오늘날의 마케도니아 북쪽 지역입니다. 모든 지중해 연안과 그 북쪽까지 그가 가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때로는 배를 탔겠지요. 때로는 말을 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는 발로 걸어서 다녔습니다. 고린도후서 7:5에 보면 그 때 그의 삶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마케도니아에 도착했을 때도 조금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밖에서는 싸움이 있었고, 안에서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에게 손톱만한 작은 의지(意志)만 있었더라도 그는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내가 미쳤나?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하지?" 이런 마음이 들었더라면,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그렇게 광활한 지역을 누비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로서 살았기에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그 엄찬난 지역을 누비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헌신 덕분에 수 많은 지역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사명을 통해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다시 보는 인생

행 9장 1~18절 / 서정호목사

한 어머니에게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둘 다 혼인하여 미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아들과 딸을 보기 위해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우선 L.A.에서 살고 있는 딸네 집으로 갔습니다. 딸과 사위가 어머니를 반겨주었습니다. 밤늦게까지 밀린 얘기를 나누었는데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깜짝 놀랄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딸은 자고 있는데, 사위가 일찍 일어나 혼자 아침식사를 해 먹고, 샌드위치 도시락을 싸가지고 출근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딸을 아껴주는 사위가 대견스럽게만 보였습니다.

다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들네 집에 갔습니다. 역시 아들과 며느리가 반겨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놀라게 되었습니다. 며느리는 꼴도 안 보이고, 금이야 옥이야 받들어 키워서 미국 유학까지 시켰던 아들이, 궁상맞게 제 손으로 아침을 지어 먹고, 샌드위치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하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런 아들이 한없이 측은하고, 한편 며느리가 몹시 괘씸하게 느껴졌습니다. 두 남자의 동일한 행동을 보고, 어머니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두 사람의 행동을 보는 잣대가 크게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다른 잣대를 가지고 동일한 행동을 보면서 자기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예는 얼마든지 더 있습니다. 내가 차에 타고 있을 때는 횡단보도를 늦게 건너는 행인을 욕하고, 내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빵빵대는 운전사를 욕합니다. 남이 천천히 차를 몰면 소심 운전이고, 내가 천천히 몰면 안전 운전입니다. 며느리는 남편에게 쥐어 살아야 하고, 딸은 남편을 휘어잡고 살아야 합니다. 남의 자식이 어른에게 대드는 것은 버릇없는 짓이고, 내 자식이 어른에게 대드는 것은 자기주장이 뚜렷해서입니다. 남이 민소매를 입으면 “그래, 다 벗어라, 벗어.” 하고, 내가 민소매를 입으면 “어때, 시원해 보이지?” 합니다. 남이 술자리에 자주 가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고, 내가 술자리에 자주 가는 것은 인생을 즐기는 일입니다. 남이 술잔을 돌리면 위생 관념이 없는 짓이고, 내가 술잔을 돌리면 다정다감한 정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왜 이러한 불합리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관적으로 현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주관성이 그리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자기중심성이 결합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곧 자기중심적 주관성, 이것이 근본 원인인 것입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어머니는 두 남자의 동일한 행동을 보고, 자기중심적 주관성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첫날 사위의 행동을 보지 않았다고 하면, 다음날 아들의 행동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갖는 것을 어느 정도 양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며느리가 괘씸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전날 사위의 행동을 보고나서는 딸이 편안하게 늦잠을 자는 것에 대해 흡족한 마음을 가졌던 겁니다. 그래 놓고서 바로 다음날 며느리가 괘씸하게 생각된다면, 이는 자기중심적 주관성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이런 모습은 두 가지 문제를 지닙니다. 하나는 그 자체가 추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 지지 않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해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했는데 괘씸한 마음이 올라왔다는 것이, 바로 힘든 상태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것이 모순입니다. 자기중심성이란 자신을 위하는 마음인데, 그것이 엉뚱하게 자기를 힘들게 하니 말입니다. 이중 잣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문제라 했습니다. 그것의 뿌리가 자기중심적 주관성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서, 동일한 잣대로 세상을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가능합니다.

자기중심성을 <에고>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자기중심성을 벗어난다는 것은, 에고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완전히 에고를 비우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고 다만 좀 가벼워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에고가 강하고 무거운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에고가 약하고 가벼운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두 주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입니다. 두 주인을 동시에 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에고가 강하면 하나님이 약해지고, 하나님이 강해지면 에고가 약해지는 것입니다. 마치 시소 현상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쪽으로 기운 상태가 많은 사람이 있고, 에고 쪽으로 기운 상태가 많은 사람이 있는데 평생을 에고 쪽으로 기운 시소를 타고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더러 에고 쪽으로 기울 때가 있더라도, 가급적 하나님 쪽으로 기울 때가 많은 시소를 타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른 인생이란, 번갈아 가며 오르락내리락 하는 시소게임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 쪽으로 기운 시소를 타고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고가 한결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마치 보채던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기면 편안해지듯 말입니다.

어떤 남자가 스승에게 찾아와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자기는 부인이 둘 있는데, 한 명은 아름답고 다른 한 명은 못생겼는데 문제는 아름다운 부인은 싫어하고 못생긴 부인을 좋아하는데 그러한 자기 마음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 때 추함이 생겨난다. 너의 아름다운 아내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이는 추해졌다. 반면에 너의 못생긴 아내는 아름답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이는 그냥 겸손하게 살 것이다. 그 겸손이 그이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래서 너는 아름다운 아내보다 못생긴 아내를 더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스승의 이 말은 우리에게 귀한 통찰을 안겨줍니다. 아름답다는 자의식은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교만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교만은 추합니다. 이 남자의 아름다운 부인에게는 아름답다는 에고가 한껏 커져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에고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에고가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에고란 그 자체로 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의 못생긴 부인은 자신의 추함을 의식하며 겸손해졌을 겁니다. 겸손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아름답다는 에고가 없습니다. 에고가 없는 겸손으로 그이는 한껏 아름다워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의식, 에고는 자신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에고를 갖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과 에고적 자의식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판단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니라, 판단하는 자기 생각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판단하는 생각입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판단하면서 그는 나쁜 사람이고, 죄인이고, 틀려먹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그 때 예수 그리스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시던가요? 중심은 다만 하나일 뿐입니다. 두 개의 중심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 개의 중심"이란 "네모난 원"이라는 말과 같이 성립되지 않는 현상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든지, 아니면 판단하는 생각이 중심이 되든지, 양자택일일 뿐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든지, 선악과를 먹든지 하나만 먹을 수 있을 뿐입니다.

 

나를 찾아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셨습니까?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는 이 물음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고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겠습니까? 참 어렵습니다. 아니 별로 생각해 보지 않고 그냥들 살고 있습니다. 중요한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묻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놓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이러 이러한 사람이야, 나는 이러 저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은 옳고, 내가 하는 일은 잘하고 보람된 일이라고 여깁니다. 특별히 종교 안에는 그런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정말 바른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큰 확신을 가지지 않고 행동하는데 실상은 이단과 사이비에 있는 사람들이 더 확신을 가지고 더 열심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확신은 옳은 것입니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행동은 바른 것입니까?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일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진정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서 하라고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사울이라는 사람/

 

사울은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는 1절에 나오는 말씀에 거의 드러납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한마디로 살벌한 분위기입니다. 여전히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인데 다메섹에 올 때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계속 그런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협과 살인의 욕망으로 대하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알고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아주 중요하고 더 나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소중했던지 자존심도 다 버리고 그 일을 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사정을 하여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올 수 있는 권리의 공문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려는 일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런 모습이 사울이었지만 그의 속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속은 많은 갈등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22:10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고 사울에 대해서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울에게 그 일이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울에게는 양심을 괴롭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속에서는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의 양심은 괴로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육체적인 괴로움보다 큰 것은 양심의 괴로움 곧 속에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가시 채를 뒷발 길 하는 행동은 무엇을 말합니까? 보통 소나 말은 적을 공격할 때 뒷발길질을 합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공격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시 채를 뒷발길질한다면 자신만 괴로운 것입니다.

 

사울에게 나타난 예수님/

 

사울에게 그런 갈등이 있을수록 살기가 더욱 등등하여 더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그날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를 좇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그렇게 가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거의 다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그가 전혀 기대치 않은, 생각하지 않은 빛에 둘러싸이게 된 것입니다. 사울 자신은 빛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하는 일이 빛 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전혀 기대하지 않은 빛이 그를 갑자기 둘러쌓습니다. 새로운 경험, 새로운 환경에 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땅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빛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당당하고 살기가 등등한 사울도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출 때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빛 앞에 내 뜻을 내세울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에 그치지 않고 소리가 있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빛도 놀라운데 그에게 소리까지 들렸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부르며 들려왔습니다. 그는 그렇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곧 바로 알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영적인 사람이었기에 하늘에 소리에 민감하였습니다. 하지만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핍박했다면 예수와 그를 따르는 예수쟁이들 밖에는 핍박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대답은 더 놀랍습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했던 그 많은 일들, 그리고 바쳤던 많은 시간들, 그 많은 정성들 그것이 곧 이 땅에서 예수를 없애려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은 바울은 기절초풍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는 행동, 선하다고 하는 행동, 나를 위한다고 하는 행동 그것이 하나님을 핍박하는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삶이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바른 길을 간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성자 예수님을 핍박했다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거짓이라고 알았던 것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라고 알았던 것이 거짓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진실은 하나님을 만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울이 그 진실을 깨달았던 것은 하나님을 만났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거짓이 깨지고 하나님 안에 진실을 좇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삶을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새 길, 바른 길을 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던 길에서 하나님이 진실이라고 말씀하시는 길로 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 돌이키는 역사가 우리 삶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작은 한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곧 예수님에게 하는 행동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핍박하는 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은 곧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고 더 나가서는 내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일입니다.

 

끌려 다니는 삶/

 

혼자서 당당하게 잘 살아가던 사울, 이제 눈은 떴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빛을 보아서 소경이 되었지만 실상은 그는 소경이었습니다. 볼 것을 제대로 못보고 살았던 사울이었습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핍박했고 믿고 따라야 할 주님을 핍박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을 고통케 하는 일이었고 자신을 고통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가려던 목적지 다메섹을 혼자 가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이끌려 갔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사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한 자의 삶입니다. 내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삶,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깨어난 자로서의 삶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 삶이 바뀌는 경험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제는 진정 나를 찾아서 사는 삶이 되었고 진정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주인이었지만 그런 나는 죽고 진정한 주인인 예수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사명을 깨달아 알고 그 사명에 충실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사가 아름다워 보여서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게 되면 그 인생은 평생을 노력해도 2류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성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떠한 분야이든지 자기만의 독특한 분야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것도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자 다 자신의 위치에 알맞게 목적에 맞게 지으셨기에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아름다운 삶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성공 여부는 바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어떠한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인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늘 점검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큰일을 한 사람들은 모두가 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평생 사명과 믿음은 같이 갑니다. 믿음은 평생 사명을 구체화할 수 있는 통로와 같습니다. 사명자가 분명한 비전을 소유하고 있다 해도 그것을 신념으로 삼지 않으면 창조적인 힘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다시 보는 인생/

 

“사울아 다시 보라”(행 22:13) 하던 아나니아의 음성은 주께서 아나니아를 통하여 사울에게 명하신 대언(代言)입니다. 그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의 광채로 인하여, 그 눈의 기능이 중단되어 버린 그의 시신경의 회복(복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그의 눈의 기능이 되살아났습니다. 주님은 그가 다메섹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전에 선수적으로 먼저 그를 체포하시고야 말았습니다. 그의 영광의 광채와 살아있는 인격적 음성으로 그를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울은 살아 계신 예수를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를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입에서 나오는 그의 전도에는 언제나 부활의 복음, 부활의 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된 자신./바울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보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신,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된 자신을 보았고,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기 자신을 보았고, 더 나아가 성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신을 보았고,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보았고, 주 앞에 서는 그날 그때에, 주께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을 미래 인생의 극치를 바라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주안에 있는 자신, 자기 실존을 본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적 재인식을 의미합니다.

 

자기 인생의 사명을 다시 보라는 의미 /

 

그가 주의 광채 앞에 눈이 어두워 길바닥에 엎드러져 있을 때, 이미 그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 왜 왔는가? 무엇 하러 왔는가? 하는 것에 대해 주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의 그 사건이 있은 후 눈먼 채로 동행하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의 직가라고 하는 유다의 집에서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했습니다. 실로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사흘이 지난 후 주께서 보낸 아나니아의 안수와 함께 다시 보라는 주의 대언을 받고, 육신의 눈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 부활의 예수, 죄인의 구주인 예수를 다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던 죄인 된 자신을 다시 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인 자신을 다시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론적 의미와 함께 사명인으로 새 출발하는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보라! 그것은 어둠에서 광명이고 육에서 영이고 사망에서 생명입니다. 그것은 새 미래를 향한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것은 사울을 향한 거듭남의 소리입니다. 그것은 절망이 아닌 소망입니다. 그것은 재생이고 재기입니다. 그것은 부활입니다. 그것은 새 용기입니다. 그것은 새 출발입니다. 그것은 새 시작입니다. 그것은 사울이 바울이 되는 신기원입니다. 그것은 세계를 받는 비전(vision)입니다. 사람은 돈이 있거나, 권력이 있거나, 힘이 있을 때 거드름거리며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힘이 있을 때, 돈이 있을 때, 권력이 주어졌을 바로 그때에 조심하여야 합니다. 인간을 재는 잣대는 좋은 일이 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변화하여 겸손하여서 주님의 그릇이 되어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인물이 되었듯이 사람은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각자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주님을 빛을 받아 변화되기를 바라며 또한 이 빛을 세상에 비춤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은 열정을 불러 일으킨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한가합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열정이 있는 사람은 일할 시간을 만들고 환경을 조성합니다. 평생 사명은 열정을 일으키며, 열정은 평생 사명을 달성하게 해줍니다. 사명자의 마음이 열정으로 타오를 때 하나님은 그것을 성취의 동력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도 열정의 하나님이십니다. 온 천하와 우주는 하나님의 열정의 산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뜨거운 구원의 열정입니다. 성령도 불처럼 역사합니다. 성령은 비전의 영이요 열정의 영이십니다. 평생 사명은 열정과 희망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 가운데 위대한 일을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열정의 사명자가 될 수 있습니다. 초점이 맞추어진 빛은 놀라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초점이 흩어진 빛은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맑은 날, 돋보기로 태양 빛을 한군데 집중시키면 종이를 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뜨거운 태양 빛이라도 집중되지 않으면 종이를 태울 수 없습니다. 초점이 안 맞는 안경을 낀 사람은 시야가 어지러워 제대로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점이 분명한 안경을 끼면 똑바로 걸을 수 있습니다. 초점이 맞추어지면 이탈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는 큰 힘을 얻는 것입니다. 사명은 해야 할 일들의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몰랑 퀴볼러는 말했습니다. “길은 많다. 그러나 그 많은 길을 다 가보기에는 생이 너무 짧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하도록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시간도,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각성하고, 다시 기도하고, 다시 회개하고, 다시 감사하고, 다시 전도하고, 다시 봉사합시다. 다시 축복을 받읍시다. 그는 다시 새 인생을, 새 축복을, 새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인생의 사명을 다시 보자

행 9장 1~18절 / 서정호목사

에고의 무덤

어제는 6.25 사변,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55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최전방 연천 G.P.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으로 희생된 8명의 장병들 합동 영결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밤 5공화국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우리나라 군인들이 광주의 시민들을 총으로 학살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찌 같은 동족들, 동료들끼리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세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깊은 아픔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밖에 있는 적을 향하는 열정을 갖지 않으면 항상 내부의 갈등과 다툼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교회 안에서 갈등과 반목과 분열이 일어나고 지나친 자기중심적 주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단하면서 자아를 향한 에고의 무덤을 파게 되는 것입니다.

한 어머니에게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둘 다 혼인하여 미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아들과 딸을 보기 위해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우선 L.A.에서 살고 있는 딸네 집으로 갔습니다. 딸과 사위가 어머니를 반겨주었습니다. 밤늦게까지 밀린 얘기를 나누었는데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깜짝 놀랄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딸은 자고 있는데, 사위가 일찍 일어나 혼자 아침식사를 해 먹고, 샌드위치 도시락을 싸가지고 출근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딸을 아껴주는 사위가 대견스럽게만 보였습니다.

다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들네 집에 갔습니다. 역시 아들과 며느리가 반겨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놀라게 되었습니다. 며느리는 꼴도 안 보이고, 금이야 옥이야 받들어 키워서 미국 유학까지 시켰던 아들이, 궁상맞게 제 손으로 아침을 지어 먹고, 샌드위치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하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런 아들이 한없이 측은하고, 한편 며느리가 몹시 괘씸하게 느껴졌습니다. 두 남자의 동일한 행동을 보고, 어머니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두 사람의 행동을 보는 잣대가 크게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다른 잣대를 가지고 동일한 행동을 보면서 자기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예는 얼마든지 더 있습니다. 내가 차에 타고 있을 때는 횡단보도를 늦게 건너는 행인을 욕하고, 내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빵빵대는 운전사를 욕합니다. 남이 천천히 차를 몰면 소심 운전이고, 내가 천천히 몰면 안전 운전입니다. 며느리는 남편에게 쥐어 살아야 하고, 딸은 남편을 휘어잡고 살아야 합니다. 남의 자식이 어른에게 대드는 것은 버릇없는 짓이고, 내 자식이 어른에게 대드는 것은 자기주장이 뚜렷해서입니다. 남이 민소매를 입으면 “그래, 다 벗어라, 벗어.” 하고, 내가 민소매를 입으면 “어때, 시원해 보이지?” 합니다. 남이 술자리에 자주 가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고, 내가 술자리에 자주 가는 것은 인생을 즐기는 일입니다. 남이 술잔을 돌리면 위생 관념이 없는 짓이고, 내가 술잔을 돌리면 다정다감한 정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왜 이러한 불합리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관적으로 현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주관성이 그리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자기중심성이 결합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곧 자기중심적 주관성, 이것이 근본 원인인 것입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어머니는 두 남자의 동일한 행동을 보고, 자기중심적 주관성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첫날 사위의 행동을 보지 않았다고 하면, 다음날 아들의 행동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갖는 것을 어느 정도 양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며느리가 괘씸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전날 사위의 행동을 보고나서는 딸이 편안하게 늦잠을 자는 것에 대해 흡족한 마음을 가졌던 겁니다. 그래 놓고서 바로 다음날 며느리가 괘씸하게 생각된다면, 이는 자기중심적 주관성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이런 모습은 두 가지 문제를 지닙니다. 하나는 그 자체가 추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 지지 않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해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했는데 괘씸한 마음이 올라왔다는 것이, 바로 힘든 상태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게 모순입니다. 자기중심성이란 자신을 위하는 마음인데, 그게 엉뚱하게 자기를 힘들게 하니 말입니다. 이중 잣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문제라 했습니다. 그것의 뿌리가 자기중심적 주관성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서, 동일한 잣대로 세상을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가능합니다.

자기중심성을 <에고:자아>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자기중심성을 벗어난다는 것은, 자아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완전히 자아를 비우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고 다만 좀 가벼워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자아가 강하고 무거운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가 약하고 가벼운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두 주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입니다. 두 주인을 동시에 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자아가 강하면 하나님이 약해지고, 하나님이 강해지면 자아가 약해지는 겁니다. 마치 시소 현상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쪽으로 기운 상태가 많은 사람이 있고, 자아 쪽으로 기운 상태가 많은 사람이 있는데 평생을 자아 쪽으로 기운 시소를 타고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더러 자아 쪽으로 기울 때가 있더라도, 가급적 하나님 쪽으로 기울 때가 많은 시소를 타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른 인생이란, 번갈아 가며 오르락내리락 하는 시소게임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 쪽으로 기운 시소를 타고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아가 한결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마치 보채던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기면 편안해지듯 말입니다.

어떤 남자가 스승에게 찾아와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자기는 부인이 둘 있는데, 한 명은 아름답고 다른 한 명은 못생겼는데 문제는 아름다운 부인은 싫어하고 못생긴 부인을 좋아하는데 그러한 자기 마음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 때 추함이 생겨난다. 너의 아름다운 아내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이는 추해졌다. 반면에 너의 못생긴 아내는 아름답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이는 그냥 겸손하게 살 것이다. 그 겸손이 그이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래서 너는 아름다운 아내보다 못생긴 아내를 더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스승의 이 말은 우리에게 귀한 통찰을 안겨줍니다. 아름답다는 자의식은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교만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교만은 추합니다. 이 남자의 아름다운 부인에게는 아름답다는 에고가 한껏 커져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에고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에고가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에고란 그 자체로 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의 못생긴 부인은 자신의 추함을 의식하며 겸손해졌을 겁니다. 겸손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아름답다는 에고가 없습니다. 에고가 없는 겸손으로 그이는 한껏 아름다워졌을 겁니다.

이러한 자의식, 에고는 자신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에고를 갖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과 에고적 자의식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판단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니라, 판단하는 자기 생각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판단하는 생각입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판단하면서 그는 나쁜 사람이고, 죄인이고, 틀려먹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그 때 예수 그리스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시던가요? 중심은 다만 하나일 뿐입니다. 두 개의 중심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 개의 중심"이란 "네모난 원"이라는 말과 같이 성립되지 않는 현상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든지, 아니면 판단하는 생각이 중심이 되든지, 양자택일일 뿐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든지, 선악과를 먹든지 하나만 먹을 수 있을 뿐입니다.

 

나를 찾아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셨습니까? "나는 누구인가? "

그리고는 이 물음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고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겠습니까? 참 어렵습니다. 아니 별로 생각해 보지 않고 그냥들 살고 있습니다. 중요한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묻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놓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이러 이러한 사람이야, 나는 이러 저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은 옳고, 내가 하는 일은 잘하고 보람된 일이라고 여깁니다. 특별히 종교 안에는 그런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정말 바른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큰 확신을 가지지 않고 행동하는데 실상은 이단과 사이비에 있는 사람들이 더 확신을 가지고 더 열심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확신은 옳은 것입니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행동은 바른 것입니까?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일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진정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서 하라고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사울이라는 사람

 

사울은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는 1절에 나오는 말씀에 거의 드러납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한마디로 살벌한 분위기입니다. 여전히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인데 다메섹에 올 때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계속 그런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협과 살인의 욕망으로 대하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알고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아주 중요하고 더 나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소중했던지 자존심도 다 버리고 그 일을 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사정을 하여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올 수 있는 권리의 공문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려는 일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런 모습이 사울이었지만 그의 속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속은 많은 갈등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22:10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고 사울에 대해서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울에게 그 일이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울에게는 양심을 괴롭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속에서는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의 양심은 괴로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육체적인 괴로움보다 큰 것은 양심의 괴로움 곧 속에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가시 채를 뒷발 길 하는 행동은 무엇을 말합니까? 보통 소나 말은 적을 공격할 때 뒷발길질을 합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공격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시 채를 뒷발길질한다면 자신만 괴로운 것입니다.

6장에서 사울은 스데반의 변론을 들었는데 그때 스데반은 돌에 맞아 피 흘리며 죽어가면서도 얼굴에 광채가 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살아계신 주 예수를 본다고 선언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는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었고 그 모습만 생각하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사울은 자신의 양심과 싸우며 부분적으로 순수한 열정으로 부분적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확신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더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행동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그 일에 빠지게 합니까? 어떤 괴로움을 어떤 확신을 지워버리기 위해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결국은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는 일은을 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실상 자신의 양심만을 괴롭히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지금 여러분은 그 어떤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하지만 위로가 되는 것은 그런 파멸로 가는 사울을 예수님은 만나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나타난 예수님

 

사울에게 그런 갈등이 있을수록 살기가 더욱 등등하여 더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그날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를 좇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그렇게 가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거의 다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그가 전혀 기대치 않은, 생각하지 않은 빛에 둘러싸이게 된 것입니다. 사울 자신은 빛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하는 일이 빛 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전혀 기대하지 않은 빛이 그를 갑자기 둘러쌓습니다. 새로운 경험, 새로운 환경에 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땅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빛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당당하고 살기가 등등한 사울도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출 때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빛 앞에 내 뜻을 내세울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에 그치지 않고 소리가 있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빛도 놀라운데 그에게 소리까지 들렸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부르며 들려왔습니다.

그는 그렇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곧 바로 알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영적인 사람이었기에 하늘의 소리에 민감하였습니다. 하지만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핍박했다면 예수와 그를 따르는 예수쟁이들 밖에는 핍박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대답은 더 놀랍습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했던 그 많은 일들, 그리고 바쳤던 많은 시간들, 그 많은 정성들 그것이 곧 이 땅에서 예수를 없애려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은 바울은 기절초풍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는 행동, 선하다고 하는 행동, 나를 위한다고 하는 행동 그것이 하나님을 핍박하는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삶이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바른 길을 간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성자 예수님을 핍박했다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거짓이라고 알았던 것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라고 알았던 것이 거짓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진실은 하나님을 만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울이 그 진실을 깨달았던 것은 하나님을 만났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거짓이 깨지고 하나님 안에 진실을 좇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삶을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새 길, 바른 길을 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던 길에서 하나님이 진실이라고 말씀하시는 길로 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런 돌이키는 역사가 우리 삶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작은 한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곧 예수님에게 하는 행동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핍박하는 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은 곧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고 더 나가서는 내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일입니다.

 

끌려 다니는 삶

 

혼자서 당당하게 잘 살아가던 사울, 이제 눈은 떴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빛을 보아서 소경이 되었지만 실상은 그는 소경이었습니다. 볼 것을 제대로 못보고 살았던 사울이었습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핍박했고 믿고 따라야 할 주님을 핍박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을 고통케 하는 일이었고 자신을 고통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가려던 목적지 다메섹을 혼자 가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이끌려 갔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사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한 자의 삶입니다. 내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삶,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깨어난 자로서의 삶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 삶이 바뀌는 경험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제는 진정 나를 찾아서 사는 삶이 되었고 진정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주인이었지만 그런 나는 죽고 진정한 주인인 예수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사명을 깨달아 알고 그 사명에 충실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사가 아름다워 보여서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게 되면 그 인생은 평생을 노력해도 2류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성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떠한 분야이든지 자기만의 독특한 분야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것도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자 다 자신의 위치에 알맞게 목적에 맞게 지으셨기에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아름다운 삶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성공 여부는 바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어떠한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인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늘 점검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큰일을 한 사람들은 모두가 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평생 사명과 믿음은 같이 갑니다. 믿음은 평생 사명을 구체화할 수 있는 통로와 같습니다. 사명자가 분명한 비전을 소유하고 있다 해도 그것을 신념으로 삼지 않으면 창조적인 힘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다시 보게 하는 예수

 

주님은 사울이 머물고 있는 다메섹에 살고 있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유대인답게 율법에 있어서 흠이 없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행 22:12). 아마 그가 주의 은혜를 입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환상 중에 아나니아에게 이르기를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알려 주었습니다(행 9:10-11). 사울도 지금 환상을 받고,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에게 안수를 받고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고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행 9:12).

 

 

이때 아나니아는 놀라면서 주께 대답하기를, "그 사람은 예루살렘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고 지금 다메섹에 온 것도 기독교 신자를 체포할 공문을 받아 가지고 와서 머물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행 9:13-14). 그때 주님은 다시 아나니아에게 이르기를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행 9:15-16).

그후에 즉시 아나니아는 다메섹 직가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을 찾았고, 거기서 눈을 못 뜨고,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며, 그 집에 머물고 있던 사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아나니아 자신에게 나타난 일을 알려주고,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라고 하였습니다(행 9:17). 그 시간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그 시간에 즉시 일어나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9:18). 아나니아는 사울을 만나 “주께서 너를 다시 보게 하신다.”라고 하였는데 여기 다시 보게 한다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행 9:12, 17, 18). 그는 이 후에 자기의 동족들 앞에서 변명할 때 “사울아 다시 보라”하던 이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행 22:13). 주께서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사울을 다시 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사울을 다시 보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마침내 그는 영육의 눈이 떠진 것입니다.

 

다시 보는 인생

 

“사울아 다시 보라”(행 22:13) 하던 아나니아의 음성은 주께서 아나니아를 통하여 사울에게 명하신 대언(代言)입니다. 그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의 광채로 인하여, 그 눈의 기능이 중단되어 버린 그의 시신경의 회복(복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그의 눈의 기능이 되살아났습니다. 주님은 그가 다메섹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전에 선수적으로 먼저 그를 체포하시고야 말았습니다. 그의 영광의 광채와 살아있는 인격적 음성으로 그를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울은 살아 계신 예수를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를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입에서 나오는 그의 전도에는 언제나 부활의 복음, 부활의 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새사람이 된 자신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보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신,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된 자신을 보았고,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기 자신을 보았고, 더 나아가 성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신을 보았고,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보았고, 주 앞에 서는 그날 그때에, 주께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을 미래 인생의 극치를 바라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주안에 있는 자신, 자기 실존을 본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적 재인식을 의미합니다.

 

자기 인생의 사명을 다시 보라는 의미

 

그가 주의 광채 앞에 눈이 어두워 길바닥에 엎드러져 있을 때, 이미 그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 왜 왔는가? 무엇 하러 왔는가? 하는 것에 대해 주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다시 보라! 그것은 어둠에서 광명이고 육에서 영이고 사망에서 생명입니다. 그것은 새 미래를 향한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것은 사울을 향한 거듭남의 소리입니다. 그것은 절망이 아닌 소망입니다. 그것은 재생이고 재기입니다. 그것은 부활입니다. 그것은 새 용기입니다. 그것은 새 출발입니다. 그것은 새 시작입니다. 그것은 사울이 바울이 되는 신기원입니다. 그것은 세계를 받는 비전(vision)입니다.

사람은 돈이 있거나, 권력이 있거나, 힘이 있을 때 거드름거리며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힘이 있을 때, 돈이 있을 때, 권력이 주어졌을 바로 그때에 조심하여야 합니다. 인간을 재는 잣대는 좋은 일이 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변화하여 겸손하여서 주님의 그릇이 되어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인물이 되었듯이 사람은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각자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주님을 빛을 받아 변화되기를 바라며 또한 이 빛을 세상에 비춤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은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한가합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열정이 있는 사람은 일할 시간을 만들고 환경을 조성합니다. 평생 사명은 열정을 일으키며, 열정은 평생 사명을 달성하게 해줍니다. 사명자의 마음이 열정으로 타오를 때 하나님은 그것을 성취의 동력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도 열정의 하나님이십니다. 온 천하와 우주는 하나님의 열정의 산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뜨거운 구원의 열정입니다. 성령도 불처럼 역사합니다. 평생 사명은 열정과 희망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 가운데 위대한 일을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열정의 사명자가 될 수 있습니다.

초점이 맞추어진 빛은 놀라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초점이 흩어진 빛은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맑은 날, 돋보기로 태양 빛을 한군데 집중시키면 종이를 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뜨거운 태양 빛이라도 집중되지 않으면 종이를 태울 수 없습니다. 초점이 안 맞는 안경을 낀 사람은 시야가 어지러워 제대로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점이 분명한 안경을 끼면 똑바로 걸을 수 있습니다. 초점이 맞추어지면 이탈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는 큰 힘을 얻는 것입니다.

사명은 해야 할 일들의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몰랑 퀴볼러는 말했습니다. “길은 많다. 그러나 그 많은 길을 다 가보기에는 생이 너무 짧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하도록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시간도,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각성하고, 다시 기도하고, 다시 회개하고, 다시 감사하고, 다시 전도하고, 다시 봉사합시다. 다시 축복을 받읍시다. 그는 다시 새 인생을, 새 축복을, 새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입니다.

 

 

 

 

눈을 떴으나

행 9장 1~18절 / 오정호목사

눈은 그 무게가 7g, 직경이 23-24m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감각의 80%를 차지하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눈은 마음의 창문이요 영혼의 창문이라 할만큼 소중합니다.

청년의 때에 승승장구하여 많은 사람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위치까지 올랐던 사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1절).

성경을 통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한 인간이 어떻게 핍박과 조롱가운데서도 자신을 주님 앞에 온전히 드리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주님을 만나기 전 스스로 눈을 떴다고 생각한 청년 사울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함이라”(2절). 청년 사울은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체포할 수 있는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가진 자신은 무소불위의 권세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종교적인 체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율법주의자” 라고 여기면서 “육체를 신뢰할만하다”고 고백합니다(빌립보서 3:4). 이것은 인간적인 조건이 대단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기의 삶의 모습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립보서 3:5~6).

사회적인 면에서는 계급장을 단것처럼 대단한 위세를 부릴 정도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길거리에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어느 자리에나 상석에 앉을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눈을 못 뜨면 인간적인 조건에 의해 자기의 구원을 오해합니다. 스스로는 잘 믿는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는 사람이 됩니다. 청년 사울은 스스로를 하나님을 잘 믿는 자로 자부했으나 주님이 볼 때에 그는 교회를 무너뜨린 사람이었습니다.

열심 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열심도 방향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단의 열심은 교회와 주님을 더럽히는 열심입니다. 우리의 열심은 분별되어야 하고 질서를 세워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거룩한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사울의 특징은 권세주의자, 율법주의자, 열심은 있었으나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되기 전인 청년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유력하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하여 스스로를 대단한 줄 알았습니다. “네(라오디게아 성도)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요한계시록 3:17a). 자신들은 부족함 없는 부자라고 여기고 자기안일과 만족에 빠집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의 모습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고 말씀하십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요한계시록 3:17b).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 그 잘못된 눈을 버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이렇게 처방했습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요한계시록 3:18b).

우리는 종종 착각하고 오해하기 쉽기때문에 주님이 눈을 열어주셔야 잘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직분, 지식, 소유, 놀라운 경험이 오히려 은혜 받는데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은혜 받고 복 받는데 너무 익숙해 져서 그 복을 분별할 수가 없다면 그 복은 복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나가야합니다.

 

2. 주님을 만난 후 눈이 열려지게 된 사울

살기 등등하고 종교적으로 열심분자였던 청년 사울이 어찌하여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쓰임 받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까?

①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변화되었습니다(4절).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4절). 사울은 자기의 세계관과 안목을 가지고는 예수님의 부활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부활을 주장하는 무리를 척결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앞장서서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정오의 빛보다도 더 밝은 광채앞에 기세 등등하던 사울이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한 예수님을 만난 순간부터 청년 사울의 눈이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새로운 안목을 여는 순간은 예수님을 만나는 때입니다. 세상 사람보다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예수 없는 지식, 안목, 소유, 경험은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살기 등등한 인간을 만들고, 자기보다 힘없는 사람들은 누르면서 우월한 사람에게는 비굴하게 구는 인생을 살게 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좁은 안목과 지식을 가지고 주님과 교회와 성도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은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자신의 인생을 해석할 수 있고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만나고 나서 인생의 시작과 목적과 그 종착지를 분별하는 은혜의 눈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안목을 새롭게 하사 인생을 새롭게 해석하게 해 주실 뿐 아니라 삶을 새롭게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서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이 누구신지를 질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교양을 증진시키고 사회활동의 지혜를 배우는 곳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전하는 곳입니다. 교회 문턱을 밟는 자마다 예수님을 전해 주어야합니다. 하나님이 복음 진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눈뜨게 만드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나는 변화의 현장입니다.

② 믿음의 형제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변화되었습니다(10-12절).

주님께서는 직접적으로 청년 사울을 변화시킬 수 있으셨지만 아나니아(“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를 예비하셔서 사울을 만나게 하셨습니다(10절).

교회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우리의 성장을 위해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성숙과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동료들을 허락해주셨습니다. 현대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간섭하지도 간섭받지도 말자는 이기주의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스스로를 갖춘 사람으로 생각하여 도움 받을 것도 줄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복을 끼치는 생각도 아닙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사울이 있는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17절). 사실 사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원수였기에 미워할 수도 있었지만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깨우쳐 주셔서 그는 자연스레 사울을 “형제”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원수가 아니라 형제를 만나는 곳입니다. 생각과 경험이 서로 다르더라도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형제자매라는 확신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다 가르쳐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공동체 내에서 형제끼리 손잡고 함께 부대끼는 과정을 통해 연단 시키시고 훈련시키십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18절). 다시 보게 하시는 능력의 주체는 주님이시고(17b). 아나니아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공동체에 속해있는 모든 믿음의 가족들을 복되게 하는 주님께서 택하신 도구입니다. 스스로를 일급신자라고 생각해서 봉사와 사랑의 한계를 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 일은 마음을 열어 함께 하는 것이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함께, 남녀노소가 함께 해야 합니다. 세대에서 세대로(generation to generation) 이어져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 사귐에 참여해야합니다. 믿는자의 사귐은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③ 자신을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11절). 사울은 밝은 빛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고 3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였습니다(9절). 그 동안 사울은 기도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오해하고 교회를 핍박한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식이 많으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지식의 눈은 열릴지 모르나 영혼의 눈은 열릴 수가 없습니다.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권이자 주님을 만나는 도구인 기도를 통해 우리는 영혼의 눈을 열 수 있습니다.

과거 사울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기도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난후 그의 기도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을 겁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작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채 누리는 소유, 지혜와 지식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릎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함으로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고 우리의 미래를 주님 앞에 열어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살기 등등하고 자신만만하였던 청년 사울은 주님을 만난 후 영혼의 눈이 열려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과의 교제와 기도를 통해 주님의 귀한 사도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스스로 눈을 떴다고 자만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우리의 안목을 새롭게 합시다. 우리의 인생과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여 우리의 삶을 새롭게 살아나갑시다. 새로남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믿음의 동료들과 함께 서로 마음을 열고 함께 훈련받고 함께 형제의식을 가지고 섬김으로 우리의 영적인 성숙과 행복을 가득 맛보아 아는 교회생활을 이룹시다. 주님께 기도로 집중하는 삶을 통해 영혼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면서 주님 앞에 금 그릇처럼 귀히 쓰임 받는 성도들이 다 됩시다.

 

 

 

 

 

다메섹 도상에서

행 9장 1~18절 / 박조준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9장에는 다소 사람 사울에 대한 것이 나옵니다. 1∼2절을 보세요.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 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했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을 옥에 가두고 죽이 는 것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왜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고 있었습니까? 그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회를 오염시키는 해로운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름이 나고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기 쁨과 사랑이 넘쳐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사울이 왜 핍박하였습니까? 문제는 저희들의 메시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사울은 예 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예수가 다시 살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 니고 예수의 제자들이 무덤에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끌어내고는 부활했다고 거짓 선전하는 것으 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정의감이 강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거짓말은 아예 하지 못하도록 근절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또 한 가지 이유는 사울은 예수를 어 부와 세리와 창녀 같은 무지하고 세상에서는 버림받은 사람들의 지도자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 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설교는 사울과 같이 존경받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했지만 낙인 찍힌 죄인 들에게 대해서는 그렇게 가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인으로 자처하는 바리새인 들을 강도와 위선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뿐더러 예수님이 실제로 모세의 율법을 대적한 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성전을 헐라 는 모독스러운 발언을 하였습니다. 사울 의 신앙 양심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이 거짓말쟁이는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울에게 거짓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은 메시아가 오시면 큰 나라를 세우고 유대인들의 적을 다 진멸시킬 것이라 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핍박자들의 분노 아래 고난을 겪고 끝내는 가혹하고 비참하게 십 자가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울의 신앙으로는 고통이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표적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반역자가 메시아가 될 수 있습니까? 사울에게 있어서는 도저 히 이해도 되지 않을 뿐더러 용납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는 죽고 매장되었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서 널리 퍼져 가고 있는 모든 거짓말들을 근절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이 운동을 계속해 나 가는 도중 사울의 삶이 온전히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세계 역사의 흐름이 뒤바 뀌는 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본문 3∼6절에 보니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 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울은 이 순간 미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제까지 믿어 온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에 부딪히 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제까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행해 오던 모든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 게 되었습니다. 왜요? 사울의 생각에 어느 무덤에 옮겨져 썩어 가고 있으리라 했던 예수가 갑자기 하늘에서 온전한 상태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사울이 지금까지 한 일은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영광의 주님을 대적해 왔던 결과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상에서 거꾸러졌습니다. 몸을 간신히 일으켰을 때는 이미 앞을 볼 수 없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해서 사울은 같이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까지 간신 히 가게 되었습니다. 본문 9절에 보니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했습니다.다 메섹에서 지낸 사흘 동안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령의 갈등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멀었으나 마음의 눈이 밝아져 그는 위대한 균형을 발견하였습니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 를 만났습니다. 마침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 앞에 놓여 있는 두 가지 길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였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 사 실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 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 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 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7∼9). 문자 그대로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을 통해서 모든 것이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그 의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그의 신앙관이 달라졌습니다. 그의 우주관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유익하게 생각되던 모든 것이 이제 사울에게는 해로 여겨졌습니다. 전에는 귀중하게 여겨지던 것이 이제는 쓰레기에 불과했습니다.그는 이제 새로운 길 주님을 따르는 길을 걷기로 결단했습니다. 물론 이 길이 위험한 길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채찍질과 감옥살이가 어떻다는 것 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변화된 유대인으로서 다메섹을 떠난다면 자기 자신 이 곧 핍박과 수난의 과녁이 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결과에는 개의치 아니하고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 다. 이렇게 새로운 결단을 하고 나니 마음에 기쁨과 담력과 평화가 솟아남을 느꼈습니다. 사울 은 주님의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1.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 고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2.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 다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3.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맛보니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4. 주 따라 가는 길 험하고 멀어도찬송을 부르며 뒤 따라 가리라나 주를 모시고 영원히 살리라날마다 섬기며 주 함께 살리라(후렴)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사도 베드로를 보세요. 밤새 고기잡이를 했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분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에게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믿음에는 다른 전제 조건이 필요없습니다. 지금까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 해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면 우리는 반드시 따라야만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이니까 그의 경험이나 이성이나 상식에 맞지 않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믿고 순종했더니 그 결과는 너무 놀라왔습니다. 누가복음 5장 6절에 보니 그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했습니다. 그들이 고기를 두 배에 나눠 실어도 배가 오히려 가라앉을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희들의 오랜 어부 경력에서 이만큼 많은 고기를 잡아 본 것은 처 음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눅 5:10)고 말씀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를 계속해야 하 느냐,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라야 하느냐 두 길 중에 한 길을 택해야만 했습니다. 베드로는 고깃배를 바닷가로 끌어 올렸을 때 배에 가득히 담겨 있는 고기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다시 고기떼를 보면서 그는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돌아보며 결심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 부자 관원에게도 똑같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청 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십계명을 늘 지켜 왔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말씀 하시기를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막 10:2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막 10:22) 갔습니다. 물론 이 청년도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뜻을 잘 알았습니다. 그도 선택을 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부와 권세와 특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참 후에 그는 예수님을 보며 결정을 내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청년 부자가 누구였었는지 이름도 모릅니다. 그는 자 기 자신을 위해서 그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 살기로 결정하고 결국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인생은 이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아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보세요. 그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퍼졌고 그의 삶은 수많은 인류에게 큰 영 향을 끼쳤습니다. 여러분, 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베드로는 생명의 주인이 신 예수님을 온전히 따라서 헌신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 때 그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 귀 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마가복음 15장을 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제사장 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했습니다. 제사장들만 예수님을 조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도 자기 머리를 흔들 며 예수를 모욕하며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했습니다(막 15:29∼30). 마태복음에서는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44)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눅 23:36∼37)며 조롱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조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군인들, 죄인들, 심지 어 지나가는 행인들까지도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이 왜 예수님을 조롱했어요? 저가 남은 구원하 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었던 것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여기에 사실은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구한다 해도 우리 자신을 구할 수는 없 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삶은 이기적인 나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럴 수도 없습니다.그러기에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 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4∼35).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생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값있는 삶일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 리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야고보 사도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우리의 삶은 한 번뿐입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 짧습니다. 이와 같은 인생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의미가 커집니다.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수행하는 데 전념하세요. 그 럴 때 비록 우리의 인생이 짧다 해도 값있는 삶이 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올 것이므로 우리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 하는 여러분,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 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눅 9:23). 이 말씀 을 분명히 들으십니까? 그리고 그대로 하실 마음이 있으십니까?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천천 히 몸을 돌이키시며 멀리 향하여 걸어가십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의 틈을 빠져 나와 어떤 상황에 처하든, 어떤 희생을 치르든 개의치 아니하고 주님을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 당시 주님을 따르던 수다한 무리처럼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 에 겁이 나고 실망해서 다 떠나가 버리지는 않겠습니까? 오늘 한국의 교회가 이렇게 왕성한 것 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요 축복된 일입니까?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 예배당에 출입하는 분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과 예수님 당시에 떡이나 먹고 병이나 고치고 이적이나 구경하 며, 저런 예수를 유대왕으로 모시면 걱정이 없겠다고 생각하며 따르던 사람하고 다른 점 이 무엇입니까?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들은 아 닙니까?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고 해서 따라 나섰는데 부자가 안되면 어떻게 합니까? 예수 믿으 면 무슨 병이든지 낫는다고 해서 따라 나섰는데 그 병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믿고 금식 하며 기도하면 마음의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만사 형통한다고 해서 여러 날을 금식하며 기 도했는데, 소원이 성취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예수님 때도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예 수님이 이적을 행하실 때 감격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 다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복음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신령한 것을 육신적인 것으로, 하늘의 것을 세상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바꿔 놓으려는 사람들의 잘못된 선전에 넘어 가지 마세요. 아무리 성경을 가지고 말한다 해도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를 읽어 보세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 3:1∼3)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우리에게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 상적인 기준의 평화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세상적인 기준에서 해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 하늘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 는 것입니다. 헌신이란 세상 편에서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헌신이란 이해 관계를 떠나서 일하는 것입니다. 헌신한다고 대가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대가를 위해 서 일하지 아니하고 일 자체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고 하는 것입니다. 헌신이란 돌이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다소 사람 사울도 예수님을 만난 뒤에 한 일이 바로 헌신이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앉아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고심하고 있는 동안 주님께서는 아나니아를 소개하셨습니다. 아나니아 는 어떤 사람이었는데요? 그의 배경은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아는 범위에서 보면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합니다. 보통 우리 같으면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을 결박할 목적으로 찾아온 사람이 있다고 하면 교회에서 존경받고 덕망 있고 유능한 사람을 택해서 대표로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와 전혀 반대였습 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주님 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의 자녀들 모두가 앞장서기를 원하 십니다. 아나니아는 사실 주님의 명령을 받고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다소 사람 사울에 대해서 많 은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왜 다메섹에 왔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나니 아는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확실히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자기가 할 일에 대하여 확신 을 가질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람들을 부르실 때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모세를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순종하기를 주저했습니다. 요나도 예레미야도 기드 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주저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 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어떤 모양으로 부르시든지 감사하십시오. 하나 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아십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순종할 때 하나 님은 우리를 아나니아처럼 기쁘게 사용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부르실 때 이유를 얼 른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순종하고 나서세요.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요긴하게 사용하시며 여러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을 믿습니다. 사울은 완전히 주님에게 항복했을 뿐 아니라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기로 나섰습니다. 사울은 자기의 과거의 죄를 보상하기 위하여 전향했습니다. 그는 적들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도 알 았지만 그는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용기 와 헌신과, 죽음까지도 개의치 아니하고 나서는 그의 태도에 대하여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뜻을 두셨고 사울은 그를 위하여 선택된 도구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두 주역인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섬기고 온전히 헌신하였습니다. 주님께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뒤엣 것을 잊어버리고 예수님만을 따랐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에 영원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그릇의 사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우리 모두 가 다 이와 같은 축복받은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들

행 9장 1~19절 / 이삼규목사

16세기 영국의 위대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암살하려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궁정의 시종으로 변장해서 여왕의 침실에 숨어들었습니다. 때가 오면 찌르려고 예리한 칼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왕의 심복들은 어수룩하지 않았습니다. 여왕이 들어오기 전 침실을 수색해서 그를 발견했습니다.

옷장에서 끌려나온 여인을 여왕 앞에 꿀리었습니다. 등은 창 자루로 무자비하게 눌리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떨며 자비를 구했습니다. 노한 여왕은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면 무엇을 대가로 주겠는가?"

그러자 암살하려던 여인은 여왕을 우러러보며 대답했습니다.

"조건을 다는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여왕은 잠시 생각했습니다.

"네가 옳다. 나는 너를 내 은혜로 용서한다."

결국 여인은 자유의 몸이 되는데, 그 후 이 여인만큼 무조건적으로 여왕에게 헌신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여왕을 죽이려면 여인은 기꺼이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여왕을 도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 로라”(고전 15:10)

그렇다면 바울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주님께 헌신하는 사명자가 되었는지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은혜받기 전 바울(1-2절)

 

사울은 교회를 핍박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철썩 같이 믿었던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8장을 어떻게 시작합니까?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스데반이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8장 2절 이하를 보십시오.

행 8: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행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만일 여러분이 사울을 멈춰 세우고 왜 교회를 그렇게 핍박하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을 지도 모릅니다.

“나사렛 예수는 죽었다. 당신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하찮은 사람을 약속된 메시아라고 믿기를 기대하는가? 우리의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누구나 저주를 받은 것이다(신 21:23). 하나님께서 저주받은 거짓 선지자를 택하여 메시아로 삼으시겠는가? 아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예수가 살아있고 그들을 통하여 기적을 행하고 있다고 전파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들은 아주 위험한 이단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의 역사적인 유대교 신앙을 파괴하기 전에 씨를 말릴 것이다”

사울은 그의 위대한 학문에도 불구하고(행 26;24), 영적인 소경이었으며(고후 3:12-18),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메시아에 관한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자기 자신의 의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사울의 태도를 보면 성난 짐승과도 같았습니다.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삼키려는 듯이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누가가 회심 이전의 사울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용어 중 일부는 의도적으로 그를 ‘사납고 잔인한 짐승 같은 존재’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신약에서는 8:3절에 나오는 사울이 교회를 ‘잔멸시키는’것에 대해 말할 때 단지 한 번 사용된 말입니다. “뤼마이노마이”라는 단어는 ‘해치다, 파괴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시편 80:13(70인역)에서는 포도원을 황폐시키는 야생 수퇘지에 대해서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특히 ‘야생 짐승에 의해 몸이 파괴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울은 교회를 완전히 파괴하려고 작정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의 씨를 말리려고 작정하였는데 몇몇 사람들이 그의 올가미를 벗어나 다메섹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곳은 외국이지만 유대인의 회당이 있어서 유대인 거류민들을 돌보아 주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들을 잡으러 외국에 있는 도시들까지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회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나면 결박하여 잡아오고자 함이었습니다.

다메섹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 수리아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주전 2000년경부터 이 도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초대교회 당시 그곳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들어 유대인 촌을 따로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족히 30-40개의 회당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유대나라가 로마의 속국이기는 하였지만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 곳이면 비록 외국이라 할지라도 대제사장은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회당은 대제사장의 명령이 하달될 수 있는 말단 조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허락만 받으면 원하는 대로 사람을 검문, 납치, 투옥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러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당당하게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야생 수퇘지 또는 굶주린 늑대와 같은 사울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을까요? 이것은 오직 한 가지 대답만이 가능합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2. 은혜 받은 바울(3-9절)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네로 황제시대에 다메섹에 만 명이 넘는 그리스도인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교회 파괴 작업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생각한 사울이 당시 최대의 그리스도인 피난 지역이었던 다메섹으로 찾아가 그 곳의 교회도 파괴시킬 무서운 계획을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과 그를 호위하던 호위병들은 약 240km에 걸친 그들의 여행을 거의 마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 일주일에 걸쳐서 여행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오정쯤 되어(22:6) 사막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오아시스인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저를 비추었습니다. 그 빛은 해보다 더 밝은 빛이었습니다(26:13).

행 26:13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그것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체험이었기 때문에 사울을 소경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를 땅에 엎드러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제 정복자의 발아래 엎드린 것입니다. 사울이 그리스도와 만나는 장면은 사울 자신이 부서지는 일과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예수 믿는 일에 가장 커다란 방해가 되는 우상이 있다면 그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일수록 고집을 꺾고 신앙의 길에 들어서기가 어렵습니다. 사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이 거울 앞에 서기까지는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그러했고 예레미야가 그러했습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만난 후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핍박했던 그 주님의 환상을 보고 그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다메섹에서 거꾸러집니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이 무엇입니까?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방사선 앞에서 자신의 추악한 죄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면서 이와 같이 자신을 발견하면서 또 다른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가 실제로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당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힘 있게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들의 증언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증인들을 잡아 죽이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 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가시 돋친 막대기를 맨발로 한번 차보십시오. 그것은 자기를 해치는 것입니다. 자기를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던져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사울아, 너는 정의감에 입각해서 행동하고 있지만 사실은 너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너는 이 일이 옳다고 생각하여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왔지만, 사실은 네 정의감이 너를 파괴하고 네 주장이 너를 망치고 네 고집과 네 철학이 너를 상처 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살아 계신 주님의 지적이었고 도전이었습니다.

사울은 여기에서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난파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때 사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주여! 뉘시오니까?” 내가 나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그에게는 자신을 통치하고 다스려줄 새로운 주인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자아가 깨어진 다는 것은 자기 포기가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자기가 새롭게 거듭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는 진정으로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주님을 만나면서 사흘 동안 눈이 멀었고 또한 식음을 전폐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고통을 주셨을까요? 그를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일시적인 고통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바울에게서 배워야할 놀라운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고통의 의미를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여! 무엇을 하리이 까?”

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고통이 당하기 전에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더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씀드려 하나님께 두들겨 맞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보다 맞기 전에 회개하고 순종하는 것이 백배나 낫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후일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로라.” 가시 채를 계속해서 차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에는 가치 채를 차는 사람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토록 멸망 길로 가던 자신을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니 은혜가 아닙니까!

 

3. 은혜로 사명 받은 바울(10-19절)

 

성난 황소가 이제는 순한 양이 되어 다메섹 시내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영적인 눈을 뜨였으나 육적인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철저히 낮추셔서 그로 하여금 아나니아라고 하는 주님의 제자를 만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 금식하면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정리했을 것입니다. 그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율법이 아닌 복음과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은혜의 복음과 사울이 평생 동안 실천해 왔던 전통적인 모세의 종교 사이의 관계를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경건한 유대인으로(22:12) 예수를 믿는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오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 주기 위해서 먼저 이 도시에 도착하여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부르셨습니다. “아나니아야!” 아나니아가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제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할 일을 지시하셨습니다.

행 9: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행 9: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는 순종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분명히 열심을 내서 순종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사울이 먹이를 노리고 있는 대신 기도하고 있다는 말씀에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이미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자기에게 안수하여 눈을 뜨게 되는 환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아나니아는 사울의 사람됨과 그의 불같은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만나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망설이고 있던 아나니아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행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아나니아는 자신의 생각을 접고 바로 순종하여 유다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안수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그가 사울을 “형제”라고 부른 사실은 틀림없이 눈먼 바리새인의 가슴에 기쁨을 안겨 주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아나니아의 음성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손길도 느꼈습니다(12,17절).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그의 눈은 열렸으며, 그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을 체험하게 되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울은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졌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힘차게 하려면 사울처럼 건강, 성령 충만,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여 눈이 밝아지고 성령 충만을 받고 세례를 준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실제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1)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이름이 없는 성도라 할지라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무명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과 연관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명성이 아니라 충성입니다.

2)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3)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균형을 이룹니다.

4)우리는 결코 그리스도께 인도된 한 사람의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그 자신이 극적으로 부름 받고 하나님의 종 된 것에 대한 감격을 일생 간직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소명에 충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사명에 충실하게 사는 삶을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나 혹독하였습니다. 우선 그는 옛날 그의 동료들이었던 유대인들의 박해에 직면하였습니다. 23절 이하에는 다메섹에 살던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고자 하여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는 바람에 한밤에 광주리에 담아 성에서 달아내려 도주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유대인들의 바울 박해는 일생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는 그의 회심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가기 위한 위장 회심으로 보기도 하였고 지난날의 잔혹한 박해의 주역이었기에 선뜻 그와 교제하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26절에는 예루살렘 성도들이‘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병약한 몸으로 험한 전도여행을 감당하는 일도 너무나 힘겹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구보다 많이 일하였습니다.

고전 15;10에서는‘내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처럼 구원 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오직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이나 교회역사에서 가장 큰일을 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한다는 점입니다. 바울이나 어거스틴 등 모든 영적 지도자들이 그렇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사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것이 주님의 은혜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여기에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산소와 같고 생수와 같습니다. 오직 은혜로 승리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행 9장 1~19절 / 이병일목사

아프간에 억류되었던 19명의 사람들이 풀려나서 오늘 아침에 입국합니다. 이제 그동안 참았던 더 많은 말들이 쏟아질 것입니다. 그 중에 대부분은 선교활동을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개신교 전체에 대한 안티나 비난의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였습니까.

개신교의 여러 단체에서는 자성의 소리도 있습니다. 공격적 선교에 앞장섰던 대형 교회와 교단들이 가입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분쟁지역 선교에 신중을 기하겠다’고 다짐했고, 세계선교협의회는 ‘각 교회의 단기봉사활동을 관리할 연합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한기총과 세계선교협의회 관계자들은 대책회의에서 아프간에서의 활동은 봉사활동이지 선교가 아니며, 이번 사태에도 개교회의 선교활동은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번에 인질이 되었던 사람들이 다니는 분당샘물교회의 박은조 목사는 배형규, 심상민 씨의 죽음을 순교로 규정하고, 성도들의 피가 뿌려진 그 곳(아프간)을 ‘하나님이 주신 선교지’이며, ‘앞으로 300여명이 아니라 3,000여명의 배형규가 나와야 한다’고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회의록에서 “인질협상에 임한 정부는 갖은 노력과 자국민 보호 차원의 모든 조치를 이해하면서도, 탈레반과의 공식합의에서 아프칸 내에서의 기독교 선교금지라는 조항에 합의한 것에 대해서는 이웃 사랑을 기본으로 하는 한국교계로서는 깊은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사실 한국 개신교계의 공격적인 선교는 대체로 교회의 위상 강화와 교세 확장을 목적으로 합니다. 포화 상태에 이른 국내 선교, 외형적 성장만을 추구하다가 직면한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시사주간지는 이를 두고 ‘신도들로부터 헌금을 기대하고 사진찍기에 불과한 활동을 하는 캠코더 선교’라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선교사 파송규모 면에서 미국에 이어 한국은 두 번째 선교국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현지의 문화나 관습을 무시한 채 이뤄지는 일방적인 기독교 신앙의 전파는 과거 제국주의 시절 서구 교회들의 과오를 답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선교기관이나 교회 간의 무분별한 경쟁으로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선교단체들이 이슬람권 지역이나 아프리카 등지를 ‘미전도종족지역’이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선교(포교)활동을 합니다.

 

남한 개신교인들의 이러한 가치관이나 신앙을 규정하고 뒷받침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갖게 되는 극단적인 과정과 그 결과의 증명을 급하게 이루려고 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울의 전향(회심)이라고 하는 사건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에 의해서 사로잡히게 된 사건을 우리는 ‘사울의 회심’ 혹은 ‘바울의 소명’ 체험이라고 합니다.

다메섹에 거의 이르렀을 때에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합니다. 그 후 그의 삶은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이러한 극적인 요소 때문에 바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삶의 전환을 강조하는 사람은 이 사건을 ‘사울의 회심’이라고 부르며, 그 이후에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를 강조하는 사람은 ‘바울의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부르든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회심과 소명 체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울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에서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전향한 일은 그리스도교 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상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의 전향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무리들에게 새로운 운동의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세계의 끝(로마)을 향하여 복음을 전파하려는 바울의 소명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전도(포교)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6세기와 19세기의 제국주의 확장과 함께 전개된 세계전도의 유형과 오늘날 남한 개신교인들의 포교 모습은 바울의 전도여행에서 그 유형에 있어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바울의 전향(회심)과 선교활동은 바울 자신의 것과는 그 상황과 목적이 사뭇 다릅니다. 바울의 회심은 단순한 종교적 개종사건(신의 존재, 경외심, 종교심)이 아닙니다. 바울의 회심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회심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나쁜 행위로 보지 않는다; 빌 3:4-8,11) 오히려 그것은 미래에 대한 회심, 새로운 실천 앞에 자신을 내놓는 것이며, 지식인이었던 바울의 “자신의 포기”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울의 전향이라는 사건의 과정을 살펴 봅시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한국 불교에서 깨달음에 대한 뿌리깊은 논쟁이 있습니다. 깨달음의 과정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옳으냐,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고(故) 성철 스님은 ‘홀연히 깨치면 미혹과 망념에서 벗어나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는 ‘돈오돈수’를 주장했습니다. 또한 보조국사 지눌은 ‘돈오점수’를 말합니다. 돈오점수는 깨달음 이후에도 끈임없이 수행 정진해야 깨달음을 완성하고 해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후에서 계속되는 성화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믿음으로 모든 구원이 완성된다고 하는 교리 논쟁과 비슷합니다.

그러면 예수와 그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유대교의 전통을 강하게 고수하려던 사울이 어떻게 다시 태어나서 예수를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정반대 방향으로 돌아설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 중에는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사울은 스데반이 처형당하는 장면에서부터 등장합니다. 스데반을 돌로 치는 사람들의 옷을 지키고 있었습니다(7:58). 게다가 그는 스데반이 그렇게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8:1). 그 후에 “사울은 교회를 없애기 위해 날뛰었다. 그는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끓어내서, 감옥에 넘겼다.”(8:3) 그는 이제 대제사장의 공식적인 문서를 가지고 다메섹으로 갑니다. 그 때에 사울은 주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습니다(9:1).

사울은 스데반이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는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는 소리를 사울은 들었습니다. 아마 그 사건은 사울의 마음에 커다란 변화를 주는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진리를 말하고 죽으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스데반의 모습은 바울의 마음을 괴롭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결렬하게 핍박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전향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에 과격해진 바울의 행동은 그의 갈등과 고통일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미쳐서 날뛰듯이 살기를 띠고 있던 그가 정반대로 그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 도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 이후에 바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26장에서는 그 동안 기도를 했다고 말합니다.

스데반이 죽는 모습과 예수의 부활한 모습은 바울이 자신의 삶을 되돌리는 동기가 됩니다. 그 과정에서 바울의 고뇌가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생각해 봅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한 소쩍새의 피울음이 있어야 하듯이, 한 사람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처절한 실존의 고뇌와 울부짖음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삶을 전환시키는 그 중심에 그리스도교에서는 믿음이 있다고 합니다. 그 믿음은 신앙인들의 가치관과 행동양식까지도 포함하는 삶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전제조건으로써의 믿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믿음생활을 잘 하느냐 못하느냐 등의 말에서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말 그 자체가 추상명사이기도 하지만, 그 용법이 다양해서 많이 사용하지만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믿음을 표현하는 라틴어 동사의 어원 credo는 “나는 나의 마음을 -에게 드립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청년들이나 밖에서 교회(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믿음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믿음이 오늘을 살아가는데 왜 중요한지, 과연 믿음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 이성적으로 생각하기에 믿음이 과연 합리적인지? 그리고 그 믿음이 깊다고 하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나 행동에 대하여 부정적인 일들을 많이 보고 경험해서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청년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교회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뿐만 아니라 오래된 사람도, 소위 모태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믿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믿음생활인지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이전의 교회에서 가르치고 배웠던 것 그대로를 답습하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예수 닮기, 예수 따름이, 예수 살기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와 어린이들>

올해에 우리가 매월 넷째주일에 하고 있는 “예수읽기마당”은 바로 이러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 믿음에 대해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삶을 내어놓고, 그것을 모아서 믿음과 믿음생활에 대하여 함께 만들어 가기 위하여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고민은 누구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무런 노력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공동체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읽기마당이 벌써 열두 마당 중에서 여덟 마당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참여하신 분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분도 있습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이 그렇듯이, 우리들의 여름(열매)을 추수할 때가 다가옵니다. 바라기는 더 많은 교우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민 없이 깨달음이 없고, 함께 하는 노력 없이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은 네 마당 동안에 계속해서 우리의 믿음과 실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할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과 노력은 하나의 과정이고, 그 과정이 무르익은 어느 시점에 내 마음을 드릴 열매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

행 9장 1~22절 / 김 조목사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성도님들 심령과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더하시기를 원합니다. 도시 산업화로 인하여 맥추 절기를 지킨다는 것이 많이 희석이 되었습니다만 하나님은 세 번 절기를 지키되 쓴나물 먹고 누룩 없는 떡을 먹는 무교절을 해방된 날이니 지키고 수장절은 연중 곡식 주신 것 감사하며 맥추절은 첫 곡식 거둠을 지켜라고(출23:14-17) 했습니다. 다 의미가 있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첫 열매 거둠이라고 초실절이라고 했고 또 유월절 후 7주후에 라고 칠칠절 또는 50일째라고 오순절이라 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현대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으니 육적으로 양식 주심도 감사하지만 성령 보내주시어 하나님을 믿고 승리하게 하시니 진정 감사하는 절기로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제목하고 말씀드리려 합니다. 17절에 하나님이 아나니아 통해 사울에게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함으로 사울이 바울 되는 엄청난 변화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1-9절 사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10-18절에 아나니아 통해 하나님이 사울에게 안수하여 보게 하고 세례 받게 하였고 19-22절에 복음 증거자가 된 사울의 다메섹 활동을 말해주고 있는 본문 통해 사울이 바울 되는 변화의 삶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원하여 성령으로 충만했던 전과 후의 사울의 삶을 살펴보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자기중심적인 삶이었습니다. (1-2, 13-14절)

스데반 집사를 죽임에 주도적인 역할 했고(7:58)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8:1) 사울이 계속적으로 성도들을 위협하고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상에게 다메섹 성에 예수 믿는 자 잡으려는 허락도 얻었던 사람으로 이렇게 잘못된 일 하면서도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고 열심 하였던 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자기들의 사상이나 지식이나 종교적으로 맞지 아니하였기에 그러한 것으로 자기중심으로 생각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왕의 지파요 바리세인이요 로마의 시민권자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자요 애제사장의 신임 받는 장래가 기대되는 탁월한 청년이 자기신념이 있었기에 기독교를 핍박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의 주장, 사상으로 자기중심이 되어 도리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 성령 충만하기 전 사울은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시대가 갈수록 인심이 없어지고 사회가 각박해지는 것이 모두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그러합니다. 자기의 학벌, 지위, 재물, 사업 등을 의지하고 다른 사람의 인격이나 인권 무시하고 냉대하고 조롱하여 이기주의적인 욕심과 자만 때문입니다. 성도들이여! 우리도 사울처럼 자신의 그릇된 신념, 자기중심적 욕심과 사상 때문에 잘못된 일을 하고 있지나 아니합니까? 자기 마음에 안들면 모두가 틀렸고 내 유익 위하여 누가 무어라 해도 양보할 수 없는 사람이지는 아니합니까?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보니 이해나 관심이나 양보는 아예 사라진 삶은 아닌지요? “자기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잠28:26) 했습니다. 나 중심의 신념, 주관 때문에 하나님 영광 가리우지 않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2. 하나님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3-17절)

사울은 주님의 음성 듣고 보지도 못하고 식음전폐 하였다가 아나니아의 안수 받고 보게 되고 세례 받았습니다. 15-16절에 이렇게 하신 것은 사울 통해 세계 복음화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고 자기중심의 삶을 깨뜨린 후 사울은 바울로 변하여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는 하나님 중심의 삶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나니아도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가라했을 때 사울이 예루살렘과 다메섹에 핍박자로 왔는데 하고 거절하게 되니 이는 자기중심이요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사울에게 갔으니 하나님 중심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에 입각하여 살게 되니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축복하는 삶이 됩니다.(사43:1-3) 주의 빛과 음성 들었던 사울이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식음을 전폐했으니 이 사흘이 요나의 고기 뱃속의 회개 기도처럼(욘1:17) 사울이 자기중심적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던 가문, 학벌, 경험, 지식과 사상 체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자신이 깨어지는 기간이었습니다. 사울의 회심은 기독교에 큰 핵을 이루는 것으로 16절 말씀대로 큰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 영광 위해 일하였던 하나님 중심의 삶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라”(갈2:20)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 했습니다. 성도들이여! 나 중심의 삶을 깨닫고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되어 사업도 건강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성령 충만한 삶이었습니다. (17-22절)

“예수께서 나를 보내시어 다시 보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하고 안수 하였더니 보게 되고 세례 받고 건강하여 성도들과 교제하였고 다메섹 회당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리스도라고 힘 있게 증거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그러했고(15절) 그대로 이루었으니 사울의 자기의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했기에 핍박자가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함으로 성령으로 충만하였기에 유대 종교로 머물 수도 있었던 기독교가 세계적인 기독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오늘 맥추감사절 오순절을 맞아 성령으로 충만하시어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 땅에 이루는 능력자요 승리자의 삶이되시기를 원합니다. 엘리야의 갈멜산 제단에 여호와의 불이 임하였기에 많은 백성 앞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했던 것(왕상18:32)과 같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는 복음 전파의 선봉장으로 크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일군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맥추감사절을 지키면서 헌금이나 하고 특송이나 하는 절기 되지 말고 오순절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울이 바울 되는 변화의 삶의 주인공 되시기 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 전 사울은 자기 사상 입장 중심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로 자기중심적인 삶이었다면 이제 우리도 자기중심적 삶을 끊고 버리고 깨뜨려 핍박자가 전도자 되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되게 합시다. 더 나아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다메섹 뿐 아니라 세계복음화에 앞장 선 바울된 것 같이 우리의 삶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능력 있는 승리자 되십시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이웃 괴롭히는 자기중심적 삶을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여 이웃을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자로 하나님께 칭찬과 상급 받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만남이 인생을 좌우 합니다

행 9장 1~22절 / 조상호목사

스페인 출신의 유명한 화가 피카소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시중에서 대단히 고가에 매매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얼마 전 피카소의 미공개 작품 한 점이 런던의 한 경매장에서 경매되었는데, 자그마치 한화로 293억원, 뉴질랜드 달러로 무려 5,000만 달러나 되는 엄청난 가격에 팔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 중에 ‘황소머리’라는 조형물이 있습니다. 그 작품 사진을 다운로드 받았는데, 한 번 보시겠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작품도 아무리 적게 잡아도 뉴질랜드 달러로 5,000만 달러가 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5,000만 달러가 넘는 이 ‘황소머리’라는 작품이 만들어진 배경을 들어보면 재미있습니다. 1943년 어느 날, 길을 가던 피카소가 우연히 버려진 자전거 한 대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자전거에서 안장과 핸들을 떼어낸 후, 그 안장에다가 핸들을 거꾸로 붙였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황소머리' 라고 붙였는데, 오늘날 최소 5,000만 달러 이상을 호가하는 고가의 작품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질문할까요? '황소머리' 라고 불리 우는 이 작품에 들어간 재료비는 얼마 정도 될까요? 자전거 안장과 자전거 손잡이를 사는데, 얼마면 되겠습니까? 요즘 굴러가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다 낡아빠진 고물 자전거를 ‘Trade Me' 인터넷 사이트에 내놓으면 살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도 고물상 수집상이나 박물관에 전시하려는 사람 등의 소수의 사람만이 관심을 보일 것입니다. 오히려 일반 사람들은 고물 자전거를 처분하는데 돈이 들기 때문에, 공짜로 준다 할지라도 거절할 것입니다. 그런데 버려졌던 자전거가 피카소를 만난 후에는 더 이상 쓰레기장에 버려질 쓰레기가 아니라, 최소 5,000만 달러 이상을 호가하는 값비싼 작품이 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인생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가치가 달라지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만남을 통해 축복된 인생을 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만남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한번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만남의 축복을 누립시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만남의 축복'입니다. 만남이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과의 만남

첫째로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원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이라는 청년은 세상적으로 볼 때,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당시에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목숨 걸고 지킬 만큼 율법을 최고로 여기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학문적으로도 오늘날의 하버드라고 할 수 있는 가말리엘 선생 밑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미래가 매우 밝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정치, 문화, 종교 등의 여러 방면에 정통하였고, 번뜩이는 지성을 소유한 천재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그의 지성과 실력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율법에 관하여 정통한 자였지만,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무고한 그리스도인을 핍박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 1절 상반절에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스데반 집사님을 의미합니다. 그는 스데반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것을 마땅히 여길 정도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핍박했습니다. 또 그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의 과거를 고백한 적이 있는데, 사도행전 26장 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u>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그러니까 예수를 대적하고 예수를 믿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 옳다고 스스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26장 11절을 보면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외국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정도로 종교적으로 열성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었습니다.

어떤 유머집에서 “목사님은 못 말려”라는 유머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컴퓨터를 고치려고 간 애프터서비스 직원이 목사님의 컴퓨터 파일을 확인하다가 이상한 파일 이름들을 발견했습니다. 한글 파일의 이름들이 모두 참새.hwp, 타조.hwp, 까치.hwp, 비둘기.hwp식이었고, 밑으로 내려 갈수록 점점 들어보지 못한 새 이름들이 즐비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직원은 너무나 이상해서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왜 이렇게 이름을 붙이셨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파일을 저장할 때, 무척 고민이 많다고 하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파일을 저장할 때, ‘새이름으로 저장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저는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이 유머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은데, 그 목사님은 ‘새이름으로 저장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나오는 ‘새이름’을 ‘New Name’이 아닌, ‘Bird Name’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파일을 만들면 참새.hwp, 타조.hwp, 까치.hwp, 비둘기.hwp, 이런 식으로 모든 파일 이름을 지었던 것입니다. 모르면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그 목사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Bird 이름으로 파일 이름을 지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빗나간 열심은 달려갈수록 손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가를 먼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잘못된 열심은 달려갈수록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은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인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악인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악인을 그대로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멸망시키기 전에 먼저 노아를 통해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기 전에도 아브라함을 통해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자와 짐승들 중 첫 번째 태어난 것을 죽게 하실 때에도 모세를 통해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멸망시키기 전에 먼저 요나를 통해 경고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회개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회개치 않은 악인을 멸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핍박자 사울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날도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에 가까이 가게 되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빛이 비추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 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들렸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그가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사울은 ‘주여!’라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는 이미 용서의 예수님을 경험하고 부른 것입니다. 그는 하늘에서 빛이 비취며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을 때, 이미 죽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을 보니, 예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같이 멸망 받을 죄인을 버리지 않고 살려두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두려움과 자비를 구하며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부른 것입니다. 다시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결국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핍박자 사울’이 오히려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후로 하나님께 가장 탁월하게 쓰임 받아,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외모를 가장 소상하게 알려주는 <바울과 데글라 행전>이라는 문서에 의하면, 바울은 대머리에 안짱다리였다고 합니다. 또한 눈썹은 맞붙어 있고, 다소 큰 코와 자그마한 몸집을 한 그의 외모는 매우 보잘것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방인 선교라는 위대한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면 축복된 인생을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만나면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연세대 도서관에는 한 동상이 있습니다. 연세대의 정신적 지주인 백낙준 박사의 동상입니다. 그런데 이 백낙준 박사는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일화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그의 아버지 백사경씨는 시각 장애인으로 점쟁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점 잘 보기로 유명하여 돈을 많이 벌게 되자, 아들 백낙준과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첩으로 두며 따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전도자가 나타나서, 백사경씨에게 “당신의 영혼과 후손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점치는 생활을 청산하고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백씨는 전도자에게 큰 소리로 야단을 치며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전도자도 지지 않고 “당신이 계속 이렇게 살면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은 물론이고, 자손들도 망할 것이오.”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백씨는 밤이면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잠만 자려고 하면 그 전도자의 소리가 자꾸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것입니다. "자식 멸망 받을 짓 그만두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그 소리가 밤마다 들려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교회로 찾아갔습니다. 목사님과 온 교우들은 점쟁이 백사경씨가 교회를 나오게 된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온 그날 점쟁이 백사경씨는 회개하고 예수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후 백씨는 점치는 일을 그만두고 모든 재산을 털어 교회를 짓고, 나중에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맥힌이라는 선교사가 백씨의 가족들을 교회에서 사찰로 봉사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인 백낙준씨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영창 중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하게 했습니다. 졸업 후 선교사는 그를 중국으로 데리고 가서 신성 고등학교에서 학교를 마치게 하였고, 나중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유명한 파크 대학과 프린스톤 대학, 그리고 예일대학에서 공부하여 철학박사 학위까지 받게 하였습니다. 그는 귀국하여 연세대 교수와 초대 총장이 되었으며, 문교부 장관까지 지냈습니다.

어린 백낙준의 저주받은 인생을 축복된 인생으로 바꾸어주신 주님이시라면 우리 인생도 바꾸실 수 있습니다. 사울의 삶의 현장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도 동일하게 찾아오십니다. 사울을 바울로 바꾸신 주님께서 못 바꿀 인생은 없습니다. 여러분, 부모를 잘못 만나 고생하고 있습니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까? 배우자를 잘못 만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선생님과 친구를 잘못 만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세상의 그 어떠한 만남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만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불행한 삶이 행복한 삶으로, 가난한 삶이 부요한 삶으로, 저주받은 삶이 축복된 삶으로 바뀌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분들은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예수님을 만난 분들은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날마다 경험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람과의 만남

우리 인생에서 두 번째 중요한 만남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마이크로 소프트사를 세워 세계 최고의 거부가 된 빌 게이츠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게는 스티브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기술적인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스티브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 초기에 영업의 1인자로 불린 스티브 볼머를 가리킵니다. 빌게이츠는 소프트웨어 개발에는 천재성을 발휘 했지만, 영업에는 문외한이었습니다. 그는 영업이 한계에 부딪혔다고 생각했을 때, 대학시절 알고 지냈던 스티브의 얼굴을 떠올렸고 곧바로 그를 찾아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스티브는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영입되었고, 그는 탁월한 영업능력을 발휘해서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업계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된 것은 빌 게이츠가 스티브 볼머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만남은 중요합니다. 남편은 성실한 부인을 만나야 하고, 부인도 가정을 잘 돌보는 남편을 만나야 합니다. 학생은 인격과 실력을 겸비한 선생님을 만나야 하고, 선생님도 가르침에 절대 순종하고 열심히 배우려는 학생을 만나야 합니다. 고용주는 지시에 순종하며 열심히 일하는 직원을 만나야 하고, 직원도 인격적인 대우를 하며 임금을 제 때에 잘 주는 고용주를 만나야 합니다. 환자들은 최선을 다하여 치료하려는 의사를 만나야 삽니다. 의사도 처방과 지시에 잘 따르고 질병치료를 위해 애쓰는 환자를 만나야 치료가 됩니다. 택시를 타더라도 친절한 운전사를 만나야 하고, 택시 운전사도 매너가 좋은 승객을 만나면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다는 것은 잘 알면서, 사울이 아나니아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합니다. 강렬한 빛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사울은 어떤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한 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11절).” 이 말씀을 들은 아나니아는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권세를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들로부터 받아 성도들이 핍박하고 있다고 주님께 말씀을 드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15~16절).” 주님의 명령을 받은 아나니아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머물며 기도하고 있는 사울을 만났습니다. 다같이 17절을 보겠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또한 아나니아는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온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이 머물러 있는 곳에 자기 발로 찾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울이 머물러 있는 곳에 찾아가서 사울을 붙들고 안수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형제 사울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사울이었다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사실 아나니아가 “야, 이 원수 같은 놈아, 그래 너 잘 만났다. 우리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네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때 알아봤다. 네가 눈이 멀게 된 이유는 네 죄 때문이야. 너는 네 죄 값을 달게 받아야 돼.”라고 해도 전혀 문제되지 않을 만큼 사울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사울을 향하여 "형제 사울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청년 사울이 얼마나 감격하였을까요? 성경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사울은 아나니아의 행동을 보고 틀림없이 감격했을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울은 “나 같은 사람을 용서해 주다니,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나를 형제라고 부르다니, 그리고 나에게 안수까지 해주다니“라고 하며 감격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은 사울은 사흘 동안 보지 못하는 눈에서 비늘 같은 것들이 벗겨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고, 일어나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음식을 먹고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바울이 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순종의 사람이었고, 용기의 사람이었고, 원수까지 형제라고 부를 만큼 넓은 가슴을 소유한 아나니아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에서 만남이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한자로 '근묵자흑(近墨者黑)' 즉 검은 색깔의 묵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착하디착한 자녀가 나쁜 습관을 가진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 나쁜 습관을 따라서 합니다. 그러나 나쁜 습관을 가진 자녀라 할지라도 좋은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 좋은 습관을 배우게 됩니다. 만남을 통해서 잘되는 일이 잘못될 수도 있고, 만남을 통해서 잘못된 일이 잘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에게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매를 맞고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잘못된 만남은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목숨까지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도 만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을 만났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그 사람을 치료해주고 나중에는 여관으로 데려가서 돈을 주며 치료를 부탁했습니다. 강도만나 죽어가던 사람은 좋은 만남을 통해서 죽기 직전에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생에 만남만큼 중요한 사건도 없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중요하고, 둘째는 믿음의 동역자들과의 만남이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저는 “숯덩이 인생에서 금강석 인생으로 변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조엘 소넨버그(Joel Sonnenberg)라는 이름의 청년을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몇 년 전에 한국에 방문한 적도 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면, 대단히 감동적입니다. 그는 올해 나이로 만28세인데, 1979년 9월15일 그가 생후 20개월 되었을 때, 부모가 운전하는 승용차에 타고 있다가 40톤 트럭과 추돌하면서 그가 타고 있던 자동차는 금새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불길에 달아오른 아이의 몸에 물을 끼얹으니 “치익” 소리를 내며 하얗게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숯덩이 같은 아이를 보며 엄마는 오열을 토했습니다. “애야, 너 조엘 맞니?” 몸의 85%가 3도 화상을 입고 50여 차례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치료과정에서 손, 발가락, 코, 입술, 귀 모두 떨어져 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그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이맛살을 찌푸리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어머 저것 봐, 외계인 같다, 더러운 가면을 썼나 봐, 밥맛 떨어져!” 다른 사람들로부터 외계인 취급받는 것은 육체의 고통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지러질 듯 울어야 했습니다. “아저씨, 제발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엄마가 예수님 얘기를 들려주면 “엄마,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보다 내가 더 아픈 것 같아요.” 그때마다 엄마는 아이를 끌어안고 격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울퉁불퉁한 자기 피부를 만지며 “내 피부는 언제 엄마 피부처럼 될까요?” 라고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조엘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엔 그렇게 살아야 할거야.” “그럼 언제 바뀌어요?” “천국에 가면.” “나 내일 천국 갔으면 좋겠어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의 가슴은 무너졌습니다. 이러한 아이가 감사와 꿈을 잃지 않고 자랐습니다. 손가락 발가락도 없는 아이가 초등학교 시절, 축구선수, 농구선수로 활약을 했습니다. 청소년 시절엔 산악자전거와 클레이 사격 선수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미국 테일러 대학을 졸업한 뒤 신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전 세계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교통사고 후 18년 만에 도주했던 트럭운전사가 체포돼 재판정에 출두했을 때 조엘은 가해자를 흔쾌히 용서했습니다. “저는 증오심으로 인생을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증오는 또 다른 고통을 낳습니다. 대신 나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무한한 사랑에 감싸여 살아갈 것입니다. 저 가해자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내 외모에 대해 손가락질하는 세상도 기쁨으로 용서합니다.” 조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본분을 정확히 깨달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많이 빼앗겨서 많은 것을 줄 수 있어 좋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실패와 손실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잃는 것보다 반드시 더 많은 것을 주십니다. 오늘 나의 승리는 내가 대단해서도 아니고 내 가족이 대단해서도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대단하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하나님은 나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비관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조엘이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었던 이유를 아십니까? 세상을 저주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조엘이 원수를 용서하고 용기를 주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었던 이유를 아십니까? 조엘이 호기심 가득한 사람들의 눈초리에 미소로 답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이유를 아십니까? 그가 하나님을 소개해준 엄마, 아빠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남의 복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핍박자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 전도자 바울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주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아나니아라는 믿음의 사람을 만나 눈을 뜨게 되고 회복된 것처럼, 여러분들에도 믿음의 사람을 만나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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