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새벽공과와 설교

20260709(4) / 사울의 회심(4) / 행 9:1-9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6.06.20|조회수57 목록 댓글 0

사울의 회심(4)

행 9:1-9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 설 교 >

바울의 교훈 – 회심의 모범

박봉수목사 / 행 9:3-9

식품은 오랜 시간 저장하다보면 변질됩니다. 이 때 변질은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부패’고, 다른 하나는 ‘발효’입니다. 식빵을 보관하다가 곰팡이가 폈다면, 그것은 부패입니다. 먹을 수 없어서 버리게 됩니다. 반면에 콩을 삶아서 으깨 만든 메주에 곰팡이가 폈다면, 그것은 발효입니다. 이것을 원료로 된장, 고추장 그리고 간장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이 부패와 발효를 우리말에서는 더 분명하게 구분하여 표현합니다. 부패를 ‘썩는다’고 하고, 발효를 ‘삭는다’고 합니다. 썩으면 악취가 나고, 우리 몸에 좋지 않은 독성분이 있기도 해서 먹지 못하고 버립니다. 그러나 삭으면 젓갈이 되고, 식혜가 되고, 김치가 돼서 그 풍미가 깊어집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이 썩는 부패와 삭는 발효는 모두 미생물에 의해 분해가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분해 결과 우리에게 유익한 물질이 만들어지면 발효라고 하고, 사용할 수 없거나 해로운 물질이 만들어지면 부패라고 합니다. 사실 과학적으로는 같은 과정이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유익하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구분한 것일 뿐입니다.

사람도 살다보면 변합니다. 세월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건을 겪거나 특별한 상황을 만나면 갑작스럽게 변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의 변화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썩는 부패와 같은 변화가 있고, 삭는 발효와 같은 변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가 죄 짓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변화는 썩는 부패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타락’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비해 예수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변화는 삭는 발효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볼 인물은 성경이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회심의 예인 바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장 발효가 잘 된 식품처럼 요긴한 인물로 변화된 바울입니다.

바울의 회심이 특별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이 회심이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적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다메섹이라는 곳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가던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회심했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단 한 번의 주님과의 만남으로 박해자가 전도자로 변한 것입니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극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회심의 결과가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는 점 때문입니다. 바울의 회심으로 복음이 이방세계로 널리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한 민족의 종교가 아니라 세계 열방의 종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회심으로 복음의 의미가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정립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학체계가 올바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회심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바울의 회심사건을 통해 본받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이루신 회심

 

바울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 오늘 본문이 소상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행 8:3을 보면, 바울은 이미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잔멸하는 일에 앞장 선 바가 있습니다. 그러던 중 예루살렘에서 무려 200킬로나 떨어져 있는 다메섹이라는 곳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을 체포하려고 그곳까지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메섹이 가까운 어느 길 위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늘로부터 빛이 바울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가 놀라서 땅에 엎드리자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후 주님께서 준비하신 변화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이 만남에서 눈이 멀어버린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사람 아나니아를 만나게 됩니다. 이 때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안수를 받고, 성령이 충만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됐고, 그 후 세례를 받고 건강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회심은 전적으로 주님의 기획 하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회심시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정하신 때 주님의 뜻대로 회심의 과정이 진행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꿈에도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남인숙이라는 분이 쓴 [인생을 바꾸는 결혼수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장이 있습니다. 거기에 도발적인 말이 나옵니다. “결혼하면 이 사람이 바뀌겠지 하는 마음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저자는 연애할 때 과거와 다르게 변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결혼하면 변하겠다고 맹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순간만은 진심일 거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반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면, 대체로 3년 내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가슴 뛰는 사랑이 식고, 반했던 콩깍지가 벗겨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 대사처럼 “사랑이 변했어!”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변한 것이 아니고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장의 결론은 변하게 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대신 남편을 관리하라고 권합니다. 변하지 않으니, 나쁜 점을 바꾸려 하지 말고 잘 관리해서 갈등으로 비화되지 않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겉사람은 변할 수 있어도 속사람은 정말 변하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변하기 어렵고 누군가가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변하게 하시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아니 주님께서 변하게 하시면 변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저히 변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도 변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변하고 싶으면 혼자 변해보겠다고 애쓰지 마십시오. 힘 만들고 안 됩니다. 대신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시면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믿고 이미 변했지만 아직도 변해야 하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주님께 간절히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새롭게 하여주옵소서. 나를 변화시켜주소서.”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자녀나 부모님 또는 지인들 가운데 그 속사람이 변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변화시켜보겠다고 애쓰지 마십시오. 힘만 들고 자칫 관계에 금이 갈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 맡기십시오.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주여 변화시켜주소서”

 

목적이 있는 회심

 

바울의 회심이 주님께서 이루신 회심이라면, 주님께서는 왜 바울을 회심하게 하셨을까요?

그 답은 본문에 명확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을 회심시키시는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바울을 안수하여 세우라고 당부하시면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주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바울을 회심시키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방인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전하기 위해 회심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롬 11:13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 말씀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은 자기의 회심에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회심하여 사도가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누군가를 회심시키실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회심한 사람들은 그 목적을 아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발효와 부패의 차이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부패는 대부분 저절로 일어납니다. 생명체가 죽어 버려지면 저절로 부패가 일어나고, 식품도 상온에 그냥 놔두면 부패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발효는 대부분 의도적인 과정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장이나 김치 또는 치즈와 같은 발효 결과물은 주부나 장인의 정성이 담긴 수고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주부나 장인이 왜 그토록 힘든 발효의 과정을 일으키느냐는 것입니다. 장, 김치, 치즈와 같은 맛있는 발효식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정성을 다하는 것은 최고의 발효식품을 얻으려는 기대 때문이 아닙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회심시키실 때는 기대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하나님의 기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보편적인 기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특수한 기대입니다. 그 사람에게 특별히 부탁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심한 뒤에 능력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았더라도 사는 것이 바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을 향한 자기의 기대만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평생 그 기대를 이루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바울에게 배워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나를 회심시키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기대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기대를 이루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뒤따르는 회심

 

오늘 본문을 보면 의미심장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바울의 회심 이야기를 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장차 그가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말씀 그대로 바울은 회심 이후에 큰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후 11:24 이하를 보면 바울이 자기가 당했던 고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그렇습니다. 회심 이후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 고난의 형태와 강도는 저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이겨내야 회심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저도 회심 이후 고난을 겪었습니다. 저는 불신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회심 이후 가정에서 고난을 겪었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제사문제였습니다. 아버님께서 장손이셨기 때문에 제사가 많았습니다. 그 때마다 일가친척들이 모였습니다. 제가 회심한 이후에 제사에 참여하지 않자 말이 많았습니다. 어른들에게 심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제사 때마다 반복됐는데, 견뎌내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사가 다가오면 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매번 체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무척이나 담대하게 맞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원래 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이 없었고, 박해가 올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제가 고백하게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겪은 뒤에 3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자기가 그런 극심한 고난을 다 견디고 이겨놓고 자기가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대목입니다. 자기가 고난을 이겨냈다면 자기의 강함을 자랑해야 하지 않을까요? 남달리 강건하고 멘탈도 강하기 때문에 이겨냈다고 자랑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고난 속에서 자기의 약함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너무 힘이 들어 쓰러질 뻔했고, 너무 두려워서 떨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께서 고난 가운데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함께 하시면서 약한 자신을 강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견딜 수 있게 해주시고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회심한 우리에게 고난만 주시지 않습니다. 함께 하십니다.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도 주시고 지혜도 주십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바울의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고전 15:31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회심한 이후 날마다 죽는 체험을 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회심했다고 완전히 천사처럼 변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영접해서 새로워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연약한 육신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영향을 받습니다. 이런 것들을 끊어내기 위해 날마다 죽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 이후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또 다른 고난입니다.

요요현상(Yo-yo effect)이란 것이 있습니다. 다이어트를 하면서 체중이 줄었다가 다시 늘어나는 것을 반복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체중감량을 위해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지만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지 못하고, 다시 살이 찌는 것을 반복합니다. 이것이 마치 장난감 요요가 되돌아오는 것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영적으로도 이런 요요현상 같은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 보겠다고 다짐하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반복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육신이 다시 살아서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심 이후 영적 요요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는 체험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이 또한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고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바울처럼 회심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서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회심한 사람으로서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다.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행 9장 6-9절 / 양향모목사

역사를 공부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끔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하여 큰일을 하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변화시켜서 사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가지고 그대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떤 사건을 통하여 완전하게 변화시켜서 사용을 하십니다.

사울은 그런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일을 감당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바꾸는 중대한 일에 그를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훌륭한 유대교인에서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바뀐 사람입니다. 가식적인 종교인에서 참된 진리의 도를 따르는 신앙인으로 바뀐 것입니다.

제가 유대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니까 혹시 여러분이 유대교는 참 나쁜 것이구나, 라고 오해를 하실까봐 말씀을 드리는데 유대교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유대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섬기고 또 말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들의 조상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도 지키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살다가 나라를 빼앗겼지만 지금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만 섬기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한 것도 인간인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하니까 한분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죄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사울은 자신을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최고의 사상가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뭘 몰라서 아무렇게나 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뭘 알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진리를 알고 진리 따라 사는 대단한 사람이며 그런 일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문제는 그런 성경공부나 그런 율법을 잘 지킨다거나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세상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을 때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을 발견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많이 배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정직하고 바르게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아 내가 부족한 사람이구나, 아 내가 뭘 잘 모르는 것이 있구나,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엄청 똑똑하고 엄청 바르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보통 말로 해서는 자기의 생각을 바꾸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비추고 눈이 멀게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음성을 듣게 하여서 그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도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일반적인 종교인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들을 버려야 됩니다. 우리가 과거에 남의 것이나 훔치고 나쁜 짓이나 많이 해서 회개를 하고 새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바르게 살고 성경공부도 많이 하고 알 것은 다 아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많을수록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는 장면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사울처럼 변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형식적인 종교인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 진리의 길을 몰라서 엉뚱한 곳으로 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바른 길로 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본문 6절 말씀에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시내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내란 다메섹 시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메섹 시내는 사울이 가고 있던 길이었습니다. 다른 길이 아니라 사울이 가고 있던 그 길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네가 길을 잘못 가고 있으니까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하실 만한데 가던 길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메섹이 아닌 다른 도시에 사람을 준비하시든지 하실 것인데 그냥 나쁜 짓을 하러가던 그곳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같은 장소이기는 하지만 가서 만날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가서 할 일은 다른 일입니다. 원래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오려고 했는데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한편이 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더 잘 믿게 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그들과 같이 삽니다. 짐을 꾸려서 세상 사람들이 살지 않는 다른 것으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살아가는 모습은 다른 모습입니다. 해야 할 일은 다른 일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과거에는 예수님을 몰랐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사울의 입장에서만 생각을 합니다. 그곳에 피난 와 있던 사람들 편에서도 이 사건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서 죽이려고 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한편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다가 유대인의 박해를 피해서 다메섹으로 피난 와서 살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렇게 변한 사울은 그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잡아가려는 사람이 자신들과 한편이 되고 자신들을 변호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저와 같이 복음을 이해하고 믿음의 위대함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로 기쁩니다. 동역자가 생기고 한편이 생겼다는 것은 외로운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의 목회자들 가운데는 예수님만 믿고 따르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똑바로 살아야 하고 충성을 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성공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피난 온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바르게 살 수가 없어서, 좋은 일만하며 살 수가 없어서, 충성하고 헌신하며 살 수가 없어서, 성공하면서 살 수가 없어서, 예수님께로 피난 온 사람들입니다. 나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 안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사울과 같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장사꾼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편이 되어서 우리를 위로할 사울과 같은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 그 복음으로 연약한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이 진정한 목회자입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7절 말씀에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라고 했습니다. 같은 장면을 22장 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이 두 말씀을 비교해보면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같이 가던 사람들이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22장에서는 소리는 듣지 못하고 빛은 보았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비슷한 말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사울과 같이 가던 사람들이 빛은 보았는데 그 빛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빛이 어떤 의미로 비추는 빛인지는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이 소리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의미하는 뜻을 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소리로만 들었지 그 속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음성은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만 자신을 보이시기 원했고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현상을 보고 들었지만 사울만 예수님을 보고 들을 수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아마도 사울과 같은 임무를 받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사울의 부하들이었거나 사울과 뜻을 같이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간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나중에 사울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사울은 배반했어도 그들은 끝까지 체포조로 활동했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사울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복음 사역자로 쓰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은 확실합니다. 사울은 이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며 준비한 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장면을 보면서 아 나도 사울처럼 변화되기 위해서 사울과 같은 체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도 그런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에게 자주 이런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기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사람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은 우리도 그런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 자연적인 현상 가운데서도 비슷한 일들을 체험하면서 삽니다. 세상을 살아가다가, 성경 말씀을 읽다가, 설교말씀을 듣다가, 기도하다가, 묵상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사울과 같이 그렇게 만나고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고 예수님이 진짜로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그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으로 나에게 하신 말씀으로 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강하게 역사하시면 무엇을 하든지 거기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큰 은혜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욕심이 우리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한 이런 음성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지만 그 마음속에 있는 이 세상의 욕심들을 버리지 못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세상을 향한 욕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돈 벌어서 잘 살고 싶고 출세해서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싶은 욕망들이 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아는 것은 성령님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강권적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 귀한, 이 위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본문 8-9절 말씀에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사울이나 같이 가던 사람들이나 다 같이 빛을 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별 일없이 볼 수 있었지만 사울만 눈을 떴으나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강한 빛 때문에 눈이 멀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로 앞을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가던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을 보지도 못했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지냈다고 했습니다. 사흘 동안을 깜깜한 암흑 속에서 가만히 있어야 했습니다.

사흘 동안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그냥 단순하게 예수님의 만나고 난 후유증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엄청난 일을 당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훌훌 털고 바로 일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흘은 특별한 의미를 주는 사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3이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두기도 합니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에 삼천만이 사는 나라였고 뭐든 삼세번은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달리기도 하나 둘 셋 하고 달립니다.

성경에서도 3이라는 숫자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 중에 우리 기억에 남을만한 3일은 요나가 고래 뱃속에 있었던 3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외치라고 했는데 그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을 가다가 바다에 던져지고 큰 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가던 요나를 하나님께서 물속에 던지게 하시고 큰 고기 배속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 사흘 동안 요나의 마음을 바꾸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유명해진 것은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자신에게 빗대어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와서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이시고 메시야가 되신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39-4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시다가 부활하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메시야가 되신다는 증거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 무덤에 머물러 계시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 사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과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가 되신다는 증거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무덤까지 내려가셔서 사흘씩이나 머물러 계셨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사실은 부활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삼일정도는 무덤에 있어야 죽음이 확인되는 것이고 죽음이 확인될 때 예수님의 부활도 확증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거치신 것입니다. 이 무덤에서의 삼일이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푸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도 이런 절차를 거치고 있는 것입니다. 깜깜한 암흑 속에서의 삼일이 그가 해야 할 엄청난 일의 준비기간입니다. 그런 흑암의 시간을 지나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깜깜한 암흑 속에서 삼일을 지낸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밝은 빛을 보게 됩니다.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새로운 사명을 가지고 새로운 진리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알고 있었던 잘못된 지식들을 이 암흑 속에서 다 묻어버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는 참된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메섹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으러 가던 사울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밝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명을 받은 새로운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외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하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외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복음이 우리가 가진 복음입니다. 그가 만난 예수님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알고 믿게 된 것이 너무나 귀한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행 9장 6~7절 / 김중석목사

Is it well? 2010년 봄의 전령들이 왔다. 노란 산수유 개나리가 눈 속에서 꽃샘추위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다(사진). 봄의 전령들이 우리보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우리도 만나면 안녕하시냐고 인사한다. ‘안녕(安寧) = 평안(平安)과 강녕(康寧)’하시냐? 는 것인데 평안은 심정적-환경적인 것이겠고 강녕은 신체적인 것이라 생각된다. 이를 앞 글자를 따서 ‘평강平康’이라 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렇다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평강해야 하지 않겠나! 먼저 믿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평강치 못한 이 세상에서 평강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안녕하세요?]

 

1.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실 것이 그 칠백 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다.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아기로 태어나실 것이며 아들일 것이며 그는 우리에게 대속물로 주신바 되었고 그는 왕이 될 것이며 그는 곧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평강의 왕이라 일컬어질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것이 칠백 년 뒤 신약에서 성취된다. 눅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찬 112) 그 맑고 환한 밤중에 뭇 천사 내려와 그 손에 비파 들고서 다 찬송하기를 평강의 왕이 오시니 다 평안하여라 그 소란하던 세상이 다 고요하도다.

그 순간 정말 평강, 평안, 평화가 왔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왔다. 동방박사들에게 왔다. 베들레헴 지경 밖의 목자들에게 왔다. 성전에서 메시야를 기다리던 시므온과 안나에게 왔다. 그는 정말 인류가 오래 기다리던 메시야 ‘평강의 왕’이었다. 그가 성인이 되어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평강은 더 잘 나타났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부터 시작하여 나병환자를 고치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2만 명을 먹이고도 남은 것이 12광주리나 되었다. 더구나 그의 말씀은 모든 서기관과 같지 아니하였다. 하나님 말씀, 진리를 완벽하게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는 실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이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시고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의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는(사61:1-3)’ 평강이다.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으며,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게 하며, 구원의 옷을 입히시며 신부가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시며,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뿌린 것을 움돋게 함같이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는(사61:4-11)’ 평강이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마11:4-5)’ 평강이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히 사는(요6:53-58)’ 평강이다. (찬96)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2. 안녕하세요? 여러분은 평강한가? 예수님이 우리로 안녕(평강)하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죽기까지 하셨는데 우리가 안녕(평강)치 못하면 어떻게 하나! 빌립보교회는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지역에 있는 도시다. 거기에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교회가 생겼는데 가정교회요 핍박이 많았고 가난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좋았고 바울의 선교사업에 적극 동참했으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구제도 많이 하는 교회였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썼다.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핍박이 심하고 가난한 중에서 기뻐하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 때문에. 우리는 지금 기뻐하며 사는가? 염려 근심이 많지 않은가? 핍박도 없고 가난도 없는데 왜 기뻐하지 않는지? 예수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를 조심하자. 예수님 계시면 그의 평강이 우리를 주장할 것이다. 세상을 보고, 문제를 보고, 나를 보면, 근심 염려 끝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 보면, 근심 끝-기쁨 시작!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립보 교회는 가난했으나 풍성한 구제(연보)를 했다. 어떻게 가능했나? 자기 주머니 보지 않고 예수님 보니까.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신 예수님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 또 하나 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잠시 잠간 후면 다 주 앞에서 설 터인데 물질에 매이지 말고, 물질 가지고 있으라고 주신 것 아니다 쓰라고 주신 것이다 주께서 가까우신데 왜 가지고 있냐? 는 말씀이다.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모든 지각에 뛰어난’ 이란 ‘우리의 이성이나 감정을 뛰어넘는 신비한’ 이란 뜻이다. 문제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 보고, 주머니 계산하지 말고 예수님 따라 하면, 하나님의 막강한 평강이 신비하게 우리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할렐루야! 이건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닉 부이치치. ‘희망 전도사’. 테트라 어멜리아 선천적 질병으로 팔다리 없이 작은 왼발에 발가락 2개를 가지고 태어남. 자살충동에 시달릴 때 요한복음9장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 이야기를 읽고 자기가 소중한 사람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신앙을 가지자 수영 줄넘기 골프 농구 해냈고 호주 그리피스 대학에서 회계학 재무학 복수전공. 미 로스앤젤스에서 ‘수족 없는 삶’ 단체 조직. 전세계 29개국 다니며 ‘희망 바이러스’를 퍼뜨린다. ‘저는 팔다리가 없지만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피조물이니까요. 여러분도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나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믿고 늘 감사드립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자살했다면 오늘날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쳤겠습니까?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참고 깜박깜박 꺼져가는 불꽃을 부여잡고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장애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성공’이라고 말한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합니다. 오히려 가진 것이 많아 더 외롭고 어두운 세상입니다.’ ‘하나님께 사랑과 행복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진리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호레시오 스패포드. 세 딸을 한꺼번에 바다에서 잃었다. 그 바다 곁을 지날 때 그의 마음에는 바다같이 큰 고통이 덮쳐왔다. 그때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찬413)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던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마음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새 학기를 맞은 학생들! 봄을 맞이하는 청년 직장인 부녀들! 이 봄이 잔인할 것인가?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사울에게 임한 성령님

유민용목사 / 행전 9:8-11, 18, 고후 12:9

성령강림후 세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사울에게 임하신 성령’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 스데반 순교 사건에서 잠시 등장한 사울은 그 이후에도 흩어진 기독교인들을 잡아오기 위해서 열심을 내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다른 지역의 다메섹까지 가기 위한 법적 효력이 있는 공문까지 청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의 거리는 200km이상 떨어진 지역인데도, 바울은 다메섹까지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을 섭니다.

사울이 이렇게까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율법과 전통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여겼으며, 기독교 신앙이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교의 율법에 도전한다고 느껴 강하게 분노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전파하였을때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는 사람들이 경계대상이었고,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을 우려하여 서둘러 가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이 태어난 곳은 길리기아 다소지역입니다. 다소지역은 교통과 상업, 교육이 발달한 도시로 로마 제국 지방 행정수도였습니다. 바울은 태어나면서 부터 로마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행22:39) 그의 아버지는 텐트를 만드는 직업이었으니, 과거에 1세대가 미국에 와서 힘든 일들을 하면서 2세대를 키웠던 것처럼 바울은 다소지역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 부터 유대 히브리 문화와 로마식 헬라 문화인 이중 문화를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그의 이름에서 볼 수 있는데요. 바울이라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 하나님께 묻다’라는 뜻이며이고,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 으로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9장은 사울의 회심사건과 성령의 통한 신비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신비는 유대교를 뛰어넘어서 기독교 복음이 온 세상을 향해 가게 되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이 추구하던 유대교 신학을 어떻게 내려 놓게 하셨고,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바울의 마음 중심에 어떻게 자리 잡게 하는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내가 끝난 자리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만나게 됩니다.

4 사울은 그만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다. 그때 한 음성이 사울에게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5 사울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 안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7 사울과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들에게는 단지 소리만 들렸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행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성 안으로 들어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지냈다.

 

다메섹에서 주님의 빛을 본 후에 사울은 시력을 잃게 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사울에게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다메섹까지 다른 사람의 손을 의지해서 걸어야만 했습니다. 스스로 걸을 수 조차 없는 지경이 된 것이지요. 평생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 두려움과 불안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을것입니다. 바울은 그 시간 동안에 지난 날들을 회고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듣지 마시고, 바울이 처한 상황속으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느날 시력을 잃었다고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평생토록 시력이 회복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잠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로마 시민권, 가말리엘의 학식,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는 자부심도 철저하게 낮아졌을 것입니다. 그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인생이 망가진 것입니다. 이 일이 바로 다메섹에서 주님의 빛을 경험한 바울의 상황이었습니다. 주의 빛으로 나아가게 되면 새 힘이 임하고 회복이 되어야 할텐데 바울은 오히려 어떤 것도 할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가 믿었던 모든 기반이 흔들리는 것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 통계를 보니까 ‘실패, 거절, 고독,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기피하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공 신화에만 마음을 기웃거리며 동경한다면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하는 것이지요. 복음은 매우 단순합니다.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이 오심으로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이제껏 믿고 의지하던 능력이 나의 능력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늘 희망적인 것들만 찾아오지 않습니다. 때때로 삶의 의욕이 없는 날도 있고, 절망적인 상황속에 놓여질 때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인생길을 걷게 될때도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인생길 위에서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부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는 바울을 위해 이미 다메섹에 제자 아나니아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10 한편, 다메섹에는 ‘아나니아’라는 한 제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주님께서 환상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 그를 부르셨다. “아나니아야!” 그가 대답했다. “예, 주님!” 11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일어나 ‘곧은 거리’로 가서 ‘유다’라는 사람의 집을 찾아, 거기서 다소 사람 사울을 만나라. 그는 지금 거기서 기도하고 있다.

며칠전만 해도 의기양양하던 사울이 유다 사람의 집에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눈이 뜨인 사람과 뜨이지 않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일평생 본인의 눈으로 보는 세계만이 전부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과 기도로 영적인 눈을 뜬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눈을 뜬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면 우리를 통해 세상속에 아나니아가 늘어 날것입니다. 다른 세계를 본 사람들에게는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아나니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이전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려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참된 길을 알려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16 그 사람이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지, 내가 그 사람에게 보여 줄 것이다. 17 “사울 형제여, 당신이 이리로 오는 도중 당신에게 나타나셨던 주 예수께서 당신을 다시 보게 하고 또 당신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 저를 여기 보내셨습니다.” 18 바로 그 순간,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들이 떨어지더니, 다시 앞을 보게 되었다. 사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즉시 세례를 받았다.

바울에게 예수가 달리신 십자가는 큰 장애물이었지만 세례를 받고 성령이 충만해 지자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게 되는 고난은 말할수 없는 축복이 됩니다. 내 안에 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증해 가는 것입니다.

15 그러나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일어나, 가거라! 그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그들의 왕들에게,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내가 특별히 선택한 그릇이다.

 

내가 특별히 선택한 그릇이다

 

주님은 사울을 쓰시기 위해서 다메섹에서 그의 이름을 2번이나 부르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사울이라는 이름을 얼마나 많이 들고 자랐겠습니까?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부르는 그 이름은 자신의 이름이 불려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이 불려진 것입니다. 사울이 그날 들은 소리는 그동안 사울이 박해하는 예수의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그릇은 인생이라는 나를 위한 욕망을 담는 일에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말씀을 채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지금 기도하는 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사람이고, 믿는 자들을 결박할 권한을 가지고 온 사람이 아니냐는 대답에 재차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을 보면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의 빛을 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말씀을 전하고 고난이 오면 고난을 당하고 핍박이 오면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길을 걷습니다. 이방인들을 위해 교회를 세우며 유대인로 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모함을 당하고 무고한 재판을 받는 시간들을 경험합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행 22:30) 이후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 서게 됩니다.(행 24:23) 세번째 재판은 로마 신임 총독이 된 베스도 앞에서의 재판입니다.(행 25:1-12) 마지막으로 아그립바 왕 앞에 서게 됩니다.(행 26:1-32) 산헤드린 공의회,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삶을 간증하고, 결국 로마를 향하는 배에 죄수의 신분으로 호송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난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예언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바울이 독사에 물려 죽을뻔한 경험도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가 고난을 피해가며 사역을 했다면 과연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말씀이 이뤄졌을까요? 바울이 지낸 감옥에서의 시간들은 돌이켜 보면 바울의 신변을 보호하는 가장 안전한 곳이 되어 주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며 바울의 서신들을 남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영에 이끌린 바울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방인과 임금들을 만나게 됩니다.

영화 The Passion of Christ의 감독이며, 배우인 멜 깁슨은 이 작품에 배우로 출연하지 않지만 딱 한번 영화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 등장을 합니다. 얼굴을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을 땅에 눕히고 대못을 손에 들고 못박은 로마 군병의 손이 바로 멜 깁슨의 손이라고 합니다. 그는 그 장면을 통해 자신이 예수를 못박아 죽인 장본인이라는 것을 영화속에 표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영화사에서는 ‘예수의 수난 12시간 이야기’ 만으로 흥행할수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는 성령이 나에게 임하셨고 주님은 나에게 복음 전파의 도구로 이 영화를 만들기를 명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개봉 첫날부터 극장마다 부흥회가 시작되고, 강도와 살인범이 영화를 보고 회개하고 자수했고, 낙심자들이 다시 회개하며, 주께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멜깁슨은 영화 상영을 반대하는 유대 단체들의 거친 질문들 앞에서 “여러분 내가 그분을 죽였습니다. 저의 죄가 그분을 돌아가시게 했고, 저의 죄 때문에 수난을 받으셨다”고 인터뷰 합니다. 예수를 부인하고 나로 살아가는 삶의 죄앞에 놓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로 그 사랑을 확증하신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고난은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사랑의 줄에 매인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나의 약함은 주님의 능력이 되십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성서학자들은 육체의 가시가 간질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 육체의 가시가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점이 오히려 바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해 지는 도구가 됨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힘의 위험성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애 동안에 자신의 힘을 내려놓는 일에 마음을 쏟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힘으로 저항하지 않고 무능한 자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세상의 힘으로 보면 예수가 달린 십자가는 실패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위대한 실패’가 되었습니다. 저는 실패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공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과 실패로 복음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복음의 결과일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고난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이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히 11:10-12)

 

우리가 가지고 있는것중에 영원한것이 있을까요? 물질도 시간도 명예도 기억력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만 영원합니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처럼 우리 삶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세번이나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문제를 없애 주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의사 누가라는 동역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갖추어야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약함을 고백할 때에 담겨집니다. 우리의 약함은 믿음의 양약이 되어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여러분은 언제 더 간절히 기도하십니까? 삶의 고통이 찾아오고 힘들 때 절실하게 기도하게 되지 않습니까? 내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우리는 그 힘을 의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동서남북이 가로막혀 길이 보이지 않고, 벼랑끝에 서게 될 때에 그제서야 하나님을 찾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삶의 가시들이 제거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십시요.

 

약함의 자리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사람들은 평생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오늘도 빚어지고 다듬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삶이라는 대본을 받았습니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선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고 내 삶에 함께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다 보면 우리안에 아픈 가시의 상처도 아물게 됩니다. 내가 먼저 기도의 사람이 되면 됩니다.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게 하는 분이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힘든 광야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때에도 언제나 그러하셨듯 우리의 손 잡아 주시고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인도하심이 망망한 바다의 끝, 외로운 광야의 자리에도 변함없이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