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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60710 / 사울에게 보내진 아나니아 / 행 9:10-19a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6.06.20|조회수47 목록 댓글 0

사울에게 보내진 아나니아

행 9:10-19a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a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행 9:10-19 / 다메섹에는 아나니아라는 한 신도가 살고 있었다. 주님이 신비로운 환상으로 그에게 나타나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셨다. `예, 주님!' 하고 그가 대답하자 11) 주님이 말씀하셨다. `곧은 거리'로 가서 유다라는 사람의 집을 찾아라. 그 집에 다소 사람 사울이 와서 지금 기도를 하고 있다. 12) 내가 환상 가운데 그에게 나타나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손을 얹으면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일러두었다.' 13) 아나니아가 말하였다. `하지만 주님, 저는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신도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가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14) 게다가 그는 이 다메섹에 있는 신도들을 모조리 체포할 권한이 있는 영장을 대제사장에게서 받아 왔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15)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다. `가서 내가 시킨 대로 하여라. 사울은 내 복음을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과 그 왕들에게 전파시키고자 내가 택한 그릇이다. 16) 그가 나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가를 일러주겠다.' 17) 그래서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가서 그에게 손을 얹고 말하였다. `사울 형제여, 당신이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나타나셨던 주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당신이 충만히 성령을 받고 또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18) 그러자 그 순간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사울은 그 자리에서 침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되찾았다.

 

본 단락은 청년 사울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10-14) 당시 다메섹에는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예수님의 숨은 제자가 있었습니다(22:12). 아나니아입니다. 예수님은 환상을 통해 그에게 해야 할 일을 일러주십니다.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지금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게다가 그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의 기도로 다시 눈을 뜨게 해 주실 것도 이미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 일은 아나니아에게도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주의 교회에 행한 사울의 만행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거라 내가 택한 그릇이다(15-16)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은 이미 이방 사람들 곧 모든 세상민족들과 여러 왕(행 26:1-32) 집권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롬 9:1-3)앞에서 예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그릇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택한 나의 그릇”이란 말은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소명대로 살려면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사울이 기독교인들에게 해를 입혔던 것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당하게 될 의로운 고난을 뜻합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16:24; 막 8:34; 눅 9:23).

 

그에게 안수하여(17-19a)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사울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미움과 증오심을 넘어 그에게 손을 얹고 기도를 했습니다. 이때 사울을 형제라고 부른 것은 사울의 모든 악한 과거가 용서되고 그를 자신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선언입니다. 그러고 사울의 눈을 멀게 하신 주님께서 다시 보게 하셨습니다.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갔다는 표현은 사울의 눈을 멀게 한 실제적인 원인이 제거되는 묘사일 것입니다. 현대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백내장의 막이 벗겨지는 과정하고 같은 원리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사울의 선교사역이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임과 동시에 사울에게도 사도적 능력이 부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안수는 성령이 임하는 방편으로 이해되었습니다(행 8:17). 이 일로 사울은 스스로의 외적, 내적 갈등과 고뇌의 종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고백하는 세례를 받습니다.

 

적용: 부정적 선입관, 증오의 감정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한 아나니아를 통해서 당신은 어떤 영적인 교훈을 배우며, 증오의 감정을 극복하는 힘과 지혜는 무엇입니까?

 

D.L 무디가 설교 중에 성도들에게 컵을 들어 보이며 말했습니다. “이 컵 안에는 공기가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컵 안의 공기를 어떻게 하면 다 뽑아 낼 수 있을까요?”라고 묻자, 뚜껑을 꼭 닫고 공기펌프로 뽑으면 된다는 등 여러가지 제안들이 나왔습니다. 무디는 컵이 진공상태가 되면 깨어져 버린다는 것 등을 알려준 다음 주전자에 든 물을 컵에 가득 채우며 “자 보십시오. 컵 안에 공기는 조금도 없습니다. 이와같이 헛되고 공허한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야만 가능하답니다.” 당신의 마음은 비워져 있지 않습니까?

 

 

호크마 주석

=====9:10

그 때에 - 헬라어 본문에는 특정한 시간을 지시하는 접속사가 없고 이야기의 진행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접속사 '데'(* , '그러나')만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데'를 생략하든지 아니면 '한편'이란 접속사로 연결시키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 - '제자'로 언급되는 '아나니아'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흔한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1;23:2). 이 이름의 히브리적 본래 의미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 이름의 뜻에 걸맞게 아나니아는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경건한 자였다(22:12). 그런데 그가 어데게 제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한편 '제자'는 기독교인에 대한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의 하나다(1절주석 참조). 22:12을 볼때 아나니아가 다메섹에 오랫동안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루살렘 박해 때 피신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오순절 때 기독교인이 되었거나(2:5-11) 아니면 그 이전 예수의 활동 당시 예수를 따랐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짐작된다. 환상(幻像)중에 불러 - 본 구절은 아나니아의 구약적인 계시 경험(삼상 3:1-9)에대한 진술이다. 이 언급은 사실적 묘사라기 보다 신적 계시에 대한 문학적 묘사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환상은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으로서 계시 전달자에게 실제적으로 일어난다. 본절에서 아나니아가 본 환상은 (1) 사울을 택하기 위한 주의 치밀한 섭리를 강조하며, (2) 아직도 의구심에 사로 잡혀 있을 사울에게 증거가 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예수의 부름에 대한 아나니아의 대답은 구약적인 형식을 띠고 있다(창 22:1;삼상 3:4). 따라서 본절에서 사울의 소명 사건을 구약 시대의소명 사건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9:11

직가라...가서 - 예수가 가라고 지시한 거리 '직가'(直街)는 동서로 곧게 뻗은 거리로서(Vincent)현재는 '다르발 무스타킴'(Darbal Mustaqim)이라고 불리어진다.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 9절에서 언급된 사울의 금식 행위를 예수는 기도하는 중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사울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깊은 고민과함께 절박한 기도를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9절 주석 참조)=====9: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보았느니라 - 본 구절은 아나니아가 자신에게 와서 안수를 통해 자신의 눈을 뜨게 하여 줄 것이라는 사실을 바울이 환상으로 이미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사울에게 아나니아의 일을 보여주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사울은 두번째 환상을 본 셈이된다. 이같이 치밀한 과정을 통해 사울의 회심시키는 사실을 볼 때 사울에 대한 예수의 깊은 애착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의 철저한 유대교적 사상과 기독교를 탄압하였던 광신적 열정만큼이나 사울의 회심은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가 겪고있는 깊은 고뇌와 예수의 집요한 노력이 사울의 회심을 가능케 하였다.

 

=====9:13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 본 구절은 아나니아가 사울을 직접적으로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또한 본 구절은 아나니아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많은 교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아나니아는 이미 이전에부터 있어 왔던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간과될 수 없는 사실은 사울의 악명이 이방 지역에까지알려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잔악하고 반(反) 기독교적인 사울의 행위에 대한 강조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나니아에게 있어서 악명 높은 사울에게 안수하라는예수의 지시는 충격적인 사실로 이해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사울의 회심이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임을 강조하는 효과를 지닌다. 주의 성도 - 이말은 기독교인에 대한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 하나로 '구별된 거룩한 자'를 의미한다. 32절과 41절에서는 단순히 '성도'라고 언급하고 있다. 본문에서 '주'라고 번역된 '당신'(* , 수)이라는 표현은 성도와 예수와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이는 성도에 대한 박해가 예수에 대한 핍박이며(5절) 따라서 사울이 예수와 적대적 관계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예수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4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9:14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 - 기독교인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다. 명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절 주석을 참조하라. 누가는 기독교인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통해서 이야기의 지루함을 피할 분 더러기독교인에 대한 당시의 다양한 이해를 소개하고 있다.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것은 그가 구원받았음을 의미한다(몸 10:13). 그렇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성도를 의미한다.

 

=====9:15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 13, 14절에서 아나니아의 입을 통해 사울의 반 기독교적 행위가 언급된 후 예수로부터 사울의 소명(召命)이 극적으로 선포되고 있다. 사울의 선교 대상이 크게 세 가지로 언급되었다. (1) 이방인, 여기서 예수는 유대 이외의 모든 나라에 대한 선교를 첫번째 관심사로 언급하고 있다. 사울이 이방인에 대해 배타적이며 광신적인 유대인이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소명은 사울의 회심에 걸맞는 매우 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2) 임금. 이는 세속적인 권력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그립바 왕(26장), 가이사(딤후 4:16, 17)등 집권자들 앞에서 증언하였던 사울의 선교 활동을 통해서 이 소명이 실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이스라엘 자손들. 사울은 자기 민족에대한 깊은 애정을 지녔으며 회심 후에도 그 애정을 잃지 않았다(롬 9:1, 2). 그렇기때문에 그는 자기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사울은 모든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다. 다만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 유대인을상대로 전도 활동을 했으므로 사울 자신은 이방인을 상대로 그 사역을 감당했다(갈2:8). 택한 나의 그릇 - 선택된 그릇에 대한 히브리적 표현법으로서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렘 22:28;51:34). 사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서 하나님께 선택된자임을 의미한다(롬 1:1;갈 1:15).

 

=====9:16

그가...받아야 할 것 - 본 구절은 복음전파를 위한 소명과 함께 사울이 겪어야 할 고난에 대한 예언으로서그 고난이 필연적인 것으로서 언급된다. 이 같은 예고는 13절에서 언급된 아나니아의말과 사응하는 표현으로 사울이 기독교인들에게 해를 입혔던 것처럼 자신도 해를 받게될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해'(害)는 고난의 의미로서 보복의 차원이 아니다. 즉 기독교인이 당하게 될 의로운 고난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따라서 바울은 예수를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는 예수의명령을(마 16:24;막 8:34;눅 9:23;14:26, 27) 실천해야 했다.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 '보이리라'로 번역된 '휘포데잎소'(* )는'지시하다', '증거하다'의 의미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사울에게 보이시겠다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앞으로의 겪어나갈 실제적인 고난을 말한다. 즉 사울은 환상을통해서 자신이 예수를 위해 어떠한 고난을 얼마나 당하게 될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기보다는 실제로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것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9:17

형제 사울아 - 아나니아는 예수의 지시에 따라 사울을 방문하여 안수하고는 '형제'라는 호칭으로사울을 부르고 있다. 특히 '형제'(* , 아델포스)라는 칭호가 암시하는바 그 의미는 매우 크다. 왜냐하면 이미 아나니아는 사울의 반 기독교적인 행위로 인해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13, 14절). 따라서 여기서 '형제'라는 호칭은 사울의 모든 악한 과거가 용서되고 사울을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선언하는 것이라고보아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 아나니아의 이 말은 사울의 선교 활동이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임과 사울에게도 사도적 능력이 부여됨 그리고 그가 참된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안수는 성령이 임하는 방편으로 이해된다(8:17). 본절에서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말을 했으나 사울이성령으로 충만케 되었는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사울의 눈이 치료되어 세례받은 사실과 이 후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 성령의 충만을 받았을 것으로짐작된다.

 

=====9:18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 사울이 다시 보게 된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가 보지 못하게 된 원인이 제거됨을 묘사하고 있늠 본문은 의학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Lumby, Haenchen, Hervey). 혹자는이 기적을 사울이 경험한 주관적 느낌이나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한다(Weiss, Barnes).그러나 이 사건은 물리적으로 나타난 사실적 현상이다(alford, Bengel, Knowling). 왜냐하면 상징적 의미만을 전달하려 했다면 단순히 '눈을 뜨게 되었다'는 표현만을 사용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누가는 사울의 눈이 치유된 기적이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며그 사건을 사울의 부름받음에 대한 증거로 기록했던 것이다 세례를 받고 - 기독교인 됨에 대한 의식으로서 사울은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게되는데 이 세례가 빌립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에게 베풀었던 것과(8:36-38)같은 형식을 취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혹자는 다메섹에 침례할만한 강이 없었다는 점에서 볼 때 침례가 행해질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현대에 행해지는 형식의간단한 예식을 치렀을 것이라(Lenski)고 말한다. 또한 어떤 학자는 다메섹에 있는 유다의 목욕탕에서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Earn). 그러나 이러한 추정들은 확실한 근거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본절에서 누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요점은 사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믿음의 공동체에 가입했다는 사실이다.

 

=====9:19

강건하여지니라 - 사울이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졌다는 본문은 9절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사울의 금식이 끝났다는 단순한 의미 외에 사울의 내적 갈등과 고뇌의 종결을 의미한다. 뿐만아니라 본 구절은 사울의 변화된 새로운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강건하여지니라'라는 단어는 사울의 변화가 매우 긍정적으로 나타난 것임을 암시한다.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 사울이 다메섹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과 함께 지냈다는 사실은 그가 기독교인으로 변화되었음을 암시하며 또한 그가 다메섹의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기독교인으로 인정받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회심과선교시작 사이에 나타난 며칠간의 공백 기간에 대한 갈 1:16, 17과의 차이점이다. 즉본절과 20절에는 사울이 회심한 후 곧바로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했으며 여러 날 후에루살렘으로 간 것으로 묘사된 반면 갈 1:16, 17에서는 그가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다메섹으로 돌아왔다고 진술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조금씩 견해가다르다. 혹자는 회심 직후 아라비아를 다녀와서 다메섹에서 머물렀다고 주장한다(Pearson).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어떤 학자들은 사울이 23절에 언급된 '여러 날' 이후에 아라비아로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Neander, Meyer). 그 외에 올스하우젠(Olshausen) 같은 학자는 25절 사건 이후에 사울이 아라비아로 갔을 것으로추정한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과 바울 자신의 진술을 문자적으로 일치시킬 필요가 없다. 누가는 사울이 회심 후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까지의 일을 간략하게 기록한 반면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함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햇수를 밝힐 필요가 있었기때문이다. 따라서 본절 이후부터 26절 사이에는 3년이란 기간이 걸렸으며 사울은 이동안에도 복음 전파를 했을 것이다.

 

 

< 설 교 >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행 9:10-12 / 양향모 목사

성경에는 아주 좋은 일을 많이 한 유명한 사람의 이야기도 기록이 되어있고 간혹 별로 한 일이 없이 잠깐 등장하였다가 사라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한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는 반면에 스쳐지나가는 사람들도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나니아 라는 사람도 그냥 잠깐 스쳐가는 정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성경에는 기록이 되지는 않았지만 복음을 위해서 애를 많이 쓴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나니아 같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냥 왔다가 우연히 이런 일을 하고 사라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귀한 일꾼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오는 도중 예수님의 빛을 보고 눈이 멀어서 먹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을 때 그에게 안수해서 눈을 뜨게 하고 세례를 베풀어서 세계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한 사람입니다. 교회사에 있어서 엄청난 일을 할 사울을 복음의 일꾼으로 세우는 일을 한 사람입니다.

우리들도 지금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별로 한 일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다 쓰임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큰일을 한 사람만 쳐다보면 우리같이 보통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은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큰 일만 하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눈에 보이는 큰일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알아보지도 못하고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아주 작은 일을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나라의 일은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다 소중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에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그 때”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미리 계획하시고 그 계획대로 진행해나가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지금 이 때는 유대교에 충실했던 사울이 기독교의 훌륭한 일꾼으로 바뀌는 중요한 때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의 빛을 보고 음성을 듣고 장님이 되었다가 다시 눈을 뜨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중요한 때입니다.

단순히 사울 한 사람의 변화가 아니라 그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유다에서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아주 중요한 때입니다. 이런 중요한 때에 이런 중요한 일로 쓰임을 받은 사람이 아나니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때를 볼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도 이런 중요한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기회라고 합니다. 이런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잘 잡고 나가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고 기회가 왔어도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은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도 이런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을 기회를 주십니다. 기회가 왔을 때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제자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의 열두제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열두 제자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제자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다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언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자 예루살렘에 살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메섹으로 피난을 왔다고 했는데 그 때 피난 온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셨을 때 그 때 이미 믿고 제자가 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보다 후에 오순절 때 성령이 임하시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 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이름인데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을 가진 이름들이 많이 있지만 당시의 유대인들도 많이 쓰는 이름이었습니다. 모두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나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의 다메섹 사람 아니니아가 있고 우리가 앞서 배운 사도행전 5장에 등장하는 아나나아와 삽비라 부부의 아나니아입니다. 그리고 23장에 등장하는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이 세 사람은 다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은혜 아래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각각 다른 삶을 산 사람입니다. 이 세 사람이 아주 방향이 다른 세 가지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도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예수님을 몰라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을 미혹하는 이단의 무리라고 로마 총독에게 고발을 한 사람입니다. 후일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반란 시에 친 로마파로 몰려 유대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은혜 가운데서 살면서도 그 은혜를 잘 모르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벌을 받아 죽임을 당한 사람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는 그런 특별한 시기에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특별한 시기에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쓸 수 있는 재물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특별한 기회에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충성을 다하지 못해서 벌을 받고 죽임을 당한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부부의 죄가 헌금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헌금보다는 진실한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진실한 마음입니다. 위대한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믿음의 고백이 진실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까지 다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거짓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벽한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일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잘못 된 것 그대로 다 보이면 됩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부족한대로 나오시면 됩니다.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이며 그 은혜 안에 사는 사람으로서 모범적인 사람입니다. 22장에 보면 바울이 아나니아를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행22:1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라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만 방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을 하는 사람이며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10절 하반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환상 중에 아나니아를 부르셨습니다. 그 때 아나니아가 대답을 하기를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환상 중에”서 ‘환상’이란 실제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꿈이나 상상 속에서 어떤 형상을 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실지 눈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실지적으로 보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그 무엇을 실제적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 환상 중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나니아야 라고 부르시니까 아니나아가 바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런 경험을 많이 했든지 아니면 언제나 그런 대답을 할 준비를 하고 살았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환상 중에라도 자주 나타나시지는 않으시기 때문에 전에 경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늘 그런 대답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늘 기도로 묵상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에 언제라도 부르면 대답할 준비를 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늘 이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언젠가 아주 중요한 일에 한두 번은 쓰시려고 준비하실 때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환상으로 어떤 기적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시지는 않으시겠지만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고백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는데 그것을 모르고 그냥 지나가거나 모른 체하고 그냥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갚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 우리의 목숨까지 다 내어놓는다고 해도 그 은혜를 갚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작은 심부름 하나 시키실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큰일에 아주 작은 역할을 주셨을 때 그 역할을 감당할 마음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무엇을 시킨다고 해서 우리가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다 준비를 하시고 우리는 그냥 아주 작은 힘만 가지고 따르면 됩니다. 나를 통해서 일은 하시되 하나님께서 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설교를 듣다가, 무슨 일을 하다가 문득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얼른 대답을 하십시오.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시고 순종을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시키시면 이런저런 핑계들을 많이 댑니다. 내가 하는 일이 너무나 소중하고 떠 이런저런 일이 너무나 바빠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음에 좀 한가해지면 이 복잡한 일이 끝나면 하겠다고 미룹니다.

인생이 그렇게 길지도 않고요 우리가 하는 일들이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어느 날 다 버리고 가야할 것들입니다. 내가 가진 지식 내가 가진 능력 내가 가진 재물 다 없어지고 말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신다고 할 때 대답하고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은혜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아서 엄청난 것들을 받았는데 평생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참 서글픈 삶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의 일들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그런 일들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다 두고 가야 하는 것들일 뿐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한번 이라도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그 명령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살피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세우는 소중한 일을 감당했습니다.

 

 

본문 11, 12절에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일어나서 직가라고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라는 사람의 집을 찾아서 그 집에 기도하고 있는 다소사람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아라. 그 사람이 지금 기도하는 중이다. 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 직가라는 거리는 헬라어를 뜻으로 번역을 한 말입니다. 헬라어로 유데이안(Εὐθεῖαν)이라는 거리인데 그 뜻이 직가 즉 곧은 거리라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길은 구불구불한 길들인데 여기만 쭉 뻗은 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현재 시리아 다메섹 즉 다마스쿠스에 이 곧은길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기도하고 있는 중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많은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다고 하니까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기도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정말로 기도같은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냥 시간을 따라서 사람들 눈에 보이도록 형식적으로 기도를 했다면 지금은 진심으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 뭘 구하는 기도를 했다면 지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모처럼 세상을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깜깜한 암흑 속에서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신다는 것을 알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모라보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인 죄가 얼마나 큰 죄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진짜 기도입니다. 내 욕심이나 채우려고 마음에 소원이나 아뢰고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세상 복을 바라고 하는 기도는 기도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그 분을 바라보고 그분의 뜻을 알고 그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는 기도가 진짜기도입니다. 이런 기도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직가로 가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기 사울이 기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기도하고 있는 사울을 일으켜 세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소중한 일을 담당하는 일꾼을 만들라는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아나니아의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사울 같은 사람이 그 귀한 사명을 감당하여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 아나니아에게 하신 명령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어진 명령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꾼을 세우고 파견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가르치고 이 복음의 진리를 바로 아는 사람을 많이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많은 설교와 가르침을 받고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감당할 때가 되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가진 이 복음운동을 더 힘 있게 전개할 일꾼들을 세우는 일에도 함을 써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동안 아동센터와 청소년 공부방을 통하여 많은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는 그들 중에서 복음의 일꾼을 양성해야 할 때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목회자훈련원을 세워서 운영하면서 많은 목회자들에게 이 복음운동을 전개하자고 호소하고 훈련을 시켰습니다. 이제는 더 적극적으로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알고 복음을 전하게 해야 합니다. 복음을 바로 알고 전하고자 하는 목회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힘을 주고 마음껏 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에도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귀한 일에 쓰임을 받는 아나니아와 같은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통해서 사울과 같은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라는 한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의 크신 일에 쓰임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아나니아의 이름의 뜻처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예라고 대답을 하시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귀한 일을 감당할 준비를 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이 열린 사람

이중표 목사 / 행 9:10-18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복받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복받은 예수를 믿고 그 복을 받으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볼 때마다 '복받은 성자 예수여 그 복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이런 고백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봐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복받은 예수를 보지 못하면 믿는 것이 허상이 됩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복있는 사람을 만나야 됩니다. 복받은 남편 만나야 일생동안 복있게 살고, 복있는 아내를 만나야 자기도 일생동안 행복하게 삽니다. 망할 사람 만나면 망하고 복있는 사람 만나면 안될 일도 잘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받은 사람을 만나야 그 은혜가 내게 옵니다. 은혜받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내 은혜까지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아무나 만나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복을 받는다고 할 때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예수님 곁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 복이 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나타난 많은 사람 중에 사도 바울은 예수 좋아하고 예수 사랑하고 예수님을 항상 흠모하고 살다가 가장 복을 많이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 믿고 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므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예수님과 함께 3년동안 동행하고 배우고 따르면서 예수님의 교훈도 받았고 인격적인 지도도 받았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죽음도 보았고 부활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았고, 예수님 곁에 있지도 않았고, 예수님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가장 예수를 정확히 알고 정확히 믿었고 예수 복을 정확히 받은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왜 그런 복을 받았는가?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가슴에 모셨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그를 이끌어 그의 생을 일관되게 살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 중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회심적 사건이라고도 말하고 사도 바울이 예수를 만나는 결정적인 체험의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원래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처형시키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날도 그가 살기가 등등해서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결박시켜 예루살렘으로 호송시키려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너무 강해서 땅에 거꾸러집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아 직가라고 하는 유다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3일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채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직가라고 하는 곳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다메섹에 있는 주님의 훌륭한 제자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아나니아야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 집에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으니 가서 기도해라" "오, 주여 들은 바로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해롭게 하고 또 이곳도 성도들을 결박하려고 온 자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자를 만날 수 있습니까" "아니다. 그 사람은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택한 그릇이니 두려워말고 가거라"

아나니아가 유다의 집에 들어갔을 때 사울이라는 청년이 보지도 못한채 3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얹고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때부터 일어나서 음식을 먹고 건강해졌습니다.

 

첫째,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20절)

사울이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순간부터 사도 바울로 바꾸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울이라는 한 청년의 눈을 멀게 하시고 또 눈을 뜨게 한 이후에 사도로 쓰임을 받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보게 됩니다.

눈을 멀게 하신 주님께서 다시 뜨게 하시고 새로운 눈을 열게 하십니다. 우리의 지나온 모든 과거의 사건 속에서 바르게 보지 못하던 눈을 주님께서 멀게 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하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니 이제 새로운 세상을 봅니다. 이제껏 자신이 살아오던 세상은 볼 가치가 없었습니다. 이제껏 눈은 떴으나 잘못 보고 살아온 자신의 생애, 가치관, 세계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그는 과거를 다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일어섰던 것입니다.

눈 먼 사람들이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눈은 떴으나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맹인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맹인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지식이 없으면 문맹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양심이 마비되면 눈먼 사람이 됩니다. 돈에 눈이 멀고, 권력에 눈이 멀고, 성공과 출세에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은 양심이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안이 먼 맹인입니다.

사울이 뜬 눈은 영적인 눈입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공경했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눈이 먼 자였습니다. 어떻게 눈이 먼 자였느냐?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이 먼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환상의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찌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사울이 기독교 박해하는 것을 끝내고 이제는 선교사로 바꾸어집니다. 자기 민족만 보던 사람이 이제는 세계를 보는 사람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영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영안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므로 그의 생애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이제 성경에서 예수를 봅니다. 이것이 바로 영안입니다. 성경에서 글자를 보는 것은 지식의 눈입니다. 안믿는 사람도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예수를 보는 사람이 영안이 열린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 속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엡 1:17-18)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목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고 세계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자신의 과거를 알고 미래를 알고 사는 목적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계시의 영을 받아야 하고 또 눈을 열어야 합니다. 육신의 눈도 자연만물을 보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눈을 떴어도 빛이 없으면 캄캄한 밤에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빛이 있어야 됩니다. 또 빛이 있어도 눈이 멀면 보지 못합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있어야 됩니다. 빛과 내 눈이 열려야 됩니다.

이와같이 신령한 눈이 열리기 위해서는 성령의 계시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육신의 눈은 태어날 때부터 보는 눈이요, 지식의 눈은 배움으로 열리는 눈이요, 영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성령이 밝혀주는 눈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예수를 만나는 것은 성령께서 비추어 주어야 되고, 열어 주어야 되고, 감동해야 되고, 내가 믿음으로 이것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성장해야 됩니다. 마치 육신의 눈도 태어날 때는 세상 만물만 봅니다. 그러다가 배우면서 지식을 봅니다. 자라면서 글을 통해서 선생님으로부터 지식의 눈이 열려가지고 세계를 보고 미래를 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양심의 눈이 떠져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알아보고, 돈을 가졌으나 남을 괴롭히지 아니하고 선하게 살도록 눈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요 17:3).

성령의 역사로 그를 점점 더 많이 아는 것이 성화입니다(빌 3:10).

부활하여 그를 완전히 아는 것이 영화입니다(고전 13:9-10).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처음에는 구원받은 신앙으로 확신을 갖습니다. 내가 믿으면서 계속 내 자신이 죽어가면서 성화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세상을 보면서 예수를 보고 내가 죽어서 부활된 영화로운 몸을 입을 때 하늘나라에서 가린 것 없이 온전히 하나님을 보는 경지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성화와, 영화로운 경지로 날마다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믿음의 눈을 뜨고 겨우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예수를 믿는 초보 단계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희미한 경지에서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 듣고 깨우쳐서 내 눈이 열리고 열려서 매사에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나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는 변화를 계속 이어가게 됩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도 소경이었습니다. 소경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는 구걸하기 위해서 거지로 여리고 성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 나사렛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지" 이 소리를 듣고 그는 그쪽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잠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거기에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더욱 더 소리높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발걸음을 돌이키면서 "저를 부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할 때 겉옷을 내팽개치고 뛰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을 때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 눈을 떴으니 얼마나 볼 것이 많겠습니까 자기 부모도 보고 싶고, 고향길도 보고 싶고, 뒷동산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는 즉시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가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그는 육신의 눈을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떴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은 세상을 보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을 뜨자마자 즉시로 예수를 좇았습니다. 소경 바디매오와 같이 우리의 눈이 열려 주님을 보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눈이란 예수님 보는 것이요, 예수님 찾아 좇는 눈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예수만 보이게 됩니다. 사울도 눈에서 비늘이 벗어지고 다메섹에 들어가 즉시 회당에 가서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눈을 열면 몸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주님을 따릅니다. 생각도 주님을 따릅니다. 내 모든 존재가 주님을 다르게 됩니다. 내 지식도, 내 명예도, 내 권세도, 내 학식도, 내 재산도 주님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바로 영안이 열린 자입니다.

성경 가운데 영안이 열린 위대한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영안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천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 예수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본 것입니다. 그는 모리아 산상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면서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 오실 예수, 그리고 결박시켜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이삭을 보면서 부활하실 예수를 미리 보았다는 것입니다.

최고 밝은 눈이 믿음의 눈입니다. 이 눈은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요, 이 눈은 하나님을 아는 눈입니다. 그러므로 최고 지식의 눈입니다. 그리고 가장 멀리보는 눈입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를 부르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보는 눈이요, 먼 미래를 보는 눈입니다. 죽음 이후까지 보는 눈입니다. 참으로 신비한 눈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자기를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보통 눈은 남을 보는 눈이지만 믿음의 눈은 자기를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다른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자기를 볼 수 있는 눈까지 열어주는 것이 영안입니다. 우리가 유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밖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은을 칠하면 거울이 자기를 보여줍니다.

자기를 보려면 거울 앞에 서야 합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그 속에서 자기의 허물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비젼도 영광스러운 존재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성경에서 그리스도 앞에 설 때만이 내 존재를 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나를 비교할 필요없습니다. 다윗과도 비교할 필요없습니다. 그도 죄인입니다. 거기에서 나를 본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나를 볼 때 내가 죄인 됨을 보며 주의 의를 봅니다. 주의 의가 나를 덮어줍니다. 그래서 나에게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면서 나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별세는 예수 안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그 안에서 나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나를 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안입니다.

지금 나에게 무슨 눈이 밝아졌는지요. 우리 자신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 돌아가서 남편을 보면서 주님을 봐야 합니다. 이것이 영안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비전은 허황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눈으로 현장에서 삶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보면서도 '내 아내이면서도 주님의 신부야 함부로 건드리면 내가 벼락을 맞지' 하고 두려운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별세의 영성을 가지면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보면서 은혜가 됩니다.

오늘날 분리된 거룩을 너무 가장하는 사람들은 꼭 거룩해야만 은혜가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별세의 영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고 이 속에 예수가 있으면 그 사람은 시장 바닥에 들어가도 그 속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유행가를 부르면 사단의 노래라고 정죄하지 말고 유행가를 들으면서도 '아, 내가 주님을 사랑해야지' 하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내 속에 들어가 내 눈을 열면 자식을 보면서도, 아내를 보면서도, 시어머니를 보면서도 시어머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 저 분이 내 남편을 낳아주신 분이야 저 분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아내가 될 수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사도 바울은 천하만물이 다 신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범신론의 얘기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눈을 뜨고 창조의 만물을 보면 하나님이 창조한 손길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벌레먹은 나무를 보고 그 속에서 탄식의 음성을 듣습니다.

 

둘째, 사랑의 눈이 열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눈은 떴으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율법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미워하고, 모든 악을 합리화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제 그가 과거의 눈뜨고 본 것은 더 이상 볼 가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봄으로 과거의 눈은 멀었고 그의 눈에서 편견과 아집과 살기의 비늘을 벗기니 사랑의 눈으로 섬김과 봉사, 용서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서 율법으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던 눈이 멀게 되고 그리스도의 영이 눈을 열게 하니 보는 것이 이전과 전혀 달랐습니다. 정죄하던 눈이 멀고 이제 이해하는 눈으로 바꾸어져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이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자기를 용서해 주신 것을 알았기에 용서하기를 힘썼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본다는 것은 자기 속에 좋은점이 있기 때문이요,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좋게 볼 수 있음에도 나쁘게 보는 것은 우리 눈에 비늘이 덮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늘이 벗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눈에 비늘이 덮혀있을 때는 정죄, 증오, 살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비늘이 벗겨지니 사람을 보는 눈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비늘이 있으면 그 비늘 때문에 볼 것을 잘 못봅니다. 사랑은 눈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비늘이 있으면 그 비늘 때문에 볼 것을 잘 못봅니다. 사랑은 눈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똑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을 보는 눈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이 됩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요인 가운데 성공자는 성공자의 장점을 바라보며 실패자는 실패자의 단점만 보고 산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긍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행복합니다. 화평합니다. 상대의 장점을 보고 칭찬할 때 자기 인격은 성숙하고 마음에 평안도 얻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어두운면만 보고 삽니다. 태양을 등지고 삽니다. 사랑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좋은 세상으로 느끼면서 행복하여집니다.

이 역사를 보면서 종말로 가는 망할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고 종말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보며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을 열어서 똑같은 세상을 보면서도 좋은 세상을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창조하신 세상이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끝까지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셋째, 소망의 눈이 열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하늘을 보는 사람이요, 하늘나라 영광을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니 보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았으며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던 마음이 변하여 긍휼의 정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청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에 그의 눈은 온통 예수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들어가도 예수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사형장에 가면서도 찬송하면서 그리스도를 보고 죽습니다.

그가 이런 삶에 위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은 스데반의 죽음을 그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 스데반의 옷을 들고 서 있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희한한 광경을 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쓰러지고 등이 깨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잠이 드는 모습을 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토록 아름답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신비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바울은 여기에서 스데반의 강한 영향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광경을 보고 '아, 내가 훌륭한 공부를 했다고 남들로부터 지성인이라는 말을 들었고 내가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한번도 남을 그렇게 용서하거나 남을 널리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 것 아닌가 저 분이야말로 위대한 분이구나! 저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분을 만난 자의 모습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스데반의 영성이 각인되어 스데반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제가 군에 입대해서 처음으로 휴가를 받아 고향집을 찾아갔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20리를 넘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군대에 입대해서 1년 있다가 처음으로 휴가를 받아서 고향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모아놓았던 건빵을 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용산역에 가서 야간 군용열차를 탔는데 군대에서 휴가 나오는 장병들과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 고향집이라는 것이 군대 막사만도 못합니다. 우리 고향집에 비하면 군대 막사는 고급입니다. 먹는 것도 군대가 좋지 집에 가도 별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휴가 얻었다고 좋다고 가느냐? 사랑하는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서, 짝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려고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나를 기다리지 않지만 나는 보고 싶어서 부모님에게는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고 달려갑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서 우물가에 나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물 긷는 것을 멀리서 보고 돌아갑니다. 가까이 가야 할 말도 없으니까요. 제가 고향을 찾아오려고 했던 것은 짝사랑하는 사람을 보려고 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흠모하고 사모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할 때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밤이 오면 집에 돌아가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요, 만약에 잠 자러 온다면 그곳은 하숙집이 되어버립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천국은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

소망은 곧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그의 전부였고 곧 행복이었습니다.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4-15)

어떤 분은 예수 믿고 손해 많이 보았다고 말합니다. 돈도 많이 잃었고 사업도 번번이 실패했고 돈도 많이 사기당했습니다. 악한 마음으로 싸워야 받을 수 있는데 교회에 와서 주일날 설교 들으면 용서하라고 하니까 그럴 수도 없고 예수 믿고 손해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 믿고 손해 많이 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 잘못 믿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큰 복을 받았습니다. 물질로는 잃어버린 것도 있지만 믿음어 얻었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세상의 명예를 잃었지만 성도라는 거룩한 명예를 얻었습니다. 생각하여 보니 잃은 것은 얻은 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렇습니다.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비교할 수 없는 은혜는 별세의 은혜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곧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의 은헤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곧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나깨나 그런 심정으로 살았기에 살아도 예수요, 죽어도 예수로 살았습니다. 이것으로 일생을 살았기에 그의 생애는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그의 눈은 말씀과 진리 속에서 그리스도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저 하늘나라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교자의 길로 가면서까지 한번도 자기 자신을 탄식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행복하고 영광스럽게 승리자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택한 그릇

사도행전 9:10-19 / 김상복 목사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쌔. 사도행전 9:10-19.

 

여러분 가운데 예수 믿기 전에 사도 바울처럼 핍박자였던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못 살게 굴고 교회를 못 가게 한다든지 교회 가는 것을 비난한 적이 있는 분들이 계시겠지요.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이와 반대로 핍박을 받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1부 예배 후에 어느 여자 분이 저에게 친구를 소개시켰습니다. “목사님, 제 친구가 오늘 교회에 처음 나왔습니다. 그런데 가족들 모르게 몰래 왔어요.” 교회 못 가게 야단을 치고 못 살게 구니까 몰래 왔다는 겁니다. 제가 그 분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 분의 발걸음이 천국에 가는 발걸음이 되게 하시고, 이 분 때문에 온 집안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모두 하나님을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바꾸는 비즈니스를 하십니다. 어느 영국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내 나이 이제 80이 되었는데 내 인생을 되돌아보니 실패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만일 내게 인생이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나는 전 생애를 바쳐서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헌신하겠다.” 사람이 변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변화 되는 것이 없습니다. 변화된 사람만이 변화를 일으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너무도 잘 하십니다.

저도 25세에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고부터 제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했어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보다 더 평화가 있고 기쁘고 행복해지니까 그 하나님을 좋아하게 되고 하나님을 따라다니다가 결국 목사가 되었어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 사람을 바꾸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어 제자가 되고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그 분의 모습과 가르침과 삶, 그 분의 가치관과 행동을 배워 꾸준히 예수님의 제자로 변화 되어가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십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예수를 만나서 구원을 받고, 천국이 안보이던 사람이 천국이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하던 사람이 그 말씀을 사모하면서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 때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더니”(10절). 사울이라는 아주 고약한 사람이 다메섹 어느 집에 들어가 있었는데 마침 아나니아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도 그 도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셨어요. 하나님과 친하면 참 좋은 것 중의 하나가 기도 가운데 환상으로, 또는 음성으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철저히 훈련 받아서 하나님과 또 예수님과 친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현실적으로 나타나셔서 여러분과 대화하시고 말씀해주시고 길을 보여주시고 힘과 용기를 주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본문에도 제자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환상 중에 불러 가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11&#8228;12절). 직가라는 거리, 유다라는 사람의 집, 다소 출신, 사울, 기도하는 중,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사울이 눈이 떠지는 환상을 보았다는 여섯 가지를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보시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지, 언제 할지, 어떻게 할지, 왜 해야 할지, 누구와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의 자세하고 아주 구체적인 부분에까지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 매일 하나님을 만나고, 매일 그 분과 대화하고, 매일 그 분의 성경을 통해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과 친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 분이 여러분의 삶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인도해 주실 수 있어요.

점을 치러 가면 점치는 사람은 “동쪽으로 가지 마시오.” 라고밖에 말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ㅅ’자 들어가는 성을 가진 사람하고 동업하지 마시오.” 뭐 그런 식이지요.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인도해주셔서 이렇게 여섯 가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이 여섯 가지가 한 사람에게 그대로 맞는 것은 수학의 확률적으로 보면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위대하신 능력의 하나님,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나니아처럼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친하고 예수님과 모든 것을 의논하고 그의 음성을 듣고 인도하심을 받아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직접 간섭하신다는 것을 체험하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제자에게 주시는 것들입니다.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고 기도하라는 말을 들은 아나니아는 “하나님! 어떻게 그 사람에게 가라고 하십니까? 그는 소문이 나쁘고 아주 악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슨 화를 입으라고 그러십니까?” 했습니다. 사울은 악한 사람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악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가두고 심지어 스데반까지 잡아다가 돌로 쳐서 죽이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돌로 칠 때 사울은 그것을 보면서 만족해하고 있었어요. 아주 독하고 악하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사람은 악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악한 사람을 싫어해요. 근처에 갔다가 물릴까봐 가능하면 멀리 있고 싶어 해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악한 사람에게 가까이 가라! 악한 사람이 변하려면 선한 사람이 가야해. 마귀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가야지. 가라!”고 하십니다. 사실 인간적으로는 찾아가는 것이 겁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가고 싶지 않겠지만 예수 믿는 사람, 착한 사람, 거룩한 사람,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야 악한 사람들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5절).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사울을 택했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독하고 악한 이 사람을 택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와 같은 충성된 제자를 사용하시고 또한 악한 자들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예수 믿는다고 여러분을 못 살게 구는 가족이나 이웃, 직장 동료들이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그 사람에게 예수 믿을 날이 가까이 온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악한 감정도, 선한 감정도 없고 예수를 믿든 안 믿든 아무 상관도 없는 무관심한 사람,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고 나빠하지도 않고 아무 반응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똑 부러질 시간이 다가온 사람입니다.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창백한 얼굴에 초조하고 긴장된 상태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습니다. “당신 왜 그렇게 길에서 서성이고 있소?” “나는 지옥에 가야 할 사람인데 마귀가 날 못 들어가게 합니다.” 이유는 마귀를 위해서 한 것이 없고 그렇다고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도 없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랍니다. 이런 사람은 마귀마저도 싫어하는 거예요. 화끈하게 자기만을 위해 일하던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지 하지 않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은 열정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6). 여러분, 이제 하나님을 알고 영원한 생명을 알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시길 바랍니다. 열정이 없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고 마귀조차 받아 주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뿐만이 아니라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열정이 있는 겁니다. 뜨거운 가슴이 있어요. 무엇을 해도 뜨거운 가슴으로 하는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감동, 감화시킵니다. 세상에서도 성공을 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의 가슴이 하나님을 향해 뜨거워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5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일에도 화끈한 사람을 택한다는 말입니다.

내년 2007년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길선주 장로를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분은 원래 불교도였고 유교도 많이 공부한 훌륭한 인물이었어요. 어느 정도 열심이었냐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매일 불공을 드렸어요. 그러던 분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매일 새벽 불공을 드리던 대로 새벽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한국교회에 새벽기도가 생겼습니다. 어느 집회에서 길 장로님이 자신의 과거 잘못을 깨닫고 회개를 했습니다. “나는 내 친구 부인의 돈 100불을 훔쳤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 통곡하며 자기 죄를 토했습니다. 거기에 자극 받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일어나 울며 온갖 죄를 다 회개하는 겁니다. 거기서 한국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오늘까지 이른 것입니다. 열정이 있었어요. 이전에 이런 열정이 있었고 이후에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아침 성찬예식을 통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잔과 떡이 여러분의 몸속에 들어 갈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슴을 새롭게, 뜨겁게 만들어 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갔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17절). 우리 속에는 누가 계시죠? 성령님이 계십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순간에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 사람 가슴 속에는 누구에게나 성령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특별히 아픈 사람이나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여러분의 손을 그 사람들의 몸에 대고 하십시오. 그러면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그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아나니아가 말했습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17절). “아, 그렇지 않아도 내 꿈에서 당신을 봤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온다고 했는데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군요.” 그리고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손을 얹어 기도하고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눈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고, 이해하지 못한 자를 이해하게 만드시고, 듣지 못한 사람들의 영적인 귀를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알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여러분의 손과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요, 여러분 속에 성령이 살아 계신데 그 성령께서 기도와 안수 가운데 나타나시는 것을 여러분이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울은 성령이 충만해져서 건강이 회복되고 다시 일어나 음식을 먹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핍박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변했습니다. 아나니아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를 통하여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님, 여러분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 속에 살아계십니다. 그 분을 통해서 또 여러분의 기도와 사역을 통해서 주위 사람들이 변화되어 복음을 위한 예수의 증인으로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예식을 합니다. 성찬은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을 받을 때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우리가 부활과 생명을 얻는 사람들이 되어서 아나니아처럼, 사도바울처럼 이 땅에서도 예수의 증인으로 쓰임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 하십시다. 기도 할 때 자신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무런 열정도 없이 냉랭하게 식은 나의 영혼에 성령을 보내셔서 다시 한 번 불을 질러 주시옵소서. 성찬을 받을 때 내 죄를 사하시고 내 안의 새로운 생명이 불 일듯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신령한 눈이 열린 사도 바울

최창훈 목사 / 행 9장 10-22절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복을 받으려면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예수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열 두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동행하며, 예수님의 교훈도 받았고, 인격적인 지도도 받았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죽음도 보았고, 부활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았고, 예수님 곁에 있지도 않았고, 예수님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가장 예수님를 정확히 알았고, 정확히 믿었고, 그리고 예수님의 복을 정확히 받은 사람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바울은 그날도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결박시켜 예루살렘으로 호송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는데 그때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비추어 눈이 멀어 그 자리에 거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릎을 꿇고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아 직가라고 하는 유다의 집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3일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 채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메섹에 있는 주님의 훌륭한 제자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아나니아야!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 집에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으니 가서 안수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말하기를

"주님! 제가 들은 바로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해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도 성도들을 결박하려고 온 사람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자를 만날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하며 두려워하는 그에게 주님께서는

"아니다. 그 사람은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택한 그릇이니 두려워 말고 가거라"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유다의 집에 들어가 소경이 되어 보지도 못한 채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고 있는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하고 안수하자 바울은 그때부터 일어나서 음식을 먹고 건강해졌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은 "신령한 눈이 열린 사도 바울"이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조명하여 하나님 앞에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은혜 받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바울은 믿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20절을 보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울이라는 한 청년의 눈을 멀게 하시고, 또 눈을 뜨게 한 이후에 사도로 쓰임을 받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눈은 떳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하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껏 눈은 떳으나 잘못보고 살아온 자신의 생애, 자신의 가치관, 그리고 자신의 세계관에 대하여 그는 과거를 다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일어섰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눈 먼 사람들에게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눈은 떳으나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눈은 떳으나 보지 못하는 맹인이 있고

육신의 눈은 떳으나 지식이 없는 맹인이 있고

육신의 눈은 떳으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영안이 먼 맹인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육신의 눈은 떳으나 돈에 눈이 멀고, 권력에 눈이 멀고, 성공과 출세에 양심의 눈이 먼 맹인이 있습니다.

 

여기 바울이 오늘 뜬눈은 영적인 눈입니다.

원래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공경했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요,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이 먼 맹인이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환상의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찌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본 사울은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 선교사로 바뀌어졌고, 자기 민족만 보던 사람이 이제는 세계의 열방을 보는 사람으로 변화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영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20절에 보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전파하니"라는 말씀은 이제 바울이 성경에서 예수를 보게 되어 영안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엡1:17-18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에 눈을 밝히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도 자연만물을 보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빛 되신 계시의 영 즉,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영안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에게 성령이 밝혀주시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사랑의 눈이 열렸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미워하고, 모든 악을 합리화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남으로서 그의 눈에서 편견과 아집과 살기의 비늘을 벗겨지고 사랑과 섬김과 봉사와 용서의 눈이 열렸습니다.

바울은 이제 이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율법으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던 눈이 멀게 되고,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하여 이해하는 눈으로 바꾸어져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본 다는 것은 자기 속에 좋은 점이 있기 때문이요, 이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가진 마음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든지 좋게 볼 수 있음에도 나쁘게 보는 것은 우리 눈에 비늘이 덮여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눈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똑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을 보는 눈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요인 가운데 성공하는 자는 성공자의 장점을 바라보지만 실패자는 실패자의 단점만 보고 산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긍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행복합니다. 화평합니다.

그리고 상대의 장점을 보고 칭찬할 때 자기 인격은 성숙되어 가고 자신의 마음에 평안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태양을 등지고 살 듯이 남의 어두운 면만 보고 삽니다.

그러나 사랑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창조하신 세상이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3. 바울은 소망의 눈이 열렸습니다

성도는 하늘을 보는 사람이요, 하늘나라 영광을 보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니 보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았으며

땅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며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던 마음이 변하여 긍휼의 정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청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에 그의 눈은 온통 예수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들어가도 예수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사형장에 가면서도 찬송하였으며, 그리스도를 보면서 죽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삶에 위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은 스데반의 죽음을 그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 스데반의 옷을 들고 그곳에 서 있던 사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등이 깨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주 예수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잠이 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토록 아름답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바울은 스데반의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이 광경을 보고 "아 내가 남들로부터 지성인이라는 말을 들었고 내가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한번도 남을 그렇게 용서하거나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 것이 아닌가? 저 분이야 말로 위대한 분이구나!"하고 생각을 하게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스데반의 영성이 각인되어 스데반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흠모하고 사모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때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천국은 아름다운 곳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곧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시17:14-15절을 보면 다윗은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의 전부였고, 행복이었으며,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눈은 말씀과 진리 속에서, 세상 속에서, 저 하늘나라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나깨나 그런 심정으로 살았기에 살아도 예수요, 죽어도 예수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교자의 길로 가면서까지 한번도 자기 자신을 탄식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행복하고 영광스럽게 승리자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 고현교회 성도님들에게도 임하여 일생을 영안이 열린 사람으로 사도바울처럼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가 택한 그릇이라!

행 9:10-22 / 崔 仁 根 牧師

오래 전 서부 아프리카 기니에 김진봉, 정순영선교사님을 찾아 갔을 때 32살의 예쁘장한 여자 선교사님을 보고 마음 깊이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도 우리들과 같은 때에 기니에 막 도착한 참이었습니다. 100내지는 110도까지 온도가 올라가고 물과 전기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척박한 그곳까지 처녀의 몸으로 선교하러 온 그 자체가 엄청난 감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잠깐 다니러 간 짧은 시간에도 그곳에서만은 살 수가 없겠다고 여겨졌는데 그곳에서 연약한 여성이 삶의 뿌리를 내리며 온전히 헌신하겠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왔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살기 좋은 조국과 부모형제를 버려두고 꽃 같은 처녀의 몸으로 그런 척박한 곳에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입증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의 집사였고 예수님을 증거하던 전도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을 섰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성도들을 잡아 죽이던 살인마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다는 좀처럼 믿기 어려운 사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삶의 주인공이 오늘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예 그를, “내가 택한 그릇이라.”고까지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행 9:15 /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 그는 믿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유대인들에게는 배신자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예수님께서 택하신 목적 그대로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일생을 다 바쳤던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2019년도 선교주일을 맞아서 오늘 우리들도 이렇게 한 번 가면 끝인 인생을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도전을 받고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 가는 은혜를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택한 그릇이라!

 

대한민국은 지금 2만 명이 넘는 선교사들을 전 세계에 보내는 선교대국이 되었습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님들을 파송하고 있고 지금도 젊은이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어 그들을 선교사로 훈련하는 훈련장이 부족하여 밀리는 지경이라니 21세기의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언어와 문화와 음식이 다른 타국에 가서 예수님을 전하며 일생을 보내겠다는 젊은이들이 그렇게 모여들 수가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사람의 역사가 아닌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수많은 선교사님들을 만나 보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보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놀라운 자부심과 기쁨이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맛을 본 사람은 결코 그것을 내려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사도 바울은 모든 선교사들이 다 그랬듯이 엄청난 고통과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많이 넘긴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인물들 중에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말을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과 감사였습니다.

 

살전 5:16-18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선교하는 분들에게는 남다른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함께 공부하면서 선교사로 헌신하고 선교지로 떠나지는 못할지라도 후원하고 보내고 이웃들에게 전도하는 사명만은 감당해 가겠다는 결심으로 풍성한 주님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을 전하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내고 허망하게 생명을 낭비하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삶의 길을 가르쳐 주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며 복음 전하는 분들의 삶은 단 하나도 헛되지 않아 역사에 남고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삶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처럼 소중한 삶을 살고 주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하나님의 칭찬과 상을 받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 전할 일꾼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십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한 사도 바울의 간증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추종하는 성도들을 잡아 죽이던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어 그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잠시 한 번 엿보고 그 배경을 통하여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행 9:1-5 /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역사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복음 전도자가 되기 전에 무엇을 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악질적으로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결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러한 그를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급격하게 만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잘난 사울의 눈을 순식간에 장님이 되게 만들어버리셨습니다.

 

행 9:8 /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제아무리 잘나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하루살이만큼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밝히 읽어보고 깨닫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손 하나 대지 않으시고 잔인하던 사울을 순식간에 거꾸러뜨리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온전히 주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악인이 선인이 될 수도 있고 선인이 악인도 될 수 있으며 잘 나가던 사업이 한 순간에 망할 수도 있고 망해가던 사업이 순식간에 흥해질 수도 있습니다. 사울을 순간에 넘어뜨려 항복하게 만드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그 잘난 사울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시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잘나 스스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그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 9:8 /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제아무리 잘나도 스스로 걸음조차 걷지 못한 채 남의 손에 의해 끌려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 순간이라는 사실을 가슴 섬뜩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잘났다는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세상만사 하나님께서 주셔야 누릴 수 있고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면 돌려 달라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제자들이 주님께서 부르실 때 단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즉석에서 순종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마 4:21-22 /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 9:9 /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이 종은 바보라서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버리고 가난하고 외롭고 힘든 이 길을 46년 동안 가고 있는 줄 아십니까? 모두가 다 주님께서 하시면, 주님께서 부르시면, 주님께서 명령하시면,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제자의 직분을 받은 것이 우리들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오늘 우리는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 한 번 거역해 보십시오. 그 결과는 입에 담기도 두려운 실로 엄청난 것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관해서도 가감 없이 모두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버려두고 원점으로 되돌아가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어떤 결과를 그들은 체험하였습니까?

 

요 21:1-4 /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양호한 경우입니다. 가룟 유다는 엄청나게 더 비참하였습니다.

 

행 1:16-18 /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하나님 앞에 거역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이처럼 평범한 것 같은 말씀으로 비범하게 오늘 우리들을 교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자들을 복이 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시 112:1 /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28:1 /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하지만 오늘날 얼마나 어리석은 교인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스스로 일꾼이 되고 스스로 일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너도 나도 목사가 되어 목사의 사명을 커녕 세상에서 영화를 누리는데 악용하며 사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 권사, 시켜주지 않는다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고 장로, 권사로 시킨다고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2019년 새해에는 제발 고집부리고 제방식대로 인생을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기며 불러주셨으니 순종하며 따라가는 순전한 일꾼들로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을 부르신 목적은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왜 하나님께서 사울을 거꾸러뜨리시고 부르셨는지 그 목적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행 9:10-16 /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사울을 친히 택하셨는데 그 이유는 오늘 본문 15절에 밝히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님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너무나도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 그렇게도 악랄하고 잔인한 사울을 하나님은 왜 친히 택하시고 굴복시키시고 아나니아를 보내시어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까? 그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요 초대교회 집사였던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살인자인데도 말입니다.

 

행 7:55-58 /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울은 이 잔인한 살인마들의 증인이 될 정도로 악에 물들어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를 선택하시고 구별하셔서 성령님으로 충만케 하시고 새롭게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행 9:17 /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주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신 목적은 오직 단 하나 예수님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거듭나고 나서 한 일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행 9:20-22 /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잡아 죽이던 그가 그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이처럼 놀라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면 수군거릴수록 더욱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유대인들이 그 말씀에 굴복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께서 친히 하시는 놀라운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날 비록 온전하지 못해서 욕을 먹으며 살더라도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거하면 그 전도를 통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전하는 우리들 때문에 죄인들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전하는 우리들을 통하여서 예수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제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스스로 위축되어 물러서지 말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자랑하고 전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맡기신 사명이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잘난 사람 앞이라고 기죽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없는 잘난 사람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출세하고 돈만 있으면 잘난 줄 알지만 출세하고 돈이 많아도 인생을 부끄럽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예수님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보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면 그보다 더 출세할 수가 없고 그 보다 더 부귀를 많이 가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부귀와 성공과 출세로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그 보다 더 불행한 자도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만 천하에 보여 주십니다. 헤롯 대왕이 바로 그 불행한 주인공이었습니다.

 

행 12:23 /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출세하고 잘났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한 순간에 이 세상을 떠나게 만들어 버리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왜 우리들에게 복을 주셨는지, 왜 우리들에게 소중한 하늘의 직분을 주셨는지, 왜 우리들에게 오늘날 까지 건강을 주셨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손 하나 대지 않으시고 사울을 엎어지게 하시고 장님이 되게 하시며 헤롯을 죽이기도 하시는 권세 있는 왕 중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사울과 헤롯의 차이점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악을 행한 것은 일반이나 사울을 붙잡아 사용하시고 헤롯은 죽이셨다는 것이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합니다. 못난 우리들이지만 헤롯같이 되지 아니하고 사울과 같이 되기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무조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이 죽어서 아무 것도 못하는 것 보다 살아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기를 더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새 직분을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만방에 전하라고 말입니다.

 

막 16:15-18 /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딤후 4:2 /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그렇습니다. 전도와 선교는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 받고 직분 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다 해야 하는 의무요 사명입니다. 올 해는 우리 모두 이 복된 일에 전념함으로 우리들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기적을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사울이 이렇게 순식간에 돌변하여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님을 증거하니 많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피하며 동족들인 유대인들을 배신자라고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행 23:20-24 /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저희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당신은 저희 청함을 좇지 마옵소서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 여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매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고하였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마병 칠십 명과 창군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사도 바울을 잡아 죽이기 위해 40여명이 동맹을 하고 술수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정보가 누설되게 하시고 위에 기록된 말씀처럼 어마어마한 군사를 동원하여 사도 바울을 보호하였던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감옥에까지 갇혔으나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으로 그를 풀어주었으며 이를 통하여 간수장이를 전도하는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 내시기도 하셨습니다.

행 16:22-26 /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쓰시는 일꾼들을 어떻게 보호하시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신비로운 광경입니다. 그래서 성군 다윗은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여 놓았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계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1,4)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것이 없다면 이 땅에 누가 주님의 종이 되어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고통과 가난과 보장 없는 미래를 두고 주님을 쫓아가겠습니까? 이는 주의 종으로 평생을 살아온 이 종의 간증이요 모든 주님의 종들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일꾼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다 살고 모든 사람이 다 가야 하는 그 순간을 만났을 때 이보다 더 감격스럽고 감사한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생을 헌신하고 바쳤던 사도 바울은 당당하게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딤후 4:6-8 /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9년도 선교주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때를 따라 일꾼들을 선택하십니다. 그 복된 자들이 바로 오늘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어떻게 복음 증거자들을 선택하시고 사명을 주시며 보호하고 지키시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목적 없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을 선택하시고 일꾼들로 구별하신 목적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각양 능력으로 보하시며 지켜주시며 풍성케 해 주십니다. 단순하게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신앙생활은 결국 자기 의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근심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분연히 일어나서 몸으로 복음을 전하고 재물로 후원하고 기도로 능력을 받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우리들의 자녀들도 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신나게 새해를 승리할 수 있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아나니아의 순종과 사울의 회복

이준원목사 / 행 9장 10~19a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개 여자 분들이 그릇을 좋아합니다. 그렇습니까? 물론 안 그런 분도 계실 줄 압니다. 그런데 그릇을 좋아한다고 집에 있는 모든 그릇을 다 사랑하고 다 똑같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집 안에 그릇이 아무리 많아도 주인이 그 많은 그릇들을 매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그릇을 다 똑같이 취급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인이 특별한 마음으로 다루는 그릇이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대개는 값비싼 그릇이 귀하게 다루어지겠지만, 단순히 비싼 그릇보다도 훨씬 더 소중하게 여기고 좋아하는 그릇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그릇입니다.

저희 집에는 이전에 진흙으로 만들어진 조그만 그릇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어디엔가 있을 텐데 요즘은 못 보았습니다. 유약도 칠해지지 않고 불에 구워지지도 않은 볼품없는 진흙 그릇입니다. 사실 제대로 된 그릇 모양도 아니고, 그냥 흙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경제적인 가치로 따진다면 몇 센트도 안 될 것이고, 아니 몇 센트라고 해도 사갈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 그릇을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집안 한 장소에 놓아두었던 것은 그 그릇이 가진 의미 때문입니다. 그 그릇은 저희 아들이 어릴 때 자기 손으로 학교에서 처음 만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만들어왔는데 이게 뭐냐고 하며 확 버리면 얼마나 상처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얼마 시간이 지난 다음에 저는 버리라고 했는데, 아이 엄마는 아니라고 하며 간직했습니다. 그 그릇은 아주 보잘것없이 보이는 진흙 그릇이지만, 아니 그릇 같지도 않은 것이지만, 엄마에게는 마치 아이의 마음을 보는 것 같은 소중한 의미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릇의 참된 가치는 그릇의 가격이나 디자인이 아니라 그릇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비싼 그릇이라도 의미가 없으면 그냥 그렇고,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의미가 있는 것이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참된 가치는 소유의 많고 적음이나 직책의 높고 낮음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특히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특히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릇의 가치가 결정되고 어디에 사용을 받느냐에 따라 의미가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오늘 본문의 사울입니다. 오늘 사울이 주님의 그릇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아나니아는 어떤 사람인가?

사울의 변화를 살펴보려면 주님께서 누구를 통해 사울을 변화시키셨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먼저 보기 원합니다.

 

1)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0절)

먼저, 아나니아는 다메섹(다마스쿠스)에 사는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이 사람 외에도 아나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 더 등장합니다. 5장에 나오는 삽비라의 남편 아나니아, 그리고 나중에 사도 바울이 잡혔을 때 그를 고소하는 대제사장 이름이 또 아나니아입니다(23-24장). 예수님이 잡히셔서 재판 받으실 때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는데, 바울 때는 아나니아였습니다.

이 세 사람이 이름은 같은데 하는 짓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5장의 아나니아는 초대 교회의 리더급였으면서도 탐심에 넘어가 성령을 속이다 죽었습니다. 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자기가 열을 받으니까 율법대로 하지 않고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할 정도로 전혀 영적이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9장에 나오는 아나니아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름은 같은데 너무 다릅니다. 이름은 같은데 너무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을 가끔 봅니다. 특히 아주 유명한 사람과 이름이 같을 경우 굉장히 힘들 때가 많고, 더 힘든 것은 흉악범이나 악질인 사람과 이름이 같으면 아주 곤란합니다. 어릴 때는 그런 것 때문에 놀림도 받습니다.

아나니아는 이름이 같았지만 너무 달랐고, 주님 보시기에 너무나 신실한 제자였습니다. 22장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앞에서 연설할 때 바로 이 아나니아를 언급합니다.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22:12)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아나니아는 주님의 제자로서 교회 내에서만 인정받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도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살고 있던 유대인 공동체로부터도 인정을 받던 사람이 아나니아였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으로 사는 동시에,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며 사는 아주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아나니아야”라고 이름을 부르시자마자 뭐라고 합니까? “주님, 여기 있습니다.”라고 바로 대답합니다. 주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셨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아주 일상적인 일이 벌어진 것처럼 대답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뭡니까? 그가 평소에 주님과 늘 교제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마스쿠스에 유대인 공동체도 있고, 원래 있던 유대인 크리스천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여러 제자들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왜 아나니아를 사용하셨는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말씀하셔도 잘 알아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거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했다.”라고 하는 음성을 들려주셨을 때 사람들은 “이게 무슨 소리냐?” 하고 놀라며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들려주신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 알아듣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셨어도 두려워하거나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민감하고 평소에 주님과 늘 교제하며 말씀을 잘 알아듣고 순종하는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면 됩니다. 매일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과 예배로 동행하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까’ 하며 살고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육성으로 귀에 들리게 하시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귀로 주실 필요가 없고 뇌로 직접 주시면 됩니다.

대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많이 듣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사람에게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계속 말씀을 하시는데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늘 동행하면서 영적으로 깨어 민감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또한 아나니아가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지탄의 대상이었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사용하시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라면 가서 사울을 만나도 괜찮은 것입니다. 사울은 바리새파 유대인의 핵심 인물이었고, 그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130-40마일 정도 떨어진 다마스쿠스까지 쫓아왔는데, 아나니아라면 그런 유대교 인물들과 만나도 괜찮은 겁니다.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그 동안 주님을 강하게 대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울을 위하여 다메섹에서 가장 훌륭한 제자를 이미 예비해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울이 씩씩거리며 살기등등해서 ‘예수 믿는 것들을 다 잡아 넣겠다’ 하며 왔는데, 그 길이 오히려 놀라운 구원의 길이었고, 그런 사울을 위해 이미 하나님은 다메섹에 아주 훌륭한 제자를 준비해놓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쓰다 남은 것이나, 가장 좋은 것은 놓아두고 그 다음으로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항상 우리를 위해 최선의 것을 예비해놓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정말로 깨닫고 믿는다면, 지금 우리 앞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당장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주 답답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때가 이르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최선의 것을 이미 오래 전에 준비해놓고 계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2) 신실했지만 주님의 뜻을 한 번에 이해하지는 못했던 부족한 사람

이렇게 신실한 제자인 아나니아에게 주님이 무엇을 지시하십니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1절)

‘직가’라는 것은 straight street, 그러니까 똑바로 뻗은 길입니다. 지금도 1마일 정도 되는 다마스쿠스의 명물인 쭉 뻗은 대로입니다. 보통 도시에 길이 꼬불꼬불한데, 1마일 정도 쭉 뻗어 있으니까 옛날부터 유명한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 있는 유다라는 사람의 집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유다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집에서 사울이 기도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울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환상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시력을 회복시켜주는 장면을 환상으로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의 상황을 아주 자세히 알려주십니다.

사울은 시력을 잃었던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식음을 전폐했습니다(9). 그리고 이제 그가 식음마저 전폐했던 정확한 이유가 여기 나옵니다. 그는 시력을 상실한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고, 그때 금식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금식기도는 사흘이 지나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부르실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길에서 만나고 시력을 잃은 뒤 너무 충격을 받아서 이제 기도를 하는데, 그것이 3일 동안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하는 3일 동안 사울이 애초부터 작정하고 금식하며 기도했다기보다는, 도저히 먹고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왔던 자신의 모든 신앙의 체계가 잘못되었고 그것이 우르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내가 잘못된 것을 믿어왔구나. 잘못된 것을 위해서 행동하며 살아왔구나.’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먹고 마실 수가 없어 그냥 기도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 하던 기도와 주님을 만난 이후의 기도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기도가 자기중심적인 기도였다면, 주님을 만난 이후의 기도는 자기를 버리고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기 위한 기도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당시 사울은 누구보다도 행동력이 뛰어나고 자기중심적이며 혈기왕성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갑자기 주님을 만나 시력을 상실했을 때,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 더욱 난폭해질 수도 있었고 정신이상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갑자기 시력을 잃은 즉시 안 되겠다고 하며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시력을 되찾기 위해 매일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다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시력을 상실하고 나서도 주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은 6절에서 사울에게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고 의사를 찾아다닌 게 아니라 기도를 한 것입니다. ‘주님,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며 기도로 준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메섹 유다 집에서 사흘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이미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올 것이라고 이미 보여주셨지만 아직도 안 오고 있습니다. 이 3일이 얼마나 긴 시간이었겠습니까? 정말 긴 시간이었지만 그는 그때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울은 원래 유대인의 모든 종교의식에 가장 철저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은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기도드리는 것을 주요 일과로 삼았고,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경건하다고 자처하던 바리새인들은 이 기도의 일과를 누구보다 더 철저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불렀던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그의 교회를 박해하며 그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그가 매일 기도를 드렸어도 그 기도는 자기중심적인 기도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열심을 냈던 이유가 아마도 유대교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기도는 그릇된 자기 신념과 관습과 이기심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이기적인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는 이것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것이 되게 도와주세요.’라는 기도였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그런 기도를 많이 합니까? 내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기보다는, 내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다 이용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후 다메섹의 직가에 있는 한 집에서 드린 그의 기도는 달라졌습니다. 그 사홀 동안의 금식기도는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릇된 생각과 사상과 판단과 욕망을 다 내려놓고 버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다 쓸 데 없는 거였구나’ 하며 자기를 비우는 기도였습니다.

동시에 그 순간은 이전에 자기가 그토록 핍박했던 주님을 철저히 만나며 선택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주님이 나를 선택해주셨다는 놀라운 은혜에 반응하며 자기도 주님을 선택하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 버림과 선택을 통해 복음의 원수였던 사울은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무한하신 하나님과 비로소 개인적인 관계를 온전히 맺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뿐 아닙니다.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2절)

무슨 말씀입니까? 다소 출신 사울이 앞을 못 보고 있으며, 그에게 안수하여 시력을 회복시켜주라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어떻게 해서 앞을 못 보게 되었는지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서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주라고 하십니다. 아나니아가 올 것도 사울이 다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가 그에게 안수하여 시력을 회복시켜주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뜻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살기등등해서 교회를 잔멸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날뛰던 사울이 앞을 못 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복음입니까?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야, 하나님께서 정말 역사하셨구나! 우리의 원수의 눈을 멀게 하셔서 더 이상 우리를 핍박하지 못하게 막아주셨구나!’ 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 원수에게 가서 눈을 뜨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눈을 뜬 다음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 잡아 죽이며 날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의를 제기합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3-14절)

영적으로 민감한 아나니아였지만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울은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울이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는 것은 굉장히 완곡한 표현입니다. 사실은 엄청난 해를 끼쳤습니다. 잔멸했다고 성경에서 표현할 정도입니다.

아나니아는 그것을 한두 사람에게 들은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한두 사람의 이야기라면 ‘진짠가?’ 할 수도 있지만, 몇 십 명이 그렇게 이야기해주면 확실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사울의 악함과 살기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정말 위험한 사람이다. 절대로 피해야 할 사람이다. 만나면 안 될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게다가 사울은 지금 주님을 믿는 성도들을 잡아가려고 대제사장들에게서 그 권한을 받아 다마스쿠스에 와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이걸 보면 재미있는 것이, 초대 교회의 정보력이 대단합니다. 사울이 체포 영장을 받아서 이리로 왔다는 것을 어떻게 벌써 알고 있습니까? 정보력이 빠릅니다. 아니면 주님께서 알려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왜 지금 다마스쿠스에 왔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울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교회 성도들이 볼 때 사울은 테러리스트 중의 테러리스트입니다. 절대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사람이고, 그의 눈에 띄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잘못하면 그에 의해서 잡힐 수 있고, 심하면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죽는 데서 핵심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를 모를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아나니아는 주님이 왜 사울에게 가라고 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두시면 눈이 안 보여서 더 이상 악한 짓을 못하니까 교회에게 좋은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위험한 사람에게 가라고 하시고, 그것도 그에게 안수해서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뢴 것입니다. 곧바로 순종을 못합니다. 두려워합니다. 걱정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주님의 명령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나니아가 아주 신실한 신앙인이었고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봅니다. 두려움도 있고 선입관과 편견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걸 보면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해서, 또는 너무 잘나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게 많아서 사용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지금은 안 되고, 나중은 되고, 그런데 그때가 되면 또 안 되고...’ 이렇게 자꾸 변명하거나 핑계 대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주님의 말씀이니까 나는 이해가 안 되도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같이 하자고 하면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다음에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지금은 형편이 어려우니까 형편이 나아지면 섬기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평생 하지 못하게 됩니다. 평생 못 합니다. 왜냐하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때, 형편이 나아지는 때는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되어야 더 나은 사람, 더 나은 신앙인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더 나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 뭔가를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중에 하겠습니다. 좀 더 나아지면 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정말로 나중에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하기 싫다는 말이 아닙니까?

또 지금은 형편이 어려우니까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하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얼마나 재산이 모아져야 만족하면서 그제야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사람은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백만장자에게 물어보십시오. “얼마나 벌면 만족하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조금만 더! 지금보다 조금만 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는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순종해야 합니다. 지금 헌신해야 합니다. 지금이 주님의 일을 할 때입니다. 여전히 나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갈등도 있습니다. 게으릅니다. 죄에 쉽게 빠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나의 모습입니다. 완벽하거나 훌륭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 같은 사람을 쓰시겠다고 불러주십니다. “내가 너를 쓰겠다.” 그리고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기 우리 중 완벽해서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알겠습니다. 저를 써주십시오.’라고 나아오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십니까?

교회 일만 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헌신의 장소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가정, 일터(또는 학교), 그리고 교회입니다. ‘내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 지금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조금 나아지면 하겠습니다. 형편이 좋아지면 하겠습니다.’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부족하지만 그냥 해보겠습니다.’ 하면서, 변명하거나 다른 말을 하지 말고 그냥 순종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일이!

 

3) 결국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아나니아의 이유 있는 항변에 대해 주님은 전혀 설명해주지 않으십니다. 그럼 뭐라고 하십니까?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5-16절)

그냥 가라고 하십니다. 사울에 대해서 아나니아가 이야기한 것에 대해 그가 이렇고 저렇다고 하신 게 아니라 그냥 가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십니까? 사울은 주님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유대인들 앞에 가지고 갈, 주님께서 택하신 주님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를 택하셨습니다. 그렇게 악독하고 살기등등하게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주님의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가 이방인들에게 가게 하실 것이고, 세상의 왕들 앞에 가게 하실 것이고, 물론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든지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가장 악독한 사람도 변화시키셔서 이렇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특히 이렇게 강하게 나온 대적자는 강하게 사용하십니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에 사용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강한 성격의 사람, 악독하게 교회를 잔멸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강력하게 나아가서 오히려 더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처럼 사도들 중 핍박을 많이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 이겨냈습니다. 이렇게 강한 사람이니까 강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력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택하셨고, 그는 그러한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 엄청나게 많은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 고난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할 사람이라면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자기가 그토록 악독하게 행한 짓을 아니까 감격이 있고 은혜가 있는 겁니다. ‘나 같은 사람도 주님이 부르셨는데 이런 고난을 못 이기겠는가?’ 하면서 계속 나아가는 것입니다. 굉장한 열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잡아넣어 죽이려 했던 사울을 택하셔서 엄청나고 강력한 복음 사역을 맡기신 것입니다.

주님의 그릇으로 택함 받은 사울에게 주님께서 부여하신 임무는 주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 디시 말해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상은 어떤 특정 개인이나 특정 그룹이 아니라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유대인들이고, 이방인은 비유대인, 즉 유대인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며, 임금들이란 지체 높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방인, 임금들, 이스라엘 자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사울이 받은 사명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지체가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동쪽이든 서쪽이든 북쪽이든 남쪽이든,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2. 거듭나고 회복된 사울

1) 영적인 회복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7절)

이제 아나니아는 아무 질문이나 거부를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야기하셨을 때 ‘그래도 그 사람은 좀 그렇고...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좀 보내시고...’라고 하지 않고 그냥 갑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러니까 즉시 떠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직가로 가서 거기 있는 유다의 집으로 들어가 그 안에 있던 사울에게 안수를 함으로 시력을 회복시켜줍니다. 사실 꼭 안수해야 시력이 회복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순간이 사울에게, 아나니아에게, 그리고 전 교회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만져서 회복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울도 이미 환상 중에 계시를 받아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언급하지 않으신 두 가지 일을 아나니아가 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 사울”이라고 부릅니다. ‘야, 이 웬수 사울아’라고 하지 않고 “형제 사울아” 합니다. ‘원수였던 사울’도 아니고 ‘형제 사울’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호칭입니까? 어떻게 스데반을 죽이고 교회를 잔멸하고 이 멀리 다마스쿠스까지 쫓아와서 잡아넣으려 했던 원수인 자기를 “형제”라고 불러줍니까?

이때 사울은 감격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 눈에서 눈물이 났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사울이 사실 마음에 얼마나 걱정이 있었겠습니까?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안수하여 시력을 회복시켜주는 환상은 보았지만, 아나니아가 와서 자기한테 뭐라고 할지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자기가 한 짓을 아니까 뭐라고 야단을 쳐도 할 말이 없고 뭐라고 해도 자기는 꾹 참겠다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형제 사울아!”라고 하니, 정말 감격스러운 말입니다.

아나니아의 입장에서 보면 사울은 원수 중의 원수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도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미 명령하셨기 때문에 아나니아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사울을 회복시키기 위해 안수해줄 뿐 아니라 그를 형제로 부르면서 인정해줍니다. 주님께서 인정하신 사람을 자기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아나니아가 시력을 회복시켜주기 이전에 이미 주님과 만나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 회심했고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나니아를 대표로 하는 교회 성도들, 형제자매들과의 관계가 이제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열렸습니다. 이웃과의 관계, 형제자매와의 관계도 열려야 합니다. 그 문을 아나니아가 열어주었고, 사울은 그리로 들어갔습니다.

둘째로, 아나니아는 주님이 사울의 시력을 회복시켜주라고만 하셨는데, 그 목적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시력을 회복시키신 목적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이 눈만 낫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나니아가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주님의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그릇으로 부르기만 하신 게 아니라 사울에게 성령 충만함을 주시고 능력도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얘야, 네가 이 일을 좀 감당하면 좋겠다.”라고 사명을 주실 때는, 그냥 가서 혼자 알아서 하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반드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사명을 거부하면 그 능력을 맛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명을 감당하면 그 능력을 맛보게 됩니다. 이전에 나에게 없었는데, 그런 능력이 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는 목적은 성령 충만하게 하셔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보기도실에서, 목장에서,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열심히 함께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응답을 해주시는 목적은 편안하게 살고 단순히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시는 게 아니라, 바로 그렇게 해주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성령 충만하여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2) 육신적인 회복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18-19a절)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집니다. 그리고 시력을 회복합니다. 그때 그는 ‘일어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안 보이니까 앉아 있거나 누워 있었는데 이제는 일어납니다. 그리고 드디어 세례를 받습니다. 이미 믿었고 회심했고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을 확증하는 의미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한 일은 음식을 먹고 힘을 얻는 일입니다. 그는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안 먹은 게 아니라, 엄청난 충격 때문에 깊은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느라 그랬습니다. 이제는 세례도 받고 음식을 먹으며 힘을 얻을 때입니다. 육신적으로도 힘을 얻어야만, 나가서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기도만 하고 예배만 해야 되는 게 아닙니다. 음식을 먹고 힘을 얻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음식을 혼자 먹었겠습니까? 거기에 같이 앉아 음식을 나누며 얼마나 분위기가 성령 충만하면서도 행복하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공부하지만, 음식을 같이 먹고 힘을 얻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기억할 것은, 그 전에 영적인 부분이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분은 해결되지 않았으면서 먹기만 해서는 곤란합니다. 여기 보면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은 다음에 음식을 먹고 힘을 냈습니다. 이 순서가 제대로 되어야 나가서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영적인 부분이 해결되지 않고 주님과의 관계가 안 뚫렸는데 먹기만 해서 힘만 넘치면, 가서 이상한 짓만 합니다. 엉뚱한 짓을 하고 못된 짓만 하며 돌아다니게 됩니다. 이 순서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나가는 말]

사울은 주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는 그릇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그릇으로 선택받는 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이지만, 그 은혜에 대한 결과는 우리 인간의 믿음의 응답에 달려 있다는 것을 사울이 오늘 보여줍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믿음의 반응이 거기에 합해질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시작될 때는 전혀 언급도 안 되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교회가 시작된 때로부터 4년이 지나 주후 32년경인 사도행전 9장에 이르러서야 겨우 회심하게 됩니다. 원래는 교회의 박해자였으며 죄인 중의 괴수이던 그는 사도행전의 주역으로 이제부터 나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사울과 이름이 동일한 구약성경의 사울 왕은 베냐민 지파였고 본문의 사울도 베냐민 지파였는데, 베냐민 지파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인 사울 왕의 이름을 따서 사울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그릇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사울이 권력의 노예로 전락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당신의 새로운 그릇으로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전에 제사장이던 엘리는 하나님께서 사사시대 말기에 영적 지도자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사장의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따라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대신하여 어린 사무엘을 당신의 그릇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영적 지도자였지만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전혀 못 들었고, 어린 사무엘은 “사무엘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그릇으로 택함 받는 은혜를 입고서도 하나님의 그릇답게 살려 하지 않았던 사울 왕은 끔찍한 죽음으로 끝났고, 하나님의 그릇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던 엘리 제사장은 충격으로 쓰러져서 목이 부러져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릇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했던 다윗 왕과 사무엘은 사도행전의 주인공이 된 오늘 본문의 사울처럼 그들 역시 구약성경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시대를 위한 주님의 그릇으로 선택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그릇으로 선택하셨고 또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사명을 주셨고, 또 이렇게 교회로 묶어주신 목적을 따라 교회로서의 사명도 주셨습니다.

여러분,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부르심을 받은 그 목적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 하나님은 나의 삶의 목적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 사명대로 지금 행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사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적은 일에 충성했으니 큰 것을 맡긴다’고 하신 것처럼, 열심히 순종해서 하게 되면 잘했다고 하시며 또 다른 사명을 주시고, 그것을 하면 또 다른 것을 주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더 주님과 가까운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울 왕이나 엘리 제사장은 사명을 받은 사람들인데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처럼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윗 왕이나 사무엘처럼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나를 부르셨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몰라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이미 나를 부르셨습니다. 내가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나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교회로서 함께 주님께로부터 받은 공동체로서의 사명은 바로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됨으로 영혼 구원하여 주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잘것없는 우리가 주님의 그릇으로 선택된 것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신 은혜이지만, 그 결과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우리가 얼마나 충실하게 감당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 결과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사도행전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남을 수도 있고 또 영원한 가치를 가진 삶이 될 수도 있으며, 아니면 이 세상에서 우리 인생이 끝날 때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직 숨을 쉬고 있는 동안, 우리의 뇌가 아직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동안, 주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주님의 그릇답게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다 느끼시겠지만, 성경도 읽을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 성경을 읽고 싶어도 눈이 침침하고 잘 안 보여서 못 읽겠다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눈이 괜찮을 때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도 다리가 멀쩡하고 몸이 멀쩡해서 마음껏 와서 예배드릴 수 있을 때 열심히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삶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안 하면 우리를 다른 그릇으로 대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 동안에,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지금도 시간은 1분 1초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생명 같은 시간을 게임이나 하고, 드라마나 보고, 예능이나 보고, 낄낄거리고, 죄 짓고 그러는 데에 허비할 수 있겠습니까?

즐기는 것을 전혀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생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붙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호흡이 멈추고 우리의 뇌가 작동을 멈출 바로 그 시각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리의 생명인 것을 깨닫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하자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삶

행 9장 10~15절 / 박지온목사

인사하겠습니다. 평강하십시오. 안녕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마음을 바로 써야 되요.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 중심으로 해서 정말 이 땅과 민족과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언약 잡고 왔사오니 주의 종들에게 실제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생활 속에 누려지게 하시고 늘 감사할 정도가 아니고 감격, 찬송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의 삶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도록 오늘도 말씀으로 충만케 해 주시옵소서.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말씀 받을 때에 각 심령에게 역사 하는 또 응답하시는 말씀으로 임하시옵고 우리 생활과 삶이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또 시작할 수 있는 이번 한 주간 되게 하시며 이 한 주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 그 계획속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데 쓰임 받도록 주의 종들에게 축복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흑암의 권세는 완전히 결박되게 하시고 이 시간 말씀들을 때에 깨닫게 하시며 우리 마음 문이 열려지도록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오늘 주보에 전도자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은혜주시는 데로 이 시간에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뭐 지난 2, 3주간 상당히 조금 어려웠던 시간입니다. 지난 한 주간도 특별히 힘들었습니다 만은 하나님 은혜 주셔서 많이 건강을 회복하게 하신 걸 감사를 드립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정말 말씀의 사실을 누린다는 것이 너무 큰 축복인데도 이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실제로 우리의 사실이 안 되기 때문에 오는 문제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전도자의 삶이라 그랬는데 응당히 그렇게 살도록 되어 있고 그렇게 살아야 되는데도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을 희망사항으로 끝내고 그렇게 지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나니아라는 이 무명의 사람 참 인생의 삶에 훌륭하지도 않았고 열심히 뭘 하지도 않았고 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도 말할 수 없는 그런 평범한 삶입니다. 그런데도 이 전도자 아나니아의 삶이 후손만대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이런 축복을 누릴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았기에 그렇게 했던 것이냐! 우리가 전도하려고 애를 쓰고 뛰어다니고 심지어는 얼마나 바쁘게 일하고 얼마나 일 하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속에서 보여지게 되는 것은 우리가 훌륭한 일을 했다고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안 했다고 중요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위대한 일을 우리가 했다 안 했다. 그게 지금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차라리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아나니아를 보면서 어떻게 해서 이 아나니아가 그렇게 평범하고 다만 조용히 한 지역에 있었는데 하나님의 역사에 남는 위대한 승리에 전도자의 삶을 살았을 것인가 하는 우리가 오늘 또 보아야 될 문제입니다. 그러니 전도캠프 하고 열심히 전도하는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성공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수 있을 것이냐? 오늘 아나니아를 통해서 조금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이 아나니아를 보면서 조금 전에 말씀한 것처럼 전에도 제가 아나니아에 대한 평이 있었지만 어디 훌륭하다! 참 귀중한 전도자다! 또 아니면 위대한 일을 했다.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이름도 없어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냐? 딱 한가지입니다.

그 첫 번에 보면 10절 말씀에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랬습니다. 아나니아가 뭐 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말도 아닙니다. 그리고 큰 뭐 공부를 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일도 아니에요. 그냥 조용히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성경에 위대한 전세계를 전도하고도 남는 중요한 일에 그 이름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냐? 다만 한 가지만 딱 이루어 졌습니다. 뭐냐하면 그때에 하나님이 원하실 때에 쓰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들이 뭘 큰일을 했다. 위대한 일을 했다. 그게 성공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된 겁니다. 이게 중요한 문제요.

내가 지금 가장 힘들다 아무 것도 못 하고 있다.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으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할 때에 그때에 여러분이 있고 제가 있으면 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거의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에 살필 때에 그때에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때에 아무도 없어요. 이게 지금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니 뭘 열심히 뛰어 다니고 아무 것도 없이 뛰어다니고 열심히 하는데 그때에 하나님이 필요할 때에 보면 없어요. 이게 지금 오늘날 성도들의 실패입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가 아마 이 오늘 중요한 주제 중에 내용입니다 만은 이렇게 될 수 있기 위한 준비가 오늘 여러분과 제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때에 누가 있었습니까? 아나니아가 있었습니다. 이게 지금 성공의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때에 여러분과 제가 있었으면 그러면 다 끝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여기서 다 해결됩니다. 물론 아나니아가 무식하다! 유식하다. 그건 뭐 여기서 문제가 된 게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손에 하나님의 필요에 쓰임 받는 순간부터 우리 인생은 승리하게 되겠습니다. 이게 전도자의 삶입니다. 다른 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앓았다 병들었다. 뭐 건강하다 내가 뭐 약하다 뭐 힘있다. 뭐 그건 상관이 없어요. 그 때에 내가 있으면 됩니다. 여러분이 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과 제가 쓰임 받는 것입니다.

자, 그러자면 먼저 뭘 이루어야 되느냐? 1차 적으로 우리가 늘 그런 말씀을 합니다. 그러나 제게 언약의 실체를 사실로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이걸 먼저 드리고 싶은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여러분과 제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참 평강이 있어야 됩니다. 어떤 누구에게도 이게 없으면 그때부터 모든 것은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아 질 수가 없습니다. 평강!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평강은 내가 노력하고 애를 쓴다고 얻는 게 아닙니다. 지식이 있고 지식이 없고 여기에 상관이 없습니다. 간단한 말로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왔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습니다. 아는 걸로만 되는 게 아닙니다. 이 사실을 실제로 누려야 됩니다.

저는 그 상담하는 중에서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구요. 목사님이 늘 평안, 평안 그러고 참 정신적인 문제 그러고 그래서 그냥 보통으로 생각했는데, 인간의 문제가 이렇게 정신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는 참 그 평안이라는 것이 그렇게 귀중한 줄은 새삼 내가 느꼈다 그러더라 구요. 여러분 이 평강이 없어져 버리면요. 불안하기 시작하면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잡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평강이 들어오면 용서할 수도 있고 돈 문제나 이권문제 이런 것도 수용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게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여러분 남편과 아내 사랑 남편이 아무리 좀 어렵고 힘들다 그래도 아내 마음에 큰 평안이 있으면 수용이 됩니다. 그러나 이게 없으면 그게 안 되요. 수용이 안 돼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정에 불화 있고 문제 있고 또 사건 있고 이럴 때에 흔히 뭔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그런 문제 그런 이유 때문에 온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간단합니다. 여러분 중심에 영적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의 자녀로 근본 이 사실만 완전히 사실화되어 버리면 여러분 실제적으로 사실화되어 버리면 이 큰 평안이 임하게 되면 모든 것이 거기서 다 퍼져 나가는 겁니다. 이것이 안 되면 돈 억 만금을 가져도 줘도 소용없어요. 이것이 안 되면 건강 아니라, 어떤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 사실 조금 조금 지나면서 더 알아 가야 될 것은 복음으로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갖지 못하면 시간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진짜 평안이 안 됩니다. 문제가 점점, 점점 더 싸이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에 여러 가지로 문제가 뭐 좋아질수록 상관없습니다. 평안 과 안식이 안 나옵니다. 그러면 그런 모든 것들이 소용이 없어요. 이 평안이 임하게 되는 그때부터 뭐냐 하면요. 이 생각이 바로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평안은 어떻게 했느냐? 이 평안이 구체적으로 임하기 위해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에게 있어서 구체적인 생명의 능력이 되신다는 사실이 체험이 되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이제 늘 싸우는 것이 불 신앙과 싸웁니다. 영적 싸움이에요. 중요한 것이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 내 안에 오시옵소서. 우리가 불안하고 염려할 때에 그런 문제가 오잖아요. 그런 문제가 오는 데 성경에 보면 뭐라 그랬냐 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뭐라 그랬습니까? 쉬게 하리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품속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참 쉼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런 축복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내 안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참 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지식으로 알고는 있고 깨닫고는 있지만 이게 뭐냐? 사실로 내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겁니다. 그것이 여러분 가정에 한번만이라도 깊이 체험되고 이 사실이 사실화되어 버리면 그 때부터는 극복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대게는 이런 분들이 좀 어려운 분들이 찾아와서 이야기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 그걸 알아요. 우리 교인들이 대화를 하고 상담을 할 수 있는 기구들이 많으니까! 그리고는 또 교회 와서 그런걸 지식으로 듣고 다락방을 통해서 듣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는데 그것이 안 믿어지는 겁니다. 솔직히 실제로 안 믿어져요. 안 믿어지는 배경은 우리가 갖고 있는 불 신앙이 구체적으로 안 믿어지기 때문에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내 안에 들어오시면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실히 임합니다. 왜 그라느냐? 십자가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해결하는데 그 모든 문제를 가지고 온 장본인이 누구입니까? 사단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직까지 그 평강 속에 서 있지 못하는 사실이 뭐냐 하면 사단의 손에 붙잡혔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렇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그때 그렇게 되면은 마음에 아직까지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내가 나를 인도를 해요. 그러면 문제 생기면 내가 걱정합니다. 내가 근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 계속 말해도 하나님의 주권이 이게 확인이 안 되어요. 문제 생겼다 그러면 내가 걱정하는데...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 해결하신 그 분 앞에 완전히 맡기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내 안에 사실적으로 확인하게 되면 뭐냐 하면, 내가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아요. 왜? 완전하신 그 분이 내 주인이 되어 있거든요. 그 분이 내 안에 계시거든요. 그게 안 되면 누구 손에 잡혀 있냐? 사단의 손에 잡혀 있기 때문에 내가 걱정과 근심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버리면 여러분 그때부터 뭐냐? 절대로 모든 문제가 거기서 풀어져 나가게 되어 있지 내가 노력해서 하려고 애를 써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에 따라서 당신의 주권 속에서 나를 인도해 나가고 나를 쓰시기 때문에 하나님 필요할 때마다 내가 항상 준비되어 있으면 하나님 손안에 하나님 앞에 있으니까! 그때부터 쓰임 받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쓰여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처음 소개해 놓아도 다 알고 다 알았지 만은 이 일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참 평안이 임하고 이런 역사를 하나님의 자녀로 알았지 만은 이걸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실질적으로 체험하고 사실로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기도해라 그랬거든요. 기도를 한다 그래요. 어떻게 하느냐? 기도를 한번하고는 보통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악한 권세는 물러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한번 하면 안 되거든요. 이게 여러분 하면 금방 됩니까? 처음에는 내가 불 신앙의 뿌리 속에 완전히 살 때는 한번 두 번해서는 안 되더라 구요.

그래서 제 경험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도 이런 밤중에 어떤 경우에는 덮칠 때가 있습니다. 제가 그래서 정신 문제를 하게 된 배경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도인지 아는데요. 그래서 처음에는 막 견딜 수 없어서 창문도 열어보고 이러다가 한번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단의 역사는 완전히 결박을 받을 지어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게 잘 안되다가 나중에는 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게 될 때에 떠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떠나게 된 그 한번에 처음이 오고 난 이후에는 그 다음에 문제는 뭐냐 아! 확실하구나 확인되어져 버립니다.

요즘은 이제는 잘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몸이 약할 때 꼭 그 약점을 타고 들어오거든요. 어떤 병을 통해서 괴로움을 통해서 이게 타고 들어옵니다. 여러분 여자들은 특별히 주기를 타고 또 들어오고요. 그런데 그런 것이 올 때는 지금은 일어나지도 않아요. 그런 어떤 것이 힘이 느껴지게 되면 누워 있으면서도 밤에 자다가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악한 흑암의 권세는 완전히 추방될 찌어다.' 한번만 기도하면 조용히 사라져 버려요. 그런데 사라져야 되는데 이것이 내가 사라져라 그래서 사라지는 게 아니고 이게 내 마음에 평안이 와 버립니다. 누구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사실이 한번만 체험되어 버리면 그 다음에는 극복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때까지 한번 싸워 보라 그랬어요.

하루면 하루 이틀이면 이틀 집중적으로 그리스도 이름 부르면서 조금 힘들면 입을 소리내어 고함을 지르면 미쳤다 그럴 거니까 조용히 속으로 해도 되고 조금 속으로 하기는 힘드니까 그러면 입을 열어 가지고도 주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하신 분 아닙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다음에 내 안에 흑암의 권세가 이 불안한 마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완전히 추방될지어다 결박을 받을 지어다. 그리고 아직까지 안 식이 없는 이 마음에 주님의 평안으로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평안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계속해서 한번 붙들고 기도해 보세요.

여러분 처음에 이것이 한번 두 번 겪게되면 그 다음에는 확인이 되어 버립니다. 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왜 그런 문제가 잘 안 되느냐? 워낙 습관이 불 신앙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워낙 여러분 잘 안 믿어요. 흔히 말합니다. 정신이 이런 불안과 염려가 올 때에 그래야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 그러면 바라보지를 안 해요.

이렇게 해 가지고 집중적으로 한 번만 바라봐도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과 은혜가 평안으로 사실이 됩니다. 여러분 이렇게 되면 그때부터 뭐가 바꾸어지느냐? 생각이 바꾸어져 버립니다. 그 다음에 문제 오는 것이 생각이 바꾸어 져요. 성경에 빌립보서 늘 말씀합니다 만은 4장 6절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뭡니까?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뭐라 그랬습니까?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할렐루야! 아멘.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예비 되어 있는 그런 자 중에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건강하다 뭐!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뭐! 말할 수 있습니다. 부지런해야 된다. 또 열심히 해야 된다. 노력해야 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생각이 발라야 됩니다. 아까 번에 인사할 때도 그랬습니다. 생각이 발라야지 삐뚠 생각가지고 심보가 틀려 가지고는 일이 안 되거든요. 여러분 생각이 발라야지 됩니다.

생각이 바르다는 말은 그 말이 뭐냐 하면 여러분 생각이 발라야 된다 그러니까 정직해야 된다. 뭐 해야 된다. 또 이리로 돌아갑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을 하라 그 이야기입니다. 생각 바른 게 다른 게 아니에요.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소원이 뭔가 그게 마음에 생각이 되고 그게 바로 마음의 생각으로 자리 잡게 되면요. 그 생각만 해도 하나님이 역사 하시기 시작합니다. 참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것이요.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교회 밖에서도 그렇고 우리 가장 안에서도 그렇고 가만히 보면요. 이것이 너무 힘들다 보다도 안되어 있다는 그걸 많이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 기관에서나 그 다음에 교회 중직자들 교회 성도들 여러분 조금만 하나님 앞에 생각을 바르게 해 버리면요. 하나님께서 그 생각 통해서 엄청나게 역사 해 버립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어떤 면에서... 아나니아가 딴걸 한 게 아닙니다. 뭐 노력하고 움직이고 한 게 아닙니다. 그저 가만히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가실 것인가 주님의 거룩한 계획 이루실 것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그를 살려버리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 전도캠프 한다 이렇게 해 가지고 할 일도 많고 많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것 할 일 이전에 여러분 생각과 마음이 달라져야 돼요. 그러면 그 생각과 마음이 어디서부터 오느냐? 내가 불안한 중에서 염려한 중에서 벌써 잡히는 생각이거든요. 그런 중에서는 항상 다른 게 나옵니다. 아무리 생각을 바로 하고 싶어도 안 돼요.

여러분 지금 그 우리가 종종 그런 소리 안 합니까? 납치 사건이 있어 가지고 무단히 애를 쓰고 사실은 그런 안타까운 일이 안 있습니까! 뭐 전에 주의 사건이라든가! 아무리 내가 사랑스럽고 그 아이가 바르게 생각하고 싶고 바르게 일을 하고 싶어도 납치범한테 붙들렸다!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생각이 바로 나올 수 없습니다. 완전히 매여 가지고 죽음도 거기에 달여 있으니까!

여러분 아무리 내가 생각을 바로 하고 싶고 아무리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도 사단의 손에 붙들려 있는 이상은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우선적인 게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어. 나와 여러분에게 뭡니까? 이로 통해서 하나님의 참 평화 그래서 세상이 줄 수 없고 세상이 준 평화를 빼앗아 갈 수 없는 이것만되면 모든 문제 해결되거든요.

그리고 여러분 신앙 생활은 이것이라야 이런 평화 속에서 뭐냐? 참 기쁨으로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봉사한다. 헌신한다. 노력한다. 교회 충성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바로 이것만 되면 뭐가 오느냐 하면 즐겁게 됩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도 그렇잖아요. 뭐든지 즐겁고 뭐든지 내가 하는 일에 행복을 느껴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이게 지속이 될 수 있습니다. 억지로 하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건강에 좋다 그래도 입맛이 떨어졌을 때는 지금도 그래요. 아직까지 밥을 먹어라! 먹어라. 그래도 밥맛이 없어 못 먹어요.

그리고 우리 집에서 죽 같은 것 끓여 가지고 한 숟갈 내가 딱 먹으면 어떠냐? 맛있냐? 속으로 맛있다 그럴 수도 없고 맛이 없는데 어떻게 맛있다 그랍니까! 그러니 또 뭐냐 맛있다 그래라! 그러면 맛있어 진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죽을 먹으면서 맛있냐? 그래요. 속으로 맛없다 그래야 바른 말인데 맛있다 그래라 그래야 된다 그러고 그래서 내가 아무 말 안하고 맛있냐? 고개만 끄덕 끄덕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아무리 죽이 맛없던지 어떻든지 간에 보리밥이든 뭐든지 간에 밥이 맛있고 즐거우면 그게 밥을 지속해서 계속 먹을 수 있습니다. 계속 밥 때마다 즐겁고 감사함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밥맛이 없으니까요. 밥 때마다 짜증이 나요. 나는 우리 집에서 요리를 그렇게 못한다고 생각 안 했거든요. 그리고 반찬을 맛있게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밥맛이 없을 때는 왜 그렇게 못 하는지 모르겠어요. 세상 뭐, 옛날 그 옛날 시골에 배추 같은 것 그런 걸 절여서 먹는 것, 그런 맛도 좀 내 줬으면 좋겠다 싶은데 그것도 안 되지 그리고 좀 뭐 물고기 같은 것도 좀 찌지가지고 옛날에 그 시골에서 먹든 것, 백사하고 이런 것, 그런걸 찌지 주면 시원하고 좋은데 이것도 안 맞고...

여러분 즐거움이 없다 그러면 밥 먹는 것도 지속이 안 돼요. 중요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 신앙생활이 감사하고 즐겁고 기쁨이 와야 해결이 됩니다. 모든 문제 거기서부터 다 나옵니다. 이게 안되면 생각이 달라져 버립니다. 생각이 없어져 버립니다. 반드시 이런 축복과 은혜가 있다고 성경이 약속을 했거든요. 언약을 잡았을 때 이게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다. 요셉이 감옥에 갔다. 그러면서도 참으로 기쁘게 막 모든 헌신을 다 안 합니까! 여러분 헌신하는 것도 교회에 와서 즐겁게 헌신하는 일이요. 이게 즐거워야 일이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 오는 일이 즐겁고 헌신하는 일이 즐겁고 전도하는 일이 즐겁고 이렇게 되어야 이것이 바로 되어 집니다. 그럴 때에 바른 생각이 나와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축복과 은혜가 여러분 가면 갈수록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이 이게 확인되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 말씀 듣는다는 자체가 얼마나 엄청나게 큰 축복이요. 행복이라는 사실이 확인이 되면 될수록 여러분 삶이 즐겁습니다. 그 다음에 기도라는 것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면 삶이라는 것이 저절로 안 나옵니까!

여러분 예수 믿고 사는 삶이 뭐 예수 믿는 사람이 뭐 저래! 그런 소리 듣는 데요. 그럴 수밖에 없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 뭡니까? 종교생활입니다. 종교생활! 여러분 종교 생활 가지고는 전부 삶이 지겹습니다. 어렵습니다. 교회 생활하는 것이 괴롭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걸 가지고 종교 생활이라 그랍니다. 이게 거의 우리가 살아왔던 배경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 받은 감격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떤 문제 사건 속에서도 모든 문제 해결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 큰 감사와 감격으로 문제 당 할 때마다 또 어떤 축복과 은혜를 주실 것인가 기대와 또 감격으로 이게 받아들이게 되게 될 때에 이건 뭐 너무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겁니다. 이 생각이 바로 되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습관이거든요. 복음이 되는 동시에 이 축복된 역사가 바로 이루어집니다.

자! 그러면 우리 속에 더욱 이것을 막게 되는 것이 나 중심적으로 자연적으로 내 중심이 되지만 하나님의 주권 속으로 들어가는 그 문제 이제 이것이 바꾸어지게 되죠. 생각이... 그런데 한 가지 큰 장애 되는 것이 뭐냐 하면, 로마서 6장 11절 말씀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 그랬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는 인식하고 돌아가야 됩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뭐라 그랬습니까? 산 자로 여길 지어다 그랬습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진 마세요. 이 사실을 인정만 하세요. 여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때 누가 역사 합니까? 성령으로 역사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 하면요. 여러분과 제가 오늘 성경에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육신과 내 욕심과 내 인생은 내 인간의 것은 완전히 사단에 속한 모든 것들은 완전히 뭐라 그랬습니까? 죽었다 그랬습니다. 죽었다! 하나님의 손에 못 맡기는 이유가 뭐냐? 그리고 평안과 안식이 없는 이유가 뭐냐? 그리고 생각이 틀리게 된 이유가 뭐냐? 내 자신이 너무 살아 있습니다. 내 자신이 살았다는 것은 아직까지 사단의 손에 붙잡혀서 놓여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제게 실현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만 해도 좋습니다. 성령이 역사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인정이 안 되거든 입으로라도 인정하세요. 하나님 죽었습니다. 어떤 성날 문제가 있거든 하나님 선언하세요. 죽었습니다. 분 내게 하고 욕심을 갖게 하는 사단의 생각 죽었습니다. 여기기만 해도 성령께서 역사 하십니다. 이 사실은 인정만 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된 안식을 주시고 이어서 생각과 마음만 바로 되게 되면은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나와 연관된 모든 부분에 축복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와 여러분 속해있는 여러분들 그리고 나와 우리 모든 사람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실 때에 그때에 내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송현 교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났습니다. 모든 것이 여기서 다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 축복을 지금 여기서 말하거든요. 하나님이 뭐 큰 일을 했다. 위대한 일을 했다.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바로 이런 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마음껏 쓰여졌습니다. 승리하게 된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생각과 마음이 지속이 될 수 있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평안과 안식이 지속이 되어야 하니까 걸핏하면 우리는 감정과 환경에 의해서 바꾸어져 버립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참 병중에 더러운 병이 뭐냐 하면 조울증입니다. 우울증보다 더 더러운 것이 조울증입니다. 이것이 감정의 변화가 급격한 것이 조울증입니다. 갑자기 웃다가 갑자기 우는 증세가 조울증입니다. 그래서 너무 좋다가 너무 절망에 빠집니다.

우리가 어떤 면에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다 조울증 환자예요. 보니까 감격의 변화가 변화 무쌍합니다. 이게 꾸준하지를 못해요. 그래서 참 안식과 평안이 지속이 안 돼요. 왜 그러냐? 환경과 사건 따라서 이게 변화가 됩니다. 여러분 환경과 사건 상관이 없습니다. 속이지 말고 속지 마세요. 여러분 환경이 어떤 환경이다. 사건이 어떤 사건이다. 아나니아를 통해서 우리 봤잖아요. 우리 9장을 통해서 봤잖아요. 그건 우리를 속이는 것이지 사단이 환경은 우리에게 문제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든 축복과 은혜로 기도에 응답으로 준비될 문제입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 속에서...

그래서 이 사건을 분명히 지속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고 환경과 사건 속에서 속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냐? 말씀 듣는 것과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게 기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나니아의 삶을 보면은 문제가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했죠. 기도할 때에 또 하나님께서 뭡니까?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이 사실을 이어 갈 수 있는 것은 주일 날 강단에서 나오는 메시지가 한 주간 가슴에 각인이 되었다 그러면 승리합니다. 계속 붙잡고 기도하시면 됩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 매일 매일 만약에 강단의 말씀이 확인되고 각인 되면은 자연적으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매일 매일 성경을 읽게 됩니다. 매일 매일 성경을 읽게 될 겁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알아듣게 되요. 알아듣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루에 많이 안 읽어도 좋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에 감동되는 말씀이 있어서 고개를 몇 번만 끄덕이는 이런 사실이 조금만 나오기 시작하면요. 이게 지속되었다 그러면 늘 새 힘으로 역사 합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는 뭐냐? 기도라는 것은 여러분 말씀과 기도 그럴 때에 이것은 하나로 묶을 수 있어요. 말씀 안 보는 기도는 신비주의로 빠지고 다른 곳에 빠집니다.

그리고 기도 없는 말씀만 본다면 지식에 빠집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말하는 것은 말씀과 기도는 하나입니다. 말씀 보면서 쭉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에 눈이 열려 있다 그러면 그게 바로 뭡니까? 기도나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일에 내가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 이게 바로 기도의 내용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말씀하고 조금만 겸하게 되면 이 문제가 간단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루에 한번씩 기도도 그냥 지나가는 기도 말고 조금 깊은 기도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깊은 기도! 그래서 깊은 기도는 어떤 면에서 집중 기도라 그렇게 말하는데 하루에 한번씩이라도 좀 정할 필요가 있다 싶어요. 안 그러면 쉽게 어느 장소를 정하든지 간에 한번 하나님 앞에 집중해 볼 수 있는 그런 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걸 조금만 하게 되면 말씀 붙잡고 조금만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미 주신 응답대로 평안과 안식이 지속 될 뿐 아니라 내가 사는 일에 즐거워집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하나님의 인도 받는 일에 즐거워집니다. 그리고 무슨 문제가 나면 주님이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가 기대가 되어 집니다. 역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가 아니기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겨도 걱정이 안 나옵니다. 내가 뭔가 걱정하기 시작하면요. 금방 문제가 생겨요.

그래서 지난주간에 너무 고통스러워 가지고 그러니까 머리 각으로도 잘 못 갔고 오래 되었죠. 이 밥도 안 넘어가니까 밥 먹기 위해서 앉아 있는 동안에 밥도 못 먹죠. 이러니까 뭐 오늘 아침에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해요. 보니까 오늘 아침에 제가 얼굴이 조금 밝아지고 생기가 나니까 참 기가 차더라 그래요. 밥을 먹는데 밥을 먹을 수 없지 먹어도 이상하게 웅크려 가지고 앉아 가지고 이렇게 있는데 죽겠다 싶더라는 겁니다. 그런 불안이 옵니다. 죽겠다 실은 불안이 오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죽어도 하나님 뜻이요. 살아도 하나님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맡겨 버리면 불안이 없어져 버립니다. 역시 나도 마찬가지고 아 이대로 끝나는가! 또 이러면 문제는 심각한 불안이 옵니다. 염려가 옵니다. 그러니 염려가 나왔다는 자체가 뭐냐 하면 아직도 내가 하나님 못 믿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간단하게 나와요. 그러면서 내 생각을 조금만 바르게 해 버리면요. 하나님이 그 생각잡고 역사 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거기서 이루어지거든요.

그러니 여러분 가정과 교회와 삶에 있어서요. 조금만 생각 바르게 해 버리면요. 감사는 저절로 나와 버립니다. 기쁨은 계속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이 바로 안 나와버리면요. 바로 그걸 타고 뭡니까? 순간의 문제입니다. 사단의 역사 속에 잡히느냐? 하나님의 역사 속에 지속되느냐? 이것이 당장 결과가 나와 버립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중요한 축복의 약속 여러분에게 이미 다 주셨습니다. 누리시되 누린다는 정도가 아니고 이 약속잡고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역사 하실 수 있는 지속적인 감격과 감사와 찬송으로 이 한 주간도 축복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간절한 마음으로 한 음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여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혜의 계획 속에 주의 종들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과 권세 속에 주의 종들에게 역사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 생각과 마음을 온전하게 이끌어 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계획과 역사로 날마다 이끌어 주셔서 주님의 축복과 역사로 종들을 이끌어 주시고 주님의 권능과 권세로 주님이 역사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귀중한 계획과 역사 속에 오늘도 주의 종을 세우셨사오니 우리 마음과 생각을 바르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에 주의 종들을 바르게 하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목적과 온전하신 계획 속에 주의 종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계획하시는 일들을 이루어 주시옵시기를 원하옵고 바라옵나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여 주의 종들에게 이미 주신 큰 평안과 안식을 붙잡고 우리 마음과 생각을 주의 평안으로 지켜주시고 하나님의 확실한 목표와 계획인 전도에 우리의 생각을 집중시켜서 주님이 원하시는 소원대로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 마음을 가질 때마다 주님 우리의 생애와 삶에 엄청난 축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뭘 크게 하고 크게 일을 하고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나니아처럼 조금만 준비되어 있을 때에 주께서 원하시는 그때에 준비된 우리 자신들이 바로 그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나님 주의 손에 쓰임 받는 종들로 일평생 응답 받는 종들로 주의 종들에게 역사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올리옵나이다. 아멘"

"지금은 우리를 구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위로 충만 교통하심이 모인 무리 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눈이 열린 사람

행 9장 10~18절 / 이중표목사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복받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복받은 예수를 믿고 그 복을 받으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볼 때마다 '복받은 성자 예수여 그 복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이런 고백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봐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복받은 예수를 보지 못하면 믿는 것이 허상이 됩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복있는 사람을 만나야 됩니다. 복받은 남편 만나야 일생동안 복있게 살고, 복있는 아내를 만나야 자기도 일생동안 행복하게 삽니다. 망할 사람 만나면 망하고 복있는 사람 만나면 안될 일도 잘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받은 사람을 만나야 그 은혜가 내게 옵니다. 은혜받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내 은혜까지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아무나 만나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복을 받는다고 할 때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예수님 곁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 복이 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나타난 많은 사람 중에 사도 바울은 예수 좋아하고 예수 사랑하고 예수님을 항상 흠모하고 살다가 가장 복을 많이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 믿고 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므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예수님과 함께 3년동안 동행하고 배우고 따르면서 예수님의 교훈도 받았고 인격적인 지도도 받았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죽음도 보았고 부활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았고, 예수님 곁에 있지도 않았고, 예수님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가장 예수를 정확히 알고 정확히 믿었고 예수 복을 정확히 받은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왜 그런 복을 받았는가?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가슴에 모셨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그를 이끌어 그의 생을 일관되게 살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 중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회심적 사건이라고도 말하고 사도 바울이 예수를 만나는 결정적인 체험의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원래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처형시키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날도 그가 살기가 등등해서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결박시켜 예루살렘으로 호송시키려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너무 강해서 땅에 거꾸러집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아 직가라고 하는 유다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3일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채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직가라고 하는 곳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다메섹에 있는 주님의 훌륭한 제자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아나니아야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 집에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으니 가서 기도해라" "오, 주여 들은 바로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해롭게 하고 또 이곳도 성도들을 결박하려고 온 자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자를 만날 수 있습니까" "아니다. 그 사람은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택한 그릇이니 두려워말고 가거라"

아나니아가 유다의 집에 들어갔을 때 사울이라는 청년이 보지도 못한채 3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얹고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때부터 일어나서 음식을 먹고 건강해졌습니다.

 

첫째,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20절)

사울이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순간부터 사도 바울로 바꾸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울이라는 한 청년의 눈을 멀게 하시고 또 눈을 뜨게 한 이후에 사도로 쓰임을 받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보게 됩니다.

눈을 멀게 하신 주님께서 다시 뜨게 하시고 새로운 눈을 열게 하십니다. 우리의 지나온 모든 과거의 사건 속에서 바르게 보지 못하던 눈을 주님께서 멀게 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하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니 이제 새로운 세상을 봅니다. 이제껏 자신이 살아오던 세상은 볼 가치가 없었습니다. 이제껏 눈은 떴으나 잘못 보고 살아온 자신의 생애, 가치관, 세계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그는 과거를 다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일어섰던 것입니다.

눈 먼 사람들이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눈은 떴으나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맹인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맹인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지식이 없으면 문맹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양심이 마비되면 눈먼 사람이 됩니다. 돈에 눈이 멀고, 권력에 눈이 멀고, 성공과 출세에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은 양심이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안이 먼 맹인입니다.

사울이 뜬 눈은 영적인 눈입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공경했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눈이 먼 자였습니다. 어떻게 눈이 먼 자였느냐?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이 먼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환상의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찌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사울이 기독교 박해하는 것을 끝내고 이제는 선교사로 바꾸어집니다. 자기 민족만 보던 사람이 이제는 세계를 보는 사람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영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영안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므로 그의 생애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이제 성경에서 예수를 봅니다. 이것이 바로 영안입니다. 성경에서 글자를 보는 것은 지식의 눈입니다. 안믿는 사람도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예수를 보는 사람이 영안이 열린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 속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엡 1:17-18)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목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고 세계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자신의 과거를 알고 미래를 알고 사는 목적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계시의 영을 받아야 하고 또 눈을 열어야 합니다. 육신의 눈도 자연만물을 보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눈을 떴어도 빛이 없으면 캄캄한 밤에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빛이 있어야 됩니다. 또 빛이 있어도 눈이 멀면 보지 못합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있어야 됩니다. 빛과 내 눈이 열려야 됩니다.

이와같이 신령한 눈이 열리기 위해서는 성령의 계시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육신의 눈은 태어날 때부터 보는 눈이요, 지식의 눈은 배움으로 열리는 눈이요, 영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성령이 밝혀주는 눈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예수를 만나는 것은 성령께서 비추어 주어야 되고, 열어 주어야 되고, 감동해야 되고, 내가 믿음으로 이것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성장해야 됩니다. 마치 육신의 눈도 태어날 때는 세상 만물만 봅니다. 그러다가 배우면서 지식을 봅니다. 자라면서 글을 통해서 선생님으로부터 지식의 눈이 열려가지고 세계를 보고 미래를 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양심의 눈이 떠져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알아보고, 돈을 가졌으나 남을 괴롭히지 아니하고 선하게 살도록 눈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요 17:3).

성령의 역사로 그를 점점 더 많이 아는 것이 성화입니다(빌 3:10).

부활하여 그를 완전히 아는 것이 영화입니다(고전 13:9-10).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처음에는 구원받은 신앙으로 확신을 갖습니다. 내가 믿으면서 계속 내 자신이 죽어가면서 성화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세상을 보면서 예수를 보고 내가 죽어서 부활된 영화로운 몸을 입을 때 하늘나라에서 가린 것 없이 온전히 하나님을 보는 경지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성화와, 영화로운 경지로 날마다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믿음의 눈을 뜨고 겨우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예수를 믿는 초보 단계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희미한 경지에서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 듣고 깨우쳐서 내 눈이 열리고 열려서 매사에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나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는 변화를 계속 이어가게 됩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도 소경이었습니다. 소경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는 구걸하기 위해서 거지로 여리고 성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 나사렛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지" 이 소리를 듣고 그는 그쪽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잠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거기에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더욱 더 소리높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발걸음을 돌이키면서 "저를 부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할 때 겉옷을 내팽개치고 뛰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을 때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 눈을 떴으니 얼마나 볼 것이 많겠습니까 자기 부모도 보고 싶고, 고향길도 보고 싶고, 뒷동산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는 즉시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가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그는 육신의 눈을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떴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은 세상을 보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을 뜨자마자 즉시로 예수를 좇았습니다. 소경 바디매오와 같이 우리의 눈이 열려 주님을 보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눈이란 예수님 보는 것이요, 예수님 찾아 좇는 눈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예수만 보이게 됩니다. 사울도 눈에서 비늘이 벗어지고 다메섹에 들어가 즉시 회당에 가서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눈을 열면 몸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주님을 따릅니다. 생각도 주님을 따릅니다. 내 모든 존재가 주님을 다르게 됩니다. 내 지식도, 내 명예도, 내 권세도, 내 학식도, 내 재산도 주님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바로 영안이 열린 자입니다.

성경 가운데 영안이 열린 위대한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영안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천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 예수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본 것입니다. 그는 모리아 산상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면서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 오실 예수, 그리고 결박시켜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이삭을 보면서 부활하실 예수를 미리 보았다는 것입니다.

최고 밝은 눈이 믿음의 눈입니다. 이 눈은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요, 이 눈은 하나님을 아는 눈입니다. 그러므로 최고 지식의 눈입니다. 그리고 가장 멀리보는 눈입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를 부르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보는 눈이요, 먼 미래를 보는 눈입니다. 죽음 이후까지 보는 눈입니다. 참으로 신비한 눈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자기를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보통 눈은 남을 보는 눈이지만 믿음의 눈은 자기를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다른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자기를 볼 수 있는 눈까지 열어주는 것이 영안입니다. 우리가 유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밖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은을 칠하면 거울이 자기를 보여줍니다.

자기를 보려면 거울 앞에 서야 합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그 속에서 자기의 허물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비젼도 영광스러운 존재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성경에서 그리스도 앞에 설 때만이 내 존재를 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나를 비교할 필요없습니다. 다윗과도 비교할 필요없습니다. 그도 죄인입니다. 거기에서 나를 본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나를 볼 때 내가 죄인 됨을 보며 주의 의를 봅니다. 주의 의가 나를 덮어줍니다. 그래서 나에게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면서 나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별세는 예수 안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그 안에서 나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나를 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안입니다.

지금 나에게 무슨 눈이 밝아졌는지요. 우리 자신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 돌아가서 남편을 보면서 주님을 봐야 합니다. 이것이 영안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비전은 허황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눈으로 현장에서 삶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보면서도 '내 아내이면서도 주님의 신부야 함부로 건드리면 내가 벼락을 맞지' 하고 두려운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별세의 영성을 가지면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보면서 은혜가 됩니다.

오늘날 분리된 거룩을 너무 가장하는 사람들은 꼭 거룩해야만 은혜가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별세의 영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고 이 속에 예수가 있으면 그 사람은 시장 바닥에 들어가도 그 속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유행가를 부르면 사단의 노래라고 정죄하지 말고 유행가를 들으면서도 '아, 내가 주님을 사랑해야지' 하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내 속에 들어가 내 눈을 열면 자식을 보면서도, 아내를 보면서도, 시어머니를 보면서도 시어머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 저 분이 내 남편을 낳아주신 분이야 저 분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아내가 될 수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사도 바울은 천하만물이 다 신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범신론의 얘기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눈을 뜨고 창조의 만물을 보면 하나님이 창조한 손길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벌레먹은 나무를 보고 그 속에서 탄식의 음성을 듣습니다.

 

둘째, 사랑의 눈이 열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눈은 떴으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율법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미워하고, 모든 악을 합리화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제 그가 과거의 눈뜨고 본 것은 더 이상 볼 가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봄으로 과거의 눈은 멀었고 그의 눈에서 편견과 아집과 살기의 비늘을 벗기니 사랑의 눈으로 섬김과 봉사, 용서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서 율법으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던 눈이 멀게 되고 그리스도의 영이 눈을 열게 하니 보는 것이 이전과 전혀 달랐습니다. 정죄하던 눈이 멀고 이제 이해하는 눈으로 바꾸어져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이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자기를 용서해 주신 것을 알았기에 용서하기를 힘썼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본다는 것은 자기 속에 좋은점이 있기 때문이요,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좋게 볼 수 있음에도 나쁘게 보는 것은 우리 눈에 비늘이 덮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늘이 벗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눈에 비늘이 덮혀있을 때는 정죄, 증오, 살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비늘이 벗겨지니 사람을 보는 눈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비늘이 있으면 그 비늘 때문에 볼 것을 잘 못봅니다. 사랑은 눈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비늘이 있으면 그 비늘 때문에 볼 것을 잘 못봅니다. 사랑은 눈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똑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을 보는 눈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이 됩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요인 가운데 성공자는 성공자의 장점을 바라보며 실패자는 실패자의 단점만 보고 산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긍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행복합니다. 화평합니다. 상대의 장점을 보고 칭찬할 때 자기 인격은 성숙하고 마음에 평안도 얻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어두운면만 보고 삽니다. 태양을 등지고 삽니다. 사랑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좋은 세상으로 느끼면서 행복하여집니다.

이 역사를 보면서 종말로 가는 망할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고 종말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보며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을 열어서 똑같은 세상을 보면서도 좋은 세상을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창조하신 세상이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끝까지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셋째, 소망의 눈이 열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하늘을 보는 사람이요, 하늘나라 영광을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니 보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았으며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던 마음이 변하여 긍휼의 정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청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에 그의 눈은 온통 예수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들어가도 예수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사형장에 가면서도 찬송하면서 그리스도를 보고 죽습니다.

그가 이런 삶에 위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은 스데반의 죽음을 그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 스데반의 옷을 들고 서 있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희한한 광경을 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쓰러지고 등이 깨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잠이 드는 모습을 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토록 아름답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신비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바울은 여기에서 스데반의 강한 영향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광경을 보고 '아, 내가 훌륭한 공부를 했다고 남들로부터 지성인이라는 말을 들었고 내가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한번도 남을 그렇게 용서하거나 남을 널리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 것 아닌가 저 분이야말로 위대한 분이구나! 저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분을 만난 자의 모습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스데반의 영성이 각인되어 스데반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제가 군에 입대해서 처음으로 휴가를 받아 고향집을 찾아갔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20리를 넘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군대에 입대해서 1년 있다가 처음으로 휴가를 받아서 고향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모아놓았던 건빵을 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용산역에 가서 야간 군용열차를 탔는데 군대에서 휴가 나오는 장병들과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 고향집이라는 것이 군대 막사만도 못합니다. 우리 고향집에 비하면 군대 막사는 고급입니다. 먹는 것도 군대가 좋지, 집에 가도 별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휴가 얻었다고 좋다고 가느냐? 사랑하는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서, 짝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려고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나를 기다리지 않지만 나는 보고 싶어서 부모님에게는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고 달려갑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서 우물가에 나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물 긷는 것을 멀리서 보고 돌아갑니다. 가까이 가야 할 말도 없으니까요. 제가 고향을 찾아오려고 했던 것은 짝사랑하는 사람을 보려고 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흠모하고 사모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할 때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밤이 오면 집에 돌아가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요, 만약에 잠 자러 온다면 그곳은 하숙집이 되어버립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천국은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

소망은 곧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그의 전부였고 곧 행복이었습니다.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4-15)

어떤 분은 예수 믿고 손해 많이 보았다고 말합니다. 돈도 많이 잃었고 사업도 번번이 실패했고 돈도 많이 사기당했습니다. 악한 마음으로 싸워야 받을 수 있는데 교회에 와서 주일날 설교 들으면 용서하라고 하니까 그럴 수도 없고 예수 믿고 손해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 믿고 손해 많이 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 잘못 믿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큰 복을 받았습니다. 물질로는 잃어버린 것도 있지만 믿음어 얻었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세상의 명예를 잃었지만 성도라는 거룩한 명예를 얻었습니다. 생각하여 보니 잃은 것은 얻은 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렇습니다.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비교할 수 없는 은혜는 별세의 은혜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곧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의 은헤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곧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나깨나 그런 심정으로 살았기에 살아도 예수요, 죽어도 예수로 살았습니다. 이것으로 일생을 살았기에 그의 생애는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그의 눈은 말씀과 진리 속에서 그리스도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저 하늘나라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교자의 길로 가면서까지 한번도 자기 자신을 탄식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행복하고 영광스럽게 승리자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다메섹 직가

행 9장 10~19절 / 이동원목사

이 충렬 감독의 다큐멘타리 영화 <워낭소리>가 이 땅의 국민들의 눈과 귀를 집중시키는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돈도 별반 들이지 않고 만든 기대하지 않았던 이 영화가 대박을 터트린 원인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명한 인기 배우 하나 출연시키지 않고 등 굽은 여든 노인부부와 마흔 살 소의 출연만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비밀이 궁금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등 굽은 투박한 농부의 다 닳아 버린 그 손과 절룩거리며 생존을 이어가는 그 치열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모 세대의 거룩한 희생을 새롭게 발견한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면서 저의 뇌리에 줄곧 머물렀습니다. 팔순의 노부부가 소 한 마리 의지하여 한 많은 일생을 이어가는 유일한 목적은 자식들 교육이었습니다. 오직 자식들 하나만 생각하며 소꼴 뜯고 쇠죽 끓이고 소 먹이러 동네 산을 힘든 줄 모르고 오르내리던 이 노부부의 모습에서 그리고 이제 그 생명을 다해가는 비틀거리는 충직한 소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모 세대의 거룩한 희생의 가치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 희생의 결과가 우리가 불평을 쏟아 내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대로 살만한 오늘의 한국의 모습을 만든 것입니다.

 

결국 내일의 한국의 모습은 우리가 다시 우리의 다음 세대의 리더십을 어떻게 길러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선교의 개척자인 믿음의 사람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열두 제자 곧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는 일로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말에도 “인사는 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없이 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3.1절을 기념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다행스럽게 민족의 내일을 걱정하고 조국의 자유를 위해 일어설 수 있었던 애국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6.25전쟁의 잿더미에서 우리 민족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우리 부모들이 논 팔고 소 팔아 자기 자녀들을 미래의 리더십으로 준비시킨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방금 회심한 젊은이 바울을 축복하고 기도하여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광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그 통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비밀- 무엇일까요?

 

1.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일은 우선 하나님의 일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일에 하나님의 간섭이 있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기를 소원한다면 말입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만난 바울은 이미 다메섹 도상의 회심의 순간에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습니다. 바울의 기도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11절에 보면 눈이 먼 바울(사울)은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기도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새 인생을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은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부르십니다. 10절입니다.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래서 아나니아가 바울을 만나러 갑니다. 11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직가’란 ‘곧은 길’이란 뜻입니다. 이 길은 본래 바울이 살던 당시 동서를 가로지르는 1,600m의 곧은 길이었고 너비만도 15m이었는데 지금은 다메섹 시내 복잡한 시장 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곳을 우리 교회 성지순례단과 함께 방문했을 때 지금도 이 시장 내에 남아있는 몇 개의 석주와 성문의 잔해로 미루어 과거의 아름다운 길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길의 끝머리 골목길 에는 유다의 집터를 개조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아나니아 기념교회(1973년에 세운 프란치스코 교회)가 서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인도로 아나니아와 바울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예로부터 사람과의 만남을 ‘신적 만남’(Divine encounter)으로 간주하는 것도 영성 훈련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주선으로 만난 것이라면 얼마나 의미 있는 만남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모든 만남은 진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낯선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이런 복음 성가를 부르며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잊기엔 너무한 나(우리)의 운명이었기에/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아나니아 시대에 이 노래가 있었으면 아나니아와 바울은 틀림없이 이 노래를 이 중창으로 불렀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을 태우는 만남이었고 시대를 바꾸는 리더십의 출현을 예고하는 만남이었습니다.

 

2. 인간적 편견을 기도로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나니아 편에서 보자면 애초에 이 만남은 기뻐할만한 그런 만남은 아니었습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70제자중(처음 12명의 제자를 전도하러 보내시고 다시 후에는 70명을 보내심)의 한 사람으로 후일 다메섹 교회의 첫 감독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 교회의 지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복음의 적이고 교회를 핍박하는 원수였기 때문에 그와 바울의 만남은 정확하게 말하면 원수와의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13-14절을 읽어 보십시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별수 없이 아나니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바울에 대한 편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 편견은 당연한 편견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나니아에게는 이런 편견을 깰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아나니아가 자신의 편견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한 리더를 세우는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나의 편견, 나의 이데올로기, 나의 신념도 아무리 중요해도 하나님이 바꾸라고 하시면 언제든 바꿀 준비를 하고 사는 것-그것이 바로 아나니아가 쓰임 받은 이유였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 하나님의 음성,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17절에 보면 바울이 거하는 집으로 갑니다. 원수를 만나러 가는 겁니다.

그는 인간적 편견의 틀을 깨고 순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내 생각을 버릴 수 없다고 버티시는 분들-이런 분들은 굳은 신념을 지닌 사람으로 존경받을 수는 있을지는 모르나 하나님 나라의 리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나니아가 이런 편견을 깰 수 있었던 것은 또한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하다가 그는 환상 중에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이런 영적 민감성이 바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리더가 되게 한 것입니다.

 

3. 주께서 보내시는 사람을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시리아 성지 순례 여정중 다메섹의 아나니아 기념교회를 방문했을 때 가장 감동적인 것은 마당에 세워진 바울이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는 모습의 동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동상이 서있는 마당의 좁은 지하통로로 내려가 자리 잡은 10평 남짓한 작은 지하 예배당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명이 부연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작은 지하 채플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감상에 젖었던 감회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나니아가 이 젊은 청년의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할 때에 아나니아 자신도 아마 그가 역사를 바꾸는 인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을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그들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까. 아나니아의 안수 곧 그의 축복으로 세상을 바꾸는 리더가 태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1800년대 중엽 미국 보스톤의 한 교회에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이란 이름을 가진 주일 학교 교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 주일 학교 반에 한 소년이 등록을 했습니다. 그는 교회 학교에 삼촌의 권유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킴 볼 선생은 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자 했으나 그는 성경도 없었고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었습니다. 구두방에서 일하는 소년이었습니다. 킴볼 선생은 그에게 성경을 사주고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자주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했습니다. 그가 바로 불세출의 세계적인 전도자로 백만명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디가 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킴볼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이들을 축복할 준비만 되어있다면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동일한 원리로 우리가 바울은 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바울을 축복하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던 아나니아는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바울의 머리에 손을 얹었을 때 그는 앞을 보지 못하고 실명한 장애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인도에 민감했습니다. 그의 마음속 깊은 편견을 뛰어 넘어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했습니다. 그 순간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18절입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 지라 일어나 침례(세례)를 받고”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사울이 새로운 세상을 보도록 도운 것입니다. 사울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의 마당 언저리에는 눈을 뜨지 못하고 사는 이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은 오늘 누군가의 축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축복하는 순간 그들은 눈을 뜨고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3.1절 기념 주일입니다. 이 맘 때가 되면 우리는 신앙인 소녀, 민족의 누나 유관순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가 민족의 여인 하나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눈을 뜨게 하려는 여러 도움의 손길이 있어서 가능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찍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린 그녀의 부친 유중권의 영향, 그리고 그녀의 공주 영명학교 시절, 이 믿음 좋은 소녀의 미래를 열고자 그녀를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도록 도운 선교사 앨리스 샤프(Alice H. Sharp), 그녀의 이화학당 시절 “십자가 신앙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십자가 신앙으로 민족을 섬겨야 한다”는 정동 교회 손 정도 목사님의 영적 감화 또한 그녀를 만든 정신의 모자이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에너지를 나라 사랑으로 실천할 것을 늘 강조한 이화학당 박인덕선생의 영향이 그녀의 믿음과 애국이라는 가치를 만들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전합니다. 그리고 역사는 다시 찾은 이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위해 이제 우리의 가정, 학교, 교회가 함께 다음 세대를 축복하는 일에 어떻게 헌신할 수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오늘도 유관순 기념비에는 그녀의 3.1운동 거사 직전의 기도문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에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 독립만세! 대한 독립만세!” 우리는 그 기도에 빚진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 세상을 향해 눈을 뜬 사울

행 9장 10~19절 / 이동원목사

지난 2006년을 마무리하며 새해 2007년을 기다릴 무렵 2006년 12월 30일자 조선일보 제1면 톱 뉴스에는 매우 특이한 기사 하나가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이슈가 아닌 전남 담양군에 살던 한 평범한 농부의 개인 이야기였습니다. 제목은 “27년 만에 본 아름답고 이상한 세상”이었습니다. 내용은 41세가 된 이 농부가 각막 이식 수술로 시력을 되찾는 순간의 감동을 묘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그의 나이 7살에 눈을 다쳐 14살에 완전 실명을 했었는데 수술로 27년 만에 눈을 다시 뜨게 된 것입니다. 수술 직후 한줄기 빛이 오른 쪽 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의 시야에 처음으로 포착된 것은 그의 아내와 세 아들들의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처음 보는 그의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과 피부 빛이 얼마나 아름답고 곱게 느껴졌던지 그는 연신 ‘고와, 고와’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어서 그는 밖으로 나와 석양으로 물든 빨간 하늘빛이 얼마나 예쁜지 넋을 잃고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날아가는 새,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리고 서서히 깊어가는 어둠의 신비, 마침내 밤하늘에 빛나는 달과 별, 그 어느 것 하나 황홀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을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동안 너무나 답답했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눈을 뜬 자의 감격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사도행전 본문에서의 키워드가 있다면 ‘다시 본다’는 말입니다. 12절에 보면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17절에도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18절에도 “다시 보게 된지라”고 했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사울(바울)이라는 이름의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러 길 가던 청년이 예수를 만나던 순간 잠시 눈이 어두워졌다가 그 예수의 도움으로 다시 눈을 뜨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 대목들입니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꼭 개안수술을 받지 않아도, 신체적인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그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마음의 눈이 열려 세상을 새롭게 보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경험을 가르쳐 ‘eye-opening experience'(눈이 열리는 경험)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 그리고 나의 삶의 장이 너무 어둡기만 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까? 우리에게도 눈이 다시 열려 세상을 새롭게 보는 경험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암담한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눈을 떠서 발견하고 경험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 인생의 진정한 주인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왜 우리가 다시 눈을 떠야 합니까? 인생의 참된 주인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의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내 자신’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나는 내 운명의 주인며, 내 영혼의 선장이다.”(I am the master of my fate, and I am the captain of my soul). 1903년에 세상을 떠난 윌리암 어네스트 헨리(William Ernest Henley)라는 영국 시인이며 저널리스트요 철학자가 한 말인데 기독교 철학자인 프랜시스 쉐이퍼 박사는 바로 이런 생각이 오늘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세속적 휴매니즘(인본주의)’의 본질이라고 지적합니다. 우리가 왜 예수를 믿습니까?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일수 없다는 발견때문이 아닙니까? 물론 우리도 우리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 아니 내가 주인된 인생의 결국이 허무요 절망인 것을 깨닫는 어느 한 순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예수라는 존재를 향하여 ‘주님이시여’라는 고백을 시작한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많이 부르는 복음 성가의 가사처럼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 놓고/내 주되신 주앞에 나아간 것”이며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하기로 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됨의 고백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사울로 말하면 자기 자신을 믿고 살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빌3:5-6에서 “나는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고백합니다. 그야 말로 그는 자기 지식을 믿고 살만한 사람이었고, 자기 신념을 믿을 만한 사람이었고, 자기 철학을 믿을만한 사람이었고, 자기 도덕적 고결성을 믿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의 종교적 판단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자 다메섹을 향해 길을 가던 중 그가 경멸했던 예수를 만나 거꾸러집니다. 그때 그의 입술에서 나온 물음이 행9:5의 “주여 누구이시니이까?”라는 말이었습니다. 주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때부터 사울은 예수를 주로 부르고, 예수를 주로 증거하고, 예수를 주로 섬기는 일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만나던 그 날 사울은 예수가 진정한 인생의 주인이심을 눈을 떠서 보게 된 것입니다. 이 경험을 가르쳐 기독교에서는 ‘회심의 체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는 106명의 분들이 시리아와 요르단으로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우리가 인천 공항을 떠나 두바이를 거쳐 시리아에 도착한 첫 날 찾아간 곳이 바로 다메섹 교외에 자리 잡은 ‘바울 회심 기념 교회’(다메섹에서 18km 떨어진 지점, 코아캅)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선 우리는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요! 우리의 감격은 단순히 바울이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만나주신 동일한 주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고, 바울의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을 확인하는 자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인생의 진정한 미숀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인생이 흑암인 이유는 인생의 미숀을 모르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를때 인생은 방황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를 주로 만나는 순간 동시에 인생의 미숀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시력을 상실했을때 그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시내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에는 사울을 VIP로 만나기로 예정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0절입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절을 계속 읽어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사울은 이 유다라 불리우는 그리스도인의 집에서 사흘을 금식하며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12절에 보면 사울은 이 집에 주의 명을 받고 도착한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눈을 떠서 주께서 보게 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합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다메섹 출신의 예수님의 70인(혹은 72인)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나중에 다메섹 교회의 첫 bishop이 된 사람입니다. 우리들 성지 순례단도 이번에 바울이 눈을 뜬 역사적 장소인 직가 거리를 찾았습니다. 본래 직가는 바울 당시 동서를 가로 지르는 1,600m의 ‘곧은 길’이었고 너비만도 15m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복잡한 시장 거리의 좁은 미로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남아있는 몇 개의 석주와 성문의 잔해로 과거의 아름다운 길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의 끝머리 골목 길내에는 다행스럽게 유다의 집터를 개조해 만든 집터위에 아나니아 기념교회(1973년에 세운 프란체스코 교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당에는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는 바울의 동상이 있었고 좁은 지하통로로 내려가면 10평 남짓한 작은 지하 예배당이 있었습니다. 이 곳이 바로 사울이 눈을 떠서 인생의 미숀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의 미숀이 무엇이었습니까? 15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26:16에는 이렇게 증거되어 있습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것과 장차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라” 행26:18에 보면 바울의 새로운 미숀은 자신이 어둠에서 눈을 뜬 것처럼 복음을 전함으로 “이방인들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고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인생의 도상에서 미숀을 발견한 날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눈을 떠서 발견하고 경험할 것은 무엇입니까?

 

3. 주님의 생생한 보호를 경험하는 일입니다.

 

믿음의 인생이란 모험의 인생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십시오. 모험을 감수하지 않고 믿음의 거인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까? 누군가가 말하기를 우리의 인생에 진정한 드라마가 없는 이유는 모험을 기피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모험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모험에는 언제나 생생한 주님의 임재와 동행 그리고 보호하심의 약속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세상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바울의 새 인생도 그렇게 시작됩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자 마자 제일 먼저 한일이 무엇입니까? 행9:20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그는 침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즉시로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교인들이 전도를 안 합니까? 교회는 나오지만 아직도 나 자신이 눈을 뜬 경험이 없어서 일지 모릅니다. 내 눈에 비늘이 벗어져 살아계신 예수가 보인다면 어떻게 그를 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된 사울의 전도는 즉각적으로 미움과 핍박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한번도 이웃들에게 미움도 핍박도 받아본 일이 없다면 그것은 전도를 안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과연 전도의 삶은 미움만 받고 핍박만 받는 삶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약속하신대로 주님의 생생한 보호의 손길이 함께 하는 드라마 인생인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 직후의 사건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이런 핍박에도 불구하고 행9:22에 보면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23절에 보면 드디어 사울을 죽이려는 음모가 진행됩니다. 성문까지 지켜가며 사울 생포작전을 전개하자 행9:25에 보면 주께서는 신실한 제자들을 통하여 바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 밖으로 탈출시키는 007작전을 전개합니다. 우리들 성지 순례단이 직가 거리 동편으로 나와 오른쪽 성벽을 따라 돌아가서 2KM지점 되는 성벽 지점에 도달했을 때 거기 사도 바울 창문 교회가 세워져 주님의 신실한 보호하심과 도우심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시리아는 지금은 사실상 회교 국가가 되었지만 살아남은 이 교회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신실성의 증거로 보였습니다. 교회 입구에는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람이 탈만한 광주리가 비치되어 있었고 벽면에는 광주리를 타고 내려가는 바울의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왜 그러면 주님은 이 시점에서 사울을 보호하셔야만 했습니까? 그가 완수해야 할 미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위기를 만날 때마다 보호하심과 도움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여러분과 저는 보호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를 시작할 때 우리는 주님의 생생한 보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분이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인생의 모험을 시작한 때문입니다. 이제 곧 10월-이웃 사랑 축제가 머지않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울이 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바울을 축복하고 안수한 아나니아는 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아나니아의 VIP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주님 앞으로 인도한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는 순간, 그 순간을 기억하십시오. 그 순간이 그들이 새로운 세상을 향해 눈을 뜨는 순간들인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들의 VIP가 바울로 태어나는 순간들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그 소중한 VIP들이 작정되셨는지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

행 9장 10~22절 / 지용수목사

19세기, 프랑스 정부의 각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있었습니다.

‘역사가 짧은 신생국 미국이 어찌 세계를 이끌어 가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는가? 그 비밀이 무엇인가?’

그래서 프랑스 정부는 알렉시스티 토코필이라는 학자를 미국에 파견하여 그 비결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게 했습니다. 알렉시스티 토코필은 미국에 도착하여 연구실마다, 사업체마다, 공장마다 다 돌아보았지만 그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들판을 돌아보아도 프랑스보다 못했습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 대로 미국에는 사막이 많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전 세계에 공급할 수 있을 만큼 과일의 생산량이 풍부하지만, 400-5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강물을 끌어 와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비가 적절하게 내려서 온 땅이 비옥합니다.

그는 어디를 가보아도 해답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중 교회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뜨거운 찬양과 예배의 열기에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설교 말씀을 들으며 ‘아,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미국을 축복하시는구나.’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이 이렇게 크게 부흥하게 된 비결은 교회다. 교회를 통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미국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약해질 때 축복도 약해집니다. 하나님께 헌신이 약해질 때 가난해집니다. 하나님께 뜨겁게 바치고 뜨겁게 예배할 때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저녁 예배가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삼일 예배가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하나님께 뜨거운 예배를 올려 드리고 뜨겁게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목사님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한국 강단에서 놀라운 말씀이 선포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 강단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위해 날마다 기도해 주시지만 갑절로 더 기도해 주셔서 제가 이 시대의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아니 베드로나 바울보다 일곱 배로 더 강력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청와대가 변하고 모든 대학이 변하고, 우리 한국이 변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우상의 전각이 무너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국이 예수님만 믿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국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시골 처녀 에스더를 하루아침에 왕비로 세우시고, 나이 30에 불과한 죄수 요셉을 하루아침에 총리로 세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막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고 양곡교회를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면 막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방해하는 자들이 있어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 교회가 2010년도에 10만 명이 모여 예배드리게 되는 것을 막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그렇게 써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말씀이 증거될 때 하나님께서 불같이 역사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사도가 되기 전에는 자기 식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기 식으로 구약성경을 읽고 자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예수님의 성도들을 미워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믿어야 되는데, 자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주일 낮 예배만 드린다. 누가 뭐래도 나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지만, 아직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기 식으로 구약 성경만 읽고 구약의 하나님만 섬깁니다.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에 가보면, 지금도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검은 양복과 검은 모자를 착용하고 와서는 그 통곡의 벽에서 고개를 흔들며 통곡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기 식으로 기도합니다. 그런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가장 불안한 나라, 가장 긴장한 상태로 사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거리마다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언제 테러가 있을지, 언제 폭발이 일어날지 모르니 평안함이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고통 당하는 나라 중 하나가 이스라엘입니다. 왜입니까? 자기 식으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지금 자기 식으로 믿는 분들은 나중에 후회할 수 있습니다.

자기 식으로 하나님을 믿던 바울(사울)이 ‘아, 이것이 아니구나.’라고 깨닫고 유턴하여 하나님 식으로 믿은 것처럼, 15년, 20년, 30년 예수님을 믿어도 아직도 자기 식으로 믿는 자는 유턴하여 바른 길로 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늦기 전에,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기 전에, 죽음을 만나기 전에 바꾸어서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며칠 전에 회개를 했습니다. 제가 헌금을 제 방식대로 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8년 전부터 주일 헌금을 10만원 드렸는데, 지금도 그만큼 드립니다. 목사로서 매주 10만 원을 드리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전에 깨닫고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해마다 교회가 부흥하고 사례비도 올려서 주시는데 8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찌 주일 헌금을 똑같이 드린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은 해마다 커지는데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어찌 그대로입니까? 그래서 오늘부터는 달리 바치자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8년 전에도 주일 헌금을 천 원을 드렸는데 오늘도 천 원을 드리지는 않았습니까? 천국에 갈 때까지 천 원을 드리겠습니까? 8년 전에도 만 원을 드렸는데 오늘도 만 원을 드리고 천국에 갈 때까지 만 원을 드리고 끝내겠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커지면 우리도 그만큼 크게 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복도 크게 받고 바치는 것도 크게 바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탄절 헌금도 20년 전에도 오만 원, 작년에도 오만 원, 금년에도 오만 원, 항상 오만 원만 바치고 끝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크게 복을 주시는데도 오만 원만 드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대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해를 맞이할 때마다 천 원씩 드리는 분은 천백 원, 만 원씩 드리는 분은 만천 원, 십만 원 드리는 분은 십일만 원 이렇게 올라갈 때 우리의 축복도 올라갈 줄로 믿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을 자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목사님이 자기 식으로 목회하면 교회도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고 목사는하나님의 종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를 섬겨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내 식’을 버려야 됩니다. 자기 식을 버리고 성령의 방식을 따라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자기 식으로 하나님을 믿은 사울(바울)은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것이 좋았던 그는 스데반이 순교할 때 “저 자는 마땅히 죽어야 될 놈이야. 잘 죽었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성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피난을 가서 복음을 증거하여 거기에 교회가 일어난다는 소식을 듣고 속이 상해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다 잡아 가두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권세를 받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이 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섰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빛이 비쳤습니다. 그는 그 빛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 사울. 왜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은 평생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는 두려워 떨며 물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의 제자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했지,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여러분이 어떤 장로님을 미워합니까? 그것은 장로님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어느 집사님을 싫어합니까? 그것은 집사님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싫어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중에서 저를 미워하는 분이 계십니까? 저를 미워하는 것은 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 됩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에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He who receives you receives me, and he who receives me receives the one who sent me.)』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자를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자를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도를 조심히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울은 빛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그곳에 네가 행해야 할 일을 이를 자가 있으리라.”

그는 사람들의 인도를 받아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가슴을 쳤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정말 바보짓을 했구나.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섬긴 것이 정말 잘못된 것이었구나. 오늘까지 내가 참 어리석게 살았구나.’

그리고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회개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자기 머리에 손을 얹으니 성령의 기름이 임하고 눈의 비늘이 벗겨져 보게 되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주목하시지만 기도할 때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시편 73편 28절에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실 때가 언제입니까?

신명기 4장 7절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하심과 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도 지켜 주시지만 기도할 때 우리 가까이에 계셔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항상 기도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한편 아나니아도 하나님의 환상을 봅니다.

“아나니아야,”

“예, 주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일어나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가라. 거기에 가면 다소 사람 사울이 기도하고 있을 터이다. 네가 안수하여 다시 보게 되는 환상을 그가 보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정확하십니다. 사울이 본 환상대로 아나니아가 왔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7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해라. 처음 오르는 고기의 입을 열면 한 세겔 동전이 있을 것이니 가져다가 너와 나를 위해 성전세를 내라.”

베드로가 낚시를 하여 처음 낚은 고기의 입을 여니 돈이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물고기 입에 돈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저희도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장로님들을 모시고 성지 순례를 가서 예수님께서 다니시던 갈릴리 해변을 걷다가 베드로 고기를 파는 식당에 사서 베드로 고기를 한 마리씩 사먹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황 권사님의 고기가 입을 딱 벌리고 있어서 보니 그 안에 동전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 황 권사님도 베드로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돈을 물고 있는 물고기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가 잡힙니다. 요한복음 21장 6절에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하니 큰 물고기 153마리가 잡힙니다.

그러나 마귀는 거짓말을 합니다.

제가 한창 은사를 받고 예언을 할 때 위험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기도하고 있는데 어느 교회의 장로님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술집에도 가고 담배도 피우고 도박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장로님을 찾아갔습니다.

“학생이 여기에 어떻게 왔는고?”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안으로 들어섰더니, 장로님께서 아주 황당해 하면서 따라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장로님께서 아직도 몰래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도박한다고 하셨습니다. 회개하십시오.”

제 말을 듣고 장로님의 얼굴이 발개졌습니다. 장로님이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도박도 하는 것이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마귀도 역사합니다. 어느 날 새벽 3시쯤 제 귀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서문시장에 있는 S상점에 가서 네가 원하는 물건을 다 골라라. 그러면 그것들을 그냥 줄 것이다.”

그때 저희에게 많은 물건이 필요했는데 그런 음성이 들렸으니 제가 얼마나 흥분했겠습니까? 제가 ‘주여, 주여!’하며 2시간 동안 차를 타고 서문시장으로 갔더니 S상점이 있었습니다. 상점에 들어가서 필요한 물건을 많이 골라 한 곳에 쌓아 놓았습니다. 점원이 물건을 보더니 계산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것을 그냥 가지고 나오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점원이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연락을 못 받으셨습니까?”

“못 받았는데요.”

“무슨 연락을 받으셨을 텐데…….”

사장님에게 물어보라고 했더니, 사장님이 직접 왔습니다. 연락 받은 것이 없냐고 물었다가 망신만 당하고 나왔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속입니다. 마귀 말을 들으면 안 됩니다. 마귀가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으니 부끄럽게 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죽습니다. 마귀의 말은 다 거짓입니다. 마귀의 말은 그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정확합니다. 하나님께서 있다고 하신 천국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아나니아가 말합니다.

“주여, 제가 사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살기 등등해서 주의 종들을 해치고,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 종들을 끌어가기 위해 다메섹으로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니야, 그는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이름을 증거할 내 그릇이다. 가서 그대로 하라.”

그래서 아나니아가 성령님의 인도대로 갑니다.

아나니아가 자기 방식대로 살았으면 가지 않았을 텐데, 성령님의 방식대로 사니 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꿈에서라도 자기 방식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의 방식대로 살아야 합니다.

아나니아가 성령님의 인도대로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가니 다소 사람 사울이 3일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울면서 회개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나의 형제 사울아, 네가 오는 길에 나타나셨던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사울에게 성령의 기름이 임하고 눈에서 비늘이 벗어져 사울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몸은 약한 그대로이니 음식을 주어서 먹게 했습니다.

여러분, 영은 영이고 육은 육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은혜를 받지만 음식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은 말씀을 먹을 때 힘이 나고, 육은 음식을 먹어야 힘이 납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의 사모님이 얼마나 야위었는지, 마치 환자 같았습니다. 병원의 의사 선생님이 너무 약해서 환자처럼 보이면 환자들이 그 의사 선생님에게 치료를 받으러 가겠습니까? 의사 선생님이 건강해야 환자들이 많이 모여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목사님이나 사모님도 건강해야 좋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은 마치 환자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께 사모님이 어디가 아픈지 여쭈어 보았더니, 수년간 금식을 해서 그렇게 야위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더 가까운 영적인 생활을 하려고 수년 간 한 끼씩 금식을 해 오셨답니다. 그리고 음식을 조금밖에 드시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제가 사모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모님, 하나님께서 밥을 먹지 못할 정도의 시련을 주시면 금식하며 기도해야지요. 그러나 평안을 주시면 기쁘게 먹으며 살아야지요. 우리 예수님께서도 얼마나 잘 드셨습니까? 생선도 잘 드시고 양고기도 잘 드시고 포도주도 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모님께서는 왜 늘 금식을 하십니까? 그리고 사모님께서 음식을 해놓았는데 아이들이 먹지 않고 학교에 가고, 학교에 갔다와서도 먹지 않으면 사모님께서 좋으시겠습니까? 아이들이 맛있게 먹어야 엄마가 행복하듯이, 우리가 말씀도 잘 먹고 음식도 잘 먹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렇네요. 제가 하나님께 걱정을 많이 끼쳐드렸네요.”

여러분, 먹는 것이 참 중합니다. 음식이 생명입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적당하게 먹어야 됩니다. 돼지도 자기 양의 70%만 먹는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꾸역꾸역 먹으면 되겠습니까? 적절하게 먹어서 영육간에 강건하기를 바랍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다시 보게 된 사울이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지자마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합니다. 삼일 전만 해도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니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이 굴복합니다.

학교 선생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해 줄 일이 적습니다. 자식을 가르치고 훌륭한 인격자가 되도록 도와주는 그 정도에서 끝나지만 부모는 자기 자녀들에게 해 줄 일이 많습니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잠 재워주고 건강 돌보아주고 결혼 시켜주고 손자 봐주고 끝도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할 일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학교 선생님 정도가 아닙니다. 부모 이상입니다. 우리를 위해 다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너무 많으니 오늘도 본문에 나오는 것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나니아가 성령으로 사울을 만났을 때 사울은 아나니아의 원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박수를 쳤던 사울입니다.

그런 원수였는데, 성령으로 만나니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형제 사울아(My brother Saul)”라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 원수라도, 정말 용납하지 못할 사람이라도 용납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도와주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5장 5절에서 8절에 보면, 우리에게 부어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했는데, 그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경건하지 못했을 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한 다음에, 경건한 다음에, 거룩한 다음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있을 때, 진창에서 뒹굴 때 우리를 사랑하시사 예수님을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게 하시고 우리를 불러 구원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사람은 매력 있을 때 사랑하고, 사랑할 가치가 있을 때 사랑하고, 존경할 가치가 있을 때 존경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매력 없는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부부간에도 존경할 만한 남편이 아니지만 그 남편을 존경하고, 매력 없는 아내지만 그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부부간에도 때로는 갈등이 있는데, 성령님께서는 그 갈등도 없애 주시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남편은 아내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내들은 백화점에 가서 쇼핑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여자들에게는 백화점을 한 두 시간 도는 것이 보약 몇 첩을 먹는 것보다 더 낫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여자들은 쇼핑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백화점에 들어가면 그 때부터 물건과 대화를 시작한답니다.

‘아! 예쁘다. 이것 참 잘 만들었다.’

‘이건 우리 딸이 입으면 참 예쁘겠다.’

‘아이고! 멋져라.’

그래서 세 시간, 네 시간을 다녀도 기쁘고 좋답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백화점에 들어가서 한두 시간만 있으면 머리가 아프고 미칠 지경이 됩니다. 백화점에서 서너 시간 아내를 따라다니다 보면 속이 끓어올라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백화점에서 여덟 시간씩 쇼핑하며 하루를 즐기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마 남자들에게 백화점에서 여덟 시간 동안 쇼핑하라고 하면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남편 여러분, 남자는 일에 살지만 여자는 쇼핑에 산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남자와 여자는 동족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동족이 아닙니다. 아주 다릅니다.

아내와 함께 백화점에 가 보십시오. 여자들은 이 가게, 저 가게에 들어가서 옷을 몇 벌씩 입어 보고 사지도 않고 그냥 나옵니다. 등 뒤에 철판을 깔아 놓은 것 같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그냥 나오면 남편들은 뒤통수가 부끄러워 가게를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남편과 아내이지만 성령님께서는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면 부부 싸움도 할 일이 없습니다. 내 식으로 사니 부부 싸움도 하고, 아내에게 상처도 주고 아내를 괴롭히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젯밤에 12시 반까지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 일찍 잠자리에 든 아내가 잠이 깰까 봐 다른 방에서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아내의 기침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음이 아파서 “주여, 기침이 나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도 계속해서 콜록콜록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기침아, 물러가라!”

그래도 기침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 성령님께서 ‘따뜻한 꿀차를 끓여다가 아내에게 갖다 주어라.’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새벽 2시가 넘었는데, 부엌에 가서 물을 끓여서 꿀을 몇 숟가락 넣어 아내에게 갖고 갔더니, 아내가 “왜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하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서 시켜서 했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아내도 기뻐했고 저도 기뻤습니다. 제 식으로 생각했다면 제가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 그날 13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와서 12시 반까지 설교 준비를 하고 자리에 누웠으니 저도 얼마나 피곤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감동을 주시니 아내를 위해 일어나서 꿀차를 준비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아내를 위하라고 하십니다.

남편들은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아내 편이다.”

성령님께서는 아내를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침에는 이랬는데 저녁에는 저렇게 하는 것이 여자입니다. 그래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분이 해외 출장을 가면서 가만히 생각하니 평소에 아내에게 너무 무심히 대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날마다 전화를 해야지.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어야지.’라고 다짐했습니다. 첫날 전화를 했지만 쑥스러워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끊었습니다. 일에 바빠 정신 없이 다니다 보니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아이고, 내가 매일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일주일이 지나고 말았네. 오늘은 정말 사랑한다고 말해야지’.하고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여보, 별일 없소? 아이들은 잘 있소? 강아지는 잘 크고? 난에 물은 주었소?”

그러자 아내의 울먹이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당신 해도 해도 너무해요. 내가 강아지보다 못해요?”

남편이 자기 식으로 말하면 아내는 상처를 받습니다. 남편이 성령님의 마음을 가져야 아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내도 성령님으로 살면 항상 남편을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부모도 성령님으로 살면 아이들을 이해하며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아들이 아버지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회사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버지, 라면을 먹고 싶으니 오실 때 라면 한 개만 사오세요.”

다 커서 청년이 된 아들이 하루종일 일하고 퇴근하려는 아버지에게 그런 전화를 한 것입니다. 보통 남자 같으면 “야, 이놈아. 너는 발이 없냐?”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고 성품이 좋은 아버지는 “알았다.”라고 했습니다. 집에 들어온 아버지가 “아들아, 라면 여기에 있다.”하며 내미는데 라면이 네 개였습니다.

“아버지, 한 개만 사오라고 했는데…….”

“네가 어떤 라면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네 가지를 다 사 가지고 온 거야.”

라면 봉지를 받아들고 돌아서는 아들의 마음에 아버지의 사랑이 전류처럼 흘러 들어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는 직접 말을 못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 사랑해요.”라고 하며 행복해 했답니다.

라면 하나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영글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아들의 성적표를 보니 아들이 60명 중에서 55등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기도하면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너도 등수에는 들었지?”

“예, 아빠. 등수에는 들었어요.”

“누가 네게 공부를 잘 하느냐고 묻거든 등수에는 들었다고 말해라.”

등수에 든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우등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아버지입니까? 아들이 60명 중에서 55등을 했다면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열을 받아서 “아니, 이것도 공부라고 했냐?”하며 꾸중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으로는 가치 있는 것만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가치 없는 대상을 사랑하시고 존중하지 못할 인물도 존중하십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인 아나니아가 자기 원수와 같은 사울에게 “형제 사울”이라고 한 것입니다. 내게 잘못하는 동생도 나는 사랑하고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형제도 나는 사랑할 수 있는 그 사랑이 성령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하니 눈의 비늘이 벗어지고 보게 되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기름이 부어지면 병이 치료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사를 통해, 약을 통해 병을 치료하십니다. 그리고 음식을 통해서도 치료하십니다. 양파를 계속해서 먹으면 중풍에 잘 걸리지 않고 웬만큼 굳어가는 간도 부드러워질 정도로 양파가 몸에 좋답니다. 또 마늘을 먹으면 암이 잘 발생하지 않는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음식을 통해서도 병을 치료하시고, 의사와 약을 통해서도 치료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기름으로도 치료하십니다. 의사가 고치지 못하는 병, 의술로 고칠 수 없는 병은 하나님께서 직접 치료하기도 하십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죽을 자가 많이 살았습니다. 성령의 기름으로 살았습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 15절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병은 아무리 기도해도 낫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사 누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 많은 은사와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몸까지 건강해지면 교만해져 망할까 봐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를 끝까지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계속 병을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대개는 성령의 기름이 임하면 병이 치료되는 것입니다.

한 공군 소령의 간증입니다. 폐암 말기가 되어 인생이 끝나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나를 치료해 주시면 주님의 영광을 빛내는 훌륭한 군인이 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며 사는 군인이 되겠습니다.”라고 끊임없이 기도했는데, 얼마 후 암세포가 없어졌답니다.

우리 교회의 한 학생이 아주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이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우들은 새벽마다 통성으로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몇 주 후 아이가 의식을 회복하여 사람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지금은 죽을 먹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의사 선생님들조차 이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했답니다.

성령의 기름이 들어가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몇 달 전에는 한 자매님이 뱃속의 아기가 잘 크게 해 달라는 기도 제목을 강단에 올렸습니다. 잉태한 지 6개월이 지났는데도 아기가 자라지 않아 정상적인 아기를 출산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병원에서 아기를 포기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우들이 아이가 쑥쑥 자랄 수 있게 해 달라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며칠 전에 그 자매님이 순산을 했는데, 아기가 얼마나 큰지 조금만 더 컸으면 태어나기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십니다. 고혈압, 저혈압을 약으로 치료하면 오래 걸리지만 성령께서 덮으시면 순식간에 치료될 수 있습니다.

우리 중 혹 병으로 고생하는 분이 계시면 오늘 이 시간에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면 주님처럼 살게 됩니다.

성령 받기 전에 사울은 자기 식으로 살았습니다. 성령 받기 전의 그의 일은 예수님을 잡아 가두는 것이었는데, 성령을 받은 다음에는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그가 합니다. 아나니아도 자기 인생길이 있었지만 성령을 받은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습니다. 결국 한 마디로 말하면 성령님을 모신 사람은 주님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만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까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그의 안에 예수님께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께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지금 가장 강력하게 커나가고 있는, 맥도날드를 능가할 정도로 무섭게 커나가고 있는 햄버그 가게가 있습니다. 그 가게 이름이 'IN AND OUT'입니다. 들어오고 나간다는 뜻인데, 요한복음 10장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읽다가 힌트를 얻었답니다. 그리고 햄버거 맛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햄버거를 잘 먹지 않는 제가 먹어도 기가 막히게 맛있었습니다. 또 그 가게의 음료수 컵 밑에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인쇄되어 있고, 체인점을 내줄 때도 신실한 크리스천에게만 준답니다. 사업을 해도 예수님께서 하시듯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태리의 유명한 한 공작이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옆도 돌아보지 않고 상자를 다듬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자기를 쳐다보는데, 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상자만 다듬고 있었습니다. 공작은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어 가까이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여보시오. 뭐 하시오?”

“상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무슨 상자요?”

“꽃을 심을 상자입니다.”

“꽃을 심을 상자라면 거기에 흙을 담을 것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거요. 어차피 흙을 담을 건데….”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목수이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상자를 만드신다면 대충 만드시겠습니까? 흙을 담을 상자라도 예수님께서 만드시면 완벽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헛된 짓 하지 마시오.”

“아닙니다. 저는 일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당신 이름이 뭐요?”

“제 이름은 미켈란젤로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무엇을 만들어도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하며 정성을 다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이번에 제가 미래 목회회원 목사님들을 섬기러 가기 전에 오늘 낮 예배 때 전할 말씀을 미리 준비해 놓았습니다. 비행기를 13시간이나 타고 와서 어제 새벽에 도착했습니다. 피곤해서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기도하니 주님께서 ‘그것이 네 최선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다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밤 늦게까지 하다가 집에 가서 12시 반까지 더 준비하고, 오늘 새벽에도 4시 반에 일어나서 마무리를 했습니다. 1부 예배를 마친 후에도 다시 한 번 더 보았습니다. 저는 쉬고 싶었지만 성령님께서 ‘너의 최선을 다해라. 1초라도 더 바쳐라.’라는 감동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감동대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교우들도 은혜를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일을 하면 무엇을 해도 정성을 다 쏟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학생이라면 공부 시간에 만화를 보시겠습니까? 부모님은 공부하는 줄 아는데 방문을 걸어놓고 컴퓨터 게임이나 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회사원이라면 대충 일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경영주라면 사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시겠습니까?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모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지십니다.

제가 우리 장로님들을 모시고 싱가포르에 갔다가 크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싱가포르에서는 중국에서 만든 그 유명한 청심환을 팔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청심환에는 중금속이 있어서 그것을 계속해서 먹으면 건강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또 껌이나 담배 꽁초를 길에 버리면 벌금이 엄청납니다. 어떤 사람이 껌을 씹다가 버리고 새 껌을 입에 넣었는데 경찰관이 나타나자 껌을 삼켜버리자 경찰관이 바로 끌고 가서 엑스레이를 찍자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공무원의 월급이 일류 회사원의 세 배나 된다고 합니다. 일류회사의 사원이 150만원을 받으면 초급 공무원에게는 450만원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무원이 부정한 일을 하면 그 아들까지도 공무원을 못하게 한답니다. 공무원에게 월급을 많이 주고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게 해야 합니다. 정직한 공무원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도 싱가포르는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싱가포르는 특별한 나라인데, 제가 더 놀란 것은 아름다운 나무 위에 피뢰침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아름다운 나무에 피뢰침이 있는 것을 보고 제가 안내하는 분에게 물었습니다.

“저것 피뢰침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벼락이 칠 때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피뢰침을 설치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피뢰침이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성령님이 계시는 우리에게는 피뢰침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벼락이 쳐도 피뢰침이 있으면 나무가 보호되듯이, 어떤 위험이 닥쳐와도 성령님께서 계시는 우리는 보호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계신 사람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만인이 에워싸도 성령님을 모신 사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모신 사람은 하나님처럼 소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유럽제도를 여행하는 큰 여객선에서 한 아이가 애완용 강아지와 공놀이를 하며 놀았습니다. 아이가 공을 던지면 강아지가 쫓아가서 그 공을 다시 아이에게 물어다 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공을 너무 세게 던지는 바람에 공이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강아지가 공을 가지러 가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선장님, 배를 세우세요. 내 강아지, 내 강아지!”

아이가 울며 부르짖었지만 배는 계속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 그 큰 배를 세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아이가 강아지를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아이가 바다에 빠지자 선장은 할 수 없이 배를 세웠습니다. 강아지는 버려두고 갈 수 있어도 아이는 버려둔 채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강아지처럼 가치가 없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24시간 주목하시며 복을 주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 제가 일어나서 말씀을 정리하다가 또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좋은 부모님을 만나고,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친구를 만나고, 좋은 스승을 만나고, 좋은 아내와 좋은 남편을 만나고, 좋은 직장을 얻고, 좋은 사업을 하는 것도 다 복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복을 다 쌓아놓아도 성령님 한 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복을 다 받아도 성령님을 모시지 않으면 망하는데 성령님 한 분만 모시면 세상의 복도 천국의 복도 다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시는 것보다 더 귀한 복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공적으로 처음 나타나신 자리에서 ‘후우’하고 숨을 내뿜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을 모시고 성령님과 함께 승리 생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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