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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260710(2) / 사울에게 보내진 아나니아(2) / 행 9:10-19a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6.06.20|조회수51 목록 댓글 0

사울에게 보내진 아나니아(2)

행 9:10-19a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a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 설 교 >

왜 복음을 자랑해야 하는가?

행 9장 10~31절 / 오정호목사

여러분에게 복음(福音)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의 역할모범(Role Model)으로 서 있는 사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사울이 깨닫고 전한 복음의 내용은 너무나도 단순 명쾌합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복음은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Jesus is the son of God)”에 관한 소식을 말합니다(20절). 예수님은 단순하게 인간만이 아니라 신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죽음에 매여 있지 않고 부활의 영광을 누리셨습니다. 이 진리를 청년사울이 깨달았습니다. 또한 복음은 “이 예수가 그(the) 그리스도”라는 소식(This Jesus is the Christ)을 말합니다(22절). 예수님은 모든 허물과 죄와 사망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자”라는 것이 복음입니다(마태복음 1:21). 인간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때때로 교회가 복음을 복잡하게 말합니다.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본질과 비본질을 혼합하여 제시할 위험이 항상 있습니다. 구제, 봉사, 사회참여도 교회사역의 일부분이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relationship)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요한복음 17:3). 예수님을 올바로 만나면 그 사람은 구원받고, 예수님을 거부하면 그 인생은 소망이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왜 복음을 자랑해야하며, 어떻게 자랑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Ⅰ. 복음을 받으면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첫째, 복음을 통해 개인은 인생의 주인을 만나게 됩니다(18절).

아무리 지식과 부가 있어도 인생의 참된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방황하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안전지대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든지 인생의 참 주인 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그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잡고 의미있는(meaningful) 삶을 살게 됩니다.

청년 사울이 아나니아의 기도를 받고 눈이 열린 후 세례를 받았습니다(18절). 세례(洗禮)는 과거의 허물과 죄를 씻는 예식입니다. 그 본질적인 의미는 주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간다, 주님만이 인생의 구주요 생명인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이 땅의 행복을 주시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소개하는 것이 신자로서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신다면 어떤 정부, 국가, 이데올로기, 철학도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대로 주님의 뜻대로 이 세상을 살다가 주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참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둘째, 복음을 통해 가정과 국가는 새롭게 변화됩니다.

예수님이 가문의 주인이 되실 때 그 가문은 새롭게 변화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어 믿음의 씨앗을 뿌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우리의 가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가문으로 변화시킵니다. 복음이 전파되면 한 나라의 어둠이 물러가고 새로운 나라로 거듭납니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박사는 “서양 문명이 기독교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결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복음은 과학의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근대 과학의 기초를 놓은 과학자들 대부분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진리의 무오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과학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개인을 새롭게 하고, 가문을 바꾸고 한 나라를 새롭게 만듭니다. 의심과 회의가 많은 의문문의 인생, 비탄에 젖어 부정적으로 사는 부정문의 인생을 감격이 넘치는 감탄문의 인생으로 바꾸어 주는 능력이 복음에 있습니다. 패배자의 노래가 아니라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승리자의 노래를 부르며 살 수 있도록 변화시켜주는 은혜와 축복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습니다.

저희 가문 역시 복음을 만난 후 예외 없이 사람들의 가치관과 세계관과 성공관이 바뀌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복음은 가문을 예외 없이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답니다.

복음의 반영이 가훈에 배어있습니다.

 

가 훈 / 성경. 로마서 14:7, 8 / 빌립보서 4:13 / 베드로전서 4:11

하나.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

둘.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셋. 이웃을 사랑하여 덕을 세우는 삶!

넷.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

다섯. 받은 것에 대한 선한 관리자가 되는 삶!

=주후 1863. 11. 1 만들다=

 

셋째, 복음을 통해 교회는 건강하게 됩니다(31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절). 유대에 있던 교회든지 갈릴리에 있던 교회든지 사마리아든지 지역을 초월해서 평안을 누렸습니다. 교회가 분란이 일어나면 사회에 빛이 되지 못합니다. 교회는 샬롬(Shalom)이 넘치고 말씀 가운데 든든히 서가야 합니다. 주를 경외함(예배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예수 믿어 생명 얻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사도행전 2:46-47,4:4,5:12- 14).

정치권의 당(黨)은 중간에 마음이 안 맞으면 갈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내 맘에 맞지 않아 뛰쳐나가도 좋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세우신 우주적인 교회는 피부 색깔, 언어, 문화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Lord)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 거룩한 모임인 교회의 건강은 주님이 기뻐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외부적으로 건물을 짓는다고 해서 건강이 자동적으로 따라 오는 게 아닙니다. 건물은 하드웨어(hardware)입니다. 소프트웨어(software), 소울웨어 (soulware)가 잘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이 또 다른 생명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교회는 이웃을 위해, 영혼구원을 위해 존재합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 주의 복음을 자랑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일수가 없고 교회다울 수가 없습니다. 내게 주신 복음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는 성도가 건강한 성도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주님사랑의 마음이 녹아서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을 증거 하게 될 때에 그 영혼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건강이 깃 듭니다.

 

Ⅱ.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첫째, 즉시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20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20절).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지 3일만에 세례를 받았습니다(18절). 그 후 “즉시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내 삶에 능력이 있으면 복음을 전하겠다 라고 거꾸로 생각합니다. 복음 전하는 그 삶에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셔서 직장생활과 사업에도 하나님의 평안과 은혜로 함께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생활은 동일한 보조로 진행됩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서도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입술로도 복음을 증거 하여야 합니다. 청년 사울은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습니다. 시간을 미루지 맙시다. 우리 가족과 동료들은 오래 기다리지 않습니다.

둘째, 담대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29절).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거침없이) 말하고”(29절a). 아나니아도 담대했기에 사울을 만났고, 사울도 담대했기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성격이 온유해도 담대할 수 있고 성격이 불같아도 허약할 수 있습니다. 성령과 복음의 은혜가 나를 사로잡을 때 주시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역설적으로 담대하지 않아야 될 일에는 나서고 막상 담대해야될 그 자리에서는 뒤로 물러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초대교회 믿음의 선배들은 담대해야할 시점에 담대했음을 기억합시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셋째,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복음을 전해야합니다.(22,29절).

“증명하다(22절)”는 의미는 “함께 맞추다” “모으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자료화했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연구할수록 풍성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29절b). “변론하다”(discuss)는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로 대화에 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증명하든지 변론하든지 직업과 나이에 따른 접촉점을 통해 우리는 각자가 경험한 하나님말씀을 차근차근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의문점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는 당당해야합니다. 우리의 혀가 짧다 할지라도 복음과 주님은 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변론할 수 있습니다. 그들 마음의 숙제와 희미한 부분을 성경의 증언을 통해 하나하나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문제 많은 인생에게 예수그리스도 우리주님과 주님의 말씀만이 유일한 해답입니다(Jesus is the answer). 성경말씀을 통해 풀어낼 수 있습니다.

넷째, 위험을 무릅쓰고 전해야합니다(23-25절)

가치 있는 것은 그에 합당한 희생을 수반합니다. 영생(永生, Eternal Life)즉 영복(永福/ Eternal Blessing)과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을 갈라놓은 인생 최대의 사건을 일으키는 복음전파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전파를 위하여 희생을 달게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인생의 구주 되신 예수님의 사랑이야기(Love Story)는 개인을 새롭게 하고, 가문과 나라를 흥왕케 하고, 교회를 건강하게 변화시킵니다. 복음의 증인된 자로서 우리는 즉시로 우리의 삶과 입술을 통해 복음을 전합시다. 뒤로 물러서지 않는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려 깊게 연구함으로 진리인 주의 복음을 증명하면서 전파합시다. 생명을 살리는 가치 있는 일이기에 두려움, 오해, 심리적 위축, 자기비하의 도전이 있다 할지 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위협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합시다.

 

 

 

 

택한 나의 그릇이라

양향모목사 / 행 9:13-16

인터스텔라(Interstellar)라는 2014년에 개봉된 영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완전히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농사는 짓는 것마다 안 되고 먼지바람이 불어와서 사람이 살기가 힘들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멸망해가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우주 공간에 인간들이 이사를 가서 살 곳이 있는지를 탐험하기 위해서 주인공이 우주로 날아갑니다. 우주선 조종사였던 주인공은 똑똑한 딸아이를 지구에 남겨두고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우주선을 타고 미지의 우주로 날아갔습니다.

우주는 우리가 사는 지구와 다른 차원을 가졌습니다. 시간의 흐름도 다르고 중력도 다릅니다. 그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은 없을까, 혹은 지구가 망해가는 원인을 발견해서 다시 살기 좋은 지구로 만들 방법은 없을까를 연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주에 인간이 살만한 곳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구가 멸망해가고 있는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구를 구할 수 있는 공식을 풀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미 다른 차원에 있는 아버지가 과학자가 된 딸에게 이 공식을 어떻게 전달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딸은 어려서부터 늘 아버지가 연구하던 서재의 책꽂이 뒤편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뒤에서 다른 차원에 있는 아버지가 딸을 보며 그 공식을 전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좋은 생각을 해 냈습니다. 우주로 갈 때 똑 같은 시계를 두개를 사서 하나는 딸에게 주고 하나는 아버지가 차고 가면서 딸에게 말한 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이 시계는 같이 가고 있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시계로 모르스 부호로 공식을 알려주었고 어렸을 때부터 자주 와서 관찰하던 그 서재에 둔 아버지의 시계에서 아버지가 보내준 모르스 부호를 해석해서 지구가 망해가는 원인을 알아내고 해결을 해서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막연한 공상으로 만든 영화는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으로도 어느 정도 일어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양자물리학 분야에서는 이런 시공을 초월하는 과학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도 엄청난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고 영화관에서 정식으로 보지도 않았고 가끔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것을 보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른 차원에 있는 아버지와 딸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 것이 마치 차원이 다른 세계에 계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는 것처럼 보여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종말을 맞이하여 멸망을 항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들은 개인적인 종말로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공식을 우리에게 전달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전달 방법이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꿈으로 환상으로 음성으로 빛으로 이런저런 방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 방법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시계를 준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읽으면서 그 성경 속에 있는 비밀을 깨닫도록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 성경 뒤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냥 성경을 읽기만 하면 그 속에 있는 비밀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조명하셔서 알게 하셔야 그 비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9장을 통하여 유대교에 열심을 내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변하는 모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와 차원이 다른 세상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으로 살고 있는 사울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13-1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예수님께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예수님의 복음을 서계만방에 전할 일꾼으로 세우기 위해서 사울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붙잡아가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오고 있는 사울에게 빛으로 나타나셔서 그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빛을 보고 또 음성을 듣고 사울은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아나니아를 보내셔서 눈을 뜨게 하시고 사명자로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사울에게 안수를 하여 세우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씀에 대답을 한 것이 13절 14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니까 가기는 가야 되겠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는 전화도 없었고 인터넷도 없었고 그저 사람과 사람에 의해서 소문이 퍼지고 정보가 전달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보통으로 유명한 사건이 아니면 잘 모르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는 여기 다메섹에 사는 사람들에게 까지 잘 알려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유대교 지도자로소 촉망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고 특별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에게 해당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소문이 빨리 전달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도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은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할 때 거기 재판관으로 스데반을 사형시키는데 가표를 던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디 그 일 뿐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무조건 체포를 하여 감옥에 갇히게 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죽임을 당하게 하고 수도 없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괴롭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 다메섹으로 오고 있는 목적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여서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기 위해서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가지고 출발을 할 때 이미 그 사실을 안 사람이 다메섹으로 먼저 달려와서 그 사실을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런 나쁜 사람인 사울을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괴롭힌 사울을 팍 고꾸라지게 만들어서 앞도 볼 수 없는 사람이 되게 만들어버렸으면 잘 된 것이지요. 그냥 그렇게 벌을 받고 살다가 죽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동안 억울하게 당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다소라도 위로가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앞을 보게 하고 또 그런 사람을 붙잡고 일을 하시겠다고 하니까 아나니아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가끔은 별로 착하지도 않고 별로 배우지도 못하고 별로 재주도 없는 사람을 불러서 쓰시기도 하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사실은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머리가 좋으면 성질이 나쁘고 마음이 착하면 뭐가 바른지 구별을 못하고 좀 머리가 똑똑하면 욕심이 많고 이것저것 다 좋으면 게으르고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좋은 면을 보고 불러다가 훈련을 시켜서 쓰시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은 참 똑똑하고 열심히 있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유대교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제일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나쁜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교육을 시켜서 바른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정말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진리를 바로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게 되어서 세계만방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님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녀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교회에 다니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의 사울처럼 유대교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면 그것이 율법도 잘 지키고 선한 일도 많이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고 결국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들도 이렇게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나라의 일꾼들이 되었지만 사실은 형편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면에 부족하고 어느 것 하나 잘 하는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고쳐서 진리를 바르게 알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선 사람들이 되게 하려고 우리들을 불러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복음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이렇게 불러서 세우셨는데 아직도 진리도 모르고 뭘 해야 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세월만 보내는 사람이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택한 그릇이었습니다.

본문 15절 말씀에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의 나쁜 점을 말씀 드리면서 사울에게 가기를 주저하자 예수님께서 아니나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가라, 사울은 내가 택한 그릇이다.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사람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들을 미리 예정하시고 미리 선택을 하시고 그 선택 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을 예수님 믿게 하시고 구원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할 사람도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셔서 사용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받기로 예정 된 사람 중에서 일할 사람도 선택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주의 일을 하고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꼭 그렇게 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일만 많이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열심히 일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박해하는 열심이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기로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정말로 굉장한 사람입니다. 아무나 택함을 받는다면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겠지만 아주 특별한 사람만 아주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만 선택을 받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아무 일에나 선택을 받는다면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겠지만 이렇게 특별한 일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받고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는 일에 선택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선택을 받은 후에도 내가 엄청난 노력을 하고 엄청난 공로를 세워야 구원을 얻게 된다면 별로 감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사람으로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아주 굉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선택을 받았다면 그것은 너무나 큰 영광일 것입니다. 이 일은 너무나 보람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나에게도 큰 기쁨이 되는 일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큰 기쁨을 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정말로 해야 할 중요하고 보람된 일입니다.

사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구원을 받기로 예정이 된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들은 각각 다르지만 그 모든 일들이 복음을 위한 일이며 하나님의 일입니다.

특별히 우리교회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알고 전하는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복음의 일꾼입니다. 여러분 하는 일 하나하나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소중한 일이며 이 일을 위해서 택함을 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동네에 동남아 오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은퇴해서 사시는 선교사님 한분이 계십니다. 가끔 만나서 선교에 대한 소식도 듣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며칠 전에 만나서 대화를 하는 중에 깜짝 놀랄만한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순교자의 후손임을 자랑하기 위해서 일제 때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더니 그 분 이야기가 일제 때 신사참배를 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했고 그로 인해서 교회가 문을 닫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을 전도해서 많이 모이게 되었으니까 다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차 내가 지금 고신출신 선교사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지 하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모이게 하는 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바른 진리를 알고 교회를 다니든지 그냥 우상숭배를 하면서 다니든지 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야기하기를 자기는 믿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일으키실 때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병이 고쳐지기도 하고 안 고쳐지기도 하는 것처럼 믿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확신을 가지고 이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습니다. 응답을 받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를 하면 그 기도가 이루어지고 확신이 없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그런 뜻으로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사람이 외국에 가서 선교를 했다면 이 사람은 선교를 한 것이 아니라 선교를 망치고 다니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도 알지 못하고 주의 일을 했다고 하니까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일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을 선택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소수의 사람들만 이 귀한 일에 선택을 받게 해주십니다. 선택받는 일꾼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는 일입니다.

 

사울은 예수님께 계시를 받았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에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 많은 계시들을 받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음성도 들었습니다. 시내로 들어가면 네가 행할 것을 말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음성도 들었습니다. 시내에 들어가면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안수를 하면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환상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도 보이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이런 계시를 통해서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나쁜 짓을 하고 살았는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불러서 예수님의 귀한 일꾼으로 삼아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자신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부터 하는 일은 옛날 유대교에 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과거에 유대교의 일꾼으로 있을 때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고 큰 소리를 치며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것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이익은 고사하고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그런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왜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지 무엇을 믿어야 되는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계시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처럼 예수님께 직접 듣지는 못하지만 성경 말씀을 통하여 계시를 받습니다. 성경 말씀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 성경을 설교하는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그냥 읽고 그냥 들으면 안 됩니다. 성령님의 감동시켜주심을 통해서 읽고 들어야 합니다. 서론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차원이 다른 세상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기 위해서 성경을 주셨고 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냥 읽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그래서 복 받고 살라는 말씀으로 들리지만 그 말씀 속에 비밀이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들으면 그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그냥 성경을 읽으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을 때 아브라함처럼 순종해서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잘 살아야지 라고 들립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그 기사를 읽으면 아브라함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언약이며 그 후손이 받는 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주신 계시의 말씀 성경을 바로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말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 말씀 속에서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사울처럼 과거에는 하나님께 사람에게 해나 끼치면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사울처럼 예수님의 일군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 받는 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선택을 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계시를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계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복음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이 비록 외로운 길이고 고난을 받는 길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영광스러운 길이고 너무나 보람된 일을 하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붙잡힘

이정익목사 / 행 9:15-19

강도가 숨어 살며 도망 다닙니다. 낮에는 숨고 밤에는 활보하며 날마다 가슴 졸이며 살아가다가 어느 날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그것은 행복입니까 불행입니까. 그 강도는 붙잡혔을 때 소감이 어떠냐고 물으니 “시원합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붙잡힘은 구속이고 속박당하는 일인데 왜 시원하다고 대답하였을까요. 때로 부자유한 자유함보다 구속이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붙잡힘은 복이고 은혜이고 참 자유이고 행복인 것입니다. 거리의 아이들이나 가출소년들은 부모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그것이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그 자유는 무책임한 자유이고 불행의 자유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구속받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의 구속받는 삶이 진정한 행복이고 참 자유입니다. 죄인이 붙잡혀 감옥에 가야 진정한 자유이고 복입니다. 남편은 부인으로부터 강하게 구속받아야 자유로운 것입니다. 느슨하게 잡히면 갈등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최고의 복은 예수에게 아주 강하게 붙잡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로부터 부름 받고 붙잡히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붙잡힌 후 고백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께 붙잡히고 나서 가장 행복해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사울시절에 그리스도인들을 지독하게 악질적으로 핍박하였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치를 떨 정도로 핍박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한참 떨어진 도시인데도 사울은 멀다하지 않고 단숨에 가고 있습니다. 그때 모습을 사도행전 9장1절을 보면 사울이 “위협과 살기기 등등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친 듯이 달려갔다는 말입니다. 그때 환상 속에서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그때 사울이 살기가 등등한 마음만큼이나 빛도 강렬하게 비추어 그 빛에 사울이 눈이 멀어 순간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손에 이끌려 사울은 죄인처럼 다메섹 시내로 끌려들어 갔습니다. 그때 사울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식음을 전폐하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때 다메섹에 살고 있던 예수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계시가 임하였습니다. “가서 사울에게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하라.” 그래서 사울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해 주면서도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평소 그리스도인들을 지독하게 핍박하던 저 사람에게 왜 눈을 뜨게 해 주라하시나, 저 사울에게는 벌 위에 벌을 내려도 시원찮은데”라는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본문 15절을 보면 또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즉 “살기등등한 사울을 거꾸러트린 것은 내가 그를 쓰기 위하여 부른 것이니 너는 가서 안수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사울이 변하여 마침내 바울이 되고 바울은 전도자가 되고 사도가 되어 평생 종횡무진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바울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잡힌 후 바울은 여러 말로 고백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였노라,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얼마나 화끈한 고백입니까. “이 붙잡힘” 이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입니다. “내가 예수께 구속되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입니다. 이렇게 붙잡혔습니까?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소명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소명은 이유이고 목적이고 중심입니다. 이 소명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소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공무원은 이 소명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 소명은 품위이고 정신입니다. 이 소명이 있어야 이권개입을 안하게 되고 돈 몇 푼 받고 불명예 당하는 일이 없어집니다. 돈에 뜻이 있으면 공무원 그만두고 사업하든지 장사하든지 해야 합니다. 기업가에게도 이 소명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왜 사업을 하는지 이유가 분명하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부정을 저지르게 됩니다. 양을 속이고 질을 속이게 됩니다. 마틴 루터는 모든 직업은 하늘이 주신 천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직업은 성직 수행하듯이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목회자는 더욱 소명이 분명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더 확실한 부름 받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소신이나 자신감이 없는 목회를 하게 되고 억지로 목회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오늘 이런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직업으로 목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정이나 희생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목회현장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직분을 받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소명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직분을 극대화해서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이 소명이 없이 직분을 받으면 권위를 앞세우게 되고 공동체 안에서 물의를 일으키게 됩니다. 직분을 계급으로 인식하여 매사에 걸림돌 노릇을 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은 대부분 중직을 맡은 자들입니다. 중직을 맡은 자들만 조용하면 교회는 조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길에는 이 소명이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께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나서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방인들과 세상의 임금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내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늘 감격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나를 직접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신서 첫 장 첫 구절을 보면 “주께로부터 부름 받아 사도된 나 바울은 ...”하고 고백합니다. 이 소명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은 이것이 불분명한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태도나 내용이나 사역이나 삶이 불분명한 것입니다.

 

응답

 

예수께서 사도바울을 다메섹을 지날 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부르셨습니다.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마침내 사울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토록 무시하고 핍박하던 예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자신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장18절을 보면 “사울이 일어나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부름에 응답하였다는 말입니다. 즉 순종을 약속하였다는 말입니다. 사울은 이제는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는 제자로, 전도자로 부름에 합당하게 순종하겠다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 결단 속에는 “이제부터는 희생과 고난도 각오하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사울이 마침내 바울이 되고 전도자가 되어 그때부터 충실하게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노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이것이 부름에 대한 응답입니다. 부름을 받았으면 응답이 분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결단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 일행이 “즉시 배를 버려두고 따랐다”고 하였습니다. 아주 무서운 결단입니다. 엘리사에게 엘리야가 “나를 따르라”고 하자 엘리사는 즉시 따라나섰다고 하였습니다. 그 속에도 무서운 결단이 들어있습니다. 주께서 마태를 부르시자 즉시 따라나섰습니다. 그것이 응답입니다.

저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 부름도 모호하였고 응답도 모호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생각해 보니 충청도 기질이 그대로 나타나 끊고 맺는 것이 불분명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집안에서 “너는 신학교에 가라”고 했을 때 화끈하게 결단하고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집에서 가라고 하니까 그냥 밀려갔습니다. 그러니까 소명도 응답도 아주 불분명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아주 엉거주춤하고 모호한 태도로 이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분명하게 응답받기까지 매사가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이런 목회자들이 많고 이런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 속에도 이런 불분명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중직자들 중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이런 목회자는 평생 불분명한 목회를 하게 됩니다. 매사 자신감이 결여되고 새벽기도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어떻게 평생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고 교회에게 불행한 일이고 교인들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오늘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매 주일마다 억지로 끌려오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직장생활을 매일 그렇게 억지로 생활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요한 웨슬레는 경건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웨슬레는 그것이 신앙인 줄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32세 때 미국 조지아 주로 선교를 떠나면서 “내가 인디언들을 다 개종시키겠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런 그가 대서양을 건너는 배를 타고 가다가 거친 풍랑을 만나 기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생과 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수도 없이 기도했지만 오늘 이 시간에는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는 믿음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모라비안교도의 지도자 슈팡겐 베르그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수를 아십니까?” 어려서부터 경건한 신앙의 집안에서 자랐는데 예수를 아느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웨슬레는 비웃듯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또 묻기를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 물음에 웨슬레는 순간 마음에 찔렸습니다. 모든 모태신앙자들이 느끼는 아픔입니다. 그래서 야코가 죽은 자세로 겨우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또 물었습니다. “당신은 진정 예수를 아십니까?” 그 물음에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고 후에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니 무슨 힘으로 선교를 하겠습니까. 실패하고 돌아와 그는 고민스럽게 기도하다가 마침내 영적 체험을 하게 되어 소명을 다시 확인하고 그때 주어진 힘으로 그 후 52년 동안 종횡무진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합니다. 소는 물가로 끌고는 갈 수 있지만 물을 먹일 수는 없습니다. 공부에 취미가 없는 아이를 억지로 공부시키려고 방문을 지켜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이나 지키는 부모나 둘 다 불행한 일입니다. 먼저 그 아이가 뭘 좋아하는가를 알아보고 그것을 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방문을 지키지 않아도 스스로 밤새워 공부를 합니다. 예수의 제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부름 받음과 응답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내가 스스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는 사로잡힘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사로잡힘

 

사울은 18절을 보면 “일어나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스스로 결단하고 응답했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만 알기로 작정합니다.”라는 응답입니다. 17절을 보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충만과 응답이 함께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제자 됨의 순서입니다. 제자의 삶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는 삶을 말합니다. 이 사로잡힘이 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영이 내 삶을 인도하고 안내하고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다 그 힘으로 살아가고 일하였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사울왕은 사무엘이 머리에 기름을 붙자마자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였다고 하였습니다.(사무엘상10장10절) 다윗은 머리에 기름을 붙자마자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셨다고 하였습니다.(사무엘상16장13절) 제자들이 진로를 위하여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였다(사도행전2장3절)고 하였습니다. 예수 제자의 표시는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기독교는 영적인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나는 고목나무에 불과합니다. 타다 버린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그때부터 주의 영이 내안에 임재하면 나는 주시는 힘을 공급받고 일하게 됩니다. 성령은 사역의 힘을 공급하십니다. 지치지 않고 방향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배후에서 무한한 힘을 공급하십니다. 그래서 든든함을 느끼며 일하게 하십니다. 이 힘이 가장 큰 백이고 배경이고 후원자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요새시요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산성이시라”(시편18편2절)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대통령께서 사람들이 경제회복을 하고 G 20 정상회담을 유치하고 아랍 에미레이트의 원전을 수주하고 남미 볼리비아에서 희귀 자원까지 확보하고 나니까 외국 정상들이 부러워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내 뒤에 하나님께서 계신 줄을 모르고”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고 있음을 느끼는 고백입니다. 내 뒤에 누가 있다는 것이 최대의 힘이고 백입니다. 바울은 그 힘을 믿고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물에 빠지면 건져주셨고 뱀에 물리면 낫게 하셨고 옥에 갇히면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를 말릴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 힘으로 소아시아의 비탈길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사역을 마칠 때쯤에는 나는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힘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붙잡혀야 합니다. 한번만 붙잡히면 주님은 평생 그 끈을 풀지 않으십니다. 참 신비한 힘입니다. 그 힘이 제자의 삶을 살게 하고 봉헌의 삶을 살게 하고 중보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희생의 삶을 살게 하고 섬김의 삶을 하되 아주 기쁨으로 살게 하십니다.

제임스 메리트라는 분이 “성령의 열매가 당신을 리더로 만든다.” 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 책에 딸에게 편지하며 현재의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외식을 한번 하자면 나는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단다. 외식을 위해 너의 엄마는 아빠에게 옷을 입혀야 하고 아빠의 수염을 깎아야 하고 머리를 빗겨 주어야 하고 아빠를 휠체어에 태워 집 밖으로 나가 계단을 내려가야 하고 차 문을 열고 아빠를 차에 태워야 하고 휠체어를 접어 차에 실어야 하고 차를 몰고 음식점에 도착하면 엄마는 차에서 휠체어를 내려 펴야 하고 문을 열고 아빠를 내려 휠체어에 앉혀야 하고 차문을 닫고 휠체어에 태운 아빠를 식당으로 밀고 들어가야 하고 식사하는 동안 엄마는 아빠를 먹여 주어야 하고 식사가 끝난 다음에는 엄마는 음식 값을 지불하고 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한단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끝내면 엄마는 아빠에게 ‘여보 저녁 외식시켜 주어서 고마워요’ 라고 진정으로 따뜻하게 말을 한단다.” 남편이 쓰러져 반실불수가 되자 부인이 언제나 남편의 손발이 되어주었습니다. 그것도 기쁨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이것이 성령 안에서 가능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도우시는 영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이 영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때 내 안에 생수가 강같이 흐르게 되고 자원하는 마음이 철철 흐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 10시까지 잠을 자도 하루 종일 피곤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하고 아침부터 움직이며 살아도 온 종일 힘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의 차이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삶이 주는 힘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특히 제자의 삶은 확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소유자들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분명하게 사역하고 신앙생활하고 주님의 편에 서서 살아야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본문은 부르심과 붙잡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진정한 제자의 삶은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땅끝까지 교회, 바울이 받은 비전

행 9장 15절 / 석원태 목사

유명한 세계적 전도자 휫필드(Whitefilled)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하였습니다. 불타는 전도자의 이 말은 바로 예수께서 선언하신 세계선교 영역을 그대로 반영하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은 예수께서 명령하신 예수 자신의 선교영역입니다(행 1:8).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하였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선언하였습니다. ‘온 천하’, ‘만민’, ‘모든 민족’, ‘온 세상’, 그리고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끝’ 등의 성경의 표현은 우주적 복음운동의 영역(지역)과 그 대상을 밝히고 있는 말씀입니다. 존재하는 세계역사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교 명령이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속경륜 가운데 자신이 기쁘게 작정하신 14만 4천인의 구원의 정족수를 채우기 위하여(계 7:4, 9, 14:1~3, 롬 11:12, 25~26) 전 우주 공간과 시간과 역사는 필연적 목적 아래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14만 4천인(계 14:1~3)은 궁극적 구원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것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들로부터 나오는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나타내는 상징적 수를 가리킵니다(계 7:9). 그러므로 역사는 우연일 수가 없고, 맹목일 수가 없고, 기계적 진화과정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 존재하는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 속에 자리잡은 2000년 기독교 역사는 온갖 박해의 태풍 속에서도 없어지거나 망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구원의 복음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교회가 어떤 때는 약하고 무명하고 잔멸되는 듯이 보여졌으나,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역사는 결코 죽음을 모르고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부흥입니다.

성령행전이라 일컫는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을 말했습니다(행 1~7장). 유대와 사마리아 교회의 부흥을 말했습니다(행 8~12장). 이제 우리는 땅끝까지 교회의 부흥을 만나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세계선교 작전 가운데 구원의 복음을 땅끝까지로 확산시키기 시작한 선교 초기에 두 인물을 기용하였습니다. 그 한 인물은 저 평범한 어부 갈릴리 사람 베드로였습니다.

한 사람은 저 길리기아 다소 사람으로 이스라엘 사람이요, 베냐민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열정적인 율법사였던 바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땅끝까지의 복음 선교를 위하여 이 두 사람에게 세계선교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먼저 바울이 받은 세계선교 비전을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9장은 이 놀라운 사실을 역사 앞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브루스(Bruce)는 말하기를 “본 장에 야기된 사건은 기독교 역사와 세계역사에 일어난 사실(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Ⅰ. 그에게는 주전(B.C.)의 삶, 곧 사울이 있었습니다(행 9:1). 곧 믿음이 오기 전의 사람입니다(갈 3:23).

 

그는 고대 헬라문화로 이름난 길리기아 다소 성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획득한 자였습니다(행 23:27). 그는 베냐민 지파요 바리새종파였습니다. 그는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빌 3:4~5). 그는 종교적 소양에 있어서 예루살렘에서 이름 높았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고, 엄격한 율법주의자로 자타가 공인한 사람이었습니다(행 9:30, 11:25, 갈 1:21). 학문적 소양으로 헬라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당시 헬라 문화의 첨단을 달리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기독신자 스데반을 죽일 때 증인노릇을 한 자였습니다(행 7:58). 그는 교회를 잔멸하던 주동자였습니다. 그는 기독신자들의 집을 무단으로 침입하여 예수 믿는 남녀를 잡아 옥에 가둔 자였습니다(행 8:1~3). 그는 교회의 궁극적 황폐(잔멸)를 목적한 자였습니다. 그는 마치 전쟁 냄새를 맡은 군마처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 있는 기독신자를 체포하러 가는 주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합법적으로 기독신자 체포령을 손에 쥐고, 예수 믿는 기독신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하였습니다(행 9:2). 그는 그 도(행 9:2) 곧 예수의 도, 진리의 도, 부활과 생명의 도를 도전한 자였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지목하신 대로 ‘예수를 핍박’하던 반 기독적 죄였습니다(행 9:4~5). 그의 옛사람은 이렇게 육이 득세하였습니다. 신분적으로 로마시민이요, 종교적으로 가말리엘 문하의 바리새파요, 그 열심으로는 반 기독자요 반 교회주의자였습니다. 나중에 그의 고백대로 그는 실로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딤전 1:15). 믿음이 오기 전의 사람, 예수 이전의 사람이었습니다.

 

Ⅱ. 마침내 그에게 주후(A.D.)의 삶, 곧 바울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이 온 후의 사람입니다(갈 3:23).

 

1. 그는 박해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자기 생의 신기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행 9:2~3).

 

사도행전 9장 3절에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다메섹에는 5만의 인구가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던 많은 기독신자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습니다. 다메섹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도시로 지금도 현존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동북 24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순례의 요로였습니다. 사울의 반 예수, 반 교회 운동이 이러한 다메섹에 접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 박해의 도상에서 사울을 만났습니다.

 

2. 예수는 사울을 바울로 재창조하였습니다(행 9:3~12).

 

1) 예수는 그를 빛으로 재창조하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3절에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고 하였습니다. 홀연히 나타난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늘로부터 나타난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때는 정오라고 하였습니다(행 22:6). 사울을 생포하는 빛이었습니다(행 9:3). 큰 빛이라고 하였습니다(행 22:6). 사울을 땅에 엎드러뜨린 빛이었습니다(행 9:4, 22:7). 그 빛은 사울의 눈의 시신경 기능을 중단시켜 버렸습니다(행 9:8). 그 빛의 정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의 임재였습니다. 인간, 죄인 사울은 그 빛 앞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2) 예수는 그를 음성(말씀)으로 재창조하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4절에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음성이었습니다. 인격적 주님이었습니다. 그를 알고, 사랑하고 있다는 음성이었습니다. 아니 그 자신의 죄를 찔러주는 음성이었습니다. 사울은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그분 앞에 엎드러져 「주여 뉘시오니이까」(행 9:5)라고 역문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5)고 하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그 빛의 정체를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예수의 실존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 음성은 앞으로 사울이 행할 일(사명)을 알려줄 사람에게로 가라고 하는 음성이었습니다(행 9:6). 그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식음도 전폐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행 9:11). 이 기막힌 하늘의 빛과 하늘의 음성을 사울만이 보고 들었습니다. 같이 수행하던 박해자들은 인간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몰랐습니다.

 

3) 성령충만으로 재창조하였습니다.

주님은 다메섹에 살고 있던 기독신자 아나니아로 하여금 다메섹에 머물고 있는 사울을 찾아가게 하였습니다. 처음에 아니니아는 사울이 기독교 박해자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겁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다메섹 직가라고 하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있다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행 9:10~11). 주님은 먹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기도하고 있던 박해자 사울에게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너에게 와서 안수해 주면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행 9:12). 마침내 주의 지시를 받은 아나니아는 사울을 만났습니다. 사울에게 나타난 아나니아는 길에서 사울에게 나타나신 주님이 보내시므로 자기가 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행 9:17)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시간, 그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즉시 일어나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행 9:18). 새로운 바울의 출생입니다. 옛사람 사울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 바울이 출생하는 신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에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편지할 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하였습니다. 이 영감 속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의 신기원을 받은 자신의 경험이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에게 있었던 성령충만은 바로 옛사람 사울이 죽고(B.C.), 새사람 바울(A.D.)이 출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께서 충만케 하시는 빛과 음성과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3. 마침내 땅끝까지 가는 선교사명을 받았습니다(행 9:15).

 

주님은 사울을 의심하여 겁내고 있는 아나니아에게 그 사람을 향한 주님의 깊은 뜻을 알려주었습니다. 바로 사도행전 9장 15절에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사울을 찾아 안수해야 할 아나니아에게 들려준 말씀입니다. 사울이 사흘 동안 다메섹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금식하며 기도할 때 주님이 사울을 소명(召命)하고 사명(使命)을 주셨던 사실을, 사울은 후일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 간증하고 있음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16~18절에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주께로부터 받은 소명과 사명은

 

① 구령(救靈)이고, ②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을 받게 해서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고, ③ 죄사함이고, ④ 영원한 영생의 기업을 받게 하기 위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에게 빛으로, 음성으로, 성령으로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세계선교 계획을 위하여

 

① 선택되었고, ② 초자연적인 소명을 받았고, ③ 죄인 구령을 위하여 사명되었고, ④ 그 사명의 내용은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 복음이고, ⑤ 그 범위는 땅끝까지이고, ⑥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세계 선교 계획 속에 있던 땅끝까지의 교회운동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바울을 기용했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반 기독자, 반 교회주의자인 죄인 사울을 재창조하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주의 빛으로, 음성(말씀)으로 그리고 성령충만으로 그를 재창조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를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한 주님의 그릇으로, 이방인의 선교사로 기쁘게 기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가 바울이 된 무적의 세계선교사였습니다. 이방 교회 창설의 주역이었습니다. 세계지도를 새롭게, 존재하는 세계역사의 본질과 그 내용과 의미와 목적을 새롭게 기록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세기의 세계적인 역사가 토인비( Toynbee) 교수가 “드로아 항구에서 바울을 싣고 가던 배는 구라파를 싣고 가던 배였다.”라고 했던 그 말은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사실상 세계를 싣고 가던 바울의 배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의 심장 속에는 역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갈 2:20). 땅끝까지 교회의 부흥은 주님이 세우신 성령의 사람 바울에 의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예수님을 만난 은총을 입은 지도자에 의하여 부흥됩니다. 그래서 존 엘러튼(John Ellerton)은 바울의 회심과 소명과 사명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다메섹 정문에서 영광의 정복을 노래하네.

교회를 망치던 사울이 거기서 위협의 숨결을 느꼈고

울부짖던 늑대가 먹이를 향하여 온힘으로 달려왔으나

오오! 목자가 그를 만나사 그를 붙잡으셨네.

 

오오, 지극한 영광이 그의 길을 가로막았네!

오오, 빛이 진노 중에 있는 그 열성분자를 꿰뚫고 눈을 어둡게 했네. 오오, 고요한 음성이 그에게 발하여 책망의 말씀을 전했네!

오오, 그를 찾아 주의 일꾼으로 그를 쓰신 사랑이여!

 

오오, 모든 일을 견고하고 아름답게 이끄시는 지혜여!

승리자의 발아래 드리워진 그 결과보다 더 숭고한 것이 어디 있는가?

지금까지 주의 건축물을 파괴하여 맹렬히 애써온 그 사람보다,

주께서 쓰시기에 더 탁월한 건축자가 어디 있는가?

 

주여, 주의 교회를 가르치소서! 아직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연약함과 위험 속에 있는 교회에 주의 감추어진 능력을 신뢰하도록 하옵소서.

주의 은혜가 신비로운 방식으로 한 사람의 진노를 묶어 놓았고, 주의 철천지원수였던 자가 주의 택하신 성자가 되었나이다!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양향모목사 / 행 9:17-19

지난주에 인터스텔라라는 영화 이야기를 통하여 다른 차원에 있는 아버지가 지구에 있는 딸에게 이 세상을 구하는 공식을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로 인해서 멸망으로 달려가던 이 세상이 다시 새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처럼 우리와 차원이 다른 세상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때로는 환상으로 꿈으로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십니다. 그 전달의 결정체가 성경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신 구원의 길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의 욕심으로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의 핵심인 구원의 복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그 뜻을 알았다면 그렇게 실천을 해야 합니다. 알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알고 나서 그 아는 것을 따라 실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마술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냥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천을 통하여 변화되는 삶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자세히 살펴보면 성령 충만을 받고 환상을 본 아나니아와 사울이 어떻게 변해 가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에 옮겼고 사울도 세움을 받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본문 17절 말씀에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갑자기 찾아오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하였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행하기는 하지만 그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듣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해쳤는지 또 다메섹으로 오는 것도 예수님 믿는 사람 붙잡아가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의 생각에는 사울 같은 사람이 장님이 되고 비참하게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나쁜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유대인에게 큰 경종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울을 일으켜 세우라고 하셨고 사울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기 위해서 택하신 그릇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대로 순종을 하기 위해서 일어나 사울이 있는 집으로 갔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 사울아”라고 부릅니다. 그냥 사울아라고 부르든지 여보세요 라고 부르든지 그러면 될 것인데 굳이 형제라고 부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형제라고 부른 것은 아나니아가 사울을 정말로 한 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호칭입니다. 당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형제자매 관계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형제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형제보다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어의 형제라는 단어는 아델프호스(ἀδελφός)입니다. 이 단어는 델프휘스(δελφύς)에서 나온 단어인데 그 뜻은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한 배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헬라어에서는 한 자궁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다른 것으로 더 이상 가까운 사이요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없는 최대한의 언어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 더 친밀한 사이입니다. 한 몸이요 한 몸 안의 각 지체라고 표현할 만큼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뜻을 따라 같은 길을 가는 친밀한 사이 그 무엇으로도 떼놓을 수 없는 사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이 자궁을 긍휼이라는 단어와 같이 씁니다. 자궁을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 배로 낳은 자식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내 배로 낳은 자식이 잘못을 했다고 해서 어찌 미워하고 버리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이보다 더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태어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안수하여”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손을 얹어서 안수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수는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 맡겨드릴 때 하는 통상적인 의식이었습니다. 원래는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릴 때 짐승에게 안수해서 그 죄를 짐승에게 돌리는 의식이었지만 그 의식을 응용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안수를 하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하거나 교회의 사역자를 세울 때 사용하였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를 하는 것도 성령 충만을 받게 하여 그를 일꾼으로 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함으로 사울이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았고 복음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 육신도 다시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이 일을 함에 있어서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라고 함으로서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뜻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사울에 다메섹으로 오다가 만난 그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많은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병을 고치고 성령 충만을 받게 하고 또 일꾼이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뜻을 따라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에 사람 마음대로 아무에게나 안수를 하고 사람을 고치고 일꾼을 세우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람의 뜻에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아무에게나 안수를 하니까 병 고침을 받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일꾼으로 세워도 일을 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지도 않습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18절 말씀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안수를 하면서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하나는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라고 했고 또 하나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말대로 볼 수 없게 된 사울이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즉시’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수라는 방법을 통해서 치료를 할 때 ‘즉시’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냥 사람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안수하는 것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눈이 그냥 아무 탈 없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붙어 있어서 앞을 볼 수 없었고 그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영적인 일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통하여 일을 하십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도 실제적인 사실이었습니다. 빛을 보았고 음성을 들었고 눈이 멀어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보게 된 것도 그 보이지 않게 고장 난 눈이 고침을 받아서 보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꾼이 되기 전에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은 세례교인에 한해서만 세웁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적인 일을 하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일개 인간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서 자청하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하니까 거절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을 하시자 허락을 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의를 이루는 것”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 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물론 우리가 받는 세례는 그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바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유대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충성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례를 통해서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울은 안수를 받고 다시 보게 되었고 그리고 성령 충만함을 받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냥 육신의 눈만 다시 보게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다시 본 세상은 그전 세상과 같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게 된 관점은 다른 관점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다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이제 율법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을 정죄하여 짓밟고 내가 올라가려는 그런 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모르고 죽어가는 불쌍한 인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19절 말씀에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라고 했습니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안수를 하니까 눈이 고침을 받아서 다시 보게 되고 그동안 먹지 못했던 음식을 먹게 되고 강건하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울이 그냥 다시 보게 되었고 그래서 음식을 먹게 되었고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단어 하나하나를 쓰면서 그 속에 있는 깊은 뜻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매.’에서 ‘먹다(람바노, λαμβάνω)’라는 동사는 좀 특별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먹는다고 번역한 것은 오늘 본문뿐입니다. 주로 취하다, 얻다, 받다, 영접하다. 이런 뜻으로 번역을 하는 단어입니다. 먹는다는 뜻을 가진 단어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단어를 쓰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먹는다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먹지만 그 음식을 통하여 다른 것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음식을 먹을 때 육신을 위해서 먹었을 것입니다. 육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많이 먹고 맛있게 먹고 즐겁게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먹는 음식은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을 취하기 위해서 먹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음식을 먹을 때 배부르면 그만이었고 맛있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이것을 먹으면 몸에 좋은 것인가 몸을 병들게 하는 것인가를 따져서 먹습니다. 아무렇게나 먹으면 금방 병들게 되고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고 영적인 생명이 건강하고 그런 음식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그 음식을 먹는 것 때문에 신앙생활과는 별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을 왜 먹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에는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음식을 먹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건강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먹을 때 그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고 사는 삶을 통하여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 먹고 몸에 좋은 것 먹고 그 힘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지도 않고 오히려 세상에서 죄 짓는 일만 한다면 그 음식은 썩을 몸을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을 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다면 새 생명을 취하는 음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강건하여지니라”에서 ‘강건’이라는 단어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여기 ‘강건’이라는 단어는 다른 강건이라는 단어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단어는 직역을 하면 “힘 안에 거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자기의 힘이 아니라 다른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힘으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가지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사울이 이 세상을 건강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울로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다닐 때 그는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병을 아마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빛을 보았을 때 눈이 나빠져서 고침을 받은 후에도 완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하도 고통스러워서 세 번이나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데 네 은혜가 족하다고 하시면서 고쳐주시지 않은 병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여기서 강건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런 세상적인 육체적인 건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세상을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 비록 세상적으로 육신적으로 강건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힘만 의지하면 우리의 능력만 의지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일을 할 때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우리는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만 보니까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능력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우리도 못할 일이 없습니다.

사울이 그동안 잘못된 것을 배웠습니다. 잘못된 힘을 키웠고 잘못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다 버린 사람입니다. 이제 그에게 세상 적인 힘이 없습니다. 아무런 권력도 아무런 능력도 그에게 이젠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새로운 능력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힘으로 그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다시 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도 세례를 받았고 성령 충만을 받았고 안수를 받아서 일꾼이 되기도 했습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고 그 가는 길도 볼 수 있고 복음의 비밀도 아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많이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늘 생명의 양식을 받아서 강건하여 지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성령

행 9장 17~22절 / 홍문수목사

제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얼마 후 지리산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그 전에도 와 봤고, 다른 좋은 산들도 보았는데, 그 날 노고단 정상에서 본 지리산은 너무 아름다운 명산 중의 명산이었습니다. 왜 그랬나 생각해 보니까 산이 달라진 게 아니라 제 눈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우리가 행복하게 살려면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조건이 달라지면 행복이 저절로 굴러들어올 것 같이 생각합니다. 얼핏 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반쪽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달라지지 않으면 세상이 절대 달라지지 않고, 또 달라져 본들 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이 이를 증명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세상은 겉보기에 풍요롭고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아니 더욱더 혼란합니다. 그 와중에 행복은 요원해져만 갑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겉포장이 달라져도 본질 상 죄인에 불과합니다.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 ” 그러한 본질이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렘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흑인의 피부를 어떻게 바꿀 수 있습니까? 표범의 반점을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인간도 변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자기 스스로 결심하고 노력하면 되나요? 작심 3일이란 말처럼 잘 안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변화되지 않는 나 자신이 미워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지식으로는요? 물론 조금은 변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고, 마치 도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겉만 약간 달라지는 겁니다. 교양 있게 보이고 세련되게 보일 뿐입니다. 죄의 본성은 교육이나 지식으로 완전하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고학력 시대인데 범죄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상한 것은 문명지수가 높아질수록 범죄지수도 높아집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더 큰 죄인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면 법이나 공권력으로는 가능할까요? 일시적으로는 악을 억제할 수는 있습니다. 사회 정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것도 필요하겠죠. 그러나 인간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감옥에 가둔다고 변화됩니까? 개중에는 좋은 모습으로 교화되어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더 악해지고 못된 것을 배워갖고 나오는 경우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정말 인간은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지 못합니다. 다만 악한 쪽으로 변질되어갈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세의 징조 중 대표적인 것으로 인간성 타락을 꼽습니다. 딤후3:1~3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 이 예언의 말씀대로 앞으로 인간성은 더욱 악해져 가고, 그에 따라 인간은 점점 더 불행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인간은 영영 변화될 수 없는 구제불능일까요? 절망할 수밖에 없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가능한 방법이 있습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합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분명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딛3:5 보면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슥4:6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하나님의 신=성령)으로 되느니라”

 

본문에 보면 그런 실례가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울의 변화입니다. 그가 나중에 사도 바울로 변화되죠. 그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었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확실하게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이 변화되면 설사 주변의 환경 조건이 달라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도 행복한 인생을 원하십니까?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이 변화되면 됩니다. 나 자신이 변화되면 주위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행복이 물결치듯 번져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사울의 놀라운 변화를 살펴보시고 우리 안에도 그런 변화가 넘치기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사울의 변화 경위 : 예수님과의 만남, 성령 충만

 

사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회심합니다. 회심은 회개라는 말과 같은데, 흔히 맨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변화되는 것을 가리켜 구분해서 회심(回心)이라 부릅니다. 헬라어 단어로는 ‘메타노이아’입니다. 그 말은 180도 방향 전환을 가리킵니다. 정말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180도 변했습니다. 그가 변화 받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어느 정도로 놀랐을까요? 21절 보면, “ ... 다 놀라 말하되 ... ”그랬습니다. 여기서 놀랐다는 단어는 그냥 놀란 정도가 아니라, 충격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22절 보면, “ ...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굴복시킨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슁케오’인데 ‘혼란하게 하다’ ‘당황하게 하다’ 등의 뜻입니다. 이만큼 사울은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① 회심 이전의 사울 :

그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당대 최고의 율법 학자 가말리엘 문하생이었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즉 종교귀족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대단한 특권층에 해당하는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춘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는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더 열심히 추구하지만 오히려 일이 더욱 꼬여만 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성경의 배경이 바로 그겁니다. 예루살렘에서 그가 대제사장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받아 멀리 다메섹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해다가 투옥하고 죽이려고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 이전에 이미 스데반 순교 사건에도 연루된 인물입니다. 본인도 불행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독소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찬란한 빛 가운데 나타나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결국 예수님의 실존 앞에 사울은 거꾸러지고 말았습니다.

 

② 회심 이후의 사울 :

사울은 회심 직후 복음 증거자가 됩니다. 핍박자였던 그가 이제는 핍박을 감수하며 복 음을 전파하였고, 나중에는 순교자가 됩니다. AD 67년 네로 황제 때 그는 참수형으로 순교합니다. 본문만 봐도 그가 얼마나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23절 이하를 보면, 사울이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하자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핍박합니다. 그러나 그 모진 고난을 감수하면서 그는 사도 바울이란 새 이름을 가지고 세계 도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결국 그 복음으로 로마를 변화시키고, 특별히 유럽의 역사와 세계 역사를 변화시켰습니다. 아마 바울이 유사 이래 예수님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일 겁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엄청난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그는 항상 기뻐하며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가 이렇게 극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2] 사울을 변화시킨 성령 : 영혼, 인생관, 인격 등 근본적인 변화

 

사울이 변화된 데에는 1차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사울에게 직접 나타나신 것이 전환점이 됐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그를 변화시킨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서 제자 아나니아를 보내서 말씀을 전하게 하셨는데, 그가 사울에게 안수 기도를 해 줄 때 성령으로 충만케 된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사는 제자입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에 주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이야기인즉슨 사울이란 사람이 어느 집에 유하고 있는데,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님을 만난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눈이 먼 채 기도하는 중이니 가서 전도하고 안수 기도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나니아는 아주 황당했습니다. "그 사람은 악명이 높은 핍박자 아닌가? ..." 아나니아는 주님께 이의를 제기합니다.(13절~14절) 그러나 주님이 굳이 명령하시는 고로 순종합니다. 그 집에 찾아가 사울을 만나 예수님을 전하고, 안수 기도합니다. 그때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게 벗어지며 환하게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다른 것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나 말씀 자체보다 그와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사울은 무엇이 변화되었습니까?

 

① 영혼의 변화 :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어진 것은 멀었던 육안(肉眼)이 치유 받고 열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영안(靈眼)이 떠진 것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영혼의 눈이 열리자 이제 사울은 더 이상 과거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마음 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순순히 믿게 됩니다. 더 나아가 천국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은 다 이렇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니고데모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박사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지 않으니까 모든 게 깜깜합니다. 신령한 진리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것은 체면 때문에 낮에는 오지 못했지만 하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밤중에라도 찾아온 것입니다. 그것을 보니까 모든 조건을 갖추고도 그 영혼이 곤고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영적 상태를 보신 예수님이 그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요3:3 “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그는 뭐라고 대꾸합니까? 요3:4 “ ...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이 설명을 해주십니다. 육체는 어머니가 낳아주지만 영혼은 성령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죄로 죽었던 영혼이 성령의 능력으로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현상이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마치 바람이 눈에 안 보이지만 느끼져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요3:5~8)

니고데모는 정말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권세, 돈, 명예도 ... 그래도 만족함이 없고, 행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천국을 소망하기 전까지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품 안에 안기기 전까지 내 영혼에 참 평안이 없었나이다!” 이게 곧 성령으로 영혼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② 인생관의 변화 :

사울은 과거에 보통의 사람들처럼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살았습니다. 세상의 부와 권세와 명예 등을 추구하였습니다.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성령으로 변화된 후 아주 달라졌습니다. 빌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후 그는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 가치관이 달라지고, 인생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 그렇게 집착하던 것들을 이제는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렇게 싫어하던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삽니다.

이제 비전이 생긴 겁니다. 비전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인생을 보는 것입니다. 육안으로만 세상을 보면 세상 것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찮은 세상 것 때문에 목숨을 걸고 울고불고 싸웁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별 게 아닙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어린 시절 소꿉장난을 했습니다. 그러나 커지면 아무리 하라고 해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유치한 짓을 합니까? 뭐가 달라졌나요? 눈이 달라진 겁니다.

여러분, 헬렌 켈러를 아시죠? 그녀는 시각, 청각, 언어 등 3중 장애인입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변화되어 하버드 출신의 세계적인 교육가로 많은 사람에게 믿음과 소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시력은 있으되 비전이 없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변화된 사람은 이제 세상의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그보다 고상한 목적에 목숨을 겁니다. 사랑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교회를 섬기는 것 등을 위해 수고하고 땀을 흘립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누구 못지않게 충분히 행복합니다.

 

③ 인격의 변화 :

사울은 아주 살기가 등등하고 흉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본문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살기가 등등했던 그가 아나니아 앞에 순한 양과 같습니다. 사실 객관적인 지위로 보면 비교가 안 됩니다. 사울은 로마시민권자요 종교 귀족입니다. 반면 아나니아는 평민이요 핍박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 앞에서 엎드려 안수 기도를 받습니다.(17절) 그리고 세월이 갈수록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해졌는지 모릅니다.

그의 이름이 바뀐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그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로 바꾸었는지 성경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스스로를 낮추어 개명한 것 같습니다. ‘사울’이란 이름은 ‘큰 자’인 반면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울이 한 고백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 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 에 내가 괴수니라” 객관적으로 보면 이미 그가 거룩한 모습으로 성화되어 있을 때의 고 백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이 큰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마치 이와 같습 니다. 검은 옷을 입고 있을 때는 웬만한 얼룩이 있어도 못 느낍니다. 그러나 흰옷을 입고 있을 때는 작은 얼룩만 있어도 눈에 확 띕니다. 갈수록 온유하고 겸손해지는 모습입니다.

한국 초대교회 역사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연동교회 초대 장로인 고찬익 장로님의 일화입니다. 그는 본래 노름꾼에다 술꾼이며 사기꾼이었습니다. 한번은 관가에 끌려가서 매를 실컷 맞고 벙어리 신세가 되었습니다. 빚 독촉까지 받게 된 그는 자살을 기도합니다. 독약을 먹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납니다. 그때 연동교회를 시무하던 게일 선교사의 전도를 받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담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전도지가 그에게 건네집니다. 그날 밤 고찬익은 꿈에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말을 못하고 “고 ... 고 ... 고 ... ” 하다가 나중에는 떨리는 음성으로 “내 이름은 ‘고’가이고, 싸움꾼, 술꾼, 망나니올시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울면서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흰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집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전도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혀가 풀리고 말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뒤 고찬익은 게일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새 사람이 됩니다. 그는 나중에 손수 지은 신발을 가지고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나는 도적놈에다 싸움꾼, 사기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만든 신발을 드리겠습니다.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면서 전도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놀라운 변화를 보고 하나님의 힘이 아니고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성령님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무엇보다 자기가 먼저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물결이 가정과 이웃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세상이 아름답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구하고 우리 자신부터 변화되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도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부디 그런 일을 통해 우리 자신과 주변에 진정한 행복의 꽃이 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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