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기도
(마크 D. 로버츠 지음)
1. 하나님 일어나세요! - 도움을 구하는 기도
시편의 절반은 거의 다윗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내용은 도움이나 보호, 구원, 치유 등으로 가득 차 있다. 다윗은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떤 것이든 자유롭게 하나님께 구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 같은 자유를 하나님과 경험하고 싶다면, 시편 17편을 좋은 시작점으로 삼을 수 있겠다. 시편 17편은 기본적이고 솔직한 기도다. 시편 17편은 단순한 요청으로 가득 차 있다. 다윗은 찬송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서론 없이 본론으로 바로 들어간다. 물론 때로는 찬송과 감사를 덧붙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시편 17편은 우리의 솔직한 간구가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는 아닐지’ 염려하지 말고, 단순하게 도움을 구하라고 말한다. 사실 적합한 단어를 찾는 데 너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장벽을 쌓는 일과 같다.
다윗 왕이 드렸던 시편 17편의 간구는, 부모님을 향한 어린아이의 순박한 요청 같다. 부모는 자녀가 무엇을 요구하면, 그 요구를 듣고자 기꺼이 허리를 굽힌다. 게다가 100% 정확한 표현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예수님은 거기에 한술 더 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셨다(마 6:9). 어쨌든 시편 기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예수님도 다윗의 뒤를 이어 주기도문과 같은 단순한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신다. 시편 17편의 단순성과 반복성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담대했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시편 17편에 등장하는 다수의 요청은 명령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상사에게 사용하는 명령문은, 무례함이 아니라 존경과 위엄을 의미한다.
시편은 자유뿐만 아니라 담대함의 모범을 보인다. 먼저 시편을 사용해서 정기적으로 기도해 보자. 시편을 가지고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께 일어나시라고 말하는 것을 실습할 기회를 많이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에는 큰 능력이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저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 누구보다도 가장 신실한 사랑을 보여 주시는 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응답할 것을 믿기 때문에 간구한다. 그렇지 않은가?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다윗은,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주님께 간청했다. 그러나 절박한 개인적인 요청이 가득한 14절까지의 내용 이후, 다윗의 어조와 초점은 기도의 끝 부분에 이르러 극적으로 변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5절). 세상의 성취를 추구하던 원수들과는 대조적으로 다윗은 하나님 한 분 안에서 궁극적인 만족을 발견했다.
우리가 간구하기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간구에는 우리의 이해를 능가하는 신비함이 있다. 통치하시는 주, 전지전능하신 그분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참모 명단에 포함하기로 선택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경청하실 뿐 아니라 기도에 응답하신다. 왜일까? 간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또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 그분의 능력을 기이하게 여기도록 돕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을 통해 우리에게 복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우리의 존재가 그분에게 복이 되게 하신다. 그러니 이제 간구하라. 단순하게 요청하라! 반복해서 요청하라! 담대하게 구하라! 하나님께 다가가라. 그리고 주저하지 마라!
2. 코끼리와 같은 기도 - 기억하는 기도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정기적으로 주님을 찾지만, 정말 그분의 놀라운 기사와 이적, 판단을 기억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과거의 것들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는 요즘일수록 기억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은 우리가 꼭 경험해야 할 일이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기억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시편 78편, 105편, 106편은 이스라엘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기사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 예로 시편 105편은 예배의 부르심에서 시작해서 기억함으로 이어진다.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5-6절).” 이 시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회상하는 데 39절을 써서 여러 가지를 기억하게 한다. 106편 역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또다시 죄를 지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고 불성실하게 행했던 결과로, 하나님은 마침내 자기 백성을 “이방 나라의 손에”(41절) 붙이셨다. 그러나 아주 백성을 버리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44-45절).” 기억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들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의 불순종과 유감스런 기록들을 미화하려 들지 않는다. 하나님의 끈질긴 긍휼은 하나님을 망각하고 배척하는 우리의 암울한 배경과 대조되어 더욱 환하게 빛난다.
기억하는 기도를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시편 78편과, 105편, 그리고 106편을 읽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만약 시편을 매일 한 편씩 읽는다면 해마다 최소한 여섯 번은 기억하는 기도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일 뿐이다. 구약의 시편을 당신 기억의 시작점으로 삼으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기도 중에 표현하는 데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라. 예수님의 탄생과 삶,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일, 우리를 자녀로 초청하신 일,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 십자가의 희생, 그리고 부활 등을 생각하라.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기사들’을 기억나게 하실 충분한 시간을 드려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기사를 회상했으면, 시편 30편을 따라가며 당신의 삶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인자하신 행사들을 생각하라. 주님께서 당신을 죽음에서 영생으로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수많은 문제나 질병, 죄에서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그분께 아뢰라. 이 과정을 위해서도 충분한 시간을 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대표적인 방법의 하나는 ‘재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기념하도록 성만찬을 베푸셨다. 떡을 떼는 것은 그분의 찢기신 몸을 의미한다. 주님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재연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주님이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도 마신다. 그리고 이같은 상징을 해석해 주는 말을 한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고전 11:23). 성만찬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함께 모여 기념한다. 회중이 함께 나눔으로, 그 성례가 개인에게 미치는 힘을 강조한다. 기억하는 기도도 마찬가지다. 사사로운 회고는 함께 모여 기억하고 재연함으로 더욱 강조할 수 있다. 때로 우리 자신의 실패를 기억나게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더 강조하게 한다. 따라서 기억하는 기도 자체가 진정한 예배의 서곡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감사의 근간이며 우리 찬양을 북돋우는 일이다.
3. 폭풍 후의 고요함 - 침묵의 기도
조용함은 흔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전제 조건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하셨던 것처럼 “세미한 소리”(왕상 19:12)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그분의 속삭임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시편은 침묵의 결과만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은혜로운 결과로 제시한다. 침묵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세상과 우리 마음은 소란스럽다. 이를 고려할 때 침묵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편 62편을 보며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1절)라는 다윗의 기도에 합세할 방법을 찾아보자. 다윗은 자신을 “흔들리는 울타리”(3절)처럼 넘어뜨리려는 적들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시편 62편을 썼다. 그럼에도 다윗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잠잠하게’ 기다린다고 두 번이나 말했다(1절, 5절). 다윗은 이 평온함이 어디서 오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5-6절).” 다윗의 침묵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온 직접적인 결과다. 다윗은 하나님과 생명력 있는 관계까지 맺었기에 폭풍우 속에서도 잠잠히 기다릴 수 있었다. 이런 잠잠함은 하나님 안에 있는 담대함과 확실한 소망에서 말미암는다.
침묵 기도는 사적인 것인 동시에 공동체적이다. 침묵 기도는 하나님과 단둘이 있을 때 경험하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함께 모인 자리에서도 경험한다. 우리는 골방의 기도와 공동 예배에서, 그리고 개인적인 묵상 시간과 집회 속에서 침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축제 분위기의 열광적인 예배를 즐긴다. 할렐루야! 그러나 그러면서 침묵 가운데 경외심에 사로잡히는 것을 상실했다. 예배마다 침묵 시간을 의도적으로 넣으려고 시도하긴 하지만, 때로는 계획하지 않은 침묵이 계획하지 않은 은혜를 가져오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줄리라는 한 자매가 봉헌송을 부른 적이 있다. 줄리의 기가 막힌 소프라노 소리는 우리의 영혼을 고무시켰다. 그러나 3절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노래하던 줄리는 목이 메었다. 노래에 담긴 의미가 줄리를 압도했다. 마지막 절과 후렴 부분에 이르렀을 때, 줄리는 그냥 우리 앞에서 자신을 잠잠히 하나님께 드리며 서 있었다. 그때보다 더 감동적인 예배의 순간은 없었다. 회중은 줄리의 놀라운 노래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놀라운 침묵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사로잡혔다. 그 귀한 순간에 우리는 모두 잠잠했고, 주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경험했다.
4. 하나님께 기립 박수 - 기도의 신체적 표현
시편은 많은 구절에서 예배 중에 경외함으로 일어서든지, 경건하게 무릎을 꿇든지, 송축하며 손을 드는 방법으로 우리 몸을 사용하라고 가르친다(시 22:23, 95:6, 134:2). 시편은 절대로 우리에게 앉아서 예배드리라고 권하지 않는다. 하나님 한 분만이 보좌에 앉으신다. 시편은 기도 중에 여러 가지 신체적 활동을 하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들(노약자, 장애인 등)은 여기에 참여할 수 없다. 그분들은 하나님 앞에 일어서기를 바라지만 신체적으로 불가능하다. 비록 그들은 예배에서는 제약을 받지 않지만 신체적으로는 상당한 제약을 받는다.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마음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기도할 때 몸을 쓸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면, 성경이 가르쳐주는 자세나 움직임을 전폭적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위엄, 그리고 통치는 어마어마한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본성은 손뼉을 치고, 소리치며 찬양하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통치자이실 뿐만 아니라 왕 중의 왕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박수와 함성, 그리고 노래로 그분의 통치하심을 축하하는 것이 마땅하다. 실상 우리는 운동선수와 가수, 승전한 장군과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배우 같은 각종 유명 인사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모든 것에 뛰어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이 사람들을 비교해 볼 때, 주님은 우리의 박수, 심지어 영원히 멈추지 않을 기립 박수를 받기에 합당하시다.
나는 기도, 특히 예배 중의 신체 표현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신체적인 표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예배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기도 한다. 신체적인 표현을 예배의 진정성과 혼동하지 마라. 시편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예배할 때 신체를 사용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단지 우리가 이 같은 일을 한다고 그것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대화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달렸다. 한편 시편은 찬송할 때뿐 아니라 절박할 때도 손을 들라고 가르친다. 다윗은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시 28:2)”하고 기도했다. 이때 손을 드는 행위는, 절대로 예배가 황홀하다는 표시가 아니다. 나는 때로 예배 중에 손을 펼치는데, 찬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분께 궁핍함의 표시로 손을 든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 주저함 없이 당신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손뼉을 치고 소리를 치며, 여러 가지 신체적 표현을 할 때, 우리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다.
5. 한밤중의 신음 - 절박함과 의심의 기도
고통을 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까? 이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계시기나 한 건지 의심이 들 때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의심과 절박함이 우리를 압도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믿음은 계략이고 하나님은 하나의 신화이며, 기도는 박살이 나 버린 우리의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임시방편도 되지 못할 시간 낭비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는 우리가 던지는 질문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은 가장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신다. 그것은 강의실에서 설정한 신학이 아니요, 삶으로 입증된 신학이다. 시편의 기자들은 근심의 골짜기에 있을 때면 어떻게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구덩이에서 드린 기도의 내용을 기록함으로, 그들의 절박함과 의심 속에 우리를 동참시킨다.
아삽은 자신의 절박한 기도를 묘사함으로 시편 77편을 시작한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로다”(1절). 오랫동안 계속 기도했지만, 아삽은 하나님이 마치 귀를 막아 버리신 것 같다고 느꼈다. 응답도, 위로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삽은 밤중에도 하나님께 손을 들고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2절).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온 긍휼의 표시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3절). 여기서 ‘불안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문자 그대로 ‘끙끙거리다’, ‘포효하다’라는 뜻이다. 시편 기자들은 우리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말로써 하나님과 대화했다. 그러나 때로는 마음의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에 말이 아닌 비장한 신음과 탄식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아삽은 하나님의 인자와 풍성을 의심했다. 다시 말해 은혜롭고 자비하다고 밝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다. 아삽은 오늘날의 우리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 게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했다. 당신도 아삽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가?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는지에 대해 의심해 본적이 있는가? 만약 그랬다면, 하나님께 그것을 말씀드렸는가? 그분의 존재하심이나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는 마당에 뭐라고 말씀드릴 것인가? ‘주님 당신이 존재하시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존재하신다면 제 기도에 주의를 기울일 만큼 내게 관심이 있으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기도할 것인가? 시편 77편을 신중하게 여긴다면, 그 대답은 ‘그렇다’다. 당신의 의심을 놓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존재 여부와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하라. 무엇을 하든 기도를 중단하지 마라. 하나님을 떠나지 마라. 당신의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려라. 이는 부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직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편의 담대하고 솔직한 태도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주님께 다가가야 함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가르쳐준다. 의심이 당신을 사로잡을 때, 하나님을 잡은 손을 놓지 마라.
6.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 - 원한의 기도
시편의 기자들은 하나님께 불평을 토하는 데 자유로움을 느꼈다. 시편에는 저주의 말들이 왕성하게 들어차 있다. 제일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시편 3편의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7절)이다. 그리고 최소한 30편이 넘는 시편에서 저주가 등장한다. 시편 58편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내용을 발설한다. 그런 시편이 많다는 사실은 우리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더욱 당혹스러운 점은, 이런 말들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우리가 싫어하는 부분을 그저 간과할 수는 없다. 실제로는 가장 난감하다고 여기는 그 구절들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저주들은 진정한 우리 자신뿐 아니라 공의롭고, 자비하시고, 용서하는 하나님이신 그분을 직면할 수 있게 해준다. 복수심에 가득 찬 시편들을 절단해 버리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구로 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더 깊고 더 진정한 관계를 맺는 데 방해가 된다. 시편 137편은 다음과 같이 악명 높은 구절로 끝난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8-9절).” 유진 피터슨은 이를 “노골적인 증오”라고 말한다. 기도 모임을 가지던 중에 시편 137편을 읽어야 했던 날이 기억난다. 나는 이 구절을 성경 읽기에서 제거해 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피터슨이 옳다. “우리의 증오심은 억압시켜야 하는 게 아니라 기도로 쏟아내야 한다. 따라서 시편 절제 수술은 잘못된 것이다.”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 증오를 느낀다. 우리를 학대한 가족, 우리를 멸시하는 교사, 혹은 빈 라덴 같은 공공의 적을 증오할 수도 있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증오는 보기 흉한 감정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조차 증오심이 없는 척 한다. “주님, 제 안에 이렇게 보기 흉한 것들이 있습니다” 하고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도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찾고 계신다. 그분은 꾸며진 이미지의 당신이 아니라 진정한 당신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증오나 분노, 복수심, 혹은 당신이 감추고 싶은 감정이 있다면, 하나님께 솔직히 말씀드려라. 그렇지 않으면 부정적인 감정들이 쌓이게 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방해받을 것이다. 유진 피터슨은 다음과 같이 지혜롭게 말한다. “우리는 정답을 가지고 기도하는 게 아니다. 반드시 정직함으로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 모든 게 달콤하고 명랑하지는 않다. 그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때, 사랑스럽지 못한 우리의 정서를 은폐해 바람직한 것처럼 위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노출해서 하나님나라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실 때 두 편의 시편을 인용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는 구절이다. 고뇌와 고통의 순간에 저주의 내용이 담긴 시편을 인용할 수 있었을 텐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만한 모든 권리가 있으셨지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하고 기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시편에 등장하는 보복의 기도는 뭐란 말인가? 나는 이 갈등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에서 당신이 이 시편을 사용하는 데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하고 싶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벌주세요’ 하고 구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반드시 그렇게 해주셔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 정직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매우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하나님이 무한한 자비를 드러내셨다는 사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우리 안에 있는 복수심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우리는 십자가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보복의 기도가 대화의 마지막이 아님을 안다. 보복의 기도가 더 친밀하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기도로 나아가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따라서 정직한 기도는 하나님과 더 깊이 관계를 맺고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줄 수 있는, 더 큰 능력을 얻게 해준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용서의 마음을 주실 수 있다.
놀랍게도 복수를 원하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실제로는 십자가 밑, 더 정확하게는 예수님의 못 박힌 손과 발 앞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자신에게 죄 지은 자들을 처벌해 주기를 요청하는 동안, 그 처벌을 이미 그리스도께서 몸소 받으셨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원수와 우리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복수심과 용서치 않으려는 마음의 죄까지도 담당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보복 기도는 우리를 다시 한 번 십자가로 인도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이 은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깨달으며, 이 은혜가 아무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기뻐한다. 따라서 보복 기도는 진정한 용서뿐 아니라 궁극적인 찬송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만일 은혜에 대한 당신의 경험이 미숙하게 느껴진다면, 또한 찬양에 힘이 없다면 아마도 당신의 마음속에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지 모르겠다. 시편을 사용해서 당신의 마음을 좀 더 온전하게 하나님께 드려라. 우리 마음속 감추어진 부르짖음을 이미 듣고 계신 그분께, 입에 담기 어려운 것들을 모두 토설하는 법을 배워라. 그분의 은혜가 당신을 둘러싸고 치유하시도록, 그리고 당신을 바꾸시도록 해라.
7. 삶의 음미 - 감사의 기도
하나님은 감사하게도 우리가 감사하지 않는 마음으로 있게 하지 않으신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 연민의 속임수에서 구해 주신다. 시편 107편은 우리에게 감사의 본질과 왜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첫 번째 이유는 그분이 선하시기 때문이다(사 107:1). 같은 절의 후반부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하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이 행하신 감동적인 기록을 통해서다. 감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며 우리는 그러한 반응을 하며 그분을 인정하게 된다. 감사는 마음에 품는 것이며, 또한 입술로 표현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2절).
시편 107편의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그리고 그 보답으로 그들이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절박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네 가지 상황을 묘사한다(6, 13, 19, 28절). 하나님은 그들이 광야에서 굶주렸든지, 감옥에 갇혔든지, 죽을병에 걸렸든지, 아니면 풍랑을 만나든지 그들을 항상 구하셨다(11, 17절). 주님은 그들의 굶주림을 채우셨고, 그들의 사슬을 깨뜨리셨으며, 그들의 병을 고치셨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9, 16, 20, 29절). 그러나 시편 기자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항상 같은 감사의 반응을 보이라고 권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8, 15, 21, 31절).”
시편 107편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회중이 함께 감사를 드리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백성의 모임에서 그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그를 찬송할지로다”(32절). 우리가 사사로이 감사를 드릴 때도 하나님은 그에 합당한 영예를 받으신다. 하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함께 감사를 드릴 때는 그 영광이 배가 된다. 우리가 공식 석상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면 다른 사람들이 듣고 우리 감사에 합세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기꺼이 감사한 일들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대부분 도전과 실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민한다. 그리고 그 고통은 때로 참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감사하라는 것인가? 시편은 감사의 모범으로 이 질문에 답한다. 다윗은 시편 86편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12절).” 여기서 다윗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고 있다(7절). 다윗의 감사는 고통을 부인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곤경을 직시했지만, 그 상황을 뛰어넘은(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성품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8. 하나님께 퍼붓다 - 찬양의 기도
시편 145편은 생각이나 감정이 아닌 우리 입술의 고백으로 주님을 찬송하라고 가르친다. 다윗은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라고 말한다(2절). 당신은 매일 하나님을 찬송하는가? 대부분 그리스도인은 찬송을 회중 예배 안에 머무르게 한다. 하지만 시편 145편은 한걸음 더 나가서 우리가 혼자 있을 때도 매일 찬송해야 함을 알려 준다. 시편 145편에 등장하는 찬송은 노래를 포함한다. “주의 의를 (크게) 노래하리이다”(7절). ‘크게 노래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기쁘고 활기차며 음악적인 찬송의 모습이다.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때 생각과 마음, 그리고 몸이 하나가 된다. 한편 시편 145편은 반복적이다. 비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실상은 이 시편의 가장 근본적인 구조임이 틀림없다. 또한 시편 145편의 형식은 온전함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드려서 하나님을 찬송하라”하고 말한다. 찬송은 쏟아져 나오는 샘물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그분을 송축하는 말들을 자연스럽게 쏟아 붓게 된다. 이 일은 매일 쉬지 않고 계속해야 한다. 다윗은 “영원히”(2절) 주님을 찬송할 것을 약속했다.
시편 145편은 찬송의 모범을 보여 주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우리가 찬송해야 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우리가 주님을 찬송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기이한 일들’과 ‘두려운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5, 6절). 이 같은 행동은 찬송의 궁극적인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무한하기 때문에 찬송에도 제한이 없다. 다윗의 선포와 같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시 145:3).” 하나님 자신의 위대하심이 찬양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분의 위대하심은 우리의 측량을 능가한다. 따라서 우리의 찬송은 절대로 끝날 수 없다. 단지 일시적인 휴식이 있을 뿐이다. 찬송을 다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더 바라보게 되고 그것은 그분을 더 찬송하게 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애써 감흥을 일으키려고 하지 마라.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분의 성품을 기억해 보라. 놀라운 행적을 곰곰이 짚어 보라. 무엇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에게 하신 일과 그 일이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신)”(시 145:8)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생각해 보라. 당신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라. 무엇이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기억나게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라. 그것은 영감을 일으키는 음악일 수도 있고 조용히 뒤를 돌아보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나는 해변에 서서 광대한 바다를 음미할 때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맛본다. 혹은 청명한 여름밤에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바라볼 때도 다윗의 노래에 합세할 수 있게 된다.
시편 145편의 결론에 주목하라.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21절).” 시편 145편은 요한계시록 5장에 등장하는 요한의 환상을 예시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본다. 그 환상에서는 허다한 천사들이 하나님께 찬송을 부른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그리고 회중의 수가 훨씬 더 많아져서 찬송이 커진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13절).” 오늘 우리의 찬송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게 될 미래의 우렁찬 합창을 위한 연습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할 때, 이곳에서 천국을 미리 맛볼 수 있으며 천국을 위해 준비하는 기회를 얻는다.
9. 두려운 만남 - 고백의 기도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넓고 큰지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을 생각하면 움츠러든다. 다윗은 자백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공포를 이해했다. 그 예로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고백하지 않아서 고통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시 34:3-4). 가장 극악한 두 가지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던 다윗은 억지로 하나님 앞에 끌려왔다. 자백은 다윗의 첫 번째 방편이 아니라 마지막 수단이었다. 우리에게는 고백하기를 주저하는 우리 모습을 이해해줄 다윗이 있다. 다윗은 우리처럼 하나님의 영에 저항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고백의 축복과, 심지어 궁극적인 기쁨까지 발견했다. 다윗이 고백하기로 작정했을 때, 다윗은 주저하지 않았다. 다윗은 죄를 지은 것뿐만 아니라 악을 행한 것도 고백했다. 다윗이 죄를 지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인정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무한 고백이다! 당신과 내게도 이와 같은 담대함이 필요하다. 시편 32편과 51편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고백의 방법뿐 아니라 고백이 우리의 영적 건강에 끼치는 영향까지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지고 있는 고백하지 않은 죄의 짐이 있는가? 그 짐 때문에 지쳤는가?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즐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 짐을 십자가 아래에 내려놓아라. 당신의 죄를 고백하라. 다 쏟아 놓아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회복되라.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시 32:11).”
10. 왕 앞에 엎드리다 - 예배의 기도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그분 앞에 겸손하게 엎드린다. 엄숙한 복종으로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린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예배의 시작일 뿐이다. 백성이 왕 앞에 엎드릴 때, 이것은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것이다. 왕은 자신의 명령을 내리며 그 백성은 나가서 그 일을 수행한다. 정확한 예배는 정확한 순종으로 이어진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예배는 우리가 교회에서 혹은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시편 전반에 걸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주님은 우리를 공의로 의롭게 만드시는 ‘심판 주’이시며, 말씀을 선포해서 우리가 그것을 믿고 행하도록 하는 계시자이시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킨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세상 속에서 그분의 뜻을 행하겠다고 서원하는 일과 같다.
예배는 혼자서 하는 어떤 게 아니다. 다른 성도들과 함께 공동체 안에서 하는 것이다. 시편 95편과 96편은, 혼자 있는 성도가 아닌 성도들의 공동체를 예배로 초청한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주님께 새 노래를 부른다. 함께 하나님 앞에 엄숙하게 엎드린다. 세상에서 함께 예배의 삶을 산다. 게다가 우리가 예배의 삶을 사는 것도 세상이 우리와 연합하게 함으로, 참된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엄숙하게 순복시킨다면,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며, 주님을 위해 사는 새로운 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시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함을 상기시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 중 하나는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누구인지 아무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다는 일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