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 박은 정욕과 탐심
7세기 정교회의 탁월한 영성가 요한 클리마쿠스는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라는 걸작을 남겼습니다. 서방교회의 번연의 ‘천로역정’이 있다면 동방교회는 클리마쿠스의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가 있다고 할 만큼 ‘천로역정’에 버금가는 책입니다. 정교회 사제들이나 수도사들은 이 책을 평생 40-50번 읽는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는 사다리는 천국과 세상 잇는 축을 의미합니다. 그는 그 책에서 식탐이란 정욕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배는 인간의 모든 파멸의 원인이며, 식탐과 정욕은 특별한 연관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배를 좇아 살면서 간음의 정신을 제어하려는 사람은 기름으로 불을 끄려는 사람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클리마쿠스는 분노나 정욕을 정면 공략하는 것 보다 식탐과 싸울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먹는 양을 겸손히 줄이면 정욕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마음이 무디면 생각도 둔해지고, 음식이 넘쳐나면 눈물샘이 마른다”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유명한 학자인 제롬은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셔 배를 채우는 일은 정욕의 온상이다”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식탐과 정욕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먹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 욕구 중에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극복하기 힘든 것이 식욕입니다. 그래서 식탐이 정욕을 일으킨다고 한 것입니다. 건강과 장수는 현대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이어트는 건강을 위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다이어트는 사회문제이며, 영양실조를 일으키고, 수면의 가장 큰 적이 되고, 과하면 죽음에 이릅니다. 최근 정신과의 여성 환자 20%가 성형이나 다이어트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근래에는 고교생 5분 1이 다이어트 등으로 말미암아 헌혈이 부적격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시도한 다이어트 방법은 총 28,000가지 보다 더 많습니다. 미국 한 나라에서만 다이어트 비용이 연 200억 달러가 넘습니다. 이 돈만 가지고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기근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건강과 장수는 현대인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등장하였습니다. 누구나 건강해야 하고 장수해야 합니다. 현대인의 육체에 관심은 지나칠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체적 다이어트도 중요하지만 영적 다이어트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방법과 비용에 많이 투자해야 할 것입니다. 영적 다이어트를 잘해야 육체도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영적 다이어트란 ‘단순한 삶’을 의미합니다. 영적 생활은 삶을 단순화합니다. 영적 생활은 인간의 갈망을 단순화합니다. 가장 강력한 삶은 단순한 삶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세이크교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거나 쓸모없는 것은 만들지 말라. 필요하고 쓸모 있는 것들이 아름다운 것이다”. 어느 사회 심리학자는 “덜 누리는 것이 더욱 많은 기쁨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3:5에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합니다. 탐심이란 하나님 보다 세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우상숭배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런 우상숭배는 다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홀가분하게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십자가에 정욕을 못 박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24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합니다. 5장 앞부분의 육체대로 범죄하지 말고 사랑을 행하라고 한 말씀에 대한 결론입니다. ‘육체’는 부패한 인간성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모든 죄악의 근원입니다. 갈라디아서 5:17에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정욕이란 의지적으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죄악의 심리를 가리킵니다. 인간에게는 본능적 욕구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본능적 욕구가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욕구도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으면서 욕구가 없으면 이것이야 말로 큰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본능대로만 살면 또한 사람이 아닙니다. 본능적으로만 살면 짐승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본능적 욕구를 이성으로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루스는 말했습니다. “정욕의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은 희망이 없다. 당신이 유혹을 받지 않는 까닭은 이미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유혹의 자리에서 죄와 싸우지 않는 사람은 이미 육체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은 유혹의 고통을 받지 않는다”. 넘어진 자는 더 이상 넘어질 염려조차 없습니다. 요한일서 2:16에는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사람으로 하여금 정욕을 일으킵니다. 세상으로부터 온 정욕이 사람을 괴롭히고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이란 그의 책에서 “영적 쾌락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몸의 쾌락으로 돌아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정욕으로 이끄는 것은 영적 공허함 때문입니다. 반면에 순결의 뿌리는 영적 충만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하는 것은 현세에서부터 아주 욕심을 없애버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현세에서 그리스도인에게서 정욕이 아주 없어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사람은 정욕을 가지고 살되 정욕을 이성으로, 믿음으로 잘 제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정욕을 완전히 끊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6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욕망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적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부활은 정욕과 싸워 더 이상 정욕이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힘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성이 가지고 있던 정욕과 결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의 정욕이 사라집니다. 부활은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더 이상 정욕이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 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 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정욕대로 살려고 하는 인간의 본능은 죄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육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정욕은 사라집니다. 더 이상 정욕으로 살지 않습니다. 둘째, 십자가에 탐심을 못 박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합니다. ‘탐심’은 따갑게 일어나는 죄가 되는 욕구를 말합니다. 정욕과 탐심은 항상 짝을 이룹니다. 정욕대로 살면 탐심이 일어납니다. 인간이 정욕을 채우려면 탐심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출애굽기 20:17에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십계명의 결론인 열째 계명입니다. 십계명의 결론은 탐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계명에서 말하는 탐심을 버려야 할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웃의 아내, 종(사람), 짐승, 그 밖의 모든 소유입니다. 이웃의 모든 것에 대하여 탐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탐심은 아예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는 선지자 나단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다윗에게 가서 비유로 책망합니다. 어떤 부자가 양과 소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은 암양 새끼 한 마리밖에 없습니다. 부자가 손님이 왔을 때 자기 양을 잡지 않고 가난한 자의 양 새끼를 잡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다윗은 “그런 사람은 당장 죽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탐심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 아합은 왕궁 근처의 나봇이란 사람의 포도밭이 탐이 났습니다. 그 포도밭은 조상이 남겨준 유산이었습니다. 아합은 그 포도밭을 뺏고 싶어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누었습니다. 아합의 부인 이세벨은 “당신은 왕인데 왜 그런 일을 걱정합니까?”라고 하면서 “내가 해결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세벨은 없는 말을 퍼트려 나봇을 모함하고 나봇을 돌로 쳐 죽이게 하고 포도밭을 빼앗았습니다. 인간의 탐심은 소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소유와는 관계없이 죄의 쓴 뿌리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학교 성경이야기 단골 메뉴인 삭개오 이야기는 아주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는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은 왜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를 갚으라고 하였습니까? 네 배가 문제가 아니라 남을 것에 대하여 절대로 탐심을 가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6:10에는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탐심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니며 이런 마음은 하나님 나라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원리를 보세요. 매일 이른 아침 하나님은 만나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자기의 것을 부지런히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욕심을 부려서 먹지 못할 것을 많이 거두지 말고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먹을 만큼 거두지 않고 욕심으로 많이 거둔 자는 벌레가 생겨서 먹지 못하고 버려야 했습니다. 만나의 원리도 탐심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이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이 기도는 오늘의 양식으로 족한 줄 알라는 말입니다.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 외에 과하게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고 남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문도 탐심을 완전히 배격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5에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탐심 때문에 돈 사람입니다. 돈은 사람을 돌게 하는 것입니다. 탐심은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돌게 만드는 요물입니다. 클리마쿠스는 “순결한 남자는 영적인 사랑으로 육체의 사랑을 몰아낸 사람, 하늘의 불로 육신의 불을 끈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욕이나 탐심은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정욕과 탐심은 영적으로, 하늘의 불로 태우고 다스려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의 직분자에게 권면의 말씀을 여러 곳에서 제시합니다. 출애굽기 18장에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선택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가 지도자를 세울 때에 지도자의 자격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였습니다. 디도서 1:7에는 장로에게 말하기를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말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3:8에는 집사에게 말하기를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라”고 합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한 결 같이 탐하지 말라고 합니다. 불의한 이득은 더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탐심을 다 버렸습니다. 바울은 부자였지만 자신의 재물을 다 버렸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철학에 능한 사람이었지만 세상 지식을 다 버렸습니다. 바울은 정욕을 다 버리고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높아질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낮아지므로 명예를 버렸습니다. 사도행전 20:33에는 바울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8에는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하여 조금도 탐심이 없음을 표하였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느 집사님 가정에서는 수시로 댁으로 식사 초대를 하였습니다. 부인 집사님은 그 때 늦둥이를 낳았는데 아기가 있음에도 초대할 때마다 식당이 아니라 댁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왜 수시로 댁으로 초대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부인 집사님의 대답이 “그래야 집 청소하지요”라고 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도 집을 청소할 필요가 있으면 제가 갈께요. 아무리 없이 산다고 하더라도 이사 할 때에 이 구석, 저 구석에 있는 것을 끄집어 내놓으면 버릴 것이 제법 많습니다. 그래서 이사 갈 때는 버릴 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버리는 연습을 잘해야 합니다. 쌓아놓기 보다 버리고, 주고, 나누는 것을 잘해야 잘 사는 사람입니다. 탐심을 제거하여야 비로소 경건한 삶이 시작됩니다. 십자가는 탐심을 못 박는 곳입니다. 아가페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헌신적 사랑입니다. 자기 몸을 아낌없이 주는 사랑입니다. 탐심을 버리고,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못 박는 곳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성령으로 다시 사는 곳이 십자가입니다. 결론 아브라함 링컨은 탁월한 유머감각을 가진 정치가였습니다. 그의 자녀들이 어렸을 때 한 번은 두 자녀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아이들이 싸우는 소리가 이웃에 들릴 만큼 요란하였습니다. 이웃 사람이 달려와서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하였습니다. 링컨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면서 “염려할 것 없습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가 일어났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웃 사람은 “인류의 보편적 문제라니요?”라고 되물었고 링컨은 “제가 두 아이에게 호두과자 셋을 주었더니 둘이서 서로 두 개씩 가지겠다고 벌어진 싸움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인류의 보편적 문제가 무엇입니까? 탐심입니다. 지금 세계는 강자가 잡아먹고 약자가 먹히는 ‘약육강식’의 정글법칙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심이 우리의 지구를 짐승이 우글거리는 정글로 만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문제가 무엇입니까? 인류의 구원입니다. 누구나 십자가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보편적 문제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읍시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랑과 공평과 정의로 삽시다. 그리하여 십자가에서 얻는 단순함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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