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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공의회 (Councils of Nicaea)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0.11.27|조회수155 목록 댓글 0

소아시아 비티니아주(州) 니케아에서 동서 교회가 함께 모여 개최한 세계교회회의를 말한다. 전후 2차에 걸쳐 열렸다.

① 제1차 공의회:325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하였다. 회의의 동기는 아리우스 논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派)를 이단(異端)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고, 로마제국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니케아 회의의 장소는 처음 앙카라로 예정 되었으나 후에 니케아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앙카라가 내륙이어서 참석자들의 여행에 어려움이 있고 황제의 거주지로부터 멀리 있었기에 황제 자신의 회의 참여에 효과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황제는 '공적인 길' (Cursus Publicus)을 제공하고 숙박과 음식을 부담하고 의사일정을 결정하였다.

회의는 325년 6월 19일 니케아의 황제의 궁에서 콘스탄틴이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었고 8월 25일 폐회될 때까지 거의 두달간 계속되었고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했다. 회의에 참석한 감독들은 세 개의 파로 나위어져 있었다. 가이샤라 유세비우스를 포함한 대다수의 중도파, 안디옥의 루시안에게서 공부한 아리우스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좌파, 그리고 정통 우파인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 및 기타 소수파로 갈라져 있었다.

공의회에서는 2편의 신경(信經)이 제출되었는데, 아리우스파인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가 제출한 것은 폐기되고, 팔레스티나 공동체의 ‘세례신경’을 기초로 ‘동질(同質)’이라는 용어를 보완한 케사리아의 에우세비오신경이 채택되어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니케아신경’이 공포되었다. 그 결과 4명의 아리우스파가 파문(破門), 유형당했다. 이 밖에도 부활제의 시기, 이단자에 대한 세례, 서품(敍品)의 장애, 속죄 및 사제제도 등을 제정, 결의하였다.

즉, 회의에서는 ① 부활절의 날자 (봄을 맞아 첫 번째 만월 후 첫 번째 주일 : 폴리캅과 소아시아 지방은 니산월 14월로 주장) ② 20개의 교회 계율 제정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새로운 제국의 구획에 따른 새로운 교회의 조직 즉 교구 관활권 확정 :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으로 ) ③ 성직자의 직위 ④ 공적인 참회에 대하여 ⑤ 분열자들과 이단지들의 재입회에 관하여 ⑥ 예배의식의 규정 등이 다뤄졌고 아리우스의 견해를 누르고 아들과 아버지는 동일 본질 (homoousios)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② 제2차 공의회: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공의회. 당시 섭정(攝政)이던 동로마제국의 황후 이레네 2세가 총대주교 타라시우스를 책동하여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성화상(聖畵像) 숭배, 남녀공주수도원(男女共住修道院)의 금지 등에 관한 조규(條規) 20개 조가 의결되었다. 그러나 성화상에 관한 교리는 서유럽에서 오해를 불러일으켜 얼마 동안 그 승인이 보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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