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종교 연구자들은 한국인들이 믿고 있는 신앙 내용과 종교적 실천을 분석하면서 그 특성의 하나로 종종 '기복신앙'이란 용어를 사용해 왔다. 기복신앙이란, 종교가 부귀영화와 건강 같은 세속적인 조건들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의 현세적 욕망과 과다하게 연결된 상태를 지칭하는 말로, 흔히 샤머니즘이나 고려시대 이후 한국불교의 특성을 언급할 때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지난 1970년대 이후에는 한국 기독교가 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기복신앙을 전파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으며, 국내외 연구자들로부터 한국 기독교는 '무속적 기독교'라는 말을 듣기에 이르렀다.
한국인들은 오래 전부터 현세에서의 복을 중시하는 종교문화적 전통 속에서 살아왔으며, 이 점에 근거해서 한국 기독교의 지나친 기복현상은 불교의 기복현상에 대한 분석과 마찬가지로 흔히 샤머니즘의 기복성과 현실주의의 영향으로 설명되어 왔다. 이 글은, 한국전쟁 이후 급격히 확산된 한국교회의 과다한 기복적 성격은 전쟁과 그후의 사회위기의 환경 속에서 독특하게 형성된, 전통적 기독교의 두드러진 변형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전쟁의 충격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신도들은 국가나 가정 등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경제생활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 자신의 생존 문제에 매달려야 했다. 전쟁 체험은 전후에도 오랫동안 한국인들로 하여금 생존을 그들의 사유와 행동의 가장 기본적인 근거로 삼도록 했으며, 전후의 교회에서는 생존동기를 충족시켜 주는 위로 및 현세 복락적인 요소가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의 사회변동
1,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참혹했던 한국전쟁은 인명과 재산의 손상은 물론 사회질서와 전통적인 규범, 퍼스낼리티 등 모든 것을 변형시키거나 붕괴시킴으로써 한국사회를 총체적 파국상태에 빠뜨린 대재난이었다. 따라서 전후의 한국사회는 장기간의 복구와 재건을 필요로 하는 파국의 시대였으며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는 시대였다. 특히 1950년대의 사회혼란은 극심하였다. 전쟁시 5백만 명에 달하는 인명 살상과 공포, 가족의 이산, 주택과 각종 산업시설의 파괴에다 1950년대 거의 해마다 계속된 가뭄과 홍수 (1954, 1956, 1957), 태풍 (1952, 1957, 1959) 같은 재난, 결핵, 나병, 뇌염 등 전염병의 만연, 그리고 빈곤은 사회불안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 구성원들을 그들의 사회적 기반에 관계없이 실존적인 상황에 내팽개쳐진 개인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전후의 한국사회는 강력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회였지만, 국가나 사회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생존을 위한 노력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 초반 이후 10여년 동안의 한국사회는 전쟁에다가 전염병, 기근, 혁명 등이 중첩된 대재난의 시기였으며 따라서 대다수의 국민들이 생존 문제에 매달려야 하는 극심한 시련의 시기였다. 전쟁과 같은 재난으로 인하여 생기는 사회적 위기는 광범위한 사회문화적인 변동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 및 행동의 변화를 포함한다. 전후의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전쟁과 그 여파는 사회현상의 세 가지 측면인 사회질서와 규범, 퍼스낼리티를 변형시키거나 손상시켰고 그 영향은 한국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오랫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피난민으로 인한 대규모의 인구이동과 기존의 사회계층의 붕괴였다. 북한지역에서 남한으로, 중부지방에서 남부로, 농촌에서 도시로, 그리고 원래의 생활 근거지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죽음, 공포, 기아 등의 '한계상황'을 경험하였다. 전쟁은 인구이동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의 이동을 경험하였다. 전시에는 거의 모든 한국인이 계층적으로 하강이동을 경험하였다. 이같은 사회적 지위변동은 그 자체가 불안 및 긴장의 원인이 되며 하강이동을 경험한 자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경제적 지위의 추락으로 국민의 거의 반 정도가 절대빈곤의 상태에 있었다. 빈곤의 보편성은 1960년도의 1인당 국민소득이 불과 80달러 수준이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전쟁은 사회질서뿐만 아니라 전통적 문화체계를 해체시켰다. 유교적 사회윤리의 해체로 사고나 행동방식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것을 관찰한 올리버 (Robert T. Oliver)는 "한국의 옛 보수주의는 마치 망치로 막 두들겨 부숴 버린 꽃병인 양 자취를 찾을 수 없다"고 표현하였다. 전시에 그리고 전후 의식주 해결에 급급했던 1950년대에는 전쟁의 파괴 뒤에 온 치열한 생존경쟁, 와해된 가족, 그리고 극심한 인구이동의 영향으로 개인 중심의 행동과 가치도 자리를 굳혔다. 이 개인주의는 일종의 무규범 상태에서 자기이익을 지키고 추구하려는 이기적 성격을 띤 개인주의였다. 전통적 가치 가운데서 개인의 도덕적 완성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의 자리를 물질주의가 차지하였다. 권위적 상징과 규범들이 붕괴한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길은 화폐를 소유하는 길밖에는 없었다. 이러한 물질주의는 사회적 상향이동에 대한 열망, 성공 지향의 가치관들이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1960 - 70년대의 경제발전 기간 동안에 만발하였다.
전쟁은 문화체계와 사회체계는 물론 심리적 안정까지 뒤흔들어 놓았다. 전쟁의 충격으로 한국인들은 자기 자신의 내적 의지나 근면한 생활과는 관계없이 다시 언제 어디서 피해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초조감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심리는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심화시켰다.
사회의 혼란과 불안심리는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하에 있었던 1950년대에 극심했으나 1960년대 이후의 시기까지도 전쟁의 충격이 다양한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961년에는 전쟁으로 강화된 군대의 영향력이 쿠데타로 나타났으며 군사정부의 산업화 정책 또한 전후 심화된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전쟁의 치명적인 충격에 시달리는 사회에서 그리고 가족의 배려를 향유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빈곤의 해결이었다. 전후의 빈곤은 다수의 사람들을 기아상태에 빠뜨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빈곤을 해결한 후에도 그들은 빈곤 의식에 빠져 있었다.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 정책이었다. 1970년대 초에는 '잘살기 운동'으로 표현된 이른바 새마을 운동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후 사회에서의 생존에 대한 욕구는 1960대 이후에는 경제성장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으며 1970년대 이후에는 더 많은 물질을 추구하려는 욕망의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산업화 정책은 민생고의 해결에는 성공하고 있었으나 생활양식의 급격한 변동을 수반함으로써 사회불안의 요인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남과 북이 모두 경제발전을 체제 우월성 또는 군부의 쿠데타 정당성으로 내걸었다. 쿠데타 세력의 정치적 욕망은 1972년에는 독재정치를 위한 유신체제를 등장시켰으며 민주화 및 인권에 참여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이처럼 전쟁의 영향은 경제생활뿐만 아니라 정치생활에도 지속되어 사회불안을 유발시켜 왔다.
전쟁의 영향은 남북관계에서도 지속되어 왔다. 휴전상태에서 벌어지는 남북간의 충돌은 1970년대만 해도 문세광 사건 (1974), 이른바 도끼만행 사건 (1976), 땅굴 발견 (1979), 그리고 무장간첩의 출몰 등으로 나타나 사회적 긴장을 극단적으로 고조시켰다. 북한의 남침 가능성 때문에 남한에서는 반공을 이념으로 하는 권위주의적인 사회통합 체제가 정당화되어 왔다. 이 모든 예들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전쟁의 영향이 약화되어 갔지만 197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사회는 전쟁의 충격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회였으며 사람들은 언제나 생존을 염려해야 하는 불안한 사회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한국사회에서 해방 후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새로 부상한 대표적인 가치로 자유, 애국, 그리고 안정이 있는데, 이것들 중 애국과 안정은 1960년대에 등장했다. 안정은 70년대에도 계속 상승세를 보인다. 이것은 70년대까지도 전쟁 이후 불안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전후 한국사회의 시련과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신도 대중들의 강한 열망은 결국 그들을 지상천국으로 인도해 줄 새로운 메시아를 대망하거나 전통적 기독교의 신앙체계를 현세적 복락 추구에 알맞는 형태로 변형시켜 왔으며, 후자는 한국사회의 급속한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성장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더욱 강화되어 왔다. 거시적으로 볼 때, 그 현상의 근원에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자의 신체적 생존욕구와 심리적 안정욕구가 놓여 있으며, 다수의 신도들은 1960년대 이후에는 경제발전이라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그러한 욕구를 종교적으로 정당화시켜 주는 신앙체계를 선호하거나 기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소로킨은 페스트나 기근, 혁명이나 전쟁 같은 재난은 인간의 감정과 느낌을 혼란 속에 빠뜨리며 결국은 욕구와 행동을 변화시켜 종교현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전후의 한국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전후 기독교 변동의 큰 흐름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 변동의 근본적인 동기로 작용해 온 전쟁을 겪은 한국인들의 생존 심리를 응시할 필요가 있다. 생존은 전쟁을 겪은 한국인들의 사유와 행동은 물론 신앙생활에까지 그것의 고유한 색조와 색채를 제공하면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근본동기였다.
기복신앙의 확산 과정
확산과정: 전시 및 전쟁 직후 교회들에서는 몇 가지 두드러진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설교 내용과 관련된 것이었다. 전쟁시기에 또는 휴전 직후에 행해진 설교들은 한편으로는 참상을 당한 교인들을 위로하면서 남은 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살 것을 격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을 민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이 시기의 설교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함으로써 삶의 곤경에 빠진 신도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려고 하였다. 이러한 설교 경향을 잘 대변해 주는 것은 박형룡 목사의 설교였다.
박형룡은 전시에 펴낸 [우리의 피난처]라는 설교집 서문에서 일제 식민지 말기 이후의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된다는 것을 이렇게 역설하고 있었다. "전후 14년의 피난생활로, 일생 중 가장 기력 왕성한 시기를 무위허송한 감개는 형언할 길조차 없다. 그러나 이 장구한 피난생활에서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진정한 <우리의 피난처> (시 46: 1)시라는 심득(心得)일 것이다." 박형룡에 의하면, "피난의 근본적 의미는 어떤 산, 어떤 강, 어떤 도시, 어떤 섬에 의지함보다도 하나님이 함께 하여 힘주시며 보호하여 주심에 있다." 그는 1950년 부산으로 피난 와서 행한 몇 차례의 설교들에서도 이런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정성구가 분석한 대로, 그의 초기의 설교는 "변증적이고 공격적이고 선포적인데 반해서 이 때의 설교는 보다 체험적이면서 위로의 복음을 증거했다."
이 시기만 해도 설교에는 죄와 하나님의 심판, 회개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것들은 약화되어 갔다. 현세 위안적인 설교에도 불구하고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생의 터전을 상실한 대다수의 전통적 교회 신도들은 확실성의 징표를 드러내는 체험적, 감정적 신앙유형을 선호하면서 성령체험을 간구하였다. 전쟁 직후에는 주로 일부 평신도 전도자들의 부흥집회나 기도원 집회에서 성령을 간구하는 신도들이 많았다. 어떤 신도들은 신앙생활을 통해 막연한 위로를 얻기보다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원하고 있었다. 우선은 건강이 중요한 문제였다. 이런 신도들 사이에서는 이미 1950년대 중반 무렵부터는 병이 나면 의사를 부르고 약을 쓰는 것보다 기도를 하는 것이 더 잘 믿는 신자가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안수 기도를 받아 병을 치료하려는 경향이 "이적이니, 산 기도니 부흥회니 하는 거룩한 이름 밑에서 은은히, 그리고 대담하게 흘러 퍼져 가고 있"었다.
신도들이 이처럼 위로의 설교에 만족하지 않고 기도원이나 부흥집회에서 신비체험을 흠모하거나 신앙치유를 간구하고 있을 때, 교회는 사회혼란에 휩쓸려 표류하고 있었다. 전쟁의 참담한 시련 속에서 교회는 분열과 갈등을 거듭하였고 신문에는 외국교회들이 보내 주는 구호품을 더 차지하려고 치고 부수고 싸우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광경을 보도하고 있었다. 교회의 극심한 분열, 피난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이기적 행위, 구호품을 더 차지하기 위한 신도들간의 싸움은 도덕적 지도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때 민중들의 좌절의 틈 사이로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구원과 안위"를 약속하는 신종교 집단이 파고 들어왔다. 문선명과 박태선 같은 종말론적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암암리에 메시아로 자처하면서 불안이 없는 이상사회의 실현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들은 현실 부정적이면서도 내세의 천국이 여기,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었다. '지상천국'이나 '천년성'이 바로 그런 사회였다. 한국교회사에서 종말론적 신비주의 그룹은 1930년을 전후해서 조직화되지만, 분단과 전쟁의 위기 상황을 겪으면서 그들의 후예들은 이전보다 더 정교한 메시지와 더 짜임새 있는 조직을 갖추고서 메시아 대망 신앙을 전파해 나갔다.
생존이 우선 되는 상황에서 윤리를 상실한 교회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와 설교, 심방을 통해 현실적 결여사항을 보충해 주거나 위로하는 일이었다. 1950년대의 이같은 교회 모습은 1950년대 후반 몇몇 신학자들과 교역자들의 눈에는 교회가 "복음의 중심인 사랑과 진실과 도의에 대하여는 무관심"하면서 "태극교나 백백교 식의 공리주의적인 이익종교"로 변해 가는 모습으로 보였다. 이러한 경향은 샤머니즘의 공리적 윤리체계의 반영으로 보였으며 그후 교회 안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한국 기독교에서의 기복신앙의 만연을 샤머니즘의 영향 탓으로 분석해 왔다.
전후의 교회에서는 기독교의 전통적 제의 외에 그것의 새로운 표현 형태가 나타났다. 전후에도 교회에서의 예배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금식 또는 기도 장소로서 기도원이 생겼으며 질병치료와 관련된 '안찰' 행위가 새로운 제의의 형태로 등장했다. 제의의 새로운 표현들은 주로 부흥회나 기도원의 예배에서 볼 수 있었으며 이곳에서는 전후에 각종 신비체험과 방언 같은 현상들이 크게 유행했다. 거기다가 장로교의 사분오열, 감리교와 성결교의 이합 등으로 교회 전체가 어지러운 상황에서 성령운동을 표방하고 방언, 예언, 입신 등 각가지 은사를 체험한다는 집회가 전국 각지를 풍미하게 되었다. 전후에 이같은 '은사집회'를 주도해 나간 기도원은 1940년대 나운몽에 의해 창설된 용문산 기도원이었다. 전후에는 기도원들 외에 사설 제단 (祭壇)과 안수 기도소들이 새로 생겨 소위 '은혜자'를 중심으로 가정집에 모여 안수기도로 병을 고치는 현상도 생겼다. 주술적 동기를 지닌 안수는 전쟁을 전후해서는 그것의 변형 형태인 '안찰'로 나타났다. 안찰은 목사나 장로가 기도 받는 사람의 몸의 어느 부위를 어루만지는 행위이며 기도와 관련시켜 '안찰기도'라는 말이 등장하기도 했다. 1940년대부터는 의학 및 약학의 혁신으로 DDT와 항생제 등을 통해서 질병으로부터 인간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후의 한국사회에서는 이것이 불충분하였다. 이 상황에서 신앙치료의 한 형태인 안찰이 평신도들 사이에서 등장하여 일부 신도들의 인기를 끌었다. 전후에 안찰기도의 명수로 널리 알려진 사람은 권사 직분을 가진 변계단이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1953년 여름부터 전국 각지의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병자들에게 안찰기도를 해주었다. 그녀가 1년이 못되어 항간의 기억에서 사라질 무렵 경기도 포천의 김상희 장로가 안찰기도를 하면서부터는 그것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전도관의 박태선도 안찰기도로 이름을 날렸다.
1960년대 이후에는 건강뿐만 아니라 물질적 축복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등장했는데 이런 교회들을 대변하는 교회는 조용기의 순복음교회였다. 조용기 목사의 말이다. "우리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은 천국이나 지옥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하루살이 삶에 지쳐서 내일은 또 어떻게 먹고살까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미래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어떤 집에 가나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은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은 천국이나 지옥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 말은 당시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처해 있던 생활형편과 신앙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가난한 신도들과 대면하면서 조용기도 그들에게 가시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종말론적 신비주의자들처럼 임박한 재림 주의 도래와 지상천국의 메시지를 전하기보다는 임박한 하나님의 축복을 설교 속에서 전달하기 시작했다. 이미 1961년 조용기는 전도사시절 한 부흥회에서 그의 "삼박자 축복"론의 바탕이 되는 설교를 하고 있었으며, 이것을 통해 생존동기가 이미 1960년대 초반부터 조용기를 중심으로 한 순복음교회 메시지의 주요한 동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는 메시지 (요한3서 2절)는 이미 1960년대 중반까지는 조용기 설교의 핵심 내용으로 체계화되고 있었다.
물론 가난한 신도들에게 힘을 주는 설교는 순복음교회만의 것은 아니었다. 이런 설교는 부흥회를 통해서도 전달되고 있었다. 부흥사들 역시 "꿈과 소망이 넘치는 설교"를 하고 있었다. "당시 1960년대 초반은 우리 나라가 아주 못살던 시절이었다. 성도들에게는 꿈과 소망이 넘치는 설교가 필요했다. 나는 성도들에게 우리 나라가 영적인 제사장 국가가 되며 경제적으로도 크게 윤택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망이 넘치는 메시지를 줄기차게 전한 것이다." 김의환의 표현대로, "6. 25동란 이후 가난에 찌들은, 그리고 농촌 고향을 버리고 빈손 들고 도시로 모여든 외로운 심령들에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기복의 메시지는 메마른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이런 내용의 설교는 1960년대에 기도원 집회나 오순절교회에서 그리고 부흥집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었으며 이와 함께 이런 집회에서 설교자들은 성령 받기를 역설하였다. 성령체험은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오순절 교회에서 그리고 1970년대 이후에는 다른 주류 교회들에서까지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성령 체험을 중시해 온 한국교회의 신앙 부흥운동 (revivalism)의 전통은 성령세례와 방언을 강조하는 오순절 교회와 주로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대규모의 부흥회, 그리고 기도원이나 교회 부흥집회 등에서 계승되었는데 이런 집회들에서는 부흥운동의 특성인 회심이나 성령충만 뿐만 아니라 생존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건강과 물질적 축복 같은 현세적 복 또한 강조되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기복신앙 확산의 통로를 분석하려면 부흥운동, 특히 한국전쟁 이후의 오순절 운동과 교회 및 기도원에서의 부흥집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196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사회는 오랜 빈곤에서 벗어나고 있었으나 불안정한 경제성장, 공업화 및 도시화에 따른 사회적, 심리적 혼란과 불안에다가 정치적 혼란 속에서 불안감은 더 심화되어 갔다. 이처럼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사회상황이 사람들의 안정심리를 촉발시켜 그들로 하여금 종교에 기대게 했다. 교회는 안정을 찾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전도활동을 벌였다. 이에 호응하는 사람들로 인해 한국교회는 양적인 급증 현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기독교인의 급증은 1960년대 후반기 이후 한국교회를 휩쓴 전도 부흥운동에 힘입은 바 크지만, 목회의 내용에 있어서도 개인들에게 심리적인 만족을 줄 수 있었다는데 기인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1960년대 이후에도 교회는 사람들의 심리적 안정과 사회적응 능력을 배양하는 기능을 수행해 나갔다.
사회적으로는 대부분의 교회는 이 시기의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재건과 경제성장을 주도한 군사정부의 정치적, 경제적 노선을 뒷받침함으로써 사회질서의 안정과 통합을 촉구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70년대는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 밑에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었고, 교회 일각에서는 거기에 발맞추기라도 하듯 개인적 사회적 안정을 강조하는 것 외에도 물질적 가치에 대한 욕구를 종교적으로 정당화시켜 주고 있었다. 이에 따라 기독교 복음의 효능을 물질적 풍요와 치병의 기적을 통해 가시적으로 확인코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절대적 빈곤상태를 막 벗어나 어느 정도 안정된 경제생활을 누리기 시작하고 있던 이 시기 한국인들의 물질 추구 경향은 그들의 마음 속에 각인된 빈곤 의식을 들어 설명할 수 있다. 경제발전으로 인해 생활 형편이 다소 나아졌다고 해도 전후 심각하게 체험한 빈곤 의식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기독교인들의 경우 이 의식이 종교생활을 통해서 더 많은 물질을 획득하려는 기복신앙의 추구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정신적 안정은 물론 물질적 풍요와 건강 같은 것을 찾아 대중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던 1970년대에는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부흥회가 주목할 만한 종교현상으로 대두되고 있었다. 이같은 부흥회는 교회나 대중집회에서만 확산되어 간 것이 아니었다. 부흥회는 1960년대 후반 이후 급증한 기도원에서도 확산되고 있었다. 많은 부흥사들은 모든 실패의 원인이 성령을 받지못한 탓이라고 말하면서 예언, 방언, 치병, 묵시 등을 강조하였고 성령의 은사를 받기 위하여 부흥회 참석과 산 기도, 금식 등을 강조하였다. 도처에 기도원과 수양관이 산중에 건립되었다. 방언을 하며 묵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각처에서 나타났다. 기도원에 대한 한 연구는 "참석자들은 개인적 관심사에 크게 동기를 부여받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1970년대 이후에는 대형집회와 교회나 기도원에서의 집회를 통해서 성령운동의 열기가 평신도들을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는데, 이것은 이 운동이 일종의 민중들의 신앙운동으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70년대 중반 무렵까지에는 교회 예배나 부흥회, 기도원 집회 어디에서나 "위로와 격려, 축복의 약속과 헌신의 요구, 개인의 행복 추구, 신비체험 간증, 길흉화복의 예언" 같은 인간의 욕구 충족을 중시하는 설교와 기도를 쉽사리 들을 수 있었으며 수많은 신도들이 이런 내용을 전하는 집회에 몰려들고 있었다. 이 시기 종교현상의 특징은 지난날의 영혼 구원을 강조해 온 보수주의적 신앙양태에 적극적 사고와 현세에서의 축복이 덧붙여진 것이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1960년대 중반 이후 교회에는 부흥운동이 전후의 종교현상을 대변하는 종교운동으로 자리잡아 갔으며 이 운동에서의 설교는 위로와 소망 그리고 마침내는 현세적 축복을 전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부흥사들과 오순절 교회를 중심으로 성령이 크게 부각되어 갔다. 이처럼 전후의 한국교회사에서 독특한 현상인 현세 위안적이면서도 복을 비는 신앙형태가 부흥운동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이 시기의 교회의 태도는 정진홍의 관찰대로 "사실상 반응이었지 도전은 아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중산층 신도들까지 확보하자 이제까지의 소극적인 반응이 적극적인 도전으로 변화해 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도전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산업사회의 빈부 문제나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정의가 보장되는 공동체적 삶을 강조한 선교방식을 사회운동이라고 비난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을 받으면 현세적 복을 받는다고 설교하면서 복을 해석 원리로 한 성서 해석을 정당화하는 작업이었다.
기복적 신앙체계: 1970년대 중반 이후 이제 교회는 한국사회의 경제성장 속에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이 있고 "배불리 먹게" 될 수 있는 (신명기 6: 10-13) 풍요와 부유의 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교회에도 몇 가지 변화가 왔다. 신도들의 부를 비는 마음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소박한 소망에서 머물지 않고 이제는 현실적으로 보다 더 많은 재물을 추구하려는 적극적 동기로 점차 발전해 나갔다. 교회는 그들에게 성령운동과 적극적 사고방식을 통해 부의 추구를 부추겨 주었고 마침내는 기독교 "축복 사상의 물질화 내지는 현금화" 현상 또는 "기독교적 물질주의"가 신도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 이런 현상은 1970년대 중반부터는 기독교의 현세 복락적 신앙양태 문제가 공적 토론의 주제로 떠오를 정도로 많은 교회들에 확산되고 있었다. 토론자들은 그 책임을 부흥회에 돌리고 있었다. 한 교역자가 보기에, "현재는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특히 부흥회에서 그렇지만, '예수를 믿으면 축복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같"았다. 또 어떤 이는 일부 부흥회가 마치 복 주고 복 받는 모임처럼 "타락"되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부흥사들은 마치 자기가 복을 부여하는 것처럼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면서 그 증거로 교회에서나 산상집회의 선전 포스터에 "신유, 은사, 축복성회"라고 쓰여 있는 것을 예로 들었다. 축복을 영과 건강과 물질에 대한 현실적 축복으로 규정하고 이 복을 받기 위해 기도하게 하고, 헌금하게 하고, 열심히 부흥회에 참여하게 하는 양태의 교회 목회나 부흥회가 유행병처럼 확산되어 갔다.
경제발전의 혜택이 교회 안으로 급속히 유입되면서 많은 교역자들이 부를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의 표징으로 설교하기 시작하였지만, 여의도 순복음교회만큼 생존동기를 만족시켜 주는 부와 건강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데 성공한 교회는 없었다. 일상생활의 형통과 육신의 건강 같은 현세적 축복을 강조하다 보니까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으로서의 성령이 강조되었다. 오순절 성령운동 교회들은, 절대자 또는 심판자로서의 성부나 종말론적 신비주의자들이 강조한 지상천국의 주인으로서의 성자 (재림주)보다 가능케 하는 힘으로서의 성령을 더 강조해 왔다.
이같은 힘으로서의 성령 강조의 신앙체계는 예수도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생활환경을 저주에서 축복으로, 인간의 육체를 죽음과 질병에서 생명과 건강으로 바꾸어 놓는 신유의 기적을 행하시는 "좋으신 예수님"이며, 하나님도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에 복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이같은 하나님 상 속에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그러면서도 심판하고 징벌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자비하시고 용서하시고 사랑이 넘치는 분으로 아는 한편, 하나님은 엄격하시고 정죄하시고 심판하시고 용서하시지 않는 분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오늘날 너무나 많은 강단에서 "엄하고 무서운 얼굴로 오직 심판만 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임재로 현세의 축복을 받는다는 설교의 확산은 세계 성령운동 교회들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우리나라 교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은 내세 지향적인 종말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다른 복음이란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환경을 저주에서 축복으로 우리의 육체를 죽음과 질병에서 생명으로 바꾸어 놓는, 보다 넓은 의미"의 기쁜 소식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 복음을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더욱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태도를 갖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세의 축복을 갈망하는 신앙이 적극적 사고와 연결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성령운동을 표방하는 교회들에서의 적극적 사고방식의 강조는 1970년대 이후 다른 주류교회의 교역자들과 부흥사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몇몇 부흥사들은 1970년대 후반에 펴낸 설교집들에서 노만 빈센트 필과 로버트 슐러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소개하면서 "긍정적 신앙" 또는 "긍정적인 신앙"이란 제목으로 설교하거나 설교 내용 중에 긍정적인 믿음의 태도를 가질 것을 강조하였다. 급속한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 능동적으로 적응할 능력을 길러 주기 위한 방안으로 적극적 사고방식과 적극적 신앙을 가장 많이 강조한 사람 중의 하나는 감리교의 김선도 목사였다. 그는 조용기처럼 물질적 축복과 적극적 사고를 연관시켜 설교하기 보다는 이미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교인들로 하여금 산업사회의 경쟁에서 자신감을 고취시킴으로써 심리적 안정감을 갖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 적극적 사고를 누누이 강조하였다.
김선도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요, "창조적인 능력, 무한한 가능성, 고귀한 양심,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런데 "한국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욕구 불만과 소외감이다. 역사적으로 오랜 식민생활을 했었고, 또 많은 수난과 격동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항상 불안과 초조가 지배하고 있고 부정적이며 억압된 심리가 형성되었다." 특히 전쟁 때문에 "사랑하는 부모를 잃은 고아들, 자녀를 잃은 부모들, 남편을 잃은 아내, 아내를 잃은 남편들, 고향과 소중한 유산을 잃은 우리의 많은 형제들이 슬픔 가운데서 오늘도 마음의 상처를 안고 외로움과 소외감 속에서 살고" 있다.
불안과 공포, 상처 속에 사는 자로서의 인간관은 그것을 물리치거나 극복하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이미지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도외시하는 분이 아니요,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시고, 그를 위대하게 만드시는 분"이고 어려운 역경과 질병, 시련과 절망, 슬픔 등 온갖 어려움으로 절망 가운데 고통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를 지키시며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염려를 축복으로 바꿔 주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넉넉하게 채워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다.
여기서 우리는 김선도의 하나님 상(像)이 조용기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보다는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필요할 때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더 부각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조용기와 김선도 목사는 전란과 산업사회에로의 급격한 사회변동의 와중에서 정신적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성적 측면을 더 강조해 왔다. 이같은 경향은 "하나님은 엄격하시고 정죄하시고 심판하시고 용서하시지 않는 분으로 잘못 알고 있다"면서 좋으신 하나님을 역설하는 조용기의 설교에서 그리고 "죄책감을 일으키는 심판의 내용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은총 속에서 얻는) 희망"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힘주어 말하는 김선도의 설교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용서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하나님을 닮아 갈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제시하기보다는 인간의 타락성을 더 강조해 왔다는 것이 김선도 목사의 진단이다. "한국기독교의 큰 잘못은,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타락한 존재'라고 하는 창세기 3장은 자주 강조하면서도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것은 강조하지 않음에 있"다.
조용기나 김선도 목사의 입장은 교회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신도들이 그들의 설교를 들으러 교회에 몰려들고 또 다수의 교역자들이 그들의 교회에서 실시하는 교육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은 다른 교역자들 역시 그런 형태의 신앙체계에 동의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기복신앙의 급격한 확산과 함께 그것이 신앙체계로까지 발전해 가자, 이에 대한 비판과 충고도 다양했다. 이장식은 "영적인 것이 물질화 되고 은혜의 단체가 실리 기관이 되고 내세적인 것이 현물 (現物)이 될 때 기독교 신앙이 미신화 되기 쉽고 인류사회에 대한 기독교의 정신적 및 도덕적 책임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을 우려했으며, 1980년대 초반에 한경직은 신도들이 하나님께 물질과 세상적 축복을 요구하도록 교회 지도자들이 부추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질주의, 물량주의를 경계하는 강단의 소리는 형식에 그치고, 그것을 외치는 설교자들이 거기에 "가장 앞장서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맺는 말
이 글은 한국교회에서의 기복신앙의 만연현상이 한국전쟁 이후의 시기에 특별히 일어난 이유와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형태의 신앙을 수용하게 된 근본동기와 수용과정을 전후의 사회상황에서 살펴보았다. 신도들은 전쟁의 참상과 그 여파, 그리고 산업사회의 경쟁 가운데서 개인의 생존과 안정을 이유로 더 현실적인 위로와 축복의 복음을 선호하고 있었으며 그런 심리를 파악한 교역자들은 기도원 집회나 부흥회에서뿐만 일상적인 설교에서도 복을 전하는 설교를 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죄나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인간의 상처와 하나님의 축복이 더 많이 강조되었으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주제인 신론, 성령론, 기독론에 기복적인 의미가 덧붙여지기 시작했다. "예수 믿고 복받으세요"라는 말과 "좋으신 하나님"이 이 시기의 신앙체계를 상징하는 언어가 되었다. 결국 1980년대에 이르면 국내의 관찰자들은 물론 외국의 연구자들까지도 한국기독교의 특성을 기복적인 것으로 말할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