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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을 묻다(R. T. 켄달)

작성자천성교회|작성시간16.08.01|조회수93 목록 댓글 0

기쁨을 묻다(R. T. 켄달)

 

 

1부 하나님께 집중하다

“하나님의 인정만으로 만족하고 사람들의 칭송을 일부러 구하지 않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명령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람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1장 하나님만 인정하시면


내가, 그리고 우리가 목말라 하는 그 ‘인정’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나이아가라 폭포를 통째로 삼켜도 해갈되지 않는, 인정받으려는 마음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진정 내 자신은 뭘 원하는 것일까.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이 구절은 내 삶을 바꿔 놓았다. 그리고 내게 두 가지를 보여 주었다. 내가 구하던 영광과는 다른 차원의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 사람보다 하나님에게서 받는 영광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기꺼이 그 영광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 내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던 이 구절은 내 마음 깊이 하나의 갈망으로 뿌리내렸고, 지난 45년 동안 이 진리의 열매를 맛보기 위해 밭을 갈고 물을 주었다. 내 안에 사람들의 인정을 기뻐하는 마음이 컸기에 더 이 구절을 붙들었던 것 같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심지어 두려움까지 불러일으킨다. 2천 년 전, 유대에 살던 이들도 지금의 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그들도 하나님의 인정하심보다는 종교적인 권위를, 율법을 지키는 데서 오는 자기 의를, 선택된 백성이라는 우월감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등한시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추구했다면 메시아를 몰라보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모든 세대의 임무는 하나님이 어느 방향으로 삶을 움직이시는지 깨닫고,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가장 온전한 기쁨을 약속한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실제로, 인격적으로, 의식적으로 받는 기쁨이다. 그분이 날 높이시고,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며, 그 사실을 내게 보이실 때 세상에 그보다 큰 기쁨은 없다. 그러나 내가 사람의 칭찬에 취해 하나님이 이 시대, 내가 있는 곳에서 하시는 역사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분의 영광이 코앞에 나타난다 해도 볼 수 없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주님은 다니엘에게 세 번 말씀하셨다.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하나님은 모세와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부르셨다. 히스기야는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라고 평가하셨다. 하나님은 요시야에 대해서도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라고 말씀하셨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만을 구하게 될 때, 사람들에게서는 잃고 하나님에게서는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공적과 신용, 만족이다. 하나님의 인정만으로 만족하고 사람들의 칭송을 일부러 구하지 않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명령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람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특별한 만남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그런 경험을 나누고 싶은 유혹을 이길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비밀’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다고 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비밀을 맡기지는 않으신다.


지금쯤 당신은 진정 사람의 칭찬보다 그분의 인정하심을 더욱 원한다고 마음속으로 외쳤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분명히 일어날 일에 대해 예언할 수 있다. 당신은 곧 사람의 칭찬과 하나님의 칭찬 중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증명해 보일 기회를 얻을 것이다. 그날이 오늘이 될지도 모른다.


2장 내가 주를 기뻐하리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구하며 살 때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 기쁨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만족스러운 성취다. 그 기쁨을 누릴 때, 양심의 가책도 사라진다. 이는 당신이 빛 가운데 행한다는 뜻이고, 하나님이 당신을 쓰시겠다는 의미다. 당대의 최고의 엘리트 그룹에 속했던 사도 바울은 자유를 잃게 되었고, 매를 맞았고, 사역자들조차 그를 핍박했다. 그런데 그가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러나 우리는 즐겁고 기쁜 상황에서는 그 말을 따르기가 쉽지만 마음이 지치고 곤고할 때는 그 말조차 거슬린다. 내게도 그런 적이 있었다. 기뻐지기가 싫었다. 그냥 이 마음의 고통을 하나님이 알아  주시기를 바랐다. 물론 하나님은 흐느끼며 괴로운 상황을 토로하는, 자기 연민을 곱씹는 나를 향해 자비와 사랑과 위로와 비전을 건네셨다. 그러나 그 순간, 기뻐하는 믿음과 그로 인해 누리는 하나님과의 더 깊은 신뢰의 관계가 내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좀 더 온전한 데까지 자라나기 위해서 기쁨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나의 예배는, 나의 영혼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내 기쁨은 오직 상황에 국한된 것이었을 뿐이었다.


옛 선지자 하박국은 기뻐하기로 선택했던 사람이다. 하박국은 그의 짧은 예언서를 시작하며 세상에서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나님께 던졌다. “어찌하여 나로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그는 자기 민족에게 들이닥칠 전쟁에 대한 환상을 보고 창자가 떨릴 만큼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기다리라”였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이 때 그가 했던 고백은 이렇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인물들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길이며,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영혼의 만족을 누리는 길이다. 상황에 따라 기뻐하는 길과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기뻐하는 길, 이 갈림길에 당신이 서 있다. 그리고 어느 길을 걷는가는 당신이 선택해야 한다. 주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훈련을 할 때, 감정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2-14).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여기서 ‘기뻐하다’는 말과 비슷한 단어가 있는데, 바로 ‘즐거워하다’(헬라어로 ‘유도케오’)이다. 이 단어는 의지적으로 즐거워한다는 뜻이 강하다. 즉, 바울의 말은 고통스러운 상황이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날 기회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기뻐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이다. 자신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육체의 가시조차 기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대상’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물이 아니라 주 예수님이다. 우리는 그분이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심을 기뻐한다. 그분은 만물을 다스리시며,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하나님은 날 향한 사랑과 용서와 보살핌을 거두지 않으시며 늘 우리와 함께하시며 내 편이 되어 주신다. 그분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설명하셔야 할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가 잘못을 범할 때도 우리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누구도 납득시킬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 이러한 느낌이 우리가 의롭거나 올바르다는 증거라고 주장하면 안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장 가치 없는 자녀에게도 그분의 임재를 드러내신다! 그분은 그들이 올바른 길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신다.


정말 놀라운 사랑 아닌가! 우리는 언제나 주를 기뻐해야 한다. 상황과 상관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 때문에 기뻐하기로 선택하는 것. 우리는 그때 하나님의 지지를 얻으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며, 더 큰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성장하게 된다. 상황에 따라 기뻐하는 길과, 기뻐하기를 선택하는 길, 이 갈림길에서 후자의 길로 들어선 대가치고는 정말 큰 보상이 아닌가.



2부 성령 안에 거하는 삶

“우리는 대부분 성령의 인도를 구하지도,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구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더 깊은 친밀함을 누릴 수 없고, 나의 계획과 방법보다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이 더 놀랍다는 사실도 체험하지 못한다.”


3장 성령의 증거


옥스퍼드에서 유학하던 시절, 나는 청교도에 대해 연구를 했다. 청교도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 “하나님이 구원을 예정하신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산다.(대전제) 나는 거룩한 삶을 산다.(소전제) 따라서 나는 하나님이 구원하도록 예정한 사람이다.(결론)” 그러나 그들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리에는 알맹이가 빠져 있으며, 심지어 율법주의와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태도를 낳는다. 이 방식의 문제점은 구원의 확신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충분히 거룩한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위의 삼단논법은 이렇게 되어야 마땅하다. “자신의 선행이 아닌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는 사람은 구원받는다.(대전제) 나는 구원에 대해 예수님의 피만 전적으로 의존한다.(소전제) 따라서 나는 구원받았다.(결론)”


지금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다. 우리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에 대해서 생소함, 혹은 거부감마저 느낀다. 하나님의 풍성함을 마치 하나님의 것이 아닌 양 거절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직접적인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사용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온기를 느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풍요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와 직접 교제하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다. 그리고 역사하신다. 그 놀라운 초청에 응하고 싶지 않은가?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고린도전서 1장 7절).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에베소서 1장 3절)라고 말씀하신 사실에 대해 저항하기보다는 기뻐하자. 성령의 역사는 구원과 관계없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으로 참여하는 축복의 일부분이다.


가장 높은 차원의 확신을 주는 성령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증거에서 오는 기쁨은 어떤 이유에선지 회심의 순간에 임하지 않을 때가 많다. 보통은 나중에, 즉 며칠, 몇 달, 몇 년 후에 임한다. 물론 고넬료의 경우처럼 회심과 동시에 임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성령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증거를 꼭 성령 세례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니다. 예수님이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 것도 바로 성령 세례다. 아버지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기 원하신다고 말씀하실 때도 이 일을 의미하신 것이다. 바울은 이 일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불렀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도 불렀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일을 ‘하나님의 안식’, 아브라함에게 그러하셨듯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맹세’,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이라고 불렀다. 요한은 이를 두고 ‘두려움을 내어쫓고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는 온전한 사랑’이라고 불렀다.


나는 성령을 체험할 때, 신학적 이해를 얻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구원을 이해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깨달았다. 어떻게 깨닫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이 믿음의 안식에 들어간 몇 시간 안에 영원히 구원받았고, 이 구원을 잃을 수 없으며,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런 신념을 예정론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가르치신 것에 참 감사하다. 그것은 성령의 계시였다. 누가 가르치거나 책에서 배운 내용이 아니었다.


성령 세례는 마음속 온전한 기쁨에 관한 것이었다. 성령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증거였다. 성령이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직접 증거하신다. 청교도의 삼단논법의 경우, 성령이 말씀을 적용시키고 우리는 머리를 써서 우리가 들은 바를 적용하고, 천국에 간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럴 때는 말씀을 적용한 후 감동을 경험한다. 하지만 성령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증거의 결과인 영혼의 쉼은 어떤 논리나 적용, 사고, 추론과 상관이 없다. 성령이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어서 마음에 직접 역사하시는 일이다. 이 역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이다. 우리가 원한다고 일으킬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는 구하는 자에게 이런 역사를 베푸시길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는 여러 번 일어날 수 있으며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 이상을 포함한다. 온전한 교리나 방언이 성령 충만의 확실한 증거는 아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서도 신학적으로는 덜 다듬어지거나 방언이 주어지지 않은 경우도 많이 보았다. 안수를 통해 일어나기도 한다.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는 우리에게 그분의 인도, 교리를 깨달음, 기도 응답, 영 분별, 기타 하나님나라에 관한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한다. 이밖에도 성령 세례를 경험하고 나면 성경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즉각적인 증거에는 여러 수준이 존재한다. 사람마다 강도도 틀리고 성령이 각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방법도 다르다. 그러나 성령 충만의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증거는 기쁨, 즉 온전한 기쁨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순전한 기쁨을 약속하셨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런 기쁨을 얻는다. 온전한 기쁨을 원하는가? 이 기쁨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그분은 당신이 진실로 그분을 경험하기 원하신다. 성령께 민감하게 반응하며, 성령의 증거를 존중하며 갈망하자. 그분의 즉각적인 증거에서 오는 평안, 기쁨, 은사, 부활에 대한 체험, 치유, 하늘에 속한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거두는 그때까지 그분의 얼굴을 구하며 기도하자.


4장 성령을 누리다


성령과 동행할 때,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모든 것을 그분과 함께할 때, 우리는 풍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성령의 즉각적인 증거나 혹은 성령 세례와는 또 다른 차원이며, 삶이 온전히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 혹시 그런 삶을 머리로만 알고 있었다면, 당신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상처를 준 이들을 향한 원망, 미움, 날 비참하게 만든 이들에 대한 저주, 분노 등이 깊이 뿌리내려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을 ‘맛보아’ 알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하늘나라의 법칙은 이렇다.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사하여 주는 만큼 우리도 용서받는다. 성령은 쓴 뿌리가 휘감고 있는 마음을 향해 그분의 선한 뜻을 말씀하실 수 없다. 아니, 말씀하셔도 우리는 들을 수 없고, 듣는다 해도 행할 수 없다. 우리에게 아픔을 준 사람을 완전히 용서하고 풀어 줄 때, 그 때가 쓴 뿌리에서 해방되는 순간이다. 그때가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순간이다. 그 때가 성령 안에서 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이제 당신이 개발해야 할 것은 바로 성령께 민감한 마음이다. 성령은 인격적이고 매우 민감한 분이시다. 성령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생각을 잃게 된다. 우리가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요소를 제거하기 전까지 그분은 마치 비둘기처럼 조용히 뒤로 물러가 멀리 떠나 버리신다. 우리가 성령의 뜻을 따르지 않거나 그분의 인도하심을 거부할 때, 우리의 욕심 때문에 그분의 생각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귀찮아할 때, 자신의 행동이 죄인 줄 알면서도 계속할 때, 인격적이신 성령의 활동은 제한을 받는다. 그러면 그분은 더 이상 우리를 인도하시거나 그분의 생각을 우리에게 나누실 수 없다. 결국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할 수 없게 된다. 음행, 추행, 탐욕에 찬 말, 추잡한 말, 어리석은 이야기, 점잖지 못한 농담은 그분의 마음에 근심을 드리운다.(엡 5:3-4) 독설, 격정, 분노, 고함소리, 욕설도 마찬가지다.(엡 4:31)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움직이며, 그분이 우리를 통해 하기 원하시는 것을 모두 이룬다는 뜻이다. 성령 안에서 행할 때는 하나님이 당신을 인정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느낌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간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행하시는 성령께 순종하며 그분을 근심하게 하지 않으며, 그분의 생각에 동의하고 함께하는 기쁨이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목적을 이루신다. 그러나 우리가 자만에 빠져 성령에 대한 민감함을 잃고, 하나님께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른 도구를 쓰신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그들이 첫사랑을 다시 찾지 않는다면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셨다. 실제로 역사를 볼 때 하나님은 전통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하지 않을 때,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셨다.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파란 불일 때뿐 아니라 빨간 불일 때도 그분의 뜻에 따른다. 하나님이 길을 여실 때도, 길을 막으실 때도 그분의 뜻에 동의하고 순종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한탄하셨다. 성령 안에서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길, 방식, 일하시는 유형,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 그분의 친절한 마음, 그분의 분노, 그분의 충동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방식에 맞게 변하기 원하신다. 누군가가 사는 방식을 알기 위해서는 그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자신을 기뻐하시며 자신을 인정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기쁨을 누렸고, 또한 기도할 때 기쁨을 누렸다.


성령 안에 거한다는 말은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뜻이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기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기도다. 예수님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기도를 뜻한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완전히 용서하면서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하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러한 기도를 할 때는 성령 안에서 머리로 생각하고 모국어로 기도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즉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하는 기도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힘쓰며 내 기도를 성령께 맡긴다. 그러나 방언으로만 기도한다면 잘못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가 영으로 기도하지만, 또한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말했다. 나도 방언으로 기도할 때보다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가 더 많다. 그러나 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중보기도를 하시기 때문에 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한다는 사실을 안다.


성령 안에 거하는 것은 가장 좋은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성령 안에 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늘 성령 안에 거하기를 구함으로써 성령과 동행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 거하면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내가 성령의 흐름을 느낄 때, 하나님은 결단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셨고 내가 후회할 결정으로 이끌지 않으셨다. 때로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온전한 기쁨이 있었다. 성령 안에서 행한 그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놀랍고 풍성했다. 중요한 순간은 언제 올지 모른다. 하나님은 예상치 못한 변화를 통해 이 평범한 일상을 중요한 순간으로 바꾸실 수 있다. 우리는 내 눈에 좋은 일, 좋지 않은 일을 떠나 오직 성령의 뜻을 구하고 행하며 평안함 가운데 걸을 수 있다. 그것이 가장 좋은 길인 것을 이미 맛보아 알았기에.



3부 불가능한 기쁨

“우리는 시련을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 즉 ‘온전한 기쁨’으로 여겨야 한다. 시련에게 ‘너는 나의 영광’이라고 영예를 부여하는 것이다.”


5장 시험을 환영하기


우리는 때때로 터널로 진입한다. 즐겁게 노래하던 라디오가 찌직거리는 소음만 내뿜기 시작한다. 그곳은 뿌연 매연으로 가득하다. 언제쯤 그 터널에서 벗어나 다시 햇빛을 즐기며 드라이브를 할 수 있을지, 언제 다시 라디오에서 즐거운 음악이 흘러나올지, 창문을 열고 목을 길게 빼보지만 이 좁고 어두운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터널에서도, 계속 가다 보면 저 멀리 한 줄기 빛이 비취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빛은 점점 눈앞으로 다가오고, 결국 우리는 그 터널을 빠져 나온다.


하나님이 보내신 모든 시험도 이와 같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련도 결국은 끝나는 법이다. 시련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솔직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이 시험을 통과했는가, 아니면 탈락했는가?’ 시련을 받아들였다면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시련을 피하려고만 했다면, 시험에서 떨어진 것이다. 시련은 터널처럼 갑자기 끝나곤 하는데, 불평과 투덜거림이 한창일 때 끝이 난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사실 시련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지만, 시련(시험)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터널에서 벗어날 때 그만큼 성장한다. 그것만큼 기쁘고 감사한 일도 없다.


하나님은 시련을 예정하셨다. 바울은 시련 때문에 요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을 계획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하나님이 보내시는 시련은 다양하며 모든 시련에는 그분의 지문이 가득 묻어 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재정적 어려움, 상실, 질병, 오해, 실패, 실망, 배신, 학대, 실업, 해고, 정신적, 감정적 우울증, 사고, 외로움, 기차나 비행기를 놓침, 열쇠 분실, 거절감, 왕따, 치통, 두통…. 이 모든 것이 시련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련을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 바울도 이 사실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우리 모두는 언젠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불의 시련을 겪는다. 물론 그분은 시련이 아닌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온전한 기쁨을 즉각 주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이끄는 일반적이고, 예측 가능하며, 성경에 약속된 방법은 우리가 시련을 온전한 기쁨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까? 첫째, 시련을 환영하라. 둘째, 두려움에서 벗어나라. 셋째, 가난한 심령을 가지라. 넷째, 하나님이 시련을 허락하셨음을 기억하라. 다섯째, 끝내려고 애쓰지 말라. 여섯째, 불평하지 말라. 일곱째, 하나님의 기대를 기억하라.


시련이 주는 유익을 생각하며 시련을 온전한 기쁨으로 여기라. 왜냐하면 시련은 축복으로 이끄는 험하고 비좁은 통로이기 때문이다. 시련은 축복으로 이끄는 불친절한 안내자다. 궂은 길로 퉁명스럽게 우리를 인도하지만, 결국 모든 길은 헤쳐 나오면 그곳이 지름길이었음을 알게 된다. 통로가 좁으면 좁을수록, 안내자가 퉁명스러우면 퉁명스러울수록 그 후에 찾아오는 기름 부으심과 축복은 더 크다. 토저는 “우리는 원하는 만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순간의 열정이 아닌, 삶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시련에 대해 얼마만큼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하는가에서 드러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한 바울의 고백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름 부으심에 만족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는 이러한 기름부으심과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다. 그러나 기억하자. 진정 더 큰 기름 부으심을 원한다면, 거대한 시련이 닥칠 때 두 손으로 그 기회를 꼭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6장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실 때


1956년 8월은 참으로 혹독한 달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엇나갔고, 미래는 암울했다. 사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감 속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렸고, 명백한 계시를 받고 앞날에 대한 기대와 열정이 넘쳐났다. 몇 달간 천국이 이 땅에 임한 듯했다. 그러나 상황이 반전되는 데는 단 몇 주도 걸리지 않았다. “왜입니까?” 나는 부르짖었다. 그 순간, 히브리서 12장 6절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구절을 찾아 읽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마주친 이 구절은 전에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징계’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그 이후 그것은 지난 46년간 내가 가르치고 설교한 모든 것의 핵심이 되었다.


사실 하나님이 얼굴을 보이실 때는 노력하지 않아도 큰 기쁨이 넘쳐난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 머리 위로 내려와 머무시며 하나님이 내 손을 꼭 잡고 어디든 함께하시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달콤한 임재를 맛보고 있는 순간, 그분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멀어지신다. 출렁거리는 파도 위에서 현기증을 느끼지만, 어디에도 도움의 손길은 없다. 당장이라도 침몰할 것 같은데 내 손을 잡고 계시던 하나님은 온데간데없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나는 이 구절이 자리잡은 위치에 늘 경이로움을 느낀다. 이 문장은 문맥상 전후 단락과 아무 연관도 없이 엉뚱한 곳에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가운데 어떤 경고나 이유도 없이 숨어 버리신다.


왜 하나님은 숨어 버리시는가? 잘 지내던 그분의 양들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그렇게 얼굴을 가리시는 이유가 뭔가? 하나님은 그분의 양들이 하나님께 집중하기 원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것을 그들이 누리기를 원하신다. 거룩함, 그 무엇도 뗄 수 없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예수님을 닮은 성품, 마음 깊은 곳에서 누리는 진정한 평화와 기쁨으로 이끌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의 양들에게 회초리를 드신다. 얼굴을 가리우신다. 잭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우리가 아직 듣지 못했다는 뜻이다. 시련이 계속되는 것은 시련을 통해 이루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더욱 경험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장벽을 넘어야 한다. 시험을 거쳐야 한다. 예기치 못한, ‘최악’의 순간에 닥치는, 갑자기 버려져 절체절명의 고독과 마주치게 된 시간, 갑자기 닥쳐온 이러한 시험을 대하는 나의 반응은 프리즘이 된다. 내 마음의 진위 여부를 드러내는 증거의 프리즘.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후 탄탄대로만 펼쳐졌다면 오히려 자문해 보는 시간을 갖자.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면 오히려 자신의 신분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히 12:8)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1-12).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이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이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하나님의 훈계에 대한 원칙과 이겨내는 방법을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훈계의 여섯 가지 원칙은; 첫째, 진정한 자녀라면 모든 훈계를 받는다. 둘째, 훈계는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다. 셋째, 훈계는 사랑 많은 완벽한 아버지에게서 온다. 넷째, 훈계는 준비 과정이다. 다섯째, 훈계는 고통스럽다. 여섯째, 그러나 훈계 뒤에 오는 기쁨은 훈계로 인한 고통보다 훨씬 크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이 훈계(징계)라는 고통의 장벽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첫째, 지금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전심으로 인정하라. 둘째, 열심히 기도하라. 셋째, 하나님의 빛 가운데 행하라.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열 명 가운데 한 명 정도만 시험의 장벽 뒤에 있는 큰 기쁨을 누린다. 하나님이 크게 쓰신 사람은 대부분 이 장벽을 돌파한 사람이다. 그는 수천 명 앞에서 설 수도 있고, 무대 뒤에서 조용히 기도할 수도 있다. 성령의 도구가 된 사람은 가장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만이 아무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얼굴을 가리우신 시간, 그 고통의 장벽을 통과한 사람은 어느덧 성장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막달라 마리아도 그런 여인이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을 때도 그녀는 십자가 앞에 머물렀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침묵하셨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킨 것이다. 마리아는 보상을 받았다. 이 시간을 넘어서는 자에게는 늘 보상이 주어진다. 부활 후 예수님을 처음 만난 이는 그 어떤 제자도 아닌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녀는 오순절 성령 충만을 경험한 무리 중 한 명이 되었고, 온전한 기쁨을 경험했다. 구약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과 욥, 사자의 이빨에 몸이 찢길지도 모르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세 번 하나님께 기도했던 다니엘이 그랬다. 히스기야 역시 그 장벽을 돌파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대하 32:31).


하나님이 당신에게 얼굴을 가리셨다고 느끼는가?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기 위해 얼굴을 가리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온전한 기쁨으로 초대하신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쓰시는 사람이 되고, 자신의 잠재력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을 보려면 믿음의 선배들이 경험했던 시험을 당신도 겪어야 한다. 그 시간을 견뎌낸 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우리 자신도 온전한 기쁨을 누리며, 예수님의 형상을 향해 자라나며,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과 순종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와 더 깊이 교제하시며, 누구보다도 친밀한 제자로 여기시며, 우리를 그분의 손으로 삼으실 것이다. 기억하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그러니 포기하지 말라. 곧 그 얼굴을 당신을 향해 드실 것이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4부 천국을 보는 믿음

“사실상 이 땅에서 우리는 나그네와도 같다. 우리 모두는 진정한 본향을 향한 영혼의 갈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너무도 자주 우리는 이 땅에서 떠나지 않을 사람처럼 살아간다.”


7장 하늘 소망

예수님은 상급을 매우 강조하셨다. 또한, 은혜로만 얻는 구원과 믿음으로만 얻는 칭의에 대해 가장 많이 가르친 사도 바울도 예수님만큼이나 상급을 강조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핍박받은 사람에게 큰 상을 약속하셨다. 이 구절만 봐도 상급에는 정도가 있고 어떤 상급은 다른 상급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상급의 원칙을 확인하기 위해 이런 말씀도 하셨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


그뿐만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이것이 우리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하셨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을 받을 것이 무엇이냐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눅 6:35).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으리라”(마 16:27). 모세는 바로의 궁전을 떠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 유익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를 실천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6).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하나님은 그분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을 보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원하신다. 우리에게는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은 본성이 있으며 이런 욕구는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 본성의 일부분이다. 상급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과대평가하고 매우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확인해 봐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의 때에 칭찬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다. 그분이 “잘했다,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해주실 것을 간절히 원하라. 내가 분명히 아는 한 가지는, 주님이 “잘했다”고 칭찬하시면 그것이 최고의 기쁨이라는 사실이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절대 없다. 이는 가장 높은 수준의 기쁨이다.


지상에서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을 기다리다 결국 그분의 역사를 보는 것이다. 그분이 나의 필요를 채우시도록 하고, 그분이 나를 옹호하시도록 하고, 그분이 행하시도록 하는 일.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그분보다 앞서거나 인내심을 잃고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일이 온전한 기쁨이다. 내게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 같다. 나는 때때로 인내심을 잃고 하나님보다 앞서 행한다. 또 억지로 상황을 끌고 가려다가 기쁨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지금껏 여러 가지 기쁨을 누려 왔지만, 늘 기쁨을 누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종국에 예수님으로부터 “잘했다. 정말 훌륭하게 해냈구나”라는 말씀을 듣는다면, 이것만큼 우리 인생을 달래는 기쁨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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