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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편지

20220412 / 수 15:13-19 / 헤브론과 드빌을 정복한 갈렙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2.04.19|조회수1,204 목록 댓글 0

헤브론과 드빌을 정복한 갈렙

수 15:13-19

13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유다 자손 중에서 분깃으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주었으니 아르바는 아낙의 아버지였더라

14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

15 거기서 올라가서 드빌 주민을 쳤는데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16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17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함으로 갈렙이 자기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18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19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수 15:13-19 / [헤브론과 드빌을 차지한 갈렙] 유다 사람이 몫으로 차지한 땅 중에서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직접 분부를 내리신 대로 헤브론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이 헤브론은 본래 `아르바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기럇아르바라고 불렸다. 이 아르바는 아낙이라는 사람의 아버지이다. 아낙이라는 사람은 거인족인 아낙 사람의 조상이다. 14) 갈렙은 그곳에서 아낙의 세 아들인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몰아냈다. 이 성에는 아낙의 세 아들을 조상으로 삼고 있는 씨족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5) 그곳에서 갈렙은 드빌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쳐들어 올라갔다. 옛날에는 드빌을 `책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기럇세벨이라 불렀다. 16) 그곳으로 쳐올라가면서 갈렙은 기럇세벨로 쳐들어가 점령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말하였다. 17) 그런데 기럇세벨로 쳐들어가 점령한 사람은 바로 갈렙의 조카 옷니엘이었다. 옷니엘의 아버지 그나스와 갈렙은 친형제지간이었다. 그래서 갈렙은 조카 옷니엘이 자기 딸 악사에게 장가 들도록 허락하였다. 18) 악사는 시집 가는 날 신랑 옷니엘과 짜고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달라고 하였다. 악사가 타고 가던 나귀에서 내리자 갈렙이 딸 악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랴' 하고 물었다. 19) `예, 아버지. 저에게 선물을 주셔야겠어요. 아버지께서 저를 물이 귀한 남쪽지방으로 시집 보내지 않으시나요? 그러니 저에게 샘을 몇 개 주셔야겠어요' 하고 악사가 아버지께 청하였다. 갈렙은 악사에게 윗샘과 아랫샘을 주었다.

 

여호수아는 갈렙이 40여 년 전 모세를 통해서 들었던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고백했습니다(14장). 그리고 갈렙은 약속에 의지하여 이 헤브론 산지를 지금 내게 달라고 요구했습니다(14:12). 그리고 오늘 본문에 정복 역사를 마치게 됩니다.

 

헤브론을 정복한 갈렙(13-14)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민 13:33)이 있는 헤브론 산악 지역의 성읍을 정복하겠다고 자원한 갈렙은 85세쯤 되었습니다. 그는 나이를 핑계로 물러서지 않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리하여 갈렙은 아낙 자손의 세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헤브론에서 쫓아내 정복 역사를 완성합니다. 이는 우리가 나이가 들어도 믿음으로 건강과 정신을 단련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생의 최대치를 향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드빌을 정복한 옷니엘(15-17) 노장 갈렙은 헤브론 정복에 만족하지 않고 그 여세를 몰아 난공불락의 드빌 곧 기럇 세벨까지 공격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앞선 전투에서 이미 지쳐 있었던 젊은이들의 숨은 힘을 끌어내야 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합니다. 그래서 “기럇 세벨을 공격해서 점령하는 사람에게는 내 딸 악사를 그의 아내로 주겠다.”라는 흥미로운 슬로건을 내겁니다. 그때 옷니엘이라는 젊은이가 나와 드빌을 취하는 승자가 되고 갈렙의 사위가 됩니다. 훗날 그는 여호수아 이후 이스라엘의 초대 사사가 되는 지도자로 성장합니다.

 

내게 복을 주소서(18-19) 악사는 아버지의 결혼 결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출가하기 전 아버지에게 “내게 복을 주소서”라고 요청합니다. 그리하여 갈렙은 딸이 무엇을 원하는지 간파하고 유산으로 윗샘과 아랫샘을 줍니다. 샘은 주변의 광활한 지역에 거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이렇게 악사는 지혜로운 여인이었고, 남편에게 큰 유익을 주는 여인이었습니다.

 

적용: 믿음의 사람들은 직면한 거대한 두려움 앞에서 피하거나 숨어야 하나요? 아니면 노익장 갈렙처럼 정면으로 맞서야 하나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진취적으로 이루어 나가도록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권면하며 격려해 줄 수 있나요?

 

대부호가 신문에 “자신의 생활에 만족함을 증명하는 사람에게 1만 달러를 주겠다.”고 광고를 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자신의 만족한 생활에 대해 열변을 토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한 가정, 주어진 명예, 안정된 직업에 크게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1만 달러는 아무도 받지 못했습니다. 광고주가 던진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을 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정말 만족한다면 나의 돈 1만 달러를 무엇 때문에 원하는가?”

 

< 설 교 >

갈렙과 옷니엘과 악사

수 15:13~19 / 손 상률 목사

성경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한 삶과 거기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공식적으로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또한 자기 한사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며 계승되고 발전하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경우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곧 아브라함의 믿음, 이삭의 헌신과 순종, 그리고 야곱의 그 다양한 축복의 영역들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성경에는 출애굽 1세대로 가나안 입국의 영웅인 갈렙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가나안 시대 최초의 사사인 옷니엘은 갈렙의 사위가 되었고, 그의 아내인 악사는 갈렙의 딸로서 그 가정에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을 고스란히 간직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소개하는 갈렙과 옷니엘과 악사는 이 시대의 훈련된 그리스도인의 표상이요, 건강한 교회운동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I. 믿음의 사람 갈렙

 

성경에는 흔히 “유다 지파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라고 기록합니다(민 13:6).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애굽에서 올라온 이스라엘 중에 광야에서 뼈를 묻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는 사십 세 나이에 모세의 수종자로 선발되어 오랜 세월 험한 과정을 거쳐서 가나안 시대를 개척한 대열에 참여 하였습니다. 여호수아 14:10에 그가 여호수아에게 한 말을 보면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팔십 오세가 되도록 생존케 하신 것은 그로 하여금 목적 있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여겼습니다.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입니다.

 

갈렙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모세가 가나안 땅을 답사 할 정탐꾼을 선발 할 때입니다. 백성을 바란 광야에 머물게 하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한명씩 정탐꾼을 내세워 미리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였는데 그 때 에브라임 지파 대표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함께 갈렙은 유다지파의 대표로 선발되었습니다(민 13:6-8).

그들이 모세의 분부를 따라 사십 일 동안 가나안 전역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백성에게 회보할 때 절대다수인 열 명의 정탐꾼들이 그 땅을 악평하며 그 여행을 포기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에 가나안의 원주민인 아낙 자손들은 장대한 대장부들이고 거기 비하면 저희들은 메뚜기 같았다고 하였습니다(민 13:33).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지도자 모세를 돌로 쳐 죽이고 애굽으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갈렙은 백성을 안돈시키며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하고 설득하였습니다(민 13:30).

갈렙도 가나안 원주민들이 견고한 성읍과 요새지를 확보하고 훈련된 군사와 무기로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하고 몸을 던져 대적하는 자들을 막았습니다(민 14:8-9).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갈렙의 신앙을 귀하게 여기시고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하였습니다(민 14:24).

 

(2) 자기의 사명을 아는 사람입니다.

 

가나안에 입국한 여호수아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원주민들과 전쟁을 치렀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 처음 접전지인 여리고 성 함락 작전에서부터 시작하여 가나안 일곱 족속이 버티고 있는 모든 지역을 석권하여 나갔습니다.

그런데 유다지파에 해당되는 지역가운데 헤브론 산지는 아낙자손 중에도 가장 강력한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수 14:15). 모든 사람이 전쟁에 지쳐있고 그 중에도 강력한 적수와 싸우기를 피하려 하는데 갈렙은 자기가 먼저 그 산지를 탈환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여호수아 14:11-12에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하고 요청하였습니다.

갈렙은 그의 삶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저와 함께 애굽에서 올라온 출애굽 일세들이 광야에서 모두 다 죽었으나 하나님께서 저를 지금까지 생존케 하시고 가나안에까지 들어오게 하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3) 솔선수범하였습니다.

 

대적과 싸우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팔십 오세의 고령인 갈렙은 젊은 사람들도 피하려 하는 싸움터에서 가장 무서운 강적이 버티고 있는 그곳으로 자원하여 나갔습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께서 자와 함께 하실 것을 믿었고 승리에 대한 자신감도 가졌습니다. 여호수아 14:12에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지도자 여호수아를 섬기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처음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을 정탐할 사람을 모집할 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각각 유다지파와 에브라임지파의 대표로 선발된 동기생입니다(민 13:6-8). 그 이후 사십 년간 광야 여행길에 똑같이 모세를 수종 들며 백성을 안돈 시켰고, 모세가 죽은 후에는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를 앞세우고 가나안 정벌에 온 몸을 바쳤습니다.

갈렙이 스스로 여호수아를 섬기며 그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여호수아로서는 갈렙을 가장 거북스럽게 여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믿음의 사람은 자기의 분수를 지키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에게 섬김의 모법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4) 하나님 나라에 기여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갈렙의 요청을 받아들여 헤브론 땅을 그에게 주었고, 갈렙은 그곳의 아낙 자손을 쫓아내고 그 땅을 자기의 소유지로 확보하였습니다. 여호수아 14:14에 보면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라고 하였습니다.

갈렙의 소유지 헤브론은 하나님 나라 역사에 요긴한 지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국을 수립할 때 초대 왕 사울을 폐하시고 이새의 아들 다윗을 통하여 히브리 왕조의 뿌리가 되게 하였습니다(삼상 16:13). 다윗도 갈렙이 속한 유다지파 사람입니다.

훗날 사울이 죽은 다음 유다지파가 중심이 되어 다윗을 왕으로 옹립할 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다윗이 헤브론으로 갔고(삼하 2:1), 거기서 왕위에 올라 칠년 육 개월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삼하 2:11). 갈렙이 싸워서 얻어 놓은 자기 기업의 땅이 다윗 왕국의 최초 도읍지가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곳 헤브론이 정치적인 수도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죽음에 의미를 가지는 것은 죽음에 내몰린 자를 살려주는 도피성으로 제공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20:7에 보면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구별하였고”라고 했습니다.

 

II. 헌신의 사람 옷니엘

 

옷니엘은 갈렙을 도와 헤브론 전쟁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훗날 갈렙의 사위가 되었고 또 이스라엘의 첫 사사가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 16-17절에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함으로 갈렙이 그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고 하였습니다.

 

(1) 모범된 하나님의 군사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다 여호수아 장군을 앞세우고 가나안 정벌에 나선 하나님의 군사들이었습니다. 첫 전투인 여리고성을 공략할 때도 남녀노소 예외 없이 모두가 다 참여했고, 제사장의 나팔소리에 따라 일사불란 하게 행동하여 승리를 얻었습니다(수 6:8-21).

어느 때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군대처럼 대적과 싸우는 그리스도의 정병입니다. 디모데후서 2:4에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갈렙과 함께 헤브론 산지 기럇 세벨을 점령한 옷니엘은 하나님의 군사로서 감투정신을 발휘하였고, 앞장서서 그 일에 나서 성공한 군인입니다. 언제나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인데 어느 누구도 자기의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없고 또한 승리의 영광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딤후 2:3).

 

(2) 갈렙의 계승자입니다.

 

갈렙이 지도자 여호수아를 받들어 섬기며 그의 말에 순종할 때 백성들의 모범을 보인 것같이 옷니엘도 갈렙의 말에 순종하며 백성들에게 자신감을 갖게 하고 통일된 행동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가운데는 옷니엘과 비슷한 청년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외모나 무용에 있어서 옷니엘보다 더 나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사람 갈렙의 뜻을 알고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옷니엘이 선뜻 그 일을 수행하였고 그 결과 약속 대로 갈렙의 후계자가 된 것입니다.

 

(3) 최초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옷니엘은 이스라엘 역사상 무정부 시기라고 불리우는 사사시대에 열네 명의 사사 중 제일 첫 번째 사사가 되었습니다(삿 3:9).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은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하나님을 섬겼지만(삿 2:7),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그 지방 백성들의 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습니다(삿 2:12).

사사기 2:14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사사기 3:9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0절에는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라고 했으며 11절에는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태평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사사 옷니엘은 하나님의 신에 충만하여 백성을 평안하게 하여준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의 표본이 됩니다.

 

III. 축복의 사람 악사

 

갈렙은 처음 약속대로 기럇 세벨을 쳐서 승리한 옷니엘에게 자기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었습니다(17절). 악사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은 성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1) 신앙 가문의 축복

 

시편 144:15에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온갖 죄와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 속에서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자손대대로 그 신앙을 이어가는 집안이야말로 보장된 축복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그 자손들을 세상사람 가운데서 의와 공도의 표본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창 18:18-19).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후손처럼 믿음의 조상을 두고 그 신앙과 유업을 계승하는 사람들은 매우 복된 후손입니다.

여기 악사의 경우 믿음의 사람 갈렙의 딸로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경건하게 자랐고, 장성한 후에는 이스라엘의 초대 사사 옷니엘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보아스의 아내로 신앙의 혈통을 잇게 해준 룻과 같이 여인으로서는 가장 큰 행복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2) 기업을 상속 받았습니다.

 

본문 말씀 18-19절에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계(父系)를 따라 남자들에게 상속권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간혹 딸들이 아비의 재산을 상속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민 27:7). 갈렙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대상 2:42-49), 외동 딸 악사에게 밭과 우물을 상속해 준 것으로 보아 그는 일찍부터 남녀 구별 없이 아비로서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축복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게 되는 영광스러운 기업의 축복을 뜻하는 것입니다(롬 8:17).

 

(3) 땅의 복과 하늘의 복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세상에서 받는 복과 함께 하늘나라의 영원한 복을 보장 받은 사람들입니다. 악사는 믿음의 사람 갈렙의 딸이요 무정부 시대에 이스라엘을 평정한 사사 옷니엘의 아내로 그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는 여인의 이름이 족보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악사의 이름은 그 아비와 남편과 함께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삿 1:14-15, 대상 2:49). 성도는 잠시 잠간 살다가 마치는 땅에서의 이름보다도 영원한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영광스러운 신분의 소유자들입니다(눅 10:20).

악사가 갈렙으로부터 받은 유산은 밭과 샘물입니다. 그가 시집 가서 살게 되는 남방 지역은 오늘날 네게브 사막에 위치한 곳으로써 매우 건조한 곳이기 때문에 샘물을 요구 했고, 이에 갈렙은 윗샘과 아랫샘을 다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막 같이 메마른 땅이라도 지하수의 근원이 흘러나오는 샘물이 있을 때 이것은 옥토로 변하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사람을 믿으며 혈육을 권력으로 삼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사막의 떨기나무 같이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물 근원에 뿌리를 박은 나무처럼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렘 17:5-8).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축복의 특징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수 15:13-19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유다 지파의 기업을 소개하는 중에 첨가된 이야기인데, 그런데 갈렙이 헤브론을 정복하고 또 조카 옷니엘이 드빌을 정복한 것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사시대 초기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삿 1:11-15).

그럼에도 여기에서 이 사건을 소개하는 것은 그만큼 교훈하는 바가 크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중요한 교훈이 되는 사건을 종종 중간에 끼워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오늘 본문에서 전쟁을 지휘한 사람은 갈렙이었습니다.

이때 갈렙의 나이는 무려 85세였습니다.

이만한 나이면 남은 정복전쟁을 후세대에게 맡기고 여생을 편히 보낸다 해도 누구 하나 탓할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갈렙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의 남은 땅을 정복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든 일을 다 지휘한 것이 아니라 후배들이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여러분, 멋지지 않습니까?

제가 갈렙이 등장할 때 마다 감탄을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만큼 순전하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갈렙에게처럼 각각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고, 또 그에 따른 하나님의 상급이 우리에게도 약속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갈렙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어떻게 마음속에 품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본이 됩니다.

 

 

2. 그런데 갈렙이 아낙 사람들을 쫓아낸 곳에 대하여 14절에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의 ‘거기서’는 13절의 ‘헤브론’을 뜻합니다.

헤브론에 거주하고 있던 아낙 사람들을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11:21-22 함께 읽습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들의 성읍들을 진멸하여 바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

그러므로 헤브론에서 아낙 사람들을 쫓아냈다는 것은 여호수아에 의해 쫓겨난 아낙 사람들이 그 사이에 다시 재기하여 헤브론을 점령하고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다른 곳을 점령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동안 그들이 다시 재무장하여 헤브론을 점령하고 또다시 이스라엘의 강력한 대적이 되어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전세가 역전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낙 자손의 군사력이 강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11장에서 이미 이스라엘에게 진멸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승리에 도취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받은 복, 곧 땅 분배에 정신이 팔려 그들의 경계에 방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잔당이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다가 방심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몰아내고 헤브론을 점령하고 또다시 이스라엘의 큰 위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성도들이 ‘처음 신앙’을 잃어버리고 잠자고 있습니다.

그들이 늘 하는 말은 ‘예전이 좋았다’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나도 한 신앙했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만일 오늘 본문의 갈렙이 아낙 자손들을 다시 몰아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상하기조차 끔찍합니다.

그리고 계속되어지는 말씀을 읽어보면 이스라엘이 점령하지 못한 곳의 사람들이 다시 결집해서 두고두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구원 받은 것에 안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다가는 다시 옛사람이 불쑥 나타나 여러분의 구원을 뒤흔들게 될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최종 평가가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그 평가는 우리가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난 뒤에 내려집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의 삶을 돌아보며, 혹시 예전에 몰아냈던 옛사람의 성품에 다시 점령당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것들이 슬며시 나를 넘어뜨리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갈렙처럼 그것을 온전히 몰아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16절 이하의 말씀은 사사기 1장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갈렙은 “기럇 세벨을 점령하는 자에게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지금 이 시대에 이렇게 말한다면 “자녀가 무슨 물건입니까” 하며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아버지가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었습니다.

갈렙은 딸을 사랑하여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18-19절 함께 읽습니다.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악사는 아버지가 약속했던 대로 기럇 세벨을 정복한 옷니엘과 결혼하여 그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아버지 갈렙이 딸 악사에게 묻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정겨운 부모의 마음이 묻어나는 말입니다.

이러한 아버지를 향해 딸 악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두 가지를 구합니다.

하나는 ‘복’이고 하나는 ‘땅과 샘물’이었습니다.

여기에서의 복은 ‘영적인 것’을 뜻하고 땅과 샘물은 ‘육적인 것’을 뜻합니다.

악사는 ‘하나님의 은혜인 영적인 축복’과 ‘육적인 축복인 물질’을 모두 구했고 아버지 갈렙은 기꺼이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아버지 갈렙은 하나님의 모습을, 딸 악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복과 육적인 복을 풍성하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갈렙이 딸인 악사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소유를 내어 준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좋은 것을 아낌없이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정겨운 음성으로 물으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영적인 복과 육적인 복을 마음껏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답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가장 큰 사명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갈렙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자세를 배우게 하시니 감사하옵나이다. 또한 이미 받은 복을 빼앗으려고 악한 사탄이 항상 노려보고 있음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악사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게 하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저희들도 악사와 같은 지혜를 소유하게 하여 주옵소서. 육의 양식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양식을 더욱 풍성히 구함으로 더욱 복된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필요한 것

수 15:13-19

지난 주일에 세상이 보인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인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편리할지 모르지만 보이는 세상을 사는 것은 사실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세상을 살아가면 자연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내 소유로 만들어야 비로소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이 보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좋은 차를 굴리는 사람들이고 좋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연 마음속에는 나도 저처럼 살아봤으면 하는 욕심이 자리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족한 줄 알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린지 오래입니다. 돈이 있어야 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족한 줄 알아라는 말은 세상을 전혀 모르는 말이고, 아직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 줄 모르고 돈이 힘이 되는 현실을 몰라서 그렇다고 치부해 버립니다.

 

세상은 온통 보이는 것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싸움터입니다.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가 되기 위해서 온갖 발버둥을 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돈입니다.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돈에 대해서 초월할 자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돈의 힘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예수께 대한 관심까지 포기하게 해 버릴 정도로 돈의 힘은 강합니다. 돈 앞에서 무릎 꿇지 않을 인간이 누구이겠습니까?

 

교회가 예배당을 짓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은 돈입니다.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필요하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예배당을 짓습니까? 믿음이 땅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 예수님이 예배당 짓는데 무엇을 보태주겠습니까? 예배당 건축에 필요한 것은 돈이기 때문에 돈 많이 바칠 교인이 필요하지 예수님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입니다. 결국 돈많은 교인이 하나님이 되버립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부자가 교회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교회마다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돈이 보입니다. 돈만 있으면 땅도 사고 건물도 짓고 이것저것 좋은 것은 다 할 수 있을텐데 하면서 돈 없는 내 교회의 현실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없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교회, 그러면서도 교회라는 간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경을 펼치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 오직 자기 필요에 의해서 기도하고 성경보고 헌금하는 교회, 이것이 현대 교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고자 했을 때 필요한 것은 선악과였습니다. 선악과는 먹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냥 먹으라고 주신 것을 먹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가고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그냥 먹는 것입니다. 따라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는 인간에게 주지 않은 것이기에 안먹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에 빠진 인간은 자기 스스로 목표를 가지게 됩니다. 스스로 목표를 가졌다는 것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뭔가를 필요로 하는 인간으로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스스로 목표를 가진 인간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데 선악과가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기고 선악과를 필요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인간입니다.

 

세상이 바로 이러한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세운 채 살아갑니다. 자기 목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히 있어야 할 것이 있고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경쟁을 하고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남을 짓밟아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심지어는 남의 입에 들어있는 것까지 빼앗아야 직성이 풀리고 그것을 능력으로 여기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로 살고자 할 때 곤란하게 여기는 것도 내가 추구하는 예수님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전혀 도움이 못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내가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는데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난감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를 포기할 수도 없고, 그런데 성경은 십자가와 세상을 반반씩 적당히 나누어서 쫓는 것을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갈등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실력이 있어야 하고 돈이 필요한 이 세상에서 예수님 한분만 주장하고 산다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고 세상에서 실패하고 나약한 자로 전락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만 먹고산다는 것이 뭔가 못마땅하게 들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못된 성품이고 아담이 보였던 실수를 오늘 우리가 똑같이 자행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에 매달려 허우적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울고 웃으면서 모든 인생의 가치를 보이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에 대해서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세상에 보내시는 아들도 목수의 아들로 보내신 것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목수의 아들로만 볼뿐이지 하나님으로 보지 않을 것을 아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는 타락된 성품입니다.

 

예수님 당시 세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살았던 세상이기에 예수님이 없이도 자신들의 죄는 자신들의 힘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지내고 금식하고 십일조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면 충분히 죄가 해결되는데 무엇 때문에 예수라는 사람의 피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너의 피가 아니라 제사고, 우리들의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필요로 하십니까?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가 묻는 것은 천당 가기 위해서 필요한 분으로만 인정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예수님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느냐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예수님만을 필요로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을 제대로 볼 때 가능한 일입니다. 즉 세상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판단했을 때 왜 예수님이 필요한지 그 답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갈렙이 자신의 딸을 옷니엘에게 시집보내는 내용이 나옵니다. 16절에 보면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는 자신의 딸 악사를 아내로 준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자 옷니엘이 기럇 세벨을 쳐서 취하게 되고 약속대로 악사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18,19절에 보면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악사가 갈렙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시집간 악사가 갈렙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나귀에서 내릴 때 갈렙이 악사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아마 악사가 나귀에서 내린 것은 뭔가 자신에게 요구할 것이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악사는 갈렙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물음에 대해서 '아버지가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시니 샘물을 주소서'라고 요구합니다. 왜 악사는 갈렙에게 샘물을 요구하였겠습니까? 우리가 보기에 샘물은 하찮은 것입니다. 오히려 더 많은 땅을 요구한 것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악사는 많은 것을 차지하는 것이 관심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관심이었던 것입니다.

 

남방 땅이란 건조하고 메마른 지역입니다. 건조하고 메마른 지역이라면 물은 필수적입니다. 많은 땅을 차지하는 것보다는 물을 확보하는 것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악사는 자신이 살 지역에서는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갈렙에게 샘물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악사의 요구에 갈렙은 윗샘과 아랫샘을 악사에게 줍니다. 윗샘과 아랫샘은 높은 지역에 있는 샘과 낮은 지역에 있는 샘을 말합니다. 즉 높은 지역의 땅이든 낮은 지역의 땅이든 물로 인해서 어려움이 없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악사가 갈렙에게 샘물을 요구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악사는 자신이 살 땅이 어떤 땅인가를 알았습니다. 메마르고 건조한 땅이기 때문에 그 땅에 필요한 것은 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물을 요구한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다가오셔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악사는 갈렙에게 '내게 복을 주소서'라고 하고서 요구한 것은 샘물이었습니다. 악사에게 있어서 복은 메마른 땅에서 자신들에게 생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메마른 땅에서 생명 되는 것은 물이지 않습니까?

 

오늘날 세상은 생명 되는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세상이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목표와 소원을 이뤄주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고 살면서도 세상이 어떤 땅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남보다 성공하고 자랑할 것이 있는 모습으로 존재하기만 원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대답은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갈 2:2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모든 근거를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도 바울이 보는 세상은 심판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심판 받기로 이미 작정되어진 땅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심판에서 생명 되는 것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가 세상을 보는 눈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보는 눈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7-39)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들면 그것을 단지 축하할 일로만 보지만 예수님은 심판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모습들을 이미 심판 속에 있는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결국 심판을 의식하지 않는 모든 삶은 심판 때까지 잠시 유보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돈 벌었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돈 번 재미도 심판 때까지 잠시 허락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만 보입니다. 심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돈을 필요로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체인데, 이 세상 속에서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과 똑같이 돈을 필요로 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산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거대하고 으리으리한 예배당이 심판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한 자식이 심판을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우리로 하여금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에서 생명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심판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심판의 장소로만 보고 산다면 자연히 그리스도의 피가 나에게는 생명이고 주님이 곧 나에게 생수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세상을 보이는 대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지혜이고 사는 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으로 여기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무시하고 세상만 보고 사는 사람은 결국 마귀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구멍이 나서 침몰하는 배에서 한가롭게 춤추며 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고 집이 아닙니다. 구명보트 하나입니다. 배가 침몰하지 않을 때는 눈길도 돌리지 않던 보트인데 침몰하는 상황에서는 생명선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가 침몰할 것을 미리 안 사람이라면 어떤 행동을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야 춤을 추고 놀든 말든 상관없이 구명보트를 확보하고 그것을 붙들고 놓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다시 올 때 사람들은 평상시처럼 먹고 마시고 밭에서 일을 하고 살아가지만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하고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안다면 밭에서 일을 하면서도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시각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에 옆사람이 수확한 것을 바라보게 되고 나보다 많이 소유하게 된 것을 시기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심판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목표한 대로 열심히 살아가시면 됩니다. 그러나 심판이 있음을 인정하신다면 심판 속에서 생명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왜 그리스도의 피에 모든 소망을 두고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심판의 세상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명으로 여기고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오늘 이시간 심판의 세상에 보냄을 받고 멸망의 땅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기도 제목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돈 없이 살고 남보다 부족하게 사는 것으로 애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생명으로 여기고 생명이 나에게 계신 것으로만 감사하지 못하는 자신의 못남 때문에 애통해 하는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자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세상을 지배하시고 장차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을 전하라고 뽑힌 자입니다. 돈도 아무것도 아니고 성공도 헛된 것이고 인생도 다 허무한 것이로되, 오직 주님이 흘리신 피만이 가치 있는 것이고 우리를 살리는 생명이라는 것을 전하라고 여러분을 신자로 뽑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들

[수 15:13-19]

앞장에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 갈렙에 대하여 살펴봤습니다. 오늘도 헤브론과 드빌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하며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또한 그분들과 같이 믿음으로 행하기를 결단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한 여호수아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13).

13절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유다 자손 중에서 분깃으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주었으니”고 했습니다. 갈렙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수14:12) 이 요청을 듣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했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 땅을 허락하도록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 땅을 갈렙에게 분배하여 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명령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인간들의 의지나 판단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순종하고 복종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명령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순종하려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분석하고 판단하여 순종여부를 결정합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명령을 평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시도 자체가 불신앙입니다. 사울왕은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 명령을 자기 나름대로 조정하여 처리했습니다. 좋은 양들은 하나님께 제사한다는 명목으로 살려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행위를 정죄하시고 왕의 자리에서 퇴출시켰습니다. 삼상15:22-23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한 말씀은 우리가 항상 되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한 여호수아의 믿음을 우리도 소유하도록 합시다.

 

2. 선언한 대로 실천한 갈렙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14).

14절에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라고 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헤브론을 기업으로 줄 것을 요구하면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 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고 선언한 일이 있습니다(수14:12). 그 선언대로 아낙 자손을 쫓아냈던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특별히 믿음 곧 하나님을 빙자하여 한말에 대하여는 목숨을 걸고 실천해야 합니다. 아무리 여건이 달라졌다고 해도 말한 것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참 신자가 아닙니다. 차라리 실천할 자신이나 확신이 없다면 말하지 않음이 훨씬 좋습니다. 어떤 경우 하나님과의 약속까지도 실행치 않는 이들이 있는데 신앙인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갈렙처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반드시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한말을 생명처럼 여기고 실천하는 책임감 있는 삶이 참 신앙인의 삶입니다.

 

3. 용감하게 적을 물리친 옷니엘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17).

17절에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기럇세벨=드빌)을 점령함으로 갈렙이 자기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고 했습니다. 헤브론을 정복한 갈렙은 이어서 드빌을 공격하는 중에 상당히 지쳐 있었던 듯 합니다. 그는 그때 지혜를 짜내서 드빌을 선봉에 서서 정복할 지휘관을 찾았던 것인데 옷니엘이 용감하게 나서서 그 일을 해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강하고 담대하며 용기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훗날 옷니엘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됩니다(삿3:7-11).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항상 긍정적입니다. 강하고 담대합니다. 주저하지 않고 용기있게 돌파해 갑니다. 특히 어떤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 줄로 여길 때에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용기있게 나서지 못하는 원인은 힘이 없기보다는 믿음이 부족한 탓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했는데 항상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용기있게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한 여호수아 선언한 대로 실천한 갈렙, 용기있게 적을 물리친 옷니엘같은 참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수 15:13-19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책으로도 우리에게 친숙한 “오스왈드 챔버스”의 또 다른 책 가운데 “최고의 하나님을 위한 나의 최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오스왈드 챔버스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삶을 살아갈 때 최고의 하나님은 나에게도 하나님의 최고의 영광이 나타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임하고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심을 믿는 나의 최선의 헌신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둘이 하나가 될 때 “뒤나미스”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역사의 현장 속에, 삶의 영역 속에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옷니엘의 삶을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갈렙이 헤브론과 드빌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기럇 세벨”이 남게 되자, “기럇 세벨”을 정복하는 자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사실 갈렙은 충분히 “기럇 세벨”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을 찾기 원했던 것은 갈렙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최선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를 누리게 하려는 갈렙의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기럇 세벨”을 정복한 사람이 나왔는데, 그가 바로 “옷니엘”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옷니엘은 이스라엘의 최초의 사사로 세워져서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데, 그 때의 일에 대한 내용이 삿3:7~11절에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옷니엘이 “기럇 세벨”을 점령하고 갈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얻게 된 이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가나안 땅의 신들인 바알과 아세라을 섬기기 시작하면서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메소보다미아 왕인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넘기셨고, 이스라엘은 8년 동안 구산 리사다임에게 지배를 받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말의 뜻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힘겨웠을 지를 또한 알게 됩니다.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뜻은 “두 배로 악하다”라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사람의 이름을 “두 배로 악하다”라고 짓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두 배로 악한 사람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옷니엘이 이렇게 구산 리사다임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최초의 사사가 되어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평안하게 다스릴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삿3: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옷니엘에게 임하였을 때 하나님은 옷니엘을 통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게 하시고, 이스라엘 위에 평화를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영은 누구에게 임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중요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옷니엘의 최선을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실 사람을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나 하나님의 뒤나미스의 능력,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역사를 경험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뒤나미스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일까요? 누가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누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요? 누가 뾰족한 땅, 두 배로 악한 왕과 같은 거친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맛볼 수 있을까요? 옷니엘과 같은 하나님을 향한 용감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열심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에 필요한 열심은 무엇으로 나타나야 합니까? 기도입니다. 전도입니다. 봉사와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에 필요한 것은 단지 하나님의 열심만이 아닌 것입니다. 나의 최선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최선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 주님께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공동체를 섬기며, 최선을 다해 복음의 삶을 사시고,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위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옷니엘에게 허락하셨던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하실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 주님을 사랑함으로 최고의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새로운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악사의 소원

여호수아 15:13-19

추수 감사절은‘초막절’로도 불립니다. 초막절은 하나님께서 땅에 열매를 맺게 하시고 풍요를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날입니다. 동시에 초막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의 삶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광야를 인도하심을 상기하는 날입니다.

[레 23:34, 42-43] 3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42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들어온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은 광야의 삶을 마치는 날이기도 합니다. 야곱이 죽기 직전에 자기의 열두 아들들에게 축복의 유언을 하고 나서 이 축복의 약속은 근 5백 년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창세기49:8-10]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 가나안 정복의 과정을 선도적으로 수행한 지파가 바로 유다지파입니다. 축복은 약속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은 약속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이 앞서 나갈 때도 유다 지파는 늘 맨 앞에 있었습니다.

● 그 결과 가나안 땅에 들어와 땅을 분배 받는데 있어서 '1번' 순서를 받은 지파가 바로 유다 지파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지형을 살펴 볼 때 이 지역은 바로 가나안 땅의 중심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지파에게 배당된 지역은 가나안의 중심 지역으로 비옥한 목장들과 포도원들이 가득한 곳이기도 합니다. ○ 지금 우리가 보는 유다 지파의 지역은 다른 지파에 비하여 유달리 큰 것을 봅니다. 무엇인가 공평하지 않은 땅 분배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네게브라고 불리는 남쪽의 광야 지역이 유대 지파 땅의 60%에 이룬다는 것입니다. 유다지파가 에브라임 지파를 이기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가 된 데에는 바로 이 유대광야라는 넓은 땅이 있으므로 가능했습니다. ○지금도 이 지역은 구리, 인산염, 각종 광물자원이 풍부한 중요한 지역입니다.

○ 앞의 14장에는 유명한 사건이 있습니다. 갈렙이 85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여호수아에게 청구하고 나아가 가나안의 강력한 부족인 "아낙" 자손을 쫓아내고 "헤브론 성"을 차지한 것은 바로입니다.

[여호수아15:13,14]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 성을 유다 자손 중에서 분깃으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주었으니 아르바는 아낙의 아비였더라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곧 그 세 아들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

이 또 다시 [15장:14절]에서는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곧 그 세 아들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라고 말합니다.

농장에서 일하던 두 사람이 새로운 곳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고 기차역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뉴욕 행을 가는 표를 샀고, 한 사람은 보스턴으로 가는 표를 샀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기차를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뉴욕사람들은 인정이 메말라 길 가르쳐 주고도 돈을 받고 보스턴 사람은 거지한테도 인심이 후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뉴욕 행 표를 가진 사람은 거지한테도 인심이 후하다는 보스턴을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보스턴 행 표를 가진 사람은 뉴욕에 가면 무엇을 해도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표를 바꿨습니다. 뉴욕에 간 사람은 도시 사람들이 흙에 대한 향수가 있을 것 같아 시골 흙을 화분에 담아 팔아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백 명이 넘는 종업원까지 두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사장은 어느 날 몸과 마음을 식히기 위하여 보스턴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보스턴 역전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낯익은 얼굴이었습니다. 바로 자신과 표를 바꾼 친구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성도들이 어떤 사람을 닮아야겠습니까?

 

▶ 초막절에 너희는 함께 나누라 했습니다.

[신 16:13-14]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 5060세대는 말하기를 ‘샌드위치 세대다’불행하다. 말합니다. 윗사람들을 열심히 모셨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는 어른을 무시하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대도 말하기를 자신들은 불행한 세대다 말을 합니다.

○ 대한민국에서 요즈음 30대 대기업의 신입사원 연봉은 4~5,000만 원 정도입니다. 이 나라에 이 정도의 수입을 받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중소기업은 어떻습니까? 2,500만 원 정도입니다. 대기업의 절반 수준입니다. 이 정도의 수입으로는 어떤 젊은 처자도 결혼대상으로 꺼리는 수준이고, 마음 놓고 소비생활을 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선택된 소수에 불과합니다.

● 한편 호주 시민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무상교육입니다. 출산하는 순간에 장려금 500만원이 나오고 양육보조비를 정부에서 지원해줍니다. 기저귀, 분유 값까지도 정부보조를 받는다 합니다. 호주에서는 일반 국립병원에서는 진료비를 받지 않습니다.

반값등록금 데모를 하고, 살아가야할 주택이 없어서 결혼을 미루는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도 다른 것을 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호주는 광활한 땅덩이에 비해 2,300만이라는 적은 인구의 나라이고, 국민소득이 6만 불에 이르는 부자나라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말합니다.

● 그러면 2만 불이라는 우리나라의 국민소득 적어서 사람들마다 빈곤을 느끼고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날마다의 경쟁으로 불안하고 삶에 여유가 없고 중병에 걸려 사는 것입니까? ○ 우리나라에는 상대적 빈곤감으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빈부의 격차는 나날이 커져 국민소득이니, 경제성장이니 하는 말은 먼 다른 나라의 일로 여겨집니다. ● 연 2500만 원의 수입이 적은 수입인가요? 왜 이정도의 수입으로는 스스로 가난하다 생각해야 할까요. 왜 소망을 가지고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10억은 있어야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 왜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일류대학을 들어가기 위하여 머리를 싸매고 경쟁해야 합니까? 왜 모든 사람이 대학을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까? ● 왜 여전히 모든 사람이 자신을 축복받지 못한 세대다. 자신을 Loser(패자)라고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까? ● 왜 이 나라가 세상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라 되었고,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아야 하고 [살인과 강도] [사건사고]가 넘치는 나라가 되었습니까?

☞ 어떤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사회정의를 외치고 역사지식을 꿰뚫고 있음을 자랑하면서, 정치가와 정부를 비판하고, 왜곡된 현실과 소망 없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분노가 가득차서 말하였습니다. ○자신은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왔다 말합니다. 자신은 성공한 사람이고 좋은 가장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무엇을 시도하였습니까? 소망은 있습니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단지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고 돈 잘 버는 것으로 만족하고, 자신의 자녀가 출세하고 무탈하기만을 바라는 소시민에 불과했습니다.

■ 사실 삼성과 같은 많은 대기업들이 대한민국에 많은 부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비인간적인 사람과 사람의 차별을 확장시켰습니다. ○이들 대기업들의 문어발식 확장경영은 뒤 골목 상권까지 차지하면서 서민의 일자리를 빼앗아 갔습니다. ○ 그들은 소수의 기득권자 제외한 대다수의 국민을 일용직 노동자와 알바 인생으로 만들었습니다.

○ 대기업 안에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역시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일 뿐 아직도 그들 기업 안에는 수많은 일용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착취를 당하고 있지만 그들은 일자리를 나누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 이 사회 속에는 무수한 이권단체, 전문인 단체들이 자신만의 장막을 치고, 불평등의 사회 안에 그래도 자기 자신만은 상류층으로 남아 있으려고 합니다. ○이 나라의 문제는 경제 저성장의 문제도 아니고, 낮은 국민소득의 문제도 아닙니다. 덩어리는 커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가난해졌고, 무정함으로 피폐해졌습니다.

[여호수아15:15-17] 거기서 올라가서 드빌 거민을 쳤는데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함으로 갈렙이 그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여기서는 유다 자손인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집안에 땅을 분배하는 중에 생긴 작은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약 20킬로미터 지점에 있던 "드빌", 원래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불리던 성읍을 점령할 때입니다. 이때 갈렙은 좀 색다른 방법을 썼습니다. 바로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고 선언합니다. ○ 사실 갈렙은 헤브론을 순전히 자기 힘으로 차지했던 갈렙은 기럇 세벨 역시 스스로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공개선언을 한 자기와 똑같은 전투적 신앙과 적극적 자세를 가진 사람을 얻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런 갈렙의 약속을 듣고 나선 사람이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입니다. 그 옷니엘이 드빌 거민을 무찌르고 기럇 세벨을 빼앗았습니다.

○ 갈렙이 약속한 대로 그의 딸을 자기 아내로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옷니엘이 갈렙의 딸 악사와 드디어 결혼하게 되었을 때에 한 가지 작은 요구를 합니다.

[여호수아15:18-19]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딸 악사는 지금 더 넓은 지역에서 더 큰 꿈을 펼치기를 원했습니다. 그녀는 드빌 땅 남쪽으로 광활한 유대평지가 물이 흐르는 옥토로 바뀌게 될 것을 꿈꾸었습니다. 그녀는 남방 네겝 광야에 속해있는 샘물을 구했습니다. 이는 장차 분쟁의 소지를 없애기 위한 확실한 보장을 얻고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갈렙은 두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소원대로 "윗샘과 아랫샘"까지 더 주었는데 옷니엘은 이 드빌 아래쪽의 넓은 네겝지방을 모두 차지합니다. 이 땅이 지금의 유대 광야입니다.

○ 그리고 나중에 옷니엘은 갈렙의 믿음과 용감한 자세를 그대로 물려받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는 이스라엘의 첫 사사까지 되었습니다.

[사사기 3: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 [수15:14] 아르바는 아낙의 아비였더라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곧 그 세 아들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 ■ [수15:15] 거기서 올라가서 드빌 거민을 쳤는데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유다지파는 매우 용감하였습니다. 그들은 계속하여 대적과 싸우며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앞장섰을 뿐 아니라 헤브론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들은 헤브론에 거하는 가나안의 용사들 중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헤브론의 강자들이었을 것이다. (세새는 태양을 뜻하고 아히만은 운명의 형제들이라는 뜻이며 달매는 가레로 땅을 일구는 자를 의미합니다.) 모두 다 우상과 관련 된 이름들입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 기럇세벨도 쳤는데, 기럇세벨은 책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현재도 기럇세벨은 도서관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왜곡된 지식, 왜곡된 사상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는데 큰 대적입니다. 이 땅에는 우상숭배와 왜곡된 사상, 왜곡된 진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 가나안의 성읍과 산지들과 족속들을 하나하나 멸하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 전통은 계승하는 것이고 악습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 이 땅에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서로가 나누고 서로가 돕고 서로가 믿을 수 있는 사회를 이루는 것은 ○ 주님이 이 땅의 주인이 되시고 주님이 이 땅을 축복하셔야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 주님의 가르치신 진리가 이 땅을 채울 때 가능한 것입니다.

○ 새 시대를 열어가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좋은 동역자가 있어야 합니다. 허옥남 집사님이 처음에는 늘 자녀를 위한 기도만을 했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되더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함께 뜻을 모으고 힘을 모으고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삶

여호수아 15장 13-19절

우리는 지난 주에 갈렙이 하나님께 약속 받은 헤브론 땅을 기업으로 구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땅을 갈렙에게 주었습니다. 이로써 헤브론에 대한 소유권은 갈렙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땅에는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에 갈렙은 헤브론을 차지하기 위해서 또 다시 싸움을 감행해야 했습니다. 특별히 헤브론에는 거인족이라 불리는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갈렙에게도 이 전투는 어려운 싸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약속 받은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한 갈렙 가문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1. 갈렙의 순종과 헌신

 

비록 거인족과 싸워야 하는 힘들고 두려운 전투였으나, 갈렙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헤브론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아낙 자손들과 전투를 벌였고, 그 결과 거인족들의 자손들은 갈렙에 의해 헤브론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헤브론 산지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사실 여호수아서를 살펴보면 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로부터 땅을 기업으로 분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 사는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을 기피하거나, 지체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단 한 순간의 망설임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기업을 소유하기 위해 헤브론으로 간 갈렙은 분명 믿음의 사람 입니다. 게다가 그가 차지해야 했던 땅은 가나안 족속 중에도 싸움에 능하기로 유명한 아낙 자손들이었기에 그가 감당해야 했던 전투는 매우 치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헤브론을 차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약속 받았지만, 그 땅이 저절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감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서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 약속 받았다고 해서 그 약속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삶 가운데 성취되도록 근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왕으로서의 소임을 등한시하자 하나님은 그를 폐위시켜 버렸고,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반대로 다윗은 어떠합니까? 그는 10대 소년 때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란 약속을 받았으나, 무려 10년이 넘도록 그 약속이 성취되도록 갖은 고생을 다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수고 끝에 그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다고 해서,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듯이 게으르게, 나태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삶 가운데 성취되도록,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가운데 확장 되도록 성실하게 일하며, 또한 주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 갈렙이 그러했습니다. 그의 나이는 여든 다섯의 노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좇아갔고, 주님의 약속을 자신의 삶 속에서 성취하기 위하여, 성실하게 아낙 자손과의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성취를 위해 우리들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병에 걸려 몸이 아픈 한 환자가 있습니다. 얼마나 밤낮으로 아파 고생하는지, 병이 낫도록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를 베푸사 병이 나을 것이란 약속을 주셨습니다. 자, 그럼 이제 이 환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병이 나을 것이란 약속을 주셨으니까 아무렇게나 살면 됩니까? 아닙니다. 재활이 필요한 사람이면 침대에만 누워 있을 것이 아니라 일어나 열심히 재활치료 받고, 음식을 조절해야 하면 부지런히 식이요법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도 더 건강해지고 튼튼해지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만 믿고 자신은 그 약속을 성취하는데 게으르게, 불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만일 다윗이 10대 때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았다고 자만하며 그 이후 게으르게, 나태하게 살았다면 그는 결코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우리의 삶 속에서 성취될 수 있도록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는 특별히 요즘같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삶이 어려운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주의 자녀들을 도와주시고, 우리의 보호해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만 믿고 태만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 고난 가운데도 주의 자녀의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일들 가운데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 찾아보고, 기도하며 성실하게 그 일들을 고난이 지나갈 때까지 인내하며 감당하는 것입니다. 아낙 자손 같이 큰 고난일지라도 주님의 약속 의지하고 성실하게 인내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이 고난도 능히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갈렙은 헤브론 땅을 차지한 후 인근 지역인 드빌로 올라가 그 땅까지 정복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가나안 땅 정복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속 갈렙은 여든 다섯의 노인입니다. 그가 헤브론 땅을 정복하고 거기에서 멈추었어도 사실 그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분량 이상으로 헌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목에서 왜 하나님께서 갈렙을 기뻐하셨는지 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일에 있어서는 거룩한 열정을 낼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더 넓게 확장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기럇 세벨을 정복한 옷니엘

 

갈렙은 드빌 곧 기럇 세벨을 점령함에 있어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갈렙의 이러한 제안은 고대 사회에서 전쟁 중 큰 공을 세운 자를 위로하기 위하여 흔히 사용된 풍습이었습니다. 후에 이스라엘 왕 사울도 거인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자기의 딸을 주기로 약속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갈렙이 기럇 세벨을 점령하는데 있어서 자기 딸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보면,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헤브론 땅을 점령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기에 갈렙 자신이 나서지 못하고, 누구든지 그 땅을 점령하는 자에게 자기 딸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보입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 중 거인 골리앗을 상대하려고 아무도 나서지 않았던 것처럼, 이 당시에도 기럇 세벨을 취하는 일에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옷니엘이 그 성읍을 취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옷니엘은 갈렙의 남동생의 아들이었습니다. 즉 갈렙과 옷니엘은 삼촌 조카 관계 입니다.

앞서 그의 삼촌 갈렙이 불가능해 보이는 아낙 자손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헤브론을 점령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옷니엘도 기럇 세벨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과의 힘겨운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옷니엘은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인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해 열심으로 나가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갈렙과 옷니엘의 공통점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과 담대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에서 승리의 약속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담대하게 나가 싸워 가나안 땅을 정복 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이 바로 갈렙과 옷니엘이 보여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용기와 그 말씀을 성취하고자 하는 담대함 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들과 같은 용기와 담대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3. 샘을 받은 악사

 

아버지 갈렙의 약속대로 그의 딸 악사는 기럇 세벨을 점령한 옷니엘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악사는 출가하며 그의 아버지에게 밭을 달라고 요청 했습니다. 18절에 보면 그녀가 아버지에게 밭을 구한 것으로 기록되 있습니다만, 19절 말씀을 보면 그녀가 윗 샘과 아랫 샘을 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옷니엘이 정복한 땅인 기럇 세벨은 남쪽에 있는 건조한 땅입니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특별히 농경사회에서 논밭에 물을 대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 입니다. 따라서 악사는 건조한 땅의 물 부족 상황을 해결할 수 있도록 그의 아버지에게 샘물을 달라 요청한 것입니다. 딸 악사의 요청에 갈렙은 지체없이 두개의 샘물을 주었습니다. 성경에는 윗 샘과 아랫 샘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윗 샘이란 높은 지역에 있는 샘을 말하고, 아랫 샘이란 낮은 지역에 있는 샘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악사는 아버지 갈렙에게 샘을 구함으로써 두 개의 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악사가 아버지 갈렙에게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무 샘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사가 갈렙에게 샘을 구하자, 갈렙은 두 개의 샘을 주저 없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복을 구하는 자의 삶을 풍성한 것으로 채워 주십니다.

악사가 자신의 아버지 갈렙에게 자신의 필요를 구한 것과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들의 필요를 적극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갈렙은 자기 딸 악사에게 샘을 주는 데 주저없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샘을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주었습니다. 악사는 갈렙의 딸 입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주는 것이 무엇이 아까웠겠습니까? 갈렙은 기쁜 마음으로 주었을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구할 때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복을 우리에게 기쁨으로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약속을 쟁취하는 자, 복을 구하는 자들에게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악사가 그의 아버지 갈렙에게 샘을 요청한 것과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 아버지께 은혜의 샘, 능력의 샘, 구원의 샘, 축복의 샘을 기도로 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지체없이 헤브론 땅을 정복한 갈렙, 기럇 세벨을 용기 있게 점령한 옷니엘, 아버지 갈렙에게 샘을 구한 악사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렙과 같이 날마다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성취해 나가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옷니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용기와 그 말씀을 성취하고자 하는 담대함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악사와 같이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함으로 말미암아 풍족한 은혜를 받으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이미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한 우리의 선택 입니다. 갈렙과 같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영원한 청년 갈렙의 헤브론 공략

수 15:13-19 / 한 홍 목사

최근 통계를 보면 40년과 비교했을 때 평균 기대수명이 많이 상승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우리나라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는데, 기업들은 정년퇴직을 앞당기고 있다.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퇴직 후의 삶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약속의 땅으로 이민 간 것은 75세 때였었고, 이삭을 낳았을 때는 100세였다. 모세는 80세를 넘긴 후에 200만 이스라엘을 이끌고 출애굽 하여 40년 동안 백성들을 이끌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나이를 초월하여 사람들을 이끄신다. 세월이 사람을 늙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가 진정으로 그를 늙게 만드는 것이다. 아직 젊은데도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 또 나이가 들었는데도 젊은이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새로운 미래를 도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

갈렙은 광야 40년 세월을 거쳐서 가나안 정복전쟁에 이르기까지 100년 가까운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불신하고 불평하는 백성들 가운데서도 독야청청하는 하나님을 향한 매일 성장하는 뜨거운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향해 영원한 청년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7년에 걸친 정복전쟁이 마무리될 즈음에 갈렙이 여호수아 앞으로 나왔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출애굽 1세대를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인데 비록 여호수아가 총 지도자였지만 그는 아마 믿음의 친구 갈렙을 존경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 갈렙이 여호수아 앞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구를 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수 14:6-9

갈렙은 지금 히스토리 리뷰를 하고 있다. 가나안에 열 두 정탐꾼을 보냈을 때 어떠 일이 있었는지를 얘기해 주고 있다. 정탐하고 돌아와서 두 명을 제외한 열명은 아주 부정적인 이야기를 전했던 사건 말이다. '아낙 자손의 거대함 앞에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라고 말하는 정탐꾼 때문에 백성들은 정작 본 적도 없는 아낙 자손을 두려워하며 불평하기 시작했다. '왜 애굽에서 나왔을까, 모세가 원망스럽다, 하나님이 원망스럽다.' 이때 갈렙이 나섰었다.

민 13: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살벌한 그 상황 가운데 웬만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저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열 정탐꾼들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어놓았기 때문에 틀린 얘기여도 다수가 압도적인 분위기로 그것을 맞다고 우기고 있으면 왕따 당하기 싫어서라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기 어렵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갈렙은 용기를 내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 누군가는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비겁한 중립을 지키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의 편을 들어야 한다. 갈렙의 말은 짧았지만 힘이 있었다.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갈렙이라고 무서운 아낙 자손을 보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압도하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무엇을 보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눈으로 보느냐 이다. 믿음이 없이 문제를 보니 다들 문제에 움츠러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갈렙도 똑같이 아낙 자손을 보았지만 그는 위축되지 않았다. 어떤 약속의 땅도 프리패스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반드시 무서운 장애물들을 거쳐서 가야 한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갈렙처럼 그 장애물들 앞에서 위축되지 않는다. 문제를 직시하지만 문제를 압도하시는 하나님을 보기 때문이다. 다른 정탐꾼들이 거인 같은 아낙 자손만 보고 완전히 움츠러들었을 때 갈렙은 아낙 자손 위에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 하나님의 임재를 본 사람은 문제가 더 이상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가슴에 뜨거운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보지 못하면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겁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

갈렙은 젊었을 때부터 문제를 보기 전에 하나님의 위대함을 먼저 묵상하는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평생 그의 인생을 승리로 이끄는 힘이 된 것이다. 우리도 젊은 청년의 때부터 그런 습관을 가져야 한다. 문제를 보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는 그런 습관. 바로 이 자세가 우리를 승리로 이끌 것이다.

이 열두 정탐꾼들은 각 지파에서 능력을 검증받은 인물들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대기업이나 좋은 회사에 취업할 수 있는 고 스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적인 스펙과는 전혀 다른 것을 가지고 갈렙을 높이 평가하셨다.

민 14: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그 마음이 그들과 달랐다'는 표현을 영어성경에서 보면 'Caleb has a different spirit'이라고 표현한다. '영'이 달랐다는 것이다. 영적인 근원이 있다. 보이는 액션 뒤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근원, 영의 근원이 있는 것이다. 불신하는 백성들 뒤에는 좌절하게 하고 낙담하게 하는 악령이 있었다면 갈렙의 뒤에는 성령이 있었다. 갈렙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시고 부활의 영이시다. 성령 충만한 사람 옆에는 생명이 살아난다. 성령 충만한 사람 옆에 있으면 놀랍게도 복잡한 상황이 심플해지고 답답한 상황도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 같다. 뭐든 될 것 같다는 긍정적인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과 대화하고 있으면 두려움이 사그라들고, 염려와 근심이 자취를 감추고 말할 수 없는 영적인 평화가 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아이디어도 항상 새롭게 나오고 생각이 항상 신선하다. 영혼이 어린아이처럼 맑고 깨끗하고 보혈의 능력이 그 안에서부터 생성된다. 이 성령 충만했던 갈렙과 같이 우리도 매 순간 성령에 감동되어 움직이는 사람이길 기도한다.

청년 시절의 갈렙이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되었을 때 그는 멋있는 '인내심'을 갖춘 사람이었다. 출애굽 1세대의 불신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 진입이 무려 38년이나 늦춰졌다. 그 세월을 그들은 광야,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보내야만 했다. 솔직히 갈렙에게 있어서 이 시간은 억울했을 수도 있다. 솔직히 다른 사람들은 불신해서 그렇게 되었다지만 자기와 여호수아는 담대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었는데 왜 같이 돌아야 하는지 인정할 수 없었을 수 있다. 공평하게 하시려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차 안에 두셨다가 바로 가나안 안으로 들여보내 주시기라도 하셨어야 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했는데, 할 수 없다고 한 쟤네들하고 왜 같이 벌을 받아야 하지? 38년 동안 이게 무슨 고생이냐' 불평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자기 꿈이 뒤로 밀려난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38년을 인내하고 참아냈다. 남들 때문에 나에게 올 복이 뒤로 밀려난 것 같아 보여도 너무 분해하지 않아야 한다. 때로는 나도 사고 쳐서 남의 꿈을 뒤로 밀려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도자란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같이 어깨에 짊어지는 사람이다. 억울한 것을 견딜 수 없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갈렙의 그 푸르른 청춘은 광야에서 지나갔다. 마라톤 경기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처음과 끝이 아니라 중간 부분이다. 거기는 손뼉 쳐주는 청중도 없고 단조롭고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은 순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 기간을 참고 견디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우리의 인생도 대부분 이 중간기를 버티는 데 사용된다. 이 기간은 성숙기이자 시련기이기도 하다. 당장이라도 가나안을 치고 들어갈 수 있었던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갈렙에게 있어서 이 광야의 시간을 견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 14: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갈렙의 고백을 보라. 그 긴 시간을 갈렙이 견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견디게 해 주셨다. 살아있는 것은 살려두시기 때문인 것을 믿어야 한다. 이 억울한 인고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하나님께서 갈렙에게 '자, 갈렙! 오늘도 힘차게 버텨보자!' 하고 응원해주셨기 때문인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어떻게든 잘 되겠지'가 아니다. 상황마다 힘을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바로 힘의 근원인 것이다.

수 14: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축복의 말씀을 전해주었더니 청년 갈렙이 그 말씀을 딱 붙잡고 의지했다. 가슴에 새기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 말씀을 묵상한 것이다. 먼지 쌓일까 보고 또 보면서 말씀을 의지한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말씀의 사람이다. 말씀과 성령은 쌍둥이 같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말씀을 허투루 듣지 않는다. 아멘으로 받고 그 말씀을 소중하게 여긴다. 만약 우리가 어떤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의지한다면 그 말씀은 우리의 것이다. 같은 설교를 들어도 어떤 사람의 인생은 변하는데 어떤 사람의 인생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씀을 가슴에 받지 않아서 이다. 오늘의 본문 여호수아 14장 9-12절에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는 구절이 계속해서 나온다. 갈렙은 말씀을 철석같이 붙드는 사람이었다. 말씀을 흘려들으면 안 된다. 딱 붙잡고 내 것으로 선포하여야 한다. 이것이 내게 이루어질 것이다 믿어야 한다.

병 속에 나쁜 공기가 깃들었다면 깨끗한 물을 부어버리면 된다. 우리 안에 절망이 있고 근심이 있다면 소망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초대해야 한다. 저런 종류의 악한 것들은 내 힘으로 쫓아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흡수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절망이 사라져 버렸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날마다 말씀이 홍수처럼 들어오게 해야 한다. 이 말씀을 듣고 귀하게 여기고 선포하여 말씀을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실 것이다. 그래서 갈렙은 이 인고의 세월을 말씀을 붙잡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죽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최고 어른은 이제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실력이나 나이나 모든 것에서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전혀 뒤처짐이 없는데 하나님의 후계자 선택은 여호수아였다. 갈렙이 섭섭하지 않았겠는가. 내가 어디가 부족한가, 불평할 수도 있었지만 갈렙은 단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았다. 7년 가나안 정복 전쟁 동안 갈렙은 여호수아를 도와 이인자로써 전쟁들을 다 치러낸다. 갈렙이 어떻게 이렇게 불평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을 붙잡았던 것이다. 원래 나이가 들수록 명예나 권력에 욕심이 더 날 수 있다. 그런데 갈렙에게는 그런 면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45년 전에 그의 가슴속에 새긴 피보다 진한 말씀이 그의 생각과 감정과 삶 안에 살아있었던 것이다. 왜 우리가 남을 질투하게 되는가, 왜 일인자와 이인자를 놓고 다투고 경쟁하게 되는가? 자기에게 주신 비전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 이웃의 것을 탐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갈렙은 여호수아가 갈 수 없는 자신에게만 주신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 14: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그도 알았다. 이 산지가 얼마나 크고 견고한지를. 헤브론이었다. 매력적인 땅도 아니었다. 해발 927m, 높은 요새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아낙 자손은 평균 신장이 2m가 넘는 네피림의 후손들이었다. 가나안 최고의 전사들이었다. 이 무시무시한 땅을 갈렙이, 그 나이에, 왜 그토록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우리가 갈렙의 최측근 참모라면 어땠을 것 같은가. 기가 차지 않았을까? 지금 갈렙은 여호수아 버금가는 큰 어른이고, 그가 세운 공로가 얼마나 많은지 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을 것이다. 갈렙은 지금 백지수표를 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호수아에게 어느 땅을 찍어도 그에게 다 주게 되어있는 것이다.

똑똑한 참모 같았으면 아마 갈렙에게 '비옥한 이스라엘 평야 달라고 그러세요!' 하고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아니면 '갈릴리 호수 달라고 하세요! 거기서 수산권만 우리가 잡아도 끝내줍니다!' 했을 수도 있다. 이미 다 토벌되어 정복할 적이라도 없는 곳을 달라고 했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헤브론은 무서운 곳으로, 우리가 지금 정복하다가는 유다 지파가 전멸당할 수도 있는 무서운 곳입니다!' 하고 말렸을 것이다. 왜 굳이 그 땅을 다시 정복하려 하냐고 어르신에게 되물었을 것이다. 이게 웬 무모한 비전이냐고 물음표를 제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갈렙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헤브론이야.' 하고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비전이기에 타협이 되지 않는 것이다. 비전은 편하고 좋은 것이 아니다. 세상적인 잣대로 크고 작음을 잴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내게만 가라고 주신 맞춤형 사명이다.

헤브론은 공격하려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데 갈렙이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땅을 원했다. 하나님께서 찍어주신 길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기로에서 자기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할 때 갈렙처럼 선택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들은 두려움의 휩싸여서 결정할 때가 많다. 이 일이 얼마나 어렵지? 내가 얼마나 희생해야 하지? 안전하게 내 능력만큼 해낼 수 있는 정도에서 스탑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한다며,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기적도 없고 승리도 없고 영광도 없다. 우리를 위해 예비한 약속은 축복이지만 쉽지 않을 뿐이다. 편하지 않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온실에서 키워주시는 분은 아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지만 안전을 추구하는 분은 아닌 것이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종이 되고 나서 한 번도 안전하게 살아본 적은 없는 것 같다고 웃으며 덧붙이셨다. 항상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서 밀어붙이셨단다. 하나님을 믿는 삶은 모험의 삶이다. 모든 문제에서 격리된 삶이 아니라 험한 물 위로 그분을 바라보는 믿음의 발을 내딛는 것이다. 헤브론과 같은 무서운 땅을 85세의 노인 보고 정복하라는 것은 무모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다. 약속을 믿고 도전하기 때문에 갈렙은 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수많은 청년들이 그를 따를 수 있었다. 젊었을 때 도전정신이 강하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좀 묵묵해 지기 마련이다. 절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마귀는 항상 우리에게 조그마한 성공 안에서 안주하라고 한다. 주저앉아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라고 한다. 그런데 그 유혹을 끊어야 한다. 성경에서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이 영웅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믿음의 모험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디아나 존스 영화만 봐도 그렇다. 최고의 보물을 찾아 들어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장애물들을 겪어 내는가. 어떤 보물도 모든 사람의 손이 닿는 푸른 초원에 예쁘게 놓여있지는 않는다. 아무나 갖고 가시라고 놓여 있는 것은 보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위해 목숨을 몇 번씩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간절하지 않은 자들을 걸러내기 위함이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 탐욕으로 그것을 가지려는 자들을 걸러내기 위함인 것이다. 헤브론은 험산 준령의 요새로 아낙 자손이라는 장애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 장애물 때문에 놀라서 돌아가버렸다.

중요한 것은 그 장애물이 욕심으로 탐하는 자를 막기 위한 것이지 나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장애물이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으로 주신 땅의 영적인 가치를 보고 나아가는 것이다. 갈렙이 왜 그렇게 헤브론을 열망했는가? 그것은 그가 청년 때 정탐꾼으로 그 땅을 보았을 그때 영적인 눈으로 그 의미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헤브론은 600년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첫 예배 장막을 세운 곳이다. 하나님이 그의 천사들과 아브라함을 만나주신 곳이며 처음으로 아브라함이 돈을 써서 아내 사래의 무덤을 만든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 믿음의 조상들이 줄줄이 잠들어있다. 갈렙은 이 땅을 하나님의 축복이 들어오는 땅으로 보았다.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흐르는 땅으로 본 것이다.

갈렙은 이 땅을 정복하는 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땅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하는 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것이라고 딱 알아본 것이다. 쉬워서 마음에 든 것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인 것을 본 것이다. 우리도 선택할 때 그렇게 해야 한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쉬운 것, 쉬운 길이 아니라 영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갈렙의 선택을 기뻐하셨다.

갈렙은 85세가 되어도 계속 성장하는 사람이었다. 벤자민 립이라는 사람은 평생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70세에 은퇴했지만 80세에 헬라어를 다시 배워 헬라어 성경을 들고 100세가 될 때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선교의 열정을 불어넣는 설교를 했다. 갈렙이 많은 나이가 되어도 이렇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던 비결 중 하나는 젊었을 때부터 쌓아온 영적 내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85세 하루아침에 신앙이 좋아져서 '한번 해볼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젊을 때부터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다. 날마다 말씀을 붙잡고 수십 년을 걸어왔던 사람이었다. 청년의 때부터 이런 내공을 쌓아서 결정적인 순간을 대비해야 한다.

수 15:14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

갈렙은 한 번의 전쟁으로 아낙 자손을 말 그대로 쓸어버렸다. 다른 이스라엘 민족들은 훨씬 약한 적들을 상대하면서도 지지부진하면서 완전히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갈렙은 가장 무섭고 강한 적을 깨끗하게 몰아냈다. 우리에게 영적인 실력이 있으면 어려운 적도 쉽게 몰아내는 것이다. 갈렙의 승리는 완전했다. 그가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따랐다는 구절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영어성경에서는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따랐다고 표현되어있다. 9절에 보면 청년 갈렙의 온전한 순종을 지도자 모세가 인정해주는 구절이 나온다. 민수기 14장 2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도 갈렙의 온전한 순종을 인정하셨다. 먼 거리에서 적당히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전심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드물다. 갈렙은 정말 드문사람이었던 것이다.

전심으로 따른다는 것은 온 마음이 흠뻑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적셔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불같은 순종은 불같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거나 요리하거나 할 때 꾀부리지 않고 전력을 다하는 것처럼 말이다. 갈렙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니까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한눈팔지 않는 것이다. 진짜 사랑하면 초지일관하게 된다. 모든 영역에서 그는 항상 하나님의 리더십을 따라갔던 사람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움직였다는 말이다.

12절에 보면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헤브론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하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헤브론 산지는 지금 아낙 자손들이 가지고 있지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는 땅이 아니었다. 갈렙이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판국에 여호수아에게 허락을 구한 것이다. 그의 영적인 축복이 필요했던 것이다. 왜?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인 권위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주신 비전은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통해 확인시켜 주신다. 축복해 주신다. 그래서 총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 갈렙의 전쟁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그 일에 흐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역의 영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갈렙이라도 이 일을 해낼 수 없다. 그래서 갈렙이 겸손하게 친구지만 영적 지도자였던 여호수아의 축복을 구한 것이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갈렙'의 히브리 뜻은 '충성스럽고 빠르게 주인의 마음을 잃어서 지혜롭게 철저히 순종한다'라는 뜻이다. 갈렙의 인생이 딱 그의 이름과 같았다.

수 14:15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전쟁이 그치게 하는 사람은 예수의 영광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의 가정과 마음, 모든 관계 가운데 전쟁이 그치게 되기를 바란다.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자손에게도 그 평안이 흘러가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날엔 많은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려고 애쓰는 부모들이 많다. 그러나 90%의 검증된 확률로 되물려진 재물은 한세대 안에 다 탕진된다. 오늘 본문의 갈렙처럼 믿음과 도전정신을 물려주어야 한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뤄가시도록 격려해야 한다. 갈렙은 후에 정복한 땅들을 레위인들에게 다 나눠주고 도피성으로 제공하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은 갈렙인 것 같지만 후에 그의 지파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축복하시는지 모른다.

유다 지파에서 다윗왕이 나오고 그의 왕국이 시작되는 거점도시가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다. 헤브론을 공략하는 자, 아브라함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갈렙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축복하셔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에서 나온 것이다. 원래 갈렙은 출신이 비천했다. 그는 이스라엘 출신이 아니라 그니스 사람 출신이다. 에서가 그의 조상인 것이다. 이방인이었다. 애굽에서 히브리 사람들과 섞여서 노예생활하고 있다가 출애굽 할 때 같이 섞여 나왔는데 갈렙이 살던 지역에 살던 히브리 노예들이 유다 지파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유다 지파의 일원이 된 것이지 갈렙의 유전자는 순수 유다 지파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갈렙 당대에는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의 에브라임 지파에게 모든 조명이 다 비치던 시대였다. 조연 같았던 그의 삶과 지파가 주인공으로 상승했던 임계점은 헤브론이었다. 갈렙이 헤브론을 선택했던 그 순간 그와 가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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