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죄가 세상으로 들어옴
아담의 죄와 예수님의 은혜
성흥모 목사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수요일 성회의 수요일로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매년 은혜스럽게 사순절과 부활절을 보냈지만, 신앙은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에게 뼈아픈 죄의식이 없기 때문이요,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어보면 그저 막연한 대답입니다. 생생하고, 살아있는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왜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그냥 믿어두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죄의식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 죄이고, 그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생생한 신앙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죄의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참으로 망설여집니다. 우리 성도들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을 어느 정도나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죄라는 것이 윤리적으로 조금 잘못된 것이지, 그 정도라면 괜찮은 편이지, 적당한 범죄도 살아가는 한 방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죄의식이 없습니다.
지난주간 화요일 아침이었습니다. 교회사무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아침 7시 경에 전화가 들어왔습니다. 교회 안에는 저 한 사람뿐이기에 교회대표전화로 걸려오는 전화를 당겨 받았습니다. 젊은 여성의 목소리인데, 영주교회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교회 선교원의 노란 승합차를 접촉사고를 일으켜 옆부분을 긁어놓았으며, 자기의 전화번호를 남겨놓았는데 보셨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전화 받는 제가 영주교회의 담임목사인데, 제가 잘 모르는 이야기요, 우리 직원들이 보고 알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혹 모르니 지금 전화 거는 분의 연락처를 주시고 성함을 불러달라고 하였더니, 순순히 전화번호와 이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확인 전화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하면서, 교회가 자주 이용하는 자동차 공업사에 가서 상태를 보고 아주 저렴하게 고치라고 하겠고, 사고를 내신 분에게 경제적인 부담이 적게 가도록 고치고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정말 이렇게 전화 주셔서 감사하고 전화를 주신 용기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혼자 생각하기를 오늘날에도 저런 사람이 다 있나 할 정도로 귀하게 보았습니다. 내가 잘못하였으니, 원상대로 고쳐주겠다고 하는 사람, 정직하게 내가 그랬다고 하는 사람, 내 잘못이니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가 정말 힘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도 전화번호를 써놓거나, 전화를 거는데 망설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가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그런 정도 가지고 무슨 사고라고 전화번호를 남기고 그러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전화를 걸 때에 걸까, 말까 망설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입니다. 죄를 죄로 인정하고 나쁜 것으로 보려고 한 것은 그의 영혼이 승리한 것입니다.
죄의식이란 결국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의 양심은 죄라고 하는데, 또 다른 자아는 그 정도는 살아가는 수단이라고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 하나님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데서 죄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성령,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죄를 죄로 볼 수 없는 영안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은 죄 문제를 말할 때마다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그런 죄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으로 죄인이라고 정의하게 됩니다. 죄 문제를 말하면서 그 죄의 책임은 세상 형편으로 돌리고, 부모에게 돌리고 형제에게 돌리고, 아내에게 돌리고, 더 나아가 뱀에게 돌리고, 더 올라가면 창조주 하나님에게 돌리고 마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그 책임을 떠넘기고 전가시키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라는 말씀을 읽거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3:24)라는 말씀을 보면 가슴을 치는 것이 아니라, 내심 안심하고 걱정이 좀 놓이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이런 심정을 묘한 안심이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만 죄인인가, 모두 다 죄인인데, 이 정도로 가지고 무슨 죄라고 그래, 뭐 살인하기를 하였는가, 남의 아내를 탐내기를 하였는가? 남의 집의 담을 넘어가기를 하였는가? 이 정도면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스스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에서 묘한 안위를 얻고 있습니다. 의인이 없음을 오히려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죄의식이 활발하고 민감한데,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 세상의 유혹으로 인하여 심령이 어두워지고 영성이 둔해져서 죄를 죄로 알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의 마음을 파악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롬1:28)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 세상에 나서 칠팔십 년 살다가 떠나고 있습니다. 평생을 살면서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미완성인 채 가야 하는 문제가 있다면 죄의 문제요, 죄와의 싸움입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난제들이 많은데 그 중에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죄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일평생에 지은 죄를 어떻게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가야 할 것입니까?
왜 사람은 죄를 짓고 있습니까? 죽음은 어디서 왔습니까? 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은 이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철학의 지혜로도 풀지 못합니다. 정치가의 안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부요함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죄와 죄의 용서라는 주제를 다루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연구하다보면 하나님은 이래서 예수님을 주셨으며,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진리가 있고,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위대한 신학자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아담 안에 있는 우리와 이제 새롭게 예수님 안에 들어간 우리를 가지고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아담 안에서 범죄 타락한 인간과, 예수님 안에서 죄의 용서를 받은 인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민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고 그 놀라우신 은총을 설명해주신 것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종교적인 천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앞서 살아간 성도들이 고민하였기에 우리는 지금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는데, 과연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앞에서 충분한 제사가 되고,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걱정이요, 고민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고민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문제로 더욱 고민하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으로 전 인류를 구원하는데 좀 부족하냐, 아니면 충분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사람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수천 수만의 제물을 드려왔고, 지금도 드려야 하고, 앞으로도 드려야 되는데, 과연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가져올 수 있느냐 하는 것을 고민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가 어느 정도기에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이시기에 하나님이 예수의 죽음을 보시고 진노를 푸시고 공의롭게 여기시고 만족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시작하신 구원의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예비하시다가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내려 보내주셨기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선한 사람이 죽었어도 그것은 그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제사를 단번으로 끝내기로 하셨습니다.
한번의 죄를 용서받으려면 한 마리의 양이나 소를 잡아드려야 합니다. 또 다시 같은 죄를 범하면 한 마리의 양이나 소를 잡아드려야 하는데, 이러한 제사는 일생에 수 없이 반복되고 계속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번에 드리셨습니다. 단번이라고 하면 두 번도 필요 없는 한번을 말합니다. 단번이란 두 번도 필요 없는 오직 한번, 단칼이란 두 번 칠 것도 없는 오직 한번에 끝낸다는 것입니다.
히9:12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히10:12에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드림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제사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이신칭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은 아담이 불순종하여 범죄하므로 우리에게도 죄가 들어오고, 죄를 물려받았고, 사망이 들어온 것처럼 이제는 같은 방법으로 아담은 불순종하였지만, 예수님은 순종하시므로, 죄가 없으신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의 의로우심이 우리에게도 전가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망이 주어진 것처럼 예수님이 순종하시므로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제2의 아담으로 구원을 이루신 새로운 시작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한 사람 아담과 또 한 사람 예수님을 대비하여 비교하면서 죄와 구원의 관계를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담 안에 있는 인간과 예수 안에 있는 인간을 비교하면서 죄와 사망, 의와 생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진리가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면 인생을 방황하지 않습니다. 모든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우리 예수님 안에 거하면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진리의 말씀, 로마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복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십자가의 도리를 굳게 잡을 수 있습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여기서 사망이라고 함은 육체적인 죽음과 하나님과의 단절, 지옥의 형벌 곧 영원한 죽음을 다 포함하는 사망입니다.
사도바울은 인간에게 죄가 들어온 경로를 설명하면서 죄의 결과로 사망 곧 죽음이 들어왔으며, 아담만이 아니라,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들어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본문의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담입니다. 아담은 피조물 중에 영장, 만물의 영장이지만 피조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창조주 하나님이 하나의 금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만들고 당신이 지으신 사람을 그 동산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동산에 각종 열매 맺는 나무를 두시고 보시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 맺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면서 그 곳을 맡아 돌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금령을 주신 것은 우리 인간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피조물인 것을 항상 기억하라고 주신 말씀이요, 인간에게 진정으로 복되게 하시려고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해야 하는 일과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금령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명령, 준엄하신 말씀을 어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아담의 아내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았는데 먹음직하기도 하였고, 보암직도 하였고,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데, 모두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워서 죄를 짓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요일2:15-17)라고 하셨습니다.
죄는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유전성입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파급되고 확산되고, 유행됩니다. 죄는 영향력이 있어 파급되고 확산되고, 유행처럼 번져갑니다. 사람은 의를 행하는 것은 어려워도 죄를 짓는 것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쉽게 배우고 따라하게 됩니다. 죄는 지배성이 있습니다. 왕노릇한다는 말입니다. 죄는 한 사람을 쉽게 정복하고 그의 중심에 앉아 왕노릇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참으로 벌벌 떨면서 죄를 지어도 다음에는 그렇게 떨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죄를 다스려야 사람이지, 죄의 종이 되어버리면 죄가 하자는 대로 합니다.
아담이 범죄하였는데, 그의 아들들 중에 살인자가 나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죄악이 너무나 관영하여 노아 시대에 홍수 심판이 있었습니다. 홍수 후에 인류는 하나님에게 도전하려고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죄는 그냥 두어도 더욱 자라고 심화되어 갑니다.
원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인이기에 죄를 지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선언하기를 "허물과 죄로 죽었다"(엡2:1)고 했으며,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엡2:3)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 아담이 죄를 지었으며, 그 결과 아담에게 사망이 들어온 것처럼 아담의 후손인 우리도 범죄 하였고, 우리에게도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하여 부패한 죄성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았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우리도 그 안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아담이 지은 죄를 우리도 지었고, 아담이 받은 벌을 우리도 받았고, 아담 안에 우리도 그 안에 있었습니다. 아담 하와의 자녀들은 죄가 유전되었고, 죽음도 유전되었습니다.
아담은 우리의 대표자입니다. 우리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악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는 문제 이전의 문제입니다. 숙명적으로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이 원죄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원죄를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사실입니다.
저는 성(成)씨입니다. 본이 하나이다 보니 어디 가서 성씨를 만나도 반갑고, 신문이나 TV에서 성씨 소리만 하여도 귀가 번쩍입니다. 그런데 성씨 중에 못된 국회의원이 있었는데, 여고생을 꾀어 탈선한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얼굴을 들지 못하겠어요. 한참 영적으로 예민한 시절이었는데,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는 성씨의 대표자입니다. 역시 아담은 우리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대표자가 범죄하므로 모두다 범죄하였습니다. 대표자가 패함으로 우리 모두 다 패하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의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아담이 죄와 사망의 시작이었다고 하면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마침이요, 공의와 생명의 시작이 되십니다. 아담은 다시 오실 제2의 아담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신학에 모형학(Typology)이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모형, 예표라는 말로 쓰는데,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표로 마치 그림자 같이 희미하여 완전하지는 않지만 모형을 보여주었는데, 신약에 와서 완전한 실체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유명한 사람들도 모형적인 인물이 있고, 유명한 사건이나 성막 같은 것들이 모형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고, 사망이 떠나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같은데, 아담보다도 더욱 나쁜 범죄자인데, 하나님은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해주시고 찾아와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선물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죄는 단지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요한16:9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박절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이요, 믿지 않으면 이미 정해진 심판의 자리로 그냥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망입니다.
18-19절은 오늘의 말씀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고 하셨습니다. 불순종한 한 사람은 아담이요, 사망에 이른 많은 사람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순종하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전에는 죄가 왕노릇하였는데, 이제는 나의 주님이 내 안에 사시면서 나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히10:19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담력이란 두려움 없이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엡3:12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예수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나의 죄를 다 담당해주신 우리 주님을 모시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당당히 나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죄의 종노릇하는데,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는 자녀로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능력 있는 자녀, 헌신하는 자녀, 칭찬 받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
김광선 목사
매주 하는 수요성경공부는 대게 한 시간 정도 강의를 합니다.
강의하다보면 시간이 모자라 중간에 끊어야 할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지금 강론하는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 는 매번 한 시간씩 삼십회 이상을 해야 하는 강의입니다만 여덟 강좌로 요약해서 하기 때문에 핵심, 즉 액기스만 공급하는 것입니다.
액기스만 먹게 되면 자칫 설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물을 타서 마셔야 탈이 없습니다.
물을 타는 작업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주일 강론을 듣고 나서 한 주간 동안 물을 타는 작업을 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단에 넘어 가고 비진리를 주는대로 받아 먹고 영적으로 체하고 병드는 것은 성도들에게도 책임이 큽니다.
이제 주는 것만 받아 먹지 말고 영양가 있는 것과 허접한 것을 가려서 먹을 줄도 알고 영양가 있는 것을 가지고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 스스로가 여러분들의 영적 건강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했습니다.
엑기스에 물을 타서 마시는 것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지난 주 서론에서,
죄 문제는 신앙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죄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이 생길 때 신앙은 무럭 무럭 자라게 됩니다.
이번 강좌를 통해 율법에 죄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깨닫게 되면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율법 문제는 기독교인의 윤리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구원 받았으면 이제 기독교인의 생활윤리로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은 절대적으로 성경과 모순된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기독교인의 새로운 윤리관은 ‘생명과 성령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구원 받은 성도들 안에 내주하심으로서 진리를 깨닫게 해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삶이 기독교 윤리관이라고 했습니다.
은혜는 평안한 가운데 감사생활을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감사생활을 하게 됩니다.
오늘은 ‘율법과 죄’의 뿌리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I. 율법과 관계없는 죄
개신교 신학에서 ‘죄’에 대한 정의는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이라는 것은 기원 전 1,500년 전에 모세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 정의대로라면 모세 이전에는 죄가 없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제까지 개신교 신학은 율법 이전의 죄 문제에 대해 기원이나 뿌리 연구에 접근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개신교 신학의 기반이 약합니다.
뿌리나 근원을 모르니까 결국 죄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도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개신교 신학의 현주소입니다.
암에 걸린 환자를 완전하게 치료하는 방법은 암의 뿌리를 캐내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종기를 도려낸들 환자에게 아픔만 줄뿐이지 치료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에 대한 근원을 알아야 치료도 근원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죄란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는 취약한 윤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신교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에, 인본주의 신학에, 신비주의 신학에 밀려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율법을 범한 것이 죄라고 가르치니 제대로 얼굴 들고 교회문을 들어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지난 주 말씀 드렸듯이 율법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법이 아닙니다.
엿세 동안 율법을 밥 먹듯이 범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어긴 것이 죄’라고 가르치니 맨 정신으로 교회 나올 성도가 누가 있겠습니까?
생각하는 것이 죄 투성이고 사는 것이 죄 투성인 죄인들에게 ‘율법을 어긴 것이 죄다’고 가르치고 ‘죄 짓지 말고 하나님 잘 믿고 살아라’는 말처럼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근원부터 찾아가 보는 것입니다.
1. 타락 이전에 악이 있었다
이미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에 ‘선과 악’이 존재했습니다.
바로 선악과 라는 나무가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창세기 2장 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인간 존재와 무관하게 있었고,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금령과도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하는 개념은 도덕적 최고 이상을 말합니다.
‘악’이라는 개념은 도덕적이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문제는 인간의 철학적,도덕적 관점에서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를 도덕종교, 규범 종교로 보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 법정 스님, 간디의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낍니다.
구구 절절이 다 공감이 가는 말씀들입니다.
공자의 교훈이 얼마나 도덕적 인간사회를 구성하는데 기준이 될 정도로 좋은 말씀입니까?
명신보감의 주옥같은 글들은 고상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보약과 같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들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을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생각 없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불교나 유교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을 같은 맥락에서 보고 모든 종교에는 공통점이 있고 나름대로 구원의 길이 있음을 인정하기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인천의 한 대형교회는 유교의 ‘효사상’을 교회에 도입하여 크게 성장을 했습니다.
교회 안에 ‘효도대학’을 만들어 주일학교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효를 가르칩니다.
노인분들에게는 좋지요.
자식 손자 그 교회 보내면 효를 배워서 용돈도 탈 수 있고, 효 관광여행도 다닐 수 있으니 이왕 교회 보낼 것 그 교회 보내지 않겠습니까?
교회인지 유교 학당인지 .......
기독교의 본질을 무너뜨리는 이런 개념없는 가르침을 본인들은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교회만 부흥할 수 있으면 무슨 방법이든지 다 쓰려고 안달을 하는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 모습입니다.
달라이 라마나 범정스님이니 간디나 공자의 가르침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현실세계가 이처럼 모순되고 불합리하고 타락해 있으니 도덕을 지켜서 이 땅에 이상세계, 도덕세계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이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인류 역사가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도덕을 지키면서 살 만큼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합니다.
공산주의 이론만큼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는 완벽한 이론이 어디 있습니까?
이론대로 되면 벌써 이 땅에 유토피아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 되잖아요.
실패했잖아요.
그들의 아름다운 이상들은 다만 이상일 뿐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도 모른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러시아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할 때 실무를 담당했었습니다.
직접 러시아 전역을 돌면서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조직해 놓고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처음 사할린에 갔을 때 아름다운 러시아 여인들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금발머리에 파란 눈 그리고 흰 피부....
식당에 갔습니다.
카운터에 금발의 미녀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앞에 다라에 음식을 가득 담겨져 있었고 그람수를 재서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음식 내용물이 구별이 안 될 정도로 파리가 뒤 덮고 있었습니다.
그 미녀들은 파리를 쫒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잡담만 하고 있었습니다.
바닥에 유리잔이 깨져 있었습니다.
식당문을 나설 때까지 아무도 치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공산주의입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시간만 때우면 되기 때문에 나 몰라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산주의로 인해 망했습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른 것입니다.
이상은 좋지만 인간 본성이 타락했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실패한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나 법정이나 간디나 공자조차도 자기들이 말한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혹 모든 인류가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그들과 같은 수준이 된다면 혹 그런 이상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인간은 본질이 죄인일 뿐입니다.
이런 죄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는 것은 실패하라고 절망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기독교를 타종교와 마찬가지로 도덕종교, 규범종교로 만드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성경의 선과 악의 개념이 인간의 철학적 도덕적 개념과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타종교의 가르침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기독교에서의 ‘선과악’은 하나님이 절대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좋아 하시는 것을 ‘선’이라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싫어 하시는 것을 ‘악’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 이성과 절대 감정과 절대 의지로 좋은 것이 바로 ‘선’이고 ‘싫은 것이 바로 ’악‘입니다.
로마서 9장 13절에,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사기꾼입니다.
이사야 41장 14절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비록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면 선이 되는 것입니다.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5절에,“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이런 놀라운 말씀에 주의하지 않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일이나 경건이 아닙니다.
인간의 기준은 뭔가 엄청난 일을 했거나 경건할 때 의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의지가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죄인인 우리가 의인으로 인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성경은 악과 죄와 범죄를 분명하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죄의 기원과 뿌리에 근접하지 못한 오늘의 신학은 혼합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죄문제 해결의 근본적인 처방마저도 혼돈스러워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주지 못하니까 불 받고 방언하는 신비체험을 통해 확실성을 가져 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 거짓된 확실성에 메달린 수 많은 신자들의 삶의 변하지 않는 이유가 바른 성경 말씀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죄의 뿌리입니다.
죄가 있기도 전에 악이 먼저 존재합니다.
악이 있기 때문에 죄가 형성이 됩니다.
악은 존재하지만 때로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악이 인간 내면 속에 구체화되게 되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미움은 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상을 향해 미움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내 속에 마치 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나를 열 받게 만들면 순간적으로 미움이 내 속에서 구체화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 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내면의 죄가 밖으로 폭발하여 그 사람을 죽이게 되면 그것을 ‘범죄’라고 부릅니다.
즉 악이라는 것은 뿌리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죄라는 것은 줄기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범죄라는 것은 열매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은 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악이 아담과 하와의 내면 속에 선악과를 보면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다’고 구체화되는 것이 죄입니다.
아담은 완벽하게 창조되었지만 죄의 유혹을 물리칠만한 능력은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내면에 구체화된 죄가 표출이 되어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분명한 구분을 알게 되면 죄의 해결 방법 역시 구체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율법 이전에 죄가 있었습니다.
개신교 신학에서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엄연히 율법이 생기기 전에 죄는 존재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인 살인 사건은 죄였었습니다.
창세기 4장 8절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13절에,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죄악으로 충만해 홍수로 멸망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6장 5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역시 죄악으로 충만하여 불과 유황불로 멸망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8장 20절에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율법 이전에도 죄가 있었는데 개신교 신학에서는 ‘율법을 어긴 것이 죄다’는 규정이 얼마나 미숙하고 문제 투성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이나 노아시대나 소돔과 고모라시대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죄입니다.
뿌리입니다.
도적질을 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도적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뿌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율법을 주셨나?
죄악을 죄악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시골에 사는 한 어머니가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 아들을 위해 맛있는 간장을 담가 왔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아들이 아침을 거르지 말라고 간장과 참기름을 가져 온 것입니다.
아들은 새벽에 일어나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밥을 해서 대강 간장에 참기름을 비벼서 먹고 출근을 했습니다.
겨우 쉬는 일요일 날 창문을 열어 놓고 환기를 시키고 대 청소를 합니다.
어느 일요일 아침 모든 창문을 열어 놓고 대청소를 하다가 부엌을 청소하는데 간장독에 빠져 죽은 쥐를 발견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매일 아침 그 간장을 먹은 것입니다.
율법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밝히 비추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본성인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십자가로 가는 것입니다.
II. 율법과 관계 있는 죄
1. 금과법 아래서의 죄이다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나?
그리고 왜 따먹도록 내 버려 두셨나?
이제껏 신학계의 결론은 ‘확실히 알 수 없다’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신학자에게 어떤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그 교수님의 대답이 “학생 나도 하나님 앞에 가면 제일 먼저 그 질문을 하고 싶네”
혹 여러분들 가운데 주일학교 때 교사 선생님한테 이런 질문을 한 일이 있습니까?
어떤 대답을 들었습니까?
“나도 잘 모르니 목사님한테 가서 물어 봐”
목사님한테 물으면 어떤 대답이 옵니까?
“몰라도 되 그냥 믿어”
“우리는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너무 많이 알면 다쳐”
죄의 근원을 모르니까 근본적인 해결책도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선악과 문제는 단순히 이 문제 하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인,
(1) 인간의 자유의지
(2)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정
(3) 타락전 선택이냐 타락 후 선택이냐
(4) 율법이 지금도 필요하느냐 필요하지 않느냐
(5) 성화에 있어서 신인협력설에 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핵심적인 문제들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의 해답만이 있음을 알고 선택해야 합니다.
첫째는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안에서 섭리되는 것을 허용하신 것인지
두 번째는 하나님의 작정 밖에서 인간의 순간적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허용하신것인지?
원래는 그런 계획이 없었는데 아담이 갑자기 사고를 쳐서 당황하여 구원계획을 세우셔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로 한 것인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만일 작정대로 허용하셨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만일 후자일 경우라면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떠나 독자적 의지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하나님과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독립적 존재라는 의미는 인간 스스로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별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국적도 결정할 수 있고, 외모도 스스로 결정하고 삶과 죽음의 시점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궤변에 불과합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맞는 지는 너무도 분명하게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다’고 한 것입니다.
‘표상’이란 무엇입니까?
‘모형’ ‘그림자’란 말입니다.
오리지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을 만드셨다는 것은 둘째 아담을 보내시겠다는 말입니다.
왜 보내시려고 하셨는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해 대속제물로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시기로 작정해 놓으시고 그 표상으로 첫째 아담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류가 죄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타락하지 않았는데 예수께서 죄악을 대속하기 위해 대속제물로 오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둘째 아담 그리스도의 사건만 예정이 되었고 첫째 아담의 사건이 예정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둘째 아담 그리스도 예수가 오시려면 반드시 첫째 아담이 타락해야만 합니다.
선악과를 먹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나게 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못 따먹게 하려면 아예 만들지 않으셨던가 아니면 만들었다하더라고 에덴 동산 골짜기 절벽에 만들어 따 먹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가장 자주 왔다 갔다하는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을게 무엇입니까?
그리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만드셨습니다.
만일 못 따먹게 만드시려면 선악과 모양을 가장 흉측하게 만들어 보기도 싫게 만들고 만지기 조차도 역겹게 만들고 그것 먹으며 바보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오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만들었겠습니까?
분명하지 않습니까?
따 먹으라고요.
왜 따먹으라고 했을까요?
왜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셨다가 의인으로 만드시는 것일까요?
왜 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성전을 이방 민족의 침입을 받아 무너뜨리게 하셨다가 다시 세우게 하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쟁에 패해 포로되게 하셨다가 기적의 방법으로 해방을 시키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범죄한 백성을 때리셨다가 다시 싸메시는 것일까요?
너무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들어 이 진리를 더욱 확고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도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느날 탕자가 집을 나가도록 허용합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어떤 인물인지를 너무도 잘 압니다.
아버지니까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무슨 짓을 할 것인지 환히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죄 짓도록 허용하십니다.
완전실패할 것을 아시고 내 보내십니다.
거지가 되고 돼지우리 속에서 쫄쫄 굶으면서 비참하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알고 계시면서 왜 아들이 그토록 비참하게 되도록 허용하셨겠습니까?
아들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의도대로 돼지우리 속에서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오게 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계획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존재와 용서와 사랑을 깨닫는,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깨닫는, 아들의 지위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깨닫는 진정한 아버지의 아들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통해 인류를 죄악 가운데 가두신 이유입니다.
로마서 11장 32-33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키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말은 죄 짓도록 허용했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지나 온 우리 삶의 흔적 가운데 지우고 싶은 죄악이나 상처나 실패가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허용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와 구원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악이나 실패 때문에 좌절하거나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무지한 행동입니다.
자신의 죄악이나 실패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구원과 축복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내 죄악의 중함을 몰랐다면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또한 모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으로 접근하는 길입니다.
2. 율법 아래서의 죄
율법이 없으면 죄를 짓고도 그것이 죄가 죄 인줄 모릅니다.
인도 사람들은 차창 밖으로 쓰레기를 버립니다.
어느 때는 뭉텅이로 버리기도 합니다.
톨게이트 지날 때마다 스트레스입니다.
테그를 단 차들이 가는 라인에 일반 차가 끼어듭니다.
그리고 부츠에 돈을 냅니다.
빠르고 편하게 가기 위해 산 테그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테그 라인에 일반차가 끼어들어 돈을 내는 놈이나 그것을 또 받는 놈이나 똑 같은 것입니다.
왜 이런 짓을 합니까?
모르니까요.
그런 사람들에게 벌금 천 루피씩만 메기면 다시는 안하게 된다
율법이라는 것은 깨닫게 하는 것이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을 통해 인간의 죄악성과 부패성을 깨닫게 되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의 용서와 은혜와 구원하심만을 의지하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율법을 주신 목적입니다.
다음주에는 ‘율법과 죄의 관계’에 대해 살피겠습니다.
한 사람이 주신 선물
로마서 5:14-15 / 김삼환 목사
지난 한 주간은 식목일도 있었고, 또 겨울 스포츠의 꽃이라고 하는 농구가 지난 주일에 마지막 결승전을 치렀습니다. 이제 농구는 금년 겨울이 되어야 다시 시작이 됩니다. 저는 농구에 많은 관심을 갖고 결승전까지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도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수집사님이 삼성의 코치예요. 그래서 열심히 삼성을 응원한 거예요. 나는 LG나 삼성이 좋은 것이 아니에요. 우리 집사님이 거기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LG가 골인을 할 때마다 '왜 저게 들어가냐 옆으로 나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3점 슛이 왜 그렇게 잘 들어갑니까? 그런데 결국은 삼성이 이겼어요. 삼성이 4:1로 이겼어요. 프로 농구가 시작되고 삼성이 처음 이긴 거예요. 목사는 다 그래요. 교인이 그 회사에 있으면 그 회사가 좋고 교인이 그 동네에 있으면 그 동네를 그냥 지나가지 않아요. 교인이 그 건물에 있으면 그 건물이 내 건물 같고, 사랑스럽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삼성이 이겨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또 국민들의 최고의 사랑을 받는 야구가 또 이번 주간 4월 5일 시작되었어요. 이번에 야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 오픈 게임에서 시구를 던지는 사람 때문이에요. 시구자는 애덤 킹이라고 하는 9살 소년이에요. 전에 보면 서울 시장님이 던지든지, 국내 최고의 각 분야에 뛰어난 분이 오셔서 던지는데 9살 난 아이가 던지는 것은 처음이에요. 그래도 보통 아이가 아니에요. 이 아이는 1995년 미국으로 입양되어 간 아이예요. 얘는 태어날 때부터 열 손가락이 붙어서 나왔어요. 손가락을 펼 수 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썩는 병에 걸렸고, 뼈가 굳어지는 병에 걸렸어요.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애덤의 부모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 한국의 의학으로는 더 이상 길이 없어 몸부림치다가 '얘를 고아원에 맡기면 혹시 미국으로 가는 길이 열려서 거기서 어떤 의학적 혜택을 받아 아이의 생명의 길이 열리지 않을까?' 그런 가느다란 마음으로 고아원 문 앞에 갖다 버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정말 부모님들의 생각대로 그런 길이 열린 거예요.
미국에 로버트 킹이라고 하는 젊은 43살의 부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부부는 자기의 아이가 세 명이나 있는데도 우리 나라나 인도의 아이를 8명이나 데려다 길렀습니다. 더욱이 좋은 아이들을 데려다 기르는 것이 아니에요. 고아원에 또릿또릿하고 건강하고 총명한 아이들 다 두고 제일 비참한 아이, 손가락이 다 붙어 있고 걷지도 못하고 너무 너무 불쌍한 이 아이를 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데리고 간 거예요. 미국의 의학이 앞서 있다는 것을 이런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몇 번의 수술을 거쳐 손가락을 분리하는데 성공을 했고 다리도 절단을 하였습니다. 더 이상 썩어 올라가지 않고 뼈도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애덤의 부모들은 애덤을 장애인들이 다니는 학교도 보내지 않고 일반 학교를 보내면서 이 아이가 밝게 밝게 자라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두 시간씩 의족을 끼고 매일 양아버지에게 코치를 받으면서 야구를 했어요.
얼마전 대통령 내외분이 LA를 갔다가 이 애덤 이야기를 듣고 만나고, 이번에 영부인께서 초청을 해서 야구장에서 공을 던진 거예요. 얼마나 밝고 건강하게 자라났는지 장애인들이 흔히 갖는 열등감과 고통이 전혀 없이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여러분 희망을 가지세요'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의 친 부모님들이 어디엔 가는 있었을 거예요. 저는 이것을 눈물을 흘리며 감격스럽게 보았어요.
물론 이것도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이지만 내게 더 은혜가 된 것은 이사야서에 말씀대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죄악 많은 세상에 밝고 건강하고 희망이 넘치게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어찌 있을 수 있겠느냐 말입니까?
주님께서 저를 촌에서 불러 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둘도 없던 나의 친구는 머리는 똑똑하고 인물 좋고 실력도 있었는데 예수를 믿지 않고 술 먹다가 노량진 시장에서 차에 치어 죽었어요. 나도 생각하면 그 친구보다 술 더 먹었을 텐데……. 주님의 은혜로 죄악의 길에서 떠나 하나님 앞에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감사합니다. '나도 거짓말하고 사기꾼 되어서 감옥에 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도박에 걸려서 재산 다 잃고 망쳐 버리고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을 텐데 주님의 은혜로 내가 이렇게 은혜를 받았구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축복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주시고 죄사함을 주시고 자유함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은혜가, 아들로 통하여 주신 은혜가 우리 인간의 삶의 생명이요, 힘이요, 능력이 되는 줄 믿습니다. 120여 년 전, 우리 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썩어 가는 병에 들린 것처럼 아무 소망 없는,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잘 곳도 아무 것도 없는, 우상숭배와 온갖 미신 앞에서 무지하고 말할 수 없는 가난 가운데 살아가던 절망의 땅, 저주의 땅이었습니다.
몇 천년동안 온 나라 임금님부터 백성까지 다른 종교에 빌기를 끊임없이 빌고 모든 일 다 해보았지만 이 나라는 병만 들었었습니다. 하나의 소망도 없던 이 나라에 백년 전에 선교사들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는 아 해가 떠올랐습니다. 저주가 떠나갔습니다. 불행이 떠나갔습니다. 먹을 것이 남아서 남을 돕게 되고 입을 것이 남아서 남을 입히게 되었습니다. 온 세계를 향해 우리의 국력을 자랑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누구의 은혜입니까? 값없이 주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지하자원을 가진다고 농토를 많이 가진다고 여러 가지 좋은 조건을 가진다고 잘 되는 것이 압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주신 그 선물이 있는 나라, 개인, 가정이 잘 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 선물을 많이 받은 분들이 많습니다. 근세에 선물을 제일 많이 받은 분은 뭐니뭐니 해도 재클린 오나시스입니다. 재클린 오나시스는 그녀의 남편이 세계적인 선박 왕이고 돈이 많고 부유해서 결혼식을 큰 섬에서 했습니다. 그 섬을 그냥 재클린에게 다 주었어요. 선물을 수 백 억을 주었어요. 그 화려한 섬을 선물로 받았으니 최고의 선물을 받았지요. 그러나 그 선물은 그에게 기쁨도 행복도 아니었어요. 준 사람이 얼마 있지 않고 바로 떠났고 받은 재클린도 이 땅을 떠나 헛되게 눈을 감았습니다.
위로부터 주신 선물, 죄 사람의 선물, 구원의 선물이신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게 되고 당신이 이 땅에 오심으로, 저 무덤에 내려가심으로 무덤에 있는 우리가 살아 나오게 되고, 당신이 저주를 받음으로 우리가 이 평화를 누리고, 당신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치료함을 얻고 건강함을 얻고, 당신이 부끄러움을 당함으로 내 모든 부끄러움 다 가져 가시고, 당신이 십자가 무겁게 지심으로 내 인생의 모든 짐 다 내어놓게 되었으니 이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시 51편에 보면 우리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모친이 나를 죄중에 잉태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리가 태어나면 바로 물로 가듯이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 바로 죄악으로 달려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 죄의 길에서 우리를 U-TURN 시켜 주신 이는 저 천국을 향하여 거룩한 길로 믿음의 길로 신령한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은 주님의 은혜인줄 믿습니다. 벧전 1장에 보면 망령된 행실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고 롬 5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진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모든 우리를 뒤덮고 있던 흑암의 세계는 물러가고 광명한 빛이 우리를 비추게 된 것입니다. 시 49편에 보면 사망의 음부의 권세, 원수마귀에게서 우리를 건져주셨어요. 이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거져 주셨습니다. 값없이 주셨습니다. 말 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우리들입니다.
♬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재물 삼겠네♬
장애인인 애덤 킹 양부모 아래서 행복하게 자라나는 것처럼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게된 줄 믿습니다.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이 오늘 오셔도 구원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굳센 믿음 위에 서야할 것입니다.
오늘이 무슨 날이에요? 오늘이 주일이에요. 주일이란 무슨 말이에요? 이 날이 왜 만들어 졌어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사망권세 이기심으로 주의 날이 된 거예요. Lord's day가 된 거예요. 오늘은 예수님의 날이에요. 예수님이 선물 주신 날이에요. 그래서 대체로 다른 종교는 출생을 귀히 여기지만 기독교는 출생을 귀히 여기지 않아요. 기독교의 생일은 출생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생일은 살아나신 주의 날, 부활의 날이에요. 이 세상 모든 종교는 우리에게 모든 짐을 지웁니다. 종교 때문에 그 나라가 발전하지 못하고 모든 삶과 문화가 발전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짐 다 벗겨 주셔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영생을 누리고 구원을 얻게 된 줄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을 사랑하며 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 보혈의 은혜, 구속의 은혜, 하나님의 자녀 된 은혜, 영원한 사랑, 나와 늘 동행하여 주신 은혜 때문입니다. 이번에 애덤 킹도 보니까 그 아버지가 늘 같이 가서 공을 던져 주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그렇습니다. 또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할 수 없는 은혜를 감사하며 우리 많은 이웃 불쌍한 이웃, 부모 없는 우리 이웃의 자녀들, 길거리를 헤매는 수많은 장애인들과 어려운 분들을 돌보면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 애덤 킹의 아버지를 보십시오. 자기의 자녀가 셋이 있는데도 남의 자녀를 데려다가 키웁니다. 남의 자녀를 데려와도 우리는 예쁘고 인물이 좋아야 데려 가려고 하는데 형편없는 소망 없는 아이를 데려다가 키웁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자신이 만족하려고 데려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으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주려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대체로 초청을 받고 어디를 가도 화려한 연회장, 잘 사는 사람, 부유한 사람, 권력 있는 사람, 힘 있는 사람, 엄청난 재벌, 화려하고 값 비싼 차가 있는 그런 집에 가려고 합니다. 가서 그런 차 타고 그런 사람 만나서 그런 음식을 먹으면 만족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엄청난 호텔에 맛있는 음식 대접받고 별장에 가서 화려한 파티 참석하고 와 보세요. 허무해집니다. 또 속상합니다. '어느 놈은 이렇게 벼락 부자가 되고 나는 또 뭐냐?' 마음에 질투심도 생깁니다. 허전한 것이 생깁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어느 놈은 넥타이 메고 어느 놈은 새끼 메고……'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는 길을, 여러분의 삶을, 사람을 사귀고 봉사하는 것을 내가 먹으려 가는 것이 아니라 대접하려고 낮은 곳으로 가고 내가 만족하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어 주기 위해 저 낮은 곳으로 다녀와 보십시오. 주님의 위로가 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기쁘고 잠자리에 천군 천사가 와서 말합니다. "삼환이 잘 자게. 오늘 좋은 일 했네" 천국의 천군 천사가 와서 위로해 줄줄 믿습니다.
거기는 배가 안 아픕니다. 나누어주며 오는 곳은 절대로 배가 안 아픕니다. 얻어먹고 오면 배가 아픕니다. 화려한 곳에 갔다와서 마름 편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가 왜 이렇게 평안이 없습니까? 높은 곳에 가서 높은 사람 만나고 음식 대접 받고 화려한 곳을 다녀오니까 우리의 정서가 평안이 없고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섬기며 나누어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들 바랍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놀라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우리 모두 제 길로 나아가십시다. 오늘 애덤 킹이 이렇게 된 것도 그 부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이 아무리 하고 싶어도 부인이 원치 않으면 안됩니다. 부인이 자꾸 원했어요. 장화홍련전 같은 것을 보세요. 남의 자녀라고 하면 얼마나 억울하게 하고 혹독하게 합니까? 내려오는 전설의 고향이야기마다 다 그래요. 우리는 그러지 마십시다.
우리 인류 역사에 훌륭한 어머니 가운데 꼽는 분이 수산나입니다. 수산나가 누군지 아세요? 따라해 보세요. '수산나!' 이 이름을 기억해 두세요. 수산나는 19명의 아이를 낳았어요. 가난한 집에 19명을 낳았습니다. 어려서부터 태어나면 말하기 전부터 주기도문을 듣게 해서 제일 먼저 주기도문 외우게 하고 사도신경 외우게 하고 십계명 외우게 했어요. 잠 잘 때는 머리마다 기도해 주어서 잠들게 했어요. 이 사랑을 받고 자라났어요.
오늘 우리 한국의 어머니들 얼굴만 예쁘면 되는 게 아닙니다. 자나 깨나 화장, 자나깨나 예쁘고 살 빼고. [1주일에 10kg 확실하게 뺌] 여러분, 내 가정에 자녀들은 엉망으로 되는데 얼굴만 예쁘면 훌륭한 어머니입니까? 가정은 지금 다 깨어져 가는데 화려하게 좋은 옷만 입고 돌아다니면 그게 행복한 것입니까? 내 가정에서 내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어머니의 행복은 어머니의 아름다움은 자녀를 잘 길러 내는 거예요. 이 수산나를 보십시오. 19명을 다 세계적인 인물로 길렀습니다. 요한 웨슬레, 찰스 웨슬레처럼 영국을 살리는 세계적인 인물을 길러 내지 않았습니까? 어려서 좋은 경험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는 역할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유명한 토스토예프스키는 말하기를 '좋은 기억처럼 훌륭한 교육이 없다'라고 했어요. 최대의 교육은 좋은 기억을 어린 양들에게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안고 다니며 새벽기도 다닌다' 좋은 교육입니다.
가슴에 박혀서 그 아이는 다른 길로 안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나라는 모두 제 길로 가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주님의 주신 은혜 감사하며 성실하게 서로 서로 봉사하고 나누어주고 섬길 때 이 나라가 좋은 나라 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큰 은혜, 이 보혈의 은혜, 샘솟듯 솟아나는 이 풍성한 위로가 남은 생애를 걸어가는 여러분들과 늘 같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선장이 죽어야 배가 산다
로마서 5:17-19 / 강문호 목사
세월호 침몰 사건은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 햇불회 목사님들 강의가 있어서 안산에 갔습니다. 마침 단원 고등학교 옆이었습니다. 보려고 본 것이 아니라 옆에 있어서 보았습니다. 학생들만 죽고 자기만 산 것이 안타깝다며 죽어 재를 그 바다 뿌리고 죽어서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자살한 교감 선생님 장례식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공교롭게도 세계에서 당시 제일 큰 배였고 제일 호화로운 배였던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날과 같은 날 침몰되어 관심을 모았습니다.
1912년 당시 타이타닉호는 제조되고 첫 출항이었습니다. 2,200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당시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은 승객중 어린이, 여자, 노인 그리고 남자 순으로 탈출시켰습니다. 이성을 잃고 먼저 살려고 발버둥치는 남자를 죽이면서 질서를 유지하였습니다. 700명을 살리고 자기는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의 고향 영국 리치필드에서는 그의 업적을 그리며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한 말을 동상에 새겼습니다.
“Be Britsh"(영국인답게 행동하라.)
그 후 선장은 사고난 배에서 제일 늦게 나와야 한다는 것은 100년 전통이 되어 왔습니다. 그 후 선장들은 배가 파선하였을 때 배와 운명을 같이 하여 왔습니다. 102년 동안 배에서 도망친 선장은 두 번이었습니다.
첫 번 사건은 이태리에서 있었습니다. 타이타닉 침몰 꼭 100년 이태리 코스타 콩크르디아호 선장 프란체스코 스케티노 선장이 배가 파손되어 침몰되는 순간 300명 승객을 배에 둔채 도망쳤습니다. 당국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배에서 나왔는가?”
“간신히 탈출하였습니다.”
“도로 배로 가라.” “가라앉는 배로 다시 들어가라는 말인가요?” “그렇다. 가서 승객을 구하라.”
“못 들어갈 형편입니다.”
“이 새끼야. 들어가!”
기어코 그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후 세월호 선장 이준석 선장이 두 번째입니다. 뉴욕타임지는 이 사건을 이렇게 보도하였습니다.
“공포에 질린 수백명의 승객을 배에 두고 맨 먼저 탈출한 세월호 선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배와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선장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버렸다.
그는 혼자 육지에 무사히 발을 디뎠는 지 몰라도 감옥에 내리게 되었다.”
2시간 30분 동안 배가 떠있었습니다. 만일 선장이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마음을 가졌었더라면 447명 승객도 다 살리고 자기도 살았을 것이라고 예상하였습니다.
단원 고등학교 2학년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모두가 죽어서 없어지는 한국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생겼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건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대통령이 죽어야 나라가 삽니다.
지도자가 죽어야 공동체가 삽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대통령이 있습니다. 대통령을 위한 나라가 있고, 나라를 위한 대통령이 있다는 말입니다.
중국에서 재앙이 그친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중국에 가뭄이 계속 되었습니다. 논과 들의 농작물이 다 타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온 국민이 기근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 때 왕이 기우제를 드리겠다고 공포하였습니다. 수많은 국민들을 한 자리로 모았습니다. 그리고 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드리는 기우제가 최고의 기우제입니다 그 동안 수없이 기우제를 드렸지만 소용이 없어서 마지막 결단의 기우제를 드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드릴지 제물이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준비가 다 마쳐졌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죽일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 때 왕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나라의 극심한 가뭄은 왕인 내 잘못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내가 죽겠습니다. 나를 묶어 제단에 올려놓고 불을 지르십시오.”
모두가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왕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자 스스로 단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단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억수같은 비가 내려 단의 불을 꺼버렸습니다. 가뭄의 재앙이 물러갔습니다.
대통령 자리를 이용하여 명예와 돈을 쌓은 대통령이 있는 나라들은 거의 다 기울었습니다. 이집트, 필리핀, 아르헨티나, 이란등이 그런 나라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나라만 생각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다스린 나라는 흥왕하였습니다.
2. 아버지가 죽어야 가정이 삽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양육의 책임자요 경제의 책임자요 가정의 생명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가정을 위하여 죽을 각오로 살아야 가정이 삽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10자녀가 다 죽고, 아내는 떠나고,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가정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굳굳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결론은 더 좋은 가정을 만들었습니다.
동양의 노벨상은 막사이사이 상입니다. 필리핀 대통령 막사이사이가 만들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땜쟁이었습니다. 뒷골목에 조금만 대장간을 만들어 놓고 땜질하여 생계를 겨우겨우 유지하여 나가는 보잘 것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이 된 후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그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땜쟁이 일을 그만 두시고 궁궐로 들어가세요. 고생하신 아버지를 편하게 하여 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네가 대통령이 된 것이지 내가 된 것은 아니다. 나는 평생 내가 할 일을 하겠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하였습니다. 이런 아버지가 그런 아들을 만들었습니다.
가정을 살린 또 하나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어거스틴이 예수님 이후 가장 성결한 성자가 된 곳에는 훌륭한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암브로시우스 목사님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눈물의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라고 격려하면서 모니카의 믿음을 식지 않게 하였던 위대한 목사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 어거스틴의 아버지 패트리커스의 영향력을 결코 간과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는 정직하고 성결하게 사는 이였습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이였습니다. 당시에는 산적들이 많아 여행하는 이들이 가진 것들을 모두 노략질당하는 이들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잘못 하다가는 생명을 잃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패트리커스가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아내 모니카가 산적을 만나 다 빼앗기게 되면 비상금으로 쓰라고 옷깃속에 금 몇 돈을 넣어 주었습니다. 산 길을 가던 그는 산적을 만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가진 것 다 내놓아라.”
“여기 있습니다.”
“이것이 다냐?”
“다 내놓았습니다.”
산적들은 패트리커스의 온 몸을 뒤지더니 보내주었습니다. 조금 길을 가던 그는 산적들에게 거짓말하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괴로움을 느끼며 다시 산적들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옷깃 속에 들어 있는 금을 꺼내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까 내가 가진 것을 다 내놓았는 줄 알았더니 아내가 옷깃속에 비상금으로 금을 넣어 둔 것을 잊었었습니다. 거짓말한 것이 괴로워서 다시 왔습니다.”
산적 두목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얘들아! 산적 생활 몇 년이지만 이런 놈은 처음 보았다. 아까 빼앗은 것 도로 주어라”
이것이 어거스틴의 아버지 패트리커스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어머니 모니카와 그렇게 정직한 아버지 패트리커스 사이에서 어거스틴같은 성자가 태어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아버지가 바르게 하여야 자녀가 삽니다.
3.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삽니다.
세월호 선장이 죽을 각오를 하였으면 내 생각에 자기도 살고 승객들도 다 살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여건이었습니다. 자기만 살려고 제일 먼저 배를 떠나는 배를 탔습니다. 선장복을 입지 않고 사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젖은 돈을 꺼내 말리던 모습이 기자들에게 보였습니다. 정말 한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눈물만 흘렀습니다.
안산 단원구에 있는 안산 제일 교회 당회장실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습니다. 강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족자가 꼭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고훈 목사님이 쓰신 것이었습니다.
아생교회사(我生敎會死)
아사교회생(我死敎會生)
마음에 확 각인이 되었습니다.
내가 갈보리 교회를 위하여 죽어야 갈보리 교회가 산다고 나는 속으로 힘차게 외쳤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죽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목사다운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희생하자, 제일 많이 희생하자. 교회를 생명으로 알고 사랑하자고 속으로 외쳤습니다.
세월호 선장 교훈은 모두의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 목사를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평생 원하였던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만 모두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인도하고 자기는 가나안을 보면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목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 잘 되게 하고 나는 죽어야 하는구나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 하는 목회 철학 그림이 있습니다.
인디안 추장이 먼 곳을 바라보는 사진입니다. 그 뒤에는 식인종들이 모두 춤추며 즐기고 있습니다. 모두를 즐겁게 만들어 놓고 미래를 구상하면서 즐거움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목사라고
생각하며 목회하여 왔습니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삽니다.
4. 장로가 죽어야 공동체가 삽니다.
지도자가 죽어야 공동체가 삽니다.
지도자가 자기만 위하는 이기적인 공동체는 발전하지 못 합니다. 지도자가 모범을 보이며 살아야 그 공동체가 삽니다.
기드온이 300명 용사로 메뚜기 떼같이 많은 미디안과 죽을 각오로 앞장 섰습니다.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공동체를 사랑한 농삿군 기드온 한 사람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장로들이 교회를 위하여 죽으려고 하면 교회가 삽니다.
지도자 한 명이 그 공동체를 살립니다.
■ 강재구 소령 이야기입니다. 1965년 10월 4일 월요일 오전 10시 37분이었습니다. 힘과 신념으로 아람찬 스물아홉의 한 장교가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고 수류탄과 함께 일순에 산화했던 사건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였습니다. 맹호부대 수도사단 예하 제1연대 10중대장 강재구 이야기입니다. 후에 그 부대는 그의 이름을 따서‘재구대대’라고 불렀습니다. 3대대는 그날 홍천 인근의 부대훈련장에서 수류탄 투척훈련이 계획돼 있었습니다. 6시 30분쯤 24인용 텐트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던 강 대위는 인접 중대장들에게 지난 투척훈련 때의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의를 당부하며 훈련장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바로 자기 중대에서 그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훈련 도중 박 해천 이등병이 던진 수류탄이 높이 치솟아 중대원 쪽으로 떨어졌습니다. 군인들 대부분이 유효반경 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모두 죽을 순간이었습니다. 지형이 평탄치 않아 손으로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발로 찰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강 재구 소령은 그 순간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쳤습니다. 강 재구는 폭음과 함께 무참한 주검으로 산화했습니다. 평소에 그는‘굵고 짧게 살자’는 말을 하였습니다.
지난 번 육사 특강을 갔었습니다. 육사 교정을 내려다 보며 그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지도자가 죽어야 공동체가 삽니다.
우리 장로님들도 내가 죽어야 우리 교회가 산다는 믿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황해도 재령읍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정 찬유 장로님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속에 사업이 잘 되어서 주일성수도 잘 하시고 십일조도 정확하게 하시고 신앙생활에 모범이 되시는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자기 집을 2층 양옥으로 잘 짓고 있었습니다. 그 날 밤에 꿈을 꾸는 데 하나님의 책망이 있었습니다. “내 집은 양철 집으로 두고 네 집만 이층 양옥으로 그렇게 잘 짓느냐?”
밤에 자다가 이 음성을 들은 그는 벌떡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회개기도를 하였습니다. 이 음성을 듣고서야 하나님의 집이 너무나 초라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 날 밤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서 흠뻑 울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일부터 당장 하나님의 집부터 짓겠습니다.”
이튿날 그는 설계사를 데려다가 성전부터 다시 설계하고 짓고 그리고 자기 집을 완성시켰습니다.
이것이 당시 한국 최초의 성전이었던 황해도 재령 동부 교회였습니다.
장로가 죽어야 교회가 삽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어야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하였은 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라.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 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되리라“(롭 5;17-19)
영국의 유명한 문호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두 가지 면에서다.하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금이나 은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없어질 것들일 뿐입니다.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중국 어느 곳에 선교사가 파송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가 오기 전에 이곳에는 크리스챤이 한 명도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비크리스챤이 한 명도 없었다.”
예수님 한 분이 죽으심으로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 한분이 죽으심으로 온 세상이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장이 죽어야 배가 삽니다.
대통령이 죽어야 나라가 삽니다.
지도자가 죽어야 공동체가 삽니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삽니다.
장로가 죽어야 공동체가 삽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야 인류가 삽니다.
이 현주의 동화 “알게 뭐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도로위에 나란히 두 트럭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한 트럭에는 밀가루가 다른 트럭에는 시멘트가 실려 있었습니다. 두 트럭 운전 기사는 나란히 차를 세워 두고 차에서 내려 소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트럭에 올라 운전하다 보니 차가 바뀌었습니다. 두 운전기사는 똑같이 외쳤습니다.
“알게 뭐야? 내 것인가?”
시멘트 운전기사는 공사장에 트럭을 세웠습니다. 공사장의 인부들은 밀가루인 것을 알았지만 “알게 뭐야? 내 집인가?”하면서 밀가루로 집을 지었습니다.
세멘트 트럭 운전기사는 제과점에 차를 세웠습니다. 제과점에서는 시멘트인 것을 알면서도 “알게 뭐야? 내가 먹을 것인가?”하면서 시멘트로 과자를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부러지는 소리가 두 곳에서 들렸습니다. 집이 무너져서 그 안에 있던 아이의 등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과점에서 손님들의 이빨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운전기사들은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돈을 벌어 달 나라에 땅을 샀습니다. 정부로부터 표창장을 받았습니다. 국토를 넓히는 데 공헌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게 뭐야하면서 자기만 생각하면 그 사회, 그 공동체는 사라지고 맙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에 우리가 살았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내가 죽어야 저 사람이 삽니다.
매일 은혜의 능력으로 삽니다
로마서 5:17 / 이삼규 목사
우리는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우리를 다스리면 안 됩 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과연 나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느냐?’
강아지 치아와와 반달곰을 생각해 봅시다. 치아와는 몸집이 작고 앙칼지게 짖어대는 사나운 개입니다. 체구는 작아도 자기 영역에 침범하는 낮선 사람이 있으면 끊임없이 짖어댑니다. 발목을 물고 늘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리를 꽥지르며 사정없이 발로 걷어차면 이 강아지는 겁을 먹고 종종 걸음을 치며 달아날 것입니다.
그에 반해 반달곰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손에 소총이 없다면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몇 일전에 경기도 한 농가에서 반달곰을 사육하다가 우리를 박차고 반달곰 한 마리가 탈출을 하였습니다. 마침 등산 왔던 아줌마가 반달곰을 보고 놀래서 나무 위로 올라갔는데 반달곰이 그만 다리를 물어버린 사고가 있었습니다. 곰은 나무를 잘 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잘못하면 곰에 의해서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이 세상에는 우리가 소명을 완수하는 것을 원치 않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들을 이길 힘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초자연적인 적들과 싸울 때 우리는 치아와와 같은가, 아니면 반달곰과 같은가? 원수들을 제압할 힘은 어디에서 올까요? 그 답은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로 인해 통치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실제적 능력이다
어떤 선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세 가지 이상으로 정의하거나 묘사해 보라’는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압도적으로 많은 응답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1)구원, 2)과분한 선물, 3)죄 사함으로 정의했다고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물로 세례를 받거나, 교회에 다니거나, 종교적인 율법을 지키거나, 선한 행위들을 더 많이 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천주교에 다니는 한분을 만났는데 그분은 결혼도 안하고 혼자 사는 분입니다. 자기는 혼자 살기 때문에 죽은 후에 자기를 위해서 헌금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죽기 전에 미리 구원받기 위해 헌금을 많이 해야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엡 2:8-9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가 아무리 선량하고 노력을 많이 한다고 해도 구원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그 후 마치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도 슬픈 일입니다. 이들은 행위를 많이 강조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갈 5:4 /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이 설문 조사가 보여 주는 또 한 가지 사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죄들이 뿌리 뽑혔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엡 1:7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감사하십니까?
하지만 이 설문 조사가 보여 준 비극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설문에 응답한 수천 명 가운데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 주심’이라고 믿는 사람은 단 2%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를 이렇게 묘사하십니다.
고후 12:9 /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것은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를 능력으로 정의하십니다.
‘약한’이라는 단어는 ‘무능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네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날 때 나의 은혜(능력)가 가장 크게 나타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후 8:1 /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고후 8:3 /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마게도냐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은혜요, 하나님의 능력주심입니다. 바울은 똑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후 1:12 /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은혜의 능력으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은혜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정의합니다.
벧후 1:2-3 /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여기서도 “은혜”가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통해 얻을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은혜의 정의?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입니다. 제임스 스트롱은 ‘완벽성서 성구사전’에서 ‘카리스’를 “선물, 혜택, 은총, 은혜로운, 후함”으로 정의합니다. 이 첫 번째 정의와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의 성경구절들을 함께 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은혜의 특징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트롱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스트롱은 계속해서 “은혜”를 “마음에 미치는 거룩한 영향력, 그리고 그것이 삶 속에 나타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정의에서 우리는 마음속에서 행해진 일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은혜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를 보고 기뻐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바나바는 은혜에 대해서 들은 것이 아니라, 그 은혜의 증거를 본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속에 나타나는 마음의 능력을 본 것입니다.
약 2:18 /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은혜)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우리는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롬 5:2). 야고보는 “네가 믿음을 통해 은혜를 받았다는 참된 지표인 능력의 증거를 내게 보여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더반의 ‘성경용어 백과사전’은 ‘카리스(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은혜는 우리를 의롭다고 여김으로써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역동적인 힘이다. 은혜는 우리의 경험에도 영향을 미친다. 은혜는 항상 하나님이 우리 안에 능력을 주셔서 우리의 무력함을 이기게 하심으로 나타난다.”
은혜에 관한 신약 성경의 모든 구절과 헬라어 사전을 연구한 결과 은혜의 간략한 정의는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값없이 권능을 주셔서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을 넘어서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설문 조사에 응답한 그리스도인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이해하는 사람이 겨우 2% 밖에 되지 않는 사실이 왜 그렇게 비극적인 일일까요? 가상 시나리오를 가지고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프리카 적도 근처 오지에 소수 부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하여 3km 이상을 걸어가야 합니다. 가서 한통을 떠서 어깨에 둘러매고 다시 그 길을 걸어서 돌아와야 합니다. 이런데 사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물 한 방울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힘들게 길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뿐입니까?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사냥에 나서야 합니다. 사자도 사냥하기 쉽지 않은데 한 마리 짐승을 잡기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뿐이 아니지요. 그 사냥한 고기를 또한 둘러매고 13-16km 걸어와야 합니다.
그곳에서 물품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물품을 구하려면 적어도 50km 이상 걸어가 물건을 사거나 교환을 한 후, 또 똑 같은 거리를 걸어서 마을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렇게 힘들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서 그들에게 선물을 주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들에게 아주 튼튼한 ‘쌍용차 렉스턴’ 차를 선물로 주기로 한 것입니다. 자동차를 구입해서 배에 싣고 아프리카 해안까지 나른 다음, 직접 차를 몰고 그들의 마을로 찾아갑니다. 근처에 차를 세운 후, 마을 안으로 들어가 추장과 부족 사람들을 데리고 나와 렉스턴을 보여줍니다. 활짝 웃으면서 “이것은 여러분께 드리는 우리의 선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추장에게 조수석에 앉아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겁니다. 우리는 기쁘게 외칩니다. “추장님, 이 렉스턴은 정말 훌륭합니다! 밖에 온도가 40도가 넘어가도, 여기 에어컨 버튼을 누르고 동그란 손잡이를 돌려 22도 정도로 맞추기만 하면 아주 시원한 바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아무리 추워도 이 버튼을 누르고 동그란 손잡이를 돌려 25도 정도에 맞추면 따뜻한 바람이 나와 밖이 영하로 내려가도 춥지 않습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라디오가 있어서 생방송을 들을 수가 있고요, 시디 플레이어가 있어서 음악도 들을 수 있고 DVD를 통해서 영화도 볼 수 있답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 준 후에 차에서 내립니다. 추장이 “이렇게 큰 선물을 받았는데 저희는 뭘 해드려야 할까요?”라고 묻습니다.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그를 안심시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신의 부족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추장과 그 부족민들은 매우 고마워합니다. 우리는 그곳을 떠납니다. 하지만 몇 달 후, 그 부족 사람들은 여전히 물을 길러 매일 왕복 6km를 걸어 다닌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긴 거리를 걸어가 사냥을 했고 무거운 짐승을 마을까지 매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건을 사기 위해서 여전히 50km 가 넘은 거리를 걸어 다닌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렉스턴이 운송수단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정의를 그들에게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특징 한 가지를 제외한 모든 것을 추장에게 설명해준 것입니다. 즉 이 렉스턴은 당신이 가야 하는 곳은 어디든지 데려다 주며 당신을 위해 짐을 날라 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가장 중요한 기능적 정의를 우리 성도들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주심입니다.
예수님의 충만함을 주신다
은혜의 가장 중요한 기능적 정의가 하나님의 능력주심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자동차의 주된 목적은 운송에 있듯이 말입니다. 거기에 에어컨도 있고 시디플레이어도 있고 여러 가지 기능들이 있지만 그런 것들은 있어도 되고 때로는 없어도 되는 것들입니다. 차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사람이 타고 다니고 물을 싣고 다닐 수 있는 운송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 성경에서 은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요 1:16 / 우리가 다 그의(예수님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은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풍성한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넘치는 은혜, 풍성한 은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분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해 준다고 말씀합니다.
벧후 1:2-4 /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성품’이라는 단어는 한 사람의 본질적 특성이나 성격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 자신의 본질적 특성과 성격을 온전히, 값없이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요일 4:17 /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 말씀의 중요성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할 능력과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줍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정확히 예수님처럼 재창조했습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그토록 담대하게 “그의 안에서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마음에 잘 새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제안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은혜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은혜의 능력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역설적 은혜
로마서 5:17-21 / 이필재 목사
로마서 성경의 특징은 교리적으로 율법과 은혜를 대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성격을 쉽게 설명하면 재판석의 검사 같은 역할을 합니다. “너는 무슨 죄를, 어떻게 지었지 않느냐? 그래서 너는 죗값으로 죽어야 한다.” 인간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면을 율법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이 되는 아담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을 순종하지 않아서 죄 아래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이 받은 최고의 형벌은 죽음입니다.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형벌로 찾아온 이 사망은 우리 인간들 앞에 나타나서 왕 노릇 하고 있다고 오늘 성경 말씀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 생활 가운데서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사망하는 일이요, 죽인다고 하면 누구도 꼼짝 못하고 벌벌 떨게 되는 이 사망이 인간 범죄 죗값으로 인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왕 노릇한다고 했는데 왕은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부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망의 왕 앞에서 우리는 꼼짝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죄의 왕권을 생각해보면 사람이 한번 이 세력에 굴복 당하고 나면 그 후 부터는 노예가 되어서 먼저 지은 죄보다 더 큰 죄를 지으라고 죄의 왕이 명령을 내리면 꼼짝도 못하고 더 큰 죄에 빠지게 됩니다. 그 다음 왕은 나를 함부로 조롱합니다. “너는 죄인의 괴수다. 너 같은 놈은 이제 영원히 그렇게 살아야 돼.” 우리 마음에 후회를 만들어주고 절망에 빠지도록 하고 나중에는 자기 학대를 하게 만들고 나약해지고 초라해지고 비참에 떨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를 향해서 “네가 갈 곳은 이제 지옥 밖에 없어. 너는 거기 가야 돼.” 이렇게 명령을 합니다.
여러분이 혹시 나가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면 이런 대답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저는 교회 못갑니다.” “왜 못 오십니까?” “하도 죄를 많이 지어서 저 같은 사람이 교회를 가면 다른 교인들까지 욕먹습니다.” 매우 겸손한 것같이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과 영은 벌써 악령의 권세에 굴복 당하고 있습니다. 죄의 권세가 그 영 가운데 왕 노릇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왕이 그의 영을 붙들고 “너 같은 놈은 절대 교회 가면 안 돼.”라고 명령한 것을 철저하게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가끔 어떤 나쁜 조직에 가담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나쁘다고 판단이 되었으면 용감하게 뛰쳐나오면 됩니다. 혼자 힘으로 어려우면 부모님이나 선생님, 경찰관의 도움을 입으면 간단합니다.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는데 그들 마음에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미리 안 나가기로 작정하고 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벌써 마귀의 영이 그의 영을 사로잡아서 “너는 이 조직에서 절대로 나갈 수 없어. 만약 빠져나가면 너는 죽을지도 몰라.” 그 말을 철저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유흥가 직업여성들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자포자기하고 자기에 대해서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나는 이대로 살다고 죽을 수밖에 없어. 여기서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어.’ 죄의 권세가 그의 영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죄의 왕권은 아주 무섭습니다.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서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이 죄의 권세가 가장 열심히 하는 일이 뭔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훼방 놓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꽤 쓸 만하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몸을 바치게 되면 마귀는 적당한 시험거리를 만들어서 그의 반대의 길을 가도록 방향 제시를 합니다. 어떤 교회가 꽤 쓸 만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간다면 마귀는 그것이 안 되도록 무슨 일을 누구를 시켜서 어떻게 해서든지 방해가 되도록 연구하고 실행합니다. 우리가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니지요? 마귀들도 새벽기도를 합니다. 교회 안에 기도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마귀의 소리가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진리입니다. 저 풀러 신학교의 교회 성장학의 권위자 웨그너 박사가 말한 것이 있습니다. 미국 내에 사탄 숭배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사탄 숭배자들은 1년마다 지령이 내려온다고 합니다. “1년 동안 열심히 기도하는데 미국사회에서 가장 훌륭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를 망가지라고 사탄의 왕에게 기도하라.” 철저하게 실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교리적으로 약간 갈등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려고 로마서 5장이 있는데 갈등 부분은 이 말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해서 죄 아래로 떨어져서 벌을 받았다면 아담 하나로 끝나야지 왜 죄도 없는 그 후손들까지 그 벌을 받아야 되는가?”라는 교리적 질문이 나온 겁니다. 이 로마서 5장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입니다. 첫째 아담, 둘째 아담이라는 말을 쓰는데 첫째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후손들이 다 죄에 물들어서 죄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둘째 아담 예수 한 사람으로 은혜의 왕권이 또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권세가 우리를 죄 짓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고 절망에 이르게 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의 왕권도 누구든지 어떤 흉악한 죄에 빠졌든지 상관없이 다 구원을 주시는 은혜의 왕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진리입니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했습니다. 검사가 율법을 가지고 나섭니다. 율법의 잣대로 사람을 심판합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많은 죄의 기록이 나오는지 판사 앞에 내가 죄 지은 것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습니다. 검사는 재판관에게 요청했습니다. “이러므로 이 피고는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렇게 많은 죄 기록이 사실적으로 있지 않습니까?” 꼼짝 못합니다. 우리가 죄 지은 것이 다 기록에 남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복음 변호사로 등장을 합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이 피고가 이렇게 많은 죄를 지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죄가 많아서 검사의 말대로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피고인을 위하여 대신 그 죄를 사하여 달라고 이 사람이 받아야 할 죗값을 내가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지 않았습니까? 이 피고인의 그 십자가의 믿음의 고백을 했고 회개하였고 예수를 믿고 이렇게 온 것입니다.” 이렇게 변호를 하면 하나님이 “아, 그렇다. 너의 모든 죄는 이미 사함 받은 죄다. 천국에 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도록 하여라.” 이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지금 이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는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죄가 커도 다 용서해 주기 때문에 죄 많이 지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죄가 적은 사람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 많이 받은 것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설교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예수님을 초대한 어떤 바리새인 집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동네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기고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문제의 여자입니다. 이 여자를 많은 신학자들이 다 막달라 마리아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의 직업은 창녀였다고 거의 정설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그 모양새가 하도 민망해서 예수님까지 비판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선지자였다면 이 여자가 죄인인 줄 알았을 텐데 왜 선지자라는, 이 소문난 사람이 와서 자기를 만지는 것을 저지해서 보내지 않고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는가?” 이렇게 막 핀잔하지 않습니까? 그의 몸은 일곱 귀신이 들린 몸이요 그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병적인 상태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는 예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선지자권을 의심하는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빚놀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빚진 자가 둘이 있었다. 하나는 500데나리온의 빚을 졌고 하나는 50데나리온의 빚을 졌다고 하자. 갚을 것이 없어서 둘 다 주인이 탕감하여 주었다. 너희 생각에는 둘 중에 누가 더 주인의 사랑을 받은 것이냐?” 시몬이 대답하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도다. 이 여인은 너희가 생각하는 대로 너무나 많은 죄가 쌓였다. 그런데 그 많은 죄가 다 사하여졌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많은 사랑이 이에게 임하였느니라.”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이제부터 평안히 가라.”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이 설교하신 내용이 탕자 비유입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의 몫을 다 가지고 나와 창기와 함께 소비하고 타락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거지가 되어서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과거를 다 잊게 해주었습니다. 옛날 모습으로 회복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자비의 큰 혜택을 받아서 정상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는 큰 아들이 이것을 보고 불공평하다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아버지!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저런 놈은 나가서 벌을 받아야지 왜 혜택을 주십니까? 그러면 나도 일찌감치 저 놈처럼 나가서 방탕하다 돌아올 것을 괜히 성실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나는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나이다. 이런 대접은 내가 받아야지요. 그리고 저 놈은 벌을 받아야지요. 이게 하나님의 공평입니까? 아버지! 이게 뭐하는 일입니까?” 아버지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네 것이 어디 갔느냐?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내 것은 네가 네 장래를 위해서 쓰지 않고 그냥 두었다. 만약 네 동생이 자기 몫을 가지고 나갈 때 네가 네 몫도 달라고 했다면 나는 너에게도 주었을 것이다. 네가 안가지고 나간 것 뿐이다. 네 것이 어디로 갔느냐? 네가 너를 위해서 지금 쓰지 않고 있었을 뿐이야. 그리고 네 가치 판단으로 네 동생의 무엇이 부러우냐? 네가 나가서 방탕하고 타락하지 못한 게 부러우냐? 거지꼴이 되어서 맨발로 기어들어온 동생이 뭐가 부러우냐? 저렇게 되지 않고 아버지 집에서 지금까지 성실하게 깨끗하게 살아온 네가 더 좋은 삶을 살았고 복을 받은 것이지 네 동생이 뭐가 부러워서 그러는 거냐?” 이게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은 그것입니다. 죄의 권세가 왕권을 가지고 인간을 죄의 노예로 만들었다면 은혜의 왕권으로 다 사하여 주는데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탕자가 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임하여 새로운 역사를 쓰게 했다.” 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왕권을 말씀 했더니 많은 사람이 큰 아들과 같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아!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면 나도 죄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짓고 이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 탕감을 받아야 더 좋을 것 아니냐?” 이런 논리를 제의합니다. 그래서 6장 1절에 보면 “우리가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한 말은 그러한 경우에 있는 사람도 그렇게 자유함을 얻은 은혜가 있다는 것이지 이미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으로 의가 아니다.” 이런 논리적, 합리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누가 예수 잘 믿는 믿음 좋은 사람인가? ‘아!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서 주일학교에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살아온 그 자체를 최고의 축복으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제일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아! 나는 괜히 어려서부터 예수 믿는다고 고생만 했네. 재미도 못 보고 억울하게 살았네.” 이렇게 후회하는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입니다. “네가 더 좋은 것을 누리며 살았으면서 네 동생이 나가서 방탕하고 죄 지은 것을 못 해보고 산 것이 그렇게 부러우냐?” 이런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작은 아들처럼 허랑방탕하다가 은혜 받고 예수 믿은 사람 퍼센트가 높습니다. 그러면 그 분은 신앙 고백을 잘해야 됩니다. “아! 나는 아주 재수 좋네. 세상 재미 볼 거 다 봤고,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대로 받았고! 와! 수지맞았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 짓고 허송하고 쓸데없이 보낸 그 과거를 가슴 아프게 생각해야 되고 “그렇게 젊었고 용기 있고 능력 있던 시절에 주님을 위해서 좋은 삶을 내가 왜 살지 못했나?” 안타까워하면서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그게 믿음이 좋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공연히 작은 아들과 같이 타락해 보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는 때가 많습니다.
신앙 간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모이는 신앙 간증 집회는 어떤 집회인가? 간증자의 과거가 컴컴할수록 좋습니다. 흉악할수록 인기가 있는데 전과 3범 같은 것은 간에 기별도 안 옵니다. “전과 10범”처럼 과거가 흉악한데 나중에 예수 믿고 간증하면 인기가 있습니다. 보통 인기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게 바로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겁니다.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뭡니까?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임해서 새 역사를 쓰게 했다.” 그것을 간증하니까 사람들이 인기 있게 들으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간증할 수 있고 나도 간증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주일학교 모범생이었습니다. 사춘기 시절에 세례 받고 교회에서 시키는 것을 거역해 본 적이 없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교회 봉사 뭐든지 다했고 나중에 믿는 자와 결혼해서 집사 되고 권사 되고 교회에서 직분 주는 것을 다 열심히 해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교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영역 다 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좋은 간증입니까? 그런데 이런 간증 가지고 강사가 되면 밥도 못 얻어먹습니다. 그게 정말 좋은 간증인데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간증거리를 만들기 위해 많은 죄를 짓겠느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나도 저런 강사가 되려면 어둠의 세계를 일부러 들어갔다 나와야 되겠구나.’ “그럴 수 없느니라. 네가 더 좋은 삶을 살았느니라. 큰 아들이여! 네가 더 하나님의 복을 받았지!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서 허랑방탕하지 아니한 삶을 산 네가 더 좋은 삶을 살았지. 거지꼴이 된 동생이 부러우냐? 죄 지어보지 못한 것이 한탄이냐?” 지금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가 지금까지 자기를 만나러 왔던 모든 남자들의 이유가 무엇인지 압니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인간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동물적 욕심을 채워주는 도구로만 사용이 되었고 사용한 후에는 그들로부터 멸시의 소리를 끝없이 들어야 되는 일곱 귀신 들린 정신 나간 여자였습니다. 그 죄가 넘친 곳에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렸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서 대화를 하는 순간 그는 자기 평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인격 대우에 가슴이 열려버리고 젖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지금까지는 죄의 권세에 눌려서 ‘나는 이대로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돼. 나는 더 이상의 길이 없어.’ 그렇게만 생각하고 죄의 권세에 절대 순종하던 그가 예수의 복음으로 새로워져서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죄의 권세를 깨버렸습니다. “네가 뭐야? 내가 주님의 딸인데 네가 왜 내 영을 붙잡고 나를 이 길로 몰고 가는 거야?” 팍 차버리고 그 순간부터 자신이 불러오던 자신의 그 처절하고 슬픈 노래를 그치고 예수를 바라보면서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순례자의 복음 성가를 부르기 시작하잖아요? 이렇게 변해버린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여기야. 못 나가. 나갈 수 없어. 이대로 살다 죽는 거야.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세례를 받고 무슨 교회를 가?” 거기에 눌려 있는 겁니다. 죄의 왕권 권세에 순종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께서 삭개오 집에 들어가셨을 때 동네 사람들은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사실 삭개오는 자신도 예수는 만나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청하셨습니다. “삭개오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들어가겠다.” 그래서 예수님의 요청으로 삭개오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심방을 받고 대화를 하다가 그는 가슴이 얼마나 뜨거워졌는지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생애를 뒤엎는 소리를 제안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는 돈만 알고 자기나라 돈 거둬서 로마 정부만 유익하게 만들어주고 자기 혼자 먹고 사는 사람으로 그렇게 돈 밖에 모르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의 그 많은 욕을 먹고 죄인 취급을 받아 왔습니다. 자기는 그것이 자기의 삶이라고 절대 순종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만나서 뒤집혔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죠? “예수여! 내가 지금까지 삶에 가장 큰 가치관이라고 생각했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사오며 만약 이것을 내가 불의하게 모았다면 4배나 율법대로 갚겠나이다.” 여러분! 삭개오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여기 나오신 갈보리 교인들 가운데 현재 자기 모든 재산의 50퍼센트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 활동비로 내 놓을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못 들으실 겁니다. 누구도 못하실 겁니다. 아무도 못합니다. 삭개오는 했습니다. 거짓말로 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으로 남은 겁니다. 제가 어디 부흥회에 가서 이 설교를 했더니 중학생이 한번 손들더라고요. “네 소유가 얼마나?” 물었더니 2만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감사하다.” 하나님의 역사는 죄 많은 곳을 통해서 더 크게 역사합니다. 이 세상의 변화는 항상 그렇게 해왔습니다.
이번 5월 갈보리교회 달력 사진은 제가 논산 훈련소에 가서 6,300명 앉혀놓고 세례를 주며 설교하는 모습입니다. 제 왼쪽 옆에 앉아있는 그 사람이 훈련소장입니다. 제가 6,300명 앞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한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훈련 소장님은 장군인데 불교신자이십니다. 제 설교를 듣고 나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훈련 소장으로 훈련병들에게 명령한다. 목사님 말씀 들었지? 오늘 세례 받는 자들은 목사님이 나눠주시는 이 성경책을 훈련소를 떠날 때까지 완독할 것! 이상!” 불교신자 훈련 소장이 그렇게 명령했습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읽으라고 하면 안 읽습니다. 목사의 말은 다 비중을 크게 두지 않습니다. 목사들 다 압니다. 그러나 훈련 소장이 명령하니까 모두 “알았습니다.” “반드시 읽겠느냐?” “읽겠습니다.” 그래서 6,300명에게 세례를 준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거슬리는 어떤 죄를 가지고 계십니까? 오늘 이 말씀은 그 죄의 권세에 묶여 있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왕권이 모든 죄를 사하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과거의 죄 때문에 묶여 있지도 말고 자유함을 얻어서 역설적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 죄의 권세를 깨뜨려 버리고 은혜의 권세 속에서 살라.” 이것이 오늘 말씀 내용입니다. 모두 그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왕처럼 살자
로마서 5:17-21 / 엄기호 목사
사무엘 슈메이커는 다음과 같은 “세 단계의 인생”을 말했습니다. 즉, “본능의 수준에서 사는 인생이 있고, 또 양심의 수준에서 사는 인생이 있으며, 그리고 은총의 수준에서 사는 인생이 있다”고 말입니다. 포르시스(F-orsyth)는 이 은총의 수단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 속에 우리들보다 높은 수준의 것이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주변에 굴복되고 만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로마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때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러면 우리가 왕노릇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나요?
우리는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한 자들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부인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안에 산다는 것과 세상에 속한다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속하여 세상과 함께 또는 세상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살 수는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환경의 조건에 따라 움직이고 여론에 따라 행동하며 유행에 따라 생활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나무나 바위, 하늘이나 달 등에 빌고 의지하며 권력, 명예, 재물들을 의지합니다. 이들은 자기의 생각과 계획과 말과 행동 모두를 세상과 타협 내지는 세상에 예속시킵니다. 그들은 세상의 사람들이요, 그들은 세상의 종들입니다.
왕들 중에는 하나님의 큰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아온 다윗 왕이 있습니다. 또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할 때 아버지 다윗 왕의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을 구하자,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시고,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내리시면서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솔로몬 왕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지니고 솔로몬의 지혜를 사랑하며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친 스바 여왕이 있으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두라 평지에 금신상을 만들고 우상을 섬기던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있고, 인도에서 구스까지 127도를 치리하던 아하수에로 왕도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왕들 중에 하나님 안에서 보호함을 입은 왕들은 언제나 승리와 축복만이 넘쳤던 반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 했던 왕들은 멸망당하여 그 말로가 비참하기 그지없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왕들은 시간적으로 제한을 받습니다. 세상 왕은 자신이 왕으로 즉위한 때로부터 일정한 집권기간에만 다스리는 시간적 제재를 받는 왕들입니다. 또 지역적으로도 제한을 받습니다.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나라)은 제한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를 다스릴 권리가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고, 생사간에 제한도 받습니다. 아무리 취임 중에 자기 나라 백성을 다스린다고 하여도 산 자를 다스리지 죽은 자까지는 다스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죽음에서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안에서 왕노릇 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해 있는 자를 구원하고 성령 충만하여 마귀 권세를 멸하고, 영권(靈權)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천한 자가 존귀한 자로, 미련한 자가 신령한 자로, 가난한 자가 부요한 자로, 부족한 자가 만족한 자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는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초월해야 합니다.
아담에게서부터 죄는 세상에 들어와 모든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고,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되었으며,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 위에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이런 상태에서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였고,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은혜와 의의 은사를 풍성히 받고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죄가 인간으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했습니다. 죄가 사탄으로 하여금 폭군이 되게 하였고(히 2:14), 죄가 하나님을 일하시게 했으며(사 65:17), 죄가 그리스도를 고난자로 만들었습니다(벧전 3:18). 죄가 땅을 황폐케 했고(롬 8:22), 죄가 형벌을 필요케 했으며(마 25:46), 죄가 음부를 실존케 했습니다(눅 16:2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총을 받게 되면 우리는 새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얻으며 은혜의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생활이란 세상 밖에 있지는 않지만 세상을 초월하여 환난에서 인내로, 인내에서 연단으로, 연단에서 소망으로 진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기쁜 복음을 심어야 합니다.
에벌린 언더 힐(Erelyn Underhill)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공공연한 생활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안방의 생활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세상 밖의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초월합니다. 필요하면 언제나 세상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죽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삶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평화와 사랑의 하나님, 화해와 기쁨과 은혜의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영원한 통치자이시며 우주적인 통치자시요 자연과 교회와 하늘의 주권들의 통치자로서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과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더 살기 좋아지고 계몽되며 개선되기를 위해 생활하고 실천하고 앞장서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세상과 함께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위하여 주는 자들이면서도 세상으로부터 그 세상에 속한 것을 얻지는 않습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여 그 세상을 구원하는 자들이면서도 세상과 함께 멸망으로 떠내려가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사기 9장 8절에 왕이 되기를 거절한 세 나무가 있습니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입니다. 이 나무들은 나무들의 왕이 될 자격이 충분하지만 거절하였습니다. 감람나무는 등불의 기름을 제공합니다. 기름은 증거를 의미합니다. 무화과나무는 달고 아름다운 열매를 제공하며 단 것은 생명력의 유지를 의미합니다. 포도나무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새 술을 제공하며 기쁨과 겸손을 의미하고 그 당시 음료로 사용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열매로 만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네들의 분수를 바로 알고 자기네들의 부여된 본래의 사명이 무엇임을 깨달아 자족하였습니다. 천직(天職)이 왕직(王職)보다 귀한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왕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지배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군림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가시나무는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받은 결과로 왔습니다. 그는 남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불만과 괴로움만 주는 존재입니다. 자기 분수와 위치도 모르고 우리의 왕이 되라 하니 가시나무는 그저 좋아서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의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고 교만을 떨었습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높여주고 존경할 때 교만을 내 버리고 더욱 온유하고 겸손하고 겸비하여 맡은바 일에 충성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이루어 예수님의 은혜로 왕처럼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왕에게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재산도 존경도 있고, 부하도 돕는 사람도 많으며, 명예와 권세도 큽니다. 따라서 우리가 왕처럼 산다는 것은 하늘의 권세로 세상을 이기고 성령의 능력으로 환경을 이기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자기 자신을 이겨서 하늘에서나 이 땅에서 왕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옛날 습관 그대로 살아가고, 세상에서 죄와 사탄의 종이었을 때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들도 생명이 왕노릇 하고, 사랑과 의로 왕노릇 하는 그리스도처럼 살아갑시다. 이 왕은 때때로 약해 보이기도 하고 손해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속이는 자 같기도 하고 바보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참으로 사는 자요 강한 자이며 모두를 유익하게 하는 왕입니다. 이 왕은 자기의 마음과 삶을 지배하고 자기의 운명을 지배하며 세상을 지배합니다. 이 왕처럼 사는 사람들에게는 늘 승리와 축복과 영광이 충만하며, 은혜의 강물이 넘쳐흘러서 이웃에게 밝고 환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존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도 잘되고 강건하는 놀라운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넘쳐 흐르는 은혜의 강물에 몸을 던지라
로마서 5:17-21 / 전순기 목사
며칠 전 신문에 요즘 대학을 졸업하는 젊은이들이 취업을 위해서 얼마나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 지를 다룬 기사가 실렸습니다. 요즘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절반은 실업자가 되는 상황입니다. 워낙 취업의 문이 좁으니까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어야 취직에 유리합니다. 그러니 토익 점수 고득점이나 인턴사원 경력은 기본이고, 남들보다 뛰어난 경력을 쌓기 위해서, 원양 어선을 타는 경력을 쌓는다든지, 히말라야 고봉을 등정한다든지, 다른 기발한 어떤 경력들을 제시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취업을 위한 '피 눈물 나는' 경력 쌓기에 나서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지금 세계 경제가 다 함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미국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불란서도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방 한 칸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돼서, 노숙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말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모두 다 느낄 겁니다.
최근에는 경제만 어려운 게 아니고, 정말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전직 프로 야구 선수였던 사람이 네 모녀를 죽여 암매장한 사건이나, 크리스마스 때에 실종되었던 한 어린이가 토막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나, 도대체 사람이 너무 두렵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사람을 대하고, 관계를 맺어나가야 할 지 모르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래도 좀 더 멀리서 일어난 일이기에 우리 가슴에 덜 와 닿을지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갑작스러운 사고로 귀한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이 아주 가까이에서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지난주에는 금호 아파트 앞에서 학원차가 미끄러지면서 여러 어린이가 다치고 두 어린이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엊그제는 우리 교회 청년부에 나오던 청년 하나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에 차가 전복되면서 튕겨나가서 현장에서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참 착하고 성실한 청년이었다는데…, 참 안타깝고 답답한 현실입니다. 이런 일들만이 아닐 겁니다. 각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개인적으로도 아마 말로 다 못할 이런저런 어려움이 모두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어렵고 답답한 경제 상황이나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면,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무슨 방법도 없습니다. 또 갑작스러운 사고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삶의 현장에서 안전하게 살아간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곤경에 처한 인생의 현실
현재 여러분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경제적인 어려움입니까? 자녀 문제입니까? 취직 문제입니까? 건강 문제입니까? 사람간의 갈등입니까?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대부분의 어려움들이 원치 않는 어려운 환경이나, 어떻게 해결할 수 없고, 어쩔 수 없는 인간관계의 갈등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사실 좀 더 깊이 따지고 들어가 보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환경이나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여유롭고 넉넉하지 못한 마음, 스트레스를 잘 감당해 내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인생들이 겪는 궁핍과 결핍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현재 겪는 어려움이 새롭게 혼자만 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또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제일 큰 것처럼 느껴진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나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 있더라도, 내 마음이 그것을 받아낼 여유만 있다면, 또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의 태도와 자세만 갖춘다면,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방송 기자였던 데보라 노빌이라는 여성이 쓴 ‘감사의 힘’이라는 책이 그것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어려운 역경 속에서 감사할 때에 거둔 놀라운 변화와 행복의 열매들에 대해서 쓰고 있는데, 실제 일어난 여러 사례들을 조사하고 또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가지고 글을 썼는데, 이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주장은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겁니다. 그 책의 내용은 “행복은 ‘감사합니다.’로 시작되고, 성공은 ‘고맙습니다.’가 보장해 준다고 요약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환경에 거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면,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고 성마르게 됩니다. 기쁨과 평안이 사라지고, 감사가 사라집니다. 불평과 원망이 마음에 가득해집니다. 사람들이 싫어집니다. 그래서 마음 문을 닫아걸고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답답한 현실을 해결해 보려고, 사람에게 기대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내 문제를 해결 받고 구원받기를 바라는 기대는 거의 실패할 것이 분명합니다. 유한한 인간은 인간에게 구세주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람에게서 내 문제를 해결 받고, 사람에게서 행복을 구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고, 또 자신이 누군가의 구세주가 되어줄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사람들끼리 약간의 도움을 주고받을 수는 있습니다. 도움을 주고받는 일은 정말로 아름다운 일이며 꼭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의지하고 돕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메마른 광야에서 단 비를 맞는 것과 같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단 비 한두 번 내린다고 해서 광야가 옥토가 되지 못합니다. 그게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도움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 범위 안에서 도움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 인생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 보면 한 사람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 되고 사망이라는 왕의 다스림을 받았는데, 이제 한 사람 예수님의 의로운 삶 때문에 우리가 의인이 되고, 은혜가 왕 노릇 하는 나라의 백성들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라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 백성들은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넘쳐흐르는 은혜의 강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저질러 놓은 죄의 결과가 엄청나게 큽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모든 인생들이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 때문에 인간은 고통을 당하고, 이런저런 궁핍과 결핍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고생하며 살다가 죽으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죄 값을 다 갚아주시고, 하나님 아버지 뜻대로 순종하고 사신 공로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종노릇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고,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군이 된다는 겁니다. 이 땅에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대사의 사명도 주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고, 또 옳은 길로만 인도해 주시고, 또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복의 통로가 되도록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은혜를 주시는데, 하나님은 “항상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넘치게 하시는 이”라고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인색하지 않고, 넘친다는 겁니다. 이것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정도는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는 만큼 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자기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복음이 그렇게 감격스럽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가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갚을 길이 없는 정도의 심각한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죄 사함의 은혜가 한없이 크게 느껴지고 감격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롭다고 여겼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고, 또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던 창기들, 세리들 죄인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구원의 은총을 누렸던 것입니다.
주님은 “왜 당신은 죄인들, 세리들, 창기들과 함께 교제하느냐?”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해 주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예화)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김익두 목사님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을 충만하게 경험하신 분입니다. 그는 천하에 둘도 없는 난봉꾼에 깡패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의 은혜를 받고 회개하고 주의 종이 되지 않았습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 것입니다.
어느 날 부흥회를 인도하려고 한 여름에 보따리를 거머쥐고 산을 넘어가는 데, 너무 덥고 혼자 가는 길이 외롭기도 하고 해서, 빨리 올라가서 산 정상에서 바람이나 쏘이고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부지런히 올라갔습니다.
아무도 없는지라 웃통을 벗고 바람을 쐬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술 취한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올라오더니, 김익두 목사님을 딱 쳐다보더니 “야,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냐?” 시비를 걸면서 막 때리더라는 겁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그냥 맞았답니다. 목사님 표현대로 하면, 이사 나간 집 굴뚝 부수듯이 막 부수더라는 겁니다. 한참을 때리더니 대항을 하지 않으니까 숨을 몰아쉬면서 씩씩거리더랍니다.
그 때에 김익두 목사님이 “형님 다 때렸소?”하고는 악수를 청하면서 손을 으스러지도록 꽉 잡으면서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못 알아듣고 벙벙해 있기에 “내가 김익두야!”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사색이 되면서 벌벌 떨더랍니다. “그래, 내가 뭐랬나 예수 믿기 전에 이런 일 당했으면, 자네는 여기서 장례식을 치렀을 거야. 그런데 내가 예수 믿는 덕에 자네가 살지 않았나!”
“아이고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날 따라와.” 그 사람을 데리고 가서 부흥회에 참석시켰더니, 그 사람이 거기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나중에 교회의 장로님이 되셨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소망 교회 곽선희 목사님이 어릴 때에 목사님에게서 직접 들으신 이야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저는 곽 목사님의 설교에서 읽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삶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은혜가 왕노릇함으로 영생을 얻게 한다는 말의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그 사람을 은혜로 대하지 않고 율법대로 대했다면, 그 사람은 영생이 아니라 사망을 얻었을 것입니다.
은혜의 강물에 몸을 던지라!
우리 삶의 현실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현실의 환경 조건이 너무 좋아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나를 에워싸고 있는 환경이나 조건을 개선함으로 행복해지려고 한다면, 어쩌면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주님의 넘쳐흐르는 은혜로 말미암아 현실을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으로 은혜를 누리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초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사55:1-3).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사55:6-7).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주님을 믿고 은혜를 구하는 자는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는 것과 같이 마음속에서 기쁨과 평안이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 주님께로 나오는 자는 다함이 없는 지혜와 능력을 주님께로부터 공급받아 승리할 수 있으며,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의 무한한 인내를 힘입어 어떤 어려운 역경에도 인내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현실이 고통스럽습니까? 불행하다고 느끼십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는 은혜의 강물이 되어 흘러넘치고 있음을 보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넘쳐흐르는 은혜의 강물 속으로 뛰어드시기 바랍니다. 마음껏 은혜의 강물을 마시고 시원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죄사함의 기쁨과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간구함으로 삶의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모든 지혜와 능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혹시 “나 같은 죄인도 은혜 받을 수 있을까? 나 같이 부족한 사람도 하나님이 받아주실까? 나처럼 기도도 못하고 말씀도 못 보고, 주일 성수도 제대로 못할 때가 많고, 십일조 헌금도 제대로 못했는데, 은혜 주실까?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나처럼 잘 변화되지 못한 사람도 은혜 받을 수 있을까?”하는 의심하는 마음, 근심하는 마음, 주눅든 마음, 낙심하고 좌절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치 않고,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은혜는 우리의 어떤 허물과 실수도 죄도, 다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용서만 해 주시는 게 아니고,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를 다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재산을 다 털어먹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과거를 묻지 않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고, 잔치를 베풀며 기뻐하시던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 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는 언제나 넘쳐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죄도 허물도 연약함도 실수도,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가시기 바랍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 오겠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자기 경험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경험이란 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경험한 게 얼마나 됩니까? 짧은 인생을 살면서 지극히 작은 것 몇 가지를 경험했을 뿐입니다. 자기 경험의 한계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가두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존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오직 은혜로만 나를 받으소서. 오직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나왔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고백하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은혜의 강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지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은 깨끗하게 씻김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청명한 하늘처럼 맑아질 것입니다. 은혜의 강물에 몸을 던지면, 삶의 소망과 기쁨이 다시 샘솟듯 솟아날 것입니다. 은혜의 강물에 몸을 던지면, 다시 마음에 강물 같은 평안이 흘러날 것입니다. 은혜의 강물에 몸을 던지면, 다시 한 번 더 인내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의 강물에 몸을 던지면, 영적인 필요만 채우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겪는 모든 결핍들을 자연스럽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정말로 필요한 거라면, 주님께서 꼭 챙겨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하지만, 주님이 판단하실 때에, 그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게 아니고, 오히려 해가 될 것 같으면 주시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은혜의 강물에서 헤엄치는 삶을 계속 살아가면, 우리의 삶은 사해 바다가 살아나서 수많은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갈릴리 바다처럼 되고, 메마른 사해 광야가 울창한 숲이 되어 아름다운 꽃이 피고 갖가지 과일을 주렁주렁 맺는 것과 같은 기적을 경험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전도자이며 신학자인 워치만 니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의 책을 청년 시절에 많이 읽고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하루는 꿈을 꾸었습니다.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가는데, 앞에 큰 암초가 나타나서 가로막습니다. 안간힘을 써 보지만 어떻게 극복을 못합니다. 그는 꿈속에서 이 난관을 극복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워치만 니야! 내가 암초를 없애 줄까? 아니면 강물을 많게 해서 넘어가게 해 줄까?”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그 때에 워치만 니는 강물을 많게 해서 암초를 넘어가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러자 강물의 수위가 올라가면서 능히 그 암초를 넘어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꿈을 깼다고 합니다. 워치만 니는 그 꿈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그의 평생에 수많은 암초들을 만났으나, 넘쳐흐르는 은혜의 강물을 힘입어 넉넉히 이겨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앞길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환난과 궁핍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넘쳐흐르는 은혜의 강물에 몸을 맡기기만 한다면, 우리는 넉넉히 이겨내고 승리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찬을 받으시면서,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은혜의 강물에 몸과 마음을 던지시는 결단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와 은혜
로마서 5:20-21 / 조남신 목사
중국의 체제가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바뀌었다고 그러지요. 우리나라도 그 동안 많은 사건을 겪으며 이제 대선 체제에 들어갔는데, 이회창후보, 노무현후보, 정몽준후보, 권영길후보...등이 이제, 3파전, 2파전을 벌이겠지요. 선거 때마다 첨예한 대립을 벌이다보면,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이번엔 과거보다 좀 성숙한 모습으로 정권이양이 잘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지나온 우리의 나날들이 오늘 설교 제목식으로 표현해볼때 죄의 순간순간들이었다면, 앞으로의 우리의 나날들은 은혜의 나날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그 동안 새벽기도회 때마다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집요한 관심을 가졌던 것이 바로 이런 문제들이었지요. 죄와 의, 율법과 의, 믿음과 의, 믿음과 은혜, ..... 그러면서 결론에 이른 것은 "죄와 은혜"였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쓰기까지 고민하며 터득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오늘 창세기 본문에서도 이미 이 "죄와 은혜"의 문제를 말하고 있어요. 놀랍지요. 놀라워요. 이미 여기에 생명의 강, 구원의 강이 흐르고 있었어요. 죄인들이 구원을 얻는 속죄의 강, 감격의 강 .....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희소식, 복음이라는 거지요. 이것이 인류에게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도 이 문제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그의 유명한 작품 중에 "죄와 벌"이라는 작품이 있지요. 이 "죄와 벌"이라는 개념은 기독교의 율법의 원리를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율법에 의하면, 죄를 범하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지요. 이것이 "죄와 벌"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죄를 지은 우리들에게 율법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누가 있겠어요? 없어요! 그렇다면 이 지구촌에서 구원의 가망성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사망, 죽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죽이는 법"이라고까지 말했잖아요. "죄와 사망의 법"(로마서8:2) .... 그런데 하나님이 또 하나의 길을 열어놓고 계셨지요. 그것이 바로 은혜의 원리라는 거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다스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은혜로!! 은혜로!! ... 이것이 다행으로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불공평하다고 느껴지십니까? 이것을 "성령의 생명의 법"(로마서 8:2)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은혜로 살아요. 그래서 은혜로 살수가 있어요.
> 언젠가 영국에서 비교종교학회의가 열렸는데, 거기서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을 것 아니예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성육신 사건이나 부활사상에서 찾았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의 몸을 입을 수 있느냐?...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느냐?... 그러나 다른 종교에도 이런 사상들이 있어요. ... 그러면 여러분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은혜라는 것이지요. 기독교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 점이 달라요. 그 회의에서도 이 점에 동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은혜!! .... 받을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가 베풀어지고 있으니 은혜예요. 은혜!! ...
> 오늘 이 창세기 20장은 바로 이 "죄와 은혜"의 문제, 이 중요한 진리를 말하기 위해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어요. 이제까지 창세기를 통해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그가 죄를 짓지요. 믿음의 조상인데 죄를 지어요. 특히 여기 20장에서 말하려는 이 죄는 어떤 성격을 띠고 있습니까? ①죄의 반복성과 ②죄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어요. 그럴 수가 없는데 그렇다는 거예요. 이것이 가장 무서운, 뿌리깊은 죄의 성격이에요. 그래서 죄의 양상은 누구에게나 이렇게 나타나지요. 여기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게 나타나요. 아브라함이 그랄 지방에 이사를 가지요. 왜 이사를 갔을까? ...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큰 일을 치르고 나서, 롯의 아내와 롯의 사위들이 죽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 그것을 잊어보려고 그랬는지, 회의가 왔는지, 아니면 먹고 살기가 어렵게 되었는지, ... 이사를 가요. 그랄지방으로 ... 그랄 지방은 팔레스틴의 제일 남쪽, 애굽과의 경계지역입니다. 아무리 봐도 이사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비장했던 것 같아요. 또 그 죄를 지으면서라도 이사해야 했거든요. 그게 무슨 죄인데? ...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는 죄!! 애굽에서 25년 전에도 그랬는데(창12장), 또 그 죄를 여기 그랄에서 범하고 있었어요. 죄의 반복성이에요. ... 소돔과 고모라 심판 때만 해도 그의 신앙이 아주 고양되어 열방 구원의 종보기도를 드렸는데, 그땐 정말 "열국의 아비"같았었는데, 또 다시 이렇게 영적인 침체의 나락으로 깊이 떨어지니, 이거 도대체 이해가 안 가요... 이것이 인간의 실존인가요?. 이것이 죄성의 깊이인가요? 죄는 이렇게 반복되고 있었어요. 헤어 나오질 못하고 계속되고 있었어요. 그리고 오늘 창세기 본문에서 더 내려가서 13절에 보면, 이 범죄는 계획적이고 의도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13절에서 이미 아내와 계획했지요. "이후로 ...가는 곳마다...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이미 계획했던 것을 한 것이에요. 이미 합의를 봤어요. 우연히 저지른 것이 아니에요...
> 그러나 우리는 여기 이 본문을 통해서 죄만 보아선 안돼요. 죄보다 은혜를 보라고 말하고 있어요. 창20장은 "죄와 은혜"를 설명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러면 여기 이 본문에서 뭐가 은혜예요? 하나님이 죄를 지은 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다루고 계셨는가를 보면, 은혜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때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이제까지의 아브라함의 모든 노력은 그냥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 ①먼저 아브라함의 죄를 묻습니다. 자기 아내를 남에게 양도하거나 방치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일까? 그런데도 그 일을 저지른 저의는 무엇일까? 돌이킬 가망성은 있는가? ... 본문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진 않았지만, 본문의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회개하도록 도와주고 있었어요... 우리가 회개, 회개하지만 사실 회개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가 없지요. 여러분, 스스로 회개할 수 있습니까? 은혜가 있으니까 회개하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은혜를 주시니까, 감동을 주시니까, 도와주시니까, 회개를 해요. 탕자도 재산 모두 탕진하고 돌아오는데 아버지에게 먼저 회개했어요? 그런 것 같지가 않아요. 회개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예요. 단지 선처를 바라며 아들은 그만두고 종으로서 먹는 것이나 해결하려고 집에 왔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이 탕자를 먼저 보잖아요. 먼저 보고 그에게 달려 갔어요. 이 탕자가 그때 한 발짝 옮길 때, 아버지는 열 발짝을 뛰어서 달려 갔어요. 그리고 이 아들을 품에 안고, 뽀뽀를 그냥 막 하지요. 수없이 입맞췄어요. 그리고 송아지 잡고 잔치를 벌여요. 이는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라고 정말 좋아하셨어요. 이것이 은혜이지요.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예요. 은혜 없인 회개할 수 없어요. 사랑 없인 변화시킬 수 없어요. 사람들은 회개를 그렇게 쉽게 할만한 위인들이 못돼요. 회개가 그렇게 쉽다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어요.
> 그 다음 사라를 보호해 주셨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사라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간섭하시지요.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간섭하세요. 이것이 은혜지요. 은혜의 간섭이십니다. 그래서 사라를 다치지 않게 해요. 그리고 아브라함도 다치지 않게 하시지요.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시지요. 7절을 보세요.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그의) 아내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 이 말씀도 은혜지요. 아브라함 편에서 볼 때 은혜예요. 아브라함이 죄를 지어서 지금 여러 명이 다치게 생겼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탓하지 않으시고, 그의 지위도 박탈하지 않으시고 - "그는 선지자라. 그가 기도해 주기 때문에 네가 살 것이다" - 그를 지켜주시고 계세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고 계셨어요. 아브라함에게도, 사라에게도,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에게도 ... . 이 은혜를 은혜로 느낄 수 있습니까?
> 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느낄 수 있을까? 은혜가 있어도 은혜를 느끼지 못하면, 은혜가 와도 은혜를 알 수가 없어요. 은혜가 은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 ①아브라함이 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솔직히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 죄와 대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13절에 보면, 자기 죄를 인정하지요. 그래서 이러 저러해서 죄가 시작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끝난 거예요.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어요. 그러므로 이미 치료가 시작된 거예요... 그러나 죄를 부인할 때 거기엔 희망이 없어요. 치료가 안 돼요. 우리의 죄를 인정할 때, 그리고 자백할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치유가, 하나님의 용서가,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은혜도 죄를 느끼지 못하면,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에도 말씀하지요.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것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많이 깨닫는 곳에라야 은혜가 넘쳐난다는 말씀이지요. 깨닫지 않으면,그래서 회개하지 않으면, 은혜가 없어요.
> ② 그 다음 창세기 본문 17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지요. 어떻게 기도했겠습니까? 자기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자기를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그리고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하지요. 그러니까 회복이 시작돼요. 자기의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주 앞에 엎드려 진지하게 기도할 때, 이때 하나님은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치유가 시작되고, 회복이 되고..... 그래서 모두가 살아났던 것이에요.
> 창세기 20장에는 죄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저지른 죄이지요. 반복적이고 계획적으로 죄를 저지르고 있었어요. 그러므로 그는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부어주지요. 그래서 그의 죄 된 본성을, 타락한 인간성을 녹이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자기의 죄성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요.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부어 주시는 은혜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은혜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때 드린 기도로 자기 자신도 살 수 있었고, 아내도 살 수 있었고, 아비멜렉과 그 아내, 여종까지 치료하고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아내와 여종들이 다시 아이를 생산할 수가 있었지요. 은혜였습니다. 죄가 있던 곳에 모두가 살아나서, 은혜가 넘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 요즈음 새벽 기도회에서 로마서 8장을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로마서8장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라고 그러지요. 그래서 이 로마서 8장을 "가장 큰 생명의 강", "하나님의 구원의 마스터 플랜"이라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8:1을 이렇게 시작하지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용서함을 받고 살아나요. 은혜예요. 은혜..... 그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도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은혜받고 회개하세요. 천국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특별히 십자가 앞에서 보혈의 피에 의지하여 구원의 감격을 느끼며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이 성찬식을 통해서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시고 그 은혜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서 뉘우치고 회개하며, 이 세대를 이기고, 시련, 역경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주 앞에서 승리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