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말라, 그리고 먼저 들보를 빼라
들어가는 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지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닮도록,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림 받도록 지어진 존재이지 하나님처럼 되어 하나님과 동등 되도록 지음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는 탄식하신 것처럼 최초 인간은 범죄 후 하나님 말씀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으로 행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인간은 자기와 같은 존재들을 낳았고 그 후손들도 똑 같은 존재들을 낳아 온 세상에 가득하게 했다. 그래서 세상은 제 잘난 맛에 사는 성향의 존재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인간 상위의 초월적인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기를 만든 창조자를 인정하지 않고 그 분의 율법도 무시했다.
게다가 진화론의 탄생은 창조주의 존재를 더욱 부인케 했다. 그리고 전방위로 그 진화사상은 모든 사람들에게 스며들고 교육되었다. 그래서 현 인류사는 그 진화 사상에 지배당하고 있다. 인간이 신의 자리를 꿰차려는 시도 이후로 필연적으로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이고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서로 부딪치고 갈등하는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불안전하고 미약하지만 인격적인 신적인 성품들 곧 도덕적인 성품들이 그 인간들 내면에 어느 정도 남아 있어서 미덕이나 질서가 유지되고 있지만 힘과 지혜가 지배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인간은 본성적으로 경쟁하고 싸우고 비교하고 깎아 내리려는 비판의 존재라는 것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남에 대한 우리의 판단과 비판은 어찌 보면 피부를 문질러대는 사포와도 같다. 사포를 맨살에 비며대면 그 아픔은 순간만이 아픈 것이 아니라 크고 넓게 그리고 오랜 시간 쓰리고 아프며 마지막에는 죽기까지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비판과 판단의 사포는 우리주변 사람에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님에게 행해진다는 것이다.
● 마태복음 7:1-5에 나오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판단을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왜 너희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탓하느냐? 네 눈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 속의 티를 빼주마’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줄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말씀을 토대로 비판에 대하여 탐구해보자
이 말씀에서 난해 절은 내가 비판을 했을 때 그 비판을 되갚아 줄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다. 내가 비판했던 사람일까? 아니면 하나님일까? 본문은 주어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두 가지가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 본문과 비슷한 패턴은 마태복음 6:14-15에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을 판단하는 그 잣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겠다는 것이니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
근원적인 비판의 존재가 된 뿌리에 대한 고찰
본래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계명을 지키면서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그 분 중심으로만 살아야할 귀하고 거룩한 존재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어 버렸다. 이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존재 곧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교만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그래서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간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좁힐 수 없는 본원적 간격이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창조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신이 되기를 선언해 버린 것이 인본주의 뿌리이다. 그 인본주의자들은 신이 인간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제 인간이 신으로부터의 해방되었다고 외치며 난리를 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해방이 아니라 지옥인 것은 거룩하신 창조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순간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인생은 마치 완벽한 기술과 경험을 가진 최고의 조종사 대신, 장난감 비행기를 가지고 놀던 어린 꼬마가 수백 명이 탄 여객기 핸들을 쥐고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소리치는 비행기에 탄 신세나 마찬가지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 하나님이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것처럼 인간이 자기중심으로 평가하고 비판하며 심판자의 자리에 올랐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자기가 가장 의로운 양, 자기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선악을 구분하려는 것을 가리켜서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하였다. 그게 원죄의 뿌리중의 뿌리다.
결국 자기 위주가 아니면 모두가 악이요 적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만 아니라 심지어 모든 사람들 관계에서도 나를 중심해서 살고, 나를 위주해서 살지 않으면 못 견디어 남을 적대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갈등의 관계 곧 비판의 존재가 된 것이다.
분별력(판단)과 비판의 차이에 대한 고찰
인간에게는 비판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순진함’은 아이들에게 이로운 특성이다. 하지만 이 특성을 고스란히 지닌 채 어른이 된다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아이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종합적인 판단과 비판적인 사고를 키워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문을 품는다는 것은 사고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 객관적이고 건강하게, 사랑에 기초한 건강한 평가이어야 한다.
성경적 용어로 찾자면 ‘분별’이다(요일 4:1).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바르게 분별하는 눈을 가져서 사람 자체에 판단과 어떤 사람이 다가온다면 그 사람의 의도를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비판하지 말라’고 해서 비판하지도 말고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고 무조건 따라가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무엇이든 바른 판단과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다른 책에서는 분별 곧 바른 판단을 하라는 말씀도 여러 곳에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12장 2절도 “여러분은 이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관습을 본받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생각이나 행동으로 새로워져서 딴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방법이 실제로 얼마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를 여러분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함이 아주 중요함을 가르친다.
요한계시록 2:2-3에서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무조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이나 행동을 시험해보고 분별해서 거짓 믿음의 형제, 거짓 사도들을 드러낸 것을 칭찬하셨다. 잠언 17:15에서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 남 짓누르고 착취하는 못된 자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판결을 내리거나, 바르게만 살아가려 몸부림 치는 이를 못된 음모 꾸민다고 몰아세우며 억울한 판결을 내리는 일은, 여호와께서 신물나도록 역겨워하신다.”고 했다. 이는 ‘악인은 악하다고 하고 의인은 의인이다’라고 할 수 있도록 분별있는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그 정확한 판단을 듣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설득력까지 갖추게 됨으로 충분해서 양심에 비추어 건설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분별력과 판단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에 맞게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속지 말아야 하고, 올바른 것을 취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세상의 일들도 분별과 판단을 잘 해서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하지만 특별히 우리는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 바르게 분별하여 절대로 속아서는 아니 된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구원에 관한 문제는 절대로 속아서는 안 된다. 성경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파악하고 그 핵심을 따르는 일에서만큼은 절대 양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본문의 비판이란 객관적이고 건설적인 분별에 불순물이 개입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감정 개입, 경멸이나 증오 같은 안 좋은 감정들의 개입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죄’의 개념 들어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비판은 비난을 의미한다.
‘비난’의 비(非)는 비방한다는 뜻이고, ‘난’(難)은 힐난한다는 뜻이다. 즉, 상대방의 잘못이나 결점의 어두운 쪽을 책잡아서 강조하며 나쁘게 말한다. 더 나아가서는 터무니없이 사실과 전혀 맞지 않게 헐뜯는 것을 의미한다. 악의적인 의도로 ‘비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비판은 한마디로 말해서 파괴적인 것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마치 자신이 재판관인양 함부로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비판하지 말라’의 비판은 인간이 스스로 의로운 하나님이 되었으니 서로가 높아지려는 것(교만과 지배)과 시기질투, 비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지 않겠느냐?”
■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정년퇴직한 한 부인이 모처럼 자기 집 거실에 나와서 커피도 마시고, 신문도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데, 건너편 집을 쳐다보곤 했답니다. 그런데 자기 앞집의 창문이 너무 흐릿흐릿하고 더러웠으며 선명하지도 않아보였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저 집 사람들은 참 게으르구나, 저렇게 아름다운 집에 살면서 창문이나 제대로 닦고 살지,” 하며 속으로 판단하고 흉을 보았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자녀들이 와서는 ‘집이 더럽다’며 창문, 바닥을 대청소를 하고 갔습니다. 다음 날도 거실 나와서 전과같이 커피도 마시고, 신문도 보면서 건너 집을 쳐다보았는데 이상하게 건너 집의 창문이 매우 깨끗했답니다. 집 안의 사람이 누구인지도 똑똑히 보일 정도였다. 그때 그 부인의 머리에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답니다. “아하, 내 집이 창문이 더러웠구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많이 들어본 예화지만 자기의 들보를 먼저 보라는 경고 같은 이야기이다.
왜 우리는 우리 눈의 들보를 볼 수 없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 내면의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 받았기 때문이다. 전에는 빛과 진리 가운데 있었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로 죄의 영향 아래서 우리가 어둠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들보를 먼저 보아야 하는데 거룩한 성령님의 조명아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분의 안목으로 나를 보아야 가능하다.
▶ 비판과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인간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증명 받고 싶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자기가 좀 나아보려고 사랑을 받았던 가까운 주변 사람들을 상처 주며 깎아내리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그러나 옳고 근거 있는 비판이라 할지라도,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 근본이 스스로 선악을 아는 일로 하나님 같이 되었기 때문에 항상 자기 옳고 남은 그르다는 근본 입장을 고수한다. 그리고 온갖 변명과 수단을 동원하여 옳음을 주장하다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면 급기야는 공격성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판을 잘하면 내가 옳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과 싸우는 상황을 항상 만들 뿐이다. 그리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다가 떠나버려 고아처럼 외로운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 비판의 말 때문에 본인은 평생 가슴 알이 하는 후회로, 상대는 그 비판의 말이 비수가 되어서 깊이 찌른 채 남아 있어서 그 상처가 아물었다 터졌다 하는 생을 살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인류의 죄와 어둠의 시작은 스스로를 높이고 높아지려는 마음인 교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둠의 세력과 세상의 비극은 교만에서 출발되었고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바벨탑도 인간이 더 높아지려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이기려는 데서 출발하였다. 거의 모든 죄악들이 높은 마음 곧 하나님 같이 되려는 교만에서 비롯되었다.
인간간의 서로 높아지려는 본능은 경쟁을 부추기고 그 경쟁은 비판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싸움이 되어서 스스로 멈출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어떻게 하든 이기려는 마음이 작동하면 스스로는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사람이 비교의식에 빠지면 일평생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다가 급기야는 어떤 불행한 일을 저질러 서로 비극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이 정리되어 있다.
그래서 신앙인의 눈으로 불 때도 내가 복 받고 내 자식이 잘되어야 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에게 우월해지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분은 속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구하고 추구하는 것이 나의 사적인 욕망과 우월감에 근거한 것이 아닌지 언제나 살펴야 한다. 사실 예수님께 직접 배우고 따라다녔으며, 훗날 순교의 올랐던 제자들마저도 예수님과의 마지막 성만찬에서, 장차 받으실 고난에 대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비판의 눈으로 ‘누가 높으냐?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느냐’로 다투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발을 닦는 종의 모습을 가르쳤고 서로 섬기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다.
잠언 16장 18절에서는 “교만은 파멸의 앞잡이이고 거만한 마음은 망하는 지름길이다”라 했다. 이는 교만은 하나님과 싸움이고 인간들끼리의 싸움으로 결국은 더 강자에 의해서 파멸과 망하는 지름길이 된다는 뜻이 된다.
본래 인간이란 어려서부터 태생적으로 스스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기 때문에 오직 자기중심적이며 스스로 의로운 존재라는 것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한 채 남을 비판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눅 6:41) 하셨다.
남의 죄를 잘 지적해낸다는 것은 죄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종교적일수록 율법을 배우기 때문에 언제든 남을 정죄할 수 있는 목록들이 늘어난 율법주의자가 되기 십상이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의 약점과 허물에 관해 관용보다는 비판과 정죄의 항목이 더욱더 늘어나는 것이 인간의 본성적인 모순이다. 심지어 주변인의 약점과 허물을 기억해두고 율법의 조항에 맞추어 정죄 리스트를 짜서 자신의 영향권 안에 묶어 두고 통제의 수단으로 쓰기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용하기까지 한다.
만약 신자가 성경 공부를 통해 죄를 세밀히 따질 수 있는 지식이 놀랍게 증가하는데다 율법주의 적인 비판에 빠지면 불신자의 정죄목록은 도덕적인 것 하나인데 반해, 신자들은 그것에 율법적이고 종교적 항목들까지 더 보태져서 더 비판에 능하고 원색적일 수 있다. 그 정죄 항목들은 남에게만 적용될 뿐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워 힘을 잃는다. 심지어 교회 안에선 무엇이든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그분이 싫어한다는 말만 더 붙이면 아주 쉽게 정죄되어 버리는 것이 우리들 간의 서로 아픔이다.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 약점을 가리고 거짓된 속마음을 감추려는 위선과 자기 이익과 영광과 존귀만을 얻으려는 욕망 때문에 먼저 공격적인 비난을 통해 의인이 되려는 함정에 빠져버린다.
그래서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고 하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거나 감추고 남의 티만 보는 위선자이다. 그리고 그 위선적인 비판은 자기 의와 자기 이익을 수반한다.
남을 비판하고 험담을 잘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거나 아니면 남의 티가 들보처럼 커 보이는 영적인 시각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기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숨기기 위해서 남의 눈에 있는 조그마한 티를 가지고 공격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별것 아닌데 너무 지나치게 공격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의 문제를 감춘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으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비판한다면 이것은 자기 모순중의 모순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을 안고 일생 살아간다면 그 인격이 건강할 수가 없고, 그 주변 사람이 얼마나 힘들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는 마침내 인격판자, 인격 장애자(personality disorder)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종류의 사람이 되지 말라는 메시지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형식의 틀을 내세워 그것에 합당하지 않은 상태의 뛰어난 사람에 대해 맹비난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자신은 형식의 틀 속에 안전하게 숨겨 놓고 그 형식에 담기지 않는 사람을 비방하여 자신이 보다 우월하거나 옳음을 입증하려 한다. 이 형식의 틀은 율법주의다.
혹은 어떤 교리나 신조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 이것들은 내용을 담기 위한 형식이었지만 내용은 시간에 따라서, 깨달음에 따라서, 환경에 의한 필요에 의해서도 변하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하고 첨가되기 한다. 그러면 그것을 담는 그릇 혹은 형식도 유연하게 변하는 것이 생명원리이다. 생명이 성장하면 모양이 변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분별력을 통한 토의 과정 없이 위선자는 이미 형식화된 틀 속에서 재단하거나 정죄의 칼로 자르는 등 판단과 비난의 공격부터 한다. 그리고 그 형식의 틀에 지원받은 판단은 비난이란 무기로 무례히 행한다.
‘위선’의 어원적인 뜻은 ‘그리스 희곡에서 무대에 서는 사람’인 ‘배우’를 가리킨다. 원어의 의미를 살피면 ‘위선’은 ‘실제와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도 거짓의 가치가 치솟고 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왜곡된 삶을 부추긴다. 위선은 실제로 품고 있는 마음과 전혀 다른 행동으로 성경은 ‘믿음이 없다’고까지 표현한다(눅 12:41-48).
외식 혹은 위선의 근본원인은 가장 의로운 자, 가장 거룩한 자로 위장하여 존경과 대우를 받고 남들보다 의와 도덕적인 측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그 자리를 유지하려는 시도이다. 자기 약점이나 이기적인 측면들을 가리고 남들에게 좋은 것만 보이려는 시도들이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유지하면 품위로 나타나지만 말이다. 지나치면 겉치레 곧 허세가 된다.
위선을 정리하면 ‘믿음과 진정한 마음이 담겨있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대단한 존재로 드러내고자 거짓된 형식을 스스럼없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위선자는 자기 영광과 이익을 위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이용하고 도구화한다.
▶ 공교롭게도 예수님께서 책망과 정죄를 받을 사람으로 선포하신 사람은 살인자, 간음한 자, 강도, 도적은 불신자가 아니라 다름 아닌 ‘종교적 지도자들의 위선’이었다. 그들은 가장 더럽고 용서 못할 위선자로 예수님께 심판을 받았다. 그들의 위선은 진실이 없이 기도를 길게 하는 가식으로 남에게 훌륭한 신앙인처럼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런 위선으로 신앙과 경건의 존경을 백성들로부터 받고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했다. 그들은 자신이 믿지 않는 진리를 도구삼아 모든 사람을 현혹하고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는 경건한 신앙인처럼 거짓 기도를 하였다. 남의 가슴에 한을 맺히게 하고, 이득을 취하면서 의로운 자처럼 행했다. 오랫동안 금식함을 위장하고 오랜 동 정기적으로 광장에서 기도하는 종교적 경건을 드러내어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얻어 하나님을 역겹게 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천국 문을 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서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돌아다니다가, 얻으면 너희 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고발하셨다. 그러나 이들의 더 큰 죄는 그들의 율법주의 형식의 틀 속에서 예수님의 구원 곧 생명의 역사를 비판하고 단죄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이라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다(막 3:4).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위선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생명역사를 감당할 방법이 없자 시기와 질투, 종교권력의 이득과 영광을 유지하기 위하여 율법중의 틀 속에서 신성모독죄와 성전 모독죄로 비판하고 고발하였다. 사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설치해놓은 정죄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은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것이 율법주의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하여 율법이 도구화된 예들이다.
갈 6:7 /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무시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렘 17:10 / 인간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자는 바로 나 여호와이다! 인간이 아무리 깊은 소원을 품더라도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행동한 것에 따라 그대로 갚아 주는 자가 바로 나 여호와이다.
아더 핑크의 설교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이유를 몇 가지로 잘 설명을 했다.
❶ 주제넘은 참견으로 비판 /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여서 자기 자신이 재판관이나 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을 잘 아는 것처럼 비판을 한다는 것이다.
❷ 추정에 근거를 두고 비판 /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떠도는 소문만 듣고 마치 실제로 일어난 일인 것처럼 비판을 한다는 것이다.
❸ 위선적으로 비판 / 자기 자신도 사실은 그 보다 못하면서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은 좋은 사람인 것처럼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❹ 성급하거나 분별없이 비판 / 비판을 할 때는 정말 그런 지를 잘 알아보고 바른 판단을 하고 비판을 하여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할 때 성급하게 분별도 하지 않고 비판을 한다는 것이다.
❺ 부당하게 비판 / 성경에는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해야 할 일들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성경에는 언급되지 않은 일들도 많다. 하나님의 말씀에 언급되지 않은 일들을 가지고 비판하는 것을 부당한 비판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도 금하지 않으신 일들을 사람이 금하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❻ 불공정하게 비판 /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무시하고 자기의 생각을 앞세워서 판단을 하고 비판을 한다. 사람들마다 자기의 저울이 있다. 자기가 생각하는 도덕과 양심이 있다. 그 도덕과 양심에 의해서 비판을 하지만 사실은 그 양심의 자가 고장이 났거나 맞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의 고장 난 저울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재어보고 비판하는 것은 불공정한 비판이 된다는 것이다.
❼ 무자비하게 비판 / 다른 사람이 잘못한 일이 보이더라도 거기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그 일을 대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잘못에는 무자비하다. 자기가 잘못한 일에는 관대하지만 남이 잘못하면 아주 엄격하게 법대로 처리하려고 한다. 이렇게 남을 비판하는 일에는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함정들이 많이 있다.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지도자들에게 큰 덕목이다.
비판의 말은 보이지 않는 찌른 창 혹은 쏜 화살과도 같다.
그 화살은 저 멀리 날아가서 상대방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나중에는 자신의 가슴에도 머무르게 된다. 그래서 되도록 말이라는 것은 지혜롭고 현명하게 잘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말하지 않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침묵은 금이라고 하는 것이다. 입에서 쏟아지는 비난은 듣기만 해도 속이 상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다. 이 비난의 말이라는 것은 한번 내 뱉으면 영원히 주워 담을 수 없다. 인간관계에서 대부분의 문제는 사소한 말실수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직장상사의 분노의 말 몇 마디가 상대의 하루를 불행하게 만들거나, 남편의 생각 없는 말들이 아내의 가슴을 멍들게 한다. 말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고통을 모르고 자연스럽게 말을 하겠지만, 듣는 당사자는 그 한마디 때문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진심으로 하는 조언은 상대방의 가슴에 치유하지만 아니 그것조차도 상대방이 받을 준비가 안되었으면 상대는 가슴앓이를 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충고도 조언도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인 것 같다. 그러니 상대방을 바꾸려고 애를 쓰는 순간부터 상태방의 마음에 들지 않는 태도 때문에 비난과 독설의 화살을 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어렵고 말이 온전한 자가 없다고 야고보는 말한다.
비판은 심리학적인 측면서 보면 경쟁과 비교의식에서 온 그 사람 안에 있는 지독한 열등감 때문
남에게 상처 주는 말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겠지만, 기본적인 심리는 그 사람 안에 지독한 열등감 때문이다. 이는 내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남과 비교하여 심한 열등감을 느낄 때 내적으로 우울증, 강박증, 대인공포, 대인기피. 공포, 불안, 정신분열증, 은둔형 외톨이, 중독 등등으로 나타나는데 외적으로 표출될 때는 심한 공격성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비판 곧 비난이다.
남에게 상처를 잘 주는 사람은 그만큼 스스로 상처받지 않으려는 심리가 다분하다. 그래서 먼저 선제공격을 함으로 자신의 심리적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열등감이라는 것은 결국은 상대방에게 공격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한 사람의 심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의 말을 잘 들어보면 알 수가 있다. 상대방에게 화를 잘 내는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마음속에 분노가 많다는 반증이다. 상처 주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은 마음속의 상처가 많다는 것이 된다. 타인을 자주 비난하는 사람은 마음속에서 스스로 자기를 비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내적 분열도 없다면 더욱 절망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타인을 자꾸 무시하는 사람은 그만큼 내면의 열등감이 많다는 것을 반증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의 거울에서 투영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심리를 알지 못하고 자꾸 타인에게 그런 심리를 투사하게 된다. 요즘 세상에서는 마치 화를 잘 내고 카리스마 있는 것처럼 자기식대로 하는 것이 강한 사람인양 비춰지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강할 뿐 실제 내면의 아주 유약한 마음일 뿐이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크게 반응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지켜보는 사람이다. 우리는 작은 일들을 죽을 일처럼 지나치게 반응하기 때문에 사소한 감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우울하고 열등감에 빠진 마음의 거울은 내 의지와 상관없는 부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연결이 되었다.
비판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자의 내적인 상태와 고통, 그리고 육신의 병에 대한 고찰
사실 내가 고통스러운만큼 상대 또한 고통스러울 것이다. 특히 내가 비난으로 공격하는 대상이 사랑하는 가족이라면 더더욱 슬픈 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 남이 나를 먼저 이해해주기를 바라기보다는 내가 먼저 이해를 해주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다. 상처를 주고받으면 자신의 삶만 괴로워질 뿐이다.
남에 대한 비판은 내적으로 허무감에 시달리게 된다. 스스로의 품격마저 떨어져 자존감은 무너지고 더 깊은 열등감에 시달리게 된다. 비판은 할 때는 승리한 것 같지만 곧 두려움과 공포감에 불안해진다.
입술의 범죄는 누워서 침 뱉기와 같다. 누워서 하늘을 향해 침 뱉으면 곧 자기 얼굴로 떨어지지 때문이다. 특히 비판하는 사람은 그 비판으로부터 오는 정신과 몸의 황폐화를 경험한다. 비판은 그 순간부터 내적인 악향을 주어서 육체적 아픔까지 수반되기도 한다.
즉 내면의 불안정한 혼돈은 육체에 영향을 주어서 뇌내 호르몬 분비가 불규칙하게 되고 이런 악영향이 다시 내면의 상처를 더욱 더 깊게 만들어 서로 악영향을 끼치는 상승효과를 가져오게 한다. 긴 시간이 지면 면역력이 떨어져 암에 걸리거나 각종 면역계통의 병에 시달리는 원인을 제공한다.
지금은 모든 병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데에는 의사들도 동의한다. 마음 곧 정신적, 정서적 과정이 신체 곧 생리적 기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제에 기초하며, 심리상태와 정신의학적 치료 사이, 생리학과 병태생리 과정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통합의학의 분야가 요즘은 대세다. 어떤 증후군이란 병명이 붙은 것만 보아도 벌써 심적인 병인 것이다.
예를 들면 스트레스 상태에서는 교감신경계가 강화되어 혈압, 맥박수가 증가하고 호흡 및 근육긴장도가 증가한다. 즉 긴장, 불안 상태인 것인데,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결국 몸의 면역체계를 저하시키고 다양한 질병 및 신체증상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부교감 신경이 작동해야 쉼이 있고 잠도 자고 회복이 가능하다. 교감 부교감은 순전히 정신의 지배를 받는 영역이다. 비판, 비난, 비방, 증오심, 분노 등등의 형태는 먼저 자신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찌른 후예야 남을 공격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쉽게 불치에 병이 든다.
따라서 의학계에서는 예방이나 치료는 이러한 정신적, 심리적, 생리적 상태를 변화시켜 이완 상태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특별한 치료는 부교감신경계를 강화하여 혈압, 맥박수를 떨어트리고 호흡 및 근육긴장도를 감소시켜 결국 휴식 및 안정 상태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주기도문에서의 용서와 사랑 그리고 관용이라는 하늘의 의학적인 치료가 있다.
성령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나를 지배하게 하자
들보를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비판을 할 줄 모르고 남만을 비판만 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래서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 미국 어떤 마을의 제빵업자가 가까운 농장에서 버터를 사오곤 했는데 버터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어 갔다. 하루는 그 사온 버터를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 보았더니 그 버터의 무게가 많이 줄어 있었다. 화가 치민 제빵업자는 버터 공장 주인을 고발해 버렸다. 그 버터 공장 주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판사는 먼저 저울의 정확성을 위해서 그 피고인에게 집에서 어떤 저울을 사용하는 물었다. 그러자 그 피고는 저울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떻게 버터의 무게를 아는가를 묻자 “저 원고의 1파운드 짜리 빵의 무게와 같게 만들어 판다.”고 하였다. 결국 버터의 양이 줄어든 이유는 제빵업자의 빵이 줄었기 때문임이 밝혀진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 가운데 하나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절제하게 하신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주하시어서 우리의 말과 혀를 통제한다. 나도 모르게 형제를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도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나의 혀를 주장하셔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신다. 성령은 먼저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우리 마음속에 계속 일으켜준다. 사람치고 약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비판 받지 아니할 만큼 온전한 사람이 천하에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완벽하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다 허물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부족하고 허물 많은 죄인으로 불쌍히 여겨야 한다. 예수님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칭찬으로 대접하면 칭찬이 도로 온다는 황금률(비난보다 칭찬을 먼저 하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칭찬으로 대접하면 칭찬이 도로 온다는 황금률이다. 자기는 더 많이 잘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조그마한 잘못과 실수만 찾아내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바르지 못하다.
■ 어떤 사람이 담장 밑에 채소를 심었다. 그런데 옆집 나뭇가지가 담장을 넘어와서 그늘을 만들어 채소가 잘 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옆집 주인에게 담장을 넘어 온 가지를 잘라 달라고 요구했으나 미관상 자를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국 재판장에게 가서 판결해 달라고 했다. 재판장은 두 사람 말을 듣더니 내일 판결을 내리겠다고 했다. 다음날 재판장은 나뭇가지를 자르라고 판결했다. 사람들이 재판장에게 왜 판결을 하루를 늦췄냐고 물었을 때 재판장은 우리 집 나뭇가지가 옆집에 넘어가 있는 것이 생각나서 먼저 그 가지를 먼저 자르고 나서 지금 판결한 것이라고 했다.
사실 따져보면 나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실수를 하고, 다른 사람과 동일한 허물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진실을 진실 되게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우리가 겪는 모든 것에 판단을 하나님께 맡길 때에 우리에게 행복이 있다. 우리의 잘 잘못조차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살아나갈 때에 우리의 심령 속에 평안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들은 남을 비판하고 비난 하면서 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사랑하고, 용납하면서 살아가야한다. 비판하기 보다는 좋은 점을 보고 칭찬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적극적으로 남의 좋은 점을 보고 말로 칭찬하는 눈을 가져야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 단점은 덮어두고 장점으로 보고 칭찬을 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으시고 우리의 잘한 점만 보시고 칭찬을 해 주신다는 것이다.
맺는 말
이제 자기 사랑에서 하나님을 사랑 눈으로 바뀌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29-30) 하셨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 때 본래 하나님이 원하신 삶의 회복으로의 길이다. 인간은 의롭지 못하다. 오직 하나님의 의만 절대 희망이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갈 선이나 능력이 없다. 그래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낮아지시고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여 우리를 구속의 은총으로 품으셨다.
시 103:8-14 / 안쓰러운 것 보시면 마음 아파 어쩔 줄 몰라 하시어 가슴에 꼭 품어 주며 아껴 주시는 분 어찌하든 잘해 주고 싶어 늘 너그럽게 대해 주시는 분 여호와,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고 한결같이 따스하게 아껴 주시는 주님. 9) 언제나 꾸짖기만 하지 않으신다. 영영 화를 내지만 10) 우리가 죄를 지었다 하여 그 죄 따라 벌을 내리지도 않으시며 우리에게 허물이 있다 하여 그 허물 따라 그대로 갚지도 않으신다. 11) 땅 위에서 하늘이 높고 높은 것처럼 한결같이 따스히 아껴 주시는 주님의 사랑 주님 모시고 사는 이들에게 한이 없으니 12) 동녘이 서녘에서 한없이 멀듯이 주께서는 우리가 지은 허물을 우리에게서 멀리 옮겨 주신다. 13) 어미가 자식을 따뜻하게 감싸주듯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모시고 사는 이들을 감싸주신다. 14)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주께서는 알고 계신다. 우리가 한낱 티끌에 불과한 줄을 그분은 기억하신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서로 비판하는 것과 달리 인간의 죄악을 이미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옮기셨다. 그 죄과를 기억치 않고 오히려 인간의 체질이 진토임을 기억하셨다. 인간은 유한한 진토인 존재이다. 지식의 한계, 판단력의 한계, 사실(fact)을 아는 것의 한계, 이해력의 한계, 통찰하는 것의 한계 등 때문에 진정 판단자, 비판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진토라는 것부터 깨달아야 한다.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바로 설 수 없음부터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이를 대할 때, 그의 있는 그대로 모습을 두고 볼 줄 알 아는 온전한 인내가 있어야 한다. 허물, 약점, 잘못, 죄악 모두가 그 사람과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에서만 해결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자기가 죽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거룩한 자가 된다. 매일 매순간 십자가에서 죽어야 주님이 내 안에 주인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고 탄식하신 말씀이 본성이 되었지만 이제 그것을 완전히 지우려면 먼저 골 2:12-15절의 말씀을 마음과 생각에 새겨야 하겠다.
골 2:12-15 / 여러분은 침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그 믿음으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13) 여러분이 전에는 죄에 가득 찬 욕망을 끊어 버리지 못해 죄 가운데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14) 여러분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사실을 기록한 명세서를 지워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목을 적은 명세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아 무효로 만드셨습니다. 15)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고발하는 사단의 세력을 꺾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없애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깊은 기도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들로 채워야 한다. 이러한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 되고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서 남과 비교하는 우열감으로 지독한 열등감에 빠져 자기중심적이고 비판하고, 비방하는 공격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