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포럼 제36강 거룩의 관점에서 본 완숙한 성결인 요셉의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성장하는 거룩한 자존감과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증명된 거룩함의 자존감, 그리고 인문학적인 면에서 본 그의 탁월한 자존감 (창 39장 1-23; 40장 6-8,23; 41장 29-55)
들어가는 말
자존심이란?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을 말한다. 그 품위의 기준은 자기의 가치관에 따라 정해진다고 한다. 이는 다른 사람과 비교를 통해 자신을 인정하려는 마음이다. 예를 들어 한 학생이 시험에서 A+점을 받았을 때, 혼자만 A+을 받았을 때는 자존심이 살아나는 반면, 여럿이 A+점을 받아 기분이 별로라면 바로 자존심이 강한 학생이다. 이렇게 자존심은 외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주변과 비교되어지면서 스스로 가지는 마음을 말한다. 때문에 자존심은 자신보다 높은 수준을 만나면 자신이 비참해 지기도 하고, 자신보다 낮은 수준을 만나면 우쭐해지며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는 것이다.
자부심이란? 자부심은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에 의한 성과를 통해 생겨나는 긍정적 자의식을 말한다. 어떤 대회의 상 획득이나 어려운 일의 성취 등으로 외부에 드러나는 성공을 했을 때나 원하는 목표를 이루었을 때 경험할 수 있는 기쁜 감정이다. 이러한 자부심은 지속성을 갖기보다 어떤 것을 이루었을 때 주변 사람들의 칭찬과 성취감을 통해 생기는 일시적인 만족감이라는 특징이 있다.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 영어: self-esteem) 곧 자존감이란 무엇일까? 자존감은 우리의 판단, 감정, 욕구, 가치, 목적,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자존감은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존감을 높이고 자존감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하며 자존감이 자신의 행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인식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이는 또한 ‘가치’와 관련이 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전 우주를 통틀어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을 유일하고 고유한 존재로 자아가 스스로 그렇게 여기는 마음이다. 그래서 무한한 지적 잠재성과 재능을 지닌, 성스럽고 고유하고 개별적인 존재이며, 다른 이들과 마음껏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소중한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 것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듯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치, 즉 "자아가치"이다.
물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부정적인 면, 약점을 모두 인식하고 받아들일 줄 안다. 이처럼 실패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극복해나가는 게 자존감 높은 사람들의 특징이다. 또한 스스로 겸허하게 상대방의 독선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넉넉함이 있다.
마치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는 작은 웅덩이와 넓은 호수에 비유할 수 있다. 작은 웅덩이의 물은 외부의 자극, 즉 돌을 던지면 물이 사방으로 튄다. 그러나 큰 호수에 돌을 던지면 아름다운 파장만 퍼져나갈 뿐이다. 이렇게 자신의 존재가치의 인식 정도가 이처럼 존재의 깊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이 말이다.
낮은 자존감이 고착화된 성인 아이란? 그러나 그런 낮은 자존감은 불가항력적인 처지에서 주위의 사람들과 환경에 의해서 형성되게 한다. 특히 부모와의 관계는 자아상이 만들어지지 전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 감정은 곧 아이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감정으로 연결된다.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성인들의 공통적 감정과 행동들은 보통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과 행동들이 동일하게 나타나는 성인 아이들이다. 성인아이는 해소되지 않은 어린 시절의 문제를 성인이 된 지금에도 어린아이 방식으로 행동하고 처신한다. 성인아이는 심하면 중독자(알코올, 도박, 섹스, 폭력, 도벽, 등)를 낳는다.
특히 분노는 왜곡된 자아를 형성시켜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도록 한다. 분노와 미움은 모든 관계를 파괴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분노로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실망과 좌절에 의한 낮은 자존감으로 생활 패턴이 바뀌기도 한다. 또 낮은 자존감은 지나친 완벽주의와 예민 반응을 일으켜 삶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죄의식, 죄책감에 대한 수치감을 느끼게 한다. 이는 깨진 거울로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거룩함의 자존감과 거룩한 자존감이란? 그 용어를 붙인 나의 이해와 이유 거룩함의 자존감과 거룩한 자존감이라는 용어는 심리학에서 가져와 신학용어화 한 것이다. 옥한흠 목사의 저서 ‘그리스도의인의 자존심’에서 이 두 용어의 개념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 두 용어의 공통점은 우주가운데 나와 거룩하신 분과의 일대일 관계에서 오는 자존감이다. 먼저 거룩함의 자존감이라는 용어다. 그 용어는 거룩한 분이 내안에 거하신다는 자존감 즉 내가 거룩한 성전이라는 자존감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또 하나는 거룩한 자존감이라는 용어다. 그것은 내가 신분과 존재의 변화, 성품의 변화 곧 인간 본래의 회복을 뜻하는 하나님의 형상화요, 그리스도의 형상화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곧 그분의 황태자의 정신과 의식으로 말하며 행동하고 그리고 그런 품격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해본다. 그렇다고 군림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의미한다.
비록 거룩의 형상을 잃고 타락한 인간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하나님 앞에서 인간 가치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더욱 하나님 사랑을 받고 있는 가치 있는 존재다.
창조 시 인간은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사랑의 빛이 언제나 인간 내면에 가득했고 그래서 인간은 거룩한 자존감으로 충만했다.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 보시기에도 심히 좋은 존재요 인간 존재 자체가 스스로 만족이요 행복이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의 형상으로 완전하게 창조되어 서로 닮은 존재라 교제의 상태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로 당신의 형상을 닮은 아들을 낳았다는 의미이다. 그 하나님의 아들인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었다. 그리고 생명나무가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의존된 영생의 존재이었다. 삶의 활력은 충만했고 그가 사는 환경은 에덴낙원이었다. 그곳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있는 곳으로 단 하나의 계명만 경외와 사랑으로 순종하면 되었다. 그 인간은 모든 것에 자유로운 존재이면서 스스로 행한 모든 것에 책임을 지는 존재였다. 만물의 모든 것을 알고 그 만물 속에 있는 생명의 존재들을 알고 관리 통치하는 존재였다. 사랑하는 배필이 있어서 항상 행복했다. 그래서 그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예배였고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선한 창조 목적이 깃든 거룩하신 분의 형상 곧 그분의 아들로서의 자존감,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통치와 만족감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런데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는 욕망은 그 거룩하신 아버지로부터 오는 거룩의 통로를 단절하게 하는 죄를 범하여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고 죄가 인간 내면과 세상에 들어왔다. 범죄로 인해 거룩하신 분과의 단절, 거룩함을 상실한 인간은 거룩함 앞에 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었다. 추한 자신만을 보고 영원성을 상실한 채 죽음의 존재가 된 자신을 보며 절망해야했다.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은 그분의 품안에서의 거룩한 자아 상실을 가져왔고 그 결과 그는 숨는 존재 곧 부끄럼으로 무화과나무로 가리는 행위를 하게 되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거룩한 형상의 상실이다. 그래서 심적으로 거룩한 자존감의 상실감이 밀려왔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거룩한 여호와의 사랑의 음성이 이제는 두려움과 부끄럼의 음성으로 바뀌어 들렸다. 그래서 에덴 동산나무 숲에 숨었다. 인간과 인간끼리도 서로 수치감을 느끼는 관계가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의 형상을 잃자 본래적인 사명도 잃고 영원한 생명도 잃었다. 그런 인간은 모든 것을 잃고 가인과 같이 유리방황하게 되었다. 인간의 내면도 죄악성 곧 부패성이 들어오고 창조 시 주어진 인간의 자연적인 욕구들이 이제는 그 부패성에 뿌리를 두기 시작했다. 하나님 앞에 분리를 선언한 인간은 스스로 서야하기 때문에 모든 것과 대치관계 있어서 불신, 불만, 불순종이 시작되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열등감, 분노, 시기 질투, 온갖 스트레스와 자기 분열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에덴을 쫓겨난 인간은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부만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사라져갔다. 세월이가고 세대가 갈수록 인간에게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사라져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다. 비록 그들이 최초의 사람이 하나님 품 안에서 지닌 거룩성, 도덕성, 영속성, 탁월성, 그리고 능력 면에서 비하면 조족지혈이지만 여전히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았던 요소와 기능은 그대로 작동하는 귀한 존재이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가치 면에서는 똑 같았다.
또한 거룩한 영적인 질서는 깨졌지만 여전히 창조의 질서는 한 치의 어김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다.
여기 인간이 낳고 죽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후에 창조질서가 되었다. 그래서 자녀를 낳는 것은 창조행위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인간의 신분이 죄인이었으며 그 인간의 후손도 동일한 취급을 받았고 내면도 그대로 유전되었다.
출생은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물려받아 태어난다. 비록 그것이 아담 자신의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후손을 온 땅에 ‘생육 번성하라’는 명령이기는 하나 이제는 각자의 자신을 닮은 후손을 낳으라는 창조행위로 연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기를 낳은 부모는 하나님의 창조의 대행자이며 그 아기를 키우고 사랑하는 부모는 하나님 사랑을 대신행하는 결과를 낳는다.
인류 심판의 노아 홍수에도 노아의 여덟 식구가 있었던 것처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 같은 세상에서도 여전히 일부는 여자의 후손 구세주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류가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인류의 구속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거룩을 상실한 추한 인간 곧 죄악 된 인간이 거룩한 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속죄의 피 곧 장차 구세주의 속죄를 의미하는 피의 예배이다. 피의 예배 곧 속죄를 통해서 거룩해진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해진다. 그런 교제의 관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그의 언약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구세주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한 사람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그의 아들 이삭으로 , 이삭은 그의 아들 야곱으로 이어지고, 야곱은 12 아들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12 아들을 믿음의 조상들로 세우는 것을 요셉이 완성 시킨다.
요셉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했던 거룩함의 자존감이 충만하고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인간실존의 자존감이 탁월한 자이었다.
본론 탐구하기
첫째, 소년 요셉의 복잡하고 척박한 가정환경이 거룩함과 탁월한 자아존중감의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인간은 악한 영향에 쉽게 영향을 받고 그것들이 내면화되기 십상이다. 그런 경우가 야곱의 아들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야곱의 아들들이 자라서 혈기 방자한 젊은이로 성장하였을 때, 그들이 아버지의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본 받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열매를 맺어 현실에서 심각한 결점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아버지 야곱의 부정적인 영향들은 아들들의 품성과 생애에 쓰라린 결과를 가져오도록 한 나쁜 열매들을 맺었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일부다처주의 폐해로는 아내들의 남편을 독차지하려는 사랑의 욕망은 결코 다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의 시기질투도 끝없이 일어나고 언제나 사랑을 더 얻기 위한 경쟁은 끝없는 마찰을 일으켰다. 그녀들의 남편독차지 경쟁의 한이 아들 낳기 싸움과 그 아들의 이름 짖기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래서 가정 분위기는 밝을 때보다 어둘 때가 대부분이었다. 자연적으로 배다른 아이들은 서로 생모 편에 서서 빈번하게 싸우고 때로 패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들은 제제를 받을 때 마다 쉽게 분노하는 성격이 형성되어 갔고 폭력성을 띠면서 성장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생애는 가족사로 인하여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근심과 염려로 얼룩져 있었다. 그런 아들들의 속이는 습성과 폭력성은 여동생 디나가 세겜성에서 성주의 아들에게 강간당한 것에 드러났다 그것은 그들의 통혼 요청에 거짓으로 약속하고 통혼하려면 그곳의 모든 남자는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고 하여 할례 중 고통이 최고조에 달할 때에 급습하여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 것에서 우리는 그들의 살인 놀이에 놀란다. 유다는 창녀를 찾아 성욕을 해소한 것이 결국 며느리와 몸 섞는 결과가 되어 후손들을 낳는다.
반면 어린 요셉은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으로 라헬이 세상을 떠남으로 친어머니 없이 그 복잡한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형들보다 더 성격이 삐뚤어지고 매사에 부정적 운명론자가 되기 쉬웠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어머니의 밝고 긍정적인 요소만을 어어 받은 특별한 자로 자랐다. 이런 그의 태어남과 자라남은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신비의 영역이다.
요셉은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어떤 유산을 받았을까?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지독하게 사랑했던 라헬과의 사이에서 얻은 열매이다. 훗날 라헬의 자녀 베냐민을 다른 10 아들보다 더 귀히 여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야곱이 네 아내 중 진정 사랑하고 연애한 여인은 라헬이다. 라헬을 위해서 7년을 머슴살이하는데 수일 같이 여겼으며 또 칠년을 더하는데도 그러했다. 게다가 라헬은 결혼 후 수년이 지나도 아이를 잉태치 못하는 세월을 보내다가 여종을 첩으로 준 후, 세월이 지난 후에 요셉을 낳았는데 무려 11번째 아이였다. 그러니 요셉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얼마나 귀하게 여겼을까? 얼마나 금이야 옥이야 했을까? 야곱이 요셉을 더욱 귀하게 여기고 특별하게 여기었던 것은 라헬의 베냐민 난산 후 죽음이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벧엘에서 에브랏(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서 막내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으로 죽었다(창35:16~18). 아버지 야곱은 라헬을 생각하는 마음과, 그녀에 대한 못다한 사랑을 그녀의 소생 요셉과 베냐민에게 쏟았던 것 같다.
그래서 요셉은 친어머니가 죽은 후에 아버지에게 더욱 밀착되었고 그의 아버지는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밀착되게 사랑하였다. 그런데 야곱의 요셉에 대한 극한 사랑은 편애로 비치비칠 만큼 다른 아들들의 눈에 띠일 정도로 드러났다. 그러한 모습은 나머지 형제들을 계속 자극해 왔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였고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요셉을 위해 특별한 채색 옷을 지어 입혔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요셉에 대한 편애 증거가 되었고 다른 형제들과 구별하는 표식이 되어버렸다.
여러 장식이 달린 그 화려한 채색 옷은 붉은 색 계통의 물감들로 물들인 알록달록한 옷으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였다. 그것은 값도 비싸 고귀한 신분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주로 입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채색 옷은 요셉이 형제들 중 가장 존귀한 자로 인정하는 것이 되어 장자를 제쳐놓고 그 장자권을 라헬의 아들 요셉에게 주려고 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스라엘이라 칭함 받은 이후 온전한 성결인 이라 칭함 받아도 부족함이 없었던 야곱일지라도 그러한 편애는 여전히 미숙한 아버지 역할이 되고 말았다. 그런 그의 미숙한 아버지 역할은 가족관계의 불화의 원인이 되었고 그것은 점점 더 확대되어 갔다. 인생의 말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버지로서의 미숙한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참 놀랍다! 야곱 자신이 어린 시절 에서를 편애하던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해 저지른 잘못으로 형의 복수를 피해 도망하여 인생의 황금기를 광야에서 유랑하며 보냈는데, 그 자신이 지금 똑같은 편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야곱의 극심한 편애는 다른 자녀들로 하여금 요셉을 미워하게 만드는 분명한 원인이 되고도 남았다.
여기에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할 만큼의 아름다운 품성과 총명함을 지녔다. 보기 만해도 마음을 주고 싶은 매력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요셉이 더 특별해지고 탁월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자장이나 귀인이 입는 긴 채색옷을 입혔다. 그리고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요셉은 아버지의 예배 생활을 배웠고 이스라엘의 아버지를 배웠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배웠다. 지난날의 아버지의 삶의 여정과 벧엘의 하나님의 인도를 배웠다. 언약의 하나님의 거룩성과 그 언약의 신실성 등을 배웠을 것이다.
이런 부모의 지독한 사랑 때문에 요셉은 어린 아이에도 청소년기에도 이 세상에 존재해야할 이유인 자아존중감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음이 감지된다. 부모 앞에서 자기는 절대 필요한 존재이며 사랑받을 귀한 존재였다.
항상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듯 일어서고 걷는 아버지에게 요셉은 애처롭고 궁금해서 묻고 했을 것이다. 그 때마다 아버지 야곱은 그 이유를 설명하곤 했을 것이다. 야곱에서 절름발이 이스라엘로 칭함 받기까지의 인생여정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을 하곤 했을 것인데 거기서 요셉은 이스라엘이 주어진 내력과 뜻, 그리고 이스라엘의 거룩신앙을 충분히 듣고 배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요셉은 아버지의 긍정적인 면인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과 거룩함의 복을 받을 때까지 결코 멈춤 없는 열망과 끈기, 그리고 삶의 아름다운 추구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측면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고난을 견디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겨룸에서 환도 뼈가 부러지기까지 꺾이지 않는 근성과 그 환도 뼈가 부러져서 더 이상 싸울 수 없는데도 결코 싸움의 샅바를 놓지 않고 매달려 하나님을 이긴 모습이다. 그는 변화된 아버지 이스라엘의 하늘의 품성만을 닮은 자로 자라가 그의 성품과 성격은 정직하고 구김살 없이 거룩함의 신앙인으로 자라갔을 것이다. 또한 그는 온유하고 아름다운 성품의 소유자로 그의 내면은 진실함과 순수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어린 요셉은 외모까지 아름다웠는데 훗날 청년의 때에 한마디로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창 39:6).라고 묘사했다.
다른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와 달리 요셉은 요셉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나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요셉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나 스토리는 요셉의 일상에 있었던 것으로 이미 전제 된 상태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오직 요셉과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 동행하는 것, 계시하셨던 것만이 기록되었다.
이렇게 요셉은 거룩함의 자존감과 거룩한 자존감은 하늘에 닿을 듯이 높아만 갔다. 그러니 그러한 요셉의 모습은 다른 형제들에게 극명한 차이로 다가와 그들은 본능적으로 시기와 질투를 느꼈다. 그리고 그들의 시기심은 미움과 증오심을 낳았고 미움과 증오심은 자라서 결국 그들 마음속에도 가인의 동생 아벨을 죽였던 살인의 추억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둘째, 요셉의 높은 거룩함의 자존감과 자기 존중감의 역작용 혹은 부작용
그것은 형들이 아버지의 양떼를 돌보는 중에 저지른 잘못(허물)을 아버지에게 수시로 알리면서 나눈 대화들 그리고 그것들을 알아차린 형들의 반응이다.
요셉과 함께 양을 쳤던 형들은 레아의 몸종이었던 빌하의 소생인 갓과 아셀, 그리고 라헬의 몸종이었던 빌하의 소생인 단과 납달리였다. 야곱이 요셉을 시켜 이들 형들과 함께 양을 돌보게 한 것은 이 아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어느 정도 짐작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듯, 혹은 아버지의 요청으로 요셉은 형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아버지에게 그대로 보고해 왔다. 본문 말씀은 형들이 잘못한 일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먼저 아버지의 재산을 축내면서까지 방탕한 생활에 빠진 것 같은 잘못을 암시한다. 그것은 아버지에게나 형들에게나 결코 유익하지 않은 일들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이런 아버지의 사랑을 형제들을 의식해서 적절히 행동을 취하거나 아버지에게 사랑과 관심의 조절을 요구할 줄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상태이었다.
요셉은 형들의 죄 짓는 집단행동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많은 이들이 혹은 수많은 역본은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일일이 알린 것을 고자질로 번역했으나 실재로는 미운 형들에 대한 고자질은 아닐 것이다. 즉 형들에 대한 미움이나 경쟁심, 혹은 모함에서 비롯된 고자질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형들의 과실을 바로 잡으려는 의도로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여 아버지의 훈계로 형들의 악행이 멈추기를 원했을 것이라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즉 실제적으로 아버지의 권위로 그들의 악한 행실을 멈추고 이스라엘의 자녀다운 신분에 걸맞게 살도록 하고자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면서 대화를 나눈 것은 형제들이 약속의 자녀들로서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무시하고 큰아버지 에서처럼 자신들의 욕망에 사로잡혀 이방 여인들과 함부로 결혼하고 이방인처럼 정욕을 따라서 사는 것을 서로 안타까워하며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예를 든다면 르우벤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빌하와의 통간하는 일들이나 유다가 이방 여인을 아내를 얻고 아들마저 이방여인을 아내로 얻는 것을 아버지께 보고하였고 아버지는 훈계로 자식들에게 말하였을 것이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교훈 받은 언약의 말씀대로, 희생 제사를 드리는 예배의 삶에 걸맞게 형제들이 믿음의 조상들을 인도하신 전능하신 하나님만 섬기며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에 맘 아파하며 아버지께 고했을 것이다. 훗날 총리요셉이 형들에 대한 거룩한 공동체 훈련, 그리고 고센에서의 구별된 지역에서 총리요셉의 통제 하에 거룩한 공동체 삶으로 바로 잡은 것에서 요셉의 행동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셋째, 소년요셉에게 닥친 형들의 죽음의 모의와 죽음의 구덩이 속에 던져지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노에로 팔려가는 상황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일 모의 후에 직접 피 흘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음의 구덩이에 던지자는 형들의 결정대로 요셉은 혼자서는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고 지나가는 사람조차 하나 없는 광야 한 복판의 깊은 마른 구덩이에 던져졌을 것이다. 이제 꼼짝 없이 목마름과 허기로 굶어 죽게 생겼지만 살아날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창 42장 21절을 보면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했다. 요셉이 그곳에서 형들에 대한 잔악성이나 죽음의 공포 앞에 그가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엿볼 술 수 있다.
즉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또 소리쳤을 것이다. 온힘이 소진 될 때 까지 그러했을 것이다. 그 죽음의 구덩이에서 살기 위한 온갖 시도를 다했으나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순간 그는 자아의식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분들이 황태자 같이 귀하게 여겨준 사랑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 유산으로 받은 신앙 곧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언약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떠 올리며 자신은 지금 하늘의 아버지 아들이라는 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지금도 자기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하늘 아버지가 지켜보시고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보호해 주시고 살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는 어떤 실낱같은 소망을 붙잡았을 것이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존귀함과 사랑을 받은 그의 아들로서의 거룩한 자존감이 그리고 하늘 아버지의 아들의 정신이 그 죽음의 절망을 이기고 그 순간을 지탱케 했을 것이다.
요셉은 이렇게 구덩이에서 절망과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시간은 천년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에 그는 삶과 죽음의 주권을 하늘 아버지께 맡기고 진실로 구원의 요청을 부르짖을 것이다.
넷째, 결박된 이후 아침에 노예로 팔리고 노예 시장을 거처 보디발 친위대장 집으로 팔리기까지 그는 그의 부모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은 자존감과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온 거룩함의 자존감과 거룩한 자존감이 고난을 이기고 오히려 성장하도록 했을 것이다.
도단에서 애굽까지의 거리는 약 500 Km가까이 될 것이라고 한다. 형들의 이런 악행은 그가 어떤 준비도 없이 순식간에 노예의 신분이 되었다. 그래서 충격이 큰 것이다. 노예로 팔린 요셉은 도망할 수 없는 신체적인 어떤 결박이 가해진 채 그 먼 거리를 가야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거운 짐도 들고 지게 했을 것이다. 요셉을 산 상인들은 긴 행렬로 무거운 물건을 낙타에 싣고 하루 길을 나아가다면 하루에 15-20km 여행 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에 머무는 시간들과 야영하는 시간들을 합하여 계산 한다면 족히 1달 이상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내 노예로 팔려 애굽으로 내려오는 동안 그의 마음에 어떤 상념들로 가득 찼을까?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십대 소년이기에 두려움, 불안, 절망, 형들에 대한 분노, 증오가 활화산처럼 타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 반복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발생이 형들 앞에서 자신의 현명치 못한 말과 행동이 주된 원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더욱 후회막급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도망할 마음조차 갖지 못하도록 수시로 공포를 조성한 거친 학대를 받을 마다 다시 도단에서 일어났던 광경과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의 소행이 자꾸자꾸 그의 앞에 떠올랐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잊혀지지 않고 더욱 선명히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그 성난 형제들을 보았고 그를 향한 그들의 사나운 이리 떼의 눈초리와 물려고 벌려진 입의 날카로운 이빨을 느꼈던 광경이 소름끼치게 했을 것이다. 그가 몸부림치며 애걸할 때 그를 향해 쏘는듯한 모욕적인 말들이, 저주의 독설들이 그의 귀에 쟁쟁하게 울리며 괴롭혔을 것이다. 이것이 심라학적으로 과거의 악몽에 시달리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면 쇠고랑에 채인 노예이었다. 도망도 할 수 없고 스스로 벗어 날 수 없는 저주의 신분인 것이다. 아버지의 귀한 황태자 같은 내가 멸시받고 자유가 없는 노예가 되다니 얼마나 처절한 상황인가!
그는 아버지 집의 노예들의 처지를 보고 자랐다. 한 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이며 도망할 수 없는 존재임을 보고 배웠다. 그러니 노예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죽어버리자 하지 않겠는가? 소위 말하는 자살의 충동을 느낄 만큼의 현실 처지의 비참함 그대로였다.
이대로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그나마 명예로운 일 아닌가? 왕이 되는 꿈을 두 번씩이나 꾸고 자랑한지가 조금 전 같은 데 쇠고랑에 묶인 노예로 몸에는 노예 표시와 주인의 표시가 새겨질 운명 아닌가?
도망할 수는 없는가? 그도 인간인지라 도망의 기회도 수없이 노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 많은 상인들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차단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현실은 노예로 팔리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억제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 그리고 두려움에 빠지곤 하는 반복적 심적 고뇌가 요셉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복수심에 사로잡혀 자신의 처지를 비관 속에 묻혀 산다면 한 발자국도 진보 할 수 없다. 남는 것은 자기 소멸 곧 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이러한 처절한 생사의 기로에서 두려움과 분노로 스스로 자해하거나 목숨을 끊는 극단을 선택하지 않았고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한 힘은 그의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자존감과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온 거룩함의 자존감과 거룩한 자존감이 그를 견디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형들을 용서하기로 작정하고 과거와 현실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기를 반복하면서 점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평화를 되찾아 갔을 것이다. 그렇게 결박되어 아침에 노예로 팔리고 노예 시장을 거처 보디발 친위대장 집으로 팔리기까지 말이다.
이는 곧 그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자존감과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온 거룩한 자존감 곧 거룩함의 자존감이 용서의 힘을 낳고 고난을 통해 오히려 성장하고 견디도록 했을 것이다.
다섯째,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절망에 빠지지 않고 지금 주어진 삶의 환경, 처지, 여건, 주어진 운명에 최선을 다하고 오히려 애굽의 최고의 총리감이 될 자로 모든 면에서 성장했는데 그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자존감과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온 거룩함의 자존감 때문이었다.
39장 1절을 보면 보디발은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의 손에서 샀다. 이제 가나안인 요셉은 애굽의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의사소통에 제한이 따랐을 것이다. 언어가 다름은 훗날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에 그 총리 앞에서 형들이 자기들 언어로 서로 원망하며 요셉을 판 것에 대해 피 값을 받는다고 탄식했을 때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창 42:23)‘의 표현에서 알 수 있다.
보디발 친위대장의 집에 애굽의 언어를 모르는 노예는 바로 기존해 있는 동료 노예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 생활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언어는 생존을 위해서 배워졌다. 그것도 보디발 친위대장과 그의 아내의 언어가 가장 많이 영향을 주어서 요셉은 마침내 애굽의 궁중 언어 곧 최고 고급언어를 배우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려니 그에 걸 맞는 곱급 언어, 그리고 궁중의 사정을 아는 자로 보디발 왕궁 친위 대장 집에서 최고의 사람으로 교육받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 요셉은 숱한 역경을 이기고 내적 성장을 이루어 차츰 어른이 되어 갔으나 그도 우리들 같이 여전히 변덕 많고 연약한 인간이며 때로는 불신에 빠져서 더 비참한 처지에 이른 때도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를 보면 중국 청나라 마지막 황제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 현실을 감당할 수 없어 동맥을 끊어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 나온다. 요셉도 마찬가지로 정신 이상이 되거나 자살할 수밖에 없었을 내적 위기도 찾아 왔을 것이다.
노예로 팔려온 소년에게 신뢰하는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보호자가 되거나 친구가 없는 오직 홀로 인생 최고의 바닥의 길을 가는 외로운 인생이었다. 소년 요셉은 절망에 빠지지 않고 한 마리의 길들여진 짐승의 처지가 되어 주인을 위해 다해 일하기 시작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고 충성했다. 처음에는 청소하는 일, 허드렛일, 바닥 쓰는 일, 수많은 잡일을 했을 것이다. 요셉은 피할 수 없이 주어진 삶에서 역동적으로 최선을 다하여 살았다. 그 결과 주인에게 믿음을 심어 주었고 주인이 귀히 여기는 존재가 되어서 드디어 가정 총무가 되는 영예가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하는 모든 일에 좋은 열매가 풍성히 결실하도록 복을 주셨다. 요셉은 주인의 집의 복덩어리가 되어버렸다
특히 그가 종으로 일하는 데도 그의 총명성, 그의 통찰력, 그의 고매한 성품은 특별이 빛났을 것이다. 특별히 요셉은 아버지의 약속된 축복 곧 거룩한 유산과 아버지의 예배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아버지의 하나님을 배운 자기에 거대한 애굽의 이방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지 않고 더욱 하나님께 향하였다. 노예의 낙락으로 떨어지도록 방치한 하나님을 부끄러워하거나 하나님보다 주인의 환심을 사려는 욕망으로 자기의 삶의 신앙원칙인 신앙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요셉이 다른 노예들과는 달리 이렇게 된 비밀은 무엇일가?
그것은 비록 노예의 처지로 전락했어도 요셉의 내면은 아버지 앞에서는, 하나님 앞에서는 노예가 아니고 존귀한 황태자였다. 처지와 신분은 노예로 취급받고 그의 외형 껍데기는 노예이었지만 속은 하나님의 황태자의 자존감을 유지했다. 노예의 처지에서 노예의 대우를 받고 살아도 그는 찌질해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하늘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존귀한 자로 자신을 여기며 당당히 살아갔다. 노예의 처지가 그를 비참하게 만들지 못했고 노예 정신이 그를 지배하지 못했다. 노예근성이 그의 존귀한 자아에 뿌리 내리지 못했다. 온 종일 노예로 취급받고 노예로 주인에게 순종하며 살아도 여전히 그의 내면은 야곱가의 존귀한 아들이요, 하늘 아버지의 아들의 정신이 충만했다.
창 39장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고 했다.
이 말씀을 요셉 편에서 다시 쓰면 “요셉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실 수 밖에 없도록 살았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니 형통한 사람이 되었다”가 된다. 이는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그분의 아들의 자존감 곧 의식으로 간절히 찾았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부모가 되어주셔서 힘도 주시고 위로도 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런 아들 요셉릏 기뻐하셨기 때문에 함께하셨고 형통케 하셨다. 또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의미는 요셉의 내면에 그 거룩한 분이 거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렇다! 지상의 무엇도 그를 구속할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가 자신을 존귀한 자로 여기니 비록 종으로 살아가는 삶이라 할지라도 당당하고 자유로웠다. 운명적인 어둔 삶이 아니라 생명력 있고 활기가 넘치는 역동적인 삶이 될 수 있었다. 존귀한 분의 아들의 정신은 비록 종의 처지라 할지라도 주인 의식을 갖는다. 성실과 열정으로 희망을 갖고 일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고 신뢰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이 그를 믿고 기대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간다. 주어진 문제 앞에 지혜가 번득이고 상황을 변화시키며 사람들을 이끌어 간다. 남들에게 생명력과 희망을 불어 넣어 주며 하늘 아버지 아들의 거룩의 빛을 드러낼 수 있었다. 존귀한 분의 아들의 정신으로 살아갔기에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서 거룩하신 분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는 힘을 느낀 것이다. 즉 요셉에게서 주인 보디발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창 39:3)”다. 요셉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정신을 가진 요셉이기에 주인 보디발은 그를 존귀히 여길 수밖에 없었고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자기 아내 이외의 모든 권한과 소유의 관리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였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b)는 말씀대로 요셉은 흔들리지 않는 거룩한 분의 거룩한 자존감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거대 이방종교도, 애굽의 문화도, 보디발의 위세도 그를 굴복시키거나 흔들지 못했다.
여섯째, 요셉의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온 거룩한 자존감과 거룩함의 자존감은 매순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살게 함으로 어떤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견디도록 한다.
하늘 아버지 아들의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매우 매력적이어서 상대 이성에게는 치명적인 유혹의 대상이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디발의 처가 요셉을 유혹한 것이 아니라 요셉의 고매한 품격과 매력이 그녀가 그렇게 밖에 행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이 된 셈이다. 왜냐하면 하늘 아버지의 아들의 정신 곧 자존감은 그 자신의 품격과 성품을 그대로 형성케 한다. 그래서 풍겨 나오는 것이 격조가 있고 매력이 있다. 항상 모든 것을 받아들고 품을 여유는 외적인 조건을 갖춘 완벽한 왕자로 보인다.
그런 그에게 가정 총무라는 책임과 권한이 주어지면서 위치의 권한에 걸 맞는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여유와 안정이 생긴 시점에 유혹은 살금살금 다가왔다.
이렇게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가 가정사무관계로 만나는 장소는 누구나 알고 있었고 수시로 만난다는 것은 남편조차 인정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곳은 오히려 그들만의 은밀한 곳이 될 수 있었고 그 일어날 정사는 은폐성의 성공을 보장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이어서 더욱 거절키 힘든 것이었다. 유혹은 이런 기회를 타고 은밀히 다가온다. 가사일로 자꾸 은밀한 장소에서 만나니 보디발 여사의 유혹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끈질기고 집요하게 다가왔다. 마침내 그 붙잡은 옷이 벗겨지기까지 놓지 않았고 매달렸다.
사실 유혹은 죄가 아니며 유혹 받는 순간도 죄는 아니다. 오히려 유혹을 이기면 더 큰 성숙과 성장을 이룰 수 있고 유혹을 이겨내는 면역력과 지혜를 얻으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유혹은 유혹일 뿐이다. 유혹 받는 인간내면의 타락본성 곧 과도한 욕망이 유혹자의 유혹에 이끌려 가는 것이 문제이고 그것들이 걷잡을 수 없이 발동되는 것이 문제이지 그 유혹을 원천적으로 피할 방법은 별로 없다.
유혹이 요셉 내면의 정욕과 탐욕을 불러일으켜 지혜의 눈이 멀게 하는 순간인 것이다. 잘만하면 그녀는 젊은 히브리 노예에게 확실한 안락과 성공을 보장해줄 안전장치와 경제적인 이득이 생길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뒤따르는 유혹이다.
어쨌든 그녀의 정열적인 유혹은 타국살이 하는 젊은 요셉에게 있어서 사랑스러운 아내와 함께하는 따뜻한 가정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어서 너무나도 감미로운 것이었다. 세속적인 귀부인이 정열과 육정적인 자태로 다가오는 달콤한 유혹은 참으로 교묘해 거절하기 어려운 격정의 유혹이었다.
사실 소년 요셉이 외국인 노예의 처지에서 바로의 왕궁친위대장 가정 총무가 됨은 모든 노예들과 종들의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다. 또한 그들 노예와 종들의 군림의 자리요 다스림의 자리인 것이다. 요셉이 노예 출신으로서는 신화적인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으로 그것에 걸 맞는 대우를 받아야한 다는 의식 곧 자만이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 유혹이 찾아왔는데 그것은 곧 외적으로는 불륜의 유혹이었고 내적으로는 정욕의 유혹이 되었다.
많은 남성들은 카사노바처럼 많은 여성과 자유로이 성의 쾌락에 탐닉하는 것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성취욕과 성욕을 채우면서 자기 존재가 살아있음을 느끼며 살아간다고 한다. 요셉도 이 범주에 벗어나지 않는 연약한 존재의 남자이었다.
게다가 요셉은 지금 삶의 터전인 주인과 안주인의 환심과 신뢰관계를 유지해야한다는 전제가 뒤따르고 있었다. 만일 그가 하나님보다 주인을 더 귀하게 여기는 의식이 잠재되어 있었다면 그 여주인에게 잘 보이려는 의식 때문에 그녀가 두렵고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서 성적인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혹은 그 여 주인이 남편에게 요셉을 모함할 것이라는 베개 밑 송사가 두려워 우물쭈물 어정쩡해 하다가 오히려 그녀에게 포로가 되어 그녀의 의도대로 끌려갔을는지도 모른다. 사람중심, 사람눈치, 시류에 따라 살려고 하면 오히려 헤어 나올 수 없는 덧에 걸리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룩함의 존재로서의 거룩한 자존감이 이 세상 무엇보다도 높고 최고로 귀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 그분의 거룩한 품성을 지닌 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거룩한 존엄과 거룩한 자존감을 더 귀히 여겼다.
비록 연약한 육체의 본능을 지녔지만 그의 또 다른 거룩한 본성이 안주인의 유혹을 거부했다. 취해지는 것이 싫었고 안주인의 성적인 노리개가 되는 것이 본능적으로 싫었다.
현재까지 거룩하게 살아온 삶의 과정과 그 삶의 아름다운 무게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유혹은 분명 자신의 거룩함의 존엄을 무시하는 행동이었으며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거룩한 자존감에 대한 훼손이었다. 요셉은 밀려오는 정욕에, 시시한 유익, 시시한 인본주의에 자신의 거룩한 자존심을 팔지 않았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 단호했음으로 자기의 내적인 거룩한 자존심으로 거룩한 빛을 그녀 앞에 드러냈다.
일곱째, 보디발 안주인의 복수에 누명을 쓴 요셉이 감옥에서 더 빛을 발하는 거룩함의 자존감과 거룩한 자존감
생각해 보자. 성적 욕망으로 불타오르던 보디발 아내 입장에서 보면 노예시장에서 사온 비천한 종이 자신의 자신과 남편의 은혜를 입어서 가정 총무까지 오른 존재가 되었는데 자신이 거듭 거듭 원했던 육체적인 관계를 거절했다. 종국에는 그의 옷을 붙잡고 그 옷이 벗겨지기까지 애걸했으나 하나님 앞에 “큰 악”이라고 소리치며 거절하고 면전에서 피해 나가버렸다. 그러니 여자로서 느꼈던 치욕적인 부끄러움이 얼마나 컸을까? 그러니 그 성적인 욕망은 집착으로 변하였고 집착의 거절은 쉽게 증오와 복수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가 가해지고 수치심에 떨어야했다. 그 순간 그녀는 지혜가 번득이었다. 그와 같은 증오가 광기로 돌변한 것이다. 그것은 도리어 요셉이 자기를 성추행했다는 누명 씌우기다. 왜 인간은 이럴 때 자신을 변명하고 남을 해할 책략이 번득이는지 의문이다.
악의 속성상 부패한 정욕은 그 욕심을 채우면 더 허해져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쾌락의 광기를 더해 간다. 그리고 그 쾌락의 광기는 자신을 삼켜버리고 그 광기의 도구가 망가져서 더 희생이 불가능할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부패한 정욕이 억제되거나 채워지지 않으면 그 쾌락의 광기는 무서운 증오의 광기로 돌변하기도 한다. 이러한 죄악 된 사랑의 예는 다말을 향한 암논의 사랑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삼하 13:15-19).
그러므로 보디발은 아내의 고발대로 요셉을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한결같이 요셉의 품행을 특징지어 온 겸손과 정직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본 주인은 아내의 주장을 속으로는 완전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보디발이 아내의 주장을 그대로 믿었다면 그 젊은 히브리 청년은 처형 받아 바로 생명을 잃었을 것이다. 보디발은 그를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는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조용한 해결과 가문에 대한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소문이 확산도기 전에 신속하게 처벌하여 왕궁감옥에 가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참혹한 것이어서 감옥 생활에 대한 형량이 주어지지 않은 무기징역에 가까운 처벌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여기서 변명이나 항변, 원망을 보디발 주인에게나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것으로 사료되며 억울함을 풀기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아 보인다.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광기어린 어떤 위험한 행동이나 자해소동도 벌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모든 오명과 수치를 뒤집어쓰고 조용히 쇠고랑의 결박을 받았던 것이다. 특히 자기 주인집의 명성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변명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치와 속박을 스스로 감수하는 정말 사려 깊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었다.
요셉은 하루아침에 10여년의 성실과 인고의 세월이 열매를 맺을 즈음에 모두가 허망한 꿈 같이 사라져버리고 감옥이라는 환경과 죄수라는 처지가 주어 졌다.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할까?
그의 발에는 족쇄가 채워졌다. 그는 일반 죄수가 갇히는 감옥이 아니라 정치범들과 같은 중대한 죄를 지은 자나 신분이 높은 죄수들만이 갇히는 곳에 있었다. 그곳은 빛도 희망도 없는 곳이었다(창 40:15). 아무 잘못도 없는 요셉이 그처럼 부당한 취급을 받았으니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정말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울분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게다가 요셉은 감옥에 잠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요셉이 “거기 감옥에 계속 있었다”고 알려 준다. 처음에는 그 충격적인 처음 며칠간의 감옥 생활이 계속 이어지면서 여러 날들이 지나고 기약 없이 세월이 지났다. 사실 요셉은 자신이 언젠가는 풀려날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 감옥이 인생의 끝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절망이 밀려오는 곳이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밀려오는 분노의 감정폭풍은 살인본능을 자극했을 수도 있다.
인간 본질에 대한 실망감과 불신이 찾아왔을 것이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절망감 곧 빛이 없는 인생에 대한 절망감도 폭풍처럼 밀려왔을 것이다.
이렇게 감정의 폭풍이 지나 어느 날 그의 불안과 두려움이 오래 가지 않고 감정의 폭풍이 가라앉은 어느 날 그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자하는 하는 내면의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향한 궁극적인 긍정이었다. 과거도 지금도 지독히 사랑하고 있고 깊은 신뢰를 주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 때문에 그의 존재의 자존감은 살아났고 그를 일어서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의 사랑 속에 있는 그의 거룩함 자존감과 거룩한 존재의 자존감은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실패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든 결국 품고 용서했으며 그들의 악행을 자신의 마음에서 지우고 그들의 악행조차 섭리로 이끄시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했다. 그래서 그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미음과 증오, 그리고 복수심의 살인 감정의 폭풍이 사라지게 했다. 들레거나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 마음에 사랑과 평화를 간직하였다. 그는 여전히 하늘 아버지의 아들의 정신, 그 아들의 자존감은 전혀 훼손당하지 않고 오히려 더 빛나 그곳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까지 받는다. 죄수가 되어도 죄수가 아니었으며 그 비참한 상황에서도 운명을 저주하며 태어나게 한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들의 정신으로서 영혼과 마음의 자유로운 자라 매사에 지혜가 열린 청년이었다
본문 말씀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다고 했다. 처절한 인간 지옥인 감옥에서 갇힌 신세가 하나님이 함께하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어떤 상황에 처해도, 어떤 상황의 나락으로 떨어져도, 어떤 불명예스러운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음의 상황에 처해졌어도 그곳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표현이 쓰였다.
이는 요셉이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그의 선하신 의도를 의심하지 않는 거룩한 자존감의 사람이었음을 증명하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 감옥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장소라는 뜻이다.
요셉은 그럴 할수록 더 하나님의 선하신 사랑에 매달렸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하신 것이다. 즉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아 현실에 충실하며 희망을 가졌고 거룩한 자존감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실패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감방의 벽도, 족쇄도, 캄캄한 지하 감옥도,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요셉이 “감옥 맡은 관원장의 눈에 호의를” 얻게 해 주셨다. 역설적으로 보면 감옥 맡은 관원장의 눈에 호의를 입을 만한 태도와 모습 그리고 얼굴을 가졌다는 것이다. 감옥에서의 요셉의 태도는 평온해 있을 것이고 눈은 맑게 미소가 머물고 있으며 얼굴은 절제와 거룩의 빚으로 빛났을 것이다. 드디어 간수장은 요셉의 하나님을 보았고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음을 보았다. 요셉은 자신의 신앙이 옥중에서도 누구든 알게 되도록 드러냈다는 의미이다.
드디어 간수장은 하늘 아버지 아들의 정신을 소유한 자 요셉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수장은 그를 곁에 두고 싶었고 그래서 자기의 간수장을 위임했다. 그리고는 요셉이 처리한 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살펴보지 않는 무한한 신뢰가 있었다.
요셉이 한 일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형통했다. 그는 충실히 일했고, 주어진 일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최고의 삶을 살았다. 그를 신임한 옥중 관원장은 그를 감옥의 총리로 삼았다.
요셉의 자존감 곧 아버지의 아들의 정신과 거룩한 자존감 곧 하나님 아들의 정신은 어떤 것도 구속하지 못했고 무너뜨리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그는 절망적인 상황을 압도하고 이기었으며 자신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 감옥의 구덩이가 깊어질수록 하늘 아버지의 어떤 계시를 깨달을 수 있을 만큼 그의 내면의 거룩을 향한 하늘의 창문은 더욱 열려갔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거룩함의 민감성은 더해 갔다. 요셉에게서 풍겨 나오는 전인적인 느낌은 아름다운 품격과 총명함, 그리고 거룩한 분이 함께 하시는 거룩함의 빛이었다.
하늘의 거룩한 아버지의 정신이 깃들지 않은 사람은 그분의 아들의 자격이 없다. 그 거룩한 분의 아들은 그 거룩한 분의 아들의 정신으로 살아야 진짜 아들이다. 다시 말하면 그 거룩한 분의 아들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그 거룩한 분의 아들의 거룩한 자존감, 존귀한 자존감을 가지고 사는 자인 것이다. 요셉은 점점 더 악화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늘 아버지 아들의 정신으로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때 여유가 생기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직관적으로, 넓게 바라 볼 수 있는 통찰의 눈을 열어 준다. 그리고 자아를 넘어 남을 돌아볼 여유와 섬김의 마음이 생긴다.
이는 애굽의 왕을 직접 모시는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같은 죄수로 들어왔는데 요셉은 그들의 “근심의 빛”까지 알아차리는 통찰과 직관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자신의 인생 상담자로 여길 만큼 무한 신뢰를 보이고 마음을 열어 꿈 이야기를 한다. 요셉의 거룩함의 민감성은 꿈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들의 삶과 죽음의 장래를 말한다. 그 요셉의 거룩함에서 오는 민감성은 요셉을 애굽 왕궁으로 인도하는 매듭을 연길해 준다.
여덟째, 바로 왕과 그의 신하들 앞에서 드러난 거룩함의 자존감과 거룩한 존재의 자존감에서 비롯된 거룩한 모습이다.
바로와 신하는 어떻게 이방인이며 노예출신에 감옥의 죄수 그것도 강간 미수범 요셉을 한 순간에 애굽의 총리로 선택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요셉이 먼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권자이신 그분의 거룩한 존재를 드러내고 자신의 그것에 상응하는 그의 거룩 캐릭터의 드러남이다. 거룩한 캐릭터 곧 먼저 이방족속 애굽의 왕과 방백들도 분명히 알아챌 정도로 하나님의 신에 충만했다.
그래서 바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라는 감탄은 한 치의 과장이나 가식 없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바로는 요셉의 모습과 꿈의 해몽이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인하여 생긴 것으로 느끼었다. 일개 종과 죄수에 불과했던 요셉이 대국의 왕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자로 부각된 것이다. 요셉으로선 하나님의 영의 깨우침이 너무나 확실했기에 혹시라도 나중에 증험과 성취가 따르지 않을지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었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연히 어떤 망설임이나 믹힘 없이 논리정연하게 풀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와 신하들에게는 인간의 통찰과 지혜를 넘어선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자로 보인 것이다. 통찰과 지혜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봐도 요셉은 초월적인 거룩한 신이 내재해 있다는 거룩한 사람임이 두드러졌다.
그것은 생사를 초월한 태도로 나타났다. 이는 곧 꿈을 정확히 해몽했다면 나중에 반드시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은 채 한 것이다. 꿈이란 장래 일에 대한 예고 내지 경고의 의미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장래에 그대로 실현되지 않으면 사형 당할 것은 자명하니 말이다. 그래서 그 꿈의 해몽은 생명까지 걸어야 함을 요셉도, 그리고 점성가들과 박사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애굽의 술객과 박사들은 자기들의 생명이 아까워 절대 자기 생각만으로 혹은 제 멋대로 지어내어 해몽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거룩한 자존감은 아름다운 품성이 거룩의 빛으로 드러났다. 곧 요셉의 그 꿈을 해몽하는 태도나 그의 의도가 너무나 순수하고 진정성 있게 드러났다. 그것은 거룩한 자존감이 품성화 되어 태도나 모습으로 드러난 결과물이다. 이는 인간의 탐욕, 자기를 위한 본성적인 추구를 배제한 하나님의 뜻과 접촉하고 있는 인간을 위한 수수함에서 시작된다. 요셉의 꿈 해몽과 그의 대책을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39절)”라고 감탄했다, 그리고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겼다.”고 했다. 이는 요셉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이다. 즉 꿈의 해몽이 아무리 좋아도, 그 미래의 대안이 탁월해도 그것을 말하고 표현하는 사람이 믿을 수 없고 거부된다면 결국 그가 말한 모든 것이 부정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요셉에 대한 의심, 경계성, 질투, 라이벌 의식 등등 같은 것들이 순간 작동했다면 신하들 일부는 집단을 이루면서 번득이는 악한 생각으로 대안에 대한 반박, 노예이며 이방인이라는 결격사유, 부끄러운 죄목을 가진 죄수라는 신분 등등 수많은 이유들로 요셉을 거부하고 모함하며 부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요셉은 그의 순수성, 그의 신비성, 그의 진실성, 그의 진면목의 아름다운 캐릭터가 아무런 거부 없이 그대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총리로 받아들여도 거부하지 않을 만큼의 아름다운 인격이 전인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거룩한 자존감에서 온 드러난 거룩함의 모습이 항거할 수 없는 신비의 힘이었던 것이다.
사실 요셉은 한 번도 총리를 꿈꾸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나아가는 거룩한 길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길에서 좌로도 우로도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분의 뜻대로 성실히 준행하는 삶에서 거룩한 자존감을 증명하는 것과 말씀의 성취가 따랐던 것뿐이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마저 그의 거룩한 인격에 그리고 그의 품성에서 나타나는 올곧음의 빛과 통찰력과 지혜에 감탄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애굽 전역을 통 털어 최고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왕은 역시 단 한 사람이었는데 요셉은 그러한 왕을 대행할 수 있는 중차대한 총리직이 맡겨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먼저 총리의 실제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바로는 자신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워주었다. 바로는 또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혀 그의 권위를 모습에서 외부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금 사슬을 목에 걸어 주어 총리직에서 왕의 호의를 받았다는 명예를 드러냈다. 더 나아가 바로 왕 다음을 나타내는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라고 실제로 바로 왕을 제외한 애굽의 고관대작들과 백성들이 그에게 엎드려 절하도록 예식을 행함으로서 공식적으로 이후 누구든지 그에게 순종해야 함을 나타내주었다. 게다가 바로는 요셉 개인에게 일말의 의심조차 제거하고 보다 강한 확실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라고 재차 강조하였다.
이렇게 인사에 달관한 바로가 한 눈에 요셉의 하늘 아버지 아들의 정신과 품격, 품성, 지혜, 거룩의 빛을 알아보았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창 41:38)라는 외침이 요셉의 거룩한 자존감에 비롯되는 거룩의 빛 때문이다.
왜 이렇게 요셉은 하늘의 아버지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존귀히 여김 받으며 쓰임 받았나? 한마디로 아버지 야곱에게서 가장 존귀한 아들로 사랑받은 아들의 정신, 하늘 아버지 아들이라는 정신으로 거룩한 인격이 지혜로, 통찰로, 품격으로, 얼굴에, 말에, 전 모습에 거룩의 빛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 치명적인 상처를 준 이들에게서 용서의 미학이 아름답게 작동했기 때문에 복수심과 증오심이 그 자신을 포로 사로잡지 못했기에 어떤 처지에 떨어져도 지상의 무엇도 그를 구속하지 못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요 하늘 아버지의 아들의 정신을 가진 완전한 성결인이었다.
바로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한 제사장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했고. 애굽 온 땅을 통치케 했다. 요셉의 아내를 특별히 애굽 제사장의 가문에서 선택해 주어 그를 왕족에 준하는 대접 을 해주었다. 요셉이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는데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이는 첫 아들을 얻자 자기를 귀한 지위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관련시켜서 아들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리고 둘째 아들의 이름도 에브라임이라 하였는데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이 역시 요셉의 신앙이 반영된 이름으로 그의 삶이 하나님께 감사이었음을 암시한다. 간략하나마 요셉의 가정생활이 기록된 것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한 요셉을 보상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종교의 핵심부에서 생활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더 나아가 이 이방신의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변질되지 않고 오히려 아내를 여호와 경외 신앙으로 이끈 점이 더욱 덧보인다. 왜냐하면 자녀 이름 짖는데 요셉의 신앙이 담긴 것을 보면 아내의 반발의 흔적이 없고 오히려 그녀 스스로의 역동적인 동의가 있었던 것으로 암시된다.
이렇게 요셉은 애굽의 왕 다음 가는 총리직과 권력, 부가 주어졌음에도 그는 그 어떤 것에서도 애굽화 되지 않았고 변질되지 않았다. 즉 거룩하신 분과의 친밀함에서 오는 거룩함의 자존감은 그의 거룩 신앙으로 승화되어 애굽의 영광과 총리의 권력 그리고 부와 거대 이방종교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음을 드러낸 것이다.
맺는 말
거룩함의 자존감 곧 거룩한 존재의 자존감은 거룩하신 하나님 곧 거룩하신 분의 무한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해 내게 임한 그분의 거룩함을 그 어떤 것 보다,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귀중하게 여기고 거룩해진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고 세상 앞에 당당히 드러내는 삶이다.
이러한 요셉의 거룩한 인격과 탁월한 지혜는 자신에게 유익은 물론 주변 사람 모두에게 덕이 되어서 그들 사이에 거룩한 결실을 맺게 된다. 다른 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 알게 하며 그들의 삶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하나님나라가 확장되어져간다. 요셉으로 이스라엘을 보존케 하여 궁극적으로 출애굽 사건과 연결시켰듯이 말이다. 사실 하나님의 섭리적인 측면서보면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로 출애굽 시키려는 하나님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요셉을 향한 최종 목적은 출애굽의 시초를 놓게 하는 것이었다.
거룩함의 자존감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순간에도 거룩함의 자존감을 잃지 않고 살게 되어 거룩한 캐릭터로 드러나 거룩의 빛을 남들이 느낀다. 그리고 내면은 외부로부터 영향 받지 않는 영원한 행복과 평화가 충만했다.
사실 그는 바로가 총리로 세우기 직전까지도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소년기 때의 그 두 꿈은 잊지 않았겠지만, 형제들과 부모가 자기에게 절한 것이지 이방 백성들이 자기에게 절하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다.
애굽 총리가 하나님은 물론 요셉에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하나님은 마음만 먹으면 바로를 폐위시키고 요셉을 전 세계의 통치자로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제국도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국도 세우시지 않는가?
만약 요셉 본인에게 총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 물어 보았다면 어떤 대답을 했겠는가? 어쩌면 틀림없이 총리는 전혀 관심 없다고 했을 것이고 오로지 가나안으로 돌아가 부모형제와 함께 살고 싶다고 했을 것이다. 아니면 소박한 자유로운 삶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야 현실에서 어떤 형편에 처하든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 그리고 그분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도구로 쓰임 받기만을 진정으로 소원하는 자의 대표였을 뿐이다.
우리는 일시적인 행복이나 쾌락, 안정감을 붙잡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소망을 붙잡고 그것을 향해 가는 거룩한 존재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인가? 물으면서 하늘의 영원한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찮은 유혹에 굴복하지 않아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 모세를 이렇게 묘사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의 거룩한 자존감으로 살아갔던 요셉은 지상에서 진정 꿈꾸었던 것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아니었다. 화려한 애굽의 피라미드에 묻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한 가지만 생각했다. 비록 초라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소망이 있고 약속이 있는 그 땅에 죽어서라도 돌아가는 것이었다. 시시한 것이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는 것이었다.
요셉은 110세에 애굽에서 죽을 때도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창 50:25)는 확약을 받았다.
개인의 통찰력을 통한 믿음과 지혜의 행보는 자신이 잘 알든 모르든 결국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역사를 이루는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출애굽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더 정확히는 아담에게 주셨던 인류 구속의 언약을 모세와 다윗을 거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되게 했듯이 말이다.]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은 거룩함의 자존감과 거룩한 존재의 자존감은 온전히 거룩케 될 하나님의 아들 곧 황태자로 거듭나게 하는 유일무이한 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자력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성취하는 것으로부터 온다.
진정으로 주님의 치욕적인 갈보리 십자가에 능력이 우리 죄된 육체에 적용되는 그 순간, 우리의 성격과 성품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이 크게 드러나게 된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것은 그리스도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그리고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거룩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의 태도, 정신, 말이 하나님의 아들의 정신 곧 황태자의 정신으로 살아가야한다.
거룩하신 분으로 온 거룩함의 가치, 거룩한 분의 형상의 가치, 세속의 어떤 것도 마음을 붙잡을 수 없는 자유인인, 세속의 어떤 것도 억압하거나 두렵게 할 수 없는 왕의 정신을 소유한 자, 정체성과 자존감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며, 구별된 삶을 향한 거룩한 동기이자 의지가 된다.
영생을 선물로 받은 우리가 어찌 자존심을 잃고 세상에 아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나라의 왕자가 무엇이 부족해서 세상 사람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구걸하겠는가?
왕 같은 제사장이 어떻게 소돔과 고모라의 거리에서 취하여 비틀거릴 수 있겠는가?
한 번 상상해 보자. 한 사람은 왕이고, 또 한 사람은 죄수이다. 큰 위엄을 갖춘 화려한 자주색 왕복을 걸친 자와 쇠고랑을 차고 냄새나는 죄수복을 입은 자가 지금 대면하고 있다. 그것도 하나는 높은 권장에 앉았고 하나는 낮은 곳에서 그들 앞에 무릎 끓여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비굴했나? 아니. 바울이 왕을 부러워했나? 아니다 그는 끝까지 떳떳하고 의연했다. 세상에서 잠시 죄수로 살다 내세에서 영원히 왕자로 사는 것이 세상에서 잠시 왕으로 살다 내세에서 영원히 죄수로 사는 것과 비교할 수 없기에 바울은 “자신의 자신이 결박당한 것 외에는 그들 모두가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한 다” 거룩한 자존심을 피력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거룩한 자존감을 발견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약속받은 자들이며 온 우주를 창조하신 거룩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는 자존감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가치관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됨의 특권으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가진 세상적인 조건과 자랑을 다 배설물처럼 여기던 그의 삶과 고백에서도 그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바울처럼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난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한 그 귀함과 가치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황태자 정신을 가져야한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곧 하늘의 황태자 병이다. .
그런 자존감을 갖고 살아갈 때 바울처럼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것들을 믿음보다 더 앞세워 부러워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살지만 하늘에 속한 자로서 품위 있는 구별된 삶을 살게 된다. 그 자존감이 세상에 묻히지 않고 거룩함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거룩함의 자존감이 거룩의 빛으로 빛나는 모습, 거룩한 존재로의 자존감이 가장 행복한 모습, 가장 신비한 모습, 말 행동, 의식, 품격이 거룩한 하나님의 황자의 거룩한 자존감으로 드러나야 한다. 하늘의 황태자의 정신으로 말이다.
오! 우리의 참 ‘정체성’
거룩함의 자존감이여 거룩한 존재의 자존감이여!
하늘 아버지의 황태자의 정신이여!
“그러나 너희 곧 우리는 아무런 공로 없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손수 택하신 족속이요 민족이다. 또한 믿음으로 왕과 같은 제사장들 곧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왕의 통치권을 가진 자이며 동시에 제사장으로서 본인과 백성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자이다.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 거룩한 분께서 홀로 다스리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래서 너희 곧 우리를 사망과 영원한 멸망의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랍고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의 빛, 거룩의 빛, 영원한 생명의 빛 가운데로 들어가도록 인도하신 분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덕과 은혜, 그리고 능력을, 너희 곧 우리가 온 세상에, 온 우주에 선포하며 찬양하는 것이 지상에 생존 하는 날 동안 할 일이다.” (벧전 2:9 편역/ 참고 사 43:20; 출 19:5-6; 사 4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