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교회의 일꾼
2014년 5월 25일 / 대예배 / 고린도전서 4:1-5
■ 어떤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다닐만한 교회가 없다고 하소연을 하면서 좋은 교회를 찾기 위해서 이교회 저 교회 돌아다닌다고 말했습니다. 하소연을 듣던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충고를 하였습니다. “혹시 완전하다 싶은 교회를 만나거든 자네는 거기 등록하지 말게. 자네 때문에 그 교회도 불완전한 교회가 될 수 있으니 말일세.”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교회를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완전한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내 자신들이 완전하지 못한데 내가 다니는 교회가 어떻게 완전할 수 있습니까? 교회 다니는 내 자신이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어서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크든 작든 어느 교회가 되었든지 하나님을 최고의 권위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마 16:16-18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참으로 복되구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18) ‘내가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 어떤 죽음의 세력도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가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되기 원한다면 목회자를 비롯하여, 모든 교인 각자가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처럼 살 때 그 교회는 좋은 교회가 되고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강한 교회 진정한 부흥이 아닙니다. 대형교회들은 부흥됐다고 말하지만 지금의 교회부흥을 이구동성으로 수평 이동이라고 합니다. 교인들 역시 시설 좋고, 환경 좋은 교회에서 편안하게 신앙생활하고 싶어 합니다.
기독교는 지금 쇠퇴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고, 교회의 주인이 누구며, 교회를 누가 운영해야 하는지조차도 모르거나 외면한 상태로 속은 이미 곪아터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이런 상황을 대변하는 찬송가 515장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찬송 515장 1, 2, 4절 /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 할꼬 2절 /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죄를 대속하신 주님 선한 일꾼 찾으시나 대답할 이 어디 있나 믿는 자여 어이 할꼬 4절 / 눈을 들어 하늘 보라 다시 사신 그리스도 만 백성을 사랑하사 오래참고 기다리네 인애하신 우리 구주의 의 심판하시는 날 곧 가까이 임하는데 믿는 자여 어이 할꼬
교회는 유기적공동체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예수님의 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롬 12:4-5 / 우리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에도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 모두가 한데 모일 때 하나의 완전한 몸을 이룹니다. 우리 각 사람이 서로 다른 지체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으며 각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도가 모인 교회 공동체를 말합니다. 또한 교회는 건물(엡 2장)로도 비유되는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지만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연합된 공동체요 성도들이 각각 자기의 역할과 기능을 다함으로 세워지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소망과 사랑만이 아니라 믿음으로도 연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개인으로 보면 성숙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려는 의도조차 보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이기심을 표출함으로 여러 사람들이 교회 소속을 꺼리거나, 교회에서 행하는 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 10:24-25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일에 응답하여 우리도 서로 돕고 친절히 대하며 선할 일을 힘써 행합시다. 25) 어떤 사람들처럼 교회에 모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 옵니다. 더욱 서로 격려하고 충고합시다.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건강하게 연합된 공동체입니까? 개인주의 공동체입니까?
1. 교회는 주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예배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공동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요 또한 세상 속으로 파송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사람 숫자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된 예배자들이 2-3사람이라도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곳에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받으시는 제사와 받지 않는 제사가 있습니다.
창 4:3-7 / 얼마 뒤 가인은 농사 지어 거두어들인 곡식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다. 4) 그때 아벨도 자기가 돌보던 양이 새끼를 낳자 그 가운데에서 첫 번째 것을 잡아 가장 좋은 부분을 여호와께 제물로 바쳤다. 여호와께서는 아벨을 흐뭇하게 여기시고 그가 바치는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다. 5) 그러나 가인은 좋게 여기시지 않고 그가 바친 제물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가인은 너무도 화가 나서 안색이 변하였다. 6) 그러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셨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느냐? 어째서 안색이 변하였느냐? 7) 네가 잘하였다면 어째서 내가 네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어째서 고개를 들지 못하느냐? 네가 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면 죄가 네 마음의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있다가 급기야는 너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그러니 너는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리라.”
아벨은 양을 치는 목동이었고,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가인이 드린 곡식예물 때문에 받지 않으셨을까요? 그 답을 히브리서 11:4에서 주십니다.
히 11:4 / 아벨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가인이 드린 것보다 훨씬 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린 것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아 들이셨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랜 옛날에 죽은 아벨에게서 우리는 지금도 많은 교훈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예물을 드렸느냐?’ 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자의 마음가짐이 더 중요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예배에 앞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마음이 앞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으로 충만해져 있어야 합니다. 누구 식대로 복 받을 생각만으로 가득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경건한 마음과 믿음 바탕 위에 드려지는 예배와 예물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가야 손이 갑니다. 마음이 가야 물질이 갑니다. 마음이 가야 순종이 따라 갑니다.
삼상 15:22 / 그런데도 사무엘이 또 다시 사울을 책망하였다. “여호와께서 무엇을 더 좋게 보실지 스스로 판단해 보시오.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화목제물을 더 좋게 생각하실 것 같소? 똑똑히 들으시오. 당신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그보다 더 좋은 제물이 없을 것이오!”
아벨과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아벨은 가인과 달리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롬 12:1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산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실 일을 생각할 때 이것이 무리한 요구이겠습니까?
교회는 예배공동체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존재와 모든 사역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지음을 받았고, 예배를 위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예배를 위해 세워졌고, 예배를 위해 전도하고, 선교합니다. 교회는 예배를 위해 교육합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예배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배가 살아야 건강한 성도요, 건강한 가정이 됩니다.
시 133:1-3 / 어찌 이보다 즐거우랴. 어찌 이보다 아름다우랴. 형제자매 오손도손 아껴주며 사는 것
▶ 교회는 성도 간에 사랑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요소는 말씀과 찬양과 기도, 예물과(헌신) 축도와 교제가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물고 뜯고 싸우는 교회는 무너집니다.
교회부흥의 요소 중에도 교제가 포함됩니다. 교회안의 성도의 교제뿐만 아니라 교회 바깥 이웃과의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를 통해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고, 이웃과의 교제를 통해 전도가 이루어지며 교회가 부흥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 바울이 세웠던 고린도교회에 바울이 편지를 보낸 것이 고린도전서인데, 1장부터 4장까지는 교회의 분쟁문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교회 분쟁의 원인 중의 하나가 앞장서서 일하는 일꾼들에 대한 지나친 비판 때문임을 설명하면서 그 해결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누가 일으킵니까? 주일날만 와서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교인들은 결코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교회 일에 앞장서서 일하는 일꾼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됩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언제나 앞장서서 일하는 일꾼들이 건강한 신앙자세로 일하는 교회요, 건강한 신앙의 일꾼들이 앞장서서 일하도록 만드는 교회입니다. 반대로 병든 교회는 앞장서서 일하는 일꾼들이 병든 신앙자세로 일하는 교회요, 건강한 신앙의 일꾼들이 일하는 것을 비판하고 상처를 입히는 교회인 것입니다.
사실, 어느 교회는 당회가 두 파로 나누어서 한쪽이 찬성하면 무조건 다른 한쪽이 반대한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랬을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파가 아니면 비판하고 방해합니다. 가령 고린도교회에 앞장서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일꾼이 바울파에 속했다면 아볼로파에 속한 사람이 볼 때는 못 마땅하여 비판하고 사사건건 반대했을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분파적으로 나가면 아무리 선하게 일을 해도 전부 편견으로 봄으로 선한 일꾼들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런 교회는 차츰 건강한 교인들은 빠져 나가거나 뒤로 물러서고 병든 교인들이 주장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건강한 믿음의 일꾼들을 많이 양육하고 그런 일꾼들이 앞장서서 일하도록 넓은 일터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건강한 믿음의 일꾼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일하도록 만들어 줍니까?
2. 건강한 교회 일꾼은 그리스도께서 세운 줄 믿어야 합니다.
고전 4:1 / 여러분은 아볼로와 내가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일꾼’이란 헬라어로 ‘휘페레테스’라는 말로, ‘휴퍼’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under’ 곧 ‘밑’이라는 말하고, ‘페레테스’라고 하는 말은 ‘노를 젓는다.’라는 말입니다. 바울 당시 큰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들을 말합니다. 주인은 자기 생각대로 노예들을 이곳저곳 앉게 하고 자기 생각대로 중간 지도자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하는 주인이라도 노예들은 감히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라는 배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들의 하나이어야 합니다. 일꾼들이란, 캄캄한 배 밑창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무조건 명령대로 노 젓는 노예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선장들이 택한 사람들이요, 선장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노 젓는 노예는 밖을 못 봅니다. “저어라”면 젓고, “멈춰라”면 멈추고, “좌”하면 좌측으로 “우”하면 우측으로 젓는 것뿐입니다. 그 명령이 자기 마음에 들면 젓고, 아니면 멈출 수 없습니다. 또한 어느 노예든지 “나는 이 자리가 싫고 저리로 보내주십시오.”라든지 “내가 저 사람보다 실력이 있는데 왜 저 사람에게 십장 일을 맡기는가?”라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오직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일꾼이 되었습니까? 담임목사나 당회가 세웠습니까? 아니면 세례교인들의 투표에 의해서 되었습니까?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그렇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님이 택하시고 구별하여 임명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일꾼은 하나님이 맡기신 줄 믿을 때 건강한 믿음의 일꾼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직책을 하나님이 주신 줄 믿고 순종하고 협력하는 자세가 건강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 전북 김제 모악산 기슭에 위치한 금산교회는 1905년 테이트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전주에 선교기지를 둔 미국 선교사 테이트(최의덕)는 정읍을 가기 위해 모악산 자락을 넘어 금산리를 통과하곤 하였다. 말을 타고 다니는 선교여행이었기에 말이 쉬어가는 마방에 들렀고 자연스레 마방 주인이었던 조덕삼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예수를 영접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그의 사랑채에서부터 금산교회가 시작되었다. 금산교회를 말할 때 조덕삼 장로 말고 빼 놓을 수 없는 또 한명의 인물이 있으니 조덕삼 장로의 머슴이었던 이자익목사다. 이자익은 본디 경남 남해에서 고아로 생활하다가 입에 풀칠할 곳을 찾던 중 김제들녘까지 흘러들어 조덕삼의 집 마방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덕삼이 예수를 믿으면서 함께 금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신앙의 돈독함을 인정받은 그는 주인 조덕삼, 그리고 박화서와 함께 1905년 10월 11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차츰 교회가 성장하여 교인이 50명쯤 되었을 때 장로를 피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인들이 모여 투표한 결과 지방의 유지이며 김제부자이고 금산교회 재정을 모두 감당하고 있던 주인 조덕삼을 제치고, 그 집의 머슴 이자익이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장로가 되게 되었다. 이때 교인들이 술렁이며 근심하는 표정들이 영력했다. 그러자 조덕삼은 교회의 결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교인들 앞에 나가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드려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교회를 더욱 잘 섬기겠습니다.” 고 선언하였다. 그제야 투표결과를 놓고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던 온 교회가 대 환영을 하면서 조덕삼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 두 사람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집에서는 주인과 머슴의 관계로, 교회에서는 평신도와 장로의 관계로 성실히 자기 본분을 잘 감당해 나갔다. 후에 조덕삼도 금산교회의 2대 장로가 되었다. 조덕삼은 자기 집 머슴인 이자익장로를 평양신학교에 보내어 모든 경비를 부담하며 공부를 시켰다. 그리고 이자익이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된 후에는 다시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하였다. 이자익은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하면서 놀랍게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3대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장로교역사상 총회장을 재임한 역사가 없다. 그런데 이자익 목사는 총회장을 3번씩이나 역임하는 등 장로교회사의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를 키워낸 인물이 바로 자기 집 머슴을 자기보다 먼저 장로로 받들며 교회를 섬겼던 조덕삼 장로이다. 이렇게 빛나는 신앙생활을 살았던 조덕삼 장로의 손자가 바로 국회의원이며 주일대사를 역임한 조세형 장로이다.
어떻게 조 장로님은 자기 집 머슴 출신을 자기보다 앞서 장로가 되게 하고 신학교를 졸업하게 한 후 자기 교회 담임목사로 모실 수 있었습니까? 목회자나 일꾼은 하나님이 세우신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모든 일꾼은 하나님이 세우신 줄 믿고 그 직책을 귀히 여기고 서로 적극 협력하심으로 우리 교회는 앞으로도 더욱 든든히 서가는 건강한 믿음의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건강한 교회 일꾼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우리가 무슨 비서나 사원, 혹은 종업원에게 일을 시킬 때 가장 신용하는 자에게 갖가지 중요한 비밀을 맡깁니다. 공장의 기술, 거래처, 은행의 예금 구좌, 금고를 여는 방법 그 외에 가장 중요한 비밀을 다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귀한 일꾼이냐? 아니냐?를 알려면 ‘얼마나 주인의 비밀을 많이 맡았느냐?’로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자기의 일꾼들에게 하나님은 갖가지 성경의 깊은 이치와 경륜, 하나님의 신령의 은사를 알게 하시고 맡기십니다. ‘맡은 자’란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인데 ‘오이코노’는 ‘집’이란 뜻이고, ‘모스’는 집사란 말입니다. 주인의 재산과 종들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 곧 집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청지기가 가장 명심할 것은 재산을 잘 관리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히 주인이 원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지혜롭게 행하고 특별히 주인이 원하는 비밀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롬 12:1 /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산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어느 청지기는 열심히 수고함으로 주인의 사업이 잘 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청지기의 약점은 말이 많습니다. 주인의 사업적인 비밀을 함부로 떠듭니다. 더 나가서는 주인의 가정의 비밀을 여기저기 옮깁니다. “주인이 몰래 만나는 여자가 있다.” “자녀가 이혼직전에 놓여 있다.”는 등 함부로 떠듭니다. 주인이 그런 말을 들으면 그 청지기를 당장 해고할 것입니다.
반면 어느 청지기는 사업은 70-80% 밖에 못해도 얼마나 입이 무거운지 무슨 비밀이라도 일생 지키는 것을 물론이고, 주인 가정의 문제는 일체 입을 다뭅니다. 주인은 그런 청지기는 일생동안 신임하고 무엇이든지 맡길 것입니다. 그만큼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가 봅니다. 때로는 당회에서 아주 비밀스러운 일을 의논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너나없이 약속하기를 ‘당분간 이런 문제는 비밀로 하자. 절대로 부인에게도 말하지 말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교회 안에 그 이야기가 전부 퍼집니다.
▶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비밀을 맡은 자들로 잘 관리하고 지켜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여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함부로 가감하지 않아야 합니다. 더 나가서는 자기의 주장을 나타나기 위해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느 분은 자기에게만 주신 특별한 계시나 환상, 혹은 꿈이나 되는 것처럼 너무나 함부로 떠듭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더 이상 보여주시거나 들려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받은바 은혜도 간증이나 전도할 때 외에는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덕을 끼쳐야 하며, 남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기는 말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일꾼들은 대단히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권면할 때나 구역을 인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할까 해서 조심스럽고, 혹은 하나님 말씀보다는 내 말이 더 앞설까 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정성껏 준비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설교를 듣기만 하는 입장이었다면 앞으로는 전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과거에는 다른 사람의 기도를 듣고 ‘아멘’만 하는 입장이었지만 앞으로는 대표기도를 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뒤에서 따라가는 입장이었다면 앞으로는 앞장을 서야 하는 입장이기에 많은 비판과 공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4. 건강한 교회 일꾼은 충성을 다하는 자입니다.
2절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충성은 ‘신실’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앙을 나타내는 신실이나, 충성을 나타내는 ‘피스토스’는 모두 한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충성’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이 세상에서의 시간, 그리고 모든 재능, 모든 소유물을 총동원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직분을 맡은 자가 가장 구할 기도제목은 충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구하다’는 ‘찾아 헤멘다’란 뜻입니다. 가능하면 찾는다는 말이 아니고 꼭 필연적 욕구를 가지고 이를 이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청지기들이 혼신을 다하여 찾아야 될 것은 바로 충성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일꾼들은 어떻게 충성합니까?
1. 은혜를 갚은 심정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충성할 때에 반드시 명심할 것은 어떤 대가나 축복을 바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감격이 없습니다. 오직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심을 감사하여 은혜 갚는 심정으로 충성해야 감격이 가득할 것입니다(고후 9:15).
바울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여 고문했고 심지어 초대교회 기둥 같은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데 앞장섰고 다메섹으로 가던 이유도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엄청난 죄인을 부르시고 구원시켜 주셨을 뿐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워주신 은혜는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기에 그 은혜 갚기 위해 죽도록 충성했던 것입니다.
2. 작은 일에도 충성입니다.
마25장에 보면 칭찬받은 청지기들은 작은 일에 충성했던 자입니다. 그것이 큰 일, 큰 축복을 체험하게 되는 첩경(捷徑)이 됩니다. 그러나 작은 일이라고 무시하는 사람은 큰일도 맡기지 않으십니다. 어느 분은 돈을 왕창 벌은 후에 큰일을 하겠다고 벼르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큰일도 맡기십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가 늙어서 죽을 날이 가까웠을 때 사람들은 그의 후계자 문제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가 그의 후계자를 지목했을 때는 전 미국과 세계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쉬브’라고 하는 무명의 사람을 후계자로 지목하였기 때문입니다. 쉬브는 초등학교 학력밖에 없었고 청소부로 회사에 입사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런 거대한 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까?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해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큰 공장의 한 부분 정원 관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부분의 정원 관리 뿐 아니라, 공장의 여러 구석진 곳까지 청소하였습니다. 이를 인정받아 정식 사원으로 채용되었습니다. 그 일에도 얼마나 땀 흘려 충성했는지 나중에는 카네기의 비서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카네기의 비서가 된 후, 바로 그의 눈과 손과 발이 되고 입이 되었습니다. 카네기가 움직이는 곳에는 쉬브가 있고, 쉬브가 있는 곳에는 카네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카네기가 자기 혼자서 밤이 늦도록 사무실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문밖에 쉬브가 서 있습니다. 카네기는 놀라면서 “오! 쉬브군! 자네 왜 아직도 퇴근하지 않았는가? 너무 밤이 깊지 않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쉬브는 조용히 웃으면서 “사장님! 사장님께서 저를 언제 부르실지 알 수 없는데 어찌 자리를 비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카네기는 그처럼 전력을 다해 충성하는 사람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3. 변함없는 충성입니다.
시종여일(始終如一) 충성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충성은 자기 이해득실 따라 달라집니다. 내게 유리하면 충성하고 불리하면 충성을 피합니다. 또한 주인의 상황에 따라 충성의 자세가 변합니다. 주인이 자기에게 잘 해주면 충성하고 아니면 충성을 멈춥니다.
진정한 충성은 내게 불리하든지, 주인이 힘이 없어지든지,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는 입장에 있어도 충성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개를 끌어안고 다닙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신탕 때문이 아닙니다. 개는 주인에게 변함없이 충성합니다. 주인이 가난하든지, 주인이 노인이든지 관계하지 않고 또 어느 때는 주인이 화가 나서 발로 배를 찰지라도 끝까지 떠나지 않고 충성을 보입니다.
5. 건강한 교회 일꾼은 다른 이를 판단하지 않는 자입니다.
3-5절 /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 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을 판단함으로써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었고,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가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만 눈에 발견하고 판단합니다. 어떤 분은 이야기 중에 거의 70-80%가 남을 비평하고 판단합니다. 경계할 사람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말씀을 통해서 옳고 그른 것을 배운 탓인지, 다른 이를 보면 벌써 쉽게 판단이 됩니다. “그 사람 회개해야지, 아니면 하나님이 매를 때리실지 몰라.” “기도생활을 하지 않더니 시험 들었군요.” “그러니까 가정을 구원시키지 못하지.” 심지어는 나이 많은 성도가 돌아갔을 때 “그 집사님은 과연 천국 갔을까?”라고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정죄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죄를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남을 비판하는 자는 하나님이 비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하나님도 그 허물을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판이나 판단으로 앞장 서 일하는 선한 일꾼들이 상처를 받는다면 그 죄는 너무나 큰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일하는 일꾼들이 반드시 명심할 것은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3절에 보면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판단에 휘말리어서 낙심하거나 열심히 하던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남을 정확히 판단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던지 간에 자기 신앙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앞장서서 일하는 일꾼들을 판단하거나 비판하기보다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마십시오. 그러면 어느 날인가 무르익은 열매, 더 귀하고 성숙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 「빙점(氷點)」을 쓴 일본 작가 미우라 아야코는 아주 불행한 젊은 날을 산 분입니다. 불치병인 폐결핵을 앓았을 뿐 아니라 24세 때부터 결핵 척추 카리에스와 대상 포진, 직장암, 파키슨 병 등으로 온 몸에 기브스를 하고 13년 동안 베드에 묶인 채 살았습니다. 그 긴 세월을 병상에서 남의 손에 의해 대소변을 받아내며 산 사람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만약 그 때에 누가 “이 여자는 얼마나 범죄를 했으면 저런 형벌을 받을까?”라고 판단했다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그런데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병상에서 하나님을 발견했고 세례를 받았으며, 기적 가운데 퇴원한 후에는 1959년에는 좋은 남자와 결혼까지 했습니다. 더 나가서는 장편 「빙점」으로 소설 공모에 응함으로 상금을 받았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줌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가 출석하는 이시히가와 로쿠죠 교회를 그 작가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7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불행한 가운데 있거나 오늘 신앙적으로 나태 가운데 있거나 더 나가서는 범죄의 자리에 있더라도 결코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어떻게 성숙한 자가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맡기신 직책에 최선을 다해 충성하심으로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주님으로부터 좋은 판단을 받아 칭찬과 상급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