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누구의 편일까?
2012년 11월 11일 / 대예배 / 여호수아 5:13-15
수 5:13-15 /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다다랐을 때 앞을 바라보니 웬 사람이 손에 칼을 빼들고 우뚝 서 있지 않는가! 그래서 여호수아가 앞으로 나아가 그에게 “당신은 우리 편이오? 아니면 우리 원수 편이오?” 하고 물었다. 14) 그러자 “둘 다 아니오. 나는 여호와의 군대 사령관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여호수아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고는 “아이고, 어르신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 자리까지 찾아 주셨습니까?” 하고 여쭈었다. 15) 여호와의 군대 사령관이 여호수아에게 “네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한 곳이다. 그러니 신발을 벗어라.” 하고 말하자 여호수아가 신발을 벗었다.
“하나님은 누구 편이실까요? 부자의 편이실까요? 가난한 자의 편이실까요? 권력을 가진 자들의 편이실까요? 사회적 약자들의 편이실까요?” 대부분의 교인들은 하나님은 부자의 편보다는 가난한 자들의 편이라고, 하나님은 권력을 가진 자보다는 사회적 약자의 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라도 얼마든지 악할 수 있고, 부자라도 구약 성경 속의 아브라함이나 욥처럼 얼마든지 선한 청지기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라고 해도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는 여전히 우상을 섬기며 악인(惡人)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요셉이나 다니엘처럼 권력을 가졌어도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붙들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부자의 편도 아니고, 가난한 자의 편도 아닙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편도 아니고 사회적 약자의 편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들의 편입니다.”(레 19:15 / 너희는 재판을 할 때 불공정하게 하지 마라.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두둔해서도 안 된다. 또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에게 마음 쏠려서도 안 된다. 정의롭고 공평하게 재판하여라.)
■ 미국 남북전쟁 당시 링컨은 야전부대를 시찰할 때도 시시로 천막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그가 기도 중임을 알리기 위해 밖에 흰수건을 걸어놓고 기도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한 번은 그의 부관이 기도를 많이 하는 링컨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링컨은 “그들(남군)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투에 나서며 하나님께 기도한다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실까요? 링컨의 말은 유대 아사왕에게 전한 아사랴의 생각(역대하 15:1-15)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사랴에게 임하신 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 오래 전, 역사책의 한 페이지에서 실린 글입니다. 유럽 국가의 국민들은 대부분이 기독교를 믿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독일이 서로 상대를 주적으로 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의 초기에 독일은 우수한 전략과 우세한 전력으로 대륙을 거의 다 석권하고 대영(對英), 대소(對蘇) 전에 몰입하였습니다. 당시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에서는 지하저항(레지스탕스)이 활발했었습니다. 그 단체의 한 분대를 맡은 책임자(분대장)에게 영국에 있는 본부로부터 독일군 모 기갑부대의 전술(작전)장교인 모 중위를 암살하라는 지령이 내려졌습니다. 소속부대와 신상의 기록 그리고 사진 등이 첨부된 지령서를 받아 읽은 그 분대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처치해야할 적군의 장교가 바로 자신과 쌍둥이인 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대장의 아버지는 독일인이었는데, 프랑스인인 어머니와 결혼을 하여 자신들 쌍둥이 형제를 낳고,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혼자 독일로 떠났습니다. 형은 자기와 함께 어머니에 의해서 양육되었으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아버지를 찾아서 독일로 떠났습니다. 그 후 독일에서 아버지를 재회(相逢)했으며 군사학교를 마치고 장교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바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자신이 처치(암살)해야 할 인물이라니 기가 막혔었습니다. 그는 ‘임무수행을 할 수 없노라’는(하지 않겠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상부의 재차 지시는 이러했습니다. “귀관이 처치해야할 적군장교 OOO는 비록 젊기는 하나 당대(이 시대)의 최고라고 할 만한 전술지략가로 개전초기에 아군(프랑스) 1개 사단을 궤멸시킨 전투이력을 가진 자이다. 향후 큰 작전에 대비하여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아군의 작전수행이 대단히 어렵게 될 것이다. 그 한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1개 사단(10,000명)의 희생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형제간의 의리도 중하다고 하겠으나 이 시대의 상황을 냉정(冷靜)하게 판단하여 투철한 결심을 해주기 바란다. 적(敵)은 인류의 평화를 깨뜨리는 사악한 집단이며, 우리는 지금 성스러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우리의 편이다.” 상부의 지령을 접수한 그는 임무수행을 결심하고 부하들을 지휘하여 적진에 잠입했습니다. 첩보에 의하면 적군장교 OOO중위는 대단히 우수한 지략가이기는 하지만 또한 대단한 염세주의자로 홀로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는데,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요원들이 포착한 암살의 최적조건이었습니다. 거사의 당일, 부대인근의 오솔길에서 상념에 잠겨 산책하던 중위를 먼발치에서 망원경으로 포착한 (레지스탕스의) 분대장은 부하에게 기관총사격을 명령하여 저격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부하에게 작전의 결과를 상부에 보고하게 하고 자신은 어머니에게로 갔습니다. “어머니! 제가 형을 살해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듯이 아버지도 형을 위해서 기도하셨을 겁니다. 프랑스 군인들의 모든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듯이 독일군의 모든 어머니들도 그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테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의 편일까요?(누구의 기도를 들으실까요?)” 비장한 절규를 외치고서는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어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서 아무 말도 안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래! 하나님은 어느 누구의 편도 아니야. 의로운 자들의 편이시겠지 …… .”
▶ 성경이나 기독교사를 통해 볼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네들 편에 계신다’고 감히 선언하면서도 비열한 행위들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 편을 들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가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늘 우리 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알고 그 뜻을 행하는 자들의 편에 계시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자신의 길이 옳다고 믿게 하려고 애쓰는 자들 편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신다.’라고 추정하여 어떤 일에 뛰어들기 보다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모세를 하나님께서 아들의 할례 문제로 죽이려고까지 하셨습니다(출 4:24). 이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일깨어 주시는 큰 교훈이었습니다.
1. 당신은 우리 편이오? 아니면 우리 원수 편이오?
여호수아 5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전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을 불신하며 “왜 자신들을 애굽에서 꺼내셨는지? 왜 광야에서 이렇게 헤매게 하시는지? … .”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 악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민 14:37 / 모세가 그 땅의 형편이 어떠한지 살펴보라고 보냈던 자들 중에서 돌아와서 그 땅의 실제 형편보다 훨씬 좋지 않게 말하며 백성들을 선동하여 모세를 괴롭혔던 자들은 여호와께서 내리신 재앙으로 모조리 죽었다.
애굽을 떠날 때 있었던 성인 남성들은, 하나님 편에 서 있던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본문은 가나안땅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의 모습 즉 순종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전쟁에 앞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할례를 명하십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의미를 가지지만,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시는 타이밍은 좋지 않습니다. 커다란 전쟁과 적이 바로 눈앞에 있는 데도 하나님은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만약, 할례 중에 적이 이스라엘 백성을 친다면 남자들은 전멸될 수도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하였습니다. 유월절을 지켰고, 그동안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가 그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와는 달리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가까운 곳을 갑니다.
그 때에 어떤 칼을 든 사람이 나타납니다. 여호수아가 그에게 묻습니다. “너는 우리 편이냐 원수의 편이냐?” 그 사람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합니다. “아니다.”(영어 성경에는 ‘둘 다 아니다 / Neither)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지도자로 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여호수아의 편도 아님을 밝힙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는 네 편이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자신을 여호와의 군대 사령관이라고 밝힌 후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을 것을 명합니다. 성경에서 신을 벗는다는 것은 존경의 의미와 함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룻 4:7).
군대장관의 출현은 전쟁에서 여호수아를 도우시려는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것보다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편에 자신을 내려놓는 사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전쟁은 칼과 창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여리고 성을 돌아서 성을 무너뜨리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의 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인들의 오래된 난제 중 하나는 “하나님이 누구의 편을 들어주실까?”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기드온과 300명 용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자신의 창과 무기로 전쟁을 시작하려고 할 때에 많은 경우 하나님은 먼저 그것들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나의 힘과 열정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려놓음과 순종 가운데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십니다(대하 20:15).
2.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의 편이십니다.
주전 720년 이스라엘 북쪽인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침략을 당했고 남쪽은 바벨론에 의해 침략을 당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식민지 정책으로 잡혼정책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땅은 바벨론 포로이후 70년 만에 돌아왔고 순수한 유대혈통을 지켰습니다. 이후로 원수가 됩니다. 원수처럼 지내왔고 심하게는 땅까지 더럽다고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주민들은 당시 추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정복자인 앗시리아인들과 혈통적으로 혼합되었기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이 그들을 유대인으로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이에 따라 사마리아인들도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게 되고 독자적으로 유대인들과는 상반되는 제단을 쌓게 되었습니다. 이에 여인은 예수님께 어디에 가서 예배를 해야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는지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네 편입니까? 아니면 유대인 편입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봅니다.
요 4:19-24 /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는 예언자이십니다. 그러니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왜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유일한 예배 장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여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예배는 어디서 드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하다. 너희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유대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예배를 드린다. 이는 구원이 유대 사람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아버지께서 이런 예배를 우리에게 원하신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예배는 사마리아에서 예배하느냐?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교파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있다.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해야 한다.” 마치 한 자리에서 감사예배를 드린 가인과 아벨의 경우와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를 들으셨는가를 묵상한다면 아니 그냥 읽기만 해도 하나님은 어떤 예배와 기도를 받으시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성경에나 나오는 이야기로 생각하지 말고 먼저 내 자신에게 적용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묵상합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예배하느냐가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장소나 예배의 형식에 국한된 분이 아니십니다. 얼마나 화려한 성전이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요한복음 2:13-22, 마태복음 21:12-13에서 두 번에 걸쳐 성전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요 2:14-17 / 예수께서는 성전뜰에 이르러 희생제물에 쓸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또 그 뒤에 환전상들이 들어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 15) 그래서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몰아내고 환전상들의 돈을 땅바닥에 쏟아 버리며 그들의 탁자들을 둘러엎으셨다. 16) 그러고 나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들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17) 그때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아끼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이 떠올랐다.
두 세 사람이 모여 있어도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북녘 땅에서는 지하에서, 알 수 없는 굴속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찬송을 소리내어 부를 수 없어서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구할 수가 없어서 나누어진 쪽복음 성경을 다 낡아서 너덜거리도록 읽고 있습니다. 소리 내지 못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처럼 화려한 조명과 우렁찬 소리로 찬양을 드리지 못하지만 그들의 눈물어린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지 않겠습니까? 남한의 기독교방송을 듣는 선원들이 의기가 투합하여 배 위에서 선상예배를 드리는 북한성도들이 있습니다. 바다에서는 전파방해가 없어 라디오로 복음을 듣고 예배하며 마음껏 찬송하는 북녘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의 신전을 보십시오! 회교 사원이나 불교의 법당, 로마교의 성당은 건물이나, 장소에 대한 의미를 크게 부여합니다. 오늘날 개신교 역시 교회당 건물의 꾸밈, 유리창, 값비싼 오르간(어느 교회 파이프 오르간은 10억 주고 독일에서 구입, 이대 음대 학장이 연주), 내부 장식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내용보다 형식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필연 이것은 현재 생활이 어떠하든지 그 장소에 들어가므로 자기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 7남매를 둔 가난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먹을 것이 없어서 술지게미에 사카린과 물을 타서 자녀들을 먹였습니다. 빈속에 술지게미를 먹은 자녀들은 취기가 돌았습니다. 소년은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어린 것이 술을 먹고 등교하다니 … 용서할 수 없다.” 소년은 아무 말도 못하고 벌을 받았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가난했지만 자녀들에게 항상 ‘정직’과 ‘봉사’를 강조했습니다. 비록 술지게미를 먹였지만 매일 자녀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며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너희들은 모두 훌륭한 종들이 될 것이다. 오늘의 시련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날이 곧 올 것이다. 술지게미를 먹던 오늘의 고통을 잊지 말아라.” 7남매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이 자녀들은 장성해 모두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이숙녀 전도사와 아들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임마누엘 교회 김국도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가난과 배고픔 속에서 예배를 가르친 어머니의 신앙이 종들을 배출했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반드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잘 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가슴을 열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당시에 잘난 사람들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 아니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가슴을 열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오히려 사회에서 버림을 받았던 문둥병자였고, 로마 사람 백부장이었고, 가나안 사람인 수로보니게 여인이었고, 개 취급을 받았던 세리 삭개오였습니다.
마 8:11-12 / 이 백부장과 같은 많은 이방 사람들이 세계 여러 곳에서부터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가 앉을 것이다. 12)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늘나라가 마련되어 있는데도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땅을 치며 통곡을 할 것이다. 21:31 / …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분명히 못된 짓만 일삼는다는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수가성 여인은 이방인이었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모셔들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퉁명스러웠지만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고 이내 자신을 다 드러내 놓고 눈물로 회개하며 “저는 남편 다섯을 두었던, 개 같은 죄인입니다.”라고 자신을 드러내놓고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마음에 모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문구멍을 내고 한쪽 눈으로 바라보면서 ‘예수가 누군지 어디 한번 보자’는 식이 아닙니다. 자기의 마음을 활짝 열어 자신을 다 공개하고 “나는 이러 이러한 사람입니다. 저는 이렇게 외롭고, 저는 이렇게 힘들고, 저는 이렇게 문제투성이의 나약한 인간입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도 은혜를 주실 수 있는지요? 제발 저를 받아주세요.”하고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누구라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찾아서 오신 의사이시고,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신 목자이시며,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요 4:28-29 /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와서 보세요. 나의 지난날을 낱낱이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그분을 만나보세요.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그런데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렇게 중요하고 급하다고 생각했던 물동이를 버렸습니다. 물동이를 내버려 깨뜨렸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을 뒷전에 두었다는 말입니다. 아니,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러 왔었는지 조차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 평생을 짓눌려 살던 그 무거운 마음의 짐과 죄를 해결 받자, 그분을 몰라서 지금도 죄와 근심에 눌려 살 사람들을 생각하니 물동이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던 일을 버려두고 주님을 증거하려고 동네에 들어갔습니다.
▶ 전도자는 무엇인가를 희생해야 합니다. 자기의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전도할 수 없습니다. 돈 버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인기 누리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사회생활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도를 못합니다. 나를 찾아와주시고, 나의 죄를 사해주신 예수님을 전하는 일이 내게는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전도를 못합니다. 여인은 더 이상 자기의 과거를 감추려고 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자신이 자랑스러워서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전도는 간증이요 자기의 고백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는데, 나의 부끄러운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나의 죄를 용서해주신 분이 계셨다. 내 안에 죄 사함과 구원의 기쁨을 채워주신 그리스도를 당신도 만나보라.”고 증거하는 간증적 전도가 가장 강력한 전도입니다. 자기를 멋지고 아름답게 꾸미는 위선적인 전도보다는,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는 고백적인 전도가 가장 효과적이고 감동적인 전도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변화를 받고 나면, 그 동안의 부끄러움과 실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주님을 믿고 변화된 사람의 지난 과거, 주님이 용서하신 지난날의 죄악과 실수는 더 이상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영광거리가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의 말을 들은 그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이 여자의 과거를 꺼내지 않았고 그녀를 비웃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녀의 말을 듣고 다 나와서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39).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은 놀라운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았던 가장 불행한 여인을 들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사랑인지 모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여인은 잘난 사람도 아니었고, 가치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행복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던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수가성 여인은 사마리아 복음화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별같이 빛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 예루살렘 교회의 위대한 결정(행 15장)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간혹 마귀가 이를 도용해서 남을 정죄하고 판단(심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도구로 삼아 영혼들을 무너뜨리고 해악을 끼치기도 하는데 이는 참 무서운 죄악입니다(약 4:11-12). 그러니 어떤 경우에라도 내가 혹 정죄받고 판단(심판)받는 궁지에 몰릴지라도 내가 남을 정죄하거나 판단(심판)하는 자리에 서지 않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남의 약점을 붙잡고 늘어져서 상대를 무너뜨리며 자신의 위치를 견고히 해보겠다는 술수는 더러운 정치판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하나님의 교회에서나 공동체에서는 절대 이런 모습이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을 판단(정죄)하는 자리에 있을 때에 판단(심판)을 받는 그 영혼이 정말 잘 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사랑의 가슴으로 할 때 효력이 있습니다. 정죄를 위한 정죄(定罪)를 하는 것은 해악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원수와 악을 행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기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마 5:43-45).
▶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할례 문제가 신학적인 문제가 되어 최초의 예루살렘 총회가 열렸습니다.
행 15:1-2 /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있을 때였다. 유대에서 온 사람들 몇이 여전히 신도들에게 유대의 옛 관습대로 할례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자 2)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큰 논쟁을 벌였다. 그래서 신도들은 그 지방 사람 몇을 동행시켜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 문제를 사도나 장로들과 함께 협의하여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는 아름답게 결정이 났습니다.
행 15:27 /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것을 먹지 말고,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고 또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 이외의 유대인의 율법을 여러분에게 짐 지우는 것은 성령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결정입니다. 이것만 지켜 주신다면 충분합니다.
바울도 그의 권면에서 같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큰 문제였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갈 5:6 / 그리스도께 영원한 생명을 받은 우리는 할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유대교의 의식을 지키든 지키지 않던 그런 것에 구애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뿐입니다.
▣ 결론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이후 지금까지 모든 지상의 교회는 이런 신학적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새로운 문제가 닥쳤을 때 ‘이것이 신앙적으로 옳은가? 아니면 그릇된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해야 되는 괴로움을 교회들이 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끊임없이 와서 교리적인 혹은 신학적 질문으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뜻을 함께 하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마귀에 들렸다’고까지 했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모양만 바뀌었을 뿐이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5년에 죽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 재임 시 옛날 가톨릭교회가 잘못한 부당성을 회개하는 말을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교회도 얼마든지 잘못 행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의 분열은 거의가 다 교리적 차이, 성서 해석의 차이, 인간의 욕심에서 빚어진 불행입니다. 지나고 보면 유치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게 심각했습니다.
한국 장로교회가 초창기에는 이렇게 많이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모세5경의 저자에 대한 문제 때문에 분열이 시작됐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모세5경으로 모세가 기록했다! 그렇지 않다! 신학에는 문서설이라는게 있는데, 그 많은 문서설이 집대성된 것이다.” 이 문제로 심한 갈등을 겪다가 마침내 교회가 갈라지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서로 마귀라고까지 했습니다.
■ 그나마 반가웠던 일은 2005년 4월 8일 도곡동 강변교회에서 한국교회의 대표급 원로 목사님들이 모여서 참회의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에 제일 앞자리에 세 분이 나란히 얼굴 표정을 심각하게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강원용 목사, 조용기 목사, 김창인 목사가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기도를 하였고, 그들의 기도 내용이 신문에 발표되어 온 세상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한국 교회의 대표급 목회자들로서 지나온 과거에 무엇을 잘못했는가? 제일 첫째가 피차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자기 교파의 신앙만을 주장해 상대방을 저주한 것에 대한 회개’였습니다. 잘한 기도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는 세계 어느 나라 교회보다도 싸움을 많이 해서 수없이 갈라졌습니다. 거기에 나오신 목회자들이 서로의 교단을 마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만 의인이라고 말한 것을 회개한 것입니다. 늦었지만 원로들이 그런 시간을 가졌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자신도 하나님을 향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짓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생각, 내 기호에 맞추어 편을 짜고는 “하나님, 하나님은 누구 편이신가요? 내 편이신가요, 적의 편이신가요?”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편도, 적의 편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매 우리로서는 인간의 생각을 버리고 그 분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것을 자주 망각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나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려는 마음은 잊어버린 채 자기 뜻과 거기에 반대되는 뜻 사이에서 편 가르기 싸움을 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 내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분란도 대개는 개인들의 편 가르기와 관계된 경우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교회를 위하는 것처럼 명분을 내세우지만, 싸움이 극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대부분의 경우에 그 밑바탕에 깔린 갈등의 원인은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구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인간 개개인의 생각은 저마다 다를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집을 세워 극한 싸움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에는 문제 해결을 하고자 하는 바램보다 질 수 없다는 욕심이 앞선 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훈계는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가르침입니다.
눅 22:24-27 /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제일 윗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다.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는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둘러선 종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또 종들은 자유가 없이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26) 그러나 너희 가운데서는 남을 가장 잘 섬기는 사람이 너희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27) 이 세상에서는 주인이 자리에 앉아서 종들에게 섬김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의 종으로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지혜를 얻은 솔로몬이 처음 만난 난제(難題)를 해결한 재판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왕상 3:16-27 / 어느 날 창녀 둘이 왕을 찾아와서 공정한 판결을 요구하였다. 17) 한 여자가 말하였다. “나의 주 임금님이시여! 이 여자와 저는 한 집에서 같이 삽니다. 제가 아들을 낳을 때에 이 여자밖에는 집안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18) 그런데 이틀이 지나 이 여자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때 집안에는 우리 둘밖에 없었습니다. 19)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이 여자가 잠을 자다가 자기 아이를 깔아 죽였습니다. 20) 그러자 이 여자는 밤중에 일어나서 제가 잠든 사이에 제 아이를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대신에 자기 아이를 제 곁에 놓고 갔습니다. 21) 다음날 아침에 제가 일어나 아이에게 젖을 먹이려고 보니 아이가 죽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를 자세히 살펴보니 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22) 이때에 다른 여자가 소리쳤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산 아이가 내 아이고, 죽은 아이가 네 아이야!” 먼저 말한 여자도 대들었다. “아니야! 죽은 것이 네 아이고, 산 것이 내 아이야!” 하며 그 두 여자는 이렇게 왕 앞에서 서로 다투었다. 23) 이때에 솔로몬이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끝이 없는 싸움이구나! 서로 산 아이는 자기의 것이요, 죽은 아이는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주장하니 증인도 없는 이 싸움을 어떻게 하겠느냐?” 24) 그러고 나서 솔로몬은 칼을 가져오게 한 후에 25) 신하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였다. “산 아이를 정확하게 두 쪽으로 잘라서 이 두 여자에게 각각 반씩 나누어 주어라!” 26) 그러자 산 아이의 어머니는 자기 아이에 대한 애정으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 이렇게 외쳤다. “안 됩니다! 나의 주 임금님이시여! 차라리 이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시더라도 제발 죽이지는 마세요!” 그러나 다른 여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어서 둘로 나누어서 저 여자의 아이도 안 되고, 내 아이도 안 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27) 그러자 왕이 즉각 판결을 내렸다. “이 아이를 죽이지 마라! 이 아이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여인이 그의 어머니이다. 그 여인에게 이 아이를 돌려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