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만난 사람(1)
< 니고데모 편 >
2018년 3월 25일 / 대예배 / 요한복음 19:38-42
니고데모 이야기는 요한복음 3장, 7장, 19장에 나옵니다. 이 세 부분을 연결해서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 대화한 후에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은 이전에 비해 다른 사람 같다고 느낄 만큼 달라지는 게 맞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알던 친구를 오랜 만에 만났을 때 그 친구 입에서 “야, 너 전혀 다른 사람 같다.” 이런 반응이 나와야 합니다.
거듭나기 전 사람과 거듭난 후의 사람을 잘 비교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바울 서신들을 본다면 거듭나기 전과 후를 비교하면서 거듭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라는 교훈들이 많이 실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두 군데를 봅니다.
엡 4:21-24 / 만일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배우고자 한다면 22) 여러분의 그 낡고 악한 옛 사람을 뽑아 던지십시오. 여러분의 그 낡고 악한 옛 사람이야 말로 육욕과 속임수로 가득 차서 속속들이 다 썩어 버린 지난날 여러분의 자화상입니다. 23) 이제 여러분은 태도와 생각을 새롭게 바꾸어야 합니다. 24) 여러분은 전혀 다른 새 사람, 거룩하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새사람이 되십시오.
골 3:1-4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여러분도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니 하늘에 있는 풍부한 보화와 기쁨에 눈을 돌리십시오. 그곳에는 그리스도께서 영예(榮譽)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2) 하늘나라의 것으로 여러분의 생각을 채우십시오. 이 세상일을 염려하느라고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3) 마치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도 이 세상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참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4) 우리들의 참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빛나며 그분의 모든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자칭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예수님 기준으로는 거듭난 사람이 아닌데, 예수 믿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교회 생활에 매우 익숙해 있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면서 지내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1.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
➊ 우선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인데, 바리새인들은 전심을 다해 율법을 연구하고, 도덕적인 깨끗한 삶을 추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일례로 주전 100년경 하스모니안 왕조 중에 아리스토블루스 1세가 죽고 그 살로메가 그 남편의 첫 번째 동생 얀네우스를 감옥에서 풀어주고 결혼을 해 버렸습니다. 다들 두려워서 조용히 있었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이 일어나 그것이 율법에 맞지 않음을 주장하며 항거를 했고, 그 결과 살로메에 의해 80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굴하지 않고 그 부도덕에 저항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을 아주 존경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전국적으로 6,000명 정도 있었는데, 그들의 종교 행위는 겉으로 봤을 때는 완벽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만을 가지고 그들을 몹쓸 인간이라고 하지 말고 그들의 행위 중에 나쁜 것은 빼어버리고 배울 것은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시기에 책망도 하시고 잘못에서 벗어나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변화시켜서 사도 바울로 만드신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자신을 소개하며 남들이 말하는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니고데모 역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던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를 보고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고 몇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➋ 니고데모는 부자 명문가(名門家) 사람이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고대사나 요아킴-예레미아스의 책을 보면, 예수님이 오시기 100년 전부터 성전이 파괴되는 AD 70년까지 니고데모의 가문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자세히 나옵니다. 얼마나 유명한 가문이면 여러 역사서에까지 등장을 하겠습니까? 또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몰약과 침향 100근을 니고데모가 가져왔는데 몰약과 침향은 당시에 엄청나게 비싼 물품이었는데 그만큼 경제력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➌ 니고데모는 관원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1에 치리자, 관원이라고 번역된 ‘아르콘(ἄρχων)’이라는 단어는 원래 통치자, 왕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사람들은 이 단어를 산헤드린 공회원을 지칭할 때 썼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 지도자 71명이 모여서 입법, 사법, 행정에 권세를 휘두르던 지금으로 치면 국회의원 정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➍ 니고데모는 교육을 많이 받은 학자인데, 예수님도 니고데모를 선생이라고 하셨습니다.
➎ 뿐만 아니라 니고데모는 나름대로 겸손한 성품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이가 있고, 바리새인이요 부자며 높은 벼슬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랍비는 랍비 학교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인데, 큰 학자인 니고데모가 랍비 학교는커녕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갈릴리 그것도 촌구석이었던 나사렛 그것도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니고데모가 얼마나 겸손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많이 사람들이 그렇게 되기를 사모하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도 좀 있었고, 신기한 표적들도 목격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겸손하게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적이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니고데모가 이 말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니고데모는 뜻밖의 말씀에 당혹스러워하며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세상적인 조건이나 행동, 환경, 미덕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오직 하나 ‘성령으로 거듭났느냐? 아니냐?’만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동문서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이니 표적이니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으시고 갑자기 ‘진실로 진실로’를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아직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거듭나는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사실 내면의 영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체험이 없으면 아무리 설명을 하여도 이해가 안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어떻게 거듭나는 것인지를 친절히 설명해 주십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무슨 말씀인지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바람에 비유해서 다시 설명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리스도를 따를 마음은 별로 없는 팬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열성적인 종교인들이라고 표현을 해야 하겠지요. 물론 그나마 열심이 미지근한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말입니다.
▶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간 건 사실 대단한 용기였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공회원인 니고데모가 갈릴리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을 찾아가 랍비라고 불렀다는 게 밖으로 알려지면 입장이 곤란할 수도 있습니다. 뒤편에서 예수를 좋게 생각하는 것과 공개적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아무도 모르게 마음으로 따르는 데는 위험한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예수의 제자라고 하려면 공회원으로서의 명성과 지위를 버려야 할지도 모르고 동료들의 조롱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를 보시면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임을 지적하셨습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너 지금의 모습으로는 안 돼, 새롭게 바뀌어져야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어. 그래야 천국에 갈 수가 있단 말이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다면 진정한 표적은 거듭나는 표적이다.’ 이런 뜻입니다. 더 알고, 더 봉사ㆍ헌신하라는 것이 아니고 심령이 새로워지고 인생의 목적이 바뀌고 새로운 가치관 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즉 서두에 말한 에베소서 4:21-24과 골로새서 3:1-4 말씀처럼 말입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주신 법들을 지켜나갈 수 있게 됩니다.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셔야 하는데, 우리로서는 성령을 구하여 새롭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과 생각으로만 믿는 사람이 되지 말고 실제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단지 예수님의 팬(fan)인지 제자(弟子)인지 갈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니고데모는 아직 팬이지 제자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백과 삶은 하나일 때만 둘 다 진짜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다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데로 산다면 고백만 있고 삶은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려고 선행에 힘쓰지만 예수님을 죄를 씻겨 주시고 죄악에서 건져주시는 구세주로 믿지 않는다면 바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는 고백과 더불어 경건한 삶, 믿음과 행함이 함께 가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값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겁먹고 떠날까 그렇습니다. 목사님들도 이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대부분 은혜로 듣기 좋고 위로가 되는 그런 방향으로 설교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세상에서 힘들게 한 주간을 살다가 교회에 와서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28-30).
세상 어디에서 오는 쉼을 얻으려고 하지말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평화와 안식을 찾으십시오(요 16:33). 이것도 저것도 아니어서 말씀을 그냥 편하게 듣고, 예배에 참석했다는 스스로의 안식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평화와 안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2. 확실한 신앙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편에 선 니고데모
초막절에 예수님을 눈앞에서 뻔히 보면서도 잡지 못하던 유대인들이 드디어 예수님을 잡으려고 사람을 보낸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아주 당당하게 ‘내가 조금 더 있다가 갈 거야’ 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성전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가 달리 온다 해도 이분이 보여주신 것보다 더 많은 이적을 보여줄 수는 없을 거요.’하고 서로 말을 합니다. 군중들이 이런 분위기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전해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합세하여 예수를 잡아들이라고 성전 경비병들에게 명하였습니다(요 7:31-32).
그런데 예수를 잡아 오라는 명령을 받고 갔던 성전 경비병들이 그냥 돌아오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왜 그를 잡아 오지 않았느냐?’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오히려 경비병들은 ‘그분의 말씀은 참으로 훌륭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그 같은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경비병들의 말이 매우 거슬리었습니다. 자기네들이 지금껏 많은 것을 가르치며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였는데, 감히 자기네들을 무시하며 오히려 자기네들이 체포하려는 예수님의 설교가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대단한 것이라는 말에 몹시 기분이 상했을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조롱하는 투로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들도 꾐에 빠져 버렸단 말이냐? 우리 유대인 의회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 중에는 그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그 어리석은 군중들이 무엇을 안단 말이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요 7:45-49)
그때 전에 남몰래 예수를 찾아가 회견을 한 일이 있는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가 입을 열었습니다. ‘사람을 심문해 보기도 전에 죄인으로 처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지 않소?’ 그러자 그들이 빈정거렸습니다. ‘당신도 그 무식한 갈릴리 사람과 한패요? 성경을 자세히 조사해 보시오. 갈릴리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한군데도 없소.’ 그러고 나서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요 7:50-53).
니고데모가 나서서 유대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즉 당신들은 어째서 그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판단하느냐는 것으로 ‘당신들은 어째서 그가 행한 일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서 판단하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한 말이나 그가 행한 일은 악한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것이 정녕 선이냐? 악이냐?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났느냐? 아니야? 하는 것도 생각해 보지 않고 그를 정죄하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이 과연 율법을 아는 자들의 태도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율법에 의하면 분명히 자기 변호와 증인들의 증언이 있어야만 정죄할 수 있었습니다(신 19:15-20).
즉 죄인으로 정죄하려면 본인에게 소명 기회를 주어야 하며 거기에 더하여 최소한 2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한 것입니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하속들과 니고데모의 태도입니다. 특히 이들은 예수님과 관련하여 어느 쪽에 서느냐하는 것이 자신들의 안위와 입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속들은 대제사장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떤 중벌이 내려질지 모릅니다. 니고데모도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의하여 자신의 입지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면서 그러한 사실은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변호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외적으로 얼마나 자신에게 유리하느냐? 불리하느냐? 보다는 과연 예수님이 말씀이 옳으냐? 그르냐?’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설령 자신의 행위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지 모르지만 진리 안에서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을 그렇게 대우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청해서 예수님의 변호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외적으로 현실적으로 얼마나 유리하냐? 불리하냐? 에 의하여 우리의 행동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그것이 진리이냐? 아니냐?’에 의하여 우리의 행동이 좌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참된 의미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유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3. 헌신의 사람으로 변화된 니고데모
요한복음 19장을 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식장에 한 번 더 등장합니다. 그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 100근쯤 가져왔습니다. 상당한 금액이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온 몰약과 침향이 얼마나 값어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나드 한 근의 향유를 부었다고 하였고 가룟 유다가 그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사회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예수님 당시 일반적인 백성들의 일 년 수입이 200데나리온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 년 365일 중 안식일과 특별한 절기를 빼면 약 200일 정도 일할 수 있는데,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부은 향유를 당시의 값으로 환산하면 일반 노동자의 1.5년 연봉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를 적용하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가져온 몰약과 향유의 값어치는 일반 노동자의 150년 치 연봉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계산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과 향유 100근이 황제에게만 해당한다는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사용한 100근을 경제적으로 계산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 거의 전부를 바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정치적으로 계산하면 니고데모에게 있어서 황제는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니고데모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예수님이 자신의 온전한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반역자로 처형된 사람의 장례를 위해 돈을 쓰며 후원하고 장례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를 죽이도록 지지한 공회원들과 다른 편에 서는 것이고, 공회원의 지위를 잃고 더 나아가 생명까지 위협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예수를 반대하고 죽이고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고 처형하는 시대에 공개적으로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은 숨어서 예수 믿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런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바리새파에 속한 산헤드린 공회원이라면 이유 없이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습니다. 이 순간 니고데모는 멀리서 예수를 바라보고나 무리 속에서 따라다니다가 자기에게 이득이 없다고 판단될 때 슬그머니 떠난 제자들과 달랐습니다. 분명하게 자기 소속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확실히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알 수 있도록 자신을 예수님의 사람으로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어떤 불이익이나 위험을 당해야 한다면 그걸 감수하는 게 제자의 대가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해야 나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나의 제자로 시인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마 10:32-33 /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하겠다. 33) 그러나 만일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
롬 10:9-10 / 만일 여러분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속에 굳게 믿으면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10) 사람은 마음으로 믿을 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고 그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입으로 고백함으로써 확실하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38-42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모셔 가게 해달라고 청하여 빌라도가 허락을 하자 그는 가서 예수의 시체를 모셔 내렸습니다.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어 만든 방부제를 100근 가량 가져왔는데, 그 두 사람은 함께 예수의 시체를 모셔다가 유대인들의 장례 풍속대로 방부제를 바르고 길고 고운 베로 감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가까이에는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는 한 번도 사용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전에 빨리 서둘러야 할 필요도 있고 또 무덤도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시체를 거기에 모셨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용기와 마지막 봉사는 너무도 고맙고 아름다웠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용기로 말미암아 주님의 시신이 더는 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잘 수습되어 새 무덤에 장사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예수님께 부활의 요람을 마련해 드린 겁니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의 봉사와 헌신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베드로행전이라는 외경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의 말년에 대해 소개했는데, 그는 예수님의 부활 후 유대교와 산헤드린을 떠나 오직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며 산 신실한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가 되어 베드로를 받들었다고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부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가 그의 재산으로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100세가 넘도록 살았다고 한다면 그와 함께 활동하였던 니고데모도 초대교회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해도 좋을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➊ 이제 우리도 예수님을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➋ 확실한 신앙을 갖고 예수님의 편에 서서 예수님을 시인하며 복음을 전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➌ 니고데모처럼 헌신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부끄러움보다 감사 찬양하며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