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무엇이관대
2021년 8월 1일 / 시편 8:4, 144:3
시 8:4 /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144:3 /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저를 알아주시며 인간이 무엇이기에 저를 생각해 주시나요!
본문의 말씀에서 시편의 저자는 ‘사람이 무엇이기에...’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 말 속에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사랑하여 주십니까!’ ‘제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까!’라는 감격과 감사의 마음을 담고 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함께 나누고자 한다.
1. 인간은 더러운 존재이다
타락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 몇 명이 예수께 물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어기고 있습니까? 그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예식조차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저들의 말대로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는 것은 결코 잘 한 일은 못된다. 우리도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가 들어오면 먼저 간식이나 밥을 주기 전에 손을 가서 씻으라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배가 고프기 때문에 손을 닦는 것은 뒤로 하고 먼저 먹으려고 한다. 굶주린 배를 채우려는 것이 본능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손을 씻고 안 씻고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해서 트집을 잡는 것이다.
먼저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을 강조하였지만 예수님은 청결한 마음과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다. 사실 신앙 특히 예배란 어떤 예식이나 의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위에 서 있어야 되는 것이다.
▶ 저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저들이 깨닫지 못하거나 등한시했던 것을 지적해 주셨다.
마 15:7-9 /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한 예언이 너희를 두고 한 것이 아니겠느냐? 8) 이 백성이 나를 섬긴다고 주장을 하지만 사실은 말로만 나를 섬기고 높이며 마음은 내게서 아주 멀리 떠나 있다(사 29:13). 9) 그들이 나를 경외하며 제물을 바친다고 해도 아무 쓸모없는 일이다. 그들은 나를 세계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편리한 대로 생각해 내어 만든 규정에 따라서만 나를 높이고 섬기기 때문이다.
말씀을 하신 후 예수께서는 군중을 불러 말씀하셨다(마 15:10). 사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저들이기에 저들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 15:11 /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더럽힌다.
이 말씀은 상식적인 문제로 조금만 마음을 기울인다면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이다.
그때 제자들이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마 15:12 / 지금 하신 말씀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나 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마 15:13-14 /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은 나무는 모두 뽑힐 것이다. 14)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맹인이면서 맹인을 인도하는 자들이다. 맹인이 맹인의 손을 붙들고 가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뿐이다.
이에 베드로가 ‘그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자 예수님은 쉽게 설명해 주셨다.
마 15:16-20 /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도 아직 깨닫지 못하였느냐? 17)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나 뱃속을 거쳐 다시 뒤로 나가 버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8)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것이 그 말하는 사람을 더럽힌다. 19)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말, 중상 같은 악한 생각들은 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이 교훈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만 들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와 우리 모두에게도 하신 말씀이다.
누가복음 18:9-14을 묵상해 보자.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교훈을 보면 ‘저럴 수가 있느냐?’하며 우리는 눈살을 찌푸리지만, 이 교훈을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이는 퍽 드물다. 왜냐하면 나는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다고 자부하는 자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보기 때문이다. 아직도 자신은 경건하다고 생각하거나 등한시하여 그냥 넘어간다. 과연 그런 말씀일까? 그렇게 해도 될 말씀인가? 예수님은 분명히 용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이 세관원이었다고 하셨다.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는 아예 듣지도 않으셨다. 아니 듣기조차 싫으셨을 것이다. 구역질하는 기도였을 것이다.
눅 18:9-14 / 자기들만 옳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자기가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뽐내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는 세관원이었다. 11)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12) 나는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13) 그러나 세관원은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고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용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그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관원이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칭찬을 받으려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베푸는 일이 없도록 하라,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하는 것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의 자선행위를 드러내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분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그러니 네가 어떤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때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라.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고 ‘기도할 때 경건한 체하는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큰길 모퉁이와 회당에서 드러나게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고 하셨다.
왜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외식에 빠져 들어갈까?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의 역사가 없거나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사람의 칭찬은 당장 달콤하지만 하나님의 중심을 보시는 칭찬은 더디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가벼운 신앙이 아닌 묵직한 신앙, 다져진 반석과 같은 신앙,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신앙이기 때문이다. 세상 풍습에 젖어있는 우리 옛사람으로서는 이러한 틀을 바꾸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럴지라도 바꿀 것은 필히 바꾸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 사람의 속성과 방법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그리고 세상에 재물을 쌓아두려 하지 말고 하늘나라에 쌓아두라.’고 하셨고, 너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마 6:33 /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적과 같이 잔과 접시의 겉과 속은 깨끗이 닦을 줄 알면서도 자신의 속마음은 방탕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는데도 깨끗하게 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자신들을 괴롭히는 쓴뿌리를 제거하는 일은 제쳐놓았다.
아담과 하와의 모습은 우리들에게서 예외가 아니라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자 아담이 탄생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가꾸어 놓으시고 손수 빚으신 아담을 거기서 살게 하셨다. 그 동산에는 아름다운 나무뿐 아니라 맛있는 과일이 열리는 나무도 자라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동산 안에 있는 온갖 나무 열매는 따먹어도 좋다. 그렇지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 알게 해주는 나무 열매는 따먹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 열매를 따먹는 날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는 아담이 혼자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고 짝이 없이는 바로 설 수도 없어 짝을 만들어주셨다. 아담은 하와를 보자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서 살이다’라고 기뻐했다.
그러나 사단이 와서 하와를 유혹하자 그만 넘어가 먹지 말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남편인 아담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아담이 먹자 곧 저들에게는 좋지 않은 반응이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왜 그 열매를 따먹었느냐?’고 책망하시자 아담이 한 변명을 보자.
창 3:12 / 하나님께서 내 곁에 늘 있도록 허락하신 이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따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 열매를 먹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네가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묻자 하와 역시 변명을 했다.
창 3:13 / 뱀이 그 나무 열매를 한번 따먹어 보라고 자꾸 꾀었어요.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신 것은 저들이 잘못을 구하였을 때에 용서해 주시기 위함이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중과는 달리 변명과 더불어 남을 원망하기에 바빴다.
2. 탕자를 뜨겁게 맞아주시는 하나님의 마음(눅 5:11-32)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는 꼼꼼하여 말없이 하라는 일을 꼬박꼬박 잘 한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철이 안 들어서 그런지 생각이 짧아서 그런지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자기 주관이다. 말썽도 많이 피웠다. 어느 날 이 둘째가 아버지에게 도전적인 발언을 했다. ‘아버지의 재산은 언젠가 제게 주실 것인데, 지금 힘 좋고, 머리 잘 돌아갈 때에 먼저 주시면, 제가 나가서 사업을 하여 크게 불리겠습니다. 그러니 지금 제 몫을 제게 주십시오.’ 정말 못된 아들이다. 철이 안 들었다고 하지만 자기 몫이 어디 있는가? 자기 것을 맡겨놓는가? 자기에게 돌아갈 몫을 주고 안 주고는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하실 일이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듯이 아버지는 할 수 없이 재산을 나누어주었다. 그랬더니 몇 날이 못 되어 둘째는 그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곳으로 떠나가 버렸다. 왜 그럴까? 가까우면 아버지의 간섭을 받게 되니까 먼 곳으로 피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가진 재산 다 탕진하고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마침 온 나라에 흉년이 드니 남의 집 돼지를 키우며 돼지가 먹는 것을 먹으며 생명을 연명하였다.
어느 날 저녁 밤, 고픈 배를 움켜쥐고 눈에 눈물이 그득하며 생각에 젖었다. ‘아! 내 처량한 모습이여!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지천이건만, 난 집에 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알지 못하였도다. 내 아버지 집의 제일 말단의 종들도 따뜻한 밥에 기름진 반찬을 먹는데 나는 짐승보다 못한 모습으로 여기서 굶주려 죽는구나!’그리고는 돌이켜 아버지 집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미 자기에게 나누어준 재산을 다 탕진한 주제에 무슨 체면으로 아버지께 돌아가겠는가.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마음에 결단을 했다. ‘내가 아버지께감히 아들이라 할 수 없으니 종으로라도 써달라고 말씀을 드려보자.’
사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감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악인이든 선한 사람이든 모든 이에게 은혜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는 감사를 해야 한다. 주어진 결과만을 보고 감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것, 깨닫는 것, 찬양하는 것, 말씀을 묵상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명심하자.
그리하여 떠났던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재산은 다 탕진하고, 얼굴은 피골이 상접하여 말이 아니다. 옷은 다 해어져서 너덜거리는 모습으로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마을 어귀에 나타난 아들을 본 아버지가 달려갔다. 냄새나고, 더럽고, 추한 거렁뱅이를 끌어안는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여 땟국이 줄줄 흐르는 얼굴에 입을 맞췄다. 오히려 돌아와 준 것,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해 준 것, 살아와 준 것만이 고마워서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이때 아들이 엎드리어 말한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자기를 종들 중 하나로 여기시고 밥만 먹여 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히려 이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풀었다.
눅 15:22-24 /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빨리 집안에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다가 내 아들에게 입혀라. 그리고 보석 반지를 끼워 주고 신을 신겨라. 23) 또 살찐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잔치를 열고 기쁨을 나눠야겠다. 24)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그를 잃었다가 찾은 것이다.’
이 비유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뒤 이어서 큰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눅 15:25-30 / 한편 밭에서 일을 끝내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자기 집에서 노랫가락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26) 그는 종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물어 보았다. 27) 종이 대답하였다. `주인님의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주인님의 아버지께서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시고자 살찐 송아지를 잡아 큰잔치를 벌이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으나 29) 그는 아버지에게 투덜거렸다. `저는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말씀하신 것 중의 어느 하나도 거역한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지금까지 제게는 친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주신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에게 아버지의 돈을 써버린 아들이 오니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시는군요.'
큰 아들이 말한 그대로 이유 있는 항변이라고 볼 수는 있다. 큰 아들은 나름대로 성실했다. 자신의 도리를 잘 지켰다. 둘째에 비하면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며 자신의 위치에서 성실하게 일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첫째 아들에게 부족한 것들이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신앙의 깊이가 너무 없다는 것이 들어났고, 아버지 집에서 의무적으로 일은 하였지만 아버지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부족했고, 의무를 넘어 아버지의 마음까지는 헤아리지 못하였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근심과 걱정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았다는 생각과 더불어 남에게 폐를 끼친 적도 없이 살아왔다는 자만심 때문에 동생에 대한 사랑과 긍휼 같은 것은 관심 밖이었다.
아무리 아버지 재산에 관심이 많다 해도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동생에게 따뜻한 한 마디 하지 않고, 동생을 위해 잔치까지 해 주는 아버지에게 불만 불평을 했다는 것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고 하겠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형은 동생에 대한 형제의 사랑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러한 첫째 아들에 불평과 불만에 대하여 아버지는 한 마디로 잘못을 지적하였다.
눅 15:31-32 / 아버지가 말하였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가진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더냐? 그러나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잔치를 벌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만일 우리가 둘째 아들과 같은 처지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첫째 아들이 문전박대하거나 잔치까지 베풀어주시는 아버지를 향해 불만불평을 했다면 좋겠는가? 괜히 돌아왔다는 생각에 다시 집을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 여기에서 우리는 첫째 아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집에 돌아온 둘째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고까지 표현하며 따뜻이 맞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면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는 시편 기자의 말씀이 입에서 저절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길 잃은 양을 찾아 온 들녘을 헤매다가 찾은 즉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놓고, 잃은 양을 찾은 것이 너무 기뻐 잔치를 벌일 것이라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탕자같은 나를 맞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읍(感泣)한다.
눅 15:7 /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명보다 길을 잃었던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한다.
3. 11시에도 일꾼으로 쓰시려는 하나님의 마음(마 20:1-16)
한 포도원 주인이 아침에 나가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일꾼을 찾았다. 한 낮에 시장에 나가보니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도 불러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저녁나절 다시 시장 터에 나가보니 그때까지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지 시장 터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포도원 주인이 그에게 물었다.
“왜 이 바쁜 철에 일도 안하고 놀고 있느냐?”, “우리는 일하고자 하여도 일을 시켜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인은 딱하여 “우리 포도원에 와서 일하라.”고 하였다.
그는 기뻐서 포도원으로 가서 뼈 빠지게 열심히 일을 했다. 그때가 오후 5시였다. 열심히 일을 할지라도 한 시간만 하면 끝난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주인은 그를 자신의 포도원에 들여보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품삯을 계산하는 시간이 왔다. 그때 주인이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주었다. 그런데 끝 무렵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이 와서 일한 사람이 속으로 생각하였다.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나에게는 적어도 2-3데나리온은 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을 이들에게도 모두 한 데나리온씩만 주었다. 그러자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 불평을 하였다. “우리는 뙤약볕에서 하루 종일 일하였는데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불공평한 일입니다.” 처음 온 일군들은 나름대로 이유 있다. 그때에 주인이 대답하였다. “당신들과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한 데나리온을 주었는데 무엇이 잘못된 것이냐?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내 뜻이다.”
이 말씀은 읽어보면 주인이 불공평한 것처럼 느껴진다. 포도원 주인이 바보인가? 아니면 사리 분별을 잘 못하는 기분파인가?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천국은 이와 같다’고 하셨다. 어떻게 천국이 이렇게 납득할 수 없는 모습이라는 것인가?
포도원 주인이 오후 5시에 나갔을 때 아무도 써주지 않아서 아직도 시장터에서 서성이는 사람이 있었다. 왜 이 사람을 아무도 써 주지 않았겠는가? 몸이 성치 않았거나, 연로하여 일을 할 만하지 못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별로 쓸모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그도 ‘내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하였다.
짐작하건대 이 사람은 오늘 일당을 벌지 못하면 집에서 기다리는 식구들 모두가 굶을지도 모른다. 그중에 어떤 이는 길바닥에서 이슬을 맞으며 잠을 자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도 돌아보아 주지 않는 사람, 쓸모가 없어서 버림받은 사람 이런 사람을 포도원 주인이 자기의 포도원으로 들여보낸 것이다. 그리고 새벽부터 온 사람과 똑같이 품삯을 주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온 사람은 좋았겠지만 아침부터 온 사람은 어떠했을까? 하루 종일 일한 그들과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을 똑같이 취급해 주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 아닐까? 그들의 불만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만약 이 말씀을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은연중 아침부터 온 사람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오후 5시에 온 사람이라면 포도원 주인의 말이 어떤 말씀으로 들렸겠는가? 너무 감사한 이야기, 포도원 주인의 너그럽고 풍성한 사랑에 감사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이 비유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는 어떤 사람이냐?’는 물음이다. ‘너는 몇 시에 온 사람이냐?’ 이것이 이 비유 속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물음이다. 이 물음은 시간을 묻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자세를 묻고 있는 것이다. 너는 지금 몇 시에 온 사람의 마음으로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너는 지금 몇 시에 온 사람의 심령으로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아침부터 온 사람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항상 ‘나’가 그 생각의 중심에 들어 있다. ‘내가 이렇게 하였는데 ….’, ‘내가 전부터 이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 ….’, ‘나는 아침부터 땀을 흘린 사람인데.’ 그러나 오후 5시에 온 사람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 주인의 사랑에 감동하는 태도이다. 아무도 써주지 않는 자기를 불러주신 것, 그나마 한 시간 밖에 일하지 못했는데도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그 주인의 사랑과 은혜 …. 너무 고맙고 놀라워 감사해서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삶이 그의 삶이었다.
우리의 믿음의 자세는 어떨까? 아침부터 온 사람의 자세인지? 오후 5시에 온 사람의 마음인지?
‘내 시간, 내가 한 일, 나의 권리, 내 것’만을 주장하는 그에게 포도원 주인이 이렇게 말하였다.
마 20:13-15 / 이보게, 나는 자네에게 잘못한 것이 없네. 자네는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처음부터 정하지 않았는가? 14) 자네 품삯이나 가지고 가게. 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준 것은 내 마음에 달린 것일세. 15)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주는데 무엇이 잘못인가? 네가 친절을 베푼 것이 자네 비위에 거슬린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0:16 / 이와 같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이다.
이 천국에 대한 비유의 말씀은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여 일을 하라는 말씀이기도 하고, 먼저 와서 일을 한 사람에게는 불평하기 보다는 형제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혹시 주인이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에게 1시간 일한 삯 1/9데나리온을 주었다면 자기의 것 일부를 떼어서라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모두에게 준 품삯 한 데나리온 역시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9시, 12시, 오후 3시에 들어왔을지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두 비유는 다른 이야기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봉사ㆍ충성하되 불쌍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되 하나님의 인자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은혜를 온 땅에 가득하기를 위해 기도하며 그렇게 되기를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4-9
아! 평생토록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다. 나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내가 드릴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