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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021년도 설교

20210912 / 눅 5:1-11 / 예수님을 따르게 된 베드로를 보면서

작성자이윤형원로목사|작성시간21.09.08|조회수921 목록 댓글 0

예수님을 따르게 된 베드로를 보면서

2021년 9월 12일 / 눅 5:1-11

메시아로서의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일은 함께 사역할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다(마 4:18-22). 그 내용은 기본적으로 마가복음(1:16-20)과 유사하나 어부 제자들의 어획(漁獲) 사건과 함께 베드로의 회심(回心)을 기술하고 있는 누가복음(5:1-11)은 매우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누가가 개인의 회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에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베드로의 회심을 강조하기 때문이다(참조, 눅 19:1-10, 행 9:1-9; 22:2-21; 26:9-18).

요한복음에서도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1:35-42), 그 내용은 공관복음서와는 매우 다르다. 예수님이 주도적으로 그들을 부른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던 안드레가 스승의 추천을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안드레가 다시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에게로 인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사이의 이런 차이는 아마도 요한복음의 사건이 먼저 발생한 후 얼마간 시간이 지난 다음에 공관복음의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보면 이해가 된다. 사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예수님의 부름에 어부들이 그 생업을 포기하고 목수인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이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네사렛 호숫가는 베드로를 비롯하여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만난 장소이다.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빈 배로 돌아온 그들과 호숫가에서 대화를 하심으로 “실패한 인생이 성공하는 비결과 육신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어떻게 영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는지? 먹기 위하여 물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어떻게 사람을 낚는 제자가 되었는가?”에 관하여 말씀해 주었다.

 

1.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베드로처럼(1-3)

 

눅 5:1-2 / 하루는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설교를 하시는데 많은 군중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왔다. 2) 그때 호숫가에서 작은 배 두 척을 대어 놓고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는 것을 보신 3) 예수께서 그 배들 중 시몬의 배에 오르셨다. 그리고 배를 호숫가에서 약간 떼어놓게 하신 후에 앉으셔서 군중들을 가르치셨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질하였으나 허탕이었다. 물고기를 못 잡은 허전함보다 어부로서의 그 자존심은 어떠했을까?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이것조차 하나님의 섭리였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욥의 경우처럼 물고기를 잡지 못하도록 하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셨을지라도 그럴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이 훤하게 터오는 아침 무렵에 그물을 씻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의 배에 오르시면서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우라고 요청하셨다. 그리고는 그 뱃머리에 앉아서 나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셨다. 이러한 특별한 만남은 성전에 올라갈 때에 있었던 것이 아닌 평범한 베드로의 일상에서 시작되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오늘도 평범한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찾아 오셔서 만나 주신다.

예수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참! 저 분은 시원시원하게 말씀을 잘 하시는구나!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는 교훈을 주시는구나! 지금까지 듣던 랍비들의 설교보다 훨씬 좋은데!’라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이 있었고, 스승인 세례 요한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눈에는 예수님이 흔한 랍비 중에 한 분처럼 보였다. 그래서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을 때에 베드로는 ‘선생이여 … ’하고 하였다. 아직 ‘당신이 성경을 잘 아시지만 물고기를 잡는 그물질은 내가 더 랍비요.’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실까? 예수님이 어떤 모습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을 기대하는지? 많은 분들은 ‘그래도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적어도 얼굴에 휘황찬란한 광채가 빛날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오실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매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런 환상을 버리라. 시몬 베드로를 찾아 가신 예수님은 적어도 평범한 옷차림, 갈릴리 나사렛의 평범한 말투, 평범한 인상을 하고 수행원도 없이 단신(單身)으로 찾아오시며 심지어는 초라한 모습으로 찾아오기도 하신다.

지금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매 주일마다 찾아오신다. 어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분은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여러분과 나)에게 직접 말씀하기도 하신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시기 위해 개인적으로 ‘너의 손과 발, 너의 음성, 너의 재능을 내가 좀 사용할 수 있겠느냐? 심지어 너의 음성 또는 시간까지 내가 좀 사용하자.’라는 감동을 통해 다가오기도 하실 것이다. 어떤 때는 우리의 병든 영혼을 치료하기 위하여 또는 육체를 치료하기 위하여 죄를 지적하기도 하실 것이다. 어떤 때는 말씀을 통해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셨고, 우리가 안고 있는 복잡한 문제나 가정의 문제에 대해 방향을 지시하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는 베드로처럼 그분이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줄도 모르고 길가에 뿌려진 씨처럼 지나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자신보다 좀 똑똑한 사람의 말이려니라는 생각에 오늘은 조금 감동적이기는 하구먼!’ 하면서 마음에 깊이 담아두려 하지도 않는다. 설마! 그것이 나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일까?’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귀한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렸던 적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때로는 예수님께서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시기도 하시고, 내 마음에 맞는 아멘일 수밖에 없는 말씀을 주시는 분으로도 오시지만 때로는 성전을 정결케 하시듯 무서운 책망과 징계의 주님으로 오시기도 하신다. 문제는 내 모습이 어떠하냐에 따라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나에게 어떻게,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말씀하시든지 간에 아멘으로 받을 자세를 가지고 매일 매시에 대비하자. 특히 매 주일마다 말씀을 통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늘 듣던 평범한 말씀을 통해서도 절대 진리를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란다.

롬 10:17 / 믿음은 이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2.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믿음을 가지기 위하여(4-5)

 

눅 5:4-5 / 예수께서 말씀을 다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제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리라. 그러면 많은 고기가 잡힐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5) 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저희가 어제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시 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잡은 것이 없었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다.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말씀은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시켰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평생을 갈릴리 바닷가에서 살며 그물질하던 어부이다. 갈릴리 바닷가에 관하여는 귀신처럼 아는 사람이요, 그물을 던지는 데는 누구보다도 특출한 노하우(know-how)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침나절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비전문가인 나사렛 목수출신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의 뜻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

물론 성령님의 감화감동이 있었겠지만 늘 말씀을 갈망했던 베드로였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붙잡혔을 것이다. 원인을 막론하고 말씀에 사로잡힐 때만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 평상시 같이 마음에 갈등이 있었는지를 몰라도 말씀에 붙잡혔기에 베드로는 자기 생각에 맞지 않을지라도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질 수가 있었다. 우리 역시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갖추자.

▶ 흘러가는 옛이야기처럼, 달콤한 이야기처럼, 오늘도 반복되는 말씀이거니라고 생각하지 말라. 어떤 교인처럼 잔소리로 듣지도 말고, 지루하게도 듣지 말라. 어떤 교인은 뒤로 설교자를 흉을 보기도 한다. 설령 그럴지라도 은혜받는 사람처럼 ‘내가 목사님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구나! 앞으로는 모세처럼 기도를 해드려야 하겠구나.’하면서 자신의 부족을 탓하면서 회개한다면 그에게는 설교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올 것이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미세하게라도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한 마디라도 흘려보내지 말자. 아니 사모하는 자의 천국이라고 하셨듯이 시편 40편으로 작사한 곡을 마음에 두고 부르자.

♬ ➊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면 귀를 기울이시고 내 기도를 들어 주신다네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주시고 나의 발을 반석위에 세우시사 나를 튼튼히 하셨네

<후렴> 새 노래로 부르자 라라라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새 노래로 부르자 하나님 사랑을

➋ 주를 의지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거짓에 치우치지 아니하면 복이 있으리라

여호와 나의 주는 크신 권능의 구주라 주의 크신 권능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여 주시네

 

도움이 되는 콜롬비아한인장로교회 이준원 목사님의 글(2017.6.18)을 요약 인용한다 /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넘어서, 듣기를 원한다는 사모함과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은 엘리야가 들은 것처럼 아주 세미하기 때문에 집중해야만 들린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바로 이런 집중력과 관심이 필요하다. 관심을 갖고 집중하면 누구나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세상이 혼란하고 복잡하고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았다면 아니 피곤하여 졸다가 듣지 못하였을지라도 ‘하나님, 다시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면 반드시 가르쳐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기를 소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로 음성을 들려주시는 주된 도구는 성경이다. 성경을 통해서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히신다. 또한 사람과 환경을 통해서도 깨닫게 해 주신다. 어린 아이를 통해서도 들려주실 수 있다. 심지어는 발람의 나귀를 통해서라도 들려주시지 않았던가?

이렇게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도구가 많은데도(성경, 기도, 교제, 설교 등)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문제는 하나님께서 안 들려주시는 게 아니라 내가 듣지 못하였거나 귀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말씀하고 계실지 모른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오늘은 예배에 은혜가 없었어. 말씀이 시원치 않아.’라고 판단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은 대부분 예배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예배를 위해 토요일에 일찍 자고, 주일 아침에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사모하면서 교회에 일찍 나와 예배한다면 그렇게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이 혹시 지금 이런 음성을 들려주시지는 않은지 잘 생각해보시라. “너는 지금 너무 돈 버는 일에 빠져 있다.”, “너는 지금 너무 일을 많이 하고 있다. 네 건강을 해치겠다. 좀 쉬어라.”, “너는 세상 일만 너무 몰두해서 하는구나. 그러다가 죽으면 내게 와서 뭘 보여줄 수 있겠느냐?”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못 들은 체할 때도 있다. 하나님의 음성은 절대로 우리를 정죄하고 죽이고 무너뜨리려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를 지적하는 말씀을 하시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세워주시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그러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시는데도 우리가 못 들은 체하고 외면하면서 ‘하나님은 음성을 안 들려주셔.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우리가 안 듣는 것이지 하나님이 안 들려주시는 게 아니다. 사모해야 하고 갈망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2-3장에서 7교회를 향해 공동으로 하신 말씀이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일러주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말씀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도 교회(교인을 포함)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대하여 귀를 기울여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되면 즉시 순종하라. 마음의 평안이 오니까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확신할 수도 있지만, 한편 ‘그래도 이게 내 스스로 하는 생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오해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것이 성경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고, 죄를 짓는 일이 아니라면 한 번 그대로 해보시라. 실습을 통해 체험적으로 하나님의 음성과 자신의 생각을 구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순종했을 때 일이 잘 풀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일이 잘 안 풀린다 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일이 안 풀리고 길이 막혀서 ‘이게 아닌가?’라고 했는데, 다른 길이 열려 있다. 그것을 내가 못 보았을 뿐이다. 그것을 보고 그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일단 순종하며 행하는 게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수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며 나아가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못 듣는 가장 큰 이유가, 정말 못 듣는 게 아니고 순종할 마음이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을 주시든지, 그것이 죄를 향해 가는 길이 아니라면 즉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겠다.

하나님은 모든 걸 다 알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과 과거에 일어난 일 밖에 못 보지만,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보고 계시는 분이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 나는 ‘하나님이 이것을 왜 안 해주시지?’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보고 계시기 때문에 나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를 정확하게 보고 계신다. 그래서 정확한 때에 주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알려주실 때 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면서 나아갈 때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누릴 때 가장 큰 축복은 바로 나 자신이 주 안에서 아름답게 변화된다는 사실이다.

 

3.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에게서도(6-9)

 

눅 5:6-9 / 시몬이 그대로 하였더니 그물이 가득 차서 찢어질 지경이었다. 7)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소리쳐 도움을 청하였다.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곧 두 배에 고기가 가득 찼다. 8)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오, 예수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죄인이다."하고 말하였다. 9)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많이 잡힌 고기를 보고 놀랐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리니 말씀하신대로 그물에 물고기가 가득 잡혔다. 그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실었다. 베드로는 많은 물질을 얻었다. 그렇다고 하여 금덩어리가 아닌 이상 물고기는 어느 정도 생활을 하는 정도였다. 이제 만나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가정들 위에 만나가 모자라거나 떨어지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상상치도 못한 귀한 것을 얻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닌 예수님이 명령하시는 대로만 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인 기적이 일어난다는 믿음이었다.

어느 시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신앙생활에 복을 받을 뿐 아니라 육신의 생활에서도 복을 받을 수 있다. 베드로처럼 말씀에 순종하면 사업에도 성공할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빈 배에 고기를 가득히 채었을 뿐 아니라 옆에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도 물고기를 가득 채우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니 자기뿐만이 아니라 받은 은혜가 넘쳐 옆 사람까지 줄 수 있다는 신앙의 원리를 깨닫게 되었다.

베드로는 두 배에 가득 찬 물고기를 보고서 ‘오, 예수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죄인이다.’라고 하였다. 왜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아 놓고 이렇게 말씀을 드렸을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5절에서는 ‘선생님(=랍비)’ 이라고 불렀고, 8절에서 놀라운 사건을 본 후에 ‘예수님(=큐리오스)’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예수님이 싫어서 떠나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서 스승이었던 세례 요한의 말처럼 이 땅에 오신 메시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시야 앞에 서 있는 믿음이 없는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예수님 앞에 설 자격이 없고 예수님과 함께 자리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바리새인처럼 성전에까지 나와서 자신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존재임을 알아달라는 추한 모습이 아닌지(눅 18장). 우리의 모습은 세리처럼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며 눈물로 기도를 드려야 할 존재가 아닌지.

베드로의 ‘오, 예수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죄인이다.’라는 모습이나,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며 눈물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의 아름다운 관계 즉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하는 포도나무의 관계를 원하신다.

우리의 신앙상태는 어떤 모습인가? 자신의 선행과 종교적인 열심을 보고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라는 착각 혹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찾아나올 수는 없는지?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 아멘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 자세를 가지고 말이다.

 

몇 분의 고백 중 휫필드의 고백을 참고로 한다 / 【daum cafe 천성성결교회】2021년 1월 23일 ‘루터, 웨슬레, 스펄젼, 로이든 존스’ 및 2021년 2월 7일 ‘존 번연, 죠지 휫필드, 요나단 에드워즈, 리처드 백스’의 거듭남에서 이들 모두는 죄로 인한 고민을 하게 된다. 이들에게서 공통점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죄에 대한 깊은 인식, 자신의 부패함에 대한 인식,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복음의 중심적인 진리를 깨닫고 확신하는 일이 이들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휫필드 역시 어느 누구보다 경건한 삶을 훈련하며 살았지만, 이러한 경건한 삶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거듭남을 경험해야한다는 도전 앞에 겸손히 엎드렸고, 영혼의 괴로움 가운데 기도하며 간절히 거듭남을 갈망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그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절망감을 느끼게 하셨고, 그가 모든 희망을 포기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8:15-16을 통해 거듭남의 선물을 은혜로 베푸셨다.

휫필드는 청소년기에 죄에 대해 심각한 갈등을 경험했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그는 어렸을 때 종종 어머니의 돈을 훔치면서도 그것을 하찮게 여겼고, 거짓말이나 욕설, 저주의 말, 어리석은 농담 등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곤 했다. 그러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휫필드는 어린 시절의 범죄와 죄악들은 셀 수 없어서 그것들은 내 머리털보다 더 많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나는 죄악 가운데서 태어났고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내 마음 속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강했지만 동시에 죄를 떨쳐버릴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죄에 대한 심각한 갈등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기도와 금식으로 수많은 날들을 보냈다.

이러한 갈등은 그가 옥스퍼드로 진학한 후에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그가 거듭남을 경험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 가운데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죄에 대한 깊은 각성과 고민 없이 죄사함의 경험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옥스퍼드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면서 온갖 굴욕적인 상황을 견뎌내야 했지만 그는 근면한 자세를 가지고 성실하게 대학시절을 보냈고 글로스터에서처럼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다가 그는 죤 웨슬리, 챨스 웨슬리 등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던 홀리 클럽(Holy Club)’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철저한 자기훈련으로 경건생활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모두 많은 선행과 경건생활이 자신들의 구원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휫필드 자신도 이러한 경건의 훈련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이루는 수단이 될 줄로 믿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그의 생애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게 된 결정적인 사건을 경험하였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거듭남이라고 되어 있는 바로 그 경험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죄 문제와 갈등하면서 참 자유를 추구해 온 그에게 마침내 진리의 빛이 임한 것이다.

어느 날 챨스 웨슬리가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생명(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1677)’이란 책을 그에게 주었다. 그 책은 휫필드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생각들을 허물고 거듭남의 필요성을 깨닫도록 해 주었다. 일부만 참고로 본다.

나는 금식을 해왔고 철야도 했으며, 기도와 성례참여 등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것들을 해 보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영원히 잊지 못할 나의 친구를 통해서 그토록 귀한 책을 나에게 보내 주시기 전까지 나는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몇 줄 더 읽어나가는 동안에 ‘참된 기독교 신앙이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형성되는 것’임을 보여주셨다. 그 순간부터 거룩한 광선이 내 영혼 위에 비쳤고, 그때야 비로소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자신의 종교적인 경건과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깨뜨리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한다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책을 통해 그로 하여금 기독교 내에서의 종교생활과 경건, 선행을 하고 있는 모습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며 이러한 삶을 철저히 할 때 구원을 받는다는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거듭남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절실히 깨닫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휫필드는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 수많은 날들을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몸부림쳤다. 그때까지 그는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은 자기 부인(否認)과 불타는 경건을 통해 오는 줄로 생각했다. 이 같은 노력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자 그는 홀리 클럽과의 관계를 끊고 간단한 빵과 차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겠다는 각오로 간절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육체의 쇠잔함과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자 하는 열정으로 계속해서 기도하였다.

마침내 휫필드는 1735년 어느 날 로마서 8:15-16을 통해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어떠한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다.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휫필드는 이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양자의 영(8:15)’을 받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체험했다. 그 날 비추어주시는 은혜의 빛을 통해 휫필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만이 구원의 길인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맡겼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

이러한 거듭남은 휫필드처럼 나중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났던 일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고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경험한 것이다. , 거듭남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가 아무리 종교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이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베드로를 통해 3천명, 5천명 그 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듯이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죤 웨슬리(John Wesley) 등과 함께 18세기 영국의 부흥을 이끌었다. 특히, 휫필드는 말씀의 불꽃으로 한 시대를 불태운 당대 최고의 설교자였다. 휫필드의 사역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에 영향을 미쳤고, 미국의 대각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루터, 웨슬레, 스펄젼, 로이든 존스, 존 번연, 죠지 휫필드, 요나단 에드워즈, 리처드 백스 그 외에 수많은 분들이 죄로 인한 고민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진리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났고, 이네들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원하신 천국복음은 깊게 그리고 넓게 땅끝까지 퍼져나게 되었다.

4.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듯이 우리들도

 

눅 5:10-11 / 시몬의 동료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똑같이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게 될 것이다.” 11) 그들은 곧 배를 호숫가에 댄 후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많은 물고기를 바라보면서 그것만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무능하고 부족함과 죄 됨을 깨닫고 회개하는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제자로서의 많은 훈련을 쌓는다면 성령의 권능을 힘입을 것이요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따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우리가 세상에서 얻은 것은 모두가 버려두고 떠나야 할 것들이다. 세상에서 얻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인식하고 자손만대에까지 가지고 있으려고 하는 것이 불신앙이다. 세상의 것들은 언젠가는 모두 버려두고 떠나야 할 것들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버리고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가장 우선적으로 떠나야 할 것, 아니 두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필히 내 던져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소유 욕심이다. 롯의 아내를 보라. 불타는 소돔과 고모라에 두고 온 재물의 미련이 남아 결국은 뒤로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후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가 되지 않았는지. 예수님이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버리라.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는 말씀을 기억하라.

그 다음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부탁하셨다. 자기의 십자가란 무엇인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뿐 아니라(갈 5:24)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 바울의 경우는 빌립보서 3장에 잘 나타나 있다.

 

▶ 누가복음은 여러 가지 비유와 사건을 통하여 ‘물질이 구원받는 것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에 관하여 말씀하였다.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왔다(눅 18:18-27).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신앙적인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께서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눅 18:22)’고 구원의 길에 관한 해답을 명백히 해주셨다. 부자 관원은 구원의 말씀을 들었지만 욕심보따리가 너무 커서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오히려 심히 근심하며 그냥 돌아갔다. 말씀은 들었지만 말씀에 사로 붙잡히지 못하고 물질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더 깊은 수렁에 들어갈 뿐이다.

세리장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눅 19장)는 부자 관원에 상반된 내용으로 예수님을 사모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힘입은 것이다. 복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을 어떻게 영혼 구원의 방편이 되게 하느냐? 물질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느냐?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사는 사람은 세상의 것들에게서 해방될 수 있다. 물질은 나를 세상에 붙들어 매어 놓는 접착제와 같은 것이다. 이 접착제에서 나를 떼어놓는 것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이시다(요 8:31).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관원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 부자가 되었지만 그 복이 오히려 이 사람을 세상에 매어 두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여 구원의 길을 가는데 걸림돌이 되게 하였다. 우리 모두는 삭개오처럼 세상 등지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도가 되자.

 

결 론

 

당신은 순종형인가? 아니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따져보고 결정하는 타입인가?

또는 감동을 받거나 충동에 의해 감정적으로 결정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편인가?

당신은 명령이 떨어지면

❶ 그것이 좋던 싫던 그 즉시로 그 명령대로 따르는 편인가?

❷ 맘에 들지 않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그 일에서 손을 떼는 편인가?

❸ 맘에 들지 않지만, 불평은 하지 않고 조용히 그 일만 그만 두는 편인가?

❹ 맘에 들지 않지만, 그 일을 행하면서 계속해서 그것의 부정적인 것을 말하는 편인가?

❶ 을 제외하고 ❷❸❹ 모두 불순종형이다. 이런 불순종형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주로 방해꾼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모세와 여호수아 두 사람은 모두 이스라엘을 인도한 위대한 지도자들이다. 지도자 밑에는 반드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추종자들을 잠시 비교해본다.

모세의 추종자들 / 이들은 틈만 나면 불평을 일삼고, 반역을 도모했다. 환경이 좋을 때는 그것을 즐기다가 조금만 환경이 나빠지면 모세를 욕한다.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이려고도 하고, 자기들이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기도 한다. 모세를 통해 수많은 기적을 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홍해를 건넌지 3일 밖에 되지 않았을 때,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하기 시작한다. '작심3일'이란 말도 있듯이, 성령충만하지 못한 사람은 3일을 넘기지 못하는 것 같다.

또한 그들은 애굽이라는 세상의 때가 너무나 많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자꾸만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거룩'과 완전히 다른 세상에 물든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가는 지도자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기도 싫었고, 그저 죽이고만 싶었다. 그들은 거룩하게 살고 싶지 않았고, 거룩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 경건한 훈련을 거부했다. 그저 가족과 친지들이 떠나니까 함께 합류해서 따라 나온 것뿐이었고, 열가지 재앙을 경험한 그들은 하나님이란 분이 무척 대단한 분이므로 하나님 쪽에 줄을 서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함께 한 것이다.

모세를 따르던 사람들은 결코 가나안 땅(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고집이 세고, 참을성이 없으며, 비전이 없고, 과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이 많고, 원망과 불평과 부정적인 말을 일삼는 비난의 영에 사로잡힌 자들로 교만하며, 감사할 줄 모르는 회의론자들로서 믿음, 소망, 사랑이 없는 자들이었다. 즉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마귀의 자녀들의 모습을 갖춘 자들이었다.

여호수아의 추종자들 / 여호수아를 따르던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세상을 잘 몰랐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왔고 또한 그들의 부모들이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불순종할 때마다 전염병에 걸리거나 칼과 지진 또는 뱀에 물려 죽는 것을 수없이 보며 살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불순종 = 죽음, 음부'라는 공식을 실제 삶 속에서 배워왔다. 따라서 그들은 만약 자기들 중에 여호수아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약속까지 하였다(수 1:18).

여호수아의 추종자들은 천국 백성을 예표한다. 그들은 매사에 지도자에게 순종적이며, (세월을 아끼기 위해) 지도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즉시 행동으로 옮기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단 한 마디의 불평이나 논리적으로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자기 지식과 경험을 통한 아는 척 즉 교만하지 않았다. 그들은 비전이 있었고, 따라서 비전을 이루기 위해 매사에 잘 참을 줄 알았고, 비전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친구와 말을 하고 싶어도 필요없는 말이 나올 수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내 귀에 들린 대로 시행하리라’라는 말씀을 기억하였다. 그리고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지 간에 입을 다물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충성된 일꾼으로서 겸손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다.

■ 여호수아 6:12-21 /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후 제일 먼저 만난 성은 여리고성이다. 여리고성은 첫 상대로 만나기엔 너무도 버거운 성이다. 아니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정도이다. 그러나 인간의 안목으로 보는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여호수아 5:2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라. 그 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를 베풀어라.’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길갈에서 할례를 거행하였다. 그러자 여호수아 6:2-5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인간적으로 상상조차 하지 못한 명령을 하셨다.

수 6:2-5 / `여호수아야! 보아라. 내가 여리고성뿐만 아니라 성의 왕과 여리고의 군인들을 모조리 네 손아귀에서 꼼짝 못하게 하리라. 3) 그러니 너희는 모두 군대를 동원하여 매일 한 번씩 여리고성 주위를 돌아라. 한 번만 돌지 말고 엿새 동안 여섯 번을 돌아라. 4) 제사장 일곱 사람은 계약궤 앞에서 숫양 뿔나팔을 각각 하나씩 들고 여리고 성을 돌아라. 군인들과 함께 성을 돌아라. 그렇게 돌다가 이렛날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돌아라. 돌면서 가지고 있던 나팔을 계속해서 불어라. 5) 그러다가 제사장들이 나팔을 길게 불면 같이 성 주위를 돌던 군인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라. 그러면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럴 때 각자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성안으로 쳐들어가거라.'

이에 모든 이들이 각자 자기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대로 100% 순종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은 대저 지키기 힘든 것이 아니다. 모세가 신명기 30:11-14에서 부탁한 말 그대로 순종하면 된다.

여리고성을 함락하기 위해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무장한 자가 맨 앞에 있고 제사장 일곱이 양각 나팔을 각기 들고 행진하고 그 뒤에 언약궤가 가고 그 뒤에 나머지 후군이 뒤따랐다.

여리고성 정복을 위해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렇게 엿새 동안 성을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이레 되는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면 된다. 여리고 성벽의 길이가 600m로 한 바퀴 도는 데 10분 정도면 충분하다.

성을 한 바퀴씩 도는 일은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참으로 별난 일이기도 하다. 큰일이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작은 일도 아니다. 대단한 일이 아닌 듯해도 꼭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았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무너뜨려야 할 때도 비슷하다.

한꺼번에 두세 바퀴 돌고 하루 쉬면 좋겠는데, 매일 한 바퀴씩 돌라고 하신다. 당장 결과가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레가 너무도 지루한 시간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래서 무슨 변화가 있을까?’ 싶다. 불만에 가득해 억지로 걷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세계사를 보아도 이런 식의 전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여리고성 정복 여정 속에 우리 신앙 여정의 단면이 들어 있다.

여리고성은 한 바퀴씩 돌아서 무너진 것도, 마지막 이레째 함성을 질러 무너진 것도 아니다. 믿음으로 돌았든 의구심으로 돌았든, 이레 동안의 순종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하루 돌고 나면 벽 한쪽에 금이 가 있고 또 하루 돌고 나니 벽돌이 떨어져 나가고, 다시 하루 도니 문이 떨어져 나가고 …. 그러면 좋을 텐데 여리고성은 그렇게 무너지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닷새가 지나도, 엿새가 되어도 꿈쩍도 안 하고 있다가 이레째에 일곱 바퀴를 돌고 다 함께 함성을 지를 때 무너졌다. 여리고성은 이스라엘의 순종이 다 쌓인 후에야 무너졌던 것이다.

우리 삶의 무너져야 하는 여리고성, 너무 견고해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성. 물리적 힘으로는 꿀려도 너무 꿀린다. 누가 봐도 무너뜨리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 삶의 여리고성은 물리적 힘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상대이다. 정신력으로도 안 된다. 오직 순종밖에 없다.

이래서 될까 하면서도 순종하며 한 주간, 도대체 잘하고 있는 것일까 하면서도 순종하며 한 달, 비웃음당해도 순종하며 일 년. 그렇게 순종이 쌓이면 우리의 여리고성도 무너진다. 순종이 쌓이면 하나님이 무너뜨리라 하신 그것이 무너진다. 여리고성은 그렇게 순종이 쌓여야 무너졌던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여리고성을 돌아서 무너뜨리고, 가나안을 점령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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