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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말씀하신다”(Deus dixit)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이삭의 번제 사건』

작성자813712|작성시간12.11.30|조회수390 목록 댓글 0

여기 시험적인 글을 올립니다. 그러므로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 앞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강조하는 바르트의 신학을 정용섭의 "말씀신학과 역사신학"(한국신학연구소)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약술하고 , 이런 관점에서 교회에 있어 설교의 의미는 무엇이며? 설교자는 무엇을 설교해야 하는가? 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 두 번째 부분은 이삭의 번제사건을 "하나님의 말씀하심"의 시각에서 재해석해 보았습니다. 이를 위해 류호준의 "장막치시는 하나님을 따라서"(이레서원)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생각을 전개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Deus dixit)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이삭의 번제 사건』


나는 개인적으로 불트만의 ‘실존적 신학’이나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이 말하는 계시신학적 관점에 대해 많은 점에서 동의하고 수용한다. 하지만 칼바르트의 신학과 그의 계시론적 관점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바르트는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계시와 하나님 말씀을 모든 신학적 사고와 판단의 준거로 삼았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신학적 사고의 전제이며 뿌리이다.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이 결코 동일한 지평에 속하지 않다는 것에서 신학적 사유를 시작한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과 그 역사에 내재해 있기 때문에 경건한 종교성, 혹은 도덕과 윤리에서 인식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사고를 거부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絶對他者’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지적인 노력이나 신비적 명상으로 결코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하나님(Gott ist Gott)이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 종교성이라는 것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우상숭배의 한 형태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인가? 만약 그러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미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을 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의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알려질 수 없고 하나님의 자기 알림을 통해 인식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은폐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동시에 계시의 하나님(Deus Revelatus)이신 것이다. 결국 바르트의 신학은 하나님이 주체로서 활동하시는 신학인 것이다.


우리는 바르트가 19세기 자유신학에서 제거된 하나님의 초월성과 대상성을 ‘절대타자’의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은폐’의 하나님 안에서 회복시키려고 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대상성”이라는 개념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는데, 하나님의 대상성이란 하나님을 일종의 사물로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과 그 역사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하여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 개념이 왜 중요한가? 하면 오늘날의 시대를 휩쓸고 있는 뉴에이지는 물론이요, 불교나 힌두교 등 타종교의 중심적인 개념이 신(들)이 인간과 모든 사물에 내재한다는 사상임을 통해서 볼 때 극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자신을 어떻게 우리 인간에게 알리시는가? 여기에 대해 바르트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알리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하나님 인식은 우리가 오직 그 분의 말씀 앞에 직면할 때 가능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계시론이 말씀 실증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에서 성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은 삼중의 형태로 드러난다. 첫째는 계시된 말씀이며, 둘째는 쓰여진 말씀이고, 셋째는 선포된 말씀이다. 바르트가 직접 이에 대해 기술한 말을 보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교회의 선포에서 인정된 성서로부터, 혹은 성경에 기초한 교회의 선포로부터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쓰여진 말씀을 우리는 선포를 완성하는 계시를 통해서만, 혹은 계시에 의해 완성된 선포를 통해서만 알게 된다.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증언된 계시를, 혹은 계시를 증언하는 성서를 이해함으로써 알 수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밖에서 돌입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문자적 성서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그 성경의 본래적 사건인 계시, 즉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그것이 실존적으로 전달되는 현재적 선포에 이르는 전체 과정을 통해 그 역동적 의미가 확장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바르트의 신학은 인간의 하나님 인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간규정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사고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바른 사고가 성서의 내용을 구성한다. 성서에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향한 길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증언되어 있다.”


그러면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계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말씀이 육신을 입음”이다. 예수그리스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이며, 곧 계시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서에 따르면 하나님 말씀이 인간이 된 것, 그리고 이 인간이 하나님 말씀이 된 것에서 발생한다. 영원한 말씀이 육신을 입음이,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이다. 이 사건의 현실성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자신의 자유를 증거한다.” 바르트는 신인식을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 그는 철저하게 모든 확실성의 근거를 인간의 주관적 사고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객관적 현실에 놓는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신학의 의미는 어떤 보편적 진리를 찾는 작업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했는가, 말씀하고 있는가를 찾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계시인식에 있어서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직면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인식론적 이성’이 아니라 ‘성서적 신앙’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바르트의 이러한 신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교회에서 설교의 의미가 무엇이며? 설교가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것을 봄으로써 오늘 한국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설교가 얼마나 잘못되고 있는지 증명될 것이다.


먼저 설교의 의미는 바르트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계시를 통해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철저하게 교회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원리적으로 설교는 사람의 변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알아듣게 설명하는 걸 목표로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사람이 변화 받아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고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이 어떻게 하면 감동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자신의 영광을 높이려함이 바탕에 깔려있음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인간 개량을 통해서 실현되는 게 아니라, 예수의 재림 표상에서 볼 수 있듯이 오직 이질적인 세계의 돌입으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란 하나님만이 실행할 수 있는 사건을 자기가 성취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며 그것을 가리켜 회심이라 한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예수의 선포는 바로 이 사실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린 이유가 그들을 회심시켜서 반듯한 사람이 되게 하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의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따라서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은 텍스트가 말하고 있는 존재와 구원과 생명의 신비를 구도자적 자세로 접근하고 풀어내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인생관과 철학을 앞세우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일종의 선동에 불과하다. 성서는 하나님 이야기이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시 말해 만약 어떤 설교자가 요셉 설화를 본문으로 “요셉처럼 꿈과 비전을 갖자”라고 설교했다면,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는 성서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 한국교회의 강단은 이런 설교가 넘치고 있다. 그리고 신자들도 사람의 가능성을 자극하는 설교에만 적극적으로 호응한다. 설교는 인간의 책임감과 결단보다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직면하는 데서부터, 바르트 식으로 말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Deus dixit)는 상황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매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열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열매를 가능하게 하는 영의 리얼리티를 포착하는 게 설교의 역할이며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볼 때 이러한 시각에서 해석해 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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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바르트의 신학과 계시에 관한 사상과 그의 입장에서 설교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설교되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실제로 성경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말씀이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실증적으로 시도해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저는 개인적으로 저의 은사이기도 하며, 자타가 공인하는 구약학의 대가이신 백석신학대학원의 류호준 교수님께서 쓰신 “장막 치시는 하나님을 따라서”(Sermonic Meditations on Old Testament Texts / 이레서원)에서 나오는 ‘순종 ; 다시 살아야만 하는 신비’에 나오는 이삭의 번제 사건을 통해서 얼마나 성경해석과 설교가 달라질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것을 통해 교수님의 학자적 명성에 조금도 흠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의 해석과 설교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다만 관점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들도 창22:1-19에 나오는 이삭의 번제 사건에 관해 아마도 한 번 정도는 설교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이 본문은 설교자들이 선호하는 본문이다. 왜 선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에 대한 답은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본문에 관한 주석들을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한결같이 인간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순종에 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지향에 중점되어 있지, 바르트가 말한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Deus dixit) 곧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에는 전혀 접근이 되지 않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제목 ; 다시 살아야만 하는 신비

본문 ; 창22:1-19


본문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의 자손을 통해 약속의 백성을 주실 것을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그 약속의 증표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칠 것을 요구하신 것과 그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에 대해 설교한 내용이다. 교수님은 설교의 포인트를 고난을 통한 순종으로 잡고 약속의 자녀로 주신 이삭을, 그것도 번제로 바치라고 하는, 인간의 관념상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되어져야 하는 신비도 아니고, 다시 쓰여져야 하는 신비도 아니고, 우리들이 다시 살아야만 하는 신비로서, 즉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메시지로서 탁월하게 증거해 주시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성경의 불가해한 이야기들에 대해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같이 인간의 경험과 사유의 틀에 맞추려는 해석적 시도에 대해 적절한 예를 들어 반론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순종 과정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묘사하면서 그 가운데서 그가 어떻게 순종의 길을 걸어갔는지를 설명한 부분은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러나 과연 본문의 메시지가 교수님 표현대로 ‘矛盾的 신앙의 영웅’으로서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가운데서 그 갈등을 승화하여 영웅적 신앙, 곧 고난을 통한 순종을 보여 준 것에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런 관점에서도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고 훌륭한 설교로서 감동을 줄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이 본문이 일차로, 본질적으로 의도하는 내용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한다.

나는 본문을 하나님이 계시하는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에 대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본다. 그것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역사적 인물을 통해 표현하고 계시하는 과정이며, 그렇게 하늘의 것이 인간에 침투하는 과정에서 즉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표상으로 계시되는 과정에서 매우 극단적이며 인간의 윤리와 상식으로는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신비로 우리에게 드러났다고 본다. 우리는 이 본문을 접근함에 있어서 우리의 상대적인 판단 의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아서는 결코 본문에 감추어진 계시를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식, 곧 하나님의 말씀하심에서 접근해야 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약속 받았을 때 웃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이미 노인으로서 삶이 얼마 남지 않았고, 육체적 생리적으로 아들을 갖는다는 것은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런 상태였다.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아브람이 이 약속을 받을 때 그가 오죽 했으면 항변 아닌 항변을 했을까?(물론 성경에 대들었다고 되어 있지는 앉지만, 그가 계집종에게 낳은 이스마엘이나 별일 없이 잘 자라주었으면 좋겠네요! 하고 푸념한 것을 보면 정황상 대든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어떻게 인간의 상대적 의식으로 그 약속이 수용될 수 있으며, 하늘의 것이 이해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이 ‘이삭’ 곧 ‘웃음’이다. 인간의 불신앙과 믿음 없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이런 표상의 이삭은 죽고 부활로 거듭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이삭이 진정 믿음을 통한 약속의 씨앗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불신앙이 믿음으로 바뀌는 우주적인 역사가 이삭을 통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교수님이 잘 묘사했듯이 아브라함은 차분히 이삭을 바칠 준비를 한다. 그리고 삼일 길을 간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실 거야” 라고 미리 짐작하고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순종했고 일순간의 감정에 의해 행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과연 삼일 길을 가며 땀을 흘리며 번민하고 고민했을까?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 사이에서 절규하며, 삼일 간을 충분히 고통하고 드디어 위대한 결단을 내렸을까? 물론 그도 인간인데 처음에는 당황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극히 인간적인 상대적인 의식에서 나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한 성경적 해답이 히브리서에 있다. 히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갈등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우리는 이 문제에, 지나치게 인간적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이미 그의 믿음이 하나님이 생각하는 그 실체(리얼리티), 거기에 도달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방법이 돼든 이삭을 통해 약속을 이행할 것임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었던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답 한대로 내가 설사 이삭을 죽이더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고 이삭을 실제로 번제로 바치려했던 것이다. 즉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펼쳐질 부활의 신앙을 이미 아브라함이 소유했던 것이다.

여기에다 자꾸 인간적 상상력을 덧붙이는 것은 본문의 뜻을 왜곡할 뿐이다. 본문은 어떤 논리와 상상력을 동원한다 해도 어차피 인간적 상식으로는 수용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인공이고 하늘의 것의 침투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마음에는 싫은데 어쩔 수 없이 결행한 것인가? 번민 끝에 위대한 결단을 내린 것인가? 과연 믿음이란 것이 그렇게 위험천만한 것인가? 갈등한다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없음을 말하는 것인데, 아브라함은 그러면 도박하는 심정으로, 아니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한 번 던져 본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운 좋게 맞아 떨어진 것인가? 아니다.

만약 그 정도라면 그 믿음과 순종이 평행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 논리라면 번민을 극복한 아브라함의 위대성은 부각되나, 하나님이 생각하는 구원을 주는 믿음이 설명될 수 없다. 믿음의 영적 실체가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 안에 있는, 하늘에 속한 믿음의 영적 실체가 이런 극단적인 방법 외에는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표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부활시킬 것을 믿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졌던 영적 리얼리티, 곧 이 '믿음'만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똑 같은 믿음을, 그 실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고 장차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정한 믿음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붙여진 “믿음의 조상”이라는 표상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 중에서 최초로 구원함에 부족함이 없는 믿음을 아브라함이 최초로 모리아산의 이삭의 번제 사건을 통해 보여 준 것이다. 이 번제 사건이 우리의 관념과 의식으로 수용하기가 어렵지만, 본문은 정말 참된 믿음, 온전한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을 주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그런 극단적 사건을 통해 그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에게 장차 주어질 믿음의 예표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비로소 우리는 그 그림을 볼 수 있다. 모리아 산에서의 바로 그 때는 이삭의 실존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삭’이라는 불신앙의 ‘웃음’이 참된 믿음과 부활 신앙으로 바뀌는 위대한 순간이었고,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른 순종을 통해 이 땅에 드디어 하늘에 속한 영적 실체인 ‘믿음’이 침투해 들어온 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믿음을 가진 최초의 사람 “믿음의 조상”으로 공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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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 기 >

-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한 영적 리얼리티가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을 본문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배우로서 출연한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이다. 그들의 순종도 물론 본문이 보여주는 중요한 내용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 그것은 본질적이고 일차적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그리고 본문의 중요한 내용이 되고 있는 번제 특별히 사람을 제물로 하는 번제 곧 ‘인신제사’와 관련된 문제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고도 비밀스러운 내용이다. 성경을 보면 세 번의 인신제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첫 번째가 이삭의 번제사건이고, 두 번째가 사사 입다의 딸의 번제 사건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예수님의 성육신과 지상의 삶과 사역 그리고 십자가를 지심이다. 예수님은 그의 태어나심과 삶과 사역과 죽으심을 통해 번제는 물론이요 레위기에서 계시된 다섯 가지 제사를 모두 자신의 몸(人身)으로 드리신 분이다.

- 이 인신제사를 중심으로 한 내용은 계시사적, 구속사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입다의 딸의 번제사건에 내포된 놀랄만한 의미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쓸데 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그 의미를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위대한 교부였던 ‘바질(Basil)’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리는 그 진리를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만 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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