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예레미야11장18~12장6절
제목 : 악인의 형통에 대한 질문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심판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에게 맞서며,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밈니다.
홀로 남겨진 예언자는 의로우신 재판관(여호와)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도움을 간구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고향 사람들에 대한 격한 감정을 토로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묻는 예언자에게 주님은 더 강력한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1. 예언자의 탄식(18~20절)
1) 하나님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알았습니다(18절).
“[18]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그들의 죄악을 꾸짖고 또 하나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언한다는 이유로 그의 생명을 해(害)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음모를 비밀스러운 경고를 통해 그에게 알려주셨던 것이며,
그 결과 예레미야는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Clarke).
한편 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예들은 솔로몬시대부터 계속 아나돗에 살아왔었습니다(왕상2:26).
솔로몬 왕위 계승시에 아비아달은 아도니야를 지지했던 탓으로 솔로몬에 의해 추방, 낙향당했던 것입니다.
2) 예레미야는 그들이 죽이려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19절).
“[19]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 아나돗 사람들은 마치 그 주인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동물과 같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나무')를 처치함으로써 그 입에서 선포되어지는 예언의 말씀('과실')을 단절시키고자 계획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레미야가 화(禍)를 면하게는 되었다 하더라도 사회적,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고향 마을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 배경상 크나큰 낙담에 빠지게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3) 예레미야는 원통함을 주께 아뢰고 그 결과를 보겠다고 하십니다(20절).
“[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 무죄한 자의 누명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탄원의 기도는 시편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주제입니다(시17:1-9).
그리고 적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가해 달라고 하는 것 역시 시편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부르짖음입니다(시17:13,Nicholson).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정당하게 판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의 동기도 검토하십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엄청난 이 문제, 즉 자기 고향 전체가 그와 맞서고 있는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 오직 하나님을 향해 중재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 이 같은 보복에 대한 요구는 이스라엘의 압제 당하던 자들이 하나님께 호소할 때 쓰던 다소 일반적인 표현이었습니다(시17:13,14;99:8;149:7;사34:8;35:4 등 참조).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들이 압제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할 때 그는 오직 하나님께 원정(寃情)을 호소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 '보복'(리브)이란 말은 구약의 여러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법적인 소송 절차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법적 소송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12:1;미6:1).
2. 하나님의 반응(21~23절)
1) 아나돗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한 말입니다(21절).
“[21]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 그들이 이처럼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 이유에 대해서 해리슨(Harrison)은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개혁 운동에 찬동하고 나선 때문이었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톰슨(Thompson)은 이보다는 예레미야가 유다의 모든 종교와 사회 생활에 대해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아마 요시야나 예레미아의 대적들이나 일반 백성들은 모두 그 당시의 종교 생활에 어떤 위험한 요소가 있을 만큼 그렇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과거나 현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실패했다고 하는 예레미야의 강도 높은 비난은 아나돗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민족의 죄악을 선언한 예레미야는 그를 출생시킨 마을의 명예를 매우 손상시킨 자로 여겨졌던 것이며, 이런 사람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생각되었을 기능성이 높다 하겠습니다.
2)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겠다고 합니다(22,23절).
“[22]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23]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자기 종을 해하려는 이런 악한 음모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반응은 단호하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남는 자가 없을 정도로 철저한 살육이 임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편 아나돗 사람들로부터의 위협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수차례나 더 계속되었습니다(20:1-3;38:6,13).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도와주시리라는 확약만으로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아나돗에 대한 심판 예언은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 당시에 성취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3. 예언자의 불평(12:1~4절)
1) 예언자의 탄식(1~2절)
(1)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1절).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악한 자들의 번성에 대해 탄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가 끊임없이 적용되고 있는데, 어떻게 악이 그처럼 종종 맹위를 떨칠 수 있는지, 그리고 경건한 자들이 고난을 겪으며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 의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모든 것이 다 바르게 진행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듯한 일들이 나타나는 사실에 대해 납득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그는 바로 이 주제를 놓고 하나님과 쟁론을 벌이고자 하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습니다(2절).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뿌리가 박히고.–예레미야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원인 중의 하나는 하나님 자신이 이러한 자들을 심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악인의 번성에 대한 의구심은 욥 21:7 이하에서도 표명된 바 있숩나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는 말씀을 통해 찾아질 수 있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섭리는 단순한 인과응보의 법칙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악인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자비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는 종국적으로 엄청난 심판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악인을 번성케 하셨다기보다는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악인이 번성해지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해 두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보다 차원 높은 공의와 자비의 실행을 위한 계획이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2) 예언자의 간구(3절)
“[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그들을 끌어내시되. – 예레미야는 자신의 항변의 근거를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에서 찾고자 합니다.
즉 악행 중에서도 번영을 누리는 자들과는 달리,
자신은 오직 주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왔음을 주께서 잘 아신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행악자들을 도살당할 양을 끌어내듯이 끌어내실 것을 탄원합니다.
'끌어내시되'에 해당하는 '하티켐'은 '잡아떼다', '근절하다', '당기다'는 뜻의
'나타크'의 히필형으로서 완전하고 철저한 파멸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Delitzsch).
3) 예언자의 탄식(4절)
“[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 혹자는 본절의 위치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절 역시 1절 이하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음이 확실합니다.
예레미야는 창궐하는 악한 새력들로 말미암아 그 땅의 모든 거민과 심지어 짐승들에게까지 재앙이 미치게 되었음을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존 브라이트(J. Bright)는 이 부분을 다음 구절과 연결시켜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 '거기에 거주하는 자들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짐승들과 새들이 모두 멸절하였습니다.'
4. 하나님의 대답(5~6절)
1)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말과 경주하겠느냐(5절)
“[5]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느닷없는 대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하나님은 '현재의 이런 고난이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더욱 험난한 일이 닥치면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하고 타이르시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또한 두 가지 은유법이 쓰이고 있는데,
첫 번째 것은 보행자와의 경주가 힘이 드는데, 어찌 말과의 경주가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유다인들의 박해나 아나돗 사람들의 음모가 장차 임할 재난과 파멸에 비하면 은유는 요단 강의 창일함에 대한 내용으로서, 이것 역시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이 평화로운 땅을 덮칠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2) 그들이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6절)
“[6]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네 형제와 아비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 5절 말씀에 대한 하나의 실례로서, 집안 사람들에게 마저 핍박을 당하는 고통스럽고 다급한 상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Delitzsch).
한편, 예수께서도 성도들의 당할 핍박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마 10:21).
*마10: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예레미야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아나돗 사람들에게 심판을 내리겠다고 하십니다.
선지자에 대한 반대는 그 말씀을 맡긴 하나님께 대한 대적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예수님처럼 고향 아나돗 사람들에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잘려나갈 과실수처럼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푸른 감람나무’였던 백성들이 이제 잘려나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11:16).
예언자의 탄식에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보병과 경주하는 현재 이 고난이 힘겹다면, 나중에 당할 일은 말과 경주하는 것만큼 힘겨울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너무 놀라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뜻이며, 능히 감당할 수 있를 때까지 함께해주시겠다는 격려이고 약속입니다.
선지자는 불의한 자의 형통을 보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이 결국엔 심판하실 줄 믿으면서도 오늘 내 현실에서 만난 불의한 자들의 형통에 분노하게 됩니다.
참된 선지자는 피할 수 없는 도전과 곤경 앞에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도 어떠한 경우라도 오직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히12:2) 바라보고 나가는 하루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어떤분입니까?
1) 예언자에게 어설픈 희망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12:5,6절).
지금까지 평지에서 사람과 경주한 것인데도 벌써 지치면, 어떻게 말과 경주하고, 범람한 강과 수풀을 어찌 해쳐 나가겠느냐며 다그치십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도움과 해명을 요구하는데도 주님은 ‘너는 더 잘 할 수 있다’고 다독이며 철저한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힘들다, 상처받았다는 말을 언제까지 반복하렵니까?
앞으로도 믿음이 아니면 극복할 수 없는 또 다른 시련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우리) 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예언자를 살해하려는 음모가 있었습니다(18,19절).
하나님이 친히 알려주지 않으셨다면 예레미야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는 양처럼 죽을 뻔했습니다.
한 의인에 대한 사악한 무리의 만장일치적 살의(殺意)입니다.
예언자는 거센 위협에 하나님의 소망을 의심하게 되고, 사람이 미워졌을 겁니다.
사명의 길이 늘 순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악한 시대에 의롭게 사는 자는 반드시 고난을 받지만, 그에게 복이 있습니다(마5:10).
2) 예레미야는 절망감에 주저앉지 않고 공의로운 심판을 요구합니다(20~23절).
고향 사람들의 살해 모의였기에 충격과 낙담은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사로운 복수가 아니라 정당한 공의의 실행을 호소합니다.
마음의 분노를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의 주인이요 일의 주관자인 하나님께 기도로 표출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불의를 방관하신다는 의심과 불평을 그치고 기도하십시오.
3)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불평하듯 따집니다(12:1~4절).
변론에서는 의로우시지만, 현실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시1:3,4)은 의이니이 시냇가 심은 나무라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악인의 잎이 푸르고 알찬 과실을 맺습니다.
예언자의 거친 물음은 하나님의 공의로움에 대한 확신과 고통 받는 현실을 주시하는 긴장위에 있습니다.
그것은 부당한 현실에 순응하지 말고, 항의하라는 도전입니다.
주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여 기억해낼 때, 말씀을 거스르는 현실 속에서도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