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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茶로 읽는 東西문화>(16)17~18세기 프랑스 살롱문화

작성자이신성|작성시간14.02.12|조회수586 목록 댓글 0

 

 

1789년 파리 Rue Richelieu에 개장한 '프라스카티 그랑 살롱 (Le Grand Salon de Frascati)'

 

<茶로 읽는 東西문화>(16)17~18세기 프랑스 살롱문화

 

유럽에 전래된 차와 커피는 상류계층과 지식인의 기호품이 되고 차차 일반 서민에게 퍼졌다. 그러한 과정에서 18세기 유럽에 독특한 카페문화와 그리고 영국에서는 사교적인 홍차문화를 꽃피게 하였다, 카페문화와 홍차문화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 전신이라고도 할 17,18세기 프랑스의 살롱문화를 먼저 들여다보자.

우리는 유럽 사람들을 ‘개인’으로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 개인은 타인과 만나고 담론하기를 즐기는 극히 사교적·사회적 인간이다. 유럽적 인간의 특징을 이루는 그 사교성은 그들의 광장(廣場) 문화에서 상징적으로 잘 나타난다.

유럽의 크고 작은 도시에는, 아니 시골 마을에도 그 중심에는 반드시 광장이 있다.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 도시공동체(폴리스)의 ‘아고라’이다. 아고라는 ‘광장’을 의미하는 동시에 또한 ‘사교’라는 뜻도 지닌다. 그곳은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담론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타인과 만나 이야기와 담론을 즐기는 사교적 공간 광장, 그곳은 또한 공동체의 공론(公論)이, 그 정체성과 연대가 형성되고 확인되는 토포스이기도 하다. 이러한 광장 문화는 로마 시대에는 ‘플라자(plaza)’와 ‘포럼(forum, 광장·토론)’의 문화로 이어지고 살롱문화와 카페문화 또한 그 선상에서 이해하고 싶다. 

살롱의 기원은 고대 아테네와 로마에까지 거슬러오른다. 플라톤의 대화록(對話錄) ‘심포지엄’이 펼쳐 보여주는, 포도주잔을 기울이며 담론을 즐기는 그 살롱의 풍경은 15,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의 ‘살로네’로 이어졌다. 

프랑스 살롱의 전아한 문은 1613년경 랑부예 후작부인의 저택에서부터 열렸다. 이탈리아 주재 프랑스대사의 딸로 태어나 모드와 패션의 메트로폴리탄 로마에서 자란 부인은 파리에 돌아오자 그 저속한 말씨들과 생활에 실망해 이탈리아풍의 ‘좋은 취미’를 옮기기로 마음먹고 프랑스 최초의 살롱을 열었다.

손님들은 제일 먼저 랑부예 부인의 침실 ‘청색 방’으로 안내받는다. 당시 귀부인들은 손님을 규방에서 맞이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인사를 받는 살롱 여주인의 모습들을 우리들은 당시의 그림에서 자주 본다. 

부인의 살롱에는 귀족과 귀부인, 성직자와 문인, 여러 고위 전문직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모두의 공통된 점은 귀족풍의 사교적인 매너와 에스프리(지성)였다. 살롱은 격식을 내세웠던 베르사유의 궁정 살롱과는 달리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랑부예 부인의 교양과 미모, 편견이 없는 인품도 사람들을 그녀의 살롱으로 끌어들이는 데 당연히 한몫하였다. 

‘그랑담’ 즉 ‘귀부인’으로 불리는 살롱의 여주인들은 대개가 명문 귀족 출신으로서 수도원에서 교육받은 뒤 정략결혼을 한 이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중세 이래 구체제 하에서 귀족의 결혼은 대체로 정략적이게 마련이었다. “좋은 결혼은 있어도 즐거운 결혼은 없다”(라 로슈푸코)는 시대에 있어 부부는 ‘즐거운 결혼’, 다시 말하면 ‘정열’의 대상을 아내 혹은 남편이 아닌 다른 이성에서 찾는 ‘자유’를 누렸다. 볼테르와 샤틀레 부인, 루소와 바랑 부인에서 보듯이 살롱의 세계에서는 귀부인을 둘러싼 염문이 그치지 않았다. 정사는 당시 스캔들이 아니었다.


 

17세기 프랑스 살롱 풍경 , Abraham Bosse 작품, 귀부인 모임(Reunion de dames)


그러면 살롱에서의 대화와 담론의 주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들은 그것을 17세기의 전형적 살롱인이던 라 로슈푸코가 자신이 출입한 살롱에서 좌흥(座興)의 화제들을 모아 담은 기록인 ‘인간고찰 혹은 처세술과 잠언’(1665)을 펼쳐 정리해본다. 사교인의 삶의 낌새를 잘 드러내주는 260여 화제의 항목 중 가장 자주 언급된 것은 ‘연애(사랑)’ ‘자기 사랑’ ‘에스프리’ ‘여인’ ‘우정’ ‘행복’ 등이다. 이에 비해 ‘예지’ ‘부(富)’ ‘신’ ‘사회’ ‘도덕심’ ‘직무’ ‘믿음’ ‘결혼’ 등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이렇듯 ‘세기 최고의 연사와 사교인의 포럼’인 17세기 살롱의 주된 관심사는 ‘사랑’과 ‘에스프리’였다. 그리고 ‘여인에 대한 예절(galanterie)’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한 살롱은 여인의 뜰이었다. “좋은 취미에 관련된 모든 것은 그녀들의 세력 범위”라고 일컬어지듯이 17세기는 여성의 시대였으며 그것을 연출한 것은 살롱의 귀부인이요 그곳에 출입한 ‘프레슈즈(가인재녀·佳人才女)’들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크게 이끄는 것은 살롱에서의 화제가 대체로 17세기 프랑스 고전풍의 문학 주제와 문맥을 공유하였다는 사실이다. 고전풍의 문학 선구자인 말레르브는 ‘청색 방’의 단골이었으며 그는 살롱의 귀부인들에게 이상적인 시인으로 비쳤다. 살롱에서는 작품 낭독과 새 작품의 발표·감상·비평이 관행처럼 행해졌다. 특히 문학 담론의 중심은 당시 소설과 더불어 ‘카운터 문화’로서 여성들을 사로잡았던 연극이었다. 살롱은 가십과 연애, 유희를 즐기는 신사·숙녀들의 단순한 ‘놀이’의 사교장이 아니었다.

살롱에서의 대화가 발산하는 재치와 아취(雅趣), 세련된 말씨와 에스프리는 그대로 문장이 되고 문학이 됐다. 17세기의 살롱이 문예살롱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볼테르는 라 로슈푸코의 ‘잠언’을 가리켜 “그만치 국민의 취미 형성에 이바지한 서적은 없다”고 찬탄한 바, 살롱은 폭넓은 취미를 두루 갖춘 프랑스풍의 이상적 인간 ‘사교인(오네톰)’의 산실이요, 또한 그들의 정념의 세계를 주제로 한 프랑스 고전문학의 모태였다. 

프랑스어의 정화를 내세워 세워진 아카데미 프랑세즈(1634년 창립)의 창시자들의 얼굴들을 우리는 먼저 랑부예 부인의 살롱에서 보거니와 ‘클레브의 마나님’의 작자인 라파예트 부인, 서간문학의 걸작인 ‘서간집’(14권)의 작자 세비녜 부인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 고전문학은 살롱을 간과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

어디 그뿐일까. 18세기 랑베르 부인의 살롱에서는 그 이전의 살롱에서는 금기였던 종교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는 등 계몽의 세기의 ‘철학’이 주제가 되었다. 철학 살롱의 출현이다. 다른 나라에서 볼수없는 프랑스의 독특한 ‘문학공화국’상류사회와 문인, 철학자간의 유대, 유연한 프랑스적 지성의 ‘사교성’, 이 모두는 살롱을 모태로 길들여졌다.

<서양사학자 이광주 교수>
 

출처: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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