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1999. 12. 27. 명지대 본관 1층 세미나실에서 가진 한국헤겔학회 월례발표회 자리에서 발표된 유희상 박사의 "피히테 <학문론>의 성립과정" 발표문입니다. (유박사는 성대 통계학과를 졸업한 후 독일 뮌헨대학에서 "야코비의 '존재' 개념"으로 석사, "피히테의 '학문론의 제1명제"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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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히테 <학문론>의 성립과정" -- 유희상(독일 뮌헨대 석,박사)
피히테는 자신의 이십대 중반기까지 신학자가 되려 했던 결정론자였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불가능하다는 원칙을 고수한 사람이죠. 이러한 피히테가 1790년도께 칸트 철학과의 접촉을 통해 자신의 원칙에 180도 수정을 가하게 됩니다. 칸트의 세 비판이론들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믿기지 않는 빠른 속도로 이 철학의 신봉자가 되는게죠. 아니 신봉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승적 승계자라 할까요. 자기 나름대로 칸트 철학의 한계를 발견, 이를 뛰어넘으려 했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컨대 세 가지 분야로 나눠진 칸트의 비판철학에 일원적 통일성을 부여하려 했던 게죠. 그것도 세 분야의 종합으로서 새로이 생성되는 후속적 통일이 아니라 세 분야로 갈라지기 이전의 원초적 통일을 철학적 규명을 통해 설득·이해시키는 작업을 피히테는 자신의 우선적 철학적 과제로 삼았던 겁니다. 1794년 처음 빛을 본 피히테의 『학문학(Wissenschaftslehre)』은 다름아닌 이러한 작업의 결과입니다.
물론 이러한 칸트 철학의 긍정적 극복이 피히테 혼자의 힘으로 쌓을 수 있었던 탑은 아니었습니다. 직접적인 도움을 준 인물로 야코비(Jacobi)와 라인홀트(Reinhold)를 들 수 있겠고 그외 마이몬(Maimon)과 슐체(Schulze)의 Aenesidemus 등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허나 제가 오늘 여러 선생님들게 송구스럽습니다만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러한 피히테 동시대 인물들이 피히테의 학문학 탄생에 끼친 전반적 영향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접할 수 있는 피히테의 유고를 근거로 『학문학』초판의 탄생사에 따른 피히테 사고의 움직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말씀드릴 내용을 짧게 요약합니다. 이 첫째 판(Grundlage)의 탄생사를 세 시기로 구분해 봅니다. 첫 시기는 Eigene Meditationen으로 칭하는 피히테의 자유수상록에 나타난 사고, 그러니까 1793/4년 겨울로 칠 수 있고요. 두 번째 시기는 피히테의 스위스 쮜리히 사설강의와 소위 Programmschrift, 그러니까 1794년 봄에 해당하고, 세 번째 시기로는 피히테의 예나대학 강의 시작과 동시에 배포된 Grundlage의 첫 번째 부분 출판, 그러니까 1794년 여름입니다. 부분 출판이란 말에서 엿볼 수 있듯, 완전한 출판은 아니었고요. 따라서 엄격히 말하자면 네 번째 시기, 그러니까 1795년 봄에 출판된 실천철학 부분 또한 탄생사에 당연 포함시켜야 되나, 저의 오늘의 주된 관심은 이 Grundlage 전체가 아니라 이 중에서 특히 제일명제의 설립을 주제로 하는 네 번째 시기를 우리의 토론에서 제외시키고자 합니다. 그대신 끝으로 피히테의 한국말로의 번역과 관련된 한 질문을 감히 던져보겠습니다.
i) EM(:Eigene Meditationen) 시기
대략 삽십년 전쯤 발굴 공개된 이 자료는 피히테가 자기 사상의 정립을 위해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어떠한 체계적 서술이라는 강박관념 없이 자유로이 끄적거린 기록입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히테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는 이유는 피히테 고유의 사상 탄생과정이 마치 알이 부화되어 병아리가 되는 과정을 필름을 통해 지켜볼 수 있듯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오늘 주제인 제일명제 '나는 있다' 내지는 '나는 즉 나'의 표현 또한 군데군데 심심찮게 보입니다. 또한 같은 시기에 발표된 『에네지데무스』에 대한 비판 논문에서는 심지어 Grundlage의 § 1에서의 표현과 거의 같은 표현을 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단지 이 제일명제의 표현에 내포되어 있는 사고의 역동성에 대한 치밀한 연구는 아직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다음의 두 번째 시기에서야 나타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제일 명제가 외포하는 이론적 내지는 실천윤지적 분야로의 긴밀한 파급효과에 대한 치열한 자기싸움으로서의 연구는 이미 이 시기에 엿볼 수 있으나, 절대자아의 자기되돌아봄(Selbstreflexion)을 통한 자기해체 내지는 자기분열과정은 이 자기되돌아봄과 더불러 형식과 내용이라는 절대자아의이중적 측면이 집중 연구되어지는 두 번째 시기에 가서야 추적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ii) ZV(:쮜리히 사설강의) 및 Programmschrift 시기
피히테는 라인홀트의 후계자로 예나대학의 철학교수로 취임하기 직전, 자기 아내의 고향인 스위스 쮜리히에서 Lavater, 페스탈로치, 바리센?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권고로 이들 앞에서 사설강의를 했습니다. 피히테가 스스로 썼다 하는 이에 준한 강의록이 있었다는 기록은 확인되었으나 막상 이 강의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이미 말씀드린 EM의 한 군데 註에 이 강의에서 취급된 내용이 - 특히 제일명제에 대한 - 짧게 언급되어 있고, 또한 삼년전 새로 발견된 Lavater의 강의기록문서의 내용을 고려해보건대 소위 Programmschrift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단지 이 Programmschrift에서는 같은 내용을 더욱 더 폭넓고 깊이있게 다룬다 할까요. 어쨌든 이 시기에선 제일명제 이해의 두 주춧돌이라 생각하는 절대자아의 자기되돌아봄과 이 자아의 두가지 관찰측면인 형식과 내용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 의식 내부의 깊숙한 곳에 아직 형식과 내용이라는 두 측면으로 분리 생각되어질 수 없는 절대 자아가 자기자신의되돌아봄을 통해 점차 표면으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이 분리과정이 이루어진다는 사고입니다. 이를 통해 절대자아의 분명한 자기의식 또한 가능케 된다는 이론이고요. 다시 말씀드려 자기되돌아봄을 통해 뚜렷해진 형식과 내용의 대립이 절대자아의 자기인식을 가능케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대립된 형식과 내용은 두 개의 개별된 주체가 아니라 같은 절대자아를 바라보는 데 있어 두 가지 상이한 관찰양태이기 때문입니다.
iii) Grundlage 시기[:『청강자를 위한 手稿로 된 전체 학문론의 기초(Grundlage der gesammten Wissenschaftslehre, als Handschrift fuer seine Zuhoerer)』]
어떻게 보면 방금 전 말씀드린 두 번째 시기에 이미 최소한 제일명제에 관한 한, 피히테의 사고는 완결되었으리라는 인상을 풍깁니다. 허나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내용을 대학 학생들 앞에서 강의해야 했던 피히테는 그 내용의 설득력있는 전달매체 내지는 전달형식에도 무척 신경을 써야만 되었습니다. 이에 준해 그는 Grundlage에서 자신의 제일명제에 관한 생각을 1부터 10까지의 번호를 붙인 열단계로 전개합니다. 누구나 쉽게 인지하는 논리적 경험적 명제인 'A ist A' 로 시작되는 이 전개는 단계적으로 발전 추론되어 잘만 따라간다면 누구나가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는 전개 형식입니다. 네, 최소한 피히테는 그렇게 생각했고 희망했었던 듯 싶습니다. 허나 아직까지 200년이 넘도록 시원한 규명이 되지 않고 있는 이 열단계가 지금의 우리한테 안겨주는 정신적 고통은 어찌보면 피히테의 희망에 놀림당한다는 느낌까지 들게 합니다. 물론 내용적인 어려움은 차치하고라도. 피히테가 이 글을 책이라는 일반적 의미로 출판한 게 아니라 단지 수강생들이 자신의 강의시간에 따라 적는다는 수고가 덜해짐으로써 자신과 같이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을 넓혀준다는 의미에서의 강의 준비록이라는 의미로 출판한지라 각 단계마다의 문자화된 해설에 극히 인색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되나, 피히테의 구두적 설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그 어려움은 근거있다 생각합니다. 어려워도 구하고자 하는 자에겐 복이 있으리라 믿고요. 어려움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iv) 끝으로 우리말로의 번역에 관한 질문 하나를 감히 던져 보겠습니다. 이는 독일말의 동사 'sein'의 번역과 관계됩니다. 이 질문은 제일명제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바, 독일어로서의 제일명제가 바로 'Ich bin(나는 있다)'내지는 'Ich bin Ich(나는 나이다)'이기 때문입니다.
번역이 언어의 옮김뿐만 아니라 언어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의 이전(移轉)이라 보면 언어구조와 언어사상과의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상호관계를 바탕으로 전개한 피히테 철학의 한국어 번역에 적지 않게 어려움이 있으리란 짐작은 쉽게 해봅니다. 나아가 더욱 첨예화된 문제는 만약 언어옮김의 올바름이냐 아니면 그 사상 이전의 올바름이냐를 선택해야 될 경우 등장합니다. 예컨대 피히테는 'Ich bin Ich' 문장의 각 자리 - 주어, 연결어, 서술어 - 에 서로 상이한 의미를 부가하였는바, 이 중 연결사의 자리는 특히 주어로부터 서술어로 내지는 각 자리에 부여된 의미의 이동자리로 보았습니다. 다시말해 되돌아봄 전의 절대자아가 되돌아봄 후의 절대자아로의 이동이 행해지는, 다시 말해 바로 이 되돌아봄이 행해지는 자리로 본거죠. 연결사가 없는 우리말로 그냥 번역한다면 '나는 나다'라 하겠는바 이 번역을 통해 피히테가 전달하고자 했던 위에 짧게 말씀드린 생각이 올바로 전달될 수 있을까 의심해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나는 즉 나' 라고 번역해봅니다. 연결사를 '즉'으로 번역해본다는 제안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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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히테 <학문론>의 성립과정" -- 유희상(독일 뮌헨대 석,박사)
피히테는 자신의 이십대 중반기까지 신학자가 되려 했던 결정론자였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불가능하다는 원칙을 고수한 사람이죠. 이러한 피히테가 1790년도께 칸트 철학과의 접촉을 통해 자신의 원칙에 180도 수정을 가하게 됩니다. 칸트의 세 비판이론들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믿기지 않는 빠른 속도로 이 철학의 신봉자가 되는게죠. 아니 신봉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승적 승계자라 할까요. 자기 나름대로 칸트 철학의 한계를 발견, 이를 뛰어넘으려 했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컨대 세 가지 분야로 나눠진 칸트의 비판철학에 일원적 통일성을 부여하려 했던 게죠. 그것도 세 분야의 종합으로서 새로이 생성되는 후속적 통일이 아니라 세 분야로 갈라지기 이전의 원초적 통일을 철학적 규명을 통해 설득·이해시키는 작업을 피히테는 자신의 우선적 철학적 과제로 삼았던 겁니다. 1794년 처음 빛을 본 피히테의 『학문학(Wissenschaftslehre)』은 다름아닌 이러한 작업의 결과입니다.
물론 이러한 칸트 철학의 긍정적 극복이 피히테 혼자의 힘으로 쌓을 수 있었던 탑은 아니었습니다. 직접적인 도움을 준 인물로 야코비(Jacobi)와 라인홀트(Reinhold)를 들 수 있겠고 그외 마이몬(Maimon)과 슐체(Schulze)의 Aenesidemus 등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허나 제가 오늘 여러 선생님들게 송구스럽습니다만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러한 피히테 동시대 인물들이 피히테의 학문학 탄생에 끼친 전반적 영향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접할 수 있는 피히테의 유고를 근거로 『학문학』초판의 탄생사에 따른 피히테 사고의 움직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말씀드릴 내용을 짧게 요약합니다. 이 첫째 판(Grundlage)의 탄생사를 세 시기로 구분해 봅니다. 첫 시기는 Eigene Meditationen으로 칭하는 피히테의 자유수상록에 나타난 사고, 그러니까 1793/4년 겨울로 칠 수 있고요. 두 번째 시기는 피히테의 스위스 쮜리히 사설강의와 소위 Programmschrift, 그러니까 1794년 봄에 해당하고, 세 번째 시기로는 피히테의 예나대학 강의 시작과 동시에 배포된 Grundlage의 첫 번째 부분 출판, 그러니까 1794년 여름입니다. 부분 출판이란 말에서 엿볼 수 있듯, 완전한 출판은 아니었고요. 따라서 엄격히 말하자면 네 번째 시기, 그러니까 1795년 봄에 출판된 실천철학 부분 또한 탄생사에 당연 포함시켜야 되나, 저의 오늘의 주된 관심은 이 Grundlage 전체가 아니라 이 중에서 특히 제일명제의 설립을 주제로 하는 네 번째 시기를 우리의 토론에서 제외시키고자 합니다. 그대신 끝으로 피히테의 한국말로의 번역과 관련된 한 질문을 감히 던져보겠습니다.
i) EM(:Eigene Meditationen) 시기
대략 삽십년 전쯤 발굴 공개된 이 자료는 피히테가 자기 사상의 정립을 위해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어떠한 체계적 서술이라는 강박관념 없이 자유로이 끄적거린 기록입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히테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는 이유는 피히테 고유의 사상 탄생과정이 마치 알이 부화되어 병아리가 되는 과정을 필름을 통해 지켜볼 수 있듯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오늘 주제인 제일명제 '나는 있다' 내지는 '나는 즉 나'의 표현 또한 군데군데 심심찮게 보입니다. 또한 같은 시기에 발표된 『에네지데무스』에 대한 비판 논문에서는 심지어 Grundlage의 § 1에서의 표현과 거의 같은 표현을 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단지 이 제일명제의 표현에 내포되어 있는 사고의 역동성에 대한 치밀한 연구는 아직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다음의 두 번째 시기에서야 나타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제일 명제가 외포하는 이론적 내지는 실천윤지적 분야로의 긴밀한 파급효과에 대한 치열한 자기싸움으로서의 연구는 이미 이 시기에 엿볼 수 있으나, 절대자아의 자기되돌아봄(Selbstreflexion)을 통한 자기해체 내지는 자기분열과정은 이 자기되돌아봄과 더불러 형식과 내용이라는 절대자아의이중적 측면이 집중 연구되어지는 두 번째 시기에 가서야 추적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ii) ZV(:쮜리히 사설강의) 및 Programmschrift 시기
피히테는 라인홀트의 후계자로 예나대학의 철학교수로 취임하기 직전, 자기 아내의 고향인 스위스 쮜리히에서 Lavater, 페스탈로치, 바리센?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권고로 이들 앞에서 사설강의를 했습니다. 피히테가 스스로 썼다 하는 이에 준한 강의록이 있었다는 기록은 확인되었으나 막상 이 강의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이미 말씀드린 EM의 한 군데 註에 이 강의에서 취급된 내용이 - 특히 제일명제에 대한 - 짧게 언급되어 있고, 또한 삼년전 새로 발견된 Lavater의 강의기록문서의 내용을 고려해보건대 소위 Programmschrift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단지 이 Programmschrift에서는 같은 내용을 더욱 더 폭넓고 깊이있게 다룬다 할까요. 어쨌든 이 시기에선 제일명제 이해의 두 주춧돌이라 생각하는 절대자아의 자기되돌아봄과 이 자아의 두가지 관찰측면인 형식과 내용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 의식 내부의 깊숙한 곳에 아직 형식과 내용이라는 두 측면으로 분리 생각되어질 수 없는 절대 자아가 자기자신의되돌아봄을 통해 점차 표면으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이 분리과정이 이루어진다는 사고입니다. 이를 통해 절대자아의 분명한 자기의식 또한 가능케 된다는 이론이고요. 다시 말씀드려 자기되돌아봄을 통해 뚜렷해진 형식과 내용의 대립이 절대자아의 자기인식을 가능케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대립된 형식과 내용은 두 개의 개별된 주체가 아니라 같은 절대자아를 바라보는 데 있어 두 가지 상이한 관찰양태이기 때문입니다.
iii) Grundlage 시기[:『청강자를 위한 手稿로 된 전체 학문론의 기초(Grundlage der gesammten Wissenschaftslehre, als Handschrift fuer seine Zuhoerer)』]
어떻게 보면 방금 전 말씀드린 두 번째 시기에 이미 최소한 제일명제에 관한 한, 피히테의 사고는 완결되었으리라는 인상을 풍깁니다. 허나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내용을 대학 학생들 앞에서 강의해야 했던 피히테는 그 내용의 설득력있는 전달매체 내지는 전달형식에도 무척 신경을 써야만 되었습니다. 이에 준해 그는 Grundlage에서 자신의 제일명제에 관한 생각을 1부터 10까지의 번호를 붙인 열단계로 전개합니다. 누구나 쉽게 인지하는 논리적 경험적 명제인 'A ist A' 로 시작되는 이 전개는 단계적으로 발전 추론되어 잘만 따라간다면 누구나가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는 전개 형식입니다. 네, 최소한 피히테는 그렇게 생각했고 희망했었던 듯 싶습니다. 허나 아직까지 200년이 넘도록 시원한 규명이 되지 않고 있는 이 열단계가 지금의 우리한테 안겨주는 정신적 고통은 어찌보면 피히테의 희망에 놀림당한다는 느낌까지 들게 합니다. 물론 내용적인 어려움은 차치하고라도. 피히테가 이 글을 책이라는 일반적 의미로 출판한 게 아니라 단지 수강생들이 자신의 강의시간에 따라 적는다는 수고가 덜해짐으로써 자신과 같이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을 넓혀준다는 의미에서의 강의 준비록이라는 의미로 출판한지라 각 단계마다의 문자화된 해설에 극히 인색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되나, 피히테의 구두적 설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그 어려움은 근거있다 생각합니다. 어려워도 구하고자 하는 자에겐 복이 있으리라 믿고요. 어려움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iv) 끝으로 우리말로의 번역에 관한 질문 하나를 감히 던져 보겠습니다. 이는 독일말의 동사 'sein'의 번역과 관계됩니다. 이 질문은 제일명제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바, 독일어로서의 제일명제가 바로 'Ich bin(나는 있다)'내지는 'Ich bin Ich(나는 나이다)'이기 때문입니다.
번역이 언어의 옮김뿐만 아니라 언어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의 이전(移轉)이라 보면 언어구조와 언어사상과의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상호관계를 바탕으로 전개한 피히테 철학의 한국어 번역에 적지 않게 어려움이 있으리란 짐작은 쉽게 해봅니다. 나아가 더욱 첨예화된 문제는 만약 언어옮김의 올바름이냐 아니면 그 사상 이전의 올바름이냐를 선택해야 될 경우 등장합니다. 예컨대 피히테는 'Ich bin Ich' 문장의 각 자리 - 주어, 연결어, 서술어 - 에 서로 상이한 의미를 부가하였는바, 이 중 연결사의 자리는 특히 주어로부터 서술어로 내지는 각 자리에 부여된 의미의 이동자리로 보았습니다. 다시말해 되돌아봄 전의 절대자아가 되돌아봄 후의 절대자아로의 이동이 행해지는, 다시 말해 바로 이 되돌아봄이 행해지는 자리로 본거죠. 연결사가 없는 우리말로 그냥 번역한다면 '나는 나다'라 하겠는바 이 번역을 통해 피히테가 전달하고자 했던 위에 짧게 말씀드린 생각이 올바로 전달될 수 있을까 의심해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나는 즉 나' 라고 번역해봅니다. 연결사를 '즉'으로 번역해본다는 제안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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