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치
고영종
누구시지. 어디선가 분명 본 얼굴이라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대충 아는 체 인사를 나누다가 낭패를 본 적이 많다. 평소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다 보니 상대방의 특징을 찾아내서 기억하려 애쓰는 편이다. 그런데도 만나는 상대가 옷차림이나 머리 스타일만 살짝 바꿔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평소에 갖고 있던 상대방의 특징은 오히려 기억을 살리는데 혼선만 줄 뿐이다. 이런 나에게 친구들이 ‘사람치’라는 특이한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런 데다 요즘은 마스크 때문에 더욱더 사람 얼굴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코로나19로 변해버린 일상 습관 중 하나가 집 밖에선 누구나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이다. 방역 지침이 완화되어 단체로 모이는 곳이 아니라면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어도 되지만 2년여 동안 몸에 배어버린 마스크 쓰는 습관은 우리의 일상 습관을 바꿔놓았다. 너 나 없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니 만나는 상대방의 얼굴은 이마와 눈만 보인다. 다들 선하게 보인다. 마법처럼 멋있고, 예쁘기까지 하다. 아내한테도 마스크를 쓴 모습이 훨씬 더 예쁘다고 한마디 하면 눈 아래는 못생겼냐고 핀잔을 준다. 칭찬했는데도 돌아오는 건 농이 섞인 짜증이다.
올해 5월 초 연휴로 모처럼 시간적 여유가 생겨 연로하신 부모님 건강을 살피려 고향 마을로 향했다. 부모님은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집 앞 우영팟에 조성해 놓은 귤밭을 가꾸시며 정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계셨다. 부모님이 건강하게 살아계시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가끔 찾아뵐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고 행복하다.
부모님을 뵙고 나면 버릇처럼 마을 친구들을 소집하여 마을 뒷산 새오름을 오른다. 오름 정상에서 맞은편으로 멀리 보이는 한라산의 전경은 가운데가 유두처럼 볼록 솟아있고 완만하게 좌우로 흘러내리며 대칭을 이룬 모습이 장관이다. 제주 어느 마을에서 보아도 새오름에서 보이는 한라산 전경만큼 좌우 대칭으로 보이는 경우가 없으니 우리 고향 마을은 명당에 자리 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버지 말을 빌리면 자그마한 산간 마을에서 교육감, 장군, 시장, 서기관, 대학교수, 면장, 등 고위직을 많이 배출한 것은 우리 마을이 명당자리에 자리 잡고 있어서란다.
새오름을 오르내리는 길목에 제주도 맛집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소리원>이라는 음식점이 있다. 점심을 먹으려고 들어서는데 길 건너편에서 횡단보도를 건너오던 젊은 여자가 아는 체하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허름한 작업복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좁은 이마와 맑은 눈망울이 상당한 미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시지. 너무 젊어 보이는 걸로 봐서 내가 전에 근무했던 고등학교 학생인가. 아니면 졸업생. 어디선가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 순간적으로 기억을 더듬으며 누구인지 알아차리려 애썼지만 ‘사람치’인 나에겐 역부족이다. 젊어 보이긴 하지만 앳된 모습은 없고 약간 성숙미가 보이는 걸로 봐서 제자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과거에 같이 근무한 적이 있는 선생님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구나 친구들과 동행하던 터라 인사를 건네는 상대방을 모른 체하기가 민망하여 아는 체할 요량이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어느 학교에…” 말을 더듬으며 잠시 머뭇거렸다. 젊은 여자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교장선생~니임!”이라며 ‘니임!’이라는 소리에 힘을 잔뜩 주며 한 옥타브 올라간다. 눈빛에 원망이 섞여 있다. 아뿔싸! 당황하여 몸이 움칫한다. 나와 같이 근무하는 동료 선생님인데도 못 알아본 것이다. 친구들 앞에서 민망한 상황이 벌어져 버린 것이다.
친구 녀석들은 역시 우리가 별명을 잘 지었네라며 놀린다. 우리 동네에서 같이 근무하는 선생님을 만날 것이라고 전혀 상상을 못 한 터였으니 기억을 더듬던 머릿속이 왜곡되어 더 ‘사람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군데군데 밀가루가 묻은 작업복과 마스크 탓이라며 어색한 웃음으로 넘겼다. 사실 함께 근무하는 교직원이 백여 명이라 평상시에도 얼굴을 다 알지는 못한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마을에 사는 동창의 딸이란다. 나는 동창의 딸이 우리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동안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선생님은 연휴를 맞아 맛으로 소문이 난 유명한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님 일손을 덜어주려고 온 것이었다.
<소리원>에서 점심을 먹는데 떡집을 하는 동창 친구가 윤기가 번지르르한 초록빛 쑥떡을 잔뜩 싸 들고 와서 나눠줬다. 친구들은 나를 쳐다보며 ‘사람치’덕분에 떡이 생기네 하며 놀려댄다. 떡을 가져온 동창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딸이 우리 학교에 근무한다는 걸 왜 말을 안 했느냐고 짜증 섞인 말로 민망한 마음을 숨겼다.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건네거나 인사를 하면, 대충 아는 체 얼버무리기를 시도해 보지만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사람치’임을 감추려다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몇 마디만 이어가면 내가 상대방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바로 탄로가 나면서 얼굴이 붉혀지는 난처한 상황이 생겨버린다. ‘사람치’임을 인정하고 “기억이 안 나는데, 누구세요?”라고 솔직하게 물어보는 게 상책일 것이다.(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