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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조명등 아래서

작성자고영종|작성시간26.06.11|조회수22 목록 댓글 0

                          조명등 아래서

고영종

  응급실 조명등이 흔들리고 있다. 머리맡 모니터에 산소포화도 수치는 위험 경계도 90을 위태롭게 넘나든다. 아버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칠판에 글을 쓰려는 듯 허공에 손을 내젓는다. 응급실로 실려 온 아버지를 마주한 순간, 내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댄다.

  아버지는 사십여 년 동안, 교단에서 아이들이 제 길을 찾아가도록 비춰주는 조명등이었다. 교직을 준비하던 내게도 늘 들려주던 말씀이 있었다.

  “공부란 점수를 얻는 일이 아니다.”
  교사는 아이들 앞에 서기 전에 먼저 자신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에게 교실은 지식만을 전하는 곳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자리였다. 아버지는 제자의 눈빛을 먼저 읽고, 지금의 성적보다 내일의 가능성을 내다보셨다.

  서른 해 전, 아버지는 긴 세월 몸담았던 교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또 다른 교실로 출근하셨다. 귤나무가 줄지어 선 우영팟(텃밭). 바람과 햇볕은 교과서였고, 계절의 바뀜은 시간표였으며, 새의 지저귐은 종소리였다. 가지를 치고 흙에 거름을 뿌려주며 열매 맺는 시간을 기다렸다. 나는 아버지의 그 세월을 노후의 소일거리쯤으로 여겼으나, 당신께서는 아이들을 돌보던 정성으로 귤밭을 가꾸며, 또 다른 시절을 청춘처럼 사셨다.

  “열매는 서둔다고 빨리 열리지 않아.”

  아버지가 귤나무 가지를 전정하며 곱씹던 말씀이었다. 그 말은 아이들을 가르치며 터득한 믿음이었고, 귤밭에서 체득한 진실이었다. 정성으로 돌보고 기다리다 보면 튼실한 열매를 얻는다는 아버지의 신념 같은 것이었다.

  그날 전화는 너무나 급작스럽고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공중목욕탕에서 쓰러지셨어요.”

  수화기 너머 119 구급 대원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내 심장은 놀라움과 불안감으로 요동쳤다. 병원으로 달려가는 동안 길을 막는 신호등들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그날따라 그 길은 끝없이 멀고 더디기만 했다. 응급실에서 뵌 아버지는 내가 알던 사리에 밝고 총기가 있는 분이 아니었다. 담당 의사는 해마가 쪼그라든 뇌 영상을 보여주며 중증 치매성 섬망 증세라고 진단했다. 지금껏 별 탈 없이 일상을 이어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 했다. 젊은 시절 교단에 섰던 그 올곧은 정신과 의지로 지금껏 버텨왔기에 가능했으리라.

  “교실로 가야 한다! 아이들이….”

  아버지는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다급히 외쳤다.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이 뒤섞인 환각 속에서 과거의 교사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에게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지고, 간호사를 향해 타이르듯 말하며, 보이지 않는 칠판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아버지에게 교육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삶을 떠받쳐 온 존재 이유이자 소명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아버지, 저예요.”

  목이 메어 그 짧은 한마디조차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른 세계로 떠나기를 반복했다. 또다시 떨리는 손으로, 허공에 글을 쓰듯 내젓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바싹 마른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아버지의 손을 감싸 쥐고,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속으로 삼켰다.

  신은 왜 아버지의 기억을 한 겹씩 거두어 가시는 걸까. 왜 섬망 속으로 느닷없이 과거의 사건들을 소환하시는가. 어쩌면 기억의 껍질은 하나씩 벗겨내고, 생을 이끌어온 삶의 본질만은 남겨두려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어떤 시련에도 쓰러지지 않을 사람으로 믿어왔었다. 아흔이 넘은 연세에도 활동적인 데다, 여태껏 귤밭에서 일하시기에 걱정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건강을 염려할 때마다 “난, 괜찮다.”라는 말씀도 나를 안심시켰다.

  응급실의 밤은 새벽이 오지 않을 것처럼 아득히 길었다. 아버지는 잠들었다 깨기를 되풀이하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었다. 나는 의자에 웅크린 채 아버지 얼굴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자상하던 목소리, 이마에 깊게 팬 주름, 햇볕에 그을린 갈색 얼굴, 초점 잃은 눈동자. 아버지 인생의 궤적들이 얼굴에 문신처럼 짙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초년 교사 시절, 아버지를 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몇 해 전 정년퇴직을 하며 큰 허물없이 교직을 마무리했다고 생각했으나, 이제 와 돌아보니 부끄러울 뿐이었다. 직업만 내려놓았을 뿐, 아버지가 걸어오신 길을 제대로 따라가 보지도 못하였다. 나는 이제야 아버지의 삶을 더듬으며,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한 걸 후회했다. 아버지가 가르쳤던 제자 이야기며, 귤나무를 가꾸던 이야기들을 귀찮아하지 말고 더 듣지 못한 뒤늦은 탄식이 가슴 깊이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사람은 사람을 남겨야 한다.”

  아버지는 평소 하시던 말씀처럼 사람을 남기며 살았다. 항상 조명등처럼 누군가를 위해 빛을 비춰주면서도, 스스로는 드러내기를 꺼리는 삶이었다.

  아버지의 손이 나를 찾고 있었다. 평생 누군가를 이끌어 주던 손, 나는 그 손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으니…. 말 대신 피의 온기를 전하고 싶어 얼른 손을 꼭 잡아드렸더니 내 체온을 느꼈는지, 아버지는 내 손을 더 세게 움켜잡았다. 잠시 후, 하고 싶은 말을 꺼내려는 듯 입술을 실룩이다 이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제 네 차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다. ‘예, 아버지…!’ 속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짊어졌던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편안하게 지내시길 온 마음으로 빌었다. 그리고 늦었지만 나도 아버지처럼 살겠노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응급실 조명등 불빛이 아버지를 밝게 비추고 있다. 그 불빛이 내 마음과 아버지 사이를 오가며 따듯하게 스며드는 것 같다. 이제야 철이 드는 것인지 송구한 마음뿐이다. (2026 수필오디세이 여름호 등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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