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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마늘 꾸러미

작성자고영종|작성시간26.06.11|조회수19 목록 댓글 0

마늘 꾸러미

고영종

  누군가 뒤쫓아온다. 도망치려 발버둥 치지만 발바닥이 땅에 달라붙어 꼼짝달싹할 수가 없다. 가슴은 파도처럼 요동치고 입안은 바짝 마른다. ‘또 꿈이었구나.’ 식은땀에 젖어 악몽에서 깨어나면, 오래전 그 여름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오십여 년 전 일이다. 매년 여름철이 되면 우리 동네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스케키 장수가 나타났다. 동네 아이들은 손가락을 세며 그날을 기다렸다. 내가 나고 자란 동네는 중산간에 위치한 벽지僻地 마을이어서, 군것질이라고는 모르고 지냈다. 그 시절, 아이들의 유일한 간식거리는 들에 나가 산딸기, 볼래, 삼동 등을 따서 먹었고, 삘기를 뽑아 벗겨 먹는 것이 전부였다.

  아이스케키 장수가 마을에 나타나는 날은 운동회 날보다 더 좋았다. 부모님은 아이스케키 장수를 학수고대하는 아이들에게 큰 자비를 베풀었다. 군말 없이 십 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여 주셨다. 자나 깨나 기다리던 그날이 오면 온 동네 아이들은 아이스케키를 물고 세상을 다 얻은 듯 동네 고샅을 누비고 다녔다. 달착지근하고 입에 착 달라붙는 맛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기쁨이었다.

  그날도 아이스케키 장수가 마을에 나타났다. 학교 끝나지 마자 아이스케키를 사 먹을 꿈에 부풀어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도착해 보니 어머니가 안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이곳저곳 갈만한 곳을 수소문하며 찾아보았으나 어머니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오늘 아이스케키 맛을 못 보면,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그날따라 어머니와 나를 기다리다가 지친 어린 동생은 아이스케키를 사달라고 칭얼대며 나를 쫓아다녔다.

  보채는 동생을 달래며 아이스케키 장수가 있는 마을 회관 앞으로 갔다. 아이들이 줄지어서 아이스케키 사 먹는 것을 보자마자, 울상을 지으며 참던 동생은 울음보가 터져버렸다. 점점 커지는 동생의 울음소리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다 마른침을 삼키며 용기를 냈다.

  “아이스케키 두 개만 외상으로 주시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쩔 도리 없이 울고 있는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아이스케키 사 먹는 아이들을 부럽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 지났을까. 아이스케키 장수가 입맛을 다시는 나를 불러 세웠다.

  “혹시, 너희 집에 마늘 있니?”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한 꾸러미 가져와라. 아이스케키 두 개랑 바꿔주마.”

  때마침 우리 집 처마 밑에는 쭉정이는 내다 버리고 굵고 실한 통마늘만 꾸러미로 묶여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어머니는 오일장 날마다 몇 꾸러미를 내다 팔아 생필품을 사 오시곤 했다.

  통마늘 한두 꾸러미를 빼내도 티가 날 것 같지 않았다. 나중에 들통나면 동생이 막무가내로 아이스케키를 사 달라고 졸라서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댈 속셈이었다. 부모님 허락 없이 통마늘 꾸러미에 손을 뻗는 순간 더럭 겁이 났으나, 입속에서 맴돌며 녹아내리던 달콤한 맛의 유혹은 이미 내 이성을 넘어섰다. 떨리는 손으로 통마늘 꾸러미 한 묶음을 꺼내들고 마을 회관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달콤한 맛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동생은 아이스케키를 입에 물고 신나게 뛰놀고 있는데, 나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처마 밑을 바라보며 속상할 어머니 모습만 자꾸 떠올랐다.

  해가 마을 뒷산을 넘어갈 무렵 옆 마을로 마실 갔던 어머니가 돌아왔다. 온 식구가 저녁상에 둘러앉아 밥을 맛있게 먹는데도, 나는 밥알이 모래알처럼 까끌까끌 거리며 입안에 돌아다닐 뿐이었다. 동생에게는 낮에 있었던 일을 고자질하지 말라고 단단히 입막음을 해 두었으나, 조마조마한 마음에 어머니 눈치만 살폈다. 밥알을 깨작깨작 씹는 둥 마는 둥 시늉만 하다가,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오늘 아이스케키 장수가 왔었다는 것을 어머니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끝내 아무 말 없었다. 저녁상을 물린 뒤 처마에 걸린 마늘 꾸러미를 한참 바라보더니, 오일장에 내다 팔려고 몇 꾸러미를 내려 바구니에 가지런히 담고 있었다.

  그날 밤은 시곗바늘마저 멈춘 듯 유난히 길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눈을 감아도 마음은 편히 눕지 못했다. 정적이 깃든 어둠 속에서 내 숨소리만 귓가에 맴돌았다. ‘왜 마늘 꾸러미에 손을 댔을까.’ 내 안에서 되뇌는 소리에 밤을 꼬박 새웠다.

  세월이 흐르며 악몽도 차츰 잦아들었다. 그러나 아이스케키를 볼 때면, 입안에 맴돌던 달콤한 맛이 감쪽같이 사라졌던 그날의 오후가 떠오르며,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리곤 한다.(2022 첫 번째 쓴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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